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히 한 겨울 날씨가 된 3월 1일, 쉽게 말해서 지나간 1월은 거의 늦은 가을이나 이른 봄 날씨였고, 2월 한달 동안은 완전한 겨울인 듯 을씨년스러운 날씨의 연속이다. 올해 Groundhog의 예측대로 봄이 일찍 온다는 것은 완전히 엉터리였음이 들어난 것이다.
2월의 마지막 날인 어제는 오랜만에 집 근처에 있는 타이 식당 Lemon Grass에서 연숙과 식사를 하였다. 집에서 밥을 해 먹기 귀찮아서가 아니고 무언가 ‘기념’을 하려고 일부러 간 것이었다. 오늘 3월 1일은 우리가 ‘매일 미사’를 시작한지 만 1년이 되는 날인 것이다. 그러니까, daily Mass 1 year Anniversary정도라고나 할까.. 하도 축하할 것이 없는 요새지만 이런 것도 자축을 하나.. 하는 생각도 들지만, 우리 둘에게는 무엇 보다 귀중한 의미를 가지기에 매년 3.1절과 함께 기념하기로 한 것이다.
2010년 가을 내가 레지오 마리애 행동단원 생활을 시작한 것도 큰 의미가 있었지만, 2012년 3월 1일에 시작한 매일미사 참례 결정은 더 큰 의미를 갖는다. 우선 일주일에 한번 참석하는 레지오 마리애와, 매일 아침 9시까지 비록 집 근처지만 성당에 가서 아침 1시간을 지낸다는 것은 생각하면 보기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 비록 눈은 별로 없는 이곳이지만 흔한 말로,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성당엘 다닌 것이다. 처음에 시작할 때는 솔직히 얼마나 갈까 둘 다 자신이 없긴 했다. 하지만 그것은 한마디로 기우였다. 우리가 의지로 나가는 것 이외에 무언가 우리를 도와주는 느낌도 떨칠 수 없는 것이다.
작년 3월 매일 미사를 하면서 가끔, 지금은 작고하시고 없지만, 레지오 동료단원 요안나 자매가 같이 와서 미사를 보곤 우리 집에도 들려서 식사도 하기도 했다. 그 자매님의 말씀으로, 미사와 영성체가 얼마나 신심생활에 도움이 되는 가를 배우기도 했다. 신심생활에 주는 의미를 떠나서, 이렇게 둘이서 매일 집밖으로 ‘나간다는 사실’, 사람들을 만난다는 ‘사회적’ 의미도 생각해 보니 참으로 중요한 것이었다. 과거 오랜 시간 집에 틀어 박혀서 백일몽을 꾸던 때를 생각하면 그것은 참 위험한 생활 방식이었음도 알게 되었다.
타이 식당인 Lemon Grass, 연숙은 항상 ‘팟타이‘, 나는 100% ‘Broccoli Tofu‘를 먹는데, 정말 주방장의 조화인지 언제나 ‘똑같이’ 맛이 있다. 이것은 chef가 변함없이 그곳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이라서 그런지 신문에 아주 좋은 review까지 났다. 꽤 많은, 이름있는 식당들의 수명이 그렇게 길지 못한 때에 이곳은 1994년에 open한 이래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앞으로도 계속 그 자리에 있어서, 다른 일로 ‘자축’을 할 일이 있을 때 우리에게 service를 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
Homecoming, 다른 말로 ‘귀향‘ 정도가 될까? 하지만 영어와 한글의 어감은 분명히 다르다. 아니 달라야 할 것이다. 언어는 그 원산지의 문화를 나타내는 것이고, 영어의 homecoming은 아무래도 서구문화적인 것, 한글의 귀향은 한반도의 배경을 흠뻑 가지고 있는 그런 것이다. 귀향은 늙어가시는 어머님을 만나러 오는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어도 어머니, 그리고 고향이 그리워 시골길을 걷는 나그네가 연상이 되고, homecoming.. 하면 어떨까.. 폭풍설이 쏟아지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산속에 있는 자기가 자랐던 통나무 집, 그곳에는 사랑하는 어머님이 계신 그런 집으로 기를 쓰고 찾아가는 다른 나그네, 그런 것이다.
사실 오늘 나와 연숙은 서양적인 homecoming에서 한국적인, 김치냄새기 풍기는 듯한 우리의 고향 집으로 ‘귀향한 온 기분이었다. 1994년 이후 ‘처음’으로 일요일 주일 미사를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에 와서 본 것이다. 거의 20년 만인가.. 물론 2010년 가을부터 이곳에 레지오 단원으로 화요일 마다 들락거리고, 일요일에도 ‘과외 행사’에 참여를 하긴 했지만 “진짜” 미사를 이곳에서 본 것은 아주 우리에게는 커다란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한마디로 ‘고향’에 온 것이다. 1994년 즈음 이곳을 ‘완전히’ 떠날 때, 언제 다시 올지는 전혀 idea가 없었고, 그럴 마음도 없었다. 우리, ‘최소한 나’는 완전히 하느님을 떠나게 된 것이다.
우리 집 근처에 있는 미국성당에 꾸준히 다니면서 익숙해지고 친근해지고 해서, 더 ‘귀향’할 구실도 없었지만, 하느님은 오묘하신가.. 아주 작은 발걸음으로 우리를 ‘고향’으로 이끌었다. 2010년 가을 레지오에 입단하기 전과 비슷한 느낌.. 무엇인가 변하게 되리라는 불안하기도 한 심정 속에서 무언가 ‘결단’이 필요함을 느끼며 몇 개월이 지났는데, 우연만은 아니게 오랜 옛 ‘후배, 지인’ 설재규씨와 재회를 하게 되고, 그것의 열매가 오늘, 우리의 ‘귀향’으로 goal-in을 하게 되었다. 이제는 이런 모든 것들이 ‘우연’만은 아님을 느낀다.
20년이 지난 주일미사의 풍경은, 흡사 내가 Rip Van Winkle이라도 된 듯한 느낌을 주는 그런 것이었다. 어제 본 듯한 연대동문 이원선씨를 그곳에서 보았지만, 역시 그와 알았던 것도 20년 훨씬 전이었다. 어쩌면 10년 20년.. 이렇게도 오래된 세월이 지났단 말인가? 모두가 생소한 얼굴들.. 내가 알았던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갔단 말인가? 현재의 목표가 한 달에 한번 이곳에 오려는 것이지만, 그것도 어떤 방향으로 나를 이끌고 가게 될지, 나도 자신이 없다.
Hagood Hardy – The Homecoming
귀향과 homecoming이란 단어를 떠 올리면서 연관되어 생각나는 것, 바로 The Homecoming 이란 제목의 연주 곡(instrumental).. 역시 아련히 떠오르는 이 단어와 그 감미로운 연주 곡.. 이 감미로운 곡은 1970년대 말에 총각으로 Ohio State University에 다닐 때, office (graduate student)에서 자주 듣던 것이고, 그 때마다 세상에서 저렇게 감미로운 것이 있을 까 감탄을 하곤 하던 그런 곡이었다. 한번은 나의 옆자리에 있던 전기과 후배 이재현씨에게, 나는 저 곡을 들을 때마다 ‘쉬 마려울 정도로’ 찌릿하다고 ‘고백’을 해서 모두 한바탕 웃었던 기억도 생생하다. 그 당시에는 그 곡의 title을 몰랐고 아주 후에 그것이 The Homecoming임을 알았다. 이 곡은 캐나다 출신작곡가 (Hugh) Hagood Hardy 의 곡으로, 1975년에 발표된 것으로 ‘일설’에 의하면 TV movie였던 (Canada) drama: Anne of Avonlea/Green Gable에 삽입된 곡이었다고 한다.
고향.. 하면 어렸을 적에 일제시대 때를 연상하곤 했다. 그 어렵던 시절 고향을 ‘강제로’ 떠나 만주 등지로 갔던 동포들.. 그들은 찌들게 가난했던 고향이었지만, 죽을 때까지 그곳을 그리워했다. 세월이 지나고, 6.25 동란 때는 ‘지옥’같던 북한 땅을 떠났던 동포들.. 그래도 죽을 때가지 갈 수 없었던 고향을 그리며 살았다. 그 이후에는 어떠한가? 멀리 갈 필요가 없이 나도 지독하게도 넓은 바다를 건너와 또 ‘죽을 때까지’ 고향을 그리며 산다. 아니 이제는 가 보아도 ‘없어진’ 고향을 꿈 속에서 그리는 것이다. 아마도 이것이 한글 단어 ‘고향, 귀향’ 이 주는 영원한 느낌이고 의미일 듯 하다.
¶ 2013년 2월도 반을 넘기고 이제 겨울과는 아주 멀어진 듯한 날씨에 익숙해지더니, 역시.. 자연의 ‘엄마’, mother nature는 못 말리나? 예고도 거의 없이 하루아침에 영하..로 그것도 낮 기온이 영상을 간신히 유지하는 싸늘함, 역시 아직도 춘분이 공식적인 봄의 시작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듯하다.
모처럼 한가한 날 들을 맞이하고 있지만, 이런 날이 계속되어도 문제다. 사람은 역시 몸이고 마음이고 계속 움직여야 사는 것이니까. 2013년 사순절이 지난 수요일에 Ash Wednesday(재의 수요일)로 시작이 되었지만, 사실 우리의 매일 routine이 크게 바뀐 것이 거의 없다. 지난 일년을 거의 사순절처럼 살려고 해서 그런가.. 이건 너무 자화자찬일 것이지만. 커피도 계속 마셔대고, 즐기던 것을 끊은 것도 별로 없는 것 같다.
올해의 사순절에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성취’할까.. 이것이 계획으로 이루어지기는 쉽지 않을 것이지만, 그래도 성 루도비코 마리아의 33일 봉헌 과정에 다시 한번 도전해 볼 마음은 아직도 있다. 2월 20일부터 시작이 되니 만큼 아직도 생각해볼 여유는 있다. 지난 해 바쁘고 힘들었던 한 여름에 열심히 33일 과정을 거쳤고, 그 후에 내가 느꼈던 것이 생각보다 훨씬 좋았지만, 알았던 것 보다 의문과 생각할 것들이 더욱 많아졌음을 알았고, 역시 다시 한번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기에 또 역시, it’s now or never의 정신으로 도전해 볼까..
¶ 요즈음 내가 즐기며 시간을 죽이는 것이 있다면 역시 computer system hacking정도 밖에 없을 것인데, 그 중에서도 요새 나의 관심은 mobile OS, 그 중에서도 Google의 Android (on Nexus tablets, mobile phones) ecosystem이 제일 관심이 간다. 지난 가을에 연숙 생일 때의 선물이 Google의 Nexus 7 tablet이었고, 올해 들어서 우리 가족이 family plan으로 T-mobile Samsung Galaxy phone으로 바꾼 뒤에 그 쪽으로 관심이 간 것이다. 두 system 모두 Android system이어서 이것 하나만 익히면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을 듯하다.
이런 것들이 요새 들어서 워낙 바쁘게 변하고 있어서 하나를 배우면 2~3년 만에 ‘고물’이 되어 버린다. 이런 것들 모두 한마디로 embedded computing device들이고, 이것을 지난 25년 넘게 ‘직업적으로 만들어’ 온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감회가 깊다.
¶ 정말 오랜만에 김인호 형으로부터 email이 왔다. 지난 연말 연시 때 연락이 되지를 않아서, 혹시 아프신가.. 아니면 세계일주 여행을 가셨나 했는데, 자세한 것은 모르겠지만 그 동안에도 계속 ‘연구’만 하신 듯, ‘김인호의 경영, 경제 산책‘이라는 장문의 column을 쓰셨고 그것의 web links(1, 2, 3, 4)도 같이 보내 주셨다. 잠깐 읽어보니 경영, 경제 쪽의 전문용어들이 많이 나와서 그런지 나에게는 모두 생소한 것이 많았다.
나의 ‘경제, 금융’ 등에 대한 일반적인 인상이 대부분 부정적이어서 더 그렇게 느껴졌을 것이다. 전문 용어를 제외하면 이런 평론의 논지는 짐작이 간다. 우리 세대 (인호 형은 나보다 조금 위지만) 입장의 경제, 경영론이겠지만, 그런 매체에 실린다는 사실은 세대에 구별되지 않는 보편성이 있다고 생각이 된다. 형만 동의를 한다면 그 평론들을 나의 blog에 전재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 2월 중순에 느끼는 으스스한 추위와 ‘라디오엔 대설주의보, 남쪽엔 꽃 소식, 영동 산간 지방의 때아닌 폭설.. 하나도 아까울 것 없는 세월’을 얘기하는 김재진 시의 구절이 멋지게 어울리는 그런 날이었다.
세월
김재진
그런 잠 있었네. 낮고 흥건한
간다던 이 가고 없는
빈방에 불 켜놓고
후회없이 자리라 저녁 거르고 누운
라디오엔 대설주의보
남쪽엔 꽃소식 분분한데
영동 산간 지방엔 때아닌 폭설
환한 이마 찌푸린 채
가고는 오지 않을
아니면 오고는 가지 않을
그러나 사실은 가든지 말든지
아까울 것 없는 세월
하나도 아까울 것 없는 세월
때로는
잘 나가던 시절의
해 놓고 지키지 않던 맹세 따라
가리라 가리라 노래하다 못간
그런 날 있었네.
품팔던 사람들 돌아오는 길목마다
소리없이 타버린 심지처럼
버려야지 버려야지 마음먹다 울던
그렇고 그런
그래서 그런
낮고 흥건한 세월 있었네.
¶ 40년 전 이 맘 때는 무엇이었을까? 그러니까 1973년.. 그 해 6월에 나는 나를 25년 동안 품에 안아주었던 고향산천을 등지고 미국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뒤는 나의 긴 이어지는 역사가 되었다. 돌이켜보는 나의 마음은 어쩐지 슬프기도 하지만, 그 때는 희망과 낭만의 쌍곡선의 연속이었고, 그 당시의 추억은 역시 우리의 등대 pop song에 고스란히 얽혀있다.
그 당시에 어떤 것들이, 그 중에서 Lobo의 노래들은 쓰레기 같은 많은 것들에 눌려서 오랜 동안 숨어있었다. 다시 들어도 그것은 역시 ‘명곡, classic’이라고밖에 볼 수가 없다. Don’t expect me to be your friend, Me and You and a Dog named Boo.. 정말 정말 오랜만이다!
지나간 일요일, 1월 27일은 ‘피로하게만 보이는’ 우리 집에 때아닌 대청소 하던 소리가 들렸다. 얼마만인가.. 머리 속의 ego만 커진 아이들이 떠난 우리 집은 고요하기만 하고, 별로 어질러 놀 만한 것도 없지만 보이지 않는 먼지는 곳곳에 도사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의 대 청소는 아래층에만 있었다. 위층까지 할 힘도 없고, 절실한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다. 청소를 했던 이유는 의외로 간단했다. Guest들이 오기 때문이었다. 얼마 만에 오는 손님들인가..
이번의 모임은 내가 붙인 이름이 ‘mid-winter classic‘ 이다. Mid-Winter는 1월 말에서 2월 초 정도에 있다는 뜻이고, classic은 이 모임이 그만큼 오랜 전통을 자랑한다는 뜻이다. 얼마나 오래 되었을까.. 아마 15년은 되었을 듯 싶다. 이 정도면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닐 것이다.
4집 부부(가족)가 ‘가끔’ 모여서 저녁식사를 같이하는 이 그룹은 시작이 15년 전쯤, 서울고,서강대 출신 최동환 (Phillip Choi), aka, ‘최형’ 과 연관’이 되면서 시작이 되었다. 그 훨씬 전에 우리 부부가 아틀란타 한국학교 에서 가르칠 때, 나의 반에 최형의 외동 딸, 진희(Alicia)가 있었고, 최형은 ‘아빠’로서는 드물게 학교에 얼굴을 보이곤 했었다. 그때 그의 인상이 참 자상한 아빠로 남았고, 항상 웃는 모습도 좋은 인상으로 남았던 기억이다.
우리가 한국학교를 떠나면서 헤어지게 되었지만, 또 다른 인연이었을까.. 우리 작은 딸 나라니와 한국학교에서 같은 반에 있었던 인연으로 나라니의 생일에 진희를 부르게 되었고,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런 때에는 대부분 엄마들이 아이를 데리고 오곤 하는데, 그 당시 진희는 꼭 아빠가 데리고 왔기에 나와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사실 이것이 인연이었다. 엄마가 데리고 왔더라면.. 아마도 이런 것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항상 웃고, 얘기를 좋아하는 최형 성격 덕분에 우리는 금새 통성명을 다시 하고 보니 그는 서울 최고 명문인 덕수국민학교, 서울고등학교, 서강대 화학과 출신으로 현재는 ‘사업’을 한다고 했다. 그 후에 우리 집 근처의 어떤 한국식당에서 정말 우연히 최형 가족과 우리 가족이 같이 식사를 하게 되는 다른 ‘우연’을 맞게 되고, 드디어 진희 엄마도 보게 되었다. 둘 다 나이가 우리부부보다 한두 살 정도 아래였던 이곳에서 ‘고르기’ 힘든 부부 ‘친구’를 얻은 기분이었고, 그 이후 우리는 서로의 집을 왕래하며 식사를 나누게 되었던 것이다.
이곳에서 ‘친구’를 별로 사귀기 꺼리며 살던 나도 이런 모임은 거부감이 없었다. 정말 오랜만에 ‘친구 수준의 한국말’을 다시 즐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이가 비슷한 것은 참으로 좋은 것인가.. 서로 공감할 수 있는 것들이 수도 없이 많기 때문일까.. 추억의 역사를 공유한다는 것은 이렇게도 좋은 것일까.. 만나기만 하면 어렸을 적 서울거리를 회상하며 열변을 토하곤 했으니까..
최형은 역시 성격 ‘탓’인지 사람들을 좋아하며, 잘 사귀었고, 특히 가깝게 지내던 ‘친구’ 가족들이 몇이 있었다. 곧바로 자연스레 우리는 그들과 같이 모이게 되었다. 그 중에는 Ohio State동문인 나이가 한참 밑(10살 이상)인 ‘전 사장’도 있었고, 최형의 서강대 동문인 윤형, 지금은 2005년에 타계해서 없는, 이대부고,경희대 출신 박창우씨가 있었다. 그렇게 모인 사연이 참 다양하고 재미있어서 아주 인상적이었고, 역시 최형의 ‘사람을 끄는 힘’이라는 공통분모가 이모임에 있었다고 느낀다.
직업도 다양해서, 최형네는 jewelry wholesale, 윤형댁은 liquor retail, 전사장네는 Italian Furniture, 박창우씨 댁은 fashion clothing retail.. 그러니까 이들은 모두 전형적인 businessmen들이었다. 나만 예외적으로 비교적 시간의 여유는 있지만 항상 cash가 모자라는 월급쟁이여서, 항상 나는 ‘공통관심사 화제’에서 애를 먹으며 그저 이 ‘이상한 나라의 얘기’를 듣기만 하곤 했다.
이중에서 2005년 여름이 정말 아깝게 타계한 박창우씨, 생김새에 비해서 호탕하고, 잘 놀며, 활달한 사람, 서울 명동을 중심으로 한 젊은이의 중심지에 대한 해박한 경험과 기억력은 우리를 항상 놀라게 했다. 특히 어느 곳에 무슨 술집, 다방이 있다는 것은 정말 ‘사진과도’ 같은 기억력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나는 이 ‘양반’의 얘기가 제일 재미있었고 실감나고, 흡사 time machine을 타고 1960-70년대를 간 것과 같은 기분에 빠지곤 했다. 특히 ‘동네 친구’인 트윈 폴리오 folk duo 중에 윤형주에 대한 이야기, 당시의 명소였던 명동 OB’s Cabin 에서 술김에 노래를 부르던 조영남을 ‘팼던’ 이야기 등등.. 나에게는 주옥과도 같은 이야기들.. 언제까지나 들으려 했지만 하느님도 무심하시게 너무도 일찍 데려 가셨다.
이날 모임에서 나를 놀라게 했던 소식은, 최형의 외동 딸, 진희 (우리 딸 나라니 친구)가 놀랍게도 우리가 활동하고 있는 레지오 마리애의 ‘활동단원’이 되었다는 사실.. 나에게는 너무도 충격적이었다. 진희는 아주 자유분망 (easy going)해서 어떻게 이렇게 ‘조직적인 신심단체’에 가입을 했을 까 상상이 되지를 않았기 때문이다. 세대적인 격차를 초월해서 꾸리아 모임에서 그 ‘애’를 보게 될 생각을 하니.. 만나면 무슨 얘기를 해야 할까 하는 생각에 사실 당황을 할 정도였다. 이것은 정말 ‘좋은 소식’일 것이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가톨릭 바리스타.. Catholic barista? Catholic+barista Hmmm.. 천주교 바리스타, 바리스타로 일을 하는 천주교 신자, 아니면 어떤 커피 숍의 이름, 나에게는 조금 생소한 것 들인데 이런 것들이 지난 몇 주일 동안 실제로 나의 눈앞에 나타났다. 처음에는 성당 주보에 그런 말들이 나타났고, 그 후에는 숫제 그 실체가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이다. 성당 주보에는 ‘바리스타 교육’ 이란 것으로 나타났고, 그 후에는 실제로 2주 동안 그 교육이 개인당 $250의 비용으로 성당 내에서 실시가 되었고, 신부님 강론 중에는 평상 미사시간 보다 더 길게 소개 되기도 했다.
가톨릭 바리스타 ‘운동’의 주역은 LA지역 성 아그네스 한인성당의 pastor 이신 최대제 신부님, 얼마 전 본당 주보에서 조그만 기사를 본 기억이 났고, 1월 초에 우리의 주임 하태수 신부와 서로 자리를 바꾸어 2주간 사목을 했다. 그때에 50+ 명을 대상으로 ‘바리스타 교육’과 뒤따라서 시험까지 다 끝냈다. 나는 최신부님이 미사 중, 미사 후에 짧지 않은 시간을 “coffee를 통한 선교”에 대해 역설을 하는 것을 듣고 처음에는 사실 의아한 심정이었다. 난생 처음 들어보는 ‘선교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그 신부님은 ‘세계 처음’을 강조하며, ‘이냐시오 영성까페‘를 소개했는데, 이 말은 아마도 예수회와의 연관성을 암시하는 것으로 들렸다. LA 성 아그네스 성당에 실제로 그 영성까페가 있다고 했고, 그곳에서 일할 수 있는 ‘바리스타’들을 훈련, 배출시키고 있다고 했다. 커피를 좋아하는 나로써는 그런 얘기를 들으면 상상만 해도 즐거운 기분이 됨을 느낀다. 편안하고 멋진 환경에서 그윽이 퍼져 나온 커피 향기는 생각만 해도 좋은 것이니까.
하지만 어떻게 ‘까페’라는 것이 성당이란 환경 속에 있을 수가 있을까? 듣기에 좋은 것이지만 실제로 자세히 들어가면 의문과 문제 투성이인 concept이라는 생각도 든다. 각가지 기발 난 idea로 ‘시장’을 개척해 나가는 개신교 mega church들이 이런 concept을 그 동안 몰랐을까? 선교를 목적으로 한다면 왜 하필 coffee 일까? 일단 이것이 이미 ‘운영’이 되고 있다고 하니까, 이런 나의 의문에 대한 ‘해답’이 이미 나왔을 것 같기도 하지만, 어떨까?
¶ 새벽 잠결에 무언가 세차게 똑똑 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어렴풋이 밝아오는 새벽, 밖을 보며 그 소리가 무엇인가를 알아차렸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주제넘게’ 비가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새빨갛게 떠오르는 태양이 가득한 성탄 전날 보다는 아마도 이렇게 잿빛하늘이 사실은 더 포근한 감을 주어서 좋다.
올해의 성탄은 예년과 조금 다르게 기다린 셈이다. 제일 눈에 뜨이는 것은 이제까지면 12월 초부터 ‘노상’ 즐겨 듣던 주옥 같은 크리스마스 캐럴을 올해는 ‘거의’ 듣지를 않았다는 사실이다. 내가 기억하는 한 이것은 아마도 처음이 아닐까.. 그것과 비슷하게 holiday decoration도 며칠 전까지 피하고 살았다. 물론 나이 탓도 있었겠지만, 사실 올해는 정말로 성탄의 뜻에 더 생각하고 싶었다. 그것이 전부다.
¶ 12월 24일.. 오늘은 조금 특별한 날이다. 내일 성탄을 하루 남긴 오늘, 우리의 한국본당 주임신부, 하태수 미카엘 신부님의 영육간의 건강을 위한 전 레지오 단원들의 묵주고리기도가 그 대장정의 막을 내리기 때문이다. 이것은 지난 3월 26일 사순 제5주일 시작되던 월요일, 주님탄생예고 대축일 날부터 시작이 되었다.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소속 전 레지오 단원이 하루에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단수의 묵주기도를 하는 것인데, 밤 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대에 골고루 나누어져서 끊임 없이 돌아가며 바치는 기도.. 그래서 고리기도였다. 주임 신부님을 위한 것이지만 결국은 우리 레지오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문제는 하루에 한번 ‘빠지지 않고’ 정해진 시간에 5단내지 10단을 바치는 것.. 정말 신경이 많이 쓰이는 것이었다. 잊지 않으려고 숫제 cellphone에 alarm을 해 놓아서 사실 잊을 수는 없겠지만, 그 시간에 하던 것을 접어두고 묵주기도를 바치는 것은 실제적으로 거의 불가능할 때도 많았다. 그렇게 해서 몇 번은 한두 시간 지연되기도 했지만, 기적적으로 하루도 빠지지 않고 오늘 마지막을 장식했다.
조금 더 의미 있는 기억도 있었는데, 7월 26일 우리 자비의 모후 쁘레시디움 단원 은요안나 자매가 기나긴 암투병 끝에 선종을 하셨고, 나는 곧 이어서 그분이 시작했던 고리기도를 이어 받아서 오늘 끝낸 것이다. 내가 원래 하던 것은 연숙이 덤으로 맡아서 했는데, 이것을 물려받아 할 때마다 저 세상에 가신 요안나 자매를 생각하며 묵주기도를 바치곤 했다. 올해는 참, 이런 뜻 깊은 기억들이 제법 있었다.
¶ 매년 성탄절이 다가오면 조심스럽게 각오를 하는 것이 하나 있었다. 지난 일년 동안 ‘못 보았던’ 친지들에게 성탄 카드를 ‘우체국의 우편’으로 보내는 것이다. 전통적인 종이로 만든 카드와 인터넷으로 보내는 ‘가짜 카드’는 정말 의미와 느낌이 다르다. 편하다는 한가지 이유로 모두들 그것을 보내지만, 받아보는 입장은 그렇게 마음이 편하지 않다.
문제는 그 진짜 카드를 진짜로 써서 진짜로 우체국 편지로 보내는 것이 왜 그렇게 힘이 든단 말인가? 올해는 결국, 보기 좋게 실패를 해서 딱 2통의 진짜 카드를 신부님께 보낸 것이 전부가 되었다. 성탄 전야에 이제는 조금 마음이 편한 것이 이제는 모든 것이 늦었다는 생각 때문이다. 하지만 석연치 않다. 무슨 방법이 없을까? 비록 가짜 카드지만, 조금 더 정성을 들이면 안 될까? 그렇다.. 진짜 카드를 인터넷으로 ‘보여주면’ 되지 않을까? 그래서 부지런히 진짜 카드를 scan을 하고 사연을 이렇게 써 본다.
죽마고우 원서동 크리스마스의 환상
내가 알았던 모든 친구들.. 그 중에서도 원서동 죽마고우들: 최승철, 김동만, 안명성, 박창희, 손용현, 유지호.. 비록 서로의 늙어가는 모습은 못 보고 살지만 마음 속에 간직된 어린 우정은 하나도 변함이 없다. 성탄과 새해에 어디에 살건, 어떻게 살건 간에 건강하기 바란다!
오늘 우리는 주일 미사 후에 Panera bakery에서 ‘마지막’ 아침 식사를 하였다. 아침 식사 라기에는 부끄러운 Asiago-Cheese, Cinnamon-crunch bagel과 Hazelnut coffee정도지만, 그것이 문제가 아니고, ‘마지막’란 것이 문제였다. 이틀 뒤에 우리에게 너무나 정이 들었던 이곳이 ‘이사’를 가게 되어서 문을 닫는 것이다.
한마디로 일요일 아침 미사 후에 우리가 갈 곳이 없어진 것이다. 일요일 아침에 거의 예외 없이 꼭 들려서 ‘똑같은’ bagel을 먹곤 해서 그곳 남자처럼 생긴 여자 manager와는 아주 친숙한 사이가 되었고, 우리가 가면 아예 menu를 묻지도 않고 갖다 주곤 했다.
정말 비교적 싼 값에 분위기 있고, 냄새 그윽한 coffee를 즐기며 연숙과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그런 곳을 다시 찾기는 어려울 듯 해서 더욱 아쉽기만 하다. 이사를 가는 이유가 더욱 안타까웠다. 매상도 비교적 오락가락 하는데, 건물주가 rent를 너무나 올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더 customer traffic도 많고 rent도 싼 곳, 어떤 shopping mall (Towne Center)근처로 간다고 했다. 우리 보고 그곳에 오면 꼭 들르라고 했지만 과연 언제 그곳에 찾아 가게 될지는 미지수이다.
그곳에 단골손님이 된 것은 아마도 5년 정도가 아닐까.. 그 전에는 Atlanta Bread Company라는 같은 류의 Bistro style bakery로 가곤 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문을 닫고 말았고, 다시 찾은 곳이 지금의 Panera 였던 것이다. 그 두 곳의 분위기는 아주 달랐다. Atlanta Bread Company(ABC)는 널찍한 마루 바닥에 아주 밝고 넓은 분위기였고, Panera는 분위기 있게 어둡고 아늑한 곳이었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coffee를 마시는 분위기는 Panera가 훨씬 더 좋았다는 것이다.
집에서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하는 것이 조금 거북하게 느껴지던 나와 연숙은 이곳에서는 분위기 덕분인지 아주 편한 마음으로 이야기를 하게 되어서, ‘분위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실감을 하기도 했다. 5년 이상 그런 분위기가 우리 부부에게 미친 ‘좋은 영향’은 상당할 것 같다. 지금은 다시 생각한다. 그곳을 찾고, 그곳에서 보낸 5년, 정말 100% 우연한 일이었을까.. 아니면?
Curia-PC? Curia, PC.. Curia pc.. 꾸리아 PC.. 3년 전만 해도 이것이 무엇인지 짐작 조차 못했을 것이다. 이제는 99% 무슨 뜻인지 안다. 여기서 curia는 로마군단 내의 조직이 아니고 레지오 마리애 조직 중의 하나일 것이다. 군대로 말하면 여러 소대를 관할하는 중대 급에 속한다고 나 할까. 그러니까 꾸리아 조직에서 쓰는 컴퓨터일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내가 속한 레지오(마리애)를 관할하는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소속 ‘천상은총의 모후’ 꾸리아를 말한다.
얼마 전, 자세히 말하면 12월 초, 그 당시에 있었던 레지오 연차 총친목회를 치르면서 알게 된 것이 꾸리아 간부들이 쓰는 (정확히 말하면 서기가 주로 씀) Windows laptop pc가 문제가 생겼다는 사실이었다. 그 Windows 7 laptop pc를 직접 내가 보게 되면서 자연스레 내가 관여하게 되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레지오 용어로 ‘본당협조 활동’에 속하는 일을 내가 맡게 된 것이다.
나에게, 이런 종류의 일은 사실 ‘일’이라는 생각보다는 ‘시간 보내기 딱 맞는’ 그런 ‘즐거움’에 속한다. 문제가 있다면, 여기에 깊이 빠져들면, ‘실생활’에 지장을 줄 정도로 빠져들어서 ‘해야 할 것을’ 미루거나 할 정도로 될 때도 있다는 사실이지만, 나이가 들면서 그것도 잘 절충을 하는 지혜도 생겨서 예전과 같은 큰 문제는 없다. 나는 이것을 쉽게 말해서 ‘공돌이’ 기질이라고 생각한다. 그저 호기심으로 인한 ‘새로운 것을 알 수 있는’ 그런 기회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비교적 복잡하게 발전한 근래의 Windows PC는 깊이 알려고 하면 그 속에 무궁무진한 ‘기술’들이 축적이 되어 있어서 이것과 더불어 보내는 시간이 절대로 낭비가 아닌 것이다.
1~2 년 전에 구입했다는 이 pc는 model이 HP G73-B66US, 2010년 경에 나온 것으로 Microsoft Windows 7 (64bit), 4GB, 2400 MHz Intel Core i3, 500GB HDD.. 등등으로 상당히 빠른 system이었다. 꾸리아 사무실에서 처음 보았을 때 보게 된 문제 중에는, 우선 BSOD(blue screen of death, system crash) 같은 심각한 것을 비롯해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system전체가 느리게 ‘돌고’ 있었고, battery 가 너무나 빠르게 discharge되는 등.. 한마디로 무언가 큰 문제가 있어 보였다. 크리스마스 씨즌으로 접어 들면서 꾸리아의 일도 바쁘지 않아서, 아예 pc를 집으로 가지고 와서 더 자세히 보게 되었다.
Booting을 하면, 5분도 되지 않아 blue screen으로 crash를 한다. Safe mode로 booting을 해 보았다. 5분이 지나도 별 문제가 없었다. 분명히 Windows core system file이 corrupt된 것이다. 최소한 safe mode에 ‘시간을 벌 수’ 있기 때문에, safe mode에서 systems diagnostic을 해 보니, 분명히 두 가지 문제가 발견 되었다. Hard-disk의 SMART built-in testing에서 disk가 error threshold를 넘어 섰는데, 한마디로 disk가 ‘죽어가고’ 있는 과정이었다. 또 다른 problem은 역시 internal battery가 이미 ‘수명’을 넘긴 상태였다.
이제는 뒤를 돌아 볼 시간이 없다. 현재의 disk data를 빨리 ‘살려서’ 옮겨야 하는 것이다. Safe mode에서 file copy는 비교적 간단하고, 더욱이 usb flash drive(thumb drive) 를 쓰면 더욱 간단하다. 또한 현재 이 pc에는 그다지 중요한 data file가 많지 않았고, 대부분이 MS Office file이어서 file의 크기가 문제가 되지를 않았다.
Data를 살려 낸 뒤에는 500GB 2.5″ hard-disk와 battery를 교체하게 되었는데, 이것으로 비용만 $100 이 쓰였다. 그 다음 과정은 사실 시간은 걸려도 비교적 straightforward한 routine으로 생각이 되었지만, 사실은 우여곡절, surprise가 참 많았다. 제일 놀란 것이, Windows 7 system recovery disk가 요새는 없다는 사실이었다.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 아예 stock hard-disk의 partition 자체에 그것이 있어서 이론상으로는 다시 recovery가 가능하지만 이것은 정말 귀찮고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다. 거기다가, 만약에 최악의 경우, 그 recovery partition이 corrupt가 되면 그때는 속수무책, HP에 연락을 해서 ‘진짜’ Windows 7 disc를 받아야 하는 번거로움도 있는 것이다.
이번에는 그런 최악의 사태로 가지는 않았다. 내가 손수 그 recovery disc를 ‘구워’ 냈기 때문이다. 그것만 있으면 앞으로 같은 문제가 생겨도 당황하지 않고 즉시 고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과정이 참으로 시간이 ‘엄청’ 걸렸는데, 어려운 것은 아니더라도 시간으로 치면 참 ‘비싼’ 작업임에 틀림이 없었다. 이렇게 해서 새로 태어난Windows 7 system은 정말 새로 샀을 때와 같이 ‘날라가는’ 기분을 느끼게 할 정도로 모든 program들이 run을 했고, 그 동안 ‘이상하게 돌아가는 컴퓨터’로 고생을 하던 꾸리아 서기님도 마음을 푹 놓고 쓰게 되리라는 생각을 하며, ‘본당협조’의 일을 끝냈다.
한 해가 서서히 저물어가기 시작하는 올해의 마지막 달 12월, 첫째 일요일 12월 2일 오후 2시에 우리 레지오 단원들의 친교를 위한 레지오 연차 총 친목회가 열리면서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은 성탄절과 송년의 분위기로 서서히 접어들었다.
나에게 이 레지오 연말 총 친목회는 올해로 벌써 3번째가 되었다. 첫해의 친목회는 입단 2개월도 못 미치는 예비단원(선서하기 전까지 단원등급)이었을 때여서 사실 레지오의 ‘문화’에 대해서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그저 ‘신 나게’ 노는 정도로만 알았다. 하지만 비록 ‘노는’ 시간은 있었어도 비교적 차분하고, 경건하게 진행이 되었던 느낌이었다. 레지오 교본에 의하면 이 친목회의 의도가 분명히 적혀있다. 모르는 단원들과 친교를 이루는, 바로 그것이었다.
의도적으로 군대의 체계를 갖춘 레지오에서 단원들끼리 친교를 갖는 것은 사실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건전한 친교를 이루는 것도 레지오의 목적을 달성할 때 도움이 되는 정도에서 까지 중요한 것이었다. 절대로 ‘사교적’인 단체와는 달랐다.
그러다 보니 단원들 간의 교류가 비교적 적어서 그런지 만나면 서먹서먹 할 때가 많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것을 조금이라도 도와주려는 것이 일 년에 딱 한번 있는 이 연차 총 친목회였던 것이다.
작년까지는 쁘레시디움 별로 ‘장기자랑’ 같은 것으로 했지만 올해는 완전히 바꾸어서 장기(talent) 별로 모든 단원들이 자유로이 섞여서 발표를 하게 되었다. 이런 방식의 의도는 바로 ‘모르는 단원 간의 친교’를 노린 것임은 두말 할 나위가 없다. 하지만, 이런 방식의 단점은 거의 전혀 모르는 단원들이 서로 모여서 ‘연습’을 하는 것이 전 보다 훨씬 어렵다는 것이었다.
합창, line dance, clogging(tap dance와 비슷한), 사물놀이, 청년 팀들의 ‘강남 스타일‘ 등이 있었는데, 내가 갈 수 있는 유일한 곳은 그 흔한 합창(chorus)밖에 없었다. ‘춤 종류’는 절대 질색이기 때문이었다. 나이를 먹으면 ‘무조건’ dance를 하는 사람들에게 좀 미안하지만 조금 바보같이, 우습게 보이기 때문이었고 사실 나는 전혀 관심이 없고, 그것은 보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장기’는 그저 조용히 노래를 하는 합창인데, 올해는 그것마저 조금 싫증을 느꼈는데, 이곳 역시 99.9%가 female, 여성동무들.. 그들의 목소리에 남자가 맞추는 것.. 생각보다 힘들다. 여자들 속에 ‘파 묻히는 것’, 소싯적에는 대환영이었지만, 지금은 그것도 조금 다르게 느껴진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내가 모르고 지내던 ‘소수민족’ 남자(들)과 중창을 하는 ‘기발한’ idea 였다. 연숙에게 의논을 하니, 의외로 대환영이었다. 모르는 ‘남자’를 알게 된다는 것도 괜찮고, 거의 여성위주인 행사에서 남자들이 모여서 노래를 한다는 것도 신선하지 않은가?
행사 한 달 전에 생각을 굳히고, 남성동무 들을 찾았는데.. 이것이 정말 장난이 아니었다. 요새 세상에 완전히 여자세상 이라고 는 하지만 정말 정말 남자를 찾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특히 신앙단체에서는 그 현상이 더 심한 것이다. 그야말로 남자란 ‘것’은 희귀한 존재였던 것이다. 거의 포기를 하려 던 참에 구세주같이 한 사람을 찾았는데, 연숙이 부단장으로 있는 꾸리아의 서기였던 자매님의 남편 형제님, 그도 레지오 단원이었던 것이다. 알고 보니 노래를 무척이나 즐기고 잘하는 형제님 이었고 나보다 나이가 2살 정도 아래여서 노래의 세대가 거의 비슷했다.
한 가지 문제점은 진한 경상도 사투리 억양이 있고, 목소리가 나에 비해서 ‘엄청’ 우렁 찬 것… 하지만 이것들은 어렵지 않게 극복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우리가 친목회에서 부를 곡은 모두 3 곡으로 정해졌는데, 시작할 때 다같이 부를 곡과, 정식 program에서 우리 둘이 부를 곡이 2 곡이었던 것이다.
선곡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지난 7월 초 레지오 교육 피정 당시 불렀던 복음성가 중, 2곡이 아주 가사를 포함해서 좋았다. ‘주님이 좋아요’ 와 ‘실로암’ 이 그것이었다. 나머지 한 곡은 1979년 발표되었던 그룹 ‘해바라기’의 ‘사랑으로’.. 이 곡은 특히 돌아가신 김수환 추기경께서 좋아했던 것이라, 더욱 마음에 들었다.
곡이 정해지고 나서 제일 큰 문제는 60대의 머리로 3절까지 되는 가사와 기타의 코드.. 이것은 정말 큰 challenge에 속했다. 결과적으로는 그런대로 무난하게 끝을 낼 수 있었지만, 이것들을 ‘외우는’ 비결은 의외로 간단했다. ‘바보처럼 반복‘하는 연습.. 그것이었다. 아마도 프로들이 쓰는 방식이 그것일 것이다. 머리를 쓰는 것이 아니고, 기계적인 반복 연습인 것이다. 처음에는 악보 stand를 사용해서 악보를 보려고도 했지만, 그것은 너무나 소극적인 모습이었다. ‘안경’을 끼고 악보를 응시하는 ‘노인네’의 모습이 얼마나 웃기겠는가?
실제로 ‘공연’을 할 때, 역시 나의 우려가 현실로 되었다. 같이 나온 형제님의 목소리가 엄청 큰 것.. 거기다 그 형제님은 마이크를 손에 들고, 입에 대고 불렀으니.. 나의 목소리는 상대적으로 마이크 stand를 통한 관계로 뒤에서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니까 결과적으로 나는 기타 반주자로 등장한 꼴이 된 듯했다. 하지만, 그것이 무슨 큰 문제가 되겠는가? 그런대로 신선하게 60/70/80 style(통기타)로 불렀고, ‘남자들’ 만의 모습도 보였고, 잘 모르던 형제님도 사귀게 되었으니.. 목적은 달성한 것이었으니까.
위에 있는 audio track은 이번 남성 이중창을 위한 연습 session중의 하나를 record한 것이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바쁜 시간에 1시간 정도 짬을 내어서 4번을 연습 하였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이것을 다시 들으면 또 하나의 추억이 될 듯하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바로 엊그제Advent 2011을 지낸 느낌이 들 정도인데.. 이 나이에 너무나 진부한 표현일 것 같다. 60대에서 60마일로 세월이 흐르고 70대에는 70마일로.. 아주 공감이 가는 말이기도 하다. 아마도 그것은 작년 대림절을 비교적 실감 있게 기억하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 슬그머니 12월 1일, 2012년의 마지막 달로 접어들었다. 무언가 또 거의 뚜렷한 이유 없이 머릿속이 바빠지는 느낌.. 이것이 바로 holiday blues의 시작일 것이다. 이것이 나는 ‘지독히’도 싫은데 빠짐없이 찾아 든다. 특히 12월에..
사실 2012년 holiday는 이미 지난 11월 셋째 목요일 Thanksgiving Day로 시작이 된 상태이다. 올해의 ‘추수감사절 (이 번역된 말이 조금 무리인 듯 느껴짐은?)’ 내가 기억하는 한 우리 가족은 이날에는 꼭 ‘핵가족’이 다 모여서 turkey meal을 즐겼는데, 드디어 세월의 흐름을 느끼게 하는 예외가 생기고 말았다. 큰 딸 새로니가 Miami, Florida로 친구와 같이 vacation을 가 버렸기 때문이다. 조금 배반당한 느낌이 들 정도로 기분도 그랬지만, 이제 아~~ 우리 가족, 가정도 변화를 겪고 있구나 하는 실감도 들었다.
그래서 전통적인 가족이 만드는 turkey early dinner를 생략하고 대신 크리스마스에 turkey 를 하기로 했다. 조금은 안 되었는지 작은 딸 나라니가 그 다음날 자기 집에서 맛있는 요리를 해 주겠다고 해서 ‘염치불구하고’ 그곳에 갔고, 식사 후에는 Life of Pi 라는 새로 나온 fantasy 영화를 같이 보았다. 거의 일년 만에 가보는 ‘진짜 극장’이었다.
올해의 대림절은 어떨까.. 크게 다를 것은 없을 것이지만 조금 더 ‘성숙된 믿음’으로 대림절을 지내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 지난 사순절부터 시작된 ‘평일 마사’ 참례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어서 대림절 동안도 마찬 가지일 것이다. 내가 속하고 활동하고 있는 레지오는 내일 연차 총 친목회를 마지막으로 올해를 마감한다.
올해, 내가 생각해도 참 열심히 레지오를 살았다. 비록 나타난 성과는 많지 않아도 내가 느끼는 나의 변화, 그것은 큰 성과인 것이다. 내년에는 가능하면 눈에 보이는 외적인 성과가 나오기를 기도하고 있다.
내일은 대림절 주일 시작이고 오후에는 우리의 ‘또 하나의 본당’인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에서 레지오 연차 총친목회가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열린다. 연숙이 꾸리아 부단장인 ‘여파’로 나는 여러 가지 눈에 잘 안 보이는 ‘봉사’를 해야 한다. 주로 여성 단원들이 대부분이라 남자의 역할은 대부분 ‘근육적’인 것 뿐이다.
하지만 올해는 조금 ‘소수 족’인 남자단원의 사기도 살릴 겸 해서 나와 새로 알게 된 다른 ‘남성’ 박 대건 안드레아 형제와 총 친목회에서 노래를 부르기로 했고, 지난 몇 주 몇 번 만나서 노래 연습을 했다. 처음에는 ‘남자 중창단’을 예상하고 사람들을 모으려고 했지만 나로써는 무리였다. 워낙 남자단원의 수가 적고, 있어도 너무나 바쁜 것 같았다. 포기하려 했지만 다행히 이 안드레아 형제와 ‘의기투합’이 되어서 결실을 보게 된 것이다.
덕분에 그 동안 가끔, 조금씩 ‘즐기던’ 나의 야마하 기타.. 얼마 전에 Seymour Duncan ‘Woody SC’ acoustic guitar pickup과 앙증맞게 조그맣고 예쁘게 생긴 Behringer AT-108 15-Watt acoustic mixing amplifier를 구입해서 이번에 쓰게 되었다.
지난 7월 달 허윤석(요한) 신부님이 지도하셨던 레지오 교육피정 때 ‘신나게’ 부르던 ‘개신교 스타일’ 복음 성가 ‘주님이 좋아요’, ‘실로암’과 김수환 추기경의 애창곡이었던 해바라기의 ‘사랑으로’를 골라서 연습을 하고 부르게 된 것이다. 내일singing duet performance의 결과에 상관없이 나는 그 동안의 연습과정을 통해서 얻은 ‘즐거움’ 하나 만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덕분에 오랜만에 여자가 아닌 남성을 알게 되었다는 것도 즐거운 일이 아닐까?
올해의 대림절은 어떻게 보내게 될까? 우리는 그렇게 흔한 holiday travel은 100% 없을 것이고, 아.. 그렇다! 올해는 지난 십 수년 동안 못했던 손으로 쓰는 정성 드린 성탄 카드, 연하장을 ‘우체국을 통해서’ 보내는 것을 해 보련다.
내 인생에서 알고 지냈지만 잊혀진 수많은 사람들, 찾을 수 있는 대로 찾아서 ‘내가 살아있다’ 는 것을 알리련다. 그것만 해도 나는 진정한 ‘구세주를 기다리는’ 대림절의 의미를 조금 알 수 있을지 모른다.
결국은 끝이 났다. 지난 일요일은 ‘아마도’ 대한민국 전례력에 의하면 평신도 주일이었던 모양이다. 분명히 이곳 나의 교민본당,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은 아틀란타 대교구 소속이라서 머나먼 대한민국의 전례력에 좌지우지 되지 않아도 될 것이지만, 그런 것들은 흑백을 가리듯 분명한 것이 절대로 아니다. 한마디로 grey area인 것이다. 따라서 이곳 순교자 성당도 그때 그때 ‘편리한 전례’의 관습을 따르는 모양이다.
그래서 지난 일요일은 대한민국 식으로 ‘완전한’ 평신도 주일의 전례를 따랐고, 신부님의 강론도 평신도가 대신 맡아서 하게 된 것이다. 나의 추측이지만 이것은 아마도 작년부터 실시가 된 듯한데, 작년 6월에 부임하신 서강대 예수회 소속 하태수 미카엘 신부님께서 지시하신 것이 아닐까.. 그리고 작년의 평신도 주일에도 평신도였던 서재욱 사목회장이 강론을 했던 것을 video를 보고 알았다.
1960년대에 있었던 바티칸 2차 공의회 (Vatican II) 이후 평신도의 역할은 그 이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이상으로 눈부시고 확장되어가고 있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쉽게 말하면 지독하게 보수적인 천주교회가 민주화가 되어가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대의 흐름에 따르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지만, 문제는 그 정도일 것이다. 이것은 고도의 ‘정치적’ 기술도 필요한 것이 아닐까?
갈릴레오를 처단했던 커다란 오류도 문제지만, 진짜 문제는 ‘완전한 방종적 자유’를 갈구하는 불완전한 인간들의 요구에 쉽게 부응하는 그것일 것이다. ‘완전한 평등’의 환상아래 너무도 많은 돌이킬 수 없는 실수들을 정치인들은 ‘표를 얻기 위해’ 자행하고 있는 사실은 어떤가?
하지만 바티칸 2차 공의회의 덕분에 교회 내에서 여성들의 지위는 눈부시게 향상한 것은 사실이고 이제는 여성들이 없으면 몇 시간도 교회가 움직일 수 없게 된 듯하게 되었다. 그런 시대의 흐름 때문일까.. 올해 평신도 주일의 신부님 대신하는 강론이 연숙에게 돌아온 것이다. 이런 것들은 ‘나서기 좋아하는 남자’들 몫일 텐데 겨우 레지오 꾸리아의 부단장 정도의 명함으로 선택이 된 것을 보니 역시 시대가 변하고 있음을 느낀다.
사람들 앞에 서본 경험이 ‘소싯적’에 그렇게 많았던 연숙도 이번에 이런 ‘요청’을 받고는 완전히 긴장을 했던 것 같았다. 강론 대에 서서 신부님 강론 대신 한다는 것은 조금 stressful했을 것이다. 처음에는 완강히 거절을 했지만 하태수 신부님도 만만치 않았던지, 굴복하고 말았고 그것을 지난 일요일에 하게 된 것이다.
나는 옆에서 보는 입장이었지만 수수방관할 입장만은 아니었던 것이, 그 강론의 주제가 바로 나였던 까닭이었다. 그저 ‘돌아온 탕자’ 에 비유하면 딱 맞는 그 ‘이야기’의 주인공은 바로 ‘나’ 였다. 나의 ‘과거’가 적나라 하게 들어나게 되는 것에 거부감을 처음에 느끼긴 했지만, 그런 이야기가 다른 사람들에 줄 수도 있는 잠재력을 생각하고 가만히 있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그 평신도 강론은 반응도 좋았고, 본인도 앓던 이를 뺀 것 같은 들뜬 기분으로 다음날을 보내게 되었으니, 이것으로 하태수 신부님이 밀어부친 평신도 주일의 성과를 느끼게도 된 것이다.
2012년 11월이 한창이었던 11월 14일경, 오랜만에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나의 Olympusdigital camera 를 손에 들었다. 그 동안 이것을 잊고 살았던가.. 어떤 ‘모습’이라도 이곳에 담아야겠다는 초조함을 느낀다. 밖을 보니 찬란하게 절정을 향한 아틀란타의 가을하늘.. 반세기전, 어린 시절 서울 종로구 가회동에서 삼청 공원을 향한 북악 줄기의 짓 푸른 가을 하늘을 반 상상,반 회상을 한다. 반 세기전의 그때는 서울의 도심(강남, 한강 아래가 완전히 논과 밭이었을 때)에도 그렇게 공해가 심하지 않았다. 아마도 지금 아직도 숲에 쌓여있는 이곳 아틀란타의 푸른 하늘이 그때 당시의 것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비교적 큰 사건 같은 것이 없었던 밋밋한 시간들 속에서 나의 생각을 사로 잡았던 것들은 어떤 시시한 것들이었을까? 아마도 5년+ 역사를 자랑하는 ‘걷기’, 아니 ‘개와 같이 걷기’를 빼어 놀 수 없을 것이다. 2006년 사랑하는 처 조카 수경이네(대현이 엄마)가 고국에서 놀러 왔을 때 그것이 시작되었을 것이다. 간신히 걷기 시작한 대현이를 우리 subdivision의 가파른 언덕에서 불호령을 하며 걷게 하던 그 이후부터 나는 ‘혼자서’ 매일 걷기 시작해서 지금까지 이르렀다. 15년 전 우리 집을 다녀갔던 원서동, 재동학교 죽마고우였던 안명성이 나보고 걸으라고 ‘신신당부’를 하고 갔지만, 그때서야 걷게 된 것이고, 지금은 완전한 습관이 되어서 우리 집 깡패 강아지 Tobey를 걷게 하면서 같이 나도 걷는다.
4계절이 뚜렷한 이곳, 걸으며 4계절을 보고 느낀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 중에서 제일 차분하게 아름다운 때는 역시 늦가을이 아닐까? 영롱한 빛깔들과, 장엄하게도 느껴지는 낙엽들.. 인생의 가을을 느끼게도 하는 그 낙엽들을 보며 또한 변하는 것과 변치 않는 것을 생각한다. 집 주위를 걷다 보면 꼭 playground를 지나게 되고 그곳에는 간단한 그네, 미끄럼틀 같은 것이 있고, 근래에는 물기만 없으면 그곳에 올라가 Tobey 와 함께 누워버린다. 짓 푸른 하늘이 우람한 단풍나무들 속으로 보이고 나는 이곳에서 꼭 묵주기도를 계속한다. 이것이 요새 나의 일과요 즐거움 중의 하나가 되었다. 묵주기도가 즐거움이라면 좀 비약적인 것으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 되었다. 그래서 인생은 재미있다고 할까?
요새 나의 머리 속은 어떤 것들이 생각되고 있을까? 일주일도 더 지나간 미국의 대통령선거.. (이것을 대선이라고 하던가) 막상막하, 손에 땀을 쥐게 하리라는 예상을 뒤엎고 바락 오바마(참 그 이름 한번 요상하다) 쉽게 재선이 되었다. 압승은 아닐지라도 그 정도면 뒤에 군말들이 없을 정도로 깨끗이 이긴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나.. 이번 선거야 말로 제3의 인물이 갈망되던 때였을까.. 생각한다. 또 다르게 이름이 요상했던 ‘밋 롬니’ (아니면 밑 롬니인가?).. 무언가 참 답답한 인물이었다.
지지 않으려면 견해와 입장을 1초도 되지 않아서 바꾸는 사람, 도대체 그의 속을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 하는 것 보다 더 답답한 노릇이었다. 그와 반대쪽에서 지나치게 약자의 쪽에 서서 ‘정 많고, 따뜻하게’ 보이려 안간힘을 쓰다 못해서 나중에는 여자는 여자끼리, 남자는 남자끼리 살림 차리고 아이를 낳는 것 ‘완전히 OK’ 라고 선언을 했던 불쌍한 현직 대통령.. 그렇게 까지 해서 연임을 하고 싶었을까?
차별 당하는 그들 (동성애)..을 법적으로 보호하는 것과 그것도 ‘문제 없다’고 말하는 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임을 어찌 그가 모르겠는가.. 하지만.. 하지만 권력의 유혹은 사실 뿌리칠 수 없을 정도였나 보다. 이제는 성숙해진 나의 신앙 체계에 이것은 말도 안 되는 ‘개소리’ 였다. 이것은 종교계를 ‘보호’ 한다는 공화당 극우론자들이 다 망쳐놓은 결과다. 정치와 종교가 섞이게 되면 이런 비극이 나오는 것이다.
얼마 전부터 새로니가 집을 사려고 realtor와 집 구경을 시작했다. 그 애의 월급으로 단독주택은 어림도 없지만 condo는 ‘사정거리’에 있고, 부동산 경기가 완전히 죽었던 여파로 여건이 좋았나 보다. 우리와 같이 임시나마 살고 있는 것이 어찌 불편하지 않을까? 그것은 완전히 상호적인 것이다. 우리도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다 큰 자식과 사는 것.. 이제야 힘든 것을 절감한다. 세대 차이는 그렇게도 골이 깊을까? 가장 좋은 방법은 놀러 갈 수 있는 정도의 거리를 두고 따로 사는 것이라고 누누이 들어왔는데 이제는 200% 동감을 한다.
11월은 가톨릭에서는 전통적으로 ‘위령의 달’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돌아가신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를 하고 생각을 하는 한 달인 것이다. 그래서 지난 11월 3일에 우리가 사는 마리에타에 있는 한인 공원묘지에서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하태수 미카엘 주임신부님의 집전으로 위령미사가 있었다. 올해에는 우리부부도 11월 한 달 동안 매일 우리의 돌아가신 부모님들의 영혼을 위한 ‘연도’를 하기로 하고 이미 시작해서 위령미사는 비록 처음이었지만 그다지 낯설지 않았다.
10여 년 전에 만들어진 한인 공원묘지.. 그 동안 참 많은 한인들이 이곳에 묻혔음을 보게 되었고, 2002년에 교통사고로 갑자기 떠나신 평창이씨 이주황 선생님(이만수 군의 아버님)의 묘소도 그 이후 처음으로 보게 되었고, 7월 말에 선종하셨던 레지오 친구, 은요안나 자매님의 묘소도 다시 보게 되었다. 이렇게 매일 연도를 하게 되었는데, 그렇게도 ‘지루하고 이상하였던’ 연도.. 돌아가신 부모님께도 좋았겠지만 이것을 하는 당사자인 우리가 더 위로를 받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제는 이런 통상 기도를 진심으로 믿게 되었고, 반드시 이런 것들이 의도하고 있는 대로 영혼들에게 전해 질 것이라는 것도 믿는다. 이것이 올해 11월 위령의 달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일 것이고, 우리들의 부모님들.. 이정모, 양점순, 전현찬, 김유순.. 아버지, 어머니, 장인, 장모님.. 연옥의 고통이 그치고 영원한 평화의 나라에 들게 됨을 계속 기도하며 깊어가는 가을을 맞는다.
묵주기도, 빛의 신비를 누워서 하기에 알맞는 깊은 가을 집 근처의 playground에 있는 그네에서
왁자지껄 시끄럽던 수영장, 테니스 코트는 적막 속에 잠기고 사람들 대신 가을의 선물, 황금 색의 낙엽들만 딩구르는 깊은 가을..
10월 31일은 이곳 미국에서Halloween (할로윈), 이어서 다음날, 11월 1일은 가톨릭 전례력으로 All Saints Day(모든 성인의 날?), 11월 2일은 역시 가톨릭의 달력으로 ‘위령의 날‘ 이다. 그 다음날, 11월 3일은 아직도 귀에 익은 광주학생 사건을 기념하는 ‘학생의 날’.. 줄줄이 이어진다. 종교성이 거의 없는 할로윈은 나쁘게 말하면 ‘귀신’에 대한 날이고, 모든 성인의 날은 정 반대로 귀신을 쫓는 ‘성인’들의 날이다. 이런 이유로 할로윈 다음 날을 모든 성인의 날로 정한 것이 아닐까?
얼마 전에 연숙과 얘기를 하다가, 올해부터는 11월 달이 ‘위령의 달’ 임을 생각하며 돌아가신 우리 두 부모님들에게 ‘매일’ 위령기도를 바치자고 합의로 하였다. 연숙은 오래 전부터 이것을 하고 싶었던 것 같지만 역시 내가 요지부동으로 가슴을 닫고 있어서 못하다가 올해는 무언가 아무 문제없이 이렇게 ‘멋있게’ 합의를 본 것이다. 나의 마음이 그 정도로 열려있음은 알고 나 자신도 사실 놀랐다.
이제는 우리의 자랑, 오랜 전통의 천주교의 일년 흐름을 아주 자연스럽게 느끼게 되고 그런 오랜 전통적 달력을 음미하고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5월의 ‘성모성월’과 11월의 ‘위령의 달’은 더 나에게 가까이 느껴짐은 왜 그럴까? 성모성월은 어머니가 주제요, 위령의 달은 돌아가신 부모, 조상, 친척들에 관한 것이라서 그럴 것이다. 가슴 깊이 고여있는 어머님, 보지도 못한 아버지에 대한 사무친 서러움, 그리움, 불효막심 등등이 한꺼번에 솟아 오르는 듯한 감정.. 그것이 무서워 항상 나는 도망만 하며 살았음을 인정하기에 더욱 더 나에게 의미가 있는 것이다.
특히 어머님께 따로 특별히 연도는커녕 기도 한번 변변히 못한 나는 사실 이런 날이나 달들을 생각하기도 무서웠다. 그러다가 레지오에 입단하게 되면서 ‘남 들’에 대한 연도와 기도를 자연적으로 시작했고, 이제는 조금씩 마음도 열리고, 더 이상 도망하고 싶지 않았다. 고향에 돌아온 듯이 살고 싶었다. 내 자신이 나의 부모님께 연도와 기도를 바치게 될 진정한 용기가 생김을 알게 되었다.
이제는 ‘영혼의 존재’를 나는 믿게 되었고, 영혼에 대한 기도나 연도가 정말 의미 있다는 것도 믿는다. 그 중에서도 나의 부모의 영혼께 기도를 하고, 혹시라도 아직도 고통을 받는 곳에 머물지 않게 기도를 할 수도 있게 되었다. 비록 하느님을 모르고 떠났다 하더라도 그것은 큰 문제가 아닐 것이다.
11월 3일, 고국의 학생의 날.. 에 이곳에서는 11월 위령성월을 맞아 아틀란타 지역 두 천주교회(순교자, 성 김대건) ‘합동’으로 마리에타 한인 공원묘지에서 위령미사가 거행 되었다. 매년 얘기만 듣던 것.. 올해는 ‘무조건’ 참례를 하였다. 집에서 비교적 가까이 있는 이곳에는 한인들만의 공원묘지가 따로 조성되어있고, 지난 7월에 떠나신 우리 레지오 단원 요안나 자매도 이것에 안치되어 있고, 2002년 4월에 불의의 교통사고로 타계하신 ‘평창이씨’ 종친 이주황 선생님도 이곳에 계셔서 우리와 익숙해진 곳이다. 가톨릭의 예식을 따랐지만 그 의식은 많이 우리나라의 전례 예절이 가미된 것이라 더욱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 오기도 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나도 이제 나이가 많이 들었는가.. 아니면 많이 이런 것들에 익숙해 졌는가.. 만감이 교차됨을 느꼈는데, 특히 1980년대 초 천주교 영세 후에 ‘멋도 모르고’ 장례미사에 갔다가 ‘시체’를 처음 보고 놀라서 그 다음부터 절대로 그런 곳에 안 가겠다고 ‘결심’을 했었던 나의 유치한 믿음을 회상하며 웃어보기도 했다. 아.. 영혼들이여.. 편히 편히 잠 드소서..
9월 22일 토요일 저녁에는 정말 오랜만에 men’s night의 모임이 있었다. 이것은 진희네 그룹 부부모임에서 ‘wife’ 들만 빠진, 그러니까 남편들만의 모임이고 이름도 men’s night이 된 것이다. 이런 모임은 주로 이번 모임의 host인 최형의 wife가 집을 비웠을 때 이루어지고, 따라서 모이는 장소도 최형의 Sugarloaf Country Club 안에 있는 ‘으리으리’한 ‘진짜’ mansion(?) 에서 모이곤 한다. 이번에도 최형의 wife가 여행을 떠나서 그렇게 된 모양이었다. 이럴 때의 저녁 음식준비가 사실은 문제인데(wife가 없으므로), 역시 으리으리한 mansion에 걸맞게 catering service로 그것은 해결이 되었다.
근래에 들어서 이 그룹 모임은 예전대로 꼭 하게 되는 술(주로 wine) 대신에 음악, 특히 악기연주를 즐기는 쪽으로 그 분위기가 바뀌고 있어서 wife들이 조금 호감을 갖게도 되었는데, 이날도 모두들 한가지 악기를 들고 와서 맛있는 음식과, 얘기, 그리고 노래와 연주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나이가 들면서 거의 유행적으로 악기를 배우는 여유를 갖는 모양인데, 나는 아직도 그런 것을 못 해보았다. 최형은 ‘소원대로’ $2000짜리 guitar를 사서 그룹지도를 받고 있어서 모두들 호기심 어린 관심을 보이고 있고, 윤형도 $500짜리 ‘연습용’ saxophone을 사서 개인 지도를 거의 일년 째 받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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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처음 들었는데, 사실 놀랄 정도라 ‘멋지게’ 그 결과를 보여주었다. 나야 옛날부터 유일하게 하던 것이 guitar여서 별로 특기사항은 없고, 이태리 가구의 전사장은 guitar를 옛날에 잘 치던 것 같은데, 요새는 많이 잊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목소리가 좋아서 악기대신에 vocal로 한 몫을 잘 치른다.
나는 근래에 들어서 이 그룹의 영향을 받아서 조금씩 guitar를 찾으며, 기억이 나는 곡들을 찾아서 다시 배우고, 연습을 하곤 한다. 나이 들면서 이런 것은 역시 건전하게 시간을 보내는 데 도움이 되고, 악기, 가사 외우기, guitar chord외우기 등등도 ‘기억력’ 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아틀란타 성체대회, Atlanta Eucharistic Congress, AEC2012.. 올해의 아틀란타 성체대회가 아틀란타 국제공항 옆에 위치한 거대한 Georgia International Convention Center에서 30,000+ 명이 넘는 아틀란타 대교구 지역의 가톨릭 형제, 자매들이 참가해 뜨거운 열기에 찬 파견미사를 끝으로 막을 내리고, 거의 같은 시기에 올해로 50주년이 되는 세계 성체대회, IEC 2012 가 아일랜드, 더블린 (Dublin, Ireland)에서 서서히 막을 올리고 있다.
이런 대규모 모임은 모두 예수님의 성체(성사), Eucharist에 관한 주제로 열리는 것으로, 모든 행사의 초점은 역시 ‘예수님의 몸과 피(성체, 성혈)’에 모여진다. 이런 까닭에 이 대회는 전례력으로 매년 6월 쯤에 있는 “그리스도의 성체성혈 대축일, The Solemnity of the Most Holy Body and Blood of Christ“을 전후로 열리게 되고 올해는 그날이 바로 6월 10일로써 그전의 이틀, 6월 8일, 9일에 걸쳐서 열렸다.
아마도 더블린의 세계 성체대회도 이날에 맞추어 열리는 것일 것이다. 나는 작년에 ‘난생’ 처음 이곳 아틀란타 성체대회에 참가해서 기대나 생각보다 더 많은 것을 느끼고 얻게 되어, 올해도 꼭 가리라 계획을 했었고, 결국은 ‘무사히’ 연숙과 같이 참가를 하게 되었다.
작년 6월 아틀란타 성체대회에서의 느낌을 적은 나의 blog에도 있었듯이, 내가 이 대회에서 제일 기대하는 것은 ‘성체’에 관한 것 보다는 그저 머리로만 알고 있는 나와 비슷한 ‘인생,세계,우주관’을 가지 형제,자매들과 그들이 한 곳에 모였을 때의 ‘열기’를 느끼고 보는 것이다. 특히 근래에 들어서, ‘종교와 믿음의 자유’가 사회적, 정치적으로 제한, 차별을 당하는 느낌을 받으며 그런 생각이 더 간절해 졌다. 한마디로 ‘뭉치면 살고, 헤어지면 죽는다’라는 생각까지 드는 것이다.
더욱이, 소위 ‘자유세계의 지도자’라는 바락 오바마(Barak Obama) 와 조 바이든(Joe Biden) 이라는 인간들이 자기들은 ‘동성 결합’ 에 ‘절대’ 문제가 없다는 발언이 나온 뒤에는 무언가 세상이 크게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들이 모여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올해의 성체대회는 또 다른 사명을 지고 있다고 느끼게 된다.
6월에 이곳에서는 보기 드문 장마 monsoon 성 날씨로 수영장이 파리를 날릴 정도로 시원한 날씨가 계속되어서 더욱 쾌적한 성체 대회가 되었고, 3만+ 명, 거대한 수의 사람들이 일심동체가 되어 일사불란하게, 아무런 사고 없이 움직이는 것도 역시 인상적이었다. 이런 것은 나의 육체를 그곳에 끌고 가지 않았으면 절대로 느낄 수 없는 것이다.
특히 미국본당과 한국본당 두 곳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우리들은 백인, 한국인 이외 제3의 형제,자매들을 그곳에서 경험한다. 엄청난 수의 Hispanic (주로 중남미, 카리비안), 나날이 늘고 있는 Vietnamese(월남인) 계통의 가톨릭 신자들이다. 아틀란타 대주교님까지 흑인이고 보면, 이런 경향이 미국 가톨릭의 미래 모습을 보여준다 고나 할까.
특히 작년에 이곳에 왔을 때 느낀 것이지만 월남계 가톨릭의 눈부신 발전은 정말 눈에 부시다. 그들보다 이민 역사가 더 긴 한국계나 중국계를 완전히 제치고 동양계에서, 아마도 그들이 앞서서 우리들까지 이끌고 나갈지도 모른다. 프랑스 식민통치에 의한 ‘빌려온’ 신앙이지만 그들이 이미 이곳 성체대회에서 그들만의 언어로 따로 모임을 갖게 된 것, 그렇게 이상할 것도 없다.
한국계 신자들의 참여는 확실히 작년에 비하면 현저하게 늘었다. 본당도 한 곳에서 두 곳,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과 둘루스 성 김대건 성당, 이 되어서 그 들을 대표하는 banner를 가지고 입장도 해서, 참 보기에도 좋았다. 특히 어린애들을 가진 부모들이 많이 참여를 해서 흐뭇했는데, 그들이 앞으로 언젠가는 우리 공동체를 이끌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남는’ 나이 든 (우리를 포함) 세대와 어린애들 부모들을 제외한 주류세대(30~50대)는 거의 볼 수가 없었다. 물론 가정을 책임진 입장에서 시간이 남아 돌 리는 없을 것이지만.. 나도 그 당시에 그렇게 살았기에, 지금은 서서히 후회를 하게 되었다. 그렇게 바쁘게 살았지만, 시간을 얼마나 ‘효율적, 생산적, 의미 있게’ 쓰며 살았을까 하는 것은 확실치 않기 때문이다.
올해 성체대회의 slogan은 위에 있듯이 We though many are one body under Christ 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역할이 다른 ‘지체, branch’는 여럿이지만 몸, body는 하나라는 뜻이다. 나날이 줄어드는 신학생, 목자, 사제, 수도자, 수녀님들의 수는 누구나 의 관심 사일 수밖에 없어서 작년부터는 성체대회의 모든 에너지가 ‘성소, vocation‘에 모아지고 있다.
듣기에 아프리카, 아시아 특히 한국에서는 오히려 목자의 수가 늘고 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전 세계적으로 예외에 속할 것이다. 무서운 속도로 퍼지고 있는 세속적, 상업적 문화는 가히 경악할 정도인 것일까? 특히 유럽의 세속화, 탈 교회 경향은 가공할 정도라고 한다. 미국도 질세라 그 뒤를 따르기 시작을 했는가.. 이것에 대응할 수 있는 것은 ‘단결된’ 교회세력, 특히 잘 조직화 된 가톨릭 교회 밖에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올해도 낯익은 얼굴이 대회를 이끌었다. 바로 local TV Fox 5의 News Anchor인 Russ Spencer, 그는 내가 기억하는 한 이 성체대회의 고정 멤버일 정도로 매년 ‘봉사’를 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극우적’인 Fox TV를 싫어하지만, 이 anchor는 아주 reasonable한 신앙인으로 보였다. 6명이나 되는 자녀를 둔 것을 보면 그가 어떤 천주교인인지 대강 짐작이 간다. 말도 잘하고, 용모도 좋고, 신앙심도 좋은 인기인,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그래서 그런지 대주교님도 항상 그를 my best friend라고 부른다. 대주교가 뉴스를 타게 되면 반드시 Fox news를 통해서 나오는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작년에는 프로그램 전부를, 점심때를 제외하고, 경청해서, 대회장 밖에서 열리는 다양한 활동을 못 보았다. 그래서 올해는 중간 중간에 hallway로 나와서 여러 가지를 보기도 했다. 대부분 수녀회,수도회, 신앙단체를 소개하는 desk였지만, 상업적인 것으로 종교서적, 각종 video, audio disc, 묵주, T-shirts등도 있어서 신선한 공기와 더불어 기분 전환을 하기에 좋았다. 특히 Adoration Chapel (성체조배실)도 올해는 잊지 않고 방문을 해 보았다. 그곳에서 우연히 우리 미국본당의 주임신부 Fr. Darragh도 볼 수 있었다.
또한 특별 전시물도 있었는데, 그 중에 제일 인상적인 것이: ‘성체의 기적’에 관한 ‘유물’이었다. 이것은 The Real Presence Association이란 곳에서 소개하는 것이었는데, 나도 언젠가 이야기로 들었던 것이었다. 그것 중에는 ‘Miracle of Luciano’ 가 있는데, 미사 중 성체성사 때, 실제로 빵과 포도주가 ‘살과 피’로 변한 case였고, 그것을 ‘과학적’으로 분석한 것이 눈길을 끌었다. 예전에는 나도 쉽게 무시해 버렸던 역사적 사실이었는데, 지금은 다르다. 나는 그것을 믿게 된 것이다. 쉽지 않지만, 나는 이제는 믿는다. 이래서 ‘신앙의 신비’라고 했던가?
Deacon Jones, Fr. Leo, Emcee Russ Spencer
올해, 초청 speaker 중에 제일 ‘유쾌’했던 분은 바로 필린핀 출신 미국 신부님인 Fr. Leo Patalinghug, 이름의 느낌으로, 나는 태국 출신인줄 알았다. 볼티모어 Baltimore, MD 지역에서 유명한 신부님인데, 요리가 프로급으로 아마도 요리를 제일 잘하는 신부님일 것이라고 한다. 요리로 선교도 한다는데, 그것보다 ‘조그맣고 젊은’ 이 동양 사제는 정말 말을 유창한 영어로 잘, 재미있게 해서 웃음이 끝이지 않았다. 젊은 나이로 보아서 앞으로 정말 크게 기대가 되는 star라는 인상을 받았다.
또한 개신교, 그것도 ‘지독한’ 쪽인 evangelical Christian에서 ‘개종’을 한 흑인 부제, Deacon Alex Jones라는 사람, 이 부제님도 참 가슴에 와 닿는 이야기를 ‘경험에서’ 우러나온 솔직함으로 우렁차게 전했다. 요새 개신교, 특히 ‘대형 교회’가 많은 문제를 노출하면서 신앙을 버리거나 개종을 하는 news가 종종 있다. 아마도 이 부제님도 그런 case였을 것이다.
5시에 시작된 마감미사, 특전미사, vigil Mass가 이 성체대회의 ‘절정’이다. 거의 모든 참가자들이 이 미사의 ‘성체성사’를 기다린다. 거의 3만에 가까운 사람들이 질서정연하게 영성체를 하는 것은 정말 보기에도 장엄하다고 할까.. 이것을 안 하고 일찍 자리를 뜬 사람들은 사실, ‘결정적’인 것을 놓치는 것이다. 올해도 작년과 같이 영성체의 느낌이 아주 좋았다. 비록 대주교님으로부터 직접 받지는 않았어도 그것이 무슨 상관이랴.
쾌적하게 넓고 큰 대형버스와 점심때의 맛있는 김밥까지 무료로 서비스를 해 준 우리 한국본당, 순교자 성당의 선교부 형제 자매들.. 코가 시큰하게 느껴지는, 고마움 뿐이다. 내년에는 올해보다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이 참가했으면, 희망을 하고, 우리 (나와 연숙)도 또 올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해본다.
성체대회에 참가한 성가대 그룹
대주교님의 개회 선언, 아틀란타 성체대회, 2012
아틀란타 성체대회, 입장하는 성체를 보며
수많은 Banner들과 같이 들어오는 순교자와 김대건 한인성당 들
전시 홀에서 보이는 레지오 마리애 선교단
AEC 2012, merchandise and vendors in concourse area
우리의 또 하나의 본당,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에서 지난 5월 24일 저녁에 연례 성모의 밤 행사 (May Rosary Procession and May Crowning) 가 있었고, 나도 ‘난생’ 처음으로 참석을 해 보았다. 대강 무엇인지 짐작은 했으나, 결과적으로 참 느낌이 좋았던, 기대보다 알찬 행사였다.
비록 본당의 전 신자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라지만 성모님이 행사의 중심에 있어서 역시 성모 마리아를 ‘총사령관’으로 모시는 레지오 마리애가 주관을 했고, 올해는 연숙이 레지오 꾸리아의 간부인 부단장의 위치에 있어서 더더욱 적극적으로 참석을 한 셈이 되었다. 게다가 얼마 전부터 나도 꾸리아의 정회원 (지단, 쁘레시디움의 회계)이 되어서 조금은 참가한다는 사실이 그렇게 이상할 것도 없었다.
2007년부터 시작된 성모님께 전구(intercession)기도를 바치는 묵주기도로 나는 사실 ‘상전벽해’ 같은 개인적인 변화를 느꼈고, 이제는 뒤로 한발자국도 물러설 수 있는 ‘사치’가 없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성모님의 존재와 의미를 믿게 된 것이다. 성모신심을 ‘거의 장난 삼아’ 놀리는 인간들을 보면 하나만 알고 둘을 모르는 바보같이 느껴지고, 그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는 수없이 많다만, 그런 구차스러움 보다 한마디만 한다면, ‘Never Say Never’ 라는 것 뿐이다.
이런 행사들은 그렇게 ‘절차’가 복잡하지는 않지만 조그만 실수는 곧바로 ‘신심’에 영향을 줄 가능성이 많기에 치밀하게 계획을 하는 것을 이번에 옆에서 보게 되었다. 성당 내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행사들, 모두 그런 과정을 거칠 것이고 그것을 위해 수 많은 ‘봉사자’들이 바쁜 시간을 쪼개어 땀을 흘리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것도 나에게는 신선한 놀라움이었고, 그들을 다시 보게도 되었다. 한마디로 하면, ‘말 많은 몇 사람들 보다 묵묵히 신앙심 하나로 거북이처럼 움직이는 일꾼 봉사자들’ 을 보게 된 것이고 나도 그렇게 묵묵히 봉사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성모님께 ‘바치는’ 수 많은 뜨거운 촛불과 장미꽃들의 행렬,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수 많이 모여있는 촛불 옆에서 더운 날씨 속에서 땀을 뻘뻘 흘리던 한복을 곱게 입고 봉사하던 자매님들, 어쩌면 그렇게 아름답게 보였을까, 그것이 성모님을 연상시킨다면 지나친 비약이었을까. 사회를 경건하고도 활발하게 잘 이끌어 준 자매님과 Ave Maria를 ‘기가 막히게’ 잘 불러 준 자매님과 젊은 냄새가 풀풀나는 성가를 선사해준 청년 성가대원들, 끝까지 하나도 흐트러지지 않고 행사에 참여한 형제,자매님들, 모두 멋들어진 교향악단원 들이었다.
하지만, 굳이 조금 아쉬운 것이 있다면, 신부님께서 조금 더 그 특유의 ‘학구적인 접근’으로 성모의 밤을 해석해 주었으면 하는 것이었다. 그분의 성모신심을 다른 쪽으로 생각하지는 않지만, 조금 아쉬운 감은 감출 수가 없다. 또한, 본당 사무실이 조그만 신경을 더 쓴다면 이럴 때 에어컨을 ‘빵빵’ 틀어주어서 수 많은 촛불과 사제복 속에서 땀을 흘리시는 신부님과, 성장을 한 한복의 자매님들을 편안하게 해 주었으면 아쉬움도 있었다.
¶ 2012년 5월 17일, 지난 목요일, 그러니까 천주교 전통적 전례력으로 “예수 승천 대축일(Ascension of the Lord)” 인 그날 저녁에 아주 이색적인 매일미사가 이곳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에서 집전이 되었다. 아마도 평생, 40명 사제가 드리는 미사는 처음이자 마지막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 정도다.
그 사제, 신부님들은 올해 이곳 아틀란타에서 개최된 (한’민족’) 북미주 지역 사제회의에 참석한 신부님들의 일부였고 그들이 회의 일정을 모두 마치고 떠나면서 드린 일종의 ‘파견’ 미사였고, 덕분에 우리 본당이 큰 ‘은총’을 받은 셈이 된 것이다. 결코 작지 않은 우리 본당의 좁게 느껴질 정도로 꽉 차고, 열기 넘치던 한마디로 ‘장엄미사’를 경험하게 되었다. 40여명의 사제들, 갓 신품 받은 젊은 신부부터 노익장들까지.. 그들은 어떻게 저런 ‘어려운’ 소명을 받아드렸을까?
처음에는 ‘혹시라도’ 참가 사제 수에 비해서 빈약한 신자들의 참여를 염려했는지, 주임신부 하태수 미카엘 신부님 그 동안의 비교적 ‘점잖은’ 태도에서 아주 적극적으로 각종 channel을 통해서 ‘홍보’ 활동을 하시고, 결과적으로 대 성공적인 추억의 미사가 되었다. 인천교구에서 오신 해외사목담당 주교님을 비롯해서 북미주 지역 구석구석에서 한인들의 영혼의 건강의 맡고 있는 120명이나 되는 사제들.. 참 인상적이다.
대한민국의 사제의 숫자가 아무리 많다고 해도 120명의 사제가 북미주에서 사목을 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커다란 은총이 아닐 수 없다. 우리 부부가 속한 레지오는 숫제 이번 미사참가가 ‘활동’으로 배당이 되었기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지만, 얼마 전에 분가한 형제 본당 (김대건 성당) 소속 레지오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소식에 흐뭇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 故 채준호(마티아) 신부님의 희재 연도가 2012년 5월 18일, 신부님이 한때 ‘머무셨던’ 이곳 미국 아틀란타 한인 순교자 성당에서 있었다. 희재 연도라 함은, 나에게는 귀에 익지 않은 용어지만, 대한민국(한국) 전통적 불교 장례의 49재와 비슷한 것으로 ’50재’에 해당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신부님 선종일로부터 50일째가 되는 날 드리는 연도인 것이다. 3월 말에 선종을 하셨으니 아마도 그쯤 되었다고 생각이 되는데, 이것은 확실치는 않지만 ‘본당차원’으로 가지는 것으로 다른 개인연도와는 다를 것이다.
개인적으로 알 기회가 없었던 이 채 신부님은 시간이 갈 수로 더 알고 싶어지는 그런 삶의 소유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렇게 일찍 선종하신 확실한 이유가 시원스레 알려지지 않았던 것은 조금 생각해 볼 문제가 아닐까. 죽음은 궁극적으로 ‘개인적이고, 홀로 겪은’ 엄숙한 과정 (천주교 교리에서의, “다음 세계로 가는”)이긴 하지만 이 채 신부님같이 널리 알려진 ‘공적인 삶’이라는 사실도 무시할 수 없다. 비록 희미하게나마 ‘아주 어려운 case의 암 투병‘ 이었다고 듣기는 했지만 누구도 확실하게 장담을 못하는 실정이다.
그렇게 어려운 투병은 일반 평신도들은 원하면 누구나 널리 ‘기도의 요청’을 하며 같이 견디는데, 어찌해서 그런 지도자의 위치에서 그런 ‘공적인 도움’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지 않는 것일까? 이것이야말로 속단은 금물이고, 결국은 신부님이나 그의 가족만의 privacy에 속하는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고통도 나누며 견디면 그만큼 덜하다고 하던데..
이제 레지오 활동 단원 선서를 한지도 일년이 훨씬 넘게 되었다. 일요일 미사에 가는 것이 가톨릭 신자 삶의 전부인 줄로 크게 착각하며 산지도 거의 30년이 지난 후 어떻게 이렇게 내가 레지오 마리애란 본당소속 평신도 단체에 들어오게 되었는지 생각하면 할 수록 신앙이란 것이 오묘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연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지만, 사실 그것은 천만의 말씀 임도 깨닫게 되었다.
누군가, 어떤 무엇이 나를 위해 기도를 한 것이 큰 역할을 했다는 ‘상투적인 말’이 이제는 많이 이해가 가고 믿게 되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한마디로 ‘기도의 힘’을 믿게 된 것이다. 그것을 깨닫기 시작하면서 이제는 많은 전에 못 보며 살았던 것들이 눈에 보이고, 들리고, 이해가 되기 시작한 것이다.
얼마 전에 레지오 마리애 특유의 ‘군대 같은 조직의 힘‘을 발휘해서 쓸쓸할 수밖에 없을, 가족 친지가 그렇게 많지 않은 어떤 교우 가정의 연도와 장례식에 참석을 해서 마지막 가시는 길을 같이했다. 이런 것이 레지오 활동의 대표적인 예인데, 이것 이외에 상당히 많은 종류의 레지오 활동들이 있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이렇게 가족들과 고통의 슬픈 이별을 하는 과정을 함께 같이하는 것에서 제일 보람을 느낀다.
그래서 레지오의 ‘왕’ 초보과정을 거치면서 한가지 결심한 것 중에는, ‘쓸쓸한 연도와 장례’일 수록 ‘우선적’으로 참여한다는 것도 있었다. 어떤 의미로 이것은 내가 개인적으로 겪은 수치스럽고, 후회스럽기만 한 쓰라린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내가 나의 가족에게 못다한 것을 이것으로 조금이라도 보상받으려는 얄팍한 심리일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무슨 상관이랴?
이렇게 쓸쓸하게 보이는 영혼을 조금 더 따뜻하게 보내드리는 것 이외에 신앙의 신비를 체험 못하고 살았던 사람들을 교회로 인도하는 것도 레지오 마리애 으뜸의 사명으로 꼽힌다. 나는 사실 ‘왕 초보’ 급이어서 그것까지는 사실 꿈도 못 꾸는 단계지만 연숙은 그런대로 경험이 쌓인 단원이라서 옆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실습적인 공부가 된다.
이것이 바로 레지오가 말하는 ‘도제제도(apprenticeship)’ 라는 것인데, 이론적인 것보다는 그저 선배를 보며 자연스럽게 배우는 것이다. 예술가나 장인匠人들이 선배들의 기술을 옆에서 배우는 과정과 비슷할 것이다. 얼마 전에 그런 완전한 한 과정을 보게 되었는데, 연숙이 어떤 영혼과 육체가 모두 지친 자매님을 교회로 이끌어 세례까지 받게 한 것이다. 몇 개월에 걸친 꾸준한 노력의 결실을 맺는 것을 보면서 나는 큰 감명을 받았다.
마냥 편하고, 행복하게 인생을사는 것이 그리 쉬운 것이 아님을 매일 느끼며 살지만, 이런 활동을 통해 보면 우리보다 훨씬 덜 행복하고, 덜 편한 삶과 인생도 안 보이는 곳에 많다는 것을 보며 놀란다. 이번에 새로 ‘부활절 이후 특별 영세’ 를 받은 자매님도 그런 인생을 살았었을 듯 한데, 그날 본 인상은 정말 완전히 새로 태어난 듯한 행복한 얼굴이었다. 이것이 바로 레지오 활동과 보람의 ‘정수(精髓, essence)’가 아닐까.. 거듭 생각하고 생각하며, 나도.. 어떨까.. 이런 일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머물면 망설여진다.
바로 내가 이런 초보, 겁 많은 단계에 있는 것이다. 레지오 교본을 거듭 읽으면, 이런 것들은 역시 ‘인간 의지’만으로는 부족함을 알 수 있고, 성모적 신심과 조직의 힘을 절묘하게 ‘이용’해야 가능함을 알게 된다. 나는 아직도 멀었다는 생각도 들지만, 첫 술부터 배부르랴.. 모든 것에는 다 초보단계를 거치며 실수와 방황을 하게 마련이니까, 조급할 것은 없지만, 그래도, 시간이 그렇게 생각보다 많지 않으니..
간밤에 근래에 듣기 힘들었던 소리를 들었다. 폭우.. 쏟아지는 물.. 잔잔하게 계속 내리는 비, 어둠 속에서도 봄비의 내음새가 코를 찌른다. 끈끈하게 느껴지기만 하고 실제로 내리지 않는 비를 기다리던 날들이 얼마나 되었던가.. 초봄에 시작된 우리 집 연숙의 자랑인 텃밭의 풍작도, 이 단비를 기다린 지 얼마나 되었던가?
그것이 어제부터 낌새가 봄비의 냄새를 풍기기 시작했지만, 우리가 사는 곳은 기가 막히게도 피해가더니 결국은 아틀란타 메트로 지역전체를 휘감고 ‘물을 퍼붓기’ 시작한 것이다. 바로 이것이 단맛의 냄새를 내는 봄비였다. 이것을 한참 잊고 살았다.
이 글의 아래 실려있는 youtube video, Spring Rain은 아주 오래 전 작을 딸애, 나라니, Veronica가 어렸을 때, Father’s Day때 나에게 선물로 준 sleep music series 의 하나인 audio cassette tape을 나의 없는 실력을 총동원해서 music video로 바꾸어 youtube에 올려놓은 것이다. 이곳의 image들을 모두 google image에서 실례를 한 것이고, Windows의 ‘공짜 프로그램’인 MovieMaker를 사용했다.
원래의 테입이 양면 (A와 B)으로 되어있어서 한 면씩 따로 copy를 해서 part 1과 part 2로 올려 놓았다. 이 ‘소리’의 특징은 자연적인 빗소리와 그에 걸 맞는 instrumental music을 절묘하게 섞어 놓아서 그야말로 sleep music 이름대로, 눈을 감고 이것을 들으면 촉촉히 대지를 적시는 봄비소리를 생각하며 잠을 잘 수도 있다.
오늘 New York Times의 기사에, 어떤 여론, 설문조사에 대한 것이 실렸다. 일반인들이 느끼는 기후에 대한 것인데, 이것은 조금 느낌이 새로운 것이, 자연 현상에 대한 여론조사? 이런 것도 있었나.. 하는 느낌이었다. 자연현상은 100% 객관적, 과학적인 것이 아니던가.. 이것도 사람들이 느끼는 ‘주관적’인 것이 상관이 되는가? 이 세계적 기후변화는 이제 과학적, 객관적인 것이 아니고 거의 ‘주관적, 정치적’인 화제로 변했다는 증거일 것이다.
특히 ‘병신같은 무지랭이‘ 일부 미국인들의 역할이 크게 작용을 한다. 과학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종교적인 것을 ‘거의’ 혼동하는 이 ‘병신같은 무지랭이, 일부 미국인 들’.. 완전한 희극의 절정을 보여준다. 그런대로 배웠다는 정치인 중에도 이런 부류들이 섞여있다. 그들의 출신지역의 ‘병신같은 유권자‘를 의식했을 것이다.
그러던 것이 작년에 그들이 실제로 보고, 느끼고, 겪었던 extreme weather로 조금 기세가 꺾인 것이 이번 여론,설문조사에서 들어난 것이다. ‘거의 대부분’이 이제는 기후,기상 system이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반응을 보인 것이다. 정말, 이런 한심하고 우매한 ‘병신’들이여..극소수의 ‘목소리가 큰’ 기상 과학자들.. 그들은 이제 어떠한 반응을 보일 것인가? 종교와 과학의 회색지대에 살고 있는 이들은 정말 위험한 부류의 인간들이고, 이들이 진정한 의미의 종교철학에 오명을 남기고 있는 ‘배반자’이라는 생각이 든다.
¶ 4월은 미국태생 영국 거장 시인T.S. Eliot 에 따르면 ‘잔인한 달, April is the cruelest month‘, 그리고 대한민국의 작곡가 박순애 교수의 가곡 classic ‘사월의 노래‘를 생각하게 하는 그런 달이다. 사월의 노래를 생각하면 특별히 1963년 4월이 생각난다. 그때에 나는 서울 중앙고교 1년 재학 중이었고, 사월의 노래는 담임 선생님 김대붕 음악 선생님께서 가르쳐주신 노래였다. 작곡자가 이화여대 음대 김순애 교수라는 것을 강조하셨는데, 그 당시 그 이유는 몰랐지만, 혹시 김선생님과 무슨 특별한 관계가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 후에 들곤 했다.
1963년이면 그 전 해에 일어난 5.16 군사혁명으로 모든 것들이 ‘재건’의 구호 하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던 때였고, 사실 ‘느끼기에’ 비록 경제적으로 가난은 했어도 앞날이 희망적인 시절이어서 그 해 4월의 유난히 더 청명하던 계절과 함께 기억하고 싶은 때였다. 이곳 아틀란타 지역은 3월에 거의 ‘여름’같은 맛을 일주일 이상 보여 주더니 4월로 접어 들면서 완전히 2월 달 같이 거의 겨울 같은 날씨로 돌아섰다. 며칠 전에는 거의 섭씨 5도까지 떨어질 정도였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도 new normal의 하나라고 푸념을 하던데.. 확실히 무언가 변한 것 같다.
4월의 노래 김소월 시, 김순애 곡
¶ 올해의 부활절에 이르는 기간은 정말 우리 부부에게 기억에 남을 만한 각가지 기록을 깨면서 보낸 정말 ‘은총’을 받은 듯한 기분으로 보냈다. 비록 나는 판공성사를 거르는 심각한 잘못을 하긴 했어도 다른 것들로 많이 보완을 했다고 믿는다. 그 중에서 지금은 거의 습관이 된, 매일미사 참례가 그 중에 가장 큰 보람이 되었다. 사순절이 시작되면서 화요일을 제외한 나머지 매일 우리의 미국본당 Holy Family Catholic Church에서 아침 9시의 미사를 본 것이다.
이것은 사실 연숙이 이번에 시도한 ‘33일 봉헌‘이라는 사순절 행사에 ‘도전’을 하면서 내가 옆에서 도와주는 것으로 시작이 되었다. 33일 봉헌이라는 것에는 매일 미사 참례를 ‘적극적’으로 권하기 때문이었다. 연숙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이 참 어려운 사람이라서 나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래서 나도 같이 갔는데.. 이것도 Never say Never 의 한 예가 아닐까 할 정도로 내가 미리 생각했던 것과 결과적 느낌이 아주 달랐다. 하루를 이 미사로 시작한 것이 너무나 하루를 보내는데 도움이 되는 듯 싶었다. 더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게 되었고, 하루 한번 꼭 밖으로 나와서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 자체가 나에게 보이지 않는 힘을 주었던 것이다.
나는 ‘절대로’ 며칠 못 견딜 것이라 ‘단정’을 했지만, 결과적으로 그것은 내 자신에 대한 지나친 과소평가였다. 이래서 매일 미사에 나오는 사람들이 그렇게 있구나 하는 생각 뿐이었다. 이것이 올해 사순절, 부활주일에서 가장 보람된 일이었고, 성3일도 빠지지 않아서 판공성사만 빼고는 거의 완벽한 성주간을 보낸 셈이 되었다. 이것이 우리 부부나 가정에 어떠한 영향이나 도움을 줄지는 ‘수학적’으로 계산을 할 수는 없지만, 이제는 신앙이란 것, 믿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야말로 ‘어렴풋이’ 느끼게 되었다.
¶ 아틀란타 혼또니 입빠이 제 2탄 믿을 수 없다. 정말 정말.. 혼또니 혼또니.. 이것이 바로 요새 유행어로 New Normal인가, New Frontier인가? 이곳 아틀란타의 ‘악명’을 하나 더 높일 사건에 우리들은 놀라기만 했다. 또 다른 한인 일가족 ‘총기 살인, 자살’ 사건이 터진 것이고, 이번에도 역시 우리가 아는 사람이 관련이 되어서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못했다.
이 사건들의 공통분모는 역시 ‘총’이란 것에 있다. 만약에 이것이 없었으면, 누가 알까.. 일본 같았으면 ‘칼’을 썼을 것이고, 오랜 전 같았으면 아마도 대판 주먹질을 하며 싸울 정도가 아니었을까? 이것도 New Normal 중의 하나로, 완전히 서부개척시대를 연상시킬 정도가 되었다. 불륜에서 비롯된 이런 사건은 사실 흔한 것이지만 이렇게 분에 못 이겨 그것도 여자가 총으로 분을 풀고 자살하는 case는 사실 그렇게 흔한 것이 아닌데.. 그것도 한인들이었고, 불륜의 주인공이 한때 우리가 잠시 알았던 50대 초반의 ‘아줌마’였으니.. 놀라지 않겠는가?
일명 ‘나래 엄마’.. 그 나래라는 여자 아이는 1990년대 초에 연숙의 한국학교 유치반에 있었고, 그 ‘나래 엄마’는 나도 그 당시 그곳에서 가르치고 있어서 알고 있던 한 젊은 엄마였다. 그 엄마가 어떤 인생을 살아왔기에 한 가정의 가장과 불륜을 저지르고 그런 사건의 빌미를 제공했을까? 역시, 올바른 인생은 못 살았을 것이다. 나래 엄마와 ‘공공연히 자기 앞에서’ 바람을 피운 남편이 얼마나 증오스러웠으면 그 가해자인 아내는 남편과 나래엄마를 총으로 쏘고 자기도 쏘았을까?
결과적으로 그 부부는 사망을 했지만, 나래 엄마라는 여자는 죽지는 않았다. 그 여자는 어떻게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며 살아갈지.. 상상이 가지를 않는다. 참 무서운 세상이여.. 총이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쓰는 사람이 죽이는 것이라는 기가 막힌 궤변이 잘 통하는 이곳 .. 실증이 나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