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eld of dreams, trancending time & place, autobio in progress..

Monthly Archives: March 2019

올 들어 처음으로 느껴본 ‘후덕지근’ 한 어제 밤을 보낸 후 결국은 자연의 섭리는 다시 ‘통계적 평균’을 찾아 제자리로 돌아오긴 했지만 조금 심했나… 극과 극의 맛을 자랑이라도 하듯 오늘 새벽은 완전한 겨울 같은 느낌이다. 3월 31일은 역시 이른 봄이라기 보다는 늦은 겨울이기도 한 것이다. 차가운 비와 더불어 시베리아 같은 느낌의 세찬 바람소리가 들리는 뒤 뜰에 잠깐 나가보니 어제 입던 옷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그런 날씨로 변해 있었다. 지나간 해 이맘때쯤 남긴 ‘세찬바람 불어오면…’ 을 읊조린 글과 그림이 생각이 나는 아침이 되었다.

이런 날 제일 먼저 머리에 떠오른 광경은 역시 ‘포근하고 따뜻한 늦잠’을 즐기는 나의 모습이지만 오늘은 그런 가능성이 제로이기에 아쉽기만 하다.  오늘은 ‘주일’이기도 하고, 한가하게 쉴 수 있는 여건도 아닌 것이 아쉽기만 하다. ‘주일은 쉬어라’.. 십계명.. 흠…. ‘노동’은 쉬겠지만 나의 七十 老軀 를 끌고 밖으로 차를 몰고 나가야 하는데..

주일 아침의 ‘십계명의 부담’ 넋두리의 유혹을 제치고 나머지 일요일 하루를 보낸 후에 느낌은 역시.. 이것이다. ‘할 것은 해야 하고, 뛸 데가 있으면 끝까지 뛰는..’ 바오로 성인의 가르침, 아니면 레지오 교본이 강조하는 ‘부지런함과 절제되고, 훈련된 삶 disciplined life’가 주는 기쁨,  기본적으로 ‘게으름의 죄악’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것도 죄악임을 가끔 완전히 잊고 살 때가 얼마나 많은가? ‘무상으로 받은’ 자유의 시간들, 정말 공짜가 아님을 잊으며 ‘나는 절대로 죄가 없다’고 코웃음을 치는 사람들.. 가끔 나도 그 중에 하나다. 오늘도 그런 유혹을 받았고 결과적으로 완전히 그것을 물리친 안식일이 되었다.

 

3월의 마지막 주일날 (다섯째)에는 21차 레지오 아치에스 Acies1 행사가 열렸고 우리 ‘자비의 모후’, 연숙이 사회를 진행하게 되어서 한 명이 빠진 상태였지만, 다행스럽게 협조단원 2명, 그것도 모두 ‘형제님들’ 이 참석을 해서 ‘기본적인 체면’을 유지할 수 있었다. 2년 전 ‘레지오 미친년들 사건‘ 이후부터 이런 행사가 오면 단원의 숫자에 무척 신경이 쓰였다.  워낙 신입단원 모집이 어려운 요새의 실정에서 기도 이외에는 크게  상황이 호전될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독을 뿜는 독사들’ 한두 명만 있어도 이렇게 오랫동안 여운을 남기는 피해를 보며… 역시 ‘뱀의 머리를 바수는 어머니’의 역할을 더욱 실감하게 된다. 군대 같은 질서로 우리들 모두 성모님께 충성을 서약하며 의미 있고 보람된 ‘안식일’ 인 3월 마지막 날이 되었다.

  1. 총사령관이신 성모님께 대한 개인 및 단체 봉헌식, 3월 25일을 전후로 개최한다. 아치에스는 라틴어로 전투대형을 갖춘 군대’라는 뜻이다.

지난 몇 주일, blog을 안 쓰며 사는 것, 그렇게 나에게 불편한 감정을 주긴 하지만 나도 이렇게 ‘변화’를 체험해야 한다. 왜냐하면 나에게 의미 있는 변화가 요새 별로 없기 때문이다. 진화가 아닌 퇴화가 되고 있는 나의 ‘잇몸’들, 며칠 전에 나를 그렇게 괴롭히던 ‘놈’이 없어지고 나는 오랜 만에 엎드려서 잘 수 있는 편안함을 만끽하고 있다. 하지만 이제부터 나의 입 속의 ‘마지막’을 향해서 계속 퇴화할 것이다. 어쩔 것인가? 어쩔 것인가? 이것은 나에게 작은 공포에 속한다. 구역모임에 의한 쓰라린 기억들도 역시 시간의 도움으로 조금씩 희미해지고 있고 심지어는 현재의 홀가분함을 우리는 만끽하고 있다. 그들에게 미안한 심정이 안 드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이 현재 우리인 것이다.

몇 주일에 걸쳐서 나의 머리 속, 나의 시간을 장악하고 있는 것, ‘아마도 우리의, 나의 마지막 total computer upgrade’.. 나의 tech era의 석양을 장식할 수도 있는 우리의 computing, computer들, 할 수 있을 때까지 우리는 이것이 필요하지 않은가? 나의 머리가 도는 한 이것은 나의 몫이다. 앞으로 몇 년간 안심하고 쓸 수 있는 computer system, 물론 제일 ‘저렴하고, 알 맞는’ 그런 magic을 나는 찾고 있고 거의 마무리 되고 있다.

R. 스콧 허드 지음, 신현숙 옮김: ‘용서가 어려울 때’, 가볍고 쉽게 보이는 작은 책, 이미 예고 된 대로 아틀란타(도라빌) 순교자 성당을 방문하신 ‘바오로딸 수녀회’의 발랄한 수녀님들로부터 직접 ‘현찰’을 주고 산 책이다. 이런 식으로 내가 직접 수녀님들로 부터 산 책은 아마도 ‘사상 처음’일 듯해서 그것에서 나는 작은 보람을 느낀다.

원서의 제목은 ‘Forgiveness: A Catholic Approach’ 로 되어있고 원저자의 이름은 R. Scott Hurd 로 나와있다.  Copyright는 2011년의 원저자의 것이다. 한국어 번역판의 Copyright는 2015년, 최근 1판 10쇄 는 2018년, 그러니까 비교적 근래에 읽혀지는 ‘따끈따끈한’ 책인 듯 하다.

머리말은 우리에게도 익숙한 이름 워싱턴대교구의 대주교, 추기경 (Cardinal) Donald Wuerl 이 썼기에, 책은 비록 가볍게 보였어도, 내용은 비교적 신학적으로도  serious, heavyweight의 느낌을 준다.

내가 이 책에 ‘불현듯’ 손이 간 것은 몇 년 전에 겪었던  불미스러운 사건들’로 비롯되었다. 전혀 예상치도 못한 두 ‘여자’들로부터 충격적으로 폭력성까지 느낀 일들, 그것도 ‘사랑의 집단, 성당’내에서 겪고 보니 그야말로 ‘망연자실 茫然自失’ 의 참담한 심정이었다. 한마디로 ‘어떻게 이런 일들이 우리에게…’ 라는 것인데, 한편으로는 우리도 ‘보통 사람’이 된 느낌도 없지 않았다. 이런 ‘드라마 같은 이야기’를 주변에서 수 없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 동안 우리가 ‘온실’속에서 산 기분까지 들었다.

사건 초기의 충격이 사그라지면서 이제는 다른 문제가 우리를 괴롭혔다. 일단 깊이 남은  (psychological) trauma는 세월이 해결할 듯하지만, 그 ‘두 인간들’을 앞으로 성당 공동체내에서 어떻게 대해야 하는 것은? 정신을 차리고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니, 제대로 처리를 못하면 필요이상으로 후유증이 오래 갈 듯 보였다.  이 ‘작은 책’을 사서 읽기 전까지 나는 “(1) 이성적인 정의 正義와 심판 (2) 이후 완전히 잊자! “라는 쪽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정의나 심판이란 말이 거창하게 들리기도 하지만 사실은 간단하다. 두 ‘가해자’가 모두 ‘레지오 간부, 단원’들이기에 그들은 분명히 레지오의 선서규율 하에 놓인 상태였고 그것에 따라 심판을 하는 것, 이론적으로 결코 무리는 아니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잘잘못을 가린’후에야 의미 있는 화해나 용서가 가능한 것이라고 나는 믿었다.

 하지만 이런 ‘심판’과정은 레지오 평의회의 ‘겁쟁이 심리’로 무산되었는데 나는 하나도 놀라지 않았다. 충분히 그들은 그런 용기가 없음을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귀찮아서, 무서워서, 소용이 없어서’ 라는 반응, 이것이 현재 레지오의 수준임을 누가 몰랐으랴?

다음 단계, ‘화해와 용서’는 글자를 보기도 무서울 정도로 몇 광년 떨어진 별들의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사건 이후 그 두 ‘가해자’들의 ‘전혀 부끄럼 없는 활보’를 가끔 보면서 가장 실용적인 대안은 ‘그저 잊자’ 라는 것 뿐이었다.

성경에 너무나도 자주 나오는 ‘용서’란 말이 어떻게 그렇게 ‘파렴치하게’ 느껴질까? 그들이 용서를 청하면 가능할 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절대로 실현가능성이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나 나름대로 일방적으로? 하!!!  그런데 이 ‘작은 책’에는 나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치명적인 상처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용서를 하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을 읽게 되었지만 역시 어렵고도 어려운 주문을 받고 있기에 즐거운 독서는 절대로 아니다.

C. S. Lewis 는 “용서는 아름다운 일이라고 누구나 생각하지만, 이는 자신에게 용서할 일이 생기기 전까지일 뿐이다” 이라고 말했지만, 그것이 진실인 모양이다.  아직도 아주 가끔 불현듯이 ‘정의라는 이름으로 복수’하고 싶은 심정이 드는 것을 보면 2년이 지나간 지금도 나는 고통을 느끼는 듯하다.

 

“우리는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모두 상처받으며 산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은 고통을 준 상대를 용서하라고 한다. 그가 무슨 짓을 했든, 얼마나 여러 번 같은 짓을 반복했든, 사과를 하기는커녕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 해도 말이다. 다시 만날 사람은 물론, 다시 만날 수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용서해야 한다. 주변 사람들과 고통을 준 당사자를 위해 용서해야 한다. 그리고 하느님을 위해, 하느님께 영광 드리고 이 세상에 그분의 사랑을 드러내기 위해 용서해야 한다.”

 

이런 표현을 읽으면, 결국 이런 문제는 ‘하느님’ 까지 올라간다. 하느님을 위해서 용서를 하라고.. 그분의 사랑을 드러내기 위해서.. 참, 괴로운 권고가 아닌가? 하지만 이런 표현은 ‘나 혼자만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라는 뜻이 아닐까?

 

“용서가 치유의 힘을 발휘한다는 사실은 최근 과학적으로도 밝혀지고 있다. 용서하는 사람이 더 오래 건강하고 행복하게 산다는 연구 결과가 속속 나오는 것이다.”

용서라는 것은 ‘나에게도 이롭다’… 이 말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주변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많은 ‘작은 용서’를 한 후 느끼는 ‘치유의 힘’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큰 용서’에는 더 큰 편안함과 치유의 혜택이 있음은 짐작이 간다.

 이 책은 분명히 ‘용서는 공평하지 않다, 그것은 사랑과 자비의 표현이다’라고 천명하고 있다. 그러니까 더 힘이 드는 것이다. 이 불공평함과 일방적인 자비의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결국은 ‘기도’ 밖에, 그것도 ‘끝까지 기도’, 로 귀착이 됨을 어찌 잊으랴? 문제는 어떻게 어떠한 기도를 하느냐, 하는 것이다. 용서하게 해 달라고, 잊어버리게 해 달라고 기도하면 되는 것인가? 그러면 초자연적인 힘으로 ‘그들이’ 먼저 용서를 청하며 다가온단 말인가?

 

이 책은 성서적, 신앙적, 영성적으로 용서와 화해를 비교적 깊숙이 분석하고 해결책을 나누고 있지만 결국은 내가 ‘행동’으로 나서야 모든 것이 가능하다. 생각만으로는 절대로 불가능한 것이다. 그렇게 ‘첫 걸음’을 띄는 것, 그것은 초자연적인 도움이 필요한 것이다.

어쩌면 이렇게도 날짜가 빠르게도 지나가는 것일까?  놀라운 일도 아닌 것, 새삼 절감한다. 시간이 점점 빨리, 세월이 점점 빨리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하기야 지나간 주가 더 빠르게 간 것은 이유가 있었다. 한 마리도 아니고 두 마리의 강아지와 지냈으니 말이다. 이번에는 사실 다른 때보다 괴로울 정도로 ‘미리’ 신경을 쓴 것이 사실이다. Ozzie와 함께 Senate가 오는 것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실 결과적으로 너무나 그 녀석과 정이 들었던 사실은 즐겁기도 한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왜 나는 이런 때가 다가오면 그렇게도 stress를 받는 것일까? 왜? 왜? 결과는 언제나 ‘좋은 것, 즐거운 것’으로 나타나는 것을 왜 나는 미리 예측을 하지 못한단 말인가?

요새 나는 거의 모든 stress를 주는 것으로부터 벗어남을 느낀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미리 생각했던 것처럼 즐겁지 않은 듯 하다. 나도 잘 모르는 나의 심정, 느낌들… 조금은 나도 혼란스럽다. 이런 것들 걱정하면 살던 내가 아니었는데.. 최소한 지나간 5년 정도는?

그제는 연숙의 big event가 끝나서 서로 축하를 해며, 하나 둘씩 우리를 떠나는 ‘일’들의 ‘부담, 고통’을 기억하며 가벼워지는 어깨를 느끼고 싶은데… 생각보다 그렇게 기쁘지는 않다.

나와 하느님은 어떤 사이인가? 하느님 모르고 살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제는 늦었다. 나는 이제 꽤 깊숙이 이 절대자의 영역에 들어온 듯 한 것이다. 지난 거의 10년 동안 나는 ‘신의 영역’ 으로 한걸음 두 걸음 발을 들여놓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돌이킬 수가 없다. 나는 이제 늦었다. 나는 나는… 이제.. ‘신의 영역’에 들어온 것이다. 돌이킬 수도 없고 그렇게 하고 싶지도 않다.

나를 즐겁게 하는 것들은 무엇일까? 하느님의 영역은 물론 그곳은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이지만 조금 멀고 높은 느낌도 있다.  감각적으로 나와 가깝게 있는 것들로부터의 즐거움은 무엇인가?  현재 아마도 나는 이 ‘새로운 것’을 못 찾고 있어서 방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무엇을 하며… 어떻게 신의 영역에 맞갖은 삶을 사느냐 말이다. 어떤 것…어떤 것… 어떤 것…

Tubi 라는 새롭고 괴상한 streaming TV에서 가슴을 아프게 하는 ‘foreign language’ 영화를 본다. 제목이 바로 illegal..  이 영화는 Belgium 에 사는 어떤 Russian ‘불법체류자’ 여자의 슬픈 이야기다.어쩌면 나는 이것을 보면서, 이렇게도 복잡한 심정이 되는가? 우선 생각나는 것, 역시 역시 나의 우리의 성모님 성모님 밖에 없다. 예수님과 성모님의 가족도 이집트에서 illegal 의 신세가 아니었던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지하에서 떨며 살고 있지 않은가? 세상이 어쩌면 이렇게 잔발잔의 시대를 연상시키는가? 나는 그들을 위한 기도를 전혀 하지 않고 살고 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법의 정신이 무엇인가? 자비는 어디로 갔는가? 어떻게 ‘서류의 잘못’으로 감옥엘 가는가?

이 영화 거의 기록영화 같이 보이지만.. 하지만 fiction drama 일지도..  밤 새 ‘일어나면 다시 보아야 한다’ 라고 되뇌며, 일어나 다시 본다. 왜 그럴까? 그렇다. 이 illegal은 common criminal이 아닌 것이다. 그들도 사람이다. 사람이야… 기본적 인간의 존중을 받아야 할 사람이다!

이 영화를 처음부터 다시 보기 시작했다. 조금 더 자세히 보고 싶었다. 느낌은 도망가고 싶은 그런 것이지만 다시 보고 싶은 이유는 무엇인가? 극과 극, 천국과 지옥 같은 곳을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내가 즐기는 것인가? 좋은 쪽으로, 하느님이 원하시는 쪽으로.. 자비, 사랑과 법, 정의 의 중간 단계는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잔발잔과 자비에르를 모두 해결할 수 있는 그 ‘신부님’은 과연 누구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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