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 달력, 최인호 선배

 

지난 연말에도 연세대 동창회를 못 갔다. 물론 매년 못 가긴 했지만 더 ‘늦기 전에’ 한번 나갈까 몇 년 전부터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아직도 ‘꼭 가야 하나’ 하는 게으름 반, 두려움 반으로 버티고 있다. ‘게으름 반’은 언제라도 극복할 수 있을 듯하지만, ‘두려움 반’은 솔직이 자신이 없다.

20년도  전에 유일하게 한 번 가본  것이 전부였는데 지금 다시 나가면 도대체 어떤 분위기를 기대할 수 있을까? 그것이 두려운 것이다. 어색할 것 같은 것… 그런 것을 나는 제일 싫어한다.

성당 교우 중에 선배님이 계셔서 가끔 동창회엘 다녀오셔서 ‘연세대 달력’을 챙겨주시곤 했는데 올해도 고맙게 도 하나를 나누어 주셨다. 이 선배님은 비교적 대 선배에 속하지만 친구처럼 자상하신 분이라 아마도 우리가 다시 동창회에 나가면 조금은 덜 어색할 것 같다.

연세대 달력을 걸고 보니 첫 장, 1월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잔잔하게 가볍고 아담하게 쌓인 눈을 배경으로 연세대의 ‘다른’ 얼굴, 이공대학 건물이 반갑게 나를 반긴다.  주로 언더우드 동상을 앞세우고 문과대학이 간판 건물로 나오는데, 올해는 어떻게 이런 행운이 있을까? 다른 이공대학과 함께 우리 전기공학과도 이 건물에 있었다. 날씨 좋은 날 이 건물 바로 앞의 bench에 앉아서 많은 시간을 보내기도 했던.. 아 ~~  연세대의 추억이여…

추억, 추억하지만 이제는 추억을 넘어서서 연세대가 나에게 가르쳐 준 것은, 그곳에서 몇 년을 보낸 것이 나의 삶에 어떤 의미를 주는 것일까 생각을 하게 되었다. 추억 만으로는 너무나 짧았던 시절이 아닌가…

입학 직후 갑자기 쏟아져 들어온 ‘완전 자유’ 분위기, 이것이 나에게는 조금 문제였고 결국 상처도 입게 되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대학 교육의 의미를 느끼게 되었다. 비록 절대자, 하느님을 모르고 살았지만 이곳에서 조용하게 느껴지는 신앙적인 분위기, 이것도 학교를 떠난 오랜 후에야 감사하게 되었다. 또한 항상 ‘세계를 향한 눈’을 강조하시던 총장님의 말씀도 좁은 곳을 떠나 미국 유학을 꿈꾸게 하는데 큰 도움을 주지 않았던가…

우연히 옛 시사잡지 ‘신동아’를 보다가 소설가 최인호 씨의 ‘연세대 추억’ 글을 읽게 되었다. 이분이 연대 영문과출신이고 나이도 3년 위여서 최 동문, 최 선배라고 불러도 될 듯하다. 1978년의 글이니까 소설계의 혜성으로 등장한 직후였을 것이다. 최인호 동문선배의 글을 읽고 보니 역시 ‘문과대’ 출신답게 보는 눈, 묘사하는 기술도 색달랐다.  당시의 풍조를 반영하듯 ‘연고대, 서울대’를 중심으로 비교, 분석한 것이 아주 이채롭지만 우리들이 이미 알고 있는 사실들도 많았다. 예를 들면,  (돈이 생기면) 연대생=구두닦기, 고대생=막걸리, 서울대생=책…  등이 그것이다.

1학년시절 지나친 영화관람으로 인한 낙제, 빠른 결혼, 결국  8년 걸린 졸업.. 등등 조금은 고생하며 보낸 학창시절이었다. 군대에서 보낸 3년 반의 공백과 학생결혼생활 등등은 나로서는 너무 감당하기 힘든 것들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밑거름이 되어서 졸업 후에 그렇게 소설계의 혜성으로 등장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도 언급했지만, 내가 보기에도 최인호 선배가 바로 ‘대표적인 연세인’의 모습이 아닐지… 하지만 하느님의 뜻을 알기 힘들어서, 어떻게 그렇게 한창 일할 나이에 일찍 세상을 떠났는지, 아쉽기만 하다.

 

작가 최인호, 2000년 경

 

延世8年에 배운 眞理

崔仁浩 (作家, 延大 文科大英文學科卒)

 

 

가슴에 새긴 푸른 문장 紋章

 

내가 연세대학교에 입학한 것은 [19]64년 3월이었고 졸업한 것은 [19]72년 9월이었으니 따지고 보면 꼬박 8년간의 아까운(?) 청춘을 대학생활에 바친 셈이다.

그렇게 오래 연세대학교에 다닐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대학교 1학년 때 철모르고 영화구경 다니다가 학점이 모자라 낙제하여 1학년을 재수하였기 때문이요, 김신조 金信朝 아저씨 덕분에 3년 복무하기로 약속되었던 군생활을 3년 반 꼬박 군대에서 청춘을 바쳤기 때문이요, 거기에다 어영부영 연애랍시고 하다가 에라 이처럼 만나고 헤어질 바에는 아예 둘이서 살림 차려도 괜찮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 가진 것은 쥐뿔도 없이 결혼식을 올리고 학생남편 노릇 하느라 바빴기 때문이었다.

막상 졸업식이라고 학사모를 뒤집어쓰고 누가 입었던 가운인지 하루만 빌려 입고 “제군들 앞길은 창창하오” 라는 식의 축사를 들으며 졸업식을 할 때 내 가슴은 우라질 학교를 드디어 졸업하게 되었다는 감개와 비애로 찢어지고 있었으며 여편네는 애를 배어 오늘 내일 하는 오똑이 같은 배를 하고서 남편 졸업식을 축하하러 나와 주었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그 지겹기만 했던 연세대학교에 있어서의 학창시절은 내 의식의 녹을 벗기고 날로 푸르게 이끼가 자라고 있으며 연세의 푸른 紋章은 내 가슴에 뚜렷이 인 印 박혀갔다.

나는 연세대학교에서 무엇을 배웠던가. 가끔 나는 돌이켜 생각해 보곤 한다. 배운 것은 술과 담배와 적당한 퇴폐와 적당한 학문과 상식, 절망과 슬픔, 은행의 박한 이자와 같은 욕망과 교활한 이기주의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비관적인 생각이 처음 몇 년간은 내 가슴을 뒤흔들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돌이켜본다면 연세의 그 깊은 손길은 천천히 다가와 나를 이루고 조각하여 나만이 가질 수 있는 빛깔과 향기를 주어 나를 달성시켜주었다고 나는 믿고 있다.

4.19 [학생혁명] 직후 한 소설가가 각 대학의 성격을 카리카츄어 하면서 돈 백 원 있으면 서울대학 학생들은 책을 사고 고려대학 학생들은 막걸리를 마시고 연세대학교 학생들은 구두를 닦는다는 식의 내용을 발표한 뒤 지독한 곤욕을 치렀다는 것을 나는 들은 적이 있었다.

어쨌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에 입학한 뒤 나는 무지무지 실망해서 그 소설가의 지적이 맞는 표현인지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었다. 고등학교 무렵에 느끼던 대학생활의 기대는 얼마나 높은 것이었던가.

‘백양’ 담배도 마음대로 피울 수 있으며 술도 합법적으로 마실 수 있고 낡은 가방에 염색한 군복바지를 입고 ‘키에르케고르’의 철학책을 읽으며 예쁜 애인과 연애도 마음대로 걸 수 있다는 대학생활에의 선망은 마악 입학하자마자 곧바로 깨어지고 말았다.

대학생활은 전국 각도에서 모여든 국적 없는 노무자들의 집합소 생활과 다름없었다. 나는 이내 실망을 하고 학교에 나가느니보다는 씨네마코리아라는 싸구려 동시상영 영화관에서 눈알이 돌도록 영화를 보는 것으로 대학 일년을 보냈으며 번번히 낙제를 하는 비운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연세대학교에는 솔직히 서울 문리대생들의 그 악바리같은 엘리트 의식, 겉으로는 만민평등의 자유를 주장하면서도 마음 속으로는 선민이라는 계급적 모순을 안고 있는 엘리트의식, 혹은 땅 팔아 논 팔아 공부 공부 공부하여 고등고시 합격하려는 끈질긴 완행열차 상경파들의 결심 같은 것도 연세대학교에는 없었으며 그렇다고 고려대학생들의 촌놈의식도 없었다. 민족자본이 만든 학교라는 자부심아래 농악에 막걸리에 여드름 툭툭 불거진 얼굴로 애써 백의민족의 후예라는 전근대적 고집을 내세우려는 촌놈의식 같은 집요한 딴 학교들의 칼라는 연세대학교에서는 볼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나는 얼마나 연세대학교에 실망을 하였던가. 마치 선교사들의 뜨락만 같던 교정. 찬송가소리. 일주일에 한 번씩 예수그리스도의 고행을 칭송하던 목사님의 열띤 주기도문. 어딘지 매끄러운 집 출신 아이들이 모인 것 같은 친구들. 부모 잘 만나 고생이라고는 모르고 자라난 것 같던 아이들의 반짝이는 구두. 차비도 꿔주지 않던 극도의 이기주의.

나는 허락된다면 학교를 때려치고 싶은 적도 있었다. 이건 대학교도 아니다. 이건 대학교가 아니라 부모 잘 만난 학생들이 모였다가 떠나가는 유치원이다.

그러나 나는 감사한다. 나는 이제 나를 키워준 연세대학교에 감사한다. 아주 먼 훗날에서야 나는 바로 그것이 연세대학교의 강점이라는 것을 배웠다.

연고전 때면 으레 고대에서는 농악을, 연대에서는 서양 나이트기사가 출연하곤 하는데 그때마다 나는 얼마나 부끄러웠던가.

그러나 바로 그것이 연세대학교가 가질 수 있는 유일의 성격이며 특색인 것이다. 나는 연세대학교에서 모난 편견을 버렸다.

 

 

세계 世界를 호흡하는 연세인 延世人

 

나는 ‘용비어천가’ 만이 우리가 배워야만 하는 문학이라는 감정적 차원에서 ‘셰익스피어’와 ‘T S 엘리오트’의 무서운 세계인들의 공통분모를 터득하였다.

연세대학교는 만인이 알다시피 외국선교사가 세운 학교로 어딘지 그런 성격이 구석구석 배어 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연세대학의 심장부 문과대학 앞에는 ‘언더우드’ 의 눈 파란 외국인 동상이 우뚝 서 있는데 그리하여 어딘지 영국식 정원 같은 교정을 지나 담쟁이 넝쿨 우거진 서양 목사관 같은 문과대학강의실에 들어서면 나는 왠지 성균관의 문을 드나드는 유생이라는 느낌보다는 갓 유학 떠난 식민지시대 때의 문부대신 이웃 집 서생 같은 느낌이 들곤 했다.

바로 그것이 연세대학교가 내게 눈뜨게 해준 의식의 세계였다.

내가 선 땅 대한민국은 아시아의 극동 그 지역에서 벗어나 세계의 한 부분이라는 민족적 자각과 더불어 지구인 地球人 이라는 범세계적 의식이 싹트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연세대학생들이 백 원 있다면 꼬옥 책을 사거나 막걸리를 마시지 아니하고 구두를 닦는 경향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비난 받아야 할 성격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강점임을 나는 배웠다.

한마디로 연세대학 학생들에겐 이상하게도 스마트한 특색이 있다. 좋은 의미의 개인주의자들이며 구태여 남에서 참견하느니보다는 남의 도움도 외면하고 그렇다고 남에게 피해를 주려 하지 않는다.  혼자의 일은 자기 스스로 처리해야 한다는 서구적 개인주의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 역시 강점이다.

언젠가 대학시절 연극반이었던 나는 다른 대학 연극반 학생들과 합동 미팅을 한 적이 있는데 다른 대학학생들은 술이 취하자 모두들 ‘두만강’이라든가 ‘타향살이’를 불렀는데 유독 연대생들은 혀 꼬부라진 목소리로 ‘캔서스 시티’를 부르는 것을 보았었다.

노래 부르는 것으로 꼭 학교 나름의 특색을 구별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애써 대학생인 만큼 평소 부르지 않던 ‘두만강’을 부름으로써 과잉 대학생 자부심을 만족하려는 위선보다는 나는 오히려 자연스럽게 ‘캔서스 시티’를 부르는 학생들이 더 솔직하지 않은가 생각하고 홀로 미소를 김치 못했던 기억이 있다.

 

 

연대 延大의 강점 强點, 연대생 延大生의 특징 特徵

 

지금 내 아내는 연세대학교에서 만난 클라스 메이트인데 간혹 이런 얘기를 하곤 한다.

“남자들은요, 연세대학교 출신들이 제일 좋아요. 이건 제 생각이 아니라 우리 친구들은 누구나 그런 말을 한다구요. 연대출신 남자들은요, 다정하구, 모나지 않구, 가정적이며 아내들을 아껴주는 성격이라구요. 우리 친구들은 이런 말을 해요. 가령 봄이라서 대문에 페인트 칠을 하는 경우가 있으면 서울대 출신 남편들은요, 말로는 가정을 가정을 위한다 라고 하면서도 ‘페인트칠 좀 해주셔요’ 하면 사람을 사서 페인트칠을 하구요. 고려대출신 남편들은요, 페인트칠 좀 해달라고 하면 ‘남자가 어찌 가정 일을 할 수 있으리오. 당신이 해’ 하고 모른 체 하지만 연대출신 남자들은요, 천천히 일어나 자신이 페인트칠을 한대요. 나는요, 이담에 우리 딸애가 시집갈 때두 연대생 출신 남자에게 시집 보낼 거예요.”

나는 이 말을 참 재미있게 생각하고 있다. 바로 이 점이 연대가 맹목적으로 왜소하고 나약하다고 비난 받는 점이기도 하지만, 이 점이 바로 연세대학교 성격의 강점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때문에 감히 단정하건대 연세대학교 출신들은 졸업 후에 별로 크나큰 변화를 보이지 않는다.

지난 겨울 우연한 기회로 고려대학교 총장이신 김상협 박사님을 만나 뵈온 적이 있었다. 잔설이 쌓인 고려대학교에 김총장님을 만나 뵈러 들어가면서 나는 이 촌놈의 학교를 바라본 순간 가슴이 찡해와서 감격의 눈시울이 뜨거워졌었다.

저 식민지시대 암울한 민족의 의식 속에 통렬한 폭죽을 터뜨린 우리 민족의 학교 고려대학교의 위풍을 보며 아, 그렇구나, 바로 이것이 대학이로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었다.

오늘날 무엇이든 천편일률로 똑같아지는 이 획일주의적 문화, 철학, 예술 속에 대학만은 그 나름대로의 칼라를 고집해야만 한다고 나는 느꼈었다.

고려대학교는 고대의 특색으로 서울대학은 서울대의 특색으로 연세대학교는 연대의 특색으로 뻗어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제발 대학교에게 한가지 빛깔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 대학을 자유롭게 하라.

고려대학교에서 김총장을 만나 뵈온 뒤 나는 그 느낌을 신문에 이렇게 썼었다.

 

“대학교문을 들어선 순간 모자를 벗어라. 교문을 들어선 순간 일체의 권위와 일체의 체면을 버려라. 아무도 이곳을 무단침입 할 수는 없으며 이곳에 들어선 순간 경례하라.

이곳은 우리의 미래를 짊어지는 우리의 젊은이들이 진리를 닦고 연마하는 곳. 목소리를 낮춰라. 저 책 속에 파묻힌 젊은이들의 머리를 혼란케 하지 마라. 그리고 용서하라. 그들이 설혹 그릇된 시행착오를 하더라도.

대학교. 이곳은 당신들이 불어나는 이자를 꿈꾸며 사고파는 증권회사가 아니며, 함부로 드나들 수 있는 자가용 족이 아니다. 당신의 어깨 위에 빛나는 계급장을 떼어라. 이곳은 신의 은총을 갈구하는 교회가 아니다. 이곳은 당신의 위장을 채우는 음식점도 아니다. 이곳은 돈만 더 주면 탈 수 잇는 일등칸 급행열차도 아니며 또한 어울렸다 떠나가는 대합실도 아니다.

대학은 당신에게 배부르게 하지 아니하며 당신을 편하게 하지 아니하며 당신의 영혼을 채워주지도 않는다.

대학 大學, 이곳은 단지 수많은 눈감은 사람들의 손끝을 위한 점자 點字, 그 진리를 샘솟게 용기 있는 자라면 저 돌계단이 여늬 돌 [石] 이 아니라 수많은 방황하던 그 시대의 젊은이들이 때로는 고뇌하고 때로는 두려워하고 때로는 슬퍼하던 청춘의 푸른 문장 紋章 임을 인정하고 풀포기 하나 강의실 벽의 낙서 하나 꺾거나 지워서는 안 될 것이다.”

 

그날 김총장은 오늘날 대학교육에 대해 걱정을 하였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였다.

 

“오늘날 대학생들에게 영국식 교육처럼 사회지도자로서의 우월성을 강조할 것이냐, 아니면 미국식 교육처럼 건전한 시민으로 키울 것이냐 하는 문제는 우리 일선 책임자로서 가장 큰 난점중의 하나라고 믿습니다. 대학교육이 사회 지도자를 키우고 그 본래의 목적에 치우친다면 그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팽배한 오늘날의 대학교육은 암초에 부딪치게 될 것입니다.”

 

 

延世가 가르친 眞理

 

나는 여기에서 우리 연세대학교 학생들이 왜 졸업한 뒤 막상 사회생활에 부딪친 후에도 잘 적응하여 그 본래의 빛깔을 잃지 않는가를 말하고자 한다.

바로 이것이 연세대학교에서 내가 배운 그 진리였기 때문이다.

연세대학교에서 배운 진리는 분명히 말해서 극단의 이상주의적 이론이 아니었다.

때문에 졸업과 동시에 사회에 나가서도 학교에서 배운 교과서적 이론과 사회와의 거리감은 별로 느끼지 않았으며 충격을 덜 받게 되었던 것이다.

타 대학생들이 학창생활에서는 그들이 비난하는 대상을 뚜렷이 하다가도 졸업 후에는 한시 빨리 그들이 비난하던 대상이 되고 싶어 안달을 하거나 막상 그 대상의 일원이 되지 못하면 그저 뒷전에 물러서서 갉아 내리는 열등감 투성이의 지 知적 소모품으로 전락되는 괴리감의 노예가 되는데 비해 연대생들은 대부분 각자 그들이 원하는 분야에 별로 드러남 없이 박혀 있다.

이것이 바로 연세대학교가 입학 때부터 배워주는 그 진리인 것이다.

연세대학교는 바로 학생들에게 사회의 구성원이라는 책임의식을 처음부터 가르치고 있으며 때문에 4년의 과정 동안 터득한 진리는 바로 타인 위에 있다는 우월의식이 아니라 바로 내 자신이 그 타인의 구성원이라는 명제를 분명히 깨닫게 되는 것이다.

 

[新東亞 1978年 6月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