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eld of dreams, trancending time & place, autobio in progress..

Daily Archives: January 31, 2022

오랜만에 ’10년 묵은 체증이 시원하게 풀리는 Washington Post의 기사를 보았다.  아~ 씨원하다~ 라는 탄성이 입에서 나온다.  세상에서 제일 증오, 혐오하는 인간 부류는 물론 “나는 개XX다, 문제 있냐?” 하는 부류 [DONALD 개XX를 포함]일 것이고, 다음으로는 오늘 신문기사에 나오는 ‘노약자를 등치는 교활한 사기꾼들 scammers‘ 이다. 전에는 ‘약자 (나를 포함한)를 등치는 깡패들’도 있었는데 요새는 세상이 바빠져서 그런지  깡패들은 영화나 책에서나 보게 되었다.

사기꾼들, 정말 싫다. 특히 노약자를 등쳐먹는 것은 firing line까지 상상을 할 정도다. 이 쓰레기 인간들이 판을 치는 데는 ‘비교적 느긋한 법’ 에도 문제가 있을 것이다. 오늘 신문 기사 이야기의 73세 Jean이라는 ‘젊은 할머니’는 아예 자신이 손수  쓰레기 사기꾼을 집으로 유도해서 법으로 넘긴 정말 용감한 여인이어서, 존경할 만하다. 이 기사 내용을 요약 하면, 이 “재수없는” 사기꾼은 자기가 할머니 손자의 변호사라고 하며 당신의 손자가 경찰에 잡혔는데 수천 불의 보석금이 필요하다며 접근한 case인데 이 용감한 여인은 집으로 돈을 가지러 오라고 유인을 하고 경찰들을 불러 집에서 대기시킨 것… 와~ 정말 10년 묵은 체증이 1초 만에 풀리는 듯하다. 감사합니다, 나보다 한 살이나 젊은 아줌마여~~~ 나도 그런 용기를 본받고 싶습니다~~

 

Tax Return Amendment, 허~  올해 처음으로 이것이 무엇인가 알게 되는 기회를 맞았다. 며칠 전에 끝난 올해 Tax Return, 이것을 너무 부지런히 일찍 하는 것도 조금 문제가 있음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간단히 말해서 모든 tax form document가 안전하게 다 도착한 이후에 하는 것을 깜빡 간과한 것이다. 최근 새로니가 가르쳐 준online bank에 open했던 savings account 를 깜빡 잊은 것이다. 이미 tax filing은 했으니.. 이런 적이 없어서 조금 당황도 했지만 오늘 알고 보니 늦게라도 고치는 것이 비교적 간단한 일이었다. 원래는 post mail로 1040-X form을 보내야 하지만 최근부터는 이것도 electronic filing이 가능.. 아~ 정말 편한 세상이 되었다. 심각한 correction은 아니었어도 새로운 것 하나 배운 것이다. 이것은 2월 중순부터 가능하다고 하니, 느긋이 기다리면 되겠지…

 

아~ 춥다~ 라는 기억이 각인된 2022년 정월의 마지막 날, 하지만 이것이 평균 기온이라고 하니, 확실히 나도 이제는 ‘늙음의 포근함’을 찾는 연령대가 된 모양이다. 확실히, 추운 것, 귀찮기만 하다. 특히 어두움 속에서 거추장스럽게만 느껴지는 두꺼운 옷을 찾아 들고 아슬아슬한 곡예를 하며 쓰러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며 나 자신에게 화를 내는 불쌍한 꼴, 모습이 싫은 것이다. 하지만, 어쩔 것인가? 안간힘을 다해서 조금은 포근한 날들을 기다리는 수밖에…

오늘은 모처럼 아침에 부산하게 움직이며 외출을 하지 않아도 되는 날이 되었다. 지난 주에는 나의 목표대로 4번이나 아침에 외출을 할 수 있었다. 조금은 가슴이 설레는 쾌거라고 할까… 주일미사, 요한복음 영성독서회, 그리도 2번의 Holy Family 동네 본당  매일미사~~ 그래, 잘하는 ‘짓’이다! 더 노력을 해서 5번 외출로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지난 밤, ear plug의 도움으로  잠은 설치지는 않았지만 모처럼 꾼 꿈이 나를 조용하게, 생각하게, 숙연하게 만들었다. 나의 ‘전통을 자랑하는’ trauma에 가까운 기억, 추억들, 그 중에는 ‘동창, 동문회’에 연관 된 꿈들이 있다. 이번에는 대학동창[회]에 관한 것, 이것은 조금 드문 것인데… 아니~ 처음인가? 거의 잊혀져 가는 대학동창들의 모습과 기억들…  나는 꿈 속에서는 그들 앞에서 ‘설치고’ 다녔다. 내가 99% 그들에게 잊혀지고 사라진 보잘 것 없는 한 동창회원이라는 사실이 꿈속에서 복수라도 하는 듯한 나의 모습으로 변하게 했을까?  이 나이에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도덕적, 윤리적 진퇴양난 딜레마 moral dilemma… 지난 2년 간 Pandemic의 세상을 살면서 겪는 것 중에 정말 협상하기가 힘든 것 중에는 이런 case가 있다. 각종 상식적, 보편적, 과학적, 이성적,  의학적, 법적 권고를 정면으로 무시하고 [심지어는 자랑스럽게]  백신 접종을 거부하고 있다가 COVID로 인해 감염, 주위에 퍼뜨리며, 최악의 경우 아예 자신이 사망하는 것.  더욱 웃기는 것은 의외로 이 사실을 주위에 알리려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런 사실을 접하게 될 때,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나의 경우에는 일단 이렇게 말하고 생각한다. ‘쌤 통이다, 이 병신아!‘ 하지만 분명히 다른 머리 속에는  ‘그러면 안 되지, 안 돼..’  하며 제동을 거는 그 무엇이 있다. 아마도 대다수가 그렇지 않을까? 쌤 통까지는 너무 하더라도, ‘죽으면 너나 죽지 왜 다른 사람들까지..’ 하는 것이 다음의 단계인데, 나도 마찬가지다. 너 자신만 생각하며 사는 것, 그것은 틀린 것 아닌가? 자신 고유의 자유라고? 그래, 그러면 너만 죽으라고~~~ 동굴에 들어가서 혼자 살면 되지!  성인 군자, 교황 정도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들도 그런 바보들을 동정하지는 않을 듯하다. 죽음 자체는 애도할 지는 몰라도…  교황님도 백신을 맞는 것이 사랑의 정신이라고 할 정도니…[물론 예외는 있을 수 있다, 비 정치적으로 의학적, 신앙적 등]

최근에 내가 본 한 case는, 브라질 대통령이라는  ‘극우, 빠가, Bolsonaro‘ 란 인간에 관한 것이 있다.  만고의 개XX DONALD를 흉내 내는 것이 특기인 그 인간은 국민들에게 아예 ‘자기처럼’ 백신을 맞지 말라고 할 정도였는데, 그의 뒤에서 그런 정책을 ‘이론적’으로 영향을 준 [아니면 조종을 한] 인물이 백신을 맞지 않은 채 COVID로 죽었다는 소식이 있었다. 이때 나는 솔직히 ‘만세, 만세, 만만세!‘를 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물론 이것은 속으로 생각한 것이다. 어쩔 수가 없었다. 거의 반사적인 반응인 것을 어찌하랴? 그의 가족들이나 인간적인 측면을 생각하면 한마디로 불쌍한 인간이 아닌가? 하지만 나도 피가 아직도 끓는 살아있는 인간일 것을 어찌하겠는가? 이런 딜레마는 이미 사회정신분석으로 연구가 되었던 것이고, 일종의 증후군이라고나 할까…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는 심리현상임을 알게 되었다.

이것과 관련되어 NYT [New York Times] 최근 issue에서 내가 좋아하는 미국 예수회 저명한 spiritual author,  James Martin 신부의 guest essay를 보게 되었다. 예수회 신부니까 당연히 가톨릭의 시각도 없지는 않겠지만 대부분은 사회심리학의 눈으로 평을 해 놓았다. 한마디로 오늘 새로 알게 된 전문용어 Schedenfreude, 쉐덴프로이데, 물론 독일어, 그 민족들은 원래부터 심리학에 관심이 많았는지…  이제는 보통명사 schedenfreude 로 쓰일 정도로 인기 시사용어가 된 모양이다.

이 말은 간단히 말하면: 남의 불행을 즐기는 현상, 사람 정도가 아닐지.

Martin 신부의 이 essay는 근래에 극단적으로 양극화된 정치 이념의 관계를 지적하는데, 사실 나에게는 이것이 문제의 중심에 있다고 본다. 정치적 욕망으로 모든 인간의 기본적인 자비와 사랑 능력을 모조리 포기한 ‘개XX DONALD’의 반인류적 범죄는 두고 두고 후세에 교훈으로 남아야 하지 않을까? 이 가증스러운 범죄자는 단지 정치적 이유로 생명을 살릴 수 있는 백신을 많은 사람들로부터 기회를 빼앗았으며 자기는 ‘몰래, 숨어서’ 맞는 가증스럽고 한심한 작태를 보여 주었으니…  이런 부류의 인간이 만약 감염으로 고생하거나 사망했다고 하면 인간 본성적 자비, 사랑의 감정보다는 쾌감을 느끼는 것이 반사적, 본성적, 자연스러운 것이 아닌가?

그래, 그래 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가르침… 하지만 이 원수는 그렇게 오랜 동안 관용, 자세, 권고 를 모조리 무시하고 남까지 피해를 주며 자랑스럽게 사는 데… 어떻게 더 사랑을 하란 말인가?   하지만 Martin신부의 결론은 역시, ‘용서하라’ 쪽이고 그길 밖에 정당하고 이성적인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역시 이것도 ‘용서의 어려움’ 문제로 귀결이 된다. 이래서 현재 세상을 사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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