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ietta Local 2, 구역 미사

이번 주 수요일 저녁, 초여름 같이 덥던 날 저녁에 오랜만에 마리에타 2구역 미사엘 갔다. 너무나 오랜만에 구역미사엘 가는 기분이 들어서 기록을 찾아보니 마지막으로 갔던 때가 작년 10월 달 C 마르코 형제 댁에서였다. 세월이 이렇게 흘렀나? 그 이후에 구역미사가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랬다면 우리는 가지를 않았던 것이다.

이번에는 가급적 구역 미사에 가리라고 마음을 먹었는데 그 이유 중에는 (1) ‘비정상적으로, 미친 듯이’ 비대해진 구역이 재 조정되는 사실(2반으로 나누임)이 신부님으로부터 공식적으로 발표가 되는 중요한 자리라는 점, (2) 평소에 친근하게 느껴지는 돈보스코 형제 댁에서 열린다는 점, 이 포함되어 있었다.

몇 년 전부터 거대, 비대, 걷잡을 수 없이 커져나간 그야말로 sprawling suburb 처럼, 온갖 예상치 못한 문제들을 안고 있었던 이곳을 나는 멀리서, 가끔은 가까이에서  ‘인과응보 因果應報, 자업자득 自業自得‘의 간단한 진리를 터득하고 터득한 터였다. 이것들은 모두 사람이 만든 재해였다. 저절로 생긴 재해가 아닌 것이다. 그 문제의 핵에는 몇몇 안 되는 사람이 항상 있었고, 그렇게도 우리는 멀리서 ‘무언 無言의 경고’를 했지만 self-correction할 시기를 놓치고, 결국은 갈 때까지 간 것이다. 뒤에 생각해 보니 역시 ‘진정한 기도’가 빠진 group의 말로가 아니었던가?  문제 핵심의 장본인은 결국은 피해자로 (a.k.a, persona-non-grata) 전락을 하고 한 동안 떨어져 나간 듯이 보였고 그 결과 겉으로 보기에는 불안한 평화, 잠잠해진 듯 했다. 하지만 그 문제의 핵은 요사이 다시 조금씩 꿈틀거리기 시작하고, 다시 이 group 앞날은 불투명해질 수도 있는 먹구름이 끼기 시작한다.

어쩔 수 없는 ‘불어난 덩치’에 의한 문제는 비교적 직접적인 조직적인 방법으로 풀릴 수 있겠지만, ‘문제의 핵’에 의한 문제는 그 핵의 중심 인간들이 바뀌지 않는 한 절대로 풀리지 않는다. 그것이 나의 결론이다.

구역의 비정상적인 덩치에 의한 문제는 이날의 미사에서 신부님의 sanction 비슷한 조치로 공식화 되었고, 거의 순간적으로 기본적인 모임에 관한 문제 logistics 는 풀린 셈이 되었다. 훨씬 전에 이런 조치로 문제를 풀 용단을 내리지 못한 것이 잘못이라면 잘못이지만, 이제라도 단계적으로 풀어나간 새 구역장단들, 의미 있고, 큰 일을 했다고 본다. 

이제부터는 bubble-era mansion같이’엄청 커다란’ 집들에 비해서 depression-era 를 연상시키는 작은 우리 집에서도 구역모임을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니까, 감회와 감개무량한 심정까지 들 정도가 되었고, 조금 더 오붓하고, 조용하고, 차분하게 신앙중심적인 소 공동체를 상상하는 것, 작은 즐거움이 아닐 수 없다.

이날 한가지 새로 알게 된 사실은 이날 host, 돈보스코 형제가 연세대 출신이라는 것이었다. 물론 ‘새카만’ 후배 동문이었지만 반가웠다. 어떻게 내가 연세대 출신임을 알았는지 모르지만 그것이 궁금할 것은 하나도 없다. 알았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니까.

p.s., 이 모임에서 우리 둘은 jumbo-size 양주 공급 덕분에 어쩔 수 없이 외도를 한 셈이 되었고 다음 날, 하루 종일 nasty hangover로 고생을 해서 쓰라린 교훈을 얻은 셈이 되었다.

 

진정 나이가 든 것인가..

¶  온몸이 쑤신다. 유별나게 예전과 다르게 쑤신다. Tylenol을 계속 먹기도 하지만 그것은 정신적인 진통제 역할밖에 못한다. 진정 나는 70이 바라보이는 늙은 몸의 소유자가 되고 있는가? 60세 만세론 에서 이제는 65세 만세론, 다음은 무엇인가, 70세 만세론 인가? 60세도 못 살고 60세 만세론을 주장한 이진섭 선생님이 생각이 난다. 과연 나는 살 만큼 산 것일까?

Gym에서 운동을 하고 느끼는 통증과 완연히 다른 ‘괴로운’ 통증을 이번에 deck을 중심으로 한 육체적 노동을 ‘갑자기’하면서 톡톡히 겪는다. 거기다가 치통까지 겹치면 나는 숫제 화까지 겹치는.. 그런 것들은 과히 평화로운 시간들이 아니다. 어떻게 나는 이런 고통을 manage할 것인가? 기도에 의지하는 것은 조금 쳐지고, 나태한 방법일 듯..

 

¶  어제 돈보스코 형제 집에서 구역미사가 있었고, 거기서 예상치 않게 ‘쎈’ 술을 연숙과 같이 마신 것이 또 다른 통증, 피로감을 주고 있다. 기분이 좋게 마셨지만 그것과 상관이 없는가? 왜 이리 몸을 주체할 수가 없는가? 이것도 역시 70에 가까운 나이 탓인가? 조금은 슬프기도 하다. 아니 생각하지 말자.. 그런 생각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

3월로 끝이 난 우리의 봉성체 중심의 레지오 활동은 4월로 접어들면서 양상이 바뀌고, 조금 활동이 주춤해진 듯하다. 묵주기도가 이제는 안정적으로 120단을 유지하는 것만이 조금 위안을 줄 뿐이다. 활동은 어디로 갔는가? 어떻게 활동거리를 찾을 것인가? ‘단장’은 별로 그것에 대한 생각을 안 하는 것인가? 개인적인 활동거리를 생각하며 나는 성모님께 ‘가끔’ 기도하고 있다. 아직 분명한 응답이 없다. 나는 ‘여생’을 무엇을 하며 보낼 것인가? 내가 꼭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

레지오에는 어떤 일들이.. 2명의 ‘이상한’ 자매들이 갑자기 들어 오더니 한 명은 다른 얼굴을 보이며 나가고 다른 한 명은 정말 ‘해괴한’ 행동으로 끈질기게 자리를 지키며 우리들을 우롱하고 있다. 나의 과잉반응인가.. 아닐 것이다. 나의 레지오 역사도 이제 꽤 되어간다는 증거인가? 어떻게 그런 성실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을까? 전혀 성모님의 사업에 도움이 안 될 것이 확실하지만, 그래도 그래도 기다리며  그 이상한 자매가 변하기만 기다려야 하는 것인가? 너무나 나는 그런 모습에 실망을 하며 괴로움을 당하니.. 거기다가 최고 연장자라는 자리를 굳게 지키는 분, 여지없이 모든 role model의 인상을 완전히 지워버리는 행동을 보여주었다. 기대를 한 것이 잘못이겠지.. 그래 있는 그대로 보고, 큰 기대 하지 말고, 나나 잘하자..

 

¶  우리 집 shed 밑에서 새로 태어난 5마리의 양양이(kitten) 가족들, 4마리의 어린 생명을 보며 지나치게 나는 감상적, 철학적 심지어 신학적으로 된다. 내가 오래 전에 괴롭혔던 양양이 에게 사죄를 청하며 산지도 꽤 오래 되었지만 하느님은 나에게 보속으로 ‘양양이를 보면 나를 슬프게 만드는 벌’을 주셨다. 나는 너무나 눈물로 보속을 청하며 이 새로 태어나는 양양이들을 보살피고 싶다. 모든 생명은 다 나름대로 귀중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앞으로 이 가족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무엇일까? 우선 배불리 먹이고 보호하는 것 이외에는 생각이 나질 않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