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eld of dreams, trancending time & place, autobio in progress..

나이야, 가라!

원이숙 글

행복한 노후를 위하여

 

원이숙

1934년 황해도 장연에서 태어나 송화 돌모루에서 자랐다. 이화여자중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화학과를 졸업했으며 동아일보 동경 특파원으로 파견된 남편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 이과대학에서 환경문제를 연구했다.

33년간 고려대학교 이과대학 교수를 지냈으면, 현재 한국천주교주교회의 환경 소위원회, 가톨릭 여성연합회, 오름회 회원으로 환경과 노후생활에 대한 강의를 하고 있다.

 

 

인사말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 (민수 6,24-26)

이렇게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16) 하느님은 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아니 느낄 수 없습니다. 이날까지 함께하시며 지켜주시고 이만큼 살아낼 수 있는 힘을 주신 주님께 감사 드립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주님을 바라보며 끊임없이 기도한다면, 하느님께 나를 전적으로 내맡기고 산다면 우리 삶은 더없이 평온하여 어려움 중에도 생기 넘치리라 믿습니다.

70이 넘어 이 책을 쓰신 원이숙 선생님의 정성과 소망을 바라보며 깊은 감동을 느낍니다. “노후 삶, 어떻게 보낼 것인가?” 라는 물음에 답하고 있는 이 책은 노인문제가 심각한 요즈음 큰 힘과 용기를 줍니다.

제2의 청춘이요 황금기인 60을 성큼 넘어선 분들이 이 책을 읽으면 큰 위로를 받으며 희망으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또한 사람의 지혜를 나누어 주시는 분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젊은이들도 이 책을 읽으면 서로를 좀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생이 다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평온하고 밝고 기쁘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는 이 책이 우리 모두에게 깊은 위로와 평화를 듬뿍 안겨주기를 기원합니다. 축하합니다!

2007년 3월

추기경 김수환

 

 

추천글

 

활기찬 삶을 바라며

‘나이야, 가라!’ 를 한자리에 앉아 단숨에 읽었습니다.

왜 그랬을까? 저자의 진솔한 이야기가 마음에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머리말과 차례를 훑어보며 평소에 생각하던 늘어나는 노인인구 문제에 대한 글이어서 반가웠습니다. 저자 자신이 노년생활에서 얻은 체험과 여러 강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 이 책은 재미도 있고 내용도 다양하여 활력을 불어넣어 줍니다.

노년기를 어떻게 하면 활기차고 우아하게 보낼 것인가 하는 문제부터 여한 없이 반갑게 죽음을 받아들이는 문제까지 생각하게 합니다. 부부가 같이 살다가 한 사람이 먼저 떠나 홀로 남을 경우에 대한 마음의 준비와 함께 실생활을 꾸려갈 수 있는 훈련도 미리 해두어야 함을 실감케 합니다.

나이가 문제가 아니라 인생에 대한 삶의 태도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육체적인 나이에 얽매이지 않고 활기차게 살아가며, 더불어 살아가는 이웃과 환경에 대해서도 따뜻한 시선과 가치관을 지니도록 일깨워 줍니다.

예전보다 사람들의 평균 수명이 늘어나 은퇴하고 난 뒤에 지낼 시간이 점점 길어지고 있습니다. 막상 노년이 되어 아무 준비 없이 허둥대거나 우울증에 빠져 지내기보다 좀더 성숙하게 고양된 삶을 살아가는 것은 우리 모두의 의무이지 하느님이 바라시는 일입니다. 우리 모두가 행복한 여생을 보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2007년 봄

천주교 서울대교구 총대리 염수정 주교

 

 

추천글

 

아름다운 노년을 위하여

‘노인은 미래다!’ 나는 감히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이제 노인이 미래인 세상이 다가왔습니다.

사람의 평균 수명이 길어졌습니다. 30, 40대의 삶이 길어진 것이 아니라 60세 이후의 삶이 길어졌습니다. 은퇴 이후 또는 아이들을 결혼시키고 난 이후에도 살아야 할 날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이 노년기를 어떻게 사느냐에 그 사회의 미래가 달려 있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활기차고 아름다운 노년의 삶이 어떤 것일까 고민하던 차에 그 답을 알려주는 한 할머니의 좋은 글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과분하게도 추천사를 써 달라는 말씀에 원고를 받아 들긴 했지만 아직 인생의 겉 맛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나로서는 어떻게 글을 써야 할 지 몰라 막막하기만 했습니다. 노인과 관련된 일을 2년 넘게 하고 있지만 실제 노년의 삶을 체험해 보지 않은 나로서는 조심스러웠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원고를 읽으면서 어런저런 염려보다는 오히려 내 노년의 삶에 대한 설계도를 그렸습니다.

이 책은 현대를 사는 많은 어르신에게 귀감이 되는 내용을 담교 있으며 나처럼 앞으로 노인이 될 많은 사람들이 활기찬 노년을 준비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활기찬 노년생활을 강조하는, 내가 그토록 보고 싶어하던 당당하고 지혜로운 원로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입니다. 아름다운 노년을 살아가야 할 모든 분에게 이 책을 권합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노인사목 전담

이성원 신부

 

 

차례

인사말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추천글  활기찬 삶을 바라며

추천글   아름다운 노년을 위하여

머리말

나는 당당한 실버

길어진 노년기를 당당하고 우아하게

일흔 살을 넘고 보니

내가 주는 극진한 사랑과 정성이

거동이 불편한 노부모

홀로 남았을 때를 생각하며

노년을 즐겁게 보내자

이젠 실버들이 앞장설 때

젊은 실버

물은 생명의 근원

승용차를 밀고 가는 사람들

실버타운의 사치

자식을 독립시키지 못하는 건 사람뿐

더불어 살아야 평화롭다

시계야, 거꾸로 가라!

노년기 외로움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유머 감각을 잃지 말고 밝게 살자

가족끼리도, 젊은이한테도 예의를 지키자

노년기에 둔해지는 감각을 알아차리고 대비하자

젊은이들이 하는 것을 거부하지 말고 받아들이자

할아버지 할머니 호칭을 자랑스러워하자

가슴으로 품어주는 실버

봉사하는 기쁨과 삶의 보람

현관문을 열어놓고 사는 마음

고향

추억을 먹고 사는 노인들

이혼

고집을 버리고 젊은 친구들을 사귀자

건강한 이별을 위하여

육신도, 정신도 건강하자

늙을수록 폐 끼치지 말고 스스로 해결하자

노년기의 가정 경제

노년기에 가장 무서운 치매

생명 유지 장치에 의존할 것인가?

죽음을 반갑게 맞이하자

맺음말

 

 

머리말

40, 50대까지만 해도 70이 넘으면 세상을 떠나는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내 조부모, 아버지, 작은아버지가 80을 살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그러다 어느새 70을 넘긴 지 3년이 되면서 ‘아니네!’ 하는 생각이 들었고, 지금도 나로서는 최선을 다해 이런저런 일을 하며 뛰고 있음을 발견하며 놀라워한다.  그만큼 수명이 늘어났고 건강한 사람이 많아진 것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노인으로 취급되는 걸 싫어하는 세대가 나를 포함한 70대이고 일부 80대에도 있다는 것은 놀랍다. 이들은 내리막길을 따라 살기보다 조금씩 위를 보며 살려고 나름대로 노력한다.

그 중에는 보람 있는 일도 많지만, 가끔은 유치하고 바보 같은 짓도 해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손가락으로 하늘을 찌르며 몸을 움직이는 춤도 춰보고 싶고 ‘차표 한 장 손에 들고…, 너는 하행선 나는 상행선~’ 하고 소리지르며 노래도 한번 해보고 싶다.

겉으로는 점잖고 교양 있게 행동하고 말하지만 속으로는 나이를 먹어도 어렸을 때 기억을 떠올리며 젊은이들이 하는 짓을 해보고 싶어 혼자 흥얼거릴 때도 있다.

노인이라고 해서 꾹 참고 점잔 빼며 침울하게 살 것이 아니라 밝고 명랑하게 하고 싶은 말고 행동을 하며 살 수 있는 ‘장’을 만들어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참 좋겠다.

자신의 재주와 취미를 살려 그림 그림 그리는 사람들은 그림을 그려 공동전시회를 열고 글 쓰는 사람들은 각자의 글을 모아 책을 냄으로써 화가가 된 기분, 작가가 된 즐거움을 맛보는 것은 어떨까? 이 밖에도 서예전, 공예전, 음악회, 연극 발표 등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수없이 많다.

집에서 공연히 이런저런 걱정을 하며 잔소리나 하고 쓸데없는 참견을 하며 헛된 나날을 보내지 말고 좀 근사한 노후를 보낼 수 있는 길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이 책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책을 쓴다는 것은 과학도인 나로서는 큰 용기가 필요한 새로운 시도였다. 또 교육받은 것과 상관없이 나이 들면서 많은 경험과 깊은 사색에서 얻은 지식과 지혜를 젊은이들에게 조금이나마 알리고 싶었다.

이 책을 쓸 수 있도록 용기를 주고 출판까지 맡아준 바오로딸에 깊이 감사 드린다.

2007년 초봄에

원이숙 元 利淑

 

 

나는 당당한 실버!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자녀들을 위한 기도를 바치면

참 행복하고 가슴 뿌듯하다.

늙어서도 내 아이들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길어진 노년기를 당당하고 우아하게

사람들의 평균 수명이 길어지고 있다.

날이 갈수록 길어지는 것은 30, 40대의 수명이 아니라 60세 이후다. 이 길어진 부분이 급경사인지(파란 선), 완만한지에(빨간 선) 따라 노후 삶의 질이 달라진다.

우리한테는 30, 40대 정점에서 조금이라도 올라가듯 완만하게 내려가는 훈련이 필요하다. 우리는 그렇게 살기를 바라며 노년을 준비해야 한다.

가톨릭 교회에서는 이와 같은 삶을 위해 ‘오름회’ 운동을 펼치고 있다. 40여 년 전 프랑스에서 시작된 이 운동 (Life Ascending International: LAI)은 교황청에서 인정한 비정부단체다. 우리나라는 2003년에 이 운동을 받아들여 교구청에서 인준했다. 우리말로 조금씩 올라가자는 뜻으로 ‘오름회’라고 했다.

사람의 일생은 네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제1기: 사람이 태어나 부모의 보살핌을 받으며 교육받고 취업하여 독립하는 시기

제2기: 성인이 되어 결혼하고 자식을 낳아 일가를 이루며 사회적으로도 인정받아 많은 일을 하며 인생의 절정에 오른 시기로 많은 의무와 책임이 따른다.

제3기: 은퇴하여 모든 책임과 의무에서 벗어나 개인 시간을 가지며 여유로운 삶을 맞이하는 시기

제4기: 나이와 상관없이 다른 사람의 도움과 보살핌을 받으며 의탁하는 삶을 사는 시기

 

30대라도 혼자 살 수 없거나 남의 보살핌이 필요한 사람은 제4기에 해당한다. 80대에도 건강하고 왕성하게 독립된 삶을 사는 사람은 제3기 인생에 속하는데, 이 시기는 길어질 수 있다.

요즘은 90대까지 사는 사람이 많은데 이런 사람한테는 60세란 제2의 황금기로 여러 가지 일을 구상하고 실천하는 시기다. 바로 이 제3기 인생이 오름회 신생에 해당한다.

사회나 단체가 노인을 제외하는 데 대해 섭섭해하고 원망하기보다 노인들 스스로 필요한 존재임을 인식해야 한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노인들에게 “교회에는 어르신들이 필요합니다. 교회는 어르신들의 봉사를 감사 드리며 경험에서 나온 조언에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하고 말씀 하셨다. 교회뿐 아니라 사회에도 나이 든 사람들을 필요로 하는 곳이 있다.

도움을 받기보다 도움을 주는 노후 제3기 인생을 어떻게 씩시하고 당당하게 살아갈 것인지를 끊임없이 연구하고 노력해야 한다.

제3기 인생을 씩씩하고 당당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먼저 기쁘게 살아야 한다.

 

늘 기쁘게 살자

 

  • 좋아하는 음식을 먹는다. 무엇보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을 먹으며 기쁘고 행복해진다.
  • 좋은 사람이나 친구들을 만나 이야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흉을 보거나 미워하지 않는다. 남의 흉을 보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나쁜 점을 따라 하게 되고, 남의 칭찬을 많이 하다 보면 좋은 점을 모두 받아들여 우아하고 아름답게 보인다. 오래 된 친구를 잃지 않도록 서로 이해하고 사랑한다. 묵은 술이 맛있듯이 오래된 친구는 가족보다 소중할 때가 있다.

 

기쁘게 살기 위해 꼭 지켜야 할 몇 가지 규범

  • 걱정하지 않는다. 걱정한다고 해결되는 일은 없다.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 빨리 잊고 체념하도록 훈련한다.
  • 단순하게 산다. 복잡하게 여러 가지 일에 관여하며 실이 엉키듯이 풀 수 없어 결국 버리거나 가위로 잘라야 한다.
  • 받으려 하지 말고 주도록 노력하자. 돈이나 물건뿐 아니라 사랑과 위로도 받는 기쁨보다 주는 기쁨이 몇 배나 더 크다. 받으려다가 자칫 잘못하면 섭섭해지기 쉽다.
  • 무엇이든지 너무 기대하지 않는다. 기대할수록 실망하여 마음 상한다.
  • 유머를 잃지 말고 늘 명랑하고 밝게 살자.

 

언젠가 중학생들에게 환경 강의를 한 일이 있다. “자동차를 많이 타지 맙시다. 비싼 기름을 쓰면 돈인 자꾸 빠져나가고 공기가 나빠져 지구 온난화 기체에 싸이게 되어 마침내 기상이변이 오기 때문입니다.” 했더니, “그럼 선생님은 뭘 타고 오셨어요?” 하고 묻는 것이었다.

나는 BMW로 왔다고 했다. 어리둥절해하는 학생들에게 “Bus, Metro, Walking.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걸어왔어요.” 하고 설명하자, 와 하고 웃더니 “할머니도 농담하세요?” 하지 않는가? 학생들이 “BMW로 안녕히 가세요.” 라고 해서 나도 “그래, 고맙다.” 하고 말했다. 뒤따라 나오는 학생들이 “우리도 BMW로 갈게요.” 하고 인사하길래 나는 “그래.” 하고 헤어졌다.

운동장을 빠져 나오는데 몇몇 엄마들이 자동차를 몰고 왔다. 그 광경을 보며 나는 ‘아이들이 엄마와 무슨 대화를 나눌까?’ 궁금해하며 돌아왔다.

집에서 혼자 무심히 앉아 있다가 거울에 비친 침울한 내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란다. 이러면 안 되겠구나 싶어 혼자 웃기도 하고 히죽거려 보기도 하고 킬킬거려 보기도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혼자 있으면 침울해지고 노인성 우울증에 걸릴 수도 있으니 항상 밝고 긍정적으로 살도록 해야 한다.

 

 

일흔 살을 넘기고 보니

내 깐에는 꽤 일찍부터, 곧 40, 50대부터 노후 삶을 생각하며 이런저런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70을 넘기고 보니 많은 부분이 달라져야 했고, 노후설계도 달라져야 할 것 같다. 평균 수명이 길어졌다고 해서 모두 평균 수명까지 사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최근에 친구 동생들이 각각 65세, 49세에 갔고, 두 친구도 올 한 해가 절반이 다 가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한편 평균 수명을 넘기고도 90세나 100세에 이르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2005년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100세 이상 인구는 961 명인데 반해 일본은 2만3천3백여 명이며 미국은 5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내가 생각했던 70, 80대의 인생 계획은 100세 시대로 수정해야 할 것 같다. 70대 초반인 나 같은 사람들이 30년을 더 살아야 하는 경우도 생길 수 있다는 얘기다.

이 긴 시간을 어떻게 지루하지 않고 즐겁게 보람 있게 살 수 있을 것인지 생각하면서 노년의 삶을 계획하고 실천 하도록 애써야겠다. 젊었을 때는 나 혼자만의 의지대로 인생을 계획할 수 없었다. 부모의 영향, 세월의 소용돌이, 집안 사정, 건강, 결혼, 육아 문제로 좌절하기도 하고 때로는 돌아가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부분만 빼고 어느 정도 내 의지로 남은 시간을 자유롭게 계획할 수 있으니 희망과 용기를 가지고 마지막 남은 인생을 멋지고 보람 있게 설계해야겠다. 비록 1년밖에 실천할 수 없을지라도 10년, 20년, 30년을 내다보며 계획대로 살려고 노력해야 한다.

젊었을 때 나는 정년 후 10년인 75세까지 현역처럼 봉사하는 일을 하리라는 계획을 세웠는데 비슷하게 맞아떨어지고 있다. 환경 문제를 걱정하는 강의와 홍보활동, 그리고 노년의 삶에 대한 연구와 강연은 물론 사회복지와 북한을 떠나온 사람들에 대한 관심으로 보내고 있다.

75세 이후에는 좀 쉬면서 평생교육 강의를 들으며 여행이나 하자고 생각했는데, 더 많은 것을 추가해야 할 것 같다.

우선 신앙생활을 좀더 철저히 하고 성경을 깊이 묵상하며 지나온 삶을 돌아보아야겠다. 그리하여 후회하고 뉘우칠 부분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기도하며 잘못을 빌어야겠다. 또 보속 補贖 으로 내가 다른 사람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꾸준히 해야겠다. 평생 가르치는 일을 해온 나는 남은 삶 동안에도 건강이 허락하는 한 이 일을 계속할 것이다.

어느 일간지의 유능한 기자를 거쳐 편집국장, 논설주간을 지낸 언론인이 퇴임 후 낙도와 오지의 초등학교 분교를 찾아 다니며 문화 혜택과 풍족한 교육을 받지 못하는 어린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며 어떤 장학재단에 부탁해 아이들이 서울 나들이를 하게 해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남편의 직장 후배라 나도 잘 아는 분이다.

나는 이 얘기를 들으며 무릎을 탁 쳤다. 그분보다 나이가 많은 나는 1년에 두세 번만이라도 따라다니며 아이들한테는 과학을 쉽고 재미있게 가르치고 어른들한테는 환경보호가 무엇인지, 얼마나 중요한지를 가르치고 싶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바다가 오염되면 어떻게 되는지, 지구 온난화가 어떤 재앙을 가져오는지, 생명 그 자체인 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 주는 것은 참으로 보람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올 여름 나는 2년 만에 미국 큰아들 집에 가서 달 반을 머물면서 생각지도 못한 일을 겪고는 몹시 서운하고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귀국 비행기 편이 마련되는 대로 예정을 앞당겨 돌아와야겠다고 결심했는데, 마음이 몹시 우울했다. 그러나 아이들 앞에서는 내색할 수 없어 혼자 울면서 기도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2년 전보다 여러 가지로 많이 변했겠지만 우리 아이들이나 다른 사람들이 나를 ‘내가 생각하는 나’로 보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또 아이들도 내가 생각하던 아들 며느리가 아니라 많이 달라져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 달라진 것이 그렇게 심각하고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2년이라는 시간을 갑자기 뛰어넘었기 때문에 충격이 컸던 것 같다.

이제 며느리도 40이 넘었으니 그 집의 안주인이고 살림을 꾸려 나가는 기둥이다. 처음 시집온 새댁일 때 내가 이것은 이렇게, 저것은 저렇게 가르치던 며느리가 아닌 것이다. 자기 의견과 방법이 있고 기호와 노하우가 있다. 그릇 하나라도 찬장 위 칸에 있던 것을 다른 사람이 이래 칸에 넣고 아래 칸의 것을 위 칸에 넣으면 당연히 불편하다.

나는 바쁜 며느리를 도와주려고 설거지를 했다. 예를 들면 왼쪽 싱크대에서는 찌꺼기가 붙어 있는 그릇을 애벌로 씻거나 세제를 써야 할 그릇을 모아 세제로 닦고 오른쪽 싱크대에서 헹구어 왔는데, 다른 사람이 거꾸로 했다면 당연히 불편하다. 아마도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았나 싶다. 그래서 며칠 동안 관찰한 후 제대로 해서 그 문제는 해결할 수 있었다.

며느리가 아무 말 없이 언짢은 표정만 짓지 말고 “어머니, 찌꺼기를 거르는 망이 있으니 여기서 애벌 씻어주세요.” 하고 처음부터 알려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 또 무엇인가를 “이렇게 하자.” 고 했을 때 “왜요, 어머니, 왜요?” 하며 눈을 똑바로 뜨고 따지듯이 말했을 때는 그야말로 말문이 막혔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 동안 많이 늙었고 생각도 시대에 뒤떨어졌을 것이고, 귀도 잘 안 들려 ‘응?’ 하고 되묻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또 기억력도 전만 못해서 상대방이 답답한 경우가 많았을 것이다. 아이들은 그전의 나와 비교하여 어머니가 왜 저러나 싶어 생소하고 이상하게 여겼을 법도 하다.

한집에서 살거나 따로 살아도 자주 오갔더라면 서로 익숙했을 터인데 1, 2년씩 띄엄띄엄 보면 많이 달라져 있는 것에 서로 놀라 이해하기가 더 어려워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정을 하는 것도, 사는 방법도 내가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젊은 세대로 넘어가 있음을 뒤늦게 알았다. 이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닌 자연현상인 것을… 빨리 자기 위치를 알아차리고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노년기를 맞은 많은 분들도 나와 비슷한 경험을 했을 때 노여워하지 말고 지금의 내가 다른 사람의 눈, 특히 젊은 사람들의 눈에는 ‘내가 생각하는 나’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빨리 알아차려야 한다. 나는 아니데 싶어도 그것은 단지 내 생각일 뿐이라고 여겨 정신 똑바로 차려 똑똑하고 괜찮은 어른으로 늙어갈 일이다. 젊은 사람들을 원망하거나 서운해하는 일이 없어야 자존감을 높일 수 있다.

노인들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옳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젊은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이 현대를 살아가는 데 필요하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을 이해하고 사랑하며 그들의 의견과 주장을 존중해 줄 때 사회는 더 평화로워지고 가정은 더 화목해진다.

70이 넘으면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여전히 멋지고 미인이고 실력 있고 우아하고 잘생기고 당당하고 존경 받을 만하고 시대감각에 뒤떨어져 있지 않으며 자신감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자신감이 있다 하더라도 자신의 내면 깊숙이 감춰두고 다른 사람, 특히 젊은이들한테는 그런 체해서는 안 된다.

젊은이들의 경솔하고 미숙한 생각이나 행동까지 이해하고 존중하자는 것은 아니다. 이에 대해서는 엄중하게 나무라고 어른들이 오랫동안 쌓아온 경험과 지혜를 전수하는데 주저해서는 안 될 것이다.

 

 

내가 주는 극진한 사랑과 정성이…

내가 주는 극진한 사랑과 정성이 상대방한테도 사랑이고 정성이라고 생각하지 말자.

대학에 다니는 손자들이 학기말 시험을 치르느라 열흘 가까이 잠도 못 자고 제대로 먹지도 못한 채 공부에만 열중했다. 시험이 끝나자 아이들은 만사가 귀찮은 듯 커튼까지 치고 늦잠을 잤다.

할머니는 시험 기간 동안 손자들이 안쓰러워 안절부절 못하다가 시험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이들이 잘 먹는 음식을 정성스레 만들었다. 그러고는 자는 애들을 깨우며 맛있는 것 좀 먹고 자라고 성화다. 아이들은 짜증이 났다. 손자들에게 이것은 사랑이 아니라 달콤한 잠을 방해하는 고통이다.

손자가 짜증을 내면 할머니는 노여워서 나무란다. 나중에 손자가 죄송하다고 사과하는 것으로 끝나지만, 이런 일이 되풀이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것은 고치기 어려운 노인들의 고집이다. 이런 일은 아이들과 멀어지게 하고 젊은 사람들에게 소외 받는 결과를 가져온다.  노인 스스로 젊은이들을 떠나가게 만들고 또 자신을 외롭게 만들어 노후 삶이 삭막하게 된다.

70년대 미국으로 유학 간 어느 후배의 이야기다. 이 후배는 그곳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결혼하여 아내와 자식들까지 거느리고 대학교수가 되어 금의환향했다. 경상도가 고향인 이 후배의 어머니는 어느 날 손수 담근 된장, 고추장 항아리를 들고 아들이 사는 것이 보고 싶어 서울에 올라왔다.  어머니는 자신이 끓이고 만든 된장찌개와 고향 음식을 맛있게 먹는 아들을 바라보며 뿌듯한 기쁨을 안고 시골로 내려갔다.

이렇게 어머니의 손맛이 밴 음식을 먹어본 지가 얼마 만인가! 며칠 뒤 아들은 퇴근하면서 ‘오늘은 아내에게 된장찌개나 끓여 달라고 해서 먹어야지.’ 하고 벼르며 집에 들어섰다.

그런데 아내와 아이들은 외출 준비를 하고 기다렸다가 남편이 오자 피자 먹으로 가자고 조르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외식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내일은 어머니가 가져온 된장으로 찌개를 끓여 먹자고 하자 아내는 냄새가 너무 나서 버렸다고 하더란다. 다음날 출근한 교수는 아내와 한바탕 싸웠노라고 했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는 유행어가 있다. 지금의 핵가족 시대에는 아내가 1번이고 아이가 2번, 남편이 3번, 강아지가 4번, 시어머니가 5번, 시아버지가 6번이란다. 김치를 가지고 아들 집에 갔다가 우연히 창 너머로 새어 나오는 아들 가족 얘기를 들은 어느 노부부의 이야기다.

며느리가 “아이, 노인네들이 힘드실 텐데 김치는 왜 가져오시나 몰라. 그러고는 ”나 죽으면 이런 김치를 어디서 맛봐. 에그 허리야! 고마운 줄은 아냐?’ 하며 웬 공치사는 그리 하시는지. 필요하면 어련히 사다 먹을까 봐!” 하고 말했다.

노부부는 김치 보따리를 놓고 돌아서며 ‘1번아, 미안하다. 김치 놓고 가니 먹어 다오. 5번, 6번은 간다.’ 는 쪽지를 남겼다. 농담일 수도 있고 실제 상황일 수도 있는 이야기다.

이 농담을 들은 남편이 ‘옛날부터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인데 왜 6번이야? 5번이라고 해야지.’ 한다. 나는 ‘5번이나 6번이나…’ 하고 중얼거렸다.

미국에서 자란 젊은 며느리나 앞에서 예를 든 손자들을 나무라고 어른들의 사랑과 정성을 봐서 참으라고 말하는 것은 어른들의 생각이고, 싫고 못 참고 짜증나는 것은 젊은 사람들의 몫이기 때문에 괘씸하다고 무조건 나무랄 일이 아니다.

나이 든 사람들은 스스로 젊은이들의 생활 방식에서 초연해야 한다. 소외되고 외롭지 않으려면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혼자 즐길 수 있는 취미를 가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테니스, 화투, 윷놀이는 상대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림 그리기, 독서, 뜨개질, 수영, 걷기는 혼자서도 할 수 있다.

다음으로는 비슷한 생각을 하는 나이 또래끼리 그룹을 만들어 함께 지내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자기 개발을 위해 다양한 강의를 듣고, 여행, 합창, 합주, 간단한 연극을 하며 즐겁게 사는 것이다. 연금을 받아 어느 정도 경제적으로 독립되어 있으면 더욱 좋겠다.

학생 때 브라스밴드(관악대)를 한 사람들, 기타나 아코디언을 즐기던 사람들까지 한데 모이면 더 재미있을 것 같다.  연극도 자작 극본에 연출, 분장 등 모든 것을 다 하면 한층 즐겁다.

이처럼 노년기를 능동적으로 보내기 위해 가톨릭 교회에서는 ‘오름회’를 만들어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으면, 일반 사회에서도 어르신들에게 생기를 주는 다양한 모임을 가질 수 있다.

 

 

거동이 불편한 노부모

거동이 불편한 부모를 슬기롭게 모신 친구의 이야기다. 내 친구는 위로 딸이 셋이고 그 밑으로 아들 다섯을 둔 집의 둘째 딸이다. 어느 날 건강하던 아버지가 자리에 눕게 되어 어머니가 시중을 들었는데, 몇 년 후 그 어머니마저 몸져누웠다.

노부모를 모신 것은 물론 맏아들이었고 어머니마저 자리에 눕자 병수발은 맏며느리 차지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이 오래 가자 친구 언니인 맏딸이 결단을 내렸다. 옛날과는 달라 맏이라고 특별히 재산을 많이 물려받는 것도 아닌데 (이 집안은 개성에서는 큰 부잣집이었으나 6.25 이후 재산을 잃었다.) 맏이만 책임을 떠안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딸들은 출가외인일 뿐 아니라 두 딸은 이미 60이 넘었고 셋째는 외국에서 살고 있으니 딸들을 제외한 다섯 며느리가 교대로 시부모 병수발을 들어야 한다고 친구 언니는 엄명(?)을 내렸다. 다섯 며느리가 모두 당번을 정해 자기 차례가 되는 날에는 도시락을 싸가지고 큰집에 출근하여 하루 종일 병시중을 들도록 했다.

점심을 싸가지고 다니라고 한 것도 친구 언니의 착안으로 될수록 맏이에게 폐를 끼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맏며느리는 자기 당번이 아닌 날에는 친구도 만나고 운동도 하며 자유롭게 생활했다. 며느리들은 한 달에 여섯 번만 시중들면 되고, ‘나 안 한다, 너 해.’ 하고 생색내거나 아웅다웅하지 않아 병수발이 원만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친구를 따라 어머니를 뵈러 간 적이 있었는데, 그날은 막내며느리가 애까지 업고 김밥을 싸가지고 와서 얻어먹기도 했다.  어찌 보면 매우 삭막하고 어쩔 수 없어 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매우 합리적이면서도 우애 있고 정겹게 보였다. 병수발에서 제외된 딸들, 특히 맏아들의 집과 같은 아파트에 사는 맏딸은 수시로 드나들며 올케들을 도와 서로 사이 좋게 지내는 것이 보기에도 좋고 부럽기까지 했다.

어느 사제 집안에도 이와 비슷한 예가 있는데, 이 사제의 부모님은 맏아들을 귀하게 키워 하느님께 바쳤다. 그런데 그 부모님이 연만해지자 미국에 사는 작은아들이 모셔갔다. 형제들이 가까운 거리에 살면서 시간 나는 대로 최선을 다해 부모님을 편히 모신다고 했다. 외국인 사위까지도 동양의 정서를 존중하며 부모님을 편하게 해드리기 위해 즐겁게 협력한다는 것이다.

차라리 아들이나 딸 혼자인 경우는 다른 방법이 없으니까 잘하든 못하든 혼자 책임지고 모신다. 그러나 자녀를 많이 둔 집에서는 형제간에 서로 눈치를 보며 부모를 모시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형제들 사이에 불화가 생겨 화목하지 못하고 이런 모습을 보는 부모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불효까지 저지르기도 한다.

이와 반대로 재신이 있으면 내가 맏이니까, 부모님이 제일 사랑하는 막내니까 하며 서로 모시려고 싸우는데 모양새가 좋지 않고 사납기만 하다.

나는 젊은이들에게 ‘평균 수명이 길어짐에 따라 늘어나는 노년층을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하고 묻고 싶다. 그리고 이 노인들이 몇 십 년 후 바로 여러분의 모습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고 싶다.

요즘 목욕을 하고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면서 깜짝 놀랄 때가 있다. 나보다 조금 못생겼다(?)고 여겼던 어머니가 바로 거기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노부모를 섬기는 것은 부모에 대한 공경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몇 십 년 후의 자신에 대한 배려라고 할 수도 있다.

지난 연말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100세 할머니가 차디찬 방에서 옷을 있는 대로 껴입고 누더기 같은 이불을 쓰고 누워 있는 모습을 보았다. 어떤 봉사단체가 연탄을 가지고 가서 불도 때주고 집안도 치워주었다.

너무 가엾고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웃들, 사회단체, 종교단체, 지방자치단체, 더 나아가 국가에서는 도대체 뭘 하고 있단 말인가?

엉뚱한 곳에 퍼주고 연말에 예산이 남으면 멀쩡한 보도 블록을 걷어내고 새로운 것을 깔며 보행에 불편이나 주는 일보다는 춥고 배고픈 사람들, 특히 불우한 노인들을 돌보는 일이 무엇보다 값지고 우선해야 할 시책이 아닐까?

효도, 효도 하며 노인들을 자식들한테만 떠맡기는 것은 옳지 않다. 안정적인 직업을 얻기도 힘들고 아이들 교육비를 감당하기도 힘든 것이 요즘의 자식들이다. 그러나 자식들은 70, 80대 노인들이 전쟁에 참전했고 경제개발에 앞장서 우리나라가 이만큼이나마 잘살 수 있게 한 공로자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들 노인들은 퇴직금이나 연금을 가지고 경제적으로 독립하여 살기를 바란다. 말로만 영구임대 아파트 운운하지 막고 너무 영세하거나 사치스러운 실버타운이 아닌, 노인들이 자립하여 살 수 있는 아파트를 많이 지어 적정한 가격으로 노인들에게 임대해 주어야 젊은 층도 마음 놓고 제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나라에서 다 하는 일을 왜 우리나라는 못하고 있는지 안타깝다.

특히 생의 마지막까지 독립하여 살고 싶어하는 젊은 실버들을 위한 배려가 제대로 이루어져야 낮은 출산과 앞으로 쏟아져 나올 노년층과의 불균형으로 인해 파생될 불편하고 어려운 문제를 조금이라도 해소할 수 있지 않겠는가.

70대 이상의 노인들은 당연히 부모를 모시고 돌보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또 이들은 형제 자매가 많아 서로 도왔기에 가능했지만 앞으로는 부부가 아이 한 명을 두는 경향이어서 그 자녀가 결혼했을 경우 양가 부모 네 분을 돌봐야 한다는 계산이다. 참으로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현상은 그렇게 먼 얘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 앞에 닥칠 일이기 때문이다.

보살핌을 받아야 할 90세 이상의 독거노인들의 형편은 말이 아니다. 동사무소에서 주는 얼마 안 되는 돈을 굶지는 않지만 난방과 의료 문제 등 어려운 일이 참으로 많다. 민간봉사단체나 착한 이웃들이 연탄이나 김치 등 반찬을 해다 주고 집안을 치워주거나 고쳐주기도 하지만 이것은 일부일 뿐 대부분 방치된 채 연명하고 있다.

이들은 노후 준비를 할 여력도 없고 또 지금과 같은 세태가 자신들에게 닥쳐오리라고 생각지도 못한 사람들이다. 이에 반해 70대 이하의 젊은 실버들은 어느 정도 노후 대책을 세우며 준비하지만 개인 능력으로는 힘에 부치기 때문에 국가의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

이렇게 되면 마음의 여유가 생겨 젊은 실버들은 같은 아파트에 사는 이웃끼리 봉사단체를 만들어 한 달에 얼마씩 거두어 형편이 어려운 노인들을 도울 수도 있다. 이러한 삶을 살 수 있다면 자부심이 생기고 보람도 느낄 것이다. 늙어서까지 너무 각박한 삶을 살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홀로 남았을 때를 생각하며

몇 십 년을 같이 살아온 부부라면 짝을 잃고 혼자 남게 되었을 때를 생각하며 미리 대비해야 한다. 짝을 잃은 사람들, 특히 그런 친구들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유능한 남편이 아내에게 아이 기르고 집안 살림을 잘하는 일만 시키고 세상 물정은 아무것도 모르게 만든 채 세상을 떠나면 그 아내는 당황하다 못해 폐인이 되고 말 것이다.

잘 나가는 의사 남편을 둔 친구가 60대에 남편을 잃었다. 경제적으로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고 아이들도 잘 자랐다. 그러나 온실 속의 화초처럼 세상 풍파를 직접 겪어보지 않은 이 친구는 허탈감에 빠져 한때 모든 것에 의욕을 잃고 노인성 우울증에 걸리기까지 했다. 차라리 벌어놓은 돈도 없고 아이들도 미성년이었다면 아이들 공부도 시켜야 하고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살길을 찾으려고 우울증에 걸릴 틈이 없을 것이다.

적어도 50대 때부터는 어느 한쪽이 먼저 죽거나 외짝이 될 수 있음을 가슴에 새기며 마음의 준비와 각오를 해야 한다. 그래서 허둥대지 않고 침착하게 뒤처리를 하며 홀로 서기를 할 수 있다.

내 남편도 집안일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내가 큰 수술을 두 차례나 하고 나자 달라졌다. 라면도 끓여 먹을 줄 알게 되었고 아직 밥물을 잘 맞추지 못해 질어졌다 되어졌다 하지만 밥 지을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큰 발전이다. 해놓은 반찬을 꺼내 데워 먹고 계란 찜을 하고 베이컨을 지지는 등 간단한 반찬은 스스로 해먹는다.

미안한 얘기지만 여기까지 오도록 기분 나쁘지 않고 훈련하게 했고 또 모르는 척하고 훈련 받는 과정이 좀 씁쓸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참 잘했구나 싶다. 자기 물건은 모두 자기 방에 관리하며 옷도 분류해 장에 넣어두면 스스로 찾아 입는다.

예금통장과 보험증권, 약간의 패물과 금붙이, 부동산 문서 따위를 지금까지는 나 혼자 관리했지만 이제 모두 남편에게 공개하고 은행에 함께 가 담당 은행원을 소개하고 금고 여는 방법도 실습했다.

이러한 것을 하지 않은 채 한쪽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되면 우리이게 돈을 갚아 달라는 사람이 돌연히 나타나거나 반대로 우리가 돈을 받아야 하는데도 누구인지 몰라 손해 보고 당황하는 예가 꽤 많다.

남성이 혼자 남으면 자기 관리와 집안 관리 때문에 문제가 있고 여성이 혼자 남으면 우울증에 걸린다. 이 우울증은 생각보다 심각하고 다른 사람이나 자식들에게 폐가 된다.

정년퇴직한 다음 언제 올지 모르는 죽음을 태연히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를 시작했다. 우선 3년이나 5년 동안 한번도 쓰지 않은 물건과 옷을 정리해, 버릴 것은 버리고 재활용할 것은 아나바다(아껴 쓰고 나눠 쓰고 바꿔 쓰고 다시 쓰고의 약자)에 보내거나 나누어 주기로 했다.

웬 사진은 그리도 많은지 들여다보면 다 추억이 있고 젊은 얼굴에 애착이 가지만 용감하게 내 손으로 없애기 시작했다. 그냥 두면 자식들이 정리하며 마음이 언짢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결혼사진도 정리하려고 찾아봤더니 없었다.

벌써 다 정리해 버렸나? 그래도 몇 장은 남겨놓을 걸 하고 조금 섭섭했는데 알고 보니 미국에 사는 큰 아들 집에 있는 것이 아닌가> 며느리 말이 하도 내가 사진을 찢어버려서 미리 챙겨 갔다는 것이다. 참 고마운 일이다.

집의 크기도 3분의 1로 줄였고 가구와 집기도 거기에 맞추어 줄였다. 절반으로 더 줄여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공연히 미련 때문에 손을 못 대고 있다.

우리는 재산이 없다. 시댁과 친정 모두 이북에서 8.15 이후 월남한데다 월급쟁이였기 때문에 사는 데 큰 불편이 없었지만 이렇다 할 재산을 모으지도 못했다.

그 동안 모아둔 많지 않은 돈을 잘 활용하여 자식들에게 의지하지 않고 노후를 보내고 싶다. 친구들과 이야기하다 “얘들아, 운이 없으면 백 살까지도 살 수 있어.” 했더니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앞으로 20년이나 30년을 더 산다고 생각하면, 어떻게 무엇으로 살아야 할지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운이 없어 백 살까지 산다고 가정하고 지금 갖고 있는 돈을 어떻게 등분하여 1년에, 또 한 달에 얼마큼씩 써야 할지 계산해 본다. 그러나 아무리 절약한다 해도 그 돈으로는 고작 10년이나 15년밖에 살 수 없으니 이를 어쩌면 좋으랴.

건강이 유지되는 동안은 스스로 밥도 짓고 집안 청소도 해야 한다. 돈을 아끼는 것은 물론 시간을 유용하게 보내고 운동도 되기 때문이다.

이 일을 감당할 수 없게 되면 일주일에 한두 번 도우미를 불러 도움을 받으며 식사는 밖에 나가 사 먹는다.

몸을 움직이기가 힘들어지면 돈이 있는 범위 안에서 유료 양로원에 들어가거나, 돈이 없으면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될 수 있으면 ‘누군가의 도움’ 없이 생을 끝내고 싶은 것이 마지막 바람이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동창들을 젊어서는 바쁘다는 핑계로 자주 못 만났는데, 이제 나이 들면서 자주 만나 우정을 다지고 있다.

그러나 다리가 아프기 시작하고 멀리 다니는 것이 힘들어질 때가 온다. 그럴 때 이웃이나 같은 교회에 다니는 교우들과 가까이 지내면 외로움을 이겨낼 수 있다.

집안에 항상 먹을 것(차, 간식, 간단한 요깃거리)을 넉넉하게 장만해 두자. 누구든 찾아오는 사람들과 나누어 먹으며 친밀하게 지내면 좋겠다.

이렇게 만나는 사람들을 소중하게 생각하며 반갑게 맞아들이자. 내가 ‘이웃사촌’을 절실하게 느끼기 시작한 것은 70이 넘으면서부터다.

누구한테나 궁상맞아 보이지 않고 깔끔하고 깨끗하게 보이도록 노력하며 우아하게 살고 싶다.

 

 

노년을 즐겁게 보내자

사람마다 애완동물을 기르고 화초를 가꾸거나 스포츠, 그림, 서예, 자수, 도예, (도박성이 없는) 잡기를 하는 등 취미가 다르다. 또 여럿이 같이할 수 있는 합창, 합주, 연극, 춤 따위가 있고, 건강이 허락하면 여행도 즐겁고 유익하다.

언젠가 법조계의 판사, 검사 출신들이 모여 연극을 발표했다는 신문기사를 읽으며 부러워한 적이 있다. 의사들이 모여 연 음악회와 어느 은퇴 검사가 춤 대회에 턱시도를 차려 입고 나와 멋지게 춤을 추는 것을 보면서 큰 박수를 보냈다.

노년기가 길어지면서 60대는 제2의 청춘이 되었다. 도전하지 못할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젊어서 폐를 앓았던 72세 친구가 하모니카를 배운다고 했다. 그것도 폐활량에 도움이 될 것이라며 의사가 권했다고 한다. 나도 시작했는데 좀처럼 늘지 않는다.

무엇을 하든 노년에는 혼자 하는 것보다 여럿이 모여서 하는 것이 재미도 있고 도움이 되며 친교도 나눌 수 있다. 다음은 20여 년 전에 들은 이야기다.

독일의 한 노부부가 교외에 토지를 장만해 방갈로 같은 집을 짓고 살았는데, 그것을 보고 부부, 자매, 친구 등 다양한 사람들이 두세 명 단위 가족으로 노부부가 사는 곳으로 모여들었다고 한다.

그러자 다양한 직업을 가진 그곳 주님들이 자녀와 친척이 찾아오게 되었고, 그들은 서로 친교를 나누고 날을 정해 각자가 할 수 있는 봉사를 했다고 한다. 그들은 의사, 전기 기술자, 미용사, 이용사, 자동차 정비사, 건축시가 등 각자의 직업을 살려 정기검진과 머리손질을 비롯해 고장 난 전기제품과 자동차와 파손된 물건을 고쳐주어 노인들이 좋아했다고 한다.

자연히 함께 모일 기회가 생겨 여름에는 마당에서 음식도 만들고 회의도 하지만 겨울에는 그럴 수가 없어 정부에 공회당 같은 공공건물을 신청해 짓게 되었다.

이와 같이 한 곳에 모여 사는 시간이 길어지니까 여러 가지 취미와 재주를 가진 사람들이 활동하게 되어 노인들이 악단을 구성해 연주도 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들이 살던 집은 사회에 기부하거나 세상을 떠나면 다른 노인들에게 거저 준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지금 내가 그 나이에 도달했다. 우리라고 못할 게 없다. 실버 극단이 연극을 할 때도 배우 노릇만 할 거이 아니라 대본, 의상, 장치까지도 스스로 하면 훨씬 재미있고 두뇌 훈련도 된다. 성탄 때 남녀 노인들이 함께 싸구려 천을 사다가 날개를 만들어 어깨에 메고 천사 노릇도 하고 목동과 동방박사 역할도 하면 좋을 것이다.

노인들이 자기 고향의 독특한 물건이나 음식을 만들어 전시회도 하고 원하면 팔기도 하며 전수하는 것도 좋겠다. 나는 시중에서 거의 볼 수 없는, 아기 돌 때 신는 버선을 만들 수 있다. 손자들에게 만들어 주었는데 보는 사람마다 신기해했다. 고향이 황해도인 나는 고모한테서 버선 만드는 법을 전수받았다.

이와 같은 일은 양보와 희생, 봉사 정신과 너그러움, 무엇보다 사랑이 있어야 하는데 신앙 공동체가 함께하면 가능하다. 어느 종교단체가 독지가 또는 정부가 땅을 내놓았을 경우 그곳에 주거를 마련하며 독립된 생활을 할 때 우리는 함께 모여 무언가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의 유료 양로원은 장삿속이어서 낭비가 많다. 예를 들어 노년기에 이용할 수 없는 시설이 너무 많고 이 때문에 비용이 많이 들며 입주금이 비싸 들어가기가 어렵다. 그리고 삶의 등차가 심해 화합해 살기가 어렵다.

70대 노인들이 모여 산다 해도 건강하다면 충분히 봉사할 수 있다. 도움을 받기보다 오히려 봉사하는 사람이 더 많이 나올 수 있다.

일본에서 들은 이야기인데, 은행이나 기타 금융기관에서 은퇴한 사람들이 유료 양로원 경리를 도와주어 경리책임자 한 사람만 두고 기쁘게 자원 봉사하는 이들의 도움을 받았다 한다. 건강한 노인들이 정원을 돌보고 운전봉사를 하는가 하면 다양한 기술을 가진 이들의 도움을 받아 절약한 인건비를 신년, 연말, 성탄절 행사 비용으로 돌려 다같이 기쁨을 나눈다고 한다. 이와 같이 길어지는 노년기를 슬기롭게 보냄으로써 노인끼리 서로 격려하고 도우며 밝고 씩씩하게 노년기를 보낼 수 있다.

노년에 유난히 병에 민감한 사람들이 있다. 내 친구 가운데 혈당으로 고행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그런데 그 병에 대한 생각과 대처하는 방법이 제각기 다르다. 대조적인 예로 S라는 친구는 고등학교에서 30년이나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날이 갈수록 체중이 늘었다. 초콜릿을 먹으면 피로가 가시는 듯하여 날마다 먹다가 몸이 이상한 것 같아 병원 갔더니 혈당치가 아주 놓아 치료를 받기 시작했고, 몇 년 후 퇴직했다.

친구들이 걱정하지만 본인은 태연한 것인지, 태연한 척 하는 것인지, 어쨌든 의사의 지시대로 약을 먹으며 꿋꿋이 잘살고 있다. 2박 3일 정도의 여행을 가도 이삿짐이냐고 놀림 받을 정도로 큰 가방을 끌고 다녔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인슐린을 냉장 보관해야 했으므로 휴대용 아이스박스를 끌고 다녀야 했기 때문이다. 인슐린을 양쪽 팔, 양쪽 허벅지, 좌우 복부에 돌아가며 매일 자신이 직접 주사하면서 밝은 표정으로 친구들이 하는 대로 할 것, 놀 것 다 했다. 이 친구는 형제들이 사는 미국으로 캐나다로, 여기저기 안 돌아다니는 데 없이 다 다니면서 여전히 씩씩하게 잘살고 있다.

이와 달리 K라는 친구는 빼빼 말라가지고 기운도 없어 환자 티를 내며 다녔다. 음식을 먹을 때도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된다며 보기에 딱할 정도로 먹는 둥 마는 둥 하여 옆에서 보는 사람들까지 식욕이 떨어질 정도였다.

그런데도 K는 더 나아지는 것 같지 않았고 S는 더 나빠지는 것 같지 않았다. 내가 보다못해 K에게 “너도 S처럼 살면 안 되니? 너나 S나 같아 보이는데.” 하고 말했다. 그러고 나서 한 1년쯤 후 만난 K는 병색이 가시고 볼에 살이 통통 올라 보기 좋게 달라졌다. 반가워서 웬일이냐고 물었더니 자기도 S처럼 인슐린 맞아 가며 먹고 싶은 것도 먹고, 하고 싶은 것도 하면서 살고 있다고 했다.

부자연스러운 삶으로 몇 년을 더 연명하거나 또 몇 년을 덜 산다 한들… 70이 넘은 후의 삶은 ‘좀 너그러워지면 좋겠다’. 병을 대하는 마음과 대처하는 방법은 민감한 것보다 여유롭고 편안한 것이 좋은 것 같다. 나이가 들수록 더욱 그렇다.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자녀들을 위한 기도를 바치면 참 행복하고 가슴 뿌듯하다. 늙어서도 내 아이들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할 일인가!

 

 

 

이젠 실버들이 앞장설 때

 

사람은 개인에 따라

넘치는 부분과 모자라는 부분이 다르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서로 관심을 기울여 나누고 배우며

함께 살아야 한다.

 

 

젊은 실버

며칠 전 일간지에 젊은 실버(young silver)와 나이 든 실버(old silver)이야기가 실려서 아주 반가웠다. 노년기가 길어져 사회에서 구분한 65세 이상 노년을 연령별로 세분해야 한다고 나는 주장해 왔다.

종교단체에서 노인회나 노인대학이라 부르는 단체에 속하는 노년층은 65세부터 90대까지 모두 망라하고 있는데, 이분들을 대상으로 한 프로그램과 교육 내용을 연령과 상관 없이 일률적으로 시행하는 것은 지금 시대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60, 70대 노년과 그 이후의 노년은 여러 가지로 다르며 세대 차이를 느끼기도 한다. 세월이 급변하는 시기를 지나온 이들은 학교와 사회교육이 다르고 옷이나 음식, 취미 등 모든 것이 다르다.

유학을 예로 들면 나이 든 실버는 일본으로, 젊은 실버는 미국으로 갔다는 점이 다르다. 또 햄버거, 피자, 프라이드 치킨을 좋아하느냐 않느냐, 한복을 입고 자랐느냐 아니야, 컴퓨터를 능숙하게 다루느냐, 전기나 전자 기구를 불편 없이 쓰느냐 하는 것이 젊은 실버와 나이 든 실버의 차이를 느끼게 한다.

또 연금이라도 받아 경제적으로 완전히 독립했느냐, 비교적 건강하냐 와 같은 차이도 있다. 90에도 건강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60, 70대에도 여러 가지 질병으로 건강하지 못한 경우가 많아 나이로 구분할 수 없다.

그렇게 때문에 때로는 같이 어울릴 필요도 있지만 대개는 나이 든 실버와 젊은 실버를 분리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젊은 실버는 여러 가지 새로운 지식을 적극 받아들이고 배우고 가르치며 실천해야 한다.

나는 퇴직 후 교회에서 환경교육과 홍보를 계속해 왔기에 젊은 실버라면 당연히 알아야 하고 또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환경 이야기를 좀더 하려고 한다.

아들이 미국 플로리다에 살고 있어 1년이나 2년마다 한 번씩 다녀오고 있다. 미국 본토 동남쪽에 길게 뻗어 있는 반도 모양의 플로리다에는 산이 없다. 고속도로를 달리면 어디에도 시야를 방해하는 게 없어 지루하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이 고속도로를 지나가다 보면 양쪽에 야트막한 동산이 보이고 나무도 제법 우거져 있다. 아들에게 “지금 이 길은 처음 가는 길이냐?” 하고 물으니 여러 번 다닌 길이라고 했다. “그런데 웬 동산이 있지?” 하고 묻자 서울의 난지도와 같은 쓰레기 산 이라고 했다.

미국 일반 가정에서 나오는 쓰레기는 우리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다. 땅이 넓고 인구밀도가 적어서 우리보다 덜 심각할 뿐이다. 그 동안 쓰레기를 묻어왔을 터인데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묻었나 보다. 그런데 이제는 고속도로 주변이나 사람이 살지 않는 곳에 산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쓰레기에도 산업쓰레기, 일반쓰레기, 음식물쓰레기가 있는데 우선 음식물쓰레기를 생각해 보자. 우리나라에서는 음식물쓰레기를 묻거나 태운다. 묻으면 침술수가 지하로 스며들어 지하수, 호수, 강, 바다를 오염시킨다. 젖은 쓰레기는 태우면 연료가 많이 들어 공기를 오염시킬 우려가 있다. 또 묻을 땅이 없는 것도 문제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음식물쓰레기를 분리수거 하여 동물의 사료와 퇴비에 쓰고 있다. 시민들은 열심히 분리배출하며 협력하고 있지만 이에 더하여 시민들이 협조해야 할 일은 음식물을 남기지 말고 다 먹는 습관을 들여 음식물쓰레기를 원천적으로 만들지 않는 일이다.

음식물쓰레기를 줄이기 위해 다음과 같은 것을 젊은 실버들이 앞장서 실천하고 가족과 이웃을 독려하는 것도 보람 있는 일이고 봉사다.

 

일주일분 식단을 꼼꼼히 짜자

식단은 영양사 같은 젊은 사람들만 짜는 것이 아니고 각 가정에서 자신의 경제에 맞게 식구 수, 먹는 양, 기호에 따라 짠다.

 

식단을 보며 장을 본다

파는 단위가 너무 크면 재료 상태로 남아 냉장고 속에서 상하므로 적당 단위의 것을 산다. 천 원짜리 무 한 개를 다 먹을 수 없는 집은 좀 비싸더라도 6백 원 주고 반 개를 사는 것이 결과적으로 4백 원을 절약하고 무 반 개를 썩히지 않게 된다. 이처럼 알뜰하게 식단을 짜고 장을 본 후 알맞게 요리한다. 그리고 빨리 상하는 재료를 먼저 먹는다.

 

음식을 골고루 먹자

좋아하는 음식만 골라서 먹는 편식을 막기 위해 식구마다 큰 접시를 주어 음식을 골고루 담아 먹게 함으로써 고기만 먹거나 생선만 먹거나 야채만 먹는 편식 습관을 바로 잡는다.

 

먹을 만큼만 먹자

밥, 국, 반찬은 먹을 만큼만 받아 남기지 않고 다 먹음으로써 쓰레기를 만들지 않는다. 특히 국물은 하수를 오염시키므로 먹을 만큼만 받아 남기지 않도록 한다.

 

음식재료를 잘 보관하자

음식재료는 투명한 그릇이나 비닐봉지에 넣고 구입 날짜를 적어 냉장고에 보관하여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재료는 무엇인지 바로 알 수 있게 한다.

 

외식할 때는 적당히 먹자

외식할 때도 가짓수가 많거나 양이 많으면 미리 사양하여 남기지 않는다. 반찬 수를 많이 내놓는 음식점보다 남지 않을 만큼 맛깔스러운 반찬 몇 가지만 내놓는 음식점을 찾아 다닌다. 집에서나 밖에서나 ‘푸짐하게’라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게 아닌 세상이 되었음을 알자.

쓰레기 문제는 국가마다 땅이 넓거나 좁거나 인구밀도가 높거나 낮음에 따라 사정이 다르다. 그러나 환경 문제는 지구 전체를 놓고 생각하며 대처하는 것이 옮음을 다같이 명심해야 한다.

우리가 버리는 음식물쓰레기를 돈으로 환산하면 1년에 15조 원이 넘는다. 굶주리는 작은 나라 하나 둘쯤 먹여 살릴 수 있는 돈이다. 환경 걱정은 젊은 사람만의 몫이 아니다. 젊은 실버들은 집에서나 친구들을 만나는 모임에서 환경을 의식하여 훌륭한 환경 지킴이로 봉사할 수 있다.

 

 

물은 생명의 근원

사람은 잉태되자마자 태중에서 양수에 둘러싸여 보호받으면 자란다. 물은 말 그대로 생명의 근원이다.

우리나라는 유엔이 정한 물 부족 국가임에도 일반 국민은 물이 풍부한 금수강산으로 착각하고 있다. 길에 물을 줄줄 흘리며 자동차를 닦는다든지 목욕을 시작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 물을 틀어놓고 쓰는 것은 잘못이다. 남탕은 볼 수가 없어 모르겠지만 여탕에서는, 그 중에도 노인들에게 이런 예가 많다.

내가 좀 젊었을 때 “그 물 좀 잠그시죠!” 하고 말했다가 “네가 이 집 딸이냐? 며느리라도 되느냐?” 하고 역정을 내며 소리를 질러 벌거벗고 싸우기가 싫어서 입을 다문 적이 있다.

이제 나도 화를 내던 노인들과 비슷한 나이가 되었다. 그래서인지 같은 잔소리를 했더니 좋지 않은 표정을 짓기는 했으나 물을 잠갔다.  젊은이들은 미안하다고 하며 잠갔다.  20, 30년 전보다 많이 계몽된 것 같다. 퍽 다행스러운 일이다.

우리나라는 비가 많이 오는 편인데, 1년에 내리는 강수량이 세계 평균보다 많다. 그러나 인구밀도가 높고 비가 1년 내내 일률적으로 내리는 것이 아니라 어느 기간에만 많은 양이 내리고 또 어느 지방에만 집중적으로 내리기 때문에 비가 많이 내린다 해도 효율적으로 쓸 수가 없어 여전히 물이 부족하다.

30년 후에는 물 기근 국가가 될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되면 물 때문에 생명이 위협을 받게 되고 지방이나 국가 사이에 공동으로 흐르는 개천이나 강, 호수로 인해 물싸움이나 물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다.

이것을 해결하려면 바닷물을 끌어들여 공업적으로 단물로 만들거나 대대적으로 지하수를 개발해야 한다. 그러나 돈이 많이 들어 중동의 산유국처럼 오일 달러가 많으면 별 문제가 없지만 우리나라는 세금으로, 그야말로 형세로 물을 얻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특히 평균 수명이 늘어나 노인인구가 많아지는 가운데 가뜩이나 부족한 노인복지 예산이 줄어드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

젊은 실버들은 물 보호운동에 스스로 나서서 봉사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조금이라도 공부할 필요가 있다. 젊은 노년층들은 즐겁고 기쁘게 산다는 것을 취미생활, 곧 오락과 운동 쪽으로만 생각하여 골프, 등산, 테니스, 노래하기, 춤추기 등을 먼저 떠올리는데, 이것 말고도 무언가를 배우고 실천함으로써 봉사하며 사회에 기여한다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

물을 보호하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만 그 가운데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은 물을 더럽히지 않는 일이다. 합성세제의 남용, 쓰다 남은 식용유나 석유를 함부로 버리는 것, 디스포저(음식 찌꺼기 분쇄 장치)로 음식물 쓰레기를 갈아서 버리는 것, 산업면에서는 여러 가지 화학 약품이 섞여 있는 공장 폐수 문제 등을 의식해야 한다.

우리가 무심히 하수구에 버리는 김칫국물 1컵, 라면 국물 1컵, 우유 1컵에서 물고기를 살게 하려면 김칫국물 1컵에는 맑은 물 1만 컵, 라면 국물 1컵에는 5천 컵, 우유 1컵에는 5만 컵을 섞어야 한다.

도 네 식구가 하루 저녁 먹을 튀김을 튀기고 남은 기름을 하수구에 버리면 30드럼 정도의 맑은 물을 섞어야 깨끗한 물이 된다. 공자 폐수는 각 공장에서 나오는 특수 성분을 자체 정화 처리하여 일반하수로 보내는 것이 원칙이다. 그런데 이 원칙을 지키지 않는 업주가 간혹 있어 하천이 오염되고 물고기가 떼죽음을 당한다.

가정에서 물을 가장 쉽게 오염시키는 것이 합성세제인데, 일반적으로 너무 많이 쓰는 경향이 있다. 한 방울이면 될 것을 덜퍼덕 부어 쓰는 경우를 많이 본다. 가령 설거지 할 때 밥그릇이나 물컵처럼 기름기가 묻지 않은 그릇은 따로 깨끗한 수세미로 씻어 건져놓는다.

기름기가 약간 묻은 그릇과 많이 묻은 그릇도 분리하여 기름기가 약간 묻은 그릇은 다른 수세미에 세제 한 방울만 묻혀 설거지하고 기름기가 많이 묻은 그릇은 먼저 종이로 기름기를 씻어낸 다음(초벌) 세제 수세미로 설거지하여 깨끗한 물로 헹구는 것이 세제를 가장 적게 쓰는 방법이다.

수세미 하나로 세제를 묻혔다 헹구었다 또다시 세제를 묻혔다 하지 말고, 세제를 묻히지 않은 기름기 없는 그릇용 수세미와 세제를 묻힌 기름기 그릇용 수세미를 마련하여 쓰는 것이 효율적이다.

합성세제는 자연적으로 정제되지 않는다. 수도국에서 화학적으로 처리하지만 완전하게 정제되는 게 힘들어 조금씩 상수도를 통해 따라 들어올 수 있다. 이것은 사람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75족 ‘환경호르몬’ 참조).

설거지할 때 그릇에 묻은 세제는 보통 우리가 하는 설거지로는 다 씻기지 않기 때문에 여러 번 헹구어야 한다. 김칫거리 같은 야채와 과일을 세제로 씻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것은 농약 세척은 되지만 이때 쓴 세제를 완전히 씻어내기가 어려워 또 다른 오염이 되므로 물로 깨끗이 씻는 것이 가장 좋다.

서울 같은 대도시에서는 가정에서 나오는 생활하수가 수질오염의 주범이다. 생활하수에 섞여 있는 음식물 찌꺼기나 유기오물은 물에서 썩는데, 썩는다는 것은 산소를 없애는 것과 같은 것으로 물에서 사는 물고기나 수초를 살 수 없게 만들어 결국 모두 죽게 된다.

물을 아껴 써야 한다. 설거지할 때나 세수나 양치질할 때 수도꼭지를 틀어놓고 흐르는 물을 그대로 쓰지 말고 그릇에 받아 쓰는 습관을 키우자. 예를 들어 큰 그릇에 물을 넉넉히 담아 설거지를 한 번 하는 경우와 똑같은 양의 물을 두 그릇에 나누어 두 번 헹구는 경우, 또 세 그릇 네 그릇에 나누어 담아 세 번, 네 번 헹굴 때 깨끗해지는 정도는 2배, 3배, 4배가 아니라 기하급수적이다.

물을 재활용하자. 쌀 씻은 물, 세탁기에서 나오는 마지막 헹굼 물은 따로 받아 베란다도 닦고 걸레도 빨고 여러 가지로 이용할 수 있다. 단독주택일 경우는 빗물을 받아서 활용할 수 있다.

지하수는 저장된 물의 밑 재산이다. 가물 때는 지하수를 퍼 올려 농사도 짓고 생활용수로도 사용한다.  이때 파이프를 박아 양수기로 끌어올리는데, 나중에 비가 와서 지하수를 쓰지 않아도 될 때는 파이프를 완전히 막아 지하수의 오염을 막아야 한다. 지하수는 한 번 오염되면 정수하기가 힘들어 하수처럼 더러워질 우려가 있다.

지구상에 65억 인구가 있는데, 그 가운데 물 기근으로 고통 받으며 생사의 기로에 서 있는 사람이 11억이 넘는다. 6명 중 1명꼴이다.

물이 풍부한 나라. 물이 부족한 나라, 물 기근인 나라고 나눌 때 우리나라는 아직도 물 부족 국가에 속하지만 앞으로 2050년쯤에는 물 기근 국가가 될 우려가 높다. 젊은 실버들은 이와 같은 물에 관한 지식을 잘 이해하고 가정에서는 물론 모임이나 단체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물을 귀하게 여기도록 알리는 일을 스스로 해나가야 한다.

 

 

환경호르몬

인간이 만든 환경오염물질, 곧 사람들이 쓰고 버리는 화학물질, 농약, 제초제, 살충제, 세제, 쓰레기를 태울 때 발생하는 여러 기체, 특히 다이옥신 같은 물질을 환경호르몬이라고 한다.

이것은 진짜 호르몬처럼 내분비계에 영향을 미쳐 생식장애를 일으킨다. 정자 수가 줄고 수컷의 생식기가 작아지며 심지어는 한 몸에 양성 생식기가 나타나기도 한다. 요즘 10쌍이 결혼하면 서너 쌍이 아기가 안 생기는 현상과 동성애자가 늘어나는 현상 따위는 우연이 아니고 이와 같은 환경호르몬이 원인이라고 과학자들은 생각한다.

대단한 찬사를 받으며 만들어진 DDT도 사용 금지되었다. DDT 살충제를 뿌린 나무 열매를 먹은 새들이 알이 부화되지 않아 번식에 지장을 주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화학물질은 약 65~70종이나 있다.

 

 

승용차를 밀고 가는 사람들

국경이 뚜렷하지 않은 유럽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한다. 유럽에서는 국경이 우리나라의 톨게이트처럼 되어 있는 곳이 많은데, 그곳을 지날 때면 간단히 입출국 수속을 한다.

어느 날 평소보다 차가 밀려 명절 때처럼 길게 늘어서서 가다 서다 했다고 한다. 그 중 한 차에서 사람들이 내려 얘기를 나누다 앞차가 4~5미터쯤 가면 자기네 차를 밀고 뒤 쫓아 가 끊겼던 이야기를 계속하며 웃고 떠들다 앞차가 가면 또 밀고 가기를 되풀이하고 있었다.

그 뒤를 쫓아가던 내 친지는 차를 밀고 가는 그들이 하도 이상해서 그 이유를 물었다. 그들은 독일 사람들이었는데 대답하기를 엔진을 공회전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했다. 차가 선 채 엔진이 돌아가면 기름도 낭비되고 매연이 나와 공기가 더러워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는 친지한테서 이 이야기를 듣고 역시 선진국 사람들은 다르다고 감탄했다. 그 매연을 사람들이 마시면 호흡기에도 해롭고 동식물한테도 해를 끼친다. 그뿐 아니라 요즘 많은 논란을 일으키는 온난화 가스가 증가하여 지구가 더워지게 된다.

탄산가스는 공기보다 무거워 지구 밖으로 확산되지 않고 지구를 둘러싸고 있어 태양에서 왔다가 반사되는 열을 밖으로 내보내지 못한다.  그 독일인들은 온난화 가스를 가능한 한 내놓지 않으려고 차를 밀고 갔다는 얘기다.

실버 나이에 들어선 젊은 실버들은 모두 이와 같은 의식을 가지고 살았으면 좋겠다. 더 나아가 가족이나 친구들과 이웃에게 계몽한다면 더욱 의미 있고 보람차게 봉사하며 인류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탄산가스 얘기가 나온 김에 좀더 깊이 있게 얘기해 보자. 지구가 더워지면 빙하나 만년설처럼 저축된 물이 녹아 내려 바닷물이 높아지고 싱거워진다. 그러면 바닷물이 역류하여 육지로 올라오게 되고 땅이 낮은 섬나라가 물에 잠기며 서울의 경우는 인천에서 물이 올라와 한강물이 높아지고 바다에 가까운 지역이 물에 잠기게 된다.

또 바닷물의 온도가 변화되어 거기에 사는 물고기들이 멸종되거나 다른 곳으로 이동해 간다. 요새 뉴스를 보면 서해안에서는 조기를 보기 어렵고 오징어가 잡히며 동해에서는 명태가 줄어든다고 한다.

예전에는 이와 같은 이야기를 듣지도 못했고 따라서 걱정도 하지 않았으나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 젊은 실버들은 당연히 이와 같은 일에 참여해야 하고 환경 문제를 걱정하며 젊은 사람들이 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도와야 한다.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배우며 알아 나감으로써 치매도 물리치는 일거양득을 거둘 수 있다.

나를 개발하는 후반기 인생의 주인공은 여전히 자신임을 명심하고 용기와 희망을 가지고 내리막길이 아닌, 조금 씩이라도 올라가는 삶을 살아야 남은 노년기가 지루하지 않고 아름다워진다.

온난화 기체는 유기물(석탄, 숯, 석유류, 각종 생활폐기물)을 태울 때 나온다. 그래서 가능하면 승용차를 자제하고 사용하더라도 배기량이 적은 것을 권하는 것이다. 한 예로 한 사람을 똑같은 거리에 이동시키는 데 드는 에너지를 보면 승용차는 전철의 5배, 버스는 3배 정도의 에너지가 소비된다.

이만큼 연료가 많이 든다는 것은 그만큼 배기가스가 많이 나온다는 얘기다. 이 가스에는 물론 온난화 가스 외에 인체나 자연물을 훼손시키는 해로운 기체도 섞여 나온다. 아황산가스와 질소산화물은 말할 것도 없고 산성비까지 오게 해서 살아 있는 동식물은 물론 문화재까지 피해를 입힌다.

우리에게 전기를 공급해 주는 화력발전 역시 온난화 가스를 내뿜고 있어 전기를 아껴 서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도 있다.

젊은 실버들은 집에서 전등 하나를 끄고 방 온도를 1~2도 낮추며 전기 플러그 하나를 빼고 자는 이유를 확실히 알아야 한다. 미처 모르는 이웃에게 계몽할 의무가 있음을 자각하자. 그럼으로써 똑똑하고 친절하며 당당하게 늙어갈 일이다.

언제부터 겨울에 반소매를 입고 살았으며 내복을 안 입는 버릇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실은 나도 아파트에 살게 되면서 전체를 대상으로 보내주는 중앙난방 덕에 내복을 안 입는다. 여름에도 긴팔 옷을 입고 살아야 하는 냉방, 심지어 백화점이나 큰 상점이 출입문을 열어놓을 정도로 센 냉방은 상술인지는 몰라도 자제해야 한다.

당연히 겨울에는 내복과 스웨터를 입고 살아야 하고 여름에는 얇게 입어야 한다. 아이들은 벗어 젖히고 땀 흘리며 살아야 건강에도 좋고 뚜렷한 계절을 느낄 수도 있다.

아주 잘사는 미국 사람 집에 아직 가 본 적은 없지만 웬만큼 잘사는 집에 가 보면 겨울에는 추울 정도로 난방을 낮게 한다. 그들은 내가 추워하는 것을 눈치 채고 춥냐고 물으며 난방을 높이곤 한다. 조금 있다 한기가 가시고 나도 모르게 웅크렸던 몸을 펴면 금세 난장을 낮추는 것을 몇 번이고 경험했다.

그들은 낮은 온도에 익숙해 있거나 거기에 맞는 옷을 입었거나 아니면 기름기가 몸 속에 많이 축적되어 있어 추위를 덜 타는 것이 아닌가 한다. 어찌 되었건 잘사는 산유국 사람들일수록 온도에 신경을 쓰더라는 것이다.

 

 

실버타운의 사치

70대에 들어서면 실버타운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 볼 일이다. 내가 옆에서 본 바에 의하면 80에 실버타운에 가는 것은 너무 늦다.

내가 잘 아는 분은 절대 남에게 폐 끼치지 않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독신이다. 그분은 동생네 집에서 가끔 저녁초대를 하면 계수의 손맛이 나는 음식을 스스로 만들어먹는 음식보다 맛있게 드시고 8시만 되면 누가 눈치를 주는 것도 아닌데 벌떡 일어나 가시곤 했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여 친척이나 다른 사람에게 지나칠 정도로 폐를 끼치지 않는 깔끔한 성격이었다.

그러던 분이 70이 넘고 75세가 지나면서 저녁 먹고 차 마시고 과일 들고 9시나 10시가 되어도 갈 생각을 하지 않고 마냥 소파에 앉아 졸곤 하셨다. “11시가 다 되었는데 이제 가셔야죠?” 하고 말해야 마지못해 일어났고, 그 집 아이(조카)들이 자동차로 모셔다 드리곤 했다.

이런 일은 날이 갈수록 더했다. 동생들이 “형님, 00에 좋은 실버타운이 생겼는데 구경 갑시다. 좋으면 그리로 먼저 가세요. 그러면 우리도 뒤따라갈게요.” 하자 아니 거긴 왜 가느냐면서 아직 혼자서도 다 할 수 있다고 완강히 거부하는 것이었다.

빨래, 청소, 음식 만들기를 스스로 했고 다른 사람이 해주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기도 했지만 당신은 무엇이든 하지 않으면 신체적, 정신적 건강에 좋지 않다고 하며 80이 넘도록 혼자 해결했다. 이분은 젊어서 졸은 직장생활을 하다가 정년퇴직 했고 노후설계도 구체적으로 하며 깔끔하게 살았다.

이분 말고도 다른 분들의 예를 보더라도 75세까지는 올바른 판단을 하다가 80을 전후하여 외로움과 소외감을 느끼며 실버타운을 거부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다른 것에 대해서는 전과 다름없는 생각과 판단을 하는데 이 부분만은 완강히 거부하며 아직은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이때가 고비다.

얼마 전 남편의 친구 세 쌍이(우리 부부를 포함해) 만나 저녁을 먹은 적이 있다. 00 에 새로운 실버타운이 생기는데 여러 가지로 편리하고 좋을 것 같다는 이야기가 나오자 한 남자분이 펄쩍 뛰며 무슨 실버타운 이야기를 하느냐며 반대하고 나섰다. 이분의 나이는 우리와 비슷한데 나는 이분도 벌써 외로운지는 게 싫나 보다고 생각되어 씁쓸했다.

요즘은 아들 손자들이 있다 해도 외국에 살거나 국내에 살고 있어도 함께 살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여 도우미를 쓰다가 더 나이 들어 몸이 불편해지면 간병인을 두고 지금 살고 있는 집에서 사는 것이 제일 좋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사람이 대부분인 것이 문제다.

그러한 생활을 유지할 만한 경제력이 있다 하더라도 그 돈을 관리하는 게 문제다. 어디에 얼마를 맡겨놓았는지, 기한이 언제인지, 어느 것을 먼저 찾아 쓰고 어느 것을 끝까지 두어야 유리한지 따위가 아리송해지기 시작한다.

꽤 잘살던 친구 어머니가 살림하는 사람에다 운전기사까지 두고 홀로 살다가 돌아가셨다. 생전에 딸이 가끔 들러 어머니 살림을 살펴보곤 했는데, 하루는 도우미 아주머니가 돈 봉투를 내놓으며 이번 달에는 월급을 두 번 주셨다고 하더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양심적인 도우미도 못 만나고 가끔 들러주는 딸도 없다면 참으로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실버타운이 비싼 것은 집도 잘 짓고 시설이 좋아서이겠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부대시설 때문인 것 같다. 골프 연습장, 수영장, 헬스클럽, 사우니… 오락 시설까지 다 갖추어 놓고 그 시설비와 운영비를 노인 입주자들에게 부담시키는 것은 참으로 부당하다. 이 시설을 이용하지 못하는 사람들, 앞으로 이용할 수 없게 되는 사람들 편에서 볼 때 이것은 절대 부당하다.

어느 친구는 그래도 그런 것들이 있어야 아들, 딸, 손자들이 찾아온다고 한다. 아이들은 수영도 하고 컴퓨터 게임도 하며, 애들 부모는 골프 연습하고 헬스클럽에서 운동하고 사우나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노인들이 아이들을 만나기 위해 지불하는 대가치고는 너무 비쌀 뿐 아니라 그렇게까지 해야 볼 수 있다면 그냥 참고 의연하게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싶다.

약 20년 전 일본에서 보고 들은, 노인들을 위한 주거 문제 이야기다. 방이 하나나 두 개가 있는 작은 평수의 가구가 굉장히 많이 들어선 큰 아파트가 있고 그 단지 안에 큰 슈퍼마켓이 있는데, 물건이 다양해서 노인들에게 필요한 것이 거의 다 있다. 점심이나 저녁때가 되면 여러 가지 음식을 즉석에서 만들어 온장고에 진열해 놓는다.

꼬부랑 노인이나 휠체어를 탄 노일들에게 시간 맞추어 나와 자기가 먹고 싶은 음식을 먹을 만큼 사가지고 간다. 양이 적거나 많거나 누구나 자기가 원하는 만큼 먹을 수 있다. 식당에서 먹지 않는 경우 관리비에 식사비가 포함되는 불합리한 일이 생기지 않는다. 또한 모든 입주자들의 식사를 준비했다가 식사하지 않는 입주자가 있을 경우 음식이 남게 되는 낭비도 막을 수 있다.

청소비와 빨래방에서 스스로 빨래하는 것까지는 관리비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거동이 불편해 스스로 빨래를 할 수 없다든지 식사 해결이 힘든 경우는 따로 요금을 지불하고 도우미를 쓰는데 이것은 관리실에서 알선했다. 이와 같은 시스템은 지금 우리나라에서 운영하는 실버타운과 많은 차이가 있다.

한편 우리나라 노인들은 비싸고 좋은 곳에서 사는 것을 은근히 자랑하는 경향이 있으며 이처럼 어린이 같은 노인들을 부추기는 업자들도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처럼 부유한 노인은 한주먹밖에 안 되는 소수이며, 대부분 여유가 없는 노인들은 이러한 세태를 한탄하거나 의기소침해지며 더러는 능력 이상으로 무리를 하여 힘들어한다는 것이다.

국가나 사회에 기여하고 봉사하는 개인이나 단체가 자선가지는 아니더라도 큰 이윤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합리적 운영으로 노인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도록 도와주는 실버타운에 머물 수 있게 해드리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는 생각이 든다.

앞에서 말한 일본의 경우는 지방자치단체에서 운영하는 것 같은데, 우리나라에도 사치의 거품이 빠진 실버타운이 우리가 들어가야 할 때쯤에는 나와주기를 초조하게 기다리는 것은 나만이 아닐 것이다.

 

 

자식을 독립시키지 못하는 건 사람뿐

‘지니’라는 이름을 가진 꽤 영리하고 귀여운 개를 길렀다. 지니는 새끼를 대여섯 마리씩 심심치 않게 낳았다. 한참 새끼를 젖 먹여 키울 때 보면 어미의 살은 쭉 빠지는데 사람으로 비교하면 환자와 같다.

그런데도 한번도 귀찮아하는 기색 없이 젖 먹이고 핥아주고 똥오줌 치워주고 추울 때는 품어주며 잘도 키우는 것이 신통하고 대견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론 안쓰러웠다. 너무 말라서 우리 애들이 “우리 지니 미스 코리아, 아니 미시즈 코리아에 내보내야 돼. 저렇게 날씬한 개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라고 할 정도였다.

그러다가 때가 되면 야멸차게 새끼를 밀어낸다. 젖도 안 주고 자기 밥그릇을 기웃거리면 으르렁거리며 쫓아낸다. 잘 때도 가슴에 품지 않고 밀어내 새끼들끼리 끙끙거리며 어미 엉덩이 쪽에 몰려 잔다.

어린 시절 시골에서 자랄 때 닭들을 보면 이른 봄 암탉이 알을 25개 정도 품으면 약 20일 후에 22~23마리의 병아리가 부화한다. 그러면 어미닭은 병아리들을 데리고 다니며 벌레를 잡아 부리로 몇 번 쪼아 작게 잘라 새끼들에게 먹이는데 어미는 전혀 먹지 않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어미닭은 하루 종일 벌레를 잡아 구구거리며 새끼를 불러 모으고 병아리들은 그때마다 쪼르르 달려가 경쟁하듯 먹곤 했는데 어떤 놈은 통통해지고 어떤 놈은 어리어리해진다. 어미는 정확히 이를 알아차리고 벌레를 물고 가 시원치 않은 새끼에게 구구거리며 먹이를 준다. 똘똘한 것들이 덤비면 머리를 쪼아 쫓아버린다.

동물들도 새끼를 공평하게 먹이며 잘도 키운다. 그러다 독립할 때가 되면 못 본 척 혼자 돌아다니며 먹이를 찾아 먹으면서 그 동안 새끼를 돌보느라 여위었던 몸을 추스르며 새끼를 떼어낸다. 그리고 다시 새끼를 낳을 채비를 하거나 알을 낳기 시작한다.

이 오묘한 법칙을 사람만 지키지 못하는 것 같다. 대학까지 공부시키고 직장을 얻었는데도 계속 부모 밑에서 밥 얻어먹고 가며 얹혀사는 자식과 이 사직을 냉정하게 내치지 않고 끌어안고 사는 부모, 이러한 예는 요즘의 세태라고 할 만큼 흔히 볼 수 있다.

특히 딸들은 여자라고 떼어놓지 못하고 40이 넘도록 부모 밑에서 용돈까지 받아 쓰며 당당하게 사는 경우를 많이 본다. 이러한 자녀들은 독립해 나가 살지 않으려면 최소한의 생활비는 내야 옳지 않을까 한다.

이와 같은 현상은 자식들한테도 문제가 있지만 부모에게 문제가 더 많다는 생각이 든다. 자식을 자기 소유물처럼 데리고 있는 사람들은 아들의 배필을 구해 장가보내려 할 때 아들의 의견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고르려 하고 아들이 마음에 들어 하는 처자는 일단 마땅찮아 하며 갈등을 빚는다.

모두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연속극에서나 볼 수 있는 일이 실제상황에서도 가끔 있다. 혼수를 어느 수준으로 하느냐, 신혼여행을 동남아로 가느냐 유럽으로 가느냐와 같은 것들이 결혼 당사자가 아닌 양가부모 선에서 흥정(?)으로 이루어진다.

그 후가 더 걸작이다. 우리 아들 아침을 굶겨 출근시킨다느니, 라면 끓여 먹여 보낸다느니 하며 말이 많아 시끄러운데, 일단 결혼시켰으면 내 아들이기보다 며느리의 남편이니 며느리가 알아서 할 일이다. 굶기거나 라면만 먹여 남편이 빌빌하는데도 그냥 내버려 두는 며느리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며느리 처지에서는 같이 살아야 할 남편이고 아이들의 아버지인데 어떻게 소홀히 하겠는가? 신혼 때는 아무것도 할 줄 몰라 실수도 하고 잘 챙겨주지 못할 때도 있지만 아이가 생기고 살림에 익숙해지면 나름대로 열심히 산다.

하루는 한 친구가 “얘, 외손자가 2월 생인데 일곱 살에 학교 보내지 말고 여덟 살에 보낼까 생각하는데 네 의견은 어때?” 하고 물어왔다. “나라가 정한 대로 하는 것이 좋지.” 하고 대답했더니 아이가 너무 어리다는 것이다.

나는 공연히 화가 난 듯 말했다. 내 손자는 2월 27일생인데 일곱 살에 학교 들어가 잘 다니고 있으며, 그 아이의 아버지인 내 아들은 3월 4일생이어서 일곱 살에 보낼까 하다가 여덟 살에 보냈다. ‘당연한 것 아니니? 네 사위도 일류대학 교수이고 할아버지 할머니도 다 인텔리(지성인)들인데 그 아이의 입학을 외할머니인 네가 왜 걱정하며 결정하려 하느냐?’ 고 쏘아붙였다. 이것은 아만 있는 나의 콤플렉스이기도 하다. 친할머니 친할머니는 제쳐놓은 것 같아서 말이다.

이것은 친정어머니의 지나친 간섭이며, 내 아이에서 손자 손녀까지 떼어내지 못하는 과보호의식에서 오는 쓸데 없는 미련이고 집착이다. 제 엄마 아빠가 오죽이나 잘 결정하여 교육시키지 않겠는가?

결혼하지 않았다고 40이 넘도록 자식을 데리고 있는 부모나 70이 넘은 부모에게 얹혀사는 자식이나 다 문제이고 특히 하숙비도 내지 않는 것은 더 잘못된 일이다.

일본의 어느 대학원생한테서 들은 얘기다. 공부가 끝나고 직장이 결정되었다고 한시름 놓기에 내가 웃으며 “그럼 결혼해도 되겠네요. 좋아하는 여자 친구도 있으니까.” 하고 말했다. 그랬더니 그 친구의 말이 몇 년 함께 벌어야 결혼할 수 있다고 했다. 본가가 지방이기는 하나 꽤 여유로운 것 같았다.

부모에게 의지하여 결혼할 생각도 없지만, 부모들 역시 스스로 벌어 결혼하라고 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부모님이 학비를 비롯한 의식주를 모두 대주셨지만 이제 월급을 받으면 첫 달부터 하숙비 내고 용돈도 스스로 해결해야 하므로 여유가 없다고 했다. 일본 샐러리맨(직장인) 초봉이 생활비와 용돈을 감당하고도 저축할 만큼 많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두 사람이 방을 얻어 자취를 하며 돈을 모아야 한다고 했다. 결국 동거한다는 소리로 들려 그러다 아이라도 생기면 더 난처할 터인데 했더니 펄쩍 뛰며 그런 게 아니고 빨리 저축해 결혼하는 게 목적이라고 했다. 1980년대의 이야기다. 그 후 그들은 계획을 착착 진행하여 5, 6년 후에 소박한 결혼식을 올렸다. 극단적인 예이기는 하나 박수를 보내고 싶다.

물론 일본이라고 해서 다 그렇지는 않다. 우리는 혼수 문제로 말썽이 나고 눈살을 찌푸리지만 일본은 결혼식 자체를 극히 호화스럽게 하며 결혼 당일에 옷을 여덟 번씩 갈아입는 예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어쨌든 짐승들도 잘해 내는 자식양육과 사랑, 엄격함을 통해 때가 되면 독립시키는 일을 사람만이 제대로 못한다는 생각이 든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해야 할 가정교육이 분명히 있고 또 어른들이 가정에서 모범을 보여줌으로써 아이들이 배우는 것도 많은데 핵가족이 되면서 이러한 것들이 사라지는 것 같아 아쉽다.

몇 년 전부터 정초에 아이들이 우리 부부에게 세배를 하고는 봉투를 내민다. 처음에는 이게 무엇이냐며 의아해했더니 세뱃돈이란다. 절까지 돈까지 주니 고맙구나 했더니 ‘아버지 어머니도 할머니한테 그렇게 하셨지 않아요!’ 하는 것이었다.

우리 섦은 실버들은 이와 같은 ‘모범’을 한 가정이 아닌 크고 넓은 분야에서 보여줄 필요가 있다. 이웃이나 교회에서, 어떤 모임에서 예의 바르게 질서를 잘 지키는 모범을 보여주고 기회 있을 때마다 가르침도 줄 일이다.

자식을 버리고 집을 뛰쳐나가는 부모,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해 빗나가는 아이들, 엄격함이 부족하여 버릇없이 흐트러지는 자식들, 40이 넘도록 노부모에게 기대 사는 사람들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다.

 

 

더불어 살아야 평화롭다

사람은 개인에 따라 넘치는 부분과 모자라는 부분이 다르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서로 관심을 기울여 나누고 배우며 함께 살아야 한다. 나이 들수록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어느 일요일 신부님이 하신 말씀이다. 신부님도 어느 시집에서 읽었다고 한다.

꽃은 곱게 피어 많은 사람을 위로하며 기쁘게 해준다. 꽃은 사람뿐 아니라 벌한테도 꿀을 준다. 나비한테는 꽃가루를 주고 향기마저도 바람에게 날려 보낸다. 그러고 나면 자기는 시들어 보잘것없어지지만 가을이 되면 먹음직한 열매와 씨앗을 품는다.

사름 사람에게 다 베푼 후 다음 세대로 이어가게 해주는 결실을 맺고 아름다운 죽음을 맞는다는 것이다. 사람들도 이와 같이 살다가 여한 없이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삶이다.

늦가을에 산에 가면 ‘도토리 채취금지’라고 쓴 푯말을 볼 수 있다. 좀 부드러운 말로 표현해 ‘도토리는 야생동물의 겨우살이 양식’이라고 하면 더 많은 호응을 얻을 것 같다. 깊은 산에서는 눈이 많이 쌓이는 겨울에 헬리콥터로 야생동물의 먹이를 뿌려주기도 하는데, 다람쥐, 산토끼, 멧돼지 같은 야생동물의 먹이인 도토리는 적어도 서울 근교에 있는 것만이라도 그냥 놔두었으면 싶다.

지구상에 있는 땅 가운데 약 3퍼센트가 원시림인데, 여기에는 알려진 것만 해도 170~180만 종의 생물이 살고 있다. 알려지지 않은 것까지 합치면 몇 천만 종이 되리라고 한다. 전쟁, 개발, 환경오염 때문에 원시림이 1년에 우리나라만큼씩 없어지고 있다. 그러다 보니 생물이 살 터전이 줄어들어 해마다 멸종되는 수가 늘고 있다.

자연에는 천적이 많아서 어떤 종이 사람 때문에 멸종되면 그것으로 인해 짓눌려 있던 다른 종, 곧 예전에는 눈에 띄지 않던 해충이나 병균이 나와 맹위를 떨친다. 그러면 특정 동식물들이 죽고 사람한테도 이유를 잘 모르는 병이 퍼지는 것으로 추측된다.

갯벌도 마찬가지인데 우리나라 남서해안의 갯벌은 세계 5대 갯벌, 곧 캐나다 동부 해안, 미국 동북부 해안, 독일의 북해 연안, 아마존 강 연안 가운데 하나다. 우리나라 갯벌에는 무려 1만2천여 종의 생물체, 곧 낙지와 같은 연체동물, 여러 종류의 조개와 게, 새우 같은 갑각류와 그 외 몇 백 종의 어류가 살고 있다. 이것은 우리의 식량이고 영양소이며 어부들의 수입원이다. 또 여기서 먹이를 얻는 철새와 물새들이 120여 종이나 된다고 하니 놀라운 일이다.

갯벌이 벗어지면 이와 같은 어패류와 동물들이 살아남을 수 없다. 자연의 균형이 깨져 혼란스럽게 되며 여러 가지 재해를 입게 된다. 오늘 아침 신문에 재선충이라는 해충의 피해가 커지면서 경기도에서 강원도 쪽으로 퍼져 나가 몇 십 년 자란 잣나무들을 잘라 불태우는 기사와 사진이 났다.

이러한 현상은 지구 온난화와 균형파괴 같은 환경 문제 때문에 발생한다. 이것이 사람을 비롯한 모든 생물이 더불어 살아야 하는 까닭이다. 사람만을 위한 환경파괴는 결국 가장 큰 피해를 가져온다.

우리나라 갯벌은 동북아시아 철새들이 남쪽으로 이동할 때 먹이를 얻고 쉬어 가는 낙원이다. 철새들 가운데 몸무게가 30그램 정도 되는, 참새보다 작은 좀도요새도 있다. 이 새는 시베리아에서 날아와 우리나라 갯벌에서 먹이를 먹고 휴식을 취한 후 한 번 날아오르면 4박 5일 동안 먹지도 자지도 않고 영하 50도 안팎의 대기를 뚫고 2만 리 이상 날아 싱가포르 습지에 내린다. 거기에서 먹이를 먹고 기력을 회복한 후 다시 날아올라 호주나 뉴질랜드까지 간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은 먹이를 구하고 쉴 수 있는 갯벌이 줄어들어 남쪽으로 날아가다 배고픔을 못 이겨 태평양 겨울 바다에 떨어져 죽은 수가 늘어났다는 보고가 있다.

이와 같은 작은 새, 갯벌의 여러 생물, 산에 있는 다람쥐와 산토끼 등 여러 동물은 모두 더불어 살아야 한다. 그래야만 자연이 균형을 이루며 순리대로 움직일 수 있다.

숲이 사라지면서 몇 십억 년에 걸쳐 다양하게 불어난 생물들이 살 곳을 잃어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그린벨트가 무너지며 골프장, 동물사육장, 숙박시설 따위가 들어서서 동물들이 수난을 겪고 있다.

숲을 보존할 이유는 많다. 비가 오면 일부는 증발하고 일부는 나무나 풀뿌리에 흡수되어 지하로 스며들어 저장된다. 많은 양의 물이 낮은 곳으로 흘러 개천을 이루고 강과 바다로 흘러가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상식이다.

숲이 없어지면 저장되는 물도 없어 사막화 현상이 일어나는데, 이 지구상에는 1년에 우리나라 만큼씩의 사막이 생긴다고 한다.  산불로 숲이 타버려도 20년이나 30년이 지나면 다시 복구된다. 그러나 산을 깎아 길을 내고 골프장을 만들면 영원히 복구되지 않는다.

우리나라에 봄이면 날아오는 불청객 황사도 사막화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으로 계절풍을 따라 한국과 일본을 거쳐 태평양을 건너 미국 캘리포니아까지 간다. 이것은 중국의 잘못도 아니고 단지 숲이 사라지기 때문이므로 당사국인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를 비롯한 이웃 나라에서도 식수와 조경을 도와 숲이 살아나도록 노력해야 한다.

황사 외에도 오염된 공기나 더러워진 물은 바람 따라 물결 따라 마음대로 움직이기 때문에 많은 나라가 괴로움을 겪게 된다. 자연을 파괴하고 균형을 깨뜨리는 행위는 커다란 재앙을 불러일으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자연을 잘 지켜 나감으로써 모든 생물이 더불어 살 수 있어야 한다. 우리를 괴롭히는 것들(모기나 메뚜기 따위)이나 좀 불편하게 하는 것들(산고 바위 등 통행에 지장을 주는 것)도 천적을 이용하거나 그대로 두는 것이 좋다. 화학약품을 써서 박멸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다.

자연을 보호하고 지켜 나가는 모습은 어른들이 모범을 보여야 젊은이와 어린이들이 배우게 된다. 이것 또한 젊은 실버들의 몫이다. 사람이 자연을 버리면 자연도 사람을 버리기 마련이다.

어려운 이웃은 물론 생명이 있는 모든 동물과 식물에 이르기까지 관심을 가지고 돌보고 도우며 더불어 살아야 평화롭다.

 

 

 

시계야 거꾸로 가라!

 

어린 사람에게, 심지어 손자 손녀한테도

미안하다, 고맙다,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고

질서와 예의를 지키는 노인은

호칭과 상관없이 참 멋있고 젊어 보인다.

 

 

노년기 외로움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노인이 되면 외로워지는 것은 당연하다. 특히 지금 같은 핵가족 시대엔 더욱 그렇다. 나는 큰아들을 결혼시킨 후 합의아래 5, 6년 동안 한 집에서 살았다.

처음에는 2층에서 딴살림을 했는데, 가끔 며느리가 “어머니, 오늘 저녁에는 뭐해 잡수세요?” 하고 물어오면 “글쎄다. 나는 내 남편 좋아하는 것 해먹을게, 너는 네 남편 좋아하는 것 해먹어라.” 하며 친구처럼 살았다.

그런데 손자가 생기고 나니까 사정이 달라졌다. 손자 사랑이 유별나서 잘 올라가지 않던 2층을 오르내리다가 아이가 좀 커지니까 요놈이 기어서 오르내리는 것이 위험스러워 아예 아래층에 데리고 있었다.

그러다 세 상 때 제 아빠가 미국으로 유학 가자 엄마와 함께 따라갔다. 손자와 처음으로 헤어진 우리 부부는 그 서운하고 공허한 마음을 다잡기가 어려웠다. 아이도 비행기에서 할머니를 찾으며 몹시 울었다고 한다.

1년 후 아이를 보러 갔는데 잠시도 떨어지지 않고 잘 때도 함께 잤다. 나는 손자를 볼 겸 아들의 유학생활 동안 몇 번이나 미국을 오갔다. 손자는 유치원 때 공부를 마친 아빠를 딸 돌아와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지금 생각해도 그 아이와 나는 초등학교 3학년까지 거의 같이 행동했다. 출근길에 학교까지 태워다 주고 오후에는 데리러 갈 때가 많았다. 일찍 끝나면 같이 먹으러 다니고 음악학원에 가고 숙제도 하는 등 정신 없이 지냈는데, 손자가 아들보다 더 사랑스러웠다. 그러다 손자가 초등학교 3학년이 되자 온 가족이 미국으로 이주했다.

그 아이는 지금 고등학교 2학년이다. 아이가 크면서 점점 거리감이 생기고 아이들이 어른스러워지며 서먹해짐을 느낄 때 그 섭섭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너무나 당연하고 그만큼 성숙한 것이 오히려 대견할 따름이다.

손자들은 물론 아들과 멀어지면서 딸이 없는 나는 며느리에게 정을 주게 되었으나 이것도 허사인 것 같은 외로움이 몰려왔다. 처음에는 우울해지고 자꾸 울음이 복받쳐 올라 몰래 울기도 했다. 그러다가 정신이 번쩍 들며 이러면 안 되는데 싶어 바쁘게 살며 여기저기 모임에 나가기 시작했다. 봉사 모임, 친목 모임, 기도 모임, 성경공부 모임에 나가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외로움은 노인들의 공통된 운명이고 고통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분명 외로움은 노인들만이 갖는 축복이기도 하다. 경제적으로 어렵거나 돌봐야 할 환자나 어린아이들을 책임지고 있으면 외롭거나 병 날 새가 없다. 그래서 외로운 노인은 축복받은 것이다.

내가 결혼했을 때 시어머니는 60대 중반이셨고 엄마를 일찍 여윈 손녀를 키우고 계셨다. 그 당시 손녀(나한테는 조카딸)는 초등학교 1학년이었다. 시어머니는 몸이 약한 편이셨는데 늘 입버릇처럼 “내가 저것을 초등학교는 졸업시키고 죽어야 할 텐데.” 하셨다.

나는 속으로 문제가 없을 것이라 생각했고 역시 초등학교를 무사히 졸업했다. 그 후에도 “중학교 졸업하는 것은 봐야지.” 또는 “고등학교 졸업만 시키면 소원이 없겠다.” 하시더니 드디어 대학생 손녀를 보셨다. 대학원까지 무사히 끝내고 좋은 집안으로 시집 보내며 기뻐하셨는데 결혼식장에 참석하셔서는 눈물까지 흘리셨다. 그때까지 바깥출입도 하시고 집안일도 돌보셨는데 그 귀한 손녀를 시집 보내더니 그만 몸져누우셨다.

이 아이는 내가 키워야 한다는 책임감에서 비롯된 긴장이 손녀의 결혼으로 풀렸기 때문이다. 그러다 그 손녀가 아들을 낳았다. 누운 채 중 손자를 품에 안아보시고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표정을 지으셨는데 지금도 그 얼굴을 잊을 수 없다.  그 아이가 잘 자라는 것을 보고 돌아가셨다. 당신 삶의 버팀목이었던 손녀가 한집안의 맏며느리로 아들까지 낳아 자리잡는 것을 보고 안도와 함께 살 힘이 다 빠지신 것이리라.

모두가 이 손녀에게 “너는 할머니께 감사해야 되.” 하지만, 한편 이 손녀가 할머니를 기쁘게 해드리는 삶의 원천이었고 외로울 틈도 없게 만든 공신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것은 원해서 된 것이 아니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 외롭지 않게 노후를 보낼 수 있게 해준 것이다. 사람은 마지막 순간까지 삶의 목적과 의미가 있어야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 심지어 누구를 몹시 미워하고 원망하는 일이라도 있어야 그 힘으로 살아가는 것 같다.

우리 어머니 시대만 하더라도 평생을 살림 돌보고 손자 손녀 기르며, 농촌에서는 농사일까지 거들면 외로운 새 없이 현역으로 사셨다. 그러나 지금은 사는 방법이 많이 달라져서 빨래하고 풀 먹이고 다듬는 따위의 일은 다 없어졌다. 청소나 빨래는 기계가 대신 하게 되었고 핵가족이 되고 나니 노인들이 손자 돌볼 일도 거의 없게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생각해 보면 아들딸들이 부모를 불편하게 하고 아이들을 할머니에게 맡기고 어디론가 떠나버려 그 손자들이 불쌍해 돌보며 사는 분들은 마음 고생이야 하겠지만 외로울 겨를이 없을 것이다 외로움은 사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외로움은 스스로 해결해야지 다른 사람에게 의존해서는 안 된다. 동정 받으려 하고 노인성 어리광이나 투정을 부리며 늘 어딘가 아프다고 엄살을 피우는 것은 더더욱 좋은 방법이 아니다. 처음에는 관심을 끌지 모르지만 오래 계속되면 무관심해져 정작 도우미가 필요할 때 외면당하게 된다. 그래서 남에게 폐 끼치지 말고 스스로 외롭지 않게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

근년에 와서는 동적인 취미를 찾아 삶의 기쁨을 얻기도 하고 정적인 취미로 보람을 찾기도 한다. 활동적인 것은 주로 스포츠다.  골프나 등산, 수영 걷기를 하며 건강 춤을 배우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정적인 사람들, 곧 다리나 허리가 불편한 사람들은 뜨개질, 그림 그리기, 음악 감상, 독서, 화투놀이, 바둑, 마작, 카드 놀이를 하며 외로움을 달래기도 한다. 이 외에 어두운 곳을 들여다보며 도움이 필요한 곳을 찾아 다니는 일도 있다.

나는 평생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일만 해왔기 때문에 70이 넘었어도 가르치는 봉사를 할까 한다. 2년 전 탈북 청소년들에게 잠시 영어 기초를 가르치며 우리 사회에 적응 할 수 있도록 일반교양, 풍습, 언어(사투리) 교정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아이들이 아주 좋아하고 신기해했다. 이 일은 정신과 육신이 건강한 동안 계속하고 싶다.

이것보다 더 하고 싶은 것은, 어렵겠지만 몇몇 뜻이 맞는 사람들과 ‘실버 합주단’ 이나 ‘실버 연극단’을 만드는 일이다. 본격적인 연극단이 아니더라도 늙은이들끼리 성경 내용을 골라 한 주제를 20분이나 30분짜리 연극으로 만들어 성탄절이나 부활절 때는 물론 수시로 노인대학과 오름회에서 발표하면 하는 사람이나 보는 사람 모두에게 재미 있을 것이다.

본당 여름 캠프에서 ‘모세와 십계명’이라는 구역반 대항 연극 경연을 벌여 일등을 한 경험이 있다. 나는 손전등을 양손에 켜 들고 번쩍이며 야훼 하느님의 상징인 떨기나무 역할을 했다. 광야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섬기는 것을 조금 코믹하게 하기 위해 울긋불긋한 수건을 모아 머리에 주렁주렁 매단 무당을 급조했는데, 그 역을 맡은 분이 껑충껑충 뛰어오르며 무당 춤을 잘 추어 강당에 모인 교우들이 박장대소를 했다.

늙을수록 용기를 내어 무엇인가를 하며 움츠리지 말고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그래야 신나게 노후를 보낼 수 있다.

 

 

유머 감각을 잃지 말고 밝게 살자

나이 들면 점잖아야 하고 구차스럽게 보이지 않는 게 좋다. 그러나 유머 감각까지 잃어버리거나 자제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선배 교수 한 분이 늘 우스갯소리를 하며 흉내도 잘 내어 후배들을 곧잘 웃기곤 했다. 그분의 형님 내외분도 잉꼬부부로 소문난 교수 커플이었다.

그런데 40대에 부인을 먼저 보내고 쓸쓸히 살다가 50이 넘어 재혼을 했다. 동생 집에서 축하 파티를 하며 음악을 틀어놓자 형님이 새 형수님과 어찌나 다정하게 춤을 추던지 동생이 행복해하는 형님을 보며 기뻐서 입을 헤벌리고(내 표현임) 보고 있었다.

경상도 출신 부인이 가까이 다가와 “그래 부럽소, 마 내도 죽어줄까?” 하자 선배님이 “웬 복에.” 하고 대꾸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후배들이 발을 구르며 웃었다.

비싼 차를 타고 다니는 부자 친구가 차가 너무 더러워 물걸레를 들고 나와 닦았더니 젊은 여자가 예쁜 소형차에서 내리면서 힐끗 쳐다보며 “아줌마, 그 차 끝나면 내 차 좀 닦아주세요.” 하더란다. 이 친구 대답이 “나는 작은 차는 안 닦습네다.” 하고 웃었더니 젊은 여자가 고개를 갸우뚱했다고 한다.

노인들이 많이 서 있는데도 지하철 노약자석에 한 젊은이가 ‘졸지도’ 않고 앉아 있었다. 서 있는 노인들이 그에게 눈총을 주고 있는데 그 젊은이는 목적지에 가까이 오자 벌떡 일어나 내리려 했다. 이때 한 노인이 젊은이를 아래 위로 훑어보며 “어! 장애인이 아니네. 그럼 문맹인가?” 하고 말했다.

나이 먹어도 유머 감각을 지니고 있으면 삶이 밝고 재미있어 젊은이도 함께하게 된다.

가끔 아이들(30대 후반이나 40대 초반)이 노래방에 같아 가지고 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좀 피곤하더라도 따라 나서면 어떨까. 이때 사양하면 다시는 같이 가자고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우리 어머니도 다 되었구나.’ 하고 생각하게 된다.

아이들이 즐겁게 노래하면 흥얼흥얼 따라 부르기도 하고 흥이 나서 몸짓을 하며 손을 내밀면 같이 일어나 비슷하게 몸을 놀리기도 한다.

때로는 흘러간 노래나 학생 때 불렀던 노래를 신나게 부르기도 한다. 영화 주제가도 부르고 로큰롤도 부르고. 아이들이 신기해하며 ‘어머니도 젊어서 노래 많이 불렀네!’ 한다. 어느 시대 젊은이나 마찬가지임을 서로 깨닫는 계기가 된다.

우리도 소년 소녀 시절이 있었고 열정이 용솟음치고 흥과 끼가 넘치던 젊은 시절이 있었음을 이들은 왜 모르는지. 하기야 이런 곳에라도 오지 않으면 우리 자신도 잊어 버리고 있으니까. 우리도 비틀즈를 좋아했고 엘비스 프레슬리, 도리스 데이, 팻 분, 프랭크 시나트라를 좋아했다.

이렇게 옛 생각을 하다 보면 내 안에 숨어 있던 재주와 소질과 가능성을 찾아 새롭게 도전해 봐야겠다는 마음이 일어난다. 같이 합창하며 화음도 넣어보고 돌림 노래도 해보면 매우 즐겁다.

2, 3년 전에 제주도에서 각 지방 교구 여성단체 임원들이 모여 회의를 한 적이 있다. 회의가 끝나고 주교님이 오셔서 미사를 드렸는데 그날은 주교임 생신이었다.

미사 후 교우들이 ‘사랑해 당신을’이라는 노래를 ‘사랑해 주교님’ 으로 개사해 불러드렸는데 거기에 동참한 서울 교구 임원들이 요새 아이들이 하듯이 손을 머리에 올리며 하트(심장 모양)를 그렸다.

제대 위의 주교님 눈이 둥그래지자 교우들도 처음에는 놀라는 듯했으나 모두 따라 했다. 나이 든 교우들의 애교였고 아주 정답게 보였다.

‘우리 나이가 몇인데!’ 하며 무엇이든 사양하며 점잔 뺄 필요가 없다. 나이가 70이나 80이 된 분들에게 물어보라. 마음은 다 30대 때와 같다고 할 것이다. 나도 어느 부분, 아니 많은 부분이 그렇다.

그러나 30대 때와 다른 점은 어떻게 하면 사랑 받고 존경 받는 노인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를 골똘히 생각하게 된 것이다.

나는 모두를 유치하고 한심하다면 안 본다는 텔레비전 코미디 프로그램을 열심히 본다. 코미디를 보다가 ‘와~~’ 하고 웃을 때가 많다. 어디서 그렇게 활짝 웃을 수 있겠는가!

미국에서 출생한 손녀의 출생증명서를 들고 출생신고를 하려고 동사무소에 갔다. 동네라 화장도 안 하고 옷도 집에 입던 대로 갔다.

동사무소 직원이 출생증명서를 보면서 “주소가 어디에요?” 하고 묻길래 “여기 셋째 줄에 있죠.” 하고 손가락으로 짚으며 말했다.

“아니, 집에서 낳았어요?”

“아뇨. 병원에서 낳았어요.”

“그럼 병원 이름과 주소를 쓰세요.” 하고 동사무소 직원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 밑에 있지 않아요?” 하고 상냥하게 대답했더니 한참 들여다보다가 “어디 있어요? 없는데, 똑똑히 알고 다니세요.” 하길래 나는 화가 났다.

‘응! 내가 노인이라고 얕봐?’ 하는 장난기가 발동했다. 일부러 혀를 심하게 굴리며 미국 명원 이름과 주소를 말했다. 얼굴을 딱 쳐다보며 “할머니, 영어 잘하시네요.” 했다. 나는 의기양양하게 “천만에요.” 하고 대답했더니 그때부터 낯간지러울 정도로 공손해졌다. 사인을 하라고 해서 보통 때와 같이 한자로 내 이름을 썼다.

“이이고, 한자도 잘 쓰시네요.”

“아! 이건 중국말인데요.”

어리둥절해하는 직원을 뒤로하고 돌아오며 나는 반성했다. 옷도 단정히 입고 얼굴도 다듬고 머리도 빗고 와야 했는데…. 나만 30대 같은 기분이고 나만 최고학부를 나왔으면 뭘 하나. 젊은 사람들 눈에는 영어도 모르고 한자도 모르는 할머니처럼 보이는데… 머리를 쓰다듬으며 돌아왔다.

그 후로는 누구와 만날 일이 있을 때마다 엷게 화장도 하고 머리도 단정하게 손질하며 옷차림도 마음 쓰게 되었다. 노인 취급 받지 않고 할머니 소리 듣기 싫은 사람은 더더욱 깔끔하게 보일 필요가 있다. 이 밖에도 나이 들면 조심할 일이 많다.

 

  • 음식을 천천히 먹는다. 기도로 넘어가 식사 중에 심하게 기침하는 일이 없도록 한다. 항상 냅킨이나 손수건을 들고 한 번 떠먹으면 입언저리를 닦는다. 입이 지저분해지기 때문이다.
  • 늙었다고 아무렇게나 앉지 말고 무릎을 붙이고 바로 앉는다.
  • 자식이나 남의 일에 끼어들지 않으며 일단 다름 사람에게 일을 맡겼으면 믿어주어야 나도 편하고 상대방도 일을 책임감 있게 한다.
  • 입학할 때 학교 선택이나 결혼과 취직 같은, 한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는 일에는 자식이 자문을 구하지 않는 한 끼어들지 않는다. ‘어른 말을 들어.’ 하는 것은 무책임하다.

 

 

가족끼리도, 젊은이한테도 예의를 지키자

나는 아들만 둘을 두었다. 큰아들은 미국 동남쪽 끝자락 플로리다에서도 또 남쪽 끝인 마이애미에 산다. 우리와는 완전히 밤낮이 뒤바뀐 곳이다. 둘째는 대덕에 있고 그 가족은 미국 뉴저지에 있다.

그 둘째가 한 달에 두 번 정도 부모를 보러 온다. 날이 갈수록 둘째를 기다리게 된다. 둘째가 오는 주말에는 잘 먹는 것을 몇 가지 장만한다. 남편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번 주말에는 맛있는 것 좀 먹겠구먼!” 이라고 한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2인분 만드는 것보다 3~4인분 하는 게 훨씬 맛이 있어 한 식구라도 더 있을 때 특별 요리를 하게 되는데, 아무리 농담이라도 아버지가 아들 때문에 얻어먹는다는 투의 말을 들으면 민망하다.

더욱이 큰아들은 식도락가여서 아들이 온다고 하면 더 부산해진다. 1년에 한두 번 정도니까, 또 오랜만에 한국음식을 먹으니까 그렇게 잘 먹을 수가 없다. 음식 하기가 힘들고 꾀도 나지만 그래도 아들이 온다고 하면 힘이 난다. 손님을 대접하듯 하게 되고 그러면 아이들도 무척 좋아한다.

가족도 손님처럼 대접하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한다. 늙었어도 내가 집에 하나밖에 없는 여성이니까 머리도 깨끗이 손질하고 얼굴도 매만지고 옷도 깨끗이 색깔 맞추어 입고 맞이하면 서로 기분이 좋다. 특히 민감하게 반응하는 둘째는 “어머니, 아주 보기 좋아요.” 하고 웃으며 말을 건넨다.

“한식구인데 뭐, 있는 대로 먹지, 입던 대로 입고 있지.” 하며 무탈하게 대하면 더 친밀해질 수 있으나 역시 집안을 정리하고 깨끗이 단장하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한다. 오래간만에 보는 식구들끼리는 말도 가려 하고 가능하면 재미있고 다정한 말이 오가는 것이 즐겁다.

거북한 말이나 타일러야 할 말을 해야 할 때도 과격하지 않게 뾰족한 것도 둥글려서 말하도록 한다. 그래도 서로 마음을 다칠 때가 있다. “제 놈이 자식인데 내가 왜 할 말도 마음대로 못해!” 하며 큰소리치는 것은 오히려 결과가 좋지 않고 마음만 다치게 된다.

오래 전 며느리가 나를 섭섭하게 한 일 있다. 마음 같아서는 ‘뭐야? 네가 나에게 그럴 수 있니?’ 너는 그렇게 배웠냐?’ 며 따지고 싶었지만 침을 꿀꺽 삼키고 “애야, 뜨는 태양아! 너, 이리 좀 와봐라.” 했더니 눈치를 살금살금 보며 다가왔다.

“애야! 너는 뜨는 태양이지 않니? 그러니 이 지는 태양 좀 봐주라, 응?” 하고 말하자 며늘아기가 금방 울상을 하며 “어머니, 잘못했어요. 제 생각이 짧았어요!” 해서 서로 웃고 끝낸 적이 있다.

얼마 후 또 비슷한 일이 생겨 이번에는 좀 화가 난 얼굴을 하고 언성을 약간 높여 말했다.

“얘, 뜨는 태양도 뜨는 태양 나름이고 지는 태양도 지는 태양 나름이다. 뜨는 태양도 떠오르자마자 구름이 덮이면 컴컴해질 수 있고 지는 태양도 경우에 따라 아름다운 노을이 되어 강렬한 감동을 줄 때가 있어. 무슨 말인지 알겠니?”

자식을 훈계하거나 야단칠 때 과격하지 않으면서도 효과를 볼 수 있도록 평소에 연습하고 훈련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또 며느리에게 할 말이 있을 때 아들도 불러놓고 함께 듣게 하는 것이 정확하고 편하다. 한 사람한테만 얘기하면 말이 옮겨 갈 때 보태지거나 빠져서 본마음이 잘 못 전해져 예기치 않은 오해가 생기기도 한다.

말이란 꼭 해야 할 때 당사자들을 불러놓고 해야지 몇 다리 건너서 전해 듣게 되면 반드시 보태지거나 빠져 전혀 다른 뜻으로 전해지는 예가 자주 있다.  이것은 가족끼리 더 조심해야 할 일이다.

텔레비전 드라마를 보면 가끔 아이까지 낳아 기르는 성인 아들을 아버지가 이 자식 저 자식 하며 나무라는 장면이 나온다. 이것은 매우 잘못된 것으로 대중문화를 이끌어 가는 텔레비전에서는 특히 삼가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어머니나 할머니를 보면 성인이 되어 자식까지 둔 아들한테는 “자네 왔는가?”, “저녁 안 먹었으면 자시게.” 하며 얘나 쟤와 같은 반말을 하지 않았다. 나도 말을 고쳐야지 하면서 못 고치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화가 나도 이 자식, 저 자식은 하지 않는다. ‘애비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좋겠다!’ 정도로 말한다.

아들의 친구나 학교 후배라도 성인이 되면 존댓말을 하는 것이 옳다. 나는 의예과에서 꽤 오랫동안 강의했기 때문에 그때 그 학생들이 중견 의사가 되어 병원에서 환자와 의사로 마주칠 때가 있다. 반갑게 인사하지만 말은 깍듯이 존대한다.

얘기가 나온 김에 아름다운 우리말이 자꾸 없어져 가고 변형되는 아쉬움을 말해 보자. 40~50년 전만 해도 설 때 나이 드신 어른들이 계신 집에는 일가친척과 손님들이 세배하러 많이 왔다. 안방에서 들리는 소리는 명확히 차등이 있어 밖에서 듣기만 해도 어떤 분이 오셨는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두런두런 들리는 말이 아름다웠다.

“아이고, 어서 오너라. 춥지?”

“뭣 좀 먹었냐? 아이고, 좀 먹어라.”

이것은 나이가 적은 손아랫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어서 오시게나. 뭣 좀 드셨는가? 뭘 좀 드시게.”

이것은 자기보다 나이 많은 조카에게 하는 말이다.

“아이고, 어서 오셔요. 떡국 드셨나요? 따뜻한 국물이라도 좀 드셔야지요!”

이것은 나이 어린 아저씨에게 하는 존댓말이다.

이와 같은 예의를 옛날처럼 꼭 지키라고 강요할 수는 없지만 이런 풍습을 보고 자란 마지막 세대로서 이제 노년이 된 우리들이라도 깍듯이 예의를 지킴으로써 존경 받는 노인이 되고 싶다.

어머니는 유행하는 옷감으로 옷을 해드리면 아끼느라 옷장 깊숙이 넣어두고 입지 않으셨다. 2~3년 후 새로운 유행이 시작되면 그 옷을 꺼내 입으셨다. 유행하는 새 옷은 아까워서 못 입고 뒀다가 유행이 지난 뒤에 입어서 내가 질색을 하면 면박주지 말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새 옷, 새 신발, 새 가방 등 새것을 사드리면 마음에 혹시 안 들더라도 좋아하면서 바로 쓰고 입고 하는 것이 자식에 대한 예의다. “그건 왜 사왔어, 돈 없애고.” 하지도 말고, 그렇다고 보는 것마다 부러워하며 사주었으면 하지도 말고 안 사주면 그만, 사다 주면 고맙게 받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나이 들어 크게 두 유형으로 살아가는 선배들을 본다. 하나는 노인이 되어도 항상 자신 있게 앞장서서 후배들을 이끌며 진취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다른 하나는 젊은 이를 앞세우고 그가 자신 있게 나설 수 있도록 뒤에서 넌저시 밀어주며 밑거름이 되고자 하는 삶이다.

나는 후자이기를 바란다. 조금이라도 여력이 있을 때 뒤에서 지켜보며 훌륭히 일하는 것을 보고 싶다. 이것이 어른들이 할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끝까지 집안 주인이기보다 며느리에게 물려주고 뒤로 물러나 후원하고 응원하는 시어머니가 되고 싶다. 이것이 어른다움이고 질서 유지에도 도움이 된다. 이러한 것도 젊은 사람에 대한 예의다.

“요새 사람들은 왜 그런지 몰라. 어리고 철이 없고 말세야, 말세.” 어른들이 모이면 푸념처럼 하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이와 같은 얘기는 조신실록에도 나온다고 하는데, 서양에서도 로마 제국 시대에 비슷한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한다.

그런데도 세상은 망하기는커녕 더 좋아지고 있지 않은가? 이것은 옛날의 요새 사람이나 지금의 요즘 아이들 문제가 아니라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이 나이 들면 세상을 보는 시야가 좁아지고 이해력이 떨어지며 자기 집념이 강해지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나이 들수록 젊은 세대를 이해하고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것도 큰 의미에서 젊은이에 대한 예의다.

 

 

노년기에 둔해지는 감각을 알아차리고 대비하자

나는 다른 친구들보다 비교적 일찍 청각이 둔해진 것 같다. 외할아버지가 그랬고 어머니도 그랬다. 내가 어렸을 때 외삼촌들이 할아버지와 얘기하려면 할아버지 귀에 대고 큰소리로 말하곤 해 온 식구가 방해를 받았다. 그러나 그때는 늙으면 그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여겨 당사자도 미안하다는 생각을 아예 하지 않았고 주위에서도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어머니가 75세를 넘기자 “응?”, “뭐라고?” 하며 되묻는 일이 잦아지니까 짜증스러웠다. 머리로는 ‘짜증내면 안 되지.’ 하면서도 가슴은 그렇게 하지 못해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어머니와 하지 않게 되고 무엇을 자꾸 물으면 “몰라도 됩니다.” 하고 퉁명스럽게 대답하곤 했다.

그러면서 나는 다짐했다. ‘청각 때문에 아이들이나 다른 사람에게 누를 끼치지 말자. 궁금해도 참고 되묻지 말자. 텔레비전 소리를 내 청각에 맞추어 높이지 말자.’ 그런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뭐라고?” 하는 소리가 자꾸 나오고 회의 때 말을 알아듣기 어려워 어쩔 수 없이 이비인후과를 찾아갔다.

의사는 청각이 약간 떨어졌으니 보청기를 끼고 청각에 자극도 주며 익숙해지도록 훈련하는 것이 좋겠다는 진단과 함께 처방했다.  자존심도 상하고 귀를 마개로 막는 것처럼 답답하기도 해 보청기를 하지 않으려 했으나 어머니 때문에 내가 괴로웠던 일과 다른 식구들이 나 때문에 괴로울 것이라는 생각에 보청기를 쓰기로 했다. 훈련기간이 어느 정도 지나고 나니 지금은 잘 들리고 편해졌다.

그러고 나서 보니 주위 친구들과 아는 사람들 가운데 청각이 나 정도이거나 더 심하게 둔해진 사람들이 꽤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 남에게 폐를 끼지는 줄은 모르는 것 같다.

예사로 “뭐라고?”, “다시 한번 말해 봐.” 한 뒤 또 “응?” 하고 다시 말해 주기를 청하는 표정을 짓는다. 내가 보청기를 보여주며 이 덕을 많이 보고 있다고 하면 “왜? 너, 잘 듣지 않니?” 하고 말한다.

청각이 둔해진 사람과 이야기할 때는 소리를 크게 하는 것보다 정확한 발음으로 또박또박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 청각장애의 시초는 안 들린다는 것이 아니라 무슨 말인지 정확히 듣지 못한다는 표현이 옳다. 강의나 토론을 할 때 음성 톤을 조금 높이고 정확한 발음으로 또박또박 말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대중 앞에서 말할 때 옆 사람과 대화하듯 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특히 성직자들이 평신도를 상대로 설교나 강론을 할 때는 노년층이 많으므로 더더욱 잘 알아듣게 말해야 한다. 목사님들은 너무 큰소리로 힘을 주어 말하는 경향이 있고 신부님들 중에는 너무 조용조용 말씀하시는 분이 꽤 많은데 심지어는 감동적인 말을 할 때 속삭이듯 하는 분도 있다. 그러면 청각이 둔한 사람은 답답하기만 하다. 그러나 절대 불평하지 말고 듣기를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보청기를 끼고라도 들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식구들과 텔레비전을 볼 때 노인들이 자신의 청력에 맞추어 음향조절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아니면 자기 방에서 따로 시청하는 것이 좋다.

보청기는 안경보다 훨씬 불편하긴 하지만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자기가 잘 못 듣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사람들이 있다. 가족이나 친구들이 친절하게 이해해 주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이야기가 ‘속삭이듯 말하고 입속에서 웅얼웅얼하는 것처럼’ 들려 짜증이 나면 바로 내 귀에 문제가 있음을 알아차려야 한다.

나이가 들면 청각뿐 아니라 손놀림도 둔해지고, 일어나고 앉고 걷고 하는 모든 몸놀림이 둔해지기 때문에 무엇을 하든 시간을 그전보다 넉넉하게 잡아야 젊은 사람들과 비슷하게 할 수 있다. 단체여행에서 많이 경험하는 일이지만, 젊은이들보다 먼저 일어나 화장하고 먼저 식당에 가 식사하며 젊은이들을 기다리는 것이 좋다.

50대 때 몇몇 70대와 함께 해외여행을 한 적이 있다. 그분들이 모두 서둘러서 극성스럽다고 생각했는데 이제야 그분들을 이해하게 되었다.

균형 감각도 둔해졌다. 눈 탓도 있기는 하나 계단을 오르내릴 때 높낮이가 잘 구별되지 않고 평지도 가끔 술 취한 사람처럼 높아 보였다 낮아 보였다 한다. 그런데도 젊어 보이려고 어정거리지 않고 똑바로 서서 시원시원하게 걷다가 그만 평지에서 넘어져 광대뼈가 부서지는 큰 부상으로 티타늄 금속을 두 개나 볼에 넣고 광대뼈를 만드는 수술을 받았다.

어머니도 91세에 넘어져 그 후유증으로 돌아가셨다. 얼마 전 건강하던 남자 대학동창이 느닷없이 지하철 계단에서 넘어져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죽었다. 나이 들면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계단을 오르내릴 때는 손잡이를 잡을 것이며, 필요하면 지팡이를 짚고 험한 길이나 밤길은 되도록 혼자 걷지 말고 함께 다니며 서로 손을 잡아주며 의지하자.

두뇌 회전과 감정도 둔해진다. 슬픈 소식을 들어도 금방 들었을 때보다 몇 시간 후, 아니 하루나 이틀 후에 몹시 슬퍼하며 우는 어머니를 본 기억이 있다. 노여운 일을 겪으면 젊었을 때는 바로 화를 내셨는데 80 넘고 90이 가까워지니까 조금 시간이 지난 후에 화를 내며 서운해하셨다. 감정과 두뇌 회전이 무뎌지는 것을 막기 위해 잡문이라도 글이나 일기를 쓰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전문가들은 권한다. 그것도 컴퓨터로 치는 것이 아니라 손으로 쓰며 소리 내어 중얼거리라고 한다.

살아 있는 동안은 모든 기능이 둔화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고 내가 둔화되었음을 알아차리고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아야 한다. 이와 같은 일은 나한테는 절대 오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창피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예외 없이 오고 있다.

늙어서 다가오는 일들을 당황해 하거나 창피해하지 말고 순응하며 받아들이자. ‘텔레비전 소리 좀 크게 해’, ‘좀 천천히 걸어’, ‘그게 뭐 그리 화낼 일이야?’, ‘응? 다시 말해 봐’, ‘약속시간, 그것 좀 늦어도 돼!’  같은 말은 되도록 하지 않는다.

 

 

젊은이들이 하는 것을 거부하지 말고 받아들이자

나는 어려서는 중국 음식을 가장 좋아했다. 아버지가 젊어서 중국에 계셨기 때문에 중국 음식을 잘 알아 다양한 중국 음식을 시켜 많은 사람과 어울려 먹으며 자랐다.

그러다 고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양식을 좋아했고 어른이 되면서 일식을 좋아하게 되었다. 지금은 무엇이나 벌겋게 고춧가루로 범벅이 된 것이 아닌, 아주 깔끔한 한식이 좋다.

그러다 보니 손자들까지 3대가 외식을 나가면 음식을 다 같이 맞추어 먹기가 힘들다. 아이들은 피자, 햄버거, 켄터키치킨, 무슨 웰빙 따위를 좋아하는데 나이 든 사람들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가끔 하는 외식에서 뿔뿔이 갈라지는 것도 옳지 않다. 처음에는 입에 맞지 않더라도 같이 몇 번 먹어보면 익숙해질 수 있으므로 아이들과 온 식구가 함께 먹는 것이 좋다.

내가 처음 카레라이스를 먹은 것은 초등학교 때였던 것 같다. 내 기억으로는 사촌 오빠 언니들이 먹기 시작했고 우리들도 따라 먹었다. 그때 할아버지 할머니는 카레 냄새 때문에 싫어하셨고 결국 드시는 것을 보지 못하고 헤어졌다.

그 당시 30대였던 어머니도 처음에는 싫어했으나 여러 번 드시면서 좋아하게 되어 나중에는 “반찬도 없는데 카레나 해먹자.” 하시며 자주 만들어 주어 오히려 우리가 질릴 지역이었다. 식성은 고정되어 있지 않으므로 익숙해지면 좋아하게 된다.

제법 첨단을 가는 할머니라고 자처하는 나도 닭고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 잘 사먹지 않는다. 피자도 화덕에서 구운 것이 아니면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손자들이 다니러 오거나 우리 내외가 아이들을 만나러 미국에 가면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아무것이나 잘 먹으며 같이 어울린다. 노인들이 맞추어 주지 않으면 아이들이나 그 부모들이 얼마나 난처하고 불편하겠는가!

먹는 것뿐 아니라 휴가를 갈 때도 아이들이 원할 때는 따라나서는 것이 좋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면 약간의 도움을 주는 재미도 있다. 우리 내외는 스키를 탈 줄 모르지만 함께 스키장에 가 아이도 봐주고 눈썰매도 함께 타며 젊은 스키어들의 열기에 휩싸여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밤에 스키장에서 산책도 하며 식구들이 함께 밤 설경을 보는 재미와 그곳 특산물 야식을 먹는 재미도 괜찮다.

또 바다로 휴가를 가면 우리는 바비큐 담당으로 점심을 준비해 온 식구가 즐겁게 먹고 바다에서 지낸다. 나는 중고등학교 때 수영선수였기 때문에  남편, 아이들, 손자들(5명)까지 수영을 가르치고 놀았으나 지금은 물에 들어가는 것을 싫어한다. 평생 물을 싫어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것도 나이 탓인가 보다. 그러마 손자들이 원하면 기꺼이 물에 들어가 함께 논다.

만화영화나 아이들 취향의 영화를 보러 영화관에도 가고 여러 가지 놀이를 배우며 같이하는 것도 가족이 한데 어울리는 데 도움이 된다. ‘난 그런 것 못해. 너희끼리나 해라.’ 든지 ‘그게 뭐가 재미있다고.’ 와 같은 말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아직도 권위적인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남자 후배는 왜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맞추어 살아야 하느냐고 언짢아해서 아이들을 달래 억지로 할아버지 할머니 의견에 맞추어 살고 있다며 불편해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우리가 사는 이야기를 듣고 꿈같다고까지 표현하는 효자 후배에게 나는 조금 일찍 변하거나 조금 늦게 변하는 경우일 뿐이니 당신이 가장 높은 어른이 되었을 때 바꾸면 된다고 했다.

어쨌든 물 흐르듯 흘러가며 주변에 맞추어 살아가는 것이 더 편안하고 자연스럽다.

이와 같이 잘 어울려 살았어도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면 점점 멀어져 서운할 때가 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하면 고2나 고3일 때 한창 그럴 나이이고 멀리 떨어져 살면 더더욱 그렇다. 그것은 철이 들고 어른이 되어간다는 뜻이므로 대견하게 생각하며 예뻐해야 할 일이다.

젊은 사람들의 제사에 대한 의견을 말하고 싶다. 나는 제사를 지내지 않는 십에서 자라 제사를 지내지 않는 집으로 시집갔기 때문에 제사에 대해 개인적인 의견을 제시하거나 비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여러 남녀 친구들한테서 다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나는 제사를 모시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데, 그 격식이 좀 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가까운 친구 얘기다. 시아버님이 살아 계실 때 지나가시다 자주 둘째 며느리인 내 친구 집에 “아가! 네가 끓여주는 커피가 먹고 싶어 들렀다. 폐가 되냐?” 하셨다 한다.  며느리가 기쁜 마음으로 정성껏 커피를 끓이고 맛있는 케이크나 과자를 곁들여 내놓으면, 시아버님은 “네 커피는 각별해.” 하며 맛있게 마시고 가시곤 했다.

시아버님이 돌아가신 후 사정이 있어 둘째가 제사를 모셨는데, 며느리는 제사상에 커피도 놓고 연한 미색과 연두색으로 장식한 케이크도 올려 놓았다. 처음에는 남편을 비롯해 손위 시누님이나 어른들이 거부감을 느끼는 듯했으나 해가 거듭할수록 모두 좋게 생각하게 되었고, 제사가 끝나면 케이크와 커피를 맛있게 먹고 돌아갔다.

이 예에서 보듯이 제사 음식도 변해야 할 것 같다. 돌아가신 분도 전통 제사 음식을 좋아하시지 않는 경우가 많다. 우리 남편은 스카치위스키를 제일 좋아한다. 지금 젊은이들이 조상이 되었을 때는 피자나 햄버거를 차려야 하지 않을까?

제사 음식을 차리는 데 중요한 점이 두 가지 있다. 첫째는 정성이 제일이고 둘째는 남은 음식을 후손들이 맛있게 먹는 게 중요하다. 전통 제사 음식은 요새 아이들이 잘 먹지 않는다고 한다.

내 후배 남자 교수는 아들만 다섯 있는 집 장남인데 동생들과 어머니가 부산에 계셔서 1년에 두 번은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내려갔다고 한다.

KTX가 생기기 전이라 부산까지 가는 일이 고생스러워 몇 년 계속하다가 동생들에게 거꾸로 서울로 오는 게 길이 덜 막히니 어머니를 모시고 올라오도록 했다. 그래서 어머니가 계시는 곳에서 제사를 모셔야 한다던 동생들이 고집을 꺾고 결국 서울 장남 집에서 제사를 모셨다고 한다. 동생들은 이렇게 고생스러운지 몰랐다면서 앞으로는 격년으로 서울과 부산에서 모시기로 합의했다.

어디서건 정성을 다하면 되는 것이 아닐까? 형식에 매이기에 앞서 기쁘게 모시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할아버지 할머니 호칭을 자랑스러워하자

아버지가 50세가 되었을 때, 맏딸인 내가 아들을 낳아 할아버지가 되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누구 할아버지 하는 호칭에 굉장히 어색해하고 거북해하셨다. 나는 56세에 할머니가 되었다. 나는 아버지와 달리 할머니라는 호칭이 그렇게 반갑고 기쁠 수가 없었다.

친구들 가운데 할머니 소리를 듣는 것이 싫다는 사람이 많은 데 놀랐다. 찬 친구는 시장에서 “할머니, 이거 사세요.”라는 가게 아주머니의 말에 화를 냈다고 한다. 그러면 할머니를 뭐라고 불러야 하느냐고 해서 더 화가 나 아무것도 사지 않고 돌아왔다고 한다.

시장에서 옷을 고르는데 30대 초반쯤 된 점원이 “언니, 이것이 잘 어울릴 것 같아요.” 하지 않는가. 그래서 화가 났다. “언니라니, 내가 어떻게 언니가 되느냐?” 하자 그 점원은 그래도 그렇게 불러주면 모두 좋아한다고 했다.

호칭만 ‘언니’면 젊어지는가? 나이로 보나 손자들은 보나 할머니가 당연하다. 늙음을 지칭하는 할머니라는 호칭을 안 듣고 회갑 잔치를 거부한다고 젊어지거나 젊어 보이지 않는다.

한 친척 오빠는 ‘회갑을 늙은이처럼 왜 하느냐며, 꼭 하려면 칠순이나 할까?’ 했는데 칠순까지 기다려 주지 않고 64세에 세상을 떠났다.

세상은 물 흐르듯 사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고 보기 좋다. 우리 내외는 아이들이 회갑연을 연다고 했을 때 말리지 않았다.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이 와서 기쁘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남편 친구 한 분은 우리 회갑연이 아주 좋았다면서 후배에게 ‘나도 내년에 회갑 잔치 해주게.’ 하며 그렇게 울었다고 한다. 그때 그분은 폐암을 앓고 있었고, 다음해 생일이 돌아오기 전에 회갑연을 열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평균 수명이 늘어났지만 모든 사람이 평균 수명을 누리는 것은 아니다. 때문에 남이 하는 대로, 풍습대로 편안히 살 일이다.

내가 하는 행동이 다 옳다는 얘기는 아니라는 전제 아래 몸에 좋다는 약이나 보조식품, 음식은 특별히 먹지 않는다. 입에서 맛있으면 먹고 아무리 몸에 좋다는 음식도 입에 맞지 않으면 먹지 않는다.

후배의 시어머님이 식물인간인 채 모든 생명 유지 장치를 써서 6년이 넘게 살고 계신다. 나는 생명과 직접 관련 있는 수술은 아니지만 큰 수술을 하면서 병원에서 생각했다. 언제든지 생명 유지 장치에 의존해야 살 수 있는 경우가 온다면 반드시 거부해야겠다고 다짐하고 아들과 남편에게 내 뜻을 전했다. 아들이 난처한 표정을 지어서 “이것은 유언이야.” 하고 못을 박았다.

치료를 할 수 없는 상태에서 그냥 생명만 유지하는 것은 효도도 인간 존엄도 아니다.

할머니 호칭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모두 젊게 살고 싶어하는 마음은 같다. 그러나 그 방법은 사람마다 다르다. 가령 외모에 신경이 쓰여 여기저기 조금씩 수술을 하고 요새 젊은이들이 입는 패션을 비슷하게 따라 하는 사람들이 있다. 70이 가까운 사람이 청바지와 청색 점퍼를 입으며 사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본다.

한편 나이 70에 무슨 화장을 하려 하고 그냥 다니는 사람, 옷도 아무렇게나 입고 다니는 것은 보기에 좋지 않다. 70대에 짙은 화장을 한 것도 민망하지만 엷은 화장을 하고 잘 손질한 옷을 색깔 맞추어 보기 좋게 입고 굽은 허리와 어깨를 자주 의식해 쭉 편 후 씩씩하고 활기차게 걸어보자. 젊어지는 기분이 든다.

‘아주머니, 멋쟁이세요.’ 보다 ‘할머니, 멋쟁이시네요.’ 가 더 듣기 좋다.

남자들도 나이 들수록 아무렇게나 입고 다니거나 편하다고 아무 곳이고 점퍼 차림으로 다니는 것보다 점잖은 곳에 갈 때는 옷 색깔에 맞추어 넥타이도 매고 바지 주름도 빳빳이 세우고 눈같이 흰 와이셔츠나 겉옷과 잘 어울리는 색깔의 셔츠를 입으면 저절로 자세를 바르게 하게 되고 걸음도 활기차진다. 따라서 젊어 보인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자랑할 일도 부끄러운 일도 아니며 자연에 순응하는 것이다.

10여 년 전 일이다. 고속버스를 타고 시골에 가는 길이었다. 반쯤 졸며 가다가 누가 버럭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정신을 차려보니 웬 할아버지가 “너는 어미 애비도 없느냐?” 하며 옆자리에 있는 아가씨를 야단치고 있었다. 금연으로 되어 있는 고속버스 안에서 노인이 계속 담배를 피우자 젊은 여자가 손을 내저으며 담배연기를 피해서 생긴 일이었다.

어미 애비도 없느냐는 호통을 듣고도 가만히 있는 아가씨를 향해 계속 어따 대고 손짓을 하느냐고 야단이다. 보다 못한 어느 신사가 금연 표지를 가리키며 “어르신, 여기서는 담배를 참으셔야 합니다.” 하며 공손하고 말하자 이제는 온 버스 승객을 상대로 더 큰소리로 야단을 치는 것이었다.

나이 들었다는 것만으로 권위와 준경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지하철에서 모두 줄을 길게 서서 승차권을 사고 있는데 당당하게 앞에 가서 무료승차권을 달라고 손을 내미는 노인을 보면 왜 질서를 안 지켜도 된다고 생각하는지 답답하다.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자리를 양보 받았을 때 ‘고맙다’ 또는 ‘미안하다’고 인사하는 노인은 반도 안 된다.

어린 사람에게, 심지어 손자 손녀한테도 미안하다, 고맙다, 잘못되었다라고 말할 수 있고 질서와 예의를 지키는 노인은 호칭과 상관없이 참 멋있고 젊어 보인다.

이런 노인들은 사랑하고 존경 받으며,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진다.

 

 

 

가슴으로 품어주는 실버!

 

젊은이들과 어울려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서로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젊은이들은 지혜와 경험에서 얻은 지식을 배우고

노인들은 현대 감각과 자기 표현법과

도전 정신을 배울 수 있다.

 

 

봉사하는 기쁨과 삶의 보람

어느 애처가 친구가 그만 일흔에 60대 부인을 먼저 보냈다. 부인은 병원에서도 확실한 진단을 못 내리는 우울증과 유사한 합병증으로 약 2년을 고생했다. 그 부인은 간병인도 싫고 집안일 도우미도 싫고 며느리 시중도 싫다고 해서 남편이 그 좋은 직장의 사장자리도 그만두고 부인 시중을 헌신적으로 들었다. 그런데 부인은 떠났다. 얼마나 허전했을까?

도저히 집에 있을 수 없다며 미국여행을 떠나 한 달을 헤매고 다니다 돌아왔다. 이제는 마음을 잡으려나 했더니 2, 3개월 있다고 또 유럽에 간다고 떠났다. 얼마 후에 돌아와 친구들이 이제는 마음 다잡고 독신생활에 익숙해지리라고 자주 만나 격려도 하고 함께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또 여행을 떠나 미국에서 두 달, 유럽에서 보름을 보내고 돌아와서는 진부령이다, 용평이다 국내에서 방황하기는 마찬가지다.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는 것이다. 부부가 같이 살다가 함께 사고를 당한다면 모를까 한날 한시에 같이 갈 수는 없지 않은가? 이 엄연한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낭비하며 떠도는 것이 참으로 딱하다.

이 친구는 종교가 없어 어디다 떼를 쓰고 원망할 곳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람이 살면서 혼자 서 있지 못할 만큼 지칠 때가 있다. 이럴 때 벽이나 나무에 기대거나 지팡이를 짚거나 무엇인가를 붙들고 버티다 보면 다시 힘을 얻어 걸을 수 있다.

몸과 마찬가지로 정신적으로도 지치고 외로워서 혼자 지탱할 수 없을 때도 있다. 정신적으로 기댈 수 있고 붙들 수 있으며 떼도 쓰고 원망도 할 수 있는 것이 종교이고 신앙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가다가 절망이라는 벽에 부딪히면 주저앉아 울거나 포기해 버리는 사람은 종교나 신앙이 없기 때문이다. 이때 그 절망의 벽을 신앙이라는 도구로 뚫고 나가거나 신앙의 사다리로 넘어간다면 다시 희망을 찾을 수 있다.

이 친구한테도 종교가 있었다면 허전함을 이겨내는 데 많은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한다. 더구나 같은 신앙을 가지고 비슷한 생각을 하는 교우들과 함께 봉사하며 바쁘게 보내는 보람된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얼마 남지 않은 삶을 그렇게 허송세월로 보내서야 되겠는가?

조금이라도 저축해서 돈이 없어 생명이 꺼져가는 사람들, 특히 어린이들을 돕고 그 외에도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돌봐야 한다. 그러면 기쁨이 온다. 봉사의 기쁨과 가슴 뿌듯함을 모르고 사는 사람은 공허하고 불행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방황하는 이 친구도 전문 산악인이라 할 만큼 학생 때부터 산을 올랐고 스키도 잘 탄다. 부모 없이 보모 손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을 일주일에 한 번씩 산에도 데리고 다니고 스키도 가르쳐 주며 아버지 사랑을 모르는 아이들에게 아버지, 할아버지 같은 사랑을 나눠주면 얼마나 보람 있는 일이겠는가? 이와 같은 후원자는 많을수록 좋다.

밖으로 방황하는 것은 낭비이고 허송세월이지만 자기에게 적합한 일이나 봉사를 찾아서 바쁘게 사는 것만이 빈 가슴을 충만함과 뿌듯함으로 꽉 채워줄 수 있다. 이와 같은 기쁨을 모르고 사는 것은 불행하다. 짝이 있고 행복하게 살 때부터 미리 이와 같은 삶을 살아야 외로움이 닥쳤을 때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생긴다.

그네도 앞으로 높이 올라가기 위해서는 뒤로 힘껏 굴러야 그 반동으로 높이 올라갈 수 있다. 앞으로 올라가는 것이 기쁨, 행복, 배부름이라면 뒤로 올라가는 것은 고통, 불행, 배고픔이리라. 그네가 뒤로 가야 앞으로 갈 수 있듯이 큰 고통을 겪은 사람일수록 큰 기쁨을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고통도 배고픔도 축복이다. 끼니를 거의 굶으며 사는 아이와 보통으로 먹고 사는 아이가 잔치에 초대받아 음식을 먹으면 굶주린 아이는 그렇지 않은 아이보다 훨씬 맛있어하고 포만감을 느끼며 행복해할 것이다.

나는 다른 사람보다 더 큰 저택에서 호사스럽게 살지는 않았지만 아이들이 건강하고 모범적으로 잘 자라 공부도 무사히 마치고 괜찮은 직장에서 일하며 결혼해 손자도 낳고 하여 매우 행복했다. 남편도 건강하고 직장에서 보람차게 일하며 승진도 했고 나도 내 일을 하며 모든 식구가 열심히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나만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보다 훨씬 나은 삶을 사는 친구도 가끔 이런저런 불평을 했지만 나는 학생 때 가정 문제나 경제적인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에 평범하고 안정된 삶이 행복하다고 느꼈고 감사하기만 했다. 그런데 나는 그처럼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에 행복이 찾아왔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이 행복을 혼자만 누리면 안 된다는 생각에 어려운 중고등학교 학생들에게 학비를 주기 시작했다. 가까운 사람들이 함께 동참해 장학회(밀알회)를 꽤 오래 계속했다. 동료 여교수들, 동네 미장원, 약국, 병원 주인들, 성당 교우들이 기꺼이 함께 해주었다. 오갈 데 없는 일곱 살짜리 아이를 집에 데려와 4년 동안 키운 적이 있는데 그대 난 너무 기쁘고 행복해 말할 수 없이 뿌듯했다.

행복할 때, 짝이 있을 때, 젊고 힘이 있을 때부터 봉사하기 시작하면 늙어서 홀로 되어도 방황하거나 우울증에 걸릴 틈이 없다.

 

 

현관문을 열어놓고 사는 마음

친구 어머니가 거동이 불편한 상태로 꽤 오래 혼자 사시다가 돌아가셨다. 물론 아들딸들이 버젓이 있었지만 폐 끼치는 것이 싫어서 집안일을 도와주는 사람과 단둘이 살았다. 하루 종일 집안에서 누워 지내려니 오죽 갑갑하고 사람이 그리웠겠는가? 항상 누구를 기다리는 것처럼 큰 바구니나 쟁반에 과자 따위를 그득히 담아두고 있었다고 했다.

어린이놀이터에서 놀던 아이들이 정신 없이 놀다가 저희들끼리 눈짓하고 ‘할머니 집에 가자.’ 며 댓 명씩 몰려왔다. 입이 심심하기도 하고 여름에는 너무 덥고 겨울에는 또 추워서 놀기가 힘들면 그때는 항상 문을 열어놓는 할머니 집이 또 다른 놀이터였다.

여름에는 에어컨이 잘 돌아가고 겨울에는 난방이 잘되는 할머니 집에서 여름에는 더위를 식히고 겨울에는 언 몸을 녹이며 게다가 맛있는 군것질까지 마음대로 할 수 있으니 이 어찌 즐겁지 않았겠는가.

할머니는 “왔어? 어서들 오너라! 춥지?” 하며 오래간만에 말상대가 와서 반갑고, 이이들은 “할머니, 편찮으세요?”, “심심하세요?” 하는 말을 시작으로 대화가 이루어진다. 이 얼마나 정겨운 장면이며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받는 아름다운 우정인가!

우리나라는 언제부터인가 이사를 자주 하는 것이 돈을 버는 수단이 되었다. 이웃을 잘 사귀기도 전에 이사를 다니다 보면 아이들도 노인들도 한참씩 낯선 외로움에 휩싸이기 마련이다.

문을 열어놓고 살면서 어른끼리도 잘 사귀어 서로 오가는 사이가 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것은 특히 노인들에게 곡 필요한 삶의 방법이기도 하다. 나는 늘 라면은 물론 물만두, 떡, 빵, 옥수수튀김을 떨어지지 않게 준비해 둔다.

특별히 볼일이 없어도 들르는 사람들과 함께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차 한 잔에 과일이나 과자를 내놓는 것보다 점심 요기가 되는 것을 먹으면 친밀감이 더 생긴다.

젊어서는 나이 들면 조용한 시골에 가서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휴가를 가도 조용한 곳, 한갓진 곳을 가고 싶어했다. 그러나 너무 조용하고 한적한 곳은 젊은 사람일수록 맥 빠지고 심심해진다. 북적거리는 곳에서 섞여 지내는 것이 재미있다.

노인은 더더욱 그렇다. 내가 노인을 모셔보니까 노인들이 피해야 할 일은 이사하는 것, 가구를 바꾸거나 자리를 옮기는 것, 자기 물건 두는 곳을 바꾸는 것이다. 또한 자주 쓰는 물건을 눈에 잘 띄는 곳에 늘어놓지 못하게 하는 것, 다시 말해 깨끗하게 한다고 정리해서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게 하는 것과 혼자 있게 하여 외롭게 하는 것도 피해야 한다.

노인 스스로가 사람들과 친해지기 어려운 성격일수록 자녀들이나 주변 사람들과 사귀도록 해야 한다.

나는 아버지와 친구 아버지들 가운데 고위직에 있었거나 성격상 아무하고나 친해지기 힘든 사람들이 노후에 외롭게 지내는 것을 보았다. 가볍게 동네에 나가 이웃과 장기나 바둑을 두며 옆에서 훈수하거나 구경만 해도 외롭지 않게 시간을 보내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내가 어떻게?’ 하면서 사람들과 섞이지 못하면 무료하고 답답한 시간을 보내기 마련이다. 아버지도 그런 분이셨는데 70이 조금 넘어 치매가 오기 시작해 78세에 돌아가셨다.

주위에 이와 같은 분이 없어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치매’하면 대소변을 못 가리고 온 방에 오물을 바르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절잖은 사람을 살던 사람 중에는 편한 의자에 앉아 멍하니 허공을 보거나 졸거나 하는 분이 있는데 이것이 치매의 시초다.

아버지를 모시고 병원에 갔다가 무척 놀란 일이 있다. “지금이 몇 년도이지요?” 하면 엉뚱한 연도를 대고, 75세 땐 의사가 “어르신, 연세가 어떻게 되시지요?” 하고 물으니까 “내 나이가 백 살쯤 됐는가?” 하며 반문하기도 했다.

동그라미를 보이며 그려보라고 하자 삼각형 비슷하게 그리고, 어디에 사시느냐고 물으면 이북 고향 주소를 대셨다. 가깝게 지내던 친구들이 일찍 돌아가시거나, 생존해 계신 분들도 하나 둘 소식이 끊어지거나 멀어지자 그 증세는 더욱 심해졌다.  게다가 외아들 부부가 손자들을 데리고 외국으로 떠나지 상황은 더 심각해졌다.

무슨 모임이든 건강할 때 잘 나가서 여러 사람과 어울리는 것이 좋다. 동창회, 옛 직장동료들과의 모임, 취미가 같은 동호인 모임으로 바쁘게 지내는 것이 바람직하다. 70대 초반인 나는 가능하면 이렇게 살려고 노력하며 교회에서 하는 봉사에 참여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언제까지 계속될 수 있을지…, 혹여 외출하기가 불편해지면 현관문을 열어놓고 살아야겠다. 성당 반모임, 가까운 이웃이나 교우들과 교류하며 언제든지 방문할 수 있는 집, 심심할 때 가서 수다를 떨 수 있고 재미있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그런 편안한 곳이었으면 좋겠다. 내 또래나 더 나이 드신 분들뿐 아니라 젊은이와 아이들도 찾아와 주기를 희망한다.

비슷한 노인들끼리 새로운 취미활동도 하고 각자의 재주를 가르쳐 주면 참 좋을 것 같다. 새로운 것에 도전해 볼 수도 있다. 간단한 악기를 배워 서로 합주를 시도해 본다든지, 노래를 배워 화음을 맞춰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시조나 잘 아는 성경 구절 앞부분이 쓰여 있는 책과 시조의 종장이나 성경 뒷부분을 써서 만든 카드 놀이가 있다.  카드는 밑에 깔고 한 사람이 책에 적힌 시조나 성경 구절을 읽으면 그 다음 구절이 적힌 카드를 찾아내는 놀이로, 많이 찾아낸 사람 순으로 1,2,3등이 정해진다.

이것을 1년에 두 번 정도 야구나 축구 하듯이 리그전(연맹전)을 펴서 챔피언을 정하는 놀이도 노인들한테는 좋은 소일거리가 된다. 무료하지 않게 적당한 경쟁심을 부추기는 시간을 가지는 것은 정신건강에도 좋다.

나이가 들면 책임이나 의무가 없어지기 때문에 자유를 만끽할 수 있다. 나이 드는 것이 무조건 나쁘고 불편한 것만은 아니다.

직장에서 중요한 일을 하거나 대가족이 함께 살 때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았지만 지금은 무엇이든지 내가 결정하고 실행에 옮기면 그만이다. 북쪽으로 갈까, 남쪽으로 갈까 의논하고 눈치 볼 필요가 없다.

무엇보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삶이 중요하다. 여러 번 되풀이하는 얘기지만 어머니는 91세에 돌아가셨고 나와는  스물한 살 차이다. 내가 어머니를 닮았다면 적어도 20년을 더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정신이 번쩍 든다.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던 어머니는 노후를 쓸쓸히 보내셨다. 눈이 나빠 책도 오래 읽지 못했고 청력도 좋지 않아 텔레비전도 잘 못 보셨다. 그래서인지 집에 계시면서 식구들에게 잔소리만 하셨다. 어머니의 삶을 보며 나는 ‘잔소리하지 말자, 많은 사람과 어울리자.’고 다짐했다.

문을 열어놓고 사셨던 친구 어머니는 참으로 현명하셨다. 당신을 방문하고 가는 사람들에게 차비를 똑 쥐어주셨는데 “가는 차비 해라.” 가 아니고 “다음에 올 때 차비다.” 라고 하시는 재치가 돋보이던 그분을 닮고 싶다.

돌아가신 후 딸이 집을 정리하며 보니까 조금이나마 남은 돈을 나눠 성당에 바칠 돈, 당신을 돌보던 사람에게 줄 보너스, 장례비 따위를 봉투에 넣어두셨고 전에 당신을 돌보다 그만둔 사람 몫까지 챙겨두었다고 한다. 나도 이렇게 삶을 깔끔하게 마무리 짓고 싶다.

 

 

고향

내 고향은 지금은 갈 수 없는 황해도 장연 長淵 이고 외가는 송화 松禾 다. 경부선을 타고 가다 천안 天安 에서 장항선을 갈아타면 그 종점이 장항 長項 이듯이 경의선을 타고 가다 사리원 沙里院 이라는 곳에서 황해선으로 갈아타고 서해 쪽으로 가면 그 종점이 내 고향 장연이다. 거기서 버스로 약 40리 넘게 가면 외가인 송화가 있다.

천안에서 장항 쪽을 갈수록 충청도 사투리가 심해지듯이 사리원에서 장연 쪽으로 갈수록 황해도 사투리가 진한데, 묻는 말의 어미에 붙는 ‘꺄’ 소리가 외지 사람한테는 아주 귀에 거슬린다.

이 ‘꺄’ 소리와 관련된 우스갯소리가 있다. 서울에 처음 온 황해도 젊은이가 담배 가게에 가서 “계십니까? 펜안하십니꺄?”, “담배 있이꺄?”, “얼맙니꺄?”, “거 왜 그렇게 비쌉니꺄?”, “저거 과잡니꺄”, “맛이 있이꺄? 없이꺄?”, “좀 눅게(싸게) 할 수 없시꺄?” 하자 가게 주인은 “당신 지금까지 ‘꺄’를 아홉 번 했는데 한 번 더 해서 열 번 채우면 지금 사겠다는 것 모두 거저 드릴게요!” 했다. 그러자 이 손님 좋아라고 “정말이꺄?” 라고 해서 거저 다 받아 갔다고 한다.

나는 1946년 봄 초등학교 5학년 때 3.8선을 넘어 먼저 서울에 오신 아버지를 찾아 월남했다. 그때는 학제가 지금과 달리 9월 학기여서 그 해 5학년으로 편입해 얼마 후 6학년이 되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60년을 서울에서 살았으니 나한테는 사실상 서울이 고향인 셈이다.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고향을 생각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고향을 그리워할 마음의 여유가 없어 거의 고향을 잊고 살았다.

그러다 결혼해 아이들이 태어나 자라면서 방학을 맞아 우리도 시골 고향에 가자고 했을 때 비로소 고향 생각이 새삼스러워지면 ‘왜 우리는 고향에 갈 수 없나?’ 하는 생각에 속도 상하고 약이 올랐다(남편도 평안도 사람이다). 그러나 특별히 안타깝게 여기지는 않는 것 같다.

그러나 나이가 60이 넘으면서 고향 생각이 아련히 떠오르며, 어렸을 때 보고 겪었던 이런저런 생각이 수채화처럼 또렷하게 되살아난다.

나는 아버지가 외국에 계셔서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는 주로 외가에서 자랐다. 우리 친가는 장연읍에 있었고 외가는 송화읍에서도 십리는 가야 하는, ‘돌모루’라는 시골 농촌으로 그 당시에는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벽촌이었다. 그러나 외가는 토지가 많은 부잣집이어서 나는 추억이 많은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시골일 뿐 아니라 그때는 지금처럼 어린이를 위한 간식거리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4, 5세 때부터 동네 소작인 집 사내아이들을 따라다니며 싱아(여러해살이풀)를 꺾거나 칡뿌리를 캐 먹어 입언저리가 시커멓게 되곤 했다.

큰 남자 애들이 초저녁에 관솔불을 켜 들고 초가집 추녀에 손을 쑥 집어넣어 잠자던 참새를 잡아오면 동네 아저씨들이 털을 뽑고 꼬챙이에 꿰어 참기름을 바르고 소금을 뿌려가며 모닥불에 구워주어서 참 맛있게 먹었다. 참으로 고소하고 맛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며 뼈를 발라버린 기억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보면 뼈까지 다 먹지 않았나 싶다. 이 밖에도 논에서는 우렁이, 개천에서는 가재를 잡아 모닥불에 구워 먹곤 했다.

외가에는 과수원도 있었지만 집 울타리에 앵두나무, 살구나무, (작고 몹시 신) 개복숭아나무, 감나무가 있었고, 밭에는 참외와 수박이 널려 있었다. 이것들은 팔기 위한 것이 아니고 식구들과 동네 소작인들과 함께 나누어 먹기 위해 심은 것이다. 나중에 어른이 된 후에야 알게 되었지만 감이 자라는 북쪽 한계선을 우리나라에서는 황해도라고 한다.

우리나라가 미국처럼 각 도 道 마다 자치정부가 있는 합중국을 만든다면 가장 독립적으로 살 수 잇는 곳이 황해도다. 연백평야, 재령평야를 비롯하여 크고 작은 평야가 많아 곡식이 풍부하며 재령,  신천 쌀 이 아주 좋기 때문이다. 서해안 해산물이 풍부했는데, 내 기억으로는 연평도 굴비, 꽃게, 까나리, 굴, 각종 조개와 꼴뚜기가 아무 맛있었다.

전국적으로 볼 때 온천이 많은 곳도 황해도인 것 같다. 내가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배천온천, 신천온천, 송화온천, 삼천온천, 달천온천이 있고, 내가 자란 장연읍이나 송화읍에는 공중목욕탕이 없었다. 그것은 가까이에 송화 온천이 있었기 때문인데 물이 아주 뜨거워 어린애들은 온천에 가자고 하면 아주 질색이었다.

온천에 가기 싫었던 또 다른 이유는 그곳에서는 냉수 마시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우물마다 계란 썩는 냄새가 나는 뜨거운 물이었고, 개천에서도 여기저기 김이 모락모락 나면서 더운 물이 솟아 한겨울에도 어려움 없이 빨래하는 사람이 많았다.

목이 말라 불평을 하면 ‘조금만 참아라, 기차정거장에 가서 찬물 줄게.’ 하고 달랬는데 기차역 우물만이 찬물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린애들이 보기에는 역정 우물이 굉장히 깊어 보였고, 도르래로 물을 퍼 올리면 이가 시리도록 차디찬 물이 두레박 가득히 올라와 보채는 어린애부터 차례로 맛있게 마시곤 했다.

추운 겨울에는 꽁꽁 언 논에서 썰매를 탔는데 벼를 베고 난 그루터기가 얼음판 위로 나와 있어 자주 걸려 넘어졌다. 이를 본 아저씨들은 넓은 논 몇 군데에 그루터기가 잠기도록 물을 대어 유리처럼 매끄럽게 얼음판을 만들어 주었다. 아이들은 아침부터 손발이 꽁꽁 얼도록 썰매를 타고 팽이를 치며 신나게 놀았다. 나는 여자 아이였는데도 썰매 뿐 아니라 팽이도 잘 쳤고 자치기, 연날리기, 구슬치기도 잘했다.

내 나이 60이 넘으면서 고향의 어린 시절과 동네 친구들 그리고 외가 식구들 생각이 생생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고향을 한번 둘러보고 싶은 충동이 파도처럼 일며 가슴이 찡하게 저려온다.

몇 년 전 단양 단양 쪽을 둘러보다가 충주댐에 들렸는데 그때 한 노인이 호수를 유심히 들여다보기에 나도 무엇이 있나 싶어 들여다보았지만 물만 출렁일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궁금해서 “무얼 그리 들여다보십니까?” 하고 물었더니 “이 물속이 내 고향인데 저기쯤에 우리 집이 있었지요.” 하며 조상대대로 살던 집과 논밭이 물에 잠기고 여기 조금 남아 있어서 가끔 온다는 것이다.

“많이 그리우시겠네요. 나도 이북에 고향을 두고 온 사람입니다.” 했더니 “그래도 당신네는 언젠가는 가 볼 수 있고, 못 가더라도 그냥 거기에 있겠지 하는 것과 우리처럼 이 세상에서 아주 사라져 버린 것과는 다르지 않겠어요?” 하면서 또다시 물속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아! 그렇구나! 한 마을이 수몰되어 몽땅 사라지면서 고향을 영영 잃어버린 사람들, 그들이 어쩌면 우리보다 망향의 함이 더 깊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젊은 실버들은 더 늙어 여행하기 어려워지기 전에 고향이 있다면 자주 찾아갈 일이다. 경제적으로나 건강 때문에 쉽게 갈 수 없는 사람한테는 어떤 방법으로든지 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봉사’활동을 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내 후배는 이북이 고향인 아버지가 돌아가시며 북쪽을 향해 묻어 달라고 하셔서 우리나라에서는 금기로 되어 있는 북향 묘를 썼다고 한다. 수구초심 首丘初心, 여우도 죽을 때는 태어난 굴을 향해 머리를 둔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이런 생각은 젊은 날에는 꿈에도 해본 적이 없다.

지금도 40대들은 이와 같은 말을 들으면 생소하고 노인들이 유별나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에 자식하고도 이러한 대화는 하지 않는다. 세대 격차는 세월이 갈수록 더해지는 것 같아 섭섭하고 서글프기만 하다.

그러나 그들도 60세가 되고 70, 80세가 되면 조상들이 살았던 곳이 궁금해지고 왕래가 가능하다면 한 번쯤 가보고 싶어질 것이 분명하다.  우리 친가의 경우 현재 살아 있는 최고 연장자가 90세 고모다. 그러나 미국에서 사시니까 내가 우리나라에서 고향을 기억하는 마지막 세대다.

고향에서 나누었던 소소한 이야기들을 글로 쓰고 고향을 찾아가는 길을 그려(지금은 다 변했겠지만) 아이들에게  남겨주려 한다. 독특한 사투리, 풍속, 음식, 기억에 남는 친척들의 이름까지 기록하여 우리 세대가 세상을 떠난 뒤에라도 나는 누구의 손자 또는 외손자, 조카라고 밝혀야 더듬어 서로가 친척임을 알 수 있지 않겠는가?

이것은 내가 해야 할 중요한 의무라고 생각하기에 하나라도 기억을 더 놓치기 전에 서둘러 하려 한다.

 

 

추억을 먹고 사는 노인들

사람의 기억력은 어렸을 때부터 차곡차곡 머릿속에 쌓이는데, 일어버릴 때는 맨 위에서 차례로 잃어버려 맨 밑바닥에 있는 서너 살 때의 기억만 남는다고 한다. 나는 세 살 때 살았던 집 구조와 이웃에 살던 사람들을 기억하고 있어 나보다 나이 많은 어른들을 놀라게 했다.

해마다 여름이 되면 나는 봉숭아물을 약지와 새끼손가락에 들인다. 며칠 전에도 새로 봉숭아물을 들였더니 친구 남편이 그걸 왜 지금도 들이느냐며 “예쁘게 하려고요?” 하고 물었다. 이 질문은 해 마다 새로 물들일 때 많이 받는데 그때마다 대답은 똑같다. “이것은 추억입니다. 내 외갓집과 외할머니에 대한 간절한 추억이랍니다.”

나는 어려서 외가에서 자랐다. 봉숭아가 한참 예쁘게 피면 할머니가 새로 나온 순과 꽃을 따서 백반을 넣고 곱게 찧어 손톱에 올려놓고 오동나무 잎이나 피마자 잎으로 싸매주시며 빠지거나 터지지 않게 얌전히 자라고 이르셨다. 봉숭아를 들이는 날 밤에는 손을 가슴에 얹고 깊이 잠들지 못한 기억이 지금도 엊그제같이 생생하다.

지난밤에도 봉숭아를 손톱에 얹고 오동나무 잎 대신 랩으로 싸매고 어렸을 때처럼 깊이 잠들지 못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손톱과 살에 곱게 물들어 있었다. 나는 만족한 웃음을 지으며 외할머니가 “아이고, 곱다. 곱게 잘 들었구나!” 하시며 내 손을 조물조물 만지며 들여다보시던 생각에 사로잡혀 그때 할머니 손보다 더 쪼글쪼글해진 내 손을 한참이나 내려다보았다. 너무나 생생하고 예뻤던 색깔, 깔끄럽고 넓은 오동나무 잎의 감촉과 할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1973년에서 1946년 사이에 있었던 일이다.

손톱 주변 살까지 물든 것을 보면서 요즘은 손톱에만 발라서 물들이는 것이 나왔다고 가르쳐 주는 사람들이 있지만 나는 살까지 물드는 것이 좋다. 추억이기 때문이다. 매니큐어와 달리 나는 자연적인 것이 좋다. 여름에 찧어서 냉동실에 넣어두면 겨울에도 들일 수 있어 1년 내내 빨간 손톱을 가꿀 수 있다.

북쪽의 외가 고향은 가 볼 수도 없고 보고 싶은 사람들도 다 돌아가셨지만 봉숭아물을 들이는 일은 지금도 그때를 그리워하며 계속할 수 있어 좋다.

이 아름다운 추억이 없으면 얼마나 허전하고 삭막할까? 여러 기억과 추억 속에서 이렇게 어렸을 때의 추억만 점점 생생하고 또렷하게 떠올라 요즘은 추억을 먹고 산다는 생각이 든다.

치매 걸린 노인들이 어려지고 어렸을 때 얘기를 많아 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된다. 지금 내 나이의 사람들이 90세에서 100세 가까이 산다면 추억이 더 많아질 것이다.

그때 20년이나 30년 전 생각을 떠올린다면 지금 65세 이상 70세 초반 사람들의 현재 삶과 생각이 추억이 되어 추억을 먹고 살아 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지금의 삶을 아름답게 살아야 한다.

며칠 전, 요새 엉망으로 돌아가는 세상 이야기를 하다 우리가 대학 다닐 때도 선거 때마다 남학생들이 부정선거 규탄대회를 벌이며(4.19 이전) 쌍가락지표(반대후보에게 찍은 표를 무효로 만들기 위해 다른 후보에게 0표를 한 번 더 찍는 부정행위)나 피아노표(반대후보에게 찍은 표를 무효로 만들기 위해 모든 후보에게 0표를 찍는 부정행위) 따위의 신조어를 쏟아내며 흥분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깔깔 웃었다.

대학 때 가정교사를 하며 공부를 했는데 그때 내가 가르치던 학생의 부모님과 조부모님이 나를 인정하고 귀여워 해 주시며 소리 없이 물질적인 도움과 위로를 주셨던 그 고마움을 잊을 수 없다.  지금도 가슴 뿌듯하고 흐뭇하기만 하다. 바쁘게 살다가 정신 차려 찾아 뵈려 했더니 다 돌아가셨다.

그분들이 지금 살아 계셔서 만날 수만 있다면 나보다 더 반가워하실 텐데… 그렇게 애쓰더니 그런대로 사람구실 하며 사는 나를 보고 대견해하실 텐데… 인자하고 점잖던 그분들에게 내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늘 내가 얘기하면 재미있어하시던 모습을 떠올리며 그 동안 30~40년을 살면서 겪었던 여러 가지 일, 괴로웠던 일까지 유머러스하게 과장법을 써가며 이야기하여 그분들이 즐겁게 웃으시도록 하고 싶다.

추억을 더듬어 보니 60년 전 일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중학교 1, 2학년 때인 것으로 기억되는데, 우리 학교에는 미국인 선교사들이 선생님으로 계셔서 영어회화를 가르쳐 주셨다. 지금과 달리 그때는 A, B, C도 모른 채 입학했는데, 무든 뜻인지도 모르고 무조건 영어로 인사하고 대답하고 따라 했다.

학교 교문 건너편에 그 당시에는 보기 드문 양옥집이 있었는데, 그분들은 그 집을 ‘그레이 하우스’라고 했다. 그곳에는 여자 선교사들이 살고 있었다. 교실 창 너머로 보이는 그 집 정원에서 금발이나 은발의 서양 노인들이 예쁜 옷을 입고 (우리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꽃을 가꾸기도 하고 빨래를 널기도 했다.

그 집이 늘 신비스럽게 보여 한번 들어가 보고 싶었는데, 하루는 한국인 영어 선생님이 큰 봉투를 주시면서 양옥집에 계신 M선생님께 갖다 드리라고 했다. 나는 너무 좋아서 얼른 가기는 했는데 어떻게 들어가야 할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걱정하다가 그냥 초인종을 눌렀다. 안에서 인기척이 나고 문이 열려 꾸벅 절을 하면서 배운 대로 인사하고 봉투를 내밀었더니 들어오라고 하셨다.

나는 머뭇거리지 않고 얼른 들어가 휘뚤휘뚤 집안을 둘러보고 있는데, 선생님은 그때 나로서는 처음 보는 아주 예쁜 통을 들고 나와 그 속에서 은종이 금종이로 싼 여러 모양의 초콜릿을 먹으라고 주시길래 ‘No’하고 우리 식으로 사양하다가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두 개를 집었는데 선생님이 뚜껑을 닫더니 치우셨다. 놓아두고 더 먹게 하실 줄 알았는데 치우시다니… 나는 그 집을 나오며 ‘다섯 개를 집을 것을’ 하며 아쉬워했다.

지금도 초콜릿 두 개의 유감은 잊혀지지 않는 가슴 찡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문화 차이를 절감하게 한 최초의 경험이다. 우리 같으면 탁자에 두고 ‘더 먹어라.’고 권했을 것이다.

내가 한 말이나 행동이 후손들에게 조금이나마 영향을 주고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래서 20~30년 후에 지금의 나를 잘 아는 40, 50대 친구들이 참 따뜻하고 재미있고 덕을 갖춘 사람이라고 기억하며 옛이야기를 하도록 살아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이혼

어떤 친구가 밤중에 열과 오한이 나 온몸을 덜덜 떨었다. 그래서 있는 힘을 다해 큰소리로 옆방에 있는 남편을 불러 이불 좀 꺼내 덮어 달라고 했더니 남편은 이불을 꺼내 개킨 채로 몸 위에 올려놓고 방을 나가더라는 것이다.

너무 서럽고 괘씸해서 이불을 덧덮으며 “이놈의 영감탱이, 날만 밝아봐라. 당장 법원에 가서 이해해 뿌야지.” (경상도가 고향이다) 하고 별렀다고 한다. 친구들이 까르르 웃으며 “그래, 이혼했니?” 물었더니 물론 못했다고 했다.

요즘은 이혼을 너무 쉽게 하는 것 같다. 결혼은 당사자 두 사람이 일직선으로 맺는 관계다. 그러나 이혼은 부부와 이이들, 곧 세 점이 삼각형으로 이어져 있는 공간을 해치는 것이다. 세 점 가운데 하나인 아이들의 의사는 어릴수록 무시되고 부부끼리 결정하는 것이 이혼이다. 아이는 자기가 원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므로 당연히 부모가 함께 양육할 의무가 있다. 아이들은 같이 살기를 원하는데 왜 부부끼리만 이혼을 결정하는가?

이러한 본질적인 문제 외에도 결혼은 새로운 인간관계를 형성한다. 아무 상관 없던 사람들이 시부모와 장인, 장모가 된다. 시숙, 시누이, 시이모, 형님, 처제, 처남, 처이모 등이 이혼했다고 싹 남이 될 수 있는가? 그것도 나쁜 관계가 아니라 정겹게 지내던 사이는 더욱 힘들고 가슴 아프다.

어쨌든 가장 불행하고 슬프고 어리둥절한 것은 어린아이들이다. 어머니나 아버지 어느 한쪽이 없는 슬픔, 할머니, 할아버지, 삼촌과도 소원하게 지내야 하는 슬픔이 가슴속에 응어리진다. 이렇게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건 내가 이혼한 부모 밑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이 같은 상처를 줄 권리는 누구한테도 없다. 이 상처는 어른이 되어도 남아 있고 아이를 낳아 기를 때는 더 많은 생각을 하면서 이혼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조심조심 살았다. 부모가 해야 할 일이다.

이렇게 늙어서 서로 의지하고 사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럽고 고마운지 젊어서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이불을 꺼내 그대로 몸 위에 올려놓고 나가더라도, 그런 사람이라도 있어야 원망도 하고 이혼하리라고 벼르기도 하며 아침에 이을 악물고 일어날 것이 아닌가? 노후에 이혼하는 경우도 있다는데 이것은 가장 나쁜 노후의 삶이라고 생각한다.

결혼은 소 두 마리가 한 말뚝에 매이는 것과 비슷하다. 가깝게 지내도록 끈을 말뚝에 감아놓는데, 하나가 슬슬 풀면 자꾸만 멀어진다. 그러면 다른 한 마리도 ‘그래? 나도 풀어!’ 하게 된다.

 

 

고집을 버리고 젊은 친구들을 사귀자

노인이 되면 고집스러워지기 쉽다. 내가 하는 생각과 일이 다 옳고 정확하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의 충고나 의견은 잘 받아들이지 않고 강력히 부인하는 경우를 많이 보아왔다.

사람의 타고난 본성은 다 다른데 살아가면서 가정이나 학교 또는 사회에서 배우고 경험하며 깨달아 그렇듯 한 포장지로 포장하게 된다. 그리하여 본성은 감춰지고 모두 비슷하게 꾸며져 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가면서 조금씩 포장이 벗겨지고 본성이 드러나 보는 사랑들이 당혹스러워 한다.

날카롭게 모난 사람은 남을 찔러 아프게 하며, 둥글둥글 한 사람은 이리저리 굴러다녀 잡기가 힘들다.

나이 들어도 포장이 벗겨지지 않도록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여러 사람들, 특히 나보다 젊은 사람들과 다양한 대화를 나누어 보자. 그러다 보면 내 생각이 고집스러워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기가 힘들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된다. 좋은 후배나 이웃 또는 단체에서 젊은이들과 우정을 나누도록 하자.

젊은이들과 어울려 진지한 토론도 하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서로 많은 것을 배운다고 한다. 젊은 사람들은 세상을 더 많이 산 사람들한테서 지혜와 경험에서 얻은 지식을 배우는 반면 노인들은 젊은이들한테서 현대 감각은 물론 절대적인 자기 표현법, 무모하리만큼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정신을 배울 수 있다.

젊은이와 나이 든 사람들은 먹는 것부터 입는 것, 생활방식과 사고방식이 모두 다르다. 이것을 비판하고 억지로 맞추려 할 필요는 없다. 젊은이들은 (아이들까지 포함) 그 나름의 가치기준대로 살고, 노인은(부모들까지 포함)  노인의 기준에 맞추어 살며 서로 간섭하지 않고 조화를 이루어 즐겁게 사는 방법을 찾을 일이다.

나는 여고시절부터 합창단에서 꽤 열심히 노래했다. 노래를 잘하는 것은 아니지만 서로 화음을 맞추어 아름다운 표현을 하는 것이 좋아 고3 때까지 열심히 했다. 그 후 전에 같이하던 후배들이 모여 동창합창단을 만든다는 연락이 와서 53세에 다시 합창을 시작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회갑이 되었을 때 그만 하겠다고 사퇴했는데 후배들이 극구 말리며 언니가 없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괜히 하는 소리지 하면서도 싫지 않았다. 내가 최고 연장자였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 기둥이 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중에 깨달은 일이지만 3년이나 5년 후배들이 3~5년 후에는 자기들도 그만두어야 하니까 이를 면하기 위해 연장자를 붙잡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나는 많은 후배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70이 넘어서도 합창을 계속하고 있다. 합창이란 여럿이 서로의 소리를 들으며 화음을 맞추기 때문에 나 혼자 힘이 아니라 서로 돕고 어울려야 하는 그야말로 화합의 모임이다.

동창합창단은 특성상 20년 안팎의 동창들, 곧 40대 후반에서 70대 초에 이르는(실은 나 혼자지만) 연령층이 모여 노래 말고도 여러 가지 대화와 친교를 나누는데, 특히 외국 연주여행 때 감격스럽게도 동문들을 상봉하여 너무도 즐거웠고 젊은 시절로 되돌아간 듯했다.

2002년 월드컵 때 우리 합창단은 뉴욕 링컨센터에서 뉴욕 동문합창단과 로스앤젤레스 동문합창단과 함께 음악회를 가졌다. 로스앤젤레스 동문합창단은 뉴욕 공항에 내릴 때 이미 양쪽 볼에 태극 마크를 그리고 붉은 악마 셔츠를 입고 있었다.

숙소에서 서울 팀과 만나자 어느 족이 먼저랄 것도 없이 다함게 ‘대~한 민국 짝짝짝 짝짝!’ 하고 50, 60대 여자들이 호텔 로비가 떠나갈 듯 외쳐댔는데, 이를 바라보던 외국인들도 처음에는 어리둥절해하다가 금세 호응해 주었다.

이 일은 당시 만 68세였던 나를 10년, 아니 20년은 젊게 해주는 것 같았고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흥분된다.

똑같은 상황이라도 젊은 사람들과 섞여 있지 않았다면 이와 같은 해프닝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설혹 일어났다 하더라도 그와 같은 흥분과 감격은 덜했을 것이다.

음악회가 끝난 후 “너희들 덕에 내가 많이 젊어졌고 즐거웠다.” 고 했더니 후배들의 얘기가 우리도 5년 후, 아니 10년이나 20년 후면 선배님처럼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선배님이 앞서서 씩씩하고 활기차게 사세요 우리도 그렇게 살게요.” 했다.

95세 된 일본의사 히노하라 씨는 본받고 싶을 만큼 멋지고 훌륭하게 사는 사람을 찾아서 그 사람이 하는 대로 따라 살다 보면 훌륭한 삶을 살게 된다고 했다. 그분은 미국의 훌륭한 의사인 오슬러 박사의 삶을 철저히 연구해 그와 같이 살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오슬러 박사는 노인들도 위했지만, 특히 어린이들을 좋아해서 나이 든 후에도 어린이들과 숨바꼭질도 하고 공차기도 하며 즐거워했다고 한다.

개를 좋아하는 한 친구가 ‘어떤 때는 애보다 강아지가 더 예쁘다.’ 고 했다. 나도 강아지를 좋아하는 편이지만 손자보다 더 예쁠 수는 없다. 첫 소자를 보니 어찌나 예쁜지 직장에서 돌아오면 아예 애를 며느리한테서 빼앗다시피 독차지했다. 밤에도 물론 데리고 잤다.

손자가 왜 아들보다 더 예쁠까? 나중에 깨달았지만 손자는 책임이 없기 때문이다. 내 아이는 앓거나 울면 밤새 간호하고 달래느라 수고(?)하지만 손자는 제 부모에게 보내면 된다. 귀찮아서가 아니라 책임을 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세 살 반가지 첫 손자를 길렀다. 그때 나는 완전히 손자 나이가 되어 같이 짝짜꿍, 걸음마 하며 놀았다. 그러면서 깊은 사랑을 느꼈다.  그러다가 미국으로 보냈는데 그 후유증이 꽤 오랫동안 계속되어 마음을 추스르기가 어려웠다.

노인과 아이가 같이 사는 것은 참 이상적이다. 다만 그 가운제 낀 아이의 부모들이 불편해해서 대부분 핵가족으로 살 뿐이다.

노인들은 간섭과 고집과 지나친 권위의식을 버리고, 젊은이들은 부모를 사랑하고 이해하며 다양한 연령층이 조화를 이루어 살아갈 때 건강하고 아름다운 가정이 되지 않겠는가!

 

 

 

건강한 이별을 위하여

 

마지막이 올 때까지는

밝고 씩씩하게 유쾌하게 살 작정이다.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며

여러 사람과 어울려 열심히 살고 있다.

어떤 일이 닥쳐도 당황하지 말고 침착하고

차분하게 해결해야겠다고 다짐한다.

 

 

육신도, 정신도 건강하자

모든 것이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훈련하면 가능하다고 한다.

 

  • 음식은 과식하지 말고 적당량을 먹는다.
  • 날마다 조금씩 운동을 한다. 특별히 하는 운동이 없으면 방에서 맨손체조라도 하고 웬만한 거리는 걸어 다니는 것이 건강에 도움이 된다.
  • 충분히 휴식한다. 잠이 오지 않아도 누워서 아무 생각 없이 푹 쉰다.
  • 호기심과 용기를 가지고 끊임없이 새로운 것에 도전하여 배운다. 배우는 건 정신 건강에 좋다. 의사에 따르면 사람의 두뇌는 일생 동안 60퍼센트만 활용된다고 한다. 그러나 특별한 사람들은 나머지 40퍼센트까지 개발하여 많은 성과를 올리는 천재성을 발휘한다.

 

‘이제는 늙어서 안 돼.’ 하지 말고 40퍼센트의 쉬는 두뇌에서 무엇이든 개발하여 숨은 재주나 능력을 찾아내어 활용하는 것이 좋다. 요즘 80대 노인들이 도자기, 그림, 서예 따위를 배워 전시회를 여는 것을 흔히 보는데 씩씩하고 당당해서 보기가 좋다.

한 친구가 거동이 불편한 시어머니를 모시고 있었는데 하루는 그만 대변 실수를 하여 모두 치우고 깨끗이 씻어드렸다고 한다. 그랬더니 시어머님이 불편한 손으로 베개 밑에서 3만 원을 꺼내주시면서 친구들과 맛있는 것 사먹으라고 하셨다.

며느리는 사양하며 시어머니 얼굴을 보았더니 그 돈을 받아야 마음이 편하실 것 같아서 “고맙습니다.” 하고 받았다. 그러자 시어머니는 “내가 고맙고 미안하지.” 하시더라는 것이다.

그러다 며칠 후 이번에는 소변 실수를 하여 치워드렸더니 이번에는 2만 원을 주시더라는 것이다. 시어머니가 생각하기에도 소변이 좀 쉬울 것이라고 생각하셨나 보다. 이 얼마나 정신이 말짱하고 건강하신가.

아주 건강하고 부지런하며 상냥한, 먼 친척 되는 시누님이 계셨다. 그런데 노후에 치매에 걸려 몸은 건강하나 대소변 처리를 못해 온 방안이 엉망이었다. 할 수 없어 아들과 같이 살게 되었고 그 시중은 물론 며느리 차지가 되었다. 젊었을 때는 며느리와 종교가 다르고 뜻도 잘 맞지 않아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리하여 서로 안 좋은 말이 오갈 만큼 소원했지만 결국 그 며느리에게 말할 수 없는 폐를 끼치고 돌아가셨다.

이 두 경우를 볼 때 미안하고 고마워한 앞의 경우와 미안하고 고마운 줄 모르고 나쁜 소리로 야단치고 떼쓰며 힘들게 한 뒤의 경우는 하늘과 땅 차이다. 전신 건강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고 하겠다.

이 말을 들으면 “글쎄, 그게 마음대로 되어야지.” 하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것처럼 미리 마음을 다잡고 훈련하면 어느 정도 나아진다고 한다. 심지어 야단치는 것과 훈계하는 것도 훈련하면 상대방이 기분 나빠하거나 반발하지 않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끊임없이 몸과 마음을 움직여 훈련하자. 친구들과 친교를 나누고 취미생활도 하자. 나이 먹은 사람이 할 수 있는 봉사도 찾아서 하자. 그러면 참 기쁨이 온다.

어머니는 60대 때 달동네에 자주 가셨다. 아이들이 신다가 작아진 신발과 옷과 먹을 것을 들고 가셨다.

한번은 남편이 몇 번 입던 한복을 깨끗이 손질해 집에 있는 솜을 두둑하게 넣어 옷을 지어 바람이 씽씽 들어오는 엉성한 집에서 추위에 떨며 외롭게 사는 할아버지한테 갖다 드렸다. 할아버지는 그 옷을 입고 그 해 겨울을 따뜻하게 지냈는데 봄이 오기 전에 그 옷을 입고 돌아가셨다 한다. 비록 작은 일이지만 얼마나 뜻있는 봉사인가.

그 할아버지 옆방에는 할머니가 손자와 함께 살고 계셨다. 가끔 콩나물국을 끓여 할아버지에게 갖다 드리면 훌훌 마시며 몸이 따뜻해졌다면 고마워하셨다고 한다. 어떻게 소금만 넣고 끓인 콩나물국을 나누어 드렸느냐고 하니까 “가난한 사람만이 가난한 사람을 알거든.” 하고 말했다.

고깃국이나 나누어 먹을 줄 아는 가난하지 않은 사람들은 이러한 봉사의 의미를 잘 모르는 것 같다. 가나하고 늙어도 봉사할 일은 많다.

정년이 되기 전 가끔 다니던 호텔 음식점에 오래간만에 가기로 했다. 그런데 그 음식점 이름이 도통 떠오르지 않았다. 남편에게 물었더니 역시 기억을 못했다. 이럴 때 “에그, 이젠 우리도 늙었어!” 하고 단념하면 안 된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며칠을 두고 기억해 내려고 애썼지만 실패했다.

이틀 후 그 음식점에 가서 간판을 보고 나서 ‘아하!’ 하며 허탈하게 웃었다. 이번에는 실패했지만 앞으로는 반드시 기억해 내야 한다.

요즘 인구들과 함께 젊어서 부르던 노래 가사 기억해 내기,  애국가 4절까지, 봉선화 3절까지, 전우가 4절까지, 교가 4절까지 부리기 시합을 하고 있다. 초등학교 교가는 기억해 내지 못했다. 같이 다니던 초등학교 친구가 주위에 없기 때문이다. 어려서 외우던  시와 시조도 기억하려고 애쓴다.  이와 같은 것을 정신 체조라고 생각하며 육체와 함께 정신 건강에 힘쓸 것을 다짐해 본다.

 

 

늙을수록 폐 끼치지 말고 스스로 해결하자

어머니는 78세에 계단에서 넘어져 고관절이 부서졌다. 수술한 선생님이 부서진 뼈를 병에 담아 보여주어 많이 다친 것을 알 수 있었다. 물론 플라스틱 뼈를 대신 넣은 큰 수술을 했다.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친구들과 다른 많은 분이 그 나이에 큰 수술을 하면 1년, 길어야 2년밖에 살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같은 일을 당한 어른들을 모셔본 사람들의 말이다.

젊은 사람들은 이런 일을 당하면 약 2개월 후에 걷기 시작해서 3~4개월 후면 정상이 된다. 그러나 70세 이상 노인들은 다 나아도 걷지 못하는데다 운동부족으로 식욕이 떨어지고 의기소침해지며 서서히 쇠약해지더라고 경험담을 들려주었다.

은근히 걱정이 되어 병원에 있을 때부터 보행기로 걷는 연습을 조금씩 하고 퇴원하시도록 했다. 어머니는 다시 잘 걸었고 외출도 하고 집안일도 하면서 13년을 더 사셨다. 그 이유는 딸들의 불효 덕분(?)이다. 퇴원하고 나서도 집에서 걸음마 연습을 하는 등 계속 움직이게 했다. 딸들이 모두 직장에 다녀 곁에 붙어서 간호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앉은 걸음으로 화장실에도 가고 부엌에도 갔다. 욕실에 의자를 놔두어 앉은 걸음으로 욕실에 가서 의자에 앉아 샤워기로 목욕하도록 강요했다. 이런 딸들을 원망하고 노여워하며 스스로 모든 일을 하면서 다시 걷게 되어 13년을 거뜬히 더 살다가 돌아가셨다.

자녀나 식구들이 다친 어머니를 누이고 일으키고 대소변을 받아내고 머리 감기고 ‘우리 어머니, 우리 어머니!’ 하며 돌보는 것이 어쩌면 죽음으로 가는 급행길일 수도 있다. 자칫하면 노인들이 어리광 부리며 남의 손에 의지하려 하고 그것이 호강인 것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내 어머니와 다른 분들과는 이런 차이가 있었다.

건강하게 살다 가기 위해서도 남에게 의지하려는 생각을 바꾸어야 할 시대가 되었다. 핵가족인데다 모두 바쁘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스스로 해결하려고 노력하며,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을 때는 그거에 대한 대가를 치를 줄도 알아야 한다. 그 대가가 돈일 수도 있고 정신적 도움일 수도 있으며 그 사람을 위해 끊임없이 바치는 기도일 수도 있다.

한 친구가 맏며느리고 시집가 46년 동안 시어머니를 모셨다. 한결같이 열심히 돌봤으나 어쩌다 한 번씩 찾아오는 둘째, 셋째 며느리는 다 착하다 하고 맏며느리는 늘 못마땅해했다. 이것은 노인이 잘못된 판단으로 고쳐야 할 일이다. 그 친구는 남편을 마저 저 세상으로 보내고도 작은아들들에게 가지 않는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다 신경쇠약에 걸렸다.

시어머니께서 “내가 너에게 이렇게 폐를 끼쳐서 어떻게 하니. 고맙다, 어미야.” 하며 미안해했더라도 병까지는 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 고약한 고부간 문제는 여성들이 풀어야 할 과제다.

우선 어른들이 권위의식을 버리고 너그럽고 자애로워야 하며 자식한테도 예의를 지켜 ‘미안하다’, ‘고맙다’며 사과 해야 할 때, 감사해야 할 때를 알아야 한다. 그렇다고 눈치 보며 기죽어 살자는 말이 아니다. 또한 젊은이는 노인을 사랑하고 측은해하며 친절하고 예의 바르게 대하면 좋겠다.

어머니가 91세 되던 해 마루에서 넘어져 오른쪽 다리에 골절상을 입고 두 번째 입원했다가 퇴원할 때 ‘너무 이른 퇴원’이라며 주위에서 곱지 않은 눈길을 보내는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일생을 나에게 의지하고 살아오신 어머니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지닌 나는 퇴원을 결정했다.

통증은 멎었고 약 6개월 후면 깁스를 풀 수 잇지만 걷지는 못할 것이라고 의사는 말했다. 퇴원할 무렵 청각은 살아 있었지만 말을 하지 못했다. 그냥 병원에 있으면서 누군지도 모르는 간병인과 있는 것보다 낯익은 방에 누워 오가는 식구들을 보고 입에 맞는 음식을 드시게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병원에 있었으면 1년 정도 더 사셨을지도 모른다. 누워서 꼼짝도 못하고 기도로 음식이 넘어가지 않도록 호스로 급식하며 아무런 의사표시도 못한 채 차츰 의식을 잃으며 가셨을 것이다.

퇴원하고 한 달에 한 번씩 병원에 갔는데 세 번째 갔을 때 의사가 어떻게 할머니를 돌보느냐고 묻는 바람에 나는 가슴이 덜컹했다. 내가 잘못하고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의사 선생님 말씀은 이 연세에 이만한 부상이면 한 달 후에는 병원에 오지 못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퇴원 때 한 달 후에 오시도록 예약했다고 한다. 그런데 세 번이나 병원에 오시는 것을 보고 특별히 돌보는 비결이 있느냐는 뜻이었다.

탈수증에 걸리지 않도록 계속 물을 마시게 했다. 처음에는 쌀을 갈아서 죽을 묽게 쑤어드렸는데 영양이 부족할 것 같아 소고기, 닭고기, 깨, 잣, 야채, 생선, 된장 멸치 죽을 교대로 쑤어드렸다. 국물에 그냥 쌀을 넣고 쑤는 게 아니라 재료를 갈아서 죽을 쑤어 상반신을 약간 옆으로 하고 떠먹여 드렸다.

그리고 등창이 나지 않도록 자주 뜨거운 물수건으로 몸을 씻어드리며 몸 위치를 바꾸어 드렸다고 말씀 드렸더니 의사는 그보다 더 잘할 수는 없다고 했다. 지금도 나는 의사의 이 마지막 말이 고맙고 어머니께 불효한 것에 대해 위로가 된다.

노인을 돌보는 것은 가능하며 스스로 하도록 하고 그럴 능력이 없을 때는 자연스럽게 사시며 죽음을 맞이하도록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노년기의 가정 경제

우리 부부는 비슷한 시기에 퇴직했다. 미리부터 각오는 단단히 했지만 막상 닥치고 보니 섭섭하고 허탈했다.

남편은 퇴직한 다음날도 보통 때와 같이 일찍 일어나 신문 보고 출근 준비하듯이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양복을 입었다. 내가 의아해서 “어디 가려고요?” 했더니 “서재로 출근한다, 왜?” 하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나는 가슴이 찡했다.

그러다 사설연구소에 나가 자료도 보고 정리도 하더니 책을 한 권 내놓았다. 돈벌이가 되는 책은 아니었지만 일본 강점기 때 독립운동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한테 참고가 될만한 책인 것 같았다. 그러면서 마음을 추스르기 시작했다.

나는 은퇴 후 처음에는 늦게 일어나도 되고 화장하지 않아도 되고 의무도 없으니 편하고 괜찮았다. 그런데 10개월쯤 지나니까 ‘이것은 사람 사는 게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툭툭 털고 일어나 봉사할 곳을 찾기로 했다. 그래서 교회가 좋겠다고 생각했고 우연히 성당에서 열심히 봉사하는 동갑을 만나 찰떡궁합처럼 죽이 맞아 함께 봉사하기 시작해서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경제적으로 어떻게 살아가는가 하는 것이었다.

 

  1. 있는 돈을 나누어 각자 가지고 살면서 무엇이든지 같이 부담하는 방법.  세금도 반씩, 쌀값도 반씩, 전기세도, 아파트 관리비도… 이 이야기를 들은 일본인 남자 선배는 ‘남편이 다 써버리고 빈털터리가 되면 어떻게 하겠느냐, 나 같으면 그렇게 되기 십상’이라며 웃었다.
  2. 지금까지 해온 대로 내가 관리하며 남편은 필요한 때마다 돈을 타서 쓰게 하는 방법. 이렇게 하다 보면 많다, 적다, 낭비다, 아니다 하며 싸울 수도 있다.
  3. 모든 것은 지금까지 해온 대로 하되 남편 용돈을 통장에 월급처럼 매달 말일에 자동 이체하는 방법이다.

 

이 세 가지를 검토한 끝에 세 번째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평생을 많든 적든 벌어서 가정 경제를 이룩했는데 마누라한테 잔소리 들어가며 용돈을 타 쓰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나도 적당한 액수를 정해 다른 지갑에 넣고 용돈으로 쓴다.

새로운 수입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가진 돈을 연봉처럼 1년에 얼마를 정해 배분하고 1년 분을 다시 14등분해 12개월 생활비와 2개월 분은 보너스로 생각하고 연말이나 신년과 성탄, 아이들이 왔을 때 가외로 나가는 비용에 충당한다.

 그러나 지난 3년 동안은 예기치 않았던 수술과 입원으로 추가 예산이 필요했다. 회사나 나라살림만 어려운 것이 아니라 두 노인이 사는데도 이러한 치밀함이 필요하지만 이것보다는 앞으로 얼마나 오래 살 것인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끝까지 아이들의 도움 없이 살 수 있을지 불안하다. 가능하면 자식들의 도움을 받지 않고 살 수 있으면 좋겠다.

70이 넘으면서 이런저런 핑계로 자녀들의 도움을 받는 친구들이 늘어난다. 당당하게 받는 사람, 마음 아파하며 받는 사람, 몹시 사양하다 받는 사람 등 아주 다양하다. 나도 언제부터인가 아들의 세배를 받고 내가 세뱃돈을 주던 것이 거꾸로 돈을 받게 되었다.

처음에는 당황스럽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하여 얼떨떨해 하며 받았다. 저금했다가 다시 돌려주는 한이 있더라도 그 마음을 고맙게 받는 것이 옳을 것 같아서였다. 그 밖에 외국에 출장 갔다 돌아오면서 선물을 사오거나 생일에 선물을 받거나 저녁을 대접받는 일도 있는데 모두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최근 차가 현직에 있을 때 쓰던 것이라 좀 크고 또 헐어서 작은 것으로 바꾸려고 했더니 아들이 선뜻 비용을 대주었다. 깜짝 놀라고 가슴 뿌듯하여 “고맙다.” 고 했더니 “엄마도 나 학위 했다고 차 사주셨잖아요. 갚는 것인데요, 뭐.” 했지만 자식 돈을 쓰는 것은 그렇게 아깝고 가슴이 짠하다.

그러나 자식은 부모를 돕는다는 사실이 뿌듯하고 자신에게 충족감을 줄 수 있다는 생각에 끝까지 사양하지 않고 받으면서 ‘아! 이래서 자식이 있어야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우리는 우리 생활을 꾸려 나가고 있는데, 이것이 세상 끝날 때까지 이어지기를 기도한다. 그래야 때때로 아이들에게 받는 도움이 더 기쁘고 마음 편할 것이다.

자식들이 노년이 되었을 때는 우리 세대보다 사회복지면에서 더 나은 사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젊어서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세금 낸 사람들이 노후 걱정을 하는 것은 우리들만으로 족하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손자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 부모를 돌보아야겠다는 마음을 갖게 될지 걱정이다.

노후에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가장 큰 원인은 병이다. 장기입원을 해야 하고 큰 수술을 받는 일이 생기지 않아야 노년에 돈 걱정을 덜 하게 된다 장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경제적으로 편안하고 고통을 겪지 않기 위해 꾸준한 영양섭취와 운동으로 건강을 유지해야 한다.

얼마 안 되는 유산을 남겨놓고 일찍 돌아간 남편을 대신 해 1남 3녀를 가게를 운영하며 키운 집에 며느리로 들어간 어느 친구 얘기다. 외며느리인 이 친구는 교직에 있으면서 시어머니와 세 시누이 뒷바라지를 하는 가운데 섭섭한 일을 겪으며 시집살이를 했다. 그 후 시어머니가 연세가 들어 재산을 정리해 네 자녀와 당신 몫까지 5등분으로 나누었다고 한다.

그리고 아들 집에 들어와 살았다. 경우 밝은 며느리는 옛날에는 아들에게 후하게 주는 것이 관례였고 또 아들이 부모님을 모시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는데, 주는 것은 아들딸 가리지 않고 똑같이 나눠주면서 아들만 부모를 모시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듣고 보니 그럴싸하다. 그래서인지 고부간의 관계가 끝까지 화목하지 못했던 것 같다.

자녀에게 조금이라도 물려줄 재산이 있다면 그대로 노인들이 가지고 독립해 살다가 남은 재산을 자녀에게 물려주든지, 아니면 특정 기관에 기부하든지 하는 것이 공연한 마찰과 불편한 관계를 피하는 한 방법이 될 것 같다.

그러기 위해서는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확실한 유서를 남겨야 하기 때문에 정신이 똑바를 때 심사숙고하여 유서를 써놓아야 한다. 형제들 사이에 유산 때문에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게 하는 것은 부모 잘못이다.

앞에서 말한 그 똑똑한 친구가 “옛날식으로 아들 가족과 함께 노후를 보내려면 유산처리도 옛날식으로 해야 하고, 유산처리를 현대식으로 한다면 노인들의 거취도 네 자녀가 골고루 책임져야 한다.”고 똑 부러지게 말하는 것을 들으며 동감했다. 그러나 경우로는 그렇지만 부모를 돌보는 일에 어떤 이유로든 돈을 결부시키는 데는 씁쓰레한 기분을 지울 수 없다.

 

 

노년기에 가장 무서운 치매

암보다 더 무서운 것이 치매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기도할 때 ‘몸과 정신을 건강하게 해주소서.’ 하지 않고 ‘정신과 육신의 건강을 주소서.’ 하며 ‘정신’을 강조해 기도한다. 치매에 걸리면 처음에는 불쌍하고 딱하다. 오래가면 많은 폐를 끼치기 때문에 천대받으며 모든 가족을 고생시킨다.

치매를 고치거나 예방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내가 책에서 보고 의사들한테서 듣고 경험자들한테서 들은 것을 참고하여 많은 사람이 노력함으로써 치매만은 걸리지 않고 살다가 ‘하느님, 감사합니다.’ 하며 눈을 감았으면 좋겠다.

치매와 함께 뇌졸증으로 신체에 이상이 생기고 사고력이 떨어지는 것은 노령화가 진행되면서 오는 자연현상이다. 요즘은 유행처럼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체중감소에 혈안이 되어 있고 적게 먹고 기름기 피하는 데 열심이다.

일본의 한 대학병원 교수인 시바다 히로시 에 따르면 지방량이 줄면서 노화가 시작된다. 물론 이것은 육식을 덜 먹는 일본인을 상대호 조사하고 실험한 것이어서 우리와는 조금 다를 것이다. 일본의 아키타 지방에서는 50~60년 전만 해도 밥만 많이 먹고 반찬은 약간의 야채 절임이었다고 한다.

그 당시 뇌 이상자가 가장 많은 고장이 아키타였다. 그러나 지금은 고기와 생선을 먹게 되면서 뇌 이상자 수가 많이 줄었다고 한다.

고령인 사람은 고기를 먹을 것을 권한다. 병원에서 무조건 소금과 고기를 줄이고 지방을 뺀 음식을 먹으라고 지도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한다. 짜게 먹는 것이 혈압과 위장에 나쁘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정도 문제다. 특히 고령자의 경우는 혈중 ‘나트륨(소금 성분)’이 줄면 쉽게 의식장애가 온다고 한다.

그러므로 싱겁게 먹는 것, 기름기 피하는 것도 나이에 따라 달라져야 하며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해서는 안 된다. 고령자는 고기(동물성 단백질)와 지방을 먹어야 하며 소금도 먹어야 한다. 내가 본 바에 따르면 고기를 좋아해 조금씩 꾸준히 먹는 노인들이 비교적 육신과 함께 정신도 똑똑하여 장수한다.

뇌세포는 60세가 넘으면 줄어들기 시작하지만 남은 세포는 쓸수록 기능이 좋아진다고 한다. 특히 글 읽기와 간단한 계산이라도 꾸준히 하면 뇌기능이 증진한다.

뇌장애가 있는 노인들에게 성경이나 불경을 소리 내어 읽게 하고 필사까지 하며 또 용돈이라도 수입 지출을 장부에 적게 하여 매일 계산하도록 하면 10명 중 3명꼴로 기저귀를 떼었다는 조사 보고도 있다. 

90세가 넘은 일본인 의사 히노하라 선생은 <인생 백 년을 돌아보며> 에서 심해지는 건망증을 고민하며 ‘나이 탓이야. 내가 이러지 않았는데. 기억력이 꽤 좋았는데.’ 하고 변명하거나 합리화하지 말라고 한다.

이 의사한테는 평소 가까이 지내며 존경하는 화가가 있었는데 90세에 돌아가셨다. 그 화가는 80이 넘어서 자리 보존하고 누웠는데도 정원에 있는 200여 종의 나무와 꽃 이름을 모두 기억하여 한자로 썼다고 한다. 그뿐 아니라 아는 사람들의 이름도 정확하게 기억하고 한자로 이름을 모두 썼다고 한다.(일본인 이름은 한자로 기억하기 어렵다.)

어떻게 90세가 되도록 그렇게 기억력이 좋으냐고 했더니 모든 것을 기억하고 외우려고 많은 노력을 했다는 말에 히노하라 선생은 눈이 번쩍 띄어 무릎을 탁 쳤다. 아무리 나이 들고 아흔 살, 백 살이 되더라도 반복 교육을 끊임없이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도 그렇게 노력했다고 한다.

지시대명사를 쓰지 말고 확실한 명사를 쓰도록 하자. 가령 “그전에 저 왕십리 근처 그게 무든 동이더라, 거기 살 때 옆집 여자가 뭔가를 잘 만들어 얻어먹곤 했지.”가  아니라 “왕십리 쪽 행당동에서 살 때 옆집 철수 어머니가 찐빵을 잘 만들어 우리도 얻어 먹었지.” 하고 말하도록 애쓴다. 가만히 되돌아보면 한글을 익힐 때도 낱말을 몇 번씩 써오라고 했고, 매일 되풀이하여 구구단을 외우도록 교육받았다. 중고등학교 때는 더 많은 것을 익히기 위해 반복 학습을 했다.

나이 들어 기억력이 약해지는 것은 이와 같은 교육을 이미 끝난 것, 하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잘못 생각하는 데 있다. 80, 90세가 되면 다시 초등학생으로 돌아가 새로운 것은 물론 알고 있는 것까지 잊지 않도록 거듭 노력해야 한다. 뇌졸증이나 다른 원인으로 몸의 움직임이 장애를 받을 때 반복해서 재활운동을 하면 회복되듯이 뇌기능도 계속 자극을 주면 활성화한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애국가를 4절까지 외워 부르고 있고 성가나 그 밖의 노래도 끝 절까지 외워 부르려고 노력한다. 또 지도책을 펴놓고 유럽과 남미 대륙, 아프리카 대륙 등 각 나라의 위치까지 외워볼 작정이다.

정신이 바를 때 흥얼흥얼 노래도 하고 성경이나 불경을 소리 내어 읽고 필사하자. 살림하는 사람은 반드시 가계부를 적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용돈 장부를 만들어 일주일 통계, 한 달 통계를 내며 계산하자. 이러한 것들이 치매를 막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한다.

뇌뿐 아니라 육체도 쓰지 않으면 퇴화가 급속도로 진행되며, 쓸수록 정상을 유지할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젊은 사람은 1~2개월 꼼짝 못하고 누워 있다가도 회복되어 일어나면 다시 움직이는 데 그리 어려움이 없지만, 고령자는 감기로 일주일이나 10일 정도 앓아 누웠다가 일어나면 움직이고 걷는 것이 쉽지 않다.

조울증을 막기 위해 위에 부담을 주는 약을 쓰는 것보다 뇌의 신경전달물질을 만드는 필수 아미노산이 많이 들어있는 고기를 먹어 자연적으로 치료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일본 오비린 대학 시바타 교수는 말했다.

고령자일수록 고기도 먹고 꾀를 부리지 말고 몸을 움직이며 뇌를 훈련하여 치매만은 물리치도록 하자.

 

 

생명 유지 장치에 의존할 것인가?

나는 거의 60세까지 ‘에너지 탱크’, ‘철의 여인’ 소리를 들으며 건강하게 살았다. 한번도 결강하지 않아 학생들이 ‘교수님은 고뿔도 않지 않나?’ 하고 말했다는 소리를 들었다. 직장에서 하는 정기 신체검사에서도 늘 ‘정상’으로 ‘A 급’ 판정이어서 동료 교수들의 부러움을 샀다.

70을 넘으면서 여기저기 아프기 시작하고 전신마취 수술도 하게 되었다. 전에 어른들이 ‘여기저기 아픈 게 늙는 거지, 얼굴에 주름이 생긴다고 늙는 게 아니야.’ 하던 말이 생각난다.

노년기에 들어서며 아프기 시작하면 겁도 나고 삶에 애착도 생겨 이것저것 몸에 좋다는 것은 다 먹는 사람들이 많다. 나는 몸에 아무리 좋다고 해도 입에서 싫으면 안 먹고 ‘그것은 몸에 안 좋은데’ 해도 입에서 좋으면 그냥 맛있게 먹는다.

나는 코에다 입에다 기관지까지 뚫어 고무호스를 주렁주렁 매달고 오래 살고 싶은 생각은 티끌만큼도 없다. 물론 젊은 사람이 위급 상태에 놓여 있을 때는 다른 문제다.

특히 70, 80을 넘어선 사람들이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생명 유지 장치로 10년 가까이 나이 먹는 경우를 보는데, 이렇게 생명을 연장한다고 해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

환자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부부는 서로 나중에 남은 사람이 상대방에게 이러한 생명 유지 장치를 하지 않도록 약속했다. 이이들한테도 유언이라며 당부했다.

어머니처럼 마지막에 말을 잃는 것은 정말 비극이다. 의사표시도 하고 마지막 말도 남기고 싶었을 터인데… 그런데 하물며 기관지를 뚫어 말을 잃게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어느 의사에 따르면 사람의 몸은 스스로 정상적인 건강을 유지하려는 힘을 지니고 있는데 인공적으로 또는 약으로 이것을 방해하면 건강해지려는 기능이 퇴화된다고 한다.

생명 유지를 위해서만 음식을 먹는 것은 아니다. 맛을 음미하며 좋아하는 음식을 먹을 때 우리는 행복하다. 어머니는 닭고기를 좋아하여 돌아가실 때까지 닭죽을 가장 맛있게 잡수셨다. 노인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먹는 행복을 빼앗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호스 급식도 그렇지만 80이 넘은 노인에게 신장에 해롭다고 배추와 무가 생으로 떠 있는 물같이 싱거운 물김치만 권하고 좋아하던 굴비도 드리지 않는 효자 아들을 보았는데, 이렇게 해서 80 사실 분이 85세에 돌아가신들 그게 무슨 효도일까?

60대 중반에 무엇 때문에 갔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병원에 간 일이 있다. 아는 의사가 오래간만에 왔는데 간단한 검사를 하자고 해서 예정에 없던 몇 가지 검사를 했다. 그랬더니 왼쪽 유방 밑에 있는 폐가 이상하다는 결과가 나왔다.

2개월 후에 엑스선 검사를 다시 하자고 했다. 그러나 나는 엑스선 검사를 하지 않고 지금까지 지내고 있다. 이것은 잘하는 것도 아니고 자랑할 일도 아니라는 걸 잘 안다. 다만 최후의 판단을 듣기 싫어서였고 예정에 없던 검사라 하지 않기로 했던 것뿐이다.

지금까지 이만큼 건강하게 산 것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앞으로도 건강에 조심하며 자연스럽게 나이 들도록 노력하려고 한다. 다만 70을 넘어섰고 곧 70대 중반을 지나 80을 향해 줄달음질칠 것인데 설혹 어려운 병을 선고 받더라도 침착하게 받아들이고 되도록 수술은 안 할 생각이다.

외국에서 어느 의사가 텔레비전에서 얘기하는 것을 들었는데 건강한 노신사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숨이 남아 있을 때 수술을 하려고 복부를 절개해 보니까 내장에 온통 암세포가 퍼져 있었다고 한다. 그 정도면 벌서 죽었거나 죽음을 코앞에 두고 있는 것이 보통이라고 했다.

결국 노신사는 자신이 암환자라는 것을 모른 채 일상생활을 하다가 교통사고로 죽은 것이다. 이렇게 사는 방법, 곧 병에 무관심한, 아니 관대한 생활 방법도 나이 든 사람한테는 괜찮은 것 같다.

나이 들면 암세포도 천천히 퍼진다고 하지 않는가. 수술을 해서 다시 사는 기간과 그냥 살다가 가는 기간이 거의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마치 어느 모임에서 1년 회비는 3만 원, 종신회비는 50만 원일 때 75세 된 사람이 종신회비가 밑질 것 같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선배 한 분이 40대에 유방암에 걸려 회복되기 힘든 상태에 이르렀다. 그때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근육이 위축되는 병으로 휠체어에 의존해 살고 있었는데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는 답답하고 애처로운 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런 상황인데도 친구나 후배들이 병문안 가면 명랑하게 웃기고 얘기하면서 오히려 방문한 사람들을 위로했다.

“걱정하지 마, 사는 대로 사는 거지, 뭐!”, “지지리 궁상 떨고 걱정한다고 뭐 해결되는 것 있니?” 하더니 결국 하늘나라로 갔다. 어쩐지 그 선배는 씩씩하게 하느님한테 갔을 것만 같다.

얼굴 광대뼈가 부서져 수술하고 병원에 누워 있는 동안 나는 내 얼굴을 바라볼 수 없었다. 병문안 온 사람들이 놀라 걱정할 때도 나는 먼저 간 선배가 죽음을 앞두고 밝게 웃으며 사람을 맞이하던 생각이 들어 “걱정하지 마! 빨리 나아서 씩씩하게 나갈게.” 하고 웃으며 헤어졌다. 그러고 나니까 웃을 때 상처는 아팠지만 마음은 밝고 편안해졌다.

병에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며 앞서 걱정하지 말자. 내가 짊어지고 가야 할 병이라면 달래가며 빨리 친숙해져야 한다. 지나치게 겁을 내며 떨쳐버리려고 허둥대는 노인의 모습은 보기에도 민망하다. 의연하고 침착하게 대응하는 것이 보기에도 좋다.

 

 

죽음을 반갑게 맞이하자

70세가 넘으면서 나는 죽음을 늘 염두에 두고 기다리는 마음으로 살고 있다.

물론 의사로부터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을 들으면 갑자기 울부짖으며 살려 달라고 외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절대로 그러지 말고 침착하게 받아들이고 우아하게 체면을 유지하며 살다가 죽고 싶은 것이 내 간절한 바람이다.

친구들에게 이와 같은 이야기를 하면 무슨 그런 흉한 말을 하느냐고 타박을 준다. 심지어는 “애! 죽으려면 아직 멀었어!” 하고 말하는 친구도 잇다. 그러나 나는 결혼 후 그리 불행한 삶을 살지 않았고 비교적 무난히 살았음에도 늘 죽음을 생각하고 어떻게 근사하게 내 삶을 마무리할 까 하는 사치스러운 생각을 해왔다.

죽음이 그렇게 빨리 찾아오는 것도 아닌데 미리부터 죽음을 생각하기 싫다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늘 열심히 운동하고 다이어트를 하며 건강관리를 철저히 하던 친구가 느닷없이 교통사고로 죽는 경우도 있다.

죽음을 생각함으로써 삶이 더 계획적인 것이 되고 바빠지며 알차게 되는 것 같다. 막연히 아직 멀었다고 생각하며 모든 일을 뒤로 미루고 느긋해질 때도 있었고 계획성 없이 비효율적으로 살기도 했다.

교통사고로 죽은 친구는 미국 대학에서 40년 넘게 강단에 선 교수였다. 같은 과도 아니었고 고등학교도 다를 뿐 아니라 대학 졸업 후 바로 미국으로 갔기 때문에 그렇게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그러나 남편 일로 약 2년간 한국에 와 있으면서 과모임에 합류하여 굉장히 재미있게 지냈다.

외국에서 성공하여 오래 살아도 한국에서 어릴 때 사귄 친구처럼 스스럼없이 농담도 하고 툭툭 치며 장난하는 친구는 없다고 한다. 40년 만에 만난 우리들과 새삼스레 정을 나누었는데, 미국으로 간다고 하니 굉장히 서운했다.

“너는 왜 와서 정을 나누곤 가버리니? 보고 싶어질 것 같아. 또 놀러 와.” 했더니 그 친구도 “나도 그래. 나는 외국에서 연구하며 바삐 사느라 봉사를 별로 하지 못했는데 네가 열심히 봉사하며 사는 것을 보니 참 좋아 보이고 부럽다.” 고 해서 “너도 성당에 나가라. 그리고 조금씩 봉사 해. 연구보다 쉽지. 얼마나 큰 기쁨이 오는데.” 했다. 그랬더니 그 친구가 “열심히 생각해 볼게.” 하며 내 손을 꼭 잡으면서 “자주 올게.”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

그 친구는 집도 새로 짓고 차도 2대나 구입해 은퇴 후 느긋한 삶을 위한 준비를 차근차근 하고 있었다. 얼마 전 남편이 먼저 한국에 나왔고 친구도 집안 마무리가 끝나는 대로 한국에 온다고 했는데, 어느 날 볼일 보러 나갔다가 열여덟 살 난 아이가 운전하는 큰 트럭이 뒤에서 받아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었다는 소식이 날아왔다. 새 차라도 타고 나갔으면 살았을지도 모른다며 모두 가슴 아파했다.

사람의 죽음, 마지막 만남과 헤어짐을 어떻게 알겠는가? 하느님밖에 모르는 이 당연함을 깜박깜박 잊어버린 채 내일도 모레도 있으려니 생각하는 이 어리석음을 어찌하랴. 이 친구는 종교가 없었다. 성당이나 교회에는 항상 노인이 많다. 외국은 더하다.

이 노인들을 보는 젊은 사람들은, 아니 나도 젊었을 때는 죽을 때가 가까워지니까 천당에 가고 싶어서라는 곱지 않은 감정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보니 이제야 알겠다, 왜 노인이 많은지를. 죽음을 준비하며 죄도 뉘우치고 여력이 있는 한 봉사도 하면서 마음의 평화를 얻고 싶어서다. 또 기도하기 위해서다.

우리한테는 내가 생각하는 것을 다 이야기하고 들어줄 상대가 필요하다. 친구들도 들어주지만 기도는 차원이 다르다. 젊었을 때보다 기도거리가 더 많아지는 게 노년기다. 나를 위한 기도, 곧 나의 구원과 건강과 평화를 위한 기도 외에 자식이나 손자 손녀를 위한 기도가 많은 시간을 차지한다. 젊어서는 성당에서 정해진 날에 이런 기도를 하라면 마지못해 했다. 그러나 지금은 어려운 이웃을 위해, 세계의 굶주리는 이들을 위해, 이북동포를 위해 기도한다. 기도할 것이 하도 많아 헤아릴 수 없다. 그러니 묵주를 들고 기도하는 노인들이 많을 수밖에 없다.

개신교 친구들한테 질문을 받을 때마다 반박을 받곤 하는 문제가 바로 성모님에 대한 신앙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이렇게 말한다. 아이를 기를 때 열이 펄펄 나고 아프면  “성모님, 당신도 아드님을 키우신 어머니셨지 않아요? 도와주세요! 당신 아드님께 전해 주세요.” 하고 기도한다고. 육신의 부모한테도, 아버지에게 부탁하고 떼쓰는 경우와 어머니에게 어리광 부리고 졸라대는 경우가 있다. 나는 극히 인간적이어서 그런지 기도할 때도 성모님께 졸라대는 경우, 하느님께 떼쓰는 경우가 다르다.

어찌 되었든 죽음을 생각하며 사는 나이가 되면 기도거리가 많아진다. 사람에게 부탁하고 조르면 크게 싫은 소리를 듣거나 야단을 맞지만 하느님은 말없이 들어주신다. 죽은 후에 남에게 갚을 것도, 받을 것도 없기를 바란다. 내 뒷 사람들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았으면 좋겠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께서 말씀하셨듯이 내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나는 행복했습니다. 당신들도 행복하세요. 그 동안 고마웠습니다. 안녕히 들 계세요, 다시 만날 때까지.” 하며 조용히 눈을 감았으면 한다. 이것을 위해 기도하며 또 그렇게 해주시리라 믿는다.

마지막이 올 때까지는 밝고 씩씩하고 유쾌하게 살 작정이다.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며 여러 사람과 어울려 열심히 살고 있다. 어떤 일이 닥쳐도 당황하지 말고 침착하고 차분하게 해결해야겠다고 다짐한다.

이 글을 쓰면서 불의의 사고로 한 발 먼저 간 친구의 명복을 빌며 하느님께 그가 평화의 안식을 얻도록 간절히 기도한다.

 

 

맺음말

처음 책을 내자고 제의를 받았을 때 ‘내가 과연 해낼 수 있을까?” 하고 생각했지만 곧 ‘나는 해내고 말 것이다.’ 하고 다짐하며 스스로 용기를 북돋았다.

자꾸 다른 일이 겹치고, 외국 갈 일도 생기고 해서 걱정했는데 무사히 끝나게 되어 ‘만세!’를 부르며 큰 소리로 ‘하느님, 감사합니다!’ 하고 외쳤다.

나는 외국에서도 우리 못지않게 경로사상이 넓게 퍼져 있는 것을 보며 부러워한 적이 있다. 노인들이 따뜻한 양지에 앉아 자녀들이 정원을 손질하고 손자 손녀들이 뛰노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흐뭇해하는 정경은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이었다. 나는 이 책에서 노인들에게 젊은이들에게 맞추어 살자고 제의하고 또 강조했다.

그렇다면 젊은이들도 이러한 노인들의 열린 자세와 양보에 대한 어떤 화답이 있어야 할 것이고, 나는 반드시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 젊은이들은 노인들보다 훨씬 현명하고 이해가 깊기 때문이다.]이 글을 마무리하고 나니 불현듯 허전하기도 하다. 내가 앞으로 이만한 일을 또 해낼 수 있을까, 아마도 이게 마지막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니 조금은 서글퍼지기도 한다.

그러나 하느님이 나를 써먹으시면서 또 하라고 하시면 무조건 해야지 별수 있나? 일을 시키실 때 건강도 주시고 용기도 주실 테니까 미리 걱정하거나 겁먹을 일이 아니다.

내일부터 다시 눈을 크게 뜨고 귀를 쫑긋 세우고 많은 얘기를 듣고 많은 것을 보고 느끼며 메모를 해야겠다. 그리고 어두운 곳도 찾아 다녀야겠다.

“하느님, 제기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아버지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찾아 심부름하며 살다 당신께 돌아갈 수 있게 도와주셔요. 아멘!”

 

2007년 4월 5일 1판 1쇄 발행

펴낸곳 바오로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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