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June 2010

No, still my php upload limit is set to 8M (with godaddy shared host), prevents me from uploading bigger sized file.  Changing php settings with shared host environment is downright miserable experience, not recommended (probably close to impossible. But a wonderful WordPress plugin 100% solved this annoying headache in a second! With plugin named “Add from server”, I was able to make any ‘media’ files which were ftp’d onto ‘upload’ folder recognized by WordPress’ media manager. This plugin literally instantly solved this stupid php 8M upload size limit. Thanks to the plugin author: Dion Hulse.

Korean War, 1950~1953: the name misleading that just North & South fought each other. Far from it. it was between all the major powers at that period of time. UN lead by US & other major WWII victors and some other smaller powers like Thailand and Philippine.

I was only 2 years old, remembering nothing about invasion on early Sunday morning, June 25th, 1950. We lived a small family, my older sister, my parents in Seoul on the day. Like many other family, we were deeply affected by this murderous crime against their other people by North’s Kim Il Sung (a Soviet puppet and product by Stalin).

Like blitzkrieg of WWII Germany, they took Seoul in 3 days by unmatched firepower and Soviet heavy tanks. Now, we know they could have taken Seoul in much shorter time, but eastern invasion through Choonchun took more time than planned. Our president at the time was Dr Syngman Rhee, stubborn politician but very anti-communist, anti-Japanese which make him very very unique and popular among people. But he and his cabinet almost ran away overnight well before other helpless mass of people.

When they’re gone, also took only bridge on Han river was destroyed, made it more difficult for ordinary citizens to flee from invading “People’s Army”. I still don’t know why our family of 4 didn’t get out of Seoul during the chaos. My mother didn’t tell us about it, but my guess is that would be safer to hide than flee under uncertainty. My father was a high school English teacher, must have feared the communists didn’t like ‘intelligent’ people. Then the occupying forces rounded up all able-bodied male, took them to north. We still don’t know the exact circumstances but my father somehow didn’t hide, maybe naively believe nothing like that would happen.

My earliest war memories are very fuzzy but real,  being under 3 years old. Our family of 3 lived (or hided) in a very small room well behind back courtyard of a house north of Seoul. I would guess it was summer of 1951 (well after landing of MacArthur’s Inchon, 2nd fall of Seoul by Chinese’s ‘Volunteer’ army, then pushed back to 38 parallel again by UN), relatively calm, but still hearing distant shell fires from northern Seoul.

Personally, I never seen dead bodies during the time, but remember lots of ruins, Jeeps and 3/4 ton trucks with GI’s, Turkish, British men.. ah, sky over Seoul was literally enveloped with F-86 Saber fighter planes, along with others like with fuel tanks at tip of wings (was it Mustang? no, it was Jet, probably F-9 Navy Jets). The almost stable battle front moved back up to the original 38th parallel, meaning Seoul looks relatively safe.

Without knowing my father’s fate, means for living, my mother struggles to make ends meet everyday for us. She found a work near where we used to live (near Secret Garden palace in the heart of Seoul) preparing foods for some ladies who comfort foreign soldiers mostly GIs and British soldiers stationed nearby high school(Hweemoon). I understand her work sounds embarrassing to her background (truly housewife, post-secondary graduates) but that’s the only work she could find. Now, many hours during her work, I used to play in the ladies’ house, seen many nice-looking soldiers with shiny medals, pistols, binoculars etc. They were very very kind to me (only 4 years old), gave me ‘genuine’ chocolates and candies.

The troop stationed nearby high school also distributed fresh milk, dried milk, dried eggs etc to our neighbors, lots of them. We’re treated fairly and nicely, but sometimes accidents happen like kids run over by 3/4 trucks, so tragic. After all, this is a war.. we all knew bad things bound to happen like that. July, 1953 saw end of war by truce. At least no more killings.. that’s good but the invading criminal Kim Il-sung’s regime stands still occupying northern half of Korean peninsula, no war criminals brought to justice, either.

Like us, so many family got broken up, losing fathers, mothers, grand parents, etc etc. Nobody witnessed the fate of my father. My mother sometimes relied upon fortune-teller about his fate, telling us he’s been killed while taken to north. I never remember him, but my older sister (3 years older) remember him vaguely, not vividly. From pictures, he looks very handsome scholar type. If he had survived to live with us, probably becomes a wonderful professor in college teaching English.

After 60 years, the criminal government still lives, now Kim Il-sung’s lunatic son ruining, starving his own people. History is there vividly, some not-so-smart people still try to rewrite the history to their own ideology. I’m really worried about the near future of Korea, knowing the North’s history, crazy government (more like Mafia than government).

한참 오래 전부터 내가 다닌 서울중앙고등학교에 대한 추억을 글로 쓰고 싶었다. 중앙중학교의 추억은 전에 조금 언급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느낀 것 중의 하나는 생각과 글의 차이였다. 생각을 글로 적는 것이 대개 어렵다고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라는 것, 하지만 일단 생각이 글로 남게 되면 그것이 또 생각 자체에 영향을 준다는 것 등이다. 하지만 다행인 것은 이 글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사실적인 것에 있다. 물론 느낌이나 100% 주관적인 평이 곁들임은 할 수가 없겠지만.

나는 서울계동1번지에 위치한 역사 깊은 사립명문학교인 중앙학교(중,고등)를 1960년부터 1966년까지 다니고 졸업을 하였다. 그러니까 나의 인생의 바탕을 형성한 사춘기를 대부분 이곳에서 보냈던 것이다. 이것은 지금 생각하면 참 의미가 있는 사실이다. 그곳의 지리적 환경, 은사님들의 성품, 주변 친구나 동창생들의 영향.. 같은 것을 생각하면 참 그곳이 그렇게 의미 있고 중요할 수가 없다.

오늘은 고등학교 1학년을 추억할까..1963년.. 5.16 군사혁명 2년 후 모든 것들은 국가재건의 슬로건으로 행해졌다. 그 나이에 우리들은 정말 국가재건을 믿었다. 벌써 무언가 달라지고 좋아짐을 조금씩 느꼈으니까. 그런 시대에 고등학생이 되었다는 것 자체에 보람과 가슴 설렘이 있었다.

김대붕 선생님

김대붕 담임 선생님, 1962년 중학교 앨범에서

나는 1학년 2반에 속했고, 담임은 음악선생님이신 김대붕 선생님이셨다. 김선생님은 이미 중학교에서 음악수업으로 알고 있던 선생님이셨다. 그러니까 선생님도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옮기신 것이다. 나중에 알았지만 김선생님은 5.16혁명 뒤에 군대미필로 학교를 잠시 떠나셨던 듯 하다. 그런 선생님이 중학교 때 몇 분 계셨는데 기억나는 분이 미술을 가르치시던 박기만 선생님. 그러니까 예능분야의 선생님들이 군대를 미필하고 학교에 재직을 하신 셈이었다.

김대붕 선생님은 조금 예술인답게 내성적인 듯 보였지만 나는 수업 중에 한번 따귀를 맞은 경험이 있어서 조금 감정도 있고 조금 무섭기도 했다. 중학교 2학년 때였나.. 음악숙제로 ‘노래작곡’ 이 있었는데, 사실 나는 전혀 어떻게 할 줄을 몰라서 5선지의 기본 룰을 완전히 무시한 채 ‘콩나물 대가리’를 잔뜩 그려서 갔다. 그것을 본 선생님은 이건 완전히 자기를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것이라고 오해를 하고 나의 따귀를 올려 부쳤다. 물론 나는 그런 의도는 전혀 없었는데.

교실은 고교 본관 바로 뒤에 있는 붉은 벽돌교사.. 앞에서 보면 바른쪽에 있던 것이었다. 일층에 두 번째 일학년 2반이 있었다. 그 옆에는 1학년 1반, 담임은 이대호선생님(별명: 망치).. 나머지 반들은 거의 기억이 없고.. 1학년에 들어오면서 나는 아주 외로움을 느꼈는데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이 하나도 같은 반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참 의외였다. 한두 명은 있게 마련인데. 이것으로써 나의 1학년은 외롭게 지낼 것 같은 기분으로 시작이 되었다.

나는 키가 작아서 10번도 채 안된 1분단에 있었는데, 그 주변에는 지금도 기억이 나는 사람들: 이강호, 신명현, 김근주, 정양조, 이종식, 김대철, 김용우, 한중희, 박태동.. 과연 이들 전부가 1분단인지는 100%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때의 사진 한 장이 기적적으로 남아서 아마도 맞을 것 같다. 그때의 사진은 1학년 겨울쯤, 미술시간인가 에서 사진 찍기 실습이 있었는데 그때 서울시장 윤치영씨의 아들 윤인선이 우리분단을 찍었던 듯 하다. 왜 그가 우리 분단을 찍었는지 확실한 정황은 기억에 없다. 하지만 사진은 기적적으로 이렇게 남았다. 이들 중에는 이미 타계한 친구도 있었는데, 김대철.. 연세대에서 잠깐 보았는데 아마도 대학재학시절에 정말 젊은 나이에 타계를 한 것이다.

중앙고 1학년때 1분단사진

중앙고 1학년때 사진실습 시간에 1분단친구들과

그 당시 이 같은 분단친구들은 나의 마음의 친구들은아니었다. 무언가 나하고 맞지를 않았고 심지어 나는 이들과 더 가깝게 지내지 못한다는 스트레스까지 받기도 했다. 기억에 김근주는 정양조, 신명현 등등과 아주 가깝게 지냈다. 그들이 김근주의 집으로 놀러 간다는 것을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김용우는 아주 활발하고 특히 수업 중에 멋진 질문들을 많이 하기도 해서 나는 그것이 정말 부러웠다. 김대철은 수학을 잘했고, 특히 동아출판사 해석정설 같은 책을 수업시간 사이에 풀기도 했다. 박태동은 별명이 모택동이었다. 키가 우리보다 훨씬 컸는데 어째서 1분단이었는지.. 아니면 1분단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그때 한 분단이 10명이 아니고 8명 정도였는지도.. 정양조는 양조장으로 통했고, 키에 비해서 아주 매서운 친구였다. 신명현은 아마도 소위 말하는 타교출신.. 그러니까 중앙중학교 출신이 아니고 전라도 광주인가에서 왔던 듯 하다. 기억에 광주일고를 못 가서 이곳에 왔다고 했다. 이강호도 마찬가지로 타교출신..

그때 우리 집은 부득이한 이유로 거의 6년을 살았던 정든 가회동 집에서 도심한복판의 남대문시장 옆 회현동으로 이사를 했다. 불과 1년밖에 못살았지만 사람의 주거환경이 얼마나 중요한지 실감한 때였다. 그곳은 절대로 학생들이 살만한 좋은 주거환경은 아니었다. 어머니가 생활하시는데 조금 편해서 잠시 간 곳이었다. 그 여파로 나는 난생 처음으로 통학이란 걸 시작했다. 그 콩나물 시루 같은 버스.. 그립기도 하다. 퇴계로에서 타면 재동 앞가지 왔고, 거기서 계동골목으로 해서 학교엘 갔다. 그곳에서 나는 고1을 보냈다. 옛 동네친구들은 여전히 집에 놀러 오곤 했지만 학교에선 외톨이 같이 지냈다.

그래도 뇌리에 강하게 남았던 기억들은 좋은, 심지어 그리운 추억으로 남는다. 예를 들면, 영어선생님이셨던 양창승선생님, 새해의 노래 Auld Lang Sine을 고어영어로 가르쳐 주셨다. 그때 배웠던 덕분에 두고두고 덕을 보았다. 망치 이대호 선생님의 한문시간, 정말 그때 그렇게 배워서 두고두고 덕을 보았고, 지금도 덕을 보고 있다. 누가 한자가 나중에 영어만큼 중요하게 될 줄을 알았을까? 김대붕 선생님, 그 어려운 시창교본, 코르위붕겐..억지로 배웠지만 그때 조금 악보의 감을 잡았다고나 할까.. 역도선수 출신 체육선생님 김종훈선생님.. 주길준 교련선생님의 기억도 대단하다. 그때 중앙고의 교련조회와 교련수업은 아마도 전국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었을 듯하다. 주길준 선생님, 일명 “나까무라”, 일본군을 연상시켜서 그랬을까? 특히 교련수업에서 도표를 놓고 박격포, 기관총 등등을 배운 것도 인상적이고 밖에서 교련 수업할 때면 꼭 ‘반동’ 체조를 시키곤 했다. 이 반동체조란 체조가 아니고 양손을 허리에 걸치고 박자에 맞추어서 흔드는 것이었다. 나를 그 것이 너무도 어색하고 이상하고, 하지만 재미있었다.

최복현 교장선생님

최복현 교장선생님

1963년은 중앙고교에서 의미 있는 해 이기도 했다. 저돌적인 에너지로 최복현 교장선생님이 중앙(재건) 6개년 계획이란 것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혁명정부에서는 국가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란 것을 한창 선전할 때였다. 한마디로 말해서 중앙고 졸업생들이 서울대학을 비롯한 소위 명문대에 지금 보다 더 많이 합격을 시키겠다는 그런 계획이었다. 그 계획의 자세한 것은 다 잊어버렸지만 목표는 서울의 일류고교인 경기,서울,경복 등을 따라가겠다는 정말 대담한 계획이었다. 그 계획에 따라 우리는 주중고사라는 시험을 매주 정교시가 시작되기 전에 치르곤 했다. 확실히 공부를 더 하게 된 것은 사실이었다.

최복현 교장선생님은 참 독특하고 고집스러운, 그런 면이 있었다. 교련조회 때면 ‘수위모자’를 쓰시고 분열, 열병을 하셨다. 그 없던 시절이 full orchestra를 만들기도 했고, 조회시간에는 외부에서 유명한 분들을 모셔다가 연설, 강의를 듣게도 하셨다. 예를 들면 고2때에는 그 유명했던 “국보” 양주동박사를 초청한 것이다. 그리고 독특한 것은 ‘소년군’이란 걸 만드셨다. 이것은 boy scout 소년단과 아주 다른 것이었다. 모든 재학생이 다 소년군에 가입이 되는 것이었다. 반면 소년단은 그야말로 boy scout으로 그 당시 여건으로 보아서 돈이 꽤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었다. 소년군은 한마디로 모든 학생들에게 더 높은 목표를 주는 그런 것이 목표였다.

최 교장선생님은 또 ‘본토박이’ 영어에 신경을 쓰셨다. 지리학 전공이신 선생님이 영어에 신경을 쓰신 것은 입시공부와는 아주 거리가 먼 것이었고, 정말 미래지향적인 것이었다. 어떻게 구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미국에서 출판된 ‘원서’, 일명 “프리즈” 영어 책이 주 교재였고 그것을 전교 학생들에게 공부하도록 지시하셨다. 일류대목표 6개년 계획과는 별도로 진행된 아주 신선한 시도였다. 하지만 이것은 높은 목표 (본토영어로 회화하는 것?)에 비해서 시간이 가면서 입시공부에 밀려 소리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미술선생님 또한 잊을 수 없다. 불행히도 존함이 확실치.. 아마도 이두영선생님이 아닐까? 기억나시는 동창들이 있으면 고쳐 주시기 바란다. 그 선생님은 지금 생각하면 완전히 미술 프로였다. 적당히 가르치는 미술선생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입시에서는 비록 인기과목이 아닐지라도 그것에 구애를 받지 않고 정열적으로 미술시간을 이끄셨다. 그만큼 우리들에게 스트레스도 많이 주신 것이다. 숙제를 게을리할 수가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들은 선생님을 따르게 되었다. 기름으로 범벅이 된 미술시간에는 신기한 추상화를 그리게 되었고, 학년이 끝날 무렵에는 학생전체가 참여해서 ‘집단화’라는 것을 그리기도 했다. 그것은 결국 고등학교 본관 lobby에 자랑스럽게 걸려서 외부인들에게 오랫동안 전시가 되었다.

1학년 학교단체소풍도 생각이 난다. 소풍을 갔을 때, 김대붕 선생님의 자상함을 잊을 수가 없다. 내가 아주 친한 친구 그룹이 없는 것을 눈치 채셨는지, 점심을 같이 먹을 친구는 있니..하며 물으신 것이다. 조금 창피하기도 하고 했지만 사실 선생님의 그 신경 쓰심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물론 1분단의 친구 아닌 친구들과 같이 점심을 먹었다. 그 소풍에서 선생님들 노래자랑이 있었는데.. 음악선생님이신 김대붕 선생님은 유행가를 부르기가 거북하셨는지 중간까지만 부르셨다. 그 노래가 “인생이란 무엇인지.. 청춘은 즐거워..” 하는 가수 윤일로의 유명한 노래였다. 그때 그 선생님의 계면적은 행동으로 선생님의 내성적인 성격을 알 수 있었다.

언젠가는 번호순으로 앉던 자리를 아주 거의 ‘혁신적’으로 바꾸었는데 키가 큰 애들과 완전히 섞어서 앉힌 것이다. 이런 적은 학교를 다니면서 한번도 경험을 못한 것이라 처음에는 정말 이상했다. 하지만 그것도 일리가 있었다. 이런 기회가 없으면 키가 큰 친구는 절대로 사귈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알게 된 등치 큰 친구들.. 나의 근처에 나종억 이란 친구가 있었다. 아주 선비처럼 하얀 얼굴에 돗수 높은 안경하며 완전히 학자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이성복.. 자리는 확실치 않다.

나종억 졸업앨범 사진

졸업앨범에 있는 나종억의 사진

나종억은 알고 보니 국회의원을 역임하신 나용균의원의 아들이었다. 독립운동지사 같은 경력이 있었고 야당의 원로 급이었는데 나중에 여당으로 변신을 하셨다. 그러니 유명한 집안의 아들이었고 당연히 부자까지는 아닐지 몰라도 부유층이었을 것이다. 그 당시에 나는 그것을 거의 몰랐다. 이유는 그 친구가 하도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그 친구는 정말 나에게 친절하고 자상하게 대해 주었다. 내가 무언가에 쩔쩔 맬라치면 격려를 해 주곤 했다. 한번은 나보고 여자를 소개해 주겠다고 편지를 전해 주었다. 나는 너무나 놀랐고 그 편지는 그 친구가 장난으로 쓴 것으로 단정을 짓고 거절을 하였다. 아마도 그런 나의 행동이 마음에 안 들었던 모양이었다. 사람을 못 믿는 것.. 하지만 나는 그렇게 믿었다. 지금도 나는 그것이 정말인지 장난인지 모른다. 그 편지의 구절도 조금 생각이 난다. 참, 순진하던 시절이었다.

인문지리 수업시간을 김기병선생님이 가르치셨다. 반들반들한 포마드로 머리를 올빽으로 빗어 넘기신 선생님은 아주 당찬 모습의 선생님이셨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최복현 교장선생님(지리학전공)의 제자였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분의 지리시간은 참 재미가 있어서 좋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수업 중에 몇 명씩 나와서 문제를 풀고 각자에게 앞에서 설명을 하도록 시키셨다. 나도 ‘걸렸다’. 큰일 났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 많은 학생들 앞에 맞대면으로 서서 그것도 혼자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중3때 아슬아슬하게 그런 ‘위기’를 넘기 적이 있었다. 그때의 나의 옆에 앉았던 친구 채현관이 재수없게 걸려서 교단에 나갔는데.. 역시 예상대로 완전히 얼어붙어서 한마디도 못하고 들어왔다. 물론 아이들의 비웃음과 차문섭 선생님의 꾸지람을 뒤로 들으면서..

그때의 아찔한 기억을 어찌 잊으랴. 아주 당황을 했다. 하지만 순간적이지만 나도 채현관처럼 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물론 칠판에다 문제는 그런대로 풀었다. 세계지도를 그리는 방법에 대한 것이었다. 앞에서 앞쪽을 바라보니 예상대로 앗질 했지만 이를 악물고 설명을 했다. 끝나고 나중의 행동이 기억이 난다. 교실 뒤에서 보시던 선생님을 향해서 무언가 이야기를 했는데 아마도 이대로 됐습니까.. 하는 나의 ‘가청’이었다. 그때 선생님이 껄껄 웃으시며, “그걸 나에게 물으면 어쩌나, 모두들에게 물어야지”.. 하셨다. 그리고 나는 거의 비틀거리며 나의 자리로 ‘기어오다시피’ 했다. 그때 나의 바로 옆자리(앞자리?)에 앉았던 나종억이 나를 위로하였다. 잘했다고. 나종억, 나는 아직도 그 위로의 말을 잊지 못한다. 아니 절대로 잊지 못한다. 그 이후로는 그런 상황이 와도 그렇게 무섭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굳어져갔다.

이성복.. 어떤 계기로 친해 졌는지 모르지만 무언가 말을 하면 재미있었다. 그 친구의 특징은 손이 그야말로 솥뚜껑처럼 컸다는 것이다. 아마도 내 손의 두 배정도가 아니었을까? 여름방학이 다가오면서 나와 그 친구는 공부시간 사이에 밖에서 무전여행의 계획으로 이야기 꽃을 피웠다. 그 당시는 김찬삼씨의 세계무전여행이 큰 뉴스였다. 모두가 그것을 희망과 꿈으로 여겼다. 그래서 우리도 세계는 몰라도 국내 무전여행의 꿈을 꾸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꿈은 실현되지 못했다. 너무나 꿈이 컸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성복은 상급학년으로 올라가면서 헤어졌다. 그러다 졸업 후에 대학입시가 끝나고 가회동에 있는 그의 집에 잠깐 들린 적이 있었다. 이성복은 집에 없었고, 어머님께서 나오셔서 고려대 농과대학에 합격을 하였다는 소식을 전해 주셨다. 그리고 완전히 소식이 끊겼다. 그 친구, 동창회에는 나오나.. 어떻게 살고 있을까 궁금하다.

또한 그 당시에 브라질이민 열풍이 불고 있었다. 김 대붕선생님께서 한번은 서동식의 이름까지 언급하시면서 당장 브라질이민에 대한 것(가려는 것, 말하는 것?)을 중지하라고 까지 하셨다. 아직도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아마도 서동식이 브라질에 가려고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때의 경제사정을 보면 브라질 이민은 사실 못사는 사람보다는 잘사는 사람들이 더 가기가 쉬었다. 하지만 그것은 많은 사람들에게는 희망이 될 수도 있었다.

인상적인 학급활동 중에 학급대항 농구시합이 있었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시합이 있었는데 우리 반이 아마도 우승, 아니면 그 정도로 잘 했다. 그 이유는 우리반의 선수들이 여름방학에 정기적으로 모여서 연습을 했다는 것이다. 어쩐지 그 팀워크가 기가 막혔다. 그때 처음 농구 보는 재미를 알았다. 그 선수 중에는 전오현, 양창걸 등등이 기억이 난다. 나는 키도 그렇거니와 농구와는 인연이 없었다. 대신 아구는 남들보다 잘했지만..

중앙고 1학년 교실이 있던 건물, 동상 바른쪽

1학년 교실이 있던 붉은벽돌 건물, 김기중설립자 동상 바른편

중앙중학교 다닐 당시에 나는 동네야구에 거의 미쳐있었다. 집에 오면 그대로 바로 옆에 있는 재동국민학교 운동장으로 달려갔다. 거기서는 항상 동네야구대회가 있었다. 나는 우리 골목 팀을 이끌고 꼭 나갔다. 그때 배운 야구실력이 내가 보아도 상당한 수준에 있었다. 그런 배경으로 가끔 학교친구들과도 야구를 학교운동장에서 했다. 고1때도 예외가 아니어서 어느 주말, 그러니까 일요일에 중앙학교운동장에 모여서 우리반의 키 작은 팀과 키 큰 팀이 시합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누가 팀 멤버였는지는 다 잊어버렸지만 우리 팀에는 분명히 정양조가 있었고 다른 팀에는 나종억이 있었다. 그것 밖에 생각이 안 난다.

군사혁명의 여파로 학생들에게 근로봉사라는 과외의무가 있었다. 우리학년은 돈암동, 미아리근처의 야산에서 하루 수업을 쉬고 봉사를 했다. 정말 힘든 노동이었다. 확실히 무엇을 했는지 생각이 까물거린다. 아마도 나무를 심었지 않았을까? 하루 종일 일을 했는데 나는 과히 몸집이 세지를 않아서 아주 힘들어 했다. 그런 것을 보고 감독하는 ‘노가다’ 가 내가 농땡이 치는 줄 알고 뭐라고 했다. 그랬더니, 우리반의 ‘강달훈’이 그 아저씨보고 내가 아프다고 말해주었다. 사실 아픈 것은 아니었지만 나를 보호해준 것이었다. 그때 나는 강달훈, 나와 별로 친하지 않았는데도 그런 것을 고맙게 생각을 했다. 그곳은 정신여학교의 옆에 위치해 있어서 그곳 옆을 지날 때 모두들 흥분해서 학교 안쪽을 향해서 소리소리를 지르곤 했다. 참, 순진하지만 조금씩 이성에 눈이 떠지던 그 시절.. 어찌 잊으랴.

아~~ 또 생각나는 사람, 지옥천.. 이름이 독특한 친구, 아마도 지방에서 온 친구였다. 이름에 ‘지옥’이 들어가서 아주 인상적이었다. 시골사람처럼 구수하게 생긴 친구다. 인상적인 것은 학급대항 축구시합에서 지옥천이 선수로 뛰었는데, 그때 offside란 것을 처음 보았다. 하도 뜀박질이 빠르다 보니 공을 몰고 goal로 뛸 때마다 offside였다. 그러니까 골을 향해서 돌진을 하다 보면 공이 뒤에서 따라오고 있었다. 그것은 정말 코믹한 장면이었다.

겨울연가에서 보는 고1때의 교사건물, 뒷쪽

겨울연가에서 1학년때의 교사건물이 뒷쪽에 보인다

2003년에 한국의 유명한 TV drama “겨울연가”를 보다가 깜짝 놀랐다. Drama에서 춘천의 학교라는 것을 서울의 우리모교 중앙고등학교에서 촬영을 한 것이 아닌가?

담임 선생님 김대붕 선생님은 나의 졸업 앨범에 계시지 않는다. 언제 학교를 떠나셨는지 기억이 안 난다. 나중에 알고 보니 성심여대 교수로 가신 듯 했고 그것은 사실이었다. 아마도 음악과 교수가 되셨을 것이다. 아주 아주 이후에 내가 가톨릭 신자가 돼서 가톨릭 성가 책을 보니 김대붕이란 이름이 자주 보였다. 아하.. 우리 고1담임 선생님께서 가톨릭 성가를 작곡 하신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금은 어떻게 건강하게 지내시는지 궁금하고, 부디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빈다.

 


ISSUU-hosted 중앙고 57회 졸업 앨범

 

 

Just moved my home office to a slightly bigger room recently. Now, I can maneuver my main work desk more freely into center as an island. No more wall to hide some ugly pc related stuffs around my beautiful desk! Hiding this mess is no easy task at all, needing some $$ to buy cable conduits, etc. But real annoyance is that fact that the pc hulk has to be as near to the desk as possible: video monitor plus mouse & keyboard, that’s problem!

Solution by chance was in using a product called usb & vga extender. For usb extender, I already had it being used for printer connection. It just worked even though sometimes presented some mysterious hiccups. It would take care of extending keyboard & mouse. Real task is to extend ‘fragile’ analog vga signals beyond 10’. Well, the proliferation of big screen lcd type monitors, extending it already in mature stage with very very reasonable cost.

One I googled today was vgatovideo.com’s very reasonable product called ‘VGA to Video Extension Kit’. It looks like a perfect product for my situation. Only at $33 for 10’ CAT6 version, that’s a perfect fit. Now, question is this: how ‘good’ is this type of product? I would guess it contains some active components like balun(i.e., impedance matcher). Has anyone has some experience with this kind of product?

Cable_200

Follow-up on this blog:

This product turns out too good to be true. After thoroughly having tested this product, I concluded this is not working as advertised at least for my application. I needed to place 1280×1080 resolution LCD monitor at least 12’ from pc box. It initially worked fine at least an hour.. then display turns unstable like flickering. They specified this particular product as resolution up to 1280×1080 at over 12’ distance. I gave up on this so called vga-to-CATx product solution, gone back to ‘classic’ vga coaxial cable which many time supports up to 16’. Too bad, too bad.. I will have to return this ‘bad’ product soon.

휴.. 덥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6월 달에 over 90 (아마도 섭씨32도?) days가 며칠째 행진을 하고 있다. 별로 반갑지 않다. 아마도 내가 젊었으면 좋았을지 모르지만 이 나이에는 아니다. A/C(에어컨)로 식혀주는 시원함은 정말 ‘강제’적이다. 찐득거리는 피부를 조금 편하게 해줄지는 모르지만 절대로 머릿속을 편안하게 해 주지는 못한다. 우리 집의 에어컨은 조금 오래된 것들이라 energy 를 효율적으로 쓰지 못하는 것을 아는 한 더 신경이 쓰인다. 하지만 이런 high humidity에는 no choice.. 더구나 2층에 있는 home office에선 이런 날씨에 거의 필수적이다.

이런 날씨에 제일 신경이 쓰이는 곳이 바로 2-car garage에 있는 home server closet이다. 이 조그만 closet에는 freezer와 함께 home network hub(Internet router, switches, VOIP devices etc)와 함께 3 physical servers가 있다. 거기서 나오는 heat가 장난이 아니지만 보통 때는 별로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우려가 되어서 온도를 재어보니 95도까지 치솟았다. 부랴부랴 방에서 쓰는 값싼 box type electric fan을 갖다 놓았다. 물론 공기온도는 별 차이가 없지만 server같은 hardware들은 stress가 덜 하리라 생각을 한다. 그래도 좋은 쪽을 생각하자. 이런 날 뒤에 오는 선선함의 즐거움은 어떠한가. 생각, 그 자체만으로도 행복하다.

6월 달도 절반이 지나간다. 어느새 이렇게 되었나. 4월부터 시작된 physical work이 계속되고 있다. 요새는 더위 때문에 조금 주춤해졌지만 끝이 난 것은 아니다. 바로 다음에 해야 할 일은: pet flap(door)와 Jacuzzi remodeling이다. 둘 다 energy saving과 직접 관련이 있다. 6개월째 같이 살고 있는 Izzie, the cat이 back porch의 view를 너무나 즐기는데, 요새 같은 더위에 일일이 문을 열어 놓을 수가 없어서 pet 전용의 ‘문’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Home Depot에서 작년에 $30주고 산 pet flap이 있는데 그것은 standard door에 맞게 된 것이라서 standard 2×4 wall에다 설치하기에는 맞지를 않는다. 2×4 wall에 맞게 설치하려면 내가 따로 framing을 해야 한다. 나의 carpentry skill이 그 정도가 아닌 모양이다. 대강 design은 해 놓고 벽도 뚫어 놓고 했는데 framing work을 아직 시작 못했다.

Jacuzzi remodeling은 사실 repurposing에 가깝다. 거의 20년 동안 그 ‘멋있는’ 곳에서 bath를 한 것이 불과 몇 번이 되지를 않는다. 그러니 그 space가 너무나 아깝다. 더욱이 그곳의 ceiling에는 skylight까지 있어서 view는 아주 멋있을지 몰라도 사실은 여름에2층 전체를 더 덥게 만든다. 그럴 바에는 아야 storage closet정도로 쓰는 것이 나을 듯 해서 그렇게 결정한 것이다. 이것도 framing work이 필요하지만 이것은 비교적 쉽다. Rigid insulation board와 drywall로 사실상 새로 벽을 만들어야 한다. 천정의 skylight도 마찬가지다.

Wow.. it’s getting hotter and hotter by days for almost 4 days in this Atlanta metro area. Of course, our clunky central a/c is in full force for days only for the living area, not including 2 car garage where our home server closet located.

Now, the small 6×3 closet is in trouble. The garage as well as the closet is not insulated at all. But the closet usually maintains ‘good’ temperature during the whole seasons except this kind of oppressive high heat and humidity condition. Only solution is good ventilation which the closet lacks. The currently the closet’s temperature has reached  lower 90s. It has 3 main pc servers which runs NAS, 7 virtual machines (most of them runs desktop pc’s), virtual Asterisk pbx(PIAF), as well as various network devices. So far, they seem functioning normally.

I moved box-type electric fan inside the closet hoping ease down the heat, but thermometer shows almost no difference! This means that somehow the whole garage must be ventilated through window which I did reluctantly last night. I can feel some ‘freshness’ inside the closet but still no temperate moderation. Just hoping everything is alright during this time.

I’m thinking about adding insulation around the server closet. Also adding small opening (with ventilation fan) on the closet wall in future. My only question is this: over 90 (lower 90s) temperature inside this small server closet is acceptable or not? If not, what kind of air temperatures are acceptable?

마음이 울적할 때

저녁 강물 같은 벗 하나 있었으면

날이 저무는데 마음 산그리메처럼 어두워올 때

내 그림자를 안고 조용히 흐르는 강물 같은 친구 하나 있었으면

울리지 않는 악기처럼 마음이 비어 있을 때

낮은 소리도 내게 오는 벗 하나 있었으면

그와 함께 노래가 되어 들에 가득 번지는 벗 하나 있었으면

오늘도 어제처럼 고개를 다 못 넘고 지쳐 있는데

달빛으로 다가와 등을 쓰다듬어주는 벗 하나 있었으면

그와 함께라면 칠흑 속에서도 다시 먼 길 갈 수 있는 벗 하나

있었으면.

도종환의 ‘벗 하나 있었으면’

양건주, 1965년, 졸업앨범에서

양건주, 1965년, 졸업앨범에서

친구야, 친구야.. 그립다. 보고 싶다. 그때로 가고 싶다. 햇수로 세어본다. 손가락으로 하나씩.. 10년, 20년, 30년, 40년.. 10년을 네 번이나 세었다. 그 때에 우리에게 ‘사심’이란 것은 없었다. 그게 진짜 우정이 아닐까. 우정이란 말과 의미와 느낌을 잊고 산지도 손가락으로 세어도 한참 세어야 할 정도로 오래 되었는가.

1969년, 양건주 군대 가기 전에 찍은 기념사진

1969년초 양건주가 군대가기 전에 연대앞의 사진관에서 찍은 기념사진, 앞줄 바른쪽이 양건주

친구, 건주, 양건주를 생각한다. 우리가 사귄 기간은 이 오랜 세월에서 년 수로 얼마 되지 않을 수 있는 짧은 기간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나는 거의 영원한 것처럼 느껴질 때가 종종 있다. 중앙중고교 동창, 연세대 동창인 양건주. 내가 대학 2학년 때 연세대 캠퍼스 에서 만나서, 같이 연호회란 대학생 클럽활동도 같이 하였다. 1973년 내가 미국에 오면서 헤어졌다. 1979년 결혼 차 귀국했을 때는 만날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1970년대 초의 젊은 모습을 아직도 서로 가지고 있을 것이다.

사실 건주는 중앙고교 2학년 때 SECC란 고등학교 영어회화클럽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그때는 별로 친하게 지내지 못했다. 그러다가 연세대에서 다시 만났던 것이다. 나하고 그는 중앙중학교, 고등학교 6년을 같이 다녔건만 때 한번도 같은 반을 한 적이 없었다. 6년 동안 같은 반을 한번도 못한 것은 사실 그렇게 흔치 않은데..

건주는 나이에 비해서 확실히 성숙한 그런 친구다. 항상 공정, 공평하였고, 우선 ‘정’이 많았다. 그것을 요란스럽지 않게 은근히 풍기는 그런 다정다감한 친구.. 그런 친구가 계속 나의 옆에서 같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나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하는 공상도 해 본다.

1999년, 20세기가 저물던 때에 다시 online으로 연락이 되었다. 이것도 나는 거의 운명적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리고 이어서 그때 헤어진 연호회 친구들의 소식을 다시 접하게 되었다. 이윤기, 윤인송, 김태일, 박창희, 김진환. 이어서 건주, 윤기, 인송, 태일이 모여서 술잔을 기울이는 사진도 보게 되었다. 김진환의 사망소식도 들었다. 다른 동창 친구 김호룡의 늦은 사망소식에 이어서 나는 한동안 충격 속에서 헤매었다.

1968, 69년, 우리들의 아지트였던 해양다방을 생각한다.국제극장 옆을 끼고 경기여중고로 향하는 좁다란 골목길에 있었다. 어떻게 그 다방에서 우리가 모이게 되었는지는 확실치는 않지만 어두운 구석 자리를 거의 전세를 내다시피, 우리들의 명실상부한 휴식처 노릇을 했다. 그 때의 그 여자회원들을 다 어떻게 되었을까? 물론 그 중에는 현재의 건주wife도 있었다. 그는 사실 그때 미래의 wife깜을 그곳에서 만났던 것이다.

아직도 그때의 추억은 흑백사진시대로 남아있다. 비교적 잘 남아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추억의 영상일 뿐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될 수가 없음을 알 때, 조금 서글퍼지는 이 마음, 어쩔 수가 없다. 영원한 친구 건주의 건강과 행복을 다시 한번 기원하면서..

All Politics Is Local — Thomas Phillip “Tip” O’Neill, Jr.

오래 전에, 그러니까 1970~1980년대에 미국 연방하원(House of Representatives, or just House) 국회의장 (Speaker of the House)을 했던 사람의 경험에서 나온 명언이다. 너무나 당연한 얘기 같지만 가끔 잊고 살 때가 많다. 이 명언을 거역하는 추세가 인터넷으로 더 가속화 되는 networked, wired, globalization trend가 아닌가..local becomes global, global becomes local.. 어느 것이 사실인가? 거의 모든 것들이 ubiquitous Internet때문에 virtual & remote 한 것들 투성이로 많이도 변해 버렸고 급속도로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 Internet speed가 점점 빨라 짐에 따라서 이러한 virtual & remote한 것들이 사실 바로 옆에 있는 것처럼 느껴질 날도 그렇게 멀지 않은 듯 하다. 심지어, remote medical diagnoses & treatment까지 거론이 된다. 2008년의 미국 대선을 보면 위의 Tip O’Neill의 명언이 얼마나 많이 의미를 상실 했는가 알 수 있다. 최소한 겉으로 보기에 그렇다. 전국적, 그러니까 non-local적인, 인 빠른 속도로 생겨난 massive Obama grass-roots support groups 의 형성은 global적인 network structure 없이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니까 McCain camp는 그 사실의 중요성을 조금 덜 인식 했을 것이다.

하지만 생각을 한다. 아무리 internet으로 news같은 것을 보고 Skype phone으로 이야기를 해도 그것은 본 것과 들은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그것들은 virtual한 것들이다. 아무리 virtual reality가 reality 가 된다 해도 인간이란 동물은 face-to-face contact으로 사회적 활동이 됨을 가끔 간과할 때가 있다. 가장 뚜렷한 예 중에 이런 것도 있다. Digital Economy craze가 한창일 때, auto dealerships이 가장 위험한 business로 지목이 되었다. 간단히 말해서 모든 car sales를 오로지 website에서 하겠다는 ‘숭고’한 희망이었다. 결과는 어떠한가.. 물론 제로는 아니지만 거의 제로에 가까운 결과였다. 그만큼 시간이 걸린다는 뜻일 것이다.

그런 저런 것들을 생각하며 이제까지 잊고 살던 나의 locale을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거의 local interest 를 잊고 살았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global reach가 keystroke away인데 구태여 내가 있는 곳을 찾는 게 조금 마음에 들지를 않았다. 그것이 위와 같은 생각을 하면서 눈을 가까운 곳으로 돌려보니.. 이게 생각만큼 간단하지 않음을 실감하게 되었다.

나의 peers들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어디에 숨어있는가? 나의 peers라고 하면 나이도 비슷하고 관심도 비슷한 그런 사람들일 것이다. 문제는 아직도 그들의 대부분이(만약에 있다면) 아직도 digital communication에 생소하거나 이것을 잊고 살거나.. 그런 것들이 아닐까? 제일 걸림돌이 write in keyboard가 아닐까 한다. 아직도 불편한 것이다. 젊은 아이들이 mobile phone으로 texting하는 수준은 멀었다고 하더라도 desktop pc에서 keyboard 를 생각대로 쓰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지 않을지도 모른다. 현재의 technology로는 keyboarding이 가장 걸림돌이 되는 길목이다.

그래도 생각한다. 이곳에 그런대로 많은 young Old (young Senior, 50~60) Korean speaking people들이 있을 것 같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런 사람들이 있다면 virtual socialize를 하면 어떨까? 그러면 local interest를 서로 나눌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이 blog을 보게 된다면.. 그리고 keyboarding에 큰 문제가 없다면?

오늘은 2010년 5월 31일, 월요일.. 이곳은 한국의 현충일 (그곳은 아마도 6월 6일이었던가?) 격인 Memorial Day, 휴일이다. 비공식적인 여름의 시작이다. 이날 neighborhood swimming pool이 열리고.. 거의 졸업과 방학이 이어진다. 그래서..4월과 5월이 다 지나간다.

그 2개월 동안 별로 이전과 같이 쓰지도 읽지도 못했다. 대신 겨울 내내 별로 쓰지 못했던 몸의 근육을 많이 쓰게 되었다. 작년 이맘때는 별로 집 밖에서 일을 못했다. 고작 한 것이 4개의 4×4 posts위에 birdie condo를 만들어 달아 놓은 것 뿐이었다.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는 1983년 이후 최악의 불경기로 인해 예상이 되는 cash crunch 때문이었다. 그래서 내년으로 모든 것을 미루자고 은연중에 합의가 되었다.

그 “내년”이 올해가 되었다. 올해는 조금 사정이 나아진 듯 서로 느끼고 (이것, home finance,은 절대로 exact science가 아니다, 적어도 우리에게는) 날씨가 풀리면서 자연스럽게 home depot로 향하게 되었다. 몇 년 전, back porch의 lattice board work을 할 때의 아찔한 기억을 떠 올리면서 lumber hauling에는 각별하고, 지나친 신경을 쓰게 되었다. 그때 lattice board를 minivan위에 싣고 오다가 길에서 모조리 차에서 떨어진 아주 무서운 경험이 있었다. ‘역학’을 100% 무시한 아주 무모한 잠깐의 결정이 그런 결과를 낳았다. 다시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우선 연숙의 ‘자랑스러운’ vegetable garden을 더 넓히는 작업이 있었다. 원래도 좁은 곳이 아니지만 더 욕심을 부려서 넓힌 것이다. 매일 먹는 야채는 거의 다 심을 예정이란다. 최근 몇 년 지독한 가뭄 때문에 예상보다 수확이 좋지를 않았다. 우리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Mother Nature는 역시 fair한 듯, 그 동안의 ‘비의 적자’를 채워 주실 듯 정말 흡족한 비의 잔치가 이어졌다. 그런 것들에 힘입어 더 늘린 것이다. 현재의 plot은 아마도 이 subdivision에서 top class에 속할 듯 하다.

Expanded vegetable garden

Expanded vegetable garden

주기적인 흡족한 비는 지독한 정도로 예상되던 pollen 의 공포도 많이 잠재워 주었다. 주변의 잔디들도 아마도 이제 까지 중에서 가장 싱싱한, 정말 건강하게 파~란 색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 와중에 나라니 가 드디어 ‘분가’을 단행하였다. 실의로 찬 몇 달을 보내더니 그것에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독립’을 선언하고 30분 정도 drive거리로 house mate 와 같이 집 한 채를 rent해서 나간 것이다. 이런 불경기에 대부분 부모가 사는 집으로 들어와 산다던 20 something young adults들.. 우리 나라니 는 거꾸로 나간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나라니 의 성격일지도..

나라니가 이사간 집

나라니가 이사간 집

4월15일.. tax day. 올해는 지난해 산 Hyundai Sonata가 큰 효자 노릇을 하였다. 그것을 의식하고 산 것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다. 가끔 우리도 이렇게 돈이 관련된 일에 ‘현명’한 선택을 할 때도 있구나 생각하니까 조금 우습기도 하다. 그런 쪽에 우리 둘은 너무너무 ‘무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라니 는 그렇게 lucky하지 못한 듯.. 올해는 처음으로 tax refund가 아니고 tax due로 바뀌어서 없는 saving에서 돈을 Washington에 지불하는 ‘불상사’가 난 것이다. 처음에는 internet tax site가 무언가 잘못하는 듯 해서 다른 두 곳에 똑같이 해 보았지만 결과는 정확하게 똑 같았다. 작년에 열심히 뛰며 $$을 벌었지만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런데도..

사다리에 오르다. 2006년 사다리에서 떨어진 (정확하게는 사다리가 떨어짐) 사고 이후 처음으로 다시 그곳에 오르게 되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까.. 지난해 겨울 바람이 불던 어느 날 나의 home office storm window가 땅으로 떨어졌다. 2층에서 땅으로 떨어 졌는데 기적적으로 유리가 깨지지 않았다. 무슨 운명같이 느끼고 그것을 고치기로 마음을 먹고 노력을 해서 결국은 다 고치고 paint까지 했더니 전의 상태보다 더 보기가 좋았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사다리가 없으면 그것은 그림의 떡이 아닌가. 전에 떨어진 악몽을 잠재우면 천천히 과거에 ‘바위’를 타던 때의 ‘용기’를 회상하며 올랐다. 결과적으로 다시 사다리를 타게 되었다. 2층 지붕에 있는 gutter를 고치거나 청소를 하려면 사다리는 정말 필수도구가 아닌가.

아찔한 사다리 오르기..

아찔한 사다리 오르기..

4월 중에 2개의 backyard structure를 만들었다. 둘 다 size가 아주 작아서 ‘몸을 풀기에’ 안성맞춤의 project였다. 거의 2년 동안 잠자던 tool을 모두 찾아서 oil을 치고 tune-up을 하고 쓰는 법을 다시 익히고 해서 큰 문제없이 며칠 안에 끝을 냈다. 그렇게 “준비운동”을 한 것은 사실 더 큰 structure를 내내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바로 pergola였다. 이것을 한국말로 무엇이라고 하나.. 모르겠다. 그냥 퍼골라.. 라고 해야 하나. 주로 backyard에 화분도 걸어놓고 넝쿨도 올라가고, 심지어는 빨래도 걸어놓을 수 있고.. 햇볕이 적당히 차단이 되어서 여름엔 조금 시원한 곳.. 그런 것이 아닐까. Costco에 아주 ‘근사한’ 것이 있었는데 가격이 장난이 아니었다. 거의 $1000정도였는데 그것은 물론 pro들이 만들어 놓은 정말 웅장한 그러니까 아주 필요이상으로 큰 것이었다. 우리는 그런 것이 필요가 없었다. deck이 12’x12′ 정도 이니까.

Pergola's early structure

Pergola's early structure

2주일의 중노동. 5월 초부터 일을 시작해서 거의 2주일이나 걸렸다. 물론 하루 종일 한 것은 아니었다. 제일 힘든 것은 실제로 build한 때가 아니고, 우리 집에 맞게 design을 하는 것과 lumber를 Home Depot에서 차에 실어오는 일이었다. 주로 4×4, 2×6 lumber가 많아서 더 힘이 들었다. 하지만 그 일을 하면서 이 나이에도 이런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하느님께 감사를 드려야 했다. 한 세대 전만 해도 이 나이면.. 손주들과 방에서 놀 그럴 나이가 아닌가. 일단 만들어 놓고 보니 그렇게 삭막하던 deck이 다시 살아나는 느낌이 들었다. 앞으로는 어떻게 장식 (화분 같은 것)을 하는가에 더 신경이 쓰일 것이다.

completed pergola

completed pergola

곧바로 pergola와 걸 맞는 cute picnic table을 만들었다. 이건 internet에서 design을 얻었다. 그래서 거의 시간이 걸리지를 않았다. 100% 2×4 lumber 12개를 45 or 30 degree angle cut을 하면서 끝이 났다. 그러니까 design한 사람의 노력 때문에 그렇게 쉬웠던 것이다. 크기가 정말 pergola의 크기에 맞춘 듯 한 것이 놀라웠다. 마지막 Mickey Mouse project가 compost bin인데 이것도 역시 build하는 시간보다 design한 시간이 훨씬 많이 걸렸다. 문제는 cover structure를 어떻게 할 것인가.. 였는데.. 역시 vinyl corrugated board로 만들었다. 그러니까 removable roof (with hinge) 로 위를 덮은 것이다. 비가 들어가지 않는 것이 composting에 도움이 되는 것 같아서 그렇게 한 것이다. 이제 부터는 kitchen waste의 대부분은 그곳으로 가서 recycle이 될 것이다. 나중에 compost 가 되면 물론 바로 옆에 있는 vegetable garden에서 쓸 것이다.

cute picnic table under pergola

cute picnic table under pergola

이래서 4월과 5월이 다 지나갔다. YMCA의 exercise도 많이 빠지고 했지만 다른 방법으로 muscle을 썼으니까.. 그렇게 큰 문제는 없을 듯 하다. 며칠 전에는 드디어 망가져서 방치해 두었던 gas grill을 꺼내어 gas mechanism을 모조리 뜯어 내고 charcoal grill로 바꾸었다. heat proof spray paint까지 했더니 거의 새 것처럼 되었다. 오늘 저녁 드디어 그것을 쓸 때가 되었다. Memorial Day barbecue, pergola, picnic bench, renewed grill.. 3 박자가 맞아 떨어진 것이 아닐까? 이래서 4월과 5월.. 안녕. 4월과 5월..하면 젊었던 시절 통기타 그룹이 생생하게 생각이 난다. 백 순진과 김 태풍 이었던가. 아 좋았던 시절이여..

small compost bin

small compost b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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