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ieu.. September 2015

Glorious, deep blue, higher and higher.. 갑자기 쏱아진 가을하늘에는..

Glorious, deep blue, higher and higher.. 갑자기 쏱아진 가을하늘에는..

 

¶ 습기가 갑자기 사라진 하늘은?  올해의 여름의 특징은 흔히 말하는 heat index, 그러니까 ‘불쾌지수’라는 것이 유난히 높았던 것이다. 한번도 화씨 95도를 넘지를 못했지만 문제는 지독한 습도였다. 정말 무시무시하게 높은 습기는 공기를 완전히 steam room같은 것으로 만들어, 보통 때면 선풍기면 시원한 것도 이번만은 ‘절대로’ a/c로 습도를 낮추어야 하는 것으로.. 이것이 쉬지도 않고 밤낮으로 돌고 돈다. 시원한 것은 좋은데.. 문제는 엄청난 electric bill. 아마도 $400까지 치솟지 않을까 미리부터 우울해 진다. 그런데 하루 아침에 하늘의 물기가 완전히 사라졌고 a/c의 소음도 따라 없어지고.. 9월로 깊이 접어들며 경험하는 신선하고 즐거운 느낌.. 이래서 계절의 변화는 신비스럽기만 하다.

 

¶ 거의 매일 장례식:  주임 신부님 (이재욱 세례자 요한)의 얼굴과 입술에 피로의 기색이 역력히 보인다. 연일 열리는 듯한 연도, 장례식, viewing.. 이것과 관련해서 거의 매일 병자성사, 병원방문, 장의사 연도.. 어찌 피곤하지 않을까? 9월 초부터 시작된 이런 의식들이 9월 중순에서야 끝이 났다. 황 어거스티나 자매님과 조 이시도르 형제님.. 특히 조형제님은 최근 몇 개월 동안 봉성체, 병자성사들을 통해서 신부님과 같이 많이 찾아 뵙기도 했다. 그렇게 우리의 방문을 꺼려하던 형제님, 선종 몇 주를 앞두고부터 서서히 가슴을 열고 우리의 방문을 기다리게 되었던 분.. 비록 신앙심의 열매를 더 맺었으면 했지만 그것이 그렇게 중요할까.. 절대자에게 조금이라도 가슴을 열고 가셨으니.. 우리는 분명히 평화스런 곳으로 가셨으리라 믿고 있다. 황 자매님은 레지오 활동단원으로 선종을 하셔서 순교자 성당 초유의 ‘레지오 장’으로 장례미사가 치러지기도 했다. 기술적인 문제를 떠나서 레지오를 그렇게 사랑하신 자매님에게 이런 ‘선물’을 누가 마다하겠는가?

 

¶ 나는 어떻게 죽을까..  레지오에 입단한 이후 참 많은 선종과 장례의식을 경험을 하였다. 입단 5년 가까이 되는 이 시점에 나는 정말 많은 영혼들과 작별을 하였고 그들의 유족들과 함께 있기도 하였다. 지난 5년간 나의 ‘좌우명’ 중에 하나는 결혼식은 빼먹을 수 있어도 장례의식은 ‘가능하면, 최선을 다해서’ 참석하리라는 것이었다. 그 이전까지 나는 이와는 정반대의 행로를 걷고 살았다. 그것이 하루 아침에 완전히 180도 뒤 바뀐 것이고 이것은 나에게 작은 기적 중에 하나로 남게 되었다. 이런 경험을 통해서 나는 항상 생각하는 것이 ‘나는 어떻게 죽을까, 죽어야 할까’ 하는 절체절명 絶體絶命의 대명제 大命題.. 바로 이것이다.. 나는 이 해답을 찾기 위해서 그렇게 나를 바꾸어 놓은 것이다. 이 죽음이야 말로 신앙의 핵심주제가 아닌가? 나는 배우러 그곳으로 가는 것이고 그 결과는 상상을 초월한 무궁무진한 놀라움 뿐이고 아직도 변함없이 계속되고 있다.

 

¶ Dark night of ..

어두운 밤에 캄캄한 밤에 새벽을 찾아 떠난다.. 종이 울리고 닭이 울어도, 내 눈에는 오직 밤이었소. 우리가 처음 만난 그 때는 차가운 새벽이었소. 당신 눈 속에 여명 있음을 나는 느낄 수가 있었소…

 

2012/13년도 레지오 연차 총친목회에서 우리 레지오에서는 ‘희귀동물’에 속하는 몇 명의 남성단원들과 같이 연습하고 불렀던 노래 중에 나오는 가사 중에 바로이다. 당시에는 큰 묵상이나 생각조차 없이 ‘신나게’ 불러 댔지만.. 어떤 것이 캄캄한 밤일까.. 생각한다. 내가 현재 가끔 겪는 것도 그 캄캄한 밤에 속하는 것일까? 특히 9월 중순의 며칠간 겪은 마음속의 고통은 예상외로 심한 것이어서 속으로 계속 이것이 바로 ‘어두운 밤의 시작..’일 것이라고 혼자 단정을 해 버리기도 했다.

대체로, dark night (of the soul)은 가톨릭 신앙에서 ‘믿음의 위기’를 말한다. 대표적으로 ‘복자 (blessed)’ Mother Teresa의 경험은 유난히 오랫동안 지속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나에게는 사실 근래까지의 ‘지독한 냉담’ 생활이 바로 이런 것이었을 것이지만 그 당시에 전혀 그런 사실조차 느끼지 못하고 살았다.  서서히 가슴을 열면서, 보이고 느껴지는 ‘빛’을 보고 느끼면서 비로소 나는 내가 바로 그 dark night에서 살았다는 것을 처음으로 실감하게 되었다.

새벽을 찾아 떠난 과정이 비록 하루 아침에 생긴 일이 아니었어도 그렇다고 그렇게 긴 여정은 아니었기에 아직도 그 경험이 신선하게 느껴지고 이제는 ‘줄줄 외울 수’ 있을 정도로 정리가 되었다. 목적은 다시는 절대로 다시는 그 전의 세월 (어두운 밤) 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우려에서였다. 하지만 그것이 그렇게 말처럼 쉬울까? 다행히 9월 중순의 ‘어두운 밤’은 불과 며칠간 계속된 ‘가벼운’ 것으로 끝이 났다.

 

나는 대체 어디에 있는가?

나는 도대체 어디에 속한 인간일까? 나를 근본적으로 혼란하게 하고 심지어 슬프게 하는 것이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나는 정말 모르고 모르고 살았고 아니 모르게 만들며 살았다는 놀라운 실감에 나는 또 한번 경악을 한다. Pretending의 극치인가? 나는 그렇게도 모질고 지독하고 이상한 인간일까? 나의 identity 에 대한 극도의 혼란을 나는 ‘모른 척’ 하고 수십 년을 살았다는 사실에 나는 초조함을 느끼기도 한다.

인생의 대부분의 세월에서 나는 이 근본적인 질문을 100% 피하며 살아 왔다. 내가 속한 곳은 도대체 어디란 말인가? 나에게도 살아계신 어머니가 서울 쪽에 아직도 계신다면 훨씬 편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나의 어머니의 땅이 나에게도 포근한 고향이고 언제라도 갈 수 있다는 생각에 나는 도취되어 행복한 마음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오래 전에 지나간 과거사가 되었다. 누나.. 어찌하여 누나는 나와 가족을 잊고 살게 되었을까? 나는 이제 고립무원, 혈혈단신이라는 슬프고 괴로운 현실을 직시하며 나의 자리를 찾아야 한다.

언제부터 나는 KOREA를 잊기 시작했을까.. 분명 나의 고향은 그곳인데 어째서 나는 남들이 못하는 ‘쾌거’를 이루었을까. 모질게도 그곳에 관한 것은 무자비하게 피하고 없는 것처럼 연극을 하며 나를 세뇌했을까? 궁여지책으로 바로 옆에 있는 일본에 기대어 가짜 향수를 느끼려고 했을까? 다른 것 보다는 비슷한 것이 더 많은 일본에서 나는 가짜 향수를 느끼고 포근함을 느끼려고 했다. 본질적인 고향은 너무나 너무나 나를 미치게 그립게 하기에 그랬다고 나는 자위하기도 한다. 그곳의 연속극, TV 영화 등을 마치 옆 동네 것처럼 가까이 달며 사는 주위의 사람들.. 연숙도 마찬가지지만.. 부럽기도 하고.. 아니.. 질시하기도 하지만 경멸하기도 했다. 이곳까지 와서 그곳을 그렇게 가까이 느끼며 살려는 그들의 자세를 비하시켜 비난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내가 이제는 마지막으로 나의 고향을 다시 찾아야 한다고 움직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작년 9월 10일에 시작된 ‘고향찾기 운동’의 시작.. 일년이 되어온다. 대 장정이라고 나는 이름을 붙였지만 솔직히 1년이 되도록 계속될 줄을 몰랐다. 이제는 조금 ‘풀이 죽어서’.. 그저 기다리기로 했다. 기다리면 오겠지.. 내가 또 성모님을 잊었던가? 나를 흙탕 또랑에서 위로 이끌어 주시는 성모님을 또 잊었던가?

나의 진정한 고향은 어디로 갔는가? 내가 편안하게 안주해왔던 머릿속에만 있던 꿈의 고향들은 사실 꿈에만 있는 것일까? 내가 너무나 심하게 옛날을 그리며 그곳에서 편안함을 찾았던 것일까? 남들처럼 ‘하나도 끌리지 않는’ 요새 세상을 포용하며 살아야 하는 것일까? 고향을 놓치지 않으려고 발버둥하며 살아온 만큼 다시 고향을 조금씩 놓아가며 현재에 더 익숙해지며 사는 것이 ‘옳은 것’일까? 그것이 나는 너무나 어렵다. 나의 신분과 움직임이 조금 더 자유스러워진다고 해도.. 나는 어려움을 겪을 듯 하다.

하지만 나는 ‘진보’하고 있다. 5년 전을 생각해보라.. 나는 ‘한국인과 한국말’을 절대로 피하며 살았지 않았던가? 5년 동안 나는 ‘어머님’을 향해 뒤를 안 보고 달렸지 않았던가? 그러한 노력과 은총이면 나의 남은 시간도 헛되게 보내지는 않으리라. 나에게 어떤 ‘과제’가 주어질지를 나는 아직도 모르기에 방황하는 것이라고 나는 낙관적으로 생각하고 싶다.

여름을 보내는 문턱에서..

¶  2015년 Summer season을 서서히 마감하는 여름의 마지막 휴일, Labor day weekend를 맞이한다. 오랜 전에는 어딘가 불쑥 계획 없이 집을 떠나기도 한 기억이 있지만 지금은 그것이 사실 너무도 옛날의 이야기일 듯 하다. 그 중에 쉽게 기억이 나는 것이 1983년 Labor Day 때의 것, 당시 9개월이 된 첫 딸 새로니를 차 뒤에 ‘묶어 두고’, 그야말로 아무런 생각 없이 Chicago 쪽으로 에어컨도 없는 ‘고물’ 차를 몰았던 추억이다. 당시에는 Columbus (Ohio)에서 학생시절이었고, 지긋지긋한 기나긴 학교생활에서 간신히 벗어나 나의 첫 career job이 정해진 직후였다.

나에게 너무나 익숙한 Chicago는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지만 그저 ‘진짜 한국음식’, 그 중에서도 ‘진짜 한국식 중국음식’들이 너무나 그리워서 에어컨도 없는 차를 겁도 없이 몰았다. 총각 때의 경험 만으로 그렇게 겁이 없었던 것일까.. 가다가 차에 문제가 생겨서 repair shop에서 지체하기도 했지만 결국 우리는 그렇게 먹고 싶던 한식, 한국식 중국음식 등으로 배를 채웠다. 지금 생각하면 조금은 아찔한 여건이었지만 젊음 때문이었을까.. 우리 부부 둘, 참 겁도 없이 그렇게 다녔다. 점점 지옥같이 느껴졌던 학교 생활을 떠났다는 기쁨에 들떠서 모든 것들이 뽀얀 희망으로 보였던 시절이었다. 새로 태어난 우리의 제2의 생명과 새로운 나의 첫 직장, 새로 얻은 가톨릭 신앙.. 등등으로 시작된 우리의 기나긴 ‘가족인생’ 여정의 출발, 그 뒤로 또 하나의 생명을 얻었고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4식구가 건강하게 나이를 먹으며 작은 식구가 같은 곳에서 모여 살게 되었음을 감사하는,  그 당시가 새삼스럽게 기억나는 오늘이 되었다.

 

¶  어제 저녁때는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의 교우이자 레지오 단원이셨던 황 어거스티나 자매님 연도에 다녀왔다. 레지오 단원의 급작스러운 선종이기에 긴 휴일 주말에도 불구하고 많은 레지오 단원들이 참석해서 정성스럽게 레지오 전 묵주기도문과 연도를 바쳤다.  참 올해는 유난히도 연도, 장례식이 많은 느낌이었지만 이 자매님의 경우 너무나 예상치 않았던 죽음에 모두들 놀라기만 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비교적’ 건강하고 씩씩한 모습이었던 모습으로 기억을 하는데 어떻게 그렇게 갑자기 가셨을까. 

각종 레지오 모임에서 보게 되는 익숙한 모습이고, 근래에는 우리와 같이 봉성체 봉사를 같이 하였고, 작년에는 점심식사도 같이 했던 친근하고 시원스러운 자매님, 정말 급작스럽게 가셨다. 병명은 ‘희귀 병’이라고 하는데.. 의사들도 마지막 순간에서야 확실한 병명을 발견했다고 했다. 미리 원인과 병명을 알았어도 치료 방법이 확실치 않은 희귀 병이라고 하니.. 참, 누구를 탓할 것인가? 선종하기 전에 유언으로 ‘레지오 장 塟’을 원하셨다고 해서 장례미사는 아마도 많은 레지오 휘장 banners 을 보게 될 듯하다.

가을 비, 마르쎌리나, 이시도르

rainy-leaves

I’m dreaming of rainy Autumn foliage..

 

¶ 지난 주부터 갑자기 건조한 가을날씨 선을 며칠 보이더니 그것도 며칠을 못 가서 다시 올 여름의 골칫거리인 습기로 가득 찬 하늘이 찾아왔다. 하지만 이런 ‘열대성 하늘’도 수명이 길지는 않으리라.. 이제부터 기대해 볼 것은 무엇일까? 건조하고 따가운 가을 햇살아래 무르익은 사과 밭의 풍경들, Holy Family성당 제단 옆의 전면유리에서 영화 장면처럼 변화하는 낙엽 떨어지는 고목들, 파~아란 하늘을 배경으로 지옥의 악마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던 9/11의 슬픈 기억들.. 하지만 최소한 한번 정도는 보여주는 ‘싸늘한 가을비‘의 포근한 느낌을 미리 그려보게 되는 2015년 9월의 시작이다.

 

¶ Marcellina, St. Marcellina  4세기 경 이태리의 성녀이름이다. 성녀 마르쎌리나.. 같은 이름을 ‘세례 명’으로 가진 자매님과 우리 부부가 같이 Fujihana 에서 점심을 했다. 마리에타 2구역에서 10 여년을 넘게 알듯 모르듯 낯을 익히며 지내던 같은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소속 교우 자매님이 아틀란타를 ‘완전히’ 떠나는, 이별을 아쉬워하는 뜻 깊은 오찬 시간이 되었다. 솔직히 섭섭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이런 타향살이에서 무언가 조금 통하는 영혼을 만나는 것 쉽지 않기에 더욱 섭섭하였다.

긴 세월 혼자서 자녀들을 다 키우며 근래에는 신앙적으로도 많이 활발해진 듯 보였기에 한때는 레지오 입단을 은근히 희망했지만 성당 성물방 봉사 등 다른 쪽으로 활동했는데 캘리포니아 주에서 공부하는 아드님의 뒷바라지를 위해서 완전히 이사를 가시는 모양이었다. 이별하는 자리에서 레지오 협조단원으로 가입을 하시는 선물과 함께 허심탄회한 인생살이를 솔직히 나누어준 자매님.. 기도 중에 서로를 기억하며 건강한 미래가 되기를 빕니다.

 

¶ Isidore, St. Isidore.. 이시도르, 이시도로, 이시돌.. 남자 성인의 이름을 가진 다른 교우 형제님의 이름, 조 이시도르 형제님. 지난 2개월 동안 시름시름 아프시다가 급기야 신부님으로부터 ‘병자 성사’를 받게 되었다. 옛날에는 ‘종부 성사’라고 불리던 이 의식은 사실은 ‘죽음이 임박한’ 가톨릭 신자에게 주는 ‘마지막 성사’다. 한때는 신부님은 물론이고 봉성체를 거부하던 이 형제님이 얼마 전부터 적극적으로 신부님과 영성체를 원하셨다. 우리가 볼 때 하나의 작은 기적이라고 할까.

사연이 간단치 않은 인생을 보내신 것을 알기에 우리는 더욱 하느님을 조금 더 알고 궁극적인 임종을 맞이하기를 희망했다. 비록 고통스럽게 투병을 하는 하루하루지만 그래도 자기가 가는 곳을 조금 더 알고 가는 것이 얼마나 위로가 될 것인가. 어제 너무나 급작스럽게 선종하신 황 어거스티나 자매님의 소식과 오늘의 병자성사는 인간에게 피할 수 없는 진실, 죽음을 더 생각하는 하루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