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eld of dreams, trancending time & place, autobio in progress..

Ken

Come September……란 미국노래가 있었지. 멜로디는 금방 생각이 안 난다. 그리고 Try to Remember란 노래에도 9월이 나온다.  Try to remember the kind of September…… 아…… 또 지나가는 9월.. 이렇게 또 세월은 지나가는 건가.  별로 한 일도 없으면서 말이다.  아마도 이것저것 연결이 잘 안 되는 그런 잡스러운 것들을 조금씩은 했을 꺼다.  하지만 그것들이 제대로 서로 연결되는 것이 없는 게 내가 하는 일들의 특징이고 내 인생의 특징이고.. 나의 최대의 문제점이다. 이걸 나는 이렇게 애도하지만 사실은 잠재적으로 즐기고 있다고 생각도 한다.

 이번 이 blog은 처음으로 OneNote로 부터 출발을 시도한다. 그러니까 Word Press의 조잡한 editor를 쓰지 않고 이 powerful OneNote를 base camp로 쓴다는 말이다. 오래 전부터 생각은 했지만 나의 특유의 ‘생각만 하고 실행을 안 하는’ 그 골칫거리 덕분에 이제야 시도를 한다. 하지만 이렇게 늦게나마 하는 것이 또한 나의 특징이라고 할까.  참 나란 놈은 내가 생각해도 우습 기만하다.

 이것은 나의 home server의 My Little Corner(MLC) 의 blog에 Diary tag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하지만 9월 15일이 최근 것인데 제목이 “한 줄 이라도 쓰자” 이었다…… 후후후.. 보름 동안 한 줄은커녕 한자도 못썼지 않은가? 왜 이렇게 쓰는 것이 힘 드는 것일까? 나의 매일 routine이 나를 이렇게 만드는 것일까?  하지만 그 동안에 serony.com blog의 new entry를 썼는데 아직 upload는 못했다. 제목은 “아…재동학교” 이다. 오랫동안 머릿속에서만 맴돌던 것들을 정말 두서없이 썼다. 조금은 속이 후련했다.

 그 이후로는 사실 나의 머릿속은 이곳의 날씨로 가득했다. 작년의 정말 ‘즐겁던’ 가을 날씨만 그리며 기대를 했는데 정반대의 현실을 보게 되었다. 밤까지 계속되는 끈적거리는 날씨를 보내더니 결국에는 ‘장마 형’ 홍수까지 보게 되었다. 6월부터 시작되던 나의 날씨혐오증의 거의 터지기 일보직전 이었다. 그런 게 결국은 Mother Nature의 도움으로 그제부터 하루아침에 가을이 와버렸다. 조금은 어리둥절할 정도로 변화가 심했지.  나의 지금 사는 방식이 나를 이렇게 한 가지, 그것도 쓰잘 것 없고, 소용없는 것에 매달리게 하는 것일까?  한 마디로 내가 바쁘지 않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내가 직장생활을 할 때 이런 것들을 경험한 기억.. 거의 없으니까.

 연숙의 2009 Sonata의 license tag은 결국은 tag office에 가서야 받을 수 있었다. 예전의 기억만 의지해서 우편으로 오는 것만 기다리던 내가 조금 우습기도 했다. 이제 Sonata는 100% 연숙의 차가 되었다. 내 이름은 그것에 아무데도 없다. 조금 섭섭할까 우려했지만 반대로 기분이 좋다. 왜 그럴까?  또한 번개처럼 떠오르는 것..을 사고야 말았다. Arduino라는 Made In Italy embedded board인데 $30정도 이었다. 물론 작은 돈은 아니지만 이 정도로 나를 위로할 수 있는 것도 드물다. 언젠가는 깊게 가지고 놀 그런 고급 toy가 아닐까?

 그 동안 또 한 가지 routine이 된 것이 있다. 아침마다 Tobey walk을 할 때 cell phone으로 나의 Google Voice phone #로 전화를 거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나의 PIAF-GV  home pbx를 test하려는 것으로 시작이 되었다. 이것으로 전화를 하면 Ext 104 (@DADPC)의 voice mail로 연결이 된다. 그러면 maximum 3분 가량 이야기를 record할 수 있다. 이것을 거의 매일 하다 보니까.. 이게 일기처럼 느껴진다. 나의 목소리도 생각보다 초라하게 들린다. 조금 실망을 했다. 그리고 참 내가 말을 정말 안 하고 사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다. 이렇게도 말하는 게 힘이 든단 말 인가. 하지만 거꾸로 생각을 해 보면 이것을 매일 하면 ‘연습’이 되어서 조금 나아지지 않을까? 

지난 8월초에 구역교우 엄 형제가 귀국하면서 송별 구역모임에서 뜻밖에 guitar로 우리부부가 노래를 불렀는데.. 그걸 계기로 다시 guitar를 잡게 되었다. 물론 거의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조금씩 생각이 나는 걸 보고 조금 놀랐다. 하지만 나의 목소리는 완전히 갔다는 것을 알았다. 목소리를 거의 죽이고 살았지 않은가. 조금은 겁도 나고 해서 의도적으로 목소리를 돋운다. 밤마다 하는 묵주기도에서도 일부러 목소리를 높이게도 되었다.

 한 가지 good news라면 정말 우연히.. 조금은 계획적이기도 했지만.. 현재 쓰고 있는 Actiontec internet modem을 오래 전에 쓰던 Alcatel SpeedTouch Home과 거의 버리기 직전의 Dlink router로 바꾸어 보았는데…… 이게 그때부터 Internet speed가 눈에 뜨이게 빨라졌다는 것 인데… 이게 우연인지.. 정말 모르겠다. 그래서 요새는 web browsing이 조금은 즐거운 일이 되었다. 동기는 물론 router에 있다. QoS 가 VoiP에서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는데.. 그러려면 QoS router가 필요했다. 그래서 또 거의 돌발적으로 Linksys WRT54GL router를 사고 말았다. 이것은 embedded LINUX firmware를 쓰는데 open source QoS router firmware가 이곳 저곳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계획은 이것을 router로 쓰려는 것이다. 그러면 VoiP을 쓸 때 outgoing voice quality가 많이 나아질 수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래저래 조금 $$을 쓰고 말았는데…… 나도 excuse가 있다. 그 동안 allowance로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 올해는 yard work도 별로 없어서.. 더 그렇다.

매일 한 줄이라도 쓰자.. 라고 얼마 전부터 생각을 했다. 그저 또 ‘실행’을 ‘안’할 뿐이다. 나의 자유라고.. 안 하는 것도 나만의 자유요 특권이라고 생각을 했겠지.  이제 이곳이 나의 세계, 나의 우주에서 정말 유일한 마음의 낙서장, 휴식처, 상담자가 되었다. 내가 유일하게 가식이 아닌 진실을 말할 수 있는 곳, 그게 유일한 위로다.

가을 같지도 않은 ‘엉터리 가을’로 접어든다. 정말 올해 여름으로 시작되는 ‘개 같은’ 이곳 날씨 이렇게 싫어 해본 적이 있을까? 날씨 가지고 불평하는 게 과연 올바른 것인지 모르지만 내가 탓할 수 있는 것 몇 가지 중에 가장 인기가 많은 곳일 게다. 한마디로 ‘개 같은’ 날씨다. 나를 괴롭힌다고 계속 생각하게 되었다. 짜증이 난다. 요새는 그 발악이 최악에 달해서 간밤에는 70도의 끈끈한 밤 같지 않은 밤이 되었다. 하지만 9월도 중순으로.. 생각에.. 첫 ‘추위’도 며칠 안 남았을지도.

정말 결과를 추적할 수 없는 ‘일’ 같지도 않은 것으로 몇 달을 보냈다. 내가 사랑하고 그런대로 정열이 남아있는 이 ‘일’들.. 나는 또 세월을 허송하고 있는 것이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일주일이라도 잊고 마음 편하게 지내는 게 더 현명할지도 모른다. 나는 그것을 못한다. 왜냐하면 너무나 무언가 불안하기 때문이다. Steven Covey의 말 대로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에 거의 모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도.

하지만 조금 위안을 삼는다면, 지난달에는 거금을 소비 했지 않는가? 이건 암만 생각해도 참 큰일을 한 것이다. 그렇게 마음을 졸이며 연숙이 minivan에 낑낑거리며 오르는 것을 보며 괴로워했는데 그게 순간에 없어졌다. 이건 참 기분이 흐뭇하고 좋은 일이다. 그래 이것만은 나의 initiative로 시작된 ‘거사’인 것이다. 나에게 축하를 해 주어야 할 일인 것이다.

나의 사랑하는 일기야.. 미안하다. 이렇게 또 늦게 너를 찾아왔구나. 찾기는 늦었지만 생각은 거의 매일 하였단다. 찾아 오려고 생각을 할 수록 더 너를 피하게 되는 나의 이 요상한 습관은 또 무엇일까? 조금이라도 무언가에 늦는다고 생각만 하면 포기해 버리고 그것도 모자라 아주 잊으려고 발버둥 치는 나의 이 아주 요상하고 이상한 습관과 생각들… 죽기 전에 다 고치고 싶은 그런  것들이다.

나의 머릿속에 있던 중요한 project들은 비록 요리조기 피하며 꾀는 부렸지만 예상외의 ‘과제’ 를 한 것은 그래도 조금은 흐뭇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새 차를 사게 된 것이다. 8월중의 반 이상은 아마도 이것을 생각하며 살았다고 해도 될는지.  이상하게도 견디기 싫은 이번 여름을 조금이라도 잊게 하여 주었던 것… 거의 10년만에 있는 ‘새 차 사기’ 행사.. 그 동안 생각만 하면 나의 가슴이 저며오던 새 차 사기.. 왜 그럴까.. 연숙이 해가 갈수록 이제는 그렇게 어울리지 않는 suburban style (soccer mom’s) minivan과 싸우는 것을 보면서 가슴이 저며 왔고.. 사실 나의 신세가 괴롭게 느껴지기 까지 하였다. 경제적인 사정이 이렇게 사람을 위축시킬 줄이야.. 물론 연숙이 새 차를 사 달라고 조른 적은커녕.. 불평한마디 없이 잘 타 주었다. 문제가 생겼을 때도 그런대로 잘 너머가 주었다. 다만 길거리에서 strand가 되었을 때는 정말 panic상태로 괴롭히지만  그것도 그때 뿐.. 하지만 그렇다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문제가 생기만 다른 차가 있어야 하고.. 그 점점 높게만 느껴지는 차를 타려고 ‘애를 쓰는’ 모습은 꿈에서도 나타날 지경이 아닌가..

조금씩 ‘주가’가 오르는 rollover IRA를 보면서 바보스러운 제안을 하게 되고.. 연숙이 그것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그것에 나는 용기를 얻게 되었다. 이번만은 서로가 무언가 맞았다. 그래서 거의 10년만에 조금은 걱정 없이 탈수 있는 새 차를 사게 되었다. 비록 IRA 의 balance는 떨어 졌어도 사실 그게 큰 문제는 아니다. 그것은 이제부터 우리가 필요하게 쓸 자원이 아닌가. 언제까지 살지는 모르지만 지금 이렇게 쓰는 것은 확실히 아주 잘 했다고 생각해 본다. 더 비싼 차도 조금 아쉽지만 다행히 나와 연숙은 그런 것에는 그렇게 연연하지 않지 않는가? 2009 Hyundai Sonata GLS… leather 가죽시트를 하였고 gas mileage도 거의 32마일이 넘는 4기통 앞으로 유지하기도 무리가 없는 .. 사실 우리에게 과분한 차 인지도 모른다.  이것은 100% 연숙의 차로 하였다. 법적으로도 연숙의 차다. 나는 그저 옆에서 유지하는 것을 도와주면 된다. 아.. 하느님 감사합니다. 이 어려운 시절에 이렇게 저희에게 ‘사치’를 허락해 주셔서 조금 저의 마음을 위로해 주셔서 감사 드립니다.

지난 두 달은 더위를 핑계로 ‘해야 할 일’에서 거의 손을 떼었다. 조금씩 진척을 보이던 정기적인 blogging도 이제야 처음으로 붓을 들게 되었고.. php/mysql쪽도 그렇게 손을 놓고 말았다. textpattern도 그렇고.. wordpress/joomla도 그렇다. 맥없이 손을 놓고 말았다. 물론 매일 매일 머릿속을 떠난 적은 없었다. 그게 나의 특유한 병신 같은 습관/고질이 아니던가? 나라니 가 새 laptop을 사게 되어서 나에게 ‘고물’ laptop이 굴러 들었다. 생각처럼 active하게 쓰지는 않았지만 앞으로 많은 역할을 기대한다.

같은 날 밤에 다시 쓴다. 역시 Kristie건 다른 곳이건 밖에 나가서 (뒷마당이 아닌) ‘일’을 끝내고 들어 오면 정말 기분이 날라간다. 이래서 그렇게 지겹게도 느껴지던 ‘회사생활’을 했나 보다. 긴장감을 조금이라도 느낀 후에 무슨 결과를 내고 ‘살아있는 진짜 인간들’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눈 후에 왔으니 이런 결과를 보는 것은 사실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예측히기 어렵지 않은가? 나는 이것을 진짜 잘 알고 있다.  거의 똑같은 pattern으로 경험하는 것이다. 내일은 슬프게만 느껴지는 9/11 8주년이 되는 날이다. 그날과 나의 그 동안의 커다란 생활의 변화, 나의 이러한 좋던 나쁘던 간의 기억과 추억들.. 무엇인가 혼동이 온다.

그렇다, 2000년 이후 나는 정말 커다란 ‘관’의 변화를 겪어 오고 있다. 2001년의 9/11, virtual retirement, 2002년의 장모님 타계, 2003년의 어머님 타계, 2004년의 새로니졸업, 나라니 대학입학, 2005년에 있었던 너무나 많았던 또래들의 장례식, .. 나의 우울증.. 2007년부터 시작된 나의 묵주기도생활.. 고질적이던 악습의 청산.. 정말 나의 인생에서 파란만장한 10년을 보내고 있다. 특히 죽음에 대한 나의 생각은 너무나 많은 변화를 보였다… 한마디로 죽음이 두렵지 않다. 너무나 두렵지 않은 사실이 오히려 두렵게 느껴질 때도 있다. 주위의 친지들의 말을 들으면 너무나 생에 애착을 보여준다. 그게 나는 그렇지 않아서 그들에게 나의 그러한 의견을 보여 주는 게 오히려 이상하게 보일까 걱정일 뿐이다. 그저 그들은 반 농담으로 들을 지도 모른다. 그렇다. 나는 참 비관적인 인생관을 지금 가지고 있는 지도 모른다.

 

 

나의 글, 일기가 대부분 어두운 이유 중의 하나는 내가 마음이 어두울 때마다 써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기쁠 때 쓰는 것 보다 쳐지거나 외롭거나 고통스러울 때 쓰는 게 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닐까. 옛날 어린시절 그러니까 고등학교 대학교 때 일기를 쓴 것을 엄마가 멀레 보고 그러셨다. 모조리 “죽고 싶다, 슬프다..” 그런 말 밖에 없더라고.  그러니까 엄마는 그런 말 조차 사치스럽다고 생각하셨는지도 모른다. 엄마는 그렇게 인생을 보내셨다. 그렇게 생각할 시간도 없었고 그것은 사치였을지도 모른다.

오늘도 그런 날 중의 하나다. 정말 짜증스러운 ‘더러운’ 날씨까지 나의 화를 부축 인다. 그렇다. 예전과 다른 것은 나는 분명히 화가 나 있는 상태이다. 거의 나 자신에게 향한 ‘불평’일 것이다. 이 시라소니 야.. 정신 차려라.. 그런 식으로. 그게.. 참 내가 왜 이렇게 화를 잘 내게 된 것일까. 분명 나는 예전에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게 화를 내지도 않았고 화를 내는 사람, 신경질을 내는 사람을 내가 제일 싫어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 이게 조그만 사소한 일로 비록 시작이 된다고 하지만 진짜 원인이야 다른 게 있겠는가. 그것이 아닌가. 나를 몇십년 동안 의식, 무의식적으로 짓누르고 있는 것은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과거’가 되고 말았다. 나는 그것으로 가족을 다 잃고, 친척도 잃고, 그렇게 친하던 친구들도 잃었다. 이런 것을 가슴에 묻고 하루 하루 늙어가는 내 자신이 어찌 좋게 느껴지겠는가. 그런 생각이 물밀듯이 쳐들어 오면 나는 거의 무방비상태로 그것들에게 처참하게 자존심의 밑바닥까지 모두 유린을 당하는 기분이다.

나의 ‘자랑 거리’이고 자존심의 최후의 보루인 personal projects들도 요새는 모조리 지리멸렬의 상태로만 느껴진다. 무언가 초점이 없고 절대로 앞으로 나아가는 느낌이 전혀 없다. 나야 말로 ADD (attention deficiency disorder)가 아닐까. 조금이라도 시간적인 계획에 의해서 내가 움직인다면 조금이라도 나으련만.. 그것을 나는 못하고 있다. 철저히 바로 눈앞의 것에 의해서 하루가 초점과 성취감 없이 흐르고 있고.. 자칫 나는 이대로 이대로 죽는 것이 아닐까 하고 걱정도 한다.

오늘은 사실 아침에 모조리 늦게 일어나는데 에서 시작이 되었다. Tobey녀석은 누가 자기만 하면 절대로 일어나지를 않는다. 그 녀석과 걷는 것도 거의 습관이 되어서 안 걸으면 무언가 찜찜하다. 그 녀석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를 생각하니 또 화가 치밀었다. 나는 어찌하여 자고 있는 여자의 얼굴을 봐야 하는 운명으로 태어났나. 왜 나보다 조금 먼저 가끔 일어나면 무엇이 잘못될까. 가끔 그런 생각을 하면 조금 슬퍼지기도 하고.. 운명이라고 자책도 하고.. 사실 그게 무엇이 이상한가 하고 생각도 하고.. 모른다. 그래 대부분 지겹게 느껴질 때가 많다.

반세기만에 써보는 양병환 이란 이름. 그 50년 동안에 비록 머릿속에서 아주 가끔 생각은 했을지 몰라도 이렇게 “써”보기는 처음 인 것 같다. 아마도 손을 쓰는 일기장에도 쓴 기억이 없다. 그만큼 오래전의 일이다. 하지만 일단 생각이 날라치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즐거운’ 추억이 샘솟는다.

나이는 아마도 (100% 확실치 않으니까) 나보다 최소한 3살이 위였지 않았을까. 나의 누나보다 한 학년이 위였으니까. 처음 알게 된 것은 내가 중앙중학교 2학년 때, 가회동 재동국민학교 뒤에 살 때였다. 그 형은 우리가 살던 집에 그 형의 누님과 같이 방 하나를 빌려 자취를 하였다. 그 누님은 그때 벌써 숙명여대생 이었다. 남매가 단둘이 자취를 한 이유는 물론 집이 서울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전라도에서 서울로 유학을 왔기 때문이다.

양병환 형은 그 당시 한국의 최고명문(그때는 그저 일류라고 불렀다) 경기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그 두 남매는 인물도 훤칠하고 행실도 좋아서 모두가 호감을 가지고 살게 되었다. 나는 아버지도 없고 누나 하나 밖에 없어서 ‘형’이나 ‘선배’란 존재는 대부분 든든하게 느껴지는 ‘좋은’ 존재였다. 아마도 내가 국민학교 6학년 때 나를 가르쳤던 가정교사  ‘김용기’ 형 (그 형도 경기고등학교 생) 이후에 처음으로 알게 되었던 ‘형’이었던 셈이다.

그 당시는 지역편견과 감정이 아주 적나라하게 표현되던 그런 시기였고, 특히 서울에서 전라도사람들에 대한 편견이 그중에 제일 심하였다. 군사혁명의 주체가 아마도 경상도출신이 많아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어린 나이에도 거의 피부로 느낄 정도였다. 그런데 나로서는 ‘드디어’ 전라도 사람을 바로 옆에서 대하게 된 것이었다. 특히 그때의 말들이 “전라도 사람들은 처음 사귈 때는 좋아도 끝날 때는 아주 나쁘다” 그런 식이었다. 물론 그 당시 나의 나이는 그런 편견에 크게 영향을 받지는 않았다. 그 나이에 어찌 그런 ‘나쁜’ 생각이 수긍이 되겠는가. 하지만 주위의 어른들은 아마도 지금 표현을 빌리면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지는 않았을까.

처음 양병환형과의 만남은 내가 친구 안명성(100% 확실치는 않지만)과 집 마당에서 장기를 두고 있었는데 그 형이 슬그머니 다가와서 ‘훈수‘를 두기 시작하면서 아주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그 당시는 우리 같은 애들 에게는 주거 여건상 날씨만 허락하면 방보다는 바깥에서 모든 일들이 이루어졌다. 집 마당이나 골목 같은 곳은 그런 ‘사귐’이 이루어지던 최고의 여건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천성적으로 수줍어하는 성격이라서 먼저 다가가서 사람을 사귀는 것은 힘이 들었는데 이때에는 그 형이 먼저 닥아 온 것이었다.  장기 두는데 여러 가지 비결을 가르쳐 주면서 나의 장기 실력도 덕분에 늘어갔다.

방과 후에 그 형이 자취방에 있으면 곧잘 그 형 방에 들어가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때 내가 흥미롭게 느끼곤 하던 것은 그 형의 ‘공부습관’ 이었다. 물론 그 형이 경기고등학교에 다닌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도 주의 깊게 보게 되는 이유가 되었다. 책꽂이에 있는 ‘참고서’를 비롯해서 내가 옆에 있는데도 먼저 공부를 해야 한다며 열심히 공부하던 그 버릇이 나는 그렇게 부러웠다.  물론 ‘무례’하게 나를 장시간 기다리게 하지는 않았다.  반드시 무언가 한 가지를 끝내곤 나와 같이 시간을 보내곤 하였다. 그때 나는 그 형에게서 참 무언가 많은 것을 듣고 배웠다. 물론 다 생각은 안 나지만 아직도 뚜렷이 남는 것 중의 하나가 “아이슈타인의 상대성이론” 이었다.

물론 그 나이에 그 어려운 이론을 이해 한다는 것은 힘들지만 그런대로 그 형은 그것을 이해한 듯이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뫼비우스 띠를 종이로 접어서 나에게 보여주던 그 진지했던 모습. 이런 것들은 그 당시 학교에서 배운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형의 진지함과 거의 매료 된 듯 한 인상. 나에게는 참 신선하고도 충격적이었다. 그 이후 상대성원리만 접하게 되면 그때 소년기에 마음 설레며 감동을 받았던 추억을 떠 올리게 되었다.

그 때 그 형이 방과 후에 꼭 공부하던 책이 있었는데 그 당시부터 인기 있던 책 “삼위일체 영어” 이었다. 꼭 사전처럼 작고 두껍고 단단하게 생겼던 그 책은 그 이후로 수험생들에게는 거의 classic이 되었다. 그 당시에는 삼위일체란 게 단순히 문법, 해석, 작문의 세 가지를 뜻하는 줄로만 알았다. 나중에 그게 기독교의 교리 (성부, 성자, 성령)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고 웃기도 했다. 아마도 첫 과가 이렇게 시작 되었지. A Newton cannot be a Shakespeare (Newton과 같은 과학자는 Shakespeare와 같은 작가가 될수 없다) 나중에 내가 중 3이 되었을 때 나는 감히 ‘무례’하게도 그 책을 공부하려고 하였다. 물론 결과는 거의 zero에 가까웠지만 내가 얼마나 그 형의 흉내를 내려고 했나 하는 한 예였다.

또 한 가지 즐거운 추억은 그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철야(밤을 꼬박 새우는 것)를 했던 것이다. 물론 그 형과 같이 ‘거행‘을 한 것이다. 왜 둘이서 그 형 자취방에서 밤을 새우게 되었는지는 기억이 희미하다. 아마도 그 형의 누님이 집에 없었던 것이 계기가 되었는지도. 그 형은 예의 바르게도 나의 어머님에게 미리 허락까지 받았다. 그런 행동도 나에게는 그렇게나 어른스럽게 보였다.

그러니까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의 몸이 ‘비정상’적인 routine으로 들어가게 된 것인데.. 신체적인 충격보다는 심리적인 충격이 더 컷다. 그러니 아직도 이 나이가 되도록 그때를 생생하게 기억하지 않는가. 졸림을 참는 것은 비교적 어렵지 않았다. 장기도 두고 책도 읽고 옛날 얘기도 하고 재미가 있었으니까. 그리고 통금시간이 지나면서 (그때는 물론 밤 12시부터 새벽 4시까지 통행금지가 있었다) 그런대로 훤한 새벽을 가로지르면서 신나게 삼청공원을 지나 말바위까지 hiking을 하였다. 그 형은 커다란 나무칼(검도와 비슷한)을 가지고 갔는데 아마도 나를 보호하려고 했던 것 같다. 새벽의 그 시간에 삼청동 산과 말바위를 간다는 것은 참 그렇게 신선하고, 무슨 아주 큰일을 한 듯한 자신감을 나에게 주었다.

모든 것에는 끝이 있는 법. 몇 달이 지나지 않아서 그 형네는 근처의 옆 동네로 이사를 갔다.  아마도 자취방을 비워야 했던 것 같다. 새로 이사 간 곳은 다행히 중앙중학교로 통하는 계동골목이었다. 이발소가 붙어있는 곳이라고 들어서 나는 어딘지 알았다. 이사 가기 전에 그 위치를 그 형에게 가르쳐 주었는데 그만 그게 틀린 이발소였다. 나중에 들으니 그 형이 그 틀린 이발소 있는 집에 가서 자취방을 찾았는데 물론 없었겠지. 나중에 알고 보니 조금 더 중앙중학교 쪽에 있는 다른 이발소였다. 

그 형네가 이사를 간 후에는 한번 놀러 갔었다. 내가 조금 더 숫기만 있었다면 더 자주 놀러가면서 더 친해질 수도 있었겠지만 나의 성격이 그렇지 못하였다. 그 후로 소식이 끊어지고 그게 거의 50년이 되어간다. 그 당시 그 형은 서울의대를 지망한다고 들었고 후에 합격을 하였다고 들었다. 아마도 훌륭한 의학인 이 되었는지 모른다. 경기고교 동창회를 통하면 아마도 소식정도는 알 수 있지 않을까. 오래 산 보람중의 하나가 Internet이 아닌가. 값이 싼 search engine의 덕을 보면 그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백일몽일까..

 

아! 만화. 내가 기억 하고 싶은 것들은  manga, cartoons, comics가 절대로 아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 들은 구체적으로 한국 1950년대 중반부터 1960년대 초반에 관한 것 들이다. 왜냐하면 내가 그 당시 거의 광적인 한국만화의 “소비자” 이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의 만화에 얽힌 추억들은 지금 생각해도 100% 다 즐겁고 유쾌한 그런 것들이다. 이런 추억들은 거의 10년 전만 해도 정확하게 기억을 했는데 최근에 많은 부분들이 희미하게 느껴짐에 더 늦기 전에 기억을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 만화 기억은 아마도 6.25 휴전 전인, 그러니까 1952~3년경 서울 원서동에 살 때 미군들이 보던 미국 만화들 이다. 그게 Walt Disney의 초창기 작품 일듯 한데, 아마도 Donald Duck인 것 같다. 문제는 어린 나이에 나는 그것을 보고 너무나 무서워해서 꿈에도 나타나고 그런 것 들이었다. 별로 기분 좋은 추억은 아니다.

진짜 좋아 하게 된 만화의 추억은 역시 국민학교에 들어가면서 나오기 시작한 만화잡지 류, 그중에서도 만화세계와 만화학생이라는 월간지였다. 그 나이에 맞는 수준으로 연재만화와 연재소설 등이 재미있게 실렸는데 매월 목이 빠지게 기다린 기억이다.

그 월간지에서 기억이 난다면 “엄마 찾아 삼만 리” 라는 김종래 화백의 작품이 있었다. 어린이에 맞는 대하소설인 셈이다. 아직 이 나이에도 그 줄거리가 생생할 정도로 재미도 있었고 인상적 이었다. 또 다른 classic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김근배 만화가 작품인 “멍청이“였다. 아마도 멍청이란 말이 유행어에서 표준어로 굳은 게 이 만화 때문이 아닐까?  그러니까 아마도 6.25가 끝나고 처음은 이렇게 만화잡지로 만화계가 출발을 한 듯싶다. 그 전에 그러니까 6.25전에는 어땠는지 전혀 idea가 없다.  그 만화세계, 만화학생지에서 또 다른 만화가는 “박기당“, “박현석” 선생님이 생각난다. 그러니까 김종래, 박기당, 김근배 박현석 제 화백들 모두 전혀 다른 story line에다가 아주 다른 만화 style을 가지고 있었다.

만화출판계는 서서히 만화 Series로 전환을 하여 지금의 연속극처럼 만화가 나오기 시작했다. 물론 위의 만화가 선생님들도 각각 단행본 series를 그리기 시작을 하였다. 이 시기가 나에게 “만화천국”의 시작이었다. 왜냐하면 만화만 볼 수 있는 만화 전용가게(만화방)가 학교 문 근처에 생기기 시작했는데, 이곳에서 많은 여가 시간을 보내기 일쑤였다.  신발을 벗고 방에 들어가 앉아서 보는데 나올 때 보면 신발이 없어지는 때가 종종 있었다. 그때는 TV가 없었던 시절이어서 우리 나이 또래들은 운동 (특히 야구)다음으로 즐거움 이었다.  그 때 이후로 만화계는 서서히 순정물에서 과학물 (Science Fiction: SF)  그리고 역사물로 분야가 넓어져 갔다.

나는 지금 생각해 보면 만화가 어떨 때는 교과서보다 더 좋은 교과서 역할을 한 듯하다. 그 만큼 많이 배웠다. 특히 역사 중에 국사는 만화의 역할이 눈부셨다. 그 딱딱하고 재미없게 씌어진 국사책 보다 만화가 훨씬 도움을 주었다. Timing이 아주 좋아서 국민학교 6학년 때 그러니까 1959년경 중학교입시 공부하는데 아주 많은 만화가 삼국시대를 다룬 게 많이 나왔는데 아주 도움을 많이 받았다. 만화가 선생님들의 이름은 희미하나 너무나도 고마운 분들이었다.  그때 나는 거의 완벽하게 한국사의 흐름을 만화로 정확히 ‘감’을 잡은 셈이다.

세계사에 관하여, 특히 일본침략과 관련된 2차대전에 관한 만화책들도 있었는데 생각나는 것 중에서 왕현 화백의 만화가 단연 으뜸이었다. 그분의 만화에서 처음으로 가미가제특공대 이야기. “야마도”라는 세계제일의 전함, 히로시마원폭. 등등 모든 걸 그림으로 즐길 수 있었다. 그때 일본말도 많이 보게 되었는데 주로 군인들의 용어였으리라. “도쯔께끼”, “우데, 우데”, “칙쇼”, “곤노야로”. 등등 기억이 난다.  그 “왕현”이라는 만화가는 지금도 사실 거의 전설적인 존재로 느껴진다. 몇 편 안 되는 작품인데 정말로 명작 이었다. 그분의 과학공상물로 “저별을 쏘라” 라는 게 있었는데. 이게 정말 얼마나 걸작 이었는지. 그림도 그림이고 그 story 또한 정말 최고였다.

위에 기억한 만화들 모두 아직도 인상적 이었지만 그래도 산호 화백의 “라이파이“는 그 중에서도 제일 기억에 남는 걸작 중 걸작이었다. 국민학교 6학년에 첫 권이 나오기 시작해서 내가 거의 중학교 2학년 때 까지 나왔으니 이거야 말로 대하 중 대하 만화였다.  이분의 만화 스타일은 사실 그때까지의 모든 것들과 조금은 ‘차원’이 달랐다. 거의 몇 단계를 뛰어 넘었다고나 할까.  그 당시 과학, 기술을 꿈꾸던 소년들은 아마도 이곳에서 최고의 기쁨을 맛보았을 것이다. 나도 그 중에 하나였다.  미래지향적인 기술과 함께 과거의 무기들 (칼, 창 같은)이 함께 등장하는 그야 말로 시공을 초월하는 그런 이야기들. 꿈에서도 꿈을 꾸는 그런 정도로 황홀한 이야기들로 그 시절을 보냈다.

몇 년 전에 친구 양건주가 이 라이파이의 저자 “산호”화백을 만나서 다시 발행된 라이파이 복제본에 사인을 직접 받아서 보내 주었다. 그때의 감격은 아직도 못 잊는다. 그 때 신문과 Internet에서 우리 또래들이 다시 라이파이 동호회를 만들어서 모였다는 얘기도 듣게 되었다. 사실 어릴 적 라이파이를 볼 때는 얼마나 많은 독자가 있었는지는 잘 몰랐는데 알고 보니 전국적 이었던 것 같았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이공계에 심취된 상태였지만 어떤 라이파이 독자는 이 만화로 이공계에 관심을 갖게 되고 나중에 그길로 가서 크게 성공을 했다고 한다. 이게 만화의 위력이었다.

나는 사실 이 라이파이에 심취가 되어서 한때 산호 선생과 같은 만화가가 되려고 했다. 물론 그 어린 나이의 생각이었지만 그 당시는 사실 심각했고 실제로 모방을 해서 만화를 그리기도 했다. 산호선생에게 편지를 계속 보내서 편지로나마 지도를 받기도 했다. 많이 그렸는데 모두 없어지고 현재 한권이 살아남아있다. 그것은 현재 우리 집의 보물로 취급이 된다. 제목은 ‘민족의 비극’이란 것인데 역시 2차대전에 관한 군인들의 이야기이다. 지금 보아도 거의 산호선생의 만화스타일을 그대로 모방한 것들이었다.

나중에 커서 어떤 분들이 만화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이야기를 하면 나는 그때는 꼭 반박을 하곤 했다. 내가 산 증인이라고.. 적절히 골라서 보게 되면 교과서 보다 훨씬 낫다고. 나와 같은 경험을 하며 자란 우리 세대들.. 나화 같은 경험을 한 분들이 나 말고 또 있을까. 참으로 궁금하다.

 

이 몸이 새라면 이 몸이 새라면 날아가리. 저 멀리 보이는 저 멀리 보이는 작은 섬 까지.

아마도 독일의 민요를 일본에서 번역해서 부르고 일제시절 우리에게 남겨지고 나의 어린 시절 그걸 또 배우고 불러서 아직도 가사와 노래가 생각난다. 어린 시절에 부를 적에는 사실 이 가사에서 비행기를 연상하곤 했다. 어린 시절 남자아이들 에게는 비행기처럼 영웅적인 존재는 없었다.  답답한 서울의 좁디좁은 골목에서 비행기를 보는 것은 무척이나 감동적이고 행복했으니까.

그걸 내가 조종을 해서 하늘을 나르고 먼 곳까지 간다는 것을 이 노래에서 생각하곤 했다. 새의 존재는 거의 잊어버리고.  나중에 알고 보니 새란 것이 현재 인간의 최첨단 비행기보다 훨씬 smart하다는 것을 알았다. 아무리 현대 비행기를 computer로 control을 한다지만 새의 그 작디작은 머리가 아마도 훨씬 더 robust할지도 모른다.

그 주인공인 새를 생각한 것도 나중에는 이 노래에서 느끼게 된 상징적인 의미를 알고 바뀌게 되었다. 아하. 이 새가 날아간다는 것은 바로 거의 완전한 ‘자유’를 뜻 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 맥락에서 나는 대학시절 기타를 배울 때 즐겨 부르곤 하던 미국 folk song, ‘도나도나’의 가사가 비슷한 의미를 주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가 듣던 것은 당시 미국 folk song, 특히 Vietnam war protest song을 불렀던 Joan Baez의 곡이었는데 당시는 사실 가사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곡자체가 좋았고, guitar를 배우기에 아주 쉬운 곡이었기 때문에 더 유행을 했을지도 모른다. 나중 나중에 가사를 잘 읽으면 제비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송아지가 주인공임을 알게 되었다. 하늘을 자유롭게 나는 제비의 거의 무한정 자유와 자기가 왜 죽어야 하는 이유조차 모르고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송아지. 이 얼마나 비극적인 대조인가?

영화화 된 Anne Frank’s Diary (안네프랑크의 일기)를 보면서 또 다른 새의 상장을 다른 면으로 보게 되었다. 어디까지를 구체적으로 영화화 했는지 모르겠지만 그 Annex Attic에 갇힌 유대인 가족의 그룹들, 비록 숨은 쉬며 살고 있었지만 거의 모든 자유를 박탈당한 몇 년의 생활, 얼마나 마음을 졸이며 살아갔을까. 어른들은 그렇다 치고 막 사춘기에 들어간 어린 소년소녀들의 심정을 어땠을까? 아무도 그들을 구할 수 가 없고 오직 radio에서 나오는 연합군의 Normandy 상륙으로 가상적인 자유를 만끽한다.  그 젊은 아니 어린 Anne Frank는 뚫어진 지붕으로 보이는 아주 파~~란 하늘을 본다. 그리고 가끔 연합군의 고공으로 나르는 폭격기편대의 하~아~얀 꼬리 연기를 보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이 제일 동경하며 보던 것은 역시 자유스럽게, 유유하고 천천히 하늘을 나는 새들이었다. 나 에게는 그 장면이 이영화의 climax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이 몸이 새라면 어떻게 할까. 내가 가기 힘든, 아니면 쉽게 갈수 없는 곳, 하지만 꼭 죽기 전에 가보고 싶은 곳으로 나도 날아가고 싶을 것이다. 죽음이 결코 먼 훗날의 남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 했을 때부터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의 기억이 시작된 곳부터 가보련다. 원서동의 아랫자락, 비원입구 돈화문의 근처, 원서동 골목은 나의 모든 기억의 출발이다. 그곳은 어떻게 변했을까. 아니 길 조차 없어 졌을지도. 옛날 휘문학교 뒷문근처, 영국군 부대가 주둔 했던 곳. 조금 더 올라가면 동섭이네 집골목.  어린 시절 나는 이 골목을 오르락내리락 뛰며 달렸다. 이 집은 물론 우리 집에 아니었다. 아버님 친구 분이 피난가편서 빈집을 우리가 잠시 산 것 뿐이었다. 나의 아버님은 납북이후 소식이 끊긴 후였다.  우리 집은 엄마, 누나, 나 이렇게 3식구만 달랑 주인을 잃은 채 아버지 없는 가정의 시작을 맞이하게 되었다.

원서동 비원 담을 따라 끝까지 올라가면 결국 막히게 되는데 그곳에서 우리는 또 살았다. 승철이네 집에서 우리는 세를 들어 살았다. 국민학교 생활도 그곳에서 시작되었다. 승철이네 집은 지금 어찌 되었을까? 조금 내려와서 유일하게 우리 집으로 살았던 곳 그곳은 나의 어린 시절에 도시계획에 의해서 철거되었다. 그 이후 기억에만 남게 되었다.

내가 다니던 재동국민학교, 가보면 크게 변하지 않았을 듯하다. 나의 국민학교 앨범도 있고, 사진에도 있고 해서 아주 친근한 풍경들, 없어지지는 않았겠지. 10년 전쯤 인터넷에서 어떤 사람이 그곳을 지나 출퇴근 하면서 그곳을 매일 본다고 들은 기억이 있어서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더 궁금한 곳은 그 재동 국민학교 뒷문 쪽에 있던 우리가 살던 2층 집이다. 이 집에서 나의 유년기를 거의 다 보냈다. 사랑채를 빌려서 살아서 우리 집 같았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이집을 떠난 후 나는 이집을 꿈처럼 그렸다. 참 순진했던 소년기의 맑고 좋은 추억들이 아롱아롱 매달린 집. 나는 또 그 집의 옛 모습을 보고 싶구나. 집 앞의 골목도 나의 전쟁터였다. 아마도 이곳도 상전벽해로 변했으리라.

이 몸이 새라면 이 몸이 새라면……. 나는 대학시절의 다방들도 다시 가보고 싶구나. 우리 연호회클럽의 추억이 찐하게 배었던 국제극장 옆 골목의 해양다방, 단성사 옆의 백궁다방, 명동에 있는 여대생이 들끓었던 SNOW다방, 미국적 멋이란 멋은 다 부리던 Rock다방, 대학 입학 후 처음으로 간 다방 연대입구 복지다방, Mamas & Papas의 ‘Monday Monday’에 황홀하던 신촌로타리 왕자다방, 거짓말 편지로 어떤 여대생을 불러낸 세종로 교육회관 지하다방,  아~ 누가 그런 아름다운 기억을 잊을 수 있으랴……. 이 몸이 새라면 다시 한 번 그곳으로 날아가 보련만……

 

일본 TV 드라마에 ‘희망이 없는 자’라는 게 있었다. 결국은 computer에서 지워 버리고 만 그런 종류였다. 하지만 여러 가지 장면들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 조금은 강렬한 그런 것이었다.  사람이 희망이 없다는 것은 정확히 무슨 뜻일까?

Financial problem도 있을 것이고, 무슨 불치병도 있을 것이고.. 정말로 많은 이유로 희망이 없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중에서 제일 심각하고 무서운 게 별로 위에 말한 물리적인 이유가 없이 희망을 못 찾는 것일 것이다. 나는 내가 무섭다. 바로 내가 바로 그런 종류의 ‘희망이 없는 자’가 되어 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나는 사실 현재 별로 희망이 없는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 마음의 여유를 찾을 듯 해서 그런 게 아닌가 했지만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 앞으로 살아야 별로 즐거울 것이 별로 없을 듯 느껴져서 그럴까. 그래 별로 없을 것 같다. 나이는 자꾸 들어서 ‘병신’으로 변할 것이고, 가족관계도 여기서 더 나아 질 수 있는 그런 것도 아닐 것 같다. 삶에 대한 ‘재미’가 없다. 누군가 재미로 인생을 삽니까 하는 개새끼들이 있지만 그래 재미가 있으면 더 살아야 하는 이유가 되지 않는가?

나는 사랑했던 내가 거의 본의 아니게 떨어져 산 엄마가 현재 이 세상을 떠나셨다. 그것이 아주 큰 ‘희망이 없는’ 이유 중에 있다. 나의 유일한 혈육인 누나도 만날 수도 없고 만난들 알아 보지도 못할 것이다. 이게 무슨 ‘비극은 없다’인가? 나는 정말 비극의 남주인공인 듯 하다. 내가 왜 이렇게 까지 흘러 왔을까? 언제부터 이렇게 모든 게 꼬였고 망가지기 시작 했을까?

누구도 남을 탓을 할 수는 없다. 핑계를 대자 치면 한도 없고 끝도 없겠지만 다 핑계일 것이다. 모든 것이 나에게 책임이 있다. 능력, 용기의 부족과 바보스러운 성숙하지 못한 나의 판단, 선택에 있을 것이다. 그것을 돌릴 용기도 없고, 현명한 선택을 다시 하기에 모든 것이 다~~~ 나를 지나쳐 버렸다. 한마디로 늦은 듯 하다.

이런 고통을 덜 느끼려고 그렇게 마약과 자살을 했을까?  절대로 찬성은 못 하겠지만 지금은 지금은 조금 이해는 한다.  결국은 종교적으로 갈 수 밖에 없다. 인간은 왜 태어났으며 이렇게 유한한 생명을 가지고 있고, 무엇을 희망으로 보고 살아가는 것일까. 교리대로 하느님 나라가 영생이라면 그곳으로 더 빨리 가면 더 낫지 않을까.  하지만 이것도 교리다. 인간의 생명은 나의 것, 개개인의 것이 아니라는 것. 다른 말로 내 마음대로 못하는 것.. 그러니 자살이란 것은 내가 신앙인이라면 상상도 못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요새 들어 많이 상상도 하고 심지어는 즐기어 상상을 한다. 이게 참 나쁜 것이 아닐까?  하늘에 먼저가신 엄마가 이런 나를 보시면 무엇이라고 하실까? 빨리 고통에서 벗어나 그곳으로 오라고 하실까, 아니면 고통스러워도 그곳의 행복을 추구하라고 하실까?

이런 꿈도 꾸어본다. 빨리 누나와 엄마와 같이 그곳에서 만나게 되는 그런 꿈이다. 하느님 나라를 정말로 믿는 다면 우리는 100% 분명히 다시 만날 것이다. 생전에 보지도 못하던 아버님도 만나게 될 것이다. 언젠가 분명히 만나게 될 테니 그렇게 빨리 갈 필요는 없지 않을까?

나는 지금 현재 아주 depress된 그런 상태이다. 그러나 위에 있는 글들과 생각은 내 나름 대로 논리적으로 나온 것 들이다. 절대로 망언들은 아닌 것이다.

그 수많은 지난해들 중에서 1962년을 가끔 더 생각한다.  왜 그럴까? 비교적 유쾌한 추억들이 더 많이 기억이 되어서 그럴까?   확실치는 않다. 조금 더 기억이 날 뿐 일지도. 그 당시 알던 사람들 기억에서도 특히 왜 그렇게 이름 황성군이 또렷이 이 나이 까지도 남는 것 일까?

아주 색깔이 바랜 중앙중학교 앨범을 볼 때에도 그 친구의 모습이 더 생각이 나곤 했다. 그것도 근래에 들어서 더욱 그랬다. 사실 나와 그 녀석은 아주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그보다 더 친한 친구들이 따로 있었는데도 이상하게 기억은 그 친구에 더 많이 머무르곤 한다. 조금은 감정이 찐하게 느껴지는 그런 독특한 추억 때문인 것일까?

황성군. 성은 황 씨이고 이름은 성군. 모든 외모가 나이에 걸맞지 않게 균형이 잡힌 모습이고, 거기에 걸맞게 ‘멋’을 부린 교복도 기억하기에 더 도움을 주었겠지. 지금 사진을 보면 나는 거의 젖먹이 어린애같이 덜 성숙했고 그 녀석은 나이보다 더 성숙한 의젓한 모습이다.  그런 나를 그 녀석은 잘 대해 주었다. 사실 그는 나의 짝(꿍)이었다.

그해, 1962년은 5.16군사혁명(1961년) 다음해, 모든 것이 긴장, 검소, 절제. 그리고 ‘재건’이라는 구호의 물결인 그런 시기였다.  4.19학생 혁명(1960년)으로 거의 아주 자유를 기치로 건 ‘방종’적인 무질서를 짧게 만끽하다가 이제는 국가재건이라는 기치아래 모두가 숨은 조금 죽이며 살았으나, 신선한 의욕이 넘치던 그런 시기였다.

그때는 거의 모두가 지금 기준으로 보면 빈곤층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그런 걸 별로 못 느끼며 살았다. 아마도 최소한 나의 나이에는 그렇게 느꼈다. 말로만 ‘멀리, 시골에서’는 밥을 굶는다는 얘기는 듣곤 했지만 피부로 느끼지는 못했다.

우리는 서울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도심 북쪽 북악산 남쪽에 있는 가회동이라는 곳에서 살았다. 이곳은 사실 서울의 알짜부자들의 집이 많이 있었던 곳이었다. 그 바로 남쪽이 재동이고 동쪽에는 계동, 또 그 동쪽에 원서동이 있었다. 나의 어린 시절은 사실 거의 이곳에서 보내졌다.  이곳의 기준으로 보면 소위 ‘중산층’집단이 살던 곳이라고나 할까.

1962년은 나의 중앙중학교 3학년인 해였다. 중학교 2학년 때 나는 별로 가까운 친구가 없었는데 3학년이 되면서 마음에 맞는 친구들을 같은 반에서 보게 되었다. 2학년 때의 몇 명 안 되는 친구들 중에 ‘문민규’,  “이경증”등이 같은 반이 되어서 너무 좋았고, 새로 알게 된 ‘김호룡’, ‘우진규’, ‘채현관’, ‘윤태석’, ‘정만준’ 등등과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황성군, 1962년

황성군, 1962년

황성군은 사실 3학년이 되면서 나의 짝으로 알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억지로’ 사귀게 된 친구인 셈이다.  위에 열거한 친구들 대부분이 3학년이라는 처지를 생각해서 공부들을 열심히 하였다. 요새 발로 study group같은 것이 형성이 되어서 공부를 했는데 한마디로 공부를 이렇게 하는 것은 정말로 효과적이었다. 친구들과 어울리는 재미에 공부까지 더 잘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나의 짝이었던 황성군은 이 group에 없었다. 그는 무엇이 그렇게 바쁜지 학교만 끝나면 사라지고 공부시간도 별로 큰 관심이 없었다. 그러니까 항상 무언가 다른 것만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마음씨도 착하고, 나이에 걸맞지 않게 의젓하고, 멋쟁이 교복을 입고 (교복이 지금 생각해 보면 거의 맞춤복에 가까웠음) 하던 황성군.

그런데 어느 날 부터 그가 점심을 가져오지 않기 시작하였다. 그러니까 점심을 굶는 것이었다. 점심시간만 되면 슬그머니 밖으로 나가곤 하고 나가지 않으면 자리에 그냥 앉아서 우리들이 맛있게 먹는 것을 물끄러미 처다 보곤 하였다. 어리고 철없던 우리들이었지만 모두들 언짢은 기분으로 점심을 먹곤 했다. 특히 짝이었던 나는 입장이 아주 거북하였다.

내가 먹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여러 가지 ‘충고’를 하곤 했다. 충고라기보다는 그냥 ‘평’이었다.  나는 그 당시 (지금도 남아 있지만) 밥을 먹을 때 습관중 하나가 반찬보다 밥을 먼저 먹는 것인데 이것은 절대로 반찬이 모자라지 않기 하기 위한 무의식적인 나의 노력이었다. 황성군은 그런 나의 식습관이 이상하게만 보였던 모양이었다. 꼭 한마디를 하곤 하였다.

채현관, 1962년

채현관, 1962년

하지만 나는 그것 보다는 그가 점심을 굶는 게 더 신경이 쓰였고 주변의 나의 친구들도 거의 무언중에 동감을 하고 있었다. 그 당시는 시골에서 보릿고개라고 해서 봄이 되면 실제로 굶는 농민들이 많다고 듣곤 했는데 서울의 노른자위에 있는 학교에서 점심을 굶는다는 게 사실 의아스럽기도 했다. 

그러던 중 우리그룹 중에 우진규란 친구가 황성군의 점심을 돌아가면서 가져오자고 제안을 하였다. 사실 나는 그런 생각을 못 하였다. 그만큼 성숙치 못했다고나 할까. 우진규는 그런 면에서 확실히 성숙했던 친구였다. 무언중에 조금씩 괴로워하던 친구들이 다 동의를 하고 사정이 되는 대로 교대로 점심을 싸오기 시작하였다. 기억이 확실치는 않지만 황성군은 고맙게 점심을 다시 먹게 되었던 것 같다.

나중에 소문으로 들게는 되었지만 (그는 절대로 자기의 사정을 직접 이야기 한 적이 없었다) 집안의 사정이 무엇인가 때문에 경제적으로 너무나 어려워 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당시 우리 나이에서는 실감은 잘 가지를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무언가 갑자기 커다란 빚을 지게 되지는 않았을까. 얼마나 급했으면 그 당시 담임선생님한테 까지 가서 돈을 꾸게 되었을까?  참 아득하게만 느껴지는 때의 어찌 보면 사심이 없고 꾸밈도 없고, 순진하기만 했던 그 서울 1962년. 나는 그곳으로 부터 얼마나 멀리 흘러 왔을까…

 

나의 Life Journal이 이렇게 조그맣게 시작된다. 소리 없이 조용히 죽어 버릴지도 모르고.. 빛도 없이 사라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작이 반이다. 천리 길도 한걸음부터.. 이런 믿음으로 오늘을 기억하자.

사실은 지금 이곳은, 그러니까.. http://vm-xampp/wordpress/는 나의 private life journal이다. 제일 중요한 목적은 나에 관한 모든 life-long data를 이곳에다 옮기고, 매일 매일 필요할 때 마다 참고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현재 내가 매일 쓰는 weblink도 이곳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Daily journal도 좋지만 life-archiver, daily reference로도 쓴다는 뜻이다.

지금까지 나는 비교적 자주 쓰던 More Icon, Sticky.txt, Journal.rtf, Blog.rtf란 것이 있다. 이것은 역사가 조금은 축적된 편이라서 아주 유용하게 쓰고 있다. 이것들부터 이 wordpress web으로 옮겨올 것이다.

 

하루에 ‘한 줄’이라도 이곳에 쓸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특별한 일이 있어야 하거나 꼭 나의 ‘괴로운’ 마음만 이곳에 늘어 놓는 것이 조금 부끄럽게 느껴져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슬픔과 기쁨의 비율이 거의 균형이 맞게 쓰면 더 좋을 듯 하다.

사실 겉보기에 세월이 이렇게 날라가는 듯 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도 아니다. 자세히 기억을 해 보면 순간 순간 많은 생각과 내 나름대로 ‘일’을 안하고 무위도식한 기억은 거의 없다. 육체적인 일이 아니면 최소한 생각과 ‘공부’는 계속하고.. ‘배운다’는 자세는 예전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다. 이것만은 자부하고 싶다. 나에게 있어서 최고의 가치는 무언가 모두에게 유익한 것을 ‘배우는’ 것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불쌍하게 여기거나 심지어는 싫어할 정도로 느낀다. 어떻게 그렇게 살까 하는 의아심 이다. 그래.. 이 나이에는 쉬면서 즐긴다는 것이 대부분 사람의 바램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사람들의 쉬거나 즐긴다는 게 정말 뻔하다.. 크루즈..여행..골프..식물 가꾸기..그래 그것도 좋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즐거울까. 나는 동조하기가 좀 그렇다. 이해는 가지만 동의는 못한다. 나는 절대로 그렇게 살지 않을 것이다. 무언가 ‘창조’적이고.. 무언가 ‘인류’에게 유익한 것을 남기고 싶다. 이게 그렇게 거대한 것은 아닐 것이다.

어젯밤에도 가끔 보는 서울의 거리로 꿈의 여행을 해 보았다. 이 꿈의 특징은 정말 기억하고 싶은걸 잠에서 깨면서 빠른 속도로 잊어버린다. 하지만 그 여운은 잔잔하게 나를 생각게 하고 심지어 즐겁게 한다. 왜 그렇게 나에게 좋은 느낌의 여운을 남기는 것일까. 그것은 사실이 아니고 꿈이라 그렇겠지. 사실을 이제는 내가 그곳에 가게될 처지가 되더라도 겁이 나는 게 사실이다. 즐거움보다 실망이 더 클 거라는 우려 때문일까. 이것은 내가 생각해도 지나친 걱정이다. 이게 나의 문제이다. 너무 미리 생각을 하고 걱정을 하는 나.. 나도 안다. 아… 이 좋은 꿈을 거의 잊어가고 있다. 더 또렷하게 생각이 나면 얼마나 좋을까.

2009년도 거의 5개월이 지나가고 있다. 무엇을 했으며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까. 계획적으로 한 것은 또 부끄럽게 거의 없다. 즉흥적인 게 대부분이다. 하지만 ‘좋아’하는 것을 찾아서 한 것도 사실이다. Asterisk/PIAF home pbx는 조금은 나의 자랑 꺼리다. 작년에 처참하게 실패했던 기억의 project가 아닌가. 그런대로 거의 실용화 시켰다. 지금 매일 쓰고 있지 않는가. 나의 자랑 꺼리다. 이것이 10년전에만 가능했다면 우리식구에게 최고의 home pbx service가 가능했을 터인데.. 지금은 연숙과 나만 쓰고 있으니 조금 아깝다.  하지만 진짜 나에게 아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professional-grade web-application이다. 이게 나의 장래의 꿈이고 목표다. 이게 나의 말년을 지탱시켜줄 인생의 해답일까. 나의 모든 것을 이곳에 집중을 시키면 내가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 할지 해답이 나올 듯 하다. 나는 이곳에서 해답을 찾고 싶다.

가끔 나의 반생을 아니 더 그 이상을 차지해온 결혼/가정생활의 의미를 생각해 본다. 왜 이 당연한 ‘생활’을 생각하려는 것일까. 가끔 꿈을 꾸는 듯 하기도 해서 내가 조금 놀란다. 연숙과 아이들로 된 이 가정의 존재가 가끔 그렇게 생소하게 느껴지니 말이다.. 결혼전의 인생이 더욱 더 나의 머릿속을 맴돌고 있으니.. 이게 문제일까..

나의 time machine은 빠르게 거의 반세기 전으로, 정확하게 1961년으로 되돌아 간다. 그해는 4.19 학생혁명의 다음해, 5.16군사혁명으로 이어지던 암담한 시절, 내가 서울중앙중학교 2년이던 그때로 되돌아 간다. 제목인 ‘오누나 오시누나 빗님이 오시누나’라는 시라기 보다는 시조에 가까운 음율을 가진 이 구절이 반세기 뒤에도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데 그 시의 저자는 그때 친하게 지내던 벗 ‘변웅지’였다. 변웅지.. 이름은 거창하지만 사실은 나와 재동국민학교를 같이 졸업한 동창생으로 중학교 2학년때 처음으로 만나게 되었다. 국민학교 때는 한번도 같은 반을 한 적은 없었지만 6년을 같이 다녔으니 얼굴정도는 알고 있었다.

변웅지, 1962년 중앙중학 졸업앨범에서

변웅지, 1962년 중앙중학 졸업앨범에서

나의 중학교 2학년은 사실 내가 조금 고생을 하던 그런 시절이었다. 학교 공부도 그렇고 깡패 비슷한 녀석들이 나를 괴롭히기도 했던 그런 시절이었는데 그래도 이 변웅지같은 친한 친구가 있어서 아직도 즐거운 추억으로 남는다. 그때 변웅지와 같이 나를 친구로 하던 게 이경증이라는 친구였다. 그러니까 나와 변웅지, 이경증이 거의 3총사 비슷하게 2학년을 보낸 셈이다.

그 당시 국어 선생님은 백정기 선생님이셨다. 백 선생님은 나중에 우리들과 같이 중앙고등학교로 올라가셔서 졸업 때 까지 가르치셨다.  이 국어시간에 국어작문 과제가 있었는데 그때에 나는 작문으로, 변웅지는 ‘시’로 제출을 하였는데 그때의 그 시가 거의 시조의 음률로 “오누나 오시누나 빗님이 오시누나” 였다.  그 후로 비가 올라치면 그녀석의 그 시조 같은 시 생각이 나곤 했다. 이것을 왜 알게 되었나 하면 제출된 작문 중에 뽑혀서 공부시간 중에 선생님이 읽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그 변웅지의 시도 뽑혀서 읽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의 글도 뽑혀서 읽혔는데 정말로 나는 당황하였다. 나는 재동국민학교 시절의 추억을 썼는데.. 그런대로 쓰긴 썼다. 하지만 중요한 서론, 본론, 그리고 결론의 구조를 지키지 못하고 그만 결론 비슷한 것이 거의 없이 끝을 내고 말았다. 시간이 없어서가 아니고.. 어떻게 끝을 내는지 그것이 확실치 않아서 그만 그랬는데.. 선생님께서는 읽으신 후에 글이 잘 씌어졌는데 아마도 시간이 없었나 보다고 평을 하셨다. 나에게는 정말로 다행이었다.

백정기 선생님

백정기 선생님

변웅지와 같이 중랑천으로 낚시도 같이 갔었다. 나에게는 난생 처음으로 해 보는 그런 것이었다. 그당시 도서관이 당시 고등학교 본관건물의 다락방에 있었다. 학교가 끝나면 같이 그곳에 가서 학원사 발행의 ‘전집’ (위인전집, 세계 명장전집)을 빌려 읽고 거의 저녁때가 되어서 집에 돌아오기도 했는데 그게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변웅지와는 중학교 2학년이 끝나면서 반이 갈렸는데 고등학교 졸업 때 까지 한번 도 같은 반이 있던 적이 없었다. 가끔 얼굴이야 서로 보며 지나치곤 했지만 그렇게 서먹서먹할 수가 없었다. 지금 이 나이에도 왜 그랬을까 생각을 하는데.. 그 녀석이 너무 갑자기 변해서 (성숙해서)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도 하지만 정말 아쉽기만 하였다. 다른 친구 이경증은 여러 가지 인연으로 대학 졸업 후까지 관계가 계속 되었다.

고등학교 졸업 앨범을 보면 키가 아주 커 있었다. 그러니 사실 어울리는 그룹이 우리와는 아주 달랐으리라 짐작을 해본다. 어느 대학엘 갔는지도 모른다. 아니 대학엘 갔는지 안 갔는지 조차 모른다. 40대, 50대에 모인 동기 중앙고 57회 단체사진을 아무리 돋보기로 보아도 안보였다. 다만 동창회 주소록에는 주소가 비교적 자세히 기재되어 있었다.

한번은 그 주소로 편지도 보냈는데 무소식이었다. 어떻게 잘 살고 있는지.. 나를 기억이나 하고 있을까.. 사실 잊을 수 도 있을 것이고 조금은 기억할지도 모른다.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런 오래전의 순진했던 기억이 나에게 있는 한 나는 행복하다는 사실이다. 함께, 부디 건강하게 잘 살기를 바라며..

 

이제는 이곳의 날씨를 거의 달 별로 짐작할 정도가 되었다. 그만큼 세월이 지나야 그런 것도 느끼게 되나. 며칠 전부터 또 축 쳐지는 듯한 기분이지만 별로 놀랠 일도 못 된다. 이게 거의 나의 정상적인 ‘기분’이었지 않을까.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을까. 이경우의 최악과 최저를 느끼며 산 게 이제 얼마나 되어가나.  10년이 되어가나. 놀라지 않는다. 10년은 결코 이제 예전과 같이 길지 않으니까.  그리고 죽음을 느끼며 살게 된것도 얼마나 되었나.  아마도 이것도 조금 과장해서 10년이 되어가지 않을까. 만성적인 불안과 초조를 나는 조금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가. 그래서 만성인가. 나는 희망이 거의 전혀 느껴지지 않는 그러면서도 불안과 초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거의 허송세월을 아니 죽을 날 만을 기다리며 사는지도 모른다.

하느님과 성모님도 여기서는 나를 못 도와 주신다. 내가 바뀌어야 하는 것도 알지만 나는 그것을 ‘절대로’ 못하고 있다. 그렇게 거의 사반세기를 살아 온지도 모른다. 절대로 의도와는 반대로 주위의 사람들에게 절대적 피해를 주어가며 살았는지도.  엄마도 그렇게 잃었다.. 누나도 그렇게 잃어가고 있다.. 친척들도 그렇게 하나씩 잃어가고 아니 잃고.. 친구들도 다 잊어갔다.  이제는 아마도 나와 같이 살고 있는 사랑하는 식구들도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재미없는 남편이고 재미없는 아빠로 산다.  왜 이렇게 까지 내가 되었을까.. 나는 절대로 이렇게 살아가려고 생각한 적인 순간도 없었다. 나는 재미있는 남편,.. 더 유머러스 한 아빠가 되리라고 절대적으로 장담한 그런 사람이다.  남에게 절대로 피해를 주며 살기 싫고 그런 사람을 제일 싫어하는 사람중의 하나라고 자부를 해 왔는데..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니… 어쩌다 내가 이렇게 되었을까. 

내가 싫어하는 muggy summer pattern이 며칠째 계속된다. 밤에도 덥게 느껴진다. 물론 추위의 ‘조금 귀찮은 느낌’은 없지만 이건 내가 사실 아주 싫어하는 그런 날씨다.  가끔 이렇게 봄/여름의 맛을 미리 ‘강’하게 보여주는 게 이곳 날씨의 특징임을 이제는 확실히 배워 느낀다. 오래 살게 되면 다들 이렇게 배워 느끼게 되는 것일까. 아니면 내가 지나치게 ‘한가’해서 느끼게 되는 것일까.. 둘 다 조금씩 진실이 있을거다.

지금 내가 무슨 ‘일’ 을 해야 제일 좋을까? 제일 내가 좋아하고 실현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내가 잘 알고 있는 것을 활용 해야 한다. 그게 win-win전략이 아닐까. 10+ 여전 전에 시작 된 Internet의 출현은 처음에 나에게 많은 ‘희망’을 주었다. 무슨 secret treasure같은 그런 것… technology자체도 매력의 우선 이었지만.. 그게 나의 senior year를 해방시킬 수도 있다고 정말 정말 믿었다. 나만 그런 것이 물론 아니었지만 나는 그런대로 그 흐름의 중심에 서서 일을 한 기회가 있었기 때문에 정말 chance가 많았지 않았을까.. 결과적으로는 1%도 나는 살리질 못했다.  drive를 못한 탓일까.. 아니면 내가 나의 technical skill-set 을 너무 과신 했을까..

지금 이 시점에서 과거를 보며 분석하는 게 그렇게 도움이 될 듯 하지 않다. 지금을 시작점으로 다시 시작하면 어찌 될까.. 과거의 좋은 것만 ‘만끽’하고 실수나 아쉬움은 정말 잊는 것이다. 노력을 하면 힘들지도 않을지도.. 시도도 않해 보았다. 나에게 그런대로 실현 가능성이 있는 것들 중에..Internet를 빼고는 많지 않다. 항상 머릿속은 그런 idea로 꽉 차있었다…  아하… 또 듣는다… Hitching a Ride  (Vanity Fair)!…. 용현아.. 오늘은 너의 날이다!

드디어 ‘더운 밤’을 느낀다. electric fan이 벌써 필요한가. 짜증이 난다. 체질적으로 나는 더운 것은 싫다. 추운 게 더운 것 보다 낫다. 물론 ‘이상’ 기온은 분명하지만 이건 싫다. 지난 여름에 감사하게 썼던 tall tower fan이 다시 등장 했다. 이게 연숙이 Costco에서 사온 것인데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연숙의 office에 다시 켜 놓았다. 조금 시원해 진 듯…

daily journal은 사실 자기 전에 써서 그날을 되돌아 보아야 하는 것인데.. 어쩌자고 꼭 제일 기분이 좋은 아침에 써서 쓰기는 좋은데 어제를 되돌아 보게 되는 결과가 되었다. 하지만 어찌하랴.. 요새는 잠자는 시간이 거의 11시 전으로 내려오고 그때가 되면 사실 잠 때문에 정신도 없고, 불면증으로 고생하는 연숙에게 미안하고 면목도 없다. 목표는 12시쯤 자서 6시쯤 일어나는 것 같은데.  다시 노력을 해 볼까.

어제는 드디어 dog fence의  post에 concrete를 붓고 고정을 시켰다. 이런 일이 사실 몇 년만인가. 10년도 넘은 듯.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dog fence가 아니고 ‘바깥 일, yard work’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제는 David 네 쪽으로 24’짜리 privacy fence를 시작 해도 될 듯하지 않은가. 하지만 진짜 문제는 lumber hauling이다. 2년전 (벌써?) 연숙과 같이 lattice board를 차 위에 실고 오다가 길거리 한 가운데서 떨어졌던 생각만 하면 아직도 아찔해서.. 더 그 이후로 그런 비슷한 일을 피하게 된다. 하지만 더 이상 피할 필요가 있을까. 잘 계획을 세워서 privacy fence를 만들어 볼까.  그러니까 8′ post 가 6개와 2×4 10개 정도 그리고 30+ pickets.. 얼마나 들까?

새로 보는, 이미 3번이상을 보고 지금도 보는 jTVDrama “무리한 연애”는 소재도 그렇고 뒤끝 맛도 그렇고 또 하나 나의 best classic이 되지 않을까.. 남자 60세가 뜻하는 것을 ‘연애적’ 감정과 배경에서 아주 코믹하지만 심각하게.. 그리고 중요한 기분 좋게 그려낸 걸작이다. 주인공은 아마도 왕년에 rock band (유명한) 의 member인 듯 하고.. 일본에서 1947년부터 1949년까지 세대를 ‘단까이’ 세대라고 이름을 부친 모양이다. 아마도 여기의 baby boomer정도가 아닐까.  그 짧은 때 태어난 세대에게 무슨 확실한 특징이 있었던 것은 ‘어른이 되기를 거부한’ 그런 처음 세대가 아닌가 .. 여기서도 마찬 가지겠지만.. 그래서 한국은 그런 면에서 어떠한지 모르겠다.  우리세대에 그런 확실한 획기적인 특징이 있을까?  모르겠다.

지난 금요일 저녁에는 예정대로 (갈 마음은 예전대로 별로였지만) 백형 네 부부와 Mable House Amphitheater에서 Creedence ClearwaterRevisited’ concert에 갔었다.  알고 보니 2명이 original member였고 나머지는 다 그런대로 젊은 사람들이었다. 100%가 다 즐겨 듣던 대 히트곡이라 그거 하나는 정말 감회가 새로웠다. 청중들은 예상대로 거의가 우리 또래의 baby boomer들~~~~~~  CCR concert는 결과적으로 만족했다. 거의 모든 히트곡이 원래가 시끄러운 것이라 더 새로웠다. 하지만 진짜 original에는 못 미친 곡도 많았다. 조금씩 variation (tempo etc)을 주었으면 다 낫지 않았을까. 거의가 같은 시끄러운, 빠른 템포라서 나중에는 조금 지루한 그런 느낌. 

머릿속은 계속 1969/70년도로 돌아가서 용현이와 어울리던 곳에 머물러 있었다. 확실히 생각나는 것은 1970년 4월초 지리산 등산을 마치고 어느 다방 (우리가 좋아하던 곳.. 이름을 잊었다.. 하느님) 어두운 곳에 앉았는데 용현이의 얼굴이 어둠 속에 묻혀 하얀 와이셔츠만 보였다.. 얼굴이 없는 사람? ㅎㅎ 그때 정말 그 녀석 Who’s stop the rain을 좋아했지.. 나도 그 이후부터 .. 그러니까 그 그룹의 시작은 1969년경이 아니었던가.. 까물거린다.

나는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내가 정말로 ‘우울증’일까?  요새는 거의 1초라도 반짝 ‘즐거운’ 순간을 느끼질 못한다. 현재 내가 살고 있는 처지와 상황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걸까?  정말로 나는 혹시라도 ‘의학적’인 우울증, 치료가 필요한 그런 정도가 아닐까?  암울하게만 느껴지는 일초일초는 괴롭기만 하다. 흔히들 말하는 ‘배가 불러서’ 하는 어리광 정도의 유치한 수준은 아닐까? 정말 나도 모르겠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정말로 하루 하루가 괴롭다는 것이다.

그런 어리광을 받아줄 사람이 나의 주변에 한 사람만 있어도.. 하는 불가능하게 보이는 희망도 있다만 그건 정말 힘들 거야. 나는 정말 잘못 살고 있다. 그것만은 확실하다. 나는 현재 그것을 뚫고 나올 힘이 부족하다. 이럴 때 나의 유치한 신세타령을 들어줄 엄마라도 전화 넘어 있었다면 하고 생각하고 또 눈물이 쏟아진다. 어찌하랴.  모두가 다 나로부터 가버렸다. 나는 정말 몸도 마음도 다 무섭게 늙어가고 있다. 희망과 젊음은 은하계가 우리로부터 멀어져 가는 듯한 무서운 속도로 나를 떠나고 있다. 유일한 나의 희망은 묵주기도의 성모님이다. 하지만 이게 그야말로 ‘악마’의 농간으로 몇 달째 나를 괴롭히고 있다. 내가 내린 결론이다. 이 ‘악’의 공격을 나는 어떻게 물리치고 이길 것인가. 더욱 더 ‘심각한’ 기도 밖에 없겠지.

이번 주 초부터는 마당뒷집에서 무단으로 들어와 자른 나무 사건으로 더욱더 나를 ‘분노’의 괴로움에 남게 하였다. 부글부글 끓어 오르는 듯한 용광로 같은 나의 이 ‘분노’와 ‘화’는 도대체 어디서부터 나오는 것일까. 하느님으로부터 다 용서를 받았다고 생각했던 지난날의 나의 죄와 거기에 따른 분노가 그대로 남아서 나를 괴롭히고 있다. 하느님, 저를 부디 이 분노로부터 해방을 시켜 주시옵소서.

오늘은 백형 부부의 호의로 oldies Rock Vocal Group CCR (Creedence Clearwater Revival) concert에 가게 되었다. 우선은 고맙지만 기쁘지는 않다. 그저 밖에 나가는 게 싫을 뿐이다. 호의는 정말 고맙지만. 왜 이럴까 나는 왜 이럴까. Get a Life!란 말이 나에게 필요하다. 나는 모든 것으로부터 ‘피하고’ 있다. 이건 위험하다. 정말 이런 식으로 살면 오래 못간다. near-term goal을 먼저 성취하고… 나는 조금씩 나올 것이다. 그것만이 나의 유일한 희망이다.  용현아.. 이 개새끼야.. 너는 어디에 쳐 박혀 숨어 살고 있다는 말이냐.. 우리는 정말 1969년으로 가고 싶지 않니.. CCRWho’ll stop the rain을 어두운 다방에 앉아서 열광하던 그때를 우리가 어찌 잊겠니?

요새 새로 보기 시작한 일본 tv drama가 바로 ‘무리한 연애’라는 것이 있다. 환갑에 된 왕년의 rock group member가 이 환갑 된 나이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를 조금은 코믹하게 그린 것이다. 그래서 나이가 그래서 더 유심히 보게 된다. 그것도 그렇지만 거기의 여자 상대가 ‘나쯔가와 유이’라는 배우라서 그런지도.  작년에 본 ‘파랑새’라는 drama에서 그러니까 거의 10년전의 드라마에 나온 여자주인공..’인상적’이었던 인상.. 그 뒤에 ‘87% 생존율’에서 아주 나의 머리에 남았던 그 배우가 환갑이 된 왕년의 rocker와 아마도 ‘연애’를 하는 모양인데.. 글쎄..  이것과 더불어 이틀 전에는 드디어 묵주기도 덕분에 거의 사라졌던 sexual fantasy가 꿈에 나타났다.  그런데 거기에 등장한 여자는 바로 ‘히로스에 교코?”.. 라는 아주 어리지만 성숙한 여배우가 나온 것이다. 이 배우는 ‘사랑과 죽음을 응시하며’라는 실화 드라마에서 여주인공으로 아주 열연을 한 사람이다. 청순하지만 다른 쪽으로는 관능적일 수도 있는 그런 타입인데.. 바로 그녀가 꿈에서 나를 ‘시험’한 것이다. … 이게 아마도 우리의 묵주기도를 시기한 ‘악’의 공격일수도 있다는 생각.. 모르지만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나이 60은 정말로 이런 sexual 한 것은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을까.. 나의 생각은 그렇지 않다. 하지만 그건 오른 생각은 아니겠지.

일기야, 정말 오랜만일세… 미안하이.  정말 쓰고 싶었다. 그러나 무서워서 못쓰고 2달을 보냈다.  그저 두 달이 훌쩍 흘러 버린 것이다.  폭풍과도 같던 마음 속속 깊이 고여있던 모든 나도 모르던 분노의 물길이 용솟음치며 한동안 나를 지배하였다.  1년이 넘게 나를 보호하여 준다고 믿었던 묵주기도도 이것에는 속수무책이었다.  나 자신도 놀랐다  내가 그렇게 분노를 많이 가지고 살았던가.  한마디로 나는 아직도 멀었다는 느낌뿐이다.  그래도 나의 하느님께로 향하는 노력이 헛것이 아니라고 나는 믿고 싶다.  그것의 덕분에 이 정도로 끝났다고 생각하는 게 더 논리적이 아닐까.

하지만 많이 자신이 없어진 게 사실이다.  2달을 그런 생각으로 주눅이 늘어 살았다.  하지만 아주 허송세월을 한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런대로 무언가는 했다.  폭발싯점까지 진행되어 오던 여러가지 mini projects들은 즉시 중단 되었지만 그 대신 다른 것들이 시작이 되었다.  나에게는 처음으로 ‘super-pc’가 생겼다. dual-core Intel mobo 를 ‘홧김’에 구입하였다. 이제는 4GB 를 가지고 11개의 virtual machines이 그 안에서 ‘활개’를 치게 되었다.  이것만이 요새 나를 유일하게 기쁘게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제는 아주 virtual machine의 신봉자가 되었다.  그 위력에 완전히 매료되었다고 할까.  이것으로 할 수 있는 project는 사실 나의 상상력에 달린 것이다.

작년 봄부터 시작된 일본 드라마 시청은 예상을 뒤엎고 올해도 반을 지내고 결말을 눈에 못보고 있다.  사실 한국 것을 보고 싶은 마음이 없어지고.. 겁이 나게 그곳으로 가기가 싫으니.. 나 자신도 조금은 겁이 난다.  내가 왜 이렇게 되어가고 있을까.  나이가 들면 다 이렇게 외골수로 빠지게 되나.  그건 아니겠지.  내가 이상한 것이리라.  어떻게 하면 ‘정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어떻게 하면.

썰물이 빠져 나가는 느낌의 조용한 아침.. 아이들은 다 늦잠을 즐기고 나는 평상시와 같이 일어나서 아침 ‘일과’ 를 ‘즐기고’ 있다. 언젠가부터 아침 routine 이 자리를 꽉 잡았다. 어두움 속에서 조용히 일어나 부엌의 dishwasher에서 거의 마른 접시들을 제자리에 넣고, 1인분 커피를 끓이고, 어떨 때는 맨손체조도 하고, window blinds를 다 열고, Tobey 밥그릇을 채워주고.. 나의 보금자리 서재로 와서 아침’공상’을 즐긴다. 사순절 때는 거의 ‘성경’에 관련된 일과가 아침 시간을 채웠는데 요새는 그것은 뜸– 해졌다. 그래도 ‘송봉모’ 테이프를 듣기도 하는데.. 이게 정말…

오랜만에 ‘성가신 아침 햇살’ 이 없는 아침을 맞는다. 왜 그렇게 나는 많은 때에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사랑하는 햇살을 성가셔 하는 것일까.  생각해 보면 나의 인생의 후반부 (언제부터 인지는.. 확실치..않지만 아마도 40대 이후가 아닐까) 리고 비가 오는 그런 것을 아주 많이 좋아하였다. 이유를 따지면 사실 이해 못할 것도 없다. 나의 ‘세계관’이 그랬을 것이다. 확실히 나는 어둡고 우울한 그런 인생후반을 보내고 있다.  밝음에 노출된 나의 못생긴 모습도 그렇고 아틀란타에 와서 느끼는 한마디로 지겨운 밝음에 의한 피곤도 한몫을 한 걸까. 그래 지겨운 그런 것이다. 반면, 어두움에 깔린 을씨년스러움에서 나는 안락 함을 느낀다. 어릴 때 그 추운 날 따뜻한 이불 속을 연상케 하는 걸까.

어제는 결국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몇 주 동안 눈독을 들이던 그런대로 최신판 Mobo/cpu를 mwave.com에 order를 한 ‘사건’이다. 이게 사건이나 될까.. 이 의미는 ‘돈’을 이만큼 지출했다는 뜻에서 사건이다. 변명은 있다. 이것은 ‘오락’적인 것이 결코 아니고 ‘투자’라는 변명 아닌 변명일까…

며칠 동안 Bee Gee의 oldie, First of May 가 머릿속을 맴 돌았다. 몇 년 전부터 이것을 ‘기록’해둔 덕에 아주 이제는 머릿속에 자리를 잡은 듯 하다.  왜 아닐까?  거의 신화적인 기억이 되어버린 그 아름다운 시절을 왜 아니 잊으랴. 용현아, 너는 어디에서 이 시절을 보내고 있냐. 창희야, 너는 어찌하여 그렇게 그 아름다운 시절을 잊은 다른 사람이 되었단 말이냐.  친구야, 지금이 어쨌건 상관이 없지 않은가. 중요한 것은 우리에겐 그 아름다운 추억이 아니더냐.. 부디 어디에서 살건 잘 행복한 나날이 되어랴, 하느님의 도움이 조금 있다면 언젠가 살아서 다시 만나서 그 아름다운 추억을 이야기 해 볼 수도..있지 않을까. 그래 그것도 조그만 소망중의 하나로 만들자.  그래 1977, 1988, 1999, 2000, 2011, 2022… 그 다음의 수열은?

우리 집의 main home server ‘FS’가 아주 큰 수술을 받았다. 이것보다 더 큰 수술은 없다  아주 MoBo(Mother Board)를 바꾸어 버렸다.  그것도 아주 down-graded쪽으로.  Athlon 2400+ 에서 Intel 600로 강등이 된 것이다. 이상한 것은 이게 더 마음이 놓인다는 사실. 그 만큼 경험으로 이 Intel 600가 더 문제가 없었다. 현재의 느낌으로는 비록 느려지긴 해도 훨씬 덜 말썽을 부릴 듯 하다. 문제가 있던 Mobo 는 우선 Ubuntu-server 를 올려 놓았다. 재수가 좋아서 그대로 Linux는 쓰게 해 주실지.  문제는 Intel600가 실제적으로 512MB max라는 사실. 그러니 무제한의 VM을 쓸 수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그런대로 2 VMs가 간신히 돌게 해 놓았다. 그래서 또 잠시 ‘몽상’에 빠졌다. 최신의 Mobo/CPU의 값이 얼마나 하는지 eye-shopping을 즐긴 셈이다. 물론 priority game에서 지긴 했지만. 계산에 $250정도면 아주 그런대로 ‘최신’의 것으로 장만할 수는 있는데.. 이게 또 걸린다. 제일 슬픈 현실중의 하나다.

올해는 ‘축복의 봄’을 보내는 느낌이다. 그렇게 적절한 때에 비가 내려준 것이다. 예상 밖이다. 현재까진 그랬다. 이건 정말 정말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고 싶다. 끈끈한 밤은 지독히도 싫지만 그래도 이런 축복의 날도 곁들이니 이게 하느님의 ‘은총’이 아니고 무엇인가. 나도 이렇게 감사할 일을 찾으면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그저 내가 나 자신에게 거는 기대감에 너무나 동떨어진 인생을 살고 있어서 나는 감사를 못하는 것이다. 그 비현실적인 기대도 버리기 싫다. 나의 능력의 문제인데, 하느님이 나에게 그만큼은 능력을 주셨다고 생각을 했는데 나이 60이 지나가는 시점에서 내가 잘못 생각을 했는지도.

요새는 자주 송봉모 신부의 강론 테이프를 듣는다. 시작은 모든 home analog media의 digitize의 일환이었지만 아직도 digitize는 시작은 못하고 있지만 사실 기술적인 문제는 거의 해결이 되었다. 그런 와중에 조금씩 듣게 되었다. 오래 전에 YS (이게, 영삼이도 YS구나)가 그렇게 좋다고 권했던 게 생각은 나지만 그때는 때가 아니었다. 지금은 그런대로 잘 들린다. 그 중에서 제일 공감이 갔던게… 꿈에 대한 의견이었다. 그는 아주 꿈의 중요성과 심각성을 강조했다. 나도 언젠가부터 그랬다. 꿈은 아주 random한 현상이 아니라는 것.. 성서에도 근거가 있지 않은가. 나도 조금 더 ‘조직적’으로 꿈을 꾸려고 노력을 하고 더 심각하게 해석을 하려고 한다. 그저 그리운 사람들이 많이 많이 나와주면 얼마나 좋을까.

오늘은 나라니 의 마지막 학기가 끝나가면서 이사를 하는 날이다. 정말 나라니의 대학생활이 나에게는 몇 달 정도처럼 느껴진다. 정말 빨랐다. 다른 한 편으로는 그래도 우리 부부 모든 자식에게 의무를 우선 했다는 안도감을 느낀다. 하느님의 도우심일 거다. 나라니도 그런대로 수고를 했다.

묵주기도는 다시 조용히 재개 되었고.. 정말이지 하고 나면 무언가 기분이 다르다. 무언가 있다. 무언가 있다. 나의 하느님으로 향한 마음의 문은 확실히 최고로 열려있다.  이런 기회를 놓치면 다음 기회는 사실 언제일지 모른다.  모든 힘을 다하여 한번 하느님께 가보자.  성모님, 예수님, 하느님.. 저에게 이런 기회를 주셔서 고맙습니다.  나를 위해 오랫동안 기도해 주신 분들 특히 연숙이.. 어떻게 나의 고마움을 표현을 할까.

진희아빠가 전화를 했는데.. 이것은 완전히 shocker가 아닌가.  이동수목사가 위암에 걸려서 수술을 했다는 것인데.. 알고 보니 사실이 아닌가. 왜 이렇게 되는 것일까. 이번에는 정말 죽음이 나의 근처까지 온 기분이 들었다. 내가 여기서 아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를 않은데도 그 중에 몇 명이나 벌써 갔던가.  만수아빠는 교통사고, 백명순씨(연숙의 친구), 김예순씨, 박만용씨, 최진착씨(자살), 박창우씨, 그리고 이동수씨는 위암?  벌써 그런 나이가 되었구나.  이동수목사는 고생을 많이 한 편인데 이렇게 되고 보니.. 정말 하나님이 그 목자를 시험을 하시나 하는 생각까지 든다. 위암은 그렇게 까지 치명적인 것이 아니니까.. 완치가 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항상 수술 후 5년까지.. 정말 아찔하다.

올해는 최고로 일찍이 사순절이 시작이 되었다.  2월이 가기 전까지  Acts of Apostles, 사도행전을 다 typing을 하였다. 그것도 영어와 한글로 다 같이.  쓰는 것에 비하면 뭐 하지만 그래도 나에게는 많은 도움이 되었다.  20년 만에 다시 읽는 ‘사도행전’.. 마음을 열고 눈을 뜨는가… 느낌이 그렇게나 달라질까?  정말 놀랐다.  3월부터는 요한복음을 영어로 읽기 시작했다.  정말 처음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항상 공관복음만 들었는데.. 처음으로 읽는 기분이다.  사실 일고 보니.. 그 ‘유명한’ 구절들은 거의 모두 이곳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았다.  특히 John 3:16같은 것..

3월 3일에는 그렇게 ‘걸리던’ 고백성사를 보았다. 미국성당이라 거의 형식적인 것이겠지만 나에게는 그런 게 아니다.  마음의 준비가 거의 99%라고 느끼니까.  그래서 너무나 홀가분 하였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매년 하기로 ‘결심’을 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시간이 갈수록 나의 하느님으로 향한 ‘마음의 문’이 조금씩 조금씩 열리는 것을 느낀다.  이것도 작년부터 시작한 묵주기도의 ‘은사’일까.. 아니면 은총일까.  모른다.. 모른다.. 하지만 나는 느낀다.. 내가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것도 하느님을 향해서 말이다.  그렇게 안 믿어 지던 것들도 이제는 믿어지는 쪽으로 향하는 나를 보고 나도 사실 놀란다.  이 모든 것이 그렇게 듣던 말과 같이 사실이란 말이다.  이게 모두 정말일까.  이게 다 사실이라면 앞으로는 어떨까.  나도 다시 어머니를 볼 수 있을까.  모두가 영생을 누릴 수 있고  육신을 떠난 더 높은 영혼의 세계가 앞으로 있을까.. 모든 게 신비롭게만 느껴 지지만 조금씩 조금씩 나의 마음을 열고 있다.

아주 오랜만에 Stephen CoveyFirst Thing First를 읽기 시작하였다.  아마도 성경 다음으로 이게 나의 ‘다음성경’이 아닐까 생각도 해 보았다. 이 책은 아마도 성경을 배경에 두고 씌어진 기분도 드니까 (이 저자는 사실 유타주 출신의 Mormon교도)  결국은 spiritual direction/goal이 없으면 결국은 ‘허무’하다는 뜻일까.  이제는 그게 이해가 간다.  무한대와 유한공간, 영원과 현세의 찰라.. 영혼과 육신.. 이런 게 이런 게 모두 나의 살에 와서 느껴진다. 아마도 나도 죽음에 대해서 많이 실감을 하며 살고 있다는 증거이다.  이 사람(Covey)말 대로 이제는 Leave a Legacy가 제일 중요한 관심이 되고 있다. 나의 존재의 의미를 느끼며 남겨야 하지 않을까.  이게 거의 본능처럼 느껴진다.  무엇을 남겨야 하나.  어떻게 남겨야 하나.  누구에게 남겨야 하나.

아주 드문 일이지만 어젯밤은 연숙이 나보다 먼저 잠자리에 들었다.  이번 침묵 피정을 다녀 온 후에 무언가 해 보려는 것 같다. 오늘도 새벽 6시 30분 전에 일어 나게 되었다. Tobey 토비를 보니, 그 net 망같이 생긴 담요를 아주 포옥 덮고 잔다. 그걸 안 덮었으면 추울텐데.. 하며, 신경을 쓰며 잤는데 그 녀석 본능적으로 그 밑으로 파고 들어가서 덮고 잔다. 역시 걱정한 내가 틀렸다. 가끔 이 녀석과 시간을 보내며 어떨 때는 이 녀석이 사람이 개가 되어서 외로운 나에게 친구로 보내 졌나.. 하는 아이 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 말만 못 할 뿐.. 감정의 교류나 표정하며 알아 듣는 것 하며 정말 사람처럼 느낄 때도…

2월도 중순이 훌쩍 지나고 춘분을 향해 돌진 중이다. 어제 Tobey 토비와 산책을 하면서 우연히 아니 설마 하며 본 것이 그 흔하던 Bradford Pear tree의 꽃망울이 많이 보였다는 사실이다. 놀랐다. 진짜 초봄이.. 그러고 보니 어제가 ‘우수’ 였던가.  내가 그걸 놓쳤다. 입춘도 훨씬 전에 지났고. 그래서 기온도 거의 50도에서 60도 사이로 왔다 갔다 하는구나. 그 배꽃이 제일 먼저 필 때가 온 것이다. 봄이.구나.. 장모님의 기일도 곧 이고. 그러면 나의 사랑하는 엄마의 ..  사순절에 하려던 매일 과제는 아주 순조롭게 실행을 하고 있다. 생각 보다 시간이 더 걸리지만 오랜만에 읽는 사도행전.. 아주 좋다. 이제 확실히 초대교회의 성인/사도 들을 그릴 수 있을 것 같다. 우선 ‘신화’같이 느껴지지 않아서 좋다 (구약처럼).. 아주 현실감과 사실감이 많이 느껴진다. 그때 사람들도 요새 사람들과 생각 하는 게 그렇게 다르지는 않았으리라 생각도 해 본다.  그래도 초자연적인 ‘기적’들이 많았다는 사실이 아주 흥미롭다.

어제의 ‘유서’가 계속 머릿속에서 맴돈다. 이제는 때가 온 듯 느낀다. 무언가 ‘심각’한 것을 남겨야 한다고. 더이상 미룰 수가 없다. 며칠 전 김정국씨가 운명한 것을 듣고 더 그렇게 느꼈는지도.. 그는 거의 나의 ‘동료’적인 사람이 아닌가. 비록 친구는 아니었을 망정 거의 나와 같은 게 많았던 사람이 또 갔다. 그의 잘못도 아니고 그냥 갔다. 어떻게 이승을 떠나는 게 나에게 바람직 할까, 우선은 더 살고 싶겠지. 하지만 이것도 많이 전과 많이 달라졌다. 60을 넘긴 이상 많이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삶의 애착이 옛 처럼 많지 않다. 이렇게 외롭게 사는데 앞으로는 더 외로우리라는 생각도 든다. 나는 원래가 외롭게 살았지만 지금처럼 외롭게 느껴본 적은 없다.  다 갔다. 나의 사랑하는 엄마가 없다. 유일한 혈육인 누나가 옆에 없다. 실제적으로 나는 고아다.  이세상에 현재의 ‘만들어진’ 가족 이외에는 아무도 없다. 친구도 없다. 하나도 없다. 나는 절대적으로 혼자이다. 그저 그리운 과거들만 있다. 그게 현재로써 나의 유일한 기쁨이다.

한 마디로 왜 내가 지금과 같은 처지가 되었는지.. 왜 이렇게 살아야만 했는지 운명이란 건가.  물론 나의 선택일 수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전혀 ‘사고’같은 뜻밖의 인생을 산 듯한 기분이다. 이건 내가 예정하고 상상했던 나의 인생은 절대로 아니다.  그래, 나의 선택이었고 시대의 선택이었고.. 그리고 운명이었다. 이렇게 살게 것이. 하지만 절대로 나 이외의 것들을 ‘탓’하고 싶지 않다. 한마디로 ‘치사’한 짓이다. 모든 것은 나로부터 시작된 행동이었고 선택이었을 테니까. 성격 탓인가. 그것도 원망하지 말자. 그건 나의 부모와 조상으로부터 물려 받은 유산이니까.  한 마디로 현재까지 흘러온 나의 인생은 거의 ‘실패’나 ‘낙제’ 점수 일지도 모른다. 남이 볼 때 그렇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내가 볼 때 그렇다. 의도적으로 된 게 거의 없으니까. 세파에 아니면 환경에 휩쓸리면 살았어도 그건 나의 책임이다. 패배의식은 분명히 나쁜 것이지만 솔직한 것은 바람직 하지 않을까.  어머니를 그렇게 돌아 가게 한 것으로 나는 99.9% 불효자이고 인생 낙오자다. 암만 생각해도 그건 말도 안 되는 불효요, 무관심이요, 불성실이요, 나태요, 패배자요, 용기가 거의 제로인 인간의 행동이었다. 시간과 세월을 가지고 도박을 한 용기가 없는 패배자는 바로 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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