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늦게 만난 사람들

 

첫째 묶음 – 길 위에 있는 사람들

둘째 묶음 – 가르치고 배우며

셋째 묶음 – 그래도 우리는 웃는다

넷째 묶음 – 아내에 관한 추억

 

 

작가소개

 

– 1955년 인천 출생.

– 제물포고, 인하대학교 응용물리학과 졸업.

– 1980년부터 1986년까지 인천기독교 도시산업선교회에서 실무자로 활동했다. 이후 3년 남짓 한국기독교 산업개발원에서 연구원으로 일했으며, 이경우 법률사무소 상담실장을 거쳐 현재 한울노동문제연구소 소장으로 있다.

– 지은 책으로는 <항상 가슴 떨리는 처음입니다> <노동자는 못 말려> 등이 있으며 <알기 쉬운 산업안전보건법> 을 기획하기도 했다.

 

 

 

 

첫째 묶음

길 위에 있는 사람들

 

한때, 옳다고 생각되는 길을 부끄럼 없이 걸은 적도 있었으나 이제는 그 길에서 내려와 길가에라도 남아 있으려 애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만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아직도 그 길 위에 있는 사람들이고 그 만남 속에서 나는 거의 매 번 감당할 수 없는 소중한 느낌을 받습니다.

열심히 일하는 노동자에게 물 한 잔 떠다 주는 일이라도 성의껏 하며 살자는 것. 그것이 길가에라도 남아 있기 위한 나의 다짐입니다.

 

 

골리앗 노동자

 

제대로 숨돌릴 틈조차 없었던 3박 4일간의 일정을 마치고 마지막 날 노동조합 간부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했습니다. 내 옆 자리에 앉았던 키가 작은 노동자가 술잔을 기울이는 중간 중간에 들려 준 이야기…

 

“나는 국민학교도 못 나왔습니다.

친구들이 책가방 들고 다닐 때 자장면 배달통을 들고 다녔지요.

구두닦이 경력도 꽤 되는 사람입니다.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다가 방어진 바닷가의 이 회사에 들어와 노동조합을 알게 되었고 비로소 사람답게 사는 길이 보이더군요.

구사대에게 식칼 테러를 당하던 날 우리 쪽 인원은 9,000명이나 되었습니다.

시퍼런 칼날이 동료의 옆구리에 쑤셔 박히고 나도 몽둥이에 맞아 쓰러지면서 ‘이 놈들아, 위원장님의 비폭력 선언만 아니었어도 너희들은 다 죽었다’고 이를 악물었지요.

서울에 올라와 전철을 타고 우리가 당했던 일들을 눈물로 호소했을 때 시민들이 보여 준 반응을 보면서 위원장님의 결단이 옳았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삼엄한 검문을 피하느라 뿔뿔이 흩어져 산 넘고 물 건너, 물어 물어 서울까지 왔더니 정주영이 있다는 본사 앞에 500명이나 모였던 그 감격은 말하자면 또 한 편의 소설이지요.

‘불법쟁의가 발생하면 신고가 없어도 공권력을 투입하겠다’고 발표했다던데 ‘범죄와의 전쟁’ 어쩌구 할 때부터 벌써 다 알아봤다 아닙니까.

우루과이 라운드가 지랄 염병을 하고 남북교류, 체육교류 해쌓는 바람에 지금은 쑥 들어가 있지만 ‘이놈들아, 다음 임투 때 보자.’ 나는 그런 사람입니다.”

 

식사를 마치고 식당을 나와 헤어지려 할 때 그가 작업복 점퍼를 벗으며 말했습니다.

“따로 드릴 것도 없고 이 잠바나 기념품으로 가져 가실랍니까? 서울 거리에서 이걸 입고 다녀 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 점퍼를 꼭 하나 입고 싶어서 공단시장 뒷골목에 가서 값을 물어 본 적도 있었지만 입고 있는 옷까지 벗겨 갈 수는 없는 일이어서 겨우 말렸습니다.

“오늘 제 숙소로 가서 같이 주무시지요.”

헤어지기 못내 섭섭해 하는 그에게 내가 말했고 그는 선선히 따라 나섰습니다.

노동조합에서 마련해 주어 며칠 동안 잘 사용했던 사원 아파트의 한 방에서 그를 포함한 대여섯 명의 노동자와 마주 앉았습니다.

이야기 중에 내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지난번 골리앗 투쟁 때 누가 단식하자고 그랬습니까? 나도 해 보았지만 단식 투쟁은 함부로 할 게 아닙디다. 이게 해결되지 않으면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각오가 되어 있을 때 해야지… 할 수만 있다면 먹어 가면서 싸워야지요.”

그가 말했습니다.

“단식 선포하기 전에 이미 실제적으로 굶고 있는 상황이었거든요. 쌀 알을 후라이팬에 구워 먹는 것도 한두 끼지… ‘이래 굶으나 저래 굶으나 마찬가지 아니냐. 이렇게 된 바에는 화끈하게 단식하자’고 결정하고 쌀 자루 두어 개 남은 것마저 아래로 던져 버렸던 거지요.”

내가 또 물었습니다.

“골리앗 크레인에서 왜 그렇게 빨리 내려왔습니까? 좀 더 버티었으면 상황이 많이 달라졌을지도 모르는 판이었는데…”

그가 고개를 숙인 채 잠시 말이 없더니 작업복 점퍼 앞자락을 확 열어 젖혀 가슴을 훤히 들여다보이게 하며 말했습니다.

“홀딱 벗고 말하지요. 디게 외롭습디다. 우리들만 꼭대기에 올려 놓고 다들 보고만 있는 것처럼 느껴지더군요… 이제 속 시원합니까?”

그리고는 고개를 푹 꺾었습니다.

“ㅇㅇ이 그 자식이 그때 투신하겠다고 웃통 벗고 머리띠 매고 좌정하고 앉았는 걸 내가 억지로 떠매고 내려왔습니다. 얼굴이 온통 눈물 범벅이 되었지요.”

그는 한동안 술 마실 생각도 않고 계속 고개를 숙인 채 있었는데, 방바닥으로 눈물 방울이 떨어지는 것이 보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소주를 마시고 나는 음료수를 마시며 얘기를 나누다가 새벽이 되어 먼동이 트는 걸 보며 자리에 누우며 우리들은 모두 이를 갈았습니다.

‘이 놈들아, 다음 임투 때 보자…’

아침에 일어나 보니 노동자들은 모두 일하러 가고 빈 방에 나만 홀로 남아 있었습니다.

 

 

 

자장면과 볶음밥

 

싸구려 영화의 엑스트라 노릇도 했었다는, 해고 노동자로서는 꽤 특이한 경력 만큼이나 그의 첫 인상은 유별났습니다. 껑충한 키에 말씨나 몸짓은 마치 길거리의 ‘어깨’라도 되는 것처럼 건들거렸는데 첫날부터 나에 대한 호칭은 대뜸 ‘형님’이었습니다.

우리 사무실에 두어 번 들락거리더니 올 때마다 여직원과 되지도 않은 ‘농담 따먹기’ 를 하려고 드는 바람에 여직원은 아주 질색을 하곤 했습니다.

언젠가는 점심 시간 무렵에 여직원이 전화를 하나 받고 나더니 급히 도시락을 꺼내 식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

“하 선생님, 그 사람 곧 온대요. 오기 전에 빨리 점심 먹어 버려야지. 그 사람만 보면 나는 밥맛이 다 없어져요. 영 밥맛이라니까…”

 

시골에서 처음 올라와 친구들과 함께 자취를 할 무렵, 라면을 끓여서 다른 친구들이 먹지 못하게 가래침을 ‘카악’ 뱉어도 막무가내로 먹어 대는 바람에 화장실로 도망가 문을 걸어 잠그고 먹어야 했을 만큼 배를 곯았다는 이야기를, 밥 먹는 여직원 옆에 붙어 앉아 태연히 하곤 했으니 그럴 만도 했습니다.

가리봉 시장에 가면 자기도 알아 주는 건달이라는 자랑을 하곤 했는데 내가 못미더워하는 눈치를 보이자 지금 당장 자기와 함께 가리봉 시장 거리를 걸어 다녀 보면 알 것 아니냐고 윽박지르기도 했고 자기 방문은 자기가 없을 때도 항상 열려 있는데 그것은 방문에 작은 글씨로 자기 이름 석 자만 써 놓았어도 그 동네 좀도둑들이 감히 얼씬거리지도 못하기 때문이라고, 묻지도 않은 자랑을 길게 하기도 했습니다.

해고된 지 수 개월이 지나자 그의 모습은 눈에 띄게 궁핍해져 갔습니다. 어느 날엔가는 ‘누가 100만원만 줄 테니 사람 하나 죽여 달라고 안 하나. 충분히 하고도 남을 텐데…’고까지 말했습니다. ‘네가 사람을 어떻게 죽이냐?’고 물으니 그는 ‘간단해요. 칼로 포를 떠서 하수도에 처박으면 아무도 몰라요’ 하고 답했는데 눈빛이 다 이상해 보일 지경이었습니다.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그가 전화를 하더니 다짜고짜 말했습니다.

“형님, 저, 일 저질렀습니다.”

“무슨 일?”

“구사대 몇 놈 죽이고, 나도 이 바닥 떠 버릴랍니다.”

“무슨 얘기야?”

“내일 총회에서 까부는 놈들 두어 놈만 회칼로 쑤셔 버리기로 했습니다.”

“지금 좀 만나자.”

“왜요? 못하게 하려구요? 다 결정된 일입니다. 벌써 여관에 동생들 몇 명 불러 모았다구요. 걔네들 덩치만 봐도 구사대 자식들이 벌벌 떨 겁니다. 굳이 칼 빼 들 필요도 없어요.”

“너는 그렇다 치고 그동안 너와 함께 일했던 친구들은 어떻게 할 거야? 앞으로 평생 이 바닥에서 얼굴 못 들고 다닐 거 아니냐구?”

“나도 그게 제일 걱정입니다. 그것만 아니었으면 벌써 몇 놈 골로 갔지요.”

“지금 어디야? 당장 이리로 와.”

“싫습니다. 이제 더 이상 눈 뜨고 봐 줄 수가 없어요.”

“한번 만나자니까…”

“싫습니다.”

“그럼, 뭐하러 나한테 전화했어?”

“……”

겨우 그를 만나서 ‘인간은 왜 태어나는가?’는 주제까지 들먹여 가며 오래도록 이야기를 나눈 끝에 결국 계획을 취소하기로 결정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포기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나서 말했습니다.

“애들 여관비하고 밥값만 깨져 버렸네. 이래서 가방 끈 긴 놈들하고는 아예 상종을 말아야 하는 건데…”

그러나 그는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던지 총회가 열리던 날 혼자서 칼을 빼 들고 폼을 잡았다가 그의 표현대로 ‘완전히 쪽 팔리는’ 일을 겪었는데 그래도 이 바닥을 떠나지는 않았습니다.

 

예나 이제나 나는 식사 시간에 찾아 온 후배에게는 무조건 밥을 사 준다는 알량한 원칙을 갖고 있는데 그에게도 예외는 아니어서 만나던 첫날 저녁부터 자장면을 사 주었더니 그 후 그는 용케도 밥 때만 되면 가끔씩 찾아오곤 했습니다.

함께 일하는 여직원조차 ‘그런 사람에게까지 매번 밥을 사 주다니 참으로 이해되지 않는다’고 말하곤 했지만 그 친구에게는 아무래도 내키지 않는 편이어서 그랬는지 자장면 외에 다른 것을 함께 먹었던 기억은 별로 없습니다.

어느 날 저녁 무렵 사무실에 혼자 있는데 그가 기름때에 절은 작업복 차림으로 찾아오더니 날더러 자꾸 어디엔가 함께 가자고 했습니다. 자기가 그 동안 나에게 얻어 먹은 신세를 갚고자 하는데 자기 형이 중국집 주방에서 일을 하고 있으니 거기에 가면 자장면 정도는 공짜로 얻어 먹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중국집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니 부천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날더러 지금 자장면 한 그릇 얻어 먹으러 부천까지 가자는 말이냐?’고 한 마디 하고는 그날 역시 그에게 자장면을 사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해 마지막 날인 12월 31일, 저녁 무렵까지 혼자 사무실에 남아 있는데 그가 전화를 했습니다.

“아직까지 퇴근 안 하고 계셔서 다행입니다. 제가 오늘 형님한테 자장면 한 그릇 사지요. 정말입니다. 돈이 생겼다구요.”

그가 씩씩하게 말하더니 잠시 후 헐레벌떡 숨을 몰아 쉬며 들어왔습니다. 어디서 오는데 그렇게 빨리 왔느냐고 물으니 바로 앞 버스 정류장에서 전화를 한 거였다고 했습니다. 내가 짐짓 호들갑스럽게 말했습니다.

“그 동안 내가 너에게 사 준 자장면만도 열 그릇은 넘을 텐데 오늘은 자장면 말고 다른 걸로 먹자.”

그는 흰자위가 보이도록 눈을 치켜 뜨며 낮은 목소리로 따지듯 물었습니다.

“다른 거 뭐요?”

“최소한 볶음밥 정도는 먹어야지. 올해 마지막 날까지 그래 자장면을 먹어야 하겠냐?”

“에이, 그냥 자장면으로 드시지…”

“아니다. 나는 꼭 볶음밥으로 먹어야겠다.”

그가 잠시 뜸을 들이더니 말했습니다.

“그럼 저는 자장면 먹을 테니 형님은 볶음밥으로 드십시오.”

“너도 볶음밥 먹지 그래?”

“아니요. 저는 자장면이 좋습니다.”

결국 자장면과 볶음밥을 하나씩 시켰습니다. 잠시 후 음식 배달 온 소년에게 내가 재빨리 말했습니다.

“오늘은 이 친구가 계산한단다. 야, 너 빨리 돈 내.”

그가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는데 아, 100원짜리 동전 한 웅큼이었습니다. 그의 큰 손으로 동전들을 헤아려 건네 주는데, 꼭 자장면 두 그릇 값이었습니다.

“모자라는 건 형님한테 받으십쇼. 에이, 자장면 두 그릇 값밖에 못 구했는데…”

모자라는 돈 400원을 건네 주며 내가 물었습니다.

“너, 집에는 어떻게 갈 거야? 걸어서 갈 거야?”

그가 고개를 푹 숙이더니 말했습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한다구요. 빨리 밥이나 먹읍시다.”

그 해 마지막 날, 해 저무는 창가에 마주 앉아 아무 말 없이 볶음밥을 먹으면서 나는 자꾸 목이 메었습니다.

 

 

 

검은 장갑

 

산업 재해 문제에 관심이 있는 노동자들과 의사, 간호사, 약사 등 보건 의료인들이 150명쯤 모여 2박 3일 동안 ‘지지고 볶으며’ 치르는 행사가 있었습니다. 이름하여 ‘산업안전보건 활동을 위한 공동교육훈련’…말이 나온 김에 산업재해에 대해서 한 마디만 하면…

오늘도 이 땅 어디에선가 적어도 7명의 노동자가 일을 하다가 다쳐서 목숨을 잃었을 거라는 것이 노동부가 매 해 발표하는 통계입니다. 노동부의 통계에 잡히지 않는 해외 건설 현장과 종업원 5인 미만의 영세 사업장에서 발생하는 사고, 회사에서 은폐 처리되는 사고들까지 합하면 우리나라에서 일 년 동안 죽거나 다치는 노동자들이 대략이라도 얼마나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니, 아버지나 아들을 그야말로 ‘산업전선’에서 잃고 완전히 결단 나 버린 가정의 식구들을 내가 거의 매 주마다 새롭게 만나야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1년에 2,000명을 훨씬 넘는 노동자가 산업재해로 사망한다는 사실을 ‘1,000만 노동자’와 ‘100만 학도’의 비율로 간단히 환산하여, 우리나라에서 최소한 1년에 200여 명씩의 대학생들이 학교 시설의 잘못이나 혹독한 수업 환경 때문에 죽어 간다고 가정해 봅시다. 천지가 개벽되어도 벌써 되었지…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정권이 바뀔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러니, 대학생이 1년에 200명씩 죽는 것은 큰일날 일이고 노동자가 2,000명씩 죽어 나가는 것은 별 것 아니라고 여기는 인식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슬프지만 우리의 현실입니다.

 

다시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가, 그 공동교육훈련 행사의 첫날, 150여 명이나 되는 참가자들이 지역 별로 무리 지어 나가 일일이 자기 소개를 하는 길고도 지루한 시간이 있었습니다.

내 바로 옆 사람은 한 손에 검은 장갑을 끼고 있던 청년이었습니다. 그 청년은 자기 순서가 되자 ‘장갑 좀 벗어도 될까요?’ 하고 말하고는 한 쪽 손과 입을 사용해 장갑을 벗으려고 애썼습니다. 내가 얼른 그 청년이 옆구리에 끼고 있던 마이크를 받아 쥐었습니다.

장갑 속에서 나온 그 청년의 오른손은 손가락 다섯 개가 모두 잘려 나가고 없었습니다. 손가락이 잘린 정도가 아니라 손등 부분이 어른 밥숫가락 만큼밖에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참가자들 사이에 작은 웅성거림이 일었고 여자들 중의 몇 사람은 차마 볼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습니다. 모두 그 청년의 한 맺힌 외침 정도를 예상하고 있었는데 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저처럼 말이지요. 순간적인 사고를 당해 손가락이 잘린 사람은 그래도 산재로 인정되어 보험 처리가 됩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 동안 공장에 다니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골병 들어 버린 노동자는 좀처럼 직업병으로 인정 받지 못해서 산재보험 처리가 되지 않습니다. 생활비는 고사하고 치료비조차 한 푼 안 나와요. 여기 보니, 훌륭하신 의사, 간호사 선생님들도 많이 오신 것 같은데 앞으로 공장에서 일하다가 폐병 걸리고 수은 중독에 걸려 병원에 찾아오는 노동자가 있거든 제발 좀 친절하게 잘 해 주십시오.”

그것뿐이었습니다. 그는 결국 자기가 다쳐서 원통하다는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음이 내 차례였는데 잠시 숙연해진 사람들에게 ‘노동상담하는 하종강입니다. 어쩌구…’ 하려니 말하는 나도 참 부끄러울 지경이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2박 3일 동안 나는 그와 내내 붙어 있다시피 지냈고 그 공동교육훈련이 끝난 얼마 후 나는 결국 사무실 사람들의 동의를 얻어 내 책상 옆에 작은 책상을 하나 더 갖다 놓고, 마다하는 그를 들여 앉혔습니다.

 

그는 의경으로 복무했는데 이른바 사복 체포조인 ‘백골단’ 출신이었습니다. 그의 표현대로 ‘세상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채, 휴가 가는 재미’에 열심히 시위 학생들을 체포했습니다.

체포한 학생이 거물이어야 휴가를 갈 수 있었기에 보고서에는 가능한 한 자기가 체포한 시위자가 거물인 것처럼 쓰는 것이 통례였습니다. 구호를 한번 선창했으면 열 번쯤 선창했다고 쓰고… 그는 요즘도 농담처럼 ‘그 때 내 손이 죄를 많이 지어 이렇게 되었다’고 말하곤 합니다.

제대를 앞두고 그는 함께 의경 생활을 했던 친구와 함께 아예 경찰에 말뚝을 박기로 결심했습니다. 제대 후 경찰 채용 시험일까지는 두어 달 정도 남아 있었는데 그의 친구는 시험 준비를 한다고 도서관에 다녔고 그는, 의경 출신은 웬만하면 붙여 준다는 그깟 경찰 채용 시험을 따로 공부까지 해 가면서 봐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그 동안 돈이나 벌어야겠다’는 생각에 구로동의 플라스틱 그릇을 만드는 공장에 사출공으로 취업했습니다.

한 달 남짓 일했을 때, 그릇을 찍어야 할 기계가 그의 오른손을 찍어버리는 바람에 그는 오른손의 손가락 다섯 개를 모두 잃었습니다. 기계의 금형이 닫혔다가 열린 다음에 제품을 꺼내는 방법만 배웠던 그는 기계의 금형을 여는 방법을 몰라 기계 사이에 손이 끼인 채 한참이나 그대로 있어야 했습니다.

멀리 떨어진 곳에 있던 고참 노동자가 와서 금형을 열고 그의 손을 꺼내주었습니다. 장갑 속에서 손을 빼내던 그는 손을 도로 집어 넣고 말았습니다. 살은 모두 문드러져 없어져 버리고 뼈만 앙상하게 남은 손가락들이 올라왔던 것입니다.

의경 생활을 할 때 여동생의 소개로 사귀었던 그의 여자 친구는 그가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하루도 빠짐 없이 문병을 오더니, 퇴원하는 날 아예 짐을 싸 가지고 그의 집으로 함께 들어갔습니다. 그의 표현대로 그는 ‘손 하나를 잃은 대신 예쁜 아내를 얻은 셈’이었습니다.

 

우리 사무실에서 일하는 동안 그는 내 옆 책상에 앉아 닥치는 대로 책과 자료들을 읽었고 때로 답하기 어려운 질문들을 퍼붓기도 했습니다. 그럴수록 그가 해야 할 일을 분명히 느끼는 것 같더니 드디어 6 개월째 되던 날 ‘내가 이런 곳에서 책상이나 지키고 있을 때가 아니다’ 면서 사직서를 냈고 나는 기꺼이 그것을 받았습니다.

 

그가 산업재해를 당한 노동자들로만 구성된 단체에서 중요한 직책으로 일하게 되었다 기에 그를 만났던 날은 마침 국회에서 ‘화염병 사용 등의 처벌에 관한 법률’이 통과되던 날이었습니다.

그가 신문을 읽다가 실로 낙담하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이제 정말 큰일 났어요. 무서운 것은 화염병밖에 없었거든요. 화염병 없으면 전경들만 살 판 나는데… 그런다고 사용 못 할 것도 없지만…”

 

얼마 후, 공장에서 일하다 어처구니 없는 사고로 사망한 노동자의 장례식이 있어서 참석했을 때였습니다. 회사 앞 마당에서 장례식을 끝내고 대형 영정을 앞세운 상여 행렬이 회사 정문을 나섰으나 중무장을 한 전투경찰의 대열이 절대로 노제(路祭)는 허용할 수 없다며 겹겹이 행렬을 막아섰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명백한 불법 행위를 하고 있습니다. 회사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다면 법을 집행해야 하는 저희들로서는 부득이…”

경찰 간부의 가두 방송이 쩡쩡 울려대었지만 동료의 죽음을 직접 목격해야 했던 노동자들 중에 그걸 겁내는 사람은 이미 없었습니다.

“흩어지면 죽는다! 흔들려도 우린 죽는다! …… 지키련다. 동지의 약속. 해골 두 쪽 나도 지킨다!”

노래 소리와 함께, 대열 선두에 있던 흰 와이샤쓰에 검은 바지를 입고 머리띠를 두른 일단의 노동자들이 달려 나가 전경들과 뒤얽혔습니다. 순식간에 이는 고함 소리…아, 그때 나는 뿌연 흙먼지 속에서 분명히 보았습니다. 대열 맨 앞에서 전경의 방패를 부여 잡고 몸부림치는 검은 장갑…그 날 전경의 봉쇄를 여섯 번이나 돌파하고 기어이 목적했던 곳에 장례 행렬이 도착할 때까지 나는 전경과 몸싸움을 하는 대열의 선두에서 매번 검은 장갑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백골단 시절 그야말로 ‘승냥이처럼 달려가서 학생들의 덜미를 잡아 채 그대로 아스팔트에 패대기치며 정확하고 빠른 동작으로 하복부를 내지르도록’ 훈련 받은 서러움을 저들에게 고스란히 갚아 주고 있는 것 같아, 그의 모습을 보며 내내 눈물겨웠습니다.

노제 도중 멀리서 나를 발견한 그가 사람들 머리 위로 깡충깡충 뛰어 오르며 신이 나서 소리쳤습니다.

“하 선생님! 우리가 저지선을 여섯 번이나 돌파했어요! 완전히 깨부수었다구요!”

마치 태권도를 하듯 검은 장갑 낀 손을 휘저으며 참으로 실감나게 말했습니다.

그 날 이후 나는 신촌에서도, 종로에서도, 미금시의 원진 레이온 정문 앞에서도 뽀얀 최루가스 속에서 구호를 선창하거나 사람들에게 ‘전노협 진군가’를 가르치고 있는 검은 장갑을 쉽게 볼 수 있었습니다.

 

그 후 어느 단체에서 ‘노동자를 위한 산재 교실’이라는 정기 강좌를 마련했을 때 나는 그 강좌의 첫 강의를 그에게 맡겨 보자고 사람들을 설득했습니다. 며칠 후 그가 전화를 했습니다.

“저를 강사로 추천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강의 준비를 위해 그를 만났던 날 회의 도중에 그가 말했습니다.

“내가 백골단 출신이라고 말했다가 사람들한테 몰매 맞는 건 아닐까요?”

“그 죄는 벌써 갚고도 남았어. 이제 더 이상 너한테 돌멩이를 던질 사람은 없다.”

그 강좌의 첫날, 강의 첫머리에서 그가 말했습니다.

“제가 백골단이었을 때, 대학생들이 던지는 돌멩이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방패와 방석복과 방석모로 중무장을 하고 시위 현장에 나갔습니다. 그러나 노동자가 되고 보니 우리 노동자들은 방패 하나 없이 산업전선에 내 몰린 꼴이었습니다.

철 없었던 시절, 제 손톱이 조금 못 생겨서 어머니에게 ‘어머니, 내 손톱을 왜 이렇게 못생기게 나아 주었소?’ 하고 따지기만 해도 어머니는 가슴 아파하셨습니다. 제가 손가락 다섯 개를 모두 잃었을 때 제 정신이 들고나서 처음 든 생각은 ‘아, 불효했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다쳤다는 이야기를 한 달 후에나 들으셨는데도 기절하셔서 병원에 2주일 동안이나 입원하셔야 했습니다.

저는 요즘 시위 현장에 나가도 돌멩이를 마음껏 던질 수가 없습니다. 던져도 멀리 나가지도 않습니다. 몸이 건강해야 싸움도 합니다. 노동자 여러분, 건강할 때 건강을 지킵시다.”

 

비록 잠시 동안이었지만 그와 함께 일할 수 있었다는 것이 참 자랑스럽습니다.

 

 

 

제주도

 

. 제주도에 가다

 

지난 초겨울 어느 날 아내가 말했습니다.

“쥐꼬리 만큼 작은 적금을 하나 탔는데, 이번 겨울 방학에 애들 데리고 제주도에 한번 가 보았으면…”

그러나 3년 동안 애써 모은 돈을 놀러 가는 데 쓴다는 게 우리와는 영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었고 ‘남들 다 가니까 우리도 한 번 가야겠다’고 기를 쓰는 것이 조금은 천박스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서, 아내와 함께 며칠 고민하다가 결국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아내는 ‘잘난 남편 만나서…’ 하고 섭섭해 하면서도 ‘우리가 행여 죽을 때까지 비행기를 한 번도 타 보지 못하고 발에 스키를 한번도 신어 보지 못한들 그게 뭐 대수냐’고 웃었습니다.

 

그런데 그 얼마 후, 제주도에서 활동하는 친구로부터 노동조합 교육을 부탁 받았습니다. 3박 4일간의 일정이었습니다.

아내는 ‘혼자 가면 이혼 당할 줄 알라’고 웃으며 협박하기도 했고 나도 ‘함께 갈까’ 하는 생각을 해 보기도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안 될 일이었습니다.

유사 이래 철저하게 착취 당하고 멸시 받아온 노동자들이 맨 몸뚱아리만으로 모여서 사람답게 살아보자고 노동조합을 만들고, 자본과 권력을 손아귀에 틀어쥔 자본가와 첨예한 이해로 대립하는 임투를 준비한다는데 그곳에 마누라와 함께 나타난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우리가 이 다음에 성공한 후’ 숙청 당하기 참한 일이었습니다.

3박 4일의 일정 동안 딱 반 나절의 공백이 있었는데 그 시간만이라도 아내와 함께 한라산을 먼 발치에서나마 바라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다가 어느 날 아침 밥상 머리에서 아내가 말했습니다.

“제주도에 혼자 보내 주기로 했어. 그 대신 갔다 오면 시키는 대로 다 해야 돼.”

“시키는 대로 다 하는 게 뭔데?”

“앉으라면 앉고 일어서라면 일어서고, 차렷, 열중쉬어, 설겆이, 청소, 빨래 기타 등등…”

그래서 제주도에 다녀왔습니다. 의자 하나 없는 곳에서 3박 4일 동안 진행된 힘든 일정이었지만 이른바 ‘민주노조’라고는 전국적으로 손 꼽아도 열 개가 채 안되었던 70년대를 지켜 보았던 사람으로서 나는, 4.3 이후 50년 만에 제주도의 숨통을 틔우기 시작하는 노동자들의 열기에 내내 감격스러웠습니다.

 

 

. 제주도 친구

 

제주도의 내 친구는 78년도에 동일방직 사건으로 수배되어 제주도로 숨어들었을 때 자기를 처음 만나 숨겨 주었던 여자와 몇 년 후 결혼을 했습니다. 산업재해 사고로 손가락 네 개를 잃기까지 한 그에게 아내는 그의 말대로 ‘넓고 따뜻한 바다’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내려가 보니 한 달 전 쯤에 아내가 그에게 헤어지자고 요구했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피눈물을 뿌리며 가시밭길을 갈 수는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는데 그동안 아내에게 지은 죄가 너무나 많은 그로서는 정말로 할 말이 없었지만 그래도 아내에게 말했답니다.

“나 너 사랑하니까아… 우리 헤어지지 말자. 돈 때문에 헤어져야 한다는 건, 스스로 너무 창피해서 용납할 수 없다.”

결국 잠시 떨어져 지내 보기로 했습니다. 그는 지금 남의 농장에 붙어 있는 오두막에서 국민학교 6학년인 딸과 함께 더부살이를 합니다.

저녁 무렵, 그가 운영하는 노동상담소에서 교육 준비를 하고 있는데 그의 딸이 전화를 했습니다. 나는 옆에서 친구가 하는 말을 가만히 들었습니다.

“아빠 오늘도 저녁에 교육이 있어서 늦는다… 맛있는 거 뭐 사왔는데? …… 무슨 찌개? …… 아, 맛있겠다 …… 저녁 맛있게 먹고 일찍 자. 아빠 기다리지 말고 …… 알았어. 굶지 않을게…..”

그의 딸은 아빠에게 전화를 해서, 끼니 거르지 말고 꼭 챙겨 먹으라고 부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날 밤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다가 상담소 바닥에 전기 담요를 깔고 구겨지듯 쓰러져 잠을 잤습니다. 아침 나절에 전화가 와서 내가 받았는데 그의 딸이었습니다.

“우리 아빠 잠 깨셨어요?”

“아니, 아직도 코 골면서 잔다.”

“히… 우리 아빠 원래 그래요. 늦지 않게 일어나시라고 전화했는데… 아저씨는 늦잠 안 자지요?”

“그럼.”

“깨우셔서, 아침 꼭 드시라고 하셔요.”

“알았다.”

“그럼 됐어요. 끊어요.”

 

그날 낮, 친구와 함께 다른 강사를 맞으러 공항까지 갔다 오는 길에 저녁의 ‘결단식’에 쓸 소주를 사느라고 구멍가게 앞에 차를 세웠는데 차에서 내리다 말고 그가 말했습니다.

“어, 저기 우리 딸년 있네. 어떻게 여기까지 왔지?”

딸도 멀리서 그를 보고는 단숨에 뛰어왔습니다. 아빠 팔에 매달려 ‘아빠 얼굴 3일만에 본다’면서 깡충깡충 뛰는 것이었습니다.

택시 안에 앉아서, 나는 아버지와 딸의 뜻하지 않은 만남을 바라보다가, 딸의 등을 감싸는 그의 짧은 손가락들이 서러워 목이 메었습니다.

 

2년 쯤 후 제주도에 다시 내려갔을 때 보니 그는 아내와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멀쩡히 잘 사는 줄 알았더니 어느 날 헤어졌다고 해서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하는 친구들도 많은 판에, 헤어져 살다가 다시 함께 살게 되었다는 것이 영 믿기지 않아서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느냐’고 묻는 나에게 그가 씨익 웃으며 말했습니다.

“기다리니까 다 되더라구.”

 

 

 

참치 잡이 외항선원

 

아침 나절, 20대 후반의 건장한 청년이 사무실에 들어와 어색한 몸짓으로 여직원 책상 앞으로 가더니 멀거니 서 있었습니다. 여직원이 ‘어떻게 오셨어요?’ 하고 물으니 ‘저, 하종강 변호사님 좀 뵈러 왔는데요’라고 고개를 건들건들 옆으로 뉘며 대답을 했는데 그 모습이 어딘가 좀 이상해 보였습니다.

여직원이 ‘하 변호사님, 손님 오셨어요’라고 일부러 ‘변호사’에 힘을 주어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잘 아시겠지만, 나는 변호사가 아닙니다).

그가 한 이야기…

 

“저는 참치잡이 원양어선의 갑판원이었습니다. 말이 좋아 갑판원이지 강제 노동을 하는 죄수나 다름 없었습니다.생선 상자를 지고 뛰어가다가 살얼음 위에서 미끄러지는 바람에 허리를 다쳤습니다. ‘뛰지 않고 걸으며 일할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마치 ‘지옥’과 같은 갑판원의 처지는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입니다.

망망 대해에 병원이 있을 리가 없었습니다. 가끔씩 허리가 끊어지는 통증이 찾아 왔지만 견디어 내며 묵묵히 일했습니다.

차츰 통증이 너무 자주 찾아오고 그 강도도 점점 심해져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이상하게도 나중에는 목 뒤까지 아프기 시작했습니다.그냥 아픈 게 아니라, 목 바로 아랫부분부터 머리 뒤꼭지까지가 ‘목뼈를 따라 쇠파이프를 꽂았다가 뽑는 것처럼’ 아팠습니다. 파도가 치는 것처럼 심했다 덜했다 하면서 아픈 게 아니라, 한번 아프기 시작하면 이틀 또는 사흘간 계속 그렇게 죽도록 아팠습니다. 아픈 동안은 먹을 수도, 잠을 잘 수도 없었습니다. 머리까지 어지러워 먹은 것 없이 토하기도 했습니다. 정말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선장에게 사정 사정해서 사고 난 지 8개월만에 겨우 귀국할 수 있었습니다.

귀국한 후 회사에서 치료비를 대주어 병원에 다녔습니다.

‘요추 및 경추 추간판 탈출증’이라고 했습니다. 쉽게 말해서 허리와 목에 디스크가 걸린 거라고 합니다. 2년 쯤 지나도록 차도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는 말이 잘 안 나오고 행동도 굼떠지고 말을 한 마디 하려면 자신도 모르게 고개가 먼저 옆으로 돌아가며 갸우뚱하게 눕기 시작했습니다. 길에 나가면 사람들이 나를 보고 수군거리곤 하는데, 거울을 보면 자신이 느끼기에도 좀 바보처럼 보였습니다. 병원에서 진단서를 받아 보니 ‘외상성 뇌증후군’이라고 써 있었고 정신과에서도 치료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회사에서는 목과 허리의 디스크만 업무상 재해로 인정되기 때문에 정신과 치료에 대하여는 치료비 등 일체의 보상을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정신병원의 치료비는 어마어마하게 비싸다던데…

담당 의사는 배 위에서 당한 부상 때문에 결국 정신적 장애가 생긴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귀국한 후 지금까지 2년이 넘도록 한 푼의 임금도 못 받아서 지금은 거지보다 전혀 나을 것도 없이 살고 있습니다.

회사에서는 그 동안의 치료비를 대 준 것만도 크게 봐 준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그 어마어마하게 많이 든다는 정신과 치료비를 회사로부터 타낼 방법이 없겠느냐는 거였습니다.

물론 방법이 있다고, 치료비뿐만 아니라 그 동안 못 받았던 임금도 받을 수 있도록 법에 다 나와 있다고, 그리고 앞으로 몸에 장애가 남게 될 터이니 앞으로 수명이 다하는 날까지의 손해도 돈으로 계산해서 받을 수 있다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 청년을 옆에 앉힌 채 항만청에 제출할 서류를 꾸미기 시작했습니다. 대개는 다음의 적당한 날에 다시 만날 약속을 하고 그때까지 내가 틈틈이 서류를 만드는 것이 보통이지만 그 청년의 거동이 불편해 보여(사무실까지 혼자 찾아 온 것이 신기해 보일 정도로 몸과 마음의 장애가 심해 보였습니다) 어떻게 할까 잠시 망설이다가, 다른 일을 미루기로 했습니다.

격무와 박봉에 시달리면서 한결같이 관료주의적 폐단에 물들어 있는 공무원들이 조금이라도 신경을 써서 서류를 보게 하려면, 불필요할 정도로 장황하게 서류를 꾸며야 한다는 것이 그 동안의 경험을 통해 얻은 ‘진리’입니다. 간단한 말도 복잡하고 거창하게 설명하고, 한 페이지에 담을 수 있는 내용도 두서너 페이지에 나누어 담고, 가능한 한 붉은 색 도장과 푸른 색 고무인을 여기저기 많이 찍을 수 있도록 신경을 써야 하기 때문에 반나절은 족히 걸리는 작업이 되고 맙니다. 그런 내키지 않는 노력들이 당사자에게 바늘 끝만큼이라도 도움을 준다면, 옳고 그름을 따질 여유는 이미 없습니다.

관공서에 찾아가 울며 불며 말로 호소하거나 아무 종이에나 개발괴발 적어서 진정서 한 장 달랑 내미는 것보다 같은 내용이라도 그럴 듯하게 수십 페이지의 서류를 갖추어 내미는 것이 훨씬 좋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인정하기 싫지만 분명한 사실입니다.

오후 두 시 쯤 되어 내용 작성을 모두 끝냈습니다.

내용 작성이 끝나면 일이 절반쯤 끝난 셈입니다. 이제는 컴퓨터 프린터로 뽑아내어 필요한 만큼 복사하고, 참고 자료 역시 필요한 만큼 복사하여 번호를 매기고, 순서대로 철해서 일일이 도장을 찍어야 합니다. 그런데, 빌어먹을 관공서 공문 서식은 복사지나 컴퓨터 용지 그 어느 것과도 규격이 맞지 않아서 자를 대고 일일이 같은 크기로 절단을 해야만 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받는 쪽에서 조금이라도 신중하게 서류를 들여다보기 마련입니다.

컴퓨터 프린터에서 막 출력이 시작되었을 때, 그 청년이 이제는 일도 다 끝냈으니 여담이나 하겠다는 것처럼 주섬주섬 말을 꺼냈습니다. 언어장애가 있어서 심하게 더듬거리는 말씨였습니다.

“사고 난 후 3년이나 되었지만 실제 치료 기간은 10 개월도 안되었어요. 회사에서 ‘죽어도 치료를 안 해준다’고 해서요… 그 동안 쫓아 다닌 병원이 열 군데도 더 될 겁니다. 회사에는 백 번도 더 찾아갔었구요.

“다치고 나서, 집에 보내 달라고 아무리 사정을 해도 선장이 허락을 해야 말이지요. 나중에는, 치료도 보상도 필요 없으니 그냥 귀국만 시켜달라고 아무리 사정해도 ‘네 마음대로 귀국하면 선원법 위반으로 공항에 내리는 즉시 구속될 테니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협박하더군요.

“목이 아프기 시작하면 어떻게 할 수가 없었어요. 고래고래 소리도 지르고 데굴데굴 구르기도 하고… 그랬더니 항해사가 나를 방에 가두라고 하데요. 거의 6개월 간을 감금 상태에 있다가 포르투갈에 배가 닿았을 때 죽어 버리겠다고 소란을 피웠더니 겨우 나를 달래서 귀국시켜 준 거예요.”

내가 그 청년의 말을 끊고 물었습니다.

“잠깐만요. 그걸 왜 지금에야 말해요? 정신과 의사한테도 그런 얘기 모두 했습니까? 어쩌면 그런 것들이 제일 중요한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 잠시 망설인 후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프린터의 전원을 끄면서 말했습니다.

“다시 시작합시다. 그 중요한 걸 빠뜨릴 수는 없어요. 오늘 다른 약속은 없지요?”

그러자 그는 무슨 말을 하려고 고개를 여러 번 꼬면서 한참이나 애를 쓰다가, 손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심하게 더듬거리는 말로 말했습니다.

“저… 식사…하셔…야…지요.”

그 말을 듣고 나는 나도 모르게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습니다.

그가 대책 없이 착해 빠지기만 한 것에 오히려 분통이 터졌습니다.

“댁이 지금 남 식사 걱정이나 하고 있을 형편이오?”

마치 그가 큰 잘못이나 한 것처럼 큰 소리가 튀어나왔는데 말 끄트머리에서 그의 우람한 손이 눈에 확 들어 오는 순간 눈물이 왈칵 솟았습니다. 수억 원을 들인다 해도 그는 결코 예전의 건강한 모습을 되찾지 못할 것이고 결혼도 하기 전의 젊은 나이에 거의 완벽하게 망쳐버린 그의 인생은 이제 어떠한 방법으로도 완전하게 보상 받지는 못할 거였습니다. 남달리 커 보이는 그의 손이 오히려 서러웠습니다.

일을 마치고 그가 간 후 나는 마음 속으로 다짐했습니다.

‘앞으로 내가 ㄷ참치를 먹으면, 개다.’

 

며칠 후 슈퍼마켓에서 무심코 참치 깡통을 집어 드는 내게 아내가 말했습니다.

“그거 ㄷ 회사 거야.”

나는 깜짝 놀라 얼른 깡통을 내려 놓았습니다.

 

 

 

마음

 

회사가 인근 폭력배들을 따로 고용해서 만든 구사대에게 번번히 얻어 터지면서도 매일 아침 회사 정문으로 출근 투쟁을 나가야 하는 나이 어린 노동자들이 있습니다. 건장한 체격의 구사대들에게 짐짝처럼 들려 내팽겨쳐지거나 집단 폭행을 당하는 모습을 보면 ‘지옥이 따로 없다’는 생각이 저절로 듭니다.

일과처럼 되어 버린 그 뼈 아픈 고통에 대해 이제는 더 이상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1단짜리 기사거리도 되지 않는 그런 일들에 대해 이제는 한겨레신문의 기자들조차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부모님의 품에서 한창 재롱을 피워도 어색함이 없을 어린 나이의 노동자들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우리는 매일 맞아요.

우리 회사는 원래 그래요. 많이 때려요’라고 하는 말을 들으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함께 이를 가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며칠 전 저녁 퇴근 무렵 그 노동자들 중의 한 사람이 전화를 했습니다.

“하 선생님, 오늘 저녁에 만날 수 있어요?”

“무슨 일인데?”

“와 보시면 알아요.”

“무슨 일인지 알아야, 나도 준비를 해서 가지.”

“그냥 오시면 돼요. 지금 회사 정문 앞인데요. 회사에서 쭈욱 나와서 다리 건너자마자 오른쪽으로 틀면 바로 공중전화 박스 있는 곳 아시지요? 거기서 만나요.”

서둘러 사무실을 나와 약속 장소까지 가는 동안 나는 온갖 경우의 일들을 다 상상해 보면서 마음을 졸였습니다. 일방적으로 몰아붙이기만 하던 회사가 갑자기 어떤 타협안을 내 놓아 서로 의견이 갈렸나? 그런 좋은 일은 좀처럼 없을 테니… 누가 크게 다쳤나? 아니면, 지난 번처럼 몇 시간째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의견이 분분해져서 울며 불며 크게 다투었나?

약속 장소에 도착했으나 아무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회사 정문 앞까지 어슬렁거리며 가 보았으나 역시 아무도 없었습니다.

시간이 꽤 지나도록 공중전화 근처에는 사람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아, 공중전화 박스에서 전화를 하라는 뜻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얼핏 들어 전화 박스에 들어서려는데 누가 뒤에서 등을 툭 쳤습니다. 돌아다 보니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벌써 모두들 모여 있었습니다.

“무슨 일이야?”

내가 물었더니 한 노동자가 뒷춤에 감추고 있던 작은 꾸러미를 쑥 내밀며 말했습니다.

“하 선생님, 이거, 우리 마음이에요.”

그 순간 모두들 작은 꾸러미를 하나씩 내게 내밀었습니다.

나에게 줄 선물을 마련해서 그날 모두 모이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양말 한 켤레, 책 한 권, 작은 어린이용 손목시계, 시간제로 일을 나가는(노동자들도 이런 일을 ‘아르바이트’라고 부릅니다) 공장에서 포장 작업을 하다가 슬쩍 집어 왔다는 초콜릿, 커피믹스 몇 봉지…

해질녘의 길거리 공중전화 박스 옆에서 나는 나이 어린 노동자들에게 둘러싸여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서 있기만 했습니다. 가슴이 벅차 숨쉬기조차 힘들었습니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10년 쯤 전, 대학생의 신분이었으나 학교에는 거의 그림자도 비치지 않은 채 어느 단체 사무실에서 무보수로 일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어느 날, 무척 똘똘해 뵈는 남녀 고등학생 두 명이 사무실로 나를 찾아왔습니다.

몇몇 학교의 고등학생들이 모여 지금까지 이러 저러한 활동을 해 오다가 ‘이제부터는 경험 있는 선배의 도움을 받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어디 마땅한 선배가 없을까’ 하고 사람을 찾던 차에 학교 문예반 선생님으로부터 나를 소개 받고 이제부터는 선배님에게 한 수 배우고자 하는데, 자기들이 아직 나를 잘 모르고 있으니 마련해 온 두어 가지 질문에 성심껏 답해 주면 돌아가 의논해 보고 결과를 알려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를테면 내 면접을 치르러 온 셈이었는데 그 학생들은 당돌하게도 ‘총체적 변혁’과 ‘점진적 개혁’, ‘참여 문학’과 ‘순수 문학’, ‘개인 구원’과 ‘사회 구원’에 대한 내 견해를 조심스럽게 물었고 나 역시 그들의 정체를 잘 모르는지라 ‘그러한 해묵은 문제들은 마치 동전의 양 면과 같아서 선명하게 둘로 가를 수 없다. 양면이 모두 있어야 동전이 되듯이 두 가지가 모두 필요하다’는 식으로 얼버무리며 대답을 하느라고 진땀을 흘렸습니다. 그래도 내 성실한 답변 태도가 좋은 점수를 받았던지 며칠 후에 나는 합격했다는 통지를 받았습니다.

문학 소년 소녀들의 모임이어서 염무웅, 임헌영의 비평들을 읽고 열띤 토론을 하는 것을 시작으로 하여 점차 역사와 사회에 대한 이해를 넓혀 갔습니다. 그들의 열정은 참으로 대단해서 나는 모임 전 날이면 마치 대학 입시생의 과외 지도를 하는 것처럼 비장한 각오로 밤을 꼬박 새워야 진도를 겨우 따라잡을 수 있었습니다.

새로 온 신입회원은 엄격한 심사와 가입 선서 등의 절차를 거쳐야만 했는데 그러한 절차들은 물론 심사 기준과 선서의 내용도 모두 그들 스스로의 결정에 의해 마련된 것이었습니다.

신입회원이 들어오면 내 자취방에 모여 창문을 꼭꼭 닫고 두터운 커튼을 드리운 채 어른거리는 촛불을 바라보며 김민기의 ‘공장의 불빛’을 듣고 따라 부르기도 하는 것으로 입회 의식을 치르곤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별 것 아닌 그 일도 살벌한 5공 정권이 막 들어선 그 때에는 참으로 비장함을 느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6개월 쯤 함께 씨름하다가 잠시 내 활동이 부자유스러워진 기간이 있어 모임이 흐지부지되자 한 회원이 다시 잘 해보자는 내용의 편지를 회원 모두에게 보낸 것이 보안부대의 우편 검열에 걸렸고 어느 날 갑자기 학생들 집에 보안대 수사관들이 들이닥치더니 ‘학교에 알려 퇴학시키겠다’는 협박으로 마음 여린 여학생들을 눈이 퉁퉁 붓도록 울리는 북새통을 겪기도 하다가 결국 나와의 관계는 소원해지고 말았습니다.

 

그들 가운데 유난히 수줍음을 많이 타서 여학생들로부터도 놀림을 받던 두 남학생이 있었습니다.

한 학생은 모임에서 발제를 할라치면 ‘나는 이 책을 읽고 다음과 같은 점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라는 귀절부터 공책에 꼼꼼히 정리해 와서는 얼굴 한번 쳐들지 못하고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읽어 내려가곤 했습니다. 얼굴이 너무 검어서 그 학생이 얼굴을 닦고 나면 친구들이 수건에 검댕이 묻지 않았는지 살펴보라고 놀려대었습니다. 유독 자신에게 깊게 배어 있는 문학적 감상을 떨쳐내기 위해 애쓰던 것이 기억에 남습니다.

또 다른 한 학생은 말을 시작하기 전에 얼굴부터 먼저 발갛게 물이 드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토론을 할 때면 아무 말 없이 빙그레 웃고 있는 적이 많았는데 그래도 가끔 면도날같이 예리한 발언으로 모임의 분위기를 모아가는 재주가 있어서 후배들이 잘 따랐습니다. <8억 인과의 대화> (당시 중국의 인구가 8억이었습니다)란 책에 밑줄을 그어 가며 읽던 어느 선배가 바로 그 책이 증거가 되어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어야 했던 숨 막히는 세상이었는데도 그 학생은 어느날 토론 중에 중국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쏟아 놓는 바람에 우리 모두를 깜짝 놀라게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얼마 전 나는 참으로 오랜만에 그 두 청년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독점 자본과 권력의 무자비한 탄압에 맞서 강철 같은 대오로 노동조합을 지켜내겠다는 결의를 다지기 위해 머리를 삭발해 버린 일단의 대기업 노동자들을 만났었는데, 아! 그 얼굴이 까맣던 소년이 그 노동자들을 지휘하는 대장이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어, 죽음까지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결의로 머리를 박박 깎아버려 살벌함마저 얼굴에 감도는 노동자들이 그 수줍음 많던 소년을 부를 때마다 매번 ‘님’자를 붙여가며 깍듯이 ‘받들어 모시고’ 있었습니다.

언제 감옥에 가게 될지 모르는 긴박감으로 인한 내 조바심을 ‘직접 찾아 뵙지 못해 미안하나 옛정을 생각하며 서로 돕고 살자’는 어른스러운 안부로 타이르더니 그는 끝내 감옥에 가 아직도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감옥 안에서도 뜻을 절대로 굽히지 않고 투쟁의 선봉에 서 있다는 소식이 간간히 담을 넘어 들려오기도 합니다.

 

그가 구속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며칠 후, 나는 그 얼굴이 발갛게 물들곤 했던 또 한 사람의 청년으로부터 한 장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가 어렵고 고통스러웠던 오랜 기간의 훈련을 무사히 마치고 이제 더 긴 세월 동안 고해의 바다를 헤쳐가야 하는 가톨릭 신부가 된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자신이 사제로 서품 받는 미사의 날짜와 장소 그리고 신부가 되어 드리는 첫 미사에 대한 안내가 상세히 쓰여 있었습니다.

그날 밤 나는 그 신부가 감옥에 있는 노동자 친구를 위해 미사를 드리는 모습과 그 청년들이 마흔 살 쯤 되었을 때의 모습들을 상상해 보느라고 잠을 설쳤습니다.

한 때, 옳다고 생각되는 길을 부끄럼 없이 걷기도 하였으나 이제는 그 길에서 내려 와 길가에라도 남아 있으려 애쓰는 내 모습을 바라보며 이제 막 그 길에 들어 선 그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분명 내 나이 또래가 되어서도 그 길 위에 있을 것이나 내가 그들에게 할 수 있는 약속은 최소한 길을 막는 사람이 되지는 않겠노라는 것뿐이어서, 길을 걷다가 혼자 울었습니다.

 

 

 

 

복직 포장마차

 

6년 전…

 

1987년, 인천의 공단 입구에 작은 노동상담소를 개설하여 혼자서 소장 겸 사무원 겸 사환으로 일하고 있던 때의 일입니다.

그 무렵 동료들과 함께 근로조건 개선 요구 투쟁에 앞장섰다가 해고된 노동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해고되자마자 자신이 다니던 회사 정문 앞에 포장마차를 차려 놓고 그 포장마차에 ‘복직 포장마차’라는 간판을 내걸었습니다. 저녁마다 자신의 포장마차에서 퇴근하는 동료들을 만나 자신의 이야기를 계속 들려주겠다는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손님의 주머니에 있는 돈보다는 손님의 입에서 나오는 대화에 더 관심을 갖는 포장마차 주인이었으니 그 장사가 잘 될 리가 없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내가 오늘은 어디에 가서 값 싸고 싱싱한 안주거리를 구해다가 맛있는 요리를 해서 팔아먹나’만을 골똘히 연구하는 바로 옆 포장마차들과는 처음부터 경쟁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어렵게 한 달 쯤 버틴 후, 달이 휘영청 밝던 어느 날 밤에 그는 커다란 망치를 들고 나가, 자본주의의 냉혹함을 미처 몰랐던 자신의 무지에 분개하며 스스로 그 포장마차를 때려 부쉈습니다.

그리고는 친구들을 불러 모아 우리가 즐겨 찾던 ‘똥바다’의 썩은 갯벌 둑 위에 앉아 달빛을 온 몸에 받으며 마지막 오뎅 국물과 김밥으로 큰 잔치를 치렀습니다.

포장마차를 잃었어도 그의 출근 투쟁은 계속되었습니다. 아침 출근 시간에 맞추어 회사 정문에 나가 동료들과 악수를 나누거나 유인물을 나누어 주고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하다가 힘이 들면 정문에 앉아 쉬기도 했습니다. 점심시간이 되면 중국집에서 자장면을 배달시켜 정문에 걸터앉아 먹기도 하다가 동료들과 함께 ‘퇴근’하곤 했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거르지 않고 계속되었습니다.

어느 날 회사 게시판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공고가 붙었습니다.

“선량한 근로자 여러분들은 좌경용공불순 세력의 선동에 절대 현혹 당하지 마시고 생산 활동에 전념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음 날 아침 그가 손에 아주 그럴 듯해 뵈는 상자를 들고 상담소를 들어섰습니다. 해병대 복무 시절 대통령에게 받은 훈장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상자를 여니 붉은 우단 가운데 놓인 훈장이 눈 부시게 빛났습니다. 그가 대자보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만약 좌경 용공 불순이라면, 좌경 용공 불순 세력한테 훈장을 준 전두환은 그럼 뭐냐? 운운…” (전두환 씨가 당시의 대통령이었습니다.)

저녁 퇴근 무렵 그가 만면에 웃음을 띠고 상담소를 들어섰습니다. ‘출근 투쟁 일주일 만에 드디어 회사와 3개 사항을 합의했다’면서 합의서를 보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첫째, 앞으로 좌경 용공 불순 세력이라고 매도하지는 않겠다.

둘째, 점심은 회사가 제공한다.

셋째, 경비실까지 들어 올 수 있다.

 

나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게 뭐야?”

“내가 그랬지요. 해고 당해서 돈도 없는 놈이 매일 중국집에 자장면 시켜 먹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니냐… 그랬더니 ‘그럼 점심은 회사가 주겠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오늘 점심은 회사에서 먹었어?”

“점심시간이 되었길래 회사 정문을 들어섰지요. 경비들이 나와서 막더라구요. 김 부장이 사무실에서 빤히 내려다 보고 있다가 보얗게 달려 나오더니 팔을 움켜 잡고는 ‘아니, 어디 가십니까?’라고 새삼스럽게 존댓말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점심 먹으러 식당에 간다. 점심은 회사가 제공하기로 하지 않았느냐?’ 그랬더니 ‘경비실에 들어가 계시면 우리가 다 날라다 드리겠습니다’ 그러더라구요. 그래서 ‘셋째, 경비실까지는 출입할 수 있다’는 합의 사항이 하나 더 추가된 거지요. 비 올 때 홀딱 젖어서 정문에 서 있으려면 되게 서글펐는데 이제는 경비실에 들어가 쉴 수 있게 되었으니 참 잘 됐어요.”

그 후 내가 그 상담소를 떠나고 활동 지역도 바뀌어서 그를 못 만난 몇 년 동안 가끔 그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경우는 있었지만 ‘복직이’라는 그의 별명만은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6년 후…

 

며칠 전 후배와 함께 어느 노동 단체 사무실에 들렀을 때의 일입니다. 함께 갔던 후배는 그날따라 일이 있어서 복부인처럼 좋아 보이는 옷을 차려 입고 나온 바람에 사무실에 선뜻 들어서기가 뭐해 문 밖에 엉거주춤 서 있었는데 사람들이 자꾸 들어오라고 해서 쭈빗쭈빗 들어가 노동자들 사이에 끼어 앉기는 했으나 옷차림새 때문인지 그의 민중적인 얼굴 생김에도 불구하고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영 어울리지를 못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복직이’가 그 사무실에 있었습니다. 자신을 해고했던 그 회사에 6년 만에 복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주변에 둘러앉은 동료 노동자들이 그를 계속 놀려대었습니다. ‘말 많은’ 여성 노동자들이 더욱 그랬습니다.

“복직이 되면 뭐해. 총무과에 책상 하나 갖다 놓고 하루 종일 논다는데…”

“그러기에 복직되기 전에 그런 걸 확실히 해야 한다고 내가 얼마나 강조했어? 원직에 복직을 해야지… 노동자가 책상이나 지키고 있으니 되겠어?”

“오늘 우리 사무실에 빈 손으로 왔지? 내가 복직만 돼 봐라. 나는 절대 빈 손으로 안 온다. 술이라도 사 들고 오지.”

그런 놀림을 받으면서도 그는 ‘이제 다시 새로운 싸움을 시작하는 거지 뭐…’라고 중얼거리며 웃었습니다. 그때, 40대 중반의 나이 지긋한 노동자가 사무실에 들어서더니 ‘복직이’와 악수를 나누며 다짜고짜 욕부터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쓰발놈, 혼자서만 복직되고… 좋겄다.”

욕을 먹으면서도 ‘복직이’는 계속 싱글거렸습니다. 그 40대 중반의 노동자는 얼마 전 구속된 선배 노동자 면회를 다녀 오는 길이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선배님 잘 계시는 거 같아요?”

“응, 아주 얼굴이 허여멀겋더라구. 거 왜 물에다 두부 담가 놓으면 허옇게 불어터지잖아. 얼굴이 딱 그 색깔이 되었더라구. 매일 땡볕에 돌아다니던 양반이 햇볕을 못 보니까 모처럼 하얀 얼굴이 되었던데…”

“뭐라고 그래요?”

“그 안에 앉아서도 바깥 일 걱정만 하고 있어. ‘이번 ㅇㅇ노동조합 위원장 선거에 누구 나온대?’ 그래서 ‘ㅇㅇㅇ이 나온답디다’ 그랬더니 ‘걔 안되는데… 걔가 위원장되면 안되는데…걔보다는 지금 있는 ㅁㅁㅁ이가 훨씬 더 나은데…지금 있는 ㅁㅁㅁ이 그냥 찍으라고 그래’ 그딴 소리나 하고 있어. 그 안에 앉아서 그런다고 뭐가 되나?”

 

복직이가 사 온 음료수를 한 잔씩 마시고 그 사무실을 나섰습니다. 후배는 아무 말 않고 얌전히 걷다가 말했습니다.

“참 대단한 사람이에요. 6년 동안이나 포기하지 않고…”

 

 

 

밑져야 본전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노동자들에게 내가 자주 하게 되는 말 중에 ‘밑져야 본전’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유사 이래 철저하게 착취당해 온 노동자들이 사람답게 살아 보자고 맨 몸뚱이만으로 모인 것이 노동조합일진대, 실제로는 그러한 숭고한 노력에 대해 피눈물을 뿌려야 하는 가시밭길로 보답하는 것이 현실입니다(끝내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기는 하지만… 영원히 달걀이거나, 영원히 바위인 것을 역사가 용납한 적은 없었으니까…)

법의 힘을 빌어 노동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때 우리가 경계해야 할 태도 중에는 ‘청산주의적 사고’라고 불리는 것이 있습니다.

법의 힘을 빌어 노동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이 아무래도 문제의 본래적 해결 방법은 아닐진대, 자칫하면 ‘그 동안 할 만큼 했으니 이제 재판 결과나 지켜 보자’는 생각으로 당면한 싸움을 게을리 할 우려가 있다는 것입니다.(알 만한 사람은 다 압니다. 힘겨운 싸움으로부터 벗어나도 스스로에게 욕 먹지 않을 이유를 찾기 위해 얼마나 애쓰게 되는지…)

매번 싸움마다 ‘이번에 지면 우리는 끝이다’는 각오로 임해야 하지만, 처절하게 실패했다 해도 마치 고개 하나를 넘은 것처럼 ‘밑져야 본전이었다’고 가볍게 생각하고 다음의 결전을 준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밑져야 본전’이라고 말할 때는 대개 그런 뜻이었습니다.

 

규모가 제법 큰 병원에 노동조합을 만들었다가 여지없이 해고된 사람들을 2년 가까이 만나 왔습니다. 회사가 고용한 폭력배들에 의해 노조 사무실 집기들과 함께 길바닥으로 내동댕이쳐져야만 했던 사연만 이야기하자고 해도 한 편의 소설입니다.

그 사람들 중에 여자처럼 곱상하게 생긴 남자가 하나 있습니다. 말씨도 여자처럼 조용조용하고 생전 화낼 줄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한번은 약속을 했는데 아무도 오지 않았습니다. 이튿날 몇 사람이 와서 하는 말이 바로 어제 그 얌전한 남자 조합원의 다섯 살 난 딸이, 세 들어 사는 집 이층에서 놀다가 떨어졌는데 그만 죽었다는 것입니다. 방금 영안실에서 동료들과 함께 밤 새고 오는 길이라면서 노동조합장이었던 친구가 얼굴이 부시시한 채 말했습니다.

“죽으려고 그랬는지 그 딸이 그렇게 예뻤어요. 그 만큼 예쁜 여자 애를 아직 못 봤었는데… 살았어도 온전치는 못했을 테니 어쩌면 죽은 게 다행인지도 모르겠어요. 참 이상해요. 죽을 만큼 높은 위치가 절대로 아니었는데…”

3한 달 쯤 지나 그를 만났습니다. 컴퓨터 부품 회사에 새로 취직이 되었다고 명함을 내밀면서 필요한 부품이 있으면 말씀만 하시라고, 대한민국에서 제일 싸게 사 드릴 자신이 있다며 웃었습니다. 집안 구석 구석에 배어 있다가 짬만 나면 아빠에게 얼굴을 내미는 귀여운 딸 아이에 대한 아픈 기억을 잘 이겨내고 있는 것처럼 보여서 기뻤습니다.

이야기 중에 내가 그 ‘밑져야 본전’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결과가 안 좋으면 그 동안의 우리 정성이 좀 아깝다는 것뿐인데, 그러니까 덤으로 해 볼 수 있는 싸움이라고 생각하고… 법이 가능한 한 노동자에게 불리하게 해석되는 세상이니 크게 기대하지는 말고… 다행히 잘 되면 좋은 거고 잘 안되어도 본전이라고 생각하고 시작해 봅시다.”

그러자 그가 얼굴 빛이 달라지면서 작은 소리로 혼잣말처럼 말했습니다.

“절대로 본전이 아니지요… 제 딸이 지난 번에 그렇게 먼저 갔을 때도… 아내가… ‘노동조합 한다고 맨날 집에 늦게 들어오느라고 언제 딸 아이 한번 따뜻하게 안아 준 적이나 있었느냐’면서… 얼마나 나한테 그랬는데요… 어찌나 울면서 그러던지 아무 말도 못했어요… 절대로 본전이 아니지요… 결코 본전일 수는 없어요.”

그는 고개를 꺾은 채 가만히 바닥만 보고 있었습니다. 그가 계속 말했습니다.

“내가 해고된 병원이 집에서 가까웠어요. 그런데 우리 애를 안고 거기로 갈 수는 정말 없더군요. 그 병원으로 갔으면 살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밤마다 잠이 안 옵니다…”

마지막 말은 채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습니다. 나는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서 정말로 궁색하게 한 마디 했습니다.

“이 다음에 하늘에서 다 같이 만날 수 있겠지요.”그 이후로 나는 어느 노동자에게도 함부로 ‘밑져야 본전’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밑지는 일이 없도록 우리 한번 잘 해 보자’라고 말합니다.

 

 

 

10만 원

 

억울하게 해고 당했다는 노동자가 찾아 왔습니다. 30대 중반쯤 되었을까, 사람은 이를 데 없이 착해 보였는데 차림새가 깔끔하지 못해서 그런지 별로 호감이 가는 인상은 아니었습니다.

그 사람에게 50만 원 정도를 준비할 수 있겠느냐고 말하면서도 그게 가능하리라고 기대하지는 않았습니다.

형편이 꽤나 어려운 사람이 일을 당하여 변호사를 대리인으로 선임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사람들은 흔히 이것을 ‘변호사를 산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처음에 준비하라고 말해 보는 비용은 우선 50만 원입니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한 푼도 안 받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돈을 보태 줘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지금 있는 사무실에서 일을 시작한 뒤 내가 ‘한 푼도 안 받아야 되겠다’고 생각한 일을 함께 있는 변호사가 마다한 적은 없었습니다. 소위 ‘무료 변론’이라는 것인데 소송을 진행하자면 최소한의 비용이 들게 마련이어서 변호사의 입장에서 보면 ‘유료 변론’인 셈입니다.

1년여 기간 동안 10여 번은 족히 재판을 해야 하는 사건을 위임 받으면서 50만 원만 받겠다는 것은 다른 변호사들로부터 ‘정신 나갔다’고 욕 먹을 만큼 작은 금액이지만, 단돈 만 원이 아쉬운 노동자에게는 그 50만 원이 여느 사람의 500만 원 만큼이나 큰돈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변호사를 돈 들여 ‘사지’ 않고도 노동자들이 빼앗긴 권리를 되찾을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이 사무실에서 내가 하는 일의 절반쯤입니다.

그러나 부득이하게 변호사를 선임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그런 경우였습니다.

일 주일쯤 지나 그가 다시 왔는데 당연히 그 돈을 마련하지 못했습니다. 내가 다시 30만 원 정도는 마련해 볼 수 있겠느냐고 했더니 그는 내 책상 옆 의자에 앉아 한숨만 몰아 쉬었는데 무슨 음식을 먹고 왔는지 입에서 냄새를 심하게 풍겼습니다. 그는 ‘할 수 있는 데까지 해 보겠다’고 하면서 갔습니다.

다시 일 주일 쯤 후에 그가 왔을 때 나는 금액을 10만 원까지 낮추어야 했습니다. 내가 오히려 그에게 사정을 했습니다.

“10만 원이라도 준비를 하셔야 내가 변호사님한테 한번 떼를 써 보든지 하지 않겠습니까? 도저히 거저 해 달라는 말은 못하겠어 서 그래요. 다른 데에서라면 최소한 200만 원은 받았을 일을 단 돈 10만 원만 받고 해 드리는 거니까 힘 들더라도 꼭 마련해 보셔요.”

한 달쯤 지나 거의 잊을 만한 무렵에 그가 다시 찾아왔습니다.

문을 열고 구부정한 자세로 어쩔 줄 몰라 하며 들어오는 모습이 첫눈에 보기에도 돈을 마련하지 못한 것이 분명했습니다. 내 옆에 앉아 잠시 뜸을 들이더니 그가 심호흡을 한번 하고는 말했습니다.

“어떻게든 해 보려고 했는데 그게…”

어지간히 주변머리도 없다는 생각이 들어 짜증이 다 났습니다.

내가 질책하듯 말했습니다.

“부인더러 아래 윗 집에서 이삼만 원 씩만 빌려 보라고 해도 10만 원이 될 텐데, 그게 그렇게 어렵습니까?”

그가 난처해하며 띄엄띄엄 답했습니다. 숨이 찬 사람처럼 말을 한 마디 할 때마다 숨을 몰아 쉬었습니다.

“시골에서 올라 와… 공사판만 따라다니다 보니… 이 넓은 서울에서… 단 돈 만원 빌릴 데가 없습디다.”

내 귀에만 겨우 들렸을 만큼 작은 목소리였지만 나는 갑자기 가슴이 무엇인가에 크게 얻어 맞은 것처럼 미어졌습니다.

‘맞아. 그랬던 걸 내가 몰랐구나… 그러고도 내가 무슨 노동 상담을 한답시고 껄떡거리고 앉아 있었다니…’

그에게 참으로 미안했습니다. 뭐라 해야 하나 잠시 망설이는데 그가 갑자기 두 손으로 내 손을 꽉 잡더니 말했습니다.

“선생님, 10만 원만 빌려 주십시오. 10만 원만 빌려 주시면 제가 평생 그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나는 당황해서 잠시 멍하니 있다가 손을 빼내며 말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내 돈을 받고 사건을 맡느니 아예 안 받고 말지, 변호사님이 그걸 받으시겠습니까?”

“그러니까 저… 변호사님한테는 절대 비밀로 해주시고… 제발 사람 구하는 셈치고… 10만 원만 빌려 주시면… 어떻게든 제가 그 은혜를 꼭 갚겠습니다.”

특히 은혜를 갚겠다는 말에 힘을 주었습니다. 10만 원만 있으면 사람을 구한다는 것이 참으로 실감 났습니다.

‘돈을 빌려드릴 수는 없지만, 돌아가 기다리시면 제가 어떻게든 방도를 찾아 보겠다’고 했더니 그는 잘 부탁한다고, 꼭 은혜를 갚겠다고, 두고 보시면 아실 거라고 몇 번 씩이나 다짐을 하고는 갔습니다.

다음날 직원들과 함께 점심식사를 하면서 지나가는 말처럼 그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넓은 서울에서 단돈 만 원 빌릴 데가 없더라는 말이 특히 가슴에 와 닿더라고… 오죽했으면 생면부지였던 나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했겠느냐고… 함께 일하는 변호사도 목이 메이는지 얼굴이 잠시 굳어지는가 싶더니 말했습니다.

“다음부터 그런 사람은 그냥 해주는 걸로 합시다.”

내가 얼른 되받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다시 오라고 했습니다. 올 시간이 다 되었군요.

이제 곧 올 겁니다.”

 

 

 

정말로 그것뿐은 아니겠으나

 

인천 지역의 상담소에서 일하는 후배가 40대 중반의 노동자와 함께 찾아 왔었습니다. 그 노동자의 아내가 과로로 인한 직업병으로 쓰러진 지 1년쯤 되었다고 했습니다.

잔뜩 움츠러든 그의 어깨 때문인지 훌쩍 큰 키에도 불구하고 그는 매우 초라해 보이는 인상이었습니다. 게다가 말을 시작할 때마다 옷깃을 조심스럽게 다시 여미는 버릇이 있어서 더욱 그랬습니다. 잘 생긴 인도 사람처럼 귀골(貴骨)이었으나 새카맣게 죽어 버린 그의 얼굴이 1년 여 에 걸친 그의 고생을 말해 주는 듯했습니다.

그 동안 노동부, 병원, 회사, 법원 등에 수십 차례나 들락거리면서 그때마다 제출하거나 받아 두었던 때 묻은 서류 보따리를 그는 마치 소중한 보물 상자처럼 가슴에 부둥켜안고 있었습니다.

노동부의 공무원들이 처음에 일을 제대로 처리하기만 했다면 너무나 간단한 일이었습니다. 그의 가정이 1년여 만에 완전히 기둥 뿌리가 뽑히고 거덜나 버릴 이유가 전혀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동안 제대로 도움을 받지 못해서 일을 많이 그르친 상태였습니다. 천하에 못해먹을 ‘요양불승인처분취소청구 행정소송’이라는 것을 혼자서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가지고 온 서류들을 날짜 순서대로 추려서 달라고 했더니 그는 사람들이 오가는 사무실 바닥에 엉거주춤 쭈그리고 앉아 서류들을 바닥에 주욱 늘어 놓고는 차곡차곡 정리하는 것이었습니다. 잔뜩 꺾어진 그의 긴 허리가 더욱 안쓰러워 보였습니다.

그간의 잘못 되었던 점들을 자세히 설명해 주자 그는 ‘이제야 비로소 제대로 찾아온 것 같다’고 좋아하면서 천진스러운 얼굴로 돌아갔습니다.

그 후 재판 준비를 하느라고 몇 번 그를 만났습니다. 사무실에 오면 내 옆에 앉아 이 말 저 말 하기도 했습니다.

“그 동안 울기도 참 많이 울었어요.”

한참 일을 하고 있다가 기척이 좀 이상해서 돌아다 보면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소리 없이 울고 있었습니다.

저녁 시간이 되어도 그는 밥 먹자는 말을 못했습니다. 내가 식사하자고 하니 그는 잠시 다녀 올 데가 있다며 나 혼자 먹으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공원 근처를 빙빙 돌다가 쫄쫄 굶고 올 것이 뻔했습니다.

“내가 사는 거니까, 맘 놓고 먹읍시다.”

솔직히 까놓고 말한다는 게 참으로 편한 건 바로 그럴 때입니다.

“제가 열 번을 사 드려도 시원찮은 데… 얻어먹기까지 해서…”

설렁탕 그릇을 들고 국물을 들이마시는 그의 코 끝에 눈물 방울이 매달려 있다가 국물 위로 떨어졌습니다.

재판에 꼭 필요한 증인이 있는데 한사코 도와줄 수 없다고 한다기에 내가 ‘구인신청이라는 걸 해서 증인을 강제로 법정에 불러 세우자’고 했더니 그가 정색을 하면서 물었습니다.

“그럼, 그 사람이 저를 욕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겠지요.”

“집사람의 친구였던 사람한테 욕을 먹으면서까지 할 수는 없습니다. 그만 두겠습니다.”

아무리 설득을 해도 소용 없었습니다. 굶어 죽으면 죽었지 그렇게는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새벽녘에 일을 마치고 죽은 듯이 고요한 거리로 함께 나서면 그는 ‘정말 고맙다’는 말을 열 번도 더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동안 자기를 도와 주었던 다른 고마운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도 했습니다.

 

그 재판 진행 과정의 중대한 잘못을 발견한 것은 그와의 만남을 대여섯 번 가진 후였습니다. 맨 처음 그가 혼자서 일을 진행했던 무렵에 범했던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발견한 것입니다. 알 만한 사람들에게 수소문해 보고 함께 일하는 변호사와 함께 아무리 머리를 짜 내어도 뾰족한 수가 없었습니다.

바로 어제 그가 회사를 조퇴하고 찾아왔을 때 하는 수 없이 그에게 말했습니다. 소송이 각하될 것 같다고… 마음 굳게 먹고 기다리자고… 여러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연구를 해보았지만 어쩔 수가 없는 일이라고… 그 어려운 내용을 가능한 한 쉽게 설명하면서 차츰 절망하는 그의 얼굴을 보는 건 차라리 고문이었습니다. 2년 여 에 걸친 그의 모든 노력이 실로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렇겠군요. 할 수 없지요”

그는 예사롭다는 듯이 답했으나 내가 사무실 문밖까지 따라 나가 ‘살펴 가시라’는 인사를 했음에도 평소와 달리 ‘안녕히 계시라’는 인사도 하지 못한 채 계단을 급히 내려 갔습니다.

계단 모퉁이를 휙 돌아가면서 그의 기다란 손이 잔뜩 일그러진 그의 콧등을 훔치는 것이 보였습니다.

복도 창가를 지나며 거리를 내려다보니 그가 휘청거리는 팔자 걸음으로 횡단 보도를 건너 가고 있었습니다. 길을 다 건넌 그가 손으로 다시 콧등을 훔치고 하늘을 쳐다보는가 싶었는데 아, 그의 무릎이 휘청 꺾이면서 그의 기다란 몸이 중심을 잃는 것이었습니다. 보물 상자처럼 가슴에 품고 다니던 서류 보따리가 땅바닥에 흩어졌고 그는 엎어진 채 한 동안 일어설 줄을 몰랐습니다.

나는 복도 창가에 서서 한참이나 하늘을 쳐다보았습니다.

나중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는 초라한 느낌으로 서러웠습니다. 그와 같은 노동자의 눈에서 눈물을 거두는 데 바늘 끝만큼이라도 보탬이 되어야 한다는 것뿐, 나는 큰 욕심은 없습니다.

 

 

 

하루에 수십 명을 만나도

 

어느 병원 노동조합의 간호사가 전화를 했습니다.

“하 선생님, 지금 바빠요?”

“별로…”

상대방이 전화로 ‘바쁘냐’고 물으면 사실 아무리 바빠도 ‘바쁘다’고 답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두 시간 반쯤 시간 낼 수 있어요?”

“무슨 일인데?”

“하여튼요.”

“왜냐니까?”

“우리가 주사 놔 주러 가게요.”

“무슨 주사?”

“요즘 너무 피곤해 보이셔서요. 두 시간 반이면 돼요.”

“아이고 이 사람아, 사무실에서 볼성 사납게 링겔 꽂고 두 시간 반이나 누워 있으라고?”

“아니요. 그거 꽂은 채 일할 수도 있어요.”

“됐네, 이 사람아.”

“그럼 토요일은 어때요?”

“됐다니까.”

“의논할 일도 있어서 그래요. 토요일 날 봐요.”

결국 토요일에 만나기는 하되 주사는 안 맞기로 약속하고 말았습니다. 나는 그 노조의 조합원들이 토요일에 느닷없이 주사 기구를 준비해 올까 봐 은근히 겁이 났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몸 생각도 좀 하라’는 충고를 무슨 칭찬 쯤으로 여기면서 잘난 체하다가 결국 몸 져 누워 사흘간 사무실에 나오지 못했습니다. 마침내 코피를 뚝뚝 흘린 날, 아내가 한의원에 한번 가 보자고 했습니다. ‘이번에도 안 가면 이혼 당할 줄 알라’는 안해의 협박에 좀 상투적이지만 ‘그럼 더욱 가지 말아야겠네’라고 답했더니 안해가 내 코 앞으로 얼굴을 들이대며 말했습니다.

“나 생과부되기는 싫은데, 우리 언제 이혼하실라우?”

한의원에서 아내가 한의사에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이 밤에 잠 자는 모습을 보면 ‘내일 아침에 제대로 일어나려나?’ 싶은 날이 많아요. 새벽에 들어와 책상 앞에 앉아서 뭘 끄적거리다가 서너 시간만 자고 나가는 걸 벌써 두 달 넘게 계속하고 있어요.”

한의사는 진맥만 하는 줄 알았더니 사람을 침대에 눕혀 놓고 여기 저기 눌러 가며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때로는 못 견디게 아파서 소리를 지르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처방이 끝나자 평소 친구처럼 흉허물 없이 지내는 한의사가 장난처럼 물었습니다.

“요즘, 거… 뭐라나, 정력은 좀 어떻습니까?”

나는 웃으며 머뭇거렸는데 아내가 답했습니다.

“정력은 둘째 치고 이 사람은 아예 정욕이 없어요.”

한의사가 빙긋이 웃으며 답했습니다.

“그럴 테지요. 그거야말로 가장 확실하게 처음에 나타나는 증상이지요. 이제는 몸 생각도 좀 해야지요.”

나는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한 마디 했습니다.

“내가 하루에 수십 명을 만나도 그 중에 나보다 잘 살거나 편히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 만나면서 내 몸 걱정이나 할 수는 없지요.”

한의사가 의외로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그 반대의 논리도 무궁무진하게 있지만 내가 오늘은 아무 말 않고 그냥 넘어갑니다. 지금처럼 내공의 기가 다 빠져 버린 상태에서는 어떤 말도 제대로 들리지 않을테니까… 이 약 다 들고 다시 오시면 그때 얘기하지요.”

아, 나는 내공의 기가 다 빠져 버린 사람입니다.

 

 

 

애비

 

철 지난 두꺼운 바바리 코트를 입은 50대 초반의 남자가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섰습니다. 미리 연락을 받았던 터라 내 옆에 앉으시라고 권했습니다. 감기에 걸렸는지 코트 소매로 연신 콧물을 훔치며 그가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죽어라 일해 주고 임금을 한 푼도 못 받았다는데 그의 이야기 중에서 짤막한 한 토막…

 

– 아들 놈이 엊그제 군대에 갔는데 내가 논산까지 따라갔었습니다. 찢어지게 가난한 살림이지만 에미도 없이 내가 직접 옷 갈아 입히며 키운 아들이라 여비를 빌려서라도 내려갔던 거지요.

그 놈이 자라는 동안 생전 나한테 뭘 사달라고 졸라 본 적이 없는 놈이었는데 여관방에서 아침에 일어나 그럽디다.

“아버지, 나 돼지고기 한 근만 사 주소. 나 그놈 먹고 군대 갈라요. 내가 지금까지 아버지한테 뭘 사 달라고 졸라 본 적이 없잖아요. 그러니 돼지고기 딱 한 근만 사 주시면, 나 그 놈 먹고 군대 가서 몸 튼튼히 있다가 올라요.”

주머니를 뒤져 보니까 만 원짜리 한 장이 딱 남았어요. 그래서 ‘애비가 너 고기를 사 주고 나면 올라갈 차비가 없어서 못 사준다’고 했더니 그 놈이 그 말 듣고 울면서 연무대 정문을 들어갔습니다.

그 꼴 보고 집에 와 보니 방바닥에 아들놈이 벗어놓고 간 옷만 덜렁 보이는데 어찌나 속이 뒤집히는지요. 에미도 없이 내 손으로 옷 갈아 입히며 키운 아들놈이 군대 가면서 그래 아무 것도 필요 없고 돼지고기 한 근만 사달라고 했는데 내가 그걸 못 사줬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뭐가 크게 잘못되었어요.

그래서 내가 국회의사당 정문에 가서 벌렁 누워 버렸던 거 아닙니까.

“법 좀 고쳐라. 어떻게 된 법이 나쁜 놈들만 보호하고 나처럼 억울한 사람 권리는 하나도 보호하지 못하니, 이건 법이 잘못된 거 아니냐. 그러니 법을 고쳐라…”

그랬더니 국회에서 검사님에게 보내고 검사님이 여기로 가 보라고 해서 우여곡절 끝에 왔습니다. 여기까지 오기도 참 힘들구만요.

 

그는 말하는 동안 내내 코트 자락으로 눈물 콧물을 닦으며 나이답지 않게 울먹였는데, 휴지를 접어 주면서 나도 결국 눈물을 참지 못했습니다.

 

 

 

 

크리스마스 카드

 

 

강경대 치사 규탄 집회에 참석했다가 시청 뒷골목에서 직격 최루탄을 맞고 화상을 입은 어느 여성 노동자를 알고 있습니다.

알고 지낸 지 수 개월이 되었는데 한번도 웃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함께 식사를 한 적도 있었지만, 농담 한 마디라도 건넬 수 있는 곁을 도무지 내주지 않아서 억지로 웃겨 보지도 못했습니다.

생각대로 올곧게 살아가지 못하는 지식인이 치열하게 사는 노동자를 만날 때 당연히 느끼는 열등감 때문이겠지만 ‘아하, 이 노동자는 나를 무시하는구나’라고 결론짓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일이 있어 띄엄띄엄 만났습니다.

그런데 지난 성탄절 무렵 그로부터 카드를 받았습니다.

우편엽서 뒷면에 정성스레 그림을 그려서 그걸 다시 봉투에 넣어 보낸 것이었습니다.

 

“감사한다는 말을 늘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고맙다는 말보다는 노동자로서, 이 땅 민중의 자식으로서 더 열심히 사는 것이 진실로 고마움을 갚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중략)… 이 엽서는 오늘 하루를 꼬박 걸려 제가 만든 겁니다.”

 

아, 그랬었구나. 나를 무시하거나 싫어한 것은 아니었구나.

화상으로 흉하게 얼룩진 가슴을 안고 평생 살아가야 할 사람에게 헤픈 웃음을 기대했었다니… 참으로 부끄러웠습니다.

그 카드를 받았던 날 오후 마침 그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카드 잘 받았습니다. 하루 종일 걸려서 만들었다는 거요. 참 고맙습니다.”

“아, 그거요? 카드를 전부 다 만드는데 하루 종일 걸렸다는 뜻이에요.”

“그래? 난 또 내 카드 하나 만드는데 하루 종일 걸렸다고… 괜히 좋아했잖아.”

내 말을 듣고 그가 까르르 웃었는데, 그를 알고 난 후 처음 듣는 웃음소리였습니다.

 

 

 

 

1992년, 한가위

 

오후 2시가 넘도록 점심 식사를 못하고 있었는데 어느 단체 사무실에서 전화가 오더니 급히 와 줄 수 없겠느냐고 했습니다.

내가 ‘전문위원’이라는 다소 애매한 직함을 갖고 있는 그 단체의 실무자들은 나를 참 마음 좋은 사람으로 보았는지 평소에도 우편물 발송 등의 일에 손이 달릴 때에 곧잘 나를 불러서 써먹고는 했습니다.

엄연히 끝자리에 ‘사’ 자가 붙는 직업들을 스스로 마다한 채 정신 없이 뛰어다니는 그분들의 ‘희생'(나이가 들어가면서 더욱, 국민학교 도덕 교과서에서나 볼 수 있는 이 단어를 자꾸 생각하게 됩니다)에 비하면, 나는 정말로 뻔뻔하게 살아가는 놈이라는 생각 때문에 그분들이 어떤 요구를 하든 꼼짝 을 못합니다. 나 같은 속물들은 일찌감치 포기해 버린 ‘한 때 각오했던 삶’을 아직도 계속하고 계시다는 이유만으로도 얼마든지 존경 받아 마땅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내가 ‘아직 점심을 못 먹었는데 거기 가면 라면 하나 끓여 줄 수 있겠냐’고 너스레를 떨었더니 전화를 한 간사님이 ‘라면은 떨어졌고 식사를 하나 시켜 줄 수는 있다’고 했습니다. 부랴부랴 그 사무실에 갔더니 간사님이 대뜸 ‘뭘 드시겠느냐?’고 묻기에 나는 ‘아무 거나’라고 간단히 답한 후 물었습니다.

“도대체 뭘 시키려구 그러는 거야?”

“뭐, 비빔밥이나 백반이나 그런 거요.”

“아니, 그게 아니고 이번에는 나한테 무슨 일을 시키려구 밥까지 먹여 주는거냐구?”

그 말을 듣고 대표님이 한참 웃고 나서 나를 사무실 한쪽 귀퉁이로 살짝 끌고 가더니 커다란 상자를 내밀며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거, 하 선생님께 드리는 우리들의 정성이에요. 직접 갖다 드려야 하는 건데… 사무실에 다른 사람들도 있을 거 같고… 그래서 저희들이 머리를 짜내었지요. 하 선생님을 오시게 하자고…”

배달된 비빔밥을 다 먹을 때까지 대표님은 내 앞에 앉아 계속 웃으며 얘기를 하셨고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밥만 먹었습니다.

그 선물의 무게를 감히 감당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어 밥숟가락이 자꾸 헛질을 했습니다.

 

 

 

 

무노동 무임금을 자본가에게

 

그는 해고된 지 9년 만에 복직되었습니다.

9년 동안 그가 겪은 고통은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누구도 그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처절한 것이었습니다. 그가 해고될 때 국민학생이었던 그의 아들은 이제 대학생이 되어 아버님을 자랑스러워할 만큼 철이 들었고 워낙 새치가 희끗희끗했던 그의 머리는 더욱 희어져 내가 그에게 아내를 처음 소개했던 날 ‘내 나이를 머리로 보지 말고 얼굴로 봐 주십시오’라고 인사를 해야 할 만큼 백발이 다 되어 버렸습니다.

노동조합 사무실에서 9년 만에 다시 작업복을 입어 보면서 씨익 웃는 그의 옆 얼굴이 한겨레신문에 실렸었는데, 수억 원을 받고 프로야구단에 입단 계약하는 선수보다도 멋져 보였습니다.

복직된 지 1년 6개월 만에 그는 노동조합장에 당선되었습니다.

그가 노동조합장으로 취임하는 날, 나는 사무실을 대표하여 생전 처음 커다란 화분을 사 들고 노조 사무실에 축하 방문을 가는 ‘미친 짓’을 해 보았습니다.

 

며칠 전 오후에 그가 사무실로 전화를 했습니다.

“자네 ‘임투에 임하는 조합 간부의 자세’라는 주제로 강의할 수 있나?”

“그거 바로 제 전문입니다.”

“그럼 하나 부탁한다.”

“어느 사업장인데요?”

“어디긴 어디야, 바로 우리 노동조합이지. 내일 오전 10시까지 조합 사무실로 와.”

“아니, 그렇게 벼락치기로 하는 교육이 어디 있어요? 다른 것도 아닌 임투 교육이라면서…”

“내일 임시대의원 대회가 열리는데 그냥 안건 토의만 하고 끝낼 수가 없어서 그렇다구. 할 거야, 말 거야?”

“해야지요. 누구 분부신데…”

그날 노동조합에 가서 들은 이야기 중에서 한 토막…

 

노동조합 위원장에 취임하자마자 그는 부서 별로 돌아가며 조합원 간담회를 가졌습니다. 새 민주 집행부의 포부와 조합원들의 요구 사항에 대해 이야기들을 나누었습니다. 물론 근무 시간을 이용했습니다.

생산부장이 부서마다 따라다니며 조합원들에게 일할 것을 지시했으나 ‘노동조합 조직부장 말 듣겠소, 아니면 생산부장 말 듣겠소?’라는 조직부장의 뛰어난 선동에 힘 입어 부서마다 모두 2시간 가량을 축내가며 무사히 간담회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며칠 후 그 동안의 노조 간담회 시간을 무노동 무임금 원칙에 따라 처리하라는, 생산부장 명의의 공문이 경리부서에 돌았습니다.

그는 그 공문을 들고 다짜고짜 생산부장 사무실로 갔습니다.

“꼭 이렇게 해야 되겠소?”

생산부장이 거만하게 되받았습니다.

“법대로 합시다.”

생산부장은 노동법 전문가인 그를 완전히 잘못 건드린 셈이었습니다.

“무노동 무임금이 법인 줄 아시나 본데 육법전서 어디에 무노동 무임금이 나옵니까? 법 좋아하시는 모양인데… 진짜 법대로 한번 해 보시겠소? 근로기준법 115개 조항과 산업안전보건법, 시행령, 시행규칙의 수백 개 조항을 회사가 얼마나 제대로 지키고 있는지 오늘부터 노동조합에서 대대적인 실태 파악을 해 볼 테니 노동부와 한번 싸워 보실랍니까? 집행부 들어선 지도 이제 며칠 안되었는데 나는 벌써부터 피곤하게 회사와 싸울 생각 없습니다. 싸움은 우리가 붙여 드릴 테니 노동부하고 한번 맞서 보시지요. 10여 년 만에 민주 집행부가 들어섰다고 조합원들 기대가 지금 이만저만 아니어서, 나도 이 참에 조합원들의 원성이 가장 자자한 관리자 한 놈 때려 잡아 조합원들에게 점수 좀 따 볼 생각인데 알아서 하시오. 이 공문을 당장 조합원 수만큼 복사해서 현장에 배포하겠습니다. 아마 오늘 저녁부터 잔업이 없을 거요.”

그가 총알같이 말을 마치고 사무실을 박차고 나오는데 생산부장이 따라 나와 그의 팔을 움켜잡으며 말했습니다.

“위원장님, 저… 없었던 일로 합시다.”

 

 

 

걸레인 줄 알았더니

 

울산 방어진의 어느 지하 다방에 앉아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다가 옆 자리의 노동자에게서 들은 이야기…

 

– 용접 작업을 하고 있는데 옆 탱크에서 ‘펑’하고 터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또 가스가 폭발했구나’ 싶어서 뛰어가 탱크 안을 들여다 보니까 걸레 더미에 불이 붙어 타고 있더군요. 녹 슬고 기름 묻은 철판을 계속 닦아가며 작업을 해야 하기 때문에 우리 작업장에는 원래 걸레가 많이 쌓여 있거든요.

돌아서서 오는데 뭔가 예감이 이상해서 ‘혹시’ 하고 다시 가 연기 사이로 자세히 살펴 보니까 걸레 더미가 아니고 사람이 타고 있는 거예요. 얼른 소방 호스를 끌어다 들이대고 밸브를 틀었지요. 아, 그런데 물이 안 나오잖아요. 씨팔, 미치겠더라구요. 하는 수 없이 탱크 안으로 뛰어들어가서 불 붙은 옷을 손으로 잡아 뜯어 버리고 사람을 밖으로 들어 내었습니다. 내 손은 괜찮았느냐구요? 그 지경에 내 손 걱정하게 됐습니까? 내 손도 홀랑 벗겨졌지요.

물론 그럴 때 탱크 안으로 무작정 뛰어 들어가서는 안 된다고… 그러다가는 연기 때문에 질식해서 같이 죽는다고 평소에 알고 있었지만 그 상황에서 탱크 안으로 뛰어들어가지 않을 사람은 아마 한 사람도 없었을 겁니다.

그 친구를 의무실 구급차에 실어 병원으로 보내고 작업장으로 돌아왔더니 그때에서야 반장이 ‘그 탱크 안에 작업 인원이 두 명이었는데…’ 하는 거예요. 허겁지겁 탱크 안을 들여다 보니까 이미 한 친구는 앉은 채로 그냥 숯처럼 까맣게 타서 죽었더라구요. 가스가 폭발할 때 기절해 버리면 자기 몸이 타는 줄도 모른 채 죽는 수가 있거든요.

병원으로 실려간 친구는 울산에서 제일 큰 병원으로 갔는데도 더 큰 병원으로 가야 한다고 해서 부산 메리놀 병원인가 하는 데에 입원시켰지요. 사흘 후에 내가 찾아갔더니 온 몸이 녹아 내려서 링겔 바늘 하나 꽂을 데도 없이 누워 있었어요. 그 지경에서도 나를 알아 보고는 ‘니, 왔나’라고 한 마디 하데요.

그 친구 결국 보름 후에 죽었어요. 동거하던 여자와 결혼식 올리고 신혼여행 갔다 와서 일 주일 만엔가 그렇게 되었지요.

다음엔 우리 회사에 한번 와 보십쇼. 한 마디로 겁나요, 겁나. 현대중공업은 우리 회사에 대면 소꿉장난이에요. 깊이 30미터나 되는 탱크에서 작업을 하다가 가스가 폭발했는데, 아무리 사다리를 타고 기어 올라와도 밑에서 올라오는 불길 속도보다 빠르지 못해 타 죽고… 몇 층 빌딩 크기의 블록이 넘어지는 걸 보고 죽어라 뛰어 도망갔지만, 블록이 넘어지는 속도보다 빠르지 못해서 깔려 죽고… 그렇게 숱하게 죽어요.-

 

그 말을 듣고 내가 말했습니다.

“오늘도 이 땅 어디에선가 최소한 여섯 명은 그렇게 죽었을 겁니다. 신문에 단 한 줄도 안 나지만…”

모두들 잠시 동안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짧은 통화

 

해고 노동자 한 사람이 농성을 하느라고 며칠 전부터 지방에서 올라와 있었습니다. 점심 무렵에 찾아 가 보려고 생각 중이었는데 아침 나절에 전화가 왔습니다.

“계획이 바뀌었어요. 여의도로 가는 중이에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지요?”

“점심 때 쯤 가 보려고 했는데…”

“저녁 6시 이후에 연락이 없으면 일이 잘못된 걸로 아시고 농성장에 남겨 둔 소지품 좀 챙겨 주셔요. 잠바랑 가방이랑 쇼핑백에 넣어 놨어요. 서울에도 챙겨 줄 사람 있다고 생각하니 든든하군요.”

“몸도 아픈 사람을 왜 방문팀에 편성했지? 점농팀에 남겨 두지 않고… 빠질 수 없었어요?”

“내가 싫으면 지금이라도 그냥 가면 그 뿐이에요.”

“조심해요. 앞에 나서지 말고… 아픈 사람이니까 욕할 사람 없을 거예요.”

“난지도에 버려지거나 기껏해야 구류를 살거나 하는 정도일 텐데요, 뭐.”

“그래도 뒷줄에 서요. 알았지요?”

“다치지나 않았으면 좋겠어요. 아, 이제 가 봐야 돼요.”

 

새 정부가 들어섰어도 전혀 달라질 것이 없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그것 하나는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2층에서 내다본 거리

 

13년 전…

1980년 5월, 나는 어느 착한 선배의 도움으로 부천 원미동의 작은 석유가게에 취직이 되어 잘 숨어 있을 수 있었습니다.

슬리퍼를 찍찍 끌고 다방에 석유 배달을 가 보면 입구에 내 현상 수배 사진이 붙어 있곤 했습니다. 수배 전단에 나와 있는 다른 동료들의 사진은 모두 학적부 등에서 복사한 것이어서 알아 보기가 어려웠지만 내 사진만은 유독 시위 현장에서 메가폰을 들고 있다가 찍힌 옆 모습이어서 한결 생생했습니다.(그 전단의 내 사진 밑에 ‘미남형’이라고 써 있었다는 말이 전설처럼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믿거나 말거나…)

다행히 추운 계절이 아니어서 시장 노점에서 500원 짜리 바지와 티셔츠를 사 입고도 잘 견디었습니다.

자전거에 석유통을 싣고 배달을 다녔는데 주택가 골목에서 중국집 배달부와 마주치는 일이 자주 있었습니다. 자연스레 친해졌습니다.

“석유 한 통 배달하러 이 산동네 꼭대기까지 올라와야 하다니….”

“넌 그래도 낫다. 나는 자장면 한 그릇 배달하러 여기까지 와야 할 때도 허다하다구. 꼬마 녀석이 전화 찍 해서 ‘아저씨, 자장면 한 그릇만 갖다 줘요.’ 해도 꼼짝없이 와야한다구”

한달 반 쯤 지나니 친구들이 제법 많아졌습니다. 중국집 배달부는 물론 쌀가게 배달원, 양복점 시다, 전자 제품 대리점 기사 등과 함께 곧잘 어울렸습니다.

석유가게 주인이 연립주택 2층에 5만 원짜리 월세방을 얻어 주어 그곳에서 잠을 잤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길 건너편에 있는 전자제품 대리점의 기사가 가게 문을 열고 청소를 하면서 크게 틀어 놓는 음악 소리가 어김 없이 들렸습니다.

“오늘 그대는 뭔가 다르네요. 사랑을 아는 듯한 슬픈 눈이네요…”

노래 소리는 길 양쪽 건물 사이의 공간이 울림통이 되어 메아리를 남기며 퍼져 나갔습니다. 창문을 열고 거리를 내려다 보면 기사가 쇼윈도우의 유리를 닦거나 막 내리쬐기 시작하는 아침 햇살 속에서 길에 물을 뿌리고 있었습니다.

‘광주에서는 수천 명이 죽었다는데 이렇게 계속 숨어 있어야만 하나’ 하는 초라한 느낌과 ‘오늘 하루를 무사히 지날 수 있을까’

싶은 불안감 때문에 햇살이 눈부실수록 마음은 더욱 슬펐습니다.

 

 

 

오늘… 와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새로 옮긴 사무실의 2층 창 가까이에 내 자리가 있습니다. 가끔 2층에서 거리를 내려다보곤 하는데 그 느낌이 꽤 괜찮습니다.

사무실에 후배가 한 명 더 들어와 책상을 다시 배치하면서 나는 책상의 의자를 아예 창 옆의 컴퓨터 앞으로 옮기고 책상에는 작은 간이 의자를 갖다 놓았습니다. 그리고는 짬만 나면 일거리를 갖고 창 옆 의자에 가서 앉습니다. 그래서 나를 찾아오는 사람들은 먼 발치에서부터 창문으로 내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돌아갈 때에도 창을 한번 올려다보면 거기에 어김없이 내가 앉아 있습니다.

30년 만에 처음으로 집회 허가를 받은 노동절 대회가 열린다는 ‘메이 데이’… 사무실 직원들이 대회장으로 간 후 나는 해외에서 20년 만에 귀국한다는 친척의 연락을 기다리느라고 늦게까지 사무실에 남아 있었습니다. 창가에서 맥 없이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는데 라디오에서 노래 소리가 들렸습니다.

“오늘 그대는 뭔가 다르네요. 사랑을 아는 듯한 슬픈 눈이네요…”

아, 5 월… 2층에서 내려다보는 거리… 눈부신 햇살…

5만의 인파가 노동절 대회에 모여 있는 동안, 나는 사무실에 혼자 남아 바보처럼 감상에 젖었습니다.

 

 

 

 

겨울 바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된 사람의 부인을 만났습니다. 그의 남편은 간첩 혐의를 받고 있으니, 함께 구속되었다가 먼저 나온 어떤 후배의 말대로 ‘쉽게 나오지는 못할 것’입니다.

차분한 말씨가 인상 깊었습니다. 미인이 아니면서도 ‘아, 천사 같다’는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여름이 된 지도 한 참 지났건만 아직도 두꺼운 모직 겨울 바지를 입고 있었습니다.

며칠 후 그 사람 집으로 전화를 했습니다. 아주 어렵게 온라인 통장번호를 알아내었습니다. 몇 사람의 주머니를 털어 마련한 적은 금액의 돈을 보내고 다시 전화를 했습니다.

“지나는 길에 은행에 한번 들려 보셔요. 일부러 가 보실 것까지는 없고…”

“그러지 않으셔도 되는데…”

“여름 바지 사 입으셔요.”

“…”

“정말 바지 하나 값밖에 안 됩니다.”

“예…”

주머니 돈을 턴 사람들도 모두 어려운 사람들이었습니다.

 

비본질적인, 그러나 본질적인

 

키가 작은 할머니 한 분이 불편한 걸음으로 들어오셨습니다.

한 걸음의 폭이 한 뼘 정도밖에 안 되는 듯했습니다. 3층 사무실까지 어떻게 올라오셨나 싶을 정도였습니다. 머리는 모두 백발이었지만 얌전하고 세련된 화장을 하셔서 불편한 행동거지에도 불구하고 여느 중풍 걸린 노인네들처럼 단정치 못하다는 느낌은 거의 없었습니다. 칠순은 쉬이 넘어 보이는 연세였습니다.

숨이 찬 듯 한참이나 쉬었다가 다시 이어지고 쉬었다가 다시 이어지는 그 할머니의 이야기를 오전 내 들었습니다.

 

– ㅇㅇ병원 노동조합장이었던 김 ㅇㅇ를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2년 전쯤에 이 사무실의 도움을 받아 체불임금 청구 소송을 했던 그 노동조합 위원장이 제 아들입니다.

제 아들이 평소 남 위하는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는 성격이었는데도 노동조합 일 가지고는 며칠씩이나 고민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결국, 자기는 아직 총각이고 홀어머니 외에는 딸린 식구도 없으니 자기 같은 사람이 노동조합을 맡지 않으면 누가 하겠느냐고 하더군요.

저도 평생 동안 사람이 옳게 사는 게 중요하지 다른 거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으로 살아왔고 애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쳤기 때문에 아들에게 부디 잘 해 보라고 당부했습니다.

지부장 되고 나중에 위원장이 되더니 어느 날 조합원들의 체불임금을 계산한다고 집으로 라면 박스로 하나 가득 서류를 들고 와서는 이틀 밤을 꼬박 새더군요.

 

(할머니는 의외로 ‘지부장’ ‘위원장’ ‘체불임금’ 등의 용어들을 여느 노동조합 간부들보다도 정확하게 사용하셨고 그 밖에도 젊은 사람들이나 알 법한 단어들을 매우 정확하게 알고 계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입술이 약간 일그러져서 어눌하게 나오는 말씨이긴 했으나 입에서 나오는 말의 표현이 토씨 하나까지도 자로 잰 듯 정리된 것이었습니다.)

 

그 해 여름 아들이 친구들과 같이 속초로 해안 탐사 활동을 가기로 했었는데 갑자기 태풍이 강원도 쪽으로 몰아치는 바람에 탐사가 불가능해졌습니다. 그러자 선발대로 이미 가 있는 친구들이 서울에 있는 대원들에게 탐사가 불가능하니 출발하지 말라고 연락을 했는데 그때는 이미 아들을 포함해서 서울의 대원들이 모두 떠나버린 뒤였습니다.

다행히 속초에서 모두 만나 탐사는 포기하고 돌아오던 길에 소양강 댐 언저리에서 날이 저물었답니다. 호수 변에 텐트를 치고 밤을 보냈는데 아침에 인원 점검을 해 보니 사람이 하나 없더랍니다. 마침 잠수 장비를 가진 대원이 있어서 강 바닥을 조사해 보니 거기서 우리 아들 시신이 나왔답니다.

저는 그때 이미 중풍으로 쓰러져 몸이 많이 불편한 상태였는데 아들이 춘천 어느 병원에 있다는 연락을 받고는 허겁지겁 올라갔습니다. 응급실에 가서 아들을 찾았지만 없는 거예요.

한참 헤매고 있는데 영안실에 가 보라고 누가 알려줍디다.

세상에…

제가 몸이 불편해서 아들 묘를 만든다 해도 나중에 찾아가 보지 못할 테니 화장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주변 사람들이 하도 그래서 그렇게 했습니다. 아들이 자주 다니던 북한산에 아들 친구들이 추모비를 하나 세워 주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몸이 불편해서 거기까지는 한번도 올라갈 볼 수가 없었습니다.

두고두고 생각해 봐도 어찌 후회가 되어야지요. ‘그때 내가 다소 무리를 해서라도 허름한 산모퉁이에 손바닥 만한 땅뙈기를 사서 묘를 만드는 건데 잘못했다’ 싶은 생각에 밤이면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북한산이 무슨 국민 관광지로 지정되고 나서 정부가 거기 있는 비석들을 모두 철거한다고 하데요. 아들 친구들이 집에 찾아 와서는 별 뾰족한 수가 없이 걱정만 하다가 갔습니다.

제가 너무 괴로워하는 걸 알고는 시집 간 둘째 딸이 하루는 오더니 그랬습니다.

“어머니, 걱정 마셔요. 제가 빚을 내서라도 ㅇㅇ이 뉘일 땅 하나 마련하지 못하겠어요?”

그 딸 아이가 전국 방방 곡곡을 뒤져서 강원도 인제 근처에 땅 열 평을 샀습니다. 나중에 저도 죽으면 같이 묻힐 수 있게…

1991년 6월 5일 아들 친구들이 북한산에 올라가 밤새 작업을 해서 추모비를 철거해 끌고 내려왔고 현충일인 다음날 인제에 가서 묘를 만들었습니다. 아들이 생전에 입던 양복, 소지품, 사진, 책 몇 권을 관에 넣어서 묻었습니다.

그런 기막힌 일들을 제가 겪었습니다.

이제부터 제가 오늘 여기에 온 이유를 말씀 드리지요.

아들 죽고 나서 며칠 후에 재단이사장 비서실장이란 사람이 집으로 찾아 오더니, 아들이 생전에 자기와 아주 친했노라고… 아들은 노동조합장이고 자기는 비서실장이어서 서로 반대되는 입장에 서 있었지만 나이도 동갑이고 홀어머니 모시고 사는 처지도 비슷해서 개인적으로는 매우 친했노라고… 앞으로 자기가 친어머니처럼 모시겠노라고… 그런 이야기들을 했습니다.

제가 교회에 다니는 걸 알고 그랬는지, 자기도 기독교 신자인데 친한 친구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보고는 심경에 변화가 일어 직장을 그만 두고 이제부터라도 목사가 되기 위한 공부를 시작하겠노라고… 당장은 먹고 살아야 하니까 못하고 여건이 허락되면 곧 신학 공부를 하겠노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기특하던지요.

그 후 그 젊은이가 정말 집에 자주 찾아왔습니다. 올 때도 꼭 빈 손으로 오지 않고 뭘 사 들고 왔습니다. 사람이 아주 진실해 보이더군요. 저도 죽은 아들 대신에 아들 하나 생긴 것처럼 좋아했습니다.

그렇게 몇 개월 지났는데 하루는 그 사람이 인삼 한 상자와 돈 10만 원을 들고 오더니 이런 말을 했습니다. 생전에 우리 아들이 이사장님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것을 꽤 후회했었노라고…

우리 아들은 소송을 원치 않았는데 조합원들이 하도 하자고 하여 조합장으로서 할 수 없이 했던 것이라고… 그 착한 성품에 자기 때문에 이사장님의 명예가 훼손된 것을 평소에 얼마나 마음 아파했는지 모르실 거라고…

그러니 저더러 아들이 제기한 소송을 취하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소송을 취하하면 이사장님이 특별히 생각하셔서 300만 원을 주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사장님의 명예 때문에 그런다고… 다른 이유는 없다고… 생각해 보시라고… 자기가 10년 넘게 데리고 있던 부하 직원에게 송사를 당했으니 이사장님이 얼마나 마음이 아프시겠느냐고…

저는 소송을 취하해서 이사장님의 명예가 바늘 끝만큼이라도 회복된다면 그것보다 좋은 일이 없겠다 싶어 결국 아들이 제기했던 소송을 취하해 주고 말았습니다. 정말로 돈 300만 원이 탐 나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후로도 그 돈에 대해서는 정말 까맣게 잊고 살았습니다.

제가 소송을 취하해 주고 나니 그 젊은이가 저희 집에 발길을 끊더군요. 그래도 저는 그 사람을 감히 나쁘게 생각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 동안 그 사람이 저에게 했던 많은 말이 새빨간 거짓이라는 어마어마한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만약 그런 것이었다면 저는 또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저는 그걸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 무렵, 그 소송이 취하되었다는 것을 알고 나서 나는 그 노동조합장의 가족을 무척 원망했었습니다. 그 소송을 취하하기까지 그와 같은 사정이 있었으리라고는 짐작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2년 가까이 끌어오면서 다 이겨 놓은 사건이 취하되는 것이 너무나 안타까웠습니다. 패배의식에 빠져 있던 조합원들이 작은 승리라도 얻었다는 기쁨을 느끼게 될 기회가 바로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 너무 억울해서 그 후 한 동안 그 생각만 하면 화가 나곤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좀 생겼습니다. ‘좀’이 아니라 큰 문제였지요.

작은 딸이 자기 동생 묘 자리를 사 준 돈이 알고 보니 빚이었습니다. 식구들 몰래 빚을 내어 땅을 샀던 것이었습니다.

그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서 문제가 복잡해지더니 우리 딸 아이는 결국 이혼을 하고야 말았습니다. 물론 그것이 이혼한 사유의 전부는 아닙니다.

그때에서야 비로서 그 돈 300만 원 생각이 납디다. 그 돈 300만 원만 있어도 제 딸 아이가 그런 곤욕은 치르지 않겠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 비서실장이란 사람에게 전화를 해 보았지요. 그런데 처음에 두어 번 저하고 통화가 되더니 그 후로는 통 연락이 안되는 거였습니다. 사무실에 전화하면 없다 하고, 집에 전화하면 안 들어왔다 하고, 새벽에 전화해 봐도 벌써 나갔다 하고, 제가 저희 집 전화번호를 알려 주면서 새벽이어도 좋고 밤중이어도 좋으니 저에게 전화를 꼭 한 통화만 해 달라고 부탁을 해 두어도 전혀 연락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며칠 전에 알아 보니 그 사람이 미국에 들어갔다고 하는데 그러니 이를 어찌하면 되겠는지 요. 그래도 저는 그 젊은이가 결국 신학 공부한다고 미국에 유학 갔는갑다 생각하고 싶으니 제가 바보라도 한참 바보이지요.

그래서, 하도 답답해서, 여기라도 와 보면 무슨 수가 있지 않겠는가 싶어서 왔습니다.-

 

법이 도무지 쓸모가 없을 때는 바로 이런 때입니다. 시효가 지났다는 이유가 아니더라도 그야말로 뾰족한 수가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돈 많은 놈들의 하루 저녁 술값도 안 된다는 300만 원을 둘러싸고 할머니가 겪어야 했던 삶이 너무 눈물 겨워 실감이 나지 않을 지경이었습니다. 어째서 법이 그런 경우에는 전혀 쓸모가 없는지를 차근차근 설명해 드리고 나서 내가 말했습니다.

“할머니, 저도 교회에 다닌 지 오래 되었습니다. 그리고 독실한 신자는 되지 못하나 ‘집사’입니다. 나이도 꽤 먹었고 아이도 둘이나 있습니다. 큰 애는 국민학교에 다닙니다.”

할머니는 ‘아이고 그러시냐’고, ‘참 감사하다’고 좋아하셨습니다. – 교회에 다니는 어르신들은 새로 알게 된 다른 이가 교회가 다닌다는 걸 알게 되면 ‘감사하다’고들 하십니다 – 할머니는 그때부터 저를 ‘집사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셨습니다.

“제가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는가 하면 말이지요. 허튼 말을 함부로 할 만큼 제 나이가 어리지는 않다는 걸 알아 주셨으면 해서요. 할머니, 나이 어린 제가 감히 말씀 드리겠는데 그 돈 300만 원에 대해서는 하루라도 빨리 잊으시는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야만 할머니 건강에도 도움이 되구요.”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이셨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계속하시면서 끝내 울음을 참지 못하셨습니다.

“제가 70 평생을 이렇게 못나게 살아 왔나 싶어서 얼마가 후회가 되는지… 제가 중풍으로 쓰러졌을 때… 꼭두새벽에… 그 녀석이 나를 업고 구급차 있는 데까지 뛰어가기를 몇 차례나 했습니다. 몇 번이나 그렇게 헐레벌떡 뛰어 다니면서…

나중에는 하루도 빠짐 없이 에미를 업고 침 맞으러 다니면서…

지 에미는 이렇게 살려 놓고, 저는 젊은 놈이 먼저 저 세상으로 가서… 아이고, 이놈아야… 에미는 어찌 살라고…

아들 녀석이 살아 생전에 뼈 빠지게 피땀 흘려가며 ‘노동’을 해서 당당히 받았어야 할 ‘임금’을… 에미가 못나서…

바보처럼… 그걸 못 받았으니, 이 다음에 죽어서 하늘에 가면 내가 아들 얼굴을 어찌 봅니까.”

이야기 끝에 할머니에게 내 명함을 드리면서 ‘궁금하신 게 있으면 몸도 불편하신데 굳이 오시지 말고 전화하시라’고, ‘제가 댁까지 찾아가 뵈올 수도 있다’고 말씀 드렸더니 할머니는 내 명함을 소중하게 받으셨습니다. 그리고는 핸드백을 열고 잠시 뭘 찾으시더니 할머니 명함이라면서 작고 예쁘게 생긴 명함을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칠순의 할머니에게 명함이 있다는 것이 놀라웠습니다. 명함에 보니 할머니에게는 호가 있었습니다.

“호가 있으시군요. 서예를 하시나 보지요?”

“아니요. 되지 못한 시를 좀 써요.”

“아, 시인이셨군요. 시집도 내셨어요?”

“아니요. 그것도 괜한 공명심이다 싶어서 안 했지요. 하지만 벌써 여러 해째 봄이 되면 덕수궁에서 시화전을 열고 있어요. 그게 훨씬 더 사람들에게 시를 가까이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는 것 같기도 하고…”

아, 할머니의 얼굴은 마치 소녀 같았습니다. 아들을 잃고 중풍까지 걸린 칠순의 노파가 어쩌면 저렇게도 순수한 느낌과 영롱한 말씨를 갖고 있는가 하는 궁금증이 한꺼번에 풀렸습니다.

할머니가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환갑이 되었을 때 사람들이 기념 시집을 만들어 준다고 해서 원고를 차곡 차곡 모아놨었지요. 그런데, 그만 집에 불이 나서 그 원고가 홀랑 재로 변하고 말았어요. 그런 불행을 제가 겪었어요. 칠순 기념으로 하나 내 볼까 하고 있었는데 이 경황에 그것도 어려울 것 같군요.”

한 동안, 그 할머니의 존재는 저에게 커다란 충격이었습니다.

 

다음날 직원들과 함께 점심식사를 하면서 그 할머니에 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함께 일하는 변호사가 잠자코 듣고 있다가 갑자기 흥분된 말씨로 말했습니다.

“그 할머니, 제가 그냥 해 드린다고 한번 오시라고 하십시오. 법으로 따지기 이전에 판사도 ‘이런 고얀 놈들이…’라고 생각하고 ‘당장 지급하라’고 호통을 쳐 줄지도 모르는 일이고…”

 

그날 이후, 별 다른 특별한 일이 없었으면서도 그 할머니와 나는 많이 친해졌습니다. 어느 날엔가는 보험 모집인으로 일하는 따님한테서 얻었다며 원적외선 물병을 전해 주러 일부러 먼 길을 오시기도 했습니다.

정말로 기구한 할머니의 가족 관계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습니다.

금년에 나이가 쉰이 된 첫 따님은 오래 전 남편을 갑자기 잃고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해서 정신병자가 되었습니다. 10년 동안이나 정신병원과 기도원 생활을 하고 요즘은 할머니 집에 와서 함께 사는데 몸이 불편하신 할머니가 그 딸을 오히려 돌보아야 하는 형편입니다.

둘째 딸은 세 번 결혼했고 세 번 이혼했습니다. 그래도 억척스럽게 세상과 싸워 이겨 작은 집 한 칸이라도 지니고 살면서 할머니에게 가끔 용돈이라도 드릴 수 있는 자식은 그 딸 하나뿐입니다. 지금은 보험모집인을 하면서 두 번째 남편한테서 얻은 국민학교 5학년짜리 아들과 단 둘이 삽니다. 자기의 아들이 있는 것을 두 번째 남편은 여태껏 모르고 있답니다.

그 밑의 아드님은 몸이 어디가 불편해서인지는 자세히 알지 못하나 아무튼 정상적인 사회 생활을 하기가 좀 어렵다고 합니다. 최근에야 어느 곳의 경비직으로 취직했는데, 할머니가 함께 데리고 – 아들이 어머니를 ‘모시고’가 아니라 – 살고 있답니다.

그리고 막내 아드님이 바로 제가 아는 노동조합장이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며칠 전이었습니다. 오전에 열렸던 어느 좌담회에 참석하느라고 나는 새벽부터 일어나 준비를 했고 그 덕에

노동부와 경총에서 별 준비 없이 온 작자들을 밀어 붙일 수 있었으나, 그래도 그 자리에서는 유일한 내 편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노총의 참석자가 어찌나 무성의하고 어눌하던지 내가 다 창피스러워져서, 그 화가 안 풀린 상태로 사무실에 막 돌아왔을 때였습니다. 며칠째 새벽잠을 설쳐서 몸도 찌뿌드했습니다.

여직원이 전화가 왔다며 바꿔 주었습니다. 어느 아주머니의 다급한 목소리였습니다.

“하 선생님이셔요?”

“예.”

“이 ㅇㅇ할머니 아시지요?”

“예, 압니다.”

“그 할머니 딸이 오늘 교통사고로 죽었어요.”

“……”

“지금 ㅇ ㅇ 병원 영안실에 있는데 하 선생님이 꼭 오셨으면 좋겠다고 할머니가 그러셔서요. 그런데 할머니가 지금 워낙 경황이 없어서…”

“어느 따님이요? 할머니하고 같이 사시는 분이요?”

“아니요.”

“그럼 보험회사 다니시는 분이요?”

“예, 맞아요.”

아, 어찌 이럴 수 있습니까?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마침 그 병원 노동조합 위원장 직무대행이 아는 사람이어서 한번 영안실에 내려 가 봐 달라고 전화로 부탁을 하고 서둘러 병원으로 갔습니다. 지하철에서 내려 연신내의 긴 언덕길을 걸어 올라가는데 자꾸 눈물이 나왔습니다. 영안실 입구에 다다르니 마침 할머니가 나와 계시다가 내 손을 덥석 잡으시고는 이내 울음을 터뜨리셨습니다.

“아이고, 집사님 오셨군요…”

나는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할머니를 의자에 앉히고 손을 잡고 있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할머니는 울음을 멈추실 때마다 간간히 말씀하셨습니다.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요즘은 정말로 ‘하나님, 저로 하여금 오늘 하루를 더 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하고 기도를 해요. …… 이제 죽을 때가 되었다 싶어서 자기 전에 매일 깨끗한 속옷으로 갈아 입고 쓰던 원고도 정리해 놓고 어느 누가 와서 보더라도 창피하지 않게 꾸러미를 싸 놓는 게 일인데… 나는 이렇게 죽지 못하고…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 동안 남들 안 당하는 불행한 일을 내가 당할 때마다 ‘하나님, 이제 더는 마옵소서… 이제 더는 마옵소서…’ 하고 얼마나 기도했는데…. 집사님, 어찌 이럴 수 있습니까.”

영안실에 들어가 밤 9시 쯤 되었을 때 할머니가 깜빡 잊고 있었다는 듯이 말씀하셨습니다.

“손주 녀석이 학원 갔다가 집에 와 있을 텐데… 아무 것도 모르는 채 혼자 집에 있을 텐데…”

내가 다녀오겠노라고 했습니다. 집을 아는 분과 함께 가자고 하니 어느 아주머니가 나섰습니다. 바로 할머니의 큰 따님이셨습니다. 할머니는 경황 중에도 가방에서 열쇠 꾸러미를 찾아 주시며 ‘요게 바로 대문 열쇠이고 요건 현관 열쇠’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죽은 따님이 ‘꼭 받아야 하는 중요한 전화가 올 터이니 집 좀 지켜달라’고 해서 할머니는 마침 이틀 전부터 그 집에 와 계신 거였습니다.

집에 도착했으나 국민학교 5학년인 아들 녀석은 아직 안 들어와 있었습니다.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기다리는 동안 할머니가 집으로 전화를 하셨습니다. 반쯤 울음이 섞인 목소리였습니다.

“집사님, 저녁 못 드셨지요? 시장하실 텐데… 어쩌나…”

“괜찮습니다.”

“냄비에 보면 햇감자 삶은 게 있을 텐데 냉장고에 있는 쥬스하고 같이 그거라도 드시든지…”

“괜찮다니까요.”

“죽은 딸 아이가 아침에 나가더니 햇감자라고, 어머니 쪄 드시라고 사 와서… 내가 얼른 삶아서 ‘따뜻할 때 먹고 나가라’고 하니까 그거 두 개 집어 먹고는 나간 지 10분도 안돼서 그렇게 되었어요. 아직도 믿을 수가 없어요.”

“아이가 아직 안 들어왔는데 10시까지 기다려 보고 그때까지도 안 들어오면 큰 따님 보고 집에 계시라고 하고 저는 다시 병원으로 가겠습니다.”

“예, 그런데 집사님, 오실 때 담요나 얇은 이불 석 장하고 방바닥에 제가 벗어 놓은 안경 좀 갖다 주시겠습니까?

죄송합니다. 그리고 감자 꼭 드셔요.”

“예, 먹지요.”

그 같은 경황에도 남 배고픈 걸 걱정해 줄 수 있다니…나는 감자를 4개나 먹었습니다. 아무 말도 안 했는데 큰 따님이 설탕을 한 그릇 가득 퍼다 주었고 커피를 큰 컵 하나 가득 넘치도록 수도물에 타 주었습니다.

큰 따님은 자세히 뵈니 도저히 쉰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젊어 보였습니다. 정말로 마흔도 채 안되어 보였습니다. 남편이 죽었을 때 그분의 나이도 이미 정지해 버린 듯했습니다.

10시가 되도록 아들 녀석은 안 들어 왔습니다. 담요를 꾸려 대문을 나서면서 나는 차라리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국민학교 5학년인 사내 녀석에게 엄마의 죽음을 어떻게 말해야 하나 걱정이었는데 이제 그 괴로운 역할을 이모에게 떠넘긴 셈이었습니다.

골목길 끝에 이르렀을 때, 대여섯 명의 국민학생들이 뒹굴며 놀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나는 혹시나 싶어서 물었습니다.

“야, 너희들 중에 혹시 권 ㅇㅇ라고 있어?”

“예, 바로 얘에요.”

손가락질을 당한 녀석이 나를 빤히 쳐다 보았습니다.

“너, 이모가 집에서 아까부터 기다리는데 빨리 가 봐.

국민학생이 이렇게 늦게까지 길에서 놀면 어떻게 해?”

“아저씨는 누군데요?”

“빨리 집에 가 보라니까. 아니다. 나랑 같이 가자.”

나는 그 애의 손을 끌고 다시 집으로 갔습니다. 아이가 앞장서서 현관을 들어서서 신발을 벗고 마루 위로 올라서자마자 이모가 말했습니다.

“니 엄마 교통사고로 죽었다. 빨리 ㅇ ㅇ 병원으로 가자.”

아이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얼른 현관으로 내려서더니 다시 신발을 신었습니다. 쏜살같이 대문으로 내닫는 아이를 내가 붙잡았습니다.

“아저씨랑 같이 천천히 가자.”

아이의 어깨를 감싸 안고 걸었습니다. 문득 그 애가 내게 물었습니다.

“아저씨, 우리 엄마 정말 죽었어요?”

“응.”

아이는 울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아이의 어깨를 감싸 안은 채 걷기만 했습니다. 병원에 이를 때까지 단 한 마디의 말도 못했습니다. 무슨 말이 필요한지조차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새벽녘까지 병원에 있다가 중요한 – 정말로 중요한 – 일이 있어서 집으로 왔습니다. 사무실에서 일거리를 한 아름 싸 가지고 나왔던 길이었습니다. 바쁘다는 게 진저리 쳐지도록 싫었습니다. 어제 같은 날은 병원에 있어야 했습니다. 할머니 혼자 정말로 아무도 없이 담요를 몸에 두른 채 썰렁한 영안실을 지켜야 하는 이 기 막한 현실이 어떻게 있을 수 있는지…

우리에게 할머니의 슬픔을 외면하고도 바르게 살아갈 수 있는 이데올로기가 있다면 그것은 거짓입니다.

 

나중에 할머니를 만났을 때 하셨던 말씀 중에…

“아들하고 같이 산악회 활동을 하던 친구들 중의 한 명에게 연락을 했더니 장례식 날 모두 왔더군요. 산악회 친구들은 항상 그래요. 무슨 일 있으면 한 사람에게만 연락해도 모두 오지요.

그런데 노동조합 같이 했던 친구들은 한 사람에게 연락하면 한 사람 오고, 두 사람에게 연락하면 두 사람 오고 그래요. 그래도 오기는 와요.”

 

 

 

점석 형님

 

입춘이 지났지만 본격적인 추위가 제대로 없었던 겨울을 분풀이라도 하듯, 그 해 들어 제일 낮은 기온을 기록했다던 날이었습니다. 정거장까지 따라 나온 선배는 기차표를 내 손에 쥐어 주며 말했습니다.

“니들, 결혼하그라. 8년씩이나 연애했다카면서… 형편 필 때까지 기다릴락하믄 한이 없다고들 안하나. 나도 그래서 했다.”

고향에 돌아가 더욱 또렷해진 사투리였습니다.

“신혼여행은 꼭 이곳으로 와.”

개찰구를 나서는 우리의 뒤통수에 대고 선배는 마지막 한 마디를 보탰습니다. 돌아다보니 형수님이 곁에서 돌이 채 안된 아기를 업고 환하게 웃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 해 늦봄에 결혼식을 올렸고 결혼식 다음 날 저녁 무렵에 신혼여행의 첫 목적지인 선배의 집에 도착했습니다.

오랜만에 선배를 뵙겠다고 친구 녀석이 두 명씩이나 우리와 동행했습니다. 마침 문을 열고 나서다 우리와 마주친 선배는 인사를 받고 나서도 잠시 웃고만 있다가 아내의 팔뚝을 잡아주며 조그맣게 말했습니다.

“니, 욕 봤다.”

“앞으로 욕 보겠지요.”

아내가 재치 있게 되받았습니다.

형수님은 반갑게 맞아 주셨지만, 알량한 살림이 그 새 더 많이 축 나 있는 것이 한 눈에도 보였습니다. 노동 야학을 다섯 개씩이나 꾸려가고 있던 선배는 집안에 쌀 한 톨이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형수님, 잠시 나갑시다.”

마다하는 형수님의 손목을 이끌고 시장에 가 쌀 한 말, 고기 두어 근, 김치거리, 김, 밑반찬 몇 가지를 눈에 뜨이는 대로 샀습니다. 돌아오는 버스 속에서 형수님은 내내 고개를 돌리고 앉아 콧등을 훔쳤습니다. 꾸러미들을 들고 언덕길을 올라오면서 형수님이 말했습니다.

“형님이 석 달 동안 집에 돈 한 푼 못 갖고 들어왔어요. 며칠 전에는 천 원 짜리 한 장 들고 길을 나섰다가 잃어버린 적이 있었는데, 전 재산을 잃어버렸다는 생각 때문에 어찌나 서럽던지… 버스도 못 타고 애 업은 채 집에까지 두 시간도 넘게 걸어 오는 동안 내내 울었어요.”

우리들은 선배의 단칸방에 배를 깔고 나란히 엎드려 새벽 먼동이 틀 때까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동행했던 친구 두 명은 정말 눈치도 없이 선배의 집에서 하룻밤을 더 묶겠다고 했고 우리 부부는 다음 날 떠나기로 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선배의 집을 나서며 나는 형수님의 손에 지폐 몇 장을 쥐어 드리며 말했습니다.

“저 녀석들 내일이나 떠날 모양인데, 아마 형님이 기차표 끊어 줄 줄 알고 있을 겁니다. 이 돈으로 차표 끊어 주셔요.”

형수님은 ‘이 돈을 받을 수밖에 없군요…’라고 말꼬리를 흐리며 얼굴을 돌렸습니다.

다른 사람들 신혼여행비의 반의 반도 못 되는 빠듯한 비용으로 출발했었는데 벌써 반 이상 써 버린 셈이었습니다. 그 후 3박 4일 동안 안해와 나는 석유 버너에 라면을 끓여 먹고 ‘입산금지’ 표지가 세워진 숲에 몰래 들어가 돌 위에 삼겹살을 구워 먹으면서 무사히 신혼여행을 마쳤습니다.

 

몇 년 후, 참으로 오랜만에 선배를 다시 찾았습니다. 작은 권리라도 찾지 않으면 주어지지 않고, 외치지 않으면 되찾지 못하는 주변의 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더 이상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작은 결단이라도 해 보아야 한다고 아내와 나는 마음을 거의 정리한 후였지만, 선배와 한번쯤 상의해야 한다고 느꼈기 때문이었습니다.

선배는 이미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고 우리도 아들 하나를 낳아 세 식구가 되었습니다.

여관에 묵겠다고 했지만 선배는 ‘이제는 어엿한 독채 전세에 사는데 그게 무슨 말이냐’ 면서 굳이 자기 집으로 끌고 가는데 길을 한참이나 계속 올라가기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형님, 전망 좋은 곳에 사십니다’ 하니 선배는 ‘그런 말 어디 가서 하지 마라. 이곳 지리 아는 사람들이 들으면 다 웃는다’고 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비좁은 방 안에 어느 새 땡볕이 깊숙이 들어와 있어 더 이상 늦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밤이면 꼭 매미만큼씩이나 커 보이는 시커먼 바퀴벌레가 소리도 요란하게 바닥을 기어 다니거나 푸르릉거리며 날아다녔습니다. 엎드려 자다가 소스라치게 놀라 깨어 보면 그 커다란 바퀴벌레가 손바닥 밑에서 기어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그 해 들어 제일 무더웠다는 2박 3일을 그 곳에서 지내며 우리 식구들은 잠을 설쳤습니다.

떠나던 날 아침, 형수님은 서랍장을 열고 무엇인가 한동안 찾더니 가슴에 장산곶 장수매 한 마리가 커다랗게 새겨진 티셔츠를 곱게 접어 내밀었습니다.

“형님이 이번 여름에 캠프 할 때 만든 옷인데… 한번밖에 안 빨았어요. 두 벌 있거든요. 마땅히 드릴 것도 없고…”

고맙게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선배는 출근 채비를 하다가 뒤 돌아서서 웃옷 안주머니에서 뭔가 꺼내 잠시 달그락거리더니 볼펜과 샤프펜슬이 가지런히 들어 있는 케이스를 내게 불쑥 내밀었습니다.

“너, 이거 써라. 지난번 어떤 행사에 갔다가 받았는데 난 이런 고급 볼펜 영 못 쓰겠더라.”

‘ㅇ ㅇ 기념’이라고 새겨진 글씨가 거의 다 지워졌을 만큼 손때가 묻은 것이었습니다. 가방을 꾸려 집을 나서는데 형수님이 얼른 우리 아이 손에 작은 장난감 자동차를 쥐어 주며 말했습니다.

“보니까, 이걸 제일 잘 가지고 놀던데…”

그 집에서는 유일하게 제대로 굴러가는 장난감이었고 선배의 큰애가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이건 정말 안 받겠어요. 이것까지 받았다가는 우리가 벌 받습니다.”

몇 번을 옥신각신하다가 끝내 방바닥에 던져 놓고 나왔습니다.

형수님은 역까지 배웅 나온다며 그 찌는 듯이 더운 날씨에 작은애는 업고 큰애는 손에 딸린 채 따라 나섰습니다. 역에 도착하니 선배가 사무실에서 시간 맞추어 나와 있다가 손에 든 작은 봉투를 또 내미는 것이었습니다.

“찾아 보니까 사무실에 마침 새 옷이 한 벌 남아 있더라. 니 하고 니 아들하고 하나씩 입그라.”

빙그레 웃느라고 선배 양쪽 눈 사이의 커다란 검은 점이 씰룩거렸습니다. 아쉬움이 너무 커 말도 별로 나누지 못한 채 멋쩍게 서 있다가 시간이 다 되어 개찰구로 막 들어서는데 형수님의 목소리가 뒤따라왔습니다.

“꼬마 자동차가 여기까지 따라왔네.”

우리 아이 손에는 얼떨결에 받아 든 장난감 자동차가 쥐어져 있었고 우리는 벌써 개찰구를 나선 뒤였습니다. 형수님과 선배는 칸막이 뒤에 서서 애를 하나씩 안고 업은 채 환하게 웃었습니다.

기차에 올라 자리를 잡고 앉은 후 한참이 지나도록 우리는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눈물 많은 아내는 아이를 무릎 위에 앉히고 창 밖만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돌아오는 기차 속에서 나는 사직서를 써야 한다고 결심했고 아내도 이미 설명을 요구할 필요조차 느끼지 않는 듯했습니다.

 

가난해서 7년 동안 점심을 안 먹었다는 벽돌공,

고생한 이야기하면 눈물이 나올까 봐 못한다는 그의 아내,

열세 살 소녀 적부터 소음과 먼지로 뒤덮인 방직 공장의 기계 속에 파묻혀 지내 온 스물아홉 노처녀의 눈물,

‘두 달 후에 집행유예로 나와서 보자’고 웃으며 머리띠를 동여 매던 친구,

해고 당한 후 어느 곳에도 취직이 안되어 포장마차라도 해야겠다고 돈을 빌려달라던 40대 초반의 노동자…

내가 그나마도, 이렇게 진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가슴 아픈 삶 주변에 있으려 애쓰는 것은 선배가 나에게 나누어 준 사랑에 값 하기 위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선배가 나누어 준 사랑은 지금도 나의 일부분이 되어, 나로 하여금 다른 이의 일부분이 되고자 노력하라고 타이르고 있습니다.

지금은 진주 YMCA의 총무로 있는 전점석 선배, 그는 팔 다리 하나를 나누어 준 것보다 더욱 귀한 것을 나에게 준 셈입니다.

 

 

 

 

둘째 묶음

가르치고 배우며

 

내가 노동자들을 가르친다는 참으로 부끄럽고 건방진 생각을 가졌던 때가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아픔에 동참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일이었습니다. 함께 아파하는 것… 우선 그것만이라도 제대로 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합니다.

최소한 내가 하룻밤을 새면서 뭔가 끄적거리면 이 땅의 노동자 한 사람이 따뜻한 밥을 먹는 데에 작은 보탬이라도 되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나의 그러한 수고가 우리 사회의 불평등한 구조를 무너뜨리는 데에 바늘 끝만큼이라도 보탬이 된다는 생각을 할 수 없다면, 새벽 기차로 지방에 내려가 사람들 앞에서 두어 시간 떠들다가 밤 기차로 올라오기를 밥 먹듯 하는 일을 오래도록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노동자들을 만날수록 부끄러움을 통해서 배울 뿐입니다.

그것을 깨닫는 데에 10년의 세월이 걸렸습니다.

 

 

노동조합과 어머니

 

조합원이 만 명이 넘는, 비교적 규모가 큰 사업장의 노조 대의원 교육이 있었습니다. 아침 9시부터 저녁 5시까지 진행되는 교육이었습니다.

경비들과 욕설이 오가는 ‘통과 의례’를 거치고 나서야 겨우 회사 정문을 들어선 우리 일행은 ‘뭔가 오늘 교육이 순탄치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을 일찌감치 받았습니다.

교육이 막 시작되려고 할 무렵, 사회를 보던 노조 부위원장이 ‘지금부터 교육을 시작하겠습니다’고 말하자마자 어느 대의원이 일어서더니 노조 집행부를 신랄하게 비난하는 발언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최근에 있었던 일련의 사태에 대한 노조측의 해명을 요구했습니다. ‘회사가 저렇게 나오는데 노조 집행부는 도대체 뭐하고 있는 거냐? 일 똑바로 하라’는 것이 내용이었습니다. 집행부 간부들이 ‘강사님도 오시고 했으니 예정되었던 교육부터 하고 나중에 이야기하자’고 설득했으나 통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교육이나 하고 있을 때요?”

“따질 건 따지고 나서 교육이고 나발이고 해야 할 것 아니요?”

대의원들의 격앙된 말들이 쏟아졌습니다. 집행부와 싸잡아, 집행부가 데리고 온 강사까지 완전히 ‘엿을 먹으며’ 앉아 있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었습니다.

임원들이 자신 없는 목소리로 어줍잖게 해명하고, 대의원들이 일어나 발언하고, 자리에 앉아 있는 대의원들도 몇 마디씩 거들고 하다가 30분도 더 지나서야 수석 부위원장이 ‘정식으로 사과한다. 어쩌구…’ 하는 발언을 하고는 겨우 수습되었습니다.

맨 앞자리에 앉아서 나는 그 말들을 모두 들어야 했습니다.

‘하나밖에 남지 않은 수도권 대기업 강성 노조의 모습이 이런 것이라니…’ 하는 생각으로 마음이 아팠습니다.

어찌어찌 교육이 시작되었고 ‘강사님이 나오실 때에 박수로 환영해 주시기 바랍니다’는 사회자의 소개를 듣고 자리에서 일어섰으나 발이 선뜻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솔직히 ‘말할 맛’이 나지 않았습니다.(노동자 교육을 무슨 ‘맛’으로 하느냐는 것과는 다른 차원인 걸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위기를 어떻게든 넘겨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동지 여러분, 반갑습니다.”

상투적인 인사말을 한 마디 하고는 더 이상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난감했습니다. 잠시 망설인 후 다음과 같이 말문을 열었습니다.

그날 내가 했던 이야기…

 

– 교육을 시작하기에 앞서, 조금 전 집행부와 대의원 몇 분 사이에 의견이 오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제가 느낀 점부터 감히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얼마 전 구미 지역에 교육하러 갔을 때의 일입니다. 10여 개 사업장의 간부님들이 참석하셨는데 교육 시작하기에 앞서 사업장별로 간단히 소개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무슨무슨 노동조합 위원장 직무대행 아무개입니다’라고 소개하는 사업장이 의외로 많았습니다. 그래서 소개가 다 끝난 후 제가 물었습니다.

“아니, 위원장님들은 다 어디 가고 직무대행들만 이 자리에 왔습니까?”

그 말을 듣고 한 간부가 답했습니다.

“위원장님들은 다 구속되었습니다.”

다른 간부가 뒤이어 더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노동법 위반으로 구속되었습니다.”

그 날 제 강의의 주제가 바로 ‘노동법’이었으니 그 말은 곧 ‘노동법이 노동자 때려 잡는 데에나 쓰이는 세상에 무슨 한가하게 노동법 교육을 한답시고 왔느냐?’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처음부터 강사에게 완전히 ‘엿을 먹이는’ 것이었습니다.

잠시 생각한 후에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동지 여러분, 우리가 오늘날 ‘위원장님들은 다 사형 당했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을 수 있는 걸 다행이라고 생각합시다. 우리 아버님, 어머님들이 노동운동을 하실 때에는 노동운동을 하던 사람이 어느 날 아침에 한강변에 시체로 떠오르고 간밤에 죽창에 찔려 죽고 그랬답니다. 그래도 다아 열심히 했답니다. 그러니 우리가 오늘날 ‘위원장님들은 다 사형 당했소’라고 말하지 않을 수 있는 게 얼마나 다행입니까?”

지금 노동조합이 매우 어려운 때라고들 말합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우리 나라 반만 년 역사를 통틀어 요즘처럼 노동조합 활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시대는 없었습니다.

제가 처음 노동문제에 관심을 가졌던 80년대 초반 무렵, 우리는 노동조합의 ‘노’ 자조차 어두운 골방에서 숨 죽여 가며 속삭여야 했습니다. 그게 불과 몇 년 전입니다. 그때 우리는 ‘노동조합이 과연 이 땅에서 노동운동을 하기에 적합한 운동틀이냐, 아니냐’는 문제로 우리들끼리 머리통이 터지게 싸웠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활동가들은 ‘분단의 벽이 두터운 이 땅 위에서 노동조합은 절대로 적합한 운동틀이 아니다’라고 결론 지었습니다. 저도 물론 그 입장에 동조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의식 있는 활동가가 노동 현장에 들어가 어찌어찌 해서 소모임을 하나 만들면 ‘근로조건 개선’이나 ‘노동조합’ 따위에 대해서 이야기할 게 아니라, 화장실에 낙서 하나를 하더라도 ‘대머리’를 직접 깨부수는 내용의 낙서를 해야 한다, 노동조합 따위에 대해 고민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주장했고 그러한 주장에 대해 이견이 별로 없었습니다. 다만 우리가 먼저 공격해야 할 대상이 ‘대머리’인가 아니면 ‘코쟁이’인가에 대한 다툼이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우리는 87년 7, 8월의 노동자 대투쟁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불과 몇 년 후를 내다보지 못했던 어리석음으로 가슴을 쳤습니다.

지금은 노동조합의 필요성과 그 가치를 부인하는 사람은 감히 없습니다. 그리고 운동 세력이 모두 힘을 합하는 조직, 이를테면 ‘통일전선’의 중심에 노동조합이 우뚝 서야 한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 또한 별로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지금 잠시 힘들더라도 불과 몇년 후 우리 사회의 모습이 어떻게 달라질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87년 노동자 대투쟁이 있던 해 가을 어느 날, 저의 어머님이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동안 말은 안 했지만 사실은 내가 전평 활동을 했다. 40년이 넘도록 아무에게도 말을 못했지만 사실은 내가 전평 활동가였다.

그때 나와 같이 일하던 사람들은 어느 날 깨어 보면 한강변에 시체로 떠오르기도 하고 간밤에 죽창에 찔려 죽기도 하고 그랬다. 그래도 다들 열심히 했다. 육이오 사변 때에는 보도연맹에 가입했다가 모두 다 죽고 나 혼자 운 좋게 살아 남았다. 다들 똑똑하고 잘 생긴, 아까운 사람들이었다. 니 애비한테도 여지껏 말을 못했지만, 사실은 내가 전평 활동가였다.”

동지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칠순의 노파가 40년 동안 살을 맞대고 살아온 남편에게조차 말하지 못했던 사실을 감히 고백하도록 하는 용기, 그것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입니까?

칠순의 노파로 하여금, 40년 동안 간직했던 비밀을 감히 털어 놓을 수 있도록 용기를 주는 세상, 바로 그 세상에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 땅 위의 반만 년 역사를 통틀어 일찍이 이런 시기는 없었습니다. –

 

여기까지 말하고 나서, 멍청하게도, 나는 울고 말았습니다.

‘아, 지금 내가 무슨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있는 것인가. 강의를 시작한 지 30분이 넘도록 이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나 하고 있는 것인가…’

지금 돌이켜보면, 어머니에 대한 ‘자기 설움’이 적당히 뒤섞인 감상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잠시 뜸을 들이며 아무리 마음을 다잡아도 울음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하는 수 없이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두서 없이 말을 이었습니다.

 

“동지 여러분, 이러면 정말 안됩니다. 지금 좀 힘들다고, 잠시 어렵다고, 이런 모습을 보여서는 정말 안됩니다. 이러다가는, 우리 다 같이 죽습니다. 노동부의 발표를 그대로 믿는다 해도, 하루에 여섯 명의 노동자가 산업재해로 죽어 나자빠지는 세상입니다. 이 방에 있는 대의원 동지 여러분들이 모두 다 죽어 무덤 속에 묻히는 데 불과 열흘이 안 걸립니다.

노동조합은 결코 ‘해결사’가 아닙니다. 조합원이 힘을 실어 주지 않으면 노동조합은 정말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집행부가 골리앗 크레인에 올라가 목숨을 걸고 머리통이 터지도록 싸우면 뭣합니까? 집행부를 골리앗에 올려 놓은 채 자가용 몰고 설악산에 놀러 가고 낚시질이나 다니는 조합원이 있는 한, 상집 간부 몇 명이 골리앗에 백 날 올라가 봐야 말짱 헛겁니다.

아까와 같은 모습을 저는 자주 봅니다. 이 노동조합에 와서 처음 보는 모습이 결코 아닙니다. 가끔 노동조합 사무실에 찾아갔다가, 집행부를 신랄하게 비난하는 조합원의 말을 들을 때마다 저는 그 다음에 이어져야 할 말을 기대합니다.

‘나는 이렇게 하겠다. 그러니 집행부가 한번 일을 제대로 해 봐라.’

그런데 지금까지 어느 노동조합에서도 제가 기대했던 그 말을 듣지 못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여기에 와서 저는 처음으로 그 말을 들었습니다. 아까 어느 대의원 동지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조합원들도 이제는 예전의 조합원이 아니다. 그러니 집행부가 한 번 용기를 갖고 밀어 부쳐 봐라. 우리가 밀어 줄 테니 소신껏 해 봐라.’

그렇습니다. 이제는 우리 노동자가 예전의 노동자가 아니라는 것. 그 말 속에서 저는 내일의 희망을 봅니다.”

 

90분 강의를 마치고 쉬는 시간에 자리로 내려오니 교육 진행을 도와 주러 따라 갔던 후배가 대뜸 말했습니다.

“아니, 울기는 왜 울어요? 그렇지만, 썩 괜찮았어요.”

다른 후배가 또 말했습니다.

“아주 감동적이었어요. 가슴이 뭉클했어요. 선배님 아니었으면 오늘 교육은 아예 시작도 못할 뻔했어요.”

 

다음 날, 종로성당에서 집회가 있어 참석했더니 ‘하종강이 ㅇㅇ노동조합 교육하다가 울었다더라’는 소문이 벌써 퍼져서, 인사 받기 바빴습니다.

 

 

 

이제, 다시 시작하며

 

어느 지방 노동조합의 교육을 마친 후, 평가회에서 나는 후배들에게 혼쭐이 났습니다.

“노동자들의 귀중한 두 시간을 그렇게 의미 없이 빼앗아도 되는 거예요?”

“어려운 때일수록 강사는 대중들에게 확신을 줄 수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그렇게 나약한 강사의 모습을 보고 어느 노동자가 변화될 수 있겠어요? 노동자를 변화시킬 수 없는 교육은 시간 낭비라구요.”

“그 자학하는 자세 좀 버릴 수 없어요? 강사가 시종일관 ‘저처럼 보잘 것 없는 놈이…’라는 식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으니 뭐가 되겠어요?”

“개인적으로도 유난히 힘든 시기라는 건 알아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정상 참작’이 될 수 있을 뿐이지 ‘무죄’가 될 수는 없어요. 프로면 프로답게 좀 해 봐요. 이제는 아마추어가 아니잖아요.”

후배들의 질책이 사그라들 무렵, 내가 힘 없이 한마디 했습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 도대체 어느 인간이 무엇 하나라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게 있겠냐. 만약 그렇다면 허위의식이거나 쓸데없는 권위의식이겠지…”

후배 하나가 혀를 차며 말했습니다.

“아주 중병에 걸렸군. 걸려도 되게 단단히 걸렸어.”

‘오늘 저녁 교육은 그렇게 되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으로 참고할 만한 책이라도 있을까 싶어 서점에 들렀더니, 무슨 책값이 그렇게 비싼지… 두 시간 넘게 서성거리다가 애꿎은 시집만 두 권 사 들고 왔습니다.

‘강사라고 뭐 뾰족한 수가 있나? 그야말로 홀딱 벗고 얼싸안은 채 함께 울어버리지’라고 항복 선언을 해버리니, 마음은 편했지만 갑자기 속이 빈 듯 허전해져서 때 이른 점심을 허겁지겁 먹어야 했습니다.

그날 저녁 교육을 되는 대로 마친 후, 뒤풀이 장소에서 빠져 나와 밤 11시가 훨씬 지난 시간에 찾아 들어간 허름한 식당에서 혼자 저녁밥을 먹다가, 한 구석에서 선명하게 들려 오는 낮은 목소리에 나는 흠칫 놀랐습니다.

“총선 이후, 오늘 같은 대오를 형성해 보기가 처음이어서 감개 무량합니다. 동지들, 건배합시다.”

맞아. 저렇게들 살고 있는 것을… 나는 정신을 가다듬었습니다.

그 이후에도 나는 한번 더 노동자 교육을 ‘완전히 조져 버리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러다가, 심기일전하여 다시 시작한 며칠 후의 교육에서 나는 드디어 명예를 되찾았습니다.

평가 모임에서 어느 나이 어린 후배가 말했습니다.

“오늘 강의를 듣고, 역시 사람은 한 우물을 파야 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저도 오늘부터 그렇게 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선배님 같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이 시대, 이 땅 위에서

 

노조 위원장을 따라 식당 뒷방으로 들어가니 앉아 있던 상집 간부들이 모두 일어서며 인사를 했습니다. 임원들과는 몇 번 만났었으나 상집 간부들은 대부분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위원장이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노동조합이 설립된 이래 가장 큰 시련에 부딪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회사가 며칠 전 부위원장에게 행한 부당한 조치는 노동조합을 본격적으로 탄압하겠다는 신호탄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오늘은 그 동안 여러분이 만나고 싶어했던 하 선생님도 오셨으니까…”

위원장이 여기까지 말했을 때 어느 재치 있는 여성 노동자가 재빠르게 말을 잘랐습니다.

“생각보다 미남이네요. 결혼하셨어요?”

모두들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배를 잡고 방바닥에 누워 마치 자전거를 타듯 발을 구르는 시늉을 내는 조합원도 있었습니다.

위원장이 다시 말했습니다.

“물론 결혼하셨으니까 쓸데없는 관심 끊으시기 바랍니다. 하 선생님 아드님이 벌써 국민학교에 다닙니다. 우선 저녁 식사부터 하시고 앞으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좋은 결론에 이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문 밖에 인기척이 있더니 안면이 있는 사무장이 서둘러 들어오며 말했습니다.

“부위원장님이 오고 있어요. 빨리 준비해요.”

방안이 갑자기 수선스러워졌습니다.

“빨리 불 꺼요. 불이 켜지면서 동시에 노래 시작하는 거예요.

케이크 사러 갔던 사람 왔어요?”

서둘러 불을 끄고 숨을 죽이며 기다리고 있자 잠시 후 부위원장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이 방이 맞을 텐데…”

부위원장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불이 켜지면서 일제히 노래가 시작되었습니다.

“… 비록 지금 우리들은 가진 것은 없어도 노동 해방 그날까지 투쟁할 수 있는 친구가 있다. 부위원장님 생일을 축하합니다. 스물아홉 살 노처녀 생일을 축하합니다.”

케이크를 자르고 먹고 삽겹살로 배들을 채우고 나서 토론이 시작되자 분위기는 다시 무거워졌습니다.

나는 되도록 말을 삼갔습니다. 비슷한 경우에 처했던 다른 노동조합들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었는지, 또 앞으로 예상되는 어려움은 어떤 것들인지 등에 관한 이야기들을 두서 없이 그러나 조심스럽게 했습니다. 다행히 위원장이 분위기를 잘 모아갔습니다.

“떡장수 할머니와 호랑이에 관한 옛날 이야기를 동지 여러분들은 모두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떡 하나 주면 안 잡아 먹지’ ‘팔 하나 주면 안 잡아 먹지’ 하는 호랑이의 말을 듣다가 떡장수 할머니가 끝내는 어떻게 되고 말았는지 잘 아실 겁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물러선다면 우리 노동조합도 마침내 그 꼴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 날 나는 밤 늦게 또 다른 모임에 가야 해서 위원장에게 미리 양해를 구했던 터였습니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두 시간 쯤 지났을 때, 손목시계를 가리키며 위원장에게 자꾸 눈짓을 보내자 위원장이 마지 못해 상집들의 동의를 구하는 듯 말했습니다.

“하 선생님이 오늘 또 다른 약속이 있어서 가셔야 한다니까, 보내 드려야겠지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어느 여성 노동자가 크게 외쳤습니다.

“싫어요.”

나와 가장 멀리 떨어진 구석 자리에 앉아 유난히도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을 열심히 들어주던 노동자였습니다. 목젖이 울컥 솟아오르도록 고마웠으나 나는 다시 양해를 구했습니다.

“꼭 가야 하는 일이니까 한 번만 봐 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두어 마디만 하고 가겠습니다. 작년 이 맘 때 쯤 제가 여기 계신 동지들 중의 몇 분을 처음 만났을 무렵, 솔직히 말해서 오늘 같은 날이 있으리라고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들의 노동조합이 1년 이상 버티어 내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잠시 웅성거림이 일었습니다. 노골적으로 기분 나쁘다는 표정을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 건방지고 섣부른 생각을 했던 것에 대해 정말로 깊이 사과 드립니다. 스스로 한없이 부끄럽습니다. 지난 1년 동안 여러분들이 쌓은 성과만으로도 저는 참으로 눈물겹습니다. 저 같은 놈이 눈물겨워한들 그게 무슨 대수이겠는가 만은, 이 노동조합이 오늘 당장 없어져 버린다 해도 여러분은 이미 자자손손 자랑해도 괜찮을 만한 일을 해낸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 생각으로는, 오늘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하셔도 상관 없습니다. 그 동안 할 만큼 했으니 노동조합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이제 시집 장가나 가서 애 낳고 행복하게 살자고 결정해도 욕할 사람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만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의 결정에 따라서 부위원장님을 비롯한 몇몇 동지들은 앞으로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큰 어려움을 겪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먼 훗날 부위원장님이 기숙사에서도 쫓겨나 어느 차가운 방 구석에 외롭게 있을 때, 라면 한 봉지라도 사 들고 찾아가 따뜻하게 손을 잡아 줄 자신이 생긴다면, 그 때 여러분 결정하시고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누군가가 칼같이 내 말을 잘랐습니다.

“그거 너무 감상적 태도 아니에요?”

내가 계속 말했습니다.

“맞습니다. 바로 그겁니다. 제가 이 나이 먹도록 이 나마의 모습을 유지하고 살아가는 데에는 방금 지적하신 대로 그 ‘감상’에 의지한 바가 컸습니다. 오래 전 책에서 읽은 훌륭한 내용은 잊혀질 때가 있어도 저에게는 도저히 잊혀지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러한 친구들의 얼굴이 저를 이 길에서 내려서지 못하도록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만 더 이야기하지요. 제가 지금 이 자리를 떠난 후 여러분들은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될 텐데, 제발 목에까지 올라 온 말은 삼키지 말고 뱉으십시오. ‘날더러 용기 없다고 욕하지는 않을까?’ 또는 ‘무모한 모험주의자라고 하면 어쩌나?’ 하는 따위의 걱정 때문에 말을 삼키면 문제는 거기서부터 생깁니다.

제가 여러분들보다 10여 년 쯤 더 세상을 살아 보니까 그렇더란 말입니다.

이제 가야 할 시간입니다. 감히 약속하건대, 여러분이 함께 감옥에 가자고 부르시면 언제라도 달려 오겠습니다. 이 시대, 이 땅 위에서 노동상담이란 걸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약속합니다.

제가 이 방에서 나가자마자 이야기 보따리들을 쏟아 놓으십시오. 아무 이야기나 막힘 없이 하시기 바랍니다. 저를 흉 보는 이야기부터 시작하셔도 좋습니다.”

아까 그 여성 노동자가 재치 있게 말을 받았습니다.

“아까 결혼했다고 하셨을 때부터 이미 흉 보기로 결정했다 구요. 어서 가 보시라구요.”

그 자리를 빠져 나오면서 나는 함께 있어야 할 자리에서 도망치는 것 같아 내내 발걸음이 무거웠습니다.

 

얼마 후 그 노동조합은 ‘철농’을 시작했고 나는 그 농성장에 가서 밤 늦도록 교육을 했으나 ‘제3자 개입’ 으로 잡혀 가지는 않았습니다.

 

 

 

 

뒤 늦은 광주 여행

 

지난 5월 초, 광주에서 노동상담소를 운영하고 있는 사람이 전화를 했습니다.

“지난 번에 말씀 드린 대로 노동조합 간부 교육 하나 부탁하려구요. 내려 오실 수 있지요?”

“그럼요.”

“강연 날짜를 잡아야 하는데… 이번 5.18 때 광주에 내려 오시나요?”

“못 갈 거 같습니다. 모임이 하나 있어서요. 지난 번 모임 때 사람들이 다음 모임 날짜를 5월 18일로 정하길래, 내가 ‘광주에 내려 가는 사람들도 있어서 모이기 어렵지 않겠느냐’고 했는데도 모두들 별 말이 없더라구요.”

“점점 잊혀져 가는 광주로군요. 어쩌꺼나…”

“……”

결국 5.18 때는 내려가지 못했습니다. 5월에는 광주 지역에 크고 작은 행사들이 워낙 많아서 마땅한 강연 장소를 구하지 못해, 6월이 되어서야 광주에 내려갈 수 있었습니다.

 

광주 YWCA 회관 내에 있는 ‘5.18 민중항쟁 추모관’에서 강연을 했습니다. 검은 천으로 벽을 두른 소강당의 3면 벽을 온통 열사들의 얼굴 사진이 둘러싸고 있어, 마치 그분들의 얼굴이 내 이야기 속에 작은 거짓이라도 있는지 지켜보고 있는 듯했습니다.

강연 끝 무렵, 표정두 열사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표정두 열사는 제가 서울 광화문 근처에 있는 어느 연구소에 다니고 있을 때 바로 우리 사무실 앞에서 분신하셨습니다. 2년 전에 제가 광주에 내려왔을 때 망월동으로 저를 안내하셨던 분이 표정두 열사의 묘 앞에 섰을 때 ‘이 친구하고는 한 현장에 있었지요’라고 말하더군요. 그 사람 잘 지내고 있는지 모르겠네… 정 ㅇㅇ이라는 분인데…”

강연이 끝나고 회관을 나서니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습니다. 뒷풀이 장소로 가고 있는데 어느 청년이 내 옆으로 바싹 다가서더니 물었습니다.

“정 ㅇㅇ 형님하고 잘 아시는 사이입니까? 당장 이리로 오라고 불러 낼까요?”

뒤풀이 중간 중간에 그 청년이 공중전화를 사용하느라고 여러 번 식당 밖으로 나가는 걸 보았지만 행사가 모두 끝날 때까지 정 ㅇㅇ는 결국 오지 못했습니다. 집에 아직 안 들어왔다고 했습니다.

 

다들 알고 계시겠지만 ’80년의 광주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를 확인하는 것이 처음 만난 사람을 이해하고 서로를 신뢰하게 되는 데에 도움이 될 때가 있습니다. 교육을 마치고 노조 간부들과 저녁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내가 먼저 물었습니다.

“80년 5월에 광주에 계셨습니까?”

어느 노동조합의 부위원장이 상기된 표정으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난 정말 죽을 뻔하다가 살아난 사람입니다. 도청으로 돌진하는 버스 안에 타고 있었는데 앞자리에 앉았던 여학생이 차를 뚫고 들어온 총알을 맞고 쓰러지는 거예요. 내 눈으로 직접 보았다니까요. 난 정말로 죽을 뻔하다가 살아난 사람입니다.”

그때, 앞머리가 훤하게 벗어져 나이보다 훨씬 더 들어 보이는 위원장이 그의 말을 끊었습니다.

“야, 그만해라. 나는 우리들부터 이제 더 이상 광주에 대해서 떠들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백 번 천 번 아무리 이야기해도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제 ‘광주’를 직접 우리 몸으로 보여주는 것밖에는 더 이상 할 일이 없습니다. 전 ㅇㅇ, 노 ㅇㅇ가 제 명에 죽지 못한다는 걸 직접 몸으로 보여주는 것밖에는… 광주는 이제 더 이상 말로 떠들어서 될 일이 아닙니다.”

그 후로는 아무도 그 자리에서 더 이상 광주에 대해 말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내 얄팍한 속이 드러난 것 같아 부끄러웠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식당 문 곁에 있는 공중전화에서 집으로 전화를 하고 있는데 누군가 100원짜리 동전 한 웅큼을 전화기 위에 살며시 놓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돌아다보니 아까 그 머리가 벗어진 위원장님이 벌써 저만치 가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습니다.

“시외전화를 하시는 것 같아서요…”

숙소에 들어와 누워 나는 그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 귓가에 맴 돌아 늦게까지 잠들지 못했습니다.

“그때 총 들고 일어선 사람들이 이 땅에서 오로지 우리 광주뿐이었다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밤 한 시가 지나서야 겨우 정 ㅇㅇ과 통화가 되었습니다. 두 달 전에 어느 노동운동 단체의 사무국장을 그만두었고 한 달 전부터 채소 행상을 시작했는데 무척 힘들다고 했습니다.

꼭두새벽에 나가 밤 늦게 들어오는데 집에 와서는 몸을 가눌 수가 없을 정도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다음 날 망월동에 갈 때 꼭 함께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비 오는 날은 완전히 장사를 못해 버려라. 내 트럭으로 후딱 댕겨 옵시다. 고물 트럭이라도 한 대 있응게 그것도 자가용이라고 엄청나게 편해 버립디다.”

다음 날 아침 그의 트럭을 타고 비바람 사이를 달려 망월동 묘역에 닿았습니다. 묘역에 들어서자마자 맨 먼저 눈에 띄는 글이 있었습니다.

 

민족의 패륜아요 광주 학살과 자주 민주 통일의 원흉 전두환이 자기 죄를 은폐코자 담양군 고서면 성산 마을을 방문하여 세운 민박 기념비를 부수어 이곳에 묻었나니 이를 짓밟아 5월 영령의 원혼을 달래고 민주 대로를 함께 걸읍시다.

– 광주 민주동우회장 –

 

입구의 발 밑 언저리에는 바로 그 ‘기념비’라는 것이 모습을 약간 드러낸 채 비스듬히 묻혀 있었습니다. 그것을 ‘짓밟고’ 들어선 5.18 광주민중혁명 희생자 묘역…그는 나를 내버려 둔 채 우산도 받지 않고 성큼성큼 언덕 위로 올라갔고 나는 묘역 맨 아래에서부터 천천히 돌았습니다.

사람들이 정성스레 접어 온 수천 수만 마리의 종이학들이 묘소 앞마다 놓여 있었습니다.

도청 최후의 전사 윤상원…

‘어머니, 조국이 나를 부릅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집을 나섰던 고등학생 전영진…

헌혈하고 나오다 병원 입구에서 총을 맞은 여고생 박금희…

아빠 영정을 들고 있는 아기의 사진으로 우리 모두에게 낯 익은 조사천…

명동 성당에서 할복 투신한 조성만…

의문사 노동자 신호수…

참교육 고등학생 김철수…

강경대, 이한열, 박승희, 이정순, 윤용하, 이철규, 이내창, 박관현…

그리고 다른 많은 무명 열사들…

서울교대생이었던 박선영의 묘비 옆에는 어머니가 쓴 시가 비닐로 코팅되어 놓여 있었습니다.

 

선영아!

죽도록 보고 싶은 내 딸아.

진달래꽃 활짝 피는 그날 그때

이 어미의 찢겨진 가슴 쾅쾅 두드리며

앞산도 뒷산도 따라 울게 네 이름을 부르마.

 

어머니!

한 줌 재로 묻힐 뿐인 제 넋을

어머니도 알아 주셨군요.

이제 저는 봄풀로 돋아나는

어머니의 가슴이군요.

 

그래 선영아!

네 눈물로 가슴에 불을 붙이고

네 이름으로 싸워 이기마.

 

통일염원 44년 11월 16일, 어머니가…

 

일반 묘역으로 갔습니다. 윤상원 열사와 영혼 결혼식을 올린 박기순… 사람들이 많이 찾아온 탓에 그녀의 묘 앞에만 유난히 맨 땅이 붉게 드러나 있어 찾기 쉬웠습니다.

그는 그대로, 나는 나대로 떨어져서 각각 두 바퀴 정도를 돌았습니다.

그런데 잠시 화장실을 다녀 온 사이에 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멀거니 서 있는 나를 발견한 그가 주차장 근처에서 소리쳤습니다.

“어디 갔었소? 빨리 오쇼. 비 맞고 섰지 말고…”

한 때 ‘민족 전대’를 주름 잡던 수재였고, 그 후에는 성실한 선반공 노동자이자 치열한 활동가였던 그가 채소 행상을 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 선뜻 받아 들여지지 않아 나는 돌아오는 차 안에서 한참 동안이나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에게 ‘복학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조심스럽게 권해 보았습니다. 그가 답했습니다.

“그럼 뭘 먹고 살게라. 어머님이 중풍으로 쓰러져 벌써 5년 째 똥을 받아내고 있어라.”

 

그날 밤 나는 꿈을 꾸었습니다. 내리는 비를 고스란히 맞으며 그를 찾아 이리저리 돌아다니는데 어디선가 갑자기 커다란 스피커 소리가 찌렁찌렁 울려 나와 망월동 묘역을 덮는 것이었습니다.

“망월동에 잠드신 열사님들… 싱싱한 감자, 토마토, 계란이 왔습니다. 어서 나와 한 입씩 맛 좀 보쇼. 싱싱한 감자, 토마토, 계란이 왔응게… 빨리 나와서 한 입씩 깨물어 보더라고…

표정두 동지… 어서 나와 한 입만 깨물어 보더라고…”

허겁지겁 달려가 주차장 입구에 다다라서 보니 멀리 보이는 트럭 안에서 그가 마이크를 잡고 계속 떠들어 대고 있었습니다.

손으로 콧등을 훔치는 게 멀리서도 보였습니다.

친한 후배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 거리를 미끄러지듯이 돌아다니는 것도 보였습니다. 그 후배의 머리 위로 수천 수만 마리의 종이학들이 날아다니고 있었습니다. 다음 날 나는 그 꿈 이야기를 여러 사람들에게 해주었습니다.

‘아직도 광주를 이야기하느냐’고… ‘그게 무슨 진부한 화제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광주 사람을 한 번만이라도 만나 보십시오. 절대로 ‘아니올시다’입니다.

 

 

 

 

텅 빈 미사리에서

 

쟁의 결의를 한 후 여차 하면 쟁의에 돌입할 태세를 갖추고 있는 노동조합이나 아예 쟁의가 진행중인 사업장으로부터 교육 부탁을 받게 되면, 이 시대 이 땅 위에서 ‘노동상담’이란 걸 한답시고 뛰어 다니는 나 같은 떨거지들은 ‘그래도 뭔가 제대로 된 일’ 하나라도 하는 것 같은 느낌을 갖습니다.

동시에, 아직도 엄연히 살아서 서슬 시퍼런 칼날을 휘두르는, 어처구니 없는 ‘제3자 개입 금지’ 조항이 솔직히 는 좀 부담스러워서 친구들에게 전화를 해 보기도 합니다.

“요즘 분위기로 봐서 말이다. 쟁의 현장에서 교육한 후 3자 개입으로 구속될 확률이 얼마나 될 것 같아? 사업장 분위기 따라 다르겠지만…”

“글쎄… 지난번 ㅇㅇ노조 교육 갔을 때, 교육 장소인 식당 유리창을 깨며 백골단이 들이닥쳤는데, 거 왜 신문에 사진까지 크게 났잖아? 내가 바로 거기 있었다구. 그런데 노조 상집 간부들을 몽땅 쓸어가면서도 나는 싹 빼 놓던데… 그리고 지금까지 아무 일도 없는 걸 보면…”

“하긴, 그런 거 겁내려면 어디 가서 ‘노동상담’한다고 떠들 생각 말아야지.”

“그래도 신중히 생각해라. 할 일이 점점 많아지는데… 워낙 미친년 널 뛰듯 하는 세상이니…”

 

쟁의 결의를 한 후 쟁의 돌입이 초 읽기에 들어갔다는 ㅎ노동조합으로부터 교육 부탁을 받으며, 교육 장소가 미사리 조정경기장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기분이 참 묘했습니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잔치였는지 아직도 감이 안 잡히고, 숨어서 더러운 이득을 챙기는 놈들은 따로 있었던 ‘당신들의 축제’ 88올림픽의 흉측한 유물로 남아서 지금은 초보 운전자들의 연습 도로 구실만 하는 줄 알았더니, 아하 노동조합이 교육 장소로 써 먹기도 하는구나 하는, 이를테면 조금은 통쾌한 느낌이었습니다.

미사리에 도착하여 ‘자기 완성 수련장’인가 하는, 관제 냄새 물씬 풍기는 이름의 교육장에 들어섰을 때 뭔가 일이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환영! ㅇㅇ노동조합’이라는 표어가 방문마다 붙여져 있었으나 전혀 인기척이 없었고 방문을 열어 보니 사람 묵은 흔적조차 없는 것이었습니다.

썰렁한 가건물에 난방조차 되지 않아 찬바람만 휙휙 돌아다녔고, 토요일 오후여서 관리 직원들도 모두 퇴근했는지, 한참을 돌아다녀도 사람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습니다.

건물 밖으로 나와 30분을 넘게 서성거리며 몇 군데 전화를 해보기도 했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습니다.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황량한 미사리 벌판을 돌아나오며, 행여나 싶어 자꾸 뒤를 돌아다보았으나 여전히 사람은 보이지 않았고 댕그마니 서 있는 가건물 벽에 노동조합에서 갖다 붙였을 것이 분명한 현수막만 혼자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습니다.

“이제, 노동해방의 깃발로 우뚝 서기 위하여…”

토요일 저녁 무렵이어서 아무도 없는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 팩시밀리로 배달된 편지가 한 장 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 하 선생님, 보십시오. 전화를 해도 받지 않아서 부득이 이렇게 연락 드립니다.

회사가 직장 폐쇄를 결정했고 저희는 눈물을 삼키며 후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합원들 사이의 이견을 좁히느라 결정이 늦어져 미리 연락 드리지 못하였습니다.

현대자동차 사태가 저렇게 끝나지만 않았어도 뭔가 달랐을 것입니다. 우리들 가슴마다에 품은 칼날이 이 짙은 패배주의를 극복할 날은 언제인지요.

미친 바람이 불 때는 잠시 가만히 있어 보기도 해야 한다고 서로를 위로하고 있는 중입니다. 죄송합니다.-

 

아, 이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 아시는 분 있으면 좀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사무직 노동자

 

‘생산직 노동자가 진짜 노동자다’라는 생각이 아직 싹 가시지는 않아서, 사무직 노동조합에 갈 때에는 심드렁한 마음이 전혀 없지 않습니다. 서비스업 노동조합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어느 서비스업 노동조합에서 교육을 했습니다. 강의 도중에 사람들에게 ‘노동조합이 생기고 나서 달라진 것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어 보았습니다. 잠시 아무도 대답이 없다가 맨 뒤에 앉아 있던 여성 조합원 한 명이 일어서더니 말했습니다.

“나는 엘리베이터에서 일을 합니다. 그런데 노동조합이 생기기 전에는 하루 종일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내려도, 나에게 인사 한 마디 건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노동조합이 생기고 나니까, 나한테도 인사를 하는 사람들이 생기더군요.”

강사가 말을 받았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노동자를 비로소 사람답게 보이게 하는 것. 그것이 노동조합입니다. 하루 종일 일해도 따뜻한 인사 한 마디 받지 못했던 노동자를 비로소 사람처럼 보이게 하는 것, 비로소 인간 대접 받도록 하는 것, 그것이 노동조합입니다. 돈이나 몇 푼 더 받자는 것이 결코 노동조합이 아니라…”

말 하는 동안 강사는 목이 잠겨 왔습니다. 그 동안 자신이 가져 왔던 부끄러운 편견에 대한 참회였습니다. 그 후에도 한 동안 그 일만 생각하면 목이 잠겼습니다.

 

 

 

2년 만에

 

이번에 교육을 했던 전주 지역 노조의 전임 위원장은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사람입니다.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 해고 등을 두루 거치고 최근 며칠 전까지 어느 노동 단체의 사무차장으로 일했었는데, 그 회사가 속한 재벌의 총수가 정치를 해 보겠다고 설치는 바람에 뜻하지 않게 본보기로 복직 결정이 되었습니다.

내가 교육을 하기로 한 날, 그는 해고된 후 처음으로 회사에 나타났습니다. 복직이 된다기에 자기가 일하던 단체의 인수인계를 마치고 전주에 내려온 지 이틀이나 되었지만 마땅한 핑계가 없어 회사에 들어오지 못하다가 마침 노조 교육이 있다기 에 들어왔노라고 했습니다.

교육 시작 전, 함께 식사를 하기 위해 회사 식당에 들어갔더니 주방에서 일하던 아줌마들이 ‘위원장님 오셨다’ 면서 반갑게 뛰어 나와, 물이 뚝뚝 떨어지는 고무장갑을 낀 채 그의 손을 마주 잡았습니다.

차례를 기다려 밥을 탄 그가 식판을 들고 내 옆자리에 와 앉더니 말했습니다.

“이 밥을 그토록 먹고 싶었는데, 2년 만에 먹게 되는군요.”

그는 한 동안 밥을 먹지 않고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겉저리 김치에 밥을 비벼 먹으며 그의 눈에 눈물이 고였던 것은 양념 맛이 매워서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여름 휴가 보고서

 

휴가라고 특별히 가족들과 함께 산이나 바다로 나들이를 해 본 지가 몇 년 되었습니다. 재작년엔가 사준 아들 녀석 수영 팬티는 결국 한 번도 물에 적셔 보지 못한 채 작아져 못 입게 되었다고, 아내의 원망이 이만저만 아니었습니다. 아내는 그 수영 팬티를 입지 못하게 된 옷들과 함께 정리하면서, 물장구 한 번 못 쳐 보고 자라는 아들 녀석을 생각하느라 얼굴 표정이 굳어졌습니다.

그래서 이번 여름 휴가 기간에는 ‘죽어도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겠다’고 안해에게 약속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휴가 며칠 전, 전주의 어느 제과회사 노동조합에 가서 교육을 해야 한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총선이 끝나자마자 노조위원장이 1년도 더 지난 옛날 일을 이유로 구속되어 사정이 매우 다급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교육 날짜가 내 휴가 일정과 딱 겹치는 것이었습니다. ‘사정이 있어서 곤란하다’고 하니 전노협의 어느 실무자를 만나 해결하라고 했습니다.

약속한 날 아침 일찍 약속 장소에서 가 기다리고 있는데, 만난 지 3년도 더 된 여자 후배가 들어오는 겁니다.

아하, 저 친구로구나.

“네가 기냐?”

“형이 바로 그 강사유? 휴가 기간이라서 교육하러 갈 수 없다는 한가한 소리 했다는… 죽여 주네.”

나는 딴청을 부렸습니다.

“네가 그 동네 어디 쯤에서 일할 것 같아서 수배해 둔 지 한참 되긴 했다만… 언제부터 거기서 일했냐?”

“벌써 한 2년 되었지요.”

“그런데 왜 이제야 만나게 되는 거야? 참 알 수 없네.”

“안 만나고 살아도, 이 땅의 민주화에 하나 지장 없잖아?”

“(할 말 없음) … 결혼은 했냐?”

“아니요, 아직…”

“요즘도 산에 열심히 다니고?”

“시간이 워낙 없어서… 우리 생활이 원래 그렇잖우.”

어쩌구 하면서 떠들다가 결국 전주에 가겠다고 약속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후배는 몇 년 전엔가 성격이 좀 모호한 어느 연구소에서 내가 ‘어엿한’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을 때 찾아오더니 ‘새로 생긴 지하철공사 노동조합에 사환 자리가 하나 났는데, 다 말해놨으니, 빨리 사표 내고 거기 취직해요. 월급은 쥐꼬리 만큼밖에 안되겠지만 능력을 발휘하기에 따라 무지무지 중요한 자리가 될 거라구요’라고 윽박질러 나를 아주 곤란한 지경에 빠지게 한 적도 있을 만큼 나에게는 만만치 않은 존재였습니다.

헤어지면서 후배가 다짐했습니다.

“형, 갔다 와서 교육 보고서 철저히 써 내야 된다.”

이제 가족들을 어떻게 설득한다? 하는 수 없이, 집에 들어가 나는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여보, 이번 여름 휴가를 전주로 갑시다.”

 

물어 물어 찾아간 전주 어느 제과 공장의 노동조합 사무실에 들어서니 조합 임원들이 마치 여자 스님들처럼 머리를 삭발한 채 저희 가족을 맞는 것이었습니다. 조합장이 집시법 위반으로 구속되자, 위원장 석방 투쟁의 결의를 더욱 다지기 위해 바로 다음날 조합원 총회를 열어 임원들의 삭발식을 치렀다고 했습니다.

150명 쯤 되는 인원이 회사 구내 식당에 편하게 모여 앉은 가운데 슬라이드 상영과 강의를 했습니다. 커튼이 없어서 과자 봉지를 수백 장이나 유리창에 붙여 햇빛을 가렸습니다.

제 아내와 아들 녀석도 구석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가족들과 함께 올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다소 과장되게 설명하자 조합원들이 우뢰와 같이 박수를 쳐주어 어찌나 머쓱하던지… 교육장은 찜통같이 더워서 아들 녀석 등허리에 땀띠가 솟았을 정도였고 아내가 보기엔 산만한 분위기였다지만, 한 마디로 ‘살아 있는’ 노동조합이라는 걸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교육이 끝난 후, 전주비빔밥으로 저녁식사를 대접 받으면서 – 서울에서 내려 온 강사들을 지역에서는 ‘전국단위 강사’라고 부르면서 깎듯이 대접할 때가 있습니다. 지역 실정에 맞지 않는 헛소리나 하다가 가기 일쑤인데도… – 자세히 보니 노조 임원들이 비록 머리는 깎았지만 모두 미인이었습니다. ‘비구니가 고기 먹고 싶어 사복 입고 왔는 줄 알까봐, 화장을 좀 진하게 했지요’라고 위원장 직무대행이 말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국민학교 1학년인 아들 녀석에게 물었습니다.

“아빠가 사람들에게 한 이야기 중에 기억나는 거 있으면 말해 봐.”

“없어요.”

“그러지 말고 잘 생각해 봐.”

“없다니까요.”

요놈 봐라.

“세 가지만 말하면, 네가 갖고 싶어하는 거 사 주지.”

“정말이요? 음… 어떤 아저씨가요… 법을 지키라고 하면서 자기 몸에 불을 질러서 죽었다는 거요. 그리고 또… 걸레에 불이 붙었는 줄 알았는데 사람이 타고 있었다는 거요. 그리고 또… 에이, 생각 안 나네… 슬라이드 본 것 중에서 말해도 돼요?”

“그럼.”

“광주에서 군인이 사람들을 많이 죽였다는 거요. 됐지요? 나

그럼 손오공 놀이 카드 사줘요. 히…”

짜식, 그래도 열린 귀라고…

 

 

 

 

적전 분열

 

조합원들 내부에 눈에 보이지 않는 깊은 골이 있었습니다. 한 쪽에서 안건을 제시하면 다른 한 쪽에서는 온갖 구실을 붙여 반대했습니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식이었습니다.

“실천 가능한 제안을 하셔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실천 가능하도록 지금부터 계획을 세워서 추진해 보자는 것 아닙니까?”

“하여튼, 지금 당장 실현 가능하지는 않은 것 아닙니까?”

“말 한 마디로 실현되는 계획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지금부터라도 계획을 세워서 추진하면 못할 것도 없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지요.”

“지금 당장 실천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것만 답해 주십시오.”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실천 가능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됐습니다. 그만 합시다.”

그 자리에 구경꾼으로 와 있던 다음 시간, 강사는 도저히 자리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총알같이 뛰어 나가 사회자의 마이크를 빼앗듯이 넘겨 받았습니다.

“이게 무슨 오합지졸 같은 꼴들입니까? 우리끼리면 괜찮습니다. 그러나, 저 놈들이 우리의 이런 꼴을 모르고 있을 것 같습니까? 다 보고 있습니다. 사장이 지금 창문 너머로 들여다보고 있지 않다고 우리의 이런 모습을 모르고 있을 줄 압니까? 다아 보고 있어요. 우리끼리라면 치고 받고 싸워서 머리가 깨져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자본가놈들이 다 보고 있단 말입니다. 지금 다 보고 있다구요. 왜들 이래요?”

강사는 목이 메었습니다.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습니다.

강의실 밖으로 나가 버렸습니다. 누군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흩어지면 죽는다. 흔들려도 우린 죽는다…”

강의실 밖으로 노동자들이 부르는 노래 소리가 울려퍼졌습니다.

 

 

 

 

 

셋째 묶음

그래도 우리는 웃는다

 

노동자들은 춤 추며 싸우고, 싸우며 웃습니다. 아무리 살벌한 분위기의 농성장에도 넘치는 웃음이 있습니다. 참 신기한 일입니다.

그 웃음은 곧 무기가 되어 적을 찌르지만, 가끔 내가 그 웃음에 찔릴 때도 있습니다. 그때마다 나는 하나씩 더 배웁니다.

세상에는, 남에게 쌀 한 톨 만큼의 도움도 안 되는 노래, 그러한 옷차림, 그러한 책, 그러한 영화, 그러한 연극, 그러한 종교 따위들이 넘칩니다. 그리고 그것을 즐긴다는 이유만으로도 우월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것들에 비하면, 우리의 웃음은 너무나 소중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남이섬 버찌 나무

 

남이섬 넓다란 잔디밭에서 ㄷ건설 노조의 교육이 있었습니다.

 

시원한 그늘에 앉겠다고 커다란 나무 밑을 골라 모여 앉았는데 그게 바로 버찌 나무였습니다. 한창 물이 오를대 로 오른 버찌가 땅에 떨어져 살짝 누르기만 해도 톡톡 터지면서 잉크보다 더 진한 즙을 뿜어 냈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교육 자료가 들어 있던 서류 봉투를 그 위에 깔고 앉았습니다.

강의 도중에, 한 노동자가 엉덩이를 만지며 벌떡 일어섰습니다.

“어, 이거 뭐야?”

버찌 물이 서류 봉투를 뚫고 올라와 바지에 배어 있었습니다.

모두들 정신 없이 일어나 바지를 살피느라고 한 동안 난리가 났습니다. (자기 엉덩이 보기가 쉽지 않은 거 아시지요?) 하는 수 없이 강의 장소를 근처 소나무 숲으로 옮겼습니다. 장소를 옮기는 중에 한 조합원이 불만을 털어 놓았습니다.

“깔고 앉을 거라도 마련해 줘야지, 노동조합이 도대체 뭘 하는 거야? 바지에 풀 물 들어서 가면 난 마누라한테 쫓겨난다구.”

그 말을 들은 위원장이 답했습니다.

“마누라를 바꿔 버리면 될 거 아냐?”

“ㄷ건설 월급으로는 능력이 없어서 못 바꿔.”

위원장이 지지 않고 답했습니다.

“돈이 아니라 뭐 다른 게 모자라는 거겠지….”

 

 

 

녹차

 

오후에 서노협에서 주관하는 교육이 있어서 강의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함께 일하는 후배가 녹차를 타 들고 내 옆을 지나다가 내 책상 위에 녹차를 모두 엎어 버렸습니다. 열심히 만든 강의안이 모두 물에 젖고 말았습니다.

“와, 대형 사고다. 남의 밥줄을 이렇게 해 놓으면 어떻게 해?”

걸레를 가지고 와 책상을 다 닦아준 후에 그 후배가 구석에 걸레를 갖다 놓으며 말했습니다.

“어디 데인 곳은 없냐고 물어 보지도 않네…”

나는 머쓱해졌습니다. 사람 되려면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날 저녁의 교육은 한 마디로 비참했습니다. 6명의 인원이 두 달 동안 교육 준비를 했었는데 교육에 참여한 노동자는 단 두 명이었습니다. 그래도 열심히 했습니다. 어려운 때라고 해서 게을러질 수는 없다고 서로 힘을 북돋아 주었습니다.

 

 

 

노동과 건강연구회

 

노동과건강연구회라는 단체의 교육전문위원이라는 직함을 하나 갖고 있습니다. 가끔 그 단체의 이름으로 산재 추방운동에 관한 교육을 하기도 합니다.

전주 지역의 교육 장소에 도착해 보았더니, 마이크 시설이 되어 있지 않아서 좀 난감했습니다. 더욱이 ‘울산이 지금 저 모양인데 한가하게 산업재해 교육이나 하고 있을 때냐?’고 생각하는 노동자도 있을 터여서 나름대로 목청껏 열강을 했습니다. ‘산재 추방운동’이 어째서 ‘노동해방운동’과 같은 것인지를 좀 장황하고 길게 설명했습니다.

밤 늦게 교육을 마치고 시내 술집에 앉았을 때, 노조 위원장이 내게 말했습니다.

“강사님, 감사합니다. 저는 오늘 아주 새로운 인식을 했습니다. 노동과 건강연구회의 회보를 간간이 받아 보면서도 노동과 건강연구회가 그 정도나 되는 단체인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기껏 ‘ㅇㅇ련’ 비슷한 단체라고 짐작했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용서하십시오.”

내가 말했습니다.

“웬걸요. 노동과 건강연구회라니까 노동자들한테 흑염소나 개소주를 싸게 파는 곳인 줄 아는 사람도 있는데요, 뭐. 괜찮습니다.”

기차 시간에 쫓겨 일어날 때까지 그는 나에게 ‘정말 죄송합니다. 앞으로 많이 도와 주십시오’라고 여러 번 말하면서, 뭔가 크게 착각했었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것이었습니다.

 

 

 

파업 이유

 

불법 파업으로 집단 해고된 노동자들을 만났습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났는데도 파업을 한 원인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서로 신뢰하게 되면 저절로 알게 되겠거니 싶어서 기다렸는데, 꽤 여러 번 만나도록 그 나이 어린 노동자들은 좀처럼 속 마음을 털어 놓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기다리다 못한 내가 ‘왜 파업을 결의했어요? 솔직히 좀 말해 봐요’라고 다그쳤을 때, 한 노동자가 참 딱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말했습니다.

“그 새끼들이 그때 현대중공업하고 KBS에 공권력을 투입했잖아요. 그거 모르셔요? 왜 우리 회사 문제만 갖고 파업했을 거라고 생각하셔요?”

아, 나는 항상 부끄러움을 통해 배웁니다.

 

 

 

 

출신

 

어느 회사의 노조 위원장이 찾아왔습니다. 회사가 부당하게 대규모 인사 발령을 낸 것에 대한 노동조합의 대처 방안을 협의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대부분의 노조 간부들이 유난히 힘들어 하는 시기인데도 그는 드물게 활기 있어 보였습니다. 요즘 보기 힘든 위원장님 같다고 솔직히 말씀 드렸더니 그가 말했습니다.

“나 재미 있는 사람이에요. 연맹에 물어 보면 다 알아요. 조 부장한테 한번 물어보셔요. 거 웃기는 놈 하나 있다고 그럴 겁니다. 히히.”

“재미 있는 거는 알겠는데 웃기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네요.”

“내가 어떻게 노조 위원장이 되었는 줄 아십니까?”

“모르지요.”

“그거 다아 비결이 있어요.”

“어떤 비결이요?오늘 하나 배웁시다.”

그는 마치 개그맨처럼 짓궂은 표정이 되어 나를 째려보듯이 바라보더니 말했습니다.

“응. 별 거 아니야.”

어느새 그는 말꼬리를 잘라 먹고 있었습니다.

“내가 체육대회 응원단장을 몇 년 동안 했었거든. 거 왜, 회사에서 매년 하는 사내 체육대회 있잖아. 직원들 중에 내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된 거지. 내가 위원장에 출마한다니까 상대로 나서는 놈이 없더라구. 하는 수 없이 단독 출마해서 찬반 투표를 했지. 개표를 해 보니까 95%가 찬성인 거야. 공산당 선거도 아닌데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어서 다시 검표를 해서 투표용지에 바늘 끝 만한 흠이라도 있으면 모두 무효 표 처리를 했지. 그랬더니 겨우 팔십 몇 프로인가로 깎이더라구. 나 원래는 응원단장 출신이야. 히히.”

 

 

 

계란 장수와 교통 순경

 

계란을 잔뜩 실은 트럭이 길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뒤에서 순찰차의 마이크 소리가 들렸습니다.

“ㅇㅇㅇㅇ호! 길 옆으로 정차하시오. 차선 위반입니다.

ㅇㅇㅇㅇ호! 안 들리나? 정차하라니까!”

계란차가 섰고 순찰차에서 내린 교통 순경이 다가왔습니다.

계란 장수가 얼른 주머니를 뒤져 보았더니 그날따라 계란이 안 팔려 개시조차 못한 터라 비상금으로 꼬불쳐 둔 만 원짜리 딱 한 장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계란 장수가 교통 순경에게 사정을 했습니다.

“오늘 계란이 하나도 안 팔려서 개시조차 못했습니다. 지금 만 원짜리 딱 한 장밖에 없는데, 이게 내 전 재산이니 이 돈이 없으면 난 당장 집에 갈 기름도 못 넣습니다. 거슬러 주실 수 있겠습니까?”

교통 순경은 순순히 그러마 했고 만 원짜리 한 장이 은밀히 계란 장수의 손에서 교통 순경의 손으로 전해졌습니다. 그런데 순찰차로 돌아간 교통 순경은 차문을 꽝 닫더니 그대로 떠나 버리는 것이 아닙니까?

계란 장수는 눈이 뒤집혔습니다.

‘아, 저게 어떤 돈인데…’

계란차는 순찰차를 뒤쫓아 가기 시작했습니다. 복잡한 도로에서 순찰차와 계란차의 추격전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나 계란을 가득 실은 트럭이 순찰차를 따라잡을 수는 없었습니다. 순찰차는 점점 멀어졌습니다.

계란 장수는 마이크를 잡았습니다.

“앞에 가는 순찰차는 정지하시오! 내 잔돈 주고 가시오!

순찰차! 안 들리나? 내 돈 내놓고 가라니까! 시민 여러분!

순찰차를 잡아 주십시오. 교통 순경이 내 거스름돈을 떼어 먹고 도망갑니다.”

순찰차가 드디어 멈추어 서더니 교통 순경이 다가와 만 원짜리 ‘온돈’을 그대로 돌려 주고는 뽀얗게 내뺐습니다.

대구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이랍니다.

 

 

 

노동자

 

노동자 한 사람이 경찰서에 잡혀가 조사를 받게 되었습니다.

조서를 작성하면서 형사가 물었습니다.

“직업이 뭐야?”

“노동자입니다.”

“음, 공원이란 말이지?”

“아니오. 노동잡니다.”

“그러니까, 공원이라는 말 아니야?”

“아니오. 노동잡니다”

“그게 바로 공원이라는 뜻 아니야. 임마”

“노동자가 맞습니다.”

“햐, 이 자식 이거… 노동자가 바로 공원이잖아?”

“공원 공원 하지 마십시오. 내가 무슨 ‘안개 낀 장충단 공원’입니까?”

형사는 결국 조서에 그의 직업을 ‘노동자’라고 표기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야간 근로

 

다음 날 아침의 강의 준비를 해야 해서 저녁 ‘단결의 밤’ 시간에는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노조 간부들이 시시때때로 내가 묶고 있는 방으로 찾아와 함께 어울리자고 했습니다. 계속 마다했지만 이미 술기운이 적당히 오른 간부들은 막무가내였습니다.

나는 ‘강사가 품위 없이 조합원들하고 함께 술 마시고 놀아 버리면 내일 아침 강의할 때 조합원들한테 약발이 안 먹힌다’는 이유까지 대며 끝내 내려가지 않았습니다.

밤 12시 쯤 자려고 누웠는데 조합원 한 사람이 참외를 곱게 깎아서 쟁반에 담아 왔습니다. 두어 개쯤 집어 먹고 다시 자리에 누웠습니다.

한 시간 쯤 지났을까… 다른 조합원이 떡을 가지고 왔습니다.

‘절편은 방금 만든 것이라 아주 부드럽고 맛있는데, 바람떡은 고물이 약간 맛이 갔지만 아직은 먹을 만하다’고 했습니다. 두어 개 집어 먹고 다시 자리에 누웠습니다.

곤히 자고 있는데 이번에는 남자 여자 조합원 두 명이 오징어와 음료수를 들고 사이 좋게 올라왔습니다. 문득 강사님이 안 보이시는 걸 깨닫고 올라왔노라고, 술은 안 드신다니 안주라도 드시라고 했습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가 갔습니다.

그 조합원들이 돌아갈 때 내가 물었습니다.

“지금 서로 짜고 이러는 거지요?”

“예? 뭐가요?”

“아, 아닙니다.”

다시 잠이 들었는데 잠결에 누군가 나를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화들짝 놀라 깨어 보니 이번에는 노조 위원장이 방문을 열고 서 있었습니다.

“제가 신경을 못 써서 죄송합니다. 강사님도 같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나는 비몽사몽 눈을 부비며 물어 보았습니다.

“지금 몇 시나 되었어요?”

위원장이 시계를 들여다 보더니 답했습니다.

“3시 반인데요. 편히 주무십시오.”

나는 다시 자리에 누웠고 아래 층에서는 풍물소리가 계속 들려

왔습니다.

 

다음 날 아침, 강의 시간에 내가 마이크를 잡고 첫 마디로 물었습니다.

“술 다 깨셨습니까?”

노동자들이 ‘예!’라고 큰 소리로 답했습니다. 한 노동자가 손을 번쩍 들더니 말했습니다.

“강사님, 질문 있습니다.”

“강의 시작도 안 했는데, 무슨 질문을…”

“노조 간부가 수련회에 와서 밤새 이야기하면서 술을 마셨으면 이것은 야간 근로를 한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오늘은 비번으로 놀아야 한다고 생각되는데, 전문가적 견지에서 강사님 생각은 어떻습니까?”

‘아, 이거 또 처음부터 강사에게 완전히 엿을 먹이는구나…’

나는 적당히 얼버무리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서 빨리 노동자가 주인 되는 세상을 만들어서 그렇게 되도록 합시다.”

 

 

 

나도 강사

 

이번 교육에서 내가 맡았던 주제는 ‘새 정부의 노동 정책과 우리의 대응’이란 것이었습니다. 내 앞 시간 강사의 주제는 ‘노동조합의 중요성과 간부의 역할’이란 것이었는데, 꽤 많이 알려진 유명한 여자분이 강사였습니다. 그 강의 속에서도 분명히 새 정부의 노동정책에 관한 것이 다루어질 것 같아서 나는 그 강의를 듣기로 했습니다.

나도 노동자들 틈에 끼어 앉았고 강의가 시작되었습니다. 강의 초반 무렵 강사는 갑자기 맨 앞에 앉은 노동자에게 말했습니다.

“이 줄, 뒷쪽으로 번호 해 봐요.”

하나, 둘, 셋, 번호가 시작되었고 내 차례가 되었습니다.

“다섯.”

강사가 번호를 중지시켰습니다.

“그만! 거기 앉은 사람. 왜 혼자서만 단체 티셔츠 안 입었어요? 행동 통일을 해야 될 거 아니에요? 다음 시간부터는 입고 나와요.”

나는 가만히 웃었습니다. 중간 휴식 시간에 내가 강사한테 다가가 말했습니다.

“선생님, 저 기억 잘 안 나시지요? 제가 바로 다음 시간 강사입니다.”

“맞어. 너 하종강이지? 강의 도중에 알아봤어. 참 오랜만이다.”

“제가 맡은 주제가 ‘새 정부의 노동 정책과 우리의 대응’이란 것인데 선생님도 꼭 그 얘기 하실 것 같아서요. 선생님이 만약 ‘새 정부는 과거의 정부와는 다른 정부다. 우리 노동자의 앞날은 장미빛이다’라고 말했는데, 내가 바로 다음 시간에 나와서 ‘새 정부는 과거의 정부와 똑 같은 놈들이다. 새 정부의 개혁 정책은 알고 보면 빈 껍데기다’라고 말할 수는 없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선생님 강의를 굳이 들었던 거지요.”

“얘는… 내가 죽었다 깨어나도 그렇게 말할 리가 있냐?”

 

 

 

 

숙청감

 

속리산에서 전노협이 주관하는 교육에 참여했을 때의 일입니다.

내가 강의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가야 한다고 나서자 강의를 마친 강사들 4명이 모두 따라 나섰습니다. 교육 첫날부터 마지막 날 퇴소식까지 강사가 함께 붙어 있어야 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강사들이 모두 바쁘기로 말하면 내로라하는 사람들이어서 전노협의 교육 담당자도 그걸 굳이 고집하지는 못했습니다.

사람들이 현관까지 따라 나와 강사들을 배웅했습니다. 모두들 ‘같이 계시면 좋을 텐데…’라고 섭섭해했습니다.우리 일행이 큰 길로 나섰을 때 내가 말했습니다.

“여기까지 왔다가 법주사를 못 보고 갈 수는 없지… 속리산에 21년 만에 와 본 건데…”

말이 끝남과 동시에 내가 발길을 휙 돌려 오던 길로 다시 갔습니다. 강사들이 모두 나를 따라 발길을 돌렸습니다.

누군가가 말했습니다.

“맞어. 나는 경주에 열 번도 더 갔었는데, 불국사 그림자 구경도 못했어.”

다른 사람이 또 말했습니다.

“터미널에 가서 표 예매한 것부터 환불 받고 갑시다.”

내가 말했습니다.

“전노협에서 알게 되면 우린 나중에 모두 숙청감이야.”

우리들은 모두 낄낄거리면서 법주사로 향했습니다.

 

며칠 후 열린 평가 모임에서 ‘다음 교육부터는 끝까지 남아 있을 수 있는 강사들로만 엄선하자’는 말이 나왔고, 나는 얼굴을 들 수가 없었습니다.

 

 

 

 

적전 분열 2

 

단체 교섭이 진행 중인 어느 노동조합 사무실에 들렀습니다.

노조 사무실에서 잠시 기다리고 있자니 교섭을 마친 교섭위원들이 왁자지껄 들어섰습니다. 위원장이 교섭위원 한 사람을 크게 나무랐습니다.

“네가 거기서 그렇게 말해 버리면 우리 꼴이 뭐가 되냐?”

내가 궁금해서 물었습니다.

“무슨 일인데요?”

“글쎄 저 친구가 사장이 뭐라고 한 마디 하니까 ‘위원장님, 거 보십쇼. 내가 아까 뭐라고 그랬습니까?’라고 나한테 따지고 드는 거예요. 회사측 교섭위원들 앞에서 우리 꼴이 뭐가 되겠느냐구요.”

“거 실수했네. 적전 분열이네…”

“군대 같으면 총살감이지요.”

그런데도 그 노동자는 아직까지도 그 말을 되풀이하고 있었습니다.

“위원장님, 그러게 내가 아까 뭐라고 그랬습니까? 그 안건은 빼 버리자고 그랬잖아요.”

 

 

 

우리말

 

단체 교섭 기간 동안에 혼자서 단식 투쟁을 했던 노조 위원장이 있었습니다. 여러 가지로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그런 대로 평년작을 웃도는 단체 협약을 체결할 수 있었습니다. 단식 후 한 동안 배탈이 나서 고생을 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가 단체 교섭이 끝나자마자 곧 이어질 임투를 앞두고 전화를 했습니다.

내가 말했습니다.

“이번에는 단식하지 마십시오. 그거 함부로 할 거 못 됩디다.”

“나도 다시는 안 하기로 했어. 되게 힘들더라구.”

“복식(復食)이 제대로 안 되어 고생했다면서요?”

“일 주일 동안 미음만 먹다가 죽 몇 번 먹고 밥 먹었는데도 여지 없이 설사만 나오는 거야. 나 된똥 눈 지 며칠 안됐어.”

주변의 소음 때문에 나는 그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해서 다시 물었습니다.

“뭐라구요?”

“된똥 눈 지 며칠 안됐다니까.”

“아! 예.”

전화를 끊고도 한참 동안 그 말이 생각나서 자꾸 웃었습니다.

‘된똥 눈 지 며칠 안됐다’ – 참 좋은 우리말입니다.

 

 

 

 

생리 휴가

 

우리 나라 여성 노동자들이 근로기준법에 엄연히 보장된 생리 휴가를 제대로 ‘찾아 먹기’ 시작한 것은 그렇게 오래 된 일이 아닙니다. 제법 규모가 큰 봉제 회사에서 처음으로 생리 휴가가 실시되던 때의 일입니다.

노동조합이 설립된 후 노동자들은 생리 휴가를 ‘쟁취’하기로 결의했습니다. 여성 노동자들이 수십 차례 생리 휴가를 신청했지만 회사는 막무가내로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나중에는 노조 위원장이 ‘생리휴가 신청서’를 서면으로 작성하여 직접 노무과에 제출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노무 관리자가 하는 말이 의사의 진단서를 첨부하라는 것입니다. 진짜 생리중인지 아닌지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무식한 놈들…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위원장이 소리쳤습니다.

“야, 이새끼들아! 진단서가 뭐가 필요해. 내가 여기서 벗으면 될 거 아냐? 보구 싶어?”

그날부터 생리휴가 제도가 실시되었습니다.

조합원들이 월급날 급여봉투를 받아 보니 남자 노동자들에게도 일제히 생리휴가 수당이 지급된 것이었습니다.

여성 노동자들이 남자들을 놀렸습니다.

“요즘은 남자도 생리를 하냐?”

그 회사는 아무 것도 모른 채 두 달 동안 남자들에게도 생리휴가 수당을 지급했습니다. 기네스북에 오를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새 문민정부는 지금 이 ‘생리 휴가’를 없애겠다고 합니다. 우리의 노동법이 ‘지나치게 선진적’이어서 ‘신경제’에 걸림돌이 된답니다.

 

 

 

 

칭찬인지 흉인지

 

나보다 1년 위인 여자 선배가 있었습니다. 대학에 수석으로 합격한 수재입니다. 기인 같은 행동으로 수 많은 일화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내가 결혼하고 나서 며칠 후, 우리 집에 와서는 정말로 한 이불을 덮고 ‘가운데에서’ (아내와 나 사이에서) 자고 간 사람입니다.

그날 저녁, 선배는 세수를 하고 나더니 우리 집 발수건으로 얼굴을 닦았습니다.

내가 놀렸습니다.

“발 수건도 못 알아봐요? 수건에 발바닥 그림은 괜히 그려 놓았는 줄 알아요?”

다음 날 아침, 선배가 세수를 하고 방에 들어오더니 말했습니다.

“나, 너희 집 얼굴 수건으로 발 닦았다. 복수하느라고…”

아침 식사를 마치고 나서 선배는 출근하느라고 서둘러 나갔는데, 방 구석에 보니 선배의 스타킹이 남아 있었습니다.

‘양말 신는 것을 또 잊어 버렸구나. 칠칠치 못한 선배 같으니라구…’

나는 얼른 창문으로 가서 스타킹을 흔들며 소리쳤습니다.

“양말 안 신고 가요?”

선배는 가던 걸음을 멈추고 창을 올려다보더니 말했습니다.

“응, 그거 너희 집에 버리고 가는 거야. 구멍 났어.”

 

그 무렵, 결코 미인이라고는 할 수 없는 그 선배를 다른 사람에게 소개할 때면 나는 거의 매번 이렇게 말했습니다.”사람이 외모와 다를 수 있다는 걸 곱배기로 깨우쳐 주는 사람입니다.”

그 말을 들으면 선배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거 칭찬인지 흉인지 모르겠네… 그걸 확실히 해줘.”

 

그 후 선배는 본의 아니게 ‘불행한’ 일을 겪어야 했습니다.

한동안 아무에게도 연락이 없었습니다. 내 아내가 수소문하여, 선배의 오빠가 경영하는 메리야스 대리점에서 일을 도와 주며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대리점에 아내와 함께 찾아 갔을 때 선배가 말했습니다.

“이런 일을 나는 못할 줄 알았어. 그런데 다 하게 되더라구… 수백 가지 물건 값을 일일이 기억하게 되더라구… 신기하지?”

선배는 그 일을 아주 오랫동안 했습니다.

그러다가 최근에 새로운 단체가 하나 만들어졌을 때, 사람들이 힘을 합하여 그 선배를 실무자로 모셔 왔습니다. 선배는 실로 수 년 만에 다시 현장으로 복귀한 것입니다.

 

그 얼마 후 내가 그 단체에 가서 강의를 할 일이 있었습니다.

선배가 사회를 보았습니다. 몇 년 만에 다시 보게 되는 선배의 모습이어서 나는 남다른 느낌이었습니다.

강의가 끝난 후 나는 짐짓 과장된 몸짓으로 선배에게 악수를 청하며 말했습니다.

“누님, 이렇게 몇 년 만에 다시 현장에서 뵙게 되다니, 감개가 무량합니다.”

선배는 예의 그 빠른 말씨로 답했습니다.

“야, 너 참 많이 컸더라. 언제 그렇게 자랐냐? 나는 몇 년 동안 ‘빤쓰’나 팔다 왔더니 이제는 사람들을 만나도 말이 잘 안 나와.”

 

 

 

 

과로

 

단체 교섭을 앞두고 과로로 쓰러져 병원에 5일째 입원해 있는 노조 위원장을 찾아갔습니다. 요즘 안 읽으면 간첩이라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한 권 사 들고 갔습니다. 위원장은 링겔을 꽂고 누워 있다가 병실을 들어서는 나를 보더니 정말로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일어나 앉았습니다.

“어라, 하 선생님이 웬일이셔요?”

“오늘 교육 있던 날이잖아요. 위원장 없으니까 영 썰렁하데.”

어머니가 간호를 하고 계셨습니다.

“걱정 많이 하셨지요?”

“웬걸 요. 아들 녀석 하나 잃어버리는 줄 알았어요. 병원에는 안 가도 된다고 말 안 듣더니 끝내는 응급실로 실려 왔다니까요.”

“제 나이가 이 친구보다 한 살 많은데 이제는 정말 몸 걱정도 해야 될 때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 애가 매일같이 새벽에 들어왔다가 아침 제 시간에 일어나 나가는 걸 보면서도, 이 못난 에미는 그 동안 참 대견하다는 생각만 했었지요. 그게 다 병을 키우는 것인 줄도 모르고…”

잠시 후 상집 간부들이 우루루 들어섰습니다. 교육부장이 음료수 깡통이 든 상자 두 개를 전해 주며 말했습니다.

“위원장님, 저… 소주는 못 사왔습니다.”

그 말을 듣고 어머니가 말씀하셨습니다.

“맞어. 정말, 술을 사오지 그랬어. 여긴 안주만 잔뜩 있는데…”

어머니가 구석에서 오징어를 꺼내시더니 주욱 찢어서 침대 위에 놓았습니다.

위원장은 조직국장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는데, 30분이 다 되도록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내가 나가서 살펴보니, 둘이 복도 끝에 서서 심각한 얼굴로 뭔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내가 상집간부들에게 말했습니다.

“위원장님 모시고 들어와요. 여기까지 와서도 일 때문에 저러고 있다가 쓰러지면, 이제는 더 이상 갈 데가 없어요.”

“맞어.”

상집 간부들이 우루루 몰려 나가 위원장을 떠메다시피 끌고 들어와서 침대 위에 눕혔습니다. 누군가가 말했습니다.

“노동조합이 뭔지…”

 

 

 

종로에서 뺨 맞고

 

대전 지역 노동조합 교육에 다녀왔습니다. 70개 사업장이 대상이었는데 40개 사업장의 노조 위원장만 참석했습니다.

나는 강의를 시작하면서 싫은 소리를 좀 했습니다. ‘이런 정신 자세로 금년 임투를 어떻게 승리로 이끌겠느냐’는 내용으로 몇 마디 했습니다.

중간에 10분간 휴식 시간을 마친 후에 다시 인원 점검을 해 보니 두 명이 빠져나가고 없었습니다.

나는 정말 화가 났습니다. 또 몇 마디 싫은 소리를 했습니다.

그때, 한 노동자가 손을 들더니 말했습니다.

“한 마디만 하겠습니다. 강사님이 방금 하신 그 말씀을 들어야 할 사람들은 이 자리에 없습니다. 욕 먹을 사람들은 모두 여기 안 온 사람들 아닙니까? 왜 열심히 교육에 참석한 우리한테 화를 냅니까? 아까 강의 시작할 때도 그러시던데, 참고 듣자듣자 했더니, 정말 너무 하시는구만요.”

 

 

 

 

평화시장 미싱사

 

하나

 

평화시장의 남자 미싱사를 만나 오랫동안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하는 일의 내용을 듣고 내가 아는 척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오야군요.”

“저 정도 되면 ‘오야’라기보다 완전 ‘프로’라고 해야 맞지요.”

 

 

그가 한달 평균 120만 원이나 번다는 말을 듣고 나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런 거 보면 나 같은 월급쟁이가 제일 불쌍하다니까.”

“월급쟁이 만큼만 일하면, 나는 한 달에 20만 원도 못 벌 겁니다.”

 

 

그가 제주도 출신이라고 하길래, 내가 또 아는 척을 했습니다.

“4.3 사건 때문인지 제주도 출신 친구들은 근성이 있어요.

육지 놈들 싫어하고… 한 집 건너씩은 제삿날이 모두 같다지요?”

“한 집 건너라니요. 전부 다예요. 제주도에 여자가 왜 많은데요. 제주도에 여자 많아서 좋겠다고 얘기하는 놈들은 다 죽이고 싶습니다.”

 

 

그는, 하루 종일 미싱만 만져 가지고는 사람 꼴이 우스워지고, 무슨 서류 한 장 제대로 꾸밀 줄도 모르는 채 살다가 죽어 버릴 것 같아서, 아는 사람 편에 어느 회사 사무직에 이력서를 냈다고, 돈이 문제가 아닌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내가 또 무심코 말했습니다.

“이 사람 아직 배가 덜 고파 봤구만.”

그가 얼굴 빛이 달라지더니 낮은 목소리로, 그러나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고생 죽도록 해 봤어요.”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그의 아내 (역시 고참 미싱사입니다)는 내가 계속 헛다리를 짚으면서 자기 남편한테 당하고 있는 것이 재미있었던지, 내내 웃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 동안 내가 노동자 정서에 그래도 충실하다고 자부해 온 게 무슨 개뼉다귀 같은 소리냐 이겁니다.

 

 

 

부채감

 

밤 늦게 집에 들어가거나 새벽까지 일해야만 옳은 줄 아는 나를 보고 어느 후배 뻘 되는 이가 말했습니다. 할 이야기 있으니 차나 한 잔 하자고 몇 번이나 벼르다가 하는 말이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지나칠 정도로 똑똑하고 유능하다는 평가를 받아 온 사람이었습니다.

“요즘은 그렇게 일하는 사람 없어요. 정말이에요. 다 자기 앞가림은 해요. 하 선생님처럼 자기 몸을 혹사하는 사람은 없어요.”

참으로 딱하다는 표정이었습니다.

“부채감으로 일하지 마셔요. 하 선생님도 할 일을 하는 거예요. 노동상담이 어디가 어때서 그래요?”

그러나 요즘도 ‘그렇게’ 일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그 친구는 모르고 있었습니다.

며칠 후, 어느 노동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그가 했던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해 주었습니다. 물론 누구라고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사람들도 그의 말에 대해 옳다, 그르다 말하지 않았습니다.

한 노동자가 그냥 자기 경험을 이야기했습니다.

“전에 있던 노동조합에 정말 끝내 주는 선배가 있었어요. 얼마 전에 길에서 우연히 만났더니 아기를 안고 있더군요. 그런데 그 언니가 날 보고 그러는 거예요. ‘너 아직도 그러고 다니냐?’…”

잠시 아무도 말이 없다가, 한 노동자가 침묵을 깨뜨렸습니다.

“그걸 그냥 뒀어?”

봇물이 터진 듯 말이 쏟아졌습니다.

“운동 안 해도 좋으니까 의리나 지키고 살라고 그래.”

“아직도 그러고 다니냐고? 말이 안 나오는군…”

“그런 사람들이 더 문제야.”

똑똑한 후배가 한 말에 며칠 동안 주눅들어 있던 나는 원군을 얻은 듯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수박족 노동자

 

노조 간부였던 노동자 한 명이 하루 아침에 지방의 지사로 인사 발령을 받았습니다. 열성적인 노조 활동에 대한 보복이 분명했습니다. 고민 끝에 그는 일단 지방으로 내려가기로 했습니다.

서울의 전세집을 처분하고 짐을 꾸려 지방에 내려가 보니 마을도 없는 황량한 논 밭 가운데 댕그마니 서 있는 회사가 그가 일할 곳이었습니다. 워낙 외진 곳이어서 서울의 전세집을 처분한 돈으로 작은 집을 하나 사고도 돈이 남았습니다. 그 남은 돈으로는 쓸모 없는 자갈밭을 2백 평쯤 샀습니다.

얼마 후 그는 그곳 노동조합 선거에 출마하여 지부장으로 당선되었습니다. 회사에서는 ‘제 버릇 개 못 준다’ 면서 그를 더욱 미워했습니다.

1년 쯤 지났을 때 그가 사 둔 자갈밭 앞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더니, 그 자갈밭은 금싸라기 땅이 되었습니다. 그 땅의 절반을 뚝 떼어 팔고 그 돈으로 나머지 절반에 지하 1층 지상 4층의 빌딩을 지었습니다. 그는 졸지에 사장님이 된 것입니다.

그곳 지사장의 승용차가 소나타였는데 그는 그랜져를 샀습니다. 그 차를 타고 출근을 해서 일부러 지사장의 소나타 옆에 나란히 세워 두었습니다.

며칠 후 지사장이 그를 불렀습니다.

“자네, 그 차 좀 안 끌고 올 수 없나?”

그 다음 날부터 그는 그 차를 타고 출근하지는 않았습니다.

동료들은 그를 ‘수박족’ 노동자라 부릅니다. ‘오렌지족’에 빗대어 부르는 말입니다.

그는 이제 부러울 것이 없습니다. 조합원들이 더 이상 그를 따르지 않는다는 것 외에는…

 

 

 

생리휴가 2

 

ㄱ공단 노동조합의 여성부장님은 전노협과 관련을 맺고 있는 노조의 여성부장들 가운에 가장 연세가 많고(48세) 또 가장 열심히 활동하시는 분으로 유명합니다. 뿐만 아니라, 성품이 어찌나 곱고 순수한지 그 분과 대화를 하는 사람은 마치 사춘기 소녀와 이야기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 노조 상집 간부들의 교육이 있었습니다. 10여 명이 둥그렇게 둘러 앉아 가족적인 분위기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임신한 여성에게도 생리 휴가를 지급하여야 하는가’에 대한 사건이 대법원에 계류중인 것에 대해 설명하였습니다. 우리나라 고등법원의 판단은 답답하게도 ‘임신한 여성은 실제적으로 생리를 하지 않으므로 생리 휴가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이고 이에 대한 우리의 주장은 ‘임신한 여성은 그 모성이 더욱 보호되어야 하므로 생리 휴가가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설명을 마쳤을 때 노조 위원장이 옆에 앉아 있던 여성부장님의 어깨에 살짝 손을 얹으면서 말했습니다.

“임신한 여성은 그렇다 치고, 우리 부장님처럼 생리가 아주 끊겨 버린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사람들이 모두 웃음을 터뜨렸는데 여성부장님이 평소처럼 조용조용한 말씨로 수줍게 말했습니다.

“나 아직 안 끊겼어…”

사람들이 더 크게 웃었습니다. 여성부장님은 꽃처럼 미소 지었습니다.

 

 

 

제명 파동

 

일과 시간 이후에 이루어지는 노조 교육 참여 여부를 조합원 각자의 결정에 맡겼고 회사측과 근태 협조가 되지 않아 근로시간으로 인정되지 않는 교육이었는데도, 이리 지역 어느 노동조합에서는 교육 참석률이 100%였습니다. 그 하루 전날 서울의 어느 노동조합에서 교육을 할 때, 집행부 간부들이 탈의실 문을 걸어 잠그고 조합원들이 퇴근하지 못하도록 막았음에도 교육에 참여하지 않은 조합원들이 꽤 많았던 것과는 참으로 대조적이었습니다.

교육을 끝내고 조합장에게 말했습니다.

“오늘 참석률이 꽤 높았던 것 같습니다.”

“지난 번 ‘제명 파동’ 이후로 노조 행사의 참석률이 꽤 높아졌다는 거 아닙니까.”

“제명 파동이라니요?”

“노조 행사나 교육에 불성실하게 참석하는 조합원 4명을 얼마 전에 본보기로 아예 제명시켜 버렸었거든요.”

“노조에서 제명 당하면 어떤 불이익이 있습니까?”

“고것이 지금 제일로 문제입니다. 조합에서 제명 당해도 아 – 무런 불이익이 없으니까…”

“조합원 자격을 상실하면 퇴직할 때 상조회에서 전별금을 못 받는다든가 하는 그런 불이익도 없습니까?”

“아직 상조회 같은 게 없어서 전혀 그렇지 못합니다. 오히려 조합비를 안내니까 금전상 약간의 이익이 되지요. 다만 ‘명예’에 지독스러운 손상이 간다 그것뿐인데… 그래도 그 명예에 손상이 가는 걸 제일 무서워할 만큼은 노조 분위기가 되어 있습니다.

나중에 그 제명 처분을 취소해 달라고 온갖 압력을 동원해서 호소하는 바람에 결국 복권시켰다니까요.”

“그 사람들 오늘 교육에 참석했습니까?”

“그럼요. 제일 먼저 와서 맨 앞 줄에 나란히 앉아 있지 않습디까? 좌우간 나도 세상 일 안 해본 거 없이 다 해본 놈인데, 내 평생에 노동조합 일처럼 어려운 건 처음 해본다니까요.”

 

 

 

정 조합장

 

제법 규모가 큰 공장의 노동조합장이었다가, 파업 -> 야당 당사 점거 농성 -> 해고 -> 구속을 두루 거치고 집행유예로 석방된 친구를 만났습니다. 그는 서른이 훨씬 지난 나이에 결혼을 하고 신혼여행도 가지 못한 채 한 달 이상이나 농성을 한 후 수배되었다가 결국 구속된 것이었습니다.

그가 조합원들과 함께 야당 당사에서 농성을 하고 있을 때 찾아갔더니 그의 아내가 코펠에 라면을 끓여 내주며 ‘이걸로 집들이 잔치를 대신하게 되었으니 미안해서 어쩌냐’ 면서 쩔쩔 매었습니다. 나는 그곳에서 처음 그녀를 보았지만 ‘아, 이 친구 장가 잘 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간다고 일어서자 그녀는 엘리베이터 타는 곳까지 배웅을 나왔습니다.

내가 말했습니다.

“욕 보십니다.”

그녀가 엘리베이터로 들어서는 내게 재빨리 말했습니다.

“다 알고 결혼했어요. 그런 것도 모르고 깜박 속아서 결혼한 여자로 알까 봐 말씀 드리는 거예요. 여기로 신혼여행 온 셈 치지요, 뭐.”

그 후로, 재판을 받던 날 스치듯 한번 보고는 오늘 처음 그를 다시 만난 거였습니다. 그 동안 궁금했던 두어 가지를 그 친구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경찰이 파업 중이던 회사를 덮쳤을 때, 한 명도 잡히지 않았잖아? 그래서 신문에까지 크게 났었는데, 도대체 어떻게 미리 알고 감쪽같이 빠져나간 거야?”

그가 답했습니다.

“경찰서 정문 건너편에서 조합원 두 명이 보초를 서며 경찰서를 계속 감시하고 있었거든. 닭장차 네 대가 출동하는 걸 보고 즉시 농성장으로 전화를 해주어서, 미리 정해 둔 집결지로 모두 빠져 나왔지. 그 경찰서 관내에 우리 말고는 다른 상황이 없었거든… 짜식들, 개미새끼 한 마리 없는 빈 집을 산소 용접기로 정문까지 절단하면서 주접들을 떨더라고… 무지 황당했을 거야.”

“수배 기간 중에도 몇 달 동안이나 잘 도망 다니더니,

어쩌다가 잡혔어?”

“친구 녀석을 찾아갔더니, 고생한다고 사우나탕에 데리고 가잖아. 벌거벗고 왔다갔다 하는데 동부경찰서 대공 최 형사 그 자식이 벌거벗고 누워 있다가 나하고 눈이 딱 마주치는 거야.

아차 싶어서 옷을 입으려는데 최 형사 그 놈까지 곰이 모두 네 마리나 달려들어서 꼼짝 못하게 붙들더라구. 홀딱 벗은 남자 네 놈이 또 다른 벗은 남자 하나를 붙들고 늘어졌을 광경을 생각해 보라구. 나도 처음에는 ‘야 이새끼들아, 이거 못놔’ 어쩌구 하면서 떠들다가 포기하고 그냥 잡혔지. 홀딱 벗고 잡혔다니까.

재수 더럽게 없었지. 나중에 알고 보니까, 형사들 일과가 원래 출근했다가 사우나에 가서 몸 풀고 그러는 거라더군. 그래서 나 말고도 사우나에서 잡힌 사람들이 꽤 있다나봐.”

내가 말했습니다.

“그러게 곱게 도망이나 다니지 왜 주제 넘게 사우나탕엘 가느냐구. 그러니까 벌 받아서 잡힌 거 아냐. 나는 여지껏 사우나 ‘사’ 자(字) 구경도 못했다.”

 

 

 

 

넷째 묶음

아내에 관한 추억

 

내가 아내 덕에 사람 구실을 하며 산다는 것을,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습니다. 나를 별로 인정하지 않는 후배조차 ‘선배님 결혼한 것만 생각하면 존경스럽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내가 때로 낙심할지라도 아내는 ‘한 때 우리가 각오했던 삶에 견주면 지금 우리 생활은 너무나 부유하고 행복하다’는 말로 무능한 가장을 격려합니다.

어느 날 아내가 문득 내게 ‘생각해 보니 우리는 서로의 생활을 너무 모르고 있다’고 지나가는 것처럼 한 말을 듣고 나서, 아내에게 전해 주기 위해 내 생활의 일부를 정리한 것이 이 모든 기록들의 시작이었습니다.

 

 

 

기절하기까지

 

결혼하기 훨씬 전, 실제와 전혀 다르게 내가 거물로 지목되어 수배된 적이 있었습니다.

나는 운 좋게도 부천 원미동(소설에 나오는 바로 그 동네입니다)의 작은 석유 가게에 취직이 되어 두 달 반 가량 숨어 지냈었는데, 슬리퍼를 찍찍 끌고 다방에 석유 배달을 가다 보면 들어가는 입구에 내 현상 수배 사진이 붙어 있기도 했습니다.

수배 전단에 나와 있는 다른 동료들의 사진은 모두 학적부 등에서 복사한 것이어서 알아 보기가 어려웠지만 내 사진만은 유독 시위 현장에서 메가폰을 들고 있다가 찍힌 옆 모습이어서 한결 생생했던 것이 기억에 남습니다.

그 무렵, 나보다 훨씬 빨리 대학을 졸업하고 이미 교사로 일하고 있던 아내는 어느 날 수업 중인 교실에 느닷없이 들이닥친 건장한 사내들에게 잡혀 가, 어느 건물의 지하실까지 끌려간 후, 기절해서야 그곳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때 아내는 내가 어디에 있었는지 알고 있었으면서도 기절하기까지 말을 안 했던 겁니다.

그로부터 2년 후, 사흘 밤 사흘 낮을 거꾸로 매달려 있다시피 한 끝에 결국 아끼는 후배의 이름을 일러 주어야 했던 내 경험과 비교하면서 나는 평생 빚진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죽는 날까지 아무리 애 써도 그 빚을 다 갚을 수는 없으리라는 생각으로…

그 마음은 사랑보다 귀중한 것이어서 때로 우리 부부 사이에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에도 마음을 다잡는 기둥이 됩니다.

 

 

대자보

 

밤 늦게 집에 들어오니 현관에 대자보가 붙어 있었습니다.

글자 그대로 ‘대문짝’ 만했습니다.

‘이대로는 살 수 없다’는 커다란 제목 밑에 ‘우리는 전부터 있어 왔으며 현재도 있다고 해서 앞으로도 그대로 있을 그런 무위자연인(無爲自然人)이 아니다’라는 다소 관념적이고 어려운 말로 시작된 대자보는 ‘아빠와 놀고 싶고 남편과 하루를 이야기하고 싶은 평범한 가족의 소망을 무참히 져버리는 행위는 당연히 규탄 받아야만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다가 드디어는 다음과 같은 아주 굵은 글씨의 구호로 끝을 맺고 있었습니다.

 

1. 귀가 시간 엄수하라!

2. 아빠와 같이 놀고 싶다!

3. 기본적인 가정 생활을 보장하라!

 

방문을 여니 아내와 아들 녀석은 이미 잠 들어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일과가 끝나는 시간이 되면 더욱 바빠지는 일을 직업으로 선택한 지 10년이 넘는 사람에게 집에 일찍 들어오라니…

다음 날 아침 아내에게 짐짓 농담처럼 말했습니다.

“무슨 대자보가 이리 어렵냐? 전혀 대중적이지 못하게…’무위자연인’이 무슨 뜻이야?”

아내가 웃으며 짧게 되받았습니다.

“무위도식(無爲徒食)하지 말라 이거지. 무식하기는…”

화장실에 들어 앉아, 뭐라고 대꾸를 해야 좋을지 궁리를 하느라고 좀 오래 있었더니 아내가 또 한 마디 했습니다.

“당신 지금 화장실에서 ‘점농’하는 거야? 30분도 넘었다구요.”

출근하면서 나는 손바닥보다 작은 메모지에 짧게 한 줄 써서 아내가 쓴 대자보 위에 척 붙였습니다.

 

– ‘일찍 들어오세요’라는 말로 남편을 무능하게 만들지 말자!

 

큰 대자보의 내용을 압도하는 듯했습니다. 적어도 내 생각으로는 그랬습니다.

 

 

 

개는 같은 소리로

 

네살바기 딸 아이가 문에 손을 많이 다쳐 병원에 입원해 있는데다가 나까지도 위경련이다 감기다 하면서 골골대느라고 한 열흘간 딸 아이 병치레를 아내가 거의 도맡아 해야 했습니다.

아내가 매일 밤마다 병원에서 쪼그리고 자면 나는 아침 일찍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가서 아내를 데리고 와, 출근 준비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게 고작이었습니다.

내 몸도 온전치 못하니 나는 아내와 함께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와서는 다시 잠자리에 누워 버려, 아내는 아침밥 차린 후에 날더러 ‘일어나라 일어나라’고 여러 번 외치는 수고까지 해야 했습니다. 그러니 아내의 마음이 편치 않을 수밖에…

아침에 아내가 날더러 뭐라 말했는데 내가 잘 못 알아 들어서 다시 물었습니다.

“방금 뭐라고 했지?”

아내는 양말 신는 동작을 멈추지 않은 채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혼잣말처럼, 그러나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개는 같은 소리로 두 번씩 짖지는 못해.”

잠시 후, 밤새 기침을 하느라고 잠을 제대로 못 자서 나는 따뜻한 물이라도 한 잔 마시려고 주전자에 물을 담아 불 위에 올려 놨습니다. 아내가 주전자를 살피고 나더니 물었습니다.

“당신이 물 올려 놨어?”

“응, 따뜻한 물이라도 한 잔 마시려고…”

아내는 대뜸 따지듯 물었습니다.

“목욕할 일 있냐?”

으, 두 컵 분량밖에 안되었는데…

 

마침 어버이날이라고 국민학교 1학년인 아들 녀석이 기특하게도 카네이션 두 송이를 내밀었습니다. 그런데 모양이 서로 달랐습니다. 내가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왜 아빠 꺼는 엄마 꺼보다 밉게 생겼냐?”

아들 녀석이 말했습니다.

“엄마 꺼는 제가 산 거구요. 아빠 꺼는 오다가 길에서 주운 거라서 그래요.”

 

 

 

경험으로 얘기하건대

 

해고된 노동자들을 저희 집에 초대했었습니다. 노동조합을 설립한 후 2년 동안 ‘뼈 빠지는’ 고생을 하다가 결국 모두 해고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고생에 내가 기여한 바가 전혀 없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고, 저녁 한 끼로 그 죄를 다 갚을 수야 없는 노릇이지만 가만히 있을 수는 도저히 없어서 저녁 자리를 마련했더니 모두들 기쁘게 와 주었습니다.

아내는 처음 만나는 사람들을 위해 직장에서 조퇴까지 해 가며 진수성찬을 마련했습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서 한 잔씩 하며 그 동안의 아픈 경험들을 안고 앞으로는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자기 고백’ 비슷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우리가 그 동안 죽도록 고생했는데 그런 고생을 한번도 안 해 본 인간들과 똑같이 살아갈 수는 없지 않느냐’고 내가 말문을 열었습니다.

돌아가면서 이야기를 하다가 아내의 순서가 되었을 때 아내가 말했습니다.

“내 경험으로 얘기하건대, 거창하게 무슨 ‘운동’까지는 아니더라도 자기 소신이 있어서 어떤 활동을 해야 할 사람은 아예 결혼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이며, 만약 부부가 함께 뛸 거라면 결혼을 하더라도 아기는 낳지 말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남편은 남편대로 아내와 아이들에게 충실할 수 없어 죄스럽고 아내는 아내대로 남편의 갈 길을 가로막는 장해물 역할이나 하는 것 같아 죄책감에 시달려야 하니, 그게 무슨 꼴이냐구요.”

그날 사무실에 함께 있는 여직원이 음식 차리는 일을 도와 주러 함께 갔었는데 다음 날 아침 출근해서 내게 말했습니다.

“어제 밤에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에서 사람들이 지운이(내 아들) 엄마 칭찬만 했어요. 하 선생님 부인이 정말 훌륭한 분이라고… 자기들은 결혼하면 절대로 그렇게 못할 거라고…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고…”

나는 그 말을 들으며 마음이 아팠습니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

 

몇 해 전, 나는 내가 받던 월급을 줄이기로 결심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줄였습니다.

운동 단체에서 일하는 친구들의 ‘기아 임금'(나도 물론 그런 임금을 받으며 일해 본 적이 있습니다)과 비교하면 엄청난 고임금, 구로동의 나이 어린 노동자들이 한 달에 1백 시간이 넘게 뼈 빠지는 잔업을 해야만 받을 수 있는 돈을 월급으로 받으면서 몇 개월 일을 해 보니, 이건 내가 뭘 좀 해보겠다는 놈인지 아니면 그냥 흔해 빠진 월급쟁이인지 영 모르게 되어 가는 것이었습니다. 한 달에 수십만 원을 받으면서 한 달에 10만 원의 월급을 받는 노동자들의 고통을 이해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혼자 고민하다가, 월급을 줄이는 수밖에 없다고 결정을 하고 안해의 이해를 구했습니다. 아내는 내 말을 듣고는 잠시 아무 말이 없더니 그 무렵 네 살이었던 아들 녀석에게 말했습니다.

“지운아, 아빠가 다시 병이 도진 모양이다. 허리띠 졸라 매자.”

지금 돌이켜보면 그것은 한낱 양심 위로용에 불과한 것이었지만 그래도 잘한 짓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내가 얻은 유익은 감히 돈으로 계산할 수는 없는 것들입니다.

내가 이렇게 어줍잖은 모습으로나마, 진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 주변에서 버틸 수 있는 것은 다른 많은 이유들과 함께 월급을 스스로 줄인 것에도 힘 입은 바가 큽니다.

 

 

 

밤중이나 새벽이나

 

밤 11시 쯤 집에 들어갔습니다. 며칠째 계속 새벽녘이 되어서야 집에 들어갈 수 있었기에 모처럼 일찍 귀가한 셈이었습니다.

속이 불편해서 화장실에 들어가 앉아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고 아들 녀석이 받았습니다. 내가 집에 들어선 지 채 10분이 안되었을 시간이었습니다.

“아빠! ㅇㅇ노동조합이래요. 전화 받으실 수 있어요?”

“아빠가 조금 있다가 전화한다고 그래라.”

“우리 아빠 지금 화장실에 들어가셔서 전화 받을 수가 없는데요. 아빠가 이따가 전화하신대요.”

볼 일을 다 마치고 전화를 했더니, 내일 있을 유인물 작업에 대해 의견이 일치되지 않는다고 내일 새벽에라도 좀 볼 수 없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잠시 후 다시 전화하겠다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습니다.

아내를 쳐다 보니 아내는 전화 내용을 들으며 벌써 입술이 이 만큼 나와 있었습니다.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새벽에 나가느니 지금 나갔다 오는 게 낫겠지?”

아내는 못들은 척했고 이부자리에 엎디어 잠들 채비를 하고 있던 아들 녀석이 혼잣말처럼 말했습니다.

“지금 나가면 새벽에나 들어오실 텐데 그게 그거지요 뭐. 밤중이나 새벽이나 마찬가지지…”

내가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아니야. 오늘은 나갔다가 금방 들어올 거야.”

“그래요? 그럼 지금 나가셔요.”

내가 다시 아내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해? 지금 나갈까? 아니면 새벽에 나갈까?”

아내는 짐짓 신경질적으로 답했습니다.

“지운이가 지금 나가는 게 좋다잖아요?”

“그거야 아들 의견이고 나는 어디까지나 당신 의견이 중요하지.”

“맘대로 해요. 나는 우리 남편이 아무 것도 아니어도 좋다구요. 훌륭한 사람 못 되어도 좋으니, 집안에 있는 시간만이라도 그냥 남편 그 자체로 충실할 수 없어요?”

“……”

나는 아무 할 말이 없었습니다. 안해가 계속 말했습니다.

“결혼한 지 10년이 넘도록 남편을 너무 사랑하는 게 문제지 다른 게 문젠가. 나가 보셔요. 사랑하는 사람을 내가 어떻게 미워할 수 있겠어요. 괜히 화난 척 해봤어요.”

그러나 꼬박꼬박 존댓말을 사용하는 아내의 말씨에서 아내가 대단히 화나 있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나는 ‘고맙습니다’라고 짐짓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나갔다가, 결국 새벽녘에야 들어왔습니다.

 

 

 

너무 늦게 만났다 싶은

 

저녁 무렵, 아내와 아내 후배들 몇 명, 나와 내 후배들 몇 명이 우리 집에 모였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잠시 숨을 돌리는 중에 이를테면 ‘부부는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주제로 이야기가 오갔습니다. 얘기 중에 내가 말했습니다.

“살다 보면 ‘아, 이 사람과는 너무 늦게 만났다’ 싶은 느낌을 주는 여인을 만날 때도 있지. 그러나…”

순간, 짧은 긴장이 감돌며 사람들이 아내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았습니다. ‘어, 큰일 났다’ 싶은 눈치였습니다. 그때 아내가 짧게 말했습니다.

“진작 만났으면, 내가 이런 고생은 안 하잖아.”

모두 웃었습니다.

‘그러나’에 뒤이어 내가 하려고 했던 말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런 여인을 만날 때마다 문제가 복잡해진다면, 인간이 개와 다를 게 무엇이겠는가.’

 

 

 

전우치나 홍길동

 

아침 식사를 막 끝냈을 무렵에 전화가 왔습니다. 오늘 아침에 유인물 작업을 하기로 한 해고 노동자들이 있어서 혹시나 싶었는데 역시 그 전화였습니다.

아침에 유인물을 싸 들고 회사에 가자마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구사대에게 둘러싸여 후미진 구석으로 끌려가 마구 얻어 터지고 있다고 어쩌면 좋으냐고 했습니다. 발을 동동 구르는 것이 눈에 보이는 듯했습니다.

내가 물었습니다.

“조합원들이 지금 다 보고 있어요?”

“아니요. 잘 안 보이는 구석으로 끌고 가서 뚜드려 패고 있어요. 어떻게 해요?”

“……”

“버스에서 보니까 그 자식들이 너무 많이 깔려 있어서 나는 내리지도 못했어요.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냐구요. 이렇게 맞고 있는 수밖에 없는 거예요?”

“…… 어쩌겠어요. 똑바로 보고 우리 머리 속에서 영원이 잊지 않고 있다가… 원수를 갚는 수밖에… 그러게 이제 싸움 방식을 좀 바꿔 보자니까…”

“뾰족한 수 없다는 거 알고 전화했어요. 끊어요.”

전화를 끊고 나서 나는 분통이 터져서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방을 서성거리다가 벽을 주먹으로 치고 발로 차며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이 썩을 놈의 자본가 세상, 언제나 끝장나냐. 이거…”

아침 일찍부터 방바닥에 배를 깔고 만화책을 보고 있던 아들 녀석이 말했습니다.

“이 딴 사람 한 명만 있으면 되는데…”

“누구?”

“전우치요.”

“그래. 전우치나 홍길동 같은 사람 한 명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설겆이를 하고 있던 안해가 말했습니다.

“그 친구 오라구 그래.”

“누구?”

“그, 칼로 사람 포 떠서 하수도에 처박는다는 사람 말이야.”

출근길에는, 눈에 뜨이는 희고 곧은 종아리들마다 못마땅했습니다. ‘날마다 얻어 터지는 사람들도 있는데, 너희들은 다 뭐냐’ 싶었습니다.

 

 

 

동반자

 

산업 재해 문제에 대한 연구조사 발표회가 있었습니다. 지역 상담소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함께 몇 개월 동안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 공부한 내용들을 여러 사람들 앞에서 한번 발표해 보자는 욕심으로, 주머니 돈을 털어 마련한 행사였습니다.

그날 아내도 그 자리에 참석하였습니다. ‘남편이 어디 가서 발제를 한다는데 잘 하는지 못 하는지 감시하러 가야겠다’고 친구들에게 말하고 왔다고 했습니다. 아내는 방명록의 직업란에 ‘하종강의 동반자’라고 적었습니다.

성황리에 발표회를 마친 후 사람들이 내게 와서는 ‘하종강의 동반자가 도대체 누구냐? 얼굴이나 한번 보자’고 했습니다. 내가 아내를 사람들에게 소개해 주었습니다.

뒷풀이 자리에서 아내는 한 다리 건너 아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 친구는 그 날 발표회의 사회를 맡아 본 사람이었습니다. 아내가 다니는 학교의 직원이었던 사람이 요즘 그가 일하는 직장에 함께 있다고 했습니다.

“그 친구가 그러더라구요. 자기가 다니던 학교에 여선생이 하나 있었는데 그 선생 남편이 무슨 노동운동을 한대나… 그래서 맨날 후줄근하게 옷 입고 다니는 여선생이 하나 있었다고…”

아내가 그 말에 답했습니다.

“옷 없기는 저 사람도 마찬가지인 걸요. 나만 사 입을 수도 없고…”

 

 

 

귀밑머리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옮겼습니다. 개인적인 전망과 관련된 고민 끝에 다른 자리를 찾은 사람들도 있고, 늦은 나이에 대학원에 진학한 후배도 많습니다. 새로운 문민정부가 들어선 후에는 뒤늦게 대학에 복학하는 사람들의 움직임이 가히 ‘물결’이라 불리울 만큼 활발합니다. 또, 지금까지는 그 중요성을 별로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시민운동 단체로 간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이런 때 가만히 있는 사람만 멍청한 것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들기도 했으나, 나는 일단 하던 일을 계속하는 멍청한 사람에 포함되기로 했습니다.

어느 날 아내에게 조심스럽게 물어 보았습니다.

“귀밑머리가 하얗게 되도록 평생 노동상담이나 하다가 늙어 죽은 사람이 당신 남편이라 해도 부끄러워하지 않겠소?”

아내는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쏜살처럼 답했습니다.

“아이고, 나는 당신이 이제 와서 뭐 다른 거 한다고 그럴까 봐 겁나는 사람이에요. 그냥 하던 일이나 계속해요.”

 

 

 

개뿔

 

아이들이 벌써 며칠째 ‘무지개 스프링’ 장난감을 사 달라고 졸라대고 있었지만 아내는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장난감’이라면서 딱 잘라 거절했습니다. 아침 밥상머리에서 아이들이 또 졸라대기 시작하자 아내가 말했습니다.

“개뿔 나면 사 줄게.”

아들 녀석이 물었습니다.

“그게 뭐예요?”

“개 머리에 뿔 나면 사 준다고…”

“에이… 개 머리에 어떻게 뿔이 나요?”

내가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 말은, 네가 여자가 되면 사 주겠다는 거나 마찬가지이니까 결국 안 사준다는 뜻이야.”

 

오후에 아내가 사무실로 전화를 했습니다. 아내가 화장실에서 일을 보고 나왔더니 아이들이 그 사이에 집안에 있는 강아지 장난감마다 모두 머리에 뿔을 하나씩 만들어 붙여 놓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집에는 아이들이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사람들이 사 준 강아지 봉제 완구를 비롯해서 크고 작은 강아지 장난감이 모두 댓 마리 정도 있는데 그 강아지들이 모두 머리에 뿔을 하나씩 달고 있더랍니다. 종이 뿔, 볼펜 꼬다리 뿔, 피리 끝 부분을 빼서 만든 뿔…

안해나 나나 ‘사 주자’는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런데 저녁에 집에 들어가니 아이들이 무지개 스프링을 들고 내게 달려 오는 것이었습니다.

아내가 말했습니다.

“애들이 하루 종일 잘 갖고 놀았어. 벌써 본전 뽑았어.”

내가 행여 불필요한 거라도 샀다고 생각할까 봐 염려하는 아내의 배려였습니다.

아이들에게 무지개 스프링 하나도 마음 놓고 사주지 못하도록 하는 무능한 가장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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