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동학교 백승호

어린 시절 친구들을 회상할 때면 그 느낌들이 갖가지임을 느끼곤 한다. 물론 생각만 나도 피하고 싶은 경우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너무나 희미한 기억들이라서 그런지 실제라 기 보다는 파란 담배 연기 속에서 춤추는 듯한 거의 꿈처럼 느껴지곤 한다. 한마디로 더 생생하게 기억을 하고 싶은 친구들인 것이다. 이런 것들을 지금 급속히 저하되는 듯한 기억력과 싸우면서도 기억하고 싶은 것이다.

나의 blog은 사실 그것을 위해서 시작했고 계속 그런 노력을 돕는 역할을 해 왔다고 생각이 된다. 영어와 ‘한국어’ 사이를 오가며 나의 감정을 알맞게 나타내는 것도 이제는 쉽지는 않다. 사실 머리 속에서 맴도는 어린 친구들은 그 당시의 사진이나 앨범들을 보면 쉽게 알아 낼 수 있다. 하지만, 그 다음이 문제다. 분명히 친하게 뛰어 논 기억은 나지만 그것이 전부인 것이다. 그래도 그 중에는 더 자세히, 생생히 기억이 나는 친구들도 있었다. 그 중에서도 오늘은 백승호의 기억이 유난히 머리에서 맴돈다.

백승호, 재동국민학교졸업앨범에서, 1960
백승호, 재동국민학교
졸업앨범에서, 1960

나의 뇌리에 ‘강하게’ 새겨져 있는 이 백승호는 1958년 서울 재동국민학교 5학년 때 같은 반의 친구였다. 한때 아주 가깝게 지냈고 분명히 서로 좋아했다고 생각을 했었는데 어느새 인가, 우리는 헤어지고 말았다. 웃기는 것은 그렇게 친구였었던 기간이 1년도 채 안되게 짧았지만 아직도 어제 본듯한 기분인 것이다. 원래가 잘 웃는 얼굴의 이 친구, 백승호 6학년 때 헤어지고 말았지만 멀찍이 볼 양이면 저 애는 나의 친구였다는 생각은 하곤 했었다.

중학교로 올라가면서 백승호는 완전히 나의 시야, radar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대부분의 국민학교 동창들이 바로 이런 식이었다. 하지만 얼마 전에 다시 연락이 되었던 다른 친구 신문영처럼 이 친구도 거의 꿈같이 연세대 campus에서 보게 되었다. 신문영은 몇 초 정도 잠깐 보고, 혹시 저 친구가 신문영.. 하며 어 떨떨 했었지만 이 백승호는 아예 자주 얼굴이 나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ROTC(학훈단, 일명 바보티씨) 생도의 모습으로 자주도 보였다.  

문제는.. 그렇게 나의 눈에 보일 때마다 왜 나는 반가운 마음을 접고 ‘모른 척’을 했었을까? 성격 적으로 그 당시 나의 먼저 나서서 백승호를 아는 척 못했을 것이다. 그저 멋 적은 것이다. 느낌에 어떤 때는 백승호도 나를 보았다고 느꼈지만 확실하지 않다. 만약 그가 나를 알아보았다면 그도 멋 적어서 나를 모르는 체 했을까.. 그것이 아직도 궁금한 것이다.

이런 사연으로 백승호의 image는 이곳 저곳에 남았다. 재동국민학교 5학년 시절의 사진 2장, 재동국민학교 졸업앨범, 하지만, 연세대 앨범.. 을 기대했지만 그는 1966년 입학으로 나보다 일 년 앞서 졸업을 한 듯, 그곳(1971년 앨범)에 그의 모습은 없었다. 사실, 학훈단 베레모를 쓴 모습도 기억을 하는데, 아마도 공학부 토목학과를 다녔던 듯 하다. 더 늦기 전에 그의 살아온 역사를 알고 싶지만, 그것은 너무나 무리한 바램일 것 같다. 하지만 build it, they’ll come의 교훈을 기대하는 것은 큰 무리가 아닐 듯..

 

재동국민학교 5학년 사진, 동그란 표시가 백승호, 1958년

재동국민학교 5학년 사진, 동그란 표시가 백승호, 1958년

 

찾았다! 재동학교 6학년 1반 신문영

나는 몇 개월 전 이곳,   나의 blog에서 연세대 시절을 회상하면서 재동국민학교 동창 신문영을 그의 졸업앨범 사진과 함께 같이 다루었다. 그 많은 재동국민학교 동창생 중에서 신문영은 나의 희석되어가는 뇌리에 뚜렷이 남아있기에 얼마 전에 그로부터 소식을 들었을 때,나는 사실 심장이 멎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그가 나의 blog을 ‘우연히’ 보았기에 연락이 되었을 것이라 serony dot com blog의 제일 중요한 목적을 달성하게 되었다.

제일 궁금했던 사실들 대부분을 이번에 알게 되었는데, 그 중에서 내가 제일 궁금했던 것은 1960년 중학입시에서 어떤 중학교에 갔느냐는 것이었는데, 알고 보니 경복중학이었다. 다른 재동 동창 심동섭이 경복으로 갔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 또 다른 동창 조성태, 정세종, 장세헌 등도 같이 경복중학교에 갔다는 것을 새로 알게 되었다. 조성태, 정세종은 같은 분단에 있어서 아는 동창들이고, 장세헌은 1학년 때 같은 반인 것만 기억을 한다.

이번에 email로 느끼는 신문영은 솔직하고 직선적인 듯 했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중학교 당시 공부를 지지리도 못해서 삼선 고교로 갔다’ 고 하는 것을 보면 그런 느낌이 드는 것이다. 나와 비슷하게 부선망 단대독자(아버지가 없는 외아들)로 군대를 안 갔었다고 했고 대학 졸업 후 곧바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고.. 느낌에 아주 ‘정석적’인 인생을 산 듯했고, 명함을 보니 사회적으로 크게 성공을 한 것 같아서 흐뭇했다.

이 친구를 통해서 재동학교 동창회가 있다는 것도 새로 알게 되었는데, 회장은 김영환, 일년에 한번 정도 모인다고 했고, 거기서 이만재, 육동구 등도 보았다고.. 듣기만 해도 흐뭇하고.. 부럽고.. 꿈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사실 나는 꿈에서만 볼 수 있었던 광경들이기 때문이다. 다음에 모이면 사진이라도 볼 수 있게 되기만 바라지만, 세월의 횡포로 얼굴이나 제대로 알아 볼 수 있을지 의문이다.

신문영을 기억하면 꼭 같이 떠오르는 것들이 몇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6학년 (1959년) 때 같은 분단 (공부를 제일 잘하던 1분단)에 있을 때 어느 날 이른 아침 수업이 시작되기 직전에 담임 박양신 선생님이 나와 신문영을 부르더니, 심부름 좀 하라고 말씀을 하셨다. 듣고 보니, 선생님이 댁에서 가져와야 하는 물건 (서류?)이 있으니 둘이서 곧바로 선생님 댁에 갔다 오라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그 당시에 우리에게는 큰 일에 속했다. 왜 나와 신문영에게 그런 심부름을 시켰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둘을 믿고 그런 일을 주신 것이 내심 기뻤던 것은 사실이다. 그 시간에 학교를 빠져 나와서 인사동 입구의 선생님 댁으로 가는 것 그 자체가 우리에게는 모험 같고 신기롭게만 느껴져서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게 남는 모양이다.

아들 딸 모두 결혼, 손주들까지 있는 신문영, 부럽기도 하고, 보고 싶어 지기도 하지만 그것이 그렇게 쉽겠는가? 하지만 이렇게 반세기가 훨씬 지난 뒤에도 가상적인 해후가 이루어지는 세상이니 이만큼이라도 오래 살았다고 위로를 하며 만족하는 것도 과히 나쁘지 않을 듯..

Men’s Night

 9월 22일 토요일 저녁에는 정말 오랜만에 men’s night의 모임이 있었다. 이것은 진희네 그룹 부부모임에서 ‘wife’ 들만 빠진, 그러니까 남편들만의 모임이고 이름도 men’s night이 된 것이다. 이런 모임은 주로 이번 모임의 host인 최형의 wife가 집을 비웠을 때 이루어지고, 따라서 모이는 장소도 최형의 Sugarloaf Country Club 안에 있는 ‘으리으리’한 ‘진짜’ mansion(?) 에서 모이곤 한다. 이번에도 최형의 wife가 여행을 떠나서 그렇게 된 모양이었다. 이럴 때의 저녁 음식준비가 사실은 문제인데(wife가 없으므로), 역시 으리으리한 mansion에 걸맞게 catering service로 그것은 해결이 되었다.

근래에 들어서 이 그룹 모임은 예전대로 꼭 하게 되는 술(주로 wine) 대신에 음악, 특히 악기연주를 즐기는 쪽으로 그 분위기가 바뀌고 있어서 wife들이 조금 호감을 갖게도 되었는데, 이날도 모두들 한가지 악기를 들고 와서 맛있는 음식과, 얘기, 그리고 노래와 연주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나이가 들면서 거의 유행적으로 악기를 배우는 여유를 갖는 모양인데, 나는 아직도 그런 것을 못 해보았다. 최형은 ‘소원대로’ $2000짜리 guitar를 사서 그룹지도를 받고 있어서 모두들 호기심 어린 관심을 보이고 있고, 윤형도 $500짜리 ‘연습용’ saxophone을 사서 개인 지도를 거의 일년 째 받고 있다고 했다.

 

 

이날 처음 들었는데, 사실 놀랄 정도라 ‘멋지게’ 그 결과를 보여주었다. 나야 옛날부터 유일하게 하던 것이 guitar여서 별로 특기사항은 없고, 이태리 가구의 전사장은 guitar를 옛날에 잘 치던 것 같은데, 요새는 많이 잊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목소리가 좋아서 악기대신에 vocal로 한 몫을 잘 치른다.

나는 근래에 들어서 이 그룹의 영향을 받아서 조금씩 guitar를 찾으며, 기억이 나는 곡들을 찾아서 다시 배우고, 연습을 하곤 한다. 나이 들면서 이런 것은 역시 건전하게 시간을 보내는 데 도움이 되고, 악기, 가사 외우기, guitar chord외우기 등등도 ‘기억력’ 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