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holic Sunday

Advent 2010 (2010년 대림절)…  오늘은 천주교 달력으로 새해가 되고 예수님 탄생인 12월 25일 성탄절까지의 대림절이 시작되는 첫 날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시기인 것이다. 개신교회에도 이러한 시기에 대한 이름이 따로 있는지 궁금하다. 기억에 들어본 적이 없다.예수님 활동 당시 12 사도들의 시대로부터 계속 이어져온 이 Roman Catholic, 천주교의 다양하고 복잡한 역사, 전통들은 알면 알수록 , 더 알고 싶은 것 투성이다. 이날부터 제대 옆에는 대림을 상징하는 4개의 촛불이 세워지고 한 주일마다 초가 하나씩 켜진다. 이것도 천주교의 특징인 ‘상징’적인 의식일 것이다.

2010 대림절 시작, 본당 주보에서
2010 대림절 시작, 본당 주보에서

우리는 주일미사를 집 근처에 있는 미국인 본당, Holy Family Catholic Church에서 본다. 이곳도 거의 10년 넘게 다녀서 정이 들었다. 아침 8시 반의 미사에 가면 거의 앉는 자리가 정해질 정도로 익숙한 신자들이 많다. 혹시나 낯익은 얼굴이 안 보이면 신경이 쓰인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제는 사실 주임신부님 보다는 부제님 중에 있다. Deacon John이라고 불리는 부제님, full name은 Deacon John Duffield인데 건장한 체구에 단정한 흰머리, 항상 진실된 웃음을 띈, 순진하게도 보이는 얼굴, 그 보다 제일 인상적인 것은 그 ‘경건’한 태도이다. 주임신부님보다 더 경건하게 미사를 돕는다. 이분이 부제가 된 것도 5년 정도 되어간다. 나이도 나와 같고 직업은 사실 nuclear engineer, U.S. navy officer로 nuclear submarine (핵 잠수함)이 전공이다. 그가 이렇게 공학도라는 사실이 나를 참 기쁘게 한다. 가끔 하는 설교도 어찌나 그렇게 틀에 박히지 않았는지.. 진실로 하느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그분의 모든 말과 행동에서 우러나오는 그런 것들.. 흔치 않은 일이다. 사실 속으로 나도 여생을 그분과 같이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내일은 이 미국본당에서 penance service(판공성사)가 있는 날이다. 해가 가기 전에 이렇게 한번 하고 부활절 전에 또 있다. 쉽게 말해서 천주교 특유의 ‘고백(고해)성사’인 것이다. 이것의 중요성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지만 그만큼 이 성사를 지키는 것 또한 쉽지 않다. 이것을 하려면 정말 심각하게 자기를 되돌아 보는 ‘양심성찰’을 해야 하니까. 자기의 죄를 찾아 내는 것은 말처럼 간단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거의 2년간 이 성사를 못 보고 있고, 이것이 항상 나를 찜찜하게 한다. 사실 이것을 하려면 ‘기도’가 필요한 것이다. 영어로 하는 고백성사는 아무래도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하니까..

 

I Understand, by G-Clefs…  며칠 전부터 정말 이상하게도 oldies중의 I Understand란 곡이 자꾸만 생각이 났다.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아마도 이런 발전이 아닐까.. 년 말이 되어가고, 그러면 분명히 Auld Lang Sine이 불릴 것이다. 그 곡이 background 로 흘러나오는 곡이 바로 G-Clefs가 불렀던 60년대 초의 hit, I Understand (just how you feel) 인 것이다. 그 당시 우리는 이 곡을 부른 group G-Clefs에 대해서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그 이후도 마찬가지.. 이번에 알고 보니 이들은 내가 잘 못 추측한 대로 영국계통의 그룹이 전혀 아니고, 미국의 ‘흑인’그룹이었다. 사실, 적지 않게 놀란 것이 사실이다. 이렇게 잘못된 사실을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조금 부끄럽기까지 하였다.

이 곡은 미국에서 1961년에 나온 것이지만 우리 때는 거의 1964년경에 많이 알려진 곡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중앙고2 때였다. 년 말에 많이 불렸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확실한 것은 고2때가 끝날 무렵, 그러니까 역시 1964년이 저물 무렵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학급회의, 그러니까 home room이라고 불렀던 그 시간에 모두들 앞에 나가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을 했다. 분위기는 완전히 고2때 특유의 감상에 젖은 그런 분위기.. 고3이 되기 전 무슨 전쟁이라도 나가는 듯한 심정으로 이별을 서러워하는 기분에 모두들 휩싸인 것이다. 바로 그때다.. 제일 키가 컷 던 김용만이 G-ClefsI Understand를 부르기 시작했다. 나는 그 광경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렇다.. 이별을 서러워하던 순진했던 가슴들의 표현이었다. 그 당시 고교2학년은 정말 모두들 문학소년,소녀들이었다. 지독히도 순진하고, 이상적이었던 그 일년.. 그때에 생각하고 꿈을 꾸었던 장차 다가올 인생들.. 과연 어떠한 인생들이었을까? 얼마나 많은 기쁨, 행복, 괴로움, 후회를 만들며 살았을까? 갑자기 지독한 감상에 젖는다.

 

I Understand by G-Clefs, 1961

I understand just how you feel

Your love for me, why not be mine?

It’s over now but it was grand

I understand, I understand

If you ever change your mind

Come back to me and you will find

Me waiting there, at your command

I understand, I understand

I miss you so, please believe me when I tell you

I just can’t stand to see you go

You know

If you ever change your mind

Come back to me and you will find

Me waiting there at your command

I understand, I understand

SPOKEN: “I understand just how you feel. Let bygones be bygones. But always

remember I love

you, I love you, I love you.”

(We’ll sip a cup of wine, my dear, for Auld Lang Syne )

I understand

마리에타 2구역

Thanksgiving Day 전날 저녁에는 몇 달 만에 연숙이와 같이 우리가 속해있는 아틀란타 한인천주교회 마리에타 2구역 미사에 다녀왔다. 지난 6월부터 이 구역모임에 참가를 못하고 있었는데 이번도 못 나가면 올해를 넘기겠다는 생각도 들고 해서 음식 하나를 해서 간 것이다. 이번의 host family 고창민 클레멘스 형제 댁, 나는 이번에 처음 가는 집이었다. 미사를 드리기에 쾌적한 장소를 제공하는 훌륭한 집, 실내 디자인도 멋있는 그런 집이었다. 이 댁의 따님, 고근정양은 10여 년 전쯤 내가 이곳의 한 한글학교에서 잠깐 가르친 적이 있었는데 지금은 다 커서 대학에서 ROTC까지 하는 용감한 아가씨가 되었단다. 참 흐뭇한 기분이었다. 고 형제는 집에서 ‘밀주’를 취미로 담근다고 하는데 그날도 예외 없이 달콤한 포도주와 인삼주가 나왔다. 물론 집에서 담근 것들이다.

마리에타 2구역은 우리부부가 속해있는 아틀란타 순교자 한인천주교회 (이하 한인성당, 본당)의 아틀란타 서북부 suburb (마리에타 포함)를 포함하는 구역system중의 하나다. 이 지역의 특징은 1996년 Atlanta Olympic을 계기로 급 팽창한 아틀란타의 다른 수도권지역에 비해서 이곳만은 아직도 거의 인구변동이 없는 ‘안정된’ 곳에 속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곳에 사는 한인들의 숫자도 그렇게 많지 않고 안정적이며, 그들은 경제적으로 대부분 안정이 됐거나 되고 있는 그런 연령층이 대부분이다.

우리부부는 현재 한인성당 주일 미사는 안 나가고 있지만 이 구역모임에 나간 지는 거의 5년이 되어온다. 사실 이것마저 안 나가면 우리는 완전히 한인성당과의 연결고리가 없어지게 되는 셈이다. 대부분 성당 구역단체들이 그러하듯 이곳도 active한 멤버는 한정이 되어있고 나머지는 가끔 참석하는 정도이다. 이 구역 시스템의 중요한 목적은 역시 교우들간의 친목도모일 것이지만 그 이외의 기능도 아주 효율적으로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구역 신자들이 손수 만든 음식을 성당 점심으로 판매해서 본당을 돕는 것 같은 것도 있다.

 

Irish Folk/ Pop/Gospel Singer Daniel O’Donnell의 “St. Francisco의 기도”

 

나에게 이 첫구역모임 참가는 조그만 culture shock이었다. 비록 열 몇 명 정도의 사람들이 모인 것이지만 나에게는 너무 많은 사람들처럼 느껴진 것이다. 이것은 물론 내가 오랫동안 한국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을 거의 의도적으로 피해와서 그럴 것이다. 그 모임에 내가 아는 사람이라곤 조바오로씨 부부가 고작이었다. 나이도 우리가 제일 많은 축에 속했다. 이렇게 해서 조금씩 한인성당을 향한 발걸음이 시작된 것이다.

나의 한 달 전 레지오 가입 후에 이렇게 오랜만에 다시 만나는 구역형제자매님들이 조금은 다르게 느껴졌다. 조금은 더 친하게 보인다고 나 할까.. 아니면 착각인가.. 하지만 분명히 내가 조금씩은 변하고 있음을 나는 느낀다. 이번의 미사집전은 올해 이곳에 새로 부임한 김영훈 스테파노 “막내” 신부님이시다. 이분은 30대의 나이보다 훨씬 ‘젊어’보이시고 다른 두 신부님보다 젊어서, 막내신부로 통한다. 말씀을 어떻게나 또박또박 하시는지 흡사 오래 전 국어시간에서 듣던 그런 발음을 연상시킨다. 역시 예수회 신부님이신데 다른 분과는 달리 미국의  Berkeley에서 공부를 하시고 이곳에 처음으로 부임하셔서, 이곳 미국의 사정을 잘 아시고, 특히 언어문제가 없어서 청소년 사목에서 맹활약이 기대되기도 한다. 조금 이색적인 것은 대부분 신부님들이 술과 담배를 하시는데 이 김신부님은 둘 다 전혀 못하신단다. 그런 것들이 아주 신선하게 느껴졌다. 이래저래 이곳 본당은 참 하느님의 은총을 최근 들어서 많이 받는 것 같다. 특히 주임신부(Pastor)이신 안정호 이시도르 신부님의 지치지 않는 헌신적 사목활동은 떠나신 뒤에도 두고두고 이곳에 깊은 영향을 남기리라 기대가 된다.

우리구역 교우의 연령층은 30대부터 70대까지 다양하지만 40~50대가 주축을 이루고 있어서 우리는 조금 은퇴세대에 속한다. 유일하게 나보다 나이가 위이신 분은 전 토마스 아퀴나스 형제님이 계신데, 사실상 이 구역을 오랫동안 지키시고 요새는 건강을 이유로 가끔 나오시곤 한다. 이 전 형제님(교우들은 대부분 형제, 자매님으로 불린다)은 조금 독특하신 분이다. 덕수상고, 고려대학을 졸업하시고 학교에서 오랫동안 가르치다가 미국엘 오신 듯한데, 정치적인 성향이 상당히 진보적이고, 따라서 보수세력을 아주 혐오한다. 쉽게 말하면 상당히 좌익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는다. 특히 개인적으로 “박정희”를 지독히 혐오하는데, 이것이 지나쳐서 거의 ‘주사파’로 오해를 살 정도의 발언을 하는데 나는 그것이 상당히 듣기가 거북하였다. 참 세상이 많이 좋아지긴 했다. 이런 발언이면 옛날에는 세계 어느 곳에 있던 간에 문제가 되지 않았던가? 나는 개인적으로 아버님이 육이오직후 공산당에게 납북을 당하셔서 김일성이라면 자다가도 이를 가는 형편인데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소화가 안 될 지경이다. 같은 신자 입장에서도 그렇다. 조금 다른 사람들의 입장도 생각을 해 주는 것이 어떨까. 사실 거북한 것은 이것만이 아니다. 사실 교우들과 어울리게 되면 자기와 입장이 아주 다른, 심지어는 아주 거북한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그 ‘다름’을 어떻게 신앙적으로 이해하고, 포용을 하는가 하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

특히 거북한 것 중에는, 천주교 교리 중에서 분쟁이나, 논란의 여지가 있는 부분을 의도적으로 파 헤치며 신자들을 괴롭히는  ‘지식인’ 교우들.. 왜 그럴까?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이란 프란치스코 성인의 기도가 정말로 필요한 교우들.. 다른 쪽으로는 “초자연적인” 신앙과 popular science를 완전히 혼동을 하는 교우도 본다. 도대체 왜들 그럴까? 그럴 때 조금 common sense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이런 조금 거북한 것들이 사람이 모이면 꼭 있는 것이므로 이것으로 신앙공동체의 구역모임을 피하면 안 되는 것을 안다. 하지만 가끔 피하고 싶은 때도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이런 저런 이유로 구역모임에 나오는 사람의 숫자는 유동적이지만 아마도 거의 고정적인 숫자는 유지하는 것으로 안다. 이것도 어떻게 보면 조그만 기적일 것이다. 둘 셋만 모여도 예수님께서 오신다고 하지 않았던가? 올해는 아주 기억에 남을만한 추수감사절 이브의 구역미사가 있었고, 성탄절 즈음의 구역모임은 어떨지 조금 기대가 된다. 작년에는 전근섭 형제 댁에서 “100% 세속적”인 모임을 즐겼던 기억이다. 흡사 노래방에 간 것 같은 그런 분위기의 모임.. 하지만 솔직히 나는 그런 분위기가 사실은 별로 재미있지는 않았다. 이것이 아마도 세대차이가 아닐까?

 

Thanksgiving Day eve

비가 오락가락하고 포근한 깊은 가을.. Thanksgiving Day가 내일로 다가왔다. 작년 이맘때도 지금처럼 아주 포근한 날이었다. 우리의 조촐한 가족만이 모였던 휴일이었고 모두 조금씩 요리를 하는 것을 거들었던 기억이다. 그때는 새로니가 Washington DC에서 일을 할 때여서 급하게 왔다가 급하게 떠났는데 올해는 다시 학생이 되어서 거리와 시간 모두 여유를 가지고 집으로 왔다. 하지만 대신 작은 딸 나라니가 처음으로 밖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첫 해가 되었다. 올해 4월에 따로 나가서 살게 되었기 때문이다. 가끔 집에 오곤 하지만 이제는 완전히 ‘독립’적인 개인으로 살고 있는데 그런 사실을 본인도 즐기는 듯 하다.

올해의 Thanksgiving Day는 오랜만에 guest와 같이 보내게 되었다. 새로니의 Emory friend인 Galina가 뉴욕에서 현재 공부를 하고 있는데, 이번에 우리 집에 놀러 온 것이다. 식사만 같이 하는 것이 아니고 며칠 동안 우리 집에 머물게 되어서 조금은 신경이 쓰이지만 예년과 조금 다른 휴일이 되어서 흥미롭다. 애들이 어렸을 적에는 이런 때면 한방에 모여서 재미있는 movie같은 것을 보는 것이 즐거움이었는데 이제는 그런 시절이 거의 먼 추억으로 남게 되었다. 사실 이것이 자연스러운 인생이 아니겠는가.

아주 오래 전부터 우리 집은 이곳의 전통인 turkey요리를 해 왔다. 아마도 그때가 1980년대 초, 그러니까 우리가 Columbus, Ohio에서 살 때였을 것이다. 연숙이 그곳 성당의 원로로 계시던 이봉모 선생님(지금은 고인이 되셨음)의 부인으로부터 recipe를 받아서 첫 turkey 요리를 했던 때가 그때쯤이었고 그 이후로 거의 한해도 빠짐없이 turkey 요리를 했다. 그래서 이제는 추석이나 설날의 한식 전통요리보다 이 turkey 요리에 대한 추억과 애착 같은 것도 생기게 되었다. 가끔 한국 손님들이 참석을 하면 별로 그 맛을 느끼지 못하는 것을 본다. 특히 김치를 꼭 같이 찾는 사람들도 있어서 조금 당황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김치와 먹어도 사실 맛이 있었다)내가 개인적으로 turkey 요리를 제일 맛있게 먹었던 기억은 사실 결혼 훨씬 전의 일이었다. 1974년 가을의 Thanksgiving Day였나.. 그 당시 알고 지내던 서울사범대 지학과 출신 성성모씨가 Indiana주 Purdue University에 다닐 당시, 그곳에 놀러 갔는데 , 같은 대학의 한국인 유학생 부부의 집에 초대되어 가서 turkey 요리를 푸짐하게 대접을 받았다. 특히 여러 가지 side dish들이 굉장했는데 그 유학생 부인은 어떻게 그렇게 많은 미국요리를 배웠는지 모두들 혀를 찰 정도였다. 처음 먹어본 것이라 그런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요리가 잘 되었는지.. 아마도 둘 다였을 것이다.

ANY CHARACTER HERE

요새 며칠 사이 내린 비로 그나마 남아서 안간힘을 쓰며 가을을 지키던 아름답던 황금색 나뭇잎들이 무더기로 떨어져 글자 그대로 “낙엽의 장관”을 이루었다. 특히 우리 집 차고로 들어오는 길은 길이 하나도 안 보일 정도로 낙엽으로 덥혔다. 이들은 해가 다시 나오면 완전히 마르면서 바람에 휘날려 다 없어질 것이다. 그러면 완전한 겨울로 향하는 12월의 입구.. 예수님을 기다리는 대림절의 시작이다. 천주교 달력에서는 이날이 새해의 시작이 된다. 11월 28일이다.

낙엽, 낙엽, 낙엽...

낙엽, 낙엽, 낙엽…

12월로 들어설 즈음이면 가끔 그리운 곡이 생각난다. 1960년대 말, 대학시절.. 멋진 가사에 매료되어 guitar로 따라 부르곤 하던 Duo Simon & Garfunkel의 rock version “I am a rock”이 그것이다. 그 대학시절, 가끔 지독한 고독 같은 것을 느끼곤 하면 이 노래를 자장가 삼아 들었다. 이 가사의 주인공이 내가 된 듯한 기분으로..특히 친구 유지호와 같이 부르던 것도 즐거운,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는다. 별명 “우중충” 유지호..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까..

 

I am a rock – Simon & Garfunkel

 

천안함 도발사건 이후 다시 이번에는 연평도 포격.. 정말 끝이 없다. 김정일이 “개XX”는 그 괴상하게 생긴 머리”통” 속이 어떻게 생겼는지 나중에 해부를 해서 히틀러와 비교해 볼 만하다. 촌스러운 북쪽 사투리로 “영쩜 영 미리메타라도 조국을 침범하는 원쑤들이..” 어쩌구, 저쩌구.. 하는 북괴왕조의 방송을 들으면 이런 Shakespeare 희극이 역사상 더 있었으랴..하는 생각도 든다. 이런 것들과 버금가게 웃기고 한심한 친구들이 바로 대한민국에도 “수두룩 닥상” 으로 많이 있다. 그 중에서도 금메달 깜은 소위 말하는 “친북 기독교 단체” 들이다. 이 사람들 과연 머리 속이 어떻게 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미국의 이간을 배격하고 예수님의 사랑으로 “동족 형제”인 김정일을 사랑하라“고.. 허..여보세요.. 정신 좀 차리십시오.

실비아 심인섭, 익평공파 29세

심인섭, 1965년
심인섭, 1965년

중앙고 57회 동기회에서 또 결혼식 소식이 날라왔다. 세월이 갈수록 점점 그 횟수가 늘어나는 것 같이 느껴진다. 확실한 통계는 물론 없다. 그저 느낌일 뿐이다. 아마도 동기녀석들의 반수 이상이 이미 할아버지가 되지 않았을까. 아~~ 세월이여. 이번의 결혼식 소식은 조금 나에게 의외의 느낌을 주었다. 주인공이 심인섭인데.. 심인섭의 차녀가 결혼을 한다는 소식이었다. 왜 의외의 느낌을 주었느냐 하면, 이 친구의 소식을 1965년 졸업 이후 처음 듣게 되어서 그렇다.

물론 친구가 사라진 것은 아닐 것이다. 동창회에도 나왔을 수 있다. 그리고 다른 친구들과 연락을 하며 지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최소한 나에게는 이제 처음 그 이름이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혹시 ‘사망’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도 해 보았다. 도대체, 어디에 갔다가 이제야 나타났을까? 그의 이름은 연락처, 주소록 등등에 전혀 없었다. 고2때 같은 반이었다. 경주 수학여행 때 같이 사진도 찍었다. 그것보다도 이 친구가 더 기억에 남는 것은 고2때 교지에 실렸던 그의 시 때문이었다. 시의 제목이 <실비아>였다. 제목도 독특하고 이국적이고..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천주교신자의 세례명일 수도 있을 그런 이름의 시.. 하지만 그 시의 내용은 기억을 할 수 없다. 언제부터인가 그 시를 다시 한번 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히 들었다. 그 “사라진” 친구가 홀연히 딸의 결혼식 소식과 같이 등장한 것이다. 하지만 조금 이상한 것은, 결혼식 장소만 있지, 연락처가 없다는 것.. 왜 그럴까. 왜 이렇게 이 친구는 ‘신비’적인 인상을 주는 것일까. 정말 나도 모르겠다. 그 긴 세월, 어떻게 살았을까, 참 궁금하다. 그 친구는 아직도 시, <실비아> 를 기억하고 있을까? 좌우지간, 딸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며칠 전에는 또 한번 googling의 덕을 보았다. 이건 내가 googling을 한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 googling을 해서 나의 site를 찾은 것이다. 너무나 반가운 발견이었다. 고국 과천시에 사시는 이종환씨, 평창이씨 익핑공파 29세 되시는 분이니까 나의 족보가 맞는다면 항열로 내가 이분의 아버지벌이 되는 셈이다. 게다가 나와 같이 가족이 모두 천주교 신자였다. 사실 나는 이 소식을 듣고 뛸 듯이 기뻤던 것이 사실이다. 나의 뿌리 찾기 노력에 대한 성모님께 드린 기도에 답을 받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조금은 비약적인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이것은 사실이다. 이분의 할아버지가 ‘모’자 돌림이라고 하셨고, 나의 아버님이 이정모, 모자 돌림.. 너무나 반가웠다. 더구나 현재 익평공파 최근의 족보를 소장하고 계신다고 한다. 그러면 혹시 나의 직계 조부님들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꿈과 상상의 나래를 다시 편다.

 

11월도 어느덧 중순으로..

IKEA Tundra on living room
IKEA Tundra on living room

한달 넘어 질질 끌어오던 living room의 laminate flooring 일이 오늘 드디어 일단 끝이 났다. 7월 달에 처음 dining room으로 시작된 올해 home renovation project중의 하나다. 그 무덥던 7월 달에 처음 시작된 일이 오늘 우여곡절 끝에 두 번째 목표가 달성되었다. 이 clink-and-snap floor는 글자 그대로 아무런 fastener가 필요 없는 정말로 쉬운 것인데, 문제는 그것이 일단 말썽을 부리면 잘 들어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처음 시작할 때 그런 문제점을 알게 되었지만 이번에 다시 알게 된 것은 그것은 나에게 기술이 부족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IKEA Tundra 제품자체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이번에 다시 정성을 들여서 잘 맞추어 보니 신기하게도 다 잘 들어 맞았다. 힘든 일은 역시 boundary condition, transition같은 것이다. 정확히 치수를 재고 정확히 corner strip을 자르고..하는 것들.. 역시 나는 pro가 아니라 정말 힘든 작업이다. 거의 20년이 되어가는 퇴색해가던 carpet이 이렇게 반짝이는 hardwood floor로 바뀌니 우선 너무나 신선하고 깨끗한 느낌인데, 우리 집의 강아지 Tobey가 앞으로는 바닥이 미끄러워서 고양이 Izzie를 갑자기 ‘공격’하기가 조금 힘들어질 듯 하다.

Glorious neighborhood Fall color
Glorious neighborhood Fall color

빙점까지 내려갔던 날씨가 다시 평균기온으로 돌아왔고, 매일같이 아주 거의 정확하게 가을 평균기온을 유지하고, 나무들도 순조롭게 ‘가을 색’으로 변화되고 있다. 이곳에서 fall color라는 것을 한국에서는 그냥 단풍이 진다고 할 듯하다. 사실 단풍이란 것은 특별한 나무의 이름이 아닌가? 그러니까 fall color라는 말이 더 정확할 것이다.

오늘은 너무나 오랜만에 연숙과 같이 subdivision neighbor(동네)를 Tobey와 같이 산책을 하였다. 우리 subdivision은 언덕이 알맞게 있는 산책도로가 있는데 천천히 걸으면 20분 정도 걸린다. 차의 왕래도 아주 적어서 개를 산책시키기에는 정말 알맞은 코스인 것이다. 1992년 부터 이곳에 살았지만 사실 정기적인 산책을 하기 시작한 것은 2007년부터였다. 친구 명성이가 이곳에 잠깐 들렸을 때, 나에게 걷기를 거의 완강하게 권했다. 자기는 거의 매일 걷는다고 했다. 그래서 나도 걷기는 했지만 습관이 되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2007년부터는 거의 매일 하루도 빠지지 않고 걷고 있다. 일주일에 두세 번 YMCA에 따로 가서 하는 운동과 이 걷기는 나에게는 유일한 건강보험인 것이다. 연숙은 언덕이 있는 것 때문에 걷기를 꺼려하는 편인데 앞으로는 자주 걷겠다고 한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그렇게 믿지는 못한다. 과거에도 그런 적이 있었으니까. 오늘 본 나무의 색깔은 너무나 찬란했다. 얼마 안 있으면 바람과 비로 인해서 다 떨어질 것이다. 아.. 찬란한 가을이여.. 조금만 더 머물다 가거라.

 

아틀란타 순교자성당 IT support team

어제는 나에게 조금은 특별한 날이 되었다. 나로서는 너무나 오랜만에, “처음 보는 사람들”을, 그것도 한꺼번에 많이 만난 것이다. 그 자리는 한인본당 (아틀란타 한인 순교자 성당) 월례 ‘전산팀‘ 회합이 있었던 곳이다. 전산팀이란 간단히 말하면 IT support team일 것이다. 성당내의 여러 가지 technology: computer, network system, website등등을 개발 관리하는 본당 신자들의 모임인 것이다.

어제 이곳에 나가게 된 것은 역시 최근에 가입한 레지오의 영향이 지대적이었다. 암만 생각해도 레지오를 통한 “오묘한 일련의 사건의 고리”를 느끼게 되고, 이것이 현재 나를 조금씩 움직이는 것을 느낀다. 이런 기회를 전 같았으면 무시하거나, 미루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은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 전산팀에 나가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레지오의 ‘본당협조’ 활동의 일환으로 이루어졌지만 그 전에도 자원봉사의 일원으로 본당을 돕고 싶었던 마음이 있었다. 다만 그것을 이루는 다리역할을 못 찾은 것 뿐이었다. 이번에 레지오가 그 다리를 이어준 셈이다. 거의 모든 교회나 성당들이 시대의 흐름으로 IT (Information Technology)의 역할이 필수적이 되었다. 처음 주보 정도를 자체적으로 만드는 것으로 시작해서 신자, 회계관리 같은 것 등도 다 전산화가 되었다. Internet의 일반화로 이제는 website도 필수가 되었다. 이런 것들을 모두 맡아서 전산팀 멤버들이 하고 있는 것이다.특히 성당의 양적 규모가 비약적으로 커지면서 IT support의 중요성이 그만큼 커지고 있을 것이다.

그런 배경을 생각하며 전산팀 회합에 처음으로 참석을 하였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며 어떤 사람들이 어떻게 운영을 하고 있는지 참 궁금했다. 2시간 남짓의 회합은 참으로 유익한 것이었다. 나의 의문점을 거의 다 풀어주었기 때문이다. 모든 단체에서 나는 ‘은퇴세대’로 밀려나고 있는 실정인 것을 감안한다면 이곳은 조금은 그런 rule에서 예외가 아닐까 희망을 해 본다. 내가 현재 가지고 있는 IT skill set은 지금 성당에서 필요로 하는 것들과 많이 중복이 되기 때문이다. 내가 현재 당장 도울 수 있는 분야는” physical” computer system, (WAN,LAN) networks, phone system intergration정도가 아닐까 생각은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더 분명해질 것이다.

 

첫 빙점, 슬픈 하루, 501 Must-Read Books

아틀란타 지역에 올 들어 첫 영하의 날씨가 들이 닥쳤다. 평년보다 일주일이 빠르다고 한다. 하도 ‘요상’한 기후가 올해를 기록으로 올려 놓더니 이것 조차 그 중의 하나가 되려나. 오늘 낮에는 잠깐 눈 싸라기까지 내려서 계절의 변화를 실감할 수 있었다. 단풍도 깊이 들지 않았는데 이렇게 겨울의 맛을 보여 주는 것이다. 밖에서 한여름을 지낸 화분의 화초들을 부리나케 집안으로 옮겨 놓았다. 분명히 날씨는 다시 따듯해 질 것이지만 언제 다시 추워질지 모르는 계절이 아닌가? 작년의 겨울은 정말 추웠는데 올 겨울은 어떨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어제는 연숙이와 같이 하루 종일 우울한 날을 지냈다. 연숙과 가까이 지내던 성당 교우 최희상씨의 대학생 작은 아들이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청천벽력이라고 하던가? 사고가 난 것이 아니고, 급성 뇌막염이었다. 이병은 가끔 대학교 기숙사의 학생들에게 걸리는 고약한 것이고, 치사율이 정말 믿지 못할 정도로 높다. 거의 아주 급성으로 손을 쓰기도 전에 이런 날벼락을 맞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너무나 우리에게 가까운 곳까지 온 것이다. 아들을 잃은 부모의 심정은 어떨까.. 우리는 그저 기도로 고인의 명복을 빌고 성모님과 함께 슬픔에 잠겨있는 부모님을 위로해 주시라고 하느님께 기도를 할 수 밖에.. 인간은 이렇게 나약한 것일까..

501 Must
501 Must

우연히 Costco에서 501 MUST-READ BOOKSdiscount book을 하나 샀다. 나에겐 거의 보물같이 느껴지는 횡재였다. 이런 류의 책이 한국에서 나온 것은 그런대로 많이 기억이 나고, 아직도 몇 권은 아직도 가지고 있다. 이제는 거의 “고서”가 되어가고 있을 정도로 오래 된 것이지만.. 예를 들면 “역사를 움직인 100권의 철학책”, “오늘의 사상: 100인의 100권” 같은 것이다. 하지만 이번의 책은 영어권에서 500권이 넘게 각 분야별로 뽑은 것인데, 영국에서 출간된 책이라는 것이 독특하다. 그러니까 조금은 “미국의 입장과 영향”에서 벗어난 것이다. 나의 희망은 이 책의 목록에서 내가 얼마나 ‘무식’하게 살았나 하는 것을 빨리 발견하고, 조금이나마 더 유식하게 살다 갔으면 하는 것이다.

Breakfast with Condi Rice, Fr. Francis Wang

어제 아침에는 이미 몇 주일 전에 이미 예고가 되어 있었던 Atlanta History CenterBreakfast with Condoleezza Rice 란 프로그램에 연숙이와 다녀왔다. 바로 전에 출간된 그녀의 성장기 중심의 자서전 Extraordinary, Ordinary People: A Memoir of Family 의 사인 회를 겸한 프로그램이었다. 전 국무장관을 역임했던 화려한 경력과 눈부신 학력 등으로 이미 그녀는 스타 급의 인기가 있다. 흑인을 제도적으로 차별을 하던 남부, 알라바마주 출신의 흑인 여성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그녀의 의미는 정말 상상하기 조차 힘들 지경이다. 현재는 다시 대학으로 돌아와서 그녀의 모교인 Stanford University의 Provost로 일을 하고 있다.

Breakfast with Rice
Breakfast with Rice

아침 8시부터는 buffet style breakfast가 있고 곧 이어서 9시부터 Condi Rice와의 대담 프로가 시작이 되었는데 우리는 나라니의 “경고”를 무시하고 시간에 맞추어 갔는데 시작 시간인 9시 10분전에 도착을 해서 아침을 놓치게 되었다. 그곳으로 가는 길의 아침 rush hour traffic이 그렇게 많다는 것을 우리 둘이 다 잊고 있었던 것이다. 제일 마지막으로 그런 곳에 들어가는 것은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것 중의 하나인데 이번에는 그런 꼴이 되고 말았다. 어떻게 그 이른 아침에 그 큰 grand ball room이 꽉 차게 많은 사람들이 이미 와 있었다는 사실이 한마디로 이 흑인여성의 인기 도를 한마디로 대변해 주고 있었다.

이곳 아틀란타에 있는 역사 깊은 흑인대학교 Spelman College의 총장 (역시 흑인여성)이 대담 상대역을 맡았다. 대부분 그곳에 모인 청중은 거의 백인들이고 드문드문 흑인과 우리 같은 아시안들이 조금 보였는데 이 두 ‘머리 좋고, 성공한’ 흑인여성들이 대다수였던 백인들과 그렇게 대조적일 수가 없었다. 참, 미국도 많이 많이 변했구나 하는 한마디로 “격세지감” 이랄까..

이번에 나온 그녀의 첫 책은 사실 어린 시절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대담의 내용도 거의 다 오늘의 그녀를 있게 한 성장기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제일 중요한 여건은 역시 그녀의 ‘든든한’ 부모의 존재였던 듯 싶다. 철저하게 그녀를 ‘차별대우’에서 보호를 하고, 이상적인 교육여건을 마련해준 그녀의 부모가 모든 것을 가능케 하지 않았을까? 흔히 대도시 흑인가정들과는 전혀 다르게, 거의 유대인가정과 같은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 그런 여건들이 그녀의 미래를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물론 아니다. 그녀의 명석함, 용감성, 그리고 심지어는 행운도 무시 못하는 것들이다. 그 행운 중에는 그녀도 인정을 하듯이 제도적인 Affirmative Action이란 ‘소수민족(주로 흑인) 우대’ 정책도 한 몫을 했다. 이 정책이 지금은 거의 퇴색이 되었지만, 그 때에는 많은 불리한 조건에 있었던 흑인학생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거꾸로 말하면 이런 것의 혜택을 받은 것 자체가 ‘자존심’이 상하게 할 수도 있어서 역시 double-edged sword 라고 할 수도 있다. 인상에 남는 말 중에는 인종이란 것을 birth defect라고 표현을 한 것이 있다. 그 말의 의도는 “복합인종,민족의 사회에서 인종, 민족이란 것을 절대로 숨길 수 없다”는 것이다. 철저히 인정을 하고 거기서 출발을 해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어제 밤에는 사실 아침에 일찍 나가는 것이 귀찮아서 이곳에 가는 것을 빠지려고 하였다. 모처럼 나라니가 어렵게 ticket을 구해 준 것이데 미안 하지만, 나중에 깜빡 잊었다고 둘러대려고 하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나라니(우리 집 작은딸)로부터 확인 전화가 왔다. 내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라고.. 그런데 아침에 나가려고 하니 올 들어 처음, “으스스하게 싸늘한 가을비”가 내리고 있어서 더 한번 안 가려는 유혹을 받았지만 역시 우리를 생각해 준 나라니 한테 미안해서 빠질 수가 없었고, 갔다 온 다음, 역시 잘 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ANY CHARACTER HERE

지난 주말에 이곳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에서는 제1차 동남부 성령대회가 열렸다. 연숙이 이곳엘 다녀왔기에 알게 되었다. 보통 때 같았으면 사실 그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느낌이 달랐다. 3주전부터 나가기 시작한 레지오 마리애 때문에 한국성당에 더 관심이 간 것이다. 이전에도 가끔 성령집회가 있다는 것을 기억은 하지만 이번 것은 조금 달랐다. 이곳 동남부 (Southeast, 그러니까 남동부가 더 맞는 말인데..) 의 한인천주교회 전부가 참가한 커다란 행사였던 것이다.

연숙이도 자세한 것을 모르고 갔다가 조금은 놀란 인상을 받았던 듯 하다. 사람이 너무나 많이 모여서 그랬고, 인도하시는 지도신부가 “김웅열” 신부라는데 사실 우리는 잘 모르는 신부였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가 한국에서는 아주 유명한 ‘치유은사’의 소유자라고 했단다.들은 말에 의하면 김(웅열)신부는 유명했던 노래그룹해바라기의 전신 멤버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신부 되기 전에 “딴따라” 경력이 있다는 말인가? 그 당시에 우리는 고국에 없어서 사실 잘 모른다. 하지만 전형적인 사제가 아니라는 느낌을 주어서 신선한 느낌도 든다. 거의 20여 년 전, 1979년에 Indiana 주에 있는 Notre Dame University에서 있었던 미국인 중심의 Charismatic Renewal Convention (성령쇄신대회)에 우리가족이 참가를 한 적이 있었다. 아마도 그런 종류의 대회였을 것이다. 지금은 그때의 느낌을 많이 잊었지만 그래도 그때의 ‘성령의 열기’는 아직도 잊지를 않는다. 그 이후 거의 다 잊고 살았다. 그런 것이 요새 조금씩 다시 마음이 열리는 느낌을 받는다. 더 이상 내일, 내일 하면서 모든 것을 미루며 사는 것이 조금은 무서워 진다. 나에게 내일이 없을 지도.. 오늘이 마지막 날일지도.. 하는 그런 생각이 자꾸 드는 것이다.

신앙의 신비여, 왕영수 신부
신앙의 신비여, 왕영수 신부
왕영수 신부님
왕영수 신부님

거기서 연숙이 책을 하나 사가지고 왔다. 아주 반가운 저자의 책이었다. 우리에게 영세를 주셨던 왕영수 신부님의 “신앙의 신비여:사제 생활 50년의 단상” 이란 책이 아닌가? 우리 부부는 1982년에 오하이오주의 콜럼버스에서 왕 신부님으로부터 영세를 받았다. 길고 우여곡절이 많았던 우리부부의 긴 신앙여정의 출발을 왕신부님과 함께 한 것이다. 한곳에 오래 머물지 못 하시고 계속 옮겨 다니시던 신부님이 칠순을 훨씬 넘어서 지금은 울진근처에 “새 예루살렘 공동체”란 집을 지으셔서 그곳에 사신다고 한다.

사진을 보니 나이는 드셨지만 아주 건강한 웃음을 보이신다. 영세의 인연도 있지만 왕 신부님은 사실 미국에서 “잔뼈가 굵은” 성령운동의 대가 라고 할 수 있다. 위에 말한 김웅열 신부가 한국을 배경으로 했다면 왕 신부님은 이곳에서 커지신 케이스다.

무엇이든지 성공하거나 유명하거나 커지면 꼭 ‘사탄’이 따른다. 이것은 예외 없는 철칙이다. 왕 신부님도 예외가 아니다. 없다고는 할 수 없는 파문과 의혹, 추문 등이 가끔 따르곤 했다. 우리는 우리는 사실 그 자세한 내막은 알 수가 없고 믿지도 않는다. 그저 들은 소문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