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nce, Tobey fence

어제는 드디어 dog fence의  post에 concrete를 붓고 고정을 시켰다. 이런 일이 사실 몇 년만인가. 10년도 넘은 듯.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dog fence가 아니고 ‘바깥 일, yard work’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제는 David 네 쪽으로 24’짜리 privacy fence를 시작 해도 될 듯하지 않은가. 하지만 진짜 문제는 lumber hauling이다. 2년전 (벌써?) 연숙과 같이 lattice board를 차 위에 실고 오다가 길거리 한 가운데서 떨어졌던 생각만 하면 아직도 아찔해서.. 더 그 이후로 그런 비슷한 일을 피하게 된다. 하지만 더 이상 피할 필요가 있을까. 잘 계획을 세워서 privacy fence를 만들어 볼까.  그러니까 8′ post 가 6개와 2×4 10개 정도 그리고 30+ pickets.. 얼마나 들까?

새로 보는, 이미 3번이상을 보고 지금도 보는 jTVDrama “무리한 연애”는 소재도 그렇고 뒤끝 맛도 그렇고 또 하나 나의 best classic이 되지 않을까.. 남자 60세가 뜻하는 것을 ‘연애적’ 감정과 배경에서 아주 코믹하지만 심각하게.. 그리고 중요한 기분 좋게 그려낸 걸작이다. 주인공은 아마도 왕년에 rock band (유명한) 의 member인 듯 하고.. 일본에서 1947년부터 1949년까지 세대를 ‘단까이’ 세대라고 이름을 부친 모양이다. 아마도 여기의 baby boomer정도가 아닐까.  그 짧은 때 태어난 세대에게 무슨 확실한 특징이 있었던 것은 ‘어른이 되기를 거부한’ 그런 처음 세대가 아닌가 .. 여기서도 마찬 가지겠지만.. 그래서 한국은 그런 면에서 어떠한지 모르겠다.  우리세대에 그런 확실한 획기적인 특징이 있을까?  모르겠다.

daily journal은 사실 자기 전에 써서 그날을 되돌아 보아야 하는 것인데.. 어쩌자고 꼭 제일 기분이 좋은 아침에 써서 쓰기는 좋은데 어제를 되돌아 보게 되는 결과가 되었다. 하지만 어찌하랴.. 요새는 잠자는 시간이 거의 11시 전으로 내려오고 그때가 되면 사실 잠 때문에 정신도 없고, 불면증으로 고생하는 연숙에게 미안하고 면목도 없다. 목표는 12시쯤 자서 6시쯤 일어나는 것 같은데.  다시 노력을 해 볼까.

 

CCR night

지난 금요일 저녁에는 예정대로 (갈 마음은 예전대로 별로였지만) 백형 네 부부와 Mable House Amphitheater에서 Creedence ClearwaterRevisited concert에 갔었다.  알고 보니 2명이 original member였고 나머지는 다 그런대로 젊은 사람들이었다. 100%가 다 즐겨 듣던 대 히트곡이라 그거 하나는 정말 감회가 새로웠다. 청중들은 예상대로 거의가 우리 또래의 baby boomer들~~~~~~  CCR concert는 결과적으로 만족했다. 거의 모든 히트곡이 원래가 시끄러운 것이라 더 새로웠다. 하지만 진짜 original에는 못 미친 곡도 많았다. 조금씩 variation (tempo etc)을 주었으면 다 낫지 않았을까. 거의가 같은 시끄러운, 빠른 템포라서 나중에는 조금 지루한 그런 느낌

머릿속은 계속 1969/70년도로 돌아가서 용현이와 어울리던 곳에 머물러 있었다. 확실히 생각나는 것은 1970년 4월초 지리산 등산을 마치고 어느 다방 (우리가 좋아하던 곳.. 이름을 잊었다.. 하느님) 어두운 곳에 앉았는데 용현이의 얼굴이 어둠 속에 묻혀 하얀 와이셔츠만 보였다.. 얼굴이 없는 사람? ㅎㅎ 그때 정말 그 녀석 Who’s stop the rain을 좋아했지.. 나도 그 이후부터 .. 그러니까 그 그룹의 시작은 1969년경이 아니었던가.. 까물거린다.

 

무엇이 문제일까?

나는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내가 정말로 ‘우울증’일까?  요새는 거의 1초라도 반짝 ‘즐거운’ 순간을 느끼질 못한다. 현재 내가 살고 있는 처지와 상황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걸까?  정말로 나는 혹시라도 ‘의학적’인 우울증, 치료가 필요한 그런 정도가 아닐까?  암울하게만 느껴지는 일초일초는 괴롭기만 하다. 흔히들 말하는 ‘배가 불러서’ 하는 어리광 정도의 유치한 수준은 아닐까? 정말 나도 모르겠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정말로 하루 하루가 괴롭다는 것이다.

그런 어리광을 받아줄 사람이 나의 주변에 한 사람만 있어도.. 하는 불가능하게 보이는 희망도 있다만 그건 정말 힘들 거야. 나는 정말 잘못 살고 있다. 그것만은 확실하다. 나는 현재 그것을 뚫고 나올 힘이 부족하다. 이럴 때 나의 유치한 신세타령을 들어줄 엄마라도 전화 넘어 있었다면 하고 생각하고 또 눈물이 쏟아진다. 어찌하랴.  모두가 다 나로부터 가버렸다. 나는 정말 몸도 마음도 다 무섭게 늙어가고 있다. 희망과 젊음은 은하계가 우리로부터 멀어져 가는 듯한 무서운 속도로 나를 떠나고 있다. 유일한 나의 희망은 묵주기도의 성모님이다. 하지만 이게 그야말로 ‘악마’의 농간으로 몇 달째 나를 괴롭히고 있다. 내가 내린 결론이다. 이 ‘악’의 공격을 나는 어떻게 물리치고 이길 것인가. 더욱 더 ‘심각한’ 기도 밖에 없겠지.

이번 주 초부터는 마당뒷집에서 무단으로 들어와 자른 나무 사건으로 더욱더 나를 ‘분노’의 괴로움에 남게 하였다. 부글부글 끓어 오르는 듯한 용광로 같은 나의 이 ‘분노’와 ‘화’는 도대체 어디서부터 나오는 것일까. 하느님으로부터 다 용서를 받았다고 생각했던 지난날의 나의 죄와 거기에 따른 분노가 그대로 남아서 나를 괴롭히고 있다. 하느님, 저를 부디 이 분노로부터 해방을 시켜 주시옵소서.

오늘은 백형 부부의 호의로 oldies Rock Vocal Group CCR (Creedence Clearwater Revival) concert에 가게 되었다. 우선은 고맙지만 기쁘지는 않다. 그저 밖에 나가는 게 싫을 뿐이다. 호의는 정말 고맙지만. 왜 이럴까 나는 왜 이럴까. Get a Life!란 말이 나에게 필요하다. 나는 모든 것으로부터 ‘피하고’ 있다. 이건 위험하다. 정말 이런 식으로 살면 오래 못간다. near-term goal을 먼저 성취하고… 나는 조금씩 나올 것이다. 그것만이 나의 유일한 희망이다.  용현아.. 이 개새끼야.. 너는 어디에 쳐 박혀 숨어 살고 있다는 말이냐.. 우리는 정말 1969년으로 가고 싶지 않니.. CCRWho’ll stop the rain을 어두운 다방에 앉아서 열광하던 그때를 우리가 어찌 잊겠니?

요새 새로 보기 시작한 일본 tv drama가 바로 ‘무리한 연애’라는 것이 있다. 환갑에 된 왕년의 rock group member가 이 환갑 된 나이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를 조금은 코믹하게 그린 것이다. 그래서 나이가 그래서 더 유심히 보게 된다. 그것도 그렇지만 거기의 여자 상대가 ‘나쯔가와 유이’라는 배우라서 그런지도.  작년에 본 ‘파랑새’라는 drama에서 그러니까 거의 10년전의 드라마에 나온 여자주인공..’인상적’이었던 인상.. 그 뒤에 ‘87% 생존율’에서 아주 나의 머리에 남았던 그 배우가 환갑이 된 왕년의 rocker와 아마도 ‘연애’를 하는 모양인데.. 글쎄.. 

이것과 더불어 이틀 전에는 드디어 묵주기도 덕분에 거의 사라졌던 sexual fantasy가 꿈에 나타났다.  그런데 거기에 등장한 여자는 바로 ‘히로스에 교코?”.. 라는 아주 어리지만 성숙한 여배우가 나온 것이다. 이 배우는 ‘사랑과 죽음을 응시하며’라는 실화 드라마에서 여주인공으로 아주 열연을 한 사람이다. 청순하지만 다른 쪽으로는 관능적일 수도 있는 그런 타입인데.. 바로 그녀가 꿈에서 나를 ‘시험’한 것이다. … 이게 아마도 우리의 묵주기도를 시기한 ‘악’의 공격일수도 있다는 생각.. 모르지만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나이 60은 정말로 이런 sexual 한 것은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을까.. 나의 생각은 그렇지 않다. 하지만 그건 옳은 생각은 아니겠지.

 

정말 오랜만일세

일기야, 정말 오랜만일세… 미안하이.  정말 쓰고 싶었다. 그러나 무서워서 못쓰고 2달을 보냈다.  그저 두 달이 훌쩍 흘러 버린 것이다.  폭풍과도 같던 마음 속속 깊이 고여있던 모든 나도 모르던 분노의 물길이 용솟음치며 한동안 나를 지배하였다.  1년이 넘게 나를 보호하여 준다고 믿었던 묵주기도도 이것에는 속수무책이었다.  나 자신도 놀랐다  내가 그렇게 분노를 많이 가지고 살았던가.  한마디로 나는 아직도 멀었다는 느낌뿐이다.  그래도 나의 하느님께로 향하는 노력이 헛것이 아니라고 나는 믿고 싶다.  그것의 덕분에 이 정도로 끝났다고 생각하는 게 더 논리적이 아닐까.

하지만 많이 자신이 없어진 게 사실이다.  2달을 그런 생각으로 주눅이 늘어 살았다.  하지만 아주 허송세월을 한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런대로 무언가는 했다.  폭발싯점까지 진행되어 오던 여러가지 mini projects들은 즉시 중단 되었지만 그 대신 다른 것들이 시작이 되었다.  나에게는 처음으로 ‘super-pc’가 생겼다. dual-core Intel mobo 를 ‘홧김’에 구입하였다. 이제는 4GB 를 가지고 11개의 virtual machines이 그 안에서 ‘활개’를 치게 되었다.  이것만이 요새 나를 유일하게 기쁘게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제는 아주 virtual machine의 신봉자가 되었다.  그 위력에 완전히 매료되었다고 할까.  이것으로 할 수 있는 project는 사실 나의 상상력에 달린 것이다.

작년 봄부터 시작된 일본 드라마 시청은 예상을 뒤엎고 올해도 반을 지내고 결말을 눈에 못보고 있다.  사실 한국 것을 보고 싶은 마음이 없어지고.. 겁이 나게 그곳으로 가기가 싫으니.. 나 자신도 조금은 겁이 난다.  내가 왜 이렇게 되어가고 있을까.  나이가 들면 다 이렇게 외골수로 빠지게 되나.  그건 아니겠지.  내가 이상한 것이리라.  어떻게 하면 ‘정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어떻게 하면.

 

썰물이 빠져 나가는 느낌

썰물이 빠져 나가는 느낌의 조용한 아침.. 아이들은 다 늦잠을 즐기고 나는 평상시와 같이 일어나서 아침 ‘일과’ 를 ‘즐기고’ 있다. 언젠가부터 아침 routine 이 자리를 꽉 잡았다. 어두움 속에서 조용히 일어나 부엌의 dishwasher에서 거의 마른 접시들을 제자리에 넣고, 1인분 커피를 끓이고, 어떨 때는 맨손체조도 하고, window blinds를 다 열고, Tobey 밥그릇을 채워주고.. 나의 보금자리 서재로 와서 아침’공상’을 즐긴다. 사순절 때는 거의 ‘성경’에 관련된 일과가 아침 시간을 채웠는데 요새는 그것은 뜸– 해졌다. 그래도 ‘송봉모’ 테이프를 듣기도 하는데.. 이게 정말…

 

성가신 아침 햇살

오랜만에 ‘성가신 아침 햇살’ 이 없는 아침을 맞는다. 왜 그렇게 나는 많은 때에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사랑하는 햇살을 성가셔 하는 것일까.  생각해 보면 나의 인생의 후반부 (언제부터 인지는.. 확실치..않지만 아마도 40대 이후가 아닐까) 리고 비가 오는 그런 것을 아주 많이 좋아하였다. 이유를 따지면 사실 이해 못할 것도 없다. 나의 ‘세계관’이 그랬을 것이다. 확실히 나는 어둡고 우울한 그런 인생후반을 보내고 있다.  밝음에 노출된 나의 못생긴 모습도 그렇고 아틀란타에 와서 느끼는 한마디로 지겨운 밝음에 의한 피곤도 한몫을 한 걸까. 그래 지겨운 그런 것이다. 반면, 어두움에 깔린 을씨년스러움에서 나는 안락 함을 느낀다. 어릴 때 그 추운 날 따뜻한 이불 속을 연상케 하는 걸까.

어제는 결국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몇 주 동안 눈독을 들이던 그런대로 최신판 Mobo/cpu를 mwave.com에 order를 한 ‘사건’이다. 이게 사건이나 될까.. 이 의미는 ‘돈’을 이만큼 지출했다는 뜻에서 사건이다. 변명은 있다. 이것은 ‘오락’적인 것이 결코 아니고 ‘투자’라는 변명 아닌 변명일까…

 

First of May, 1970

며칠 동안 Bee Gee의 oldie, First of May 머릿속을 맴 돌았다. 몇 년 전부터 이것을 ‘기록’해둔 덕에 아주 이제는 머릿속에 자리를 잡은 듯 하다.  왜 아닐까?  거의 신화적인 기억이 되어버린 그 아름다운 시절을 왜 아니 잊으랴. 용현아, 너는 어디에서 이 시절을 보내고 있냐. 창희야, 너는 어찌하여 그렇게 그 아름다운 시절을 잊은 다른 사람이 되었단 말이냐.  친구야, 지금이 어쨌건 상관이 없지 않은가. 중요한 것은 우리에겐 그 아름다운 추억이 아니더냐.. 부디 어디에서 살건 잘 행복한 나날이 되어랴, 하느님의 도움이 조금 있다면 언젠가 살아서 다시 만나서 그 아름다운 추억을 이야기 해 볼 수도..있지 않을까. 그래 그것도 조그만 소망중의 하나로 만들자.  그래 1977, 1988, 1999, 2000, 2011, 2022… 그 다음의 수열은?

우리 집의 main home server ‘FS’가 아주 큰 수술을 받았다. 이것보다 더 큰 수술은 없다  아주 MoBo(Mother Board)를 바꾸어 버렸다.  그것도 아주 down-graded쪽으로.  Athlon 2400+ 에서 Intel 600로 강등이 된 것이다. 이상한 것은 이게 더 마음이 놓인다는 사실. 그 만큼 경험으로 이 Intel 600가 더 문제가 없었다. 현재의 느낌으로는 비록 느려지긴 해도 훨씬 덜 말썽을 부릴 듯 하다. 문제가 있던 Mobo 는 우선 Ubuntu-server 를 올려 놓았다. 재수가 좋아서 그대로 Linux는 쓰게 해 주실지.  문제는 Intel600가 실제적으로 512MB max라는 사실. 그러니 무제한의 VM을 쓸 수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그런대로 2 VMs가 간신히 돌게 해 놓았다. 그래서 또 잠시 ‘몽상’에 빠졌다. 최신의 Mobo/CPU의 값이 얼마나 하는지 eye-shopping을 즐긴 셈이다. 물론 priority game에서 지긴 했지만. 계산에 $250정도면 아주 그런대로 ‘최신’의 것으로 장만할 수는 있는데.. 이게 또 걸린다. 제일 슬픈 현실중의 하나다.

올해는 ‘축복의 봄’을 보내는 느낌이다. 그렇게 적절한 때에 비가 내려준 것이다. 예상 밖이다. 현재까진 그랬다. 이건 정말 정말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고 싶다. 끈끈한 밤은 지독히도 싫지만 그래도 이런 축복의 날도 곁들이니 이게 하느님의 ‘은총’이 아니고 무엇인가. 나도 이렇게 감사할 일을 찾으면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그저 내가 나 자신에게 거는 기대감에 너무나 동떨어진 인생을 살고 있어서 나는 감사를 못하는 것이다. 그 비현실적인 기대도 버리기 싫다. 나의 능력의 문제인데, 하느님이 나에게 그만큼은 능력을 주셨다고 생각을 했는데 나이 60이 지나가는 시점에서 내가 잘못 생각을 했는지도.

요새는 자주 송봉모 신부의 강론 테이프를 듣는다. 시작은 모든 home analog media의 digitize의 일환이었지만 아직도 digitize는 시작은 못하고 있지만 사실 기술적인 문제는 거의 해결이 되었다. 그런 와중에 조금씩 듣게 되었다. 오래 전에 YS (이게, 영삼이도 YS구나)가 그렇게 좋다고 권했던 게 생각은 나지만 그때는 때가 아니었다. 지금은 그런대로 잘 들린다. 그 중에서 제일 공감이 갔던게… 꿈에 대한 의견이었다. 그는 아주 꿈의 중요성과 심각성을 강조했다. 나도 언젠가부터 그랬다. 꿈은 아주 random한 현상이 아니라는 것.. 성서에도 근거가 있지 않은가. 나도 조금 더 ‘조직적’으로 꿈을 꾸려고 노력을 하고 더 심각하게 해석을 하려고 한다. 그저 그리운 사람들이 많이 많이 나와주면 얼마나 좋을까.

오늘은 나라니 의 마지막 학기가 끝나가면서 이사를 하는 날이다. 정말 나라니의 대학생활이 나에게는 몇 달 정도처럼 느껴진다. 정말 빨랐다. 다른 한 편으로는 그래도 우리 부부 모든 자식에게 의무를 우선 했다는 안도감을 느낀다. 하느님의 도우심일 거다. 나라니도 그런대로 수고를 했다.

 

묵주기도, 재개

묵주기도는 다시 조용히 재개 되었고.. 정말이지 하고 나면 무언가 기분이 다르다. 무언가 있다. 무언가 있다. 나의 하느님으로 향한 마음의 문은 확실히 최고로 열려있다.  이런 기회를 놓치면 다음 기회는 사실 언제일지 모른다.  모든 힘을 다하여 한번 하느님께 가보자.  성모님, 예수님, 하느님.. 저에게 이런 기회를 주셔서 고맙습니다.  나를 위해 오랫동안 기도해 주신 분들 특히 연숙이.. 어떻게 나의 고마움을 표현을 할까.

진희아빠가 전화를 했는데.. 이것은 완전히 shocker가 아닌가.  이동수목사가 위암에 걸려서 수술을 했다는 것인데.. 알고 보니 사실이 아닌가. 왜 이렇게 되는 것일까. 이번에는 정말 죽음이 나의 근처까지 온 기분이 들었다. 내가 여기서 아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를 않은데도 그 중에 몇 명이나 벌써 갔던가.  만수아빠는 교통사고, 백명순씨(연숙의 친구), 김예순씨, 박만용씨, 최진착씨(자살), 박창우씨, 그리고 이동수씨는 위암?  벌써 그런 나이가 되었구나.  이 목사는 고생을 많이 한 편인데 이렇게 되고 보니.. 정말 하느님이 그 목자를 시험을 하시나 하는 생각까지 든다. 위암은 그렇게 까지 치명적인 것이 아니니까.. 완치가 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항상 수술 후 5년까지.. 정말 아찔하다.

 

일찍 온 사순절에..

올해는 최고로 일찍이 사순절이 시작이 되었다.  2월이 가기 전까지  Acts of Apostles, 사도행전을 다 typing을 하였다. 그것도 영어와 한글로 다 같이.  쓰는 것에 비하면 뭐 하지만 그래도 나에게는 많은 도움이 되었다.  20년 만에 다시 읽는 ‘사도행전’.. 마음을 열고 눈을 뜨는가… 느낌이 그렇게나 달라질까?  정말 놀랐다.  3월부터는 요한복음을 영어로 읽기 시작했다.  정말 처음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항상 공관복음만 들었는데.. 처음으로 읽는 기분이다.  사실 일고 보니.. 그 ‘유명한’ 구절들은 거의 모두 이곳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았다.  특히 John 3:16같은 것..

3월 3일에는 그렇게 ‘걸리던’ 고백성사를 보았다. 미국성당이라 거의 형식적인 것이겠지만 나에게는 그런 게 아니다.  마음의 준비가 거의 99%라고 느끼니까.  그래서 너무나 홀가분 하였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매년 하기로 ‘결심’을 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시간이 갈수록 나의 하느님으로 향한 ‘마음의 문’이 조금씩 조금씩 열리는 것을 느낀다.  이것도 작년부터 시작한 묵주기도의 ‘은사’일까.. 아니면 은총일까.  모른다.. 모른다.. 하지만 나는 느낀다.. 내가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것도 하느님을 향해서 말이다.  그렇게 안 믿어 지던 것들도 이제는 믿어지는 쪽으로 향하는 나를 보고 나도 사실 놀란다.  이 모든 것이 그렇게 듣던 말과 같이 사실이란 말이다.  이게 모두 정말일까.  이게 다 사실이라면 앞으로는 어떨까.  나도 다시 어머니를 볼 수 있을까.  모두가 영생을 누릴 수 있고  육신을 떠난 더 높은 영혼의 세계가 앞으로 있을까.. 모든 게 신비롭게만 느껴 지지만 조금씩 조금씩 나의 마음을 열고 있다.

아주 오랜만에 Stephen CoveyFirst Thing First를 읽기 시작하였다.  아마도 성경 다음으로 이게 나의 ‘다음성경’이 아닐까 생각도 해 보았다. 이 책은 아마도 성경을 배경에 두고 씌어진 기분도 드니까 (이 저자는 사실 유타주 출신의 Mormon교도)  결국은 spiritual direction/goal이 없으면 결국은 ‘허무’하다는 뜻일까.  이제는 그게 이해가 간다.  무한대와 유한공간, 영원과 현세의 찰라.. 영혼과 육신.. 이런 게 이런 게 모두 나의 살에 와서 느껴진다. 아마도 나도 죽음에 대해서 많이 실감을 하며 살고 있다는 증거이다.  이 사람(Covey)말 대로 이제는 Leave a Legacy가 제일 중요한 관심이 되고 있다. 나의 존재의 의미를 느끼며 남겨야 하지 않을까.  이게 거의 본능처럼 느껴진다.  무엇을 남겨야 하나.  어떻게 남겨야 하나.  누구에게 남겨야 하나.

 

Bradford Pear Spring…

2월도 중순이 훌쩍 지나고 춘분을 향해 돌진 중이다. 어제 Tobey 토비와 산책을 하면서 우연히 아니 설마 하며 본 것이 그 흔하던 Bradford Pear tree의 꽃망울이 많이 보였다는 사실이다. 놀랐다. 진짜 초봄이.. 그러고 보니 어제가 ‘우수’ 였던가.  내가 그걸 놓쳤다. 입춘도 훨씬 전에 지났고. 그래서 기온도 거의 50도에서 60도 사이로 왔다 갔다 하는구나. 그 배꽃이 제일 먼저 필 때가 온 것이다. 봄이.구나.. 장모님의 기일도 곧 이고. 그러면 나의 사랑하는 엄마의 ..  사순절에 하려던 매일 과제는 아주 순조롭게 실행을 하고 있다. 생각 보다 시간이 더 걸리지만 오랜만에 읽는 사도행전.. 아주 좋다. 이제 확실히 초대교회의 성인/사도 들을 그릴 수 있을 것 같다. 우선 ‘신화’같이 느껴지지 않아서 좋다 (구약처럼).. 아주 현실감과 사실감이 많이 느껴진다. 그때 사람들도 요새 사람들과 생각 하는 게 그렇게 다르지는 않았으리라 생각도 해 본다.  그래도 초자연적인 ‘기적’들이 많았다는 사실이 아주 흥미롭다.

아주 드문 일이지만 어젯밤은 연숙이 나보다 먼저 잠자리에 들었다.  이번 침묵 피정을 다녀 온 후에 무언가 해 보려는 것 같다. 오늘도 새벽 6시 30분 전에 일어 나게 되었다. Tobey 토비를 보니, 그 net 망같이 생긴 담요를 아주 포옥 덮고 잔다. 그걸 안 덮었으면 추울 텐데.. 하며, 신경을 쓰며 잤는데 그 녀석 본능적으로 그 밑으로 파고 들어가서 덮고 잔다. 역시 걱정한 내가 틀렸다. 가끔 이 녀석과 시간을 보내며 어떨 때는 이 녀석이 사람이 개가 되어서 외로운 나에게 친구로 보내 졌나.. 하는 아이 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 말만 못 할 뿐.. 감정의 교류나 표정하며 알아 듣는 것 하며 정말 사람처럼 느낄 때도…

 

어제의 ‘유서’가..

어제의 ‘유서’가 계속 머릿속에서 맴돈다. 이제는 때가 온 듯 느낀다. 무언가 ‘심각’한 것을 남겨야 한다고. 더 이상 미룰 수가 없다. 며칠 전 김정국씨가 운명한 것을 듣고 더 그렇게 느꼈는지도.. 그는 거의 나의 ‘동료’적인 사람이 아닌가. 비록 친구는 아니었을 망정 거의 나와 같은 게 많았던 사람이 또 갔다. 그의 잘못도 아니고 그냥 갔다. 어떻게 이승을 떠나는 게 나에게 바람 직 할까, 우선은 더 살고 싶겠지. 하지만 이것도 많이 전과 많이 달라졌다. 60을 넘긴 이상 많이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삶의 애착이 예처럼 많지 않다. 이렇게 외롭게 사는데 앞으로는 더 외로우리라는 생각도 든다. 나는 원래가 외롭게 살았지만 지금처럼 외롭게 느껴본 적은 없다.  다 갔다. 나의 사랑하는 엄마가 없다. 유일한 혈육인 누나가 옆에 없다. 실제적으로 나는 고아다.  이세상에 현재의 ‘만들어진’ 가족 이외에는 아무도 없다. 친구도 없다. 하나도 없다. 나는 절대적으로 혼자이다. 그저 그리운 과거들만 있다. 그게 현재로써 나의 유일한 기쁨이다.

한 마디로 왜 내가 지금과 같은 처지가 되었는지.. 왜 이렇게 살아야만 했는지 운명이란 건가.  물론 나의 선택일 수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전혀 ‘사고’같은 뜻밖의 인생을 산 듯한 기분이다. 이건 내가 예정하고 상상했던 나의 인생은 절대로 아니다.  그래, 나의 선택이었고 시대의 선택이었고.. 그리고 운명이었다. 이렇게 살게 것이. 하지만 절대로 나 이외의 것들을 ‘탓’하고 싶지 않다. 한마디로 ‘치사’한 짓이다. 모든 것은 나로부터 시작된 행동이었고 선택이었을 테니까. 성격 탓인가. 그것도 원망하지 말자. 그건 나의 부모와 조상으로부터 물려 받은 유산이니까.  한 마디로 현재까지 흘러온 나의 인생은 거의 ‘실패’나 ‘낙제’ 점수 일지도 모른다. 남이 볼 때 그렇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내가 볼 때 그렇다. 의도적으로 된 게 거의 없으니까. 세파에 아니면 환경에 휩쓸리면 살았어도 그건 나의 책임이다. 패배의식은 분명히 나쁜 것이지만 솔직한 것은 바람 직 하지 않을까.  어머니를 그렇게 돌아 가게 한 것으로 나는 99.9% 불효자이고 인생 낙오자다. 암만 생각해도 그건 말도 안 되는 불효요, 무관심이요, 불성실이요, 나태요, 패배자요, 용기가 거의 제로인 인간의 행동이었다. 시간과 세월을 가지고 도박을 한 용기가 없는 패배자는 바로 나였던 것이다…

김정국씨, 영면

어제 김정국씨가 영면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골통을 꽝~하고 치는듯한 느낌, 바보 같은 느낌.. 또 시간을 가지고 놀았다 하는 느낌.. 우리세대도 죽음의 세계로 완전히 돌입한다는 조금 과잉우려 같은 이런 저런 복잡하고 착잡한 그런 느낌이었다.  분명 김정국씨는 다행히도 하느님을 많이 알고 믿으면 저 세상으로 갔으리라 확신을 한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을 분명히 같은 분이실 거다.  김형, 먼저 가서 나의 자리 좀 잡아놓고 기다리쇼..라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역시 내가 이렇게 시간을 멋대로 해석하며 사는 것에 대한 우려와 실망은 금할 도리가 없다.  아니 나의 인생이 그런 인생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보미 아빠.. 딸 손주도 못보고.. 흔히 하는 세속적인 소리지만 슬프기 그지 없소.  그 예쁜 딸을 두고 먼저 간다는 게 그렇게 슬프구료.. 정말이오..  서로가 생각도 조금 다르고 성격도 다르다고 하지만 우리는 더 가까이 지낼 수도 있었던 그런 인연도 있었는데.. 이것도 아마도 서로가 생각만 하며 끝이 난 모양이오.  그런 면에서 김형이나 나나 비슷한 듯 하오.  분명히 더 거의 형제같이 지낼 수도 있었던 인연이 있었는데 참 서로가 무참히 도 무시하며 외면을 했구료.. 아.. 하느님.. 그를 따뜻한 손길로 받아 주시옵소서.. 김형 그곳에서 편안히 잘 지내시구료.. 우리 모두 언젠가는 다 다시 만날 꺼 아니요..

 

넘어간 60년의 세월은..

이제는 ‘명실공히’  나는 60세가 넘었다.  앗 싸리 넘어 버리니까 조금 후련한가.. 그러니까 그걸 기다리는 게 더 초조 했던가.  매도 먼저 맞고 주사도 먼저 맞으라는 것과 비교가 될라나.  아마도 남들도 그렇게 느낄지도.  마음 같아서는 조용히 아무도 모르게 보내고 싶은 심정이 없는 것은 아니나 우선 우리 ‘극성맞은’식구들이 그렇게 놔둘 리가 없고, 나도 그건 좀 너무한 것 같은 생각도.  그래도 예상보다는 더 차분하게 그리고 즐겁게 시간을 보냈다.  연숙과 나라니 가 참 정성껏 모든 것에 신경을 쓰며 보아주었다.  이번에는 나도 좀 이 ‘극성맞게’ 일을 하는 모녀에 대한 생각을 다시하게 되었다.  이게 바로 ‘식구’의 본래가 아닌가..

십 년이 넘게 눈에 거의 보이지 않던 ‘통’ 기타를 잡아 보았다.  물론 미끄럽게 이것을 다시 즐기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좌우지간 그걸 ‘치게’도 되었다.  한마디로 감개가 무량하고 옛날의 거의 산화가 되어가는 악보를 다시 보니 그런대로 생각도 나는 듯 하였다.  엇그제 같기도 하고 아주 몇 백 년 전 같기도 하고 조금은 혼동도 되는 게.   무슨 소릴하는 건가.  다 생각이 나는데.  그냥 그 동안 잊고 살았던 것 뿐이다. 

그러고 보니 지난 10년 그러니까 나의 50대..는 정말 정말 정말 힘든 세월이었다.  거의 한번도 행복이란 걸 느낄 수 없는 세월들.  내가 인생의 어려움을 잘 감당을 못했던 것일까, 아니면 그때의 상황들이 그렇게도 어려웠던 것일까.  아마도 둘 다 일 거다.  하지만 어렵다는 걸 일초 일초 느끼며 살수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마음의 ‘여유’가 있었다는 뜻도 되려나.  나는 그렇게 생각 치는 않지만 최동명씨의 지론에 의하면 그런걸 느낄 수 있는 것은 그만큼 ‘배가 부르다’는 뜻이란다.  하지만 사람이 배가 부른 게 다 인가 말이다.  하기야 그렇다.  배고픔 정도까지 만약에 경험을 하거나 걱정을 할 정도가 된다면 그렇게 될지도.  다행히 아직(?)  나는 그런 경험은 못했다.  한마디로 어머님의 철저한 도움으로 나는 컸으니까  생각이 그렇게까지 극단적은 아니다.  아직도 나는 막연히 ‘누군가’ 나를 도울 거라는 거의 형편없는 ‘망상’을 가지고 사는 지도 모른다.  나도 그게 싫지만 한편으로 ‘즐기는지’ 도 누가 아는가.

 

환갑 생일의 추위는..

강 추위 계속.. 나의 환갑생일날.. 아득한 옛날.. 엄마 고마워요..

강추위가 계속된다.  대한이고.. MLK [Martin Luther King] 휴일이고.. 나의 환갑날이다.  차분하게 느끼려고 노력 노력을 하지만 아무래도 마음이 안정되지 못함을 느낀다.  나도 무언가 ‘선’을 넘는 듯 한 느낌.. 남들도 다 이랬을까.. 아니다.. 개개인 마다 다 느낌이 다를 것이다.  어머니, 고마워요.  나를 낳아주고.. 키워주고.. 이런 날도 맞게 해 주셔서.  아니 이세상에 ‘이경우’라는 사람이 존재할 수 있었다는 것을 가능케 해 주신 것.. 기억조차 없는 아버님께도.. 그리고 엄마 아빠를 존재케 해 주신 조상님들 모두 모두…

어제 저녁에는 모처럼 식구들과 함께 부엌에 앉아서 오늘 쓸 음식준비를 거들었다.  나라니 와도 정말 모처럼 도란도란 얘기도 했는데.. 느낌이 어쩌면 그렇게 다르게 느껴질까.  역시 가는말이 고와야 오는 말도 곱고.. 대화도 같이 앉아야 더 재미있는 것을 느낀다.  그래서 더 나라니 에게 대한 나의 감정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것을 더 느낀다.  아마도 아마도 이 모든 나의 느낌은 내가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 사실만은 항상 항상 기억하며 살아야 할것 같다.  기도에서도 이것을 도와달라고 해야 한다.

간밤에는 참 재미있는 두 가지 꿈을 꾸었다.  그게..참.. 현재 Democratic party의 John Edwards의 선거운동에 내가 참여를 한 것이다.  이게 또 무슨 개꿈일까 아니면..  최근 들어 고전을 하는 그가 불쌍해 보였는가.  아니면 암 투병으로 고생을 하는 연상의 부인 때문일까.  그 부인과 악수도 하였다.  신나게 노래도 하였다.  분명한 것은 이것이 나의 잠재의식은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사실 그런 미국대통령선거를 피부로 느낄 정도로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니까.  그런 다음이 더 추억거리인데.. 국민학교 6학년때 짝이었던 “이규재”를 어릴 때의 얼굴로 보았는데, 사실 너무 반가웠다.  그는 나처럼 반갑지는 않았던 듯 한데.. 그에게 다른 그때의 친구들에 대해서 물어 보려는데 거기서 끝났다.  이규재.. 그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도 경기 중학교에 갔나.  사실 아무런 그 이후의 소식은 모른다.  그도 죽기 전에 한번 소식이나 들을 수 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