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Easter

2016년 부활절, Easter day가 어둡게 시작되어서 어둡게 저문다. 요새 매일 틀리는 일기예보, 예보되었던 thundershower와는 대조적으로 아주 조용한 이슬비가 간간이 뿌린다. 기후적인 느낌은 비록 완전한 봄의 것이지만 그 이외의 나의 모든 것들은 모두 아직도 끌려가는 듯한 겨울의 그것이다.

어제 늦은 밤까지 진행된 ‘피곤한’ 부활성야 Easter Vigil mass를 마치고 힘들게 집에 들어오면서.. 아마도 다음 날 아침의 ‘진짜’ Easter ‘main’  mass는 빠질지도, 못 갈지도 모른다는 쳐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런데 그런 기분이 현실이 되었다. 거의 10년도 넘게 처음으로 나는 ‘진짜’ 부활절 미사 참례를 못 한 것이다. 미안합니다.. 성모님, 어떻게 이런 일이? 암만 생각해도 이것은 추악한 것이다. 최고 내가 믿는 신앙의 절정의 시간이 가장 밑 바닥으로 떨어진 것이다. 오늘의 날씨와 같이 ‘어두운 부활절’을 남기고 간다.

무거운 성 금요일.. 어쩔까?

40일의 사순절 내내 잠재적으로 머리에 그려지던 광경, 성 목요일 최후만찬, 세족례, 뒤에 어두운 대성전에 앉아 새벽 1시나 2시까지 수난감실 성체조배 시간을 기다리던 나의 모습, 아니 우리의 모습들.. 어김없이 그 시간은 다시 우리를 찾아왔고 지나가고 있다. 그리고 Good Friday의 답답하게 쩨쩨할 만큼 조금의 비를 뿌린 대기는 답답한 느낌만 주며 다시 ‘더운’느낌을 예고하는 내가 싫어하는 시간을 예고한다.

지난 2년간의 이 성삼일은 너무나 fresh하고 holy한 느낌을 주었기에 올해는 은근히 기대를 너무나 하였는지.. 역시 expectation game에 내가 눌리고 지고 있는 느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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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글은, 성금요일 아침, 이날 새벽 1시~2시의 수난감실성체조배를 ‘무사히’ 마치고 조금은 피곤한 몸으로 늦은 잠을 자고 ‘제시간’에 일어나서 쓴 모양이다. 성금요일, 토요일 그리고 부활절 미사를 예상하며 쓴 글이었지만 끝맺음이 없었다. 올해는 이렇게 조금은 무언가 끝맺음에서 문제가 있는 모양인가?

이제 성삼일도 일주일이나 훨씬 지나가고 있을 뿐만 아니라 3월도 지나고 4월이 넘어가고, 내일은 4월 3일 Divine Mercy Sunday까지 코 앞에 다가왔다. 어쩌면.. 어쩌면.. 나는 놀라고 놀라고 놀란다.. 이렇게 세월이 빠를 수가 있단 말인가? 68 마일의 시간 흐름인가.. 아니면 요새 나의 생활 style이 그렇게 느끼게 만들고 있는 것인가? 아닐 것이다..  나 정도의 인생을 살았으면 ‘모두’ 그렇게 느낄 것이라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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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성삼일.. 크게 기대는 안 했지만 그렇다고 아주 기대감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근래 사순절은 거의 매년 나에게 무언가 선물을 주었기 때문이고.. 그만큼 나도 노력을 안 한 것도 아니다. 오늘 식사를 같이 하면서 연숙이 한 말을 다시 음미한다. 나의 요새 모습이 오래 전에는 정말 기대할 수가 없이 살았다고.. 절망적인 나의 모습을 보며 사실 큰 기대를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 말을 들으면 물론 기분이 좋아짐은 사실이지만.. 그것보다 도 이런 나의 현재 모습을 나의 지난 자신이 자꾸 보며 놀라는 것을 나는 그림으로 그릴 수가 있다는 사실이 더욱 재미있다. 어떻게 이렇게 내가 변할 수가 있었을까? 놀랍다. 놀랍다.

올해의 성삼일은 사실 성공작은 아니었다. 문제가 있었다. 부활 성야미사 토요일 것..에서 문제가 생겼던 것이다. 무엇이 나를 ‘미치게 화나게’ 만들었나? 우선 답답하고 숨막힐 듯 더운 공기, 성전이 그렇게 느껴져서 나는 괴롭기만 했다. 그렇게 오랜 미사는 은근히 예상은 했지만.. 나는 우선 답답했고.. 하지만 그것이 직접적인 것은 아니었다. ‘이 요셉’이라는 남자.. 이렇게 표현하는 나를 용서하기를.. 아니 그 인간은 나와 무슨 연고가 있는지.. 참.. 보게 된 세월도 꽤 오래 되었지만 어쩌면 그 ‘인상’은 그렇게 나를 차갑게 만드는 것일까? 좋게 생각하려 무던히 애를 쓰기도 했지만 그 ‘묘하게 차가운’ 느낌의 얼굴과 행동을 나는 넘어갈 수가 없었다. 그날 미사 전에 만났을 때의 무표정하고, 차갑게 느껴지는 얼굴표정은 아직도 나를 분노하게 만든다. 오래 오래 전.. 나를 싫어하고 무시하는 듯한 ‘꼰대’들의 모습을 나는 다시 떠올린다.

그렇게 시작된 부활성야미사를 나는 완전히 망친 것처럼 느껴졌다. 옆을 보니.. S 형제의 딸.. Mary .. 이미 나의 가슴은 닫히고.. 그 애의 무표정한 모습이 나를 다시 불쾌하게 만든다. 이런 식으로 나는 그날 밤 ‘작은 악마’에게 시달린 꼴이 되었고.. 다음 날 아침 나는 ‘근세사 처음’으로 부활절 미사를 빠지게 되었다. 반항적인 자세로 미사를 빼먹은 것이 끝내 나를 슬프게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성모님.. 저를 용서해 주세요…

Palm Sunday 2016

오랜만, 오랜만에 나의 electronic note인 OneNote를 연다. 지난 1월이 지나며 조금씩 note를 남겼지만 제대로 생각이 정리가 되지 않은 채 거의 두어 달이 ‘눈 깜짝할 사이에’ 흘러갔다. 이곳에는 unfinished bits of note들이 패잔병처럼 이곳 저곳에 흩어져 있고, 흡사 한 달의 시간이 하루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착각이 나를 혼란하게 만든다. 무언가 무언가 많은 일들이 나를 지나간 느낌이지만 거의 정리가 안 된듯한 ‘따끈따끈’한 fresh한 것들이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그 깜짝할 사이에 꽁꽁 얼어붙었던 땅에서 생명의 찬란한 꽃들이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났다는 사실과, 2016년 부활절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Palm Sunday도 지나갔다는 사실이다.

Trump의 ‘ugly 머리통’이 보기 싫어서 dumb TV를 완전히 떠난 지도 꽤 되었다. 나의 피난처는 역시 다른 곳에 있는 평화로운 것이었지만 오늘 아침 아주 우연히 유럽의 CNN격인 France24를 엿보니 다른 세상은 역시 마찬가지였다. Brussels 의  terror attack news가 live로 나오고 있었다. 이런 ‘미친 terror’가 정치적으로 ugly Trump를 도와 줄 것이 분명한 이런 news는 나로 하여금 다시 dumb or smart TV에서 멀어지게 할 것이 분명하다. ‘높은 진리’을 떠난 secular humanity에 대한 경고일지도 모르는 이러한 일들.. 어찌하여 그들은 모를까.. 답답하기도 하다.

안녕, 보나 자매님..

보나 자매님과의 ‘생각하기 싫었던’ 작별시간은 시계처럼 어김없이 왔고 사랑하던 가족, 열심히 보살피던 레지오 도우미 자매님들과 아쉬운 이별을 해야만 했던 연도, 장례미사, 운구, 장지동행 등이 모두 큰 차질 없이 끝났다. 허탈감, 피로감, 아쉬움, 슬픔 등이 뒤섞였던 며칠이 오늘로 다 막을 내렸다. 끈질긴 기도와 몇 개월에 걸친 레지오 ‘도우미’ 자매님들의 정성스런 방문도, 끊임없는 카톡의 chatter도 오늘로 다 끝이 났다. 또 한 명의 영혼이 저 세상, 하느님의 영역 domain 으로 간 것이다.

언제였나.. 약 1년 반 전 한참 찌듯이 덥던 한여름이었나.. 그 보나 자매님을 처음 만났던 것이.. 하 미카엘 본당신부님과 연숙이 보나 자매님 댁 병자성사 주러 처음 방문했었고 그 때부터 우리 둘의 비 非 규칙적인 봉성체 방문이 시작되었다. 병자같이 않게 항상 재잘거리고 명랑하고 지나치게 순진하게만 보이는 ‘젊은’ 자매님이었다. 그 나이에 어떻게 그런 ‘치명적’인 두 가지 병고를 10년도 훨씬 넘게 짊어지고 살았는지 솔직히 상상하기가 힘이 들 정도였다. 본인은 물론이지만 가족들의 견디기 어렵게만 보이는 간병 노고도 너무나 안타깝게만 느껴지는 그런 상황, 운명이라고 하기에는 어떨까? 자매의 남동생까지 몇 년 전에 병으로 타계를 했다고 들어서 할 말을 잃을 정도였다. 굳건한 믿음을 가진 어머님이 계시지만 가까이 살지를 못해서 그저 전화만 하시는 정도였다. 그러니까 모든 간병은 남편 형제님과 남매 자녀가 운명처럼 여기며 하고 있는 것이었다. 욥기가 생각이 날 정도로.. 왜 이 영혼들에게 이런 고통이 왔을까..

이 요한 본당신부님의 push로 레지오에게 정기 환자 방문 ‘도우미’ group이 3개월 전에 구성된 이후 운명하던 날까지 매주일 2~3회 ‘도우미 자매님’들이 정기적으로 방문, 말동무와 간단한 식사 등을 보살펴 주었다. 금전적인 도움이 금지된 레지오의 봉사는 아무래도 ‘신앙대화’, 그러니까 영혼을 간호하며 돌보는 일인데, 그것이 좀처럼 쉽지 않았다. 이 자매님.. 절대로 죽음을 정면으로 대하지를 못했다. 그러니까.. 끝까지 마지막 순간까지.. 죽음에 대한 언급이나, 대화를 못했던 것이다. 조금은 예외적인 case라고도 생각이 되었지만, 생각을 해 보니.. 왜 안 그렇겠는가? 쉰 살도 안 된 나이에 쉽게 죽음을 대할 용기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가급적 ‘저 세상, 하느님의 세상’에 대한 대화를 하려 했지만 그런 approach가 쉽지 않다는 것을 배운 기회가 되기도 했다.

거의 단장 급의 간부 자매님들로 구성된 팀이었지만 모두 다른 인생, 다른 기술, 다른 성격을 가진 관계로 항상 매끄러운 teamwork은 기대하기는 힘들겠지만, 그래도 결과적으로 참 ‘멋진 노력’을 했다고 나는 보았다. 운명 시에 신부님도 재빨리 모셔와서 보나 자매님 정식으로 사제의 전대사를 받으며 평화스럽게 임종을 했다 (우리는 traffic jam에 길이 막혀서 2시간 뒤에나 도착을 하였지만.) 관심을 많이 쏟으신 관계로 신부님의 ‘다정스런’ 장례미사도 잘 끝날 수 있었다.

오랜 기간을 예상할 수 없는 중병이었지만.. 그래도 언제나 느끼는 것.. 생각보다 빨리 찾아온 놀라움.. 암만 짐작을 해도 누가 운명의 정확한 순간을 알 수 있겠는가? 하느님만이 아신다고 하니까..  조금이라도 더 살고 싶은 표정으로 끝까지 희망을 놓지 않았던 그 노력은 참 눈물이 나는 것이지만, 다른 한편 그 형언할 수 없는 고통에서 벗어나고 주위의 가족들도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는 안도감도 어쩔 수 없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하지만 그 동안 정이 들었던 자매님.. 숨겨놓은 눈물을 더 이상 감출 용기가 나지를 않았다. 자매님의 영혼, 평화로이 받아주소서..

 

 

Nearer, My God, to Thee – André Rieu

 

야~~ 미치겠다..

십 년도 넘는 옛날 한국드라마를 보던 때, 사랑과 전쟁이라는 드라마 프로그램을 본 당시.. 어쩌면 그렇게 옛날과도 같을까? 나는 그런 것들을 완전히 지난 10년도 넘는 세월을 그렇게 살았구나.. 하지만 그것이 point가 아니다.. 그 드라마에서 한 남자가.. ‘야~~ 미치겠다~‘ 하고 절규를 하던 그 모습과 언동이 현재 나의 심정과 잘 맞기에 그것을 기억한 것이다.

정말.. 정말.. 이런 때가 싫고 싫다.. 하지만 잠시 멈추고 생각하면 인생은 이런 것들을 겪는 것이 정상이라는 위로 같은 생각. worst scenario가 현실화 되었다. 내 몸의 한 부분처럼 굳어진.. proxmox ve가 드디어 crash한 것이다. 내가 거의 ‘매일’ 쓰고 있는 몸의 일부분 같은.. kvm-vista, kvm-xampp, 그리고 piaf (pbx in a flash) home pbx.. 이것의 중요성은 이것이 진짜로 없어서는 안 될 것이라기 보다는 ‘무의식’ 중에 이것이 몸에 배었다는 사실이다.

Virtual Machine의 마력과 매력에 흠뻑 젖어 살아온 지난 10여 년이었다. 나의 technical showmanship이라는 생각도 들 정도로 이것들은 나를 지탱시켜 주었던 practical toy들이었다. 이것과 싸우고 어루만지고 시간을 죽여주었던 멋진 것들이었다. 하지만 오늘 이것이 all stop되면서 생각이 조금씩 달라짐을 느낀다. 언제까지.. 언제까지 이것과 씨름을 할 것인가?

이런 것들에 내가 완전히 의존한다는 사실이 나를 슬프게 한다. 단순히 살고 싶은 것이다. 어떻게 이런 것들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간단히, 단순히 살고 싶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나에게 주는 기쁨과 보람 또한 쉽게 포기할 수도 없지 않은가?

pc box가 하나씩 하나씩 망가져가며 사라지고 있지만 아직도 적지 않은 수의 그런 iron box에 시간을 쏟고 돈을 쏟고 있는 것.. 성모님은 어떻게 생각하실까? 이런 것들.. 과연 세속적인 것일까요? 이런 것들이 성모님의 사업에 도움이 될 수는 없을까요?

Jubilee of Mercy at Monastery

(Extraordinary) Jubilee of Mercy, (특별)자비의 희년 喜年 2016년 (2015년 12월 8일 부터 2016년 11월 20일까지) .. 작년 말에 교황 프란치스코  Pope Francis 께서 발표했던 것, 올 들어 가톨릭 교회와 신자들의 ‘화두 話頭 talking point’ 가 되었다. 처음에 이 ‘뉴스’에 접했을 때 나는 그저 덤덤하기만 했다. 그렇게 관심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자비의 희년이 도대체 무슨 뜻인가, 그것이 어떠한 의미가 있고 나와는 어떤 상관이 있는 것일까?

솔직히.. 몇 년 동안 ‘혼신을 다해서’ 나는 ‘한때 거의 버렸던’ 가톨릭 믿음을 찾아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고 이제는 자신까지 얻었다고 조심스런 안심까지 했지만, ‘이런 생소한 말’들에 접하며 다시 ‘나는 역시 아직도 무식하구나1‘ 하는 탄식이 저절로 나옴을 느낀다.

어디선가 들어보았는지 확실치 않은 이런 ‘희년’이란 말도 그렇고 게다가 ‘자비의 희년’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거기다 ‘전대사 全大赦 indulgence’를 받을 수 있는 것이라고.. 모두 들어보았던 단어들이지만 확실한, 자세한 의미는 사실 나는 하나도 모르고 있었다. 언젠가 어떤 글, 사진에서 고 김수환추기경 사진의 설명에, ‘2000년, 대희년 great jubilee 의 추기경’이란 말을 기억한다. 이 ‘대희년’이란 또 무슨 말인가? ‘큰 희년’이란 말인데..

이러한 나의 ‘교리, 전승, 가톨릭 신심 문화에 무식한 배경’ 속에서 올해 ‘진짜’ 희년의 소식을 코 앞에서 접한 것이다. 어쩔 것인가? 예전처럼.. 속으로 ‘아~ 그렇구나..이런 것이 있었구나~’ 정도로 끝날 것인가.. 아니면 ‘이것들이 무엇인가, 더 늦기 전에 한번 알고나 죽자’하고 ‘무조건’ 덤빌 것인가? 결과적으로 근래2 나의 mottos가 된 ‘It’s now or never, don’t think twice, don’t look back‘를 다시 한번 발동해서 나는 관심을 갖기 시작하고 알아보는 (study) 노력을 하는 과정을 거치게 되었고, 그 노력의 백미 白眉 는 3월 14일, 화창하고 써늘했던 조용한 월요일 우리 “자비의 모후” 레지오 단원님들(2쌍 부부 포함)과 함께 방문했던 아틀란타 교외 Conyers에 있는 Holy Spirit Monastery ‘자비의 문 doors of mercy‘ 통과에서 이루어졌다.

 

Conyers 수도원 '자비의 문'

Conyers 수도원 ‘자비의 문’

 

이번 우리들의 ‘Conyers trip 쾌거’는 사실 우리 자비의 모후 레지오 쁘레시디움차원 ‘공식 활동’의 이름으로 이루어졌지만 대다수의 찬성에도 힘을 입은 것이어서 더욱 의미가 새롭다. 또한, 이번 기회에 나는 지금 우리에게 다가온 자비의 희년, jubilee of mercy의 반포배경과 그 이전에 있었던 크고 작은 희년 들의 역사적 배경도 자세히 알게 되었다. 또 하나의 ‘무식 ignorance stupid point’가 사라지는 기회가 되었다.

 

평화스러운 수도원

평화스러운 수도원

 

이번의 자비의 희년은 Extraordinary라는 수식어가 붙는데, 그 이유는 정기적으로 25년마다 찾아오는 희년과 달리 특별하게 제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 특별 자비의 희년은 로마 바티칸 만이 아니고 전세계적으로 각 교구마다 지정된 성전, 역사 깊은 성당에 ‘자비의 문’이 설정이 되었다. 이 자비의 문을 통과하면 전대사 全大赦를 받을 수 있는데 부수 조건은: (1)  교황님의 지향기도, (2) 고해성사, (3) 영성체, (4) 죄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함, 등이다.

나는 이제까지 이런 ‘교황이 선포하는’ 전대사 같은 것에 큰 의미나 흥미를 느낀 적이 사실 없었다. 솔직히 핵심 교리적인 것 빼놓고는 믿어지지도 않았던 것이 솔직한 고백이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교리의 한가지는 믿고 다른 것은 안 믿는다는 것 cafeteria Catholic 은 어불성설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믿으려면 다 믿고 안 믿으려면 차라리 믿는다고 ‘까불지 말라’는 뜻이다. 이것이야 말로 ‘무조건’ 믿는다. 전대사를 받는다면 그야말로 이제까지 ‘쌓였거나, 남아있는’ 나의 죄는 모두 없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간단하다.

생애 처음으로 전대사를 받은 우리들, 반응은 확실치 않았지만 우리는 조금 남들과 다른 ‘양도’를 하였다. 전대사를 남에게 주어도 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는데 이번에 알게 되었다. 나는 돌아가신 어머님께 양도를 하였고 연숙은 작년에 선종하신 배 베로니카 자매님께 양도를 하였다. 결과적으로 나와 연숙은 우리 자신이 전대사를 못 받은 셈이 되었나.. 하지만 상관이 없다. 이것이 우리를 더 기쁘게 한 것이니까…

3월의 어느 평화스러운 월요일, 신앙과 사명감으로 뭉친 레지오 단원 그룹이 이렇게 자비의 해에 선포된 자비의 문을 ‘통과’ 하려고 유서 깊은 Conyers의 수도원을 방문한 것,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것이다. 정오에 있는 수도자들의 기도의식에도 참여를 했고, 준비해 간 음식으로 한적한 곳에서 점심식사를 즐긴 월요일 하루, 너무나 좋았다.

  1. 나 말고도, 이런 가톨릭 전통, 신심들에 무식한 교우들 참 많이 있을 것이다.
  2. 최소한 6년 전부터, 특히 레지오를 시작하면서부터..

Growing pain

Growing pain, size matters, evolution, exclusive, divide & conquer, tribalism.. 이런 말들이 머리 속을 맴돌던 (마리에타 2) 구역모임이었다. 중대한 논의와 결정이 필요하니 ‘꼭’ 참석하라는 ‘신 新 구역장’ 클레멘스 형제의 말을 상기하면서 참석을 한 모임이라 조금은 기대, 회의, 우려, 걱정 등이 교차하는 시간을 예상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아주 시원스럽고, 무언가 희망적인 생각을 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이날 구역모임의 특이한 점은 ‘잔칫집,상가집을 연상케 하던’ 식사와 술 마시는 시간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아주 ‘가벼운 스낵 류’와 술 맛이 ‘거의’ 안 들어간 음료들.. ‘지지고, 볶고, 부어라 마셔라’ 하던 분위기가 아주 차분하게 가라 앉은 이 모습은 사실.. 믿을 수가 없는 모습..속으로 ‘자신 없다던’ 구역장.. 거침없이, 필요하고 기대하던 agenda를 밀어 부치는 것을 보고 ‘당분간’은 이 모임에 큰 문제가 없겠다는 안도감마저 들었다.

결과적으로 구역문제 중 제일 심각한 ‘불어난 덩치’ 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조금 쉽게 manage할 수 있는 반쪽 크기, 둘로 나누자는 것으로 ‘표결’이 났다. 본당의 ‘사무, 행정적 문제’를 간단하게 하기 위하여 현 구역 system은 그대로 두고 ‘반 공식적’으로 1반, 2반으로 나누는 것이다. 사실 이 방법이 제일 쉽게 이행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 되었다.

나누는 방법과 절차가 신경이 쓰였지만, 우선 ‘투표’로 결정이 났기 때문에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다리를 건넌 셈인데.. 이것은 분명히 ‘진화적’인 변화라고 볼 수 밖에 없고, 사실 왜 ‘문제가 되기 전’에 이런 결단을 못 내렸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몇 년간 ‘미친 듯이’ 불어난 덩치를 속수무책으로 보고만 있었던 것인가. active하게 참여를 못한 우리는 사실 할 말이 없지만.. 한가지 의문은..어찌해서 이 ‘조용하고, 평화스럽고, 한가했던 동네’에 이렇게 사람들이 들어오는가.. 하는 것이지만.. 알 수가 없다.

우엉 차 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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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엉 차, 언젠가 이 말을 들어보았다. 우엉으로 만든 차 茶. 그런데 우엉이 확실히 어떻게 생긴 것인지도 모르고 솔직히 본 적, 먹어 본 적도 없다. 이것이 우리 식탁에 등장한지 얼마나 되었나, 아마도 한 달 정도가 넘었을까? 그러니까 근래 들어서 ‘건강식품’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연숙이 어디에선가 (분명히 인터넷) 듣고 보고 구한 것이고 이것을 ‘우려서’ 차 비슷하게 만들어 마시기 시작한 것이다.

효능 같은 것은 잘 모르고 그저 식사 후에 물 대신 맛이 괜찮기에 마시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조금 우리를 놀라게 한 것이다. 대부분 인터넷에서 이런 것들을 과대 보도하거나 선전을 하는 것을 누가 모르랴마는 우리가 직접 마셔보고 기대치도 않은 효과를 보고 나서, 모든 것들이 다 과대 보도는 아니었구나 하는 미안한 심정도 들게 되었다.

이것을 마시기 시작하고 나서 우리들의 irregularities  (변비의 고상한 표현) 문제가 거의 하루아침에 바뀐 것이다. 며칠 동안 화장실에 가지를 않던 것이 거의 하루에 한번씩 가는 것이다. 왜 그럴까? 우엉 차의 영향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물론 이것도 시간이 지나면 몸이 적응을 해서 효과는 분명히 떨어질 것이지만, 다시 끊고 시작하는 등 변화를 주면 다시 몸이 적응을 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아는 사람) 거의 효과가 없었다고 해서 이상하게 생각은 했지만 아마도 우엉을 말리거나, 잘게 써는 방식 등이 우리의 것과 다른 것 같았다. 아마도 그 차이 때문인가, 아니면 체질에 따라서 다른 것인가.. 알 수 없다. 이것도 그러니까 한방재료, 한약에 속할 것이고 사람마다 다 다를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다행히 우리, 특히 나는 이것으로 몸이 가벼워진 듯 느껴짐은 물론이고, 가벼운 치질의 공포에서도 벗어날 수 있겠다는 희망도 생긴다.

7 Daffodils, 봄은 어디에..

out backyard daffodil

out backyard daffodil

 

올해도 과꽃이 피었습니다.. 봉숭아 꽃, 나팔꽃, 분꽃.. 어렸을 적에 나의 방 앞 뜰에 신나게 피어나던 꽃들을 잊고 산 지가 반세기가 훨씬 지나가며 인생의 황혼기에 다시 그런 ‘신비의 모습’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참 신기하다.. 어떻게 ‘그런 것’들이 눈에 다시 보이게 되는 것일까?

기계적, 강제적으로 일년 사시사철 꽃을 보고 과일을 먹는 요상한 세상에 익숙해져서 더욱 봄의 꽃들은 의미가 심장하다. 올해도 어김없이.. 어김없이..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것들, 아침미사 (car) drive길에 연숙의 ‘꽃에 대한 자세한 논평’을 들어야 했다. 특히 2월 달에 ‘처음’으로 선을 보이는 꽃들은 그녀를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 넣고 나는 옆에서 안 들을 수도 없지만 과히 나쁘지 않은 자연공부를 하게 되기도 한다.

봄을 알리는 1번 타자가 바로 수선화.. 신기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수선화.. 그 이름부터 신비롭다. 수선.. 수선화.. 물에 관련되었나? 그렇다. Narcissus와 나르씨시즘(자기도취)의 유래도 이 꽃이 관련되어 있지 않은가? 1960년대 초, Brothers Four의  folk hit, Seven Daffodils 같은 추억의 folk song도 회상이 되고.. 을씨년스러운 2월의 겨울 날씨에도 봄의 모습을 선을 보이며 고개를 갸우뚱하는 모습이 그렇게 그렇게.. 이런 삼라만상, 자연의 섭리를 어떻게 받아들이며 겸허하게 보존하고 가꾸어야 하는가는 Pope Francis의 2번째 encyclical 회칙, Laudato Si (부제: On Care For Our Common Home, 자연환경보호)  를 보면 얼마나 커다란 신학적인 명제가 곁들여 있는지.. 알 수 있다. 자연, 환경이..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는 사실이 다시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고 이런 생각의 고리를 일깨워준 ‘가냘프지만, 강건하게 보이는’ 수선화.. 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내년에도 나도 너도 같은 모습으로 볼 수 있게 되기를..

 

Vincent Van Gogh's rendition of daffodils

Vincent Van Gogh’s rendition of daffodi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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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others Four – Seven Daffodils

 

 

꽃밭 속에 꽃들이..

Where have all the flowers gone?

Where have all my flowers gone?

 

꽃밭 속에 꽃들이 한 송이도 없네.. 양희은, 김민기의 ‘젊은’ 목소리가 회상되는 노래 구절이다. 없는 꽃을 기다리는 이 곡은 분명히 정치적 angle을 내재한 것이겠지만 현재 나의 꽃밭에는 멋진 꽃들이 만발함을 있음을 느낀다. 내가 꽃밭 속에 앉아 있다는 표현은 비유적으로 여자, 여성들, 그러니까 ‘자매님’들 속에 있다는 뜻이다.

인생의 황혼기에 다다르며, 지나간 세월을 돌아다보니 과연 나의 집안이 꽃밭이었다. 나 자신의 family가 생기기 전부터도 나는 100% 꽃밭 속에서 자란 셈이다. 할아버지는 물론 삼촌이나 아버지가 안 계신, 외롭기만 한 외아들(父先亡 單代獨子), 남자 친척도 거의 없이 6.25 동란 와중에 자라난 세대.. 거리에 나가 앞뒤를 보아도 확실히 남자보다 여자가 많았던 시절, 젊은 남자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만고  萬古의 역적, 김일성 개xx 와 싸우다 죽고 불구자가 되고..

아버지 삼촌 오빠 등 남자가 없던 가정이 ‘거의’ 정상이던 그 시절에 자란 나의 주위는 모두 엄마, 아줌마, 누나, 게다가 가난에 시달려 시골에서 올라온 ‘무단 상경’ 식모 누나들.. 그러다 급기야는 훗날 내가 ‘만든’ 가족들 조차도 모두.. 여자들.. 와~~ 이러니 내가 꽃밭에 앉았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다 보니 ‘이성 異性’으로 느끼는 어떠한 종류의 감정들도 많이 둔화가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가까운 곳, 나의 가정의 이런 꽃밭과는 대조적으로 사회적으로 나의 직장생활은 지금보다 훨씬 보수적인 ‘남성적’인 engineers들의 환경들이었다. 지금은 많이 여성들에게 개방이 되어가고 1 있지만 당시에는 거의 여성을 찾을 수 없었던 그런 곳 중에 하나가 기술직이었다. 이런 대조적인 환경들을 무의식적으로 왔다갔다하며 살았지만 결국은 말년에 ‘별 수 없이’ 다시 ‘가족의 꽃밭’ 속으로 돌아오게 되어서 현재에 이른다.

하지만, 거의 기적적으로, 비록 천천히 진행이 되긴 했지만, 나의 coming home (to church & faith), 신앙적인 귀향은 뜻밖으로 ‘다른 종류’의 꽃밭을 선사해 주었다. 건전한 신앙적 믿음으로 살려고 노력하며 또한 그렇게 살아가는 ‘멋진’ 자매님들의 꽃밭이었고2 그것은 너무나 신선하게 내 인생 마지막으로 異性적 여성을 재발견 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현재 나의 꽃밭에 있는 꽃들은:

  1. 거의 다수가 나보다는 인생을 덜 살았지만 충분한 경험을 가진 나이이고..
  2. 대부분 그들의 신앙심의 깊이나 경험, 경륜은 훨씬 선배들이고..
  3. 절대 소수 minority인 나를 거의 차별하지 않은 듯 하고..
  4. 나를 opposite-gender 의 angle로 보는 듯 하지도 않는 듯..

 

결론적으로 그들, 꽃들은: 비슷한 세계관, 내세관, 가치관을 가진 ‘진정한 친구’로 나를 대한다는 사실을 5년 정도의 intensive한 경험을 통해서 터득하게 되었다.

내가 현재 경험하고 있는 것들의 의미는 과연 무엇인가? 우선 참 인생이란 것.. 예측하게 힘든 숨은 즐거움이, 찾으려고 노력만 하며 어디엔 가에 숨어 있다는 놀라운 사실. 꽃들과의 스스럼없는 친교와 대화가 이렇게 쉽다는 사실은 나를 더욱 놀라게 한다. ‘성숙한 나이’ 탓도 있겠지만 사실은 ‘비슷한 생각, 습관, 나아가 가치관’을 가졌고 가지려고 노력한다는 사실이 이것을 가능하게 만든다고 믿고 싶다.

 

 
Best Rendition: Kingston TrioWhere Have All the Flowers Gone?

  1. 어떤 것들은 조금 웃기는 현상이지만..
  2. 이 post의 직접적인 동기는, 어제와 오늘 계속 함께했던 ‘꽃’들과 가졌던 impromptu dining 에 있었다.

무언가 안정이 안 된듯한..

¶ 오늘은 무언가 안정감을 못 느끼는 날로 끝나는 모양이다. 가끔 이런 날이 있긴 하지.. 하루의 반 정도는 무언가 의욕적으로 할 것들을 list로 만들며 모두 ‘끝낼 것’ 같은 희망에 쌓였다가.. 갑자기 일들이 틀어지고 예상을 빗나가는 그 사실에 화가 나며 의욕이 떨어지고 끝내 ‘아무 것도 못한 하루가 되었다’ 라는 실망감이 젖는 그런 것이다.

이런 pattern들은 대부분 computer를 가지고 ‘놀다가’ 생기는 것이 태반이다. 최소한 나에게는 그렇다. 갑자기 많아진 pc들을 만지며 앞으로 나에게 필요한 home system을 구상하는데.. 결국은 $$$을 최소한으로 절약하는 쪽으로 나의 모든 노력이 집중되고.. 그것도 사실 나를 우울하게 하는 것 중에 하나가 되었다. 사실은 이런 것들이 나의 자랑이 되어야 하는 것인데.. 나는 그런 자부감을 항상 무시하는 것 같다.

오늘은 며칠 전부터 손에 불이 붙기 시작한 soldering으로 pc power supply의 SATA connector 를 assemble해서 얼마 전에 ‘죽어버린’ home file server FS  대신 임시로 그 역할을 하게 된 나의 dadpc를 다시 찾기 위해서 kitchen-pc를 개비해서 FS로 쓰려고 하던 계획이 급속도로 진행되었지만 여기저기서 예기치 않던 문제들이 현재 나를 괴롭히고 있다. 예상이 몇 시간이면 끝날 듯하던 것이 하루 종일 나를 놓아주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나를 괴롭게 한다.

결국, 오늘 해야 할 묵주기도를 놓치게 된 것이다. 그것이 나를 조금은 쳐지게 한다. 나도 참 많이 변했다. 묵주기도 20단 이상을 못한 것을 가지고 그렇게 신경을 쓰는 나 자신을 보며.. 참 나.. 많이 변했다는 놀라움이다. 좋은 것이다. 그것이 좋은 것이다. 나를 현재 살려주고 이끌어주는 것이 바로 묵주기도, 성모님이기 때문이다.

 

¶  최근에 들어서 우리의 레지오 활동은 예전보다 조금은 더 발전을 했다고 할까.. 우리 생활의 가장 중심적인 위치에 이 활동이 있고 거의 모든 생각과 행동이 이곳으로부터 나올 정도가 되었다. 솔직히 우리는 활동을 할 수 있는 한 이곳에서 못 벗어날 것 같다. 아니 못 벗어나고 싶기도 하다. 이런 우리의 생활에서 느끼는 보람과 평화는 정말 경험을 해 보지 않은 사람들은 실감을 못 할 것이다. 내가 나 자신의 변화를 보고 내가 계속 매일매일 놀라는 것.. 누가 상상이나 할까?

이런 생각도 요새 나의 머리에서 맴도는 것이다. 현재 내가 레지오를 비롯한 ‘신앙생활’에서 대부분 대하는 사람들은 99% 이상이 자매님들이라는 사실.. 지난 성탄 고해성사에서 결국은 신부님께도 말했지만.. 혹시 내가 자매님들과 이렇게 어울리는 것이 다른 생각이 있어서 그렇지 않는가.. 나도 모를 지경이 되었다. 이제는 남자들 보다 여성들이 더 편해지고.. 대화도 잘 되고.. 심지어 즐겁기까지 한 것.. 바람직한 것인가? 혹시 이상한 것은 아닐까? 고민도 많이 했지만 결론은 사실.. 내가 사람들을 대부분 좋아하게 되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고 이것도 그런 것 일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확실히 내가 ‘사람 자체’를 좋아하게 된 것이고 만나는 대부분이 자매님들이니.. 그들도 ‘좋아하게’ 된 ‘인간’들이기에.. 참.. 세상은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어쩌다 내가 이렇게까지 변해가고 있는 것일까? 성모님.. 저를 올바른 길로 이끌어 주소서..

Lunch at Don Quixote

돈키호테 점심식사Atlanta Metro, 도라빌 Buford Highway Korea town,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Don Quixote 돈키호테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이곳은 원래 잘 알려진 일본식 분식점이었고 전통적인 돈카츠를 위시한 일본식 경양식 전문이었지만 지금은 owner가 바뀌어서 주문형 도시락을 전문으로 하는 ‘가벼운’ 한식점으로 바뀌었다.

위치가 별로 맘에 들지 않아서1 우리는 전혀 근처에도 가 본적이 없었는데 얼마 전에 바로 그곳에 가서 점심을 먹게 된 것이고, 그것도 이(요한) 주임신부님과 함께였다.

이날 늦은 아침에 우리(부부)는 L 바울라 자매님의 요청으로 이 신부님을 모시고 아틀란타 공항 서쪽에 위치한 어떤 깨끗한 suburban house로 한 시간여를 drive해서 S 안나 자매님 (할머님) 병자성사를 주러 갔었고 성당으로 다시 돌아오면서 이곳에 들려 같이 점심식사를 하게 된 사연이다.

‘비상적인’ 성사 (sacramental emergency)를 철저히 챙기시는 우리 주임신부님, 사실 확인여부를 떠나서 요청이 들어오면 거의 무조건 나서시는데.. 그 중 99%는 정말로 비상일 텐데.. 이번의 case는 나머지 1%에 속한 것으로 ‘다급한 비상이 아닌 것’으로 판명이 났다. ‘물어 물어’ 찾아간 곳.. 우리가 미리 들은 바에 의해서 예상한 것은:  “거의 죽음을 앞에 놓고, 아무도 정성껏 챙겨주는 사람이 없는..외로운 삶을 마감하는..” 등등의 scenario를 무언중에 생각하고 갔지만 놀랍게도 우리가 본 것은 그런 것과는 너무나 거리가 있는 것: 반짝이고 널찍한 저택에 ‘어떤 할머니들’보다 더 수려하고 건강하게 보이시는 분이 우리를 맞아준 것이다. 중간에 서서 ‘병자성사’를 주선하신 자매님.. 겉 표정은 잘 모르겠지만 솔직히 당황하셨으리라.. 곧 숨이 넘을 듯한 절박감과는 서울과 부산 정도로 거리가 멀었다.

바울라 자매님 왈.. 이 자매님과 전화만 하면 ‘너무 외로워서 오래 못 살 것 같다.. 신부님 좀 모시고 와라..’ 고 하신다니..  신부님 표정은 잘 모르겠지만 솔직히 예상 밖인 상황에 조금은 ‘실망 아닌 실망’일까.. 말이 별로 없으시다. 하지만 기왕 간 김에 전대사를 위시한 병자성사를 확실하게 주시고 오게 되었으니.. 그 S 안나 자매님 안심하시고 하루하루 보내시게 되었다. 사실 우리도 중간에 서서, 진실 확인 여부를 떠나서 조금은 바쁘신 신부님 시간을 빼앗은 결과에 잘잘못을 떠나서 점심식사가 생각보다 덜 맛있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럴 때.. 우리가 배울 것은 무엇인가.. 하나도 없다.. 누가 ‘신부님이 필요하다’고 하면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모시고 가야 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는 것이니까.

  1. 바로 근처에 adult entertainment shop이 도사리고 있는..

Love You, Tobey..

My favorite moment in cold, damp Winter February

My favorite moment in cold, damp Winter February

 

지난 12월 초에 12살이 된 우리 집 강아지, 내 ‘아들’ Tobey녀석.. 이제는 나보다 더 늙은 나이가 되었지만 비교적 건강하고 보기에는 아직도 어렸을 때의 모습.. 강아지, 바둑이 정도로 보인다. 다시 물끄러미 서로를 바라본다.

하루 종일 사사건건 이곳 저곳, 심지어 화장실까지 따라오는 나의 그림자다. 자는 시간을 빼고는 그 녀석의 눈은 나의 눈에 고정이 되어있다. 처음에는 아주 귀찮았고, 성가셨지만 고칠 수 없는 버릇임을 알고 그대로 지낸 지가 몇 년이 되어가나? 생각한다. 만약 이 녀석이 없어진다면.. 생각하기도 싫지만 12살이라는 나이가 그런 생각을 지울 수가 없는 것이다.

사람의 장례식은 이제 익숙해졌다고 볼 수 있지만 나의 분신 같은 ‘말 못하는 동물’과의 영원한 이별의 준비가 덜 된 것을 절감하며, 괴롭기까지 하다. 요새 주위에서 오래 정든 pet animal (주로 개와 고양이들) 들을 떠나 보내며 겪는 stress와 ‘의외적인 고통’에 대한 이야기를 보고 듣고 나는 그들의 심정을 나의 것처럼 실감 한다. 아마도 pet과 인연이 없는 조금은 ‘냉정하고, 이기적인 사람’들은 정말 이런 것들을 이해할 수가 없을 것이다. 이 pet들의 인간들에 대한 정과 사랑을 조금이라도 보고 느끼면 조금은 이해할 것인가?

평균 수명의 경고를 생각하며 오늘도 이 ‘귀찮은 녀석’과 우리는 어제까지 눈을 맞출 수 있을까.. 나에게 soul이 있다면 이 녀석의 soul은 어떤가.. 그 soul도 육체를 초월하는 transcendent state가 있을까.. 이 녀석과의 작별은 absolute한 것일까, 아니면.. 춥기만 한 2월의 한 때, 따뜻한 체온을 포근하게 느낄 수 있는 오후…

Very Early Tax Return

thank you freetaxusa, nice job!

thank you freetaxusa, nice job!

 

2월 17일에 Federal Income Tax Return을 끝내 버렸다. 아마도 기억에 이렇게 일찍 한 것은 처음이 아닐까? 대개 3월 중순이 지나고, 심지어는 4월 14일 저녁 (그러니까 마지막 순간)에 집 근처 post office (before Internet era)에서 줄을 서서 tax party의 분위기를 구경한 적도 있었으니.. 참 그 동안 나도 부지런해진 것인가? 하지만 이렇게 간단히 쉽게 끝낼 수 있는 것은 우리의 financial situation이 그 정도로 간단해진 것을 뜻하기에 내가 더 부지런해진 것과는 상관이 없을 것이다.

그 동안 비록 우리는 ‘진짜’ business는 안 했어도 연숙의 1099 type tax return 때문에 이 맘 때면 골치를 썩히곤 하기도 했다. 그 때에는 내가 비록 tax pro는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tax document를 꼼꼼히 읽고 해서 나름대로 ‘감’을 잡고 있었지만  요새는 web-based tax return을 하게 되면서 거의 ‘자동화’가 되어 버려서 ‘글자만 잘 읽으면’ 모든 것이 큰 문제없이 끝난다. 지난 5년 동안 나는 freetaxUSA.com으로 return file을 하는데 다른 곳과 비교는 안 해보았지만 내가 쓰는 데는 거의 문제가 없었다. 우체국 갈 필요도 없고, return check 같은 것도 mailbox에서 도난 당할 염려도 없다. 모든 것이 online인 것이다.  

ObamaCare가 들어오면서 조금 더 복잡하게 되기도 했지만 그것도 더 시간이 들지는 않았다. 이렇게 간단한 이유는 딱 한가지.. 우리의 (taxable) Income situation이 최소한으로 간단해졌다는 것.. 좋은 것인지.. 불쌍한 것인지.. 솔직히 우리들도 잘 모른다. 내년은 어떨까.. 아마도 조금은 더 복잡한 situation이 되지 않을까.. major capital spending이 필요하게 될지 모르는.. 그것도 이제는 더 이상 미룰 수도 없는 듯하니..

Einstein Revolution, HarvardX

HarvardX, Einstein Revolution

HarvardX, Einstein Revolution

Einstein 시대적 배경은 뽀앵카레 (프랑스 수학자) 의 지도로 부터 시작된다.

Einstein 시대적 배경은 뽀앵카레 (프랑스 수학자) 의 map으로 부터 시작된다

 

2월 16일은 기다리던 HarvardX  online course, EMC2x @edX,  MOOC1  The Einstein Revolution이 시작되는 날이다. 미리 preview를 보긴 했지만 그래도 호기심 가득한 어린이 같은 심정으로 기대한 것이다. 이 course 는 Einstein의 상대성이론에 관한 것이지만 절대로 이 이론의 science 자체를 다룬 것이 아니고 이 ‘신비에 가까운 혁명적’인 idea의 역사적 의미와 인류사에 미치는 영향을 철학적, 역사적인 배경과 함께 폭 넓게 다루는 course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역사적 배경으로 본 Einstein, 철학적인 시대적 접근은 흔히 접하기 힘든 분야이다. 예전 같으면 이런 ‘심각한 과학적 이론’을 알려면 수학적으로 접근하지 않으면 거의 불가능했었다. 수학을 떠나서 설명을 하면 잘못하면 완전히 ‘신화’같은 결과를 얻기도 했었던 이론이기에, 나도 어렸을 때 상대성 이론에 대한 많은 공상과학적 만화 같은 이야기로 잠을 설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순진하던 시절 이후 인생, 삶의 십자가를 지면서 이런 언뜻 보기에 irrelevant 한 것은 관심에서 사라지고 조금 삶의 십자가가 가벼워질 무렵에 이것은 나의 관심을 다시 받게 되면서 이렇게 ‘쉽게 공부할 수 있는’ format으로 나에게 다가온 것이다.

몇 년 동안 꽤 많은 MOOC course를 ‘청강’했지만 결과는 항상 불만.. 언제나 course schedule을 따르지 못하는.. 내 탓이지만.. 하지만 이번 것은 어떨까? 지금 시작된 사순절의 깊은 의미와 배경은 Quantum Mechanic 과 더불어 이 상대성 이론의 진정한 의미와 혹시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둘 다 infinite (무한)에 도전하는 인간의 도전과 발상이므로 관계가 있음은 자명한 것이 아닐까? 그것이 나의 요새 나의 최대 관심사가 되었다.

  1. Massive Online Open Courses

우리는 싼 wine을 마신다

우리는 ‘제일 싼’ wine을 마신다. 그것도 불평 한마디 안 하고 계속 그곳 supermarket에서 사서 마신다. 제일 싼 것으로.. 우리는 그런 것에서 궁합은 기가 막히게 맞는 모양. 고급..같은 것 거의 생각조차 안하고 사는 우리들.. 어떨까나? 가상하다고 할까 아니면 불쌍하다고 할까? 별로 생각조차 안 해서.. 모른다. 가상한지 불쌍한지 조차도. 하지만 지금 이 쓰기도 하고 가볍기도 한  제일 싼 것을 마시며 문득 내가 조금은 불쌍하다는 생각도 해 본다. 지금은 그 흔한 눈물까지 눈가에 어리는 것을 느끼고 감상적인 꼴불견까지..

어머니.. 참 나를 지지리도 어려운 것 모르고 키우셨습니다. 그런 탓입니다. 어려운 것을 실감조차 못하는 지지리도 못난 자식으로 만드셨습니다. 엄마.. 정말..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왜 그렇게 키우셨는지 이유를 내가 어찌 모르겠습니까? 고마워요.. 엄마!!!! 엄마.. 당신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엄마 어디 있어요? 제가 엄마를 어디서 다시 볼 수 있어요? 이것만은 압니다. 제도 ‘죽어야’ 엄마를 볼 수 있다는 진리를.. 기다립니다. 그 때가 언젠가 오겠지요.

나는 과연 얼마나 더 살까? 분명히 나는 이제 죽어도 큰 여한이 없다고 믿고, 말하고 있지만 과연 그럴까? 지금 내가 더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그런대로 이제 죽어도 나의 사랑하는 가족들은 예전처럼 그렇게 걱정을 안 해도 된다는 사실이 그렇게 나를 행복하게 한다. 과연 그럴까? 내가 오늘 없어진다면 그래.. 연숙은 하나도 문제가 없을 것이다. 하느님을 굳게 믿는 그녀는 문제가 없다. 아이들도 잠시 슬퍼하겠지만 시간문제일 것이다. 자기들 엄마를 의지하고, 나중에는 엄마를 잘 보살필 것이다. 분명히 그럴 것이다.

하지만 내가 언제 세상을 뜰지 아무도 모른다. 하느님만이 아시는 것이다. 그때까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성경의 말씀대로, 하느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할 것이다. 어떻게 살다 가는 것이 제일 하느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일까? 나는 그것을 생각한다.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 어떤 ‘유산’을 남기고 가는 것이..

매일 매일을 살아야 하는 최선의 방법… 경제적인 것을 무시할 수 없다. 건강하게 살아야 남은 식구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다. 그러니까.. 나는 건강하게 살아야 한다. 운동을 하고 잘 먹고.. 건강한 모습으로.. 남을 위하며 사는 것이 제일 건강한 삶이다. 특히 나보다 덜 행복한 사람들을 위하는 것이 내가 따르고 실천하는 것이 예수님의 계명이다.

장례식과 선발식

¶ 장례미사 2월 12일, 금요일에 정말 난데없는 날 벼락 같은 장례미사를 참례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날 벼락일 듯 하다. 레지오에서 낯 익은 얼굴, A 자매님의 조카,  40세가 갓 넘은 ‘건강하게 보이는’ 젊은 형제가 급사를 한 것이다. 밤에 자다가 심장마비.. 와.. 이것이 날벼락이 아닌가? 놀란 것은 그 나이에.. 어떻게.. 알고 보니 평소에 심장에 지병이 있긴 한 모양이었지만 그래도 나이에 유언도 없이 간다는 사실은.. 무섭지 않은가? 사회적으로 잘 나가던 청년이 혼자 객지에 사는 것, 멋지게 보이기도 하지만 이런 류의 dark side도 있을 것이다.

자랑스럽던 아들을 그렇게 보낸 부모의 심정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알고 보니 이 부모님은 2년 전에 우리가 교리반 교사로 있을 때, 통신반 교리로 세례를 받은 분들이었다. 그의 아드님, LA 지역에 있는 큰 은행 지점의 부사장, 40세에.. 그러면 크게 성공한 아들이었다고 보아야 할 텐데.. 얼마나 자랑스러웠을 텐데.. 모든 조문객들 그런 생각 속에 잠겨있었을 것이고 우리도 마찬가지.. 만약 우리 두 딸이 ‘잘 나가는 직위, 직업’으로 $$을 억수로 벌면서 객지에서 ‘건강을 챙기지 못하고’ 살다가.. 이런 일을 당했다고 생각하면.. 너무나 가슴에 느껴지는 것이다. 무엇이 과연 잘 사는 인생일까? 40세면 별로 인생의 의미를 느낄 나이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먼저 살아가는 우리들이 그것을 일깨워 주어야 할 것인데.. 그러니까, true-north principle을 알면서도 그것을 따라가는, 그것이 쉽지 않구나.

 

¶ 선발식 Cobb Galleria Centre, 2016년 아틀란타 대교구 주관 예비자 선발식이란 것이 열렸다. 2년 전에는 다른 곳에서 한 이 행사에 나는 ‘교리반 교사 도우미‘로 참가한 적이 있었다. 그것이 작년부터 집에서 훨씬 가까운 이곳에서 열리고 있다. 올해의 예비자 수가 너무나 단출해서.. 미안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들의 꾸준히 신앙을 지킨다면 크게 상관이 없을 듯하다. 미사 중에 파견식을 하고 연숙은 그들과 먼저 성당을 떠나고 나는 꾸리아 월례회의에 단장 없이 참석을 하고 집에 먼저 왔다. 그리고 예비자 선발식이 끝날 무렵에 Cobb Galleria Centre로 가서 연숙을 데리고 왔다. 웃기는 것은.. 그곳을 찾느라 촌놈 행세를 했다는 사실.. 미리 지도를 공부한 것이 우습게 되었다. 한 번도 그곳엘 가 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간과한 나의 실수.. 또 잊었다.. GPS가 있건 없건 이놈의 동네는 절대로 처음 찾아가는 곳은 장담하지 말라는.. 경험에 의한 교훈을..

 

Ash ash.. Wednesday, 2016

Ashes-2016

 

2월 10일, Ash Wednesday 2016 올해 재의 수요일이 슬그머니 다가왔다. 예년처럼 Holy Family CC 아침 9시 미사엘 가서 이마 위에 재의 십자가를 받고 왔다. 올해는 느낌이 사람이 예년에 비해서 더 많아진 듯 했다. 느낌인가.. 사실인가.. 무언가 가톨릭 교회의 근래 움직임이 활발해 진 것은 아닐까? 냉담자를 교회로 돌아오게 하려는 대교구의 운동, 물론 바티칸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이지만.. 전 같지 않게 나는 이런 움직임에 귀를 기울이고 싶다. 내가 변했다는 증거 중에 하나일 것이다.

올해의 40일은 어떻게 보내나.. 매년 생각하는 것들.. coffee를 줄이자.. 잠을 줄이자.. 같은 것은 이제 ‘촌스럽게’만 보인다. 더 깊은 것을 찾고 싶다. 눈에 안 보이는 것, 나의 깊은 속 마음을 들여다 보고 싶고, 더 높은 것으로 바꾸고 싶고.. 어떻게? 2년 전의 사순절, 1년 전의 사순절과 비교하기도 한다. 2년 전.. 다급하지만 무언가 이루어 질 것, 성모님의 손이 나를 꼭 잡았다는 느낌 같은 것.. 결국은 그 해 9월에 모든 일들이 시작되었지 않은가? 하지만 그것들은 사순절에 시작되었다고 봐야 한다. 작년도 마찬가지.. 비록 첫 산은 넘었지만 두 번째의 미지의 산을 기다리던 사순절이었다. 다급한 것은 큰 차이가 없었다. 올해는 어떤가? 성모님의 손에 끌려 (낯 가려운 표현이지만..) 두 번째의 산을 다치지 않고 넘었다. ‘그것’과 ‘저것’ basics들이 정말 그림같이 해결이 된.. 그런 기적의 성탄을 맞게 해 주셨다. 이것을 우리는 잊으면 안 된다. 홍해바다를 건넌 심정을 잊으면 안 된다. 올해의 사순절은 이런 배경으로 묵상을 해야 한다. 우리의 앞에 있는 산은 무엇이며, 그것을 맞는 의미와 사명은 무엇인가? 무엇을 하며 ‘그날까지’ 하느님 앞으로 갈 것인가?

두 번째 날리는 눈발

Backyard 시야를 가리는 태고의 눈발..눈발..

Backyard 시야를 가리는 태고의 눈발..눈발..

 

드디어 올 겨울에 와야 할 것이 드디어 두 번째로 아틀란타 지역에 찾아왔다. 지난 몇 년간 이것 때문에 고생한 것은 작은 개인역사에 남게 되었고 은근히 이것을 걱정하게도 되었지만.. 사람 심리는 묘해서.. 이것이 올 때쯤에 실제로 안 오니까.. 조금은 기다리게도 되었다. wintry mix.. ice storm같은 것들은 말만 들어도 등골이 오싹하게 되었어도 제 때에 못 보니까 조금은 섭섭한 것이다. 이것 사실 전형적인 ‘어린이 심리’가 아닐까? 이런 것으로 ‘비상사태’가 와서 내일 아침에 학교에 안 가게 되는 꿈.. 같은 기대감. 학교에 안 가도 되고, 직장에 안 가도 되는… 인생의 황혼기에 이런 것들은 간단히 말해서 깊이 쌓여가는 경험에 의한 향수 같은 것이다.

오늘 화요일, 도라빌 소재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에서 레지오 주회합이 있는 날.. ‘죽었다 깨어나도 빠질 수 없는‘ 모임이라 이날의 겨울 날씨는 항상 신경(차의 트렁크에는 비상도구를 가지고 다닌다)이 쓰이는데.. 왜 하필 이날 일기예보가 그렇게 애매한 것일까? 분명히.. wintry mix가 예보 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stay home하라는 말이 전혀 없으니까. 학교도 그렇고 직장도 그렇고.. Closing이란 말이 전혀 없다. 무언가 wintry mix가 내리는 것이 시간적으로 퇴근 후로 나와서 그럴 것이다.

집을 떠날 때부터 눈발이 나리기 시작했고, 우리와 비슷한 거리를 운전을 해야 하는 단원 실비아 자매, 무서워서 못 나오겠다고 연락이 왔지만 나중에 회합이 시작되자마자 ‘용감한 모습’으로 나타나서 우리를 기쁘게 했다. 올해, 오늘의 일기예보는 정확하였고, 우리가 다시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2년 전의 악몽이 서려있는 I-285 West를 달려서 집에 무사히 왔고, 거의 즉시로 다시 눈발이 내리기 시작하였다. 와~~ 이번의 예보 정확하구나.. 시간 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안 되는 때, 문제가 안 되는 양 정도 내린 셈이다. 집에 goal-in을 하고 푸근한 마음으로 창 밖을 보니.. 아름답게만 보이는 white stuff들이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한 때의 폭설에 대한 악몽을 제치고 잠깐이나마 시야를 완전히 가린 하아~얀 눈발은 1950년대 어린 시절, 서울 원서동에서 보던 그런 포근하기만 한 눈발을 다시 보는듯한 착각에 빠진 시간이 되었다.

Poor man’s lab bench

나는 현재의 집 saybrook court 에서 오랫동안, 25년 이상, 살면서 비록 나만의 공간, home office, study는 항상 가지고 있었지만 제대로 된 tinkering 용 lab-bench 같은 것은 한번도 가져본 적이 없었다. lab 역할을 하는 것은 그저 아무 곳에나 있는 work space, extra desk, table이 전부였다. 사실 lab역할을 할 만한 bench가 들어갈 공간이 없었다는 것이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현재 우리가 사는 집은 so called, traditional house이기에 더욱 그렇다. 모든 것이 ‘전원적, 아늑하고 조그마한’ 느낌을 주는 분위기와 방들.. 그 이후의 유행은 the bigger, the better 가 판을 치면서 지어진 집들은 전체 크기에 상관이 없이 모든 공간이 서로 연결이 되고 트여진 그런 구조가 standard가 되었다. 한마디로 ‘미친 듯이’ monster처럼 커진 공간으로 사람의 존재가 보잘것없게 보일 정도로.. excess of excess가 판을 치던 bubble craze 시대가 도래하고, 내가 그런 부류의 인간이었으면 아마도 그러한 널찍한 공간에 monster workbench를 놓아도 무방했을 듯하다.

 

poor man's personal electronics work bench

poor man’s personal electronics work bench

 

운명적으로 나는 현재의 ‘작은’ 공간에 만족하는 인간이었고, 현재도 그렇다. full-retirement 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책이 주로 있는 나만의 아늑한 공간에 어떻게 ‘고철이 즐비한’  lab-style 공간을 만들 것인가..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고 했던가? 아주 우연한 순간에 자그마한 lab-style work ‘bench’ idea를 얻었고 ‘순식간’에 만들게 되었다. 우리 부부의 bedroom에 쓰던 옛날 ‘고리짝’ 서랍장 drawer chest와, 이제는 모두 집을 떠나간 아이들이 어렸을 때 쓰던 desk hutch를 다시 recycle한 것이다. 크기가 정확히 도 잘 맞아 떨어지고 현재 나의 home office의 구석에 놓으니 크게 방이 작아 보이지도 않는다.

Basic setup, 시작은 간단했지만 진짜 문제는 내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electronic gadget stuffs junks 를 찾아서 버릴 것은 버리고 ‘남은 여생’에서 쓸 만한 것들을 정리해서 이곳에서 ‘갖고 놀 수 있게’ 만들어 놓는 작업.. 장난이 아니다. 한 달이 훨씬 넘어가고 있지만 아직도 junk들이 계속 나오니.. 언제나 끝이 날지도 모르고, 언제 ‘본격적’인 joy of tinkering & making 을 할 것인지 미지수지만 솔직히 말해서 너무 크게 ‘즐거움’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남아있는 세월과 시간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