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을 맞으며…

 

 

슬그머니 6월을 맞는다. 어제로 가버린 2019년 5월은 사실 온통 ‘어머니’의 모습으로 가득한 ‘제일 좋은 시절’ 이었지만 5월의 마지막 2주간의 ‘한여름 더위’는 기억에 남을 듯하다. 6월의 싱그러움은 뒷마당의 초록색의 향연으로 익히 즐기고 있지만 사실 나에게 이달은 우울한 추억이 있기에 조금은 슬퍼지기도 한다. 작년 6월에 영원히 우리 곁에서 떠나간 ‘나의 아들’ Tobey, 일년의 세월이 조금은 슬픈 기억을 무디게 한 듯 하지만 사실은 아직도 나는 ‘작은 고통’을 느낀다.

안톤 슈낙의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의 6월은 역시 그의 특유의 ‘푸른 여름,  자연의 찬가’를 들려준다. 그는 자연주의자인가, 어떻게 그렇게 주변의 소소한 것들,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우리와 함께 진화하며 살아가는 친구들임을 나이가 들어가며 더욱 실감한다. 특히 birch tree, 버치, 어릴 때 따먹던 ‘뻐찌’열매로 알고 있던 것들과 함께 역시 6월, 초록색의 싱그러움을 예민하게 관찰한 이 6월의 찬가를 안톤 슈낙은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 들 중에 하나로 꼽았다.

이미 여름 같은 더위에 익숙해졌기에 더위는 그리 두렵지 않지만, 6월의 하루, 6월 25일을 다시 맞으며 나는 6.25 동란을 피해갈 수가 없다. 어떻게 나는 이런 ‘전쟁’의 피해자가 되었는가… 왜 김일성이란 괴물이 나의 시절에 존재했던가… 역사는 역사지만 인과응보적인 종말론으로 나는 조금 위안을 삼는다.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안톤 슈낙의 6월은..

풋풋한 사랑 체험으로 특허를 내어보라

 

스스로 잊어 버리도록 하라

 

시냇가에 앉아 보자. 될 수 있으면 너도밤나무 숲 가까이에 앉아 보도록 하자.

한 쪽 귀로는 여행길 떠나는 시냇물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다른 쪽 귀로는 나무 우듬지의 잎사귀 살랑거리는 소리를 들어보자

그리고는 모든 걸 잊어보도록 해 보자. 우리 인간의 어리석음, 질투, 탐욕, 자만심 결국에는 우리 자신마저도, 사랑과 죽음조차도….

 

조금 있다가 프랑크푸르트 시의 포도농장에서 만든 1953년도 내지는 1954년도 호흐아이머 돔데샤나이 포도주를 차가운 물에서 끄집어내 마셔 보자.

첫 한 모금을 마시기 전에 사랑스런 여름 구름, 시냇물, 숲과 언덕을 둘러보며 우리들의 건강을 축복하며 건배하자.

가까운 시야에 원을 기르며 날아다니는 나비떼, 둥글게 줄지어 피어 있는 꽃들과 골짜기의 풀밭에서 부지런히 건초더미를 뒤집고 있는 자그만 여인네들도 바라보면서…

 

 

버찌씨로 유리창을 깨뜨려 보라

 

텃밭에 있는 따리 모판을 들여다 보자.

거기엔 탐스러운 딸기가 빨갛게 타오르는 숯불처럼 잘 익어가고 있다.

그 자리에서 즉각 딸기로 볼주를 만들어 보라.

우리들에게 기쁨을 선사하는 모판에 대한 고마움의 뜻으로 포도주를 약간 뿌려보자.

근처에 있는 곤충들이 애타게 볼주를 마시고 싶어 갑자기 몰려오면 가느다란 콩넝쿨대로 쫓아버리면 된다.

 

버찌나무 회초리로는 개구쟁이 사내 아이들이나 개똥지빠귀, 찌르레기들을 쫓아내면 된다.

만일 개구쟁이 사내 아이들이 버찌나무 가까이 접근해 오면 번갯불에 콩 볶듯이 뛰쳐나가야 한다. 그래야만 틀림없이 달아날 거다. 그래도 정말 소용이 없을 수가 있다.

저만치 떨어져 있는 곳에서는 개똥지빠귀 암수가 적이 불쾌한 표정을 지은 채 계속 이쪽을 기웃거리며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기 때문이다. 가마우지새를 미끼로 고기를 낚는 중국 어부를 흉내내어 몰래 버찌를 따먹는 찌르레기를 괴롭히는 시도를 해 보자.

버찌 나무 가까이에 있는 커다란 전신기둥으로 가 보면, 숱하게 버찌씨가 떨어져 있다.

찌르레기가 주로 모여 있는 버찌나무 아래는 버찌씨로 꽉 덮여 있다. 그 수를 헤아려 본다면 수백 개도 더 될 거다. 그러나 실제로 그 씨의 오분의 일 정도만 다시 열매를 맺게 된다.

그러니 화를 내지 말고 비를 들고 떨어진 씨들을 쓸어 모아서 자루에 넣어 겨울까지 보관해 두었다가, 버찌씨를 먹는 겁많고 부리가 딱딱한 새들의 겨울 먹이용으로 정원길에 뿌려 두면 어떨까.

 

찌르레기들이 과일 서리 수업을 받고 있는 버찌나무에 계속해서 돌을 던져 보자.

정확히 잘 맞는다고 잘난 체 으스대지 말고 차라리 나무 뒤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는 작은 집의 알록달록한 유리창을 돌을 던져 깨뜨려 보자.

중요한 건 산산이 부서진 유리 조각들 때문에 끊임없이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난다는 건데, 찌르레기들은 이런 소음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싫어한다.

다만 자기 자신들이 내는 소음만은 별반 시끄럽게 여기지 않으면서 말이다.

 

 

새들이 읽을 수 있는 글자로 푯말을 세워라

 

만일 정원에 뽕나무가 있으면 인간의 탐욕에 버금갈 정도로 버찌를 먹고 싶어 안달하는 새들을 그런대로 괜찮은 과일 매장으로 유혹해 보자.

그러니까 새들의 나라 말로 작은 푯말에 ‘하늘에 계신 존경하는 새님들에게 전혀 방해 받지 않는 먹이터를 보장해 드립니다!’라고 써서 갖자 붙여 보라.

지빠귀, 녹색 방울새, 도요새들은 종종 이런 꼬임에 쉽사리 넘어가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찌르레기들은 이런 걸 재빨리 눈치채고 마구 삐삐거린다.

정말로 무언가 항의할 듯이 부리와 꼬리를 흔들면서 요란스레 삐삐거린다.

 

 

개똥벌레로 여자 친구를 사귀어 보라

 

밤에 갑자기 몸이 후텁지근해지면 개똥벌레를 잡아서 여자 친구들에게 선물로 주어 보라.

그리고는 개똥벌레가 요즘 유행하는 장신구 중에서도 ‘최신의 유행’이라고 설득을 해 보라.

다이아몬드보다 더 잘 어울린다고 말이다.

만일 당신의 여자 친구들 중에 단 한 명이라도 그걸 믿는다면, 당신은 남은 여름을 함께 지내게 될 기가 막히게 멋진 벗을 찾은 셈이다.

 

그녀와 같이 옛 성터나 유적지를 찾아 다니거나 진한 자줏빛 나무딸기를 따서 손으로 콕 찔러 터뜨려보기도 하고, 고색창연한 물레방아 바퀴가 돌 때 끊임없이 새어 나오는 한숨 소리를 들어보기도 하고, 금잔화로 뒤덮인 언덕에 함께 앉아 있어 보면 어떨까.

물이 맑고 차가운 강의 상류 움푹 들어간 웅덩이에서 송어를 살짝 잡아보기도 하고 나무 위에 올라가 보기도 하고 말이다.

그러면서 당신은 발이 예쁜 소녀에게 자전거 타는 모습이 정말 잘 어울릴 거라며 은근히 칭찬을 해 볼 수도 있지 않은가.

 

 

풀벌레 오페라에 귀를 기울여라

 

꽃피는 보리수 나무 아래로 가서 풀벌레 오페라단인 ‘찌르르단’과 ‘쓰르람단’의 공연을 들어보자.

먼저 관객이 쇄도해서 놀랄 거고 그 소리의 다양성과 위력에 또 한 번 놀라게 될 거다.

높은 음에서 가장 묵직한 저음에 이르기까지…

연한 자줏빛의 사프란 색 먼지가 머리와 피부에 살그머니 내려 앉는다고 해서 불쾌하게 여기지는 마라.

그건 유황가루도 아니고 원자탄의 먼지도 아니며 다만 꽃가루일 뿐이다.

황홀한 기분으로 보리수향을 맡아 보라. 그리고는 왜 이런 대단한 향이 아직도 향수의 재료로 사용되지 않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라.

이런 좋은 아이디어가 있다면 특허를 내어 보자.

 

전문 음악지에 이 두 풀벌레 오페라단들에 대한 상세한 기사를 쓰려는 헛된 생각은 하지 마라.

이런 오페라의 형식과 내용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지 못하며, 그야말로 현대의 음악 발전에 아무런 보탬도 되지 않는다.

이 밖에도 풀벌레들은 날아다니기만 할 뿐 하나같이 글을 읽을 줄도 모르며, 기사가 나오기 전에 이미 생명이 다했거나 새들의 부리에 찍혀서 일용한 양식이 돼 버렸을지도 모른다.

 

 

풋풋한 사랑 체험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라

 

보리수나무 아래에 앉아 있는, 나이가 지긋이 들어보이는 여성들에게 친절하게 인사를 해보라.

그녀들은 짤막한 인상이나 달콤한 향기를 모으는 게 아니라, 손에 닿을 수 있는 꽃들을 모두 따버리거나, 11월에 내릴 비와 안개, 겨울에 대해 생각하거나 기관지에 담이 차지나 않을지 독감에 걸리지나 않을지 염려한다.

깜짝 놀랄 일이 있었으면 곧바로 휴가를 내어라. 가능하다면 연장을 해서 초가을까지 휴식을 취해 보는 게 어떨까.

휴가일이 서서히 끝나가고 있다고 해서 신경을 쓸 필요는 없다.

다만 은은한 차의 향, 찻물 끓일 때 나는 증기, 소금 결정체, 알프스의 들장미, 춤 출 때의 즐거운 기분, 풋풋한 사랑 체험을 하고서 집으로 돌아가 내면 깊숙이 추억을 간직해 두는 게 좋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