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zzie, Adios My Friend, 2006~2023

식구야, 친구야 잘 가시오~~ 부디 잘 가시오~~ 사랑하는 님이여~
사랑하는 친구여, 식구여~~ 부디 천국에서 나를 기다리시게나~~

정신 없이, 머리 속이 텅 빈 상태로 ‘관’을 만들었다.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전혀 idea가 없이 손이 가는 대로 몇 개월 만에 circular saw를 돌려 판자조각을 삐뚤게 자르고 못을 박고.. 거의 순식간에 조금 볼품이 없는, Izzie가 쉬어야 할 집을 만들고… 또한 한 겨울에 땅을 파는 것도 역시 쉽지 않았다. 결과는 깊지 않게  파인 곳이 되었지만 얇은 흙 위로 걸맞지 않게 커다란 flag stone 2개를 얹으니, 순식간에 아주 안정된 묘소가… 우리는 자주 이곳을 보며 남은 여생을 살게 될지도 모른다. 정신을 차린 후 오늘 일을 되돌아 본다.

몇 가지 상상되는 광경을 미리 그려보며, 함께 머물던 새로니의 pet dog, Ozzie와 함께 아래층으로 내려온다. 일부러 전등불을 꺼놓은 dining room 구석, 어둠 속에 있을 ‘녀석’을 일부러 안 보고 Ozzie를 볼일을 보게 밖으로 내보내고… 조심스레 돌아와 전등을 손으로 켠다. 아무런 소리가 안 들린다. 움직임이 안 느껴진다. 그래도 자세히 얼굴을 보니 ‘잠 자는 듯’한 모습, 목덜미를 만져보니 어제처럼 따뜻하지 않구나. 그러면… 눈도 감고… 하지만 잔잔하게 숨쉬는 움직임은 보인다. 그러면.. 서서히 서서히… 가는 것인가? 아~ 또 눈물이 앞을 가린다. 울고 싶다. 울고 싶다… 정녕 떠나는 것인가, 정녕 우리에게서, 나에게서… 식구의 또 한 생명이 이렇게 추운 겨울, 성탄절을 앞두고 우리를 떠난단 말이냐?
…………
아~ 아무리 기다려도 녀석의 야옹~ 소리는커녕 움직임이 아직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느껴지지도 않는다. 눈 감고 자는 듯한 잔잔하게 숨을 쉬는 모습…  한번 안아볼까… 밤에 잠을 자는 것이었다면 이렇게 되면 조금은 깨어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을까? 반응에 변화가 없다면.. 아~ 이것은 지금 점점 의식을 잃는 중이 아닐까? 기다려보자, 기다려보자… 오늘 밝은 낮에 밖으로 안고 나가서 ‘네가 살았던  인간 세상’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거다. To Dance with the White DogHume Cronyn 할아버지처럼..
…………
숨을 쉬는 모습.. 하지만 목덜미를 만져보니 어제처럼 따뜻하지 않다. 손과 발도 마찬가지, 눈도 잘 뜨지 않는다. 어제보다 더 저 세상으로 간 것인가? 지금 꿈꾸듯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잠을 자는 듯 가는 것일까? 아픈 곳은 없는 듯 보이는 것이 그저 감사할 수밖에 없는 이 절박한 순간들… 지나가라, 지나가라, 빨리 지나가면.. 지나가리라, 지나가리라… 성모 마리아님, 이 불쌍한 것을 위해 빌어주소서… 부디 하느님 옆으로 가도록…
…………
결국 녀석은 우리를 떠났다. 아침 8시 15분 경부터 숨쉬는 느낌이 없어지고,  움직임조차 없어졌다. 몸이 더욱 차지고, 아~ 떠났구나… 떠났구나… 떠났구나… 잘 가시게, 우리의 벗이여~ 잘 가시게… 17년 잘 살다가 갔지? 마지막에 너와 이렇게 함께 한 것 두고두고 귀중한 기억, 추억으로 간직할 거야~ 그곳에서 다시 만날 수 있기를 이제부터 성모님께 빌어 볼게, 잘 가~ Izzie야, 나의 친구야~~~

아무리 봐도 이상하고 불편하고 조금 편하기도 하고, 이런 복합된 생각과 느낌이 머리 속을 빙빙 돈다. 고민하고 걱정하고 돌보아 주는 일, 귀찮은 일도 많았다. 그런 것들이 일시에 사라진 것이 어깨를 가볍게 한다. 하지만 2006년 이후 거의 우리와 함께 있었던 ‘존재’가 없어진 것은 역시 슬픈 일이다. 저쪽 방 dining room에서 나를 보며 야옹거리던 녀석, 그 녀석이 안 보이는 첫 저녁.. 정말 이것은 참기 힘들게 슬픈 것이다. 시간이다, 시간… 시간이 이 유일한 해결책인 것이다. 지나가라, 지나가라…

계동 1번지, 그리고 계동 ‘길’ 98번지

은지가 보낸 계동 ‘길’ 동영상, 크게 확대해서 자세히 천천히 본다. 추억의 극치 중에 하나, 그 중에서 바로 으뜸이구나… 당시 비가 온다는 그곳, 크게 자세히 보니~ 아~  골목 끝 위 먼~ 곳에,  ‘계동 1번지, 중앙고등학교 white castle‘이 ‘솟아 솟아 솟아서’, 솟은 것을 찾는다.  더 확대해서 자세히 보니~ 원래부터 문이 없던 ‘교문’ 기둥 둘이 보이고, 그 뒤는 김성수 ‘교장’이 손수 화강암 돌을 날라다 쌓아 만들었다는 본관 건물, 그곳으로 오르는 가파른 언덕길이 가려져 있다. 교문 왼쪽은 ‘사령관 모자를 쓴 수위’ 아저씨가 상주하던 수위실, 오른 쪽에는 당시에 그다지 싸지 않았던 통학용 자전거들을 두던 곳. 이 문짝 없는 교문, 언덕길을 6년이나 오르내렸으니.. 그것이 나의 뇌리에서 그리 쉽게 사라지겠는가?

교문에서 왼쪽은 가회동 으리으리한 한옥들 골목, 오른 쪽은 상대적으로 우중충했던 무허가 건물 처럼 초라한 집들이 도열한,  또 다른 언덕길은 나의 6.25이후의 고향, 원서동으로 이어진다. 추억의 계동 골목이 이제는 계동길 X번지로 바뀐들 , 너무나 깨끗하게 정리가 된 것 외에는 추억의 골목과 크게 다를 것이 있겠는가? 그곳은 그곳이고 그때는 그때다. 오늘따라 왜 나는 그곳에서 사는, 아니 살아온 사람이 된 착각에 빠지는 것일까? 그리고 그것이 나는 그렇게 기쁘고,  행복할까, 왜?  추억의 시대를 반세기 넘어서 세대도 두 번씩이나 바뀌어, 코흘리개였던 조카 은지가 계동길 98번지에서 희망에 찬 모습으로 ‘식물이 좋아서 because Ilove plants‘라는 이름도 거창한 plant gift shop, ‘창업’을 하며 나의 추억을 되살려주고 있으니까.. 고맙다, 은지야~  부디 그렇게 좋아하던 것, 크게 성공하기를…

날씨를 핑계로 편안하게 일요일 아침, 또, 집에 있고 싶었다. 아니 20마일이나 운전을 해서 한국본당에 가는 것이 싫었다. 그쪽에서 나를 잡아 끄는 그 무엇이 오늘도 없었다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한 표현이지.. 하지만 오늘은 지난 일요일과 조금 다르게 미사를 완전히 빼먹기도 께름칙하고, 아침 식사를 끝내며 옆에 켜있던 TV를 보며 CPBC 평화방송 생각이 문득 난다. 아~ 코로나, 코로나 Pandemic 이것도 벌써 ‘향수鄕愁’ 깜이 되었나?  불과 2~3년 전에 거의 매일 찾던 곳, 평화방송의 인터넷 미사!

이것이라도 있어서 오늘 하루는 그런대로 견딜만했다. 조금 덜 미안하고 덜 죄스러웠으니까.. 오늘 YouTube에서 방영된 미사는 방송국 chapel이 아닌, 서울 시내 성당에 나가서 한 것이어서 더욱 실감이 있었다. 오늘 평화방송이 간 곳은 구로2동 성당, 1969년에 지어진 성당이라서 요새 지은 성당과 너무나 다르게 소박하기만 했지만, 나에게는 오히려 1969년 나의 대학3학년 때를 돌아보는 친근함만 더해 주었다.

이제는 그곳 [고향 땅]에 있는 성당에 대해서 조금은 실감이 가기에 오늘 미사는 나에게 조금 다른 각도로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필연적으로  10월 달에 인연을 맺었던 경기도 군포시 금정성당, 그곳의 레지오 회합, 단원들 생각이 나고, 이어서~ 아~  역시 나의 ‘진짜’ 고향이 그립다라는 생각에서 비약.. 혹시 우리가 그곳에서 다시 산다면? 나에게도 그곳에 가까운  가족, 친척, 친구들이 있다는 생각이 비약적으로 그들을 이제는 가까이 옆에서 보고 살고 싶은 뜬금없는 가망성이 희박한 희망까지 생긴다.

김형석 [명예] 원로 ‘백세인’ 교수님의 아침 식사, 오늘 비로소 그 식단을 알게 되었다. 놀랍게도 우리의 지난 20여 년 간의 아침 식사의 모습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또한 매일 매일 심심할 정도로 큰 변화가 없다. 그러면~ 이것이 바로 건강식이었단 말인가?  이것이 백세인의 습관 중의 하나란 말인가? 그러면 우리도 백세를 살고 싶다고? 어찌 우리가 그것을 알 수 있겠는가? 물어볼 가치도 없는 질문이다. 하지만 이 아침 식단은 조금 격려를 받으며 계속될 것은 분명하다. 그러면 하루 두 끼 먹는 것은 어떤가? 그것은 김교수님의 습관에 보이질 않는다.

어제 저녁 연숙이 아슬아슬한 자세로 기우뚱거리며 의자에 올라가서 이 ‘포도 성탄 장식’을 설치했는데, 오늘 보니 너무나 예쁘고 귀엽다. 갑자기 떨어진 기온으로 집 안팎이 쓸쓸하기만 한데 이 조그만 노력으로 당분간 우리 부엌  주변은 성탄과 새해를 조금 따뜻하게 보이게 할 것 같다. 고마워~ 고마워~

불고기 볶음밥과 두부 된장국, 갑자기 추워지는 늦은 오후의 늦점심.. 영양학적으로 봐도 완전 균형식이다. 감사, 감사…

즈음 우리 둘 모두 양양이에게 신경을 쓰고 산다. 나이도 그렇고, 최근 계속 ‘실수, 사고’ 를 연발하는 녀석이 걱정도 되고, 특히 먹는 것이 주춤해서 살이 더 빠지고 있어서 은근히 혹시~ 하는 상상까지 안 할 수가 없구나. 아~ 갈 때 가더라도 지금 안 된다, 안 되~~   이런 와중에서 녀석과 우리는 갑자기 가까워졌다. 전혀 화도 안 내고, 나의 곁을 안 떠나려고 하는 등, 너무나 사랑스러운 것이다. 심지어 지금은 예전의 Tobey와 거의 같은 모습으로 나의 무릎에 앉는 것은 물론 아예 거기서 졸기도 하고, 오늘은 그와 함께 나도 졸았으니… 참, 꿈을 꾸는 듯하다. 이런 세상이 올 줄이야~~ 그래, 양양아, 편안하게 살다가 가자꾸나, 그곳으로, 그곳으로…

포근하던 며칠~ 새벽에 무섭게 폭풍이 지나가더니 일요일 하루 종일 세찬 바람에 컴컴한 비가 하루 종일… 게다가 오후로 들어서는 기온까지 급강하~~ 아마도 내일 새벽은 다시 빙점으로 돌아가는 완전 “겨울의 초상”인가… 하지만 나는 이런 날씨를 ‘지독히’ 사랑하니까.. 아무런 문제는커녕 기다리며  산다.

불안, 두려움, 절망감의 정체와 해답은…

예전, 아니 오래~ 전에 스쳐갔던 생각 중에는 ‘현재가 힘들어도 나이가 들면 분명히 도사나 신선처럼 느끼는 잔잔한 평화, 불안이 없는 지혜와 함께 살 것’이라는 뜬구름 같은 희망이었다. 그것이 지금 눈을 떠보니, 어떻게 되었는가~ 별로 아니 전혀 나이와 편안함은 상관이 없음을 깨닫는다. 나이, 세대별로 그 성질이 달라진 차이뿐이다.  그 중에는 불안과 두려움 같은 것은 끈질기게도 따라오고 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비록 육신의 건강은 점점 내리막 길을 걷게 되어도 머리 속에 펼쳐지는 세상은 점점 편해질 것이라는 희망, 바로 그 희망을 원하며 살았는데… 결과는 거의 참패에 가깝다.

얼마 전,  ‘강산이 99%  변해버린 고향’ 방문 시, 처조카 딸 수경가 선물이라며 수원근교 미리내 성지 내 성물방에서 건네 준 책에서 이 급한 명제에 대한 분석적인 essay를 읽게 되었다. ‘잊혀진 질문’ 중에 하나로 등장하는 이 질문은 바로 ‘불안과 두려움’에 관한 것이다. 나는 이것과 더불어 ‘희망의 부재’까지 함께 다루었기를 바라기도 했다. 과연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신부님이 제시할 것인가, 궁금했는데 나에게는 50% 정도의 답은 주신 셈이니까, 이번 고국 방문의 성과 중에 하나라고 기억을 할 것이다.

불안, 초조, 두려움 이런 감정들을 ‘특권’이요 ‘에너지’로 승화하려는 신부님의 ‘성경해법’이 과연 나머지 50%의 해답을 줄 것인가?  모든 것, 아니 이 우주의 모든 것 (없는 것도 포함한)은 궁극적으로 내가 보는 세계관 안에서 내가 가진 생각의 눈으로 보는 나만의 실재, 현실이라는 것을 인식하면 분명히 해답은 있다. 쉽게 말하면 ‘세상은 생각하기에 달린 것’이다.  코앞에 다가오는 물리적인 위험을 제외한 모든 것들은 머리 속 consciousness 의식체계, 아니 우리가 ‘상상’하는 세계일 뿐이 아닐까? 성경 속 예수님의 진복팔단 眞福八端 Beatitudes 도 이런 각도에서 보면 전혀 이해 못할 것도 아니다. ‘긍정적인 착각의 영역’인 것이다.


 

‘불안’과 ‘두려움’이 끈질기게 따라올 때 극복할 방법은 있는 걸까요?

 

두려움에 대하여 독일 소설가 장 파울이 위트 있는 말을 했습니다.

“소심한 사람은 위험이 일어나기 전에 무서워한다. 어리석은 사람은 위험이 일어나고 있는 동안에 무서워한다. 대담한 사람은 위험이 지나간 다음부터 무서워한다.”

이 말은 그대로 진실입니다.

소심한 사람은 위험을 미리 걱정합니다. “어이쿠, 이러다가 뭔 일 터지는 것 아냐? 어떻게 준비해야 하지?” 그러면서 나름 철저히 준비한답시고 우왕좌왕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위험에 직면하여 공포에 짓눌립니다. “우와, 집채만한 호랑이잖아. 이제 나는 죽었다!” 벌벌 떨다가 그만 위험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대담한 사람은 위험이 지난 다음 사태를 인식합니다. “이거 뭐야? 돌이 굴러 떨어졌잖아! 하마터면 큰일 뻔했네.” 순간적으로 엄습하는 전율에 식은땀을 흘립니다.

결국 두려움은 누구도 피할 수 없다는 말인 셈입니다.

 

수천 년 철학사에서 근세기에 등장한 실존주의 사조는 철학적 고민의 획기적인 전환을 가져왔습니다. 그것은 우주, 자연, 사회 등의 거창한 주제보다 더 시급한 주제가 인간의 실존이며 나아가 인간의 적나라한 감정이라는 깨달음이었습니다.

실존주의 철학 안에도 여러 색깔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이구동성으로 꼽는 인간의 숙명적인 문젯거리가 있으니 바로 ‘불안’입니다. 약간씩 의미상 편차가 있습니다만 두려움, 공포, 염려, 걱정 등을 아우르는 ‘불안’이야말로 인간 심리의 표층과 심층을 장악하고 있는 생존 인자라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이 독심술은 오늘날까지 그대로 적중하고 있습니다. 다음과 같이 줄을 잇고 있는 통계만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취업, 인사포털 인크루트가 졸업을 앞둔 대학교 4학년 212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전체 응답자 5면 중 4명꼴인 82.1 퍼센트가 졸업을 앞두고 불안함, 극심한 스트레스를 느끼는 일명 ‘4학년증후군’에 시달리고 있다고 응답했다.”

“24일 구직포털 HR KOREA 는 지사 회원 직장인 315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직장생활 스트레스’에 대해 발표했다. 조사 결과, 응답자의 39.3퍼센트가 미래에 대한 (관한) 불안감으로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답했다.”

 

편의상 젊은층의 ‘불안증후군’에 초점을 맞춰보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불안이 습관화된 사람들이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그 강도가 약해지길 기대하는 것은 경험상 무리일 것입니다. 도리어 나름 탄탄하던 사람들조차 은퇴를 기점으로 불안의 늪에 빠지는 경우를 허다합니다. 불안이야말로 예측불허로 찾아오는 불청객이며, 수시로 변색하며 살아남는 카멜레온입니다.

 

그러면, 이 불안의 정체는 무엇이며, 어떻게 생겨나는 것일까요?

‘불안’이라는 것은 ‘공포’와는 다른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불안’은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감정상태입니다. 눈앞에 주어진 자극이나 위협에 대해서 본능적으로 생기는 감정을 ‘공포’라고 합니다. ‘공포’는 동물도 느낄 수 있습니다. 말 그대로 ‘원초적인 본능’이거든요. 쥐는 눈앞에 고양이가 나타나면 공포에 떨면서 안절부절못합니다. 이것은 사고 작용이 없어도 생기는 일종의 반사 반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안’은 반드시 생각의 결과로써 생깁니다. 자신의 존재와 관련해서 어떤 위기나 피해를 미리 상상하거나 불길한 일을 예상할 때 그 생각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것이 ‘불안’입니다. 동물은 불안을 느끼지 않습니다. 동물이 미래의 일을 미리 걱정하느라 불면증에 빠졌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동물이 느끼는 것은 눈앞에 전개되고 있는 변화에 대한 반응, 즉 공포입니다.

그러므로 불안은 인간 고유의 정서반응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하버드대 정신과 교수인 필레이 박사는 수년간의 뇌 영상 연구를 통해 인간이 공포, 불안, 두려움에 반응하는 독특한 방식을 밝혀냈습니다. 그에 의하면 우리의 뇌는 아주 작은 위험도 재빠르게 감지하며 ‘원하는 것’보다 ‘피하고 싶은 것’을 우선적으로 처리하도록 진화해왔다고 합니다. 이를 처리하느라 다른 일들을 뒤로 미룬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건 불가능해, 하지만 나는 이직을 하고 싶어”라고 생각한다면 뇌는 이 상충된 메시지를 받고 혼란스러워한다고 합니다. 그러다 ‘불가능해’라는 두려움을 먼저 처리하느라 진정 원하는 ‘이직’을 하려는 에너지를 빼앗긴다는 것입니다. 필레이 박사는 그의 저서 <두려운, 행복을 방해하는 뇌의 나쁜 습관>에서 이것이 바로 뇌가 우리를 과잉보호하는 방식이라 설명합니다.

이 통찰은 우리가 두려움을 처리하는 데 매우 도움이 됩니다. 그르므로 우리는 ‘나’ 자신의 불안을 들여다보기에 앞서 불안의 작동 방식을 확실히 파악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조금 더 가까이 불안현상을 들여다보기로 하겠습니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어떤 것에 위협을 느낄 때, 우리 뇌는 0.01초 만에 두려움의 시스템을 작동시킨다고 합니다. 뇌의 편도체가 위험을 감지하고 우리에게 신호를 보내는 데 걸리는 시간은 0.01초에서 0.03초. 이후 의식적인 처리가 일어나면서 우리는 두려움과 두려움의 대상을 파악하게 됩니다.

이 두려움은 본래 인간이 진화하는 데 필수 요소였습니다. 두려움을 얼마나 빨리 감지하느냐가 생존과 직결되었기에 뇌는 다른 감정들보다 위협을 먼저 처리하도록 진화한 것입니다.

하지만 역기능도 따랐습니다. 이 예민하고도 무의식적인 두려움에 대한 자각이, 상황을 부정적으로만 파악하고 위축된 반응을 유발하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두려움은 단지 이전에 기억된 정보일 뿐’이라는 자각이 중요합니다. 예컨대 어린 시절 물에 빠져 익사할 뻔했던 경험이 있는 사람 중 더러는 어른이 된 뒤에도 웅덩이의 물만 보면 반사적으로 두려움을 느낍니다. 이는 어린 시절 편도체가 물에 대한 두려움을 강하게 학습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뇌에서 일어나는 가상의 반응일 뿐 실제가 아니지요. 다 큰 어른이 웅덩이의 물을 무서워할 이유가 얼마나 있겠습니까.

따라서 우리는 생각의 힘만으로도 두려움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불안의 작동방식을 잠깐 짚어보았습니다. 그러니까 불안은 없어도 문제고 너무 많아도 문제라는 얘기가 됩니다.

이제 불안의 순기능을 클로즈업해보겠습니다. 심리분석가 프리츠 리만은 ‘불안의 심리’를 이렇게 요약합니다.

“불안은 우리의 발전에 특별히 중요한 지점들에서 제일 먼저 의식 속으로 온다. 즉 친숙한 옛 궤도를 떠나는 곳에. 새로운 과제를 감당하거나 변화해야 하는 지점에 불안이 온다. 발전, 성장, 성숙은 그러니까 명백히 불안 극복과 깊은 관계가 있다. 어느 연령에서든 그 나이에 상응하는 성숙을 위한 걸음이 있으며, 그 걸음은 있게 마련인 불안을 수반한다. 걸음을 내딛자면 그 불안을 다스려 이겨내야만 한다.”

프리츠 리만보다 앞서 불안의 긍정적 역할을 철학적으로 섬세하게 규명한 사람이 철학자 키르케고르입니다. ‘불안’을 일생의 연구 주제로 삼았던 그는 불안을 도약을 위한 계기로 보았습니다. 사람은 심미적 삶, 윤리적 삶, 종교적 삶의 3단계로 질적 성숙을 이루는데, 불안이 앞 단계에서 다름 단계로 도약하는 계기로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우선 사람은 본능적으로 심미적인 삶을 산다고 합니다. 이 단계에서 사람들은 감각적 쾌락을 좇아 살거나 환상에 빠져서 삽니다. 삶을 기분풀이로 여기며 쾌락을 탐닉하면서 기분에 따라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인간은 결코 이것만으로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이러한 삶은 결국 권태와 싫증에 다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마침내 무기력한 자신의 눈에 비친 인생은 무상하며 미래는 불안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절망합니다. 이 절망은 새로운 삶을 찾게 합니다. 이렇게 해서 절망의 늪을 넘어 윤리적 삶으로 도약이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불안으로 말미암아 이제 두 번째 단계인 윤리적인 삶이 시작됩니다. 이 단계에 이르면 쾌락만을 좇아 무비판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지켜야 하는 보편적 가치와 윤리에 따라 생활하게 됩니다. 사람은 이제 내면의 양심에 호응하고 의무에 성실하려고 애씁니다. 이제 비로소 인간은 ‘되어야 할 것’이 됩니다. 그러나 이 단계도 결국 벽에 부딪치고 맙니다. 높은 도덕에 이르지 못하는 능력의 한계 그리고 현실의 모순과 부조리에 무력함을 절감합니다. 윤리적으로 산다는 것이 뜻대로 잘 되지 않고, 또 윤리적으로 산다고 세상이 알아주는 것도 아닌 데다 엉터리로 사는 사람들이 망하지도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맞서서 고뇌하는 인간은 마침내 죄의식과 불안에 빠지고 절망하게 됩니다. 이 불안과 절망이 다시 도약을 만들어 사람을 신에게로 내몬다고 합니다. 이 현실의 모순을 심판해 줄 하느님을 찾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침내 불안은 종교적인 삶으로 옮겨가도록 사람들을 이끌어줍니다. 키르케고르는 인간으로서 완전하고 참된 삶은 세 번째 단계인 ‘종교적 단계’에 와서야 비로소 실현된다고 말합니다. 스스로의 결심에 따라 진정으로 하느님을 믿고 따를 때에 인간으로서의 무력감과 허무함을 떨쳐버리고 완성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한 단계에서 다른 단계의 삶으로 옮겨가는 것은 자기 자신의 주체적 결단과 도약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점입니다. 이는 마치 부모님과 선생님이 아무리 공부하라고 다그쳐도 정작 학생 자신이 공부하려고 하지 않으면 성적이 오르지 않는 것과 똑같은 이치입니다.

 

불안의 역기능 역시 만만치 않습니다.

첫째로, 불안은 사람을 안절부절 못하게 하여 결국 도전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공학기술자 헨리 포드의 말이 딱 들어맞습니다. “미래를 두려워하고 실패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활동을 제한 받아 손도 발도 움직일 수 없게 된다”라고 했거든요.

나는 해군 출신입니다. 해군 훈련 과정에서 “퇴함 훈련”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배에서 물로 뛰어 내려야 할 유사시를 대비하여, 실내 수영장 10m 높이에서 뛰어내리는 훈련입니다. 적음을 위하여 먼저 5미터에서 시작해 다음 7미터, 그 다음 10미터 순으로 진행합니다. 전원이 차례로 뛰어내려야 하기에 줄을 지어서 기다립니다. 자기 차례가 오면 다이빙 대 끝에서 서서 오른손은 코를 쥐고 왼손은 낭심을 잡은 채 호흡을 가다듬고 “000 사후생 퇴함준비 끝!”이라고 외칩니다. 그러면 지휘관이 “퇴함!” 하고 명령을 내립니다. 이때 “퇴함!” 이라고 복창하고 뛰어내려야 합니다.

사람은 10미터에서 가장 큰 고소공포를 느낀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높이에서 그냥 뛰어내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에 그 위에는 구대장 몇 명이 지휘봉을 휘두르며 포진하고 있습니다. 훈련생들에게는 10미터 높이도 무섭지만 그 지휘봉도 만만찮게 무섭지요. 그런데 세 명이 끝내 뛰어내리지 못했습니다. 구대장들이 격려를 하고, 협박을 하고, 떼밀고 온갖 수단을 동원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난간을 붙잡고 있는 힘은 여러 장정이 떼어낼 수 없을 만큼 초인적으로 강했습니다. 결국 그 세 명은 석식 열외에다, 완전군장 차림으로 날이 저물도록 연병장을 ‘평화롭게’ 돌아야 했습니다. 이렇듯 두려워하는 마음을 먹으면 발이 땅에 딱 달라붙고, 어떤 외부의 압력에도 요지부동하게 됩니다.

둘째로, 불안은 사람의 심신을 해칩니다. 제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으로 말미암아 죽은 청년의 수가 30만 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들과 남편을 일선에 내보내고, 염려와 불안과 근심에 빠져 심장병으로 죽은 미국 시민이 100만 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총탄이 사람을 꿰뚫어 죽인 수보다 불안과 공포가 죽인 사람의 수가 훨씬 많았습니다.

 

그러기에 넬슨 만델라는 이렇게 말합니다.

“용감한 사람은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두려움을 정복하는 사람이다.”

지지 않으려면 정복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두려움을 어떻게 정복할 것인가?

리처드 바크는 그의 저서 <날개의 선물>에서 인간이 성취를 향하여 전진하는 과정을 수영장의 다이빙대를 예로 들며 설명합니다.

다이빙대에 처음 도전하는 사람은 우선, 며칠 동안 다이빙대를 올려다 만 봅니다. 이는 올라갈 것인지 말 것인지를 생각하는 과정입니다. 그 다음 단계로, 그는 드디어 젖은 계단을 조심조심 오릅니다. 어떤 일을 앞두고 결단을 내리는 단계에 해당하며, 아직 결심을 굳히지는 못한 채 불안 중에 조금씩 전진하는 단계입니다. 셋째 단계로, 그는 높은 다이빙 대 위에 섭니다. 결단 직전, 가장 불안한 단계입니다.

이제 그에게는 두 가지 길만이 있을 뿐입니다. 하나는 다이빙을 포기하고 내려오는 길로 이는 “패배를 향한 계단”입니다. 다른 하나는 과감하게 물속에 뛰어드는 길로 이는 “승리를 향한 다이빙”입니다. 다이빙대 끝에 선 그는 두려움에 소름이 끼쳐도 두 개의 길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침내 그가 몸을 앞으로 기울인다면, 후퇴는 이미 늦었고 물속으로 뛰어드는 길에 들어선 것입니다. 바로 이때가 인생이라고 불리는 다이빙대가 정복되는 순간입니다.

이처럼 불안과 두려움의 다이빙대를 한 번 정복한 사람은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으며, 오히려 더 높은 데서 다이빙을 즐길 정도가 됩니다. 바크는 책 말미에 이렇게 말합니다.

“천 번 올라가고 천 번 뛰어내리고, 그 다이빙 속으로 두려움이 사라지고 내가 비로소 인간이 된다.”

 

어떻게 하면 이 불안감을 덜 수 있을까요? 나는 인생의 위대한 멘토들의 지혜를 빌리는 것 자체가 지혜라고 생각합니다.

 

첫째 방법은 강력한 희망과 꿈으로 불안을 몰아내는 것입니다.

몇 년 전 모 방송사에서 방영한 다큐멘터리 <인간의 두 얼굴>은 꿈의 한 모습인 ‘긍정적인 착각’의 효과를 밝혀냈습니다. <인간의 두 얼굴: 착각> 편을 제작한 정성욱 PD는 프로그램을 준비하며 국내외 책과 논문을 샅샅이 뒤졌습니다. 그러고는 인간의 착각과 행동 사이의 인과관계를 설명해줄 실험을 구상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도화지에 손가락 하나를 없는 손을 그리고, 다섯 살짜리 아이들에게 보여주면서 묻습니다. “10년 후 이 손가락은 어떻게 될까요.” 일부 아이들은 어른들의 예측을 뛰어넘는 엉뚱한 대답을 했습니다. “손가락이 자라나요!” 라고요. 실험 결과 손가락이 자란다고 대답한 아이들이 그렇지 않은 아이들보다 지능지수가 높았다 합니다.

이것이 바로 긍정적 착각입니다. 이는 살아가면서 겪는 실패와 좌절의 상황에서 스스로를 감싸는 보호막 역할을 합니다. 정 PD는 말합니다.

“긍정적 착각이 인간을 행복하게 하고 발전시킨다는 결론을 얻었다. 우울증 환자들은 절대 착각에 빠지지 않는다. 그들은 언제나 주변 상황을 냉철하게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긍정적 착각을 동반하는 희망과 꿈이야말로 ‘실패와 좌절’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우리를 감싸는 ‘보호막’ 역할을 해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둘째 방법은 불안을 신께 맡기는 것입니다.

토론토대학 심리학과 마이클 인즐릭트 교수 팀은 신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이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불안과 걱정에 덜 시달린다는 연구 결과를 얻어냈습니다. 인즐릭트 교수는 “신앙이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 테스트에서 실수를 하거나 잘 모르는 것이 나와도 크게 걱정하지 않는 것 같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이 팀은 그 내용을 2009년 <심리과학> 온라인 판에 발표했습니다.”

한마디로 기도가 불안감을 해소해준다는 얘기입니다. 나 자신 직접 확인해보지는 않았습니다마는, 어떤 사람이 옥중에서 성경을 읽으면서 “두려워 말라”는 말씀이 수없이 기록된 것을 보고 도대체 몇 번이나 씌어 있는가를 세어보았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꼭 365번이 기록되어 있더라는 것입니다. 1년 365일 매일 한 번씩 해당하는 숫자입니다. 그럴듯한 수치적 일치입니다. 우연이긴 하지만, 신은 불안에 떠는 우리를 최소한 매일 한 번씩 위로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메시지를 은근히 전해줍니다.

 

뭐니 뭐니 해도 불안을 이기는 최고의 방법은 그 불안을 성장의 계기로 삼는 것이겠지요. 불안하니까 더 준비하고, 불안하니까 더 정진하고, 불안하니까 더 노력하자는 얘기입니다.

영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베로니카 웨지우드의 말을 기억해둘 것을 권합니다.

“불안과 무질서는 절망의 징후가 아니라 에너지와 희망의 징후다.”

체념한 사람에게는 불안이고 뭐고 가 없습니다. 불안은 희망을 가진 사람이 누리는 특권, 곧 생의 에너지인 것입니다.

올해의 자랑스런 中央人, 김형석 교수님

이 사진에 대한 아래의 소개글은 중앙고 57회 동창 교우 이재영이 동창회 카톡방에 쓴 것이다. 이 동문이 쓴 것이면 나는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무조건 믿는다.

김형석 교수님께서 중앙고 교사(사회과목 담당) 시절인 1953년 가을, [중앙고교]본관 앞에서 제자들과 함께 찍은 사진.  당시 고3이던 45회 선배님들은 모두 작고.  맨 오른쪽 학생은 전주교육대학교 미술 교수로 정년퇴직을 하시고 최근까지 작품 활동하셨는데 금년 봄에 소천.

103세이신 김형석 교수님의 만수무강을 기원합니다.

김형석 명예 교수님이 중앙학교 교우회로부터 ‘자랑스러운 중앙인’으로 선정되어서 상패 증정식을 가졌다는 소식이 중앙고57회 동창회카톡 소식으로 알게 되었다. 솔직히 나는 김교수님을 연세대 시절의 인연으로 알고 만 있었지만 우리 중앙중학교 교감이셨고 고등학교 사회과목을 가르치신 선생님이셨다는 사실은 이번에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속으로 “그러면 그렇지~” 라는 말이 나온다. 당시 중앙학교에는 주시경 선생님 등 민족계열의 선각자님들이 교편을 잡고 계셨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우리 어머님보다 한 살 젊으신 103세의 향년을 누리고 계신 철학자, 석학, 교수, 교감.. 지금은 대한민국의 지성과 양심을 대표하는 ‘광야의 목소리’..  연세대 교양학부시절 교수님의 철학개론을 들었다. 딱딱하고 심오한 것들을 쉽고 유머러스하게 이끄셨던 기억, 교수님 댁에 일시 살았던 미국인 여성에 얽힌 일화를 나누어주시기도 했는데..  참, 대단하신 것, 현재도 정정하신 모습을 마주 대하기가 부끄럽다. 지금 우리들 나이를 두고 한탄조로  나이타령이나 하고 사니 말이다.

콜럼버스 중앙고 후배 단톡방에 위의 글을 올린 후에 새로운 사실들을 많이 알게 되었다. 우선 전주에 사는 김명환이와 사진 속 얼마 전에 타계하셨다는 45회 선배는 이미 아는 사이, 둘이 만났던 사진까지 올려 주었다. 성당에 그림을 남기셨다는 것을 보면 아마도 천주교 신자가 아니었을지. 게다가 안동규 후배 아버님, 안병욱 교수와 김형석 교수는 절친한 사이였다고, 묘소 자리도 나란히 준비를 해 놓았다는 놀라운 사실도 함께. 하기야 당시 두 분은 거의 동등한 위치의 석학이셨음을 기억한다.

 

일찍 Tucker로 손자 Knox 녀석 babysitting  ‘출근’하는 연숙이, 그 집에서 푸짐하게 먹지 못하는 듯해서 신경이 쓰인다. 무조건 많이 먹어서 덜 배고프게 하고 싶은 것이다. 오늘은 연숙이 좋아하는 bagel을 bread대신 했다. 양적으로 다른 것보다 조금 더 많으니까 분명히 소화되는 시간도 더 걸릴 테니까..

드디어 ‘인형의 집’에 성탄 불이 들어왔다. 일단 제자리를 잡고 보니 생각보다 훨씬 예쁘지 않은가? 그것도 뒤편에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이 자상하고 부드럽게 미소를 짓고 계시지 않은가? 무슨 걱정을 할 필요가 있는가? 절대로, 절대로 걱정, 근심은 하지 말자. 슬퍼하지도 말고..

 

어제 Sam’s Club 갔을 때 나의 유일한 관심은~~ 역시 ‘술 종류’, 그래 봤자 wine종류였다. 하지만 습관적으로 눈치를 보는데, 우선 지금은 12월 특별한 때니만큼 죄송스럽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최소한 12월과 1월은 예외적임을 아니까.. 특별히 1월 1일을 생각해서 champagne 에 신경을 써서 그것도 함께… 하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3 병 만큼의 양이라는 BLACK BOX.. 당분간 ‘머리가 복잡하거나’, 아니면 ‘너무 좋은 일이 생겨도’ 이것이 있으니 걱정이 없다. 하지만 조심조심 자제하며 즐길 수 있을 때 마시자…

후아~ 오늘 아침도 추운 정도가.. 아마도 빙점부근일 듯하다. 그렇구나 이곳은 34도! 거의 제일 두꺼운 옷을 향하고 있는 이 즈음이다. 이곳, 이 지역, 아니 제2고향의 기후적 위치는 흥미롭다. 경계선에 있는 위치, 기온도 날씨도 이곳으로부터 변화하는 것, 왜 그럴까? 대부분 기후대란도 이곳에서 완화가 되거나 기온도, 바람도.. 특히 더위도 아틀란타 중심과 꽤 차이가 나는 것 등등… 그러니 이제 나는 거의 느낌으로 이런 기후 특징을 알아가게 되고.. 진정 이곳이 제2의 고향이 된 것인가?

원죄없으신 동정마리아 ‘대축일’… THE IMMACULATE CONCEPTION OF THE BLESSED VIRGIN MARY, SOLEMNITY, Holy Day of Obligation (의무 대축일)

대림절 첫주일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 의무대축일도 지킬 수 없게 되었다. 이유가 충분하다는 것이 조금 위안은 되지만 과연 그럴까? 오늘은 갈 수도 있긴 한데.. 그러면 그 외에 내가 이것을 보속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특별히 바치는 환희의 신비 묵주기도, 성경읽기를 더 하는 것, 관계된 영화 루르드 발현 이야기 등등.. 물론 나를 ‘늪에서 이끌어 내신 성모님’의 2010년대의 은총 등등을 회고할 수도 있지 않을지..  성모님이시여, 저를..

세월

12월도 ‘벌써’ 나흘 째로 슬그머니 넘어온 즈음, 중앙고, 연세대 친구, ‘도사’ 양건주가 1999년 8월에 보내주었던 [외로움의 도사] 김재진의 시집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를 다시 꺼내었다.  이 시집의 표지의 글,  건주의 속삭임을 듣는 듯하다.

그 당시 이미 상당한 세월을 훌쩍 넘기고 ‘가상공간’에서 다시 만나는 행운과 함께 힘든 시절, 고민과 고독을 호소하던 나를 위로하며 이 소책자를 보내 주었던 그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 이후 이 시집은 나의 영적 상담자가 되었다.

너무나 힘들었던 40대 말을 바로 뒤로했던 시절로 깊이 각인된 그때, 이 소책자는 나에게 시의 안 보이는 위로의 손길을 느끼게 해주기도 했는데.  올해 한달 전  서울 근교 일산시의 그의 보금자리에서의 기적적, 극적인 해후 이후 더욱 이 시집에 진하고 진한 남자의 우정을 되찾게 되었다.

그때 그와의 ‘역사적 만남’은 나에게 ‘세월’이라는 간단한 말을 두고 두고 묵상하는 계기를 주었고, 밤 잠을 설칠 때마다 나를 흔들어 깨우는 악동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세월, 세월… 세월…

그런데 역시 이 김재진의 시집 속에도 이 ‘세월’은 유감없이 그의 생각을 타고 있었다. 100%는 아니더라도 나의 깊은 속을 유감없이 속삭이고 있었으니..  사 반세기만에 나를 찾아온 선물이라고 할까. 건주야, 고맙고 그립다. 잠을 설치는 밤에 다시 보고 싶구나. 조금 더 나은 건강을 빌며.. 우리의 긴 세월은…

 

세월

김재진

 

살아가다 한번씩 생각나는 사람으로나 살자.

먼길을 걸어 가 닿을 곳 아예 없어도

기다리는 사람 있는 듯 그렇게

마음의 젖은 자리 외면하며 살자.

다가오는 시간은 언제나 지나갔던 세월.

먼바다의 끝이 선 자리로 이어지듯

아쉬운 이별 끝에 지겨운 만남이 있듯

모르는 척 그저 뭉개어진 마음으로 살자.

 

대림초 가 처음으로 켜지는 날…

일요일 아침시간을 편하고 아늑한 집에서 보낼 수 있는 기회, 비록 성당제대에 켜진 대림초 는 코앞에서 못보고 있지만 의외로 마음은 가볍기만 하다.  대학시절 수업을 빼먹고 연대 입구 [사실은 신촌 로터리] 대지다방으로 클럽 여자친구를 만나러 나가던 그 가벼움과 비슷한가…  지금 50년 후의 그 연대입구, 신촌 로터리에는 꾀죄죄했던 2층 다방의 모습은 간데 없고 우람하고 번쩍이는 ‘명동, 강남 스타일’의 고층건물 아래의 ultra-modern cafe들.. 아~ 싫다, 싫어… 우리 마음의 고향은 도대체 어디로 갔는가? 보너스로 생긴 일요일 아침, 성당 망치회의 김밥 대신에 left-over fried chicken, SPAM, 따끈한 밥이 곁들인 한 접시 요리는 나의 혀끝에는 천하일미였다.

중앙고 콜럼버스 인연의 채인돈 후배의 ‘서울역 선물’ 제주산 차茶.. 지난 한달 간 우리는 거의 매일, 정기적으로 이 차의 향기에 취해 서울역 모임을 음미하며 살았다. 문제는… 이제 거의 이것이 떨어져간다는 사실, 하나뿐이다.

나는 과연 너무 생각을 많이 하며 사는 ‘장애자’인가?  그것도 특히 우려, 걱정, 부정적인, 나쁜, 해가 되는 그런 것들을 주로 하며…  왜 좋은 생각, 희망적인 것, 사랑스런 것들 그런 것들을 지나치게 생각하며 사는 재주가 없는가? 정말 나도 나 자신을 잘 모를 지경인 것이다. 무엇이 문제인가, 이런 자가진단이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이 전부인가?

연숙이의 sinus infection과 심지어 기침까지 조금씩 나오는 것으로, 오늘 ‘쉬기로’ 정했기에 마음은 훨씬 편할 거라는 생각은 지나친 것이었다.  물론 미사엘 못 갔다는 미안함도 한 몫을 했겠지만, 생각만큼 그렇게 편한 새벽을 맞이하지는 못했다는 것, 아~ 그렇구나… 다가오는 시간, 날, 세월들에서 나를 즐겁게, 편하게 하는 ‘희망’이란 놈이 잘 안 보인다는 슬픈 사실이다… 왜 요새는 그렇게 앞날이 어둡게만 보이는 것일까?

어제 읽었던 NYT 논설, Is South Korea Disappearing? 생각보다 ‘비 과학적’ 분석인 것이 사실은 나에게는 더 도움이 된다. 그의 ‘느낌’이 ‘과학’보다 더 설득력이 있었을까?  내가 과연 조국의 출산율에 관심을 가졌던 때가 있었는가? 절대로 절대로 한 적이 없다. 우리의 시대에는 이것[낮은 출산율]은 사실 ‘선진적’ 인 좋은 것에 속했기 때문이다. 잘사는 곳일 수록 ‘초고층 건물’이 즐비하고, 출산율은 반비례해서 낮았으니까…  이 두 가지를 현재 모두 가지게 된, ‘자랑스런 조국’ 인데…  무엇을 걱정하랴? 하지만 세상이 이렇게 변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것이 바로 이미 시작된 대한민국의 출산율 걱정인 것이다. 세계적인 환경위기와 더불어 모국, 대한민국은 이것을 현명하게 해결할 것임을 물론 나는 신앙적으로 믿는다.

오늘 CBS Sunday Morning show에 이 ‘미국판 애국열사’의 침통한 얼굴이 나온다.  Elizabeth ‘Liz’ Cheney, 그녀는 누구인가? 오래 전 ‘추억의 부통령’ Dick Cheney의 딸, 정치집안의 산물, 모두 강경 보수파 매파 공화당 계열.. 한때 나는 이들을 싫어했고 때에 따라서 ‘증오’까지 했던 때도 있었다. 특히 선제공격 형 전쟁 광으로까지 치부하기도 했다. 하지만 세월은 흐르고, 좋은 놈과 나쁜 놈의 기준이 180도 바뀐 후.. 무엇이 변했나?

이 극우 대부격인 아버지와 그의 딸, 모두 지금은 거의 ‘성인 聖人 반열급’으로 보이는 이유는 무엇인가? 미국의 민주주의의 양심을 몸으로 지키는 사람 중에 나는 이 ‘용기 충만한 여성’이 제일 으뜸이라고 생각한다.  썩을 대로 썩은 Republican 중에서 거의 홀로 DONALD ‘개XX’를 탄핵했던 용기와 양심의 소유자, 그녀가 이번에 ‘미국을 살리는 책’ “OATH and HONOR  A Memoir and a Warning” 펴냈다. Memoir는 그렇다 치고 Warning이란 글자가 무겁게 다가온다. Warning이란 것, 쉽게 말해서 Trump의 ‘다가올 제2 쿠데타 음모’ [사실은 음모가 아니고 공공연한 호언장담] 에 관한 것, 진정 미국의 ‘전통자유민주주의’는 벼랑 끝으로 몰리고 있는 것일까?  이것에 대한 ‘해독제’는 과연 무엇인가? 정치철학, 도덕률의 절대잣대가 사라진 이때 도대체 어떤 기준에 의지하며 살 것인가? 

일요일 이른 아침을 (old fashioned) TV 와 함께 한다는 것, 전혀 추억조차 까마득한 것, 그야말로 surreal한 경험이다. 실감이 안 가는 것이다. 최소한 20년 이상은 되지 않았을까?  얼마 전 최적의 위치를 찾은 HDTV antenna 덕분이다. 이 작은 gadget으로 제일 보기 편한 local channel 들의 signal들, 특히 비록 HD format은 아니어도 KBS AMERICA가  ‘간신히 나마’, 30마일의 Atlanta Metro 를 횡단하며 Marietta에 비추이는 것, ‘공짜 programming’ 이라는 사실과 함께, 요새 나에게는 드문 ‘행복한’ 순간을 선사한다. 세 군데 major channel은 역시 아직도 ‘목사님’들이 설교로 침을 튀긴다. 예전에는 ‘성경유일주의’로 조금은 배울 것도 있었지만, 그들이 Donald ‘개XX’에 목을 매는 것을 보며 오늘은 100% 완전 외면을 한다.  100% analog에서 99% digital로 변하던 그 동안 참으로 세상이 많이 변했다.  심지어 AI preacher의 등장까지 꿈속에 등장하니, 유일한 등대는 이곳이 아니고 저쪽이 아닐까?

아~ 골치 아프다~ 왜 올해는 이것까지 말썽을 부리는가? 근래 우리의 holiday lighting 은 큰 문제가 없었는데, 올해는 왜 이러는가? Strand중의 한 부분이 이빨 빠진 듯 감감소식..  이것을 내가 고쳐본 적이 있었던가? 물론 가끔 bulb하나가 ‘죽으면’, 교체를 하면 됐지만 지금은 모두 led여서 거의 불가능하니.. 문제는 어떤 led가 죽었는가 찾는 것인데, 아직까지 고전 중… 이것은 가만히 보니 고치는 것보다는 아예 새것을 사라는 의도로 만들어진 듯, 역쉬~ 짱개의 얄팍한 발상인가?

오늘은 예전의 ‘보편적’ 주일, 일요일 같지 않은 새로운 일요일을 보냈다. 비록 대림1주 첫째 날 미사는 못 보았어도 큰 후회는 없다. 감기기운이 있는 연숙이 모처럼 아침잠을 깊이 잘 수 있었고, 나도 솔직히 오늘은 ‘순교자 성당’에 가는 것을 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주 갑자기[이상한 예감이 없던 것은 아니지만]  monster로 돌변한 추한 모습의 어떤 ‘정서적으로 불안한’ 여자 얼굴을 다시 볼 기분도 아니었다.  한때는 대신 Holy Family 동네 성당에 가는 생각도 했지만 결국은 포기하고 말았다. 그래~ 뜻밖의 휴일이라고 생각하고 조금 긴장, 스트레스도 잠재울 수 있는 ‘하루’도 우리에게는 귀중한 휴식의 시간이 될 것이 아닌가? 이런 편안한 일요일, 모처럼 연숙이의 homemade 해물잡탕까지 해 먹을 수 있었으니~

저녁때 가슴이 써늘할 정도로 놀랄 뜻밖의 카톡 메시지~ 분명히 캐나다의 중앙고 동창 정교성이 보낸 것인데~~ 보니 딸이 쓴 것인 듯, 교성이가 11월 24일 심장마비로 입원했고,  이후 그곳에서 또 COVID까지 걸렸다는 요지의 메시지였다. 그것이 전부~~ 현재의 상태를 조금 더 자세히 알려주었으면~~ 기도하겠다는 답을 보내긴 했지만… 아~ 요새, 아니 요즈음, 아니 가을부터 이것이 웬일들인가? 줄줄이 세상을 떠나고, 급기야는 교성이의 입원소식까지~~ 내가 할 것이 하나도 없으니, 기도라도 열심히 할 것이지만 조금 어두운 예감이 조금씩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고.. 정말 우리는 인생의 황혼을 더 빠르게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죽을 준비를 서서히 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Is South Korea Disappering?

 

 NYT Opinion 난에 갑자기 South Korea란 글자가 보인다. 이것 또 무슨 안보나 정치에 관한 심각한 것은 아닐까 하고 보니… 맙소사, 어떻게 이런 것이 논설란에?

Ross Douthat의 ‘조금은 수박 겉핥는 정도의 생각’, 알고 보니 대한민국의 출산율, 그것의 심각성에 관한 것이다. 어떻게 이것이 미국의 입장에서 다가오는 위기로까지 비쳐졌을까? 쉽게 말하면 대한민국의 국제적 위상, 위치가 그만큼 세계적으로 중요해졌다는 단적인 표현일 듯하니, mixed feeling 일지…

어느 정도로 심각한 것인지는 과학적(통계적) data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는데… 한마디로 인구 감소 정도가 아니라 인구 소멸, 국가 소멸로 향할 수도 있다는 ‘미래성’ 경고다.

이런 추세의 결과는 일본에서 이미 겪고 있지만 그 정도가 일본을 앞지르고 있다는 것, 나도 이제 조금 염려가 되기 시작한다. 전에는 그저 지나가는 ‘해외토픽’ 정도로 넘기곤 했던 것인데 지금은 아닌 것이다.

왜 이렇게까지 되었을까? 이 논평은 현재 대한민국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우리들은 쉽게 알 수 있는 것들이었다. 

현재의 추세라면 2060년이 되면 3천5백만으로 인구 감소, 거의 국가 위기 수준이라는 것. 경제 성장에 심각한 타격은 불 보듯 뻔한 것, 빈집 속출, 대량 이민자 유입, 국방 문제 등등.. 이런 인구감소의 원인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대한민국의 ‘유명한’ 치열한 경쟁에 따른 교육 시스템으로부터 시작된 가정의 건강상태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인데, 과연 그것이 전부인가? 물론 아니다.

급속도로 비정상적으로 급부상한 feminism, 여성들의 지위, power가 전통적인 가족 구조를 바꾸어 놓고 있다는 것.  결혼기피부터 시작해서 출산도 사실 여성들의 몫이었으니 결과는 뻔한 것 아닐까?  긴 세월 ‘억압받던’ 여성들은 이제 더욱 자유롭게 살고 싶은 것이다.

지난 10월 한달 동안의 고국 방문에서 느낀 것 중에 하나도 ’10~20대 젊은이들’의 초점을 잃은 듯한 눈을 보며, 급변화를 거듭하는 초고성장 시기에 정신을 잃은 듯한 진화, 변화, 아니 심지어 퇴화로 까지 보이는 정말 이상한 모습들을 가까이 피부로 느꼈다는 사실이다. 나의 지난 반세기를 되돌아보면 생각 없이 질주했던 ‘우리세대’들의 ‘애국’도 한몫을 하지 않았을까?  앞으로 물질적인 초고성장과 쉽게 안 보이는 다른 여러 문제를 제대로 슬기롭게 풀어 갈 수 있는 능력이, 건강한 출산율과 함께,  대한민국에 있을까…  물론이다, 나는 물론 있다고 믿는다. 절대적으로 극복하며, 장래 아시아의 희망의 등대 역할을 할 것이다.

Wet & Milder, Foggy & Misting…

요란하게 예보되었던 ‘비, 가을비, 초겨울 비’ 대신에 이슬비가 포근한 땅으로 잔잔히 내리는 아침이다. 잠시 앞문을 열고 눈에 익숙한 모습을 남기고, ‘수경이네’ 단톡방에 올려 놓았다. 수경이네가 이곳에 왔던 것이 거의 20년에 가까워온다는 사실을 믿을 수는 없지만 이것으로 우리 집 주변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기억해 보라는 뜻도 있었다. 수경아~ 벌써 보고 싶다.. 하루 속히 이곳으로 날라 올 수 있기를 기도한다!

새벽 6시 central heating 잔잔한 소음, 불과 20분 만에 꺼진다. 기온이 많이 올랐다는 뜻이다.  별로 가볍지 않은 머릿속, 아~ 또 왜 이러는 것일까? 보기 싫은 ‘쓰레기’ 급 단상斷想들이 분명히 나를 괴롭힌 것이다. 오늘은 참을 성을 가지고 아래층 전깃불이 켜지는 시간을 기다렸다가 일어난다.

분명히 일기예보는 온통 비와 천둥이 치는 밤, 새벽을 예상하게 했는데~ 또 속은 느낌. 바깥을 보니 온통 어두운 안개.. 속을 자세히 보니 역시 땅은 젖어있었다. 나의 속마음을 조금이라도 씻어주는 세찬 비바람을 원했지만, 어찌 세상이 나의 뜻대로 돌아갈까?

오늘은 정말 이상하게도 기분이 그렇게 가라앉을 수가 없었다. 어제 ‘마포 종수 후배’와의 45분 간의 긴 통화 이후부터 그런 것을 보면 분명히 지난 10월 콜럼버스 중앙 후배들과의 ‘서울역 재회’로 느끼게 된 새로운 깨달음 때문이 아니었을까.

11명의 ‘잘나가는’ 후배들, 모두 그곳에서 꾸준히 만나며 사는 모습이 그렇게 부러운 것, 반대로 나의 모습은 상대적으로 그렇게 외로운 기러기처럼 보이는 것, 지극히 ‘정상적’, 자연스러운 반응이 아닐지,

진정한 행복의 길, 원칙에 ‘남과 비교하는 삶의 폐해’에 대한 것이 제일 중요한 것, 모를 리가 있겠는가? 하지만 이런 삶은 단계가 낮은 거의 인간 본능에 가까운 것이어서 한눈만 잠깐 팔면 이 비교의 유혹에 넘어가는 것이 문제다.  이런 ‘잡념, 유혹, 고민’에 대한 나의 돌파구 중에는 예수님의 진복팔단 眞福八端  Beatitudes , 행복의 대헌장이라고 할까, 그것을 묵상하는 것이 있는데… 이것 역시 얼마나 진지하게 복음말씀을 이해하는가에 달려있다. 오늘 내가 이것을 통해서 효과를 보았는지는 솔직히 말해서 아직 잘 모른다.

올해 성탄 lighting은 왜 이렇게 문제가 많은가? 문제는 작년에 쓰던 것의 일부분이 ‘망가져’서 그런 것이고, 새로 한쪽만 산 것의 색깔이 글쎄 전의 그것과 다른 cool color가 아닌가? 섞어도 될 것이라 희망을 했지만 실제로 켜보니 솔직히 별로인 것이다. 어쩔 것인가? 고장 난 것을 고치면 되는데 솔직히 말해서 열의가 없다. 기를 쓰고 노력하지 않는 것이다. 일단 lighting은 켜졌으니까 조금 시간을 두고 고치는 시도를 계속하면~~  연숙이 몇 년 전부터 이 장식에 유난히 신경을 쓰고 있음을 아는데 나는 어찌 이렇게 항상 뒤쳐지고 시큰둥한 하고 있단 말이냐? 그래 조금이라도 신나게 할 수 있는 모습을 보이면 얼마나 좋을지…

내일 주일미사는 ‘순간적 기지’를 발휘해서 조금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될 듯하다. 아~ 우리 동네 Holy Family 성당 주일미사! 이것 도대체 얼마만인가?  마지막으로 그곳으로 주일미사를 보러 갔던 때가~~  달력을 찾으면 알 수 있을 듯한데 지금으로서는 전혀 idea가 없다. 그만큼 오래된 것 같으니까.. 처음엔 내일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엘 가기가 싫어서 미사를 빼먹을 생각까지 하다가, 순간적으로 이렇게 마음을 고쳐 먹은 것이다. 감히 대림절 첫날을 어떻게 빠질 수 있단 말인가? 왜 순교자 성당엘 가기 싫었는지, 간단하다.  갑자기 monster처럼 출현한 그 ‘제3의 미친X’ (이제는 부부),  영성체 하러 줄 서서 나가는 뒷모습조차 보기 싫었기 때문이다.

Closer to Truth Redux, HAMAS problem

아~ Closer to Truth! 오랜 세월 동안 거의 잊었던 얼굴, Robert Lawrence Kuhn…  거의 7년 전에 이미 나는 이 주제를 이곳에서 소개한 바가 있다.  Wikipedia에 의하면 이 PBS program은:

The show is centered on on-camera conversations with leading scientists, philosophers, theologians, and scholars, covering a diverse range of topics or questions, from the cause, size and nature of the universe (or multiverse), to the mystery of consciousness and the notion of free will, to the existence and essence of God, to the mystery of existence (i.e., why there is anything at all).

그 동안 잊고 살았던 이 program, 오늘 다시 보며 아직도 건재, 아니 승승장구, 매 season 마다 새로운 program 들로 그득한 사실에 놀라기도 했다. PBS science program 중에서 제일 ‘진보적, 아니 심지어 영성적’인 각도로 그들의 진실에 과감하게 도전하는 이런 것, PBS 만이 할 수 있는 용기가 충만한 쾌거라는 생각. 오늘도 역시 그들은 problem of consciousness & universe의 궁극적인 문제를 세계의 석학들과 과감하게 파헤치는 모습이 보인다. 이런 주제로 조금만 들어가면 현재의 미소하고 미천한 ‘작은 고민, 사람’들은 거의 일 순간에 사라진다. 이것도 다른 의미의 life-saving enlightenment가 아닐까?

ISRAEL & HAMAS [Palestinians]…  현재 진행 중인 .. 싸움, 전쟁, 살상, 살인.. 이 모든 것들의 역사적 이유를 떠나서 나는 언제나 고민하는 것이 있다. 바로 이 분쟁의 언제나 보이는 것, ‘인질 전술’이다. 그들의 말할 수 없는 역사적 고통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거의 언제나 이런 ‘반인류적인 전술’을 쓰는 그들, 어떠한 이유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것이 제일 싫고, 저주의 대상이다. 보이기에 죄가 없는 사람들을 인질로 삼는 Hamas [와 대부분의 그 민족들]의 술책, 그것으로 그들이 인류 보편적인 선과 악의 사이에서  ‘악의 세력에’ 더 가깝다는 심증을 더하는 것이다. 어쩔 수가 없는 나만의 철학일지는 모르지만, 그런 세력에 가담하는 Gaza의 ‘죄 없는 민간인’에 동정을 할 수 없는 것, 나도 별 수가 없다.

연숙이 코감기 증세가 심해지는 가운데 가랑비를 뚫고 손주를 보아주기 위해서 Tucker로 가는 날, 나는 집에서 편하게 있게 된 것이 아무래도 미안하지 않는다면.. 문제는 20 마일 traffic drive.. 빗속으로.. 또한 로난 (산)과 달리 잠투정이 심한 낙스 (하늘)와 씨름, 아~ 이것이 70대에서 손주들 보아주는 수고인가.. 남들도 다 하는 것인데 어찌 우리만 특별하다고…

‘GOOD TIDINGS WE BRING, to you from our friends’… 행복하게 보이는 아프리카의 가족의 모습이 너무나 편안, 감사하게 보이는 holiday card가 왔다. 아하~ UNBOUND! 잊고 살았다. 우리보다 더 도움이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십시일반 으로 도와주는 charity UNBOUND를 통해 우리와 인연을 맺은 필리핀 노부부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들 지금 어떻게 잘 살고 있는가? 미미한 우리의 ‘도움’이 조금이라도 그들의 삶에 의욕을 주고 있을지… 더 많은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이 항상 미안하기만 하다.

천장의 tv-antenna 가 새로 제자리를 잡은 이후부터 며칠 동안 signal reception의 건강이 나의 관심사 중의 하나가 되었다. 덕분에 더욱 자주 거의 모든 channel의 ‘영상 건강’을 살피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 아하~ 오늘 아침, 모든 channel 전혀 문제가 없구나, 제일 signal이 약했던 Channel 8.x, 제일 먼 곳에서 오는 KBS-AMERICA 등등 모두 궂은 날씨에서도 전혀 문제가 없으니.. 아마도 현재 antenna의 attitude가 그런대로 optimal한 것인 듯하다. OK & OK!

요한복음 전부, 묵주기도 200단.. 이것이 순교자 본당에 성탄 직전까지 하기로 약속한 ‘아기예수’를 향한 작은 선물이다. 하지만 이런 것을 떠나서 이 작은 선물 봉헌 숙제가 나에게 주어진 timing을 다시 묵상해본다.

매일 저녁기도 때 묵주기도 5단을 통상적으로 하고 있지만 이것은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나를 살려주는’ 듯한, 아기예수님이 나에게 주시는 선물로 다가오는 것이다. 현재 나 우리가 겪고 있는 뜻밖의 작은 고통의 경험이 동정녀로서 아기를 출산해야만 하는 인류의 고통의 하나로 생각하라는 위로의 암시는 아닐까, 비약도 이런 비약이…

하지만 일단 약속을 한 이 봉헌, 일단 시작을 하고 보니 역시 적절한 timing이었다. 의외로 잔잔한 가슴 깊은 곳의 평화의 느낌, 샘이 흘러나오는 것이다. 레지오 시절 때 주변 인물들로부터 당하고, 겪었던 각종 ‘인재 人災’의 고통의 순간들에도 우리를 살려준 것은 역시 ‘성모님의 묵주기도’ 였으니까..  지금 겪는 심적 실망, 고통도 그때와 거의 비슷한 ‘악의 현존’을 일깨우는 커다란 교훈으로 인정하면 된다.

9월 말 나의 유일한 누님이 뜻밖에 세상을 떠난 이후부터 시작된 그치지 않는 행렬: 사망, 선종..  나의 대자 김영태 세례자 요한 형제님의 뜻하지 않은 죽음, 예고 없이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서울 교동학교 출신, 불과 몇 주 전까지 친했던 R 형제님을 필두로,  오늘은 Sandra Day O’Conner 93세.. 전 미국 연방대법원 여성 판사.. 며칠 전의 Rosalynn Carter, 그제의 Henry Kissinger에 이어서 연속으로 3번 째 ‘역사적 인물들’의 타계소식.. 어떻게 받아드려야 할 것인가?

George Santos, I Love to Hate 인물 중의 하나, role model이 Trump ‘개XX’ 이며, baby Trump 역할을 자랑스럽게 자처하는 상습 거짓말쟁이, 사기꾼, 쓰레기 급 1st term Republican CongressSOB, 결국 congress에서 투표로 쫓겨났다. 얼마 후에는 각종 사기, 횡령 혐의로  형사재판 기소로  감방에 갈지도 모른다. 너무나 놀라고 놀라는 사실은 어쩌면 이 Brazilian 쓰레기는 그렇게도 그의 role model인 Trump ‘개XX’를 따라가려고 마지막 순간까지 희망을 버리지 못하는 것일까?  나이로 보면 그는 baby Trump 쯤 될 것이다. 사실 정말로 감방에 먼저 가야 할 X은 그의 role model인 ‘개XX’ 인데…

예정된 대로 서울 마포에 사는 김종수 후배와 장장 45분 카톡 통화를 했다. 주목적은 육성을 듣고 싶었고, 그를 통해서 궁금한 사실들을 알고 싶었던 것이었다. 대강은 짐작했던 사실들이었지만 그래도 더 자세히 알 수가 있었다. 그 중 제일 인상적인 새로운 사실은 하재주 후배가 ‘자랑스런 중앙인’으로 뽑힐 정도의 대한민국 원자력 계 leader로서 크게 성공했다는 것.  이 후배와 오랜 전에 이곳에서 만나기도 했었는데 전혀 그런 느낌을 못 받았던 것은, 이 후배가 너무나 겸손해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는지.. 근래 경주용 자전거를 타며  활기찬 모습을 느끼게 해 주었는데 그의 삶도 그처럼 dynamic했던 것 같다.  이들 모두 ‘사회적으로 성공한 삶, 가정, 업적’의 소유자들인 듯한 것, 물론 만감이 교차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나의 문제일 뿐이다. 절대로 이상하게 삶의 비교를 하는 것, 신앙적으로도 절대로 피해야 하지 않을까?

앞으로 그곳을 가게 되면 더욱 이들 후배 그룹과 관계를 유지하고 싶고, 또 만날 수 있는 기대도 한다..  오늘 들은 소식 중에 이들 대부분이 크리스천, 교회나 성당을 다니는 신앙 생활을 한다는 반가운 사실이었다. 이들과 신앙적 관계로 발전하는 모임이 되는 꿈도 꾸어보는데 과연~~

밤부터 내린다는 비.. 이것은 나에게 작은 위로를 준다. 늦은 밤 이제 2주 밖에 남지 않은 시간, 그 동안 기타와 노래 연습을 해야 하는 스트레스가 서서히 쌓이기 시작한다. 다행히 대부분의 노래들과 그에 따른 코드들을 많이 잊지는 않았다. 하지만 목소리는 개미처럼 들리고, 기타소리는 경직이 되었는지 전혀 마음에 들지도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