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eld of dreams, trancending time & place, autobio in progress..

Monthly Archives: March 2015

또 ‘그것’을 할 때가 다가왔다. 그것.. 판공성사, 고백성사, 고해성사.. 어떻게 표현해도 다 마찬가지다. 결코 쉽지 않은 ‘의무’, 가톨릭 신자의 의무다. 이것도 의무지만 자유로운 의무고 다른 쪽으로는 우리 교회만의 권리, 특권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이 성사의 의미와 특징 (좋은 쪽으로)은 열거하면 한이 없이 많다. Matthew KellyRediscovering Catholicism 책을 요새 다시 읽으며(aka typing) timing 좋게 confession 에 대해서 복습을 하였다. 시간이 갈수록 쓰레기로 쌓이는 집이나 차에 비유해서 정기적으로 청소를 하는 것과 비교한다. 많이 쌓이면 그런 사실자체에 둔감해져서 더 많이 쓰레기가 쌓인다고. 자주 하면 할 수록 좋은 것이라고.. 누가 모르나? ‘괴롭게 들어갔다가 날라가는 기분으로 나오는 곳’ , 그곳이 바로 고백성사란 것만 기억해도 좋은 것, 이것 하나, 나는 분명히 기억한다.

올해는, 아니 내일로 다가온 이 ‘것’을 어떻게 해야 하나? 무엇을 고백해야 하나? 어떻게 해야 하나? 10중 8/9는 하태수 신부님께 하게 될 듯 한데.. 그것이 상관이 있을까? 모두들 어렵다고 하는 이것, 나에게도 어려운 것인가, 아니면 귀찮은 것인가?

이제는 ‘양심성찰’을 해야 할 때가 온 듯하다. 지난 해 6월이었던가, Conyers의 수도원에서 가진 레지오 피정 때 내가 이것을 했다고 생각하는데, 알쏭달쏭하다. 한 듯하기도 하고, 안 한 듯 하기도 하고.. 하지만 작년 사순절 때는 100% 확실히 했다. 비록 ‘사소한’ 것을 고백한 기억이지만.

 

그 동안 나의 ‘죄’는 무엇이 있을까? 대죄는 물론 없다. 소죄는 있을 듯 하다. 확실히 기억은 안 나지만. 십계명으로 출발하면, 어떤 주일을 거룩하게 안 보낸 것은 확실할 것이다. 제일 쉬운 것이 이것인가? 하지만 이런 것을 하면 내가 만족할 수가 없다. “고백성사 101″을 다시 한번 볼까나..

아마도 십계명에 ‘정면으로 거역’ 된 일을 없을 것이다. 나에게 우상이란 것은, 분명히 없다. 하느님의 이름을 마구 함부로 ‘팔아 넘기듯’ 부른 적도 없다. 주일이나 종교적 축일들을 소홀히 보냈는가.. 다행히 지난 해에 우리는 ‘부지런히’ 주일, 축일을 보냈을 것이다. 부모님을 공경하는가.. 이것은 비교적 쉬운 듯 하지만, 실제적으로 우리는 죽어도 부모님을 잘 모셨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영원히 죄로 고백해야 할 것 중에 하나다. 살인한 적도 없고, 간음한 적도 없다. 훔친 적도 없고, 요상한 소문을 낸 적도 없고 거짓말 증언을 한 적도 없다. 남의 아내를 엿보거나 흠모하거나 사랑한 적도 없다. 남이 잘 사는 것에 질투심을 느꼈을까? 이것은 100% 부인할 수가 있을까? 나는 ‘지나치게 사치하게 잘 사는’ 사람을 가끔 ‘경멸’한 적은 있지만 그 정도로 부러워한 적은 거의 없었다.

 

죄를 안 짓는다는 소극적인 것에서, 과연 적극적으로 ‘선행’을 하고 살았던가? 이것은 자신이 없다. 죄를 피하며 살았을지언정 적극적으로 남을 인간으로 사랑하거나 물질적으로 도와 주었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나의 ‘재주, 재능’을 하느님을 위해서 효과적으로 사용했을까? 이것도 자신이 없다. 비록 레지오라는 단체에서 ‘봉사’를 한다고 하지만 언제까지나 만족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할 수가 없다.

 

예수님의 사랑의 2계명:

‘You shall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with all your soul, and with all your mind. This is the greatest and the first commandment. The second is like it: You shall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The whole law and the prophets depend on these two commandments’(Mt 22:37-40).

“Love is patient, love is kind. It is not jealous, [love] is not pompous, it is not inflated, it is not rude, it does not seek its own interests, it is not quick-tempered, it does not brood over injury, it does not rejoice over wrongdoing but rejoices with the truth. It bears all things, believes all things, hopes all things, endures all things. Love never fails” (1 Cor 13:4-8).

 

지난 해 판공성사 (사순절부터) 이후 나는 어떻게 살았는가? 남이 보기에 부끄러운 짓을 하지 않았던가? 고정적인 일상생활의 pattern으로 두드러진 것은 생각이 안 난다. 가깝게 나를 ‘괴롭히는’ 것이라면 ‘겸손하지 않다고 보이는’ 연숙의 행동들에 대한 나의 짜증 정도? 이것도 죄가 될까? 마찬 가지로 두 딸들에 대한 나의 실망감..

하지만 조금 밖으로 눈을 돌리면, 미안한 것들이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작년 여름 레지오 회합에서 큰 생각 없이 한 나의 ‘솔직한’ 말 때문에 장 실비아 자매가 퇴단까지 한 것은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는 뜻밖의 일이었고, 나의 말을 너무나 심각하게 받아들인 상대방만 탓하기도 했다. 하지만 원인은 무조건 나에게 있기에 나의 잘못이고 미안해 해야 한다는 생각이 너무나 뒤 늦게 들었다. 같은 여름 미국성당에서 ‘사소한 고정석’을 빼앗긴 것이 발단으로 ‘터진’ 나의 ‘분노’도 마찬가지로 전적으로 나의 ‘문제’에 의한 것이었다. 상대방이었던 필리핀 자매에게는 너무나도 잘못을 하였다. 기분이 쳐지거나 나의 ‘운전 불능’신세를 한탄하며 연숙의 운전 실력을 100% 매도하는 나날들 또한 어떨까.. 나의 일방적인 잘 못이 아닐까? 이런 것들을 떠나서 나는 언급하기 싫은 ‘잘못’을 했고 현재도 하고 있다. 가슴 속 깊이 잠자고 있는 나의 ‘깊은 상처, 수치’를 건들이거나 하고 싶지 않다. 그만큼 이것이 무서운 것이다.

근래에 너무나 가까워진 수 많은 ‘자매님들’.. 인간의 한 부류로 신선하게 다가온 수 많은 자매님들을 나는 어떻게 생각하는 것일까? 신앙적 동지일 수 밖에 없는 그녀들을 나는 가끔 어떤 생각까지 하며 ‘즐기고’ 있는 것일까? 아직도 나는 여성에게 여자의 미련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은근히 나는 이성들이 많은 곳에서 어떠한 환상적인 생각을 하고 싶은 것은 아닐까? ‘생물적’인 충동이 아직도 있다는 사실은 나를 진정 놀라게 한다. 그것 때문이 예전의 ‘환상적 잘못’의 세계로 조금이라도 다가 갈까 봐 조바심도 나는 것이다. 성모님에 의지하는 내가 왜 다시 성모님께 의지하지 않는 것일까? 너무나 수치감을 느껴서 그런지도 모른다. 나는 이런 상태를 초월하는 다음의 단계로 성숙해야 한다. 이것을 나는 어떻게 신부님께 고백을 해야 하는 것일까? 이것이 오늘 저녁에 예정된 성사에서 풀어야 할 과제가 되었다.

Early Spring Bradford Pear

Early Spring Bradford Pear

 

오랜만에 가랑비가 싸늘하게 느껴지는 조용한 점심 식사 전, 오후를 맞이한다. 그렇게 추웠던 올 겨울도 결국은 나와 같이 나이를 느껴는 듯 조용히 물러가고 있다. 이곳 이른 봄의 상징인 Bradford Pear tree의 하얀 꽃이 부끄럽게 피어나는가 싶더니 갑자기 무덥게 느껴지는 봄 기운을 맞이 했는지 갑자기 만발을 했다. 뒤뜰을 조심스럽게 보니 거기에는 일년 전에 보았던 노란 개나리가 피기 시작한 모습이 있었다. 내일이 춘분, ‘사철과 책력’의 기억에 봄의 시작인 춘분, 달력에는 그저 Spring begins라고 쓰여있지만 유식한 (천문학적) 표현은 역시.. Spring Equinox일 것이다. 그러니까.. 봄의 계절에 밤과 낮의 길이가 거의 같이 되는 날..

2015-03-19 15.08.49-1올해의 겨울도 작년과 버금갈 정도로 끈질기게 길었던 추위를 느끼게 했다. 20년 동안 ‘동복’이라는 말을 잊은 채 살다가, 태고적에 입었던 ‘진짜 겨울 옷’들이 대거 등장해서 톡톡히 본전을 뽑았다. 아닌게아니라 그런 옷들은 반 세기 전에 고국에서 입었던 ‘골동품’도 있었고 Midwest에서 살 때 (Illinois, Ohio, Wisconsin) 겨울에 입었던 그런 종류였다. 사반세기 전에 이곳에 이사온 이후 거의 한번도 입어본 적이 없었던 것들.. 다행히 대부분 이곳의 더운 공기 피해를 입지 않고 잘도 보존이 되어 있었던 고마운 역사적인 옷들이 올해는 차가운 공기를 맡으며 생기를 찾았다. 이런 연이은 추운 겨울을 보내며 global warming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기도 했다. 느끼는 것은 global cooling같았지만 역시 이것은 지역적인 현상에 불과한 것일 것이다. 겨울을 완전히 보내며, 작년과 같은 추위와 눈에 의한 ‘대형사고’가 올해는 하나도 없었던 것을 감사 드린다. 눈이 올 때 느끼는, thrill과 dramatic 한 짜릿한 suspense 는 조금 아쉽기도 하지만, never mind, who cares?

차분하고 경건해야 할 것만 같은 사순절의 한 가운데를 지나면 왜 이렇게 ‘우리’는 초조함을 느끼는 것일까? 평화가 줄어들고 수심과 걱정이 휩싸이는 느낌.. 이번 사순시기는 무엇인가 이런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지만 대부분 나의 탓이기에 할 말이 없다. 내가 그렇게 만든 것.. 이라고 생각한다. 해야 할 ‘중요한’ 것은 계속 뒤로 미루며 사는 것, 왜 나는 진정한 proactive한 인간이 못 되는 것일까? Matthew KelleyThe Four Signs of a Dynamic Catholic에게 오랜 만에 자극을 받는가 싶었지만 다시 주저앉는 나의 모습.. 절제된 자기훈련이 된 하루하루를 살고 싶었고 그렇게 할 희망은 충분히 아직도 있다. 비록 치통에 모든 잘못을 탓하고, 비실비실 잠열에 뒤척이는 모습이었지만.. 훌훌 털고 일어나자! 작년에 비한 우리의 ‘위상’은 하늘과 땅이 아니던가? 최소한 무언가 변하게 될 ‘희망’이 있지 않은가?

진정으로 우리를 초조하게 하는 것은 배해숙 자매의 병세 때문일 것이다. 생각보다 더 약한 모습으로 변하는 자매님, 돼지띠 동갑 자매님.. 놓칠 수가 없다. 우리 부부는 그런 심정으로 지금 싸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얼마 더 오래 살지는 하느님만 아시겠지만 우리의 ‘요구’는 최소한 이 자매님이 짧지 않은 ‘진정 행복한 나날’을 아드님들과 즐길 수 있는 ‘건강한 나날’을 주시라는 것이다. 수 십 년도 아니고 아니 몇 년이라도 좋다. 진정한 행복한 인생이 무엇인지 되돌아 볼 수 있는 건강한 기간, 시간을 주시라는 우리의 기도가 그렇게 무리일까? 아니지요.. 성모님.. 어머님.. 인자하신 성모님, 기도해 주세요.

오늘 예정대로 ‘병원’에서 배 자매님의 세례식이 ‘거행’될 것이다. 분명히 그녀는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실 것이다. 그것과 더불어 더 건강한 새 생명이 함께 하시게 되시기를 우리는 기도한다. 하신부님의 배려로 성사되는 이번의 세례식.. 조금 있으면 떠나게 되는 하 신부님, 지금부터 서운하기만 하다. 어쩌면 나와 그렇게 모든 ‘코드’가 잘 맞았는지 아무도 모들 것이다. 이런 신부님 앞으로 나는 다시 못 만날 것이다. 개인적으로 친해지고 싶었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다 지나지 않았던가..

Before the Internet, most people rarely wrote for pleasure or intellectual satisfaction after graduating from high school or college.

 – Clive Thompson on Wired Magazine

 

Some researchers believe that by writing and then editing our own stories, we can change our perceptions of ourselves and identify obstacles that stand in the way of better health.

 – Tara Parker-Pope on New York Times

 

5년 전쯤 나의 Serony’s Friends personal blog을 시작할 때 ‘왜, 지금?’ 이라는 생각은 별로 심각하게 한 기억이 없다. 이유가 있었다면, 그저 막연하게.. 남들이 하니까.. 혹시 옛 친구나 친지를 이곳을 통해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정도가 아니었을까? PC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많은 덕분에 tinkering을 하는 시간도 따라 많고, 그 중에 blogging은 아주 적당한 ‘머리 운동’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  동안 나의 blog post (and pages)가 500 에 다다르게 되었고, 이것들을 ‘찾거나, 보아주는’ view count는 30,000 에 가깝다. 블로그의 숫자를 보면 나는 일주일에 2번 이상 posting을 했다고 볼 수 있고, 이것들이 public viewer 들에게 ‘노출된’ 것은 하루 평균 거의 30회에 달한다. 이런 통계는 나를 모르는 public에게 알리는 것을 꺼려하는 것에 비하면 놀랍게도 상당한 ‘노출’인 것이다. 하지만 이런 ‘무미건조’한 통계가 나의 블로그 그 자체는 아니다. 그 이외의 숨은 나도 모르던 것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 것을 위에 인용한 Wired magazine와 New York Times 기사들을 보며 조금 깊이, 다른 각도로 생각하게 되었다.

위에 quote 된 Wired Magazine의 말 대로, 한마디로 인터넷이 대중화1 되기 전까지 (아니면 blog가 출현하기 전까지) 대부분 사람들.. 학교를 떠나고 나서, ‘필요에 의해서가 아닌’ 이유로 의미 있는 ‘자기의 글’을 쓰게 될 기회가 있었을까? 아마도 아주 소수의 ‘선택된’ 사람들을 제외하고,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런 글들도 대부분 diary, journal 정도였을 것이다. 나도 무언가 남기고 싶은 심정으로 일기를 조금 씩 ‘남기곤’ 했지만 그것도 사실 나이가 들어가며 서서히 없어지고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남이 볼 수도 있는 글이나 기록’을 만든다는 것은 사실 ‘말도 안 되는’ 꿈에 가까운 상상이었다.

20세기가 저물어가며 본격적으로 쓰기 쉬운 인터넷의 광장, World Wide Web 이 대중화 되면서 조금씩 ‘쓰는 것’이 쉬워지기 시작했는데, 이것도 대부분 ‘말도 안 되는 바보 같은 댓글’ stupid comments 가 주류였다. 조금은 심각한 forum같은 것도 있었지만 그런 곳에 심각한, 의미있는 글이 나올 것은 기대하기 힘들었다. 또한 그런 곳에 자신을 들어내며 글을 쓰는 부류는 아주 소수에 불과했고 대부분은 ‘읽기만 하는 정보 소비자’역할을 했다.

서서히 자신의 독특한 ‘의견, 견해, 주의’ 등을 특별한 대상이 없이 발표하는 ‘결심이 단단한’ 부류들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그들이 지금 거의 당연시 되고 있는 블로그의 효시가 되었고 그들은 서서히  blog ecosystem, blogosphere를 형성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자신만의 homepage란 것을 만들어야 하는 귀찮은 과정을 거쳐야 했지만 무료 blog host2란 손 쉬운 platform 이 생기며 이것은 폭발적인 기세로 퍼져나가서 이제는 블로그 ecosystem에서 아주 중요한 얼굴이 되었다.

블로그 중에서도 나의 관심은 역시 ‘개인적 블로그’인 personal expressive blog 이다. New York Times의 기사가 그런 현상을 잘 보도하고 있다. 이 기사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글을 쓴다는 것, 물론 전문적인 author 들이 아닌 고등학교, 대학교를 졸업한 정도의 사람들이 쓰는 수준을 말하지만 문제의 핵심은, 안 쓰는 사람보다 쓰는 사람들이 훨씬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여러 가지 ‘개인적 심리, 사회적 심리’의 각도에서 ‘과학적’인 실험을 하며 설명을 하였다. 이렇게 과장된 듯한 결론에 대한 우리의 의문은 역시,  ‘왜 그럴까?’ 하는 것이다.

언어의 힘, 언어의 잠재력.. 특히 written language의 특성을 잘 생각해 보면 위의 의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다. 머리 속에서 맴돌던 생각, 오랜 동안 남았던 생각들, 골머리 앓던 생각들.. 이것과 ‘언어’에 의해서 말로 나타나면 더 구체적인 힘을 얻고, 더 나아가서 ‘쓰여진 언어’로 가면 다른 차원의 힘을 얻을 수 있다. 나는 이런 명제를 ‘성경쓰기’에서도 찾아 볼 수 있고, 책을 읽을 때 ‘쓰면서 읽는’ 방식에서도 분명히 느낄 수 있다. 이렇게 ‘나의 생각’을 글로 나타낸다는 행위는 생각 뿐인 것으로부터 구체적인 쪽으로 변화를 시키는 힘이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수동적, 피동적’에서 능동적, 적극적으로 바뀌는 촉매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blog을 시작할 때, 이런 거창한 논제보다는 상식적인 선에 의해서 나의 blog agenda를 정하고, 고치며 지금까지 왔다. 100% personal한 것이 첫째이며 마지막이었다. 모든 것이 나에 관한 것, 나의 생각, 나의 결정, 나의 인생, 나의 주변..100% expressive blog을 목표로 하였다.  나의 blog은 물론 public이 대상이지만 이것은 별로 생각할 여지가 없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사항. 나 혼자 본다는 blog은 diary이기 때문(이미 쓰고 있는)이다. 그러니까 ‘가상적인’ viewer들을 ‘상상’할 수 밖에 없는데.. 나는 구체적인 목표를 만들었는데.. 나와 우리 가족을 개인적으로 아는 집단을 생각했다. 시공간을 뛰어넘어 나를 알았고, 기억하고, 알고 있는 사람들.. 과연 얼마나 될까? 과거로 돌아가면 꽤 많은 사람들이 있기에 이런 blog을 통해서 과거와 연결이 되기를 기대하며 글을 내 보였다. 이것이 나의 blog이 memoir로 시작된 이유가 되었다.

시간적으로 계속되는 blog은 한마디로 autobiography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blog tag line에도 autobio in progress가 붙게 되었다. 나의 개인자서전을 과연 누가 읽을까 하지만 그것은 전혀 문제가 아닌 것이.. 그것을 쓰는 자체가 주안점 whole point 이기 때문이다. 희망적으로는 내가 먼지가 된 오랜 후에 나의 offspring이 발견한다면.. 하는 것 뿐이다. 다음은 나의 남은 생의 과정을 남기고 싶었다. 그러니까 public diary인 셈이다. 나는 이것을 Daybook이란 category로 만들어서 쓰고 있다. 개인 일기는 ‘아무 것, 비밀, 욕, 불법적인 것’등을 마음대로 쓸 수 있지만 daybook은 그런 것들을 할 수 없다. 그것이 매력이고 마력이다. 나와 public이 같이 share할 수 있는 것들.. 그러니까 ‘사회적인 나’ 에 관한 것들.. 생각들.. 신변잡기, 나의 생각, 무궁무진한 제목들이 이곳에서 기다린다. 다만 대상이 public이란 특성을 항상 염두에 두고.. ‘조심스레’ 다루어야 한다. 현재까지 나는 큰 문제가 없었지만 그래도 작은 몇 가지 잡음을 경험했다. privacy control의 ‘절묘한’ 기술이 필요한 것이 바로 이곳이다.

현재까지 나의 Memoir 를 고등학교 시절까지는 일단 끝 냈고 근래에는 대학 2학년까지 다다르고 있다. 목표는 내 인생의 ‘전부’를 글로 남기려는 것이지만 글쎄 그것이 그렇게 쉬울까? 인생의 처음 부분이 비교적 쉽게 기억이 나고 쓰기가 쉬웠던 것은 역시 simple했던 시절이어서 그랬을까? 대학을 넘으며 더 어려워지고.. 인생의 전환기를 미리 생각만 해도 골치가 아파져 온다. 그래도 노력을 해 볼 것이다.

  1. 쉽게 말하면.. ‘보통 중년이 지난 아줌마’들이 매일 편히 쓸 정도가 될 때쯤이 아닐까?
  2. blogger나 wordpress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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