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든 삶, Trump, Windows 10, 최인호

¶  Come to me… and I will give you rest (Matthew 11:28): 오늘의 성서 말씀, 그러니까 Today’s Readings 중 복음말씀, 마태오 복음 11장 28절은 이렇게 시작이 된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나머지 부분은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귀에 많이 익은 구절이라 사실 새삼스러운 것 같지 않지만, 그래도 스치는 느낌은: “산 중 폭풍우 속에서 보이는 먼 곳 가물거리는 불빛이 흘러나오는 오두막집, 그곳으로 비틀거리고, 쓰러지며 들어가 푹신푹신한 이부자리에 쓰러지듯 누웠을 때”.. 오랜 세월을 살면서, 참 어떨 때는 삶, 인생이란 것이 이렇게 힘든가.. 묻고 물을 때, 게다가 편히 기댈 곳이 없을 때.. 친구가 하나도 없다는 자괴감에서 그 구세주란 것을 믿을 수 있었고, 그에게 기댈 수만 있었다면.. 하지만 나는 불행히도 그렇게 예수님을 믿으며 나의 모든 것을 기댄 적이 없는 것 같다. 이제는 조금 가능할 것 같지만. 하느님은 사랑의 자체이고 성삼위 성자께서 그것을 우리들에게 나누어 주시고자 한다는 비교적 간단한 교리, 진리를 전에 가슴으로 믿을 수만 있었다면.. 그랬었다면 나의 인생은 조금은 더 밝은 쪽으로 방향을 잡을 수 있었지 않았을까?

 

¶  retarded Trump, Americans:  요사이 미국이 돌아가는 꼴을 보면 실로 가관중의 가관이다. 오~랜 세월을 이 common sense의 나라에 살면서 이런 해괴한 ‘정치적’ 현상들은 못 본 듯 싶은데.. 어떻게 이런 ‘속물중의 속물, 정박아, 양아치’ Trump란 ‘쓰레기’가 대통령을 하겠다고 나섰을까? 졸부중의 졸부, 부동산 투기의 귀재인 것은 인정하지만 그것 빼고는 그야말로 ‘양아치, 정박아’에도 미치지 못하는 그의 ‘원시적’ 생각은 그야말로 ‘쓰레기’ 수준이다. 하지만 내가 요사이 이 인간을 쫓아 다니는 news media를 피하는 이유는 이런 쓰레기를 쫓아다니며 바보, 천치 같은 얼굴로 환호하는 지지자들, 이들은 그야말로 미국인 유권자의 최저 중에 최저에 속하는 집단들이다. 대부분 white trash급에 속하는 불쌍한 인간군상들이다. 잘못하면 내년 봄까지 이 쓰레기들에 대한 것들을 듣고, 보고 할 생각을 하면 아찔해진다. 시간이 약이고 세월이 모든 것들을 correct 할 것이라 생각은 하지만 어쩌다 미국이 이 지경까지 추락하고 있는지.. 최악의 악몽중의 악몽은 이 쓰레기가 대통령이 되어서 ‘고함을 지르며, 악을 쓰며’ nuclear button을 누르는 모습이다. 그야말로 ‘성모님의 전구’가 진짜로 필요한 때가 온 것인가? 어머니, 제발 이 쓰레기가 나의 눈에 보이지 않게 해 주세요.. 부탁합니다, onegaishimas!

 

¶  Windows 10‘s comingsuddenly지난 달부터 나는 corporate life 이후의 나의 좌우명 ‘Never Apple, Never Microsoft‘란 철학으로부터 조금씩 외도를 시도하고 있었다. 나에게 그들은 two evils에 속했고 누가 lesser evil인가 하는 것은 시간에 따라서 뒤 바뀌기도 했다. 현재 나에게 lesser evil은 바로 Microsoft인 셈이다. 이들이 evil까지 된 것은 나의 신경을 건드리는 일들이 있었고 Apple의 경우에는 egomaniac Steve Jobs가 바로 그 이유고, Microsoft의 경우에는 당시 그렇게 엄청난 $$$를 가지고 마지막까지 1 cent라도 더 짜내려고 발상한 Activation이란 것이었다. 그런 nonsensical ‘사건’들 이후 나는 두 번 다시 뒤를 보지 않고 그들에게서 완전히 떠났다. Open Source 쪽이 나를 구해준 것이다. 하지만, Duopoly인 이 세상에서 그들을 100% 떠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나의 결심은 “절대로 나의 $$$이 그들에게 가는 것만은 피하겠다는 것”으로 고착이 되어서 현재까지 흘러왔다.

다행히 세상이 desktop에서 mobile쪽으로 변하고 있지만 나에게는 아직도 desktop OS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중요한 생활의 일부이기에 조금씩 신경을 쓰다가 얼마 전에 우리에게 적합한 해결 방법을 찾게 되었다. Refurbished hp business pc, 그것도 OEM Windows 7이 들어있는 것, $70로 ‘실험용’으로 구입을 해서 샅샅이 test를 해 보니.. 이것이 ‘대박’이었다. 결과적으로 말해서 최신판 Windows 10으로 가는 ‘가장 싼’ 길이 바로 이것이었다. 최소한 나의 $$이 Windows 10으로 직접 쓰여진 것이 아니므로, 나의 자존심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현재까지 내가 만들어 쓰던 PC들과 다른 것은 물론 내가 마음대로 바꾸거나 고치는 것에 제한이 많지만 대신 이 ‘box’들은 정말 tank처럼 단단히 만들어짐을 알기에 큰 걱정이 필요 없었다. 나의 예상이 이 2 hp ‘box’들.. Windows 10으로 앞으로 수년간은 걱정 없이 우리들의 mainstream desktop 구실을 할 듯하다.

마지막으로 쓰던 Windows Vista에서 Windows 10의 변화는 참 신선한 것이어서 현재까지 나의 평가는 아주 호의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앞으로 나의 main desktop은 물론 Open Source, 그러니까 Linux임에는 변함이 없지만 side-by-side로 이 Windows 10로 ‘주류 세상’의 맛도 볼 것이다.

 

¶  최인호의 신년 스페셜, 다큐로망: 장보고  이것이 나온 지 거의 15년이 되어가나.. 고국의 KBS 걸작  program이었던 ‘역사 스페셜‘ series, 다시 보게 되었다. 이번 Thanksgiving Holiday이후 일 주일 동안 앓아 누워지내며 ‘우연히’ home server에 있는 이것 중에서 예전에 안 보았던 ‘최인호 스페셜’을 보게 된 것이다. 왜 그 당시에 이것을 안 보았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아마도 당시에 내가 최인호에 대한 선입견이 안 좋아서 그랬을지도 모른다는 미안한 생각도 든다. 우리세대, 우리시대를 풍미하며 인기를 구가하던 그..얼마 전에 암으로 타계를 했다고 했을 때도 나는 그렇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나와 비슷한 나이란 것, 연세대 동문이라는 사실을 빼고는 나와 공통점이 거의 없는 그였다. 나보다 2살 정도 위였지만 연세대는 나보다 조금 늦게 입학한 것을 보면 아마도 재수를 하였던 모양이다. 연숙은 그의 책을 잘도 보았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1970대의 그를 기억하기에 그 시대의 유행을 잘도 타던 그가 나의 radar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았고 오랫동안 그렇게 살았다.

가톨릭으로 언제 개종을 했는지는 몰라도.. 주위에서 그가 아주 경건한 신앙인이 되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는 조금 반갑기도 했지만 그런 것도 잠깐.. 어떻게 그렇게 건장한 나이에 암으로 타계를 해야만 했는지.. 아쉽고 아까운 기분, 우리 세대의 celebrity였던 그가 그렇게 ‘일찍’ 가는 것을 보며 우리들의 mortality도 생각 안 할 수 없었다.

이 ‘신년 스페셜, 다큐로망 장보고‘라는 5부작 video를 보면서 ‘처음으로’ 그의 모습과 인상을 자세히 ‘가까이’ 보게 되었다. 우리 세대라는 느낌이 우선 ‘확~’ 들어왔고, 다음은 ‘우와~ 멋진 사람이다’ 라는 탄성이 나왔다. 물론 celebrity의 후광이 있을지는 몰라도 그것과는 다른 ‘지식인, 신앙인’의 냄새가 확~ 느껴지는 것이다. 이 프로그램은 비록 ‘역사 스페셜’의 일부였지만 사실은 역사적인 접근보다는 ‘문학적인 접근’에 더 가까워서 그렇게 느낌이 신선했는지 모른다. 게다가 그가 ‘추적 취재’를 하며 보여주는 일본과 중국에서의 행적들은 내가 정말로 부러워하는 모습들이었다. 예를 들면 일본 취재를 하면서 산중의 고요한 온천 여관의 방에 앉아서 ‘향기 짙은 coffee’를 마시는 모습이 나는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아하.. ‘인기’ 문학인들은 저런 멋에 사는구나. 처음으로 나도 ‘저런 멋진 문학인’이 되었다면 어떨까.. 하는 해괴한 상상도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이래저래.. 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장보고와 9세기 무렵 활발했던 통일신라시대를 실감나게 공부했지만 그것 보다는 최인호란 ‘멋진 사람’을 왜 그렇게 일찍 데려가셨을까.. 하는 아쉬움이 나의 머리를 더 휩싸곤 했다. 지금 살아있었으면 얼마나 정열적으로 가톨릭 신앙을 전하기도 할 것이고, 숨어있는 역사를 문학적인 신선한 접근으로 우리들에게 전해 주지 않았을까? 아쉽다.. 아쉽기만 하다. 앞으로 (가능한 그날까지) 나는 이 작가의 글을 ‘체계적’으로 읽으며 우리가 살아온 세대를 ‘최인호가 본 눈’으로 기억하고 찾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2003년 신년 KBS Special: 최인호의 다큐로망: 해신 장보고

2003년 신년 KBS Special: 최인호의 다큐로망: 해신 장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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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L! 2 Francescos

¶  LOL! The news is not all gloom and doom..

lol-francis이 cute한 사진을 보고 안 웃을 수 있을까? 자유롭고 ‘유치’한 어린아이의 큰 웃음과 파안대소 교황님 프란체스코의 만남.. CNN의 제목은 ‘우울한 암울한 뉴스’에 치어 죽을만한 이 시기에 이런 웃음은 우리에게 어떤 선물일까? 희망은 있다.. 대림절의 뜻과 부합하는 희망이 솟구친다.

¶ 오늘은 기가 막히게도 청명하고 높은 하늘아래 10여일 만에 처음으로 regular normal routine을 따른 하루가 시작되었다. 심지어 생소하게까지 느껴지는 Holy Family 성당, 하지만 모든 것은 ‘그대로’ 우리를 기다리고 반겨주었다. 정말 ‘고향’같은 느낌까지 받았고 그렇게 하루의 평화는 주어졌다. 역시 그 동안 못 보았던 다른 프란체스코, ‘고려대 출신’ 김 프란체스코 형제, 역시 충실히 서울에서 방문오신 장모님을 모시고 미사 참례를 하고 우리와 만나게 되었다. 예상대로 형제님의 wife자매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는데.. 아직도 여독과 시차가 있으리라 benefit of doubt을 생각하기도 하지만 아마도 미사란 것이 생소해서 그럴지도 모른다는 다른 생각도 든다.

별로 말이 없으신 장모님에게 거리감을 줄이려 대화를 하려고 성당 hospitality room으로 coffee 를 마시러 갔지만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오늘 따라 funeral이 있어서 쓸 수가 없었다. 할 수없이 우리가 잘 가던 Roswell road at Canton road에 있는 McDonald로 가 breakfast #2 로 짧지 않은 즐거운 대화를 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이렇게 모인 것은 아마도 처음이었겠지만 그래도 무슨 오랜 친지를 만난 듯 거리감 없이 대화를 하는 월요일 아침이 되었다. Regular routine 중에는 YMCA workout이 있는데 아마도 그것은 며칠 뒤에나 시작이 될 듯하다. 그래서.. 명언.. ‘이 모든 것 다 지나가리라..’ 세월은 흐른다.

Two Candles, ‘Legio’ Reun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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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번째 대림 초

대림2주일로 들어서는 아침이 밝아온다. 나의 올해, 2015년  대림주간은 내가 기억하는 한, 처음으로 ‘별로 묵상도 못하고’ 지낸 첫 대림주가 될듯하다. 아니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서’ 그럴 것이고, 그 다른 것이란 ‘육체적 고통’이다. 사순절이라면 고통을 느끼고 묵상하는 것이 큰 의미가 있겠지만, 희망과 기다림이 주제인 대림절에서 말초적인 고통 감은 별로 달갑지 않았지만.. 별도리가 없었다. Thanksgiving Holiday를 비교적 무절제하게 ‘외도’했기에 당한 self-inflicted damage라고 순순히 받아들이는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래도 앞으로 3개의 초가 남아있다. 희망은 있고 다시 겸손, 절제하는 생활로 들어가면 되는 것이다.

각종 ‘해괴한’ 것들이 news media에 흘러 넘치는 이 세상.. 어떨까? 암만 생각해도 유일한 희망과 해답은 ‘절대적 선(善)’이신 하느님, 구세주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맞다.. 모든 근초적인 악의 원인은 사랑의 부재에서 오는 것이고 사랑의 원천은 하느님이라고 보면 해답은 비교적 간단한 것이 아닐까?

 

¶  레지오 연차 총 친목회 2015

참.. 세월도 빠르지.. 작년 ‘연총: 레지오 연차 총 친목회’의 기억이 어제같이 생생한데 어떻게 벌써 올해 또 이렇게 같은 곳에 모두 모였던가? 작년 것이 생생하다는 것은 글자 그대로 생생하게 몸으로 우러나오는 것을 말한다. 작년에는 우리들과 나이가 비슷한 ‘평화의 모후’와 같이 합작해서 karaoke style로 오승근의 ‘내 나이가 어때서’ 를 신나게 불렀었다. 그때에 연세대 선배님과 가까이 알게 되는 친목회의 목적이 달성되었다. 친목회의 목적은 지난 일년 동안 잘 모르고 지내던 단원들과 친교를 이루는 것으로 ‘레지오 교본’에 명시가 되어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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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갑자기’ 늘어난 단원 수에 힘을 입어서 대담하게 새로운 것을 시도하였다. 연숙에 오래 전에 관여 되었던 ‘탈춤’을 ‘흉내’ 내 보기로 한 것이다. 예전부터 나는 그녀로부터 이 탈춤에 대한 추억의 얘기를 많이 들었기에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지만.. 글쎄.. 가까이서 본 적도 없는 나로서는 ‘힘들 것이다’라는 우려를 하고 연습을 하면서 신도 별로 나지 않았다. 사실.. 나는.. ‘몸을 움직이는 예술’은 딱 질색이라서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래도 ‘순명’을 제일 덕목으로 삼고 있는 ‘성모님의 군단’의 ‘장교’로서 단체행동을 피해갈 수는 없는 것이고.. 빠지지 않고 연습을 했지만 결국은 마지막 단계에서 허리통증과 부차적인 고통으로 ‘공연’은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오늘의 ‘연총’ 은 작년 때와 거의 완전히 같은 format으로 진행이 되었지만 그래도 눈에 띄게 ‘발전’한 것이 있었다. 교본의 정신을 따라서 ‘사치스럽고, 게걸스러운 음식’들이 자제되었고, 각종 ‘경품’ 같은 것도 사라졌다. 그러니까 performing group에 거의 모든 focus가 맞추어져서.. 어떨까.. 이것이 이상적인 연총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나는 비록 탈춤공연에 참가는 못 했어도 오늘 하루 온전히 이 연례행사에 참가를 해서 오랜만에 ‘방관자’의 여유로 장기자랑(공연)과 행사의 진행을 만끽하였기에 예년과 다른 색다른 각도로 보고, 생각하는 뜻 깊은 기억을 만들었다.

totally grounded Advent Sun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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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을 향한 4주의 ‘희망의 촛불’..

¶ 은근히 그 동안 기다려 오던 2015년의 대림절이 시작되기도 전부터 나는 꼼짝없이 집안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니까.. totally grounded가 된 것이다. 나의 기억 속에 이런 중요한 season에 이런 적은 한번도 없지 않았을까 생각이 되는데.. 속으로 생각하기에 그야말로 what a lousy timing!  인가 되뇌기만 하고 현재도 계속하고 있다. 왜 하필 이런 중요한 시기에..  살아서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는가?

조금은 비 전통적인 Thanksgiving holiday를 보냈던 올해, 가족보다는 친지와 어울린 것에 대한 ‘보복’인가? 지금 생각해보니 그것은 무언가 주객이 전도된 느낌을 떨칠 수가 없다. Thanksgiving 이 무엇인가.. 가족들과 감사를 드리는 조용한 때인가 친지들과 어울려 부어라 마셔라 고성방가를 하는 시절인가? 완전히 무언가 잘 못된 것이었다. 그것이 시발이었는지.. 그 다음날 나는 ‘허리를 다쳐서’ 드러눕는 불쌍한 신세가 된 것이 그저 우연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는 것이다.

나의 등, 허리 문제는 보통 사람들도 가끔 당하는 조그만 사고일 수도 있지만.. 문제는 나의 ‘젊지 않은’ 나이와 그것과 겹쳐서 발생하는 다른 ‘이상한’ 고통들이 amplified가 되어서 무섭게 괴롭히는 시간의 시작된 것.. Bible 속 Job 의 고통이 생각날 정도로 이 시간들 괴롭기만 하다.  오랜 동안 ‘몸에 익었던’ 친근한 daily routines들이 100% 정지가 되고, 중요한 Advent Sunday Mass는 물론 레지오 주회합 결석까지.. 서기로서의 간부기능도 빼먹게 되었고, 이제는 금요일 봉성체 동행도 포기할 지경이 되었다. 아니.. 이번 일요일의 레지오 연차 총친목회에 참석하는 것도 확신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작년 2014년 봄에 지독한 몸살독감으로 며칠을 누웠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때에도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고 레지오 주회합도 못 갔었던 나에게는 ‘대형 사고’였던 때였다. 그때에 느낀 것이 참으로 많았었다. 별로 육체적으로 고통을 모르고 살았던 나에게 처음으로 ‘아픈 사람들의 고통’을 생생하게 느낀 것이다. 몸이 아픈 누구를 보거나 들으면 그저 ‘상상’만 할 정도였고 그 고통에 동참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나의 표정과 말에 더 신경을 써서 위로할 정도였다. 그것이 그때에 확실한 교훈을 받았고 그 이후에는 많은 노력과 발전이 있었다.

이번의 경우에는 집 밖으로 ‘자유자재’로 나갈 수 없는 교우들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거동이 불편’한 형제자매들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얼마나 불편할까? 얼마나 나가고 싶을까? 얼마나 사람들과 만나고 싶을까? 그런 것을 일깨워주기 위해서 이런 고통을 받는다고 까지는 생각하지 않지만 timing이 전혀 우연만은 아닌 듯 해서 조금 더 묵상할 수 있는 시간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자유롭게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는 사실만은 나를 지독히 우울하게 한다.

그립다.. 공산당?
그립다.. 공산당?

¶  “공산당이 그립다..”  허~~ 이게 웬 망언인가? 근래에 들어서 이렇게 가끔씩 ‘공산당 향수’란 것이 머리에서 왔다 갔다 함을 느끼고 나도 깜짝 놀란다. 이것은 사실 사연을 알고 보면 해괴할 것까지 없다. 근래에 뉴스를 보면 ‘악 중의 최고 악’도 세대의 변천에 따라 변하며 현재의 ‘최악’까지 온 듯하다. 현재의 최악은 물론 ‘모슬렘을 자처하는 미친 로보트’ 들이다. 솔직히 이들 존재는 내가 보기에 이미 ‘인간이기를 거부한, 악의 씨로 프로그램이 된 로보트 집단’으로 밖에 안 보이는 것이다. 이 ‘물건’들은 사실 그러니까 생각 깊이 할 필요도 없이 destroy되어야 하는 ‘물건’들인 것이다.

이 불쌍한 xx들은  이 세상이 싫어서 죽으려면 자기네들만 죽지 힘들게 남들과 함께 죽으려는 것인지.. 이런 물건들이 어떻게 세상에 출현하게 되었는지.. 종교를 탓하지 말고 그것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인간을 탓해야 할 것인지..  그래서 생각하는 것이.. “그래도 ‘인간 집단’과 싸우던 공산당 시절이 그리운” 것이다. 그 공산당 집단도 극단적인 case에는 거의 로보트에 가까운 것들이었지만 최소한 자기와 가족들의 목숨은 아끼던 인간들이었기에 지금의 사태에 비하면 그들과 싸우던 그 시절이 조금은 그리운 것이다.

이런 ‘악에 대한 향수’ 중에는 어린 시절의 공포의 대상, ‘소련, 중공, 북괴, 일본 공산당’ 등이 떠오르는데.. 당시에는 정말 무서운 대상들이었지만.. 지금 생각하니 최소한의 ‘전쟁법’은 지키던 집단들이었다. 그런데 요새 일어나 기가 막힌 사태들의 주범들은 도대체 우주의 어디에서 도래한 종자들인가?

‘Giving Thanks’ 2015..

Thanksgiving SongMary Chapin Carpenter

 

Thanksgiving Holiday 2015, 올해에 나는 우리는 어떻게 누구에게 giving thanks를 해야 할 것인가? 연일 뼈가 시려오게 내리는 가랑비의 하늘은 다시 ‘기가 막히게’ 멋진 낙엽을 바라보는 드높은 가을 하늘로 변했다. 지금 seasonal holiday의 상징인 pumpkin color로 온통 주변이 덮인 이곳에서 조용히 생각한다. 올해는 어떤 감사를 어떻게 드려야 하나..

상투적인 관례로.. 가족 친지들이 모두 건강했던 것.. 물론 제일 먼저 감사를 드려야 하지만 그것들 이외에도 생각보다 많은 것들이 있음을 안다. 아하… 구체적으로 밝힐 수 없는 어떤 ‘사건’ 이, 사실은 올해를 the best year of my life, our lives로 만들었다. 어떨까.. 그것이 우리의 노력이나 그저 행운의 chance로 말미암은 것이었을까? 분명히 아니다. 어떤 ‘안 보이는 손’이 우리 뒤에 있었음을 절대로 확신을 한다.  안 보이는 그것은 우리의 어머니요 하느님의 어머니였다는 사실도 거리낌없이 밝히고 싶다.

2011년부터 올해 6월까지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의 주임신부로 계시던 하태수 미카엘 신부님.. 어찌 잊을 수 있습니까? 내가 한국어미사 공동체인 그곳으로 서서히 복귀를 하며 이 ‘날카로운 지성’을 가진 예수회 사제로부터 무척 깊은 것을 배우고 소화를 시키려 했다. 그와의 3년은 나에게 무척 깊은 묵상자료가 주워졌던 시기였고, 오래 잊고 살았던 것, 안 믿었던 것, 확실치 않았던 것들에 서서히 빛이 비추어졌던 시기이기도 했다. 깐깐한 성격을 감안한다 해도 이 사제는 나에게는 ‘은인, 구원자’임에 틀림이 없고, 이곳을 이미 떠난 사실이 나를 허전하게 하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나는 이 예리한 사제에게 감사, 감사 감사를 드리고 싶다.

하 신부님 뒤를 이어 새로 부임하신 주임신부 예수회 사제 이재욱 세례자 요한 신부님도 빼놓을 수 없는 감사의 대상이다. 개인적으로 사제를 사귀는 것은 나와는 거리가 먼 ‘취미’이지만, 본당 사목 차원의 사귐은 나에게 그렇게 이상할 것 없다. 이신부님은 사람과 거리를 두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정도로 친숙하게 다가온다. 우선 개인적인 친근감이 사제적인 후광에 앞 서서 느껴진다. 오시자 마자 쉴 틈도 없이 ‘봉성체 환자’를 찾아 나신 것.. 그것이 우리와 같은 차를 타게 만들었고 아주 가까운 입김을 느끼게 되고 이 젊은 사제의 사사로운 따뜻한 손길도 느낄 수 있었다. 예리한 지성의 하 신부님을 대신해서 따뜻한 온정의 손길이 우리 성당을 3년간 감싸 주시리라 생각하며 감사를 드리고 싶다.

친지 중에 이동수 목사님을 빼놓을 수가 있을까? 일년에 한두 번 정도 잊지 않을 정도로 우리 부부들끼리 만나지만, 만나면 농도가 짙고, 심도가 있는 이야기를 나눈다. 개신교와 천주교의 거리를 전혀 느끼지 않는 허심탄회한 자세로 말하고 듣는데, 나에게 큰 영향을 주는 이야기들의 깊이는 사실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그의 체험적인 신앙, 영성은 하나도 빼놓을 수가 없이 진실하고 공감이 가는 것들이었다. 그리 건강하지 못한 것이 조금 신경이 쓰이지만 그래도 항상 밝게 살아가는 이 ‘아틀란타 한국학교’ 선생님 (한때 우리 부부는 같이 그곳에서 주말에 일을 한 적이 있다), 올해도 감사 드리고.. 부디 몸이 더 건강해 지기를 기도한다.

아차 하면 빼놓을 수 있는 우리의 ‘보금자리’가 있다. 그것은 내가 만 5년 째 몸담고 있는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의 레지오 이다. 5년 전에 입단한 것, 엊그제 같은데 올해로 5년이 지났다. 소박한 동기로 입단 활동을 시작했고, 99%가 자매님들인 이곳에서 내가 과연 몇 달을 버틸까 생각도 했지만 나의 부질없는 걱정은 완전한 걱정으로 나타나.. 이제 5년을 넘게 되었고, 이곳은 내가 몸이 불편하거나 ‘강제로’ 퇴단을 당하기 전까지는 큰 무리, 저항 없이 몸을 담고 싶은 ‘신비로운 단체’가 되고 있다. 신비라는 표현이 과장된 것이 아님을 누가 알랴? 보이지 않는 부드러운 손길로 성당 공동체 구석구석을 위해 봉사하는 이 ‘생활 전선에서도’ 바쁘기만 한 자매님, 형제님들은 가히 배울 것의 표본이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이 신심봉사 단체를 만들어 주신 Irish gentleman, Frank Duff 형제께 감사를 빼놓을 수가 없다.

Soggy, bone-chilling day n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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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Office 창문으로 보이는 11월의 싸늘한 비.. 너무나 편안한.

와~~ 싸늘하다.. 스웨터가 어디에 갔나.. 두꺼운 양말은.. 갑자기 느닷없이 11월에 장마 같은 비가 연일.. 거기다 기온은 급강하.. 그야 말로 double whammy인가? 뽀얀 안개가 뒤덮인 바깥은 온통 차가운 빗물에 섞여서 그야말로 뼈까지 시린 느낌을 준다. 황금색의 나무들과, 깊은 하늘을 연상시키는 11월의 상상이 완전히 건너가고 숫제 이제는 굵직한 warm-feeling holidays들이 기다려지는 그런 기분까지 느끼게 한다. 비록 weather person들은 ‘미안한 표정’을 계속 짓지만 나는 사실은 반대로 이런 ‘음산한 기분’을 즐기는 편이다. 이런 날씨에 나는 최소한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되는 home office의 특권을 만끽할 수 있다.

 

이불로 igloo를 만들고 낮잠을 잘 준비가 끝난 Tobey

이불로 igloo를 만들고 낮잠을 잘 준비가 끝난 Tobey

최근에 들어서 나는 30분 정도의 낮잠을 즐기는 습관이 들어가고 있다. 특히 피곤한 때의 낮잠은 아마도 최고의 선물일 듯하다. 우연히 얼마 전 피곤함을 느끼며 desk에 앉아서 고개를 떨구고 졸다가 그냥 carpet위에 쓰러져서 잤던 것이 시발점이 되었다. 그때의 바깥 날씨는 기억이 나지를 않지만 최소한 그때의 30분간의 낮잠은 너무나 경이로운 경험을 주었다. 그야말로.. 이것이 몇 십 년 만이냐.. 하는 기분. 나는 낮에는 ‘절대로’ 졸거나 잠을 안 자는 것이 철칙인데 역시 이것도 나이 때문일까? 그러다가 날씨가 싸늘해지고 요새처럼 음산하고 을씨년스러운 날씨의 낮잠은 정말 멋진 것이었다. 내가 낮잠을 자면 제일 날뛰는 것은 우리의 11살 짜리 pet dog, Tobey인데, 왜 내가 자기 옆에 누우면 그렇게 좋아하는 것일까 의아할 정도다. 그래도 옆에서 같이 그 녀석과 즐기는 음산한 날의 home office에서의 낮잠의 매력은 그 누구도 상상을 못할 것이다.

A Lotta stuffs in October

2015년 10월 달은 정말로 우리, 나와 연숙의 인생에서 가장 뜻 있는, 의미 있는, 많은 일들이 있었고, 또한 그런 일들을 ‘했고, 보았고, 느꼈고, 남기며’  보내게 되었다. 나의 오래된 기억 속에 이번 10월 달 같은 특별한 달도 없었으리라 짐작을 한다. 이것이 흔히 말하는 ‘하느님의 은총’인지까지는 몰라도 그것에 가까운 것임에는 틀림이 없을 정도로 많을 것, 좋은 것들을 받았다. 시간적으로도 너무나 바쁜 일정의 시월 달이어서 무언가 나의 역사에 때 맞추어 남길 수가 없었지만, 틈틈이 남기고 기억된 것을 note, memo등을 더듬어 본다.

 

¶  한민족이란:  10월 3일은 아틀란타 지역 한인회 주최 Korea Festival이 열린 날이었다. 이제까지 이런 ‘한류, 대한민국 적’ 인 것에 관심이 거의 없이 살았지만 올해의 사정은 조금 달랐다. 연숙이 관련된 ‘아틀란타 묵향 회원 전’이 이 행사에 맞추어서, 그곳에서 함께 열리게 된 것이 우리가 그곳엘 간 제일 큰 이유였지만 아주 오랜만에 ‘대한민국에서 갓 온 느낌을 주는 사람들’을 보고 싶은 묘~한 심정도 없지 않았다. 한 마디로 고향의 냄새를 조금 맡고 싶다는 순진한 희망이라고 할까.

그렇게 오랫동안 ‘한반도 땅’ 의 냄새를 안 맡고, 못 맡고 살았는가.. 조금은 타향살이의 슬픈 감정을 느끼고 싶었던 날이었고, 나는 아직도 ‘고향의 좋은 것과 싫은 것’을 분명하게 구별해서 알고 있기에 혼란스러운 심정도 어쩔 수가 없었다. 나의 identity 문제를 수십 년간 요리조리 피하며 살았던 게으름의 결과란 것도 잘 안다. 이제는 조금 이런 혼란스런 문제를 정면으로 맞대면할 때가 온 것도 잘 알기에 이렇게 별로 즐겁지 않은 ‘낮은 기대감’으로 이곳에 왔지만 역시 그곳을 떠나며 느끼는 앙금같이 가라앉는 찜찜함을 어쩔 도리가 없었다.

 

¶  Peace is flowing: 갑자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평화와 해방감을 느낀다. 낮은 차원의 이유를 말하면 몇 가지가 있다. 하지만 그것은 조그만 원인에 불과하고 ‘높은 차원’의 것들은 그야말로 높은 곳에서 온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인생 최고의 10월’을 만끽하며 ‘자유 만세!’를 외친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무엇이 진리였던가? 우리는 조금 알게 되었기에 그렇게 자유스럽고 해방감을 느끼는 것이다. 무슨 ‘개소리, 횡설수설’ 같이 들리는 이 말들을 어떤 피조물들이 상상을 할까마는… 상관없다. 이어 흐르는 평화는.. Peace’s flowing like a river.. Carey Landry의 잔잔한 음성이 우리의 말랐던 가슴을 촉촉히 적신다. 감사합니다.

 

Peace is Flowing like a RiverCarey Landry

 

¶  레지오 사업보고 10월 둘째 주일 미사 후에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천상은총의 모후’ 꾸리아 월례회의에서 우리 자비의 모후 Pr. (쁘레시디움) 연례 ‘사업보고’가 있었다. 서기가 된 이후 벌써 네 번째 해보는 것이라 조금 익숙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성가신’ 일이기도 하다. 단장 서기가 부부라 보니 집에서 편하게 일 년 사업을 정리하는 이점 利點 도 있다. 할 때마다 지난 해의 것과 비교해서 어떻게 ‘나아졌나’ 하는데 관심이 간다. 이번 것을 보면 확연히 지나간 해들 보다 돋보이는 것이 없지 않았다.

우리 부부의 출석률.. 주회합, 평의회 모두 100%인 것이 은근히 자랑스럽다. 출석이란 말.. 예전에는 크게 ‘사지’ 않았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이 말에 많은 것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우리 둘.. 최선을 다했다고, 하늘을 보고 부끄럽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것도.. 우리의 commander-in-chief,   BVM: Blessed Virgin Mary께 더욱 그렇다.  단.. 단원이 8명에서 6명을 감소한 것이 제일 찜찜한데.. 이것도 최선을 다 했지만 그렇게 된 것이라고.. 미안합니다. 이유가 있어서 퇴단, 전출을 하는 것이니까.. 하지만 일 년 동안 1명이 들어오고 3명이 나간 것은 암만 생각해도 모두들 최선을 다했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묵주기도 횟수가 포함된 ‘영성 활동’도 다른 곳에 비해 아주 활발했지만, 그것보다 ‘진짜 활동 (몸으로 뛰는)’ 을 우리 단원들 ‘특기사항’으로 잘 정리해 둘 정도로 기억에 남는 것들이었다. 선종하신 배해숙 베로니카 자매님.. 그 ‘구원된 영혼’을 떠나 보내며 우리들 참 많은 것을 배웠기에 두고두고 기억할 것이다. 이날 관행적인 보고였지만 그래도 많은 꾸리아 간부, 임원들 경청을 해 주었고, 많은 관심을 보여 주어서 기억에 남는 꾸리아 월례회의가 되었다.

 

 ¶  RSVP @CPACS 이미 시작된 나의 인생의 황혼기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보내야 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최근에 들어서 많이 하게 되었다. 해답을 찾는데 성모님께 도움을 청하는 때도 종종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닌 모양.. 별로 해답을 못 찾고 지냈는데 불현듯 해답 ‘비슷한 것’이 찾아왔다. CPACS란 이름의 한인봉사센터에 근무하는 교우 오 안젤라 Angela 자매님의 귀띔으로 자원봉사, RSVP란 program이 시작이 된다고 와 보라는 것. 시간을 내서 그곳을 찾아가서 introductory meeting 비슷한 것에 우리부부가 참가를 했다. 이 program 이름이 귀에 익어서 생각해보니 일전에 연세대 장 선배가 이것을 한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있었는데 물론 곧 잊고 지냈는데 이번에 다시 온 것이다.

그날 소개모임에서 비교적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고 간단히 말해서 ‘seniors help seniors‘란 것. 취지는 ‘노인복지는 노인들 스스로가 돕자’ 라는 것. 하고 싶은 때 하는 것이 아니고 어느 정도의 조직 속에서 기본적은 시간을 봉사해야 한다. 미국인들 사회는 이 program이 이미 뿌리를 내렸다고 한다. 이런 소개말을 들으며 속으로 ‘계산’을 하기에 바빴는데.. 우리의 현재 상황에서 효과적으로 시간과 energy를 할애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내가 기다리고 찾고 있었던 ‘황혼기에 할 일’이 바로 이것이었나 하는 ‘운명적’인 느낌도 없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아깝게도 현재 우리가 뛰고 있는 레지오와 겹친 일이라서 문제가 없지 않았고, 다음은 시간이 문제였다. 한마디로 commit 를 할 단계가 아니라는 결론인 것이다. 우선은 다음으로 미루자 라는 것으로 이 일은 끝이 났지만 조금 미안한 생각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의 시간, energy를 필요로 하는 senior들이 얼마든지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외면할 수 있을까? 하지만 우리의 ‘변명’은.. 조금 뒤로 미루며 때를 기다려 보자는 것, 그것으로 일단 정리가 되었다. 안젤라 자매님.. 미안합니다.

 

¶  PC Recycling   전에 Kristie의 최사장, business computer들 특히 오래된 것들을 처분해 달라는 부탁이 있었다. Old PC들이란 거의 모두 10년 가까이 된 것들이지만 그런대로 running하는 것도 많았다. Business가 다음 세대로 (literally) 경영권이 바뀌는 과정인데 역시 차세대답게 모조리 stupid head’s Mac으로 비싸게 바뀌고 server들도 모두 cloud로 사라지고 있었다. 글쎄.. business가 멋과 유행을 타야 하는지 나는 의아하지만.. that’s not my business.

문제는 거의 junk같이 보이는 이 많은 고철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우선 떠오르는 것이 혹시 ‘고쳐서 쓸 수 있으면’, donation하는 것은 어떤가.. 드디어 그 고철들이 pickup truck에 잔뜩 실려서 우리 집 garage에 도착했고 곧바로 savage 작업에 들어갔다. 현재까지 printer와 pc  하나 씩은 살려내었지만 나머지들은 아무래도 고치는데 비용이 한계를 넘을 듯.. 이것은 사실 나의 머리와 시간의 싸움이다. 아마도.. 위로를 받는다면, 나의 치매예방에 조금 도움이 되지 않을까?

 

¶  연차 총 친목회: 10월 달.. 이제는 익숙한 광경이 눈에 떠오르게 되었다. 12월 초에 있는 순교자 성당 레지오 연차 총친목회 발표 준비를 시작하는 달인 것이다. 지난 몇 년 동안 최소한 나는 신들린 듯이 열심히 참가를 했고 즐기려 노력을 했다. 그것이 이 연례 행사의 주 목적이 아닌가? 문제는.. 무엇을 어떻게 ‘발표’를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나이가 많은 우리 단원들에게는 그저 ‘합창’ 류가 제일 쉽고 무리가 없다. 작년에는 ‘내 나이가 어때서’ 라는 비교적 잘 알려진 유행가에 맞추어 노래와 line dance를 했는데 올해는 연숙이 ‘아주 다른 것’을 하고 싶은지.. 자기가 오래 전에 했던 ‘봉산 탈춤’ 비슷한 것을 제안했고 모두들 찬성을 해서 벌써 연습을 2번이나 했다. 이런 것들은 참가자가 가급적 ‘모두, 열심히’ 하는 것이 주 목적인데 현재까지 최근에 입단한 신 단원들이 아주 열심히 따라와 주어서 보기가 아주 좋았다. 하지만 나 개인적으로는 무리, 무리, 무리라는 생각.. 나는 흔히 말하는 ‘몸치’임을 내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묵주기도 성월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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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0월 12일, 며칠 있으면 ‘또’ 10월의 반이 지나간다. ‘진부한 표현’으로 세월은 잘도 흘러간다. 세월이 갈 수록 daybook 과 calendar 를 유심히 챙기는 습관이 더욱 세월의 흐름을 실감나게 느끼게 한다. 인생의 남은 시간이 하루 하루 줄어든다는 생각에 조금이라도 무언가 남기고 싶은 심정을 억제할 수가 없어서 시간과 세월의 감각을 흔적이라도 남기려 애를 쓰지만 모든 것은 순리적으로, 절대적 존재에 맡기는 자세를 취하려 애도 쓴다. 이런 mental balancing은 어느 나이에도 중요한 것이기에.. 이런 횡설수설이 나는 요새 필요한가 보다.

내일은 10월 13일, 1917년 바로 같은 날에 PortugalFatima에서 성모님이 three shepherds 세 목동  어린이 shepherd children들에게 발현 apparition 하신 날이기도 하다. Portugal의 ‘국, 관영 신문’에 당시에 성모님이 어린이들에게 약속을 하셨던 ‘태양의 기적’ 보도가 된 것이 특이하고, 이에 관한 극 drama 영화도 몇 개 있어서 나는 그것들을 흥미 있게 보기도 했다. 2017년이면 100주년 기념이 되기에 서서히 그곳으로 관심이 쏠릴 것을 예상한다. 역사이래 성모님 발현은 수없이 세계 전역에서 보고가 되지만 실상 교회가 공식인정을 한 것은 불과 수십 건밖에 안 된다. 그 중에서도 아주 유명한 곳은 몇 군데에 불과하고, 아마도 Fatima(파티마)는 프랑스의 Lourdes(루르드)에 이어 두 번째로 유명한 발현지일 것이다. 근래에는 30년도 넘게 ‘계속 매일’ 발현하시는 곳, Medjugorje 메주고리예 가 수많은 순례 행렬이 끊이지 않는 곳이 되었다. 하지만 이곳은 ‘아직도’ 교황청의 공식인정을 받지 못한 곳이다.

Fatima 의 성모님은 발현 당시부터 Rosary(묵주)를 들고 나오셔서 묵주기도의 중요성을 알리시기도 해서, 10월이 묵주기도의 성월로 정해 졌을지도 모른다. 묵주기도.. 2007년 초부터 거의 매일 매일 하는 묵주기도, 이제는  내 몸의 일부처럼 느껴진다. 거의 10년에 가까워오는 나의 묵주기도 역사, 솔직히 나 자신이 보아도 이건 기적 중에 기적에 속한다. 예상도 못했고, 아직도 변함없이 계속되는 것도 그렇고, 그런 ‘와중’에 세계관이 완전히 변한 나 자신, 이 모든 것은 솔직히 기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묵주기도에 무슨 마력이라고 있을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너무나 단순 반복되는 간단한 기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point는 이 기도가 성모님이 간절히 ‘요청’하는 것이라는 사실일 것이다. 시작한지 몇 년 동안은 외우느라고, 지루함을 이기느라고 애를 쓴 기억이고 점차 습관이 되면서는 짧은 묵상 같은 것도 할 정도가 되었다. 바로 이것이었다. 지루하고 반복되는 그 시간 중 몇 초씩 들어가는 ‘생각지도 못한 느낌’, 바로 그것이 내가 기대하는 시간이 되었고, 그렇게 지루한 것을 극복할 수가 있었다. 집에서 연숙과 둘이서 하던 묵주기도에서 레지오의 ‘강도 높은’ 묵주기도로 바뀌며 나는 ‘기도’란 것이 무엇인지 어렴풋하게 알아가게 되었다. 레지오 5년 동안 계속되는 이 ‘지루하고 반복되는’ 묵주기도, 이제는 알 듯하다. 왜 성모님이 ‘친히’ 이 ‘고역’을 청하시는지를..

Adieu.. September 2015

Glorious, deep blue, higher and higher.. 갑자기 쏱아진 가을하늘에는..

Glorious, deep blue, higher and higher.. 갑자기 쏱아진 가을하늘에는..

 

¶ 습기가 갑자기 사라진 하늘은?  올해의 여름의 특징은 흔히 말하는 heat index, 그러니까 ‘불쾌지수’라는 것이 유난히 높았던 것이다. 한번도 화씨 95도를 넘지를 못했지만 문제는 지독한 습도였다. 정말 무시무시하게 높은 습기는 공기를 완전히 steam room같은 것으로 만들어, 보통 때면 선풍기면 시원한 것도 이번만은 ‘절대로’ a/c로 습도를 낮추어야 하는 것으로.. 이것이 쉬지도 않고 밤낮으로 돌고 돈다. 시원한 것은 좋은데.. 문제는 엄청난 electric bill. 아마도 $400까지 치솟지 않을까 미리부터 우울해 진다. 그런데 하루 아침에 하늘의 물기가 완전히 사라졌고 a/c의 소음도 따라 없어지고.. 9월로 깊이 접어들며 경험하는 신선하고 즐거운 느낌.. 이래서 계절의 변화는 신비스럽기만 하다.

 

¶ 거의 매일 장례식:  주임 신부님 (이재욱 세례자 요한)의 얼굴과 입술에 피로의 기색이 역력히 보인다. 연일 열리는 듯한 연도, 장례식, viewing.. 이것과 관련해서 거의 매일 병자성사, 병원방문, 장의사 연도.. 어찌 피곤하지 않을까? 9월 초부터 시작된 이런 의식들이 9월 중순에서야 끝이 났다. 황 어거스티나 자매님과 조 이시도르 형제님.. 특히 조형제님은 최근 몇 개월 동안 봉성체, 병자성사들을 통해서 신부님과 같이 많이 찾아 뵙기도 했다. 그렇게 우리의 방문을 꺼려하던 형제님, 선종 몇 주를 앞두고부터 서서히 가슴을 열고 우리의 방문을 기다리게 되었던 분.. 비록 신앙심의 열매를 더 맺었으면 했지만 그것이 그렇게 중요할까.. 절대자에게 조금이라도 가슴을 열고 가셨으니.. 우리는 분명히 평화스런 곳으로 가셨으리라 믿고 있다. 황 자매님은 레지오 활동단원으로 선종을 하셔서 순교자 성당 초유의 ‘레지오 장’으로 장례미사가 치러지기도 했다. 기술적인 문제를 떠나서 레지오를 그렇게 사랑하신 자매님에게 이런 ‘선물’을 누가 마다하겠는가?

 

¶ 나는 어떻게 죽을까..  레지오에 입단한 이후 참 많은 선종과 장례의식을 경험을 하였다. 입단 5년 가까이 되는 이 시점에 나는 정말 많은 영혼들과 작별을 하였고 그들의 유족들과 함께 있기도 하였다. 지난 5년간 나의 ‘좌우명’ 중에 하나는 결혼식은 빼먹을 수 있어도 장례의식은 ‘가능하면, 최선을 다해서’ 참석하리라는 것이었다. 그 이전까지 나는 이와는 정반대의 행로를 걷고 살았다. 그것이 하루 아침에 완전히 180도 뒤 바뀐 것이고 이것은 나에게 작은 기적 중에 하나로 남게 되었다. 이런 경험을 통해서 나는 항상 생각하는 것이 ‘나는 어떻게 죽을까, 죽어야 할까’ 하는 절체절명 絶體絶命의 대명제 大命題.. 바로 이것이다.. 나는 이 해답을 찾기 위해서 그렇게 나를 바꾸어 놓은 것이다. 이 죽음이야 말로 신앙의 핵심주제가 아닌가? 나는 배우러 그곳으로 가는 것이고 그 결과는 상상을 초월한 무궁무진한 놀라움 뿐이고 아직도 변함없이 계속되고 있다.

 

¶ Dark night of ..

어두운 밤에 캄캄한 밤에 새벽을 찾아 떠난다.. 종이 울리고 닭이 울어도, 내 눈에는 오직 밤이었소. 우리가 처음 만난 그 때는 차가운 새벽이었소. 당신 눈 속에 여명 있음을 나는 느낄 수가 있었소…

 

2012/13년도 레지오 연차 총친목회에서 우리 레지오에서는 ‘희귀동물’에 속하는 몇 명의 남성단원들과 같이 연습하고 불렀던 노래 중에 나오는 가사 중에 바로이다. 당시에는 큰 묵상이나 생각조차 없이 ‘신나게’ 불러 댔지만.. 어떤 것이 캄캄한 밤일까.. 생각한다. 내가 현재 가끔 겪는 것도 그 캄캄한 밤에 속하는 것일까? 특히 9월 중순의 며칠간 겪은 마음속의 고통은 예상외로 심한 것이어서 속으로 계속 이것이 바로 ‘어두운 밤의 시작..’일 것이라고 혼자 단정을 해 버리기도 했다.

대체로, dark night (of the soul)은 가톨릭 신앙에서 ‘믿음의 위기’를 말한다. 대표적으로 ‘복자 (blessed)’ Mother Teresa의 경험은 유난히 오랫동안 지속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나에게는 사실 근래까지의 ‘지독한 냉담’ 생활이 바로 이런 것이었을 것이지만 그 당시에 전혀 그런 사실조차 느끼지 못하고 살았다.  서서히 가슴을 열면서, 보이고 느껴지는 ‘빛’을 보고 느끼면서 비로소 나는 내가 바로 그 dark night에서 살았다는 것을 처음으로 실감하게 되었다.

새벽을 찾아 떠난 과정이 비록 하루 아침에 생긴 일이 아니었어도 그렇다고 그렇게 긴 여정은 아니었기에 아직도 그 경험이 신선하게 느껴지고 이제는 ‘줄줄 외울 수’ 있을 정도로 정리가 되었다. 목적은 다시는 절대로 다시는 그 전의 세월 (어두운 밤) 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우려에서였다. 하지만 그것이 그렇게 말처럼 쉬울까? 다행히 9월 중순의 ‘어두운 밤’은 불과 며칠간 계속된 ‘가벼운’ 것으로 끝이 났다.

 

나는 대체 어디에 있는가?

나는 도대체 어디에 속한 인간일까? 나를 근본적으로 혼란하게 하고 심지어 슬프게 하는 것이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나는 정말 모르고 모르고 살았고 아니 모르게 만들며 살았다는 놀라운 실감에 나는 또 한번 경악을 한다. Pretending의 극치인가? 나는 그렇게도 모질고 지독하고 이상한 인간일까? 나의 identity 에 대한 극도의 혼란을 나는 ‘모른 척’ 하고 수십 년을 살았다는 사실에 나는 초조함을 느끼기도 한다.

인생의 대부분의 세월에서 나는 이 근본적인 질문을 100% 피하며 살아 왔다. 내가 속한 곳은 도대체 어디란 말인가? 나에게도 살아계신 어머니가 서울 쪽에 아직도 계신다면 훨씬 편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나의 어머니의 땅이 나에게도 포근한 고향이고 언제라도 갈 수 있다는 생각에 나는 도취되어 행복한 마음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오래 전에 지나간 과거사가 되었다. 누나.. 어찌하여 누나는 나와 가족을 잊고 살게 되었을까? 나는 이제 고립무원, 혈혈단신이라는 슬프고 괴로운 현실을 직시하며 나의 자리를 찾아야 한다.

언제부터 나는 KOREA를 잊기 시작했을까.. 분명 나의 고향은 그곳인데 어째서 나는 남들이 못하는 ‘쾌거’를 이루었을까. 모질게도 그곳에 관한 것은 무자비하게 피하고 없는 것처럼 연극을 하며 나를 세뇌했을까? 궁여지책으로 바로 옆에 있는 일본에 기대어 가짜 향수를 느끼려고 했을까? 다른 것 보다는 비슷한 것이 더 많은 일본에서 나는 가짜 향수를 느끼고 포근함을 느끼려고 했다. 본질적인 고향은 너무나 너무나 나를 미치게 그립게 하기에 그랬다고 나는 자위하기도 한다. 그곳의 연속극, TV 영화 등을 마치 옆 동네 것처럼 가까이 달며 사는 주위의 사람들.. 연숙도 마찬가지지만.. 부럽기도 하고.. 아니.. 질시하기도 하지만 경멸하기도 했다. 이곳까지 와서 그곳을 그렇게 가까이 느끼며 살려는 그들의 자세를 비하시켜 비난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내가 이제는 마지막으로 나의 고향을 다시 찾아야 한다고 움직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작년 9월 10일에 시작된 ‘고향찾기 운동’의 시작.. 일년이 되어온다. 대 장정이라고 나는 이름을 붙였지만 솔직히 1년이 되도록 계속될 줄을 몰랐다. 이제는 조금 ‘풀이 죽어서’.. 그저 기다리기로 했다. 기다리면 오겠지.. 내가 또 성모님을 잊었던가? 나를 흙탕 또랑에서 위로 이끌어 주시는 성모님을 또 잊었던가?

나의 진정한 고향은 어디로 갔는가? 내가 편안하게 안주해왔던 머릿속에만 있던 꿈의 고향들은 사실 꿈에만 있는 것일까? 내가 너무나 심하게 옛날을 그리며 그곳에서 편안함을 찾았던 것일까? 남들처럼 ‘하나도 끌리지 않는’ 요새 세상을 포용하며 살아야 하는 것일까? 고향을 놓치지 않으려고 발버둥하며 살아온 만큼 다시 고향을 조금씩 놓아가며 현재에 더 익숙해지며 사는 것이 ‘옳은 것’일까? 그것이 나는 너무나 어렵다. 나의 신분과 움직임이 조금 더 자유스러워진다고 해도.. 나는 어려움을 겪을 듯 하다.

하지만 나는 ‘진보’하고 있다. 5년 전을 생각해보라.. 나는 ‘한국인과 한국말’을 절대로 피하며 살았지 않았던가? 5년 동안 나는 ‘어머님’을 향해 뒤를 안 보고 달렸지 않았던가? 그러한 노력과 은총이면 나의 남은 시간도 헛되게 보내지는 않으리라. 나에게 어떤 ‘과제’가 주어질지를 나는 아직도 모르기에 방황하는 것이라고 나는 낙관적으로 생각하고 싶다.

여름을 보내는 문턱에서..

¶  2015년 Summer season을 서서히 마감하는 여름의 마지막 휴일, Labor day weekend를 맞이한다. 오랜 전에는 어딘가 불쑥 계획 없이 집을 떠나기도 한 기억이 있지만 지금은 그것이 사실 너무도 옛날의 이야기일 듯 하다. 그 중에 쉽게 기억이 나는 것이 1983년 Labor Day 때의 것, 당시 9개월이 된 첫 딸 새로니를 차 뒤에 ‘묶어 두고’, 그야말로 아무런 생각 없이 Chicago 쪽으로 에어컨도 없는 ‘고물’ 차를 몰았던 추억이다. 당시에는 Columbus (Ohio)에서 학생시절이었고, 지긋지긋한 기나긴 학교생활에서 간신히 벗어나 나의 첫 career job이 정해진 직후였다.

나에게 너무나 익숙한 Chicago는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지만 그저 ‘진짜 한국음식’, 그 중에서도 ‘진짜 한국식 중국음식’들이 너무나 그리워서 에어컨도 없는 차를 겁도 없이 몰았다. 총각 때의 경험 만으로 그렇게 겁이 없었던 것일까.. 가다가 차에 문제가 생겨서 repair shop에서 지체하기도 했지만 결국 우리는 그렇게 먹고 싶던 한식, 한국식 중국음식 등으로 배를 채웠다. 지금 생각하면 조금은 아찔한 여건이었지만 젊음 때문이었을까.. 우리 부부 둘, 참 겁도 없이 그렇게 다녔다. 점점 지옥같이 느껴졌던 학교 생활을 떠났다는 기쁨에 들떠서 모든 것들이 뽀얀 희망으로 보였던 시절이었다. 새로 태어난 우리의 제2의 생명과 새로운 나의 첫 직장, 새로 얻은 가톨릭 신앙.. 등등으로 시작된 우리의 기나긴 ‘가족인생’ 여정의 출발, 그 뒤로 또 하나의 생명을 얻었고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4식구가 건강하게 나이를 먹으며 작은 식구가 같은 곳에서 모여 살게 되었음을 감사하는,  그 당시가 새삼스럽게 기억나는 오늘이 되었다.

 

¶  어제 저녁때는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의 교우이자 레지오 단원이셨던 황 어거스티나 자매님 연도에 다녀왔다. 레지오 단원의 급작스러운 선종이기에 긴 휴일 주말에도 불구하고 많은 레지오 단원들이 참석해서 정성스럽게 레지오 전 묵주기도문과 연도를 바쳤다.  참 올해는 유난히도 연도, 장례식이 많은 느낌이었지만 이 자매님의 경우 너무나 예상치 않았던 죽음에 모두들 놀라기만 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비교적’ 건강하고 씩씩한 모습이었던 모습으로 기억을 하는데 어떻게 그렇게 갑자기 가셨을까. 

각종 레지오 모임에서 보게 되는 익숙한 모습이고, 근래에는 우리와 같이 봉성체 봉사를 같이 하였고, 작년에는 점심식사도 같이 했던 친근하고 시원스러운 자매님, 정말 급작스럽게 가셨다. 병명은 ‘희귀 병’이라고 하는데.. 의사들도 마지막 순간에서야 확실한 병명을 발견했다고 했다. 미리 원인과 병명을 알았어도 치료 방법이 확실치 않은 희귀 병이라고 하니.. 참, 누구를 탓할 것인가? 선종하기 전에 유언으로 ‘레지오 장 塟’을 원하셨다고 해서 장례미사는 아마도 많은 레지오 휘장 banners 을 보게 될 듯하다.

가을 비, 마르쎌리나, 이시도르

rainy-leaves

I’m dreaming of rainy Autumn foliage..

 

¶ 지난 주부터 갑자기 건조한 가을날씨 선을 며칠 보이더니 그것도 며칠을 못 가서 다시 올 여름의 골칫거리인 습기로 가득 찬 하늘이 찾아왔다. 하지만 이런 ‘열대성 하늘’도 수명이 길지는 않으리라.. 이제부터 기대해 볼 것은 무엇일까? 건조하고 따가운 가을 햇살아래 무르익은 사과 밭의 풍경들, Holy Family성당 제단 옆의 전면유리에서 영화 장면처럼 변화하는 낙엽 떨어지는 고목들, 파~아란 하늘을 배경으로 지옥의 악마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던 9/11의 슬픈 기억들.. 하지만 최소한 한번 정도는 보여주는 ‘싸늘한 가을비‘의 포근한 느낌을 미리 그려보게 되는 2015년 9월의 시작이다.

 

¶ Marcellina, St. Marcellina  4세기 경 이태리의 성녀이름이다. 성녀 마르쎌리나.. 같은 이름을 ‘세례 명’으로 가진 자매님과 우리 부부가 같이 Fujihana 에서 점심을 했다. 마리에타 2구역에서 10 여년을 넘게 알듯 모르듯 낯을 익히며 지내던 같은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소속 교우 자매님이 아틀란타를 ‘완전히’ 떠나는, 이별을 아쉬워하는 뜻 깊은 오찬 시간이 되었다. 솔직히 섭섭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이런 타향살이에서 무언가 조금 통하는 영혼을 만나는 것 쉽지 않기에 더욱 섭섭하였다.

긴 세월 혼자서 자녀들을 다 키우며 근래에는 신앙적으로도 많이 활발해진 듯 보였기에 한때는 레지오 입단을 은근히 희망했지만 성당 성물방 봉사 등 다른 쪽으로 활동했는데 캘리포니아 주에서 공부하는 아드님의 뒷바라지를 위해서 완전히 이사를 가시는 모양이었다. 이별하는 자리에서 레지오 협조단원으로 가입을 하시는 선물과 함께 허심탄회한 인생살이를 솔직히 나누어준 자매님.. 기도 중에 서로를 기억하며 건강한 미래가 되기를 빕니다.

 

¶ Isidore, St. Isidore.. 이시도르, 이시도로, 이시돌.. 남자 성인의 이름을 가진 다른 교우 형제님의 이름, 조 이시도르 형제님. 지난 2개월 동안 시름시름 아프시다가 급기야 신부님으로부터 ‘병자 성사’를 받게 되었다. 옛날에는 ‘종부 성사’라고 불리던 이 의식은 사실은 ‘죽음이 임박한’ 가톨릭 신자에게 주는 ‘마지막 성사’다. 한때는 신부님은 물론이고 봉성체를 거부하던 이 형제님이 얼마 전부터 적극적으로 신부님과 영성체를 원하셨다. 우리가 볼 때 하나의 작은 기적이라고 할까.

사연이 간단치 않은 인생을 보내신 것을 알기에 우리는 더욱 하느님을 조금 더 알고 궁극적인 임종을 맞이하기를 희망했다. 비록 고통스럽게 투병을 하는 하루하루지만 그래도 자기가 가는 곳을 조금 더 알고 가는 것이 얼마나 위로가 될 것인가. 어제 너무나 급작스럽게 선종하신 황 어거스티나 자매님의 소식과 오늘의 병자성사는 인간에게 피할 수 없는 진실, 죽음을 더 생각하는 하루가 되었다. 

8월이여 안녕!

¶  어느덧 2015년 8월 31일이 되었다. 지겹게도 끈적거리던,  둔한 a/c의 소음이 아직도 귓전에 울리는 듯한 그런 한 달이었다. 올해 여름의 humidity 그러니까 heat index (불쾌지수)는 아마도 기록적인 것일 하다. 공기 자체의 온도는 100도를 못 넘었어도 체감적인 온도는 거의 매일 100도를 넘나드는 그런 무더위의 몇 주를 보낸 후 몸은 적응이 되었지만 몽롱한 듯한 기분과 느낌은 아직도 생생하다.

수십 년 동안 버티어온 고물 에어컨 clunker a/c  unit,  올해는 솔직히 간당간당한 초조함을 금할 수가 없었다. 올해는 이것이 버틸까… 거의 도박하는 기분이 되지만 매년 무사히 버티어 주었다. 문제는 천문학 적인 electric bill, 이것은 옛날 ‘gas-guzzler‘ model이라서 쉽게 이해는 간다. 우리 집의 cash flow가 조금 더 편한 숨을 쉴 수 있게 되면 이 clunker들을 최신 energy-smart model로 바꾸기로 결심을 하고 결심을 한다. 그러면 조금은 편안~~하게 시원한 a/c cool air를 즐길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Mother Nature는 8월 말이 되면서 며칠 전부터 계절의 신비를 과시하며 ‘찬 바람’을 ‘공짜’로 선물로 보내 주시니.. 세상은 참 공평한 것인가? 이제는 어깨를 조금 펴고 낙엽의 계절을 기다려 볼까..나?

 

8월을 작별하는 포근하고 시원한 단비가 뒷뜰을 적신다

8월을 작별하는 포근하고 시원한 단비가 뒷뜰을 적신다

 

¶  지난 며칠은 예상치도 않게 나의 ‘밝은 태양’ desktop pc와 씨름을 하며 지냈다. 이것이야말로 계획에도 없고 꿈에도 없었던 귀중한 시간을 ‘낭비’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것이 인생이 아니던가.. 어디 인생이란 것이 예상대로 굴러가나.. 온통 놀라움과 예외와 낭비적인 일들이 많은 것이 정상이란 것.. 실감하며 산지 오래 되었으니까.

이번 씨름 문제의 발단은.. 결국 나의 ‘괴벽’ 때문이라고 밖에 할 수 없을까. 나의 (‘인생’이 담겨있는 virtual server를 access하는) desktop pc 가 갑자기 (최소한 내가 보기에) sleepless, hibernate-less로 변한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1시간?) 자동으로 sleep mode로 들어가가 2시간 지나면 완전히 hibernate mode로 가야 정상인데.. 그것이 안 되는 것이다. 나의 괴벽은, 이런 것들이 너무나 민감하게 나를 괴롭힌다고 느끼는 것이다. 특히 windows pc에서 더욱 그렇다. 어찌나 이것이  monster처럼 복잡하게 변했는지.. 이런 문제가 생기면 정상적인 step-by-step diagnostics가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다. 눈을 감고 이것 저것 setup을 바꾸는 것이 제일 빠른 방법이 된 것이다. 문제는 setup option의 ‘조합, combination’ 숫자가 장난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럴 때 아마도 제일 현명한 방법은 그냥 두는 것인데.. pc가 sleep을 안 하면 어떻고, hibernate를 안 하면 어떤가? 그저 이런 ‘자질구레한 것들’을 잊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 나는 그렇게 못했다. 완전히 내 ‘자존심의 함정‘에 빠진 것이다. 묵주기도 시간에도 이것이 생각나고 잠을 잘 때도 생각나고.. 나를 놀리는 듯한 괴로움이었다. 수십 년 동안의 computer engineer의 경험으로 이런 문제는 사실 시간만 충분히 쓰면 풀린다는 것을 알기에 그런 것이다.

현재 나의 desktop pc는 Linux, (Ubuntu 14.04 LTS)와 Microsoft Windows Vista가 dula-disk/dual-boot mode로 되어 있어서 두 개의 system을 번갈아 가며 쓰는데.. 이렇게 하는 목적은 궁극적으로 ‘지겨운’ Windows를 완전히 나의 눈앞에서 제거하려는 것이지만.. 하도 오랫동안 Windows-monopoly에 길들여져 있어서 하루 아침에 그것에서 벗어날 수가 없음을 알기에 시간을 두며 적응을 하려는 것이다. 이 과정의 ‘불편함’은 아마도 ‘마약 중독, 알코올 중독’의 금단현상(withdrawal syndrome)과 비슷하다고 할까.

몇 달째 Ubuntu pc를 쓰며 100% Windows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마도’ 가능하지 않을까 희망을 갖게 되어서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아직도 Ubuntu로 porting이 되지 않은 전통적인, 주옥과 같은 killer apps들 (Office suite, photoshops, gom player, hdhomerun viewer 같은)은 계속 기다리거나 아니면 영원히 포기해야 할지 모르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이번의 episode의 결론은 happy ending이었는데.. Dual-disk/dual-boot에서 Single-disk/dual-boot로 바꾸고 나서 위에 말한 sleep/hibernate 문제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이 ‘기적적인 발견‘은 정말로 ‘우연히’ 알게 된 것이다. 이런 문제는 ‘논리적인 분석‘으로는 찾기가 거의 불가능하고, brute-force, trial-and-error 밖에 없다. 이런 사실은 새로울 것이 별로 없다. 모든 것을 ‘step-by-step, top-down approach’ 로 풀려는 경험이 별로 없는 새파란 젊은 친구들.. 인생의 비밀도 바로 여기에 있음을 모를 것이다.

 

¶ 연숙의 생일이 내일로 다가왔고 최근에 정착된 우리 가족의 ‘짧은 전통’을 따라 어제 우리 집에 모여서 ‘아이들’이 요리한 southern fried chicken 으로 ‘돼지엄마’의 생일을 축하하였다. 나의 선물은 그 자리에서 줄 수 없는 rain check 으로 그녀의 home-office flooring을 새것으로 바꾸어 주기로 약속을 한 것이고, 두 딸들은 여자들에게 익숙한 것들.. purse, bag 그리고 예쁜 orchid 등이었는데, 무섭게 바쁜 시간을 보내는 작은 딸 나라니의 정성이 곱게 담긴 선물과 요리는 엄마를 너무나 기쁘게 하였다.

Job interview와 side job등으로 정신이 하나도 없는 작은 딸이 그렇게 시간을 쓴 것이 나도 놀라웠다. 한마디로 참 성실한 삶을 사는 것이 보기에 그렇게 흐뭇하였고 그것이 제일 큰 생일 선물로 보였다. 또한, 최근에 있었던 job interview의 결과, 오늘 job offer를 받았다는 전화를 받고 우리는 너무나 기뻤는데.. 아마도 그것이 제일 큰 생일 선물이 될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조금도 의심치 않는다.

 

¶  Report Card: Trifexis, flea wonder drug 매달 마지막 날은 우리 집 강아지 (사실은 아저씨가 된 개) Tobey가 약을 먹는다. 예전에는 heartworm 약만 먹었지만 지난 달부터는 heartworm과 flea 를 한꺼번에 ‘처치’하는 신비로운 약 Trifexis를 먹고 있는데 한마디로 결과가 너무나 놀라웠다. Heartworm은 그렇다 쳐도 (우리 눈으로 볼 수가 없는 것이니까) flea가 ‘완전히’ 없어진 것은 사실 예상을 넘어서는 거의 기적적인 것이었다. 작년 여름만 생각해도.. 매일 매일 toxic하기만 한 flea spray로 ‘전쟁’을 치르곤 했던 것이 아찔한 경험이 된 것이다. 세상에 이렇게 편한 ‘약’이 어디에 있을까? 거의 하루 아침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간 벼룩들..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살을 물게 되면 곧바로 죽는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죽은 ‘시체’라도 보여야 할 것이 아닌가? 그것조차 없이 사라진 것이다. 참 좋은 세상이 되었다.

 

¶  이렇게 씨~원~한 일요일이 얼마만이던가? 잔잔하게 내려오는 늦여름, 아니 초가을 비의 느낌은 아마도 정말 글이나 말로 표현을 하기가 힘들 정도로 행복한  그런 것이다. 게다가 주일미사를 거른 일요일 아침의 기분은 묘하게도 색다르게 기분이 좋으니.. ‘죄스럽다고’ 해도 괜찮다.. 괜찮아..

입추 立秋.. really?

‘주후 主後’, 2015년 8월 8일.. 슬그머니 8월로 접어들었던 것 느끼며 곧바로 8월 8월이 된 느낌.. 요사이의 일주일이 그렇게 하루처럼 느껴질 때가 점점 잦아지고 있음은 ‘시간의 상대성’을 절실히 느끼게 해 주는 계기가 되곤 한다. 소립자 sub-atomic particles 들의 움직임에 의지하는 절대시간 측정은 아무래도 의식과 영혼을 지닌 인간에게는 100% 신뢰성이 없는 것일까? 인간의 의식과 영혼은 결코 물질만이 아닌 것이기에 이런 느낌과 기계적인 측정치 사이에 괴리 乖離 가 생기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든 인간의 의식과 영혼이 다르기에 그들만의 시계에 의지하면 인간이 모인 사회적인 조직상에 커다란 문제가 있기에 이렇게 모든 인간을 같은 시간에 묶어 놓는 인위적인 장치인 공통 시계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 만약에 인간이 혼자 살면 이런 ‘절대적 시간’은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태양이 작열하고 움직일 수 없을 정도의 ‘억압적인 습도 oppressive humidity’가 괴롭히는 때에 오늘이 갑자기 ‘입추’라는 말이 너무도 우습게도 느껴진다. ‘가을이 섰다고..’ 하지만 이 말의 의미는 오랜 세월을 산 후에야 조금씩 느낌으로 다가온다. 정말 ‘가을이 서서히 일어서고’ 있음을 느끼게 되는 날이 온 것이다. 올해 내가 유난히도 고추와 피부를 바짝 말리는 가을바람을 기다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까워오는 70이란 숫자 때문일까..

2015년 7월 24일 금요일

그 동안 우리들이 열심히 기도하던 윤(태옥) 막달레나 자매가 선종을 하였다. 마지막 무렵 연숙이 ‘과거를 풀게’ 하려는 노력을 시작했으나 때는 너무 늦었다. 시간이 없었다. 그 자매는 ‘거대한 과거’를 완전히 하느님께 맡기고 떠난 것이다. 하느님과는 관계를 풀었을지 몰라도 ‘피조물’ 가족들과 친지들은 어떨까? 조금은 자만하거나, 이기적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어찌 그 비밀스런 과거를 우리들이 짐작이나 할 수 있으랴?

다른 영혼, 바울라 자매 형제님 조 이시도로 형제님.. 간경화로 투병 생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우리들.. 모두.. 사실 최악을 사태를 생각 안 할 수 없는 병이다. 이진섭 씨도 간경화로.. 보리밭 작곡가 누구더라.. 내가 치매인가.. 아.. 윤용하 선생님.. 도 술로 인한 간 질환으로 가셨다. 이 병은 그렇게 무서운 것이다. 바울라 자매 이런 사실들을 알고 계실까? 부부 사이가 그렇게 이상적인 것이 아님을 알기에 이런 투병 생활, 간병 생활 정말 지겨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나의 ‘건강’상태는 어떤가? 그야말로 영육간의 건강이다. 솔직히 나의 영적인 건강은 좋다고 할 수 있다. 아니 점점 좋아지고 있다. 자만심으로 ‘내가 노력을 한다’고 소리치고 싶지만 솔직히 내가 나를 움직이는 것 같지 않을 것이다. 분명히 초자연적인 거대한 손이 나를 이끌고 있다고 감히 생각한다. 나는 이미 그 거대한 손에 ‘걸려서’ 이끌려 가고 있다. 그렇게 되기를 바라기도 한다. 다시는 이런 ‘초 자유’에서 나가고 싶지 않다. 그 전의 그 복잡하고, 불확실한 세계관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육적인 건강은.. 이것도 분명히 ‘우리’는 건강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 하루 하루를 건강하게 살자.. 그것이 ‘우리’의 motto가 되었다.

Lazy-Hazy-Crazy Days..

 

Those lazy, hazy, crazy days of summerNat King Cole

 

지나가는 2주간을 보내는 나의 촉감은 바로 1960년대 초  Nat King Cole의 hit song  ‘Those lazy hazy crazy days of Summer‘ 가 100% 맞을 것이다. 시원하게 내리던 비가 어느 순간에 ‘딱!’ 그치고 이후 2주간은 정말 바람 한 점 없이 뿌연 하늘과 공기에 엉킨듯한 뜨거운 열기, 늦은 밤까지 쉬지 않고 돌아가는 a/c와 electric fan의 소음.. 이것은 Nat King Cole의 노래 가사와는 거리가 아주 먼~ 것인 듯… 지난 몇 년 동안 우리들의 아틀란타 여름은 사치스러울 정도로 비에 씻긴듯한 상쾌한 것이었지만 올해는 not so lucky, 조금 다른 게 돌아가는 것인가?  ‘여름을 사랑하는 젊은이’들의 ‘여름 찬가’ 에 가까운 이 Nat King Cole의 경쾌한 tune을 추억으로 더듬으며.. 어리고, 젊었던 시절의 그 뜨거운 여름 밤의 공기를 회상하기도 한다.

태고적같이 느껴지는 1950년대의 한여름.. 가회동에 있었던 ‘남미당‘의 아이스케익.. (그때는 아이스케키 라고 불렀다) 그것이 먹고 싶어서 여름을 기다리기도 했다. 비교적 시원했던 그 당시의 여름 밤에는 모기장이란 것을 방에 치고 자기도 했고 그것도 너무나 좋은 추억거리였다. 중학교 시절 한 여름 에는 골목의 꼬마들을 몰고 뚝섬으로 수영을 갔는데 지금 생각하며 아찔한 것이 만약 무슨 ‘큰 사고’라도 났으면 어땠을까.. 그 당시에는 그런 걱정 하나도 하지 않고 그저 시원한 물에 뛰어드는 생각만 하며 뚝섬행 버스를 탔다. 물가도 시원하지만 사실은 공해 ‘하나도’ 없었던 당시의 삼청공원 뒤 ‘말바위‘ 주변은 거의 완벽한 어린시절의 피서지였다. 크지 않았던 남산에 가린 ‘강북’ 서울이 눈에 다 보이고 써늘한 무공해 바람을 즐기던 그 시절이었다. 서울 도심에서도 당시의 여름에는 매미가 요란하게 울어댔다. 그 매미소리가 끝날 무렵이면 잠자리들이 나타나고 그러면 그것이 바로 가을의 시작이었다. 찐득거리는 한 여름도 이런 추억을 생각하면 너무나 시원해진다.

젊음의 여름은 분명히 ‘흐느적거리는 듯한, 별로 할 일없는 듯 하지만 멋지고 재미있는 기나긴 여름’을 바라겠지만 현재 나는 9월 중순의 상쾌한 가을바람을 꿈속에서나마 그리고 있다. 2개월도 채 안 남은 시간이지만 올해는 길게만 느껴진다. 자연, 산, 바다와 자꾸만 멀어지는 우리들의 규칙적인 suburban 생활 때문만은 아닐 것이지만, 이런 ‘규칙적’임도 조심해야 할 것 중에 하나라는 것을 작년 이맘때의 경험을 통해서 안다. 폭탄이 터지듯 RESET!을 외치며 일방적으로 1주일 간의 ‘강제 휴가’를 선언했던 때였다. 머리청소가 필요할 때는 역시 vacation밖에 없다는 진리를 터득했던 때였다. 아마도 올해는 그 정도로 머리가 혼잡하지는 않기에 작년과 같은 ‘대형 사고’는 없을 것이다.

Car Connex, Inc.

Scan1몇 달을 미루고 미루다가 결국은 60,000 mile이 70,000 mile 이 되었다. 우리의 ‘대중교통수단’ workhorse,  2009 Hyundai Sonata.. 세월을 어찌 따라가랴 이것을 산 것이 벌써 6년이 되어간다. Mileage로 보면 이제는 ‘고물’, ‘중고차’가 되었지만 이상하게도 우리들에게는 항상 새 차 같은 느낌을 줄 정도로 ‘조용하게, 기운차게’ 달려주고 있다. 이것이 바로 ‘차와의 인연’이란 것일까? 차도 “인연이 있고 없고” 에 따라서 고생을 하고 안 하고 하니까. 정말 이 차는 우리에게 best service를 주었고 주고 있다. 이차가 그 옛날 이승만 대통령 시절, 미군 군용차를 뚜드려서 만든 ‘시발’ 택시를 만들었던 조국 대한민국에서 만든 차라는 사실, 그것도 주먹구구식으로 ‘불가능’을 밀어 제치며 ‘박정희 수출정책’을 주도했던 현대 ‘건설’의 차라는 사실.. 간간히 내가 살아온 짧지 않은 국가적인 역사를 생각하게 하기도 한다.

비록 이곳 Georgia에서 ‘조립’된 것이라지만 design은 역시 ‘국산’이 아닌가.. 너무 문제가 없어서 mileage에 신경을 쓰지 않으면 이렇게 60,000 mile을 놓치게 된다. 한 번 ‘손을 볼’ 때가 10,000 mile이나 지났지만 우리의 ‘등대, 정직한 자동차박사’ Car Connex에 맡겼는데, 검사 결과는 아주 좋은 것이었다. ‘아무런 문제 없음’이라는 판정을 받았다. Car Connex는 우리가 사는 곳에서 아주 멀지 않은 Atlanta suburb , Smyrna에 있는 한인 pro mechanic,  Mr. Won이 운영하는 car repair shop인데 이곳과 다른 인연을 맺은 것도 이제 수 년째가 되어간다.

처음 이 ‘정비소 car repair shop’를 알게 된 것은 몇 년 전 작은 딸 나라니가 Smyrna에 살 당시, 자기가 가는 car repair shop이  ‘한국사람’ mechanic 이 하는 것이고 ‘너무 정직하고 잘 고친다’ 는 말을 듣고서였다. 처음에는 그저 그런가 보다 했는데.. 자세히 듣고 보니 과장된 칭찬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다.

나라니가 살고 있던 Smyrna Condo의 이웃 ‘미국사람’들이 그곳의 loyal customer란 사실과 그들이 한결같이 그곳을 recommend했다는 사실이 나의 귀를 솔깃하게 한 것이다. 3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Mr. Won (애들은 그저 first name, Chang이라고 불렀다), 우리 차를 맡기고 얘기를 해 보니 역시 소문 그대로였다. 완전한 ‘차 박사’였다. 아니 차를 사랑하는 남자였다. 거기다가 차의 문제와 그 해결책을 ‘기계적, 과학적’으로 잘도 설명을 했다. 그런 상황에서 수리비는 큰 issue가 되지를 않는다. 정확하게 진단을 하고 알맞게 수리를 하니까..

내가 진짜로 혀를 찾던 case는 우리 Sonata의 ‘이상한 버릇’에 대해서 설명하고 부탁을 했던 것이었다. 거의 새 차였을 당시 transmission에 이상한 느낌이 있었는데, 차가 2단 기어에서 1단 기어로 감속을 할 때 99% ‘쿵!’ 하는 충격이 느껴진 것이다. 처음에는 그저 잠깐 그러려니 했지만 점점 심해지는 느낌이었는데 Mr. Won을 만났고, 그가 ‘멋지게’ 고친 것이다. 고친 과정을 설명하는데.. 실로 대단한 추리로 Sonata를 control하는 computer가 우리의 운전습관을 잘 못 판단한 case로, mechanical problem이 아니었던 것이다. computer를 완전히 reset을 하고 나서 그런 문제는 완전히 사라졌다. 이런 문제를 가지고 dealer한테 갔으면 ‘아마도’ 시간을 계속 끌며 시간을 허비하고 (결국은 고칠 테지만..) 엄청난 charge를 했을 듯 하다.

그 이후로 우리 집은 완전히 그를 믿게 되었고 문제가 있건 없건 간에 차에 관한 것이면 그에게 상담을 받게 되었다. Tire를 바꿀 때에도 그의 advice를 꼭 받았다. 그의 의견은 거의 틀림없이 정확하고 현명한 것이었다. 차에 문제가 생기면 99% 꼼짝달싹을 못하는 Atlanta Metro에 사는 한 우리는 ‘차의 노예’가 된 기분이지만 우리는 Mr. WonCar Connex 가 가까운 곳에 있는 한 다리를 쭉 뻗고 살 것 같다.

Mr. Won과의 인연이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지난 번 60,000 mile service를 받으러 갔을 때, 그가 우리 부부를 유심히 보더니.. 한다는 이야기가.. 우리를 오래 전에 본 것 같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를 전혀 기억을 못하는데. 듣고 보니.. 1998~9년 경에 서울에서 연숙의 조카 딸 수경이가 어학연수차 Georgia Tech에 왔을 때, 그들 group과 어울려서 우리 집엘 왔었다는 사연이었다. 우리 집의 모습을 정확히 그려낸 그의 기억력도 놀라웠지만.. 이런 인연이 세상에 또 있을까? 너무나 즐겁고 유쾌한 해후가 되었고 그가 제발 이곳에 오래 오래 성공적인 car (repair) business를 계속하게 되기를 기원했다.

동심초 同心草, 표류도 漂流島

영화 동심초 신문광고, 1959년 7월 22일자 동아일보

영화 동심초 신문광고, 1959년 7월 22일자 동아일보

 

며칠 전 오랜만에 열어본  KoreanFilm@youtube 에서 머리를 띵~ 하게 만든 영화 제목을 보게 되었다. 다름이 아닌 1959년 멜로드라마 최은희, 김진규 주연 신상옥 감독 영화 ‘동심초 同心草’ 였다. 이 동심초 영화는 당시 대한민국의 유일한 ‘라디오’ 방송 KBS의 ‘초 인기’ 일요 드라마 (당시에는 ‘방송극’이라고 했던) 를 영화화한 것이고, 당시에 어린 나도 ‘누나, 아줌마들’ 옆에 끼어서 같이 들을 정도로 대단한 인기 방송으로 기억을 한다.

그 당시 국민학교(서울 재동 齋洞) 6학년이었던 내가 그런 ‘어른들’ 순정드라마를 어찌 이해할 수 있을까.. 당시 자세한 내용은 잘 몰랐지만 항상 흘러나오던 주제곡만은 녹음기처럼 기억을 한다. 당시 최고 인기가수 권혜경씨가 불렀던 그 주제곡이 나는  원로 김성태씨의 가곡인 것을 잘 몰랐다. 아니.. 지금까지도 그 곡이 오래 전부터  있었던 가곡인 것을 몰랐던 것이다. 그러니까.. 가곡이 먼저인가, 주제곡이 먼저인가.. 나의 무식의 소치였던 것이다.

이 영화를 거의 surreal한 기분으로 보는 느낌은.. 1959년 당시의 대한민국, 특히 서울을 감싸고 있던 ‘공기, 분위기’ 같은 것이 ‘어른들의 사랑’보다 더 관심이 갔다. 그 당시의 분위기, 공기는.. 어떤 것들일까?

 

당시에 TV가 없었던 때, 유일한 것이 그저 ‘듣기만 하는 라디오’.. 가 전부였다. ‘책보다 읽기 쉬운’ 라디오는 서울에서는 거의 모든 가정이 가지고 있었을 것이고, 그곳에서 ‘정기적’으로 듣게 되는 ‘드라마’는 참 매력적인 연예 프로그램이었기에 어린 우리들까지 ‘꼽사리’를 끼어서 듣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대부분 여자들 (누나들, 식모 누나들, 아줌마들이 거의 전부) 틈에 끼어서 들었던 기억이 너무나 즐겁기만 했다. 기억나는 것들.. ‘산 너머 바다 건너’, ‘청실 홍실’, ‘동심초’, ‘현해탄은 알고 있다’,  기독교 방송국의 ‘수정탑’, 그 후에 ‘현해탄은 알고 있다’, ‘장희빈’ 등등.. 이 당시의 성우들은 당시 영화배우에 버금가는 최고의 연예인, idol, celebrity에 속했다.

나의 1950년대 향수 nostalgia를 너무나도 자극하는 이런 오래 된 영화들을 다시 보게 된다는 사실 자체에 나는 전율을 할 정도다. 비록 동심초 영화는 처음 보는 것이고, 그 내용의 ‘순진함, 단순함’에 코웃음이 나오지만.. 그것은 내가 인생을 그만큼 오래 살아서 그럴 것이다. 1959년, 내가 재동국민학교 6학년 시절.. 박양신 담임선생의 ‘입시지옥’ 열차를 한창 타며 고생하던 시절이다. 4.19혁명을 향한 이승만 대통령의 최후의 정권유지 안간 힘을 쓰던 시절이었다.

 

이 영화와 비슷한 시대적 배경을 가진 다른 영화 ‘표류도’, 이 영화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근래에 인터넷으로 여러 번 본 기억으로 이제는 친숙하게 느껴진다. 당시의 신문을 보면 역시 1960년 12월 25일 성탄절 때 을지로 국도극장에서 개봉된 영화광고를 볼 수 있었다. 시대적으로 ‘표류도’는 4.19학생 혁명 후, 5.16 군사혁명 전 장면 내각시절인 1960년 말에 나온 것으로 동심초와 거의 비슷한 때에 나온 것이지만 동심초 처럼 라디오 방송 드라마에 근거한 것이 아닌 ‘박경리’ 여사의 소설을 영화화 한 것이 다르다고 할까.. 아니면 이것도 방송극으로 먼저 소개가 된 것이었을까.. 확실할 것은 나도 모른다.

 

영화 표류도 신문광고, 1960년 12월 25일자 동아일보

영화 표류도 신문광고, 1960년 12월 25일자 동아일보

나에게 이 두 영화가 일깨워 준 사실은, 그 동안 잊고 살아온 자질구레한 시대적 역사보다 더 의미가 있었던 것도 있었다. 당시, 육이오 전쟁이 휴전으로 끝났던 사회적인 배경으로 이 두 영화의 ‘주인공’들, 특히 여성 protagonist들의 모습들이다. 동심초의 최은희, 표류도의 문정숙 씨들이 연기한 그 주인공들의 처지나 배경들은 모두 대학출신의 고등교육을 받은 인텔리 여성들로서, 거의 완전히 나의 어머니의 것, 바로 그것이었다. 그래서 이 두 영화를 나는 더 자세히 관심을 가지고 보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전쟁 미망인.. 당시 전쟁으로 남편을 잃었던 여인들이 불리던 이름이었다. 대부분 군인으로 전사를 했던 case였지만 그 이외의 case도 부지기수.. 우리 어머님의 case는 남편이 하루아침에 ‘사라진’.. 그러니까 납북(당시에는 납치라고 했다) 된 어처구니 없는 시대였다. 대부분 어린 아이들이 있었던 그 여인들.. 전쟁으로 황폐된 땅에서 어떤 도움을 정부로부터 기대를 하겠는가? 친척들의 도움이 아니면 길거리로 나가서 돈을 벌어야 했을 것이다. 영화 동심초에서 최은희, 표류도의 문정숙 모두 그래도 버젓이 자기집을 가지고 있었는데도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가정을 떠나 살벌한 사회에 뛰어들었던 것인데.. 우리 집의 경우, 그것은 사치였다고 할까.. 자기 집이 없었기에 어린 남매를 데리고 셋집을 전전해야 했던 어머니.. 얼마나 고난의 세월을 보내셨을까?

거의 모든 것을 가장, 남편에게 의지했던 당시의 사회적 상황에다 전쟁 후의 파탄 직전의 경제 상황.. 그런 것들을 느끼기에 너무나 어렸던 나는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야 피부로 조금 실감하게 되었다. 지금은 ‘상상’으로나마 나의 것으로 실감할 수 있다. 동심초의 주인공 최은희는 경제적 해결을 위하여 양장점을 경영하다가 실패로 빚을 지고 결국은 집까지 팔고 시골의 집으로 내려간다. 그 과정에서 경제적인 도움을 주는 김진규와 사랑을 하는 사이가 되지만 그것조차 미망인과 총각 사이가 주는 사회적인 파장 때문에 실패를 한다. 영화 표류도에서는, 법적인 결혼 전에 아기를 낳고 전쟁으로 남편을 잃은 후, ‘용감하게’ 생활전선으로 뛰어들어 다방을 경영하는 고급 인텔리 여성 문정숙의 파란만장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사생아라는 낙인이 찍힌 딸 전영선을 데리고 ‘철 없는’ 어머니를 모신 ‘가장’이 된 문정숙, 물장수를 한다고 멸시를 주는 대학동창생들.. 그녀를 동정하다가 사랑하게 되는 동창생 남편 김진규, 당시의 사회적 윤리 도덕을 느끼며 망설이다가 우발적으로 살인을 해서 감옥엘 가고, 병보석으로 출감 후에 기적적으로 김진규와 결혼, 낙도에서 일생처음으로 행복을 맛 보지만.. 병의 악화로 세상을 떠난다.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이야기.. 나에게는 하나도 낯 설지 않게 느껴지는 이야기들이다.

 

이 두 영화의 공통점 중에 하나는, 자식이 있는 여자가 혼자 살기가 쉽지 않고, 가장 家長 그러니까 남자주인인 남편이 가정에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경제적인 이유가 제일 크지만 그것을 제외한 다른 모든 사회적인 여건도 남자 주인이 필요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혼자 된 여자가 다시 남편을 만다 산다는 것은 힘들고 모험이기도 했다. 우리 집의 경우, 어머니가 경제활동을 하셔서 우리 가정을 지켰지만 그 30대 초의 꽃다운 나이에 ‘청혼’이 없었을까? 우리들이 너무 어려서 실감은 못했지만, 재혼의 유혹은 항상 있었을 것이고, 그 중에 한 가지의 ‘일’은 내가 어른이 된 나중에야 다시 깨달은 것도 있었다. 영달이 아저씨.. 경주출신으로 학교 선생님이었던,  잘 생겼던 아저씨였는데, 몇 번인가 우리 집에 그 아저씨의 친구와 같이 ‘초대’된 것을 기억한다. 어떻게 알게 된 아저씨인지 밝힐 수는 없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아마도 재혼까지 생각이 된 관계는 아니었을까.. 훗날 어머니는 ‘우리남매를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했다고 하신 말씀을 남기셨다. 당시의 사회적, 윤리적인 상황이 그랬다. 아마도 그때 다른 쪽으로 ‘재가’를 하셨다면 나와 우리 누나의 인생은 ‘완전히’ 다른 곡선을 탔을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 이후 반세기가 훨씬 넘어가는 지금은 어떤가? 가련한 남편들이 늘어가는 요즈음, 가련한 여인들이 등장하는 이런 이야기는 분명히 ‘고전 중의 고전’으로 그야말로 ‘옛 이야기’일 것이고 나 자신도 그 중에 하나.. 도대체 이 세상은 어떻게, 어데 까지 변할 것인가?

 


영화 동심초, 1959년  

6ㆍ25때 남편을 여읜지 8년. 이숙희(최은희)는 양장점을 하다가 빚을 지고, 출판사 전무 김상규(김진규)가 빚 청산을 도와주면서 둘은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상규는 사장 딸 옥주(도금봉)과 약혼한 사이고 누이(주증녀)는 그의 출세를 위해 이 결혼을 서두른다. 숙희의 장성한 딸 경희(엄앵란)는 어머니의 행복을 위해 상규와의 재가를 권유하지만, 숙희는 자신에게 주어진 사회적 관습과 윤리적 도덕관 때문에 갈등한다. 숙희와 상규는 진실로 사랑하지만, 숙희는 헤어지는 길을 택하고 서울 집을 팔아 고향으로 떠난다. 몸 져 누워있던 상규는 이 소식을 듣고 서울역으로 나가 이 여사가 탄 기차를 바라보며 괴로워한다. 

 


영화 표류도 1960년  

사생아인 딸(전영선)과 어머니(황정순)를 부양하며 살고 있는 여인 강현희(문정숙)는 `마돈나’라는 다방을 운영하면서 생계를 유지한다. 현희는 생활고에 시달리지만 자존심을 잃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 애쓴다. 그러나 그녀가 사생아를 낳고 다방을 경영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사람들은 그녀를 무시하려 한다. 강현희는 손님 중의 한 명인 신문사 논설위원 이상현(김진규)과 사랑에 빠지지만 그는 그녀의 대학동창과 결혼한 몸이다. 한편 `마돈나’의 단골손님인 젊은 시인 민우(최무룡)는 현희를 좋아하지만 현희가 받아주지 않자 술을 먹고 행패를 부린다. 민우를 좋아하는 다방종업원 광희(엄앵란)는 민우와 하룻밤을 지내고 민우가 자신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자 절망하여 현희의 도움도 거절하며 거리에서 몸을 팔다가 정신을 잃고 자살한다.

현희는 사랑과 윤리 사이에서 고민하면서도 상현과의 사랑을 키워나간다. 그러나 상현이 출장 차 미국으로 떠난 어느 날, 손님 중의 한 명인 통역자 최영철(허장강)이 외국인에게 자신을 팔아 넘기는 대화를 듣고 분노하여 우발적으로 화병을 던져 영철을 죽인다. 감옥에 수감되어 병을 앓던 현희는 병 보석으로 풀려나 상현과 함께 외딴 섬으로 내려가 살게 되지만 행복한 시간도 잠시, 병으로 죽음을 맞이한다.

 

주여, ‘이 자매에게’ 임하소서..

Nearer, My God, to Thee

Sharon Singers of the Sharon Mennonite Bible Institute  

 

우리들이 거의 3년이 넘게 간절하게 기도해 오던 윤 막달레나 자매님이 오늘 오랜 암 투병을 마치고, 선종을 하셨다. 개인적인 연분이 거의 제로에 가까웠던 영혼이지만 나의 가족같이 생각하며 기도해온 것, 전혀 ‘효과’가 없었을까? 누가 알랴.. 어떠한 사연을 가지고 그 영혼이 하늘로 가게 되었을 지를. 몇 달 전까지도 성당에서 가끔 뒷모습을 보는 것,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어서 그때마다 안심을 하곤 했지만 기어코 그 극성스러운 ‘암 투병’에 육체는 더 견딜 수 없었나 보다.

이 자매님의 선종 소식에 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외롭게 가는 것과 사랑했던 사람들 옆에서 가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하는 것이었다. 저 세상으로 가는 것은 마찬가지니까 무슨 차이가 날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것은 본인의 생각이 아닐까? 옆에서 ‘봐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쓸쓸한 선종은 역시 쓸쓸한 기분을 주기 때문이다. 막달레나 자매님의 선종이 그런 case가 아닐까.. 모든 ‘사랑하던 사람’을 멀리 떠나서 ‘조용히’ 가겠다는 의지는 과연 어떤 것일까? 이 자매님의 가족들은 어떻게 생각을 할까? 생각만 해도 가슴이 저려온다.

하느님을 ‘절대적’으로 믿고 가심을 알기에 그래도 그렇지 못한 영혼들 보다는 보내는 것이 덜 슬프긴 하지만.. 어찌 이런 과정이 담담할 수 있을까.. 결국은 슬프고 슬픈 것이다. 인간의, 아니 모든 피조물 creatures들의 ‘원죄’의 슬픔이여.. 자매님, 잠깐씩 가끔 본 인연이지만.. 부디 빛나고 편한 하느님의 세상에서 육체의 고통을 잊고 나비처럼 훨훨 나르며 그렇게 그리고 그리던 성모님, 예수님, 하느님을 보게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Updated on July 20, 2015

윤 막달레나 자매님: 지나간 주 초 初 에는 그 바로 며칠 전 선종 禪宗 하신 막달레나 자매님의 연도와 장례미사가 있었다. 불과 며칠 전에 병상에 누워서 이야기를 하던 모습을 본 것이 거짓말같이 선명하게 머리에 남는다. 그야말로 삶과 죽음의 갈래 길을 걸으며 며칠을 보낸 듯하다. 산 것이 무엇이고 죽은 것이 무엇일까.. 하는 원초적, 실존적인 물음만 계속 귀에서 울린다. 이 고독하지만, 고고 呱呱한 자매님, 고국에 가족 들이 있다는데 어떻게 해서 장례미사 안내서의 ‘유가족’란 이 완전히 비어있을까? ‘유가족 없음’.. 완전히 비어있는 것이 너무나 충격적이고, 나를 슬프게 만든다. 인간이 어찌 세상을 살다가 떠나면서 하나도 ‘인연’이 없단 말인가.. 행복하고 추억에 남기고 떠날 인연이 없음 때문일까.. 

나보다 더 불쌍한 사람을 위한 마음이었는지 자신의 시신을 병원에 의학연구를 위해 기증했다고 한다. 나의 몸 나 자신이야 떠나면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과연 그럴까? 어떠한 인생 역정이 이 자매님을 그렇게 고독하게 가족마저 잊고 떠나게 했을까.. 나의 넓지 않은 머리로 이해를 하려 애를 쓰지만 쉽지 않은 문제다. 시신 없는 장례미사이라 조금 쓸쓸할 것 같았지만, 새로 부임하신 이재욱 (세례자) 요한 신부님, 적절한 절차와 인정의 균형 balance을 잘 맞추시며 몇 번 병자성사를 통해서 보았던 짧은 인연을 상기시키셔서 적지 않은 조문객들을 위로하셨다. 저희들의 연도를 통해서 자매님 하루속히 연옥의 고통을 마치시고…

Trifexis, Benadryl wonders

Licking and scratching away.. until..
Tobey, Licking and scratching away.. until..

Drug company, Eli Lily and CompanyTrifexis, 트라이훽시스.. 조금은 요란한 이름의 이것은 ‘먹는 약 oral’, 그것도 개들이 먹는 약의 이름이다. 언제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몇 년을 넘지 않았을 것 같고, 이 약의 정확한 역사와 유래는 googling을 하면 홍수같이 잡스러운 (대부분 허위를 포함한) 사실들은 알 수 있겠지만, 필요 이상의 ‘정보 홍수’를  원치 않기에 모르고 지나기로 했다. 불과 한두 달 전쯤에 이 약에 대한 것을 새로니를 통해서 듣긴 했었다. 새로니의 pet dog, Ozzie는 flea 문제가 없다고 자랑을 하기에 물어보니, 흔히 알고 있는 flea collar나 spray, three-drops같은 것이 아니고 ‘먹이는 약’이라기에, 너무나 우리는 놀랐던 기억이 있었다. 그러다가 flea season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우리 집 Tobey에게는 괴로운 계절이 되었기에 annual shots (rabies shots etc) 수의사에게 ‘먹는 약’에 대해서 물어 보았었다. 그의 대답이 의외로.. ‘그 약 아주 잘 듣는다..’ 이었고, 큰 부작용이 없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새로니의 말로도 그랬지만 이제 pro의 말을 듣고 보니 심각하게 이것을 써보기로 결정하고 더 research를 해 보았다.

미국의 pet population이 장난이 아니었기에 Eli Lily and Company 같은 거대 제약회사에서 이런 쪽에 관심을 기울였을까? 그저 밖에서 바르는 약, 모두 poisonous 한 chemical approach를 넘어서 이제는 ‘간단히 먹는’ 약이 나올 정도가 되었는가.. 참 $$이 좋구나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이번에 알게 된 이 약은 flea뿐이 아니고 heart worm까지 ‘처방’ 한다고 하니.. 입이 벌어질 정도다. 문제는 과연 어느 정도 효과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역사가 짧은 듯 하니.. 분명히 예기치 못한 문제가 있을 지도 모른다. 그야말로.. too good to be true.. 란 표현이 이런 때 맞는지…

약 값이 만만치 않음은 알지만, 반드시 유난히 비싼 것이 아님은 우리 Tobey를 보면 알 수 있다. Flea bite로 여름 내내 고생하는 것은 물론이지만 2차적인 문제가 더 심각함을 이번에 알게 된 것이다. 너무나 flea bite가 가려워서 무차별하게 긁어대는 바람에 skit infection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이번에는 귀에까지 감염 되어서 무려 $200의 치료비가 들었던 것을 생각하니.. 조금 비싸도 이런 편리하고 확실한 oral medicine은 너무나 매력적인 것이다. 수많은 flea product가 있지만 그 무엇이나 시간과 노력이 드는 것들이다. 귀찮으니까 (사람이) 더 이상의 노력을 포기하고 만다. 한 달에 한번 ‘먹이면’ 되는 이 wonder drug..과연 얼마나 효과가 있을까.. 기대를 가지고 지켜 보기로 했다.

이런 flea drug것과 더불어 유난히 가려움증으로 고생하는 우리 Tobey같은 개에게 사람이 먹는 allergy drug을 먹여도 좋다는 사실도 우연히 알게 되었다. 물론 체중에 따라서 양을 조절하여야 하지만.. point는 그 약이 사람처럼 잘 듣는다는 사실.. 위에서 말한 대로 가려우니까.. 우선 2차적인 피부감염이 일어나는 것에는 이런 ‘가려움 증’을 control하는 방법이 얼마나 효과적인가? Doctor의 prescription이 필요한 Trifexis과는 달리, Benadryl (non-prescription 비 처방) 같은 allergy drug은 의사 처방 없이 살 수 있으니 이것 또한 너무나 편리했다. 이런 과정으로 Tobey는 한꺼번에 2가지 약을 먹기 시작하고.. 결과는 너무나 happy한 것이었다. 최소한 현재까지는.. 긁느라고 얼이 빠진 듯한 얼굴에서 이제는 제 정신을 차린 듯한 모습이다. 하지만 우리의 주 관심사는 역시 앞으로 어떻게 flea가 control되는가 하는 것이다. 원칙적으로는, flea들이 ‘알을 낳지’ 못하게 된다고 했으니까.. 그야말로 control이 되는 것이지만.. 과연 원칙대로 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