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eld of dreams, trancending time & place, autobio in progress..

Monthly Archives: June 2020

 

이번 주일은 성체성혈 대축일, 매년 이때를 기해서 아틀란타에서는 20, 000명 이상이 모이는 연례 성체대회가 열리곤 했었다.  그것이 올해는 완전히 취소가 되었다.  정말 세상이 완전히 바뀐 것을 실감하게 된다. 그 열기에 찼던 성체대회, 언제나 다시 그런 모습을 보게 될 것인가?

순교자 성당 주일 온라인 미사, 비록 제한적인 미사였지만 주임신부님의 강론은 성체성사의 깊은 의미를 조명하는 명 강론이었다. 비록 성당에 가서 교우들과 같이 어울리지 못해도 이렇게 멀리서나마 성당내의 환경을 공유한다는 것, 불행 중 다행이다. 문제는 오늘 같은 성체성혈 대축일에도 성체를 영할 수가 없었다는 것, 그것이다.

 

요새 며칠 밤에 나의 잠은 평상시와 다른 것이 되었다. 내가 ‘자랑하던’  시계처럼 잠에 떨어지는 습관이 변한 것이다. 잠드는 속도가 느려진 것. 나에게도 불면증이 드디어 온 것인가? 분명히 나는 정신이 말짱하게 밤을 보낸 것으로 기억하지만 나중에 일어날 즈음에는 잠깐 꿈을 꾼 것을 또 기억하니… 어찌된 일인가? 이래서 나는 ‘공식적인 잠’이란 말을 쓰게 되었다. 아주 조금이라도 잔 것이니까, 지난 밤도 그렇게 해서 ‘공식적으로  잤다!’ 로 선포한다….

시간이 갈 수록 나는 고통, 치아의 통증에 더 민감해지는지 우울해진다. 하지만 육신의 신경을 건드리는 고통, 이것도 머리를 다른 곳으로 집중하면 훨씬 나아진다. 이런 사실을 실감한 것도 이제는 꽤 오래 되었다. 나의 모든 정신을 다른 곳으로 쏟으면 말초신경도 둔해지는 모양이지? 그런 신체역학을 나는 지금 조금 위안으로 이용하고 있다. 언제까지나 이것이 통할지는 나도 모른다. 하지만 조금만 더 오래가면 좋겠다.

 

이순원이란 사람이 쓴 ‘은비령‘이란 1997년 경의 수상작품을 ‘읽으며 필사’ 하기로 했다. 계획적인 아닌 아주 우연하게… 며칠 전 청옥산에 대한 회고를 하면서 강원도 생각이 난 것도 이유가 될지… 언젠가 이것을 조금은 읽었을 듯한데… 불현듯 떠난 여행… 그것이 나에게는 청옥산이었기에 공감을 하고 싶었다. 여기도 여성과 얽힌 여행담이 있는 듯 보여서 호기심도 난다. 100여 쪽인 중편소설… 이것으로 조금 ‘납량’의 효과와 추억의 포근함을 받을 수 있게 되기를…. 바라며…

 

온 세상이 시끌벅쩍, 요새 주위에 들려오는 소식들, COVID-19 Pandemic 에다가 엎친 데 덮인 격으로 이제는 [흑백] 인종차별 폭동 riot 으로 이어지고….  한마디로 어디에서도 GOOD NEWS가 찾을 수 없는, 정말 암담한 현실이 되었다. 이번 뉴스의 추이를 보며 문득 그 옛날 1968년 경의 미국과 대한민국을 생각한다.

우리 조국은 ‘민족반역자, 萬古 역적 김일성’이 5.16 군사혁명 주체 박정희의 ‘목을 따러’ 김신조 무장공비 31명을 청와대로 보냈고, 곧 이어 미국 첩보선 프에블로 Pueblo를 동해상에서 강제로 원산으로 끌고 가  한때 전쟁 일보직전까지 갔던,  우리에게 너무나 암담한 시절이었다.

하지만 그 당시 미국도 유례없는 사회적 혼란과 위기감 속에 있었다.  국론이 수렴되지 못한 월남전으로 완전히 분열된 국론, 흑백 인종문제의 갈등으로 마틴 루터 킹 목사가,  또한 당시 젊은 진보세대 희망의 상징이었던 로버트 케네디까지 저격을 당하고, 시카고에선   민주당 전당대회 와중에 벌어진 격렬한 폭동성 데모… 정말 미국이 곧 망할 듯한 느낌을 주던 때였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하던가, 요새 많은 사람들이 이런 위기감을 낄 듯하고 나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위기와 도전은 언제나 상응하는 변화를 초래하고 그것은 거의 언제나 전보다 진보,  향상, 개화된 것이어서 너무 지나친 걱정은 안 한다.

 

이번 주말에 새로니 네Florida beach엘 머리를 식히려 간다고 해서,  9살 짜리 dog, Ozzie가 오랜만에 우리 집에서 며칠 머물게 되었다. 아침마다 그 녀석과 걷는 것도 그렇게 2년 전의 Tobey의 추억과 맞물려 6월을 다시 보내게 되었다. 이것도 나에게 기분전환의 기회를 주는 것이다. 이렇게 세월과 나의 생은 흐른다. 이별할 것은 이렇게 하나 둘 씩 나를 떠나고 나도 언젠가는 같은 운명을 맞을 것이다. 요새 우리와 친하게 지내려는 늙은 고양이 Izzie도 마찬가지다. 그렇다.  같이 있을 때 잘하자.

 

 

1980년대 대한민국의 대표적 장수 長壽 농촌드라마, 전원일기 田園日記, 그 중에서도  ‘응삼이’ 이야기…  코로나 Pandemic이후 특히 요새 너무 자주 보게 되어서 이것이야말로 전형적인 binge watching인가? 몸이 아프거나, 갑자기 옛날이 그립거나, 어머니가 생각날  때, 나를 그런대로 따뜻하고 포근하게 하는 것이 의외로 전원일기의 응삼이 series 였다. 이런 것이라도 있으니 나는 한시름을 잊을 수가 있었다. 내가 서울토박이여서 그런지 농촌의 주는 그 독특한 향수 鄕愁는 다른 곳에서 찾을 수가 없다.

고향을 떠난 이후에 나온 드라마라서 한번도 실제로 이것을 그 당시에 본적이 없었다. 1980년 대라서 아마도 VHS video tape으로 보던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 드라마의 제목은 들은 적도 있었고, 최불암, 김혜자 같은 heavy급이 나온다는 사실도, 새로운 얼굴로 유인촌이란 사람이 인기라는 등은 귀동냥으로 듣고는 있었다.

 

 

그러다가 어떤 심심한 사람이 이것을 아마도 cable TV로 녹화를 했는지 비록 저질의 영상이지만 많이 Youtube에서 볼 수가 있게 되었고, 나는 그것을 download해서 이렇게 보게 된 것이 사연이다.

1980년대의 대한민국 농촌의 실상을 생생하게 볼 수 있는 것은 사회역사 공부를 하는 셈이고, 당시에 유행하던 유행가, 유행어, 옷 fashion등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기회도 되었다. 1980년대 거의 10년 간 방영이 되었다고 하니, 이것은 아마도 고국에서는 거의 모두 보았을 듯하다.

 

첫 처가집 나들이, 장인 장모가 따뜻한 안방을 내어주고 냉골에서 잔다

 

내가 본 것 중에서 제일 많이, 자주 보게 된 것이 바로 박응삼 청년의 결혼 전후의 이야기이고 특히 ‘처가말뚝’이라는 episode에 나오는 장면들이다.  나의 결론은 이 박응삼 역의 탈렌트가 이 드라마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우수한 연기를 했다는 사실이었다.  예를 들면 응삼이가  가까스로 골인을 한 결혼 이후 첫 처가집 나들이를 갔다가 그 집의 구들장에 문제가 있는 것을 고쳐주는 따듯함과, 장인장모에게 ‘저는 너무나 행복합니다, 꿈이라면 깨지 않게..’라는 말을 계속하는 그의 천진스러운 모습 등등… 그 당시에 이렇게 ‘정겹게, 구수하게, 자연스럽게, 매끈하게’ 연기한 탈렌트, 배우가 없었을 듯 하다.  이 박응삼 역의 탈렌트의 이름도, 나이도 모르지만, 이후에 크게 성공을 했는지, 현재는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다른 역’ 일용이네’ 복길이 엄마로 나온 탈렌트가 얼마 전에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것을 흘깃 보기도 했는데, 나이가 73세라고… 그러면 나와 비슷했던 동년배? 새로운 놀라움이다. 이제는 이 전원일기, 사실 나와 직접 연관된 이야기는 하나도 없지만,  하도 계속 보게 되니 지금은 거의 나의 것이 되었다.  혹시 이 드라마 전체가 녹화되어 있는 DVD는 없는지…  1080p 고화질 영상으로 이것을 다시 불 수 있으면… 하지만 이것은 나의 꿈일지도 모른다.

 

망가진 처가집 온돌방을 그날로 다시 돌아와서 고쳐준 후, 정겨운 식사를 하는 응삼이

사위 응삼이의 이 환한 웃음… 정말 명연기였다

 

제1차 산행 때의 유일한 사진… 청옥산 정상 부근

 

지금부터 거의 50년 전 어떤 산행의 기억을 더듬게 되었다. 물론 다시 보게 된 퇴색되어가는 사진 몇 장 때문이다. 머리에서 거의 사라진 그 당시 대한민국의 산악의 느낌도 느낌이지만 그것에 연관된 두 명의 아가씨들,  끝을 못 맺은 로맨스, 숨가쁘게 악화되어 가던, 유신체제로 치닫는 정치국면을 피하려 도피하고 싶던 때, 이 땅을 떠날 것이냐 말 것이냐 등등의 산적한 문제들.. 그것에 대한 해답이 청옥산으로 가는 것이었다.

 

몇 개월 깊게 사귀던 이문아 씨, 그리고 생각나는 다른 한 명의 아가씨, 그녀의 여고 동창, 엄순옥씨, 너무도 또렷이 생각나는 그녀들의 얼굴과 얽힌 추억들. 나의 20대 초의 개인역사에서 이 두 아가씨들은  빼놓을 수는 없다.  더욱 잊을 수 없는 것은 미스 엄과 둘이서 갔던,  두 번에 걸친 강원도 영월, 평창, 정선 사이에 위치한 청옥산 靑玉山 (그 때는 청악산으로 이름을 잘못 알고 있었다) 등산여행, 바로 그것이다. 이 산은 사실 엄청 높았던 산도 아니고 유별난 산도 아니었다. 나중에 백두대간의 산들 중에 이 산의 이름이 있어서 혹시… 했지만 이름만 같았을 뿐이었다. 백두대간의 것은 그야말로 1,400 미터가 넘는 고산이었다. 3개의 산 이름이 모두 청옥산이었는데 나머지 것은 경상도에 있던 것이었다.

1971년 대학 졸업 무렵 전후로  깊이 사귀었던 문아씨 와 ‘어렵게’ 헤어진 후  그녀의 동창 친구와 그렇게 둘이서 등산 여행을 했다는 사실은 보통사람들이 보면 이해가 안 갈 것이다. 내가 지금 생각해도 그러니까.  하지만 그 당시에 나의 생각은 그게 아니었다. 주위의 생각을 전혀 개의치 않았던 것이다. 나의 의식 수준이 그 정도로 성숙하지 않았을까? 그럴지도 모른다. 그 당시 나는 그런 것들을 깊게 생각하지 않았던 듯 싶다. 단순하다고나 할까 바보같이 순진하다고나 할까.

그녀와 일방적, 운명적으로 헤어진 후 나는 그 허탈감과 허전함을 그녀의 동창생인 미스 엄과 등산을 하면서 풀려고 한 것이지만 그 이외의 남녀간의 불순한 의도는 전혀 없었다. 둘이 다 산이 좋았고 어디로 도망가고 싶은 마음들이 어울렸던 것이다. 사실 나보다도 그녀에게 더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20대초의 남자와 둘이서 집을 떠나서 며칠 동안 등산여행을 한다는 사실은 그 당시의 사회적 여건으로 봐서 그렇게 단순치 않았으니까.

 

첫 번 청옥산 등산여행은 1971년 겨울이었고 두 번째는 1972년 봄, 아마도 4월쯤이었다.  청옥산은 강원도 영월, 평창을 지나서 정선 쪽 부근에 있었다. 그곳은 사실 그녀의 집안과 인연이 있고,  (어머니) 다니던 절이 있었던 곳이기도 했다.  전에 가족들과 이곳을 다녀갔기에 그녀는 안심하고 나와 같이 갔는지도 모른다. 1971년 겨울, 아마도 12월.. 제1차 등산여행, 모든 것을 그녀의 안내에 맡기고 떠났다. 집에는 물론 혼자서 등산을 간다고 거짓말을 했는데 이것이 쉽게 통했던 이유는 그 훨씬 전부터 혼자 등산을 갔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1970년 가을 치악산을 혼자서 등산을 며칠 한 적이 있었다. 그때 혼자서 가는 등산의 맛과 멋을 깨닫기도 했다.

당시 강원도 쪽으로는 고속도로가 없었고, 유일하게 경부 고속도로 공사가 진행 중이었던 때, 중앙선 완행열차를 타고 단양에서 내려, 거기서 시외버스를 타고 영월을 지나고 평창을 지나고 정선 쪽까지.. 그 당시만 해도  강원도 시골을 ‘모든 것이 낙후된’ 시골이었다. 등산 때마다 시골을 많이 다녀서 대강 그곳의 경제수준을 알고 있었다.  감자바위로 불리던 강원도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산세가 험하던 태백산 줄기.. 나의 선조 평창이씨 平昌李氏 본관 本貫 이 있던 평창을 지나면서 감회가 깊었다. 정선은 아리랑 밖에 생각이 나지를 않았다.

 

시외버스에서 오후 늦게 내린 첫날은 산자락으로 들어가기 전에 해가 저물어서 어떤 농가 집에서 민박을 하게 되었다. 암만 누추해도 나는 시골의 구수한 집 분위기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불편한 게 거꾸로 더 편하게 느껴지는 듯한 묘한 그런 것이다.

그 초가집, 농가, 우리가 민박한 집의 아주머니는 시골 애기엄마치고 아주 수려하게 생긴 젊은 아줌마였는데,  친절하고도 수줍게 우리 민박을 시켜주었다. 12월 초겨울의 저녁 어둠이 서서히 깔리던 때 갑자기 나타난 남녀 등산객을 아무런 의심 없이 방을 내어준 준 그 젊은 애기 엄마, 지금도 감사한 마음이다. 

그런데 조금 불가사의 한 것이.. 미스 엄과 같은 방에서 잤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등산복 차림으로 sleeping bag 속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새우잠을 잔 것이지만, 나중에 이 사실을 친구들에게 아무리 설명을 해도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을 알고 우리가 조금 외계에서 온 사람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서로 아무런 생각도 없는 듯이. 그야 말로 아무 생각도 없이 편하게 같은 방에서 남녀를 의식하지 않고, 친구처럼 잔 것이다. 나를 기본적으로 믿어준 그런 미스 엄이 편하고 좋았는지도 모르고 거꾸로 그녀도 그런 내가 편했는지도 모른다. 정말이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순진, 순수하고 아름다웠던 시절이여..

 

그 다음날 가파른 경사의 힘들고 지루한 등반 끝에 청옥산 거의 정상 밑 벼랑 끝에 위치한 사찰에서 배낭을 풀었다. 아쉽게도 그 절의 이름이 전혀 생각이 안 난다. 미스 엄의 집안이 이 절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몰라도 그녀는 아주 그 절에 익숙한 듯 보였다. 그 당시 이 절에 대한 기억은 별로 특별한 것이 없었지만,  청옥산의 정상 부근 다른 쪽에 위치한 화전민이 사는 집의 기억은 특별하고 생생하다. 추운 겨울에 대개 화전민들은 아랫마을로 내려가는데 그 집은 예외였고, 그 곳 역시 미스 엄이 개인적[집안끼리] 으로 아는 집이었다. 어떤 관계인지 묻지 않았지만, 지금도 나는 꿈이나 영화에 나올 듯 그런 전설적인 기분으로 그곳을 기억한다.

그 집에는 화전민 중년 부부와 다 큰 아가씨가 살고 있었다. 그 때는 이미 눈이 허리춤까지 쌓여있던 때여서 아마도 한 겨울을 그곳에서 세 식구가 나는 모양이었다. 그런 곳을 미스 엄과 둘이서 눈을 헤쳐가며 그곳엘 가서 하룻밤을 거기서 묵게 되었다. 그러니까, 그 화전민 딸 아가씨가 쓰던 조그만 방에서 셋이 같이 잔 것이다.  이것도 지금 생각하면… 참, 재미있지 않은가? 같은 방에서 처녀 둘과 스스럼없이 친구처럼 잤다는 사실이 눈물겹도록 깨끗하고 순수한 것이…

눈 雪이 허리춤까지 강산처럼 내린 청옥산의 정상자락의 화전민 집.. 귀를 에이는 듯한 차가운 바람소리, 요란한 자연의 소리를 들으며 그 조그만 방에서 서로의 젊은 관심사를 이야기 하며… 지금 생각해도 너무나 너무나 잊지 않고 싶은 추억들이다. 아가씨가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는 라디오를 유일한 오락기구로 삼으며 남진의 노래도 그렇게 좋아했지만 예외적으로 수준 높은 노래들도 좋아하던 활달하고 귀여운 그 아가씨..  강원도 감자바위 시골의 인심, 그 푸짐한  밥상을 대하는 것이 참 고역이었다. 밥을 그 큰 밥공기의 거의 2배로 담아서 주는데, 흰 쌀밥도 아니고, 반찬은 거의 없고.. 하지만 절대로 남기면 실례이고..  하지만 참 당시 시골의 좋은 인심이 아니었을까? 단 한 장의 흑백사진이 남았던 제1차 청옥산 등반여행은 그렇게 기억에 남는다.

 

1972년 이른 봄, 제 2차 청옥산 등반여행은 다행히 흑백 사진이 몇 장 남아있다.  몇 개월 후에 어떻게 다시 미스 엄과 연락이 되었는지 자세한 사연을 잊었지만 사실 헤어진 여자친구의 친구를 이렇게 만난다는 사실이 조금은 이해가 잘 안 되지만, 그 당시에는 큰 문제로 여기지를 않았다. 사진을 보니 나만 보인다. 왜 그랬을까? 분명히 그녀도 사진에 있었던 것을 기억하는데 아마도 사진 정리 때 없어졌거나, 어머니가 다 버렸을지도…  그때는 화창한 초봄 무렵의 등반이어서 산의 분위기가 전번과 달랐다. 그리고 이번에는 산자락 밑 사찰로 올라가는 길에 있던 어르신들이 모여 계시던 어떤 민가도 방문을 하게 되었다. 미스 엄의 집안과 그곳은 무슨 관계가 있었던 듯 싶다. 그 민가에는 어르신네들이 많이 계셔서 나는 사실 참 불편하였다. 나의 자란 환경과 배경 때문인지 나는 남자 어르신들과 어울리는 게 그렇게 편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신 예의를 갖추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비록 불편하더라도. 

1972년 이름 봄, 제 2차 청옥산 산행에서는 날씨도 비교적 따뜻하고 한번 와 보았던 곳이라 조금은 여유가 있었다. 생각이 잘 안 나는 것 중에는, 지난번에 와서 보았던 화전민가족을 또 보았나 하는 것이다. 분명히 그때 그  화전민 집을 우리는 찾아가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미스 엄.. 당신은 기억하십니까? 추억에 대한 기억력이 비상한 나도 지금의 나이에서는 모든 것이 희미하게만 느껴진다.

2차 등반 때는 전과 달리 정상 부근에 있었던 사찰 생각이 많이 난다. 며칠 간을 거기서 먹고 자고 했으니까. 무슨 시골 여인숙 같은 분위기의 절..  풍경소리도 나고.. 그때 나는 첫 번째 왔을 때처럼 여러 명이 기거하던 사랑방이 아니고, 독방에서 혼자 잔 기억이다. 진흙 벽이 보이고 벌레가 기어 다니는 방바닥이었지만, 정말 그렇게 포근하고 아늑한 기분일 수가 없었다. 이 절에서 잤던 느낌은 현재까지도 나를 너무나 포근하게 만들고 죽기 전에 이런 분위기의 절에서 한번만 자 보았으면 하는 평생의 소원이 생겼다. 옆 방에서 계속 들리는 독경, “아바사바 아바..” 로 계속되는 불경, 그때 처음으로 나는 불경 책을 볼 수가 있었다. 그게 아마도 불교 경전일 것이다.

민가들이 있던 산 밑자락에서 조금 올라 온 곳에 거의 움막 같은 집 [거의 움막의 수준]이 있었는데, 듣고 보니 거기서 어떤 ‘서울 여자’가 혼자 사법고시 공부를 했다는데 나중에 붙었다고 들었다. 그것이 거기서는 큰 경사였던 모양이었다.

이 글을 쓰면서, 계속.. 운명적으로 헤어진 문아 씨와 그녀의 친구 미스 엄을 다시 생각한다. 살아 있을까? 어떤 인생을 살았을까? 그들도 반세기 전의 기억을 가지고 있을까? 하지만 거기까지가 한계다. 그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을 그대로 죽을 때까지 기억하고 싶으니까…

 

제2차 청옥산 산행, 1972년 초봄

 


Footnote:  50년 후에 회상하는 청옥산의 정확한 위치를 찾는 것, 처음에는 그야말로 piece of cake! 50년 축적된 digital power Google Map을 믿었지만 결론적으로 역부족이었다.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다 보는 것’ 만으로는 부족한 듯하다. 땅 위를 걸었던 인간들의 스토리가 필요한 듯하다. 마지막으로 찾은 것,  평창과 정선 사이에 있는 ‘미탄면 소재 청옥산’이런 말이었지만 그것이 끝이다. 그때 우리가 묵었던 민가와 사찰의 위치와 이름은 과연 무엇일까?

 

지난 밤 자다가 갑자기 끈끈함을 느끼며 서서히 정신이 너무나 말똥거리고 그 ‘덕분’에 주위의 모든 것이 너무나 선명하게 느껴지는 가운데 불면증의 괴로운 밤을 보냈다. Ceiling fan의 도움으로 조금 끈끈함은 물리칠 수 있어서 새벽녘에 조금 잠을 잤는데. 나는 이것으로 충분하다. 결과적, 공식적으로 나는 밤잠을 자긴 잔 것이다. 갑자기 습도가 뛰어오른 것인데, 아마도 shower를 안 하고 잔 것 때문에 더 끈끈하게 느꼈던 것 같다. 솔직히 내가 제일 싫어하는 그런 type의 날씨가 예년에 비해서 일찍 온 것인가… 옛날 고국에서 7월 초부터 느꼈던 ‘장마성’ 기후와 비슷한 것이다.

3월 중순부터 시작된 코로나-19 Pandemic 이후, 매일 그날이 그날 같은, 나의 머리 속을 조금 현재와 다른 것으로 청소하고 싶은데, 그 방법이 문제다. 며칠 집을 떠나는 것이 제일 효과적임은 알지만 지금 여행하는 것은 한마디로 stupid한 것이다.  설사 여행이 자유스럽다고 해도 우리는 둘 다 집을 떠나는 것은 고생으로 느끼기 때문에 역시 Home Sweet Home 안에서 여행을 해야 하는데,  어떤 식으로 우리의 머리를 청소할 수 있을 것인가?

 

어제는 순교자 성당의 공개된 주일 미사가 있었지만 우리는 65세 권고를 받아들여 집에서 온라인 미사를 보았다. 작은 놀라움은, 예상을 뒤엎고 교우들의 숫자가 공개미사 첫날보다 적었다는 사실이었다. 신부님도 꽤 실망을 한 듯한 표정. 또한 참석한 대부분이 ‘고정멤버’들인 듯 보였는데 그들의 나이도 만만치 않아서, 도대체 비교적 젊은 층들은 모두 어디로 간 것인가? 각자의 사정이 다 있겠지만 아주 젊은 세대가 주로 오는 토요일 특전미사는 아예 당분간 중지한다는 발표까지 있었다.  아마도 모두들 아직까지 조심들 하는 것이겠지만 참 어려운 문제다. 불현듯 모든 권고사항을 무시하고 우리도 평상시처럼 가볼까 하는 충동까지 들었다. 이것도 성령의 도우심이 없으면 현명한 결과가 안 나올지도…

 

삼위일체 대축일 주일미사 강론 – 이영석 세계자 요한 주임 신부님

 

이날 오후에는 김계환 안토니오 형제님의 가족장례미사가 있었을 것이다. 호스피스로 옮긴지 불과 하루 만에 선종하신 것인데, 이분에 대한 기억도 그렇고 그렇게 열심히 ‘소리없이, 조용히’ 봉사하신 분도 드물어서 애석함을 금할 수가 없었다. 연도, 장례미사에 가 본지 도대체 얼마나 되었는지, 정말 그런 연령 행사가 고인과 유족들은 물론이고 함께 한 모든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희망과 위안을 주는지 새삼 깨닫게 된다.

 

나의 blog post 가 드디어 1,000을 넘었다. 십 년 전부터 post 했던 ‘원래’ blog에 덧붙여 그 이전 것을 조금 더했기 때문에 1,000의 의미는 조금 퇴색했지만 그래도 이것은 조그만 이정표 역할을 한다. 1,000… 에다가 10년이 넘었다는 사실은 나도 놀란다.  나는 이렇게 오래 끈기 있게 했던 것이 별로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면 모두 이런 ‘좋은’ 습성이 생기는 것은 아닐까? 언제까지 이렇게 갈 지는 솔직히 나도 모른다. 우리가 어떻게 변할 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posting하는 작업 자체는 나를 하루하루 ‘제 정신을 가지고’ 살게 하는데 큰 도움이 됨은 분명하다.

 

아~ 청옥산…  얼마 전부터 자꾸만 ‘청옥산 靑玉山’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마도 백두대간 중에 청옥산이 있음을 알고부터였다. 나의 추억으로 알았던 ‘청악산’이 사실은 청옥산이었음은 오래 전에 알았다. 왜 이때의 생각이? 아마도 나의 잠재적인 ‘현실도피’의 표현이 아닐까? 눈이 쌓였던 산봉우리, 화전민 집의 아가씨, 풍경소리 은은하던 사찰의 진흙 벽 방… 모든 것이 꿈처럼 아름답고 그립기도 하다. 이것에 대한 ‘회상기’를 한번 블로그로 써보는 것도 기분 전환을 하는데 도움이 될 지도…

청옥산을 googling하면서 새로운 사실은 대한민국에 청옥산이란 이름은 3곳이나 있다는 사실이고, 이중에 두 곳의 청옥산은 모두 강원도에 있고 다른 곳은 경상북도 봉화군에 있음도 밝혀졌다. 게다가 백두대간 중의 하나인 1,400m의  청옥산은 내가 갔던 곳이 아님을 알고 조금은 실망을 하게 되었다. 내가 간 곳은 삼척시 부근이 아닌 평창군 (미탄면) 부근의 산이었음도 확인을 하였다. 문제는 그 산이 Google map에 아직까지 안 보인다는 사실이다.

 

Deep Cleaning, 어제 무려 15년 만에 main bathroom tile grout에 깊숙이 스며든 곰팡이 자국들을  모조리 긁어내었다. 15년 만에! 어떻게 이렇게 우리는 게으르게 살았는가? 누구를 탓하지 말자… 유혹은 강하지만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나는 조금 더 깨끗한 환경에서 살고 싶은 것 뿐이다. 골치를 썩히던 shower door frame 문지방을 최신의 design으로 바꾸는 것, 이것은 그야말로 metal work이었다. $23 을 아끼려고 하기보다는 그저 내가 하고 싶었다. 결국은 해 내었다. 이것이 이번 일의 보람 중의 하나가 되었다. 갈고 닦아 모든 것이 반짝거리지만… 언제까지 그 맑음을 간직하겠는가…

이렇게 해서 일은 모든 끝났지만, 생각을 한다. 이런 일 앞으로 몇 번이나 더 할 수 있을까? 하지만 다른 쪽으로 생각해보니 10년이 아니라 1년에 한번씩 대청소를 하면 이렇게까지 힘과 시간이 들지는 않을 듯해서 앞으로는 일년에 두 번 정도 간단히 하기로 생각을 맞추었다.

 

거의 완전히 복원 된 main bath tub shower closet

 

새로니의 Vegetable Container, 지난 토요일 첫 손자 Ronan의 백일축하 모임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Sandy Spring에 있는 새로니 집엘 잠시 들려서 백일음식을 전해주었다. 새로니는 완전히 방학이 되어서 stress가 많았던 online class  가르치는 것이 피곤한지 요새는 거의 완전히 gardener, 그것도 vegetable gardening에 심취를 하고 있었다. 엄마의 영향을 받기도 했겠지만 요새 아이들 모든 것을 science & technology의 시각으로 각종 야채들을 그 좁은 deck에서 잘도 기르고 있었다.  오랜만에 Tobey를 보는 듯한 Ozzie를 다시 보니 눈물이 날 정도였다. 그 녀석도 우리를 보고 깡충깡충 뛰며 오줌까지 흘릴 정도였다. 다시 나는 2년 전 6월 19일 날 세상을 떠난 나의 Tobey 모습과 이 녀석의 모습이 함께 어울림을 느낀다.

 

 

우리 집 첫 손자 Ronan [Irish name] 의 백일 ‘잔치’에 다녀왔다. ‘백일잔치’의 전통적 느낌이라기 보다는 그야말로 국제적 느낌의 ‘백일축하모임’ 이란 표현이 맞을 듯.  첫 돌잔치도 아니고 겨우 백일의 삶을 위해 이렇게 모인 것은 완전히 아기 엄마가 push한 결과인 듯..  이렇게 우리 작은 딸, 애기 엄마가 우리들, 대한민국의 혈통을 강조하는 것이 흐뭇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다. 아기 옷까지 online으로 특별주문을 해서 입히고, 잔치상의 모습을 재현하려고 노력하고, 특별히 아기 아빠 쪽 부모와 우리 둘만 부른 것 등, 이런 일을 성사시킨 작은 딸 나라니 가 이제는 완전한 책임감 있는 성숙한 어른이 된 듯 보였다.

아기가 워낙 건강하고 실實 해서 엄마의 어렸을 적의 모습을 연상시켰지만 그래도 아빠의 모습과 겹치는 부분들이 골고루 있어서, 이 애는 이중적 복합 문화를 다 배워야 하는 운명임을 실감한다. 요새 인종문제로 시끄러운 때에 이렇게 백인 사돈댁을 만나게 된 것이 우연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모두 열린 마음으로 서로의 전통과 문화를 존중하는 것이 이 아기에게는 커다란 축복이 될 것이다.

사돈 댁 [Chuck & Judy]은 북 독일계 이민의 후손들인데 초기 이민은 대부분 Midwest쪽 Indiana, Ohio 등지 에서 farmer로 살았고, 애 아빠 쪽 집안은 military family로 Georgia로 이주해서 살고 있었다.  이날 조금 더 서로의 ‘조상과 문화’등에 대한 애기를 나누었는데 독일계 이민이 겪은 ‘차별대우’에 대해서도 언급을 했다. 유럽 쪽 이민도 흑인들과는 정도는 아주 다르지만 문화적, 종교적, 언어적 차이, 나중에는 정치적 차이 [2번에 걸친 세계대전] 로 겪은 다른 의미의 ‘인종차별’을 경험하였다고 한다.

이들은 전통적으로 개신교, 공화당에 속한 보수 집안이지만 Trump라면 고개를 설레설레 할 정도였고, 그 반대쪽인 Biden도 마찬가지… 그래서 우리의 결론은 역시 제3당,  ‘구세주 인물’의 출현인데… 그것이 쉬울까 하는 것이다. 심지어는 현재의 정치구조를 완전히 뒤집어 놓는 ‘혁명’의 발상까지 거론하기도 했다. 아마도 이 과제는 우리 세대가 다 사라진 후에야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괴로운 생각을 하기도 했다.

 

 

“타인의 평화에 관심이 없는 나의 평화는 진정한 평화가 아니다. 아니 막연한 수동적인 관심이 아니라 사랑과 공감에 의한 구체적인 사랑의 결심, 행동이 부족한 나만의 평화”, 그것에 대해서 오랫동안 생각, 반성, 묵상을 하던 며칠을 보낸다. 5월 말에 있었던, 이제는 거의 무감각해진 비극적인 인종적 사태, 나는 거의 일부러 ‘영상적’인 뉴스를 피하며 살고 싶다. 그것은 2016년부터 시작된 나의 작은 피해망상증부터 시작된 것이고 그 이후 나의 정신건강 유지에 지대한 효과를 발휘했다. ‘그 인간의 얼굴만 보아도 혈압이 뛰는’, 그런 4년 간의 괴로운 시절에 어느 정도 적응을 하고 있지만 이런 도전은 끝도 없이 일어나고 있다.  그 인간이 성경을 들고 성당 앞에 서있는 모습을 보고 나는 정말 할 말을 잃는다. 그것은 위선 중의 위선, 그것의 극치를 보여주는 듯하다. 이것이 현재 미국의 최악의 문제다.

각자, 각 가정, 각기 공동체 community, 나라마다 역사적인, 고유하고 독특한 난제 難題들이 있다. 미국에서는 아마도 40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흑백, 인종문제가 그것이고 우리조국 대한민국에서는 아마도 마르크스, 레닌, 스탈린, 김일성 왕조로 이어지는 빨갱이 문제가 그것인가? 두 곳 다 이 난제로 급기야 동족을 서로 죽이는 전쟁까지 했기에, 진정한 화해는 오랜 세월이 필요한데 사실 이 문제는 나아지기는 하고 있지만 완전히 끝나는 것은 기대하기 힘들 듯하다.

이런 문제는 피조물의 본성적 결함으로 사실 인간적 두뇌만 가지고는 해결하기가 힘들기에 결국은 아주 높은 차원의 도움을 기대할 수밖에 없다. Hatred, 사랑과 정반대 쪽에 서있는 인간적 감정, 증오심은 누구도 이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것을 다스리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생각 속에서 머무는 증오가 아닌 행동으로 나온 것, 그것이 진정한 문제다.

 

하루 하루 날씨가 똑같으니까 세월이 서서히 가는 듯도 하지만 벌써 목요일.. 하면 너무 빠른 듯… 이것이 나이가 들어가며 느끼는 세월의 모습인가? 빠른 듯도 하고 느린 듯도 하고…  날씨의 변화가 이제는 조금 그립다. 덥던 춥건, 다시 땅이 말라가는 것을 보니까, 조금은 삭막한 느낌이다.

 

성경통독, 어느새 삼손과 데릴라..아니 ‘들릴라’까지 왔다. 이 대목에서는 어쩔 수 없이 1950년대의 Hollywood영화, Samson & Delilah 를 생각 안 할 수가 없다. 사자를 동물의 턱뼈로 때려죽이는 Samson역 Victor Mature, 십대의 나이에 느껴본 ‘관능적인 매력’의 Delilah역 Heddy Lamar의 요염한 모습…  1967년 Tom Jones가 불렀던 hit oldie, Delilah 딜라이라, 당시 ‘겁도 없이 날뛰던’ 조영남의 딜라일라, 이런 것들이 줄줄이 연상퀴즈처럼 풀려 나온다. 이모든 것들이 구약 판관기의 짧지 않은 대목이었다는 것을 어찌나 알았으랴.

하느님에게서 눈이 멀어지면 이민족에게 억압을 당하고, 돌아오면 그들을 ‘쳐 죽이며’ 해방을 얻고… 이것이 거의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자그마한’ 이스라엘의 역사, 이것이 구약의 거대한 흐름인 듯하다. 여기서 끝나는 유대교의 신앙인가, 그들은 어떻게 그렇게 철저히 예수의 존재를 무시할 수가 있었던 것일까?

 

간단하지 않은 결정을 오늘 단행 했다. Catholic sites: CRISIS Magazine, Catholic Thing과  EWTN의 National Catholic Register같은  newsletter를 모조리 cancel한 것이다. 이것 이외도 정리해야 할 곳이 더 있을 것이다… 그 동안 그들의 위선적인 ‘정치적’ 논조에 동의할 수가 없었던 것이 쌓인 것이다.  소위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신봉한다는 fundamentalist들이 가톨릭에도 예외가 아님을 알았지만 이제는 솔직히 지겨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사랑과 정의는 흑백논리와는 다른 그 너머에서도 의미를 찾아야 하고, 가슴속에서 뛰는 느낌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이들, 소위 말하는 ‘원칙, 원리주의자’들은 그런 것들이 심히 결여된 집단인 듯, 요새의 인종문제로 시끄러울 때 그들의 논조, 비록 조심스러운 듯하지만 실제 그들의 기본적인 생각은 숨길 수 없는 듯하고, 나도 이제는 지겨운 것이다. 이들은 한마디로 예수가 그렇게 질타하던 ‘바리사이’의 위선자들인 것이다.  또라이 트럼프에게 정치적으로 이용을 당하고 있음을 알면서도 그를 지지하는 그들은 후에 돌이킬 수 없는 커다란 후유증을 남길 것이다. 세속의 문화는 종교나 교회를 이제보다 더 증오할 것임을 어찌 그 위선자들은 모르는가?

 

성당에서 봉사를 많이 하시던 요셉회의 김계환 안토니오 형제님, 선종기도 요청이 왔다. 어쩌나.. 어쩌나.. 그렇게 건강하시던 형님 같은 형제님, 왜 그렇게 빨리 가시나요? 우리 시대는 이렇게 하나 둘씩 사정없이 떠나야만 하는 겁니까? 형제님, 나으시지는 못하더라도 고통 없이 성모님의 손을 잡고 가세요…

이 형제님을 생각하면 우미관의 의협깡패 김두한을 연상케 한다. 의리 있는 젊잖은 깡패, 시대를 잘못 만난 탓으로 험한 생을 살았었을 것 같은 형제님이었다.가끔 만나면 그 옛날 잘나가던 시절의 무협담을 끊임 없이 자랑하셨다. 기억나는 것 중에는 6.25때 가족과 헤어져서 백선엽 장군의 포병 부대에서 house boy로 일했던 것, 명동, 삼선교 근처에서 깡패들과 싸우던 이야기 등등… 6. 25 이후 시절 서울 장안을 누볐을 듯. 하지만 다행으로 자유당정권에 개입된 정치깡패의 그림자는 벌로 찾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근육이 좋으시던지, 한번은 성당사무실에 놓여있던 커다랗고 무겁게 생긴 상자, 내가 한번 들어보려다 그냥 놓았는데, 글쎄 그것을 산뜻 번쩍 들고 나가시는 것이 아닌가? 나도 웬만한 것은 무리 없이 들곤 하는데… 나는 놀랐다. 어떻게 그런 분이 갑자기 폐암이라니.. 그것도 폐암 말기…허~~  참, 인생이란…

 

하루의 일정이 나의 마음대로 흐르지 않는 느낌, 끌려가는 느낌, 심지어는 불안한 느낌까지.. 평화의 강의 깊이가 얕아지는가. 요새의 각종 [코로나, 인종]사태 때문에 그런지도. 아까 podcast [tested.com]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더 그렇게 되었나? 세상이 조금 불안하게 느껴지는 것은, 역시 나의 믿음에 문제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 레지오 활동을 하던 시절이 갑자기 그리워진다. 장례미사, 연도를 하던 때가 진정으로 나에게는 축복의 시간들이었다. 이제는 다 갔는가? 나의 진정한 평화는 언제 다시 찾아오려나?

 

점점 나아지는 아침 메뉴 요리 솜씨, 이것은 나의 영역, 담당, 그리고 나의 자랑이다. 처음에는 아침잠이 많은 연숙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려고 ‘장난 삼아’ 시작했던 아침 담당이 이제는 10여 년이 훨씬 넘어가는 역사가 되었다. 모든 것을 연숙에게 배워서 시작했지만 계속 하다 보니 어떤 것은 내가 만든 것이 더 맛있게 되는 이변까지 생겼고, 그것에 신이 난 나는 아예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 내가 아침을 하기로 한 것이 이제까지 온 것이다.

아침 메뉴 중에서 내가 거의 완숙의 경지에 도달한 것 중에는 pancake과 French toast가 있는데 사실 이것들은 비교적 간단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라  아침 맛이 식상을 하면 이것으로 대체를 하곤 하는데 오늘 아침도 그런 날이 되었다. 이런 것들을 만들며 배운 것은 요리는 절대로 시간과 세월, 경험’이 절대로 필요한 것이라는 진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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