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you’re sixty-four..

 

The Beatles – When I’m Sixty-Four

 

휴~ 이제 다 끝이 난 모양이다.  연숙의 생일 ‘먹기’. 1월 달에는 나와 큰 딸, 9월 달엔 엄마와 작은 딸의 생일이 같은 날짜 차이로 있다. 그래서 1월도 조금 바쁘고 9월 달도 마찬가지다. 올해 연숙의 생일은 조금 지나치게 보낸 것은 아닐까? 생일 전날에 Thai restaurant Lemongrass에서 ‘간단히’ 둘이 ‘먹었고’, 생일 날엔 아이들이 와서 Marietta Square에 있는 gourmet hamburger restaurant Stockyard 란 곳에서 ‘무지막지’하게 큰 hamburger와 local microbrewery 산 draft beer sampler로 배가 터지게 먹었고, 마지막으로는 우리 레지오 단원들과 같이 한 생일회식이 마지막을 장식하였다. 그러니까.. 무려 3번 생일축하를 한 셈이다. 조금 지나친 감도 없지 않았으나.. 생각을 해 보니 올해 생일이 육십사세 란 것이 귀에 익은 숫자였다. 내가 4년 전에 1월에 친구 양건주와 나의 생일을 자축한 Beatles classic, When I’m sixty four..  생각이 나는 것이다.  4~5 년 뒤로 나를 따라오는 연숙이 64세라는 것이 조금은 실감이 안 간다. 부모세대의 64세를 생각하며, 손주들이 주렁주렁한 할머니의 모습들.. 암만 봐도 그 때의 그 모습들이 없다. 한 세대가 흐른 시점에서 세대 차를 느끼지만 그것은 모두 ‘겉 모습’에 관한 것 들이다. 아마도 세월에 의한 경험은 그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아닐까? 그 옛날 60년대.. 이 Beatles의 When I’m sixty four를 들었을 당시.. 기억에, 와~ 그 나이까지 살면 어떻게 하나.. 하고 은근히 기분이 쳐지는 느낌도 있었다. 그런데 이제 우리 부부는 ‘완전히’ 그 magic number를 모두 넘어선 것이다. 참 정직하다, 세월은.. 어김없이 일초 일초..흐른다.

 

Adieu, August 2016

서기 2016년 8월이 역사의 한 chapter로 사라지는 날이 되었다. 올해 8월을 어떻게 보냈고 나중에 어떻게 기억하게 될 것인가? 날씨로 말하면.. oppressive month라고 할까.. 정말 잔인하게 땅을 말리는 더위도 그렇지만.. 나를 괴롭힌 것은 그것보다는 ‘매일 매일이 거의 carbon copy 같은’ 그런 정말 세월이 정지된 듯한 모습의 날씨가 거의 30일간 계속된 것.. 이것도 아마 기록에 남을 듯 하다.

날씨 뿐만 아니라 다른 것들도 수확이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수확은커녕 기대를 한 것이 유산이 되는 실망도 있었다. ‘거창하게’ 출범을 했던 ‘봉헌을 위한 33일’이 골인 3일을 남겨두고 무릎을 꿇은 것이다. 비록 앞으로 기회가 또 있다고 하지만 나의 ‘자존감’에는 분명히 피해를 주었을 듯 하다. 교훈은 무엇인가.. control your temper..가 될 듯하다.

지난 수년간 바쁘기만 했던 한 여름의 ‘레지오 활동’들.. 올해는 거짓말처럼 조용해진 것.. 솔직히 불안하다. 활동거리가 없다는 사실 자체는 축하할 일일 수도 있지만 새로운 활동거리를 찾는 활동이 약해졌음을 어찌 모르랴.. 활동거리를 proactive하게 찾는 활동.. 바로 그것이 최근 들어서 slow down된 것은 분명한 현실인 것이다.

그런 것에 비해서 나, 아니 우리의 ‘세속적’인 활동이 시간적으로 늘어난 것도 관심의 대상이 된다. 오랜 동안 잊고 살았던 social activities에 서서히 조금씩 관련이 되는 것, 어떻게 봐야 할지 솔직히 지금은 잘 모른다. 시간이 조금 지나가 봐야 제대로 판단을 내릴 수 있지 않을까? 그 중에 시간적으로 제일 ‘부담’이 된 것이 guitar coaching 인데, 이 새로운 활동을 조금 더 비판적으로 봐야겠다는 생각이 자꾸 드는 것을 보면 조만간 scale down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조금은 바깥일을 할 수 있는 ‘멋진 가을 하늘’, 그것이 9월인데.. 집안에 갇혀 지내니 ugly backyard stuffs들이 나의 손길을 기다린다. 그러고 보니 정말 우리 집은 손을 볼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고, 모조리 모조리 나의 muscle과 money를 요구하는 것들이다. 이럴 때 근육이 적당한 ‘동갑내기 죽마고우  竹馬故友’가 나의 옆집에 살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갑자기 평화스러운 낮잠에서 꾸는 나의 이루어질 수 없는 꿈.. 바로 그것이었다.

 

'날이 좋아'..허.. 이런 것이 요새의 소주인가? 하지만 평화스런 오후의 기분과 너무나 잘 맞아 떨어진다.. 연숙의 깜짝 선물 (from H-mart)

‘날이 좋아’..허.. 이런 것이 요새의 소주인가? 하지만 평화스런 오후의 기분과 너무나 잘 맞아 떨어진다.. 연숙의 깜짝 선물 (from H-mart)

5마리 식구가 2마리로.. 엄마를 포함한 3식구가 떠난 나머지 2마리가 똘똘 뭉쳐서 우리집 뒷뜰에 안주하기 시작하나..

5마리 식구가 2마리로.. 엄마를 포함한 3식구가 떠난 나머지 2마리가 똘똘 뭉쳐서 우리집 뒷뜰에 안주하기 시작하나..

 

처서 處暑… waning Summer

올 여름들어 두번째 쏟아진 오후 소나기

올 여름 들어 두 번째 쏟아진 오후 소나기

 

올해는 유별나게 절기의 이름이 눈에 잘 들어온다. 이것도 나이 탓인지.. 지난 번에는 말복이란 것으로 계절의 변화를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처서.. 란 것. 거의 칠십에 가까운 장구한 세월을 살면서 올해처럼 이런 절기의 이름이 눈과 머리에 들어오는 적은 처음일 것이다.

처서.. 유난히 지겹게도 덥게 느껴지던 올해의 여름 내내 꿈 속에도 보였던 말이 ‘써늘한 아침바람’ 이었다. 거의 3개월 동안 내내 내가 느꼈던 새벽 6시 경의 느낌은 끈끈함 그 자체였었다. 간혹 바람이란 것이 있었어도 그것은 물기가 잔뜩 섞여있는 거의 ‘열대성’ 그 것이었다.

지난 3년 간 여름철에 그렇게도 자주 내려주던 오후의 소낙비, 올해는 거의 없었고 그 느낌조차 잊을 정도였다. 7월 초에 딱 한번 내렸던 것은 반가운 기록으로 나의 blog에 남을 정도의 역사가 되었다. 그리고 며칠 전에 그 반가운 오후의 소나기가 사정없이 쏟아졌다. 올 여름의 2번째 귀중한 소나기가 된 것이다.

처서.. 왜 이름이 처서 處暑일까? ‘곳’ 處, ‘더울’ 暑.. 이것이 무슨 뜻인가? 물론 전체의 뜻 자체는 ‘여름이 지나 더위가 한풀 꺾이고 신선한 가을을 맞이 한다고’ 하는 뜻이다. 그렇다. 이제는 더워도 그 더위가 별볼일 없다는 뜻일 것이다. 수그러드는 더위, 그러니까.. 아마 waning Summer 정도가 될 듯하다.

아침부터 해가 안 보이는 구름들, 그렇게 해가 안 보이는 것이 반가울 수가 없다. 올해처럼 아침에 뜨는 시뻘건 태양의 느낌이 싫었던 때도 없었던 만큼 잔뜩 흐린 아침이 그렇게 반가웠다. 바로 오늘이 그런 날이 되었다. 기분이 갑자기 홀가분해지고 날라갈 듯하다. 아~~ 가을도 얼마 남지 않았구나..

 

올해 구경도 못 했던 쓸쓸한 해변가.. 파도소리 들리는..

올해 구경도 못 했던 쓸쓸한 해변가.. 파도소리 들리는..

올 가을은 또다시 쓸쓸한 해변가로 오려는가..

올 가을은 또다시 쓸쓸한 해변가로 오려는가..

 

지나간 몇 해의 여름에 비해서 올해는 참 한가한 기분이 들었다. 실제로도 그랬다. 지나간 해, 유난히도 병고로 고생하던 분들이 많았고 그 중에는 세상을 떠난 영혼들도 있었다. 그 영혼들과 보낸 세월도 짧지 않았고, 덕분에 날씨의 느낌에도 둔하게 될 수도 있었다. 다행이라면 다행인가, 올해는 그렇게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지만 따라서 우리들이 할 ‘일’이 줄어든 것도 사실이었다. 여가 시간이 갑자기 나타난 것이다. 이제는 이 ‘귀중한 남는 시간‘을 어떻게 ‘멋지고 뜻 깊게’ 쓸 것인가.. 그것이 이 시원한 늦여름의 작은 즐거운 과제가 되었다.

 

말복 末伏 … 2016

2016년 8월 16일, 레지오 수첩을 보니 ‘말복’이라고 쓰여있다. 결국은 그날이 지나가는구나..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왜 그럴까.. 지독히도 끈적거리게 덥던 올해의 여름이 그렇게 고맙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말복은 복날 중 마지막으로 삼복 더위가 일단 끝나는 때인데, 이 초복, 중복, 말복의 삼복은 절기에 속하지 않는다고 한글 Wikipedia에 나와있다.  이것은 나도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다른 것들은 내가 잘 못 알고 있었던 것도 있었다. 복 날의 복 자가 나는 이제까지 개 와 연관이 된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알고 보니 이것은 실제로 직접 상관이 없는 것들이었다. 그러니까 복 더위하고 개 하고는 원래 상관이 없었던 것. 미국에서 제일 더운 때 여름철을 Dog Days 라고 부르는 것에서 생긴 나의 오해였는지도..

말복이 지나감에도 더위는 조금도 수그러지지 않지만 그래도 이날을 나는 기쁘게 맞이하는 것은, 이제 여름의 무더위는 ‘시간문제’임을 오래 산 경험을 통해서 알기 때문이다. 작년에는 말복이 지나고 열흘 뒤쯤에 비로소 아침 기온이 떨어지고 첫 시원한 공기를 느낀 것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야말로 이제는 ‘시간 문제’인 것인가..

그러면 이 복, 삼복이란 것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절기에 속하지도 않는 그저 일년 중 제일 더운 때의 3일, 삼복날.. 이것도 Wikipedia에서 ‘사실 여부에 상관없이’ 알게 되었다. 역시 짱 깨 들의 유산인가.. 중국 사기에 의하면 진 나라의 ‘덕공(德公) 2년’ (연호인가?) 에 시작되었다고 나와있다. 무척 역사가 깊은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더위를 이기느라 ‘고기류’를 먹는 관습이 생겼다고 한다. 이것으로부터 대한민국의 자랑인 ‘개고기’ 먹는 해괴한 전통도 생겼나.. 

집을 완전히 떠나는 휴가가 없었던 올해의 무척 더운 여름, 비교적 건강하고 차분하고 규칙적인 나날을 만들려 안간 힘을 썼다. 하지만 2년 전의 경험했던 것 처럼 나는 올해도 mild burnout 이후 3일간의 big reset의 풍랑을 겪어야 했다. 그것으로 인해 야심 차게 시작하고 열심히 해 왔던 ‘성모님께 대한 33일 봉헌’ 과정의 끝을 맺지 못하는 불상사를 남기게 되었다. 모두들 아깝다고 comment를 했지만 나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이 보였던 disaster였다.  지금도 big reset의 과정이 다 지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훨씬 맑은 정신으로 뒤를 돌아보게 되었다. 나의 불찰이었다. 내가 나를 너무나 push했던 탓도 있었다. 인간의 기본적인 physical-mental-spiritual  balance가 완전히 깨진 것을, 나는 거의 무시하며 강행군을 한 것인지도 모른다. 지겹게 덥기만 하던 올 여름에 얻은 귀중한 교훈.. 이것도 남은 생을 통해 두고두고 기억할 만한 귀중한 것이 되었다.

 

Typewriter.. 그리고 추억..

1960년 대 Hermes typewriter

1960년 대 Hermes typewriter

 

Georgia 10, 굴림 10:  얼마나 멋진 type shape인가? 하지만 그것보다 더 멋진 것은.. 아~~ 그립다, 태곳적 太古的 둔탁하지만 경쾌한 typewriter의 잔잔한 소음들.. 지금은 원시적인 얼굴의 mono type Pica, 그들은 이제 모두 어디로 갔는가? 아~~ 그 예전에 ‘학문적, 지적 정보’의 총아 寵兒 였던 mechanical typewriter 의 멋진 추억들이여!

나와 typewriter의 첫 만남은 1960년대 초쯤이었다. 서울 중앙중학교 1, 2학년 쯤이었나.. 나의 경기고교생 가정교사였던 김용기 형, 나이에 비해서 조숙했던 그 형이 나의 typewriter에 대한 꿈을 며칠 동안 이루어 주었다. 나의 꿈은 그 것을 직접 만져보고 쳐보는 것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 괴물처럼 무겁게 보였던 Underwood typewriter를 들고 나타난 것이다. 내가 하도 그것에 대한 호기심을 보였기에 그 형이 어디선가  며칠간 ‘빌려온’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그것, Underwood typewriter는  ‘고철’이었다. 크고, 무거운 쇠 덩어리로 보였던 것이다. 어린 애는 들기도 힘들 정도였다. 당시 중학교부터 영어를 배우기 시작해서 영어에 대한 관심이 많을 때였고 학생전용 영어 신문도 학교에서 가끔 볼 수도 있었는데 typewriter는 집에서 활자체로 인쇄물을 찍어 낼 수 있다는 사실에 나는 완전히 그것의 위력에 매료되기도 했다. 영자신문 비슷한 것을 찍어보기도 하며 즐거워한 기억이 생생하다.

당시의 typewriter는 물론 거의 모두 ‘중고’, 아마도 미8군 부대를 통해서 흘러나왔을 것이고 그 값은 만만치 않은 것이고.. 보통 사람들은 그것은 가질 수 없는 물건이었다. 고등학교 대학교를 다니며 그것을 집에 가진 사람은 거의 못 보았다. 당시에 이미 한글타자기(공병우 3벌식)도 나와 있었지만 아마도 대부분 기업체에서나 쓸 정도고 학생들은 그것을 쓸 수가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언제 그랬나 할 정도로 당시는 거의 모든 학교 공부, 강의 시간에 손으로 받아 쓰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Typewriter가 나에게 가까이 온 것은 대학교 4학년 당시의 겨울방학 때였다. ‘무위도식의 극치’를 실행하던 당시 나는 한강 남쪽 ‘변두리’에 속했던 숭실대학이 있었던 상도동 종점 부근에 살았는데 무슨 구실로든가 시내 그러니까 종로, 명동 등지로 나와야 했다. 그래서 찾은 것이 타자학원이었다. 왜 타자학원을 골랐는지 지금은 기억이 희미하다. 좌우지간, 졸업 후에 공부를 더 하거나 유학 같은 것을 가려면 타자기를 칠 수 있는 것이 유리하다는 단순한 생각이었을 것이다. 하루에 한번 씩 종로거리로 나올 수 있다는 것이 주목적이긴 했지만, 그래도 일단 배우려고 한 것이라 열심히 배우긴 했다.

타자학원에 가서 놀란 것은 이것이다. 학생들이 ‘모조리’ 여자, 그것도 아주 젊은 여자들이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그들은 그 ‘기술’로 취직을 하려 했기에 나와는 목적이 전혀 달랐다. 그들은 심각한 자세였고 청일점인 나에게는 관심조차 없었다. 학원 강사는 남자였는데, 나의 출현에 꽤 놀란 눈치였고 아주 반가운 모습이었다. 강의가 끝나면 그는 나와 사무실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우리들이 그곳에서 유일한 남자들이었다.

집에 타자기가 없었던 관계로 학원에서 배우는 것은 비교적 값싼 방법이었고, 종로2가에 학원이 있어서 나는 매일 종로거리로 나올 수 있었기에 그것은 지루한 겨울방학을 보내는데 안성맞춤이었다. 나의 타자 실력이 얼마였는지 생각이 안 나지만 그것은 나에게 큰 관심사는 아니었다. 최소한 touch typing만 알면 나의 목적은 이루어지는 것이었으니까..

그 이후 미국유학을 준비할 때 나는 ‘중고’ 아주 portable 한 typewriter, swiss 제 Hermes란 것을 살 수 있었다. 싼 것은 아니었어도 미국에 가면 필요할 것 같아 미리 투자를 한 것이다. 유학을 떠날 때까지 나는 이것으로 심심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왜 그렇게 그 타자 소리가 나에게는 멋지게 들렸는지 아직도 이유를 모른다. 당시 그것을 치는 사람들은 주로 여성들, 그것도 회사의 비서급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간혹 남편이 논문 같은 것을 쓰게 되면 그의 아내들이 그것을 돕느라 타자를 치곤 했다. 남자가 손수 타자를 치는 것은 정말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결국 남자들은 나중에 쓰지 못할지도 모를 기술 touch typing을 미리 배운 셈이 된 것이다.

미국에 와서 사실 내가 직접 typewriter를 쳐야 할 기회는 별로 찾아오지 않았는데, 당시만 해도 학교에서 꼭 typewriter로 쳐서 내는 숙제는 별로 없었다. 쓰려면 도서관에 가면 되기에 꼭 나의 것을 사야 할 이유도 없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나의 눈을 끈 것이 있었다. 바로 electric typewriter, 바로 그것이었다. electric! 보통 typewriter는 완전히 수동, manual, 온 손끝의 힘으로 치는 것이지만 electric은 조금만 touch를 하면 electric striker가 이어받은 치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것이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었다.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고 결국은 나는 그것을 사고 말았다. 비록 큰 돈이었어도 당시만 해도 100% 자유스러운 ‘총각’시절.. 마음만 먹으면 아무 것이나 가능하던 그 자유스러운 시절..

비록 멋으로 샀지만 실제로는 방 구석에서 놀고 있었는데, 결국은 시간은 찾아왔다. 70년대 중반 쯤 나는 West Virginia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당시 course들 중에 typewriter를 써야 하는 것들이 꽤 있었다. 남들은 잘 모르지만 나는 이제 그 옛날 ‘타자학원’에서 배웠던 기술, 철저히 쓸 기회가 온 것이다. 그 때 보니까 나의 typing 속도는 꽤 빨랐고 제출해야 할 것들은 손쉽게 처리할 수 있었다. 나중에는 그 소문을 듣고 나에게 typing을 부탁하는 classmate들도 등장했다. 여자들 같으면 돈을 받고 쳐 주곤 했지만 나는 ‘취미’로 생각했기에 모두 무료로 service해 주곤 했다.

Electric typewriter의 위력은 나중에 Ohio State University에서 논문을 쓸 때 절정을 이루었다. 남들은 모두 professional typist를 찾는 고역을 치렀지만 나는 조금 더 시간을 내서 내가 모두 치곤 했다. 그 때 나는 상당한 분량의 논문을 typing했는데, 나중에 ‘책’으로 나온 그 논문집을 도서관에서 찾아보니.. 역시.. professional이 typing한 것과 비교하니.. 완전히 아마츄어 냄새가 났다. 조금은 부끄럽기도 했지만 그래도 내가 손수 만든 것이라고 나를 위로하기도 했다.

그 이후 typing의 필요는 사라지는 듯 했다. 가끔 영어로 쓰는 서류, 편지들 이외에는 그것이 공부하는데 꼭 필요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누가 예상을 했으랴.. digital computer의 출현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처음에는 ‘집채만한’ mainframe ‘monster’ (e.g., IBM S/360), 다음에는 minicomputer (e.g., PDP11) 이것들은 거의 모두 keypunch input으로 결국은 typing기술이 필요한 것, 나중에 나온 personal (micro)computer들 (e.g., Apple II, IBM PC) 모조리 앞 모양은 거의 typewriter의 모습을 갖춘 것이었다. 본격적으로 touch typing 의 위력이 돋보이는 세월이 도래한 것이다. Touch typing에 전혀 문제가 없었던 나는 그때 비로소 느꼈다.. 무언가 배워서 절대로 손해를 볼 수가 없다는 사실..

typesetsEngineer들의 필수 portable ‘analog calculator’ 였던 slide rule (계산척)은 1970년대 초에 ‘갑자기’ 등장한 ‘digital’ calculator로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향수에 젖은 ‘mechanical’ typewriter는 personal computer/printer의 등장으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갔다. 하지만 그리운 향수를 느끼게 하는 그것들, 가끔 그리울 때가 있다. 갑자기 무언가 쓰고 간단히 ‘하~얀’ 종이 한 장에 까~만 typeset의 짧은 문장을 쓰고 싶을 때… 그것이 그립다. computer로 쓰면 고치는 것 떡 먹기지만 한 장 정도 print 할 때 얼마나 overhead가 많은가.. 귀찮고.. 그립다.. 그립다.

그 지겹게 공해로 찌들었던 서울의 겨울 하늘아래서 꽤죄죄한 타자학원을 다녔던, 비록 동기는 뚜렷하지 않았더라도, 나는 꽤 쓸만한 겨울방학을 보냈던 것이다. 그 touch typing 기술은 현재까지도 두고 두고 나를 도왔다. 특히 빠른 typing이 필요했던 때, 나는 1960년대 말 서울 종로에 있었던 ‘xx 타자학원’을 떠올리곤 하며 빙그레 웃곤 한다.

 

納凉: Spitzer, 歷史 Specials, 三國志

초복, 대서 가 멀찌감치 지나가고 드디어 중복을 갓 넘어간다.  이렇게 고국적인 냄새가 흠뻑 묻은 절기의 이름들: 소서, 초복, 중복, 대서, 입추 같은 것들.. 언제나 들어도 부드럽던 고국의 계절, 절기의 느낌이 그렇게 살아날까?  정작 옛날에는 ‘비과학적’이라고 거들떠도 안 보던 그 이름들을 지금은 아련한 기억의 선물로 즐긴다.

이런 이름들이 그런대로 나에게 다가오는 것은 우연이라고 할 수 있다. 나의 달력들에는 그런 것들이 거의 안 나오기에 완전히 잊을 수 있지만 다행히도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의 필수적인 지참 ‘활동수첩’에 그것이 고스란히 나오는 것이다. 하기야 레지오 마리애의 초 강대국인 대한민국의 단원수첩을 거의 그대로 베꼈으니.. 빠질 수도 없긴 하다. 처음에는 안 보이던 그런 절기 이름들이 이제는 나의 눈이 들어오니.. 무언가 나의 ‘가슴’이 많이 열린 모양이다.

중복이 지나가면 한국형 dog days들이 한창 지나가는 때이다. 그래서 보신탕을 이때 먹는지도 모르지만.. 지금 생각하니 참 ‘야만적’인 전통이 남았고, 먹을 것이 지천으로 쌓인 땅에서 아직도 이것을 먹는 것은 그것을 100% 증명하는 셈이다. 문화적이 차이라고 위선을 떨지만 그것이 그렇게 설득력이 있을까?

중복이 지나고 마지막 말복이 2주 쯤 남은 이 시점, 무척 덥다. 처음보다는 덜 덥지만 그것은 우리의 몸이 적당히 적응이 된 덕분이고 ‘과학적인 더위’는 거의 같은 정도로 매일 덥다. 이때를 어떻게 더위를 잊으며 빨리 보내나..  올해 피서 여행은 일찌감치 포기를 했기에 죽어도 집에서 이 시간을 보내야 하는데.. 문득 생각나는 아련~한 단어: 납량.. 이란 말.. 한자로 쓰면 納凉 이다.

받을 納, 서늘한 凉. 입시지옥 속에서 달달 외웠던 한자 1000자 덕분에 아직도 기억이 난다. 글자 그대로 시원함을 주는(or 받는) 것들을 뜻 한다. 하지만 납량이란 말은 학교에서 배운 것이 아니고 당시의 여름철 Radio, TV program에서 배운 것이다. 여름 이 맘 때쯤 되면 예외 없이 納凉物 이란 것을 내 보낸다. 그 시절엔 그 말의 뜻을 몰랐다. 하필이면 지독한 여름에 쓰는 말이 ‘별로 시원한 느낌이 없는’  납량일까.. 한 정도다. 납 이면 금속의 납 lead을 먼저 생각했으니까… 이제 알고 보면 이 걸맞지 않은 단어도 분명히 일제의 유물일 것이다.  일본 TV 프로그램 중에 이런 말이 자주 나온 것을 보았으니까…

방송계에서 납량물 이라는 것은 물론 ‘보고 들으면 몸이 서늘해 지는’, 그런 것들.. 거의 귀신에 관한 drama가 아닐까? 무서운 것을 듣거나 보면 상식적으로 더위를 잊을 수 있을까? 심리적으로 가능할 것이다.  이곳에 살면서 그 일본, 한국의 전통적인 귀신 납량물은 찾을 도리가 없지만 실제로 그런 것들을 보아도 이제는 하나도 무섭지 않으니 크게 시원함을 느낄 수도 없다. 나이 탓도 있겠지만 솔직이 이제는 귀신이나 ‘보이는’ 영혼들, 하나도 안 무섭다. 그들의 ‘정체’를 이제는 대강 알게 되었고 한 방에 그들을 물리칠 계책도 가지고 있으니까.

몇 년 전부터 나의 납량물은 역시 ‘시원한’ 책이나 귀신이 안 나오는 무섭지 않은 비 전통적인 납량물이다. 책들은 물론 읽어서 시원해야 하는 것이지만 무엇보다도 마음의 평정감과 만족감을 주어야 한다. 시끄러운 피서지가 아니고 사람들을 피해서 찾아간 심심산중의 느낌을 주어야 한다. 올해 나의 여름 납량물은 2권의 책과 home server archive에 거의 십 년 이상 건재 해온, 두 가지 video 다. video는 오랜 전에 보았고, 불현듯 가끔 보기도 하는 대한민국 KBS의 걸작 documentary ‘역사 歷史 스페셜‘ series, 그리고 고전중의 고전, 중국의 대하 역사 drama ‘삼국지 三國志’. 그러니까 video는 모두 역사에 관한 것이다. 2권의 책은 몇 주전에 산, 과학자출신 신부 Fr. Robert Spitzer의 저서로 제목은: (1) New Proofs for the Existence of God, (2) God so Loved the world.  이 것들은, 조금씩 더위의 한 풀이 꺾이는 이 시점에서 시작해서 이번 여름이 다 가기 전까지 나에게 ‘시원함을 보내주는’ 즐거움 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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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산 두 권의 책, 참 마음에 드는 cover design과 종이의 촉감 등도 그렇지만, 사실은 내용들이 너무나 기대가 된다. 근래에 나의 모든 관심을 끄는 분야가 바로 science & religion 인데 이 저자 신부님, 완전히 이 분야의 ‘뜨는 별’이라고 할까.. 물론 충분한 자격을 갖춘 ‘박학다식’하고 영성적인 사제(예수회)라 benefit of the doubt는 충분히 줄만 하다.

The New Proofs for the Existence of God  제목이 거창하지만 사실은 이 분야 apologetics의 전통적인 것에다가 최근 25년 사이에 밝혀진 (우주) 물리학, 철학 적 ‘발견’을 덧붙인 것이다. 특히 물리학 쪽인 Cosmology분야에는 원래의 Big Bang theory의 최 현대판인 contemporary Big Bang Cosmology를 비교적 기술적으로 다루었다. 예를 들면 bouncing universe, space-time geometry, quantum cosmology, The Borde-Vilenkin-Guth Theorem’s boundary to Past Time, Inflationary Cosmology, String Multiverse 같은 것이 포함되어 있다.

또 다른 책, The God so Loved the World 이 책은 물론 이 신부님의 전공인 Science와는 큰 상관이 없는 영성적인 책이다. 하느님의 존재를 인정한다고 해도 왜 하느님이 사람이 되어서 나타나셨나.. 하는 문제를 다룬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하느님이요 인간이신 예수, 특히 그의 인간에 대한 사랑을 다룬 책이다. 그러니까.. 이 책의 주제는 ‘사랑’이다. 왜 하느님이 사랑이신가 하는 것을 참으로 조직적으로 파 헤친 것이다. 무조건 믿을 것인가, 아니면 심각하게,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고 믿을 것인가.. 바로 그것이다. 나는 무조건 믿는 것보다 생각해 보고 믿는 것이 건강한 믿음이라고 생각하지만..

 

7월을 보내며..

¶  결국 7월의 마지막 날은 이렇게 오고야 말았다. 표현이 아주 극적이지만 사실 하나도 극적인 것이 없는 2016년 7월이 ‘영원히’ 나로부터 떠나려 하고 있다. 올 여름의 특징이었던 ‘변화 없는 더운 날씨’ 바로 그것으로 기억에 남으리라. 어제가 그제고 오늘이 ‘아마도’ 내일일 것이다. 거의 변화를 못 느끼는 그런 날씨, 더위, 느낌들.. 지겹게도 느껴질 수 있겠지만 올해의 이 여름의 지겨움은 사실 그렇게 견디기 힘든 것은 아니다. 재수가 잘 맞으면 늦은 오후에 쏟아질 수도 있는 소나기의 희망도 있고, 이제는 우리의 몸도 더위에 잘 적응이 되었고, 33일 봉헌 준비를 위해 ‘질주’하는 짧지 않은 영원과의 대화 시간도 있기에 그럴지 모른다.

7월 초에 우리의 미국본당 Holy Family 성당에 ‘기혼자’이신 주임신부님이 부임해서 관심과 우려를 예상했지만 결과적으로 기우였다는 것으로 판명이 되었다. 진지하고 영성 적이고 정치, 사회에 관심이 많은, 강론이 진지하고 준비가 잘 된, 한마디로 ‘합격, 합격’ 이었다. 가정이 따로 있어서 사제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 아침마다 출근을 하는 것이 처음에는 너무나 이상했지만 이제는 모든 신자들이 잘 받아드리는 느낌이다. 우리도 마찬가지.. 전번 traditional Irish 신부님과 너무나 느낌이 다른, 너무나 ‘살아있는’ 강론, 앞으로 우리 본당은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생긴다.

 

¶  오늘부터 우리의 일요일 routine이 조금 바뀌게 되어서 조금 더 새로운 느낌의 일요일을 맞는다. 바뀌게 된 큰 이유는 동네본당 Holy Family  Catholic Church의  10시 미사 대신에 8시 30분 미사로 바꾼 것 때문이다. 일요일의 은근한 위안이었던 ‘조금 늦게 일어나는’ 것이 없어진 것이 조금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변화였다. 연숙이 한인본당 순교자 성당의 교리반 director가 되면서 어쩔 수 없이 그녀는 ‘매 주일’ 미사에 관계없이 순교자 성당엘 가야 하는 입장이 되었는데, 문제는 우리 둘이 어느 쪽에서 미사참례를 하느냐 하는 것이다.

제일 이상적이고 간단한 것은 우리 둘이 함께 순교자 성당에서 주일미사 참례를 하면 되는 것이다. 비록 정든 Holy Family 동네본당의 주일미사를 못 보게 되긴 하지만 그곳은 평일 미사를 거의 매일 가니까 큰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비록 순교자 성당엘 둘이 가게 되면 나는 교리반이 완전히 끝나는 시간까지 ‘할일 없이 밖에서’ 기다려야 하는 고역도 있긴 하지만 그것도 내가 조금 불편함을 참으면 크게 어려울 것도 없었다. 그런 배경으로 나는 ‘거의’ 주일 미사를 순교자 성당엘 둘이 가기로 마음을 정하려고 하고 있었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인가, 악마의 손길인가..

우리와는 어쩌다 보니 거의 운명적으로 incompatible한 것으로 판명이 된 인물들이 갑자기 우리 주위의 공동체(주로 구역과 순교자 주일 미사) 에 등장한 것이다. 한 명이라면 그런대로 참고 견디겠지만 그 이상은 감당하기가 힘들다. 멀리서라도 보이게 되면 간단히 피할 것인가, 이들의 존재를 완전히 무시할 것인가, 극약으로 정면으로 대할 것인가.. 어느 것도 나에게는 쉽지 않은 option이라는 결론이 나왔고 결국은 구역 모임, 순교자 본당 주일미사에 가는 것을 아예 포기하고 말았다. 조금 아쉽긴 하지만, 할 수가 없는 노릇.. 다른 것은 배를 쓸고 참을 수 있어도 멀지 않은 과거에 divide & conquer를 motto로 공동체를 사정없이 분열시키고 ‘해괴한 수준의 박학다식‘을 자랑하던 그들의 위선적인 얼굴과, 진짜 속 마음을 알 수 없는 언행 등은 정말로 참기가 힘든 노릇이니 결론은 이렇게 간단한 것이 되었다.

한때 급작스럽게 우리에게 가깝게 다가오던 정들었던 구역 모임과 그곳의 착하게 열심히 살아가던 교우들, 주일 미사에 항상 앉던 자리의 주변에서 그런대로 얼굴이 친숙해지던 형제, 자매님들.. 당분간 (얼마나 오래갈지 아무도 모르는..) 잊어야 할 듯.. 이래서 이것은 운명의 장난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것은 내가 풀 문제가 아니라 우리들의 전구, 보호자이신 성령과 성모님의 절대적인 도움이 필요한 문제가 아닐까? 8월에는 조금 선선하고 신선한 쪽으로 사정이 흐르기만 바라고 있다.

 

DASUQUIN magic: 3주 전쯤 하루아침에 갑자기 거의 신체불구가 된 듯 했던 우리 집 12살짜리 ‘강아지’ Tobey는 한때 ‘장례식’을 연상했을 정도로 암울한 며칠을 보냈었다. 속으로 나는 그 녀석을 보낼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고 설마.. 하는 심정으로 며칠을 정성껏 돌보았는데 문제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나타내는 것을 옆에서 볼 수가 없었던 것.. 우리의 결론은 비록 ‘심한 신경통, 관절염’ 쪽이었지만 혹시 만에 하나라도 다른 것이라면.. 하는 우려가 떠나질 않았다. 하지만 급히 order했던 약을 먹은 그날부터 거의 기적과 같이 움직이며, 신음소리도 줄어들었다. 그 약의 이름이 바로 DASUQUIN 이었는데.. 나는 이때야 비로소 ‘약 장사’의 인상이 조금은 좋아짐을 느꼈다.

이것은 우리에게는 거의 ‘생과 사’의 갈림에서 기적과 같은 느낌을 주는 경험이 되었다. 생각에 그래서.. 그래서.. 약 장사 (제약회사)들이 그렇게 돈을 버는구나 하는 자명한 사실.. 내가 원래 약을 싫어하고 안 믿는 인간이라 더욱 놀란 것이다. 어떻게 거의 죽다시피 보이던 것이 그렇게 나아질 수 있었을까? 3주가 지난 지금 Tobey는 거의 전처럼 돌아왔고 우리 집의 공기는 다시 활기가 돌아오고 있다. 7월이 준 따스한 은혜라고나 할까..

 

생의 마지막 것들..

2016년 7월 24일, 봉헌을 위한 33일 준비기간 중 제12일째, 묵상 주제는: 생의 마지막 것들. 결국 12일 간의 ‘세속정신을 끊음’의 끝은 바로 인생의 마지막에 대한 생각과 묵상으로 끝이 난다. 오늘의 논제는 이것이다: 죽음은 한 번이고 그것이 언제인지 아무도 모르기 항상 이것을 염두에 두고 살면 이 세상의 ‘헛된’ 것들에서 벗어난다.

 

a beautiful final sunset ..

a beautiful final sunset ..

 

이것은 우선 개인적, 사회적인 배경으로부터 시작해서 철학적으로 더 깊이..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영성적, 신학적으로 결론을 맺어야 하는 정말 거창한 화두요 주제다. 우리의 보이는 생의 결말이 죽음이라는 신비는 누구나 피하고 싶기에 별 것 아닐 수도 있지만 반대로 우리 인생에서 잠재적으로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는 이것에 대한 걱정과 고민에서 자유스러워 질 수 없기에 아예 정면으로 도전을 하는 것은 어떨까..

오늘의 묵상 논제는 이렇게 시작된다.

자기 생의 마지막을 예견하고 준비 없이 기습을 당하지 않도록 준비하는 것이 필요하고, 그 때 비로소 이 세상의 헛된 것에서 벗어날 수 있다.

오늘의 말씀들은 다음과 같이 정리가 된다.

하루라도 더 살 줄을 분명히 모르면서 모든 사람들이 죽음으로 끝을 맺으니, 사람의 생명은 그림자와 같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네가 죽은 다음에 누가 너를 기억하여 주며, 누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여 주랴! 사랑하는 이여, 네가 무엇이든지 할 만한 것이 있으면 지금 하라. 이는 네가 언제 죽을지 모르고, 또한 네가 죽은 후 사정이 어떻게 될는지 모르는 까닭이다.

너는 이 세상을 지나는 순례자와 나그네로 여겨 세상의 모든 사정에 상관치 말아라. 네 마음은 아무것도 거리낌없이 자유스러이 보존하고 하느님께로, 위로 향하여 둘 것이다.

죽음을 준비하며 산다는 것은 실질적으로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유산 정리, 유언, 장례식의 절차 같은 것을 말하는 너무나 물질주의적 냄새가 나는 것이 제일 중요한 것이 아닐 것이다. 주위를 눈 여겨 살펴보면, 평균 수명을 채우건 못 채우건 사람들은 모두 하나 둘 씩 ‘사라져’ 간다. 이별을 겪고 난 이 세상은 한때 우리와 같이 숨을 쉬었던 그들을 일상적으로 결국 잊는다. 가끔 기도 중에 기억하기도 하고, 주기 연도 같은 것을 통해 그들을 기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의 ‘물질적 요소들’은 우리의 감각에 더 이상 이세상, 즉 물리적인 세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매일 매일 세속에 파묻혀 오랜 세월을 산 사람들, 나도 포함되는, 이 조금씩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어떻게 대응하는 것일까? 아마도 대부분 ‘세속의 잡음과 잡념’이 이 궁극적인 난제를 가려주고 곧 잊게 해 줄 것이다. 나도 그랬으니까..  하지만 그것은 세속사회에서 부지런히 활동을 할 때가 가능했지만, 칠순이 가까워 오는 그 이후는 점점 어려워지는 ‘조금씩 다가오는 공포의 그림자’ 처럼 느껴진다.

한마디로 물질적 세속적 사고방식에서는 ‘이제는 모든 것이 끝장이다’ 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못 다한 것이 있다면 그것에 대한 후회가 밀려올 것이고, 잘 살았다고 자부하는 사람은 더 오래, 거의 영원한 세월을 원할 것이다. 여기서 세계관의 차이가 나머지 인생을 좌우한다. 나를 제일 괴롭히던 생각은: 가족 친지들과의 ‘영원한’ 이별? 죽을 때의 육체적 고통? 어떤 방식으로 죽는 것이 편한가?  주위에 필요이상의 괴로움을 주는 것? 이런 것도 괴로운 사실이지만 사실은 ‘이 우주에서 나 라는 존재가 없어지는 것‘ 바로 그것이 제일 괴로운 사실이었다.

6년 전부터 ‘부지런히’ 장례, 고별, 연도 등으로 ‘내가 잘 모르는 가족들’의 슬픔에 동참하려고 무척 애를 쓴 보람이 있었는지 이제는 예전처럼 죽음이 그렇게 멀게만 느껴지지 않는다. 내가 실제로 당해보지 않은 것이기에 물론 확신을 할 수 없지만 그래도 교리적, 신앙적 죽음의 의미를 어렴풋이 알아가기에 조금은 더 당당하게 죽음이라는 문제와 맞대면을 할 용기도 생겼다. 아마도 이것 근래 5~6년 동안에 내가 경험한 ‘깜짝 놀랄만한 진리’ 일 것이다. 이제는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 그렇게 복잡하지 않다. 아니 너무나 간단하다. ‘영원한 진리의 말씀’ 대로 살고 죽으면 되는 것이다.

 

summer retreat, one third..

나만의 올해 summer retreat 하계피정의 3분의 1일 지나가고 있다. 말이 좋아서 하계피정이지.. 하얀 모래사장, 시원한 바람과 바닷물이 보이는 어느 East Coasta summer place하고는 너무나 거리가 먼 곳에서 보내는 하계피정은  별로 시원하지 않은 나의 this old house 지붕 아래에서..  그것이 벌써 3분의 1일,  11일째 날을 맞는다.

1장: 세속 정신을 끊음, 제11일: 삶에 대한 불안과 근심..  33일 봉헌준비기간 중 11일 째, 첫째 편인 ‘세속정신을 끊음‘  12일 중에서 11일 째, 그 동안 세속 정신에 대한 인식과 결단에 대한 ‘공부, 묵상’ 한 셈이다. 과연 얼마나 ‘피정 retreat’ 을 한 것일까?

Daily routine이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지만 시원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하루 중 머리가 그런대로 깨끗한 시간 아침 6시~6시 30분경에 모든 창문을 열고 환기를 하며 그날의 ‘과제, 주제’를 생각하며 묵상하는 것, 처음에는 거북한 느낌도 들고 ‘잡 것들 distraction, 주로 Internet’ 같은 것과 씨름을 하기도 했지만 며칠 만에 자리를 잡았다. 이제는 ‘좋은 습관’을 만드는 비결을 터득했다고 자부하기에 이것도 그 중에 하나가 되었다. 비결은 간단한:  ‘just do it‘와 몇 가지 화살기도가 전부지만..

내일까지 과제는 ‘세속정신과의 싸움‘ 에 대한 것이다. 그 중에 오늘 것은 ‘(삶에 대한) 불안과 근심‘ 이다. 이것은 다른 것과 다르게 그렇게 형이상학적인 것이 절대 아니라서 조금 친근감을 느낀다. 삶에 대한 불안과 근심.. 왜 그렇게 익숙한 말이 되었나? 그렇다.. 그만큼 오래 살았다는 증거인 것이다.

오늘 주제의 서문은 다음과 같은데, 공감이 가는 글이다.

 

사람들은 겉으로는 지극히 태연자약해 보이지만 삶에 대한 불안에 사로잡혀 있다. 그래서 갖은 수단을 다해 갖가지 고난과 위험으로부터 자신과 자신에게 속한 모든 것들을 보호하려 안간힘을 다하고 무엇보다도 돈과 재물을 모으기 위해 애쓴다. 그러한 것들로 행복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며 그것에 안정과 평화를 구한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고 그분의 뜻을 청하며 그리하여 평화와 기쁨 중에 살아간다. 하느님 안에 참 된 안전이 있기 때문이다.

 

지나간 세월을 돌아보면.. 삶이란 과연.. 어떻게 보면 ‘삶에 대한 불안에서 벗어나려는 발버둥의 자취‘ 가 아니었을까? 그 불안은 사실 육감적인 피부로 느끼던 불안이 아니라 나 자신의 가장 밑 바닥에 도사리고 있는 ‘원초적인 불안’이다. 대부분 너무 깊숙한 곳에 도사리고 있어서 자주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만 없앨 수도 없는 것.. “나이에 따른  죽음과 점점 가까워지는 내가 사는 의미” 바로 “내가 왜 태어났고, 어디로 가는가?” 삶의 목적과 의미다. 이것을 잊고 살려고 하던 노력들은 사람에 따라 다 다르겠지만 대부분 ‘물질적 육감적 보호‘에 치중하다 보면 반드시 함정에 빠지게 되는 것으로 이런 불안에 궁극적인 해답이 안 된다.

이것에 대한 삶의 예는 얼마든지 있고, 비교적 가까운 주변에도 있다. 삶에 대한 걱정과 불안으로 ‘아무것도 못하며 가족을 괴롭히는‘ 그런 형제님.. 너무나 그런 생각에 빠져서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다. 이것은 거의 depression에 가깝지만 알고 보면 그것도 아니다. 결국은 ‘나는 나, 너는 너, 나는 나의 소리만 듣겠다’라는 심하게 꼬인 이기심의 소산이라고 나는 본다. 어떻게 그런 늪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결국은 ‘초자연적’인 힘을 빌릴 수 밖에 없음을 나는 경험으로 잘 안다. 초자연적인 것.. 나만의 육감에만 의존하던 과거의 경험으로 해답은 바로 이것이다.

“너희는 무엇을 먹고 마시며 살아갈까, 또 몸에는 무엇을 걸칠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지 않느냐?”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잘 알고 계신다…. 그러므로 내일 일은 걱정하지 말아라. 내일 걱정은 내일에 맡겨라. 하루의 괴로움은 그날에 겪는 것만으로 족하다.”

 

Good Ole Days 의 시원한 여름에 대한 추억은 역시 어린 시절 poster로만 보았던 Troy Donahue, Sandra Dee 주연의 영화 A Summer Place 보다 더 멋진 것은 없었다. 학생입장불가 급의 poster도 화려했지만 몇 년 뒤에 취입된 Percy Faith 악단의 영화주제곡이 또한 ‘불후의 명곡’으로 남았고 아직도 그 당시 평화스러웠던 여름을 연상하게끔 한다.

 

 

Theme – A Summer Place – Percy Faith – 1960

 

white trash vs. baby killer

Unthinkable again오래 살다 보니 series“의 최근 version은 이것이다. “White trash versus Baby killers” 제목의 느낌이 아주 강한 것으로 보아 이것은 심상치 않은 것이다. 이것을 조금 쉽게 풀어서 쓰면 “Donald duck Idiot trash versus Hillary” 정도가 아닐까? 근래에 겪었던 unthinkable 중에 가장 뇌리에 남아있는 것은 Irish same-sex ‘union’ 이었다. 작년 경이었나.. 그때 놀라고 실망한 것은 말이나 글로 표현을 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다른 곳도 아니고.. Frank Duff1의 고향인 Ireland에서 어쨌다 구.. . 정말 믿을 수 없는 Screwtape Letter2였다.

지금의 unthinkable도 그와 못지 않게 놀라고 실망스러운 것이지만 그런대로 천천히 진행 되어온 것이라서 조금 심리적으로 준비, 놀랄 준비는 되어 있다고 할까? 40년 미국 정치계를 보면서 처음으로 느낀 것, ‘미국이 갈 때까지 갔다. 이제는 더 내려갈 곳이 없다..” 라는 반대적, 상대적인 안심인가.. 정말 더 내려갈 곳이 없는 그런 위치에 온 것이다. 양아치, 또라이 Donald Duck..  문제가 아니라.. 그에게 미국의 희망을 거는 white trash들이 문제다.  더 나아가서 이런 white trash들의 목소리가 들리게 만든 것은 두말 할 나위도 없는 ‘불능상태’가 된 현 congress (거의 이조 중엽 당쟁을 연상시키는)와 그것에 전혀 힘을 쓸 수가 없는 false prophet Barak Hussein Obama..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인물이 8년 동안 미국의 근간을 흔들어 놓았던 것, 나는 이 요인이 더 심각한 것으로 판단을 한다.

사회 근간을 흔드는.. traditional family, marriage가 흔들리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서서히 사회는 곪아간다는 것을 모르는가? 모든 것이 ‘동등하고, 차별 없고, 자유스럽고’ 에 목숨을 거는 Obama나 Hillary 쪽은 한마디로 baby killer의 choice morality에 곪아간다.  이번 ‘대선’은 한 마디로 누가 더 나쁜 ‘놈’인가 자랑을 하는 선거가 되었다. 유권자는 누가 더 싫은 가에 의해서 거의 선택의 여지가 없게 되었다. 바로 이것이 내가 보는 unthinkable 인 것이다. 나에게 두 ‘놈’중에 어떤 놈이 조금 덜 ‘나쁜 놈’이가 꼭 뽑아야 한다면.. 정말 어렵지만 그래도 ‘여성’인 Hillary가 아닐까.. 하는 정도에서 이 짜증나는 더위에 골머리를 썩는다. 한마디의 시원한 산들바람은 이것이다.. ‘이 모든 것은 결국 다 지나가리라‘..

 

 

Satisfaction..NO NO NO NO NO!

 

  1. Irish catholic, 20세기 초 Legion of Mary를 창설하였다.
  2. C. S. Lewis 1940년대 초 저서

준비 6일째, animal pain, 우아~ 쳐진다..

¶  봉헌을 위한 33일간의 준비, 간단히 “33일 봉헌 기도” 라고 불리는 이 한 달을 넘는 준비기간이 7월 13일 시작되어서 이제 6일이 지나고 있다. 33일 중, 첫 12일간을 ‘첫째 시기 12일: 세속 정신을 끊음‘ 이라고 하는 ‘준비 전의 준비기간‘에 속하고, 나머지 3주가 사실 본론에 속한다. 첫 12일 ‘준비 전의 준비기간’ 에는 ‘세속에서 떠나는’ 노력을 하는 것이다.  2년 만에 다시 이 ‘‘을 보며 ‘묵상’을 하는 것, 새롭기도 하고 조금은 귀찮기도 하지만 이것이 나의 올해 ‘개인피정 personal retreat’ 라고 여기고 조금은 심각하게 받아들인다.

현재까지 느낌은 전 보다 조금은 더 높고 넓게 주제를 받아들이는 그런 것.. 이것은 분명히 발전이다. 과연 우리가 세속이라는 것으로부터 자유스러울 수가 있을까? 우리가 현재 보내고 있는 초 현대는 99.99%가 세속세계가 아닌가? 깊은 산속의 수도원에 들어가기 전에는 아마도 2중 적인 삶(생각과 행동이 같지 않은) 을 살아야 할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노력은 할 수 있고, 궁극적으로 조금씩 이 세상을 탈 세속 사회로 바꿀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초자연적인 도움이 있다면…

 

¶  Tobey가 하루아침에 ‘갑자기’ 누워버린 지 일주일이 지나간다. 그 애나 우리나 어떻게 보면 참 긴 시간이었다. 집안에 환자가 생기는 것이 이런 기분이겠구나.. 그렇게 주위에 아픈 사람을 많이 보았지만 집안의 개가 아픈 것을 보는 것은 전혀 색다른 경험이 되었다.

급하게 order한 약, 신경 관절염 치료 보조제 supplement를 기다리는 동안 증세가 조금은 호전된 듯 보이기도 했지만 그렇게나 아픈 신음소리를 내는,  말 못하는 ‘식구’를 보는 것은 정말 괴로운 일이었다.

이틀 전에 도착한 ‘기적의 약’에 모든 희망을 걸긴 했지만 사실 속으로는 확실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혹시 이렇게 아픈 이유가 우리가 생각한 그런 것이 아니라면? 하지만, 그것이 아니었다. 그 약을 먹은 지 24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Tobey는 다시 서서히 천천히 일어나 걷기 시작한 것이다!  고통스러운 초점을 잃었던 눈이 원래대로 ‘뱅글뱅글’ 돌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가 본 대로 이것은 arthritis계통의 ‘노인병’일 것이다. 이것의 고통은 사람들에게 들어서 익히 알지만 그들은 말이라도 하지만 말 못하는 동물들은 그 심정이 어떨까.. 다시 한번 언젠가 다가올 ‘이별의 순간’에 대한 생각을 물리치며, 이제는 animal pain, animal theology의 의미를 어렴풋이나마 알 듯하다.

 

¶  와~~ 쳐진다.. 오랜만에 기분이 무척이나 쳐진다. 우울할 정도로 쳐지는 느낌 아주 오랜만인가? 예전에는 하루를 멀다 하고 우울한 감정과 싸우던 기억인데 이제 그것도 조금씩 추억으로 변하고 있으니,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왜 그렇게 ‘나아진 것’인지 그 이유는 나에게 너무나 자명하다. 바로 깊숙한 곳에 도사리고 있는 ‘마음의 평화’일 것이다. 이것이 예전에 비해서 그렇게 외부에 의해서 좌지우지되는 것이 힘들어진 것이다. 왜 그럴까? 그런 중에도 가끔 이렇게 우울한 날이 오긴 한다. 얼마를 못 가지만 그래도 이것은 괴롭다. 어찌해서든지 몸을 바쁘게 해서 마음을 다른 곳으로 돌리며 시간을 보내는 수밖에 없다.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었다. 이유를 생각하면 몇 가지가 분명히 있지만 나로써는 어떻게 해결할 수도, 그럴 가지도 없는 ‘사소한 것’으로 생각하기에 그저 시간만 가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Thundering afternoon..

 

problem-of-pain-1

¶  전깃불이 안 나가게 하는 ‘얌전한’ 천둥, 번개는 언제나 반갑다. 오늘 오후가 바로 그런 얌전한 날이 되었다. 암만 요란스럽게 으르렁거려도 나에게는 자장가처럼 포근하게 들리니.. 게다가 태양예찬론자들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지겹게 밝고 뜨거운’ 올해 여름의 하늘에서 나는 포근하건 무섭건 상관없이 어두운 구름이 깔린 모습이 그렇게 반갑다. 오늘 오후가 그런 반가운 토요일 우후가 되었다. 낙엽이 떨어지는 깊은 가을이나 삭풍이 부는 초 겨울 창문을 바라보며 마시는 구수하고 진한 커피의 느낌과는 사뭇 다르지만 이것은 그것 못지않게 멋진 여름의 선물이다.

나는 이런 포근함과 동떨어진 고통, 특히 ‘육체적’ 고통이란 무엇인가 다시 생각한다. 이것은 최근에 나 자신도 조금은 해당이 되지만 그것 보다는 우리 식구가 된 미운 정 고운 정이 엮일 대로 엮인 우리 집의 개에 불현듯 찾아온 ‘육체적’ 고통을 지척에서 보며 느끼게 된 것을 말한다. 6일 전에 찾아온 Tobey의 ‘움직이지 못하는 고통’을 보며 사람이나 동물이나 옆에서 느끼는 것은 하나도 차이가 없음을 절감했다. 아니.. 말을 못하는 탓에 사람보다 더 측은하다고 할까?

인간이나 동물 등은 분명히 구조상 고통을 안 느낄 수가 없게 태어났지만.. 근본적인 의문은 ‘왜’ 라는 것, ‘어떻게’가 아니고 왜..이다. 물론 이것은 하느님이라는 절대적인 존재를 전제조건으로 한다. 하느님 존재의 정의는 무엇인가? 전능하신, 우주의 어느 곳에나 계신, 한없이 좋으신.. omnipotent, omnipresent, benevolent.. 이것으로부터 problem of pain 이 나온다. 그런 전지, 전능, 한없이 좋으신 하느님이 피조물을 만들었다면 왜 왜 피조물들이 고통과 불행을 겪어야 하는 것인가.. 이것이 바로 ‘고통의 문제’ 인 것이다.

C. S. Lewis의 ‘고전 classic’ The Problem of Pain이라는 소고(小考)는 바로 그런 문제를 신앙의 변호자 입장으로 생각을 한다. 문제는 그 고통이란 것이 100% ‘나쁜 것’이냐 하는 것이다. 특히 신약성경을 보면 그 반대의 case가 부지기수가 아닌가? 자기의 십자가, 고통을 통한 영광, 깨우침을 주는 고통.. 구약에서도 욥기를 보면 ‘편안한, 행복함’과는 거리가 먼 느낌의 고통 투성이가 아닌가?

황혼기에 접어든 사랑하는 식구 같은 개의 고통을 하루 24시간 보면서 밝음과 어두움의 양쪽을 오가며 나만의 ‘고통의 문제’를 다시 음미한다. 그렇다, 고통의 뒤에는 반드시 그것의 뜻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것, 아니.. 나아가서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 

 

 Honeymoon’s Over? 최근에 와서 머릿속에서 이 구절이 자꾸만 떠오른다. 왜 그럴까? 어떤 특정한 사람에 관한 것이기에 조심스럽긴 하지만 그렇다고 1급 비밀에 속하는 것도 아닐진대.. 그것도 사제에 관한 것이라면 언제나 조심스럽긴 하다. 이런 사제의 부임 1년이 지나면서 이런 표현이 나오는 것은 자연스럽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 표현은 사실 negative한 쪽을 항상 쓰인다고 하지만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처음에 너무나 후한 점수를 주었기 때문에 ‘정상치’ 로 안정이 되었다는 표현은 어떨까? 그러니까.. 처음 1년 정도는 ‘무조건’ benefit of the doubt의 기간인 것이다. 이 부임 1년이 지나가는 사제가 전형적인 이런 case가 되고 있다. 나 개인적으로 느낌은 한마디로 실망적인 것이다. 이제까지 너무나 후한 점수를 주었나.. 지금이 정상인가.. 그래서 honeymoon’s over란 표현이 이 case에 딱 들어 맞는다. 희망사항은 더 이상 정상치에서 떨어지지 않았으면 하는 것, 사제의 기도를 통해서 간구하고 싶다.

 

Tobey scare, 33일 봉헌 retreat

¶  Tobey Scare: 12살 배기 male mixed Dachshund, Tobey, 이틀 전부터 거의 움직일 수가 없게 되었다. 자는 시간 빼고 거의 모든 시간 나를 졸졸 따라오는 나의 그림자였지만 그날 아침부터 나를 따라오지를 않았다. 아니.. 아예 움직이지를 않았다. 거의 죽은 듯이 엎디어 있고 만지지도 못하게 했다. 일순간에 가슴이 철렁 내려 앉는다. 12살의 나이면.. 언제나 가능성이 있는 나이라고 서서히 우려를 하고 있던 차였다. 제 발로 계단을 못 내려가는 것이 뻔하기에 내가 앉고 나가서 bathroom처리를 했다. 집안의 분위기가 일순간에 변했다. 조용해진 것은 물론이고.. 거의 초상집 같은 느낌까지 들었다. 처음으로 우리 Tobey와 이별할 수도 있다는 현실감도 들 정도..

주위에서 정든 pet dog을 보내며 보여준 각가지 반응들에 우리는 남의 일처럼 comment를 하곤 했지만.. 이제는 조금 이해가 간다. Veterinarian을 찾으면 이상적이겠지만.. 그것도 꺼려지는 것, 이것 저것 test test.. 로 개를 잡을 것이고, $$$도 만만치 않을 것이지만 그것 보다는 증세가 최소한 internal한 것이 아니기에 며칠을 두고 보자고 결정한 것이다. 그렇다, 최소한 먹는 것과 ‘싸는 것’은 전혀 문제가 없었으니까..

오늘 소식을 듣고 새로니가 부리나케 ‘병문안’을 왔고 이곳 저곳 연락을 해서 알아보니, 역시 ‘심한 신경통, 관절염‘ 계통의 증상인 듯 했다. 그렇게 잘 걷고 활발하던 애가 어떻게 하루 아침에 그렇게 될 수가 있을까? 부리나케 신경통증을 완화하는 약을 order하고 더 지켜 보기로 했는데, 시간이 가면서 조금씩 나아지는 듯 하긴 하다. 새로니의 이야기가 만약 관절염계통이면 치료가 불가능하고, 통증만 control할 정도라고.. 슬픈 이야기가 아닌가? 어떻게 그렇게 활발하던 애가.. 하지만 12살이 되는 나이를 무시할 수가 없다. 항상 이별할 준비를 하는 것은 생각하기도 괴롭지만.. 어쩔 수가 없는 것인가?

 

¶  2016년 ’33일 ‘대장정’ 의 첫날을 맞이했다. 이번이 3번째의 33일 봉헌이 되기에 조금은 경험이 있다고 할까.. 처음 두 번의 것보다 조금은 느긋한 심정으로 첫 날을 맞이했다. 아침 6시 반에 일어나서 며칠 전부터 뒤적거리던 ‘봉헌을 위한 33일간의 준비‘ 책의 첫 장을 열고 첫 12일의 목표: ‘세속 정신을 끊음‘ 의 제1일 ‘그리스도께서 나를 당신 제자로 부르심‘ 을 읽고 묵상을 시도한다. 12일 동안 ‘세속적인 삶에서 벗어나라’ 는 과제.. 이것이 과연 그렇게 쉬울지..

사실 이 33일 과정은 이 책으로 비교적 안전하게 guide를 받으며 독서, 묵상, 기도를 할 수 있다. 이 ‘책’을 그대로 따라가면 큰 문제없이 33일 기간을 마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큰 의미가 없다. 실제로 독서 후에 깊은 묵상과 제시된 기도를 다 마쳐야 하는 것이다. 그것 뿐이 아니다. 33일의 기간 동안 지켜야 할 것들이 이 책에 일목요연하게 제시가 되어 있어서 그것을 ‘가급적’ 지켜야 하는 부담도 있다.

한창 더운 복더위의 여름에 이것은 무엇인가.. 시원한 beach나 산 속의 summer vacation도 아니고.. 에어컨 소음이 요란한 자기 집 방구석에 앉아서 이렇게 33일 보낸다는 것은 사실 그렇게 큰 매력적인 것은 아니다. 아니.. 그렇게 ‘라고’  생각했던 나였지만.. 지금은 전혀 아니다.  이것이야말로 최고의 의미가 있는 멋진 summer ‘spiritual’ retreat, vacation 일 수 있는 것이다.

33일 매일의 실천 사항 이란 list를 보면: 거의 모두 ‘상식적’인 것들이다. 이 기간 동안 ‘대죄’를 짓지 말라는 것도 그렇고, 1시간 이상 조용한 시간을 할애하라는 것, TV같은 ‘잡 雜 것’들 을 피하라는 것, 아니 요새 나온 실천사항에는 분명히 인터넷을 적극적으로 피하라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을 듯 하다. 아마도 제일 힘든 것이 ‘조용한 1시간 이상의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 아닐까? 이것이 정말 힘들게 된 요새세상, 참 많은 사람들 ‘로봇트’ 같은 정해진 일상을 보낸다는 사실에 경악을 한다.

이 중에는 가능하면 매일미사 참례하라는 것이 있는데 모르긴 몰라도 이것에서 ‘걸리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을 것 같다. 요새 세상에 매일 미사를 한다는 것, 내가 생각해도 그렇게 인기 있는 활동이 아닐진대.. 하지만 나는 문제가 없다. 2012년 부활시기에 이 ‘인기 없는 활동’을 시작해서 아직까지 굳건한 생활의 일부가 되었으니까.. 참 오묘한 것은, 2012년 부활시기에 연숙이 33일 봉헌을 시도하면서 ‘시험 삼아’ 평일미사를 같이 시작했는데 그것이 바로 모든 ‘작은 기적들’의 시작이 되었으니 말이다. 성 루도비코 마리아의 33일 봉헌은 이래서 우리에게는 거의 ‘신화적 역사’가 되었다.

 

T-minus 48 hours..

7월 11일, 2016년 아침.. T-Minus 48 hours.. 이틀이 남았다 2016년 ‘성모승천 대축일’ ‘봉헌을 위한 33일 준비’ 기간이 시작되는 날이.. 7월 13일로 다가왔다.  2012년 8월 첫 봉헌, 2014년 3월 갱신 이라는 이력을 가진 내가 왜 다시 이 쉽지만은 않은 신심에 도전을 해야만 하는 것일까? 2012, 2014, 다음은 수열 상으로 2016이라는 것은 조금 우습지만, 그런 것도 좋은 이유 중에 하나로 넣기로 했다. 하지만, 하지만 조금 깊고 심각한 이유는 그것이 아니다.

레지오 마리애의 생활을 하는 덕에 성 루도비코 마리아의 가르침으로부터 크게 멀어진 적은 없는 듯 하지만 과연 그럴까? 혹시 타성에 젖어가는 것은 아닐지, 항상 의식한다. 편한 기분이 들어가면 그것은 분명히 타성에 젖는 것이다.배우고 알고 경험이 쌓이면서 편해진 것이면 큰 문제가 없지만, 무디어지고 느낌이 없어지고, 짜증도 나고 하면 그것은 분명히 커다란 reboot, reset이 필요한 때인 것이다.

2014년 더위가 극성을 부리던 7월에 나는 reset과 reboot을 해야만 했던 경험이 있었다. 비록 비싼 vacation trip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그것은 인생 최고의 ‘free’ vacation으로 남았다. 하지만 2014년 여름의 big reboot은 spiritual, devotional한 것이 전혀 아니고, 완전히 나만의 mental exercise에 불과한 것이었다. 길고도 죽을 때까지 남는 그런 ‘비싼’ 경험은 아닌 것이다.

이러한 background를 가지고 나는 이번 여름 Marian Assumption Day1 에 맞춘 봉헌을 하기로 결정하고 말았다. 2013년에 시도했던 33일의 노력이 도중하차로 끝난 것을 명심하면서 이번에는 그런 과오를 범하지 않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삼는다. 그 다음은 역시 ‘또 다른 경험’을 하는 것.. 어떤 것이지 모르지만 그것은 사실 상관이 없다. 다른 느낌과 체험, 경험.. 그것이면 족하다.

이 정도의 준비각오면 (이렇게 요란하게 글로 남기는 것도 포함)  아마도 아마도 이번에는 도중하차를 할 것 같은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러면 8월 15일 후에 내가 ‘얻는 것’은 어떤 것에 중점을 두면 좋을까? 분명히 더 낫고 더 올바른 성모마리아 신심(이것은 그리스도께 더 가까이 가는 첩경이다) 에 다가가는 것이다. ‘오해 받지 않는 철저하고 용감한’ 성모신심을 얻는 것도 아주 중요한 과제다.

어제 Catholic News Agency website에 조금은 섬뜩한 기분의 기사가 실렸다. Fatima 의 visionary Lucia 루치아 수녀님의 예언이었다. 파티마 목격자 중 유일한 생존자였던 수녀님 2005년 선종 전에 증언이 그것이다. 인류 최후의 심판, 결전은 그리스도와 사탄 간의 ‘결혼과 가정’2에 대한 투쟁이라는 것, 그것을 ‘예언’하시고 선종하셨다고 보도가 된 것이다. 이것이 수녀님의 예언인지 혹시 성모님의 예언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어떨까.. 나도 비슷한 느낌과 생각을 가지고 있던 참이었기에 우연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Humanity의 근간 중의 근간인 ‘정상적인 가정’의 파괴와 붕괴는 사실 핵전쟁이나 다름없는 인류파멸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우매한 지식인‘들은 그렇게 stupid한 것일까? 10은 알고 11는 모르는 것.. 이런 뉴스에 접하며 나는 이번 33일에 이런 Current social problem을 같이 생각하기로 했다. 이런 뉴스와 일맥상통하는 글이 바로 33일 봉헌 Guide에 잘 나와있다. 아래 그것을 전문 발췌를 했는데, 원제는 20세기에 관한 것이지만 21세기에도 전혀 달라지지 않은 것들이다.

 

20세기에 들어 성모님은 파티마를 비롯한 세계 곳곳에 발현하셔서 당신의 티없는 성심께 대한 봉헌을 간곡히 호소하고 계신다. 20세기의 초엽인 1917년 파티마에 발현하셨을 때에는 원죄에 물들지 않은 당신의 티없는 성심을 직접 보여주시면서 티없는 성심께 대한 신심과 봉헌을 호소하셨다.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 나의 티없는 성심에 대한 신심을 일으키기를 원하신다” (파티마, 19717. 6. 13).

“내 티없는 성심은 너의 피시처가 될 것이며, 너희를 하느님께로 이끌어가는 길이 될 것이다” (파티마, 19717. 6.13).

이에 따라 1942년 10월 31일 비오 12세 교황은 전 세계를 마리아의 티없는 성심께 봉헌하고, 1946년에는 파티마의 성모님을 세계의 여왕으로 대관하고 ‘여왕이신 성모 마리아 축일’을 제정하였다.

또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미 청년시절에 <성모님께 대한 참된 신심>에서 큰 감화를 받고 자신을 온전히 성모님께 봉헌하였으며 이 책에서 ‘온전히 당신의 것 (Totus Tuus)‘라는 문장을 뽑아 교황 즉위 시에 모토로 삼기까지 했다. 1984년 3월 25일에는, 1917년 파티마에서 하신 성모님의 요청에 따라 전 세계의 주교들과 뜻을 합하여 소련은 물론 전 세계를 티없으신 마리아 성심께 봉헌하였는데 그 이후 마침내 소련을 포함하여 여러 나라의 공산주의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오늘날 여러 교황님들의 모범에 따라 이 봉헌을 실천하는 이들은 이 길이 틀릴 수 없는 가장 완전한 길임을 체험하는 동시에 이 봉헌으로써 이루어지는 놀라운 결과 즉 “티없는 내 성심이 승리할 것이다” (파티마 1917. 7.13)이라는 성모님의 약속의 실현을 자신들 안에서도 보게 될 것이다.

성모님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이 봉헌은 하느님께 봉헌되기 위한 가장 완전한 방법인 동시에 성모님의 티없으신 성심께 대한 가장 완전한 신심행위이다. 성모님께서는 우리의 봉헌을 받으셔서 당신 아드님과의 완전한 일치 안에서 그러나 그분께 종속되어 “은총의 질서 안에서 우리의 어머니의 자격으로” (교회헌장 61항) 하느님의 자녀들인 우리의 생활에 모성적으로 관여하신다. 그리고 우리의 봉헌을 당신의 봉헌과 일치시켜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고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가능케 해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결론지을 수 있다. “성모님께 봉헌하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께 이르는 길을 통과하는 것이며 성모님은 그리스도께 이르는 길이시다” 라고. 따라서 성모님을 통하여, 성모님 안에서, 성모님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 자신을 바치면 바칠수록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이 봉헌의 주된 목적이며 의의이다.

<봉헌을 위한 33일간의 준비> “봉헌의 의미와 그 중요성” 중에서

 

  1. 매년 8월 15일: 성모승천 대축일: The Assumption of the Blessed Virgin Mary
  2. Homosexuality, Same-sex ‘marriage’, transgender, rampant divorce etc etc

33일 봉헌 갱신 更新..

더위를 먹은 머리가 갑자기 쏟아진 소낙비로 조금 식어간 후에 문득 7월 13일이 코 앞에 다가온 것을 느낀다. 레지오 주회합 때마다 회의록을 읽는 서기 書記(2012년부터)인 관계로 레지오의 공식활동의 목록을 앵무새처럼 읽는 것, 듣는 이에게는 크게 새로운 것이 없을지라도 나 자신은 은근히 세뇌 洗腦 가 되는 효과가 있다. 7월 13일.. 아하.. 올해 여름 중에 봉헌되는(정확히 8월 15일 Marian Assumption Day, 고국의 광복절)  ‘봉헌을 위한 33일간의 준비‘, 간단한 말로 ’33일 봉헌’ 준비 기간이 시작되는 날이 바로 7월 13일이었다.

St. Louis Marie Grignion de Montfort
St. Louis Marie Grignion de Montfort

몇 달 동안 이 공식예고를 듣고 보며 잠깐씩 생각하곤 했다. 내가 전에 이것을 언제 했지.. 근래에 체험한 행사와 경험들이 하도 많아서 ‘레지오 수첩’을 안 펴보고는 확실히 알 수가 없게 되었다. 이것에 대한 자세한 기억이 조금 희미해진 것을 느끼고, 너무 오래 잊고 살았구나 하는 자괴감 自愧感 도 들었다. 우선 성모님께.. 다음은 루도비코 마리아 성인 Saint Louis of Montfort 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분명히 나는 몇 년 전에 봉헌을 했지만, 그 다음에 다시 갱신 renew 을 한 것이 100% 확실하지 않은 것이다. 이것은 실망이다.. 이런 것에 대한 기억력이 떨어지면 어찌할 것인가?

Personal blog에 나의 흔적을 남기는 것, stupid한 것도 많지만 나중에 유익한 개인역사를 남기는 것은 이럴 때 도움이 되고, 이곳을 찾아보니 역시 2012년 7월 11일 자 blog이 그것이다. 그러니까 2012년 8월 15일 즈음에 나는 ‘첫 33일 봉헌’을 한 것이다. 이 blog에 봉헌 준비 당시 나의 심정이 잘 보이고 있지만 실제로 어떻게 33일 ‘하루하루’를 보냈는지.. 그것은 어디 있는 것일까? 그것도 찾았다. 나의 OneNote1 Journal에 33일의 일기가 거의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첫 번째 봉헌, 나는 그만큼 심각하게 그것을 받아들이고 노력을 하고 기록을 남긴 것이다.

그러면 나는 과연 그 후에 갱신 renew를 한 것일까? 머릿속의 잡티를 청소하고 기억을 해 보니 2013년 부활시기에 갱신 시도를 했지만 도중 하차..  다음 해 2014년 부활시기에 연숙과 같이 갱신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 정도로 갱신은 첫 봉헌과 비교해서 깊이나 느낌의 정도가 다른 것일까? 그렇다면 갱신할 당시 나의 33일 준비는 첫 번에 비해서 훨씬 허술했던 것은 아닐까? 그때의 묵상기록도 OneNote Journal에 남아있지만 첫 번에 비해서 그렇게 허술한 것은 아니었다. 갱신 때는 첫 봉헌에 비해서 오히려 하루도 빠짐없이 꼼꼼히 묵상기록을 남겨 놓았다.

2016년 연중시기 중의 제일 ‘한가한’ 시기인 8월 봉헌 시기가 다가오면서.. 이번은 꼭 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무엇인지.. 한마디로 나의 성모신심 Marian devotion 의 나사가 조금 씩 풀어지기 시작한 듯한 느낌이 들어서일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고, 행여라도 풀어지지 않기 위한 안간힘일지도 모른다. 지난 두 번의 봉헌에 빠졌거나 못했던 것을 이번에 더 노력을 하면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특히 이번에 더 할 것이 있다면 성 루도비코 마리아와 그의 불후의 명저 ‘성모님께 대한 참된 신심‘을 더 자세히 읽어 보는 것도 포함이 되어 있다. 8월 16일로 예정이 되어있는 봉헌, 갱신식에 과연 내가 서있을 것인가.. 아니면..

 

  1. Microsoft Office note app

downpour, 갑자기..

지난 2주 동안 계속되던 폭염, 95도 (섭씨 36도쯤 되나..)의 나날들.. 가뭄까지 겹친 매일매일은 서서히 피곤하게만 느껴지기 시작.. 거의 매일이 그야말로 dog days of summer. Backyard의 찬란하던greenery 들이 서서히 시들 거리는 모습은 절대로 올해 여름에 기대한 것이 아니었다.

자연과 싸우려는 city water 의 무력함을 거의 매일 느끼는 것도 고통이 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 낮에 일 순간에 쏟아진 ‘멋진’ 폭우는 일 순간에 이런 고통을 편안 함으로 순식간에 바꾸어 주었다. 이럴 때 Mother Nature의 여성형은 오늘 오후에 더욱 편안하고 포근한 느낌은 준다. 역시 Nature는 fair한 것이다. 감사, 감사..

 

2016-07-06 12.27.19

 

2016-07-06 12.27.01

 

Mercy, 피하고 싶은 사람들..

Fr. Miguel, new pastor
Fr. Miguel, new pastor?

¶ Mercy or Conspiracy?   Wife와  family가  있는 주임신부 부임: 드디어 그날이 오늘 아침에 갑자기 왔다. 결혼한, 부인과 자식 그러니까 자기만의 ‘단란한’ 가정이 있는 주임 신부님의 첫 주일미사가 있었던 날.. Father Miguel.. Spanish full name이 너무 길어서 가급적 first name 이자 영세명인 Miguel로 불러달라는 50대의 건강하게 보이는 새로 부임한 주임신부님.. 제일 염려했던 Spanish accent문제는 완전한 기우.. native, full American accent로 주일 첫 부임 미사를 자유자재로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설득력 있게 끝냈다. 그러니까.. 첫 인상은 완전한 pass였다. 몇 년이나 계실지는 모르지만 그런대로 안심을 한 것이다.

그것까지는 문제가 없지만 제일 우리의 관심사요 염려는 역시 ‘기혼 신부‘라는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다. 아주 ‘자신 있게’ 30년 역사의 wife와의 결혼생활을 언급을 하는데.. 성실한 것을 강조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런 기정사실을 받아 들이라는 호소인가? 모르긴 몰라도 ‘인상은 좋았어도’ 이 wife와 가정이 있는 Roman Catholic priest를 생각 없이 받아들이는 것은 무리일 듯하다. 최소한 얼마 동안은.. 우리는 이미 한달 이전에 이 신부님에 대해서 다 알아보고 심리적인 대비를 하긴 했지만, 이런 것을 잘 모르고 오늘 처음 알게 된 교우들은 아마도 크게 놀랐을 것이다.

오늘 우리 둘이 같이 느끼는 것, 분명한 것은 이것이다… 세상이 변하고 있고 그것도 빠르게 변하고 있고.. 항상 깨어서 대비하라는 말씀을 잊지 말라는 것 바로 그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것이 교황 Francis의 big Mercy agenda중에 하나인가 하는 점이다. 그러니까 계획적으로 ‘밀어 부치는’ 바티칸의 주도에서 우리 대주교도 그것에 따른 것인가 하는 점이다. 하지만 mercy를 너무나 강조하다 보면 신앙 교리와 교의 敎義의 경계선에 자칫하면 실수를 하거나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널 수도 있기에 항상 아슬아슬하기만 하다. 심지어 교황이 homosexual 들에게 ‘사과’를 했다는 ‘억측과 conspiracy theory’도 나도는 이때.. 이번에는 결혼신부가 ‘전통 보수’의 아성인 East Cobb에 부임.. 우리들이 심려는 전혀 불가능한 추측은 아닐 듯 하다. 모든 ‘교회를 떠난 무리’들을 다시 불러 들이는 현 교황의 염원이 이런 식으로 나타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바람직한 부류가 아니더라고 교회만은 당신을 사랑한다.. 그것 아닐까? 그것이 mercy의 정신이라면 어쩔 수 없이 우리의 생각도 서서히 그것에 맞추어가야 할 듯 하다. 덥기만 한 Independence Day 전날, 조금은 가라앉는 듯한 심정이다.

 

피하고 싶은 사람들:  Persona Non Grata, 피하고 싶은 사람들을 어떻게 다루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가? 이것은 그야말로 case by case인 case이지만.. 그래도 일반론 一般論은 있을 듯하다. 정도의 차이도 중요하다. 얼마나 피하고 싶은 가 하는 것.. 우리도 인간이기에 예외는 아니고.. 피하고 싶은 ‘인간’들이 있고, 그것에 슬기롭게 처신하는 것, 생각하고 노력한다고 자부하지만 한마디로 괴롭다. 생각만해도 싫은 것이다. 이것도 mercy mercy하면 할 말이 없지만 억지로 mercy 를 베풀고 싶지 않은 것이 문제다. 그들을 미워하는 것인가.. 하면 반드시 그것도 아니다. 다만 안 보고 살면 너무나 행복하다는 것 뿐이다.

우리에게 그들의 이름은 persona non grata.. 그러니까.. 기피인물 인 것이다. 지난 수 년 동안 이들이 ‘사라진 것’은 정말 우리에게는 기적과 같은 ‘성모님의 손길’이었다. 우리가 손끝 하나 들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그렇게 기적적으로 ‘자멸의 길’로 들어가고 사라진 것일까? 하지만 운명의 장난인가.. 시간은 흐르고 그들이 다시 꿈틀거리며 나타나기 시작하고 심지어 우리 앞에 나타나 스스로 건재함을 과시하기도 했고 요새 본당 ‘weekly bulletin’ 사진에도 그들의 모습들이 보인다. 어쩔 것인가? 이런 것들이 현재 우리들의 가장 심각한 challenge가 되고 있다. Mercy? Ignore? Shun? 어쩔 것인가? 어떻게 그렇게 사람들이 뻔뻔할 수가 있을까? 크지 않은 ‘교회 공동체’이고 보니.. 아마도 안 보려 피하는 것은 조금 stupid한 것일 듯하고.. 연극을 하며 마주서서 웃는 것은 더더욱 싫고.. 우리의 희망은 역시 BVM1 밖에 없는 듯.. 몇 년 전에 보여 주신 기적을 다시 보여 주소서…

 

  1. Blessed Virgin Mary, 복되신 동정 마리아

dog days afternoon..

¶  Dog Days afternoon, daydreaming:  와~ 7월도 되기 전에 언제 여름이 이렇게 무르익었나? 그야말로 relentless heat (stress) days after days..  머리가 조금은 몽~롱~ 해진 상태에서 아하.. 요새가 바로 dog days.. 라는 탄식이 나온다. hot & sultry.. days.. 이것이 바로 dog days가 아니고 무엇인가? 거기에다가 Dog Day Afternoon같은 Al Pacino 1975년 영화까지 머리에 겹치니까 아주 더 머리가 혼란하기까지 하다. 더운 것은 여름이니까 그런대로 참는다고 하지만 문제는 ‘물’이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공짜 물’, 그러니까 비가 안 오는 것이다. 예년의 기억을 떠올리며 backyard의 green field를 상상한 것이 완전히 수포로 돌아가고 있다. Hose water.. 의 무력함을 이렇게 실감하는 나날도 없는가? 암만 암만 홍수가 날 정도로 뿌려도 몇 분이면 땅이 완전히 다시 굳는다. 아.. Mother Nature여.. 오후에 딱 5분만 폭우를 보내 주어도 모든 문제가 일순간에 사라지는데.. 기우제라도 드려야 하는 것인가?

오래~전 오래~ 전.. 직장생활을 할 때를 가끔 기억에 떠올린다. 그때의 여름도 사실 요새와 그렇게 다를 것 없이 무더웠을 터이지만.. 내가 기억하는 것은 정 반대였다. 당시 corporate life (a.k.a salaried man)의 혜택.. ‘빵빵’ 사정없이 냉동이 된 건물 안에서 Nine to Five 를 견디고 집에 오면 몸이 녹는데 몇 시간이 걸린다. 한마디로 ‘푸근~’한 집이 그렇게 덥게 느껴진 적이 없었던 것이다. 훗날.. 연숙과 이야기를 하며 느낀 것은, 하루 종일 집에 있었던 사람은 내가 요새 느끼는 것과 같이 항상 더웠던 것.. 가정 집에서 암만 에어컨이 나와 보았자 그것은 사실 별 것이 아니었던 것.. 그제야 나는 실감을 한 것이다. 아무리 여름에 78도 에 맞추어진 집이어도 그것은 그렇게 시원한 느낌이 아니었을 것이고 그것을 안 후에는 조금 미안한 심정도 들었다.

 

¶  Greenfields are gone now, parched by the sun..  Yonsook Trail이라고 이름이 된 backyard의 깊숙한 곳 오솔길.. 초 여름까지 푸른 화초들이 길을 따라 ‘파~랗게’ 도열을 하며 맞아 주었지만 하늘에서 물기가 사라지고 대신 인정사정 없이 작열하는 태양열에 하나 하나씩 마르기 시작하며.. 이 1960년 초 folk classic Greenfields 의 가사 중 Greenfields are gone now parched by the sun.. 이란 구절이 떠오른다. Greenfields.. 어쩌면 그렇게 신선한 느낌을 주는 것일까? 대학생 출신 quartet The Brothers Four의 이 노래는 중학생 때 귀따갑게 듣던 명곡인데 당시 우리나라에서도 인기 quarter이었던 불루벨즈가 멋지게 ‘모창’을 한 기억도 난다. 나중에 가사를 음미해 보니 역시 이것도 ‘가버린 연인’을 그리는 노래였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을 때의 Greenfields가 가버린 연인을 따라 모두 황폐해진 것.. 잔잔하지만 격조 있게 은은하게 불린 멋진 4중창의 화음.. 역시 60년대 초만이 가질 수 있었던 멋진 추억이었다.

 

dried up, Yonsook Trail

parched, dried up, Yonsook Trail

 

Greenfields란 말은 그 이후에도 유행어가 되었는데 기억에 남는 것은: 하숙생들이 고기와 계란이 없는 순전히 야채 중심의 밥상을 꼬집을 때 하던 말.. 그것도 Greenfields였다. 세상이 많이도 변해서 당시에 야채중심의 식사는 ‘가난한’ 것이었다. 요새는 어떤가.. 돈이 없으면 야채를 많이 먹지 못하는 희한한 세상이 아닌가? 참 세상은 오래 살고 볼 것인가..

 

 

GreenfieldsThe Brothers Four – 1961

 

 

Smartphone Blues

Android Jelly Bean
Samsung Galaxy S2 Android Jelly Bean

 

S2 Android ICS Blues: 여기서 S2는 Samsung Galaxy S2 smartphone을 뜻하고, ICS는 그것을 ‘움직이는 system software: operating system’ 인 Google의 Linux-based Android의 version 4.0x  code name ‘Ice Cream Sandwich‘를 말한다. Android code name은 전부 ‘달고 맛있는 당과 糖菓’류의 이름들인 것이 재미있다.

우리는 2012년 경에 나온 삼성 smartphone Galaxy S2를 아직까지 쓰고 있다. 그러니까.. 벌써 4년이 지나가는 ‘고물’이 되었나.. 우리의 30~40대 같았으면 아마도 매년 새로 나온 것으로 바꾸었겠지만 지금은 older & wiser, smarter 해 진 것인지.. 절대로 그런 바보 같은 짓은 안 한다. 30대에 타던 차들이 100,000 마일이 되면 못 쓰게 되곤 했지만 요새 차들은 200,000 마일까지 쓸 수도 있다는 것처럼 근래의 electronic hardware들, 정말 ‘잘만 만들면’ 절대로 쉽게 고장이 안 난다. 그런 덕분인지 고물이 된 S2, 거의 새것처럼 보이고 느껴지고 그렇게 쓰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좋은 면 뒤에는 반드시 보이지 않는 함정과 그늘이 있다. 바로 software인 것이다. Smartphone이라고 하지만 phone의 기능 이외에 desktop computer의 기능을 능가하는 computing power를 가진 이 ‘조그만 괴물’, 문제가 생기면 바로 이 software에 문제가 생기고, 성질이 급하면 아주 고장 난 것으로 오해를 하고 새것으로 바꾸곤 한다. 무언가 잘 안 되면 과연 그것 hardware가 고장이 난 확률은 아주 낮다. 근래의 값이 저렴한 Desktop PC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대부분의 digital device들 (desktop pc, smartphone, tablet etc),  요새는 거의 다 Internet에 연결이 되어있기에 아차..하면 virus나 malware 같은 것이 들어오고 갑자기 성능과 속도가 떨어지고 심지어는 완전히 고장 난 것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공평한 것인가.. 복잡한 것은 물론 기능이 많다는 뜻에서 좋지만 그에 비례해서 이런 다른 문제가 생기는 것이니까..

이런 것들을 생각하며 최근 연숙의 smartphone이 각종 문제가 생긴 것을 다시 보았다. 나와 똑 같은 T-mobile version S2 model인데, 내 것은 거의 새것처럼 보이고 연숙의 것은 완전히 ‘기어가는’ 듯 느껴진다. 하지만 그런 것을 참고 쓴 것은 좋았는데 아주 최근에는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 phone이 항상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 물론 이것은 phone이 ‘지독히 busy’ 한 것을 뜻한다. 그러니까 battery를 최고로 많이 쓰는 것이고 그래서 뜨거운 것이다. Battery가 금새 discharge (방전) 가 되어 버리니.. 몇 시간마다 charge (충전)를 해야 하는 수고를 해야 한다. 이것으로, phone을 새것으로 바꾸느냐 마느냐 하는,  아주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잠깐 내가 살펴보니.. 역시 cpu (microprocessor)가 거의 80% 이상으로 ‘계속’ running을 하고 있었다. 전화를 쓰지도 않는데 무엇이 그렇게 뒤에서 ‘돌아가는’ 것일까? 처음에는 ‘아마도’  이것 저것 download가 된 program들.. 거의 필요하지 않은 것들이려니.. 추측을 했지만 암만 뒤져 보아도 그런 것은 없었다. OS Monitor란 app으로 살펴보니.. 항상 바쁜 것은 ‘Android_system‘이란 process 였다. 이것은 download가 된 user app이 아니고 Android system의 일부가 아닌가? 이 정도가 되면 아주 심각한 문제다. 문제가 된 것이 Android system자체이니 이것 자체를 바꾸거나 reset을 해야 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Android system을 새로 hard-reset을 하거나 re-install을 해야 할 듯하니.. 골치가 아픈 것이.. user setup data들을 backup 해야 하는데, 다행인 것은 거의 모든 것이 Google cloud에 있어서 자동 backup이 된 상태고, 예외적은 것은 아마도 KakaoTalk 정도가 아닐까.. 생각보다 local data는 제한적, 거의 모든 것이 Google소관, 참 묘한 세상에 살고 있다. 이렇게 시작해서 소위 말하는 hard-reset, re-install을 했지만 surprise! No change! 그래도 battery는 빠르게 discharge가 되고 phone은 항상 뜨겁게 달구어진다. 왜 그럴까?

S2-Jelly-Bean-2거의 포기상태에서 마지막으로 알게 된 사실.. Samsung Galaxy S2 에 마지막으로 upgrade가 되었던 Android는 Ice Cream Sandwich로 불리는 4.04이 아니고 Jelly Bean으로 code name이 된 version 4.12가 아닌가? 그러니까.. 아직 희망은 사라지지 않은 것이다. 마지막으로 Jelly Bean으로 upgrade를 시도하였다. 어떻게 upgrade를 하는가? 보통은 OTA mode 인데, 그러니까 Over The Air.. ‘자동적’으로 upgrade가 되었어야 하는데.. 그것이 되지를 않았다. 왜 그랬을까.. 하지만 이제는 늦었다. 그것이 upgrade가 되었으면 거의 4년 전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Googling을 해 보니.. 방법이 있었다. 역시 Samsung의 도움으로.. Samsung에서 나오는 Kies란 Windows software가 그것이다. S2 phone을 usb 로 PC에 연결하면.. ‘재수가 좋으면’ 큰 문제없이 Jelly Bean으로 upgrade가 되는 것이 원칙인데.. 세상이 그렇게 공식, 원칙대로 될 리가 없지 않은가? 첫째, 생각 없이 usb 로 연결을 하면 Kies는 절대로 S2를 인식하지 못한다 (비록 PC Windows는 phone을 storage로 알게 되지만, 그것은 useless). Android의 developer mode를 ON하고 그곳에서 developer usb mode를 set하여야 비로소 Kies가 연결이 되고 모든 upgrade business가 가능하게 된다.

Upgrading 은 무려 overnight동안 오랜 시간에 걸쳐서 download, re-flashing이 되는데 이때가 제일 긴장이 되는 순간들이다.. 무슨 일이 이때 생기면 최악의 경우 phone자체가 무용지물 bricking 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긴 여정을 끝내고 연숙의 Ice Cream Sandwich는 드디어 Jelly Bean으로 booting을 하고.. 결과는 상상을 초월한 것.. 모든 모든 모든 문제가 일 순간에 다 사라진 것이다. 너무나 예상을 넘는 변화였다. 완전히 S2 phone이 새것으로 바꾼 느낌이 드는 것이다.

이런 결과에 대한 기쁨이 가시면서.. 다시 생각을 한다. 과연 연숙의 phone에 어떤 일들이 일어났던 것일까? Hardware자체는 완벽하게 문제가 없었음도 증명이 되니까.. 100% Android system에 문제가 생겼던 것이다. Battery문제가 한창 극성을 부릴 때, ‘Battery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제시하는 message가 떴다는 연숙의 이야기를 기억한다. 거의 분명히 이것은 의도적인 외부에서 들어온 malware, 그것도 $$$을 요구하는 그런 criminal한 것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다른 것은, 제일 처음에 시도한 system total reset때 Android system은 ‘원래의 상태’로 restore가 되었을 것인데 어째서 그 때에 문제가 사라지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 아직도 나를 괴롭힌다. 완전히 다른 것으로 upgrade를 했을 때야 비로소 모든 문제가 사라졌다는 사실은.. 원래의 Android 였던 Ice Cream Sandwich 자체가 malware로 infect가 되었을 것이다. 이것이 가능한가? flash-rom은 비록 read-only 지만 flashable한 것은 사실이니까, 불가능할 것도 없다. 그러면 이 malware는 ‘지독한’ 것이다. 어떤 ‘놈들이’ 만들고 보낸 것일까?

한창 더운 여름에 2~3일을 이런 것으로 골머리를 썩힌 것, 즐거운 일은 절대로 아니지만 우선 ‘놀라운’ 결과가 모든 것을 시원한 오후의 소나기 처럼 깨끗이 씻어 주었다. ‘고물 phone’에 대한 불평을 최근에 끊임없이 말하는 연숙이 잠잠해진 것이 나는 제일 기쁘다. 이것도 요새 우리 집의 많은 clunker들을 손수 고치는 것의 일환이 되었지만  ‘save-the-earth 보람’의 일부도 되었다.

 

원서동, 苑西洞.. 1954

서울 특별시 종로구 鍾路區 원서동 苑西洞 비원 秘苑의 서쪽 담장을 따라 맑은 시냇물 (당시에는 개천 이라고 불린)을 따라 아늑하게 남북으로 펼쳐진 그 옛날 1950년대의 종로구 원서동, 전설의 고향 같은 느낌으로 나의 기억 제일 깊숙한 곳에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는 그곳.. 특히 1954년 경 그 동네의 모습은 아마도 내가 죽는 순간까지도 기억하며 그릴지도 모른다.

육이오 6.25란 글자가 보이면 원서동에 연관된 추억들이 왜 그렇게 지워지지 않고 생생하게 나를 깨우는가. 이런 이유로 나의 blog 특히 memoir 에는 이곳의 추억이 이곳 저곳 산재해 있다. 그만큼 이곳은 나의 추억에서 지울래야 지울 수 없는 곳이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 된 것들이 이곳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오늘  6.25 동란, 66주년 아침에, 남기려는 것들, 6.25 동란 기록영화의 추억,  ‘더 늦기 전에‘라는 말을 되뇌며 생각하고 기억력을  총동원한 것이다. ‘원서동 극장, 한성택, 조흔파’ 정도가 keywords가 될 듯한 오늘의 추억은 정말로 아련한 추억들이다. 뒤 늦게 연대를 찾아보니 분명히 1954년 에서 1955년 사이 정도가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6.25 동란이 일단 끝난 휴전 바로 다음해 쯤이었다.

내가 너무 어려서 기억할 수 없었던 때, 전쟁 이후 휴전이 될 무렵까지 우리는 원서동의 아래쪽, 휘문중고교 바로 옆, 동섭이네 집이라고 불리던 집에서 살았는데, 그 집의 주인이 휴전 이후에 피난에서 돌아왔기에 우리 3식구 (아버지는 전쟁 초에 납북)는 가까운 곳, 아주 작은 ‘무당집’ 단칸 방으로 이사를 갔는데 이때의 기억들은 나의 오래 전 blog1에서 이미 회상을 하였다. 그 이후, 우리 세식구는 1954년 초에 이곳, 승철이네 집의 건넌방으로 이사를 왔고 본격적인 ‘재동국민학교 1~2학년’ 시절의 ‘평생 기억’을 만든다.

 

승철이네 집.. 최승철.. 어찌 잊으랴.. 나보다 2살 밑이었지만 그 나이에 나의 제일 친한 ‘한 집’ 친구가 되었다. 안 방 주인집은 양 부모가 있는 ‘정상적’인 주인이었지만 나는 우리 아버지가 없는 것이 그렇게 부끄럽거나 그 집이 부럽지는 않았다. 그저 다른 집이라고만 생각하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비록 큰 집은 아니었어도 승철이네 집에서 보낸 2년 정도는 한마디로 즐겁고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았다. 집의 위치도 원서동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하고 북쪽과 서쪽은 비원의 담으로 완전히 가로막힌 아늑한 곳, 여름에는 비원에서 들려오는 매미소리로 잠을 설칠 정도였고, 겨울에는 가운데로 흐르는 개천 (청계천으로 흐르는) 에서 썰매를 타는 그곳은 어린이들의 천국이었다.

승철이네 엄마는 우리 엄마와 나이도 비슷하고 친절한 분이셨다. 큰 딸 시자누나는 나의 누나와 동갑이었는데, 어머님이 재혼을 하셨는지 성이 ‘주’씨여서 원래는 주시자 누나로 통했는데 나중에는 성을 최씨로 바꾸었다. 그러니까 두 남동생인 승철이와 승관이는 현재 아버지와의 자식인 것이다. 당시에 그런 것이 그렇게 관심은 없었지만 기억에 뚜렷이 남은 것은 왜 그런 것일까?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 5명 그것도 두 누나들까지 포함 된.. 그런 승철이네 집은 어떻게 보면 재미있는 추억이 많은 곳이었다. 승철이 아버지는 경찰출신으로 (해방 전에도 그랬는지는 몰라도) 훤칠한 키의 호남형, 하지만 사나운 사나이 기절도 있었다. 일정한 직장이 없으셔서 거의 집에 계신 것이 특이한 점이었지만 그래도 부지런하셔서 놀지는 않으셨다. 항상 무언가 하신 것 같았다. 기계 쪽에 관심과 특기가 있으셨는지, 엔진 같은 것을 집에다가 갖다가 놓으시기도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얼음을 만드는 냉동기였다. 그것을 가지고 후에는 경기도 연천 인가 하는 곳으로 가셔서 가게를 차리셨다. 물론 아이들은 집에다 두고 부부만 가신 것이다. 물론 그것은 내가 그 집에서 이사 나온 후의 일이었지만.

구파발의 추억: 가끔 승철이 아빠는 우리 아이들을 모두 데리고 고향인 경기도 구파발로 놀러 가시기도 했다. 여름 겨울 모두 갔었는데, 나에게는 그것이 너무도 즐겁고 신기한 추억이 되었다. 구파발.. 어찌 잊으랴.. 그것이 그러니까 1954, 5년 경이었을 것이다. 서울역 염천교 옆에서 시외 버스를 타고 ‘한없이’ 달려서 간 곳.. 구파발, 구파발.. 그곳은 내가 태어나서 처음 가보게 된 ‘시골’이었다. 시골, 시골,.. 처음으로 ‘쌀나무, 벼’를 보았고, 논을 보았고 ‘진짜 초가집’ 안에 들어가서 자 보았다. 처음으로 알았다.. 그곳은 아름답기 전에 너무도 가난한 곳이었음을.. 서울에 비해서 그런 것이지만, 어떻게 그렇게 ‘원시적’인 것인지 이해가 가지를 않았다. 아름다운 곳, 진짜 시냇물에서 수영, 미역을 감고, 미꾸라지를 잡고, 차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 깜깜한 밤에 술래잡기를 하고, 한없이 많았던 메뚜기를 잡으려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우리가 가서 자던 초가집이 승철이 아빠와 어떤 친척인지는 아직도 확실하지 않지만 아주 가까운 사이였을 것이다. 그 집에 ‘희덕이’라는 우리보다 조금 나이가 많은 남자아이도 있었는데.. 이제는 기억이 희미해져서 그것이 전부다. 겨울에 놀러 갔을 때는 얼어 붙은 논에서 ‘한 없이 하루 종일’ 썰매를 타는 황홀에 빠지기도 했다. 승철이 아버지, 감사 드립니다. 셋방에 사는 아이까지 데리고 가신 것.. 아직도 이렇게 생생한 황홀경의 추억을 만끽하고 있습니다. 당시 기억에 뚜렷한 것 중에, 그곳 (구파발)에서 나올 때 어떤 초가집을 지나가는데, 비명소리 울음소리가 나고 어떤 사람이 승철이 아빠에게 도와달라고 애원하던 것, 그러니까 그 집 남편이 아내를 구타하던 것, 그 아내가 살려달라고 울며불며 승철이 아빠에게 매달리던 것, 잊을 수가 없다. 어느 정도 해결이 된 후 그 집을 떠나는데 또다시 그 집 아내는 비명을 지르며 우리를 쫓아오던 모습.. 어린 나이에도 그것은 한마디로 공포의 장면이었다. 그것을 만류하고 해결해 주었던 승철이 아빠.. 존경을 받을 만 했다.

하지만, 사람은 언제나 어두운 쪽도 있다. 다른 기억에, 한 때 어떤 ‘장판지 외판원’을 구타했던 사건이 있었다. 나는 분명히 기억을 하는데, 한번 장판을 파는 젊은 청년이 왔었는데, 무언가 잘 못 되어서 승철이 아빠가 그 청년을 거의 구타하다시피 해서 쫓아 낸 것이다. 나는 너무나 혼동스러웠던 것이 어떻게 그렇게 사람이 변할 수 있는가, 그리고 사람을 어떻게 그렇게 심하게 대할 수 있는가 하는 것. 어린 나이에 그것은 나에게 큰 상처가 되었다. 아버지의 상에 흠이 간 것이다. 그런 아버지는 없는 것이 낫다 라는 생각까지도 한 것이다. 

 

작가 조흔파:  집에서 북쪽으로 50m 정도 올라가면 조금 더 좋은 집들이 나오는데, 그 중에 바로 ‘작가 조흔파’ 선생의 집이 있었다. 당시에 솔직히 조흔파가 누구인지 잘 몰랐지만 그 집의 둘째 아들 ‘조영환’과 같이 놀았기에 그 집엘 놀러 가며 그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 소설가라는 것, 학생잡지를 보면 그의 이름이 눈에 뜨일 정도였지만 그런 것을 읽기에는 너무나 어렸다. 그 집의 큰 아들이 이름, 그러니까 조영환의 형의 이름이 조영수였다. 나중에 휘문중학교에 들어간 것도 기억이 난다. 조영환은 장난이 조금 심한 애였고 우리들을 조금 괴롭힌 기억도 나는데.. 의문은.. 분명히 나와 같이 재동국민학교에 다녔을 텐데.. 졸업 앨범에 그의 모습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마도 졸업하기 전에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갔을 것이다.

그 집에 몇 번 놀러 갔을 때 느낌은.. 어린 나이에도 무언가 다른 집이다.. 그러니까.. ‘작가, 문필가 소설가’의 집이란 느낌을 받은 것이다. 물론 그 아빠 조흔파 씨는 집에 없어서 못 보았다. 그리고 그 엄마도 못 보았는데.. 그 집 툇마루에서 이상한 것을 본 기억, 바로 수영복이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남자 수영복을 보았다. 그리고 들었던 소문이 있었다. 그 집 엄마는 진짜 엄마가 아니고, 후처였다는 사실.. 어린 나이에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몰랐다. 게다가 그 후처는 당시에 숙명여대 학생이었고 조영환이 엄마는 ‘쫓겨 났다’는  이야기도 듣고 자랐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아하~ 그 새 엄마는 조흔파씨가 아마도 숙명여대에서 가르친 학생이 아니었을까.. 하는 것. 아마도 맞지 않았을까? 그 이후 ‘사라진’ 조영환이네 기억은 서서히 사라졌지만 TV가 나오면서 가끔 조흔파씨가 출연하는 game show 같은 것을 보게 되면 그 집 생각이 나곤 했다. 또한 알게 된 것은 조흔파씨의 이름은 생각보다 훨씬 유명한 이름이었다는 사실이었다.

 

김관형, 종맹이 형들:  집 바로 앞, 골목길 건너에 붙어있는 두 집이 있었다. 한 집에는 어머니와 아들, (김) 관형이 형 살고 있었고 (나머지 가족은 기억이 안 남) 또 한 집은 ‘원서동 극장’ 이라고 내가 기억하는 집, 종맹이 형이 사는 곳이었다. 그러니까.. 나에게는 관형이형, 종맹이 형으로 기억이 나는 두 집이다. 관형이 형, 어린 눈에도 그 형은 여자처럼 예쁘게 생긴 형이었다. 말도 부드럽고 우리들, 나와 같은 동생뻘 아이들을 잘 돌보아 준 형.. 가끔, 옆집인 종맹이 형네 집에서는 극장처럼 영화를 상영하였다. 아마도 종맹이 형의 아버지가 기록영화에 관련된 사람이 아니었을까? 심심하면 여름 밤에 우리를 포함한 동네 사람들 몇 집을 불러다가 대청 마루에서 영사기를 돌렸다. 극장가는 것 당시에 그렇게 쉽지 않았는데 ‘활동사진’을 집에서 본다는 것은 참 희귀한 일이었다. 문제는 그 ‘영화’라는 것이 모조리 6.25 전쟁 기록영화였다는 사실.. 대부분 모인 사람들이 동네 아낙네들인데 그들이 그것에 열광할 리는 없었다.

하지만 우리 같은 아이들은 아주 달랐다. 만화를 보아도 전쟁, 군인들에 관한 것만 보는데.. 실제 전쟁 기록 영화를 집에서 생생하게 본다는 것은 완전히 꿈같은 일이었다. 심심치 않게 많이 보았던 6.25 기록영화들.. 군대 사열식하는 것부터 실제 대포를 쏘는 것, 군인들이 쓰러지는 것.. 그것은 당시 여름 밤을 다시 회상할 수 있는 멋진 추억으로 남았다. 종맹이 형은 그 이후 다시 볼 수 없었지만 관형이 형은 나중에 중학교까지 가서도 멀리서 가끔 본 기억이 난다. 나를 특별히 잘 돌보아 주었다는 나만의 상상인가.. 두고두고 기억하고 싶은 이름이 되었다.

 

한성택 형.. 집 옆에 흐르는 개천 건너 쪽에 있는 나즈막 한 집들에 ‘한씨 일가’가 살고 있었는데, 그 집에 나의 다른 기억을 만들어준 성택이 형이 있었다. 그 나이가 얼마 정도 였을까? 아마도 중학생 정도가 아니었을까? 그 집에는 사촌으로 알려진 한성우도 있었는데 그는 나와 동갑으로 재동국민학교도 같이 다니고 졸업도 같은 때 하였다. 성택이 형, 전형적인 ‘형 type’ 이라면 어떨까.. 동생뻘 아이들을 아주 능숙하게 다루고 ‘조종’을 하는 type, 나와 승철이는 그를 ‘하느님’처럼 따르기도 했지만 내가 훨씬 더 ‘보살핌’을 받았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돈을 갖다 바쳤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생각하면 웃긴다.. 그 나이에 어떻게 야쿠자도 아니고, 그런 ‘돈 관계’가 있을 수 있었을까? 나의 사고방식은 간단했다. 그 형에게 더 보호를 받고 싶다는 일념으로 내가 받는 용돈을 그에게 바치곤 한 것이다.

덕분에 동네에서 나는 주먹 같은 아이들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를 받고 어린 나이에도 ‘돈의 위력’을 실감하게도 되었다. 우리 어머니는 그런 것도 모르고 그 형만 보면 고맙다고 칭찬을 하곤 했다. 그 성택이 형의 심정은 어땠을까? 돈을 받으니 좋았을 것이고, 졸졸 따라다니며 ‘숭배’를 하는 꼬마가 있었으니 좋았을지 모른다. 한번은 한 겨울에 눈이 왔을 때, 그 형을 따라서 ‘한없이 걸어서’ 썰매를 사러 간 적이 있었다. 그 위치는 나중에 생각해 보니 아마도 삼선교 부근이 아니었나.. 돈화문, 창경원 앞 전차 길을 따라 걸어 간 곳, 눈부신 쌓인 눈을 밟으며 걸었던 그 추억.. 결국 간 곳에서는 썰매를 살 수가 없었다. 

6.25의 기억을 다시 생각하면 100% 생각나는 원서동 어린 시절, 그 중에서도 1954년 무렵의 승철이네 집 주변의 추억들은 나의 6.25에 대한 심각한 역사를 조금은 부드럽게, 포근하게 만든다. 절대로 잊을 수가 없는 너무나 아름다운 추억, 인물들.. 지금 다 어떻게 살고들 계신지..

 

  1. 육이오, 원서동, 동섭이네집, 영구차 귀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