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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ily Archives: September 4, 2013

具 常(1919~2004) 시인

具 常(1919~2004) 시인

최근에 발견한 가톨릭 시인 구상 님의 주옥 같은 시들이 있다. 내가 본 것은 구상 문학관의 웹사이트였는데, 이것들이 copyright restriction이 있는지 확실치 않지만, 염치불구하고 신앙과 믿음의 시 8편을 옮겼다. 서정적인 윤동주 님의 세계로 부터 영원을 노래하는 신앙의 세계로 와서 느끼는 구상 님의 시 여덟 편은 아름답기만 하다.

 시만이 갖는 특징 중에 시 속의 같은 낱말과 구절이 함께 어울려 각자에게 다른 느낌과 상상의 여지를 준다는 사실을 나는 좋아한다. 이런 시의 특성을 무시하고 학교에서 국어시간에 배웠던 시들은 시험을 위한 정답 찾기에 급급했었던 기억인데, 시를 가지고 시험을 본다는 자체가 위험한 발상이 아니었을까…

 

 

은총에 눈을 뜨니

 

이제사 비로소

두 이레 강아지만큼

은총에 눈이 뜬다

 

이제까지 시들하던 만물만상이

저마다 신령한 빛을 뿜고

그렇듯 안타까움과 슬픔이던

나고 죽고 그 덧없음이

모두가 영원의 한 모습일 뿐이다

 

이제야 하늘이 새와 꽃만을

먹이고 입히시는 것이 아니라

나를 공으로 기르고 살리심을

눈물로써 감사하노라

 

아침이면 해가 동쪽에서 뜨고

저녁이면 해가 서쪽으로 지고

때를 넘기면 배가 고프기는

매한가지지만

 

출구가 없던 나의 의식 안에

무한한 시공이 열리며

모든 것이 새롭고

모든 것이 소중스럽고

모든 것이 아름답다

 

천주교 교리반 봉사를 시작하며 나를 구상 신앙의 시에 눈을 뜨게 한 ‘고백’이 바로 이 시였다. 이렇게 아름답고 솔직한 시가 있었던가? 이런 ‘눈을 뜨는’ 경험이나 생각을 하며 사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오랜 세월 살면서 거의 나는 못 느꼈다. 들으면 공감은 갔다.

하지만 나는.. 아니었다. 세상이나 인생은 자기가 생각하기 나름이라지만 나는 거의 지루하고 힘들고 심지어 지옥으로 만들고 살았던 때도 기억을 한다. 하지만 나도 이제는 ‘두이레 강아지만큼’ 눈을 떠가기 시작 함을 느낀다. 이것이 인생인가.. 이렇게 살고, 가는 것, 그리고 궁극적으로 가는 곳이 그곳이었던가..

 

 

오늘

 

오늘도 신비의 샘인 하루를 맞는다

 이 하루는 저 강물의 한 방울이

어느 산골짝 옹달샘에 이어져 있고

아득한 푸른 바다에 이어져 있듯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하나다

 

이렇듯 나의 오늘은 영원 속에 이어져

바로 시방 나는 그 영원을 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죽고 나서 부터가 아니라

오늘로서 부터 영원을 살아야 하고

영원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이 가난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을 비운 삶을 살아야 한다

 

Here and Now.. Today while the blossoms cling to.. 이런 귀와 눈에 익은 멋진 구절들을 생각하게 하는 시.. 시공간에 억매인 유한한 곳에서 우리는 영원의 한 점을 살고 가는 존재, 거기서 큰 의미를 찾는 자체가 행복이고 은총이 아닐까..

나는 영원의 미립자도 못한 짧은 시간을 이곳 ‘이승’ 에서 ‘하루 하루’ 보냈지만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영원의 시간, 무한대의 공간임을 몇 초라도 느끼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보람이 있을까?

 

 

인류의 맹점에서

 

시방 세계는 짙은 어둠에 덮여 있다

그 칠흙 속 지구의 이곳 저곳에서는

구급을 호소하는 비상경보가 들려 온다

 

온 세상이 문명의 이기(利器)로 차 있고

자유에 취한 사상들이 서로 다투어

매미와 개구리들처럼 요란을 떨지만

세계는 마치 나침반이 고장 난 배처럼

중심도 방향도 잃고 흔들리고 있다

 

한편 이 속에서도 태평을 누린 달까?

황금 송아지를 만들어 섬기는 무리들이

사기와 도박과 승부와 향락에 취해서

이 전율할 밤을 한껏 탐닉하고 있다.

 

내가 이 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저들에게 새 십계명(十誡命)은 무엇일까?

아니, 새 것이 있을 리가 없고

바로 그 십계판(十誡版)을 누가 어떻게

던져야 하는가?

 

여기에 이르면 판단 정지!

오직 전능과 무한량한 자비에 맡기고 빌 뿐이다

 

 

‘시방’은 ‘지금’의 고어인가.. 전에 많이 썼던 구수한 말… 인간의 맹점, 약점, 허점, 죄악, 그것도 점점 심각해지는 듯한 느낌을 어떻게 할 것인가, 시인은 고뇌를 한다. 2000년 전이나 1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이것은 ‘똑 같은’ 문제였을 것이다.

시대마다 나름대로 황금 송아지가 있었고, 그것을 경고하는 ‘성인’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성인들이 보이지 않는 듯한 비극이 있다. 누가 십계판을 던질 것인가? ‘판단정지!’.. 어두운 밤을 의식하며 그저 ‘맡기고 싶은’ 시인의 고뇌를 본다.

 

 

기도

 

저들은 저들이 하는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이들도 이들이 하는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이 눈먼 싸움에서

우리를 건져 주소서.

 

두 이레 강아지 눈만큼이라도

마음의 눈을 뜨게 하소서.

 

St. AugustineJUST WAR 논리.. 현대판 empire, only superpower가 되어버린 ‘기독교의 나라 미국’, 어찌도 그렇게 cruise missile을 좋아하게 되었는가?

인간의 존엄성을 먼저 생각하면 just war는 그렇게 쉽게 거론되지 않을 듯 한데.. 기본적 이성적인 믿음이 없는 정치와 정치인들을 어떻게 vote out을 할 것인가?

 

 

그 분이 홀로서 가듯

 

홀로서 가야만 한다.

저 2천년 전 로마의 지배 아래

사두가이와 바리사이들의 수모를 받으며

그분이 홀로서 가듯

나 또한 홀로서 가야만 한다.

 

악의 무성한 꽃밭 속에서

진리가 귀찮고 슬프더라도

나 혼자의 무력에 지치고

번번이 패배의 쓴잔을 마시더라도

백성들의 비웃음과 돌팔매를 맞으며

그분이 십자가의 길을 홀로서 가듯

나 또한 홀로서 가야만 한다.

 

정의는 마침내 이기고 영원한 것이요,

달게 받는 고통은 값진 것이요,

우리의 바람과 사랑이 헛되지 않음을 믿고서

 

아무런 영웅적 기색도 없이

아니, 볼꼴 없고 병신스런 모습을 하고

그분이 부활의 길을 홀로서 가듯

나 또한 홀로서 가야만 한다.

 

고독과 적막과 어두운 밤, 우리는 혼자다. 그 ‘주님’도 갈 때는 철저히 버림받고, 배반되고, 조롱 받으며 혼자서, 혼자서 갔음을 시인은 아마도 자신의 ‘홀로 있음’에 비교하며 위로를 받았을까?

궁극적인 심판과 결과는 정의의 이김이요, 모든 것이 고통의 가치를 가지고 있었음을 다시금 되새기는 시인.. 현재는 병신 바보같이 느껴져도 묵묵히 어둠의 길을 걸어간다.

 

 

오늘서부터 영원을

 

오늘도 친구의 부음을 받았다.

모두들 앞서거니 뒤서거니

어차피 가는구나.

 

나도 머지않지 싶다.

 

그런데 죽음이 이리 불안한 것은

그 죽기까지의 고통이 무서워설까?

하다면 안락사(安樂死)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것도 두려운 것은

죽은 뒤가 문제로다.

저 세상 길흉이 문제로다.

 

이렇듯 내세를 떠올리면

오늘의 나의 삶은

너무나 잘못되어 있다.

 

내세를 진정 걱정한다면

오늘서부터 내세를

아니 영원을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암만 내세와 신앙으로 무장을 해도 결국 우리는 한번 거쳐갈 그 끝의 단계를 피하려는 본능은 피할 수 없다. 어떻게 가는지, 고통을 의식하지 않을 수도 없다.

모든 것이 미지의 세계다.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는 것이 삶의 연장이라고 생각한다면, 오늘부터 저승의 삶을 살아가면 되지 않을까.. 시인도 고민하고, 나도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고요

 

평일 한낮

명동 성당 안에는

고요만이 있었다.

 

온 세상이

일체 멈춤과 같은

침묵과 정적속에서

제단 위에 드리운 성체등이

이 역시 고요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수라장(修羅場)을 방불케 하는

문 밖 거리의 인파와 소음은

마치 딴 세상 정경인 듯

오직 죽음과 같은 고요 속에

고요가 깃들어 있었다.

 

그 고요 속에 나 또한

고요히 잠겼노라니

그 고요가 고요히 속삭였다.

 

이제 너의 참 마음을 열어보라고!

 

그러나 나는 말을 못하고

눈물만 흘렸다.

 

천주교회 성당, 특히 안은 개신교회의 분위기와 어쩌면 그렇게도 다를까? 고요와 엄숙함, 그것이 바로 성스러움이라는 것이다. 성당 특유의 제단과 성체등 빛, 그 위에서 실제로 성체의 변화까지 느끼기라도 하면 제아무리 성당의 바깥이 시끄러울지라도 상관이 없을 듯.. 이런 고요함을 성당 외에 어느 곳에서 느낄 수 있을까? 구상 시인은 고요를 ‘이용’해서 마음을 열어보려 노력하지만 눈물만 흘리고 있다.

 

 

노경(老境)

 

여기는 결코 버려진 땅이 아니다.

 

영원의 동산에다 꽃 피울

신령한 새싹을 가꾸는 새 밭이다.

 

젊어서는 보다 육신을 부려왔지만

이제는 보다 정신의 힘을 써야 하고

아울러 잠자던 영혼을 일깨워

형이상(形而上)의 것에 눈을 떠야 한다.

 

무엇보다도 고독의 망령(亡靈)에 사로잡히거나

근심과 걱정을 능사(能事)로 알지 말자.

 

고독과 불안은 새로운 차원의

탄생을 재촉하는 은혜이어니

육신의 노쇠와 기력의 부족을

도리어 정신의 기폭제(起爆劑)로 삼아

삶의 진정한 쇄신에 나아가자.

 

관능적(官能的) 즐거움이 줄어들수록

인생과 자신의 모습은 또렷해지느니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더욱 불태워

저 영원의 소리에 귀기울이자.

 

이제 초목(草木)의 잎새나 꽃처럼

계절마다 피고 스러지던

무상(無常)한 꿈에서 깨어나

 

죽음을 넘어 피안(彼岸)에다 피울

찬란하고도 불멸하는 꿈을 껴안고

백금(白金)같이 빛나는 노년(老年)을 살자.

 

인생의 황혼기를 맞는 심경 그 자체가 신앙이나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나이가 들면 들수록 젊은 시절에 비해서 나아지는 것은 아마도 자연적으로 느끼게 되는 신앙심일 것이다. 죽음에 가까이 옴을 느끼며 그런 심정이 되지 않는 것이 그렇게 쉬울까?

눈에 보이는 것보다는 안 보이지만 더 큰 의미가 있는 것들.. 시인은 영혼과 형이상의 것들에 눈을 떠야 한다고 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였던 시절을 생각하면 확실히 이것은 ‘초능력’이다. 그래서 세속문화와는 반대로 여기서는 인생의 황혼기가 더 멋져 보인다.

 

 

나자렛 예수

 

나자렛 예수! 당신은 과연 어떤 분인가?

마구간 구유에서 태어나 강도들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기구망측한 운명의 소유자

집도 절도 없이 떠돌아다니며 상놈들과 창녀들과 부역자들과 원수로 여기는 딴 고장치 들과 어울리며 먹고 마시기를 즐긴 당신,

가난한 사람들에게 굶주린 사람들에게 우는 사람들에게 의로운 일을 하다 미움을 사고 욕을 먹고, 쫓기고 누명을 쓰는 사람들에게 ‘행복한 사람은 바로 당신들’ 이라고 ‘하느님 나라는 바로 당신들 차지’라고 엄청남 소리를 하신 당신,

소경을 보게 하고 귀머거리를 듣게 하고 앉은뱅이를 걷게 하고 문둥이를 말짱히 낫게 하고 죽은 사람을 살려내고도

스스로의 말대로 온 세상의 미움을 사고 욕을 먹고, 쫓기다가 마침내 반역자란 누명을 쓰고 볼 꼴 없이 죽어 간 철저한 실패자,

내가 탯줄에서 떨어지자 맺어져 나의 삶의 바탕이 되고, 길이 되고, 때로는 멀리 하고 싶고 귀찮게 여겨지고, 때로는 좌절과 절망까지를 안겨주고, 때로는 너무나 익숙하면서도 생판 낯설어 보이는 당신, 당신의 참모습은 과연 어떤 것인가?

당신은 사상가가 아니었다. 당신은 도덕가가 아니었다. 당신은 현세의 경륜가가 아니었다. 아니, 당신은 종교의 창시자도 아니었다.

그래서 당신은 어떤 지식을 가르치지 않았다. 당신은 어떤 규범을 가르치지 않았다. 당신은 어떤 사회혁신운동을 일으키지 않았다. 또한 당신은 어떤 해탈을 가르치지도 않았다.

한편 당신은 어느 누구의 과거 공적이 있고 없고를 따지지 않았고 당신은 어느 누구의 과거 죄악의 많고 적음을 따지지 않았고 당신은 실로 이 세상 모든 사람의 생각이나 말을 뒤엎고 ‘고생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고 고통 받는 인류의 해방을 선포하고

다만, 하느님이 우리의 아버지 시요, 그지없는 사랑 그 자체이시니 우리는 어린애처럼 그 품에 들어서 우리도 아버지가 하시듯 서로를 용서하며 우리도 아버지가 하시듯 다함 없이 사랑할 때

우리의 삶에 영원한 행복이 깃들이고 그것이 곧 ‘하느님의 나라’라고 가르치고 그 사랑의 진실을 목숨 바쳐 실천하고 그 사랑의 불멸을 부활로써 증거 하였다.

 

구상시인의 처절하고 치열한 ‘예수님 찾기’의 절정인 듯한 서사시.. 이 서사시를 보며 어찌 감동, 전율, 공감, 감사를 안 할 수 있을까? 위에 실었던 8편의 시에 덧붙이게 된 이 걸작은 ‘여기에 불이 있다’ 라는 천주교 예비신자 교리교과서에 실린 것으로 훨씬 이후에 읽게 되었고, 추가하게 되었다. 이것이야말로 나에게는 숨겨진 보물이었다. 예비신자들이 이 시를 접하고 어떤 정도의 느낌을 받았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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