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아니 2010년도 열흘 정도 남았나? 나의 마음도 무언가에 쫓기듯이 종종 발걸음이 빨라진다. 왜 그럴까? 왜 그렇게 쫓기는 심정이 되는 것일까? 아무리 나의 쫓기는 심정을 분석하려 해도 확실한, 그럴듯한 대답이 없다.올해는 조금 느긋하게 년 말을 보내려고 했지만 여지없이 나는 또 이렇게 2011년을 향해 내몰리는 듯한 심정이 되고 만다. 급기야는 어제 밤에 또 무언가에 쫓기는 꿈까지 꾸고 말았다.캐나다의 친구 정교성이 크리스마스 카드를 보내왔다. 수십 년간 꼬박 보내던 그, 최근 몇 년은 소식이 없었다가 올해 다시 그의 카드를 받은 것이다. 언제나, CANANA의 symbol이 꼭 들어간 그런 카드를 보내온다. 언제 한번 그와 그의 새 wife를 만나보게 되려나?
나는 오랫동안 성탄 카드를 친지들에게 보내지 못하고 살았다. 그것이 그렇게 힘이 들게 느껴졌지만, 사실은 역시 그것은 핑계에 지나지 않았다. 한마디로 내가 소식을 끊어버리고 산 것이다. 그 결과 하나하나 친지들이 주변에서 사라짐을 알았다. 오랜 동안 떨어져서 산다는 것은 바로 그렇게 친하던 친지들이 하나씩 둘씩 사라짐을 뜻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절대로 내가 의도한 바는 아니었다. 또한 그렇게 연락이 끊어진 사람들과 다시 연결이 되기는 생각보다 쉽지를 않다. 하지만 노력을 다시 하고 있다. 작년부터는 가까운 사람들부터 성탄카드를 조금씩 보내기 시작했다. 올해도 조금은 늦었지만 이제부터 보내기 시작을 할 것이다.
내일은 정말 오랜만에 ‘한국어 고백성사’를 할 예정이다. 레지오에 입단을 하면서 생각한 것 중에 정기적인 고백성사를 심각하게 다시 시도할 것도 들어있었다. 최소한 전통적으로 교회에서 하라는 것은 원칙적으로 피할 생각이 없다. 천주교 교리에 다 그런 것들이 필요하니까 하라고 할 것이 아닌가? 근래에는 거의 미국본당에서 미국인 신부님들께 영어로 고백성사를 드렸었다. 비록 형식적인 기분이 많이 들었지만 하고 나면 그렇게 마음이 후련할 수가 없었다. 그것 조차도 사실 3년 전부터 못하고 있지만.. 영어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고백성사’ 그 자체가 문제였다. 나의 ‘치부’를 들어내야 하는 작업은 사실 쉬운 것이 아니다.
내가 아는 신자들 중에도 잘못한 것을 찾는 것이 쉽지 않다고 하는 이야기를 듣곤 하는데, 어떤 때는 나도 이 말에 수긍이 가곤 한다. 하지만 이것이 함정인 것을 또한 나는 안다. 비록 행동에 문제가 없었다고 해도 나의 마음에 문제가 없었다고 할 수 있을까? 비록 나의 의도가 아니었다고 해도 그것이 남에게도 그렇게 이해가 되었을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문제는 나같이 이렇게 오랫동안 그런 것들이 쌓여가면 그것들을 기억하는 것이 참 힘들다는 것이다. 몇 년 전에도 그렇게 쌓인 것을 하려고 무척 고생을 했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이것을 조금 체계적으로 하는 방법이 있었다. 2천년 전통의 가톨릭교에 이미 그런 것들이 있다는 것은 사실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 많은 성인,성녀들이 이미 다 겪었을 것이 아닌가? 그 중에서 ‘양심성찰’이라는 아주 체계적인 이론까지 있었는데, 그것이 고백성사의 어려움을 극복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 ‘죄’를 찾는 것도 그렇지만 사실 나에게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고백성사 그 분위기의 ‘어색함’에도 있다. 특히 고백성사를 하기 전에 느끼는 것.. 하지만 또한 안다. 고백성사 후의 그 날라갈 것 같은 그 기쁨.. 죄를 용서 받았다는 것을 느끼는 것은 흔히 겪을 수 있는 일이 아닐 것이다.
얼마 전에 한국 과천에 사시는 평창이씨 익평공파 29세손 종친님(사실은 아주 젊은 entrepreneur) 이종환 님이 족보의 무려 1700여 쪽을 확인하면서 나의 아버님의 성함이 보이는 몇 쪽을 scan을 해서 보내 주셨다. 그 동안 추측으로만 알던 것을 다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직계조부님들의 거주가 경기도 평택에 집중되어 있었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하지만 문제는 이제 부터 인가.. 해답보다는 의문이 훨씬 더 많아지게 된 것이다.
그 중에 제일 궁금한 것은, 아버님의 사촌들이 거의 6명이나 되는데 그들의 후손들이 전혀 기재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무엇을 뜻 하는 것일까? 물론 나의 이름도 거기에 없었다. 그러니까 우리의 증조부이신 이종득 할아버지의 후손이 28세손에서 최소한 족보에서는 ‘전멸’인 것이다. 그분들의 ‘남자’ 후손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라면, 나머지는 역시 동족의 비극 육이오 때문이 아니었을까? 우리의 할아버지들이 모두 북한에서 사셨을까? 최소한 나의 직계 할아버지 ‘이경호’ 님은 서울에서 사셨다고 들은 적이 있는데..그리고 나의 삼촌 ‘이준모’.. 호적에도 없는 그 삼촌은 사실 어머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잠깐 들은 적이 있었다. 육이오 전쟁 때, ‘월북’을 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그래서 우리의 호적에서 없어진 것이다. 이것이 무슨 해괴한 역사일까? 아버지는 공산당에게 당하시고, 그 동생은 빨갱이였단 말인가? 정말 그 짧은 공산당 혁명 역사가 이렇게 한 가정을 파괴할 수 가 있을까? 할말을 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