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카고 택시기사, 서충일 형

서형은 비록 기타를 잘 못쳤지만 포즈는 거의 프로같다, 1976년 시카고
서형은 비록 기타를 잘 못쳤지만 포즈는 거의 프로같다, 1976년 시카고

이것만은 절대로 쓰고 싶었다. 더 미룰 수가 없는 것이다. 더 이상 망각의 세계로 굴러 떨어지기 전에 나는 서형(서충일씨, Choong Suh)과의 추억을 이렇게라도 남겨야 한다. 비록 아주 오래 전, 기간으로 따지면 3년도 안 되고, 그 3년도 여름(방학)이나 겨울(방학)에 잠깐 같이 살았던 정도였지만 그 당시 서로의 나이가 나이인 만큼 아주 길이 남는 추억이 되었다. 본의 아니게 서형께 내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이 글을 통해서 사죄하고 싶기도 하다.

머리 속에서 간신히 견디고 있는 가물거리는 기억 이외에 남아있는 것은 Kodak Instamatic 110 camera로 찍은 색갈이 바랜 서형의 사진 한 장.. 그것이 전부다. 하지만 이 글을 쓰려면 사진 한 장가지고는 어림도 없다. 기억을 그것도 자세히 생각해 내야 한다.

내가 서형을 처음 만난 것이 언제일까? 나는 기억력이 남보다 좋은 편이다. 하지만 서형을 언제 처음 만났는지.. 처음 봤을 때 인상이 어땠는지.. 그것이 기억에 확실치 않은 것이다. 이 사실이 오랫동안 나를 조금 우울하게 만들기도 했다. 물론 대강은 안다. 처음 보게 된 것이 1975년 가을쯤이 아니었을까? 시카고 lake side 쪽의 Broadway에 있는 허름한 working class 벽돌 아파트였나..

Broadway apartment, Chicago
Broadway apartment, Chicago

그 전해, 1974년 말부터 나는 그 당시 시카고 한국일보지사의 기자였던 고려대 출신 임송백 씨와 roommate로 그 Broadway의 한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우리 아파트의 문과 마주보는 방에 서형이 혼자 살고 있었다. 그 당시에 어떤 한국사람이 거기 살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인사를 하거나 만난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우리 아파트에 다른 한국사람, 이기홍(다른 이름은 이창엽씨)이란 분이 잠깐 같이 살았는데 그 분이 서형과 알고 지내기 시작하면서 우리와 인사를 하게 되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1975년 말에 임송백씨의 가족이 한국에서 올 때에 헤어지게 되면서 나는 바로 문 마주편의 서형의 아파트로 옮기게 되었다. 이때의 자세한 과정은 정말 기억이 나지를 않는다.

1976년 초부터 나는 거의 2년간의 시카고 생활을 청산하고 West Virginia Tech으로 학교를 transfer를 하게 되었지만 방학 때마다 서형의 아파트를 나의 고향 집처럼 여기고 돌아오게 되었다. 그러니까 명실상부한 나의 제2의 고향 집이 된 것이다. 1976년 여름, 겨울방학, 1977년 여름, 겨울방학.. 이렇게 4번의 방학을 서형과 같이 지낸 것이고 여기서 말하는 서형과의 추억은 바로 그때에 만들어진 것이다. 1977년 12월부터 나는 완전히 시카고를 떠나서 Columbus, Ohio로 가게 되었고 사실 서형과는 그때 완전히 헤어지게 된다.

서형은 나보다 나이가 한두 살 위지만 나에게 깎듯이 존댓말을 썼다. 비록 그것이 조금은 거리감을 느끼게도 했지만 나는 그런 깔끔한 성격이 좋았다. 한마디로 예의가 있는 사람인 것이다. 키는 나와 거의 비슷했지만, 겉으로 잘 안 보이는 팔 다리의 근육이 대단해서 무슨 물건을 만져도 그 힘이 대단했다. 가끔 무거운 것을 옮기거나 할 때는 나를 막내 동생처럼 생각하듯 자기가 다 힘을 쓰곤 했다. 자랄 때, 부산에서 잔뼈가 굵었다고 누누이 들었고, 필라델피아에 친형님 가족이 사신다고 했는데 형수님과 별로 잘 맞지를 않아서 무작정 시카고로 왔다고 했다. 한번도 대학 때의 이야기를 듣지를 못했지만 영어를 기기 막히게 잘했다. 그것은 절대로 엉터리 broken English가 아니고, 문법이 정확한 good English였다. 그 젊은 나이에 걸맞지 않는 묘하게 생긴 truck을 타고 다녔고, 정식 job은 개인 taxi driver였다. 그러니까 택시기사인 것이다. 운전을 하면서 생기는 이야기를 가끔 얻어듣곤 했는데, 서형은 아주 모범적이고, 정직한, customer를 첫째로, 절대로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택시비가 모자라거나, 위급한 상황에서 손님을 먼저 생각해서 도와주고, 나중에 고맙다는 인사를 받는 것을 보고 참 나의 마음도 흐뭇해지곤 했다.

1976년 시카고에서 산 악보 책,가요반세기. 지금은 고서가 되었다.
1976년 시카고에서 산 악보 책,가요반세기. 지금은 고서가 되었다.

내가 방학 때마다 와서 지냈으므로 나야 낮에 시간이 많았지만 서형은 주로 밤에 택시를 몰고 낮에는 자는 편이라 어울린 시간이 생각보다 많지를 않았다. 하지만 그 비교적 짧은 시간을 같이 보낸 추억이 참 아름답게 느껴지곤 했다. 비록 자란 환경은 전혀 달랐지만 비슷한 나이가 서로 같이 있는 것 자체가 즐거움이었다. 식사도 같이 하고, 특히 노래의 취향이 많이 비슷해서 참 많이도 노래를 부르며 시간을 즐겼다. 서형은 부산에서 어렸을 때 많이 본 영화들에 대한 추억이 많았다. 특히50년대 최고스타 최무룡이 부른 영화주제곡 <외 나무 다리>와 <꿈은 사라지고>, 왕년의 액션스타 황해 주연의 영화주제곡, <한 많은 청춘>, 그리고 참 구성지게 들리던 <삼팔선의 봄> 등등 그때 내가 배운 노래들이다. 그 당시 시카고에서 새로 산 <가요반세기> 라는 세광출판사 에서 나온 노래책에 나오는 옛 노래를 서로 앉기만 하면 같이 부르곤 했다. 그 책은 기적적으로 아직까지 살아 남아서 나의 고서(古書)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원래 이런 트로트 풍의 노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잘 몰랐지만 그때 서형과 같이 부르면서 많이 생각이 바뀌게 되었다. 특히 둘 다 고향을 떠난 신세가 같아서 더욱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그때의 추억에는 이것 이외에 사실은 조금 더 심각하고 로맨틱 한 것도 있었다. 20대의 팔팔한 나이였고 둘 다 “침을 질질 흘리는” 총각들이어서 여자에 관한 추억이 없을 리가 없다. 서형과 조금 알고 지내는 간호사 아가씨가 있었다. 불행하게도 그 아가씨의 이름을 잊어 버렸다. 서형과 그 아가씨는 로맨틱한 관계가 아니고 돈 관계로 조금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서형이 그 답지 않게 그 아가씨와 사귀어 보라고 해서 집에 데리고 왔다. 나는 사실 조금 당황을 한 것도 사실이지만 그런대로 셋이서 잘 어울리며 놀았다. 그 후부터 그 아가씨는 우리 퀴퀴한 총각냄새가 진동하는 아파트에 와서 청소도 해주고 음식도 같이 해 먹고, 노래도 부르고 참 건전하게 놀다 가곤 했는데, 문제는 아주 곤란하게도 그 아가씨는 조금 심각한 사귐을 전제로 한 듯하고 나는 그저 젊은이들의 사귐으로 생각을 한 것이다.

 

 

삼팔선의 봄

그 당시 나는 서형으로 부터 오래된 가요곡을 많이 배웠다. 그리고 같이 부르기도 했는데, 그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곡이 바로 이 “삼팔선의 봄”이었다. 다행히 가요악보에 있는 곡이라 그 뒤에도 계속 나의 애창곡이 되었다.

 

가요 삼팔선의 봄, 악보
가요 삼팔선의 봄, 악보

그 아가씨는 아주 활달한 성격이었고 한국에서 학교에서 근무도 한 사회경험이 있는, 우리보다 훨씬 성숙한 사람이어서 어떨 때는 우리가 어리게 느껴질 정도였다. 아주 당당하게 희망하는 배우자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그런 행동에 나는 사실 상당히 부담을 느낀 것은 사실이다. 그렇게 나는 그녀보다 덜 성숙한 편이었다. 그녀는 간호사 출신이지만 그 당시는 시카고 오헤어 국제공항 바로 옆에 있는 Bensonville이란 곳의 어떤 nursing home(양로원)에서 근무를 하고 있었고, 어떤 미국 여자의 양녀가 되어서 그 집에서 살고 있었다. 그렇게 셋이서 어울리긴 했지만 서로 생각이 너무나 달라서 곧 좋지 않은 관계로 발전을 하고, 친구관계까지도 금이 가고 말았다. 나는 그러한 미묘한 남녀관계를 멋있게 끌고 나가기에 너무도 미숙했다. 결과적으로 그녀는 자존심에 큰 상처를 받은 듯하고.. 중간에 다리를 놓은 서형도 나에게 아주 실망을 한 듯했다.

그 당시 서형에게 비밀의 취미가 있었다. 그것은 조금은 중독성의 경마로 하는 도박이었다. 그 당시는 그렇게 심각하게까지 생각지 않았지만 지금 생각하니 거의 중독이 된 상태임을 안다. 그러니까 돈을 벌어서 곧 경마장으로 가서 돈을 잃곤 한 것이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나보고 한번도 경마장엘 가자고 안 했던 사실이었다. 물론 학생이었던 나에게 돈이 많을 리가 없다는 것을 알아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나는 그 형의 성격으로 보아서, 경마하는 것을 그렇게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아서 그랬을 것이라 짐작을 한다. 위에 말한 아가씨도 사실은 경마를 하기 위해서 돈을 빌린 것으로 시작이 되었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빚을 졌는지는 모르지만 상당한 액수로 짐작이 되었다.

방학이 끝나고 나는 시카고를 떠나서 잘 몰랐지만 그 후에 사실은 서형과 그 아가씨는 서로 깊이 사귀게 되었고 결국은 동거를 하게 되었다. 1977년 말 시카고를 완전히 떠날 무렵 새로 신혼의 보금자리가 된 아파트에 들려서 작별 인사를 했는데.. 그 아가씨는 아직도 그때 받은 자존심의 상처를 되뇌는 듯해서 사실 나와 서형의 관계도 끝이 난 것이나 다름이 없이 느껴져서 한편으로 참 슬프기도 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나..하는 심정뿐이었다. 나의 희망에는 그 아가씨가 조금 더 관용이 있었으면 서로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도 있었는데 하는 것이었다. 그 중간에 있었던 서형은 사실 그 아가씨보다 더 힘들었을 지도 모른다. 그 후에 예상대로 연락이 완전히 끊어졌다. 나도 잊으며 나의 인생을 살게 되었지만 정말 가끔 그 때를 생각한다. 괴롭던 때도 많았지만 그보다는 소중하게 기억하고 싶은 그런 것도 참 많았던 시절이었다.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몇 명의 자녀를 두었을까? 어디에 살고 있을까.. 서형.. 서충일 형!

 

1970년 4월 13일

On April 13, 1970, Apollo 13, four-fifths of the way to the moon, was crippled when a tank containing liquid oxygen burst. (The astronauts managed to return safely.) — today’s New York Times

오늘 뉴욕타임스 이메일 뉴스를 잠깐 보니 위의 ‘오늘의 역사’ 구절이 눈에 띄였다. 1970년 오늘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그 유명한 Apollo 13이 아닌가? 그 중에서도 13이란 숫자가 두 번이나 반복된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당시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하고 생각하는 나를 보게 된다..

어찌 잊으랴.. 뚜렷이 기억을 한다. 나는 그 당시 top news였던 아폴로 13호 폭발사고를 전혀 몰랐던 것을 기억한다. 왜 그랬을까? 그 당시 그 뉴스의 심각성을 아직도 피부로 느끼지 못한 것은 간단히 말해서 그 뉴스를 듣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1970년이면 지금에 비하면 거의 ‘원시적’인 뉴스 매체, 그러니까 신문, 라디오, 흑백 TV가 전부였던 시절이지만 그것을 못 듣고, 보고 하는 것은 특히 그 나이 (20을 갓 넘은)에 힘들었을 것이다.

1970년 4월, 지리산 정상 천왕봉에서 운해를 내려다보며..
1970년 4월, 지리산 정상 천왕봉에서 운해를 내려다보며..

사실, 그 당시 나는 죽마고우 친구들과 함께 지리산 깊은 산중에 있었다. 그렇게 이유는 간단했다. 그 해 초에 아주 오랜만에 재회를 한 원서동 죽마고우, 손용현과, 다른 원서동 친구, 박창희.. 그리고 나 셋은 아직도 눈이 쌓였던 지리산 능선 종주등반 중이었다. 라디오를 가지고 갔지만 뉴스 같은 것을 들을 정도로 편한 등산이 절대로 아니었다. 예상을 뒤엎고, 지리산 주 능선에는 아주 깊은 눈이 그대로 쌓여있어서 걷는 자체가 힘이 들고 시간이 걸렸다. 화엄사에서 출발을 해서 노고단을 거쳐서 계속 천왕봉을 향해서 능선을 따라 걷고 걸었다. 그때 처음 주능선 등반의 매력을 깊이 느끼게 되었다. 그 유명한 지리산의 운해(雲海)란 것을 눈(雪)과 함께 즐긴 것이다. 그때 생각나는 곳들, 노고단, 토끼봉, 지보등, 세석평전.. 천왕봉에서는 다른 코스로 남원쪽으로 하산을 하였다. 그때만 해도 지리산 등반은 그렇게 흔치 않았던 것인지, 하산을 하니까 경찰에서 나와서 입산 기록부에 우리의 이름을 적기도 했다.

거의 일주일 만에 ‘속세’에 나와보니 참 기분이 달랐다. 그때 처음으로 ‘세상을 떠난’ 경험을 한 것이다. 그 당시 나이에 일주일 동안 세상 돌아가는 것과 차단이 된다는 것은 참 힘든 일이었으니까. 일주일 동안의 뉴스 중에 아폴로 13호에 큰 사고가 난 것과, 서울의 ‘와우 아파트’가 붕괴된 것들이 있었다. 사실 와우 아파트 사고가 우리에겐 더 큰 뉴스였다. 그때 서울 시장이 김현옥씨였는데 그 사고를 계기로 ‘불도저’ 스타일의 밀어 부치는 행정에 브레이크가 걸리기도 했다. 그 것이 1970년 4월 이맘때 쯤이다. 조금 후회가 되는 것이 있다면, 지리산 등반은 나와 박창희가 연세대 전기과 4학년 졸업여행(제주도)을 빼먹고 갔다는 사실이었다. 그 당시는 전혀 미안한 마음이 없었지만 세월이 지나고 보니 그것이 아니었다. 졸업여행이 사실은 더 중요한 것이었다. 지리산 등산이야 그 후에 갈 수도 있었던 것이었지만 졸업여행은 그야말로 딱 한번의 기회가 아니었던가? 이런 후회될 만한 일들이 그 후에도 계속이 되었지만, 어찌하랴.. 그때는 절대로 후회란 것을 생각도 못하던 젊은 시절이었으니 말이지..

그 당시를 회상하면 꼭 생각나는 것이 하나가 있는데.. 지리산의 고요 속에서 일주일을 보내고 다시 시끄러운 고향 서울로 돌아와서 위의 등산친구 셋이 어느 다방에서 다시 모이게 되었다. 그때 우리의 아지트는 중앙극장의 길과 퇴계로가 만나는 곳에 있는 지하다방(절대로 이름을 잊었다) 이었는데, 손용현이 먼저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웃기는 것은 얼굴이 전혀 안 보이고 하얀 셔츠의 상체만 보였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무슨 ‘투명인간’ 영화의 그런 모습이었다. 이유는 용현이가 원래 얼굴이 조금 거무틱틱한 편인데, 이번에 지리산 종주등반을 할 때 쌓인 눈 때문에 완전히 타버리고, 그 당시 지하다방들이 대부분 어두워서 그렇게 보였던 것이다. 박창희가 나중에 와서 똑같이 그것을 보고 한참을 웃었고, 두고두고 그것이 우리의 ‘일화’로 남게 되었다. 그 당시 다방에서는 손용현이 제일 좋아하고, 우리도 열광을 하던 CCR (Creedence Clearwater Revival)의 Who’ll Stop the Rain이 우렁차게 나오고 있었다.

 

Who’ll Stop the RainCreedence Clearwater Revival

 

봄이 오면 산에 들에..

드디어..아틀란타에도 봄이..
드디어..아틀란타에도 봄이..

다시 싸늘해진 아틀란타의 3월 말: 일 주일을 넘게 거의 초여름의 맛을 미리 보여주던 날씨가 역시 ‘평균치’를 유지하려는 듯 급강하하여 오늘 아침은 거의 빙점까지 떨어지는 추위가 되었다. 아래층은 결국 central heating이 요란하게 나오고 있었다. 다행히 맑은 날씨에 바람이 없어서 느낌은 역시 봄이다.

오래 전에 고국에서 느끼던 3월의 날씨도 사실 이와 비슷했다. 그래서 이곳 아틀란타는 많은 것이 서울의 그것을 연상시킨다. 뚜렷한 4계절, 지형, 나무, 꽃들의 종류 등등이 그렇다. 다만 연 평균기온이 조금 높다는 것인데.. 사실 서울의 평균기온도 그 동안 (30년) 조금은 올랐을 것 같아서 결국은 비슷하지 않을까? 3월 초부터 Bradford pear, 개나리, 진달래, 수선화 등이 이미 다 피고 졌다. 지금은 벗 꽃이 조금씩 선을 보이기 시작한다. 옛날 서울에서 창경원의 벗 꽃놀이가 4월 초에 있었으니까.. 이것도 시기적으로 비슷하구나. 다만 조금 다른 것은 이 아틀란타지역에 너무나 많은 소나무들.. 이것 때문에 이곳의 봄은 꽃가루가 지독하다. 특히 바람이 잘 불지 않으면 완전한 비상사태가 된다. 나는 다행히 꽃가루 앨러지가 별로 없지만 많은 사람들이 거의 한달 동안 고생을 해야 한다. 그것이 5월 중순까지 계속 된다.

하지만 4월과 5월은 역시 찬란한 계절.. 비가 조금씩 오기만 하면 너무나 정서적인, 시적인 계절.. 전 이대음대 교수 김순애씨의 ‘4월의 노래’를 연상시키는 아름다운 추억이 계절이 된다. 언젠가 부터 나는 4월과 5월을 은근히 기다리게 되었다. 특히 최근에 레지오 마리애의 단원이 되어서 그런지.. 특히 성모성월, 어린이 날 (일본의 5월5일 어린이날을 그대로?) 어머니 날(후에 어버이날로 바뀐 것.. 참 마음에 들지 않음) 의 5월 달이 더욱 기다려진다. 그 중에서, 특히 5월 1일은 ‘friends forever’를 생각하게 하는, First of May.. 물론 이것은 The Bee Gees의 1960년대 pop song에 불과하지만 나와 나의 몇 친구들에게는 거의 암호와도 같은 추억의 노래가 되었다. 그래서 5월은 더욱 나에게는 빛나는 달이 되어간다.

 

First of May – Bee Gees, 1969 

이 Bee Gees의 classic을 처음 들었을 때는 가사보다는 감미롭고 신비스럽게까지 느껴진 melody에 매료가 되었었다. 그런 나이였다. 하지만 그 후 그 가사를 음미하면서 이제는 가사에 깊이 빠져든다. 가사와 곡이 어쩌면 그렇게도 멋지게 조화를 이룰까.. 이런 것이 진정한 classic이 아닐까.. 이 곡 뒤에 항상 보이는 흩어져 인생을 살아온 친구들을 생각한다. 그래서 5월1일은 Friends Forever의 날이 되어간다.

4월의 노래 – 박목월 시, 김순애 작곡 

서울 중앙고 1학년 때(1963년) 담임 김대붕 선생님께서 좋아하시는 곡이라며 가르쳐 주신 또 다른 불후의 명곡.. 어찌 잊으랴. 4월이 되면 어찌나 이 곡을 배울 때가 그립던지.. 또한 타계하신 김대붕 선생님도 함께 그때의 행복하고, 순진 하던 시절의 찬란했던 4월의 봄 동산을 그린다.

 

 

toward 100th, dismal frozen days, Persian friends

나의 serony.com published blog count가 이번으로 94번째가 된다. 그러니까 100번째가 아주 멀지 않았다. 그래서 생각에 올해가 가기 전에 100회라는 milestone을, 조금은 우습지만, 만들어 볼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쓰고 싶고,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은 최소한 머릿속에는 무궁무진하게 느껴진다. 그것들을 어떻게 ‘한글’로 표현을 하는가 하는 것이 문제로다. 그렇게 아름답게 느껴지던 ‘한글 형용사‘들이 다 어디로 도망을 갔단 말인가? 참 슬프다. 한글도 잘 못하고, 영어도 잘 못하고.. 이것이 진정 30년 넘게 만들어진 나의 bilingual culture 라면 참 나도 나에게 실망을 금할 수가 없다.

약 1년 반전에 시작한 이 ‘초라한’ 나의 public diary는 사실 나의 앞으로 살 수 있는 날이 이미 살아온 날들보다 훨씬 짧을 것이라는 ‘놀라움’에서 시작이 되었다. 사실은 더 급하게 느껴졌다. 이제는 이러한 digital records의 수명은 원칙적으로 거의 무한에 가깝다. 일부러 없애지 않는 한 남아있을 것이다. 또한 누가 보건 간에 (희망에는, 나를 태고 적부터 이미 알았던 사람들) 나의 진실된 생각을 알리고, 남기고 싶었다. 그것이 시작의 모든 것이었고, 하느님의 도움으로 아직도 계속이 되어서 자그마한 100회를 바라보게 된 것이다. 그 다음은 200회가 될 것인가, 아니면 500, 혹은 1000.. 그저 겸손한 희망일 뿐이다.

올해의 연말 휴일은 한마디로 ‘죽을 쑨’ 격이 되고 말았다. 하나도 ‘성공’한 것이 없다. 하나도 앞뒤가 맞지를 않았다. 제일 중요한 천주교회 미사란 미사는 모조리 빠진 결과가 되었고, 반갑지 않은 ‘세속적’인 모임에서 쓸데없이 ‘세속적’인 마음의 상처만 입고, 가장 가까워야 할 사랑하는 식구들에게 마음의 상처를 입히고.. 이보다 더 망친 휴일이 이제까지 있었을까.. 암만 생각해도 이런 적은 없었을 것이다. 유일하게 나를 위로한 것이 있다면 강추위를 동반한 하얀 눈뿐일 것이다. 문제는 이미 다 엎질러진 물이 되었다는 것이다. 잘 못한 것은 인정을 하고 앞으로 반복을 하지 않는 수 밖에 없다는 것도 잘 안다. 하지만 이 나이에 이렇게 ‘잘못’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문제인 것이다.

 

아주 우연히도 “‘이란’에서 한국의 TV 사극드라마대장금‘이 인기”였었다는 기사를 보게 되었다. 문제는 그때가 또 이미 몇 년 전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결과적으로 나는 ‘옛날과 그 옛날’의 것을 본 것이다.

with Persian friends, West Virginia 1977
with Persian friends, West Virginia 1977

내가 요새 사는 것이 이런 식이다. 무언가 새로 알았다고 한 것은 대부분 최소한 몇 년 전의 것이었다. 이것도 archived googling 때문일까? 이제 이런 digital contents들은 여간 해서는 저절로 없어지지 않는다. 이것은 분명히 의도와 다른 결과를 초래할 여지가 다분히 있다. 한마디로 Internet에 무언가 ‘남기면’, 거의 영원히 남을 수 있다는 것이다. 조금은 생각해 봐야 할 현상이다.

왜 이란과 대장금을 연관하게 되었을까.. 오래 전 1970년대에 West Virginia에서 학교(West Virginia Tech)를 다닐 때 나는 유난히도 많은 Persian(Iranian student를 그때는 그렇게 불렀다)들을 알게 되었고 어울렸었다. 물론 그때는 Shah (of Iran)가 이란을 통치할 당시였다. 호메이니의 이란 혁명의 바로 전이었다. 그래서 그 Persian들은 연일 학교근처 도시(Charleston, West Virginia)로 몰려가서 데모를 하곤 했다. 그 당시 내가 알고 지내던 가까운 친구들은 공부벌레들이 많았다.

대장금과 관련된 기사에서 그들을 잘 묘사하고 있는데, 대부분 나의 경험과 일치한다. 종족적으로 유럽과 아시아 중간이라 그런지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다들 handsome, attractive한 모습이고, 아주 다정다감하였다. Shah의 친미정책으로 그 들도 미국,유럽문화에 상당히 빠진 상태였다. 아마도 그것이 호메이니의 이란혁명으로 완전히 제지를 당한 듯 하다. 짧은 시간 (1년 반정도) 였지만 그들과의 우정은 아직도 잊지를 못한다. 졸업 후 다 연락이 끊어지고 했는데 이번 기회에 다시 사진을 꺼내 보면서 그들을 생각한다. 비록 정치적으로 이란이 곤경을 겪고 있지만 국민성은 그것과 많은 차이가 있음을 나는 안다. 그런 사람들이 우리의 사극 대장금을 보았다니 참 믿어지지 않는 즐거운 소식이 아닐까?

 

Catholic Sunday

Advent 2010 (2010년 대림절)…  오늘은 천주교 달력으로 새해가 되고 예수님 탄생인 12월 25일 성탄절까지의 대림절이 시작되는 첫 날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시기인 것이다. 개신교회에도 이러한 시기에 대한 이름이 따로 있는지 궁금하다. 기억에 들어본 적이 없다.예수님 활동 당시 12 사도들의 시대로부터 계속 이어져온 이 Roman Catholic, 천주교의 다양하고 복잡한 역사, 전통들은 알면 알수록 , 더 알고 싶은 것 투성이다. 이날부터 제대 옆에는 대림을 상징하는 4개의 촛불이 세워지고 한 주일마다 초가 하나씩 켜진다. 이것도 천주교의 특징인 ‘상징’적인 의식일 것이다.

2010 대림절 시작, 본당 주보에서
2010 대림절 시작, 본당 주보에서

우리는 주일미사를 집 근처에 있는 미국인 본당, Holy Family Catholic Church에서 본다. 이곳도 거의 10년 넘게 다녀서 정이 들었다. 아침 8시 반의 미사에 가면 거의 앉는 자리가 정해질 정도로 익숙한 신자들이 많다. 혹시나 낯익은 얼굴이 안 보이면 신경이 쓰인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제는 사실 주임신부님 보다는 부제님 중에 있다. Deacon John이라고 불리는 부제님, full name은 Deacon John Duffield인데 건장한 체구에 단정한 흰머리, 항상 진실된 웃음을 띈, 순진하게도 보이는 얼굴, 그 보다 제일 인상적인 것은 그 ‘경건’한 태도이다. 주임신부님보다 더 경건하게 미사를 돕는다. 이분이 부제가 된 것도 5년 정도 되어간다. 나이도 나와 같고 직업은 사실 nuclear engineer, U.S. navy officer로 nuclear submarine (핵 잠수함)이 전공이다. 그가 이렇게 공학도라는 사실이 나를 참 기쁘게 한다. 가끔 하는 설교도 어찌나 그렇게 틀에 박히지 않았는지.. 진실로 하느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그분의 모든 말과 행동에서 우러나오는 그런 것들.. 흔치 않은 일이다. 사실 속으로 나도 여생을 그분과 같이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내일은 이 미국본당에서 penance service(판공성사)가 있는 날이다. 해가 가기 전에 이렇게 한번 하고 부활절 전에 또 있다. 쉽게 말해서 천주교 특유의 ‘고백(고해)성사’인 것이다. 이것의 중요성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지만 그만큼 이 성사를 지키는 것 또한 쉽지 않다. 이것을 하려면 정말 심각하게 자기를 되돌아 보는 ‘양심성찰’을 해야 하니까. 자기의 죄를 찾아 내는 것은 말처럼 간단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거의 2년간 이 성사를 못 보고 있고, 이것이 항상 나를 찜찜하게 한다. 사실 이것을 하려면 ‘기도’가 필요한 것이다. 영어로 하는 고백성사는 아무래도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하니까..

 

I Understand, by G-Clefs…  며칠 전부터 정말 이상하게도 oldies중의 I Understand란 곡이 자꾸만 생각이 났다.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아마도 이런 발전이 아닐까.. 년 말이 되어가고, 그러면 분명히 Auld Lang Sine이 불릴 것이다. 그 곡이 background 로 흘러나오는 곡이 바로 G-Clefs가 불렀던 60년대 초의 hit, I Understand (just how you feel) 인 것이다. 그 당시 우리는 이 곡을 부른 group G-Clefs에 대해서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그 이후도 마찬가지.. 이번에 알고 보니 이들은 내가 잘 못 추측한 대로 영국계통의 그룹이 전혀 아니고, 미국의 ‘흑인’그룹이었다. 사실, 적지 않게 놀란 것이 사실이다. 이렇게 잘못된 사실을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조금 부끄럽기까지 하였다.

이 곡은 미국에서 1961년에 나온 것이지만 우리 때는 거의 1964년경에 많이 알려진 곡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중앙고2 때였다. 년 말에 많이 불렸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확실한 것은 고2때가 끝날 무렵, 그러니까 역시 1964년이 저물 무렵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학급회의, 그러니까 home room이라고 불렀던 그 시간에 모두들 앞에 나가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을 했다. 분위기는 완전히 고2때 특유의 감상에 젖은 그런 분위기.. 고3이 되기 전 무슨 전쟁이라도 나가는 듯한 심정으로 이별을 서러워하는 기분에 모두들 휩싸인 것이다. 바로 그때다.. 제일 키가 컷 던 김용만이 G-ClefsI Understand를 부르기 시작했다. 나는 그 광경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렇다.. 이별을 서러워하던 순진했던 가슴들의 표현이었다. 그 당시 고교2학년은 정말 모두들 문학소년,소녀들이었다. 지독히도 순진하고, 이상적이었던 그 일년.. 그때에 생각하고 꿈을 꾸었던 장차 다가올 인생들.. 과연 어떠한 인생들이었을까? 얼마나 많은 기쁨, 행복, 괴로움, 후회를 만들며 살았을까? 갑자기 지독한 감상에 젖는다.

 

I Understand by G-Clefs, 1961

I understand just how you feel

Your love for me, why not be mine?

It’s over now but it was grand

I understand, I understand

If you ever change your mind

Come back to me and you will find

Me waiting there, at your command

I understand, I understand

I miss you so, please believe me when I tell you

I just can’t stand to see you go

You know

If you ever change your mind

Come back to me and you will find

Me waiting there at your command

I understand, I understand

SPOKEN: “I understand just how you feel. Let bygones be bygones. But always

remember I love

you, I love you, I love you.”

(We’ll sip a cup of wine, my dear, for Auld Lang Syne )

I understand

Thanksgiving Day eve

비가 오락가락하고 포근한 깊은 가을.. Thanksgiving Day가 내일로 다가왔다. 작년 이맘때도 지금처럼 아주 포근한 날이었다. 우리의 조촐한 가족만이 모였던 휴일이었고 모두 조금씩 요리를 하는 것을 거들었던 기억이다. 그때는 새로니가 Washington DC에서 일을 할 때여서 급하게 왔다가 급하게 떠났는데 올해는 다시 학생이 되어서 거리와 시간 모두 여유를 가지고 집으로 왔다. 하지만 대신 작은 딸 나라니가 처음으로 밖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첫 해가 되었다. 올해 4월에 따로 나가서 살게 되었기 때문이다. 가끔 집에 오곤 하지만 이제는 완전히 ‘독립’적인 개인으로 살고 있는데 그런 사실을 본인도 즐기는 듯 하다.

올해의 Thanksgiving Day는 오랜만에 guest와 같이 보내게 되었다. 새로니의 Emory friend인 Galina가 뉴욕에서 현재 공부를 하고 있는데, 이번에 우리 집에 놀러 온 것이다. 식사만 같이 하는 것이 아니고 며칠 동안 우리 집에 머물게 되어서 조금은 신경이 쓰이지만 예년과 조금 다른 휴일이 되어서 흥미롭다. 애들이 어렸을 적에는 이런 때면 한방에 모여서 재미있는 movie같은 것을 보는 것이 즐거움이었는데 이제는 그런 시절이 거의 먼 추억으로 남게 되었다. 사실 이것이 자연스러운 인생이 아니겠는가.

아주 오래 전부터 우리 집은 이곳의 전통인 turkey요리를 해 왔다. 아마도 그때가 1980년대 초, 그러니까 우리가 Columbus, Ohio에서 살 때였을 것이다. 연숙이 그곳 성당의 원로로 계시던 이봉모 선생님(지금은 고인이 되셨음)의 부인으로부터 recipe를 받아서 첫 turkey 요리를 했던 때가 그때쯤이었고 그 이후로 거의 한해도 빠짐없이 turkey 요리를 했다. 그래서 이제는 추석이나 설날의 한식 전통요리보다 이 turkey 요리에 대한 추억과 애착 같은 것도 생기게 되었다. 가끔 한국 손님들이 참석을 하면 별로 그 맛을 느끼지 못하는 것을 본다. 특히 김치를 꼭 같이 찾는 사람들도 있어서 조금 당황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김치와 먹어도 사실 맛이 있었다)내가 개인적으로 turkey 요리를 제일 맛있게 먹었던 기억은 사실 결혼 훨씬 전의 일이었다. 1974년 가을의 Thanksgiving Day였나.. 그 당시 알고 지내던 서울사범대 지학과 출신 성성모씨가 Indiana주 Purdue University에 다닐 당시, 그곳에 놀러 갔는데 , 같은 대학의 한국인 유학생 부부의 집에 초대되어 가서 turkey 요리를 푸짐하게 대접을 받았다. 특히 여러 가지 side dish들이 굉장했는데 그 유학생 부인은 어떻게 그렇게 많은 미국요리를 배웠는지 모두들 혀를 찰 정도였다. 처음 먹어본 것이라 그런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요리가 잘 되었는지.. 아마도 둘 다였을 것이다.

ANY CHARACTER HERE

요새 며칠 사이 내린 비로 그나마 남아서 안간힘을 쓰며 가을을 지키던 아름답던 황금색 나뭇잎들이 무더기로 떨어져 글자 그대로 “낙엽의 장관”을 이루었다. 특히 우리 집 차고로 들어오는 길은 길이 하나도 안 보일 정도로 낙엽으로 덥혔다. 이들은 해가 다시 나오면 완전히 마르면서 바람에 휘날려 다 없어질 것이다. 그러면 완전한 겨울로 향하는 12월의 입구.. 예수님을 기다리는 대림절의 시작이다. 천주교 달력에서는 이날이 새해의 시작이 된다. 11월 28일이다.

낙엽, 낙엽, 낙엽...

낙엽, 낙엽, 낙엽…

12월로 들어설 즈음이면 가끔 그리운 곡이 생각난다. 1960년대 말, 대학시절.. 멋진 가사에 매료되어 guitar로 따라 부르곤 하던 Duo Simon & Garfunkel의 rock version “I am a rock”이 그것이다. 그 대학시절, 가끔 지독한 고독 같은 것을 느끼곤 하면 이 노래를 자장가 삼아 들었다. 이 가사의 주인공이 내가 된 듯한 기분으로..특히 친구 유지호와 같이 부르던 것도 즐거운,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는다. 별명 “우중충” 유지호..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까..

 

I am a rock – Simon & Garfunkel

 

천안함 도발사건 이후 다시 이번에는 연평도 포격.. 정말 끝이 없다. 김정일이 “개XX”는 그 괴상하게 생긴 머리”통” 속이 어떻게 생겼는지 나중에 해부를 해서 히틀러와 비교해 볼 만하다. 촌스러운 북쪽 사투리로 “영쩜 영 미리메타라도 조국을 침범하는 원쑤들이..” 어쩌구, 저쩌구.. 하는 북괴왕조의 방송을 들으면 이런 Shakespeare 희극이 역사상 더 있었으랴..하는 생각도 든다. 이런 것들과 버금가게 웃기고 한심한 친구들이 바로 대한민국에도 “수두룩 닥상” 으로 많이 있다. 그 중에서도 금메달 깜은 소위 말하는 “친북 기독교 단체” 들이다. 이 사람들 과연 머리 속이 어떻게 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미국의 이간을 배격하고 예수님의 사랑으로 “동족 형제”인 김정일을 사랑하라“고.. 허..여보세요.. 정신 좀 차리십시오.

이경증, 이도영, 배경상..

서울근교 등산차 모인 이도영, 이경증, 이경우 1972년경
1972년경 이도영,이경증,이경우가 서울근교 등산 차 모였다. 묘한 자세들이 웃긴다.

배경상, 이도영, 이경증.. 나에게는 서울 창신동 삼총사..라는 인상이 깊이 깊이 뇌리에 남아있다. 동대문 옆에 있는 산동네.. 창신동. 나는 물론 그곳의 근처에서도 살아 본 적이 없었다. 서울운동장에 갈 때 동대문 옆으로 보이는 산동네..정도로만 알고 있었던 곳이다. 그 곳이 내가 알던 이 삼총사가 자라던 곳이었다.

이중에 이도영, 배경상은 모두 이대부고(이화여자대학교 부속 고등학교) 동창이기도 했다. 이경증은 나와 같이 서울 중앙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녔다. 경증이는 고2때 담임 박영세 선생과의 trouble로 학교를 떠나게 되어서 검정고시를 보고 연세대 지질학과에 입학, 졸업을 했다. 그러니까, 경증이는 고등학교 2학년 때 헤어지고 연세대학교 졸업 무렵 쯤에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나는 대학교를 군대에 가지 않고 계속 다녔지만 경증이는 연세대에 입학한 후에 곧 바로 입대를 했는데, 거기에 멈추지 않고 월남전에 자원을 했고 그곳에서 맹호부대의 일원으로 케산전투 같은 곳에서 싸웠던 ‘용감한’ 친구였다. 나는 경증이의 이런 ‘인상과 어울리지 않는’ ‘의외의 삶’을 참 좋아했다.

다시 만났을 당시 우리들은 상당히 다른 길을 걸어오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자라온 동네가 서로 아주 다르고 거기에 따른 친구들의 배경이 완전히 달랐다. 한 마디로 그의 동네친구들은 내가 전혀 모르고 경증이도 나의 친구를 모르는 것이다. 그 중간에 중앙중, 고교의 친구들이 서로 다리를 놓는 역할을 했다. 특히 동창 김호룡, 우진규 같은 친구들은 경증이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중간에는 역시 내가 있었다. 그런 이유로, 처음 다시 만났을 때 조금은 서먹서먹한 감정이 조금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감정은 역시 오래가지 못했다. 그게 진정한 ‘어리고 순진한 우정’이 아니었을까.

그 때부터 나는 경증이의 ‘동네친구’들과 어울리게 되었다. 어울리면서 우선 놀란 것이 그 많은 창신동 친구들의 숫자였다. 그 중에는 그때 한창 인기절정의 통기타 가수 이장희도 그 중의 한 명이라고 들었다. 어찌 그렇게나 많을까. 나는 어렸을 때부터 이사를 자주 다녀서 오래된 동네친구가 많지 않았지만 경증이는 아마도 그 창신동의 토박이여서 그렇게 친구가 많았던 모양이었다. 그 중에서 처음 사귀게 된 사람들이 바로 이도영, 배경상이었다. 어떻게 같은 이대부고를 다니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지만 남녀공학을 다닌 흔적이 여기저기 보였다. 진한 농담으로 이도영은 이대부고 다닐 당시 여학생의 옆에 가면 냄새로 지금 period 인가를 알 수 있다고 해서 모두들 게면 적게 웃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자연스레 여자들을 대할 수가 없었다.

이도영은 이미 어떤 재수하는 어떤 귀여운 여자와 동거 중이었고, 배경상은 그 보다 더 야심이 커서 ‘돈 있는’ 여자를 만나는 꿈을 꾸고 있었다. 그래서 나이에 걸 맞지 않게 최고급 까만 정장 양복을 입고 다녔다. 키도 커서 멀리서 보면 무슨 영화배우 처럼 보이기도 했다. 거기에 비하면 경증이는 사실 여자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었다. 나는 그의 그런 초연한 태도가 그렇게 신선하고 멋있게 보일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나이에 맞지 않게 점잖다고나 할까. 또 한 명의 친구가 있었다. 성은 잊어 버렸다. 이름은 경화였다. 꼭 여자이름 같지만 아주 예술가처럼 멋지게 생긴 남자였다. 그 친구는 미술학도인데 참 그림을 재치 있게 잘도 그리는 예술가 타입이었다. 이렇게 성격, 배경, 취향이 다른 친구들이 경증이 주변에서 아주 멋있게 어울리며 청춘을 구가하던 그 시절.. 하지만 모두들 쉽게 풀지 못하는 고민들은 한두 가지 다 안고 ‘밤을 잊은 그대’ 의 청춘을 보내던 시절이 우리젊음의 전성기, 1970년대 초였다.

그때 우리들이 명동 같은 곳의 다방에서 모이면 주로 여자들이 많이 모이는 그런 곳을 골라서 만났다. 물론 여자들에게 장난스럽게 ‘추군’대려는 의도가 갈려 있었다. 일본에서는 그런 것을 hunting이라고 하던데 우리는 그저 “꼬신다” 고 했다. 심지어는, 그것에 관한 방법론 같은 것은 “꼬셜로지”, 그러니까 sociology같이, 라고까지 했다. 우리는 완전히 아마추어수준에 불과했지만 그런 곳에 가보면 완전히 고정멤버 같은 프로 급 들도 많이 보였다. 우리 팀에서는 배경상이 조금은 프로급이 아니었을까? 주로 장난스러운 게임을 하곤 했는데 여자들이 그룹으로 모인 곳에 혼자 가서 미팅을 하자고 제안을 하는 게임이었다. 다들 잘 했는데 나는 끝까지 그럴 용기가 나질 않았다. 의외로 점잖은 경증이가 그런 것을 대담하게 잘 하곤 했다. 대부분 일언지하에 거절을 당하지만 아주 가끔은 성사가 되는 수도 있었다. 그런 것 때문에 재미가 있었지 않았을까?

마지막으로 성사가 된 미팅그룹이 생각이 난다. 출신성분이 아주 다양한 여자들의 그룹이었다. 그런대로 정기적으로 만났다. 거기서 만난 사람이 바로 김성혜씨였다. 조금은 도도하고 고고한 척 하는 듯한, 툭하면 영어로 대답을 하곤 했다. 어떤 미국사람에게 영어회화를 배운다고 해서 물어보니 얼마 있다가 간호원취업으로 미국엘 간다고 했다. 또 생각나는 사람, 이대생, 오연희씨.. 우리는 우연희, 라고 불렀다. 밝고, 항상 웃는듯한 얼굴.. 그들은 다 어떻게 살았고 지금은 무엇을 할까.. 간호원 김성혜씨는 나중에 미국에서 다시 만나는 인연을 가지게 된다.

1970년대 초에 그들과 어울리며 찍은 사진이 아주 적게 남아있지만 불행하게도 내가 제일 궁금하던 배경상이 빠져있다. 등산가서 찍을 때 왜 배경상이 빠져있을까? 기억이 안 난다. 돈 많은 여자를 쫓아다니느라 너무 바빠서 그랬는지도.. 분명히 그랬을 것이다. 이도영은 왜 재수생 cute girl friend를 안 데리고 왔을까. 그것도 의문이다. 꼭 붙어 다니고 했는데. 그들과 마지막으로 만났던 것이 1975년이었다. 잠깐 여름에 귀국을 했을 때 정말 반가운 만남을 했다. 몇 년 전 여자들을 쫓아가느라고 명동을 헤매던 때를 서로 그리며 다시 명동을 누비기도 했다.

우리는 그때보다 조금은 더 어른스러워져 있었다. 3~4년은 더 늙은 것이었다. 그들은 어떠한 인생을 살았을까? 이도영은 그 재수생과 결혼을 했을까? 배경상은 정말 부잣집 딸을 만났을까? 경화는 무슨 예술 대상을 받지나 않았을까? 상상의 나래를 펴 본다. 그 중심에 있었던 나의 친구, 이경증.. 1980년 나의 결혼 때 잠깐 보고 다시 없어졌다. 이 친구는 거의 정기적으로 만나고 헤어지고 한 셈이었다. 조금은 방랑자 기질이 있다고 할까. 자식 어디로 증발을 했니..이제는 슬슬 나타날 때가 되지 않았니? 죽기 전에 한번 소식이라도 듣자.

 

남과 여, 42년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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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우리가 보았던 영화, 신문광고 1968년 4월

1966년 불란서 칸느 영화제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불란서 영화 “남과 여” 를 42년 만에 다시 보았다. 처음 그 영화를 나는 1968년 봄에 죽마고우 친구 안명성과, 그 당시 바로 얼마 전에 알게 된 어떤 여대생 2명과 같이 개봉관인 서울 중앙극장에서 보았다. 그러니까 이름 그대로 double date를 하면서 그 영화를 본 것이었다. Francis Lai의 영화 주제곡이 먼저 히트를 해서 더 인기를 끌었던 영화였다. 불란서 영화 특유의 ‘아름다운 흑백의 영상’을 마음껏 보여주는 그런 영화였다. full color와 black & white가 교차하는 것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그 당시 우리는 사실 “남과 여”의 진정한 의미를 알기에는 턱없이 덜 성숙된 ‘아이’들에 불과 했다. 그저 멋진 Monte Carlo와 race car driver 가 더 머리 속에 더 남아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영화 속의 남과 여는 사회적인 angle 은 거의 없었다. 그저 남녀의 사랑과 그들의 심리적인 차이를 보여 주었다고나 할까. 그 때, 영화를 본 다음 바로 옆에 있던 빵집에 모여서 이야기를 하던 중 2명의 여대생 중의 한 명이 영화제목이 왜 “여와 남” 이 아닐까..하고 의문을 제기한 것이 생각난다. 그러니까 “남과 북, 북과 남”, “한일관계, 일한관계” 같이 조금은 유치한 우열의 순위를 가리는 것이었다. 그때 우리는 그런 나이었다. 영화 원래의 제목은 분명히 “한 남자와 한 여자” (Un Homme et Une Femme)”였다.

그런 순진한 남녀관계의 추억을 떠올리면서 사회적인 angle로 본 남녀의 관계는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심지어는 내가 여자로 태어났으면 어떻게 다른 인생을 보냈을까 하는 아주 비약적인 상상도 해 본적이 있었다 . 분명한 것은 그 당시에 여자로 태어나지 않은 것이 절대로 다행이었다는 결론이었다. 분명히 종속적인 남녀의 관계가 거의 법적으로 인정이 되던 그런 시절에서 나는 자랐다. 점차 법적인 남녀평등이 자리를 잡긴 했지만 그것은 오랜 세월이었다. 절대로 남자들이 자기들이 즐겨온 위치를 곱게 넘겨줄 리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요새는 어떠한가? 근래에 들어서 여기를 봐도, 저기를 봐도, 젊은이, 늙은이 할 것 없이 요새 남자들.. 참 불쌍하게 되었다는 한숨이 나온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만큼 여자들이 ‘덜’ 불쌍하게 되었다고 할 수도 있다. 누가 더 불쌍할까. 아주 해괴한 문제일까? 하지만 그렇게 해괴하지도 않다. 그런 추세는 꽤 오래 전부터 느리지만 확실하게 꾸준히 진행되어 왔으니까.

그러니까 나도 남자의 한 사람으로 조금 더 불쌍해 졌다고 할 수도 있다. 현재 우리 가족은 4명인데, 그 중에 여자가 무려 3명이나 된다. 비록 나는 불쌍한 한 남자지만 나머지 가족 3명은 상대적으로 덜 불쌍한 사람이 되니 그것으로 조금 위안을 삼을지.나의 전 세대에서 이런 구성(딸만 둘)이었으면 아마도 조금은 동정 어린 시선을 받고 살았을 것이다. 현재 미국의 대학생은 압도적으로 여자가 많다고 하고, 직장에서도 드디어 남자보다 숫자가 많아졌다. 여성학이란 조금 생소한 단어를 듣게 된 것도 거의 한 세대가 지나가고, 지금은 아주 단단한 기반 위에 자리를 잡은 듯 하지만 남성학이란 것이 없듯이 이제는 여성학의 의미도 필요하지 않게 되지는 않을까? 그 만큼 전반적으로 남녀의 차이가 없어졌다는 뜻일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똑 같이 먹고 살아야 한다는 공산주의는 나의 눈 앞에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한 마디로 인간의 기본권인 ‘자유’를 뺏는 것으로 시작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강제로 인간평등을 실현할 수는 없다는 뜻이 아닐까? 남녀평등은 어떠한가? 물론 일단은 정치,경제적인 문제가 아니니까 문제의 본질이 다를 것이다. 하지만 반드시 그럴까?

나는 어렸을 때부터 왜 이렇게 여자들이 거의 일방적으로 차별을 받을까.. 하는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그 당시에는 아주 간혹 여장부 스타일의 여자들이 있긴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야기 속의 주인공에 불과했다. 일반적으로 여자는 우선 경제적으로 남자의 밑에 있어서. 사회적인 역할도 거의 태어나면서 정해 진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어느 정도의 교육을 받으면 결혼으로 이어지고 그게 사실은 사회적인 활동의 전부였다. 그러니까, 극단적으로 말해서 교육을 잘 받는 목적 중에서 제일가는 것이 좋은 결혼상대자를 만나는데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이 이상적인 여성의role model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힘들게 얻은 고등교육이 거의 확실하게 결혼 후에는 쓸모가 없어지곤 했다.

오랜 역사를 굳이 따질 것도 없이 사실 남녀의 차이는 성경부터 확실히 밝히고 있다. 아담과 하와(이브)의 role model이 그것이 아닐까? 성경의 영향을 받지 않은 다른 문화와 문명은 어떠한가? 한결같이 남녀의 차별은 분명히 있었다. 그래서 Amazon같은 신화적인 이야기가 나온 것이 아닐까.. 그곳에서는 여자들이 남자들 위에 군림을 했었다. 어디까지나 이야기에 불과하다. 자연과 싸우면서 이어지는 농경사회에서 힘에 필요한 근육이 모든 가치가 되면서 더욱 남자의 가치가 올라간 것도 이유가 될 것이다. 그러니까 이 남녀차별의 근원은 분명 물리적인 생존경쟁을 배경에 두고 생물학적인 차이에서 출발했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곳 미국에 와서 지금도 인상적인 것이 역시 미국여성의 눈부신 사회진출이었다. 그 당시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할 정도의 직업 구석구석에 진출해 있는 것이다. 그 좋은 예로써 Janet Guthrie라는 여자 race car driver가 있었다. 남자의 영역에 당당히 도전한 그녀를 나는 잊을 수가 없다. 거의 한 세대가 지난 지금은 또 거기에 비해서 말도 못할 정도로 눈부시게 나아졌고 현재도 무서운 속도로 진행 중이다.그만큼 남자들의 상대적인 위치와 권위는 떨어 졌다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급기야는 근래 몇 년의 지독한 경제불황의 여파로 직장여성의 숫자가 남자를 역사상 처음으로 능가를 하게 되었다. 여대생의 숫자가 남자를 능가한 지는 그 훨씬 이전이다. 이것이 앞으로의 추세를 반영해 주고 있기도 하다. 바보 남자의 숫자가 바보 여자의 숫자를 능가하고 있는 것이다.

산업의 구조가 산업혁명의 기간산업에서 거의 완전히 지적인 산업으로, 그것도 컴퓨터,인터넷의 도움으로 무섭게 바뀌고 있고 더 이상 근육이 절대적인 역할을 하던 시대는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추세에서 나는 어쩔 수 없이 남자들의 비애를 느끼고 공감할 수 있다. 나의 어머니, 아내, 딸들이 다 여자이니까 그들의 지위가 높아짐은 환영하나 나 자신을 생각 할 때 과거의 영화를 그리워하게 됨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특히 더욱 고통스러운 것은 우리 같은 어정쩡한 세대인 것이다. 남녀차별을 뼈저리게 보고 자란 세대, 하지만 자식세대에서는 그것을 없애려고 노력 했던 세대, 그 사이에 sandwich가 된 우리세대, 이제 우리가 남길 legacy는 과연 무엇인가?

이상적인 사회적 남녀관계는 무엇일까? 이제는 이런 문제에서 남녀만 따지는 것도 유행에서 지나가고 있는가. different life style? 남자끼리, 여자끼리 결혼하겠다고 하는 것이 different lifestyle? 정말 웃기는 세상이 된 지금 남녀의 차별을 따지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모든 것들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학교에서는 옳고 그른 것을 따지는 자체가 그른 것이 되어가는 묘한 세상이다. 정답이 없다는 것이 유행이 되어버린 이 세상, 선택의 많음이 최선이 된 이세상, 결국은 자신의 저 깊은 속에서부터 울어나 오는 ‘믿음’ 밖에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 닳는다.

 

 

 

휴…. 덥다, 더위..

와.. 이게 장난이 아니네..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이글거리는 아침 해를 보며 오늘은 heat index(불괘지수)가 얼마나 될까..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지난 겨울이 그렇게 춥더니 여름은 그것을 복수라도 하듯이 무척 덥다. 올 여름의 전기료는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대개는 1층의 에어컨은 사용할 필요가 없는데 올해는 절대로 필요하다. 그러니까 거의 보통 여름의 2배의 에너지가 소모되는 것이다. 이렇게 에너지를 더 쓰면 그만큼 CO2가 더 유출될 것이고, 그것은 더 지구를 덥게 한다.. 아~~ 안 좋다, 역시 안 좋아..

왜 더울까 암만 생각해도 이건 바보 같은 질문이고 불평이다. 그저 Mother Nature가 가끔 하는 경고이거나 장난하는 그런 것일 것일지도 모르니까. Weather person들도 해답이 없는 모양이다. 예보는 하고 있어도 왜 올해는 이럴까 하는 해답은 ‘절대로’ 안 한다. 모르니까. 과학이 설명을 못하는 것이다.

올해의 특징은 온도, 습도가 같이 기승을 부린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심하면 밤에도 별로 시원하지를 않다. 결국은 그때에 에어컨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 집의 에어컨은 사실 무척 고물에 속해서 사실 언제 고장이 날지 모르는 상황에 있다. 별로 신경을 쓰지를 않았는데 요새는 조금 걱정도 된다. 제일 더운 날 이것들이 stop working을 한다면 그야말로 ‘비상’ 일 것이다. $$이 많으면 이럴 때 brand new energy efficient model로 바꾸면 전기료도 덜 들고 더 시원할 것이지만..아~~ 안 좋다, 역시 안 좋아..

추억에 남을만한 더위가 몇 번 있었다. 아마도 1972년 쯤이 아니었을까? 그 해 서울의 여름은 정말 지독하였다. 1973년에 고국을 떠났으니까 그 후에도 그런 더위가 또 있었을 듯 하다. 그때가 특별히 왜 기억에 남는가 하면 밤에 잠을 전혀 못 잤기 때문이었다. 그때 서울의 민가나 아파트에는 에어컨이 거의 없었다. 사실 필요가 없었다. 필요한 날이 일년에 며칠 밖에 없었으니까. 하지만 최소한 보통 밤에 잠은 잘 수 있었는데 그 해는 예외였다. 그때 조금 겁이 났다. 밤에 잠을 못 자게 되면 이건 큰일이 아닌가? 거의 밤을 새우다시피 하고 경증이와 새벽같이 연세대로 테니스를 치러갔던 확실한 기억이다. 그 다음은 1975년 초여름 (6월 초였나?), 시카고에 열대야가 갑자기 들이닥쳤다. 그때 알고 지내던 일본인의 집에서 자고 있었는데.. 역시 밤을 거의 꼬박 새웠다. 아마도 그때의 밤 기온이 80도(화씨)가 넘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미 잠은 설쳤으니까..하고 Lake Michigan으로 갔는데.. 그렇게 차게 느껴지던 곳이 그때는 별로 도움이 되지를 않았다. 그 정도였다. 그때 시카고의 많은 집에 에어컨이 없었고, 사실 필요한 곳도 아니었다. 그러니까 그런 이상한 현상이 나타나면 꼼짝없이 당하는 수 밖에 없었다. 확실한 것은 이러한 지독한 더위가 여기 저기서 더 자주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이래서 global warming의 경고가 나오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특별히 이런 ‘설’을 액면 그대로 믿지는 않지만 극단적인 기후(extreme high & low)가 자주 나타남은 믿는다. 올해가 바로 그런 해가 아니었을까?

하지만 불쾌지수가 높다 함은 기습적인 폭우의 가능성이 많다는 뜻도 된다. 오늘, 아니 지금이 바로 그런 때다. 하루 종일 찌더니 급기야 오후 늦게 터지고야 말았다. 우박과 더불어 폭우가 쏟아진다 이것이 바로 한여름의 즐거움이다. 이런 더위에 이렇게 폭풍과 같은 빗소리를 듣는 즐거움은 상당하다. 나는 원래 비를 좋아하지만 그것은 특별히 싸늘한 가을 비였다. 하지만 이곳에 오면서 부터는 이런 열대성 여름 비도 많이 좋아하게 되었다. 이럴 때, 태고적 시절 (고2) 여름방학 때 서울 남영동시원한 마루바닥에 누워 ‘삼국지’를 읽던 것을 회상하면 더욱더 시원해짐을 느낀다.

 

인생 고수

책, 인생고수……참 제목이 좋다. 인생을 통달한 듯 한 저자의 자신 있는 실용화 된, 바로 써 먹을 수 있는 오래된 인류의 축적된 지혜와 철학.. 이렇게 책 하나에 그것을 모아 놓은 것은 사실 드물게 만나는 작은 기쁨이다. 목차를 보면 저자의 의도가 한 눈에 들어온다.

 

고단한 이들에게 보내는 응원

  • 내 힘든 삶은 무엇으로 보상받을 수 있을까?
  • 오늘이 내 생애 마지막인 것처럼
  • 건강한 생활을 위한 지혜로운 습관
  • 스스로 선택할 줄 아는 어른 되기
  • 언제 어디서나 통하는 고민 해결법
  • 왜 사람들은 나를 몰라주는 걸까?
  • 삶의 행복지수를 높이는 방법
  • 나이 듦에 대처하는 자세
  • 콤플렉스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다면

 

원하는 것 하며 살아가기

  • 왜 나는 항상 불리한 조건에 있는 걸까?
  • 하고 싶은 일과 안정된 직업 사이에서
  • 터닝 포인트를 꿈꾸는 이들에게
  • 인정받고 싶은 마음, 버림받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 하루하루 힘겨운 일상, 미래는 언제 준비하나?
  • 존경 받는 리더 되기
  • 내가 있는 집단은 언제나 옳은 것일까?
  • 오늘도 나 혼자 모임을 준비하는 이유는

 

너에게 의미 있는 사람이고 싶다

  • 지금 하는 이 사랑, 진정한 사랑일까?
  • 세상의 반항아들과 대화하기
  • 인간관계가 나를 괴롭힐 때
  • 이기적인 이웃과 평화롭게 살아가기
  • 나를 알아주는 친구는 어디에 있을까?
  • 피할 수 없다면 제대로 싸우자
  • 서로 다른 믿음이 관계를 악화시킨다면
  • 세상의 폭력에 맞서는 가장 큰 힘

 

큰 제목 밑의 소 항목 들은 사실 서로 많은 연관은 없어 보인다. 그러므로 소 항목은 차례를 무시하고 읽어도 될 듯하다. 이중에서 나에게 제일 흥미롭거나 관계가 있다고 하는 것들을 열거 해 본다.

  • 오늘이 내 생애 마지막인 것처럼
  • 건강한 생활을 위한 지혜로운 습관
  • 왜 사람들은 나를 몰라주는 걸까?
  • 나이 듦에 대처하는 자세
  • 콤플렉스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다면
  • 터닝 포인트를 꿈꾸는 이들에게
  • 오늘도 나 혼자 모임을 준비하는 이유는
  • 인간관계가 나를 괴롭힐 때
  • 나를 알아주는 친구는 어디에 있을까?
  • 피할 수 없다면 제대로 싸우자
  • 서로 다른 믿음이 관계를 악화시킨다면

 

생각이 머릿속에서 자꾸 맴돈다. 혼자서 읽고 생각한 것보다 이런 것들은 누구와 같이 읽고 의견을 교환하거나 토론을 하면 어떨까 하는 것이다. 읽은 후의 서로의 생각은 비슷한 것 보다 다른 것이 많을 것처럼 생각이 된다.  바로 그것이다. 그 다른 것을 서로 생각해 보면 책을 혼자서 보는 것보다 효과가 그만큼 증가하게 되지 않을까? 사실 성경공부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 다만 종교를 떠난 것이라 그만큼 제한조건이 줄어든다.  

아주 오래 전 그러니까 1990년 초 내가 마리에타로 이사를 오게 만든 직장: Automated Logic Corporation(ALC) 에서 일을 할 때 그 사장 (별명이 Jaws였다) 이름도 생생히 기억이 난다, Gerry Hull이었다. Gerry는 Jerry로 발음을 하는 게 아니고 Gary로 발음을 하였다. 그 사장이 우리 그룹의 중요 멤버와 같이 공부를 하던 게 있었다. 나는 거기에 참여를 못했지만 (이미 진행 중이었다) 옆에서 보니 참 신선하고 건강한 회사로 느껴졌다. 그때 같이 공부하며 토론을 하던 책이 바로 그 유명한 Stephen Covey의 “7 Habits of Successful People” 이었다. 이 책은 이미 베스트셀러였고 후에 나도 사서 읽게 되었다. 

그 이후로 나도 기회가 되면 이런 모임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살았다. 결과는 역시 제로.. 나의 고질병인 timid &passive.. 최근 10년은 연숙의 ‘눈치’를 보게 되어서 아주 그런 것은 꿈도 꾸지 못하였다. 나의 알량한 자존심을 버리고 싶지 않다. 경제력도 없는 꼴에 사람들을 모으고 만나서 한가하게 인생철학을 토론한다고?  웃기지도 않는 한가한 얘기가 아닐까? 구차하게 그녀에게 구걸하고 싶은 마음 눈곱만치도 없다.

궁극적으로는 이런 discussion group이 virtual이건 아니건 상관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virtual한 것은 현재도 작업 중이 아니던가! (정말 웃기는 인간이 바로 이경우, 이경우 병신XX 다) 그래도 시작해 볼만한 resource는 하나 있다. 바로 이 “진희네 그룹” 이다. 이제 보니 10년이 훨씬 넘은 관록도 자랑한다. 요새야 10년 하면 별거 아니라는 기분도 들지만 10년은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니다. 그 동안 끊어질 듯 말듯 교제를 해온 나의 유일한 ‘친지’들이 되었다. 친구라고까지는 하지 못하지만 10년 동안 꾸준히 만났다는 것은 그런대로 친지의 영역에 속하지 않을까? 

이 그룹에서 만약에 이런 진지한 토론을 하게 된다면.. 아니 이게 우선 말이나 되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그것도 wife들까지 참여를 한다면.. 말이나 되나.  아.. 조금 이건 힘들지 않을까?  성경공부에선 그게 별로 문제가 되지를 않았다. 왜 그럴까? 이게 더 공부를 해야 돼서 그런가? 인원이 너무나 적어서 그런가?

결국은, 결국은?

결국은, 결국은 크리스마스 ‘이브의 이브…  이 말이 웃긴다. 시간이야 다 결국은..이 아닌가!  그래 결국은 크리스마스 ‘이브의 이브’가 되었다. 이 말도 웃긴다. 이브의 이브라.. 처음 써 보는 말인데 그럴 듯 하구나. 분명히 나는 이제 61번째의 ‘이브’를 맞이하는 셈이다. 구정과 추석 다음으로 나는 이날이 좋았다. 예수와 나는 개인적인 관계가 없어도 그건 상관이 없었지 않은가? 

춥기만 했던 그 한겨울 누나, 누나친구들과 그리던 크리스마스카드.. 는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날 지경이다. 미제 카드, 그것도 새것이 아닌 쓴 것을 그림만 잘라 가지고 다시 만든 카드를 보며 그 아름답고, 이국적인 눈 덮인 세계를 우리는 다시 옮겨서 그렸다. 눈 덮인 조그만 교회당,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의 크디큰 선물자루, 뉴욕의 야경에 찬란히 빛나는 크리스마스트리, 장식들…… 모두가 가난했던 우리들에겐 동경과 환상의 대상이었다. 그림을 좋아했던 (그다지 잘 그린 것은 아니라도), 나는 그 시간들이 너무나 좋았다. 비록 추웠어도 온돌은 따끈해서 화로 불을 옆에 놓고 우리들은 그곳에 누워서 만화도 즐기고 카드도 그리곤 했다. 특히 누나친구들과 같이 놀던 생각도 많이 난다. 누나야, 참 그때는 즐거웠지?

하지만 그때 우리나라는 분명히 성탄절의 나라는 아니었다. 비록 이승만대통령의 ‘희망’대로 휴일이었고 이브의 밤에는 ‘통행금지’가 없었다. 소위 통금이 없다는 것은 그 당시 사람들을 심리적으로 완전히 풀어 버려서 1964년 (내가 고2때)에는 서울시내, 특히 명동의 거리는 완전히 밤새 동안 ‘광란’의 거리로 변해 버렸다. 그게 사회적으로 ‘문제’가 될 정도였다. 최근에 일본에 대해서 알게 되면서 거의 같은 시기에 일본도 거의 같은 현상을 겪고 있었다. 그러니까 1964년의 겪은 것을 같은 때 일본이 앞서 가고 있었던 것이라서, 지금 생각해 보면 조금 흥미롭기도 하다. 그러니까 1964년 성탄절은 기억이 또렷한 게, 나도 그 ‘소란’함에 조금 기여를 했던 것인데.. 그때 명성이와 동만이를 우리 집으로 불러서 밤을 새운 것이다.  아마도 그때의 분위기가 모든 사람들을 그렇게 만들었던 모양이다. 그러니까 고2 였던 우리들까지 합세를 하지 않았던가?  그 당시는 나이가 나이인지라 한창 외국 (거의가 미국이겠지)의 pop song들에 심취해 있었는데, Christmas carol도 예외가 아니었다. Living Stereo라고 label이 붙은 LP jacket에 그때의 유명했던 Pat Boone이 있었다.  그가 불렀던 Jingle Bells는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TV가 그다지 많이 보급되지 않았던 당시에 라디오가 왕 이었는데, 그곳에서도 완전히 Christmas special일색이었다. 그 당시에 왜 그렇게 까지 ‘과열’이 된 상태가 되었을까? 아직도 그게 나는 궁금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아무리 분위기가 그랬어도 그것은 역시 12월 24일 하루뿐이었다. 그 전이나 그 이후에는 전혀 그런 분위기가 없었다. 그게 지금 내가 여기 살면서 얼마나 이곳이 그런 분위기를 오랫동안 가지고 있는지 실감을 하게 된다. 요새는 거의 Thanksgiving이 끝나자마자 시작되는 느낌이다. 그래서 나는 요새는 한마디로 ‘지겹다’는 느낌도 든다. ‘소박’한 기분이 거의 들지를 않는다. 너무나 상업화 되어서 그런가? Holiday blues란 말이 실감이 간다. 분명 나는 오랜 전부터 내가 즐기는 게 아니고 아이들이 즐기는 것을 보며 위안을 삼을 그 정도가 되었다. 내가 확실히 ‘우울’한 인생의 후반을 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 재동학교..

재동국민학교, 1959년 경

재동”초등”학교가 아니고 나에겐 분명히 재동”국민”학교다. 이름에도 정치, 역사가 있지만 나에겐 100% “초등”학교가 아니었고 분명히 “국민”학교였다. 서기 1954년부터 1960년 초까지 나는 이곳에서 대한민국 어린이의 꿈을 키웠다. 서기 1954년이라고 하지만 이것도 그때는 “단기” 4287년이었다. 그러니까 단기 4287년부터 4293년 초까지다.  참 오래전. 일이다.

온통 나의 어린 시절은 이곳을 중심으로 이야기들이 만들어 졌다. 서울의 심장부에 속하던 종로구에서 가회동과 계동의 옆과 위에 접한 꿈의 운동장. 이곳에서 얼마나 많이 순진한 꿈을 꾸며 뛰어 놀았던가? 여기서는 누구나 감상적이 되지 않을 수 가 없을 것이다.

 

취운정 활터에서 힘을 기르고

엣궁의 거문고로 마음을 닦던

빛나는 화랑정신 이어 나가자

우리는 재동학교 나라의 새싹

 

재동학교 교가  아마도 1~2학년 때 부터 이 ‘새’교가를 불렀지 않았을까? 누가 이 사실을 기억을 할까? 그 당시 이 ‘취운정’이란 게 무엇인지도 모르고 열심히 불렀다. 최근에서야 인터넷의 힘으로 옛날 옛적에, 언제인지는 잘 모르지만, 재동학교 근처에 있었던 고적지란 것을 알게 되었다.  재동학교 졸업 앨범을 보면 ‘윤성종’작사라고 보인다. 작곡은 ‘김성태’로 되어있다.  김성태라고 하면 물론 귀에 아주 익은 이름인데 윤성종은 전혀 무언가 떠오르지를 않는구나. 이 교가는 물론 아직도 100% 가사를 안 보고 부를 수 있다. 이것이 그 나이 또래의 기억력이다. 무서울 정도이지 않을까?

입학하기 전부터 생각이 나는 게, 그러니까 아마도 6.25동란이 끝나기 전인 듯싶다. 그때 나는 돈화문 (비원정문)근처의 원서동에서 아버지가 납북되시고 어머니, 누나와 같이 살았는데 재동학교에서 화재가 나서 전체 건물의 반이 불에 타 버린 것을 생생히 기억을 한다. 그 나이에는 불이 나면 우선 ‘경사’라도 난 듯이 그곳으로 뛰어 가지 않았던가? 그때 재동학교는 아마도 군인병원으로 임시로 씌어졌던 모양인데, 왜 불이 났는지는 확실치 않다. 혹시나 폭격이라도 당하지 않았을까?  그때 타버린 건물은 몇 년 뒤에 미군들의 도움으로 새 건물로 태어났고 동시에 나머지 건물들도 한층 씩 더 올려지게 되었다.  5학년 때 갑자기 모두 운동장에 나가서 ‘즐겁게 뛰어놀라’ 는 지시에 전 학년 생과 선생님들 모두 나와 그야 말로 뛰어놀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 미군들이 와서 사진(그리고 아마도 영화도)을 찍고 있었다. 그때는 미군을 보는 게 참 즐거운 일 이었는데 (우리를 공산당으로 부터 구해준 십자군?) 그들이 사진을 찍으니 우리들은 더 신들린 듯이 뛰어 놀았다.

은사님들을 생각해 본다. 교장 선생님. 심원구 선생님이 거의 5년 동안 나의 교장선생님이셨다. 6학년 때에 지금 졸업앨범에 찍히신 윤형모교장 선생님께서 오셨다. 아마도 5학년 중에 부임을 하셨던 게 아닌가. 누군가 이것을 기억할 수 있다면. 5학년 때 인천으로 당일치기 수학여행을 갔을 때 사진에 심원구 선생님이 보이시니까 분명히 5학년 까지는 계셨던 것이다.  선생님들. 지금 모두 어떻게 지내실까. 혹시나 연로하셔서 타계나 인하셨을까? 이걸 어떻게 알아 볼 수 없을까?

1학년 때의 담임선생님 윤원범 (여자)선생님. 졸업앨범에 없다. 졸업 전에 떠나신 것이다. 그 옛날. 1학년 때.. 그때 나는 학교 가는 게 아주 싫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모두들 엄마의 손을 잡고 학교엘 오곤 했는데 나는 그렇지 못했다. 그때 어머니는 이미 생활전선에 뛰어든 뒤였다. 옆집 친구 할머니의 손을 잡고 가곤 했다. 그 친구는 ‘안윤희’였다. 그런 중에 드디어 대형 사고를 쳤는데. 그만 학교를 안 간 것이다. 원서동에서 재동학교를 가려면 계동을 지나는데 거기에 대동상고가 있었다. 거기에서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내다 집에 가곤 했다. 내가 “깡”이 있어서라기보다는 그만큼 학교가 싫었던 게 아니었을까. 얼마나 그랬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우리 집의 주인아저씨가 (그때 우리는 세를 들어서 살았다) 나를 보았다고 했다. 들통이 나고 어머니는 장장문의 편지를 써서 나를 학교로 데리고 갔다. 그때 윤원범 선생님이 담임이었다.

아마도 윤 선생님이 나를 조금 더 자상하게 대했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있었다. 조금은 무뚝뚝한 여선생님. 한번은 연필을 가지고 가지 않았다고 나를 그냥 (다른 아이와 같이) 돌려보낸 적도 있었다. 그때는 담담히 받아 들였다. 나중에 생각하면 조금 내 자신이 불쌍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어머니가 그만큼 바쁜 탓도 있지만 우선은 나의 잘못이었다.  몇 년 후에 우리 집에서 일하던 아줌마(그때는 모두 식모라고 불렀다)가 알고 보니 그 윤원범 선생님의 집에서 머물며 밥을 해 주었다고 들었다. 참 반가운 소식이었다. 그 선생님은 그때 결혼 전이셨는데 그 후에 결혼을 하셨는지 알 길이 없다. 마지막을 뵌 건 2학년이 되자마자 교과서를 받으러 선생님을 교무실로 찾아간 때였다. 그때는 밝게 웃으시며 공부 잘하라고 격려를 해 주신 기억이다.

2학년으로 올라가며 선생님도 바뀌고 물론 친구들도 모두 바뀌었는데 나는 그때 너무도 놀라고 슬퍼서 집으로 걸어오는 길 내내 울었던 기억이다. 그 이후로 나는 학년이 바뀔 때쯤이면 필요이상의 stress를 느끼곤 했다. 나의 성격이 아마도 수줍고, 조용해서 남들보다 더 예민하게 받아 들였는지 모른다.  2학년 때 선생님의 이름을 기억을 못하는데 이것이 내가 유일하게 기억 못하는 선생님이 되었다. 얼굴은 생각이 난다. 유별나게 신경질 적인 여자 선생님.. 대나무로 만든 자로 손바닥을 아프게 맞았던 것도 쓰라린 기억이어서 아주 나쁜 기억이 되었다. 1,2학년 때는 사진도 없었다. 그때는 사진기도 흔치 않았지만 그래도 조금씩 남는 법인데 그때는 아주 암흑의 학년이 된 것이다.

 

재동국민학교 3학년 학급사진, 1956년

3학년 때는 학급단체 사진이 아주 잘 남아 있다. 3학년의 담임 배은식 선생님. 앨범에도 남아있다. 참 다정스런 아줌마 타입의 선생님.. 학년이 올라 갈수록 사진은 많아 졌다. 하지만 불행히도 4학년 때는 없다. 왜 그랬을까?  4학년 담임 김경구 선생님. 미술이 전공인 담임. 항상 수염자국이 뚜렷한 남자 처음 남자 선생님. 물론 4학년부터 남자, 여자 반이 갈리었다. 모든 게. 우락부락하게만 느껴져서 나도 그곳에 적응을 할 수 밖에. 그때 처음 죽마고우중의 하나 안명성을 만났다. 같은 원서동에 살아서 죽마고우가 된 친구다.

4학년의 기억은 조금 고통스럽다고나 할까. 이 김경구 선생님은 좀 독특한 스타일로 가르치셨는데. 그중에 하나가 ‘공부한 시간표’라는 유별난 system을 고집하면서 1년 동안 우리를 괴롭혔다. 한 마디로 하루에 최소한 4시간 이상 집에서 공부 했다는 것을 증거로 부모님의 도장을 받아오는 것이었다. 그 나이에 하루에 집에서 4시간을 꼬박 공부를 할 수 있을까?  진정한 목적이 무엇인지는 아직도 잘 이해가 안 가지만 모두들 ‘거짓도장’을 잘도 받아서 제출을 하였다. 항상 양심의 가책을 받으며 어머니 도장을 몰래 찍는다는 것은 그 나이에도 괴로운 일이었다. 그래도 어떤 아이들은 3시간 30분이라고 적어 오기도 했는데. 그게 정말로 3시간 30분을 공부 했는지. 아니면 양심의 가책으로 30분을 일부러 뺏는지. 아직도 불가사의다.  결과적으로 김경구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사회에 나가서 survive하는 예비 훈련을 시키신 셈이다.

 

5학년때, 인천 만국공원, 1일 수학여행, 1958년

5학년의 추억은 참 밝기만 하다. 담임은 이원의 선생님.. 지금 생각해 보면 이 선생님은 ‘반 입시형’인 ‘미국식’ 선생님이라고나 할까? 교과서를 줄줄 외우는 스타일이 전혀 아니고 실습과 생활. 탈교과서적인 그런 쪽을 강조하신 선생님.. 그 당시는 아마도 학부형들에게 별로 호응을 못 얻으셨을 지도 모른다.  자연공부도 실습으로 하시고, 음악은 전공 선생님을 불러 오셨다. 여름방학 일기는 ‘일일 일선 (하루에 한 가지 좋은 일 하기)’ 을 주제로 삼으셨다. 그래서인지 외우는 것 같은 것은 거의 배운 기억이 없지만. 아직도 그 선생님의 스타일이 멋지기 느껴지는 것은 왜 그럴까? 그렇다. 그렇게 계속 가르치시면 절대로 우리들을 ‘좋은 학교’로 진학시키기 어렵다. 그래서 모든 게 균형이 맞아야 하는 것일까?

 

5학년말 교생실습후 단체사진

6학년은 5학년 때와 정 반대의 담임선생님이 오셨다. 학부모들은 아마도 ‘구세주’가 오셨다고 했을 듯하다.  새 6학년 담임은 박양신 선생님인데 바로 서울 안산국민학교에서 전근을 오셨다. 무언가 다르다고 모두들 짐작은 했는데 정말 공부시간이 되어보니 정말 완전히 이건 입시준비학원 style로 분위기가 변한 것이다.  학부형들은 완전히 무언가를 느꼈는지 치맛바람의 극치를 이루며 교실을 들락거렸다. 아주 학교에서 살다시피 하는 엄마들도 있었고, 공부시간에도 쉬는 시간만 되면 재빨리 들어와 선생님의 책상을 청소하거나 무언가 놓고 가거나 할 정도였다.

5학년 담임선생님 이원의 선생님도 6학년 다른 반의 담임이 되셨는데, 나의 짐작대로 절대로 입시준비를 하는 그런 style이 아니셨고 결과적으로 예상대로 아주 결과는 참담한 듯 했다. 결과란 것은 물론 일류 중학교 합격률을 뜻하는 것이다. 친구 안명성이 그 선생님의 반에 있었는데 항상 부정적으로 선생님을 평하였다. 과장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많은 시간 ‘양호실’에 누워 계셨다고 했다. 그게 게으르다는 뜻인지 정말로 몸이 편찮으셨는지는 아직도 알 수가 없다.

6학년의 추억은 아주 또렷하고 생생하다. 처음 겪는 ‘입시’공부였고 이 박양신 선생님은 요샛말로 ‘수험의 신‘ 이셨다. 좋게 말하면 많은 입시용 지식을 그 어린 머릿속에 아주 효과적으로 주입 시키셨다. 나쁘게 말하면 어린이의 꿈의 시간, 공간을 많이 빼앗아 갔다고나 할까. 사실을 말하면 그 중간 정도일 것이다. 한 가지 아주 인상적인 것은 가끔 수업을 ‘정규’시간에서 벗어나 저녁때 까지 연장을 해서 한 것이다. 그야말로 어두워서 책이 안보일 때 까지 하는 것이다. 전등을 킬 수가 없으니까 그런 것인데.. 사실 힘은 들었지만 무슨 캠핑을 간 듯한 기분도 들어서 한편으론 재미있기까지 하였다. 이런 모든 것들은 분명히 학부모들을 아주 만족시켰으리라 짐작을 해도 무리는 아닐 듯하다. 또한 다른 6학년 담임들의 선망과 질시를 받았다고 생각해도 무방할 듯.

그때 우연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우리 반에 정말 공부를 잘하는 녀석들이 많이도 모여 있었다. 하기야 반을 가를 때 완전히 random하게 할 터인데 우연이라고 봐야 할 듯 하지만, 우연치고는 참 선생님의 운도 좋았다.  지금도 생각나는 애들.. 이만재, 김두철, 정세종, 조성태, 이정택, 장정석, 전경훈, 이규재, 한윤석, 심동섭, 김정훈, 임한길, 신문영, 유성희, 김승종.. 사실 앨범을 보면서 이름을 떠올리지만.. 이들이 소위 말해서 1분단의 member들인데.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제일 공부를 잘하는 애들 그룹이다. 나도 나중에는 그 그룹에 들어가는 ‘영광’을 누리긴 했다.

이들은 입시에서 거의 경기, 서울, 경복, 용산으로 이루어지는 1류 공립중학에 들어갔다. 하지만 자세히 누가 어디에 갔는지는 아직도 확실치 않다. 분명한 것은. 이만재, 김두철, 김정훈은 경기였고, 심동섭은 경복이라는 사실뿐이다. 아직도 궁금한 것은 신문영[나중에 경복중에 간 것을 알았다]과 이규재.. 인데. 알 길이 없다. 이규재는 나의 짝이었고.. 신문영은 내가 혼자 그냥 좋아하던 애였다. 이만재는 나중에 Internet을 통해서 숙명여대 교수인 것과 전자/컴퓨터전공이란 것을 알았다. 신문영은 내가 연세대학에 다닐 때 잠깐 본 듯한데 말을 걸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김두철은 서울공대 입학시험을 볼 때 멀리서 보았는데 아마도 그의 경기고 후배 응원 차 나온듯한 모습이었다.

우리 6학년 1반, 박양신 “사단”의 system중에 독특한 것은 가차 없는 경쟁유도체제 이었다. 그것은 거의 매일 치르는 모의고사의 성적에 의해서 앉는 자리, 그러니까 분단의 위치가 바뀌는 것이다.  그 당시는 그게 적응이 되어서 몰랐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면 참으로 잔인한 것이었다. 아마도 다른 어느 반에도 그런 것은 없었을 듯하다.  ‘공부 잘하는’ 1 분단으로 올라가려면 죽어라 시험을 잘 보아야 했다. 1분단에 올라갔으면 떨어지지 않으려고 또 죽어라 공부를 해야 했다.  그러데 이상한 것은 그다지 생각만큼 자리가 쉽게 바뀌지를 않았다. 그만큼 성적의 순위가 바뀌기가 어렵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니까 공부 잘하는 애들은 거의 항상 잘했고 못하는 애들은 거의 항상 못한 셈이다.

나는 6학년에 들어오면서 어머니가 신경을 많이 쓰셨다. 이제까지는 그다지 성적에 집착을 안 하셨는데 학기가 조금 지나면서 선생님을 만나고 오시더니 한숨 투성 이었다. 물론 나의 성적이 아주 안 좋다는 얘기였다. 1분단은 꿈에도 못 꾸는 처지였다. 그러더니 어느 날 한 고등학생을 데리고 들어오셨는데. 알고 보니 가정교사인 셈이었다. 그 당시는 대학생보다 고등학생들이 과외선생을 많이 했다. 특히 경기고 같으면 더 많이 했을 것이다. 김용기라는 경기고 2년생이었다.

그러니까 그 때 부터 나는 학교에서도 공부, 집에 와서도 공부하는 신세가 되었는데, 생각보다 효과가 좋았다. 공부도 점점 재미가 있어졌고 따라서 학교성적도 오르기 시작했다. 결국에는 곧 대망의 1분단으로 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부터는 떨어지지 않겠다는 stress가 나를 괴롭혔다.  그래도 졸업 할 때까지 다행히 1분단을 고수를 할 수는 있었다.

또 한 가지 잊혀 지지 않는 것. 이것도 다른 반에선 없던 그런 것이다. 그러니까 1분단의 반대편에 있는 제일 쳐지는 분단 애들이 있다. 성적순으로 제일 밑인 셈이다. 그들의 심정이야 이해를 하기 어렵지 않다. 하지만 제일 기억에. 그것도 좋은, 즐거운 기억으로 남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애들은 비록 공부는 힘들었어도 유머와 여유가 있었다. 쉬는 시간만 되면 그들은 group으로 앞에 나가서 코미디를 하거나 유행가를 합창으로 부르곤 했다. 거의  pro의 수준이었다. 그게 그당시 그렇게 즐겁고 재미있었다. 그 애들은 입시공부도 거의 포기한 듯한 모습들이었는데도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그들은 지금 다 무엇을 하는고..

보고싶다, 친구야.. 정문신
보고싶다, 친구야.. 정문신

졸업하면서 거의 영원히 소식들이 끊어진 친구들.. 여기서 몇몇을 회상하고 싶다. 정문신. 정문신. 아 잊을 수 없다. 내가 1분단으로 이사하기 전에 짝을 하던 친구다. 짝이라 친했는지는 모르지만 이상하게 그 애가 그렇게 나는 좋았다. 아주 이상할 정도로 좋았다. 그 애가 나를 좋아하는 정도보다 훨씬 내가 더 좋아했다. 여름방학이 되면서 나는 그 애가 그렇게 보고 싶었다. 이건 내가 생각해도 이상할 노릇이었다. 오죽하면 여름방학이 빨리 끝나기를 기다렸을까? 그 나이에 동성애였나? 우습기만 하다. 졸업을 하고서 다른 친구 김천일이 그 애 사는 곳을 안다고 해서 솔깃했는데. 그대로 지나가 버리고 말았다. 정문신. 어디선가 살아 있다면 그때 내가 그렇게 좋아했다는 사실을 알아주기 바란다.

그 당시에 이승만 정권에 식상한 국민의 여론이 서서히 야당 쪽으로 기울기 시작한 시기였다. 그리고 정치바람이 학교까지 들이 닥쳤다. 그 당시에 우리들은 별로 잘 이해를 못했지만 무언가 크게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느끼긴 했다. 하긴 우리나이 또래면 북한(그때는 북괴라고 했다)에 못지않게 이승만대통령을 거의 영웅처럼 생각했다. 그렇게 교육을 시켰다. 반공, 반일로 일관된 교육 속에서 우리들은 자랐다.

그런데 아마도 정부에서 우리또래 학생들에게도 선거운동을 시킨 모양이었다. 우리들은 선거권은 비록 없지만 아마도 부모를 설득하도록 한 것이나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선생님들을 시켜서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지금도 나는 실망을 금치 못한다. 우리 입시의 아니 수험의 신이신 박양신 선생님은 자발적으로 우리를 설득했다. 우리가 무엇을 안다고 여당은 좋은 사람들이고 야당은 나쁜 사람들이라고.. 비록 선생님은 경기, 서울, 경복에 많이 입학은 시키셨어도 진짜 교육은 못하셨다고 이제껏 확신을 한다.

이렇게 졸업은 해서 재동학교는 떠났지만 그 후 3년 동안 몸은 떠나지 않았다. 집이 바로 재동학교 후문 옆에 있었기 때문에 중학교 3년 다닐 때 까지 옆에서 보며, 야구를 할 때면 운동장을 빌려 놀곤 했다. 나의 어린 시절은 온통 재동학교가 꽉 가운데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다행인 것은 그 많은 역사 깊은 국민학교들이 문을 닫거나 이사를 가거나 했다지만 우리 재동학교는 아직도 같은 위치에 건재하다고 들었다. 얼마나 다행인가. 그야말로 모교. 나의 어머니격이다. 그게 아직도 건재하다니.. 부디 오래 오래 더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희망도 해 본다.

 

재동국민학교 졸업앨범 1960

 

CCR night

지난 금요일 저녁에는 예정대로 (갈 마음은 예전대로 별로였지만) 백형 네 부부와 Mable House Amphitheater에서 Creedence ClearwaterRevisited concert에 갔었다.  알고 보니 2명이 original member였고 나머지는 다 그런대로 젊은 사람들이었다. 100%가 다 즐겨 듣던 대 히트곡이라 그거 하나는 정말 감회가 새로웠다. 청중들은 예상대로 거의가 우리 또래의 baby boomer들~~~~~~  CCR concert는 결과적으로 만족했다. 거의 모든 히트곡이 원래가 시끄러운 것이라 더 새로웠다. 하지만 진짜 original에는 못 미친 곡도 많았다. 조금씩 variation (tempo etc)을 주었으면 다 낫지 않았을까. 거의가 같은 시끄러운, 빠른 템포라서 나중에는 조금 지루한 그런 느낌

머릿속은 계속 1969/70년도로 돌아가서 용현이와 어울리던 곳에 머물러 있었다. 확실히 생각나는 것은 1970년 4월초 지리산 등산을 마치고 어느 다방 (우리가 좋아하던 곳.. 이름을 잊었다.. 하느님) 어두운 곳에 앉았는데 용현이의 얼굴이 어둠 속에 묻혀 하얀 와이셔츠만 보였다.. 얼굴이 없는 사람? ㅎㅎ 그때 정말 그 녀석 Who’s stop the rain을 좋아했지.. 나도 그 이후부터 .. 그러니까 그 그룹의 시작은 1969년경이 아니었던가.. 까물거린다.

 

무엇이 문제일까?

나는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내가 정말로 ‘우울증’일까?  요새는 거의 1초라도 반짝 ‘즐거운’ 순간을 느끼질 못한다. 현재 내가 살고 있는 처지와 상황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걸까?  정말로 나는 혹시라도 ‘의학적’인 우울증, 치료가 필요한 그런 정도가 아닐까?  암울하게만 느껴지는 일초일초는 괴롭기만 하다. 흔히들 말하는 ‘배가 불러서’ 하는 어리광 정도의 유치한 수준은 아닐까? 정말 나도 모르겠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정말로 하루 하루가 괴롭다는 것이다.

그런 어리광을 받아줄 사람이 나의 주변에 한 사람만 있어도.. 하는 불가능하게 보이는 희망도 있다만 그건 정말 힘들 거야. 나는 정말 잘못 살고 있다. 그것만은 확실하다. 나는 현재 그것을 뚫고 나올 힘이 부족하다. 이럴 때 나의 유치한 신세타령을 들어줄 엄마라도 전화 넘어 있었다면 하고 생각하고 또 눈물이 쏟아진다. 어찌하랴.  모두가 다 나로부터 가버렸다. 나는 정말 몸도 마음도 다 무섭게 늙어가고 있다. 희망과 젊음은 은하계가 우리로부터 멀어져 가는 듯한 무서운 속도로 나를 떠나고 있다. 유일한 나의 희망은 묵주기도의 성모님이다. 하지만 이게 그야말로 ‘악마’의 농간으로 몇 달째 나를 괴롭히고 있다. 내가 내린 결론이다. 이 ‘악’의 공격을 나는 어떻게 물리치고 이길 것인가. 더욱 더 ‘심각한’ 기도 밖에 없겠지.

이번 주 초부터는 마당뒷집에서 무단으로 들어와 자른 나무 사건으로 더욱더 나를 ‘분노’의 괴로움에 남게 하였다. 부글부글 끓어 오르는 듯한 용광로 같은 나의 이 ‘분노’와 ‘화’는 도대체 어디서부터 나오는 것일까. 하느님으로부터 다 용서를 받았다고 생각했던 지난날의 나의 죄와 거기에 따른 분노가 그대로 남아서 나를 괴롭히고 있다. 하느님, 저를 부디 이 분노로부터 해방을 시켜 주시옵소서.

오늘은 백형 부부의 호의로 oldies Rock Vocal Group CCR (Creedence Clearwater Revival) concert에 가게 되었다. 우선은 고맙지만 기쁘지는 않다. 그저 밖에 나가는 게 싫을 뿐이다. 호의는 정말 고맙지만. 왜 이럴까 나는 왜 이럴까. Get a Life!란 말이 나에게 필요하다. 나는 모든 것으로부터 ‘피하고’ 있다. 이건 위험하다. 정말 이런 식으로 살면 오래 못간다. near-term goal을 먼저 성취하고… 나는 조금씩 나올 것이다. 그것만이 나의 유일한 희망이다.  용현아.. 이 개새끼야.. 너는 어디에 쳐 박혀 숨어 살고 있다는 말이냐.. 우리는 정말 1969년으로 가고 싶지 않니.. CCRWho’ll stop the rain을 어두운 다방에 앉아서 열광하던 그때를 우리가 어찌 잊겠니?

요새 새로 보기 시작한 일본 tv drama가 바로 ‘무리한 연애’라는 것이 있다. 환갑에 된 왕년의 rock group member가 이 환갑 된 나이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를 조금은 코믹하게 그린 것이다. 그래서 나이가 그래서 더 유심히 보게 된다. 그것도 그렇지만 거기의 여자 상대가 ‘나쯔가와 유이’라는 배우라서 그런지도.  작년에 본 ‘파랑새’라는 drama에서 그러니까 거의 10년전의 드라마에 나온 여자주인공..’인상적’이었던 인상.. 그 뒤에 ‘87% 생존율’에서 아주 나의 머리에 남았던 그 배우가 환갑이 된 왕년의 rocker와 아마도 ‘연애’를 하는 모양인데.. 글쎄.. 

이것과 더불어 이틀 전에는 드디어 묵주기도 덕분에 거의 사라졌던 sexual fantasy가 꿈에 나타났다.  그런데 거기에 등장한 여자는 바로 ‘히로스에 교코?”.. 라는 아주 어리지만 성숙한 여배우가 나온 것이다. 이 배우는 ‘사랑과 죽음을 응시하며’라는 실화 드라마에서 여주인공으로 아주 열연을 한 사람이다. 청순하지만 다른 쪽으로는 관능적일 수도 있는 그런 타입인데.. 바로 그녀가 꿈에서 나를 ‘시험’한 것이다. … 이게 아마도 우리의 묵주기도를 시기한 ‘악’의 공격일수도 있다는 생각.. 모르지만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나이 60은 정말로 이런 sexual 한 것은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을까.. 나의 생각은 그렇지 않다. 하지만 그건 옳은 생각은 아니겠지.

 

봉정암

KBS Special (downloaded): 봉정암을 본다.  처음에는 그저 그랬는데 더 보니 아주 좋은 것 같다.  옛날을 달린다.  확실치를 않다.  설악산에 갔을 때 내가 그곳엘 갔던가.. 천일이와 같이 내설악으로 들어갔을 때 아마도 갔던 것 같다.  아마도 대학 4학년 여름인가.. 천일이, 김종호와 같이 동해안으로 돌아서 포항, 그리고 대구로 왔던가.  거의 맞는 듯 하다.  분명히 갔었다.. 봉정암.  거의 정상 바로 아래 있던 절.. 포타즈 스프를 그곳에서 먹었다.  비록 김천일이와 티격태격 했지만 좋은 추억으로..  다시 이런 비디오로 자세히 보니 아주 수려한 절이다.  언젠가 한번 가볼 수 있을까.. 꿈 같은 꿈이다.

Dotnetnuke site가 거의 순식간에 복구가 되고 있다.  비록 template에 의한 design이지만 그것이 ‘돌아’ 간다는 것은 큰 성과이다.  이제는 어떻게 나의 content를 넣느냐.. 그게 진짜 과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