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eld of dreams, trancending time & place, autobio in progress..

Monthly Archives: September 2010

9월도 30일.. 9월의 마지막 날이다. 완전히 여름이었던 9월도 며칠 전부터 완전한 가을로 돌변을 하였다. 모든 것이 요새는 이렇게 extreme, extreme 이다. 올해는  매년 9월 중순 가족행사로 나서던 apple orchard drive 도 완전히 잊어버렸다. 한여름 같은 날씨에 사과 과수원은 생각만 해도 뜨겁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제는 사과도 다 수확이 되었을 것이고 한마디로 김이 다 샌 것이다. 이곳에서 약 한 시간 반 정도 북쪽으로 drive를 하면 Ellijay라는 apple town이 나온다. 그곳은 완전히 사과 과수원이 밀집해 있는 산자락이고 경치도 아주 좋다. 이곳에 이사온 이후 한해도 빠짐 없이 그곳을 가곤 했는데 올해는 정말 예외가 되었다.

채인돈가족과 함께 Columbus, Ohio 1987

채인돈가족과 함께 Columbus, Ohio 1987

오늘 뜻밖의 손님이 나의 blog에 찾아왔다. 오랜 전에 쓴 나의 blog entry: “1980년대 Ohio State의 중앙동창들” 에 중앙고 67회 후배 채인돈의 아들인 채경덕군이 comment를 한 것이었다. 인물검색을 하다가 실린 사진에서 자기나이또래의 아빠를 찾았다고, 감회가 깊었다고 했다. 그 사진은 1987년경 콜럼버스의 교민회주최 소프트 볼 대회에 중앙고 동창 팀에서 참가를 하고, 첫 회전에서 탈락을 한 후에 찍은 사진이었다. 얼굴들이 모두 비록 웃기는 했지만 맥이 빠진 모습을 볼 수 있다. 

완전히 한 세대가 흐른 것을 느낀다. 채인돈 후배는 비록 나의 새까만 후배였지만 같은 천주교 신자였고, 전공도 비슷하고 (EE, CIS), 한 때는 Ohio State campus중심의  PC Users Group에서 같이 공부를 하기도 했다. 항상 웃는 얼굴이고 wife는 미스 코리아처럼 예쁘게 생겼었다. 집안이 상당한 power class인 것에 비하면 채인돈 후배는 상당히 검소하고 겸손했다. 마지막으로 연락이 되었을 때 그는 한국에서 computer 관련 venture project에 관련이 되어서 아주 바쁜 것 같았다. 경덕이 밑으로 동생을 두었는지도 소식이 끊겨서 잘 모르고 지낸다.

The Vikings, 1958

The Vikings, 1958

미국의 원로배우 Tony Curtis가 오늘 세상을 떠났다. 85세였으니까 사실 평균수명은 채웠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오랫동안 알고 있던 유명인들이 하나 하나씩 세상을 떠나면 느끼는 것은 역시 나이가 들면 들수록 외롭게 느껴지리라는 사실이다. 나에게 이제는 이런 것들이 남의 문제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유괘하게 잘생긴 그는 역시 영화 The Vikings에서의 연기가 제일 기억에 남고 또 Spartacus도 기억에 생생하다. 둘 다 Kirk Douglas와 공연을 했는데 그렇게 조화가 잘 맞을 수가 없었다. 그가 이름과는 달리 항가리계의 유태인(Hungarian Jew)임을 오늘에서야 알았다. Kirk Douglas도 역시 유태인이다. 이 글을 쓰다 보니 다시 바이킹을 보고 싶어진다. 이 영화에서는 wife인 Janet Leigh와 같이 나온다.  이미 download한 것이 있어서 아무 때나 볼 수 있으니 참 편한 세상이 되었다.

오늘은 “구이 팔”, 9.28, 9/28/1950: 서울수복 60주년 기념일이다. 60년의 강산이 변했고 “역사수정주의자” 들이 판을 치는 고국은 아마도 대부분이 오늘이 무슨 날인지도 모를 것이다. 예외는 물론 우리같이 조금은 알고, 기억하는 세대들일 것이다. Mafia 집단으로 변한 김씨 일당들은 “미제의 앞잡이”들이 퍼다 준 밥으로 잘 먹고 잘 살고 있다. 이제는 그것도 모자라 김씨 세습을 강행하려 한다고.. 참, 이건 완전히 희극중의 희극이다.

LA area, 그러니까 캘리포니아, 로스엔젤레스 지역이다. 기온이 120도가, 물론 화씨로, 넘었다고 한다. 올해는 참 기후에 관한 얘기가 끝이 없더니 이것도 한 몫을 한다. 올해는 동부,남부가 완전히 더위로 거의 “익어가는” 과정을 겪었다.  Weather Channel 에서는 올해 “최악의 여름” 상은 Washington DC로 정했다. 여러 가지 최고 기록이 있었겠지만 최고,최장의 무더위와 더불어 폭풍 같은 것도 곁들어서 그런 “불명예’를 차지한 모양이다. 하지만 내가 사는 이지역도 내 기억에 정말 오랫동안 “쉬지 않고” 더웠다. 하지만 오늘은 6월 이후 처음으로  “긴팔, 긴바지” 에다 양말 까지 신고 Tobey와 집 주변을 산책을 했다. 그러니까 가을이 마침내 이곳에 도착한 것이다. 이제부터는 급속도로 단풍이 들 것이고, 첫 얼음이 얼고, 시베리아의 바람이 부는 날이 올 것이다. 특히 을씨년스러운 가을비가 기다려진다.

아주 오랜만에 서울의 처남형님(연숙의 큰오빠)과 email로 연락이 되었다. 2002년에 이곳에서 만나고 그 후에도 조금씩 연락은 하며 살았지만 언젠가부터 거의 연락두절로 살았다. 이건 100% 우리부부의 책임이다. 마음만 먹으면 거의 “공짜”로 연락을 할 수 있었는데.. Skype은 물론이고 Google Voice같은 것을 쓰면 일반전화로도 분당 2 cent 정도로 전화를 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 동안 조카들은 무럭무럭 장성을 해서 둘 다 결혼을 하고 이제는 손주들까지.. 형님말씀대로, 무소식이 희소식이란 말은 오래 전 전화요금이 비싸던 때의 말이었던 것 있음을 실감한다.

To be or not to be, that’s the question: 연숙이 이곳의 한인천주교회에서 활동하는 것 중에 레지오(마리애:Legio Marie, 마리아의 군단)가 있다. 성모님을 통한 봉사,기도단체다. 우리가 오랜 전에 영세를 받은 후에 이 단체의 이름이 제일 먼저 들어왔고, 다음이 꾸르실료..하는 “해괴” 한 이름이었다. 오랜 기간 그런 단체에 무관심으로 지냈다. 하지만 현재 연숙은 이것 두 신심단체에서 활동을 한다. 그렇게 된 것이 이제는 몇 년이 되어서 나에게도 그 단체들의 활동에 조금 익숙해진 것이다. 이것이 이제 나에게도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 결국은 “결정”을 할 단계가 되었다. 나는 무언가 “큰” 변화가 필요함을 느낀다. 그것을 도와주는 것이 아마도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 할 것이냐, 말 것이냐.. 그것이 문제다. 일단 가입을 하게 되면 3개월의 “대기 기간”이 주어진다. 그 기간이 무사히 끝나면 정식으로 단원이 되는 것이다.

오랜만에 google earth에 몸을 싣고 “무전여행”을 해 보았다. 우선 우리 집 주변을 선회하며 그 동안 얼마나 변했나 보았다. 내가 만든 green roof shed와 Tobey fence가 뚜렷이 보이고 정문 앞으로 진달래가 만발한 것이 보인다. 그러니까 아마도 2009년 아니면 올해 봄의 모습이다. 그리고 parking garage 앞에는 나라니가 타는 Hyundai Elantra가 보인다. 그런데 그 차의 위치가 조금 이상하다. 이것은 나라니가 이사를 나간 후에 집에 잠깐 들렸을 때의 위치인 듯하다. 그러면 이것은 작년이 아니고 올해인 듯하다. 한마디로 거의 최근의 항공사진인 것이다. 조금만 더 가까이 찍었으면 roof에 무슨 damage같은 것도 보일 지경이다. 참 좋은 건지, 으시시한 건지.. 그런 세상이 되어간다. 이제는 personal privacy란 말은 의미가 없어지는 것일까.

Ohio Stadium near Dreese Lab

Ohio Stadium near Dreese Lab

내친김에 mouse cursor를 Columbus, Ohio로 흘려보았다. 너무나 오랜만이라 많이 잊었다. 목적지는 Ohio State University campus주변이다. 처음 Columbus downtown에서 출발을 하여  I-71를 따라서 올라갔다. 그저 Ohio Stadium만 찾으면 되니까.. 역시 왼쪽 편으로 말굽모양의 football stadium이 보인다. 처음에는campus  바른 쪽의 High Street를 찾았다. Long’s Bookstore와  McDonalds를 찾는다. 그리고.. 잠깐 살았던 “rooming house” Frambes Avenue, Harrison House, Jones Tower.. 제일 마지막에 나의 Department (of Electrical Engineering)가 있던 Dreese Lab, Caldwell Lab을 찾았다. 그런 건물들이 쉽게 변할 리는 없다. 100% virtual bird’s eye tour였지만 그와 함께 time machine을 타고 30년 전으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었다.

오늘은 몇 개월 만에 처음으로 하루 종일 에어컨이 한번도 들어오지 않은 그런 날이 되었다. 결국은 가을이 온 것이었다. 기온도 거의 화씨 15도나 떨어지고, 하루 종일 가을비가 주룩주룩 내린 그런 날이었다. 1970 년대의 가수 최헌이 부른  “가을비 우산 속에” 를 생각하고, 부르고 싶은 그런 날이었다. 지나간 해들을 기억해 보면 아마도 2주 내에 central heating이 가동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본격적으로 “여름의 것”들을 치워야 하고 winterizing을 하여야 한다. 아~~ 세월의 흐름이여~~

오늘은 매월마다 돌아오는 이곳 한국천주교회의 “마리에타 2구역” 구역모임이 있는 날이었다. 돌아가며 각 구역 신자들의 가정에서 저녁을 같이 먹으며 친교를 하는 날인 것이다. 우리 부부는 비록 주일미사를 한국천주교회에서 하지는 않지만 이 구역모임에는 거의 정기적으로 참여를 하고 있다. 참여를 한지 아마도 벌써 5년 정도 되지 않았을까? 아주 큰 그룹이 아니지만 활동적인 비교적 착실한 구역에 속한다. 성서공부를 한지도 꽤 오래되었다. 나 개인으로 보면 이 구역모임에 나가면서 더 신앙적으로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을 한다. 하지만 최근 몇 번을 나가지 못하게 되었다. 이런 이유, 저런 이유로 못나가게 되었지만, 역시 사람이 모인 곳이라 전혀 문제가 없다고 볼 수는 없다. “사랑”의 마음으로 극복을 해야겠지만 항상 쉬운 것은 아니다.

home office at the latest

home office at the latest

이제 드디어 나의 home office가 최소한 제 자리들을 잡았다. 역시 main desk는 다른 것들과 평행으로 놓아야 심리적으로 편한 것을 알 수 있었다. 물론 정말 해야 할 것은 다 끝나지 않았다. 서류와 computer 같은 hardware part를 정리하는 일이 남았다. 사실 이것이 골치 아픈 일이라, 계속 미루고 있지만 이제는 핑계가 없다. 하지만 일단 시작을 하면 생각보다는 쉬울지도 모른다. 모든 일들이 대개 이런 식이니까..

6월초 나의 blog entry중에6월 달의 한여름” 란 것이 있었다. 보통 때에 비해서 몇 주일이나 빨리 온 무더위에 관한 것이었다. 아마도 거의 3주간 계속된 더위였다. 그래서 아하.. 올 여름의 무더위는 다 갔구나..하고 생각을 했는데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온통 최고기록을 경신한 올 여름의 무더위였다. 그런데 9월의 공식적인 가을, 추분이 시작된 지금도 사실 한여름이다. 올해의 기후 pattern은 하나로 요약할 수 있다. 한번 기상 system이 하늘에 자리를 잡으면 여간 해서는 “요지부동” 움직이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보통은 며칠마다 변화무쌍 변화하는 것을 생각하면 이것도 조금은 “으시시”한 앞으로의 기후가 아닐까. 혹시 이것도 global warming의 한 경고가 아닐까 생각하니 조금은 우울해진다. 하지만 모래부터는 완전한 가을날씨가 온다고 한다. 기온이 거의 15F나 곤두박질을 친다고 하니까. 다시 가을/겨울의 준비를 할 때가 오는 것인가…

고국의 중앙고 동창 친구 유정원, 양건주가 email 회신을 보내왔다. 45년 만에 연락이 된 동창 유정원, 조금은 꿈같은 기분으로 이 친구와의 “만남” 을 음미해보곤 한다. 어머님을 얼마 전에 보내드리고 처음 맞는 추석은 어떠했을까? 이렇게 email 로 나마 “대화” 가 가능하니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고 싶다. 건주는 항상 자상하게 자기의 근황을 알려준다. 이 친구, 그런 것은 정말 변하지 않았다. 성실하고, 자상한 것.. 얼마 전에 회사생활을 끝냈다고 들었는데 요새는 어떻게 지내는가? 오늘 처음 안 사실은, 건주가 6남매의 맏이였다는 것이다. 그것도 정확히 3남3녀 중의.. 아버님이 3대 독자라고 하시니까 조금은 이해가 간다. 그래도 우리 때의 기준으로 보아도 조금 많은 식구였다. 그 많은 식구 다 뒷바라지 하셨으리라 생각하니 참 대단하시다. 이렇게 소가족 추세인 세상에서 그들은 얼마나 외롭지 않을까.. 참 부럽다. 정말 부럽다. 역시 식구는 행복이다. 그 말이 맞다.

 

지난 7월에 우리 집 dining roomlaminate floor 로 바꾸는 일이 있었다. 난생 처음 해본 것이라 고생도 했고 시간도 걸렸지만 그런대로 잘 되었다. 덥고, 힘도 들고, 재료도 떨어지고 이런 저런 핑계로 일을 쉬어버렸다. 원래 계획은 living room, hall way, kitchen을 포함한 일층 전체를 다 laminate floor로 바꿀 예정이었다. 문제는 flooring을 아무리 간단한 것으로 바꾸려고 해도 마루 밑바닥의 상태가 좋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subfloor (마루밑의 마루)의 상태를 말한다. 역시 이곳 저곳 문제가 있었는데, 어떤 곳은 마루 밑이 썩은 곳도 있었고, 어떤 곳은 오래되어서 밑으로 축 쳐진 곳도 있었다. 그런 것을 그 동안 다 손을 보았던 것이다. 주로 joist re-framing과 additional support같은 것을 할 수밖에 없었다. 거의 $$은 들지 않았지만 나의 muscle과 power tool들이 절대적으로 도움이 되었다. IKEA Tundra라는 비교적 가격이 저렴한 laminate floor  15 package를 이미 구입해 놓아서 곧바로 living room과 hallway를 시작하려고 한다. Good luck to me on this job!

 

re-framed damaged floor joists

정문 현관의 마루밑은 아주 오래전에 termite damage가 있었다. 별로 더 이상 진행되는 피해가 없어서 잊고 살다가 이번에 마루를 갈게 되면서 다시 보게 되었다. joist 몇개가 완전히 삮아 있었다.

 

3 new posts under floor

그 바로 밑에다 아주 튼튼한 기둥 3개를 설치하였다. 이정도면 현관에 heavyweight 급의 장정들이 여러명 서 있어도 끄떡이 없을 듯하다.

 

오늘 뉴스를 잠깐 보니 오래 전의 미국가수 Eddie Fisher가 82세로 세상을 떠났다. 솔직히 말해서 하도 오래 전의 유명인이라서 나이가 최소한 90세 이상은 되었을 줄 알았다. 그런데 “겨우” 82세? 알고 보니 우리가 알던 때의 그의 나이가 아주 아주 젊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흔히들 말하는 “십대의 우상 (teenage idol) 이었던 것이다. 노래도 물론 잘 불렀겠지만 대부분 그가 더 유명해진 이유는 그 당시 최정상 급의 배우,가수들과 이혼과 결혼을 줄기차게 감행했던 사실이다. 내가 아는 사람만 해도 그 유명한 Elizabeth Taylor, Debbie Reynolds, Connie Stevens 등등이 있다. 이 남자, 어떤 마력과 매력이 있길래 그 유명한 여자들과 그렇게 결혼과 이혼을 할 수 있었을까? 나중에 그의 인터뷰를 보면 역시 그는 “예쁜 여자를 보면 참을 수가 없다” 고 말할 정도로 그는 유명하고 예쁜 여자를 좋아했던 것 같다 (그렇지 않은 남자가 이세상에 어디에 있을까?) 그의 hit song중에는 역시 많이 들었던 1954년의 Oh My Papa를 빼 놓을 수 없다.

 

Oh My Papa – Eddie Fisher – 1954

 

어제 오랜만에 죽마고우 안명성이 추석안부의 너무나 짧게 쓴 나의 email에 대한 회신을 보내왔다. 이 친구는 내가 이름만 들어도 이제는 조금 찡~~한 느낌을 주는 그런 “진짜” 죽마고우다. 자기가 만든 섬유관련사업체를 오랫동안 열심히 경영을 해 오더니 이제는 아주 retire를 한 모양이다. 자기는 백수라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백수치고는 그 이전보다 더 활기차고 즐거운 느낌.. 부럽다, 명성아!
“죽마고우”란 말의 어원을 내가 잘 기억은 못하지만 한자를 생각해 보면, 대나무로 만든 말을 같이 타고 놀던 오랜 친구.. 같은 것이 아닐까? 우리는 비록 그런 말을 타고 놀지는 않았어도 “고우”란 말은 맞는다. 정말 오래되었으니까. 원서동시절을 온통 같이 보낸 친구.. 국민학교 3~4학년 때부터 알게 된 친구.. 자주 보았다가, 오랫동안 못 보았다가 를 반복한 인생, 결국은 나의 미국 행으로 인생의 황금기 우정을 끝없이 미루어야 했던 친구.. 이제 우리에게 그 우정의 공백을 채워 줄 시간은 그렇게 많은 것 같지 않다. 그래서 이런 헤어진 죽마고우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련하게, 찡~~ 해 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간 백두 대간 종주를 마치고, 영월서부터 춘천까지 가는 영춘 지맥을 끝내고, 금강 북쪽 논산북쪽에서 금강 하구까지 가는 금북 정맥을 마치고, 금강 남쪽을 달리는 금남 정맥을 하고 있다. 앞으로 얼마나 더 할지는 모르지만 건강이 허락하는 날까지 천천히 하려고 한다.

 

명성이의 이 말이 나를 또 역사,지리학도로 만든다. 백두 대간은 지리적인 명칭이겠지만 역시 한민족을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영월부터 춘천까지의 “영춘 지맥”, 논산에서 금강하구까지의  “금북 정맥”, 금강 남쪽의 “금남 정맥”.. 와~~ 이런 말은 솔직히 처음 들어보았다. 하지만 그 곳을 달리는 듯한 한반도 산맥의 “정기”가 화악~~하며 나를 덮는다.

안명성과 설악산 울산암에서, 1968년

안명성과 설악산 울산암에서, 1968년

이곳에도 산이 많이 있다. 하지만 고국의 산과 같을 수는 없다. 백두 대간의 “줄기”를 따진다면 이곳의 Appalachian Trail과 그 의미가 비슷하지 않을까? 이 Trail은 미국에서 제일 긴 것으로 아팔라치아 산맥의 시작과 끝을 종주하는 길고도 긴 등산로다. 남쪽의 시작은 이곳 조지아 주에서 시작이 되어 북쪽은 뉴욕을 훨씬 지나서 Maine 주에서 끝이 난다.
명성이와 나는 사실 학생시절 산에 얽힌 이야기기 꽤 많은 편이다. 둘 다 그 당시 산을 좋아했으니까. 하기야 그 당시 일반적인 수준으로 보아서 산 만큼 “값 싸게” 즐길 수 있는 곳도 드물었다. 군용장비와 최소한의 식량, 그리고 시간만 있으면 갈 수 있는 곳이 국토의 거의 전부를 차지한 주변의 산들이었으니까. 명성이와 같이 “등산”을 처음 한 것이 국민학교시절 “남산”이었다. 또 다른 죽마고우 “동만이”와 셋이서 서울 시내를 가로질러 남산을 보면서 그대로 걸어간 것이다. 물론 가는 길을 알 턱이 없었다. 하지만 그 산은 계속 우리에게 보였기 때문에 헤맬 필요가 없었다. 그때 동만이의 괴성은 “오~~ 감격!” 이란 말이었다. 우리가 수시로 오르던 삼청동 뒷산에서 본 서울의 모습과 남산에서 본 것은 물론 달랐다. 뿐만 아니라 남쪽으로는 한강과 관악산이 보였기 때문이다.
다음에 기억이 나는 때는 고1이 끝날 때 쯤, 진짜 등산이었다. 나의 오래된 가정교사였던 김용기 형이 나와 명성이 둘을 데리고 아주 추운 겨울에 백운대로 간 것이었다. 그 때 등산의 어려움을 처음 체험 하였다. 숨이 목까지 차는 괴로움을 겪은 것이다. 하지만 첫 진짜 산의 위용과 느낌을 두고 두고 느끼게 한 산행이었다. 그 때도 명성이가 산을 좋아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때 우리는 (최소한 나는) 처음으로 야외에서 밥을 해 먹는 경험을 하였다. 내려 올 때는 올라간 길의 반대쪽으로 내려와서 더 첫 등산의 추억을 멋있게 장식하였다.

제일 추억에 남는 명성이와 의 등산은 역시 1968년 여름방학 때 내가 대학 2학년 때 둘이서 갔던 설악산 등산이었다.  둘 다 처음 가는 설악산이었고 이렇게 먼 곳을 둘이서 간 것도 처음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 둘이서 간 등산의 마지막도 되었다. 그때는 비교적 초보적인 수준이어서 내설악이 아니고 외설악으로 갔다. 이것이 추억에 남는 이유는 그곳에서 내가 사고로 화상을 입고 일찍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때 혼자서 남게 된 명성이는 꽤 고생을 했다고 들었다. 물론 발에 심하게 화상을 입은 내가 고생은 더 했겠지만 나중에 생각을 하니 명성이도 꽤 고생을 한 것을 알고 내가 너무나 무심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 이후로 나는 어쩐지 명성이와 어울릴 기회가 별로 없었다. 서로 다른 대학을 다니고 연락도 별로 안 되고 거의 잊고 살게 되었다. 무언가 그때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달랐나.. 기억이 잘 나지를 않는다. 그는 그의 대학친구들과 어울리고 나는 나대로 나의 그룹과 어울리는 그런 식이었다. 그것이 지금 생각해도 조금 아쉬운 것이다. 더 죽마고우의 정을 살릴 수도 있었을 터인데.. 하지만 내가 결혼을 할 때 그는 옛정을 발휘해서 결혼식 사회를 보아주었다. 그리고 어릴 때 별로 보이지 않던 기업가적 자질을 발휘해서 멋있게 자기의 사업을 키워나갔고 모범적인 가정을 이끌며 현재까지 왔다. 비록 오랫동안 떨어져 살아는 왔지만 그게 그렇게 느껴지지를 않는 것은 역시 “죽마고우” 라서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을 해 본다. 이 나이에 백두 대간을 종주하는 명성아… (한마디로)부럽다!

 

 

The Tremeloes – Silence Is Golden
1967-1968

나도 이제 본격적인 돋보기 시대로 접어들었다. 일년 도 넘게 아주 조잡한 돋보기 안경 하나를 가지고  곡예를 하다시피 살았다. 그것들도 내에게 맞추어서 산 안경이 아니고 연숙의 것을 빌리기도 하고 어떤 것은 심지어 hardware store에서 산 것도 있었다. 그저 가까운 곳이 보이면 쓰고 그렇지 않으면 벗고.. 마음 한편에서는 신경질과 함께, 나는 절대로 이런 것들이 필요 없을 것이라고 나를 위로하면서..

그것이 이제는 불편한 정도를 넘어서게 되었다. 성당에서 성가의 가사가 보이지를 않는 것이다. 하지만 절대로 항상 쓰고 살기는 싫으니까, 그것을 가지고 다녀야 하는데 그것이 쉽지를 않다. 주머니에 넣었다가 잘못하면 잃어버리거나 망가트릴 가능성이 많으니까. 그래서 어제는 용단을 내려서 reading glass 3 pack 이란 것을 Costco에서 $18에 샀다. 이제는 이곳 저곳에 두고 다녀도 문제가 없게 되었다. 아.. 나이 먹음의 설움이여..

 

중앙고 57회 동기회 총무 신동훈이 또 동기회 소식을 전해왔다. 3/4분기 모임의 소식과 함께 놀랍게도 교우 차정호의 개인 사진전 소식이었다. 고국의 교우들은 다들 그 동안 알고 있었겠지만 나는 전혀 모르는 사실이..차정호가 사진전을 할 정도의 사진예술가란 것을.. 미안하구나, 차정호. 너무나 모르고 살았다. 차정호는 중앙중학교 1학년 때, 중앙고 3학년 때 같은 반이었다. 너무나 친숙한 이름과 얼굴이다. 중앙고 졸업 후에 한번도 그와 개인적으로 연락이 된 적이 없어서 어느 대학엘 간 것도 모를 정도다. 그러다가 얼마 전에 교우친구 목창수가 57회 동기회 회장을 할 당시 그의 이름이 총무로 나와있었다. 너무나 반가웠다. 그가 건강히 살아 있었구나. 그런 그가 이번에는 개인 사진전이라니 너무 축하할 일이 아닌가? 웹사이트를 통해서라도 한번 어떤 것인가 볼 수 없을까..

 

오늘은 다시 일요일, 나의 정신적인 피난처, 휴식처, 성체와 성혈을 영할 수 있는 곳, 우리가 사는 지역의 (미국)본당인 Holy Family Catholic Church에 다녀온 날이다. 우리가 가는 오전 8시 반의 미사는 우리에게 조금은 이른 시간이지만 거의 일년이 넘게 우리의 일요일 미사가 되었다. 그 이전에는 거의 10시 미사에 갔었다. 그 시간 미사의 신자수가 아마도 제일 많고 따라서 조금만 늦게 가면 익숙한 자리를 놓치게 된다. 그래서 조금만 더 일찍 일어나면 8시 반의 미사에서 조금 더 마음의 여유를 갖고 미사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제는 8시 반 미사의 regular (매주 보는 교우들) 들도 낯이 익숙해 졌고 혹시라도 못 보게 되면 조금 신경이 쓰이곤 한다. 특히 regular 교우들은 가급적 자리를 바꾸지 않는다. 그래서 더욱 친근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비록 매주일 미사는 Holy Family 미국본당에서 하지만 역시 “정신적”인 본당은 이 곳에 있는 유일한 한인성당인 “아틀란타 한인 순교자 성당” 임을 부인을 할 수 없다. 이곳은 우리가 1989년 이곳에 왔을 때 이미 있었다. 당연히 우리는 그곳에 나갔다. 그 당시 신자 수는 지금에 비하면 작았지만 우리는 그 보다 훨씬 작은 공동체 (Madison, WI & Columbus, OH)에 익숙해 있어서 처음으로 “진짜” 공동체 같은 느낌으로 미사를 보게 되었다. 그런대로 비슷한 나이 또래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기도 하고 성가대에도 참가하는 전형적인 “일요일 신자”의 생활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못하고 위기를 맞게 되었다. 1990년대 초에 주임신부님이셨던 현유복 신부님 “사건”,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그 당시 한창 문제가 되기 시작한 사제들의 추문과 그에 따른 과잉반응, 오해.. 등등으로 사태가 걷잡을 수 없게 되었고 결국 신부님은 갑자기 귀국을 하시게 되었다. 사실과 헛소문,그것을 개인적으로 이용하려는 사람들.. 한마디로 종교의 어두운 곳을 들어내는 사건이었다. 아틀란타 대교구청의 처사도 그렇게 친절한 것은 아니었고 한창 커지던 공동체도 “본당”에서 “공소”로 추락을 하고 말았다. 나는 자세한 경위는 모르지만 정말 실망적인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공동체의 이미 곪았던 인간적인 치부들이 들어나게 되었고 심지어는 신부 파, 수녀 파 등의 이름이 생기고 성전 안에서 물리적인 실력행사까지 보이게 되었다. 끝에는 결국 법적인 소송으로까지 악화를 하게 되었고 그때 우리는 자발적으로 공동체를 떠나게 되었다. “일요일의 평화”가 깨어진 곳에 더 가기가 싫었다. 사랑의 계명을 철저히 잃어버린 형제자매들도 대하기가 두려웠다. 그 이후로 우리는 성당을 “완전히” 떠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교회를 떠난 것은 잘못된 것이었다. 인간들의 교회면 당연히 문제가 없을 리가 없는데 그것을 깊게 생각을 못한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우리, 특히 나는 많은 것을 잃게 되었다. 그 당시는 물론 그런 것을 크게 생각을 못했다. 지금 생각하니까 그런 것이다. 하느님의 “역사”하심을 감히 인간들이 어찌 다 알겠는가. 결과적으로 한인성당은 큰 타격을 받고 많은 신자들이 떠났지만, 아주 버려지진 않았다. 아주 영성 적인 “강 팀”인 한국 예수회(Society of Jesus: Jesuit)에서 직접 예수회 신부님들을 파견하시기 시작한 것이다. 철저한 spiritual discipline으로 무장한 그들이 다시 공동체를 부활하기 시작하고 서서히 떠났던 신자들이 돌아오게 되었다.그 이후 한인공동체는 하느님의 축복으로 질적, 양적인 성장을 계속하고 몇 년 전에는 드디어 숙원이었던 “본당”의 지위를 되찾게 되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곳이 미국에서 유일한 한국파견 예수회 성직자들의 “본거지”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런 축복이 어디에 있을까. 아냐시오 로욜라(Ignatius of Loyola) 영성으로 무장된 신부님들의 목회를 받고 있는 이곳의 본당은 거의 20년 전의 “추문”을 다 씻어버리고 다음세대의 이민본당으로 발 돋움을 하고 있다. 최근에는 새로운 성전을 구입하고 크게 불어난 신자 인구를 대비하게 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나에게 큰 과제가 다가오고 있음을 느낀다. 미국본당을 떠나서 한국본당으로 갈 것인가.. 하는 문제다. 물론 주일미사를 어디로 가느냐 하는 문제일 수도 있지만 사실 그보다도 더 큰 의미를 갖는다. 나 혼자서 결정을 하는 것이 지금은 생각보다 힘이 든다. 하지만 이건 시간문제가 되고 있다.

 

9월도 거의 하순으로 접어든다. 세월의 흐름과 빠름은 이제 아주 익숙해져서 놀랄 것은 하나도 없다. 하지만 며칠 안으로 분명히 “가을”이 시작이 되는데.. 이게 어찌된 모양인가. 아침 저녁은 분명히 시원해 졌는데 낮의 기온이.. 내가 잘못 보았나.. 아니다.. 분명히 화씨 95도? 좌우지간 올해 기후는 정말 끝내준다. 겨울은 거의 시베리아였고, 여름은 거의 열대지방.. 거의 극과 극이다. 기상과학자들은 분명히 말한다. “지구온난화”의 특징이 바로 이런 “극과 극”의 패턴이라고. 나치 독일의 유태인 학살을 “허구”라고 말하는 바보들이나, 온난화는 정치적인 음모라고 믿는 바보들이나 하나도 다른 것이 없다. 참, 한심한 인간들이 많이도 있다.

한국식품점에서 준 달력을 보니, 다음주중이 빨갛게 표시되어있다. 자세히 보니 “추석” 이었다. 또 그 때가 왔구나. 이곳에서 오래 산 관계로 사실 그때의 생동감을 많이 잊어버렸다. 아니면 나이 탓도 있을지 모른다. 이곳의 추수감사절이 아마도 고국의 추석과 제일 비슷할 듯하다. 결국은 가족이 모이는 것이니까. 어렸을 때의 추석이나 설날을 생각하면 된다. 기억에, 그 전날 밤에 잠이 오지를 않았으니까.. 그 정도면 어느 정도인가 알만하다. 모든 것이 부족한 때여서 명절의 “혜택”은 더 기억에 남고 즐거웠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사실 고국의 명절이 되면 더 외로움을 느끼곤 한다. 많은 것을 잊고 살았다는 생각도 들고.. 고향이란 것이 무엇이길래 이렇게 느껴지나 하며 더 생각을 하게 된다.

오늘 배달된 Georgia Bulletin (아틀란타 대교구청 발행 주간지) 을 잠깐 보니 흥미 있는 글이 있었다. 요새 조그만 불씨처럼 퍼지는 “작은 집에서 살기 운동”.. 나도 전에 PBS방송에서 잠깐 본 적이 있었다. 100 square feet (입방 피트)의 좁은 집에서 “즐겁게”사는 사람의 이야기였다. 100 sf (square feet)면 어느 정도일까? 가로세로 4미터 정도의 크기다. 머리를 짜내서 그만한 크기에 각종 시설을 모조리 넣고 설계한 특별한 집일 것이다. 우리 집이 3000 sf정도 되니까 얼마나 작은지 상상이 가기도 하고, 사실 믿을 수가 없다. 그러니까 간단히 말해서 법정스님의 “무소유” 을 실천하는 그런 집인 것이다. 화제가 된 것은 그런 곳에서 편하고 행복하게 산다는 얘기다. 그런가 하면 10,000 sf가 넘는 초대형 호화주택에서 사는 사람도 생각보다 많다. 나의 아는 사람도 그런 곳으로 이사를 갔는데 그곳에 가보고 사실 조금 “불편한” 심정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큰 집에서 살 수가 있을까.. 인간의 욕망이 이렇게 끝이 없을까..하는 조금 복잡한 심정이었다.

 

오늘, 9월 17일은 우리 집 둘째 딸 나라니의 25번째 생일이다. 벌써 그렇게 되었구나.. 얼마 전부터는 사실 아이들도 나이를 셀 때 조금 시간이 걸렸다. 앞으로 점점 더 그렇게 될 것이다. 25세면 내가 미국에 처음 올 때 정도의 나이가 아니던가? 흔한 말로 25년이면 강산이 두 번 반이 변할 정도의 세월일 것이다. 특히 근래의 강산이 변한 정도는 옛날이 것과 비교가 되지를 않을 듯 하다. 나는 딸만 둘을 두어서 아주 가끔 아.. 나도 아들이 하나 있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후회까지는 못 미치는 그런 생각을 할 때도 있다. 자식 둘이면 만족하던 세대였고, 남녀구별을 싫어하던 우리 부부였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남자가 필요한 일들을 만나거나 남자들만이 좋아하는 그런 취미들을 생각하면 조금 아쉬워지기도 하긴 했다. 왜냐하면 어떤 것들은 절대로 남자와 여자가 서로 이해를 못하는 그런 것들도 있으니까.

큰애와 다르게 나라니는 무척 감성적이다. 머리보다는 가슴으로 생각하는 그런 타입이다. 책보다는 사람을 더 좋아하고, 하나에 “미치면” 빠져 나오기가 무척이나 힘들다. 한때는 Backstreet Boys의 semi-groupie가 될 정도가 되어서 우리를 애타게 했다. 그러면서 생각을 해 보니 나도 그 나이에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어도 지독히pop culture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면서 이해를 하려고 노력을 하곤 했다. 어렸을 때에 나는 아이들과 재미있게 지냈지만 가장 중요한 10대 후반에 그 애들을 완전히 놓치고 말았다. 왜 그렇게 어려웠을까? 아니면 그렇게 어려워야만 했을까?

나라니가 태어날 때 너무 난산이어서 더 이상 고생을 원치 않았지만 그 이후 가끔 하나 더 둘까..하는 “부질없는 상상”도 해 보긴 했다. 하지만, 역시.. 더 이상 “고생”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근래에 이곳에서 여자로 태어나는 것은 시간이 가면 갈 수록 모든 여건들이 나아지고 있는 추세이고 아마도 고국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흑인대통령에 이어 여자대통령도 “절대로” 가능한 세월이 되고 있으니까, 참, 좋은 세상이 되었다. 비록 상대적으로 남자들이 조금 불쌍해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이것이 더 공평한 것이 아닐까?

나라니에게 주는 노래선물을 고르는 것,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1985년 태어난 해의 80s song은 역시 We Are the World가 제일 적격이고, 나라니가 제일 좋아하던 Backstreet Boys의 hit songs중에서는 나도 좋아하던 Show Me the Meaning of being Lonely가 좋을 듯 하다. 나라니,  Happy Birthday!

 

 

We Are the World – 1985 Usa For Africa

 

 

Show Me The Meaning Of Being Lonely– Backstreet Boys

이 오랜 된 이야기는 사실 아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족도 예전에는 나의 이 이상한 귀신 이야기에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으니까 남들에게 말을 해도 반응이 그저 그랬다. 하지만 지금은 이것을 기억하고 싶고 더 나아가서 이렇게 “개인 역사적인 기록”으로 남겨두기로 했다.

제목이 사실은 잘 연결이 되지 않을지도…. 육이오, 원서동, 동섭이네 집, 영구차, 귀신.. 등등이 말이다. 우선 배경이 되는 시기는 나중에 생각을 해 보니 1953년 경이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재동국민학교에 들어가기 1년 전 쯤, 내가 5살 정도나 되었을까? 그때의 기억은 사실 아주 또렷하다. 한국전쟁 휴전이 되기 일년 전부터 기억이 나는 것이다. 하지만 아주 가끔 정말 꿈에서나 볼 정도로 가끔 그 이전도 기억을 한다. 그러니까 1952-3년 정도쯤일까?

6.25전쟁이 터질 당시 우리 집은 4가족의 행복한 가정이었다고 들었다. 나보다 세 살 정도 위인 누나와 같이 우리는 평범한 가정이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그 당시 경기고등학교의 영어선생님으로 계셨고(그 전에는 선린상고에 재직, 심리학교수가 되신 장병림씨와 같이 근무) 어머님은 이화여전 가사과 출신의 가정주부. 언제인지 모른다. 아버님이 납북이 되신 것이.. 그 때의 자세한 상황을 나는 어머님으로부터 자세히 듣지를 못했다. 아마도 인민군(괴뢰군이라고 불렀다)들이 후퇴를 할 때쯤이 아니었을까? 나의 모교인 재동국민학교에 젊은 남자들을 모두 집합시켜서 미아리고개를 넘어 북으로 끌고 갔다고만 들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단장의 미아리고개” 노래의 불씨가 아니었을까? 나의 죽마고우 유지호의 아버님도 그때 같이 끌려가시다가 구사일생으로 탈출을 하셨다고 들었다. 지호 아버님으로 부터 왜 그때의 이야기를 더 자세히 들어보지 않았는지 정말 후회막급이다. 나중에 이곳의 천주교 교우 한 분께서 말씀이 아마도 나의 아버님이 영어선생이라서 끌고 갔을 것이라고 귀 띰을 해 주셨다. 조금 동감이 가는 말씀이었다. 그 이후 우리는 아버님의 생사를 전혀 모른다. 전혀..

어머님은 생활력이 세다는 이북여자였다. 외가댁은 “버들 양씨”로써 모두 함경도 원산의 대 지주였고 어머님을 서울의 이화여전으로 보내셨다. 다른 고모, 삼촌들도 모두 일본으로 유학을 보내신 그런 개화된 집안이었다고 들었다. 어머님은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시고 서울남자를 만나서 결혼을 하셨는데 해방이 되었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남북이 갈리고 외가 쪽은 대지주로써 “악질 반동”으로 재산을 다 몰수 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가 쪽은 워낙 식구가 많아서 그랬는지 삼팔선을 넘지 않으셨다. 그때의 애기로, 내가 태어났을 때 외 할머님께서 혼자 삼팔선을 넘어서 왔다 가셨다고 들었다. 그리고 김일성(개새끼)의 육이오..

아버님이 납북이 되시고 완전히 혼자 서울에 우리 두 남매를 데리고 남게 되신 어머님의 심정을 누가 알 수 있을까? 나도 사실 요새 그런 상황을 상상하며 눈시울을 적시니까. 그때 우리는 집이 없었다. 남의 집에서 산 것이다. 전쟁 중에 집 걱정보다는 우선 밥을 먹어야 하는 게 급선무가 아닐까? 이남에 일가친척의 수는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완전히 혼자였다. 그때 아버님의 친구이자 나의 친구 유지호의 아버님이 사시던 곳, 원서동에 한옥이 있었다. 1.4 후퇴 때 임시로 그 집으로 가셨다. 어쩐 일인지 지호네 집은 지호만 우리 어머님께 남겨두고 (갓난아기) 전부 전라도로 피난을 간 것이다. 서울이 다시 유엔군에 수복이 되고 지호네 집은 돌아왔고, 우리식구는 같은 원서동에 있던 어느 무당집에서 살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집 무당 아줌마네는 우리같이 남매가 있었는데 남자애(김병세)는 나와 동갑으로 나중에 재동국민학교를 같이 다니고 그 누나(양님이 누나라고 불렀다)는 나의 누나와 동갑, 같이 재동학교를 다닌 인연이 있었다. 그 집에 살던 기억이 나는 그런대로 난다. 무당이 무엇인지는 잘 몰랐어도 대청 마루에 무서운 ‘귀신’ 같은 것이 앉아있었다는 기억이 뚜렷이 난다. 그 때가 아마도 1952년경 쯤이 아니었을까?

그 병세네 집에 살면서 어머니는 원서동 조금 아래쪽, 그러니까 돈화문 근처 (비원 정문)의 어떤 골목에 있던 한옥에 가서 밥과 빨래 등을 하는 일을 하셨다. 그 집을 어머님은 동섭이네 집이라고 부르셨다. 우리도 심심하면 누나와 같이 손을 잡고 그 집에 놀러 가곤 했다. 그 집이 무슨 집인지는 잘 몰랐고 동섭이가 누구인지도 몰랐다. 그저 동섭이네 집이라고만 알았다. 그러다가 얼마 후에 우리는 그 집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왜 가야만 했는지는 모른다. 그 집은 무당집과는 분위기가 완전히 다른 우선 밝고, 아주 마당도 크고 사랑채가 여럿이 있는 제법 큰 집이었다. 거기서 살던 기억이 나는 거의 고스란히 남아있다. 아마도 1952년에서 1953년 사이였을 것이다.

그 집은 골목(끝에는 휘문학교가 있었다)의 중간쯤에 위치해서 아이들이 나와서 놀기에는 안성맞춤인 그런 골목이었다. 그 골목을 빠져나오면 원서동을 관통하는 큰 도로가 나오고 그곳은 그런대로 차들이 지나다녀서 아이들에게는 조금 위험한 곳이었다. 골목에서 놀다가 아주 심심해지면 그곳으로 잠깐 나와서 놀곤 했다. 원서동 입구, 돈화문 옆쪽으로는 헌병부대, 미군부대들이 있었고 항상 커다란 트럭들이 드나들곤 해서 가끔 아이들이 차에 치어서 죽는 사고도 나곤 했다. 한번은 그 길에 나가보니 어떤 엄마가 길바닥에 깔린 거적 앞에서 땅을 치며 통곡을 하는 것을 보았다. 그 엄마의 아이가 차에 치어서 죽은 것이다. 전쟁 중에 있었던 또 다른 비극이었다. 하지만 미군들은 가끔 먹을 것과 우유 같은 것을 배급으로 나누어 주곤 했고 재수 좋으면 정말 정말 맛있는 쵸코렛도 주었다. 나도 누나와 같이 우유배급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그 당시 어떤 날, 나는 아주 무서운 것을 보았다. 다른 날과 같이 골목을 오르내리며 놀다가 심심해져서 원서동 대로로 나갔는데, 그날은 이상한 차 한대가 와서 서있었다. 그 당시 차들은 거의가 군용차라서 그런 차가 아니면 다 이상하게 보이긴 했다. 하지만 그 차는 정말로 요상하게 생겼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이 영구차였다. 기분 나쁠 정도로 요란하게 모서리를 장식한 것이 그 나이에 보아도 으시시했던 것이다. 아주 자세한 상황은 물론 다 잊어버렸지만 그 때 내가 경험한 것 한가지는 아직도 뚜렷하다. 그 영구차의 뒷문이 활짝 열려 있었고 그 안에는 사람들이 앉아서 울고 있었다. 그것 까지는 정상일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바닥이었다. 그 바닥에 “죽은” 사람들이 여럿이서(아주 많았다) 서로 엉켜서 누워있었던 것이다. 나의 어린 눈에는 그 숫자가 그저 많았다. 그 많은 시체들이 서로 엉켜서 누워있었던 것을 나는 “분명히” 보았던 것이다!

너무나 놀라서 나는 곧바로 집으로 뛰어서 엄마를 찾았다. 나는 너무나 놀라면 절대로 울거나 하지 않는다. 그저 얼굴이 굳어지고 더 정신을 바짝 차리는 그런 타입이다. 본대로 그대로 나는 엄마에게 말하면서 몸서리를 쳤다. 물론 엄마는 전혀 믿지를 않으셨다. 암만 이야기를 해도 전혀 믿지를 않으시는 것이었다. 나는 그 당시 귀신이란 것을 잘 믿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이것은 내 눈으로 분명히 본 것이 아닌가? 그 이후 나이가 들면서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하면 그저 상상력이 많았던 정도로 이야기가 끝이 나곤 했다. 과연 그때 내가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아주 가끔 그때 생각을 떠 올리면서 이성적인 노력을 해 본다. 과연 무엇이었을까? 혹시 장례식에 가는 가족들이 너무 슬퍼서 엎드려서 울던 것이 아니었을까? 가능하다. 하지만 내가 본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분명히 ‘죽은 사람’들이 엉켜있었던 것이다. 그것만은 나는 절대로 확신을 한다.

조동주, 재동국민학교 6학년, 1959년

조동주, 재동국민학교 6학년, 1959년

이야기는 이렇게 끝이 나지만 사실 결론이 없다. 하지만 나는 지금은 믿는다. 절대로 ‘초자연적인’ 것은 있다고.. 이렇게 신앙을 가지게 되면서 그런 생각이 더 굳어져간다. 절대로 귀신이나 영을 보는 것은 가능하다는 사실을. 그러면 그때 내가 본 것들은 정말 정말 죽은 사람들이었을지도 모른다. 믿기 힘든 경험이 이렇게 나에게도 있다는 것이 조금은 “대견” 스럽다. 그리고 동섭이네 집의 동섭이가 누구인가도 나중에 알게 되었다. 남자의 이름이었고, 이름은 “조동섭”, 그 집 주인의 큰 아들이었을 것이다. 나보다 3살 정도 위였던 듯 하고 역시 재동국민학교를 다녔다. 그 집도 역시 6.25때 임시로 집을 비우고 피난을 갔던 것 같았다. 내가 국민학교 들어가기 전에 그 집은 다시 돌아왔고 우리는 다시 이사를 가야 했다. 또 나중에 알고 보니 조동섭의 동생이 나와 동갑인 조동주였다. 국민학교를 나와 같이 다니고 그것도 모자라서 중앙 중, 고등학교도 같이 다녔다. 그러고 보니 그 동섭이 형도 중앙중고를 다녔었다. 이것은 참 기묘한 인연이 아닌가? 나의 가장 오래 전의 기억을 온통 차지한 “동섭이네 집”, 요사이 Google Satellite사진으로 보니 그 근처는 완전히 없어진 듯 보였다. 무슨 원서동 공원 비슷한 것으로 “상전벽해“가 되어있었다. 그것이 거의 60년 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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