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sus in Galilee

갈릴래아의 예수님

갈릴래아의 예수님

갈릴래아 호수를 배경으로 계시는 예수님… 이 그림은 기묘한 인연으로 알게 된 배 HC 대건 안드레아 형제님의 작품이다. 몇 년도에 그린 것인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5년 전 이후의 것일 듯 하다. 이 갈릴래아 호수의 예수님이 우리 집에 온 것은 지난 성탄절 무렵이었다. 배 형제님이 보내주신 성탄 카드에 이 그림이 있었다. 몇 개월 후에는 이 그림이 picture frame용으로 큰 것이 보내져 와서 우리 집 family room 가운데 걸려 있다. 갈릴래아 예수님이 우리 가정을 보살펴 주시기 시간한 것이다.

기묘한 인연.. 정말 기묘한 인연으로 알게 되고 만나게 된 형제님, 나보다 몇 살 위이신 인생선배님이지만 나이보다 젊게 보이는 탓일까.. 어떨 때는 친구처럼 느껴지는 형제님. 이 대건 안드레아 형제님은 우리와 또 다른 ‘묘한’ 인연을 맺고 병상에서 가톨릭에 귀의하고 곧바로 성모님의 품에 안기신 돼지띠 동갑 베로니카 자매님의 친정오빠가 되신다.

 마음의 문을 꼭꼭 닫고 하느님을 거부하던 베로니카 자매님의 오빠로써 꺼져가는 동생의 생명을 보며 무엇을 제일 먼저 생각했을까? 병을 낫게 하고 싶지만 인간의 한계를 아셨는지 곧바로 다음의 세상을 생각하고 ‘불도저’같은 우직함과 사랑으로 동생을, 본인이 믿는 하느님께 보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 ‘우격다짐’이 결실을 보아서 우리와 연결이 되었고 그 동생 자매님을 ‘안전하게’ 하늘나라로 보낸 것이다.

대건 안드레아 형제님은 서울 홍익대 출신 미술 전공이셨는데, 대학 졸업 후에는 ‘상업미술’을 계속하셨다고 했다. 그런 분이 또 다른 묘한 인연으로 가톨릭 신자가 되었고 지금은 이렇게 ‘성화’를 그리신다고.. 이 갈릴래아 예수님은 5년 전쯤 사고로 실명의 위기까지 갔던 후에 그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실명은 면했지만 시력이 평상의 몇 % 밖에 남지 않았는데 그런 장애와 싸우며 이 그림을 그렸다. 왜 갈릴래아의 예수님일까.. 대답은: ‘새로 시작하는 인생’ 이라고.. 예수님 부활 후에 제자들을 갈릴래아로 보내셨던 것을 생각한 듯.. 새 인생으로 일생일대의 ‘성화’를 계획하고 현재 진행 중이라고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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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해 11월부터 시작된 이런 ‘묘한’ 인연으로 우리는 이렇게 의미 심장한 ‘성화’를 얻게 되었다. 겁에 질린 제자들을 갈릴래아 ‘고향’에서 새로 시작하게 한 것은 무엇일까.. 2000년 굳건하게 지속되는 하느님의 교회.. 바로 그 것일 것이다. 배 대건 안드레아 형제님,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장례미사, 자랑스런 ‘레지오’

가볍지만, 몇 개월 동안 쳐졌던 나와 연숙의 어깨가 조금은 올라간 날이 되었다. 안도의 큰 숨을 쉴 수도 있었고, 말로 표현하기 힘든 보람과 은총을 느끼는 하루도 되었다. 몇 개월 동안 우리와 인연을 맺으며 삶을 위한 고통스런 투쟁을 하였던 P 베로니카 자매님, 오늘 조촐한 가족들과 적지 않은 레지오 단원들의 전송을 받으며 하늘나라로 완전히 떠났다. 이번 일을 통해서 ‘달릴 곳은 끝까지 달려야 한다.’라는 레지오 교본의 구절을 굳게 상기하고, 성모님을 의지한 레지오의 막강한 힘을 절실히 느끼는 기회도 되었다.

연도와 장례 미사.. 공식적이고 전통적이며 사랑이 가득한, 정성된 신부님의 자상한 미사집전, 어느 것 하나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 없었다. P 베로니카 자매님은 물론이고 두 아들, 동생 자매님, 가까운 친척들도 같은 느낌이었으리라 생각을 한다. 장지 동행에 각별한 신경을 쓰셨던 Lee’s Funeral Home 이 사장님.. 이번에 처음 가까이 대하는 기회가 되었는데 참으로 자상한 분이셨다. 성당 연령회 분들도 정성을 다 해서 준비해 주셨고, 특히 눈이 시려오는 것은 생소하기만 한 ‘신 영세자’ 베로니카 자매님을 위해서 각별한 사랑으로 참석해 준 자랑스런 우리 본당 레지오 단원님들.. 어느 것 하나 ‘사랑’을 느끼게 하는 하루였다

자매님, 비록 고달픈 인생여정을 보냈어도, 가는 길은 너무나 희망적이고 자상한 여정이 될 것이라 우리들 모두 생각한다. 내가 제일 감동을 받은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100% 확신 여부를 떠나서 ‘나는 하느님을 알고 간다’ 라는 천상의 선물을, 그 형언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세례를 받음으로써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주고 갔다는 사실이다. 특히 짧지 않은 시간 동안 헌신적으로 어머니를 간호했던 큰 아들에게 주고 간 선물도 그것이 아닐까. 우리는 하느님의 섭리와도 같이 느껴지는 ‘묘한 인연’을 음미하며 우선 안도의 큰 숨을 내려 쉴 수 있게 되었고, 남은 유족, 특히 큰 아드님이 하루 빨리 안정이 되고 어머니의 간 길을 거울 삼아 ‘평화’를 찾는 긴 여정을 시작하기를 기도하기로 했다.

R.I.P. 2 ‘Sisters’: 두 자매님을 보내며..

André RieuNearer, My God, to Thee (live in Amsterdam)  

 

지나가는 2주 동안 2명의 ‘자매님’들이 일주일 간격으로 하느님의 품으로 갔다. 한 자매님은 지난 주 일요일에 2시간 drive해서 간, 어떤 funeral home의 chapel에서 ‘개신교’의식으로 치러진 예배에 그 자매님의 ‘고이 잠든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었다. 25년 전 이곳으로 이사했을 당시부터 연숙이 알고 지내던 K 자매님.. 나와는 직접 상관이 없다곤 해도 간접적으로 그녀의 삶을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다. 연숙보다 몇 살 밑인 나이에 어떻게 벌써 귀천 歸天을 했을까? 우리가 알기에 지난 몇 년 동안 앓아온 당뇨병과 신장  kidney의 기능악화로 투석 dialysis 을 받았지만 근래에는 포기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투석을 받는 것은 일시적인 방편이고 결국은 신장 이식을 해야만 살 수 있는데 그녀는 그 투석조차 못 받았던 모양이었다. 나의 어머님도 이런 처지였지만 신장이식을 하기에 너무나 고령이어서 결국은 운명을 하셔서 이런 처지를 뼈저리게 나는 실감한다. 하지만 이 K 자매님은 충분히 나아질 여지가 있었을 텐데.. 장례예배에서 목사님의 말씀이 그녀는 아마도 투석을 제대로 못 받았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번지르르한’ 목사의 조사에서 밝히지 못하는 사정을 더 많이 알고 있기에 관에 누워있는 그녀를 보며 깊은 슬픔에 잠겼다. 형제, 자매가 그렇게 많은 그녀가 ‘시골’에 묻혀서 별로 도움을 주지 않는 남편과 살려고 노력을 했던 것을 알기에.. 아마도 주위의 도움은 거의 받지 못했을 것이고 결국은 모든 것을 포기했던 것은 아닐까.. 우리의 우려는 아마도 맞을 것이다. 이럴 때 다시 생각한다. 과연 가족이란 무엇인가? 문제가 없는 가족, 가정은 없겠지만 그래도 위기에 처했을 때 도움을 주는 것이 가족들이 아닐까? 사랑하는 방식이 달랐다고 ‘사탕발림’같은 조사 弔詞 eulogy가 우리에게는 너무나 우습게 들렸고 2시간 집으로 오는 drive길이 너무나 우리에게는 무거운 시간이 되었다. K 자매님, 아마도 이제는 그런 모든 고통을 훨훨 벗고 저 세상에서 힘차게 비상하는 새, 유유히 춤추는 나비가 되시길 기도합니다.

또 다른 자매님, 돼지띠 동갑 P 자매님.. 지난해 11월에 우리와 ‘묘한’ 인연이 되어 알게 된 분.  어제아침, ‘격심한’ 고통에서 벗어나 근래에 새로 ‘사귄’ 성모님의 품에 안겼다. 병 간호에 지친 두 아들, 특히 큰 아들을 두고 어떻게 눈을 감았을까.. 생각하니 가슴이 저려온다. 우리 부부는 이 자매님을 천주교로 인도하면서, ‘기적’까지는 안 바랐어도 그래도 평화를 충분히 맛 보시는 충분한 시간을 바랬는데.. 그것이 아무래도 부족한 시간이 되었다. 지난 5개월 우리는 이 분이 하느님을 알게 하려고 레지오의 조직을 통해서 지속적인 노력을 해 왔다. 비록 육체적인 죽음은 맞았어도 영혼은 건강하게 살아 가시리라 우리는 굳게 믿는다. 이 자매님도 알고 보면 참으로 ‘사연’이 많은 인생이 아니었을까.. 오래 전, 소설가 박경리 여사의 대하소설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 정도의 복잡하고 운명적인 인생, 결국 운명은 바꿀 수가 없었던가? 나도 운명이란 것을 어느 정도 믿긴 하지만 그래도 그래도 결말이 더 나아지는 노력은 어땠을까? 더욱 더 슬픈 것은 작년 이맘때 남편이 거의 ‘같은 병’으로 운명하신 사실..남아 있는 두 아들에게 이런 가혹한 고통이 어디 또 있을까? 그래도, 세상 모든 것을 등지고 마음의 문을 걸어 닫았던 P 자매님, 3월에 하느님께 모든 것을 열고 병원에서 세례를 받았고, ‘베로니카’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다. 형언할 수 없는 극심한 고통 중에서도 새로 알게 된 천주교 기도문을 열심히 읽고, 평화스러운 모습으로 천천히 귀천을 하였다.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시작” 이라는 위령기도문을 믿으며 우리는 이 자매님 먼저 가신 부모님들과 재회를 했으리라 굳게 믿는다.

First of May, 2015

창희야, 용현아 그립구나.. 행복하게 살기를..

 

창희야, 용현아.. 친구여, 잊었는가? 1970년, 45년 전 우리의 시대를.. 박창희 손용현 그리고 나 이경우 비록 흔히 말하는 삼총사까지는 아니었어도 원서동 죽마고우 세 악동이었지… 재동국민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헤어진 우리들, 모두 개천이 고즈넉이 흐르던 비원 옆 담을 끼고 추우나 더우나 밤이 되도록 밖에서 뛰놀던 시절을 뒤로하고 의젓한 대학생으로 우리들 다시 만난 것이 1970년 이 시작되던 때였지. 비록 나와 박창희는 같은 대학, 같은 학과에서 이미 만나서 다시 ‘죽마고우’가 되었지만 너는 더 늦게 다시 만나게 된 것.. 거의 기적과 같은 ‘사건’이었어.

그래도 그때부터 우리들은 헤어진 시절을 만회라도 하듯이 열심히 도 자주 만났었지. 비록 우리들 공부는 뒷전이었지만 당시에 사실 제일 중요한 것은 ‘청춘’을 공부하는 것이 먼저가 아니었던가? 그런 우리들 뒤에 두고두고 그 ‘놀았던’ 값을 치르기 했지만 크게 후회는 안 하고 싶구나. 특히 1970년 4월의 우리들만의 1주일간의 지리산 등반, 나는 아마도 ‘죽어도’ 못 있을 것 같다. Pop song에 열광하던 우리들, 멋진 다방을 찾아 어둠 속에서 진을 치고 백일몽을 꾸었던 시절, 찌들었던 연간 소득 수백 불 밖에 안 되던 그 시절이었지만 우리는 그런 것들 별로 걱정한 적이 없었지.. 항상 우리는 무언가 희망이 있었으니까..

Bee Gee’s 의 ‘명곡’ First of May를 애창하던 그 시절의 화창한 봄날들, 비록 대학 졸업을 앞둔 불안한 시절, 정권연장에 골몰하던 박정희 정권의 하늘아래 있었지만.. 그런 것들 우리에게 그렇게 보였던가? 산과 노래와 멋진 다방들만 있으면 족하던 그 시절을 반세기가 지나가도 똑같은 심정으로 생각한다. 우리들 모두 ‘해외로 해외로..’를 외치면 헤어졌고 결국은 ‘완전히’ 헤어졌지만, 다행히도 우리의 머리 속만은 절대로 헤어짐을 못 느끼며 산다. 특히 나는.. 최소한 일년이 하루 오늘만은 절대로 못 잊는다.

작년 5월 1일 이후, 너희들은 어떤 인생의 변화가 있었는지? 창희는 물론 ‘든든한’ 신앙을 더욱 더 성장시켰으리라 짐작이 되지만 용현이, 너는 정말 알 수가 없구나. 혹시나 어떤 ‘믿음’을 가지게 되었는지? 나는 최소한 나의 믿음이 아주 희망적이고, 날이 갈 수록 더욱 희망적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지난 일년 동안 그것이 조금은 더 성숙해 졌다고 자부한다. 나의 세계관은 180도 변하고 있으니까.. 다른 쪽에서 세상을 보는 것, 정말 신기하기만 하구나.

너희들 자식들 모두, ‘정규 코스’를 거치며 살아가는지 궁금한데.. 나의 두 딸들은 그렇지 못해서 우리의 나이 든 인생은 조금 다른 사람들과 다른 것 같구나. 하지만, 이제는 별로 큰 걱정을 안 한다. 그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니까. 우리 부부, 가족 모두 ‘영, 육’ 모두 건강한 편이니까.. 그것이면 족하지 않니? 너희들도 모두 영육간 모두 건강한 나날을 보내기 바란다. 내년 5월 1일에 또 ‘보고’를 하면 좋겠구나. Adios Amigo!

4월을 보내며..

배(해숙) 베로니카.. 자매님.. 지금 조금씩 영원의 세계로 가고 있는가? 작년 11월 이후 이 자매, 그 가족들과 우리는 묘한 인연으로 알게 되었고, 연숙의 지극정성으로 3월에는 세례를 받기도 했고, 기적을 바라는 기도를 열심히 했지만 역시 무리인가? 이 자매를 보면.. 참 인생의 역정은 모두 독특하게 다름을 느낀다. 작년에 남편이 거의 같은 병으로 가시고.. 어찌 운명의 장난인가 이 자매마저 이런 운명의 길을 걷고 계신가? 한때 독특한 고집을 가진 이 자매를 나는 오해할 정도로 ‘호감이 가지’ 않았다. 어떤 분인지도 모르지만 우선은 좋게 보아야 하지만 조금은 ‘이기적’인 듯한 ‘덜 겸손한’ 태도가 나를 실망케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이 무슨 문제일까? 하지만 내가 그 처지라면 조금은 조금은 더 ‘겸손’하도록 노력하리라는 자신을 추스른다.

이런 생각을 하며.. 다시 나는 최악의 겸손으로 내려 앉는다. 내가 누구를 탓하거나 겸손을 운운할 수 있는가? 이 자매를 보며 나는 나의 엄마를 어떻게 보냈는가 절감을 하며 실망, 고통, 후회의 구렁텅이로 빠져든다. 얼마나 당신의 외아들, 편치 않은 누나를 걱정하며 눈을 감으셨을까.. 나는 사실 이런 상상의 근처도 가기 싫었고, 그런 광경을 애써 잊으려, 없는 것처럼 미화, 청소하며 살았다. 고통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비열한 수법임을 내가 어찌 모르랴.. 내가 어떻게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가족들을 돌보는 것에 대해 왈가왈부할 자격이나 있었던가?

오늘, 내일 하며 선종기도를 바치고 있는 배 자매.. 어떤 인생을 살았을까? 오빠 형철 형제가 어쩔 수 없이 동생의 곁을 떠났다. 그 운명하는 동생의 모습을 어찌 더 볼 것인가? 이해를 한다. 결국은 기진맥진한 두 아들, 특히 큰 아들 호구.. 의 어깨가 더욱 무거워졌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무엇인가? 레지오의 조직을 우리는 한껏 이용해서 이 자매를 천주교로 이끌었지만 나의 역할은 아무래도 미미한 것인지도.. 물불 안 가리고 노력하는 연숙이를 어찌 당할 것인가? 하지만 그런 돌파력, 지구력, 조직력 등은 정말 가상하다. 누구도 못 따라갈 것이다. 인정을 안 할 수가 없다. 처음으로 장례의 과정을 우리는 경험할 듯 하다. 비록 식구들이 있다고 하지만 성당과의 관계는 우리가 유일한 연결점이니까.. 어떤 역할이 될지는 미지수지만.. 그저 최선을 다하자. 그것이 나의 현재 조금 긴장되지만 담담한 심정이다.

김대중 redux.. bigotry

인호 형의 email을 받았다. 요새는 column style 글 보다는 현재 시사적인 글들, 그것도 ‘서로 돌려보는’ 류의 글들을 받아보는데, 이런 글을 볼 때마다 나는 곤란한 심정이 들기도 한다. 새로 나온 정보, 뉴스로 보거나 ‘재미’로 보면 간단하게 흘려 보낼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때도 있는 것이다. 이번에 받았던 글은 대한민국 전 대통령 김대중 씨에 관한 것이었다. 이런 email들은 대부분 original 의 출처가 묘연하다. 받은 것을 계속 forwarding을 하면서 분실이 될 수도 있을 것이지만, 이런 것으로 보아서 우선 이런 글들은 ‘차가운’눈으로 읽어야 함을 오랜 전부터 나는 배웠다. 의식적으로 ‘의심’을 하는 마음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몇 년 전 나를 바보처럼 느끼게 하는 email을 한국의 처형(wife’s brother)으로부터 받은 적이 있었다. 분명히 기억한다. 박근혜 대통령이 출마한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 직전이었다. 물론 처형은 큰 생각 없이 나에게 forward한 것이었지만 그 글이 나중에 알고 보니 참 의심스러운 것이.. 대통령 선거 직전이라는 timing이었다. 그 글의 주제는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을 기리는 것으로 예전에 쓰여진 ‘소설, fiction’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와 재미 핵물리학자 이휘소 박사를 절묘하게 fiction과 nonfiction으로 접목을 시켜서 Internet으로 ‘뿌린’ 것이다.처음에 나는 그것이 100% 사실인 줄 알았지만 나중에 ‘조사’를 해 보니 대부분이 ‘소설’이었다. 그 글을 읽고 아마도 ‘영웅 박정희 대통령’의 후계자 박근혜씨를 지지하는 마음이 들지 않을까 하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그때 나는 인터넷의 함정을 절실히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를 완전히 바보로 만들었던 그것들..

이번의 글은 배경이 조금은 다르다. 아마도 지금은 대통령 선거 같은 것이 없을 것이고.. 김대중의 현재의 대한민국 정치에 relevant한 것 같지도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김대중 전 대통령은 사기꾼’이라는 인상을 주게 하는 폭로성 글.. 그것도 김대중 씨를 가장 많이 interview했다는 당시의 도쿄 주재원, 영국출신의 언론인, Henry Scott Stokes의 글이고 보면, 잠재적인 효과는 크고 파괴적이 되지 않을까? 이 글은 첫머리에 밝혔듯이, 그가 지은 ‘어떤’ 책의 일부를 발췌, 번역을 한 것이고 글의 요지는 한마디로, ‘내가 알았던 김대중은 알고 보니 정치적 사기꾼’ 이었고, 그에게 오랫동안 속아온 내가 너무나 한심하다’ 라는 것인데, 유감스럽게도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는 하나도 내세우지 않고 있다.

답답한 마음으로 내가 모르는 사실을 찾기 위해서 wikipedia를 찾았지만 비교적 중립적인 그곳에서도 나는 김대중 씨에 관한 특별한 것을 찾을 수가 없었다. 문제가 되는 광주사태, 노벨상, 평양방문 등에서도 특별한 것이 없었다. 어떤 것들이 ‘사기성’이 있다는 것일까? 오랫동안 대한민국의 정치 소식에서 관심을 접은 나로서 이럴 때.. 나는 참 곤란하다. 근래에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가끔 ‘김대중은 빨갱이’ 라는 소리를 듣기는 했지만, 그런 것이 그렇게 심각하게 정확한 것일까?

최후의 수단으로 나는 ‘폭로자’인 Henry Scott Stokes란 인물이 과연 어떤 사람인가 찾아 보게 되었다. 시작은 물론 liberal의 아성인 The New York Times의 특파원이라는 사실.. 무조건 그의 말을 믿어야만 할 정도이지만.. 자세히 그의 행적을 알아보면 정말 뜻밖의 사실들을 만나게 된다.

미시마 유키오, 자살직전 1970년 11월
미시마 유키오, 자살직전 1970년 11월

제일 먼저 돋보이는 것은: 당시 일본 ‘극단적 극우파’ 미시마 유키오.. 이와의 특별한 관계.. 이것 하나로 짐작이 간다. 극소수, 극단적, 극우파.. 미시마 유키오는 1970년에 자기가 만든 ‘극본, 각본’에 의한 극우파 쿠데타를 시도, 공개할복자살을 한 인물이다. 과거의 일본천황체제로 다시 복귀하자는 것의 그의 의도였다. 2차대전의 과오성을 ‘완전히’ 부인하는 인물.. 그와 친하게 된 Henry Scott Stokes는 어떤 사상인가? 역시 아니나 다를까.. 그는 한 술 더 떠서 ‘일본은 아시아의 희망이었다‘ 라고 주장, 2차 대전은 연합국이 만들어낸 일방적 역사였다고.. 이것이 만약 독일에서 일어난 일이라면 그는 일찍이 ‘감방’ 신세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일본의 아시아 침공, 진주만 공격 등 모두 ‘방어전’이라는 해괴한 논리를 편다. 중국에서 벌어진 ‘남경 대학살’도 조작된 것이라고까지 한다.

이런 경력의 그가 한때 김대중을 ‘보호’하던 입장이었는데 왜 그렇게 방향을 바꾸었을까? 여기에 소개된 글을 보면 대강 짐작이 간다. 극우파, 국수주의적 (fascism)인 그가 ‘평화’를 사랑할 리가 없으니.. 노벨 평화상을 공격하고, 극좌적인 공산당을 좋아할 리가 없다. 그가 느끼기에 김대중의 남북협상이 그의 심기를 틀어놓았을 듯 하다. 그렇다고 그런 것과 상관없는 다른 모든 부분을 그렇게 도매금으로 공격할 수 있을까? 이것을 보면서 나의 생각을 정리하면, 나는 공산당, 김일성 왕조라면 자다가도 일어나는 사람이기에, 그의 반공적인 것은 수긍이 간다. 문제는 그의 일본적 극단적 극우, 수정적 역사관 인 것이다. 이런 그의 배경으로 나는 이 글의 거의 전부를 배척할 수 밖에 없었다.

최근 Henry Scott Stokes 인터뷰: 일본은 아시아의 희망이었다..

최근 Henry Scott Stokes 인터뷰: 일본은 아시아의 희망이었다..


 

 

민주화 운동의 투사를 가장한

사리사욕에 눈 멀었던 김대중

전 뉴욕 타임즈 동경. 서울 주재 특파원

Henry Scott-Stokes 기자가 저술한 한 저서

(번역: 라디오 코리아 고문 양준용) 중에서.

 

카멜레온과 같았던 정치인 김대중

김대중 한국 대통령은 2000년에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이 해에 한국의 대통령 중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 남북간의 긴장 완화에 공적을 남겼다는 게 수상 이유였다.

그런데 오늘날 남북관계가 조금이라도 개선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어떻든 노벨 평화상이란 상은 적당히 주고 받는 상인 모양이다. 2009년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이 상을 받았었다. 대단한 인기를 안고 대통령에 취임한 그는 취임 8개월반만에 이 상을 수상했다. 독일 베를린에서의 연설에서 핵무기 근절을 호소했다는 게 수상 이유였다. 그렇다면 <지상에서 병마를 영구히 추방한다>고 큰 소리를 쳤어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할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하게 한다.

2013년의 노벨 평화상은 화학무기 금지조약에 의해서 설립된 화학무기 금지기관인 OPCW가 수상했다. 시리아가 화학무기를 포기하겠다고 약속한 직후였기 때문에 주목을 받았었다. 그러나 시리아의 독 가스 무기의 제거작업은 다만 시작만 했을 뿐 그 작업이 성공적으로 진행될 것인가의 여부는 의심스러웠을 따름이다.

그 전 해에는 유럽 공동체가 수상했다. 그런데 유럽 공동체 역시 경제 파탄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나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취재를 위해 30회 이상 단독으로 만났다. 아마도 내가 인터뷰한 아시아의 요인들 중에서 가장 횟수가 많았던 것 같다. 김대중씨는 한국의 서남부 전라남도의 하의도 출신이다. 그는 매스컴이 자신을 어떻게 다루는가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민감하게 신경을 쓰는 사람이었다. 코미디언들처럼 장면 장면 마다 화장을 바꾸며, 상황에 따라 자신을 변신하는 카멜레온(Cameleon, 주위의 환경에 따라 몸의 색깔을 자유자재로 변화시키는 새의 총칭)과 같은 변신의 달인이었다.

전 생애를 통해 가장 극적으로 연출한 것은 그가 한국의 현직 대통령으로 북한을 처음 방문했을 때의 일이었다. 바로 이 북한 방문이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민주화 운동의 투사를 가장한 김대중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그가 아직 야당생활을 하던 70년대였다. 그는 미국과 일본에 체재하면서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추진하는 한편 인권활동가로서도 활약해 주목을 받았다. 73년 8월 김대중씨는 동경의 구단시타에 있는 그랜드 팔레스 호텔에서 행방불명 되었다.

한국 중앙정보부가 그를 납치한 것으로 뒤에 밝혀졌다. 일본의 한 항구를 출항한 화물선에서 그를 수장하려 했지만 바로 그 시각에 군용기가 상공에서 감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살해 의도는 중지되었다. (역자 주:이 주장은 김대중씨의 증언에 의한 것이지만 관계자들의 증언으로 이 수장 계획은 사실 무근으로 판명되었다.)

그 뒤 그는 서울의 자택에서 연금상태에 놓이게 되었고, 76년에는 <민주구국선언>을 발표, 다시 체포되었다. 80년 2월 사면되었지만 5월에 재 구금 되었다. 바로 이 사건이 원인이 되어 광주사태가 발발했다. 군부가 민주화 요구의 데모를 진압했고 유혈의 참사로 진행되었다.

김대중씨는 미국에 대해 강한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다. 미군이 한국에 계속 주둔하고 있어야 하는가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 김대중씨의 항의 주장은 과격했고 주목을 끌었다. 한국 국내에서 그만큼 강력한 항의를 주장한 지도자는 아무도 없었다. 나의 인터뷰 요청을 받아들인 김대중씨는 민주화 운동의 투사로서의 이미지를 빈틈없이 연출했다.

70년대 후반에 이르러 박정희 대통령이 돌연 암살되었다. 박 대통령은 61년부터 70년대까지 정권을 유지했다. 박대통령의 암살사건 후 권력은 곧바로 신 군부에 넘어갔고 군부가 모든 것을 장악했다. 당시의 군부는 김대중씨를 반군정의 중심 인물로 간주, 적대시하고 제거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나는 김대중씨의 자택을 방문했다. 그는 자택연금 상태에 놓여 있었고 군에 의해 엄중한 감시를 받고 있었다. 뉴욕 타임스 특파원으로 자택을 몇 차례 방문하면서 나는 김대중씨가 뉴욕 타임스 지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다른 모든 언론 매체와 나를 대하는 태도가 눈에 띄게 달랐다.

김대중씨의 자택 밖에는 언제나 보도진으로 둘러 쌓여 있었다. 그러나 뉴욕 타임스의 특파원이 취재를 위해 방문한 것을 알면 곧장 집안으로 안내되었다. 그의 이 같은 특별한 배려가 미국으로 하여금 김대중 자신의 생명을 구하도록 하는데 큰 역할을 감당하도록 한 것이었다. 미국의 민간 조직과 언론이 김대중의 보호세력으로 등장했다. 뉴욕 타임스는 그 선두에 선 모습이었다.

나는 1980년 봄에 서울을 거점으로 해서 동경을 오가며 특파원의 업무를 할 수밖에 없었다. 김대중씨가 가장 위험한 상황에 부딪쳤을 때에 직접 만나 취재활동을 한 나는 김대중씨를 한국의 민주화 활동의 중심인물로 치켜세웠고, 사설을 통해서도 김대중씨는 어떤 이유에서든 처형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거듭했다.

광주 사건을 사주한 장본인

그러나 김대중이란 인물은 가짜(fake) 인물이었다. 진짜 인물(real person)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사기꾼(imposter)이었고 위선자(pretender) 였다. 언제나 술수를 노리는 연기자였다. 사람들의 속 마음을 교묘하게 이용해서 뒤에서 조종하는데 몰두했다. 측은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었다.

나도 그의 연기에 놀아난 한 사람이었다. 수 많은 한국인들도 그에게 속아 넘어갔다. 김대중씨의 대단한 능력은 이 같은 그의 술수가 오랫동안 발각되지 않은 채 계속되었다는 점이다. 김대중씨가 저지른 최대의 범죄행위는 민주주의의 대의를 그의 속임수의 소재로 이용했다는 것이다.

광주 사건이야 말로 김대중씨의 기만행위를 그대로 들어낸 사건이었다. 1980년 5월, 김대중씨는 신 군부의 정점에 있던 전두환 세력에 의해 체포되었다. 광주에서 소란 사태가 발생하자 김대중씨는 그 배경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김대중씨가 탐한 것은 권력이었다. 그는 항상 자신의 입장만을 생각했다. 광주사태가 발생한 시기에 그가 가장 마음을 쏟은 것은 자신이었고 이 광주사태를 이용해서 자신이 권력을 장악하는 일이었다.

Henry Scott Stokes 편집, '광주 봉기' : 김대중 대통령 서문
Henry Scott Stokes 편집, ‘광주 봉기’ : 김대중 대통령 서문

광주 사건으로부터 20주년을 맞은 2000년에 광주봉기(kwangju Uprising)란 책이 뉴욕의 출판사에서 간행되었다. 이 책은 내가 편집한 책인데 당시의 사건 취재에 임했던 10명의 유럽 및 미국의 기자와 10명의 한국인 기자가 집필했다. 이 책의 출간으로 사건 당시에 쓸 수 없었던 사실들이 햇볕을 볼 수 있었다. 공동집필자들은 모두 기꺼이 옛 일을 되새겨 볼 수 있었다.

광주봉기의 참 모습은 <김대중 폭동>이었다. 광주사건은 김대중씨 자신이 민주화의 기수라는 가면을 쓰고 폭동을 사주해서 대통령이 되고자 했던 폭동이었다. 우리 저널리스트들도 그의 연출에 영락 없이 속은 꼴이었다. 우리들은 꼭두각시(puppet)에 불과했다.

나의 처는 전업주부이지만 예리한 감성을 지니고 있었다. 당시에 그녀는 김대중씨가 깔아 놓은 연극에 놀아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나에게 주의를 주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광주봉기는 그 발단부터 김대중씨가 깔아놓은 연극이었다.

광주는 김대중씨의 근거지였고 이곳 주민들은 군사정권의 압정에 시달려 왔다. 김대중 때문에 압정에 시달린 것은 아니지만 이 점이야 말로 그의 집권 전략에 꼭 들어 맞는 환경이었다. 광주 사태는 김대중씨가 의도해 온 그대로였다. 나는 <광주봉기>가 출판되었을 당시까지도 김대중씨의 역할이 그렇게 큰 것으로 상상할 수 없었다. 김대중은 봉기가 폭발했을 당시에 투옥된 상태에 있었고 그 이후의 재판에서 사형 판결을 받았었기 때문이다.

김대중씨의 생명을 구한 것은 그 뒤 미국 대통령에 취임한 로날드 레이건의 측근 관계자들이었다. 1980년 가을, 군을 장악한 전두환 한국 대통령과 레이건 대통령의 측근들 사이에 한 밀약이 맺어졌다. 레이건 신 대통령을 만나는 최초의 외국 원수로 전두환 대통령이 되도록 워싱턴 행 초대장을 받는 것과 수감중인 김대중을 처형하지 않는다는 것을 서로 교환키로 한 약속이 밀약의 내용이었다.

레이건 대통령이 사형수 김대중을 처형하지 못하도록 노력한 것은 미국의 일반인들이 당시의 김대중씨가 한국의 민주화 운동의 기수라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광주에서의 광란사태가 김대중 파의 리더들에 의해 일어났고 광주가 점거 되었을 때에 서방측 미디어가 한결같이 김대중을 한국의 민주화를 추구한 착한 동아리 (good guys) 로 치켜 세웠었다. 물론 당시의 군부는 사악한 무리(bad guys) 로 그려졌다. 이 같은 <착한 동아리>와 <사악한 무리>의 단순한 이분법은 수년간 지속되었다. 아마 아직까지도 이 이분법이 여전히 살아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까지도 미국에서는 김대중이 한국의 민주화를 꽃 피운 영웅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 흔히 있어 보인다. 그러나 김대중은 착한 동아리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나는 지금도 후회막급일 뿐이다. 광주에서 300명 이상이 학살 당했다. 시민 뿐만 아니라 군인도 살해되었다. 그 책임은 김대중이 오직 혼자 져야 할 일이었다.

광주사태를 일으킨 사람들, 김대중 주변의 사람들은 모두 김대중이 얼마나 세속적인 지위와 돈에 집착하고 있었는지, 그리고 일족의 축재를 위해 돈줄 만드는데 에 혈안이 되어 있었는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들 서방측 저널리스트들에게는 이런 사실을 숨겨왔던 것이다.

저널리스트로서의 과오를 부끄러워 할 뿐

그런데 그의 죄상은 개인 축재보다 훨씬 더 무거운 국가반역죄에 해당되는 매국행위였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북한과의 관계에서 뚜렷하게 들어났다.

김대중씨는 뼈 속 깊은 곳까지 부패해 있었다. 한국의 서민들 사이에서 그가 대통령에 취임한 후 얼마 되지 않아 그의 본명은 김대중이 아니라 돈(금)을 너무 많이 사랑한다는 뜻의 금대호로 불리어야 한다는 죠크가 나돌기까지 했었다.

한국은 어디까지나 중국 문화권에 속해있는 나라이다. 오늘날 중화인민공화국을 포함해서 역대의 중국과 조선의 권력자들은 횡령이나 착복에 깊숙이 빠져들어 있었다. 김대중씨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었다. 민주화의 기수라는 간판 외에 노벨 평화상이란 명예를 얻고자 그의 부하들을 동분서주케 했다. 그는 물욕과 명예욕을 주체할 수 없었다. 말 그대로 사리사욕의 화신 그 자체였다.

내가 1968년 처음 한국을 방문했을 때에 한국은 아직 가난한 국가였다. 박정희 대통령이 현재의 한국을 만든 기초를 구축했다. 박정희 장군은 일본 국내에서 훈련을 받고 만주 국의 군 장교가 되어 있었다. 그는 20년 만에 한국을 현대국가로 변신시키는데 성공했다. 만약 그가 이 때에 암살되지 않았더라면 더 많은 업적을 쌓을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60년대에서 80년대에 걸쳐 한국은 끊임없이 위험한 상황의 연속이었다. 실제로 나도 암살 대상자의 리스트에 올라 있었다. 특파원의 입장에서 한국의 정계와 군 관계에 관한 공개되기를 꺼려한 많은 것들을 보도해 왔기 때문이다. 한국의 중앙정보부는 나를 총이나 칼로 해치는 것이 아니라 사고를 가장한 환경을 조성해서 죽이려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의 마이크 맨스필드 주일 미국대사는 내가 한국을 방문할 때 마다 보디 가드의 역할을 담당할 대사관 경호원들을 동행토록 하겠다고 제의하기도 했다. 그 제의를 나는 거절했지만 암살 위협은 광주사태 이후 상당기간 계속되었다.

오늘날 이런 위험은 이미 사라졌다. 서방측 저널리스트의 생명이 총구의 표적이 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당시의 한국에는 독기(toxic air)가 충만해 있었다.

나의 주변 인사 중 한 사람이 오래 전부터 “김대중은 신용할 수 없는 사람이다. 북조선의 포켓 속에 있는 사람이다. 그는 북한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지 한국을 위해 일하는 사람은 아니다.”라고 말해 왔다. 나는 “그런 바보 같은 소리가 어디 있어. 그는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노력해 온 정치지도자이다. 크리스천이며 선량한 사람이다”라고 반론을 제기해 왔다.

하지만 김대중에 대한 나의 당시 진단은 과녁 밖으로 한참 빗나가 버렸다. 대통령에 당선 되어 얼마 되지 않은 시기에 그는 자신이 북한의 괴뢰임을 스스로 들어 내었다.

나는 저널리스트로서 자신의 불민했음을 부끄럽게 여길 수 밖에 없다. 정말 부끄럽고 죄송하다는 생각이다.

<역자 註>

이 글을 쓴 헨리 스캇 스토우크스 기자는 어떤 사람인가 간단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아 부연한다.

그는 영국에서 태어나 옥스포드 대학에서 수학, 1962년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즈에 입사해서 언론인 생활을 시작했다. (그의 아버지도 옥스포드 졸업생이었고 그의 어머니는 옥스포드 제1호 여성 졸업생으로 알려져 있다). 64년 동경지국 초대 지국장으로 임명되었고, 67년 영국의 더 타임즈 동경 지국장, 78년 뉴욕 타임즈 동경. 서울 특파원을 역임.

더 타임즈 특파원 시기에 김대중 전 대통령의 납치사건이 발생한 후 집중적으로 이 사건을 취재했고 뉴욕 타임즈 특파원에 임명된 뒤에는 동교동 취재를 거의 독점적으로 취재한 외신 기자로 명성을 날렸다. 내 외신 기자들의 동교동 접근이 거의 불가능 한 시기에 그만이 김대중씨와 자유스럽게 독점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언론계에서는 그를 동교동 통으로 부른 시기가 있을 정도였다.

일본의 김대중 지지세력에게는 둘도 없는 고마운 파란눈 언론인으로 사랑과 존경을 받았었다.


 

비와 나

2015-04-19 11.46.30-1

집 앞에 내리는 봄비, 그 소리와 모습을 Tobey도 너무 좋아하나..

봄비, 그것도 4월에 촉촉히, 싸늘하게 내리는 비를 나는 ‘아직도’ 좋아한다. 다시 찾아온 4.19 학생 혁명기념일도 거의 잊은 채, 나는 하루 종일 잔잔히 내리는 봄비를, 가라앉지만 포근한 심정으로 바라보며 일요일 오후 시간을 보냈다.  잔잔하지만 쉬지 않고 relentless 내리는 비, weather person들은 분명히 귀찮은 annoying, nuisance 것으로, 미안한 표정으로 비를 예보 하지만 나는 그러한 그들이 이상하기만 하다. 나는 너무나 반갑기 때문이다. 나도 안다. 나 같은 사람들은 역시 ‘소수 minority일 것이란 것을.

내가 언제부터 이 ‘비’를 좋아했던가 생각을 해 본다. 분명한 것은 최소한 나의 사춘기, 황금시절 10~20대에는 ‘절대로’ 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물’을 귀찮아 했었다는 사실이다. 특히 밖으로 나가는 일이 있을 때, 등산 같은 것을 갈 때.. 이 내리는 비는 사람을 귀찮게 하는 것이었다. 특히 머리 style에 신경을 쓰던 철없던 그 나이에 머리카락에 떨어지는 물은 절대 사절이었다. 그 당시에 자가용은 꿈도 못 꾸었고, taxi를 탈 처지도 아니고 분명히 콩나물 시루 같은 시내버스를 타야 했던 시절.. 비 오는 날은 분명히 구질구질하기만 했다. 물에 떨어지는 우산을 접은 사람들로 꽉 차고 담배연기 자욱한 ‘시내’ 버스 안을 상상하면 쉽게 이해가 간다.

세월은 흐르고 머리 스타일에 신경을 쓸 나이가 훨씬 지난 후에, 그것도 공간적으로도 공해로 가득 찬 서울에서 초록색이 감도는 미국으로 완전히 바뀌어서 시내버스를 탈 기회는 완전히 사라지고 ‘자가용’이 필수가 된 곳에서 잔잔히 내리는 비에 대한 생각은 서서히 바뀌었다. 넓은 하늘, 대지에 내리는 비와, 우중충한 urban 도심지의 그것은 분명히 다르다. 귀찮기만 하던 비가 나에게는 이제 ‘진정제’로 서서히 변했고.. 그것이 조금은 지나치게.. 너무나 좋아하게 되었다. 그런 나를 연숙은 이해를 잘 못하는 것 같아서 더 이상 비에 대한 말을 안 하게 되었다.

비를 사랑하게 된 것이 정확히 감상적이거나 지리적인 환경에 의한 것일까? 이런 생각도 해 본다. 혹시 나의 성격이나 성질이 조금씩 어둡게 변하고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 걱정을 해 본적도 있었다. 어둡다기 보다는 나이에 따른 ‘내면적 삶’을 더 중요시하는 경향 때문이 아니었을까? 비가 ‘멋지게’ 내리는 것을 보는 것은 아름다운 꽃을 보거나, 각가지 종류의 새들을 멀리서 보는 것 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그 것들이 가진 독특함으로 위안을 받기도 하고, 더 깊은 생각도 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시기적으로 40대 이후부터 현재까지 이런 ‘취미’를 가지고 살았고 아마도 ‘그 날’까지도 나는 밖에 오는 비 소리에 귀를 기울일 것 같다.

2015년, 4월의 딱 절반..

4월 15일.. 4월의 딱 절반에 도달했다는 것 이외에 다른 뜻이 있을까?  물론 있다.. (income) tax return day 마지막 날이다. 이곳에서 오래 살다 보니 이제는 이런 미국적인 날도 나의 것처럼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아니.. 이제야 이날의 진정한 의미를 알 것 같은 후회감도 없지 않다. 나는 인생을 남들보다 조금씩 더 늦게 깨닫고 늦게 행하는 그런 삶을 살았다. 어릴 적부터 나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신체적인 ‘발육’도 남들보다 항상 늦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마도 죽는 것도 남들보다 조금 더 늦게 죽을 것이라고 미소를 지었던 기억이다. 하지만, 하지만 나는 인생의 막바지에서 얼마나 많은 ‘손해’를 보았던가.. 주위에 얼마나 본의 아닌 ‘게으름에 의한’ 피해를 주었던가? 할말이 없다.

올해의 부활 주일.. 참 만족스럽게 보람 있게 보냈다고 느낀다. 목요일 부터 일요일 부활까지 우리는 ‘고향’ 순교자 성당엘 갔다. 작년부터 시작된 우리의 새로운 전통이다. 평일미사는 거의 Holy Family엘 가지만 레지오는 물론이고, 가급적 주일미사와 큰 행사는 순교자 성당엘 가려고 하는데.. 이런 format을 성모님은 어떻게 보실까? 큰 이의가 있을까? 현재 우리의 사정에 가정 적합한 방식이라고 나는 굳게 믿는다. 심야 수난 감실 성체조배.. 올해도 나는 아주 만족스러웠다. 특히 성체가 빠져나간 깜깜한 본당에서 기다리는 그 시간이 나는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참… 나도 많이 많이 변한 것이다.. 이렇게까지 될 수가 있을까?

나는 현재 어떠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 얼마 전부터 나는 책, Rediscover Catholicism을 읽으며 조금 더 ‘조직적’인 신앙생활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 중에 첫 번째가 내가 얼마나 이곳 영성, 신앙적인 곳에 ‘투자’하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었다. 이것이 내가 제일 싫어하는 일 중의 하나다. 계획에 의한 일은 체질적으로 싫어하는 나에게 이것은 고역 중의 고역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제는 느낀다. 이것도 나의 인생에서 풀어야 할, 고쳐야 할 고질적인 습관이기에.. 고쳐야 한다고. 2007년 묵주기도와 성모님으로 근본적으로 바뀐 ‘버릇’이 얼마나 많은가? 하나 하나씩 좀 더 나은 (better version) 이경우 빈첸시오를 향해서 노력을 하는 그런 시간, 세월도 그리 길지 않을 듯 하다. 레지오를 중심으로 매일/평일 미사에 ‘쓰이는 시간’.. 이제는 계산을 할 때가 되었다. 시간 상 문제가 없다면 이제는 quality에 신경을 더 쓰면 어떨까?

 

요새 우리 부부의 레지오 활동은 주로 배해숙(베로니카) 자매를 돌 보아주는 일에서 머물고 있다. 지난 11월에 시작된 ‘묘한’ 인연의 배 자매님.. 결국은 3월 15일 ‘극적’으로 병원 침대에서 영세/세례를 하태수 신부님으로부터 받았다. 거의 사경을 헤매는 모습으로 지내던 그 병원.. 당시는 느낄 수 없었어도 참 큰 일이었다. 특히 가족들이 그렇게 바라던 일, 한마디로 연숙이 아니었으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 나도 인정을 한다. 나는 옆에서 ‘견습생’으로 함께 하며 이런 과정을 보고 배웠다. 이제는 배해숙 자매가 ‘안심하고’ 하느님께 갈 수 있다고 생각하니 나도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조금은 짜증스러운 행동을 보이는 것에 나도 짜증이 나곤 했지만.. 이것도 견습생으로 나는 배우고 있다. 내가 모르는 연숙의 프로같은 환자간호 솜씨에 모두들 놀라곤 한다. 특히 까다로운 배 자매가 연숙에게는 큰 무리 없이 순종하는 것을 보면 나도 놀라곤 한다. 비록 병원에 입원하면서 더 할 것이 없다고 퇴원을 해서 조금 두려운 생각이 들었지만 이제는 기도의 순리, 하늘에 맡기는 심정이 되니 다른 기분도 들고 실제로 그녀는 퇴원 후에 더 밝은 모습을 보이고 있어서.. 나도 놀란다. 최악의 경우야 모두 생각하겠지만.. one day at a time이란 말처럼 조금씩 조금씩.. 살면 되지 않을까?

Longfellow Serenade

Longfellow Serenade – Neil Diamond – 1974

 

롱펠로우 세레나데.. 롱휄로우 세레네이드.. 무척 오랜만에 불러보는 단어들이다. 이 두 단어를 합치면 곧바로 떠오르는 것은 물론 1974년 Neil Diamond의 hit song 일 것이다. 나의 ‘전성기’였던 그 당시는 뇌리에서도 아직도 가장 활발한 부분에 모여있는지 생생하고 흥미롭기도 하지만 사실은 이런 주제의 제목에 도달한 생각의 과정이 더욱 흥미로운 것이다.

‘늙은 두뇌’에는 사실 잡동사니 같은 많은 ‘정보’들이 쌓여있을 것인데, 그런 많은 것들이 서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연결이 되면 가끔 기발한 추억을 찾기도 한다. 나이 먹는 ‘즐거움’ 중에는 이런 흥미로운 혜택이 있음을 어떤 사람들이 알까 궁금하기도 하다.

Longfellow Serenade에 도달한 과정은 우습게도 최근 edX online course중에 하나인 MyDante (my Dante)를 ‘청강, audit’ 하는 과정에서였다. 이 MOOC(Massive Open Online Course)  style course 는 Georgetown University (Washington DC) 교수들이 가르치는 것인데 Dante의 classic인  Divine Comedy (신곡, 神曲)를 완전히 digital 형식으로 바꾸어 제공해서 ‘초보자’들도 아주 쉽게 이 ‘거창한 고전’을 접할 수 있다.

내가 이 course에 흥미를 가진 이유는 물론 신학적인 호기심도 있었지만, 사실은 그 course technology가 cutting edge digital (Internet) technology를 적절히 이용한 것에 매료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13세기 무렵에 쓰여진 ‘대 서사시’ 그것도 Italian으로 쓰여진 ‘고물’을 본래 식으로 읽는 것은 아마도 박사학위가 필요할 것처럼 어려울 것이지만, 이 course는 21세기 초현대식으로 접근방법을 바꾸어 놓아서, Dante를 전혀 모르는 나 같은 사람도 감상을 할 수가 있었다.

연옥, 7층산을 바라보는 단테
연옥, 7층산을 바라보는 단테

Dante Alighieri, 단테 앨리기에리.. 단테..라면 사실 중고등학교 다닐 때 배웠던 것이다. 단테의 신곡.. 아마도 세계사 시간이 아니었을까? 그 당시의 기억으로는 중세가 끝날 무렵의 이탈리아의 단테가 지었던 거창한 서사시 정도였다. 나아가서 ‘지옥, 연옥, 천국’을 그린 것이라는 기억 정도였다.

나중에 신곡이 Divine Comedy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Divine은 이해가 가는데 왜 하필 Comedy인가 하는 의문을 갖기도 했다. 하지만 comedy의 뜻이 여러 가지가 있다는 것도 나중에 알았다. 최소한 ‘웃기는’ comedy가 아님을 알고 웃기도 했다. 그렇게 접하게 된 단테와 신곡.. 추억도 곁들였지만 지금은 그런 감상적인 느낌보다는 나에게는 조금 절실한 현실로 받아들여졌다. 과연 ‘지옥, 연옥, 천국’이 나에게 지금 어느 정도로 심각한 relevancy가 있는가? 그것도 이제는 ‘소수 종교’로 쳐지는 듯한 천주교의 중심교리, 개신교에서는 거들떠 보지도 않는 연옥 purgatory, purgatorio.. 그것이 나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일까?

토마스 머튼, 7층산
토마스 머튼, 7층산

얼마 전에 내가 속한 ‘레지오’의 주 회합 ‘훈화’에서 단테의 이야기가 나왔었다. 바로 연옥에 관한 이야기 그러니까 7층산으로 묘사된 ‘일곱 가지의 죄’.. 그 중에서 pride에 관한 이야기였다. pride의 죄를 범한 사람들이 세상에서 목에 힘을 주며 살았기에 그들의 ‘보속’은 ‘돌이나 납덩어리’ 같은 무거운 짐을 목에 걸고 걷는 형벌이었다. 이것은 나에게 우연이 아닌 듯 싶은 것이 그 전에 Thomas MertonThe Seven Storey Mountain을 알게 될 무렵.. 사실 그 7층산이 단테의 신곡 연옥에서 보여주는 Seven deadly sins임을 알게 되었기에 이제 확실히 ‘점’들이 연결이 된 것이다.  이 일곱 죄는: wrath(분노), greed(탐욕), sloth(게으름), pride(자랑), lust(음욕), envy(시기), gluttony(게걸스러움) 인데 단테는 이것을 연옥의 7 terrace mountain으로 그린 것이다.

이렇게 단테의 신곡을 공부하며 신곡의 역사를 알게 되는데, 신곡은 대 서사시이기도 하지만 이탈리아의 ‘표준어’를 만드는 역할도 했다고 한다. 아마도 영국의 Shakespeare 정도 위치를 이탈리아의 단테가 차지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신곡은 이태리 어로 읽어야 단테 문학의 정수를 맛본다고 하지만 그에 맞먹는 영어 번역본들도 있다. 그 중에는 19세기 미국의 대표적 시인 Longfellow가 번역한 것도 있는데, 그 번역본이 나올 당시 (19세기 중엽) 미국에서 이 책을 ‘들고 다니는 것’이 지식인들에게는 유행이었다고 한다. 비교적 간추린 것이지만 나는 이렇게 해서 Merton에서 시작해서 Dante로, 거기서 다시 Longfellow까지 갔고 종착역은 역시 우리 시대의 idol이었던 Neil Diamond가 맡아 주게 되었다. 참.. 연상퀴즈의 묘미는 이런 것인가?

Henry Wadsworth Longfellow
Henry Wadsworth Longfellow

그런 과정에서 다시 Longfellow의 대표적인 시를 ‘구경’하게 되었다. 미국 19세기 시문학을 대표하는 그는 미국 Northeast의 정서를 잘 묘사를 하였고 당시에는 꽤나 ‘유행적’인 시인이었다. 요즘 들어서 매일 내리는 4월 느낌의 비를 보며 유심히 그의 시에서 이런 느낌을 150% 느끼게 하는 시를 찾아 내었다.  The Rainy Day.. 글자 그대로 비 오는 날.. 비교적 직설적인 표현의 이 시를 자세히 읽으며 생각했다. 오늘 오는 비의 느낌과 비슷하기도 했지만, 무언가 기억이 나는 시라는 생각이 번뜩 든다. 5분도 걸리지 않았다. 1967-8년 경의 기억이 남아있는 뇌세포에 자극이 갔는데, 아하… 즉시 ‘유영’이라는 단어가 떠 오른다.

영문학과 유영 교수님
영문학과 유영 교수님

유영.. 유영 교수, 연세대 영문과 유영 교수님… 교양학부 과정의 마지막 영어독해 강의에서 유영교수가 가르쳐준 시였다. 그것이 바로 이 시였던 것이다. 이 시의 시작부분이 이 의문의 key였다. The day is cold, and dark, and dreary .. 바로 이 dreary란 단어, 이것이 거의 반세기 동안 나의 깊은 뇌세포에 잠재해 있었다. 유영교수의 이 dreary란 단어의 발음이 너무나 독특해서 우리들 모두 웃었던 기억.. 당시에 이 시를 읽으며 정말 ‘음산한 4월’을 몸이 오싹할 정도로 움츠린 기억.. 그것이 바로 요새 이곳 4월 비의 느낌과 비슷하니.. 참.. 이렇게 해서 오랜만에 따뜻한 ‘아랫목’에서 ‘추억의 백일몽’을 즐긴 날이 되었다.

 

The Rainy Day

by Henry Wadsworth Longfellow

 

The day is cold, and dark, and dreary;

It rains, and the wind is never weary;

The vine still clings to the mouldering wall,

But at every gust the dead leaves fall,

And the day is dark and dreary.

My life is cold, and dark, and dreary;

It rains, and the wind is never weary;

My thoughts still cling to the mouldering Past,

But the hopes of youth fall thick in the blast,

And the days are dark and dreary.

Be still, sad heart! and cease repining;

Behind the clouds is the sun still shining;

Thy fate is the common fate of all,

Into each life some rain must fall,

Some days must be dark and dreary.

 

봉성체 奉聖體, 1년 후

봉성체 봉사자를 구하는 Holy Family 성당의 brochure
봉성체 봉사자를 구하는 마리에타 Holy Family Catholic Church 의 brochure

봉성체 奉聖體, home Eucharistic communion service, ministry 성체를 집으로 모시고 가서 영성체를 할 수 있게 하는 것을 일반적으로 봉성체 라고 하는데 이것은 Extraordinary Minister of the Holy Communion 라는 평신도 중에서 특별히 선발되고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서류상으로도 본당, 교구, 대교구에 등록을 하여야 하고 대강 3년 정도 유효하다고 한다. 이만큼 사제가 아닌 평신도가 성체를 성당 밖으로 모시고 나가서 영성체 봉사service를 하는 것은 조심스럽고 신중하다고 할까.

4년 전쯤, 말기 암으로 투병을 하던 우리 레지오 단원 은 요안나 자매님이 거동이 불편해져 집에만 있게 되었을 때, 그 자매님에게 성체를 모시게 해 주고 싶다는 일념 으로 연숙이 ‘두말없이’ 봉성체 교육을 받고 교구청에 등록을 했는데.. 좀 늦었던가.. 안타깝게도 한번도 봉성체를 해 주지 못하고 그 자매님은 운명을 하게 되었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그 이후로는 ‘가능하면’ 늑장을 부리지 않고 성체를 원하는 거동이 불편한 신자들을 찾게 되었고 필요한 곳은 찾아가게 되었다.

5년 전쯤만 해도 나는 ‘성체의 심각한 의미’를 잘 몰랐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성체와 성혈은 100% 예수님의 몸과 피라는 교리상식은 물론 ‘머리’에서는 알지만.. 그래서..어쨌다는 말인가 라는 선에서 멈추곤 하였다. 미사에서 성체, 성혈을 받을(모실) 때에도 ‘의미 있는 묵상’이 별로 쉽지 않았다. 그것은 물론 내가 별로 깊이 생각과 묵상을 안 해서 그런 것이다. 최후의 만찬에서 비롯된 성체,성혈의 신학적, 역사적 의미를 조금 더 겸손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데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다가, 한 순간 ‘점들이 연결되는 순간부터’ 나는 거의 무조건 성체의 신비를 믿게 되었다. 의외로 간단한 과정이었을까?

그런 배경으로 봉성체 봉사자인 연숙을 따라다니며 ‘봉성체 동행’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레지오 활동의 일환으로 봉성체 봉사를 할 수 있게 되었고 집이나 병원에서 성체를 모시는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되었다. 일년이 넘은,  작년 2월경 부터 우리는 정기적인 ‘화요일 봉성체’ routine을 시작하게 되었다. 실제적으로 우리는 레지오 주회합이 있는 화요일에 정기적인 봉성체 활동을 하고 가끔 비정기적인, 예외적인 봉사를 한다.

이 봉성체 활동을 하며 느끼는 것은 한마디로 가톨릭 신앙에서 얼마나 성체신심이 중요한 가 하는 때늦은 놀라움이다. 1982년 영세를 받고 나서 수십 년이 흐른 인생의 황혼기에 나는 이것을 정말 늦게 깨달아가고 있는 것이다. 성당의 미사를 못 보며 느끼는 이들 봉성체 대상 교우들의 성체에 대한 갈증, 갈망을 느끼고 보며 나는 너무나 많은 은총을 받는 듯 하다. 이 우리의 봉사는 사실 우리가 봉사를 받는 다는 쪽이 더 맞는 표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 정도다. 고령의 봉성체 대상 자매님, 기억력과 씨름을 하시지만 우리들이 가면 ‘일제 시대(요새는 일제 강점기라고 하던가)’에 남편 형제님을 만나게 된 경위를 일본말을 섞어가며 설명하시던 모습을 보며, 이 분들에게 성체 이외에 ‘인간적 대화’가 필요함도 절실히 느낀다. 성체의 ‘기적’까지는 기대 못하더라도 이런 활동이 외로울 수도 있는 그분들에게 다른 기적을 가져다 줄 수 있게 되기를 바라며 우리는 ‘자동차와 다리가 성한 한’ 이 활동을 계속할 것이다.

사순절 판공성사, 2015

또 ‘그것’을 할 때가 다가왔다. 그것.. 판공성사, 고백성사, 고해성사.. 어떻게 표현해도 다 마찬가지다. 결코 쉽지 않은 ‘의무’, 가톨릭 신자의 의무다. 이것도 의무지만 자유로운 의무고 다른 쪽으로는 우리 교회만의 권리, 특권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이 성사의 의미와 특징 (좋은 쪽으로)은 열거하면 한이 없이 많다. Matthew KellyRediscovering Catholicism 책을 요새 다시 읽으며(aka typing) timing 좋게 confession 에 대해서 복습을 하였다. 시간이 갈수록 쓰레기로 쌓이는 집이나 차에 비유해서 정기적으로 청소를 하는 것과 비교한다. 많이 쌓이면 그런 사실자체에 둔감해져서 더 많이 쓰레기가 쌓인다고. 자주 하면 할 수록 좋은 것이라고.. 누가 모르나? ‘괴롭게 들어갔다가 날라가는 기분으로 나오는 곳’ , 그곳이 바로 고백성사란 것만 기억해도 좋은 것, 이것 하나, 나는 분명히 기억한다.

올해는, 아니 내일로 다가온 이 ‘것’을 어떻게 해야 하나? 무엇을 고백해야 하나? 어떻게 해야 하나? 10중 8/9는 하태수 신부님께 하게 될 듯 한데.. 그것이 상관이 있을까? 모두들 어렵다고 하는 이것, 나에게도 어려운 것인가, 아니면 귀찮은 것인가?

이제는 ‘양심성찰’을 해야 할 때가 온 듯하다. 지난 해 6월이었던가, Conyers의 수도원에서 가진 레지오 피정 때 내가 이것을 했다고 생각하는데, 알쏭달쏭하다. 한 듯하기도 하고, 안 한 듯 하기도 하고.. 하지만 작년 사순절 때는 100% 확실히 했다. 비록 ‘사소한’ 것을 고백한 기억이지만.

 

그 동안 나의 ‘죄’는 무엇이 있을까? 대죄는 물론 없다. 소죄는 있을 듯 하다. 확실히 기억은 안 나지만. 십계명으로 출발하면, 어떤 주일을 거룩하게 안 보낸 것은 확실할 것이다. 제일 쉬운 것이 이것인가? 하지만 이런 것을 하면 내가 만족할 수가 없다. “고백성사 101″을 다시 한번 볼까나..

아마도 십계명에 ‘정면으로 거역’ 된 일을 없을 것이다. 나에게 우상이란 것은, 분명히 없다. 하느님의 이름을 마구 함부로 ‘팔아 넘기듯’ 부른 적도 없다. 주일이나 종교적 축일들을 소홀히 보냈는가.. 다행히 지난 해에 우리는 ‘부지런히’ 주일, 축일을 보냈을 것이다. 부모님을 공경하는가.. 이것은 비교적 쉬운 듯 하지만, 실제적으로 우리는 죽어도 부모님을 잘 모셨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영원히 죄로 고백해야 할 것 중에 하나다. 살인한 적도 없고, 간음한 적도 없다. 훔친 적도 없고, 요상한 소문을 낸 적도 없고 거짓말 증언을 한 적도 없다. 남의 아내를 엿보거나 흠모하거나 사랑한 적도 없다. 남이 잘 사는 것에 질투심을 느꼈을까? 이것은 100% 부인할 수가 있을까? 나는 ‘지나치게 사치하게 잘 사는’ 사람을 가끔 ‘경멸’한 적은 있지만 그 정도로 부러워한 적은 거의 없었다.

 

죄를 안 짓는다는 소극적인 것에서, 과연 적극적으로 ‘선행’을 하고 살았던가? 이것은 자신이 없다. 죄를 피하며 살았을지언정 적극적으로 남을 인간으로 사랑하거나 물질적으로 도와 주었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나의 ‘재주, 재능’을 하느님을 위해서 효과적으로 사용했을까? 이것도 자신이 없다. 비록 레지오라는 단체에서 ‘봉사’를 한다고 하지만 언제까지나 만족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할 수가 없다.

 

예수님의 사랑의 2계명:

‘You shall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with all your soul, and with all your mind. This is the greatest and the first commandment. The second is like it: You shall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The whole law and the prophets depend on these two commandments’(Mt 22:37-40).

“Love is patient, love is kind. It is not jealous, [love] is not pompous, it is not inflated, it is not rude, it does not seek its own interests, it is not quick-tempered, it does not brood over injury, it does not rejoice over wrongdoing but rejoices with the truth. It bears all things, believes all things, hopes all things, endures all things. Love never fails” (1 Cor 13:4-8).

 

지난 해 판공성사 (사순절부터) 이후 나는 어떻게 살았는가? 남이 보기에 부끄러운 짓을 하지 않았던가? 고정적인 일상생활의 pattern으로 두드러진 것은 생각이 안 난다. 가깝게 나를 ‘괴롭히는’ 것이라면 ‘겸손하지 않다고 보이는’ 연숙의 행동들에 대한 나의 짜증 정도? 이것도 죄가 될까? 마찬 가지로 두 딸들에 대한 나의 실망감..

하지만 조금 밖으로 눈을 돌리면, 미안한 것들이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작년 여름 레지오 회합에서 큰 생각 없이 한 나의 ‘솔직한’ 말 때문에 장 실비아 자매가 퇴단까지 한 것은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는 뜻밖의 일이었고, 나의 말을 너무나 심각하게 받아들인 상대방만 탓하기도 했다. 하지만 원인은 무조건 나에게 있기에 나의 잘못이고 미안해 해야 한다는 생각이 너무나 뒤 늦게 들었다. 같은 여름 미국성당에서 ‘사소한 고정석’을 빼앗긴 것이 발단으로 ‘터진’ 나의 ‘분노’도 마찬가지로 전적으로 나의 ‘문제’에 의한 것이었다. 상대방이었던 필리핀 자매에게는 너무나도 잘못을 하였다. 기분이 쳐지거나 나의 ‘운전 불능’신세를 한탄하며 연숙의 운전 실력을 100% 매도하는 나날들 또한 어떨까.. 나의 일방적인 잘 못이 아닐까? 이런 것들을 떠나서 나는 언급하기 싫은 ‘잘못’을 했고 현재도 하고 있다. 가슴 속 깊이 잠자고 있는 나의 ‘깊은 상처, 수치’를 건들이거나 하고 싶지 않다. 그만큼 이것이 무서운 것이다.

근래에 너무나 가까워진 수 많은 ‘자매님들’.. 인간의 한 부류로 신선하게 다가온 수 많은 자매님들을 나는 어떻게 생각하는 것일까? 신앙적 동지일 수 밖에 없는 그녀들을 나는 가끔 어떤 생각까지 하며 ‘즐기고’ 있는 것일까? 아직도 나는 여성에게 여자의 미련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은근히 나는 이성들이 많은 곳에서 어떠한 환상적인 생각을 하고 싶은 것은 아닐까? ‘생물적’인 충동이 아직도 있다는 사실은 나를 진정 놀라게 한다. 그것 때문이 예전의 ‘환상적 잘못’의 세계로 조금이라도 다가 갈까 봐 조바심도 나는 것이다. 성모님에 의지하는 내가 왜 다시 성모님께 의지하지 않는 것일까? 너무나 수치감을 느껴서 그런지도 모른다. 나는 이런 상태를 초월하는 다음의 단계로 성숙해야 한다. 이것을 나는 어떻게 신부님께 고백을 해야 하는 것일까? 이것이 오늘 저녁에 예정된 성사에서 풀어야 할 과제가 되었다.

Spring came forever..

Early Spring Bradford Pear

Early Spring Bradford Pear

 

오랜만에 가랑비가 싸늘하게 느껴지는 조용한 점심 식사 전, 오후를 맞이한다. 그렇게 추웠던 올 겨울도 결국은 나와 같이 나이를 느껴는 듯 조용히 물러가고 있다. 이곳 이른 봄의 상징인 Bradford Pear tree의 하얀 꽃이 부끄럽게 피어나는가 싶더니 갑자기 무덥게 느껴지는 봄 기운을 맞이 했는지 갑자기 만발을 했다. 뒤뜰을 조심스럽게 보니 거기에는 일년 전에 보았던 노란 개나리가 피기 시작한 모습이 있었다. 내일이 춘분, ‘사철과 책력’의 기억에 봄의 시작인 춘분, 달력에는 그저 Spring begins라고 쓰여있지만 유식한 (천문학적) 표현은 역시.. Spring Equinox일 것이다. 그러니까.. 봄의 계절에 밤과 낮의 길이가 거의 같이 되는 날..

2015-03-19 15.08.49-1올해의 겨울도 작년과 버금갈 정도로 끈질기게 길었던 추위를 느끼게 했다. 20년 동안 ‘동복’이라는 말을 잊은 채 살다가, 태고적에 입었던 ‘진짜 겨울 옷’들이 대거 등장해서 톡톡히 본전을 뽑았다. 아닌게아니라 그런 옷들은 반 세기 전에 고국에서 입었던 ‘골동품’도 있었고 Midwest에서 살 때 (Illinois, Ohio, Wisconsin) 겨울에 입었던 그런 종류였다. 사반세기 전에 이곳에 이사온 이후 거의 한번도 입어본 적이 없었던 것들.. 다행히 대부분 이곳의 더운 공기 피해를 입지 않고 잘도 보존이 되어 있었던 고마운 역사적인 옷들이 올해는 차가운 공기를 맡으며 생기를 찾았다. 이런 연이은 추운 겨울을 보내며 global warming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기도 했다. 느끼는 것은 global cooling같았지만 역시 이것은 지역적인 현상에 불과한 것일 것이다. 겨울을 완전히 보내며, 작년과 같은 추위와 눈에 의한 ‘대형사고’가 올해는 하나도 없었던 것을 감사 드린다. 눈이 올 때 느끼는, thrill과 dramatic 한 짜릿한 suspense 는 조금 아쉽기도 하지만, never mind, who cares?

초조한 사순절 4주째..

차분하고 경건해야 할 것만 같은 사순절의 한 가운데를 지나면 왜 이렇게 ‘우리’는 초조함을 느끼는 것일까? 평화가 줄어들고 수심과 걱정이 휩싸이는 느낌.. 이번 사순시기는 무엇인가 이런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지만 대부분 나의 탓이기에 할 말이 없다. 내가 그렇게 만든 것.. 이라고 생각한다. 해야 할 ‘중요한’ 것은 계속 뒤로 미루며 사는 것, 왜 나는 진정한 proactive한 인간이 못 되는 것일까? Matthew KelleyThe Four Signs of a Dynamic Catholic에게 오랜 만에 자극을 받는가 싶었지만 다시 주저앉는 나의 모습.. 절제된 자기훈련이 된 하루하루를 살고 싶었고 그렇게 할 희망은 충분히 아직도 있다. 비록 치통에 모든 잘못을 탓하고, 비실비실 잠열에 뒤척이는 모습이었지만.. 훌훌 털고 일어나자! 작년에 비한 우리의 ‘위상’은 하늘과 땅이 아니던가? 최소한 무언가 변하게 될 ‘희망’이 있지 않은가?

진정으로 우리를 초조하게 하는 것은 배해숙 자매의 병세 때문일 것이다. 생각보다 더 약한 모습으로 변하는 자매님, 돼지띠 동갑 자매님.. 놓칠 수가 없다. 우리 부부는 그런 심정으로 지금 싸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얼마 더 오래 살지는 하느님만 아시겠지만 우리의 ‘요구’는 최소한 이 자매님이 짧지 않은 ‘진정 행복한 나날’을 아드님들과 즐길 수 있는 ‘건강한 나날’을 주시라는 것이다. 수 십 년도 아니고 아니 몇 년이라도 좋다. 진정한 행복한 인생이 무엇인지 되돌아 볼 수 있는 건강한 기간, 시간을 주시라는 우리의 기도가 그렇게 무리일까? 아니지요.. 성모님.. 어머님.. 인자하신 성모님, 기도해 주세요.

오늘 예정대로 ‘병원’에서 배 자매님의 세례식이 ‘거행’될 것이다. 분명히 그녀는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실 것이다. 그것과 더불어 더 건강한 새 생명이 함께 하시게 되시기를 우리는 기도한다. 하신부님의 배려로 성사되는 이번의 세례식.. 조금 있으면 떠나게 되는 하 신부님, 지금부터 서운하기만 하다. 어쩌면 나와 그렇게 모든 ‘코드’가 잘 맞았는지 아무도 모들 것이다. 이런 신부님 앞으로 나는 다시 못 만날 것이다. 개인적으로 친해지고 싶었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다 지나지 않았던가..

why I blog

Before the Internet, most people rarely wrote for pleasure or intellectual satisfaction after graduating from high school or college.

 – Clive Thompson on Wired Magazine

 

Some researchers believe that by writing and then editing our own stories, we can change our perceptions of ourselves and identify obstacles that stand in the way of better health.

 – Tara Parker-Pope on New York Times

 

5년 전쯤 나의 Serony’s Friends personal blog을 시작할 때 ‘왜, 지금?’ 이라는 생각은 별로 심각하게 한 기억이 없다. 이유가 있었다면, 그저 막연하게.. 남들이 하니까.. 혹시 옛 친구나 친지를 이곳을 통해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정도가 아니었을까? PC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많은 덕분에 tinkering을 하는 시간도 따라 많고, 그 중에 blogging은 아주 적당한 ‘머리 운동’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  동안 나의 blog post (and pages)가 500 에 다다르게 되었고, 이것들을 ‘찾거나, 보아주는’ view count는 30,000 에 가깝다. 블로그의 숫자를 보면 나는 일주일에 2번 이상 posting을 했다고 볼 수 있고, 이것들이 public viewer 들에게 ‘노출된’ 것은 하루 평균 거의 30회에 달한다. 이런 통계는 나를 모르는 public에게 알리는 것을 꺼려하는 것에 비하면 놀랍게도 상당한 ‘노출’인 것이다. 하지만 이런 ‘무미건조’한 통계가 나의 블로그 그 자체는 아니다. 그 이외의 숨은 나도 모르던 것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 것을 위에 인용한 Wired magazine와 New York Times 기사들을 보며 조금 깊이, 다른 각도로 생각하게 되었다.

위에 quote 된 Wired Magazine의 말 대로, 한마디로 인터넷이 대중화1 되기 전까지 (아니면 blog가 출현하기 전까지) 대부분 사람들.. 학교를 떠나고 나서, ‘필요에 의해서가 아닌’ 이유로 의미 있는 ‘자기의 글’을 쓰게 될 기회가 있었을까? 아마도 아주 소수의 ‘선택된’ 사람들을 제외하고,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런 글들도 대부분 diary, journal 정도였을 것이다. 나도 무언가 남기고 싶은 심정으로 일기를 조금 씩 ‘남기곤’ 했지만 그것도 사실 나이가 들어가며 서서히 없어지고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남이 볼 수도 있는 글이나 기록’을 만든다는 것은 사실 ‘말도 안 되는’ 꿈에 가까운 상상이었다.

20세기가 저물어가며 본격적으로 쓰기 쉬운 인터넷의 광장, World Wide Web 이 대중화 되면서 조금씩 ‘쓰는 것’이 쉬워지기 시작했는데, 이것도 대부분 ‘말도 안 되는 바보 같은 댓글’ stupid comments 가 주류였다. 조금은 심각한 forum같은 것도 있었지만 그런 곳에 심각한, 의미있는 글이 나올 것은 기대하기 힘들었다. 또한 그런 곳에 자신을 들어내며 글을 쓰는 부류는 아주 소수에 불과했고 대부분은 ‘읽기만 하는 정보 소비자’역할을 했다.

서서히 자신의 독특한 ‘의견, 견해, 주의’ 등을 특별한 대상이 없이 발표하는 ‘결심이 단단한’ 부류들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그들이 지금 거의 당연시 되고 있는 블로그의 효시가 되었고 그들은 서서히  blog ecosystem, blogosphere를 형성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자신만의 homepage란 것을 만들어야 하는 귀찮은 과정을 거쳐야 했지만 무료 blog host2란 손 쉬운 platform 이 생기며 이것은 폭발적인 기세로 퍼져나가서 이제는 블로그 ecosystem에서 아주 중요한 얼굴이 되었다.

블로그 중에서도 나의 관심은 역시 ‘개인적 블로그’인 personal expressive blog 이다. New York Times의 기사가 그런 현상을 잘 보도하고 있다. 이 기사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글을 쓴다는 것, 물론 전문적인 author 들이 아닌 고등학교, 대학교를 졸업한 정도의 사람들이 쓰는 수준을 말하지만 문제의 핵심은, 안 쓰는 사람보다 쓰는 사람들이 훨씬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여러 가지 ‘개인적 심리, 사회적 심리’의 각도에서 ‘과학적’인 실험을 하며 설명을 하였다. 이렇게 과장된 듯한 결론에 대한 우리의 의문은 역시,  ‘왜 그럴까?’ 하는 것이다.

언어의 힘, 언어의 잠재력.. 특히 written language의 특성을 잘 생각해 보면 위의 의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다. 머리 속에서 맴돌던 생각, 오랜 동안 남았던 생각들, 골머리 앓던 생각들.. 이것과 ‘언어’에 의해서 말로 나타나면 더 구체적인 힘을 얻고, 더 나아가서 ‘쓰여진 언어’로 가면 다른 차원의 힘을 얻을 수 있다. 나는 이런 명제를 ‘성경쓰기’에서도 찾아 볼 수 있고, 책을 읽을 때 ‘쓰면서 읽는’ 방식에서도 분명히 느낄 수 있다. 이렇게 ‘나의 생각’을 글로 나타낸다는 행위는 생각 뿐인 것으로부터 구체적인 쪽으로 변화를 시키는 힘이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수동적, 피동적’에서 능동적, 적극적으로 바뀌는 촉매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blog을 시작할 때, 이런 거창한 논제보다는 상식적인 선에 의해서 나의 blog agenda를 정하고, 고치며 지금까지 왔다. 100% personal한 것이 첫째이며 마지막이었다. 모든 것이 나에 관한 것, 나의 생각, 나의 결정, 나의 인생, 나의 주변..100% expressive blog을 목표로 하였다.  나의 blog은 물론 public이 대상이지만 이것은 별로 생각할 여지가 없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사항. 나 혼자 본다는 blog은 diary이기 때문(이미 쓰고 있는)이다. 그러니까 ‘가상적인’ viewer들을 ‘상상’할 수 밖에 없는데.. 나는 구체적인 목표를 만들었는데.. 나와 우리 가족을 개인적으로 아는 집단을 생각했다. 시공간을 뛰어넘어 나를 알았고, 기억하고, 알고 있는 사람들.. 과연 얼마나 될까? 과거로 돌아가면 꽤 많은 사람들이 있기에 이런 blog을 통해서 과거와 연결이 되기를 기대하며 글을 내 보였다. 이것이 나의 blog이 memoir로 시작된 이유가 되었다.

시간적으로 계속되는 blog은 한마디로 autobiography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blog tag line에도 autobio in progress가 붙게 되었다. 나의 개인자서전을 과연 누가 읽을까 하지만 그것은 전혀 문제가 아닌 것이.. 그것을 쓰는 자체가 주안점 whole point 이기 때문이다. 희망적으로는 내가 먼지가 된 오랜 후에 나의 offspring이 발견한다면.. 하는 것 뿐이다. 다음은 나의 남은 생의 과정을 남기고 싶었다. 그러니까 public diary인 셈이다. 나는 이것을 Daybook이란 category로 만들어서 쓰고 있다. 개인 일기는 ‘아무 것, 비밀, 욕, 불법적인 것’등을 마음대로 쓸 수 있지만 daybook은 그런 것들을 할 수 없다. 그것이 매력이고 마력이다. 나와 public이 같이 share할 수 있는 것들.. 그러니까 ‘사회적인 나’ 에 관한 것들.. 생각들.. 신변잡기, 나의 생각, 무궁무진한 제목들이 이곳에서 기다린다. 다만 대상이 public이란 특성을 항상 염두에 두고.. ‘조심스레’ 다루어야 한다. 현재까지 나는 큰 문제가 없었지만 그래도 작은 몇 가지 잡음을 경험했다. privacy control의 ‘절묘한’ 기술이 필요한 것이 바로 이곳이다.

현재까지 나의 Memoir 를 고등학교 시절까지는 일단 끝 냈고 근래에는 대학 2학년까지 다다르고 있다. 목표는 내 인생의 ‘전부’를 글로 남기려는 것이지만 글쎄 그것이 그렇게 쉬울까? 인생의 처음 부분이 비교적 쉽게 기억이 나고 쓰기가 쉬웠던 것은 역시 simple했던 시절이어서 그랬을까? 대학을 넘으며 더 어려워지고.. 인생의 전환기를 미리 생각만 해도 골치가 아파져 온다. 그래도 노력을 해 볼 것이다.

  1. 쉽게 말하면.. ‘보통 중년이 지난 아줌마’들이 매일 편히 쓸 정도가 될 때쯤이 아닐까?
  2. blogger나 wordpress같은

afternoon delight, Krispy Kream..

perfect combo: donuts, coffee & banana

perfect combo: donuts, coffee & banana

 

요즈음 우리가 가는 supermarket: KrogerPublix같은 곳엘 가면 나의 눈에 아주 편안하게 들어오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Krispy Kream donut box 들이다. 단맛 때문일까.. 아니면 부드럽게 느껴지는 혀끝의 맛 때문일까, 아니면 이것과 곁들여 떠오르는 향기 가득한 ‘새카만’ dark black coffee ‘맛의 모습’ 때문일까? 몇 년 전에 donuts을 먹고 배탈로 며칠을 고생한 이후 이것만은 피하며 살았지만 그런 기억도 희미해 진 요즈음 다시 이 ‘단맛과 coffee’의 유혹은 피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이곳에서는 전통적으로 도넛은 거의 이른 아침에 먹지만, 그런 ‘직장 생활’ 시절이 다 지나간 요새, 나는 이것을 거의 혼자 먹는 ‘점심 후 간식’으로 즐긴다. 특히 hazelnut coffee 같은 것을 곁들이면 이것은 나에게 진정한  afternoon delight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다가 afternoon delight이란 말이 귀에 익은 말이고.. 이 말은 오랜 전의 hit  pop song, 노래 제목 임까지도 기억을 해냈다.

태고(太古) 적.. 이런 말이 아직도 쓰이는지.. 그러니까 까마득히 오래 전 이런 제목의 popular tune이 있었고 사실은 그 tune의 일부분은 생생히 기억한다. 누구의 노래였던가.. 이런 것으로 기억력 test하기 좋은가? 우선, 1970년대라는 것은 분명하다. vocalist도 분명히 ‘남자’ 였고… Sebastian이란 이름도 연관된 이 group은 누구인가? 아하! John Sebastian이었던가?  그 다음은 아주 깜깜해진다. googling, youtube’ing time 이 되었다. 결과는 .. 실망적인 나의 기억력. 1970년대는 맞았지만 vocal group이 완전히 틀렸다. vocalist는 남자와 여자가 반반이 섞인 4인조 Starland Vocal Band였다. 내가 왜 John Sebastian과 혼동을 했는지 분명치 않다. 이 두 artists들은 모두 1976년 경에 활동을 했는데 그 당시의 추억이 이제는 까물거리는 ‘태고’가 되어가나 보다. 더 추억을 더듬어 보니.. Afternoon Delight란 노래는 주로 radio를 통해서 들었고, John Sebastian의 귀에 익숙한 노래였던 Welcome back 은 같은 때, TV sitcom ‘Welcome back Kotter‘의 주제곡으로 들었음이 밝혀진다. 이 추억들은 모두 1976년 경.. West Virginia 에서 학교 다니던, 비교적 미성숙한 총각이었던 꿈같은 시절이었다. 나이가 많아지니까 머릿속이 온통 ‘추억거리’로 가득 차면서 가끔 조금 한가한 오후에는 이렇게 ‘유치한, 말도 안 되는’ daydreaming을 즐기기도 한다. 이런 것이 나이 먹음의 즐거움 중에 하나일지도 모른다.

 

 
Afternoon Delight – Starland Vocal Band – 1976

 

 
Welcome Back – John Sebastian -1976

사라진 보리밭, 윤용하님

보리밭이 사라졌다! 그와 함께 윤용하 교우의 추억도 함께 없어졌다. 그 자리에 돈에 굶주린 듯한 stupid famer’s market이 버젓이 자리잡고 돈을 세고 있었다. 10년 전, 2005년 당시 분명히 그 자리 boribat.org에는, 시대를 잘못 만난 ‘돈 없는’ 불우한 음악가, 동요작곡가였던 윤용하님의 일대기가 간직되었던 유산이 있었다. 10년 후에 그것이 commercial website로 둔갑.. 아니 domain ORG는 분명히  non-profit일 터인데 어떻게 염치도 없이 그런 일을 했을까? 고 윤용하 님을 기리던 이름을 어떻게 그렇게 값싸게 팔아 치웠을까. 그 자세한 내용에는 분명한 이유는 있을 터이지만.. 알고 싶은 마음조차 없이 나는 식상한다.

그러면 그 많던 윤용하 님의 ‘이야기’들은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그러다가 2011년 경 나의 윤용하 님 blog을 작성할 당시 research해 둔 기사들을 발견했다. 문제는 그 원래의 보리밭 site에서 얼마나 내용을 건졌는가 하는 것인데.. 그것은 현재로서는 알 길이 없다. 아마도 희망적으로 대부분 내가 save하지는 않았을까 하는 정도다. 이곳에 내가 간직해 두었던 윤용하님 이야기: “윤용하를 말한다” 를 ‘영구히’ 남기고자 한다. 내가 살아있는 한 이것은 절대로 ‘팔아 넘기지‘않을 것이다.

 


윤용하를 말한다

 

 

성악가 오현명

 

내가 만주 봉천 보통학교의 분교인 북시장학교 5, 6학년때쯤 나의 집이 윤용하가 다니던 석탑 보통학교 근처여서 오후쯤 그 곳 운동장에서 놀다가 가끔 그를 보곤 했다. 그는 별로 말이 없고 남들과 잘 어울리지도 않았으며 가끔 팔짱을 끼고 남들이 노는 것을 조금 멸시하는 듯이 쳐다보곤 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서로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었는데, 내가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요일마다 보천 석탑교회 성가대에서 등사도 하고 합창을 하고 있을 무렵 신문광고와 포스터에서 조선 합창단 단원모집이라는 내용을 보고 일본 천리교라는 교회로 시험을 치러 갔을 때 그 합창단원과 간부들 중에서 지도자격인 사람이 바로 국민학교 운동장에서 보던 윤용하였다. 테스트를 한 후 그는 나에게 아주 좋다며 같이 일을 하자고 하였다. 그는 철저한 카톨릭 신자였으며 그가 다니던 교회에는 어느 한국인 성악가가 카톨릭 합창단을 조직해서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때이미 윤용하는 합창곡이나 독창곡을 많이 작곡하여 내게는 나의 음악수준과는 비교도 안될만큼 훌륭한 작곡가로 여겨졌다. 그는 이따금 일본인이 만든 봉천 방송국에서 피아노 반주로 합창을 지도 하기도 했고 기념행사 같은 것이 있을 때는 일본인으로 구성된 약 20여명의 방송 관현악단을 지휘하며 합창을 같이 했으며, 지휘, 편곡까지 능란히 해내고 있었으므로 당시 나의 수준을 생각해 볼 때 그의 수준은 상당한 것이라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봉천에 있던 사람들의 음악 수준은 아주 저조한 것이었다. 

직업 음악가는 학교 선생님 뿐이며 1년에 한두번 정도의 음악회가 있을 뿐이었으므로 당시의 형편에서 조선 합창단을 조직한 윤용하의 활동은 대단히 괄목할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합창단의 경제적 사정은 말이 아니었다. 단원들 중에는 형편에 따라서 경비를 내는 사람도 있었으나 거의 그 혼자서 꾸려나가야 할 형편이었다. 연습장소가 없어서 교회나 유치원등 여러곳을 전전 해야만 했는데, 악기가 없어서 내가 가지고 있던 아코디언을 반주악기로 삼아 그가 직접 음정을 짚어가며 합창단을 지도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때 ‘교성곡’, ‘조선의 사계’라는 거창한 이름을 내걸고 제 1회 발표회를 갖게 되었으나 당시는 전쟁이 한층 가열되고 있던 때라 좀처럼 음악회 허가를 받을수 없어 명칭을 ‘승리의 음악회’라는 일본말로 고쳐서 겨우 허가를 얻었는데 나는 교성곡(칸타타)이 뭔지도 모르면서 무조건 윤용하를 따라 다녔다. 당시방송 관현악단의 반주로 30명쯤 되는 합창단이 독창곡을 낀 창작곡을 발표한다고 하여 굉장한 반응을 얻은적이 있었다. 

그때부터 윤용하는 연습후면 거의 매일 아코디언을 짊어진 채 술집으로 향하곤 했다. 돈이 없으면 하나밖에 없는 반주 악기인 아코디언을 전당포에 잡히는 것이 상례였다. 그때 나의 일과는 술취한 그를 십간방이라는 그의 집으로 데려다주는 것이었다. 그가 신경으로 떠날 무렵, 마지막 연주회라고 하여 조선 합창단을 주축으로 약 700석 정도의 만주 봉천 기념회관을 빌려 음악회를 열었는데 이는 한국 사람으로서는 아주 드문 일이었다. 고별 연주회를 갖고 신경으로 떠난지 서너 달 후 그는 나에게 신경으로 빨리 오라는 편지를 보냈다. 

그가 신경에서 창단한 카톨릭 계통의 ‘백조 합창단’의 발표회에서 그가 작곡한 ‘독백’을 불러 달라는 것이었다. 그곳에 가서 보니 신경에는 만주에서 최초로 조직된 일본인, 중국인, 한국인이 같이 끼어있는 신경 교향악단이 있었는데, 그 단원으로는 바이올린의 한명서 선생, 첼로의 전봉초씨, 김동진씨등 한국인이 꽤 있었다. 그 교향악단은 만주 전역에 걸쳐 지방공연을 하기도 했는데 작곡가로는 김성태씨가 전속으로 있었고 김동진, 김대현씨와 함께 약관의 윤용하씨도 끼어 그 4명의 한인 작곡가들이 공동으로 두 세번 정도의 발표회도 열고 있었다. 거기서는 우물안 개구리가 아닌 본격적이며 제대로된 작곡 활동을 하고 발표회까지 가져가며 펼칠 수 있었던 것이다.

봉천 시절의 윤용하는 카톨릭 교회의 신부에게서 오르간을 치는 법이나 작곡을 배웠다고 한다. 또한 오케스트라 단원 중 밤이면 다고 한다. 어쨋든 그 나이에 오케스트라 편곡을 한 것은 대단하다고 하겠다. 그때 쯤 정확히 언젠가 기억은 확실하지 않지만, 일본에서 음악을 공부하여 육군군악학교 교장을 지내고 트럼본을 전공한 백 영준 이라는 음악가가 만주에서 우연히 윤용하의 음악을 들은 후, 멜로디는 슈베르트같은 점이 있고 가곡이 무척 좋았다는 평을 했을 때, 그 평을 듣고 매우 기뻐하며 자신이 한국의 슈베르트인가 하며 좋아하던 그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시인 박화목

 

이 청년은 처음엔 편성을 담당한 한 사람을 만났는데,그 사람을 통해 이내 나에게 소개 되었다. 당시 나는 방송국 편성과의 말단 프로듀서로서 시 낭송.소설 낭독 등 문예물 프로그램을 맡고 있었다. 그를 내게 소개하는 동료직원의 말인 즉, 그가 작곡 활동을 벌이고 싶어 방송국을 찾았는데 내가 시를 쓴다니까 나를 만나는 것이 좋을 성 싶어 소개 한다는 것이었다. ‘시를 쓰시는 박 선생을 만나게 되어서… 앞으로 많은 도움을 받아야겠습니다.’ 하고 그는 퍽이나 겸양스럽게 내게 말을 건네었다. 나는 찬찬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볕에 그을렸는지 조금은 거무칙칙한 얼굴이었으나, 크고 서글서글한 두 눈이 인상적이었다. 그의 그런 두 눈이 창작의욕에 불타는 듯 빛나고 있었다. 이렇게 어느 날 홀연히 서울 방송국에 찾아와, 또 나를 만나게 된 이 시골청년은 다른 사람 아닌, 바로 작곡가 윤용하였고, 그와 나의 만남은 이렇게 이루어진 것이다, 그는 나를 만나자 가곡을 작곡하고 싶다면서 시를 써줄 것을 부탁도 하였다.

마침 그 무렵 방송국에서는 우리가 새 가곡을 보급하기 위한 새로운 방송사업을 마련하고 있던 참이었고, 이 일을 내가 담담하고 있었으므로, 윤용하의 작곡활동에는 내가 도움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가곡이 될 수 있는 시를 시인에게 청탁하여 그것을 작곡가에게 나눠 주어서 작곡을 의뢰하곤 하였다. 그리고 작곡이 된 새 가곡을 방송을 통해 널리 보급하고자 하였다. 그 당시의 그 프로젝트가 얼마만큼 성과를 거두었는지는 차지하고서라도 새 가곡 운동의 효시가 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알고 있을 것이다. 또한 윤 용하에게 몇 편의 작곡이 의뢰되었는지 지금 기억이 분명치가 않다. 그러나 적지 않은 작곡이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그리고 윤 용하의 작곡이 당시 방송에 크게 도움을 준 것도 누구나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만큼 그때에는 자주 방송국에 드나들었다. 아니, 그의 해방 후 서울에서의 작곡 활동이 방송을 중심으로 펼쳐졌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는 만주 땅(신경 등지)에서 살다가 해방 후 귀국해서는 약 1년간 강원도 어디엔가 있다가 상경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후 방송국에 자주 드나들면서 활발한 작곡 활동을 폈다고 볼 수 있다.

‘네가 조국을 모른다니 이게 될 말이랴…’ 이런 구절로 시작되는 ‘민족의 노래’며 ‘광복절의 노래‘등 우수한 국민 가곡을 지은 것은 이 무렵인 것이다. 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그는 해방 후 귀국하여 서울에 오기까지 잠시 동안 함흥의 영생여고의 음악교사를 지냈다 한다. 그런데 당시 어째서 강원도에서 왔다는 것으로 그렇게 알게 되었는지 잘 모를 일이다. 추측 건데 이북 함흥에 있다가 잠시 강원도에서 지낼 법한 일이다. 6.25 당시 강원도 홍주 땅에서 피신을 했던 사실로 미루어 보아 그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다. 피신해 있으면서, 국군이 반드시 이기고 돌아온다는 신념아래 ‘개선’ 이란 표제의 교향곡을 작곡하기도 하였다.

6.25 와중, 항도 부산에서 피난살이를 할 때, 나는 그를 다시 만났다. 6.25가 일어난 다음해 늦봄이었다. 1.4후퇴때, 나는 예기치 않았던 병을 얻어, 마산의 육군병원에서 서너 달 누워있어야만 했던 까닭으로, 부산으로 온 것은 늦은 봄이었다. 그리고 역시 초여름 어느 날, 남포동 거리 어느 다점에서 그를 반가이 만난다. 그 후, 윤용하와 나는 자주 만나는 편이었고, 어쩌다 돈푼이 생기면 울적한 심정을 달래기 위해 함께 막걸리를 마시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전쟁 틈 바구니에서 자라는 청소년을 휘해서 정성이 듬뿍 깃든 가곡을 만드세. 전쟁 중 서정 가곡을 작시 작곡해 낸다면, 이건 정말 역사에 남을 희한한 일 일거야.” 하고 윤용하가 제안하여 내가 당장 시를 쓰고 또 작곡한 것이 가곡 ‘보리밭’이었는데, 불과 2,3일 동안에 지어졌다.

당시 그가 작곡한 가곡으로 보리밭 외에도 몇 편의 가곡이 더 있었으나, 지금 잘 모르겠고, 처음의 결심과는 달리 그리 많은 창작 가곡을 남기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그는 피난 시절 중 ‘피난 온 소년’ 등 많은 동요작곡을 남기었다.

 

 

음악 평론가 이상만

 

윤용하가 세상을 떠난 지 벌써 2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43년의 짧은 생애, 그러면서도 굴곡이 심한 인생을 역류해 가면서 살아간 음악가 윤용하, 얼마 전 그의 유족들이 보관하고 있던 그의 비망록을 살핀 일이 있다. 300원 500원,… 거기에는 만년에 그가 폐인 되다시피 하여 이곳 저곳 구걸하러 다닐 때에 추념을 해 주었던 사람들의 이름과 액수가 적혀 있었다. 대부분 동료 음악인들의 이름이 거기에 적혀 있었는데, 어떤 어떤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 있는가 하는 호기심보다도 그 비망록이 그렇게 소중하게 간직된 까닭이 사뭇 나의 눈시울을 뜨겁게 만들었다. 친구들의 신세를 졌지만 그 신세 갚음을 잊지 못하고 눈을 감은 사람이 윤용하였다.

윤용하의 음악적인 경험은 모든 것이 체험적인 것이었다. 3대째 가톨릭을 신봉해 온 그의 집안인지라 가톨릭 교회를 떠나서는 그를 생각할 수 없다. 교회에서 풍금을 치고 성가대에서 노래를 부르면서 음악적인 역량을 키운 그는 일반적인 교육에서도 음악적인 전문 교육에서도 체계적인 교육기회를 갖지 못하였다. 학력은 보통학교가 고작이고 음악학교는 문턱도 넘어보지 못하였지만 그의 음악적 경험은 작품을 통해서 볼 때 하나의 맥이 이루어진다.

그가 비교적 본격적인 음악 수업을 한 것은 옹기상을 하는 부친을 따라 고향을 떠나 만주 봉천으로 이주하여 성장기를 보낼 무렵이었다. 그것은 이미 국제화된 분위기 속에서 여러 종족이 모여 사는 도시 였으므로 여러 나라의 각기 다른 풍물을 함께 접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그 곳에서 성가대에 출석하며 노래를 배우던 그는 프랑스 영사의 부인에게 오른을 배우게 된다. 이 접촉은 그의 음악에 나타나는 성향을 결정지었던 중요한 계기였다. ‘보리밭’같은 노래에서 우리가 느끼는 구조적이기 보다는 감성적인 흐름은 바로 흐름을 중요시 하는 프랑스적 경향이 이러한 경험에 의해 그의 멜러디에 스며들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가네꼬라는 일본인 지휘자에게 화성악 및 대위법을 배운 소산으로 20대에 이미 교성곡이나 칸타타등을 작곡하여 나름대로의 음악적 기량을 증명하지만 이러한 대작속에서도 그의 표현은 소박하고 선율적이다. 20을 갓 넘긴 젊은시절 신경에서 김성태, 김동진, 김대현, 오현명등과 함께 체례악 ‘양산가'(김동진), 한국 선율에 의한 ‘수상곡'(김성태), 교성곡’ 조선의 사계'(윤용하)등을 발표하며, 소위 우리 악단의 암흑기에 민족적 명맥을 유지하던 시절의 작품에도 이러한 경향은 드러난다. 

이런 어둡던 시절의 경험은 훗날 그가 ‘민족의 노래’.’광복절 노래’등 애국적인 노래를 작곡하는데 반영되기도 한다. 그가 단순한 작곡가라기 보다는 거의 음악 운동가의 차원에서 6.25사변 후 음악 신문사를 차리고 주간을 맡았던 일이나 문총 중앙위원, 작각고 협회 사무국장, 음악 교육협회 사무국장 등의 직을 맡아 악단 일선에서 활동했던 경력, 그리고 틈나는 대로 합창단을 조직하여 활발한 활동을 펼쳤던 일등은 아마 신경에서 만난 무라마쓰 라는 일본인 음악 평론가의 영향을 받아서 인성 싶다. 

그리 길지 않은 만남이었지만 채동선을 만나 그에게 감화를 받고 민족적인 입장을 찾으려고 노력했던 부분에서도 이러한 성향은 두르러 진다. 실제로 그는 채동선을 존경하며 그의 기일이 되면 신문에 그를 회고하는 글을 쓰기도 했던 것이다.

어쨌든 나약한 듯 나약하지 않으면서도 심하게 격변하는 시대를 적응 못하고 역류를 시도하다가 쓰러진 사람이 윤용하였다. ‘독백’, ‘고독’ 등 애수 어린 가사를 선택, 즐겨 작곡했던 윤용하, 티 없이 맑은 선율 속에서도 그의 고고함은 언제나 흐르고 있다. 그 고고함 때문인지 그의 노래를 들으면 들을수록, 부르면 부를수록 다시 듣고 부리고 싶으니, 시간이 흐른 후에야 그의 값어치는 발견되어 이렇게 찬란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아깝게도 여기 저기 흩어져 찾을 수 없는 것이 많다. 그나마 윤용하가 간지 7년 뒤에야 김대현이 노래를 모아 출판해 주었는데 그도 올해 세상을 떠났다. 지금 돌이켜 보건대 윤용하는 진작에 마땅히 한국 음악사의 견지에서 재조명 되었어야 할 인물이었다.

 

 

논설고문 이규태

 

‘보리밭’ 음악회

‘보리밭’을 지은 천재 음악가 윤용하(尹龍河)와는 세 번 만남이 있었다. 그 첫 만남은 공전의 재해를 몰아왔던 사라호 태풍 때였다. 의연금품을 모집하는 신문사 데스크에 노숙자 차림과 다름없는 허술한 중년 신사가 나타나 입고 있던 겉저고리를 벗어 놓고 돌아서 나가는 것이었다. 주소 성명을 묻자 돌아보지도 않고 고개를 흔들며 사라졌다. 소매나 깃이 헐어 너덜너덜한 그 저고리 속 주머니 위를 보았더니 ‘尹龍河’라고 박혀 있었다. 후에 들은 것이지만 그에게는 여분의 옷이 없어 한동안 윗옷 없이 살았다고 한다. 그 낡은 옷이 도움이 돼서가 아니라, 그렇게 해서 얻어지는 마음의 질(質)을 선택했을 것이다.

그 후 ‘보리밭’을 작곡하게 된 어떤 사연이라도 있는지 물은 일이 있다. “나는 헛소리 듣는 허청(虛聽) 기가 있으며 분명히 들렸는데 돌아보면 아무것도 없을 때 그곳에 아무것도 없을 리 없다고 작심하고 추구하다 보면 미(美)의 꼬리 같은 것이 어른어른 보이기 시작한다”던―그의 집요한 예술관에 접했던 것이 두 번째 만남이다.

그 윤용하가 40대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는 부음에 접했다. 보도의 필요성에 쫓겨 빈소를 찾는 데 신문사의 기동력을 동원했지만 한 번지에 수천 호가 잡거하는 판자촌인지라 이틀을 넘겨서야 찾을 수 있었다. 이 천재가 누워 있는 곳은 판잣집도 못 되는, 종이상자를 뜯어 여민 단칸방의 거적 위였다. 미의 순수한 응어리가 저렇게 이승을 마칠 수 있었던가 가 원망스러웠던 세 번째의 만남이었다.

그에게 영화음악의 작곡을 부탁하러 갔을 때, 또 대중 가요 작곡심사를 의뢰하러 갔을 때 못 들을 소리 들었다고 귀를 씻었다던 그의 순수성이 현대사회에서의 위상을 그대로 구현했던 윤용하와의 마지막 만남이기도 하다. 그 후 뉘 부르는 소리 있어 뒤돌아보니 아무도 없던―그 윤용하가 찾아낸 미의 터전에서 재즈 리듬으로 편곡된 ‘보리밭’ 고고가 판쳐, 짓밟혀 망가진 지 오래인 그 터전에서 고인이 살았을 제 공감대에서 예술을 교감했던 팔순 고개의 원로 음악가 바리톤 오현명, 피아니스트 정진우, 테너 안형일 세 분이 추모 음악회를 연다고 하니 그 보리밭에 새싹이 돋아날 것이다.

조선일보 [칼럼] 이규태 논설고문 2005-10-24

 


신동아 평전 (이부영)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

뉘 부르는 소리 있어 

나를 멈춘다.

옛 생각이 외로워

휘파람 불면

고운 노래 귓가에

들려온다.

돌아보면 아무도 뵈이지 않고

저녁 노을 비인 하늘만

눈에 차누나.

 

이제는 [아리랑]만큼이나 우리들의 입가를 맴도는 멜로디, 박화목 작시 윤용하 작곡의 [보리밭]이다. 설움에 마음이 올올이 젖어 있는 듯, 그러면서도 서러운 마음을 남에게 보이지 못해 홀로 삭여버리는 애잔한 숨결이 멜로디에 스며 있다.

가난과 유전, 그리고 술의 동반자이자 순수와 좌절의 벗이었던 윤용하. 그가 세상을 등진지도 올 칠월로 만 구 년째다. 그 동안 그의 묘비도 작곡집도 생전의 친지들의 노력으로 세워지고 만들어졌다. 그러나 모든 인생의 굴레에 목조여 피어보지도 못하고 스러져간 그의 노래들은 무엇으로 보상될 것인가. 저임에도 충실히 근무하다가 엉뚱하게 숨져가는 말단 순경 사병 철도간수들이 일계급 특진되듯. 묘비도 작곡집도 추서였다. 그리고 남은 것은 다시 망각뿐이다.

윤용하-그는 태어나서 한번도 그의 소유로 된 집을 가져본 일이 없다. 운명하는 순간에도 남산 중턱 움막판자집 단칸셋방이 이승의 마지막 현주소였다. 그는 태어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고향을 등진 후 유전만을 거듭했을 뿐 다시는 한번도 고향 땅을 밟아보지 못한 실향민이었다. 그는 장남으로 태어나 철이 들면서부터 부모와 다른 오 남매 동생들과 더불어 함께 한 일이라곤 없는, 그가 살다간 시대만큼이나 불행한 유랑인 이었다. 그는 명색이 작곡가라면서 생전에 자신의 작곡 집 한번도 내보지 못한 부실한(?) 예술가였다. 그는 모든 것을 술로 풀어버리려고 술에 함몰 당해 부인마저 집을 나가버릴 정도로 초탈한 생활무능력자였다.

그는 삼대째 황해도 바닷가에서 고기잡이로 생계를 잇다가 조부 때 이르러서는 그것도 어려워 구월산 기슭에 옮겨와 독구이 하던 옹기장이의 맏아들이다. 이 사실을 강조하려는 뜻은 그가 움직일 수 없는 민중의 아들임을 미리 설정해놓으려는데 있다. 그의 피 응어리진 생애를 더듬어가는 동안 우리는 예술인으로서의 윤용하의 역정과 더불어 민중의 고난, 민중의 착각, 좌절로만 끝낼 수 없는 민중의 자각적 초설을 읽어볼 수 있을 것이다.

 

독가마 집 맏아들

용하가 태어난 곳은 황해도 은율군 일로면 농림리다. 동남쪽으로 신기 어린 구월산의 웅봉 들이 도열, 천연의 병풍을 둘러치고 서쪽으로는 확 트인 황해의 넒은 뜰에 둘러싸인 옴폭한 곳이다. 은율이란 곳은 사실상 황해도의 중심부인 재령 신천 안악 서흥 봉산 황주 평산 등지에서는 유리된 벽지에 속한다.

용하의 오대부조는 은율 이로면 바닷가에서 고기잡이를 생업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의 사대부조가 어떻게 황해도의 서북단 오지인 은율로 옮겨가 살게 되었는지는 기록으로나 구전으로도 알 길이 없다. 다만 그들이 독실한 가톨릭교도였으며, 이후 대원군에 이르는 대박해를 피해 안전한 곳으로 차아 헤매다 이곳에 정착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그 자손들도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 추리는 용하의 부친 대에 이르면 거의 확실해진다.

그의 부친은 험준한 구원한 구월산기슭에 독가마를 차려놓은 옹기장이였다. 다른 사람들과 접촉이 잦은 바닷가의 어부생활에서 언제 그리고 왜 심산궁곡의 옹기장이로 생활의 터전을 바꿨는지 알 길이 없다. 이들은 다시 한번 박해를 피하기 위해 신앙의 도피행각을 벌인 듯하다. 이런 추측을 가능케 하는 사실로는 오늘날에도 도자기 장인(匠人)들 가운데 수많은 가톨릭신자들이 그 가업을 전승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원군의 대 박해가 가해지던 시절 [천주학장이]들이 피할 방법이라곤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심산궁곡에 파묻혀 숯가마나 독가마를 걸고 생계를 유지하는 길이었다. 더욱이 옹기나 숯을 지고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으로 팔러 나가는 것은 정보교환이나 포교의 이로운 점도 없지 않았다. 한국의 숯가마나 독가마는 로마의 [가다꼼바]이기도 했으니까.

그는 삼일 독립운동의 여진이 아직 울리고 있던 일구이이년 삼월 십육일 고난의 생을 시작했다. 아버지 윤갸오로(상근)와 어머니 이마리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즈음은 전국에서 실향사태가 벌어지는 등 민족의 본격적인 수난기에 접어든 시기였지만 용하의 출생은 그 배경이나 경제적 기반으로 미루어봐도 어차피 리향의 쓰라림을 겪을 씨앗을 이미 품고 있었다.

그의 부친은 용하가 네 살 되면 해 만삭의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사대째 뿌리내려 살던 은율땅을 등진다. 철부지 용하는 아버지등에 업혀 떠나는 고향땅이 다시는 그가 생전에 밟아보지 못할 땅이 될줄은 몰랐다. 일가가 정착한 곳은 평안북도 은주군 비현면 채마동. 이곳은 경의선의 종착역인 신의주 못 미쳐 세정거장째로 오백여 호의 가옥이 철로 변에 모여 있는 소읍이었다. 이곳에서도 윤상근은 읍밖의 산비탈에 독가마를 쌓고 천형처럼 물려진 옹기상을 또 시작했다.

그 당시 남부여대 해서 고향을 등진 수많은 실향민들이 그랬듯이 집안은 찢어지게 가난했다. 가난이 곧 생활이었다. 그런 속에서도 어린 용하는 양친의 뜻대로 열심히 성당에 다녔다. 그 곳에서는 천주 이외에도 풍금과 성가가 있었다. 그의 음악적 재질은 이곳 성당에서 발견되었다. 그의 핏속을 사대째나 흘러내려온 가톨릭과의 인연은 가톨릭을 통해 음악적 잠재재능을 발휘해낸 사실 이외에도 그의 일생을 지배한 정신적 기둥을. 그리고 외곬으로 빠졌다가 결국은 좌절을 통해 자기의 껍질을 벗어버린 보편적 사고에로 의 회귀를 결과한다. 참으로 오랜 기간이다. 

그의 사대부조가 왕조 말의 고난 속에서 구원의 샘을 천주에게서 찾은 것이나 별 차이 없는 백성 본래의 본능이었을지 모른다. 여하튼 어린 용하는

『성당에서 한번 배운 성가의 멜로디는 절대로 잊은 법이 없었지요. 자기보다 나이 많은 청년성가대원들이 올간에 맞춰 연습하는 날이면 늦은 저녁에도 성당 구석에서 구경을 하곤 했어요. 올간을 타고 싶어서 주위를 맴돌기도 하고요. 어린이 성가대에서는 으레 동창자로 뽑혔고 성탄절이나 부활절의 어린이 성극에 출연도 하고요』

평북 비현면 채마동 용하의 어린시절에 같은 동네에서 지냈던 량마리아( 서울 영등포구 상도동거주)여사의 말이다.

『저보다 일곱 살이나 어렸지요. 제가 청년성가대로 있을 때 국민학생인 윤용하씨는 키가 작기는 해도 곱슬머리에 서글한 눈을 가져 귀여움을 받았어요』

채마洞 어린시절 용하의 마음속은 이미 음악에 대한 막연한 갈망으로 채워졌지만 그런 갈망을 뒷받침할 만한 형편도, 이해를 가질 만한 양친의 양식도 없었다. 도리어 학교를 끝내고 집에 돌아오면 일에 바쁜 양친의 일손을 덜기 위해 동생들을 돌보는 것이 큰 아들에게 맡겨진 몫이었다. 채마동에서 이남일녀의 가장이 된 용하의 부친은 이 곳에서도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웠다. 더구나 만주사변 전야 국경지역인 이곳은 반도에서 살수 없어 만주로 생의 터전을 찾아 옮아가는 실향인파들이 모여든 곳이기도 하다. 용하일가는 그가 열두살 되던 해 모든 것이 생소한 만주 봉천으로 옮겼다. 채마동으로 리향할 때 이미 그의 유전은 시작된 것이지만 이제부터 그의 떠돌이 일생이 본격적으로 펼쳐지게 된 것이다.

 비현면 채마동에서 보통학교 오학년을 중퇴한 용하는 봉천의 석탑보통학교 육학년으로 편입했다. 이즈음 그는 일인들이 월등히 많은 이 보통학교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다만 난생 처음 보는 피아노에 매료 당한 채 한 주일에 두 번 있는 음악시간을 손꼽아 기다리는 것이 즐거움의 전부였다. 또한 그의 생애가운데 단 한번 행운의 여신이 그에게 손길을 보냈으나 부모의 반대로 허망하게 틀어지고 만다. 그러나 이『부발신운』은 그로 하여금 음악회 길에서 일생 동안 헤매게 만든 계기이기도 했다. 용하는 일구오구년 이월삼일자 『세계일보』문화면에 그의 어린 시절과 함께 『음악가가 된 동기와 이유』를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나는 처음에는 음악가가 되려는 꿈도 꾸지 않았었다. 다만 어린 시절 나의 꿈은 천주교회의 수사가 되겠다는 희망뿐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사대째 천주교집안이었고 또 나의 외조부님께서는 나를 예수를 친히 길러내신 예수의 아버지 요셉의 성명을 나에게 지어주시면서 『너는 장차 예수의 아버지이신 목수 요셉과 같이 되기 위해서 사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나의 양친에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런고로 나는 어려서부터 비가 내리거나 눈이 펄펄 나부끼거나 하루를 빠지지 않고 성당에 열심히 다녔다. 

이렇게 지내는 동안 나는 음악에 대한 소질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자연히 성가를 부르게 되었고 때에 따라서는 풍금을 만져보기도 하였고 부활절이나 성탄절 같은 큰 축일에는 연극이나 독창도 하고 교회의식에도 참례하게 되었다.

이렇게 지내던 나의 제 이의 고향 평북 비현이라는 곳을 일이세때 가친풍의 직업 관계로 떠나 나는 그리운 산천 벗들과 석별하고서 풍토가 다르고 낮 설은 이성땅 만주 봉천이란 곳에서 약 팔 년 동안 살게 되었다. 그때 나는 두루마기를 입고 봉천보통학교 육학년에 편입되어서 공부하려니까 눈물겨운 점이 많았었다.

– 다만 견딜 수 없는 것은 당시 보통학교 교과서에서도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는 피아노가 교실에 놓여져 있었다는 점이다.

나는 어느 학과보다도 일주일에 두 번씩 배우는 음악시간을 기다리는 것이 제일 좋았었다. 그리고 나는 이 보통학교에 다니면서 졸업기념으로 학예회에서 독창을 하였고 또 처음으로 조선어 방송시간(오후 육시로 기억됨)에 기념방송으로 독창과 합창을 해서 선물로 연필과 공책 몇 권을 받아가지고 퍽 기뻐하였다. 이렇게 학교생활을 지내는……

이 교회에는 우리나라와 이- 불 – 미- 독- 영 – 일등 여러 나라의 가톨릭신도들이 모이게 되는 까닭으로 신도들 가운데에서도 교양의 수준이 각양각색이었다. 

여러 나라의 상인으로부터 영사나 고관에 이르기까지 차별 없이 매주일과 복일에 참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가대만은 달랐다. 악보를 읽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 때에는 프랑스 영사부인이 풍금을 치면서 성가를 가르쳐 주었다. …… 

이 당시 불인신부는 나를 음악신부로 만들어 보겠다고 당시 동양을 순찰 중이던 법황사절에게 나를 소개하면서 일본 나가사끼에서 일년간 나전어와 불어를 공부하고 빠리 신학교에 가게 하려 했으나 양친의 반대로 다 깨어지고 결국 등사도 아니고 음악신부도 아닌 속된 음악가라는 칭호를 받게 된 것이 영광스러운 일인지 알 수 없다……

 

다소 장황한 느낌이 들지만 거의 전문을 옮긴 것이다. 그러나 그 자신이 남긴 이 시기에 관한 유일한 기록이기에 빼놓을 수 없는 자료이다. 우리는 그의 이 문맥 속에서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읽을 수 있다. 이미 봉천석탑보통학교에서 그는 다른 학생들보다는 월등한 재질을 보였음도 글속에 나와 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만주에 와 있던 여러 나라 사람들 가운데 가난에 찌든 한 조선소년이 음악적 재질을 인정받아 불인신부가 음악신부로 키우려고 했다는 점이다. 

그는 이미 보통학교 졸업할 나이에 음악에 관한 한 같은 연배의 다른 학생이나 신도들은 엄두도 못 낼 수준에 이르러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불발로 그쳐버린 단 한번 행운의 좌절은 그와 부모 사이에 깊은 구렁을 파놓기도 했다. 이후 그는 성년이 될 때까지 자기가 스스로 자기 길을 걸었을 뿐 양친과 상의를 거쳐 장래를 결정한 일이라고는 없다. 또한 그런 저런 과정을 거치면서 용하는 자신이 음악에 남다른 재능을 가진 점을 확신하고 그 길로 인생항로를 정한 계기가 되었다. 

 

무학의 수기-질풍노도

나라 없는 실향민 막벌이 일꾼의 아들-그가 보통학교라도 나온 것은 그의 양친들 스스로가 배우지 못해 설움 당한 것을 큰 자식에게만은 물려주지 말자는 한 때문이었을 것이다. 단지 용하가 외국에 나가 더 수학할 기회라 할지라도, 아무리 그들 자신이 가톨릭신도이기는 했어도 장남을 영원히 가족으로부터 떼어놓을 신부로 만들 수는 없다는 안타까운 부모의 정이 그의 소망을 꺾는 작용을 했을 것이다.

어찌 됐던 용하의 정규교육은 이것으로 끝난다. 다음은 파란과 유전과 그에 따르는 가난. 그리고 술이 모두였다. 살림에 보탬이 되기 위해 닥치는 대로 막일을 했으나 음악에 대한 갈망을 이기지 못해 일을 걷어치웠다. 그는 일오세에 십간방천주교회의 성가대 지휘자로 활약하는 한편 음악이론 공부에도 열중했다. 이즈음 그는 그의 생재 중 단 한번 체계적인 음악이론을 익힐 기회를 얻었다.  봉천방송국 전속 관현악단의 일본인 지휘자『가네꼬』라는 사람을 만난 것이다. 열정과 재능이 충만한 어린 소년의 지식욕에 감복한『가네꼬』는 틈나는 대로 화성악과 대위법을 가르쳤다. 이 수업이야말로 그의 장래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용하가 일팔세 되어서는 봉천의 한인사회에서 이미 유명한 젊은이로 꽤 널리 알려져 있었다. 일구사십 년 십구세 되던 해 봄 그는 신문에『봉천조선합창단원 모집』광고를 냈다. 그랬더니 봉천 동광중학을 갓 졸업한 까까중머리의 한 청년이 응모했다. 지휘자이자 단장인 용하는 이 청년에게 발성 테스트도 받는 등 심사를 이모 저모 했다.

『목소리가 바리톤으로 아주 좋군. 전에 노래를 불러본 적이 있소?』

『예. 그저 학교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합창 정도 했을 뿐 집에서 혼자 불러본 것 외에는 독창은 해본 일이 없습니다.』

『우리 함께 일해 보겠소? 이 곳에는 아직 우리 동포들로만 조직된 합창단이 없는 터에 젊은 우리들이 기틀을 잡아봅시다.』

『같이 일할 수 있다면야…… 열심히 해 보죠』

하이칼라신사와 까까중머리 중학졸업생의 대면이다. 이 까까중머리 청년은 오현명씨 (현한양대음대학장.)

『머리도 곱슬곱슬한 올백으로 멋지게 빗어 넘기고 하이칼라 양복차림에 으젓 하길래 대선배인줄 알았어요』

당시를 회상하며 오씨는 파안대소 한다. 그들은 동갑내기였던 것이다.

 

일구삼오년 같은 해에 용하는 석탑보통학교를. 오씨는 북시장 보통학교를 졸업했다. 그 후 오 년의 세월 동안에 한 사람은 자기 재주대로 가시밭길의 사회에서 발돋움해서 그럴듯한 하이칼라신사가 되어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중학교 막 나온 풋내기 청년이었다. 그러나 이 오 년이란 짧은 세월 속에 두 사람에게 각각 생겨난 차이,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정상적인 교육과 정을 밟지 않은 채 독력으로 발돋움한 조숙한 용하와 제 과정을 순탄히 밟은 오현명 – 이 두 사람의 장래를 바라보는 전망에는 그들 나이로는 헤아리기 힘든『비극적인 착오』가 도사리고 있었다.

주위에서 『천재적 소질』을 지녔다고 선망의 눈초리를 받으면서『예술에 무슨 자격요건이 필요한가. 재질과 열정만 있으면 그만이지』라고 믿던 조숙한 천재가 어니 때엔가 어느 곳에 서는 『자격』이『재능』을 타고 앉고 예술이 밥벌이의 수단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기엔 너무나 순정적인 젊음의 질풍노도에 들떠 있었다. 이와 같은 예술 지상론적 심리상태는 뒤집어보면 정상적 교육과정을 밟을 수 없었던 자신의 불우한 처지나, 조숙한 머리로 설사 늦게나마 학업을 계속하려 해도『젖비린내 나는 애들』과는 자리를 같이 할 수 없다는 자존심, 이런 등등으로 인한 반사심리일 수도 있었다.

[천구백] 사십 년대에 접어들어 이차세계대전의 전인 일제의 살기등등한 위세가 대동아 공영권을 마치 거의 이루어 놓은 듯 괴뢰 만주국의를 구가하고 있었다. 한반도의 내선일체에 밀려 만중에 쫓겨간 우리 동포들은 다시 오족협화(日-한-중-만주-몽고족)의 꽹과리에 시달림을 받고 있을 즈음이었다. 용하의 일가도 그 예외일 수는 없었다. 봉천서쪽 교외의 판자촌신세였다. 그의 부친은 봉천에 처음 옮겨와서는 가업으로 물려진 옹기상을 그대로 해보았으나 도저히 생계를 이을 길이 없어 뜨내기 막벌이 노동자로 나섰던 것이다. 당시 이곳의 한인들은 일인계통의 기관 업체에 근무하는 사람이나 어느 정도 중류의 생활을 누릴 수 있었을 뿐 대부분 밑바닥에서 방황할 때였다.

 

20세가 못돼 시작된  음주벽

오현명이 조선합창단원으로 합류한 이후 자주는 아닐지언정 어쩌다 한번『네기시』단장의 집을 찾을 적이 있었다. 이즈음 만주에도 창시개명의 바람이 밀어닥쳐 용하는 『네기시 유기찌』로 행세했다. 한인들이 음지에 돋아난 버섯처럼 어귀다툼을 벌이며 모여 사는 판자촌, 용하는 그 나이에 이미 집안 일에는 초연했다. 연습을 마치고 용하가 친구 현명을 데리고 굴속 같은 집으로 들어섰다. 언짢은 표정으로 부친이 돌아보면서

『집에는 무엇 하러 들어오느냐』

『……』

아무 내색을 않은 채 외면하는 용하. 그들 부자 사이는 이런 식이었다.

『다 자란 큰애에게 왜 이런 말을 하시우. 제가 어련히 알아서 할라고』

용하를 언제나 감싸는 어머니가 거든다.

『어쨌건 저놈은 내 자식이 아니야. 저 좋을 대로 새처럼 날아다니든지……』

 

용하의 부친은 그를 내어놓은 자식으로 이미 간주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용하가 들어오면 그의 손 밑 남동생 용학은 좋아 라고 형에게 다가와 주일성당에서 형이 합창단을 지휘하던 모습을 흉내 내며 가르쳐 달라고 졸라댔다. 그럴라치면 부친의 불호령이 떨어진다. 

『이놈 그 밥 빌어먹을 미친 지랄 그만 두지 못하겠냐』

『어린것이 무얼 안다고 그러슈』

 

어머니는 언제나 자식들 편을 든다. 그럴 즈음엔 용하는 다시 자리에서 슬그머니 일어나 어느 친구의 하숙방으로 잠자리를 옮겼다. 그의 아버지는 체구가 작달 만하고 깡마르기는 했어도 막일로 단련된 단단한 몸을 가지고 있었으며 누구에게도 굴하려 들지 않는 강기(剛氣)의 소유자였다. 그에 비해 어머니는 여자 키로서는 천칠 했으며 성격은 씩씩하고 이해심이 깊었다. 용하의 경우 외모나 성격이 거의 외탁을 한 편이었다. 여하튼 당시 용하가 지휘자겸 단장이던 조선합창단은 단원만 십 오명 정도 모였지 연습장소도 반주할 악기도 없었다.

그들은 틈나는 대로 용하가 성가대지휘자로 일하던 십간방천주 교회를 이용했다. 그러나 그곳도 언제나 마음 놓고 이용할 수 있는 장소는 아니었다. 이때 그들에게는 같은 연배의 조천석이라는 시작 공부하는 친구가 있었다. 조는 동시를 주로 썼고 용하는 그의 시에 곡을 붙여 동요를 짓곤 했다. 조는 그때 봉천주재 영국영사관에 잡역을 하면서 뒤뜰에 있는 헛간창고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다. 조선합창단은 조의 자취장소인 이 헛간을 자주 연습장소로 이용했다. 합창연습에 쓸 피아노나 올간이 있을 턱이 없어 오현명이 중학 다닐 때 집에서 취미 삼아 켜던 아코디언을 가져다 합창단 반주악기로 썼다.

1940년 가을 마침내 조선합창단의 첫 공연이 다가왔다. 합창곡목은 칸타타『조선의 사계』조선합창단의 공연을 위해 용하가 동요 말고는 처음 작곡한 교성곡이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약관 19세. 연주는 『가네꼬』가 지휘하는 봉천방송국 전속 관현악단이 맡기로 되었다. 합창단원들은 조선인들로서는 봉천에서 처음으로 합창공연을 갖는다는 열기에 들떠 포스터를 손수 시내 요소에 붙이고 다녔다. 그러나 공연은 일보직전에서 좌절되는 듯했다. 일본관헌 측에서 합창공연을 그만두라는 명령이었다. 이유인즉 한인들의 민족감정을 촉발시켜 오족협화의 성스런 분위기를 깰 우려가 있다는 것 그들은 시내에 붙여 놓았던 포스터를 다시 때어내야 했다. 그러나『가네꼬』를 비롯한 여러 사람이 애쓴 보람이 있어 포스터를 다시 붙이고 공연을 할 수 있었다. 용하는 이미 일본관헌 눈에 별로『곱지 못한 젊은 한인』으로 비치고 있었다. 

 봉천공회당에서의 합창공연은 성황이었다. 봉천방송국은 이 합창공연을 생방송으로 내보냈다. 당시만 해도 이런 공연에 입장료를 받는 일은 거의 없었고 더구나 공연장소는 공회당이었다. 단지 열정을 가지고 대가를 바라지 않은 채 자기들의 성장을 남에게 보이며 조선인들도 합창단을 만들어 자기의 작품을 공연할 수 있다는 것을 과시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공연에서 박수를 아무리 푸짐하게 받았다고 해도 이들 풋내기들의 주머니 속에는 먼지밖에 나올 것이라고는 없었다. 그렇지만 자축파티가 없을 수는 없었다. 자금은 공연 연습 때 관현악단 노릇을 톡톡히 해온 오현명의 아코디언을 전당포에 맡겨 마련했다. 이 아코디언을 조선합창단이 삼 년 동안 활동하던 시기에 걸핏하면 전당포신세를 지기 일쑤였다. 전당포에서 꾼 돈을 단장인 용하는 어찌 어찌 구해서 다시 갚고 합창연습에 없어서는 안 되는 아코디언을 되찾아 쓰곤 했다.

용하는 이 당시 술에 관한 한 어떤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20 대 초반에 항용 있는 풋술 정도가 아니었다. 당시 괴뢰 만주국을 쥐고 흔들던 일제동군부는 만주의 경제체제를 어느 정도 사회주의 방식으로 통제하고 있었다. 명분이야 어떤 것이건 그런 경제통제방식이 원료나 인력의 수탈에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주당들에게는 별로 바람직하지 못한 세상이었다. 즉 오후 오시 이후에라야 술을 먹을 수 있었으며 그것도 감질나는 분량의 배급제였으니까 말이다. 한 사람에 대한 하루 배급정량은 일장에 맥주 이잔 마실 수 있는 표 이장이었다. 즉 하루에 맥주 사 잔이 배급정량이다.

이때 용하는 맥주 사 잔으로는 주량을 채울 수 없을 정도의 만만찮은 주당이었다. 그는 거의 매일 저녁, 표를 사서 줄을 서가지고 술을 받아 마시려고 맥주 집에 서 있었다. 으레 술을 못 마시는 오현명을 데리고 갔다. 현명의 표 2장 몫까지 마시면 맥주가 8 잔이다. 옆에서 그의 술잔을 세어본 어느 날 현명은 그것이 18 잔까지 올라가는 것을 확인했다. 술 못 마시는 사람들의 표를 몽땅 바꿔 마신 것이다. 요즘 생맥주 500cc 가량 되는 나무잔이었다. 그렇게 마시고서 『어 시원하다. 이제 살 것 같구먼』하는 용하의 주량에 이미 다른 합창단원들도 익숙해 있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압도당한 것도 사실이다.

20세가 못돼 이미 시작된 그의 음주 벽은 섣부른 풋내기 음악가의 왁자한 기고만장 이었다기 보다는 그 자신, 음악, 그리고 민족, 나라에 대한 설움을 애꿏게 풀어보려는 몸부림이었다. 그런 성벽은 노갑이지하는. 벙어리 냉가슴 앓듯 자학적인 그렇지만 겉으로 말을 않고 속으로 삭이는 못난 수더분한 우리 동포의 속성이기도 했다. 용하의 주량을 채워주느라고 맥주집에 거의 함께 동행을 해주던 현명에게 겸연쩍고 미안했던지 용하는 어느 날

『자네 왜 제 몫으로 나오는 그 좋은 술을 안 먹고 모두 나에게 빼앗기나. 

오늘은 내가 뺏지 않고 않을 테니 안마셔 보려나』

하고 술을 권했다.

『글세, 이때까지 술이라곤 입에 대어본 적이 없어 겁이 나는 걸』

『아마 자네가 이때까지 맛보지 못한 다른 세계가 있을 걸세』 

용하가 이렇게 부추기는 바람에 현명은 그날 자기 몫으로 배급 받은 맥주 사잔을 모두 

비웠다. 이층 맥주집 계단을 내려오는 현명을 용하가 부축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온 세상이 흔들거리는구먼. 술맛이란게 이런 건가』

『어떤가, 기분이 별로 나쁘지 않지』

 

이 일이 있은 후부터 현명은 자기 몫의 배급맥주를 모두 비우게 됐다. 현명이 용하를 통해 본격적으로 술을 배운 것이다.

봉천의 조선합창단은 활동 삼여 년 기간 동안 합창공연 발표회 두 차례와 방송국 출연도 여러 차례 가졌다. 용하는 어린 나이에 사람을 모아 무엇인가 일을 꾸미는 남다른 리더십을 그 나름대로 얻고 있었다. 그의 봉천음악활동은 1943년에 끝난다. 일이세에 실향한인의 아들로 봉천에 발을 들여 놓은 후 이제는 스무 살이 넘는 늠름한 청년음악가로 성장한 것이다. 그는 좀더 넓은 세계에 뛰어 들어 자기의 가능성을 더 깊이 파보고 싶었다. 

당시 만주의 심장은 일제의 괴뢰 만주국의 수군 신경(장춘의 만주국 시대의 이름)이었다. 그의 마음은 신경으로 달렸다. 우선 수소문을 했다. 당시 만주의 한인거류민단체로 계림회가 있었다. 계림의 신경분회장 이던 이홍조씨가 의주군 비현면 채마동, 즉 용하의 제 2의 고향출신이었다. 용하가 채마동에서 알았던 양마리아 여사가 바로 이홍조옹의 외손녀였다. 용하는 신경계림분회의 사무원으로 일단 직장을 얻었다.

봉천을 떠날 날이 다가왔다. 삼 년이여 동안 고생을 하며 함께 합창을 해오던 조선합창단원들은 그들의 단장 겸 지휘자를 떠나 보내게 된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 『근암(용하)단장석별 기념촬영』도 했다. 그러나 송별연이 없을 수 없었다. 오현명의 아코디언은 다시 마지막으로 전당포 신세를 졌다 용하도 신경으로 간지 얼마후 봉천으로 돈을 우송해 현명은 아코디언을 전당포에서 되찾았다.

 

맨주먹 청년

1943년 만주국 수도 신경. 소위 남방전투에서는 기승을 부리던 일제가 차츰 수세에 몰리는 등 일진일퇴의 숨가쁜 공방전이 벌어지고 있을 즈음 이곳 만주국의 수도 신경은 표면적으로는 적어도 평온한 분위기 속에 잠겨 있었다. 북지방 쪽의 요란한 항일전선이나 국공내전의 입김이 관동군의 아성 신경에는 감히; 스며들 수 없는 듯이 보였다. 종전이 임박할 시기까지 만주대륙의 무연한 벌판 한가운데 자리한 이 도시는 『가식에 찬 평온』의 꿈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용하가 봉천을 떠날 때 신경계림분회 사무원으로 취직이 된 것으로 알았으나 그것은 오산이었다. 나라 없이 남의 땅에 와서 기식하고 있는 백성의 거류민 단체가 사무실을 가지고 있으리라는 것은 너무 큰 기대였다. 회관 같은 것은 꿈에도 생각 못할 일이었다. 이홍주 선생댁이 분회사무실 겸 회의집회 장소였다. 이홍주선생은 신경의 한인사회의 지도자였다. 이선생은 계림분회의 한인들을 이끄는 한편 당시 일제 괴뢰 만주국의 국민회의격인 오족협화회의 대의원도 겸하고 있었다. 당시 말해 이미 연로한 지도자로서 소극적인 항일자세를 지키면서 많은 우리 젊은이들을 거두어준 인물이었다. 용하는 어쩔 수 없이 이선생댁의 식객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李선생댁에는 앞서 말한 량마리아여사가 있었다.

『아 마리아누님 아닙니까. 구 년 만이구만요』

『아니, 용하가 아니요. 이젠 몰라보겠군요. 그 동안 봉천활동이 대단했다면서……』

『대단할 건 없습니다만 앞으로 이곳에서 좀더 힘을 써볼까 합니다.』

고향에서 귀여워하던 용하가 어릴 때의 그 재능대로 헌칠한 청년음악가로 성장해 있는 것에 양여사는 보통학교 교원으로 지내면서 같은 교원이자 친구인 김임순여사와 함께 성가대를 맡아 이끌고 있었다.

『인편으로 전해 들었는데 용하씨가 작곡도 하고 합창단 지휘까지 했다면서』

『예, 모두들 열의껏 해보았지만 여건이 맘 같지 못해서 그리 큰 성공은 못 거둔 편이죠』

『언제 작곡공부는 하고 지휘하는 것을 익혔수』

『그저 혼자 이리 저리 뛰면서 노력했을 뿐, 좀 두서가 없는 편입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해 보픈데 앞으로 어찌 될는지……』

『요즘 내가 김임순이란 친구하고 성당 성가대를 지도하고 있는데 우리가 보통학교 훈도 노릇하랴 또 음악실력도 달려 힘겨운데 용하씨가 맡아보지 않겠소』

이렇게 해서 생겨난 것이 옥명합창단이다. 옥명이란 이름은 이홍주선생이 지어준 이름이었다. 용하는 우선 합창단장으로 있으면서 성당의 올간을 이용해서 작곡연습을 하고 그 습작품들을 합창단원들에게 연습시켜보곤 했다. 또한 이때 용하는 이홍주선생댁에 올간은 물론 축음기 등이 있어 서구의 고전음악에 본격적으로 접할 기회를 가졌다. 이선생댁에는 가톨릭가정답게 고전음악, 음악서적들이 많았다. 당시 만주에는 러시아인들을 비롯한 구미인들이 적잖이 들어와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통한 구미예술의 파급이 대전말기 폐쇄적이던 일본본토보다도 더 활발했다.

용하는 계림회의 한인지도자들을 접하는 동안 이들로부터 촉망을 모은 젊은이였다. 어린 나이에 어려운 역경을 뚫고 자기의 재질을 유감없이 드러내는 그에게는 너무나 자연스런 촉망이었다. 그는 신경에서 당시 이곳에 와서 활동하고 있던 한인 음악가들을 여러 사람 만나게 된다. 이들의 해후는 신경의 한인음악활동에 활력소를 불어 넣었을 뿐만 아니라 해방 후 이 나라 음악계에 커다란 초석으로 변할 계기를 품고 있었다. 용하는 봉천시절과는 달리 신경에는 음악활동을 하고 있는 한인이 여러 명 있다는 것을 알고 우선 이들을 한데 묶어볼 마음을 궅히고 일차 순방을 다녔다.

 일차적인 그의 관심사는 예술활동이 활발한 만주국 수도 신경에서 한인들로만 이루어진 합창단을 만들어 공연을 갖도록 하는 일이었다. 봉천에서처럼 그의 혼자 힘만으로 하기에는 신경이란 곳은 너무나 넓고 수준도 봉천과는 달랐다. 한인합창단을 만드는 일에 앞서 정규적인 음악활동을 벌이고 있는 한인 동지들을 규합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가 처음 찾아간 사람은 빙락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으면서 틈틈이 작곡을 하고 있던 김대현씨(현중앙대예대음악과교수)였다. 난생 처음 만나는 사이였다. 나이도 일곱 살이나 김대현씨보다 아래였다. 그러나 찾아온 취지를 설명하는 폼이나 사람됨으로 봐서 녹녹하지 않은 위인으로 보였다고 김씨는 용하와의 첫 대면을 회상한다.

다짜고짜 교무실로 찾아 들어온 용하에게 김대현은 의외의 눈길을 보냈다.

『무슨 일로 찾아오셨는지요?』

일제의 밀정들이 득시글대던 시절, 생면부지의 청년이 아무 예고도 없이 찾아 왔으니 경계의 주눅이 드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예. 한인』동포로 작곡을 하고 계시다는 말씀을 듣고 이렇게 찾아 왔습니다. 아무 예고 없이 찾아온 것을 허물 마십시오』퍽 어른스럽고 굳굳한 인상이었다.

용하는 자기가 김대현을 찾게 된 이유, 봉천에서의 활약 등을 설명했다. 그는 한인음악가들이 모일 것을 역설하면서 열정적으로 말했다.

『이 넓은 신경바닥에 조선인합창단 하나도 없다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윤형 말씀에 전적으로 동감입니다. 신경교향악단에 김동진씨가 계시니 한번 찾아가 상의해 보십시오. 근간에 한번 모여보십시다.』

이 두사람의 만남은 그 후 용하가 세상을 등지기까지 이십여 년 동안 계속되며 수많은 일화를 뿌렸다. 결국 일곱 살이나 손아래인 용하와 끊을 수 없는 친구 사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 후 친구관계에서 항상 나타난 일이지만 용하는 그의 동년배와는 거의 사귀지 않고 오~십 년 연상의 친구들이 대부분이었다.

신경교향악단에 한인이 있다는 소리를 들은 용하는 당장 찾아간다. 당시 만주에서는 가장 수준이 높은 악단이던 신경교향악단에는 김동진 김성태 등 한인 여러 사람이 일인, 러시아인과 어깨를 겨루면서 활동하고 있었다. 동경 등지에서 정규 음악교육을 받은 이들 교향악단원들은 그를 동키호테같은 젊은이로밖에 처음에는 보지 않았다. 그러나 끈질기게 찾아와 한인음악가들이 모일 것과 한인합창단의 결성을 역설하자 그의 진심은 점차 이해되고 그의 열정은 어느 정도 받아 들여지고 있었다.

한인음악가들의 규합을 휘해 애쓰는 한편 용하는 성당의 옥명합창단을 지휘해서 신경방송국의 조선어방송시간을 통해 몇 차례 작품을 발표했다. 그의 이런 활동은 계림분회 등의 한인사회에 조그만 센세이션을 일으키면서 그가 하고자 하는 음악활동을 가능케 하는 촉매역할을 했다. 그에 대한 한인음악가들의 선입견을 씻는데 적지 않은 공헌을 한 것이다. 용하는 봉천에 온지 넉 달째 되는 사삼년 여름 계림분회 사무원자리를 그만두고 만주국의 예총격인 예문회관의 사무원으로 직장을 옮겼다. 이때 예문회장은 동경의 주간음악신문사 사장을 지낸 음악 평론가『무라마쓰』(村松도미)였다.

봉천시절부터 드러난 일이지만 용하에게는 음악적인 재질 말고도 남다른 재주가 있었다. 같은 일을 하면서도 흩어져서 유기적인 관계를 갖지 못하는 개체들을 한데 묶어 조직화하는 재주였다. 그의 이런 재능은 음악활동뿐만 아니라 술을 마시는 행각에도 다양하게 동원되곤 했다. 어찌됐건 서로 유기적인 관계없이 그저 자기가 속한 부서에서 생계나 꾸려가던 신경의 한인만의 음악가들은 난데없이 뛰어든 한 젊은이의 저돌적인 활약으로 순수한 한인만의 음악활동을 벌일 계기를 갖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재만조선인 연합합창단. 합창단원들은 대부분 신구교의 성가대원들이었다. 

창단공연 작품은 제 일부 윤용하, 제 이부 김대현, 제 삼부 김동진작곡의 대합창곡이었다. 신경교향악단이 연주를 하고 신경방송국에서는 실황을 중계했다. 사삼년 가을에 있었던 이 합창공연은 한인음악가들에게는 감격스런 일이었다. 한인작품을 한인만으로 이루어진 합창단이 노래 부르고, 콧대 높은 일인들이 주축을 다룬 신경교향악단이 협연을 했으니 말이다. 이들 한인음악가들은 이후에도 협화회관을 통해 몇 차례 작품발표회를 가졌다. 관현악곡의 작곡은 김동진-김성태가, 합창곡 작곡은 윤용하-김대현이 맡아 일하였다.

그는 이런 활동 이외에도 그 자신이 혼자 백조합창단을 만들어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다. 용하는 백조창단공연에 멀리 봉천에 있는 친구 오현명을 불렀다.  현명으로 하여금 그가 작곡한 독창곡 『독백』을 부르게 하려는 의도에서였다. 또한 용하의 마음속에는 음악에 관한 한 신경보다 변경인 봉천에 틀어박혀 있는 현명을 큰 곳으로 끌어내 새 물을 마셔 보게 하는 한편 현명의 훌륭한 목소리를 신경음악계에 소개하려는 뜻도 들어 있었다. 전보를 받고 신경으로 달려온 현명은 잊지 않고 불러준 친구가 고마웠다.

 


윤용하(요셉)와 가톨릭 음악 

 

1959년 봄에 찍은 사진, 사제 (아마도 대주교님, 2차 공의회 전 복장] 왼쪽에 신사복을 입은 분이 윤용하님.. 이곳은 어데일까? 아마도 재직할 당시의 학교가 아닐까..

1959년 봄에 찍은 사진, 사제 (아마도 대주교님, 2차 공의회 전 복장] 왼쪽에 신사복을 입은 분이 윤용하님.. 이곳은 어데일까? 아마도 재직할 당시의 학교가 아닐까..

우리에게 가곡 <보리밭>과 동요 <나뭇잎 배>의 작곡자로 알려져 있는 윤용하(요셉)는 가난한 옹기장이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운 환경 아래에서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가톨릭 음악을 위해 사용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우리나라 가톨릭에는 종교 가요와 주일 학교용 노래가 너무 없어서 탈이요“라는 말을 자주 할 만큼 가톨릭 음악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실천하는 삶을 살던 가톨릭 음악가였다. 

그가 떠난 지 40년 조금 못 미치는 현재, 비록 몇 편 되지 않지만 그가 잡지나 신문에 기고했던 글들을 통해 그의 생애와 함께 그가 한국 가톨릭 음악을 위해 고민했던 점들을 되돌아 보고자 한다.

윤용하는 1922년 3월 16일 윤상근 (가롤로)과 이 마리아의 9남매 중 첫째 아들로, 천주교가 비교적 활발하던 황해도 은율군 일도면 농림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윤용하의 조부 때부터 가톨릭 신앙을 갖게 되었는데 윤용하의 부모도 적극적인 교회 활동을 벌이지는 않았지만 신앙심이 매우 깊은 사람들이었다. 이와 같은 가정 환경에서 출생한 윤용하는 태어나서 5일만에 어머니의 품에 안겨 은율(殷栗) 본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 후 윤용하는 세살 때 평북 의주군 비현면으로 외할머니의 등에 업혀 이사를 갔고, 그는 그 지방 성당(비현 본당)에서 처음 오르간을 구경했다고 한다. 

윤용하는 어릴 때부터 노래를 좋아해서 부활절이나 크리스마스 같은 대축일에는 독창으로 성가를 불렀고 연극에도 출연하여 본당 신부와 주일 학교 선생들의 귀여움을 받았다.보통학교 5학년 때 그는 옹기장이인 아버지를 따라, 만주의 봉천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보통학교 과정을 마쳤다. 만주의 가톨릭 교회에서 합창단원으로 활동하면서 음악에 더욱 심취한 그는 당시 심양 관현악단의 일본인 지휘자 가네코 로부터 틈틈이 작곡과 화성학을 배웠다. 그 후로는 음악적 경험을 바탕으로 거의 독학으로 음악 공부를 하며 합창곡과 동요곡을 작곡하였다. 

 

이 사진은 언제 찍은 것일까? 정면은 분명히 노기남 대주교님일 듯 한데 앉아 계시는 서양 신부님은? 입맞춤을 하는 이는 분명히 윤용하님일 것이다.

이 사진은 언제 찍은 것일까? 정면은 분명히 노기남 대주교님일 듯 한데 앉아 계시는 서양 신부님은? 입맞춤을 하는 이는 분명히 윤용하님일 것이다.

 

그의 나이 17세 때 윤용하의 신덕과 음악적 재질을 일찌감치 알아본 어느 프랑스인 신부가 그를 음악 신부로 키우기 위하여 프랑스에 유학을 보내려고 하였다. 윤용하 자신도 신부가 되어 교회 음악에 공헌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지만. 장남이라는 이유로 반대하는 부모의 고집에 꺾여 절호의 기회를 놓쳐 버리고 만다.

 

이 사진은 '아마도' 성당에서 성가대를 지휘하는 모습이 아닐까..

이 사진은 ‘아마도’ 성당에서 성가대를 지휘하는 모습이 아닐까..

 

음악에 대해선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그는 19세때에 이미 ‘만주 작곡가 협회’ 회원과 봉천 조선이 합창단 단장으로 , 그리고 신경 가톨릭 성가대 지휘자로서 아름답고 경건한 멜로디로미사곡을 편곡 지휘하였으니 모두들 윤용하를 ‘신동’이라고 칭송하였다. 그의 나이 스무살 때이미 처녀 작곡한 칸타타(교성곡)<조선의 사계>를 봉천 기념 회관에서 직접 지휘하여 봉천 조선 합창단의 합창과 봉천 방송 관현악단과의 협연으로 공연하였다. 

1년후 윤용하는 신경으로 옮겨가 ‘백조 합창단’을 직접 조직하여 자작곡 합창 발표회를 두세 차례 갖기도 하였다. 그는 일제 말기에 징병으로 끌려가던 도중 탈출하여 간도에 피신한 후, 간도 사범 학교에서 교편을 잡기도 하였다. 광복 후 만주 용정으로 이사를 간 그는 용정 사범 학교에서 음악 강사 자리를 얻어 일하게 되었고, 또 이곳에서 결혼을 하였다. 결혼 후 그는 함흥으로 발길을 돌려 함흥 영생 여자중학교에서 다시 교편을 잡았으나 공산 정권의 예술 어용화 정책에 염증을 느끼고 1946년 아내와 함께 밤에 보따리를 싸 가지고 월남하게 된다.

 

가톨릭 음악인으로서의 고민과 노력

 그를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의 삶을 회고할 떄 빠지지않는 것이 그의 ‘신앙’과 ‘작곡’과 ‘술’이다. 그가 살던 시대가 시대인지라 그가 막걸리를 들지 않은 날은 이상한 날로꼽힐 만큼 현실의 불만이나 불우한 처지를 술로 달래며 기염을 토하곤 하였다. 그는 안주 없이 술을 마시는 걸로유명했다고 한다. 하지만 자신이 그토록 좋아하는 술을 아무리 많이 마셔도 주정을 하지 않고, 마실수록 조용해지고 수줍어지는 것이 그의 특징이었다. 하지만 술로 인해 자신의 신앙 생활을 게을리 하지는 않았는데, 사순절 기간인 40일동안만은 술을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았던 사실로 그의 신앙심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평소 어린이를 사랑했던 그는 자신이 어린이들을위해 할수 있는 일은 어린이들이 부를 아름답고 건전한 동요를 많이 만드는 일이었다. 특히 가톨릭 신자인 그의 입장에서는 주일 학교 아동들이즐겨 부를 수 있는 동요를 많이 만들어서 보급하는 일이었다. 또한 그는 당시 주일 학교에서 성인용 성가책을 사용함으로써 어린이들이 부르기 어렵고, 성장기에 있는어린이들의 건강상으로도 좋지 못하다는 점을 제시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어린이를 위한 성가책을 다시 편찬하여야한다고 주장하였는데, 편찬 요령에 대해서는 그가 당시 <가톨릭 청년>에 기고했던 <주일학교성가 소고>라는 글에 잘 나타나 있다.

1) 어린이 성가 편찬위원회를 조직하되 여기에는 성직자, 시안, 작곡가, 가톨릭 음악 지도자들로 구성해야 된다. 만일 한두 사람이 책임을 지게 된다손치더라도 이러한 모임을 거쳐야만 내용이 충실한 성가책이 엮여져 나오게 될 것이다.

2) 내용에 있어서는 현재의 성인 성가책을 중심으로 하되 가사를 어린이들이 해독하기 쉽게수정해야 될 것으로 생각되며, 때에 따라서는 성가를 시인과 작곡가에게 위촉해서 새로운곡을 만드는 것도 좋을 것이다.

3) 성가책이 나온 후에 성가 지도자와 주일 학교 선생들을 한자리에 모시고 어린이 성가책의출판에 대한 취지와 곡에 대한 해설, 또는 시에 대한 해설도 하여서 가르치는 선생님들로 하여금 가사의 뜻과 곡의 내용을 알리도록 하는것도 뜻이 있다고 생각된다.

4) 편찬된 곡 중에서 추려서 레코드에 취입하도록 해야한다. 우리 신자들의 가정들에서도 축음기를 많이 가지고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신자들 가정에서 어떠한 레코드판을 가지고있는지 추측하기 곤란하나, 사회물이 많을 것이다. 물론 현재까지 레코드를 제작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도 사실이다. 이런 기회에 어린이 성가레코드판을 제작하여서 신자들의 가정은 물론이려니와 일반 사회에도 내놓아서 어린이 성가를 통한 전교에도 힘씀이 필요하다고 본다.

5) 우리 가톨릭 어린이들의 정서를 함양하기 위해서 일 년에 한두번씩 정기적으로 음악회를가질 필요가 있다. 이러한 기회를 줌으로써 어린이들을 점점 성당과 더 가까워질 것이며 또한 주성모님을 더욱 공경하게 되는 기회가 될 것 이다. 이러한 음악회에는 꼭 성가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유명한 곡목을 택해서 음악적인 시야를 넓혀 주도록 해야 될 것이며, 이러한 기회에 음악에 국한할 것 없이 무용, 연극 등오 같이 할수 있도록 하면 더욱 좋으리라고 본다.

6) 이러한 음악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나타낸 단체나 개인을 선출하여 가지고 그들을 장려하기 위한 표창도 해야 될 것이고, 떄에 따라서는 방학이나 공휴일을 이용하여 지방 순회 연극회 등을 가져서 지방 어닐이들의 문화 향상에도 도움이 되도록 하여서 어려서부터 지방 어린이와 도회지 어린이들과의 사이에 따뜻한 친밀감을 가지게 한다.

앞의 글에서 볼수 있듯이 그가 얼마나 어린이들을 사랑했으며, 어린이들을 위한 성가를 만드는 데 많은 고민과 노력을 했는지 알 수 있다. 이에 그는 아동 문학가인 이석현(세바스티아노)과 친분을 맺고 그의 동요 20여 작품을 노래로 만들었으며,그 작품중에서는 <가톨릭소년의 노래>,<성당 종> 등 주일 학교 어린이들이 부를 노래도 있다.

 

<가톨릭 소녀의 노래>

떠오른 아침 해는 예수님 마음

그 햇빛 그 사랑을 담뿍 받아서

하늘처럼 푸르고 높이 자라는

천주님의 착한 아기 가톨릭 소년

늘 함께 돌보시는 성모님 은혜

호수천신 손목 잡고 참다이 살자 

 

<성당 종>

성당 종 칩니다. 뗑뗑뗑

성당 종 칩니다. 뗑뗑뗑

어서 모여라 마을 아이들

신부님의 검은 수염 손을 펴들고

 

윤용하는 주일 학교 동요를 작곡하는데 만족하지 않고 주일 학교용 동요집 출판을 위해 이석현과 만날 때마다 얘기를 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윤용하는 천안 복자여자고등학교 교가를 작곡했고, 몇몇 신부들의 회갑 축하곡도 작곡하였으나 끝내 동요집 출판은 나오지 못하였다. 한편 그는 어린이뿐만 아니라 청소년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과 사랑을 갖고 있었다. 특히 당시 대다수의 가톨릭 청소년들이 성가보다 유행가를 자주 부르는 모습에 대해 걱정하고 있었는데,이는 그가 1964년 1월 <가톨릭 청년>에 기고했던 <가톨릭 청소년과 음악>이라는 글에 잘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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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윤용하님의 전쟁중 가톨릭 신앙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들이다. 전방이건 후방이건 야외미사의 모습들.. 절박한 미사였을 것이다

 

이처럼 그는 앞으로 한국 가톨릭 교회를 이끌어 나가야 할 어린이와 청소년에 대해 가톨릭 음악 부문에 있어서 고민하고 해결하고자 하였다. 또한 그는 전체적인 한국 가톨릭 음악계에 대한 고민도 많이 했음을 알 수 있는데, 특히 그가 강조했던 점은 한국 가톨릭음악계를 이끌어 갈 조직체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는 당시 가톨릭음악계가 처한 문제점 들을 본당의 지도자들과 가톨릭음악가들이 함께 뭉쳐서 해결해야 한다고 하면서 바람직한 가톨릭 음악의 방향 제시와 음악가들의 사명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수 있다.이처럼 한평생 가톨릭 음악에 대한 고민과 실천의 삶을 살았던 그의 소원은 앞에서 잠깐 언급되었다. 가톨릭 주일 학교용 동요집’과 자신의 작곡집 출판, 그리고 자신이 만들었던 ‘대한 어린이 합창단’의 재건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게 소원했던 그의 작곡집은 그의 사후 7년 후인 1972년 4월 19일에야 출판되었다.

 

맺음말 

그는 평생을 자기 소유의 집을 지닌 일이 없이 단칸 셋방살이를 전전할 만큼 가난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가난했지만 그는 자신의 예술적 혼을 가톨릭 음악에 헌신하고자 노력했던 사람이었다. 부모의 반대로 자신의 어렸을 적 꿈인 음악 신부로의 꿈이 깨어졌지만, 그 못지않은 가톨릭 음악활동과 믿음을 가졌던 사람이었던 것이다.그가 작곡한 <보리밭>의 가사 중에 ‘옛 생각이 외로워 휘파람 불면 고운 노래 귓가에 들려 온다’ 라는 구절이 있다. 어쩌면 우리가 휘파람 불면서 흥얼거리는 이 노랫소리가 하늘에 있는 그의 귓가에까지 들릴 것이고, 그는 그 소리를 안주 삼아 기분 좋게 술을 마시고 있지 않을까…

 


 

음악평론가 이상만씨 회고

 

윤용하 는 주일 학교 동요를 작곡하는데 만족하지 않고 주일 학교용 동요집 출판을 위해 이석현과 만날 때마다 얘기를 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윤용하 는 천안 복자여자고등학교 교가를 작곡했고, 몇몇 신부들의 회갑 축하곡도 작곡하였으나 끝내 동요집 출판은 나오지 못하였다. 한편 그는 어린이뿐만 아니라 청소년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과 사랑을 갖고 있었다. 특히 당시 대다수의 가톨릭 청소년들이 성가보다 유행가를 자주 부르는 모습에 대해 걱정하고 있었는데,이는 그가 1964년 1월 <가톨릭 청년>에 기고했던 <가톨릭 청소년과 음악>이라는 글에 잘 나타나 있다.

 

우리 가톨릭 청소년들의 입에서 우리 나라와 일본의 유행가나 또는 동서양에서 유행되고 있는 샹송, 재즈 등의 노래가 불려지고 있다는 현실에 비추어 볼 때에 내가 한 바를 써보기로 하겠다.

샹송을 유행시킨 불란서 ‘파리’에서도 그 자취를 감추기 시작하고 고전 음악으로 되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우리 가톨릭 청소년들은 명심해야 되며 또 가톨릭 청소년들을 직접적으로 간접적으로 지도하고 계시는 분들은 더욱 이런 점에 대해서 정신을 가다듬어야 될 것이다. 왜냐하면 청소년들이 가사나 곡이 저속한 것을 부르고서 고해 신부님 앞에 어떻게 무릎을 꿇겠는가 말이다….(중략)…. 우리 가톨릭 청소년들이 다른 일반 청소년과 다름없이 유행가라면 덮어놓고 모조리 부른다면 무엇 때문에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지를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중략)… 물론 교회의 사정에 따라서 청소년들을 위한 건전한 오락 시설도 없으려니와 성가를 부르고 싶어도 성가 연습실 지도자의 결원 등으로 여의치 못한 교회도 있으리라고 생각되지만 적어도 가톨릭의 청소년이라면 주일날 성가 책 한 권쯤은 들고 미사에 참례해야 될 것으로 생각되는데 반해서 도리어 어린이와 노인들이 가지고 와서 성가대들을 부르는 것을 쫓아서 부르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현실은 기현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가톨릭 청소년은 깨끗하고 곱고 아름답고 거룩한 노래를 부름으로써 정신을 가다듬고 하루의 생활을 남보다 더 훌륭한 생활을 보내도록 해야만 의의가 있는 것이다…(중략)… 끝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십이단의  봉헌경신공 경문 중에 ‘내 소리를 드림은 네 아름다움을 노래하기 위함이요’라고 聖句를 명심하여 주기를 바라며 이만 그치는  바이다.

 

얼마 전 그의 유족들이 보관하고 있던 그의 비망록을 살핀 일이 있다. 300원 500원,… 거기에는 만년에 그가 폐인 되다시피 하여 이곳 저곳 구걸하러 다닐 때에 추념을 해 주었던 사람들의 이름과 액수가 적혀 있었다. 대부분 동료 음악인들의 이름이 거기에 적혀 있었는데, 어떤 어떤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 있는가 하는 호기심보다도 그 비망록이 그렇게 소중하게 간직된 까닭이 사뭇 나의 눈시울을 뜨겁게 만들었다. 친구들의 신세를 졌지만 그 신세 갚음을 잊지 못하고 눈을 감은 사람이 윤용하였다.

 


 

작곡가 윤용하 40주기 작품 연주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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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용하 40주기 작품 연주회 포스터: 이 사진의 님은 언제의 모습일까.. 태극기의 모습으로 6.25 전쟁 중이 아니었을까?

 

2005년 윤용하선생을 기리고 그가 남긴 아름다운 음악 세계를 되새기기 위해 그와 음악을 함께 했던 동료 음악인들이 모여 「늘 금밖에 섰던 남자 – 윤용하, ‘보리밭’의 추억」이라는 타이틀로 지난 20주기에 이어 두번째로 「작곡가 윤용하 40주기 작품연주회」를 엽니다.이 나라의 음악을 사랑하는 모든 분들과 함께 점점 잊혀져 가는 우리의 정서를 보리밭의 추억과 함께 아름다운 옛 추억을 일깨워 드리는 자리가 되고자 합니다.

■ 일시: 2005년 10월 26일(수요일) 오후8시

■ 장소 : 호암아트홀

 


 

2005년 문화예술 발전 유공자에 대한 <보관문화훈장> 추서

훈장을 받는 여성은 윤용하님의 (남매 중) 따님일 듯..

훈장을 받는 여성은 윤용하님의 (남매 중) 따님일 듯..

 

짧은 인생을 오로지 음악에만 몸던져 가난과 몰이해, 

전쟁의 참담함 속에서도 순수한 열망과 불타는 의지로 

우리의 아름다운 정서와 곧은 민족혼을 끊임없이 노래했던

작곡가 윤용하. 역류해 가면서 한 시대의 아웃사이더로 

늘 금밖에 섰던 남자, 윤용하.

 

티없이 맑은 선율과 그의 고고함을 우리 가슴에 묻고 

우리 곁을 떠난지 40년이 지난 지금, 

우리나라 문화예술에 기여한 공적을 기리는 2005년 문화훈장

음악부문에 윤용하 선생이 선정되었습니다.

 

시상은 오는 10월 15일(토) 오후 3시 전주시 한국소리문화의

전당에서 거행되는 ‘문화의 날 기념식’에서 실시되었다 

 


 

고 윤용하 선생 40주기 추모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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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경제 사정과 무더운 여름 날씨 속에서도 기념사업회에 보내주신 관심과 사랑에 진심으로 감사 드리오며, 임원 여러분의 건강을 기원합니다.

기념사업회에서는 올해로 40주기를 맞는 故 윤용하 선생의 기일인 7월 23일(토) 경기도 금곡에 위치한 선생의 묘소에서 아래와 같이 추모 미사를 개최하고자 합니다.

특히 이번 미사는 본 사업회 이사로 계신 백남용 신부님께서 주관하시게 되어 더욱 뜻 깊은 시간이 되리라 생각됩니다. 바쁘시더라도 시간을 내시어 자리를 함께 해 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 일시 : 2005년 7월 23일(토) 오전 9시

■ 장소 :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천주교회 공원묘지

■ 미사 집전 : 백남용 신부

 


 

언론 보도

 

중앙일보 [칼럼] 2005.10.24 (월) 

 

오현명 윤용하기념사업회 회장·성악가·전 한양대 음대 학장

아, 윤용하! 순백의 예술혼이여

올해는 윤용하 형의 40주기가 되는 해다. 벌써 40주기가 되었나 싶게 세월은 화살처럼 흘렀다. 용하 형을 그리워하고 그의 음악과 인생역정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 몇몇이 모여 40주기를 그대로 지낼 수 없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급히 필자를 회장으로 하는 기념사업회를 만들고 정부에 문화훈장 추서를 건의하는 한편 추모음악회도 준비했다. 고맙게도 정부에서는 보관문화훈장의 추서를 결정해 주었고, 추모음악회도 ‘늘 금 밖에 섰던 남자 윤용하 – 보리밭의 추억’이라는 주제를 걸고 내일(26일) 저녁 호암아트홀에서 열리게 되었다.

많은 사람이, 특히 용하 형의 노래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으레 보리밭을 떠올린다. 그의 대표적인 가곡 ‘보리밭’이 우리 국민 누구나 사랑하는 국민가곡이 된 지 오래됐다. 이 가곡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피란 수도 부산에서 박화목 선생의 노랫말에 곡을 붙여 태어났다.

전란으로 인해 메마를 대로 메말라버린 우리네 마음을 푸근하게 적셔주어야겠다는 두 사람의 뜻이 투합하여 만들어졌다. 용하 형의 작품 영역은 넓고 다양하다. 가곡뿐만 아니라 오페라 오페레타 그리고 무엇보다 특히 동요가 두드러진다. 그는 광복 전 20세 전후에 이미 오페라 ‘조선의 사계’를 작곡했고 오늘날에도 어린이들이 즐겨 부르는 동요의 고전이 된 ‘나뭇잎배’ ‘노래는 즐겁다’ 등 수많은 동요를 만들었다. 또한 지금도 우리들이 부르고 있는 ‘광복절 노래’를 비롯하여 ‘민족의 노래’ 등 많은 국민가요를 작곡했다.

용하 형은 광복과 전란 기간 중에 지치고 메마른 우리 국민의 정서를 위로하고 순화시키기 위해 음악활동을 펼쳤다. 그는 특히 어린이들이 전란 속에서도 즐겁고 밝게 자라려면 아름답고 씩씩한 노래들을 많이 불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휴전 이후 그는 서울 중앙방송 어린이 시간의 전속 작곡가 노릇을 했다.

용하 그의 삶 자체가 음악이고 예술이었다. 그는 어떤 가식이나 타협도 용납하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가난을 천형(天刑)처럼 둘러메고 살다가 그 가난을 깔고 누워 세상을 등졌다. 부조리하고 타락한 세계와 끊임없이 불화할 수밖에 없었던 그는 술로써 저항하고 술로써 풀어보려 했다. 그는 패배할 수밖에 없었고 늘 금 밖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광복 직후 나라가 새로 세워지면서 모든 분야에 인재들이 필요했다. 인재들을 키워낼 고급 인재들은 더욱 모자랐다. 그래서 중.고등학교 졸업장과 대학 졸업장이 공공연히 돈으로 거래되었다. 많은 동료가 그 길로 갔고 그들은 용하 형에게도 그 길을 권했다. 그는 거부했다. 초등학교 5학년 중퇴가 그의 정규학력의 전부였고 그래도 그는 그의 천부적 재능으로 10대 말의 나이에 이미 어엿한 작곡가이자 방송국 교향악단 지휘자의 경력을 쌓았다. 대학교수가 되어 가르쳐야 할 그에게 세상은 초.중.고등학교와 대학 졸업장을 요구하고 그것도 부정한 방법으로 구해 오도록 강요했다. 예술적 재능과 노력보다는 학력과 졸업장 그리고 연줄이 더욱 위력을 발휘하는 풍토에서 그는 변두리로 변두리로 밀려났다.

휴전 직후 문화예술인단체의 3.1절 기념식장 소동도 상징적 사건이었다. 내로라하는 문화예술계의 거물들이 기념식을 마치고 다과회를 열고 있었다. 하필 그들은 그날 그 자리에서 일본말로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고 떠들었다. 이미 술이 거나해 있던 용하는 “예끼, 이 똥만도 못한…”이라 고함을 지르면서 테이블을 뒤집어엎어 수라장을 만들어 놓고 휑하니 사라졌다. 그러니 그는 발붙일 곳이 없어졌다.

우리는 용하의 음악을 사랑한다. 그리고 그의 불꽃 같은 순수예술혼을 그리워한다. 자신의 소유로 되어 있던 집이나 악기를 가져보지 못했으면서도 창작열에 들떠 살면서 타협을 모르고 곧은 길을 걸어간 그의 고집에 경의를 보낸다. 허기진 배를 술로 채우며 일으켰던 수많은 소동과 실수에 따듯한 연민의 미소를 보낸다.

우리는 용하에게 많은 빚을 졌다. 그의 생전은 물론이고 그가 세상을 등진 지난 40년 동안 빚 갚을 생각을 못했다. 이제 정부가 문화훈장을 추서했고 추모음악회도 열리게 되었다. 이 보잘것없고 때늦은 보은이 용하 형의 영혼에 위안이 되기를 빌어본다. 용하 형의 40주기 행사를 위해 애써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 드린다. 

 

[한국일보 ]2005-10-24]

‘보리밭’ 윤용하 추모 음악회

가곡 ‘보리밭’의 작곡가 윤용하(1922~1965) 40주기를 맞아 그의 노래들로 구성한 추모 음악회가 26일 오후 8시 호암아트홀에서 열린다. 평생 가난에 시달리며 유랑한 그는 가곡 외에 동요 ‘나뭇잎배’ ‘노래는 즐겁다’ 등 200여 곡을 남겼다.

이번 행사는 그의 음악 동지였던 바리톤 오현명을 중심으로 출발한 윤용하 기념사업회가 주최하는 것으로, 테너 안형일, 소프라노 김영애, 바리톤 오현명, 난파 소년소녀합창단이 출연한다. (02)541-6234 

[중앙일보 이장직 음악전문기자 lully@joongang.co.kr] 2005-10-22

 

윤용하 40주기 가곡의 밤… 국민가곡 ‘보리밭’ 작곡가 추모

황인호의 시 ‘고독’에 곡을 붙인 고(故) 윤용하(1922~65)의 가곡이다. 이 노래는 작곡자의 고달픈 삶을 대변해 주는 것 같다. 그는 가족이 함께 살지 못할 정도의 생활고에 시달리다 43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떴다.

국민 가곡 ‘보리밭’의 작곡자인 윤용하 선생의 40주기 기념 연주회가 26일 오후 8시 호암아트홀에서 열린다. 윤용하의 작품만으로 꾸미는 음악회는 85년 20주기 추모 음악회를 연 이후 두 번째다. 올해 40주기를 기해 정부는 그에게 문화훈장을 수여했으며, 최근 기념사업회(회장 오현명, 부회장 이부영)가 공식 발족했다.

1922년 황해도 은율 태생인 고인은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가곡, 동요 등 주옥 같은 작품들을 숱하게 남겼다. 동요 ‘나뭇잎 배‘ ‘노래는 즐겁다‘, 정인보 선생이 가사를 쓴 ‘광복절 노래‘가 가장 유명하다. 한국 전쟁 당시에는 종군 작곡가로’사병의 노래’ 등 군가를 작곡했다. 이 밖에도 미완성 오페라 ‘견우 직녀’, 오페레타 ‘해바라기 노래’, 교향곡 ‘개선’, 교성곡 ‘조선의 사계’등이 있다. 하지만 아직도 귓가에 맴도는 것은 역시 서정적 선율로 가득한 가곡과 동요다.  ‘보리밭’은 고인이 부산 피란시절 박화목 시인에게 국민의 마음을 달래 줄 서정 가곡 한 편을 만들자고 제안해 가사를 받아 쓴 작품이다.

이번 음악회에는 1940년 고인과 함께 ‘조선합창단’을 창단했던 바리톤 오현명씨를 비롯, 테너 안형일, 소프라노 김영애, 피아니스트 정진우, 서울신포니에타 등이 출연한다. 02-541-6234. 

[조선일보 김성현 기자] 2005.10.21

 

백발의 음악가들 무대에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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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서울 광진구 구의동의 한 스튜디오. 피아니스트 정진우(77)씨의 반주에 맞춰 바리톤 오현명(80)씨가 윤용하의 가곡 ‘독백’을 나지막이 부르기 시작했다. 정씨의 박자가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려고 하면, 오씨는 연방 “스타카토는 두 번이야”라며 잔소리를 했다.

곁에서 노래를 듣고 있던 테너 안형일(78)씨가 “늙어서 그런지 요즘엔 도통 가사가 외워지질 않아”라고 푸념했다. 이번엔 정씨가 “아무 거나 딴 가사로 부르면 되잖아. 예전에 오 선생이 그랬다며…”라고 핀잔을 주자, 오씨는 “내가 뭘…”이라 뾰로통한 표정이다. 하지만 금세 이들은 입맞춰 ‘보리밭’과 ‘민족의 노래’를 함께 불렀다. 윤용하. 40년 전 세상을 떠난 친구인 ‘보리밭’의 작곡가를 옛 친구들이 연주회로 기린다.
 

[문화일보 김순환 기자] 2005. 10. 20

‘보리밭’ 작곡 윤용하 40주기 음악회

(::26일 서울 호암아트홀서::)

 

가곡 ‘보리밭’을 작곡한 고 윤용하 선생의 40주기를 기리는 음악회가 열린다.

윤용하기념사업회가 오는 26일 오후 8시 서울 호암아트홀에서 여는 ‘늘 금밖에 섰던 남자, 윤용하 ‘보리밭’의 추억’음악회는 지난 85년 20주기 연주회에 이은 20년만의 행사이다.

이번 음악회에는 바리톤 오현명, 테너 안형일, 소프라노 김영애, 파아니스트 정진우 씨, 난파 소년소녀합창단, 체임버 서울신 포니에타(지휘 김영준) 등이 출연, ‘보리밭’‘뱃노래’‘동백꽃 ’‘노래는 즐겁다’‘나뭇잎 배’‘추억’ 등 그의 대표작들을 들려준다. 

특히 1940년 윤용하와 함께 ‘조선합창단’을 만들어 활동했던 오현명 한양대 명예교수도 무대에 올라 ‘독백’ 등 2곡을 부를 예정이다.

고 윤용하 선생은 1922년 황해도 은율 에서 태어나 지난 65년 43 세라는 젊은 나이로 요절했다. 그는 시대와의 불화와 가난 등으로 고달픈 삶을 살았으나 가곡과 동요 등에서 주옥 같은 작품들을 남겼다.

그는 6·25 전쟁 때에는 종군 작곡가로 참여해 군가 ‘사병의 노래’등을 작곡했으며, 이후 가곡 ‘보리밭’ ‘동백꽃’등과 동 요 ‘나뭇잎 배’‘노래는 즐겁다’ 등 200여 곡을 작곡했다. 또 ‘민족의 노래’ ‘광복절의 노래’ 등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주옥 같은 노래들을 남겼다. 

고 윤용하 선생은 최근 우리나라 문화 예술계에 기여한 공로로 올해 문화훈장 음악부문 수상자로 선정됐다.

한편 이번 음악회는 동아일보 기자시절 미발표 원고를 발굴했던 이부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 이상철 디자인이가스퀘어 대표, 이형대 캠브리지㈜ 대표 등이 적극 주선해 성사됐다. 

[서울=연합뉴스 이윤영 기자] 2005. 10. 19

 

작곡가 윤용하 40주기 기념 연주회

 

‘보리밭’을 작곡한 고(故) 윤용하(1922-1965) 선생의 40주기 기념 연주회가 26일 오후 8시 호암아트홀 에서 열린다.

윤용하 선생은 1922년 황해도 은율 에서 태어나 65년 43세라는 젊은 나이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시대적 불운과 가난 등으로 인해 짧고도 고달픈 삶을 살다 갔지만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가곡, 동요 등 주옥 같은 작품들을 숱하게 남겼다.

한국 전쟁 당시에는 종군작곡가로서 군가와 ‘사병의 노래’ 등을 작곡했으며, 이후 가곡 ‘보리밭’ ‘동백꽃’ ‘한가위 달’ 등을 비롯해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친숙한 동요 ‘나뭇잎 배’ ‘노래는 즐겁다’ 등 200여 곡을 작곡했다.

우리나라 문화예술계에 기여한 공로로 올해 문화훈장 음악부문 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번 연주회는 윤용하 기념사업회(회장 오현명, 부회장 이부영)와 호암아트홀이 지난 20주기에 이어 두 번째로 여는 그의 작품 연주회다.

바리톤 오현명, 테너 안형일, 소프라노 김영애, 피아니스트 정진우, 난파 소년소녀합창단, 서울 신포니에타(지휘 김영준) 등이 출연해 ‘뱃노래’ ‘동백꽃’ ‘노래는 즐겁다’ ‘나뭇잎 배’ ‘추억’ ‘보리밭’ 등 그의 대표작들을 연주한다.

[동아일보 전승훈 기자] 2005. 10. 19

 

‘보리밭’ 작곡가 윤용하 40주기 추모 음악회

 

가곡 ‘보리밭’의 작곡가 윤용하 선생의 서거 40주년을 기리는 음악회가 26일 오후 8시 서울 호암아트홀에서 열린다. 1922년 황해도 은율 에서 태어난 선생은 1965년 43세에 짧은 생을 마친 작곡가. 가곡 ‘보리밭’ ‘동백꽃’ 등을 비롯해 ‘나뭇잎 배’ ‘노래는 즐겁다’ 등 200여 곡의 동요, ‘민족의 노래’ ‘광복절의 노래’ 등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주옥같은 노래들을 남겼다.

이번 음악회는 1985년 20주기 기념음악회를 연 이후 두 번째. 올해 40주년을 기념해 정부는 그에게 문화훈장을 수여했으며, 최근에는 윤용하 기념사업회가 공식 발족했다.

이번 공연에는 안형일, 김영애, 정진우 씨 등 성악가들이 그의 대표 가곡과 동요를 부른다. 특히 1940년 선생과 함께 ‘조선합창단’을 만들어 활동했던 바리톤 오현명(81·한양대 명예교수)씨도 무대에서 ‘독백’ 등 2곡을 부를 예정이다. 

 


 

윤용하의 작품세계

가곡

1) 보리밭 (박화목 작사)

2) 산골의 노래 (박목월 작사)

3) 독백 (김기영 작사)

4) 동백꽃 (이정호 작사)

5) 고독 (황인호 작사)

6) 자장가 (황해룡 작사)

7) 도라지꽃 (박화목 작사)

8) 뱃노래 (이석현 작사)

9) 한가윗 달 (김도성 작사)

10) 도래춤 (임안서 작사)

11) 달밤 (윤곤강 작사)

12) 어느 군인의 독백 (이영순 작사)

 

국민가요

1) 민족의 노래 (장유점 작사)

2) 무궁화

3) 광복절의 노래 (정인보 작사)

4) 국토아리랑 (이은상 w가사)

5) 우리들의 노래 (이기태 작사)

6) 근로인의 노래 (최숙자 작사)

7) 희망의 노래 (조지훈 작사)

8) 전원의 노래 (이석현 작사)

9) 백일(百一) 용사의 노래 (하한주 작사)  

 

동요

1) 나뭇잎배 (박홍근 작사)

2) 카톨릭 소년의 노래 (이석현 작사)

3) 가을산 (강소천 작사)

4) 가울 수풍 (박화목 작사)

5) 강물과 떼 배 (권태응 작사)

6) 고개길 (이원수 작사)

7) 고개길 버스 (이석현 작사)

8) 고마운 순경 (박화목 작사)

9) 골목길 달 모롱이 (정완영 작사)

10) 구름 (이석현 작사)

11) 굴뚝 (이석현 작사)

12) 귀뚜라미 (이석현 작사)

13) 9.28 노래 (이석현 작사)

14) 널뛰기 (유석준 작사)

15) 노래는 즐겁다 (박목월 작사)

16) 눈 (김영일 작사)

17) 눈온 날 아침 (박화목 작사)

18) 눈이옵니다 (박경종 작사)

19) 다람쥐 (윤석중 작사)

20) 동물원 곰 (이석현 작사)

21) 동화 할아버지 (이석현 작사)

22) 등대 (박경종 작사)

23) 딱따구리와 다람쥐 (박경종 작사)

24) 때때춤 (이석현 작사)

25) 또랑물 (권태응 작사)

26) 매미와 개미 (박경종 작사)

27) 무지개 (박경종 작사)

28) 무지개 다리 (이석현 작사)

29) 버들 강아지 (이석현 작사)

30) 별 (목일신 작사)

31) 봄이 오네 (김영일 작사) 

32) 별님동무 고기동무 (권태응 작사)

33) 산길 (이순희 작사)

34) 산샘물 (권태응 작사)

35) 새나라 새싹 (이석현 작사)

36) 설맞이 (이석현 작사)

37) 성당종 (이석현 작사)

38) 소년 (이석현 작사)

39) 설맞이 (이석현 작사)

40) 싸락눈 (이순희 작사)

41) 아기는 해바라기 (이석현 작사)

42) 아기의 꿈 (홍은순 작사)

43) 아지랑이 (서정봉 작사)

44) 우리 엄마 (이석현 작사)

45) 어린 고기들 (권태응 작사)

46) 어린이날 행진곡 (윤석중 작사)

47) 어린이 명절 (김영일 작사)

48) 어머니 (이석현 작사)

49) 오리 (권태응 작사)

50) 오막살이 집 (김영일 작사)

51) 우리 나라 좋은 나라 (박화목 작사)

52) 우리집 봄님 (이석현 작사)

53) 인형의 자장가 (강소천 작사)

54) 크리스마스 (이석현 작사)

55) 큰 별이 뜨면 (이석현 작사)

56) 편지 (김영일 작사)

57) 풍년노래 (박경종 작사)

58) 피리 (유석준 작사)

59) 함박눈 (이보라 작사)

60) 호박꽃 초롱 (강소천 작사)

61) 할머니 산소 (이석현 작사)

고즈넉한 2015년 1월은..

고즈넉하다:

1. 고요하고 아늑하다.
2. 말없이 다소곳하거나 잠잠하다.

 

이 ‘귀한’ 한글 단어는 분명히 속어나 유행어는 아니다. 조금은 희귀한 말인 것이다. 어디서 이 말을 들었나 암만 생각해 보아도 확실치 않다. 분명히 ‘문어체’인 이 단어는 어떤 ‘고상’한 책에서 보았을 듯 하다. 아니면 고상하고 가슴을 울리는 어떤 ‘서정시’ 에서 였을지도..

한반도에서 태어난 이상, 모르는 한글단어를 들으면 분명히 무슨 느낌을 받는다. 짐작하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짐작에도 분명히 ‘고즈넉한’ 것은 ‘잔잔히 조용한, 다소곳한 조용함, 아늑한 조용함’ 그런 느낌을 준다. 나는 올해 2015년 1월을 지내며 계속 이런 ‘고즈넉한 1월’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집의 일월은 추운 겨울과 겹치는 무언가 쫓기듯 바쁜 달이다. 정월 초하루, 새로니 생일, 크리스마스 12일이 서서히 저물고 나도 저물어 가는 듯한 나의 생일의 느낌, 와~~ 오래 살았다는 느낌을 더해주는 결혼 35주년 기념일.. 등등이 조금은 생각을 하게 만들기에 더 부담을 받는가..  그런 일월을 참 많이 보냈지만 올해는 뜻밖에도 ‘고즈넉한’ 느낌을 받을 정도로 잔잔하고 평화스럽게 보낸 듯 하다. 누구에게 감사를 할 것인가.. 나는 안다.

지난 해 11월에 겨울 맛을 단단히 예고하더니 올해의 이곳 겨울.. 하루가 멀다 하고 빙점을 맴돈다. 암만 생각해도 우리가 이곳으로 온 이후 이곳은 분명히 추워졌다. 지구 온난화와 반대인 것이다. 어찌된 일인가? 다행인 것은 그렇게 기승을 부리던 energy cost가 엄청 떨어졌다는 사실.. 세상은 오래 살고 볼 것인가? 이것은 뜻 밖의 ‘하늘의 선물’ 처럼 느껴지기만 한다. 원인은 확실하지 않지만 그것은 큰 상관이 없다. 없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공짜 선물’도 없을 것 같다.

지난 12월에는 번갯불에 콩 구어 먹는듯한 빠른 속도로 family room flooring 을 비롯해서 그 방을 ‘새 방’으로 꾸며 놓았다. 아마도 현재 우리 집에서 제일 ‘깨끗하고 멋진’ 방일 것이다. 문제는 그곳을 별로 사용할 일이 없다는 사실.. 나의 서재를 그곳으로 옮기려는 계획도 해 보았지만 그렇게 되면 그 방의 멋을 사라질 것이라서 망설이게 된다. 임시 서재로 쓰는 방법도 있어서 생각 중이지만.. 어떨지 모르겠다.

 

family room or my study

family room or my study

 

올해의 성탄은 12 days of Christmas의 정신을 150% 살려서 ‘교회의 권고’를 충실히 받아 드리고 실천을 하였다. 과연 성탄의 의미가 무엇일까.. 아마도 처음으로 생각을 하였을 것이다. 선물을 주고받고 눈을 기다리는 세속 성탄의 유혹에서 나는 과연 얼마나 벗어 났을까? 내년을 다시 기대해 본다. 더 나은 season이 되기를..

너무나 고즈넉한 1월을 지내면 깜빡 한 것 중에는 나의 연례적인 즐거움인 Davos Economic Forum (DEF)을 ‘관망, 감상’하는 것. Forum이 시작되기 며칠 전에 preview를 하긴 했는데 그만 정작 Forum 3일간을 완전히 놓친 것이다. Archive된 video를 보면 되겠지만 어떨까.. 완전히 거품 빠진 맥주 맛이 아닐까?

1월 중에 또 놓친 것은.. Our Winter Classic Dinner란 친지들의 저녁 모임인데.. 그런대로 역사를 자랑한 것이었지만 이것도 너무나 나이를 먹었는지 올해는 별로 큰 관심이 없는 듯하였다. scheduling상에 문제가 있었고 모두들 그렇게나 바쁜지. 하지만 이것도 세월이 흐르고 있다는 표시인지도 모른다. 세월이 지나면 안 변하는 것을 찾을 수가 없으니까.. 아마도 올해부터 이 모임이 없어지지 않을까 하는 잔잔한 우려를 느낀다.

2014 Atlanta SnowJam
2014 Atlanta SnowJam

며칠 전 1월 28일을 지나며 작년 1월 28일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날 낮부터 갑자기 쏟아진 얼어붙는 함박눈으로 집으로 돌아오는 freeway에서 완전히 모든 차들이 ‘얼어 붙어서’ 영하 10도의 밤을 차 속에서 지낸 일.. 그 유명한 2014 Atlanta Snowmageddon, SnowJam 이였다. 그때 하도 고생을 해서 그 이후로는 ‘눈’자만 일기예보에서 들으면 집 밖으로 안 나가기로 생각을 했다. 하지만 현재까지 이 지역에는 한번도 눈이 내리지를 않는다. 앞으로는 어떨까. 2월과 3월도 만만치 않은 snow day들이 있었으니까.

Gas Price: 오래 살다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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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보고 이런 말이 ‘즐거운’ 한숨처럼 흘러 나온다. 집 앞의 BP gas station의 현재 gas price을 보니 조금은 익숙지 않은 숫자.. $1.99란 숫자다. 자동차 기름값.. gas price, regular gas 값 (갤론)이 2불 이하로 떨어진 것이다. 그것도 서서히 내려간 것이 아니고 갑자기 떨어진 것을 보며 느낀다. ‘조금 살겠다..’ 하는 즐거운 모습들을 이곳 저곳에서 볼 수 있다. 드디어 news에도 이것이 등장할 정도다. 언젠가 gas price가 $5을 넘으리라는 예측도 보았다. fixed income에 익숙한 우리로써는 이것은 정말 ‘신나는 달밤’일 수밖에 없다. 근래 몇 년에 걸쳐서 우리는 차를 탈 일이 자꾸만 늘어가고 있어서 ‘기름값’에 신경을 쓰고 있었는데 이렇게 값이 떨어지는 것을 보는 것 그 자체가 즐겁기만 하다. 그러면 왜 이렇게 이상한 현상이 일어나는 것인가? 1970-80년대만 해도 수십 년 안에 석유가 고갈 될 것이라는 암울한 예측도 있었는데 어떻게 석유 공급이 늘어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중동이나 외국의 석유에 덜 의존하려는 미국의 발버둥이 효과를 보아가고 있는지 미국내의 석유 생산이 생각보다 많은지도 모른다. 아니면… Why.. why not, why now?  New York Times의 분석기사를 보니 이제 조금 그림이 그려진다.

결론은… 역시.. It’s simple economics.. stupid! 이라고 할까? 간단한 경제원리가 이곳에서도 역시 작용을 하는가? 2009년 이후 최저로 떨어진 원유값, $50/barrel 밑으로 떨어져다. 무려 55% 가 급속도로 떨어진 것이다. 경제적인 이유는 역시 수요와 공급의 기본원칙일 것이다.

공급은.. 미국내의 자체원유 생산량이 지난 6년 동안 거의 2배로 늘어났다. 그 만큼의 국외 원유 (특히 사우디, 나이제리아, 알제리아 등)는 서로들의 경쟁으로 값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

수요는.. 유럽과 developing countries들의 불경기로 에너지 수요가 줄었고, 자동차의 energy-efficiency가 크게 좋아진 것으로 예전 같은 gasoline-guzzler (덩치가 큰 고철 같은 차들)를 보기가 힘든 것 같은..

100% 다 믿기가 힘들지만, 사실은 지금 gas값이 내려가고 있는 것은, 이렇게 간단한 수요 공급의 법칙 때문인 것이다. 그러면 결과는? 내가 생각하는 것은 물론 ‘주머니 사정’에 큰 여유가 생길 것이다. $4을 넘던 것이 $2 이하로, 반이 떨어지면 나머지 돈은 분명히 다른 곳에 쓰이거나 저축이 될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은 ‘소비’가 될 것이다. 이런 것에 민감한 ‘정치지도자’들은 이런 것을 절대적으로 환영할 듯.. 특히 지역적으로 예외적으로 추운 겨울을 예상하는 Northeast (특히 Boston같은) 지역은 난방비 걱정이 훨씬 덜 해질 것 아닐까?

국제정치 쪽을 보면: 원유값에 거의 모든 경제를 의존하는 산유국들은 정치적인 위기를 맞을지도 모른다. 결과는 확실치 않지만 러시아 같은 나라가 제일 큰 피해자가 아닐까. 미국 내의 사정도 비슷해서, 알라스카, 텍사스, 오클라호마, 루이지애나 같은 주도 재정적인 고통을 받지 않을까?

한때 세계경제, 정치까지 영향을 주던 그 유명한 OPEC은 어떨까? 예전 같으면 이런 상황에서 분명히 원유생산을 줄여서 값을 올릴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그런 power가 없는 듯 하다. 예전 같지 않은 것이다.

여기에도 conspiracy theory (음모 론)이 있을까? 예를 들면, 사우디 아라비아나 미국이 ‘공모’를 해서 그들의  ‘적국’ 러시아, 이란에게 고통을 주기 위해서 원유값을 내렸다는 음모론.. 사실 1980년대에 급락한 원유값은 ‘소련’을 붕괴시키는데 한 몫을 했으니까. 하지만 이런 가능성은 거의 희박한 것이다. 미국과 사우디가 그런 ‘공모’를 한 예가 없었으니까.

언제 다시 원유값이 예전의 수준으로 오를 것인가? 당장 오를 것 같지는 않지만 올해가 지나가면서 다시 조금씩 오를 것이라는 Wall Street의 전망이다. 예전의 역사를 보면 이것은 오르고 내림을 반복하는 그 과정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이런 분석을 보며 생각을 한다. 오래 전 처음 미국에 왔을 때 1불도 채 되지 않는 휘발유 값을 기억하며 자동차의 나라 미국에서 이 휘발유 값이 미치는 영향력을 다시 실감을 한다. $4까지 치오르는 것을 보며, 이제 ‘자가용’의 시대가 끝이 나는가도 생각을 했다. 다른 나라처럼 대중교통수단의 시대가 올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무섭게 갑자기 늘어나는 원유생산을 보며, 이것이야말로 not so fast..란 말이 어울리는 착각이 아니었을까?

조용한, 너무 차분한 그것..

성탄 씨즌이 고요히 우리에게서 떠나갔다. 나의 결사적인 노력으로 성탄의 느낌을 하루라도 더 느끼려 노력을 하며 살았다. 성탄절 며칠 전부터 시작해서 12일을 더 넘기고 ‘연중시기’가 시작되는 때가지 굳세게 견디었다. 작년에 이어 두 번째 ‘성공’한 것이다. 이제는 죽는 날 까지 이런 나의 ‘새로운 성탄절’ 풍습이 계속될 것이다. 왜 성탄절이 있었으며 그것이 과연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계속 생각하는 그런 축제기간이 될 것이다.

요새는 많은 시간을 reading by typing으로 보내고 있다. 두세 권으로 시작한 것이 이제는 거의 10권의 책으로 늘어나고 있고 아마도 계속 늘어날 것이다. 덕분에 그 동안 녹슬어가던 typing도 놀랍게 발전함을 느낀다. 이런 typing의 느낌, 기분이 너무나 좋다. 목표는 역시 typing을 하며 reading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생각보다 쉽지를 않다. 조금만 한눈을 팔면 .. reading도 typing도 망치는 것이다. 물론 typing에 더 신경을 쓰는 단계이지만 언젠가는 reading에 더 신경을 쓸 그런 날이 올 것이다. 이 ‘습관’의 최대 이점은 어떡해서든지 책 한 권을 그런대로 읽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냥 책을 읽는다는 것.. 요새는 생각보다 쉽지 않다. 너무나 중단이 많이 되는 것이다. 이 노력의 결실로 오늘 드디어 Crossing the Threshold of Hope의 reading by typing이 끝났다. 2개월 정도 걸렸나.. website에 수시로 update를 하던 것이지만 이제는 ‘완전한’ update가 될 것이다.

양양이의 승리 勝利

Tobey의 보금자리 앞에서 시위하는 Izzie, 옆에서 보고만 있는 불쌍한..

Tobey의 보금자리 앞에서 시위하는 Izzie, 옆에서 보고만 있는 불쌍한..

결국은 보금자리를 완전히 빼앗기고.. 그나마도 이불에 누운 것만도 다행..

결국은 보금자리를 완전히 빼앗기고.. 그나마도 이불에 누운 것만도 다행..

 

엊그제 찍은 몇 장의 snap 사진을 보고 한참 웃었다. 꽁꽁 얼어붙는 듯한 추위에 이렇게 웃기는 광경은 나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이 모습은 ‘고양이 Izzie가 강아지 Tobey의 보금자리를 멀쩡하게 차지한 것’이다. 우리 집 ‘터줏대감’ 10살이 넘은 강아지 Tobey와 지독히도 lucky한 ‘집 앞에서 데려온’ 고양이 Izzie 가 추운 겨울을 보내는 이 광경에는 많은 뒤 이야기들이 있기에 내가 만에 일이라도 이들 보다 먼저 세상을 뜬다면 인간 가족 못지않게 이들에게도 반드시 의미 있는 작별인사를 할 것 같다.

가끔 사람을 bite하는 고약한 성미를 가진 Tobey는 이제 나이가 들어서 그런 ‘사고’는 더 이상 없지만 ‘전과’의 기억으로 인해서 나를 제외한 나머지 가족에게는 아직도 ‘찬밥’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Tobey는 나에게 거의 ‘맹목적’으로 의지하는데, 나는 그것이 참 훈훈한 느낌이라서 하나도 귀찮지 않다. 솔직히 말하면 찬밥 취급하는 나머지 가족들이 원망스럽기도 하고, ‘사랑이 결여’된 것 같은 싸늘한 느낌을 떨칠 수가 없다.

그런 중에 갑자기 2006년 경에 우리 집에 고양이가 나타났고 어찌어찌 해서 2009년 부터 우리 집 고정 식구가 되었다. 2006년 6월 경.. 잊지도 못한다. 6월 가랑비가 내리던 날 집 앞에서 아기 고양이 소리가 구성지게 들렸고.. 그런 것은 귀신처럼 신경을 쓰는 연숙이 배고픈 애기 고양이를 집 안으로 불려 들여서 먹을 것을 준 것이 인연의 시작.. 보통 집 고양이인 그 baby는 분명히 누가 버린 듯 했다. 너무나 가슴이 쓰린 것을 어찌할까.. 그래도 혹시나 해서 사진을 찍어 동네에 붙여 놓았지만 아무도 claim을 하지 않았다. 고양이 기를 생각은 전혀 못했지만 이제는 choice가 없어서 기르기로 했는데, 때마침 큰 딸 새로니가 Washington DC job 으로 그곳으로 데리고 가서 살았는데 이곳으로 다시 이사를 오면서 우리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런 ‘비 오는 날의 구출’ 특별한 인연이 있어서 기르게 되었지만 제일 골치 아픈 것이 개와 같이 살아야 하는 기구한 운명이었다. 개와 고양이는 옛부터 유명한 관계가 아닌가? 무척 신경이 쓰였고 accidental bite 전과가 있는 Tobey가 제일 문제로 여겨져서 촉각을 세우고 감시를 하기도 했다. 결국은 몇 번 대형사고 직전까지 갔고 우리는 당연히 ‘전과범’ Tobey만 벌을 주곤 했다. 상대적으로 고양이 Izzie는 더욱 보호와 대접을 받기도 했다.

시간이 가며 Tobey의 attack 회수는 줄어들고 서로의 turf만 침범하지 않으며 ‘평화공존’의 상태를 유지하는데 큰 문제가 없게 되었다. 그러면서 서서히 ‘사태의 진실’이 밝혀지게 되었는데.. 모든 accident 의 원인은 Tobey가 아니고 Izzie 였다는 사실. 그러니까 고양이가 강아지를 ‘먼저’ 괴롭히고 심지어는 attack한다는 놀라운 사실.. 그것을 참다 참다 강아지가 defensive하게 된 것을 우리는 반대로 본 것이다.

다른 집에서는 어떨지 모르지만.. 우리 집은 이런 상태에 있다. 한마디로 고양이의 승리인 것이다. 참.. 우리 집에서는 오랜 전부터 고양이란 말을 쓰지 않고 ‘양양이’라는 말을 쓰는데.. 이것이 연구 대상이다. 어떻게 해서 (누가 먼저) 이런 말을 쓰게 되었는가.. 양양이.. 참 재미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