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June 2009

이 몸이 새라면 이 몸이 새라면 날아가리. 저 멀리 보이는 저 멀리 보이는 작은 섬 까지.

아마도 독일의 민요를 일본에서 번역해서 부르고 일제시절 우리에게 남겨지고 나의 어린 시절 그걸 또 배우고 불러서 아직도 가사와 노래가 생각난다. 어린 시절에 부를 적에는 사실 이 가사에서 비행기를 연상하곤 했다. 어린 시절 남자아이들 에게는 비행기처럼 영웅적인 존재는 없었다.  답답한 서울의 좁디좁은 골목에서 비행기를 보는 것은 무척이나 감동적이고 행복했으니까.

그걸 내가 조종을 해서 하늘을 나르고 먼 곳까지 간다는 것을 이 노래에서 생각하곤 했다. 새의 존재는 거의 잊어버리고.  나중에 알고 보니 새란 것이 현재 인간의 최첨단 비행기보다 훨씬 smart하다는 것을 알았다. 아무리 현대 비행기를 computer로 control을 한다지만 새의 그 작디작은 머리가 아마도 훨씬 더 robust할지도 모른다.

그 주인공인 새를 생각한 것도 나중에는 이 노래에서 느끼게 된 상징적인 의미를 알고 바뀌게 되었다. 아하. 이 새가 날아간다는 것은 바로 거의 완전한 ‘자유’를 뜻 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 맥락에서 나는 대학시절 기타를 배울 때 즐겨 부르곤 하던 미국 folk song, ‘도나도나’의 가사가 비슷한 의미를 주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가 듣던 것은 당시 미국 folk song, 특히 Vietnam war protest song을 불렀던 Joan Baez의 곡이었는데 당시는 사실 가사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곡자체가 좋았고, guitar를 배우기에 아주 쉬운 곡이었기 때문에 더 유행을 했을지도 모른다. 나중 나중에 가사를 잘 읽으면 제비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송아지가 주인공임을 알게 되었다. 하늘을 자유롭게 나는 제비의 거의 무한정 자유와 자기가 왜 죽어야 하는 이유조차 모르고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송아지. 이 얼마나 비극적인 대조인가?

영화화 된 Anne Frank’s Diary (안네프랑크의 일기)를 보면서 또 다른 새의 상장을 다른 면으로 보게 되었다. 어디까지를 구체적으로 영화화 했는지 모르겠지만 그 Annex Attic에 갇힌 유대인 가족의 그룹들, 비록 숨은 쉬며 살고 있었지만 거의 모든 자유를 박탈당한 몇 년의 생활, 얼마나 마음을 졸이며 살아갔을까. 어른들은 그렇다 치고 막 사춘기에 들어간 어린 소년소녀들의 심정을 어땠을까? 아무도 그들을 구할 수 가 없고 오직 radio에서 나오는 연합군의 Normandy 상륙으로 가상적인 자유를 만끽한다.  그 젊은 아니 어린 Anne Frank는 뚫어진 지붕으로 보이는 아주 파~~란 하늘을 본다. 그리고 가끔 연합군의 고공으로 나르는 폭격기편대의 하~아~얀 꼬리 연기를 보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이 제일 동경하며 보던 것은 역시 자유스럽게, 유유하고 천천히 하늘을 나는 새들이었다. 나 에게는 그 장면이 이영화의 climax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이 몸이 새라면 어떻게 할까. 내가 가기 힘든, 아니면 쉽게 갈수 없는 곳, 하지만 꼭 죽기 전에 가보고 싶은 곳으로 나도 날아가고 싶을 것이다. 죽음이 결코 먼 훗날의 남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 했을 때부터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의 기억이 시작된 곳부터 가보련다. 원서동의 아랫자락, 비원입구 돈화문의 근처, 원서동 골목은 나의 모든 기억의 출발이다. 그곳은 어떻게 변했을까. 아니 길 조차 없어 졌을지도. 옛날 휘문학교 뒷문근처, 영국군 부대가 주둔 했던 곳. 조금 더 올라가면 동섭이네 집골목.  어린 시절 나는 이 골목을 오르락내리락 뛰며 달렸다. 이 집은 물론 우리 집에 아니었다. 아버님 친구 분이 피난가편서 빈집을 우리가 잠시 산 것 뿐이었다. 나의 아버님은 납북이후 소식이 끊긴 후였다.  우리 집은 엄마, 누나, 나 이렇게 3식구만 달랑 주인을 잃은 채 아버지 없는 가정의 시작을 맞이하게 되었다.

원서동 비원 담을 따라 끝까지 올라가면 결국 막히게 되는데 그곳에서 우리는 또 살았다. 승철이네 집에서 우리는 세를 들어 살았다. 국민학교 생활도 그곳에서 시작되었다. 승철이네 집은 지금 어찌 되었을까? 조금 내려와서 유일하게 우리 집으로 살았던 곳 그곳은 나의 어린 시절에 도시계획에 의해서 철거되었다. 그 이후 기억에만 남게 되었다.

내가 다니던 재동국민학교, 가보면 크게 변하지 않았을 듯하다. 나의 국민학교 앨범도 있고, 사진에도 있고 해서 아주 친근한 풍경들, 없어지지는 않았겠지. 10년 전쯤 인터넷에서 어떤 사람이 그곳을 지나 출퇴근 하면서 그곳을 매일 본다고 들은 기억이 있어서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더 궁금한 곳은 그 재동 국민학교 뒷문 쪽에 있던 우리가 살던 2층 집이다. 이 집에서 나의 유년기를 거의 다 보냈다. 사랑채를 빌려서 살아서 우리 집 같았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이집을 떠난 후 나는 이집을 꿈처럼 그렸다. 참 순진했던 소년기의 맑고 좋은 추억들이 아롱아롱 매달린 집. 나는 또 그 집의 옛 모습을 보고 싶구나. 집 앞의 골목도 나의 전쟁터였다. 아마도 이곳도 상전벽해로 변했으리라.

이 몸이 새라면 이 몸이 새라면……. 나는 대학시절의 다방들도 다시 가보고 싶구나. 우리 연호회클럽의 추억이 찐하게 배었던 국제극장 옆 골목의 해양다방, 단성사 옆의 백궁다방, 명동에 있는 여대생이 들끓었던 SNOW다방, 미국적 멋이란 멋은 다 부리던 Rock다방, 대학 입학 후 처음으로 간 다방 연대입구 복지다방, Mamas & Papas의 ‘Monday Monday’에 황홀하던 신촌로타리 왕자다방, 거짓말 편지로 어떤 여대생을 불러낸 세종로 교육회관 지하다방,  아~ 누가 그런 아름다운 기억을 잊을 수 있으랴……. 이 몸이 새라면 다시 한 번 그곳으로 날아가 보련만……

그 수많은 지난해들 중에서 1962년을 가끔 더 생각한다.  왜 그럴까? 비교적 유쾌한 추억들이 더 많이 기억이 되어서 그럴까?   확실치는 않다. 조금 더 기억이 날 뿐 일지도. 그 당시 알던 사람들 기억에서도 특히 왜 그렇게 이름 황성군이 또렷이 이 나이 까지도 남는 것 일까?

아주 색깔이 바랜 중앙중학교 앨범을 볼 때에도 그 친구의 모습이 더 생각이 나곤 했다. 그것도 근래에 들어서 더욱 그랬다. 사실 나와 그 녀석은 아주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그보다 더 친한 친구들이 따로 있었는데도 이상하게 기억은 그 친구에 더 많이 머무르곤 한다. 조금은 감정이 찐하게 느껴지는 그런 독특한 추억 때문인 것일까?

황성군. 성은 황 씨이고 이름은 성군. 모든 외모가 나이에 걸맞지 않게 균형이 잡힌 모습이고, 거기에 걸맞게 ‘멋’을 부린 교복도 기억하기에 더 도움을 주었겠지. 지금 사진을 보면 나는 거의 젖먹이 어린애같이 덜 성숙했고 그 녀석은 나이보다 더 성숙한 의젓한 모습이다.  그런 나를 그 녀석은 잘 대해 주었다. 사실 그는 나의 짝(꿍)이었다.

그해, 1962년은 5.16군사혁명(1961년) 다음해, 모든 것이 긴장, 검소, 절제. 그리고 ‘재건’이라는 구호의 물결인 그런 시기였다.  4.19학생 혁명(1960년)으로 거의 아주 자유를 기치로 건 ‘방종’적인 무질서를 짧게 만끽하다가 이제는 국가재건이라는 기치아래 모두가 숨은 조금 죽이며 살았으나, 신선한 의욕이 넘치던 그런 시기였다.

그때는 거의 모두가 지금 기준으로 보면 빈곤층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그런 걸 별로 못 느끼며 살았다. 아마도 최소한 나의 나이에는 그렇게 느꼈다. 말로만 ‘멀리, 시골에서’는 밥을 굶는다는 얘기는 듣곤 했지만 피부로 느끼지는 못했다. 우리는 서울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도심 북쪽 북악산 남쪽에 있는 가회동이라는 곳에서 살았다. 이곳은 사실 서울의 알짜부자들의 집이 많이 있었던 곳이었다. 그 바로 남쪽이 재동이고 동쪽에는 계동, 또 그 동쪽에 원서동이 있었다. 나의 어린 시절은 사실 거의 이곳에서 보내졌다.  이곳의 기준으로 보면 소위 ‘중산층’집단이 살던 곳이라고나 할까.

1962년은 나의 중앙중학교 3학년인 해였다. 중학교 2학년 때 나는 별로 가까운 친구가 없었는데 3학년이 되면서 마음에 맞는 친구들을 같은 반에서 보게 되었다. 2학년 때의 몇 명 안 되는 친구들 중에 ‘문민규’,  “이경증”등이 같은 반이 되어서 너무 좋았고, 새로 알게 된 ‘김호룡’, ‘우진규’, ‘채현관’, ‘윤태석’, ‘정만준’ 등등과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황성군, 1962년

황성군, 1962년

황성군은 사실 3학년이 되면서 나의 짝으로 알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억지로’ 사귀게 된 친구인 셈이다.  위에 열거한 친구들 대부분이 3학년이라는 처지를 생각해서 공부들을 열심히 하였다. 요새 발로 study group같은 것이 형성이 되어서 공부를 했는데 한마디로 공부를 이렇게 하는 것은 정말로 효과적이었다. 친구들과 어울리는 재미에 공부까지 더 잘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나의 짝이었던 황성군은 이 group에 없었다. 그는 무엇이 그렇게 바쁜지 학교만 끝나면 사라지고 공부시간도 별로 큰 관심이 없었다. 그러니까 항상 무언가 다른 것만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마음씨도 착하고, 나이에 걸맞지 않게 의젓하고, 멋쟁이 교복을 입고 (교복이 지금 생각해 보면 거의 맞춤복에 가까웠음) 하던 황성군.

그런데 어느 날 부터 그가 점심을 가져오지 않기 시작하였다. 그러니까 점심을 굶는 것이었다. 점심시간만 되면 슬그머니 밖으로 나가곤 하고 나가지 않으면 자리에 그냥 앉아서 우리들이 맛있게 먹는 것을 물끄러미 처다 보곤 하였다. 어리고 철없던 우리들이었지만 모두들 언짢은 기분으로 점심을 먹곤 했다. 특히 짝이었던 나는 입장이 아주 거북하였다. 내가 먹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여러 가지 ‘충고’를 하곤 했다. 충고라기보다는 그냥 ‘평’이었다.  나는 그 당시 (지금도 남아 있지만) 밥을 먹을 때 습관중 하나가 반찬보다 밥을 먼저 먹는 것인데 이것은 절대로 반찬이 모자라지 않기 하기 위한 무의식적인 나의 노력이었다. 황성군은 그런 나의 식습관이 이상하게만 보였던 모양이었다. 꼭 한마디를 하곤 하였다.

채현관, 1962년

채현관, 1962년

하지만 나는 그것 보다는 그가 점심을 굶는 게 더 신경이 쓰였고 주변의 나의 친구들도 거의 무언중에 동감을 하고 있었다. 그 당시는 시골에서 보릿고개라고 해서 봄이 되면 실제로 굶는 농민들이 많다고 듣곤 했는데 서울의 노른자위에 있는 학교에서 점심을 굶는다는 게 사실 의아스럽기도 했다.  그러던 중 우리그룹 중에 우진규란 친구가 황성군의 점심을 돌아가면서 가져오자고 제안을 하였다. 사실 나는 그런 생각을 못 하였다. 그만큼 성숙치 못했다고나 할까. 우진규는 그런 면에서 확실히 성숙했던 친구였다. 무언중에 조금씩 괴로워하던 친구들이 다 동의를 하고 사정이 되는 대로 교대로 점심을 싸오기 시작하였다. 기억이 확실치는 않지만 황성군은 고맙게 점심을 다시 먹게 되었던 것 같다.

나중에 소문으로 들게는 되었지만 (그는 절대로 자기의 사정을 직접 이야기 한 적이 없었다) 집안의 사정이 무엇인가 때문에 경제적으로 너무나 어려워 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당시 우리 나이에서는 실감은 잘 가지를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무언가 갑자기 커다란 빚을 지게 되지는 않았을까. 얼마나 급했으면 그 당시 담임선생님한테 까지 가서 돈을 꾸게 되었을까?  참 아득하게만 느껴지는 때의 어찌 보면 사심이 없고 꾸밈도 없고, 순진하기만 했던 그 서울 1962년. 나는 그곳으로 부터 얼마나 멀리 흘러 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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