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ster 2013, Proof of Heaven

¶  2013년 3월 31일 일요일, 예수님의 부활 대축일.. 첫 부활로부터 2000년 이상 계속 되풀이 되고 있는 예수를 믿는 기독교의 최고의 축일이다. 재의 수요일부터 40일간 계속된 사순절도 오늘로서 끝이 난다. 지난 목요일부터 시작된 ‘피곤하기도 한’ 각종 의미를 갖는 ‘무거운’ 날들, 특히 토요일 밤의 Easter Vigil 은 영세,견진의식까지 있어서 부활 일요일 아침에는 피곤하기까지 하다. 불과 7~8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 식구들이 나를 ‘끌고’ 부활절 미사에 가곤 했는데 그것이 이제는 완전히 반대가 되어서 우리부부가 두 ‘아이’들을 ‘끌고’ 가게 되었다. 그러니까 그 전에는 내가 C&E Christian (크리스마스와 부활 때만 성당엘 가는 신자) 였는데 지금은 우리 두 아이들이 그렇게 되었다.

그래도 오늘 아침에 제 시간에 같이 집에 온 ‘아이’들.. 기꺼이 미사에 참석을 하였다. 현재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그 정도인 것이 조금은 안타깝지만.. 언젠가는 ‘집’으로 돌아올 것이라 생각하고 싶다. 모든 식당들이 문을 닫기에, 언젠가부터 이날도 다른 holiday같이 ‘잘 먹기로’ 하고 fillet minion steak 와 wine으로 이른 점심을 하고 아이들은 집을 떠났다. 엄마의 제의로 매달 넷째 일요일에 집에서 ‘이렇게’ 먹자고 했는데, 의외로 ‘아이’들이 기꺼이 동의를 해서 조금 마음이 가벼워지기도 했다. 아무래도 이제는 ‘아이’들이 아닌가.. 그렇게 커버렸나.. 생각하며 세월의 횡포를 생각하기도 했다.

 

뇌전문 외과의가 본 천국
뇌전문 외과의가 본 천국

¶  얼마 전 ‘갑자기’ Costco에서 갔을 때, 우연히 보게 된 책 proof of heaven, 진부하기도 한 제목이었지만 조금 독특하게 기분이 좋은 표지에 끌려서 읽고, 결국은 사게 되었다. 읽기에 부담이 없는 200 page가 안 되는 것도 그렇고, 저자의 경력이 더욱 독특했다. Neurosurgeon, 그러니까 신경외과의 정도가 될까.. 한마디로 뇌수술 전문의인 것이다. 그가 정말로 희귀한 ‘감염’으로 일주일간 사경, coma 끝이 역시 ‘기적적’으로 ‘완전 회생’, 그때 그가 ‘보았던 것’을 적은 것이다.

작년에 나온 책으로 New York Times Best Seller #1, 그러고 보니까 언젠가 뉴스에서 본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이런 ‘현상’을 NDE, Near Death Experience라고 부르는데, 사실 새로운 것이 아니다. 수 없이 이런 사례가 보고가 되고 있고, 일부에서는 본격적으로 ‘과학적’으로 연구까지 한다고 한다. 이 책이 특출한 것은 그것을 겪은 사람 자체가 뇌외과 전문의라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그 분야의 과학자중의 과학자인 것이다. 그가 비과학적인 것을 겪었으니, 그의 고뇌를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과학과, 비과학적 경험을 그는 어떻게 ‘절충, 타협’을 했을까.. 하는 것이 이 책의 주요 내용이다.

지난 금요일 새벽에 예수성체를 지키며 하던 성당 새벽 성체조배를 앞뒤로 나는 이 책을 읽게 되었는데.. 이때의 나의 느낌과 경험은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전율과 감동의 연속이었다. 한마디로.. 절대적 하느님의 존재는 이제는 거역할 수 없는 ‘진리’임을 겸허하게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이것은 이번 부활에 나에게 주어준 은총임을 깨닫고 소스라치게 놀라고 있다. 이것이 65년 만에 알게 된 진리였던가?

Good Friday, Tipping Point of..

Seven Last Words..
Seven Last Words..

¶  Good Friday..   of the Passion of the Lord. 주님 수난의 성금요일.. 바로 오늘이다. 부활 성삼일 중간에 있는 ‘조용한’ 날이기도 하다. 한글로는 성금요일인데 영어로는 Holy Friday라기 보다는 항상 Good Friday라고 부른다. 이 성삼일에 있는 천주교 전례는 모두 독특한 이름이 있다. 목요일 것은, The Mass of the Lord’s Supper, 금요일 것은 The Passion of the Lord, 토요일은 Easter Vigil.. 우리의 본당인 영어권과 한국어권 두 곳에 있어서 실제적으로 둘 다 알고 있어야 하는 부담이 항상 있지만 나는 그것이 부담이라기 보다는 ‘더 많이 알게 되는 기회’라고 생각한다.

오늘이 Good Friday 인데 왜 하필 ‘Good‘ Friday라고 부르는 것일까? 오랜 전부터 나는 그것이 의아스러웠다. 하지만 그것은 그렇게 의아스럽지 않다는 것을 쉽게 깨달을 수 있었다. 비록 예수님은 처참하게 죽어갔지만 그것의 결과인 부활과 그것으로 2000년 이상 계속되고 있는 천주교의 ‘인류에 미친 영향’을 생각하면 그것은 한마디로 Good인 것이 아닐까?

얼마 전에 우리의 젊은 신입 레지오 단원 엘리사벳 자매님이 우리 Holy Family 본당에서 있었던 일일 피정에 참가하면서 그 때 교재로 쓴 Dennis Billy 저, subtitle “Meditation on the Seven Last Words of Jesus”란 가벼운 책자 하나를 나에게 빌려주었다. 이 책은 글자 그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처참하게 ‘천천히’ 죽어가면서 하신 일곱 마디 ‘말’들.. 을 가지고 reflection questions 을 제시하며 서로의 의견 나눔을 도와준다. 사순 절에 일일 피정의 교재로 쓰기에 정말 안성맞춤인 책이라고 할까. 그 일곱 마디의 말은:

 

  1. “Father, forgive them, they know now what they do.” (LUKE 23:34)
  2. “Amen, I say to you, today you will be with me in paradise.” (LUKE 23:43)
  3. “Woman, behold, your son… Behold, your mother.” (JOHN 19:26-27)
  4. “My God, my God, why have you forsaken me?” (MATTHEW 27:46)
  5. “I thirst.” (JOHN 19:28)
  6. “It is finished.” (JOHN 19:30)
  7. “Father, into your hands I commend my spirit.” (LUKE 23:46)

 

이 말들은 예수님의 ‘생전’에 하신 마지막 ‘역사적’인 말들이다. 그 이후, 그러니까 부활하신 후에 하신 말씀들도 있지만 그것은 아주 차원이 다르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인간의 육신에서 해방이 되신 이후의 말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와 같은 살과 피를 가진 상태에서 하신 이 마지막 말들은 더욱 가까이 다가오는 것이 아닐까?

오늘 새벽 아니 한밤중이었던 새벽 2시부터 3시까지 나는 연숙과 같이 난생 처음으로 아틀란타 한국 순교자성당에서 성금요일 성체조배(Eucharistic Adoration) 를 ‘감행’ 하였다. 연숙은 오래 전에 친지교우들과 같이 한 번 해 보았던 것을 나도 기억을 하지만 나는 처음이다.

이것은 천주교만의 전통일까.. 성목요일 최후의 만찬 미사가 끝나면 성당내의 ‘모든 전례 도구’들은 ‘철거’가 되고 성체가 모셔진 ‘감실(tabernacle)’ 도 비게 된다. 그때 성체가 성체 조배실로 옮겨지게 되고 그때부터 ‘쉬지 않고 계속’ 성체조배가 행해지는데, 문제는 이렇게 자정 이후 한 밤중에는 그것이 중지될 수도 있기에, 미리 ‘예약’을 받아두고 조금도 그 성체가 ‘방치’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다.

지난 달 꾸리아 월례회의에서 새벽 시간의 예약을 받을 때 나는 거의 ‘무심코’ 이름을 써 넣었다. 주로 레지오 단원들이 참가하기에 나는 큰 부담 없이 한 것인데 밤 11시면 ‘세상없어도’ 잠자리에 드는 나의 육신에는 사실 큰 부담이었다. 하지만 결국은 ‘무심코’ 감행을 하였고 나에게 미치는 영향은 두고두고 보아야 할 테지만 나는 ‘좋을 것이라고’ 믿는다. 이것도 사실 나의 근래의 좌우명 ‘It’s Now or Never‘ 의 도움을 받은 것이다.

 

¶  Tipping Point..   한참 유행했고 이제는 ‘흔한’ 용어가 된 말이다. 무언가 ‘거대한 것, 힘든 것’이 오랜 노력과 시간 끝에 ‘움직이기’ 시작하며 뒤돌아 가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현상을 말한다고 할까.. 나는 65년 일생을 통해서 이런 것을 나의 몸으로 경험한 것이 없는 것 같다.

좋건 싫던 간에 나와 직접 상관이 없는 것들이 ‘넘어가는’ 것은 물론 많이 보았다. 정치적으로는 요지부동의 공산당 제국들(김일성 개xx는 제외)이 넘어가는 것도 보았고, 사회학 적으로는 ‘말단,주변 생물’이었던 ‘동성’들이 이곳 저곳에서 어깨를 펴고 기어 나오는 것도 보았고, 자연과학에서는 global warming같이 세계적 기후가 변화 되는 것도 현재 목격하고 있다. 이런 global한 것이 아닌 나 자신의 personal tipping point는 무엇일까..

요새 목격하고 있는 나 자신의 세계,우주관의 지각변동일 것이다. 이것이 tipping point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이 변동이 참 오랜 세월이 걸렸기 때문이다. 세계, 우주관이라고 하면 조금은 막연한 느낌도 들지만, 조금 더 구체적인 표현은 ‘종교, 신앙관’이 맞을 지도 모른다. 반세기 넘게 희미하게 흩어져 있던 조그만 ‘점’들이 조금씩 연결되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서로 연관들이 없었던 것들이 하나 둘씩 연결되며 조금 더 큰 점으로.. 그 커진 점들이 다시 다른 것들과 연결이 되며 더욱 커지고.. 결국은 그 점들의 ‘질량, mass’가 tipping point에 다다르고 있다고 할까. 이제는 확실히 느끼며 믿게 되었다. 이 불가사의한 우주와 우리들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이것이 이번 사순절을 지내며 내가 받고 있는 ‘은총’이다.

 

꽃샘 추위, 아치에스, 판공성사

¶  꽃샘 추위   3월 25일, 어제는 Palm Sunday였고 드디어 2013년 성주간이 시작되었다. 이번 주에 ‘그 것’이 모조리 있는 것이다. Easter or Paschal Triduum이라고 불리는 성삼일(Holy Thursday, Good Friday, Easter Vigil)에 이어 부활절 일요일.. 조금 생각만해도 숨이 찬 기분이랄까.. 하지만 이것이 바로 우리들이 모두 일년 내내 기다리던 그 때가 아닐까?

십자가 수난과 부활이 없다면 사실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그런 성주간에 다시 ‘겨울’이 찾아왔다. 아니, 사실 지나간 2월 달이 1월 보다 더 추웠고, 지금의 3월 달이 2월 달보다 더 춥다. 오늘은 낮 기온이 화씨 40도(섭씨 5도?)도 안 되는 듯하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세상일까? 옛날 옛적 서울에서 살 때 이것을 ‘꽃샘’ 추위라고 했지만 지금 것은 조금 다르다고 할까.

제일 큰 ‘희생물’은 봄을 기다리던 꽃나무들이다. 찬란하게 초봄을 알리던 수많은 꽃, 나무, 잔디들.. 모조리 거의 ‘잠잠’하다. 아니 불쌍할 정도다. 작년을 생각해보니 너무나 대조적, 정말 찬란한 작년 3월 말을 기억하니까.. 방방에 놓여있는 space heater를 ‘거의’ 치우려고 했는데, 그랬다면 정말 큰 실수를 한 것이다. ‘동복’들도 고스란히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아마도 아마도 부활절, 4월 초가 되면 정말 봄이 오지 않을까?

 

acies-2013¶  아치에스(Acies)   지난 일요일 3월 17일에는 일년에 한번씩 있는 레지오의 주요 행사중의 하나인 ‘아치에스’ 행사가 열렸다. 아치에스, Acies라는 말은 라틴어로 로마시대 군대의 전투대형을 뜻한다. 레지오 마리애 조직의 원형이 로마 군대의 것을 따랐기에 이것도 그것의 일부인 것이다. 비록 군대식으로 조직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조직의 운영에 대한 것이다. 조직의 힘을 모으려면 역시 군대식이 최고일 것이다.

그래서 일년에 한번 거의 군대식으로 모두 모여서 ‘충성 서약’을 하는 것인데, 올해로 나는 세 번째 이것을 맞이한다. 지난 2년 동안 참가하고 보면서 느낌이 참 신선하고, 무엇엔가 끌려들어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쉽게 말해서 우리의 총 사령관이신 성모님께 충성을 서약하는 것인데, 평소에 잘 못 보던 동료 단원들을 이곳에서 모두 보게 되는 것도 그렇고 함께 묵주기도를 하는 것은 아주 감동적이기도 했다.

 

¶  부활절 판공성사   판공성사, 고백성사, 고해성사.. 이름도 다양하다. 이것은 가톨릭 교회에서 말하는 7성사 중의 하나인 ‘성사’다. 그 중에서도 이것은 가톨릭만이 ‘자랑’하는 아주 독특한 것이고, 제일 인기가 없는 성사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어찌 안 그렇겠는가.. 자기의 ‘치부, 부끄러운 곳’을 ‘남에게’ 드러내야 하는 것이니. 영화에서 보는 듯이 그렇게 dramatic한 것도 없고, 대부분 일상생활에서 야기되는 ‘꽤 죄죄’한 이야기들을 어떻게 고백을 할 것인가?

이 성사를 교회에서는 최소한 한 달에 두 번을 하라고(보라고) 하지만 과연 그렇게 따르는 모범신자들이 많이 있을까? 하기야, 주일미사를 빠질 때마다 이 성사를 보는 교우를 보기는 보았지만, 그것은 예외에 속할 듯 하다. 내가 본 많은 사람 중에는 ‘전혀’ 하지 않는 사람부터 시작해서, 일년에 중요한 때 (부활, 성탄 같은) ‘겨우’ 보는 사람들.. 그렇게 이것은 사실 부담스러운 것일까.

하지만 선택의 여지는 없는 듯하다. 괴롭게 느껴지는 ‘죄’는 고백을 하면 시원하게 느껴질 것이고, 분명히 사제는 주님을 대신해서 ‘용서’를 하신다. 그러니까 고백성사를 하는 것은 정말 괴롭고 어려운 것이지만 이것을 마쳤을 때의 ‘환희’는 어디에도 비교하지 못한다.

이것을 조금이라도 기억을 하며 다시 성사를 준비하고 한다. 이것이 이 성사의 매력이라고 할까? 나는 최근에 신앙의 르네상스를 맞이하며 일년이 최소한 2~3번은 간신히 유지하고 있고, 사실 나는 이것도 자랑스럽다. 특히 어둡기만 한 고백소에서 하는 것을 피하고 ‘대담하게’ 신부님의 사무실에서 면담하는 식으로 한 것이 나에게는 큰 도움이 되기도 했다.

올해 부활절 판공성사는 지난 목요일에 ‘가족행사’로 보았다. 연숙의 대녀님인 권 모니카 자매를 대동하고, 게다가 올해는 오랜 지인 설재규씨가 합류를 해서 4명이 같이 보게 된 것이다. 지난 일년간 성사를 못 보았다던 설재규씨가 참가한 것은 나에게 신선한 즐거움으로 느껴졌고,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 같이 하게 될 수 있을 것을 꿈꾸기도 했다.

‘ 후리타, 집을 사다’, 떠나는 새로니

Cornerstone Village Condo

돌아온 새로니.. 제목이 그럴 듯하다. 영화제목 ‘돌아온 장고‘ 처럼.. 우리 집의 큰딸, 새로니가 거의 6년 만에 ‘일단’ 정든 집으로 돌아와 우리와 같이 살게 되었다. 물론 그 전에 잠깐 머문 적은 많았지만 자기의 살림살이 짐을 ‘완전히’ 우리 집으로 옮기고 들어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근래 지독한 경제불황의 여파로 Y 세대는 물론이고 심지어 비교적 젊은 축 X 세대들까지 자기가 자라던 집, 그러니까 부모의 집으로 ‘퇴각하는 것’이 요새 많이 보이는 현상중의 하나라는 보도도 심심치 않은 이때, 큰딸 새로니가 집으로 들어온 것은 그런 보도와 전혀 무관하지 않은 듯 느껴진다.

젊은 ‘애’들이 ‘지독한 불경기’를 못 견디고 집으로 ‘퇴각’하는 것과 새로니는 조금 사정이 다르지만 ‘무섭게 예리한 경제감각을 가진 요새 애들, 특히 여자애들’ 중의 하나인 새로니에게도 경제적인 이유가 전혀 없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새로니에게는 그다지 신나는 결정은 아니었을 것이다. 새로 career의 방향이 바뀐 후 처음으로 맞는 불경기 하의 job market에 대한 불안 감도 많이 작용했을 것이다. 일단 우리의 혈육이 자기가 자란 집으로 돌아온 것은 반가운 일이다. 조금은 경제적으로도 새로니에게 도움이 될 것이고, 오랜만에 다시 이사를 가야 하는 압박감 없이 자유스럽게 ‘옛날 같은’ 기분을 느낄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이것은 조금 비약적인 희망일 것이지만.

 

위의 메모는 작년, 그러니까 2012년 4월경에 남겨둔 것이고 ‘미완성’의 글로 남았었다. 그것을 오늘 다시 본다. 집을 떠난 지 6년 만에 같이 산 것이 이제 거의 1년이 되어간다. 6년 떨어져 산 돌아온 ‘아이’를 옆에서 보며 참 많은 것을 느꼈다. 우리가 난 ‘아이’가 돌아온 것은 물론 포근하고 부드러운 느낌을 주긴 하지만, 당혹한 순간들도 한 두 번이 아니었고, 괴로운 시간도 적지 않았다. 그와 더불어 과연 ‘혈육, 가족’이란 것이 어떤 것인가 새삼스레, 아주 다른 각도로 생각해 보기도 했다. 가장 놀란 것이 있다면 그 동안 내가 심각하게 가족관계에 대한 생각을 별로 하지 않았다는 것, 아니 할 필요가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행복어 사전>으로 번역이 된 일본에서 나온 수필집을 보면 역시 ‘머리가 큰’ 자식과 한 지붕 밑에서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가를 보여준다.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제일 좋은 방법은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며 ‘다른 지붕’ 아래서 사는 것이라고 한다. 그것을 읽을 당시에는 정말 실감을 못했지만 요새는 그 책 저자의 의도와 생각에 150% 동감을 하게 되었다. 그만큼 어려운 것이다. 왜 그럴까? 지난 일년 새로니와 같이 살면서 나는 그런 질문만 계속하며 살았다. 왜 그렇게 어려울까? 왜 어렸을 때와 같이 살 수는 없는 것일까?

답은 간단할 지도 모른다. 어느 누구의 특별한 문제가 아니고 모두 그 동안 ‘변한’ 것이다. 부모인 우리도 ‘나이에 따른’ 고집과 경륜이 쌓였고, 성장한 아이도 혼자 살아도 되는 독립된 어엿한 사회인으로 그 애 만의 독특한 경험과 주관이 생긴 것이다. 예전 같으면 특별한 ‘배려 없이’ 의견이 모아지던 것이 이제는 ‘협상’이 필요한 때도 많이 생기는 것이다. 그것을 옛날의 ‘즐거운’ 때만 생각하며 ‘쉽게’ 생각하는 그 자체에 문제가 있었지 않았을까? 집을 떠난 6년 동안 그 애만이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배운 습관들.. 역시 옛날의 것에 비교하면 무리가 있다. 나는 그저 그런 모든 ‘조그만 문제’들은 가족의 사랑으로 아무 문제가 안 될 것으로 ‘확신’을 하며 살았다. 하지만 나의 생각은 역시 모자랐다.

하느님은 공평하신가.. 괴로운 때와 즐거운 때의 비율이 반반 정도라고 하면 조금 과장 된 것일까..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즐거운 순간들이 기가 막히게도 괴로운 순간들을 ‘중화’시키며 살아가게 해 준다. 하지만 역시 결론은 각각 독립적으로 살려면 물리적 환경을 바꾸는 수밖에 없다. 불경기 속에서 job을 용케 찾았고, 안정된 재정계획을 세울 수 있게 되자마자 새로니는 ‘결사적‘으로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게 되었다.

우리의 희망은 결혼을 하면 더 안정될 것 같지만, 세상은 참으로 많이 변했다. 요새 젊은 여성들의 생각은 우리의 희망과는 전혀 무관하게 흐르고 있었다. 인생에서 결혼의 우선순위는 과장된 표현으로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낮아지고 있다. 하물며 자식을 낳은 다는 것은 그 보다 더 낮은 곳에 있었다. 결혼을 안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다지 급할 것도 없고 중요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다. 남의 간섭을 덜 받고, 편하게 살려는 일종의 ‘쾌락주의‘라고나 할까. 간혹 행운적으로 예외는 있지만 조금 배웠다는 사람들일 수록 더 그런 경향이 심하다. 그런 것을 알면서 push한 다는 것은 더욱 큰 역효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우리가 왜 모르겠는가?

결국, 옛날 우리의 즐거움이었던 큰 딸 새로니는 우리의 품을 ‘완전히’ 떠나기로 하고, 불경기에서 조금씩 벗어나는 부동산 경기를 의식하며 혼자 몇 년은 살 수 있는 1 bed-room condo를 사게 되었다. 처음에는 거의 혼자서 직장시간을 쪼개어서 집을 찾고 보고 하더니 너무나 피곤한지 realtor를 구하게 되었다. 미국인 realtor만 상대하더니 나중에는 아무나 상관이 없는 듯해서 우리 한인성당에서 알게 된 Emily Kim 자매님을 연숙이 소개해 주었고, 조금 씩 오르기 시작하는 집값을 의식하며 거의 3개월 동안 이곳 저곳을 찾아 다니다가 결국 Atlanta mid-town에 있는 condo를 찾게 되었다.

그 property는 비교적 싸게 나온 것으로 역시 지독한 불경기 속에 foreclosure된 것으로 bank소유였고 소위 말하는 short sale되는 그런 곳이었다. 한창 부동산 거품일 적 그곳은 아마도 $100,000이상에 거래 되던 곳이었을 것이 거품이 빠지면서 거의 $85,000까지 떨어지게 되었다. 원래 주인은 아마도 mortgage를 낼 수가 없어서 그냥 집을 떠났던 그런.. 지난 5년 동안 이런 ‘비극’은 미국 전역에서 수없이 일어났는데, 지금 그런 곳들이 저렴한 가격으로 조금씩 팔리게 된 것이다. 그뿐이랴.. Mortgage interest rate가 옛날 우리가 듣고 보던 것의 반도 채 안 되는 저렴한 것과, 지역마다 부동산 경기를 살리려고 ‘정부 레벨’에서 각가지 혜택을 주는 프로그램까지 생겨서 그런 정보들만 잘 찾아내면 더 싸게 살 수도 있게 되었다.

악착같이 새로니는 그런 것을 찾아내어서 거의 $15,000을 절약하게 되었다. 그것은 아마도 연방정부에서 주정부로 보조해 주는 것인 모양인데, 조건은 집을 처음으로 사는 것과, 그 집에서 5년은 살아야 하는 것, 지역도 Atlanta 시내 인 것 등으로 새로니에게는 아무 하자가 없는 조건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최소한의 조건이고 역시 관건은 ‘구비 서류’에 있었는데 그것을 그 애는 정말 꼼꼼히도 챙기며 노력을 해서 결국은 그 혜택을 받아내었다. 그것을 보고 우리부부는 입만 벌리기만 했는데, 우리보고 하라면 ‘절대로’ 못할 서류들이었기 때문이다.

Bank loan을 신청하고 승인을 받는 것이, 우리가 20년 전 집을 살 때와는 정말로 sea change였다. ‘무섭게, 까다롭게, 시간을 질질 끄는’ 그런 식.. 어찌 안 그렇겠는가? 지난 부동산 거품이 그런 것을 너무나 해이하게 하였기에 생겼던 것이 아닌가? 하지만 군소리를 못 할 것이 그렇게 해야 다시는 전과 같은 ‘거품’이 생기지 않기에 말이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2주 전에 드디어 closing이 성사가 되었는데, 그때 새로니의 기쁨은 우리가 옆에서 보아도 큰 듯 했다. 거의 ‘혼자서’ 한 것이다. 아니 100% 혼자서 한 것이다. 우리는 가끔 집을 같이 보았던 것.. 그것 뿐이니까. 그런 날이 우리 집에서는 Lemon Grass moment 라고 불려져서 모처럼 단출한 4식구가 ‘모두’ 모여서 외식을 하고 ‘꼬마’ 집주인이 된 새로니의 ‘독립’을 축하해 주었다.

그저께 드디어 moving truck이 와서 많지 않은 짐을 mid-town으로 날랐다. 동생 나라니 집에서 언니에게 주는 used couch도 날라와서 그런대로 살만한 환경으로 변하고, 새로 페인트를 칠하며 ‘혼자 사는’ 꿈을 꾸는 듯.. 옆에서 보는 우리의 심경은 조금 mixed라고나 할까.. 어찌 안 그렇겠는가.. 우리 가족의 변천사에 큰 획을 긋는 그런 시간들이 아닐까. 막상, 마지막 이삿짐이 나가면서 우리는 정말 착잡한 심경을 맛 보았다. 같이 있을 때, 조금 더 친절하게 해 줄 수는 없었을까.. 역시 우리는 후회를 만들며 살고 있는 것이다. 속으로 계속, “새로니, 서로 섭섭하게 한 것들이 있으면 빨리 잊자, 우리는 가족이니까” 라고 되뇐다.

생각한다. 아주 오래 전, 1960년 영화 ‘로맨스 빠빠‘ 에서 보는 것처럼, 고향 서울 커다란 한옥 줄줄이 이어지는 사랑방에서 각자 기거하며 ‘오순도순’ 살던 대가족들, 비록 가난했지만 절대로 외롭지는 않았다. 이제 우리는 4명 밖에 안 되는 ‘형편’에 그것도 떨어져 살아야 마음이 편하게 느껴진다는 그런 사실이 슬프게 하는 것이다. 시대는 변하고 시간은 흐르고, 사는 방식도 변한다. 이제는 절대로 옛날 식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일까. 역시 슬픈 심정을 떨칠 수 없는 시간들이다.

 

Blind가 아직 없는 창문으로 보이는 mid-town view

Blind가 아직 없는 창문으로 보이는 mid-town view, 정말 오랜만에
urban feeling을 회상하게 하는  광경이었다.

아틀란타 midtown, 기대 보다 훨씬 깨끗하고 젊게 느껴진다

아틀란타 midtown, 기대 보다 훨씬 깨끗하고 젊게 느껴진다

 

얼마 전에 일본 TV 연속 드라마 ‘후리타 집을 사다(フリ-タ-、家を買う)‘라는 것을 본 기억이 난다. 후리타는 freeter의 일본식 표기 발음이고, ‘공짜로 부모 집에’ 얹혀 사는 young adult children을 말한다. 대부분 ‘바이또’ (아르바이트)를 하며 ‘독립할’ 날만 손꼽는 자녀들, 경제적인 이유로 그렇게 사는데, 미국과 마찬가지로 일본도 그런 현상이 있는 모양. 하지만 그 드라마는 아주 ‘착실한 후리타’를 잘도 그려냈다.

열심하고 건실하게 사는 애 띤 청년이 삼류대학 출신이라 대기업 직장을 못 구하고 조그만 토목회사에 ‘아르바이트’ 로 들어가 일을 하지만 우울증에 걸린 엄마를 위해서 좀더 좋은 집으로 이사를 가겠다는 일념으로 각가지 어려움을 겪는 과정을 참 눈물겹게도 그려냈다. 끝이 정말로 흐뭇한 것으로 결국 집을 사게 되는 것이다. 가족관계가 경제성장으로 많이 해이해진 일본, 연로해가는 부모를, 자기 희생까지 하며 돕는 이런 드라마는 아마도 현재 일본의 개인적 사회 현상에 ‘경고, 충고’를 하려는 저의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도 해 본다.

 

후리타 집을사다, 인기 일본 TV 연속 드라마

후리타 집을사다, 인기 일본 TV 연속 드라마

Freeter, 후리타 주연배우 들

후리타 집을사다, 주연배우, 왼쪽

 

보리수와 들장미

영화 보리수 광고, 1959
영화 보리수 광고, 1959

보리수, 들장미.. 허~ 웬 꽃 나무 이름들.. 그 말이 맞긴 하지만 여기서는 사실 영화의 제목들이다. 머리를 짜내고 내며 희미해져 가는 기억들 들추어서 다시 새 것으로 바꾸려고 노력을 하지만 이 두 영화이름은 사실 그렇게 큰 노력을 할 필요도 없이 기억해 낼 수 있었다. 거의 50년 이상을 견디어온 그 기억력의 원인은 무엇일까?

이 두 영화는 모두 독일(그 당시는 서독, West Germany)의 영화로써 1950년대 중반에 나왔고 수 년 후에 곧바로 ‘일본을 거쳐’ 대한민국에도 들어와서 특히 ‘재미있는 것이 거의 없던’ 그 당시 어린 학생들에게 대인기를 끌었었다. 나의 기억이 맞는다면 나는 ‘보리수’란 영화를 국민학교 4학년, 그러니까 1957년경, 화신 백화점 옆 골목의 우미관에서 보았었다. 들장미란 영화는 사실 나는 못 보았지만 내가 ‘거의’ 본 것이나 다름이 없었던 것이, 우리 누나가 이것을 보고 완전히 ‘빠져’ 버렸기에 사진처럼 그 장면들이 상상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서울에 있던 옛 극장 (주로 1950~60년대)을 회상하면서 그 당시 신문에 나오는 영화 광고를 보다가 보리수와 들장미의 광고를 찾아 내었다. 보리수의 광고는 1959년 신문에 ‘문화극장’에서 재개봉되는 것으로 나왔지만 내가 본 것은 아마도 1957~1958년 사이였고 극장은 분명히 우미관이었다.

누나와 우리 집에서 밥을 해주며 같이 살았던 ‘필동 아줌마’와 아침에 갔다가, 아줌마는 한번만 보고 극장을 떠나셨고, 누나와 나는 거의 연속으로 계속 몇 번을 보았다. 그 정도로 재미가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그때 그것이 ‘독일어 영화’인지도 모르고 그저 ‘외국’ 영화라는 것만 알았다.

‘수많은’ 예쁜 남녀 아이들이 등장하며 노래를 부르고, 장난을 치고.. 우리로써는 그 당시 ‘침만 삼키는’ 부러운 광경들을 몇 시간이고 즐긴 것이다. 영화 제목인 보리수 라는 것은 그 주인공 대가족이 살았던 저택의 앞에 있던 커다란 나무의 이름이었고, 그들은 보리수란 명곡을 불렀던 듯 하다. 그것은 슈베르트(F. Schubert)의 Der Lindenbaum(보리수, 菩提樹) 이란 명곡이었다.

그 이후 나는 미국의 서부영화, 전쟁영화에 완전히 빠져서 이 영화를 거의 잊고 살았다. 그러다가 나중에 이 영화가 미국의 musical, The Sound of Music과 plot이 거의 같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저 짐작만 하고 있었는데, Ohio State (Univ.)에서 만난 중앙고 후배 김종수의 wife(선희 엄마)가 나에게 그것이 맞는다고 확인해 주었다. 그러니까 ‘영화 보리수 = 영화 The Sound of Music‘이었던 것이다.

이제 Googling의 힘을 빌려서 찾아보니, 너무나 오래된 것이라.. 별로 나오는 것이 없었지만 ‘간단히’ 한가지만 찾아 내었다. 그 옛날 독일영화 보리수의 원제목은 역시 보리수가 아니고 The Trapp Family( Die Trapp Familie) 였는데, 이것은 이 영화에 나오는 가족의 이름이 Von Trapp 이었으니 말이 된다. 서양식은 이렇게 ‘구체적’인 영화이름을 쓰지만, 동양식으로는 조금 곤란했을 것이다. ‘트랩 가족’.. 이런 영화제목을 하면 아마도 사람들이 많이 관심조차 가지지 않았을까? 그래서.. 보리수.. 아마도 99% 이것은 ‘일본아이’들의 발상일 것이다.

 

 

독일영화 보리수, Die Trapp Familie 1956
독일어로 나오지만 줄거리는 미국영화 The Sound of Music과 거의 비슷하다

 

영화 들장미 광고, 1959

영화 들장미 광고, 1959

들장미 주인공 Michael Ande
들장미 주인공 Michael Ande

들장미.. 이것도 천신만고 끝에 딱 한가지 가느다란 단서만 찾아내었다. Keyword는 역시 내가 찾아낸 신문광고에 가느다랗게 나오는 ‘원제목’.. ‘Der schoenste Tag meines Lebens‘ .. 와~~ 이것이 ‘들장미’란 말인가.. 아닌 듯 하다. 이것도 역시 서양식 영화이름과 동양식은 차이가 있기에 들장미 조차 일본아이들의 발상이었을 것이다.

그러면 원제목의 ‘뜻’은 무엇인가? 비록 고등학교 1,2학년 때 독일어를 배웠건만 나는 지지리도 그것을 못했다. Der Des Dem Den Die, Der, Der, Die.. 같은 정관사만 기억하고 나머지는 ‘모조리’ 잊어버렸다. 그러니까 Der 만 아는 것이다. 그것은 영어의 The일 것이다. 하지만 이것조차 Googling이 도와준다. 독일어로 찾으니 단서가 드러난다.

역시 1957년 독일영화, 우리 말고도 나이 지긋한 사람들 이것을 그 옛날에 많이 보았던 모양, 특히 일본사람들.. 그들의 제목은 Heidenröslein, 野ばら, 한글로 역시 ‘들장미’였다. 이것은 아마도 대만에서도 상영이 되었던 듯, 순 짱께 표현도 있는데, 그것은 野玫瑰, 한글로 읽으면 ‘야매괴‘ 이 듣기 거북한 말이 바로 ‘장미’의 순 한자어인 것이다. 이제 ‘매괴의 여왕’이 왜 성모님인가 이해가 간니, 장미의 여왕인 것이다.

이 영화 들장미에 나오는 비엔나 소년 합창단과 주인공이 바로 이 영화의 매력인 듯 싶다. 특히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Michael Ande 는 정말 귀엽게 생겼다. 그는 1944년 생으로 그 당시 나이가 13세 정도였을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누나가 이 영화에 ‘홀딱 반했던’ 것은 바로 이 Michael Ande 때문이 아니었을까?

내가 국민학교 6학년 때 누나가 이 영화를 보고 와서 (누나는 중학생, 나는 못 보았다) 아마 한 동안 정신이 멍~ 한 상태로 있었던 것으로 기억을 한다. 그런 긴 ‘잠’에서 깨어나더니 하는 소리가 걸작이었다. 비엔나 소년합창단에 ‘식모’로 가겠다는 것이었다. 우리(식구)들은 하도 기가 막혔지만 덕분에 실컷 웃기는 했다.

그런 추억의 영화를 신문에서 광고로 다시 보니 감개무량하긴 하지만, 누나를 생각하니 참 옛날이 그립고 이렇게 운명적으로 오랫동안 떨어져 사는 것이 슬퍼지기만 한다. 이런 어릴 적의 ‘보물’들을 기억이나 할지..

 

 

영화 들장미, Michael Ande가 비엔나 소년 합창단과, 1957

Pope Francis from Argentina

새 교황 프란치스코, Pope Francis
새 교황 프란치스코, Pope Francis

¶  프란치스코, 프란시스, Francis  새 교황님: 드디어, 아니 생각보다 ‘훨씬’ 빨리 새 교황님이 선출되었다. 며칠 전 레지오 마리애 꾸리아 월례회에서 교황선출에 대한 특별 기도 활동이 하달 되었는데, 이틀도 되지를 않아서 ‘결말’이 난 것이다. 별로 알려진 선두주자가 없었기에 쉽게 절대다수(2/3)표가 나오기 힘들 것이라고 예상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은퇴하신 베네딕트 명예교황은 사실 그 전의 요한 바오로 2세의 총애를 받았던 분이기에 예측하기에 그렇게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이번의 교황님은 결국 1200여년 만에 처음으로 유럽계가 아닌 곳에서 뽑히신 분이 된다. 이것은 분명하고, 강력한 ‘신호’일 것이다. 이제 가톨릭의 본고장 유럽의 무대는 서서히 끝이 나고 있는 것이고, 신세계 그것도 남반구 쪽으로 교회의 주류세력이 내려가고 있다는 징조가 아닐까?

Vatican의 독특한 신호, 하얀연기는 교황의 선출을..
Vatican의 독특한 신호, 하얀연기는 교황의 선출을..

나이 76세면 생각보다 ‘한창의 나이’는 지나간 것이지만, 개개인 마다 활력과 건강은 다 다른 것이라 전 명예교황님과 직접 비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사진으로 보기에도 아주 아주 건강해 보이신다.

이름은 조금 이태리 냄새가 나는 Bergoglio(버골리오), 역시 이분은 이태리 이민의 후손이시다. 결국은 이태리 가톨릭의 전통으로 자랐을 것 같고, 이태리 중심인 로마 바티칸의 ‘이태리 문화’를 잘 이해하고 무리 없이 잘 교회를 이끄실 것 같은 희망은 준다.

제일 큰 관심사는 그런 주변적인 것 보다는 역시 교회의 당면한 과제들에 대한 새 교황님의 대응책인데, 이것은 역시 정치적인 문제가 아닌, 종교적인 문제로서 더 높은 곳에서 해결책을 찾으실 것이다. 교회의 방향을 시대에 맞게 바꾸자는 사람들을 보면 조금 답답한 것이 그들은 비록 ‘사람’들의 교회이긴 하지만 아마도 무슨 정치, 사회단체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는 것이다.

비록 시대를 한 걸음 뒤 늦게 가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다 바뀌어도 ‘절대로 바뀌지 않는’ 것은 시대성이라는 요구와는 별개이기 때문이다. 이 새교황님은 두 분의 전 교황님들과 그런 면에서 비슷한 견해를 가지셨다고 하고, 결국은 일반인들이 말하듯 이것은 ‘보수적’인 것이라, 당분간 교회의 전반에 걸쳐서 큰 변화는 없을 것 같다.

동포의 교황선출에 환호하는 브에노스 아이레스
동포의 교황선출에 환호하는 브에노스 아이레스

알젠티나 수도지역인 브에노스 아이레스 대교구 출신의 추기경인 버골리오, 프란치스코 새 교황님은 ‘청빈하고 단순한’ 실 생활을 하셨다고 보도가 되고 있어서 더욱 호감이 간다. New York Times는 그를 A Conservative With a Common Touch라고 평하기도 했다.가난한 수많은 사람들의 목자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런 면에서 미국 대통령 오바마는 빠른 성명서를 발표했는데, 모처럼 나는 그에게 ‘후한 점수’를 주게 되었다. 걸핏하면 ‘평등’을 내세워 가톨릭 교회를 괴롭히던 그가 재빨리 새 교황에게 찬사를 보내는 것은 조금 의외라는 생각이 들 정도지만, 그래도 그의 성명서는 ‘진심으로’ 역사, 정치 속의 하느님을 ‘인정’하는 느낌을 주었기에 흐뭇한 기분을 가지게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새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성모신심, 특히 레지오 마리애에 대한 견해와 관심도에 신경을 쓴다. 이분은 예수회 출신(SJ Society of Jesus)이라고 한다. 예수회는 비록 성모님을 주보성인으로 모신다고 하지만, 프란치스코 회 같은 그런 밀착된 관계는 없는 듯 하다. 하느님을 팔아먹는 듯한 악마 같은 존재들인 ‘성추행 사제’들을 그는 어떻게 ‘근본적’으로 해결할 것인가 하는 것은 물론 당면한 ‘치명적’인 과제들일 것이고, 인터넷 시대에 맞게 ‘홍보, 전교’하는 문제는 보수적인 아닌 진보적인 사고로 대응을 하는 ‘상식’을 가지고 교회를 이끌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20 years ago, Storm of the Century

Storm of the Century최근에 ‘요상한 기후’에   대해서 연숙과 얘기를 하다가 문득 storm of the century란 것을 기억했다. 일명 super storm이라고도 했다. 문제는 그것이 언제였나 하는 것이었다. 일종의 ‘치매 예방’ 기억력 test였다. 나에게 제일 알쏭달쏭한 것이 지나간 10년에서 20년 전 일들의 기억이다. 각가지 연상technique를 동원해서 아마도 1992년에서 1994년 사이일 것이라고 일단 결말을 지었다. 그 super storm이 온 것이 3월 이때 쯤인 것도 기억했다.

문제는 100% 자세한 것이 어떤 것일까.. 1992년은 우리가 현재의 집으로 이사 온 해였고, 장모님과 나의 절친한 친구, 지금은 타계해서 없는 김호룡 식구가 거의 같은 때에 우리 집에 온 해이기도 했다. 1992년 3월 1일에 이사를 왔는데, 곧 이어서 이 super storm이 온 것 같지는 않았다. 1994년을 생각해보니 여름에 누님의 아들, 준형이가 다녀갔던 것 이외에 별로 특별한 것이 없었다. 결국은 1993년임을 알았다.

나의 제일 큰 문제는 이 1990년대의 기억이 제일 희미하다는 것이다. 아마도 기억해내기 싫었다는 간접적인 증거가 아닐까도 생각을 했다. 그만큼 큰 기쁨이나 즐거움, 그렇다고 특별한 괴로움도 없는 그런 세월을 보낸 것이 아니었을까.. 한마디로 ‘세파’속에 휩쓸려 간 듯한 그런 10년간인 듯한 느낌인 것이다.

고국이나 이곳이나 그 나이쯤이면 ‘샐라리맨’의 다람쥐 쳇바퀴 도는 그런 생활을 많이 보내니까 사실 이상할 것도 없다. 하지만 이런 커다란 기후에 관한 사건들은 기억이 난다. 게다가 그때에는 VCR, video (cassette) recorder가 한창 유행할 때여서 그런 것들의 기록도 남아있어서 기억하는데 도움이 되기도 한다.

조금 더 알아보니 그것은 1993년 3월 13일, 토요일의 일이었다. 사실 그 당시의 일기예보는 그렇게 ‘자신 있던’ 것이 아니었던 것이, 미리 커다란 ‘경고, 경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거의 생각도 없이 아침 10시부터 쏟아지기 시작한 ‘얼어붙는 눈보라’ 에 그냥 당한 것이다. 다행히 토요일 아침이라 교통에 관한 문제는 별로 없었다. 그냥 퍼 붙는 눈보라를 집에 틀어 박혀서 ‘즐긴’ 것이다. 그 전날만 해도 봄 같은 포근한 날이 어떻게 그렇게 하루아침에 변할 수 있을까? 예보, 경보도 그렇게 없이..

하루 종일 강풍과 함께 쏟아진 얼어붙는 눈에 나무들이 하나 둘씩 쓰러지기 시작했고 전기도 나가기 시작하고.. 길은 완전히 얼어붙고.. 이곳 지역은 완전한 시베리아를 연상하는 광경으로 변했다. 다행히 우리 집의 전기는 나가지 않아서 하루 종일 TV앞에 앉아서 뉴스를 보게 되었다 덩치가 큰 소나무가 쓰러지면서 우리 집 drive-way를 가로막았다. 그러니까 나중에 차가 나갈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오후가 되면서 무슨 요란한 소리가 나서 밖을 보니 남자 몇 명이 power chainsaw로 우리 집의 쓰러진 소나무를 잘라서 치워주고 있었다. 동네에 사는 ‘마음 좋은 아저씨’들이었다. 동네를 돌면서 우선 급한 것들을 치워주고 있었던 것이다.

TV 뉴스에서는 이번의 snow storm은 ‘아마도’ super storm, storm of the century정도로 monster 급이라고 했다. 멕시코 만에서 시작된 사상 최저기록의 저기압과 북쪽에서 하강한 cold front가 ‘완전히’ 결합이 된 그야말로 perfect storm이었다. 결국은 이 system은 우리가 사는 Georgia를 거쳐서 northeast의 덩치 큰 도시들로 갔고 그곳의 피해는 엄청난 것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그것은 엄청난 것으로 느껴졌지만, 2000년대가 지나가면서 그때의 것은 별로 큰 것이 아니었다. 점점 더 큰 monster storm들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그때 찍어둔 video tape을 본다. 그러니까 정확히 20년 전 우리 집 주변이 남아있고, 그 눈 속에서 ‘신나게’ 놀던 우리 집 두 아이들.. Wisconsin에서 이사온 것이 불과 몇 년 전이라 그 추운 곳에서 타던 ‘썰매’와 겨울 옷들을 다시 꺼내어서 아주 요긴하게 쓰기도 했다.

큰 애 새로니는 Ohio와 Wisconsin에 살 때 경험했던 눈과 얼음으로 그다지 생소하지는 않았겠지만 작은 애 나라니는 거의 기억이 나지를 않는지 신기하게 눈과 얼음을 바라보며 썰매를 탔다.

그 당시 나는 비교적 젊었던 45세.. 와.. 정말 젊었다.. 피곤을 모르며 직장생활(‘embedded software’ engineer at Automated Logic Co)을 했고, 연숙은 home-based business, housewife, mom, PTA등으로 시간을 보낼 때였다. 신앙적으로는, 유일했던 한국본당에 ‘대 파란’이 나던 때여서 아마도 그 근처에 가지도 않던 ‘신앙적으로 암울한 시기’였다.

당시는 Internet이란 것이 아주 미미하게 보급이 되고는 있었지만 지금 보는 것 같은 graphical web browser가 없어서 일반인에게는 그런 것은 ‘학교에서만 쓰는’ 그림의 떡이었다. Email은 직장이나 학교 내에서만 쓸 정도고, PC 는 Microsoft Windows 95 전의, 조금은 원시적이었던 Windows 3.x이 전부였고, 지금 쓰는 cellular mobile phone도 없었던 그런 시절이었다.

아틀란타 올림픽이 열리기 3년 전이었던 그 당시 이곳에 한인의 인구는 현재에 비하면 아주 미미한 편이었다. 생각해보니 그 동안 참 변한 것이 많았지만 제일 ‘충격적인’ 것이 내가 40대에서 60대가 되었다는 ‘자명한’ 사실.. 어떻게 그런 ‘자연스러운 변화’가 충격으로 느껴지는가.. 그것은 생생하게 뇌리에 남은 20년 전 1993년 3월 13일을 회상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Stupid (YouTube) ‘copyright police’ bot

얼마 전에 정말 오래된  vinyl LP record 중에서 통기타 시절 김세환 album을 digital format (mp3)으로 바꾸었다. 과정이 아주 힘든 것은 아니었지만 조금은 귀찮은 job에 속한다. 이 특별한 LP record는 1975년경에 Chicago에서 산 것으로 아마 1974년경에 발표된 것으로, 김세환 특유의 ‘감미로운‘ 곡들이 실려있었다. 1970년대 후반에 자주 들었지만 Cassette tape, CD등이 나오면서 눈앞에서 거의 사라졌다가, 1990년 초에 새로 audio system을 장만하면서 큰 마음 먹고 ‘한동안 없어졌던’ LP disc turntable을 다시 사게 되었고, 그 이후로는 가끔 이LP를 듣게 되었다. 문제는 그 turntable이 좋은 것이 아니어서 (너무나 fragile, 장난감 수준의 제품) LP disc를 걸 때마다 손이 떨릴 정도로 조심을 해야 했다는 것이었다.

세월이 지나가고, 음악 듣는 방식도 많이 바뀌어서 ‘거창한’ audio system앞에서 듣는 것도 사치로 보이게 되었다. 거의 주로 desktop pc아니면 mp3 player, smartphone으로 듣게 된 것이다. 그래서 부랴부랴 보물처럼 간직했던 그 많은 LP record들을 digital format으로 바꾸어야 했는데, 나 같은 older generation을 의식했는지 이제는 시장에 LP record를 ‘직통으로’ mp3로 바꾸어주는 ‘smart-turntable’이 등장을 하고, high school student들이 이것으로 돈까지 벌기도 한다.

내가 택한 방식은 의외로 간단했다. 지금은 값이 많이 떨어진 personal voice recorder를 쓰는 것이다. 요새 것들은 audio recording을 곧바로 mp3 format으로 flash card에 save를 해 주기 때문에 이 방식은 거의 ‘직통’ 인 것이다. 이렇게 해서 오래된 analog audio, music (on cassette tape, LP record, VHS tape etc)들이 하나 둘씩 mp3 audio로 바뀌면서 제 1호가 ‘오래 된’ 조동진 album audio tape, 제 2호가 위에 언급된 김세환의 LP album 인데, 요새의 standard video cloud 의 대명사가 된 YouTube에 이것들을 upload해서 Internet에서 볼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도 의외로운 복병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 저작권(copyright)문제인데, 40년 전의 analog music을 digitize한 것이 저작권 침해라고 생각해 본적은 한번도 없었다. 문화적 유산을 보존한 것으로 상을 받아야 할 지경이 아닐까? 제일 웃기는 것은 이것이다. 김세환 앨범에 Bee Gees의 word란 곡을 한국어로 바꾸어 부른 것이 있었다. 그 위력을 자랑하는 Google의 database 속에서 그 곡이 ‘걸려들고’ 말았다.

저작권이 ‘영국’의 어느 단체에 있다는 것이다. Bee Gees의 word를 digital format으로 그냥 올려 놓았으면 할 말이 없겠지만 그 당시(1974) 국제문화계에서 거의 ‘거지취급’을 받던(dollar 보유고가 없어서) 한국의 ‘학생가수’가 부른 곡을 40년 뒤에 mp3로 바꾸어서 인터넷에서 다시 듣겠다는데 ‘저작권 침해’라고? 웃기지 마라.. 이것은 물론 ‘사람이’ 개입이 된 것이 아니고 monster같은 YouTube의 ‘감시경찰 bot’ 이란 software가 ‘실수’를 한 것이다.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이 system은 보통의 사법system처럼 ‘Innocent until proven guilty’ 가 아니고 ‘Guilty until proven innocent‘ 인 것이다. 우선 ‘죄인’으로 취급하고, 억울하면 무죄를 밝히라는 것.. 참.. 웃기는 세상이다.

 

 
김세환 Gold, 1974

 

 
조동진 47 minute classics

추악 중의 추악한 인간들..

아주 가끔 세상에서 제일 ugly한 것이 무엇일까 생각을 한다. 생각하기 조차 싫은 것이 바로 이것일 것이다. 하필 왜 그런 것을 생각조차 한단 말인가?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생각이 날 때가 있다. 그런 ‘부류’는 적지 않을 것 같다. 어렸을 적에는 ‘깡패‘들이 나의 #1 ugliest였던 기억이고, 미국에 와서 본 것 중에는 trash TV show에 나오는 얼굴들, 그 중에서도 으뜸은 The Jerry Springer Show에 나와서 머리채를 붙들고 싸우는 ‘돼지 같은’ 군상들.. 나는 세상에 아니 꿈에서도 그렇게 추악한 모습들을 상상조차 못했다.

그러다가 나에게 진짜 #1이 등장했다. 멀리 갈 필요도 없었다. 북한 괴뢰 3대 김씨 왕조의 세 인간들.. 전범 일가: 김일성, 김정일, 김정운의 세 개XX들이다. 이 개XX들은 아마도 두 명은 이미 지옥으로 떨어졌을 것이고 나머지는 아마도 그의 ‘애비와 할애비’가 지옥에서 기다리고 있을 듯하다. No Further Question..

Lemon Grass day

Thai Restaurant, Lemon Grass
Thai Restaurant, Lemon Grass

완전히 한 겨울 날씨가 된 3월 1일, 쉽게 말해서 지나간 1월은 거의 늦은 가을이나 이른 봄 날씨였고, 2월 한달 동안은 완전한 겨울인 듯 을씨년스러운 날씨의 연속이다. 올해 Groundhog의 예측대로 봄이 일찍 온다는 것은 완전히 엉터리였음이 들어난 것이다.

2월의 마지막 날인 어제는 오랜만에 집 근처에 있는 타이 식당 Lemon Grass에서 연숙과 식사를 하였다. 집에서 밥을 해 먹기 귀찮아서가 아니고 무언가 ‘기념’을 하려고 일부러 간 것이었다. 오늘 3월 1일은 우리가 ‘매일 미사’를 시작한지 만 1년이 되는 날인 것이다. 그러니까, daily Mass 1 year Anniversary정도라고나 할까.. 하도 축하할 것이 없는 요새지만 이런 것도 자축을 하나.. 하는 생각도 들지만, 우리 둘에게는 무엇 보다 귀중한 의미를 가지기에 매년 3.1절과 함께 기념하기로 한 것이다.

2010년 가을 내가 레지오 마리애 행동단원 생활을 시작한 것도 큰 의미가 있었지만, 2012년 3월 1일에 시작한 매일미사 참례 결정은 더 큰 의미를 갖는다. 우선 일주일에 한번 참석하는 레지오 마리애와, 매일 아침 9시까지 비록 집 근처지만 성당에 가서 아침 1시간을 지낸다는 것은 생각하면 보기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 비록 눈은 별로 없는 이곳이지만 흔한 말로,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성당엘 다닌 것이다. 처음에 시작할 때는 솔직히 얼마나 갈까 둘 다 자신이 없긴 했다. 하지만 그것은 한마디로 기우였다. 우리가 의지로 나가는 것 이외에 무언가 우리를 도와주는 느낌도 떨칠 수 없는 것이다.

작년 3월 매일 미사를 하면서 가끔, 지금은 작고하시고 없지만, 레지오 동료단원 요안나 자매가 같이 와서 미사를 보곤 우리 집에도 들려서 식사도 하기도 했다. 그 자매님의 말씀으로, 미사와 영성체가 얼마나 신심생활에 도움이 되는 가를 배우기도 했다. 신심생활에 주는 의미를 떠나서, 이렇게 둘이서 매일 집밖으로 ‘나간다는 사실’, 사람들을 만난다는 ‘사회적’ 의미도 생각해 보니 참으로 중요한 것이었다. 과거 오랜 시간 집에 틀어 박혀서 백일몽을 꾸던 때를 생각하면 그것은 참 위험한 생활 방식이었음도 알게 되었다.

타이 식당인 Lemon Grass, 연숙은 항상 ‘팟타이‘, 나는 100% ‘Broccoli Tofu‘를 먹는데, 정말 주방장의 조화인지 언제나 ‘똑같이’ 맛이 있다. 이것은 chef가 변함없이 그곳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이라서 그런지 신문에 아주 좋은 review까지 났다. 꽤 많은, 이름있는 식당들의 수명이 그렇게 길지 못한 때에 이곳은 1994년에 open한 이래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앞으로도 계속 그 자리에 있어서, 다른 일로 ‘자축’을 할 일이 있을 때 우리에게 service를 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