Ideas & Analysis

 

Android Jelly Bean

Samsung Galaxy S2 Android Jelly Bean

S2 Android ICS Blues: 여기서 S2는 Samsung Galaxy S2 smartphone을 뜻하고, ICS는 그것을 ‘움직이는 system software: operating system’ 인 Google의 Linux-based Android의 version 4.0x  code name ‘Ice Cream Sandwich‘를 말한다. Android code name은 전부 ‘달고 맛있는 당과 糖菓’류의 이름들인 것이 재미있다.

 

우리는 2012년 경에 나온 삼성 smartphone Galaxy S2를 아직까지 쓰고 있다. 그러니까.. 벌써 4년이 지나가는 ‘고물’이 되었나.. 우리의 30~40대 같았으면 아마도 매년 새로 나온 것으로 바꾸었겠지만 지금은 older & wiser, smarter 해 진 것인지.. 절대로 그런 바보 같은 짓은 안 한다. 30대에 타던 차들이 100,000 마일이 되면 못 쓰게 되곤 했지만 요새 차들은 200,000 마일까지 쓸 수도 있다는 것처럼 근래의 electronic hardware들, 정말 ‘잘만 만들면’ 절대로 쉽게 고장이 안 난다. 그런 덕분인지 고물이 된 S2, 거의 새것처럼 보이고 느껴지고 그렇게 쓰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좋은 면 뒤에는 반드시 보이지 않는 함정과 그늘이 있다. 바로 software인 것이다. Smartphone이라고 하지만 phone의 기능 이외에 desktop computer의 기능을 능가하는 computing power를 가진 이 ‘조그만 괴물’, 문제가 생기면 바로 이 software에 문제가 생기고, 성질이 급하면 아주 고장 난 것으로 오해를 하고 새것으로 바꾸곤 한다. 무언가 잘 안 되면 과연 그것 hardware가 고장이 난 확률은 아주 낮다. 근래의 값이 저렴한 Desktop PC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대부분의 digital device들 (desktop pc, smartphone, tablet etc),  요새는 거의 다 Internet에 연결이 되어있기에 아차..하면 virus나 malware 같은 것이 들어오고 갑자기 성능과 속도가 떨어지고 심지어는 완전히 고장 난 것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공평한 것인가.. 복잡한 것은 물론 기능이 많다는 뜻에서 좋지만 그에 비례해서 이런 다른 문제가 생기는 것이니까..

 

이런 것들을 생각하며 최근 연숙의 smartphone이 각종 문제가 생긴 것을 다시 보았다. 나와 똑 같은 T-mobile version S2 model인데, 내 것은 거의 새것처럼 보이고 연숙의 것은 완전히 ‘기어가는’ 듯 느껴진다. 하지만 그런 것을 참고 쓴 것은 좋았는데 아주 최근에는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 phone이 항상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 물론 이것은 phone이 ‘지독히 busy’ 한 것을 뜻한다. 그러니까 battery를 최고로 많이 쓰는 것이고 그래서 뜨거운 것이다. Battery가 금새 discharge (방전) 가 되어 버리니.. 몇 시간마다 charge (충전)를 해야 하는 수고를 해야 한다. 이것으로, phone을 새것으로 바꾸느냐 마느냐 하는,  아주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잠깐 내가 살펴보니.. 역시 cpu (microprocessor)가 거의 80% 이상으로 ‘계속’ running을 하고 있었다. 전화를 쓰지도 않는데 무엇이 그렇게 뒤에서 ‘돌아가는’ 것일까? 처음에는 ‘아마도’  이것 저것 download가 된 program들.. 거의 필요하지 않은 것들이려니.. 추측을 했지만 암만 뒤져 보아도 그런 것은 없었다. OS Monitor란 app으로 살펴보니.. 항상 바쁜 것은 ‘Android_system‘이란 process 였다. 이것은 download가 된 user app이 아니고 Android system의 일부가 아닌가? 이 정도가 되면 아주 심각한 문제다. 문제가 된 것이 Android system자체이니 이것 자체를 바꾸거나 reset을 해야 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Android system을 새로 hard-reset을 하거나 re-install을 해야 할 듯하니.. 골치가 아픈 것이.. user setup data들을 backup 해야 하는데, 다행인 것은 거의 모든 것이 Google cloud에 있어서 자동 backup이 된 상태고, 예외적은 것은 아마도 KakaoTalk 정도가 아닐까.. 생각보다 local data는 제한적, 거의 모든 것이 Google소관, 참 묘한 세상에 살고 있다. 이렇게 시작해서 소위 말하는 hard-reset, re-install을 했지만 surprise! No change! 그래도 battery는 빠르게 discharge가 되고 phone은 항상 뜨겁게 달구어진다. 왜 그럴까?

 

S2-Jelly-Bean-2거의 포기상태에서 마지막으로 알게 된 사실.. Samsung Galaxy S2 에 마지막으로 upgrade가 되었던 Android는 Ice Cream Sandwich로 불리는 4.04이 아니고 Jelly Bean으로 code name이 된 version 4.12가 아닌가? 그러니까.. 아직 희망은 사라지지 않은 것이다. 마지막으로 Jelly Bean으로 upgrade를 시도하였다. 어떻게 upgrade를 하는가? 보통은 OTA mode 인데, 그러니까 Over The Air.. ‘자동적’으로 upgrade가 되었어야 하는데.. 그것이 되지를 않았다. 왜 그랬을까.. 하지만 이제는 늦었다. 그것이 upgrade가 되었으면 거의 4년 전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Googling을 해 보니.. 방법이 있었다. 역시 Samsung의 도움으로.. Samsung에서 나오는 Kies란 Windows software가 그것이다. S2 phone을 usb 로 PC에 연결하면.. ‘재수가 좋으면’ 큰 문제없이 Jelly Bean으로 upgrade가 되는 것이 원칙인데.. 세상이 그렇게 공식, 원칙대로 될 리가 없지 않은가? 첫째, 생각 없이 usb 로 연결을 하면 Kies는 절대로 S2를 인식하지 못한다 (비록 PC Windows는 phone을 storage로 알게 되지만, 그것은 useless). Android의 developer mode를 ON하고 그곳에서 developer usb mode를 set하여야 비로소 Kies가 연결이 되고 모든 upgrade business가 가능하게 된다.

 

Upgrading 은 무려 overnight동안 오랜 시간에 걸쳐서 download, re-flashing이 되는데 이때가 제일 긴장이 되는 순간들이다.. 무슨 일이 이때 생기면 최악의 경우 phone자체가 무용지물 bricking 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긴 여정을 끝내고 연숙의 Ice Cream Sandwich는 드디어 Jelly Bean으로 booting을 하고.. 결과는 상상을 초월한 것.. 모든 모든 모든 문제가 일 순간에 다 사라진 것이다. 너무나 예상을 넘는 변화였다. 완전히 S2 phone이 새것으로 바꾼 느낌이 드는 것이다.

 

이런 결과에 대한 기쁨이 가시면서.. 다시 생각을 한다. 과연 연숙의 phone에 어떤 일들이 일어났던 것일까? Hardware자체는 완벽하게 문제가 없었음도 증명이 되니까.. 100% Android system에 문제가 생겼던 것이다. Battery문제가 한창 극성을 부릴 때, ‘Battery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제시하는 message가 떴다는 연숙의 이야기를 기억한다. 거의 분명히 이것은 의도적인 외부에서 들어온 malware, 그것도 $$$을 요구하는 그런 criminal한 것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다른 것은, 제일 처음에 시도한 system total reset때 Android system은 ‘원래의 상태’로 restore가 되었을 것인데 어째서 그 때에 문제가 사라지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 아직도 나를 괴롭힌다. 완전히 다른 것으로 upgrade를 했을 때야 비로소 모든 문제가 사라졌다는 사실은.. 원래의 Android 였던 Ice Cream Sandwich 자체가 malware로 infect가 되었을 것이다. 이것이 가능한가? flash-rom은 비록 read-only 지만 flashable한 것은 사실이니까, 불가능할 것도 없다. 그러면 이 malware는 ‘지독한’ 것이다. 어떤 ‘놈들이’ 만들고 보낸 것일까?

 

한창 더운 여름에 2~3일을 이런 것으로 골머리를 썩힌 것, 즐거운 일은 절대로 아니지만 우선 ‘놀라운’ 결과가 모든 것을 시원한 오후의 소나기 처럼 깨끗이 씻어 주었다. ‘고물 phone’에 대한 불평을 최근에 끊임없이 말하는 연숙이 잠잠해진 것이 나는 제일 기쁘다. 이것도 요새 우리 집의 많은 clunker들을 손수 고치는 것의 일환이 되었지만  ‘save-the-earth 보람’의 일부도 되었다.

 

 

catholic-thing-1

최근 몇 개월 동안 나의 e-mailbox에 아침마다 배달이 되는 newsletter 중에 The Catholic Thing 이란 것이 있다. 우연히 찾은 이곳 website는 시각적, 내용적 balance가  잘 맞아서 나의 favorite site 중에 하나가 되었고  곧 이어서 daily newsletter를 받아보기 시작하였다.  ‘지속적으로 매일 받아 읽는 글’의 영향은 절대로 무시할 수 없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이것은 습관적으로 읽게 되고 자기도 모르게 그날의 생각에 첫 실마리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2008년 6월에 시작된 이 site는, 주로 대학 교수급, 지식층, 다양한 저자들이 교대로 글을 써서 ‘매일’ 이곳에 발표를 한다. 그러니까, 내용은 우선 pro 레벨, fresh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글의 내용이 일반인에게 크게 무리 없이 읽힐 정도로 아주 자상하게, 조심스럽게 쓰여져 있다. 그러니까 나 같은 ‘일반인’ 도 큰 무리 없이 읽게 되는 것이 아닐까? 내용들도 박사학위 논문 같은 것, 아주 현실과 동 떨어진 것, 자기자랑을 하려는 것 같은 것보다는  대중적 가톨릭 신앙을 가진 사람에게 ‘현재’에 필요한 ‘모든’ Issue를 다루고 있다. 이 모든 것이란 예를 들면: “politics, economics, culture & warfare, the temporal and the eternal, children and careers, and many other contemporary questions” 라고 처음에 밝히고 있다. 영어를 큰 무리 없이 읽을 수 있는 가톨릭 신앙인에게 생각을 할 수 있는 근거와 이유 그리고 “내가 믿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라는 의문에 대답을 줄 수 있는 곳이다.

 

WHO IS GOD? 오늘 아침에 본 것이 바로 이것이다. 거창하게: WHO IS GOD? 평범한 질문이 아님은 분명하다. 이런 것을 하루 동안 기억하며 살면 그래도 조금은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역시 지식적인 출발로 하느님은, 기하학의 공리 같은 출발로 정의가 된다. 이것이 바로 가톨릭 핵심교리에 선언된 것이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의 하느님:

“that there is one true and living God, creator and lord of heaven and earth, almighty, eternal, immeasurable, incomprehensible, infinite in will, understanding and every perfection.”

 

Self-Existence: 육감적으로 전혀 느낄 수 없는 존재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그런 것이 이 표현에 전부 들어가 있다. 아니 느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를 만든 ‘것’이 하느님이다. 존재를 만든 것이 하느님이지만 하느님의 존재가 필요한 ‘분’이 아니다. 모세에게 하느님은: “I am who I am” 이라고 선언을 하신 것이 그와 비슷한 뜻이 아닐까?

 

The First Cause: 시공간의 연속은 인과관계의 무한한 연속이다. 원인이 결과를 낳고 그 결과가 결과를 낳고.. 그 중에 바로 ‘the first cause, 첫 원인’이 바로 하느님이란 ‘분’이다. 모든 결과는 이 하느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이러한 철학적인 접근으로, 모든 존재의 그 모든 것(생명체나 물체)은 하느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것, 이것을 조금 더 생각하면: 사람은 이 물체들 중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 것일까.. 특별한 은총을 받은 존재인가, 아니면..물리적인 위치로 상상할 수 없이 크고 무한한 시공간 속, 거의 보이지 않는 존재 ‘지구’ 위에서 복닥거리는 인간의 존재는 성경의 표현대로 특별한 존재일 수가 있을까? 창조의 근원이 ‘하느님’이라는 성경을 믿고 그 다음에 나오는 것도 믿는다면..하느님의 존재와 그가 ‘특별히’ 보내셨다는 ‘예수님’을 안 믿는 것은 어렵지 않을까?

 

철학적인 접근으로는 보통 사람 특히 육감을 사랑하는 요새 세속적인 존재들을 설득하기는 쉽지 않다. 나도 그 중에 하나였으니까.. 사람마다 다르지만 나는 ‘물리적’인 육감을 믿기에 물리적인 접근으로도 풀어서 설명을 해야 한다. 20세기에 들어오면서 그런 접근은 상상 이외로 빠르게 시도되고 현재도 시도되고 있다. 그런 설명은 나에게 훨씬 더 설득력이 있게 들린다. 이렇게 ‘물리적, 철학적’인 접근을 왔다 갔다 하면 확실히 무언가 보인다. 절대로 절대로 불가능했던 것들이 하나 둘 씩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2주일 대출기한이 수개월을 지나가면서 이 책을 우선 반납하여야 한다는 stress를 느끼며 이제까지 ‘시간이 날 때마다’ 이곳 저곳을 훑어보고, 비교적 가볍게 접한 이 책에서 나의 재동 齋洞 동창, 김정훈 부제에 대해서 알게 되고 느낀 것을 정리한다.

 

신학생 김정훈

신학생 김정훈

이 책을 처음으로 접하면서 제일 궁금했던 사실은 정훈이가 어떻게 그렇게 일찍 타계 他界 를 했던가 하는 것보다는 그가 생전에 어떻게 살았는가, 그의 집안, 가족은 어떠한 사람이었는지.. 어떻게 신앙, 성소를 가지게 되었는지..그런 것들이었다. 하지만 이 책은 그가 20대를 훨씬 넘은 시절부터 쓰여진 일기 형식이기도 하고 자기의 생각이 정성스럽게 담겨진 ‘문학적 냄새’가 나는 글로써,  꼼꼼히 ‘정독’을 하지 않는 한 그러한 나의 궁금증에 대한 답은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처음 대강 책을 훑으며 느꼈던 감정은 의외로 반갑지 않는 나의 반응이었다. “좋은 집안, 머리가 좋은 덕으로 선택된 선망의 대상으로 어려움과 고민 같은 것 별로 없이 유럽 유학 중, 좋아하는 등산을 하다가 조난사고로 운명”.. 비록 너무나 이른 인생의 비극적인 마감이지만 이러한 피상적인 이력서적인 눈에 쉽게 뜨이는 사실들 만으로는 정훈이 이야기가 왜 이렇게 ‘김수환 추기경의 서문’이 실릴 정도로 큰 화제나 영원히 남을 만한 책으로의 가치가 될까 하는 의문은 남는다. 물론 이 책을 계속 읽으며 이것은 나의 ‘너무나 성급한’, 생각임을 알게 된다.

 

 

¶ “산, 바람, 하느님 그리고 나.. “ 김정훈 유고집의 제목인데.. 과연 이것은 어떻게 나온 것일까? 이 궁금증은 19 쪽을 보면 간단한 설명이 나온다. 이 대목은 김정훈의 신학교 영적 지도 신부인 Stefan Hofer신부의 추모의 글에 있는데 그 신부님은 김정훈이 조난을 당한 사고 현장에 있었다고 했다.

 

우리는 별이 총총한 밤에 세르레스(Serles)에 등반하였던 적도 있었다. (중략) 베텔풀프(Bettel Wurf) 정상 정복자가 된 우리는 그 곳의 방명록에 우리들의 이름도 기록하였다. 베드로(김정훈)는 이름뿐만 아니라 한국 말로 무엇인가 썼다. 내가 무엇을 썼는지 그에게 묻자 그는 독일어로 그 밑에 주를 달았다.

산, 바람, 하느님과 나, 김 베드로.”

이처럼 베드로는 단순한 산에의 낭만주의뿐만 아니라 그때 그때의 깊은 종교적 느낌 속에서 산을 찾고 만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회고’를 보며 생각한다. 정훈이는 진정으로 산을 사랑하고 등반을 했지만 단순히 산이 좋아서, 산이 그곳이 보이고 있어서라기 보다는 깊은 종교적 체험을 통한 등반을 더 사랑하였던 듯 싶다. 나도 대학시절 참 산을 많이 찾아 다녔지만.. 어떨까, 종교적인 체험을 하였던 기억이 거의 없음에 정훈이의 나이에 비해 ‘성숙한’ 인생체험은 더욱 돋보인다.

 

 

¶ 정훈이의 가족관계는 어떤가? 이것은 사실 기본적인 호기심이 아닐 수 없다. 비록 재동 동창생이지만 ‘공부를 잘 해서 경기중학교에 갔다’는 사실 이외는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재동학교 졸업 후 중학교 시절, 파고다공원 수영장에서 그가 아이(아마도 동생)를 데리고 가는 것을 보았던 기억.. 그것이 전부다. 그러니까 남자 동생은 있었을 듯 하다. 이 책에 가족에 관한 단편적인 이야기들이 간단히 이곳 저곳에 나오기에 한 눈에, 명확하게 알기는 힘이 들었다. 우선 자신이 묘사한 가정은 204쪽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사직동 김판사네 가정도 한국에서는 신앙으로 가꾸어진 훌륭한 이상적인 가정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 일이 잘 풀려 나가지 않는 면들도 보인다. 아이들이 제 발로 걸을 수 있을 때까지, 자기가 사리를 스스로 옳게 판단할 수 있을 때까지는 부모가 이끌어 주어야 한다. 그들의 인생관과 신앙에 근거해서. 그런데 압도적으로 비중이 큰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그만 손보기가 어려워져 버린 난맥상이 드러나고 있다. (중략) 곧 아버님 돌아가신 지 10년째가 된다. 벌써 그렇게. 강산이 정말로 크게 변했다. 아버지의 그 보화를 캐내어 나눠 줘야 할 큰 책임은 바로 나에게 있는 것이 이 순간 확연해진다. (1975년 3월 10일)

 

이 글은 1975년 3월 10일 일기에 나오는 것이다. 오스트리아 친구 클레멘스의 가정을 부러워하는 글 뒤에 나온 것이다. 그 친구의 가정이 부러운 이유 중에는 ‘아버지가 높은 지위에 있고 건강한 아이들, 높은 교육을 받은 것, 3남 2녀라는 것.. 이런 것과 더불어 잘 화합된 부모의 교육, 그것도 참된 신앙에 의한 것.. 이라는 사실. 아마도 김정훈의 가정도 이에 뒤지지 않았던 이상적인 가정은 아니었을까? 하지만 10년 전에 돌아가신 ‘김판사’ 아버님의 비중이 너무나 컸기에 가정은 ‘난맥상’이 드러났다는 판단이다. 그러니까.. 1965년 경에 아버님이 타계를 하셨으니까, 정훈이 경기고 3학년 때였을 것이다. 혹시 그런 충격이 정훈이에게 깊은 성소의 뜻을 남긴 것은 아니었을까? 사회적 지위가 높고, 신앙심이 깊고, 가정을 사랑하는 아버님을 가진 정훈이었다. 아버지 없이 자란 나로써는 부럽지 않을 수가 없다. 분명히 천주교 가정이었기에 자연스럽게 천주교인이었을 정훈이네 가정, 혹시 대대로 내려온 ‘박해 받았던 가문’은 아니었을까? ‘비중에 컸던 아버지’에 대한 회고는 이곳 저곳에 나온다.

 

나가이 다카시의 ‘만리무영’에서 여러 대목을 읽었는데 느끼는 점이 많다. 우선 그 글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차분하고, 원만하고, 노력을 기막히게 많이 한 신앙인인 것을 알게 해 준다. 내게 특히 좋게 여겨지는 것은 그 글의 분위기와 저자가 바로 돌아가신 아버지를 연상시키는 까닭이다. 무엇보다 진지하고 신념에 찬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도 그러하고, 어투며 그 상황까지 어쩌면 그렇게 흡사할까. 공감 가는 점이 정말 많다. 자식에 대한 배려, 아내 생각 등도 아버지 경우와 같다. 동시에 그 사람의 아들들은 어떨까 하는 호기심이 부쩍 동하는데, 많은 사람이 우리 집안이나 나에게 대해 갖는 기대와 주시도 그런 종류일 것이다. 불쌍하신 아버지, 죽음을 앞두고 아내를, 자녀들을 그대로 놔두고 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무슨 생각에 젖으셨을까? 얼마나 우심 憂心 이 크셨을까? (1972년 6월 11일)

 

위의 일기에서, 아버지가 권해준 책을 읽으며 그 책의 저자가 아버지를 연상시키는 ‘좋은 점’들을 열거한다. 여기서 보아도 그 아버지는 정말로 존경 받을 만한 가장이었음이 짐작이 된다. 일찍 운명을 하신 아버지, 아마도 불치의 병으로 돌아가신 듯하다. 장남일 것 같은 정훈이, 이때부터 아마도 가장으로써의 기대를 받으며 성장하지 않았을까?

 

 

 

¶ 20대를 꽉 차게 살아오던 정훈이의 모습, 언행, 성품 등은 어땠을까? 이것은 친구들이 본 것이 아마도 제일 정확한 것이 아닐까? 일찍 타계한 친구를 보내며 친구 대표 ‘기헌’의 ‘조사’에 잘 묘사되어 있다.

 

너는 너의 가족들이 기도하며 바랐던 대로, 평소에 너를 아끼고 사랑했던 사람들과 친구들이 기대했던 대로, 너의 훌륭한 재능과 착하고 인간미 넘치는 성품이 더욱 닦아지고 완성되어 이 한국 교회를 위해서 많은 일을 했어야 하는데.. 이제 겨우 서른 해를 넘기고 가다니.. (중략)

너는 순진하고 단순하면서도 깊이가 있는 사람이었어. 너의 신심 생활의 진보는 언제나 앞서 있었고, 너의 정신적인 사고력은 언제나 예리하게 우리를 압도했었지.

책 읽기를 그렇게나 좋아하고, 깊은 명상과 기도의 생활을 너는 얼마나 사랑했었니? 그러면서도 네 마음은 언제나 뜨거운 인정이 넘치고 있었다. 친구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아낀 너였는지 우리는 잘 안다. 모든 친구들에게 한결같이 잘 해 주었어. 특히 괴로운 일을 당하고 있는 친구들에게는 어떻게 해서라도 도와 주고 싶어하던 너였지. 너의 특징인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머리를 긁적거리면서 두 눈을 껌벅거리던 너. 어떻게 해서라도 그 괴로움을 나누고 싶어 너는 애썼지.  (중략) 그러기에 친구이면서도 우리는 너를 존경하였고, 우리를 대신해서 큰 일을 해 주리라 믿었다. (중략) 착하고 아름답게 산 너의 영혼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백 배의 보상을 틀림없이 천국에서 받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너와 영결하는 이 마지막 순간을 기쁘게 받아들이겠다. (1977년 6월 7일, 정훈이를 보내며.. 친구대표 기헌이가)

 

비록 고인을 기리는 조사이긴 하지만 이 글에서 정훈이의 이목구비, 면모, 표정, 성격 들이 직접 간접적으로 다 보인다. 나로써는 이것이 ‘성인’ 정훈이를 상상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친구들에게 그렇게 기대를 받았던 ‘장래가 촉망되던 큰 재목’ 이었다는 인상을 받지 않을 수가 없다.

 

 

 

¶ 가톨릭 신부와 여성, 신부 지망생 그러니까 신학생이었던 김정훈은 어떤 여성관, 여성 경험을 가졌을까.. 20대 중반의 혈기왕성한 ‘멋진 남자’에게 여성과의 교제가 없다는 것은 사실 말이 안 된다. 나와 동갑(돼지띠) 이기에 1970년대 중반의 나를 생각하면 너무나 쉽게 상상이 가는 것이다. 다만 나의 background와 그 이외 많은 것들이 아마도 나와는 ‘하늘과 땅’ 같은 차이가 있었음을 생각한다.

우선 절대자 하느님, 예수님을 자연스레 알고 믿는 그, 완벽한 가정교육을 받고 자란 유복한 가정.. 등을 생각하면 정말 ‘자격을 갖춘 멋진 여성’이 그의 주변이 있었을 듯 하다. 다만 이 유고집에는 그에게 가장 중요한 여성, J 라는 여성만이 눈에 뜨인다. 과연 J란 여성은 누구일까? 거의 한 chapter “J와 인생” 이 J 라는 여성에 관한 일기인 것을 보면 ‘신부와 결혼’에 대한 그의 결심에서 가장 심각한 인물이었음 에는 틀림이 없다.

 

J에 대한 나이, 출신배경, 알게 된 경위 같은 것은 알 수가 없다. 다만 집 식구들에게는 알려진 사람, 공개된 데이트였음은 확실히 알 수 있다. 신부를 지망하는 신학생과 데이트를 하는 여성은 어떤 여성들일까? 결혼을 전제로 할 수가 없는 100% 순수한 지적인 만남이었을까? 계속되는 깊어지는 만남에 자신에게 제동을 거는 자신의 결심도 보인다.

 

J와의 문제에 단안을 내려야 하고, 내렸으면 확실하게 밀고 나가야 한다.

‘그래야 하는 까닭’

1. 실험적인 사귐은 있을 수 없다.

2. 그렇지 않으면 내 자신이 문제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타의에 의하게 됨.

3. 그녀를 위해서도 더 깊어지지 않는 것이 좋다. 실제로 나의 결론은 지어졌는데, 실행은 빠를수록 좋다.

4. 언젠가 끝에 가선 내가 당황하게 될 것이다.

이 문제는 내 햄, 내 의지만으로 될 수 없는 것이니 주님, 빛과 길을 주소서. 이럴 때 주님을 찾는다고 나무라지 마소서. 이럴 수밖에 없습니다.

 

이 일기에서 그는 ‘조직적’으로 차근차근하게 문제의 본질과 방향을 찾으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한다. 문제의 심각함과, 어려움을 알고 그는 결국 ‘절대자’의 힘을 기대하고 있다. 그 당시, 나의 모습을 여기에 비추며 돌아본다. 이런 문제에 있어서, 나는 절대로 혼자였다. 절대자가 절대로 나에게는 없었다. 혼자였던 나는 모든 것을 ‘나침반’이 없이 헤매며 허우적거린 세월들이었다. 나와 정훈이의 20대 중반은 이렇게 하늘과 땅만큼 멀리 있었던 것이다. 그는 한마디로 ‘은총을 일찍 받았던’ 영혼이었다.

 

곧바로 그는 J에게 쓴 ‘헤어짐의 편지’를 쓴다. ;7월 23일자 일기에 편지가 실려있다. 분명하지 않은 것이.. 이 편지는 일기인가 아니면 실제로 J에게 보내진 편지인가 하는 것이다. 이별의 편지, 참 balance와 courtesy, essence가 모두 있는 편지가 아닐까?

 

J씨 귀하,

 

이 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있어야 할 순간이고 또 그 때는 빠를수록 좋기 때문입니다. 이런 책이며 글 같은 것이 부질없는 것이고 오히려 없느니만 못한 것이라고도 생각됩니다만 다른 방법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역시 글로 써야 제 뜻을 그래도 명확히 전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동안 정말 고마웠습니다. 그리고 참으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그 동안 받은 것에 대해 어떻게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주로 받기만 하고 드린 것은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제가 주는 방법을 몰라서가 아니라 줄 것을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자기의 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설령 기존의 길이란 있는 것이 아니라 해도 자기가 뜻을 정하고 온 가능성을 모으고 있는 터에 이와 상치되는 사상 (事象)을 지닌다는 것은 일을 이루지 않겠노라는 것과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의 목표가 확실한데 이런 상태를 계속한다는 것은 저로써 더 이상 용납 못 할 일입니다. 그것은 제 자신과 J씨를 크게 속이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간이 길면 길수록 쓰라림만 커질 것입니다. 여기서 해야 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항상 이것을 알면서도 갈팡질팡하며 생각을 모으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그리고 오늘을 기다린 거지요.

지금 이 글월을 쓰면서 저는 이 글의 의미가 엄청난 데 스스로 놀랍니다. 이는 우리의 사귐에 대한 결단일 뿐 아니라 저로서는 제 삶의 의미를 향해 다시 한 번 크게 내딛는 순간이기도 한 때문입니다. 이런 결정이 일방적이고, 제게 있어서는 쉬운 일이고 또 회피가 아니냐고 하지 마십시오. 또 이 일이 그런 점을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하고, 단안을 반드시 필요로 하는 것이냐고 도 하지 마십시오. 제가 얼마나 힘들게 이 글을 쓰고 있는지 또 그런 만큼 얼마나 정확하게 그 의미를 파악하려 하고 있는지를  J씨라면 아실 것입니다. 우리는 일생에 몇 번은 결정을 내려야 할 때를 만나고, 또 한 번 내린 결정은 단호히 밀고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J씨는 제게 너무도 과분하고 소중한 분이었습니다. ‘두 번 다시 그런 사람은 만나지 못한다.’ 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그런 만큼 지금의 제 심정도 몹시 단호함으로 차 있습니다. 아니, 단호하려고 애써 노력하고 있습니다. 학교 주소도 아시고 또 9월에 학관에도 나가겠지만 제게 소식 주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언젠가 고등학교 때 학생회장이 말했다고 한 것처럼 저도 J씨가 그 근본을 향한 고귀하고 투철한 노력을 조금도 흩뜨리지 않고, 그 동안 얘기했던 모든 것을 이루실 수 있으리라고 굳게 믿으며, 용맹스럽게 전진하시기를 진정으로 빕니다.

– 김정훈

이 책은 그 동안의 우정에 대한 저의 기념의 선물입니다. 기꺼이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이 작별편지를 보면, 그의 확고한 결심을 J에게 전하며 다시는 연락을 하지 말라는 부탁을 한다. 이 정도만 아주 단호한 결심이 아니었을까? 이런 것으로 보아서 J라는 여성은 ‘적극적’으로 정훈이를 만나는 사람으로 느껴지고, 아주 나이에 비해서 성숙할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9월에 학관에도 나간’다는 구절을 보아서 이들은 아마도 같은 ‘학관’에 다녔던 것은 아닐까? 학관이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대강 그 당시에는 ‘학원’이라는 말을 썼는데.. 학관은 종류가 다른 것이었을까? 마지막 구절에 ‘근본을 향한 고귀하고 투철한 노력을 … 용맹스럽게 전진하시기를..’ 이것으로 J라는 여성도 무슨 뚜렷한 목표를 향한 ‘지식층’ 여성이었을 것 같은 느낌도 받는다.

 

이 ‘편지 일기’ 이후에도 그는 사실 J를 잊은 것이 아닌 것 같다. 계속 J를 만나며 그녀에 대한 글이 나오니까.. 아마도 서로가 ‘가벼운 마음’으로 ‘결혼의 가능성을 배제한’, ‘진정한 친구’로써 만난 것일지도 모른다. 다음 8월 21일의 일기는 J에 대한 끈질긴 미련과 자신의 필연적인 결심에 대한 분석이 나온다.

 

J를 본 지 열흘이 지났다. 지난 금요일과 월요일에도 만나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다 하면서도 보고 싶다.

그냥 당겨지는 이 마음은 무엇인가? 왠가? 누가 무엇이라 한다 해도 이런 마음은 참 순수한 것이다. 그리고 자연적 현상이다.

간단한 기록으로 끝나려 했는데 또 길어진다. 내심에 잠겨 있는 것이 들고 일어나는 까닭이다. 파헤쳐 본다는 것도 힘에 겨웁다.  문제는 결단만이 해결의 관건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또한 결단을 내렸으면 책임지고 수행해야 하고, 끝까지 충실해야 한다.

그런데 결혼도 포기하고, J와 같은 사람과의 사귐도 금기(禁忌)인 신부가 되려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신부행(神父行)을 결심한다는 것은 그만한 의미가 있어서일 터인데 과연 그런가? 어째서 내 단 하나뿐인 인생을 사제에다 걸었는가? 사제가 무엇인가? 그 본질을 분명히 보고 결단해야 하는 것이다. 오늘은 비교적 분명하게 문제점들이 드러난다.

내가 보는 신부에 대한 정의, 그 신원(身元)은? 고전적 정의로서는 내게 그 의미가 약하다.

 

위의 일기로 나는 그가 아직 신부가 되려는 결정을 하지 못한 것을 안다. 하지만 계속 내면적으로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자연적으로 생리적으로 끌리는 사랑을 느끼는 이성, 그것도 20대 중반의 나이에.. 어찌 간단히 결단을 내릴 수가 있단 말인가? 이 과정에서 김정훈의 ‘결단의 힘’을 볼 수 있다. 한 인간인 여성에 대한 사랑, 관심, 끌림 등과 신부가 되려는 성소의식이 치열하게 싸우는 듯한 몇 개월로 1973년의 마지막을 보내는 김정훈, 드디어 무서운 결단을 내리며 편지를 쓴다. 신부가 된다는 확고한 결심이다.

 

J씨 귀하.

이 시각을 위해 사귐을 해 왔다는 말이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저는 초조하리만치 이 순간을 기다려 왔습니다. 뜻밖의 이 글월을 받고 놀라시리라 믿습니다만 끝까지 읽으시기 바랍니다. 이 글이 가능한 근거는 우리가 하느님을 지고(至高)로 모시고 있고, 그 동안 J씨나 저나 거짓 한 점 없이 서로 성실하였다는 사실 자체에 있습니다.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벌써 짐작을 하실지 모르나 정말 그렇습니다. 결단을 지금 내려야 합니다. 일찍이 저는 신부행(神父行)을 결단했습니다. 설령 각 사람에게 이미 정해진 길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해도 저의 그 선택에는 후회나 변함이 없습니다. J씨는 제게 너무나도 소중한 분이었습니다. 지난 번에 J씨가 말한 뜻대로 그 동안 우리는 분명 서로에게 성실하였습니다. 그러나 한계가 있다는 것 자체가 피치 못할 불성실의 시작입니다. 반드시 그렇습니다. 제가 J씨를 아끼는 그만큼 이 문제는 절실합니다. 이 문제는 누가 무어라 해도, 어떤 식으로 가설을 세운다 해도 사실입니다. 이 점을 항상 의식한 저는 두려워하면서도 이 시각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한껏 회피하려 했으나 결단은 있어야 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빠를수록 좋을 것입니다. 비참하고 단호한 심정으로 이 글을 씁니다. 저는 이 글을 쓰기가 쉬웠고, J씨는 어렵다고 믿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의 만남, 사귐이 그렇게 순수했던 것처럼 이 시작도 서로에게 순수해야 하고, 전적인 동의로써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믿습니다. J씨는 J씨의 길을 힘차고 명랑하게 가십시오. 저도 제 길을 용기 있게 웃으면서 가렵니다. 이상이 제가 쓰고 싶은 전부입니다. 사실 J씨는 이 글의 진의(眞意)를 잘 알고 계십니다. 저의 집 전화번호도 알고 또 찾을 수도 있지만 저를 찾지 마십시오. 이별은 엄청난 사건이지만 한 순간에 이루어집니다. 저도 결코 J씨를 찾지 않겠습니다.

1973년 12월 26일 김정훈

 

정중하고 진심이 우러나오는 글이지만, ‘영원히’ 남녀로써 헤어져야 한다는 냉혹한 진실 또한 외면하지 않았다. 미련을 0%도 남기지 않고 그는 ‘결코 J씨를 찾지 않겠습니다.’라는 작별인사로 끝을 내는 그.. 얼마나 괴로웠을 결단이었을까? 그 나이에 나라면 ‘절대로 절대로’ 못하였을 것이고 그렇게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음 해 1974년 봄 무렵 유럽 유학을 떠나는 그는 아마도 그 때서야 J씨를 조금은 더 쉽게 잊을 수 있지 않았을까? 그렇게 남녀관계는 알 수가  없는 것이니까..  (Part 2로 계속 됨)

 

closerto-1

 

Closer to Truth? 혹시 예수님의 말씀에서 나온 것인가? 하지만.. 아니다. 예수님은 closer to truth 라고 하시지 않았고, 간단하게 I am the truth.라고 하셨다. 하느님과 인간의 차이를 극명 克明 하게 보여주는 말 들인가? 철학적, 과학적으로 truth란 것은 어떻게 정의가 되어 있는가? 한가지인가, 여러 가지인가? 여기서의 Closer to Truth는 다행히 복잡한 정의가 불필요한 TV Program과 그에 연관된 website의 이름이다. 자기 나름대로 진실을 찾고자 하는 노력을 ‘멋진 format’으로 마음껏 보여주고 우리로 하여금 ‘생각 좀하며 살라’는 교훈까지 주는 program이다.

 

PBS channel로 방영이 되지만 나는 commercial이건 public이건 근래 ‘완전히’ TV 보는 것을 끊었기에, 이것은 program website: www.closertotruth.com을 통해서 video-on-demand 로 편안하게 생각하며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이 program에 대한 나의 견해는, science 특히 natural or applied science background를 가지고 신앙이나 철학적인 것을 추구하려는 사람에게 이 program은 편안하고도 냉철하게, 폭 넓게, 열린 가슴과 마음으로 생각하게 하는 topic들을 세계적 석학들의 view interview를 통해서 제공한다는 사실이다. 특히나 ‘성서적 사실과 natural science’의 ‘사실적, 역사적 마찰’로 고생하는 사람들에게 (나 같은 경우) 다시 한번 ‘진실과 진리’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이 program의 tag line을 보면 어떠한 주제를 다루는지 간단하게 알 수 있다. “The Greatest thinkers exploring the deepest questions: Your Sources for Cosmos, Consciousness, Meaning” 이 정도의 introduction이면 얼마나 깊고 넓은 주제인지를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여기에 등장하는 the greatest thinkers란 누구인가? 일반에게 알려진 석학도 있고 전혀 생소한 얼굴들도 있다.  예를 들면: John Polkinghorne, Deepak Chopra, Michio Kaku 등은 나 정도도 알만한 ‘석학’들이고 나머지 대부분은 생소한 얼굴들이다. 하지만 나의 제일 관심사는 이 program의 producer, host인 Robert Lawrence Kuhn이란 인물이다. 이 program전에 나에게는 생소한 인물이었다. 어디선가 본 얼굴인데.. 할 정도였다. 이번에 ‘알고 보니’ 조금은 실망감을 감출 수 없는 background의 소유자인 것이: 비록 natural science 배경 (life science)은 가졌지만 그의 생애 대부분은 ‘돈에 관심이 많았던 money man’에 관한 것이었다. 어떤가.. 돈을 억수로 벌고 보니 인생이 별것 아니라는 철학적, 신앙적인 눈이 뜬 것인가? 특히 내가 제일 싫어하는 나라 중에 하나인 ‘짱께, 중국’을 상대로 아니, 정권에 아첨하며 돈을 벌었다는 사실이 나를 실망하게 한다. 하지만 나의 관심사는 어디까지나 그가 만든 이 ‘심각하고 의미 있는’ TV program에 관한 것이니까.. 그렇게 실망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더군다나 그는 ‘세계적 석학’들을 자유자재로 ‘주무르며’ 인류가 가진 가장 심각하고 심오한 주제를 그들과 거침없이 토론을 하니.. 참 ‘재주 꾼’임에는 틀림이 없다.

 

3가지 주제: Cosmos, Consciousness, Meaning 중에서 나의 깊은 관심은 역시 자연과학적, 거시적 물리학 Cosmology이고 다음은 자연과학과 신학을 함께 다루는 Consciousness 인데, 마지막의 Meaning은 주로 철학적인 것으로 내가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는 분야다. 이 중에 ‘중간적’인 것, Consciousness 는 알면 알수록 정말 신비스러운 분야가 아닐 수 없다. 특히 가슴과 마음을 활짝 열고 신앙적, 신학적인 것을 이해하려는 지금, 나에게 이 분야는 실제로 physical 한 것과 metaphysical한 것을 골고루 융합을 시킨다는 것으로 현재 내가 practice하고 있는 모든 ‘신앙적인 노력’이 결코 감상적이거나 신화적인 것이 절대로 아니라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다. 우리의 자아 의식이 과연 뇌 안에만 제한되어 존재하는 것일까? 뇌가 죽으면 의식도 함께 사라지는 것일까? 현재 나의 입장은,  의식은 뇌에만 존재하는 local적인 것이 아닐 것 그러니까 nonlocal 이라는 심증이다.

 

이런 ‘아슬아슬한’ 주제를 세계적인 석학들이 ‘무서움 없이, 거침 없이, 열린 마음으로’  이 program에서 토론을 하는 모습들 너무나 너무나 인상적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이런 ‘열린 과학’의 도래를 진심으로 쌍수를 들어 환영하며, 이런 추세들이 과학 특히 자연과학 background를 가진 ‘수세에 몰린 듯한’ 신앙인들에게 많은 희망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안다.

 

4.19 에 대한 것, 물론 나의 기억에 의한 것이 대부분이지만 상당한 부분은 news media에 의한 것들이다. 현장에서 목격한 당시 서울의 일간지가 제일 그렇고 나머지 것 중에는 미국의 LIFE magazine도 한 몫 낀다. 특히 당시의 ‘최첨단’ 사진기자, 기술을 자랑하던 잡지라서 그 역사적 가치는 상당할 것이다. 하지만 사진, 화보 이외에도 사설, 논설 등도 수준급이었는데, 다만 지금 기준으로 보면 조금은 left-leaning (좌향적)  한 쪽이 아니었을까는 생각도 든다. 4.19 학생 혁명이 난 후 처음으로 기사와 화보를 다룬 것이 5월 9일자였고 거기에는 아주 비중 있는 ‘논설, editorial’이 실렸다. 제목이 바로 The Student Phenomenon, 학생현상(?).. 그 전문을 여기에 발췌하였다.

 

논설의 주제는 바로 ‘학생’들이다. 한국의 학생을 중심으로 세계도처의 학생들, 그들의 사회적, 정치적 영향력을 분석하였다. 이 논설을 쓰게 된 동기는 ‘분명히’ 한국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린’ 4.19 혁명이었을 것이다. 공교롭게도 곧바로 터키에서 4.19 와 비슷한 혁명이 일어났고 ‘이승만의 친구’ 멘데레스 수상이 실각을 하였는데,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 조금 난처한 사태가 아닐 수가 없었다. 두 나라가 거의 같은 미국의 ‘맹방’, 제1의 적인 소련의 공산당과 총칼로 맞선 나라가 아닌가? 이 나라의 지도자들을 돕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고 보니 나라 안에 조금 잡음이 있어도 외교적으로 무마할 정도였다. 4.19 혁명 당시도 미국은 한국 학생의 ‘유혈사태 희생자’정도에만 관심을 두었다. 만에 일이라도 이 사태를 이용해서 김일성 개xx가  제2의 6.25 라도 꿈을 꾼다면 그것이 진짜 미국의 악몽이 아니었을까?

아무리 그래도 자기 국민의 지지를 못 받는 맹방의 지도자, 사실 또한 골칫거리였을 것이다. 터키 또한 비슷한 상황이고 보니 한쪽은 ‘한미 상호 방위조약’, 다른 쪽은 나토 NATO로 묶여 있는 상황의 미국, 참 입장이 어려웠을 듯 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각자 국민이 원하는 방향으로 사태는 흘러갔고 미국의 입장 또한 큰 문제없이 해결 된 셈이다.

 

LIFE magazine의 논설은 다음 사실을 주목하였다.

이 두 나라의 사태의 ‘근본적’인 원인은 역시 “immeasurable stresses of the cold war” 지독하게 심각한 미국 소련간의 냉전상태 라는 사실. 이 편이 아니면 저 편, 중간이 없었던 그런 심각한 냉전 상태에서 ‘약소국’들은 어쩔 것인가? 그러다 보니 지도자들에게 너무나 많은 권력 남용이 허용되었고, 그들이 독재자로 ‘전락’하게 되었다. 이런 어려운 여건을 견디지 못한 첫 그룹이 대학생을 중심으로 한 학생들이었다.

미국의 경우, 학생들의 정치에 대한 ‘운동권’ 형성이 이제까지 거의 없었던 이유는 ‘아마도’ 미국이 독립하는 과정의 혁명이 ‘완전한’ 것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미국의 문제는 아마도 ‘노예제도의 전통’을 고수하는 주들과 연방정부간의 마찰, 충돌이다.

 

이어서 논설은 유럽의 사례를 들며, 1848년 Hungary 의 학생을 중심으로 한  ‘무정부주의, 허무주의, 사회주의’ 운동을 예로 든다. 근래의 예로써 1956년 역시 Hungary의 소련침공을 유발시킨 ‘자유운동’을 들었다. 대부분의 학생운동들은 결과적으로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갔지만, 극단적인 예외는 세계 제1차 대전을 유발시킨 ‘사라예보사건’ 이었다.

 

논설은 다시 LIFE magazine의 progressive value를 다음과 같은 ‘미국 흑인차별’의 사건들에서 나타내고 있다.

 

미국의 South (남북전쟁의 남쪽 측)에서 흑인 학생들이 제도적인 흑백차별에 항의해서 식당 같은 곳에서 백인들 옆에 앉아서 식사를 하는 ‘데모’를 벌리고 있고 미국 전역에서 지지를 얻고 있다. 이런 ‘남측의 웃기는 전통’에 대항하는 이런 운동이 가능하게 된 것은 아마도 신세대들이 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덕이 아닐까.

 

동정적으로 이승만 대통령을 보는 논설은, 학생들이 정부의 극단적인 탄압적인 정책에 반발을 한 것으로 보았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3.15 부정선거를 비롯해서, 정치깡패, 정치경찰들이 얼마나 웃길 정도로 비행을 저질렀던가? 그저 휴전선 넘어 김일성 개xx가 ‘무서워서’ 침묵만 지키던 일반 국민들과 달리 대학생들은 그런 목불인견 적인 꼴들을 못 참았을 것이다. 그런 백주대로 강도 같은 정책을 싫어한 것은 한국 대학생만이 아니었음을 주지하는 논설은 당시의 국무장관 ‘허터 Herter‘와 아이젠하워 Eisenhower 대통령을 예로 들었다.

 

아무리 맹방이고 소련에 대항하는 동맹국이라고 해도 미국의 기본적인 자유의 가치를 저버리는 것은 용납할 수가 없다. 탄압적인 정책이 안보를 위한 일시적인 것이 아니고 ‘영구적인 정책’이어서는 안 된다. 국무장관 허터와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생각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남미에서 일어난 학생운동에 대한 것도 거의 같은 ‘미소 냉전’의 산물이었다. 공산당을 잡으려는 부패정권에 대항한 학생들의 데모와 항의에 의한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어려워도 ‘자유를 억압’하는 것은 참을 수가 없다는 미국의 기본 자세는 이곳에서도 변함이 없었다. 남미의 좌익을 지지하는 학생들이 쿠바 카스트로 를 왜 미국에 반대하는가 항의를 했을 때,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대답은 간단했다. 카스트로 Fidel Castro 가 ‘공약’을 어기고 ‘자유를 억압’ 했기 때문이라고 한 것이다. 바로 기본적인 ‘자유’가 모든 것의 밑에서 흐르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논설은 한국과 터키의 학생들을 지지하는 결론을 내린다.

 

학생들이 생각하는 불만사항을 들어주는 것이 옳은 것이다. 이것은 미국만이 아니고 전 세계가 기대하는 것이기도 하다. 특히 미국의 credo가  Don’t tread on me! (밟지 마!)라는 사실임을 주지해야 한다.

 

 

논설을 4.19혁명이 난지 66년이 지난 뒤에 읽으니 격세지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그 때나 지금이나 상황적으로 가치적으로 변한 것은 거의 없다는 느낌이니까. 기본적인 ‘사회적, 정치적’ 자유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으면 역사의 잘못을 되풀이 하지 않을 것이고.

이 논설이 조금 과소평가한 낙관적인 분석은: ‘미국 학생들은 절대적 자유가 보장된 덕분에 조용할 것이다’ 라는 것.. 이 논설이 쓰여진 지 불과 10년도 되지 않아서 미국은 역사상 유례없는 ‘반정부 학생운동’의 전성기를 겪게 되니까.. 월남전의 정당성에 대한 불만에 의한 것, 이것은 반대로 지나치게 자유가 ‘보장, 허용’ 되어서 그랬던 것은 아닐까.. 역사적인 irony가 아닐 수가 없다.

 

LIFE cover

LIFE cover

There is a fascinating pattern emerging in Latin America, Korea and now Turkey. What is taking place in these widely separated lands is an outburst of resentment by university students against governments which – partly as a result of the immeasurable stresses of the cold war – have become tyrannical. And what the students are proving – which free men must of course welcome – is that young, spirited and determined people can still make tyrants tremble, and even totter.

Political revolt by university students is a well-known story abroad, thought not common to our own land. This may be a reflection on the seriousness and maturity o f U.S. students but, whatever the cause, other students around the world are politically minded by traditional and are accepted as a dynamic political force.

Perhaps the contrast exists because our own revolution was so complete – in establishing the basic freedoms of conscience, press and speech for once and all – that there has been no need to question what it has settled. The greatest challenge was met in our War Between the States which settled forever that no man may be another’s master.

In Europe, where things have been different, it was a young poet, Sándor Petöfi, who in 1848 set off the revolution in Hungary against the tyranny of the Habsburgs, only to be crushed later by the Russian czar. And it was the students of Budapest again in 1956, acting in the name of Petöfi, who overthrew – if only briefly – the czar’s successors. Serious, impassioned Italian students were the backbone of Garibaldi’s Risorgimento. In France, it was students who in 1897 rioted in defense of Captain Dreyfuss. Students were the nihilists, the anarchists, the Marxists of Russia. What all these movements had in common was idealism backed up by willingness to fight. Sometimes this violence was bent to good ends and sometimes ill. It was, we must remember, a Bosnian student named Princip who at Sarajevo lit the fuse which doomed more than eight million men.

Most of these revolts of the young have been beneficial. We are seeing something of that sort now in our own country. By their sit-ins Negro students in the South are demonstrating the silliness of a system which denies the right of humans to eat alongside one another. They are getting an impressive amount of support from which students outside the South. They are getting some, too, from which students in the South, who find they cannot rationalize or defend these paradoxes. The spread of education in the South has produced a force to make men think.

The students who have overthrown the government of Syngman Rhee in Korea have obviously been stirred to the depths by oppressive practices. Rhee’s motives were understandable in a land which has been horribly devastated by Communist incursions and must still live beneath the gun of possible new attacks. This is true in Turkey, which lies immediately beneath the guns of the vast Soviet Union and is subjected to continuous and insidious subversion. Yet, when all is said and one, the fear of losing freedom can never be made an excuse for suppressing freedom – certainly not as a permanent policy.

The demonstrating students who are insisting on freedom have an ally in Secretary of State Herter. In his denunciations of the killings of South Africa and Korea, he has made clear that he will not allow the common interests of defense to put the U.S. in the position of endorsing practices which offend our basic principles. The students have another wise friend in President Eisenhower. On his Latin American visit Chilean students asked him trenchant questions about our alleged hostility to Fidel Castro. The President’s written answer to them left little more to be said: Castro has betrayed “the ideals of freedom of expression, equal protection of the laws, and the right freely to choose a representative government.”

Of course, that is also what Rhee did, and what Menderes is doing in Turkey. Students are letting them know that the time is later than they thought – and are right to do so. And we are right to endorse their legitimate grievances and their right to have them redressed. That is what the world would expect – and is entitled to expect – of a nation born in revolution and whose credo was, “Don’t tread on me!”.

 


 

아래의 사진을 보라.. LIFE에 실린 내 또래 아이들의 모습들.. 국민학생, 중학생이 섞인 이 데모는 4.19 이후 계엄령이 선포되면서 송요찬 장군휘하의 계엄군이 탱크를 몰고 시내 중심을 장악했을 때 ‘군인 아저씨 우리를 쏘지 마세요’ 라고 다시 학생들이 그것도 어린 아이들이 외쳤다.

당시 계엄군은 ‘정치적 중립’을 고수하며 자기 국민을 ‘보호’하였다. 1년 뒤 5.16으로 ‘그 고마운 군인아저씨’ 들 자신이 정권을 잡았다. 이 사진을 유심히 보며.. 서울 시청을 뒤로하며 남대문 쪽으로 행진하는 아이들.. 바로 나를 보는 듯 했다. 꾀죄죄한 구제품 옷, 신발, 교복을 ‘걸치고’ 골목 뒤에서 놀다가 나온 모습들.. 바로 나의 모습, 이 사진의 ‘아이’들 다 70을 바라보는 할아버지들이 되었을 것인데 그 날 ‘형님 학생’들에게 이끌려 나온 사연이나 기억하고 있을는지..

 

4.19 이후, 서울 중심가 악동들의 절규와 호소..

4.19 이후, 서울 중심가 악동들의 절규와 호소..

 

NPR, National Public Radio.. 오래 전, 지루하고 지겨운 Atlanta Metro I-285  통근 길의 벗이었다. 이 방송을 거의 매일 들으면서 배운 것도 참 많았다. 특히 ‘통근시간’에 맞추어 방송을 하는  Morning & Evening News, ‘All Things Considered‘ 같은 program은 가히 일품이었다. 특히 그들이 자랑하는 independent & progressive value에 대해서 많이 배우기도 하였다. 하지만 가끔씩 신경을 건들이던 ‘going too far’ 했던 것들1이 나를 그들로 부터 멀어지게 하였다. 통근할 필요가 없어진 이후 나는 거의 그들을 잊고 살았다. 그 사이에 Internet이 traditional over-the-air mass media를  누르면서  FM radio를 따로 들을 기회가 없어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들도 Internet에 등장하게 되어서 다시 그것들을 듣거나 볼 기회가 없는 것도 아니지만 그 옛날 그들의 golden-age는 최소한 나에게는 지난 듯 싶다.

 

오늘 우연히 들린 그들의 website에 나의 눈을 끈 것이 하나 있었다. 건강에 관한 기사였는데, ‘유행을 타는 건강지식’에 대한 가벼운 경고를 포함하고 있는 주로 common sense에 바탕을 둔 것이어서 나도 많이 공감이 가기도 했다. 기사의 골자는 ‘치료보다는 예방’이라는 이제는 상식화 된 것인데, 예전에 이런 것들에 거의 관심이 없었던 나도 결국은 Medicare age로 들어가게 되면서는 이야기가 달라졌다. 골자는.. “언제 죽더라도.. 죽는 날까지 필요이상의 고통이 없이 살자” 라는 것. 그러니까.. 한마디로 ‘건강하게 죽자’ 라는 이상한 표현이다.

 

예방의학의 발전이 치료의학의 발전에 비해서 훨씬 앞서고 있다는 저자의 말, 그도 physician이고 보니 공감이 간다. 치료하는 의사들, 특히 primary doctor들이 병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것, 아직도 심하게 말하면 ‘추측하는 game’이라는 것, 조금은 소름이 끼친다. 확률적으로 진단, 치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재수없는 case에는 병을 키우고, 사망으로 이어지는 것일까? 그러면 예방의학 차원에서, 어떻게 살면 건강하게 죽을 수 있는 것일까? 이것이 바로 내가 보아도 상식, common sense가 아닐까 생각한다.

 

1. Get enough sleep.

2. Move your body throughout the day.

3. Eat well — a healthy assortment of foods. Mostly plants, and not too much. (An ideapopularized by author Michael Pollan.)

4. Interact socially. Isolation is not good for the body, soul or mind.

5. Take some time to reflect on what you are grateful for.

 

1. 숙면: 밤에 잠을 잘 잔다

2. 운동: 부지런히 움직이는 하루를 보낸다.

3. 음식: 적당한 양의 음식, 야채,과일을 잘 먹는다.

4. 사회적인 활동으로: 고립 됨을 피한다.

5. 자기 반성, 감사: 항상 뒤돌아 보며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다.

 

 

이 정도면 아하~~ 나도 알던 것이다 라고 생각을 한다. 하지만 과연 모두들 이런 것을 지키며 살까? 아닐 것이다. 이중에서 1,2,3 은 모두 소위 말하는 육체적인 건강에 관한 것이다. 과학적인 통계도 가능한 것들이고 이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나는 이중에 1, 2 는 그런대로 잘 하고 있다. YMCA에서 일주일 두 번 정도는 heavy workout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이외에 ‘움직이는 것’도 큰 문제가 없다. 매일 빠짐없이 (car) drive를 비롯해서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3번의 음식: 확실한 것은 모르겠지만 ‘적당한 양’이 관건인데 나는 소식 小食을 좋아하기에 이것도 pass다.  근래에 들어서서 연숙의 ‘권장’으로 매끼 빠지지 않고 야채와 과일을 먹게 되고 이제는 습관이 들어서 그것들이 식탁에서 빠지면 이상하게 되었다. 그러면 physical한 것이 아닌 4번과 5번 (사회적, 자기반성)은 어떤 것일까?

 

짐작으로도 4번과 5번은 그야말로 make perfect sense라고 할까. 특히 4번의 ‘사회적인 인간 교류’는 공감을 수없이 하고도 모자란다. 간단히 말해서 사람들을 가급적으로 face-to-face 만나는 것이다. 심리 과학적으로 이것이 body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지까지는 몰라도 경험적으로 이것에 이견을 가질 수가 있을까? 5번의 자기반성, 성찰, 감사 등은 어떤가? 어느 정도까지 이런 것들은 과학적으로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궁극적인 것은 모른다. 이것은 소위 말하는 ‘자연과학’적이 아닌 것이기 때문이다. 믿음이나 신앙처럼 그저 옳다고 믿는 것이다.

 

위에 열거한 것들은 물론 모두 경험통계에 의한 것들이고 그 대표적인 것이 소위 말하는 Blue Zones에 사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다. Blue Zones란 ‘지역’은 세계에 5군데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1. Okinawa, Japan

2. Ikaria, Greece

3. Sardinia, Italy

4. Nicoya, Costa Rica

5. Loma Linda, California  U.S.A.

 

이 다섯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물론 ‘장수촌’을 말하는 것으로, 건강하게 오래 사람사람들이 많은 곳들이다. 위에 말한 ‘건강습관’을 골고루 실천하는 이 지역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그런 습관이 배어있다고 한다. 적당한 양의 인근에서 재배한 채식을 중심으로 먹고, 적당히 걷고, 특히 다양한 세대에 걸친 인간적 교류가 눈에 뜨인다. 이들은 술도 적당히 마시고 고기도 적당한 양을 먹는다고 한다. 그러니까.. 극단적인 생활방식이 절대로 아닌 ‘상식적’인 사람들인 것이다.  다른 것으로는 이들은 거의 ‘정제된 설탕’을 피하고, 가공식품도 거의 피하며 산다는 정도다. 이런 것들.. 참 많이 들어 보았고, 이제는 상식화 된 건강지식들이다. 문제는.. 어떻게 보면 쉬운 이런 상식적인 것들이 실제로는 그렇게 쉽지 않다는 것이 아닐까? 결국은 ‘몰라서가 아니라 안 해서’ 문제인 것이다. 건강뉴스에 ‘미쳐서’ 무슨 새로운 발견에 빠져 이런 상식적인 것을 못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이런 기사를 읽으며 생각한다. 올해 나의 New Year’s Resolution에 이런 ‘상식적’인 것을 꼭 실천하리라 하는 것을 포함시키는 것.. 비록 대부분 나는 비슷한 life style을 가지고 현재 산다고 해도 더욱 잘 할 수 있는 여지가 많은 것이다. 특히 쉽게 먹을 수 있는 processed food (가공식품)들, 아차~ 하면 손이 가는 것들이다. 가끔 기분전환 한답시고 ‘맛있게 먹는’ Hamburger 류들.. (어떤 것들은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돈다) 이런 것들을 조금 더 신경을 써서 가려먹으리라 생각도 해 본다. 그렇다. 오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날’까지 건강하게 살고 싶은 것이다.

 

  1. mostly homosexual issues

Before the Internet, most people rarely wrote for pleasure or intellectual satisfaction after graduating from high school or college.

 – Clive Thompson on Wired Magazine

 

Some researchers believe that by writing and then editing our own stories, we can change our perceptions of ourselves and identify obstacles that stand in the way of better health.

 – Tara Parker-Pope on New York Times

 

 

5년 전쯤 나의 Serony’s Friends personal blog을 시작할 때 ‘왜, 지금?’ 이라는 생각은 별로 심각하게 한 기억이 없다. 이유가 있었다면, 그저 막연하게.. 남들이 하니까.. 혹시 옛 친구나 친지를 이곳을 통해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정도가 아니었을까? PC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많은 덕분에 tinkering을 하는 시간도 따라 많고, 그 중에 blogging은 아주 적당한 ‘머리 운동’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  동안 나의 blog post (and pages)가 500 에 다다르게 되었고, 이것들을 ‘찾거나, 보아주는’ view count는 30,000 에 가깝다. 블로그의 숫자를 보면 나는 일주일에 2번 이상 posting을 했다고 볼 수 있고, 이것들이 public viewer 들에게 ‘노출된’ 것은 하루 평균 거의 30회에 달한다. 이런 통계는 나를 모르는 public에게 알리는 것을 꺼려하는 것에 비하면 놀랍게도 상당한 ‘노출’인 것이다. 하지만 이런 ‘무미건조’한 통계가 나의 블로그 그 자체는 아니다. 그 이외의 숨은 나도 모르던 것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 것을 위에 인용한 Wired magazine와 New York Times 기사들을 보며 조금 깊이, 다른 각도로 생각하게 되었다.

 

위에 quote 된 Wired Magazine의 말 대로, 한마디로 인터넷이 대중화1 되기 전까지 (아니면 blog가 출현하기 전까지) 대부분 사람들.. 학교를 떠나고 나서, ‘필요에 의해서가 아닌’ 이유로 의미 있는 ‘자기의 글’을 쓰게 될 기회가 있었을까? 아마도 아주 소수의 ‘선택된’ 사람들을 제외하고,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런 글들도 대부분 diary, journal 정도였을 것이다. 나도 무언가 남기고 싶은 심정으로 일기를 조금 씩 ‘남기곤’ 했지만 그것도 사실 나이가 들어가며 서서히 없어지고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남이 볼 수도 있는 글이나 기록’을 만든다는 것은 사실 ‘말도 안 되는’ 꿈에 가까운 상상이었다.

 

20세기가 저물어가며 본격적으로 쓰기 쉬운 인터넷의 광장, World Wide Web 이 대중화 되면서 조금씩 ‘쓰는 것’이 쉬워지기 시작했는데, 이것도 대부분 ‘말도 안 되는 바보 같은 댓글’ stupid comments 가 주류였다. 조금은 심각한 forum같은 것도 있었지만 그런 곳에 심각한, 의미있는 글이 나올 것은 기대하기 힘들었다. 또한 그런 곳에 자신을 들어내며 글을 쓰는 부류는 아주 소수에 불과했고 대부분은 ‘읽기만 하는 정보 소비자’역할을 했다.

 

서서히 자신의 독특한 ‘의견, 견해, 주의’ 등을 특별한 대상이 없이 발표하는 ‘결심이 단단한’ 부류들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그들이 지금 거의 당연시 되고 있는 블로그의 효시가 되었고 그들은 서서히  blog ecosystem, blogosphere를 형성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자신만의 homepage란 것을 만들어야 하는 귀찮은 과정을 거쳐야 했지만 무료 blog host2란 손 쉬운 platform 이 생기며 이것은 폭발적인 기세로 퍼져나가서 이제는 블로그 ecosystem에서 아주 중요한 얼굴이 되었다.

 

블로그 중에서도 나의 관심은 역시 ‘개인적 블로그’인 personal expressive blog 이다. New York Times의 기사가 그런 현상을 잘 보도하고 있다. 이 기사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글을 쓴다는 것, 물론 전문적인 author 들이 아닌 고등학교, 대학교를 졸업한 정도의 사람들이 쓰는 수준을 말하지만 문제의 핵심은, 안 쓰는 사람보다 쓰는 사람들이 훨씬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여러 가지 ‘개인적 심리, 사회적 심리’의 각도에서 ‘과학적’인 실험을 하며 설명을 하였다. 이렇게 과장된 듯한 결론에 대한 우리의 의문은 역시,  ‘왜 그럴까?’ 하는 것이다.

 

언어의 힘, 언어의 잠재력.. 특히 written language의 특성을 잘 생각해 보면 위의 의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다. 머리 속에서 맴돌던 생각, 오랜 동안 남았던 생각들, 골머리 앓던 생각들.. 이것과 ‘언어’에 의해서 말로 나타나면 더 구체적인 힘을 얻고, 더 나아가서 ‘쓰여진 언어’로 가면 다른 차원의 힘을 얻을 수 있다. 나는 이런 명제를 ‘성경쓰기’에서도 찾아 볼 수 있고, 책을 읽을 때 ‘쓰면서 읽는’ 방식에서도 분명히 느낄 수 있다. 이렇게 ‘나의 생각’을 글로 나타낸다는 행위는 생각 뿐인 것으로부터 구체적인 쪽으로 변화를 시키는 힘이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수동적, 피동적’에서 능동적, 적극적으로 바뀌는 촉매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blog을 시작할 때, 이런 거창한 논제보다는 상식적인 선에 의해서 나의 blog agenda를 정하고, 고치며 지금까지 왔다. 100% personal한 것이 첫째이며 마지막이었다. 모든 것이 나에 관한 것, 나의 생각, 나의 결정, 나의 인생, 나의 주변..100% expressive blog을 목표로 하였다.  나의 blog은 물론 public이 대상이지만 이것은 별로 생각할 여지가 없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사항. 나 혼자 본다는 blog은 diary이기 때문(이미 쓰고 있는)이다. 그러니까 ‘가상적인’ viewer들을 ‘상상’할 수 밖에 없는데.. 나는 구체적인 목표를 만들었는데.. 나와 우리 가족을 개인적으로 아는 집단을 생각했다. 시공간을 뛰어넘어 나를 알았고, 기억하고, 알고 있는 사람들.. 과연 얼마나 될까? 과거로 돌아가면 꽤 많은 사람들이 있기에 이런 blog을 통해서 과거와 연결이 되기를 기대하며 글을 내 보였다. 이것이 나의 blog이 memoir로 시작된 이유가 되었다.

 

시간적으로 계속되는 blog은 한마디로 autobiography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blog tag line에도 autobio in progress가 붙게 되었다. 나의 개인자서전을 과연 누가 읽을까 하지만 그것은 전혀 문제가 아닌 것이.. 그것을 쓰는 자체가 주안점 whole point 이기 때문이다. 희망적으로는 내가 먼지가 된 오랜 후에 나의 offspring이 발견한다면.. 하는 것 뿐이다. 다음은 나의 남은 생의 과정을 남기고 싶었다. 그러니까 public diary인 셈이다. 나는 이것을 Daybook이란 category로 만들어서 쓰고 있다. 개인 일기는 ‘아무 것, 비밀, 욕, 불법적인 것’등을 마음대로 쓸 수 있지만 daybook은 그런 것들을 할 수 없다. 그것이 매력이고 마력이다. 나와 public이 같이 share할 수 있는 것들.. 그러니까 ‘사회적인 나’ 에 관한 것들.. 생각들.. 신변잡기, 나의 생각, 무궁무진한 제목들이 이곳에서 기다린다. 다만 대상이 public이란 특성을 항상 염두에 두고.. ‘조심스레’ 다루어야 한다. 현재까지 나는 큰 문제가 없었지만 그래도 작은 몇 가지 잡음을 경험했다. privacy control의 ‘절묘한’ 기술이 필요한 것이 바로 이곳이다.

 

현재까지 나의 Memoir 를 고등학교 시절까지는 일단 끝 냈고 근래에는 대학 2학년까지 다다르고 있다. 목표는 내 인생의 ‘전부’를 글로 남기려는 것이지만 글쎄 그것이 그렇게 쉬울까? 인생의 처음 부분이 비교적 쉽게 기억이 나고 쓰기가 쉬웠던 것은 역시 simple했던 시절이어서 그랬을까? 대학을 넘으며 더 어려워지고.. 인생의 전환기를 미리 생각만 해도 골치가 아파져 온다. 그래도 노력을 해 볼 것이다.

  1. 쉽게 말하면.. ‘보통 중년이 지난 아줌마’들이 매일 편히 쓸 정도가 될 때쯤이 아닐까?
  2. blogger나 wordpress같은

보리밭이 사라졌다! 그와 함께 윤용하 교우의 추억도 함께 없어졌다. 그 자리에 돈에 굶주린 듯한 stupid famer’s market이 버젓이 자리잡고 돈을 세고 있었다. 10년 전, 2005년 당시 분명히 그 자리 boribat.org에는, 시대를 잘못 만난 ‘돈 없는’ 불우한 음악가, 동요작곡가였던 윤용하님의 일대기가 간직되었던 유산이 있었다. 10년 후에 그것이 commercial website로 둔갑.. 아니 domain ORG는 분명히  non-profit일 터인데 어떻게 염치도 없이 그런 일을 했을까? 고 윤용하 님을 기리던 이름을 어떻게 그렇게 값싸게 팔아 치웠을까. 그 자세한 내용에는 분명한 이유는 있을 터이지만.. 알고 싶은 마음조차 없이 나는 식상한다.

 

그러면 그 많던 윤용하 님의 ‘이야기’들은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그러다가 2011년 경 나의 윤용하 님 blog을 작성할 당시 research해 둔 기사들을 발견했다. 문제는 그 원래의 보리밭 site에서 얼마나 내용을 건졌는가 하는 것인데.. 그것은 현재로서는 알 길이 없다. 아마도 희망적으로 대부분 내가 save하지는 않았을까 하는 정도다. 이곳에 내가 간직해 두었던 윤용하님 이야기: “윤용하를 말한다” 를 ‘영구히’ 남기고자 한다. 내가 살아있는 한 이것은 절대로 ‘팔아 넘기지‘않을 것이다.

 

 

 


윤용하를 말한다

 

 

성악가 오현명

 

 

내가 만주 봉천 보통학교의 분교인 북시장학교 5, 6학년때쯤 나의 집이 윤용하가 다니던 석탑 보통학교 근처여서 오후쯤 그 곳 운동장에서 놀다가 가끔 그를 보곤 했다. 그는 별로 말이 없고 남들과 잘 어울리지도 않았으며 가끔 팔짱을 끼고 남들이 노는 것을 조금 멸시하는 듯이 쳐다보곤 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서로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었는데, 내가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요일마다 보천 석탑교회 성가대에서 등사도 하고 합창을 하고 있을 무렵 신문광고와 포스터에서 조선 합창단 단원모집이라는 내용을 보고 일본 천리교라는 교회로 시험을 치러 갔을 때 그 합창단원과 간부들 중에서 지도자격인 사람이 바로 국민학교 운동장에서 보던 윤용하였다. 테스트를 한 후 그는 나에게 아주 좋다며 같이 일을 하자고 하였다. 그는 철저한 카톨릭 신자였으며 그가 다니던 교회에는 어느 한국인 성악가가 카톨릭 합창단을 조직해서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때이미 윤용하는 합창곡이나 독창곡을 많이 작곡하여 내게는 나의 음악수준과는 비교도 안될만큼 훌륭한 작곡가로 여겨졌다. 그는 이따금 일본인이 만든 봉천 방송국에서 피아노 반주로 합창을 지도 하기도 했고 기념행사 같은 것이 있을 때는 일본인으로 구성된 약 20여명의 방송 관현악단을 지휘하며 합창을 같이 했으며, 지휘, 편곡까지 능란히 해내고 있었으므로 당시 나의 수준을 생각해 볼 때 그의 수준은 상당한 것이라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봉천에 있던 사람들의 음악 수준은 아주 저조한 것이었다. 

 

직업 음악가는 학교 선생님 뿐이며 1년에 한두번 정도의 음악회가 있을 뿐이었으므로 당시의 형편에서 조선 합창단을 조직한 윤용하의 활동은 대단히 괄목할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합창단의 경제적 사정은 말이 아니었다. 단원들 중에는 형편에 따라서 경비를 내는 사람도 있었으나 거의 그 혼자서 꾸려나가야 할 형편이었다. 연습장소가 없어서 교회나 유치원등 여러곳을 전전 해야만 했는데, 악기가 없어서 내가 가지고 있던 아코디언을 반주악기로 삼아 그가 직접 음정을 짚어가며 합창단을 지도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때 ‘교성곡’, ‘조선의 사계’라는 거창한 이름을 내걸고 제 1회 발표회를 갖게 되었으나 당시는 전쟁이 한층 가열되고 있던 때라 좀처럼 음악회 허가를 받을수 없어 명칭을 ‘승리의 음악회’라는 일본말로 고쳐서 겨우 허가를 얻었는데 나는 교성곡(칸타타)이 뭔지도 모르면서 무조건 윤용하를 따라 다녔다. 당시방송 관현악단의 반주로 30명쯤 되는 합창단이 독창곡을 낀 창작곡을 발표한다고 하여 굉장한 반응을 얻은적이 있었다. 

 

그때부터 윤용하는 연습후면 거의 매일 아코디언을 짊어진 채 술집으로 향하곤 했다. 돈이 없으면 하나밖에 없는 반주 악기인 아코디언을 전당포에 잡히는 것이 상례였다. 그때 나의 일과는 술취한 그를 십간방이라는 그의 집으로 데려다주는 것이었다. 그가 신경으로 떠날 무렵, 마지막 연주회라고 하여 조선 합창단을 주축으로 약 700석 정도의 만주 봉천 기념회관을 빌려 음악회를 열었는데 이는 한국 사람으로서는 아주 드문 일이었다. 고별 연주회를 갖고 신경으로 떠난지 서너 달 후 그는 나에게 신경으로 빨리 오라는 편지를 보냈다. 

 

그가 신경에서 창단한 카톨릭 계통의 ‘백조 합창단’의 발표회에서 그가 작곡한 ‘독백’을 불러 달라는 것이었다. 그곳에 가서 보니 신경에는 만주에서 최초로 조직된 일본인, 중국인, 한국인이 같이 끼어있는 신경 교향악단이 있었는데, 그 단원으로는 바이올린의 한명서 선생, 첼로의 전봉초씨, 김동진씨등 한국인이 꽤 있었다. 그 교향악단은 만주 전역에 걸쳐 지방공연을 하기도 했는데 작곡가로는 김성태씨가 전속으로 있었고 김동진, 김대현씨와 함께 약관의 윤용하씨도 끼어 그 4명의 한인 작곡가들이 공동으로 두 세번 정도의 발표회도 열고 있었다. 거기서는 우물안 개구리가 아닌 본격적이며 제대로된 작곡 활동을 하고 발표회까지 가져가며 펼칠 수 있었던 것이다.

 

봉천 시절의 윤용하는 카톨릭 교회의 신부에게서 오르간을 치는 법이나 작곡을 배웠다고 한다. 또한 오케스트라 단원 중 밤이면 다고 한다. 어쨋든 그 나이에 오케스트라 편곡을 한 것은 대단하다고 하겠다. 그때 쯤 정확히 언젠가 기억은 확실하지 않지만, 일본에서 음악을 공부하여 육군군악학교 교장을 지내고 트럼본을 전공한 백 영준 이라는 음악가가 만주에서 우연히 윤용하의 음악을 들은 후, 멜로디는 슈베르트같은 점이 있고 가곡이 무척 좋았다는 평을 했을 때, 그 평을 듣고 매우 기뻐하며 자신이 한국의 슈베르트인가 하며 좋아하던 그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시인 박화목

 

 

이 청년은 처음엔 편성을 담당한 한 사람을 만났는데,그 사람을 통해 이내 나에게 소개 되었다. 당시 나는 방송국 편성과의 말단 프로듀서로서 시 낭송.소설 낭독 등 문예물 프로그램을 맡고 있었다. 그를 내게 소개하는 동료직원의 말인 즉, 그가 작곡 활동을 벌이고 싶어 방송국을 찾았는데 내가 시를 쓴다니까 나를 만나는 것이 좋을 성 싶어 소개 한다는 것이었다. ‘시를 쓰시는 박 선생을 만나게 되어서… 앞으로 많은 도움을 받아야겠습니다.’ 하고 그는 퍽이나 겸양스럽게 내게 말을 건네었다. 나는 찬찬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볕에 그을렸는지 조금은 거무칙칙한 얼굴이었으나, 크고 서글서글한 두 눈이 인상적이었다. 그의 그런 두 눈이 창작의욕에 불타는 듯 빛나고 있었다. 이렇게 어느 날 홀연히 서울 방송국에 찾아와, 또 나를 만나게 된 이 시골청년은 다른 사람 아닌, 바로 작곡가 윤용하였고, 그와 나의 만남은 이렇게 이루어진 것이다, 그는 나를 만나자 가곡을 작곡하고 싶다면서 시를 써줄 것을 부탁도 하였다.

 

마침 그 무렵 방송국에서는 우리가 새 가곡을 보급하기 위한 새로운 방송사업을 마련하고 있던 참이었고, 이 일을 내가 담담하고 있었으므로, 윤용하의 작곡활동에는 내가 도움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가곡이 될 수 있는 시를 시인에게 청탁하여 그것을 작곡가에게 나눠 주어서 작곡을 의뢰하곤 하였다. 그리고 작곡이 된 새 가곡을 방송을 통해 널리 보급하고자 하였다. 그 당시의 그 프로젝트가 얼마만큼 성과를 거두었는지는 차지하고서라도 새 가곡 운동의 효시가 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알고 있을 것이다. 또한 윤 용하에게 몇 편의 작곡이 의뢰되었는지 지금 기억이 분명치가 않다. 그러나 적지 않은 작곡이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그리고 윤 용하의 작곡이 당시 방송에 크게 도움을 준 것도 누구나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만큼 그때에는 자주 방송국에 드나들었다. 아니, 그의 해방 후 서울에서의 작곡 활동이 방송을 중심으로 펼쳐졌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는 만주 땅(신경 등지)에서 살다가 해방 후 귀국해서는 약 1년간 강원도 어디엔가 있다가 상경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후 방송국에 자주 드나들면서 활발한 작곡 활동을 폈다고 볼 수 있다.

 

‘네가 조국을 모른다니 이게 될 말이랴…’ 이런 구절로 시작되는 ‘민족의 노래’며 ‘광복절의 노래‘등 우수한 국민 가곡을 지은 것은 이 무렵인 것이다. 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그는 해방 후 귀국하여 서울에 오기까지 잠시 동안 함흥의 영생여고의 음악교사를 지냈다 한다. 그런데 당시 어째서 강원도에서 왔다는 것으로 그렇게 알게 되었는지 잘 모를 일이다. 추측 건데 이북 함흥에 있다가 잠시 강원도에서 지낼 법한 일이다. 6.25 당시 강원도 홍주 땅에서 피신을 했던 사실로 미루어 보아 그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다. 피신해 있으면서, 국군이 반드시 이기고 돌아온다는 신념아래 ‘개선’ 이란 표제의 교향곡을 작곡하기도 하였다.

 

6.25 와중, 항도 부산에서 피난살이를 할 때, 나는 그를 다시 만났다. 6.25가 일어난 다음해 늦봄이었다. 1.4후퇴때, 나는 예기치 않았던 병을 얻어, 마산의 육군병원에서 서너 달 누워있어야만 했던 까닭으로, 부산으로 온 것은 늦은 봄이었다. 그리고 역시 초여름 어느 날, 남포동 거리 어느 다점에서 그를 반가이 만난다. 그 후, 윤용하와 나는 자주 만나는 편이었고, 어쩌다 돈푼이 생기면 울적한 심정을 달래기 위해 함께 막걸리를 마시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전쟁 틈 바구니에서 자라는 청소년을 휘해서 정성이 듬뿍 깃든 가곡을 만드세. 전쟁 중 서정 가곡을 작시 작곡해 낸다면, 이건 정말 역사에 남을 희한한 일 일거야.” 하고 윤용하가 제안하여 내가 당장 시를 쓰고 또 작곡한 것이 가곡 ‘보리밭’이었는데, 불과 2,3일 동안에 지어졌다.

 

당시 그가 작곡한 가곡으로 보리밭 외에도 몇 편의 가곡이 더 있었으나, 지금 잘 모르겠고, 처음의 결심과는 달리 그리 많은 창작 가곡을 남기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그는 피난 시절 중 ‘피난 온 소년’ 등 많은 동요작곡을 남기었다.

 

 

 

 

 

음악 평론가 이상만

 

 

윤용하가 세상을 떠난 지 벌써 2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43년의 짧은 생애, 그러면서도 굴곡이 심한 인생을 역류해 가면서 살아간 음악가 윤용하, 얼마 전 그의 유족들이 보관하고 있던 그의 비망록을 살핀 일이 있다. 300원 500원,… 거기에는 만년에 그가 폐인 되다시피 하여 이곳 저곳 구걸하러 다닐 때에 추념을 해 주었던 사람들의 이름과 액수가 적혀 있었다. 대부분 동료 음악인들의 이름이 거기에 적혀 있었는데, 어떤 어떤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 있는가 하는 호기심보다도 그 비망록이 그렇게 소중하게 간직된 까닭이 사뭇 나의 눈시울을 뜨겁게 만들었다. 친구들의 신세를 졌지만 그 신세 갚음을 잊지 못하고 눈을 감은 사람이 윤용하였다.

 

윤용하의 음악적인 경험은 모든 것이 체험적인 것이었다. 3대째 가톨릭을 신봉해 온 그의 집안인지라 가톨릭 교회를 떠나서는 그를 생각할 수 없다. 교회에서 풍금을 치고 성가대에서 노래를 부르면서 음악적인 역량을 키운 그는 일반적인 교육에서도 음악적인 전문 교육에서도 체계적인 교육기회를 갖지 못하였다. 학력은 보통학교가 고작이고 음악학교는 문턱도 넘어보지 못하였지만 그의 음악적 경험은 작품을 통해서 볼 때 하나의 맥이 이루어진다.

 

그가 비교적 본격적인 음악 수업을 한 것은 옹기상을 하는 부친을 따라 고향을 떠나 만주 봉천으로 이주하여 성장기를 보낼 무렵이었다. 그것은 이미 국제화된 분위기 속에서 여러 종족이 모여 사는 도시 였으므로 여러 나라의 각기 다른 풍물을 함께 접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그 곳에서 성가대에 출석하며 노래를 배우던 그는 프랑스 영사의 부인에게 오른을 배우게 된다. 이 접촉은 그의 음악에 나타나는 성향을 결정지었던 중요한 계기였다. ‘보리밭’같은 노래에서 우리가 느끼는 구조적이기 보다는 감성적인 흐름은 바로 흐름을 중요시 하는 프랑스적 경향이 이러한 경험에 의해 그의 멜러디에 스며들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가네꼬라는 일본인 지휘자에게 화성악 및 대위법을 배운 소산으로 20대에 이미 교성곡이나 칸타타등을 작곡하여 나름대로의 음악적 기량을 증명하지만 이러한 대작속에서도 그의 표현은 소박하고 선율적이다. 20을 갓 넘긴 젊은시절 신경에서 김성태, 김동진, 김대현, 오현명등과 함께 체례악 ‘양산가'(김동진), 한국 선율에 의한 ‘수상곡'(김성태), 교성곡’ 조선의 사계'(윤용하)등을 발표하며, 소위 우리 악단의 암흑기에 민족적 명맥을 유지하던 시절의 작품에도 이러한 경향은 드러난다. 

 

이런 어둡던 시절의 경험은 훗날 그가 ‘민족의 노래’.’광복절 노래’등 애국적인 노래를 작곡하는데 반영되기도 한다. 그가 단순한 작곡가라기 보다는 거의 음악 운동가의 차원에서 6.25사변 후 음악 신문사를 차리고 주간을 맡았던 일이나 문총 중앙위원, 작각고 협회 사무국장, 음악 교육협회 사무국장 등의 직을 맡아 악단 일선에서 활동했던 경력, 그리고 틈나는 대로 합창단을 조직하여 활발한 활동을 펼쳤던 일등은 아마 신경에서 만난 무라마쓰 라는 일본인 음악 평론가의 영향을 받아서 인성 싶다. 

 

그리 길지 않은 만남이었지만 채동선을 만나 그에게 감화를 받고 민족적인 입장을 찾으려고 노력했던 부분에서도 이러한 성향은 두르러 진다. 실제로 그는 채동선을 존경하며 그의 기일이 되면 신문에 그를 회고하는 글을 쓰기도 했던 것이다.

 

어쨌든 나약한 듯 나약하지 않으면서도 심하게 격변하는 시대를 적응 못하고 역류를 시도하다가 쓰러진 사람이 윤용하였다. ‘독백’, ‘고독’ 등 애수 어린 가사를 선택, 즐겨 작곡했던 윤용하, 티 없이 맑은 선율 속에서도 그의 고고함은 언제나 흐르고 있다. 그 고고함 때문인지 그의 노래를 들으면 들을수록, 부르면 부를수록 다시 듣고 부리고 싶으니, 시간이 흐른 후에야 그의 값어치는 발견되어 이렇게 찬란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아깝게도 여기 저기 흩어져 찾을 수 없는 것이 많다. 그나마 윤용하가 간지 7년 뒤에야 김대현이 노래를 모아 출판해 주었는데 그도 올해 세상을 떠났다. 지금 돌이켜 보건대 윤용하는 진작에 마땅히 한국 음악사의 견지에서 재조명 되었어야 할 인물이었다.

 

 

 

 

 

논설고문 이규태

 

 

‘보리밭’ 음악회

‘보리밭’을 지은 천재 음악가 윤용하(尹龍河)와는 세 번 만남이 있었다. 그 첫 만남은 공전의 재해를 몰아왔던 사라호 태풍 때였다. 의연금품을 모집하는 신문사 데스크에 노숙자 차림과 다름없는 허술한 중년 신사가 나타나 입고 있던 겉저고리를 벗어 놓고 돌아서 나가는 것이었다. 주소 성명을 묻자 돌아보지도 않고 고개를 흔들며 사라졌다. 소매나 깃이 헐어 너덜너덜한 그 저고리 속 주머니 위를 보았더니 ‘尹龍河’라고 박혀 있었다. 후에 들은 것이지만 그에게는 여분의 옷이 없어 한동안 윗옷 없이 살았다고 한다. 그 낡은 옷이 도움이 돼서가 아니라, 그렇게 해서 얻어지는 마음의 질(質)을 선택했을 것이다.

 

그 후 ‘보리밭’을 작곡하게 된 어떤 사연이라도 있는지 물은 일이 있다. “나는 헛소리 듣는 허청(虛聽) 기가 있으며 분명히 들렸는데 돌아보면 아무것도 없을 때 그곳에 아무것도 없을 리 없다고 작심하고 추구하다 보면 미(美)의 꼬리 같은 것이 어른어른 보이기 시작한다”던―그의 집요한 예술관에 접했던 것이 두 번째 만남이다.

 

그 윤용하가 40대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는 부음에 접했다. 보도의 필요성에 쫓겨 빈소를 찾는 데 신문사의 기동력을 동원했지만 한 번지에 수천 호가 잡거하는 판자촌인지라 이틀을 넘겨서야 찾을 수 있었다. 이 천재가 누워 있는 곳은 판잣집도 못 되는, 종이상자를 뜯어 여민 단칸방의 거적 위였다. 미의 순수한 응어리가 저렇게 이승을 마칠 수 있었던가 가 원망스러웠던 세 번째의 만남이었다.

 

그에게 영화음악의 작곡을 부탁하러 갔을 때, 또 대중 가요 작곡심사를 의뢰하러 갔을 때 못 들을 소리 들었다고 귀를 씻었다던 그의 순수성이 현대사회에서의 위상을 그대로 구현했던 윤용하와의 마지막 만남이기도 하다. 그 후 뉘 부르는 소리 있어 뒤돌아보니 아무도 없던―그 윤용하가 찾아낸 미의 터전에서 재즈 리듬으로 편곡된 ‘보리밭’ 고고가 판쳐, 짓밟혀 망가진 지 오래인 그 터전에서 고인이 살았을 제 공감대에서 예술을 교감했던 팔순 고개의 원로 음악가 바리톤 오현명, 피아니스트 정진우, 테너 안형일 세 분이 추모 음악회를 연다고 하니 그 보리밭에 새싹이 돋아날 것이다.

 

조선일보 [칼럼] 이규태 논설고문 2005-10-24

 

 


신동아 평전 (이부영)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

뉘 부르는 소리 있어 

나를 멈춘다.

옛 생각이 외로워

휘파람 불면

고운 노래 귓가에

들려온다.

돌아보면 아무도 뵈이지 않고

저녁 노을 비인 하늘만

눈에 차누나.

 

이제는 [아리랑]만큼이나 우리들의 입가를 맴도는 멜로디, 박화목 작시 윤용하 작곡의 [보리밭]이다. 설움에 마음이 올올이 젖어 있는 듯, 그러면서도 서러운 마음을 남에게 보이지 못해 홀로 삭여버리는 애잔한 숨결이 멜로디에 스며 있다.

 

가난과 유전, 그리고 술의 동반자이자 순수와 좌절의 벗이었던 윤용하. 그가 세상을 등진지도 올 칠월로 만 구 년째다. 그 동안 그의 묘비도 작곡집도 생전의 친지들의 노력으로 세워지고 만들어졌다. 그러나 모든 인생의 굴레에 목조여 피어보지도 못하고 스러져간 그의 노래들은 무엇으로 보상될 것인가. 저임에도 충실히 근무하다가 엉뚱하게 숨져가는 말단 순경 사병 철도간수들이 일계급 특진되듯. 묘비도 작곡집도 추서였다. 그리고 남은 것은 다시 망각뿐이다.

 

윤용하-그는 태어나서 한번도 그의 소유로 된 집을 가져본 일이 없다. 운명하는 순간에도 남산 중턱 움막판자집 단칸셋방이 이승의 마지막 현주소였다. 그는 태어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고향을 등진 후 유전만을 거듭했을 뿐 다시는 한번도 고향 땅을 밟아보지 못한 실향민이었다. 그는 장남으로 태어나 철이 들면서부터 부모와 다른 오 남매 동생들과 더불어 함께 한 일이라곤 없는, 그가 살다간 시대만큼이나 불행한 유랑인 이었다. 그는 명색이 작곡가라면서 생전에 자신의 작곡 집 한번도 내보지 못한 부실한(?) 예술가였다. 그는 모든 것을 술로 풀어버리려고 술에 함몰 당해 부인마저 집을 나가버릴 정도로 초탈한 생활무능력자였다.

 

그는 삼대째 황해도 바닷가에서 고기잡이로 생계를 잇다가 조부 때 이르러서는 그것도 어려워 구월산 기슭에 옮겨와 독구이 하던 옹기장이의 맏아들이다. 이 사실을 강조하려는 뜻은 그가 움직일 수 없는 민중의 아들임을 미리 설정해놓으려는데 있다. 그의 피 응어리진 생애를 더듬어가는 동안 우리는 예술인으로서의 윤용하의 역정과 더불어 민중의 고난, 민중의 착각, 좌절로만 끝낼 수 없는 민중의 자각적 초설을 읽어볼 수 있을 것이다.

 

 

독가마 집 맏아들

용하가 태어난 곳은 황해도 은율군 일로면 농림리다. 동남쪽으로 신기 어린 구월산의 웅봉 들이 도열, 천연의 병풍을 둘러치고 서쪽으로는 확 트인 황해의 넒은 뜰에 둘러싸인 옴폭한 곳이다. 은율이란 곳은 사실상 황해도의 중심부인 재령 신천 안악 서흥 봉산 황주 평산 등지에서는 유리된 벽지에 속한다.

 

용하의 오대부조는 은율 이로면 바닷가에서 고기잡이를 생업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의 사대부조가 어떻게 황해도의 서북단 오지인 은율로 옮겨가 살게 되었는지는 기록으로나 구전으로도 알 길이 없다. 다만 그들이 독실한 가톨릭교도였으며, 이후 대원군에 이르는 대박해를 피해 안전한 곳으로 차아 헤매다 이곳에 정착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그 자손들도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 추리는 용하의 부친 대에 이르면 거의 확실해진다.

 

그의 부친은 험준한 구원한 구월산기슭에 독가마를 차려놓은 옹기장이였다. 다른 사람들과 접촉이 잦은 바닷가의 어부생활에서 언제 그리고 왜 심산궁곡의 옹기장이로 생활의 터전을 바꿨는지 알 길이 없다. 이들은 다시 한번 박해를 피하기 위해 신앙의 도피행각을 벌인 듯하다. 이런 추측을 가능케 하는 사실로는 오늘날에도 도자기 장인(匠人)들 가운데 수많은 가톨릭신자들이 그 가업을 전승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원군의 대 박해가 가해지던 시절 [천주학장이]들이 피할 방법이라곤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심산궁곡에 파묻혀 숯가마나 독가마를 걸고 생계를 유지하는 길이었다. 더욱이 옹기나 숯을 지고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으로 팔러 나가는 것은 정보교환이나 포교의 이로운 점도 없지 않았다. 한국의 숯가마나 독가마는 로마의 [가다꼼바]이기도 했으니까.

 

그는 삼일 독립운동의 여진이 아직 울리고 있던 일구이이년 삼월 십육일 고난의 생을 시작했다. 아버지 윤갸오로(상근)와 어머니 이마리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즈음은 전국에서 실향사태가 벌어지는 등 민족의 본격적인 수난기에 접어든 시기였지만 용하의 출생은 그 배경이나 경제적 기반으로 미루어봐도 어차피 리향의 쓰라림을 겪을 씨앗을 이미 품고 있었다.

 

그의 부친은 용하가 네 살 되면 해 만삭의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사대째 뿌리내려 살던 은율땅을 등진다. 철부지 용하는 아버지등에 업혀 떠나는 고향땅이 다시는 그가 생전에 밟아보지 못할 땅이 될줄은 몰랐다. 일가가 정착한 곳은 평안북도 은주군 비현면 채마동. 이곳은 경의선의 종착역인 신의주 못 미쳐 세정거장째로 오백여 호의 가옥이 철로 변에 모여 있는 소읍이었다. 이곳에서도 윤상근은 읍밖의 산비탈에 독가마를 쌓고 천형처럼 물려진 옹기상을 또 시작했다.

 

그 당시 남부여대 해서 고향을 등진 수많은 실향민들이 그랬듯이 집안은 찢어지게 가난했다. 가난이 곧 생활이었다. 그런 속에서도 어린 용하는 양친의 뜻대로 열심히 성당에 다녔다. 그 곳에서는 천주 이외에도 풍금과 성가가 있었다. 그의 음악적 재질은 이곳 성당에서 발견되었다. 그의 핏속을 사대째나 흘러내려온 가톨릭과의 인연은 가톨릭을 통해 음악적 잠재재능을 발휘해낸 사실 이외에도 그의 일생을 지배한 정신적 기둥을. 그리고 외곬으로 빠졌다가 결국은 좌절을 통해 자기의 껍질을 벗어버린 보편적 사고에로 의 회귀를 결과한다. 참으로 오랜 기간이다. 

 

그의 사대부조가 왕조 말의 고난 속에서 구원의 샘을 천주에게서 찾은 것이나 별 차이 없는 백성 본래의 본능이었을지 모른다. 여하튼 어린 용하는

『성당에서 한번 배운 성가의 멜로디는 절대로 잊은 법이 없었지요. 자기보다 나이 많은 청년성가대원들이 올간에 맞춰 연습하는 날이면 늦은 저녁에도 성당 구석에서 구경을 하곤 했어요. 올간을 타고 싶어서 주위를 맴돌기도 하고요. 어린이 성가대에서는 으레 동창자로 뽑혔고 성탄절이나 부활절의 어린이 성극에 출연도 하고요』

 

평북 비현면 채마동 용하의 어린시절에 같은 동네에서 지냈던 량마리아( 서울 영등포구 상도동거주)여사의 말이다.

『저보다 일곱 살이나 어렸지요. 제가 청년성가대로 있을 때 국민학생인 윤용하씨는 키가 작기는 해도 곱슬머리에 서글한 눈을 가져 귀여움을 받았어요』

 

채마洞 어린시절 용하의 마음속은 이미 음악에 대한 막연한 갈망으로 채워졌지만 그런 갈망을 뒷받침할 만한 형편도, 이해를 가질 만한 양친의 양식도 없었다. 도리어 학교를 끝내고 집에 돌아오면 일에 바쁜 양친의 일손을 덜기 위해 동생들을 돌보는 것이 큰 아들에게 맡겨진 몫이었다. 채마동에서 이남일녀의 가장이 된 용하의 부친은 이 곳에서도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웠다. 더구나 만주사변 전야 국경지역인 이곳은 반도에서 살수 없어 만주로 생의 터전을 찾아 옮아가는 실향인파들이 모여든 곳이기도 하다. 용하일가는 그가 열두살 되던 해 모든 것이 생소한 만주 봉천으로 옮겼다. 채마동으로 리향할 때 이미 그의 유전은 시작된 것이지만 이제부터 그의 떠돌이 일생이 본격적으로 펼쳐지게 된 것이다.

 

 비현면 채마동에서 보통학교 오학년을 중퇴한 용하는 봉천의 석탑보통학교 육학년으로 편입했다. 이즈음 그는 일인들이 월등히 많은 이 보통학교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다만 난생 처음 보는 피아노에 매료 당한 채 한 주일에 두 번 있는 음악시간을 손꼽아 기다리는 것이 즐거움의 전부였다. 또한 그의 생애가운데 단 한번 행운의 여신이 그에게 손길을 보냈으나 부모의 반대로 허망하게 틀어지고 만다. 그러나 이『부발신운』은 그로 하여금 음악회 길에서 일생 동안 헤매게 만든 계기이기도 했다. 용하는 일구오구년 이월삼일자 『세계일보』문화면에 그의 어린 시절과 함께 『음악가가 된 동기와 이유』를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나는 처음에는 음악가가 되려는 꿈도 꾸지 않았었다. 다만 어린 시절 나의 꿈은 천주교회의 수사가 되겠다는 희망뿐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사대째 천주교집안이었고 또 나의 외조부님께서는 나를 예수를 친히 길러내신 예수의 아버지 요셉의 성명을 나에게 지어주시면서 『너는 장차 예수의 아버지이신 목수 요셉과 같이 되기 위해서 사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나의 양친에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런고로 나는 어려서부터 비가 내리거나 눈이 펄펄 나부끼거나 하루를 빠지지 않고 성당에 열심히 다녔다. 

이렇게 지내는 동안 나는 음악에 대한 소질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자연히 성가를 부르게 되었고 때에 따라서는 풍금을 만져보기도 하였고 부활절이나 성탄절 같은 큰 축일에는 연극이나 독창도 하고 교회의식에도 참례하게 되었다.

이렇게 지내던 나의 제 이의 고향 평북 비현이라는 곳을 일이세때 가친풍의 직업 관계로 떠나 나는 그리운 산천 벗들과 석별하고서 풍토가 다르고 낮 설은 이성땅 만주 봉천이란 곳에서 약 팔 년 동안 살게 되었다. 그때 나는 두루마기를 입고 봉천보통학교 육학년에 편입되어서 공부하려니까 눈물겨운 점이 많았었다.

– 다만 견딜 수 없는 것은 당시 보통학교 교과서에서도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는 피아노가 교실에 놓여져 있었다는 점이다.

나는 어느 학과보다도 일주일에 두 번씩 배우는 음악시간을 기다리는 것이 제일 좋았었다. 그리고 나는 이 보통학교에 다니면서 졸업기념으로 학예회에서 독창을 하였고 또 처음으로 조선어 방송시간(오후 육시로 기억됨)에 기념방송으로 독창과 합창을 해서 선물로 연필과 공책 몇 권을 받아가지고 퍽 기뻐하였다. 이렇게 학교생활을 지내는……

이 교회에는 우리나라와 이- 불 – 미- 독- 영 – 일등 여러 나라의 가톨릭신도들이 모이게 되는 까닭으로 신도들 가운데에서도 교양의 수준이 각양각색이었다. 

여러 나라의 상인으로부터 영사나 고관에 이르기까지 차별 없이 매주일과 복일에 참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가대만은 달랐다. 악보를 읽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 때에는 프랑스 영사부인이 풍금을 치면서 성가를 가르쳐 주었다. …… 

이 당시 불인신부는 나를 음악신부로 만들어 보겠다고 당시 동양을 순찰 중이던 법황사절에게 나를 소개하면서 일본 나가사끼에서 일년간 나전어와 불어를 공부하고 빠리 신학교에 가게 하려 했으나 양친의 반대로 다 깨어지고 결국 등사도 아니고 음악신부도 아닌 속된 음악가라는 칭호를 받게 된 것이 영광스러운 일인지 알 수 없다……

 

 

다소 장황한 느낌이 들지만 거의 전문을 옮긴 것이다. 그러나 그 자신이 남긴 이 시기에 관한 유일한 기록이기에 빼놓을 수 없는 자료이다. 우리는 그의 이 문맥 속에서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읽을 수 있다. 이미 봉천석탑보통학교에서 그는 다른 학생들보다는 월등한 재질을 보였음도 글속에 나와 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만주에 와 있던 여러 나라 사람들 가운데 가난에 찌든 한 조선소년이 음악적 재질을 인정받아 불인신부가 음악신부로 키우려고 했다는 점이다. 

 

그는 이미 보통학교 졸업할 나이에 음악에 관한 한 같은 연배의 다른 학생이나 신도들은 엄두도 못 낼 수준에 이르러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불발로 그쳐버린 단 한번 행운의 좌절은 그와 부모 사이에 깊은 구렁을 파놓기도 했다. 이후 그는 성년이 될 때까지 자기가 스스로 자기 길을 걸었을 뿐 양친과 상의를 거쳐 장래를 결정한 일이라고는 없다. 또한 그런 저런 과정을 거치면서 용하는 자신이 음악에 남다른 재능을 가진 점을 확신하고 그 길로 인생항로를 정한 계기가 되었다. 

 

 

무학의 수기-질풍노도

나라 없는 실향민 막벌이 일꾼의 아들-그가 보통학교라도 나온 것은 그의 양친들 스스로가 배우지 못해 설움 당한 것을 큰 자식에게만은 물려주지 말자는 한 때문이었을 것이다. 단지 용하가 외국에 나가 더 수학할 기회라 할지라도, 아무리 그들 자신이 가톨릭신도이기는 했어도 장남을 영원히 가족으로부터 떼어놓을 신부로 만들 수는 없다는 안타까운 부모의 정이 그의 소망을 꺾는 작용을 했을 것이다.

 

어찌 됐던 용하의 정규교육은 이것으로 끝난다. 다음은 파란과 유전과 그에 따르는 가난. 그리고 술이 모두였다. 살림에 보탬이 되기 위해 닥치는 대로 막일을 했으나 음악에 대한 갈망을 이기지 못해 일을 걷어치웠다. 그는 일오세에 십간방천주교회의 성가대 지휘자로 활약하는 한편 음악이론 공부에도 열중했다. 이즈음 그는 그의 생재 중 단 한번 체계적인 음악이론을 익힐 기회를 얻었다.  봉천방송국 전속 관현악단의 일본인 지휘자『가네꼬』라는 사람을 만난 것이다. 열정과 재능이 충만한 어린 소년의 지식욕에 감복한『가네꼬』는 틈나는 대로 화성악과 대위법을 가르쳤다. 이 수업이야말로 그의 장래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용하가 일팔세 되어서는 봉천의 한인사회에서 이미 유명한 젊은이로 꽤 널리 알려져 있었다. 일구사십 년 십구세 되던 해 봄 그는 신문에『봉천조선합창단원 모집』광고를 냈다. 그랬더니 봉천 동광중학을 갓 졸업한 까까중머리의 한 청년이 응모했다. 지휘자이자 단장인 용하는 이 청년에게 발성 테스트도 받는 등 심사를 이모 저모 했다.

 

『목소리가 바리톤으로 아주 좋군. 전에 노래를 불러본 적이 있소?』

『예. 그저 학교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합창 정도 했을 뿐 집에서 혼자 불러본 것 외에는 독창은 해본 일이 없습니다.』

『우리 함께 일해 보겠소? 이 곳에는 아직 우리 동포들로만 조직된 합창단이 없는 터에 젊은 우리들이 기틀을 잡아봅시다.』

『같이 일할 수 있다면야…… 열심히 해 보죠』

하이칼라신사와 까까중머리 중학졸업생의 대면이다. 이 까까중머리 청년은 오현명씨 (현한양대음대학장.)

『머리도 곱슬곱슬한 올백으로 멋지게 빗어 넘기고 하이칼라 양복차림에 으젓 하길래 대선배인줄 알았어요』

당시를 회상하며 오씨는 파안대소 한다. 그들은 동갑내기였던 것이다.

 

일구삼오년 같은 해에 용하는 석탑보통학교를. 오씨는 북시장 보통학교를 졸업했다. 그 후 오 년의 세월 동안에 한 사람은 자기 재주대로 가시밭길의 사회에서 발돋움해서 그럴듯한 하이칼라신사가 되어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중학교 막 나온 풋내기 청년이었다. 그러나 이 오 년이란 짧은 세월 속에 두 사람에게 각각 생겨난 차이,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정상적인 교육과 정을 밟지 않은 채 독력으로 발돋움한 조숙한 용하와 제 과정을 순탄히 밟은 오현명 – 이 두 사람의 장래를 바라보는 전망에는 그들 나이로는 헤아리기 힘든『비극적인 착오』가 도사리고 있었다.

 

주위에서 『천재적 소질』을 지녔다고 선망의 눈초리를 받으면서『예술에 무슨 자격요건이 필요한가. 재질과 열정만 있으면 그만이지』라고 믿던 조숙한 천재가 어니 때엔가 어느 곳에 서는 『자격』이『재능』을 타고 앉고 예술이 밥벌이의 수단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기엔 너무나 순정적인 젊음의 질풍노도에 들떠 있었다. 이와 같은 예술 지상론적 심리상태는 뒤집어보면 정상적 교육과정을 밟을 수 없었던 자신의 불우한 처지나, 조숙한 머리로 설사 늦게나마 학업을 계속하려 해도『젖비린내 나는 애들』과는 자리를 같이 할 수 없다는 자존심, 이런 등등으로 인한 반사심리일 수도 있었다.

 

[천구백] 사십 년대에 접어들어 이차세계대전의 전인 일제의 살기등등한 위세가 대동아 공영권을 마치 거의 이루어 놓은 듯 괴뢰 만주국의를 구가하고 있었다. 한반도의 내선일체에 밀려 만중에 쫓겨간 우리 동포들은 다시 오족협화(日-한-중-만주-몽고족)의 꽹과리에 시달림을 받고 있을 즈음이었다. 용하의 일가도 그 예외일 수는 없었다. 봉천서쪽 교외의 판자촌신세였다. 그의 부친은 봉천에 처음 옮겨와서는 가업으로 물려진 옹기상을 그대로 해보았으나 도저히 생계를 이을 길이 없어 뜨내기 막벌이 노동자로 나섰던 것이다. 당시 이곳의 한인들은 일인계통의 기관 업체에 근무하는 사람이나 어느 정도 중류의 생활을 누릴 수 있었을 뿐 대부분 밑바닥에서 방황할 때였다.

 

 

20세가 못돼 시작된  음주벽

오현명이 조선합창단원으로 합류한 이후 자주는 아닐지언정 어쩌다 한번『네기시』단장의 집을 찾을 적이 있었다. 이즈음 만주에도 창시개명의 바람이 밀어닥쳐 용하는 『네기시 유기찌』로 행세했다. 한인들이 음지에 돋아난 버섯처럼 어귀다툼을 벌이며 모여 사는 판자촌, 용하는 그 나이에 이미 집안 일에는 초연했다. 연습을 마치고 용하가 친구 현명을 데리고 굴속 같은 집으로 들어섰다. 언짢은 표정으로 부친이 돌아보면서

 

『집에는 무엇 하러 들어오느냐』

『……』

아무 내색을 않은 채 외면하는 용하. 그들 부자 사이는 이런 식이었다.

『다 자란 큰애에게 왜 이런 말을 하시우. 제가 어련히 알아서 할라고』

용하를 언제나 감싸는 어머니가 거든다.

『어쨌건 저놈은 내 자식이 아니야. 저 좋을 대로 새처럼 날아다니든지……』

 

용하의 부친은 그를 내어놓은 자식으로 이미 간주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용하가 들어오면 그의 손 밑 남동생 용학은 좋아 라고 형에게 다가와 주일성당에서 형이 합창단을 지휘하던 모습을 흉내 내며 가르쳐 달라고 졸라댔다. 그럴라치면 부친의 불호령이 떨어진다. 

 

『이놈 그 밥 빌어먹을 미친 지랄 그만 두지 못하겠냐』

『어린것이 무얼 안다고 그러슈』

 

어머니는 언제나 자식들 편을 든다. 그럴 즈음엔 용하는 다시 자리에서 슬그머니 일어나 어느 친구의 하숙방으로 잠자리를 옮겼다. 그의 아버지는 체구가 작달 만하고 깡마르기는 했어도 막일로 단련된 단단한 몸을 가지고 있었으며 누구에게도 굴하려 들지 않는 강기(剛氣)의 소유자였다. 그에 비해 어머니는 여자 키로서는 천칠 했으며 성격은 씩씩하고 이해심이 깊었다. 용하의 경우 외모나 성격이 거의 외탁을 한 편이었다. 여하튼 당시 용하가 지휘자겸 단장이던 조선합창단은 단원만 십 오명 정도 모였지 연습장소도 반주할 악기도 없었다.

 

그들은 틈나는 대로 용하가 성가대지휘자로 일하던 십간방천주 교회를 이용했다. 그러나 그곳도 언제나 마음 놓고 이용할 수 있는 장소는 아니었다. 이때 그들에게는 같은 연배의 조천석이라는 시작 공부하는 친구가 있었다. 조는 동시를 주로 썼고 용하는 그의 시에 곡을 붙여 동요를 짓곤 했다. 조는 그때 봉천주재 영국영사관에 잡역을 하면서 뒤뜰에 있는 헛간창고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다. 조선합창단은 조의 자취장소인 이 헛간을 자주 연습장소로 이용했다. 합창연습에 쓸 피아노나 올간이 있을 턱이 없어 오현명이 중학 다닐 때 집에서 취미 삼아 켜던 아코디언을 가져다 합창단 반주악기로 썼다.

 

1940년 가을 마침내 조선합창단의 첫 공연이 다가왔다. 합창곡목은 칸타타『조선의 사계』조선합창단의 공연을 위해 용하가 동요 말고는 처음 작곡한 교성곡이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약관 19세. 연주는 『가네꼬』가 지휘하는 봉천방송국 전속 관현악단이 맡기로 되었다. 합창단원들은 조선인들로서는 봉천에서 처음으로 합창공연을 갖는다는 열기에 들떠 포스터를 손수 시내 요소에 붙이고 다녔다. 그러나 공연은 일보직전에서 좌절되는 듯했다. 일본관헌 측에서 합창공연을 그만두라는 명령이었다. 이유인즉 한인들의 민족감정을 촉발시켜 오족협화의 성스런 분위기를 깰 우려가 있다는 것 그들은 시내에 붙여 놓았던 포스터를 다시 때어내야 했다. 그러나『가네꼬』를 비롯한 여러 사람이 애쓴 보람이 있어 포스터를 다시 붙이고 공연을 할 수 있었다. 용하는 이미 일본관헌 눈에 별로『곱지 못한 젊은 한인』으로 비치고 있었다. 

 

 봉천공회당에서의 합창공연은 성황이었다. 봉천방송국은 이 합창공연을 생방송으로 내보냈다. 당시만 해도 이런 공연에 입장료를 받는 일은 거의 없었고 더구나 공연장소는 공회당이었다. 단지 열정을 가지고 대가를 바라지 않은 채 자기들의 성장을 남에게 보이며 조선인들도 합창단을 만들어 자기의 작품을 공연할 수 있다는 것을 과시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공연에서 박수를 아무리 푸짐하게 받았다고 해도 이들 풋내기들의 주머니 속에는 먼지밖에 나올 것이라고는 없었다. 그렇지만 자축파티가 없을 수는 없었다. 자금은 공연 연습 때 관현악단 노릇을 톡톡히 해온 오현명의 아코디언을 전당포에 맡겨 마련했다. 이 아코디언을 조선합창단이 삼 년 동안 활동하던 시기에 걸핏하면 전당포신세를 지기 일쑤였다. 전당포에서 꾼 돈을 단장인 용하는 어찌 어찌 구해서 다시 갚고 합창연습에 없어서는 안 되는 아코디언을 되찾아 쓰곤 했다.

 

용하는 이 당시 술에 관한 한 어떤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20 대 초반에 항용 있는 풋술 정도가 아니었다. 당시 괴뢰 만주국을 쥐고 흔들던 일제동군부는 만주의 경제체제를 어느 정도 사회주의 방식으로 통제하고 있었다. 명분이야 어떤 것이건 그런 경제통제방식이 원료나 인력의 수탈에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주당들에게는 별로 바람직하지 못한 세상이었다. 즉 오후 오시 이후에라야 술을 먹을 수 있었으며 그것도 감질나는 분량의 배급제였으니까 말이다. 한 사람에 대한 하루 배급정량은 일장에 맥주 이잔 마실 수 있는 표 이장이었다. 즉 하루에 맥주 사 잔이 배급정량이다.

 

이때 용하는 맥주 사 잔으로는 주량을 채울 수 없을 정도의 만만찮은 주당이었다. 그는 거의 매일 저녁, 표를 사서 줄을 서가지고 술을 받아 마시려고 맥주 집에 서 있었다. 으레 술을 못 마시는 오현명을 데리고 갔다. 현명의 표 2장 몫까지 마시면 맥주가 8 잔이다. 옆에서 그의 술잔을 세어본 어느 날 현명은 그것이 18 잔까지 올라가는 것을 확인했다. 술 못 마시는 사람들의 표를 몽땅 바꿔 마신 것이다. 요즘 생맥주 500cc 가량 되는 나무잔이었다. 그렇게 마시고서 『어 시원하다. 이제 살 것 같구먼』하는 용하의 주량에 이미 다른 합창단원들도 익숙해 있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압도당한 것도 사실이다.

 

20세가 못돼 이미 시작된 그의 음주 벽은 섣부른 풋내기 음악가의 왁자한 기고만장 이었다기 보다는 그 자신, 음악, 그리고 민족, 나라에 대한 설움을 애꿏게 풀어보려는 몸부림이었다. 그런 성벽은 노갑이지하는. 벙어리 냉가슴 앓듯 자학적인 그렇지만 겉으로 말을 않고 속으로 삭이는 못난 수더분한 우리 동포의 속성이기도 했다. 용하의 주량을 채워주느라고 맥주집에 거의 함께 동행을 해주던 현명에게 겸연쩍고 미안했던지 용하는 어느 날

 

『자네 왜 제 몫으로 나오는 그 좋은 술을 안 먹고 모두 나에게 빼앗기나. 

오늘은 내가 뺏지 않고 않을 테니 안마셔 보려나』

하고 술을 권했다.

『글세, 이때까지 술이라곤 입에 대어본 적이 없어 겁이 나는 걸』

『아마 자네가 이때까지 맛보지 못한 다른 세계가 있을 걸세』 

용하가 이렇게 부추기는 바람에 현명은 그날 자기 몫으로 배급 받은 맥주 사잔을 모두 

비웠다. 이층 맥주집 계단을 내려오는 현명을 용하가 부축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온 세상이 흔들거리는구먼. 술맛이란게 이런 건가』

『어떤가, 기분이 별로 나쁘지 않지』

 

이 일이 있은 후부터 현명은 자기 몫의 배급맥주를 모두 비우게 됐다. 현명이 용하를 통해 본격적으로 술을 배운 것이다.

 

봉천의 조선합창단은 활동 삼여 년 기간 동안 합창공연 발표회 두 차례와 방송국 출연도 여러 차례 가졌다. 용하는 어린 나이에 사람을 모아 무엇인가 일을 꾸미는 남다른 리더십을 그 나름대로 얻고 있었다. 그의 봉천음악활동은 1943년에 끝난다. 일이세에 실향한인의 아들로 봉천에 발을 들여 놓은 후 이제는 스무 살이 넘는 늠름한 청년음악가로 성장한 것이다. 그는 좀더 넓은 세계에 뛰어 들어 자기의 가능성을 더 깊이 파보고 싶었다. 

 

당시 만주의 심장은 일제의 괴뢰 만주국의 수군 신경(장춘의 만주국 시대의 이름)이었다. 그의 마음은 신경으로 달렸다. 우선 수소문을 했다. 당시 만주의 한인거류민단체로 계림회가 있었다. 계림의 신경분회장 이던 이홍조씨가 의주군 비현면 채마동, 즉 용하의 제 2의 고향출신이었다. 용하가 채마동에서 알았던 양마리아 여사가 바로 이홍조옹의 외손녀였다. 용하는 신경계림분회의 사무원으로 일단 직장을 얻었다.

 

봉천을 떠날 날이 다가왔다. 삼 년이여 동안 고생을 하며 함께 합창을 해오던 조선합창단원들은 그들의 단장 겸 지휘자를 떠나 보내게 된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 『근암(용하)단장석별 기념촬영』도 했다. 그러나 송별연이 없을 수 없었다. 오현명의 아코디언은 다시 마지막으로 전당포 신세를 졌다 용하도 신경으로 간지 얼마후 봉천으로 돈을 우송해 현명은 아코디언을 전당포에서 되찾았다.

 

 

맨주먹 청년

1943년 만주국 수도 신경. 소위 남방전투에서는 기승을 부리던 일제가 차츰 수세에 몰리는 등 일진일퇴의 숨가쁜 공방전이 벌어지고 있을 즈음 이곳 만주국의 수도 신경은 표면적으로는 적어도 평온한 분위기 속에 잠겨 있었다. 북지방 쪽의 요란한 항일전선이나 국공내전의 입김이 관동군의 아성 신경에는 감히; 스며들 수 없는 듯이 보였다. 종전이 임박할 시기까지 만주대륙의 무연한 벌판 한가운데 자리한 이 도시는 『가식에 찬 평온』의 꿈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용하가 봉천을 떠날 때 신경계림분회 사무원으로 취직이 된 것으로 알았으나 그것은 오산이었다. 나라 없이 남의 땅에 와서 기식하고 있는 백성의 거류민 단체가 사무실을 가지고 있으리라는 것은 너무 큰 기대였다. 회관 같은 것은 꿈에도 생각 못할 일이었다. 이홍주 선생댁이 분회사무실 겸 회의집회 장소였다. 이홍주선생은 신경의 한인사회의 지도자였다. 이선생은 계림분회의 한인들을 이끄는 한편 당시 일제 괴뢰 만주국의 국민회의격인 오족협화회의 대의원도 겸하고 있었다. 당시 말해 이미 연로한 지도자로서 소극적인 항일자세를 지키면서 많은 우리 젊은이들을 거두어준 인물이었다. 용하는 어쩔 수 없이 이선생댁의 식객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李선생댁에는 앞서 말한 량마리아여사가 있었다.

 

『아 마리아누님 아닙니까. 구 년 만이구만요』

『아니, 용하가 아니요. 이젠 몰라보겠군요. 그 동안 봉천활동이 대단했다면서……』

『대단할 건 없습니다만 앞으로 이곳에서 좀더 힘을 써볼까 합니다.』

고향에서 귀여워하던 용하가 어릴 때의 그 재능대로 헌칠한 청년음악가로 성장해 있는 것에 양여사는 보통학교 교원으로 지내면서 같은 교원이자 친구인 김임순여사와 함께 성가대를 맡아 이끌고 있었다.

『인편으로 전해 들었는데 용하씨가 작곡도 하고 합창단 지휘까지 했다면서』

『예, 모두들 열의껏 해보았지만 여건이 맘 같지 못해서 그리 큰 성공은 못 거둔 편이죠』

『언제 작곡공부는 하고 지휘하는 것을 익혔수』

『그저 혼자 이리 저리 뛰면서 노력했을 뿐, 좀 두서가 없는 편입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해 보픈데 앞으로 어찌 될는지……』

『요즘 내가 김임순이란 친구하고 성당 성가대를 지도하고 있는데 우리가 보통학교 훈도 노릇하랴 또 음악실력도 달려 힘겨운데 용하씨가 맡아보지 않겠소』

 

이렇게 해서 생겨난 것이 옥명합창단이다. 옥명이란 이름은 이홍주선생이 지어준 이름이었다. 용하는 우선 합창단장으로 있으면서 성당의 올간을 이용해서 작곡연습을 하고 그 습작품들을 합창단원들에게 연습시켜보곤 했다. 또한 이때 용하는 이홍주선생댁에 올간은 물론 축음기 등이 있어 서구의 고전음악에 본격적으로 접할 기회를 가졌다. 이선생댁에는 가톨릭가정답게 고전음악, 음악서적들이 많았다. 당시 만주에는 러시아인들을 비롯한 구미인들이 적잖이 들어와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통한 구미예술의 파급이 대전말기 폐쇄적이던 일본본토보다도 더 활발했다.

 

용하는 계림회의 한인지도자들을 접하는 동안 이들로부터 촉망을 모은 젊은이였다. 어린 나이에 어려운 역경을 뚫고 자기의 재질을 유감없이 드러내는 그에게는 너무나 자연스런 촉망이었다. 그는 신경에서 당시 이곳에 와서 활동하고 있던 한인 음악가들을 여러 사람 만나게 된다. 이들의 해후는 신경의 한인음악활동에 활력소를 불어 넣었을 뿐만 아니라 해방 후 이 나라 음악계에 커다란 초석으로 변할 계기를 품고 있었다. 용하는 봉천시절과는 달리 신경에는 음악활동을 하고 있는 한인이 여러 명 있다는 것을 알고 우선 이들을 한데 묶어볼 마음을 궅히고 일차 순방을 다녔다.

 

 일차적인 그의 관심사는 예술활동이 활발한 만주국 수도 신경에서 한인들로만 이루어진 합창단을 만들어 공연을 갖도록 하는 일이었다. 봉천에서처럼 그의 혼자 힘만으로 하기에는 신경이란 곳은 너무나 넓고 수준도 봉천과는 달랐다. 한인합창단을 만드는 일에 앞서 정규적인 음악활동을 벌이고 있는 한인 동지들을 규합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가 처음 찾아간 사람은 빙락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으면서 틈틈이 작곡을 하고 있던 김대현씨(현중앙대예대음악과교수)였다. 난생 처음 만나는 사이였다. 나이도 일곱 살이나 김대현씨보다 아래였다. 그러나 찾아온 취지를 설명하는 폼이나 사람됨으로 봐서 녹녹하지 않은 위인으로 보였다고 김씨는 용하와의 첫 대면을 회상한다.

 

다짜고짜 교무실로 찾아 들어온 용하에게 김대현은 의외의 눈길을 보냈다.

『무슨 일로 찾아오셨는지요?』

일제의 밀정들이 득시글대던 시절, 생면부지의 청년이 아무 예고도 없이 찾아 왔으니 경계의 주눅이 드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예. 한인』동포로 작곡을 하고 계시다는 말씀을 듣고 이렇게 찾아 왔습니다. 아무 예고 없이 찾아온 것을 허물 마십시오』퍽 어른스럽고 굳굳한 인상이었다.

용하는 자기가 김대현을 찾게 된 이유, 봉천에서의 활약 등을 설명했다. 그는 한인음악가들이 모일 것을 역설하면서 열정적으로 말했다.

『이 넓은 신경바닥에 조선인합창단 하나도 없다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윤형 말씀에 전적으로 동감입니다. 신경교향악단에 김동진씨가 계시니 한번 찾아가 상의해 보십시오. 근간에 한번 모여보십시다.』

 

이 두사람의 만남은 그 후 용하가 세상을 등지기까지 이십여 년 동안 계속되며 수많은 일화를 뿌렸다. 결국 일곱 살이나 손아래인 용하와 끊을 수 없는 친구 사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 후 친구관계에서 항상 나타난 일이지만 용하는 그의 동년배와는 거의 사귀지 않고 오~십 년 연상의 친구들이 대부분이었다.

 

신경교향악단에 한인이 있다는 소리를 들은 용하는 당장 찾아간다. 당시 만주에서는 가장 수준이 높은 악단이던 신경교향악단에는 김동진 김성태 등 한인 여러 사람이 일인, 러시아인과 어깨를 겨루면서 활동하고 있었다. 동경 등지에서 정규 음악교육을 받은 이들 교향악단원들은 그를 동키호테같은 젊은이로밖에 처음에는 보지 않았다. 그러나 끈질기게 찾아와 한인음악가들이 모일 것과 한인합창단의 결성을 역설하자 그의 진심은 점차 이해되고 그의 열정은 어느 정도 받아 들여지고 있었다.

 

한인음악가들의 규합을 휘해 애쓰는 한편 용하는 성당의 옥명합창단을 지휘해서 신경방송국의 조선어방송시간을 통해 몇 차례 작품을 발표했다. 그의 이런 활동은 계림분회 등의 한인사회에 조그만 센세이션을 일으키면서 그가 하고자 하는 음악활동을 가능케 하는 촉매역할을 했다. 그에 대한 한인음악가들의 선입견을 씻는데 적지 않은 공헌을 한 것이다. 용하는 봉천에 온지 넉 달째 되는 사삼년 여름 계림분회 사무원자리를 그만두고 만주국의 예총격인 예문회관의 사무원으로 직장을 옮겼다. 이때 예문회장은 동경의 주간음악신문사 사장을 지낸 음악 평론가『무라마쓰』(村松도미)였다.

 

봉천시절부터 드러난 일이지만 용하에게는 음악적인 재질 말고도 남다른 재주가 있었다. 같은 일을 하면서도 흩어져서 유기적인 관계를 갖지 못하는 개체들을 한데 묶어 조직화하는 재주였다. 그의 이런 재능은 음악활동뿐만 아니라 술을 마시는 행각에도 다양하게 동원되곤 했다. 어찌됐건 서로 유기적인 관계없이 그저 자기가 속한 부서에서 생계나 꾸려가던 신경의 한인만의 음악가들은 난데없이 뛰어든 한 젊은이의 저돌적인 활약으로 순수한 한인만의 음악활동을 벌일 계기를 갖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재만조선인 연합합창단. 합창단원들은 대부분 신구교의 성가대원들이었다. 

 

창단공연 작품은 제 일부 윤용하, 제 이부 김대현, 제 삼부 김동진작곡의 대합창곡이었다. 신경교향악단이 연주를 하고 신경방송국에서는 실황을 중계했다. 사삼년 가을에 있었던 이 합창공연은 한인음악가들에게는 감격스런 일이었다. 한인작품을 한인만으로 이루어진 합창단이 노래 부르고, 콧대 높은 일인들이 주축을 다룬 신경교향악단이 협연을 했으니 말이다. 이들 한인음악가들은 이후에도 협화회관을 통해 몇 차례 작품발표회를 가졌다. 관현악곡의 작곡은 김동진-김성태가, 합창곡 작곡은 윤용하-김대현이 맡아 일하였다.

 

그는 이런 활동 이외에도 그 자신이 혼자 백조합창단을 만들어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다. 용하는 백조창단공연에 멀리 봉천에 있는 친구 오현명을 불렀다.  현명으로 하여금 그가 작곡한 독창곡 『독백』을 부르게 하려는 의도에서였다. 또한 용하의 마음속에는 음악에 관한 한 신경보다 변경인 봉천에 틀어박혀 있는 현명을 큰 곳으로 끌어내 새 물을 마셔 보게 하는 한편 현명의 훌륭한 목소리를 신경음악계에 소개하려는 뜻도 들어 있었다. 전보를 받고 신경으로 달려온 현명은 잊지 않고 불러준 친구가 고마웠다.

 

 

 


윤용하(요셉)와 가톨릭 음악 

 

1959년 봄에 찍은 사진, 사제 (아마도 대주교님, 2차 공의회 전 복장] 왼쪽에 신사복을 입은 분이 윤용하님.. 이곳은 어데일까? 아마도 재직할 당시의 학교가 아닐까..

1959년 봄에 찍은 사진, 사제 (아마도 대주교님, 2차 공의회 전 복장] 왼쪽에 신사복을 입은 분이 윤용하님.. 이곳은 어데일까? 아마도 재직할 당시의 학교가 아닐까..

우리에게 가곡 <보리밭>과 동요 <나뭇잎 배>의 작곡자로 알려져 있는 윤용하(요셉)는 가난한 옹기장이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운 환경 아래에서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가톨릭 음악을 위해 사용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우리나라 가톨릭에는 종교 가요와 주일 학교용 노래가 너무 없어서 탈이요“라는 말을 자주 할 만큼 가톨릭 음악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실천하는 삶을 살던 가톨릭 음악가였다. 

그가 떠난 지 40년 조금 못 미치는 현재, 비록 몇 편 되지 않지만 그가 잡지나 신문에 기고했던 글들을 통해 그의 생애와 함께 그가 한국 가톨릭 음악을 위해 고민했던 점들을 되돌아 보고자 한다.
 

윤용하는 1922년 3월 16일 윤상근 (가롤로)과 이 마리아의 9남매 중 첫째 아들로, 천주교가 비교적 활발하던 황해도 은율군 일도면 농림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윤용하의 조부 때부터 가톨릭 신앙을 갖게 되었는데 윤용하의 부모도 적극적인 교회 활동을 벌이지는 않았지만 신앙심이 매우 깊은 사람들이었다. 이와 같은 가정 환경에서 출생한 윤용하는 태어나서 5일만에 어머니의 품에 안겨 은율(殷栗) 본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 후 윤용하는 세살 때 평북 의주군 비현면으로 외할머니의 등에 업혀 이사를 갔고, 그는 그 지방 성당(비현 본당)에서 처음 오르간을 구경했다고 한다. 

 

윤용하는 어릴 때부터 노래를 좋아해서 부활절이나 크리스마스 같은 대축일에는 독창으로 성가를 불렀고 연극에도 출연하여 본당 신부와 주일 학교 선생들의 귀여움을 받았다.보통학교 5학년 때 그는 옹기장이인 아버지를 따라, 만주의 봉천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보통학교 과정을 마쳤다. 만주의 가톨릭 교회에서 합창단원으로 활동하면서 음악에 더욱 심취한 그는 당시 심양 관현악단의 일본인 지휘자 가네코 로부터 틈틈이 작곡과 화성학을 배웠다. 그 후로는 음악적 경험을 바탕으로 거의 독학으로 음악 공부를 하며 합창곡과 동요곡을 작곡하였다. 

 

이 사진은 언제 찍은 것일까? 정면은 분명히 노기남 대주교님일 듯 한데 앉아 계시는 서양 신부님은? 입맞춤을 하는 이는 분명히 윤용하님일 것이다.

이 사진은 언제 찍은 것일까? 정면은 분명히 노기남 대주교님일 듯 한데 앉아 계시는 서양 신부님은? 입맞춤을 하는 이는 분명히 윤용하님일 것이다.

그의 나이 17세 때 윤용하의 신덕과 음악적 재질을 일찌감치 알아본 어느 프랑스인 신부가 그를 음악 신부로 키우기 위하여 프랑스에 유학을 보내려고 하였다. 윤용하 자신도 신부가 되어 교회 음악에 공헌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지만. 장남이라는 이유로 반대하는 부모의 고집에 꺾여 절호의 기회를 놓쳐 버리고 만다.

 

이 사진은 '아마도' 성당에서 성가대를 지휘하는 모습이 아닐까..

이 사진은 ‘아마도’ 성당에서 성가대를 지휘하는 모습이 아닐까..

음악에 대해선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그는 19세때에 이미 ‘만주 작곡가 협회’ 회원과 봉천 조선이 합창단 단장으로 , 그리고 신경 가톨릭 성가대 지휘자로서 아름답고 경건한 멜로디로미사곡을 편곡 지휘하였으니 모두들 윤용하를 ‘신동’이라고 칭송하였다. 그의 나이 스무살 때이미 처녀 작곡한 칸타타(교성곡)<조선의 사계>를 봉천 기념 회관에서 직접 지휘하여 봉천 조선 합창단의 합창과 봉천 방송 관현악단과의 협연으로 공연하였다. 

 

1년후 윤용하는 신경으로 옮겨가 ‘백조 합창단’을 직접 조직하여 자작곡 합창 발표회를 두세 차례 갖기도 하였다. 그는 일제 말기에 징병으로 끌려가던 도중 탈출하여 간도에 피신한 후, 간도 사범 학교에서 교편을 잡기도 하였다. 광복 후 만주 용정으로 이사를 간 그는 용정 사범 학교에서 음악 강사 자리를 얻어 일하게 되었고, 또 이곳에서 결혼을 하였다. 결혼 후 그는 함흥으로 발길을 돌려 함흥 영생 여자중학교에서 다시 교편을 잡았으나 공산 정권의 예술 어용화 정책에 염증을 느끼고 1946년 아내와 함께 밤에 보따리를 싸 가지고 월남하게 된다.

 

 

가톨릭 음악인으로서의 고민과 노력

 그를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의 삶을 회고할 떄 빠지지않는 것이 그의 ‘신앙’과 ‘작곡’과 ‘술’이다. 그가 살던 시대가 시대인지라 그가 막걸리를 들지 않은 날은 이상한 날로꼽힐 만큼 현실의 불만이나 불우한 처지를 술로 달래며 기염을 토하곤 하였다. 그는 안주 없이 술을 마시는 걸로유명했다고 한다. 하지만 자신이 그토록 좋아하는 술을 아무리 많이 마셔도 주정을 하지 않고, 마실수록 조용해지고 수줍어지는 것이 그의 특징이었다. 하지만 술로 인해 자신의 신앙 생활을 게을리 하지는 않았는데, 사순절 기간인 40일동안만은 술을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았던 사실로 그의 신앙심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평소 어린이를 사랑했던 그는 자신이 어린이들을위해 할수 있는 일은 어린이들이 부를 아름답고 건전한 동요를 많이 만드는 일이었다. 특히 가톨릭 신자인 그의 입장에서는 주일 학교 아동들이즐겨 부를 수 있는 동요를 많이 만들어서 보급하는 일이었다. 또한 그는 당시 주일 학교에서 성인용 성가책을 사용함으로써 어린이들이 부르기 어렵고, 성장기에 있는어린이들의 건강상으로도 좋지 못하다는 점을 제시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어린이를 위한 성가책을 다시 편찬하여야한다고 주장하였는데, 편찬 요령에 대해서는 그가 당시 <가톨릭 청년>에 기고했던 <주일학교성가 소고>라는 글에 잘 나타나 있다.

 

 

1) 어린이 성가 편찬위원회를 조직하되 여기에는 성직자, 시안, 작곡가, 가톨릭 음악 지도자들로 구성해야 된다. 만일 한두 사람이 책임을 지게 된다손치더라도 이러한 모임을 거쳐야만 내용이 충실한 성가책이 엮여져 나오게 될 것이다.

 

2) 내용에 있어서는 현재의 성인 성가책을 중심으로 하되 가사를 어린이들이 해독하기 쉽게수정해야 될 것으로 생각되며, 때에 따라서는 성가를 시인과 작곡가에게 위촉해서 새로운곡을 만드는 것도 좋을 것이다.

 

3) 성가책이 나온 후에 성가 지도자와 주일 학교 선생들을 한자리에 모시고 어린이 성가책의출판에 대한 취지와 곡에 대한 해설, 또는 시에 대한 해설도 하여서 가르치는 선생님들로 하여금 가사의 뜻과 곡의 내용을 알리도록 하는것도 뜻이 있다고 생각된다.

 

4) 편찬된 곡 중에서 추려서 레코드에 취입하도록 해야한다. 우리 신자들의 가정들에서도 축음기를 많이 가지고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신자들 가정에서 어떠한 레코드판을 가지고있는지 추측하기 곤란하나, 사회물이 많을 것이다. 물론 현재까지 레코드를 제작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도 사실이다. 이런 기회에 어린이 성가레코드판을 제작하여서 신자들의 가정은 물론이려니와 일반 사회에도 내놓아서 어린이 성가를 통한 전교에도 힘씀이 필요하다고 본다.

 

5) 우리 가톨릭 어린이들의 정서를 함양하기 위해서 일 년에 한두번씩 정기적으로 음악회를가질 필요가 있다. 이러한 기회를 줌으로써 어린이들을 점점 성당과 더 가까워질 것이며 또한 주성모님을 더욱 공경하게 되는 기회가 될 것 이다. 이러한 음악회에는 꼭 성가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유명한 곡목을 택해서 음악적인 시야를 넓혀 주도록 해야 될 것이며, 이러한 기회에 음악에 국한할 것 없이 무용, 연극 등오 같이 할수 있도록 하면 더욱 좋으리라고 본다.

 

6) 이러한 음악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나타낸 단체나 개인을 선출하여 가지고 그들을 장려하기 위한 표창도 해야 될 것이고, 떄에 따라서는 방학이나 공휴일을 이용하여 지방 순회 연극회 등을 가져서 지방 어닐이들의 문화 향상에도 도움이 되도록 하여서 어려서부터 지방 어린이와 도회지 어린이들과의 사이에 따뜻한 친밀감을 가지게 한다.

 

 

앞의 글에서 볼수 있듯이 그가 얼마나 어린이들을 사랑했으며, 어린이들을 위한 성가를 만드는 데 많은 고민과 노력을 했는지 알 수 있다. 이에 그는 아동 문학가인 이석현(세바스티아노)과 친분을 맺고 그의 동요 20여 작품을 노래로 만들었으며,그 작품중에서는 <가톨릭소년의 노래>,<성당 종> 등 주일 학교 어린이들이 부를 노래도 있다.

 

 

<가톨릭 소녀의 노래>

떠오른 아침 해는 예수님 마음

그 햇빛 그 사랑을 담뿍 받아서

하늘처럼 푸르고 높이 자라는

천주님의 착한 아기 가톨릭 소년

늘 함께 돌보시는 성모님 은혜

호수천신 손목 잡고 참다이 살자 

 

<성당 종>

성당 종 칩니다. 뗑뗑뗑

성당 종 칩니다. 뗑뗑뗑

어서 모여라 마을 아이들

신부님의 검은 수염 손을 펴들고

 

 

윤용하는 주일 학교 동요를 작곡하는데 만족하지 않고 주일 학교용 동요집 출판을 위해 이석현과 만날 때마다 얘기를 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윤용하는 천안 복자여자고등학교 교가를 작곡했고, 몇몇 신부들의 회갑 축하곡도 작곡하였으나 끝내 동요집 출판은 나오지 못하였다. 한편 그는 어린이뿐만 아니라 청소년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과 사랑을 갖고 있었다. 특히 당시 대다수의 가톨릭 청소년들이 성가보다 유행가를 자주 부르는 모습에 대해 걱정하고 있었는데,이는 그가 1964년 1월 <가톨릭 청년>에 기고했던 <가톨릭 청소년과 음악>이라는 글에 잘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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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윤용하님의 전쟁중 가톨릭 신앙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들이다. 전방이건 후방이건 야외미사의 모습들.. 절박한 미사였을 것이다

 

이처럼 그는 앞으로 한국 가톨릭 교회를 이끌어 나가야 할 어린이와 청소년에 대해 가톨릭 음악 부문에 있어서 고민하고 해결하고자 하였다. 또한 그는 전체적인 한국 가톨릭 음악계에 대한 고민도 많이 했음을 알 수 있는데, 특히 그가 강조했던 점은 한국 가톨릭음악계를 이끌어 갈 조직체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는 당시 가톨릭음악계가 처한 문제점 들을 본당의 지도자들과 가톨릭음악가들이 함께 뭉쳐서 해결해야 한다고 하면서 바람직한 가톨릭 음악의 방향 제시와 음악가들의 사명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수 있다.이처럼 한평생 가톨릭 음악에 대한 고민과 실천의 삶을 살았던 그의 소원은 앞에서 잠깐 언급되었다. 가톨릭 주일 학교용 동요집’과 자신의 작곡집 출판, 그리고 자신이 만들었던 ‘대한 어린이 합창단’의 재건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게 소원했던 그의 작곡집은 그의 사후 7년 후인 1972년 4월 19일에야 출판되었다.

 

맺음말 

그는 평생을 자기 소유의 집을 지닌 일이 없이 단칸 셋방살이를 전전할 만큼 가난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가난했지만 그는 자신의 예술적 혼을 가톨릭 음악에 헌신하고자 노력했던 사람이었다. 부모의 반대로 자신의 어렸을 적 꿈인 음악 신부로의 꿈이 깨어졌지만, 그 못지않은 가톨릭 음악활동과 믿음을 가졌던 사람이었던 것이다.그가 작곡한 <보리밭>의 가사 중에 ‘옛 생각이 외로워 휘파람 불면 고운 노래 귓가에 들려 온다’ 라는 구절이 있다. 어쩌면 우리가 휘파람 불면서 흥얼거리는 이 노랫소리가 하늘에 있는 그의 귓가에까지 들릴 것이고, 그는 그 소리를 안주 삼아 기분 좋게 술을 마시고 있지 않을까…

 

 

 


 

음악평론가 이상만씨 회고

 

윤용하 는 주일 학교 동요를 작곡하는데 만족하지 않고 주일 학교용 동요집 출판을 위해 이석현과 만날 때마다 얘기를 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윤용하 는 천안 복자여자고등학교 교가를 작곡했고, 몇몇 신부들의 회갑 축하곡도 작곡하였으나 끝내 동요집 출판은 나오지 못하였다. 한편 그는 어린이뿐만 아니라 청소년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과 사랑을 갖고 있었다. 특히 당시 대다수의 가톨릭 청소년들이 성가보다 유행가를 자주 부르는 모습에 대해 걱정하고 있었는데,이는 그가 1964년 1월 <가톨릭 청년>에 기고했던 <가톨릭 청소년과 음악>이라는 글에 잘 나타나 있다.

 

 

우리 가톨릭 청소년들의 입에서 우리 나라와 일본의 유행가나 또는 동서양에서 유행되고 있는 샹송, 재즈 등의 노래가 불려지고 있다는 현실에 비추어 볼 때에 내가 한 바를 써보기로 하겠다.

 

샹송을 유행시킨 불란서 ‘파리’에서도 그 자취를 감추기 시작하고 고전 음악으로 되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우리 가톨릭 청소년들은 명심해야 되며 또 가톨릭 청소년들을 직접적으로 간접적으로 지도하고 계시는 분들은 더욱 이런 점에 대해서 정신을 가다듬어야 될 것이다. 왜냐하면 청소년들이 가사나 곡이 저속한 것을 부르고서 고해 신부님 앞에 어떻게 무릎을 꿇겠는가 말이다….(중략)…. 우리 가톨릭 청소년들이 다른 일반 청소년과 다름없이 유행가라면 덮어놓고 모조리 부른다면 무엇 때문에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지를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중략)… 물론 교회의 사정에 따라서 청소년들을 위한 건전한 오락 시설도 없으려니와 성가를 부르고 싶어도 성가 연습실 지도자의 결원 등으로 여의치 못한 교회도 있으리라고 생각되지만 적어도 가톨릭의 청소년이라면 주일날 성가 책 한 권쯤은 들고 미사에 참례해야 될 것으로 생각되는데 반해서 도리어 어린이와 노인들이 가지고 와서 성가대들을 부르는 것을 쫓아서 부르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현실은 기현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가톨릭 청소년은 깨끗하고 곱고 아름답고 거룩한 노래를 부름으로써 정신을 가다듬고 하루의 생활을 남보다 더 훌륭한 생활을 보내도록 해야만 의의가 있는 것이다…(중략)… 끝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십이단의  봉헌경신공 경문 중에 ‘내 소리를 드림은 네 아름다움을 노래하기 위함이요’라고 聖句를 명심하여 주기를 바라며 이만 그치는  바이다.

 

 

얼마 전 그의 유족들이 보관하고 있던 그의 비망록을 살핀 일이 있다. 300원 500원,… 거기에는 만년에 그가 폐인 되다시피 하여 이곳 저곳 구걸하러 다닐 때에 추념을 해 주었던 사람들의 이름과 액수가 적혀 있었다. 대부분 동료 음악인들의 이름이 거기에 적혀 있었는데, 어떤 어떤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 있는가 하는 호기심보다도 그 비망록이 그렇게 소중하게 간직된 까닭이 사뭇 나의 눈시울을 뜨겁게 만들었다. 친구들의 신세를 졌지만 그 신세 갚음을 잊지 못하고 눈을 감은 사람이 윤용하였다.

 

 


 

작곡가 윤용하 40주기 작품 연주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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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용하 40주기 작품 연주회 포스터: 이 사진의 님은 언제의 모습일까.. 태극기의 모습으로 6.25 전쟁 중이 아니었을까?

 

 

 

2005년 윤용하선생을 기리고 그가 남긴 아름다운 음악 세계를 되새기기 위해 그와 음악을 함께 했던 동료 음악인들이 모여 「늘 금밖에 섰던 남자 – 윤용하, ‘보리밭’의 추억」이라는 타이틀로 지난 20주기에 이어 두번째로 「작곡가 윤용하 40주기 작품연주회」를 엽니다.이 나라의 음악을 사랑하는 모든 분들과 함께 점점 잊혀져 가는 우리의 정서를 보리밭의 추억과 함께 아름다운 옛 추억을 일깨워 드리는 자리가 되고자 합니다.

■ 일시: 2005년 10월 26일(수요일) 오후8시

■ 장소 : 호암아트홀

 

 

 


 

2005년 문화예술 발전 유공자에 대한 <보관문화훈장> 추서

훈장을 받는 여성은 윤용하님의 (남매 중) 따님일 듯..

훈장을 받는 여성은 윤용하님의 (남매 중) 따님일 듯..

 

 

 

짧은 인생을 오로지 음악에만 몸던져 가난과 몰이해, 

전쟁의 참담함 속에서도 순수한 열망과 불타는 의지로 

우리의 아름다운 정서와 곧은 민족혼을 끊임없이 노래했던

작곡가 윤용하. 역류해 가면서 한 시대의 아웃사이더로 

늘 금밖에 섰던 남자, 윤용하.

 

티없이 맑은 선율과 그의 고고함을 우리 가슴에 묻고 

우리 곁을 떠난지 40년이 지난 지금, 

우리나라 문화예술에 기여한 공적을 기리는 2005년 문화훈장

음악부문에 윤용하 선생이 선정되었습니다.

 

시상은 오는 10월 15일(토) 오후 3시 전주시 한국소리문화의

전당에서 거행되는 ‘문화의 날 기념식’에서 실시되었다 

 

 

 


 

고 윤용하 선생 40주기 추모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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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경제 사정과 무더운 여름 날씨 속에서도 기념사업회에 보내주신 관심과 사랑에 진심으로 감사 드리오며, 임원 여러분의 건강을 기원합니다.

기념사업회에서는 올해로 40주기를 맞는 故 윤용하 선생의 기일인 7월 23일(토) 경기도 금곡에 위치한 선생의 묘소에서 아래와 같이 추모 미사를 개최하고자 합니다.

특히 이번 미사는 본 사업회 이사로 계신 백남용 신부님께서 주관하시게 되어 더욱 뜻 깊은 시간이 되리라 생각됩니다. 바쁘시더라도 시간을 내시어 자리를 함께 해 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 일시 : 2005년 7월 23일(토) 오전 9시

■ 장소 :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천주교회 공원묘지

■ 미사 집전 : 백남용 신부

 

 

 


 

언론 보도

 

중앙일보 [칼럼] 2005.10.24 (월) 

 

오현명 윤용하기념사업회 회장·성악가·전 한양대 음대 학장

아, 윤용하! 순백의 예술혼이여

올해는 윤용하 형의 40주기가 되는 해다. 벌써 40주기가 되었나 싶게 세월은 화살처럼 흘렀다. 용하 형을 그리워하고 그의 음악과 인생역정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 몇몇이 모여 40주기를 그대로 지낼 수 없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급히 필자를 회장으로 하는 기념사업회를 만들고 정부에 문화훈장 추서를 건의하는 한편 추모음악회도 준비했다. 고맙게도 정부에서는 보관문화훈장의 추서를 결정해 주었고, 추모음악회도 ‘늘 금 밖에 섰던 남자 윤용하 – 보리밭의 추억’이라는 주제를 걸고 내일(26일) 저녁 호암아트홀에서 열리게 되었다.

 

많은 사람이, 특히 용하 형의 노래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으레 보리밭을 떠올린다. 그의 대표적인 가곡 ‘보리밭’이 우리 국민 누구나 사랑하는 국민가곡이 된 지 오래됐다. 이 가곡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피란 수도 부산에서 박화목 선생의 노랫말에 곡을 붙여 태어났다.

 

전란으로 인해 메마를 대로 메말라버린 우리네 마음을 푸근하게 적셔주어야겠다는 두 사람의 뜻이 투합하여 만들어졌다. 용하 형의 작품 영역은 넓고 다양하다. 가곡뿐만 아니라 오페라 오페레타 그리고 무엇보다 특히 동요가 두드러진다. 그는 광복 전 20세 전후에 이미 오페라 ‘조선의 사계’를 작곡했고 오늘날에도 어린이들이 즐겨 부르는 동요의 고전이 된 ‘나뭇잎배’ ‘노래는 즐겁다’ 등 수많은 동요를 만들었다. 또한 지금도 우리들이 부르고 있는 ‘광복절 노래’를 비롯하여 ‘민족의 노래’ 등 많은 국민가요를 작곡했다.

 

용하 형은 광복과 전란 기간 중에 지치고 메마른 우리 국민의 정서를 위로하고 순화시키기 위해 음악활동을 펼쳤다. 그는 특히 어린이들이 전란 속에서도 즐겁고 밝게 자라려면 아름답고 씩씩한 노래들을 많이 불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휴전 이후 그는 서울 중앙방송 어린이 시간의 전속 작곡가 노릇을 했다.

 

용하 그의 삶 자체가 음악이고 예술이었다. 그는 어떤 가식이나 타협도 용납하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가난을 천형(天刑)처럼 둘러메고 살다가 그 가난을 깔고 누워 세상을 등졌다. 부조리하고 타락한 세계와 끊임없이 불화할 수밖에 없었던 그는 술로써 저항하고 술로써 풀어보려 했다. 그는 패배할 수밖에 없었고 늘 금 밖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광복 직후 나라가 새로 세워지면서 모든 분야에 인재들이 필요했다. 인재들을 키워낼 고급 인재들은 더욱 모자랐다. 그래서 중.고등학교 졸업장과 대학 졸업장이 공공연히 돈으로 거래되었다. 많은 동료가 그 길로 갔고 그들은 용하 형에게도 그 길을 권했다. 그는 거부했다. 초등학교 5학년 중퇴가 그의 정규학력의 전부였고 그래도 그는 그의 천부적 재능으로 10대 말의 나이에 이미 어엿한 작곡가이자 방송국 교향악단 지휘자의 경력을 쌓았다. 대학교수가 되어 가르쳐야 할 그에게 세상은 초.중.고등학교와 대학 졸업장을 요구하고 그것도 부정한 방법으로 구해 오도록 강요했다. 예술적 재능과 노력보다는 학력과 졸업장 그리고 연줄이 더욱 위력을 발휘하는 풍토에서 그는 변두리로 변두리로 밀려났다.

 

휴전 직후 문화예술인단체의 3.1절 기념식장 소동도 상징적 사건이었다. 내로라하는 문화예술계의 거물들이 기념식을 마치고 다과회를 열고 있었다. 하필 그들은 그날 그 자리에서 일본말로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고 떠들었다. 이미 술이 거나해 있던 용하는 “예끼, 이 똥만도 못한…”이라 고함을 지르면서 테이블을 뒤집어엎어 수라장을 만들어 놓고 휑하니 사라졌다. 그러니 그는 발붙일 곳이 없어졌다.

 

우리는 용하의 음악을 사랑한다. 그리고 그의 불꽃 같은 순수예술혼을 그리워한다. 자신의 소유로 되어 있던 집이나 악기를 가져보지 못했으면서도 창작열에 들떠 살면서 타협을 모르고 곧은 길을 걸어간 그의 고집에 경의를 보낸다. 허기진 배를 술로 채우며 일으켰던 수많은 소동과 실수에 따듯한 연민의 미소를 보낸다.

 

우리는 용하에게 많은 빚을 졌다. 그의 생전은 물론이고 그가 세상을 등진 지난 40년 동안 빚 갚을 생각을 못했다. 이제 정부가 문화훈장을 추서했고 추모음악회도 열리게 되었다. 이 보잘것없고 때늦은 보은이 용하 형의 영혼에 위안이 되기를 빌어본다. 용하 형의 40주기 행사를 위해 애써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 드린다. 

 

 

 

[한국일보 ]2005-10-24]

 

‘보리밭’ 윤용하 추모 음악회

가곡 ‘보리밭’의 작곡가 윤용하(1922~1965) 40주기를 맞아 그의 노래들로 구성한 추모 음악회가 26일 오후 8시 호암아트홀에서 열린다. 평생 가난에 시달리며 유랑한 그는 가곡 외에 동요 ‘나뭇잎배’ ‘노래는 즐겁다’ 등 200여 곡을 남겼다.

이번 행사는 그의 음악 동지였던 바리톤 오현명을 중심으로 출발한 윤용하 기념사업회가 주최하는 것으로, 테너 안형일, 소프라노 김영애, 바리톤 오현명, 난파 소년소녀합창단이 출연한다. (02)541-6234 

 

 

 

[중앙일보 이장직 음악전문기자 lully@joongang.co.kr] 2005-10-22

 

윤용하 40주기 가곡의 밤… 국민가곡 ‘보리밭’ 작곡가 추모

 

황인호의 시 ‘고독’에 곡을 붙인 고(故) 윤용하(1922~65)의 가곡이다. 이 노래는 작곡자의 고달픈 삶을 대변해 주는 것 같다. 그는 가족이 함께 살지 못할 정도의 생활고에 시달리다 43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떴다.

 

국민 가곡 ‘보리밭’의 작곡자인 윤용하 선생의 40주기 기념 연주회가 26일 오후 8시 호암아트홀에서 열린다. 윤용하의 작품만으로 꾸미는 음악회는 85년 20주기 추모 음악회를 연 이후 두 번째다. 올해 40주기를 기해 정부는 그에게 문화훈장을 수여했으며, 최근 기념사업회(회장 오현명, 부회장 이부영)가 공식 발족했다.

 

1922년 황해도 은율 태생인 고인은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가곡, 동요 등 주옥 같은 작품들을 숱하게 남겼다. 동요 ‘나뭇잎 배‘ ‘노래는 즐겁다‘, 정인보 선생이 가사를 쓴 ‘광복절 노래‘가 가장 유명하다. 한국 전쟁 당시에는 종군 작곡가로’사병의 노래’ 등 군가를 작곡했다. 이 밖에도 미완성 오페라 ‘견우 직녀’, 오페레타 ‘해바라기 노래’, 교향곡 ‘개선’, 교성곡 ‘조선의 사계’등이 있다. 하지만 아직도 귓가에 맴도는 것은 역시 서정적 선율로 가득한 가곡과 동요다.  ‘보리밭’은 고인이 부산 피란시절 박화목 시인에게 국민의 마음을 달래 줄 서정 가곡 한 편을 만들자고 제안해 가사를 받아 쓴 작품이다.

 

이번 음악회에는 1940년 고인과 함께 ‘조선합창단’을 창단했던 바리톤 오현명씨를 비롯, 테너 안형일, 소프라노 김영애, 피아니스트 정진우, 서울신포니에타 등이 출연한다. 02-541-6234. 

 

 

[조선일보 김성현 기자] 2005.10.21

 

백발의 음악가들 무대에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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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서울 광진구 구의동의 한 스튜디오. 피아니스트 정진우(77)씨의 반주에 맞춰 바리톤 오현명(80)씨가 윤용하의 가곡 ‘독백’을 나지막이 부르기 시작했다. 정씨의 박자가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려고 하면, 오씨는 연방 “스타카토는 두 번이야”라며 잔소리를 했다.

 

곁에서 노래를 듣고 있던 테너 안형일(78)씨가 “늙어서 그런지 요즘엔 도통 가사가 외워지질 않아”라고 푸념했다. 이번엔 정씨가 “아무 거나 딴 가사로 부르면 되잖아. 예전에 오 선생이 그랬다며…”라고 핀잔을 주자, 오씨는 “내가 뭘…”이라 뾰로통한 표정이다. 하지만 금세 이들은 입맞춰 ‘보리밭’과 ‘민족의 노래’를 함께 불렀다. 윤용하. 40년 전 세상을 떠난 친구인 ‘보리밭’의 작곡가를 옛 친구들이 연주회로 기린다.
 

 

[문화일보 김순환 기자] 2005. 10. 20

 

‘보리밭’ 작곡 윤용하 40주기 음악회

(::26일 서울 호암아트홀서::)

 

가곡 ‘보리밭’을 작곡한 고 윤용하 선생의 40주기를 기리는 음악회가 열린다.

윤용하기념사업회가 오는 26일 오후 8시 서울 호암아트홀에서 여는 ‘늘 금밖에 섰던 남자, 윤용하 ‘보리밭’의 추억’음악회는 지난 85년 20주기 연주회에 이은 20년만의 행사이다.

이번 음악회에는 바리톤 오현명, 테너 안형일, 소프라노 김영애, 파아니스트 정진우 씨, 난파 소년소녀합창단, 체임버 서울신 포니에타(지휘 김영준) 등이 출연, ‘보리밭’‘뱃노래’‘동백꽃 ’‘노래는 즐겁다’‘나뭇잎 배’‘추억’ 등 그의 대표작들을 들려준다. 

특히 1940년 윤용하와 함께 ‘조선합창단’을 만들어 활동했던 오현명 한양대 명예교수도 무대에 올라 ‘독백’ 등 2곡을 부를 예정이다.

고 윤용하 선생은 1922년 황해도 은율 에서 태어나 지난 65년 43 세라는 젊은 나이로 요절했다. 그는 시대와의 불화와 가난 등으로 고달픈 삶을 살았으나 가곡과 동요 등에서 주옥 같은 작품들을 남겼다.

그는 6·25 전쟁 때에는 종군 작곡가로 참여해 군가 ‘사병의 노래’등을 작곡했으며, 이후 가곡 ‘보리밭’ ‘동백꽃’등과 동 요 ‘나뭇잎 배’‘노래는 즐겁다’ 등 200여 곡을 작곡했다. 또 ‘민족의 노래’ ‘광복절의 노래’ 등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주옥 같은 노래들을 남겼다. 

고 윤용하 선생은 최근 우리나라 문화 예술계에 기여한 공로로 올해 문화훈장 음악부문 수상자로 선정됐다.

한편 이번 음악회는 동아일보 기자시절 미발표 원고를 발굴했던 이부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 이상철 디자인이가스퀘어 대표, 이형대 캠브리지㈜ 대표 등이 적극 주선해 성사됐다. 

 

 

 

[서울=연합뉴스 이윤영 기자] 2005. 10. 19

 

작곡가 윤용하 40주기 기념 연주회

 

‘보리밭’을 작곡한 고(故) 윤용하(1922-1965) 선생의 40주기 기념 연주회가 26일 오후 8시 호암아트홀 에서 열린다.

윤용하 선생은 1922년 황해도 은율 에서 태어나 65년 43세라는 젊은 나이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시대적 불운과 가난 등으로 인해 짧고도 고달픈 삶을 살다 갔지만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가곡, 동요 등 주옥 같은 작품들을 숱하게 남겼다.

한국 전쟁 당시에는 종군작곡가로서 군가와 ‘사병의 노래’ 등을 작곡했으며, 이후 가곡 ‘보리밭’ ‘동백꽃’ ‘한가위 달’ 등을 비롯해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친숙한 동요 ‘나뭇잎 배’ ‘노래는 즐겁다’ 등 200여 곡을 작곡했다.

우리나라 문화예술계에 기여한 공로로 올해 문화훈장 음악부문 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번 연주회는 윤용하 기념사업회(회장 오현명, 부회장 이부영)와 호암아트홀이 지난 20주기에 이어 두 번째로 여는 그의 작품 연주회다.

바리톤 오현명, 테너 안형일, 소프라노 김영애, 피아니스트 정진우, 난파 소년소녀합창단, 서울 신포니에타(지휘 김영준) 등이 출연해 ‘뱃노래’ ‘동백꽃’ ‘노래는 즐겁다’ ‘나뭇잎 배’ ‘추억’ ‘보리밭’ 등 그의 대표작들을 연주한다.

 

 

 

[동아일보 전승훈 기자] 2005. 10. 19

 

‘보리밭’ 작곡가 윤용하 40주기 추모 음악회

 

가곡 ‘보리밭’의 작곡가 윤용하 선생의 서거 40주년을 기리는 음악회가 26일 오후 8시 서울 호암아트홀에서 열린다. 1922년 황해도 은율 에서 태어난 선생은 1965년 43세에 짧은 생을 마친 작곡가. 가곡 ‘보리밭’ ‘동백꽃’ 등을 비롯해 ‘나뭇잎 배’ ‘노래는 즐겁다’ 등 200여 곡의 동요, ‘민족의 노래’ ‘광복절의 노래’ 등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주옥같은 노래들을 남겼다.

이번 음악회는 1985년 20주기 기념음악회를 연 이후 두 번째. 올해 40주년을 기념해 정부는 그에게 문화훈장을 수여했으며, 최근에는 윤용하 기념사업회가 공식 발족했다.

이번 공연에는 안형일, 김영애, 정진우 씨 등 성악가들이 그의 대표 가곡과 동요를 부른다. 특히 1940년 선생과 함께 ‘조선합창단’을 만들어 활동했던 바리톤 오현명(81·한양대 명예교수)씨도 무대에서 ‘독백’ 등 2곡을 부를 예정이다. 

 

 

 

 


 

윤용하의 작품세계

가곡

1) 보리밭 (박화목 작사)

2) 산골의 노래 (박목월 작사)

3) 독백 (김기영 작사)

4) 동백꽃 (이정호 작사)

5) 고독 (황인호 작사)

6) 자장가 (황해룡 작사)

7) 도라지꽃 (박화목 작사)

8) 뱃노래 (이석현 작사)

9) 한가윗 달 (김도성 작사)

10) 도래춤 (임안서 작사)

11) 달밤 (윤곤강 작사)

12) 어느 군인의 독백 (이영순 작사)

 

국민가요

1) 민족의 노래 (장유점 작사)

2) 무궁화

3) 광복절의 노래 (정인보 작사)

4) 국토아리랑 (이은상 w가사)

5) 우리들의 노래 (이기태 작사)

6) 근로인의 노래 (최숙자 작사)

7) 희망의 노래 (조지훈 작사)

8) 전원의 노래 (이석현 작사)

9) 백일(百一) 용사의 노래 (하한주 작사)  

 

동요

1) 나뭇잎배 (박홍근 작사)

2) 카톨릭 소년의 노래 (이석현 작사)

3) 가을산 (강소천 작사)

4) 가울 수풍 (박화목 작사)

5) 강물과 떼 배 (권태응 작사)

6) 고개길 (이원수 작사)

7) 고개길 버스 (이석현 작사)

8) 고마운 순경 (박화목 작사)

9) 골목길 달 모롱이 (정완영 작사)

10) 구름 (이석현 작사)

11) 굴뚝 (이석현 작사)

12) 귀뚜라미 (이석현 작사)

13) 9.28 노래 (이석현 작사)

14) 널뛰기 (유석준 작사)

15) 노래는 즐겁다 (박목월 작사)

16) 눈 (김영일 작사)

17) 눈온 날 아침 (박화목 작사)

18) 눈이옵니다 (박경종 작사)

19) 다람쥐 (윤석중 작사)

20) 동물원 곰 (이석현 작사)

21) 동화 할아버지 (이석현 작사)

22) 등대 (박경종 작사)

23) 딱따구리와 다람쥐 (박경종 작사)

24) 때때춤 (이석현 작사)

25) 또랑물 (권태응 작사)

26) 매미와 개미 (박경종 작사)

27) 무지개 (박경종 작사)

28) 무지개 다리 (이석현 작사)

29) 버들 강아지 (이석현 작사)

30) 별 (목일신 작사)

31) 봄이 오네 (김영일 작사) 

32) 별님동무 고기동무 (권태응 작사)

33) 산길 (이순희 작사)

34) 산샘물 (권태응 작사)

35) 새나라 새싹 (이석현 작사)

36) 설맞이 (이석현 작사)

37) 성당종 (이석현 작사)

38) 소년 (이석현 작사)

39) 설맞이 (이석현 작사)

40) 싸락눈 (이순희 작사)

41) 아기는 해바라기 (이석현 작사)

42) 아기의 꿈 (홍은순 작사)

43) 아지랑이 (서정봉 작사)

44) 우리 엄마 (이석현 작사)

45) 어린 고기들 (권태응 작사)

46) 어린이날 행진곡 (윤석중 작사)

47) 어린이 명절 (김영일 작사)

48) 어머니 (이석현 작사)

49) 오리 (권태응 작사)

50) 오막살이 집 (김영일 작사)

51) 우리 나라 좋은 나라 (박화목 작사)

52) 우리집 봄님 (이석현 작사)

53) 인형의 자장가 (강소천 작사)

54) 크리스마스 (이석현 작사)

55) 큰 별이 뜨면 (이석현 작사)

56) 편지 (김영일 작사)

57) 풍년노래 (박경종 작사)

58) 피리 (유석준 작사)

59) 함박눈 (이보라 작사)

60) 호박꽃 초롱 (강소천 작사)

61) 할머니 산소 (이석현 작사) 

 


 

 

 

 

¶  CROSSING THE THRESHOLD OF HOPE

Scan10105-1 몇 개월 전이던가.. 확실치 않다.. 하지만 6개월은 넘지 않았을 것 같은 느낌. 우리가 다니는 미국 본당 Holy Family CC (Catholic Church)의 성체조배실 (adoration chapel) 에서 비교적 낡은 책 하나를 읽게 되었다. 조그만 책자였는데, 눈에 익은 이름이 보였다. HIS HOLINESS JOHN PAUL II.. 그러니까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저자인 책이었다. 제목이 바로 ‘CROSSING THE THRESHOLD OF HOPE” 였다. 직역을 하면 ‘희망의 문턱을 넘어서..’ 정도가 될까. 나 나름대로의 의역은 ‘희망으로 넘어 가며’  조금은 어색한가.. 희망이 없던 사람이 그것을 찾으려 노력하다가 비로소 조금씩 그것을 찾아간다 정도가 아닐까?

 

성체조배실에서는 주로 성체를 앞에 두고 명상이나 묵상 나가가서 관상까지도 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무엇을 하던 사실 제한은 없는 것 같다. 연숙과 그곳을 거의 정기적으로 가게 된 것은 우리가 ‘평일 미사’를 시작하면서였고 평일 미사가 끝난 후에, 필수적으로 일주일에 몇 번을 하는 것은 정하지 않고, ‘가고 싶으면’ 가는 것으로 했는데 의외로 정기적인 것이 되었다. 이 본당의 성체조배 활동은 참으로 활발해서, 우리의 한국본당 순교자 성당에 비하면 ‘하늘과 땅의 차이’라고 할만 하다. 왜냐하면 순교자 성당에는 ‘성체조배실’이란 것이 아예 없기 때문이다. 항상 비어있는 듯한 컴컴하고 춥고, 더운  순교자 성당의 분위기1와 이곳의 24시간 쾌적하게 돌아가는 성체조배실이 있는 미국본당의 ‘눈에 안 보이는 차이’는 아마도 상상을 초월할 듯 하다. 어떤 자매님은 경험적으로 성체조배 활동이 있는 모든 본당의 신심 수준2은 ‘거의 자동적으로’ 올라가게 되어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나는 성체조배 Eucharistic Adoration  란 것이 처음에 너무나 생소했지만 의외로 좋은 ‘선배’들을 만나서 큰 무리 없이 합류가 되었고 이제는 ‘좋은 시간’ 중에 하나가 되었다. 레지오 덕분에 처음에는 ‘기본’ 묵주기도 의무를 채우려 이곳에서 그것을 하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나며 나만의 ‘묵상, 생각’의 시간들이 늘어나기도 했다. 다른 것 중에는 그곳에 비치된 ‘좋은 책’들을 ‘난독’하는 것이다. 거기서 정독을 할 수는 없기에 눈에 ‘꽂히는’ 것을 읽는다. 이런 것들이 우연일 수도 있지만 이제는 그렇게 생각지 않게 되었다. 그 중에 하나가 여기에 언급하는 이제는 ‘성인’이신 요한 바오로 2세의 책인 것이다.

 

 처음에 이 책을 접했을 때 직감적으로 ‘괜히 어려운 책을 골랐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교황님이 쓰신 글들은 ‘무조건 어렵다’ 는 선입관 때문이었을 것이다. 분명히 ‘교황 회칙이 어쩌구.. 교회 헌장이 어쩌구..’ 하는 글들이 태반이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원인이었을까.. 이 책을 조금 읽으며 나는 너무나 놀라서 입이 다물어지지를 않았다. 웬만한 교구신부님3들이 일반 본당에서 하시는 수준의 글들.. 주제 들은 ‘항상 궁금했지만 창피해서 물어보지 못하던 것’들로 꽉 차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우연이었을까.. 내가 이 책을 고르게 된 것이.. 아닐 듯 하다.

 

그렇게 성체조배실에서 ‘가끔’ 즐기던 이 책이 어느 날 보니 다시 찾을 수가 없었다. 누가 ‘빌려간’ 모양인지.. 아쉬운 마음이었지만 포기를 하고 있었는데, 최근에 다시 그 책이 돌아왔기에 이번에는 never again의 심정으로 그 책의 제목을 적어와서 Amazon.com에서 찾았다. 1994년 발행된 책으로 그러니까 20년이 된 책이었다. 역시 이것도 contemporary classic 영역으로 들어가는가.. 왜 이렇게 세월이 빨리 가는가. 아직도 ‘출판’이 되는 책인 것을 보니 역시 popular classic이 된 듯하다. 거의 free로 사게 된 (shipping & handling + nothing!)이 책.. 나와는 우연이 아닌 인연으로 성체조배실 보다 더 쾌적한 나의 서재에서  ‘정독’을 하게 되었다.  읽으며 ‘남기는’ 방법.. Reading by Typing.. 이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어디에 있을까? ‘성경필사‘를 하는 이유와는 다른 것이지만 아마도 그 다음으로 좋은 방법이 아닐까? 읽은 후에 다른 ‘영혼’들과 이 생각과 글을 나눈다는 것은 내가 생각하는 ‘레지오의 사명‘ 중의 하나일 것이다.

 

이 책이 나오게 된 연유, 과정이 머리글에 자세히 적혀있다. 그것을 읽어보니 ‘왜 이 책이 그렇게 읽기 쉽던가?’ 하는 의문이 저절로 풀린다. 1993년 가을 이탈리아의 TV 방송국에서 ‘교황청 역사상 유례없는’ 기획을 했는데.. 교황과 TV인터뷰를 하는 idea였다. 그것도 ‘전세계로 방영이 되는’ 것으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그 당시에도 거의 ‘의외적’인 교황으로 ‘예상을 불허하는’ 교황직을 수행하고 있었기에 이런 제안을 ‘수락’한 것도 전혀 예상 밖은 아니었다고 한다. 교황과 인터뷰를 하려면 아마도 미리 ‘예상적인 질문’ 이 있었을 것이지만 그것, 대답, 반응도 예측 불허였을 것이다.

 

하지만 또 예상을 뒤엎고 이런 기획이 취소가 되었다. 너무나 바쁜 교황의 스케줄 때문이었다고 한다. 연기를 할만한 여유도 없었고.. 그러니까 TV 인터뷰 계획은 ‘물 건너 간 것’이 되었다. 몇 개월 후에 또 다른 surprise가 있었는데, 역시 요한 바오로 2세의 ‘예측 불허’한 행적이었을까.. TV 인터뷰 대신에 ‘서면’으로 인터뷰를 할 수 있다는 교황님의 대답이 왔고 그 결과가 이 책이 된 것이다. 이 책을 보면 ‘질문’과 ‘대답’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질문의 ‘수준’이 거의 예비자 교리공부의 것과 비슷할 정도다. 그러니까 교황님이 직접 지도하는 예비자 교리반 같은 분위기인 것이다.

 

이 책의 비교적 짧은 질문, 대답 을 읽는 것은 한마디로 즐겁기만 하다. 감히 교황님께 이런 질문이… 가당한가.. 하는 것들이지만 ‘기가 막힌 대답’들이 너무나 놀라운 것이다. 이분의 ‘지식’은 상상을 초월하지만 ‘알기 쉽게’ 설명하는 실력은 더 놀라운 것이다. 내가 제일 놀라워한 질문은 ‘예수님이 진정 하느님의 아들인가?‘ 하는 것이다. 이 정도면 우리 교리반 교사들 같으면 어떻게 대답을 했을까? ‘그것도 모르며 어떻게..’ 하지는 않았을까? 아마도 ‘그것은 ‘무조건’ 믿어야 하는 ‘공리’ 중에 하나다’ 할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의 대답은 그런 것들을 모두 뛰어 넘는 ‘자상한’ 대답들이다. 현재 1/4 정도 typing을 하고 있고, 덕분에 더 빠른 pace로 모두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정독을 하며, 각 질문과 대답에 대한 나의 생각을 정리하는 것은 전혀 다른 과제일 듯 하다.

 

 

 ¶  MERTON by Thomas Merton

Scan10109-1Thomas Merton, 가톨릭 교회, 특히 ‘미국 가톨릭’ 계에서는 너무나 잘 알려진 ‘트래피스트 수사님’..이기전에 bestseller author 인 것을 나는 비교적 근래에 들어서야 알게 되었고 그 분의 사후 posthumous 의 인기와 power를 실감을 하게 되었다. 우선 1968년, 그러니까 아주 오래 전에 ‘선종’한 이 Trappist Monk가  왜 아직도 그렇게 화제이며 유명할까.. 흥미롭지 않은가? 현대판 성 어거스틴, 아우구스티노 라고도 불리는 이분의 일생은 비록 50세를 조금 넘는 비교적 짧은 기간이만 너무나 색채가 진하고 강하고 다양해서 이분의 전기를 쓰는 사람들은 아주 애를 먹으리라 생각이 된다. 50세의 인생을 이렇게 강렬한 후광을 뿌리고 갔다는 것 자체가 ‘멋진’ 것이 아닐까?

The Seven Storey Mountain 칠층산 이란 제목의 ‘자서전, 참회록’이 초기 대표작이지만 그 이후 수 많은 주옥 같은 시집을 비롯한 저서를 남겼고, 사후 이분에 대한 저서는 셀 수도 없이 많다. 그만큼 후대에 큰 영향을 미친 ‘수도자’라 할 것이다. 일화에 위에 말한 그의 첫 자서전이 세상에 나온 뒤 1950년대에 많은 ‘건강한 젊은 남자’들이 이 책의 영향으로 가톨릭 수도회에 입회를 했다고 한다. 그들은 한결같이 뒤 주머니에 이 책을 끼고 왔다고 했다. 그 정도면 대강 짐작이 가지 않을까?

Thomas Merton

Thomas Merton

여기서 이들의 공통점은 그 책의 저자도 당시 ‘젊다’라는 것이고 영향을 받았던 이들도 젊었다는 것인데.. 지금 60대 중반을 훌쩍 넘어가는 나는 과연 이것들과 무슨 공통점이 있단 말인가? 나이에서는 전혀 공통점이 없다. 하지만 ‘진리를 찾고 싶고, 그 진리로 생을 살고 싶다.’ 라는 것은 비슷하지 않을까? 하지만 나는 그들처럼 수도승이 되고 싶지도 않고 사실 이제는 되고 싶어도 될 수도 없다. 그것 빼고 나머지는 나도 ‘진리’를 알고 싶은 것이다.

Thomas Merton을 가장 ‘짧게 소개한’ 글이 있을까? 대강 2~3 페이지 정도로.. 물론 내가 신뢰하는 Wikipedia를 보았지만 그곳은 ‘객관적’인 역사, 사실, 업적 들을 dry하게 기술했을 뿐이다. 그곳에는 ‘주관성’이 개입할 여지가 별로 없다. 그러다가 ‘우연히’ A Thomas Merton Reader란 책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찾았다. 그 방대한 Merton 저서들을 모아서 500 여 페이지 한 권으로 압축한 편리한 이 책의 서두에 있는 Introduction(by M. Scott Peck) 바로 그것이다. 이 ‘소개장’을 한마디로 줄이면 “Merton은 짧은 글로 표현하기 힘든 복잡한 사람’ .. 이것은 나도 이제 충분히 이해가 가고, 그래서 그렇게 많은 책들이 그를 모든 각도에서 조명하려고 했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Merton에 대한 Introduction은 이렇게 시작이 된다. 

It is impossible to adequately “introduce” Thomas Merton. I have a sense I might almost as well attempt to introduce God. This is not because I worship Merton but because he was an extraordinarily complex and complicated man, multifaceted, diverse, and variable. He was one of those occasional people who could be described as “larger than life”.

 

500 페이지의 Reader 어떤 방식으로 읽을까 생각하니 이것이 장난이 아니다. Reading by Typing 물론이지만.. 페이지부터 읽을 것인가.. 아니면 난독random 하게 골라서, 아니면 다른 곳에서도움 받아서 읽을 것인가.. 아직은 전혀 idea 없다. 하지만 이제까지의 경험으로 나는난독으로 시작할 하다. 나에게 방법이 제일효과적임을 나는 알기 때문이다.

 

  1. 한 여름에 순교자 성당 대성당에서 성체조배를 해본 사람들이면 이것이 무슨 말인지 짐작이 갈 것이다.
  2. 이것은 또한 신자 수와 헌금액수에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3. 예수회신부님들이나 수도회 수사들과 다른 일반 목회자들

 

극(極)에 달한 좌익(左翼)분탕질, 구조적으로는 소멸된다. 

태평로포럼 2014. 9. 24

 

조영환 대표 (올인 코리아)

 

 대한민국은 비록 남북한 좌익선동세력의 억지와 깽판으로부터 협공 당하고 있지만, 결국은 이를 극복하고 정치적 선진국가로 발돋움할 것으로 낙관한다. 그 이유는 한국사회에 나타나는 정치적 적폐는 군중사회의 마지막 병리증상으로 보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의 ‘군중현상’은 김대중-노무현 좌익세력이 침투한 상층부에 깊이 남아있다. 김대중-노무현 좌익세력은 군중인간들을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에는 물론이고, 교육계, 종교계, 시민단체 등에 심었기 때문에, 군중현상이 한국사회의 저변에는 잘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상층부에 나타난다. 여기서 말하는 ‘군중현상’이란 오르테가 가세트, 윌리엄 콘하우저, 데이비드 앱터, 사무엘 헌팅턴, 로버트 니스벳 등이 지적한 군중의 파괴성을 뜻한다. 공동체(국가)에 대한 감사와 의무를 모르는 방자하고 무책임한 사회구성원을 ‘군중’이라고 부른다.

 

오르테가 가세트는 ‘완전한 직접 민주주의’는 전체주의를 초청할 것이라고 했는데, 전체주의적 선동꾼 김대중은 ‘아테네 이후에 최고의 직접 민주주의’라는 구호로써 2008년 광우병 촛불폭동을 부추겼다. 광우병 촛불폭동은 김대중의 선동능력이 구현된 반란현상이다. 김대중은 무자격적 군중인간에게 주권행사를 강조하면서, 오르테가 가세트가 말한, ‘민주적 폭군(democratic tyranny)’을 길러낸 민주주의 파괴범이었다. 오르테가 세세트는 군중인간을 문명파괴적 인간으로 봤다. 한국사회에서 광우병 촛불폭동, 국정원 댓글과 세월호 참사를 악용한 깽판극들을 벌이는 군중인간들은 사실상 민주주의를 할 자격이 없는 미개한 군중인간들이다. 정몽준 전 수울시장 후보자의 막내아들이, 성숙한 국민을 대변하여, 세월호 사건에 대한 군중인간들의 대응방식을 놓고 ‘미개인’이라고 지적한 것은 박원순 지지자들의 정치적 미개성과 기만성을 잘 지적한 것이다.

 

오그스트 콩트가 지적한 것처럼, 이런 군중인간들이 설치는 시대에 새로운 의식(정신)혁명이 없으면, 대한민국은 재앙을 맞을 수 있다. 지난 20여년 동안, 니체가 말한 ‘니힐리즘의 홍수’가 김대중-노무현 좌익세력에 의해 군중현상의 형태를 띠면서 한국사회를 휩쓸고 지나갔다. 오르테가 가세트가 지적한 것처럼, 옛날 제왕보다 더 풍족하게 살아가는 무자격적 군중인간들이 무의미성에 시달리면서 자신과 국가공동체를 파괴하는 자해극을 벌인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김대중-노무현 추종 좌익세력이 반정부 깽판질을 하는 한 심리적 원인 중에는 배부른 군중이 복에 겨워 지랄 발광하는 측면도 없지 않다. 좌익세력이 김대중-노무현 집권 기간에 분에 넘치는 부를 축적하여, 그 넘치는 자금으로 반국가적 억지와 깽판을 맘껏 치고 있는 측면도 있다. 지금 우익단체보다 좌익단체들이 더 군중 선동과 동원 자금을 풍족하게 확보해서 쓰고 있다는 사실도 자유민주체제 위협요인 중에 하나다.

 

그 결과 지금 한국사회에는 정상적으로 명령하고 정상적으로 복종하는 공권력이 약화된 상태가 됐다. 오르테가 가세트는 ‘군중의 반란’이라는 책에서 “국가는 정상적으로 명령하고 정상적으로 복종하는 것보다 더한 자유와 행복을 줄 수 없다”고 주장했는데, 지금 대한민국은 상층부에 뿌리내린 군중인간들에게 정상적으로 명령하고 정상적으로 복종하는 공권력 시스템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한국사회의 교육계, 입법계, 사법계, 종교계, 언론계, 문화예술계에 주도권을 장악한 군중인간들에게 정부도 정상적인 공권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다. 좌익교육감, 좌익국회의원, 좌익 검판사, 좌익기자, 좌익교사, 좌익연예인들은 정부의 공권력이나 국민의 상식과 국가의 법치를 파괴하는 주범으로 등장했다. 저변 국민들은 애국심으로 국가공권력 유지에 애를 쓰는데, 상층을 장악한 좌익세력의 군중인간들이 자해적으로 공권력 파괴에 주범 역할을 하고 있다.

 

군중은 ‘양적인 떼’를 지칭하지 않고, ‘질적인 성격’을 의미한다. 물론 군중인간들이 떼법의 횡포를 보여주지만, 군중인간은, 오르테가 가세트가 지적한 것처럼, ‘아무런 권위나 외부인의 충고나 도움도 필요로 하지 않는 완전한 자족적 인간이라고 착각해서 억지부리는 방자한 인간’을 뜻한다. 전통사회(유교사회)가 붕괴되면서 어떤 사회적 권위나 통제도 무시하고 부자집 망나니처럼 불평과 불만에 찌든 인간이 바로 ‘군중인간’이다. 오르테가 가세트는 ‘군중인간’에 대해 “군중들의 토론 없는 직접적 의사표시는 문명을 파괴하는 폭력행사로 나타난다”며 “군중은 사회적 제약, 기준, 예절, 간접적 소통방식, 정의, 이성 등을 모조리 파괴하고 오직 단순화된 이분법적 구호를 사회적 난제에 대한 해답으로 강요한다”고 규정했다. 2008년 ‘광우병 촛불폭동’, 2013년 ‘국정원 댓글사건’, 그리고 2014년 ‘세월호 침몰사건’ 등에는 ‘군중인간의 이분법적 판단과 파괴적 횡포’가 두드러졌다.

 

한국사회에 나타나는 군중현상에서 군중의 속성은 바로 ‘극단주의’다. 극단적 좌절감과 소외감과 박탈감(‘을’의 콤플렉스)에 찌든 군중인간들이 갑자기 자신을 절대적 ‘갑’이라 되는 것처럼 폭력을 행사하는 양극적 행동양태를 군중인간들이 보여줬다. 과격한 ‘갑질’은 ‘을의 열등감 폭발’일 뿐이다. 에릭 호퍼는 이런 군중인간에 대해 “좌절과 소외에 시달리는 마음을 가진 군중은 모든 것을 자신이 신봉하는 망상에 내던질 준비가 되어 있는 자포자기의 확신범”으로 봤다. 이런 군중인간이 도덕적 성실성을 무시하고 후안무치 해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에릭 호퍼는 봤다. 광우병 촛불난동, 국정원 댓글, 세월호 사건 등에는 자신의 도덕과 체면을 무시하는 군중인간들이 정치적 광신도가 되어서 법치와 공권력을 부정했다. 구스타브 르 봉이 지적한 것처럼, 한국사회에 나타난 군중인간들은 자신의 체면과 개성을 잃고 파괴적 집단의식에 예속된 익명의 노예들이었다.

 

이렇게 파괴적 감정에 취하여 충동성, 과잉반응, 추론능력 결핍, 비판정신의 부재, 과장된 감정표현의 노예가 된 군중인간들이 파괴적 수구꼴통이 되어 반정부 횡포와 난동을 부리니, 국가의 공권력은 부재상태로 전락되었다. 이런 군중인간의 위험성에 대해 윌리엄 콘 하우저는 ‘사회적 다원주의(자유민주주의)에 가장 해로운 적’으로서 ‘군중인간’을 지목했다. 그는 “군중운동은 자유민주적 정치체제를 파괴할 수 있는 위험성을 가졌다”고 ‘군중사회의 정치학(The Politics of Mass Society)’에서 주장했다. 그는 현대사회의 저변에는 ‘군중성향’과 ‘다원주의성향’이 경쟁한다고 봤다. 주어진 자유와 민주를 잘못 작동시키면, 다원주의적 자유민주체제는 쉽게 군중의 난동질이 난무하는 무정부상태가 되고 이런 무질서가 지속되면 전체주의적 선동꾼이 민심을 얻으면서, 전체 국가가 전체주의사회로 전락할 수 있다. 민주화는 흔히 과잉민주화와 공권력붕괴로 실패한다.

 

군중인간들에 의한 공권력 혹은 법치의 파괴를 군중연구가들을 모두 우려했다. 윌리엄 콘 하우저는 군중사회의 특징으로 ‘권위의 상실’를 주목하면서 ‘군중의 떼법이 교양인(엘리트)의 법을 대체하는 것이 군중사회의 조건’이라고 지적했다. 데이비드 앱터도 ‘정당한 공권력의 부재’를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군중현상의 적폐로 보면서 ‘권위적 정부의 부재가 민주주의를 구축하는 데에 적’이라고 주장했고, 구스타브 르 봉은 ‘문명을 무너뜨리는 수단으로서 군중 혹은 야만주의의 물결’을 지적했고, 오르테가 가세트는 ‘무자격적 주권 행사로써 군중은 사회적 권위를 파괴한다’고 지적했다. 콘 하우저는 “군중사회에서는 ‘공동체의 상실’이 있다”고 지적하면서, 공동체에 대한 소속감을 상실한 군중인간들과 지도력을 상실한 엘리트(사실상 군중인간)들은 사회를 원자화(파편화)시켜서 공동체로서 역할 하지 못하게 한다고 콘 하우저는 걱정했다.

 

한국사회에서 지도층이 깽판꾼이 되고 군중의 떼법에 공권력이 무력화 되는 현실은 전형적인 군중현상의 적폐다. 사무엘 헌팅턴은 ‘교육을 많이 받은 지식군중인간이 사회불안을 조성하는 주범이 되는 현상’을 주목했다. 한국사회에서 공권력을 마비시키는 과잉민주주의는 지식군중인간들의 법치파괴에 따른 병리증상에 가깝다. 좌익지식인들이 주도한 법치파괴에 대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정상적 공권력을 작동시키지 못했다. 언론계, 법조계, 입법계, 교육계, 종교계 등에 뿌리 내린 김대중-노무현 좌익세력은 정상적 법치를 거부했다. 한국사회에서 국가사회를 파괴하는 군중현상을 척결하기 위해서는 김대중-노무현 좌익세력의 척결은 필수적이다. 김대중-노무현 좌익세력은 대한민국에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고 좌우익에 연합한 추상적 연방제국가에 정서적으로 소속된 망상가들이다. 그래서 북괴의 독재와 폭압에는 침묵하고 대한민국의 넘치는 자유와 민주에는 불평하는 정치행태를 보여준다.

 

나쁜 군중사회를 김대중-노무현 추종세력이 만들어가는 것은 각성된 국민과 민주적 정부는 제압해야 한다. 우리 국민들은, 탈몬이 지적한 것처럼, 완전한 민주화를 요구하는 전체주의적 선동꾼의 군중 장악과 예속의 음모를 제압해야 한다. 이른바 ‘완전한 민주주의’를 외치는 좌익선동꾼들은 전체주의사회를 구축하려는 발악을 하고 있다. 2008년 남북한 좌익선동세력이 전개한 ‘광우병 촛불폭동’을 ‘아테네 이후에 최고의 직접 민주주의’라고 칭송한 김대중은 완전한 민주주의를 외치는 전체주의 선동꾼에 불과하다. 아직도 새정치민주연합이 김대중과 노무현을 민주주의의 화신으로 착각한다면, 이는 군중을 악용한 전체주의 추구세력으로 낙인 되어 마땅하다. 광주사태나 광우병 촛불폭동을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군중선동현상으로 비판하지 않는 한, 한국사회는 전체주의 선동세력에 취약하다. 김일성-김대중-노무현 추종세력은 대한민국의 안녕과 번성에 장애물이다.

 

그렇다면, 한국사회는 파괴적 군중선동에 기댄 김대중-노무현 좌익선동세력에 의해 자멸하는 군중사회로 악화될 것인가? 그렇지는 않아 보인다. 한국사회가 좌익선동세력의 억지와 깽판을 극복할 수 있는 두 가지 요인을 주목하는데, 하나는 바로 ‘군중현상은 시대적으로 일시적이라는 점’과 다른 요인은 ‘저변 한국인들 수준 높은 정치의식과 윤리성’을 꼽고 싶다. 망국적 군중현상이 ‘민주팔이’로 집권한 김대중-노무현 좌익세력의 쇠퇴와 함께 사라질 것이다. 지난 몇 년 동안 좌익세력이 그렇게 언론계, 문화예술계, 교육계, 법조계 등을 장악해서 군중을 기만하고 미혹했지만, 선거전에서 번번히 패배한 것은 남한 좌익세력에 대한 국민들의 각성과 반감이 고조되기 때문이다. 김대중과 노무현의 민주팔이, 통일팔이, 복지팔이는 서울이나 호남에서는 먹혀 들지만, 다른 지역들로부터 점점 배척되고 있다. 이정현 의원의 경우, 호남에서도 지역주의는 바람직하게 극복되고 있다.

 

저변 한국인들의 높은 교육열과 도덕성은 언론계, 교육계, 법조계, 정관계를 장악한 좌익세력의 조작과 선동과 억압을 극복하는 주요 원인이 될 것 같다. 비록 서울과 호남에서 낡은 좌익이념과 지역주의에 찌든 군중인간들이 다수를 차지하지만, 전국적으로 보면, 저변 민중들은 무섭고도 급격하게 각성되고 있는 것이다. 만약 한국의 저변 민중들이 월남 패망 전의 월남인들 처럼 거짓과 자멸의 좌익선동꾼들에게 깊이 홀렸다면, 지금 한국의 정치상황은 내전적 상태였을 것이다. 하지만, 저변 국민들이 언론계와 교육계의 좌익선동꾼들에게 홀리거나 눌리기 않아서 대한민국은 서서히 좌익선동세력이 물러나고 있다. 언론계의 좌익선동세력이 광적으로 선전선동하지 않으면, 장차 선거들에서도 좌익선동세력은 패배를 거듭할 것이다. 지금은 중도인 것처럼 위장한 박원순 같은 좌익선동꾼들의 정체도 날이 갈수록 더 드러날 것이다. 박원순의 역할은 박헌영 같아 보인다.

 

그리고 사회구조적 혹은 시대추세적으로 군중들을 미혹하는 좌익선동세력은 설 땅이 좁아질 것이다. 과학의 발달로 사회구성원들이 정치의식적 측면에서 미개해진다는 우려도 있지만, 워낙 통신과 교통이 발달해서 전체주의적 선동세력은 방송과 신문과 인터넷을 장악해도, 워낙 신속하고 대대적인 정보유통 때문에, 끝내 저변 국민들을 다 속이진 못할 것이다. 그 결과 좌익선동세력은 가파른 언덕을 기어올라가는 이념전쟁을 앞으로도 계속해야 할 것이다. 공산주의가 퇴조하면서, 남북한 좌익선동세력도 고립무원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막강한 자금력과 선동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좌익세력은 집권에 막대한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김대중-노무현 추종 좌익선동세력은 한국사회에서 퇴조될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좌익선동세력을 퇴조시켜야, 대한민국이 다원주의적 민주사회를 유지시킬 것이다.

 

한국사회는 김대중 집권 후에 상층부가 좌경화, 군중화, 망국화, 무정부화 되었다. 지도층이 저변 민중들보다 정직성, 정의감, 민주의식, 애국심 등이 더 없다. 국가권공력은 입법부, 사법부, 언론계, 교육계, 종교계 등을 주도권을 장악한 좌익세력에 의해 심각하게 약화되었다. 떼법이 국법을 농락할 정도로 한국의 준법정신과 사법문화는 심각하게 훼손됐다. 간첩을 간첩으로 판결하지 못하는 판사들이 버젓이 법복을 입고 기업가들만 엄벌하고 있다. 우익세력의 도움으로 집권한 이명박-박근혜 정권은 껍데기만 집권했지, 사실상 반국가세력을 제압할 통치력을 구사하지 못했다. 집권은 했는데, 통치력이 없는 중도세력의 한계가 뚜렷하게 나타난다. 남북한 좌익세력의 준동을 보면, 대한민국이 내전적 상황으로 전락할 것 같기도 하다. 적어도 군중 선동력과 동원력의 측면에서 좌익선동세력은 우익애국세력을 압도한다. 이번 점은 대한민국의 장래에 비관적 변수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구조적으로 잘 유지될 것이며, 민심도 국가를 번성시킬 정도로 수준이 높다. ‘이승만-박정희-전두환이 구축한 자유민주체제’와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저변 국민’에 의해 대한민국은 건재할 것이다. 대한민국은, 좌익선동꾼이 두 번이나 대통령이 되어도, 국가를 지탱시킨 튼튼한 자유민주체제를 가지고 있다. 그런 점에서 자유민주체제를 한국사회에 깔았던 이승만 건국대통령의 기운은 지금도 대한민국을 지키고 있다. 군사력을 동원해서라도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체제를 지킨 박정희와 전두환도 군중선동세력에 맞서서 지금도 대한민국을 지키는 수호의 기운을 남겼다. 대한민국을 지키는 가장 핵심적 변수는 바로 누구도 함부로 대항할 수 없는 대한민국의 헌법과 자유민주체제인 것이다. 우리 헌법과 체제를 생뚱 맞은 핑계를 들이대면서 함부로 손대려는 좌익선동꾼들을 사회교란범이나 망국노로 의심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저변 국민들은 상부 지도층보다 훨씬 더 위대하다. 광우병 촛불난동, 국정원 댓글사건, 그리고 세월호 침몰사건 등을 정권타도로 악용하려던 좌익선동세력을 제압한 주체는 언론인도 정치인도 교육자도 검판사도 아닌 바로 저변 민중들이었다. KBS, MBN, YTN, JTBC 등을 비롯한 좌익선동매체들이 아무리 사실을 왜곡해도, 저변 택시기사들의 현명한 판단을 유린하지는 못했다. 지식과 정보를 직업으로 다루는 전문가들이 무책임한 군중선동꾼으로 전락되어 있는 한국사회를 건전하게 유지하는 것은 저변 민중들이었다. 물론 서울과 호남의 일부 미개한 군중인간들이 골칫거리이긴 하지만, 한국의 전반적 민중들은 서서히 각성되어서, 이제는 좌익세력의 거짓선동이 민중들에게 쉽게 먹혀 들지 않는 것이다. 좌익세력의 준동 앞에, 상층부의 관군은 도피하고 저변 민병이 대한민국을 지킨다.

 

눈에 두드러진 두 현상이 있다. 하나는 요즘 대학가에서 좌익세력의 거짓선동이 먹혀 들지 않는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세월호 참사가 지난 6.4지방선거에서 서울을 제외하고 먹혀 들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두 현상은 군중선동세력의 퇴조를 의미하는 사회변화의 징조로 보인다. 민주화를 빙자한 좌익세력에 의해 조장된 ‘군중사회’는 서서히 ‘선진사회’로 바뀌고 있다. 한국민들은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 ‘다원주의적 사고’로써 ‘복합적으로 판단’한다. 좌익선동세력의 이분법적 반미-반일-반한선동은 성숙한 국민들에겐 미개한 정치선동으로 취급되고 있다. 자유민주체제와 선진국민이 망국적 군중선동을 제압하니, 대한민국의 미래는, 군중의 난동질과 지도층의 무책임 등의 난관들에도 불구하고, 구조적으론 낙관적이다. 아니 정부와 국민이 대한민국의 장래를 낙관적으로 만들어야 한다.

 


위의 글, 논설은 인호 형(한양대 명예교수, Dynamic Management학회장)이 보내 준 것이다. 주로 경영학 쪽의 논설을 발표하시던 형이 근래에 들어서는 부쩍 정치, 사회 쪽의 글들을 나누어 주시는 것을 보고 조금은 현재 대한민국이 돌아가는 ‘꼴’을 의식하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다른 곳에서도 이런 류의 논설을 접하게 되는데 두드러진 특징 중에는 부쩍 늘어난 ‘강도 높은 표현들’인데, 이런 류의 단어들은 ‘좌익’이 즐겨 사용하던 것들이라.. 조금은 의아해지기도 한다. 그 정도로 대한민국의 정치현실도 미국 못지않게 polarized가 되어간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모든 나라들이 ‘돈’을 쫓는 자본주의의 ‘후기’로 치닫는 시점에 100년이 넘는, 실패한 ideology의 흙탕물 속에서 싸우는 것 같아 안쓰럽기까지 하다.

나는 그 동안 그런 ‘꼴’을 피부로 못 느끼고 살아서 왈가왈부할 자격이 거의 없지만, 그래도 의견과 느낌은 다른 사람들에 못지않게 유지하며 살았다. 좌익, 우익 하지만 그것은 조금은 ‘정제, 순화 된’ 표현일까.. 나의 집안을 100% ‘파괴’했던 김일성 개XX 집단’이 좌익이라고 순화 된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위의 논설에서 자주 사용한 ‘강도 높은 표현’의 ‘강도’를 100배 이상 거세게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자주 생각하는 것 중에 가장 쉽게 이들의 ‘행태, 작태’를 노출 시키려면 이들을 돈을 많이 주어서 (세금으로) 그들이 ‘선망하는’ 김씨 왕조의 나라에 ‘이민’을 시도해 보는 것은 어떨까? 이들 미숙집단의 몇 %가 과연 이민 신청을 할 것인지.. 상상만 해도 즐겁기만 하다.


대한민국 산업화 경험이 계발(啓發)시켜준
다이나믹 매니지먼트

2014.06.23

대한민국(Republic of Korea)은 지난 반(半)세기에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룬 세계 유일의 나라라고들 해외에선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칭송한다. 그런데 민주화에 대해서는 대한민국과 태극기와 애국가를 거부하는 것도 모자라 광화문 한복판에서 ‘김일성 만세’를 부를 수 있어야만 참다운 민주화라 외치는 반국가무리들의 회괴한 주장으로 인해 민주화의 의미가 엄청 변질·왜곡되었다고 보는 이가 국내에 다수인 반면 산업화 성공에 대해서는 국내외 그 어느 누구든 이의(異意)를 달지 않는다.

 

김인호 교수

김인호 명예교수

필자는 산업화 성공과 관련하여 참으로 운(運)좋게도 지난 40여년 이상 산업체와 정부의 재정지원에 힘입어 아주 값진 연구기회와 산업연구경험을 공유할 수 있었는데 이를 잠시 더듬어 보고자 한다.
 

  • 1969년 공군중위 제대를 두 달 앞둔 5월 어느 날 우연찮게 합류하게 된 KIST에서 전문성도 없으면서 당장 POSCO 건설타당성연구의 실무책임을 맡아 수행해야했던 연구경험이 바탕이 되어 필자는 철강에 뒤이어 1981년까지 10여 년간 KIST, ETRI(한국전자통신연구원), KNFC(한국핵연료개발공단), KAERI(한국원자력연구원)에서 정부가 주도했던 정보통신, 자동차, 전자, 에너지, 교통, 핵연료 등 중화학관련투자 사업에 대한 타당성연구(feasibility study)를 주도적으로 심도 있게 수행할 수 있었다. 그리고 1980년대 초반 교직으로 옮긴 후 필자의 손을 거쳤던 투자 사업들이 성공적으로 순항(順航)하고 있음에 대해 뿌듯하게 느끼며 그 성공원리를 이론적으로 구명(究明)하고픈 강렬한 연구욕구를 가지게 되었다.
  • 1980년대 중반 KTA(현 KT의 전신) 장기발전전략연구 책임자로서 ATTACK 전략을 제시했던 필자의 연구경험에 비추어 후속으로 이어진 Harvard Business School의 Michael Porter 교수팀 Monitor Consulting사가 보여준 KTA 전략 연구결과에 대한 실망은 필자로 하여금 감히 Dynamic Management라는 새로운 경영패러다임을 독자적으로 계발하고픈 열망을 강력하게 촉발시켜준 계기가 되었다. 여기서 ATTACK이란 198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미·소 양극체제 붕괴가 전자통신에 줄 충격과 이에 대해 KTA가 어떻게 적응할 것이냐의 관점에서 제시한 전략으로 이는 ‘Advanced Total Telecom AdvantageCreating KTA: 첨단의 유·무선통신을 통해 우위를 창출하는 KTA가 되라’는 뜻의 이니셜로 표현되는 전략슬로건인데 포터 교수팀의 연구결과를 아무리 뜯어봐도 이런 측면이 전혀 담겨져 있지 않았음에 필자는 대단한 실망감을 느꼈으며 나아가 독자적으로 연구하고픈 강한 의욕을 갖게 되었다.
  • 1990년대 초반 한국주택은행(현 국민은행과 합병이전의 국책은행) 장기발전전략 연구프로젝트 책임자로서 그리고 뒤이은 3여년 이상 주택은행 사외이사로 활동하며 실물경제와 금융경제와의 바람직한 관계에 대하여, 그리고 다소나마 눈뜨게 된 세계금융의 주도세력과 그들의 행보, 특히 1984년 신자유주의의 기치아래 추진된 레이건 정부의 규제완화(deregulation)가 금융업에 어떻게 작용할 것인가에 대하여 필자는 궁금증이 컸었다. 왜냐하면 규제완화 이후 재무 분야에서 위험관리(risk management)라는 미명하에 금융공학(financial engineering)이라는 신(新)용어를 들고 위험을 사고파는 희한한 돈놀이꾼들이 등장하여 금융파생상품(이는 그 자체가 본질적으로 제로섬zero-sum이므로 이 시장을 유지하는 비용만큼 사회에 부담을 주는 네거티브 섬 negative sum의 해악상품 임)을 통해 미국경제를 좌지우지하며 월가(Wall Street)를 주도하는 움직임이 심상치 않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 한편 1997년 IMF 금융위기로 대기업(재벌) 반(半)정도가 파산한 충격과 그 후 살아남은 기업들이 2008 미국발 경제위기에서 오히려 선방하며 한국경제를 업그레이드 시켜 온 산업화 성공경험은 필자로 하여금 한국 재벌구조(Chaebol Structure)의 진화논리와 기업의 지속번영원리를 보다 일반적으로 이해·설명할 수 있는 이론으로 정립하고픈 강한 열망을 더해 주었다.

 
그런데 이러한 연구열망이 생길 때마다 참으로 공교롭고 다행스럽게도 필자에게 기업과 정부의 연구비 지원이 뒷받침 되어주어 필자는 산업·기업·사업연구에 대하여 폭넓고 심도 있는 연구를 그간 지속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으며 이런 연구경험을 토대로 세계 석학들과 학문적 교류를 가지며, 다이나믹 매니지먼트(Dynamic Management)라는 새로운 경영패러다임을 구축해 올 수 있었는데, 이에 대해 필자는 늘 감사하며 대한민국과 우리 기업들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지니고 있다.
 
물론 때론 기업인들 중에서 장사꾼 행태의 일탈을 저지르는 경우를 접할 땐 그래서 더 큰 분노를 느끼기도 하지만 누가 뭐래도 대한민국 국력의 원천과 양질의 일자리 진원지는 기업이다. 그런 우리의 기업들이 지난 40여 년간 발전해 온 경험을 토대로 다이나믹 매니지먼트를 구축할 수 있었으니 이 어찌 감사하지 않으랴?
 
다이나믹 매니지먼트는 한마디로 니즈진화에 적응하는 혁신경영이며 이는 니즈맞춤혁신(needs-focused innovation)으로 대변될 정도로 고객니즈 밀착혁신을 강조한다.
 
고객맞춤혁신은 니즈진화가 거의 없는 경우에서건 니즈진화가 빈발(頻發)하는 상황에서건 기업은 언제나 구매력을 지닌 고객 중에서 자신의 니즈충족을 위해 구매/지불의향(willingness to purchase/pay: WTP)을 갖고 있는 바로 그 니즈(이를 현시니즈 explicit needs라 함)를 충족시켜줄 제품·서비스를 혁신을 통해 개발·제공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상식(常識)에 기초한다.
 
그래서 고객이 지불의향을 지니는 경우를 구명(究明)하는 데서부터 출발하여 거래조건과 최대의 지불의향수준(이를 이상적인 모범답안이라는 의미로 Norm이라고 부름)이 어느 정도일가를 탐색(seek norm)하고 기업에서 혁신을 통해 이를 달성하면(get to norm) 언제나 그 기업은 성공한다는 혁신논리를 다이나믹 매니지먼트는 제공해 준다.
 
‘Seek Norm & Get-to-Norm: 모범답안을 찾고 답안을 써라’는 혁신논리는 기업의 모든 활동은 모름지기 고객으로 하여금 우선 자사의 제품·서비스에 대해 지불의향을 갖게 하는데 집중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이는 여타의 기업 활동들이 제 아무리 호소력 있고 사회적 명분과 사회적 공헌이 크다손 치더라도 자사의 제품·서비스를 고객이 사주지 않는다면 기업은 곧 끝장이라는 상식에 기초한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지극히 당연한 명제가 경영학분야에서 그간 왜 크게 강조되지 않아왔던 걸까? 아무래도 그 연유는 경영학의 태동배경이었던 대량생산체제 탓이 아닌가 싶다.
 
개관컨대 20세기 초반 대량수요가 형성되어 있었던 미국의 산업현장에서 태동한 (정태)경영학의 주관심사는 대량생산시스템을 구축하고 이를 운영하는데 있었다. 대량생산시스템에서 각 요소들이 제 기능을 잘 수행해 주기만 하면 전체가 잘 돌아가는 상황(이를 요소환원주의: reductionism라고 함)에서 투입과 산출 비율(input-output ratio) 곧 능률을 극대화시키는 것이 핵심 관심사였다.
 
1970년대 후반까지 여러 우여곡절을 거치며 철강산업, 자동차산업, 전기통신산업현장에서 대량생산체제가 유지되어 온 관계로 그때까지 경영학에서의 주된 이론/모델/방법/기법은 요소환원주의에 입각하여 생산성을 증대시키는데 집중되어 왔다.
그런데 1980년을 전후하여 디지털혁명이 일어나고, 1979년 2차 오일쇼크로 초(超)경쟁상황이 심화되던 산업현장에서는 능률/생산성을 높이는 노력을 계속하되 생존하려면 우선 경쟁자보다 우위를 점해야한다는 목소리가 호소력을 지니면서 경쟁우위 달성을 강조하는 전략경영이 등장하게 되었다.
 
물론 기존의 경영학에서 전략경영으로 진화했다고 해서 그간 강조되어 온 능률향상을 등한히 해도 좋다는 의미가 아니라 능률향상만으로는 경쟁상황에서 생존이 불투명하므로 우선 경쟁자보다 상대적으로 경쟁우위를 점해야한다는 주장이 강조되게 되었다는 얘기다.
 
그러다 2000년대를 전후하여 인터넷시대가 글로벌 차원에서 보편화되고 스마트 혁명이 전개되면서, 더욱이 사물인터넷(Internet of Things)을 거쳐 만물인터넷(Internet of Everything)으로 진행되어가면서 기업 및 산업시스템은 선형세계에서 비선형세계로 패러다임이동(paradigm shift)이 급전하고, 힘이 기업에서 고객으로 옮아가는 권력이동(power shift)이 심화되면서 새로운 경영패러다임이 요구되게 되었다.
 
그간 대량생산체제에서 산업·기업·사업시스템의 각 요소마다마다 제 기능을 제대로 수행해 주면 족했던 선형세계에서와는 달리 인터넷/스마트혁명은 산업·기업·사업을 각각 하나의 전체로서(as a whole) 인식(이를 전일주의: holism라고 함)하고 요소와 요소간의 관계를 중시하는 비선형세계에 부합하는 새로운 경영패러다임의 등장을 불가피하게 하고 있으며 또한 고객이 힘을 쥐는 상황이 전개되자 고객이 구매력을 지니더라도 구매의향을 갖는 경우와 구매의향이 갖지 않는 경우를 구분해서 다룰 새로운 경영패러다임이 요구되게 되었는데 이를 동시에 충족시키고자 등장한 것이 바로 다이나믹 매니지먼트다. 이런 의미에서 다이나믹 매니지먼트는 인터넷/스마트혁명시대에 부합하는 경영패러다임이다.
 
그런데 선형세계란 비선형세계에서의 특수한 한 경우이며, 또한 고객이 힘을 쥔 상황일지라도 고객이 그 힘을 행사하지 않는 경우라면 이는 바로 기업이 힘을 쥐고 있는 경우와 같으므로 다이나믹 매니지먼트는 이익을 추구하는데 있어서 선형세계에서건 비선형세계에서건 또 기업이 힘을 쥐고 있는 상황에서건 고객이 힘을 쥐고 있는 경우에서건 항상 통하는 이익추구 일반이론(The general theory of profit-seeking)의 성격을 띠고 있으며 이는 혁신의 성공논리로서 그리고 기업의 지속번영원리로서 기업 및 산업현장에서 광범위하게 활용될 수 있다.
 
기업레벨에서 이익추구 일반이론을 기초로 다이나믹 매니지먼트가 구축된 것은 마치 경제레벨에서 케인즈(Keynes)의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The General Theory of Employment, Interest And Money)을 기초로 거시경제(macro economics)가 자리자게 된 경우와 비견(比肩)될 수 있지 않을까? 필자는 자족하며 감히 그리 생각해 보기도 한다.
 
현재 다이나믹 매니지먼트는 중국 북경대 MBA 정규 이수과목으로 가르쳐지고 있으며 이를 계기로 중국 전역으로 확산 중에 있고, 한편 한국 재벌구조의 진화논리가 영국 Wiley-Blackwell 출판사 경영백과사전 3판(2014)에 실려 전 세계경영학계와 산업계 및 컨설팅업계로 보급되며 글로벌 촌으로 퍼지고 있다.
 


김인호 교수는 서울상대(1965)와 공군장교복무후(1969),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한전원자력연료(KNFC), 한국원자력연구원(KAERI)등 정부출연기관에서 10여 년간의 연구경험을 갖고 1981년 한양대학교에 부임하여 27년간 연구소장·학장·대학원장을 역임하며 주로 기업·산업연구에 전념했다. 2008년부터는 한양대학교 ERICA캠퍼스 경상대학 경영학부 명예교수로 재임 중이며 현재 다이내믹 매니지먼트학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김 교수는 사업과 기업, 기술전략 관련 서적을 수십 권 저술하였으며, 최근 저서로는 2008년에 출판된 ‘Dynamic Management Theory’와 2010년에 출판된 ‘Why Industrial Hegemony Shifts’ 그리고 2013년에 출판된 ‘Dynamic Enterprise Strategy (Chinese version)’가 있으며 이들은 현재 amazon.com에서 판매되고 있다.
(자료출처: 동태경영학회 Dynamic Management Society)

 


제2차 경제위기가 다가오고 있다!

2014.01.10

우리나라를 먹여 살릴 첨단과학기술교육기관이 되라고 국민세금으로 지원해 주고 있는 KAIST 금융전문대학원에서조차도 그 머리 좋은 잠재인재들을 모아다가 이 파생금융상품을 전공하는데 대부분 매달리게 하는 꼴을 보면 참으로 기가 차고 아연실색해지기도 한다.

 

김인호 교수

김인호 명예교수

긴급경보: 2차 금융핵폭발(核爆發) 임박!

 필자는 2008년 이명박(MB)정부출범 바로 이틀 후인 2008년 2월 27일에 한국경제신문에 ‘파생상품에 대하여 주목하는 이유’라는 칼럼을 그리고 2013년 5월 14일 인터넷경제지 데일리안에 재차 ‘파생금융상품 망국론’이라는 칼럼을 통해 파생금융상품의 사기성을 지적하고 그 위험성을 경고한바 있다.

물론 2008년 필자의 경고성칼럼에 대해 관심을 두는 이는 별로 없었으나 경고 후 7개월 뒤 9월에 월가붕괴(Wall Street meltdown)라는 금융 핵폭탄(核爆彈)이 터졌고 그 낙진(落塵)피해는 5여 년이 지난 지금도 세계 여러 곳에서 여전히 심각할 정도이며 더 심각한 것은 2008년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초강력 파생금융시한폭탄이 찰각찰각 폭발을 향해 재빠르게 다가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이를 알리기 위해 2013년 5월 필자가 두 번째 경고성 칼럼을 썼던 것인데, 6개월쯤 지난 11월에 조선일보와 하나은행 사보에서 금융파생상품에 대한 특집을 통해 한국의 파생상품시장이 너무나 왜소하여 이대로 가다간 한국금융이 도태될 것이라는 우려와 경고에 가까운 입장을 피력하면서 이제부터라도 금융규제를 확 풀어서 파생금융시장을 키워야 한다는 기괴한 논리를 펴는 것이었다.

이는 아마도 금융파생상품을 염두에 둔 듯한 그간의 주장들, 특히 이제부터는 수출중심의 제조업대신에 규제를 확 풀어 관광, 교육, 의료, 소프트웨어와 금융을 함께 묶어서 내수중심의 서비스산업을 키워 양질의 일자리를 만들어 먹고 살자는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이명박 정부의 출범 때와 마찬가지로 박근혜 정부 출범초반에 또다시 펴는구나 하는 의구심을 갖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박근혜 정부 출범초반에 맥킨지(McKinsey)는 성장공식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한국이 이제는 규제를 확 풀어서 금융선진화를 이루고, 금융경쟁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을 편바 있는데 이제 이를 뒷받침이라도 하듯 조선일보와 하나은행에서 특집을 꾸민 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불쑥 들었던 탓이다.

더욱이 2008 월가붕괴 직전에 한국산업은행으로 하여금 리번 브라더스를 인수케 하려는 획책을 꾀했던 세력이 있었던 사실이 떠오르며 결국 외국금융사와 컨설팅사들이 한국에서 파생상품시장을 키워 한탕 하려는 숨은 의도가 있는 게 필자의 눈에 보이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추론은 맥킨지의 비(非)전문성을 제대로 간파 못하고 오랫동안 그들의 컨설팅을 받아 오다가 낭패를 맛본 LG가 ‘맥킨지, 말만 들어도 치가 떨린다.’는 자극적 반응에서도 확인될 수 있었다. 그런데 LG의 이런 반응은 우리나라로 봐서는 시기상 절묘하게도 다행한 일이라 여겨졌다. 왜냐하면 박근혜정부가 출범한 절묘한 시기에 맥킨지를 앞세운 경제정책결정 근처에 있는 관료와 언론인과 정치학자(polyfessor)들이 여기저기서 서비스산업을 키워서 양질의 일자리를 만들어야 한다는 밑도 끝도 논거도 빈약한 말을 입에 올리는 꼴이 눈에 뜨일 뿐만 아니라 서비스라는 말에 담긴 금융서비스에는 필히 파생상품이 숨겨있음이 보이기에 말이다.

   

필자는 이런 배경에서 파생상품기사를 다룬 조선일보 기자에게 연락을 했더니만 자본시장연구원의 모 박사가 쓴 것이라며 뺑뺑이 돌리는 것이었다. 아무튼 그 기사의 내용에 대해 일체의 정보를 제공했다는 그 모 박사에게 연락하여 미안하지만 금융파생상품에 대해서 뭘 좀 아느냐고 했더니만 자기네 연구원엔 파생상품전문가 여럿이 한 팀을 이루어 파생상품을 연구하고 있지만 솔직히 잘 모른다는 답변이었다. 필자는 이분들의 무지를 지적하고자 함이 아니지만 어떻게 모르면서 그런 기사를 다루는지에 대해 새삼 놀랐다.

허긴 우리나라를 먹여 살릴 첨단과학기술교육기관이 되라고 국민세금으로 지원해 주고 있는 KAIST 금융전문대학원에서조차도 그 머리 좋은 잠재인재들을 모아다가 이 파생금융상품을 전공하는데 대부분 매달리게 하는 꼴을 보면 참으로 기가 차고 아연실색해지기도 한다.

그러면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한마디로 금융전문가라는 분들조차도 금융파생상품에 대해 별로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금융파생상품에 대해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알려고도 하지 않고 그냥 아는 척 하는 사이비가 되다 보니 미국 금융계에서 행해지고 있는 대로 우리도 따라가면 되는 줄로 알 수밖에.

주식투자나 채권투자는 기본적으로 실물(實物)에다 투자하는 것인데 반하여 파생금융상품은 미래가치나 약속이라는 허상(虛像)에 투자할 수 있게 1980년대 초반 레이건 정부에서 허용한 법적투기(legal bet)다. 이는 마치 어떤 이가 여행을 하면서 주말에 어느 축구팀이 승자가 될 것인가에 대해 투기하는 것이나 앞으로 이자율이 어떻게 변동할 것인가에 대해서 투기하는 것이나 이후 어느 금융기관이 채무불이행할 것인가에 투기하는 것이나 심지어는 앞으로 물가지수나 주가지수나 날씨가 어떻게 변할 것인가에 투기하는 것과 똑같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성격의 완벽한 투기다.

사이비 금융전문가 중엔 파생금융상품에도 순기능이 존재한다고도 주장하기도 하지만 이 역시 무지에 기초한 억지다. 그들은 파생금융상품은 위험을 사고 팔 수 있게 해줌으로 경제에 유익을 주는 순기능(virtuous circle)도 있다고 주장하지만 최초(最初)의 선물(先物) 이후의 파생금융상품은 ‘나의 위험을 더 큰 위험을 감수하면서 더 큰 수익을 기대하는 상대방’에게 전가하는 투기도구로서 본질상 다음과 같은 문제를 안고 있는 역기능의 투기수단일 뿐이다. 

 

(1) 파생금융상품은 본질적으로 제로섬의 비생산적 활동이다. 따라서 실제로는 그 유지비용만큼은 항상 국가경제에 부담을 주는 negative-sum의 비생산적 활동이다.

(2) 위험관리의 이론적 기초인 재무 포트폴리오 이론(portfolio theory)에 의하면 분산투자를 통해서 관리가 가능한 위험은 체계적 위험(systemic risk)과 비체계적 위험(un-systemic risk) 중에서 비체계적 위험뿐인데 파생금융상품의 경우 전 세계적으로 몇 개의 상위 글로벌 금융기관에 집중되어 있어 거기에서 오는 체계적 위험(systemic risk)은 이론적으로도 실무적으로도 도저히 관리할 방법이 전무(全無)한 금융상품에 불과하므로 위험을 헤지(hedge)해 주는 금융상품일 수가 없다.    

(3) 위험을 쪼개서 파는 파생상품의 특성상 팔고 사는 과정에 미결재 부채(outstanding debts)가 계속 연결되기 때문에 시장에서 약간 사기를 치거나 시장을 조작하거나 가격을 소폭 교란시킬 경우일지라도 연결고리를 타고 투자자들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대량살상 재무무기(financial weapon of mass destruction)로 작용하여 엄청난 파국을 초래할 수 있는 투기상품이다.

(4) 돈이 일단 파생상품시장으로 흘러 들어가면 절대로 빠져 나오지 않는 불랙홀(black hole)로 작용하여 실물경제는 점점 줄어 들게 되고 그래서 결국은 경기침체나 공황을 초래할 수 있다.

 

파생금융상품은 한마디로 zero-sum인 도박이며 그 시장을 유지하는데 소요되는 비용만큼은 사회에 부담을 주는 negative-sum의 도박수단이라는 점과 도박은 도박인데 다른 도박들과는 달리 크게 문제될 수 있는 건 그 엄청난 파생상품시장규모와 파생상품거래의 불안정성이 엄청나다는 점이다. 파생금융상품은 1980년대부터 조금씩 선을 보이다가 1997년부터 급작스레 급증하면서 월가는 그간 누구든 자기가 생각하는 것이면 그 어떤 것에든 투기하는 거대한 카지노(Casino)장으로 바뀌어 버렸고 그러다가 드디어 2008년 월가붕괴를 맞았던 것이다.

2008년 월가 붕괴 당시 미국의 GDP는 11조 억불임에 반하여 파생상품의 미결재 부채규모는 263조 억불로 GDP의 25배가 넘는 규모에서 2008 미국 발 월가붕괴가 터졌고  그 충격은 곧 지구촌 전역으로 그 폭발 피해를 증폭시켜갔던 것이다.

2008 월가붕괴 후 파생금융상품문제는 일단 리먼 브라더스(Lehman Brothers)하나의 희생양으로 외형적으로는 일단락된 듯 했지만 세계최대 보험회사인 AIG도 바로 이 금융파생상품투기에 걸려들어 파산지경과 다를 바 없는 상태가 되었고 MF Global 실패와 60억불을 날린 JPMorgan Chase의 경우도 다 파생상품으로 생긴 사건 사고였다. 최근 국내에서 터진 금융권 사고들, 예컨대 무슨, 무슨 저축은행, D그룹 H그룹의 금융파탄사건, 모 증권사의 파산, 유수그룹 회장단들의 비자금사고 등등은 모두가 파생상품과 직간접으로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은 아는 이는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2014년 현재 초강력 시한폭탄으로서 파생금융상품의 본질적 문제는 2008년 이후에도 계속 지속되어 왔을 뿐만 아니라 더 심각한 것은 2008년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그 규모가 천문학적이라는 사실이다. 즉, 2013년 12월 현재 US의 GDP는 15조억불인데 파생상품시장규모는 660조 억불로서 GDP에 대한 배수가 44배로 2008년의 25배보다도 엄청 커졌다는 사실이다. 한편 전 세계적으로도 파생상품시장이 1,500조 억불로서 GDP 70조 억불의 20배가 넘다 보니 한번 삐끗하면 글로벌 전체를 날려버릴 핵폭탄임을 절감케 하며 그 폭발장소는 역시 미국이 될 것임을 쉽게 알게 해준다.

파생금융상품의 폭발가능성에 관해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점은 바로 실물이 아닌 허상에 대한 엄청난 규모의 93%가 미국 상위 4개 금융기관에 의해 자행되고 있으며 미국산업의 81%가 파생금융상품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잠시 미국 상위 4개 은행의 실상을 들여다보자.

이 들은 아마도 대마불사(大馬不死) 신화를 신봉하며 무모한 투기를 계속 가속화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법이 만들어져 규제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이들은 미국경제 전체는 물론 글로벌 경제전체를 집어 삼킬 정도로 무모한 투기를 아무 제약 없이 지속해왔고 지금도 하고 있으며 2008년의 경우보다 훨씬 더 악화 일로에 있어 이제는 마치 암이 몸 전신에 퍼져 암을 죽이려면 몸 전체를 죽여야 하는 수준에까지 다다른 양상이 되었다. 

The Comptroller of the Currency에 의하면

  1. JPMorgan Chase는 1.8조 억불 자산에 파생상품 69조 억불로 허상인 빈 껍데기가 자산의 38배이며
  2. Citibank는 1.3조 억불 자산에 파생상품 52조 억불로 자산의 40배이고
  3. Bank Of America는 1.4조 억불 자산에 파생상품 44조 억불로 자산의 31배이며
  4. Goldman Sachs는 0.11조 억불 자산에 파생상품 41조 억불로서 자산의 372배다.

이들 숫자를 보면 직감적으로 턱이 빠질 지경의 한계에 가까워졌다고 느껴진다. 특히 골드만색스는 밑이 까마득하게 보이는 고공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는 형상인데 머지않아 곧 일을 낼 것 같은 직감이 든다.

결국 파생금융상품이 일을 낼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다만 그 시기가 얼마나 빠를 것이냐에 대한 논란만이 있을 수 있을 뿐 글로벌 패닉을 초래할 초강력 금융핵폭탄임에는 틀림없고 머지않아 폭발이 임박했음도 부정할 길이 없다.

필자는 국부(國富)창출과 이익(利益)추구와 관련하여 다이나믹 매니지먼트(Dynamic Management)라는 새로운 경영패러다임을 주창해 오면서 어떤 경우든 혁신의 효과를 추구하지 않고 돈을 번다는 것은 결코 오래 갈 수가 없으며 혁신은 실물경제 특히 제조업(조립산업, 부품산업, 소재산업)과 건설업 중심의 산업구조 위에서 서비스산업이 고부가치화 될 때 일국의 경제체질이 강화된다는 점을 강조하여 왔다.

같은 맥락에서 혁신의 효과가 없는 금융서비스는 실물경제를 지원해주는 바탕 위에서만 금융업 본연의 사회적 기능과 역할을 부여 받는다는 사실과 실물경제와 맞물려 돌아가는 금융경제가 아닌 금융활동은 결국은 거품만 키운다는 점을 강조하여 왔다.

그리고 더 나아가 경제운용과 관련하여 시장과 정부의 관계에서도 정부관여가 불가피하다는 케인즈(Keynes)의 주장과 시장에 전적으로 일임해야 한다는 하이에크(Hayek)의 주장은 보편적 관점에서가 아니라 혁신효과의 유무와 그 강약의 견지에서 혁신효과가 큰 경우엔 시장에 맡기고 혁신의 효과가 미미한 경우엔 정부가 규제해야 한다는 관점으로 보강되어야 한다는 점을 또한 강조하여 왔다. 

이런 정책판단기준을 따른다면 외국 특히 미국에서 어떻게 하든 우리는 실물경제에서 니즈맞춤혁신(needs-focused innovation)으로 창조경제를 실현시키는데 전력해야 하며 금융선진화 금융전략산업화 금융허브육성이라든가 하는 실체가 없는 데에 힘을 낭비하지 말아야 한다. 특히 negative-sum인 파생금융거래는 즉시 전면 금지시키며 금융기관들을 엄격히 규제해야 한다. 

왜냐하면 일단 미국 발 2차 금융핵폭발이 터지면 아무도 그 엄청난 피해를 아예 피해 갈 길은 없겠지만 얼마나 핵폭발 반경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느냐에 따라서 그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여 피해를 입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언제 어디서나 누구나가 준거해야 할 중력법칙(gravity law)의 자연 질서로서 혜안을 지닌 사람들이라면 미리 예견할 수 있는 대목이다.

따 라서 이제부터 국내금융기관들의 경영 제1목표는 이익확대가 아니라 생존을 도모하는 일이며 생존을 추구하는 바탕 위에서 이익을 추구하는 경영지표가 추구되어야 한다. 적어도 머지않아 터질 파생금융상품의 폭발과 그 패닉이 지나갈 때까지는.

이것이 지혜로운 금융기관의 경영방식임을 금융인들은 미리 깨달아야 한다. 특히 주인이 없는 대형금융기관일수록 더 더욱 그러해야 한다. 지금은 글로벌 금융핵폭발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긴급경보가 발해진 상태와 전혀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미물인 개미도 태풍이 오면 미리 알고는 부랴부랴 대비하는 지혜를 발휘하거늘, 하물며 우리 인간들이 금융핵폭발을 미리 대비하거나 덜 피해 입는 지혜를 왜 발휘할 수 없겠는가? 우리 모두 선견력(先見力)이 요구되는 이 시대의 주역임을 잊지 말자!

 


노벨경제학상 수상할 경영이론 과연 나올까?

2013.10.16

김인호 교수

김인호 명예교수

 

누군가가 앞으로 경영학분야에서 노벨경제학상 을 탈 사람이 있다면 어떤 사람이 타야 할 것인가를 필자에게 묻는다면 아무래도 2008 미국 발(發) 글로벌 경제위기 극복과 관련하여 그 해법을 제공하는 사람이거나 부(富)창조 동인인 혁신과 관련하여 설득력 있는 독자이론 주창자라야 할 것이라 답할 것 같다. 물론 이들을 동시에 설명해 주는 기업일반이론(The general theory of the firm)이라도 나온다면 그게 당연히 노벨경제학상 감이라고 답하리라고 본다.

 

다이나마이트(dynamite) 개발로 세계 부(富)를 긁어 모은 스웨덴의 노벨(Alfred Nobel), 그의 유훈에 따라 제정된 노벨상은 1901년부터 2012년까지 물리, 화학, 의학, 문학, 평화 5개 분야에 대해 주어져왔는데 1969년부터는 경제학상이 추가되어 그간 555회에 걸쳐 863의 개인과 기관이 수상하였고, 이중에서 경제학수상은 43회에 걸쳐 50여명 웃도는 사람들이 수상하였는데, 이번 2013 노벨경제학상을 끝으로 2013 모든 노벨상 수상자는 정해졌다. 경제학과 경영학 경계를 규정짓는 기준이 명확하지는 않지만 이제껏 경영학분야에서는 단 3명만이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것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첫 번째 분은 경제학에서 빌려 온 최적화 (optimization) 방식을 경영학 배태기 때부터 오랫동안 기업의사결정에 준용해 오던 때인 1950-60년대에 이와 다른 새로운 관점의 만족화(satisficing) 방식을 개척한 공로로 1978년에 수상한 사이몬(Herbert A. Simon)이다.

 두 번째 수상자는 1991년 로날드 코스(Ronald H. Coase)인데 그는 경제제도의 구조와 기능에 있어서 거래비용(transaction cost)과 재산권(property right)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를 명확히 한 공로를 인정받아 수상하였다.

 세 번째 수상자는 2009년 기업의 경계(boundaries of the firm)를 분석하여 경제 지배구조(economic governance)를 다룬 공로로 수상한 올리버 윌리암슨(Oliver E. Williamson)이다.

 

그런데 경제학과 경영학은 경제, 산업, 기업 간의 관계를 어떻게 연관 지어 보느냐에 따라서 그 구분이 물론 달라질 수 있는데 이익(이윤) 추구의 생산경제주체인 기업 본연의 성격을 강조한다면 두 번째 및 세 번째 수상자는 경영학자라기 보다는 미시경제학자라고 볼 수 도 있을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이렇게 본다면 사이먼 만이 경영학자로서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유일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데, 기실 사이먼도 경영학자라기보다는 경영학분야에서 심리학을 가르친 심리학 분야의 석학이다.

 

경제학에서의 의사결정은 언제나 최적화를 지향하는데 최적화란 주어진 조건을 충족시키면서 목적하는 바를 극대화 또는 극소화시키는 의사결정구조를 다루는 방식이다. 다시 말해 최적화(optimization)는 인간을 합리적・경제인(rational economic man)으로 전제하고 또 모든 정보를 다 갖고 있는 전지의(omniscient) 상황에서 특정 문제에 대한 모든 해결대안을 탐색하고 평가하여 최선을 선택하는 의사결정방식으로 완전한 합리성(perfect rationality)을 전제한다. 수리적으로는 목적함수(objective function)와 목적함수에 포함된 결정변수(decision variables)의 값을 제약하는 제약조건(constraints)들을 충족시키면서 목적함수의 값을 극대화 또는 극소화시켜 주는 결정변수의 집합(이를 최적해: optimal solution 라고 함)을 선택하는 방법이다.

 최적화에서는 우선 문제(problem)에 대한 모든 해결대안(all alternatives)을 열거하고 각 대안에 대한 예상결과를 평가한 후 최선의 것을 규범으로 선택하게 하는 가장 이상적인 의사결정방법임에 틀림없지만 문제와 문제해결대안 및 각 대안의 예상결과에 대하여 모든 정보를 다 갖고 있는 전지(全知)한 경우에만 실행 가능한 방식으로, 실제로 많은 경우, 비현실적일 수밖에 없는 방법이다.

 

이런 배경에서 사이먼은 최적화(最適化)와 다른 각도에서 만족화(滿足化)를 주창했다. 사이먼은 1950년대에 의사결정구조(decision-making structure)면에서 합리적 경제인・완전한 합리성을 전제로 최적화를 추구하는 경우와 달리, 사회인(social man) ․ 제한된 합리성(bounded rationality)을 전제로 만족화(satisficing)라는 의사결정과정(decision-making process)을 다루면서 행동과학(behavioral sciences)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확립하였다.

 만족화는 미래의 가능성에 대하여 많은 것을 알고 있지 못할 때 모든 대안을 탐색하는 대신에 가능한 대안들만을 탐색하고 이들을 욕망수준(level of aspiration)에 기초하여 평가를 행하다가 욕망수준을 충족시키는 첫 번째 대안을 선택하는 방법이다. 즉, 만족화에서는 그만하면 충분하다고 느끼는 욕망수준을 설정하고 대안을 탐색하고 평가해 나가다가 욕망수준을 능가하는 대안이 발견되면 그것을 선택하게 된다. 따라서 만족화에서는 제한된 합리성만이 추구될 뿐이다.

 

만족화의 철학은 실제세계에서 최적해를 얻기에는 너무나 많은 불확실성과 상충요인들이 혼재해 있기 때문에 이제까지의 것보다 좋으면서 그 정도면 족(足)하다는 욕망수준을 주관적으로 정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해결대안을 채택하게 되는데 이때 그 채택대안은 최적해(最適解)는 아니지만 현실적인 만족해(滿足解)라고 인식한다.

 만족화는 보다 현실에 가까운 의사결정을 유도하는 방법이라는 면에서는 최적화보다 실제적이라고 평가를 받지만 의사결정에 있어서 욕망수준이라는 주관적, 심리적 요소가 도입됨으로써 단순히 의사결정과정을 기술(記述)할 뿐, 의사결정에 있어서 규범성을 제시 못하는 한계를 물론 지니게 된다.

 아무튼 사이먼은 오랫동안 경제학 영역의 최적화방식을 원용해 오던 기업세계에 독자적인 의사결정방식으로 만족화(satisficing)모델을 제시하고 행동과학이라는 학문세계를 열어 온 공로를 인정받아 1978년에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후 혁신주체인 기업을 축으로 한 경영학 이론과 관련하여 노벨경제학상을 받을 다음주자는 과연 누구일까? 아마도 기업과 산업과 경제에 있어서 경제성장발 전의 동인/동력에 관해 명쾌한 틀과 논거에 기초하여 연구한 학자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서 만약 필자에게 그 선발권을 준다면 필자는 혁신이나 기술변화가 경제성장・발전의 원동력임을 설파한 슘페터(Schumpeter, 1934)와 넬슨 ・윈터(Nelson and Winter, 1982)을 우선 추천하고프다. 그런데 슘페터는 이미 타계했음으로 고려 밖이고, 넬슨・윈터는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데 다만 한 가지 미심 쩍인 것은 그들이 주류경제학자가 아니다 보니 실제로 수상여부를 갈음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그러함에도 1980년대에 행한 그들의 연구가 기술경쟁이 심화되는 21세기에 더 돋보이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데 잠시 이들의 연구업적을 살펴보자. (이 대목에서는 아무래도 개념적 이야기가 많이 등장함으로 다소 난해할 수도 있음을 양해바랍니다.)

 

진화경제이론(evolutionary economic theory)은 변화과정의 관점에서 생태생물학에서의 변이・유전・도태의 개념을 빌어 사회․경제현상을 설명하고자 하는 이론으로 구조(structure)보다는 과정(process)을 중시한다. 이 이론의 기초는 슘페터의 혁신이론(1934)과 기업의 성장과정을 이론화한 펜로즈(Penrose, 1959)의 이론과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이 이론의 효시는 아무래도 1980년대 들어 생태생물학에서의 경쟁이론을 경제・경영에서의 경쟁현상에 적용을 시도한 넬슨과 윈터의 An Evolutionary Theory of Economic Change(1982)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들은 기술변화(혁신)를 돌연변이로, 지식보유체로서의 기업을 변이유전으로 보고 시장을 도태의 장으로 구체화한 진화의 틀을 개념화하였다.

 

넬슨과 윈터는 기업을 이익추구자이며 기업역량과 의사결정룰(decision rules)을 가지고 행동하는 주체로 인식한다. 즉, 기업은 단순히 외생적으로 주어지는 대안만을 통해 이익극대화(profit maximization)를 추구하는 게 아니라 기업은 실제로 서로 다른 경로(path)를 지니며, 다른 기업역량과 의사결정 룰(decision rules)을 가진 이질적(heterogeneous) 존재로서 기업의 탐색활동(search)을 통해 기술변화가 일어난다는 점을 강조하며 기술환경과 시장환경의 공진화(共進化, coevolution)를 전제한다. 이런 배경에서 진화경제학의 철학적 배경은 요소환원주의(reductionism)가 아닌 전일주의(holism)에 기초한다.

 그리고 기업역량과 의사결정 룰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문제해결노력과 예기치 않았던 사건에 의해 수정・보완되는 경로의존적(path-dependent) 지식기반이 루틴들(routines)을 형성하는 것으로 본다. (여기서 루틴들이란 예측 가능한 기업의 행동패턴으로 정의할 수 있는데, 구체적으로는 주어진 시점에서 기업의 외부요소(시장 상태)와 내부요소에 대한 의사결정기능의 집합을 말한다.)

 

한편 기업성과는 기업외부의 기술변화(technological change)에 대해서 기업이 루틴으로 어떻게 적응하느냐의 선택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본다. 즉, 루틴을 통해 기술변화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수익성 있는 기업은 선택되고 수익성이 없는 기업은 도태되는 자연선택원리가 작동하는 장소를 시장으로 인식하며 시장에서 보다 수익성이 좋은 기업들이 선택되게 됨에 따라 경제전반의 성장이 도모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기업의 routines 변화요소가 성장 동인으로 중시되다 보니 기술변화, 투자, 진입강도, 노동시장, 시간에 따른 산업의 투입-산출, 기업의 경로 등 기업레벨이 자연히 중시되게 된다.

 그런데도 진화경제학은 실제로 신(新)다윈주의(Neo-Darwinism)에 기초하여 적자생존(survival of he fittest)이 아닌 적합관계자 생존(survival of the fitting)의 관점에서 기업레벨보다는 산업레벨에서의 산업진화에 더 관심을 둔다. 따라서 넬슨과 윈터 이후 그간 변이의 유전(보전)과 관련한 적응・학습・탐색・경로의존성 등 기업과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개념들을 포함하는 진화적 사고를 적용하려는 많은 시도가 있어왔음에도 여전히 기업레벨에 대한 구도가 미흡한 것이 진화경제학의 현 수준이며 한계이기도 하다.

 그러함에도 진화경제이론은 주로 내용(content)지향의 정태적 측면을 주로 다루는 기존의 이론들과는 달리 과정(process)지향적이라는 동태적 측면을 다루며, 또 기술변화와 시장진화를 경제발전의 원동력과 산업간 차이의 동인으로 인식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시장을 선택(選擇)과 도태(淘汰)의 장으로 인식하는 점에서는 대단히 호소력 있는 이론임에 틀림없다.

 

한편 시대상황의 관점에서 보면, 슘페터 혁신이론이 등장한 1930년대 초반부터 1970년대 후반 진화경제학이 등장하기 바로 직전까지 약 50여 년간은 대량생산체제가 여러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지속되어 왔는데 1970년대 후반에 2차 오일쇼크(1979)로 초(超)경쟁상황이 전개되고 거의 같은 시기에 디지털화 혁명(digitalization revolution)을 비롯한 기술변화가 분출되는 상황에서 진화경제학이 배태되다 보니 진화경제학에서는 자연히 공급자간의 경쟁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고 따라서 시장/고객니즈 측면을 소홀히 다루는 한계를 안게 되었다.

 다시 말해 진화경제학에서는 기업이 시장고객을 주도하고 고객은 동일한 니즈를 갖고 있거나 동일제품/서비스를 원한다는 묵시적 전제를 깔고, 산업레벨의 기술변화에 기업레벨에서 어떤 루틴으로 적응할 것이냐에 주로 관심을 두어왔고, 혁신과 관련해서는 기업이 시장고객을 주도한다는 전제에서 시장환경과 기술환경의 공진화(coevolution)를 다루고 있어 기업이 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경우에 한해서만 유효하다는 한계를 보인다.

 

자, 그렇다면 고객이 기업보다 더 힘을 쥐고 있으며 고객의 니즈진화가 빈발하는 상황에서는 어떤 이론이 유효할까? 이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구축된 것이 바로 다이나믹 매니지먼트이다. 다이나믹 매니지먼트는 한마디로 니즈진화에 적응하는 혁신경영으로 정의될 수 있으며 니즈맞춤혁신・니즈진화・적응우수성을 key words로 한다. 여기서 적응이란 니즈진화를 선도하거나 니즈진화에 편승하는 행위 모두를 포괄한다.

 요컨대 니즈맞춤혁신을 통해 니즈진화에 적응하며 지속번영을 도모하는 경영이 다이나믹 매니지먼트인데, 이는 특히 2000년대 인터넷/스마트혁명 이후 고객의 니즈가 까다로워지고 니즈진화가 빈발하는 비선형(非線型)세계에 부합하는 경영패러다임이라 할 것이다.

 

다이나믹 매니지먼트는 크게 세 가지 이론으로 구성되어 있다. 산업레벨에서 시장의 고객니즈와 니즈진화를 설명해주는 현시니즈이론(explicit needs theory)과 기업레벨에서 이익추구 동력을 나타내는 기업파워이론(firm power theory) 그리고 산업레벨에서의 니즈진화와 기업레벨에서의 전략행동을 연결시켜주는 니즈맞춤혁신전략(needs-focused innovation strategy)이 그것이다.

 

현시니즈이론에서는 구매력을 지닌 고객집단인 수요가 중요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수요 중에서도 지불의향(willingness to pay: WTP)을 지닌 현시니즈/현시수요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기업파워이론에서는 시장의 현시니즈/현시수요로부터 이익을 캐내는 기업의 힘 곧 기업파워(firm power)는 성장벡터(growth vector)에 부합하는 혁신(innovation)에 좌우되고 성장벡터는 또한 고객의 니즈진화에 부합해야 한다는 점에서 결국 니즈맞춤혁신이야말로 기업성과의 원동력임을 강조한다.

 

기업파워이론은 기술변화(혁신) 요소를 강조하는 진화경제학과 맥을 같이 하면서도, 첫째 정태적으로는 니즈맞춤혁신으로 기술(공급)요소와 시장(수요)니즈가 연결된다는 점, 둘째 동태적으로는 니즈맞춤혁신전략으로 니즈진화와 기업의 혁신활동이 연결되며 니즈맞춤혁신전략의 유효성 정도에 따라 제품적합성(예상수익지표)과 공정적합성(예상비용지표)이 좌우되면서 예상이익이 얻어지는 혁신과 이익실현과의 메커니즘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를 갖는다.

 

2013년 10월 14일 스웨덴 왕립과학원은 2013년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로 주식 채권 및 주택 시장 등의 추세 연구 방법을 개발한 공이 있는 미국의 유진 파마(Eugene F. Fama), 라스 피터 한센(Lars Peter Hansen) 및 로버트 쉴러(Robert J. Shiller) 교수가 선정됐다고 발표했다.

 효율적 시장가설과 비효율적 시장가설이라는 서로 상반된 독자적인 연구를 통해 세 수상자들이 자산 가격에 관한 현재의 최고 이론에 기초를 놓았으며 이에 따라 사람들의 투자 방식을 변하게 한 점을 높이 사서 수상하게 되었다고 전하는데 수상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주식이나 채권 가격의 단기적 등락을 예측하는 것은 어렵지만 3년 이상의 장기 변동 추세를 예견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한다.

 이들의 노벨경제학상 수상 근거에 대해 전문영역이 다른 필자가 왈가왈부할 성질의 것도 아니고 또 그럴 만한 전문성을 필자가 물론 갖고 있지도 못하다. 다만 이들의 수상과 관련한 주제가 자산 가격의 예측 특히 주식과 채권가격의 등락을 다룬 것이란 점에서 그리고 그들의 연구가 1960년대부터 2008 글로벌 금융위기 때까지를 포괄하는 것이란 점에서 아무래도 금융파생상품과도 밀접할 것이며 그래서 2008 Wall Street Meltdown과도 직결될 것이란 느낌이 들면서 동시에 두 가지의 사념(思念)이 필자 머릿속에서 강하게 떠올랐다.

 

첫 번째 사념은 2011년 San Diego에서 열린 세계전략학회(Strategic Management Society) 특별회의에서의 일이다. 필자가 논문 발표 후 개별적으로 필자와 더 토론을 원하는 어느 핀란드 교수와의 대담을 끝내고 나서 시간이 어중중하지만 흥미로워 보이는 한 발표세션에 들어갔는데 발표논문이 4개였는데도 발표자들을 제외한 청중은 오직 필자뿐이었다.

 

그 세션의 발표논문은 금융재무와 관련한 실증연구들이었는데 연구기간(research span)이 모두 2008 월가 발 금융위기를 포함하고 있었다. 한참 자기네들끼리 묻고 대답하더니만 필자에게도 질문의 기회를 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각 논문마다의 이론모델과 가설 및 그 검증방법에 대해서는 필자의 관심을 벗어난 것임을 밝히고 다만 연구기간과 그에 따른 데이터의 성격에 대해서 어느 정도로 생각해 보았느냐는 질문을 특별히 와튼 스쿨(Wharton School)에서 온 교수라는 분에게 던졌다.

 그 분의 발표논문요지는 금융파생상품을 다루는 월가 금융사들을 다양한 금융상품을 다루는 다각화 추구의 금융사와 덜 다각화를 추구한 금융사로 대별하여 경영성과를 비교했더니만 더 다각화를 추구한 금융사의 경영실적이 더 우수했다는 내용을 다룬 것이었다. 그래서 교수님이 연구에 사용한 1980-2009년까지의 데이터를 보면 실물경제에 있어서는 세계최대 채권국이었던 미국이 1985년을 기점으로 세계최대채무국으로 전환된 시기가 포함되어 있으며 또 이어지는 실물경제의 쇠락과는 반대로 금융파생상품이 증가해 오다가 미국의 무역적자가 마치 산사태를 맞은 듯 급증하기 시작한 1997년부터는 금융파생상품이 초거대화 되며 미국경제의 활황을 주도하다가 결국 2008 금융위기를 초래한 패닉(panic)도 연구기간에 포함된 것임을 지적하면서 이런 비정상적 특성을 지닌 데이터를 가지고 행한 금융사의 전략행보 차이에 대한 연구결과가 과연 유의적인 의미를 지닌다고 보는가 라며 다소 예의에 벗어난 듯한 질문을 던졌다.

 사실 그 당시 그 특별회의에는 전략경영 여러 분야에서 소위 세계석학이란 70여명이 초청되었는데 그때 그 세션 발표자들의 연구문제 의식과 연구 감각이 너무나도 미시적이고 시대흐름을 읽는 안목이 결여된 탓에 다소 거칠게 질문을 던졌던 것이다. 그러면서 왜 2008 월가붕괴가 터졌는가를 구명(究明)하는 게 오히려 더 시급한 연구주제가 아닐까라는 의견을 피력한 바가 있었는데 웬일인지 그 때의 그 일이 2013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발표를 접하는 순간 문득 필자의 머릿속을 스치는 것이었다.

 

두 번째 사념은 2013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의 핵심내용인 주식・채권 가격등락에 대한 예측과 관련한 것이었다. 이번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들은 주식이나 채권 가격의 단기등락에 대한 예측은 곤란하지만 3년 이상의 장기 변동 추세를 예견하는 것은 가능하다는 주장을 펴고 있는데 이는 카오스 이론과 복잡성과학에서의 메시지와 완전히 상반되는 것이라는 인식이 필자를 감쌌다.

국내시장이건 글로벌 시장이건 주식・채권을 다루는 금융자본시장은 대단히 가변적이고 취약한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있는 하나의 복잡시스템(complex system)으로 이해되는데 카오스 이론과 복잡성과학은 복잡시스템의 행동은 단기적으로는 어느 정도 그 예측이 가능하지만 중장기적으로 는 그 예측이 아예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고 단지 하나의 패턴으로만 이해 될 수 있을 뿐이라고 전한다.

 

그렇다면 카오스 이론과 복잡성과학이 전하는 메시지와 이렇듯 상반된 2013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들의 연구결과는 과연 금융자본시장에는 자연 질서와 반대로 움직이는 어떤 고유한 특성이 존재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노벨 수상자들이 이 점을 몰라서 자연 질서와 반하는 연구결과를 주장하는 것인지 또 아니면 복잡시스템을 연구하는 방법론이 아직 덜 확립된 탓에서 비롯된 것인지 여부는 필자로서는 전혀 모를 일이며 다만 만년에 필자에게 연구주제 하나가 더 추가되고 있다는 느낌일 뿐이다.

 

글 / 김인호 한양대 명예교수. 다이나믹 매니지먼트 학회장 

 오랜만에 인호 형에게서 email이 도착, 아하.. 따끈따끈하게 새로 ‘구워낸’ 김인호 칼럼이 나왔구나..하고 보니 이번은 인호 형의 인생 동반자 박계형 작가님의 ‘조갑제 netizen column’ 에 관한 것이었다. 작년에 여사님께서 손수 보내주신 친필로 쓰여진 멋진 글과 다수의 논고를 본 적이 있었는데 그 이후 처음 보게 된 것이라 아주 반가웠다. 논제는 지극히 평범할 수도 있고 진부할 수도 있지만 왕년의 실력으로 아주 설득력 있게 다가온 글이었다. 암만 세상이 변해도 변하지 않는 것들 중의 으뜸이 아닐까, 이 진실과 정직이라는 것이. 거짓이 새로운 진실로 태어나는 것이 new normal이 되어가는 이 세상에 진실의 등불은 더욱 그 빛이 밝게 느껴진다. 그 ‘진실의 원천’은 무엇일까? 나는 100% 저자의 의도를 이해하고 동의한다. 다만, 다만, 지나친 흑백논리에 빠지는 함정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피해야 하는 다른 ‘진실’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진실(眞實)의 가치(價値)

정치가가 가야 할 길도 첫째가 정직이고, 기업가가 가야 할 길도 우선 정직이다.

박 계 형(朴啓馨) 소설가

 

PARK-GYEHYUNG몇 해 전인가, 해외나들이를 위해 공항에 나가 서류를 적을 일이 있었는데, 미리 가이드가 나에게 여행목적 란에, – 관광이라고 적지 말고 다른 이유를 쓰라고 가르쳐 준다. 관광이라고 쓰면 무슨 세금을 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도 그런 법이 아직 있는지 모르지만 그렇게 수입을 만들어 국내관광지를 개발하려는 의도에서 만들어졌던 방안인 모양이다.

  가이드의 충고는 고마웠지만 거짓말을 써야 한다는 게 찜찜해서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관광을 나가는 길이니까 그냥 사실대로 쓰겠다, 고 말했다. 그랬더니 가이드는 마치 외계인이라도 보는 듯 아주 이상한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무엇 때문에 손해를 보면서까지 곧이곧대로 쓰겠다, 는 것인지 도저히 이해를 못하겠다는 표정이다. 알고 보니 그 세금이라는 게 겨우 만원이었다.

  하마터면 나는 돈 만원에 진실을 팔아버릴 뻔 한 것이다. 적어도 나에게 만은 진실이란 것이 1만 원짜리 한 장과 바꿀 수 있는 그런 정도의 값싼 것은 아니다. 사실 진실의 가치를 따지자면 무한대다. 돈 만원이 줄 수 있는 그 정도의 일시적인 쾌락이나 즐거움에 비할 바가 아닌 것이다. 사람들은 많은 것들의 가치와 중요성을 논하고 있으면서도 진실의 가치에 대해선 자주 말하지 않는다.

  아이들에게도 엄청난 교육비를 투자하며 이것저것 여러 가지 것들을 가르치고 있으면서도 정작 가르쳐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인 정직을 심어주는 일엔 등한히 하고 있다. 혹시나 우리는 비겁하게도 우리의 아이들에게 정직을 가르치기를 두려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워낙 세상이 거짓된 것들로 가득 차 있으니 우리아이들만 정직했다간 세상에서 손해만 보고 쫓겨나는 게 아닌가, 당연히 겁이 날 수 있는 일이긴 하다.

그러나 그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우리들에게 다른 선택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오직 정직만이 우리와 우리의 아이들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것이다.

인간이 제아무리 잘났다고 날뛰고 실제로 대단한 짓들을 하고 있지만 해가 뜨고 지는 것을 막지 못하고 결국은 그 밑에서 살고 있듯이 빛은 반드시 어둠을 이기고 만다는 섭리의 육중한 힘을 우리는 막을 수가 없는 것이다.

  초식동물인 소에게 고기를 먹이니 소가 미치지 않는가.

  지금은 미국도 타락하여 쇠퇴의 길을 걷고 있지만 한 때 전 세계인이 선망하는 나라가 되어 부와 힘과 영광을 누릴 수 있었던 이유도 그들 안의 정직의 정신 때문이었다, 고 나는 생각한다. 미국인들을 가장 노하게 하는 두 가지 말이 있는데, liar(거짓말쟁이)와 coward(비겁자)라는 말이다. 그 중에서도 거짓말쟁이라고 하면 더욱 화를 내고 심하게 표현해 결투를 신청할 정도로 참지 못한다. 불과 몇 백 년 전만해도 수풀더미에 묻혀있던 미국을 전 세계위로 솟아오르게 만든 것은 그들의 기독신앙 안에서 피어났던 정직의 정신이었다.

  정직한 나라, 정직한 정치가, 정직한 기업인만이 결국은 이 땅 위에서도 흥하고 살아남을 수 있다, 라고 나는 굳게 믿고 있다.

  건강식품을 파시는 어떤 분에게서 들었는데, 이상하게도, 자기가 양심을 속여 물건을 조금 적게 가지고 가면 거의 어김없이 사는 편에서 저울로 달아보고 적발해 내는 바람에 결국 속인 것이 들통 나 고객이 떨어져 버리고 만다는 것이었다. 

비록 콩나물장사를 하더라도 한군데에서 손님을 속이지 않고 오래 하다 보면 그 사람은 거기서 사람들의 신임과 지지를 얻어, 결국은 땅에 뿌리를 내리고 번성하게 되어 있는 법이다.

  내 친척동생뻘 되는 여자 하나가 시집을 갔는데, 신랑이 간신히 지방대학은 나왔지만, 체격이 너무나도 왜소하고 인물도 변변치 못해, 직장이라고 얻은 것이 작업환경도 열악한데다 위험하기 짝이 없는 기계 만지는 일이어서, 나를 찾아왔을 땐 이미 손가락 하나가 조금 잘린 상태였다. 그 모습이 너무 딱해 지인을 찾아가 사정사정해서 겨우 입사시험을 치르게 하였는데 성적이 하도 형편없어 우리가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였다. 중견 증권사였는데 간신히 취직을 시키긴 했지만 그곳에서 과연 얼마나 견디어 낼 수 있을지, 안심이 되질 않았다. 그런데 얼마 후에 그 회사의 높은 분을 만났더니 그분이 하시는 얘기가 그 사람이 지금 고객들에게 대단한 인기와 호평을 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내용을 알아본 즉, -고객들이 와서 증권을 사자고 하면 지금 사면 안 되고, 이것을 사면 손해를 보고, 등등의 구실을 붙여 고객을 돌려보내기가 일쑤인데 계약 고를 많이 올려 회사에 득을 주어야 할 직원으로서 손님을 쫓고 있는 형상이니 말도 안 되는 짓인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감에 따라 약삭빠르지 못하고, 일면 어리석어 보이는 그의 진실성이 오히려 고객들의 신뢰와 호감을 당하여, 모두 그에게로 몰려들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내가 직접 목격한 사례이다.

  그의 장모인 나의 아줌마가 죽어서 그 장례식에 갔었는데 마당에 가득한 자가용 행렬을 보고 나는 하도 오랜 만에 좋은 것을 보곤 마음이 너무나 감격해 눈물까지 흘렸었다.

안튼 슈낙은 우리를 슬프게 하는 여러 가지 것들을 우리에게 이야기해 주었지만 나는 우리를 기쁘게 하여 주는 것들 가운데 하나로 이 이야기를 늘 떠올리곤 한다.

그렇게나 보 잘 것 없는 사람에게도 세상을 지배할 수 있는 길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진실의 힘인 것이다.

우리가 이 사람보다 더욱 정직하게 산다면, 이 사람이 얻은 것보다 더욱 큰 영광을 누릴 수도 있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많은 처세술과 대인관계법 등이 연구되고 있지만 정직보다 더 앞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사실 정직처럼 쉬운 처세법도 없다. 따로 머리를 굴리고 계략을 짜내려고 골치 아프게 궁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정치가가 가야 할 길도 첫째가 정직이고, 기업가가 가야 할 길도 우선 정직이다.

  정직의 성과는 당장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 반드시 나타나고 만다. 세상에서 보라. 씨가 떨어져 열매를 맺기까지는 반드시 시간의 경과가 필요하지 않은가. 우리가 뿌린 정직의 씨도 그렇게 언젠가는 반드시 풍성한 좋은 열매를 맺어 우리들에게 되돌려 줄 것이다. 설령 우리가 정직을 택함으로써 많은 손해를 본다 해도, 슬퍼하거나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반드시 갚아주실 분이 계시다!

  진실을 행하는 자는 혼자가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진실 안엔 반드시 동행하시는 분이 계시다.

  진실이 이기고야 마는 이유도 간단하다. 전능하신 분께서 진실 안에 반드시 함께 계시기 때문인 것이다.   

 

박 계 형(朴啓馨) 작가 소개

1943년 서울에서 출생
1961년 수도여고 졸업
1965년 고려대학교 영문학과 졸업
1963년 동양방송(현 KBS 2의 전신)개국(開局) 현상문예소설 50만원 당선작 [머무르고 싶었던 순간들]
1976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입선작 [어떤 신부(神父)]
1999년 조선일보 선정 [한국을 이끈 50인]의 한 사람으로 뽑힘
2002년 [자랑스러운 고려대인(高麗大人)상] 수상
현재   연변과학기술대학교 겸임(兼任)교수, 성 어거스틴 회(St. Augustine Society) 대표

주요저서:
A Life(임종의 영문판), Troubador 출판사 출간, 영국, 2007>
<留すりたかった瞬間の數數(머무르고 싶었던 순간들) 일어판, 新宿書房 출간, 2005>
<정(情)이 가는 발자국 소리>, <해가지지 않는 땅>, <사랑의 샘>
<자유를 향하여 날으는 새>, <머무르고 싶었던 순간들>
<어느 투명한 날의 풍경화>, <회귀(回歸)>, <환희, 구(舊)임종(臨終) 1,2>
<朴啓馨 全集> 외 약 60여권  


니즈맞춤혁신논리 : Seek Norm & Get-to-Norm

2013.09.11

김인호 교수

김인호 명예교수

 

혁신에 대한 성공률은 아이디어 발상에서부터 연구개발(R&D)과 실용화(implementation)단계를 거쳐 상용화(commercialization)된 후 성공하는 경우는 겨우 4%선이라고 Booz Allen & Hamilton은 전한다. 그리고 상용화된 혁신의 평균성공률은 17%라는 혁신성공 조사보고서도 있다. 그리고 경영컨설팅업계에는 혁신과 관련하여 벼라 별 다양한 주의주장들이 난무하고 있는 게 현실인데 이는 아직 혁신에 관한 이론다운 이론이 없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다이나믹 매니지먼트(dynamic management)는 어떤 경우든 고객이 원하는 제품/서비스를 기업이 제공하여 고객으로 하여금 돈을 내게끔 하지 않으면 결코 돈을 벌 수 없다는 지극히 당연한 상식에서부터 시작한다. 기업이 제공하는 제품/서비스에 대해 고객이 언제 왜 구매의향 또는 지불의향(willingness to purchase or willingness to pay: WTP)을 갖는가에 대한 구명(究明)부터 시작한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고객은 어떨 때 지불의향을 갖게 될까? 고객이 최소한 이것만은 우선적으로 꼭 충족되길 바라는 기본니즈속성(basic needs attributes: BNA)이 100% 충족되지 않으면 결코 돈을 지불할 의향을 갖질 않기 때문에 BNA가 우선 100%로 충족된 상태에서 그것이 충족되면 될수록 만족이 점점 더 커지는 어필니즈속성(appealing needs attributes: ANA)이 충족되기 시작하면서부터 지불의향을 갖게 된다. 그리고 기본속성(BNA)도 100% 어필속성(ANA)도 100%로 충족되면 고객은 감동을 느끼며 최대지불의향수준을 내보이게 되는데 이 최대지불의향수준을 내보이는 제품/서비스를 최소비용으로 제공하면 최대로 돈을 벌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최대지불의향수준을 내보이는 제품/서비스를 최소비용으로 제공하는 사업패러다임(business paradigm: 현시니즈와 확장가치사슬과의 연결 메커니즘을 말하는데 그냥 사업모델정 도로 이해해도 무방함)은 이상적인 모범답안(Norm as Ideal)으로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고객이 최대지불의향수준을 내보일 어필속성과 기본속성의 집합을 찾고(Seek Norm), 이를 충족시켜 줄 제품/서비스를 니즈맞춤혁신을 통해 충족시켜주기만(Get-to-Norm) 하면, 바로 이상적인 모범답안이 얻어지면서 기업은 최대로 돈을 벌게 된다.

 

그런데 어필속성의 특성에 따라서 지불의향의 탄력성은 다르다. 예컨대 어필속성의 미소한 차이에도 지불의향수준이 대단히 탄력적으로 반응하는 경우(명품이나 고기술 니즈)가 있는가 하면 대단히 둔감하게 반응하는 경우(생필품 니즈)도 있다. 어필속성의 미소한 차이에도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경우는 주로 핵심기술이나 긴요한 기술과 관련한 경우인데 이런 분야의 글로벌 틈새(niche)시장에서 니즈맞춤혁신을 통해 Seek Norm & Get-to-Norm으로 이상적인 모범답안을 선취(先取)하여 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기업이 바로 히든 챔피언(hidden champion)이다.

 히든 챔피언이 주목 받게 된 배경은 이렇다. 2008 8월 월가붕괴(Wall Street meltdown) 후 5년이 지난 2013년의 글로벌 촌은 참으로 많은 구조변화를 겪어온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 많은 변화 중에서 특히 국별 수출규모의 서열변화를 갈음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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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Apologetics.. 아폴로제틱스..흠.. 이 단어를 보면 연관되어 생각나는 것은 apology 아폴로지.. 가 아닐까? apology 하면 우선 사과, 사죄, 변명, 변론 정도의 뜻이다. 여기의 apologetics는 마지막 것인 변론에 가까운 것으로 거의 99% 이것은 ‘자기 믿음, 신앙의 방어, 변론’을 뜻 한다. 이 blog에서는 내가 현재 믿고 있는 가톨릭, 천주교 신앙에 대한 변론을 말한다. 내가 알고 있는 한 개신교에서는 이 말조차 ‘구교, 천주교’ 냄새가 난다고 오래 전에 팽개쳤을 지도1 모른다. 이 ‘변론’을 통해서 나는 내가 알게 되고, 좋아하게 된 당대의 다른 apologist 변론가 들을 언급하고 나 나름대로 형성을 하게 된 것 (이것도 사실 지금도, 매일 변화, 발전을 해나가고 있다) 을 남기고자 한다.2

 

가까이 온 죽음과 신앙

처음 이 ‘신앙 변론 분야’에 관심을 가졌을 때는 내가 오랫동안 잃어버리고 살았던 가톨릭 신앙을 되찾고자 시도를 할 때였다. 나의 유일한 등대, 나의 분신이셨던 어머님의 타계와 더불어 나는 죽음이란 것을 인생 처음으로 피부로 느끼며 나의 것으로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50이 훨씬 넘은 후에야 죽음에 대한 생각을 시작했던 나는 한마디로 철부지였다. ‘죽음’의 ‘죽’자만 보면 나는 외면하고 그런 것은 나의 사전에 없다고 피하고 살았고, 죽음에 관련된 어떤 것, 장례식 같은 것도 나에게는 없었다. 죽음은 한마디로 ‘수백 년 뒤에 있을’, 나에게는 그저 ‘추상 명사‘였다.

 인간의 수명을 생각해보니 기껏해야 70~80세 정도였고 그것은 나에게 불과 20~30년 정도의 여유를 주었지만, 20~30년 정도의 세월은 전에 생각하던 것 보다 ‘훨씬’ 짧다는 것도 50년 이상 살아본 경험에 의해서 쉽게 짐작이 갔다. 나의 20~30년 정도 전의 ‘개인 적 역사’를 생각해 보면, 그것은 바로 엊그제 같이 느껴지니, 사실 나의 수명은 그렇게 많이 남지 않았음은 암만 죽음의 죽 자를 피하려 해도 그것은 너무나 자명한 진리였다. 한마디로 죽음의 그림자는 나를 덮치기 시작하는 것이고, 아니 이제부터는 내일의 태양을 못 볼지도 모른다는, 몇 안 되는 가족들도 오늘이 마지막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그렇게 과장된 표현이 아닌 듯 싶었다. 이런 것이 지나친 우려처럼 들렸으면 하고 바라고 살았지만, 이제는 그것, 죽음이 진리이고 사실임을 부정할 도리가 없었다.

 

철학적 실존과 죽음

이제는 죽음을 의도적으로 가까이 보려고 노력을 하고, 그 동안 꽤 보아왔기에3 조금은 그 보이는 모습과 배경도 생각하게 되었다. 천차만별의 모습을 한 죽음의 과정, 여정도 알게 되었고, 남아있던 사람들의 모습과 반응도 보게 되고, 그것을 보는 나 자신도 보게 되었다. 이런 노력을 통해서 나는 조금은 냉정하게 죽음을 대하게 되었고, 무조건 피할 때보다 훨씬 냉정하게, 이성적으로 죽음을 생각하게 되었다. 죽음의 제일 큰 명제는 이것이다. 죽음은 과연 그 죽음의 주체에게 모든 것의 끝일까? 그 당시까지 신앙심이 거의 사라진 나에게 대답은 ‘죽음은 모든 것의 끝, 깜깜한 암흑‘이란 것이 대답이었다. 모든 것의 끝.. 모든 것의 끝.. 이 거대한 우주 안에 유일한 존재였던 나, 이경우란 생물, 인간이 완전히 없어지는 것, 그러니까 실존이 허무가 되는 것이다. 바로 이 사실이 나를 괴롭고 슬프게 하는 것이었다. 이런 고통은 사실 젊었을 적, 대부분 10대에 잠깐 찾아오긴 하지만, 사회란 거대한 보호 막 속에서 자연스레 잊게 되지만, 그것은 표면적인 것일 뿐이다. 나란 사람의 의미는 무엇이고 내가 왜 실존이 되었다가 허무로 사라지는 것인가? 철학적인 문제일 수도 있지만 과연 기라성 같은 철학자들이 대답을 주었을까? 모두 ‘말의 장난‘에 지나지 않았었을까?: 절대로 철학이 이것에 대답을 주지 못함, 그것이 바로 ‘유한한 인간’의 슬픔일 것이다. 이런 ‘안 보일 수 있는 것에 대한 생각들’을 잊고 살 수도 있겠지만, 중년이 훌쩍 넘었던 나에게 그것은 사치였다. 죽음이 striking distance에 왔음을 알기 때문이다. 결정의 순간은 한걸음 한걸음 다가오고 있었다.

 

파스칼의 내기, Pascal’s Wager

역사적으로 잘 알려진 신앙적 변론들이 있다. 그 중에서 제일 쉽고 그런대로 수긍이 가는 것으로 Pascal(파스칼)의 Wager 란 것이 있다. 여기서 wager라면 ‘도박이나 내기’ 정도의 뜻이 아닐까? Pascal 하면 누구에게나 친근한 이름일 것이다. 그는 신이 있다 와 없다 중에서 어떤 것이 맞는지 ‘내기’를 한다. 내기에 참가를 안 하면 ‘신은 없다’로 간주가 된다. 만약 내가 ‘신이 있다’를 고르고 그런 믿음으로 살다가, 그것이 틀렸더라도, 그러니까 하느님이 없었더라도.. 아무런 ‘손해’보는 것이 없을 것이다. 그는 사실 ‘거룩한’ 삶을 살았기에 더욱 그렇다. 하지만 실제로 신이 있었다면? 나는 이긴 것이고 내가 가고 싶었던 천국이 나의 것이다. 내가 신이 없다는 것을 선택했고, 없는 것처럼 일생을 살았고 실제로 하느님이 없었다고 해도 내가 얻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만약, 틀렸다면, 그러니까 하느님이 계셨다면.. 나는 하느님을 안 믿는 ‘죄’를 지는 것이다. 이런 논리는 간단히 말해서.. 하느님을 믿는 것이 ‘현명’ 한 것이고, 믿어서 손해를 볼 것이 ‘하나도’ 없다는 논리다. 나도 이런 식의 ‘논리’를 혼자서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그렇게 ‘현자와 성인’들이 하느님이 있다는데, 그것 믿어 보는 것이 나쁘지 않다는 것.. 만약 믿었다가 사실이 아니더라도 사실 손해 보는 것은 극소적이 아닐까 하는 지독히 타산적인 생각을 해 본 것이다. 하지만 역시 이 논리는 너무나 ‘타산적’인 것으로, 가슴으로 하느님이 믿어지지 않을 때나 쓸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왜냐하면 그 외의 훨씬 더 이성적이고 수긍이 가는 변론들이 있기 때문이다.

 

우주적 이성으로, Cosmological Reasoning

파스칼의 조금은 타산적인 이유보다도 훨씬 이성적이고 심지어 과학적인 논증이 비교적 가까운 곳에 있다. 바로 깜깜한 밤에 찬란히 떠오른 달과 별들로 가득 찬 하늘, 막막한 우주인 것이다. 이 ‘우주적 논증’이 내가 얼마 전까지 ‘사랑’하던 것이었다. 종교적 믿음에 회의가 들면 나는 ‘무조건’ 하늘과 우주를 생각했다. 그러면 십 중 팔구 회의감을 무마할 수 있었다. 우주적 논증은 우주 과학 같은 것과 상관이 없는 사람도 쉽게 이해는 할 수 있다.

이 논증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명백한 ‘공리’로부터 출발한다. ‘원인과 결과’, 모든 현상이나 결과는 분명히 원인 제공이 필요하다는 너무도 명백한 이론인 것이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우주를 생각해 보면 인간이 알 수 있는 크기는 무한대에 가깝다.. 무한대가 아니고 가까운 것은 사실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그 한계를 알 수가 없고, 실증적으로 관념적으로도 알 수가 없다. 언제 시작이 되었는지, 어디까지가 우주의 끝인지 ‘모른다.’ 그것이 현대인이 종교처럼 신봉하는 기술적 과학의 끝이다. 그러니까 그 끝을 이어 받아 해답을 주는 것이 종교적 신앙인 것이다. 최첨단 기술과학이 밝힌 것은 우주에 시작이 있었다는 것, Big Bang 이론이 있다. 태초에 ‘꽝!’ 하고 gas가 터지고 그곳에서 현재의 모든 우주의 물질들이 생겨났고 그것들이 움직이는 것이 ‘천문학’이 되었고, 생물이 나오며 생물학이 되었다. 그러면 당연한 의문이 생긴다. 그 ‘태초의 꽝!’ 전에는 무엇이 있었나? 그것은 과학이 아니란다. 과학의 영역 밖이란다. 그리고 우주의 크기까지 계산을 해낸 천문과학자들, 크기가 있으면 그 변두리도 있을 것인데.. 그 변두리 밖에는 무엇이 있는가? 그것도 과학 영역의 밖이란다. 이런 근본적인 과학의 한계를 알면, 사실 누구나 ‘겸허’해 지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의 머리는 아직도 멀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이런 ‘모르는 것 투성이’에 대한 ‘명쾌한 대답’이 바로 ‘하느님의 만드신 우주와 피조물인 인간’ 설, 바로 종교인 것이다. 그러니까 현재 실험으로 알려진 기술적 과학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고 과학적 사실보다 엄청 커다란 진리의 일부가 과학인 것이다. 그 진리가 바로 ‘하느님의 세계’를 말하는 종교 신학이 아닐까? 여기까지 모든 것인 ‘과학적 실험’에서 벗어나지만 완벽한 이론과 이성에 부합되는 것 들이다.

 

역사적인 접근, Historical Signs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는 하느님, 그것도 유대교-기독교적인 생각에서 보는 하느님은 어떻게 설명이 될 수 있을까? 하느님을 말하는 ‘믿음 체계, 종교’는 지구상에 얼마든지 많이 있지 않은가? 그 중에서 왜 나는 그리스도교 적인 하느님을 믿어야 하는가? 왜 그것이 나에게 유일한 하느님에 대한 해답이라고 생각하는가? 왜 불교는 아니고, 왜 일본 신도나 이슬람은 아닌가? 이것은 비교적 길지 않은 인간 역사에서 찾을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역사’는 다름아닌 유대-기독교에서 모두 사용하는 ‘구약성경’을 말한다. 이 구약성경은 신앙적인 bible이지만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서’이기에 그 의미가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창세기에서 시작되는 이것은 현대적 세속적 과학적인 ‘보이는 것’을 찾는 관점으로 보면 ‘설화’에 가깝지만 그 속에서 ‘안 보이는 것’을 찾는 것 또한 의미가 크다. 제일 큰 의미는 바로 하느님의 존재와 ‘우주 창조’에 있는데, 모든 것의 시작인 절대 유일 존재, singularity, 시 공간 이전의 창조의 모든 근원이 하느님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이것이 이스라엘 민족이 계시 받은 것이라면, 그 절대존재, 야훼라고 불리는 그것이 하느님이 아닐까? 물론 이런 접근 방식은 어느 정도 ‘믿음의 문’을 열고 있어야 이해가 가능함은 물론이다. 그래서 그 ‘마음의 문’이 열릴 수 있는 것도 ‘은총’이라고 했는지 모른다.

 

나가며

기독교에는 ‘믿음은 은총‘ 이라는 말이 있다. 은총이란 하느님이 주시는 ‘공짜의 선물’이란 뜻이다. 이 말은 누구나 받는 선물이란 뜻이지만, 인간 고유의 특성인 ‘자유의지’에 따라서 이 선물을 받고, 안 받고 한다. 애써서 거부만 안 하면 받는 선물이 바로 ‘자연스럽게 하느님을 믿는’ 능력인 것이다. 무조건 믿는 것이 아니고 또한 하느님이 주신 ‘이성’이라는 인간의 능력의 도움을 받기도 하지만 이성이란 것은 신앙적 차원에 못 미치는 불완전한 것일 수 있다. 위에 나열한 여러 가지의 ‘변론, 이유’들은 개개인 마다 다른 의미로 비쳐지기도 하고 이런 이유가 전부가 아닐 수도 있지만 적어도 믿음이란 것이 ‘이성적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더 나아가서 믿음의 부정이 오히려 비이성적임도 보여주기에, 파스칼의 말 대로 ‘믿어서 손해 보는 것이 없다’는 것만 인정해도 어떤 무신론자에게는 거의 천지개벽 같은 변화를 주지 않을까..

 


 

  1. 추측에 그들은 주로 신앙간증이란 형식으로 이것을 대신하고 있는지도..
  2. 나의 유일한 희망은 이것이 어떤 한 사람에게라도 ‘이 험한 세상이 알고 보면 생각보다 희망적’이라는 사실을 느끼게 해 주고 싶은 것, 그것뿐이다.
  3. 주로 장례행사: 장례미사, 연도 등을 통해서.

아마존닷컴에서 시작된 다이나믹 매니지먼트 확산

2013.08.16

김인호 교수

김인호 명예교수

 

2010년 6월 영어버전 졸저, Why Industrial Hegemony Shifts: Needs Evolution and Dynamic Management가 독일 Lambert Academic Publishing(LAP) 출판사에 의해 출간되어 Amazon.com에서 팔리기 시작했다. 필자는 2008년에 이미 ‘Dynamic Management Theory (Hanyang Univ. Press)’라는 졸저를 Amazon.com을 통해 선을 보이긴 했지만, 국내대학 출판이라 외국인에겐 생소할 것으로 생각되어 서둘러 2년 후 ‘Why Industrial Hegemony Shifts’를 다시 선보이게 된 것이었다.

 니즈진화라는 동태적 관점에서 니즈맞춤혁신을 통해 지속번영을 도모하는 다이나믹 매니지먼트라 는 신(新)기업전략이론을 가장 극명하게 내 보일 수 있는 실증사례가 아무래도 산업주도권 이동일 것으로 판단하고 세계 유수산업들을 대상으로 산업주도권 이동원리를 정성적(qualitative)으로 구명(究明)하고자 한 것을 재차 선 보인 것이다.

 

그런데 LAP 졸저의 출간에 앞서서, 기업전략과 관련하여 그간 정태적 관점의 이론에 익숙한 학자들 특히 미국과 유럽의 석학들에게 동태적 관점의 졸저가 어떻게 비쳐질까를 고려하며 세계 석학 십여 분에게 출간용 원고를 미리 보내 그들의 반응을 타진해 보고자 하였다.

 약식형태의 서평을 보내 온 분은 미국 하버드 경영대 학의 Gary Pisano교수, Dartmouth 대학의 Margaret Peteraf교수, 영국 Warwick 경영대학의 John McGee교수, 스위스 IMD의 Bala Chakravarthy교수, 동경대 Junjiro Shintaku교수, 북경대 경영대학(GSM) 부원장 Changgi WU교수, 서울대 조동성교수를 비롯하여 몇 분이 더 있었다.

 

의례 서평에는 호평이 주류를 이루기 마련이라고 생각했던 필자의 예상대로 평해준 분들 모두가 호의적인 평을 보내주었는데 그 중에서 필자의 의중을 가장 꿰뚫어 본 이는 Bala교수였다고 생각되었다. 그는 인도태생 미국인으로 한동안 최연소 하버드 박사라는 별칭이 붙었던 분으로 전략 프로세스(Strategic Process) 분야의 석학으로 일찍이 젊은 나이에 세계전략경영학회(Strategic Management Society) 석좌회원이 된 스위스 IMD교수다.

 Bala 교수가 보내 온 약식서평은 이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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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나믹 매니지먼트, 과연 유용하며 실용적인가?

2013.08.12

김인호 교수

김인호 명예교수

 

몇 해 전 어느 제조업 중심의 대기업 인사교육담당 책임자라는 사람이 자사 중견간부사원을 대상으로 한 산업교육 프로그램에 동참해 달라며 강의주제를 혁신경영으로 요청해 온 적이 있었다. 그는 그 회사에서 16년간이나 인사교육에 관해 정평이 나 있는 분이라고 교육생 누군가가 필자에게 귀 뜸해 주었다.

 필자는 강의에 앞서서 그 회사의 기본정보를 알고 강의에 임하고자 그 인사교육담당 책임자에게 다음의 질문을 던져보았다.

 

1) 귀사의 주종사업이 무엇이며 어떤 제품/서비스를 어느 시장의 어느 고객의 무슨 니즈를 충족시키려고 생산・제공하고 있는가?

2) 제품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 무엇이며 어떤 면이 고객에게 어필하고 있다고 보는가, 그리고 타사 것보다 더 우수하거나 부족한 면은 무엇인가?

3) 제품생산에 들어가는 핵심부품이 몇 개 정도이며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게 어떤 것이며 그것을 어디의 누구로부터 조달 받는가?

 

그런데 그의 답은 놀랍게도 이들 질문에 대해 한 발짝만 더 나아가면 거의 막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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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즈맞춤혁신, 대박성공의 진원지

2013.07.31

기업이 지나치게 영리만을 꾀해서는 안 된다는 사회적 요구를 반영해 가치창조(또는 부(富)창조)등의 우호적인 표현을 빌려서 기업존재에 대한 사회적 당위성을 부각시키려는 의도도 있지만 어떻게 표현하든 기업의 본질은 여전히 이익추구에 있다.

 

김인호 교수

김인호 명예교수

기업 CEO가 지녀야할 자질과 역량을 기업의 존재목적과 관련시켜보기로 하자. 기업의 궁극적 목적은 이익추구다. 기업이 지나치게 영리만을 꾀해서는 안 된다는 사회적 요구를 반영해 가치창조(또는 부(富)창조)등의 우호적인 표현을 빌려서 기업존재에 대한 사회적 당위성을 부각시키려는 의도도 있지만 어떻게 표현하든 기업의 본질은 여전히 이익추구에 있다.

 이는 어떤 상황에서건 리더로서 기업 CEO의 소임과 책무는 기업본연의 목적인 이익추구에 충실해야함을 강조해 준다. (여기서 이익추구에 충실해야 함에는 물론 옳은 방법으로 추구해야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으므로, 기업이나 이익추구란 말만 나오면 대뜸 그러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익만 많이 내면 되느냐며 대드는 단세포 인간들과 또 기업은 돈 버는 조직이 아닌 사회봉사기관 정도로 착각하고 있는 얼빠진 친구들이 현재 우리 사회에 너무 많기에 본 독자들 중에는 그런 류의 인간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이익추구에 충실한 기업 CEO의 대표적 인물들은 어떤 분들일까? 물론 성공한 기업 CEO들임이 틀림없지만 가장 두드러진 분들은 아마도 자수성가(自手成家) 억만장자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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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사조(時代思潮) 탁류에서 우리의 선택은..

2013.07.15

시대사조(時代思潮) 탁류에서 우리의 선택은 양자역학(量子力學)에서는 원자레벨 이하에서는 확정적 질서가 아닌 다만 하나의 패턴을 갖기 때문에 거기에서의 관계는 단지 확률로서만 얘기될 수 있다고 전한다.

 

김인호 교수

김인호 명예교수

선의의 거짓말(a good lie)이라는 말이 자연스레 쓰이곤 한다.

 

사람에 따라서 거짓말은 절대적으로 나쁜 것이기에 선의의 거짓말은 절대로 있을 수가 없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이 다수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유익을 가져오거나 적어도 불이익을 가져오지 않는 한 거짓말이라도 선한 것일 수 있다고 주장하며, 또 어떤 사람들은 아예 거짓과 거짓말을 전략・전술수단으로 활용하여 인간이 지닌 이해력과 판단력은 물론 양심을 마비시켜 선과 악, 정의와 불의, 옳음과 그름에 대한 인식을 헷갈리게 하여 공산주의 이념을 구현시키려고까지 한다.

 물론 이런 주장을 놓고, 각자가 옳다고 생각하면 그것을 옳은 것이라고 인정해야 한다는 상대주의(relativism)와 각자마다의 다양성을 존중해야 한다는 다원주의(pluralism)가 현대를 풍미하고 있다. 그러함에도 상대주의와 다원주의에서의 주장과는 달리 거짓과 거짓말을 전술적・예술적으로 구사해 온 공산권은 이미 망하는 길로 접어든 북한만 남겨두고 모두 망했거나 사라진 사실을 역사는 생생하게 전해준다.

 거짓과 거짓말 이외에도 동성애, 사형제도폐지, 안락사, 낙태, 피임, 수간 등등에 대해서도 서로 상충되는 무수히 많은 주의주장들이 세상에 난무하고 있다.

 상대주의 하에서는 절대적으로 옳은 것도 절대적으로 그른 것도 없다며 모든 게 다 수용되게 되다 보니 서로 상충․모순 된 것들도 동시에 공존하게 된다. 그리하여 상대주의가 지향하는 상호이해(相互理解)에 의한 공존(共存)은 일시적인 것으로 그치게 되고 세월이 흐름에 따라 오히려 이견(異見)과 반목(反目)과 투쟁(鬪爭)과 전쟁(戰爭)을 불가피하게 만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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