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October 2014

 

¶  CROSSING THE THRESHOLD OF HOPE

Scan10105-1 몇 개월 전이던가.. 확실치 않다.. 하지만 6개월은 넘지 않았을 것 같은 느낌. 우리가 다니는 미국 본당 Holy Family CC (Catholic Church)의 성체조배실 (adoration chapel) 에서 비교적 낡은 책 하나를 읽게 되었다. 조그만 책자였는데, 눈에 익은 이름이 보였다. HIS HOLINESS JOHN PAUL II.. 그러니까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저자인 책이었다. 제목이 바로 ‘CROSSING THE THRESHOLD OF HOPE” 였다. 직역을 하면 ‘희망의 문턱을 넘어서..’ 정도가 될까. 나 나름대로의 의역은 ‘희망으로 넘어 가며’  조금은 어색한가.. 희망이 없던 사람이 그것을 찾으려 노력하다가 비로소 조금씩 그것을 찾아간다 정도가 아닐까?

 

성체조배실에서는 주로 성체를 앞에 두고 명상이나 묵상 나가가서 관상까지도 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무엇을 하던 사실 제한은 없는 것 같다. 연숙과 그곳을 거의 정기적으로 가게 된 것은 우리가 ‘평일 미사’를 시작하면서였고 평일 미사가 끝난 후에, 필수적으로 일주일에 몇 번을 하는 것은 정하지 않고, ‘가고 싶으면’ 가는 것으로 했는데 의외로 정기적인 것이 되었다. 이 본당의 성체조배 활동은 참으로 활발해서, 우리의 한국본당 순교자 성당에 비하면 ‘하늘과 땅의 차이’라고 할만 하다. 왜냐하면 순교자 성당에는 ‘성체조배실’이란 것이 아예 없기 때문이다. 항상 비어있는 듯한 컴컴하고 춥고, 더운  순교자 성당의 분위기1와 이곳의 24시간 쾌적하게 돌아가는 성체조배실이 있는 미국본당의 ‘눈에 안 보이는 차이’는 아마도 상상을 초월할 듯 하다. 어떤 자매님은 경험적으로 성체조배 활동이 있는 모든 본당의 신심 수준2은 ‘거의 자동적으로’ 올라가게 되어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나는 성체조배 Eucharistic Adoration  란 것이 처음에 너무나 생소했지만 의외로 좋은 ‘선배’들을 만나서 큰 무리 없이 합류가 되었고 이제는 ‘좋은 시간’ 중에 하나가 되었다. 레지오 덕분에 처음에는 ‘기본’ 묵주기도 의무를 채우려 이곳에서 그것을 하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나며 나만의 ‘묵상, 생각’의 시간들이 늘어나기도 했다. 다른 것 중에는 그곳에 비치된 ‘좋은 책’들을 ‘난독’하는 것이다. 거기서 정독을 할 수는 없기에 눈에 ‘꽂히는’ 것을 읽는다. 이런 것들이 우연일 수도 있지만 이제는 그렇게 생각지 않게 되었다. 그 중에 하나가 여기에 언급하는 이제는 ‘성인’이신 요한 바오로 2세의 책인 것이다.

 

 처음에 이 책을 접했을 때 직감적으로 ‘괜히 어려운 책을 골랐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교황님이 쓰신 글들은 ‘무조건 어렵다’ 는 선입관 때문이었을 것이다. 분명히 ‘교황 회칙이 어쩌구.. 교회 헌장이 어쩌구..’ 하는 글들이 태반이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원인이었을까.. 이 책을 조금 읽으며 나는 너무나 놀라서 입이 다물어지지를 않았다. 웬만한 교구신부님3들이 일반 본당에서 하시는 수준의 글들.. 주제 들은 ‘항상 궁금했지만 창피해서 물어보지 못하던 것’들로 꽉 차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우연이었을까.. 내가 이 책을 고르게 된 것이.. 아닐 듯 하다.

 

그렇게 성체조배실에서 ‘가끔’ 즐기던 이 책이 어느 날 보니 다시 찾을 수가 없었다. 누가 ‘빌려간’ 모양인지.. 아쉬운 마음이었지만 포기를 하고 있었는데, 최근에 다시 그 책이 돌아왔기에 이번에는 never again의 심정으로 그 책의 제목을 적어와서 Amazon.com에서 찾았다. 1994년 발행된 책으로 그러니까 20년이 된 책이었다. 역시 이것도 contemporary classic 영역으로 들어가는가.. 왜 이렇게 세월이 빨리 가는가. 아직도 ‘출판’이 되는 책인 것을 보니 역시 popular classic이 된 듯하다. 거의 free로 사게 된 (shipping & handling + nothing!)이 책.. 나와는 우연이 아닌 인연으로 성체조배실 보다 더 쾌적한 나의 서재에서  ‘정독’을 하게 되었다.  읽으며 ‘남기는’ 방법.. Reading by Typing.. 이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어디에 있을까? ‘성경필사‘를 하는 이유와는 다른 것이지만 아마도 그 다음으로 좋은 방법이 아닐까? 읽은 후에 다른 ‘영혼’들과 이 생각과 글을 나눈다는 것은 내가 생각하는 ‘레지오의 사명‘ 중의 하나일 것이다.

 

이 책이 나오게 된 연유, 과정이 머리글에 자세히 적혀있다. 그것을 읽어보니 ‘왜 이 책이 그렇게 읽기 쉽던가?’ 하는 의문이 저절로 풀린다. 1993년 가을 이탈리아의 TV 방송국에서 ‘교황청 역사상 유례없는’ 기획을 했는데.. 교황과 TV인터뷰를 하는 idea였다. 그것도 ‘전세계로 방영이 되는’ 것으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그 당시에도 거의 ‘의외적’인 교황으로 ‘예상을 불허하는’ 교황직을 수행하고 있었기에 이런 제안을 ‘수락’한 것도 전혀 예상 밖은 아니었다고 한다. 교황과 인터뷰를 하려면 아마도 미리 ‘예상적인 질문’ 이 있었을 것이지만 그것, 대답, 반응도 예측 불허였을 것이다.

 

하지만 또 예상을 뒤엎고 이런 기획이 취소가 되었다. 너무나 바쁜 교황의 스케줄 때문이었다고 한다. 연기를 할만한 여유도 없었고.. 그러니까 TV 인터뷰 계획은 ‘물 건너 간 것’이 되었다. 몇 개월 후에 또 다른 surprise가 있었는데, 역시 요한 바오로 2세의 ‘예측 불허’한 행적이었을까.. TV 인터뷰 대신에 ‘서면’으로 인터뷰를 할 수 있다는 교황님의 대답이 왔고 그 결과가 이 책이 된 것이다. 이 책을 보면 ‘질문’과 ‘대답’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질문의 ‘수준’이 거의 예비자 교리공부의 것과 비슷할 정도다. 그러니까 교황님이 직접 지도하는 예비자 교리반 같은 분위기인 것이다.

 

이 책의 비교적 짧은 질문, 대답 을 읽는 것은 한마디로 즐겁기만 하다. 감히 교황님께 이런 질문이… 가당한가.. 하는 것들이지만 ‘기가 막힌 대답’들이 너무나 놀라운 것이다. 이분의 ‘지식’은 상상을 초월하지만 ‘알기 쉽게’ 설명하는 실력은 더 놀라운 것이다. 내가 제일 놀라워한 질문은 ‘예수님이 진정 하느님의 아들인가?‘ 하는 것이다. 이 정도면 우리 교리반 교사들 같으면 어떻게 대답을 했을까? ‘그것도 모르며 어떻게..’ 하지는 않았을까? 아마도 ‘그것은 ‘무조건’ 믿어야 하는 ‘공리’ 중에 하나다’ 할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의 대답은 그런 것들을 모두 뛰어 넘는 ‘자상한’ 대답들이다. 현재 1/4 정도 typing을 하고 있고, 덕분에 더 빠른 pace로 모두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정독을 하며, 각 질문과 대답에 대한 나의 생각을 정리하는 것은 전혀 다른 과제일 듯 하다.

 

 

 ¶  MERTON by Thomas Merton

Scan10109-1Thomas Merton, 가톨릭 교회, 특히 ‘미국 가톨릭’ 계에서는 너무나 잘 알려진 ‘트래피스트 수사님’..이기전에 bestseller author 인 것을 나는 비교적 근래에 들어서야 알게 되었고 그 분의 사후 posthumous 의 인기와 power를 실감을 하게 되었다. 우선 1968년, 그러니까 아주 오래 전에 ‘선종’한 이 Trappist Monk가  왜 아직도 그렇게 화제이며 유명할까.. 흥미롭지 않은가? 현대판 성 어거스틴, 아우구스티노 라고도 불리는 이분의 일생은 비록 50세를 조금 넘는 비교적 짧은 기간이만 너무나 색채가 진하고 강하고 다양해서 이분의 전기를 쓰는 사람들은 아주 애를 먹으리라 생각이 된다. 50세의 인생을 이렇게 강렬한 후광을 뿌리고 갔다는 것 자체가 ‘멋진’ 것이 아닐까?

The Seven Storey Mountain 칠층산 이란 제목의 ‘자서전, 참회록’이 초기 대표작이지만 그 이후 수 많은 주옥 같은 시집을 비롯한 저서를 남겼고, 사후 이분에 대한 저서는 셀 수도 없이 많다. 그만큼 후대에 큰 영향을 미친 ‘수도자’라 할 것이다. 일화에 위에 말한 그의 첫 자서전이 세상에 나온 뒤 1950년대에 많은 ‘건강한 젊은 남자’들이 이 책의 영향으로 가톨릭 수도회에 입회를 했다고 한다. 그들은 한결같이 뒤 주머니에 이 책을 끼고 왔다고 했다. 그 정도면 대강 짐작이 가지 않을까?

Thomas Merton

Thomas Merton

여기서 이들의 공통점은 그 책의 저자도 당시 ‘젊다’라는 것이고 영향을 받았던 이들도 젊었다는 것인데.. 지금 60대 중반을 훌쩍 넘어가는 나는 과연 이것들과 무슨 공통점이 있단 말인가? 나이에서는 전혀 공통점이 없다. 하지만 ‘진리를 찾고 싶고, 그 진리로 생을 살고 싶다.’ 라는 것은 비슷하지 않을까? 하지만 나는 그들처럼 수도승이 되고 싶지도 않고 사실 이제는 되고 싶어도 될 수도 없다. 그것 빼고 나머지는 나도 ‘진리’를 알고 싶은 것이다.

Thomas Merton을 가장 ‘짧게 소개한’ 글이 있을까? 대강 2~3 페이지 정도로.. 물론 내가 신뢰하는 Wikipedia를 보았지만 그곳은 ‘객관적’인 역사, 사실, 업적 들을 dry하게 기술했을 뿐이다. 그곳에는 ‘주관성’이 개입할 여지가 별로 없다. 그러다가 ‘우연히’ A Thomas Merton Reader란 책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찾았다. 그 방대한 Merton 저서들을 모아서 500 여 페이지 한 권으로 압축한 편리한 이 책의 서두에 있는 Introduction(by M. Scott Peck) 바로 그것이다. 이 ‘소개장’을 한마디로 줄이면 “Merton은 짧은 글로 표현하기 힘든 복잡한 사람’ .. 이것은 나도 이제 충분히 이해가 가고, 그래서 그렇게 많은 책들이 그를 모든 각도에서 조명하려고 했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Merton에 대한 Introduction은 이렇게 시작이 된다. 

It is impossible to adequately “introduce” Thomas Merton. I have a sense I might almost as well attempt to introduce God. This is not because I worship Merton but because he was an extraordinarily complex and complicated man, multifaceted, diverse, and variable. He was one of those occasional people who could be described as “larger than life”.

 

500 페이지의 Reader 어떤 방식으로 읽을까 생각하니 이것이 장난이 아니다. Reading by Typing 물론이지만.. 페이지부터 읽을 것인가.. 아니면 난독random 하게 골라서, 아니면 다른 곳에서도움 받아서 읽을 것인가.. 아직은 전혀 idea 없다. 하지만 이제까지의 경험으로 나는난독으로 시작할 하다. 나에게 방법이 제일효과적임을 나는 알기 때문이다.

 

  1. 한 여름에 순교자 성당 대성당에서 성체조배를 해본 사람들이면 이것이 무슨 말인지 짐작이 갈 것이다.
  2. 이것은 또한 신자 수와 헌금액수에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3. 예수회신부님들이나 수도회 수사들과 다른 일반 목회자들

st-john-paul-2며칠 전이던가.. 우리의 미국본당의 달력을 보니 10월 22일에 Bl. John Paul II라고 적혀 있었다. 이 달력은 교회달력이라서 일년 열두 달 거의 매일 성인의 feast day가 적혀있다. 매일 미사를 다닌 이후 나는 이렇게 매일 성인의 축일이 있던 사실에 새삼 놀랐고 얼마나 내가 ‘무식한 천주교 신자’였던가 부끄럽기도 하였다. 매일 미사를 다니다 보면 ‘부수입’으로 이렇게 성인열전을 가볍게라도 공부하게 되어서 아주 유익하다.

그런데 오늘 10월 22일 수요일 미사엘 가니 바로 요한 바오로 2세의 ‘첫 축일’ 이었음을 알게 되었고 며칠 전에 잠깐 본 Bl. John Paul II가 생각났다. Blessed John Paul Second 그러니까 ‘복되신 요한 바오로 2세’의 축일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inaugural feast day, 시성 후 첫 축일이라서 나는 무슨 ‘역사적인 사건’을 겪는 듯 가벼운 흥분이 스며들었다. 올해 부활절 때 시성이 되신 후 첫 축일.. 역시 역사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나의 살아 생전에 ‘살아 계셨던’ 교황님이었고 나의 살아 생전에 돌아 가셨으며, 또한 살아 생전에 성인이 되신 것은 나로써는 조금 역사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것이다.

 

무척 많은 ‘일반 인’들이 이 성인을 개인적으로 좋아하지만 나도 그들에 못지 않게 이분을 좋아한다. 아니 존경, 아니 공경을 한다. 내가 꿈에도 꿀 수 없는 role model로 삼고 살아간다고 하면 조금 over일까? 2005년 선종을 하실 때, 나는 처음으로 이분에 대해 깊이 공부를 하고 묵상을 하게 되었고 그 당시 나는 이분이야 말로 나의 남은 평생 role model로 삼아도 문제가 없을 것이라 100% 확신을 하였다. 그 이후 나는 얼음처럼 차갑게 얼었었던 나의 신앙심을 조금씩 녹여 나가기 시작해서 현재까지 계속 그 여파로 녹아가고 있다고 생각을 한다. 어떠한 인생관, 세계관, 가치관, 그리고 세속적인 변화에도 이분만은 변함없이 ‘진실’을 밝히고 선포하실 것이라 나는 믿게 된 것이다. Do not be afraid라는 간단한 명언을 나는 얼마나 좋아했던가?

처음에는 약간 감상적인 기분으로 이분을 존경하기 시작했지만 시간이 지나며 더 이 성인을 알아가며 인간 요한 바오로 을 ‘절대적’으로 믿고 존경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나를 매료시켰던 면은 이분의 ‘찬란한 지적 은총’이었다. 철저한 신앙적 믿음에 못지 않는 지성의 깊이는 상상을 초월하는 듯 하다. 한 마디로 ‘공부 잘하는’ 교황인 것이다. 후계 교황인 베네딕트 16세가 아마도 지적으로 이분을 능가할 지도 모르지만 베네딕트 16세는 요한 바오로 2세에 비해서 다른 면이 떨어지는 듯 느껴진다. 절대로 굽힐 수 없는 지켜야 할 ‘진리, 교리’를 지켰고, 세계 정치를 신앙적인 눈으로 설득시켜는 힘은 아마도 이 요한 바오로 2세 성인을 따를 수가 없을 것이다.

오늘 이날을 맞아 ncregister.com에 관련 기사가 실렸는데 Catholics Remember St. John Paul II’s Personal Impact on Inaugural Feast란 제목으로 몇 명의 가톨릭 신자들이 이날을 맞아 이 성인에 대해 회고를 하는 기사였다. 평범한 젊은 신자에서 신부님까지 포함 된 이런 개인적 경험 일화를 보면서 1978년부터 2005년까지 이 성인이 세계적으로 미친 영향, 거의 한 세대에 걸친 범세계적인 불굴의 선교는 앞으로 상당한 기간에 걸쳐서 험난하고 어지러운 세상의 등대역할을 하리라 확신한다.

싸늘하고 깜깜한 가을 새벽

포근함과 따뜻함을 주는 radiant heater finally..

포근함과 따뜻함을 주는 radiant heater, finally..

새벽 5시에 깨어나니 칠흑 같은 어둠이 유난히 싸늘하게 느껴진다. 아~ 이제 2014년도 ‘겨울’이 서서히 오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집의 Central Heating이 kick-in 된 것이 지나간 10월 5일 아침이었고, 그때 유난히도 끈적거리던 2014년 여름 기운이 순식간에 식어버렸다. 하지만 그 이후 간간이 이어지던 Indian Summer 로 말미암아 ‘월동 준비’는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 동안 심지어 tornado siren을 새벽에 듣기도 해서 아직도 따뜻한 10월의 나날을 보냈지만 역시 며칠 전부터 평년 같은 기온으로 급강하.. long sleeves shirts, pants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럴 때면 사실 약간 아쉬움이 남는다. 조금 더 편한 짧은 차림을 하고 싶은 것이다. 워낙 길었던, 은근히 덥던 여름이어서 올해의 ‘단풍’은 정말 늦게 오는 모양.. 아직도 주변이 거의 초록색이다. 하지만 지난 며칠 새에 곳곳이 주황색으로 변하기 시작 하였다. 아마도 11월 중순 경이면 완전히 deep fall color로 변하고.. 천주 교회력으로 대림절(Advent)이 시작되는 11월 30일부터는, 성탄을 기다리게 될 것이다. 9월 초에 시작된 우리 가정의 ‘일생일대의 최대 project‘ 가 시작된 이후 세월이 어떻게,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감’을 잊고 사는 요즈음.. 이것이 현재 나의 주변에서 내가 느끼고 보는 66마일로 질주하는 세월의 모습이다.

 

 

Front side gutter re-gutted!

또 하나의 앓던 이가 빠졌다. 우리 집 앞쪽 지붕의 gutter를 완전히 새로 설치한 것이다. 내가 손수 달았던 이 vinyl gutter는 거의 15년이 넘어서 이은 부분이 여기저기서 물이 샌다. 뒤쪽 지붕은 올 봄에 모두 손을 보았지만 앞쪽은 그런대로 견딜 만해서 미루고 있었는데 바로 앞 문 위로 새는 빗물 때문에 벽돌 콩크리트 계단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정신이 바짝 들었다. 이구동성으로 ‘사다리’에 올라가지 말라는 주변의 우려는 잘 알지만.. 어찌하랴.. handyman을 살 돈도 없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알면서 돈을 쓸 수는 없지 않는가? 2006년에 작지 않은 사다리 사고의 경험이 있어서 이번 봄에는 정말 ‘초긴장’을 하며 사다리를 올라서 지금은 사실 큰 걱정은 하지 않는다. 근래 들어 YMCA에서 열심히 운동을 한 탓에 이런 일을 하는 것이 큰 무리로 느껴지지도 않는다. 하지만 이번 job은 하루 종일이 걸리는 큰 작업이었고 며칠 후까지 피로가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도 절약하고 나의 몸이 아직도 큰 무리 없이 움직인다는 사실에 그저 감사하기만 하였다. 며칠 후에 엄청난 폭우가 쏟아졌는데 다행히 이번에는 거의 완벽하게 ‘물 새는’ 것이 없어져서 기쁘기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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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te pergolas at Marian Hill

연숙의 레지오 꾸리아 부단장 임기가 7월 중에 끝이 난 이후 우리는 오랜만에 무슨 vacation이나 방학을 맞는 느낌으로 몇 주일을 보냈는데 그 여파로 주일 미사를 근처의 미국본당에서 보는 횟수가 늘어났다. 한 달에 한번씩 있는 레지오 꾸리아 월례회의 때에만 순교자 성당엘 가게 된 것이다. universal church를 자랑하는 천주교회는 사실 어느 곳엘 가던지 미사는 똑 같으니 사실 성사생활에 큰 변화는 없지만 그래도 한국교우들과 ‘친교’를 못 이루는 단점은 있다. 하지만 아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은 나는 ‘큰 손해’를 보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는다. 오랜 만에 간 듯한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했다. 기존의 ‘성모 동산’에 무언가 ‘멋진 것’이 세워진 것이다. Bench까지 달린 앙증스럽게 귀여운 두 pergola였다. 성모님을 옆에 두고 그곳에 앉아 있는 것을 상상하니 흐뭇한 idea가 아닌가? 주변이 ‘너무나 삭막한’ 성모동산..이었는데 그래도 이것으로 조금은 포근한 느낌을 주게 되었다. 본당 목수가 손수 design을 했을까.. 아니면 home depot에서 kit를 샀을까? 하지만 아주 알맞은 design으로 보였다. 돈이 없어 항상 쩔쩔매든 인상을 주던 본당에서 어떻게 이런 $$을 쓰게 되었을까? 누가 이런 것을 제안하고 밀어 붙였을까.. 생각도 해 보았다. 한마디로 dollars well spent라고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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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bey, a Live Laptop

2014-10-20 10.39.04-1우리 집 bully doggie, Tobey도 이제 12월에 10살 생일을 맞게 되었다. 사람의 나이로 나보다 더 늙었다는 것, 조금 슬퍼지기도 한다. 생후 1개월 쯤에 우리 집엘 왔나.. 이제는 좋던 싫던 완전히 우리 식구가 되었다. 성미가 유별나고 폭력을 가끔 쓰기도 해서 다른 식구들에게 미움도 사곤 했지만 그래서 그런지 나는 정이 들었다. 나를 너무나 잘 알고 ‘이해’하는 이 Tobey는 어떨 때는 나의 분신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한다. 24시간 나를 졸졸 따라다니는 것이 처음에는 너무나 부담이 되고 귀찮기도 했지만 이제는 완전히 나도 적응이 되어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가 섭섭해지기도 한다. 근래에 들어서는 flea때문에 고생을 하고 있지만 이제는 flea와 ‘같이 사는 지혜’도 터득해서 처음보다는 덜 고통스럽다. 나와 같이 동네를 산책하는 것도 이제는 거의 8 년째가 되어간다. 완전히 습관이 된 것이다. 나도 운동이 되고 Tobey도 아마도 건강에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최근에 들어서 자세히 움직임을 관찰하곤 하는데 다행히 아직도 걷는 것은 변함없이 씩씩하다. 주위에 ‘늙은 개’를 키우는 집들을 보면 우리도 조금씩 ‘노후 대책’을 마련해야 하나 하는 걱정이 생기기도 한다. 눈이 멀어가는 개, 움직이지 못하는 개.. 등등.. 주인을 잘 만난 개들이라 크게 고통을 받지는 않지만 그것을 옆에서 보는 사람들의 기분은 어떨까? 나와 Tobey가 추운 계절이 돌아오면 좋아하는 습관 중에는 나의 무릎에 올려 놓는 것이다. 책상 위에 다리를 얹으면 뛰어올라 그곳에서 퍼지는 것이다. 이때 가끔 나는 뒤에서 번쩍 몸통으로 들어서 나의 가슴에 앉곤 하는데 처음에는 너무나 불편해 하더니 지금은 은근히 그런 시간을 기다리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이 녀석이 나보다 먼저 떠난다면 나는 이 순간들을 가장 값지게 추억으로 남겨둘 것 같다.

 

 

 

¶  들어가며

연세대학 시절의 추억과 회상에 관한 나의 memoir blog을 쓴지 일년이 훨씬 넘어가고 있다. 첫 두 편의 연세대 회상기(1966~1967)를 쓸 당시 너무나 진을 뺐는지 한동안 그것에 대한 것을 잊고 싶기도 했다. 그렇게 쓰고 싶었던, 누가 보거나 말거나 써서 남겨야만 했던 그 시절의 이야기 임에도 많이 희미해진 기억과 싸우는 것도 힘들었다.

또한 그 당시를 회상을 할 때마다 가슴이 벅찰 정도로 느껴지는 흥분과 격정은 어떨 때는 며칠이고 나를 못살게 굴 때도 있었다. 이제 세월의 약이 작용해서 다시 나의 약해져 가는 기억력과 싸울 용기가 충전이 되었다. 연세대학의 추억 제 3편은 2편의(1학년 가을학기) 이후, 그러니까 대부분 대학 2학년 시절, 그러니까 1968년 경과 그 전후의 이야기가 된다.

 

¶  1.21사태, 김신조, 프에블로, 월남 확전

대학교 1학년 시절이 2년에 걸쳐서 두 동강이로 갈라지고1 조금 패배의식도 느꼈지만 마지막 한 학기에 나는 모든 것을 정신적 육체적으로 회복 하고 제 정신을 차리면서 1968년을 맞았다. 1968년 1월에는 나의 생일이 있는데 바로 나의 20세 생일이 되는 달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도 그 해 나의 생일이 기억에 더 남는 것이, 바로 생일 전날 밤에 ‘북괴’의 김신조를 위시한 31명의 무장 공비2 게릴라 특공대가 청와대 근처까지 잠입해서 그 유명한 1.21사태를 유발했기 때문이었다. 유혈 사태의 대부분은 1월 21일에 보도가 된 것이어서 일.이일 사태라고 이름이 붙었다.

 

박정희 목따러..김신조

박정희 목따러..김신조

박정희 목 따러.. 나의 생일을 전후로 대강 서울의 날씨는 정말 무섭게 춥다3. 그때도 예외가 아니어서 모든 것이 무섭게 얼었던 기억인데, 죽음을 각오한 김일성의 로보트(robot)4 공비들에게는 그런 추위가 아랑곳 없었다. ‘박정희 목을 따러’ 기계처럼 행진하며 쳐들어 온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등골이 오싹할 정도의 김일성 개XX의 전쟁도발이었다. 그때 만약 그 무장공비들이 작전에 성공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나의 인생도5 바뀌었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대부분의 공비들은 사살되거나 휴전선을 넘어 도주를 했고6 유일한 생존자는 김신조 뿐이었다. 기자회견에 황급히 끌려 나온 그의 얼굴은 얻어맞은듯한 멍으로 일그러져 있었고, 첫 마디가 ‘박정희 목 따러 왔수다..’ 그런 정도의 것으로 기억을 한다. TV에서 그 투박한 이북사투리를 듣고 모든 사람들이 잠에서 깬 듯이, ‘정부의 선전대로 북의 위협은 사실이구나..’ 하는 조금은 자책적인 심정으로 정말 김일성의 위협이 국가적 생존위협임을 모두 실감을 하게 되었다. 비록 이 김일성의 무모한 작전은 실패했지만 이 사건의 여파는 나의 남은 대학시절과 그 이후에도 두고두고 우리에게 미쳤다7.

 

프에블로 나포.. 이 사건 이후 얼마 안 있어, 이번에는 미국의 조그만 첩보선 프에블로(Pueblo) 호가 원산 앞바다 공해에서 북괴에 나포가 되고 그 과정에서 선원들은 죽거나 포로가 되는, 또 하나의 한반도 전쟁 위기를 맞는다. 곧바로 미국의 원자력 항공모함 Enterprise가 원산 앞바다에 나타나고 무력행사를 불사하는 미국의 성명이 발표되는 등 정말 심각한 전쟁의 구름이 몰려왔다. 하지만 월남전에 완전히 발이 빠진 미국은 더 이상의 작전을 중지하고 외교적으로 포로 석방 협상의 노력을 시작하게 되어서 더 이상 악화는 피하게 되었다.

 

1968 사이곤 Tet offensive

1968 사이곤 Tet offensive

악화일로 월남전.. 사실 그 당시의 국제정세는 미국의 월남전 100% 개입으로 말이 아니었다. 국제적인 비난이 거세지고, 미국내의 여론도 학생을 중심8으로 악화일로, 데모는 끊임이 없는 그야말로 미국판 ‘운동권’의 시대이기도 했다. 박정희의 대한민국은 조금 다른 입장이었는데, 박정희 정부는 ‘명분이 밥 먹여주냐.. 실리가 최고다‘ 의 정책을 거세게 밀어 부친 것이다.

거의 6만 명의 전투부대를 월남에 보내며, 미국과의 협상으로, 수출, 월남전 수입 등으로 경제 제1주의를 고수해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의 국내정치의 분위기로 사실 박정희는 반대를 무리 없이 무마하는 권력과 정치 기술을 잘 이용해 나갔다. 경제적인 효과가 국민의 피부에 느껴지기 시작하면 모든 반대와 파병에 따른 후유증을 처리하리라 보았을 것이다. 또한 그것은 사실상 그렇게 되어가고 있었다. 실제로 대한민국으로 $$$ 가 흘러 들어오고, 경제 규모가 조금씩 커지고, 기간산업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며 우리들 눈과 피부로 ‘무언가 잘 되고 있다’ 라는 희망이 느껴지던 그런 시절이었다.

 

박정희의 고민.. 당시 공산주의 정치세력의 두목 격이었던 소련과 중공은 무언가 미국의 군사력을 월남전에서 분산시키려 했을 것인데, 김일성은 분명히 그 총 두목들에게, Yes Sir..하며 머리를 굴렸을 것이고 그것이 바로 1.21 사태프에블로 선박 나포 사건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사실 이 연속적인 김일성의 불장난의 결과로 곧바로 대한민국 국회에서는 야당에서 추가 월남파병 보류안 이 나오게 되었지만, 박정희가 그것이 쉽게 통과되도록 놔둘 리는 없었다. 미국 자신은 월남전에서의 고전을 모를 리가 없었지만, 파리 평화협상 회담과 더불어, ‘명예로운’ 철수작전을 구상하면서 B-52 전폭기로 월맹(하노이 정부) 폭격을 계속하는.. 참 미국이 고전하던 시절이었다. 그 반면에, 김일성과의 ‘의미 있는’ 평화협상이 100% 불가능했던 우리들은 미국의 ‘꼬붕’ 이라는 국제적 비난과 고립9에도 불구하고, 그저 ‘반공, 경제’ 의 두 가지로 똘똘 뭉치며 살 수 밖에 없었다.

 

 

¶  나를 1968년으로 보내주세요

이런 으시시 한 국제, 국내 정치적 배경에서도 나는 ‘희망’의(why not, 그때는 팔팔한 20세였느니..) 대학 2학년 시절을 맞게 되었으며, 나의 오래된 추억 중에서도 이 1968년의 대학2년 시절은 나에게 제일 ‘신나며 기억하고 싶은’ 시절로 꼽힌다. 사실, time machine을 타고 과거의 한 해로 돌아갈 수 있다고 하면 나는 주저 없이 내 나이 20세였던, 1968년으로 가고 싶을 것이다.

 

정법대 앞에서 박창희, 이윤기, 이경우 2학년이 시작될 무렵 1968년 이른 봄

정법대 앞에서 박창희, 이윤기, 이경우 2학년이 시작될 무렵 1968년 이른 봄

 

¶  연세대 보건학강의

학부 2학년이 되면서 1학년의 ‘교양학부’는 끝이 나고 대망의 전기공학 전공과정이 ‘조금씩’ 시작되었다. 교양학부 1학년의 과정은 마치 고교 3년 과정의 연장선 같은 느낌을 주었지만 그래도 상아탑 대학의 맛을 보여주는, 전공과는 상관이 없는 과목들도 많아서 그런대로 느낌이 좋았다. 특히 연세대만이 자랑하는 의대교수들이 가르치는 과목들, 특히 ‘보건’이라는 것도 기억에 상당히 남았다. 전매청 담배 소비의 극치를 이루던 그 나이에 그 과목은 우리들에게 ‘소름 끼치는’ 담배의 해독에 대해서 무자비하게 경고하기도 했다.

그런 교육은 정말로 선견지명적인, 몇 십 년 후에 미국에서 담배가 제한 받기 시작한 것을 보면, 연세대 의대 교수들의 사명적인 결단이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런 교육을 받은 우리들 조차도 ‘성인들의 특전’이었던 담배를 오히려 더 피고 즐기는 대학생 시절을 보내게 된다.

 

 

¶  매력적인 담배와 술

이 무렵에 나는 ‘진정한 성인 남자’의 상징이었던 ‘대망’의 담배10를 배우게 되었다. 1966년 대학 입학 후 거의 2년간 나는 별로 담배를 피울 마음이 없었는데 1968년 들어서야 주위의 친구들 보다 거의 2년 늦게 이 담배에 대한 무관심이 풀어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술의 맛은 그보다 6개월 전 어머님이 미제시장에서 사다 주신 ‘깡통 맥주, Black Label‘로 이미 알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드디어 담배에 도전한 것이다. 1학기가 시작되기 전, 어느 날 같은 상도동에 살던 나의 원서동 죽마고우 유지호가 놀러 와서 그가 피우던 담배11를 나에게 권한 것이다. 그 때, ‘한번 피워보자’ 라는 생각이 들었고 실행에 옮기었다. 결과는 뻔했다. 피우고 나서 나는 거의 ‘기절’ 상태로 빠져서 한 동안 혼미상태를 경험하였다. 하지만 그 다음의 흡연은 완전히 성공이었고, 그 맛과 멋도 조금씩 알게 되었다. 그것은 다른 ‘성인 식’의 하나였다. 그 이후로 나는 꽤 담배를 많이 피우는 축에 속한 대학생이 되었다12.

 

 

¶ 담배와 문상희 교수

연세대와 담배..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일화가 있는데.. 이 사실을 모르면 아마도 당시 연세대 ‘남학생’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공개적’인 사실이었다. 당시 신과대학에 ‘문상희’라는 교수가 있었는데 이분이 바로 요새 말로 하면 담배추방운동의 우두머리 중의 우두머리 격이었고, 그 추방 방식이 독특했고 문제가 되기도 했다. 캠퍼스를 돌아다니며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무조건 ‘저지’를 하고 ‘폭행’까지 했다. 자유의 전당이라고 하는 대학 캠퍼스에서 그것도 신과대학 교수가 ‘불심검문’을 하며 ‘폭행’을 한다는 사실은 아무도 믿지 못할 것이지만 당시에는 사실이었다.

나는 직접 ‘얻어 맞는’ 경험은 못 했지만 실제로 ‘목격’은 했다. 입이 벌어질 정도로 놀랐지만 대학당국에서 ‘아무도’ 그를 제지 못했다. 지금 생각하면 당시의 ‘개신교 문화’에서 담배는 ‘지독한 악’으로 여겨졌던 것도 한 몫을 한 것이 아니었을까? 심지어는 동료 교수들 조차 그의 제지를 받았다고 했을 정도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 문교수님은 ‘선각자’임에 틀림이 없지만 당시에는 ‘빈축과 냉소’의 대상이기만 했다. 제일 ‘우스운’ 사실에는 어떤 신문사 기자가 도서관 앞에 앉아 있다가 갑자기 이 문교수에게 얻어 맞고 항의를 하니.. 문교수 왈.. 왜 옆에 있는 사람이 담배 피우는 것을 제지 못했느냐고 했다고 한다. 사실인지 과장인지 확인을 할 길은 없지만 당시에는 꽤 유명한 소문이기도 했다.

 

¶  복교생과 재학생, 민바리와 군바리

새 학기가 시작되면서 ‘복교생, 복학생’들이 대거로 들어왔고 그보다는 적은 수의 재학생들이 입영영장을 받고 학교를 떠났다. 다행히 나와 나의 친구들의 대부분은 아직 영장을 못 받아서 큰 변화가 없었다. 나는 다른 친구들과 다르게 호적상 사망으로 처리된 6.25때 납북되신 아버지 ‘덕분’13에 병역법상 ‘부선망 단대독자14 라는 긴 이름의 ‘특혜’가 있어서 영장이 나와도 졸업 후로 입영을 연기할 수 있는 입장이어서 졸업 전까지는 군대 생각을 안 하고 있었다.

 

복학생들이 대거 복교를 하면서 순식간에 우리 과의 분위기는 변했으며 완전히 나이별 2파로 나뉘게 되었고, 재학생들은 ‘민바리’, 복학생들은 ‘군바리’로 불리게 되었다. 나이가 거의 2~3년 차이가 나는 두 그룹이 생긴 것이다. 분명히 나이가 위였던 그들이었어도 우리들에게 반말을 쓰지 못했지만 우리들은 깍듯이 선배 대우를 해 주었다. 하지만 같은 고등학교 동창관계가 되면 이것은 완전히 다시 고등학교로 간 기분이 들 정도로 거의 군대식으로 대우를 했다. 나의 경우에는 중앙고 선배(54회 2명, 53회 1명)들이 3명이 들어왔고 우리들은 큰 원군을 만난 듯 그들을 친형들처럼 따르게 되었다. 재학생 중에 중앙고 출신이 5명이나 있어서 총 8명의 ‘중앙고’ 그룹이 형성되었고, 숫자로써도 상당한 세력이었다. 그 3명의 중앙 선배들이 바로 안낙영, 오성준, 최종인 제 형들이었고, 이들과 나는 졸업할 때까지 3년을 같은 전공으로 공부를 하게 된다.

 

재학생들과 복학생들은 비록 3~4년 정도밖에 나이차이가 없었지만, 생각과 행동은 완전히 서울과 부산처럼 달랐다. 군대를 갔다 온 이유도 있었지만 우선 공부하는 자세가 아주 심각했다. 이 형들은 졸업과 동시에 취직을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에 비해서 우리 재학생들은 어차피 도중이나 졸업과 동시에 군대를 가야 하기 때문에 조금은 불투명한 미래를 보며 방황하는 기분이었다. 그 당시 나이에서 군대 복무기간인 2년 6개월 (거의 3년)은 참 영원처럼 긴 것처럼 느껴졌기에 더욱 절망감 같은 것도 느끼곤 했다. 그런 환경에서 시작된 나의 2학년 학교 생활은 조금씩 조금씩 학점에 연연하는 것으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1학년 1학기 때의 ‘땡땡이’의 쓰라린 경험은 잊지 않고 학점의 최소한 하한선은 유지하려 애는 썼다. 하지만 지난 1학년 2학기, 가을학기 때 진정한 공부의 맛을 느끼던 그 당시의 정열은 어쩐지 많이 빠져나간 기분이었다.

 

¶  중앙고 동창들과 아미고 클럽

당시 나는 주로 중앙고 출신 동창들과 타교 출신 몇몇과 어울리게 되었는데, 그 중에는 화공과의 중앙고 동창 양건주도 있었다. 왜 화공과의 양건주가 전기과의 우리들과 섞이게 되었는지는 확실치 않았으나 그냥 중앙고 출신이었기에 그랬을 것이다. 전기과에는 이윤기, 박창희, 김태일, 이상일이 중앙 동창이었지만 사실 박창희 김태일 이상일은 모두 나의 중앙고 1년 후배들 이어서 친구로 지내기는 조금은 거북한 관계였다. 하지만 여기에 중앙 1년 후배였던 박창희가 사실은 ‘옛날’ 원서동에서 잔뼈가 굵었던 죽마고우 친구였기에 아주 묘한 ‘일년 선배,후배’로 이루어진 그룹이 형성된 셈이다. 나는 창희와 직접적인 친구관계여서 큰 문제가 없었지만 나의 동기 친구인 이윤기는 사실 갑자기 1년 후배들과 친구처럼 지내야 하는 문제가 있었지만 그런 것을 따질 그런 나이들이 아니었다. 한마디로 문제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자연스레 형성된 그룹의 이름의 ‘아미고 클럽’이었다. 아미고는 물론 Spanish로 amigo, 그러니까 ‘남자친구’란 뜻이었다. 아마도 그 시절 유행하던 Jim Reeves의 hit country, Adios Amigo에서 이름을 따 왔을 것이다. 이 클럽에는 타교 출신들도 있었는데, 전라도 유학생 김진환, 강원도 유학생 김철수가 바로 그들이었다. 그리고 이상일은 비록 중앙 동창이었지만 우리 그룹에는 전혀 관계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당시 우리 아미고 클럽은: 화공과 양건주, 전기과 나(이경우), 이윤기, 박창희, 김태일, 김진환, 김철수 등으로 7명이 연세대 캠퍼스에서 만나거나 학교 입구에 있는 ‘굴다리’ 바로 앞에 있었던 ‘빵집’에서 모여서 ‘잡담’을 즐기곤 했는데, 사실 그것이 보기보다는 참 즐거운 시간 들이었다.

 

¶  1968년 봄의 관악산

Scan10308-1그 해 봄에 아미고 클럽 전원이 관악산으로 ‘등산’ 을 갔었는데 그 때의 ‘흑백’사진이 고스란히 남아서 그 당시의 우리들 ‘꽤죄죄’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그 당시에 관악산엘 가려면 용산 시외버스 터미널로 가서 과천 행 시외버스를 타고 갔다.

비록 ‘구제품 복장, 교복’등의 신세에서는 벗어났다고 하지만 당시 대학생들의 복장은 참 가관이었는데, 100% 신사복에서 100% 염색된 작업복까지.. 천차만별이었고 등산복도 마찬가지.. 우리 클럽에서 박창희를 제외하고는 등산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그저 허름한 옷들.. 우리들은 그저 ‘잠바’라고 부르던 옷 차림 일색이었다. 외모에 각별한 감각이 있었고 등산의 유행에 민감하던 박창희는 우리가 보기에 완전한 ‘히말라야 등산대’ 옷차림으로 관악산을 올랐다.

 

그때 남은 사진을 보면 ‘진실로, 진실로’ 어제 같은 착각에 빠지곤 한다. 너무나 그 당시를 생생하게 기억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술에 취하는 것을 경험했다. 관악산 정상 바로 아래 자리를 잡고 신나게 밥을 해 먹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는데 누가 술을 가지고 왔는지 기분에 취해서 멋도 모르고 마신 것이다. 우리들은 모두 취해서 돌아오는 시외버스 속에서 너무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사실 그때 나는 난생 처음으로 술에 취하면 기분이 너무나 좋아진다는 사실을 체험하였고, 평소보다 말이 더 많아지고, 피하거나 못했던 말들이 ‘거침없이’ 나온다는 신기한 현상도 알았다.

 

아미고 양건주, 김진환, 김철수, 이경우, 이윤기, 박창희, 김태일.. 과천에서 관악산으로..  1968년 봄

아미고 양건주, 김진환, 김철수, 이경우, 이윤기, 박창희, 김태일.. 과천에서 관악산으로.. 1968년 봄

 

¶  연세대 연영회와 갈월동 양옥

학기 초에 기억나는 것 중에는 학교 내 서클 중에 연영회라는 서클에 가입하려 했던 추억이다. 그 당시에는 요새 흔히 쓰는 ‘동아리’라는 말이 없었고 그저 서클이라고 불렀다. 그 중에 연세대에는 역사가 깊다는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이었던 연영회(延影會)라고 불리던 서클이 있었고, 나와 양건주가 그곳에 가입을 하려고 그 모임엘 나가게 되었다. 왜 건주와 같이 그곳에 가입하려 했는지는 확실히 기억이 나지를 않지만, 나는 2년 전 입학했을 때 몇 개월간 사진, 카메라 등에 빠져서 살았다. 입학기념으로 어머님이 사주신 일제 Petri 카메라를 가지고 이곳, 저곳을 다니며 사진을 찍곤 했고, 도서관에서 사진 촬영에 대한 책도 많이 대출해서 읽기도 했다. 아마도 그래서 연영회에 관심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대학 2학년이니까, 특별활동도 하고 싶었던 마음도 있었다. 그 당시 입회신청을 해놓고 기다리니까, 연영회 신입회원 모임을 한다는 공지가 붙어서 읽어보니 ‘갈월동 어느 어느 빵집‘에서 모인다고 했다. 빵집에서 학교서클이 모이는 것이 조금 그랬지만, 아마도 환영하는 의미로 빵을 먹으며 모이나 보다 생각하고 건주와 그곳엘 갔는데, 가 보니 사실은 그곳에서 모임을 하는 것이 아니고 그 빵집 근처에 있는 연영회 ‘간부’의 집에서 모인다고 해서 안내를 받아서 단체로 그 집을 찾아갔다. 갈월동 그 빵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근사한 양옥집’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입추의 여지없이 연대생들로 꽉 차있었다. ‘근사한’ 여학생들도 꽤 있어서 흥미진진했는데, 그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커다란 거실 구석에 완전히 프로 같이 전기기타와 드럼까지 갖춘 rock band가 warming up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들도 모두 연영회원이라고 했는데 가만히 그 중의 한 명을 보니 낯이 익었다. 건주는 그를 곧바로 알아보았다. 중앙고 ‘심상욱’이라는 우리의 동기동창이었던 것이다. 그는 우리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는데, 건주가 가서 우리도 중앙고 출신이라고 했어도 그는 우리를 알아 보지를 못했다. 신입회원으로 꽉 찬 모임에서 간부, 임원들이 나와서 연영회 소개를 하고 돌아가며 자기 소개도 하고 했는데, 그 임원들은 새로 가입한 ‘멋진 여대생’들에게 꽤나 관심을 보였다. 사실은 그 여대생들도 그 ‘근사한 양옥집에 근사한 rock band’에 완전히 매료된 것으로 보이긴 했다. 그 모임에서 우리 둘은 뜻밖에 우리의 전기과 복학생, 중앙 선배 최종인 형을 만났다. 그도 사진에 꽤 취미가 있다고 했는데, 군대를 갔다 온 신입회원이 없었던 관계를 그 형은 아주 ‘정중한’ 대접을 받았다. 그렇게 멋진 모임이었었지만, 후에 우리는 그 모임에 전혀 나가질 못했다. 다른 곳에서 다른 흥미로운 일을 찾아 다녔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  이성에 눈이 뜨이던 시절

아미고 클럽의 남자친구들도 좋았지만 나의 연세대 2학년 시절은 내가 이성에게 완전히 눈을 뜨기 시작했던 시절이기도 했다. 사실 이전까지만 해도 나는 이성(異性)에게 크게 끌리는 그런 심정이 없었는데, 이때는 달랐다. 분명히 정상적인 20세의 남성 호르몬의 영향이 본격적으로 작용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나는 1968년, 연세대 2학년을 그렇게 생생하게 기억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 일년 전부터 나는 조금씩 무언가 여성에게 끌리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놀란 적이 있었다. 첫 번 것은 TV에서 본 어떤 여자 탤런트를 보고 밤에 꿈을 꾼 것이다. 그녀는 조영일 이라는 인기 탤런트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다른 탤런트 오지명이라는 사람의 부인이었다. 두 번째는 지난 가을학기 때 상도동 종점에서 치과를 다녔는데 그때 거기서 치과의사 조수를 하던 어떤 ‘여성’도 나의 꿈에 나타난 것이다. 그러니까 ‘아이’같았던 내가 분명히 ‘어른’으로 변하는 것을 느끼던 그런 때였던 것이다.

 

 

¶  남과 여, 윤여숙과 용정애, double date

그 당시 나의 원서동 죽마고우 친구였던 안명성은 한양대 섬유공학과엘 다녀서 나와는 별로 만날 기회가 없었는데 한번 연락이 와서 double date를 하자고 하였다. 솔직히 내가 깜짝 놀랐던 것이, 내가 알던 명성이는 나와 비슷하게 숫기가 없었던 것으로 알았는데 어떻게 여자 2명씩이나 알았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가 말하는 두 여자는 한양대학생 용정애 씨, 이화여대 생물학과 여대생, 윤여숙 씨였다. 명성이가 먼저 자기와 같은 대학에 다니던 용정애씨를 알았고, 그녀의 창덕여고 동창생인 윤여숙 씨를 데리고 나오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double date가 시작되었고, 우리는 그 당시 유행하던 불란서 영화 ‘남과 여’를 같이 보았다. 서울 근교의 광릉으로 피크닉도 같이 갔고, 관악산으로 등산도 갔다. 그것이 1968년 봄이었다. 그때 난생 처음으로 여성들과 가까이 어울리면서 이래서 사람들은 결혼을 하는구나 하는 ‘자연의 섭리’를 절실히 실감하기도 했다. 나의 의지도 상관이 없이 여성들에게 ‘무조건 끌리는’ 체험은 사실 나에게 겁을 주기도 했다. 학교 공부가 잘 되지를 않았던 것이다. 바로 6개월 전만해도 나는 공부의 재미에 푹 빠져 있었지만 지금은 정말 자신이 없었다. 학교 공부에 애를 먹기 시작한 것이다.

 

남과 여 (Un Homme Et Une Femme

 

double date는 명성이와 용정애씨, 나와 윤여숙씨가 짝을 되었는데, 그 이유는 명성이가 용정애씨를 먼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때 놀란 것은 명성이가 여자들을 다루는 자세가 정말 나에 비하면 성숙하고 노련했던 사실이었다. 그러니까 최소한 겉으로 보기에 자기 할 일을 다 잘 하면서 여자와 date를 즐기는 모습이었는데, 나는 정 반대였던 것이다. 내가 알아온 명성이의 모습과는 조금 다른 면을 본 것이지만, 그때의 나이 20세였으니 한창 우리들을 변하고 있었기에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되었다. 한마디로 말하면 ‘쑥맥’이었던 나는 ‘완전히’ 나의 ‘정상적’인 학교생활의 리듬이 깨어짐을 느꼈고, 학교 공부도 예전처럼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바야흐로 나의 이성에 대한 동경과 호기심이 완전히 싹이 트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한마디로 나는 그 윤여숙씨에게 빠진 것이었다. 나이가 우리와 거의 같았지만 학년은 하나 위였을 것이다. 그러니 그녀들은 우리들 보다 ‘훨씬’ 성숙하고 세련되어 보였다. 아마도 그런 점을 내가 좋아했을 것이다.

 

그 때 우리들 네 명은 중앙극장에서 개봉되었던 영화 ‘남과 여’ 를 같이 보았고, 관악산으로 등산도 갔었다. 또한 당시 유원지가 별로 없었던 때 그런대로 갈 수 있었던 ‘광능’이란 곳으로 놀러 가기도 하였다. 그 해의 봄은 정말 찬란한 느낌이었고, 하늘에 떠있는 느낌이었다. 나로써는 아마도 puppy love같은 심정을 가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꿈같은 시절은 오래가지 못했다. 봄이 거의 가던 무렵, 명성이가 나를 보자고 해서 만나니, 그 녀석 왈, 윤여숙씨가 이제 나를 안 만난다고 했다는 통고였다. 쉽게 말하면 나는 한마디로 ‘차인 것’이다. 감정처리에 지독히도 미숙했던 나는 사실 실망보다는 당황 그 자체였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몰랐다. 헤어지자는 이유를 안다는 자체가 우습지만 명목상은 그녀의 아버지가 경찰관이었는데, 우리들이 같이 다니는 것을 보았다는 것이다. 참 편리한 이유였다. 물론 내가 싫다는 뜻을 그렇게 나의 체면을 세워준 것이라고 나는 해석했다.

그때 나는 일생 처음으로 동대문 근처의 어떤 술집에서 명성이와 같이 막걸리를 퍼 마셨다. 그리고 비틀 거리며 집으로 왔다. 그래도 그녀는 나보다 성숙했었는지 우리들이 ‘마지막 인사’할 기회를 주는 아량이 있었다. 돈암동 종점 부근에 있었던 한일다방에서 우리는 마지막 대화를 하고 헤어졌다. 그 당시 그 다방에서는 Engelbert Humperdinck의 당시 hit ‘Am I that easy to forget‘ 이 요란하게 나오고 있었다. 완전히 그 때의 situation에 알맞은 제목의 노래였다. 이때 나의 ‘상처’는 두고두고 이성(여자)에 대한 나의 생각과 행동에 영향을 미쳤다. 또한, 전에 나의 다른 blog에서 1968년 당시 나의 죽마고우 친구 유지호를 회상할 때, 윤여숙씨에 대한 나의 ‘선의의 장난’을 언급한 것도 있었다. 사귄 지 불고 몇 개월 만에 이 두 여대생들과는 헤어지게 되었지만 명성이는 저력을 발휘해서 용정애씨와 계속 관계를 유지하는 듯 했고 몇 년 뒤에 윤여숙씨도 잠깐이나마 한번 보았지만 이미 그때에는 나도 전에 비해 훨씬 성숙한 남자로 변해 있어서 아주 유연한 자세로 그녀를 대했던 것으로 기억을 한다.

 

 

¶  오성준 형과 이대생 김갑귀

오박사, 오성준 형

오박사, 오성준 형

비록 지난 학기에 비해서 공부에 신경을 덜 썼지만 아미고 클럽의 친구들 덕분에 사실 학교생활은 전에 비해서 훨씬 재미있었다. 그러니까 학점에 연연하던 생활보다 훨씬 더 진짜 대학생 같은 느낌도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미고 클럽은 역시 100% ‘거무틱틱하고 냄새 나는’ 남자들 뿐이어서 모이기만 하면, ‘우리도 한번 여성 동무들과 어울릴 수 없을까..’ 하고 성토를 하곤 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우리의 염원이 이루어지는 계기가 왔다. 우리의 ‘자랑스런 군바리’ 중앙선배 오성준 형이 구세주처럼 우리 앞에 ‘답’을 가지고 나타난 것이다. 우리에게 형이 아는 친구의 여동생을 소개시켜 주겠다는 믿을 수 없는 희소식이었다.

 

오성준 형은 자그마한 체구였지만 사교성 좋고 유머러스하고 특히 후배들을 아주 잘 돌보아주는 그런 타입의 사나이여서 우리들이 아주 잘 따랐는데, 그 형의 공군 동료친구가 연세대 뒤에 있는 북가좌동(남가좌?)에 살고 있고 이화여대에 다니는 여동생이 그 집에 살고 있다고, 나와 이윤기를 데리고 그 집엘 가게 되었다. 우리들은 그렇게까지 ‘빨리’ 도와줄 줄은 몰라서 그저 ‘황송하고 고맙게’ 따라갔다. 하지만 그 집엘 가보니 문제의 그 형의 친구도, 여동생도 없었다. 그것은 그 오성준 형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일이나 문제가 있으면 질질 끌며 생각하기 보다는 행동에 먼저 옮기고 보는 그런 시원스런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나중에 그 문제의 이대생과 만나게 되었는데, 그녀의 이름은 아직도 생생한 ‘김갑귀’.. 아니 무슨 여자 이름이 갑귀인가? 한자이름으로 오형의 말대로 ‘갑오년에 귀하게 태어난’ 것인지는 잘 몰랐지만 한번 듣고 ‘절대로’ 잊지 않는 이름이 되었다. 만나보니 이름과는 느낌이 다르게 아주 귀엽게 생겼고, 행동도 귀여웠고, 어리광 부리는 느낌이 절로 흘러 나왔다. 그녀는 이화여대 법대에 다닌다고 했지만 법대 스타일로는 보이질 않았다. 우리들은 그녀에게 우리의 아미고 클럽을 소개하고 거기에 맞는 여대생들 좀 소개시켜 달라고 매달렸다. 이때의 이런 ‘궂은’ 일들은 나와 이윤기가 도맡아서 했는데, 아직도 왜 우리 둘만 여자에게 ‘관심’을 가지고 덤볐는지 확실치 않다. 지금 생각에, 나는 그 당시 ‘윤여숙 사건’으로 ‘여자 실전 경험’의 소유자가 되었고 그래서 조금 더 성숙해 졌을 것이고 이윤기는 그 당시 연애 같은 것은 안하고 있었지만 원래 cool한 사나이라서 ‘묵묵히’ 여자들에게 관심이 많았을 것이라는 추측을 한다. 아미고 클럽의 나머지 ‘아이’들은 사실 나보다도 ‘덜 성숙’한 상태여서, 여자들에게 그렇게 목매거나 하지는 않았다.

 

 

¶  남녀 클럽, 해양다방, 선화공주님

이렇게 우리는 ‘여대생’들을 우리 클럽에 연관시키려 시도를 했고, 결국 ‘착한’ 김갑귀 씨는 자기 과 科 여대생들을 데리고 나와서 meeting비슷한 것을 했는데.. 이대 앞 어느 음식점에서의 그 첫 모임은 아주 어색한 느낌이었다. 남자들 보다 여자들이 ‘훨씬’ 성숙하고, 키가 훌쩍 컸고, 그래서 그런지 나이까지 들어 보였던 것이다. 이런 과정으로 우리는 정기적으로 만나는 것으로 ‘합의’는 보았지만 무언가 ‘화학적, 체감적’인 것이 맞지를 않았는지, 모임 자체가 흐지부지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그 중에 몇 명하고는 따로 만나는 기회가 몇 번 있었다. 그 중에 생각나는 사람이 ‘신인옥‘ 씨였는데 왜 그 사람의 이름과 얼굴까지 기억이 나는지 나도 잘 모른다. 특히 그녀의 pop song에 대한 지식은 상당해서 대화가 아주 재미있었다. 또 한 명, 키가 무척 컸는데 불행히도 얼굴이 아주 못생겼던 그 여대생, 미도파 옆에 있었던 ‘거대한 소파의 운동장’, 삼화다방 에서 만나곤 했는데 그 때마다 주로 이윤기와 같이 만나곤 했다. 하지만 여름방학이 다가오면서 그들과의 만남도 끝이 나게 되었다.

 

한번 여대생들과 어울리기 시작하면서 우리들 (주로 이윤기와 함께)은 그 ‘매력’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염치불구하고 김갑귀 씨에게 다시 매달릴 수 밖에 없었다. 그 당시 그녀가 유일한 ‘여자들과의 통로’였기 때문이었다. 역시 김갑귀 씨는 동정심도 많고 착한 여자였다. 이번에는 숫제 자기의 친한 여고동창생을 소개시켜 주겠다고 한 것이다. 그녀는 창덕여고 출신이었다. 지난번 나에게 상처를 주었던 윤여숙 씨도 창덕여고 출신이어서 나는 창덕여고와 무슨 인연이 있는 모양이었다. 사실 가회동에 오래 살면서 창덕여중고는 나에게 참으로 친숙한 학교이긴 했다. 그 친한 친구가 바로 이선화씨였다. 실은 그 전에 이미 한번 그녀를 본 적이 있었다. 김갑귀 씨와 만날 적에 한번 같이 나온 것을 멀리서 본 적이 있었던 것이다. 이제 그녀를 ‘공식적’으로 소개를 받게 된 것이다. ‘바보, 선화공주’, 이선화 씨..

 

이선화씨는 서울간호학교에 다니던 간호원 지망생이었고, 그녀의 간호학교 친구들을 소개시켜 주겠다고 해서 우리들은 ‘여자에 대한 제 2차의 도전’을 하게 되었다. 1968년 1학기(봄학기)가 거의 끝나갈 무렵에 명동의 어느 식당 2층 방에서 우리들은 단체로 만나게 되었다. 나와 이선화씨는 구면이었지만 나머지는 모두 처음인 셈이다. 이번에는 지난번 이대생 들과의 모임의 실패를 만회하고자, 나가기 전에 조금 계획을 만들어 놓고 그대로 밀어 부쳤다. 계획이란 별로 유별난 것이 아니고, 만나서 통성명을 하며 시간을 끌지 않고 우리가 미리 생각해 놓은 그룹의 성격과 조직을 ‘알리고’ 밀어 부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첫 모임에서 ‘무조건’ 어떤 그룹이 생기게 하는 그런 ‘선제공격’ 의 치밀한 계획인 것이다.

물론 여자들은 뻥~한 모습으로 당황을 했지만 그렇다고 ‘조직적’으로 반대도 하지 못했다. 그것이 그룹의 습성인 것이다. 이렇게 해서 명목상 우리들의 남녀혼성 클럽이 생기게 되었는데, 회원은 그날 모인 사람으로 우선 정하고 ‘정기적’으로 만나기로 합의까지 보게 되었다. 한번 모여서 그 정도의 합의는 사실 기대 이상으로 성과가 좋은 것이라고 우리들은 ‘신’이 났었다. 우리가 정기적으로 모이게 된 장소는 국제극장 옆쪽 골목에 있었단 해양다방이었고 우리들은 앞으로 최소한 6개월 이상을 그곳을 ‘아지트’로 삼아 모여서 ‘친목도모’를 이루게 된다. 여름방학이 다가오고 우리는 새 2학기에 만나는 암암리의 약속을 하며 헤어지게 되었다.

 

 

¶  여름의 설악산과 3도 화상

여름방학.. 1968년의 여름방학은 나에게 절대로 잊을 수 없는 한 달이 된다. 그 당시를 몇 마디로 요약을 하면, ‘설악산, 축축한 비’, ‘2~3도 화상’, ‘비행기’ 쯤.. 될 듯하다. 방학이 시작되면서 나는 전부터 계획한 대로 죽마고우 안명성과 둘이서 설악산엘 갔다. 물론 ‘등산’을 하러 간 것이다. 친구 안명성은 지금은 산에 대한 취향이 나와 조금 다르지만 그 때는 그것이 큰 문제가 아니었다. 20세의 젊음의 혈기로 아무것도 모른 채 ‘완전 군장’으로 설악산 ‘정복’을 하러 간 것이다. 하지만, 나중에 우리들의 사진에 나타난 ‘꼴’은 등산이 아니라 무슨 하이킹 하는 듯한 모습들이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무슨 북악산, 남산 보다는 조금 더 심각한 산에 간다는 기분으로 간 것이다. 그 당시 외 설악은 요새에 비하면 거의 처녀 산이나 다름없이 덜 개발이 된 상태였지만 그래도 다른 산에 비하면 ‘하이킹’도 할 수 있을 정도의 코스도 즐비했다. 우리의 복장이나, 장비는 사실 하이킹이나 캠핑에 맞는 정도의 수준이었다. 우리는 버스로 속초로 갔고, 거기서 다른 버스로 외설악의 입구인 신흥사 앞, 설악동으로 들어갔다.

 

우리가 갔을 때부터 설악산은 완전히 ‘장마’ 철로 접어들어서 그야말로 ‘매일’ 비가 왔다. 아마도 해를 못 보았던 기억이니까.. 문제는 확실히 ‘언제’ 우리가 그곳엘 갔는지 전혀 기록이 남아있질 않다는 것이라서 참 안타깝다. 방학이 시작되고 얼마 안 되었으니까 분명히 7월 말 정도가 아닌가 추측만 한다. 캠핑 장비가 별로 없었고, 비가 매일 와서 우리는 할 수 없이 신흥사 입구에 있는 설악동에 즐비한 어떤 여관에서 짐을 풀었고, 날씨로 봐서 우리는 그곳을 base camp로 삼고 매일 ‘출근’을 할 생각을 했다. 그 당시 여관을 잡으려는데 우리는 뜻밖의 사람을 만나게 되었는데, 나의 중앙고 동창 이종원을 만난 것이다. 그는 ‘혼자서’ 그곳엘 왔다고 했다. 게다가 우리와 비슷한 등산객 청년 두 명도 그곳에서 만나 방값도 줄일 겸해서 같은 방을 쓰기로 했다. 그러니까.. 5명의 사나이가 한 방을 쓰게 된 것이다.

 

비는 그칠 줄 모르고 오락가락해서 우리는 거의 비를 맞으며 이곳 저곳 ‘구경’을 갔다. 그것은 진짜 등반하는 등산이 아니고 하이킹 정도에 속했지만 그래도 ‘난생 처음’ 그 유명한 설악산에 왔다는 자부심으로 가지고 즐기려 했다. 구름이 자욱하게 덮인 울산암은 아직도 그 바위들이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개울과 바위를 걷던 완만한 계곡들, 물론 모두 구름 속의 모습들이었다. 제일 힘들었던 곳은 바로 여관에서 개울 건너 하늘을 찌르듯이 솟아있던 ‘권금성‘이었다. 바위는 하나도 없던 ‘토산’이었지만 어떻게 경사가 가파르던지 오르는 자체가 고행이었고 비까지 맞으며 오르는 것은 한마디로 괴로움의 연속이었다. 그래도 그곳에서 고생을 한 것으로 조금은 ‘날라리’ 하이킹한다는 아쉬움’에서 벗어날 수도 있었다.

 

권금성 입구에 있는 설악천 다리에서 안명성과..

권금성 입구에 있는 설악천 다리에서 안명성과..

그리고 운명의 날이 왔다. 권금성에 갔던 날 저녁, 파김치가 되어서 여관으로 돌아와서 예의대로 저녁 준비를 하게 되었다. 물론 비가 계속 뿌리던 그런 날이었다. 비가 오는 관계로 방 안에서 버너로 식사를 만들고 있는데, 이종원이 우리가 쓰는 것과 다른 종류의 버너를 쓰라고 내어 주었다. 그것은 당시에 많지 않았던 프로판 가스 버너였다. 요새는 보통 집에서 불고기를 식탁 위에서 구어 먹을 때 흔히 쓰지만 그 당시는 사실 새로 나온 것이었다. 문제는 프로판 가스통(카트리지)을 버너의 본체에 충격을 주며 밀어 넣는데 조금 프로판 가스가 새어 나올 수 있다는 것을 나는 몰랐던 것이다. 가스 통이 장착이 될 때 만약 근처에 불이 있으면 그대로 인화가 되어 폭발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을 모르고 나는 생각도 없이 가스통을 밀어 넣었고, 그것은 그대로 옆 버너의 불에 인화가 되어 흡사 전쟁에서 무기로 쓰는 ‘화염 방사기’ 같이 불을 요란하게 뿜어 댔다. 너무나 급작스러운 일이었다. 가스 통에서 뿜어 나오는 불길은 나의 발 등을 태우고, 나의 얼굴을 데어 버렸다. 불과 몇 초가 되지 않았을 것이지만 나에게는 아주 긴 고통과 충격의 시간으로 느껴졌다. 그 순간에 나의 1968년 여름방학은 완전히 폐허로 변해 버렸다.

 

나는 순식간에 오른 쪽 발등은 3도, 얼굴은 2도 화상을 입게 되었고, 곧바로 속초 시내로 옮겨졌다. 어느 ‘돌팔이’ 외과의원에 일단 갔는데.. 이곳은 정말 거의 ‘무허가, 돌팔이’ 의사가 진단서를 돈 주고 파는 그런 정말 양심 없는 중년 의사가 있던 곳이다. 그러니 나는 사실 며칠 간 이곳에서 하나도 치료가 안 되었던 괴로운 시간을 보낸 것이다. 명성이가 우리 집에 연락을 해서 누나가 기차를 타고 오고 있었지만 나는 화상의 여파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발과 얼굴은 심하게 부어 오르고 나는 아무래도 발보다는 얼굴에 신경을 더 쓸 수밖에 없었다. 누나는 우리들의 원서동 친척 같은 벗, 시자 누나와 함께 그 먼 길을 중앙선 기차를 타고 왔다. 당시에 속초는 극동항공 쌍발 여객기(아마도 DC-9)가 정기적으로 서울과 연결이 되어 있어서 나는 그것을 타고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서울 김포공항에 도착하게 되었다. 난생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 보았지만 기분은 괴롭고 착잡하였다. 서울에 도착하여 나는 곧바로 청와대 근처에 있는 화상 치료로 유명하다는 ‘목상돈’ 외과 의원에 입원을 하여 집중치료를 받았고, 일주일 가량 입원을 끝내고 퇴원을 하여 그 때부터 통원치료를 받았다. 그렇게 해서 나의 1968년 여름방학이 완전히 끝난 것이다. 정말 악몽 같던 비와 불에 젖은 설악산 여행이었다. 그 당시 그 사고로 인하여 같이 갔던 명성이도 고생 고생하며 집으로 돌아왔다고 들었다.

 

나의 오른 발등의 3도 화상은 생각보다 심각한 것이었는데 초기에 적절한 치료가 늦어서 잘못했으면 큰일 날 뻔 했다고 들었다. 하지만 나는 발 보다는 얼굴에 신경을 더 쓰고 있었다. 나이 20세에 발 등이 중요한가 얼굴이 중요한가는 어려운 질문이 아니다. 하지만 여름 방학이 다 끝날 무렵에는 얼굴이 거의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발등 화상의 영향으로 조금 쩔뚝거려도 나는 사실 하나도 걱정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 여름방학은 ‘완전히’ 끝나가고 있었다.

 

 

¶  연호회, 본격적인 이성들과의 만남

1968년도 2학기, 가을학기가 시작되어서 학교엘 갔더니 역시 사람들 속에 어울리는 것은 좋은지.. 지나간 여름의 악몽이 조금씩 잊혀지기 시작하고, 여름 방학 전에 ‘급조’ 되었던 우리들의 남녀 클럽에도 나의 사고 소식이 전해 졌는지, 어느 날 연세대 캠퍼스로 이선화씨가 찾아왔다. 나는 그때의 ‘감격’을 잊을 수가 없다. 그런 꿈은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다. 아프고 외로움을 느낄 때, 어떤 ‘아련한 여자’가 위로 차 자기를 찾아 온다는 상상은 어느 남자나 하고 있을 것인데, 그런 꿈이 실제로 나에게 찾아온 것이다. 그때 나는 선화씨를 진정으로 가깝게 느끼게 되었고 조금은 의지하는 감정까지 느끼게 되었다. 이렇게 1968년 2학기는 이선화씨와의 짧지 않은 ‘영원히 잊지 못할’ 아련한 추억을 만들게 되는 시기가 되어갔다.

 

2학기에는 약간의 편입생들이 들어왔는데 그 중 한 명이 우리와 ‘눈이 맞아서’ 어울리게 되었는데, 그의 이름은 윤인송 이었다. 그래서 자연스레 우리의 아미고 클럽에 합류하게 되었지만 우리 클럽에서 ‘탈퇴’한 사람도 있었다. 그가 바로 강원도 출신 유학생 김철수였다. 김철수, 너무나 친근한 ‘교과서적 이름’이었고, 우리들은 정말 왜 그가 우리에게서 떨어져 나갔는지 이유를 모르지만 추측에 그는 여학생들과 어울리는 것이 달갑지 않았나 하는 생각은 해 보았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를 참 좋아했고 그가 우리를 떠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는데, 슬프게도 그것이 현실이 되었다. 내가 알았던 김철수가 실상의 김철수가 아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게다가 그는 한때 전기과에서 다른 과로 적을 옮기는 등 참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했는데 거의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왜..왜..’ 라는 의문만 남는다.

 

학기가 시작되면서 이선화씨의 서울간호학교 친구들과 국제극장 옆 골목, 경기여고로 가는 길에 있던 해양다방에서 거의 정기적으로 만나게 되었고, 정식으로 클럽의 이름도 ‘연호회’라고 붙였는데, 윤인송의 제안으로 ‘연세 와 간호’ 에서 연 자와 호 자를 따서 붙인 그럴듯한 이름이었다. 이렇게 해서 1학기 때 실패로 끝났던 이대생들과의 클럽 만들기가 이제야 다른 ‘여대생’들과 조그만 성공을 이루게 되었고, 내가 그리고 상상하던 ‘멋진 대학생활’ 이 우리 앞에 보이는 듯 했다. 하지만 이런 즐거움 뒤에는 아무래도 이런 ‘과외활동’이 학교 공부하는 시간을 빼앗는 부정적인 면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한창 잘나가던 청춘 20세의 ‘아무것도 두려울 것이 없었던’ 그런 때였기에 큰 신경을 쓰지 않았다.

 

연호회 클럽의 여학생들은 모두 간호원 지망생들로, 간호원은 당시 한창 외국으로 잘 나가는 직종이었고 그녀들은 분명히 해외취업이나 이민을 꿈꾸고 있었을 ‘세상을 조금은 냉정하게 보는’ 자세를 가졌음에 비해 우리들 남자들은 모두 ‘병역 미필’의 백일몽을 꾸는 듯한 ‘아이’들이었고 나도 그 중에 하나였다. 장래의 꿈은 그렇게 심각성의 차이가 있었어도 만나기만 하면 우리들은 같은 나이또래의 꿈과 취미를 나누며 장시간 담배연기 자욱한 해양다방에 죽치고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 때의 여성동무 6명들, 존칭을 빼면: 이선화, 조인선, 신언경, 이재임(인자), 황인희, 정수임 등이었는데, 이들은 알고 보면 우리 남자들같이 서로 친한 사이가 아닌 것 같고, 우리 클럽에 ‘불려 나와서’ 서로 친해진 듯 했다. 심지어, 어떤 여학생(이재임)은 자기가 어떻게 그곳에 나왔는지 이유도 모를 지경이었다. 하지만 우리 남자들 에게는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특히 그 중에 정수임씨는 학생이라기 보다는 아예 직장인 같은 인상을 주며 주말에는 ‘경마장’에서 일하는 아르바이트 생으로 모임에도 거의 빠져서 아직도 그 녀는 무슨 베일에 가린 듯한 추억을 남겼다.

 

연호회 가을산행 관악산 1968

연호회 가을산행 관악산 1968

곡식이 한창 무르익던 가을의 햇볕이 따갑지만 드높은 가을하늘이 파랗던 어느 일요일에 연호회의 첫 하이킹 겸 등산이 한강의 남쪽, 관악산에서 이루어졌다. 그 당시에는 등산 붐이 서서히 일고 있었지만, 주로 ‘남성적’인 북한산 (백운대, 도봉산) 이 인기였고, 관악산은 사실 모르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로 등산코스로 알려지지 않았었다. 용산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모여서 우리들은 과천 행 버스를 타고 갔는데, 그 당시 우리들은 버스 속에서 서로 어울려 그 당시 유행하던 ‘참새 시리즈‘ 농담 같은 ‘그 나이에 맞는 유치한 이야기들’ 을 하며 정말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언제나’ 프로 산악인 임을 자랑하는 박창희는 역시 ‘너무나’ 멋진 등산복 차림으로 등장했지만 15 나머지 ‘날라리 남녀들’ 은 모두 하이킹 차림으로 관악산 정상으로 올라갔다. 그때의 등산은, 주말 경마장에서 일을 하는 정수임씨 빼고 모두 참가를 했던, 지나고 보니 우리 클럽의 ‘유일한’ 산행이었다. 게다가 적지 않은 ‘흑백’ 사진도 고스란히 남게 되어,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그 당시의 우리들의 갓 스무 살의 젊음을 지켜주게 되었다. 그 사진에 있는 애 띤 모습의 ‘호남 사나이’ 김진환은 비교적 젊었던 나이에 운명을 해서 지금은 없기에, 사진을 보면서 ‘하늘나라’에 있을 김진환의 애 띤 모습을 더욱 안타깝게 그리곤 한다.

 

Scan10129-1꿈에 그리던 남녀 혼성클럽을 나 자신은 가슴 뿌듯하게 여겼다. 그것을 만드는데 나의 시간과 정성도 많이 들어갔기에 그런 것도 있었지만 정기적으로 그녀들과 해양다방에서 볼 수 있다는 생각 자체로도 행복했기 때문이다. 2학년 2학기, 그러니까 1968년의 가을학기를 나는 사실 공부보다는 연호회 과외활동에 더 신경을 쓰며 지냈는데, 그 시절은 비록 학교 공부에 게을러 몇 년 후에 큰 후회를 하기는 하지만 참 아직도 다시 돌아가고 싶을 정도로 후회 없는 청춘의 시간들이었다. 우리 중에 가장 의젓한 모습의 양건주가 회장을 했는데 사실 그는 나이보다 성숙한 편이어서 이런 모임도 조금은 우리보다 심각하게 이끌어 나갔다. 그래서 여자 회원들이 그를 ‘도사’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그 별명은 참 잘 지어졌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우리들이 모이면 대부분은 그 나이에 걸맞게 노래들, 특히 미국 pop song을 즐기곤 했는데, 나는 가끔 그 당시 유행하던 top tune들의 가사를 print(당시에는 등사기로 찍은) 해서 나누어주곤 했는데, 사전에 아무런 이야기도 없이 그런 일을 하는 나를 건주는 사실 못 마땅하게 생각하는 듯 했다. 그 때는 내가 그런 그의 태도가 이해가 잘 가질 않았지만 후에 왜 그랬는지 충분히 이해가 갔고, 역시 깊이 생각하는 그의 다른 면을 보는 듯 했다.

 

 

¶  이윤기의 짝짓기 아이디어

남녀가 모인 클럽이고, 분명히 클럽의 목적은 이름도 그럴싸한 ‘친목도모’였기에 남녀의 개인적인 사귐은 예상하기 어렵지 않았고, 그러면 분명히 예상치 못한 일들이 나올 것도 예측을 할 수가 있었다. 가을 해가 따갑던 가을 어느 날 나와 윤기는 연세대 중앙도서관에서 시험공부를 하다가 조금 쉬려고 담배연기로 앞이 안 보이는 끽연실에서 모였는데 느닷없이 연호회 남녀에 대한 ‘심각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윤기의 말은 직설적으로서, 서로 속으로 꿍꿍대지 말고 아예 미리 ‘짝을 짓자’라는 것이었는데, 처음에는 놀랐지만 충분히 이해는 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을 두 사람 이상이 동시에 좋아하게 되면 문제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협정’의 골자는 윤기 자기는 이재임(본명: 이인자) 씨와 짝이 되고 나는 이선화씨와 짝을 이루자는 것이었다. 정말 재미있는 이 발상은 나중에 다른 남자들에게도 알려져서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나머지 여자들을 ‘골라 잡게’까지 되었는데, 창희는 신언경씨, 건주는 황인희씨.. 등등이었다. 물론 이것은 거의 ‘장난의 수준’에서 이야기가 된 것이지만, 그런대로 이 ‘협정’은 지켜진 듯 하고, 장래에 이 ‘짝’이 결혼까지 이르는 경우도 생겼다.

 

¶  연고전 보다 대지다방

이런 ‘유치한 사건’이 도움이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눈에 띄게 이선화씨와 가깝게 느껴지게 되었고, 이것은 상호적인 감정임도 서로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나와 선화씨는 ‘정식 데이트’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 시절에 정식이라 함은 서로의 집안에 이 사실을 알리고 만나는 것을 뜻했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우리 집 식구들(어머니와 누나)에게 말한 것일 뿐, 선화씨의 집안 사정은 솔직히 확실하지 않았다. 가끔 일요일 일찍 만나서 하루를 마음 놓고 즐긴 기억인데, 그 당시 우리들은 ‘정말로, 진짜로’ 순수한 감정을 나누었던, 하지만 ‘사랑, 연애’란 말이 어울리지 않던 그런 관계였다. 지금도 다시 생각해 본다. 그때 우리들은 과연 ‘연애’를 한 것이었을까.. 아마도 ‘연애’까지는 아니었을 것이다. 주말이 아니었던 어느 날에는 선화씨와 연세대 앞에 있었던 2층 ‘대지다방’ (신촌로터리에서 가까운)에서 강의가 모두 끝난 시간에 만나기로 해서 기쁜 마음으로 시간을 기다렸는데, 그만 그날은 연고전 응원연습이 예정된 날이기도 했다.

조금은 미안하지만 그것을 빼먹고 백양로를 빠져나가려고 하는데, 예상대로 그날도 체육과 교수(강교수)의 진두지휘로 ROTC생들이 스크럼을 짜고 길을 막고 있었다. 사실 그 며칠 전 연습 시에 그것을 보았고 그날은 친구들과 연세대 뒤에 있는 ‘연희고지’를 넘어서 ‘도망’나간 경험이 있었기에 이번에 데이트가 있던 날은 아주 간교하게 머리를 써서, 죽마고우 유지호의 ‘수도공대’ 학교 배지를 빌려와서 그것을 달고 ‘당당히’ ROTC 스크럼을 빠져나가 대지다방까지 갔었다. 아마 나의 얼굴이 그들(ROTC)에게 잘 알려졌었으면 나는 ‘정학처분’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가끔 나는 기대를 벗어난 ‘악동’기질을 발휘하곤 했는데, 대부분 문제가 없었지만 지금 생각하니 후회가 없는 것이 아니다. 드높은 푸른 하늘에 펼쳐지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연고전을 마다하고 어둡고 가라앉은, 시끄러운 다방엘 가려고 그런 행각을 했다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두 번 생각할 겨를이 없이 그런 ‘달콤한’ 시간들을 즐기기에 바빴다.

 

¶  연호회지, 국전감상, 동양 TV 견학, 음악감상회

연호회가 확실히 자리를 잡고 정기적인 모임이 활기를 띠면서 무엇인가 기록과 역사를 남기려는 노력이었을까.. 물론 확실한 이유는 기억이 안 나지만 회보를 만든다는 그 자체가 멋진 생각이었다. 남녀가 정기적으로 어두운 다방에 죽치고 앉아서 ‘친목도모’를 하는 것은 그 자체가 보기보다는 즐겁기는 했지만 그런 모임이 오래 갈 수가 없음도 자명했다. 그렇게 해서 연호회보가 탄생했고, 순식간에 글과 시 들을 모아서 주로 나와 박창희가 편집을 해서 지금 기준으로 보면 ‘원시적’인 수준의 철필, 가리방 과 등사기로16 조그만 책자를 낼 수 있었다. 내가 권두사를 쓰고 설악산에서 겪은 화상, 사고를 그린 설악산 등산기, 박창희의 산에 관한 글 ‘악(岳)’ 이라는 글, 주로 여자회원들의 시들이 실렸다.

우리의 회보 발간 자체에 대한 열의는 상당했지만 그것이 우리 연호회에 미친 영향은 미미했고 시간과 정력이 생각보다 많이 소요되어서 단 한번 발행으로 끝이 나고 말았다. 아련한 기억 속의 이 ‘회보’는 세월의 횡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지만 가끔 다시 보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창간호로 끝이 난 연호회지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정말 기적적으로 2000년이 되던 즈음 양건주가 그것의 ‘사본’을 나에게 보내주었다. 제일 웃긴 것은 내가 쓴 글을 내가 알아보지 못했다는 사실17이었고 이것이 바로 세월의 장난이었다.

1968년 가을은 유난히도 청명했던 기억인데 그 찬란한 가을에 우리들은 경복궁으로 국전을 보러 가기도 했다. 평소에 나는 국전 같은 것에 별로 관심이 없었지만 이성과 같이 감상한다는 것은 별다른 의미가 있었는지 이렇게 아직도 기억에 남을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볼 줄도 모르는 예술작품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나는 사실 본격적으로 이성의 존재와 의미에 즐겁게 놀라기도 했다. 한마디로 ‘삶이 신나는, 즐거운’ 시절이 시작된 것이다. 반면에 나의 ‘공부’에 대한 열정은 그에 비례해서 식어 들어가기만 했다.

당시 나의 원서동 죽마고우인 유지호가 잘 알고 지내던 젊은 ‘아저씨’가 동양 테레비에서 엔지니어로 근무를 하고 있었고 우리 연호회 회원들이 단체로 ‘견학’을 할 기회를 만들게 되었다. 내가 중간에서 주선을 한 것이고 이것이 성사가 되어서 나는 내심 자랑스럽기도 했다. 우리들은 흡사 낙도 어린이들이 서울 수학여행 온 듯이 방송국 내부를 흥미 있게 돌아 보았다. 평소 테레비에서 보던 ‘인물’들, 연예인 평론가 등이 연습, 녹화하는 것도 보았는데 기억 속에 당시 잘 나가던 펄 시스터즈가 신나는 soul에 맞추어 춤추며 노래하는 것도 보았고 뉴스 평론가 김용기 씨도 본 기억이 난다.

또한 인상적이었던 것은 방송국 옥상에 있는 ‘거대한’ 마이크로웨이브 안테나였는데.. 그 기술자 아저씨 설명이 방송국의 모든 program이 이 안테나를 통해서 지척에 보이던 남산의 거대한 안테나로 ‘송신’이 된다고 했다. 그것까지는 보통의 설명이었는데.. 그 아저씨 왈, 그 안테나 근처에 가지 말라고, 특히 앞쪽으로 가지 말라고 했는데.. 그야말로 전기통닭 구이가 될 정도로 ‘열’이 날 것이라고 했다. 그 정도로 energy가 큰 것으로 바로 이것이 마이크로웨이브 오븐의 원리였던 것이다.

 

그 당시 한창 pop song, mostly American 에 심취해 있던 우리들에게 좋은 pop 음악이 나오는 다방에 죽치고 앉아 있는 자체가 즐거움이요 멋이었는데 다방 보다는 우리들만의 음악감상을 할 자리를 마련해서 실컷 좋은 음악을 들어보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의욕도 거창하게 연세대 뒤편에 있는 ‘청송대‘ 숲 속에서 하자는 이야기도 있었다. 같은 과에 있는 김광호가 자기 클럽이 그렇게 했다는 말을 해서 생각하게 되었는데, 문제는 ‘전축’ audio system의 전원을 어떻게 마련하는 가에 있었다. Battery로 가능한 big audio system이 없던 그 시절이었다. 결국은 회원이었던 박창희의 집에서 하게 되었고, 그 집에는 그런대로 멋진 전축이 있어서 큰 문제가 없이 음악감상회를 진행할 수 있었다. 이날 새로 느낀 것은 나로써는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모든 회원들이 다 나만큼 pop song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  크리스마스 비밀 데이트, 윤인송의 입대

그 해의 크리스마스는 이런 배경으로 조금은 ‘덜’외로운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확실한 timeline은 다 잊었지만 당시 유행하던 (아마도 일본에서 유래 된?) 크리스마스 이브에 ‘길거리’로 나가야만 했던 ‘해괴한’ 풍습은 우리도 피할 수가 없었다. 우리들이 생각했던 idea는 간단히 말해서 남녀 한 쌍이 각기 다른 다방에서 크리스마스 이브에 만난다는 것인데.. 사실 생각만 해도 너무나 멋졌고 모두 동의를 해서 실행이 되었다. 이것은 제비를 뽑아서 정해진 couple이 정해진 다방에서 만나는 그런 것이었다. 다만 누가 누구와 한 쌍이 되었는가가 아직도 확실치 않지만 나는 ‘거의 확실히’ 선화씨와 만났던 것 같다. 너무나 오랜 세월이 지난 것이다. 그 당시에는 그렇게 생생했던 시간들이 왜 그렇게  희미해졌을까.. 안타깝다 안타까워..

 

이 무렵쯤 윤인송이 군대 징집영장을 받고 입영준비를 하는 ‘신세’가 되어서 우리들의 클럽은 조금씩 김이 새기 시작하게 되었다. 하기야 큰 이유가 없었으면 이 나이에 대개 군대를 가던 시절이었고 우리 클럽의 나머지 남자들도 거의 영장을 기다리던 때였다. 그 중에 윤인송이 제일 먼저 가게 된 것이다. 그때가 1968년이 지나가던 연말 연시 즈음이었는데.. 우리 그룹에서 제일 먼저 입영을 하는 case가 되어서 유난히 관심을 많이 받았다. 윤인송도 그것을 의식했는지, 흥분이 된 상태로 년 초로 예정된 입영 날 자를 기다리며 2학년 2학기를 마치고 있었다. 당시 제일 기억이 나는 것 중에는 인송이가 평소와는 다른 의외의 면모를 보게 되었던 것이 있었다. 평소에 여자 회원들과 깊이 사귀는 것은 고사하고 그런 것에 별로 관심을 보이지도 않았는데 입영날자를 받고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변해서 이 여자 저 여자와 개인데이트를 하기 시작을 해서 우리를 놀라게 했다.

조용하고 무슨 비밀의 베일에 싸인듯한 모습의 이재임(본명: 이인자, 평창이씨)와 단독 데이트를 했고, 신언경씨의 경우에는 숫제 그녀의 집에 ‘쳐들어가서’ 식사 대접을 받기도 했다. 우리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진 것이다. 당신에는 조금 의아하기도 했지만 나중에 생각해 보니.. 역시 군대를 간다는 ‘엄청난’ 사실 하나로 모든 것이 이해가 되고 동감도 하게 되었다. 다른 면으로 그는 ‘멋진’ 입영 전야를 보낸 셈이 아닐까? 그런 후 인송이는 1969년이 되자마자 수색 군부대로 입영을 하고 우리에게서 일단 사라졌다.

 

¶  21세 생일, 교육회관 지하다방과 연세춘추

1969년 1월 21일은 나의 21세 생일이었는데 그날 나는 가까운 친구들 (남녀)을 우리 집으로 불러서 식사를 했었다. 그 당시에는 생일을 사람들과 같이 차려먹는 관습은 지금처럼 흔하지 않았던 기억인데 어떻게 내 생일에 그들을 초대했었는지 정말 기억이 또렷하지 않다. 분명한 것은 대부분 연호회 회원들과 가외로 같은 과에 있었던 다른 중앙고 1년 후배 이상일이 합세를 했다는 사실이었다. 어떻게 음식을 차렸는지 기억이 희미하지만 아마도 누나가 힘을 썼을 듯 하였다.   당시만 해도 어머님은 밖에서 일을 하실 때였다. 그 추운 겨울에 당시 널리 보급되었던 ‘석유난로’로 마루방을 덥혀서 그런대로 아늑한 분위기였다. 식사도 한식이었지만 풍성하였고.. 그래서 정말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양건주가 무슨 게임을 하자고 해서 모두 더 즐거웠던 기억도 난다. 이채로웠던 것은 많지는 않지만 여대생들이 함께 그 자리를 채웠다는 사실이었는데, 나는 당시에 그 사실 하나 만으로 너무나 즐겁기만 했었다.  그 때는 그런 식으로 나는 본격적으로 이성에 눈이 뜨이던 그런 시절이었었다.그 당시 어떤 ‘여자’가 그 자리에 있었는지 나는 수십 년 동안 기억하려 애를 썼지만 100% 확실치 않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재임(이인자)’씨(평창이씨)는 분명히 그 자리에 있었고, 나의 regular 이선화씨가 함께 했었는지.. 나는 그것이 더 궁금하지만 슬프게도 사진도 없고 기억도 확실하지 않았다.

 

대학 2학년이 끝나가던 겨울방학 중에 나는 친구들과 교육회관 지하다방에서 진을 치고 시간을 보냈다. 당시 겨울방학에는 무슨 여가 활동을 할 여지가 별로 없었다. 학구열이 이미 조금씩 시들해지던 시절, 본격적으로 ‘이성’에 눈이 뜨이던 그런 때에 제일 손쉽게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방법은 pop 음악이 멋지게 흘러나오고 여대생들이 복작거리는, 담배연기가 자욱한 ‘지하다방’에 죽치고 앉아서 시간을 죽이는 것이다. 시간이 ‘무한정’ 있다고 생각하며 살던 20대 초의 전형적인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지금 생각하면 조금 한심한 작태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때 내가 낸 기발 난 ‘time-killer’ idea중에 하나가 생생하게 기억난다. 지루한 시간도 ‘죽이고’, 오랜 전(하지만 1년도 안 된)에 한때 ‘빠졌던’ 사람을 볼 수 있게 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가졌던 것.. ’20대 초 악동’의 장난이었지만 그 후에 후회도 많이 했다. 장난은 결국 ‘새빨간 거짓말’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나의 ‘음모’에 수동적으로 가담해서 ‘공범’이 된 사람들은 양건주와 이윤기 였지만 그들은 그저 옆에서 의아해 하고 놀란 모습만 보여 주었다. 모든 것은 100% 나의 작품이어서 아직도 이 두 친구에게 미안한 마음이다.

 

이 project의 핵심은 가급적 많은 ‘여대생’을 ‘계속’ 만날 수 있게 하는 것 이었다. 하지만, 순진한 ‘사기’극이라고 할 수 있을까? 가능한 많은 여대생들의 주소를 찾아서 ‘연세춘추(연세대 학보)’의 이름으로 편지를 보낸다. 일종의 대학생들의 pop culture 특히 pop song에 대한 그들의 의견을 듣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당시에 제일 ‘잘 나가던’ 유행음악이 무엇인가 ‘취재’를 하는 것이다. 이런 plan은 사실 크게 잘 못된 것이 없지만 우리가 ‘연세춘추 기자’라고 한 것은 ‘사칭’에 속하는 일종의 ‘범죄’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것까지 생각할 정도로 머리가 굳어진 나이는 아니기에 ‘거침없이’ 계획을 밀어 부쳤다.

죽마고우 유지호가 열심히 다니던 CCC(Campus Crusade for Christ)란 대학생 선교회 회원들의 주소록을 입수한 것이다. 거기에는 우리들이 침을 흘리던 여대생들의 주소가 빽빽이 실려 있었고, 몇 명의 주소를 고르고 그들에게 연세춘추의 이름으로 편지를 보냈다.

 

별로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연세춘추’의 위력이 있었는지, 초대받았던 몇 명의 ‘여대생’이 담배연기 자욱한 다방으로 하나 둘씩 걸어 들어왔다고, 놀란 것은 사실 우리들이었다. 비록 ‘인터뷰’ 준비는 하고 있었지만 너무나 당황한 우리 모습들이 우리가 보아도 웃겼다. 다행히 당시 나는 pop song의 ‘권위자’ 급에 속해서 크게 실수를 안 하고 그들이 좋아하는 것들을 물어보고 즐겁게 대화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곳에 나왔던 ‘여대생’들 중에는 ‘짱!’ 하는 느낌을 주는 무언가 없었다. 그저 ‘시간을 죽인’ 효과만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 그것이 우리가 원하던 것이었으니까.. 별로 후회는 없었다.

이런 ‘성공적’인 일이 있고 나는 조금 더 ‘대담’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오래 전 (사실은 반 년이 조금 넘은.. 당시에는 그 정도면 ‘영원’에 가까운 세월이었다.) 헤어진 나의 첫 date 윤여숙 씨에게 도전을 해 보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번에 성공리에 끝난 ‘연세춘추 인터뷰’의 방법을 써서 그녀를 불러내 보자는 idea.. 얼마나 장난스러운가?  그것이 전부였다. 그저 한번 해보자.. 는 100% 장난이었다. 나의 이런 idea에 두 친구들은 회의적이고 반대를 했지만 나는 밀어 부쳤다. 이런 아이장난에 쉽게 넘어갈 상대가 아니기에 밀어 부쳤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문제는 그 초대받은 날에 그녀가 ‘출현’을 한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나는 대책이 없었다. 그녀와 맞대면한 용기는 제로에 가깝고.. 이런 식으로 만나는 내 자신이 사실 ‘비참’하게 느껴졌기에 속으로 그녀가 안 나타나기만 바랬는데..

 

약속시간이 되어 다방 문에 출현한 그녀를 보고 나는 완전히 얼어 붙었고 고개를 숙이고 어찌할 바를 몰랐고 옆에 있던 두 친구들은 왜 그러냐고 계속 추궁을 했다. 만날 곳, 좌석의 위치가 지정되어 있기에 우리 옆까지 온 그녀를 나는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연세춘추 기자’라고 인사를 못하고 있으니 결국 그녀는 급기야 counter에 가서 무언가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이 모습들은 내가 목격한 것이 아니고 옆에 있던 친구들이 본 것이다).. 화가 난듯한 모습으로 counter에 무언가 ‘따지고’ 있었다고 했다. 아마도 우리를 찾으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사실 그런 모습들은 내가 생각한 그녀의 평소 모습들이 아니라서 나는 놀라기만 했다. 너무나 적극적인 것이었다.

결국 그녀는 사라지고 나는 다른 걱정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녀의 아버지가 경찰관’이라고 들었기 때문이다. 만에 일이라도 이런 ‘사기극’이 그녀의 아버지에게 알려지는 날이면… 우아.. 너무나 아찔한 상상이었다. 이런 이후 나는 그녀를 ‘완전히’ 기억에서 잊게 되었고 그것이 나에게 ‘안전’함을 알았기에 이번의 ‘사기극’이 나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고 자위를 하기도 했다. 몇 년 후에 (도미 직전) 그녀를 볼 기회가 있었는데.. 이 당시의 일을 전혀 기억을 못하는 것을 보고.. ‘연세춘추’ 사건의 배후에 내가 있었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때 내가 ‘진실’을 밝혔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한다. 그저 넘치는 시간을 주체 못한 덜 성숙한 ‘아이’의 애교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 않았을까? 아~~ 추억이여.. 모든 추억이 이렇게 아름다웠으면..

 

 

¶  나가며…

2013년 7월 초에 쓰기 시작했던 이 blog.. 일년 반 만에 ‘나가며’ 란 종장을 쓰게 되었다. 짧지는 않을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오랜 세월과 싸울 줄은 미쳐 몰랐다. 서두에 말했듯이.. 내가 time machine을 타고 돌아갈 수 있는 ‘일 년’이 있다면 서슴지 않고 1968년이라고 말할 수 있기에 나는 더욱 나의 굳어져가는 머리의 기억세포를 짜내었고 그것이 너무나 힘이 들었기에 시간이 갈 수록 더욱 더 쓰기가 싫어지게 되었음도 솔직한 고백이다. 하지만 과정보다는 결과가 더 중요하다. 내가 짜 낼 수 있는 것은 99% 뽑아 낸듯하다. 이제는 ‘가미사마‘의 심판을 기다리는 기분으로 이곳에 홀로 남겨두고 나는 떠난다. Good Bye (forever).. 1968!

 

 


 

  1. 1966년 입학해서 1학기를 마치고 휴학하고 다음해 2학기에 복교를 하였다.
  2. 요새도 공비라는 말이 있는지조차 나는 확신이 없다. 공비라는 말은 ‘공산당 비적’의 준 말이다.
  3. 대개 소한과 대한이 이때에 걸쳐있다.
  4. 이들은 보통 사람의 능력을 넘는 체력으로 거의 나르듯이 행군을 했다고 한다.
  5. 그때 박정희 대통령이 살해가 되었다면.. 아마 소규모의 전쟁으로 이어지지 않았을까?
  6. 상당수가 살아서 월북을 했을 것이다.
  7. 이때 미국의 미온적인 태도는 박정희의 자주국방 의지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게 되고, 미국식 자유민주주의 체제하에서는 국가의 존망 자체가 문제가 될 수 있어서 3선 개헌으로 시작되는 ‘장기집권’의 명분과 빌미를 주게 된다. 그러니까 김일성 개xx도 박정희 장기집권을 도와준 셈이 되는 것이다.
  8. 부족할 것 하나도 없었던 그 당시 ‘철부지’ 학생들은 거의 문화혁명을 방불케 하는 권위에 대한 도전의식으로 월남전을 기피하고 반대를 했다.
  9. 당시 대한민국은 경제적으로도 쪼들렸지만 국제적인 입지도 미국의 똘마니 정도, 미국에 완전히 의지하는 약소국가로 취급이 되었고, 반면에 김일성 개xx의 북괴는 의외로 ‘자주국가’로서 제3세계까지 포함한 상당 수의 국가들에게 지지를 받고 있었다.
  10. 담배와 담배연기, 담배 피우는 남자의 모습은 여성들과, 거의 모든 곳(특히 영화나 TV 드라마)에서 멋진 것으로 묘사되던 시절이었고 여자가 담배를 피우면(할머니는 예외) 그녀는 분명히 화류계로 취급이 되었을 것이다.
  11. 아마도 아리랑 아니면 신탄진이었을 것이다.
  12. 그때 피우기 시작한 담배는 1990년 중반까지 계속 되었다.
  13. 그 당시는 군에 가는 것은 가급적 피하고 싶었던 의무였다. 사실상 군 복무 시 사고로 죽거나 병신이 되는 예도 허다하게 많았다.
  14. 父先亡 單代獨子, 아버지 없는 1대 독자
  15. 창희는 이미 거의 프로에 가까운 요델 산악회의 멤버였다.
  16. 이것이 사실 당시의 유일한 desktop publishing 의 한 방법으로 그야말로 Gutenberg를 연상케 하는 수준이었다.
  17. 권두사가 바로 그것인데.. 당시 유행하던 G-CliffsI Understand란 노래중의”let bygone be bygone“을 유치하게 인용한 글.. 그것을 읽고 누가 이런 유치한 글을 썼을까.. 생각했지만 희미한 기억으로 조금은 귀에 익은 글이라는 생각 끝에 나는 그것이 나의 글이었음을 알고 정말 의자에서 떨어질 정도로 놀랐다.

 

 

千の風になっ –  A Thousand Winds.. – 秋川雅史(아키가와 마사후미) – 2006

 

 

 

Do not stand at my grave and weep.

 I am not there. I do not sleep.

 I am a thousand winds that blow.

 I am the diamond glints on snow.

 I am the sunlight on ripened grain.

 I am the gentle autumn rain.

 When you awaken in the morning’s hush

 I am the swift uplifting rush

Of quiet birds in circled flight.

 I am the soft stars that shine at night.

 Do not stand at my grave and cry;

 I am not there. I did not die.

 
Mary Elizabeth Frye – 1932

 

 

 

천 갈래의 바람으로

 

내 무덤가에 서서 울지 마십시오.

나는 거기 없습니다. 나는 잠든 것이 아니니까요.

나는 천 갈래로 부는 바람입니다.

나는 흰 눈 위에 반짝이는 다이아몬드입니다.

나는 여무는 곡식 위에 비친 햇살입니다.

나는 조용히 내리는 가을비입니다.

그대가 아침의 고요에서 깨어날 때

나는 하늘을 고요히 선회하다가

갑자기 비상을 감행하는 새입니다.

나는 밤하늘에 부드러운 별빛입니다.

내 무덤가에 서서 울지 마십시오.

나는 거기 없습니다. 나는 죽은 것이 아니니까요.

 

 

 

 

 

얼마 전 아내 연숙으로부터 류해욱 요셉 신부님의 ‘그대는 받아 들여졌다’ 라는 책자를 건네 받았다. 류 신부님은 비록 나와 개인적인 인연은 없었어도 간접적으로 친근하게 느껴지는 신부님이다. 내가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에 ‘본격적으로’ 나가기 시작한 2010년대 이전에 한때 주임신부님으로 계셨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사진’도 보았고 연숙, 많은 교우들로부터 이야기도 많이 들었다. 최근에는 몸이 아프시다는 소식과 레지오에서는 ‘병자기도’의 요청도 들어와 많은 단원들이 기도를 열심히 하고 있기도 하다.

 ‘중풍’같은 stroke으로 쓰러지셨다는데 어떻게 또 이런 책이 나왔을까? 친필로 sign이 책 안에 보였는데 아닌 게 아니라 ‘떨리는 필체’였다. 아직도 ‘마비 증상’에서 못 벗어나신 것일까? 나이는 나보다 한참 밑이라고 알고 있는 ‘젊은’ 신부로만 알고 있었는데 어떻게 그런 고생을 하시는지 안타깝기만 하다.

 류신부님의 책 번역 솜씨는 가희 내가 제일 좋아하는 style중의 하나다. 어떻게 그렇게 ‘자연스러운’ 번역을 하는지.. 이것은 번역 사이에 있는 2가지 언어를 거의 완전히 이해하지 않고서는 힘든 일이다. 직역 체와 의역 체의 거의 중간에 있는 거의 완전한 번역인 것이다. 특히 시어체의 번역은 더욱 그러하다.

 

이번에 접하게 된 책은 ‘51편의 묵상 잠언‘이라는 부제가 있는 대부분 시와 묵상들을 저자의 소견을 곁들여 간결하지만 깊이 있게 설명을 하고 있다.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된 사실 중에는 신부님이 이전에 ‘이미’ 갑상선 암 치료를 받았다는 사실이었고, 건강에 신경을 쓰는 탓인지 ‘나이를 먹는 것’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고 있음도 알게 되었다. 나보다 거의 10년이 ‘젊은’ 것을 생각하면 조금 ‘가소롭게’도 느껴지지만 어떻게 느껴지는 나이를 직접 비교를 할 수 있겠는가?

칼릴 지브란의 시가 많이 실린 것으로 지브란의 시를 좋아하고 있음도 알게 되었지만 나의 눈길을 끈 것은 바로 A Thousand Winds로도 알려진 Don’t stand at my grave and weep이라는 Mary Elizabeth Frye의 1932년 경의 시였다.

 이 ‘나의 무덤에서 울지 마세요’로 시작되는 시는 내용적으로 추측해서 아메리칸 인디안 (native Indian)의 구전에 의한 것으로 추측을 했지만 사실 지금은 저자가 ‘완전히’ 밝혀진 것으로 1932년에 미국 Baltimore에 살고 있는 Mary Elizabeth Frye라는 여성의 시로 확인이 된  것이다. 내가 신뢰하는 Wikipedia에 의하면 오랜 세월 동안 비밀의 veil에 쌓였던 이 ‘감동적’인 시가 세상에 나오게 된 경위는 다음과 같다.

 

1932년 경 Frye여성은 같은 집에 독일에서 나치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미국에 온 유대인 여성과 그녀의 남편이 살고 있었는데 그녀는 항상 독일 나치 치하에 남겨두고 온 어머니를 걱정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 어느 날 그 어머니가 병으로 돌아가시게 되었고 임종을 지키지 못한 슬픔으로 고통을 받는 것을 알게 된 Frye여성은 거의 즉흥적으로 그녀를 위로하려고 shopping bag 누런 종이에 생각이 나는 대로 시를 적었다고 한다. 그녀는 그 전에 시를 써본 경험이 없었다고 한다. 슬픔에서 고통을 받는 것을 위로하려고 거의 ‘본능적’으로 쓴 그 시가 그 이후로 전세계적으로 같은 슬픔으로 고통을 받는 이들을 위로하게 된 것이다. 이 시는 Frye여성의 친지, 주변에 천천히 알려지게 되고 ‘장례행사’같은 곳에서 낭송이 되었고 서서히 세계적인 시로 발전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대부분 누구의 시인지 모르며 애송을 하여서 작자 미상으로 남게 되었고 심지어 American Indian의 전통적인 시로 추측이 되기도 한 것이다. 후에 본격적인 ‘저자 찾기’ 노력이 이루어 졌는데 저자인 Frye여사가 94세로 세상을 떠나며 자신이 저자임을 밝힌 사실이 미국 신문의 컬럼 Dear Abby로 잘 알려진 Abigail Van Buren 의 추적으로 확인이 되었다.

 

저자인 Mary Elizabeth Frye는 이 시에 저작권을 요구 않았기에 완전한 public domain에 남아서 누구라도 인용을 할 수 있게 되어서 가히 모든 사람의 ‘장례식 애송시’가 될 수 있었다. 이 시를 조용히 가만히 읊으면.. 사랑하는 가족, 친지와 이별을 해 본 사람이면 엄청난 위로를 받게 됨을 느낀다. 큰 재난 때마다 낭송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나에게 개인적으로 다가온 것은 아마도 2007년 경이 아니었을까? 그것은 ‘나의 무덤에서..’ 가 아니고 ‘천 갈래의 바람.. a thousand winds’로 나에게 다가왔다. 2006년 말 일본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NHK의 연말 가요 홍백전에 이 시를 classic style로 부른 아키가와 마사후미 에 의해서였다. 처음 들을 때, 나는 이 노랫말이 일본 것인 줄 잘못 알았다.  센~노 가제 (천千의 바람)라는 제목이 붙은 이 classic style 곡은 곧바로 일본 최고의 인기 곡이 되었다. 그때까지도 나는 이 곡이 작자미상인 것도 몰랐다. 이 시는 당시의 일본 TV drama 였던 ‘어른들의 여름휴가(おとなの夏休み)’ 에도 나온다. 주인공 여성의 병 간호를 하는 할머니가 애송하던 시집이었다. 곧 바로 세상을 뜨는 할머니가 아마도 자기의 죽음 앞에서 울지 말라는 뜻이었을 듯 하다. 당시 그것을 보면서 나는 이 시가 왜 여기에도 나오는 가.. 일본인들과 무슨 큰 관계가 있는가 의아해 했었다.

 

결국은 류해욱 신부님의 신간인 ‘그대는..’ 에 의해서 나는 완전히 이 시를 알게 되었고 나를 매료시켰다. 왜 안 그렇겠는가? 나는 류 신부님처럼 나의 어머니를 생각한다. 이 시는 세상을 먼저 떠나간 사랑하는 사람이 남겨 두고 온 슬픔에 고통을 받는 이들을 위로한다. 거꾸로 된 것이다. 무덤 옆에서 먼저간 영혼을 위로하는 것이 아니고 그 반대인 것이다. 가슴을 깊이 울리는 아름다운 정경들을 배경으로 죽은 이가 산 이를 위로한다. 나는 죽지 않고 남겨둔 너를 항상 바라 보고 있다고. 영혼의 불멸을 믿게 된 나는 이 시어들을 이제는 100% 실감나게 믿는다. 그래서 더 나에게 ‘산’ 의미가 있다. 어떤 곳에서 세월호 비극 때에 이 노래가 번역이 되어서 불렸다고 들었다. 아마도 일본이라는 거부감 없이 슬픔에 고통을 받는 산 이들이 위로를 받았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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