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가의 파수꾼

 

맹자가 살던 시기에 유가는 어떤 계층으로부터도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맹자는 사람들이 대부분 양주 아니면 묵적을 따른다고 비판했습니다. 이런 맹자의 비판 의식은 우리 나라 조선 후기에 천주교로 대표되는 서양 사상의 유입에 대응하는 척사 위정 논리의 근거가 되기도 했습니다. 사실 유가 이론은 지배 집단의 잘못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용적으로는 기존 질서를 지키려는 뜻이 강하게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맹자는 전통 질서와 신분제를 부정하는 민중 중심의 이론을 단호하게 배척했습니다.

맹자가 배격 대상으로 삼은 것은 크게 세 가지 사상입니다.

하나는 양주의 사상이었습니다. “내 몸의 털 한 가닥을 뽑으면 온 세상이 잘된다고 해도 나는 하지 않겠다”는 말에서 보이듯 양주의 사상은 극단적인 개인주의였습니다. 남으로부터 빼앗지도 않지만 결코 남을 위해 희생하지도 않겠다는 사상입니다. 일반적으로 양주의 사상은 노장 계열의 사유 체제로 봅니다. 이러한 사유는 언제나 지배 집단의 강압에 희생당하기만 하는 피지배 집단의 소극적인 저항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는 일반인의 개성이 존중되지 않는 봉건제 사회였습니다. 전국 시대의 혼란이 봉건적 질서의 붕괴에서 왔다고 보는 유가가 피지배 집단의 개성을 논함으로써 개인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양주의 사상을 큰 적으로 본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맹자는 양주의 사상을 따르면, 결국 자기 임금을 부정하게 된다고 비판하였습니다.

두 번째 배격 대상은 묵자였습니다. 묵자는 지배 집단을 향해 피지배 집단을 똑같이 사랑하고, 이익을 함께 나누자고 외쳤습니다. 게다가 주장만으로 그치지 않고 집단을 통한 사회적 실천으로까지 나아갔습니다. 맹자는 묵자의 무차별한 사랑은 자기 아버지를 남의 아버지와 똑같이 사랑하라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자기 아버지에 대한 부정이 된다고 비판하였습니다.

세번째 배격 대상은 허행으로 대표되는 농가였습니다. 그들은 지배 계급이 노동하지 않는 것을 반대하면서, 임금도 백성과 함께 농사지어 먹고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맹자는 그들이 농사를 직접 짓기는 하지만 모자나 솥은 자신들이 생산한 곡식과 바꿔 구입한다는 데 착안하여, 지배 집단도 분업의 논리에 따라 다스리는 일을 맡은 사람들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맹자가 주 공격 대상으로 삼은 사상들은 모두 지배 집단에 불리한 것들이었습니다. 여기서 맹자 사상의 또 다른 모습인 보수적 성격을 볼 수 있습니다.

 

 

참다운 임금의 길

 

맹자는 전국 시대의 혼란을 끝낼 수 있는 방법은 왕도 정치의 실현이라고 보았습니다. 맹자의 왕도 정치 이론은 성선설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성선의 근거는 하늘에 있습니다. 왕도 정치는 도덕의 근원인 하늘의 뜻을 실현하는 일인 동시에 하늘로부터 받은 인간의 착한 본성을 실현하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 인류는 자연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인식하였습니다. 중국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고대 중국인들은 자연의 꼭 대기에 하늘을 놓고,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러나 맹자의 하늘은 단순한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도덕의 근원이었습니다. “사람이 제 마음을 다하면 자기의 본성을 알게 되고, 자기의 본성을 알면 하늘을 안다”고 한 말은 이러한 맹자의 생각을 잘 나타내 줍니다.

하늘이 도덕의 근원이라는 생각은 정치적 입장을 설명하는 이론으로도 연결됩니다. 맹자는 도덕의 근원인 하늘이 덕이 많은 사람을 택해 임금을 시킨다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통치자는 하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서도 도덕에 바탕을 둔 정치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착한 본성이 있기 때문에 그 본성을 잘 기르면 성인이 될 수 있다고 본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임금은 어진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잘 기르면 왕도 정치를 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왕도 정치는 덕으로 하는 정치이고, 그 반대는 힘으로 하는 패도 정치입니다. 사실 고대부터 오늘까지 어떤 통치 집단도 국가와 사회와 민족을 위해 일한다고 하지, 자기 자신이나 자기 집안을 위해 일한다고는 하지 않습니다. 힘으로 다스리는 독재 권력도 언제나 민주를 가장합니다. 맹자가 주장한 참다운 임금의 길은 바로 이 같은 집단의 허위 의식에 대한 지적이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맹자가 양나라 혜왕을 만났다. 왕이 맹자에게 물었다.

“선생께서 천리길을 멀다 않고 저희 나라를 찾아 주셨으니 저희 나라에 무슨 이로운 일이 있게 될까요?”

“왕께서는 하필이면 이로움을 말씀하십니까? 오직 인과 의가 있을 뿐입니다. 임금께서 어떻게 하면 내 나라에 이로울까를 따지면 벼슬아치들은 어떻게 하면 내 집안에 이로울까를 따지게 되고, 선비나 일반 민중들은 어떻게 하면 내게 이로울까를 따지게 됩니다. 그러면 나라가 위태로워질 것입니다.”

 

맹자는 철저하게 이익을 배격했습니다. 심지어 맹자는 전쟁이 이롭지 못하다고 설득함으로써 초나라와 진나라의 싸움을 말리려 했던 송경이라는 사람을 보고, 이익이 되지 않는다는 것으로 설득해서는 안되며 오직 인과 의로써 설득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면 인과 의에 기초한 왕도 정치란 어떤 모습일까요?

양혜왕이 고민스러운 표정으로 맹자에게 물었습니다.

“저는 나라를 다스리는 데 온 마음을 쏟고 있습니다. 어떤 지방에 흉년이 들면 그 곳 백성들 가운데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을 다른 지방으로 옮겨 주고, 거동이 어려운 노약자를 위해서 곡식을 날라다 줍니다. 다른 지방에 흉년이 들어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합니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저만큼 백성들에게 마음을 쓰는 임금이 없는데, 어째서 이웃 나라 백성이 줄지 않고 우리 나라 백성이 늘지 않는 것일까요?”

당시 제후국들은 독립적이기는 했지만 사실은 모두 주나라에 속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언제라도 국경 통과세만 내면 다른 나라에 가서 살 수 있었습니다. 어떤 나라에서 백성들을 크게 위한다는 소문이 나면 그 나라로 백성들이 몰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백성들이 느는 것은 노동력과 군사력이 느는 것입니다. 따라서 강한 나라를 만들어 천하를 틀어쥐려는 야심을 가진 양혜왕이 백성이 늘지 않는다고 고민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맹자는 양혜왕의 고민에 찬 질문에 대해 첫 마디부터 비꼬는 태도로 응수합니다.

“왕께서 전쟁을 좋아하시니까 제가 전쟁에 빗대어 말씀드리지요. 한참 맞붙어 싸우다가 힘이 달려 갑옷도 내던지고 무기를 질질 끌면서 달아나는데, 어떤 자는 쉰 걸음 도망가서 멈추고 어떤 자는 백 걸음 도망가서 멈추었습니다. 쉰 걸음 도망간 자가 백 걸음 도망간 자를 비웃으면서,’야, 이 비겁한 놈아!’ 하면 어떻겠습니까?”

“말도 안 되지요. 백 걸음이나 쉰 걸음이나 달아난 것은 마찬가지지요.”

양혜왕은 맹자의 논리에 걸려들었습니다. 회심의 미소를 지은 맹자는 흐르는 물처럼 자기 주장을 펴 나갑니다.

“그런 이치를 아신다면 이웃 나라보다 백성이 많아지기를 바라지 마십시오. 백성들의 농사철을 빼앗지 않는다면, 곡식이 다 먹지 못할 정도로 많아지겠지요. 가는 그물로 어린 물고기까지 잡지 못하게 한다면, 다 먹지 못할 만큼 물고기가 많겠지요. 적절한 때에만 나무를 베어 내게 한다면, 재목이 쓸 수 없을 만큼 많아지겠지요. 이렇게 하면 산사람이 먹고 사는 데 문제가 없을 것이며, 죽은 사람 장사지내는 데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왕도 정치의 시작입니다.

백성들에게 집 주변 땅에 뽕나무를 심게 하면 50세 이상 노인들이 비단옷을 입을 수 있고, 닭, 돼지, 개 같은 가축의 번식 시기를 놓치지 않게 하면 70세 이상 노인들이 고기를 먹을 수 있겠지요. 한 가구가 농사지어 먹을 수 있을 만한 땅에 농번기의 일손을 빼앗지 않는다면, 식구들이 굶주리지 않겠지요. 학교 교육을 잘 실시하고 부모에 대한 효와 형제간의 우애를 되풀이해서 가르치면, 머리 허연 노인들이 짐을 진 채 길을 가지 않게 되겠지요. 이렇게 하고서도 왕 노릇 하지 못한 사람은 아직 없습니다.”

위의 대화에서 보았듯이 맹자가 무조건 도덕만을 강조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경제적 토대가 없는 왕도 정치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으며, 민중의 삶을 확보해 주고 나면 왕 노릇이 저절로 이루어진다고 보았습니다. 정전제를 실시하여 그 땅에서 난 수확에 대해 10분의 1의 토지세만 걷어야 한다는 견해와, 점포세와 국경 통과세를 펴지 하자는 맹자의 주장들은 왕도 정치 실현을 위한 구체적 방안이었습니다.

 

 

음악도 여자도 재물도 민중과 함께

 

맹자가 하루는 제나라 선왕을 만나 물었습니다.

“어떤 신하에게서 들으니 왕께서 음악을 좋아하신다는 데 사실입니까?”

왕은 얼굴이 벌개지며 부끄러운 듯 대답했습니다.

“사실 제가 좋아하는 음악은 유행가입니다.”

“왕께서 음악을 좋아하신다면 천하를 통일할 수 있습니다. 본래 음악이란 가곡이나 유행가나 원리는 같으니까요. 그런데 혼자서 음악을 즐기는 것과 남과 더불어 함께 즐기는 것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좋을까요?”

“그야 여럿이 즐기는 게 좋겠지요.”

“그러하면 많은 사람이 즐기는 것과 몇 사람이 즐기는 것은 어떨까요?”

“많은 사람이 즐기는 것이 좋겠지요.”

제선왕도 맹자의 말에 말려들었습니다. 맹자는 신이 나서 거침없이 하고 싶은 얘기를 시작합니다.

“그러면 음악을 가지고 얘기해 보지요. 왕께서 음악을 연주하는데 백성들이 듣고는 머리를 흔들고 얼굴을 찡그리면서 ‘우리 임금 음악 되게 좋아하지. 우리는 이 지경으로 사는데 말야’라고 말합니다. 또 왕께서 사냥을 나가는데 백성들이 그 모습을 보고는 머리를 흔들고 얼굴을 찡그리면서 ‘우리 임금 사냥 되게 좋아하지. 우리는 이 지경으로 사는데 말야’라고 말합니다.

또 반대로 왕께서 음악을 연주하는데 백성들이 듣고는 좋아서 벙글대며 ‘우리 임금 다행히 건강하신가 봐. 어쩌면 저리도 연주를 잘 하실까’라고 말합니다. 또 왕께서 사냥을 나가는데 백성들이 그 모습을 보고는 좋아서 벙글대며 ‘우리 임금 다행히 건강하신가 봐. 어쩌면 저리도 사냥을 잘 하실까’라고 말합니다. 이 차이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왕께서 백성과 함께 하느냐 그러지 않느냐의 차이입니다.”

며칠 뒤 제선왕이 다시 맹자를 보고 말했습니다.

“저는 아무래도 왕도 정치를 할 수 없나 봅니다. 제게는 재물을 좋아하는 못된 버릇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슨 어려움이 되겠습니까? 재물 좋아하는 것을 백성과 함께 하십시오.

떠나는 사람이 언제나 임금 창고의 곡식을 가지고 떠날 수 있고, 그대로 머물러 사는 사람들이 언제나 임금 창고의 곡식을 먹을 수 있으면 됩니다.”

“아, 그렇겠군요. 그런데 제게는 또 못된 버릇이 있습니다. 제가 여자를 좋아합니다.”

“그게 무슨 흠이 되겠습니까? 여자 좋아하는 것을 백성과 함께 하십시오. 그래서 시집 못 간 처녀와 장가 못 간 총각이 없게 하시면 됩니다.”

며칠 뒤 제선왕이 맹자를 보고서는 불만이 가득한 목소리로 투덜대면서 물었다.

“문왕의 사냥터가 사방 70리였다는 말이 정말입니까?”

“예,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 사냥터는 사방 40리밖에 안 되는데도 백성들이 넓다고 하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문왕은 사냥터가 사방 70리나 되었지만 그 사냥터를 백성과 함께 썼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백성들은 오히려 좁다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왕께서는 사방 40리의 사냥터를 혼자서만 쓰면서 그 안에 들어와 사냥을 하거나 나무를 베면 벌을 줍니다. 이것은 나라 안에 사방 40리짜리 함정을 파 놓은 것과 같으니, 어찌 넓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사실 맹자의 왕도 정치는 현대 민주주의에서 보면, ‘민중에 의한’ 정치나 ‘민중의’ 정치는 아니었고 단지 ‘민중을 위한’ 정치였습니다. 하지만 2000여 년 전의 절대 군주들에게 백성들에 대한 양보를 요구한 것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맹자는 군주들을 향해 민중을 위하라고 했을 뿐만 아니라, 가장 귀한 것이 백성이고 그 다음이 국가이며 가장 가벼운 것이 임금이라고까지 하였습니다. 그래서 백성의 마음을 잃으면 천하를 잃는 것이라고 하였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덕이 없는 임금, 즉 백성들이 따르지 않는 임금은 갈아엎어야 한다고까지 했습니다.

 

 

백성이 따르지 않는 임금

 

맹자는 하늘로부터 천명을 받는 사람이 왕이 될 수 있으며, 그 천명은 덕 있는 사람에게 주어진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천명을 받았는가, 그렇지 못한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맹자는 민중이 따르는가, 그렇지 않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예전에 요임금이 순에게 왕위를 주었다. 그러자 순은 요의 아들이 있는데 자신이 어떻게 왕이 될 수 있느냐고 하면서 숨어 버렸다. 백성들이 모두 순을 쫓아갔다. 순은 신하인 우에게 왕위를 주었다. 우도 순의 아들이 있기 때문에 왕이 될 수 없다고 하면 숨어 버렸다. 역시 백성들이 우를 쫓아갔다. 우도 신하인 익에게 왕위를 주었다. 익 또한 우의 아들이 있기 때문에 왕이 될 수 없다고 하며 숨어 버렸다. 그러나 백성들은 익을 쫓아가지 않았다.

 

맹자는 백성이 따르지 않는 임금은 이미 천명이 떠난 임금이며 따라서 혁명이 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맹자는 그런 점에서 하나라를 무너뜨리고 은나라를 세운 탕임금의 혁명이나 은나라를 무너뜨리고 주나라를 세운 무왕의 혁명을 긍정했습니다. 그는 탕왕이 하나라의 폭군 걸을 죽인 것이나 무왕이 은나라의 폭군 주를 죽인 것은 못된 사나이 하나를 죽인 것일 뿐, 신하가 임금을 죽인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맹자는 또 이 혁명 전쟁이 아주 치열해서 피가 강물처럼 흘러 쇠절구공이가 둥둥 떠내려갔다는 옛 기록을 부정합니다. 백성들이 따르는 임금이 백성들이 따르지 않는 한 사나이를 치는데 전쟁이 심했을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맹자의 혁명론에는 한 가지 필수 전체가 있습니다. 그것은 혁명 주체에게 민주의 뜻에 근거한 도덕성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과거 붕건 왕조의 교체는 언제나 혁명이냐 아니냐의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5 16 과 12 12의 주체들이 자신들의 행동을 혁명이라고 강변하지만, 역사가 준엄하게 군사 쿠데타로 규정한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맹자의 혁명론은 지배 집단에게는 반갑지 않은 것이었지만, 임금이 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꼭 필요한 주장이었습니다.

 

 

꿋꿋함은 어디서 오는가?

 

“맹자”에 나타난 맹자의 모습은 당당합니다. 그런 꿋꿋함은 어디서 왔을까요?

맹자는 제자 공손추와의 대화에서 용기 있는 옛 사람으로 복궁유와 맹시사, 그리고 증자를 듭니다. 북궁유는 바늘로 눈을 찔리면서도 깜박거리지 않고, 모욕을 당하면 상대가 누구든 가리지 않고 반드시 보복을 하는 사람입니다. 맹시사는 이기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이길 것처럼 대드는 사람입니다. 증자는 스스로 자신을 돌이켜보아 거리낌이 없으면 천만 명과도 대적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의 용기를 평가하고 나서 맹자는 자기가 호연지기를 잘 기른다고 덧붙였습니다. 맹자의 꿋꿋함은 바로 호연지기에서 온 것입니다.

호연지기가 무엇이냐는 공손추의 질문에 대한 맹자의 첫 마디는 “설명하기 어렵구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호연지기가 온 세상을 꽉 채울 수 있는 도덕 기운임을 밝힙니다. 호연지기는 밖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실천을 통해 쌓은 정당함에서 나오는 기운입니다. 사실 맹자 이전의 기에 대한 이해는 대자연의 기운이나 인간의 혈기와 같이 자연적인, 또는 생리적인 것이었습니다. 맹자는 호연지기를 도덕적 실천을 통해 길러진 도덕 기운으로 파악함으로써 기 개념을 확대 발전시켰습니다.

호연지기를 가진 사람은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일까요? 맹자는 세상에 살면서 올바른 자리에 서서 도를 실천해 가는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이런 사람은 부귀로 유혹해도 마음을 바꾸지 않고, 위협이나 무력에 굴복하지 않으며, 가난 같은 어려운 상황도 마다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맹자는 이런 사람을 대장부라고 하였습니다.

맹자는 강한 자기 확신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인간의 본질은 선이며 그 근거는 하늘이라고 하면서, 왕도 정치를 통해 인간의 선한 본성을 사회에 실현해 보려고 했습니다. 맹자는 자기 마음을 다함으로써 사람의 본성이 어떠한 것인가를 제대로 깨달은 사람을 하늘의 백성이라고 하였습니다. 맹자가 바라본 사람은 사화를 떠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은 사회 속에서 실천하는 존재이며, 그 경우 강한 힘은 인간 본질에 대한 신뢰에서 출발한다고 본 것입니다. 맹자의 사상은 후대 유학자들의 참된 표본이 되었으며, 지배 계급에게는 항상 경종이 되었습니다.

 

 

순자: 동양의 프로메테우수

 

사람들이 선을 행하고자 하는 것은 본성이 원래 악하기 때문이다. 이는 가난한 사람이 부자가 되고자 하고, 천한 사람이 귀해지려 하는 것과 똑같은 이치이다.

그리스 신화에 프로메테우스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신들의 왕인 제우스 밑에서 불을 다루는 거인이었습니다. 프로메테우스는 어느 날, 제우스를 속여서 불을 훔쳐다가 인간에게 주었습니다. 불을 갖게 된 인간들은 그때부터 신의 영역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삶을 살아가기 시작합니다.

인간 사회의 모습을 보고 화가 난 제우스는 대장장이 신 헤파이스토스에게 판도라라는 아리따운 여자를 만들게 해서 인간 세상에 내려보냅니다. 신들은 인간 세상으로 가는 판도라에게 예쁜 상자 하나를 선물로 주었습니다. 판도라가 호기심에서 상자를 열자 상자 속에 들어 있던 질병과 재앙의 영들이 나와서 온 세상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상자 구석에는 마지막으로 한 조각의 희망이 남아 있었습니다.

제우스는 불을 훔친 프로메테우스에게도 벌을 내렸습니다. 카우카수스 절벽에 프로메테우스를 묶어 놓고는 독수리가 간을 쪼아먹게 했습니다. 하루가 지나면 간이 다시 생겨났고, 그때마다 독수리가 날아와 간을 쪼아먹는 고통이 끊임없이 계속되었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난 뒤 헤라클레스가 독수리를 쏘아 죽이고 프로메테우스를 고통에서 구해 주었습니다. 프로메테우스는 하늘로부터 버림받았지만 인류의 문화를 일으킨 사람으로 평가됩니다. 프로메테우스가 훔쳐다 준 불은 인류의 문화를 상징합니다.

순자는 여러 면에서 프로메테우스와 유사합니다. 순자 이전의 사상가들은 대부분 모든 것의 근원을 하늘에서 찾았습니다. 만물을 낳아준 것도 하늘이고, 주재하는 것도 하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늘은 만물 생성의 근원일 뿐 아니라 인간 도덕의 근원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순자는 인간과 하늘의 관계를 끓어 버렸습니다. 하늘이란 비가 오고 바람 부는 자연 현상에 지나지 않을 뿐이라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인간을 낳아 준 존재도 아니며 더구나 인간의 도덕적인 행위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되고 나니 그 이전까지 하늘에 기대어 운명이라고 생각하던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진 대신에 인간은 스스로를 책임져야 하는 홀로 서기의 어려움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순자는 인간의 화와 복은 오직 인간 자신의 노력에 달려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순자의 생각은 인간의 지위와 실천을 극대화시킨 인문 정신의 완성이었습니다.

하늘과의 관계를 끊어 버린 순자의 눈에 보인 인간의 참모습은 자신의 욕심을 위해 끊임없이 싸우는 존재였을 뿐입니다. 이것이 순자의 성악설입니다. 순자의 성악설은 판도라의 상자인 셈입니다. 그러나 순자의 판도라 상자 속에는 악한 본성을 이겨 나갈 숭고한 인간의 의지가 남아 있었습니다. 순자의 철학이 인 문 정신의 극치를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본성을 악하다고 본 그 한 가지 이유만으로 순자는 마치 프로메테우스처럼 뒷날 많은 학자들에 의해 두고두고 비판받는 고통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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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삶, 어두운 죽음

 

순자는 공자와 맹자를 이어 유가 철학을 발전시킨 사람입니다. 순자가 언제 나서 언제 죽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대체로 기원전 298 년 무렵에 나서 238 년 무렵에 죽은 것으로 추정할 뿐입니다. 기원전 298 년은 공자가 죽은 지 200 년쯤 뒤이고, 맹자가 죽은 무렵입니다. 당시는 혼란이 극에 이른 전국 시대 말기였지만, 한편에서는 서서히 통일의 기운이 무르익고 있었습니다.

순자의 이름은 황이고, 자는 경입니다. 순자가 손자와 발음이 비슷해서 손경이라고도 불렸는데, 경이란 벼슬한 사람에 대한 존칭이기도 했기 때문에 순자를 귀족 출신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중국 고대의 가장 믿음직한 역사서인 “사기”는 순자의 일생을 50세 무렵부터 적고 있습니다. 50세 이전에 무엇을 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습니다.

젊은 시절의 순자는 어디로 갔을까? 아마도 이 점은 순자에 대한 뒷사람들의 평가가 별로 긍정적이지 못했던 것과도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순자는 공자나 맹자의 삶과 비교해 볼 때 살아 있을 당시 상당한 영광을 누린 사람이었습니다. 순자는 조나라에서 태어났으며 50세 무렵에 제나라로 갔습니다. 당시 제나라로 모여든 학자들을 직하 학파라고 했다는 것은 앞서 이야기했습니다. 순자는 직하에서 가장 덕망 있는 학자로 인정받았습니다. 그래서 직하의 최고 사상가가 맡는 좨수 벼슬을 세 번이나 지낼 수 있었습니다. 좨주는 대부 정도에 해당하는 명예직에 지나지 않았지만, 국가의 큰 행사가 있을 때면 술을 부어 제사하는 일을 담당하는 벼슬이었기 때문에 언제나 가장 덕망 있는 사람에게 맡겨지는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순자의 행복은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마침내 자신을 시기하는 사람들로부터 참소를 당한 순자는 제나라를 떠나 진나라로 갑니다. 진나라는 당시 최강대국이었으며, 부국 강병을 주장하는 법가 사상을 통치 이념으로 삼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덕을 강조하는 순자의 사상이 받아들여질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덕을 강조하는 순자의 사상이 받아들여질 수 없었습니다. 그 뒤 순자는 조나라에 잠시 머물렀다가 나중에는 초나라의 실력자 춘신군 밑에서 난릉이라는 지역을 맡아 다스리게 됩니다.

난릉은 사방 백 리 정도의 작은 고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때가 순자가 처음으로 자신의 철학을 구체적으로 실천해 본 시기였습니다. 춘신군이 권력 다툼의 소용돌이에서 살해당하자 순자는 그대로 난릉에 정착합니다. 그리고는 제자들을 가르치고 책을 짓는 일로 여생을 보냅니다.

순자의 제자 가운데서 법가 사상의 이론적 기초를 세운 한비자와 진시황을 도와 중국을 통일한 이사가 나옵니다. 그러나 후대 학자들은 한비자와 이사를 유가 사상가로 보지 않고, 순자를 법가 사상가로 보지도 않습니다. 순자는 유가와 법가의 갈림길이었던 셈이며, 순자의 현실 지향적 사고가 법가 사상의 모체가 된 것입니다. 덥스는 순자를 원시 유가를 틀에 구어 낸 사람이라고 평하였습니다. 순자가 예를 강조하면서 공자의 사상을 구체화시킨 점에 대한 평가일 것입니다. 이런 평가는 순자의 사상 속에 현실 지향적 측면이 들어 있음을 잘 지적한 것입니다. 사실 후대 학자들로부터 비난을 받기는 했지만, 순자의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사유를 통해 유가의 본질인 인본주의가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순자는 사후에 몹시 불행해졌습니다. 죽은 뒤에 그에 대한 평가가 완전히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송나라 이후 성리학자들은 공자의 맥을 정통으로 이은 사람으로 맹자를 꼽았고, 그 뒤로는 도통이 끊어졌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평가가 나온 근본적인 이유는 순자가 인간의 본질을 악하다고 규정했기 때문입니다. 그 뒤 현대로 들어오기 직전까지 순자는 사상에서 거의 매장되다시피 했습니다.

순자의 사상을 잘 나타내고 있는 책이 “순자”입니다. “순자”는 본래 323 편이었다고 하는데, 한나라 때 유향이 32 편으로 정리했습니다. 책의 편제는 대화체가 많은 논어나 맹자와는 달리 논문식으로 되어 있으며, 제자들의 기록이라고 짐작되는 일부분을 빼면 대부분 순자가 직접 쓴 글로 보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예기”가운데 많은 부분을 순자가 지은 것으로 보기도 하고, 증자가 그의 문인들과 함께 지었다고 하는 “대학”도 순자의 글로 보기도 합니다. “순자”에 들어 있는 대부분의 글은 표현이 소박하며 꾸밈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글의 전개 방식이 체계적이며, 비교적 논증이 세밀합니다. 이 점은 순자의 철학이 객관적 방법론 토대 위에 서 있음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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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악설

 

강의실에서 학생들에게 사람의 본성이 착하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면 악하다고 생각하느냐 하고 물으면, 착하다고 대답하는 사람이 훨씬 많습니다. 이 점은 철학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의 본성을 선으로 규정한 철학자가 대부분입니다. 그렇지만 사실 어떤 사람이 인간의 본성을 착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그렇게 생각하는 그 사람 자신이 과연 착하냐 하는 것은 별개 문제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본성을 악하다고 보는 문제 역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 자신이 악한 사람인가의 문제와는 별개입니다. 그런데도 인간의 본성이 착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이상한 눈으로 보기 마련입니다. 아마 이런 탓이었을까요? 순자는 생존 당시를 빼놓고는 역사적으로 별로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특히 송나라 이후의 유학자들은 순자를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순자는 무슨 근거로 인간의 본성을 악하다고 한 것일까요? 순자도 맹자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본성을 선천적인 것으로 규정합니다. 본성이란 배우거나 노력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인간의 도덕적인 측면에 주목한 맹자와 달리 순자는 배고프면 먹고 싶고, 추우면 따뜻하게 하고 싶고, 피곤하면 쉬고 싶은 인간의 자연적이고 생리적인 욕구에 주목했습니다. 이 욕구는 귀가 좋은 소리를 듣고 싶어하고, 눈이 좋은 빛깔을 보고 싶어하는 감각 기관의 이기적 욕구와도 통합니다. 순자는 이러한 생리적 욕구에 바탕한 이기심이 누구에게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 욕구대로 간다면 다툼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순자가 볼 때 이러한 인간의 본성이 그대로 나타난 것이 춘추 전국 시대의 혼란이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본성을 악하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사람들이 악한 행위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행동하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일하고 있다고 해 봅시다. 피곤하면 쉬고 싶은 게 인간의 생리적 욕구입니다. 그 욕구대로라면 아버지와 자식 사이라도 일을 하다 피곤해지면 서로 상대방에게 남은 일을 맡기고 자기는 얼른 들어가 쉬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실제 행동은 반대로 나타납니다. 서로 자기가 남은 일을 다 할 테니 먼저 들어가 쉬라고 합니다. 이처럼 스스로 자신의 악한 본성을 거스르는 착한 행위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순자는 인간의 마음 작용을 성, 정, 려, 위의 4부분으로 나누었습니다. 이 4부분은 마음이 움직이는 순서이기도 합니다. 이 4 단계가 구체적으로 무엇이며,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살펴봅시다.

첫 단계인 성은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부분으로서, 삶의 자연스러운 본질이자 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본성입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배고프면 먹고 싶고, 목마르면 마시고 싶고, 피곤하면 쉬고 싶은 생리적 본성입니다.

두번째 단계인 정은 밖에 있는 사물들과 만나서 생기게 되는 감정입니다. 좋다, 나쁘다, 기쁘다, 노엽다, 슬프다, 즐겁다 하는 것들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세 번째 단계인 려는 구체적인 감정이 생긴 뒤에 어떻게 할 것인가를 선택하는 문제입니다. 사람의 사고 작용에 해당하는 셈입니다.

네번째 단계인 위는 선택이 끝난 후 실행해 나가는 의지적인 실천입니다.

위에서 말한 4 단계를 구체적인 상황과 연결해서 생각해 봅시다. 지금 내가 3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못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본성은 끊임없이 먹고 마시고 싶다는 방향으로 움직일 것입니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생리적 현상입니다.

그때 떡과 음료수를 본다면, 입에 침이 고이면서 저 떡을 먹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저 음료수를 마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감정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당연히 먹을 자격이 있는데도 누군가가 부당하게 먹지 못하게 한다면, 노여워질 수도 있고 슬퍼질 수도 있습니다. 또 내게 먹을 차례가 돌아오면, 기쁘다 즐겁다 하는 감정이 생길 것입니다.

그렇지만 인간은 본성과 감정대로 움직이지만은 않습니다. 내 곁에 나보다 더 불쌍한 어린아이나 농인이 있다면 고민에 빠질 것입니다. 모른척하고 나 혼자 먹어 버릴 것인가, 아니면 나누어 먹을 것인가? 먹을 것이 많지 않으니까 그냥 다 주어 버릴 것인가? 만약 그 자리에 주인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음식들이 누군가의 소유물이라면 다른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허락을 받기 위해 주인이 올 때까지 기다릴 것인가, 아니면 먼저 먹고 볼 것인가?

이런 고민의 결과는 여러 가지로 나올 수 있습니다. 나 혼자 다 먹어 버릴 수도 있고, 불쌍한 어린이나 노인과 나누어 먹든가 다 주어 버릴 수도 있습니다. 사실은 나 혼자 먹어 버리거나, 주인이 오지 않더라도 그냥 먹고 달아나는 것이 본성에 충실한 행동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부분 그렇게 행동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 본성의 욕구와 반대 방향으로 행동을 선택하고 굳센 의지로 본성을 억누르면서 참아내기도 합니다. 이렇게 참는 작용이 순자가 마음의 네번째 작용으로 파악한 위입니다.

사람들의 심리 상태에 대한 순자의 분석은 심리학자를 방불케 합니다. 순자는 본성대로 가면 결과가 악이고, 본성을 거스르는 의지적 실천대로 가면 선이기 때문에 성은 악이고, 위는 선이라고 합니다. 순자가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고 보았다고 해서 본성대로 살자고 한 것은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의지적 실천을 통해 본성이 가져올 악한 결과를 변화시켜 갈 것이냐가 문제였습니다.

따라서 순자의 철학이 갖는 가치는 위에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순자의 철학은 의지에 기초한 실천 철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위라는 글자를 한자 사전에서 찾아보면 거짓이라는 뜻이 가장 먼저 나옵니다. 그러나 위자의 의미를 거짓이라는 뜻으로 새기면 순자의 철학은 죽습니다. 여기서의 위는 사람 인과 할 위를 합쳐 놓은 글자입니다. 사람이 하는 것, 즉 의지적인 실천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순자의 철학은 철저히 인간 중심적이었으며, 그 속에는 인간의 의지적인 노력에 대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순자는 인간의 본성을 착하다고 한 맹자의 주장은 본성을 제대로 알지 못한 것이라고 비판합니다. 사람이 타고난 본성과 후천적인 의지에 의한 노력을 구분하지 못한 것이라는 지적입니다. 그리고 맹자의 말대로 본성이 본래 착한 것이라면, 현실의 인간은 대부분 태어나면서 바로 자신의 착한 본성을 잃어버리게 되는 셈이라고 비판합니다. 또 인간이 본래 착한 존재라면 애초부터 훌륭한 임금이나 좋은 제도 따위는 필요가 없게 된다고도 했습니다.

앞서 보았듯이 맹자는 인의 도덕이 인간에게 선천적으로 갖추어져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증거로, 어린아이가 물에 빠지려는 것을 보았을 때 마음속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불쌍하게 여기는 감정을 들었습니다. 인간의 본성이 착하다는 주장의 근거를 인간 내면에서 찾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순자는 현상에서 출발하여 인간 내면으로 거슬러 들어가서 본성이 악하다는 규정을 내립니다. 순자는 사회가 잘 다스려지는 상태는 선이고, 혼란한 상태는 악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현실은 혼란 상태로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현실적 혼란은 인간의 이기적 욕구 때문에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순자는 맹자와 달리 선악을 가르는 기준을 인간 외적인 현실에 두었습니다.

맹자는 모든 인간의 본성이 착하다고 하면서도 실제적인 강조점은 군자에게 두었습니다. 인간의 본성에 생리적인 면이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그러한 생리적인 면을 본성으로 보는 사람들은 소인이고, 군자는 도덕성만을 본성으로 본다고 하였습니다. 맹자는 사실상 군자의 도덕성만을 인정한 것이며, 일반 백성들에 대해서는 도덕성에 근거한 군자의 교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 정도의 토양만을 인정한 셈입니다. 그렇다면 순자는 어떨까요? 순자가 본래부터 악하다고 한 그 본성은 누구의 본성을 가리킬까요?

순자는 어떤 사람인가를 구분하지 않고 모든 사람의 본성이 악하다고 합니다. 가장 훌륭한 사람의 표본이었던 요순의 본성과 가장 악한 사람의 표본이었던 걸임금이나 도척의 본성이 같다고 보았습니다. 순자가 같다고 본 본성은 당연히 생리적, 감각적인 본성입니다. 그렇다면 도덕성은 본성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현실에서 부차적인 노력인 셈이 됩니다.

물론 순자도 맹자처럼 군자와 소인을 나눕니다. 그렇다면 이런 구별은 무엇을 기준으로 한 것일까요? 순자는 사람의 성품과 지능, 그리고 이기적인 욕심은 군자와 소인이 같다고 보았습니다. 다만 그것을 구하는 방법이 다를 뿐입니다. 소인은 본성이 하고자 하는 욕구를 그대로 따라가지만, 군자는 교육과 예를 통해 절제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것은 본성을 거스를 수 있는 의지적인 노력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입니다. 순자가 그러한 의지적인 노력을 제도화하려고 한 것이 예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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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홀로서기

 

당시 사람들의 생각 속에서 정치와 가장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은 하늘이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늘이 덕이 가장 높은 사람을 뽑아서 통치를 맡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어진 임금이 나온 것은 하늘의 뜻이고, 포악한 임금이 망한 것도 하늘의 뜻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사실상 지배 권력이 자신들의 통치를 합리화하기 위해 만들어 낸 이데올로기였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상가들이 이런 생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고, 일반 민중들은 운명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재해나 일식, 월식 같은 급작스러운 자연 현상의 변화가 보이면 하늘로부터 다스림을 위임받은 임금들의 덕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순자는 인간과 하늘이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합니다. 잘 다스려지느냐 그렇지 못하냐는 다만 통치자가 하기에 달려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자연 현상은 자연 현상일 뿐이고, 인간 행위는 인간 행위일 뿐입니다. 이러한 순자의 이해는 하늘을 도덕 근원으로 이해한 맹자와 전혀 다릅니다. 순자는 이러한 주장을 통해 하늘로부터 인간을 독립시켰습니다.

순자는 하늘에 빌고 매달리는 행위를 비웃었습니다. 기우제를 지내니까 비가 왔다고 합시다. 순자는 이런 일은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고 합니다. 기우제를 지내지 않았는데도 비가 오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낮과 밤이 끊임없이 바뀌는 것이나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이 변하는 것도 인간의 삶과 인과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순자는 이러한 주장을 통해 인간을 하늘과 대등한 자리로 끌어올렸습니다.

하지만 순자는 기우제 같은 것도 아주 의미가 없다고 보지는 않았습니다. 제례와 상례 그리고 점을 치는 행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순자가 이런 일에 대해 의미를 둔 것은 미신을 믿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순자는 이런 행위들에 대해 문화적인 기능으로서의 사회적 가치를 인정하였습니다. 일반 민중들은 그런 일이 귀신이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지식인들은 감정을 다스리기 위해 삶을 장식하는 행위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당시는 일반 민중들에게까지도 상례와 제례가 보편화되어 있었습니다. 순자는 상례란 삶과 죽음의 의미를 밝히고 죽은 이를 슬픔과 존경으로 떠나 보내는 것으로,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꾸미는 행위라고 규정했습니다. 제례에 대해서도 죽은 사람을 그리워하는 산 사람의 감정을 꾸미는 행위라고 했습니다.

순자는 사람에게 있는 지성과 감정을 다 인정한 셈입니다. 지성적인 판단으로 보면 귀신이란 없으며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일뿐입니다. 그러나 감정의 측면에서 보면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에는 불안해질 수밖에 없고, 불안한 감정이 지나치면 아무것에나 의지하려는 미신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또 가까운 사람이 죽으면 슬퍼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이 감정을 잘 조절하지 못하면 혼란이 올 수밖에 없습니다. 순자는 지성과 합리를 강조했지만, 인간의 이런 정서적인 부분도 그냥 버리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경우 예식을 통해 감정을 조절하고 순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그런 의미에서 제사, 점, 기우제 등을 인정한 것입니다.

하지만 순자는 본질적으로 하늘을 자연적인 현상으로만 이해했습니다. 하늘은 사계절의 변화를 보이는 기계적인 하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땅은 사람이 사는 데 필요한 여러 가지 자료를 제공해 주는 존재입니다. 그 가운데 사람이 있는 것이며, 사람은 만물을 다스릴 수 있는 방법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늘, 땅과 대등하게 만물의 변화에 참여하는 존재입니다. 순자의 이러한 생각은 인간의 의지적인 노력에 대한 강조로 이어질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늘과의 관련성을 부정한 것은 프로메테우스처럼 하늘에 맞서는 인간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하늘로부터 벗어난 인간을 세우는 힘은 무엇일까요? 순자는 결국 그 힘을 인간 자신에게서 찾았습니다. 앞에서 본 의지적인 노력도 여기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순자는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든 일을 하늘의 뜻에 맡겨 놓고 운명이라고 생각하던 데서 벗어나, 인간이 반드시 하늘을 이겨야 한다는 과감한 주장을 내놓았던 것입니다. 순자의 철학은 운명론에 대한 부정이었고 인문 정신의 극치였습니다. 오늘날 중국에서는 순자의 이런 점에 주목해 유물론 철학의

창시자라고 평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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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를 위한 규범: 예

 

순자는 질서 잡힌 사회는 좋은 것이고 혼란스런 사회는 나쁜 것인데, 인간이 타고난 본성대로 가면 혼란이 올 수밖에 없지만 자신의 악한 본성을 거스르는 의지적 행위를 통해 질서 있는 사회로 갈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의지적인 행위를 제도화한 것이 예입니다. 그는 예에 의한 통치를 강조했습니다.

순자는 인간이 사회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많은 물건들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혼자서 그 여러 가지 물건들을 일일이 만들어 가면서 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사회와 따로 떨어져 혼자 살면 가난해질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이것이 사람들이 사회를 이루고 사는 까닭입니다. 순자는 또 사람들이 힘센 것으로 따지면 소를 따를 수 없고, 달리기에서 말을 따를 수 없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말과 소를 부리면 살 수 있는 까닭은 사회 조직을 이루고 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순자는 사람들이 사회를 이루고 살면서도 화합하지 못하면 소용이 없다, 모두가 화합하여 하나가 되면 사회의 힘이 풍부해지고 강해지며 그 결과로 어떤 것이든 이겨낼 수 있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고 그 욕심을 채울 수 있는 재물은 부족하기 때문에 그대로 두면 서로 더 많이 갖기 위해 다툴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을 다투지 않고 화합하게 할 수 있는 통제 수단은 무엇일까요? 이것이 바로 예입니다. 순자는 사람에게 예가 없다면 짐승과 다를 것이 없다고 합니다. 남자와 여자, 부모와 자식의 구분 자체는 자연적인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남자와 여자 사이의 분별, 부모와 자식 사이의 아껴줌은 인위적인 노력입니다. 이러한 인위적인 노력이 짐승과 다른 점입니다. 순자는 예를 통해 인간의 행위를 공리주의적 입장에서 규제하려 하였습니다. 이 경우 예는 많은 사람들의 욕구를 최대한 고르게 채우기 위한 방법인 셈입니다. 그리고 앞에서 보았듯이 의식과 예절을 통해 사람들의 감정을 순화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회의 질서를 지키기 위해서 요청되는 행위 규범인 예의 제도는 누가 만드는 것일까요? 예 자체는 의지적 노력을 구체화시킨 것일 뿐 인간의 본질은 아닙니다. 따라서 타율적인 규제일 수밖에 없습니다. 순자는 구체적인 예의 제도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성인이라고 했습니다. 성인이란 과거의 훌륭한 임금들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사회는 항상 바뀌는 것이고, 예는 언제나 구체적이며 현실적이어야 합니다. 사회가 바꾸면 여기에 따라 구체적인 예의 제도도 바뀌어야 합니다.

순자는 예가 바뀐다는 사실에 인정하였습니다. 이러한 생각의 핵심은 현실 중시에서 찾아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당시는 변법이 행해지던 사회였고, 변법의 생명은 그 이전의 제도와 예법을 지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맞는가의 시의성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어떠한 제도도 현실에 맞지 않는다면 정당성을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같은 순자의 현실 중시 관점은 복고적인 모습을 보였던 맹자의 관점과 다릅니다. 순자는 적어도 현실 중시, 아니면 미래 지향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과거에 만들어진 예의 제도만 강조한다면 권위주의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권위주의는 변화를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창조적인 지성을 묵살하게 됩니다. 그러나 순자는 예의 제도가 바뀔 수 있다고 봄으로써 예의 탄력성을 인정한 것입니다.

사회 변화에 따라 예전의 훌륭한 임금들이 만들어 낸 예의 제도를 바꿀 수 있는 살들은 또 누구일까요? 순자는 오늘날의 임금들이 옛 훌륭한 임금들을 이어받아 예의 제도를 새롭게 만들 수 있다고 했습니다. 순자는 예를 만들고, 그 예를 가지고 남들을 가르치는 역할이 통치자들의 몫임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물론 이 경우 그러한 통치자들은 후천적인 인위적 노력을 통해 자신이 타고난 본성의 악한 본질을 극복한 사람이어야만 합니다. 따라서 힘이 센 군주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군자를 의미합니다.

이 같은 순자의 주장에는 사람의 본성이 악하다는 사실을 강조함으로써 통치자의 권위를 더 보장해 준 면이 있습니다. 즉 본래의 악한 모습을 극복하고 남을 다스리는 지위에 오른 사람만이 선한 것이며, 그로부터 통치받는 사람들은 모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본질적으로 악한 본성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고 본 것입니다.

순자가 이처럼 모든 인간의 본성을 악하다고 규정하고, 이 악을 극복할 수 있게 하는 예에 의한 교육을 성인의 몫으로 돌리고, 그 구체적인 실현을 통치자 한 사람에게만 인정한 것은 당시 시대적 상황과 연관하여 이해해야 합니다. 순자가 살던 시기는 전국 시대 말기입니다. 전국 시대 말기는 양면성이 있었습니다. 한쪽으로는 혼란이 더 심해졌지만 동시에 다른 한쪽으로는 통일의 기운이 무르익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통일의 가능성은 덕에 의한 것보다는 변법에 기초한 무력에 의해서였습니다. 비록 무력 통일이라 하더라도 이것은 혼란의 종식인 동시에 법질서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순자는 혼란의 원인이 인간의 무한한 욕구에 있다고 보았고, 동시에 통치자의 교화가 무한한 욕구들을 조절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순자는 이런 간절한 희망을 가졌을 것입니다.

‘지금 통치자들이 모두 자신의 생리적, 감각적 욕구대로 전쟁과 침략을 일삼고 있지만, 통일과 동시에 자신의 본성이 더 이상 욕구대로 움직이지 않게 인위적인 의지로 억누르면서 나아가 모든 사람들을 욕구가 다시 일어나지 않게 다스려 나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 같은 통일이 가능한 상황과 통일을 가능하게 할 현실적 힘의 주체에 대한 순자의 기대를 ‘후왕 사상’이라고 합니다. 후왕이란, 과거의 훌륭한 임금을 뜻하는 ‘선왕’에 대한 반대 개념으로 현실의 군주를 의미합니다.

후왕 사상을 당시의 시대 상황과 연관해서 생각해 봅시다. 전국 시대 후반에 올수록 주나라가 임명했던 구 귀족의 몰락이 심화되고, 신진 지주 계층의 성장이 두드러집니다. 아울러 구 귀족들을 돕던 관리들의 세습도 점점 없어져 갔습니다. 따라서 그나마 지탱되어 오던 구 제도나 문화 유습은 급속히 무너져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같은 사회 변화는 모든 제도의 변화를 요구했습니다. 빠른 속도로 변하는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면 아무리 훌륭한 사상이라 해도 도태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이 순자에게 과거의 제도에 더 이상 집착하지 않는 강한 현실 의식을 주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 결과가 바로 후왕 사상이었습니다.

후왕은 현실적으로 철저한 세습제의 부정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순자가 말한 후왕은 지금 있는, 또는 앞으로 올 군주를 의미합니다. 순자는 주나라의 통치가 이미 무너졌다는 현실 긍정의 토대 위에서, 자신의 본능적 욕구를 의지적인 노력으로 극본하고 동시에 강력한 통치력을 가진 군주를 후왕이라고 했습니다. 그럼으로써 그의 통치가 피치자 모두의 생리적, 감각적 욕구를 잠재우고 선왕의 훌륭한 정치를 현실에 맞추어 되살려 낼 수 있기를 기대한 것입니다.

순자가 이처럼 사회의 통제 수단으로 강조한 예는, 한비자와 이사에 의해 법치주의를 강조하는 생각으로 발전해 갔습니다. 하지만 법가 사상은 순자의 예에 대한 생각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병으로 치면 예는 사전 예방이고, 법은 병에 걸린 다음에 하는 치료입니다. 또 순자는 예의 제도가 바뀔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법가 사상이 말하는 법은 불변이어야 했습니다. 순자의 후왕 사상 또한 신진 지주 계층에서 올라 온 당시 모든 임금들의 권위를 인정한 것이 되어 후대 통일 국가의 통치자를 옹호하는 이론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순자는 폭군들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세습적 군주들의 권위에 대한 부정은 곧 폭군에 대한 부정이기도 했습니다. 순자는 서민도 재상이 될 수 있고, 왕이나 귀족들도 서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당시는 이미 이런 경우가 많이 있었습니다. 순자는 군주란 민중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며, 민중의 뜻을 거스르는 폭군은 혁명의 대상이라고 했습니다.

순자는 폭군을 길길이 뛰는 난폭한 말이나 철모르는 갓난아기에 비유하였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을 배를 띄우는 물에 비유하였습니다. 그래서 백성을 위하지 않는 군주는 물이 배를 뒤엎듯이 혁명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순자의 혁명론은 맹자의 혁명론과 다릅니다. 맹자의 혁명론도 민중이 따르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에 민중의 뜻에 근거를 둔 것이기는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하늘의 뜻이 그렇게 나타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순자는 하늘을 끊어 버렸습니다. 순자의 혁명론은 직접적인 민중의 의지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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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자의 논리학

 

순자는 고대 논리 체계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습니다. 순자의 논리는 공자의 정명론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공자와 맹자의 논리가 도덕적인 목적을 그 안에 담고 있다면, 순자는 순수하게 논리적 관점으로 발전시켰습니다. 당시에는 명가와 후기 묵가들의 역설적 논리가 지배적이었습니다. 순자는 이들의 논리를 극복하기 위해 명과 실의 문제를 따진 것입니다. 순자는 명이란 무엇이며 어디에서 생겨났는가, 그리고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바른 방법인가를 탐구하였습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순자의 ‘명실론’은 현대의 논리학과 여러 가지로 비슷합니다.

순자는 먼저 지와 지를 구별하였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지와 지를 구별 없이 사용하였습니다. 순자는 이러한 습관적인 부분을 과감하게 정리하고 두 개념을 엄격히 구분합니다. 순자에 따르면 지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앎의 능력입니다. 그리고 지는 사람이 안 것과 실제 대상이 들어맞았을 때 쓰는 용어입니다. 순자는 인간의 인식 기능을 두 가지로 나누었습니다. 하나는 감각 기관이고 다른 하나는 마음입니다. 감각 기관은 바깥 사물을 받아들이는 통로이고, 마음은 감각 기관을 통해 받아들인 사물을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기능을 합니다.

마음의 작용을 더 세분해서 보면, 먼저 감각 기관이 받아들인 사물을 비슷한 것끼리 나누고 그것들을 이전에 가졌던 경험과 맞추어 봅니다. 이 과정에서 같은 것도 있고 다른 것도 나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비로소 인식이 성립한다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감각 기관이 받아들이고도 알지 못하거나 또는 마음이 해석해 내지 못하는 것을 우리는 ‘모른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인식 대상을 구분하면서 생기는 것이 명입니다. 사물의 명칭이 생기는 이유는 편의라는 필요에 의해서라고 합니다. 그 필요성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하나는 윤리적 이유이고, 다른 하나는 논리적 이유입니다. 윤리적 이유란 명칭을 통해 귀한 것과 천한 것을 구분하기 위함이고, 논리적 이유란 같은 것과 다른 것을 구분하기 위함입니다.

명칭은 약속입니다. 새로운 것이 생겼을 때 과거의 어떤 것과 같으면 같은 이름을 붙이고, 다르면 다른 이름을 붙입니다. 그리고 가장 좋은 명칭은 간단하면서도 쉽게 이해가 되고, 사물을 직접적으로 가리켜 혼동이 없는 이름입니다.

그 밖에 알맞는 이름은 아니지만 습관적으로 써 오는 명칭은 실명이라고 했습니다. 순자는 명칭도 여러 종류로 나누었습니다. 말이나 돌 같은 단순 명사와 흰 말이나 단단하고 흰 돌 같은 복합 명사가 있습니다. 순자는 단순 명사를 단명이라 했고, 복합 명사를 겸명이라고 했습니다.

또 공명과 별명이라는 구분도 있습니다. 공명은 보편적인 명칭이고, 별명은 구분하는 명칭입니다. 예를 들어 동물이 공명이라면, 사람이나 말은 별명입니다. 순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더 이상 포괄할 수 없는 통칭을 대공명이라 했고, 더 이상 세분할 수 없는 명칭을 대별명이라고 했습니다.

순자는 이런 기반 위에서 묵가나 명가의 궤변적인 논리를 비판합니다. 묵가의 주장 가운데 도둑을 죽이는 것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 있습니다. 순자는 이러한 논리는 도둑이 사람에 포함되는데도 도둑과 사람의 구분을 모호하게 하여 명칭을 가지고 명칭을 혼란시키는 것이라고 비판합니다.

순자는 혜시가 제시한 산과 연못이 똑같이 평평하다는 논리도 비판합니다. 사물을 구체적이지만 명칭은 추상적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높은 지대에 있는 연못이 낮은 지대에 있는 산보다 고도가 높을 수는 있지만, 산과 못이라는 일반 명칭은 일반적인 법칙에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혜시의 논리는 구체적인 사실로 일반 명칭을 혼란시킨 것이라고 지적하였습니다. 또 공손룡의 흰 말은 말이 아니라는 논리도 비판합니다. 흰 말은 말 속에 포함되는 것이므로, 이런 논리는 명칭만을 가지고 사실을 혼란시키는 것이라고 비난하였습니다. 순자는 이 같은 잘 못된 논리들이 논쟁과 시비거리로 발전하는 까닭은 근본적으로 훌륭한 임금이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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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자 철학의 가치

 

순자가 살던 시대는 주나라가 완전히 몰락하던 전국 시대 말기였습니다. 공자 때에도 이미 겸병 전쟁의 주체가 점점 아래 계층으로 이동하는 현상을 나타냈지만, 전국 시대에 이르면 구 귀족만이 아니라 새로운 지주 계층들까지 등장하면서 혼란이 더 심해집니다. 그리고 이 같은 상황은 기존 통치 세력과 신흥 지주 계층의 대립으로 압축됩니다. 구 귀족은 봉건 통치의 부활을 꿈꾸면서 예치를 내세웠고, 신흥 지주 계층은 개혁을 표방하고 법치를 주장했습니다.

순자는 이런 상황에서 예에 의한 통치를 주장하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법에 의한 통치 이론을 완성시킨 제자들, 한비자와 이사를 통해 열매맺게 됩니다. 역사의 발전이 가져온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순자의 사상은 위에서 본 것 같은 사회적 배경에서 나왔습니다. 순자 사상의 특징은 철저하게 인간의 의지를 강조한 것입니다. 순자는 사람의 본성을 악하다고 했지만, 그 악한 본성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인간 자신의 의지적인 노력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노력의 구체적인 제도로 예제의 부활을 주장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단순한 복고가 아니라 현실의 임금들이 당시에 맞는 예의 제도를 만들어서 피치자 모두를 교화시켜 가기를 바랐습니다.

순자는 자신의 철학에 여러 가지 가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인간의 본성에 대한 신뢰가 없었다는 이유 때문에 동양의 프로메테우스가 되어야만 했습니다. 카우카수스 절벽에 매달려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던 프로메테우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을까? 아니면 인류를 위한 자신의 행동이 옳았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을까?

순자는 자기보다 먼저 유가를 높였던 맹자를 혹평하였습니다. 맹자는 글과 말만 뛰어났을 뿐 현실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덕을 강조하기는 했지만 오히려 유가의 몰락을 재촉했다는 것입니다. 순자는 유가가 몰락한 책임을 맹자에게 물었던 것입니다.

순자는 날카로운 눈으로 인간의 어두운 면을 집어내고 그 현실적인 처방을 제시하였습니다. 순자는 인간을 파헤쳐 어두운 구석들을 다 끌어냈습니다. 마치 판도라의 상자에 들어 있던 불행들처럼. 그러나 그 제일 밑에 희망을 남겨 놓았습니다. 착한 일을 행하면서 본성을 거스를 수 있는 인위적인 의지가 그 희망입니다.

 

 

법가: 인간을 조직하고 인간을 활용한다

 

이회는 위나라 문후에게 벼슬하여 태수가 되었다. 그는 백성들에게 활을 보급시킬 생각으로 이런 포고령을 내렸다.

“소송에서 판결을 내리기 어려울 때는 쌍방에게 활로 과녁을 쏘게 해서 맞춘 사람을 이긴 것으로 하고, 못 맞춘 사람을 진 것으로 한다.”

포고령이 나붙자 사람들은 너나없이 활을 배우기 시작하여 밤낮을 쉬지 않게 되었다. 이윽고 진나라와 전쟁이 일어났을 때, 적을 여지없이 쳐부수고 승리하였다. 모든 사람이 다 활을 잘 쏘았기 때문이다.

법가는 중국 고대의 여러 학파들 중에서 가장 현실적이고 실천성이 강한 이론을 냈습니다. 춘추 전국 시대의 제가 백가 가운데 현실에 가장 적중했던 이론이 법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곱 나라로 갈라져 서로 싸우던 상황을 진나라가 통일하고 전국 시대를 마감한 것은 법가의 이론에 힘입은 바 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법가가 모든 면에서 다른 학파보다 뛰어나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당시의 현실적 모순을 이해하고 해결하는 데 비교적 과학적인 인식을 가졌던 것이 법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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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이기적 동물이다.

 

한비자를 비롯한 법가 사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이론은 인간의 본성에 관한 생각입니다. 한비자가 순자의 학문과 연관된다고 하는데, 그것은 바로 순자의 성악설을 흡수하기 때문입니다. 순자 ‘성악’편의 첫 문장은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 인간이 선한 것은 위다”로 시작됩니다. 여기서 ‘위’는 ‘거짓’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인간의 노력’을 뜻합니다. 순자의 이 명제에서 중점은 ‘인간의 노력’에 있습니다.

법가 사상은 인간을 근본적으로 이기적 동물로 보았습니다.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도 이익을 탐하는 욕심으로 물들어 있다고 합니다. 한비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는 사랑 말고 그 무엇이 있다. 아들이 태어나면 부모는 서로 반가워하고, 딸이 태어나면 죽일지도 모른다. 아들과 딸은 다같이 어머니의 자궁에서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일 때는 기쁨이 따르고, 딸일 때는 죽음이 따르는 것은 어째서인가. 부모는 나중에 편할 것을 생각하고 장기적 이익을 계산한다. 부모까지도 자식과의 관계에서 이해 타산적인 계산을 하고, 이에 따라 아들과 딸을 다르게 대하는 것이다.

 

역사학자들은 중국에서 모계 사회가 부계 사회로, 즉 가부장제로 바뀌는 시기를 대개 기원전 11세기 경의 은주 교체기로 봅니다. 따라서 한비자의 시대에는 이미 부권 사회가 확립되어 있었습니다. 또한 농업 사회에서 사람(노동력)은 매우 중요한 재산이었습니다. 아들은 나중에 자라서 일손을 하나 데려오지만, 딸은 커서 다른 집으로 시집가 버리니 손실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같은 개인주의와 자유 경쟁의 자본주의 사회에 살면서도 부모 자식의 관계가 이기적이라고 말하기를 꺼리는 것을 생각하면, 법가 사상가들의 주장은 놀라울 정도로 철저합니다.

이익을 추구하는 인간의 마음을 인정한 위에서 이론을 펴는 것이 법가의 분명한 입장입니다. 그들은 이해 타산을 따지는 것을 인간의 본래 모습이 아니라고 하는 일체의 이론을 진실을 숨긴 이론으로 봅니다. 한비자의 주장을 더 들어 보겠습니다.

 

하인이 주인을 위하여 일하는 것은, 그가 충실하기 때문이 아니라 일에 대한 보수를 받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주인이 하인을 잘 대우하는 것은 그가 친절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인이 열심히 일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생각은 이용 가치에 집중되고, 서로 자기의 이익만을 도모한다.

 

사람은 이기적 목적으로 주고 받는다. 이해 관계가 맞으면 낯선 사람이라

할지라도 서로 화목하게 살 것이고, 이해가 충돌한다면 아비와 자식 사이라도 서로 충돌할 것이다.

 

뱀장어는 뱀을 닮았고, 누에는 송충이와 흡사하다. 사람들은 뱀을 보면 깜짝 놀라고, 송충이를 보면 소름이 오싹 끼치지만, 고기잡이는 뱀장어를 손으로 주무르고, 여자들은 누에를 손으로 만진다. 이득이 생기기만 하면 사람은 누구나 최고의 용사가 되는 것이다.

 

수레 만드는 기술자는 사람들이 모두 부귀해지기를 바라고, 관을 짜는 기술자는 사람들이 일찍 죽기만 기다린다. 수레 만드는 사람이 더 착하고 관 만드는 사람이 더 악해서가 아니다. 사람들이 부자가 되지 않으면 수레가 팔리지 않고, 사람들이 죽지 않으면 관이 안 팔린다. 종사하는 일의 업종에 따라 이해 타산이 서로 다르다. 이해 때문에 결과적으로 사람이 선해질 수도 악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인간 관계가 이익을 기초로 이루어진 것이 사실이고, 있는 그대로를 표현한 것이라 하더라도 사람들은 자신이 오직 이런 존재일 뿐이라는 주정에 동의하고 싶어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주장은 너무 적나라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동아시아의 역대 국가는 실제로 유가의 도덕적 인간관을 기초로 한 예악 문화와 법가의 사상이 동전의 양면처럼 어울리며 통치 질서를 유지하였습니다. 안으로 법가를 뼈대로 삼으면서, 겉으로 유가의 도덕 규범을 이용하여 통치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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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묘한 인간 심리를 이용한다.

 

법가의 사상은 이상을 말하거나 목표를 말하는 데서 맴돌지 않습니다. 바로 현실 속에서 효과를 얻어야 하고, 상대를 제압하고 일을 이루어야 합니다. 정치는 하나의 큰 사업이고, 사업의 방법 속에는 인간을 활용하고 이용하는 문제가 중요한 주제를 이룹니다. 사업가가 상대하는 인간은 다양합니다. 직위가 높은 사람도 있고 대중도 있습니다. 그러나 근원적으로는 이익을 추구하는 인간 심리와 변화하는 상황의 변수를 잘 읽는 것이 중심 문제입니다. 그것을 기초로 인간의 일반 심리와 약점을 교묘히 이용합니다.

 

미자하라는 미소년이 위나라 왕의 총애를 받고 있을 때, 그 어머니 병환이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고 왕의 수레를 몰래 훔쳐내어 급하게 타고 나간 일이 있었다. 위나라 법에는 국왕의 수레를 몰래 타면 다리를 자르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왕은 그의 효심이 극진함을 가상히 여겨 문책하지 않았다. 또 어느 날 위나라 왕이 과수원에 나들이할 때 그가 함께 수행하여 복숭아를 따서 먹었다. 그 가운데 아주 단 복숭아가 하나 있어 그것을 먹다가 말고 나머지 반쪽을 왕의 입에 넣어 맛보게 하였다. 왕은 이를 무례하다 아니하고 오히려 고맙게 여겼다.

그런 뒤 미자하가 늙고 보기 싫어지자 왕은 싫증이 나서 그 전에 한 일을 들추어 벌주었다. 미자하가 취한 행동은 달라진 게 없었으나 앞서 칭찬받은 그 일로 뒤에 벌을 받게 된 것은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의 변화에서 온 것이다.

 

방경이 현령이 되어 시장 관리 책임자를 시장에 순찰 보내게 되었다. 책임자를 내보내고 나서 다른 관리를 시켜 그를 다시 불러들인 다음, 잠시 같이 서 있다가 아무 말 없이 그대로 순찰하러 가도록 하였다. 시장 관리 책임자는 현령이 다른 관리에게 무언가 이야기를 한 것 같다는 생각에서 혹시 감시하고 있나 싶어 감히 나쁜 짓을 할 수가 없었다.

 

이회는 위나라 문후에게 벼슬하여 태수가 되었다. 그는 백성들에게 활을 보급시킬 생각으로 이런 포고령을 내렸다.

“소송에서 판결을 내리기 어려울 때는 쌍방에게 활로 과녁을 쏘게 해서 맞춘 사람을 이긴 것으로 하고, 못 맞춘 사람을 진 것으로 한다.”

포고령이 나붙자 사람들은 너나없이 활을 배우기 시작하여 밤낮을 쉬지 않게 되었다. 이윽고 진나라와 전쟁이 일어났을 때, 적을 여지없이 쳐부수고 승리하였다. 모든 사람이 다 활을 잘 쏘았기 때문이다.

 

진평공이 가까운 신하들과 술을 마시다가 문득 한숨을 지으며 말했다.

“임금이 되었다고 해서 이렇게 할 즐거움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무슨 소리를 하든 내 말을 거역하는 사람이 없는 것이 즐거움이라면 즐거움이다.”

그러자 옆에 앉아 있던 장님 악사인 사광이 거문고를 번쩍 들어 평공을 꽉 찌르려 했다. 평공이 급히 피하는 바람에 거문고는 벽을 허물어뜨렸다. 평공이 놀라서 물었다.

“너는 지금 누구를 치려고 했더냐?”

“방금 옆에서 못된 소리를 하는 사람이 있었으므로 그를 치려 했습니다.”

“그게 바로 나다.”

“아아, 그런 말씀은 임금의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뒤에 일꾼이 허물어진 벽을 고치려 하자, 평공은 중지시켰다.

“그대로 두어라. 나의 교훈으로 삼겠다.”

 

“사기”에도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상앙은 높이가 세 키 되는 나무를 시장 남문에다 세우고 ‘이 나무를 북문에다 옮겨 놓는 자에게는 10금을 준다’고 글을 써 사람을 모집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깟 일에 10금을 줄 까닭이 없다고 생각하여 아무도 나서지 않았습니다. 다시 공고하기를 ‘이 나무를 북문에다 옮기는 자에게는 50금을 준다’고 하였습니다. 어떤 할 일이 없는 자가 이것을 옮기자 바로 50금을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백성을 속이지 않는다는 것이 잘 알려진 다음에 법령을 공포하자 그때까지 잘 시행되지 않았던 진나라 법령은 하루 아침에 백성들을 승복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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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은 극복되어야 한다.

 

현실 세계에서 서로 대립하고 있는 둘을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고, 결국 하나가 옳은 것으로 되어야 합니다. 유명한 한비자의 ‘창과 방패’ 즉 ‘모순’의 고사가 이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법가의 이러한 현실 인식은 상황의 변화에 따른 대응 방식의 변화를 강조하는 것이고, 이론이 현실의 변화를제대로 따라가지 못할 때별 의미를 가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론을 현실을 통하여 진위가 가려지고, 실제의 성과가 기준이 됩니다. 이것을 무시하면 신발을 맞추러 간 사람이 자기 발 크기를 재어 둔 쪽지를 가지고 오지 않았다고 신발 가게 앞에서 집으로 다시 돌아오는 우스꽝스런 일이 벌어집니다.

초나라에 창과 방패를 파는 사람이 있었다. 우선 그 방패를 자랑하기를 “나의 방패는 아주 견고하여 어떤 것으로도 뚫을 수 없다”고 하고, 곧 그 창을 칭찬하기를 “나의 차이 아주 예리하여 어떤 물건도 뚫지 못하는 것이 없다”고 하였다.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이가 말하기를 “너의 그 창으로 너의 그 방패를 뚫어

보아라. 어찌 되겠는가”라고 하니, 그 사람은 아무 말도 못했다.

무릇 꿰뚫을 수 없는 방패와 뚫지 못하는 것이 없는 창은 같은 시대에 함께

존립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유가의 주나라 봉건 제도를 회복하자는 주장과 계급 조화론에 대한 강한 비판입니다. 유가는 관리들에게 예를 적용하고, 민중들은 법을 적용하여 통치하는 구상을 이론화하였지만 법가는 관리들도 법의 적용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법가 사상은 중앙 집권적 정치 제도를 실현하면서 법질서의 확립과 사상의 통일을 중시하였습니다. 한비자는 당시의 지적인 무정부 상태는 “사회의 실상에 대한 혼란한 마음을 조성할 뿐만 아니라 나라에 대한 불신감도 일으킨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생산 노동에 참여하지 않는 이론가들은 사회의 부강에 보탬이 되지 못한다고 하고, 실용성을 기준으로 가치를 평가하였습니다.

 

오늘날 나라 안의 사람들은 너도나도 정치를 논하고 있고 관중과 상앙의 법률서를 가지지 않은 자가 하나도 없건만 토지는 자꾸 황폐해 간다. 이것은 농사를 이야기하는 사람은 많은데 쟁기를 드는 사람은 적기 때문이다. 나라 안의 사람들은너도나도 병법을 말하지만 우리의 군대는 자꾸 약해지고 있다. 이것은 병법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많으나 무기를 드는 사람은 적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주나라 왕을 위해 말 채찍에 그림을 그렸는데, 삼 년이 걸려서야 일을 끝냈다. 왕이 그것을 받아 보니 보통 채찍에 옻칠한 것과 조금도 틀리지 않았다. 왕이 버럭 화를 내니 그 사람이 말했다.

“두 길쯤 되는 높은 벽을 만들어 거기에 여덟 자 정도의 창문을 낸 다음 아침에 해가 떠오를 무렵 채찍을 그 창에 비추어 자세히 보십시오.”

왕이 들은 대로 방을 꾸미고 채찍을 보았더니, 거기에는 용과 뱀, 새와 짐승, 수레와 말, 그리고 그 밖의 여러 가지 모양들이 보기 좋게 새겨져 있었다. 왕은 여간 기뻐하지 않았다.

이 채찍에 그림을 그린 재주는 과연 놀라운 것이지만, 그것의 쓸모로 말하면 보통 채찍보다 나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

 

법가는 구체적인 정책론에서 당시의 다른 학파와 뚜렷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춘추 전국 시대에 남아 있던 세습적 신분제에 위한 옛 귀족의 지배를 반대하고 새로운 관료제의 확립을 통한 중앙 집권적 전제 국가의 창설을 목표로 삼았고, 법질서의 강화를 지향하였습니다. 또한 국가의 부강을 위해 농업을 장려하고 상공업을 억제하였으며, 군사력의 강화와 국토의 확장에 힘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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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변화한다.

 

한비자를 비롯한 사상가들은 다른 학파들의 복고적인 역사관에 반대하고 역사의 발전관을 주장하는 입장에 섰습니다. 공자를 이론의 최고봉으로 삼는 유가는 요순의 도를 내세우고, 노자를 이은 도가 학파는 황제를 으뜸으로 내세웠으며, 묵가학파는 치수 사업에 성공한 우임금을 자신들의 모범으로 내세웠습니다. 이처럼 이상적 모델을 고대에 설정하여 전통을 자랑하는 것은 역사적 유산과 전통 속에서의 안정에는 도움이 되겠지만, 사상의 발전과 새로운 변모에는 장애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태를 한비자는 변화의 역사관에 입각하여 강력히 규탄하였습니다. “법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바뀌어야 하고, 정치란 현재의 긴박한 사정에 부합해야 한다.”

‘수주대토’의 고사에도 이것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옛날 송나라에 농부가 있었다. 그 사람의 밭 가운데 나무 그루터기가 하나 있었는데, 어느 날 토끼 한 마리가 마구 달려와서 그루터기를 정면으로 들이받고 목이 부러져 죽었다. 그러자 이 농부는 쟁기를 버리고, 토끼가 또 와서 부딪쳐 죽기를 기대하며 서서 기다렸다. 그러나 당연히 더 잡을 수 없었고, 다른 사람들의 웃음거리만 되었다. 만약 우리가 옛날의 통치 방법으로 오늘날의 민중을 다스리려 한다면, 우리는 농부와 똑같은 웃음거리가 되는 것이다.

 

한비자의 이러한 주장은 법가 사상이 원대한 이상과 철학을 강조하기보다 사회 정치적 현실과 국면의 변화에 실천력 있게 대응할 수 있는 능률적 사고를 중시한 것임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실용성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현실적 인간 이해를 바탕으로 인간이 좇아야 할 준칙을 정하고, 사물의 실정을 측량하고 판단하여 옳고 그름을 명확히 밝히고자 한 사상이었습니다. 그들은 유가처럼 선험적인 도덕 원리나 추상적인 원리보다 객관적이고 대상화할 수 있는 기준을 세우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이제 법가 사상의 형성 과정을 통해 이 이론의 세부적인 측면을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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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가 사상의 선구자들

 

어떤 학자들은 법가 사상을 처음으로 정립한 사람은 기원전 7세기 제나라의 유명한 정승으로, 우리에게 ‘관포지교’란 고사로 잘 알려진 관중이라고 합니다.관중은 소금과 철에 세금을 매기는 등 여러 가지 제도를 시행하여 제나라를 동쪽에서 가장 부유하고 강대한 나라로 만들었고, 훌륭하고 효과적인 행정의 모범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지금 전해지는 “관자”라는 책은 대개 기원전 250 년 경에 법리학자들이 지은 것이라고 봅니다. 관중은 실제적인 정치가였으며, 그의 사상은 예의 범절, 정의, 분별과 절제 등을 강조하였는데 이것은 춘추 시대의 합리주의 사상의 특징을 가진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법가 사상에서 관중의 지위는 유가 사상에서 주공의 위치와 비슷합니다. 한비자도 역시 관중을 존경했습니다.

또 다른 중요한 인물은 기원전 536 년 경 처음으로 성문법을 공표한 정나라의 재상 자산입니다. 그가 집권하고 있을 때 민중은 모두 그의 개혁안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나라에는 질서가 잡히고 이웃 군주들은 정나라를 존경하는 태도로 대했다고 합니다. 관중이나 자산은 실제 정치 속에서 법가 사상의 모범을 보인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론적으로 법가 사상을 발전시킨 인물로서는, 조나라의 신도와 한나라의 신불해, 위나라의 상앙이 있습니다.

신도는 맹자와 같은 시대 사람으로 그의 중요한 이론은 ‘세’에 관한 주장입니다. ‘세’는 권세, 세력이라고 할 때의 ‘세’자인데, 한비자는 ‘세’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훌륭한 임금으로 기록된 요는 평민이었을 때 세 집을 다스리지 못하였고,

폭군이었던 직은 황제가 되어 온 천하를 혼란에 빠뜨릴 수 있었다. 이로써 나는 권세와 지위가 반드시 필요하고 지혜와 착함은 믿을 수 없는 것임을 안다. 착함과 똑똑함으로는 민중을 복종시킬 수 없으나 권세와 지위로는 민중을 복종시킬 수 있다.

 

이 주장은 유가의 덕이 있고 지혜로운 임금이 하늘의 명령을 받아 백성을 다스릴 자격이 있고, 덕이 있는 사람에게 임금의 자리가 돌아온다는 이론을 맞대놓고 반대한 것입니다.

“관자”에서는 ‘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습니다.

 

현명한 군자가 절대적 권능을 가지고 다스릴 때 신하들은 모든 비행을 삼간다. 그렇게 되면 신하들은 감히 군주를 속이려 하지 않는데 그것은 그들이 군주를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군자의 권능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민중은 기꺼이 봉사할 것인데 그것은 군주를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군주의 권능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높은 지위에 있는 현명한 군주는 민중을 다스릴 수 있으며, 절대적 권능을 가진 사람을 백관을 제어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민중과 백관은 명령에 복종하고, 군주의 지시 사항은 잘 시행된다. 군주는 존중을 받고 백관은 복종하게 된다. 그러므로 법에는 “군주는 높이고 백관은 천대한다. 그것은 특별한 애정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최고의 권능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유가에서 군주의 훌륭한 인격으로 관리들이 심복하게 하고 관리들도 훌륭한 인품으로 백성들을 심복시킬 수 있다고 한 이론을 비현실적이라고 보는 것이다. 원리적으로 보면 유가의 이론은 백성들의 자발성을 근거로 삼는 반면에 법가는 강제력을 근거로 삼고 있습니다. 법가의 이러한 주장은 왕권을 강화하여 절대 군주적 정치 제도를 실현하려는 목적을 가진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물론 우리가 추구하는 민주적인 사회의 방향과는 맞지 않습니다.

신불해는 기원전 4세기 후반에 활동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는 정치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술’을 말하였습니다. ‘술’은 ‘꾀’, ‘방법’, ‘기술’, ‘전술’이란 의미의 ‘술’자인데, 법가에서 쓰는 의미를 구체적으로 말하면 통치자가 신하를 제압하여 군주 자신에게 유리하게 만드는 정치술 또는 책략입니다. 신불해의 정치 사상은 도가 특히 노자의 ‘무위’ 사상과 관계가 깊습니다. 신불해는 ‘무지’와 ‘무위’가 지식과 행동보다 낫다고 하고, ‘무지’와 ‘무위’가 군주의 길이라고 했습니다.

상앙(?–기원전 338)은 실무적인 사람으로 정치 제도에 통달하였고 열성 있는 연구자이기도 하였습니다. 위나라 왕족이었지만 기원전 4세기 중엽에 진나라에 벼슬하여 생애의 대부분을 진나라에서 활동하였습니다.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데에는 그의 힘이 컸습니다. 상앙은 군대의 규율에서 토지 제도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을 개혁하였고 법과 행정 기구를 재편하였습니다. 그의 사상의 골자는 ‘농병술’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라의 기초로서 식량과 군대는 가장 중요한 것이고, 따라서 나라가 격려해야 할 계층은 오직 농민과 군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유가에서 중시하는 문화적 가치 추구에 대하여 심하게 비판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나라에 시와 역사, 예절과 음악, 도덕과 효도, 사랑과 신분 질서 등의 도덕과 문화가 있다고 해도 통치자가 나라를 지키고 싸우는 데 쓸 사람은 한 사람도 없는 셈이다. 만일 어떤 나라가 이런 것들로 다스린다면 적이 쳐들어오자마자 무너지고 말 것이다. 적이 쳐들어오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 나라는 가난할 것이다.

 

이러한 법가 사상이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뒤 농업, 의학 등 기술 분야 책을 빼놓고 모든 책들을 불사른 사건을 일으킨 동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문화적 가치에 대한 법가의 이러한 태도는 어느 시기에 현실적으로 장점이 되기도 했지만, 또한 자기의 사상을 좁은 영역에 가두어 놓아 높은 이상이 결여된 하나의 테크닉, 방법론으로 떨어지게 한 약점이기도 합니다. 천하를 통일한 지 20 년도 채 못 되어 진나라가 멸망한 뒤에 천하를 차지한 한나라 고조에게 한 신하는 “천하를 말 위에서 얻을 수 있지만, 말 위에서 통치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하면서 문학과 역사를 공부할 것을 권했습니다. 근대에 강대국들이 약소국을 침략할 때 먼저 문화적 침략을 했던 것이나 현대 세계에서 경제, 외교, 문화적 종속이 국가간의 심각한 문제로 등장하는 것을 보면, 법가 사상가들은 부국 강병에 직접 효과가 없는 문화를 비판하는 데 치중하여 문화적 가치의 유용성을 지나치게 낮추오 보았다고 하겠습니다.

상앙의 중요한 공헌은 법가의 핵심 개념인 ‘법’ 이론을 만들어 내고, 그것을

현실적으로 시행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신상 필벌’의 새로운 법을 제정하여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공평하게 적용하였으며, 친척이나 아는 사람이라고 해서 편의를 봐주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신상 필벌’이란 법 적용에 신뢰성이 있어 민중에게 권위를 얻어야 하고, 범법자에 대해서는 가혹한 벌을 내려야 한다는 원칙입니다. 한비자에 오면, 법은 나라가 부강해지느냐 침체하느냐를 결정짓는 중대한 요소로 떠오릅니다. 한비자는 상앙의 이론을 인용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 나라가 항상 강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항상 약한 채 있을 수도 없다. 법이 엄격히 운영될 때 그 나라는 강하고, 법이 허술하게 시행될 때 그 나라는 약하다.

그는 또 법전은 구체적이고 자세해야 하며, 법은 엄중하고 무겁게 시행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학생들은 그들의 교과서가 너무 간략하면, 그 뜻을 멋대로 추리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법이 지나치게 간결하면, 민중은 그 의도를 이러쿵저러쿵 논의할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은 저술할 때 그 논지를 자세하고 명확하게 해 놓는다. 현명한 통치자는 법을 제정할 때 모든 우발 사건에 꼼꼼히 대비한다.

 

상앙은 사소한 비행에 대하여 중벌을 제정하였다. 큰 죄를 범하는 일은 드물다. 그러나 사소한 비행은 잦다. 최선의 정책은 민중으로 하여금 범하기 쉬운 것을 피하고 그리하여 큰 죄를 범하지 않도록 인도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상앙은”벌이 무겁다면 아무도 감히 법을 어기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처벌로 범죄를 없애는 방법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사마천은 “사기”에서 한비자를 이렇게 평했습니다.

 

한자(한비자)는 도덕을 법률에 맞추도록 하되, 마치 먹줄을 친 것처럼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그 줄을 벗어나지 않도록 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는 인정에 비추어 생각할 때는 절박한 일이요, 잘잘못을 분명히 가리자는 것은 좋으나 결과적으로 인간의 따뜻한 아름다움을 없애는 일이다.

 

사마천의 이러한 평가에서 한비자가 합리적 통치를 위해 규격화, 객관화를 극단적으로 추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비자는 신도와 신불해, 상앙의 ‘세’, ‘법’, ‘술’ 사상을 탁월하고 독창적인 원칙 아래 자기의 것으로 종합하였습니다. 한비자는 군주의 ‘세’를 호랑이와 표범의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에 비유하였습니다. ‘세’가 없는 왕은 이빨과 발톱을 잃어버린 호랑이처럼 무력하며, ‘세’는 왕의 지위 때문에 생기는 권세, 권력을 뜻하므로 왕의 인격, 도덕성, 능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왕이라는 지위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통치술을 도덕에서 상대적으로 독립시킨 이론입니다. ‘법’과 ‘술’은 군주와 관리와 민중 사이의 관계를 조종하는 이론입니다.

 

법은 문서로 편찬하여 관청에 비치해 두고 인민에게 공포하는 것이지만, 술은 군주의 가슴속에 넣어 두고 신하의 언행 등 많은 단서를 수집 검토하여 은연중에 여러 신하를 지배하는 것이다. 그 때문에 법은 명확할수록 좋고, 술은 알려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현명한 군주가 법을 말하면 나라 안의 비천한 자까지도 알아들어야 하며, 단지 방 안에 가득 채워 두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법은 관리들이 민중을 통제하는 기준으로 법에 복종하는 자는 상을 주고 법을 어기는 자에게는 엄한 벌을 내리는 것입니다. ‘술’은 군주가 관리를 통솔하는 방법으로 은밀하고 상황적인 판단입니다. 법가 사상을 권모 술수로 보는 의견이 나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술’ 개념 때문입니다. 군주가 신하의 항명을 제압하고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내심을 드러내지 않고 전격적으로 신하를 파면하고 등용하는 권한이 ‘술’에서 나옵니다.

 

임금으로서 술이 없으면 윗자리에서 정보를 어두워지고, 신하로서 법이 없으면 아래에서 혼란을 일으킨다. 이 술과 법은 하나라도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니 모두 제왕이 쓰는 기구이다.

 

옛날 정나라 무공이 오랑캐를 정벌하려 했다. 무공은 먼저 자기 딸을 오랑캐 나라 임금에게 시집보내 그로 하여금 안심하게 했다.

어느 날, 그는 신하들에게 물었다.

“나는 한바탕 전쟁을 벌이고 싶은데, 누구를 치는 것이 좋겠소?”

대부 관기사가 대답하였다.

“오랑캐를 치는 것이 좋겠습니다.”

무공은 크게 노하여 그를 처형하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오랑캐는 이제 형제와 같은 나라인데, 네가 그를 치라는 것은 무슨 말이냐!”

오랑캐 나라 임금이 이 말을 전해 듣고, 마침내 정나라에 대해 방비를 하지

않았다. 그때 정나라 군대가 오랑캐 나라를 습격하여 점령해 버렸다.

 

이 이야기는 신하가 임금에게 건의할 때 어떤 어려움이 있는가를 논하면서 예로 든 것이지만. 여기에서 무공이란 군주의 처사를 기준으로 생각하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자기의 딸과 자기의 뜻을 잘 아는 신하를 희생시킨 것입니다. 법가 사상은 평가 기준으로 일의 성공과 결과를 중시합니다. 그러므로 ‘술’이란 전제 군주의 성공을 위한 그때그때의 계책과 판단이 돕니다. 관리들은 민중을 법이라는 기준으로 제어하고 관리들 자신도 법의 시행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게되며, 군주는 결국 법으로 민중들을 다스리고 술로서 신하들을 제어하며 자신은 법을 초월한 존재가 됩니다. 한비자가 “정승이라 하더라도 잘못하면 결코 벌을 면하지 못하고, 평민이라 하더라도 잘하면 반드시 상을 받는다”고 한 것은 이것을 말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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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비자의 생애

 

법가 사상을 종합 정리한 사람은 한비자입니다. 한비자의 출생 연대는 명확하지 않으나 대략 기원전 280 년 경으로 봅니다. “사기”의 ‘노장신한 열전’에 의하면, “그는 한나라의 높은 귀족 출신으로 태어났고, 형명법술의 학을 좋아하였으며, 언변은 능하지 못하였으나 저술에 뛰어났다”고 합니다. ‘형명법술의 학’은 법가 사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기에서는 한비자가 이사와 함께 순자에게 배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비자가 순자에게 직접 배웠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곽말약이나 가이쯔까 같은 학자들이 의문을 제기했지만, 순자의 사상이 한비자에게 수요되어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순자의 사상만이 아니라 춘추 전국 시대의 법가 전통과 도가, 묵가, 유가의 사상이 한비자의 체계에 흡수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전국 시대 말기 이후 각 학파 사이의 사상적 교류와 융합의 자연스런 경향을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비자의 청년기는 그의 조국 한나라가 역사상 가장 비참한 처지에 있었던

시기입니다. 한나라는 기원전 5세기 말 경 진나라의 침입을 받은 나라 중의

하나였으며, 그중에서도 가장 작은 나라로 강대한 이웃 나라에게 군대를 잃고 영토를 유린당했습니다. 한비자는 위기에 놓인 조국의 정세를 인식하고 한나라 왕에게 여러 차례 국정 개혁에 관한 상소를 올렸으나 왕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상소가 채용되지 않자 한비자는 자신의 부국 강병 방안을 10여 만 자의 저술로 남겼다고 합니다. 이 가운데 ‘고분’과 ‘오두’편을 우연히 읽은 진시황이 “이것이야말로 내가 기다리던 사상이다. 내가 이 사람을 만나 같이 일할 수 있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기원전 234 년, 진나라가 한나라를 공격하자 한나라 왕은 한비자를 진에 사신으로 보내 위기를 넘기려 하였습니다. 한비자는 진시황을 설득하여 조국의 위기를 구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고, 도리어 진시황은 한비자를 자기편으로 쓰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사와 요가의 획책으로 한비자는 감옥에서 사약을 받았습니다. 진시황이 뒤에 죽이라는 결정을 취소하였으나 이미 때가 늦었습니다. 이 일이 일어난 것은 기원전 233 년이라고 하므로, 한비자는 대략 기원전 280 년 경에 태어나서 233 년에 죽은 것입니다.

한비자의 저서는 처음에 ‘한자’라고 불렸습니다. 책 이름이 ‘한비자’로 바뀐 것은 송나라 이후의 일입니다. 송대에 유교가 새롭게 부흥하면서, 불교와 도교가 유행했던 당나라 때에 유학을 부르짖었고 대문장가로서 당송 팔대가에 든 한유를 높여 ‘한자’라 부르게 되어 원래 ‘한자’로 불리던 책이 ‘한비자’가 되었습니다. 유학이 세력을 얻자 한비자가 밀려난 셈입니다.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한비자”는 20권 55편으로, 한비자의 저술과 후인들의 글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어느 것이 한비자 자신의 저작인지에 대해서는 학자에 따라 의견이 다르지만, ‘고분’, ‘오두’, ‘현학’, ‘정법’ 등은 한비자의 저작이라고 믿을 수 있는 편들입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한비자의 생애는 진나라와 한나라의 정치적 관계와 진시황, 이사라는 인물과 관계가 깊습니다. 기원전 3세기 전반에 진나라는 강적 초나라를 거듭 무찌르고 그 영토를 많이 병합시켰습니다. 한비자와 함께 순자에게 배우고 뒤에 진시황의 신하가 된 이사의 힘으로 마지막 승리는 이루어졌습니다. 이사는 먼 나라의 힘을 빌어 가까운 나라를 치는 ‘원교 근공’의 외교술과 적국에 첩자를 보내 민심을 교란하고 정보를 훔치는 방법으로 이 사업을 성공시켰다고 합니다. 지리상으로 진나라에 가장 가까웠던 한나라는 진나라의 영토 확장 정책에 가장 위협을 받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기원전 약 250 년 경, 진나라는 여러 나라 가운데서 경제력과 군사력이 강한 나라가 되었고, 제도를 고쳐서 중앙 집권적 관료 제도를 확립했습니다. 천하를 통일하고 최초의 통일 제국을 다스릴 기초를 마련한 것입니다. 한비자는 비록 진나라 죽었지만, 그의 이론은 진나라의 통치 제도에 이론적으로 기여하고 이후 중국 역사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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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가 사상의 의의

 

지금까지의 내용을 요약해 보면, 한비자의 철학은 세 가지 중심 이론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인간은 근본적으로 이기적이기 때문에 국가는 그 이기심을 강력하게 통제하고 조종함으로써 부강을 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군주는 법과 세와 술로 민중과 백관을 통솔하며 그 제재방식은 종교적, 도덕적인 것이 아닌 사회 조직의 장점에 선 왕의 권세와 법의 강제에 의한다는 것입니다. 셋째, 가치 판단의 기준은 현실적으로 효과 있는 결과를 낳았느냐 아니냐이고, 따라서 ‘고대의 도와 원칙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상황을 연구하고 대처 방안을 내는 것’이 관리들의 임무가 된다는 것입니다.

법의 공정한 시행과 중앙 집권화된 관료 제도, 사회의 경제적 기초의 강조 등을 통하여 한비자는 정치 철학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고, 다른 학파보다 현실적인 정치관을 내놓았습니다. 그러나 법가 사상은 자유와 자발성이 아니라 복종과 강제를 강조하여 군주 전제주의를 이룬 것입니다. 이 사상은 민중에게 정치에 대한 의논이나 생각을 하지 말고 다만 복종하라고 가르쳤습니다. 분명히 이런 이론은 민주주의 원칙과 거리가 있지만, 주나라 식 봉건 제도를 넘어서 효율적인 관리 제도를 확립하는 이론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상에 힘입어 진시황은 중국 천하를 통일하였습니다. 또한 법가 사상은 유교의 도덕론과 결합하여 중국 사회를 2000년 동안 전제 군주제로 이끌어 온 이론적 배경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어떤 면에서 법가 사상의 현실적 합리성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중국의 문화대혁명기에는 과거의 철학을 유가와 법가로 대립시키고, 법가 진영에 속한 사상을 유물론의 입장에 선 진보적 사상이라고 평가하였습니다. 이것은 법가의 현실적 인간관, 역사의 진보에 대한 인식에 주목하고 현실의 모순을 해결하려는 실천적 지향이 강한 철학으로 평가했지 때문입니다. 이러한 점은 당연히 법가 사상이 긍정적으로 평가받아야 할 부분입니다. 그러나 법가의 이론이 비교적 과학적 인식을 담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법은 군주의 무한 권한에 의존하는 통치술의 의미가 강했습니다. 또한 인간관도 인간을 오직 통치의 대상으로만 볼 뿐, 자율성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어서 중앙 집권적 전제 군주 국가가 합법적으로 독재를 행사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사회의 현실적 토대를 기준으로 이론을 전개하고,

현실의 변화에 따라 옛 제도를 바꾸어야 하며, 이론은 현실적 실효성을 가져야 한다는 법가의 정신은 아직도 가치 있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명가: 상식을 부순 사람들

 

두께가 없는 것은 쌓을 수 ㅇ벗지만 그 크기는 천리가 된다.

하늘과 땅은 높이가 똑같고 산과 연못은 똑같이 평평하다.

남쪽은 끝이 없으면서 끝이 있다.

오늘 월나라에 가서 어제 돌아왔다.

둥근 고리는 풀 수 있다.

만물을 사랑하라. 온 세상이 한 몸이다.

 

유강에 물이 불어 정나라의 어떤 부자가 급류에 휘말려 빠져 죽었습니다. 시체가 물에 떠내려가다가 하류에 이르렀을 때, 마침 배를 띄우려던 사공이 시체를 발견하고는 건져내었습니다. 화려한 옷과 장신구들을 보고서 큰 부자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한 사공은 많은 보상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 부풀었습니다. 물에 빠져 죽은 부자의 집에서는 주인의 시체를 찾기 위해 난리가 났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자의 집에서 보낸 사람들이 시체를 건진 사공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사공은 엄청난 금액을 요구했습니다. 요구액이 터무니없이 많은 데 놀란 그들은 어떻게 할까를 상의하다가 변론을 잘하기고 유명한 등석을 찾아갔습니다.

“선생님, 저희 집주인이 물에 빠져 돌아가셨는데, 그 시체를 건진 사공이 엄청난 대가를 요구합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기다리시오. 그 뱃사공이 시체를 팔 수 있는 곳은 당신네 집뿐이지 않소. 기다리면 값이 내려갈 것이오.”

“기다리다 보면 자꾸 시체가 부패할 텐데요.”

“그럴수록 기다리시오. 시체가 부패할수록 값이 내려갈거요.”

부잣집 사람들은 등석의 말대로 기다렸습니다. 그러자 난리가 난 것은 뱃사공이었습니다. 이번에는 애가 탄 뱃사공 쪽에서 등석을 찾아갔습니다.

“선생님, 제가 어떤 부자의 시체를 건졌는데 많은 보상을 요구했더니 값을 깎자고만 하면서 시체를 찾아갈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기다리시오. 그 부잣집이 시체를 살 수 있는 곳은 당신네 집뿐이지 않소. 기다리면 값이 올라갈 것이오.”

“기다리다 보면 자꾸 시체가 부패할 텐데요.”

“그럴수록 기다리시오. 시체가 부패할수록 값이 올라갈거요.”

 

이 사건이 어떻게 해결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명가의 한 모습을 잘 보여 주는 이야기입니다. “여씨춘추”에 따르면 등석은 변론에 뛰어났는데, 오늘 옳다고 했던 것이 내일은 옳지 않은 것이 되고, 또 오늘 옳지 않은 것이 내일은 옳은 것이 되어 옳고 그름이 날마다 바뀌었다고 합니다.

등석은 큰 사건의 변론 대가로는 겉옷 한 벌을 받았고, 작은 변론의 대가로는 속옷 한 벌을 받았다고 합니다. 등석을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 혼란을 일으켰다고 하며, 이런 까닭에 등석은 민중의 풍속을 흐린 죄로 처형당했다고 전해집니다.

명가의 주장들은 과연 사회의 혼란을 일으킨 부정적 사유밖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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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가란?

 

제자 백가라고 할 때 가는 학파를 의미합니다. 하지만 명가는 학파라는 성격이 명확하지 않습니다. 명가의 대표격인 혜시, 공손룡, 등석, 윤문자, 송경 등은 서로 관련성이 별로 없습니다. 따라서 그들 사이에는 어떤 계통성이나 조직의 모습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더구나 그들이 남긴 저술을 거의 찾아볼 수 없으며, 다만 맹자와

장자가 살던 무렵의 사상가들이라는 공통점과 아울러 명과 실의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는 정도가 서로 관련이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명가를 ‘명의 대가’라는 식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명가로 분류되는 사상가들은 다양합니다. 송경이나 윤문자는 묵가 집단으로 분류되기도 하고, 장자의 친구인 혜시는 노장 계열로 보기도 합니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는 종합적 학문의 성격을 보이고 있습니다.

명가라는 이름은 한 대에 만들어졌습니다. 명가는 명칭과 실제, 또는 형식과 내용의 본질과 그 관계성을 논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명과 실의 관계를 바로잡아 사회 질서를 확보하려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공손룡에게서는 사물의 명칭을 통해 개념의 분석을 꾀한 모습이 보이기도 하고, 혜시에게서는 새로는 세계관의 제시가

보이기도 합니다. 이들의 사상은 단순한 궤변의 논리는 아니었습니다.

서양 학자들은 명가를 궤변론자, 논리학파, 변증론자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 세 가지 표현도 사실 모두 같은 뜻은 아니지만 명가를 표현하는 적절한 말도 아닙니다. 명가가 궤변적인 모습을 보이기는 하지만 명가 사상가들 모두가 그러한 것은 아닙니다. 또한 그들은 논리 자체에 치중한 것도 아니었으며, 변증법적 요소도 다

설명될 수도 없습니다. 그들은 정치적 목적을 가졌으며, 그 방법으로 명의 문제를 중심에 두었을 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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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명가 사상이 나왔는가?

 

명가가 나오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한자어 자체가 가지고 있는 특성 때문입니다. 한문은 고립어입니다. 고립어의 특성은 한 글자 한 글자가 모두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조선조 말에 일본의 이또오 히로부미가 조선의 대신들을 모아 놓고 일본에 모든 권한을 위임하는 것이 어떠냐는 논의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총리 대신 한규설의 대답이 걸작입니다. 한규설은 ‘불가불가’ 네 글자로 답했다고 합니다. 이 말은 세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불가 불가라고 끊으면, 안돼 안돼라는 뜻이 됩니다. 또

불가불 가로 끊으면, 어쩔 수 없지만 그렇게 할 수도 있다는 뜻이 됩니다. 마지막으로 불 가불가로 끊으면,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할 수 없는 것도 아니라는 어중간한 뜻이 됩니다.

고립어의 특성은 이처럼 같은 말인데도 엉뚱한 해석이 나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고립어에는 어미 변화가 없고, 고정된 품사도 없습니다. 아울러 조사가 별로 없으며, 문장 부호도 쓰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직감에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과거 선비들은 10 년을 공부해야 한문의 이치를 터득한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경험적인

부분이 많다는 얘기입니다. 동양 철학이 논리성이 부족하다고 지적받는 근원 원인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둘째는 당시의 시대적 배경이 원인입니다. 당시는 혼란기였습니다. 혼란기란 옳고 그름의 혼란을 의미합니다. 제후들은 서로 자기가 옳다는 논리를 내세우며 이웃을 침략했습니다. 따라서 다른 나라와의 관계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말 잘하는 사람이나 사정을 잘 살피는 사람을 우대했습니다.

당시 강력한 제후국이었던 제나라는 많은 예물을 주면서 학자들을 모아들였고, 직접적인 정치 참여를 허용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을 대부로 예우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을 모아 놓은 곳을 직하라고 불렀는데, 직하는 기원전 357 년에서 310 년까지 57 년간이나 문화 구심점을 역할을 하였습니다. 직하에 머물렀던 명가 사상가들이 송경, 윤문 같은 사람들입니다.

마지막으로 명가 이전에 명의 문제를 다룬 사상가들의 영향을 들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은 공자입니다. 공자는 명이 바로잡히지 않으면 그 영향이 말과 행동에까지 미치고, 나아가 정치, 문화, 형벌에까지 영향을 주게 되며, 그 피해는 오로지 백성들의 입게 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정치를 하려면 먼저 명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명을 문제삼은 또 다른 사상가로는 노자가 있습니다. 노자는 “노자” 1장에서 ‘이름 있는 것은 하늘과 땅의 시작이며, 이름 없는 것이 만물의 어머니’라고 하였습니다. 물론 노자가 더 높이는 것은 이름 없음입니다. 노자의 사상은 유명에 대한 반대이기 때문에 명가 이후에 나온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 밖에 묵가 사상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묵가 집단은 초대지도자인 묵자가 죽자 세 파로 갈라졌습니다. 이 세 파를 후기 묵가라고 하는데, 그들은 서로 자신이 정통을 이었다고 하면서 서로를 비난하는 싸움을 벌였습니다. 그 과정이 논리의 발전을 가져왔습니다.

또 묵가와 유가의 다툼에서 나온 영향도 있습니다. 묵가의 유가 비판은 매우 엄격합니다. 묵가는 유가 사상의 중요 부분인 천명, 상례, 예와 악 등을 비판했습니다. 유가 또한 묵가의 비판을 받으면서 그냥 있지는 않았습니다. 자연히 두 사상 사이에는 논쟁을 끊이지 않았고, 이 과정에서 다양한 궤변과 논리가 나왔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명가 가운데 가장 뛰어난 사상가는 혜시와 공손룡입니다. 이 두 사람을 중심으로 명가 사상을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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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의 좋은 친구 혜시

 

혜시는 기원전 300 년을 전후한 시기에 살았습니다. 송나라 사람으로 양혜왕 밑에서 재상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혜시는 장자와 아주 가까운 사이였던 것 같습니다. 장자가 자기 부인의 시체에 걸터앉아 항아리를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는 대목에서도 혜시가 등장합니다. 장자와 혜시가 다리에 서서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 수 있느냐 없느냐 하면서 논쟁을 벌인 것은 여러분도 기억할 것입니다. 이처럼 “장자”에는 혜시의 이야기가 자주 등장합니다. 이런 까닭에 혜시를 도가 사상가로 보기도 합니다. 혜시는 또 전쟁 반대와 박애를 주장하였습니다. 그래서 묵가 사상가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혜시가 전쟁을 반대한 일화는 유명합니다.

언젠가 양나라와 제나라가 우호 조약을 맺었습니다. 그런데 제나라가 그 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해 버렸습니다. 그러자 양나라는 공격 준비에 들어갔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혜시는 자기가 추천한 대진인을 만나 양혜왕을 설득할 수 있는 좋은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대진인은 혜시의 생각을 가지고 양혜왕을 만났습니다.

 

“왕께서는 뿔이 양쪽으로 달린 팽이를 잘 아시지요?”

“잘 압니다.”

“옛날에 달팽이의 왼쪽 뿔 위에는 촉씨가 다스리는 나라가 있었고 오른쪽 뿔 위에는 만씨가 다스리는 나라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 나라는 항상 서로의 땅을 빼앗으려고 싸웠습니다. 한번 전쟁이 벌어지면 20일씩이나 싸우다가 물러나고는 했는데 죽거나 다친 사람이 수만 명씩 되었습니다.”

얘기를 듣고 있던 양혜왕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허허, 그거 참 재미있는 이야기군요. 지어낸 얘기지요?”

대진인은 정색을 하면서 말했다.

“지어낸 얘기라니요. 임금께서는 동서 남북이나 위아래가 끝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끝이 없겠지요.”

“임금께서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끝없는 우주와 비교해서 생각해 보시지요. 끝없는 우주 속에서 양나라와 제나라는 달팽이 뿔 위에 있는 만씨의 나라와 촉씨의 나라보다 과연 얼마나 클까요?”

 

혜왕은 대진인의 말에 감복하여 군사를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임금을 설득한 사람은 대진인이었지만 설득의 논리는 혜시의 생각이었습니다. 혜시는 양나라로 하여금 제나라, 초나라 등과 연합하여 당시 가장 큰 세력이었던 진나라와 균형을 이루게 함으로써 혼란을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혜시의 생각은 당시 국가간의 외교에서 큰 이름을 떨치던 장의의 생각과 부딪쳤습니다. 장의 는 진나라를 도와서 작은 몇 나라와 힘을 합치게 하여 꽤 큰 세력을 무너뜨리게 하려고 했습니다. 마침내 혜시는 정적 장의의 모함을 받아 정치적 기반을 잃고 초나라, 송나라 등을 전전하게 되었습니다.

혜시는 비유에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필요하다면 상대의 논리를 가지고 상대를 제압하기도 하였습니다. 한 번은 맹자의 제자인 광장이 양혜왕에게 다음과 같이 혜시를 비난했습니다.

“왕께서는 농부들이 왜 메뚜기를 없애려고 하는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것은 분명 농작물을 해치기 때문이겠지요. 지금 혜시에게는 수레를 타고 따라다니는 사람, 걸어서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모두 합해 수백 명이나 됩니다. 바로 혜시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일은 안 하면서 말솜씨만으로 밥을 먹고 있으니, 메뚜기떼와 다를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곰곰이 생각해 본 양혜왕은 광장의 말이 옳은 듯하여 직접 혜시를 불러 스스로 해명해 보도록 했습니다. 혜시는 전혀 굽히지 않고 광장을 향해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지금 성을 만들고 있다고 해 봅시다. 어떤 사람은 성 위에서 돌을 쌓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성 밑에서 흙을 나르겠지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설계도를 들고서 여러 일을 감독하기도 합니다. 나 혜시는 바로 설계도를 들고 감독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내가 메뚜기라니요. 만약 실을 짜는 여공이 실이 되어 버린다면 다시는 실을 짤 수 없지 않을까요? 나무를 다루는 목수가 나무가 되어 버리면 그 목수는 나무로 된 도구를 만들어 낼 수 없겠지요. 마찬가지로 성인이 농부와 함께 밭을 일군다면 그 성인은 농부들을 다스릴 시간이 없을 것입니다. 내가 농부들과 같이 일하지 않는 까닭은 농부들을 다스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할 일이 많은 나를 가리켜 감히 메뚜기라고 하다니요.”

일찍이 맹자는 공동체 노동을 강조한 허행의 제자들로부터 농부들과 함께 일하지 않는다고 비난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맹자는 다스리는 사람과 일하는 사람은 서로 할 일이 다르다는 분업의 논리를 폈습니다. 지금 혜시는 광장의 스승인 맹자의 논리를 빌어다가 광장을 비판한 것입니다.

언젠가 혜시의 뛰어난 비유를 문제삼아 양혜왕에게 혜시를 헐뜯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양혜왕에게 다음과 같은 청을 했습니다.

“혜시는 말할 때 항상 비유를 씁니다. 임금께서 혜시에게 비유를 쓰지 말고 말하라고 하신다면 아마도 혜시는 한 번도 입을 열 수 없을 것입니다.”

재미있는 제안이라고 생각한 양혜왕은 다음날 혜시를 불러 말했습니다. “그대는 언제나 비유를 즐겨 쓰는데, 앞으로는 비유를 쓰지 않고 말할 수 있겠소?”

“만일 어떤 사람이 한 번도 활을 본 적이 없다고 해보지요. 그 사람이 임금께 활이 무어냐고 물었다고 합시다. 임금께서 활은 활처럼 생겼다고 하신다면 그 사람이 활이 어떻게 생긴 것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그야 물론 알 수 없겠지요.”

“그렇다면 그 사람에게 활은 대나무를 구부려서 그 양쪽 끝에 줄을 맨 것이라고 설명해 준다면 어떨까요?”

“그러면 알 수 있겠지요.”

“우리가 말을 하는 까닭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가지고 잘 설명해서, 아직 모르고 있는 다른 사람을 이해시키기 위함입니다. 지금 임금께서 제게 비유를 쓰지 말라고 하시는 것은 제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말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는 더 이상 말을 꺼낼 필요도 없겠지요.”

“그대의 말이 맞소. 비유를 쓴다는 것은 옳은 일이요.”

양혜왕과의 대화에서 혜시는 벌써 활로 비유를 들고 있는 셈입니다. 아무튼 혜시는 뛰어난 말솜씨로 양혜왕을 설복시키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아마도 장자와 어울리면서 항상 논쟁을 해 온 혜시로서는 이런 정도는 힘든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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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을 보는 방법 열 가지: 역물십사

 

“장자” ‘천하’편에는 혜시가 말한 열 가지 명제가 나옵니다. 역물이라는 말은 사물을 관찰한다거나 또는 대상을 파악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혜시는 명제만 제시했을 뿐 아무런 논증을 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후대의 많은 학자들이 자기 나름대로 해설을 붙이기도 했습니다. 그 열 가지 명제를 하나하나 검토해 보겠습니다.

1. 지극히 커서 밖이 없는 것을 가장 큰 것이라고 하고, 지극히 작아서 안이 없는 것을 가장 작은 것이라고 한다.

이 명제는 가장 크다는 것과 가장 작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형식 명제입니다. “장자” ‘추수’편에는 항상 자기가 이 세상에서 가장 크다고 자부하던 황하의 물귀신이 황하가 홍수로 넘치는 바람에 바다로 떠밀려 내려가서 바다의 신을 만나는 얘기가 나옵니다. 처음으로 자기보다 큰 것을 만나서 놀라는 황하의 신에게 바다의 신은 자기도 천지와 비교하면 커다란 창고에 들어 있는 곡식 한 톨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자기 경험의 범주에만 머물러 있기 쉽습니다. 그래서 경험상 자기가 본 가장 큰 것을 크다고 하고 가장 작은 것을 작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런 개념은 모두 상대적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정말 큰 것은 밖이 없는 것이며 정말 작은 것은 안이 없는 것입니다. 이 명제는 경험 세계에만 근거를 갖는 상식을 부수는 것입니다.

 

2. 두께가 없는 것은 쌓을 수 없지만 그 크기는 천리가 된다.

두께가 없는 물건은 아무리 쌓아도 놓아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늘어놓으면 그 넓이는 굉장할 수 있습니다. 두께와 넓이는 다른 개념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두께가 없다고 하면 넓이도 없는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반적으로 얼굴이 번듯하고 옷을 잘 입으면 대접을 잘 받습니다. 그러나 얼굴도 못생기고 옷이 허름하면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합니다. 바로 이런 것이 우리의 상식이 갖기 쉬운 맹점입니다. 고정된 상식은 곧 편견을 의미합니다.

 

3. 하늘과 땅은 높이가 똑같고 산과 연못은 똑같이 평평하다.

사람들은 모두 하늘은 위에 있으니까 높고 땅은 아래 있으니까 낮다고 생각합니다. 또 산은 쑥 올라와 있고 연못은 움푹 패여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달나라에 가서 지구를 보면 그런 차이는 거의 드러나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더 높이 올라가서 볼수록 더욱 평면에 가까워 보일 테지요.

일반적으로 우리는 재능이나 지위를 가지고 사람을 평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금 어떤 두 사람이 차이가 많아 보이더라도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보면 도토리 키재기일 수도 있습니다. 절대의 위치에서 보면 세상 모든 것이 상대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4. 남쪽은 끝이 없으면서 끝이 있다.

남쪽이라고 하면 그 연장선의 끝은 어디일까? 아마도 무한히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나 서울에서 보면 대구도 남쪽이고 부산도 남쪽입니다. 물론 대구에서 보면 경주도 남쪽이고 부산도 남쪽이 됩니다. 남쪽이라는 개념은 기준을 어디로 잡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서울에서의 남쪽과 대구에서의 남쪽, 대구에서의 남쪽과 부산에서의 남쪽, 이 문제는 멀고 가까운 거리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출발점을 어디로 잡느냐의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아무런 기준도 없이 바람직한 사람, 바람직한 세상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떤 기준을 가지고 말하느냐에 따라 내용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똑같은 바람직한 세상이 자본주의일 수도 있고, 사회주의일 수도 있습니다. 똑같은 바람직한 사람이 개인적 차원에서 성실한 사람일 수도 있고, 자기 희생적인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기준 없이 막연히 하는 우리들의 일상적인 말들은 모두 틀린 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5. 나는 세상의 중심이 어디인가를 안다. 연나라의 북쪽과 월나라의 남쪽이 바로 그곳이다.

연나라는 중국 북쪽에 있던 나라이고 월나라는 남쪽에 있던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연나라의 북쪽과 월나라의 남쪽은 서로 다른 방향이어서 겹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은 무슨 뜻일까요? 이 명제가 갖는 의미는 어떤 신비스러운 것도 아닙니다. 이 명제대로라면 중심은 없다는 말이 됩니다. 더 비약하면 어디든 중심이라는 말이 됩니다. 지구를 봅시다. 지구의 중심이 어디일까? 북극인가, 아니면 남극인가?

사실은 내가 딛고선 이 자리가 바로 중심입니다. 우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주는 무한합니다. 따라서 무한한 공간에서는 어디든 중심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살면서 자신만을 중심에 놓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옳으냐 그르냐의 문제가 생기고 다툼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자기만이 중심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누구나 자기 삶의 중심입니다. 따라서 중심이란 고정된 것이 아니며 상대적인 개념일 뿐입니다.

 

6. 오늘 월나라에 가서 어제 돌아왔다.

상식에서는 오늘 갔으면 내일이나 모레 돌아와야 합니다. 사실 어제, 오늘, 내일은 나누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편의상 빈틈 없이 이어져 있는 시간을 나누어 쓰고 있을 뿐입니다. 오늘은 어제에서 보면 내일이 되지만 내일의 시점에서 보면 어제가 됩니다. 따라서 이러한 구분은 상대적인 나눔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약속 시간을 지키는 것은 예의이고 5분 늦은 것이 큰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생각을 바꾸어 전체 우주의 역사에서 보면 몇 만 연도 잠깐이 됩니다.

 

7. 해가 막 하늘 가운데 뜬 상태는 막 지는 상태이며, 어떤 존재가 막 태어났다는 것은 막 죽어가는 것이다.

상대성 원리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는 것이 관찰자의 위치입니다. 어떤 입장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 보입니다. 이제 겨우 다섯 개 남았다는 말과 아직도 다섯 개나 남았다는 말은 내용에서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보는 사람의 입장은 큰 차이가 납니다. 소고기 통조림 공장에서 포장이 끝난 통조림들이 수없이 쏟아져 나오는 반대편 끝에는 끊임없이 죽어가는 소가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혜시의 논리는 사회의 또 다른 모순을 잊어버리고 한 면만을 보고 사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인 셈입니다.

 

8. 많이 같은 것과 조금 같은 것은 다르다. 이것을 조금 같거나 조금 다른 것이라고 한다. 만물은 어떤 점에서는 완전히 같지만 또 어떤 점에서는 완전히 다르다. 이것을 크게 같거나 크게 다른 것이라고 한다.

‘같다’와 ‘다르다’는 동전의 양면인 셈입니다. 무엇을 기준으로 하느냐에 따라 같아지기도 하고 달라지기도 합니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돌멩이까지도 존재한다는 점에서 보면 다 같습니다. 그러나 돌멩이들조차도 같은 돌멩이는 하나도 없습니다. 전체를 강조하면 개인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반대로 개인을 강조하면 개인을 침해하는 전체는 부정되어야 합니다. 사실은 이런 문제가 모두 관념에 불과합니다. 현실은 언제나 가변적이어야 합니다. 전체를 강조할 때도 있고 개인을 강조할 때도 있습니다. 어느 한쪽으로 고정시키면 그 나머지는 버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명제는 사람들이 갖기 쉬운 고정 관념에 대한 부정인 셈입니다.

 

9. 둥근 고리는 풀 수 있다.

둥근 고리를 풀어 보라고 하면 우리는 무슨 마술을 떠올리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고리를 자른다거나 부수는 것은 푸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둥근 고리 그 자체는 현실에 놓여 있더라도, 그에 앞서 부수면 안 된다는 머리 속의 고정된 생각이 현실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나무를 쪼개서 책상을 만드는 일을 생각해 봅시다. 나무에서 보면 부수는 것이지만 책상에서 보면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부순다와 만든다, 푼다와 이어져 있다는 것은 상대적일 뿐입니다.

고정 관념은 언제나 현실을 왜곡하거나 억누르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30 미터 높이의 장대를 밟고 올라서서 안 떨어지려고 애쓰지 말고 앞으로 한걸음 내딛으라는 불교의 명제는 바로 발상의 전환을 말하는 것입니다. 상식의 틀을 부수는 발상의 전환이 이 명제의 목적입니다.

 

10. 만물을 사랑하라. 온 세상이 한 몸이다.

이 명제는 앞에서 본 명제들의 결론의 셈입니다. 1번부터 5번까지의 명제는 공간 개념의 명제들이며, 6번과 7번은 시간 개념의 명제들입니다. 그리고 8번과 9번은 현상계의 존재들과 고정 관념에 관한 명제입니다. 혜시는 이 명제들을 통해 존재든 관념이든 모든 것은 상대적일 뿐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차별성은 부정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지양과 통일을 거쳐 만물이 하나라는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혜시의 열 가지 명제가 서양의 논리적 명제들과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혜시의 결론은 정치적입니다. 혜시는 당시의 혼란을 바로잡기 위해 사람들의 상식을 부수려고 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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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의 대가 공손룡

 

공손룡은 조나라 사람인데, 한때 정치 고문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명가 사상가 가운데 드물게 그의 저술이 남아 있습니다. 본래 14 편으로 된 “공손룡자”라는 책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5 편만 남아 있습니다. “여씨춘추”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진나라와 조나라가 서로 돕기로 조약을 맺었습니다. 조약을 맺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진나라가 군대를 동원하여 위나라를 공격했습니다. 그런데 조나라는 위나라를 도우려고 했습니다. 화가 난 진나라 임금이 사신을 보내 조약 위반이라고 따지고 들었습니다. 다급해진 조나라 왕이 공손룡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러자 공손룡은 이쪽에서도 사신을 보내서 조나라가 위나라를 도우면 진나라도 약속대로 조나라를 거들어야 하는데 오히려 위나라를 공격하고 있으니 조약 위반이라고 따지고 조언했습니다. 이런 모습은 공손룡을 궤변론자처럼 보이게 만듭니다.

공손룡은 “장자” ‘추수’편에서 스스로 자신을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습니다.

 

나는 다른 것과 같은 것을 한데 합치기도 하고, 한데 붙어 있는 개념을 떼어 놓기도 했다. 나는 옳지 않은 것을 옳은 것으로 만들고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어서,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들을 혼란에 빠뜨렸다.

 

혜시와 마찬가지로 일반 사람들의 상식을 부순 작업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루는 공손룡이 말을 타고 국경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관문을 지키는 사람이 그를 가로막았습니다. 말을 탄 채로 관문을 지날 수 없다는 규칙을 내세우며 말에서 내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공손룡은 ‘흰 말은 말이 아니다’는 명제를 제시하고 그대로 말을 탄 채 관문을 지나갔다고 합니다. “공손룡자”에 나오는 여러 명제 중에서 가장 유명한 두 가지 가운데 하나가 이 고사와 관련 있는 ‘흰 말은 말이 아니다’는 명제입니다. 또 하나는 ‘단단하고 흰 돌을 나눌 수 있다’는 명제입니다.

 

흰 말은 말이 아니다

 

공손룡이 흰 말을 어떻게 말이 아닌 것으로 만드는가를 봅시다. 그는 세 가지로 논증합니다.

 

첫째, 말이라는 것은 모양을 가리키는 개념이고 희다는 것은 빛깔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빛깔을 가리키는 것은 형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흰 말은 말이 아니다.

둘째, 말이라고 하면 흰 말, 검은 말, 누런 말이 모두 해당되지만, 흰 말이라고 하면 누런 말이나 검은 말은 해당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흰 말은 말이 아니다.

셋째, 말에는 여러 가지 빛깔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말에서 빛깔을 빼 버리면 말 그 자체만 남는다. 흰 말은 바로 그러한 말에다가 흰색을 더한 것이 흰 말이기 때문에 흰 말은 말이 아니다.

 

사실 흰 말과 말의 관계를 정확하게 나타내려면 ‘흰 말은 말의 일종이다’라고 해야 합니다. 또 곤손룡의 말대로라면 흰 말은 말이 아닌 소나 개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공손룡의 본래 뜻은 우리가 일상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는 개념들을 바로잡으려는 것이었습니다.

또 공손룡은 단단하고 흰 돌을 나눌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 명제에 대해서는 두 가지로 논증합니다.

 

첫째, 흰 돌과 단단한 돌은 두 가지이다. 왜냐하면 희다는 것은 보고 아는 것이고, 단단하다는 것은 만져 보고 아는 것이다. 따라서 보기만 해서는 단단하지를 알 수 없고 만지기만 해서는 희다는 것을 알 수 없다. 그러므로 흰 돌과 단단한 돌이라는 두 개념으로 나누어진다.

둘째, 희다는 것과 단단하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대상에만 한정된 것이 아닌 보편 개념이다. 따라서 이 두 개념은 돌과는 별개로 존재할 수 있다. 사실 물체 가운데는 희지만 단단하지 않은 것도 있고, 단단하지만 희지 않은 것도 있다. 따라서 희다는 것과 단단하다는 것은 서로 다른 것임이 분명하다.

 

이 명제의 문제는 분리해서 생각한다는 점 자체에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단단하고 흰 돌을 인식할 때 먼저 시각을 통해 희다는 것을 알았고 나중에 촉각을 통해 단단하다는 것을 알았다고 해 봅시다. 그러나 두 가지로 나누어 알게 되었다 하더라도 결국은 두 가지를 통일적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실제 단단하고 흰 돌은 우리의 감각 이전에 한 덩어리로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공손룡의 이러한 논리는 중국 고대의 여러 명제 가운데 대표적인 것에 속합니다. 공손룡은 당시의 사회 혼란이 개념 규정의 혼란에서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이러한 논리적 설명을 통해 구체적인 사물의 개념을 명확히 규정해 보려고 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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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을 부정하는 참 의미

 

사마천의 아버지 사마담은 춘추 전국 시대의 대표적인 사상들을 여섯 학파로 나누어 그 각각의 특징을 설명한 글에서 명가에 대해 이렇게 평했습니다.

“복잡하게 얽힌 정교한 문구의 아주 미세한 부분까지 엄밀하게 밝혀서, 남들이 자기 뜻을 반박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개념을 명확히 밝히려다가 상식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명가와 상당히 비슷해 보이는 장자도 “입으로는 남을 이길 수 있었지만 마음으로 탄복하게 만들지는 못했다”고 비판했습니다. 순자는 한걸음 더 나아가 “이상한 주장을 다루기 좋아하는 기묘한 말장난에 지난지 않았다”고 혹평했습니다.

과연 명가의 논리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마담이 ‘상식을 벗어났다’고 한 것처럼 명가의 실제 목표는 상식으로부터의 탈출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남들이 다 동쪽이 옳다고 할 때 서쪽을 말했으며, 북쪽을 옳다고 할 때 남쪽을 말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파괴를 통해 새로운 것을 세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논리는 남들로 하여금 마음으로 따르게 할 필요도 없었고 반드시 참일 필요도 없었습니다.

철학의 생명은 비판에 있습니다. 비판은 비판받는 사람들을 반성하게 만드는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논리라 할지라도 비판을 받지 않으면 더 이상 발전하기 어렵습니다. 상식을 부순 명가의 논리들은 바로 이러한 비판 기능을 충실하게 수행한 셈입니다.

우리 사회를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몇 십 년 동안 미국을 점령군이 아닌 해방군으로 여겨 왔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여러 가지로 도운 진정한 우방으로만 생각해 왔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상식을 넘어 신화로 굳어지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1980 년대 들어와 광주 민주화 운동에서의 미국의 역할이 문제가 되면서, 미국을 상대로 한 몇 가지 큰 사건들이 있었고 반미를 이슈로 한 학생들의 격렬한

데모가 일어났습니다. 처음에 대다수 사람들은 철없는 학생들이 미국의 신경을 건드려서 오랜 우의에 금이 가지나 않을까 걱정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시골 농부들까지도 미국을 친구로 여기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오로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움직여 왔을 뿐 진정한 우리의 친구는 아니었습니다. 국제 관계에서 우방이란 속빈 강정이기 쉽습니다. 미국이 베푼 많은 무상 원조는 우리들 자신들의 시장 경제에 넣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입니다.

북한에 대한 우리의 태도도 구호의 변화만큼이나 많이 바뀌어 왔습니다. 초기에는 북진 통일이었고, 나중에는 멸공, 승공으로 달라졌습니다. 하지만 뜻 있는 사람들의 과감한 노력과 사회주의 몰락에 따른 정부의 태도 변화가 새로운 전환을 가져왔습니다. 이제는 다양한 교류 문제가 공식적으로 논의되고 있는 설정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문제 있는 상식들이 많습니다. 속담에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고 했고, ‘뱁새가 황새 쫓아가다 가랑이 찢어진다’고도 했습니다. 이러한 상식들은 본질적으로 지배 계급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신화일 수 있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오르지 못할 나무는 자꾸 쳐다보아야 한다’라든가 ‘가랑이가 찢어지는 한이 있어도 뱁새는 부지런히 황새 쫓아가는 연습을 해야 한다’고 바꾸면 어떨까요? 아마 상식과 맞지 않기 때문에 이런 주장은 오랫동안 비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과감한 전환이 더 많은 발전을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합니다.

이처럼 뛰어난 논리성을 갖추었던 명가가 왜 후대로 이어지지 못했을까요? 명가의 논리를 뒷받침하는 것은 개념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입니다. 그러나 분석적인 방법은 동양적인 사유 체제에서 주류를 이루지 못했습니다. 예를 들어 의학의 경우를 보면, 오랜 옛날부터 중국에도 해부한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의성으로 불린 화타 같은 사람이 그 대표적인 실례입니다. 실제로 화타에게는 23번의 수술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화타 식의 방법은 뒤로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까닭은 그 같은 방법론이 발전할 수 있는 사상적 토양이 척박했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정치 상황의 변화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춘추 전국 시대의 혼란은 법가 사상의 지원을 받은 진나라가 통일 국가를 이루면서 끝나게 됩니다. 진나라는 초기부터 도량형이나 많은 문물 제도를 통일시켰고, 나아가 분서 갱유를 통해 사상마저 통일시키려 했습니다. 진나라는 얼마 가지 못했지만, 바로 뒤를 이은 한나라도 같은 정책을 취했습니다. 사실 통일 국가는 혼란기 동안 흔들렸던 많은 부분을 상식 차원에서 바로잡을 필요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정치 상황 아래서 상식을 부정하는 명가 사상이 후대로 이어지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주역: 점쟁이와 철학자

 

“나에게 몇 년만 더 삶이 주어진다면, 주역을 통달할 수 있을 것이다.”

(공자)

 

“수십 년간 역을 연구하였지만, 나 자신의 일을 가지고 점을 쳐 보지는 않았다.”

(정약용)

이번에는 주역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그전에 우선 잘 알려진 퀴즈 하나를 내겠습니다.

세 사람의 나그네가 밤늦게 여인숙을 찾았습니다. 이 여인숙의 하룻밤 숙박비는 3000원이어서 이들은 한 사람이 1000원씩 냈습니다. 너무 늦게 도착한 이들은 이 여인숙에서 마지막은 제일 나쁜 방에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숙박비 3000원을 받고 아무래도 미안한 생각이 든 주인은 심부름하는 아이를 시켜 500원을 손님들에게 되돌려 주게 했습니다. 방값을 깎아 준 것입니다.

하지만 심부름하는 아이는 ‘손님이 셋인데 500원을 돌려주면 똑같이 나누기가 힘들잖아’ 하면서 200원은 자기가 슬쩍 하고 300원만 돌려주었습니다. 나그네들은 주인의 착한 마음씨를 칭찬하면서 100원씩 나누어 가졌습니다. 처음에 1000원씩 내고 나중에 100원씩 돌려받았으니, 나그네들은 한 사람당 900원씩 숙박비를 부담한 꼴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니, 900원씩 셋을 합치면 2700원이고 거기에 중간에서 심부름하는 아이가 슬쩍 한 200원을 합쳐도 2900원밖에 되질 않습니다. 그러면 처음의 3000원 에서 100원은 어디로 갔을까요?

글쎄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이지요? 이 문제에 나오는 숫자 3000, 2900, 2700, 500, 300, 200은 무엇을 뜻할까요? 이 숫자들은 서로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을까요? 이런 질문을 남겨두고 주역 이야기로 들어가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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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이라는 책

 

주역은 유교의 ‘5경’에 들어가는 고전입니다. 시경, 서경, 역경, 예기, 춘추를 합쳐서 5경이라 하며, 그 중 역경은 주역을 가리킵니다. 5경이라고 할 때, 경이란 본래 베 짤 때 세로로 걸어 놓는 날줄을 말하는데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를 적은 책이라는 의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주역은 ‘주나라의 역’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주나라 이전의 하나라와

은나라에도 역이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주나라는 기원전 11세기에 들어선 나라인데, “사기”에 기록된 중국의 역사는 그보다 수천 년을 더 올라갑니다. 주나라 바로 앞 왕조가 은나라이고, 은나라 앞이 하나라입니다. 하나라의 역을 ‘연산’이라 하고 은나라의 역을 ‘귀장’이라고 하지만, 내용은 온전하게 전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연산역은 산을 상징하는 간괘로 시작하고 귀장역은 땅, 여자를 상징하는 곤괘로 시작하는 반면, 주역은 하늘, 남자를 상징하는 건괘로 시작하는데, 이것은 주역이 부권 사회에 들어와서 탄생했음을 보여 준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지금 보는 주역의 내용을 어느 시기에, 누가 만들었는지는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합니다.

일반적으로 주역은 5경 중에서도 가장 심오한 철학을 담고 있다고 합니다. 중국에서도 ‘역림 삼천’이라고 할 만큼 주역 하나에 대하여 수천 명의 쟁쟁한 역대 학자들이 연구 해설서를 내놓았고, 그만큼 다양한 해석을 끌어낼 수 있는 문제의 책입니다. 책을 묶은 가죽 끈이 세 번 끊어질 만큼 공자가 애독하였던 책도 바로 주역이었고, 거기에서 ‘위편삼절’이라는 고사 성어도 나왔습니다. 물론 당시의 책은 종이로 만든 것이 아니라 글이 적힌 대나무나 나무 조각을 묶어 놓은 것입니다.

주역에 대한 연구가 역대로 이처럼 많기 때문에 여기서 주역의 구체적 내용을 다룰 수는 없습니다. 자칫하면 역이라는 울창한 숲 속에서 길을 잃을지도 모릅니다. 하나의 괘에 대한 해석만을 놓고 이야기하더라도 엄청난 시간이 필요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역의 내용은 명확하게 표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비유와 은유, 암호 같은 말로 되어 있고, 그 때문에 방법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우리가 주역을 사서 읽더라도 다른 책을 읽었을 때처럼 그 책에 어떤 내용이 쓰여 있더라 하고 말하기 쉽지 않은 것입니다.

주역의 ‘계사전’에는 점을 치는 원리와 해석 방법에 대한 원리적 설명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역을 이용하려면 먼저 계사전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계사전에도 충분한 설명이 있는 것이 아니어서, 계사전에 대한 해석에 따라 역을 운용하는 방법이 달라지는 점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계사전은 공자가 지었다고 전통적으로 주장하지만 지금 학자들은 전국 시대에 그 대부분이 이루어진 것으로 봅니다. 또 중국 고대의 문헌들이 대개 그렇듯이 나중에 끼어든 대목이나 순서가 뒤바뀐 부분들이 있다는 문헌학적 비판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사실이 계사전의 중심 사상이 공자의 사상이라는 주장을 뒤집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다만 계사전의 내용도 해석에서 일치를 볼 수 없는 요소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주역이라는 거대한 숲을 전체적으로 훑어보고 그 의의를 정리하는 데서 그쳐야 할 것 같습니다.

주역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하나는 ‘경문’이고 또 하나는 ‘역전’입니다. 경문은 일찍 만들어진 내용이고, 역전은 경문에 대한 해설로 뒤에 만들어졌습니다. 역전은 ’10익’이라고 하는데, 10익은 글자 그대로 ‘열 개의 날개’이므로 주역을 보조하는 해설이라는 뜻입니다. 주역의 형성에 대해서는 전통적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복희씨가 처음 8괘를 그렸고 신농씨가 64괘로 나누었다. 주나라 문왕이 비로소 괘에 풀이하는 말을 붙여 역이란 이름이 생겼고, 그 후 문왕은 아들 주공이 ‘효사’를 지어 일단 완성되었다. 공자가 다시 10익, ‘단전’ 상 하, ‘상전’ 상 하, ‘문언전’, ‘설괘전’, ‘서괘전’, ‘잡괘전’, 을 지어 보충 설명하였다.

 

그러나 복희씨나 신농씨가 역사상 실존했던 인물인지도 분명하지 않고, 10익에는 전국 시대 후기나 진한 시대의 사상과 연관된 내용들이 들어 있어 이러한 주장을 그대로 믿을 수는 없습니다. 대체로 주역은 중국 고대의 중요한 정신적 유산으로서, 오랜 기간에 걸쳐 연구 정리된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주역은 64괘에 대한 해석인 괘사, 각 효에 대한 효사로 이루어져 있고, 10익 가운데 문언전, 단전, 상전의 내용은 해당 괘에 포함시켜 편집해서 계사전, 설괘전, 서괘전, 잡괘전처럼 따로 독립되어 있지 않습니다. 본래는 10익이 따로 있었는데 한나라 때 비씨가 지금처럼 배치하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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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의 짜임새

 

주역은 또한 내용을 표현한 방식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상징 부호이고, 다른 하나는 문자입니다. 상징 부호가 들어 있는 것이 다른 책에서 보기 드문 특색입니다.

주역에는 64가지 상징 부호가 나오는데, 우리는 그것을 64괘라고 합니다. 각 괘는 대부분 한 글자, 가끔 두 글자로 이름이 붙었고, 두 종류의 부호로 이루어졌습니다. 한자의 한일 자처럼 죽 그은 선이 양효고, 양효에서 가운데가 끊어진 모양을 한 것이 음효입니다. 그러므로 주역에 나오는 상징 부호는 결국 양효와 음효 두 가지로 이루어졌습니다. 주역 부호의 기본 단위인 효가 6개씩 모여서 만들어지는 것이 64괘입니다. 12세기에 활동한 소강절이라는 사람은 이 64괘를 원형과 방형으로 배열하였습니다.

양효만 6개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 주역의 맨 처음에 나오는 건괘이고, 음효만 6개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 건괘 바로 다음에 나오는 곤괘입니다. 건괘와 곤괘는 주역의 모든 괘를 낳은 모체로서 우주에서는 하늘과 땅에 해당하고, 가정에서는 아버지와 어머니에 해당합니다.

음, 양 두 가지 부호를 세 번 사용하여 만들 수 있는 서로 다른 괘의 숫자는 모두 8개입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기본 8괘의 이름은 각각 건, 태, 이, 진, 손, 감, 간, 곤인데 건, 곤, 감, 이 네 괘는 우리 태극기에 들어 있습니다. 초기의 태극기 중에는 8괘가 다 그려진 것도 있었습니다.

건은 하늘, 태는 못, 이는 불, 태양, 진은 우레, 손은 바람, 감은 물, 달, 간은 산, 곤은 땅을 상징하는데, 이 상징은 대상 영역이 바뀌면 그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한 괘에는 위에 말한 하나의 상징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건괘는 하늘뿐 아니라 아버지를 상징하기도 하고, 동물 중에서는 말의 이미지와 연관을 맺기도 합니다.

주역의 64괘 384 효는 우주 만상의 변화 원리를 알리는 부호이고 64괘는 기본 8괘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계사전에서는 “역에 태극이 있으니 이것이 양의를 낳고, 양의가 4상을 낳고, 4상이 8괘를 낳는다.” 고 하여 기본 8괘가 생성되는 원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양의는 음과 양을 가리키고, 사상은 음양이 분화하여 이루어지는 노음, 노양, 소음, 소양 넷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이것은 주역이 설명하는 천지 만물의 생성 도식이 되고 우주 진화론의 기본 골격이 됩니다.

그러면 기본 8괘는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요? 거기에는 두 가지 주장이 있습니다.하나는 ‘하도 낙서설’이고 다른 하나는 ‘앙관 부찰설’입니다.

하도 낙서설은 하수와 낙수라는 강에서 등에 신비한 그림과 글이 적힌 용마가 나와서, 그것을 해석하여 팔괘를 그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역의 탄생을 매우신비화하고 있는 설입니다. 반면에 앙관 부찰설은 “옛날 복희씨가 천하를 다스릴 때 우러러 천문을 보고 굽어 자리를 살펴서” 팔괘를 그렸다는 주장으로 자연과 인간사를 모두 설명하는 주역의 원리를 천지 자연의 운행 법칙에서 찾았습니다. 실증적, 과학적인 연구 경향이 생기면서 하도 낙서설은 학자들에게 많은 비판을 받았고, 비판의 증거를 대는 글들도 많이 나왔습니다. 청나라 때 호위라는 학자가 지은 “역도명변”은 그 대표적인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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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신인가, 철학인가?

 

주역을 연구하는 것을 역학이라 하는데, 역학은 연구자가 주역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크게 두 파로 나누어져 왔습니다. 하나는 주역을 수리와 예언의 책으로 보는 상수학파이고, 다른 하나는 주역을 도덕, 철학의 책으로 보는 의리학파입니다.

의리란 도리나 윤리와 같은 말인데, 의리학파는 성인이 주역을 만든 본래 의도가 결코 점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며, 역의 목적은 천지 자연의 운행과 역사의 변화 원리를 밝혀 인간의 임무를 분명히 아는 것이 라고 봅니다.

그러나 상수학파는 점치는 기술에서 나온 상수학적 해석 기술을 중요시하고, 도상과 수리라는 해석 방법에 의하지 않는 의리의 주장은 내용이 없다고 합니다. ‘상수’라는 개념은 “춘추 좌씨전”에 처음 나타납니다. 거기에는 “거북점은 상이고 산대점은 수이다. 사물을 생긴 뒤에 상이 먼저 있게 되고, 상이 있게 된 뒤에 여럿으로 늘어나게 되며, 늘어난 뒤에 수가 있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상은 거북을 불에 구워 금이 갈라지는 형태로 점을 치던 것이고, 수는 시초라는 식물의 줄기로 조작하여 수의 원리에 따라 점을 치던 방법이었습니다.

상수학과 의리학의 역사적 변천에 대하여 “사고전서총목제요”에 정리된 것에 따르면, 상수학은 “좌씨전”에 쓰인 옛 점법의 계승이고, 한나라 때의 유가가 말한 상수도 이와 연결되며, 경방과 초연수에 이르러 미신적 예언 이론으로 빠졌고, 도사인 진단과 송대의 유학자 소옹에 와서 무궁한 조화의 학문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또 의리학은 역학이 백성의 실생활에 맞지 않는 공허한 이론으로 되자 왕필이 상수론을 비판하며 노장의 학설로 해석했고, 호원과 이천에 이르러 유학의 의리 정신으로 해석하였으며, 이광과 양만리에 이르러 역사 사실로 해석하는 방향으로 변천하였습니다.

왕필의 해석은 한 대의 미신적, 신비적 경향을 벗어나 역을 철학적으로 해석하였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한강백이 왕필의 미완 작업을 보완한 후 왕필 역은 역학의 정통으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상수론자들은 왕필의 이러한 해석이 상수학적 방법론의 중요성을 무시하게 만들었다고 비판하였습니다. 그러나 이후 의리론자들이 괘상과 관련 없이 문장의 의미를 중심으로 철학적이고 윤리적인 교훈을 끌어내려고 한 것은 왕필의 영향력이라고 하겠습니다.

왕필은 ‘설괘전’에서 괘상과 물상을 연관지어 설명한 대목을 무시하고 물상과 괘사는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을 근거로 해서, 괘사 자체에서의 의미가 서로 맞는 것을 보면 될 뿐 괘상이 괘사에 반드시 일치할 필요는 없다고 하였습니다. 왕필의 이러한 입장은 ‘득의망상론’에 들어 있는데, 이것은 역의 괘가 구체적 대상의 직접적인 추상이라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입니다.

오대 말기와 송대 초기, 즉 10세기 전후에 도사인 진단은 화산에 숨어 살며 역학 도형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후세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합니다. 진단의 영향을 받아서 주돈이는 ‘태극도설’을 지었습니다. 당시 역학의 새로운 흐름인 도수학적 상수학이라는 방법이 탄생한 것입니다. 특히 소강설의 상수학은 이 새로운 상수학을 대표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도중에서도 하도와 낙서를 중요하게 여겨 수리적인 해석을 붙였습니다.

의리학파인 정이천은 상이 의리, 곧 도덕을 밝히기 위한 수단적 의미를 가질 뿐이라고 하고, 소강절과 한마을에 살면서도 상수에 대해서는 한 번도 묻지 않았다고 합니다. ‘천둥이 일어나는 곳은 어디인가’하는 소강절의 질문에 정이천은 ‘그것은 일어나는 곳에서 일어난다’고 대답하고, 도리를 아는 것이 중요하지 수란 도리의 부스러기에 불과하므로 군자의 관심 대상이 아니라는 입장을 보였다고 합니다. 정이천은 수에 집착하면 점치는 사람들의 허황한 이론에 빠지게 된다고 비판하였습니다.

지금도 역의 해석에 대한 의리학파와 상수학파의 차이는 그대로 존재합니다. 상수학파의 입장은 주역이 천하 만물의 변화 법칙을 담고 있으며, 괘를 풀이한 말과 괘와 효의 상징은 구체적 세계를 표현한 상징이자 해석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입장을 발전시키면 주역은 만물의 이치를 담고 있는 책으로 미래를 예언할 수 있다는 이론이 나오고, 점을 쳐서 미래에 대비한다는 실제적인 행동을 일으킵니다. 간단히 말해서 지금도 점의 예언이 의미있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미신에 불과하다는 사람으로 나누어지는 것은 상수학에 동의하는 입장과 반대하는 입장에 따른 것입니다. 점에 대한 입장의 차이는 마지막 대목에서 다루기로 하고, 먼저 주역의 기본 원리와 사상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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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은 변화한다.

 

장자 ‘천하’편에서는 “역으로 음양의 변호 원리를 말하였다”고 했습니다. 또한 근세 서양 학자들은 주역을 번역할 때 ‘변화의 책’이라고 제목을 붙였습니다. 그것은 역이란 글자에 바뀐다. 변한다는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글자에는 또한 쉽다, 간단하다는 뜻도 있습니다. 한자 사전에서도 ‘바뀔 역’자와 ‘쉬울 이’자로 풀이하고 있습니다. 우주 삼라만상의 온갖 복잡한 변화를 음양의 대립, 조화 원리로 설명하므로, 쉽고 간단하다는 뜻입니다. 우주의 변화는 끊임이 없지만 음양의 원리는 변하지 않기 때문에 역에는 변하지 않는다는 뜻도 있습니다.

그래서 역이란 글자에는 첫째 변하다, 바뀐다, 둘째 간단하고 쉽다, 셋째 변하지 않는다는 세 가지 뜻이 있습니다. 결국 주역은 우주 만물의 변화를 음양의 변화 원리로 풀이한 책이라고 하겠습니다.

‘만물은 변화한다’는 생각은 주역의 가장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이 생각은 사물을 보는 방법에서 매우 중요한 하나의 입장을 선택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결혼 상대자를 고를 때, 오직 미모를 기준으로 고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미남이나 미녀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가 선택한 사람이 30 년, 40 년 뒤에도 미인일지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미에 대한 자신의 기준도 바뀐다는 점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가지고 있는 미인의 기준을 계속 고집한다면, 이 사람은 평생 새로운 미인을 찾아다녀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 만물이 변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사물을 바라보는 것과 지금 보이는 것을 고정시켜서 생각하는 것은 똑같은 문제에 대하여 다른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변화를 모르면 세계를 바로 알 수 없다고 주역은 가르칩니다.

주역에서 만물의 변화는 일정한 원리를 따르고 있습니다. 그것은 ‘순환의 원리’라 이름 붙일 수 있는 것입니다. 만물은 태어나서 성장하고 노쇠하여 죽은 과정을 반복합니다. 이것을 보여 주는 예는 동식물의 성장과 자연계의 사계절 변화 같은 것에서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주역의 64괘 배열에서 마지막 괘의 이름이 ‘미제’인데, 그것은 글자 그대로 ‘완성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미제’ 괘 바로 앞에 있는 괘의 이름은 ‘기제’입니다. 이것은 ‘완성되었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지막을 ‘미완성’으로 열어 놓은 것도 주역의 무한한 순환 원리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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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지위와 역할

 

주역은 괘의 해석에서 천, 지, 인이라는 세 범주를 이용합니다. 이것을 ‘삼재 사상’이라고도 하는데, 이 세 변수가 변화의 핵심 요소라는 생각입니다. 이것을 더욱 실천적으로 표현하면, 천시와 지리와 인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셋은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고, 만물의 변화 가운데 큰 덩어리입니다. 주역의 삼재 사상은 천지 자연의 위력을 높이면서도, 인간의 위치를 만물을 덮고 만물을 실은 하늘과 땅에 맞먹는 존재로 올려 놓았습니다. 계사전에서 구체화된 이 사상은 순자에서 뚜렷이 표현된, 자연을 이용하고 다스리는 인간상을 나타낸 것입니다.

주역의 괘사에서는 ‘회린’과 ‘길흉’을 표시하고 있는데, 역이 미래를 알려주는 책이라고 해석할 때 가장 중요시되는 개념입니다. 계사전의 해석을 통하여 이 말을 풀이하면, 회린은 사태와 사물이 앞으로 변화해 갈 싹을 보인 것이고, 길흉은 사태가 진전되어 점치는 사람에게 좋은 결과와 나쁜 결과로 확정된 것을 알려줍니다. 주역을 윤리적으로 해석하는 입장에서는 흉한 결과를 예고하면 반성 경계하고, 길한 결과를 예고하면 그 방향을 잘 유지할 수 있도록 조심해야 한다고 해석합니다. 나이가 훌륭한 연구자는 회린, 다시 말해 사태의 초기에 더욱 잘 알아서 대처합니다. 그러므로 주역은 결정된 미래의 변화를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그 책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반성하고 조심하도록 하는 계기가 된다는 것입니다.

점을 믿는 사람들은 미래의 일이 정해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역의 사상에서 보면 사람의 미래는 스스로의 노력과 행동에 따라 다른 결과로 나옵니다. 조선 후기의 대학자인 다산 정약용 선생은 유교 경전을 깊이 연구하고 특히 역에 대한 해설도 썼지만, 한 편지에서 “수십 년간 역을 연구하였지만 나 자신의 일을 가지고 점을 쳐보지는 않았다”고 썼습니다.

주역을 점치는 책으로 보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점이라는 것이 이기심에서 나온다는 점을 우선 문제 삼습니다. 자기의 이익만을 목표로 점을 치는 심리 자체가 선한 동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주역을 스스로 반성하고 경계하는 윤리서로 해석하지, 자기에게 유리하게 할 방법을 찾는 도구로 여기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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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재 세계와 수

 

역은 세계의 변화를 괘와 효로 상징하고 괘사와 효사는 그 상징을 말로 풀이하고 있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 바 있습니다. 또한 역의 괘가 이루어지는 원리와 괘효의 변화에는 일정한 수리 법칙이 있고, 그에 따라 해석하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과 사물의 미래를 알 수 있다는 것이 상수학의 논리라는 것도 이미 말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수나 말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사물 그 자체는 아니라는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첫머리에 냈던 퀴즈를 다시 생각해 볼까요?

이 문제의 답은 무엇일까요? 나그네들이 낸 돈을 모두 합치면 2700원이고, 거기에 중간에서 심부름하는 아이가 슬쩍한 200원을 합쳐도 2900원밖에 되질 않았지요.그래서 처음의 3000원에서 100원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하지만 다시 잘 생각해 보면 나그네들이 낸 돈은 모두 2700원이고 그중에서 주인이 2500원을 가졌고, 심부름꾼이 200원을 가졌으니 아무런 착오도 없었던 것입니다. 100원이 사라진 것처럼 보였을 뿐, 사실 이 퀴즈는 문제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수나 말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사물 그 자체는 아니라는 점이, 수리로 운명을 해석하는 경우에 흔히 무시됩니다. 예를 들어 수가 곧 참 세계라고 생각한 서양 고대의 피타고라스 학파는 수의 원리에 따라 태양계에는 10개의 행성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실재 세계에서 이들이 말하는 10이라는 숫자는 무엇을 가리키는지 불확실합니다.

현대 과학에서 분류하는 방식으로 하면 지금, 금성, 화성, 수성, 토성 등의 행성과 태양은 서로 다른 종류의 별입니다. 우선 스스로 빛을 내느냐 아니냐의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태양처럼 스스로 빛을 내는 별을 항성이라 하여 행성과는 다른 종류로 분류합니다. 지구와 달도 종류가 다릅니다. 달은 지구의 위성입니다. 태양계 안에서 발견된 수천 개의 행성들은 왜 그 10에 넣을 수 없는 것일까요? 이렇게 따지기 시작하면 피타고라스 학파의 주장은 기초에서부터 합의해야 할 것이 너무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수는 대상을 분류하는 방식에 따라 달리 나타납니다. 대상 세계와 우리의 분류 방식을 무시하고 수를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동양에서도 하늘과 사람은 닮은꼴이라 하여 사람을 ‘소우주’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예를 들기를, 하늘에 해와 달이 있는 것은 사람에게 두 눈이 있는 것과 같고, 천지에 오운 육기가 있는 것은 사람에게 오장 육부가 있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해와 달이 있는 것과 눈이 둘인 것이 서로 연관이 있다고 주장하는 근거는 무엇일까요? 우리 몸에는 눈 외에도 쌍을 이루고 있는 것이 많을 뿐더러 우주에는 태양이 하나가 아니라 엄청나게 많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즉 태양계와 같은 구조가 수백억 개 모여 하나의 은하계를 이루고, 그 하나하나의 태양계에는 각각 태양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수의 신비한 법칙으로 밝힌 주역의 운명론이라는 것은 자칫하면 아무 관련이 없는 수를 서로 더하고 곱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나그네들, 여인숙 주인, 심부름하는 아이 중 누구도 가져가지 않은 100원을 찾아 헤맬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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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은 미래를 알려주는가?

 

주역에 대한 현대인의 태도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하나는 주역에는 우주의 원리가 들어 있고, 주역은 완전히 이해하면 우리의 미래와 사물의 변화를 예견할 수 있다는 태도입니다. 다른 하나는 주역은 인류 정신 문화의 유산이고, 우리가 지나간 역사를 연구하여 오늘의 자신을 더 잘 알고 오늘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얻고자 하는 것처럼 주역의 정신도 연구할 가치가 있다는 태도입니다. 이 두번째 태도가 보통 주역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주역은 과거 무지한 시대의 유치한 부호 놀이에 불과한 것이라고 일축하는 입장도 있겠지만 그런 독자라면 여기까지 앍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문제는 주역의 원리를 알면 미래를 예견할 수 있다는 이 매혹적인 주장이 우리의 과학적인 태도와 부딪힘에도 불구하고 계속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점입니다. 아들 딸이 대학에 합격했으면 하는 바람이나 중요한 거래가 잘 이루어져 사업이 번창하기를 바라는 마음, 서로 모르는 것이 많은 한 쌍의 남녀가 앞으로 행복한 가정을 이루었으면 하는 기원, 위험한 일을 하는 사람이 다치지 않기를 바라는 염려 등등 너무나 인간적이고 절실한 소망들에 대답하는 것에서부터 국가의 미래나 세계 정세는 물론이고, 인류의 미래를 떠맡고 있는 과학 기술의 최첨단 이론에 대답하는 것까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신비한 책으로 주역을 믿는 태도, 이것이 문제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주역이 인기를 유지하고, 복잡한 이론을 계속 만들어 오고, 세상의 온갖 일에 끼어들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신봉자들의 노력에 힘입은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태도는 주역이 어째서 그토록 신비하고 위대한 힘을 가질 수 있는지 설명하기에는 궁색합니다. 다만 성인이나 신인이 만들었다거나 하늘이 내려준 신비한 기적으로 주역 탄생의 신비성을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주역의 신비와 위력을 객관적으로 보여 줄 방도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역의 신비와 위력을 객관적으로 보여 줄 방도가 없습니다. 주역을 믿는 사람들이 신통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허점투성이로 보이는 것도 큰 부담입니다. 1989 년에 중국에서 출판된 어떤 책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1981 년 1월, 미국 해군 천문대의 두 과학자는 태양계에 열 번째 행성이 존재한다고 예언하였다. 매스컴은 이 특종을 대서 특필했고, 사람들은 감격하고, 토론하고, 찬탄했다. 일찍이 1940 년대에 한 중국인 학자가 역학의 특수한 방법을 사용하여, 열 번째 행성의 존재를 계산하고 목왕성이라 이름 붙였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1940 년 11월 1일, 프랑스 파리 대학에서 통과된 사천 출신 유자화 선생의 박사 학위논문 ‘8괘 우주론과 현대 천문학, 한 행성에 대한 예측’이다.

 

이 중국인 학자는 현대 천문학 이론과 주역의 하도, 낙서 수리를 결합하여 이러한 예측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른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그렇게 놀라운 일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피타고라스 학파는 이미 오래 전에 열 번째 행성을 말하지 않았습니까? 또한 현대 천문학의 이론과 관측 자료, 계산 자료를 이용하였다면 이 논문의 결론이 주역의 원리에서 나왔다고 할 이유가 있을까요? 그렇지만 중국의 역학 신봉자들에게는 역시 반가운 소식이었을 것입니다. 21세기를 눈앞에 둔 지금, 현대 과학의 놀라운 성과가 혁명을 일으키고 있다는 이 시점에 주역 신봉자들은 더욱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개혁 개방을 추진하면서 학술 연구의 자유로운 분위기를 열어 놓은 중국에서 이 모습은 흥미 있게 나타납니다.

 

최근 10 년 동안 주역 신봉파는 중국 학술계에 다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점차 흥성하고 있다. 새로운 신봉파들은 근대 이후 국내외의 성과 외에도 주역 속에 포함된 현대 과학 내용을 계속 끌어내고 또 새로운 방향을 개척하였다. 주역을 중국 고대 자연과학 모든 분야의 원류라고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주역 속에는 고대 천문학이 있고, 중국 의학이 기본 이론이 있고, 고대 수학의 성과가 있다는 등등이다.

그리고 이 몇 년 사이에 기공이 인기를 끌고 있다. 송대 이후 기공의 이론적 근원인 내단설은 역학의 도식을 많이 끌어왔으므로 기공의 유행은 또한 역학에 생기를 주었다. 인체의 건강과 장수는 여러 요인에 달려 있기 때문에 완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그래서 인체에는 산과 바다를 움직이고 백만 대군을 막아내는 능력이 얼마나 숨어 있는지, 얼마나 많은 신비가 숨어 있는지 알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현대 과학의 진보로 일반인들은 우주의 신비는 이제 거의 없다고 생각하게 된 반면, 현대 의학의 결함 때문에 어떤 사람은 인체의 신비가 도리어 무궁무진하다고 생각하게 된 것 같다. 인체의 신비는 태극, 음양, 5 행, 8괘, 선천 후천 따위의 관념 속에 들어 있고, 다양한 역학 도형 속에 들어 있다. 특히 흑백이 서로 휘감아 도는 ‘음양어도’는 더욱 사람들이 오묘 무궁하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주역은 우리가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계획적으로 실천하기를 포기하고 무슨 신통력을 믿어 우주와 인간의 비밀을 알 수 있도록 하는 책은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고대에 형성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입장에서 해석하고 보완하여 만들어낸 세계에 대한 이해 방식이고, 자기 성찰을 전제한 행동 지침입니다. 주역의 설명 원리는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나온 역사의 산물이면서 갈래가 아주 많은 해석과 학설들의 집합입니다. 그러나 보통 점을 믿는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미래의 세계가 도식적이고 운명적으로 결정되어 있다거나 주역이 생년월일을 집어넣으면 미래가 나오는 신비한 장치라고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주역의 이론이 고대 과학 기술과 일상 생활 속에 하나의 사고 방식으로 널리 파고 들어가 미신과도 붙고 경험 과학의 원리로 원용되기도 하여 잡다한 모습을 띠게 되었고, 점의 대명사처럼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

주역의 신비성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말하듯이 고대 과학이 모두 주역에서 나왔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이야기입니다. 주역에서 말하는 수는 1, 3, 5, 7, 9는 홀수, 양수요, 2, 4, 6, 8, 10은 짝수, 음수이며, 이들의 합은 55라는 정도의 초보적인 개념과 논리를 기초로 합니다. 주역에는 정수만이 쓰입니다.

주역이 책으로 만들어진 시기에서 그리 멀지 않은 때에 나온 중국 고대의 수학책 “구장산술”, “주비산경” 등에는 삼각형, 사다리꼴 , 원, 부채꼴의 면적 구하기, 비례 문제, 6 면체, 원기둥, 각기둥, 원뿔, 각뿔 등의 체적 구하기, 개방술(제곱근을 구하는 법)과 구고법(피타고라스 정리의 특수 형태)등이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주역의 수로는 물론이 문제들을 다룰 수 없는 것입니다. 주역의 원리를 연역하여 이들 수학책이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주역에서 디락 방정식이 나온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자신도 모르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 그는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입니다. 즉, ‘현대 과학의 최첨단 이론을 주역은 이미 고대에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니 우주의 비밀을 담고 있는 신비의 책이다. 인류 지혜의 알파요 오메가다. 자잘한 인간들이 감히 멋모르고 비판할 책이 아니다’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더 이상 이런 이야기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을까요? 동양 고전에 대한 신비화는 동양 철학 자체의 발전을 가로막을 뿐입니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주역이 인류의 정신적 유산임을 부정하거나 그 철학적 가치를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사고를 단련하는데 철학 공부가 가장 좋은 방법이라면, 우리는 주역을 철학사 안에서 의미 있는 책으로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돌아보기: 남은 이야기들

서독이 동독을 흡수 통합했다는 뉴스로 온 나라가 떠들썩하던 무렵, 동독에서 나온 철학 교과서를 보다가 언뜻 한 구절에 눈길이 갔습니다.

“포유 동물 태내에서 인간 수정란 양육.”

‘포유 동물’이라니! 소, 말, 개, 돼지, 고래 같은 것 아닌가? 그렇다면 소나 말의 뱃속에서 사람의 지식이 자라고 소나 말이 사람을 낳는다는 말인가? 그 책은 이러한 일이 유전 공학의 발달로 가능해지기는 했지만, 도덕적으로 거부해야 한다고 덧붙이고 있었습니다.

그런 일을 가능하게 만든 과학은 무엇이고, 그런 일을 거부하는 도덕은 무엇인가? 아이 낳는 일이 공장에서 물건 찍어내는 일인가? 하긴 그렇게 되면 많은 여성들이 분만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도 있겠고, 임신으로 사회 활동이 중단되지 않을 수도 있겠구만. 생각은 꼬리를 물고 일어났습니다. 대리 임신으로 아이(새끼)를 빼앗기는 짐승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짐승들은 아이를 낳게 될까, 아니면 해부를 해서 꺼내게 될까? 이상한 이야기에서 받은 충격이 이상한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이런저런 생각 끝에 지금은 고인이 되신 옛 은사님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그때는 유신 정권이 물불 가리지 않던 시기였고, 지붕 개량 다 끝내고 ‘한국적’인 것을 찾느라 고심하던 시기였습니다. 동양 철학자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전통적 덕목 가운데서 새삼스럽게 ‘충효 사상’을 뽑아내 정권을 떠받드는 역할을 열심히 해냈습니다. 현실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낡은 것으로만 보이던 동양 철학이 현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 준 일이었다고나 할까요?

마침 논어의 ‘효’에 관한 구절을 강의하던 그 선생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즈음 아이들은 우유를 먹고 자란다. 우유는 소 젖 아닌가? 소 젖 먹고 자란 아이와 사람 젖 먹고 자란 아이는 다르지 않겠는가?”

아마도 ‘충효 사상’을 내세우면서 불효자들이 가득 찬 세상 탓만 할게 아니라, 먼저 아이들을 사랑으로 키웠는지 반성해야 한다는 뜻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우유를 먹는다고 사람이 달라질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도덕은 문화의 산물이며, 사회의 상부 구조인 문화나 도덕은 우유를 먹느냐 모유를 먹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생산 관계나 물질적 토대에 달려 있다는 생각에서 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생각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우유를 먹느냐 모유를 먹이느냐의 문제가 바로 사회적 토대와 관련 있는 것이며, 나아가 가치관이나 생활 양식까지를 반영하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몇 달 전 신문에서는 영국의 한 의학팀에 돼지의 유전자를 조작해서 그 뱃속에 사람의 간이나 심장을 달고 살게 하는 데 성공하였다는 보도가 실렸습니다. 그 기사를 보면서 언제든 뱃속에 있는 인간의 장기를 다시 사람들에게 내주어야만 하는 그 돼지가 사람들의 식사를 위해 제 몸을 내주는 돼지보다 더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강의 시간에 이런 문제를 가지고 토론을 했을 때, 학생들은 윤리라는 명목으로 과학 연구를 제한할 것이 아니라, 과학이 발견한 지식과 능력을 바르게 사용하도록 통제하면 될 뿐이라는 의견을 많이 냈습니다. 나는 학생들에게 묘한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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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살아나는 춘추 전국 시대

 

과학의 발달은 인간에게 끝없는 가능성을 보여 주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과학을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옳으냐 하는 문제를 가져왔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인간의 능력이 한계에 이르렀다고 하면서 과학이 마침내 사람을 다 죽이고 말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그래서 자원 고갈이나 환경 문제, 과학의 윤리성 문제 등을 제기합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과학이 더 발달하면 모든 문제는 해결된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와중에서 이제까지 과학이 싸워서 이겨냈고 생각했던 과거의 적들이 곳곳에서 들고일어났습니다. 신비주의, 종교, 도덕이 그것들입니다. 얼마 전에는 미국에서 낙태 반대 운동을 하는 사람이 산부인과 의사를 총으로 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사람을 죽이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세계는 고대의 한 나라만큼이나 좁아졌습니다. 그 속에서 모든 나라들이 자기 나라, 자기 민족의 이익을 위해 치열하게 싸웁니다. 조금 더 커진 ‘달팽이 뿔 위의 전쟁’으로 발전한 셈입니다. 물론 이런 싸움의 주도권은 사회주의권이 몰락한 뒤로는 엄청난 과학 기술을 가진 서양, 특히 미국이 쥐고 있습니다.

15세기 무렵까지는 동양의 과학이 서양보다 앞서 있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동양의 과학을 받아들여간 서양이 18세기 무렵까지 동양을 뒤쫓아 오더니, 18세기를 넘어서면서부터 어느새 동양을 앞지르고 말았습니다. 동양은 그 동안 무엇을 했을까?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이상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그 바람은 복고풍이었으며, 동양 철학 바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때아닌 동양 바람은 동양이 아닌 서양에서 불어오고 있습니다. 그 바람을 일으킨 사람들 가운데는 과학이 이룬 성과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동양적 세계관으로 전환한 무리의 종교인 비슷한 과학자들도 있고, 자본주의 발전을 합리화하면서 그 속에 들어 있는 모순을 감추려는 철학자, 경제학자, 정치학자들도 있습니다. 이들이 가진 목표와 분위기는 서로 다르지만 끌어다 쓰는 것은 한결같이 동양 철학입니다. 참 별일입니다. 과학과 신비주의라니, 자본주의와 유교라니? 모두 하나같이 어정쩡한 모습입니다.

어쩌다 이렇게 복잡해졌을까? 돈 되는 일이면 무엇이든 상품화하는 자본의 속성이 이런 분위기를 가만 놓아둘 리 없습니다. 한의학이나 기공, 태극권, 주역 등에 대한 일반 사람들의 관심이 부쩍 늘어난 것이 그 증거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동양 철학에 흥미를 느끼면서 한편으로 무언가 기대를 갖고 있습니다. 마치 만병 통치약이나 구세주를 기다리던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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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과학 운동, 기공, 유교 부흥론

 

동양 철학을 전공하는 사람에게 동양 철학의 유행이 반갑지 않을 리는 없습니다. 그러나 무작정 반가워할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바라던 모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복고풍 속에서 100여 년전 동양을 짓밟아 오던 서양의 총칼이 다시 보입니다. 또 다른 오리엔탈리즘의 부활인 셈입니다.

서양의 눈에 동양이 언제 무엇으로 보였었는가? 중고등학교부터 대학까지 가르친느 세계사를 봅시다. 동양은 고대 문명의 발생기에 그 모습이 조금 나옵니다. 그 이후 알렉산더의 동양 침략이나 마르코폴로의 여행, 바스코다가마의 인도 항로 발견, 그리고 근대 제국주의 침략에서 동양이 다시 등장합니다. 이 모두가 철저히 서양에서 본 동양일 뿐이며, 서양의 이용 대상으로서의 모습에 지나지 않습니다. 바로 이런 관점이 오리엔탈리즘의 전형입니다. 20세기 후반에 우리 사회에 불어닥친 복고풍 또한 연장선 위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작정 반가워할 일이 아닙니다.

근래 동양 철학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흐름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상당히 체계적인 ‘신과학 운동’을 먼저 봅시다. 신과학 운동은 핵물리학자였던 카프라가 시작했습니다. 카프라가 쓴 “현대 물리학과 동양 사상”이 우리 나라에 소개된 것은 1979 년이었습니다. 신과학 운동은 1960 년대 월남전 반대 운동, 히피 운동 같은 뉴 에이지 운동과 연관하여 자리잡았습니다. 카프라는 현미경을 통해 발견해 낸 존재의 본질, 세계의 참모습은 동양 고대 사상가들이 직관을 통해 본 그것들과 같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주장하는 세계관을 보강하는 논리로 화엄, 철학, 힌두교, 주역, 노장 철학, 기철학 등에 나타난 물질관 또는 우주관을 끌어들여 옵니다.

카프라는 독일 녹색당의 강령을 기초하기도 했고 여성 운동에도 관여했으며, 지금은 미국에서 동양 철학과 과학에 대한 강연과 저술 활동을 하면서 주역을 읽고 태극권을 수련하는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현대 물리학과 동양 사상”이 소개된 뒤를 이어 카프라의 책들뿐만 아니라 비슷한 종류의 책들이 수십권 나왔습니다. 이런 책들은 어느 정도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고, 아울러 동양인들의 자부심을 부추기는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신과학 운동은 뉴튼과 데카르트로 대표되는 근대 과학의 기계적 세계관과 양자 역학이나 상대성 이론에서 나온 현대 과학 이론 사이에 벌어진 틈을 타고 생겨난 새로운 세계관입니다. 카프라는 근대 과학의 세계관은 세계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근대 과학의 세계관은 만물을 쪼개고 나누어서 그 본질적인 구성 요소들을 찾아내려는 요소론적 세계관, 현상의 원인을 그렇게 찾아낸 요소들에 귀결시키려는 환원론적 세계관, 현상과 현상 사이의 관계를 필연적으로 메커니즘으로 설명하려는 기계론적 세계관입니다. 카프라는 이 같은 세계에 대한 이해를 생태학적이고 유기체적인 새로운 세계관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유기체적 세계관의 모형으로 동양 철학의 세계관을 끌어오는 것입니다.

유기체적 세계관은 개체와 개체의 관계, 개체와 전체의 관계에 주목합니다. 인체를 자연과 인간의 조화와 인체 내 각 기능들 사이의 조화로 설명하는 한의학적 세계관, 정신과 육체까지 포함하여 만물의 통일성을 기로 설명하려는 기철학, 개체 속에 만물이 담겨 있다는 화엄적 세계관 등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동양 철학을 유기체적 세계관으로 본 사람은 니덤이었습니다. 니덤은 제1차 세계 대전을 전후하여 유럽에서 서구 문명 위기론이 유행할 무렵 젊은 시절을 보냈습니다. 뒤에 니덤은 열렬한 중국 지지자가 되었는데 그 배경에는 이때 서구 문명에 대해 느꼈던 감정이 많이 작용하였습니다. 니덤은 20세기를 통틀어 손꼽힐 만한 저작으로 지목되는 “중국의 과학과 문명”이라는 방대한 책을 펴냈습니다.

카프라의 동양 철학 이해는 니덤의 소개에 많이 의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카프라는 중국의 사상뿐만 아니라 건축, 관개, 의학 등 다양한 과학과 사회, 경제까지를 폭넓게 이해한 니덤과는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카프라는 동양 철학의 수행론에 관심이 많으며, 참선이나 요가 등이 과학만큼 객관적인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수행을 통한 세계 이해와 과학을 통한 세계 이해의 차이를 모호하게 만듭니다.

결과적으로 신과학 운동은 동양 철학을 신비한 상품으로 유행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일부 동양 철학 연구자들은 동양 철학에 현대 과학을 지도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들어 있다는 은근한 자부심까지 갖게 되었습니다. 이런 분위기를 옆에서 부추긴 책들은 한둘이 아닙니다. 미국의 시각으로 오리엔탈라이즈드되어 서구의 우월감을 관철하는 역할을 하는 데 불고한 라즈니쉬 계열의 책들, 알맹이를 빼 버리고 현실과 동떨어진 우화로 만들어 버린 동양 고전들, 지고의 복음으로 포장되어 개인의 이익을 부추기는 주역과 관련한 책들이 모두 그러합니다.

두 번째로 볼 수 있는 흐름은, 과학의 남용이 환경과 인체 건강에 심각한 문제를 가져오면서 생긴 수련 차원의 관심 증가입니다. 이 문제는 1980 년대 우리 사회 상황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1980 년대 초에 우리 사회는 엄청난 폭력을 겪었습니다. 그 뒤 죽어 버린 것 같았던 민주화의 열망의 조금씩 자라면서 이를 누르려는 정치적 폭력과의 사이에 대립과 긴장이 확장되는 틈을 타 초능력과 신비를 파는 시장이 넓어져 갔습니다.

여기에는 사회주의권이 몰락하면서 우리 사회의 변혁에 대한 전망이 퇴조한 것도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북방 외교다 올림픽이다 하는 사이에 개인적인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아울러 단학, 태극권, 기공이 유행하면서 ‘기철학’도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중국과의 수교는 기공에 대한 관심을 더욱 높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중국은 현재 기에 대해 대대적으로 연구하고 있으며, 우리 나라에도 ‘기를 찾는 사람들’이 더욱 늘어 가고 있었습니다. 이런 추세로 나가다 보면 ‘기’가 사회 문제를 일으키게 될지도 모릅니다.

기를 가지고 사회를 설명하려 한 사람들은 중국 명말 청초의 지식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기에서 사회적 실천을 끌어내려고도 했고, 은둔 철학을 설명하는 개념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우리 나라 조선 시대의 유학자들도 명상과 정신 통일을 자기 성찰의 방법으로 삼았던 것으로 보이며, 궁극적으로는 경건한 생활을 실천하는 토대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수련 목적은 기의 단련이 아니라 도덕적 자각이었습니다. 유학자들은 대부분 기를 물리적이고 기계적인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의학이나 단학에서 말하는 수명을 연장한다거나 신통한 능력을 얻는다는 주장을 이치에 맞지 않는 이야기라고 비판하였고, 신체가 떠오른다거나 신통한 능력이 생겼다는 것은 물리에 본래 있는 이치의 표현이며 결국 정해진 한계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것은 유학자들이 도덕적 가치를 중시하면서 얻은 합리성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기공이나 기철학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도 동양 철학의 대중화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기공 수련이 건강이나 신체에 대한 이해와 직결되면서 한의학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습니다. 기공이나 한의학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동양 철학 전체 체계를 알고자 하는 의욕을 보이고는 있지만, 아직은 동양 철학을 개인적인 양생 수련법의 지침 정도로 이해하고 있는 셈입니다. 요즈음 사람들의 이 같은 관심은 과거 동양 철학자들의 문제 의식이 정치와 도덕이라는 구체적인 사회 현실에 있었던 것과는 다른 접근 방법입니다.

세 번째로 볼 수 있는 흐름은 자본주의 질서와 관련된 유교에 대한 관심입니다. 이 문제는 동아시아 지역의 문화 전통과 관련한 학계의 토론에서 잘 나타납니다. 문제의 중심은 정치 경제적인 분야와도 관련이 있으며, 새로운 사회주의 중국을 건설하기 위해 개혁 개방 정책을 펴고 있는 중국의 학계에서 1980 년대에 일어났던 ‘문화열’ 논쟁이 이런 모습을 잘 담고 있습니다. 먼저 중국의 ‘문화열’ 논쟁을 봅시다. 중국은 자신들이 처한 위치를 ‘사회주의 초급 단계’라고 규정합니다. 따라서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경제 건설에 모든 힘을 쏟는 과정에서,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전통 문화를 사회주의 정신 문명 건설에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를 논의하기 시작했습니다. 주된 관점은 전통 문화를 정확하게 알고, 경제 건설에 유리한 요인 불리한 요인을 분석해 내서 정책에 반영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일본의 어떤 중국학자는 중국의 사회주의 초급 단계론은 문화를 거론하는 까닭은 사회주의 가치 규범이 담당하고 있던 영역에 생긴 공백을 전통 철학의 윤리 규범으로 채우려는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이 같은 중국 내의 유교에 관한 논의는 그 동안 일본을 중심으로 자본주의 진영에서 논의해 왔던 ‘유교자본주의론’과 연관이 많습니다. 유교자본주의론은 일본과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인 한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의 경제 성장에 유교 문화가 긍정적으로 작용한 면이 많다는 내용을 검토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논의는 그 다섯 나라의 경제 성장 원인을 공통된 문화적 토대에서 찾으려는 것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에는 유교를 중심으로 한 문화 심리적 전통을 경제 건설에 이용하려는 뜻이 담겨 있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최근 들어 이와 비슷한 논의가 많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이 논의의 중심은 일본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일본은 세계 경제의 블록화 추세로 아시아 지역에서 발판을 굳히는 문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새로운 ‘중국학’을 논의해 왔습니다. 중국과 수교한 지 20년이 넘은 지금, 일본은 중국에 대한 많은 전략적 연구를 축적해 놓았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이러한 논의 속에서, 아시아 사회의 미래를 전망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문화적 특수성과 전통에 대한 새로운 검토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볼 수도 있습니다. 유교자본주의론은 우리 나라의 동양 철학 연구자들에게도 상당한 영향을 주고 있으며, 나아가서는 철학보다도 경제학이나 정치학 분야에서 연구 성과가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움직임들에는 많은 편차가 있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전통적 가치 규범이나 도덕 윤리의 부활을 주장하는 데까지 나아가는 복잡한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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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문제인가?

 

오늘 우리 사회의 경제 체제는 자본주입니다. 자본주의는 속성상 상품화된 도덕과 신비주의를 만연시킵니다. 앞에서 살핀 동양 철학 붐은 자본주의 발전에서 나온 도덕적 타락과 인간성 상실, 공해로 대표되는 생태학적 위기 등을 상품화된 전통으로 메우려는 시도들입니다. 공자, 맹자, 순자의 유교는 도덕의 부재, 인간성 상실 같은 가치적 측면을 메우는 도구이고, 이울러 자본주의 구조를 강화하는 탈출구입니다. 이 같은 동양 철학 붐이 왜 문제인가? 그 문제점들을 짚어 보면 무엇이 바람직한 동양 철학일까라는 물음에 대한 해답이 나올 것입니다.

첫째 문제는 개인주의입니다. 이러한 관심의 밑바닥에는 자신의 내면에 주관적인 틀을 만들고 거기에 안주하면서 자유를 누리려는 이기주의적 발상이 깔려 있습니다. 수련을 통한 개인의 완성으로 둔갑한 노자와 장자의 철학, 도덕적 자아를 강조하는 데 그치는 공자, 맹자, 순자의 유학, 개인의 이익을 따지는 점서로서의 주역 등이 그러합니다. 이 같은 경향은 만원 지하철 속에서 곁의 사람이 어떻게 되든 상관 않고 노자나 장자 같은 책을 읽으면서 자기 마음의 평안을 구하는 모습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오늘날 유행하는 노장 사상은 신경 안정제 같은 구실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사회 구조가 만들어낸 문제까지도 개인의 문제로 돌려 버려 문제의 본질을 왜곡시킬 우려가 있습니다. 유교 또한 개인의 도덕적 반성을 통해 반사 이익을 얻음으로써 봉건 도덕 전체를 미화시킬 수도 있습니다.

둘째 문제는 개인주의의 확산이 가져오는 사회성의 부정과 실천성의 결여입니다.

개인에 대한 집착은 내면의 주관적 행복만을 추구하게 만듭니다. 그 결과는 자신의 문제가 아니면 돌아보려 하지 않는 이기주의를 만듭니다. 따라서 사회 곳곳에서 나타나는 불의와 부정에 타협하지는 않는다고 해도 눈을 감게 만듭니다. 그리고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책을 내면의 수양에 둠으로써 실천이 결여된 주관의 문제로 바꾸어 버립니다. 이런 경향은 기의 수련을 통해서 또는 한의학에 대한 관심을 통해서 얻으려는 것이 건강한 사회가 아니라 건강한 개인인 것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셋째 문제는 이런 것들이 귀결할 수밖에 없는 신비주의입니다. 객관성과 합리성에 대한 거부는 주관적, 비합리적 경향으로 나타나며, 내적, 직관적 체험의 강조로 이어집니다. 그 결과 사회의 기본 동력인 물질적 토대를 무시하게 되며, 나아가서는 모든 사회 관계와의 단절을 가져옵니다. 이러한 경향은 개인의 목표를 불변의 진리 또는 신적인 것과 하나가 되는 데 두게 합니다. 그것은 덕으로 완성된

성인일 수도 있고, 깨달은 도사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궁극적 인간형을 현실을 떠난 존재로 생각함으로써 마침내는 초월적 경향을 강하게 드러내게 됩니다.

넷째 문제는 위의 문제들이 갖는 몰역사성입니다. 쏟아져 나오는 대부분의 책이 그 사상을 낳은 사회 구조와 그 사상이 역사에서 한 역할을 따지지 않습니다. 사실 유행하는 대부분의 동양 철학은 전근대적 사회를 토대로 한 사유들입니다. 따라서 그 사유 체계들은 당시 사회가 가졌던 한계를 그대로 반영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속에 담긴 가치와 아울러 한계를 함께 보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일방적으로 절대화한 보편성과 가치만을 강조하면서, 토대가 다른현대에 무차별로 접맥시키는 것이 객관적이라고 강변합니다. 객관적이라는 말을 통해 사실은 엄청난 주관화를 꾀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향은 변형된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유교자본주의론 같은 것이 바로 여기에 해당합니다.

유교자본주의론은 자본주의적 물질 문명과 봉건주의적 정신 문명을 무차별로 결합시키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또 다른 지배 형태인 관과 민, 자본가와 노동자 등의 관계에서 지배 집단의 이익을 관철하는 논리가 되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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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 철학의 참모습

 

동양의 여러 사상들은 오랜 역사 속에서 긍정적으로 또는 부정적으로 작용해 왔습니다. 이런 점을 검토하고 반성해 보지 않은 채 지금의 유행처럼 동양 철학을 되살려 내는 것은 문제가 많습니다. 더구나 정치적으로는 민주이고, 경제적으로는 사유이며, 사회적으로는 평등인 현대에 군주가 다스리고, 군주 또는 귀족 계급의 소유였으며, 엄격한 신분제를 바탕으로 한 전통 사회에서 생겨난 철학을 그대로 접맥시킬 수는 없습니다.

현대와 동양 철학을 바르게 접맥시키려면 무엇보다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기준이 있어야 ‘알맹이’와 ‘찌꺼기’를 나눌 수 있으며,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바꿀 수 있습니다. 우리가 동양 철학에 관심을 갖는 까닭은 옛날로 돌아가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기준은 현실적 요구입니다. 봉건 시대는 임금이 기준이 군주 사회였지만 현대는 민중이 기준인 민주 사회입니다. 따라서 대다수의 민중이 인정하는 사회성과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실천성이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다도, 서예, 예비 신부 교육, 전통 혼례 같은 실천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같은 기준에서 동양 철학을 봅시다.

공자, 맹자, 순자로 대표되는 유학은 어떠한가? 유학은 분명히 도덕적 완성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부분적인 완성에 지나기 않습니다. 유학의 궁극적인 목적은 모두가 어우러지는 대동 세계의 실현에 있었으며, 그 세계를 사회적 실천을 통해 이루려고 했습니다. 이러한 유학의 본질은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불의에 항거해 온 많은 사람의 실천을 통해 지탱되어 온 것이지 몇몇 유명한 철학자들의 사상만으로 이어져 온 것은 아닙니다.

또한 유교 도덕의 우월성은 실천 행위에 대한 사후 보장이 전혀 없다는 데 있습니다. 그들의 실천은 죽은 뒤에 복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었으며, 오직 인간답기 위해 그렇게 했을 뿐입니다. 이것이 양심이고 도덕이며, 이것을 실현할 수 있는 용기가 호연지기였습니다.

도덕 없는 자본주의는 짐승만도 못합니다. 자본주의의 논리는 자본의 논리입니다. 자본은 선악을 따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윤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자본이 모이기 마련입니다. 권력과 재벌이 결탁하여 온갖 못된 짓을 하고도 법에만 걸리지 않으면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세상, 돈이 되는 일이면 사람까지 팔고 사는 세상, 이 속에서 논의해야 할 도덕의 문제는 무엇을 하기 위한 도덕인가입니다. 그리고 그때 얼마나 도덕적이냐 하는 것은 얼마나 남을 위해 자신을 버릴 수 있는가의 문제로 나타납니다.

남을 위한다는 것이 바로 유학에서 말하는 정의입니다. 묵자의 철학도 바로 그런 것이었으며, 오늘날 필요한 유교적 삶 또한 도덕적 실천, 즉 도덕의 사회적 실현인 정의의 실천인 것입니다.

노자, 장자로 대표되는 도가 사상은 어떠한가? 도가 사상에는 회의와 부정, 풍자적 비판 같은 소극적인 모습도 있습니다. 그러나 노장 사상의 참모습은 허위 의식에 대한 비판과 평등 의식에 대한 갈망이었습니다. 그들은 모순에 찬 현실을 보면서 모두가 제 모습을 드러내고 제 역할을 다하는 모두가 주체로 어우러지는 평등 사회를 바랐던 것이며, 이 같은 이상의 실현을 위해 주체적 삶을 가로막는온갖 사회 제도와 허위 의식을 부정하고 비판했던 것입니다.

공자나 노자가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 온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요? 지금 유행하는 자신들의 사상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릴까요?

중국의 유명한 학자 곽말약은 ‘마르크스의 공자 방문기’라는 재미있는 꽁트를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공자의 사상이 오늘날 어떤 의의와 한계를 갖는지를 해학적으로 보여 주는 그 꽁트를 요약해서 소개합니다.

 

공자 제사가 있었던 이튿날, 공자는 제자들과 함께 공자 사당에서 식어 버린 돼지머리를 먹고 있었다. 그때 젊이 넷이 주홍색 옻칠을 한 가마를 들고서 사당 안으로 불쑥 들어왔다. 가마 속에서는 뺨이 온통 수염으로 뒤덮인 서양인 하나가 나왔다. 그 사람은 다름아닌 칼마르크스였다. 그 이름은 요즈음 인기가 높아서 이미 공자의 귀에까지 들려왔던 터였다.

공자는 자기를 찾아온 사람이 바로 마르크스라는 말을 듣고는 너무나 몰라 기쁨에 넘쳐 외치듯 말했다.

“유붕 자원방래니 불역열호아! 마르크스 선생, 저에게 어떤 가르침을 주시려고 먼 길을 오셨습니까?”

이렇게 해서 공자와 마르크스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저는 제 사상이 중국에서도 실현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제 사상과 선생님의 사상이 너무 달라서 선생님의 사상이 지배하고 있는 중국에서는 제 사상이 실현될 수 없을 거라고 말합니다. 도대체 선생님의 사상은 어떤 것입니까? 제 사상과 어디가 얼마나 다릅니까?”

“요즘 외국의 유명 인사를 초청하여 강연회를 여는 것이 우리 나라의 최신 유행이니 선생께서 먼저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좋습니다. 제가 먼저 이야기하지요. 우선 제 사상의 출발점부터 말씀드려야 하겠군요. 저는 종교가나 형이상학자들과는 전혀 다릅니다. 저는 어떻게 해야 우리들이 이 현실 세계에서 최고의 행복을 얻을 수 있는가. 어떻게 해야 이 세상을 살 만한 곳으로 만들 수 있는가를 탐구합니다. 선생님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그건 제 사상의 출발점과 똑같군요. 그러면 어떤 세상이라야 우리가 최고의 행복을 누릴 수 있을까요?”

“정말 좋은 질문입니다. 제가 이상으로 삼는 사회에서는 모든 사람에게 재능을 발휘할 기회가 평등하게 주어지고, 모두가 생활 보장을 받아 굶주리거나 추위에 떠는 일이 없습니다. 이만하면 지상 천국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선생의 이상 세계는 나의 대동 세계와 완전히 똑같군요. 제가 문장 하나를 읊을 테니 한 번 들어 보십시오. ‘대도가 실행되면 천하는 공유된다. 덕 있고 재능 있는 사람을 뽑아 정치를 맡기니 모두가 화목하다. 노인들은 편안히 여생을 마칠 수 있고, 젊은이들은 능력을 발휘할 곳이 있으며, 아이들은 모두 양육된다. 이것이 대동 사회이니라.’ 어때요? 선생과 똑같지요?”

공자는 목소리를 길게 빼며 읊다가 나중에는 자기 최면에 빠지는 듯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조금도 냉정을 잃지 않았다. “하지만”하고 힘을 주어 말한 마르크스는 연설을 하듯 말을 이었다. “저는 공상가가 아닙니다. 저는 역사와 경제를 깊이 연구한 결과 산업이 점차 발전하면서 자본이 소수인의 손에 집중되어 노동 계급의 투쟁을 불러일으키게 된다는 것을 증명해 냈습니다. 그래서 혁명이 일어나는 것이지요.”

“아, 물론이지요. 저도 일찍이 ‘적음을 걱정 말고, 균등하지 못함을 걱정하라’고 말했지요.”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적은 것도 걱정합니다. 저는 사유 재산에는 반대하지만 산업의 발전은 적극 제창하는 사람입니다.”

“예, 예. 저 또한 ‘먼저 민중을 부유하게 하고, 그 다음에 가르치라’ 하고 말했고,

경제력, 군사력, 민심 획득이 정치의 근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우선 산업을 발전시켜야 균등한 분배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재물이 땅에 떨어지는 것은 싫어하지만, 반드시 자기 것으로 하지는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물질을 아주 중요시하는 사람입니다. 저기 있는 제 제자 자공만 해도 장자를 해서 돈을 엄청나게 번 인물입니다.”

여기까지 대화를 나눈 마르크스는 비로소 감탄하기 시작했다. 공자의 사상이 자기와 별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확인했지만, 공자도 2000 년 동안이나 식당에서 식은 돼지머리나 씹고 있는 마당에 자기의 사상이 중국에서 실현될 리가 없다고 생각한 그는 그만 돌아가기로 했다.

“전 이제 돌아가서 마누라 얼굴이나 보아야겠습니다.”

공자는 부러워하며 말했다.

“아, 선생은 부인이 계시군요?”

“왜 없겠습니까? 제 마누라는 제 동지인데다 굉장히 예쁩니다.”

공자는 마르크스가 부인 자랑을 늘어놓는 것을 보고 길게 한숨을 내쉬며 탄식했다.

“모두가 부인이 있는데, 나 혼자만 없구나!”

그러나 공자는 이내 안색을 바꿔 마르크스에게 말했다.

“하지만 저는 ‘우리 집 어른을 공경함으로써 남의 집 어른에게까지 마치고, 우리 집 아이들을 사랑함으로써 남의 집 아이들에게까지 미친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따라서 내 처를 사랑함으로써 남의 처에게까지 미치니 선생의 부인 또한 내 처 아니겠소.”

마르크스가 이 말을 듣고는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

“아니, 저는 공산을 외칠 뿐인데 선생님은 공처까지 주장하는군요. 선생님은 저보다 더 위험한 인물입니다.”

그리고는 서둘러 사당을 빠져 나갔다. 그는 공자가 정말로 유럽까지 쫓아와 자기 부인을 공유하자고 할까 봐 내심 두려웠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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