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또다른 ‘젊은‘ 엄마의장례미사: 오늘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에서는 ‘뜻밖의, 급작스러운’ 연도와 장례미사가 있었다. 모든 죽음이 어떤 면에서는 뜻밖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번의 죽음은 내 주위의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젊은 느낌’을 주는 Camilla 자매님의 죽음이었다. 지난 3월 사순절 막바지에 오랜 투병을 끝내고 선종을 한 다른 ‘젊은 엄마’ 보나 자매님의 기억이 생생한 이 마당에 또 한 명 자매님의 선종은 예기치 않았던 글자 그대로 ‘급작스런’ 죽음인 것 같아서 가족들에게는 큰 고통이었을 것 같았다.
한창나이 쉰 을 갓 넘은 ‘젊은 엄마’의 죽음.. 불과 3일 전, Mother’s Day 하루 전에 급작스러운 엄마의 타계.. 그 가족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나로써는 도저히 가늠을 할 수가 없었다. 특히 학생나이의 두 따님의 심정은..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사연은 알 수가 없지만 그래도 ‘고향’같을 수도 있는(견진성사를 이곳에서 받았다기 에) 순교자 성당에서, ‘해맑은’ 한 토마스 신부님의 ‘젊지 않게 깊이 있고, 자상한’ 고별강론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는 유족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었으리라..
비교적 앞 자리에 앉아서 고별미사 내내 나는 고인의 사진을 응시하며 생각을 한다. 60/70년대 통기타 folk singer였던 박인희씨를 연상시키는 그런 ‘청초’한 모습, 저렇게 ‘예고 없이’ 급작스럽게 떠나는 것.. 본인은 알지도 모르겠지만 가족들과 지인들의 놀라움과 슬픔을 한동안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우리 부부가 그런 처지를 당하면.. 상상을 한다. 그런 제로가 아닌 가능성을 매 순간 생각하며 살면 비록 피곤은 하겠지만 조금이라도 ‘사랑스런 말이나 표정’으로 서로를 대할 것 같지 않을까?
고인의 큰 따님(순교자 성당 종교학교 교사였다고 함)이 사실 불과 일 주일 전 마지막 고인을 보았을 때 별로 좋은 않은 감정으로 헤어졌다고 후회를 했다는 신부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어찌 안 그렇겠는가, 아마도 두고두고 후회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떠난 날 다음날이 Mother’s Day임을 생각할 때, 이건 너무하다는 생각까지 든다. 그래서, 매일 매일이 마지막 날이라는 생각으로 살라는 말이 바로 그런 뜻이 아니겠는가? 비록 평소 전혀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교우 자매의 고별식이었지만 뜻 밖에 이런 저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된 ‘레지오 화요일’ 오후가 되었고 차를 타고 집에 돌아오며 가족들끼리 틈이 날 때마다 ‘We love you‘라는 message를 교환하자고 하기도 하였다.
¶ 돼지띠프란체스카: 장례미사가 끝나고 ‘실로’ 오랜만에 가보는 ‘본가 설렁탕’이란 순교자 성당에서 아주 가까운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뜻 밖에도 20년 지기 知己, 최형 (a.k.a.진희 아빠)의 누님인 프란체스카 자매님를 만나게 되어서 합석을 하게 되었다. 참 이곳에 오래 살다 보니 이런 때도 오는가.. 최형은 비록 ‘전통적’인 가톨릭 교우이지만 Sunday Catholic 정도라고 할 수 있는데 비해 누님인 프란체스카 자매는 매주 화요일 레지오 주회합 우리 바로 옆 방에서 모이는 다른 레지오의 부단장을 하는 비교적 활동적인 교우라고 할 수 있다.
예전에는 최형의 집에서 모임이 있을 때 가끔 볼 정도로 잘 알지 못했는데,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주일 마다 얼굴을 보게 되기도 하고 꾸리아 월례회의에서도 우리의 바로 옆자리에 앉는 등 가까워진 느낌까지 들게 되었다. 그래서 알게 된 사실은.. 이 자매님, 비록 ‘누님’ 격으로 통했지만 나와 띠가 같은 ‘돼지띠’였다. 최소한 나와 동갑인 셈이 아닌가? 깎듯이 누님으로 대하던 것이 조금은 어색해지기도 하고, 이렇게 가까이 앉아서 식사까지 하게 되니 이제는 동갑친구 같은 생각까지 드는 것이다.
돼지띠를 만나거나 보게 되면 나는 이상할 정도로 정이 가는 것은 왜 그럴까? 2년 전까지만 해도 ‘전요셉’ 형제가 돼지띠 동갑으로 사귀게 되어서 나를 기쁘게 했지만 사귀자 마자 ‘영구귀국’을 해 버려서 얼마나 섭섭했는지 모른다. 그러던 차에 돼지띠 ‘누님’이 나의 앞에 등장한 것이다. 친구누님으로 대할 것인가 돼지띠 동갑친구로 대할 것인가.. 조금은 혼란스럽기까지 하지만 이날 동석으로 식사를 하면서 ‘말이 통하고, 재미있는 자매’임을 느끼고 안심을 하였다. 동생 최형과 같이 서울 덕수국민학교 출신 임도 알게 되었는데, 나와 정확히 같은 해에 같은 서울 하늘아래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사실만도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으니..
이날 같이 합석을 한 ‘자매님’들은 같은 레지오 단원들인데 우연히 이들 group이 몇 년 전 최형과 같이 기타 강습을 받았던 것을 알았는데, 다시 기타를 배우고 싶다고 하더니 나보고 가르쳐달라는 요청까지 받았다. 글쎄.. 내가 얼마나 할 수 있는지 잘 모를 텐데, 꼭 배우고 싶은 열망이 있다는 것으로 짐작을 하였다. 우선 생각을 해 보자고 했지만.. 솔직히 말하면 나의 guitar솜씨로 남을 가르칠 수 있을까.. 자신이 없다. 나의 기타 솜씨는 완전히 ‘등 넘어 배운’ 정도인데 어떻게 남을 가르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이렇게 무언가 배우며 살고 싶은 건강하고 멋진 자매님들이 레지오에 있다는 사실이 신선하고 기쁘기까지 했던 명랑했던 장례미사 후의 식사시간이 되었다.
5월 1일의 친구들이여 용현아, 창희야.. 잘들 있었는가? 다시 5월 1일이 일년을 지나서 우리를 이렇게 ‘허공’에서 만나게 하는가? 허공에서라도 큰 문제는 없지 않는가? 생각과 의식적 역학으로 우리는 일년 동안 계속 만날 수 있으니까. 이래서 일년의 흐름을 가늠하며.. 자네들의 지난 지난 일년, 옛 친구의 정을 이런 찬란한 어머님의 계절에 다시 한번 추억하는 것.. 나쁘지 않네..
코흘리개 원서동 개천시절부터 연인들까지 합세한 대학시절들까지.. 우리의 시대, 역사 속으로 빠르게 사라지고 있지만.. 사진 같은 그런 추억들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 믿고 싶다. 이제는 다시 이 세상의 친구로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지나가는 생각이 들 때는 하찮은 ‘느끼고 보여야만 하는’ 이 세상이 지나면 다른 그림들이 보이지 않을까 생각을 한다.
지난 일년 어디서라도 가족들 모두 건강하게 잘 지냈으리라 믿고 싶고, 우리 집도 하느님의 보호로 비교적 건강한 세월을 보냈다고 말 하고 싶다. 너희들은 분명히 출가한 자식들이 있으리라 추측을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모두 single을 고수하는 이상한 풍조에 휩쓸려 편안한 ‘혼자의 인생’을 고집하고 있으니.. 하지만 나는 이것만은 조금 progressive한 쪽인가..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 자기들의 인생은 이미 우리에게서 떠난 것이고,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것인지 그것은 공식이 없지 않은가?
70을 바라보는 시점에서.. 자네들은 나머지 세월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생각을 하며 사는가? 나는 아직도 뚜렷한 계획이 없지만 조만간 어떤 ‘계시’를 받을 수 있다는 희망은 버리지 않는다. 예전에 그렸던 노후인생의 모습들은 이제 완전히 사라지고 전혀 예상치 않았던 다른 세계관에 의한 것들이 우리의 앞에 나타나는구나. 아마도 그것이 진정한 평화로 가는 유일한 길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도,
아무리 ‘나의’ 세계관이 엄청 변했어도 절대로 변할 수 없는 것은 역시 ‘우리들의 시대’에 대한 아련한 추억들일 것이다. 내년 2017년 5월 1일에 다시 만나자! Adios Amigo!
¶ J. Christopher’s, Expect the unexpected: 2016년 4월 11일 월요일, Monday morning stress (even disease), 이제는 거의 잊고 살게 되었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는 아직 그 ‘싫은 월요일 아침’,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 Monday Monday..
허.. 4월도 어느덧 중순으로 돌진? 점점 weekly routine이 고정되는 느낌도 없지 않지만 다른 쪽을 생각하면 안정된 나날을 보내고 있다는 위안감도 없지 않다. 무언가 폭풍우가 지난 후의 평온 감이라고나 할까..
며칠 전부터 몸이 이상하게 피로하고 낮에도 잠이 쏟아지고 몽롱한 느낌이 계속 머리를 맴돌았다. 처음에는 그저 보통 이른 봄에 느끼는 그런 것이겠지 했지만 오늘 확실한 증상을 잡았다. ‘미열’이 느껴지는 것이다. 머리가 아뜩아뜩한 것도 그것이 이유였다. 그러면 왜 ‘미열’이? 99% 이것은 감기나 몸살 나아가서 독감의 초기증상이라는 짐작이 들었다. 과거에도 이런 적이 있었다는 기억이 나는 것이다.
이 정도면 정상적인 생활의 리듬을 전혀 깨지 않을 자신이 있다는 생각으로 오늘도 월요일 regular workout day 의 routine인 Sonata Cafe snack 준비로 시작해서 아침 미사 (along with the Miraculous Medal novena), 엘 갔었다. 미사가 끝나면 곧바로 Sonata breakfast snack을 먹고, YMCA workout을 하게 되는데.. 오늘은 예외가 생겼다. 같은 구역, 엘리사벳 자매가 자기 남편이 (외국에서) 잠깐 들리러 왔으니까 아침을 같이 먹자는 것.. 근래 morning daily mass regular가 된 크리스티나 자매까지 해서 오랜만에 남자가 하나 더 늘어난, 5명이 우리는 처음 가보는 J. Christopher breakfast & lunch 란 곳에 가서 찐~한 구수한 내음새의 coffee를 ‘무한정’ 즐기며 아침식사를 같이 했다.
우리 집 바로 근처에도 있는 J. Christopher’s, 처음에는 Panera Bread 가 없어진 이후로 우리의 regular place가 될 가능성이 없지 않았던 곳인데 이번에 와 보게 된 것이다. ‘색다른’ 곳으로 연상을 했지만, 물론 McDonald’s 와는 ‘차원’이 다른, 대부분 menu가 under $10 정도로, 얼마 전에 없어진 Einstein Brother’s 와 비슷한 model 인 곳이었다. 이 정도면 McDonald’s를 대신해서 더 자주 들려도 될 듯하다.
여기서 마리에타 2구역의 현황에 대해서 비교적 자세히 듣게 되었다. 결국 공식적으로 구역이 2반으로 나뉘고, 기준은 전에 제안이 되었던 zip code에 의한 것, 처음에는 예외를 둔다는 정도로 우리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특기사항은 과연 어떤 누가 어떤 ‘반’으로 갔느냐는 것이다. 듣고 보니 역시 예상대로였다. 평소에 같이 buddy-buddy 모이던 사람들끼리 같은 ‘반’에 모이게 된 것이고 그것이 사실 대부분이 원하였던 것이다. 이런 사실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제는 그룹의 ‘덩치’가 반으로 줄어들어서 모이는 것이 쉬워지고 food, parking etc, 더 이상 분열되는 동기도 줄어들고, 한마디로 자연적인 해결의 방향으로 가게 된다는 사실이다. 조금 아쉬운 것은 이런 변화가 훨씬 전에 시도가 되었으면 여러 가지 불필요한 소음과 불미스러운 소문들이 훨씬 덜 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 Curia Monthly Sunday, 꾸리아 월례회의: 어제는 모처럼 (나로서는 3주 만에) 도라빌 순교자 성당 주일미사를 참례하게 되었다. 부활절 미사는 나의 불찰로 빼먹었고 (고해성사 깜이다!), 지난주 주일 미사는 ‘모처럼’ Holy Family 성당으로 갔었다. 그러니까.. 특별한 일 business 이 없으면 ’15분 drive 거리, 정든 동네성당’, Holy Family 로가는 것이 rule이 되었지만 통계적으로 한 달에 2번 정도는 도라빌 순교자 성당 주일 미사엘 가게 되니까 그런대로 우리는 공평하게 반/반으로 미국/한국 성당 주일미사 참례를 하는 것이다. 나는 이것.. 참 이상적인 것이라고 생각을 한다. 어차피 우리는 bi-cultural 환경으로 오래 살았기에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이것이 역시 편한 것이다.
어제 도라빌 순교자 성당에 간 것은 물론 레지오 (마리애) 꾸리아 Curia 월례회의가 있다는 것이 이유다. 이 월례회의도 레지오 간부들 의무 중에 으뜸이기에, 잠재적으로도 ‘절대로 가는 것’이 rule이 되었다. 이제는 이 월례회의에 출석하는 것, 익숙해졌고, 나아가 편해지기도 했다. 그만큼 그 동안 (거의 3+ 년?) curia business에 대해 많이 듣고 배웠다는 증거일 것이다.
이 월례회의에 가보면 요새 사회적으로도 ‘남자들의 신세’가 어떤가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기도 하다. 평의원 중에 눈에 뜨이는 ‘형제’님.. 거의 없을 정도다. 역시 이곳에서도 나는 좋건 싫건 간에 ‘꽃 밭’에 앉아 있는 셈이다. 이것도 이제는 익숙해져서 큰 문제는 없지만.. 그래도 외로운 느낌이 없는 것도 아니다. 1년 전만해도 돼지띠 동갑전요셉 형제가 항상 이곳에 버티고 있어서 반갑고, 덜 외로웠다. 다른 형제님, 한때 노래도 같이하며 알고 지냈지만 이곳에서 다시 보면 그렇게 생소하게 느껴질 수가 없다. 애석하게도 역시 mutual interest 가 별로 없다는 증거일 것이다.
1시간 반 정도의 ‘월례회의’는 사실 우리 본당 레지오에서 가장 실질적이고 눈에 보이는 ‘평의회, council ‘로 사실상 레지오의 ‘정부기관’이라고 볼 수 있다. 그만큼 power와 responsibility가 큰 것이다. Rules & regulations 같은 것보다는(그것도 중요하지만) ‘실질적 활동의 예와 모범case’를 이곳에서 나누며 ‘배우는’ 것이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회의를 끝내고 나오며 이런 아쉬운 감을 떨칠 수 없다.
산, 바람, 하느님 그리고 나.. 서정적인 시를 연상시키는 이 구절은 사실 어떤 ‘유고집 遺稿集’ 책의 제목이다. 언뜻 들으면 “산에 가서 부는 바람을 맞으며 하느님을 생각하는 나” 정도로 연상이 되기도 하지만 과연 이 책은 어떤 책인가?
주일 전에 아틀란타 도라빌 소재 한인 천주교회, 순교자 성당의 ‘성물방 책 코너 book corner’엘 들렸다가 ‘우연히’ 보게 된 책이었다. 이런 것들이 우연일 것이다. 전혀 계획을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우연이 정말 우연일 chance는 과연 얼마나 될까?
평소에 보통 나는 성물방엘 잘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은 예외적으로 10시 반 미사에 맞추어 성당 주차장 교통정리 봉사를 하게 되어서 아침 8시 30분 미사에 참례했어야 했고 12시 45분에 예정된 레지오 꾸리아 월례회의 때문에 ‘장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성물방에 있는 book corner에 들린 것이고 그곳에서 이 책을 잠깐 보고 대출을 받게 받게 되었다.
이 책이 눈에 들어온 것은 이유가 있었다. 이 유고집 저자의 이름, 김정훈, 김정훈 베드로 부제 副祭.. 나의 거의 60년 된 깊숙한 곳 뇌세포에서 이 오래된 이름을 찾아 내었다. 1959년 서울 재동국민학교 6학년 동창이었다. 이 책을 대출 받으며 곧바로 나는 옆에 서있던 연숙을 바라보았다. 서로가 이 책의 제목을 알아본 것이다. 1990년 쯤 아틀란타에 이사 와서 처음 살던 Norcross의 직장 바로 근처에 있던 Four Seasons Apartment.. 우리 살던 아파트 건물 아래 쪽에 한국 상사직원 가족이 살고 있었는데 두 딸이 곧바로 우리 애들과 학교를 같이 가게 되었고 알고 보니 그 집 엄마가 나의 중앙고 동창 박우윤의 여동생이었다. 그 집에 책이 많이 있어서 연숙이 가끔 빌려보곤 했는데.. 그 당시 연숙이 그 책을 보고 ‘나와 비슷한 나이로 일찍 타계한 아까운 젊은 신부’에 대한 이야기를 했던 까물거리는 기억.. 그 당시 나는 거의 직감적으로 ‘김정훈’이란 나와 동갑인 신부의 이름이 ‘나의 재동국민학교 동창’일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러고 나서 그 책은 곧바로 뇌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아마도 그 당시 연숙은 그 책을 읽었을 것이다.
이런 인연으로 이번에 다시 나의 ‘손에 들어온’ 이 책이 우연만은 아니라는 생각, 어쩌면 재동 동창생 김정훈을 다시 발견하게 될 기회라는 ‘사명감’ 같은 것도 느끼게 되었다. 김정훈, 김정훈 부제.. 1960년 재동국민학교 졸업, 1966년 경기중고교 졸업.. 가톨릭대학 신학부 졸업, 인스부르크 대학교 유학, 부제 서품, 1977년 6월 2일 예기치 않았던 등산길에서 조난 사.. 김수환 추기경까지 참석예정이었던 사제 서품을 바로 코앞에 두고 선종.. 흡사 작은 ‘개인 서사시’ 같은 느낌.. 흠~ 30세에 선종..이란 말이 나의 코를 찡~~하게 만든다. 어찌 채 날개도 못 펴고 그렇게 갔단 말인가?
내가 아는 김정훈은 사실 단편적인 평범한 오래 된 동창의 기억 정도다. 나와 ‘친한 친구’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같은 반이라는 정도지만 이 ‘친구’는 조금 더 기억이 나는 것이.. 6학년 때 ‘아마도’ 전학을 왔던 것 같다. 학년이 시작되고 중간에 들어온 case였던가? 당시 우리 반은 6학년 전체에서 가장 우수한 애들이 몰려있었는데.. 당시 담임 박양신 선생님 왈: ‘김정훈은 공부를 아주 잘한다’는 말로 소개를 했던 것. 아니나 다를까.. 이 애는 기기 막히게 공부를 잘했다. 하지만 말이 별로 없었고.. 그러니까 나이에 걸맞지 않게 ‘겸손’하다고 할까? 그것이 전부였다. 말썽을 피우지 않으니 크게 기억할 사건이 없는 것이다. 우리 반에는 당시 ‘경기중 지망’ 수재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대부분 집안들이 떠들썩하던 치맛바람이 아니면 아이들이 그다지 겸손한 편은 아니었는데 이 김정훈은 그런 기억이 전혀 없었다. 그러니까 ‘조용히’ 경기중학교에 간 것이다. 그런 사실만 나중에 알았고 곧 잊었는데.. 중학교 당시 나는 이 친구를 서울 낙원동 파고다 공원 (일명 탑골공원) 수영장 앞에서 ‘멀리서’ 보았다. 자기보다 나이 어린 아이를 데리고 수영장으로 들어가던 모양.. 그 이후로 나는 김정훈을 완전히 잊고 살았는데, 다시 이렇게 불현듯 나의 시야에 들어온 것이다. 그것도 ‘죽은 모습’으로…
연숙이 처음 이 책을 대하면서 아주 인상적이었던지 나에게 몇 번 언급을 하긴 했지만, 저자 김정훈이 나의 재동학교 동창인 김정훈이라는 100% 확신도 없었고 신부지망생이었다는 말도 나에게는 가슴 가까이 들리지 않았다. 그 당시는 그만큼 성소 聖召 란 말의 느낌도 나는 피하고 싶었던 ‘마음과 가슴이 황폐하던’ 기나긴 시절들이었다. 하지만 이번은 아주 아주 달랐다. 두말없이 그 책을 ‘2주 대출’을 받아왔고 관심 있게 이리저리 요모조모 앞과 뒤를 왔다 갔다 하면서 ‘조금씩’ 김정훈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요새 나의 버릇인 ‘난독’으로 거의 한번은 읽은 듯하고 이제는 조금은 체계적으로 읽어볼 까.. 현재의 느낌은 김정훈의 30세가 되어가던 그 당시 그의 생각과 나의 삶을 비교하며 너무나 애와 같은 생각으로 살던 나 자신을 보았다는.. 숨길 수 없는 사실 하나다. 아무래도 하느님을 이미 찾은 그의 인생에 대한 자세를 나와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지만 그래도 참 너무나 차이가 나는 30세까지의 우리 둘의 인생이었다.
창희야, 용현아.. 친구여, 잊었는가? 1970년, 45년 전 우리의 시대를.. 박창희 손용현 그리고 나 이경우 비록 흔히 말하는 삼총사까지는 아니었어도 원서동 죽마고우 세 악동이었지… 재동국민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헤어진 우리들, 모두 개천이 고즈넉이 흐르던 비원 옆 담을 끼고 추우나 더우나 밤이 되도록 밖에서 뛰놀던 시절을 뒤로하고 의젓한 대학생으로 우리들 다시 만난 것이 1970년 이 시작되던 때였지. 비록 나와 박창희는 같은 대학, 같은 학과에서 이미 만나서 다시 ‘죽마고우’가 되었지만 너는 더 늦게 다시 만나게 된 것.. 거의 기적과 같은 ‘사건’이었어.
그래도 그때부터 우리들은 헤어진 시절을 만회라도 하듯이 열심히 도 자주 만났었지. 비록 우리들 공부는 뒷전이었지만 당시에 사실 제일 중요한 것은 ‘청춘’을 공부하는 것이 먼저가 아니었던가? 그런 우리들 뒤에 두고두고 그 ‘놀았던’ 값을 치르기 했지만 크게 후회는 안 하고 싶구나. 특히 1970년 4월의 우리들만의 1주일간의 지리산 등반, 나는 아마도 ‘죽어도’ 못 있을 것 같다. Pop song에 열광하던 우리들, 멋진 다방을 찾아 어둠 속에서 진을 치고 백일몽을 꾸었던 시절, 찌들었던 연간 소득 수백 불 밖에 안 되던 그 시절이었지만 우리는 그런 것들 별로 걱정한 적이 없었지.. 항상 우리는 무언가 희망이 있었으니까..
Bee Gee’s 의 ‘명곡’ First of May를 애창하던 그 시절의 화창한 봄날들, 비록 대학 졸업을 앞둔 불안한 시절, 정권연장에 골몰하던 박정희 정권의 하늘아래 있었지만.. 그런 것들 우리에게 그렇게 보였던가? 산과 노래와 멋진 다방들만 있으면 족하던 그 시절을 반세기가 지나가도 똑같은 심정으로 생각한다. 우리들 모두 ‘해외로 해외로..’를 외치면 헤어졌고 결국은 ‘완전히’ 헤어졌지만, 다행히도 우리의 머리 속만은 절대로 헤어짐을 못 느끼며 산다. 특히 나는.. 최소한 일년이 하루 오늘만은 절대로 못 잊는다.
작년 5월 1일 이후, 너희들은 어떤 인생의 변화가 있었는지? 창희는 물론 ‘든든한’ 신앙을 더욱 더 성장시켰으리라 짐작이 되지만 용현이, 너는 정말 알 수가 없구나. 혹시나 어떤 ‘믿음’을 가지게 되었는지? 나는 최소한 나의 믿음이 아주 희망적이고, 날이 갈 수록 더욱 희망적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지난 일년 동안 그것이 조금은 더 성숙해 졌다고 자부한다. 나의 세계관은 180도 변하고 있으니까.. 다른 쪽에서 세상을 보는 것, 정말 신기하기만 하구나.
너희들 자식들 모두, ‘정규 코스’를 거치며 살아가는지 궁금한데.. 나의 두 딸들은 그렇지 못해서 우리의 나이 든 인생은 조금 다른 사람들과 다른 것 같구나. 하지만, 이제는 별로 큰 걱정을 안 한다. 그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니까. 우리 부부, 가족 모두 ‘영, 육’ 모두 건강한 편이니까.. 그것이면 족하지 않니? 너희들도 모두 영육간 모두 건강한 나날을 보내기 바란다. 내년 5월 1일에 또 ‘보고’를 하면 좋겠구나. Adios Amigo!
¶ Our Lady of Guadalupe: 과달루페의 성모님! 처음 이 성모님 발현에 대한 것을 듣게 된 것은 ‘아마도’ 무척 오래 전이었을 것이다. 문제는.. 그 당시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서 그저 ‘마음 약한 영혼들’이 애타게 찾는 천상의 예수님의 어머니 정도로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1989년 쯤 위스컨신 매디슨에 살 적에 한국에서 University of Wisconsin, Madison 위스컨신 주립대로 ‘연수 차’ 오셨던 김희선 신부님 (본명을 잊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께서 멕시코에 다녀 오시면서 과달루페 성모님 상 사진을 선물로 사가지고 오셔서 우리집도 한 장을 받았고 기회가 있으면 벽에 붙여놓기도 했었다. 그 당시 과달루페 성모님에 대한 이야기를 신부님으로부터 분명히 들었을 터이지만 역시 ‘관심 밖’이어서 전혀 기억이 안 난다. 그것이 과달루페 성모님에 대한 나의 기억의 전부였다.
25년을 fast forward한 현재는 어떠한가? 오늘이 바로 천주교 전례력으로 ‘과달루페 성모님 축일 feast’로 나는 처음으로 특별히 신경을 써서 뜻 깊게 축일 미사를 맞았다. 그렇게 바뀐 나 자신이 나도 놀랍기만 하다. 세월의 장난일까.. 아니면? 이제는 이 특별한 발현의 배경, 역사, 뜻, 그리고 인류 구원사, 세계사에서의 의미까지도 깊이 생각하게 되었는데, 이 ‘발현 사건’은 알면 알게 될수록 신비롭고 특히 ‘과학과 신앙’의 각도로 깊이 연구한 결과는 가히 놀랍기만 하다. 물론 이 ‘발현’을 ‘믿는다면’ 그렇다는 것인데 지금 나 자신은 100% 이 발현 ‘역사’를 믿는다. 그래서 더욱 놀라운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 시대 이후 “예수님의 어머니’ 성모님이 ‘계속’ 인간들에게 발현하시는 첫 번째 이유라고 나는 확신한다. 나같이 자신이 없는 신앙인들을 ‘응원’하시는 그것이 첫 번째 발현 이유가 아닐까?
1531년 12월 9일에 지금의 Mexico City 에 발현하신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과달루페 성모님이라고 하는데 이 과달루페라는 이름은 성모님 자신이 발현 당시 자신을 지칭하는 ‘단어’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특별한 뜻은 없는 것 같다. 16세기 초 멕시코 지역은, 물론 Aztec 아즈텍 원주민들이 살던 땅이었지만 Spain 에게 ‘정복, 개척’되기 시작했던 때였고, 따라서 가톨릭 신앙이 전해지던 때이기도 했다. 그 당시 Aztec ‘나라’는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원시,태양숭배 종교로 통치되던 때였고 살아있는 사람들이 ‘살인적 희생물’로 바쳐지던 공포의 시대이기도 했다.
이 당시 이들의 태양숭배 인간제물에 대한 기록을 보면 오래 전 Indiana Jones (Temple of Doomed) 영화에 나온 그런 장면이다. 살아있는 사람의 심장을 손으로 꺼내는 끔찍한 장면.. 그런 ‘공포 정치’속에서 살던 원주민들.. 그들에게 스페인 정복자들이 ‘사랑과 자비’를 기치로 가톨릭 신앙을 전하던 때에 ‘과달루페 성모님’이 발현하신 것이다. 발현은 그래서 어떤 원주민 ‘아저씨’ Juan Diego (후안 디에고?) 에게 나타나셨는데 이 이야기는 너무나 잘 알려지고 유명해서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듯 하다. 12월의 추운 날씨에 ‘아저씨’에게 나타나신 성모님은 지역이 피지 않는 장미를 ‘증거’로 Juan Diego에게 주시고 그것을 의심 많은 주교에게 전하게 되었는데.. 그 ‘아저씨’가 그 장미를 tilma(망토) 에 담아 왔고 그것을 주교에게 보여주려 펼치자.. 장미를 쏟아지고.. 그 tilma에는 ‘찬란한’ 성모님의 상이 ‘각인’이 되어 있었다. 선인장으로 만든 그 tilma에 그 유명한 과달루페 성모님의 모습이 그대로 새겨진 것이다.
그것을 보고 어떻게 더 ‘의심’을 할 수 있겠는가? 그 주교님은 그대로 땅으로 쓰러지면 경배를 하고.. 성모님의 요청인 ‘성모님 성당’을 그곳에 짓기 시작하였고.. 그것이 ‘과달루페의 역사’가 되었다. 이후 그 ‘성모님 상’에 많은 피해와 위기가 있었지만 모두 ‘기적적’으로 극복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발현 자체도 기적이고 그 ‘상본’이 하나도 변질되지 않고 지속되는 것도 기적이고.. 발현 이후 수많은 원주민이 가톨릭으로 개종하게 된 것도 기적이고… 기적의 집합체인 것이 바로 과달루페 발현이다. 신학적으로도 신세계인 America대륙에 복음을 전파하려는 성모님 사랑의 배려로 충분히 설명이 되기도 한다.
이런 ‘흔한’ 배경 이야기 보다 나는 그 유명한 성모님 상본이 ‘과학적’으로 분석되고 있는 것, 그리고 그 결과에 더 관심이 많이 간다. 과학적 분석만으로는 기적을 증명할 수는 없지만 할 수 있는 만큼은 설명을 할 수 있다. 그것이 종교적 믿음과 ‘수학적’ 과학의 차이이니까 당연한 것이다. 특히 무신론적인 일본인 과학자가 digital image analysis를 통해서 분석한 성모님의 눈동자 속에 반사된 Juan Diego(목격자)와 주교의 모습들은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로 놀라울 뿐이다. 나에게 정말 분명한 것은 이것이다: 인류역사에서 성모님 발현의 목적은 분명하고 뚜렷하다는 것.. 특히 초 현대를 살아가는 요새의 인간들에게… 절대로 희망은 있다!
¶ Tobey, 10! 12월 9일.. 은 우리 집‘수컷강아지‘ Tobey의생일이다. 그런데올해는조금특별한생일인 10살생일을맞았다. 이런중요한날을완전히잊고넘어갈뻔했는데 Tobey와오랜역사를같이해온 East Cobb Animal Medical Center에서 ‘축하카드‘가 email로와서알게되었고곧아하.. 올해가 10살생일이구나..하는탄식이나왔다. 10살이면이제인간나이로나와맞먹는것이기에더욱감회가새로웠다.
현재까지 Tobey는건강이좋은편이다. 하지만 10살이라는느낌이그리좋은것은아니다. 한마디로본격적인노년으로접어든것인데, 주변에서듣고보고한것으로앞으로일어날가능성이있는문제들을생각하며우울해지기도한다. 진희네집의개, ‘공주‘는하루아침에눈이멀었고, 다른쪽에서는개가제대로걷지를못한다. 사람은아프면말이라도하지만이애들은어떨까? 사회적, 문화적으로이제개나고양이들은거의 ‘사람같은식구‘대접을받게되어가고우리도큰차이가없다. Tobey에게무슨문제가생긴다면사람못지않게정말슬플것같다. 열살을맞이한 Tobey.. 우리와사는동안건강하게살아다오!
¶ Bernadette.. 버나뎃, 벨라뎃따, 흔히들 프랑스의 루르드 성모님 발현의 목격자 소녀의 이름을 떠올린다. 하지만 여기의 Bernadette는 캐나다에 사는 나의 중앙고 동창 정교성 딸의 이름이다. 인 친구는 매년 꼬박꼬박 크리스마스 카드를 12월 초만 되면 보내준다. 요새 우표를 붙여서 카드를 보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련만 이 친구는 고집불통으로 ‘인터넷’을 외면하고 이렇게 고전적인 방식을 고집해 왔다. 오랜 전에는 나도 우편 카드로 답을 하려고 무척 애를 썼지만 나중에는 포기하고 말았다.
나의 작은 친 형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언제나 성숙한 친구, 전통적인 천주교인’ 정교성.. Wife를 병으로 잃은 후 재혼한지도 꽤 오래 전인데 이제는 딸 (큰 딸인지 작은 딸인지 확실치 않지만) Bernadette이 결혼을 한다고 결혼 안내장을 동봉해 주었다. 청첩장이 아니고 청첩장을 예고하는 card였는데.. 신부와 신랑감에 대한 아주 자세한 설명이 그곳에 있었다.
신랑감은 테네시주 내쉬빌 출생의 미국인, 그리고 evolutionary biology (진화생물학) 박사학위 소지자 로서 캐나다 시민인 Bernadette을 Toronto의 Royal Ontario Museum에서 post-doctoral research하면서 만났다고 한다. 교성이는 딸이 두 명이 있는데 Bernadette이 장녀인지 차녀인지.. 확실치 않다. 오래 전에 보내준 가족사진이 어디로 갔는지.. 우리 집도 두 딸이고 해서 ‘동지’같이 느꼈는데 이렇게 결혼을 하게 되는 것을 보니 참 부럽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집 두 딸은 요새의 풍조대로 결혼 생각이 별로 없는 것 같아서 더욱 부러운 것이다.
신랑이 우리가 사는 인접한 테네시 주 출신이라서 혹시 결혼식을 그곳에서 하게 된다면 이 친구가 미국을 방문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수십 년 만에 다시 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아마 우리 둘은 서로 몰라볼 정도로 변해 있을 것 같은데.. 교성이는 옛날 부터 ‘어른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 별로 변하지 않았을 것에 비하면 나는 ‘완전히 변한’ 모습이라서 더욱 그렇다. 하기야 내년에는 더 늦기 전에 캐나다 쪽으로 여행을 할 계획도 있어서 딸의 결혼과 상관없이 한번 보게 될지도 모른다.
친구야.. 정말 축하한다. 정든 딸을 보내는 아비의 심정 나는 현재 상상이 잘 안 가지만.. 어찌 섭섭하지 않겠니? 하지만 그것이 인생의 순리가 아니겠니.. 덤덤하게 행복을 빌어주며 보내렴.. 인자하신 성모님과 주님의 가호가 딸 부부에게 함께하기를 빌어본다.
¶ First of May 뚜루루.. 뚜루루.. 뚜루루루 루루루루.. 아련히 Bee Gee’s의 애수 어린듯한 멜로디가 귀를 울린다. 5월 1일이라는 제목의 이 First of May oldie는 내가 제일 사랑하는 oldie중의 하나다. 왜 이 ‘명곡’의 제목이 5월 1일인지는 가사를 아무리 읽어도 확실치 않지만 분명한 것은 어린, 소싯적의 꿈과 우정이 세월의 여파에도 빛난다는 것으로 나는 ‘아전인수 我田引水’ 격으로 해석하며 산다는 사실이다.
When I was small, and Christmas trees were tall, we used to love while others used to play. Don’t ask me why, but time has passed us by, some one else moved in from far away.
Now we are tall, and Christmas trees are small, and you don’t ask the time of day. But you and I, our love will never die, but guess we’ll cry come first of May. The apple tree that grew for you and me, I watched the apples falling one by one. And I recall the moment of them all, the day I kissed your cheek and you were mine.
Now we are tall, and Christmas trees are small, and you don’t ask the time of day. But you and I, our love will never die, but guess we’ll cry come first of May.
When I was small, and Christmas trees were tall, do do do do do do do do do… Don’t ask me why, but time has passed us by, some one else moved in from far away.
20대 비교적 짧은 시기의 청춘 때 만들었던 작은 우정의 친구들, 청운의 꿈을 안고 헤어졌지만 언제고 다시 어디에선가 만날 수 있으리라는 꿈도 있었다. 특히 이맘때면 창희와 용현이를 곁들여 생각한다. 식구보다 더 가까웠던 죽마고우 친구들.. 순진했던 꿈은 삶의 세파에 시달리고 거의 잊고 살기도 했지만 사실은 뇌리의 깊은 곳에 그 녀석들은 언제나 생생하게 남아서 나를 반기었다.
특히 그 녀석들과 Bee Gee’s 의 이 명곡을 듣던 때 1970년과 불도저의 소음으로 요란했던 서울 거리를 회상한다.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걱정 속에서도 우리는 우정에 대한 희망은 잊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하기도 했다. 지지리도 가난했던 우리의 조국, 우리는 운명을 믿지 않을 정도로 젊었었지만 떠날 수 밖에 없었지.. 그것이 우리의 운명이었을까? 친구여.. 잘들 살게.. 1977, 1988, 1999년을 모두 놓치고, 21세기부터는 해가 가는 것을 포기했지 않은가? 잘들 살게.. 어데서고 언제나 언제나..
창희야, 용현아 그립구나.. 행복하게 살기를..
¶ 오발탄, 전후 문학, 소설가 이범선 작가의 1950년대 소설작품이었을 것이다. 나는 이 소설을 읽은 적이 없었다. 그 당시면 나는 중학교 1학년 정도의 코흘리개로 만화 라이파이에 더 어울릴 나이었기 때문이다. 그 작품이 그래도 그 당시 나의 귀에 익은 것은 역시 같은 제목의 영화 때문이었다. 극장 포스터에도 보이고 신문광고에도 보여서 더 그랬을 것이고.. 무언가 ‘문제 영화’임도 짐작을 하였다. 간단한 역사극이나 순정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다.. 그 당시 사회상을 ‘적나라’ 하게 ‘고발’ 했던 수준 높은 작품이었다.그것을 반세기가 지난 지금 70mm 대형 극장 스크린이 아닌 23″ computer monitor로 보고 있는데 1960대 초 기억에도 생생한 서울의 풍경들이 ‘여과’없이 찍혔던 이 영화를 이렇게 볼 수 있다는 사실은 정말 작은 기적에 속한다. 분실되었던 original film이었지만 미국 San Francisco영화제에 출품을 했던 덕분에 그곳에서 다시 찾았다고 처음 화면에 나온다. 그때 출품을 안 했었으면 이것은 영원히 사라졌을 것이었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특히 5월이 코앞에 다가옴과 곁들여서 5.16 혁명 주체 ‘박정희 소장‘이 생각난다. 한마디로 그가 제시하는 5.16 혁명의 명분이 이 영화 오발탄에 고스란히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당시 1960년대 초의 분위기를 충실히 화면에 담은 이 영화는 몇 번을 보아도 ‘수준작’이다. 김진규, 최무룡의 연기도 아주 실감이 간다. 비록 중산층이 거의 없던 그 시절이었지만 이 작품의 주인공들은 ‘중산층같이 살려고 발버둥치지만 희망이 없는’ 사람들이다.
고지식하고 도덕적인 자세로 세파를 헤치려는 김진규와 그런 형이 답답하기만 한 동생 최무룡.. 이들은 기본적으로 착하고 도덕적이지만 그들이 몸담은 ‘서울거리’는 그들을 지옥같이 느끼게 한다. 최무룡이 못 참고 최후 수단을 쓴 것은 결국 ‘오발탄’이 되어 형을 더욱 곤경으로 빠져들게 하고.. ‘가자 가자..’ 를 외치는 정신이상의 어머니, 영양실조 상태로 난산하는 아내 문정숙은 허무하게 죽어가고.. 이것이 그 당시 1960년대 초 서울 장안에서 볼 수 있는 장면들이었다.
이런 모든 비극의 기본 뿌리는 역시 6.25를 겪은 후 썩은 ‘민간’ 정권 하에서 계속되는 ‘절대로’ 희망 없는 경제사정에 있었다. 한마디로.. 돈과 희망이 없었던 시절이었던 것이다. 굶주린 배를 해결하기 전에 의미 있는 민주주의는 무의미하다. 우선 배고픈 것을 해결하자.. 아마도 이것이 박정희 소장의 간단한 혁명 논리였을 것이다. 이 영화를 보면 충분히 공감을 할 수 있다. 최소한 나는..
보드카 야.. 물러가라, ‘강남스타일’ 진로소주가 들어간다.. 이런 식으로 진로소주의 본격적인 미국 주류시장 공략에 대한 이야기가, 미국 주요 뉴스 매체[major news outlet]가 보기에 ‘하찮은’ 것들 즐겨 찾는 NPR[National Public Radio]에 보도가 되었는데 그냥 지나치려다가 ‘파아란’ 쏘주 병 사진을 보고 어쩔 수 없이 보고야 말았다. 그 ‘파아란, 두꺼비 표’ 진로 쏘주 병 색깔을 보니 어쩔 수 없는 향수 심이 돋아나는 것이었다.
이 보도를 보면 내가 그 동안 몰랐던 것들이 있었다. 그 중에, 진로 소주는 술 종류 SPIRITS (증류주?) 중에서는 판매량이 ‘세계에서 1위’라는 것이다. 대표적인 ‘경쟁 주’는 Smirnoff, Jack Daniel’s, Bacardi등이 있는데 그들의 판매량 보다 거의 갑절이라는 것은 사실 놀랍기만 하다. 하지만 미국 시장에서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판매량이 적은데 전체의 5% 정도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국시장이 거의 압도적으로 제일 크고, 다음이 일본, 중국 정도 인데.. 이것도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는다. 나는 한국사람들의 술 문화를 비록 오래 전이었지만 ‘알맞게’ 겪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의 ‘술고래’ 전통이 계속 그렇게 유지되지는 않을 듯.. 그래서 이제는 제일 큰 미국시장을 겨냥하는 것일지도… 술을 파는 것은 사실 술 맛도 중요하지만 ‘멋진 광고’도 중요할 것이고, 그래서 제일 효과적일 수 있다는 강남스타일을 광고로 골랐는지도 모른다. 나 자신은 그 ‘강남 어쩌구’ 하는 것, 한마디로 ‘병신 지x’로만 보이지만 그것에 넘어가는 작은 머리들이 생각보다 많을 지도 모른다. 그것이 광고인 것이다. 그저 ‘넘어가면’ 그 역할을 끝나는 것이니까. 그러니까 ‘한국 팝 문화’를 이용하고, 곁들이는 방식인데, 글쎄요.. 그것이 그렇게 보는 것처럼 쉬울까?
한 전문가는 지금까지의 넘버 원이었던 러시아 보드카를 예로 들었는데, 그것이 처음 들어왔을 때가 1950년대였고, 현재에 이르러서 그것이 top이 되었으니.. 얼마나 오랜 세월이 걸렸는가? 반세기가 흐른 것이다. 그것이 ‘술 문화’가 변하는 ‘속도’인 것이다. 그런데, 난생 처음 들어보는 아시아의 요상한 맛을 가진 소주를 ‘강남 스타일’ 등으로 팔겠다는 것도 생각보다 긴 ‘세월’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렇지만, 소주에는 보드카에 없는 장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소주의 알코홀 ‘도수’가 20%라는 것인데, 이것은 정식 주류 면허에 못 미치는 맥주, 와인 정도의 면허만으로 팔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낮은 알코홀 도수이기에 보드카로 만드는 칵테일 대신에 색깔이 같은 소주를 대신 쓸 수가 있고, 실제로 이런 방식으로 소주를 bar에서 많이 쓴다고 한다. 물론 이것은 한국문화의 관계성과는 전혀 상관없이 ‘장사 속’으로 생각해서 훨씬 경제적이라는 뜻이다. 미국 시장에서의 성공 여부를 떠나서 아마도 진로소주는 내년에도 ‘전세계 판매량 제1위’를 계속 유지할 확률이 크다고 한다.
이러한 보도를 읽으며 생각을 해 본다. 나 자신의 ‘술 문화’를 생각하는 것이다. 그 옛날 대학시절 무렵, 팔팔할 적에는 술에 너무나 약해서 제대로 ‘술 맛과 멋’을 몰랐다. 쉽게 퍼 마셔도 별로 탈이 없었을 나이에 제대로 못 마신 것이다. 취하면 기분이 날라갈 듯했지만 대신 ‘술 탈’로 고역을 겪어야 했다. 유혹에 약해서 술을 제대로 거절할 수 도 없었다. 그런 문화에서 계속 살았으면 나는 나의 절친한 친구 김호룡1 처럼 50세도 못 채우고 황천으로 갔을 확률이 90% 이상이었을 것이다. 다행히 술 문화가 ‘전혀 다른’ 미국에서 오래 살아서 나는 그런 함정은 피할 수 있었고, 대신 ‘서서히, 알맞은’ 속도로 주량을 늘려 나가서 이제는 맥주 5병을 마셔도 괜찮고, 기분도 좋게 되었다. 한마디로 나의 ‘체질’이 변한 것이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주막집 문화’를 느끼며 마시는 ‘재미’는 물론 거의 없고, 대신 집에서 하는 모임 같은 곳에서나 그런 재미를 ‘상상’하긴 한다. 그 옛날 서울 포장마차에서 마셨던 ‘진짜 진로 소주‘는 없어지고, 이곳에 들어온 것들은 모두 ‘와인’ 정도로 ‘약 하게’ 변해서 도저히 그 옛날의 ‘목 젖이 아파오는‘ 그런 짜릿한 맛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20% 소주가 그런 것들이다. 술에 얽힌 이야기들은 적지 않지만 대부분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들이 많아서 잊은 것도 많다. 하지만 언젠가는 그것들도 ‘치매 예방’ 차원에서 하나 둘 씩 기억을 해내어 개인 역사에 남겨 놓는 것도 나쁜 생각이 아닐지도 모른다.
지나간 일요일, 1월 27일은 ‘피로하게만 보이는’ 우리 집에 때아닌 대청소 하던 소리가 들렸다. 얼마만인가.. 머리 속의 ego만 커진 아이들이 떠난 우리 집은 고요하기만 하고, 별로 어질러 놀 만한 것도 없지만 보이지 않는 먼지는 곳곳에 도사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의 대 청소는 아래층에만 있었다. 위층까지 할 힘도 없고, 절실한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다. 청소를 했던 이유는 의외로 간단했다. Guest들이 오기 때문이었다. 얼마 만에 오는 손님들인가..
이번의 모임은 내가 붙인 이름이 ‘mid-winter classic‘ 이다. Mid-Winter는 1월 말에서 2월 초 정도에 있다는 뜻이고, classic은 이 모임이 그만큼 오랜 전통을 자랑한다는 뜻이다. 얼마나 오래 되었을까.. 아마 15년은 되었을 듯 싶다. 이 정도면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닐 것이다.
4집 부부(가족)가 ‘가끔’ 모여서 저녁식사를 같이하는 이 그룹은 시작이 15년 전쯤, 서울고,서강대 출신 최동환 (Phillip Choi), aka, ‘최형’ 과 연관’이 되면서 시작이 되었다. 그 훨씬 전에 우리 부부가 아틀란타 한국학교 에서 가르칠 때, 나의 반에 최형의 외동 딸, 진희(Alicia)가 있었고, 최형은 ‘아빠’로서는 드물게 학교에 얼굴을 보이곤 했었다. 그때 그의 인상이 참 자상한 아빠로 남았고, 항상 웃는 모습도 좋은 인상으로 남았던 기억이다.
우리가 한국학교를 떠나면서 헤어지게 되었지만, 또 다른 인연이었을까.. 우리 작은 딸 나라니와 한국학교에서 같은 반에 있었던 인연으로 나라니의 생일에 진희를 부르게 되었고,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런 때에는 대부분 엄마들이 아이를 데리고 오곤 하는데, 그 당시 진희는 꼭 아빠가 데리고 왔기에 나와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사실 이것이 인연이었다. 엄마가 데리고 왔더라면.. 아마도 이런 것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항상 웃고, 얘기를 좋아하는 최형 성격 덕분에 우리는 금새 통성명을 다시 하고 보니 그는 서울 최고 명문인 덕수국민학교, 서울고등학교, 서강대 화학과 출신으로 현재는 ‘사업’을 한다고 했다. 그 후에 우리 집 근처의 어떤 한국식당에서 정말 우연히 최형 가족과 우리 가족이 같이 식사를 하게 되는 다른 ‘우연’을 맞게 되고, 드디어 진희 엄마도 보게 되었다. 둘 다 나이가 우리부부보다 한두 살 정도 아래였던 이곳에서 ‘고르기’ 힘든 부부 ‘친구’를 얻은 기분이었고, 그 이후 우리는 서로의 집을 왕래하며 식사를 나누게 되었던 것이다.
이곳에서 ‘친구’를 별로 사귀기 꺼리며 살던 나도 이런 모임은 거부감이 없었다. 정말 오랜만에 ‘친구 수준의 한국말’을 다시 즐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이가 비슷한 것은 참으로 좋은 것인가.. 서로 공감할 수 있는 것들이 수도 없이 많기 때문일까.. 추억의 역사를 공유한다는 것은 이렇게도 좋은 것일까.. 만나기만 하면 어렸을 적 서울거리를 회상하며 열변을 토하곤 했으니까..
최형은 역시 성격 ‘탓’인지 사람들을 좋아하며, 잘 사귀었고, 특히 가깝게 지내던 ‘친구’ 가족들이 몇이 있었다. 곧바로 자연스레 우리는 그들과 같이 모이게 되었다. 그 중에는 Ohio State동문인 나이가 한참 밑(10살 이상)인 ‘전 사장’도 있었고, 최형의 서강대 동문인 윤형, 지금은 2005년에 타계해서 없는, 이대부고,경희대 출신 박창우씨가 있었다. 그렇게 모인 사연이 참 다양하고 재미있어서 아주 인상적이었고, 역시 최형의 ‘사람을 끄는 힘’이라는 공통분모가 이모임에 있었다고 느낀다.
직업도 다양해서, 최형네는 jewelry wholesale, 윤형댁은 liquor retail, 전사장네는 Italian Furniture, 박창우씨 댁은 fashion clothing retail.. 그러니까 이들은 모두 전형적인 businessmen들이었다. 나만 예외적으로 비교적 시간의 여유는 있지만 항상 cash가 모자라는 월급쟁이여서, 항상 나는 ‘공통관심사 화제’에서 애를 먹으며 그저 이 ‘이상한 나라의 얘기’를 듣기만 하곤 했다.
이중에서 2005년 여름이 정말 아깝게 타계한 박창우씨, 생김새에 비해서 호탕하고, 잘 놀며, 활달한 사람, 서울 명동을 중심으로 한 젊은이의 중심지에 대한 해박한 경험과 기억력은 우리를 항상 놀라게 했다. 특히 어느 곳에 무슨 술집, 다방이 있다는 것은 정말 ‘사진과도’ 같은 기억력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나는 이 ‘양반’의 얘기가 제일 재미있었고 실감나고, 흡사 time machine을 타고 1960-70년대를 간 것과 같은 기분에 빠지곤 했다. 특히 ‘동네 친구’인 트윈 폴리오 folk duo 중에 윤형주에 대한 이야기, 당시의 명소였던 명동 OB’s Cabin 에서 술김에 노래를 부르던 조영남을 ‘팼던’ 이야기 등등.. 나에게는 주옥과도 같은 이야기들.. 언제까지나 들으려 했지만 하느님도 무심하시게 너무도 일찍 데려 가셨다.
이날 모임에서 나를 놀라게 했던 소식은, 최형의 외동 딸, 진희 (우리 딸 나라니 친구)가 놀랍게도 우리가 활동하고 있는 레지오 마리애의 ‘활동단원’이 되었다는 사실.. 나에게는 너무도 충격적이었다. 진희는 아주 자유분망 (easy going)해서 어떻게 이렇게 ‘조직적인 신심단체’에 가입을 했을 까 상상이 되지를 않았기 때문이다. 세대적인 격차를 초월해서 꾸리아 모임에서 그 ‘애’를 보게 될 생각을 하니.. 만나면 무슨 얘기를 해야 할까 하는 생각에 사실 당황을 할 정도였다. 이것은 정말 ‘좋은 소식’일 것이다.
어린 시절 친구들을 회상할 때면 그 느낌들이 갖가지임을 느끼곤 한다. 물론 생각만 나도 피하고 싶은 경우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너무나 희미한 기억들이라서 그런지 실제라 기 보다는 파란 담배 연기 속에서 춤추는 듯한 거의 꿈처럼 느껴지곤 한다. 한마디로 더 생생하게 기억을 하고 싶은 친구들인 것이다. 이런 것들을 지금 급속히 저하되는 듯한 기억력과 싸우면서도 기억하고 싶은 것이다.
나의 blog은 사실 그것을 위해서 시작했고 계속 그런 노력을 돕는 역할을 해 왔다고 생각이 된다. 영어와 ‘한국어’ 사이를 오가며 나의 감정을 알맞게 나타내는 것도 이제는 쉽지는 않다. 사실 머리 속에서 맴도는 어린 친구들은 그 당시의 사진이나 앨범들을 보면 쉽게 알아 낼 수 있다. 하지만, 그 다음이 문제다. 분명히 친하게 뛰어 논 기억은 나지만 그것이 전부인 것이다. 그래도 그 중에는 더 자세히, 생생히 기억이 나는 친구들도 있었다. 그 중에서도 오늘은 백승호의 기억이 유난히 머리에서 맴돈다.
나의 뇌리에 ‘강하게’ 새겨져 있는 이 백승호는 1958년 서울 재동국민학교 5학년 때 같은 반의 친구였다. 한때 아주 가깝게 지냈고 분명히 서로 좋아했다고 생각을 했었는데 어느새 인가, 우리는 헤어지고 말았다. 웃기는 것은 그렇게 친구였었던 기간이 1년도 채 안되게 짧았지만 아직도 어제 본듯한 기분인 것이다. 원래가 잘 웃는 얼굴의 이 친구, 백승호 6학년 때 헤어지고 말았지만 멀찍이 볼 양이면 저 애는 나의 친구였다는 생각은 하곤 했었다.
중학교로 올라가면서 백승호는 완전히 나의 시야, radar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대부분의 국민학교 동창들이 바로 이런 식이었다. 하지만 얼마 전에 다시 연락이 되었던 다른 친구 신문영처럼 이 친구도 거의 꿈같이 연세대 campus에서 보게 되었다. 신문영은 몇 초 정도 잠깐 보고, 혹시 저 친구가 신문영.. 하며 어 떨떨 했었지만 이 백승호는 아예 자주 얼굴이 나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ROTC(학훈단, 일명 바보티씨) 생도의 모습으로 자주도 보였다.
문제는.. 그렇게 나의 눈에 보일 때마다 왜 나는 반가운 마음을 접고 ‘모른 척’을 했었을까? 성격 적으로 그 당시 나의 먼저 나서서 백승호를 아는 척 못했을 것이다. 그저 멋 적은 것이다. 느낌에 어떤 때는 백승호도 나를 보았다고 느꼈지만 확실하지 않다. 만약 그가 나를 알아보았다면 그도 멋 적어서 나를 모르는 체 했을까.. 그것이 아직도 궁금한 것이다.
이런 사연으로 백승호의 image는 이곳 저곳에 남았다. 재동국민학교 5학년 시절의 사진 2장, 재동국민학교 졸업앨범, 하지만, 연세대 앨범.. 을 기대했지만 그는 1966년 입학으로 나보다 일 년 앞서 졸업을 한 듯, 그곳(1971년 앨범)에 그의 모습은 없었다. 사실, 학훈단 베레모를 쓴 모습도 기억을 하는데, 아마도 공학부 토목학과를 다녔던 듯 하다. 더 늦기 전에 그의 살아온 역사를 알고 싶지만, 그것은 너무나 무리한 바램일 것 같다. 하지만 build it, they’ll come의 교훈을 기대하는 것은 큰 무리가 아닐 듯..
나는 몇 개월 전 이곳, 나의 blog에서 연세대 시절을 회상하면서 재동국민학교 동창 신문영을 그의 졸업앨범 사진과 함께 같이 다루었다. 그 많은 재동국민학교 동창생 중에서 신문영은 나의 희석되어가는 뇌리에 뚜렷이 남아있기에 얼마 전에 그로부터 소식을 들었을 때,나는 사실 심장이 멎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그가 나의 blog을 ‘우연히’ 보았기에 연락이 되었을 것이라 serony dot com blog의 제일 중요한 목적을 달성하게 되었다.
제일 궁금했던 사실들 대부분을 이번에 알게 되었는데, 그 중에서 내가 제일 궁금했던 것은 1960년 중학입시에서 어떤 중학교에 갔느냐는 것이었는데, 알고 보니 경복중학이었다. 다른 재동 동창 심동섭이 경복으로 갔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 또 다른 동창 조성태, 정세종, 장세헌 등도 같이 경복중학교에 갔다는 것을 새로 알게 되었다. 조성태, 정세종은 같은 분단에 있어서 아는 동창들이고, 장세헌은 1학년 때 같은 반인 것만 기억을 한다.
이번에 email로 느끼는 신문영은 솔직하고 직선적인 듯 했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중학교 당시 공부를 지지리도 못해서 삼선 고교로 갔다’ 고 하는 것을 보면 그런 느낌이 드는 것이다. 나와 비슷하게 부선망 단대독자(아버지가 없는 외아들)로 군대를 안 갔었다고 했고 대학 졸업 후 곧바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고.. 느낌에 아주 ‘정석적’인 인생을 산 듯했고, 명함을 보니 사회적으로 크게 성공을 한 것 같아서 흐뭇했다.
이 친구를 통해서 재동학교 동창회가 있다는 것도 새로 알게 되었는데, 회장은 김영환, 일년에 한번 정도 모인다고 했고, 거기서 이만재, 육동구 등도 보았다고.. 듣기만 해도 흐뭇하고.. 부럽고.. 꿈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사실 나는 꿈에서만 볼 수 있었던 광경들이기 때문이다. 다음에 모이면 사진이라도 볼 수 있게 되기만 바라지만, 세월의 횡포로 얼굴이나 제대로 알아 볼 수 있을지 의문이다.
신문영을 기억하면 꼭 같이 떠오르는 것들이 몇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6학년 (1959년) 때 같은 분단 (공부를 제일 잘하던 1분단)에 있을 때 어느 날 이른 아침 수업이 시작되기 직전에 담임 박양신 선생님이 나와 신문영을 부르더니, 심부름 좀 하라고 말씀을 하셨다. 듣고 보니, 선생님이 댁에서 가져와야 하는 물건 (서류?)이 있으니 둘이서 곧바로 선생님 댁에 갔다 오라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그 당시에 우리에게는 큰 일에 속했다. 왜 나와 신문영에게 그런 심부름을 시켰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둘을 믿고 그런 일을 주신 것이 내심 기뻤던 것은 사실이다. 그 시간에 학교를 빠져 나와서 인사동 입구의 선생님 댁으로 가는 것 그 자체가 우리에게는 모험 같고 신기롭게만 느껴져서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게 남는 모양이다.
아들 딸 모두 결혼, 손주들까지 있는 신문영, 부럽기도 하고, 보고 싶어 지기도 하지만 그것이 그렇게 쉽겠는가? 하지만 이렇게 반세기가 훨씬 지난 뒤에도 가상적인 해후가 이루어지는 세상이니 이만큼이라도 오래 살았다고 위로를 하며 만족하는 것도 과히 나쁘지 않을 듯..
9월 22일 토요일 저녁에는 정말 오랜만에 men’s night의 모임이 있었다. 이것은 진희네 그룹 부부모임에서 ‘wife’ 들만 빠진, 그러니까 남편들만의 모임이고 이름도 men’s night이 된 것이다. 이런 모임은 주로 이번 모임의 host인 최형의 wife가 집을 비웠을 때 이루어지고, 따라서 모이는 장소도 최형의 Sugarloaf Country Club 안에 있는 ‘으리으리’한 ‘진짜’ mansion(?) 에서 모이곤 한다. 이번에도 최형의 wife가 여행을 떠나서 그렇게 된 모양이었다. 이럴 때의 저녁 음식준비가 사실은 문제인데(wife가 없으므로), 역시 으리으리한 mansion에 걸맞게 catering service로 그것은 해결이 되었다.
근래에 들어서 이 그룹 모임은 예전대로 꼭 하게 되는 술(주로 wine) 대신에 음악, 특히 악기연주를 즐기는 쪽으로 그 분위기가 바뀌고 있어서 wife들이 조금 호감을 갖게도 되었는데, 이날도 모두들 한가지 악기를 들고 와서 맛있는 음식과, 얘기, 그리고 노래와 연주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나이가 들면서 거의 유행적으로 악기를 배우는 여유를 갖는 모양인데, 나는 아직도 그런 것을 못 해보았다. 최형은 ‘소원대로’ $2000짜리 guitar를 사서 그룹지도를 받고 있어서 모두들 호기심 어린 관심을 보이고 있고, 윤형도 $500짜리 ‘연습용’ saxophone을 사서 개인 지도를 거의 일년 째 받고 있다고 했다.
이날 처음 들었는데, 사실 놀랄 정도라 ‘멋지게’ 그 결과를 보여주었다. 나야 옛날부터 유일하게 하던 것이 guitar여서 별로 특기사항은 없고, 이태리 가구의 전사장은 guitar를 옛날에 잘 치던 것 같은데, 요새는 많이 잊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목소리가 좋아서 악기대신에 vocal로 한 몫을 잘 치른다.
나는 근래에 들어서 이 그룹의 영향을 받아서 조금씩 guitar를 찾으며, 기억이 나는 곡들을 찾아서 다시 배우고, 연습을 하곤 한다. 나이 들면서 이런 것은 역시 건전하게 시간을 보내는 데 도움이 되고, 악기, 가사 외우기, guitar chord외우기 등등도 ‘기억력’ 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5월 1일을 향한 달, 4월, 그것도 특별히 오래 전 1970년의 4월을 더 기억한다. 연세대 4학년이 되던 그 해의 4월, 지나간 3년간 나와 형제처럼 가깝게 지내던 중앙고 동창들, 특히 양건주와 이윤기가 모두 군대로 갔고, 사실 조금 외로움을 느끼기 시작하던 때였고, 비록 다른 동창, 죽마고우 박창희가 있긴 했지만, 그것은 조금 다른 위안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그 해 초에 친구 유지호의 도움으로 박창희와 같이 원서동에 살았던 다른 죽마고우 손용현과 거의 극적인 재회를 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거의 10여 년 만에 ‘불알친구’ 삼총사가 다시 모인 것이다. 당시 용현이는 건국대학교 영문과에 다니고 있었는데, 어렸을 때부터 미국과 영어를 그렇게 좋아했던 그에게 영문과는 아주 자연스럽게 보였다.
그 이후 우리는 뒤를 돌아볼 틈도 없이 오랫동안 헤어졌던 시간을 만회 하려는 듯, 급속도로 가까워지고 거의 매일 만나다시피 했다. 그 당시 그 나이또래가 갈 곳이 어디겠는가.. 거의 다 다방, 아니면 술집이었는데, 모두 담배연기가 자욱한, 건강한 곳들은 아니었다.
그것 대신, 값싸고 건강하게 모여 즐기는 방법이 있었다. 바로 산, 그러니까, 등산이었다. 특히 박창희는 거의 프로 급에 가까운 산 사나이였고, 요델 산악회의 멤버이기도 해서, 우리들에게는 조금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고, 그런 이유로 우리 셋은 같이 등산을 즐기기 시작했는데, 사실 그 당시 그것은 대학생들에게 유행이기도 했다.
그래서 셋이서 서울 근교의 산들(특히 도봉산)을 다시기 시작하다가 그 해, 4월 초에 장거리 산행을 하게 되었다. 육이오 때 김일성 공산당의 공비, 빨찌산들의 오랜 거점으로 유명하던 지리산엘 가게 된 것이다. 나는 그 전해(1969년)에 박창희와 같이 여름방학때 소백산 등산의 경험이 있었지만 용현이는 이런 산행이 처음이었다.
나와 박창희는 비록 연대 전기과 졸업 수학여행을 빼먹고 간 것이었지만,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정도로 그 산행은 일생을 통해 길이 남을 추억거리가 되었다. 당시는 color film이 나오기 시작할 무렵이라서 거의가 흑백의 사진으로 그 추억이 담겼다. 그 당시 우리들이 좋아했던 Bee Gees의 First of May, 지리산 등반, 그리고 그 속의 세 죽마고우들.. 비록 모두 헤어져 살았지만, 항상 꿈속에서라도 보고 싶은 친구들… 건강하기를 빈다.
유지호, 나의 원서동(苑西洞) 죽마고우(竹馬故友)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친구, 별로 잊고 산 적이 없는듯한 착각도 든다. 헤어져서 못 보고 산 세월이 꽤 오래되었지만 그런 사실과 상관없이 아직도 가슴 아련히 찐~하게 느껴지니 참 어릴 적 친구는 별수가 없다. 그 녀석을 정말 오랜만에 얼마 전 꿈에서 생생히 보았다.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그 녀석, 유지호와의 어린 추억을 회상한다.
사실 나의 블로그 에서 옛 친구들을 그리며 쓴 글이 꽤 많이 있었지만, 몇몇 친구들에 대해서는 아직도 쓸 엄두를 내지 못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이유는 간단하다. 너무나 감정이 복받친다고 나 할까, 심지어 괴로울 것 같아서 미루어 온 것이다. 친구 유지호가 바로 그런 친구 중에 하나라고나 할까.. 그런데 정말 오랜만에 그를 꿈에서 보게 되었고, 잘못하면 못 보고 죽을 수도 있겠다는 가능성과 함께, 이제는 더 미룰 수 없는 생각이 들었다.
지호, 유지호(柳池昊).. 구수한 얼굴만 생각해도 정겹게 느껴지는 친구, 이 친구와 이렇게 일생을 떨어져 살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본 것이 1980년1월 나의 결혼식 때였을까.. 마지막 소식은 우리 어머님께서 그 해 5월쯤 그 녀석의 딸이 태어났을 때 병원으로 찾아가셔서 본 때였고 그 이후 우리는 소식이 끊어졌다.
그 이후 우리 어머님은 항상 지호의 안부를 걱정하셨다. 심지어는 혹시 죽은 것이 아닐까 하시기도 했다. 그리고 인생이라는 커다란 수레바퀴에 치어서 정신 없이 살아온 것이다. 한동안 여러 군데로 수소문을 해 보기도 했지만 소용이 없이 지호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지호는 친구 중에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친구다. 물론 우리들은 너무 어려서 기억이 안 나지만, 어머님으로부터 들은 바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숨은 사연이 있었다. 원래 육이오 동란 전에 지호의 아버님과 우리 아버님은 친구였던 것 같고 (우리 아버지는 지호 아버님을 ‘원동 친구’라고 불렀다고 함, 원동은 지금의 원서동), 전쟁 발발 후에 두분 다 납북행렬에 끼어서 북으로 끌려갈 때, 지호 아버님은 구사일생으로 탈출을 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 아버님이 납북되신 것을 우리 어머님께 알리셨던 것이다. 그러다가 1.4 후퇴(1951년 1월 4일) 당시 지호네 식구는 모두 피난을 가게 되었고, 우리 집은 그대로 원서동에 남게 되었다.
하지만 그때 지호의 나이가 (나와 동갑인) 두 살밖에 되지 않아서 그랬는지 우리 어머님께 임시로 맡기고 전라도 지방으로 피난을 가게 되었다. 아버지가 납북되신 후 거처가 마땅치 않았던 어머님께서는 우리 집 남매, 그리고 지호를 데리고 원서동 비원 담 옆 텅 빈 지호네의 커다란 한옥의 사랑채에서 머물며 우리들을 돌보셨는데, 나중에 지호는 전라도로 피난 간 가족의 품으로 갔다가, 휴전 후에 다시 가족들과 함께 서울로 올라와 원서동에서 살게 되었다.
지호와는 이런 우리가 기억할 수 없는 묘한 인연이 있었다. 어머님의 추억에, 그 길게만 느껴졌던 지호네 사랑채에서의 생활이 참 무서웠다고 한다. 젊은 여자 혼자서 어린 애들 세 명을 데리고 텅 빈집에서 전쟁을 겪었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아슬아슬하고, 무섭게 느껴지곤 했다. 그래서 어떨 때는 지호가 우리 집 식구처럼 느껴지곤 할 때도 있었다. 나의 가장 오래된 지호에 대한 기억은 역시 원서동의 개천을 사이에 두고 살던 국민학교 1학년 시절이 아닐까..
우리는 승철이네 집에서 세 들어 살고, 지호네는 비원 담을 끼고 있던 커다란 한옥에 살았다. 그때의 지호는, 우리와 별로 다른 것이 없었다. 구제품 옷을 입고 신나게 개천을 중심으로 뛰어 놀았다. 지호와 우리가 뚜렷이 달랐던 것은, 그의 말투였다. 분명히 우리와 다른 말투.. 알고 보니 그것은 바로 전라도 사투리였다. 전라도에 잠깐 피난 생활을 하면서 배운 것이다. 우리들은 그것을 가지고 신나게 놀리곤 했다.
비원에서 흘러나오는 비교적 맑은 원서동 개천은 그 당시 우리들 꿈의 놀이터였다. 여름이면 시원한 물장난, 종이배 띄우기, 목욕을 할 수 있었고, 겨울에는 더 신나는 썰매타기, 빙판에서 팽이 돌리기를 하며 놀았다. 하지만 지호는 그런 것 이외에도 개천을 좋아하는 이유가 더 있었다. 바로 “폐품수집” 이었다. 개천가에는 군데군데 폐품, 심지어 쓰레기까지 버린 곳들이 있었는데, 대부분 더럽다고 피하는데 지호는 그곳을 열심히 뒤지면서 ‘보물’을 찾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런 것이 신기하고 재미있었지만 어른들은 더럽고, ‘거지같다’ 고 핀잔을 주곤 했다.
원서동에서 가까운 국민학교는 옆 동네에 있는 재동(齋洞)국민학교였고, 대부분이 그곳을 다녔지만, 이상하게도 지호는 낙원동 덕성여대 옆에 있던 교동(喬桐)국민학교를 다녔고, 우리 집에 같이 살던 승철이네 누나 시자 누나도 교동국민학교엘 다녔고, 졸업을 했다. 사실 왜 그곳을 다녔는지 그 이유를 모르지만, 학군에 관한 정확한 법적 제한이 없던 시절이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아직도 건재한 재동국민학교와 달리 교동국민학교는 비교적 일찍 폐교가 되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중고등학교는 지호 아버님이 서무부장으로 근무하시던 계동(桂洞) 입구의 휘문(徽文) 중 고교를 다녔는데, 중학교 시절에 철봉을 하다가 잘못 떨어져서, 팔이 골절되는 바람에 일년을 휴학을 해서 나보다 1년 늦게 (1967년) 졸업을 하였다.
내가 원서동에서 가회동으로 국민학교 4학년 때 이사를 가는 바람에 헤어지고 말았지만 그래도 연락은 끊어지지 않고, 계속되었다. 한가지 특기사항은 나에게 그 당시 친구들이 많았지만 그들 서로가 다 친구는 물론 아니었다. 심지어는 지호와 다른 친구들의 사이가 별로 좋지 않을 때도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나의 다른 절친한 죽마고우인 안명성과 지호의 아주 설명할 수 없는 관계였는데, 간단히 말해서 그들 서로가 좋아하지 않는 그런 사이였다.
그 가운데 내가 있어서 가끔 모두 만날 때에도 느껴지는 분위기기 별로 좋지 않았다. 그래서 나중에 나는 이들과 별도의 관계를 유지하기에 이르렀다. 지금도 생각을 한다. 왜 그들은 그렇게 서로 좋아하지 않았을까? 뚜렷한 이유가 없었는데.. 하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지호보다 명성이와 더 가깝게 중 고교 시절을 보내게 되었지만, 육이오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오랜 역사 때문일까, 무언중에 서로의 우정에는 추호의 변함도 없음을 서로 느끼며 살았다.
중 고교 시절, 지호네는 육이오 때부터 살던 오래된 원서동 집을 새로 아주 깨끗하고 중후한 느낌의 한옥으로 개축을 하였다. 그 당시 동네에서 아마도 가장 멋진 한옥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식구 수에 비해 방이 많아서, 항상 직장인 하숙생을 두고 있었는데, 언젠가는 방송국의 기술자 (아마도 엔지니어)가 하숙을 들어 살았는데, 가끔 그의 빈방을 우리는 몰래 들어가 보기도 했다. 그 당시, 아마도 고교 1년 때, 나는 한창 라디오를 중심으로 전기,전자 쪽에 관심이 많을 때여서 각종 전기,전자 부품으로 가득 찬 그 방의 책상설합을 보는 것은 즐거움이었다. 게다가 TV가 귀하던 그 시절, 그 하숙생 아저씨는 아주 옛날 것으로 보이는 동그란 스크린을 가진 흑백 TV 수상기가 있어서 비록 화면은 엉망이지만 그것으로 권투 중계 같은 것도 보곤 했다.
그 ‘악동’의 시절, 더욱 흥미로웠던 기억은 지호와 광순 형(지호의 형)으로 부터 들었던 ‘이웃집 여자 담 넘어보기‘ 이야기였다. 바로 이웃집에는 ‘화류계’ 여자가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마당에 나와서 목욕하는 것을 본 것이다. 그 당시는 개인 집에 목욕탕이 거의 없어서 공중 목욕탕을 쓰는데, 더운 여름에는 어두운 밤에 마당에서 목욕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 여자는 숫제 대낮에 나와서 목욕을 한 모양으로, 지호와 광순형이 손에 땀을 쥐고 담을 넘어 엿본 것은 완전히 김홍도의 그림1 같은 이야기가 된 것이고, 아직도 생생한 지호의 손에 땀을 쥐게 하던 이야기가 귀에 쟁쟁하다.
1966년 봄이 되면서 지호와 ‘지리적’으로 가까워지는 계기를 맞게 되었다. 우리 집이 연세대 1학년 초, 용산구 남영동에서 영등포구 상도동으로 이사를 갔는데. 그 당시 이미 지호네는 원서동에서 상도동 김영삼의 집 근처의 멋진 양옥으로 이사를 가 있었던 것이다. 지호 아버님이 이전에 무진회사(당시의 금융회사) 출신으로 수완이 좋으셔서 그랬는지, 큰 수입이 없으신 것처럼 보였는데도 아주 크고 멋진 집을 잘도 구하셨다.
나의 집은 비록 전세였지만 완전히 단독주택으로 그 당시 상도동 숭실대학 앞, 버스 종점 옆에 있어서 지호네 집은 걸어가도 될 정도로 가까웠고, 방 두 개의 작은 우리 집에서 그 녀석의 ‘파란 잔디에 별채까지 딸린 커다란 저택’에 가서 노는 것은 아주 즐거운 일이었다.
지호는 휘문고를 졸업하고 일차대학에서 낙방을 했는지, 한전(한국전력 주식회사) 산하의 수도공대에 입학을 하였는데, 서로 학교가 다르고, 학교 환경에 의한 관심사와 대학 친구들이 달라서 생각만큼 자주 만나지는 못했어도, 한번도 연락이 끊기거나 한 적은 없었다. 그래서 생각이, 이 녀석은 친구라기 보다는 나의 친척 같은 느낌을 줄 때가 많았다. 친척이야, 자주 못 보거나, 잠시 헤어져도 그 기본적인 관계는 없어지지 않기에 바로 우리들의 관계가 그것과 비슷했던 것이다.
지호는 그 당시 나이에 비해서 조금 느린 듯 하지만, 대신 여유 있고 폭 넓은 행동과 인간 관계를 유지하는 느낌을 주었다. 느린듯한 인상은 그 나이에 맞는 유행이나 멋 같은 것에 남보다 둔감한 편이고 그것은 옷이나 유행 같은 것에서 그가 좋아하는 것들을 보면 쉽게 짐작이 되었다.
그가 알고 지내는 사람들을 보면, 나 같은 비슷한 나이가 비슷한 사람들 이외, 나이와 배경 같은 것이 다른 사람들과도 잘 어울렸다. 대학시절부터 지호는 CCC (Campus Crusade for Christ) 라는 김준곤 목사가 이끄는 개신교 대학생 선교단체에 관련이 되어서, 나도 끌리다시피 그곳에 몇 번 가보기도 했다. 나는 아직도 지호가 그때 그렇게 신앙심이 깊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 당시 그는 아주 진지하게 활동을 하곤 했고, 흔히 생각하듯이 여학생을 만나기 위해서 그곳에 들어갔다는 느낌도 들지 않았다.
그 당시 CCC는 명동입구 부근에 어떤 빌딩의 옥상에 자리를 잡고 있었고 나도 지호와 몇 번을 가보았다. 지호는 이미 AS (Athletic Society, 체육부)라는 부서의 멤버로 활약을 하고 있었고 그곳에서는 이미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나는 그 당시 신앙적으로 너무나 유치해서 그곳에서 하는 신앙적인 활동에는 큰 관심을 없었고, 그저 대학생들, 그것도 꽤 많은 여대생이 있는 것만 관심이 있었다. 이곳에서도 역시 지호는 ‘인심 좋은 아저씨’ 같은 인상이었다. 이사람, 저 사람 할 것 없이 편하게 사람들과 사귀고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 나이에 비해서 성숙한, 하지만 부정적으로 표현하면, 조금 ‘영감’ 같은 그런 지호의 모습이었다.
‘I Am a Rock’ – Simon & Garfunkel – 1966 – Live
그 당시 둘이서 즐겨 ‘따라’ 부르던 smash hit oldie
이때에 일어난 잊지 못하는 일이 하나 있었다. 내가 가끔 발동하는 ‘악동기질’을 발휘해 지호에게 부탁을 해서 CCC소속 여대생들의 주소를 얻어낸 것이었다. 그때가 아마 1968-1969에 걸친 겨울 방학이었을 것인데, 그때는 거의 매일 광화문 근처에 있던 교육회관 지하다방2에서 살다시피 할 때였는데, 장난기가 발동해서 주소록에 있는 몇몇 여대생들에게 편지를 보내서 그 다방으로 불러낸 것이었다. 편지는 ‘연세춘추3‘에서 보낸 것처럼 하고, 무슨 설문조사(대학생의 팝송취향)를 한다고 꾸며 댄 것이었다. 내가 아이디어를 내고 내가 편지를 쓰고 보내고 했지만 내가 보아도 거의 ‘완벽’한 각본이었다. 그때 다방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나와, 양건주, 이윤기 등이었는데, 물론 이들은 ‘주저하는 공범’이 되고 말았다.
솔직히 나는 그 당시 너무나 심심해서 한 장난이었고, 그들이 나오리라고는 전혀 상상도 하지 않았다. 문제는 그들이 모두 나왔다는 사실이었고, 물론 그들과 ‘설문조사’까지 해야만 했다. 이구동성으로 그 여대생들은, 혹시 속는 것이 아닐까 하고 나왔다고 했고, 우리들의 ‘진지한 모습’에 안심을 했다고 했다. 그제야 나는 무언가 우리들 너무 장난이 심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물론 모두 나의 ‘잘못’이었다.
이 ‘연극사건‘은 사실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때 내가 편지를 보낸 여대생 중에는 CCC와 상관이 없었던 전에 잠깐 알았던 윤여숙(창덕여고, 이대 생물과) 이라는 여대생도 끼어있었는데 나의 최대의 관심사는 사실 그녀가 나올까 하는 것이었다. 사실 전혀 기대를 안 했던 것인데, 놀랍게도 그녀가 ‘편지를 들고 출현‘을 한 것이었다.
우리와 만나서 ‘설문조사’를 했던 여대생들에게는 편지로 우리가 기다리는 위치를 미리 알려주었지만, 윤여숙씨 에게는 카운터(계산)로 와서 찾으라고만 해 두었는데, 역시 그곳에 편지를 들고 나타났던 것이다. 나는 너무나 놀라서 얼굴도 못 들고 옆에 앉아있던 이윤기에게 그녀가 어떻게 하고 있느냐고 묻기만 한 것이 고작이었다. 카운터에서 편지를 들고 그녀가 화를 내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그제서야 내가 너무 지나친 장난을 했구나 하고 겁이 나기 시작했다. 그녀의 아버지가 경찰관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때의 이 ‘지나친 장난’은 두고두고 잊지 못하는 추억이 되었고, 후회를 하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을 하니 그 나이에 그런 악의 없는 장난은 조금 애교 있게 보아도 되지 않을까?
연세대 2학년 시절, 나는 연호회라는 남녀 대학생 클럽에서 활동을 했다. 말이 활동이지.. 그저 남녀 대학생들끼리 만나는 것이 주목적인 조금은 맥 빠진 듯한 클럽이었지만, 그 나이에 젊음을 발산하는 알맞은 역할을 하기도 했다. 활동이란 것에는, 정기적으로 다방에서 만나는 것, 야외로 놀라가는 것 등, 주로 ‘노는 것’ 이외에도, 조금은 심각한, 말도 그럴듯한 ‘견학’이란 것도 있었다. 그러니까 조금 공부하는 활동인데, 우리들이 유일하게 성사시킨 것이 ‘동양방송국 견학‘ 이었다. 그 당시 동양 방송국, TBS는 삼성재벌 산하의 아주 큰 언론기관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 우리가 간 곳은 서소문에 있던 동양 텔레비전 방송국이었는데, 그것을 성사시킨 것이 바로 지호였다. 지호가 알고 있던 어떤 ‘아저씨’가 그곳에서 엔지니어로 일을 하고 있어서 가능했던 것이다. 그 아저씨는 역시 지호네 집에서 하숙을 하던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지호는 엉뚱한 곳에서 엉뚱한 사람들을 많이도 알고 있었다.
대학 3학년 (1969년) 때 즈음, 지호 아버님의 환갑잔치가 있었다. 그때만 해도, 시골은 물론이지만 서울에서도 환갑이란 것은 집안, 친척의 경사요, 동네의 경사이기도 할 정도로 나이 60세를 장수한 것으로 여길 때였다. 그때가 1969년 경이었으니까, 지호 아버님은 아마도 1909년 생이셨을 것인데, 우리 아버님이 1911년 생이셨으니까, 우리 아버님보다 나이가 위셨다. 나는 그 잔치에 특별히 관심은 없었지만 지호가 스냅사진 좀 찍어달라고 해서 갔고, 우리 어머님도 잠깐 들리셔서 돈 봉투를 놓고 가셨다. 나는 사실 처음 환갑잔치에 갔던 것인데, 신발 표까지 나누어 줄 정도로 사람들이 많이도 왔다. 그때 지호네 친척들이 또한 많다는 사실에 놀랐다. 가족들 마다 모여서 합동으로 절을 하였고, 그런 것들을 그 당시에 고가였던 플래시를 써서 모두 찍었는데, 상당히 많은 양의 사진을 찍고 다녔지만, 나는 어디까지나 ‘아마추어’ 자격으로 찍은 것이고, 프로 사진기사가 와서 정식으로 사진을 다 찍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프로 사진기사가 찍은 사진이 무언가 크게 잘못되어서 모두 못쓰게 되었다고 해서, 결과적으로 내가 찍은 사진이 ‘완전히’ 환갑기념 공식사진으로 남게 되었다. 그런데, 그 사진들이 내가 보아도 괜찮게 나왔던 것이다. 만약 이날 내가 사진을 찍지 않았더라면 그 큰 환갑잔치의 모습들은 영원히 사라졌을 것이다. 나는 이것을 계기로 사진에 대해서 자부심을 갖게 되기도 했고, 두고두고 그 지호 아버님의 환갑잔치는 머리에 사진처럼 남게 되었다. 특히 지호 아버님, 기분이 좋으셔서 커다란 안방에 사람들에 둘러싸여 덩실덩실 춤을 추시던 모습, 지호의 형 광순형 또한 완전히 만취가 되어서 나를 붙잡고 ‘기분 좋게’ 술주정을 하던 모습 등등.. 참 기억하고 싶은 잔치였다.
1970년 (대학 4학년) 쯤에는, 항상 폭넓은 친구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지호를 통해서 나는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원서동) 친구들과도 다시 만나게 되기도 했다. 그 중에는 국민학교 친구, 김천일과 또 다른 죽마고우였던 손용현이 있었고, 그렇게 친하지는 않았지만 역시 원서동 개천친구, 한성우(한성택 형의 사촌) 도 다시 보게 되기도 했는데, 이것은 지호가 그들과 끊어지지 않는 원만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김천일은 원서동의 토박이로 재동국민학교 동기동창이었는데, 중학교 1학년 때 사소한 나의 철없던 실수로 헤어지게 되었는데 지호를 통해서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나이는 조금 밑이었지만 박창희와 같이 국민학교 4학년 때까지 개천을 사이에 두고 살았던 손용현.. 이들은 나중에 내가 미국으로 떠날 때까지 나와 아주 가까이 지낸 친구들이 되었다.
지호는 언뜻 보기에 그다지 노래 같은 것을 잘 부르지는 않았어도 아주 좋아하여서, 그런 기회가 있으면 빠지지 않았다. 그 예로 어느새 ‘서울합창단’이란 곳에 가입을 해서 활동을 하였던 것을 나중에 알게 된 것이고, 우리들은 사실 장난끼 섞인 말로 ‘비웃기’도 했다. 지호는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아주 꾸준히 그 ‘서울합창단’이란 곳에 나갔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아주 ‘공식적이고, 역사 있던’ 단체여서 나도 놀랐다. 그곳은 장상덕이란 분이 지휘자로 있었고, 그분은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도 자주 볼 수 있던 사람이었다. 그러다가 지호가 나보고도 가입하라고 했는데, 회원이 부족하다고 하던가.. 했는데, 사실은 그 때, 10월 유신이 나고 박정희가 통일주체국민회의란 것을 만들어서 종신 대통령으로 선출이 되는 시기였는데, 그 취임식이 열리는 장충체육관에서 ‘공화당 찬가’를 이 서울합창단이 맡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우리들은 사실 정치에 별로 관심이 없었고, 공화당찬가를 부른다는 것이 별로였지만 이미 청탁을 받고 연습을 시작한 모양이어서 나도 ‘끌려 가다시피 해서’ 합창 연습을 하곤 했다. 실제로 나는 장충체육관에 가지는 않았지만, 두고두고 이것은 별로 좋지 않은 찜찜한 추억으로 남게 되었다.
그 이후 지호는 군대로, 나는 미국으로 가서, 헤어졌다가 1975년 여름에 지호를 서울에서 다시 잠깐 만났는데, 어엿한 대기업의 자재과 샐러리맨이 되어있었다. 그리고 5년 뒤, 1980년에는 나의 결혼식에 왔고, 그 후 소식이 끊어졌는데, 주위를 암만 찾아도 그 녀석은 없었다.과연 지호는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동국대 사학과를 나온 지호의 형, 광순형 도 찾을 수가 없었다. 이제는 거의 포기하는 심정으로 이렇게 회고담 속에서나 듣고, 보고, 느낄 수 밖에 없는가?
1. 17세기 조선,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 단오 2. 위치가 좋아서 1960년대 말 대학생, 직장인 할 것 없이 ‘잘나가던’ 다방 3. 연세대학교 발행, 학교신문
postscript: 오랫동안 기억해낸 추억을 글로 옮기는 것, 몇 시간이면 될 줄 알았지만, 결과적으로 일주일 이상이 걸렸다. 한 가지를 쓰고 나서 다음 날, 다른 추억이 되 살아나고, 그런 것이 며칠이나 걸렸다. 이제 내 기억력의 한계를 분명히 느낀다.
¶ 현재 진행되고 있는 11월 미국의 대통령 선거를 향한 치열한 공화당 후보들의 debate와 이틀 전부터 시작된 2012년 스위스 다보스(Davos, Switzerland)의 World Economic Forum(WEF)을 주의 깊게 지켜보면서 조금씩 복잡한 나의 심경을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우선 강하게 느끼는 ‘감정’은 바로 이것이다. ‘지독한 부자’에 대한 혐오감이다. 여기서 지독한 부자는 ‘돈 장난’을 해서 ‘지독히도’ 많이 번 부자들을 말한다. 자칫하면 ‘질투’로 부터 나온 것일 수도 있지만 그렇게 간단히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정도로 그들이 ‘부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 front-runner인 Mitt Romney의 ‘거대한 재산’은 아주 눈에 가시처럼 보인다. 과연 그가 99%의 심정을 조금이라도 이해를 할 수 있을까? 본인은 분명히 머리가 좋으니까 그렇다고 생각하겠지만, 현실적으로 참 힘들 것이다.
Warren Buffet같이 부자들이 더 세금을 내야 한다고 하는 양심들도 있지만, 이들은 절대로 자기들이 ‘법적’으로 하자가 없다고 우긴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절대로 법적인 것 만이 아니다. 인간과 사회는 법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재 쟁점이 되는 것이 법 자체를 바꾸자는 의견이다.
그런데 이 법은 단순한 법의 차원을 넘어서, 숫제 자본주의 자체를 수정하자는 정도까지로 나갔다. 문제는, 그 것이 예전 같았으면 ‘배가 나온, 지독한 부자’ 들이 총 동원해서 반격을 할 텐데.. 이번에는 Occupy Wall Street 때문일까.. 비겁하게 눈을 깔고 관망만 하는 듯 보인다. 그래서 그런지 이번 Davos에도 그들 특히 banker, investment fund manager같은 부류들이 대거 불참을 했는데, 내 생각에 그들은 ‘무서워서’ 못 온 것 같다. 나도 그런 ‘대중’의 의견에 100% 동감이 간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 I TOLD YOU SO department: 이 분명한 사실이 믿기는가? 바보 같은 iPxx customers & Apple Lover 들이여, 그대들이 꾸뻑~하고 흠뻑 빠져버린 iPxx (iPod, iPad, iPhone, iWhatnext?)가 $Apple company에 갖다 바친 돈이 얼마나 되는가? 46 BILLIONS! 이것이 얼마나 큰 돈인지 아시는가?
거기에 비해서 지난 10년 이상 그렇게 억수로 돈을 벌던 $Microsoft조차도 년 수입이 $20 BILLIONS이고, 고철 컴퓨터의 대부, computer science를 독자적으로 창시한 IBM 조차 $25 BILLIONS에 지나지 않는다. 나에게 애플이 그렇게 억수로 돈을 번 것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벌고 있고, 그렇게 번 $$$이 어떻게 쓰이고 있는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 같은 것들이 어떨까가 더 회의적이고 문제라는 것이다.
그 들은 현재의 상태를 결사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특허재판 전쟁으로 엄청난 돈을 뿌리고 있다. 말도 안 되는 것들을 모조리 특허로 만들었다. $Apple company가 앞으로도 그들의 ‘대부’ S. Jobs의 그늘에서 계속 머문다면 역시 그들의 운명도 분명히 시간문제일 것이다. Jobs는 죽어가는 마당에서도 그의 국가 대통령인 Obama에게 ‘죽어도 iPxx 는 미국땅에서 만들지 않을 것(결국은 중국에서만)’ 이라고 단언을 했다는 말을 듣고 정말 그가 그런 생각으로 죽고 싶었을까 하는 측은지심을 버릴 수가 없었다. 절대적인 이익을 위해서 모든 것을 경쟁국이며 잠재적인 군사적국인 ‘공산당 중국’의 착취적인 노동력을 이용해서 사상 초유의 이익을 추구하는 Jobs 의 집단, 완전히’무엇인가에 미친 영혼’을 보는 것 같아서 긴 시간을 두고 생각하게 되었다. 비슷한 배경의 억수 부자라도 Microsoft의 Bill Gates는 완전히 스펙트럼의 반대쪽에서 전 세계인들의 존경을 받는다. 과연 누가 이 시대의 진정한 영웅일까?
¶ 나의 친척 같이 느껴지는 죽마고우 친구, 유지호를 생각하며 쓰기 시작한 글, 시작한지 이제 보름도 넘었다. 거의 끝났다고 생각하면 다음날 아침에 꿈결에 새로 기억이 되살아 나는 것이 있어서 보충을 하고, 다음 날 또 새로운 것이 되 살아나고.. 그런 식으로 보름이 지난 것이다. 왜 이리 기를 쓰고 있는 것 없는 것 다 기억하고 기록을 남기려 할까.. 생각해 보니 나도 조금 웃음이 난다.
혹시 내가 치매예방을 염두에 두고 두뇌운동을 하는 것일까.. 아니,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하기야 그렇게 두뇌 운동을 하면 조금 치매방지에 도움이 되기도 하겠지만.. 그 동안 오랜 동안 잊고 산 것이 죄스럽기도 하고, 시간이 갈 수록 기억이 새로워질 리는 만무하고, 지금이라도 기록을 어디엔가 남겨두면, 그 친구를 ‘죽기 전에’ 다시 소식을 들을 chance가 조금은 올라갈 것이라는 그저 희망에서 쓰기 시작한 것이고, 다시 들을 수 없다면 그저 그가 어디에선가 건강하게 살고 있기를 바랄 뿐이다.
2012년 1월 15일, 그리운 동창 친구, 양건주의 생일을 축하한다. 아버지 세대 같았으면 ‘정말 오래 살았다’는 축하겠지만 완전히 한 세대가 흐르면서 그런 기분은 조금씩 사라지는 듯 하다. 꼭 오래 사는 것이 최선은 아닐지라도, 기왕 조금 길어진 수명은 소중히 써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각자가 그렇게 덤으로 주어진 선물을 어떻게 써야 할 지는 모두 다르겠지만, 아주 작더라도 개인적, 사회적, 역사적인 유산은 조금 남기고 갈 수 있게 노력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
그 옛날 비틀즈의 When I’m Sixty Four를 들을 때, 과연 우리에게 그런 때가 올까 했지만 시간과 세월만은 참으로 정직하구나. 바로 그런 순간들이 우리들에게 왔으니 말이지. 다시 한번 그리운 친구 건주의 예순 네 번째 생일을 축하 한다!
흑용의 해라는 새해, 용의 해 임진년이 밝았습니다. 비록 자주 연락을 할 수 없었던 지난 한 해였지만 항상 생각 중에, 기도 중에 함께하고 있습니다. 멀리 타향에서 사귄 친지들이지만 세월의 흐름과 함께 허물없이 느껴지는 친구들, 항상 멋진 host역을 열심히 하시는 서울고, 서강대 최동환씨네, 진희 아빠 엄마, 항상 커다란 동작과 유머, 그리고 Clark Howard 뺨치는 소비경제의 도사 서강대 윤재만씨 부부, 멋진 노래만 골라서 잘도 부르는 이태리 가구점 Ohio State 동창 전성준 사장님 부부 올해는 경기가 잘 풀려서 순조로이 business가 풀려나가기를 바랍니다.
제가 항상 은총을 듬뿍 받는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자비의 모후 레지오, 단원 자매 형제님들: 김용란 안젤라 단장님, 안애자 로사 부단장님, 이연숙 베로니카 서기님, 은효순 요안나 회계님, 이길영 아가다 자매님, 김희대자 고레따 자매님, 이남순 바울라 자매님, 장춘자 실비아 자매님, 우원실 마리아 자매님, 우동춘 요셉 형제님, 그리고 얼마 전 신상의 이유로 퇴단을 하셨던 이순섭 마리아 자매님과, 송희빈 젤뜨루다 자매님.. 너무나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새해, 더 건강하시고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송년, 2011년.. 결국은 왔다. 결국은.. 이제부터는 내일을 못 볼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살려고 하지만, 조금 더 확대를 해서 내년을 못 맞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한다. 2011년이 나의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살았어야 했다. 하지만 은근히 2012년을 의식도 하며 살았다. 그럴 확률이 높다는 것을 은근히 의식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정말 이것은 찢어지는듯한 외로움이다. 그렇게 외롭게 느껴진다. 곁에 연숙과 아이들이 있다는 사실도 소용이 없다. 나에게 엄마와 누나가 옆에 없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도 나는 정말 광활한 이 우주공간에 외톨이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왜 이렇게 나는 더 성숙하지 못할까? 엄마는 이미 하늘나라로 가셨다. 그러니 내가 죽기 전에는 다시 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도 그래도 보고 싶다. 나를 진정으로 위로해 줄 만한 사람은 엄마밖에 없기 때문이다. 누나는.. 있어도 볼 수가 없다. 어찌해야 할까? 억지로라도, 모든 것 다 잊고, 다 포기하고 고향에 간다 해도 나의 꿈의 고향이 이미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나는 정말 슬프기만 하다. 내가 상상하는 고향과 친구들은 사실 내가 쓴 소설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한다. 아마 그것이 사실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정말 외롭다. 나는 혼자다. 나를 아는 사람은 이제 세월의 횡포로, 거리의 횡포로 다 피안의 세계로, 나의 상상의 세계로 다 사라진 것이다. 이런 꿈에서 깨어나기 전에는 이런 고통이 계속될 것이다. 그것이 나의 운명이다. 아무도 이런 것에는 나에게 도움이 될 수가 없다. 그것을 나는 안다. 내가 매듭을 풀어야 한다. 나 혼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외로움, 과연 언제부터 내가 씨를 뿌렸을 까. 내가 무엇을 크게 잘 못하며 살았을까? 그렇게 내가 잘못 했을까..
모든 것이 다 나로부터 사라졌다. 나는 친구가 이제 단 한 명도 없다. 친척도 다 사라졌다. 가까운 누나도 나를 모른다. 아니 그곳에 갈 수도 없다. 아니 간다 해도 그곳이 이미 내가 그리는 고향이 아닐 수도 있다. 아~~ 나는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어떻게?
내가 연세대를 지망하게 된 것은 복잡한 이유가 필요치 않았다. 철학적인 이유보다, 실제적인 이유가 있었다. 한마디로 서울공대 전기, 전자공학과는 나에게 조금 ‘위험한’ 선택이었고, 그 다음은 무엇인가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 이외에도, 무언가 부드럽고 ‘낭만적인 인상’을 주던 신촌 독수리의 요람, 반짝이는 구두, 바로 옆에 ‘기다리고’ 있던 이화여대생들.. 등등이 자연히 나를 그곳으로 끌었다. 어렸을 때부터 나의 관심은 100% 전기,전자 ‘과학’ 쪽이어서 전공을 선택할 때에 한번도 다른 생각도 한 적이 없었다. 그 당시만 해도, 대학의 학과를 지망할 때, 본인의 취향이나, 포부보다는 성적 순위로 정하는 것이 통례였는데, 지금 생각하면 이것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사고방식 이었다. 성적순위로 경쟁 학과를 지망하는 것이었다. 단적인 예로, 그 당시 서울공대 화공과나 전기,전자과의 커트라인이 제일 높았고, 그런 분야를 자기가 좋아하건 안 하건 상관없이 학교 성적만 좋으면 지망을 하곤 했던 것이다. 그저 그런 과를 졸업하면 보장된 취직의 문이 열려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그런 분야에 얼마나 관심이나 있었을까? 어쩔 수 없이 하게 된 불행한 친구들, 많이 있었을 것이고, 그 분야에 진짜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기회가 줄어들게 된 것이다. 그런 의미로 내가 연세대 전기공학과에 입학한 것은 아주 적절한 선택이었고 결과였다.
연세대학 전기공학과의 경쟁률은 상당히 높아서 시험을 치르고 나서 상당히 스트레스를 느끼긴 했지만, 사실은 끝났다는 안도감과 편안함도 잔잔하게 느끼며 발표를 기다렸는데, 그만큼 입학시험이란 것이 괴로운 것이었다. 그 당시, 입학시험 발표는 대부분 라디오에서 제일 먼저 발표를 했고, 나도 그것을 통해서 합격 발표 결과를 들었다. 입시 전에 합격하면 ‘진짜’ 카메라를 사주시겠다는 어머님의 약속을 기억하며 나는 정말 합격발표를 기뻐했는데, 진짜로 며칠 후에 나는 일제 페트리(Petri) 란 카메라를 선물로 받게 되었다. 나중에 가까웠던 친구들의 대학입시 결과가 속속 알려졌는데, 김호룡은 연대 기계공학과에 합격을 했는데, 나머지 이종원, 우진규 등은 모두 떨어졌다. 이들에게는 2차 대학을 응시하거나 재수를 하는 두 가지 길이 있었고, 종원이는 2차였던 외국어대에 갔는데, 우진규는 재수를 하게 되었다.
비록 추운 겨울 날씨였어도 입학식 전까지의 시간은 정말 ‘천국’에 있는 기분이었다. ‘악몽’ 같던 시절이 끝나고, ‘완전 자유’의 대학시절이 눈 앞에 보이니 어찌 안 그렇겠는가? 새로 산 카메라를 들고 이곳 저곳을 다니며 사진을 찍으며 자유로운 시간을 즐기고, 드디어 ‘학생입장불가’ 라는 영화도 당당히 들어가게 되었다. 그때에 나는 용산구 남영동, 금성극장 바로 앞에 살았고, 그곳에서 연세대를 다니기 시작했는데, 사실 고등학교에 다니던 것과 크게 다를 것은 없었다. 약간 달라진 것은 까만 교복대신에 곤색 대학제복을 입었던 것, walker(군화) 대신에 진짜 신사화 (단화)를 신었고, 머리는 조금 자라서 스포츠형 정도가 된 것, 그것이 전부였다. 어떤 애들은 완전히 기름까지 바르며 머리를 기르고, 신사복까지 입었지만, 나는 그렇게까지는 못했다.
그 때 연세대 캠퍼스에서 제일 인상적인 것이 여기저기 보이던 “멋진” 여대생들이었다. 나는 그것이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었다. 비록 내가 속한 과에는 여학생이 하나도 없었지만 그것은 상관이 없었다. 여기저기 강의실 이곳 저곳에 여대생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입학 오리엔테이션도 아주 인상적이었는데, 그곳에서 소개된 도서관, 학생보건소, 채플시간 등등은 나중에 연세대만의 특징을 보여 주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입학을 한 후 얼마 안 있어 우리 집은 용산구 남영동에서 영등포구 상도동 (숭실대학 앞 버스 종점)의 단독주택으로 이사를 갔는데, 비록 멀어지긴 했지만, 다행히 버스노선이 있어서 사실은 더 편했다. 종점에서 종점까지 매일 왔다 갔다 한 것이다. 이곳에서 대학졸업 때까지 살았기 때문에 나의 대학시절의 추억은 이곳과 항상 연관이 되어있었다.
연대 전기과, 우리는 그저 그렇게 불렀다. 내가 1966년 입학할 당시 연세대학교는 공과대학이 아닌 이공대학이 공학부를 포함하고 있었고, 전기공학과와 비슷한 전자공학과란 것이 생기기 전이었다. 아마도 몇 년 후에 전자공학과가 분리되었을 것이다. 내가 다닐 당시에는 3학년이 되면서 강전, 약전 이란 이름으로 갈라졌다. 그러니까 강전(强電)이란 것은 전통적인 전기공학이었고, 약전(弱電)이란 것은 새로 유행하기 시작한 전자공학인 셈이었다. 이것은 글자 그대로 강전은 (electric) power system, 그러니까 전력의 발전,송전 같은 ‘강한, 높은 전압’의 것을 다루고 약전은 그 이외의 것, 특히 electro-magnetic, radio, amplifier, control systems 같은 것을 다루었던 것이고, 이 약전이 바로 전자공학(電子工學)인 것이다. 나는 약전, 전자공학에 관심을 두고 입학을 했기 때문에 3학년 때 약전 반으로 가서 공부하게 되었다. 물론 각자의 지망대로 배치를 하지만 워낙 약전, 전자공학에 지망생이 많아서 교수님들도 조금 골치를 썩힌 듯 했다. 하지만 큰 문제는 없었던 것으로 보였다.
이런 환경에서 재학생, 복학생으로 갈라지는 판에 3학년부터는 약전,강전으로 거의 반반으로 갈라게 되어서, 심하면 서로 모르는 학생도 생길 정도였다. 지금 졸업 앨범을 보니 그것을 느끼게 된다. 얼굴만 조금 익혔을 뿐 이름 이외에는 전혀 기억이 안 나는 것이다. 이것이 대학 이전의 동창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설상 가상으로 나는 1학년 가을학기부터 1년 휴학을 했기 때문에 입학동기들은 거의 놓치게 되었다. 이런 조금은 복잡한 이유로 나의 연세대 4년은 조금 비정상 적인 것이 되었다.
1학년 1학기 때, 그러니까 1966년 봄 학기, 그야말로 freshman의 기분으로 인생에서 조금은 새로운 기분을 만끽할 수 있었다. 지금의 고등학생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그때는 대학생이 되어야 비로소 ‘성인’, 그러니까 사람 취급을 받았다. 머리도 기르고, 신사복도 입고, ‘단화’ 구두도 신을 수 있고, 극장도 마음 놓고 들어가고, 다방, 술집.. 이런 것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또한 마음 놓고 남들이 보이게 ‘연애’도 할 수 있었다. 이런 사회적인 환경 때문에 대학에 들어와서, 아차..하고 한눈을 팔면 완전히 자제력을 잃기가 아주 쉬웠다. 내가 바로 그런 대표적인 케이스라고나 할까.. 조금 부끄럽지만..
나는 이런 갑작스런 개인적 자유를 슬기롭게 감당할 준비가 덜 되었던가.. 자유의 전당에서 나는 첫 학기를 혼돈과 방황으로 보냈다. 대학 강의란 것도 실망스러운 것이, 사실 고3때의 스파르타 식, 우스꽝스럽게 어려웠지만, 멋지던 수학, 화학 같은 것이 대학에선 수준이 ‘낮아진 듯’이 느껴졌다. 1학년의 교양학부 과정 전체가 고등학교와 수준이 비슷한 듯했다. 한가지 다른 것은 강의를 ‘땡땡이’를 쳐도 당장 아무런 ‘처벌이나 문제’가 없는 듯이 보였던 것이었는데, 그런 ‘안심’에는 무서운 함정이 도사리고 있는 것을 나중에 뼈저리게 체험하게 되었다.
그런 새로운 환경에서 전기공학과 1학년에는 중앙고 동기동창 2명, 그것도 3학년 8반 때의 ‘반창’이었던 신창근과 조남재가 있었다. 중앙고의 같은 반에 있었어도 개인적으로 별로 가깝지 않았지만, 이제는 조금 더 가까이 느낄 수 있었다. 그것 뿐이 아니었다. 중앙고 1년 선배인 구장서, 더 위의 선배인 (2~3년?) 차재열 형.. 등등, 그러니까 중앙고 출신이 전기과 1학년에 나까지 5명이나 있었던 것이다. 이 정도면 은근한 ‘힘’을 가진 집단이어서, 무슨 투표,선거 같은 것이 있으면 절대로 무시 볼 수 없는 숫자였고, 과 대표를 뽑는데도 영향력을 행사할 정도였다.
보슬비 오는 거리 – 성재희
1965년 말에 발표된 성재희씨의 데뷔 힛트, 입학시험 즈음에 거의 매일 듣었던 곡으로, 그 당시를 추억하게 하는 대표적인 가요가 되었다. 레코드가 크게 힛트한 후에 시민회관에서 공연을 했는데 많은 관중의 사랑을 받았던 기억도 난다.
I Could Easily Fall in Love with You – Cliff Richard
연세대 입학 후에 참 많이 듣고 좋아했던 곡, 전 해에 Cliff Richard는 이미 The Young Ones라는 영화로 일본과 한국에 많은 fan을 가지고 있었다.
같은 해 연세대에 입학한 중앙고 동창 중에는 기계과에 나의 절친했던 친구, 김호룡을 비롯해서 김연응이 있었고, 다른 과에도 상당히 많이 있었다. 이런 사실은 나중에 총학생회장을 뽑을 때에 은근한 세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그 당시는 별로 그런 것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나중에 생각하니 그것은 작은 규모의 정치적 발상이고 행동들이었다. 그런 것들은 나의 체질에 별로 맞지 않았지만 기성 정치인을 흉내 낼 정도로 선거운동에 열을 올리는 사람이 꽤 있었다. 투표에서 표 하나가 사실은 땀과, 그리고 돈이 필요하다는 조금은 실망스러운 사실도 그때 보게 되었다.
그 당시 전기과 3학년에 어머님의 절친한 원산 루씨여고 동창 친구분의 아드님이 있었는데, 이름은 위재성 형, 보성고교 출신으로, 학훈단(ROTC) 생도였고, 성적도 뛰어나고, 지도력까지 있는 그야말로 모범적인 형이었다. 그 형의 여동생인 위희숙씨는 1967년에 연세대 영문과에 입학을 해서 나와 같이 1971년에 졸업을 한 졸업동기생이 되었다. 어느 날 그 형이 나를 보자고 불러서 갔더니, 그곳은 전기과 학생회 선거본부였다. 알고 보니 그 형이 학생회장(이공대 회장)으로 출마를 해서 겸사겸사 나를 보자고 한 것 같았다. 반가운 마음도 들었지만, 사실 곤란한 것도 없지 않았다. 이미 나는 다른 과에서 중앙고 출신의 선배가 출마를 했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대학 학생회 선거는 일반 선거의 풍토와 별반 다름이 없고, 완전히 ‘출신지’에 좌우되는 판이었다. 출마 후보의 경력, 자질, 포부 같은 것은 사실 뒷전에 있었다. 그때 나는 대한민국 선거풍토를 그대로 보게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나는 출신고의 압력에 굴복한 셈이 되었는데, 이것은 두고두고 나를 괴롭혔고, 부끄럽게 만들었다.
그 1학년 1학기의 시작 무렵에 나는 ‘사진 찍기‘에 완전히 빠졌고 그것이 조금 수그러질 무렵에는, 나의 다른 blog에서 다루었던 ‘모형 비행기‘ 로 시간을 다 보냈다. 온통 정신이 그곳에 가 있어서 학교 공부를 제대로 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고교시절의 학과목 정도의 수준이었지만, 역시 공부를 제대로 안 하니 시험도, 출석도 문제가 없을 수가 없었다. 특히 체육 같은 것은 출석미달로 시험도 치르지 못할 정도였다. 하지만 나와 반대로 ‘성공’을 하겠다고 정신무장을 하고 들어온 학생들도 있었는데, 그가 군대(공군)를 마치고 입학한 사람, 이름이 강성모 였다. 나이나 성품, 성숙함 등으로 전기과 1학년 과대표로도 뽑히고, ‘공부도, 활동’ 도 잘해서, 결국 강성모씨는 나중에 대학 졸업하기도 전에 학과장의 추천으로 미국유학(Fairleigh Dickenson College, NJ)을 갔고, 그 이후 미국에서 아주 유명한 대학교수가 되었다. 이 강성모씨는 내가 한창 ‘놀던’ 그 학기에 거의 매일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 주어서, 절대로 재수가 좋아서 성공한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학기가 끝나면서 나는 정신적으로 완전히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휴학계를 제출했는데, 그 당시에는 그것이 나에게 최적의 선택이었다. 1966년 입학 동기들은 사실 이때부터 1년 휴학을 하면서 완전히 ‘놓치게’ 되었고, 1967년 가을 2학기에 복교를 하고 보니, 전기과의 학생들은 사실상 1년 뒤에 입학했지만 나와 나이는 거의 비슷했다. 거의 모두 생소한 얼굴로 가득 찬, 완전히 다른 환경이 되었지만, 그래도 하늘이 도와서 나의 중앙고 반창인 이윤기와 나의 죽마고우 박창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윤기는 3학년 때 그런대로 친하게 지낸 친구였는데, 재수를 해서 들어왔고, 박창희는 나의 중앙고 1년 후배여서 제대로 입학을 한 것이었다. 같은 고등학교엘 다니면 1학년의 차이에도 존댓말을 써야 했지만, 나와 창희가 죽마고우의 친구여서 그럴 수는 없었고, 이것 때문에 창희와 윤기도 서로 말을 놓게 되었다. 그 외에도 중앙 1년 후배인 김태일, 이상일 등도 있어서 더욱 마음이 든든하게 느껴졌다.
이외에도 전기과에는 조금 낯이 익은 얼굴 두 명이 보였는데, 그 들은 이헌제, 김현식.. 이름보다는 얼굴이 낯이 익어서 생각해보니 작년, 나의 입학동기생이었다. 그들을 어떻게 일년 뒤에 다시 보게 되었을까? 나와 같이 휴학을 하지 않았으면, 유급일 것이었다. 나중에 들으니 이헌제는 유급이 분명했는데, 김현식은 그 당시 이유를 분명치 않았다. 그래도 이헌제는 나를 알아보아서 나도 아주 반가웠는데.. 그 해(1967년) 겨울이 지나면서 자살을 하고 말았다. 겨울방학 중이었는데 갑자기 같은 과의 한창만으로부터 연락을 받아서 한강 파출소로 가보니, 이헌제 가 한강 철교다리 위에서 투신자살을 했다고.. 충격적이고 어이가 없었다. 이헌제.. 얼굴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참 외향적 성격의 소유자였는데, 어떻게 그가 자살을.. 나중에 들어보니 열렬히 연애하던 여대생(이대 음대생)과 결별을 하면서 비관 자살인 것 같다고 했다. 연기를 깊숙이 빨아들이며 담배 피던 모습이 흡사 외국 영화배우 같았고, 삶을 마음껏 즐기는 것처럼 보이던 그가 얼마나 충격과 절망이었으면, 그 나이에 자살을 했을까.. 아직도 그의 얼굴을 생각하며 채 피지 못한 그 영혼의 명복을 빈다.
이윤기, 박창희 같은 뜻밖의 ‘친구’들 때문에 나의 대학 1학년 2학기의 시작이 아주 순조롭게 시작 될 수 있었고, 1년 전의 ‘악몽’을 되씹으며, 단단히 결전의 자세로 학교생활에 임하게 되었다. 이래서 사람은 가끔 실수도 해 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제 학교생활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학교의 강의,과목을 충실히 공부하고 좋은 결과를 내는 것이 되었다. 사실 이것이 정상적인 대학생활이었고, 나는 처음 그런 대학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공부도 열심히 했지만, 새로 만나게 된 과 친구들과도 큰 무리 없이 어울리게 되었는데, 이것은 전적으로 이윤기와 박창희가 있어서 가능했다고 아직도 믿고 있다. 이미 이윤기와 친하게 지내던 그룹이 있었는데, 흔히 그들을 ‘식당파‘라고 불렀다. 그들이 모이는 장소가 그 당시의 학생식당이어서 그런 것 같았다. 모두 쾌활하고, 다양한 남자들.. 그 중에는 과 대표였던 고종태, 기타를 귀신처럼 잘 치던 보성고 출신 심재흥, 항상 옷을 멋있게 입던 문욱연, 그리고 몇 명이 더 있었는데, 그들은 나중에 일찍 군에 입대하고 나의 졸업앨범에 남지를 않아서 이름을 기억할 수가 없다. 그 중의 한 명, 이름은 비록 잊었지만 그 당시 가요 히트곡 최희준의 “이별의 플랫트 홈” 을 좋아했던 친구, 그 노래는 나도 좋아하던 것이라 더 그를 기억한다.
최희준의 이별의 플랫트홈
이윤기, 박창희와 더불어 그 당시 어울리게 된 사람들 중에는 화공과의 중앙고 동창 양건주, 전기과의 강원도 출신 김철수, 중앙고 후배 김태일, 그리고 지방(전라도) 출신의 김진환 등이 있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그룹이 형성이 된 것이었다. 학교가 끝나면 연세대 굴다리 바로 앞에 있던 다과점(빵집)에 둘러 앉아 얘기를 하고 했는데, 그 때의 추억이 참 아름답게 느껴지곤 한다. 어떻게 그런 ‘순진’한 순간들이 있었을까 할 정도로 우리들은 어린이처럼 모이곤 했는데, 재미로 가위, 바위, 보를 해서 그날 돈을 낼 사람을 뽑기도 했다. 이렇게 다양하게 모인 우리 그룹은 다음해에는 완전한 남녀 혼성 클럽으로 발전을 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1967년 1학년 2학기는 공부도 열심히 하고, 좋은 친구들도 사귀게 되고 해서 사실 나에게는 보기 드문 완벽한 학기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호사다마(好事多魔), 꼭 좋은 일에는 악재가 낀다고, 작은 사고 하나로 나는 조금은 우울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강의실에서 어린애들처럼 분필 던지는 놀이를 하다가 내가 앞 이빨을 부러뜨리는 조그만 사고가 났던 것이다. 이것 때문에 치과를 계속 다니게 되었고, 친구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줄어들게 되면서 더욱 학교공부에 전력을 다하게 되었다. 1학년 1학기에 겪었던 학교공부의 어려움을 1년 뒤의 2학기에 완전히 만회를 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나는 다시금 대학생활에 자신감을 되찾기 시작하게 되었고, 학기가 끝나면서 대망의 장학금까지 받게 되었다. (계속)
30년이 넘는 빛나는 역사를 자랑하며 우리를 즐겁게 해 주었고, 집안 가족들에게 진정한 안방극장의 역할을 다 했던 비디오 테이프(‘테입’ 이 더 맞을 듯 한데, 아마도 표준용어는 역시 ‘테이프’ 인 모양), VHS video tape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몇 주 전에 우연히 VHS cassette에 있는 오래 전의 영화를 보려고 하다가 VCR(video cassette recorder, 일본에선 VTR: video tape recorder라고 함) 이 ‘고장’ 난 것을 발견하고, ‘망연자실’을 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갑자기, 이렇게 많이 쌓여있는 ‘옛날’ 비디오 영화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생각하게 되었다.
5년 전쯤에 우리가 찍었던 가족 비디오들은 일단 모조리 computer로 복사를 해 두었지만 돈을 주고 산 영화 비디오들은 너무 많아서 엄두를 못 내고 그대로 두었고, 최악의 경우에 그런 것들은 나중에 DVD로 다시 나올 것이니까, 가족 비디오처럼 중요한 것이 아니라서 잊고 살았던 것이다. 물론 그것은 VCR이 ‘건재’ 하다는 전제하에서의 이야기였는데, 이제는 손쉽게 테이프에 있는 영화 비디오 조차 못 보게 된 것이다. 결론은 분명히: 이번에 무언가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최우선의 과제는, 오랜 동안 모았던 주옥 같은 영화 비디오를 가족이 모일 때, TV로 쉽게 볼 수 있어야 하므로, VCR을 사야 하는 일이고, 다음은 언젠가는 ‘없어지거나, 상태가 나빠져 못 볼’ 이 많은 영화 비디오를 ‘가족 비디오처럼’ computer로 옮겨야 하는 일이었다. 컴퓨터로 일단 digitize가 되면, 수명은 거의 반 영구적이 될 것이고, 여기저기서 computer로 볼 수가 있게 되니까, 조금 지루한 일이지만 효과는 몇 배로 나올 것이다. 그래서 곧바로 VCR 을 사려고 보니까, 요새는 VCR과 DVD player가 함께 붙어서 나오고, 값도 $70 정도여서, 참 세월의 흐름을 느끼게 했다. 그 옛날 VCR이 처음 나올 당시.. 처음에는 천불이 넘었었던 것을 기억하니까.. 이렇게 해서 VHS tape을 computer(digital) movie file (WMV, Vidx/Xvid/AVIformat)로 하나 둘씩 옮기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장난이 아니게 많아서, 언제 끝나게 될지 한심하다. 하지만 정말 오랜만에 다시 보는 영화들을 다시 볼 수 있어서 조금은 덜 지루할지도 모른다. 예를 들면 벌써 Carroll Baker와 Roger Moore의 명화 The Miracle(기적), Tom Hanks의 Apollo 13, Jennifer Jones의 The Song of Bernadette (루르드 성모님 이야기) 등등을 다시 보게 되었다. 이것들의 대부분은 1990년대에 우리 집 식구들이 즐겨 본 것들이라 그 당시의 추억도 함께 떠오른다. 근래에 HD(high definition) TV에 익숙해지고 있는 마당에 VHS의 ‘조잡한’ SD (standard, low) definition을 보니까 어떻게 옛날에 저런 것을 보며 살았나 하는 생각도 들지만, 사실은 그런 ‘조잡’한 맛이 은근한 맛도 있고, 감정적으로도 부드럽고, 따뜻하게 느껴지니, 나도 참 오래 살았나 보다.
10 years with YMCA.. 허.. 언제 이렇게 되었나? YMCA의 gym에서 운동을 한 것이 10년이 넘었다. 우리 가족은 1990년대에 다같이 이곳에서 ‘거의’ 정기적으로 운동, 수영을 했지만, 나는 2011년 9월 이전까지는 아주 가끔 갔었다. family plan으로 멤버가 되면 조금 싼 이유도 있었지만, 정기적 육체적인 운동의 필요성을 누가 모를까, 집에서 비교적 가까운 곳에 연숙이 거의 강제로 가게 만들어 놓은 것이 이제 10년이 훨씬 넘게 된 것이다. 요새는 우리 부부만 일주일에 3일 정도를 목표로 하고 다니는데, 이제는 습관이 되어서 안 가게 되면 더 신경이 쓰일 정도가 되었다. 생각한다. 지난 10년 동안, 이것마저 없었다면 어땠을까? 생애를 통해 지난 10년은 사실 내가 감당하기 힘들었던 십 년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아마도 아마도 이 YMCA는 내가 ‘살아’ 남는데 큰 한 몫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처음에는 주로 아침에 갔고, 그때면 주변에 사는 한인들과도 어울리며 커피나 얘기도 나누기도 했는데, 그때 알던 부부가 거의 연달아서 암으로 세상을 떠나기도 해서 참 가슴이 아프기도 했다. 그때 느낀 것 중에 하나가, 운동을 하고, 겉으로 건장하게 보여도 그것과 ‘수명적인 건강’과는 크게 상관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오랜 옛날 미국에 오기 전에 서울 종로에 있던 종로서적센터 뒤에 있던 그 당시에는 최신식인 health center에 몇 개월 다니면서 ‘빈약한’ 근육을 바꾸려고 노력을 한 적이 있었고, 친구 이경증과 같이 서울 운동장에 있었던 체육관에도 가본 적이 있어서, 이곳에 있는 weight training 은 그다지 생소한 것이 아니었고, bench press에서 나의 체중(145파운드) 무게로 10 reps까지 하게 되었지만, 요새는 근육의 모양새보다는 근육의 목적에 더 신경을 쓴다. 예를 들면 무거운 것을 옮긴다던가 할 때 큰 문제없이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고, 다음은 역시 근육의 빠른 노화를 완화시키는 것인데 사실인 이것이 더 중요할 것이다. 요새는 근육운동보다 걷는 것, bike등으로 하체에 더 신경을 쓰는데, 이유는 간단하다. 더 나이가 들어서 ‘넘어지는 사고‘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YMCA gym에 갈 때마다 그 옛날 나에게 ‘역기운동’의 기초를 가르쳐주던 친구 이경증을 생각하곤 한다.
며칠 후의 일기예보는 드디어 올해 처음 아틀란타 메트로 지역에 빙점(화씨 32도, 섭씨 0도)의 가능성을 예고해서, 본격적인 가을의 중반을 향하는 느낌이다. 2주 뒤에는 크리스마스에 다음의 미국 최대 명절인 Thanksgiving Day (추수감사절)이고, 사실상 그때부터 크리스마스 season이 시작이 된다. 올해는 조금 ‘극단적인’ 기후였는지는 몰라도 단풍을 보니 역시 피곤한 빛이 역력하였다. 빛깔이 그렇게 곱지를 않은 것이다. 동네를 걷다 보면 이 근처에서 제일 빛이 찬란한 나무가 하나 있는데, 나는 그것으로 올해의 단풍의 질을 판단하게 되었다. 역시 작년에 비해서 조금은 초라한데, 색깔자체는 크게 차이가 없지만 잎사귀들이 건강하게 변하지를 않았고 심지어는 한쪽이 대머리처럼 듬성듬성 빠져 보여서 조금은 가엽게 느껴지기도 했다. 자연도 기후의 스트레스를 왜 받지 않았겠는가? 우리 집 앞쪽에 있는 나무들도 역시 색깔들이 바랜 것하고 떨어지는 모양새가 예년에 비해서 아주 비정상적으로 불규칙한 모습들이다. 확실히 ‘심한’ 기후에 의한 피곤한 자연의 표현이다. 이러다가 바람이 부는 을씨년스런 날이라도 오게 되면 아마도 하루 아침에 앙상한 가지만 남게 되지나 않을까? 작년의 폭설을 기억하면서 올해는 과연 어떨지 궁금하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