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March 2011

드디어..아틀란타에도 봄이..

드디어..아틀란타에도 봄이..

다시 싸늘해진 아틀란타의 3월 말: 일 주일을 넘게 거의 초여름의 맛을 미리 보여주던 날씨가 역시 ‘평균치’를 유지하려는 듯 급강하하여 오늘 아침은 거의 빙점까지 떨어지는 추위가 되었다. 아래층은 결국 central heating이 요란하게 나오고 있었다. 다행히 맑은 날씨에 바람이 없어서 느낌은 역시 봄이다. 오래 전에 고국에서 느끼던 3월의 날씨도 사실 이와 비슷했다. 그래서 이곳 아틀란타는 많은 것이 서울의 그것을 연상시킨다. 뚜렷한 4계절, 지형, 나무, 꽃들의 종류 등등이 그렇다. 다만 연 평균기온이 조금 높다는 것인데.. 사실 서울의 평균기온도 그 동안 (30년) 조금은 올랐을 것 같아서 결국은 비슷하지 않을까? 3월 초부터 Bradford pear, 개나리, 진달래, 수선화 등이 이미 다 피고 졌다. 지금은 벗 꽃이 조금씩 선을 보이기 시작한다. 옛날 서울에서 창경원의 벗 꽃놀이가 4월 초에 있었으니까.. 이것도 시기적으로 비슷하구나. 다만 조금 다른 것은 이 아틀란타지역에 너무나 많은 소나무들.. 이것 때문에 이곳의 봄은 꽃가루가 지독하다. 특히 바람이 잘 불지 않으면 완전한 비상사태가 된다. 나는 다행히 꽃가루 앨러지가 별로 없지만 많은 사람들이 거의 한달 동안 고생을 해야 한다. 그것이 5월 중순까지 계속 된다.

하지만 4월과 5월은 역시 찬란한 계절.. 비가 조금씩 오기만 하면 너무나 정서적인, 시적인 계절.. 전 이대음대 교수 김순애씨의 ‘4월의 노래’를 연상시키는 아름다운 추억이 계절이 된다. 언젠가 부터 나는 4월과 5월을 은근히 기다리게 되었다. 특히 최근에 레지오 마리애의 단원이 되어서 그런지.. 특히 성모성월, 어린이 날 (일본의 5월5일 어린이날을 그대로?) 어머니 날(후에 어버이날로 바뀐 것.. 참 마음에 들지 않음) 의 5월 달이 더욱 기다려진다. 그 중에서, 특히 5월 1일은 ‘friends forever’를 생각하게 하는, First of May.. 물론 이것은 The Bee Gees의 1960년대 pop song에 불과하지만 나와 나의 몇 친구들에게는 거의 암호와도 같은 추억의 노래가 되었다. 그래서 5월은 더욱 나에게는 빛나는 달이 되어간다.

 

First of May – Bee Gees, 1969 

이 Bee Gees의 classic을 처음 들었을 때는 가사보다는 감미롭고 신비스럽게까지 느껴진 melody에 매료가 되었었다. 그런 나이였다. 하지만 그 후 그 가사를 음미하면서 이제는 가사에 깊이 빠져든다. 가사와 곡이 어쩌면 그렇게도 멋지게 조화를 이룰까.. 이런 것이 진정한 classic이 아닐까.. 이 곡 뒤에 항상 보이는 흩어져 인생을 살아온 친구들을 생각한다. 그래서 5월1일은 Friends Forever의 날이 되어간다.

4월의 노래 – 박목월 시, 김순애 작곡 

서울 중앙고 1학년 때(1963년) 담임 김대붕 선생님께서 좋아하시는 곡이라며 가르쳐 주신 또 다른 불후의 명곡.. 어찌 잊으랴. 4월이 되면 어찌나 이 곡을 배울 때가 그립던지.. 또한 타계하신 김대붕 선생님도 함께 그때의 행복하고, 순진 하던 시절의 찬란했던 4월의 봄 동산을 그린다.

 

 

    20 something, 40 years later.. 40년 전의 20대와 오늘날의 20대는 과연 무엇이 변했나? 특히 나의 20대와 요새의 20대는 어떠한가?  결론부터 말하면 ‘아찔한’ 변화다. 엄청난 변화. 각 세대마다 조금 특징을 지울 수 있는 역사의 흐름이 있을  것이다. 이곳 미국에서 보면,  나의 나이는 baby boomer generation 의 거의 시작에 속한다. 공식적으로는 태어난 해가 1946년부터 1964년까지가 그 세대에 속한다. Baby boomer뒤는 어떻게 되는가? 별로 큰 특징이 없다. 그저 gen-X, gen-Y 등으로 불린다.  일본에서도 미국에 비슷한 baby boomer 세대가 있었다. 2차대전 패전 후의 시기다. 단까이 세대로 불리는 세대가 거기에 속한다. 하지만, 나와 같이 20 something의 시기가 한국과 미국으로 갈려 있으면 사실 세대의 특징이 더 복잡해 질듯 하다.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미국의 세대별 이름은 출생 년도에 따라서 다음과 같다.

     

    2000/2001-Present New Silent Generation or Generation Z
    1980-2000 Millennials or Generation Y
    1965-1979 Generation X
    1946-1964 Baby Boom
    1925-1945 Silent Generation
    1900-1924 G.I. Generation

     

    나는 잘 모르지만 한국도 이것과 비슷한 세대별 이름이 있을 듯하다. 나는 그곳에서 어떤 이름의 세대로 불릴까,궁금하기도 하다. 절대로 baby boomer는 아닐 것이다. 해방이 되고 나서 갑자기 출산율이 늘어났다는 얘기는 못 들어 보았으니까. 6.25전쟁을 선두로 가족과 친척을 잃어버리고 전쟁 후의 찌든 가난을 다 겪고, 살인적인 입시, 취직경쟁을 몸의 전체로 경험을 하며, 박정희의 경제성장의 밑거름이 되었던 어떻게 보면 이곳의 great generation과 비슷하지 않을까? 이렇게 보면 일본의 같은 나이들도 비슷한 경험을 했을 것이다. 비록 패전 후 또 다른 전쟁은 없었지만 이들도 우리에 비해서 그렇게 잘 산 것은 아니었다. 찌들은 가난, 기아를 보았고 미친 듯이 일을 해서 그들의 경제기적의 주춧돌이 되었던 세대다.

    미국의 baby boomer는 전혀 다르다. 아니 극과 극이다. 풍요와 자유, 반항, 반전, 방종..등등으로 이어지는 세대인 것 같다. 미국은 2차 대전 이후 소련과 초강대국이 되었고 경제적으로도 초강대국이 되었다. 자기의 부모세대들이 겪은 실업이나  세계 대전과는 전혀 다른 세계에서 자랐다. 비록 핵전쟁의 공포를 안고 자랐지만 거의 무제한적인 미래에 대한 가능성을 믿었다. 하지만 이들도 월남전을 겪어야만 했다. 물론 부모세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전쟁을 치렀다. 반전과 인종간의 평등 같은 차원이 높은 이상이 현실화하는 것을 보며 자랐다.

    예전에 don’t trust over 40s..란 말이 유행했었다. 나이가 드는 것 중, 아주 부정적인 면을 부각한 말이다. 연륜과 경험에 반비례해서 늘어나는 권모술수와 거짓말, 능글맞음, 옹고집..등등 수도 없이 많은 ‘꼰대 근성’.. 얼마나 우리들 그런 것들을 경멸했던가? 이제 우리가 그런 것들을 그대로 뒤집어 쓰게 되었다. 하지만 그 반대의 말도 있다. 쉽게 말해서 stupid digital generation이라고나 할까.. 기초, 근본적인 교육의 바탕이 전혀 없이 벼락부자가 되는 Internet generation을 말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전혀 기본이 되지 않은 ‘철없는 애’들이 $$$에 미쳐서 날뛰는 그런 세대를 말한다. 이들의 half-life도 지난 세대와는 비교가 안될 만큼 짧다. 그것은 큰 문제가 아니다. 과연 이 ‘철없는 세대’가 ‘성장’을 해서 사회의 중견세대가 되었을 때, 그들은 어떻게 세상을 이끌어 나갈까.. 참.. 한숨부터 나온다.

     

     

     

 

매디슨의 첫 아파트에서, 1988년 가을

매디슨의 첫 아파트에서, 1988년 가을

Madison, Wisconsin.. 매디슨 위스컨신. 위스컨신주의 수도, 위스컨신대학교 매디슨 캠퍼스가 있는 곳. 거의 찰나의 시간처럼 느껴지고 심지어는 전설적으로도 느껴지는 위스컨신 주의 수도에 우리식구는 1988년과 1989년 사이에 1년이 채 안 되게 살았다. 전에 살았던 오하이오 주의 콜럼버스에 비해서 워낙 짧은 기간 살았던 이유인지 그곳이 지금 무섭게도 기억에서 사라지고 있다. 이런 추세로 나가면 거의 다 잊게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 나는 조금씩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우리가 매디슨으로 이사를 간 직접적인 이유는 나의 새 직장 때문이었다. 그 당시 콜럼버스의 나의 회사, Toledo Scales Co. (주로 weighing scale을 만들던 곳)에서 나는 layoff가 되어서 열심히 새 직장을 찾고 있었고 이곳 저곳으로 job interview를 하며 . 나는 그때 새로운 직장으로 두 곳을 두고 고민을 하고 있었다. 하나는 Oklahoma City에 있는 hard disk maker SEAGATE였고, 다른 곳이 Madison에 있던 Nicolet Instruments였다. 그러니까 두 군데서 job offer를 받은 것이다. Oklahoma City는 예전에 가본 적이 있는 조금 익숙한 곳이고 기후도 훨씬 따뜻한 곳이고 Madison은 정 반대로 아주 추운 곳이었고, 오래 전 Chicago에 있을 때 한번 가본 적이 있었다. 주위의 사람들에게 의견을 물어보면 99%는 모두 다 Madison으로 갈 것을 권했다. 왜 그러냐고 하면 확실한 이유가 없었다. 그저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는 것 뿐이었다. SEAGATE는 99% computer hardware company라서 어떤 것인지 확실히 알 수가 있었지만 MadisonNicolet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내가 갈 곳은 생긴지 얼마 되지 않는 audio diagnostic division이었다. 쉽게 말하면 최첨단 보청기를 만드는 곳이었다.

매디슨 위스컨신 주립대 중앙고 동창 후배들과, 1988년 가을

매디슨 위스컨신 주립대 중앙고 동창 후배들과, 1988년 가을, 뒷줄 왼쪽의 전기석 후배는 곧 그곳을 떠났다

결국은 Madison으로 가기로 정했는데 제일 중요한 이유는 새로운 것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Nicolet Instrument는 원래는 digital storage oscilloscope를 만드는 회사인데 이 audio diagnostic쪽은 biomedical분야라서 그 회사로써도 조금 모험을 하는 셈이었다. 이 회사는 위치가 바로 위스컨신대학 매디슨 캠퍼스의 바로 옆에 있어서 그쪽 연구단체들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었다. 이 새로운audio diagnostic venture도 이곳 의과대학 교수들이 모여서 만든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것이 조금 신경이 쓰이긴 했지만 직업의 안정보다는 나이가 더 들기 전에 조금 더 새로운 것을 배운다는 것에 더 마음이 끌린 것이다.

결혼 후 그것도 조그만 아이 둘을 데리고 가족이 이사를 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때의 나이가 40정도였으니 사실 힘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기분에 처음으로 미국에서 ‘혼자가’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미지의 서부를 개척하는 조금은 불안한 심정이었다. 그때 조금이나마 나를 위로하는 것이 있었다면 조금은 불이 붙었던 나의 가톨릭 신앙심과, 모교의 동창들이었다. 한마디로 처음 가는 매디슨이지만 그곳에 한인천주교 공동체가 있으리라는 희망과, 혹시 큰 학교가 있으니까 중앙이나 연세대 동문들도 있을 것 같았다.

나의 추측은 맞았다. 둘 다 있었다. 지금 같았으면 Internet으로 googling을 10분만 하면 다 찾을 수 있을 정보들.. 그 당시는 물론 다 수소문을 해서 찾아야 했다. 그래서 둘 다 연락처를 찾았다. 먼저 중앙고 동창회를 찾으니 65회 전기석 후배의 이름이 나왔다. 물론 유학생이었다. 역시 동창은 좋은 것인가.. 그를 통해서 그곳의 여러 가지의 정보를 다 얻을 수 있었다. 중앙고 후배들이 몇 명 있다고 했다. 그리고 한인 천주교회 공동체도 역시 유학생이었던 유왕식 씨를 통해서 연락이 되었다. 그곳 공동체는 대부분 학생이 주축이 되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특이한 사실은 매디슨에 있던 세계신용조합(Credit Union)의 총본부에서 일을 하시던 강정열 박사님께서 그곳 한인 천주교 공동체의 정신적인 지주로 계시다는 사실이다. 그곳은 밀워키(Milwaukee, WI) 본당의 공소였는데 본당의 김정웅 주임신부께서 정기적으로 오셔서 학생신자를 중심으로 목회를 하고 계셨다.

이렇게 해서 사실 그곳으로 이사를 가서도 우리가족은 큰 어려움 없이 정착을 할 수 있었다. 이런 한국인들의 끈끈한 학교와 신앙의 ‘인연’들은 지금 생각해도 자랑할만한 것이었다. 그런 것들이 없었으면 참 힘이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우선 나는 마음 놓고 먼저 새로운 직장에 적응하는 것에 온 신경을 쓸 수가 있었다.

매디슨은 크고 작은 호수가 많았다. 아파트 근처의 호수를 보는 새로니와 나라니

매디슨은 크고 작은 호수가 많았다. 아파트 근처의 호수를 보는 새로니와 나라니, 새로니는 아직도 그 곳을 기억한다.

매디슨은 여러모로 내가 살던 콜럼버스와 비슷했지만 도시의 규모는 콜럼버스보다는 작았다. 둘 다 주의 수도였고, Big Ten 계열의 큼직한 주립대학이 중심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는 것.. 비교적 깨끗하고 교육도시였던 점, 아주 유명한 기업이 없었다는 것도 비슷했다. 심지어는 Mid West의 냄새까지, 날씨까지 비슷했다. 차이는 매디슨은 콜럼버스보다 훨씬 혹독하게 추운 곳이라는 것과 매디슨이 훨씬 더 정치적, 사회적으로 liberal, progressive한 색갈이 있었다. 쉽게 말하면 매디슨은 콜럼버스 보다 훨씬 ‘좌익’적인 곳이다. 농담으로 옛날 소련수상 후르시쵸프가 그곳에 왔다가 “소련보다 더한 빨갱이” 라서 울고 갔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매디슨 시내에서는 불법마약이 허용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겠지만 그 정도로 진보적인 곳이라는 뜻일 것이다.

이곳으로 이사를 가는 것은 시간이 좀 걸렸다. 간단히 말하면 내가 혼자서 먼저 ‘기러기 아빠’노릇을 몇 주간 한 셈이다. 나 혼자 먼저 와서 아파트에서 혼자 살면서 출근을 하였다. 지리적으로 매디슨은 콜럼버스보다 아주 작았다. 중심부에는 웬만한 작은 마을 크기의 호수가 몇 개나 있었다. 큰 도로로는 동서로 달리는 간선도로 (Beltline Highway) 하나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Interstate Highway가 이 도시에는 없는 것이다. 지형은 조금 낮은 언덕이 조금 있을 뿐 그런대로 평지에 가까웠지만 도로는 그렇지 않았다. 바둑판형의 규칙적인 도로에 익숙한 나에게 이곳은 서울의 구불거리는 도로가 연상이 되었다. 주소만 가지고 위치를 찾는 것이 더 힘든 것이다. 특히 밤에 주소만 가지고 집을 찾는 것은 조금 모험에 가까울 정도였다.

아파트 근처의 호수가에서 새로니, 나라니와 함께..

아파트 근처의 호수가에서 새로니, 나라니와 함께..

약 보름간 혼자 살다가 다시 콜럼버스로 돌아와 대형 트럭으로 짐을 다 부쳤다. 그리고 완전히 온 가족이 다 매디슨으로 이사를 했다. 그때가 1988년 8월 하순 경이었다. 나는 혼자 살던 보름 동안에 이미 중앙동창 후배들과 만나서 저녁을 했었다. 특히 65회 후배 전기석의 도움을 받았고, 후배 강태중은 University of Wisconsin의 campus를 친절하게 안내를 해 주기도 했다. 곧바로 우리는 매디슨의 한인천주교 공동체에서 미사를 드릴 수도 있었다. 교민이 거의 없고 거의 다 유학생인 관계로 따로 교회가 없었고 위스컨신대학 내에 있는 Newman Center에서 미사를 드리는 형편이었다. 신부님은 근처에 있는 밀워키 한인천주교회의 예수회 김정웅 신부님이셨는데 그 분은 밀워키에 있는 위스컨신대학에서 Computer Science를 공부하시는 분이었다. 신부님이 어떻게 그런 공부를 하시는지는 아직도 이유를 모른다. 신학과 과학을 같이 한다는 것이 그때는 조금 이해가 잘 되지를 않았다.

그 해 가을에는 서울올림픽이 열려서 그것을 보며 향수를 달래기도 했다. 열심히 TV 녹화도 하곤 했다. 가을은 짧았고 곧 겨울이 왔다. 완전히 모든 것이 얼어붙는 시베리아를 연상시키는 그런 겨울이었다. 모든 것들이 실내로 활동이 옮겨지는데 이곳은 아주 모든 것들이 철저히 월동 준비가 되어 있었다. 특이한 것이 위스컨신대학 캠퍼스에 있는 실내 테니스 코트였다. 얼마나 그 시설이 거대한 지 모른다. 겨울이 워낙 춥고 길다 보니까 이 정도의 시설 투자는 이해가 갔다. 그곳에서 중앙 후배들과 주말이면 그 추운 겨울에 테니스를 치곤 했다.

그 당시 우리부부는 아주 신앙적인 삶을 살려고 노력을 하던 때였다. 그래서 그곳에 가자마자 교회공동체에 적극 참여를 했고, 그 결과 정기적인 성경공부에도 나가게 되었다. 이곳도 역시 유학생중심의 모임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유일한 비유학생은 나와 강정열 박사님 댁 식구가 전부였으니까. (계속)

 

 

 

최근 몇 개월.. 참 세상이 숨차게도 돌아간다.. 특히 세계적인 정치적인 사건들.. 보통 때 상상도 못했던 큼직한 뉴스들.. 누가 이집트가 그렇게 쉽고, 급작스럽게 ‘민주화’가 될 줄을 상상이나 했겠는가? 모든 것들이 1월 쯤부터 시작이 되었나? 누가 누가 그 조그만 튜니시아의 한 서민의 “불합리한 공무원의 억압”에 반발해서 분신자살을 한 것이 모든 것의 불씨가 될 줄을 누가 누가 알았겠는가? 역시 침묵의 다수가 그곳에도 있었던 것이다. 인간의 기본적인 요구가 그렇게 오랫동안 잠자고 있다가 그런 계기로 터진 것이다.

리비아의 mad dog

리비아의 mad dog

그곳에 있던 거의 비슷한 수준의 독재정권 국가들..전염병처럼 퍼져나가 제일 큰 나라 이집트까지 퍼졌지만 누가 그렇게 모든 것들이 소설처럼 풀려나갈 줄 알았겠는가? 한국만 하더라도 그런 것들이 수십 년이나 걸리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게 쉽게 된 것은 아닐 것이다. 너무나 오래 동안 참았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그 다음 차례가 리비아..인데, 안타깝게도 이곳은 이집트와는 조금 다르게 진행이 되었다. 가다피.. 무바락이 그렇게 쉽게 넘어가는 것을 보고 느낀 것이 있었을 것이다. 그 동안 저지른 일과 무수한 적들이 있음을 알고 그렇게 쉽게 항복을 할 리가 없다. 운이 좋았는지 결사적으로 반기를 제압하더니 거의 성공을 할 찰라.. 결국은 나토를 중심으로 최후의 사태를 막으려는 총 출동.. 이런 대형 뉴스들이 끊임이 없다.

그것들과는 전혀 종류가 다른 초대형 천재지변.. 일본의 3-11 대지진과 그에 따른 해일(쓰나미), 최악의 원전사고.. 이런 것들이 어찌 이렇게 끊임이 없을까? 내가 너무 오래 살았나? 젊었을 당시의 초대형 뉴스는 사실 별것이 없었다. 그 동안 나에게 제일 큰 뉴스는 ‘나의 살아 생전에 절대로 넘어가지 않을 것 같던’ 소련연방(그 당시는 소련이라고 불렀음)의 붕괴’였다. 이것을 나는 아직도 믿을 수 없는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나는 그 ‘사건’이후 불가능한 일은 없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확률이 아주 낮아도 절대 제로가 아닌 한 ‘장담’ 못한다는 말이다.

이번 일본의 대형 재난의 경우, 나는 오래 전과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하며 일본의 재난 뉴스를 보고, 생각하게 되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2007년 이후부터 일본을 보는 나의 생각이 조금씩 달라진 것이다. 그 해, 그러니까.. 2007년 봄쯤이었나.. 그때부터 나는 아주 우연히, 뜻하지 않게 일본의 TV drama를 한국의 Clubbox 로 부터 download해서 보기 시작하게 되었다. 원래는 그곳을 통해서 아주 가끔 한국의 video를 보긴 했지만 사실 재미있는 것이 별로 없었다. 그러다가, Clubbox중에 “일마래”라는 곳을 우연히 보고 혹시 볼만한 것이 있나..하고 거의 random으로 하나를 골라서 보게 되었다. 그것이 나에게는 거의 classic으로 기억되는 “간호사 아오이(Ns´あおい)”였다. 그것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나에게 항상 관심 밖에 있었던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이 나의 코앞에 다가온 것이다.

항상 복잡한 감정을 유발시키는 나라, 일본의 실상을 가까이서 보게 되었다. 그 이후 나는 100% 그들의 TV program만 보게 되었다. 재미보다는 공부하는 자세로 보게 되어서, 쉽게 싫증이 나지는 않았다. 그것들을 보면서 잘못하면 아주 큰 오해를 남기고 갈 뻔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방적인 반일교육과, 불균형적인 경제격차 등으로 거의 의도적으로 일본을 무관심한 자세로 살아온 것이 조금 후회가 되었지만, 사실 이제라도 알아가고 있는 것이 너무나 다행스럽게 느껴진다. 특히 나와 같은 세대에서는 더욱 그렇다. 시기적으로 다행인 것이 그들도 한류의 영향으로 아마도 나와 같이 새로운 눈으로 상대방을 보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없다는 명언을 상기시킨다. 그 동안 새로 알고, 느끼게 된 오해가 풀린 것들이 많지만 그 중에서 나는 그들이 2차 대전 중에 민간인들이 얼마나 많이 일방적으로 피해를 보았나 하는 사실이 충격적이었다. 상상을 훨씬 넘어서는 그런 고통을 당한 그들.. 우리 민족에게 많은 고통을 준 것은 분명히 사실이지만.. 그것을 주도한 것은 사실 그들의 군국주의자들이 아니던가? 멋모르고 따르던 국민, 신민들을 일방적으로 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도 너무나 큰 고통을 당한 피해자들인 것이다. 그것을 이번 3-11 재난에서 또 생생하게 보게 되었다. 그래서 이번은 그들을 정말 동정적인 눈으로 보며 슬픔을 나누고 싶은 것이다.

TIME magazine의 cover

TIME magazine의 cover, 현재 일본인들의 심정을 잘 나타내는..

 

 

 

우미관, 문화극장, 아데네 극장.. 1950년대와 60년대를 걸쳐서 내가 즐겨 다녔던 극장들의 이름이다. 나와 비슷한 나이또래로 서울에서 살았으면 분명히 이 이름들을 기억할 것이다. 정확하게 이 극장들의 역사는 잘 모른다. 그저 나의 기억에 항상 그곳에 있었던 것 뿐이다. 더불어 이 극장들은 소위 말하는 일류 개봉관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입장료가 비교적 싼 편이었다. 종로2가 화신 백화점 바른쪽 옆 골목에 있었던 우미관, 낙원동 북쪽, 덕성여대 바로 앞, 천도교회관 바로 옆에 있었던 문화극장, 퇴계로 대한극장 길 건너 편 골목에 있었던 아데네 극장.. 그 많은 극장 중에서도 이 세 극장이 더 기억에 남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당시 그곳에서 많은, 아직까지도 뇌리에 생생하게 남는 주옥 같은 영화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우미관과 아데네 극장은 거의 외국영화만 상영을 했고, 문화극장은 거의 국산영화만 상영을 했다. 다만 문화극장은 아주 가끔 연극도 곁들여 보여주었다. 그리고 우미관은 외화를 좋아하는 일반 대중, 문화극장은 한국영화를 좋아하는 일반인 대상이었는데, 아데네 극장만은 조금 특이하게 중고등 학생들이 주 관객이었다. 그러니까 아데네 극장만은 항상 학생입장이 가능하게 검열이 된 영화만 보여준 셈이다. 그 당시 사회, 경제수준으로 이런 중고등학생을 배려한 사업은 지금 생각해도 참 진보적이고 혁신적인 생각이었다. 다른 극장은 대부분 ‘학생 입장 불가’ 라는 것으로 ‘성인용’ 영화를 구별하였다. 성인용 영화라 해도 요새 말하는 XXX 급을 말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고 그저 조금이라도 사회기준으로 보아서 ‘낯을 붉히게’하는 것이 ‘성인용’ 영화였다.

 

이 세 극장 중에서 내가 제일 많이 가고 좋아했던 곳이 바로 우미관이었다. 이곳이 그 당시 유행하던 미국, 그러니까 Hollywood급의 ‘멋있던’ 영화만 보여주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대부분 일류 개봉관이었던 단성사, 대한극장, 중앙극장 같은 곳에서 이미 보여준 것들이 이곳에서 다시 상영되었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처음 본 영화가 국민학교 5학년 때 쯤(1958년 쯤) 본”타잔과 잃어버린 탐험대” 라는 영화였다. 그 당시는 서부영화와 타잔 영화가 유행을 할 때였다. 그 많은 것 중에 이것이 기억에 남는 이유는.. 그 영화를 보러 갈 때의 과정이 뚜렷이 기억에 남기 때문이다. 그때는 영화가 들어오면 제일 손쉽게 알 수 있는 광고매체가 영화벽보였다. 가게의 벽이나 길거리의 벽에 붙여놓은 poster같은 것이었다. 그때 “타잔과 잃어버린.. 어쩌구” 하는 영화벽보를 보고 그것을 보고 싶었는데.. “타잔과 잃어버린..어쩌구” 하는 제목 중에 “어쩌구” 하는 대목이 한자로 쓰여있었다. 그것이 바로 “탐험대”였는데 그것을 나는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집에 와서 극장을 가겠다고 돈을 달라면서 영화 이름을 “타잔과 잃어버린 코끼리”라고 둘러 댔다. 내가 생각해도 조금은 ‘촌스러운’ 영화 제목이었다. 그래서 그것을 보기는 보았다. 그때부터 나는 미국 영화의 마력과 위력에 빨려 들어갔다. 대부분 국산영화는 우리 같은 어린이들이 보아도 유치하기 이를 데 없던 그런 시절이었기에 더 그랬을 것이다.

 

비록 개봉관보다는 입장료가 쌌겠지만 우리 같은 코흘리개 국민학생에게는 그것도 장난이 아니었다. 그래도 더 싸게 표를 살 수 있는 방법이 있었는데, 바로 가게에 붙여놓은 영화포스터에 따라 나오는 무료입장권이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포스터를 붙여놓은 가게에서 아주 헐값으로 사는 것이다. 그런 잔꾀를 동원해서 참 많이 영화를 보았다. TV가 없던 그 당시 만화와 더불어 우리에게 살 맛을 준 것이 이 미국영화들이었던 것이다. 오디 머피, 게리 쿠퍼, 버트 란카스타, 아란 랏드 주연의 ‘베라크루즈’, ‘쉐인’ 같은 서부명화들, 로버트 밋첨 주연의 ‘상과 하’ 같은 2차 대전 전쟁영화들, 그리고 프랑크 시나트라, 케리 그란트 주연의 ‘자랑과 정열’ 같은 유럽풍의 사극영화들.. 그때 본 영화들을 미국에 오면서 쥐 잡듯이 찾아서 TV로 다시 보거나, video tape등으로 다시 볼 수 있었는데 그 덕분에 우리 집 식구들, 특히 아이들이 그런 것들을 자연스럽게 보면서 자라게 되었다. 거의 50년대의 영화들이었으니, 아이들에게는 완전히 ‘활동사진’ 류의 화석 같은 느낌이었겠지만 미국의 그 당시를 공부할 수 있게 해준 ‘역사적’인 가치가 없지도 않았다.

아데네 극장 개관 광고, 1961

1961년 12월 초 개관 된 아데네 극장의 광고, 그 당시에는 미국영화 이외에도 가끔 여기에 보이는 유럽쪽의 ‘명화’들도 상영 되곤 했다. 광고를 자세히 보면, 화폐의 단위가 ‘원’이 아니고 ‘환’.. 1962년 화폐개혁 때 ‘원’으로 바뀌었다.

 

퇴계로에 있었던 아데네 극장은 주로 중,고등학교 다닐 때 많이 갔다. 그곳에서는 주로 외국영화를 많이 했지만 가끔 국내영화도 보여 주곤 했다. 절대로 학교 선생님에게 잡히지 않는 곳이라는 장점이 있어서 아주 어깨를 쭉~~펴고 영화를 볼 수 있어서 좋았다. 그곳에서 많이 본 영화들은 주로 중세 유럽을 배경으로 하는 사극영화들이었다. 아깝게도 그 영화들의 이름이 생각 나지 않는다. 이것들과 대조적인 곳이 바로 낙원동에 있었던 문화극장이었다. 이곳은 정말 ‘서민’의 냄새가 풀풀 나던 곳이었다. 100% 국내 영화만 상영하였고, 가끔 연극도 보여주었다. 나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연극이란 것을 보게 되었다. 주로 국민학교 때 많이 갔는데, 내가 살던 가회동에서 정말 가까운 곳이어서 더욱 편했다. 이곳에는 참 기억에 많이 남는 추억들이 있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그 당시 전쟁 후 가난에 찌들었던 국민들을 즐겁게 해 주었던 코메디 듀오가 있었는데 바로 “뚱뚱이와 홀쭉이”였다. 뚱뚱이는 “양훈”, 홀쭉이는 “양석천” 두 분이었는데 둘 다 우연히 양씨였지만 한자가 같지를 않았다. 이 두 사람이 콤비를 이루어 영화를 많이 만들었는데, 그 중에서 내가 문화극장에서 본 것이 “천지유정”이란 홍콩 현지에서 찍은 코메디 영화였다. 물론 흑백영화였다. 그것을 그때 집에서 밥을 해주며 같이 살던 ‘필동 아줌마’와 누나, 셋이서 아침에 가서 보았는데.. 영화가 끝나고 나니 또 보고 싶어서 나만 혼자 남아서 또 보게 되었다. 그렇게 보기 시작해서 하루 종일을 보게 되었다. 같은 영화를 계속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해서 더욱 그랬다. 결국은 저녁 무렵에 필동아줌마가 극장으로 들어 와서 나를 데리고 나갔다. 몇 번을 계속 보았는지 기억이 나지를 않을 정도로 하루 종일 본 것이다. 이것이 두고 두고 우리 집의 얘기 거리가 되었다. 덕분에 그 영화는 아직도 눈에 선할 정도로 뚜렷이 머리에 남아있다. 아직도 나는 이 세 극장에 고마움을 느낀다. 그 가난하고 순진하던 시절 이곳들은 사실 나에게 거의 마음의 등대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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