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eld of dreams, trancending time & place, autobio in progress..

Monthly Archives: December 2012

잠에서 깨어난 Rip Van Winkle

잠에서 깨어난 Rip Van Winkle

얼마 전부터 까마득한 옛날에 읽은 듯한 미국 단편소설 (단편보다 더 짧은 장편掌篇 일지도..) Rip Van Winkle (맆 밴 윙클)의 생각을 하게 되었다. Nostalgic한, 그러니까 좀 포근한 기분을 느끼는 듯한 기분으로 기억력을 되살리며 그 소설책을 어떻게 읽었던가를 기억하려고 애를 쓴 결과, 이것은 영어책 읽기를 배우려는(당시에는 ‘영독’이라고 했다) 의도로 영어로 된 ‘원서’를 읽은 것이었고, 아마도 나의 ‘전설적인’ 아르바이트 가정교사 경기고 김용기형이 ‘반 강제로’ 권해서 읽었을 것이고, 그 정도를 읽으려면 고등학교 2학년(1964년) 정도였을 것이다.

거의 50년이 지난 지금 그 책 저자의 이름은 비록 잊었지만(찾아보니 미국의 Washington Irving) 스토리의 대강은 기억한다. 주인공인 맆 밴 윙클이 하루 종일 바가지 긁는 마누라를 피할 겸해서 산으로 갔다가 ‘귀신’들을 만나서 술을 마시고 신나게 놀다가 잠이 들었는데 깨고 보니 20년의 세월이 흘렀다는 비교적 ‘간단한’ 내용이었다.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동서고금을 통해 비슷하게 많이 남아있다고 한다. 아마도 대한민국의 전설에도 비슷한 것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문제는, 내가 이 주인공이 된 듯한 느낌으로 사는 기분이 든다는 것이다.책의 주인공은 20년의 잠을 잤지만, 나는 대강 10년 정도의 잠을 잤다는 것, 그는 괴로운 현실을 떠나서 즐겁고 편안한 잠을 잤지만 나는 사실 그 반대인 것이 차이라면 차이일까? 가끔 현실이 꿈같이 느껴지고, 꿈이 현실처럼 느껴진다는 표현을 생각하는데, 어떨 때는 그 표현이 그렇게 실감날 수가 없었다. 현실감이 희박해 진다는 것은 엄밀히 생각하면 조금 위험한 상태가 아닐까? 그래서 나는 가끔 혹시 내가 무슨 ‘정신이상’, 아니면 비정상적인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닐까 의심도 많이 해 보았지만, 그런 말을 할 때마다 연숙에게 핀잔만 듣곤 하고 금새 현실을 느끼곤 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나는 지금 현재 Rip Van Winkle처럼 느낀다는 사실이다. 기나긴 잠에서 깨어나는 기분인 것이다. 그러면 나의 그 긴 잠이 언제부터 시작이 되었을까.. 생각해보니, 아마도 1998년 경부터가 아닐까. 50세가 되던 그 해부터 2008년경 까지의 10년간.. 기나긴 그 때에 연숙의 어머님, 나의 장모님께서 갑자기 타계를 하시고, 그 다음해에는 나의 ‘태양, 그리고 별’, 어머님이 뒤 따라 가셨다.

그때의 심한 충격에서 아마도 나는 나의 고통을 ‘기나긴 잠’으로 잊고자 한 모양인가? 내가 살고 있어도 살아있는 기분이 아니었다. 그때야 나는 비록 오랜 세월 떨어져 살았지만 나의 어머님의 존재와 위치의 ‘위대함’을 알 수 있었다. 나에게는 너무나 커다란 방파제요, 희망이요, 피난처였던 나의 어머니.. 어린아이같이 나는 어머니가 무한정 내가 죽을 때까지 사시리라 ‘말도 안 되는’ 꿈을 꾸며 나를 기만하며 살아온 것이다. 그 꿈이 현실적으로 사라지자 나는 고통을 피하려 본능적으로 잠 속으로 숨었을 것이다.

긴 잠에서 서서히 깨어나며 나는 10년이 지난 나의 모습을 다시 보게 되었고, 10년 더 먹은 나의 모습은 거울조차 보기 싫은, 과히 보기 좋은 모습이 아니었다. 처음에 느낀 것은 또 다른 종류의 실망, 충격, 당황함 등등.. 하지만 시간이 지나가면서 서서히 나는 나의 현재 몰골과 처지를 인정하게 되었다. 그때 내 앞에 슬며시 다가온 것이 ‘성모님의 묵주기도‘ 였는데, 처음에는 그저 ‘살려고’ 아무 것이나 잡겠다는 심정으로 시작했지만,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나는 가게 되었다. 그것이 나의 믿음의 르네상스 시작이 되었다. 이제는 절대로 뒤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sweaters, Starbucks, DVDs

sweaters, Starbucks, DVDs

2012년 우리들의 크리스마스는 조금 색이 다른 것으로 기억이 남게 되었다. 이것은 사실, 시간문제가 아닐까? 가족들이 나이가 들어가면서 겪게 되는 조그만 growing pain일 지도 모른다. 이런 큰 holiday때면 생각나곤 하던 ‘즐거운’ 추억들은 역시, relax된 기분으로 새벽같이 living room에 모여서 선물을 풀어보던 것, 구수하고 따뜻한 음식을 만들며 holiday classic video나 TV movie를 보던 기억들, 조용하기만 한 길거리의 풍경들.. 그런 것들이 전형적인 모습과 소리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Charles Dickens원작의 classic중의 classic, A Christmas Carol (1951’s movie version)과, 이제는 완전히 Christmas classic이 되어버린 1978년 미국영화, A Christmas Story (Ralphie란 안경 낀 꼬마의 성탄 추억)란 것을 ‘하루 종일’ 보던 때가 이제는 그립기도 하다. 아이들이 집을 떠나고, 머리가 큰 ‘아이’들이 산타클로스의 비밀을 알아 버린 후에는 모든 것이 ‘천천히’ 바뀌었다. 더 이상, 비밀이 없는 것이다.

그런대로 신앙적인 기분을 가지고 있던 그런 날들도 그 애들에게는 이제 완전한 세속적인 ‘즐기는’ 날로 바뀌고.. 그런 배경에서 이제 나는 우리의 전통적인 ‘포근한’ 성탄기분을 ‘절대로’ 기대하지 않게 되었다. 내가 살아 생전에 언젠가 다시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희미한 희망만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머리가 커져버린 ‘아이’들.. 정말 재미없고, 실망스럽기만 하다.

골칫거리일 수도 있는 ‘선물’ 사기.. 거의 ‘강제성’을 지니고 있는 미국경제를 좌지우지하는 이것.. 어떻게 생각하고 처리해야 할 것인가? 오죽하면 크리스마스의 장본인 예수님의 가르침을 2000년간 고수하고 있는 교황청과 교황님.. 제발 크리스마스는 선물을 주는 날이 아니라고 강조하게 되었는가.. 숫제 성탄 1주일 전 이후부터 크리스마스 캐럴을 들으라고 충고하게 되었을까? 하지만 가만히 보면 이런 축제 분위기에 사로잡힌 대부분의 인간들은 아마도 대부분 세속적인 인간들일 것이라고 짐작을 한다.

Pancake Handbook

Pancake Handbook

올해 성탄에는 나에게 줄 선물 고르는 것의 수고를 덜어 주려고 Costco에 갔을 때 두 가지를 골라 주었다. 하나는2-disc DVD set 였는데, 내가 좋아하는 ‘옛날’ 전쟁영화들 8개나 실려있는 것이었다. 또 하나는 귀엽게 생긴 battery-powered screw driver였다. 이중에 전쟁영화 DVD는 나에게는 정말로 횡재였다. 8개의 보물 같은 영화 중에서 제일 다시 보고 싶었던 것 중에는, Von Ryan’s Express, Twelve O’clock High The Young Lions가 제일 보고 싶었던 것이고 나머지 것들도 모두 수준급 추억의 영화들이었다.

그것 이외에 새로니는 내가 그 동안 ‘싼’ 커피를 마시는 것을 보았는지 여러 뭉치의 Starbuck coffee를 주었고, 나라니는 Pancake 책을 선물했다. 내가 그 동안 아침마다 pancake을 직접 만드는 것을 보고 hint를 얻었을 것인데, 내가 instant pancake mix로 만들었기에, 이 책을 보고 ‘진짜’ 를 만들라는 것이었다. 과연 내가 이 ‘진짜’ pancake recipe를 보고 만들 수 있을 지는 미지수이지만, 나를 생각해 준 나라니의 마음을 볼 수 있어서 고맙기만 했다.

Spielberg's Lincoln

Spielberg’s Lincoln

올해부터 시작된 조금 이상한 holiday tradition에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는 것이 포함 되었다. 다른 날도 아니고 가족이 집에 모이는 날에 밖으로 나가는 것은 사실 이상적인 idea는 아니었지만, 이것도 ‘머리가 커버린 아이들’의 생각이었고, 우리는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억지로’ 나가는 꼴이 되었다. 텅텅 비었을 것으로 상상이 되던 극장에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미국도 그 동안 변했나.. 할 정도로 생각이 착잡했다.

전통적인 가정, 고향이라는 향수적인 생각은 이제 정말 골동품이 되어가는 것인가.. 함박눈이 아닌 ‘함박 억수비’가 쏟아지던 성탄절날 우리는 어울리지 않게 ‘밖으로’ 나가서 Lincoln 영화를 보았다. 이것도 전통적인 Lincoln (Abraham)영화가 아니었다. 역시 또 다른 Political Correctness의 냄새가 심하게 풍기던 ‘명화’가 될 가능성이 많은 그런 작품이었다. 그 당시의 역사로 현재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Washington DC의 공기를 바꾸려는 가상한 노력도 짐작이 된다. 아마도 다가올 Oscar상도 그다지 어렵지 않을지도..

Silent Night.. Holy Night, 2012

Silent Night.. Holy Night, 2012

¶  새벽 잠결에 무언가 세차게 똑똑 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어렴풋이 밝아오는 새벽, 밖을 보며 그 소리가 무엇인가를 알아차렸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주제넘게’ 비가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새빨갛게 떠오르는 태양이 가득한 성탄 전날 보다는 아마도 이렇게 잿빛하늘이 사실은 더 포근한 감을 주어서 좋다.

올해의 성탄은 예년과 조금 다르게 기다린 셈이다. 제일 눈에 뜨이는 것은 이제까지면 12월 초부터 ‘노상’ 즐겨 듣던 주옥 같은 크리스마스 캐럴을 올해는 ‘거의’ 듣지를 않았다는 사실이다. 내가 기억하는 한 이것은 아마도 처음이 아닐까.. 그것과 비슷하게 holiday decoration도 며칠 전까지 피하고 살았다. 물론 나이 탓도 있었겠지만, 사실 올해는 정말로 성탄의 뜻에 더 생각하고 싶었다. 그것이 전부다.

 

¶  12월 24일.. 오늘은 조금 특별한 날이다. 내일 성탄을 하루 남긴 오늘, 우리의 한국본당 주임신부, 하태수 미카엘 신부님의 영육간의 건강을 위한 전 레지오 단원들의 묵주고리기도가 그 대장정의 막을 내리기 때문이다. 이것은 지난 3월 26일 사순 제5주일 시작되던 월요일, 주님탄생예고 대축일 날부터 시작이 되었다.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소속 전 레지오 단원이 하루에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단수의 묵주기도를 하는 것인데, 밤 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대에 골고루 나누어져서 끊임 없이 돌아가며 바치는 기도.. 그래서 고리기도였다. 주임 신부님을 위한 것이지만 결국은 우리 레지오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문제는 하루에 한번 ‘빠지지 않고’ 정해진 시간에 5단내지 10단을 바치는 것.. 정말 신경이 많이 쓰이는 것이었다. 잊지 않으려고 숫제 cellphone에 alarm을 해 놓아서 사실 잊을 수는 없겠지만, 그 시간에 하던 것을 접어두고 묵주기도를 바치는 것은 실제적으로 거의 불가능할 때도 많았다. 그렇게 해서 몇 번은 한두 시간 지연되기도 했지만, 기적적으로 하루도 빠지지 않고 오늘 마지막을 장식했다.

조금 더 의미 있는 기억도 있었는데, 7월 26일 우리 자비의 모후 쁘레시디움 단원 은요안나 자매가 기나긴 암투병 끝에 선종을 하셨고, 나는 곧 이어서 그분이 시작했던 고리기도를 이어 받아서 오늘 끝낸 것이다. 내가 원래 하던 것은 연숙이 덤으로 맡아서 했는데, 이것을 물려받아 할 때마다 저 세상에 가신 요안나 자매를 생각하며 묵주기도를 바치곤 했다. 올해는 참, 이런 뜻 깊은 기억들이 제법 있었다.

 

¶  매년 성탄절이 다가오면 조심스럽게 각오를 하는 것이 하나 있었다. 지난 일년 동안 ‘못 보았던’ 친지들에게 성탄 카드를 ‘우체국의 우편’으로 보내는 것이다. 전통적인 종이로 만든 카드와 인터넷으로 보내는 ‘가짜 카드’는 정말 의미와 느낌이 다르다. 편하다는 한가지 이유로 모두들 그것을 보내지만, 받아보는 입장은 그렇게 마음이 편하지 않다.

문제는 그 진짜 카드를 진짜로 써서 진짜로 우체국 편지로 보내는 것이 왜 그렇게 힘이 든단 말인가? 올해는 결국, 보기 좋게 실패를 해서 딱 2통의 진짜 카드를 신부님께 보낸 것이 전부가 되었다. 성탄 전야에 이제는 조금 마음이 편한 것이 이제는 모든 것이 늦었다는 생각 때문이다. 하지만 석연치 않다. 무슨 방법이 없을까? 비록 가짜 카드지만, 조금 더 정성을 들이면 안 될까? 그렇다.. 진짜 카드를 인터넷으로 ‘보여주면’ 되지 않을까? 그래서 부지런히 진짜 카드를 scan을 하고 사연을 이렇게 써 본다.

 

죽마고우 원서동 크리스마스의 환상

죽마고우 원서동 크리스마스의 환상

내가 알았던 모든 친구들.. 그 중에서도 원서동 죽마고우들: 최승철, 김동만, 안명성, 박창희, 손용현, 유지호.. 비록 서로의 늙어가는 모습은 못 보고 살지만 마음 속에 간직된 어린 우정은 하나도 변함이 없다. 성탄과 새해에 어디에 살건, 어떻게 살건 간에 건강하기 바란다!

Panera bagels

Panera bagels

오늘 우리는 주일 미사 후Panera bakery에서 ‘마지막’ 아침 식사를 하였다. 아침 식사 라기에는 부끄러운 Asiago-Cheese, Cinnamon-crunch bagel과 Hazelnut coffee정도지만, 그것이 문제가 아니고, ‘마지막’란 것이 문제였다. 이틀 뒤에 우리에게 너무나 정이 들었던 이곳이 ‘이사’를 가게 되어서 문을 닫는 것이다.

한마디로 일요일 아침 미사 후에 우리가 갈 곳이 없어진 것이다. 일요일 아침에 거의 예외 없이 꼭 들려서 ‘똑같은’ bagel을 먹곤 해서 그곳 남자처럼 생긴 여자 manager와는 아주 친숙한 사이가 되었고, 우리가 가면 아예 menu를 묻지도 않고 갖다 주곤 했다.

정말 비교적 싼 값에 분위기 있고, 냄새 그윽한 coffee를 즐기며 연숙과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그런 곳을 다시 찾기는 어려울 듯 해서 더욱 아쉽기만 하다. 이사를 가는 이유가 더욱 안타까웠다. 매상도 비교적 오락가락 하는데, 건물주가 rent를 너무나 올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더 customer traffic도 많고 rent도 싼 곳, 어떤 shopping mall (Towne Center)근처로 간다고 했다. 우리 보고 그곳에 오면 꼭 들르라고 했지만 과연 언제 그곳에 찾아 가게 될지는 미지수이다.

그곳에 단골손님이 된 것은 아마도 5년 정도가 아닐까.. 그 전에는 Atlanta Bread Company라는 같은 류의 Bistro style bakery로 가곤 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문을 닫고 말았고, 다시 찾은 곳이 지금의 Panera 였던 것이다. 그 두 곳의 분위기는 아주 달랐다. Atlanta Bread Company(ABC)는 널찍한 마루 바닥에 아주 밝고 넓은 분위기였고, Panera는 분위기 있게 어둡고 아늑한 곳이었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coffee를 마시는 분위기는 Panera가 훨씬 더 좋았다는 것이다.

집에서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하는 것이 조금 거북하게 느껴지던 나와 연숙은 이곳에서는 분위기 덕분인지 아주 편한 마음으로 이야기를 하게 되어서, ‘분위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실감을 하기도 했다. 5년 이상 그런 분위기가 우리 부부에게 미친 ‘좋은 영향’은 상당할 것 같다. 지금은 다시 생각한다. 그곳을 찾고, 그곳에서 보낸 5년, 정말 100% 우연한 일이었을까.. 아니면?

Curia-PC? Curia, PC.. Curia pc.. 꾸리아 PC.. 3년 전만 해도 이것이 무엇인지 짐작 조차 못했을 것이다. 이제는 99% 무슨 뜻인지 안다. 여기서 curia는 로마군단 내의 조직이 아니고 레지오 마리애 조직 중의 하나일 것이다. 군대로 말하면 여러 소대를 관할하는 중대 급에 속한다고 나 할까. 그러니까 꾸리아 조직에서 쓰는 컴퓨터일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내가 속한 레지오(마리애)를 관할하는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소속 ‘천상은총의 모후’ 꾸리아를 말한다.

얼마 전, 자세히 말하면 12월 초, 그 당시에 있었던 레지오 연차 총친목회를 치르면서 알게 된 것이 꾸리아 간부들이 쓰는 (정확히 말하면 서기가 주로 씀) Windows laptop pc가 문제가 생겼다는 사실이었다. 그 Windows 7 laptop pc를 직접 내가 보게 되면서 자연스레 내가 관여하게 되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레지오 용어로 ‘본당협조 활동’에 속하는 일을 내가 맡게 된 것이다.

나에게, 이런 종류의 일은 사실 ‘일’이라는 생각보다는 ‘시간 보내기 딱 맞는’ 그런 ‘즐거움’에 속한다. 문제가 있다면, 여기에 깊이 빠져들면, ‘실생활’에 지장을 줄 정도로 빠져들어서 ‘해야 할 것을’ 미루거나 할 정도로 될 때도 있다는 사실이지만, 나이가 들면서 그것도 잘 절충을 하는 지혜도 생겨서 예전과 같은 큰 문제는 없다. 나는 이것을 쉽게 말해서 ‘공돌이’ 기질이라고 생각한다. 그저 호기심으로 인한 ‘새로운 것을 알 수 있는’ 그런 기회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비교적 복잡하게 발전한 근래의 Windows PC는 깊이 알려고 하면 그 속에 무궁무진한 ‘기술’들이 축적이 되어 있어서 이것과 더불어 보내는 시간이 절대로 낭비가 아닌 것이다.

OLYMPUS DIGITAL CAMERA1~2 년 전에 구입했다는 이 pc는 model이 HP G73-B66US, 2010년 경에 나온 것으로 Microsoft Windows 7 (64bit), 4GB, 2400 MHz Intel Core i3, 500GB HDD.. 등등으로 상당히 빠른 system이었다. 꾸리아 사무실에서 처음 보았을 때 보게 된 문제 중에는, 우선 BSOD(blue screen of death, system crash) 같은 심각한 것을 비롯해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system전체가 느리게 ‘돌고’ 있었고, battery 가 너무나 빠르게 discharge되는 등.. 한마디로 무언가 큰 문제가 있어 보였다. 크리스마스 씨즌으로 접어 들면서 꾸리아의 일도 바쁘지 않아서, 아예 pc를 집으로 가지고 와서 더 자세히 보게 되었다.

Booting을 하면, 5분도 되지 않아 blue screen으로 crash를 한다. Safe mode로 booting을 해 보았다. 5분이 지나도 별 문제가 없었다. 분명히 Windows core system file이 corrupt된 것이다. 최소한 safe mode에 ‘시간을 벌 수’ 있기 때문에, safe mode에서 systems diagnostic을 해 보니, 분명히 두 가지 문제가 발견 되었다. Hard-disk의 SMART built-in testing에서 disk가 error threshold를 넘어 섰는데, 한마디로 disk가 ‘죽어가고’ 있는 과정이었다. 또 다른 problem은 역시 internal battery가 이미 ‘수명’을 넘긴 상태였다.

이제는 뒤를 돌아 볼 시간이 없다. 현재의 disk data를 빨리 ‘살려서’ 옮겨야 하는 것이다. Safe mode에서 file copy는 비교적 간단하고, 더욱이 usb flash drive(thumb drive) 를 쓰면 더욱 간단하다. 또한 현재 이 pc에는 그다지 중요한 data file가 많지 않았고, 대부분이 MS Office file이어서 file의 크기가 문제가 되지를 않았다.

Data를 살려 낸 뒤에는 500GB 2.5″ hard-disk와 battery를 교체하게 되었는데, 이것으로 비용만 $100 이 쓰였다. 그 다음 과정은 사실 시간은 걸려도 비교적 straightforward한 routine으로 생각이 되었지만, 사실은 우여곡절, surprise가 참 많았다. 제일 놀란 것이, Windows 7 system recovery disk가 요새는 없다는 사실이었다.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 아예 stock hard-disk의 partition 자체에 그것이 있어서 이론상으로는 다시 recovery가 가능하지만 이것은 정말 귀찮고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다. 거기다가, 만약에 최악의 경우, 그 recovery partition이 corrupt가 되면 그때는 속수무책, HP에 연락을 해서 ‘진짜’ Windows 7 disc를 받아야 하는 번거로움도 있는 것이다.

이번에는 그런 최악의 사태로 가지는 않았다. 내가 손수 그 recovery disc를 ‘구워’ 냈기 때문이다. 그것만 있으면 앞으로 같은 문제가 생겨도 당황하지 않고 즉시 고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과정이 참으로 시간이 ‘엄청’ 걸렸는데, 어려운 것은 아니더라도 시간으로 치면 참 ‘비싼’ 작업임에 틀림이 없었다. 이렇게 해서 새로 태어난Windows 7 system은 정말 새로 샀을 때와 같이 ‘날라가는’ 기분을 느끼게 할 정도로 모든 program들이 run을 했고, 그 동안 ‘이상하게 돌아가는 컴퓨터’로 고생을 하던 꾸리아 서기님도 마음을 푹 놓고 쓰게 되리라는 생각을 하며, ‘본당협조’의 일을 끝냈다.

몇 달 전부터 이것에 대한 것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시각적으로 눈으로 봐야 하는 나의 글이 아니고 눈을 편히 감고, 잘 안 보이는 희미한 글자나 그림 대신에 나의 살아있는 ‘육성’을 나의 그리운 가족과 친구들에게 들려주고 싶다는 생각.. 그런 꿈같은 상상을 하다가..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실, 현재 내가 가장 부끄럽고 창피하고 부족하게 느끼는 것이 바로 육성을 쓰는 ‘진짜 전화’ 대화임을 나는 잘 안다. 가장 싫은 것 중에 하나가 전화로 하는 대화들, 언제부터 그렇게 피하고 싫어했을까? 지금은 거의 없어졌지만 예전에는 수도 없이 걸려오는 telemarketing, anonymous call들, 그런 것들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기도 했고, 불편하고 피하고 싶은 ‘인간’들과 말을 나누는 자체를 상상하기 싫었다. 그러다 보니 caller-id 를 보며 귀찮은 사람의 전화는 숫제 받지를 않게 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email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되었는데, 상상외로 이런 삶의 방식이 부드러운 것은 아니었다. ‘반 사회적 anti-social’ 으로 가는 느낌까지 들 때도 많았다.

나의 전화사용이 거의 내가 필요할 때만 (내가 먼저 거는 것만) 하게 되기 시작하면서, 횟수도 점점 떨어지고, 나에게 걸려오는 전화도 따라서 줄어갔다. 잘 받지 않는 전화.. 누가 하겠는가? 내가 생각해도 이것 너무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 정도였다. 혹시 전화로 이야기를 하게 되어도 그 대화는 내가 바라는 것처럼 편한 것들은 아니었다. 내가 언제 마지막으로 ‘신나는 전화대화’를 ‘즐겼던 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다.

이런 문제들이 2년 전에 레지오 마리애에 입단을 하고 단원활동을 시작하면서 내가 풀어야 할 과제로 간주가 되었고, 약간 심각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레지오의 거의 모든 business가 ‘아직도’ 전화가 제일 효과적이기 (빠르고, 확실하고) 때문인데, 그것은 아직도 email을 안 쓰거나 못쓰는 사람들이 상당수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다시 활발하게 전화 하는 것.. 그것이 생각만큼 쉽지를 않았다. 너무나 ‘조용한’ 나만의 comfort zone 에 나는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난 10여 년 동안 email을 쓰는 ‘일반’ 사람들이 점점 많아져서 전화로 ‘실시간 real-time’ 대화가 없는 생활이 우려하는 만큼 치명적으로 불편한 것은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말을 하지도 않고 듣지도 않고..) 살아가게 되었기 때문이다.그래서 내가 제일 ‘존경’하는 부류의 사람들은 ‘전화 잘 걸고 잘 받고, 잘 하고’ 하는 그런 사람들이 되었다. 나의 인생 반려자인 연숙이 바로 그런 부류에 속한다. 어쩌면 그렇게 전화를 ‘용감하게’ 잘 사용할까.. 그 중에서도 제일 놀라운 것이 바로 이것이다. 전화 벨이 울리면 ‘99.99% 무조건’ 받는 것이다. 육체적으로 불가능한 상태를 제외하고는 식사를 하건, 화장실에 있건 상관이 없다. 전화를 거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정말 ‘고마운’ 일임에 틀림이 없다. 나에게 전화가 오면 99.9% 통화가 안 되고 연숙은 정 반대로 99.9% 받는 것이다. 어떻게 이렇게 다를 수가 있을까?

아마도 ‘고철’같은 레지오도 초현대 디지탈의 편리함에 서서히 변할 것이지만 그래도 그래도 email이나 instant messaging 같은 것.. 전화의 간단 편리함은 ‘절대로’ 따라가지 못할 것이다. 내가 레지오 활동을 더 적극적으로 하려면 이 전화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이고, 더욱 높은 차원의 협조를 구해야 할 지도 모른다.

요새도 ‘빌어먹을’ 이란 말을 쓰나.. 우리 때는 참 이런 표현을 많이 하며 살았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그저 가벼운 욕에 속했지만 이 말을 쓰면 속이 한결 시원해지곤 했다. 그 옛날, 또 다른 유행어로 ‘아더메치’ 란 것도 있었다. 아니꼽고, 더럽고, 메스껍고, 치사하다 에서 따온 말이었다. 지금의 시간을 살아가면서 그때 그때 유행하는 ‘씨원한 욕’ 들이 있었다. 

어제 다시 그 말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지금이 바로 빌어먹을 세상이 아닐까? 해도 해도 너무 한다는 말도 흘러나왔다. 6~7세 아이들 20명을 쏘아 죽이는 미친 세상이 바로 빌어먹을 세상이 아닐까?

하지만 다른 생각에, 이제 이런 미친 짓들이 너무나 익숙해 진 것이 더 놀랍다고나 할까? 아마도 다음에는 30명, 50명, 100명.. 아니면 3000+.. 너무나 ‘독해진’ 최신 무기들이 미국 헌법에 의해 가질 권리를 보장 받은 이 나라는 역시 하느님의 ‘공정’하심을 다시 느끼게 한다. 모든 것이 다 좋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런 것으로 하느님은 미국의 ‘인간적 완전 자유’에 제동을 거신 것일까?

A Memorial site near Sandy Hook Elementary

A Memorial site near Sandy Hook Elementary

이번 Sandy Hook Elementary School (Newtown, Connecticut) 참사는 다른 쪽으로 그 잔인함에 놀라게 된다. 그 코흘리개 어린 아이들을 골라서 죽인 잔인함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일까? 이것으로 극단화 된 정치인들을 자기 자리를 고수하려고 안간힘을 쓸 것이다.

우선 제일 쉬운 것이 무기, 그것도 ‘총’의 규제일 것이지만 이것은 ‘재앙적’인 미국 헌법에 엄연히 보장된 권리이고 보니.. lawyer 로 이루어진 이곳에서 그것이 쉬울까? 무법천지의 미국 서부시대에서 제일 존경을 받던 것이 바로 이 ‘총’이 아니던가? 역시 ‘정당 방위’용으로만 생각할 것이다.

여기서 미국과 미국인들의 고뇌를 알 수 있다. 개인적 자유냐.. 공공 안전이냐.. 역시 절묘하고 고도의 정치력을 요구하는 정책적 균형, 그것을 과연 어떤 사람이 십자가를 지고 이끌 것인가? Obama 는 틀렸다. 그는 그만한 의지와 정치력이 부족한 사람이다. 그가 이끄는 liberal 들은 그저 쉽게 보이는 direct gun control만 주장할 것이고, 반대 편에서 결사적으로 ‘나는 총을 가질 권리가 있다’.. 문제는 총을 잘못 쓰는 ‘썩어가는 가정’ 에 있다고 부르짖을 것이다.

이 병신들아.. 그대들은 모르는가? 해결책은 바로 양쪽에 다 있다는 사실을.. 자유와 방종의 극단으로 치닫는 미국의 family value system, 이것을 무시할 수 있을까? 이런 잔인한 ‘아이’들을 만드는 곳은 바로 그런 가정인 것이다. 그런 반면에 그런 가정에 어찌해서 그런 ‘무시무시한’ 무기들을 가질 권리가 있단 말인가?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을 모르는가? 모르는가.. ‘타협과 절충과 이해’만이 이 미국의 비극을 해결하는 열쇠인 것을..

2012년 12월 12일도 어제로 지나갔다. 12/12/12로 ‘난리’를 치는 사람들.. 참 부럽다. 단순한 부류의 사람들일까, 아니면 참 한가한 사람들일까 생각도 나지만, 12가 세 번씩이나 겹치는 것보다는 각자의 일생에서 드물게, 아니면 다시는 못 볼 숫자이기에 그럴 것 같다. 우선 13/13/13은 아예 불가능 할 것이고, month의 숫자와 맞는 햇수라면.. 2101년이 되어야 01/01/01 라는 숫자 놀음이 가능한 것이다.그러니까 간단히 말하면 2012년에서 2101년까지의 공백이 생기고.. 앞으로 89년을 더 살아야 그것을 보는 것이다. 현재의 ‘피상적인 의학’의 발달을 감안 한다면 아마도 지금의 20대나 30대 정도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나로써는 정말 오랜만에 ‘백일몽’같은 생각과 망상을 해 보았지만, 역시 이것도 인간이 겪는 유한성, 잠깐 왔다가 가는 어찌 보면 슬프기도 한 ‘피조물’의 신세를 실감케 한다. 하지만, 요새 내가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서 느끼는 것은, 모든 것이 생각하기에 달렸고, 인간은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선물’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발전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것이 아닐까?

매년 12월 12일이 되면 연숙과 빠짐없이 한가지 얘기를 나누며 웃는다. 1979년 서울의 12월 12일을 서로 회상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는 그날 밤에 박대통령 시해사건을 빌미로 전두환이 무혈 쿠데타를 하던 날이었다. 그들이 한강 다리를 건너오기 바로 전에 우리 둘은 김포공항에서 연숙의 지도교수 김숙희 교수를 만나 인사를 하고 밖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도 모른 채, 유유히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 다음날 그 쿠데타 소식을 알게 된 것이다.

기억을 하고 싶은 것은 그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날 저녁 김포공항으로 둘이 걸어 들어가는데, 처음으로 연숙의 손을 잡은, 그것을 회상하고 싶은 것이다. 비록 결혼 약속은 얼마 전에 했지만 손을 잡는 것은 ‘큰 사건’이었다. 더욱 재미있었던 사실은 그날 날씨가 매섭게 추웠고 바람이 심하게 불던 날이라서 손목을 잡힌 연숙은 너무나 ‘고생’을 했다고 한 사실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참 해맑고, 아름다운 추억으로 그날 12/12가 남았다.

 

요사이 나의 workstation  pc desktop의 모습

요사이 나의 workstation pc desktop screen, New York Central Park

오늘 아침에 나의 workstation kvm virtual pc의 desktop background art를 보니, 이것은 거의 흑백으로 눈에 덮인 뉴욕 city, Central Park 의 모습이었다. 이것으로 바뀐 것이 한 달도 채 안되지만, 이것을 보면서 계속 머리에 떠오르는 ‘영상’이 있었다. 물론 아름답게 기억되는 광경이고, 그것도 역시 흑백의 영상이었다. 그곳은 바로 연세대의 상징인 백양로.. 그곳이 완전히 눈 속에 쌓이고 있던 그 광경이었다. 나의 기억력을 시험하려 나는 그때가 구체적으로 언제인가 계속 생각해 본다.

1967년 겨울 아니면 1968년 겨울이었다. 그때는 겨울 방학 때였고, 성탄이 훨씬 지난 때였다. 그러니까 1월 쯤이었을 것이다. 한낮에 함박눈이 그야말로 ‘펄~펄’ 내리던 날, 시커먼 공해로 그다지 깨끗하지 않았던 그 당시의 서울거리가 순식간에 깨끗해지는 그런 날, 어찌 나와 같이 한가한 사람들이 집의 안방에 앉아있겠는가? 지독히도 한가했던 대학시절의 겨울방학의 ‘누에고치’ 속에서 나는 눈 덮인 거리로 뛰쳐나갔다.

그때 상도동 버스 종점에 살던 나는 ‘portable’ FM radio를 들고 나갔고 시내 버스 <상도동-모래내 >를 타고 연세대로 갔다. 왜 그곳에 갔는지.. 하기야 그 당시 잠깐 갈 곳이 별로 없었을 것이다. 연대 앞 굴다리 앞에서 내려서 펑펑 쏟아지는 함박눈을 맞으며 백양로를 따라 걸어 들어갔다. 손에는 작지도 않았던 ‘소형’ 금성 FM radio를 들고, 신나게 pop song을 들으면서.. 눈 속에서 기가 막히게 조용하고 아름답게 보이던 연세대 백양로.. 이제 시간적인 단서가 잡힌다. 그것은 1968년 한겨울 방학 중, 1월 쯤이었을 것이다.

나의 서재에 보이는 금성 FM radio, 신탄진 담배와 SPAM can 재털이

나의 서재, 금성 FM radio, 신탄진 담배, SPAM can 재털이 1968

그 당시의 timeline을 확실히 잡아주는 유일한 것이 바로 사진인데, 바로 여기에 보이는 사진, 나의 책상에 놓여있는 새로 산 금성 FM radio, 이것을 찍었던 때가 1968년 3월 경. 1967년 성탄 때에 어머니께서 선물로 사주신 그 당시에 대한민국에서 처음으로 나왔던 FM radio였다.

그 당시에 들을 수 있었던 FM 방송은 딱 한군데였지만 물론 미8군의 FM 방송은 그 훨씬 전부터 있었다. 잡음이 많았던 AM 방송에 비해서 FM방송은 정말 음이 깨끗해서 대부분 classical 쪽의 음악을 방송하곤 했다. 이후에 이 radio는 장기간 등산을 갈 때마다 가지고 가서 사진에도 몇 군데 남아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1969년 여름에 요델 산악회 친구 박창희와 갔던 소백산, 그때의 사진에도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당시의 대한민국의 수준은 그렇게 간단하게 보였던 FM radio를 ‘간신히’ 만들고, 커다란 업적을 이룬 ‘금자탑’으로 소개하던 때였다. 일제를 배척하던 것이 애국이었던 당시에 그나마 ‘국산’으로 그렇게 깨끗한 음악을 들을 수 있었던 때, 그것을 들고 함박눈을 맞으며 연세대 백양로를 따라 걸으며 ‘백일몽’을 꾸던 그 죄 없던 시절이 왜 이다지도 그리울까.. 육신적으로 다시는 못 겪을 일이지만, 기억이라는 선물이 있는 한 그런대로 괜찮지 않을까?

 

금성 FM radio를 듣고 있는 박창희, 1969년 소백산

금성 FM radio를 듣고 있는 박창희, 1969년 소백산

내가 친구들과 마지막으로 본 백양로, 1973년 6월

내가 친구들과 마지막으로 본 백양로, 1973년 6월
이종원, 이경우, 이경증, 윤인송, 이진섭, 김호룡, 신창근

 

Postscript: 나의 머릿속의 기억을 뛰어 넘어서 그 당시의 서울 일간지를 인터넷으로 찾으면 아마도 그 함박눈이 내렸던 날짜까지 확실히 알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도 한가함을 달래주는 좋은 project가 아닐까.

 

 
그 당시에 듣던 golden oldie, Ruby Tuesday by the Rolling Stones, 1967

 

서서히 물러가는 2012년, 올해에 기억에 남는 큰 일은 무엇이 있을까? 아마도 1965년 초에 나를 가르쳤던 ‘아르바이트’ 대학생 김인호 형의 소식을 알게 된 것이 그중에 하나가 아닐까?

다시 연락이 된 경위는 의외로 간단했다. 내가 먼저 1960년 중반 때의 서울 일간지를 훑어 보다가 (물론 인터넷으로) 영화 광고를 보게 되었는데 그 영화의 제목이 <젊음이 밤을 지날 때>, 거기서 ‘박계형’ 이란 이름을 보게 되었다. 불현듯 스치는 것이.. 나를 가르쳤던 아르바이트 대학생의 ‘애인’이 바로 그 당시 베스트셀러 소설의 ‘대학생 저자’ 박계형 이었던 것이 기억이 난 것이었다. 그 때까지 나는 그 ‘박계형’이란 이름이 생각이 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나의 blog에 내가 기억하던 아르바이트 “서울고, 서울상대” 대학생 김인호 형을 회상하게 된 것인데 그것을 정말 정말 ‘우연히’ 인호형이 보게 된 것이다. 정말 모든 것들이 우연의 연속이었다. 이것까지 필연 이라고 우기고 싶지는 않지만, 누가 알랴. 이 세상 삼라만상의 모든 것들은 어딘가 서로 연관이 되어 있다고 하지 않는가?

서로 email을 교환 하면서 형이 보내 준 이미 공개된 ‘글’이 하나 있었다. 아마도 서울 상대 동창회지에 실렸던 글 같았다. 서울 상대에 입학하게 된 동기나 경위도 있었지만 그 이후로 인생의 여정이 정말로 ‘웅장하게’ 압축 된 글이었다.

이미 공개된 글이라서 다시 공개하는 것은 큰 문제가 없겠지만, 혹시 해서 나의 blog에 전재를 해도 좋겠냐고 물어 보았는데.. 답을 얻지 못하고 말았다. 하지만 글이 너무 솔직한 인생의 고백록 같아서 나는 ‘무엄 하게도’ 이렇게 공개하기로 했다.

 

 

+ Deo Gratias

 

인생은 Given Way (?)

 

 

김 인 호 (서울상대 상학과 19회)
한양대 명예교수 (경영학)

입학 50주년이라니 문득 서울상대를 지원하게 된 연유가 새삼 닥아 온다. 고3 내내 이과(理科)반을 듣고서 느닷없이 문과인 상대로 왔기에 말이다. 원래 성품이 온순했던 탓(?)에 여름방학 하던 날 (당시엔 실제로 이날부터 고3생의 대입특강이 본격화되는 첫날이었음) 무기정학을 당해 50일을 열외가 되다보니 대입지원서 작성 시 가장 중시되는 고3 2학기성적이 엉망일 수밖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대 의예과 아니면 서울공대 화공과나 기계과를 써달라는 나의 막무가내와 이 점수로는 서울대 어떤 과에도 못 간다는 담임선생님과의 승강이 끝에 ‘자네 상대가면 어때?’ 하는 급작스런 제의에 선택과목이 완전히 다른데 어떻게 문과인 상대를 갈 수 있느냐고 항변하자 나의선택과목인 화학과 생물을 가지고도 서울상대에 응시가 가능하다며 지원서를 써주셨던 선생님. 전형조건이 그 전해의 것과 같을 것으로 알고 있던 나는 상대지원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했으므로 상대는 애초부터 전혀 고려조차 않고 있었던 터였다. 기실 그 전해뿐만 아니라 그 다음해부터도 또다시 안 되게끔 다시 바뀐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해엔 어쩐 일로 가능했었는지 지금 생각해봐도 분명 어떤 손길이 아니었나, 쉽다.

아무튼 일순간에 이과에서 문과로 나의 행로가 180도 바뀌었고, 이후 상대생활은 우리 모두가 그러했듯이 당시의 혼란한 사회분위기 덕에 ‘노나 공부하나 마찬가지’인 4년을 얼렁뚱땅 마치게 되었다. 나는 곧장 국방의무를 보다 충실하게(?) 다하고자 공군장교 코스를 택했다. 소위로 임관된 지 4개월여쯤 되던 어느 날 국군의 날 행사일환으로 당시 서울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삼군사관학교 종합체육대회응원단으로 차출되어 응원을 마치고 공군장교버스를 타고 오산으로 귀대하던 중 수원 세류동 건널목에서 내가 타고 있던 공군장교버스가 서울발 하행열차에 박치기 당해 즉석에서 3명의 장교가 죽고 약 5-60여명의 중상자가 발생한 대형 사고가 일어났다. 사고 직후 난 얼굴과 몸이 묵사발이었는데도 피가 안 나는 바람에 경상자축에도 끼이지 않을 만큼 운이 좋았던 몇몇 장교 중 하나였다. 몇 십 미터 열차에 끌려가며 구겨지는 버스 안에서 순간 ‘야, 여기서 이렇게 죽는구나,’ 하는 생각과 더불어 어릴 적서부터 그때까지 내가 살아 온 긴대목이 일순간에 쫙 주마등처럼 지나가던 묘한 체험을 잊을 수가 없으며 이는 나로 하여금 그 후 지금까지도 우리 삶과 또 우리의 기억이란 게 과연 무엇인가를 되새기게끔 해 준다.

아무튼 그때 그 사고는 당시 무신론자를 자처하던 나에게 삶과 죽음과 인생의 목적에 대하여 많은 사유의 계기를 던져주었다. 그때 그 충돌사고는 과연 필연이었을까, 우연이었을까? 물론 사고가 난 다음에 생각이 미친 것이긴 하지만 우리가 탄 장교버스와 그 기차는 노량진역을 지날 때에도 나란히 같이 가고 있었고 또 안양으로 진입하는 구름다리 위에서도 같이 마주쳤던 것이 아무래도 우연 같아 보이질 않았었다. 우리 눈에 우연처럼 보일지라도 만사가 필연 아닐까, 그리고 살아있다는 것은 무엇이며 또 죽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등등. 어느 문학도의 여유로운 넋두리가 아니라 당시 나에겐 대단히 심각한 현안이었다. 요컨대 당시의 그 사고는 나에게 삶과 죽음과 인생의 목적에 대해 아주 심각하게 생각하게 하는 큰 계기가 되었다.

사고 후 몇 달이 지나 사고후유증이 거의 가시어 갈 무렵 6.25 피난시절 대전에서 같이 초등학교 다녔던 한 여학생과의 상봉에서 그녀가 제일 먼저 던진 ‘하느님의 존재를 인정하느냐?’는 물음은 이런 나의 사유를 더 깊이 뿌리내리게 했다.삶과 죽음의 견지에서 볼 때 내생명이 내의지로 또는 내 부모의 뜻에 따라서 생성된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내가 원하는 때 또 내 맘대로 죽을 수도 있는 존재가 아닌 한 적어도 생명을 주관하는 존재가 계시다는 사실을 내가 부정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하는 추론을 당시 난 쉽게 받아들이고 있던 터이었으므로.

하느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합의가 이루어진 두 젊은 남녀는 그래서 자연스레 아무 장애 없이 그이후의 만남으로 이어지게 되었고 난 공군제대를 2, 3개월을 앞둔 어느 날 내 근무지였던 공군본부로 찾아온 어느 선배의 스카웃 아닌 스카웃으로 KIST에서 첫 작장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과를 듣고도 상대를 다녔던 내가 첫 직장을 이과의 본산인 KIST에서 시작하게 된 것도 과연 우연이었을까, 난 지금도 가끔 생각해 보곤 한다.

KIST에 입소한 그해 늦가을 난 아무것도 모르면서 단지 결혼하기 위해 가톨릭집안인 처갓집의 요구대로 성당에서 관면혼배라는 것을 했고 또 일반예식장에서도 결혼식을 올리는 등 두 번의 행사를 거쳐 드디어 원하던 가정을 꾸리게 되었다. 뒤이어 제왕절개로 힘들게 얻은 첫아들은 나에게 또 한번 생명의 신비와 생명의 주관자에 대한 인식을 더욱 새롭게 해 주었다. 양수과다증이라는 특이한 상황에서 태어난 첫아들은 식도가 위가 아닌 기관지와 연결되어 있는 태중에서부터 기형이었던 것이다. 기형이란 사실을 처음 알려주는 의사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까무라쳤고 잠시 후 깨어났는데 깨어나는 바로 그 순간 느닷없이 ‘내 죄 때문에 저애가 내벌을 받고 저렇게 태어났구나, 라는 죄의식이 내 인생 안에서 최초로 강력하게 밀려왔다, 사실 난 그 전까지만 해도 단 한 번도 죄라는 것을 진지하게 생각해 본적이 없는 천방지축의 생활을 해왔다고 해야 할 것이다.

수술시키겠다며 울부짖는 나를 진정시킨 병원 측의 말은 수술성공률은 제로이며 애를 수술시킨다는 것은 자기네에게 애를 실험용 재료로 내주는 일일뿐 아니라 수술비용도 퍽 많이 들므로 신중하게 판단하라는 충고였다. 우리는 가족회의를 열고 의논한 끝에 결국 병원의 충고를 따르기로 했다. 며칠 후 졸지에 배를 가르고 첫아들을 낳았다는 기쁨에 차있던 산모의 충격을 달래며 빠른 퇴원수속을 밟던 중 이미 세상을 떴을 것으로 생각했던 아이가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을 접한 그 순간 어디선가 들려오는 ’네가 뭔데 감히 한 생명에 대해서 결정을 내리느냐? 는 음성에 난 성공가능성이 제로일지라도 수술시키기로 결정했다.

수술을 서두르는 나에게 그날이 토요일이었는데 아무리 서둘러도 월요일이라야 수술이 가능하다며 집도의사가 던진 또 한마디 말, ’수술은 내가 하지만 애가 살고 안 살고는 나의 영역이 아닙니다,‘ 란 당시엔 퍽 이해하기 어려웠던 말이 아직도 생생하다. 수술은 잘되었다고 했다. 그간 동일한 수술에서 제일 오래 산 아이의 기록이 2주일이었는데 2주일이 지나자 국내기록을 깼다는 것이다. 약 40여일이 지나자 이 수술은 국내 최초의 성공이라며 퇴원시켜도 좋다는 집도의사의 말에 따라 집으로 데려 온 아이는 아주 강건하진 않았지만 보통아이처럼 잘 먹고 잘 자는 아이로 정상아와 별 차이가 없었다. 다만 mental 면에서 또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하는 불안감이 내 맘을 무겁게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꼭 그래서만은 아니지만 불안감을 달랠 겸 또 생명의 주관자(사실 난 그때 소위 때의 교통사고와 첫애의 탄생과정을 통해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것을 존재케 하는 주관자가 존재한다는 명제를 스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도 인정할 겸 해서 난 집근처의 성당신부를 찾아갔다. 왜 왔느냐는 신부님의 물음에 ’생명을 주관하는 존재‘를 인정하고 싶어왔다는 나의 답변에 앉기를 권한 후 양주 한잔을 건네며 느닷없이 엄숙한 어조로 ’예수님은 역사적 인물입니까?‘ 라고 묻는 것이었다. 느닷없는 질문에 머뭇거리는 나에게 재차 묻자 ’약 2천 년 전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태어났던 한 청년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자 ‘그러면 그분이 우리와 다른 게 뭐라고 생각하시오?’ 하며 연이은 질문에 ‘그분은 우리와 똑같이 인성(humanity)을 지닌 인간인 동시에 또한 신으로서 신성(divinity)도 지닌 분으로 듣고 있습니다.’ 란 나의 답에 ‘내일 모레 오시오 내가 영세를 주겠소. 올 때 본명(세례명)이라는 걸 하나 지어갖고 오시오.’ 하며 가도 좋다고 했다.

물론 당시엔 몰랐지만 그 분은 벨기에에서 신학을 공부한 좀 트인(?) 분이었던 것을 후에 알게 되었다. 내가 그 옛날 서울고를 다닐 때 광화문 코너에서 언젠가 보았던 국제극장의 영화간판에서 ‘스테파노의 세레나데, 란 뮤지컬 영화제목이 퍼뜩 떠 오르길레 본명을 스테파노로 정하고 영세를 받게 되었다. 이는 최소 6개월 이상 교리공부를 거치지 않으면 영세를 주지 않던 당시의 관례로 본다면 난 분명히 엉터리로 영세를 받은 것이고 또 그 신부님은 엉터리로 영세를 주신 것임에 틀림없는 일이었다.

결국 나는 공군소위 시절 당한 교통사고와 제대 후 결혼과 첫애의 태어남과 포기 그리고 그 다음 수술성공으로 인한 재탄생의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무신론자임을 자처하던 젊은 날의 나와는 달리 생명의 원천이 어디이며 생명을 주관하시는 존재가 누구이신가의 관점에서 만물을 만드신 하느님의 존재를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분의 뜻을 우리가 자유의지로 어기는 것이 죄며 죄를 지으면 반드시 죄 지은 만큼 벌을 받는 정의의 질서가 온 우주 안에 꽉 차있다는 사실도 깨닫게 된 것이다. 따라서 정의의 견지에서 우리가 지은 죄가 사(赦)하여지려면 반드시 죄 없는 존재가 내 죄를 대신하여 벌을 받아야만 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명제도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죄가 없으신 하느님께서 바로 육화(incarnation)되어 오시어 우리 죄의 대속(代贖)제물로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이 바로 하느님이시며 그래서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세상의 어떤 죄도 결코 해결될 수 없다는 명쾌한 논리도 쉽게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하느님을 알고 그분을 두려워하는 것이 모든 지혜, 지식의 원천임을 알게 된 나에게 그분은 커다란 은총으로 내가 단 한 번도 생각조차 해 본적이 없었던 교직을 천직으로 주셨다. 그리고 1960년대 중반 당시 보이는 세계의 중심이었던 미국이 수정헌법을 통해 도덕 다원주의를 그리고 영적세계의 중심인 로마가톨릭교회가 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종교다원주의를 수용하자 더욱 기승을 부리며 판을 치는 대 혼란의 격랑 속에서 미국사회와 로마가톨릭교회야말로 다원주의와 상대주의의 최대 피해자임을 교직기간동안 확인할 수 있는 눈도 주셨다. 그래서 난 내 전공영역인 경영전략과 기업윤리에서 ‘뿌린 대로 거두는 정의의 질서가 온 우주 안에 엄존’함을 근거로 상대적 가치판단기준이 아닌 절대적 기준에 입각한 ‘Dynamic Management‘라는 새로운 경영패러다임을 정립할 수 있었고 이를 amazon.com과 해외학회에서의 발표, 세미나, 특강 등을 통해 국내?외 학계와 산업계에 보급 확산시킬 수 있는 토양도 갖추게끔 해주셨다.

상대입학 후 어느새 훌쩍 지나버린 50년 세월은, 인간은 자기의지로 뜻을 세우지만 그 뜻이 이루어지고 않고는 온전히 하느님 의지에 따라 정해진다는 사실을 터득케 한 귀중한 시간이었다. 특히 첫애가 잘못 태어났을 때 내 죄 탓임을 인정하고 통회하던 마음을 보시고 아들을 살려주셨음같이 낮 추인 마음을 그분은 아니 낮추어보신다는 성경의 경구도 참임을 굳게 받아들이게끔 한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래서 난 오늘도 누구든 자기의 죄를 인정하고 낮출 때라야 하느님께서 천상은총을 듬뿍 부어주신다는 사실을 굳게 믿으며, 매 순간순간 죄를 성찰하며 만물을 만드시고 보전하시며 다스리고 계시는 하느님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찬미와 감사를 드리며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

 

wikipedia-logo

Hope from free knowledge

오늘 우연히 Wikipedia website엘 들렸다가.. 왜 그곳에 갔던가.. 기억이 잘 안 나지만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이곳 website의 top area에 무언가 묵직한 것이 보였다. 이곳은 ‘절대로’ 광고 같은 것이 없는 곳인데 하며 자세히 보니 financial donation (giving)을 요청하는 글이었다. 최근에는 Massachusetts 주의 senator (상원의원) 선거에서 Elizabeth Warren이라는 용감하고 시원스럽고 귀엽게(?) 생긴 아줌마 가 출마를 하면서 역시 donation을 그녀의 공식 website에서 하는 것을 보았다.

헌금 액수를 보니 그야말로 ‘아무라도’ 할 수 있는 정도로 $5~$10 가 대부분이었다. 그 정도로 모금을 해 보니 큰 결과를 기대 못하는 듯 해도 그것이 아닌 것이 참가하는 사람의 숫자가 엄청난 것으로, 역시 online의 위력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되었다. 나는 물론 Massachusetts 의 유권자가 아니라 해당은 안 되었지만, 이렇게 ‘코 흘리개’ 정도의 돈으로 그녀는 당당히 당선이 되었다. 상당한 조직(공화당, who else?)의 돈으로 버티던 상대방도 이런 ‘개미 군단’의 위력에 놀랐을 것이다.

다시 Wikipedia 로 돌아와서, 나는 최근에 이 ‘free’ 백과사전을 정말로 애용하는 한 사람이 되었다. 그 옛날, 책으로 된 백과사전을 한번도 살 수 없었던 때를 생각하며, 나는 이곳을 자주도 찾는다. 그야 말로 ‘조그만 아무 것’이라도 궁금증이 생기면 이곳에서 해결과 해갈을 한다. 궁금증이 많은 사람들, 특히 제3세계의 ‘가난한 학생’들을 생각하면 이것은 거의 꿈과도 같은 service인 것이다. 이용자들의 조그만 헌금으로 운영이 되는 것에 비해서 이곳은 그렇게 자주 fund-raising을 하지 않는다.

그곳에 비해서 public radio/TV같은 곳은 너무도 자주해서 짜증이 날 정도다. 그들의 ‘무료’ service는 감사하지만 지나치게 liberal한 그들의 논조도 짜증이 나는데 말이다. 모든 것들이 ‘극단’으로 치닫는 풍토, 지독한 예로 Apple Co.와 같이 ‘나만 잘 먹고 잘 살겠다는’ 철면피 철학의 집단이 있는가 하면 Open Source, Wikipedia 같이 모두 잘 나누며 살자는 ‘예수님’ 철학의 집단이 공존하는 이때..결과적으로 이곳의 헌금부탁은 절대로 거절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해서 나는 더 Wikipedia 와 가까워 지게 되었다. 나의 재력이 100불 정도 더 많았다면.. 하는 꿈이 너무나 간절해지던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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