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eld of dreams, trancending time & place, autobio in progress..

Monthly Archives: September 2009

재동국민학교, 1959년 경

 

재동”초등”학교가 아니고 나에겐 분명히 재동”국민”학교다. 이름에도 정치, 역사가 있지만 나에겐 100% “초등”학교가 아니었고 분명히 “국민”학교였다. 서기 1954년부터 1960년 초까지 나는 이곳에서 대한민국 어린이의 꿈을 키웠다. 서기 1954년이라고 하지만 이것도 그때는 “단기” 4287년이었다. 그러니까 단기 4287년부터 4293년 초까지다.  참 오래전. 일이다.

온통 나의 어린 시절은 이곳을 중심으로 이야기들이 만들어 졌다. 서울의 심장부에 속하던 종로구에서 가회동과 계동의 옆과 위에 접한 꿈의 운동장. 이곳에서 얼마나 많이 순진한 꿈을 꾸며 뛰어 놀았던가? 여기서는 누구나 감상적이 되지 않을 수 가 없을 것이다.

 

취운정 활터에서 힘을 기르고

엣궁의 거문고로 마음을 닦던

빛나는 화랑정신 이어 나가자

우리는 재동학교 나라의 새싹

 

재동학교 교가. 아마도 1~2학년 때 부터 이 ‘새’교가를 불렀지 않았을까? 누가 이 사실을 기억을 할까? 그 당시 이 ‘취운정’이란 게 무엇인지도 모르고 열심히 불렀다. 최근에서야 인터넷의 힘으로 옛날 옛적에, 언제인지는 잘 모르지만, 재동학교 근처에 있었던 고적지란 것을 알게 되었다.  재동학교 졸업 앨범을 보면 ‘윤성종’작사라고 보인다. 작곡은 ‘김성태’로 되어있다.  김성태라고 하면 물론 귀에 아주 익은 이름인데 윤성종은 전혀 무언가 떠오르지를 않는구나. 이 교가는 물론 아직도 100% 가사를 안 보고 부를 수 있다. 이것이 그 나이 또래의 기억력이다. 무서울 정도이지 않을까?

입학하기 전부터 생각이 나는 게, 그러니까 아마도 6.25동란이 끝나기 전인 듯싶다. 그때 나는 돈화문 (비원정문)근처의 원서동에서 아버지가 납북되시고 어머니, 누나와 같이 살았는데 재동학교에서 화재가 나서 전체 건물의 반이 불에 타 버린 것을 생생히 기억을 한다. 그 나이에는 불이 나면 무선 ‘경사’라도 난 듯이 그곳으로 뛰어 가지 않았던가? 그때 재동학교는 아마도 군인병원으로 임시로 씌어졌던 모양인데, 왜 불이 났는지는 확실치 않다. 혹시나 폭격이라도 당하지 않았을까?  그때 타버린 건물은 몇 년 뒤에 미군들의 도움으로 새 건물로 태어났고 동시에 나머지 건물들도 한층 씩 더 올려지게 되었다.  5학년 때 갑자기 모두 운동장에 나가서 ‘즐겁게 뛰어놀라’ 는 지시에 전 학년 생과 선생님들 모두 나와 그야 말로 뛰어놀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 미군들이 와서 사진(그리고 아마도 영화도)을 찍고 있었다. 그때는 미군을 보는 게 참 즐거운 일 이었는데 (우리를 공산당으로 부터 구해준 십자군?) 그들이 사진을 찍으니 우리들은 더 신들린 듯이 뛰어 놀았다.

은사님들을 생각해 본다. 교장 선생님. 심원구 선생님이 거의 5년 동안 나의 교장선생님이셨다. 6학년 때에 지금 졸업앨범에 찍히신 윤형모교장 선생님께서 오셨다. 아마도 5학년 중에 부임을 하셨던 게 아닌가. 누군가 이것을 기억할 수 있다면. 5학년 때 인천으로 당일치기 수학여행을 갔을 때 사진에 심원구 선생님이 보이시니까 분명히 5학년 까지는 계셨던 것이다.  선생님들. 지금 모두 어떻게 지내실까. 혹시나 연로하셔서 타계나 인하셨을까? 이걸 어떻게 알아 볼 수 없을까?

1학년 때의 담임선생님 윤원범 (여자)선생님. 졸업앨범에 없다. 졸업 전에 떠나신 것이다. 그 옛날. 1학년 때.. 그때 나는 학교 가는 게 아주 싫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모두들 엄마의 손을 잡고 학교엘 오곤 했는데 나는 그렇지 못했다. 그때 어머니는 이미 생활전선에 뛰어든 뒤였다. 옆집 친구 할머니의 손을 잡고 가곤 했다. 그 친구는 ‘안윤희’였다. 그런 중에 드디어 대형 사고를 쳤는데. 그만 학교를 안 간 것이다. 원서동에서 재동학교를 가려면 계동을 지나는데 거기에 대동상고가 있었다. 거기에서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내다 집에 가곤 했다. 내가 “깡”이 있어서라기보다는 그만큼 학교가 싫었던 게 아니었을까. 얼마나 그랬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우리 집의 주인아저씨가 (그때 우리는 세를 들어서 살았다) 나를 보았다고 했다. 들통이 나고 어머니는 장장문의 편지를 써서 나를 학교로 데리고 갔다. 그때 윤원범 선생님이 담임이었다.

아마도 윤 선생님이 나를 조금 더 자상하게 대했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있었다. 조금은 무뚝뚝한 여선생님. 한번은 연필을 가지고 가지 않았다고 나를 그냥 (다른 아이와 같이) 돌려보낸 적도 있었다. 그때는 담담히 받아 들였다. 나중에 생각하면 조금 내 자신이 불쌍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어머니가 그만큼 바쁜 탓도 있지만 우선은 나의 잘못이었다.  몇 년 후에 우리 집에서 일하던 아줌마(그때는 모두 식모라고 불렀다)가 알고 보니 그 윤원범 선생님의 집에서 머물며 밥을 해 주었다고 들었다. 참 반가운 소식이었다. 그 선생님은 그때 결혼 전이셨는데 그 후에 결혼을 하셨는지 알 길이 없다. 마지막을 뵌 건 2학년이 되자마자 교과서를 받으러 선생님을 교무실로 찾아간 때였다. 그때는 밝게 웃으시며 공부 잘하라고 격려를 해 주신 기억이다.

2학년으로 올라가며 선생님도 바뀌고 물론 친구들도 모두 바뀌었는데 나는 그때 너무도 놀라고 슬퍼서 집으로 걸어오는 길 내내 울었던 기억이다. 그 이후로 나는 학년이 바뀔 때쯤이면 필요이상의 stress를 느끼곤 했다. 나의 성격이 아마도 수줍고, 조용해서 남들보다 더 예민하게 받아 들였는지 모른다.  2학년 때 선생님의 이름을 기억을 못하는데 이것이 내가 유일하게 기억 못하는 선생님이 되었다. 얼굴은 생각이 난다. 유별나게 신경질 적인 여자 선생님.. 대나무로 만든 자로 손바닥을 아프게 맞았던 것도 쓰라린 기억이어서 아주 나쁜 기억이 되었다. 1,2학년 때는 사진도 없었다. 그때는 사진기도 흔치 않았지만 그래도 조금씩 남는 법인데 그때는 아주 암흑의 학년이 된 것이다.

 

재동국민학교 3학년 학급사진, 1956년

 

3학년 때는 학급단체 사진이 아주 잘 남아 있다. 3학년의 담임 배은식 선생님. 앨범에도 남아있다. 참 다정스런 아줌마 타입의 선생님.. 학년이 올라 갈수록 사진은 많아 졌다. 하지만 불행히도 4학년 때는 없다. 왜 그랬을까?  4학년 담임 김경구 선생님. 미술이 전공인 담임. 항상 수염자국이 뚜렷한 남자 처음 남자 선생님. 물론 4학년부터 남자, 여자 반이 갈리었다. 모든 게. 우락부락하게만 느껴져서 나도 그곳에 적응을 할 수 밖에. 그때 처음 죽마고우중의 하나 안명성을 만났다. 같은 원서동에 살아서 죽마고우가 된 친구다.

4학년의 기억은 조금 고통스럽다고나 할까. 이 김경구 선생님은 좀 독특한 스타일로 가르치셨는데. 그중에 하나가 ‘공부한 시간표’라는 유별난 system을 고집하면서 1년 동안 우리를 괴롭혔다. 한 마디로 하루에 최소한 4시간 이상 집에서 공부 했다는 것을 증거로 부모님의 도장을 받아오는 것이었다. 그 나이에 하루에 집에서 4시간을 꼬박 공부를 할 수 있을까?  진정한 목적이 무엇인지는 아직도 잘 이해가 안 가지만 모두들 ‘거짓도장’을 잘도 받아서 제출을 하였다. 항상 양심의 가책을 받으며 어머니 도장을 몰래 찍는다는 것은 그 나이에도 괴로운 일이었다. 그래도 어떤 아이들은 3시간 30분이라고 적어 오기도 했는데. 그게 정말로 3시간 30분을 공부 했는지. 아니면 양심의 가책으로 30분을 일부러 뺏는지. 아직도 불가사의다.  결과적으로 김경구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사회에 나가서 survive하는 예비 훈련을 시키신 셈이다.

 

5학년때, 인천 만국공원, 1일 수학여행, 1958년

 

5학년의 추억은 참 밝기만 하다. 담임은 이원의 선생님.. 지금 생각해 보면 이 선생님은 ‘반 입시형’인 ‘미국식’ 선생님이라고나 할까? 교과서를 줄줄 외우는 스타일이 전혀 아니고 실습과 생활. 탈교과서적인 그런 쪽을 강조하신 선생님.. 그 당시는 아마도 학부형들에게 별로 호응을 못 얻으셨을 지도 모른다.  자연공부도 실습으로 하시고, 음악은 전공 선생님을 불러 오셨다. 여름방학 일기는 ‘일일 일선 (하루에 한 가지 좋은 일 하기)’ 을 주제로 삼으셨다. 그래서인지 외우는 것 같은 것은 거의 배운 기억이 없지만. 아직도 그 선생님의 스타일이 멋지기 느껴지는 것은 왜 그럴까? 그렇다. 그렇게 계속 가르치시면 절대로 우리들을 ‘좋은 학교’로 진학시키기 어렵다. 그래서 모든 게 균형이 맞아야 하는 것일까?

 

5학년말 교생실습후 단체사진

 

6학년은 5학년 때와 정 반대의 담임선생님이 오셨다. 학부모들은 아마도 ‘구세주’가 오셨다고 했을 듯하다.  새 6학년 담임은 박양신 선생님인데 바로 서울 안산국민학교에서 전근을 오셨다. 무언가 다르다고 모두들 짐작은 했는데 정말 공부시간이 되어보니 정말 완전히 이건 입시준비학원 style로 분위기가 변한 것이다.  학부형들은 완전히 무언가를 느꼈는지 치맛바람의 극치를 이루며 교실을 들락거렸다. 아주 학교에서 살다시피 하는 엄마들도 있었고, 공부시간에도 쉬는 시간만 되면 재빨리 들어와 선생님의 책상을 청소하거나 무언가 놓고 가거나 할 정도였다.

5학년 담임선생님 이원의 선생님도 6학년 다른 반의 담임이 되셨는데, 나의 짐작대로 절대로 입시준비를 하는 그런 style이 아니셨고 결과적으로 예상대로 아주 결과는 참담한 듯 했다. 결과란 것은 물론 일류 중학교 합격률을 뜻하는 것이다. 친구 안명성이 그 선생님의 반에 있었는데 항상 부정적으로 선생님을 평하였다. 과장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많은 시간 ‘양호실’에 누워 계셨다고 했다. 그게 게으르다는 뜻인지 정말로 몸이 편찮으셨는지는 아직도 알 수가 없다.

6학년의 추억은 아주 또렷하고 생생하다. 처음 겪는 ‘입시’공부였고 이 박양신 선생님은 요샛말로 ‘수험의 신‘ 이셨다. 좋게 말하면 많은 입시용 지식을 그 어린 머릿속에 아주 효과적으로 주입 시키셨다. 나쁘게 말하면 어린이의 꿈의 시간, 공간을 많이 빼앗아 갔다고나 할까. 사실을 말하면 그 중간 정도일 것이다. 한 가지 아주 인상적인 것은 가끔 수업을 ‘정규’시간에서 벗어나 저녁때 까지 연장을 해서 한 것이다. 그야말로 어두워서 책이 안보일 때 까지 하는 것이다. 전등을 킬 수가 없으니까 그런 것인데.. 사실 힘은 들었지만 무슨 캠핑을 간 듯한 기분도 들어서 한편으론 재미있기까지 하였다. 이런 모든 것들은 분명히 학부모들을 아주 만족시켰으리라 짐작을 해도 무리는 아닐 듯하다. 또한 다른 6학년 담임들의 선망과 질시를 받았다고 생각해도 무방할 듯.

그때 우연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우리 반에 정말 공부를 잘하는 녀석들이 많이도 모여 있었다. 하기야 반을 가를 때 완전히 random하게 할 터인데 우연이라고 봐야 할 듯 하지만, 우연치고는 참 선생님의 운도 좋았다.  지금도 생각나는 애들.. 이만재, 김두철, 정세종, 조성태, 이정택, 장정석, 전경훈, 이규재, 한윤석, 심동섭, 김정훈, 임한길, 신문영, 유성희, 김승종.. 사실 앨범을 보면서 이름을 떠올리지만.. 이들이 소위 말해서 1분단의 member들인데.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제일 공부를 잘하는 애들 그룹이다. 나도 나중에는 그 그룹에 들어가는 ‘영광’을 누리긴 했다.

이들은 입시에서 거의 경기, 서울, 경복, 용산으로 이루어지는 1류 공립중학에 들어갔다. 하지만 자세히 누가 어디에 갔는지는 아직도 확실치 않다. 분명한 것은. 이만재, 김두철, 김정훈은 경기였고, 심동섭은 경복이라는 사실뿐이다. 아직도 궁금한 것은 신문영과 이규재.. 인데. 알 길이 없다. 이규재는 나의 짝이었고.. 신문영은 내가 혼자 그냥 좋아하던 애였다. 이만재는 나중에 Internet을 통해서 숙명여대 교수인 것과 전자/컴퓨터전공이란 것을 알았다. 신문영은 내가 연세대학에 다닐 때 잠깐 본 듯한데 말을 걸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김두철은 서울공대 입학시험을 볼 때 멀리서 보았는데 아마도 그의 경기고 후배 응원 차 나온듯한 모습이었다.

우리 6학년 1반, 박양신 “사단”의 system중에 독특한 것은 가차 없는 경쟁유도체제 이었다. 그것은 거의 매일 치루는 모의고사의 성적에 의해서 앉는 자리, 그러니까 분단의 위치가 바뀌는 것이다.  그 당시는 그게 적응이 되어서 몰랐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면 참으로 잔인한 것이었다. 아마도 다른 어느 반에도 그런 것은 없었을 듯하다.  ‘공부 잘하는’ 1 분단으로 올라가려면 죽어라 시험을 잘 보아야 했다. 1분단에 올라갔으면 떨어지지 않으려고 또 죽어라 공부를 해야 했다.  그러데 이상한 것은 그다지 생각만큼 자리가 쉽게 바뀌지를 않았다. 그만큼 성적의 순위가 바뀌기가 어렵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니까 공부 잘하는 애들은 거의 항상 잘했고 못하는 애들은 거의 항상 못한 셈이다.

나는 6학년에 들어오면서 어머니가 신경을 많이 쓰셨다. 이제까지는 그다지 성적에 집착을 안 하셨는데 학기가 조금 지나면서 선생님을 만나고 오시더니 한숨 투성 이었다. 물론 나의 성적이 아주 안 좋다는 얘기였다. 1분단은 꿈에도 못 꾸는 처지였다. 그러더니 어느 날 한 고등학생을 데리고 들어오셨는데. 알고 보니 가정교사인 셈이었다. 그 당시는 대학생보다 고등학생들이 과외선생을 많이 했다. 특히 경기고 같으면 더 많이 했을 것이다. 김용기라는 경기고 2년생이었다.

그러니까 그 때 부터 나는 학교에서도 공부, 집에 와서도 공부하는 신세가 되었는데, 생각보다 효과가 좋았다. 공부도 점점 재미가 있어졌고 따라서 학교성적도 오르기 시작했다. 결국에는 곧 대망의 1분단으로 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부터는 떨어지지 않겠다는 stress가 나를 괴롭혔다.  그래도 졸업 할 때까지 다행히 1분단을 고수를 할 수는 있었다.

또 한 가지 잊혀 지지 않는 것. 이것도 다른 반에선 없던 그런 것이다. 그러니까 1분단의 반대편에 있는 제일 쳐지는 분단 애들이 있다. 성적순으로 제일 밑인 셈이다. 그들의 심정이야 이해를 하기 어렵지 않다. 하지만 제일 기억에. 그것도 좋은, 즐거운 기억으로 남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애들은 비록 공부는 힘들었어도 유머와 여유가 있었다. 쉬는 시간만 되면 그들은 group으로 앞에 나가서 코미디를 하거나 유행가를 합창으로 부르곤 했다. 거의  pro의 수준이었다. 그게 그당시 그렇게 즐겁고 재미있었다. 그 애들은 입시공부도 거의 포기한 듯한 모습들이었는데도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그들은 지금 다 무엇을 하는고..

보고싶다, 친구야.. 정문신

보고싶다, 친구야.. 정문신

졸업하면서 거의 영원히 소식들이 끊어진 친구들.. 여기서 몇몇을 회상하고 싶다. 정문신. 정문신. 아 잊을 수 없다. 내가 1분단으로 이사하기 전에 짝을 하던 친구다. 짝이라 친했는지는 모르지만 이상하게 그 애가 그렇게 나는 좋았다. 아주 이상할 정도로 좋았다. 그 애가 나를 좋아하는 정도보다 훨씬 내가 더 좋아했다. 여름방학이 되면서 나는 그 애가 그렇게 보고 싶었다. 이건 내가 생각해도 이상할 노릇이었다. 오죽하면 여름방학이 빨리 끝나기를 기다렸을까? 그 나이에 동성애였나? 우습기만 하다. 졸업을 하고서 다른 친구 김천일이 그 애 사는 곳을 안다고 해서 솔깃했는데. 그대로 지나가 버리고 말았다. 정문신. 어디선가 살아 있다면 그때 내가 그렇게 좋아했다는 사실을 알아주기 바란다.

그 당시에 이승만 정권에 식상한 국민의 여론이 서서히 야당 쪽으로 기울기 시작한 시기였다. 그리고 정치바람이 학교까지 들이 닥쳤다. 그 당시에 우리들은 별로 잘 이해를 못했지만 무언가 크게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느끼긴 했다. 하긴 우리나이 또래면 북한(그때는 북괴라고 했다)에 못지않게 이승만대통령을 거의 영웅처럼 생각했다. 그렇게 교육을 시켰다. 반공, 반일로 일관된 교육 속에서 우리들은 자랐다.

그런데 아마도 정부에서 우리또래 학생들에게도 선거운동을 시킨 모양이었다. 우리들은 선거권은 비록 없지만 아마도 부모를 설득하도록 한 것이나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선생님들을 시켜서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지금도 나는 실망을 금치 못한다. 우리 입시의 아니 수험의 신이신 박양신 선생님은 자발적으로 우리를 설득했다. 우리가 무엇을 안다고 여당은 좋은 사람들이고 야당은 나쁜 사람들이라고.. 비록 선생님은 경기, 서울, 경복에 많이 입학은 시키셨어도 진짜 교육은 못하셨다고 이제껏 확신을 한다.

이렇게 졸업은 해서 재동학교는 떠났지만 그 후 3년 동안 몸은 떠나지 않았다. 집이 바로 재동학교 후문 옆에 있었기 때문에 중학교 3년 다닐 때 까지 옆에서 보며, 야구를 할 때면 운동장을 빌려 놀곤 했다. 나의 어린 시절은 온통 재동학교가 꽉 가운데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다행인 것은 그 많은 역사 깊은 국민학교들이 문을 닫거나 이사를 가거나 했다지만 우리 재동학교는 아직도 같은 위치에 건재하다고 들었다. 얼마나 다행인가. 그야말로 모교. 나의 어머니격이다. 그게 아직도 건재하다니.. 부디 오래 오래 더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희망도 해 본다.

 

Come September……란 미국노래가 있었지. 멜로디는 금방 생각이 안 난다. 그리고 Try to Remember란 노래에도 9월이 나온다.  Try to remember the kind of September…… 아…… 또 지나가는 9월.. 이렇게 또 세월은 지나가는 건가.  별로 한 일도 없으면서 말이다.  아마도 이것저것 연결이 잘 안 되는 그런 잡스러운 것들을 조금씩은 했을 꺼다.  하지만 그것들이 제대로 서로 연결되는 것이 없는 게 내가 하는 일들의 특징이고 내 인생의 특징이고.. 나의 최대의 문제점이다. 이걸 나는 이렇게 애도하지만 사실은 잠재적으로 즐기고 있다고 생각도 한다.

 이번 이 blog은 처음으로 OneNote로 부터 출발을 시도한다. 그러니까 Word Press의 조잡한 editor를 쓰지 않고 이 powerful OneNote를 base camp로 쓴다는 말이다. 오래 전부터 생각은 했지만 나의 특유의 ‘생각만 하고 실행을 안 하는’ 그 골칫거리 덕분에 이제야 시도를 한다. 하지만 이렇게 늦게나마 하는 것이 또한 나의 특징이라고 할까.  참 나란 놈은 내가 생각해도 우습 기만하다.

 이것은 나의 home server의 My Little Corner(MLC) 의 blog에 Diary tag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하지만 9월 15일이 최근 것인데 제목이 “한 줄 이라도 쓰자” 이었다…… 후후후.. 보름 동안 한 줄은커녕 한자도 못썼지 않은가? 왜 이렇게 쓰는 것이 힘 드는 것일까? 나의 매일 routine이 나를 이렇게 만드는 것일까?  하지만 그 동안에 serony.com blog의 new entry를 썼는데 아직 upload는 못했다. 제목은 “아…재동학교” 이다. 오랫동안 머릿속에서만 맴돌던 것들을 정말 두서없이 썼다. 조금은 속이 후련했다.

 그 이후로는 사실 나의 머릿속은 이곳의 날씨로 가득했다. 작년의 정말 ‘즐겁던’ 가을 날씨만 그리며 기대를 했는데 정반대의 현실을 보게 되었다. 밤까지 계속되는 끈적거리는 날씨를 보내더니 결국에는 ‘장마 형’ 홍수까지 보게 되었다. 6월부터 시작되던 나의 날씨혐오증의 거의 터지기 일보직전 이었다. 그런 게 결국은 Mother Nature의 도움으로 그제부터 하루아침에 가을이 와버렸다. 조금은 어리둥절할 정도로 변화가 심했지.  나의 지금 사는 방식이 나를 이렇게 한 가지, 그것도 쓰잘 것 없고, 소용없는 것에 매달리게 하는 것일까?  한 마디로 내가 바쁘지 않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내가 직장생활을 할 때 이런 것들을 경험한 기억.. 거의 없으니까.

 연숙의 2009 Sonata의 license tag은 결국은 tag office에 가서야 받을 수 있었다. 예전의 기억만 의지해서 우편으로 오는 것만 기다리던 내가 조금 우습기도 했다. 이제 Sonata는 100% 연숙의 차가 되었다. 내 이름은 그것에 아무데도 없다. 조금 섭섭할까 우려했지만 반대로 기분이 좋다. 왜 그럴까?  또한 번개처럼 떠오르는 것..을 사고야 말았다. Arduino라는 Made In Italy embedded board인데 $30정도 이었다. 물론 작은 돈은 아니지만 이 정도로 나를 위로할 수 있는 것도 드물다. 언젠가는 깊게 가지고 놀 그런 고급 toy가 아닐까?

 그 동안 또 한 가지 routine이 된 것이 있다. 아침마다 Tobey walk을 할 때 cell phone으로 나의 Google Voice phone #로 전화를 거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나의 PIAF-GV  home pbx를 test하려는 것으로 시작이 되었다. 이것으로 전화를 하면 Ext 104 (@DADPC)의 voice mail로 연결이 된다. 그러면 maximum 3분 가량 이야기를 record할 수 있다. 이것을 거의 매일 하다 보니까.. 이게 일기처럼 느껴진다. 나의 목소리도 생각보다 초라하게 들린다. 조금 실망을 했다. 그리고 참 내가 말을 정말 안 하고 사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다. 이렇게도 말하는 게 힘이 든단 말 인가. 하지만 거꾸로 생각을 해 보면 이것을 매일 하면 ‘연습’이 되어서 조금 나아지지 않을까? 

지난 8월초에 구역교우 엄 형제가 귀국하면서 송별 구역모임에서 뜻밖에 guitar로 우리부부가 노래를 불렀는데.. 그걸 계기로 다시 guitar를 잡게 되었다. 물론 거의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조금씩 생각이 나는 걸 보고 조금 놀랐다. 하지만 나의 목소리는 완전히 갔다는 것을 알았다. 목소리를 거의 죽이고 살았지 않은가. 조금은 겁도 나고 해서 의도적으로 목소리를 돋운다. 밤마다 하는 묵주기도에서도 일부러 목소리를 높이게도 되었다.

 한 가지 good news라면 정말 우연히.. 조금은 계획적이기도 했지만.. 현재 쓰고 있는 Actiontec internet modem을 오래 전에 쓰던 Alcatel SpeedTouch Home과 거의 버리기 직전의 Dlink router로 바꾸어 보았는데…… 이게 그때부터 Internet speed가 눈에 뜨이게 빨라졌다는 것 인데… 이게 우연인지.. 정말 모르겠다. 그래서 요새는 web browsing이 조금은 즐거운 일이 되었다. 동기는 물론 router에 있다. QoS 가 VoiP에서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는데.. 그러려면 QoS router가 필요했다. 그래서 또 거의 돌발적으로 Linksys WRT54GL router를 사고 말았다. 이것은 embedded LINUX firmware를 쓰는데 open source QoS router firmware가 이곳 저곳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계획은 이것을 router로 쓰려는 것이다. 그러면 VoiP을 쓸 때 outgoing voice quality가 많이 나아질 수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래저래 조금 $$을 쓰고 말았는데…… 나도 excuse가 있다. 그 동안 allowance로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 올해는 yard work도 별로 없어서.. 더 그렇다.

매일 한 줄이라도 쓰자.. 라고 얼마 전부터 생각을 했다. 그저 또 ‘실행’을 ‘안’할 뿐이다. 나의 자유라고.. 안 하는 것도 나만의 자유요 특권이라고 생각을 했겠지.  이제 이곳이 나의 세계, 나의 우주에서 정말 유일한 마음의 낙서장, 휴식처, 상담자가 되었다. 내가 유일하게 가식이 아닌 진실을 말할 수 있는 곳, 그게 유일한 위로다.

가을 같지도 않은 ‘엉터리 가을’로 접어든다. 정말 올해 여름으로 시작되는 ‘개 같은’ 이곳 날씨 이렇게 싫어 해본 적이 있을까? 날씨 가지고 불평하는 게 과연 올바른 것인지 모르지만 내가 탓할 수 있는 것 몇 가지 중에 가장 인기가 많은 곳일 게다. 한마디로 ‘개 같은’ 날씨다. 나를 괴롭힌다고 계속 생각하게 되었다. 짜증이 난다. 요새는 그 발악이 최악에 달해서 간밤에는 70도의 끈끈한 밤 같지 않은 밤이 되었다. 하지만 9월도 중순으로.. 생각에.. 첫 ‘추위’도 며칠 안 남았을지도.

정말 결과를 추적할 수 없는 ‘일’ 같지도 않은 것으로 몇 달을 보냈다. 내가 사랑하고 그런대로 정열이 남아있는 이 ‘일’들.. 나는 또 세월을 허송하고 있는 것이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일주일이라도 잊고 마음 편하게 지내는 게 더 현명할지도 모른다. 나는 그것을 못한다. 왜냐하면 너무나 무언가 불안하기 때문이다. Steven Covey의 말 대로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에 거의 모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도.

하지만 조금 위안을 삼는다면, 지난달에는 거금을 소비 했지 않는가? 이건 암만 생각해도 참 큰일을 한 것이다. 그렇게 마음을 졸이며 연숙이 minivan에 낑낑거리며 오르는 것을 보며 괴로워했는데 그게 순간에 없어졌다. 이건 참 기분이 흐뭇하고 좋은 일이다. 그래 이것만은 나의 initiative로 시작된 ‘거사’인 것이다. 나에게 축하를 해 주어야 할 일인 것이다.

나의 사랑하는 일기야.. 미안하다. 이렇게 또 늦게 너를 찾아왔구나. 찾기는 늦었지만 생각은 거의 매일 하였단다. 찾아 오려고 생각을 할 수록 더 너를 피하게 되는 나의 이 요상한 습관은 또 무엇일까? 조금이라도 무언가에 늦는다고 생각만 하면 포기해 버리고 그것도 모자라 아주 잊으려고 발버둥 치는 나의 이 아주 요상하고 이상한 습관과 생각들… 죽기 전에 다 고치고 싶은 그런  것들이다.

나의 머릿속에 있던 중요한 project들은 비록 요리조기 피하며 꾀는 부렸지만 예상외의 ‘과제’ 를 한 것은 그래도 조금은 흐뭇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새 차를 사게 된 것이다. 8월중의 반 이상은 아마도 이것을 생각하며 살았다고 해도 될는지.  이상하게도 견디기 싫은 이번 여름을 조금이라도 잊게 하여 주었던 것… 거의 10년만에 있는 ‘새 차 사기’ 행사.. 그 동안 생각만 하면 나의 가슴이 저며오던 새 차 사기.. 왜 그럴까.. 연숙이 해가 갈수록 이제는 그렇게 어울리지 않는 suburban style (soccer mom’s) minivan과 싸우는 것을 보면서 가슴이 저며 왔고.. 사실 나의 신세가 괴롭게 느껴지기 까지 하였다. 경제적인 사정이 이렇게 사람을 위축시킬 줄이야.. 물론 연숙이 새 차를 사 달라고 조른 적은커녕.. 불평한마디 없이 잘 타 주었다. 문제가 생겼을 때도 그런대로 잘 너머가 주었다. 다만 길거리에서 strand가 되었을 때는 정말 panic상태로 괴롭히지만  그것도 그때 뿐.. 하지만 그렇다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문제가 생기만 다른 차가 있어야 하고.. 그 점점 높게만 느껴지는 차를 타려고 ‘애를 쓰는’ 모습은 꿈에서도 나타날 지경이 아닌가..

조금씩 ‘주가’가 오르는 rollover IRA를 보면서 바보스러운 제안을 하게 되고.. 연숙이 그것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그것에 나는 용기를 얻게 되었다. 이번만은 서로가 무언가 맞았다. 그래서 거의 10년만에 조금은 걱정 없이 탈수 있는 새 차를 사게 되었다. 비록 IRA 의 balance는 떨어 졌어도 사실 그게 큰 문제는 아니다. 그것은 이제부터 우리가 필요하게 쓸 자원이 아닌가. 언제까지 살지는 모르지만 지금 이렇게 쓰는 것은 확실히 아주 잘 했다고 생각해 본다. 더 비싼 차도 조금 아쉽지만 다행히 나와 연숙은 그런 것에는 그렇게 연연하지 않지 않는가? 2009 Hyundai Sonata GLS… leather 가죽시트를 하였고 gas mileage도 거의 32마일이 넘는 4기통 앞으로 유지하기도 무리가 없는 .. 사실 우리에게 과분한 차 인지도 모른다.  이것은 100% 연숙의 차로 하였다. 법적으로도 연숙의 차다. 나는 그저 옆에서 유지하는 것을 도와주면 된다. 아.. 하느님 감사합니다. 이 어려운 시절에 이렇게 저희에게 ‘사치’를 허락해 주셔서 조금 저의 마음을 위로해 주셔서 감사 드립니다.

지난 두 달은 더위를 핑계로 ‘해야 할 일’에서 거의 손을 떼었다. 조금씩 진척을 보이던 정기적인 blogging도 이제야 처음으로 붓을 들게 되었고.. php/mysql쪽도 그렇게 손을 놓고 말았다. textpattern도 그렇고.. wordpress/joomla도 그렇다. 맥없이 손을 놓고 말았다. 물론 매일 매일 머릿속을 떠난 적은 없었다. 그게 나의 특유한 병신 같은 습관/고질이 아니던가? 나라니 가 새 laptop을 사게 되어서 나에게 ‘고물’ laptop이 굴러 들었다. 생각처럼 active하게 쓰지는 않았지만 앞으로 많은 역할을 기대한다.

같은 날 밤에 다시 쓴다. 역시 Kristie건 다른 곳이건 밖에 나가서 (뒷마당이 아닌) ‘일’을 끝내고 들어 오면 정말 기분이 날라간다. 이래서 그렇게 지겹게도 느껴지던 ‘회사생활’을 했나 보다. 긴장감을 조금이라도 느낀 후에 무슨 결과를 내고 ‘살아있는 진짜 인간들’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눈 후에 왔으니 이런 결과를 보는 것은 사실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예측히기 어렵지 않은가? 나는 이것을 진짜 잘 알고 있다.  거의 똑같은 pattern으로 경험하는 것이다. 내일은 슬프게만 느껴지는 9/11 8주년이 되는 날이다. 그날과 나의 그 동안의 커다란 생활의 변화, 나의 이러한 좋던 나쁘던 간의 기억과 추억들.. 무엇인가 혼동이 온다.

그렇다, 2000년 이후 나는 정말 커다란 ‘관’의 변화를 겪어 오고 있다. 2001년의 9/11, virtual retirement, 2002년의 장모님 타계, 2003년의 어머님 타계, 2004년의 새로니졸업, 나라니 대학입학, 2005년에 있었던 너무나 많았던 또래들의 장례식, .. 나의 우울증.. 2007년부터 시작된 나의 묵주기도생활.. 고질적이던 악습의 청산.. 정말 나의 인생에서 파란만장한 10년을 보내고 있다. 특히 죽음에 대한 나의 생각은 너무나 많은 변화를 보였다… 한마디로 죽음이 두렵지 않다. 너무나 두렵지 않은 사실이 오히려 두렵게 느껴질 때도 있다. 주위의 친지들의 말을 들으면 너무나 생에 애착을 보여준다. 그게 나는 그렇지 않아서 그들에게 나의 그러한 의견을 보여 주는 게 오히려 이상하게 보일까 걱정일 뿐이다. 그저 그들은 반 농담으로 들을 지도 모른다. 그렇다. 나는 참 비관적인 인생관을 지금 가지고 있는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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