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eld of dreams, trancending time & place, autobio in progress..

오빠한테 아버지 얘기를 끝내자 오빠는 갑자기  앉은 자리가 불편한지 몸을 비비  틀면서 하품을 해댔다. 빨리 결론부터 말하라는 소리 같아서 아버지의 근황은 생략하기로 했다.  

“아버질 우리집 근처로 모셔올까 해서. 마침 옆라인에 마땅 한 전세가 나왔거든 몇년 외국에 나가 있게 되는데 세간을 맡길 데가 마땅찮아 다두고 가고 싶대. 안방하고 거실만 비워주고. 그래서 아주 싸.”

  나는 나도 또르게 죄지은 것처럼 위축되어 오빠의 눈치를  살폈다. “왜 아버지 동네 그린벨트라도 해제된다던? 아니면 정서방이 부도라도 네게 생겼던지  .” 오빠가 자리를 고쳐 앉으면서 물었다 매사가 귀찮다는 듯 늘 피곤해 보이는 오빠의 시선이 일순 짓궂고 공격적으로 변했다. 그제서야 나도 저자세로 나온 걸 후회하면서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렸다. 그러나 오빠하고 다투거나 구차한 변명을 늘어 놓고 싶진 않았다. 오빠는 좀 그런 데가 있었다. 속마음은 그렇지도 않으면서 빈정거리길 잘했고 남한테 고약하게 보이고 싶은 객기를 애꿎은 나에게 발산할 적이 많았다.

  “친정집 그린벨트 해제되는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야. 장손이 이렇게 시퍼렇게 건재하신데. 그리고 우리 그이, 큰돈은 못 벌어도 착실하게 사업 잘하고 있어요. 내가 설마 아버지  집이 욕심나서 그러겠수. 가 보면 사시는 게 말이 아니고 자주 가 뵐 수는 없고… 오죽 멀어야 말이죠. 그래서 가까이 계셨으면 하는 거야. 왜 있잖아요?  서양 속담에도 그런 말이… 수프가 식지 않는 거리가 자식네하고 가장 적절한 거리라는… 아버지도 팔십이 내일모레유.  돌아가신 지 며칠 만에 시신이 발견되는  일 우리라고 당하지 말란 법 없잖우  ”  “알아, 나도 다 알아, 네가 천사푠 거. 그렇지만 천사  옆에 서면 보통사람도 나쁜 새끼밖에 해먹을게  없이 되는 것도 할 짓이 아니다, 너. 어머니 때 그만큼  이 오래비 망신시켰으면 됐지, 이번엔 또 무슨 망신을 시키려고…” “그때 오빠가 무슨  망신을 했다고 또 그 소리야.  약속대로 임종 즉시 영안실로 모셨잖아. 딸네서 죽은 시신은 관에 그렇게 써붙이 기라도 한대?”

  내가 할 수 없이 언성을 높이며 세게 나오자 오빠는 단박 풀이 죽으면서 심약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왜 있잖냐? 도둑이 제 발 저리다는 거. 그리고 젤 죽겠는게 정서방  앞에서 기죽근 거야, 너. 오죽 못났으면 마누라하고 같이 벌어야 사나 하고 속으로 얼마나 날  무시하겠냐?” “오빠, 정서방이 그런 사람이면 내가 엄말 모셔 갔겠수.”

  어머니가 우리집에서 돌아가시게 한 걸 오빠는 늘 그런  식으로 못마땅해했나. 위암 수술을 했지만 개복해보니 암이 모든 장기로 번저 육개월을 못 넘길 거라고 했을 때 나도  중환자를 우리집으로 모시고 싶지 않았다. 맞벌이하는 올케한테 모셔가라는 건, 말을 안  꺼내니만도 못할게 뻔해서 내가 모신 거였다. 그때도 오빠는 자기  네만 못 모시겠다는 게 아니라 내가 모시는 것도 반대했다. 딸이 모셔간 줄 알면 남들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겠냐면서 간병비나 서로 분담하자고 했다.

  오빠는 고등학교 윤리선생이고 올케는 국민학교 선생이었다. 남 보기에 부부가 안정된 직업을 가지고 남매 기르는게 넉넉할 건 없어도 그닥 궁상을 떨진 않아도 될 것 같은데  오빠는 안 그랬다. 직접 아쉬운 소리를 해서가 아니라 삶을  짜증스러워하는 태도 때문에 늘 찌들어 보였다. 대학원도 가고 외국  유학도 가고 싶었는데 난봉 피우는  아버지 때문에 그게 여의치 않았다는게 지금까지도 오빠에게 자기 직업에 대한 비하가 되어 남아 있었다.

  어머니의 마지막 육개월이 보통 간병인이 감당할  수 있을 정도만 됐더라도 아마  오빠의 뜻대로 됐을 것이다. 암환자의 말기가  거의 다그렇다지만 어머니도 숨을  거두시는 날까지 의식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명료했다. 그러나 뒤를 가리지 못했다. 수술 후 어떻게 된  게 항문의 괄약근이 고무줄이 빠진 것처럼 열런 채 오므라 드는 작용을 못하니 아무리 깔끔한 어머니도 속수무책이었다. 처음엔 일시적인 현상이려니 했다. 어머니도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 하셨다. 자기가 거기를 통제할 능력이 없어진 걸 너무도 기운이 떨어졌기 때문이라고 여기는 듯 뭐든지 주는 대로 열심히 잡수셔서 몸을 보하려 드셨다.

  그때만 해도 간병인이 어머니를 돌보고 가는 일주일에 두세 번 잡술 것만 해 나를 적이었는데 경험 많은 간병인은 그런 나를 노골적으로 못마땅해했다. 이 지경이 되고 나서 회복된 환자를 본 일이 없다, 이런 환자에게 가장 좋은 약은 덜  먹이는 것밖에 없으니 먹을 것 좀 작작 해 나르라는 거였다. 네가 안 볼 때 그 여자가 어머니에게 잡술 걸 제대로 드릴 리 만무했아. 그걸 안 이상 어머니를 그 여자에게 맡길 수가 없었다. 내가 설사 그 여자보다 어머니를 더 구박하게 될지라도.

  내가 떠맡고 싶은 건 어머니가 아니라 어머니의 똥구멍이었다.  생판 남이 어머니의 똥구멍을 진저리를 치며 구박하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그건  효도 따위보다 훨씬 진실하고 씩씩한 분노였다.

  하필 항문의 고무줄이 빠질 건 뭐였을까, 다른 사람도 아닌 우리 어머니가 어머니에게 그건 얼마나 참을 수 없는 치욕이었을까. 나는 어머니가 어떤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다는 대가로라도 그 치욕을 다소나마 가려주는 일을 맡고 나설 수밖에 없었다.

  회갑을 앞두고 비로소 시부모 봉양에서 놓여나고 아버지도 마지막 소실이 떨어져나가  집에 들어와 계시게 되어 어머니도 노후에 비로소 삶의 구색을 갖추고 사시는가 싶을 때였다. 친정집은 낡을 대로 낡은 구옥이었지만 터가 넓고 마당을 잘 가꿔서 여름이면 어머니 연세의 동네 노인들의 쉼터가 되곤 했다. 노인네들만 남아서  그린벨트 해제나 기다리며 소일하는 퇴락한 마을이었다. 아버지가 들어와 계시고부터 오빠네는 더욱 부모와 최소한도의 의무적 관계 이상은 기피하는지라 나라도 자주 찾아뵈려고 한달에  한번 정도가 고작이었다. 별러서 간 날이 마침 동네 노인네들이 마당에 모여앉아 수박과 부추부침 따위를 나누며 잡담을 즐기고 있을 때였다. 내가 가자 어머니가 여봐란듯이 나에게 노인네들 시중을 맡겼다. 그때, 부추에다 깻잎을 더 썰어넣고  고추장을 약간 푼 내 식의  지짐이도 부쳐보고 사가지고 간 과일과 케이크를 모양있게 썰어서 느티나무 밑 평상으로 나가기도 하면서 들은 노인네들 얘기는 주로 죽을 걱정이었다.

  요샌 왜 생전 안 보이던 친정어머니가 자꾸 꿈에 보이나  모르겠어. 우리 기택이 대학 붙는 것까지는 보고 죽어야 할 텐데.

  아이고, 듣기 싫소. 또 그소리. 기택이는 효손이요. 저의 할매 죽지 말라고 남 안하는 삼수꺼정 했으니.

  자네 손주 첫번에 척 대학 붙었다고 기택이 할매 너무  구박 말거라. 기택이가 그게 보통 손준가. 맏며느리가 딸만 내리낳고 단산한 줄 알았다가 그게 생겨났으니 자네라면 안그러겠나.

  중한 자식일수록 그렇게 자꾸 입초시에 오르내리 게 아니란 소리 아닌감. 아들 손주 하나만 보면 당장 죽어도 한이 없다고 저 마누라 얼마나 동네방네 나발을 불고 다녔는지 생각들 안 나우? 오죽해야 저 마누라 아들  손주 본 날, 아마 곧 초상도  날 거라고 수군거렸잖우? 초상이 뭐야. 손자 본 날부터 그애 가방 메고 소학교 가는 건 보고 죽어야 한다더니, 소학교 가니까 또 중학교 가는 것까지는 봐야 한다고 글강 외듯 하다가 이젠 딱 대학 가는  것까지만 보겠다니 타고난 명은 길고, 기택이가 대학을 자꾸 떨어질 수밖에.

  요 할망구가 악담을 하네그려.

  악담이 아녀. 우리덜 다 과히 박복한 팔자는 아니지만 지금 죽어도 누가 그렇게 애통해할 것도 아닌데, 천금같은 손주한테 잘난 명을 빌붙지 말자, 이거지.

  증말 그래. 아직 거정은 수족이 성해 파 한뿌리라도  다듬어주면 주었지 저희들한테 양말 한짝, 사루마다 빨래 한번 내놓은 적이 없건만도 툭하면  며느리가 시집살이하는 유세를 떠니, 만약 죽치고 들어앉았게 되면 무슨 꼴을 볼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답답하면 이렇게 훌쩍 동네 마실도 다니고, 더 속상하는 일이  생기면 훨훨 딸네라도 다녀올 근력이 있을때꺼정만 살아야 할 텐데.

   무슨 복에 그렇게까지 바라겠소. 난 내 발로 변소 출입할 수 있을 때꺼정만 살게 해달라고 조상님한테도 빌고, 부처님한테도 빌고, 예배당 앞을 지날  때도 빌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도 비는데, 글쎄 어떤 귀신이든 신령이든 들어주셨으면 좋으련만.

  난 뒷간 출입보담은 망령인지 치맨지 그게 더 걱정입디다. 그놈의 건 안 걸리고 죽었으면 쓰겄는데.

  난 아냐 변소 출입만 할 수 있으면 그까짓 망령 좀 들면 어때?

  아이고 그게 따로따로가 아니라니까. 망령이 드니까 똥오줌을 못 가리게 되는 거지 , 정신만 멀쩡하면 기어서라도 됫간에 못 가겠수.

  아이고, 그렇지도 않아요. 늙어서도 젤로 서러운 게 몸 따로 마음 따롭디다. 난 우리집 제삿날 생일날뿐 아니라 일가친척의 이름 붙은 날도 안  잊어버려서 정신 좋기로 소문났잖우. 우리 며느리한테는 그것도 흉이긴 하지만 글쎄 그렇게 똑똑한 내가 툭하면 오줌을 지린다니까요, 자다가도 아니고 백주 대낮에, 한번 마렵다 생각이 들면 못 참아요.

  어머 , 집이도 그래? 나도 그런데.

  그건 약과예요. 난 서울서 변소 찾다 말고 그냥 절절 다 싸버린 적도 있다우. 망신도 망신이지만 어떡허든지 며느리한테 숨겨야 한다는게 더 서러웁디다. 영감만 있어봐요. 젊어서 고생한 탓을 해가며 보약이라도 먹어야겠다고 앙탈을 부리련만.

  그러구 보니 여기서 민영이 할머니 팔자가 제일이구랴. 과부 아닌 이는 저 마누라밖에 없잖아? 그러게 사람은 뭐니뭐니 해도 후분이 좋아야 한다니까.

  민영이 할머니는 우리 어머니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나는 그때까지 들며  나며 신바람이 나서 노인네들 시중을 들고 있었다. 죽는 문제만 남겨놓고 모든 가능성을 다 소진해버린 노인네들의 넋두리를 들으며 나는 사십대라는 내 나이에 울렁거리는 기쁨을 느꼈다.

  춤추듯이 경쾌하게 깡총거리며, 느티나무  잎을 흔들고 난 푸른  바람에 주름치마가 부풀 때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마치 갓스물같은  싱그러운 젊음에 흠뻑 도취해 있었다.  고작 배설이 주제인 노인네들의 넋두리에 동정어린 경멸을 보내기 위해서라도 아직도 성적인  상상력에 충만해 있고, 성적인 화제가 가장  즐거운 내 나이에 새삼 황홀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때였다.

  난 방귀를 참을 수 있을 때까지만 살았으면 싶다우 .

  처음으로 그 화제에 끼여든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노인네들이 다들 박장대소를 했다. 아마 방귀처럼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고루 웃길 수 있는 단어도 드물 것이다. 방귀는 뀌는 소리 그 자체도 하나의 완성된 유머였다. 애  업은 젊은 엄마의 방귀, 시아버지 진지상  들이다가 뀌는 새며느리의 방귀, 맞선보는 자리에서 누가 뀐 건지 아리송한  방귀 등은 또 얼마나 꾸준하게 사람들의 유머감각을 자극하고 웃음을 재생산해왔던가.

  그러나 나는 느닷없이 끼여든 그 말이 마치 순조로운 차의 흐름속에서 급브레이크를 밟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가슴이 철렁하면서 진저리가 쳐졌다. 우습기는커녕 여지껏의 즐거운 기분이 일시에 깨어나는 듯했다. 어머니는 사람들이나 웃기자고 그런 말을 할 분이 아니다. 깔끔하다 못해 결연하기까지 한 어머니의 표정이 아니더라도 나는 그걸 알 수 있었다. 늙어갈수록 생리현상을 참는 기능이 헐거워지는 건 사실이나 어머니가 못 참아낼까봐  두려워하는건 단지 그뿐이 아닐 것이다. 사람의 체면 유지를 위태롭게  하는 온갖 것들이 포함된 것처럼 느껴지는 건 어머니를 누구보다도 잘 안다고 믿는 딸의 감상 이상의 것, 연민이었다.

  어머니가 얼마나 완벽하고 당당하고 한결같이 인고의 세월을 견디어냈는지는  친척간에도 동네에서도 유명했다. 그로 말미암아 어머니에게  늘 따라다니는 품위에다가 위엄  같은 게 어릴 적엔 자랑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사춘기를 거치고 인생에 대해  뭘 좀 아는 척을 하고 싶어지면서부터는 그런 어머니가 싫었다. 자존심 없는 사람을 가장 경멸스러워할 때였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일직선으로 자존심이 관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어머니가 자존심은커녕 배알도 빼놓은 여자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자존심이란 적어도 익으면 돌돌 말리게 돼 있는 오징어 따위를 반듯하게 익히려고 일직선으로  꿰는 쇠꼬챙이하고는 달라야 할 것  같았다.

  네가 기억하는 한 아버지는 철저하게 어머니를 무시했다. 구박하거나 아옹다옹 다투는 것하고는 달랐다. 옛말에도 있는 소 닭 보듯 한다는 표현이 아마 가장 적절할 것이다 그런 재미없는 사이는 맞선볼 때부터 비롯됐다고  한다. 식민지 시대 말기에  양가어른까지 합석한 거창한 맞선자리였는데, 소학교밖에 안 나온 어머니는 수줍어서 신랑  얼굴 한번 재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는데 신랑 쪽에선 다들 마음에 있어 한다는 통고를 받게 되었다. 박색이랄 것까지는 없어도 한창 꽃다운 나이에도 예쁘단 소리 한번을 못 들어봐서 용모에 자신이 없는 어머니는 맞선자리처럼 위축되는 자리가 없었다. 한번 더 보고  싶다는 자기 생각은 네색도 못한 채 신랑집 마음에 들었다는 것만을 감지덕지해하는 부모님 뜻에 순종할 수 밖에 없었다. 세라복 입은 여고생을 동경하던  멋쟁이 아버지에게 투덕 투덕 복스럽다는  것 외엔 볼 게 없는 어머니가 처음부터 마음에 안 찼을 것이다. 그러나 벌써 몇번째 맏아들의 연애질에 속을 썩어온 부모는 그 듬직한 색싯감이 마음에 쏙 든다고 바싹 아들을 조이기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부모가 강력하게 주장하면, 코찡찡이나 곰보가 아닌 이상 승복하는 게 자식된 도리였다. 더군다나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부모한테 순종하고 부모님의 노후를 책임질  장남이란 걸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철저하게 교육받아온 터였다.

  어머니가 아버지의 아내가 된 게 아니라 그 집안의 며느리가 됐을 뿐이라는 걸 깨달은 것은 첫날밤부터였다고 한다. 당신이 할 일은 시부모를 극진히  받들고 시동생 시누이 들하고 우애있게 지내는 거라는 걸 엄숙하게 선언했을 때 어머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죽어도 시집 문지방을 베고 죽어야 한다는 절대절명의 명제 앞에서  입술을 깨물었을 것이다. 남편이 소 닭 보듯 하는 아내가 대접받을 수 있는 길은 대를 이을 수 있는 아들을 낳고 시부모님의 눈에 드는 거였다. 어머니는 그걸 해냈다. 한술 더 떠서 아버지가 갈아들이 없는 소실에  대해 전혀 투기하지 않음으로써 마치 성군의 중전마마처럼 품위있고 당당해졌다.

  아버지도 어머니에 대한 조강지처 대접 하나만은  깍듯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일제시대부터 다니던 경전을 해방 후 한전이 된 후에도 눌러서 다녔는데, 당시로서는 안정되고 대우도 괜찮고 가욋돈도 생기는 꽤 좋은 직장이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직장 근처에 딴살림을 차리고도 월급봉투 하나만은 한푼도 안 건드리고 큰 집으로 들여왔다고 한다. 어머니는 소실하고 아버지가 무슨 돈으로 살림을 꾸리는지 아랑곳하지 않고 그 월급봉투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고 하는데 그나마 오래 누리진 못했다. 박정희 정권 초기에 사회를 정화한답시고 관청이나 국영기업체에서 축첩한 자는 자진해서  사표를 쓰라고 엄포를 놓은 적이 있었다. 상습적인 바람둥이들도  서로 눈치를 봐가며 그럭저럭 그 시기를 무사히 넘겼는데 아버지는 그러지를 못했다.  아버지가 소실을 두고 있다는건 사내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엄포가  내린 이상 실적을 올려야 하는 건 피할 수 없었고, 아버지는 당연히 최초의 희생양이 되었다.

  세상에 그런 법이 어딨다냐? 할아버지 할머니는 그로 인하여 돌아가시는 날까지 박정희를 미워하였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후 다시는 아버지 월급봉투를 받아본 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일에 대해 원망도 고소해하지도 않았다. 다행히 삼촌  고모 들을 다 결혼시킨 후라 생활비 걱정도 훨씬 덜 됐고, 마침 서울 근교의 도시화에 힘입어 농토를 야금야금 팔아먹는 재미도 쏠쏠했다. 어머니는 할아버지의 도움으로  마을에 방앗간을 열었고, 그게 꽤  잘됐기 때문에 땅 팔 일이 생기는 건 주로  이것저것 사업에 손댔다가 조금 돈을 만져보기도 하고 실패도 하는 아버지 때문이었다.

  아마 사업하면서 돈 좀 만질 때였을 것 같은데 아버지는 할머니 환갑 잔칫날 어머니나 어른들에게 미리 아무런 연통도 안하고 꽃같이 야들야들 예쁜 소실을 대동하고 나타나 큰절을 시킨 적이 있었다. 그래도 어머니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맏며느리다운 체통을 지켜 냈다. 여고생이던 네가, 어머니처럼 저 여자의 존재를 무시해버릴 것인가, 덤벼들어 머리채를 쥐어뜯을 것인가, 어떤 것이 어머니를 더 위하는 길인지 몰라 붉으락 푸르락하면서도 한가닥 위안이 됐던 건, 미남에다 멋쟁이인 줄로만 알고 있었던 아버지가 연세가 들수록 경박하고 볼품없어지는 반면 어머니는 그 정반대라는 걸 발견한 거였다. 어머니는 젊어서는 별로였지만 늙어가면서 점점 더 보기 좋아지는 얼굴이었다. 그게 아버지한테는 고소하면서도 내 나름으로는 가슴이 뭉클하니 슬펐다. 사십세 후의 얼굴은 본인  칙임이라지만 양귀비로 변신할 수 있다고 해도 배알을 빼놓지 않은 이상 어머니처럼 그렇게 철저하게 욕망이나 분노를 감추고 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그때 내가 알면 뭘 얼마나 알았겠는가. 어머니의  비장하다 못해 결사적인 자존심에 대해 어렴풋이 짚이기 시작한 것은 나 역시 시집갈 날을 앞두고였다.

  넌 연애결혼이니까 그런 일은  없겠지만서두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  일러두는 건데, 혹시 첫날밤 네 신랑이 제 부모 잘 모셔야 한다는  소리를 제일 먼저 하거나 계집은 또 얻을  수 있어도 부모는 또 얻을 수 없다는 식의 수작을 하거든, 그  자리에서 그 혼인 파투 치고 나와도 나는 너를 내치지 않으마. 야단도 안  치마. 그쪽만 귀하게 기른 자식인 줄 알지  말거라. 너도 똑같이 귀하게 길렀어.

  어머니한테 그런 소리를 교훈이라고 듣고 시집간 딸은 이 땅에 아마 나밖에 없을 것이다. 어머니 또한 당신이 견디어온 굴욕에 대해 그 정도의 원성이나마 외부에 발산한 건 아마 그때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아무리 인간적인 추태라 할지라도 그렇게 철저히 갈무리해온 어머니였다.

  방귀를 참을 수 있을 때까지만 살고 싶다던 어머니가 하필 말년에 괄약근이 열린 채 다물 줄 모르게 될 건 또 뭘까. 나는 도저히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그 난해한 아이러니에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어머니의 발병과 수술과 항문이 그 지경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다 빈털터리가 된 아버지가 역시 팔아먹을 거라곤 아무것도 안 남은 집으로 들어와 계시게 된 후에 일어난 것이었다.

  처음부터 내가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다녔기 때문에 암이라는 것도 내가 가장 먼저 알았다. 어머니가 당신이 암이라는 걸 알고나서 제일 먼저 한 말은 아버지한테는 알리지 말아달라는 거였다

  오갈 데가 없어서 할 수 없이 들어와 있긴 해도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소 닭 보듯  데면데면하게 굴기는 소실 두고 살 때와 조금도 달라진 게 없기 때문에, 나는 그런 어머니가 속으로 불쌍하기도 하고 조금은 가소롭기도 했다.  마나님이 곧 죽게 될 걸 알아봤댔자,  부리던 하녀가 죽게 됐다는 것만큼도 충격을 받을 아버지가 아닌데 뭘 숨기자는 걸까. 텔레비전 극 같은 데서 본 품실 좋은 노부부 흉네를 내고 싶어하는 것 같기도 하고, 곧 죽을 마누라한테도 여전히 데면데면하게 굴 영감꼴을 보게 될 것을 피하려는 어머니의 마지막 자존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버지는 어머니로서는 그렇게 저항할 수밖에 없는 상대였다.

  자식들이 드러내놓고 말은 안했어도 분위기로 봐서 대수술이라는 것쯤은 눈치챘으련만 입원하러 들어가는 날 아침까지 아버지는 태연하게  어머니가 사력을 다해 손수 차린  밥상을 받았고, 근심하는 말 한마디 없이 어머니를 떠나보냈다.  수술하는 날에도, 그후의 입원기간에도, 어머니가 와보실 것 없대요라는  우리의 전갈한마디에 그대로 한 아버지였다.  퇴원할 때도, 싸우고 친정으로 갔다가 제풀에 걸어들어오는 마누라 대하듯 평소보다 더 데면데면하게 굴었다. 그때부터는 어머니 부탁이 아니더라도 아버지가 하나도  안 놀랄 것이 두렵다기보다는 너무도 뻔해서 어머니가 곧 돌아가실거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그렇게까지 무자비하다는게 어찌 어머니에게만 고통스러운 일이었겠는가. 자식한테도 못할 노룻이었다.

  입원하기 직전까지 당신 시중을 들던 어머니가 퇴원하고는 뒤도 못 가리게 된 것을 보면서도, 아버지는 병세가 심상치 않다는 걸 눈치채기는 커녕 병원 욕만 했다. 멀쩡한 사람  병신 만든 의사를 그냥 놔두냐는 거였다. 어머니에 대한 근심은 조금도 안하면서 괜히 길길이 뛰는게 마치 의사를 걸어서 돈 뜯어낼 빌미라도 생긴 깡패 같아서 가뜩이나 낯설기만 한 아버지가 더욱 정떨어졌다. 한약이나 몇첩 쓰면 나을 병을 가지고 괜히 자식들한테 엄살을 부려서 몸에 칼을 대게 하더니 꼴 좋다고 우리까지 싸잡아 비꼬기도 했다.  우린 그저 기운이 떨어져서 생긴 일시적인 현상이니 조금만 참으시라고 아버지를 달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어머니의 소원이라지만 주인 앞에 병든 동료를 숨기고 감싸야 하는 종년 심정과도 같은 마음으로 아버지한테 절로 앙심이 품어졌다.

  어머니를 우리집으로 모셔갈 때도 우리 모녀를 같잖아하는 아버지의 태도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동안 혼자서 불편해할 걱정조차 안하는 것은 어머니에  대한 얼마나 철저한 무시인가.

  그래도 어머니는 뒤도 못 가리는 주제에 온종일 똥구덩이에 빠지다시피 해서 허덕이는 딸에게 아버지 밑반찬을 해 나르지  않는다고 성화를 했다. 그럴 경황도  없었지만 내 손으로 아버지 밑반찬을 만든다는 것 조차 자존심이 상해서 시장에서 파는 걸 몇가지 사고 어머니 옷가지도 좀 가져올 겸 해서 친정집에 갔을 때였다. 아버지는 며칠 사이에 몰라보게 추레해져 있었지만 여전히 그놈의 똥구멍은 언제 아문다더냐고, 항문  걱정만 함으로써 어머니 안부는 생략하고 마는 것이었다. 나는 억지로 아버지 진짓상을  봐드리고 나서 어머니 옷장을 뒤졌다. 속옷이 무진장 필요했기 때문이다.

  어머니 옷갈피에는 어디서 난 건지 흔히 향비누라고 일컫는 냄새 좋은 세숫비누가 구메구메 들어 있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엔 옷장 버선갈피마다에서 지폐가 쏟아져나왔다고 하더니 어머니는 향비누였다. 화장품을 살 때 선물로 얹어주는 작은 향수병도 몇개 마개가 헐겁게 닫힌 채 들어 있었다. 행여 늙은이 냄새가 날세라 그렇게 철저히 대비를 했던  것이다. 몸으로도 마음으로도 추레해지는 걸 극도로 두려워했던 어머니다운 자기관리였다.

  그런 어머니가 지금 딸네 집에 악취를 풍기며 누워 있는  것이다. 도대체 누가 무슨 권리로 어머니를 그렇게까지 희롱해도 된단 말인가. 하필이면 우리 어머니를. 나는 천방지축  도무지 종잡을 수 없이 조화를  부리는 인간살이에 분노를 걷잡을 수가  없었고, 그건 곧바로 아버지를 향해 폭발했다. 그때 아버지는 나한테 당해 싸게 굴었다. 어머니 반찬솜씨를  한번도 칭찬한 적이 없는 아버지가 시장 반찬은 도무지 못 먹어주겠다는 얼굴로 그놈의 똥구멍 때문에 언제까지 이 고생을 시킬 작정이냐고 투덜거렸으니 말이다..

  어머니는 지금 말기 암환자고, 남은 명이 다섯 달도 안될 거라고 말해버리고 나서 아버지의 반응 같은 건 살피지도 않고 친정집을 뒤로 했다. 말해버리고 나니 허망했다. 뭐가  허망한 건지 잘 모르겠으나 길거리만 아니면 목놓아 울고 싶게  산다는 것 자체가 허망했다. 어머니에게는 간단하게 이제 아버지도 아시게 됐다고만 말했다. 어머니는 왜 그랬냐고 야단도 안 치셨지만, 그 소릴 듣고 뭐라시던? 하고 묻지도 않으셨다.

  그날 밤이었다. 아버지한테 전화가 걸려왔다. 처음엔 누군지 알아들을 수도 없는 목쉰  소리로 어머니를 바꾸라고 했다. 아버지가 어머니하고 직접 통화를 하고 싶어한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콧물을 들이마시는 것도 같고 딸꾹질을 참는 것 같은 이상한 소리가 섞여 들려서, 나는 어머니에게는 무선전화기를 갖다드리고, 계속해서 수화기를 들고 있었다. 엿들을  작정이었다. 어머니의 전화 바꿨어요, 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도 뜻밖인지 약간 어눌하고  떨리는 소리였다. 저쪽에선 아직도 짓눌린 딸꾹질 같은 소리만  들렸다. 전화 바꿨어요. 전 괜찮아요. 많이 나았어요. 참다 못해 어머니 혼자서 말을  이어갔다. 그러고도 한참 만에 아버지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요.

  그 흐느끼는 음성을 통해 여지껏 들리던 그 이상한 잡음도 복받치는 울음을 참는 소리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런데도 나는 웃음이 폭발할 것 같아 얼른 전화통을 손바닥으로 틀어막고 방바닥에 뒹굴고 말았다. 나중에 보니까 통화가 끝난 어머니도 아픈 배를 움켜쥐고 그렇게 웃고 있었다. 어머니는 하루에도 몇번씩 그 통화를 생각하고 웃음을 걷잡지 못했다. 어머니는 의사가 예언한 생존기간도 미처 못 채우고 돌아가셨지만 칠십에 처음 들은 사랑의 고백 때문에 그 동안을 즐겁게 보내셨다. 똥구덩이에 빠져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아버지도 말로만 아니라 거의 매일같이 어머니를 문병했고 똥도 치우고 싶어했지만 어머니가  그것만은 허락하지 않으셨다. 죽을 때까지 사랑받고 싶어서 그 꼴만은 안 보이고 싶었나보다. 어머니 묏자리를 잠는 데도 정성을 다하셨고, 장례 때도 수시로 그 딸꾹질을 참는 것 같은 소리를 내며 눈물을 뚝뚝 흘려서 우리를 민망하게 했다. 아버지에 비해 자식들은 솔직히 슬픔보다는 시원한 쪽이 더했을 것이다. 상주인 오빠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영락없이 길고 지루한 영화가 끝났을 때의 관객의 얼굴을 연상시켰다. 나는 지쳐 있기라도 하지, 오빠는 장남된 도리를 제대로 못한다는 자책감을 어서 벗어나고 싶어서 이제나 저제나 임종 소식만 기다리기가 얼마나 지루했을까.

  “아무튼 고맙다. 나도 아버지를 언제까지 거기서 그렇게 지내시게 할 순 없다고 생각하긴 했었어.” “그럼 됐네 뭐. 아직 정정하시겠다, 가끔  모셔가기도 하고 방문도 하고 그러면 되잖아. 나도 가까운데 계셨으면 하는 거지, 전적으로 책임지겠다는 건 아냐.” “그래봤댔자 기죽는 건 마찬가지지 뭐.” “기가 왜 죽어?” “네 따위가 장남 심정을 어떻게 아냐?” “그래, 난 참새구 오빠는 대붕이다. “

  “참 나이가 무섭군 그 능력은  다 어떡허구 이제 와서 자식  신세를 지게 되다니. 당신이 생각해도 한심하실걸, 아마 ” “오빠는 아버지가 능력이 없어서 새장가를 못 든다고 생각해?”

“그럼 수절이라도 하신다는 거냐? 웃기지 마, 야 그게 아버지한테 가당키나 한 소리냐.” “오빠는 뭘 몰라 지금도 중매가 꽤 쏠쏠히 들어와요. 내가 접수한 것도 두어 건 되는걸.” “아직도 돈푼이나 있는 척하고 다니나보지, 자식들 고혈을 빨아서 연명하는 주제에. 말년엔  그래도 개과천선한 줄 알았더니…” “오빠, 무슨 말을 그렇게  하우. 아버진 아직 집이 있잖아.” “그까짓 것도 재산 축에 드나.” “아까 오빠가 그랬잖아. 그린벨트라도 해제됐냐고. 해마다 될 듯 말 듯 소문이 무성한 데가  거기잖아. 장래성을 보고 그러는지, 꽤 젊은  여자들한테서도 프로포즈가 들어오나보던데 ” “안돼. 그건.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는  아버지 여자문제를 내가 이러구저러구 할 입장이 못 됐지만, 이제부턴 아냐. 입적까지 시킬수도 있는 문젠데 어떻게 가만히 당하기만 하겠냐? 안 그러냐?” “오빠, 그렇게 무섭게 눈을 부라릴 것 없어. 그 문제는 벌써 아버지가 입장을 분명히 하셨으니까. 재혼문제는 입도 뻥긋 못하게 하셨어. 웬 줄 알아? 장남한테 그 집 하나만이라도 온전히 물려주고 싶다고 하셨어. 내가 가까이 모시겠다니까 나한테도, 너는 남부럽지 않게 사니  그 집 욕심내지 말라고 당부하셨는걸, 솔직히  나 그때 조금은 기분 나빴다. 흑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아버지도 내 마음을 순수하게  받아들이기 전에 저 계집애 저의는 뭘까, 그 계산부터 하는 게 역력했으니까.” “솔직히 말해 너 같은 딸이 어딨냐? 나도 좀 기분이 나쁘다, 야.”

   나는 내가 효녀도 아니고 착한 여자도 아니란 것을 오빠에게 제대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서 그냥 그런 척하고 있었다. 그건 자신에게도  설명되어지지 않는 복잡하고 난해한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오빠의 승낙도 받은 셈이겠다, 이제 아버지하고 몇가지 최종적으로  의논할 것만 남아 찾아뵙겠다는 연락을 했더니 매일 서울에 오니까 서울서 만나자는  거였다. 아버지가 주로 나오시는 데는 롯데월드 들어가는데 있는  지하광장이라고 했다. 전철을 한번만  갈아타면 갈 수 있는 재미에 거의 매일 출근을 하다시피  하니 시간에 구애받지 말고 아무 때나 나와서 찾으면 된다는 아버지의 말투는 마치 그  광장의 주인처럼 당당해서 그만 실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차를 갖고 다니는 나에겐 교통체증 때문에 자꾸  멀어지는 것처럼 느껴지는 친정이 새로운 전철노선 개통과 함께 훌쩍 수도권이 된 것도  신기했다. 반사적으로 친정집의 삼백평이 넘는 평수가 떠올랐다. 어느새 일흔보다는 여든에 더  가까워진 아버지지만 살아 생전에 부자가 되는 것도 아주 허황된 공상만은 아니다 싶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는 아무도 마당을 가꾸지 않아 친정집은 사람이 사는 집 같지 않게 퇴락한 모습을 그대로 밖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어머니는 나무나 꽃이 좋아서라기보다는 추해진 집 모습을 가리기 위해 그렇게 열심히 마당을 가꾸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그런 사람이니까 일생을 오로지 아무것도 내색하지 않기 위해 사신 분이니까.

  롯데월드 지하광장은 어디가 어딘지 모르게 넓고 휘황하고 시끌시끌 했다. 마침 성탄절을 앞둔 연말이었다. 브래지어나 팬티를  세일하는 임시매장을 슈퍼마켓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설치해 놓고 젊은 여자들을 불러모으고 있는가 하면, 그 옆  폭포 앞에서는 볼에 솜털이 보송보송한 앳된 무명 보컬그룹이 불우이웃돕기 성금함을 놀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여기저기 앉을 자리도 많이 마련돼 있는데도  슈퍼로 통하는 계단에까지 사람들이 앉아서  통행에 지장을 줄 만큼 광장엔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누구를 기다리는 것 같기도 하고,  이미 만나 잡담을 즐기는 것 같기도 하고, 우두커니 그냥 시간을 보내는 것 같기도 한 사람들 사이로 뭐가 그렇게 바쁜지 신경질적으로 종종걸음을 치는 수많은 사람들이 급류를 이루고 있는, 그야말로 인산인해의 혼잡 속에서도  아버지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노인네들끼리만 모여앉아 있는 데가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거의가 남자 노인들이고 여자 노인은 어쩌다 섞인 한떼의 노인들이 광장 한복판에 둥글게 둘러앉아 있었다.

  눈에 잘 띄게 아버지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처음 들어보는 아버지의 노래는 한창 나이의 중년 남자 못지않게 끈적끈적 엉겨붙을 것처럼 기름진 목소리였다. 마이크가 있을 리 없는, 기껏 육성이, 보컬그룹이 부르는 내가 살아가는 동안에 할 일이 또 하나 있지,를 압도하고 훼방놓는 것처럼 들리는 건 피붙이로서의 민망함 때문이었을까. 아버지는 케케묵은 옛날 유행가, 진주라 천릿길을 내 어이  왔던가를 눈을 스르르 감아가며 한껏  기분을 내 부르고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나무기둥을 얼싸안고’라는  가사를 슬쩍 ‘남의 계집을 얼싸안고’라고 바꿔 부르면서 옆에 앉은 여자 노인네의 허리에다 팔을  감는 것이었다. 구렁이 담 넘어가는 것보다 훨씬 더 유연하게.

  수적으로 단연 열세인 여자 노인의 옆자리를 아버지가 차지한 것도 아마 우연은 아닐 듯 싶었다. 그 여자 노인도 아버지의 팔이 허리를 감는 게  싫지 않은지 그때까지 꼬나물고 있던 담배를 얼른 비벼끄고는 아버지의  노래에 능숙하게 화음을 맞추기  시작했다. 남이라면 얼마든지 웃어 넘길 수도 있겠지만 내 아버지가 그러는 건 창피하고 민망해서 얼굴이 붉어질 법한데 나는 문득 생각에 잠겼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이 처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아득한 기억의 저편에서 떠오른 아버지 얼굴에 나는 피할 수 없는 친근감을 느꼈다. 그때도 아마 어쩔 수 없이 엿보게 되었을 것이다. 여학교 때, 부득이한 일로 아버지 소실 집에 내가 심부름을 가야 할 일이 몇번인가 있었다. 그때  내 앞에서 아버지가 소실과 희희덕댄 적은 한번도 없었지만, 소실  집에 있는 우리 아버지는 집에서하고는  전혀 딴사람 같은 게 이상했었다. 집에서는 경직되고 근엄하고 불편해 보이던 아버지가 거기서는 편안하고 자유스럽고 느긋해 보였다. 롯데 월드 광장에서 본 아버지도  그렇게 편안하고 거침없어 보였다. 아버지는 장남 노릇이 몸을 옥죄는 걸 참지 못해 편안하게 퍼질 자리를 찾아 난봉을 핀게 아니었을까. 소년적엔 그렇게 풀린 아버지가 추악하게만 보였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난봉기도 도가 트니까 관록 같은게 생겨 멋있고 풍류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어머니는 늙을수록 괜찮아지는 타입이고 아버지는 늙을수록 경박하고 추레해 진다는 내 예상도 결국은 들어맞지 않았다.

  사람 팔자는 관뚜껑 덮을 때까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그야말로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난해한 숙제로구나. 아버지가 어떻게 죽게 될지 그걸 누가 알랴. 까딱하면 아버지의 임종을 책임지게 될 지도 모를 이번 결정을 후회할지 안할지는  더군다나 알 수 없는 일이다. 일생을 자기의 한숨소리 한번 제대로 밖으로 새나가지 못하게 잔뜩 오므리고만 사신 어머니가 자기 항문도 못 오므리게 된 치욕적인 마지막을 보냈으니까, 식구들한테 못할 노릇만 시키면서 너절하게 산 아버지는 혹시 우아하게 돌아가실지도 모른다는 요행수를 바란 건 아닐까? 그건 아니다. 어머니의 마지막을 행복하게 해드린 은혜 갚음을 하고 싶은가? 그것도 아니다. 나는 내가 그렇게 어머니 편에만  서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차라리 공식이  통하지 않는 그 난해함 때문에 그 일을 한번 더 해보고 싶다는 게 조금은 더 맞는 말이 될지도  모르겠다.

  오빠는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시종일관 길기만 하고 재미없는 영화가 마침내 끝났구나. 하는 얼굴로 상주노릇을 했다. 길고 재미 없는 영화는 아무도 또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러나 난해한 영화를 보고 나면 혹시라도 이번엔 조금이라도 더 이해할 수 있을까 해서 한두 번 더 보게 되는 수가 있다.

  나는 웃으면서 아버지 앞으로 다가갔고, 아버지는 그제서야 그  노파의 허리에서 팔을 풀었다. 노파가 담배를 꼬나물자 아버지는 나에게 찡긋 윙크를  하고는 찰카닥 라이터를 켜서 노파의 담배에 불을 붙여주고 나서 일어섰다.

(라쁠륨 1997년 봄호)

 


Disclaimer: 여기에 실린 글은 copyright가 된 책, 기사를 ‘발췌, 전재’를 한 것입니다. 모두 한 개인이 manual typing을 한 것이고, 의도는 절대로 저작권 침해가 아닌, fair use의 정신을 100% 살린 것입니다. 의도적으로 ‘시간적인 제한, 독자층의 제한’을 염두에 두었고, 목적은 단 한 가지 입니다. 즉 목적을 가진 소수 group (church study group, bible group, book club) 에게 share가 되었습니다. password protected가 되었는데, 만일 이것이 실패를 하면 가능한 시간 내에 시정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July 2019
S M T W T F S
« Jun    
 123456
78910111213
14151617181920
21222324252627
28293031  
Categories
Archiv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