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eld of dreams, trancending time & place, autobio in progress..

성숙한 신앙의 삶을 위해 [9]

기억의 치유

Healing of Memories

Dennis Linn and Matthew Linn

 

마태오 린 데니스 린 신부 지음

염영호 옮김

 

성요셉출판사

1986

 

 

<기억의 치유>는 고통과 불행에서 벗어나 하느님과 이웃 그리고 자기 자신을 더욱더 깊이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고 있다.

고백성사는 우리 자신을 배우게 도는 하나의 과정이다. 용서함으로써 우리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배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다시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우리를 치유하고자 하신다.

 

 

“그리스도의 영혼은 나를 거룩하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성체는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스도의 성혈은 나를 열광케 해 주시고,

그리스도의 늑방에서 나온 물은 나를 씻겨 주시며,

그리스도의 수난은 나를 강하게 만들어 주소서.

오! 착하신 예수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당신의 거룩한 상처 속에 나를 숨겨 주시고,

당신으로부터 떠나지 않게 하소서.

원수들의 손에서 나를 보호해 주시고,

내가 죽을 때 나를 불러 주소서.

그리하여 나로 하여금 성인들과 더불어

영원히 당신을 찬미하도록

당신께 오라고 명하여 주소서.”

 

 

저자소개

린 신부 형제는 미국 미네소타 주 출신으로 한국 예수회와 같은 활동을 하는 위스컨신 관구에 소속해 있다.

그들은 수년 간 정신병원 원목 신부로 일해 오면서 미국 내 여러 대학과 멕시코시티 대학에서 내적 치유에 관한 세미나를 지도했고 세계 각국을 두루 다니며 성령쇄신에 관한 세미나를 지도하고 있다.

한국 가톨릭 성령쇄신 봉사자 위원회의 초청으로 린 신부 형제는 지난 80년과 83년 두 차례에 걸쳐 내한하여 특별 세미나를 지도한 바 있으며 현재 그들은 미국 내에서 성령쇄신 전담 신부로 일하고 있다.

 

 

 

저자 서문

<기억의 치유> 한국판에 부쳐

 

우리가 알기로, 한국만큼 그리스도교가 빨리 성장하는 곳도 없습니다. 지난 1980년 11월에 서울, 대구, 광주, 부산에서 세미나가 개최되는 동안 우리는 한국 교우들의 기도에 대한 갈증을 직접 알게 되었습니다. 서울에서는 3만여 명, 부산에서는 5천여 명의 신자가 치유를 받기 위해 그 추운 11월 밤도 마다 않고 축구 경기장에 모였습니다. 대구에 모인 신자들은 오전 9시부터 이튿날 새벽 5시 반까지 고백 기도하면서 지새웠습니다.

 

이들 세미나가 개최되는 중에 우리는 많은 치유를 체험했습니다. 서울에서는 기도가 끝난 후, 2년 전 교통사고로 반신마비가 된 여섯 살 난 여아가 왼손을 움직이기 시작했으며, 여섯 살이 되도록 언어 장애로 고생하던 사내아이가 말을 하고 노래까지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치유보다 훨씬 깊은 치유는 진실로 통회하면서 지난 기억의 상처들을 용서할 때 일어났습니다. 광주에서는, 예수께서 용서하신 것처럼 깊이 용서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도저히 다 수용할 수 없어서 많은 수의 사람들이 되돌아가야 하는 사태까지 벌어졌습니다.

 

하느님의 도우심 없이는 기도도, 과거의 깊은 상처의 용서도 불가능합니다. 그분의 도우심이 있음으로 해서 한국인의 심령은 자기 아들을 살해한 살인범까지도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지난 1948년 ‘손양원’ 목사의 두 아들 ‘동인’군과 ‘동신’군이 살해를 당했습니다. 억울하게 두 아들을 모두 잃고 만 아버지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런데 아버지 손 목사의 마음에 예수께서 당신의 처형자들을 용서하셨듯이 두 아들의 살인자를 용서하고자 하는 바램이 커 갔습니다. 이틀 후 살인범 ‘안재산’은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자신의 아들들을 살해한 살인범이 사형언도를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손 목사는 경찰 당국에 가서, 그 어떠한 형벌도 자신의 두 아들을 다시 살릴 수는 없으니 그 살인범을 석방할 것을, 그리하여 자기네 집으로 데려가 따스한 환경 속에서 자라게 하여 두 아들이 못다한 일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이리하여 살인범 안재산은 손 목사와 함께 살게 되었으며, 그들은 같이 부산에서 개최된 세미나에 참석했습니다.

손 목사는 원수까지도 용서하신 예수의 용서의 선물을 증언한 아름다운 사랑의 주인공이었던 것입니다.

 

아직까지 기억의 치유가 이루어지지 않은 분들을 위하여 ‘영육의 상처를 치유하시는 예수님’에 이어 이 ‘기억의 치유’가 한국에서 출간됨을 저희는 매우 기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끊임없는 내적 순례와 외부의 구체적인 삶의 여정을 계속해야 할 우리 크리스천들은 먼저 과거의 아픈 여러 상처들을 기억의 창고에서 쓸어 버림으로써 출애굽의 영성을 시도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무한하신 자비와 용서, 그리고 위대한 사랑의 능력으로 오늘도 깨어진 부스러기들 속에 임재하시어 우리 존재의 찢어지고 터진 상처를 치유의 손길로 어루만져 주실 줄 믿습니다.

 

 

기도 속에서

마태오 린, 데니스 린

 

 

 

역자 서문

 

“형님들이 나를 이집트로 팔아 넘겼었지요. 그러나 이제는 나를 이곳으로 팔아 넘겼다고 해서 마음으로 괴로워할 것도 얼굴을 붉힐 것도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목숨을 살리시려고 나를 형님들보다 앞서 보내신 것입니다” (창세기 15, 5).

 

가장 가까운 형들로부터 음모와 거부와 중상모략을 당하고 짐승처럼 팔려 간 구약의 요셉 이야기입니다. 그 쓰라린 내, 외적 상처를 경험한 요셉은 그 경험들을 모두 기억 속에 담고 있었지만 하느님을 마음의 주인으로 섬기고 있던 그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이 아픈 기억을 치유 받고 도리어 형들의 죄의식을 치유시키는 하느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환경과 만나고, 사람과 만나고, 사건과 만납니다. 행복과 불행을 체험하고, 성공과 실패, 슬픔과 기쁨을 체험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평화와 사랑을 갈망합니다. 우리는 내적인 평화를 얻으려고, 또 주위 사람들과 환경 속에서 조화를 이루려고 애씁니다. 우리가 의식하든 안 하든 간에 이러한 갈망은 우리 존재의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사람으로서는 감히 생각할 수 없는 하느님의 평화가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실 것입니다”(필립비 4,7) 하고 말씀하신 사도 바오로의 권고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이처럼 성령으로 충만 되어짐에 따라 우리는 참 평화가 우리 안에서 차츰 실현되어 가고 있음을 경험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내 과거의 주님이시고 현재의 주님이시고 또 미래의 주님이심을 우리는 기억의 치유기도를 통해서 몸소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의 능력으로 우리를 변화시켜 주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자유와 평화를 일상생활 안에서 경험하게 됩니다. 이 말이 그리스도인은 실패나 실망, 상처, 분노, 최 같은 것을 직면하기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런 모든 갈등과 경험 안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평화와 능력을 체험하게 되고 새롭게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어두웠던 면을 포함한 과거 우리 생활의 모든 부분을 예수님께 열어 보이고 그분의 구원의 능력이 이런 상처와 흉터, 숨겨진 죄악들을 모두 없애고 해방해 주시도록 우리 자신을 내맡길 때 주님께서는 우리를 치유해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기억의 치유입니다.

 

우리의 기억 속에는 슬펐던 일, 원통했던 일, 억울했던 일, 방황했던 일, 부끄러웠던 일 등 부정적인 것들이 남아 있습니다. 이러한 과거의 기억들이 현재 우리 자신의 심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볼게 될 때, 우리는 그 기억들을 싫어하고 되고 나아가서 지금의 자신까지 싫어하게 됩니다. 즉 현재에 살면서도 과거의 쇠사슬에 얽매여 내적 자유가 없는 상태에 있게 됩니다. 이 과거의 경험들이 축적되어 있는 기억의 탱크를 누가 깨끗이 해줄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우리의 기억을 깨끗이 해주시고 치유해 주십니다.

 

“마치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낡은 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마태오 13, 52).. 여기에는 고난과 상처를 받으셨으며 어둠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역할과 이 능력을 받는 인간의 역할이 있습니다. 마치 베드로의 발을 씻기는 것은 예수님의 역할이요, 이 씻김을 받는 것은 베드로의 역할이듯이 (요한 13,22) 우리의 나쁜 기억을 씻어 주시고 새롭게 치유해 주는 것은 예수님의 역할이며, 이 예수님의 자비와 사랑(성령)을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 인간의 역할입니다. 기억을 치유하고 새롭게 하시는 주님의 능력을 받아들이고 나아가 그 능력을 기억 소에 받아들이는 사람은 (묵시로 3, 20) 마치 조개의 상처가 진주로 생성되듯이 알게 모르게 자신이 입은 상처들이 진주와 같은 새로운 사랑과 자유로 변화됨을 발견하게 돕니다.

 

“마음이 즐거우면 앓던 병도 낫고 속에 걱정이 있으면 뼈도 마른다”(잠언 17, 22)라고 성서는 말합니다. 이 아픈 기억들을 그냥 둘 경우에는 분노와 노여움과 앙심이 생겨나며, 저주와 앙갚음의 독기운이 퍼져 나옵니다. 기억의 상처는 가슴을 에는 듯한 아픔의 원천이 되는 가 하면 상처를 준 사람에 대한 원한이 되어 칼을 가는 복수심으로 응어리지기도 합니다. 그 응어리는 뜨거운 불길처럼, 차가운 얼음처럼 나타납니다. 이러한 상처들은 돌이킬 수 없는 파탄을 불러 일으키기도 하고 땅을 치는 통곡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가난과 질병, 그리고 버림과 천대를 받으며 살아온 사람들은 주위로부터 받은 기억들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고통스런 기억들이 치유되면 이것은 우리에게 정신적 장애물이 아니라 선물이 될 수 있습니다. 오히려 그런 기억들 때문에 우리는 좀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고, 같은 경험을 가진 사람들을 도와 줄 수 있습니다.

 

시편 139편과 로마서 8장 28절은 기억의 치유를 필요로 하는 분들을 도와 주는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하느님, 나를 살펴보시고 내 마음을 알아 주소서. 나를 파헤쳐 보시고 내 근심 알아주소서. 죽음의 길 걷는지 살피시고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작용해서 좋은 결과를 이룹니다.”

 

성령이 우리를 치유하시고 주님과 하나가 되게 하심에 따라 우리는 형제 자매들과 한 조각의 성체와 한 방울의 성혈을 나누는 새로운 관계, 즉 친교를 이루게 됩니다. 기억의 상처 속에서 고민하는 분들에게 예수님이 곁에 계심을, 사랑과 기쁨의 원천으로 계심을 이 책의 저자인 린 신부님 형제는 설명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쓰라림과 분노를 자비와 사랑으로 어루만져 주시고 변화시켜 주십니다. 그분께서 우리의 상처 가운데 찾아오셔서 나쁜 기억들을 치유하시고 당신의 치유하시는 사랑과 능력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통로와 도구가 되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시는 이치를 이 책은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5년 전 한국어 출판을 허락해 주시고 서문을 직접 한국에서 써 주신 린 신부님 형제에게 이 책의 발간에 앞서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또한 이 책을 위해 감수와 지도를 해 주신 김수창 신부님, 박홍 신부님께 가사를 드립니다. 아울러 이 책의 출판을 맡아 헌신적으로 수고해 주신 성요셉출판사 한종배 사장님과 한주훈 형제님과 그리고 모든 편집부원에게 감사 드립니다.

나는 이 책을 한국 가톨릭 성령쇄신의 발전과 기억의 치유를 필요로 하는 모든 분들에게 바칩니다.

 

“아무 걱정도 하지 마십시오.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으로서는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하느님의 평화가 그 리스도 예수를 믿는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실 것입니다”((필립비 4, 6-7).

 

 

1986년 부활절에

옮긴이 염영호(요한)

 

 

차례

 

저자 서문

역자 서문

 

제1장 치유의 능력

제2장 기억의 치유

제3장 하느님의 선물에 감사 드리기

제4장 그리스도께서 무엇을 치유하고자 하시는지 여쭙기

제5장 치유를 방해하는 고통의 기억을 그리스도와 함께 나누기

제6장 고통의 기억을 용서함으로써 상처를 사랑으로 바꾸기

제7장 고통의 기억에 대해 감사함으로써 상처를 사랑으로 바꾸기

제8장 치유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하기

제9장 다른 기억들과의 만남

제10장 기억을 치유하기 위한 기도

제11장 기억의 치유와 고백성사

제12장 기억의 치유와 분노

제13장 성체성사의 신비와 기억의 치유

제14장 기억의 치유를 위한 매일기도

 

부록 1 기억의 치유와 삶의 재조면

부록 2 치유를 위한 영성 훈련

부록 3 성사와 고백성사

부록 4 고백성사를 위한 준비

부록 5 저자의 한국 강의

 

 

 

 

제1장

치유의 능력

 

 

지금 한 인디안 족의 장엄한 예식에 당신이 참여하고 있다고 상상해보라.  오두막집 안의 더운 열기로 당신의 몸은 온통 땀으로 젖어있고 호흡은 매우 가빠진다. 당신은 수우 Sioux 족의 “감사와 용서의 의식 儀式”에 참여하고 있다. 이글루 모양의 오두막집 한가운데는 빨갛게 달구어진 열 네 개의 돌들이 놓여 있고 그 돌 위로 이제 막 주술사가 물을 뿌렸다. 더운 증기가 당신의 온 몸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마치 강한 햇빛으로 뜨거워진 아스팔트 길 위에 맨발로 서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당신이 온 몸에서 땀을 흘리고 있는 동안, 주술사는 하느님을 향해 네 발 달린 동물들, 날개를 가진 짐승 무리, 두 개의 다리를 가졌으나 날개가 없는 무리 등을 주신 것에 대하여 감사 드린다. 그리고 당신은 땀내나는 오두막집의 문을 열 수 있는 마력을 지닌 <미타쿠예 오야신 Mitakuye oyasin, 모든 존재와 모든 사물이 우리와 친족이 되게 하소서> 이라는 주문을 듣게 된다. 이것은 수우족이 드리는 기도의 끝부분에서 들을 수 있는 주문이다. 친족을 주신 것을 하느님께 감사드린 후 당신은 그 주술사와 함께, 다투고 있는 이웃들을 위하여, 아버지와 싸워 헤어져 있는 아들들을 위하여, 그리고 ‘운디드 니 Wounded Knee’에서 분쟁하고 있는 정부와 인디언들을 위하여 기도한다.

 

친족들을 주신 것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 드리고, 그들과의 우정을 해친 것에 대해 용서를 구한 후, 당신은 바로 옆에 있는 사람과 서로서로 입김을 내쉬기 시작한다. 그러면 당신의 몸 어떤 부분엔가 시원한 공기가 스쳐감을 느낄 것이다. 두통을 앓고 있었다면 머리 주위에 시원한 공기를 느낄 것이고, 우울증이 있었다면 심장에서, 말하기를 두려워하였다면 입술 부근에서 시원한 공기를 느낄 것이다. 이 상쾌하고 시원한 미풍은 용서를 통한 치유를 상징하고 있다.

 

5년 전, 처음으로 이 땀의 목욕에 참여했을 때 나는 치유되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것은 원시적인 미신에 불과할 뿐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정신병동에서 임상치료 사목자로 일해 오면서 그리고 피정이나 워크샵을 지도해 오면서 나는 이러한 용서의 예식이 육체적인 면에서뿐만 아니라 정신적이고 영적인 면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을 치유한다는 사실을 당연시하게 되었다.

여러 가지 잡다한 육체적인 증후들 때문에 정신병 진료소를 찾아왔던 사람들이 자신의 부모를 용서하기 시작하자, 그 모든 증후가 하나씩 사라져 버리는 것을 나는 보아 왔다. 그리고 피정에 참석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들 자신과 이웃 또는 하느님을 용서하고 나자, 전에는 그 자신들이 생각지도 못했던 방식으로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광경도 목격하곤 했다. 지나간 5년 동안 하느님은 나에게 용서야말로 치유를 가져온다고 가르치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고백성사이건 기도이건 간에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용서를 자주 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상태는 변하지 않는 것일까? 사실, 우리는 하느님이나 이웃 또는 자신에게 활짝 열려 있지 못하고 두통, 우울증, 시기, 분노 또는 말할 수 없는 것들로 인해 여전히 괴로움을 당하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치유되기를 원하시는가? 아니면 하느님 곁에 가까이 두시기 위해 연약한 상태 그대로 그냥 내버려두길 원하시는가?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가려낼 수 있는가? 그 해답은 연약함이나 병이 우리를 하느님과 이웃에게 중심을 두고 살도록 하는지, 아니면 더욱더 자기 중심적으로 살도록 하는지를 깨닫는데 있다. 가령 우리가 더욱 자기 중심적으로 되어 가고 있다면, 이것은 하느님께서 치유하기를 원하고 계시다는 표지인 것이다.

 

예를 들어, 소아마비에 걸린 어떤 친구가 세상은 항상 자신이 요구하는 대로 들어 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오히려 그의 이기적인 마음을 치유하고자 하실 것이다. 한편 앞을 보지 못하는 탓으로 남보다 두 배나 더 잘 들을 수 있는 예수회의 신부님이 있는데, 하느님께서는 그분의 먼 눈을 치유하려고 하시는 것 같지 않다. 왜냐하면 더 잘 들을 수 있는 능력으로 인해 그는 어둠 속에서도 하느님께서 우리의 손을 잡으시고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뛰어난 영적 지도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그 분을 장님으로 그냥 내버려 두실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앞 못 보는 것을 통해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고통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고통에 참여하는 소명을 가르친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열 두 제자가 도망한 것에 대하여 한탄하셨던 것처럼, 또 예루살렘에 대하여 한탄하셨던 것처럼 우리 역시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지 못하는 고통을 함께 겪어야 한다. 그분의 말씀을 전하려면 고통 역시 겪게 될 것이다. 우리는 무시당하고 미움을 받을 것이며 머리 둘 곳이 없게 될 것이다 (마태오 10, 17; 요한 15, 18). 그러므로 우리는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기도하지 말고 자기 중심적인 데에서 벗어나 한층 더 그리스도와 함께 할 수 있도록 기도하여야 한다.

그러나 해야겠다고 마음은 먹으면서도 실제로는 그 반대로 살아가는 것이 일반 신도들의 생활일 것이다. 우리는 자신을 개방하고 우리의 삶을 다른 사람과 함께 하고 싶어하면서도, 사실은 마음의 문을 닫고 각각 개별적으로 살고 있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모두지 알 수 없습니다.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로마서 7, 15)라고 고백했던 바오로의 심정처럼 우리 역시 갈등을 겪고 있다.

여기에서 바오로가 의도했던 것은 성령에 의해서가 아니라 율법에 따라 사는 크리스천은 비참함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오로는, 크리스천은 자신을 죄에 죽고 자유를 얻은 새로운 피조물로 느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내적 자유는 성령을 필요로 하는데, 그 이유는 율법은 단지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드러낼 뿐이지만 성령은 그 잘못을 바로 잡을 수 있는 능력을 우리 마음에 불어넣어 주기 때문이다.

“형제 여러분, 우리는 과연 빛을 진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육체를 따라 산다면 여러분은 죽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힘으로 육체의 악한 행실을 죽이면 삽니다”( 로마서 8, 12-14).

인간은 육체에 따르게 되면 점차 자기 중심적으로 행동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크리스천이 되면서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귀의하게 되고 성령의 힘으로 말미암아 죄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중대한 계명을 주신 것은, 닿지 않는 곳에 먹을 것을 매달아 놓고 묶여 있는 개에게 그걸 먹으라고 하듯이 그렇게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는 주인으로서 명하신 것이 아니다. 세리와 창녀들, 베드로, 우도 右盜 등의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용서를 통한 치유가 그분이 그들에게 명했던 대로 하느님, 이웃 그리고 자신을 사랑하도록 만들었다고 분명하게 증언하였다.

그리스어 프네브마 Pneuma는 성령 Spirit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바람, 숨, 공기 등의 뜻도 나타낸다. 당신이 수우족의 의식에 참여항여 머리, 가슴 또는 입가에 느꼈던 영인 프네브마는 와칸탕카 Wakantanka, 위대한 신비, 의 치유 능력을 나타낸다. 크리스천을 위해 하느님께서는 새롭게 태어나 새로운 삶을 가질 수 있도록 우리에게 성령을 주셨다. 수우족이나 크리스천에게 있어서 용서는 치유의 영 Pneuma을 가져다 준다. 그러나 많은 크리스천들이 전혀 치유를 경험하지 못하고 있다. 탕자나 베드로처럼 눈에 띄게 변화되어 새롭게 태어나는 치유를 경험하기 위해서 우리는 고백성사에 성실히 임해야 한다.

 

 

나눔의 주제

(주의: 묵상과 대화는 사고를 활성화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아마 간단히 대답할 수 없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1. 그리스도께서는 치유를 갈구하는 모든 사람들을 항상 치유하셨습니까?

2. 크리스천은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오히려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로마서 7, 15) 라는 바오로의 고백을 반드시 경험해야 합니까?

3. 당신은 고백성사가 더 깊은 치유 경험이 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2장

기억의 치유

 

 

지난 해 정신병원에서 매우 바쁜 한 주일을 지낸 후, 나는 휴식을 취하기 위해 피정에 들어갔다. 이 기간 중에 주어진 한 가지 질문은 “당신은 어느 때에 하느님과 가장 가까이 있다고 느껴집니까?”라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친구가 죽었을 때, 외로울 때 또는 부당하게 비난 받았을 때 등으로 대답했다. 이것은 충격적이었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이 하느님 곁에 가까이 가게 된 경험들은 내 환자들이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 경험들과 매우 흡사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모든 사건은 두 가지 면에서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 하나는 하느님, 이웃 그리고 자신에 대해 우리의 마음을 열어 놓게 할 수 있다는 것이며, 또 하나는 우리 마음을 가두어 놓음으로써 정신병 치료를 받아야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친한 친구의 죽음은 우리가 하느님께 대해 영원히 분노하게 되는 사건이 될 수도 있다. 이별의 아픔으로 인해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깊이 열어 놓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반대로 죽음이 하느님과의 깊은 인격적인 관계를 마련해 주는 외로움을 가져다 줄 수도 있다. 죽음으로 인해 우리의 삶을 새롭게 이해하게 되고 이러한 이해를 이웃과 함께 나누고 싶은 바램을 가질 수도 있다.

 

우리는 이미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 마음을 열어 놓게 된 기억들을 갖고 있다. 이들 기억들을 상기할 때마다 우리 마음은 하느님의 사랑과 평화 그리고 기쁨을 느낀다. 기억의 치유에서는 우리를 묶어 놓는 기억들을 다루고 이 기억들을 성령의 능력으로 바라볼 것이다.

 

기억의 치유는 성서의 어느 시기에서나 나타나고 있다. 이스라엘이 모진 노예생활을 했던 때, 사막에서 방황해야 했던 때를 돌이켜보면, 이 비극적인 시기에 오히려 야훼 Yahweh께 더 가까이 다가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는 요셉이 그의 형제들 손에 의해 노예로 팔려 갔던 이야기를 생각해 보라 (창세기 45장).. 형제의 배반은 요셉으로 하여금 쓰라림과 불신, 복수의 마음을 품도록 속박시키는 계기가 되어 그는 형제들이 그에게 식량을 요구했을 때 거절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요셉은 그 기억을 치유했다. 자신이 노예로 팔려 갔던 일을 상기했을 때, 그는 그 속에서 긍정적인 면을 보고 그것이 그로 하여금 이집트에 자리잡게 해서 이스라엘을 먹여 살리게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신약성서 저자들 역시 계속해서 우리가 사건들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를 묻고 있다. 우리는 아담을 그리스도와 관련해서, 또 십자가를 부활과 관련해서 생각해 볼 수 있을까?

잃었던 아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이야기는 성서를 통해 전개되는 노력, 즉 기억을 하느님의 견지에서 파악하여 기억이 더 이상 우리를 정신적인 불구로 만드는 일이 없도록 하려는 노력을 예증하고 있다 (루카 15, 11). 아버지와 큰아들은 똑같은 기억 – 작은 아들이 자기 재산을 청해서 갈라 가지고 아버지를 떠났던 일 – 을 돌이켜본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 기억을 돌이켜보면서 돌아온 아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래, 내 아들이 많이 성장했구나. 네가 돈을 요구해서 집을 떠나갔기 때문에 과거에 여기서는 결코 이루지 못했던 것을 이제 이루게 되었구나.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풀자.” 한편 큰아들은 자신의 동생을 되돌아볼 때, 동생은 떠나면서 자기에게 일거리들만 많이 남겨 놓았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머리 끝까지 울분이 치솟아 이 잔치를 몹시 못마땅하게 여긴다. 큰아들의 마음을 분개시키고 그를 정신적인 불구상태로까지 이끈 기억이 아버지에게는 희망을 가져다 주고 성령의 평화와 기쁨을 갖고 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요즈음, 하느님께서 나에게 성직을 마련해 주시고 그 성직을 통해 나와 다른 사람들에게 그분께서 하시는 일에 대하여 글을 쓸 수 있는 능력을 주신 데 특히 감사 드린다. 하느님께서 나의 무엇을 치유하고자 하시는지 내가 물을 때, 그분께서는 글을 쓰는 것뿐만 아니라 삶의 모든 면을 더욱더 나누라고 가르치신다.

과거의 많은 사건들이 내가 내 삶을 함께 나누는 것을 방해한다. 예를 들어, 좋은 성적을 얻기 위해 급우들과 경쟁했을 때 나는 그들과 나눔 할 수 없었다. 이러한 경쟁적인 태도는 지금도 뿌리깊게 남아 있어서 내가 모르고 잇는 것이나 다른 사람으로부터 배울 점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길 꺼려하고 나 자신을 나누기를 거부한다. 치유되지 않은 사건들은 지금 이 책을 쓰는 것마저도 방해한다.

 

진심으로 치유 받기를 갈구하고 나서야 나는 그리스도께 질투심이나 경쟁심을 없애고 대신에 당신 성령의 사랑과 가쁨을 함께 나눌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간청할 수 있게 되었다. 그분께 기도하고 간청하는 것 외에도, 나는 과거의 고통스런 기억들이 남겨 놓은 부정적인 결과를 생각하려 하기 보다는 그 기억들이 내 삶에 남겨 준 선물과 은총을 새겨 봄으로써 많은 도움을 얻게 되었다. 한 예로 들자면, 경쟁심은 내가 공부를 더 많이 할 수 있도록 부추겼고, 하느님께 더욱 감사하는 마음을 심어 주었으며, 지금 이 책을 쓸 수 있는 능력도 주었다. 하느님의 사랑이 준 많은 선물들로부터 나는 성장하고 변화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되었다.

기억의 치유에 있어서 우리는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한다. 과거의 상처들이 준 영향에 굴복하여 자기 중심적으로 생활할 것인가, 아니면 성령의 평화와 사랑이 우리 미래를 이끌어 가도록 할 것인가. 기억을 따라 과거의 고통스런 사건들로 돌아가서 그것들을 성령께 되돌려 놓는다면, 과거의 상처들은 더 이상 우리를 묶어 놓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자유를 주시는 성령의 권능이 우리를 지도해 나갈 것이다.

성서에서 하느님이 기억을 치유하신 방법을 곰곰이 생각하면서, 나는 그분의 치유가 우리의 생활에서도 똑같은 방법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즉각적으로 치유하실 수도 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 마음을 움직여 다음과 같이 하라고 부르신다.

 

1.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내려 주신 선물에 대해 감사할 것.

2.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어떤 점을 치유하고자 하시는지 여쭈어 볼 것.

3. 치유를 가로막는 고통스런 기억을 그리스도와 함께 나눌 것.

4. 나를 가두고 있는 상처와 분노, 그 외 다른 감정들을 그리스도께서 물리쳐 주시도록 돕고, 성령께서 고통스런 기억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들을 용서하셨던 것처럼 우리를 용서하여 그 감정의 자리에 성령의 사랑이 자리하도록 도울 것.

5. 고통의 기억에 대해 감사를 드리면서 그리스도께서 상처를 가져 가시고 그 자리에 성령의 사랑을 놓아 주시도록 계속 도울 것.

6. 치유해 주신 것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 드리고 하느님께서 치유하신 대로 행동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할 것.

 

성령께서 치유가 필요한 기억들을 드러내 주셨을 때, 나는 이들 단계 중 전부 또는 몇몇 부분들은 반복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책의 3장에서 8장까지는 각 단계에 들어갈 수 잇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나눔의 주제

 

1. 당신은 요셉의 이야기 (창세기 45장) 와 잃었던 아들에 대한 이야기 (루카 15장) 사이에 어떤 유사점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2. 우선 루카 복음 24장 13절에서 15절까지 읽으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이 자신을 버리고 달아났던 고통스런 기억을 어떻게 치유하고 있습니까?

 

 

개인묵상

 

* 고통스런 기억을 치유한 경험이 있습니까? 있다면 그것을 치유하는 데 어떤 단계들이 있었습니까?

 

 

 

 

제3장

하느님의 선물에 감사 드리기

 

 

한 광신도가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상 像 에 치명적인 손상을 가했을 때 사람들은 몹시 격분하였다. 그 불후의 명작을 복원하기 위해 세계적으로 뛰어난 예술가들이 모여들었다.

그러나 이탈리아에 모인 조각가들은 훼손된 그 작품을 곧바로 복원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피에타 상을 바라보면서 부드럽게 흐르는 선을 감상하고, 고통과 동시에 황홀함을 나타내고 있는 각 부분들을 바라보고 느끼면서 몇 달을 보냈다. 어떤 사람은 손 부분만을 몇 달 동안 연구하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조각가들은 피에타 상에 대해 더욱더 미켈란젤로의 눈으로 보게 되고 미켈란젤로의 느낌으로 느끼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이 조각가들이 불후의 명작을 복원하기 시작했을 때, 그들의 매만짐은 그들 자신을 벗어나 미켈란젤로의 매만짐에 이르렀다.

우리 모두는 미켈란젤로의 손이 아니라 하느님의 손에 의해 흙으로부터 빚어져, 피에타 상을 능가하는 걸작품이 되었다 (창세기 2, 7).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항상 우리를 복원하시는 것에 놀라워할 필요가 없다. 하느님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손상시키자마자 훼손된 부분들을 복원하신다.

치유를 간청할 때, 우리는 곧바로 치유의 상태로 들어가려 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조물주께서 하셨던 것처럼 우리 자신을 알아 보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우리 자신의 무한한 가치를 알기 전에는 치유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 자기 중심적인 행위는, 그것이 비록 아주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피에타 상에 끼쳐진 손상보다 훨씬 더 큰 손상을 입힌다.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곧 하느님께서 미리 마련하신 대로 선한 생활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창조하신 작품입니다” (에페소 2,10).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에 대해 감사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눈으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마음으로 우리 자신을 보게 된다.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을 알게 될 때, 우리는 치유를 청하는 방법을 알게 되고 조물주께서 계획하셨던 대로 온전한 자신이 될 수 있다.

 

성서는 창조주께서 우리를 바라보시는 눈으로 우리 자신을 바라보도록 도와 준다. 예를 들어 창조 과정을 설명하고 있는 창세기는 하느님께서 “하느님의 모습” (창세기 1,27)대로 인간을 지어 내셨다고 할 만큼 인간을 귀중하게 여기셨음을 설명하고 있다. 우리 자신을 하느님의 모상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자신의 모든 신체 부위와 감각기관을 소중히 여기고 창조주께서 하셨던 대로 경건하게 대하여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피에타 상의 손을 바라보았던 조각가처럼 자신의 손을 바라보고 경외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잠시 동안 조용히 자신의 손을 바라보면서 다른 사람의 손과는 다른 독특한 점을 보도록 하라. 그리고 그 손을 주신 데 대해 하느님께 감사하라.

그러나 우리의 손과 같은 선물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도움을 주었는지 알기 전에는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에 대해 충분히 감사드릴 수 없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다른 조각가들과는 달리 당신 스스로 만드신 바로 그 손들 속에서 살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손을 사용하여 다른 이들에게 어떻게 도움을 주시는지 알려면, 먼저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손으로 어떻게 우리를 어떻게 도와주었는지는 쉽게 알 수 있지만, 내가 다름 사람들에게 어떻게 도움을 주었는지 즉 야훼께서 어떠한 방식으로 나를 통해 다른 사람들을 도와 주었는지 깨닫기란 쉽지 않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완전히 이해하기 전가지는 창조주의 시야로써가 아니라 우리의 좁은 시야로써 우리 자신을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성령의 선물에 대한 성서 구절들은 우리가 지닌 가장 심오한 선물을 발견하게 해 준다. “성령께서 맺어 주시는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그리고 절제입니다”(갈라디아 5, 22). “그러니 여러분은 열성을 다하여 믿음에 미덕을 더하고, 미덕에 진실을, 진실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교우끼리의 사랑을, 교우끼리의 사랑에 만인에 대한 사랑을 더하십시오”(베드로 1,5-7). 우리는 평화, 인내, 사랑, 친절 등의 순간에는 하느님의 마음으로 행동하고 느낀다. 이러한 성령의 열매들은 나의 마음 속에 사람들이 나를 용서해 주었던 일, 그들이 하느님을 통해 얻은 깨달음을 나에게 나누어 주었던 일, 그리고 나로 하여금 더욱더 공동체를 위해 살도록 고무시켜 주었던 일을 상기시켜 준다. 도한 성령의 선물은 똑같은 방식으로 내가 다른 사람들을 도와 주었던 일들을 상기시켜 준다.

자신이 지닌 은총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 자기 중심적인 행동인 것처럼 여겨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자신을 자랑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지닌 은총을 되돌아봄으로써 예레미야나 이사야가 위기의 시기에 신앙을 굳건히 지켜 나갔던 것처럼 우리 자신의 신앙의 역사를 세워 나가게 되는 것이다.

자신이 지닌 아름다움을 잘 깨달을 때, 우리는 창조주께서 하셨던 것처럼 부서지고 흩어진 자신의 조각들을 모아 더 쉽게 자신을 복원시킬 수 있다. 다라서 우리를  치유해 주시기를 하느님께 간청드릴 때에는 자신의 손에 있는 부서진 조각들을 보기 보다 자신이 하느님의 귀중한 작품임을 먼저 알아야 한다. 그러할 때,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의 어떤 점을 복원시키려 하시는지,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의 귀중한 자녀가 될 수 있는지 여쭈어 볼 수 있다.

 

 

나눔의 주제

 

1.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2. 자기 중심적으로 행동하지 않고 자신이 지닌 재능이나 은총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 드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3. 피에타 상의 복원과 하느님의 자비에 의한 우리의 복원과는 어떠한 차이점과 유사점이 있습니까?

 

개인묵상

 

1. ‘하느님의 사랑과 원’ (본서 176페이지)을 해 보십시오.

2. 하느님이 사랑을 매우 깊이 느꼈던 사건이 있습니까?  그때 어떻게 느꼈습니까? 당신의 체험은 갈라디아서 5장 23절에 있는 구절과 비슷하였습니까?

3. 본서 178페이지에 나오는 ‘사랑의 봉헌과 삼각형’을 해 보십시오. 이것은 더 큰 도전입니다.

 

 

 

 

제4장

그리스도께서 무엇을 치유하고자 하시는지 여쭙기

 

 

때때로 우리는 잘못된 동기를 가지고 치유받고자 한다. 단지 타인의 기대에 맞추어 살기 위해, 그리고 단순히 삶이 주는 긴장을 피하기 위해 치유를 구하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치유되기를 원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친교를 나누시려고 오셨다. 그분은 당신과 우리가 하나됨을 가로막는 모든 장애물들이 우리에게서 치유되기를 원하신다 (요한 17, 21).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치유를 생각할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 자신과 타인들을 그리스도로부터 격리시키고 있는 상처를 발견할 수 있다.

한 가지 예로, 우리는 자주 의심을 한다. 이러한 의심하는 마음을 우리가 치유받고자 할 때, 스스로에게 실망하였기 때문이라든가, 혹은 나의 경우에 있어서 이러한 의심이 학생들을 자극시키기 때문이라는 등의 이유로 치유받고자 해서는 안 된다. 치유의 동기는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춘 것이어야 한다. 내가 학생들을 가르칠 때, 불신이 가져다 주는 진정한 비극은 학생들과 나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와 학생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보다 어렵게 만드는 데 있다.

다음은 내 친구 얘긴데, 그는 과제물을 늦게 제출하여 그를 괴롭혀 온 한 여학생에게 격앙된 어조로 메모를 썼다. 그러나 그는 그녀를 힐책하는 이 메모가 하느님과 자신, 그리고 하느님과 그녀와의 관계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생각하고 그 메모 용지를 찢어 버렸다. 그리고는 상처를 주는 말을 다시는 쓰지 않기로 하였다는 것이다. 그는 그 여학생에 대한 치유를 자신의 눈이 아닌, 그리스도의 눈으로 바라봄으로써 그 여학생 스스로가 자신의 빈정거리는 태도를 고치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여학생 역시 자기 과의 친구들과 원만하게 지낼 수 있도록, 또 교수와 자신 모두가 궁극적으로 하느님과 보다 나은 관계를 가질 수 있도록 치유를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말씀에 마음의 귀를 기울일 때, 그분이 무엇을 치유하고자 하시는지 듣게 된다. 주님의 뜻을 행하고자 할 때, 나의 기본적인 입장이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다면 내 마음은 그분의 평화, 기쁨, 신뢰 그리고 사랑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내가 불안, 근심, 슬픔 혹은 갈등을 느끼고 있다면, 이것은 나의 기본적인 입장이 악과 싸우고 잇는 것이니 주님으로부터 그 악을 치유받아야 할 것이다.

다른 사람의 성공을 기뻐하지 않거나 다른 사람의 도움을 거절하고 스스로를 소외시키려고 했을 때, 우리에겐 평화가 사라져 버림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학교 수업을 지겨워하거나 시험을 치르기 위해 과도하게 공부할 때, 도한 다른 사람과의 토론이나 대화에 충분히 참여하지 못했을 때 우리의 마음은 편치 못하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글 쓰는  그 자체와 이 글 속에 있는 의미를 발견하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이 책을 끝마치는 데 관심을 더 기울인다면, 나는 마음의 평화를 잃고 말 것이다. 하루를 돌이켜보면 깊은 평화와 인내 그리고 기쁨을 누렸던 때가 언제였는지 그리스도와 깊은 관계를 맺지 못한 때가 언제였는지 알 수 있다.

우리가 무엇을 치유해야 할지 그리스도로부터 알게 되면, 우리는 그분을 가까이 하지 않았을 때 어떤 마음을 지니고 있었는지 우리에게 알려 주시도록 그분께 기도하고 간구해야 한다. 내 경우에 있어서는, 내가 얼마나 자주 나 자신의 자부심을 증명하려고 하였는지 하느님께서 지적해 주셨다. 내가 나에 대한 그분의 생각대로가 아니라 나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생각대로 살고자 했을 때 나와 그분과는 친교는 줄어 들었다.

우리의 바람직스럽지 못한 행동의 이유를 알고 난 후, 우리는 정말로 치유받기를 원하는지 주님과 얘기를 나누어야 한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만짐으로써 하혈병을 치유받은 여자의 경우와 같다(루카 8, 40). 빽빽한 군중 속의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만졌지만 치유되었다고 애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늘날 성사 신학은, 그리스도의 권능은 마술적인 것이 아니며 그것을 받고자 하는 사람의 열망에 좌우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약 이천 년 전의 성찬에 있어서나 지금의 안수기도에 있어서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진실로 그분의 치유를 간구하면 그것을 이루어 주신다.

우리는 진정으로 치유를 갈망하는가? 돌아온 탕자는 이제는 더 이상 아들이 아니라 종이 된다 하더라도 치유되기를 원한다고 마침내 고백할 수 있었다 (루카 5, 19).

여러분은 그분의 대가를 기꺼이 치르겠는가? 예를 들어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어떻게 여기든 그것에 좌우되지 않겠는가? 이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성공, 다른 사람들의 칭찬,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압박감, 혹은 자신의 성공이 다른 사람의 성공에 미치지 못할 때 느끼는 열등감 등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여러분이 “예, 나는 어떠한 대가를 지불하고라도 치유받고 싶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다면, 여러분은 다음 단계로 넘어갈 준비를 갖춘 것이다.

그러나 만약 “예”라고 대답할 수 없다면, 치유를 열망하는 마음을 갖도록 기도해야 한다. 이러한 열망은 주님이 나의 삶 속에서 나를 어떻게 축복하셨고 치유하셨는지를 생각하며 거듭 기도할 때 일어난다. 만일 그러한 열망을 가지게 되었다면 이제 나의 죄는 무엇이고 그 죄가 어떻게 퍼지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인정을 받고자 하는 열망과 권위를 지니고자 하는 열망은 모방되고 확산되어, 종국엔 전쟁이나 경제적 파탄 혹은 다른 비극적인 상황을 몰고 온다. “나는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당신께 치유받기를 원합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을 때까지 우리는 주님을 좇게 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예”라고 대답할 수 있다면 여러 가지 사건들을 통해 우리를 치유해 주신 그리스도께 감사드려야 한다. 이렇게 과거의 기억을 치유해 주신 것에 대하여 주님께 감사드릴 때, 우리는 우리의 삶에 있어서 하느님과 이웃 그리고 우리 자신에 대해 아직도 죽어 있는 영역들을 희망찬 그리스도의 기도로 나누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아버지, 제 청을 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제 청을 들어 주시는 것을 저는 잘 압니다. 그러나 이제 저는 여기 둘러 선 사람들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 주셨다는 것을 믿게 하려고 이 말을 합니다’. 말씀을 마치시고 ‘라자로 야, 나오너라’ 하고 큰 소리로 외치시자 죽었던 사람이 밖으로 나왔는데 손발은 베로 묶여 있었고 얼굴은 수건으로 감겨 있었다.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그를 풀어 주어 가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요한 11, 41-44).

 

 

 

나눔의 주제

 

1. 모든 죄가 죄인뿐만 아니라 죄인 이외의 다른 사람까지도 해친다고 생각하십니까?

2. 다른 사람들을 해치는 모든 죄는 또한 그 사람과 그리스도의 관계에도 해를 끼칩니까?

3. 모든 죄는 그러한 죄를 매혹적으로 보이게끔 하는 “보상”을 가져다 줍니까?

 

 

개인묵상

 

1. 오늘 어떠한 느낌들이 당신 가슴 속을 오고갔습니까? 오고 간 느낌이 있다면 그것은 왜 생긴 것일까요?

2. 그리스도는 당신 안에서 무엇을 치유하고자 하시는 것일까요?

3. 만일 당신이 치유를 받았다고 가정한다면, 당신은 어떠한 보상을 하여야 할까요?

 

 

 

 

제5장

치유를 방해하는 고통의 기억을 그리스도와 함께 나누기

 

 

저격범의 총탄이 케네디 대통령의 목을 관통했을 때, 딕 브라운 Dick Brown 씨는 겨우 한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총탄을 맞지는 않았지만 달라스에서의 그 운명의 날 이래 브라운 씨는 달라스의 악몽과 목의 통증 때문에 자주 놀라곤 한다.

고통스러운 기억은 육체적으로뿐만 아니라 심리적으로도 상처를 준다. 어떤 친구는 국민학교 시절에 잘못된 답변을 하여 비웃음을 당한 이후 다른 사람과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기가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다고 한다.

육체적 정신적 치유를 위한 고백성사에 있어서 우리는 상처뿐만 아니라 상처를 가져다 준 원인도 고백하고 보여 주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바라시는 대로 자신의 마음을 터놓고 얘기하지 않는다고 고백하는 것은 상처에 대해 고백하는 것이다. 그러나 국민학교 때 잘못된 답변으로 해서 자신을 비웃은 친구들을 용서하지 않았다고 고백하는 것은 그 원인에 대해 고백하는 것이다.

어떤 어머니가 자기 아들을 못마땅하게 여긴다고, 그리고 어떤 주부가 자신은 집안 일을 소홀히 한다고, 또 어떤 남편이 자신의 아내와 자주 다툰다고 계속 고백한다면, 진정한 치유는 자신으로 하여금 그렇게 행동하도록 만드는 과거의 기억을 다룬 후에야 이루어진다.

자신의 아들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어머니는 자기 친구들이 놀러 올 때 특히 아들이 싫어진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 사실을 알고 난 후, 어머니는 자기가 아들을 싫어하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아들이 자기 친구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그들로부터 자신이 따돌림 당할 것이라는 두려움에 실제 문제가 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른 사람들로부터 따돌림 당했던 과거의 사건으로 되돌아가 그리스도께서 하셨던 대로 그들을 용서한 후에야, 따돌림이라는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모자간의 관계에 있어서도 훨씬 인내심을 가질 수 있었다.

집안 일을 잘 돌보지 못한다고 자책하던 주부는 자신의 이런 행동이 처음 시작되었던 때를 돌이켜보았다. 그리고는 그것이 9년 전의 유산 流産 이래로 계속되어 온 생활태도라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녀는 그리스도와 함께 유산의 기억을 나누면서 자신의 유산이 하느님의 형벌이었다고 주장한 종교 단체를 그분과 함께 용서한 후 좌절감을 극복할 수 있었다.

아내와 자주 다툰다고 한 사람은 아내가 옳은 말을 할 때조차 아내의 의견에 반대하고 있는 자신을 깨달았다. 어느 날 그는 어머니가 자기를 못마땅하게 대했던 것처럼 아내를 반박하고 있으며, 어머니가 자기를 위협하였던 것처럼 아내를 위협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어머니가 자기의 얘기를 들어 주지 않았던 것처럼 아내도 자기의 얘기를 듣지 않으리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아내에게 마음을 개방하기 전에, 그에겐 어머니와 자기 사이에 있었던 고통스러운 기억들을 그리스도와 함께 나누는 일이 필요하였다.

 

상처의 근원이 되는 기억을 찾아 낸 후, 우리는 엠마오로 가던 클레오파와 그 친구처럼 그 기억을 그리스도와 함께 나누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그들이 침통하게 고개를 땅바닥으로 떨구었다고 하여 그들을 책망하지는 않으셨다. 그분은 언뜻 보이는 사실을 문제 삼기 보다는 무엇이 그들을 좌절시켰는지에 관심을 두었다. 그들은 예수께 예루살렘에서 본 모든 것, 그들이 느꼈던 것, 그리고 사람들에게 미친 영향을 설명하였다 (루카 24, 13).  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그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눔으로써 사건을 자신들의 제한된 시각으로뿐만 아니라 예수의 시각으로도 바라볼 수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이 그리스께서 하셨듯이 치유를 가져다 주는 진정한 의미의 용서를 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이제 그들은 더 이상 고개를 떨구고 걷지 않고 불타는 가슴을 가지고 걸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엠마오로 가는 길의 제자들처럼 우리는 주님을 따르게 하기보다는 공포, 죄악감, 혹은 고통을 좇게 하는 기억을 그리스도와 함께 얘기해야 한다. 과거의 불행했던 기억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매우 심리학적인 것으로 들릴지 모른다. 사실 그렇다. 육체적으로 우리를 치유시키기 위해 기도와 함께 약을 복용 하듯이, 우리는 공포, 죄악감 혹은 고통을 치유하기 위해 기도와 함께 심리학 중에서 도움이 되는 것을 이용한다.

우리는 이러한 기억을 그리스도께 가져 감으로써 진정한 의미의 용서를 받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의 반응의 뿌리가 되는 기억이 무엇이니 인식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기억을 인식할 수 없다 하더라도 그것을 찾으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이것은 술래잡기가 아니다. 오히려, 성령께서 치유하고자 원하시는 우리의 고통스런 기억을 우리의 의식에 가져다 주시도록 청하여야 한다.

때때로 성령은, 위에서 말한 것처럼 유산 流産에서 비롯된 자신의 문제를 찾아 냈을 때와 같이, 우리가 언제 처음으로 지금의 행동과 같은 것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알려 주심으로써 우리에게 뿌리가 되는 기억을 보여 주신다.

 

또한, 때로 성령은 되풀이되는 우리의 사랑스럽지 못한 행동 (예를 들어, 친구를 맞이할 때마다 짜증을 내는 것) 을 보여 주시거나, 그와 똑같은 방식으로 우리를 대하였던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얘기해 주실지 모른다. 그분께서 언제 그리고 무슨 말을 하든지 간에 우리는 아직도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기억에 대해 그분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게 되는 것이다.

아마도 우리는 성령이 우리가 오랫동안 잊어 왔거나 차라리 묻어 두고 싶은 기억을 들추어 낼까 봐 두려워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기억은, 비록 무의식적으로 감추어져 있긴 하여도 우리 안에서 여전히 곪아 가게 될 것이며 그리스도의 성심을 아프게 하는 행동을 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과거의 기억을 돌이켜보면서, 우리는 피에타 상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작품을 보듯이 그 기억을 보아야 한다. 스스로가 얼마나 가증스러운 존재인가를 알기 위해서 이러한 기억을 바라보기 보다는, 오히려 우리의 전능하신 예술가와 함께 어떤 결점들을 고쳐 나갈 수 있는가를 파악하기 위해서 이러한 기억을 바라보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자신에게 상처 입히는 기억을 깨닫게 되었다면 이렇게 스스로를 알게 해 주신 성령께 감사 드려야 한다. 그러나 어떤 기억이 상처를 주고 있는지 깨닫지 못하고 있다면, 자신에게 괴로움을 주었던 모든 기억을 그리스도와 함께 나누어야 한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제자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사건들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우리도 치유를 필요로 하는 기억을 그리스도와 함께 나누어야 한다. 우리는 그분을 기억 속의 그때 그 자리에 초대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그분을 소개하고 그분과 함께 그들의 얘기를 듣는다. 이것은 단순한 상상력 훈련이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와 보다 친밀한 관계를 갖고, 함께 나누고, 그분을 체험하기 위하여 사람들과 사물들과 장소들을 기억하며 경건하게 묵상하는 것이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자. 아내와 자주 다투던 남편은 자신을 끊임없이 간섭하던 어머니에 대한 괴로운 기억을 치유할 수 있었다. 어느 무더운 날에 그가 어머니에게 너무 덥다고 이야기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가 스웨터를 껴입도록 하여 아이들로부터 놀림 당했던 일을 기억할 수 있었다. 어머니는, 그가 무슨 말을 하든지 들어 주지 않았다. 친구들이 “갓난애”라고 놀리면서 자기들과 공을 차며 놀기 보다는 집에서 인형을 갖고 노는 편이 낫겠다고 비웃었다고 어머니께 말씀 드렸으나 어머니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때 치솟았던 분노와 반감이 이제는 어머니뿐만 아니라 어머니와 닮은 자신의 아내를 포함한 타인들에게도 반발심을 갖도록 만들었다. 그러한 모든 고통, 분노, 고독 그리고 반발심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께 넘겨 주어야 했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말, 심지어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고 조용히 내뱉는 말까지도 들어 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엠마오로 가는 여행자들이 자신들이 느꼈던 실망감을 표현하였듯이, 그 남편 역시 자신의 어머니와의 사이에 있었던 일에 대해 어떻게 느꼈는지를 표현하였던 것이다. 용서를 필요로 하는 일을 그리스도의 눈으로 보기 위해서는 고통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를 그분께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스도께서는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의 감정에도 귀를 기울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에도 응답하셨다.

고통스러운 기억 속에 결핍되어 있는 것에 대해서는 그것이 어떤 것이든지 간에 그리스도께서 응답하시도록 내맡김으로써 우리는 그분께서 치유의 과정을 계속하시도록 도와 드릴 수 있다.

가령 아내와 자주 다투던 그 남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께서는 그와 함께 그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 그의 스웨터를 벗겨 주시고, 시간을 내어 그와 그의 친구들과 함께 공놀이를 해 주실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그 모든 소외감과 괴로움을 참고 견뎌 내가는 데 큰 인내가 필요하다고 알려 주실 것이며, 그의 아픈 상처를 매만져 주시고, 가시 돋친 그의 말고 행동을 알려 주실 것이다.

악령은 번번히 우리를 유혹하여 분노, 슬픔, 근심 같은 감정을 모두 부인하도록 하거나 그리스도의 응답을 구하지 못하도록 그러한 감정들을 간단히 언급하게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엠마오 마을로 가던 사람들에게처럼 우리에게도 당신의 응답을 들려 주시기 전에 우리가 이러한 감정에 접할 수 있도록 충분한 시간을 주신다.

 

분노 등의 감정 그 자체는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러한 감정들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취하는가, 즉 우리가 그러한 감정을 그냥 그대로 드러내는가 아니면 자제하는가에 달려 있다 예를 들어, 주차 위반으로 경찰관으로부터 호출장을 받고 화가 나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니다. 하지만 경찰관에게 화를 내는 것은 잘못이다. 성서는 이러한 중립적인 감정과 도덕적 행동 사이의 구별을 강조하고 있다. “화나는 일이 있어도 죄를 짓지 마십시오. 해질 때까지 화를 풀이 않으면 안 됩니다” (에페소 4, 26).

분노와 패배감에 직면하면 할수록 치유의 가능성 또한 높아진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런 감정을 가졌을 때 이러저러한 상황 중 어느 것이 그러한 감정을 유발시켰는지 주의 깊게 생각하게 되고, 그러한 고통스러운 기억을 치유시켜 달라고 간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일단 분노와 같은 감정들이 표면에 드러나기 시작하면 그 감정들을 그리스도께 맡기고 그분의 감정으로 바꿀 수 있게 된다.

 

절친한 친구의 죽음으로 하느님을 저버렸다는 한 여자를 나는 기억하고 있다 친구의 죽음으로 인해 그 여자는 하느님이 자신을 돌보아 주지 않는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하느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시작하기 위하여 그 여자는 먼저 고해소에 들어가서 시편 저자들이 하였듯이 자신도 주님께 화가 나서 외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가 느끼고 있는 바 그대로를 표현하는 것은 적절한 일이 아니라고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도 기도를 하시면서 자신의 솔직한 느낌을 하느님께 표현하셨다. 게쎄마니 동산에서 거의 절망상태에 빠져 있었던 그리스도는 수난을 겪지 않게 해 달라고 아버지께 부르짖었다. 이것은 “마음이 과로와 죽을 지경”이 된 사람의 울부짖음이었다 (마르코 14, 35).

 

임종할 때 그리스도는 이렇게 소리치셨다.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르코 15, 34). 그리스도께서 우도 右盜 에게 베푸신 용서는 자신의 감정과 화합하여 마음에서 우러나온 용서였다 (루카 23, 39). 우리도 우리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볼 때에만 그리스도께서 하셨듯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용서를 할 수 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수난과 주변 상황과 그에 대한 자신들의 감정 외에 그 수난이 끼친 영향에 대해서도 그리스도께 말씀 드렸다. 나자렛 예수의 죽음은 위대한 예언자가 이스라엘을 구원할 것이라는 그들의 희망을 무참하게 꺾어 버렸다 (루카 23, 21). 이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미치고 있는 이 괴로운 기억의 영향을 그리스도께 알려 들려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분께 “예, 나는 이 상처로 생겼던 모든 것을 싫어합니다. 그런데도 그 영향을 받고 있으니 용서하여 주십시오”라고 고백하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당신과 당신의 고통스러운 기억 속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용서하시는지 살펴보라. 아마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현존, 한 번의 어루만짐, 한 번의 눈길, 한 마디 요청, 한 마디 말씀으로 용서하실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사람들을 단순히 받아들이는 것을 뛰어넘어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것처럼 그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도록 이끄신다.

 

 

나눔의 주제

 

1. 고통스러운 기억은 언제 시작되었나? 그것은 반복되고 있는가? 내가 다른 사람들을 대우하듯이 그들로부터 대우를 받고 있습니까? 이러한 질문을 통하여 당신은 고통스런 기억의 뿌리를 발견해 내는 데 도움이 되는 다른 질문이나 방법이 있습니까?

2. 그리스도께서는 엠마오에 사는 제자들이 갖고 있던 기억을 어떻게 치유하셨나요? (루카 23, 13-35). 비록 기록으로 남아 있지는 않지만 주님께서 말씀하셨거나 행 하셨다고 생각되는 것이 있다면 그러한 것들은 어떤 것들입니까?

3. 분노는 고통 즉 무엇인가 치유되어야 할 것들에 대한 경고와 같습니까? 그리스도께서는 분노를 어떻게 다루셨습니까?

 

 

개인묵상

 

1. 180페이지를 펴십시오. 그리고 ‘기억의 치유와 사각형’ 1단계와 2단계를 해 보십시오.

2. 그 장면 속으로 들어가 당신도 자신이 느낀 모든 것, 심지어 분노까지도 그리스도께 말씀 드립니까?

3. 그러한 기억들은 되풀이되고 있습니까?

4. 당신은 이러한 고통스러운 기억들 중에서 한 가지 기억이 시작되었던 때로 돌아갈 수 있습니까?

 

 

 

제6장

고통의 기억을 용서함으로써 상처를 사랑으로 바꾸기

 

 

예전에 나는, 서로에 대해 깊은 분노와 원망을 가졌으나 불과 몇 분만에 아주 깊은 사랑을 체험한 한 가족과 함께 생활했던 적이 있다. 그 가족은 사귄 지 넉 달밖에 안 된 사람과 결혼하겠다는 딸 때문에 가족 내에 의사 소통이 단절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가족은 경제적인 면에서 볼 때 그녀가 결혼하기엔 너무 이르고, 또한 그녀가 가족을 사랑한다면 결혼을 미루고 대학을 마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이제 갓 18세의 나이로서는 진정한 의미의 사랑을 알기에 너무 어리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딸은 그 남자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으며, 그것이 또한 전부이고 나머지는 이차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여러 시간 동안 치열한 대화가 오갔으나 가족 중 어느 누구도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마침내 전 가족이 함께 모여 그녀와 같이 기도를 했다. 기도가 끝난 후, 그들 중 누구도 결심을 바꾸지는 않았으나 모두가 서로에 대해 깊은 사랑을 느끼게 되었다.

 

그들이 느낀 사랑은 용서를 통하여 온 것이었다. 이제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는 말을 해도 더 이상 미운 감정을 갖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어느 때보다도 서로 더 다정하게 대하려고 하였다. 그들의 용서하는 마음은 비록 그 어느 누구도 결심을 바꾸지는 않았지만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게 한 것이다. 이제 더 이상 고통, 분노, 그리고 원망이 그들을 사로잡지 못하였다. 오히려 용서와 사랑과 관심이 그들 안에 자라났다.

우리는, 성령께서 그 가족에게 해 주셨던 것과 똑같이 우리가 지닌 고통도 치유해 주시기를 간구하고 있다. 우리는 사랑이 없는 행동을 하게 하는 모든 고통, 분노 혹은 원망을 뿌리뽑고 그 자리에 하느님의 용서와 사랑을 심고 싶어한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사랑한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 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 주셨기 때문이다 (로마서 5, 5).

성령께 우리의 모든 고통을 뿌리뽑고 그 자리에 하느님의 용서와 사랑을 심어 달라고 간구함으로써, 우리는 이제 단순히 종이 아니라 자유인이 되는 첫걸음을 내딛기 시작한다. 우리는 우리를 조종해 왔던 고통을 기꺼이 주님께 맡기고,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능력과 사랑을 채워 주시는 성령께 사로잡히고자 함을 표현하여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리스도인에게 성령이 주시는 자유를 누릴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노예 상태로 계속 남아 있을 것인가를 선택하게 하신다 (로마서 8, 12; 갈라디아 5, 1). 성령이 주시는 자유는 우리를 얽어 매는 죄와 고통스런 기억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기 위하여 죽으신 그리스도로부터 나온다 (로마서 6, 15). 그리스도를 선택하였다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를 죄와 고통스러운 기억 때문에 죽었으나 그리스도에 의해 다시 살아난 존재로 여긴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선택하였다면, 이젠 더 이상 죄와 과거의 상처로 인해 절뚝거리는 삶을 살아갈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다른 삶을 살고자 결심하여야 한다. 율법 시대에 유다인들은 많은 계명을 따라 살려고 하였으나 죄와 상처에 의해 불구가 되고 행동할 힘을 잃게 되었다 (로마서 7장 참조). 그러나 성령은 ‘용서하는 사랑’이라는 살아 움직이는 새 계명을 내려주신다. 성령은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삶을 분명히 알려 줄 뿐만 아니라 그렇게 살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 (로마서 8장 참조). 새로운 계명을 통하여 성령은 성부와 용서하는 사랑을 우리들에게 불어넣어 주신다. 우리는 이제 상처를 입고 들으려 하지 않는 대화의 노예가 아니라 말을 걸어 오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용서하는 마음을 가지고 응답하는 자유인이 되어야 한다.

성령이 비록 고통스런 기억에 스며 있는 분노나 고통을 즉각 없애 주시고 그 자리에 하느님의 사랑을 채우실 수 있다 할 지라도, 대개 주님은 우리가 용서하며 협조할 때 서서히 역사하시기 시작한다. 고통스런 기억을 주님과 함께 나누며 내맡기고 그 기억이 생명을 갖도록 이끄신 그 분께 감사 드리면서, 우리는 성령께 협조하는 것이다.

우리가 얼마나 우리 자신의 상처를 벗어 던지고 그 자리에 하느님의 사랑을 채워 놓았는가를 알 수 있는 기준은 우리가 얼마나 그리스도와 같은 용서를 했느냐에 달여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부의 용서로 용서하실 때마다 성부의 사랑으로써 고통스럽고 일그러진 기억을 치유하셨다.

 

항상 나는 그리스도처럼 용서하기란 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때의 용서란 “나는 당신을 용서합니다” 라고 진지하게 말하고, 단지 증오심만 품지 않는 것을 뜻하였다. 나는 그런 용서는 할 수 있었지만 그리스도처럼 흔쾌히 무조건적으로 그리고 완전하게 용서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주님은 자신에게 닥칠 어떤 대가에도 구애 받지 않고 흔쾌히 용서하신다. 그분은 자신의 용서로 말미암아 신성모독죄로 돌에 맞아 처형될 위험에 처할 때조차도 죄를 용서하시곤 하였다 (루카 5, 17-26). 용서하고자 하는 열망이 너무도 컸으므로 그분은 간음한 여인에게 돌로 치려던 성난 사람들이나, 당신만이 더럽고 미움 받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을 걸었다고 해서 화가 난 사도들로부터 오는 모든 위험을 감내할 수 있었다 (요한 8, 1-11).

그리스도께서는 용서를 준비하고 있음으로 해서 무조건적으로 용서하신다. 우도는 연옥에서 고통을 겪는 등으로 자신의 사랑을 증명할 필요도 없이 아무 조건 없이 곧 천국에 갈 수 있었다 (루카 23, 39-43).

그리스도는 “네가 술을 끊으면, 네가 사과한다면, 네가 태도를 바꾼다면 너를 용서하겠다”와 같은 어떠한 조건도 내세우지 않는다. 상대방이 비록 변화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일곱 번이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그를 용서해 주어야 한다 (마태오 18, 22).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사랑하시는 것은 그가 사랑을 받을 가치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백만 원 빚진 사람보다 천만 원 빚진 사람을 더 용서해 주시려 하기 때문이다 (루카 7, 41).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도 그리스도는 여전히 긍정적인 면을 찾고자 하신다. 부자 청년이 등을 돌렸을 때에도 그리스도는 “그를 존중하셨고 사랑하셨다” (마르코 10, 21). 긍정적이라는 것의 범위는 때로 우리가 얼마나 잘 알고 있는가에 따라 정해진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못 박혔던 손에 대한 보상으로 인간의 악의를 찾으려 하지 않으시고 무지를 보려 하셨으며, 고통이 아니라 용서하는 가운데서 절규하셨던 것이다 (루카 23, 34).

변화가 일어날 때, 그리스도는 그 변화에 대해 기뻐하고 축하해 주시며 과거의 상처에 대해서는 잊어 버리신다. 루카 복음 15, 11-32 에 나오는 잃어버린 아들의 이야기를 보면, 아버지는 자신의 상처를 끄집어 내려고 하지도 않고, 사과를 받으려고 하지도 않으며, 심지어는 고해조차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들이 마음먹었던 고해를 중단시켜 버리기까지 한다 (루카 15, 11-32). 아들의 성장만을 바라보며 과거의 상처를 모두 잊어 버린 채, 아버지는 상심한 아들을 전보다 더 존중해 줌으로써 아들이 돌아와 더욱 가까운, 새로운 관계를 이루게 된 것을 기뻐하였다.

 

우리는 우리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나아가 친구로까지 대우해 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기까지 할 수 있을까?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요한 15, 13).

 

“옳은 사람을 위해서 주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혹 착한 사람을 위해서는 죽겠다고 나설 사람이 더러 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죄 많은 인간을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당신의 사랑을 확실히 보여 주셨습니다” (로마서 5, 7-8).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은 이러한 단계를 뛰어 넘는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자신의 전 생명을 단 한 번 바치시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계속 바치시기 때문이다.

 

“이것은 나의 피다.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내가 흘리는 계약의 피다” (마태오 26, 28).

 

그러나 우리 대부분은 그리스도처럼 용서하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음의 질문들에 대하여 정직하게 대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나는 어던 대가를 치르더라도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나의 용서는 무조건적인가, 아니면 상대방의 어떤 변화를 요구하고 있는가?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선한 것에 마음의 문을 열고, 나에게 상처를 입힌 사람들을 사랑으로 대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걱정하고 있는가? 나는 탕자의 아버지처럼 상처가 아니라 우리 사이의 성장을 중히 여기며, 그럼으로써 우리 사이에 있었던 일에 대하여 기뻐하고 감사드릴 수 있는가? 나는 상대방이 나에게 상처를 입혔던 때보다도 훨씬 더 그를 가까이 대하려고 노력하는가? 나는 상대방에게 목숨까지 내어 놓을 수 있는가?

 

우리는 이러한 물음에 대한 그리스도의 답변을 알고 있다.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라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서로 용서하십시오” 라는 정신과도 일관성이 있는 정신인 것이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용서하려면, 그리스도와 함께 고통스런 기억의 현장으로 들어가 하느님께서 어떻게 행동하시고 말씀하시는가를 주의 깊게 보아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손길과 말씀으로 단지 우리의 아픈 곳을 치유해 주시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상처를 입힌 사람들까지도 치유하시기 위해 그 기억 속으로 들어오신다.

 

그러므로 아내에게 짜증을 부리던 남편은 그리스도와 함께 자신의 어머니로부터 책망 받던 어린 시절의 기억 속으로 돌아갔다. 그 남편은, 아들을 간섭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어머니의 불안감을 치유하시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어머니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 주시거나 미소 지으며 포옹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 남편은 어머니를 용서하고 포옹하고 말을 건네면서 그리스도를 비추게 된 것이다.

주님께서 용서하셨던 것처럼 용서하고 용서를 청하는 것은 여전히 어렵지만, 우리는 기도와 행동을 통하여 더 깊은 용서로 나아가기 위해 노력하여야 한다. 그러면 주님께서도 우리에게 고통을 주었던 사람에게 더욱 자비롭게 행동할 수 있도록 조금씩 우리를 이끌어 주실 것이다. 예를 들어, 하느님께서는 아내에게 짜증을 내던 남편에게, 오늘은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고 다음 주에는 어머니를 찾아 뵐 수 있도록 하고 또 그 다음 주에는 어머니를 저녁 식사에 초대할 수 있는 힘을 주실 것이다.

용서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은 상대방을 우리의 삶에 어느 정도의 깊이만큼 초대할 수 있는가 하는 것과, 그들과 얼마만큼 우리 자신을 나누는가에 달려있다. 서로가 상대방을 또 하나의 그리스도로 존중하고 기꺼이 용서하며 삶을 더욱 완전히 나눌 때, 우리는 쉽게 그리스도의 용서에 이를 수 있음을 알 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가 상대방을 대하는 방식 외에도 기도생활 또한 우리가 용서하는 폭과 깊이를 드러내 준다. 우리는 우리에게 상처를 입혔던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 용서하고 용서받았던 모든 체험을 드러내 주시도록 성령께 기도 드린다. 기도할 때 성령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도록 도와 주시며(마르코 11, 25; 마태오 18, 21; 루카 23, 39) 우리에게 상처를 입혔던 사람들에게서 긍정적인 면모를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신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의 싸움일 수 있다. 우리는 신뢰가 부족하여 그들을 기쁘게 맞아들이기 힘들 때가 많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떠한 선함도 그들에게서 발견할 수 없다 하여도, 하느님께서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듯이 그들 모두를 용서해야 한다 (마태오 5, 44). 마지막으로 하느님께 고통스러운 기억에 관하여 이야기할 때, 우리에게 상처를 입혔던 사람이 어떠한 환경에 의해서 우리를 그렇게 대했는지를 그리스도의 눈으로 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어떻게 하여 그는 우리보다 더 많은 상처를 받고 우리에게 그러한 상처를 주고 있는가?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처럼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는 것은 갑자기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분노의 화살을 다른 사람으로 부터 자신에게로 돌리게 될 때, 우리는 점점 좌절하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 상처를 입힌 사람을 비난하지 않고 용서하려 할 때, 우리는 자신이 유치하게 과잉반응 하였다고 해서, 자기 자신이 더욱 쉽게 상처받았다고 해서, 그리고 자신에게 상처를 입힌 사람을 돕지 못했다고 해서 스스로를 더욱 탓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어떤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때, 자기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절망감이 들어 자신에게 고통을 가한다거나 자신을 처벌하고 싶은 마음을 느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자학적으로 돌리지 않고 그리스도와 잘못한 이에게 용서를 청하겠다는 신념을 가져야 한다.

고통 중에 있을 때,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약함에 인해 좌절한다. 예수의 제자들은 모두 도망쳤고, 베드로는 울면서 달아났다. 우도도 자학하였으나 끝내는 그리스도의 용서를 청하였다. 희망을 지니고 용서를 구할 수 있었던 사람은 그리스도를 더욱 가까이 모실 수 있었던 것이다. 좌절감은 이처럼 우리가 자신의 힘에 의존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용서하는 품 속에 머무를 수 있도록 우리를 초대한다. 십자가의 길을 바치고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하며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암흑 속에 찾아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얼마나 우리를 용서하려고 하셨는지 깨달을 수 있다. 좌절은 우리가 용서하기 시작하였다는 표지이기 때문에, 그분은 “예’ 하고 응답한다면 더욱더 우리를 용서하고자 갈망하실 것이다.

 

예수께서는 용서의 선물을 거저 주신다. 그분이 주시는 선물을 완전히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여부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우리가 얼마나 상처를 내어 놓고 그 자리를 하느님의 사랑으로 채우는가와 상관없이, 십자가의 그리스도께서 우도에게 베푸셨던 것과 같은 완전한 용서가 될 때까지 그분과 함께 그 기억을 떠나 용서의 과정을 모두 이룰 수 있도록 간구하는 것이 중요하다 (루카 23, 39).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의 모든 짐을 어깨에 메고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의 한 가지 짐 – 기억 – 도 그분께 내어 드릴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특히 우리가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상처를 입힌 모든 사람을 용서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시고, 그 상처로부터 어떤 좋은 점을 깨닫게 되었는지 그분의 눈으로 보도록 이끌어 주신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은 그리스도께서 메시아의 죽음이 어떻게 해서 그들에게 새 생명을 전해 주었는지에 대해 말씀해 주셨을 때, 그들의 모든 상처를 씻을 수 있었다. 비극이 얼마나 우리의 삶에 큰 선물인가 하는 것을 깨닫는 것은 요셉이 노예로 팔려갔으나 그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을 먹여 살릴 수 있었음을 깨달았던 것과 같다.

이와 비슷하게 바오로도 아담의 비극은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주었고, 십자가는 부활을 가져 왔다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용서한 후에 그 기억을 잊어 버리는 것은 원치 않으신다. 그분은 우리가 그 기억을 그분의 눈으로 바라보고 우리를 불구로 만들었던 그 기억이 얼마나 좋은 결과를 가져 왔는가를 알게 되기까지 그분과 함께 그 기억을 간직하길 원하신다 (로마서 8, 28).

 

 

 

나눔의 주제

 

1.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이 먼저 변화하고 사과하고 고통을 받고, 혹은 다시는 그 일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지 않는다면 용서하지 않겠다고 하신 적이 있습니까?

2. 거만한 사람이 화를 내고 있다면, 그는 무엇 때문에 그러한 반응을 나타냅니까? 사람을 거만하게 만드는 것은 어떤 것들입니까?

3. 죄지은 사람이 어떻게 이전보다 더 그리스도에게 가까이 갈 수 있습니까? 어떤 사람이 용서를 청하면 그리스도께 더 가까이 갈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많은 죄를 범하고 있다면, 그에게 무어라고 얘기해 주겠습니까?

4. “그리스도께서 용서하신 것처럼 용서하라”는 말은 어떤 뜻입니까? 루카 복음 7, 36-50을 보십시오. 복음사가가 기록하지 않은 내용 중에 그리스도께서 용서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또 용서하신 일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것들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개인묵상

 

1.  용서받은 경험을 크게 느낀 적이 있다면 몇 번이나 됩니까? 그리고 그때 무엇을 느꼈습니까?

2.  당신은 언제 잘 용서할 수 있었습니까? 그때 무엇을 느꼈습니까?

3.  175페이지에 나와 있는 기억의 치유 단계를 보고 제3단계를 해 보십시오. 그가 당신에게 상처를 주었을 때, 왜 그가 그런 식으로 대했다고 생각합니까?

4.  기억의 치유 제4단계를 해 보십시오. 당신은 그리스도처럼 기꺼이 그리고 조건 없이 말하고 그와 접촉했습니까?

5.  제5단계를 보십시오. 기어이 그리고 조건 없이 용서하지 않았을 때 당신이 얻은 이익은 무엇이었습니까?

 

 

 

 

 

제7장

고통의 기억에 대해 감사함으로써 상처를 사랑으로 바꾸기

 

 

고통스런 기억이 우리를 하느님, 이웃 그리고 우리 자신에게로 향하도록 하는 것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 드리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나는 몇 해 동안 기억의 치유라는 봉사를 해오고 있지만 작년에야 비로소 이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때 나는 피정을 마치고 다시 정신병원에 돌아와 일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곳에서 죽음이나 고독 그리고 불의 등이 피정에 참여한 사람들에게는 하느님께 좀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지만, 나의 환자들에게는 정신병원에 오게 된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한 가지 사건을 두고 어떤 사람은 축복을 보는 반면 어떤 사람은 비극을 보는 것이다.

기억의 치유를 해 오면서 그때까지 내가 하는 일이란 단지 그 기억을 그리스도와 함께 나누고 그분께서 모든 상처를 거두어 주시어 그 자리를 사랑으로 채워 주십사 고 기도 드리는 것이었는데, 대개의 경우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피정이 있는 후, 나는 고통스런 기억을 그분과 나누는 데 그치지 않고 그 기억에 대해 감사드릴 때, 비로소 그분은 나의 모든 상처를 거두어 주시고 그 자리를 사랑으로 채워 주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분은 나를 가망 없는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당신과 함께 일할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려 주셨다.

주님께서는 당장이라도 기억을 치유하실 수 있지만, 언제나 우리를 통해, 우리의 보조에 맞추어 일하신다. 대개 우리는 갑작스런 치유에 의해서보다는, 기억들에 대하여 무한히 감사함으로써 점차적으로 변화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단계적으로 옮아감에 딸아 우리는 좀더 큰 치유를 받는다. 그러므로, 고통이 비극이긴 하지만 그 고통을 그리스도와 함께 나눔으로써 변화되기에 우리는 결국 그것에 감사드릴 수 있다.

설령 어떠한 사건이 우리를 하느님으로부터 떼어 놓는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 사건이 생긴 것 자체를 좋아해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사건들 속에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이웃 그리고 우리 자신과 함께 할 수 있도록 하는 새로운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로마서 8, 28).

그리스도를 죽음으로 몰아 넣은 죄악에도 불구하고,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은 이러한 비극적인 죽음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부활의 새로운 삶을 가져다 주셨다는 사실에 기뻐할 수 있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처럼 우리 역시 왜 우리가 비극적인 기억에 대해 감사해야 하는지에 관한 그리스도의 말씀에 귀 기울임으로써 좀더 치유될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지닌 모든 기억에 감사해야 한다.

여러분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선물 열 가지를 종이 위에 적어 보고 삶의 어떤 시기에 어떤 선물이 성장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면 가작 비극적인 순간이라고 여겼던 그 시기에 바로 여러분의 선물이 가장 큰 성장을 이루었음을 알고는 깜짝 놀라게 될 것이다.

탕자의 아버지는 자신이 상심해 있을 때에 집을 나간 아들과의 관계가 깊어졌음을 발견하곤 깜짝 놀랐다. 이와 같이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은 자신들의 삶에서 가장 어두운 순간이라고 생각했던 그때가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으시고자 선택한 순간이었음을 알고는 깜짝 놀랐던 것이다 (루카 15장과 24장).

우리가 우리의 선물을 의식한다 할지라도 막상 어떤 사건이 우리 가까이에 다가오면 좀처럼 감사하게 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잃어 버린 아들이 다시 돌아오기 전에 그 아버지는 과연 감사할 수 있었을지, 또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이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 자기들이 처함 상황에 대하여 감사할 수 있었을지 의심스럽다. 또한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을 판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요셉을 노예로 판 결과에 대하여 감사할 수 있었을지 의심스럽다 (창세기 45장).

우리가 처한 사건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기가 어려울 때에는 이전에 있었던 그와 유사한 사건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되돌아 가서 자신의 성장을 발견토록 하라.

기원 전 6세기경 이사야와 유다 사람들은 바빌론의 포로가 되어 자신들의 집과 땅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유다인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이사야는 그들의 현 처지를 칠백 년 전 이집트의 포로 생활했던 선조들의 처지에 비유했다.

과거 유다인들은 이집트에서 포로생활을 했는데, 이 시기에 그들은 야훼에 대한 믿음을 이해하게 되었고 위대한 국가에의 결속을 이루게 되었다. 그래서 이사야는 포로가 된 유다인들에게 지금의 처지도 그때와 같이 서로서로의 관계와 야훼와의 관계를 돈독히 할 수 있는 계기로 삼도록 제의하였다 (이사야 40, 11; 48, 10).

우리는 우리로 하여금 고통스런 기억에 대하여 감사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실 것을 그리스도께 간청한다. 그때 우리의 초점은 성전이나 빼앗긴 땅에 대해서가 아니다. 하느님과 이웃 그리고 우리 자신에게 우리를 개방하려는 내적 자유에의 추구인 것이다.

고통스런 기억으로 하여 우리가 하느님의 작품임을 스스로 깨닫게 될 때, 우리는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탄생하게 된다. 요셉처럼 우리도 형제들에게 어떻게 좀더 봉사할 수 있는지 생각하게 돌 때, 또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처럼 하느님의 길을 발견하여 새로운 비전을 갖게 될 때,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성령으로 새롭게 탄생하여 괴로운 상처를 뿌리뽑고 그 자리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심을 수 있다.

우리 자신이 하느님의 작품임을 인식하게 될 때, 우리는 이 고통의 기억들이 우리 안에서 발전시킨 새로운 영역들을 깨닫게 된다. 이런 고통스런 사건들은 아마도 글이나 그림이라는 새로운 의사소통의 길을 발전시키도록 우리를 인도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선물에 관해 알게 됨으로써 이 기억이 우리들에게 어떻게 새로운 영역들을 창출해 내었는가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학급 동료들로부터 받은 조소는 우리 안에 있는 새로운 선물들을 개발시킬 뿐만 아니라, 하느님께 우리 자신을 개방하는 새로운 존재가 되도록 우리를 변화시킨다. 우리 자신이 고독에 빠질 때, 우리는 하늘과 땅 사이에 고독하게 매달리신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 마태오 복음 5장의 산상수훈은 고통의 기억으로 인하여 하느님을 만나게 되는 여러 방법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친구들로부터의 소외나 죽음에 관한 고통의 기억은 그분이 겪으셨던 것과 똑같은 경험을 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한 측면을 이해하도록 우리의 마음을 열어 놓는다.

홀로 십자가의 길을 가고 있는 동안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친구들로부터 버림받았다고 느끼셨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느낌은 같은 경험을 겪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일깨우는 것이다. 이렇게 그분은 사도 요한에게 또 당신의 어머니에게 또 오른편의 회개한 도둑에게 다가가신다. 또한 우리가 그 같은 버림을 당하지 않도록 우리에게 성체성사를 남겨 놓으셨다.

그리스도는 고통스런 기억이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열어 놓게 하는지 말씀하신다. 단지, 우리들은 우리들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상처를 받듯 우리를 역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 있음에 어떻게 좀더 민감해야 할지 혹은 그와 같은 상황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을 어떻게 동정해야 할지 그리스도께 여쭙기만 하면 된다.

 

한 신앙심 깊은 자매는 자신이 개발시켜 온,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않겠다는 선물에 대해 감사했을 때, 자기 상관의 거친 말까지도 용서할 수 있었다고 했다.

수년 동안 우울병으로 고생해 온 한 부인은 자기를 우울병에 걸리도록 한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었다. 그것은 우울병에 걸린 사람들을 동정하면서 그들을 돕고 잇는 일이 현재 자기의 가장 큰 축복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새로운 선물을 통해 우리가 원하지 않는 행동이나 충동을 극복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힘을 주신다. 우리의 선물에 대해 더 많은 감사를 드릴 때 우리는 상처, 화, 분노 등에 더 이상 지배되지 않고 하느님께 감사 드리게 된다.

이런 기억들이 어떻게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과 우리의 이웃 그리고 우리 자신에게 마음을 여는지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시면, 우리는 그 기억에 연관된 모든 것이 우리가 성장하는 경험이 될 수 있도록 그분께 간구해야 한다.

 

“어떤 사람이 자기 형제가 죄짓는 것을 볼 때 그것이 죽을 죄가 아니라면 하느님께 간구하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 그 죄인을 살려 주실 것입니다. 사실 죽을 죄가 있습니다. 이런 죄를 지은 사람을 위하여 간구하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I 요한 5, 16).

 

비극적인 모든 기억들은 각기 감사할 기회를 제공하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우리 하느님 아버지의 가족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그 가족이 점점 가족다워짐에 따라 한때 비극적은 것으로 보였던 사건들이 생명을 주는 사건들로 바뀌게 된다. 자녀가 실패를 겪어 보고, 실망감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혹은 집을 나가 버린 후에 그 자녀는 성장한다. 이러한 얘기는 하느님의 가족 누구나가 되풀이하고 있는 얘기다.

하느님과 그 외 잡신들과의 기본적인 차이점은 하느님은 우리에게 당신 가족으로서의 구성원이 돌 것을 요청한다는 사실에 있다. 하느님의 백성은 생명의 빵 – 과월절에서 유래된 성찬을 나눈다. 그 백성의 자녀들은 그들의 하느님을 “아빠 Abba, 아버지”라고 부르는데, 이는 팔레스티나 지역에서 사용되는 어휘이다.

 

“여러분이 받은 성령은 여러분을 다시 노예로 만들어서 공포에 몰아 넣으시는 분이 아니라 여러분을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성령에 힘입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로마서 8, 15).

 

우리 가족의 이야기에 대하여 그리스도께서 속죄의 순간을 보여 주실 때,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줄곧 보여 주신 새로 우리의 삶을 보기 시작한다. 우리가 가족으로서 성장하며 할수록, 우리 가족의 이야기에 대해 감사하면 할수록, 우리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치유하신 방식을 소중히 여기게 된다. 우리는 감사하는 사람이 됨으로써 한 가족이 되는 것이다.

 

 

 

나눔의 주제

 

1. 똑같은 스트레스 (예를 들어 죽음, 병, 상실감)라 할지라도 마음을 쇠약하게 하거나 혹은 하느님의 사랑을 새로이 경험하도록 이끌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비극적으로 경험하고 또 어떤 사람은 성장의 기간으로 경험합니다. 왜 틀린 경험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2. 애굽[이집트] 의 요셉, 엠마오의 제자들, 그리고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는 비극에서 출발되었으나 결과적으로는 성장을 가져 왔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드라마인지요, 아니면 삶의 진리를 말하고 있는 것인지요?

3. 친구의 죽음이나 병 등의 비극이 어떻게 자신의 참된 자아와 하느님 그리고 이웃에 좀더 가까이 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일까요? 또, 이런 행위를 방해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개인묵상

 

1. 당신이 갖고 있는 선물 10가지를 종이 위에 적어 보십시오. 비극적으로 생각되었던 것들이 그 동안 얼마나 변했습니까?

2. “치유를 위한 영성훈련 (177-179페이지) 으로 가 보십시오. 사랑을 주고받는 이러한 경험 중의 그 어떤 것이 비극의 중앙에 자리잡고 있습니까?

3. ‘기억의 치유와 사각형’ (180페이지)을 보십시오. 당신도 그와 같이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공감합니까? 당신은 당신이 받은 상처를 다른 사람에게 주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까?

4. ‘기억의 치유와 사각형’의 제6, 제7 단계를 실시해 보십시오. 당신의 상처가 성장한 경우를 적어도 다섯 가지는 찾아 보십시오.

 

 

 

 

제8장

치유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하기

 

 

주님을 만난 사람들에게서 우리는 변화를 기대한다. 우도 나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처럼 주님을 만나자마자 새롭게 되는 경우가 있다. 우리는 이러한 쇄신의 순간들을 성령세례라고 부른다.

성령세례가 자신의 마음의 문을 여는 전환점이 되듯 기억의 치유 또한 그러하다. 성령세계와 기억의 치유를 체험한 사람은 모두 회개하는 사람으로서, 새로운 삶을 발견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에 초점을 맞추며, 하느님과 이웃 그리고 자신을 사랑할 새로운 힘을 달라고 그리스도께 간청한다.

우리는 기억의 치유를 받은 사람이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타인을 위하여 봉헌하는 아름다운 은총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또한 우리 자신도 스스로를 주님께 봉헌하였을 때 체험하였던 새로운 삶을 되살리게 될 것이다.

기억의 치유에 있어서 우리는 우리의 상처가 성령의 평화와 사랑으로 대치되는 것을 보고 성령의 현존하심을 체험하게 된다. 한때 우리는 분노나 절망을 느끼기도 했으나 이제는 성령의 선물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성령이 주는 느낌을 더 잘 깨닫게 될 때, 우리는 그 느낌을 선택의 지침으로서 사용할 수 있다.

 

기억의 치유는 내게 지나간 사건뿐만 아니라 현재의 선택에 있어서도 평화를 체험하게 해준다. 또한 나의 직관력을 사용하는 법을 배워 왔는데, 그것은 내가 내 안에 처음 떠오르는 감정을 따를 때 기억의 치유를 통해 느꼈던 것과 똑같은 평화와 사랑을 내게 가져다 주었다.

 

기억의 치유 중에 일어나는 그 같은 평화와 사랑으로 우리 자신을 채울 때, 우리는 성령의 인도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때 우리는 성령이 이끄는 대로 우리 자신이 점점 개방되어 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성령의 현존을 깨닫고 성령의 감정에 근거하여 모든 결정을 내릴 때 우리는 만물 안에 계시는 하느님을 보게 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결정을 내릴 때뿐만 아니라 의식적으로 기도 드리는 순간에도 매우 가까이 우리와 함께 계실 것이다.

 

치유의 효과들은 기도와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기억의 치유는 나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을 다시 느끼게 한다.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동안 나는 기쁨과 평화와 삶의 풍요로움을 체험하였으며, 복음은 찬란한 생명력을 뿜는다는 것을 체험했다. 그것은 성령쇄신 기도가 주는 새로움이었다. 또한 나는 통회의 눈물을 자주 흘리게 되었고 정서적인 선물에 더욱 감사하게 되었다.

 

지나간 기억들에 대한 감정과 용서 그리고 선물을 그리스도와 함께 나눔으로써 우리는 기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평온함을 누리게 될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우리의 감정을 하느님과 나눔으로써 더욱더 우리 자신에 대한 자신감을 갖게 되는 것이다.

 

나는 나의 삶 자체가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나는 삶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않고 그 자유로움 사랑 속에서 평화로이 지내고 있다. 나는 쉼 없이 일하는 것을 멀리하고 더 많은 휴식시간을 취하고자 하며 또한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다. 다름아닌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휴식하는 것이다. 그때 내 마음 속에는 삶의 풍요로움이 고요히 찾아 든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사랑으로 빚은 작품이기에, 우리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 더 이상 이리저리 헤맬 필요가 없다. 치유는, 우리 자신을 과시하기 보다는 하느님이 원하시는 대로, 설령 가난이나 모욕 혹은 또 다른 고통을 의미한다 할지라도 즉각적으로 우리 자신을 내맡기게 한다.

 

치유의 선물은 내가 나에게 부가되는 고통을 견디어 낼 수 있도록 해 준다. 지난 날을 돌이켜 볼 때, 내가 고통의 의미를 잘 알고 있을 때는 그다지 크게 고통 받지 않았으나, 그 의미를 모를 때에는 좌절감이나 죄의식이 나를 휩싸 왔음을 알 수 있다. 치유를 경험하고 나자, 나는 하느님께 나를 고통 받는 곳에 투신하라고 부르실 때에도 “왜”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 별로 걱정하지 않게 되었으며, 과거에 그분께서 해 주신 것처럼 고통으로부터 좋은 결과를 주시리라고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기억의 치유에 있어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고통과 가난, 모욕의 순간에 조차도 어떻게 선물을 주시는지 경험할 수 있다. 이때 우리는 이러한 순간들을 두려워하기 보다는 우리 자신을 열고 그리스도를 따라 어디라도 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 그곳이 가난하든지 부유하든지 간에 우리가 성공하든지 실패하든지 간에. 왜냐하면 어는 것이든 우리에게 선이 된다는 것을 경험해 왔기 때문이다 (로마서 8, 35-39).

기억의 치유는 성령을 민감하게 느끼도록 해 줄 뿐만 아니라 하느님과 이웃 그리고 자신에게 기꺼이 마음을 개방하도록 하며 때로는 물리적인 치유를 가져 오기도 한다. 인디안 수우 족이 좌절감을 없이기 위해 무더운 오두막집에서 마음에 숨을 불어 넣는 광경을 상상해 보라. 또한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도록 입에 숨을 불어 넣고, 두통을 경감하기 위하여 이마에 숨을 불어 넣는 광경을 상상해 보라.

수우 족처럼 크리스천들도 용서가 심리적인 치유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치유도 가져 온다고 믿는다. 그리스도의 용서가 신경마비 환자를 움직이게 한 것처럼 성교회는 용서로 말미암아 육체적인 건강이 회복된다고 믿고 있다. (마르코 2, 1). 예를 들어, 환자에게 주는 병자성사에서 사제는 육체적인 치유를 원하는 사람은 자신을 위해 기도할 사람을 청할 것을, 자신이 지는 죄를 고백할 것을, 또한 그러한 기도가 치유를 가져올 것임을 선언하고 있다 (야고보 5, 13).

파티마와 루르드에서 일어난 것과 같은 육체적인 치유는 좀더 깊은 용서가 오갈 때 일어날 수 잇다. 의학 박사인 찰스 마요 Charles Mayo 는 병을 일으키는 요소들 중 정신적이고 심리적인 요소가 65%~75% 를 차지하고 있다고 보고 했다. 즉 대장염, 위궤양, 심장마비는 아내나 고용주와의 긴장관계에서 생긴 신체상의 반응인 것이다. 나의 환자들은 종종 위궤양, 심장마비, 기절 또는 일시적인 기능정지 등의 고통을 받고 했다. 그러나 그들이 기억의 치유를 받기 시작하자 이러한 증상들이 사라졌다.

우리 자신이 다른 사람과 잘 일치되었을 때 우리는 병에도 덜 걸리게 되고 회복도 훨씬 빨라진다. 용서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가도록 하며, 대부분의 경우 우리를 건강하게 회복시킨다. 하느님은 우리가 당신을, 또 우리 자신과 이웃을 사랑하기를 바라신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심리적 육체적 병을 치유하고자 하신다.

심리적 육체적 병이 우리를 점점 자기 중심적인 사람으로 만들지라도, 우리는 우리를 불러 치유하심으로써 새로운 창조를 이루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으면 새 사람이 됩니다. 낡은 것은 사라지고 새것이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모두 다 하느님께로부터 왔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내세워 우리를 당신과 화해하게 해 주셨고 또 사람들을 당신과 화해시키는 임무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곧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죄를 묻지 않으시고 그리스도를 내세워 인간과 화해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화해의 이치를 우리에게 맡겨 전하게 하셨습니다” (II 코린토 5, 17-19).

 

이러한 새로운 창조는 누리가 하느님의 치유 방식에 “예” 라고 대답하는 순간에 시작된다. 우리 자신을 하나의 새로운 피조물로 인식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순간을 넘어 미래를 바라보게 되고, 하느님께서 치유하신 새로운 존재로 행동하게 된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내 말을 잘 들어 두어라. 너희가 기도하면 구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임 받았다고 믿기만 하면 그대로 다 될 것이다. 너희가 일어서서 기도할 때에 어떤 사람과 서로 등진 일이 생각나거든 그를 용서하여라. 그래야만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해 주실 것이다” (마르코 11, 24-26).

 

우리는 이미 하느님의 치유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음으로써 우리가 하느님의 치유 능력에 함께 참여하는 데 있어서 방해가 되는 요소, 즉 우리 안의 의심하는 마음과 싸우게 된다.

 

“그런 사람은 아예 주님으로부터 아무것도 받을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 의심을 품은 사람은 마음이 헷갈려 행동이 불안정합니다” (야고보 1, 7-8).

 

나는, 치유가 우리가 상상했던 시간에 정확히 일어나고, 우리가 생각했던 방식에 정확히 일치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보다도 우리 자신을 더 잘 아시고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의 치유 방식대로 간청해야 하며 우리의 근시안적인 방식으로 그분께 요구해서는 안 된다.

참된 희망은 모든 것을 하느님께 두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하느님을 묶어 두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마치 어머니에게 먹을 것을 보채는 어린애와 같지만, 어머니께서 그 요구를 들어 주지 않으신다고 해서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어머니는 아이에게 가장 좋으리라고 생각되는 것만을 주시며 아이도 그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의 미래를 향해 나아가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방식대로 우리를 치유해 주시고, 우리를 우리 이웃과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께로 점점 더 이끌어 주신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다.

잔치는 언제나 기억의 치유가 이루어진 다음에 일어났다. 요셉은 벤야민의 팔짱을 끼고 울면서 이렇게 말했다. “주인께서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그리고 길 위에 있던 사람들은 제자들과 함께 축하해 주기 위해 달려갔습니다” (창세기 45, 25; 루카 15, 27; 24, 34).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음을 주님과 함께 축하하고 그 분께 즐거움과 감사를 드려야 한다.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을 그리스도께 감사하고 또한 진정한 용서가 오갈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방식대로 치유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성령쇄신운동에서 체험할 수 있는 성령 세례이며, 수우 족의 오두막집에서 겪을 수 있는 체험인 것이다 우리가 거룩하신 주님과 만나 그분의 용서를 펼치게 될 때, 분명 우리는 더욱 치유될 것이다.

 

 

 

나눔의 주제

 

1. 용서는 정신적 육체적 병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2. 하느님은 우리가 당신의 뜻에 맞게 간청하면 치유해 주시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왜 우리가 간청하는 방식이나 시간에 맞지 않게 우리를 치유하시는 것일까요?

3. “하느님은 나를 사랑하지 않아” 혹은 “치유를 위한 기도가 응답을 받지 못한 것을 보니 믿음이 적은 모양이야” 라고 느끼는 사람에게 당신은 무슨 말을 해줄 수 있겠습니까?

4. 하느님께서 사용하시리라고 생각되는 치유 방법을 묵상해 보십시오. 하느님께서 우리를 치유하시도록 자유롭게 맡겨 드리는 데 있어서 그 묵상은 어떻게 힘이 되어 줍니까?

 

 

개인묵상

 

1. 당신은 당신이 요청했던 것보다 더 좋은 방식으로 당신의 기도가 응답을 받은 경험이 있습니까?

2. 당신이 어떤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자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게 된 경험이 있습니까?

3. 당신이 진실로 주님의 치유에 대해 감사를 느낀다면 그 치유를 당신 자신과, 당신이 상처를 입힌 사람들에게 나누어 보십시오. 183 페이지에 나오는 ‘기억의 치유와 마름모꼴’을 해 보십시오. 천천히 일 주일 혹은 그 이상의 시간을 가지고 해 보십시오.

 

 

 

 

제9장

다른 기억들과의 만남

 

기억의 상처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마치 빚지고 있던 백만 원을 탕감 받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께 기억들을 많이 내맡기면 내맡길수록 그분께서는 백만 원이 아니라 천만 원 아니 그 이상이라도 갚아 주실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듯이, 천만 원을 빚진 사람이 백만 원을 빚진 사람보다 더 그의 은인을 사랑할 것이다 (루카 7, 41 참조)

우리가 고통스런 기억들을 그리스도께 내맡길 때 비로소 우리는 하느님과 이웃 그리고 우리 자신을 더욱더 완전한 방식으로 사랑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의 바르지 못한 행동이 시작된 시기와 그 유형을 깨닫고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그같이 행동했을 때의 경우를 되돌아봄으로써 우리가 어떻게 고통으로 일그러진 자신의 기억들에 접하게 되는지 보아 왔다. 그뿐만 아니라 어떤 특정한 사람이나 말 혹은 사건들을 회상함으로써 우리는 상처받은 기억에 다가가기도 한다.

아내와 자주 다투던 남편은 자신이 사람들로부터 받은 상처를 돌이켜보면서 아내와의 반목을 멈추기 위하여 먼저 자기를 무시했던 어머니를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과 어머니가 포함된 여러 기억들을 그리스도께 내맡긴 후 그는 더 나아가 가족들, 학교 선생님들, 친구들, 함께 일하는 동료들, 그리고 이웃들과의 기억을 상기하였다.

거절, 당황, 두려움, 무시, 분노, 불친절 또는 험담 같은 말들이 우리 안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아직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께 온전히 내맡기지 않았음을 뜻한다. 아들이 자기 친구들에게 행여 흉잡히지나 않을까 하여 아들을 “따돌린” 어머니에겐 그녀가 치유되어 아들에 대해 인내심을 갖기 전에 먼저 그리스도께 봉헌해야 될 기억이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나 말들이 우리 마음 속에서 기억을 떠올리지 못할 때, 우리는 단체를 생각하게 된다. 군사 집단, 경제 단체, 정당 그리고 종교 단체 등에 우리가 소속해 있든지 혹은 소속해 있지 않든지 간에 그로부터 받은 상처라 우리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다.

실수와 고통은 곧 하느님의 벌이라고 가르친 종교 단체를 용서한 후에야 좌절을 극복할 수 있었던 여자를 상기해 보라. 그녀는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라는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됨으로써 자신의 존재 가치를 소중히 여길 수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남편의 성급한 언사, 어머니의 조바심, 아내의 좌절감 같은 것들을 더 특별히 치유하신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더욱 전반적인 치유, 즉 우리를 불구로 만드는 그 모든 것에 접하기를 바라신다.

우리는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지금까지 겪어 온 모든 상처를 내버림으로써 전반적인 치유에로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다. 모태에까지 거슬러 올라가 어머니의 호르몬을 나누게 됨으로써 우리는 어머니가 경험한 상처를 똑같이 경험할 수 있다.

우리는 여러 방법으로 전반적인 치유를 체험할 수 있다. 우리의 일생을 어린 시절, 사춘기 그리고 성년기로 나누어서 약 일 주일 정도의 기간 동안을 어린 시절에 관한 기억에 접해 보라. 그 다음 주에는 사춘기적 기억을 되돌아보고, 이어 성년기에 관한 기억도 더듬어 보라. 여러 피상적인 기억을 생각하기 보다 다른 기억들에 영향을 미치는 뿌리가 되는 한 가지 기억을 온전히 그리스도께 내맡기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각각의 기억에 시간을 할애하고, 주님과 함께 기억 속에 들어가 주님께서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도 용서하고, 그 기억에 대해 감사드려야 한다. 이처럼 우리의 삶을 모두 되돌아본 후에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든지, 어떤 특정한 기억을 다시 돌아보든지 할 수 있다.

비록 어떤 기억이 점진적으로 치유된다 할지라도, 우리가 주님의 신발을 신고 그분과 함께 그분의 발걸음으로 우리 기억 속에 깊숙이 걸어 들어간다면, 점점 깊은 치유가 일어날 것이다.

삶을 돌이켜보노라면, 전혀 기억할 수 없는 시기에 접하기도 한다. 이러한 경우 하느님께 우리는 잘 기억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여전히 우리를 통제하고 있는 상처를 없애 달라고 간청할 수 있다. 우리는 비록 잊어 버렸다 할지라도,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어머니의 뱃속에 있던 시절조차도 기억하고 계신다 (이사야 48, 1; 예레미야 1, 15; 갈라디아 1, 15). 우리가 상처를 의식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실 것을 간구해야 한다.

 

“성령께서도 연약한 우리를 도와 주십니다. 성령은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모르는 우리를 대신해서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깊이 탄식하시며 하느님께 간구해 주십니다. 이렇게 성령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 성도들을 대신해서 간구해 주십니다. 그리고 마음 속까지도 꿰뚫어 보시는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성령의 생각을 잘 아십니다” (로마서 8, 26-27).

 

우리가 상처받은 마음을 하느님의 사랑처럼 큰 사랑으로 바꾸기 위해 주님께 모든 것을 내어 맡길 수 있도록 성령께서는 우리를 도와 주신다.

우리는 더 이상 상처에 집착하거나 또는 상처가 우리를 조종하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 더 많은 죄를 진 여자를 용서하셨듯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큰 사랑으로 우리를 용서하신다.

 

“너는 내 머리에 기름을 발라 주지 않았지만 이 여자는 내 발에 향유를 발라 주었다. 잘 들어 두어라. 이 여자는 이토록 극진한 사랑을 보였으니 그만큼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루카 7, 46-47).

 

많이 용서하고 많이 용서받음으로써 우리는 주님께서 당신과의 관계를 방해하는 모든 것을 치유하시도록 할 수 있다.

 

 

 

나눔의 주제

 

1. 한 가지의 기억이 치유되면 그것은 다른 기억들의 치유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그 예를 들어 보십시오.

2. 기억은 하나의 둥치, 하나의 뿌리에 달린 나무 가지와 같이 서로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당신은 연결된 그 기억들을 어떻게 밝혀 내겠습니까?

3. 언제 당신은 개별적인 이억에 대한 특정한 치유보다 전반적인 치유를 사용하겠습니까?

4 뿌리가 되는 한 가지 기억을 완전히 치유하는 것이 나은지, 아니면 깊이는 덜하지만 많은 기억들을 치유하는 것이 나은지 얘기해 보십시오. 자기 주장의 이유를 설명해 보십시오.

 

 

 

개인묵상

 

1. 180페이지에 나오는 ‘기억의 치유와 사각형’을 보십시오. 사람, 단체 또는 말이 치유되어야 할 기억들을 상기시켜 줍니까? 그 기억들은 다른 기억들보다 뿌리가 되는 기억에 더 근접합니까? 부리가 되는 기억에서 가장 가까운 다음 기억을 치유하기 시작하십시오.

2. 어린 시절, 사춘기, 성년기로 나누어 각 시기에 경험한 상처들의 목록을 만들어 보십시오. 목록이 작성되면 1시간 동안 전반적인 치유의 기도를 시작하십시오. 당신이 몇 가지 형태의 상처를 발견할 경우 뿌리가 되는 기억에 대한 치유를 시도해 보십시오.

 

 

 

 

제10장

기억을 치유하기 위한 기도

 

기도는 우리가 특별히 원하지 않는 한은 일어나야만 하는 잠자리와 같다. 아침식사의 음식 냄새를 맡으며 오늘은 좋은 일들이 생길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좀더 쉽게 잠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수 있다.

앞에서, 우리는 과거의 상처 때문에 움직이지 못하던 생각을 털고 일어나 기억의 치유를 통해 그리스도와 함께 걸으면서 새로운 하루를 시작했을 때에 얻는 이득을 이야기했었다. 여기에 한 가지, 즉 “직접 행함”이라는 단계가 더 첨부되어야 한다.

당신은 기억의 치유를 어떤 방식으로 간청할 것인가? 여기 그 한 예로서, 자신의 직무에 즐거움을 느끼기 보다는 조바심만 내는 한 가정의 가장의 기도를 소개하겠다.

 

 

+ 하나

주님, 치유를 위한 이 시간에 당신이 함께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 치유를 행하시도록 저의 시간을 기꺼이 내어 드리고자 합니다.

특히 저의 미래가 더욱 주님께 속하도록 하기 위하여 저를 늘 지배하고 있는 과거의 상처들을 당신께서 치유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 둘

주 예수여, 그 어느 때라도 당신이 치유하고자 하시면 내가 그 치유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나의 과거를 통하여 당신께 가까이 걸을 수 있도록 나를 도우소서.

제가 직접 보지는 못할지라도 주님의 무한하신 능력이 저를 다시 다듬으시고 치유하시리라 믿습니다. 주님께서는 제가 저 자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저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간구한 사람 모두를 치유하셨던 것처럼 저를 치유하고자 하심에 감사드립니다.

 

 

+ 셋

주님, 제 과거 속에서 저에 대한 당신의 사랑이 깃든 모든 생활양식들을 보게 됩니다. 주님, 제가 그림과 글을 감상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신 저의 고등학교 선생님께 특히 감사를 드립니다.

또한, 제가 이러한 재능을 저의 자식에게 전할 수 있도록 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자식들과 가까워지게 된 것을 비롯하여, 그 모든 관계 속에서 당신이 행하신 치유에 대해 감사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주님, 당신께서 저의 지나간 과거를 함께 걸으면서 이때까지 치유해 주신 것과는 다른 길을 저에게 보여 주실 것을 특별히 간구합니다. 이제 저를 쉬게 하시어 주님께서 보여주신 것들에 대해 감사하게 하소서.

 

 

+ 넷

예, 주님, 주님께서는 여러 방법으로 저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저는 이것을 당신께서 더욱더 많은 것을 하시고자 한다는 표지로 받아들입니다. 주님께서는 제 안의 그 무엇을 치유하고자 하시는지요? 저의 어떤 것을 치유하고자 하시는지 저에게 보여 주소서. 또한 이것이 단순히 저의 자아 여행이 되지 않도록 하소서. 저와 함께 지나간 몇 주를 되돌아보면서 제가 어느 때 주님의 현존을 막았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주님께서는 무엇을 보십니까?

 

제가 당신과 함께 걸을 때, 제가 인내심을 잃을까 봐 당신은 매우 불안해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제가 평화와 기쁨을 잃고 굴복할 때조차도 당신은 당신 현조의 자취를 남겨 놓으십니다.

제가 추측하건대 그것은 대개 사무실에서, 특히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 ‘아니오’라고 말할 수조차 없을 때 일어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물론 제가 열심히 일을 해야 하고 저 자신을 증명해야만 하는 그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누구에게냐구요? 저 자신, 저의 동료, 심지어는 당신께까지도.

주님, 이는 참으로 비극입니다. 저는, 당신의 사랑을 획득해야만 하며 저 자신을 주님께 증명해야 한다고, 혹은 그 밖의 무엇인가를 생산해 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럼으로써 저는 저 자신뿐만 아니라 직장의 동료들이 당신을 ‘사랑’으로 알아 뵙는 것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저 자신을 과시하고자 할 때의 저의 행동은 사랑에서라기 보다는 두려움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저는 우리 모두가 당신의 사랑으로 서로서로 사랑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고 있습니다. 저는 일을 하다가 화가 나면 제 주위의 모든 일들이 정리될 때까지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으며 집에 돌아와서는 가족들을 돌보지 않습니다.

주님, 진실로 저는 이 문제가 치유되기를, 어떤 대가를 지불하고라도 치유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주님, 당신께서 이미 저의 삶 속에서 이런 것을 치유하기 시작하심에 감사드립니다. 이제 저는 어린아이들이 집 주변에서 떠들며 놀아도 그 아이들에게 성을 내가 않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저는 저녁에 아이들과 함께 그림을 그리면서 즐거워하기까지 했습니다.

 

이제는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때에도 저 자신을 과시하고자 하는 강한 욕구가 사라짐을 느낍니다. 계속 치유해 주시어 제 삶에서 만나는 사람들, 특히 역사하시는 주님 당신과도 친교를 나눌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저는 에 아이들과 노는 즐거움보다 주님과 함께 하는 즐거움을 더 누리고자 합니다. 평화로이 주님과 함께 있고 싶습니다.

 

 

+ 다섯

주님, 당신께서는 저의 과거를 낱낱이 알고 계십니다. 저 자신을 과시하고 싶은 충동의 배후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그 충동은 언제 시작되었나요? 그것은 오랫동안 제 곁에 머물렀던 것 같습니다. 이제 멈추어 서서 지나간 세월을 당신과 함께 돌이켜 보도록 해 주십시오.

결혼, 고등학교 시절의 과외공부, 국민학교 시절, 집 마당에서 놀던 꼬맹이 시절 등등 그 모든 과거에 자신을 과신하고자 했던 나를 발견합니다. 그때의 제 모습이 어떠했습니까? 이런 태도는 내가 나 자신에 대해 확신을 갖지 못하거나 다른 사람들이 나를 신뢰해 주지 않을 때 생겨났던 것 같습니다.

 

주님, 저는 저의 부모, 친구 혹은 급우들이 저를 단 돈 백 원의 가치로도 취급해 주지 않을 때의 그 모든 시간을 당신께 내어 드립니다. 그 시간으로 들어오시어 상처를 끄집어 내시고 당신의 사랑을 부어 넣으십시오. 주님께서 치유해야겠다고 생각하시는 특정 시간이 있습니까? 그것 역시 쓰리고 가슴 아픈 시간일 것입니다.

주님, 제가 가장 큰 상처를 입었던 기억은 제 아버지가 저를 무시하고 신문만 계속 읽으시던 때입니다. 제가 치유 받아야 할 모든 감정을 당신께 봉헌하며 당신과 함께 그 감정들을 풀 수 있도록 도와 주십시오.

 

제가 어렸을 때 아버지께서는 집으로 돌아오셔서 커다란 붉은 의자에 앉아 신문을 꺼내 드시고는 쉬고 싶으니 우리더러 밖에 나가 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 저는 조용히 있겠다고 말씀드립니다. 그러다가도 조금 후면 다시 소란을 피우게 되고 아버지는 아까보다 더 큰 목소리로 “그만해! 밖에 나가서 놀라니까! 다시 또 떠들면 내쫓을테다. 마지막 경고야!” 라고 소리치십니다. 그것이 저를 무섭게 했으며, 그 후 그분은 결코 또다시 경고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나는 그 신문을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싶었지만 그렇게까지는 못하고 한때 그것을 숨기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언제나 나를 보면 으르렁거렸기 때문에 “너는 사람도 아니야” 라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울고 말았습니다 이전에도 비난 받았던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마 그것이 그 이후로 제가 아버지에게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나 자신이 누구보다도 더 훌륭하다고 뽐내려 하는 행동의 동기가 된 것 같습니다.

주님, 제가 그때 느낀 것과 지금까지 저에게 남아 있는 모든 잔유물을 당신께 봉헌하도록 도와 주십시오. 주님, 저는 상처를 입고 있습니다. 저를 어루만져 주십시오 그리고 제가 지금 아버지를 필요로 하고 있다고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 여섯

사랑하는 주님, 당신은 그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저로 하여금 당신과 함께 그 장면으로 돌아가 당신께서 하시려고 하는 것을 보게 해 주십시오. 당신은 저와 저의 아버지를 보고 웃고 계시는 것 같군요. 당신께서는 또 무엇을 보고 계십니까? 아버지는 왜 그렇게 행동하지요? 추측하건대, 저와 제 아버지의 행동의 원인은 그렇게 많이 틀리지는 않을 듯 합니다. 아마 아버지에게도 아버지를 무시하는 사람이 있었고, 사무실에서 지내기가 어려웠던 모양입니다. 환풍기도 없는 사무실에서 하루 열 시간씩이나 일하고 또 그로 인해 건강도 퍽 해친 것 같습니다. 분명 아버지는 가족을 위하여 최선을 다해 일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 저를 잠시 멈추게 하시어 당신이 보시는 아버지의 선한 면을 저로 하여금 보게 하시고, 어떤 고통이 아버지를 억누르고 있는지 보게 해 주십시오.

 

주님, 당신께서 저의 아버지에게 말씀하시는 바를 제가 주의 깊게 보도록 해 주십시오. 당신께서는 제 아버지를 기꺼이 그리고 완전히 사랑하시며 또한 제 아버지가 변하든 변하지 않든 간에 조건 없이 사랑하시면서 잃어버린 아들처럼 대하고 계십니다. 제 아버지에게 더 많은 배려와 사랑이 필요하다는 증거로 그의 약점을 보고 계십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주님, 제가 용서를 경험했거나 그것을 제공할 수 있었던 시간과 접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시오. 저의 제안이 어떻습니까? 저를 세우시고 당신과 함께 제 아버지에게 가서 그를 위로하고 당신께서 말씀하시고 싶어하는 것을 제가 아버지에게 말하도록 도와 주십시오. 제가 말할 수 없는 것은 저를 위하여 당신께서 말씀해 주십시오.

 

 

+ 일곱

감사합니다, 주님. 저 혼자서는 제 아버지를 결코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용서와 더불어 깊이 있는 치유가 새로이 생겨나고, 비록 그것이 저의 자만심 때문에 숨겨진다 해도 거기에는 성장이 있음을 믿습니다. 그 성장은 상처의 시간, 애굽의 요셉이나 탕자가 성장할 수 있었던 바로 그 상처의 시간에 시작되었습니다.

 

이제는 제가 상처로 인해 성장했다는 사실을 주님께 감사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시오. 당신께서는 제가 저의 참된 자아, 다른 사람들 그리고 당신께 좀더 가까이 다가가도록 하기 위하여 그 상처를 어떻게 활용하셨나요? 제가 추측하기로는 아버지로부터 받은 무시로 인해 어머니께 좀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으며, 반면 아버지를 멀리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로 해서 아버지 곁을 떠나게 되었으나 약간의 죄의식을 느꼈으며 아마도 그것이 아버지께서 저와 가까워지게 된 원인이 된 것 같습니다.

새로운 친구들의 도움으로, 그리고 주님과 함께 한 기도 속에서 제가 의지할 곳을 찾게 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제가 민감하게 반응을 보이며 저의 친구들을 무시했던 것은 아마도 제가 무시당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주님, 저 자신을 입증할 목적으로 개발시켜 온 재능에 대해서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구체적인 표현 양식인 글과 그림들을 허락하심에, 또 제 아이들이 당신의 선물을 볼 수 있도록, 저의 글과 그림을 그들과 함께 나눌 수 있도록 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주님, 잠시 머물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이 상처를 통하여 당신께서 저에게 주시는 또 다른 양식의 선물을 내 마음에 받아들일 기회를 갖겠습니다. 또한 제가 미처 보지 못하고 있는 그 모든 것에도 감사를 드립니다.

 

 

+ 여덟

주님, 당신께서는 저의 요청 없이도 이미 이토록 많은 치유를 행하셨습니다. 제 삶에서 상처를 벗겨 버리시고 사랑으로 가득 채워 주셨으니 이제 당신께서는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저는 당신께서 과거에 제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거의 알지 못합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제가 미래에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사랑하시기를 바라십니까? 제가 저의 사장님을 어떻게 사랑하시기를 바라십니까? 오 주님이시여, 저로 하여금 당신을 바라보게 하시어 당신의 뜻을 간구하게 하소서.

주님, 저는 당신께서 저의 미래를 저와 함께 걷기를 얼마나 바라시는지 알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 제 책상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서류를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서 열심히 일하는 그런 굳은 마음은 이제 갖고 있지 않습니다. 저는 제 사장님에게 미소를  지을 수도 있으며, 기쁜 마음으로 서류 뭉치를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그 일을 받아들이시겠는지요? 아니면 그에게 다른 일거리를 보여 주시거나 먼저 할 일이 어떤 것인지를 알려 주시려는지요? 제 생각에 당신은 그에게진실을 알려 주시려는 것 같아요. 사실, 그 일은 네 사람이 해야 할 몫이지 저 혼자서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차거든요. 그러나 문제는 내가 이미 떠맡고 잇는 일이 얼마나 되는지 그에게 얘기하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문제를 사장님에게 말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그는 잘 이해할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일이 잘 될 것입니다. 주님, 바로 당신이 그곳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 저를 도와 주십시오. 당신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바를 제가 말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또한 과중한 업무임에도 아무 소리 하지 않고 그 많은 일거리를 묵묵히 떠맡는, 그런 안일한 태도를 취하지 않도록 저를 도와 주십시오.

 

주님, 당신이 제 사무실에서 하루를 보내신다면 직장 동료들과 어떻게 유쾌히 지내시는지 볼 수 있도록 저를 잠시 쉬게 해 주십시오.

 

 

+ 아홉

주님, 당신은 단 한 가지 사건을 통해서도 그처럼 많은 것을 알려 주십니다. 저는 이제 막 시작하였습니다. 당신께서는 당신의 치유 능력으로 저의 모든 삶에 관여하시고자 하십니다. 당신의 치유를 필요로 하는 다른 고통스런 기억들도 제 마음에 일깨워 주십시오. 개인적으로 혹은 제도적으로 다른 사람들이 저에게 입힌 상처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저로부터 어떠한 고통스런 말을 듣고자 하시는지요?

저에게 상처를 주어 지금도 제가 주님께 상처를 입히도록 만드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당신께서는 이 기도 중에 이미 저로 하여금 몇 가지 – 고등학교 시절의 과외, 국민학교 생활, 결혼 등에서 나 자신을 과시하고자 했던 것 -를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또 무엇이 있습니까? 어느 것이 가장 뿌리깊은 것인지요? 가장 먼저 치유되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주님, 이웃뿐만 아니라 나 자신을 용서하고 치유할 수 있도록 이 기도 중에 저를 일깨우소서. 또한 치유되어야 할 새로운 영역을 오늘 열어 주심에 감사 드리나이다.

 

 

 

 

제11장

기억의 치유와 고백성사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백성사를 점점 더 게을리하고 있다. 우리는 왜 고백성사를 꺼리는 것일까?

 

고백성사를 드린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것이라고 오랫동안 인식되어 왔다. 나 역시 고백성사를 빠질 수 있는 핑계를 짜내어 제법 그럴 듯하게 이유를 내세우곤 하였다. 나는 고백성사란 단지 죽을 죄를 지었을 경우에만 드리는 것이며 다소 사소한 죄는 내가 부끄러움을 느끼는 그 순간에 용서받은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피상적이고 비인간적인 고백성사라는 형식을 택하기 보다는 그리스도께 내 스스로 잘못을 뉘우치고 기도하고 싶었다. 하느님은 우리의 마음이 바뀌길 원하시는 것이지 고백할 때마다 되풀이되는 듯한 죄의 목록을 만드는 데 급급해 하시지는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고백성사가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의미한다면, 굳이 단조로운 목소리로 숨쉴 틈 없이 충고를 늘어놓는 신부님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만날 필요는 없다고 여겼다. 신부님이 그렇게 똑같은 모양으로 애기하시려면 아예 녹음이라도 해 놓으실 일이지…

 

우리는 똑같은 죄를 서두르며 고백하거나, 급하게 중얼거리시며 신부님의 말씀을 거의 알아 듣지 못하거나, 혹은 고백을 드린 후에도 자신의 삶에 아무런 변화를 체험하지 못한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우리가 죽음에 이를 대죄를 지어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 놓인 친교의 끈을 끊어 버리지만 않는다면, 살면서 고백성사를 드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과의 친교를 끊어 버린 사람만이 고백성사를 볼 필요가 있는 것은 물론이나 고백성사는 어느 누구에게나 사랑하고 성장할 수 있는 힘을 키워 준다. 고백성사는 자양분이 듬뿍 든 음식이나 혹은 치료제와 같다. 그러므로 고백성사는 단지 죽음에 직면했을 때 찾는 것이 아니라 치유를 보존하고 활력을 얻고자 할 때 필요한 것이다.

고백성사를 받은 사람이 점점 줄어 들고 있는 요즈음, 칼 메닝거 Karl Menninger 박사와 같은 정신과 의사들은 우리가 스스로 죄인임을 깨달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우리가 스스로 죄인임을 깨닫는다는 것은 우리가 끼쳤던 해악 害惡을 스스로 알고, 그것에 대해 책임을 지며, 따라서 우리가 변화할 수 있기 때문에 정신적인 건강을 가져다 준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스스로의 잘못을 깨닫고 그것에 책임을 지고 변화한다면, 어떤 문제가 남아 있겠는가? 인종차별, 공해문제, 전쟁 그리고 정치적인 부패가 만연한 세상도 따지고 보면 죄를 부인하는 데 그 원인이 있는 것이다 고백을 하면서 우리는 더 이상 자신의 잘못에 대해 눈을 감거나 마음을 무디게 하지 않으며, 더 이상 무책임한 정신적인 병에 자신을 내맡기지 않겠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고해소가 없다면,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은 감옥이 아니면 정신병원이다. “용서해 주십시오, 하느님. 저는 죄인입니다”라는 말은 “용서해 주십시오, 하느님, 제가 책임이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변화되리라는 희망도 갖고 있습니다”라는 말이다.

그러나 정신과 의사들이 말하는 것은 메닝거 박사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고백성사가 특별한 점은 우리를 인정해 주고 변화될 수 있다고 말해 주는 정신병 치료사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용서하시고 또한 우리가 변화할 수 있도록 당신의 능력을 주시는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는 데 있다 (마태오 16, 19; 요한 14, 10-12).

그리스도께서 ‘용서’라는 치유를 부각시키기 위하여 왜 고백성사를 택하셨는지 우리는 모른다. 우리가 아는 것은 그리스도 당신의 생명을 우리 안에 깊이 심어 주심을 우리가 구체적으로 느낄 수 있도록 그분께서 고백성사를 택하셨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연인이 되고 싶어 하신다.

어떤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고 있다면, 서로 상대방에 대해 단지 생각만 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상대방이 어떻게 지내는지 들어주며, 자신을 상대방에게 내어 주고자 하는 표현으로서 선물도 주고받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신다는 표시로서 용서에 대한 말씀을 주셨으며 사제도 허락하셨다. 이러한 구체적인 표시는 비록 사라져 버릴지라도 예수님의 치유에 대한 체험만은 우리에게 깊이 남아 있다.

어떤 신부들은 우리에게 귀를 기울여 주고 대화하면서, 고백시간을 사랑이신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로 이끌어 준다. 그러나 급히 서두르며 중얼거리는 신부의 말을 알아 듣지 못할 때에도, 그리고 구체적으로 용서를 받았다는 느낌이 잘 들지 않을 때에도 그리스도는 우리를 용서하시고 새롭게 만들어 주신다.

 

저는 비인격적인 사제에게 가서 고해하는 것보다 홀로 기도하기를 더 원해 왔습니다. 그런 사제를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 제가 어떻게 하느님께 진정으로 용서를 청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능력이 이천 년 전의 어린아이로부터 나오고 말없는 성체 속에서 드러나시는데, 왜 약한 세자를 통해서는 드러나지 않는다고 믿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당신께서 가장 완전하고 인격적인 용서로써 택해 주셨던 고백성사를 통해서가 아니라 제 방식대로 당신께 용서를 청해 왔습니다. 저는 정말로 당신께 마음을 열고 있습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저는 바리사이파 사람과 같았습니다 (루카 18, 11-12). “오, 주님! 감사합니다. 저는 죄인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고백성사를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저는 죄인인 신부를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 당신께 용서를 청하고 기도를 드리는 선량한 사람입니다.”

 

비록 사제가 비인격적이며 습관적으로 성사를 집행하여 우리에 대하 그리스도의 사랑이 구체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고백한 후에 우리는 새로운 힘을 느낄 수 있다. 고해 성사의 힘은 책임 있는 발언이나 감정의 수용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개인적으로 치유해 주시고 성사를 통해 용서해 주시겠다고 보증하셨던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나온다.

기억의 치유에 있어서, 우리는 자주 고백성사의 치유 능력이 주는 도움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기억을 거듭 되풀이함으로써 우리의 죄가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까지 얼마나 크게 미치고 있는가를 보게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면, 배운 것을 서로 나누려 하기 보다는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 경쟁함으로써 자신을 과시하고자 한다. 또한 이러한 경향은 다른 면으로까지 발전하여 누가 더 큰 집을 갖고 있고 누가 더 멋진 차를 소유하고 이는지 경쟁하게 된다. 오염된 물이 작은 시내에서 시작되어 강으로 확산되듯이 우리의 죄도 우리 자신으로부터 시작되어 사회에까지 퍼지게 된다. 우리의경쟁심은 상대방의 경쟁심을 유발시키거나 상처를 입게 한다. 경쟁심이 극단적으로 발전되면 누가 더 힘이 센가를 증명해 보이려고 더 큰 미사일을 만들고, 더 큰 전쟁을 일으키게 된다. 우리의 죄가 이처럼 공동체를 황폐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그 모든 이들에게 용서를 청해야 할 것이다.

 

어쩌면 미국의 국무장관이 우리 모두의 이름으로 용서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공동체의 용서뿐만 아니라 당신의 용서까지도 베풀 수 있는 권한을 사제에게 부여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사제에게 고백한다 (히브리 5, 1; 요한 20, 22). 고백성사는 죄가 비단 우리의 관계뿐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도 깨뜨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자신을 과시하고자 하는 우리의 욕망은 세상 사람들과의 관계를 해칠 뿐만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도 해친다. 항상 자신을 과시하고자 함으로써 우리는 하느님을 우리의 행위 하나하나를 따지고 계산하시며 당신과의 우정에 걸맞도록 우리가 더욱더 열심히 일하기를 바라고 계시는 분으로 여기게 된다. 고백성사는, 죄의 진정한 비극이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주님으로부터 등을 돌리게 하는 데 있다고 깨닫게 해줌으로써 그리스도의 눈으로 죄를 볼 수 있게 한다.

다음에 제시된 고백의 예는 그리스도의 용서하며 치유하시는 과정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하여 준다. 그리고 이어서 세 가지 그 기본 단계 – 하느님께 감사함, 그리스도께서 치유하기 원하시는 것을 고백함, 그리고 고통스런 기억을 그리스도께서 치유해 주시도록 내맡김 – 를 설명할 것이다.

 

죄인에게 강복하소서. 고백성사 본 지 3주됩니다. 저는 네 자녀를 두고 있는 아버지입니다. 지난 번에 고백성사를 보면서 저는 가족에게 좀더 인대심을 갖고 대하겠다고 약속 드렸습니다. 자녀들이 이것저것 물어 올 때 인내심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신 하느님께 감사 드리고 싶습니다. 저도 어릴 때, 어떻게 했는지 기억이 납니다. 아버님이 항상 저와 함께 놀아 주시길 원하였습니다. 또한 하느님께서 지금 아이들에게 글도 지어 줄 수 있고 그림도 그려줄 수 있는 능력을 주신 것에 대해서도 감사 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상처 입혔습니다. 저는 더욱더 인내심 있는 사람으로 성장하여야 합니다. 가정을 나와 있을 때도 그러합니다. 저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말할 때 머뭇거리는 버릇입니다. 사친회에 가서 저는 할 말이 많아도 한 마디 말도 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학부모들의 의견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저의 그런 태도는 좋지 않습니다. 나중에 사무실에 돌아와서야 중요한 요점을 얘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선생님들은 한 명의 사무원을 감원해야 하였는데 그 문제를 꺼내 좋지 않아 결국은 한 여직원이 직장을 잃게 되었습니다. 저의 그러한 불안 중의 어떤 것은 사람들을 너무 의식하며 살려고 하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요즈음 저는 새 집과 새 차를 장만하기 위해 정신 없이 일하느라고 사무실 직원이나 친구들에게 충분한 관심을 보여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하느님께 대해서도 점점 불안을 느끼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처럼 하느님께도 제 자신을 과신하고 싶어서입니다.

 

저는 그리스도께 제 자신을 과시하게 만드는 기억의 뿌리와 말할 때 머뭇거리는 버릇이 있게 하는 기억의 뿌리를 맡겨 드리고 싶습니다. 그러한 충동의 대부분은 제 자신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비롯됩니다. 부모님들, 친구들, 학급 동료들이 저를 깔보고 무시하였을 때의 모든 감정을 그리스도께 맡겨 드리고 싶습니다. 특히 제 아버지께서 저와 얘기하기 싫다며 자주 저를 무시하던 일이 생각납니다. 아버지께서 직장에서 지쳐 돌아오실 때는 더더욱 저를 가까이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러한 기억을 주님께서 치유해 주시고 있는 것에 대해 감사 드리고 싶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가 어떻게 자녀들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는지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제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게 했던 많은 상황들을 용허사고 치유할 수 있도록 그리스도께서 이 고백성사의 치유 능력을 통하여 저를 용서해 주기를 간구합니다. 그리고 다음에 고백하러 오기 전까지는 특히 이웃 사람들에게 좀더 인내심을 갖지 못하게 하는 기억들을 치유해 주시기를 그리스도께 간구합니다.

 

그리고 참회하면서 제가 제 아버지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를 드릴 수 있을 지, 이번 주에 아버지께 편지를 쓸 수 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신부님, 이 모든 것에 대해서, 그리고 지난 날의 모든 죄, 특히 참지 못하는 성격에 대해서 용서를 청합니다.

 

 

 

세 가지 기본적인 단계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고백성사와 기억의 치유는 세 가지 기본적인 단계를 갖고 있다. 즉 하느님께 감사함 (3장, 8장) 그리스도께서 치유하기 원하시는 것을 고백함 (4장), 고통스런 기억을 그리스도께서 치유해 주시도록 내맡김 (5장, 6장, 7장, 9장) 이 그것이다. 다음은 이 세 가지 단계들을 통해 고백성사에서 어떻게 치유하시는 주님과 만나게 되는지 설명하고 있다.

 

 

1. 하느님께 감사함

 

고백성사를 보며 하느님께 감사드린다는 것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구약과 신약에서 또한 교회의 교부들에게 있어서 고백한다는 것은 종종 하느님을 찬양한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고백록>에서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과 치유에 대해 그분께 찬양드리고 있다. 그러므로 그분께서 우리를 어떻게 치유하시고 선물을 주시고 있는가를 분명하게 깨달을 때, 우리는 창조주와의 친교에 장애가 되는 잘못과 죄를 깨달을 수 있다.

앞서 살펴본 고백의 예에서 그 남자는 작가와 화가로서의 능력을 주시고 자녀들을 가르칠 수 있도록 인내심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림으로써, 죄에만 사로잡혀 있지 않고 치유하시는 그리스도께 향하고자 하고 있다. 그 남자는 과거 3주 동안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어떻게 치유하셨는지 잘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직장 일을 마치고 피곤해서 돌아온 아버지로부터 무시받았던 어릴 때의 고통스런 기억의 뿌리를 그리스도께서 치유해 주시고 있음을 감사드리고 있다.

치유는 그 남자가 기억의 뿌리에 성장의 여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됨으로써 시작되었다. 그는 아버지가 대화를 해주지 않았으므로 해서 글 쓰는 능력과 그림 그리는 능력을 배우게 되 것을 감사히 여겼으며, 그 때문에 자녀들의 욕구도 더욱 잘 알 수 있게 된 것을 고맙게 생각했다.

지난 모든 삶에서, 또는 지난 번 고백한 후의 생활에서 하느님이 주신 선물을 감사드릴 때, 우리는 하느님께서 끊임없이 우리를 치유해 주시고 있으며, 이번 고백성사에서도 그와 똑 같이 치유해 주실 것이라고 믿을 수 있다.

 

 

2. 그리스도께서 치유하기 원하시는 것을 고백함

 

그리스도께서 치유하기 원하시는 것을 고백할 때, 우리는 죄를 열거하기에 힘쓰기 보다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믿어야 한다 (4장) 우리는 모든 영역에서 완전하다고 가장하지 않아야 한다. 인간의 능력은 제한되어 있으므로 한 영역에 중점적으로 집중할 때 가장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죽음에 이르는 대죄가 없다면, 고백성사를 보면서 우리의 모든 죄를 일일이 열거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우리가 뉘우칠 필요가 있는 한 가지 죄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기억의 치유에 있어서 우리는 한 가지 죄가 다른 죄로 확산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므로 비록 한 가지 영역의 치유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치유는 많은 영역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기대해야 한다.

뉘우침과 그에 따른 변화에의 결심은 깊은 치유를 가져 온다. 그러나 우리의 죄가 다른 사람들 속의 그리스도를 어떻게 상처 입히고 있는가 하는 것을 보지 않고 단지 우리 자신만을 상처 입히고 있다는 데 초점을 맞출 때는 치유도 피상적으로 일어난다.

“고백의 예’에서의 남자는 계명을 지키지 않은 행동의 양 (저는 다섯 번이나 도둑질을 했습니다)으로 죄를 고백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다른 이들 안에 살아 계신 그리스도와의 친교를 깨뜨린 것에 대해 고백하고 있다는 점을 유의하라. 그 남자는 말할 때의 두려움이 자신뿐만 아니라 학교와 사무실 직원들에게까지 상처를 입힌다는 것을 잘 깨닫고 있으며, 또한 하느님과 자신의 관계도 잘 이해하고 있다.

 

죄의 마수가 우리의 삶에서 어떤 부분을 질식시키고 있는가를 하나하나 헤아려 봄으로써, 그는 치유가 필요한 모든 영역에서 끼어 있을 수 있었으며, 뉘우치고 변화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죄 그 자체를 조목조목 따지기 보다는 실제의 상황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그는 인내하지 못하는 그 공통적인 원인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데 있다는 것을 끄집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3. 고통스런 기억을 그리스도께서 치유해 주시도록 내 맡김

 

그리스도께 고통스런 기억을 치유해 주시도록 내맡길 때, 우리는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는 기회를 그분께 마련해 드리는 것이다. 우리는 고백할 때마다 다른 방법이 있다는 것을 결코 깨닫지 못한 채, 말하는 데 있어서의 두려움이나 자신을 과식하고자 하는 헛된 욕망을 고백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문제를 바라볼 수 있다. 죄를 피상적으로 얘기하는 대신 그러한 죄의 뿌리가 되는 기억을 그리스도께 치유해 주시도록 내맡길 수 있다 (5장, 6장, 7장, 9장).

 

“고백의 예’에서 그 남자는 자신이 말할 때 두려움을 느낀다든지 자신을 과시하려고 한다든지라고만 하며 피상적인 죄를 고백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는 그 모든 것의 뿌리가 되는 것 중 한 가지 –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 -를 고백하였다. 일단 그 뿌리를 발견하였을 때, 그는 그리스도께 그 기억을 맡길 수 있었다. 그러므로 고백성사를 준비할 때, 그는 부모님, 친구들 그리고 학급 동료들이 자신을 갈보고 멸시하던 때로 기억을 거슬러 올라갔던 것이다.

 

우리는 고백성사를 준비할 때뿐만 아니라 매일 주님께 고통스런 기억을 내맡겨야 한다. 그러므로 고백성사를 보기 전에 우리가 내맡겨야 하는 모든 기억을 생각해 내려고 초조해 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성령께서 일러 주시는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겨 드리도록 해야 한다.

기억의 치유는 시간을 요한다. 그러므로 치유가 끝났을 때 우리는 변화하기 시작하는 자신의 모습을 기대할 수 있다.

 

저는 고백성사가 구체적이고 개인적인 체험으로 이루어지길 원해 왔습니다. 그러나 고백할 때 늘상 15분 이상의 시간이 필요치 않았습니다. 고백성사를 거의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에 변화가 별로 일어나지 않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저는 죄를 하나하나 늘어놓는 데는 급급하였지만 그런 식으로 행동하도록 만드는 고통스런 기억을 내놓는 데는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표면적인 죄가 아니라 주님께서 치유하시도록 고통스런 기억을 그분께 맡겨 드릴 수 있는 시간을 가짐으로써 변화를 기대할 수 있다. 고백성사를 보러 갈 때, 우리는 더 이상 이러한 기억을 끌고 다니지 않겠다고 결심하여야 한다. 우리가 그 기억들을 당신께 내어 드릴 수 있다고 그리스도는 말씀하신다.

 

 

참회의 표현

 

우리는 이제 더 이상 고통스런 기억을 끌고 다니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용서하신 것처럼 용서한다는 표시로서 때때로 참회를 표현할 수 있다. 그것은 기도를 드리거나 방문하거나 전화를 하거나 편지를 드리거나 하여 화해를 표시하는 것일 수도 있다. ‘고백의 예’에서의 남자가 아버지를 위해 기도드리고 편지를 쓴다면, 우리는 그가 그리스도께서 용서하신 것처럼 아버지를 용서하고자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참회는 어떠한 대가를 치르는 한이 있더라도 또 다시 아버지를 용서하겠다는 갈망의 표현이다. 아버지가 변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는 아버지를 가깝게 대할 수 있다. 비록 우리가 고백성사를 보기 전엔 그리스도의 뜻대로 행동하는 것이 어렵다고 느꼈을지라도, 고백성사를 보면서 그리스도를 따를 수 있는 힘을 달라고 요청할 때 그분은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을 주신다 (요한 14, 12-14; 골로사이 3,13).

죄를 열거하는 태도를 넘어서 그리스도의 치유 능력에 초점을 맞출 때, 고백성사는 새로 태어난 삶을 축하하는 축제가 될 것이다. 우리 자신을 용서받지 못할 죄인이라고 생각하며 고백성사를 대하기 보다는 치유되어 우리가 새로운 삶을 맞이 하도록 이끄시는 그리스도께 감사하는 응답으로 고백성사를 대하여야 한다.

 

 

 

총고해* 와 특별한 치유

 

[* 역자주: 총고해란 일생 동안 혹은 일정한 기간에 범한 죄에 대하여 이미 그때마다 고백을 하였으나 이를 한꺼번에 고백하고 용서받는 일을 말한다. 원래 개별적으로 고백한 적이 있는 죄들은 다시 고백할 의무가 없는 것이 원칙이나 과거에 대죄를 고의적으로 은폐한 채 고백을 한 후 일정한 기간을 지낸 신자는 반드시 총고해를 해야 한다. 한편 과거에 고백한 죄에 대하여 그 유효성이 의심스러울 때 새 출발을 결심하고 총고해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한국 교회사 연구소 ‘한국 가톨릭 대사전’)]

특정한 영역을 고백하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가 어떻게 변화되길 원하시는지를 더욱 자세하게 알 수 있도록 하여 준다. 이것은 앞서 “고백의 예”에서 그 남자가 자신을 더욱더 사랑해야 함을 알게 된 것과 같다. 피정이나 성령세례 준비와 같은 주요한 반성의 기간에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자신을 불구로 만드는 모든 것을 내어 놓고 전반적인 치유를 받게 되길 원하신다. 이에 응답하여 지금까지 우리를 불구로 만들어 왔던 모든 기억을 그분께 내어드리고, 과거의 기억이 더 이상 우리를 끌어 가지 않고 오직 성령의 힘만이 우리를 이끌어 주시도록 요청하며 총고해를 드릴 수 있다.

총고해에 있어서도 우리는 주님의 치유 능력보다 자신의 죄에 집착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그 때문에 다음과 같이 개별 고백에서와 똑같은 단계를 총고해에서도 밟는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삶에 주신 선물에 대해 감사를 드린 후, 우리가 누군가에게 상처를 업혔거나 누군가로부터 상처를 받은 모든 기억들을 그리스도께서 치유해 주시도록 맡겨 드린다. 그리고 주님께서 피상적인 죄뿐만 아니라 그 원인이 되는 뿌리들까지 치유해 주시도록 넘겨 드림으로써 변화되리라는 신념을 가진다.

총고해에서 우리는 죄가 비단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공동체에까지 번져 나가게 한 것에 대해 주님과 공동체가 용서해 주기를 청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진정한 가치, 새로운 친구와의 사귐, 모험의 시도, 혹은 성령께서 거하시는 자신의 몸에 대한 사랑을 가로막는 모든 기억의 뿌리들을 치유하고 싶다고 공동체에 얘기해야 한다. 그리스도께 향유를 바른 여자처럼 우리는 더 많이 용서 받았음으로 해서 사랑할 수 있는 새로운 능력이 자라고 있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개별 고백에 있어서의 치유

 

총고해를 드리거나 특정 고해를 드리거나 간에 우리는 용서의 치유 능력을 접하게 된다. 고백의 치유 능력은 고백성사의 전 역사를 누비고 있다. 3세기 때 사람들은 사제가 성사를 통해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깨닫고 처음으로 사제를 “신부”라고 부리기 시작했다. 옛날 시리아에서의 교회는 주교가 서품 받는 날에, 죄를 사함으로써 교회를 치유하는 성령을 받았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었다. 이처럼 교회사 전반에 걸쳐 교회는 주교와 사제가 죄를 사함으로써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음을 깨달아 왔다.

 

개별 고백이라는 새로운 전례를 통해 교회는 고백성사가 비인격적인 심판이라기 보다는 치유를 통한 화해의 성사라는 고대 교회의 인식으로 되돌아가고 있다. 오늘날 고해 신부는 고해받으러 온 사람을 따뜻하고 친절한 말로 반겨 맞아들이고, 하느님을 신뢰해야 함을 말해 주며, 하느님의 자비로우신 치유가 적힌 성서 구절을 그에게 준다. 이와 같은 신뢰에 대한 긍정적인 강조는 고해받으러 온 사람이 단순히 죄를 열거하지 않고 기억의 치유와 같은 더 깊은 고해로 나아갈 수 있게 한다. 그런 다음 고해 신부는 고해받으러 온 사람에게 인격적이고 부드러운 말로 얘기를 건넴으로써 그가 전통적인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치유받고자 원하는 것을 자신의 말로 표현할 수 있도록 인도한다. 마지막으로 고해 신부는 성령으로 치유되었음을 표현하는 전통적인 몸짓으로 고해자의 머리에 손을 얹는다. 이러한 모든 변화는 교회가 비인격적이고 습관적인 고해성사를 지양하고 용서하시고 기억을 치유하시는 그리스도와의 깊은 만남을 가져다 주는 고해성사를 원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스도를 만나고 용서를 받은 후, 우리는 용서받은 죄 많은 여자 (루가 7장)나 돌아온 탕자 (루가 18장)처럼 고해소를 떠난다. 그리스도의 용서를 받았던 사람들이 사랑에 대한 새로운 힘을 갖게 되었듯이, 우리도 고백성사를 통하여 그분과 얼굴을 맞대고 만났을 때, 우리의 삶에 사랑할 수 있는 새로운 힘을 갖게 된다. 고백성사를 통하여 치유받지 않고 단지 용서만 받았다면, 우리는 아직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한 것이다.

 

 

 

나눔의 주제

 

1. 고백성사를 보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드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2. “고해소가 없다면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은 감옥이나 정신병원뿐이다” 라는 말은 무엇을 얘기하고 있습니까?

3. 사람들이 지은 죄에 대하여 정신과 의사보다 사제들이 더 많이 언급하고 있는 이유는 어디에 있겠습니까?

4. 고백성사를 볼 때 뵙게 되는 사제들 역시 때로는 비인격적이며 죄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 사제들을 도구로 사용하셔서 우리가 당신을 만날 수 있도록 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사제들을 어떻게 이용하십니까?

5. 화나 거짓말과 같이 죄가 어떻게 우리오 이웃 그리고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갈라 놓습니까? 죄란 단지 자신과 하느님에게만 상처 입히는 개인적인 행위에 불과합니까?

6. 정신적, 육체적 혹은 영적으로 치유를 받은 많은 사람들이 다시 전에 있던 환경으로 되돌아가면 치유되기 전과 같이 됩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7. “고백의 예” 에서 당신은 어떤 점이 마음에 듭니까? 어떤 점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까? 당신이 그 예를 바꾸고 싶다면 어떻게 고치고 싶습니까?

8.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기 전에 먼저 감사를 드리는 것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9. 우리는 성찰문에 있는 것보다도 더 많은 죄를 고백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 왜 그렇게 합니까?

10. 고백성사를 본 후에도 거의 변화를 체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11. 참회를 표현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험담하는 것을 뉘우치고자 할 때는 무엇이 도움이 되겠습니까?

12. 왜 총고해를 해야 합니까?

13. 개별 고백이라는 새로운 예식은 기억을 치유하는 데 어떻게 도움이 됩니까?

14. 루가 7, 47의 구절은 고백성사 그리고 기억의 치유와 어떤 관련이 있습니까?

 

 

개인묵상

 

1. 고백성사의 능력으로 기억을 치유할 준비를 하십시오.

다음 것들이 그 준비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가. 고백의 예 102~104 쪽

나. 고백성사를 위한 준비 188~192쪽

다. 성서와 고백성사 184~187쪽

라. 기억의 치유와 마름모꼴 182~183쪽

이상의 것들은 죄의 유형과 성사적인 치유가 필요한 기억의 뿌리를 드러내 줄 것입니다.

2. 가장 깊은 상처를 받았던 고통스런 기억을 한 가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 기억이 어떻게 지금도 당신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습니까? 이 불안은 도 어떻게 당신이 다른 많은 큰 죄를 범하도록 만들고 있습니까?

3. 기억의 치유와 사각형, 기억의 치유와 마름모꼴에 있는 고통스런 기억들, 그리고 당신이 어릴 때, 사춘기 때, 어른이 되었을 때 받은 고통스런 기억들을 총고해 하십시오.

 

 

 

 

제12장

기억의 치유와 분노

 

 

교양 있는 귀부인조차도 자신이 암에 걸렸다는 것을 더 이상 부정하지 않게 되면 화를 잘 내는 환자가 된다. 음식에 트집을 잡고, 일 분이 지나가기 바쁘게 의사가 보이지 않는다고 화를 내며 꽃을 가져 오지 않았다고 친구를 비난한다.

우리도 상처를 입었을 때는 조그만 것에도 트집을 잡아 다른 사람을 비난하려 하는 암 환자처럼 된다. 교통사고를 당한 운전사들은 그것이 자신의 과실이라는 것을 거의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그들은 다른 운전사를 탓하며 상대편이 갑자기 뛰어들었기 때문에 사고가 났다고 주장한다. 미끄러운 길을 탓하기도 하며 브레이크가 고장났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노여움은 그 분노의 대상이 필요한 것이다.

 

 

분노의 징후

 

나는 내 자신의 분노와 징후를 부정하는 데 있어서는 전문가이다. 빅토리아 시대가 섹스를 억제했던 식으로 나는 분노를 억제하는 마음만으로 양육되어 왔다. 나는 화를 내는 것은 으뜸가는 죄이며, 내 목소리를 높여서는 안 된다는 것, 그리고 부모님께서는 화가 나시면 나를 때리신다는 것과 화가 난 동료들이 나를 못 살게 굴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친구들의 애정을 잃지 않기 위해서 그들에게 내 분노를 숨기게 되었다. 그리하여 결국 이것이 반복되어 나 자신에게 조차도 내 분노를 숨기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오랫동안 내 강연에 대한 친구 거스의 비난에 대해 분노를 느끼는 것도 억제하였다. 분노를 느끼기 보다는 오히려 좌절감을 느꼈으며, 긴장하고, 비판적이고, 초조해하고, 실망하고, 날카로워지고, 못 본 체하고, 사랑에 인색하는 등 ‘분노’ 대한 다른 완곡한 행동들을 수없이 하였다. 때때로 나는 부정적인 감정조차 느끼지 않았으며 다만 즐거움, 창조의 기쁨, 자발성, 사랑 같은 것들을 덜 느꼈을 뿐이었다. 나는 분노에 차 있었지만 친구를 잃고, 그 때문에 상처를 받으며, 또 자제력을 잃게 될 것 같아서 분노를 나타내기가 두려웠다.

그러나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고 도 더욱 비판적이 되었을 때, 분노를 억제하는 것은 결국 친구를 잃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나는 내가 초조함 때문에 모든 행동을 서둘러 해치우고 있음을 발견했다. 이를테면 나는 식사 후 신문을 읽기 위해 식사를 급히 서둘렀으며 다시 다음 동작을 하기 위해 신문을 급히 읽어 치우곤 하였다. 심지어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계속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이 말을 끝맺는 것을 도와 주기도 하였다. 어떤 사람과 얘기할 시간을 가졌을 때는 주의를 집중하지 않아, 그가 말하는 것은 듣되 그가 진정으로 어떻게 느끼고 있는 가 하는 것은 놓쳐 버리곤 하였다. 나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학과목을 가르치기 시작했으며 수업이 시작되는 것보다 끝나기를 고대하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은 나를 도와 주기 싫어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혹은 다름 사람들은 일을 잘 처리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는 거의 남에게 일을 시키지 않고 혼자서 더 열심히 일했다.

나는 내 추정에 의해 (왜냐하면 나는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비난자였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 즉 내가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내 강연시간에 지각하는 사람들, 그리고 무관심에 의해 나를 부당하게 다루는 사람들을 비평하게 되었다. 기도할 때에는 하느님에 대해서도 다름 사람들에게 하는 것처럼 행동하여, 주님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나의 일에 대해서만 얘기하고, 거스의 비난처럼 부당한 일에 대해서는 불평을 했다. 여러 날 동안 나의 분노는 무엇인가 변화가 일어날 것이며 더 빨리 혹은 더 좋게 될 것이라는 되풀이되는 희망으로 나타났다.

분노를 나타내는 방법은 우리가 얼마나 깊게 상처를 입었으며 얼마나 수비고 분노를 표현하는가에 달려있다.  분노는 사람들의 겉모습이 다른 것 만큼이나 그 양상이 다양하다. 화가 났을 때, 어린이들은 자리에 오줌을 싸고 방금 약속한 것을 이행할 것을 잊어 버리며, 남편들은 업무와 신문 뒤로 움츠러들며 아내들은 전화로 잡담을 하고, 수사와 수녀들은 억지로 미소를 띠고 자제심을 기르려고 애쓴다. 노동자들은 때때로 병을 불러들여 집에서 회복하기도 하고, 분노를 내뿜으려 술로 그것을 달래기도 하고, 음식과 환약으로 분노를 달래기도 한다.

만일 분노가 오랫동안 억제된다면, 우리는 종기, 천식, 고혈압, 과갑상선증, 류마티스성 관절염, 대장염, 신경성 피부염, 편두통, 관상성 질병, 그리고 정신적 질병을 겪게 될지도 모른다. 분노의 징후는 심장병에 영향을 주는 “조급증”의 징후와 완전히 일치한다. 해결되지 않고 억제된 분노는 종종 자기 혐오와 우울증을 초래하기 때문에 정서 건강에 상당히 치명적이다. 만일 우리가 “나는 결코 분노를 느끼지 않아” 라고 말한다면, 아마도 우리는 분노를 질병으로 변화시키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성서에 나타난 분노

 

어떤 상처로 인하여 생긴 분노는 아마도 방탕한 아들로 하여금 재산 상속을 요구하게 하고 먼 나라로 도망하게 하여 그의 문제들을 방탕한 생활의 환락 속에 빠뜨리게 했을 것이다 (루가 14, 11-32). 이와 같은 행동들은 그의 깊은 분노를 치유하지 못하였으며 오히려 그는 화를 내며 “아버지 집에는 양식이 많아서 그 많은 일꾼들이 먹고도 남는데 나는 여기서 굶어 죽게 되었구나!” 라고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간다. 그의 분노나 우리들의 분노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며, 오직 그것이 우리를 우리의 자비로운 아버지로부터 떠나게 했는가 혹은 상처를 낫게 하는 그분의 품으로 돌아가게 했는가에 따라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결정된다.

그 방탕아는 전혀 분노 없이 다만 자비로움만을 갖고 있는 그의 아버지에게로 돌아간다. 그 방탕아의 아버지가 분노로 인해 아들을 다시는 보지 않으려 했던 적이 있었는가? 자비로운 아버지는 아들에 대해 무관심하지 않았으며, 아마 이별의 아픔을 느꼈을 것이다. 분노의 고통은 그로 하여금 잃어 버린 아들을 다시 볼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길을 바라보도록 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아마도 아들을 떠나게 한 그 무성에 대한 그의 분노는 그로 하여금 즉시 성대한 잔치를 벌여 상황을 바로잡아 보고자 하는 생각을 갖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분노 속에서 사랑과 기쁨을 선택한 아버지와 작은 아들과는 달리, 큰 아들은 그의 분노 속에서 적개심을 선택했다. 큰아들은 화가 나서 집에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아버지. 저는 이렇게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위해서 종이나 다름없이 일을 하며 아버지의 명령을 어긴 일이 한번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저에게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새끼 한 마리 주지 않으시더니 창녀들한테 빠져서 아버지의 재산을 다 날려 버린 동생이 돌아 오니까 그 아이를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까지 잡아 주시다니요!” (루가 15,29-39)

 

큰 아들의 분노는 그의 아우의 추정된 “창녀와의 생활”과 그의 아버지의 부당한 용서를 공격하는 적의로 변한다. 큰 아들이 그의 아버지나 방탕한 아우와 다른 점은 분노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살진 송아지를 잡는 자비를 베풀기 전에 선한 행동에 의해 용서는 얻어져야 한다는 거의 적의에 찬 요구이다. 치명적인 죄악은 분노의 느낌 그 자체가 아니라, 결국 적개심으로 귀착하게 되는 해소되지 않은 분노의 방치와 조장, 부정적인 기분에 의해 남을 상처입게 하는 태도, 그리고 파괴적인 비난 또는 그 밖의 충실하지 못한 행동들이다. 분노를 느끼는 것은 건전한 것이나, 적개심을 키우는 것이야말로 불건전한 것이고 죄악인 것이다.

방탕아의 자비로운 아버지와 같이, 우리는 분노를 느낄 때 큰아들의 적개심으로보다는 사랑으로 응대해야 한다. 분노가 아닌 적개심이야말로 치명적인 죄이기 때문에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화나는 일이 있더라도 죄를 짓지 마십시오.” (에페소 4, 26) 라고 훈계하고 있다. 분노가 우리로 하여금 자신이나 다른 이들을 해치는 사람을 돕게 한다면 그것은 건설적일 수 있다. 그리스도는 노여워하며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장애물이다” (마태오 16, 23)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그는 베드로를 사랑했으며, 또한 그가 장차 다가오는 예루살렘에서의 수난을 겪음으로써 성장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탐욕스러운 성전 장사꾼들 (마태오 21, 12-끝), 악마들 (마태오 1,25), 위선적인 바리사이 파 사람들 (마태오 15장), 자비롭지 못한 사람들 (마태오 3, 5), 신앙이 없는 사람들 (요한 8, 44) 또는 사악한 종들 (마태오 18, 34)에 의해서 사람들이 상처받은 곳에서 그리스도의 노여움은 격앙한다. 그리스도는 단지 조용히 물러나거나 분노를 억제하면서 적개심이 사라지기를 바라시지는 않는다. 분노는 그로 하여금 해가 지기 전에 빨리 불의를 바로잡도록 몰아친다(에페소 4, 26).

그러나 수세기 동안 예술가들은 성전의 상인들을 쫓아내어 불의를 바로 잡는 성난 그리스도보다는 “온유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마태오 5,15) 라고 말한 평화스러운 선한 목자이신 그리스도를 그려 왔다. 아마도 우리는 ‘적시 적시에 화를 낸다’와, orgilotes 지나친 분노 에서 aorgesia 지나치고 노하지 않음 까지 넓은 스펙트럼의 중간 지점을 뜻하는 ‘온유 prates 를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분노는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마태오 5, 44) 라는 것을 성취했을 때 그 정당한 이유를 갖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야훼도 분노에 정통하시다. 분노와 격노에 대한 술어들은 인간에게보다 다섯 배나 자주 하느님에게 돌려진다. 야훼의 분노의 대상들 중에서 가장 빈번한 것은 야훼가 가장 사랑하시는 이스라엘 백성이다.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서도 야훼는 그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인 야곱 (창세기 32, 23-끝), 모세 (출애굽기 4, 24-끝), 그리고 다윗 (II 사무엘 24, 1-끝)에게 화를 내신다. 사랑하는 것은 상처받고 노여워지는 것을 무릅쓰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야훼께 대해 화낼 수 있는 사람은 그분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다윗은 계약의 궤가 떨어질 때 그것을 잡으려고 한 우짜를 쳐서 죽게 한 야훼께 대해 분노하며, 그래서 그는 그 궤를 시 시 안으로 가지고 들어가는 것을 거부하기까지 한다(II 사무엘 6, 8). 욥은 부스럼에 싸여서 “어찌하여 당신은 나에게서 얼굴을 돌리시고 이 몸을 원수로 여기십니까?” 의 변형된 물음들을 분노하여 반문하였다(욥기 13, 24). 이 사람들은 야훼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으로부터 더 많은 것을 기대하며 그래서 그들이 야훼의 방식들을 이해하지 못할 때는 훨씬 쉽게 상처를 받게 된다. 구약성서는 우리로 하여금 다음과 같이 묻게 한다. 우리는 야훼처럼, 화를 낼 수 있을 정도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가? 우리는 욥과 같이, 야훼께서 그 얼굴을 돌리셨을 때 그분에게 화낼 정도로 그분을 믿고 있는가?

 

 

건전한 분노

 

우리가 전혀 분노를 느끼지 않는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나 남들을 폭력, 이기심, 편견, 성에 대한 차별 그리고 다른 불의들을 미워할 정도로 사랑해야 한다. 분노는 우리가 보다 좋고 사랑스러운 환경에서 살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변화되어야만 하는 것을 변경시킬 수 있도록 우리에게 기운을 불어 넣는다. 가난하고 실직 상태이며 알코올 중독에 빠져 있고 백인들의 희생물이 된 수우족의 수난에 대해 내가 초연할 때, 나는 뒤로 물러나 앉아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이 불의를 바로잡게 한다. 내가 불의에 대하여 화났을 때에만 비로소 나는 수우족 사이에서 정의를 갈망할 것이다. 분노는 또한 내가 두려워하는 것과 대항하도록 나를 돕는다. 고속도로 위에서 어떤 차 한 대가 차선을 빗나가 나의 차선으로 꺾어 들어올 때 나는 화가 나고 나의 몸은 즉시 부신 호르몬과 신장 호르몬에 의해 당 糖을 방출하고 혈액을 근육으로 밀어 보내어 나로 하여금 사고의 위기에 반응하여 극복할 수 있게 한다.

분노는 내가 직시하고 극복해야만 하는 두려움을 정확하게 지적해 낼 수 있다. 분노를 덮어 두는 것은 우울과 자살을 야기할지도 모르는 두려움을 축적시킬 수도 있다.

나에게 있어서 분노가 의미하는 것은 인정을 받거나, 상처를 받거나, 혹은 자제력을 잃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친구를 잃는 두려움을 극복하려는 시도를 의미한다. 내가 나의 기도 강연에 대한 거스의 비난으로 인한 나의 분노를 인지할 정도로 단련되기까지는 많은 치유가 필요했다. 처음에 나는 그것이 신앙적인 것이 아니기나 한 것처럼 나의 분노를 감추려고 노력했다. 때때로 나는 얼마나 많은 신앙적인 용서가 단지 미소짓고 있는 외관 뒤에 미움을 감추고 잇는 반응 형성물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를 알고 놀란다. 그러나 분노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가정하는 것은 단지 분노를 더욱 자라게 하고 그 분노가 엉뚱한 대상들, 즉 술을 너무 많이 마시는 나의 학생들이나, 분노가 아니라 특별한 배려를 필요로 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히게 할 뿐이다. 자제심과 친구들을 잃지 않기 위해 내가 분노를 부정한 것은 결국 불리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는데, 그때 나는 나 자신이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나의 학생들에 대해서, 또 결국은 거스에 대해서도 더욱 비판적이 되었음을 발견했다. 분노를 억제하는 것은 억제된 분노의 결과만을 거두어들이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독일의 강제 수용소의 죄수들은 살아남기 위해서는 벌을 받으면서도 자신들의 분노는 직접적인 희열(음식 때문에 싸우는 것과 그것을 게걸스럽게 먹는 것 등), 환상(기적적인 구출을 꿈꾸는 것), 침략자와의 동일시(감시인들을 도와서 새로 온 죄수들을 협박하기) 등의 형태에로의 여행을 개시하여 결국 무관심으로 끝난다. 정신병 의사이며 의미 치유의 창시자인 빅터 프랭클 Victor Frankle 은 그의 동료죄수들이 강제 수용소에 공포를 느끼고 화를 내는 쪽을 택하였는가 또는 어떤 잔인성에 대해서도 그들의 분노를 무감각 속에 묻어 버리는 것을 택하였는가를 보고해 주고 있다. 어떤 상처이든 느끼는 것으로부터 자신을 격리시키기를 끊임없이 택하는 수용자들은 전적으로 무관심해지고 결국은 그들이 죽을 때까지 점호나 식사 또는 화장실에 가기 위해서조차 움직이기를 거절한다. 아무것도 더 이상 그들을 두려워하게 하지 못하며 그들을 피가 나도록 때려도 거의 아픔을 느끼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분노를 부정하는 것은 불건전하며 그것은 우리를 파멸시킬 수 있다. 한편, 아픔을 느끼는 것이 신체적인 상처 때문에 받는 것과 같이 분노를 느끼는 것은 정서적으로 상처를 입는 데 대한 건전한 반응이다. 정서적으로 상처를 입었을 때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화를 내지만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우울해지거나 프랭클이 말한 강제 수용소에서의 경우처럼 자기 파멸적으로 되기조차 한다.

분노를 느끼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상처를 확인하고 그것을 건전한 방법으로 치유할 수 있도록 해 준다. 인지되지 않은 정서적 상처는 발견되어 그 감추어졌던 조직들이 잘라져 나갈 때까지 광범하게 자라는 암과 같아진다. 내가 상처 받았으며 하느님과 다른 사람들로부터 나를 폐쇄시켜 버릴 위험에 처해있다는 분노의 경고는 나의 분노에 자극을 주는 모든 상처들을 친구와 하느님과 함께 나누도록 나에게 충고해 줄 수 있다. 분노는 마찬가지로 나의 감정을 가장 건드리는 것이 무엇이며 무엇이 가장 치유를 필요로 하는지 정확하게 가리킨다. 나는 단지 누가 또는 무엇이 나를 가장 괴롭히는가 묻고, 이것을 정확히 표현하기만 하면 된다. 치유는 경찰관이 나에게 딱지를 뗀 것에 대해 화가 나서 하느님이나 친구에게 도움을 청할 때 시작되는 것이지, 그 경찰관의 코를 후려쳤을 때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분노는 무엇이 해를 끼치는가를 알려 주며, 내가 그것을 치유하기 시작할 때는 나 자신을 사랑하도록 도와 줄 뿐만 아니라, 나에게 정신적 상처를 입히는 사람도 사랑할 수 있도록 도와 준다. 한번 나의 부정을 인식하고 숨겨진 분노와 접하기 시작하여 용서의 필요성을 인정하게 되면 나는 다른 사람의 약점을 부정하고 “당신은 그렇게 나쁘지 않습니다. 나는 당신을 용서합니다”라고 말하는 소극적 용서와, 나의 분노가 다른 사람의 약점을 직시하여 “나는 당신 안에 있는 가장 추악한 것과 내 안에 있는 상처들을 압니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처럼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하게 되는 적극적 용서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누구든지 사람의 아름다운 일면을 사랑할 수 있다. 그러나 분노는 나의 사랑을 깊게 하여 다른 사람의 상처를 입히는 일면까지도 용서하도록 한다. 나는 그리스도께서 그랬던 것처럼, 나 자신의 노여운 감정과 약점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정도까지 만은 다른 사람의 상처 입히는 일면에 있는 분노와 약점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므로 분노는 나 자신의 내부와 다른 사람 안에 있는 약점조차 용서할 수 있을 때까지 그리스도처럼 더 많이 사랑하도록 나는 성장시켜 준다.

분노를 느끼는 것이 우리를 더욱 깊은 사랑으로 이끌기도 하지만, 더욱 깊은 사랑이 우리로 하여금 분노를 느끼게 할 수도 있다. 또 애정을 품고 있는 아내는 그녀의 이웃이 그녀의 생일을 잊어 버렸을 때보다는 그녀의 남편이 잊어 버렸을 때 더욱 화를 낼 이유를 갖는다. 사람을 사랑하면 할수록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의 우리에 대한 사랑의 부족에 더 많이 상처받기도 하고 분노를 느끼기도 한다. 가장 깊은 상처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로 인한 것이다. 이 점이 바로 상담 내방객의 깊은 정서적 상처를 치유하려 할 때 정신과 의사들이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배우자와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는 이유이다.

그러므로 분노를 느끼는 것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하라. 그것은 종종 상처를 주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표시거나 혹은 상처 입는 것을 싫어할 정도로 우리 자신을 사랑한다는 표시이다.

노여운 감정과 접촉하는 것은 항상 건전하나, 우리가 우리의 노여운 감정을 어떻게 다루는가에 따라 우리는 정신적 불구자가 될 수도 있고 아니면 대담하게 새로운 자유를 얻을 수도 있다. 아픔이나 분노를 느끼는 것은 인간적인 것이지, 잘못된 것은 아니다. 옳고 그르게 되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아픔과 분노를 어떻게 표현하는가에 달려 있다.

 

 

분노는 어떻게 다루어져야 할 것인가

 

분노는 처리되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우리를 지배할 것이다. 플로이드 링 Floyd Ring 박사는 분노에 대한 반응이 어떻게 우리의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해 연구하였다. 네브레스카 의학 대학 University of Nebraska Medical School 의 링 박사는 그의 동료들에게 이미 14가지 질병으로 진단된 400명의 환자 (그에게는 모두 알려지지 않은) 를 보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는 각 환자와 15분간의 개별 면담을 한 결과를 토대로 400명의 환자를 진단하려 했다. 그들 환자는 린네이 홑이불에 덮여 있었고 두 명의 입회인이 곁에 서있었는데, 그들은 박사가 의학적 징후들을 드러내는 어떠한 것도 보거나 묻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환자들의 성격만을 근거로 하여 링 박사는 갑상선증의 100%, 관상동맥 폐색증의 71%, 위궤양과 류마티스성 관절염의 83%와 천식, 당뇨병, 고혈압과 궤양성 대장염을 가진 자들의 60% 혹은 그 이상을 정확하게 진단하였다. 그의 첫 번째와 두 번째의 진단은 87%의 환자에 대해 정확하였다. 그는 가장 좋은 진단 질문으로 “만일, 당신이 병들기 전에 공원 벤치에 앉아 있는데, 당신과 똑같은 체격의 낯선 자가 당신의 정갱이를 걷어 찬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라고 물었다.

 

말로나 또는 몸으로 싸우기를 원하는 ‘지나친 반응자’들은 관상동맥 폐색증, 퇴행성 관절염, 그리고 위궤양으로 고생하는 경향을 띠었고, 두려움이나 분노를 억누르고 거의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은 ‘부족 반응자’들은 신경성 피부염, 류마티스성 관절염, 그리고 궤양성 대장염을 앓고 있었으며, 두려움이나 분노를 의식하지만 그것들을 잘 표현하지 않는 ‘억제되지 않은 반응자’들은 천식, 당뇨병, 고혈압, 과갑상선증 그리고 편두통의 경향이 있었다. 분노를 다루는 우리의 태도는 질병을 야기시키는 많은 정서적 압박 요인들 중의 하나에 불과하지만 그것은 종종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기도 한다.

걷어 채인 것에 대해 어떤 식으로 반응하든지 그 사건은 병을 야기시키는 것 같다. 플로이드 링 박사가 건강한 사람들과도 면담을 해서 그들은 어떤 식으로 분노를 다루는가를 주시하지 않은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정신 의학자들은 건강한 사람들과의 면담을 통해 그들이 자신들의 노여운 감정을 인식하기도 하며 자신들의 분노를 나타내기 위한 적당한 방법을 찾아 낸다는 것도 알아 내었다.

화나는 사람들이 많은 만큼이나 그 분노를 건설적으로 다루는 방법도 많다. 어떤 이들은 장작을 패든가, 청소를 하다든가 하여 그들의 분노를 일에 돌리는 것이 도움이 됨을 발견한다. 그러므로 뜨거운 샤워, 달리기, 혹은 편안한 산책 등 긴장을 해소시키는 것이면 어떤 것이든지 분노도 감소시킬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들이 보통 현재의 분노를 감소시킬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들이 보통 현재의 분노를 감소시킨다 하더라도, 지속적인 악영향을 미치고 분노를 야기시키는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지는 못한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스스로의 감정을 정확히 알아서 말로 나타내고 느낌을 서로 나눌 수 있을 때 과거의 상처에 대한 분노가 치유되기 시작한다는 것을 발견한다. 만약 우리가 상처를 입었을 때 “나는 지금 정말로 화가 납니다. 그러니 그 화를 푸는 데 나를 도와 주십시오” 하고 간청한다면 동정심 많은 친구는 우리가 갈망하는 사랑을 이해를 줄 것이다. 나의 분노가 친구가 따뜻이 받아들여 준다면 기도 속에서 그리스도가 나의 분노를 받아 주시는 것을 체험하는 것도 보다 쉬워진다.

친구나 그리스도와 함께 나누는 것 이외에, 때때로 우리는 우리에게 상처를 입힌 사람에게 직접 우리는 어떻게 느끼고 있으며 왜 화가 났는지를 말할 수 있다. 쌍방이 상처를 남기지 않고 솔직해지기 위해서는 깊은 신뢰가 필요하다.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화가 난 사람으로부터의 건설적 비판에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열 수 있다. 초기 단계의 분노는 보통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입은 피해를 과장하도록 하며, 또한 다른 사람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폐쇄시키게 한다. 치유는 우리가 화를 내며 반발하기보다는 오히려 사랑 안에서 다른 사람을 직면할 수 있을 때 이루어진다. 내재된 분노는 밖으로 표출되어야만 하나 다만 사람들을 더 가깝게 결속시키는 방향이어야 한다. 공동체 안에서의 이러한 친밀성의 정도는 다음과 같은 간단한 질문을 통해 알 수 있다. “사람들은 애정을 품은 건설적인 방향으로 분노를 나타낼 만큼 서로 신뢰하는가?” 사랑이 바탕이 된 치유는 깊은 사랑의 공동체를 필요로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랑이 깃들인 치유를 강력히 장려하신다. ‘어떤 형제가 너에게 잘못한 일이 있거든 단 둘이 만나서 그의 잘못을 타일러 주어라. 그가 말을 들으면 너의 형제 하나를 얻은 셈이다” (마태오 18, 15). 그러나 이 충고는 우리가 어린아이와 같이 겸허하게 (마태오 18, 1-6), 그리고 우리 자신의 죄에 의해서 얼마나 우리가 비천한가를 알며 (마태오 18, 7-9), 또한 길 잃은 양을 찾는 목자와 같은 (마태오 18, 10-14) 자세를 가지는 것이 전제가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분노의 초기 상태에서는 이렇게 이상적이 도리 수 없으며, 후에 그들이 상처 입은 것이 그들 자신의 책임임을 깨닫고 그리하여 용서함과 동시에 형제로부터의 용서를 구할 때에만 비로소 가능하다.

우리는 우리 형제가 다른 사람들의 충고에 귀를 기울일 수 있고 화해할 수 있도록 돕고자 하며 그에게 다가간다. 베드로는 이 점을 이해하여 다음과 같이 묻는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마태오 18, 21). 어떤 사람이 분노를 가지고 대하는 시기는 우리가 70회의 일곱 곱까지 용서할 수 있을 때이다. 왜냐하면 용서할 줄 모르는 시종과는 달리, 우리는 얼마나 많이 우리가 용서를 받았는지 알기 때문이다 (마태오 18, 21-34). 우리가 말 할 수 있는 시기는 우리가 단지 용서를 요구하고 우리의 약점을 다른 이에게 노여워하며 투영시키기보다는 우리 자신의 약점을 알고 용서를 구하는 때이다. 내가 너무 자주 화를 내며, 공부하지 않는다고 나의 학생들을 책망한 것은 더 나은 수업을 준비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은 나의 약점의 투영이다.

종종 내가 거스나 나의 학생들에게 분노를 나타내기 전에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나의 분노를 나누면서 그것이 분노의 치유에 도움이 됨을 발견한다. 그리스도야말로 완전히 이해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박해를 받았고, 우리가 상처 입은 모든 방법으로 상처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그분이 들어 주시는 것 이상의 것을 하실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부정해 버린 모든 상처를 생각해 내어 과거와 미래에까지 닿는 그분의 치유로써 모든 아픈 부분을 만져 주실 수 있다. 그분은 그분의 사랑과 배려를 갈망하는 우리의 근심과 숨겨진 상처들을 알고 계신다. 만일 부정을 다룰 때 했던 것처럼 다시 한 번 다음과 같은 과정을 따른다면 우리는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처럼 우리의 상처를 치유 받을 수 있을 것이다.

 

1. 그리스도께 내가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말씀드리기 (루가 23, 13-24)

2. 성서를 통해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느끼고 계신지 들어보기 (루가 23, 25-30).

3. 그리스도의 치유 응답을 받아들여 그 안에 머무르기 (루가 23, 31)

 

 

 

1. 그리스도께 내가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말씀드리기

 

첫 단계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앞에 나아갈 수 있도록 나를 도와 주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행하고 또한 내가 느끼고 있는 것을 그분과 함께 나누는 것이다.

 

 

 

 

 

 

 

 

 

 

 

 

제13장

성체성사의 신비와 기억의 치유

 

제14장

기억의 치유를 위한 매일기도

 

 

부록 1 기억의 치유와 삶의 재조명

 

부록 2 치유를 위한 영성 훈련

 

부록 3 성사와 고백성사

 

부록 4 고백성사를 위한 준비

 

부록 5 저자의 한국 강의

 

한국 강의 1

예수님의 삶에 일치됨으로 인한 치유

마태오 린 신부

 

한 수녀님과, 그 수녀님을 위해 기도드리고 있는 친구분이 있었습니다. 10분 동안 그들이 한 일은 오직 예수님만을 바라보며, 침묵 속에서 예수님 이름을 부르는 것뿐이었습니다. 10분 기도가 끝난 후, 그 두 분은 지금 여러분이 한 것처럼 그 기도 속에 주님께서 어떻게 역사해 주셨는가를 서로 증거하고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예수님이 그 기도 중에 두 분에게 해 주신 것은 그 아득한 옛날 예수님이 태어나신 순간에 베들레헴으로 데리고 가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 엤날 베들레헴에서 수녀님이 체험한 것은 성모 마리아의 품 속에 수녀님 자신이 안겨져 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런데, 신비롭게도 이 수녀님을 위해 기도하고 있던 친구분의 체험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수녀님과 친구분은 왜 자신이 기도 속에서 베들레헴을 보았는지 의아해 하면서도 예수님이 이끌어 주시는 대로 그 장면을 관상하며 똑같은 기도를 계속하였습니다. 계속되는 기도 속에서 수녀님은 자기가 생후 육 개월 된 아기로 베들레헴 말구유간 안에 앉아 계시는 성모 마리아의 품에 안겨 있는 장면을 관상할 수 있었습니다.

 

** 지금도 ‘필사 筆寫’ 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Disclaimer: 여기에 실린 글은 copyright가 된 책, 기사를 ‘발췌, 전재’를 한 것입니다. 모두 한 개인이 manual typing을 한 것이고, 의도는 절대로 저작권 침해가 아닌, fair use의 정신을 100% 살린 것입니다. 의도적으로 ‘시간적인 제한, 독자층의 제한’을 염두에 두었고, 목적은 단 한 가지 입니다. 즉 목적을 가진 소수 group (church study group, bible group, book club) 에게 share가 되었습니다. password protected가 되었는데, 만일 이것이 실패를 하면 가능한 시간 내에 시정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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