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eld of dreams, trancending time & place, autobio in progress..

지은이 와타나베 가즈코 渡辺和子 (1927-2016)

1927년 일본 홋카이도에서 태어나 1956년 노틀담수도회에 입회하였다.

아홉 살 때 눈앞에서 부친이 총탄에 맞아 쓰러지는 충격적인 장면을 본 후 정신적 번뇌에 시달리고 우울증을 앓았지만 사랑의 힘으로 고통을 딛고 일어나 교육자로서, 종교인으로서 많은 사람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었다.

주요 저서로는 <와타나베 수녀님의 사랑과 격려의 말 366일>, <당신이 선 자리에서 꽃을 피우세요>, <오늘, 그 사랑이 보입니다>, <사람으로 소중한 것> 등이 있다.

 

 

들어가며

일본 규슈에 있는 어느 초등학교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아마도 신문에 실리자 입소문을 타고 많은 사람에게 전해진 모양입니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온 초등학교 1학년 여자아이에게 아빠가 물었습니다.

“오늘 숙제는?”

“누군가한테 안기는 거예요.”

아이가 대답하자 아빠는 “좋아!” 라고 말하고는 곧바로 아이를 꼭 껴안았습니다. 이어서 엄마, 할아버지, 증조할머니, 두 언니가 차례로 아이를 안아주었습니다.

다음 날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는 여섯 명한테나 안긴 사람은 자신밖에 없었다며 아빠에게 자랑을 했습니다.

아빠가 물었습니다.

“다들 숙제를 해왔나 보구나.”

“아뇨, 몇몇 친구는 못 했어요. 그래서 선생님이 그 친구들을 앞으로 나오라고 했어요. 그러고는 한 명 한 명 안아주셨어요.”

 

저는 숙제를 못 한 아이들을 나무라지 않고 부모님을 대신해 안아준 선생님 모습에 마음이 따뜻해졌습니다.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난 후에 어느 학자는 이렇게 말했지요.

“이 시대는 환경재난, 인류재난, 문명재난에 휩싸여 있다.”

분명 눈부신 문명의 발달로 삶은 상당히 편리해졌습니다. 많은 혜택을 누리고 있지만 사실 우리는 발전과 함께 따라오는 재해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인간성 상실’ 같은 문제 말이지요.

마더 데레사는 말했습니다.

“사랑의 반대는 증오가 아니라 무관심입니다.
 

아이의 숙제에 관심 없는 부모 또는 아이에게 젖을 물린 채 핸드폰에 빠진 엄마 손에 자란 아이 마음은 어쩌면 채워지지 않을 수도 있겠지요

‘너는 내 보물이란다’ 하며 안아주고, 젖을 물리고 사랑스러운 눈길로 아이를 바라보며 웃음 짓는 엄마 모습을 떠올립니다. 기계의 편리를 누리면서도 기계의 노예가 아닌 주인으로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1   사람은 완전하지 않아요

 

완전한 사람이 있을까요?

오랜 전 성인과 죄인에 대해 이야기한 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자신만 성인이고 다른 사람은 모두 죄인처럼 대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며, 그 반대도 있다고 합니다. 자신은 죄인이고 불완전해도 되지만 주위 사람들은 모두 성인이어야 하지요. 그렇기에 그들은 모든 일을 완벽하게 해야 합니다. 또 어느 누구도 나를 오해하거나 나한테 화를 내서도 안 됩니다. 네게는 항상 웃는 얼굴로 대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상대방은 성인이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나’는 예외입니다. 내가 잘못을 해도 다른 사람들은 당연히 이해해 줘야 합니다. 내 기분은 이랬다 저랬다 할 수 있고, 맘대로 상대방을 오해해도 괜찮다고 생각하지요.

저는 직장에 다닐 때 어머니한테 아주 차갑고 모질게 대한 적이 있습니다. 어머니도 사람이니까 몸이 안 좋으면 아침밥을 차리지 못 할 수도 있는 건데, 그걸 받아들이지 못해서 버럭 화를 내고 출근한 적이 몇 번이나 있었지요. 지금 돌아보면 어머니한테 정말 죄송한 마음이 들어요.

저는 너그럽지 못한 성격인지라, 수도원에서 생활하면서도 함께 사는 자매가 하는 일을 보고 속으로 비판하는 것이 괴로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마디 말씀이 저를 빛으로 이끌었습니다.

“이 세상에 하느님 외에는 모두 피조물이고 불완전하다.”

아, 정말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완전함을 요구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은 제가 다른 사람의 불완전한 모습에 화를 내는 것은 분별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란 걸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게다가 다른 사람을 비난하면 언젠가는 똑같은 방법으로, 또는 그 이상으로 저한테 다시 돌아온다는 것도 깨달았지요.

예를 들어 열쇠를 어디에 두었는지 깜박 잊어 허둥대는 사람을 보고 혀를 차며 ‘참 조심성도 없지. 저 사람은 항상 저렇다니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저한테도 똑같은 일이 일어나지요. 이런 일은 제가 교만에 빠지지 않도록 해주는 좋은 기회가 됩니다.

 

나는 ‘죄인’, 상대방은 ‘성인’으로 나누어 생각하고 있지는 않나요?

 

하느님만이 완전한 분이시기에, 불완전한 사람에게 화를 내는 것은 교만입니다.

 

 

나를 위한 용서

‘용서’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필요하지만 나 자신을 살리기 위해서도 필요합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말씀하셨지요.

“용서할 때 자유로워지고 해방됩니다. 용서할 때 비로소 미래를 창조적으로 개척해 나갈 수 있습니다.”

용서하지 않으면서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교황님은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어요.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은 오히려 지배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참 재미있는 말이지요. 용서하지 않는 사람이 우위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용서를 하지 않겠다는 집착에 얽매여 상대에게 지배를 당한다는 의미입니다.

결국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될 수 없지요.

어떤 사람이 파티에 참석했을 때 일어난 일입니다. 한창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데, 갑자기 한 남자가 고의로 치고 가는 바람에 손에 들고 있던 샴페인을 옷에 쏟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무례할 수가,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렇게 생각하면서 고개를 들어 보니 그 남자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일부러 부딪치며 지나가더랍니다. 그제야 그 사람은 ‘아, 이건 내가 아니라 저 남자 문제구나’ 하고 생각을 바꾸어 마음을 가라앉혔답니다.

내 잘못으로 일어난 일이면 관여해야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이건 ‘상대방의 문제다’라고 생각하며 분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렇게 스스로 마음의 평화를 지키는 것은 나에게 불합리한 행동을 하거나 무례한 말을 하는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것과 아주 관계가 깊기 때문이지요.

이 말에 이렇게 질문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 상대방을 무시하면 되는 건가요?”

어떤 의미로는 그렇게 해석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저런 녀석은 그냥 내버려 두는 게 상책이야’ 같은 무시가 아니라, ‘저 사람 때문에 내 마음이 혼란할 이유가 없어’라고 거리를 두는 것입니다.

마음이 흐트러지는 것도 억울한데 소중한 시간까지 낭비할 수 없기에 내 마음을 지키는 방법입니다. 결국 누군가의 지배를 받지 않는 자기 해방을 위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때로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감정을 싹둑 자를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제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아’ 하고 말이지요. 하지만 제아무리 잘 끊었어도 머릿속에 맴돌며 용서가 안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시간이 해결해 준다는 말에 기대보는 건 어떨까요?

 

남을 용서할 때 내가 자유로워집니다.

 

상대방의 행동이 이치에 맞지 않는다면 ‘무시’가 아닌 ‘거리 두기’를 해보세요.

 

 

사람과 사람 사이

일본의 근대 시인 야기 주키치의 시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아름답게 보자

나와 다른 사람 사이를

아름답게 보자

지치지 아니하고”

 

야기 주키치는 인간관계를 아름답게만 본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불완전하다는 것과 내 잘못을 스스로 깨달으면서 사람과 사람 사이를 아름답게 보려 한 것입니다.

관계를 맺는 일은 참 어렵지요. ‘용서’도 학습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의 행동을 보고 용서하기 힘들 때, 상대방의 처지에서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나는 더한 행동을 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러다가 보면 차오르던 분노가 가라앉으면서 상대방을 이해하는 폭이 넓어집니다. 그리고 나에게 고통이 왔을 때 예수님이 받은 고통을 생각하며 받아들인다면 나를 성장으로 이끄는 고통을 감사히 받아들일 수 있어요.

중요한 건 지치지 않는 거예요. 그래도 지치는 순간은 오겠지요. 특히 내가 너무 괴로워서 사람 사이의 관계를 아름답게 보려고 애쓰는데도 상대방은 조금도 노력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 말이에요.  그럴 때면 저는 혼잣말로 ‘지지지 말자’라고 말해봅니다.

 

왜곡과 집착으로 인간관계를 끊어버리지 마세요

예수님도 고난을 당하셨으니, 우리가 괴로운 일을 겪는 것은 당연합니다.

 

 

쉽게 비판하지 마세요

남을 비판하기는 쉽지만 자신에게 향하는 비판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무척 힘듭니다. 왜냐하면 비판은 어떤 의미로 판단 받는 것이고, 부정적인 의미로 확장될 수 있기 때문이지요. 비판하는 능력은 인간에게 주어진 특권이기에 이를 사용하는 것은 무척 중요하지만, 상대방을 위한 배려와 친절함도 함께 따라야 합니다.

“저 사람은 정직하긴 한데 일 처리가 느려.”

“저 사람은 일처리가 느리지만 정직해.”

같은 사람에 대한 평가인데 느낌이 다르지요?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다릅니다. 상대방의 단점을 강조한 것인지, 장점을 강조한 것인지의 차이지요.

어느 누구도 원해서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결국 모든 사람은 살아가는 일에 자신이 없지요. 그래서 사람은 힘들고 괴로운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 ‘당신이 있어서 좋아요’라는 누군가의 격려와 따뜻한 말 한마디가 필요합니다.

저는 하루 종일 따뜻한 격려를 받지 못하고 싸늘한 비판만 들었을 때 이렇게 스스로를 위로합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받은 심한 비난을 나도 똑같이 받는구나’ 그러고 나서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하는 비판은 하지 않을 거야’라고 결심하면 자연스레 마음이 가벼워집니다.

 

남을 비판할 때에도

배려와 친절함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모두 괴롭고 힘든 순간들을

버티며 살아가기에, 서로 험담하고

깎아내리는 말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아요.

 

 

사랑의 쓴소리

저는 언젠가 제출 날짜를 지키지 않은 어느 학생의 리포트를 끝내 받아주지 않은 적이 있습니다. 그 학생은 한바탕 변명을 한 뒤에 이렇게 말했지요.

“수녀님은 가톨릭 신자신데 길 잃은 어린양을 받아주지 않으실 건가요?”

순간 멈칫한 저는 이렇게 대답했어요.

“길 잃은 어린양을 버려두는 게 아닙니다. 곧 사회에 나갈 학생에게 세상은 그리 만만하지 않다는 걸 알려주려는 것입니다.”

그 학생은 졸업 후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결혼을 했고 아이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담아서요. 만일 그때 제가 그 학생의 리포트를 그냥 받아줬다면, 지금까지 편지 주고받는 사이가 될 수 있었을까요.

‘관용’은 남의 잘못을 너그러이 용서하며 책망하지 않는 것이지, 잘못을 덮어주는 것과는 다릅니다. 언뜻 보면 상대를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진정한 배려와 사랑은 어매 보이기까지 하지요.

저는 이십 대 때 7년 동안 어느 미국인 곁에서 일하면서 진정한 관용을 배웠습니다. 그분은 일에 있어서는 너그러움이 조금도 없는 아주 엄격한 분이었습니다. ‘단 1센트의 계산착오도 만 달러와 계산착오와 다를 바 없다’는 사고를 가지셨기에 제가 하는 작은 실수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따뜻한 사람이었습니다. 인간이 지닌 나약함을 언제나 감싸주고 사랑으로 용서하는 넓은 마음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저한테는 “길 잃은 어린 양’에 대한 참사랑이 무엇인지 알려주셨지요.

 

쓴소리는 상대방을 사랑할 때만이

해줄 수 있습니다.

 

관용은 잘못을 눈감아 주거나

어리광을 받아주는 것과는 다릅니다.

 

 

길을 밝혀주는 말

어릴 적 어머니는 저의 말대답을 받아주신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런 어머니 밑에서 자란 저는 부모님 말씀을 참 잘 듣는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사춘기가 되면서 부모님께 짜증을 부리고, 억눌렸던 것이 폭발하여 막무가내로 우기기만 했습니다.

저는 좋아하는 사람이 하는 말은 곧이곧대로 따랐지만, 싫어하는 사람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습니다. 도 상대방이 마음에 들지 않다는 이유로, 옳은 말을 하는데도 반대하고 나섰지요. 이런 저한테 ‘의견’은 상대와 멀찍이 떨어져서 객관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알려준 사람이 말했지요.

“나에게 옮은 말을 해주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따르세요. 하지만 틀린 말이라면 따를 필요가 없답니다.”

상대방 의견의 옳고 그름을 따지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의견과 판단을 갖고 있어야만 합니다. 또한 내 생각만 옳다고 단정하지 않는 겸손과 상대방에 대한 존중도 필요하지요. 내 의견이 그렇듯 다른 사람의 의견도 그 사람이 살아오면서 만들어진 것이기에, 그 사람의 가치관에서 형성된 것임을 염두에 두고 경청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들의 말을 아무리 많이 들어도 마지막 결단은 내가 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에 대한 책임 또한 스스로 지는 것임을 잊지 마세요.

내게 ‘듣고 싶지 않은 말’을 해주는 사람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그런 말일수록 내가 가야 할 길을 밝게 비춰주기 때문이지요.

 

싫어하는 사람이 한 말도

옳은 말이라면 들어야 합니다.

 

‘듣기 싫은 말’을 해주는

사람을 소중히 여기세요.

 

 

기대를 버릴 때 힘이 생겨요

제가 들은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오랜만에 산속에 사는 차주 친한 친구를 만나러 갔답니다. 친구와 끊임없이 재잘거리며 이야기 꽃을 피우다가 날이 저물었는데, 금세 산속에 폭풍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오랜만에 찾아갔으니 하룻밤 정도는 재워주겠거니 했지만, 친구하네 전혀 그런 기색이 보이지 않아 말했답니다.

“늦었으니 슬슬 가봐야겠네.”

현관문을 열자 밖은 칠흑 같았습니다.

친구가 말했지요.

“어둡네.”

그러고는 밤길은 어두우니 조심이 가라고만 할 뿐, 손전등 하나 건네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그 컴컴한 밤에 나무 밑동에 발이 걸려 넘어지고 구르며 산 아래로 내려왔지요. 그러자 곧 비바람이 멎고 달빛이 그를 환히 비추어 주었답니다. 비로소 그는 남에게 의지하려는 마음과 기대를 완전히 버릴 때 생겨나는 자신의 힘을 깨닫고,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상쾌한 기분을 맛보았다고 합니다.

우리도 살면서 종종 이런 기대를 합니다. 하룻밤 재워주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설마 배웅은 해주겠지, 도는 손전등 정도는 손에 쥐여주겠지 하고 생각할 만하지요. 하지만 그런 바람을 버리고 마지막 기대까지 버릴 때, 뜻밖에도 새로운 길이 펼쳐집니다.

자기 힘으로 무언가를 성취했을 때 맛보는 기쁨은 누군가한테 의지해서 성취한 기쁨과는 전혀 다르지요. 그건 터널로 들어가기 전의 빛만 아는 것과 언제 끝날지 모르는 캄캄한 터널을 빠져나갔을 때 쏟아지는 빛을 아는 것의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은

마음과 기대를 버릴 때

새로운 길이 펼쳐집니다.

 

길고 어두운 터널을 통과해 본 사람만이

터널을 빠져 나왔을 때 만나는

빛과 기쁨을 알 수 있지요.

 

 

행복과 불행은 나에게 달렸어요

누군가 따뜻하고 친절한 선을 베풀 때, 순수하게 감사히 받는 것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도와 줄거라 생각하고 기대에 부풀었다가 막상 도움을 받지 못했을 때 그 사람을 원망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세이신 여자대학은 자유인 육성을 지향합니다. 자유인은 글자 그대로, 자신의 뜻대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에 의해서도 아니고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지도 않으면서, 모든 행복과 불행은 자신에게 달렸다는 생각으로 외로움과 냉혹함, 그리고 기쁨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이지요.

저명한 신경정신과 의사인 빅토르 에밀 프랑클은 인간의 자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의 자유란 여러 가지 조건이 필요한 게 아니라,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는 것이다.”

신이 아닌 피조물인 우리는 다양한 조건 속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중에는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조건을 타고난 사람도 있지요. 우리는 주변 사람과 다양한 환경에서 살아가야 하고 병이나 재난처럼 생각지 못한 것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조건에 맞서 극복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겠지요.

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그 상황에서 지혜롭게 대처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자유인으로 살아가는 증거일 것입니다.

 

자유인이란 행복과 불행 모두

스스로 결정하는 사람입니다.

 

우리에게는 주어진 조건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어떻게 존재하고 싶은지 결정할 자유가 있어요.

 

 

새로운 시작을 하는 그대에게

졸업증명서 안에 들어있던 작은 카드에 이런 기도문이 쓰여있었습니다.

 

“신이시여, 제가 바꿀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는 평온함을,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꾸는 용기를,

그리고 이를 구별할 줄 아는 지혜를 주소서.”

 

주어진 상황을 바꾸려고 발버둥 치거나, 바꿀 수 있는데 노력하지 않으면서 괴로워하는 일은 없도록 하세요. 바꿀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는 마음의 평화를 키워나가고, 바꿀 수 있는 것은 용기를 내서 바꾸세요.

이는 앞으로 험난한 사회로 나갈 여러분이 중요히 여겨야 할 마음가짐입니다.

투정부리고 싶을 때, 그리고 자신의 생각이 그저 어리광인 건 아닌지 의문이 들 때, 위의 기도문을 읊조려 보세요. 지금 자신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평온함’인지,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용기’인지, 이를 가려내는 지혜를 얻을 수 있도록 겸허히 고개를 숙이고 기도해 보세요.

해마다 졸업생들에게 하듯이, ‘안녕’이 아닌 ‘잘 다녀오세요’라는 말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보냅니다. 폭풍이 휘몰아치고 때로는 암흑 속에 혼자 있게 될 세상에 ‘잘 다녀오세요.’

함께 따라가고 싶은 마음을 참으며 등불도 건네지 않고 여러분을 보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이미 4년 동안 올바른 판단과 좋은 선택을 하며 살아가는 법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능력에 상관없이 존재만으로 하느님께 깊은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거예요. 소중한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며, 다른 이도 나와 마찬가지로 소중한 존재임을 인식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사회에서 사람들에게 외면 받는다는 생각이 들 때, 자신을 포기하지 마세요. 우리 학교의 창립자이신 율리아 수녀님은 괴로울 때도, 악조건에 놓여있을 때도 ‘선하신 하느님의 뜻대로’라는 말고 함께 웃음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진정한 자유인이셨지요.

여러분도 사회로 나가면서 웃음을 잃지 않기를 바랍니다. 어려움을 하나씩 이겨나가며 계속 걸어가세요.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의 존귀함을 깨달으며,

다른 사람도 소중하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험난한 세상 밖으로 나가는 그대들에게 말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을 포기하지 말고

웃음을 잃지 마세요.

 

 

 

2. 원하는 것이 주어지지 않더라도

 

좌절이 주는 선물

해마다 4월이면 입학하는 학생들을 만납니다. 그 중에는 우리 대학에 들어오길 원하지 않은 학생들도 있기 마련인데, 저는 학생들의 얼굴을 보면 그들을 알아볼 수 있지요.

인생에서, 간절히 원하는 것이 언제나 이루어지는 건 아닙니다.  그리고 가장 원하는 길을 걷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이라고 할 수도 없지요. 이것은 제가 그 동안 어쩔 수 없는 선택을 경험하면서 깨달은 사실입니다.

저는 유치원에 다니지 않고 보모 손에 자랐습니다. 아마도 당시 4, 5년 동안 홋카이도에서 도쿄, 대만, 다시 도쿄로 오간 아버지의 전근 때문이라고 짐작합니다.

가쿠슈인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저는 시험을 쳤지만 떨어졌습니다. 유치원에 다녔다면 분명 풀 수 있는 문제였지요. 처음 맛본 좌절이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저는 세이케이 초등학교에 입학했고, 후타바 여자 고등학교를 무사히 졸업했습니다.

당시 여성들에게는 유일한 고등교육 기관인 전문학교에 들어가기 직전이었습니다. 국립학교를 동경한 탓에 오차노미즈 여자대학을 지원했지만 역시나 불합격이었습니다. 추가 합격을 기다려야 한다는 말을 듣고 자존심이 상해 세이신 여자전문학교 (현재 세이신 여자대학)에 입학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좌절은 수도회 입회였지요. 그땐 마치 오랫동안 짝사랑하던 연인에게 버림받은 기분이었습니다.

제 마음이 항상 고등학교 시절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수도회에 들어간다면 생모르 Saint Maur 수도회(후타바 여자고등학교를 운영하는 수도회)에 들어가기로 마음 먹었지요. 수도회에 들어가기 위해 프랑스어를 배우고, 프랑스로 여행을 떠났을 때는 수도회의 모원 母院 에서 한 달 반 정도 머무를 정도로 열심히 했지요.  그래서 수도회도 집안 사정으로 입회가 늦어지는 저를 느긋하게 기다려 주시리라고 생각했습니다.

드디어 생모르 수도회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바로 내일 일어날 일도 모르는 것이 세상일입니다. 당시 제 집안 사정도 이해해 주시고 저를 예뻐해 주시던 관구장님 임기가 끝나고 새로운 분이 관구장님이 되셨습니다. 저는 처음 뵙는 분이셨지요.

결국 저는 입회 할 수 없었습니다. 후타바 성당에서 세례 받은 뒤, 11년이나 마음에 품어온 ‘연인’에게 버림받은 것입니다.

하지만 수도회에서 저를 거절한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당시 저는 스물아홉 살, 입회하기에 아슬아슬한 나이였습니다. 더구나 저는 조신하지도 않았고 수도생활을 희망하는 사람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화려한 생활을 하고 있었지요.

수도회 면접 때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당신보다 이른 나이에 수도원에 들어온 사람의 지시를 따를 수 있나요? 어떤 지시라도 말이에요?”

그분은 이어서 말했습니다.

“수도원에 들어오려고 마음먹은 사람이라면 그렇게 빨간 립스틱을 입술에 바르지 않을 거예요. 그 빨간 스웨터도 너무 화려하네요.”

따끔한 한마디에 속앓이 한 그때가 아직도 생생합니다. 아마도 그분은 저한테서 간절한 모습을 볼 수 없었나 봅니다.

저도 수도회 입회를 미루고 싶어서 미룬 것은 아니었습니다. 평생 고생만 하신 어머니 곁에 되도록 오래 있고 싶었어요. 그리고 전쟁이 끝난 뒤 의대에 들어간 오빠가 졸업과 결혼식을 무사히 마치면, 제가 정한 길을 가겠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그런데 처음 만난 수녀님에게서 “나이가 너무 많아요’라는 말을 듣자 충격을 받았지요. 하지만 곧바로 대답했어요. “네, 알겠습니다. 그럼 다른 곳을 찾아보도록 하죠.”

저는 워낙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라 머리를 숙이고 받아들여 달라고 부탁할 생각은 안 했어요. 이렇게 11년 동안 한 ‘사랑’에 깔끔히 마침표를 찍고 다른 분의 추천으로 낯선 ‘노틀담수도회’문을 두드렸습니다.

 

내가 가장 바라는 것이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이 아닙니다.

 

좌절했기 때문에 경험하는 것이 있습니다.

좌절은 우리를 강하게 성장시켜 주니까요.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을 바라봐요

가쿠슈인 초등학교가 아니라 세이케이 초등학교에, 오차노미즈 여자대학이 아니라 세이신 여자대학에, 그리고 생모르 수도회가 아니라 노틀담 수도회에 들어간 경험이 저한테는 좌절한 순간이기도 했지만 돌아보니 실패가 아닌, 참으로 다행이고 감사한 일이었다는 생각입니다.

저는 학생들에게 “잃은 것에 집착하지 말고 얻은 것을 바라보며 살아야 해요”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한 학생이 “지금 해주신 말이 마음에 와 닿아요”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내가 가장 바라던 것이 이루어지면 축하할 일이고 기쁜 일이지요. 하지만 좌절은 우리 인생에서 대단히 소중한 경험입니다. 좌절을 만나면 괴로워하세요. 다만 괴로운 감정에 억눌려 있지 말고, 내가 바란 그것만이 내가 갈 수 있는 길의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여유가 필요합니다.

사람이 보는 것에는 한계가 있지만 멀리 바라보면 모든 일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어쩌면 “하느님의 생각은 사람의 생각과 다르다”라는 말씀을 신뢰하는 과정에서, 좌절을 통해 내 생각이 얼마나 얕은지 체험하는 것이 필요한가 봅니다.

부끄러움을 받아들일 때 겸손할 수 있다고 하지요.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좌절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좌절은 나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는

기회이지요.

 

사람이 앞을 내다보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지나고 나면 좌절이 선물이었음을

깨닫는 순간도 옵니다.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요?

“돈과 행복에는 꼬리가 없다”라는 말처럼, 행복은 붙잡을 수 없고 어느 틈에 스르륵 사라지고 마는 것 같습니다. 사람이 사람답기 위한 조건에는 ‘항상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이 있습니다. 삶 속에는 분명 어느 정도 불행이라는 그림자가 따라다니기 때문이지요.

저의 어머니는 여든일곱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셨는데, 살아계실 때 종종 저한테 이렇게 물으시던 기억이 납니다.

“너는 어떤 사람이니?”

저 스스로를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는지 바라보게 하기 위한 말씀이셨지요. 이 말은 제 생각대로 일이 풀리지 않아 뾰로통한 얼굴을 하고 있거나 속이 부글부글 끓을 때 자주 들었습니다. 또 자라면서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은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 생각대로 세상이 움직이지 않고 일이 잘 풀리지 않는 게 당연하다고, 만약 내 뜻대로 술술 잘 풀린다면 감사하게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어머니 말씀 덕분에 저는 쓸데없는 괴로움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습니다. 저는 행복한 사람이지요.

‘이건 이래야 하고, 저건 저래야 해’ 라는 확신에 매일수록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가족은 나에게 항상 다정하게 대해줘야 해’, ‘저 사람은 내 처지를 이해할 거야’, ‘나한테 감사하는 건 당연해’ 처럼 말이지요. 이런 확신이 현실과 다를 때 괴로움은 커집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대부분의 확신은 다란 사람이 내 뜻을 실현해 주기를 기대하는 마음에서 나옵니다. ‘친절하면 좋지’, ‘날 이해해 주니 고맙다’, ‘감사 받는 건 참 고마운 일이야’ 처럼 생각을 바꾸면 마음이 한결 자유로워집니다. 참 신기한 일이지요.

 

세상 일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건 당연해요.

 

만일 내 뜻대로 된다면 감사한 마음을 가지세요.

확신에서 벗어날수록 마음이 자유로워집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은혜를 모르는 상대방의 태도에 ‘내가 이만큼 해주었는데 당연히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냐?’라고 꼬집어 말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제 경험에 비추어 보면 고마운 마음을 갖든 그렇지 않든 그것은 상대방의 자유입니다. 자기 신념대로 살면서 고마워해 주기를 바라는 상대방과 불편하게 되는 경우도 있고, ‘고마운 마음을 가져주면 좋지’라고 생각하며 웃어넘기는 경우도 있다는 말이지요.

내가 손해 보는 거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우리는 감사 받지 못해서 ‘손해’본다고 느끼는 것과, 그 때문에 마음이 계속 흐트러지는 ‘손해’를 구분해야 합니다.

제 경우는 전자의 손해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분노와 아쉬움 모두 일단 맛보는 것이지요. 그런 다음에는 ‘내가 이런 일로 오늘 하루를 불쾌하게 지낼 수는 없지’하고 생각을 바꿉니다. 그리고 ‘내게 고마운 마음을 가져주면 좋지만, 그러지 않더라도 괜찮아’ 하고 마음을 바꾸지요. 어쩌면 이런 방법은 나를 속이는 것일 수 있습니다. 자기합리화라는 말을 들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세상은 내 바람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남에게 바라기보다는 내가 매쳐있는 것에서 나를 자유롭게 해주는 편이 훨씬 좋지 않을까요? 세상에는 타협하거나 양보해서는 안 되는 신념이 있고 또 있어야만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감사를 전하는 말을 잊지 말고 해주세요. 그리고 나는 언제나 감사 받고 배려 받아야 한다는 생각은 나만의 착각임 도 기억하세요.

 

마음의 행복과 자유는 나에게 달려있어요.

 

매달리지 않아도 될 일이라면

집착하기보다는 벗어나면 어떨까요?

 

 

불편함 껴안기

확신하지 말고 거리를 두라는 것은 적당히 넘어가라는 말이 아닙니다. 쓸데없이 에너지를 낭비하지 말라는 뜻이지요. 무기력해지라는 말이 아니라 비생산적인 에너지를 줄이라는 뜻입니다.

상대방의 무례한 태도, 이해 받지 못하는 괴로움, 마음의 상처로 인한 고통 등, 세상의 부조리를 확실히 인식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한계가 사람이 가지고 있는 모습이라고 조금씩 받아들이는 것이지요. 완벽하기를 바랄수록 상처를 받고 무거운 짐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으면 합니다.

고통과 시련의 상징인 십자가!

겉으로는 어려움이 없어 보여도, 모든 사람은 저마다 남들이 쉬이 짐작할 수 없는 십자가를 지고 살아갑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하느님께 청했습니다.

“조금만 더 가벼운 걸로 바꿔주세요.”

크고 작은 십자가로 가득 찬 방으로 안내 받은 그는 십자가의 크기와 무게를 재며 마음에 드는 십자가를 찾아서 하느님 앞에 내놓았습니다.

“이거라면 평생 짊어지고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그 순간 그는 깨닫습니다. 자신이 선택한 십자가는 처음 자신한테 주어진 십자가임을.

나약한 인간이 아무리 지혜롭게 처리한다 해도 자신이 선택한 행복과 불행에는 한계가 따르지요. 여류 시인 구조 다케코는 이런 글을 썼습니다.

 

“품에 안길 줄도 모르고

어수룩하게도

저항하네

위대한 손에서.”

 

우리가 일상에서 하는 일은 대부분 이 ‘위대한 손’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일이지요. 하느님 품에 안겨있음을 깨닫고 저항하지 않는 것이 하느님을 향한 신뢰겠지요.  하지만 하느님 품에 안겨있음을 알면서도 그 사실을 잊고 벗어나려 해도 괜찮아요. 다만 저항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 의미 없는 저항을 멈추고 깨끗하게 백기를 드는 것이야말로 사람이 자신을 알고 살아가는 방법이 아닐까요?

 

누구나 남모르는

고통을 짊어지고 삽니다.

 

명확하지 않은 것을 나름대로 받아들이며

올곧게 앞으로 나아가세요.

 

 

내 맘대로 안 되는 일도 있어요

장래가 유망한 어느 학생이 유서를 남기고 자살을 했습니다. 유서에는 ‘내 맘대로 되지 않는 인생이 몹시 싫다. 인생이 뭔지 모르겠다’는 내용이 쓰여있었답니다.

슬픔에 잠긴 친구들은 서둘러 평소 존경하던 어느 노교수를 찾아갔어요. 그러면서 그분이 함께 친구의 죽음을 애도하며 위로해 줄 것을 기대했습니다. 유서의 내용에 조용히 귀를 기울이던 교수는 그들의 예상과 달리 냉정하게 말했답니다.

“그런 이유로 죽다니… 인생 人生은 사람 人이 살아간다 生 는 말이네. 나는 60년 넘게 살았어도 인생을 모르겠는데 스무 해 남짓 산 사람이 인생을 알 리가 있나.

그리고 인생은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게 당연한데, 그게 오히려 고마운 거지. 사람이 하는 생각은 선하기도 하지만 악한 것도 있기 마련이네. 만일 인생이 사람이 생각하는 그대로 이루어진다면 우리는 맘 놓고 살 수 없지. 생각대로 되지 않기에 마음을 놓고 살 수 있고, 더 높으신 분께 순종할 마음도 생기는 거라네.”

노교수는 이 말을 자살한 친구를 비난하기 위해 한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들,  다시 말해 내일을 알 수 없고 뜻대로 되지 않는 인생을 살아갈 젊은이들을 위해 한 말입니다.

만일 ‘그런 녀석은 죽었으면 좋겠어’라고 생각한 것이 그대로 이루어진다면 아무도 안심하고 살아갈 수 없겠지요. 그러니 인생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은 생각하기에 따라 감사해야 할 일이 되지요.

가장 나답게 산다는 것은 뜻대로 풀리자 않는 인생을 내 나름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닐까요?

 

인생은 생각한 대로 되지 않기에,

오히려 마음 놓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받아들이기 힘든 일을 만날 때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자신의 참모습이 나옵니다.

그게 바로 ‘개성’이지요.

 

 

3 나를 포기하지 마세요

 

진짜 사랑

어느 날 어떤 학생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 학생은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지요. 자신이 무심코 던진 말에 친구가 상처를 받았는데, 아무리 사과를 해도 용서해 주지 않는다고 말이에요. 저는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이렇게 이야기해 주었어요.

“친구의 반응이 그렇다면 이 사건을 계기로 그 친구와 거리를 두면 어떻겠니?”

그러자 그 학생은 풀이 죽어서 돌아갔습니다. 한 달쯤 지났을 때 그 학생이 다시 저를 찾아와 감사 인사를 했어요.

“수녀님, 결국 그 친구와 멀어졌는데 오히려 잘된 것 같아요. 마음이 전보다 훨씬 더 자유로워졌어요.”

우정을 비롯해 사랑은 결코 상대방을 구속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방을 속박하거나 숨 막히게 하는 게 아니라 더욱 자유롭게 해주는 것이지요.

자신의 기분에 거슬리는 말은 못 하게 하거나, 다른 사람과는 친하게 지내면 안 되는 자기중심적이며 배타적인 조건이 따르는 관계는, 결국 상대방을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게 하고 싶어 하는 주인과 노예 관계와 같습니다. 이는 동등한 관계에서 오가는 교류가 아니지요.

소설가 무샤노코지 사네아쓰 가 한 말이 기억나네요.

 

“너는 너, 나는 나.

그렇지만 사이좋게.”

 

부모와 자녀, 부부, 연인 간의 사랑이나 우정에서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소유하고 지배하는 것은 부당한 관계입니다.

물론 사랑하는 관계에서 어느 한 시기에는 상대방이 나를 구속하려 하는 것을 기뻐하기도 하지요. 이는 상대방 마음 안에 내 자리가 확실하게 자리 잡아 가는 안정감이 주는 기쁨이지요.

사람에게는 본래 자유롭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서 자신의 고유한 모습과 주체성을 잃고 살아간다면 진정한 행복과 영원한 기쁨을 느낄 수 없답니다.

 

남에게 매이거나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설 때, 비로소 사랑은

성장합니다.

 

사람을 소유하거나 지배하려 하면

사랑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내 모습, 있는 그대로

평소엔 무심코 목구멍으로 침을 넘기지만 만일 내가 접시에 뱉어놓은 침을 다시 삼켜야 한다면 기분 좋은 일은 아닐 거예요. 피도 마찬가지입니다. 피는 생명과 직결된 아주 소중한 것이라는 걸 알고 있고, 손끝이 바늘에 찔리면 망설이지 않고 그 손끝을 입에 갔다 대지요. 하지만 시험관에 담기 피를 아주 소량이라도 마셔야 한다면 거부감부터 들겠지요.

때때로 모든 사람한테 드러난 내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힘이 듭니다. 나조차 똑바로 쳐다보기 힘든 모습, 받아들이기 힘든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것은 훨씬 괴로운 일이지요. 수치심이 맘속 깊이 가라앉아 있을 때는 그래도 감당할 수 있지만 한번 표출되면 스스로 감당하지 못하고 필사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숨기려 하지요.

다른 사람에게 숨겨야 할 것이 많을수록, 또는 숨길 상대가 많을수록 생활은 자유롭지 못합니다. 평안하게 사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지요.

다른 사람이 보면 난처해질 물건이 방 안에 있으면 방문을 잠그는 것처럼 우리 마음 안에도 단단히 잠가놓은 곳이 있습니다. 그래도 불안해서 끊임없이 다른 사람을 살피고 노크 소리가 들리면 ‘보여선 안 되는 것’을 서둘러 옷장에 숨깁니다. 상대방과 이야기를 하고 있어도 마음은 옷장에 있지요. 혹시라도 그 옷장에 들어있는 것을 꿰뚫어 보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마음이 평화로울 수 없습니다.

우리 마음에는 나도 보고 싶지 않고, 더욱이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로 보이거나 알리기 싫은 모습이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감춘다 한들 그 사실이 변하지는 않지요.

질투를 하며 미움이 생기고, 모르는 것이 많으면 틀리는 것이 있는 것처럼 ‘있는 그대로의 나’를 그저 숨기고 숨겨서 ‘완벽한 내 모습’을 보이려 하는 것은 무리지요.

다른 사람에게 결점을 보였다고 겹겹이 울타리를 치면 오히려 방어기제가 생겨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완벽한 내 모습’을 지키기 위해 쓰는 에너지는 엄청납니다. 그것은 마치 격식 있는 자리에서나 입는 정장을 평소에도 계속 입고 있는 것과 같아요.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 만 의식해서는 자유로운 삶의 주인이 될 수 없지요.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인정하며 자유로워져요.

 

다른 사람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것을

숨기고 꾸밀수록 마음은 혼란스럽고

삶은 자유롭지 못합니다.

 

 

열등감 덩어리

 그리스 델포이 신전에는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이 적혀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들은 어른들이 평가는 내가 어떤 사람이지 아는 데 큰 영향을 줍니다. 구제불능에 뭘 해도 형보다 못한다고 끊임없이 비교당하며 자란 아이의 자화상에서 열등감을 지워내기는 어렵겠지요. 그러나 이런 모습은 성장하는 과정에서 경험이나 체험으로 변화가 가능합니다.

구제불능이 아닌 나를 발견하고 늘 남에게 뒤떨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깨달으면 그전까지 잘못 그린 자화상은 좀 더 사실적으로 바뀝니다. 그래서 사람의 일생은 자신을 발견해 가는 여행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자신을 아는 일이 언제나 유쾌하지만은 않습니다. 자신을 싫어하고 미워할 만한 요소를 스스로 잔뜩 끌어안고 있거든요.

예전에 어떤 학생한테 편지를 받았습니다. 빽빽이 적힌 세 장의 편지지에는 ‘선생님께 편지를 쓸 자격도 없는 제가’라는 말로 자기소개를 시작해, ‘매력 없는 여자’, ‘구제불능’, ‘그릇이 작은’, ‘겁쟁이’, ‘깊이 없는 인간’, ‘치사한 성격’ 등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이어졌습니다. 마침내 그 편지는 ‘전 살아봤자 아무 소용도 없어요’라는 말로 끝이 났습니다.

이런 자기표현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발견했을 수도 있고, 단순한 자기 확신일지도 모릅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 학생이 편지를 쓸 당시에 행복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자신에게 실망하고, 자신을 인정하지 못해서 자신이 가진 소중한 가치를 아직 발견하지 못한 거죠.

열등감은 누구에게나 있어요. 하지만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는 모습은 아름답지 않아요. 모든 사람은 아름답고, 각자 있는 모습 그대로 살아갈 권리와 의무가 있습니다.

 

인생은 나를 발견하는 여행입니다.

 

누가 뭐래도 나에게도

좋은 점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삶은 반짝반짝 빛날 거예요.

 

 

나를 꽃피우세요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 어떤 평가를 하고 있는지에 대해 우리는 늘 마음을 씁니다.

칭찬받으면 기쁘고, 비난 받으면 슬프지요.

미움 받으면 절망하고, 사랑 받으면 평온해집니다.

존중 받으면 용기를 얻고, 경멸이나 무시를 당하면 자신감을 잃지요.

사람이 이렇습니다.

다른 사람의 평가와는 상관없이 고유한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물론 사람들이 하는 판단에는 정확한 것도 있기에, 겸손하게 귀를 기울이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 사실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불완전하기 때문이죠.

소설가 무샤노코지 사네아쓰가 한 말이에요.

 

“누군가 봐도 좋고

누군가 보지 않아도 좋다.

어쨌든 나는 꽃을 피울 테니.”

 

어떻든 ‘피운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는 다른 이의 평가를 받아들이는 주체성의 문제겠지요.

칭찬을 받으면 감사히 받아들이고, 쓴소리를 들으면 그것도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마음에서는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상관없이 따뜻하면서도 냉정하게 나 자신을 바라보세요. 자신만이 피울 수 있는 꽃을 가장 아름답게 피우려는 결심과 노력이 중요하지요.

꽃이 피기 위해 햇빛, 공기, 물 등이 필요하듯이 사람이 ‘피어나기’ 위해서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건 나를 사랑하는 것이자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고, 무엇보다 하느님의 무조건적 사랑입니다.

 

자신의 꽃을 활짝 피워요.

 

다른 사람의 시신과 평가에

흔들리지 말고 자신만의 꽃을

아름답게 활짝 피우세요.

 

 

사랑도 연습이 필요합니다.

50년 넘게 학생들과 지내면서 느끼는 것은 그들 대부분이 완벽한 사람과 만나는 것을 사랑의 조건으로 생각한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상대가 ‘완벽함’을 잃어도 계속 사랑할 수 있을까요? 여기서 ‘사랑의 본질’을 묻게 됩니다. 앞날이 밝고 건강하던 상대방이 병에 걸리거나 좌절해도 그 사람을 그전처럼 똑같이 사랑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나의 ‘사랑하는 힘’에 달려있습니다.

정신분석학자이자 사회심리학자인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명확히 이야기합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단순한 열정이 아니다. 그건 하나의 결정이고 판단이며 약속이다.”

저는 이 말이 사랑의 본질을 잘 이야기해 준다고 생각해요. 평소에 연습은 하지도 않으면서 피아노만 근사하면 멋진 연주를 할 수 있다고 말하거나, 그림 그리는 연습은 하지 않으면서 아름다운 경치만 찾아 다니는 사람들이 있지요. 이처럼 평소에 사랑하는 연습은 하지 않으면서 좋은 사람 만나기를 기대해서는 안 되지요.

사랑하는 힘을 키우기 위해서는 먼저 일상에서 당연하게 여기는 일이나 사람, 사물을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손해를 보거나 불행, 재난, 고통이 따르더라도 그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감사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주변을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볼 수 있지요.

그리고 사랑하기 힘든 사람도 그 사람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는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어요.

 

사랑에는 결정과 판단,

그리고 약속이 필요해요.

 

단순한 열정으로 만난 두 사람에게 시련이 닥친다면,

과연 그 둘은 계속 사랑할 수 있을까요?

 

 

4. 반짝반짝 빛나는 삶

 

대학의 목적

어느 잡지에서 대학생 자녀를 둔 부모를 대상으로 ‘대학생들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라는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입시지옥에서 겨우 벗어났지만 이젠 자녀들의 비싼 학비 부담을 안고 있는 부모들은 ‘대학생들이 성실히 공부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무척 성실하게 공부하고 있다’는 겨우 0.4 퍼센트, ‘그럭저럭 공부한다’는 21.1 퍼센트, ‘그다지 성실하지 않다’는 63.2 퍼센트, ‘전혀 성실하지 않다’는 8.5 퍼센트,  ‘모르겠다’, ‘무응답’이 6.8 퍼센트였습니다.

‘대학생들의 사고방식’에 대해서는 ‘나이에 비해 성숙하다’가 4.5 퍼센트, ‘나이에 맞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가 16.6 퍼센트, ‘나이에 비해 미숙하다’가 62.8 퍼센트 였습니다. 기타 응답에는 ‘지식이 있어도 응용할 줄 모르며 말만 잘한다’, ‘일반상식도 모르면서 자신의 의견만 주장한다’는 단호한 비판이 있었습니다. 사실 20년 전 결과지만 상황은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점이 놀라운 일이지요. 제가 대학에서 교수로 근무할 때, 휴강을 알리는 게시판 앞에서 환호하는 학생들을 보고 마음이 씁쓸하던 경험이 있습니다. 제가 뒤에 있는 줄도 모르고, ‘대학까지 와서 또 공부해야 해?”라는 학생의 말에 말문이 막히기도 했지요.

대학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 학문 탐구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치른 수능시험, 암기에 중점을 둔 학업방식이 아닌, 사고하는 것이 중시되어야 합니다. 대학생활 4년은 인생, 사랑, 자유, 삶의 의미와 목표를 찾기 위해 보내는 풍요로운 시간이기 때문이지요.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뎌낼 수 있다’라는 니체의 말처럼 삶의 목적을 인식하고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가치를 확신할 수 있다면, 인생에서 만나는 많은 난관을 헤쳐나갈 수 있을 거예요.

이렇게 대학은 학생들의 사회적, 경제적 자립과 함께 인격 형성을 도와주는 것이어야 하지요. 사회의 일부인 대학에서 학생들은 다양한 사회 현상의 의미를 스스로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법을 배웁니다. 사회현상을 긍정하든 변화를 바라든, 나름의 이유를 가지고 그에 맞는 적절한 방법을 찾아가죠.

대학이란 ‘그럴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어’라고 스스로 생각하며, 의문을 갖고 비판하는 힘을 키우는 훈련장입니다.

 

대학이 어떤 곳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대학의 중요한 목적은

학생 한 사람 한 사람이 학문을 탐구하고

삶의 목표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작은 일에도 마음을 담다

“수녀님은 그릇 정리를 하면서 무슨 생각을 하세요?”

저를 동반해 주시던 나이 지긋한 미국인 수녀님이 물었습니다.

“글쎄요, 아무 생각 안 하는데요”

이렇게 대답하면서 이내 저는 부끄러워졌지요.

저는 수도원에 들어오기 전까지 사회생활을 하면서 하찮고 시시한 일을 해보지 않았습니다. 회사에서는 남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견주며 직접 업무 진행을 도맡아 큰 성과를 거두곤 했습니다.

각오하고 들어온 수도원이었지만, 온종일 하는 일은 청소, 세탁, 다림질, 수선 등의 소소한 일이었지요. ‘내가 밖에서 하던 일과 다른 게 당연해’라고 스스로 위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시시한 일로 채우는 하루하루가 불편하기도 했습니다.

백 명 이상의 수도자들이 식당에 들어오면 바로 자리에 앉아 식사를 할 수 있도록 하루에 세 번, 접시를 놓고 식사 준비를 했습니다. 큰 쟁반 위에 수프 담는 그릇을 놓고, 옆에는 나이프와 포크, 스푼을 챙겨 자리에 놓습니다. 같은 동작을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저는 기계처럼 움직이고 있었지요.

유일하게 일본에서 온 저에게 마음을 써주시던 노수녀님은 제게 이렇게 말씀해 주시곤 하셨습니다.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용히 놓으세요. 그리고 그 자리에 앉는 사람이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정성껏 놓으세요.”

접시를 식탁에 위에 놓고 포크를 가지런히 놓는 단순한 작업을 하면서는 보람을 느끼기 어렵고, 보수도 없지요.  하지만 그럴수록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는 것을 그날 배웠습니다.

 

단순하고 사소한 일을

의미 있게 바꿀 수 있는 비결이 있어요.

 

세상에 쓸모 없는 일은 없습니다.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달려있어요.

 

 

아름답게 가꾸기

오늘날에는 ‘예절’을 진부하다거나 형식일 뿐이라고 여겨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익을 따져 ‘아무것도 얻을 게 없어’라고 하거나, ‘이렇게 바쁜 세상에 예절에 마음 쓸 여유가 어디 있어’라고 말하기도 하지요.

무례한 것이 오히려 현대적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젊은 부모들 대부분은 아이들에게 예절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건 그들이 커다란 것을 놓치고 있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아름다움’이란 사람이 변함없이 추구해야 할 가치이고, 그 아름다움을 만들어 가는 것은 예절이라는 이름 안에서 사소한 행동이 하나 둘 쌓이면서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이걸 왜 해야 하는지 묻는다면 선뜻 대답할 수 없는 ‘규칙’을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아름다움’이라는 결실을 맺게 되지요.

어린 시절 어머니는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무릎을 가지런히 모으렴. 무릎과 무릎 사이를 벌리고 앉아서는 안 돼. 공주들은 몇 시간이고 그렇게 앉았단다.”

그러면 저는 속으로 ‘난 공주가 아닌데’ 하며 반발하면서도 마지못해 무릎을 붙이고 앉았습니다.

“집에서 새는 바가지는 밖에서도 샌다.”

이런 신념을 가지고 계셨던 어머니는 집에서 지키는 예절을 중요하게 생각하셨습니다.

음식을 입에 넣고 말하거나 걷는 것은 당연히 안 되고, 식사 후에 바로 드러누우면 소가 된다, 문지방에 걸터앉거나 밟으면 복이 나간다는 미신적인 이유를 듣기도 했습니다. 또 방문을 제대로 닫지 않을 때에도 어김없이 잔소리를 들었지요.

‘하지만 엄마, 다른 집은요’ 하고 말하려 하면 ‘다른 집은 다른 집이고, 우리 집은 우리 집이야’라며 늘 똑같은 말씀을 하시곤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유도 모르고 지킨 예절은 결국 자신과의 싸움이자, 아름다움을 가꾸는 방법이었습니다.

 

아름다움을 가꾸기 위해서는

수행이 필요합니다.

 

예절을 지키는 데서 아름다움이 나와요.

그것은 자신과 싸운 결과이기도 하지요.

 

 

아름다움의 비결

귀찮다고 생각될 때 ‘그럼 하지 말아야지’가 아니라 ‘그럼 해야지’라고 생각 바꾸기, 어른이 들어오시면 일어나기, 대화할 때는 목도리와 장갑, 코트를 벗고 주머니에서 손 빼기.

이런 것들을 내 마음이 내킬 때, 내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의 방식으로 지켜나간다면 언젠가 ‘아름다움’으로 바뀔 거예요.

신문을 보면 종종 일상생활에 필요한 소소한 요령들이 실려있어요. ‘이렇게 하면 어려운 것을 쉽게 할 수 있어요’ 같은 생활의 지혜 말이지요.

지난번 신문 기사에는 지저분해지기 쉬운 세면대 주변을 깨끗이 유지하는 방법이 실려있었습니다. 그 비결은 ‘사용한 후 부지런히 닦아요’라는 한 문장이었습니다. 저는 저절로 감탄이 나왔습니다. 이런 방법을 소개하다니 놀랍지 않나요?

힘들이지 않고도 깨끗하게 할 수 있는 세제가 넘쳐나는 요즘 세상에서 당연하면서도 실천하기 힘든 행동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무척 신선했습니다.

마음도 부지런히 닦으면 분명 깨끗해지겠지요. 문득 그런 생각이 듭니다.

 

시시한 일일수록 실천해 보세요!

 

작은 일이라도 소홀히 하지 말고

꾸준히 실천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세요.

 

 

5. 사랑을 품은 사람

 

제가 할게요

양로원에서 봉사하고 온 학생들의 이야기를 듣다가 문득 마음에 걸리는 말이 있었습니다.

어르신들을 위해 ‘책을 읽어주었다’, 혹은 ‘안마를 해주었다’ 등의 말입니다. 봉사는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보수가 없고 그저 마음에서 우러나와 하는 일이니까 단순히 ‘(내가 여유가 있으니) 해준다’라고 말해도 상관은 없겠지요. 하지만 그것은 봉사의 참된 정신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번은 어느 젊은 어머니가 중증장애아 보호시설에 천 기저귀를 접으러 가서 느낀 점을 나누어주었습니다.

“천장까지 쌓인 기저귀를 처음 봤을 때, 잊고 있던 여러 생각이 스쳐 지나가더라고요. 알지도 못하고 본적도 없는 사람들이 울고 웃으면서 나와 똑같이 살아가고 있다는 걸요. 지구 저편에서 비참하게 굶어 죽어가는 아이들과 헛된 전쟁도 떠올랐어요. 이 세상에서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깨달았거든요.”

지금까지는 자기 자신과 가족만 생각하며 지낸 그 어머니는 봉사활동을 통해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기쁨을 배운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퍼즐의 한 조각을 끼워 넣어 그림을 완성하는 것처럼, ‘봉사’는 아름다운 세상을 완성하기 위한 마지막 퍼즐 조각임을 깨달은 것이지요.

바쁜 생활에 쫓겨 당연한 사실을 잊고 지내지는 않았나요? 사람다움을 되찾아 주는 봉사는 은총이라는 사실을 말이지요.

 

봉사는 선물입니다.

 

봉사는 우리가 서로 도우며

살아가고 있음을 알려주고

기쁨을 주지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인도를 방문했을 때, 마더 데레사가 하는 일을 보고 말했습니다.

“백만 파운드를 준다고 해도 저는 못하겠어요.”

그러자 마더 데레사가 대답 했습니다.

“그렇다면 저도 할 수 없을 거예요.”

언뜻 두 사람이 ‘완전한 공감’을 한 것처럼 들리지만 실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엘리자베스 여왕은 아무리 많은 돈을 준다고 해도 자신은 그런 일을 할 수 없다고 말한 것이고, 데레사 수녀님은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한 것이지요.

당시 데레사 수녀님은 나병 환자나 에이즈 환자, 혹은 버림받은 아이들을 보살피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또 수녀님은 길가에 쓰러진 병자들을 정성껏 간호하며, 가난하고 실의에 빠져 살다가는 사람들의 임종을 끝까지 지켜주었지요. 이런 일들은 자진해서 나서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힘들지요.

세상에는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사기, 소매치기, 강도 짓은 물론 살인마저 서슴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또한 먹고 사는 일이 힘겨워 어쩔 수 없이 한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보지만, 가만 보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돈이 더 필요해서, 사치를 부리고 싶어서, 또는 놀고 싶은 마음에 저지르기도 합니다.

요즘에는 ‘돈만 있으면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일이 너무 많아졌습니다. 돈은 분명 좋은 것이지요. 제가 대학생일 때 아버지는 군인이셨어요. 당시 군인 수입은 적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정부에서 주는 장학금으로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고, 집안 살림을 돕기 위해 틈틈이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지요. 공부와 아르바이트만 하며 지낸 저는 대학 시절의 즐거움이나 동아리 활동의 추억이 없습니다. 돈이 있었다면 새 옷을 사 입고, 걷지 않고 버스를 탈 수 있었겠지요. 또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과자를 사드릴 수도 있고, 의대에 간 오빠도 공부에 전념할 수 있었겠지요.

이렇게 보낸 제 대학 시절은 돈이 없는 서러움을 가슴 깊이 느끼는 날들로 가득했습니다. 그만큼 저는 돈이 지닌 가치와 감사함을 알고 있기에, 앞에서 소개한 일화를 들었을 때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데레사 수녀님이 돈도 받지 않으면서 사람들이 꺼리는 일, 보상도 없는 일을 계속할 수 있었던 힘은 과연 어디서 오는 걸까요?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든 세상에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는 건 어떨까요?

 

풍요로운 삶은

돈으로 살 수 없어요.

 

돈으로가 아닌,

순수한 사랑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있어요.

 

 

따뜻한 공감

좋은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비결에 ‘그랬구나’라고 상대방의 말을 반복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남편이 퇴근하고 집에 와서 “오늘은 좀 피곤하네”라고 말하는데 모르는 척하거나 흘려 들으면서, “나도 하루 종일 바빴어”라고 자기 말만 한다면 두 사람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기 어렵겠지요. 그럴 때는 “많이 피곤하구나”라고 상대방의 기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친구가 “나, 해외여행 갔다 왔어”라고 말할 때 “나도 갔다 왔는데?” 하며 할 말이 없게 만들거나 “누구랑? 어디로?”라고 되묻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아, 여행 다녀왔구나”라고 친구가 한 말을 그대로 반복하면서 공감해 주는 것이 진정한 배려지요.

우리가 곧잘 나만 생각해서 공감하기도 전에 먼저 내 주장을 하곤 합니다. 상대방이 느끼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전에 ‘나는 아닌데’ 또는 ‘나라면’ 이라며 비교하지요.

내가 느껴보지 못한 것은 공감할 수 없기 때문에 잘 공감하기 위해 두루두루 경험해 보는 것이 중요해요. 단 아무리 비슷한 경험이더라도 다른 사람이 느낀 감정과 내가 느낀 감정은 똑같지 않다는 것을 유념해야 합니다.

아이를 잃은 경험이 있는 사람은 아이를 잃어 슬퍼하는 사람의 마음을 다른 사람보다 잘 공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각자의 경험은 특별하기에 똑같지는 않겠지요. 똑같은 경험은 할 수 없다는 깨어있는 의식과 더불어 내 경험을 통해 조금이나마 상대를 이해하려는 따뜻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위로해 주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냥 곁에 있어주세요.”

‘슬프구나’, ‘괴롭구나’ 라고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사람, 예수님도 그런 분이십니다.

 

깨어있는 의식과

따뜻한 마음을 간직하세요.

 

진정한 배려는 공감하는 것입니다.

그저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으며 곁에 있어주세요.

 

 

우리 곁에 있는 콜카타

마더 데레사가 일본에 오셨을 때 일입니다.

데레사 수녀님은 우리 대학에도 방문해서, 기다리고 있던 학생들에게 이야기를 해주셨지요. 데레사 수녀님 이야기를 듣고 감동한 학생들 가운데 봉사단을 결성하고 싶다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고, 어떻게 하면 콜카타에서 봉사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 이어졌습니다. 데레사 수녀님은 무척 기쁜 마음으로 감사해하며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마음은 정말 고맙지만 일부러 콜카타까지 오지 않아도 돼요. 먼저 여러분이 있는 자리의 ‘콜카타’에서 기쁘게 살아가세요.”

그 뒤로 2년 반이 지난 어느 날, 졸업생 히로세 씨한테서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는 지난해 3월에 대학을 졸업하고 도심의 어느 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여학생이 졸업식이 끝나고 찾아와 말했답니다.

“선생님만큼은 저를 존중해 주셨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이렇게 말하고 떠나는 학생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히로세 씨는 생각했답니다. ‘내가 한 일이라고는 수업 중에 그 여학생과 눈이 마주쳤을 때 웃어준 것밖에 없는데.’

사실 그 여학생은 학교생활과 가정에 모두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다른 선생님들은 ‘짐’이라고 생각하여 받아주지 않았지만 히로세 씨는 오히려 활짝 웃어주며 그 학생의 존재를 인정하고 존중해 준 것이지요.

히로세 씨도 전에 콜카타로 봉사하러 가고 싶어 하던 학생 중 한 사람이었지요. 제가 특별히 기쁜 이유는 히로세 씨가 데레사 수녀님과 한 약속을 기억하며, ‘교실’이라는 ‘콜카타’에서 훌륭한 자신의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곁에도 ‘콜카타’가 있습니다. 가족에게 소외된 노인,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거나 무시당하는 아이, 직장과 사회에서 외면당하는 사람들, 살아갈 이유를 잃어버리고 외로움을 느끼며 살아가는 사람들, 이들 속에 콜카타가 있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이들에게 먼저 상냥한 말 한마디와 따뜻한 눈빛, 웃음을 건네보는 것 어떨까요?

어머니는 제가 침울해 있을 때면 위로도, 훈계도 아닌 이런 말을 해주셨어요.

“사람들은 모두 자기 자신을 가장 사랑한단다.”

그래서 세상엔 외로운 사람들이 생기는 것 같아요. 물론 저도 외로울 때가 있어요. 그럴 때마다 저는 다른 사람이 건네는 작은 관심과 웃음, 말 한마디에 위로를 받고 힘을 내서 다시 걸어요.

나 자신도 ‘콜카타’에 남겨질 때가 있지요. 그렇기에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작은 관심과 따뜻한 눈빛,

다정한 웃음과 한마디 말은

외로운 사람을 살립니다.

 

‘당신은 소중한 사람’이라고

웃으며 말하는 작은 친절이 세상을 바꿀 수 있어요.

 

 

모든 것에서 배워요

저는 공부란 학교 교육이 끝나는 시점과 함께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평생 계속해야 하고 계속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책상에서 하는 공부도 중요하지만 살면서 만나는 모든 것에서 배울 수 있고, 또 배우지 않는다면 아깝겠지요.

우리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시달리기도 하고, 곤욕을 치르기도 하고, 배려를 받기도 하면서 배웁니다.

제가 대학 학장으로 임명되었을 때는 서른여섯 살, 젊은 나이였지요. 그 자리는 나이를 떠나 업무 절차에 따라 결정을 해야만 했습니다.

“당신은 ‘여’, ‘아니오’가 너무 확실해요. 조금은 돌려서 말하는 게 좋을 수 있어요.”

한 선배 수녀님이 해준 이 조언이 오랫동안 미국인 곁에서 일을 배운 제게는 새로운 공부였습니다.

어떤 결정을 하든 늘 찬성하는 사람과 반대하는 사람이 나옵니다. 한번은 누군가한테서 심한 비판을 받고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는데 어떤 분이 웃으며 “안심해요. 저 사람이 수녀님을 해치진 않을 거예요” 하고 건넨 농담에 안정을 되찾았지요. 그날 이후로 저는 제 의견이 거부당해도 크게 동요하지 않습니다. 좋은 공부가 된 거지요.

예상치 못한 병에 걸려 침울해 있을 때, “운명은 냉혹하지만 섭리는 따뜻해요”라는 말이 저를 살린 경험이 있어요. 병을 섭리로 받아들이자 감사드리는 것을 배우는 기회가 되었고요. 지금 일어나는 모든 일은 운명이 아닌 하느님의 계획, 섭리로 보고 사는 법, 저는 돈으로는 살 수 없는 공부를 했답니다.

에도 시대 검객인 미야모토 무사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이 곧 스승이다.”

이 말처럼 부드럽고 겸손한 마음을 갖고 앞으로도 계속 배우며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선물로 받아들이세요.

 

날마다 예상치 못한 일을 만나더라도,

그건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는 기회임을 기억하세요.

 

 

 

지은이 와타나베 가즈코 渡辺和子 (1927-2016)

1927년 일본 홋카이도에서 태어나 1956년 노틀담수도회에 입회하였다.

아홉 살 때 눈앞에서 부친이 총탄에 맞아 쓰러지는 충격적인 장면을 본 후 정신적 번뇌에 시달리고 우울증을 앓았지만 사랑의 힘으로 고통을 딛고 일어나 교육자로서, 종교인으로서 많은 사람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었다.

주요 저서로는 <와타나베 수녀님의 사랑과 격려의 말 366일>, <당신이 선 자리에서 꽃을 피우세요>, <오늘, 그 사랑이 보입니다>, <사람으로 소중한 것> 등이 있다.

 

옮긴이 박지은

대학에서 일본학을 전공하고 현재 바른번역 소속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오롯이, 담담히, 그득히’를 지향하며 번역과 기회게 매진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투데이즈 샌드위치>, <블루 블랙>이 있다.

 

 

 


Disclaimer: 여기에 실린 글은 copyright가 된 책, 기사를 ‘발췌, 전재’를 한 것입니다. 모두 한 개인이 manual typing을 한 것이고, 의도는 절대로 저작권 침해가 아닌, fair use의 정신을 100% 살린 것입니다. 의도적으로 ‘시간적인 제한, 독자층의 제한’을 염두에 두었고, 목적은 단 한 가지 입니다. 즉 목적을 가진 소수 group (church study group, bible group, book club) 에게 share가 되었습니다. password protected가 되었는데, 만일 이것이 실패를 하면 가능한 시간 내에 시정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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