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승자의 혼미

 

로마인은 현실주의적인 민족이다.

관념론으로 ‘이렇게 되어 있어야 한다.’ 고 생각하는 그리스인과는

다른 정신세계의 소유자들이었으니까.

그러나 포에니 전쟁 결과, 동쪽은 소아시아에서 서쪽은 이베리아 반도까지

로마의 판도가 너무나 확대돼 버린 나머지,

유감스럽게도 그들이 바라는 대로 역사는 나아가지 않았다.

 

 

급성장의 주름살

 

약 1세기에 걸친 포에니 전쟁이 끝나자, 로마는 지중해 세계의 패권국가가 되었다.

오늘날 리비아, 튀니지, 알제리에 해당하는 카르타고의 옛 영토는 물론이고, 한니발 가의 사유지 같았던 스페인, 그리고 그리스와 마케도니아, 소아시아(현재의 터키)까지도 영토에 편입시켰다. 또한 동맹국도 동쪽에 있는 아르메니아와 시리아, 그리고 북아프리카의 이집트, 누미디아, 마우리타리아(현재의 모리타니) 등으로 늘어났다. 로마의 동맹국은 로마의 유사시에 군사를 제공해 줄 의무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은 대국인 이집트와 시리아조차도 로마의 패권에 굴복한 것이다.

한니발은 로마를 타도할 생각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오히려 로마의 잠재능력을 이끌어내 준 셈이 돼 버렸다.

한니발을 통해 단련된 로마의 공화정은 스스로가 가진 조직력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리는 데 성공한다. 그 결과 정신이 들고 보니 지중해는 로마인에게 ‘우리의 바다’ 혹은 ‘내해’ 가 되었다. 그러나 이 급성장은 로마에게 ‘승자의 혼미’를 초래한다.

혼미란 보통은 패자 쪽에서 일어나는 현상처럼 생각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대승리를 거두고도 그로 인해 혼미가 일어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더구나 같은 혼미라도 승자 쪽이 훨씬 심각한 경우가 많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패지일 경우는 패자니까 혼미가 일어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누구나 이해하고 단념해 버린다. 패배했는데도 밝은 미래가 기다린다고 믿는 사람은 정말 경박한 사람이 아니면 바보일 뿐이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승자에게 혼미가 덮쳐 왔을 경우에는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우리가 이겼는데 혼미해질 리가 없다, 밝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 고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뭔가 이상하다’ 고 발버둥친다. 하지만 혼미 속에서 발버둥을 치면 사태가 더 심각해질 뿐이다….

포에니전쟁 후 로마를 덮친 것은 바로 이 같은 사태였다.

 

 

강대해진 원로원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등장으로 로마는 한니발을 타도했다. 천재를 이기기 위해서는 또 한 사람의 천재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으로 원로원으로 상징되는 조직의 로마는 과거의 일이 되었을까?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포에니전쟁이 끝나고 보니 원로원의 권위와 권력이 전쟁 전보다 더 강고해졌다. 원로원이 로마 그 자체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기원전 509년에 루키우스 브루투스에 의해 시작된 공화정은 집정관, 원로원, 그리고 시민회라는 세 기둥에 의해 유지되고 있었다. 로마의 정치와 군사를 담당하는 집정관, 그 집정관을 보좌하는 원로원, 그리고 집정관 등 국가의 요직에 오르는 사람을 선출하는 시민회 이들 세 기관이 조화를 이루어 로마의 공화정이 기능하게 되어 있었다.

원로원은 왕정 시대부터 본질적으로 ‘자문’ 기관이었고, 그 자체로는 결정권이나 어떠한 권리도 없었다. 집정관의 선출 등에 관해 은밀한 힘을 발휘하는 일은 있어도 원로원이 무엇인가를 결정하여 그것을 실행할 권리는 없었다. 어디까지나 로마의 공화정은 ‘주권재민’ 이었다.

그런데 그때 나타난 것이 한니발이었다. 한니발과 싸우기 위해서는 평상시의 공화정으로는 역부족이라고 생각한 로마는 원로원에 모든 권한을 집중시키기로 했다. 즉 군사령관의 배치에서부터 외교권, 인사권, 재정권, 사법권 등 모든 권력을 원로원이 장악함으로써 신출귀몰하는 한니발에 즉각 대응한다는 위기관리 체제가 갖추어졌다.

원로원의 권력 집중은 확실히 로마의 방위에는 효과가 있었다. 한니발의 맹공을 로마가 계속 버틸 수 있었던 것도, 파비우스의 지구전 전략을 충실하게 실천할 수 있었던 것도 합동참모회의로서의 원로원이 존재한 덕분이었다.

그런데 포에니 전쟁이 끝난 뒤에도 원로원의 권한 집중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포에니전쟁 결과, 로마의 패권이 지중해 전역에 이를 정도가 되었으므로 오히려 원로원의 권력은 더욱 강대해졌다. 그러나 원로원 사람들은 원로원이 로마 전체, 이탈리아 전체, 그리고 지중해 전 지역의 사실상의 지배자가 된 것을 당연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어쨌든 원로원은 카르타고까지 타도한 것이다. 이런 성공 체험이 원로원의 자신감을 확고부동하게 만들었다.

 

 

혼미는 왜 생겼을까

 

정치란 어디까지나 결과론의 문제이다. 그래서 비록 원로원의 돌출로 로마의 공화정이 변질되었다고 해도, 그것으로 정치가 잘 기능하고 있으면 불만은 일어나지 않는다.

아마도 당시 로마인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로마인은 어디까지나 현실주의적인 민족이다. 관념론으로 ‘이렇게 되어 있어야 한다.’ 고 생각하는 그리스인과는 다른 정신세계의 소유자들이었으니까.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들이 바라는 대로 역사는 나아가지 않았다. 그 가장 큰 이유는 로마의 판도가 너무나 확대돼 버린 데 있었다. 포에니전쟁 결과, 로마의 영토는 동쪽은 소아시아에서 서쪽은 이베리아 반도까지 펴져 있었다. 그리고 이집트, 시리아를 비롯한 동맹국도 늘어나 ‘로마 연합’도 또한 급격하게 팽창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의 변화에 대응할 수 있을 정도의 유연성이 원로원에도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았다.

먼저, 원로원의 구성원이 너무나 고정화되어 있었다. 기원전 367년의 리키니우스,섹스티우스법에 의한 개혁으로 로마의 원로원은 평민에게도 문호를 개방하여 원로원의 경직화를 막을 생각이었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면 개혁의 효용도 약해지게 마련이다.

포에니전쟁 무렵에는 소위 ‘원로원 계급’ 이라고 불린 만한 집단이 형성되었고, 그 집단 이외의 인물은 집정관으로 선택될 수 없게 되었다. 귀족과 평민 사이에는 기회의 평등은 실현되었지만, 그 대신 새로이 ‘원로원 계급’과 그 이외의 시민 집단으로 로마 사회가 둘로 나뉜 것과 마찬가지였다.

구성원을 교체하지 않으면 그 집단은 필연적으로 내향적이 된다. 그리고 그것은 구성원 상호간의 이익을 보호하는 것을 우선시하는 ‘이권 집단’으로 화한다.

현실에서는 로마의 판도가 거대해졌다. 그만큼 골고루 살펴야 할 일이 증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 원로원 의원들의 ‘현실’ 은 로마 국내, 그것도 자신들의 계급과 관련된 일로만 좁혀져 갔다.

더구나 원로원에는 강렬한 자부심이 있었다. 성공 체험에서 생긴 자부심은 때로는 인간의 눈을 흐리게 만든다. 한니발을 패배시켰다는 자신감에서 원로원은 ‘자신들의 판단에 문제가 있을 리가 없다.’ 고 생각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는 원로원의 자기 개혁은 기대할 수조차 없을 것이다. 내향적인 정신세계와 강렬한 자부심이 복합되어 버리면 거기에서 생기는 것은 현상 유지적인 발상뿐이다.

후세는 이런 현상을 ‘동맥경화 현상’ 이라고 한다.

자신들이 속한 ‘공동체’, 이것을 고대에서는 ‘국가’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공동체’ 에 대한 공공심과 자기비판의 정신 양쪽 모두가 없으면 개혁은 실행될 수 없다. 이 두 가지 모두를 기피할 때 남겨진 길은 현상 유지, 아니면 기껏해야 형식적인 개혁이 고작이다.

포에니전쟁 이후의 로마는 ‘패권 국가’ 라는 자신의 현실을 잘 대응하지 못한 채, 약 1세기 반에 걸친 긴 혼미의 터널에 돌입하게 된다.

 

 

‘새로운 현실’ 의 아픔

 

비록 로마의 원로원 계급이 ‘새로운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 계속 회피한다 하더라도 변화는 가차 없이 덮쳐 온다. 그 직격탄을 처음 받은 사람들은 ‘로마국가의 기반’ 이라고 해야 할 일반 시민들이었다.

앞에서도 소개했듯이 포에니전쟁 후의 로마는 영토가 단번에 확대되었고, 그에 따라 경제 규모도 그만큼 확대되었다. 게다가 그때까지 로마의 경제력은 전쟁 비용 때문에 억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중압이 없어지면 경제가 단번에 활성화돼 누구나 풍요로워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뚜껑을 열어 보니 그렇게 되지 않았다.

그런데 로마 경제는 전체적으로 분명히 규모도 확대되었고 활성화되었다. 영토의 확대는 시장의 확대이며, 그것은 비즈니스 기회가 증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혜택을 입은 것은 일부 계층뿐이었고 일반 평민에게까지 그 혜택이 미치지 못했다.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중산계급 이하 사람들의 생활은 악화되었다.

그것을 가장 잘 증명하는 것은 전후 로마에서 실업자가 급증한 사실이다. 로마가 패배했다면 실업자가 증가해도 그것은 어쩔 수 없다고 단념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로마는 이겼다. 왜 전승국에서 실업자가 대량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었을까? 이것은 누가 봐도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일 것이다.

어떤 학자는 그 당시 로마는 인구의 약 7퍼센트가 실업자였다고 추정한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매우 심각한 상화이었다고 할 수 있다. 실업률이란 전체 노동인구 중에서 차지하는 실업자의 비율이다. 전 인구의 7퍼센트가 실업자라는 것은 실업률이 그 이상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10퍼센트를 훨씬 넘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대체 왜 로마에 이렇게 많은 실업자가 발생하게 되었을까? 그 이유는 다름 아닌 로마의 영토 확장에 있었다.

 

 

자작농의 몰락

 

로마가 일약 대국이 된 결과, 가장 영향을 받게 된 분야는 로마의 기간산업이라고 해야 할 농업이었다.

옛날부터 로마인은 농경민족이어서 시민 중에 자작농이 차지하는 비율이 높았고 농업은 훌륭한 직업으로 존경까지 받을 정도였다. 제3장에서 소개했듯이 기원전 5세기에 독재관이 된 킹킨나투스는 전쟁이 끝나자 곧바로 지휘봉을 내던지고 다시 괭이를 잡고 농사를 지음으로써 시민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로마인에게 농업은 조상 대대로 내려온 직업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농업에 대변동이 일어나고 말았다. 가장 먼저 일어난 것이 밀 판매 가격의 폭락이었다.

제1차 포에니전쟁 결과, 로마는 시칠리아 섬을 ‘속주’ 로 삼아 이 섬을 직할령 으로 만들었다. 그 결과, 시칠리아에 사는 사람들은 로마 본국이나 동맹국 등과는 달리 병역의 의무를 지지 않는 대신 로마에 속주세 라는 명목의 직접세를 납부했다. 세율은 수입이나 혹은 수확의 10분의 1이었다.

이 시칠리아는 옛날부터 밀 재배가 번창한 곳이었으므로 이 후 로마에는 대량의 밀이 수입되었다. 그 결과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때까지 밀 재배로 자활하고 있던 로마 농민들의 생활이 타격을 받게 되었다. 시칠리아 산 값싼 밀은 로마 근교에서 재배하는 밀을 금세 퇴출시켜 버렸다.

그래서 로마의 자작농은 밀에서 포도나 올리브로 재배 작물을 바꿔 이에 대응하려고 했지만 곧바로 성공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포도나 올리브로 전환하려면 자금이 필요했고, 심었다고 해도 금방 그 해에 수확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여러 해에 걸쳐 선행투자가 필요하였고, 당연한 일이지만 빚을 내야만 했다. 비록 자금을 조달할 수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번에는 이자를 지불해야 했다. 그런 까닭에 규모가 작은 농가일수록 일찍 경영 위기에 빠졌다.

그리고 이런 추세를 가속화시킨 것이 대규모 농원의 등장이었다. 전쟁이 끝나 전쟁비용이 줄어들자, 그것이 원인이 되어 ‘자금 과잉’ 상태가 되었다. 그러자 로마의 부유 계층은 빠짐없이 대규모 농원 경영에 진출했다.

어쨌든 전쟁에서 이긴 덕분에 로마의 영토는 확대되었으므로 그만큼 투자할 수 있는 토지는 증가해 있었다. 게다가 경제는 활성화되어 경기가 좋아지자 수요도 많았다. 그리고 여기에다 전쟁 과정에서 포로나 패잔병들이 노예가 되어 그 노동력이 대량으로 로마에 흘러 들어왔다. 이들 노예의 이용으로 인건비도 훨씬 싸졌다.

이리하여 각지에 대규모 농원이 만들어지자, 가격 경쟁력이 더욱 뒤떨어진 자작농은 몰락해 갔다.

 

 

공동화되는 공화정

 

자작농의 몰락은 로마에서 ‘산업구조의 변화’ 만으로 규정할 수 없는 큰 문제였다.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로마의 공화정을 지탱하는 핵심인 시민의 대부분이 이 자작농이었기 때문이다. 자작농이 경제 기반을 잃고 계속하여 실업자로 전락해 가는 사회 현상은 로마의 공화정이 공동화되어 간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이 가장 현저하게 나타난 현상이 로마군단의 질적 저하였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로마에서는 일정 이상의 자산을 가진 시민에게 병역 의무가 부과되어 있었는데, 포에니전쟁 종결을 계기로 징병 자격을 가진 시민이 감소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정원 부족을 보충하기 위해 자격 재산의 기준을 내렸다. 그렇게 해도 병사 부족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말하자면 병역을 면제받는 무산자가 그만큼 증가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단순히 병사의 부족으로 끝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병역 면제 기준을 내림에 따라 로마 군의 질도 어쩔 수 없이 떨어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자산이 없는 시민에게 병역을 면제해 준 것은 재산이 없는 사람들을 병사로 징용하면 그들 가족의 생활이 유지될 수 없게 되기 때문이었다. 병역에 종사하고 있는 동안에는 수입이 없으므로 그 동안 가족이 살아갈 만큼의 자산이 없는 사람은 징병할 수 없었다.

그런데 포에니전쟁 뒤에는 병사 부족을 보충하기 위해 면제 기준을 내려 버렸다. 그러다 보니 새로 병가가 된 시민들의 사기가 오르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리 병역이 로마 시민의 의무이며 자랑이라고 알고 있어도, 두고 온 가족을 걱정해야 하는 상태에서는 분전할 생각이 들지 않을 것이다.

또한 병사의 사기를 떨어드린 것은 포에니전쟁 이후 ‘전쟁의 질’ 이 달라졌다는 사실이었다. 포에니전쟁 때까지 로마가 싸워 온 전쟁은 모두 ‘방위를 위한 전쟁’ 이었다. 그래서 로마의 병사들은 분투할 마음이 생겼다. 하지만 포에니전쟁으로 로마가 지중해의 패권을 획득한 후로는 전쟁이 달라졌다. 이후의 전쟁은 모두 로마의 패권 유지를 목적으로 하게 됨에 따라 ‘무엇을 위해 싸우는가?’ 라는 명분이 모호해졌다.

사실 포에니전쟁 후에 로마 군이 출동한 전투는 시칠리아의 노예반란 진압이나 스페인 원주민 반란 진압 정도였다. 로마의 패권에 있어서는 간과할 수 없는 사건이라고 해도 로마의 시민, 특히 가난한 시민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이 두 전쟁은 모두 결과적으로 로마 군이 승리를 거두었지만, 병사들이 싸우는 모습은 포에니전쟁 당시와는 달랐다. 로마 군은 질과 양에서 모두 확실하게 약체화되어 가고 있었다.

 

 

기사 계급의 대두

 

몰락하는 자작농과 교체되는 형태로 로마에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기사 계급이었다. ‘기사 계급’ 이라고 하면 중세의 기사를 상상하는 사람도 많겠지만 로마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그 말을 의역하면 ‘경제 계급’ 이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로마에서는 원로원의 소속 원이 고정화되어 ‘원로원 계급’ 이라고 불리며 공화정 시대 로마의 귀족 계급이 되어 있었다.

따라서 포에니전쟁 후에는 경제 변화에 잘 적응해 부를 축적한 사람들이 설령 희망한다 해도 옛날처럼 원로원 의원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에 원로원 계급이나 평민이 아니라는 의미를 가진 ‘기사 계급’ 이 두각을 나타내게 된 것이다.

앞에서 나는 ‘설령 원로원 의원이 되기를 희망한다 해도’ 라고 썼다. 그런데 실제적으로 기사 계급 사람들은 원로원 계급에 들어가기를 바란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농경을 존중하는 로마 사회에서는 귀족은 농원을 가지는 거이 당연했고, 원로원 의원의 ‘상업’, 즉 비즈니스를 하는 것은 로마의 법으로 금지돼 있었기 때문이다. 원로원 의원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법에서 자유로운 기사 계급은 로마의 패권 확대를 비즈니스 기회로 삼고 신분상승을 이루고 있었다. 그래서 원로원에 들어가 정치 활동을 하는 거에 매력을 느끼지 않았다.

게다가 당시의 로마에는 얼마든지 비즈니스 기회가 널려 있었다. 그들이 먼저 취급하기 시작한 것은 직할령인 속주의 조세 징수업무 대행이었다. 로마는 속주에 전문 공무원을 두는 대신에 민간에서 ‘푸블리카누스 (publicanus)’라는 징세업자를 모집했다. 다만 이들 민영 징세업자에게는 세금 사정 업무는 맡기지 않았고 징세 의무만 부과되었다.

이 징세업자에 대한 보수는 자신들이 모은 세금에서 수수료라는 형태로 지불되었다. 그런데 세금을 징수하다 보면 ‘세금을 낼 수 없다’는 사람들도 나온다. 그때 푸블리카누스는 사채업자로 재빨리 변신하여 세금을 떠맡는 대신 그에 대한 채권을 획득했다. 물론 돈을 빌려 주고 이자를 받는 것이 목적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때의 이율은 양심적인 업자라고 해도 연리 12퍼센트였다고 하니 영업으로서도 수지가 맞았다.

로마의 패권 확대가 기사 계급에 가져다 준 것은 그뿐만이 아니다. 영토가 넓어지면 사회기반시설 정비에 특히 열심인 로마였으므로 공공사업도 증대한다.

나중에는 공공사업은 고용대책의 일환을 로마군단이 공사를 하게 되지만, 이 시대는 민간업자에게 맡기고 있었다. 그래서 기사 계급은 현대의 합작회사 같은 조직을 만들고 그것을 통해 공사 하청을 받았다. 공공사업이 수지맞는 장사인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데, 발주하는 측으로부터 확실하게 돈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기사 계급이 부를 축적해 가는 한편, 원로원 계급도 빈틈없이 자산을 늘려 간다. 원로원 의원들은 법적으로는 비즈니스가 금지되어 있었지만, 법에는 반드시 빠져나갈 구멍이 있게 마련이다. 직접 비즈니스에 손을 대지만 않으면 위법이 아니라는 점을 이용해, 많은 원로원 의원들은 자신들에게 충실한 노예에게 자유를 주어 해방노예로 만들어 그들이 명의로 투자나 비즈니스를 했다.

 

 

좁히기 어려운 틈

 

그래서 부자들은 더욱더 부자가 되어 갔고, 가난한 사람들은 더욱더 가난해졌다. 이 빈부의 양극화는 결국 로마의 정치를 뒤흔들게 된다.

옛 공화정은 귀족과 평민의 오랜 세월에 걸친 항쟁으로 인해 요동쳤지만 이번 대립은 훨씬 심각했다. 왜냐하면 정치상의 평등을 요구하는 항쟁이라면 귀족 측이 평민에게 문호를 개방하면 단번에 해결된다.

그러나 빈부의 대립인 경우는 단번에 양자의 틈을 줄여 로마인이 좋아하는 ‘융화’를 실현하기가 어렵다. 가난한 사람을 하룻밤에 부자로 만드는 ‘마법’ 은 21세기에 들어선 지금도 발견되지 않았다. 일찍이 그 불가능한 일을 사회주의가 실현하려다 크게 실패했다는 사실은 말할 필요도 없다.

결국 전 시민이 굳게 하나가 되어 한니발과 싸운 로마는 이제 빈부라는 양극화로 분열되어 버렸다.

 

 

로마 연합의 ‘균열’은 왜 생겼을까

 

포에니전쟁 후 로마가 안게 된 모순은 그것뿐이 아니었다. 한니발마저 괴롭힌 ‘로마 연합’ 에도 역시 분열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시민권을 둘러싼 문제였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로마 연합 안에 사는 시민들은 크게 세 부류로 나누어졌다.

하나는 로마 본국이나 로마가 정략에 의해 건설한 ‘콜로니아’ 에 살면서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 이 사람들은 로마법에 의해 투표권부터 재판 때의 공소권에 이르기까지 시민의 권리를 인정받고 있었다.

또 하나는 ‘라틴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 로마 연합 내에서도 지방 자치체를 의미하는 ‘무니키피아’ 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참정권을 뺀 시민권이 주어져 있었다. 그것이 ‘라틴 시민권’ 이었다 말하자면 ‘준 로마 시민’ 이다.

그리고 마지막은 ‘이탈리아인’. 그들은 로마 연합에 가맹하고 있는 이탈리아 반도 내의 동맹국 국민인데, 물론 로마 시민에게 주어지는 여러 특권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 이들 세 부류의 시민들은 각각 권리는 달라도, 전시에는 병역에 종사한다는 의무만은 같았다.

한니발과의 전쟁을 치를 때도 이들 세 부류의 시민들은 일치단결하여 싸웠다. 전쟁터에서 위험에 처한다는 점에서는 로마 시민과 비 로마 시민 사이에 구별이 없었다. 오히려 부담은 로마 시민에게 많았다. 그 이유는 포에니전쟁의 전쟁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로마 시민은 오늘날 말하는 전시 국채를 부담해야 했기 때문이다.

‘로마 연합’ 이 철의 결속을 유지하면서 장기간에 걸친 포에니전쟁을 일치단결하여 싸울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러한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자 로마 시민과 비 로마 시민 사이에 서서히 격차가 생기기 시작했다. 예컨대 직접세에 대해서도 로마 시민의 경우 징병의 의무만 다하면 직접세는 지불하지 않아도 됐다. 그런데 라틴시민이나 이탈리아인들은 자신들이 직접 속하는 부족국가나 도시국가에 세금을 납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고 경제적인 기회 면에서도 ‘세계의 수도’ 로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훨씬 기회가 많았다. 뿐만 아니라 포에니전쟁 후 동맹국과 함께 싸운 전쟁의 전리품을 로마인 자신들만 독점했다.

이렇게 되면 라틴 시민이나 이탈리아인들이 로마에 대해 불만을 품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함께 고생하며 긴 전쟁에서 싸웠는데 왜 로마 시민권 소유자만이 이익을 독점한단 말인가? 라는 불만이 서서히 울분으로 쌓이기 시작했다.

 

 

그라쿠스 형제

 

이와 같이 내외적으로 로마는 확실히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의 로마 국력을 생각할 때 현실적으로 보면 그리 대단한 문제가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사실 로마의 군단은 약해졌다고 해도 스페인 원주민이나 시칠리아 노예의 반란을 진압할 수 있었고 또한 로마 연합의 결속이 흐트러진 것도 아니었다. 따라서 원로원이 시대의 변화에 따른 ‘새로운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 그에 대한 개혁을 취하지 않아도 나름대로 로마의 번영은 유지되고 있었다.

하지만 로마의 정치가들 모두가 현실에서 눈을 돌리고 기득권 유지에 급급해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극히 소수라고는 해도 씁쓸한 현실에 주목하고 그 대응책을 생각하며 실행하려는 사람도 있었다.

그 첫 번째 기수로 등장한 사람이 티베리우스와 가이우스의 그라쿠스 형제였다. 기원전 2세기의 로마에서 모든 사람이 부러워할 만한 환경에서 태어났다. 그들의 외할아버지는 한니발을 쓰러뜨린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였다. 또한 아버지는 두 번이나 집정관에 오른 유력자였다. 계급으로서는 평민 계급이었지만 ‘평민 귀족’ 이라고 불리었을 만큼 재산이 많았다. 그래서 그라쿠스 형제는 ‘은수저를 입에 문 채 태어났다’ 는 표현이 잘 어울리는 출신이었다.

 

 

실업 대책

 

그러한 그라쿠스 형제가 무엇보다도 의분을 느낀 것은 로마 평민들의 궁핍 상태였다.

“로마의 승리를 이해 온 힘을 다했던 로마 시민이 왜 실업자의 처지로 떨어져야만 했나?” 라고 호소하며 30세가 된 형 티베리우스가 호민관에 당선된 것이 기원전 133년, 제3차 포에니전쟁이 종결된 지 13년 되던 해였다.

명칭 그대로 평민의 권리를 지키는 호민관으로 취임한 티베리우스가 손을 댄 것이 농지개혁이었다. 그렇지만 사유재산을 존중하는 로마인만큼, 티베리우스가 시행하려고 한 농지개혁은 과격하지 않았다. 그가 행하려고 한 것은 농지로서 빌려 주는 국유지를 더욱 공정하게 재분배한다는 것이었다.

로마는 전쟁에서 이겨도 상대를 멸망시키지 않았고, 한때의 적을 동맹국으로 바꾸어 갔다. 하지만 그 대신 상대의 토지 일부를 몰수해 그곳을 국유지로 삼곤 하였다.

이렇게 해서 얻은 국유지를 시민에게 유료로 대여해 주었는데, 그 배분에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결국, 그때까지의 제도는 빠져나갈 구멍투성이여서 돈만 내면 넓은 국유지를 빌릴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원로원 계급이나 귀족 계급 사람들이 대규모 농원을 소유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래서 티베리우스는 부정하게 토지를 빌린 사람들에게 농지를 반환하게 해서 그것을 실업자에게 대출하는 방식을 생각했다. 일시적인 복지가 아니라 실업자의 자립을 촉진해 로마사회를 활성화시키려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다.

 

 

이리하여 비극은 일어났다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개혁은 결코 과격하지 않았다. 오히려 온건한 수준이었지만 그의 언동은 원로원을 자극할 수밖에 없었다.

원래 호민관인 티베리우스가 개혁의 선두에 서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는 원로원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비쳤다. 로마의 국책을 결정하는 권리는 어디까지나 원로원에 있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티베리우스의 농지개혁은 원로원 계급의 기득권을 침해하는 것이기도 했다. 법을 지켜야 할 원로원 의원들 주에는 국유지를 대량으로 빌려, 거기서 개인적으로 농원을 경영하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그래서 원로원은 음으로 양으로 그의 개혁을 방해하려고 했다. 그러나 젊고 이상가 기질의 티베리우스가 원로원과 타협할 리가 없었다. 그는 일관되게 자신의 개혁을 추진하려고 했다. 어쨌든 그에게는 열광적인 시민의 지지가 있었다. 하지만 그 열광적인 지지야말로 원로원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기도 했다.

원래 로마의 공화정이란 독재자를 부정하고 출범한 시스템이기 때문에, 그들은 한 사람의 정치가에게 인기가 몰리는 현상을 공화정에 대한 반역, 즉 원로원에 대한 반역으로 여겼다. 티베리우스에게는 공화정을 타도하겠다는 생각은 조금도 없었지만, 공화정 유지를 지상 명제라고 생각하는 원로원에는 그이 존재가 위협적으로 보였다.

그 결과 비극이 일어났다.

티베리우스의 호민관 재선을 결정하는 평민회에 그의 지지자들이 결집해서 기세를 올리고 있다는 것을 안 원로원은 과잉반응을 보였다. 평소부터 티베리우스에게 반감을 가진 의원들의 눈에는 원로원을 타도하기 위한 모임으로 비치었기 때문일 것이다.

원로원의 반 티베리우스 파 의원들은 자신의 종과 노예까지 무기를 들게 해서 그라쿠스의 재선을 실력으로 저지하려고 했다. 원로원 의원들과 티베리우스의 지지자들은 로마 중심부에서 충돌한다. 그리고 이 혼란 속에서 티베리우스와 그의 지지자 300명은 참살 당하고 만다.

 

 

‘내란 시대’의 시작

 

법적인 지배를 자랑으로 삼는 로마에서, 그것도 시내 한복판에서 유혈 사태가 일어난 것은 공화정이 시작된 이래 한 번도 없었다. 그런 만큼 로마인들은 티베리우스와 그의 지지자들의 죽음을 불행한 사고로서 마무리 지으려고 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렇게 끝나지는 않았다.

기원전 133년 여름의 사건은 이후 대략 1세기에 걸쳐 이어지는 ‘로마의 내란’ 개막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융화’를 사랑하는 로마인들끼리 서로 싸우고 죽이는 참혹한 시대는 옥타비아누스 가 안토니우스 와 클레오파트라 연합군을 무너뜨리고 초대 황제가 될 때까지 계속된다.

물론 티베리우스 에게는 공화정을 넘어뜨린다거나 독재자가 되겠다는 야심은 없었다. 그가 품었던 것은 로마에 대한 애국심이었고, 평민의 몰락을 걱정하는 정의감이었다. 풍족한 가정환경에서 태어나 세상물정 모를 만큼 순수해 너무 곧게 행동했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문제의식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는 점에서 원로원의 경직화는 이미 나타나 있었다. 그리고 그 원로원은 다시 같은 잘못을 반복하게 된다.

다음에 살해당한 사람은 다름 아닌 티베리우스의 아우인 가이우스였다. 티베리우스보다 아홉 살 아래인 가이우스는 형과 마찬가지로 30세가 되자 호민관에 입후보하여 당선된다. 물론 목적은 형이 이루지 못한 실업자 구제였다.

가이우스는 차례차례 그것을 위한 법률을 만들어 간다. 그가 재임 중에 행한 개혁은 수없이 많아 여기서는 다 설명할 수 없다. 농지개혁의 재시도는 물론이고, 공공사업에 의한 고용 대책, 실업자에게 특별히 싼 가격으로 밀을 배급하는 것, 그리고 새로운 식민 도시를 건설하여 실업자를 이주시키는 법안 등… 가이우스는 형 티베리우스 이상으로 급진적인 정책을 실현해 나간다. 로마의 실업은 이미 지속적으로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가이우스도 결국 원로원의 ‘호랑이 꼬리’를 밟아 버린 형국이 되었다. 그 발단이 된 것은 그가 제출한 시민권 개혁법이었다.

 

 

‘국경 자유화’를 시도한 가이우스의 개혁

 

가이우스는 여러 개혁을 단행하는 동안 로마 시민권이 ‘개혁의 장벽’ 임을 알아차렸다.

이미 로마는 도시국가의 테두리를 넘어 지중해 세계 전체로 뻗은 영토 형 국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법체계만은 옛 도시국가 시대와 다르지 않았다.

그 상징이 시민권이었다. 같은 로마 경제권에 살면서도 로마 시민과 라틴 시민, 이탈리아인이라는 세 종류의 주민이 있다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예컨대 대규모 농원에 대한 제한을 해도 그 대상이 되는 사람들이 로마 시민뿐이라면 개혁은 흐지부지되고 만다. 국유지를 불법으로 소유하고 있는 라틴 시민은 규제의 대상에서 제외된다. 또한 라틴시민이나 이탈리아인 측에서 보면 로마인만이 번영의 혜택을 입고 있다는 불평이 나온다.

그래서 가이우스는 로마 연합 내의 ‘보이지 않는 벽’ 인 시민권 구분을 철거해 버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가이우스의 생각은 현대의 EU통합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실제로는 사람, 물건, 돈은 국경을 너머 이동하고 있는데 그것을 규제하기 위한 법률이 국내법밖에 없다면 많은 모순이 생긴다. 그래서 유럽에서는 EU 통합을 해서 국경 철폐를 하기 위해 수많은 개혁에 손을 대고 있는 중이다. 그것을 2,000년이나 전에 구상한 사람이 가이우스 그라쿠스였다. 그렇지만 그가 제출한 법안은 어디까지나 온건한 것이었다.

갑자기 로마 연합 내의 국경을 철폐하겠다, 즉 모두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겠다면 저항이 클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래서 단계적으로 로마 시민권을 확대하겠다는 안을 냈다. 우선 라틴 시민에게 로마 시민권을 개방하고, 이탈리아인에게는 라틴 시민권을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쇄국주의

 

그러나 이 가이우스의 안을 본 원로원 의원들은 양심 있는 자들조차도 위기감을 느꼈다. 만약 가이우스의 안이 통과되면 머지않아 로마 연합 내의 모든 시민이 로마 시민권을 획득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원로원의 권위도 상실될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했다.

왜냐하면 원로원이 권위가 있는 것은 원래 로마가 연합 중에서 특별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로마 시내에 살아 본 경험도 없는 변경의 주민까지 시민권을 갖게 되면 원로원의 권위가 떨어져 버릴 것이라는 우려가 그들의 반응이었다.

이러한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로마의 공화정이 이미 ‘제도적인 피로’ 를 일으키고 있다는 증거였다.

본래 로마공화정도 로마 연합도 ‘패자도 동화시킨다’ 는 로마인의 독특한 정신세계에서 생긴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가이우스의 시민권 개방은 로마의 전통에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기원 전 2세기 당시의 원로원은 그와는 반대인 ‘쇄국주의’ 의 입장에 서 있었다.

어디까지나 로마는 옛날처럼 도시국가이어야 하고, 공화정은 옛날과 똑같은 방식으로 지켜져야 한다. 로마는 특별한 나라다. 그러니까 어떠한 마찰을 일으켜도 로마 시민권은 어디까지나 로마인에게 한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원로원 의원들의 관념이었고, 그것이 로마의 권위를 지키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비장의 무기’를 휘두른 원로원

 

이리하여 원로원과 호민관 가이우스는 날카롭게 대립하게 된다. 원로원은 로마 시민을 향해 ‘가이우스는 독재자가 되려는 야망을 품고 있다’는 캠페인까지 벌이며 그의 신망을 떨어뜨리려고 한다.

이 계략은 성공하여 가이우스는 호민관 3선을 이루지 못하고 실각한다. 그런데도 원로원은 안심하지 못한다. 그의 존재 자체가 원로원에게 몹시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원로원은 마침내 그를 배제하기 위한 최종 수단을 취한다. 그것이 ‘원로원 최종 권고’ 였다.

나중에 카이사르에게도 선포하는 원로원의 이 최종 권고는 일종의 비상사태선언이었다. 이 권고가 나오면 반국가적 행위를 저지른 인간은 재판 없이도 처형마저 가능하게 되어 있었다. 즉 원로원은 가이우스를 ‘국가의 적’ 으로 매도한 것이다.

가이우스는 일단 도주를 결의하지만 쫓기다가 결국은 테베레 강가의 숲 속에서 자살한다. 그러나 원로원은 그의 죽음을 지켜본 것만으로도 만족하지 못하고 그의 편이라고 간주되는 사람들을 모두 끌어다 사형시킨다. 그 숫자는 3,000명이라고 전해진다.

로마의 혼미는 마침내 원로원 스스로가 동족을 처형하기에까지 이르렀다.

 

 

무기 없는 예언자는 실패한다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죽음으로 로마의 개혁은 좌절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농지개혁도 백지화되고, 시민권 개혁도 철회되었다. 원로원도 로마에서 실업을 비롯한 사회문제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현실을 직시하고 ‘고통을 수반하는 개혁’을 실시하는 것에서 또다시 등을 돌려 버린다.

그런데 그라쿠스 형제가 개혁에 실패한 것을 원로원 측만의 문제라고 할 수 있을까? 분명한 것은 그라쿠스 형제가 앞서 실시하려고 한 개혁은 그로부터 70년 뒤 카이사르가 실현한 시책 속에 다수 포함돼 있다. 그 중에서도 로마 시민권을 개방해 ‘로마의 국경 자유화’를 실현하고자 했던 것은 나중에 로마제국이 펼쳤던 시책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로마의 현상을 직시하여 그 대책을 구체적으로 생각했다는 점에서 그라쿠스 형제는 카이사르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카이사르와 그라쿠스 형제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하나 있다. 그것은 카이사르에게는 무력이 있었지만 그라쿠스 형제에게는 없었다는 점이다. 이 두 사람에게 원로원은 똑같이 원로원 최종 권고를 냈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이에 무력으로 대항할 수 있었지만,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무기를 가지 않은 예언자는 실패를 피할 수 없다.” 고 마키아벨리는 말했는데, 그라쿠스 형제가 바로 ‘무기 없는 예언자’ 였다.

누구도 쓰라린 현실을 겪고 싶어 하지 않는다. 더구나 ‘나는 성공했다.’ 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당신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고 말하면, 그 충고를 기분 좋게 받아들일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라쿠스 형제는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냉정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거기에 그들의 실패 원인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단순한 비평가라면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지 않더라도 그것을 한탄하고 있으면 임무가 끝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라쿠스 형제는 정치가였다. 그렇게 생각하면 아무래도 ‘채점’ 이 엄격해지지 않을 수가 없다.

물론 그라쿠스 형제도 개혁이 순조롭게 이루어진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들은 원로원에 들어가서 내부에서 개혁을 실시하지 않고 평민의 세력을 배경으로 한 호민관이 된 것이지만, 예상보다 원로원의 반발은 거세었다.

호민관의 권위가 커지는 것 자체를 원로원의 입장에서는 허용하기 어려웠다. ‘로마에는 원로원 이외의 지도자는 필요 없다.’ 고 확신하고 있었으니, 반발은 당연했다. 그 점을 그라쿠스 형제는 잘못 읽었던 셈이다.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이 원로원의 저항으로 어긋난 이후, 로마의 실업 문제는 사실상 방치된 상태였다.

그리고 실업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그것은 좋든 싫든 로마 군의 약체화를 더욱 심화시키는 결과를 불러오게 된다. 이전에는 병역을 면제받던 “프롤레타리” 까지 모으진 않으면 군단을 편성할 수 없을 정도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 결과 로마군 은 각지에서 형편없는 패배를 당한다. 북쪽에서 침입한 야만족을 격퇴하는 전투에서도 패전했다. 그리고 북부 아프리카의 누미디아 에서 일어난 ‘유구르타 전쟁’ 에서도 패배한 로마는 굴욕적인 강화를 맺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로마 시민들의 원로원에 대한 불신은 심화되어 갔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등장한 사람이 가이우스 마리우스였다. 기원 전 107년에 집정관으로 취임한 마리우스는 로마의 군제 개혁에 나선다.

마리우스는 장교로서 오랜 군대 생활을 경험할 만큼 했기 때문에 로마군 약체화의 실제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징병됨과 가족을 부양할 수 없게 된 대부분의 프롤레타리인 병사들은 아무리 장교가 질타나 격려를 해도 용감하게 싸울 수 없었다.

그래서 마리우스는 로마 건국 이래의 전통이라고도 할 수 있는 징병제에서 지원제로 전환을 단행한다. 즉 그때까지처럼 시민의 ‘의무’로서 병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 병역을 ‘직업’으로 바꾼 것이다. 지원해서 병사가 된 사람에게는 급료를 지불한다. 같은 프롤레타리 출신의 병사라고 해도 스스로 지원한 병사와 억지로 징집된 병사는 사기가 천지차이라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게다가 지원제를 도입한 것은 실업대책이 되기도 했다. 로마에서 흘러 넘치는 실업자를 구제하려면 그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할 수 밖에 없다.

그라쿠스 형제는 농지개혁을 해서 실업자를 자작농으로 돌리려고 하다 실패했지만, 마리우스는 실업자에게 군에 입대하는 길을 열어 주어 그들을 구제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생각지 못한 부작용

 

그런데 어떤 일이든 ‘현상 유지’ ‘전통 견지’를 내세우는 로마의 원로원이 왜 마리우스의 이러한 개혁에 대해서만은 그것을 인정했을까?

로마의 군제는 이미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로마의 공화정과 깊이 결합된 것이다. 시민이 자신들의 손으로 로마를 지킨다는 점에 로마의 강인함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왜 원로원은 마리우스의 개혁을 수용했을까?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먼저 너무 약해진 로마군 의 현상을 원로원에서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쟁에서 패배한다는 것은 어떤 사람의 눈에도 뚜렷이 보이기 때문에 이 문제를 방치해 두면 원로원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질 수도 있었으며 로마군 의 연전연패는 로마의 존망과도 관련되었다.

둘째로 마리우스의 개혁은 원로원 계급의 기득권을 건드리는 것이 아니었다. 같은 실업 대책이라도 그라쿠스 형제의 농지개혁은 로마 부유층의 기득권을 침해하는 것이어서 저항이 컸지만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

셋째로 마리우스의 개혁에는 즉효성 이 있었다는 것이다. 실업자들은 지원병이 되는 것으로 생활의 안정과 자기 자신에 대한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고, 그때까지 병역에 끌려간 하급 평민들은 징병되지 않아도 되었다. 따라서 로마 시만 사이에서도 마리우스의 개혁은 대 호평을 받았다. 원로원도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 이유로서 마리우스가 집정관의 자격으로 개혁을 담당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라쿠스 형제의 경우는 평민회를 기반으로 하는 호민관으로서 개혁을 하려고 한, 말하자면 ‘체제 외 개혁’ 이었던 데 비해, 마리우스의 경우는 집정관이므로 ‘체제 내 개혁’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하지만 마리우스의 개혁이 체제 내에서 실시되었다고는 해도 역시 이 군제 개혁은 로마공화정의 핵심을 건드리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라쿠스 형제의 경우에는 로마의 공화정 전체의 개혁을 시야에 넣은 개혁이었던 데 비해 마리우스의 개혁은 어디까지나 군제에만 한정되어 있었다. 즉 마리우스의 개혁이란 당장 망가질 것 같은 자동차 엔진을 바꿔 넣는 것만으로 ‘성능 개선’을 한 것과 같았다.

섀시 도 보디도, 그리고 타이어까지 노후화되어 사실은 전체를 바꿔야 하는데 엔진만을 고출력으로 바꿔 넣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오히려 그 자동차의 밸런스가 무너져 버려 여기저기서 문제가 터질 것이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라 큰 사고를 일으킬 위험마저 안고 있다.

마리우스의 개혁도 이와 마찬가지였다. 지원제의 도입은 ‘누구의 기득권도 해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는 이점이 있었지만, 생각지 못한 부작용을 로마에 안겨 주었다.

 

 

동맹자 전쟁

 

마리우스의 개혁은 앞에서 설명했듯이, 위로는 원로원에서 아래로는 프롤레타리에 이르기까지 로마의 시민 모두에게 환영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눈을 로마 밖으로 돌리면 평가가 완전히 달라졌다. 그것을 마리우스나 원로원 의원들은 예측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당시의 로마인들은 심각한 폐쇄주의로 인해 시야가 좁아져 있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로마 시민권을 가지지 않은 로마 연합의 여러 동맹국에서 보면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은 ‘또 로마인만이 이득을 보겠다는 속셈이다’ 라는 식으로밖에 비치지 않는다. 왜냐하면 로마 연합에 속하는 동맹국이나 지방자치체의 시민들에게 병역의 의무는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 비로마 시민들은 직접세를 납부하고도 라틴어로 말하는 ‘피의 세금’으로서의 병역에 종사할 의무가 부과되어 있었다. 이에 비해 마리우스의 개혁 이후 로마 시민은 병역이 시민의의무가 아니라 직업이 되었기 때문에 ‘피의 세금’을 지불하지 않아도 되었다. 게다가 직접세는 이전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이것이 불평등이 아니고 무엇이 불평등이냐는 불만이 분출한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불평등한데도 로마는 전쟁이 일어나면 매번 동맹국이나 지방자치체에 출병을 요구했다. 그런 전쟁도 결국은 로마 본국의 이익을 이한 것이었고 비로마 시민들에게는 아무것도 돌아가는 것이 없었다.

마리우스의 개혁은 이미 해체되기 시작한 로마 연합의 결속에 결정적인 치명타를 준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리하여 일어난 것이 기원전 91년 ‘동맹자 전쟁’ 이다. 로마 연합의 맹주로서 군림하고 있다고 생각한 로마가 동맹국에게 공격을 당하는 처지에 몰려 버린다.

이탈리아 반도 안에서도 비교적 가난한 8개 부족이 일제히 봉기한 이 전쟁에서 그 동안 힘을 자량하던 로마도 고전을 면할 수가 없었다.

어쨌든 바로 얼마 전까지 함께 싸운 같은 이탈리아인이라 로마군 의 전법을 다 알고 있었으므로 주변의 야만족과 싸우는 것과는 전혀 달랐다. 햇수로 2년에 걸친 전쟁은 일진일퇴의 공방이었다.

 

 

 

‘제국’ 의 이정표

 

결국 이 동맹자 전쟁은 전투에는 이겼지만 로마 측이 대폭 양보하면서 완전히 수습된다.

전쟁 2년째에 해당되는 기원전 90년 겨울, 로마는’율리우스 시민권법’을 제정해 동맹국에 사는 시민들이 로마 시민권을 자유롭게 취득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일찍이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시민권 개혁을 제안한 것은 그보다 30년 전의 일이었다. 인간이란 어려운 현실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쓰라린 경험을 직접 겪어 보지 않으면 개혁을 할 수 없단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보아 당시 로마가 시민권을 개방한 것은 큰 영단을 내린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시민권법에 의해 로마는 ‘다민족 종합국가’의 길을 걷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남부 이탈리아에 사는 그리스인, 중부 이탈리아에 사는 에트루리아인, 아펜니노 산맥의 산악 민족 모두 로마 시민이 되었다. 로마 연합은 발전적인 길을 찾았고, 이탈리아 반도 전토가 하나의 ‘국가 로마’가 되었다.

나중에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이 노선을 한층 더 발전시켜 그때까지는 ‘속주민’으로 한 단계 낮은 지위에 놓여 있던 사람들에게까지 로마 시민권을 개방한다. 이 조치에 의해 로마는 당연히 인류 사상 최초의 ‘보편 제국’이 되었다고 할 만하지만, 그러한 제국 실현의 이정표는 이 시기에 세워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로 이 율리우스 시민권법의 성립은 로마 역사에서 획기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획기적인 시민권법을 제출한 집정관의 이름은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이 인물은 그 당시 아직 10세이던 어린 카이사르의 백부였다.

 

 

또 하나의 ‘재앙’

 

마리우스 군제 개혁으로 시작된 동맹자 전쟁은 ‘전화위복’ 이라는 결과로 끝났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지원병 제도의 전환은 다른 형태의 또 하나의 ‘재앙’을 초래하게 된다. 그것은 로마군단의 ‘사병화’라는 현상이었다.

마리우스 개혁 이전의 로마에서 군대는 상비군이 아니라 필요할 때마다 징병을 통해 편성되는 것이 관례였다.

그래서 징병되는 군인은 시민의 의무로서 참가하는 것이기 때문에 당초의 목적이 달성되면 해산하고 원래의 일로 돌아갔다. 그러한 의미에서 지휘관인 집정관과 병사의 관계는 비교적 담백하고 형식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원병, 즉 직업군인으로 군단을 편성하게 되자 사정은 달라졌다. 어쨌든 병사 측은 생활이 걸려 있는 문제라 아무래도 ‘위’를 본다. 군단 해산 후, 즉 퇴직 후의 문제까지 신경을 써 주는 보스라면 좋을 텐데 그렇지 않으면 어쩌나 하고 눈치를 보게 된다.

그러한 병사의 심리는 물론 지휘관에게도 전해진다. 전쟁의 승패여부는 현장 병사의 움직임 여하에 달려 있으므로 유능한 지휘관일수록 병사들로부터 신임을 받으려고 노력한다.

이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군단 지휘관과 병사의 관계는 개인적인 관계가 되어 간다. 게다가 로마인은 옛날부터 의리 깊은 ‘클리엔테스 관계’를 존중하는 민족이다 보니 그런 경향에 더욱 박차를 가하였다. 그래서 로마군단은 ‘공화국 군단’이라는 성격이 희석되고 그 군단을 지휘하는 사령관의 ‘사유물’ 이라는 색깔이 진해졌다.

후년에 카이사르 대 폼페이우스, 혹은 옥타비아누스 대 안토니우스의 내전이 일어난 것도 모두 마리우스의 개혁이 가져온 파급효과였다.

만약 마리우스의 개혁이 없었다면, 원로원에게서 ‘국가의 적’으로 낙인 찍힌 카이사르를 따라 얼마나 많은 병사가 함께 루비콘 강을 건넜을까? 그의 부하들은 ‘카이사르가 가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따라가겠다.’ 고 생각했다. 카이사르는 그들 병사에게 ‘좋은 후원자’ 였던 것이다.

로마공화정은 개인플레이를 철저하게 부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 시스템이므로, 군단의 사령관이 병사들의 덕망을 한 몸에 모으는 사태가 일어나서는 안 될 것이었다. 그러나 징병제라는 공화정의 근간을 이루는 부분을 바꿔 버렸기 때문에 바로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현실이 되었다.

여기서 로마는 사상 처음 군단간의 충돌 사태를 맞게 된다.. 그것은 동맹자 전쟁이 끝나고 몇 년 지나 마리우스와 술라의 대립에서 시작된 일련의 내전이었다.

 

 

 

유혈의 연속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는 유구르타 전쟁 때 마리우스 군단 내에서 회계 검사관을 맡은 것이 계기가 돼 출세의 끈을 붙잡은 남자였다. 그러나 한때의 상사와 부하라는 관계이면서도 이들 두 사람의 정치적 자세는 전혀 달랐다.

‘달랐다’ 고 하는 것은 조금 어폐가 있다. 왜냐하면 원래 마리우스에게는 정치적인 센스가 결정적으로 부족했던 데 비해 술라 쪽은 ‘더 이상은 없다’ 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정치적인 센스가 대단했다. 그리고 로마의 공화정에 대한 생각도 마리우스는 그 군제 개혁에서 알 수 있듯이 현재 상황에 대응하는 영역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않았다. 이에 비해 술라는 확고한 비전이 있었다.

술라는 당시의 혼미의 원인을 공화정이라는 시스템이 올바르게 기능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공화정을 본래의 모습으로 ‘정화’ 하면 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마리우스가 집정관으로서 힘을 가지고 있던 시대에는 양자의 대립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동맹자 전쟁 직후에 술라가 집정관으로 취임하자 양자는 격렬하게 대립한다. 그리고 이 대립이 그 후 6년에 걸쳐서 계속된 내란으로 확대되어 간다.

이 6년간의 이야기는 너무나 뒤얽혀 있어 여기서는 생략하겠다. 이 술라와 마리우스의 대립이 계기가 되어 일어난 내란은 그야말로 유혈에 버금가는 것이었다.

옛 부하에 대한 원한에 사무친 마리우스가 복수하겠다고 로마 시민 1,000명을 죽이자, 로마를 무력 제압한 술라가 그 다음에는 반대파 4,000명을 숙청한다. 그 외에도 술라의 군단과 로마 토벌군의 싸움을 합하면 그간에 죽은 로마인의 숫자는 수만 명에 이르렀다.

내전은 동포끼리 서로 죽이기 때문에 어느 나라나 어느 시대나 더욱 비참한 법인데 이때의 싸움도 예외는 아니었다.

 

 

‘정치적 인간’ 술라

 

앞에서 소개했듯이 술라는 공화정에 대한 강한 신뢰감을 품고 있었다. 공화정이 올바르게 기능만 하면 로마의 혼미는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다. 말하자면 타고난 공화정주의자인 술라가 자신의 ‘사병’을 이끌고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했다는 것은 그야말로 모순이라고 생각될지 모른다.

공화정을 폐지하려고 카이사르가 쿠데타를 단행한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공화정의 정화를 정치 이념으로 삼은 술라가 왜 국법을 어기면서까지 수도 로마에 군대를 진군시켰을까?

그러나 이것은 술라에게는 논리의 모순도 아무것도 아니다. 그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면 “맨손으로 어떻게 공화정을 지킬 수 있단 말인가?” 라고 태연하게 대답했을 것이다. 술라는 개혁이란 언변이나 설득만으로는 실행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아는 ‘정치적 인간’이었던 것이다.

술라가 원로원을 거의 위협하는 형태로 임기 무기한의 독재관에 취임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로마의 공화정에서는 독재관이란 유사시에만 허용되는 직무였다. 게다가 그 임기는 반년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집단 지도를 신조로 하는 공화정에 있어서는 당연한 규정이었다.

물론 그것을 술라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테가 빠진 공화정’을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리려면 이런 방법밖에는 없었다. 독재관이 제출하는 법안은 집정관이나 호민관과는 달리 시민회의 의결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일부러 임기 무기한인 독재관이 된 것이다. 그래서 ‘공화정을 지키는 독재자’ 가 된 술라는 재빠르게 속속 개혁 정책을 펴 나간다.

그 중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원로원의 증원

마리우스와 술라가 저지른 살육으로 정원 300명인 원로원에 100명 가까운 결원이 생겼다. 그는 그것을 보충한 다음에 의석을 배로 증원시킨다. 새 의원은 대부분 기사 계급에서 선출되었다. 기사 계급을 수중에 넣어 원로원을 더욱 안정되게 만들겠다는 목적이 있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리고 임원의 정원 등을 개정해 원로원 내의 연공서열 제도를 명확하게 만들었다. 집단지도 체제가 올바르게 움직이게 하려면 인사를 질서 있게 실시해야 한다. 그것을 위해서는 연공서열 제도를 엄밀하게 실시해야 한다는 것이 술라의 생각이었다.

 

호민관 제도의 개혁

원로원의 의석을 배로 증원시키는 동시에 술라는 평소부터 원로원과 대립이 잦았던 호민관을 약하게 만들 계획을 한다.

먼저 종래에 가능했던, 호민관에서 다름 임원으로 승격하는 길을 차단한다. 종래는 호민관을 거쳐 원로원에 들어가면 다른 직무를 경험한 다음에 집정관을 목표로 삼을 수도 있었다. 술라는 그 길을 차단함으로써 호민관 자리를 노리는 야심 찬 젊은이들로 하여금 그 자리가 매력 없는 것으로 보이게끔 만들어 버린다.

또 호민관의 재선에는 사임한 뒤 10년이 지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규정을 두어, 그라쿠스 형제처럼 연속으로 당선되는 사람이 나오지 않게 바꾼다.

 

군사 개혁

술라는 스스로 쿠데타를 일으켰으므로 정치와 군사를 명확하게 분리하는 것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우선 집정관이 이끄는 상비군 외에는 국내에 들어올 수 없다고 정한다. 그 이외의 속주에 배치된 군단도 이동할 때 반드시 원로원의 허가를 얻어야 한다고 정한다. 그리고 어떤 이유가 있어도 루비콘 강을 넘어서는 안 된다고 정해 놓았다.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널 때 ‘주사위는 던져졌다.” 고 외친 이유는 바로 이 규정 때문이었다.

그리고 술라는 군단의 사병화를 막기 위해 군단 사령관의 임기를 모두 1년으로 정했고 임지도 원로원이 정하기로 했으며, 최고사령관은 군무가 완료되면 즉시 군을 해산하는 것을 의무화했다.

말하자면 술라는 실업대책으로서 지원병 제도를 바꿀 수 없는 이상, 모든 점에서 군에 대한 민간인 통제를 철저히 실시함으로써 쿠데타의 재발을 막으려고 했다.

 

 

술라 개혁의 맹점이란

 

이 같은 ‘공화정 정화’를 위한 개혁을 차례차례 실시해 나간 술라는 불과 2년 만에 독재관에서 물러나고 정계에서도 은퇴한다. 오랜 세월에 걸쳐 구상해 온 개혁을 모두 실현해 공화정을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렸으니 이미 자신의 역할은 끝났다고 생각하고 내린 은퇴였다.

하지만 술라의 개혁은 그의 사후에 바로 붕괴해 버린다. 특히 그의 예상이 빗나간 것은 군사 개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폼페이우스, 그리고 카이사르라는 인물이 자신들이 이끄는 군단의 힘을 배경으로 로마의 정치적 중심에 뛰어든 것이다.

왜 술라라는 뛰어난 인물이 실시한 개혁이 불과 몇 년밖에 생명을 가질 수 없었을까? 그 이유는 역시 지중해 전역을 차지한 로마의 확대에 있었다. 이것을 술라는 잘못 보았다.

분명히 술라가 행한 민간인 통제 계획은 아주 잘 만들어져 있었다. 그대로만 하면 군단들이 지휘관의 사병이 될 위험성은 최소한으로 억제할 수 있었다. 다만 거기에는 “평시라면” 이라는 조건이 붙는다. 로마의 판도가 커졌다는 것은 그만큼 국내외에 전란의 위험이 증가했다는 것과 다름없다.

사실 술라의 사후에 로마는 속주 스페인에서 일어난 세르토리우스 전쟁(기원전 80 ~ 기원전 72), 소아시아의 동맹국 폰토스에서 일어난 미트리다테스 전쟁**, 그리고 지중해에서의 해적 퇴치(기원전 67년) 등 이어지는 출병을 감행하게 된다. 모두 로마가 원한 전쟁이 아니었다. 그러나 패권을 지키기 위해 출병하지 않을 수 없는 전쟁이었다.

이러한 ‘유사시’ 가 계속되면 당연히 ‘평상시’의 규칙을 지키고 있을 수만은 없다. 1년으로 정해진 지휘관의 임기도 연장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변경에 출동한 군대를 간단히 귀환시킬 수도 없다. 긴 시간 고락을 함께하면 그 군단 병사들이 지휘관을 자연스럽게 따르게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이리하여 로마의 원로원 체제는 존속의 위기에 다시 직면하게 된다. 공화정에 있어서는 가장 피하여야 할 ‘개인플레이’ 의 시대가 개막했기 때문이다.

거기서 가장 먼저 폼페이우스가 등장하고, 그 다음에 카이사르가 나타난다. 그리고 그 카이사르에 의해 마침내 공화정은 막을 내리게 된다.

 

** 미트리다테스 전쟁: 기원전 88년 폰토스 왕 미트리다테스는 로마의 혼미를 틈타 세력 확장에 나선다. 이 움직임을 일단 술라가 봉쇄했지만(제1차 전쟁: 기원전 88~기원전 84), 술라의 사후 다시 폰토스 왕이 움직이기 시작했다(제2차: 기원전 83 ~ 기원전 81, 제3차 전쟁: 기원전 74~기원전 63). 이 전쟁은 궁지에 몰린 미트리다테스의 자실로 겨우 종결된다.

 

 

 

 

7장 ‘창조적인 천재’ 카이사르

 

카이사르는 갈리아를 정복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갈리아를 정복 지배하여 착취하는 땅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비록 민족이나 문화와 풍습이 다르다 해도

한번 로마의 패권 아래 들어오면 거기는 이미 ‘로마국’이 된다.

이 방식이 결국은 로마에 이익을 가져오는 최선의 방법임을 잘 알고 있었다.

 

 

종신 독재관

 

루비콘 강을 건너 원로원 측에 서 있던 폼페이우스 파와 내전을 끝낸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종신 독재관으로 취임한 것은 기원전 44년 2월이었다.

당연히 6개월이 임기임에도 불구하고 그 제한을 넘어 독재관에 취임한 술라의 ‘임기 없는 독재관’ 이 있었다. 카이사르의 종신 독재관은 술라를 흉내 낸 듯하지만 그 의미는 전혀 달랐다.

우선 술라의 독재관 취임은 그가 생각하는 개혁을 단행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일종의 긴급 조치라고 할 수 있다. 사실 그는 자신이 예정한 개혁을 독재관의 권한으로 모두 실현시키자 즉시 그 자리에서 물러나고 정계에서도 은퇴해 버렸다.

하지만 카이사르의 경우는 달랐다. 카이사르에게 종신 독재관 취임은 방편이 아니라 그 자체에 큰 목적이 있었다. 그것은 종신 독재관이란 직무의 탄생은 ‘공화정의 마지막’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분명히 카이사르가 정권을 장악한 뒤에도 로마에는 원로원이나 호민관이 남아 있고 시민회조차도 형태가 남아 있었다. 따라서 밖에서 보면 로마의 공화정은 건재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거기에 종신 독재관이 등장하면서 완전히 다름 양상을 띠게 된다.

본래 독재관이란 로마공화정에서 위기관리 시스템이었다고 할 수 있다. 국가 존망의 유사시에 두 명의 집정관이 독재관을 지명하면 그 순간부터 집정관이나 호민과, 그리고 입법권을 가진 시민회도 무력해진다. 독재관이 결정한 정책은 시민회를 통하지 않아도 정식 법이 되고, 호민관 최강의 무기인 ‘거부권’ 발동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즉 이것은 독재관의 재임 중에는 로마의 공화정이 정지된다는 것과 같았다.

따라서 카이사르가 ‘종신’ 독재관이 되었다는 것은 그가 살아 있는 동안 로마의 공화정이 계속 정지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카이사르는 독재관에 ‘종신’ 이란 한마디를 붙임으로써 로마의 정치체제를 사실상 완전히 바꿔 버린 것이다.

 

 

“술라는 정치를 몰랐다”

 

도대체 왜 카이사르는 공화정을 폐지하고 새로운 정치체제, 즉 제정으로 로마를 이행시켰을까? 그것 역시 술라와 비교해 보면 알기 쉽다.

제6장에서도 말했듯이 술라는 로마 혼미의 진정한 원인을 ‘공화정의 혼란’에 있다고 생각했다. 공화정이 본래의 기능을 되찾으면 모든 문제는 해결되고, 특히 원로원의 권력과 권위 회복이 가장 중요하다고 술라는 생각했다.

그래서 술라는 원로원 주도 체제에 반대 의견을 내세우는 ‘민중파’ 사람들을 가차없이 탄압하고 죽이고 그들이 재산을 몰수해 나갔다. 술라 이전에 로마에서 학살을 행한 마리우스는 술라로 인해 로마에서 내쫓긴 원한으로 50명의 원로원 의원과 1,000명의 기사계급을 죽였다. 하지만 술라의 경우는 원한 같은 감정이 들어갈 여지가 없었다. 술라는 ‘공화정의 정화’를 위해 필요하다는 신념에서 반대파를 숙청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 술라의 인식과는 정반대의 생각을 가졌던 사람이 카이사르였다. 카이사르에게 ‘로마의 혼미’란 결국 공화정, 좀 더 깊이 말하면 원로원 주도 체제가 초래한 것이었다.

카이사르를 대신해 설명하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어떤 제도라도 그것을 인간이 만든 이상, ‘규모의 한계’를 면할 수 없다. 포에니전쟁에 의해 로마의 영토가 급성장한 시점에서 이미 공화정의 수명은 다했다. 분명히 로마가 한니발과 대결한 시점, 즉 로마의 세력권이 이탈리아 반도의 안쪽에 머물고 있던 단계에서는 공화정은 실로 잘 기능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이탈리아 반도를 넘어 지중해가 ‘우리의 바다’가 된 시점에서 원로원은 기능 저하를 일으키게 되었다.

분명히 ‘과두정치’는 그 조직력이나 안정도에서 다른 정체보다 우수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려면 무엇보다도 효율이 필요하다. 바꾸어 말하면 스피드이다.

예컨대 로마의 변경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다고 생각해 보라. 현행 원로원 체제로는 그 반란을 제압할 군대를 파견하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 모른다. 원로원에서 토의를 거듭하고 앉아 있는 동안 전선이 그만큼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원로원 회의에서 결정이 내려지지 않으면 집정관은 군단을 파견하는 일조차 할 수 없다…”

술라가 원로원 의원의 정원을 600명으로 증원하고 나서부터 원로원의 비효율성은 더욱 심해져 있었다. 정책 하나를 결정하는 데도 훨씬 많은 시간이 걸렸고, 경우에 따라서는 논의만 분분한 채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을 때도 많았다.

카이사르가 “술라는 정치를 몰랐다.” 고 신랄한 평가를 내린 데는 이러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진정한 개혁이란 재 구축이다

 

그렇다면 카이사르가 종신 독재관으로 취임해 실행하려고 한 개혁이란 무엇일까?

자칫하면 개혁이란 낡은 껍질을 벗어 던지고 새로운 제도를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진정한 개혁이란 결국 재구축을 하는 것이고, 카이사르가 실행하려고 했던 것도 바로 그것이었다.

어떤 민족이나 어떤 조직도 자신들의 체질에 맞지 않는 것을 외부에서 가져와 이식하면 성공하지 못한다. 비록 한때는 극적인 성공을 거두었다고 해도 토양이 맞지 않는 개혁은 정착하기 어렵다. 따라서 개혁이란 우선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자질이나 특징 중에서 어떤 것을 살리고 어떤 것을 버려 조합해야 하는지를 결정해서 재구축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다.

카이사르가 실행하려고 한 ‘신생 로마’의 개혁도 바로 그것이었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카이사르는 ‘로마의 전통’ 이라고 생각되고 있는 공화정 체제는 이미 시대에 맞지 않다고 생각하고 잘라 버릴 각오를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로마인이 왕정 시대부터 계속 이어온 ‘패자도 동화시킨다’ 는 정신은 버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을 최대한으로 살리고자 노력했다. 이것이 카이사르가 실행에 옮긴 ‘정리 해고’의 본질이었다.

 

 

카이사르 식 ‘평화 선언’

 

카이사르 이전의 원로원의 ‘로마’란 옛날의 도시국가 로마였다. 조금 시야를 넓힌다 해도 이탈리아 반도를 넘지 못한다. 로마 국경이라고 여긴 루비콘 강 너머는 로마의 속령이라도 해도 로마가 아니다. 이것이 원로원의 생각이었다.

이러한 원로원의 쇄국주의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이탈리아는 온 지중해의 지배자이어야 한다.

로마가 온 이탈리아의 지배자이어야 한다.

원로원이 온 로마 시민의 지배자이어야 한다.

 

동맹자 전쟁에 의해 이탈리아 반도 안에서는 모든 시민이 로마 시민권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원로원의 발상은 거기까지가 마지막이었고, 로마 중심주의 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카이사르에게는 처음부터 국경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그에게는 로마의 패권 아래 있는 땅이라면 모두 로마였다. 그는 수도 로마 주위를 둘러싼 성벽을 부수어, 전시를 하듯 로마 시민들에게 보여 주었다.

고대에서 중세에 이르기까지 유럽이나 중국에서 도시란 성벽으로 지켜지는 내부를 말했다. 그래서 외적으로부터 백성을 지키기 위한 성벽이 도시에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여겼다.

이것이 로마도 예외는 아니었다. 제6대 로마 왕 세르비우스의 지시에 의해 세운 세르비우스 성병은 로마의 일곱 개 언덕을 둘러싸고 있었다. 이 성벽의 견고함은 일찍이 한니발조차 로마 공략을 주저하게 만들었을 정도였다. 그러데 이처럼 견고한 세르비우스 성벽을 카이사르는 무너뜨렸다.

어떤 일을 행하든 한 가지 이유만으로는 행동하지 않는 카이사르였다. 성벽의 철거에는 ‘좁아터진 로마시가를 확장하기 위해서’ 라는 현실적인 목적도 있었다. 카이사르는 로마 중심부의 재개발도 추진하고 있었다. 이에 따른 용지의 절대적 부족은 재개발 정도로는 해소할 수 없었다. 도시로서 로마의 발전을 꾀하는 데 성벽의 철거는 필수조건이었다.

그러한 실리적인 이유도 있지만 카이사르에게 ‘새로운 로마’ 에서 성벽만큼 어색한 것은 없었다. 성벽이란 사람들의 마음에 ‘안’과 ‘밖’의 구별을 만든다. 원로원 의원의 특권 의식도 벽이 낳은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성벽은 사람이나 물건이 자유로운 왕래를 방해한다. 그래서 카이사르는 상식을 뛰어넘는 성벽 철거를 실행함으로써 ‘도시국가 로마의 시대는 끝났음’을 국내외에 천명한 것이다.

벽의 철거는 카이사르의 평화선언이기도 했다. 즉 새로운 로마는 수도 방위를 할 필요가 없을 만큼 평화로워진다는 결의의 표명이었다. 방위는 원격지에 있는 국경에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

사실 그 후로 로마는 300년에 걸쳐 ‘성벽 없는 수도’ 로서 계속 존재한다. 로마제국의 대명사가 된 ‘로마에 의한 평화(팍스 로마나)’ 라는 시대의 시작이었다.

 

 

갈리아에서 온 원로원 의원

 

‘로마의 패권이 미치는 곳이라면 모두 로마이다.’ 카이사르의 이 같은 사상이 명확히 나타난 것이 속주 통치의 모습이었다.

로마 개혁의 일환으로 카이사르는 원로원 개혁에 착수한다. 술라가 600명으로 증원한 원로원 정원을 그는 더 늘려 900명으로 하였다. 술라는 원로원의 힘을 강화하기 위해 증원했지만 카이사르의 의도는 그것과는 정반대였다. 즉 정원을 늘리면 늘릴수록 종래와 같은 형태로 원로원이 갖고 있는 권위와 권력은 약해지리라고 생각했다.

그300명의 ‘신참’ 의원 중에 유달리 눈에 띈 사람들은 ‘알프스 저편’ 에서 온 갈리아의 부족장들이었다. 카이사르는 자신이 수년에 걸쳐 싸워 온 ‘적’ 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원로원의원 자격까지 준 것이다. 카이사르는 ‘패자도 동화시키는’ 로마의 전통에 충실했다. 물론 옛날의 적이라고 해도 부족 내에 영향력을 가진 유력자에 한해서였지만.

갈리아에서 온 ‘신참자’ 의 모습을 보고 로마 시민들은 그것을 조롱했다.

“원로원 의원이면서 로마 시재의 지리조차 모른다니까.”

“아니, 로마의 지리 정도라면 괜찮아. 라틴어도 못하는걸.”

“그 사람들은 토가 속에 바지를 입는다던데.”

로마인은 토가 라는, 긴 옷감을 휘감은 형태의 옷을 입고 있었는데, 갈리아인의 ‘민족의상’은 긴 바지였다.

그런데 로마 시민들이야 갈리아인 을 비웃으며 그것으로 끝나지만, 원로원 의원들에게는 한없이 불쾌한 일이었다. 그들에게 ‘로마의 전통’ 이란 라틴 민족만으로 구성된 원로원이라는 의미였다.

그런데 현대의 우리라고 원로원 의원들을 비웃을 자격이 있을까?

카이사르가 한 것을 근현대사에 옮겨 놓으면 대영제국이 의회에 인도인 간디나 네루를 맞이하는 것과 마찬가지며, 나바호 족의 족장이 미국의 상원의원에 추천되는 것과 같다. 민주주의의 전통을 자랑하는 영국이나 미국이라고 해도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카이사르가 갈리아의 유력자들에게 원로원 의석까지 준 것은 기독교의 박애정신이나 근대 민주주의의 평등 정신 같은 추상적인 이념 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생각하는 ‘새로운 로마’ 는 그렇게 함으로써 공생을 실현하는 길로 들어선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루비콘 강을 넘은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와 전쟁을 치르고 있는 동안에도 정복된 지 얼마 되지 않는 갈리아의 여러 부족들은 카이사르에게 반대하여 봉기하지 않았다. 로마 내부가 둘로 나뉘어 내전을 치르고 있는 그때야말로 갈리아인 에게는 로마에 반기를 드는 좋은 기회였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이다.

카이사르는 갈리아를 정복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갈리아를 정복하고 지배하여 착취할 땅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비록 민족이나 문화와 풍습이 다르다 해도 한번 로마의 패권 아래 들어오면 거기는 이미 ‘로마국’ 이 된다. 이 방식이 결국은 로마에 이익을 가져오는 최선의 방법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갈리아의 유력자들에게 아낌없이 로마의 시민권이나 원로원의 의석을 주었고, 그의 가문 이름인 율리우스마저도 내주었을 정도였다.

이것을 보고 키케로와 브루투스를 비롯한 원로원 의원들은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이것이야말로 로마 고래의 방식이 아닌가?’ 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속주도 역시 로마이다

 

‘속주’를 뜻하는 라틴어 ‘프로빙키아(provincia)’는 현대 이탈리아어에서도 그대로 사용되고 있는 단어이다. 현재는 이 말을 ‘도(도)’ 혹은 ‘지방’ 이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예컨대 ‘밀라노 도’ 라고 말할 경우의 ‘도’는 ‘프로빈차’ 인데 또한 지방 출신자라고 말할 때의 ‘지방’ 도 ‘프로빈차’ 이다. 즉 현대의 프로빈차에는 어디에도 ‘지배되는 토지’ 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이것은 이탈리아어에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다.

남부 프랑스의 ‘프로방스’는 라틴어로 ‘프로빙키아’ 에서 온 말이다. 옛날에 로마인에게 지배당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고향을 ‘속주’ 라고 부른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라고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카이사르의 등장으로 인해 본국 로마와 그 속주의 관계가 바뀌었다는 것을 알면 전혀 이상하지 않다.

속주가 ‘로마 본국이 직할 지배하는 땅’ 에서 ‘로마의 한 지방’ 으로 위치가 바뀌면 당연히 그 지역에 실시하는 정책도 바뀐다.

로마는 원래 속주민에게 속주세를 징수했다. 적이 쳐들어오면 로마의 군단이 달려가 주니까 안전보장비 라고 생각하고 수입의 10분의 1을 납입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징수는 푸블리카누스라는 징수업자에게 맡겼다.

푸블리카누스는 공무원이 아니라 민간업자라서 빈틈이 없다. 보수는 긁어 모은 세금의 몇 퍼센트를 나눠 받기로 계약이 되어 있다. 그래서 세금을 많이 징수하면 할수록 그들이 수입도 증가했고, 세금을 납부할 수 없는 사람에게는 고리로 돈을 빌려주었기 때문에 평판이 나빴다. 카이사르는 이것을 바로잡았다.

그렇더라도 수입의 10분의 1을 속주세로 납부하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다만 평판이 나쁜 푸블리카누스 제도를 폐지하고 공정한 징세가 실시되도록 크게 배려했다.

‘돈의 원한’ 은 동서고금이 다르지 않다. 더구나 누구라도 싫어하는 세금이라면 더욱 그렇다. 세금징수를 공정하게 실시하는 것은 속주 통치를 안정시키는 데 가장 필요한 일이었다.

그리고 카이사르는 납세자 명단을 공개하여 마치 유리창 안에서 징세를 하듯 투명하게 했다. 물론 징세업무도 공적인 기관에 의해 실시하게 만든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다만 이 정책으로 푸블리카누스 집단을 적으로 만들어 버리게 되었다. 그러나 모두가 찬성하는 개혁은 개혁이 아니다.

 

 

‘일석 삼조’의 식민 도시 건설

 

징세 문제를 해결하는 것과 동시에 카이사르가 실시한 것은 속주에도 로마 시민을 적극적으로 늘려가는 방책이었다.

카이사르는 로마의 속주가 ‘운명 공동체’ 가 되기 위해서는 속주에도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을 늘리는 것이 대전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크게 두 가지 방법으로 속주에 거주하는 로마 시민을 늘려 나갔다.

첫째는 속주민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하는 방법이었다. 옛날부터 로마인들은 ‘패자도 동화시킨다’ 는 독특한 철학을 실천해 왔는데 그것을 속주민에게도 적용하기로 한 것이다.

우선 카이사르는 속주가 된 뒤 계속 주민의 로마화가 진해되고 있는 북부 이탈리아 속주의 자유민 모두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했다. 그리고 로마화의 수준이 약간 낮은 시칠리아나 남부 프랑스 속주 주민에게는 ‘라틴 시민권’을 주기로 한다. 라틴 시민권이란 간단하게 말하면 ‘참정권을 뺀 시민권’ 이지만, 물론 이 죄에 ‘머지않아 정식의 로마 시민권을 부여한다’는 내용이 함축되어 있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어쨌든 ‘라틴 시민권’ 은 ‘준로마 시민권’ 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치에 이어 카이사르는 갈리아나 북부 이탈리아에만 머물지 않고 스페인의 원주민 중 유력자들에게도 로마 시민권을 주었다. 후세의 역사가들이 유럽은 카이사르가 창조했다고 말하는 근거가 여기에 있다.

두 번째 방법으로 카이사르가 실시한 것은 로마 시민을 속주에 보내 그곳에서 ‘식민 도시’를 건설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미 로마 연합 시대에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의 방위 거점마다 식민 도시를 건설했는데, 그 형태를 속주에도 확대한 것이다.

그런데 이 아이디어는 카이사르가 처음 생각한 것이 아니다. 일찍이 그라쿠스 형제의 동생 가이우스가 앞서 시도했지만 원로원이 뭉개어 버린 카르타고도 그렇고, 포에니 전쟁 당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스페인에 건설한 이탈리카 도 로마인이 건설한 본국 밖의 ‘식민 도시’였다. 카이사르가 실행한 것은 이런 종류의 식민 도시를 더 많이, 널리 건설해 나가는 것이었다.

카이사르의 이 정책에 의해 속주로 이주한 로마 시민의 총인구는 8만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로마 시민에게 ‘본국의 바깥’ 이라고 생각되는 속주로의 식민은 마치 ‘버려진 백성’ 이라고 생각하지 쉽지만 그렇지 않았다. 왜냐하면 식민 도시에 이주한 사람들은 대부분 로마에서 할 일이 없는 실업자였고, 또한 폼페이우스 파와 치름 내전이 끝나서 해산할 수 밖에 없는 카이사르 군단의 병사들이었기 때문이다.

카이사르가 ‘식민 도시’를 각지에 건설한 것은 속주에 로마 시민권 소유자, 즉 로마 시민을 늘림과 동시에 실업 대책, 군단 병사의 재취직 대책이라는 ‘일석삼조’의 효과를 노린 것이었다.

로마군단에서는 퇴역 제대할 때까지 결혼이 허용되지 않았다. 따라서 로마군 병사가 현역일 때는 미혼이지만 만기제대를 하면 이전부터 사귀어 온 현지 여성과 결혼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런 길도 열려 있어 현지 주민의 혈통을 받은 로마 시민이 증가해 갈수록 속주와 로마는 일체화가 되어갔다.

카이사르가 생각했던 대로 속주의 적극적인 식민정책은 로마에 큰 의미를 가져왔다. 훗날 이러한 이주자의 자손 중에서 로마 황제에 오른 사람이 여러 명 나온다.

로마와 속주는 ‘운명 공동체’의 길을 확실히 걷기 시작한다.

 

 

코스모폴리스

 

카이사르는 로마 본국과 속주의 일체화를 진행하기 위한 방법으로 이 외에도 다양한 정책을 구체화시켜 갔다.

수도 로마와 속주를 묶는 가도의 네트워크 정비도 그 하나이지만, 그 밖에도 카이사르는 통화를 개혁하고 율리우스력도 제정했다.

현대의 우리가 볼 때 놀랄 수밖에 없는 일이, 로마는 건국 이후 500년 가까이 자신이 만든 통화를 갖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로마가 최초로 통화를 만든 것은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고 난 후 기원전 267년이다. 그때까지는 남부 이탈리아의 그리스 계 도시국가가 발행하는 통화가 로마에서도 그대로 통용되었다. 그리고 자국 통화를 발행한 후에는 원로원이 조폐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카이사르를 이것을 빼앗아 국립 조폐소를 개설하여 그곳에서 금화와 은화를 만들게 했다.

그렇지만 카이사르는 ‘통일 통화’를 발행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생각한 것은 오늘날 말하는 ‘기축통화’의 확립이었다.

로마 패권 아래 있는 모든 지방의 경제를 일체화 시키려면 중앙집권적으로 통화를 통일하는 것이 편리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세우려는 제국이란 중앙집권과 지방분권이 적당히 혼합된 ‘세계국가’ 였다.

그러니까 로마 통화 이외에도 다른 통화의 발행이나 유통이 금지된 것은 아니었다. 아테네처럼 옛날부터 자신의 통화를 가지고 있는 자치도시나 속주의 일부에서는 이전 그대로의 통화 발행이 허용되고 있었다.

그의 이름을 딴 율리우스력의 제정에도 이런 카이사르의 생각이 반영되어 있다. 그때까지 로마에서 사용되고 있던 달력은 달이 차고 이울어지는 것에 입각한 음력이었다. 음력이면 1년은 355일이다. 따라서 해가 지나갈 때마다 음력으로는 실제 계절의 진행과 달력 사이에 차이가 생겨난다.

그래서 카이사르는 동맹국 이집트에서는 천문학자, 그리고 그리스에서는 수학자를 초빙하여 정확한 달력 제작에 착수한다. 그렇게 하여 완성된 것이 1년이 365일로 4년에 한 번 윤년이 오는 태양력이었다. 이것이 율리우스력이다.

그 당시의 최첨단 과학에 입각해서 계산한 율리우스력은 아주 정확해 오랫동안 유럽과 지중해 세계, 그리고 중동까지도 널리 사용하였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자신의 이름을 붙인 이 달력의 사용을 강제하지 않았다. 달력이란 각각의 민족 문화와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율리우력’ 도 기축 달력이라고 여겼다.

 

 

집권과 분권

 

카이사르는 속주 통치 방식에 대해서도 이러한 분권적인 요소를 도입했다. 속주는 로마 본국의 직할지로 정해진 땅이므로 ‘지방자치체’ 처럼 완전한 자치를 실시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카이사르는 공화정 시대부터 원로원 의원 중에서 뽑아 임명하던 ‘속주 총독’은 그대로 이어 나간다. 따라서 기본은 어디까지나 중앙집권이었다.

본국에서 파견되는 속주 총독은 속주의 군사, 징세, 사법, 행정의 총책임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법이나 행정에 관하여 카이사르는 속주마다 ‘속주 의회’ 라고 할 수 있는 자치조직을 만들게 하고 그 기관에 일부를 맡겼다. 로마 본국에서 파견된 총독이 속주 주민사회의 내부에까지 지나치게 간섭해 로마의 중앙정부가 속주민들의 반감을 사는 원인 되는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속주라고 해도 그들 사회의 모습은 가지각색이다.

예컨대 갈리아인의 경우 넓은 갈리아 지방에만 100 이상의 부족이 존재한다 이 부족 사이에 마찰이 일어나면 그것을 속주 총독이 처음부터 나서서 해결하는 것보다 각 부족장끼리 서로 대화를 하게 만드는 것이 더 빨리 해결될 수도 있다. 그래서 카이사르는 갈리아를 정복하자, 그전부터 존재해 왔던 부족장 회의를 없애지 않고 오히려 장려해 서로간의 문제를 거기서 논의하게 했다. 갈리아 전쟁 당시는 카이사르 자신이 의장을 맡는 적도 있었다.

물론 이것은 부족사회인 갈리아나 스페인 등의 이야기이고, 일찍부터 도시국가가 성립해 있던 그리스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그리스의 각 도시에서는 선거에 의해 만들어진 의회가 그 역할을 수행했다.

광대한 로마 영토를 통치하기 위하여 중앙집권 체제를 일방적으로 강요한다면 통치가 불가능하다. 어디까지나 ‘경우에 따라’ 시행했다. 옛날부터 로마인이 활용해 온 지혜를 카이사르도 답습한 것이다.

 

 

공격의 시대에서 방비의 시대로

 

카이사르가 로마와 속주의 일체화를 도모하고 로마국가 전체를 운명 공동체로 이끈 것은 로마를 고도성장에서 안정성장 노선으로 이끌기 위해서였다고 할 수 있다.

로물루스 시대로부터 포에니전쟁에 이르는 약 600년의 세월은, 도중에 켈트 족 습격 충격으로 인해 좌절한 적이 있었지만 로마는 기본적으로 한결같이 확대 노선을 진전시켜 왔다. 왕정에서 공화정으로의 이행도 로마가 한층 더 확대해 나가기 위해 곡 필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확대 노선도 이윽고 정점을 맞는다. 그것이 포에니전쟁이었다. 공화정 로마는 카르타고와의 결전을 거쳐 마침내 지중해 전역의 패자가 된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여기서 로마는 확대 수준을 낮춰 안정 성장노선으로 전환하였어야 한다. 급격히 팽창한 로마의 영토를 어떻게 통치할까? 그것을 주요 주제로 해서 국가 개혁이 시행되었어야 했다.

그러나 포에니전쟁 후에도 로마의 정치체제는 달라지지 않았다. 성공 체험이 너무나도 화려했기 때문에 진로를 변경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일어난 것이 ‘승자의 혼미’ 라고도 한 만한 사태였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예가 로마 연합이다. 포에니전쟁의 승리로 로마 연합은 사실상 존재 의미가 없어진다. 이미 로마나 이탈리아 반도를 적이 침략해 오지 않게 되어 방위를 위한 동맹을 맺을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그런데도 로마는 전과같이 연합을 유지하려 했다. 그리고 이 모순 때문에 일어난 것이 동맹자 전쟁이었다.

여기에서 카이사르는 로마가 이른바 ‘공격의 시대’ 에서 ‘방비의 시대’로 접어든 것을 냉철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공격의 시대에는 유익했던 것도 방비의 시대에는 유해한 것이 될 수도 있다. 원로원 주도 체제는 그 대표적인 예이고 속주 통치 방식도 마찬가지였다.

기본적으로 카이사르는 장래의 로마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안정이 필요하며, 더 이상의 영토 확장은 필요 없다고 인식하였다.

……이렇게 쓰면 일부 독자는 틀림없이 “카이사르 자신이 행한 8년에 걸친 갈리아 전쟁은 무엇이었나.” “갈리아 정복은 확대 노선의 계승의 아닌가.” 라고 반론할 것이다. 그러나 카이사르에게 갈리아 전쟁이란 로마의 확대 노선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반드시 완수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갈리아 문제는 게르만 문제였다

 

기원전 60년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라는 군의 거두와 함께 ‘삼두정치’를 개시한 카이사르가 가장 먼저 착수한 것이 알프스 북쪽에 퍼져 있는 갈리아 지방을 완전 제압하는 것이었다.

기원전 390년의 켈트 족 습격 충격을 인용할 필요도 없이 로마에게 북방의 갈리아인(그리스 명은 켈트 족)의 존재는 국가 방위상으로 볼 때 위협요소였다. 그 갈리아를 향해 카이사르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아갔지만 그의 진정한 목적은 실은 갈리아 민족이 아니라 그 너머에 사는 게르만 민족이었다. 어떤 문제라도 그 본질을 간파하는 능력이 뛰어난 카이사르는 ‘갈리아 문제’란 결국 ‘게르만 문제’ 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갈리아 인이 자주 남하해서 로마에 침입해 오는 것은 결코 로마에 대한 욕심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 갈리아의 동쪽에 세력을 편 수렵민족 게르만 인들이 라인 강을 넘어 갈리아인이 사는 지역까지 진출해 오기 때문에 도미노 식으로 갈리아인 이 로마에 밀어닥치는 것이다. 즉 갈리아인의 남하란 난민 문제이기도 했다.

따라서 갈리아인의 남하를 멈추려면 게르만 인을 그들의 본거지인 라인 강에서 넘어오지 못하게 만들면 된다. 그렇게 해서 갈리아를 게르만의 위협에서 해방시키면 갈리아인은 원래 정착형이기 때문에 이탈리아 반도에 침입해 오지 않게 된다.

이러한 관찰을 바탕으로 하여 카이사르가 내린 결론이 갈리아 전쟁이었다. 즉 갈리아전쟁이란 침략 욕구나 영토 욕구를 위해서 행해진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와는 반대로 로마의 안전을 확립하기 위한 전쟁이었다.

카이사르는 로마의 세력 범위는 라인 강까지로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더 이상의 확대는 필요 없다고 판단했다. 게르만 인은 원래 수렵민족이고 독자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어 그들을 로마화하려면 굉장한 노력이 필요하다. 아니, 차라리 불가능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라인 강의 방위 체제를 확립해 게르만 인을 봉쇄하는 데 전념하면 그것으로 충분하고, 그렇게 되면 갈리아 땅은 저절로 평온해지고 로마도 반란이나 침입을 무서워할 필요가 없어진다고 판단하였다. 그런 까닭에 카이사르는 우선 갈리아 땅에 군사를 이끌고 원정에 나선 것이다.

카이사르의 이 같은 현실적 판단에서 로마제국의 방위선은 라인강과 도나우 강, 그리고 유프라테스 강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카이사르는 라인 강 방위선 확립을 위해 갈리아 전쟁을 감행했을 뿐만 아니라, 동방의 파르티아에도 원정을 나가 유프라테스 강 방위선을 확립하고 돌아오는 길에 도나우 강 방위선을 구축을 할 예정이었다.

유감스럽게도 이 대 원정은 그가 암살당해 실현되지 못했다. 그러나 카이사르의 방위 구상은 제정 시대에 접어들어서도 계승되었고 로마제국이 안전보장 시스템의 기본 방침이 되었다. 진정 카이사르야말로 로마제국을 위한 ‘그랜드 디자인’의 설계자였다.

 

 

카이사르가 유럽을 만들었다

 

그런데 카이사르에 의한 로마제국의 안전보장 구상은 로마사뿐만 아니라 후대의 유럽의 역사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아니, 그뿐만 아니라 ‘카이사르가 유럽을 만들었다’ 고 단정하는 사람이 많다.

사실 현재 서유럽 도시의 상당수는 카이사르 이후의 로마제국 시대에 만들어진 군단 기지나 식민 도시를 기원으로 하고 있다. 프랑스의 리옹, 스타라스부르, 프레쥐스, 독일의 쾰른, 본, 마인츠. 영국의 요크, 체스터, 바스. 오스트리아의 빈, 헝가리의 부다페스트, 세르비아의 베오그라드… 그 외에도 유럽 곳곳에 수도 없이 많아 거론하기 힘들 정도이다. 단정해서 말하면 유럽은 고대 로마인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영국의 수상 윈스턴 처칠 도 “대영제국의 역사는 기원전 55년 8월 26일에 시작되었다.” 라고 했다. 카이사르와 그 군단이 브리타니아, 즉 현대의 영국에 상륙한 날부터 영국사 가 시작된다는 이야기이다.

갈리아 원정을 구상한 카이사르는 브리타니아를 타도하지 않고서 갈리아의 안정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직접 원정 길에 나선다. 당시 브리타니아는 로마에 대한 저항운동을 지원하는 거점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원정을 시도했지만 브리타니아 를 완전 제패해 속주로 만들지는 못했다. 브리타니아가 로마에 편입되는 것은 1세기 후인 클라우디우스 황제 시대가 되어서이다.

그러므로 처칠 이 “카이사르 상륙의 날부터 대영제국의 역사가 시작된다.” 고 쓴 것은 조금 과장되었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브리타니아는 카이사르에게 실컷 얻어맞았으니까 자랑할 만한 일도 아닐 텐데.

영국은 전통적으로 고대 로마의 연구가 번성한 곳이다. 그런데 그 열의가 카이사르의 브리타니아 원정에서 기인된 것일까?

영국인 연구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영국의 원점은 로마제국에 있으므로 로마 연구가 활발한 것이 당연하다고 하니까 이것도 재미있는 이야기이다. 실은 그들의 이러한 주장은 영국과 함께 고대 로마사 연구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는 독일을 의식한 것이고, 영국인들이 보기에는 ‘독일은 카이사르에게 정복당하지 않은 나라’ 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반응이지만, 카이사르의 존재는 지금도 강렬하게 의식되고 있다.

 

 

왜 카이사르는 ‘관용’ 을 내걸었을까

 

그런데 이처럼 ‘새로운 로마’의 그랜드 디자인을 그리고 그것을 잇달아 구체화시켰던 카이사르였지만, 그의 구상을 올바르게 읽어 내고 이해하는 동시대인은 거의 없었다.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라고 알려졌으며 날카로운 지성의 소유자였던 키케로조차 처음에는 카이사르가 공화정 재건에 힘을 쏟고 있다고 믿었을 정도였다.

그러므로 종신 독재관으로 취임한 카이사르가 계속하여 새로운 정책을 실행하자 카이사르를 로마에서는 ‘왕위에 오르려는 속셈이 있다’ 고 생각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물론 카이사르 자신은 로마를 사물화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에게는 영토가 확대된 당시의 로마에 적합한 통치 시스템은 무엇일까 하는 문제의식뿐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군주정에서 찾았다. 하지만 그러한 그의 생각을 정확하게 파악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바로 카이사르가 생전에 적어 놓은 글과 같이, “누구나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이 보고 싶어하는 것 밖에는 보지 못한다.”

그러나 이처럼 냉철하게 로마 세계의 현실을 바라보았던 카이사르이지만, 그는 반대 세력 사람들을 결코 탄압하려 들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정권에 오르자마자 ‘관용’ 을 신조로 내걸고, 전에는 서로 칼을 겨누었던 폼페이우스 파 사람들의 안전한 귀국을 보증해 주었을 정도였다.

술라는 자신의 개혁을 가로막는 반대자들을 탄압하고 숙청하는 일에 전혀 망설임이 없었다. 아무튼 그는 용의주도하게 ‘처형자 리스트’를 만들었을 정도였다.

그 술라에 의해 젊은 시절 한때 망명할 수밖에 없었던 경험이 있는 만큼 카이사르는 탄압이나 숙청이 후대에까지 응어리로 남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 같은 고통과 어려움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적군도 아군도 없는 일치단결한 로마의 탄생을 바랐던 것이다.

 

 

카이사르의 죽음

 

그렇다 치더라도 카이사르의 ‘관용’ 은 너무나도 철저했다. 그는 종신 독재관으로 취임하자 자신의 호위대를 해산시켜 버리고 무방비 상태나 다름없는 차림으로 로마 시내를 아무렇지 않게 돌아다녔다. “신변의 안전을 걱정하며 사는 것은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기 때문” 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카이사르의 관용은 합리적인 계산의 결과라기보다는 ‘그것이 그의 기질’ 이라고밖에 설명할 수가 없다.

인간은 누구나 ‘어떤 일이 있어도 그것만은 할 수 없다’는 부분을 가지고 있다. 행동의 미학이라고 바꿔 말해도 된다. 그토록 냉철한 지성을 가졌으면서도 자신의 적을 철저히 배제하지 않았던 것은 결국 ‘그것이 카이사르다’ 라고 할 수밖에 없다.

사실 카이사르는 키케로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내가 자유를 준 사람들이 다시 나에게 칼을 들이댄다 해도 그런 일로 번민하고 싶지 않네. 나 스스로 다짐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내 생각에 충실하며 사는 것이네. 그래서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네.”

그는 자신의 안녕을 위해 원로원 의원들을 모아 놓고 맹세를 하게 만들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카이사르를 적대시하는 사람은 원로원에게도 적이다.그 적으로부터 카이사르의 몸을 지켜 줄 것을 맹세한다.”

자신의 몸을 지키는 갑옷은 신의만으로 충분하다고 카이사르는 생각했을 것이다.

원로원에서 행한 이 맹세가 있고 불과 2개월 후인 기원전 44년 3월 15일, 카이사르는 ‘카이사르가 왕위를 노리고 있다’ 고 확신한 마르쿠스 브루투스 이하 14명의 원로원 의원들에게 의하여 암살당한다. 이때 카이사르의 나이 55세였다.

암살자들의 칼에 찔려 원로원 회의장 바닥에 쓰러지면서 마지막으로 카이사르가 한 것은 스스로의 유해를 보기 흉하지 않게 하려고 토가의 옷자락으로 몸을 감싼 일이었다. 고대 로마사의 기록은 그렇게 전하고 있다.

 

 

 

 

8장 ‘팍스로마나’ 의 길

 

사람의 왕래를 끊는 방벽과 사람의 왕래를 촉진하는 가도…

똑같이 고대 제국이라 일컬어진 로마와 중국, 두 나라의 ‘삶의 방식’은 전혀 달랐다.

그리고 로마의 도로망은 ‘팍스로마나(로마의 평화)’로 연결된 데 비해

만리장성은 중국에 ‘팍스(평화)’를 가져다 주지 못했다.

 

 

‘국가’는 누구의 것인가

 

기원전 44년 3월 15일 브루투스와 그 동지들이 카이사르를 암살한 것은 최고 권력자가 된 카이사르에 대한 오해나 질투 때문은 아니었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로마의 장래를 걱정해 카이사르를 죽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공화정체는 로마의 자랑이며 로마 영광의 원천이라고 생각하는 그들에게는 종신 독재관 카이사르가 이미 실행하고 앞으로도 실행하려는 개혁이 로마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카이사르 스스로 왕이 되어 로마를 다른 나라로 만들려고 하는 것 같아 두려웠다. 그래서 브루투스와 동지들은 로마의 공화정을 지키기 위해 카이사르 암살을 결의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본다면 그들의 ‘우국의 정’은 순수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로마를 지킨다’ 는 우국의 정은 결코 암살자인 브루투스와 그 동지들만의 독점물은 아니었다. 로마를 사랑하고 그 장래를 걱정한다는 점은 카이사르도 똑같았다. 다만 로마의 장래를 구상하는 본연이 자세에서 카이사르와 암살자들이 너무 다르다 보니 브루투스는 카이사르가 실행하려고 하였던 대 개혁의 의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카이사르가 종신 독재관이라는 전대미문의 지위에 취임하면서까지 행하려고 한 것은 로마라는 ‘국가’를 지키는 것이었다.

고대 로마 사람들은 국가를 ‘레스푸블리카(respublica)’ 라는 말로 나타내는 것이 보통이었다. 현대 이탈리아어의 ‘레푸블리카(republica)’, 영어의 ‘리퍼블릭(republic)’의 근원이 되는 이 레스푸블리카는 보통 ‘공화국’ 이라고 번역한다. 그러나 원래의 의미를 거슬러 올라가면 공동체라든가 공공이라는 의미가 된다. 즉 고대 로마인에게 국가란 주민 공동체이며 따라서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었다.

국가는 일부 특권계급이나 개인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국가의 목적은 그 안에서 사는 사람들의 행복감을 높이는 데 있다는 것이 로마인의 일관된 사상이었다. 그리고 카이사르 역시 국가는 레스푸블리카라고 생각했다. 다만 이와 같은 ‘레스푸블리카’ 로서 로마를 지키려면 이제는 공화정을 폐지하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이것이 카이사르의 각오이며 우국의 정이었다.

 

 

로마의 사명

 

처음 공화정이 수립된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공익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로마를 왕 한 사람의 독점물이 아니라 바로 공공의 것으로 하기 위해서 공화정은 만들어졌다.

그러나 그 공화정이 지금은 공공의 이익을 해치는 것이 돼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는 아무리 나쁜 사례가 돼 버렸다 해도 그것이 시작된 원래의 계기는 훌륭한 것이었다.” 고 말한 사람은 다름 아닌 카이사르였다.

훌륭한 동기로 출발한 공호정이었지만, 이제는 오히려 해를 끼치는 것으로 변했다. 원로원 의원들은 자신들의 권위와 전통을 지키는 일에는 열심이었지만 로마 평민들의 ‘공익’에는 둔감해져 버렸다. 그리고 속주에 사는 사람들의 문제는 아예 관심 밖의 일로 치부해 버리고, 자신들이 지배하고 있는 대상으로 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카이사르가 생각하는 ‘레스푸블리카(공동체)’는 단지 로마 시민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

카이사르는, 패권국 로마의 사명은 광대한 로마 영토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 모두의 공익을 최대한으로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원로원은 더 이상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로마라는 레스푸블리카를 지키기 위해서는 원로원 주도 체제이기도 한 공화정 폐지가 불가피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아직 ‘속주민도 포함한 로마’ 라는 카이사르의 사상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너무나도 적었다.

브루투스 일동은 처음부터였지만, 로마에서 제일가는 변론가로 알려져 있었고 카이사르도 그 지성을 높게 평가한 키케로마저 카이사르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다. 인간이란 어차피 ‘자신이 보고 싶은 것밖에 보지 않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카이사르의 진심을 완벽하게 이해한 단 한 사람의 남자가 있었다. 그는 바로 옥타비아누스, 나중에 초대 로마 황제가 되는 아우구스투스였다.

 

 

로마 역사상 최대의 ‘명배우’

 

카이사르 사후에 공개된 유언장은 로마 시민들을 적잖이 놀라게 했다. 카이사르는 그 유언장에서 자신의 후계자로서 당시 불과 18세밖에 안 된 여동생의 손자인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를 지명하고, 이 젊은이를 자신의 양자로 삼아 카이사르의 성을 잇도록 지시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 당시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에서는 거의 무명이라고 할 수 있는 존재였다. 사실 옥타비아누스는 내란 때 카이사르를 따라 스페인에 가 본 경험이 고작이었고, 아직은 군인으로서나 정치가로서의 실적은 전무였다. 키케로의 평가에 의하면 ‘소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카이사르의 입장에서는 옥타비아누스 를 결코 무책임하게 지명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이 유언장을 쓸 당시 카이사르는 자신이 암살되리라고 생각지 않았다. 당시의 카이사르는 아직 55세, 적어도 10년 이상은 현역으로 활약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옥타비아누스도 30세가 되어 의젓한 사내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불과 18세인 소년에게서 장래 지도자의 모습을 발견한 카이사르의 분별력은 역시 대단하다고 밖에 할 수 없다. 카이사르만큼 지식이나 군사적인 면으로 뛰어나진 않지만, 옥타비아누스에게는 카이사르에 필적할 만한 정치적 감각과 재능이 있었기 때문이다.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이 설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연기’ 도 불사하는 강한 의지를 가진 남자였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위선’ 에는 상등품과 하등품 두 종류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등품 위선이란 요컨대 ‘겉치레뿐인 선행’ 이다. 본심은 악한 데도 표면상으로만 선으로 위장하는 것이다. 우리가 평상시 위선이라고 하는 것은 여기에 해당한다. 그것과는 달리 상등품 위선이라고 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선을 가장한 목적이 공공의 이익을 실현하기 위한 경우이다.

그리스 사람들은 정치가가 그러한 위선을 행하는 것을 비난하지 않았다. 오히려 당연한 일이라고까지 생각했다.

왜냐하면 모든 정책에는 반드시 빛과 그림자가 있다. 어떤 정책을 행하면 한쪽은 혜택을 받지만 다른 한쪽은 새로운 정책으로 인해 기득권을 잃는 경우도 있다. 그러므로 당연한 일이지만 그 실현을 필사적으로 방해하려고 한다. 카이사르가 살해당했던 것도 분명히 그런 까닭에서였다.

이러한 교훈에서 옥타비아누스가 얻은 것은 카이사르의 유지를 이어받아 그것을 실현해 나가려면 ‘상등품 위선자’ 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즉 개혁의 저항 세력인 원로원을 속여서라도 제정을 실현해 나가겠다는 각오를 굳혔던 것이다.

그리스어에서 ‘위선’ 을 의미하는 ‘후포크리시스(hupocrisis)’라는 말은 원래가 배우의 ‘연기’를 어원으로 하고 있다.즉 위선이란 ‘연기하는 일’과 다름없는 것이다.

이 의미를 상기해 보면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역사상 전무후무한 명배우였다고 할 수 있다. 어쨌든 이 인물은 원로원 의원 전체를 만족시키면서 원로원 체제나 공화정체를 부정하는 제정으로 옮겨 가는 아슬아슬하면서도 대담한 곡예를 해냈으니까.

 

 

‘아우구스투스’의 신중한 계책

 

유언에 의해 후계자로 지명되었다고 해도 옥타비아누스가 순조롭게 카이사르가 가지고 있던 권위와 권력을 승계하지는 못했다. 카이사르의 부관인 안토니우스, 그리고 그 안토니우스의 아내이자 이집트 여왕인 클레오파트라를 상대로 한 전쟁에 종지부를 찍고 사실상 로마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을 때 옥타비아누스는 30세를 지나고 있었다.

옥타비아누스는 내전 종료 2년 뒤가 되는 기원전 27년 1월 13일 원로원 회의장에서 놀라운 선언을 한다.

“내 일신에 집중돼 있는 모든 권력을 여러분의 손에 되돌리겠다. 무기와 법과 로마의 패권 하에 있는 속주의 모든 것을 원로원과 로마 시민의 손에 다시 되돌려 드릴 것을 선언한다.”

사실상 절대 권력자로서 로마 정계를 지배하게 된 옥타비아누스의 ‘공화정의 완전 복귀 선언’에 회의장은 일순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그리고 곧이어 커다란 환호성이 터졌다고 한다.

원로원 의원들의 이런 반응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었다. 카이사르의 후계자이므로 당연히 옥타비아누스도 역시 종신 독재관의 자리를 노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두려워하고 있었는데, 이와는 반대로 원로원에 권력을 되돌린다는 것이다. 모두들 자신의 귀를 의심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들은 놀라는 한편 아이들처럼 기뻐했다.

하지만 ‘위대한 위선자’ 옥타비아누스는 물론 로마를 공화정으로 되돌릴 생각도, 원로원에 권력을 내줄 생각도 전혀 없었다. 만약 그렇게 하면 로마는 곧바로 다시 내란과 혼미의 시대로 돌아가 버린다는 것을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속에 숨기고 있는 제정에 대한 결심이 원로원에 들통이라도 나면 그는 의붓아버지 카이사르와 같은 운명이 된다. 그래서 옥타비아누스는 원로원을 방심하게 만들 철저한 계획을 세운다. 그 최초의 수단이 이 ‘공화정 복귀 선언’ 이었던 것이다.

이 대담한 옥타비아누스의 책략은 즉시 성과를 올렸다. 원로원 의원들은 생각지도 못한 옥타비아누스의 ‘선물’을 받고 미친 듯이 환호하며 그에게 ‘아우구스투스’ 라는 칭호를 주기로 만장일치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투스는 ‘성스러운’ 이라는 뜻이며, 이 칭호 자체에는 정치적인 특권은 아무것도 없는 단순한 존칭이다. 그러나 인간은 언어에 얽매이는 존재이기도 하다. 단순한 통칭이라고 알고 있는데도 ‘성스러운 사람’ 이라고 계속해 부르다 보면 거기에 자연히 존경심이 싹튼다. 더구나 원로원 의원들 앞에서 호소하고 있는 상대가 브루투스나 안토니우스를 넘어뜨린 실력자이면 더욱 성스러워진다. 게다가 그 이름은 원로원 의원 자신들이 주었으므로 누구에게 불평도 못할 노릇이었다.

실은 이 아우구스투스라는 존칭 수여도 옥타비아누스 자신이 생각했다. 그것을 실현하는 데도 주도 면밀한 사전 교섭이 있었다. 이렇게 해서 이 명배우는 공화정을 지키겠다는 연기를 계속해 나가면서 ‘황제 아우구스투스’ 가 되는 길을 걷기 시작했다.

 

 

황제로 가는 ‘카드’

 

그 후 아우구스투스는 역사가 타키투스가 평한 것처럼, ‘눈치 채지 못하게 하나씩 긴 시간을 들여 모든 권력을 손에 넣어 갔다.”

그렇다고 해도 그는 숨어서 권력을 탈취한 것이 아니다. 그가 행한 것은 모두 당시의 로마에서 완벽하게 합법이었다. 그런데 그 합법적인 일을 점차 쌓아 가다 보니, 공화정 로마라면 비합법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제정이 거기에 출현한다. 이처럼 일종의 마법으로 그는 황제가 되었다. 카드게임에서 하나하나는 시시한 카드이지만 다섯 장이 모두 갖추어지면 ‘최강의 패’가 만들어지는 것과 비슷하다.

그래서 그가 조금씩 손에 넣어 간 것을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다.

 

 

아우구스투스와 카이사르의 이름

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은 원로원에서 부여해 준 것이고 카이사르라는 이름은 그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양자가 되었기 때문에 얻어진 것이다. 어느 쪽이나 물론 완전하게 합법이다.

 

‘일인자’의 칭호

일찍이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에게 부여된 적도 있는 이 칭호는 문자 그대로 ‘로마 시민 중의 일인자’ 라는 의미 이상의 것이 아니었다.

말하자면 원로원 의원 일동의 대표라는 위치를 매긴 것이고, 그 자체에는 아무 권력도 없는 일종의 명예직과 같은 것이다.

 

임페라토르

나중에 영어 ‘황제’ 의 어원이 되는 임페라토르이다. 이것도 본래는 단순한 칭호에 지나지 않았다. 로마의 군단에서는 예부터 승리를 한 장군에게 부하 병사들이 ‘임페라토르’ 라고 불러서 칭송하는 것이 관습이었다.

 

 

위에서 설명한 세 가지 칭호는 실제 정치에서 어떤 권력도 보증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원로원은 임페라토르도, 일인자의 칭호도 기꺼이 그에게 부여했다.

이것을 만약 실적이 전무한 인물에게 부여했다면 이러한 칭호들은 우스꽝스러움을 느끼게 하는 효과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에게는 내전을 수습했다는, 누구나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실적이 있었다.

그 실적과 칭호가 합해지나 거기에는 간단히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권위가 생겼다. 원로원의 회의장이든 일상의 발언이든 그이 입에서 나오는 말에 사람들은 중량감을 느꼈다. 아우구스투스는 그러한 인간의 심리를 잘 알고 있었다.

 

 

전군 최고 사령관

 

아우구스투스는 이렇게 권위를 손에 넣고 한편으로 정치,군사상의 실권도 ‘합법적으로’ 획득해 간다.

 

전군 최고 사령관

아우구스투스의 공화정 복구 선언에 감격한 원로원 의원들은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주면서 평화가 확립할 때까지 속주의 방위도 담당해 달라고 의뢰한다.

원래 속주의 방위는 원로원 담당이었지만, 속주를 통치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어쨌든 쾌적한 로마의 생활을 버리고 갈리아나 스페인 등과 같은, 당시에는 아직 생활수준이 낮은 지방에서 생활해야 한다. 그런 속셈도 있어서 원로원은 그에게 속주 통치를 일임한 것이다.

이 뻔뻔스러운 원로원의 청에 대해 아우구스투스는 어떻게 응했을까?

그는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나아가 원로원 의원들이 기뻐할 형태로 역으로 제안한다. 이때의 술수는 가히 명배우의 연기라고 할 수밖에 없다.

아우구스투스는 속주를 통치의 난이도에 따라 두 종류로 나누었다. 즉 로마화가 진행되고 있어 통치가 편한 지방은 ‘원로원 속주’ 로 정해 그곳의 통치는 원로원에 맡기겠다고 말한다. 이러한 지방이라면 경제적으로도 발전되어 있으니 부임해도 생활이 쾌적하고 여러 가지 보답도 많다. 그런데 항상 적과 마주 보는 변경의 고생스럽고 보답 같은 것을 기대할 수 없는 곳의 통치 책임은 아우구스투스 자신이 맡겠다고 말한다.

‘성가신 일은 모두 나에게’ 라는 그이 제안에 원로원 의원들은 크게 환대하며 공화정에 헌신하는 그이 모습을 칭송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거기에는 아우구스투스만이 가능한 주도 면밀한 계산이 들어 있었다.

나중에 이 지역들은 ‘황제 속주’라고 불리게 된다. 이때 그는 변방을 통치하려면 꼭 군사력이 필요하고, 자신에게 로마군단의 지휘권이 없으면 아무래도 불편하니 그것을 인정해 주었으면 한다고 원로원에 신청한다.

아우구스투스의 ‘위선’에 완전히 속아 넘어간 원로원은 그에게 ‘전군 최고 사령관’ 의 지위를 부여한다. 이렇게 하여 모든 로마군단은 그가 일원적으로 관리하게 되고, 게다가 각 군단 사령관의 인사권도 그이 수중에 들어간다.

이리하여 일찍이 카이사르가 종신 독재관이라는 비상시의 지위에 오름으로써 획득한 권력을 아우구스투스는 완전히 합법적으로, 게다가 원로원의 보증까지 얻는 데도 성공한다.

 

 

아우구스투스의 ‘작은 소원’

 

아우구스투스는 이렇게 해서 군사권을 수중에 넣었지만, 로마를 개혁해 나가려면 절대로 빠뜨릴 수 없는 정치상의 권력도 교묘하게 획득해 간다.

 

호민관 특권

공화정 복귀 선언 이래 아우구스투스는 그의 오른팔인 아그리파와 함께 매년 집정관에 취임해 왔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원래의 공화정에서는 집정관의 임기는 1년으로 정해져 있었다. 말할 것도 없이 독재자의 출현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러나 잇따른 내란에 의해 이 규정은 사실상 유명무실하게 되었으며, 마리우스 이래로 당시의 권력자가 집정관에 연속 취임하는 것이 당연시 되고 있었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가 연속해 집정관이 되는 것은 결코 위법이 아니었다. 또한 카이사르 암살 후 혼란한 로마의 정치를 재정비하기 위해서도 아우구스투스가 집정관에 연속 오르는 일이 불가피하다고 여겨졌다.

그런데 기원전 23년, 40세가 된 아우구스투스는 또다시 사람들이 예상하지 못한 선언을 한다. 그것은 아그리파와 함께 집정관을 사임하고 그 이후는 시민회에 의한 집정관 선출이라는 공화정 본래의 형태로 되돌린다는 것이었다.

이 선언을 듣고 원로원 의원들은 다시 환호했다. 원로원 주도의 공화정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아우구스투스는 ‘공화정의 수호자’ 로까지 보였다. 기쁨에 찬 원로원 의원들은 기꺼이 아우구스투스의 ‘작은 소원’을 들어주기로 한다. 그것은 ‘호민관 특권’을 1년 한정으로 수여한다는 것이었다.

 

 

‘황제’ 의 탄생

 

이미 이 책에서 몇 번이나 소개한 것처럼 호민관이란 귀족 계급에 맞서 평민 계급의 정치적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 생겨난 것이다.

평민회가 선출한 호민관은 ‘거부권’ 이 주어지므로 원로원이나 집정관의 결정마저도 백지로 돌릴 수 있었다. 게다가 호민관이 평민회에 제안해서 가결된 법안은 비록 원로원이 반대해도 법제화 할 수 있은, 정책 입안에서도 우선권이 주어져 있었다.

이 호민관의 특권을 이용해 로마의 정치 개혁을 단행하려고 한 것은 그라쿠스 형제였다. 그런데 아우구스투스가 바란 것은 호민관에 오르는 것이 아니고 호민관과 같은 특권을 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아우구스투스는 기사 계급 출신이지만 귀족인 카이사르의 양자가 되었으므로 평민만이 되는 호민관에 취임할 수가 없었다. 그런 까닭에 특권만으로도 괜찮다는 것이 그이 제의였다.

원로원 의원들은 아우구스투스의 진심을 깊이 생각할 필요도 없이 무조건 그이 제의를 가결했다. 그들은 공화정 복귀가 이제 본격화된 것이라고 감격했다. 또한 자신들도 집정관이 될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쁨에 차 있는 의원들에게 1년 기한의 호민관 특권 따위는 대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거기에서 의결된 내용에는 드러나지 않게 중요한 부대 조항이 들어 있었다. 그것은 “이의가 없는 한, 아우구스투스의 호민관 특권은 자동적으로 갱신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미 사실상 로마의 최고 권력자가 되어 있는 아우구스투스에게 누가 이의를 제의할 수 있을까? 사실 그 후 아우구스투스는 죽일 때까지 호민관 특권의 보유자가 된다.

아우구스투스는 원로원이나 집정관의 결정을 언제라도 백지로 돌릴 수 있는 ‘거부권’을 가졌다. 이것에 의해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정치에서 사실상의 지배자가 된다.

표면상으로는 집정관과 호민관은 대등한 입장에 있었으니까 아우구스투스가 호민관 특권을 얻었다고 하여 로마의 정치를 독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원로원 의원은 그에게 특권을 준 것이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는 호민관 특권의 보유자인 동시에 원로원의 ‘일인자’ 이며 ‘아우구스투스’ 라는 존칭을 원로원으로부터 수여 받았다. 거기에다 로마의 군사권을 장악하고 있다. 그런 그가 말없는 압력을 가하면 이제는 집정관이나 원로원이라고 해도 그에게 반항하기 어렵다. 이것이 정치라는 것이다. 원로원 의원들은 정치가 어떤 것인지를 몰랐던 것이다.

호민관 특권을 얻게 되면서 마침내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권력기반을 확고하게 만든 셈이다. 즉 초대 ‘황제’가 탄생한 것이다.

실제로 그 후의 황제들도 모두 아우구스투스와 똑같이 일컬어진다. 즉 ‘Imperator Caesar Augustus Tribunicia Potestas’가 그것이다. 굳이 번역해 보면 ‘임페라토르이자 호민관 특권의 보유자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역대 황제들은 이 칭호 뒤에 자신의 이름을 붙여 공식명칭으로 삼았다. 아우구스투스야말로 로마 황제 제도의 창조자였다.

 

 

카이사르 암살의 교훈

 

그런데 도대체 왜 아우구스투스는 이런 복잡한 순서를 밟아 제위를 확립했을까? 그 최대의 이유는 역시 카이사르의 암살에 있었다.

다섯 장의 카드를 조합해 절대 권력자의 지위를 획득한 아우구스투스와는 달리, 카이사르는 종신 독재관이라는 한 장의 카드만으로 로마의 권력자가 되었다. 제도로서 보면 카이사르의 방식 쪽이 훨씬 명쾌하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명쾌했기 때문에 카이사르의 행동은 원로원의 반발을 불러일으켜서 결국은 암살당하는 사태로 발전하였다.

아우구스투스는 그것을 최대의 교훈으로 삼아 어떻게 하면 원로원이나 로마 시민의 반발을 사지 않고 절대 권력을 잡을 것인가를 생각하고 지예를 짜낸 것이다. 살해당하면 아무리 숭고한 목적이라도 중단돼 버린다. 그와 같은 사태만은 절대로 피해야 한다는 것이 아우구스투스의 결심이었다.

호위도 받지 않고 비무장인 채 로마 시재를 걸어 다닌 카이사르와는 대조적으로, 아우구스투스는 원로원 회의장에 들어갈 때조차도 반드시 자신을 따르는 힘센 원로원 의원의 경호를 받았다. 생각해 보면 카이사르는 무기를 지니지 못하는 것이 규칙인 원로원 내에서 살해당하지 않았던가? 아우구스투스의 주의는 결코 소심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정치적 사명을 알고 했던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제정만이 로마를 구한다’ 는 확신에 있어서는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는 똑같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아우구스투스가 쓴 방법이 완벽했던 것만은 아니다. 무릇 살아 있는 인간의 행실에는 결함이 있게 마련이다. 아우구스투스가 만들어 낸 황제란 일종의 픽션, 좀 더 분명히 말하면 거짓말 위에 성립된 것이었다.

아우구스투스 자신이 그랬듯이, 어디까지나 로마의 공화정을 지킨다고 계속해 외쳐야만 황제의 권위나 권력도 확립돼 간다. 만약 황제가 공화정을 정면에서 부정하면 그것은 바로 그가 가지고 있는 호민관 특권도 부정하는 것이 되고 도한 ‘제1인자’ 라는 칭호도 부정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황제가 된 사람은 공화정 지지자인 체해야 한다는 모순이 거기에 나타난다.

 

 

황제라는 존재

 

조금 의외로 생각될지 모르지만 중세 이후의 유럽 황제와는 달리, 로마제국에는 황제의 대관식이 없었다. 아니, 원래 황제의 권위를 상징하는 관 자체가 로마 제정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즉 로마의 황제란 문자 그대로 ‘무관의 제왕’인 것이다.

대관식이 없었다면 언제 황제가 취임하는가? 바로 로마의 원로원과 시민의 승인을 얻는 그 순간이다. 즉 원로원이 새로운 황제에게 일인자, 호민관 특권, 전군 최고 사령관의 권한을 주는 것을 의결하는 동시에 시민들이 새 황제의 통치를 승인한다는 것을 표명하면 비로소 그는 황제가 된다.

로마의 황제란 중국의 황제처럼 천명을 받들어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승인을 얻어야만 비로소 존재 이유를 획득할 수 있는 지위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 로마의 황제 역할이 얼마나 중대한 ‘일’ 인지 알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황제가 되려면 시민이나 원로원의 평판을 항상 신경 써야 했다. 그렇다고 시민이나 원로원에 아첨만 해서는 황제로서의 직무를 성실하게 수행할 수 없었다. 그리고 원로원이나 시민을 내세우는 척하면서도 스스로가 ‘이루어야 할 일’ 이라고 믿는 것을 과감하게 실행해야만 비로소 로마의 황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곡예는 ‘위대한 위선자’ 아우구스투스와 같은 인물에게는 가능했지만,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예컨대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가 된 티베리우스 황제(재위 14~37)는 황제로서는 실로 유능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원로원이 너무나도 완고하고 고루하고 능력도 없는 것에 정나미가 떨어져 결국 나폴리 근처에 있는 카프리 섬에 은둔해 그곳에서 로마를 통치하기로 결정한다. 그 결과 로마 시민과 원로원으로부터 엄청난 악평을 들어야 했다.

그 티베리우스의 뒤를 이은 칼리굴라 황제(재위 37~41)는 전임자가 저지른 실수의 전철을 밟는 것이 싫어 원로원이나 시민의 인기를 얻으려는 행동이나 정책으로만 치우쳐 버렸다. 칼리굴라의 치세는 처음에는 평판이 좋았지만, 그 결과 국고를 거덜 내어 심각한 재정 위기를 초래함으로써 결국 암살당하고 만다.

또한 그 칼리굴라 황제의 2대 후인 네로 황제(재위 54~68)는 황제라는 지위가 ‘섬세한 픽션’ 위에 성립된다는 것을 잊고 자신이 가진 권력에 취해 버린다. 그도 역시 시민들의 신임을 잃어 자살한다.

이렇게 보면 로마의 황제를 계속 이어 나간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곡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한마디로 황제라고 해도 중국의 황제와 로마의 황제는 완전히 실상이 다르다. 그러나 그만큼 황제의 지위가 불안정했기 때문에 로마제국은 오래갔다고도 할 수 있으므로 역사를 평가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만약 로마 황제가 절대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면 ‘권력은 부패한다. 절대 권력은 반드시 부패한다.’ 는 말대로 로마제국도 일찍이 부패해 멸망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지 않았던 것은 역시 ‘섬세한 픽션’을 만들어 낸 아우구스투스의 공적이라 해야 할 것이다.

 

 

‘안의 평화’와 ‘밖의 평화’

 

아우구스투스는 양아버지 카이사르와는 전혀 다른 수단을 써서 제정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수단은 달라도 목적은 카이사르와 똑같았다. 즉 로마를 확대노선에서 안정노선으로 전환시키는 것이었다. 아우구스투스가 온갖 지혜를 짜내어 제정의 확립에 노력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면 로마를 안정 노선으로 이끌어 갈 수 있을까? 아우구스투스는 ‘평화’를 확립시키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말하는 평화란 단지 외적으로부터 방위를 잘하는 것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비록 외적을 막는 데는 성공해도 국내에서 치안이 유지되지 않아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이 안심하고 생활할 수 없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 즉 ‘평화’는 ‘밖의 평화’와 ‘안의 평화’ 양쪽이 모두 이루어져야 한다.

아우구스투스는 ‘팍스로마나(로마에 의한 평화)’라는 국가 전략의 구축에 나섰지만, 그도 역시 ‘밖의 평화’ 와 ‘안의 평화’ 의 양립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내외 모두의 평화’란 이상적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실현시키는 일은 간단하지 않다. 왜냐하면 외적으로부터 국가를 지키는 일은 군사력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침입자들로부터 완벽하게 국경을 지키려면 더욱 많은 군비가 필요하게 된다. 평화를 지키는 데 는 비용이 드는 것이다. 하지만 그 군사비용을 도대체 어디에서 염출할 것인가?

옛날처럼 로마가 확대일로에 있을 때라면 그 대답은 ‘원정’에 의해서’ 라고 할 것이다. 적을 물리치면 강화조약의 배상금도 들어오고 또한 새로 획득한 영토의 세금 증가를 바라볼 수도 있다. 그러나 로마는 이미 ‘방비의 시대’에 접어든 탓에 그것을 바랄 수도 없었다.

그렇다면 남아 있는 길은 증세밖에 없었지만 이것은 ‘안의 평화’에서 마이너스 정책이었다. 안이하게 세금을 늘리면 주민의 불만을 초래하고, 나중에는 반란까지 일어날 수 있다. 이것은 동서고금 변함없는 진실이다.

그리고 로마의 주된 재원이 되는 직접세는 속주민에게만 과세하고, 로마 시민에게는 부과하지 않았다. 수입의 10퍼센트로 정해져 있는 속주의 세율을 올리면 속주민들이라고 잠자코 있을 리 만무하다. 그렇다고 해서 로마 시민에게 속주민과 같은 세금을 부과할 수도 없다. 어쨌든 로마 황제는 로마 시민이 승인해야만 제위를 유지할 수 있다. 시민이 불만을 품게 되면 제정 그 자체가 성립되지 못할 위험성마저 있다.

평화란 그것을 마음에 두고 기원한다고 실현될 만큼 간단하나 것이 아니다. 물론 군사력만 있으면 손에 들어오는 것도 아니다. 서로 모순되는 많은 과제를 정면으로 맞붙어서 해결하려는 강한 의지와 실행력이 있어야만 비로소 평화는 현실이 된다.

그 점에서 아우구스투스라는 남자는 이 ‘지속적인 의지’ 의 완고함 에서는 비교할 자가 없는 인물이었다.

로마서 연구의 세계적인 권위자 가운데 한 사람인 프랭크 애드콕 교수는 아우구스투스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나 카이사르처럼 압도적인 지성을 지닌 인물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시기의 세계는 바로 그와 같은 인물을 필요로 했다.”

긴 내란으로 인해 지칠 대로 지친 로마 세계는 평화를 갈망하고 있었다. 그러한 기대의 부응에 아우구스투스는 성공한 것이다.

 

 

세금 체제의 확립

 

아우구스투스가 ‘팍스로마나’의 기반을 쌓아 올릴 때 가장 심혈을 기울인 문제 가운데 하나가 세제였다.

세금 수입이 받쳐 주지 않는 국가에서 방위는 있을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금을 내고 좋아하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타국에서 보면 로마의 세율이 낮다고 해도 과세 당하는 당사자에게는 세금은 세금이고, 과중하다고 느껴진다.

이런 감각은 현대의 우리도 고대 로마 사람들과 전혀 다르지 않다. 따라서 아무리 이론을 들이대고 설득해도 과세 당하는 입장에서는 그 필요성을 완전히 납득하지 못한다. 아우구스투스는 이런 인간성의 실체를 냉철하게 내다보고 로마제국의 세금 체계를 가능하면 단순하게 만들 생각을 한다.

복잡한 세금 체계는 징세 조직의 확대로 이어질 뿐이다. 더구나 재정 위기라고 해서 세제를 자의적으로 변경하는 것도 옳지 못한 일이다. 세제는 한번 정하면 그것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최상의 방책이다.

이와 같은 아우구스투스의 의도는 ‘대부분’ 그 후의 로마제국에서 그대로 지켜진다. 즉, 아우구스투스 이후에는 시대 상황에 맞추어 세제 개정이 이루어졌다.

어떤 일에도 현실주의자인 로마 사람들은 비록 아무리 ‘훌륭한 황제 아우구스투스’이 유훈이라도 무조건 금과옥조처럼 여기지는 않았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우구스투스의 의도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며, 형태만 지키면 된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이 또한 로마제국이 500년에 걸쳐 지속된 이유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상속세의 ‘발명’

 

아우구스투스가 정한 기본 노선으로 300년에 걸쳐 계속된 로마제국의 세제는 다음의 표와 같다.

 

  로마시민 비로마 시민(속주민)
직접세

직접세 수입세로서 직접세는 없다

노예 해방세 5%

상속세 5%

토지세 내지 속주세는

수입의 10%(병역 의무를 지는 속주민은 면세)

간접세 관세 1.5~5% (오리엔트 신 사치품에 대해서는 25%)
매상세 (소비세) 1%
 

 

 

이미 여러 차례 언급한 것처럼 고대 그리스나 로마에서는 세금이라고 하면 그것은 간접세를 의미했다.

직접세가 없었던 이유는 물건이나 돈으로 세금을 납부하는 것이 아니라 병사나 장교로 국가 방위에 참가함으로써 ‘시민의 의무’를 완수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실 고대 로마에서는 병역을 ‘혈세’ 라고도 했다. 이것을 바꾸어 발하면 로마에서 직접세라는 것은 국가 방위에 몸을 던지는 것과 관련된 부담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속주민 에 대해서는 직접세를 과세했던 것도 이 사상에 근거한 것이다. 즉 로마 시민의 군단이 나라를 지켜 주는 까닭에 국가 방위의 의무를 지지 않는 속주민이 그 방위비를 세금으로 부담하는 것이 논리에 맞다.

자산, 즉 토지를 가지니 속주민에게 부과하는 ‘토지세’는 라틴어로 ‘스티펜디움’ 이라고 한다. 이 말을 직역하면 ‘급료’이다. 속주를 방위하는 군단 병사들의 급료를 지불하기 위해 받는 세라는 취지가 담겨 있다. 그러나 속주민에게 그렇게 하면서 로마 시민에게 직접세 부담이 전혀 없는 것도 역시 불평등하다. 옛날처럼 ‘시민 개병’ 이라면 직접세 면제가 설명되지만, 지원제로 바뀌고 100년이 지났다. 일생을 병역에 나가지 않고 끝나는 시민 쪽이 압도적으로 많아진 지금에 와서도 세금이 전혀 없다는 것은 옳지 않다.

그렇다고 정복자인 로마 시민의 입장에서는 정복당한 속주민과 같은 세금을 내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우구스투스가 도입한 것이 ‘상속세’ 였다.

현대의 우리에게는 친숙하지만 고대에는 유례가 없는 상속세를 아우구스투스가 ‘발명’ 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는 전혀 시행된 적이 없는 세금이라 그것을 처음 듣게 된 시민들은 판단할 자료가 없다는 점, 두 번째는 정해진 세금이라고 해도 매년 정해 놓고 내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압박감이 없다는 점, 세 번째는 유산을 받는 행복한 시기에 내는 것이라 저항이 비교적 적다는 점이다.

또한 아우구스투스는 상속세로 거둔 수입을 로마군단에서 제대하는 병사의 퇴직금으로 충당한다고 공표했다. 말하자면 오늘날의 상속세를 목적세화한 것이다.

같은 로마 시민인 병사에게 지불한다면 표면상으로 반대할 수 없을 것이라는 계산이 있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게다가 상속세의 세율은 5퍼센트로서 속주세 세율의 반이기 때문에 로마 시민의 체면도 선다.

앞의 표에 있는 ‘노예 해방세’ 란 로마 시민이 내는 것이 아니라 자유를 되찾은 해방 노예가 자신이 가진 가치의 5퍼센트를 내는 것이다. ‘가까스로 자유를 되찾은 사람에게 세금을 부과’ 하는 것 같지만 여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 이유는 노예 해방을 방치해 두면 생활 능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 늘어나 치안이 악화되고 사회문제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세를 낼 만큼의 재산조차 갖지 않은 노예의 해방을 막기 위해서도 이 세금이 필요했다.

 

 

로마의 소비세

 

이러한 직접세에 덧붙여 제국의 모든 주민에게 부과되었던 것이 간접세였다. 하지만 그 간접세의 금액은 현대의 우리가 보면 매우 낮다.

첫 번째는 관세이다. 이것은 바다나 강의 항구를 통해 들어오는 지역 산물에 부과하게 돼 있었다. 그런데 이 세율은 제국 전역에 동일 비율로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1.5~5퍼센트로 폭이 있었다. 각 지방의 경제력을 배려한 결과였다.

예컨대 아직도 로마화도 진행되지 않고 경제적인 발전도도 낮은 갈리아에서는 관세가 1.5퍼센트였지만, 본국 가운데도 경제력이 높은 이탈리아 반도에서는 5퍼센트라는 식이다.

또한 그 밖에 동방에서 들어오는 비단이나 보석, 향신료 등의 사치품에 부과되는 관세는 25퍼센트, 다만 이것은 홍해와 나일 강 중 양 유역의 세관을 통과한 물건에만 부과했으며, 다른 세관을 지나는 경우에는 과세하지 않은 것 같다.

제국 내에서 유통되는 상품에 세금을 부과한다는 것은 “제국을 운명 공동체로 만들겠다.” 고 말한 카이사르의 유지에 반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할지도 모른다. 로마 전역을 오늘의 EU처럼 하나의 경제권으로 묶는다면 관세는 오히려 방해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로마 세계를 생각하면 이 정도의 관세는 거의 문제가 되지 않았다.

먼저 속주민 입장에서 보면 로마가 지배하기 이전에는 더 고율의 통행료를 부과했던 것이다. 각각의 지방에 부족이 할거하던 시대에는 각각의 부족이 마음대로 관문 같은 것을 만들어, 그곳을 지나는 상인들에게 관세라고 칭한 통행료를 받고 있었다. 거기에 비하면 로마제국이 부과하는 관세는 세율도 명확하고 게다가 세관의 수 자체가 적었다. 연구자들의 조사에 의하면 당시의 세관은 제국 전역에서 10개소 정도밖에 없었다고 한다.

또 한 가지, 로마의 지배 아래 들어가면서 도로와 항구 등의 사회기반시설이 현격히 좋아졌음을 들 수 있다.

로마제국이 속주 내에서 로마의 가도 정비 사업에 힘을 쏟았던 목적은 로마군단의 민첩한 이동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로마 가도는 지세에 맞춰 가능하면 평탄하고 직선 코스가 되도록 설계돼 있었다. 또한 간선도로 모두가 돌로 포장되어 있었다. 또한 강에는 석조다리가 놓여 나룻배를 사용할 필요가 없었다.

이런 로마 가도는 간선도로만 하더라도 전체 길이가 8만 킬로미터에 이르렀고, 지선도로와 사도까지 포함하면 총 연장 30만 킬로미터가 되었다고 한다.

로마의 속주가 된다는 것은 이 로마 가도의 도로망을 무료로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전에는 며칠이나 걸려 옮기던 것을 가도를 이용하면 불과 하루 만에 옮길 수 있게 되었다. 눈이나 비가 내려도 통행이 가능했다. 또한 그때까지는 왕래조차 없던 먼 곳의 지방과도 교역이 이루어졌으므로 편리함을 생각하면 몇 퍼센트 관세는 싼 것이었다.

로마제국에서 시행된 또 하나의 간접세는 판매세 였다. 현대에는 소비세라 하는 세금이다. 그렇지만 로마의 경우는 ‘백분의 일세’ 라는 명칭대로 세율이 겨우 1퍼센트의 저율이었다. 참고로 현재의 유럽에서는 2퍼센트가 보통이다.

아우구스투스는 이 판매세를 상속세와 동일하게 목적세로 만들어 방위비에 충당하기로 한다. 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시민이 지불하는 이 세금을 방위비로 돌림으로써, 속주민만 방위비를 부담하는 현상을 바꾸려 하였다고 볼 수 있다.

 

 

‘빵과 서커스’의 거짓말

 

이상이 아우구스투스가 정한 로마제국이 세제였다. 나중에 약간의 개정은 이루어졌지만, 로마제국의 세금 수입은 여기서 소개한 다섯 종류의 세금으로 대부분 조달했다.

매년 봄 확정 신고 시기에 세금 대책으로 골치를 썩고 있는 사람이라면 타임머신을 타고 고대 로마로 이주하고 싶지 않을까? 그런데 로마가 부럽다는 생각과 함께 ‘단 다섯 종류의 세금만으로 어떻게 로마제국이 운영될 수 있었을까?’ 라는 의문도 틀림없이 들 것이다.

나중에 언급하겠지만, 아우구스투스는 대폭적인 군비 축소를 꾀해 군사비를 경감시켰다. 그래도 광대한 로마제국을 지키려면 거액의 경비가 필요하다. 또 그 외에도 로마 가도의 건설과 유지에도 비용이 들게 마련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처럼 세액이 낮은 것이 마법 같기도 하다.

로마제국이 이런 단순한 세제로 유지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가장 큰 이유는 현대처럼 사회복지를 실시하지 않아도 됐다는 것이다. 복지국가를 지향하는 오늘날의 선진 국가들은 모두 증대하는 사회복지비 와 싸우고 있지만, 로마에는 그러한 고민이 없었다. 하지만 로마인이 전혀 사회복지에 관심을 갖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라쿠스 형제 시대부터 실업자의 증가가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었다. 마리우스가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군제 개혁을 행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로마에서 빈민 구제는 중요한 정치 과제였다. 이것은 제정 시대가 되었어도 마찬가지였다. 아무튼 황제란 시민의 지지가 없으면 권력을 가질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빈민이라도 유권자인 이상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러나 현대 국가의 사회복지 정책과 로마의 그것은 근본적으로 달랐다. 로마는 어디까지나 당사자가 스스로 노력하는 것이 중심이고, 공적인 보조는 생활의 최저한도를 지원해 줄 뿐이었다는 점이다. 예컨대 수도 로마에서는 빈민에게 매월 약 32.5 킬로그램의 밀을 무료로 배포했다. 이것만 들으면 마치 ‘뿌리기 복지’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런데 내가 실제로 같은 양의 밀로 빵을 구워 보았는데 그 정도 배급량 으로는 도저히 한 가족이 생활을 조달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현대의 극진한 복지와는 달리 로마의 사회복지로는 일하지 않고 생활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역시 스스로 일해서 그 결과에 따라 보수를 받는 것이 어디까지나 기본이 되어 있었다.

현대에도 로마제국이라고 하면 ‘빵과 서커스’ 정책에 의해 시민은 무료로 식량 배급을 받아 일하지 않고 황제가 개최하는 구경거리에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는 이미지가 남아 있는 것 같지만 그것은 완전한 오해이다.

현대의 일중독 만큼은 아니더라도 고대 로마 시민들 또한 생활을 위해서 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황제가 로마 시민 모두를 놀고 먹는 한량으로 만들 만큼 국가 예산을 사용했다면, 로마의 국고는 금세 거덜 나고 말았을 것이다.

 

 

로마에는 왜 공립학교나 공립병원이 없었을까

 

현대의 사회복지 정책에서 빈곤 대책과 함께 중심축으로 여기는 것은 교육과 의료 분야이다. 그 중에서도 의료는 복지 관련 예산 가운데 높은 비율을 차지해 재정 적자의 원인 중 하나가 되어 있다.

로마제국은 여러모로 돈이 드는 이 두 분야에 관해서는 완전한 ‘민간 활동’ 으로 해서 예산 압박의 원인을 없앴다.

로마 사람들은 수도 로마든 속주의 식민 도시든 도시란 이름이 붙은 것을 건설할 경우에는 가능하면 기능적으로 쾌적한 도시를 만들고자 하였다. 제국 내 어느 도시나 도심부 에는 신전과 집회 시설이 있고, 그 바깥쪽에는 극장이나 투기장, 스타디움, 공중목욕탕 등이 건설되어 있어, 어느 도시에 가도 수도 로마와 다르지 않은 생활을 보낼 수 있게 되어 있었다.

현대의 우리가 봐도 로마의 도시건설에 들인 노력은 감탄할 만하지만, 이만큼 충실한 도시에 빠진 것이 두 가지 있다. 그것은 공립병원과 학교였다.

로마 방위의 최전선에 있는 군단 기지에는 설비가 잘 갖추어진 병원이 있었다. 그러나 수도 로마에는 공적인 병원은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학교에 관해서는 기초교육이든 고등교육이든 공립학교가 없었다. 이것은 수도에 한정되지 않고, 다른 수많은 제국 내의 도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해서 고대 로마 사람들이 교육이나 의료를 소홀히 한 것이 아니다. 자식의 교육에 힘쓰지 않는 나라는 멸망하고, 도 의료 수준이 낮으면 인구가 밀집된 도시는 금방 전염병의 소굴이 돼 버린다.

의료와 교육은 문명도가 높은 도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을 모두 공적 비용으로 조달하게 되면 증세를 피할 수 없다. 이 어려운 문제에 대해서도 로마 특유의 해결책을 밝힌 것은 다름 아니 카이사르였다.

카이사르는 그가 재임하는 동안 어떤 민족, 어떤 인종이든 교양학과* 를 가르치는 교사와 의료에 종사하는 의사에게는 무조건 시민권을 주었다. 속주민에게 시민권은 직접세가 면제되고, 또한 로마법에 따라 그 권리가 보증된다는 것이기도 하다. 의료나 교육에 종사하면 그 권리를 획득하는 것이기 때문에 의료와 교육이 매력 있는 직업이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카이사르는 로마에 많은 의사와 교사를 불러들임으로써 교육과 의료에 충실을 꾀하려고 하였다. 의사나 교사가 증가하면 거기에는 자유경쟁이 저절로 생겨난다. 그러면 의료나 교육의 수준은 향상되고 또 비용도 낮아진다. 공교육이나 공적 의료를 유지하기 위해 계속되는 증세를 시행해 시민의 미움을 사는 것보다는 민간에게 맡기는 것이 낫다고 카이사르는 판단했을 것이다.

공교육이나 공공 의료의 폐지라고 하면 대부분의 사회에서는 곧 바로 ‘질의 저하가 걱정’ 이라는 소리가 높아지지만, 로마제국에서는 300년 이상에 걸쳐서 카이사르의 개혁을 계속 답습하였다. 물론 고대 로마와 현대 국가를 그대로 비교할 수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사회복지 본연의 모습을 생각하면 로마제국이 방식이 많은 참고가 될 것이다.

 

 

로마군단의 감축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세제를 정리하고 재구성함으로써 이후의 로마제국의 재정 기반을 확립했지만, 한정된 재원을 바탕으로 어떻게 ‘팍스로마나’ 를 실현했을까?

카이사르의 죽음에서 비롯된 옥타비아누스 대 안토니우스의 내전이 종결된 시점에서 로마에는 50만 명에 이르는 방대한 병력이 있었다.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양쪽에 각각 군단을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많은 수의 군단을 이루게 된 것이다. 초대 황제가 된 아우구스투스는 최종적으로 이 병력을 무려 3분의 1이하인 25개 군단 15만 명까지 삭감한다.

그 이유는 말할 필요도 없이 건전한 재정을 꾀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아무리 아우구스투스가 최고 권력자라고 해도 군사력 삭감은 쉬운 작업이 아니다.

마리우스의 개혁 이래 로마군단 병사는 지원병, 즉 직업군인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군단 해산 후의 퇴직금이나 재 취직 수당을 지불해야 한다. 만약 그것을 소홀히 하면 병사들은 로마 시민권을 갖고 있는 시민이기도 하기 때문에 아우구스투스 자신의 지지율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렇다고 필요한 퇴직금을 국고에서 지출하면 재정은 궁핍해진다.

그래서 결국 아우구스투스는 지주 자신의 사재를 털어 그들의 퇴직금 지불에 충당하기도 했다. 남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몸이란 곁에서 보는 만큼 그렇게 편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여기서도 알 수 있다.

이리하여 로마의 군사력은 3분의 1까지 줄어들게 된다. 그러고 나서 아우구스투스는 이 로마군단을 우선 상비군으로 개편한다. 공화정 시대 로마에는 상비군이라는 제도가 없었다. 집정관이 지휘하는 방위 군사력으로서 4개 사단이 있었지만, 필요에 따라 군단을 편성하는 것이 로마 군제의 기본이었다.

이 같은 방식으로도 문제가 없었던 것은 당시 로마가 확대일로에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가 먼저 공세를 취한다면 공격 계획이 서고 나서 거기에 필요한 군단을 편성하는 것이 오히려 경제적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때부터는 방위에 전념한다고 결정한 이상,, 상비군이 없으면 곤란했다. 적이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니까 방비는 항상 굳건히 해 둘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상비군을 두는 것이야 훌륭했지만, 문제는 그 규모였다. 광대한 로마제국의 방위선은 너무 길었다. 이 방위선을 사수하려면 아무리 군사가 많아도 충분하지 않았다.

하지만 상비군을 유지하려면 큰 비용이 든다. 군비는 물론이고 병사의 급여나 퇴직금까지 부단해야 하기 때문에 그것은 틀림없이 국가 예산을 압박하게 된다.

아우구스투스가 최종적으로 결정한 25개 군단 15만 명이라는 상비군의 규모는 방위상의 요처이라기 보다는 로마의 재정 사정을 근거로 하여 산출한 숫자라고 생각된다. 무리를 해서 큰 군비를 유지할 경우 분명히 로마의 재정은 악화되어 속주세를 인상해야만 한다. 그렇게 되면 속주에서 불만이 폭발하고 외적에 대한 방위가 혼란스러워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정된 병력으로 광대한 로마제국을 끝까지 지켜 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우구스투스가 내놓은 대답은 속주민의 활용이었다.

 

 

‘보조병사’ 제도의 숨겨진 지혜

 

로마의 군단은 본래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되는 것이 건국 이래의 전통이었다. 그러나 거기에 비로마 시민이 참가한 예는 아우구스투스 이전에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예컨대 카이사르는 갈리아 인이나 게르만 인 기병을 유효하게 전장에 투입해 수많은 승리를 했다. 하지만 이런 비로마 시민 병사는 어디까지나 비정규군이었으며, 제도로서 확립된 것은 아니었다.

팍스로마나를 실현하기 위해서 아우구스투스는 과감하게 이 전통을 바꾸기로 했다. 즉 로마 시민권을 가지지 않은 속주민도 로마군 의 정규병으로 만들려고 한 것이다.. 그렇지만 로마 시민병과 속주민 병사를 하나로 묶어 같은 군단으로 만들려고 한 것은 아니다. 그렇게까지 해 버리면 로마의 전통을 파괴하는 셈이 되어 아우구스투스에게 비난이 쏟아질 것이 뻔했다.

그래서 그는 로마 시민권을 가진 ‘군단 병사(레기오나리우스)’와는 별도로 속주민 지원자인 ‘보조 병사(아욱실리아리우스)’ 로 이루어지는 부대를 결성한다. 그 수는 군단 병력과 거의 동등한 15만 명. 아우구스투스는 이러한 30만의 병력이면 로마제국의 방위선을 끝까지 지킬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방위비의 절약을 목표한 한 아우구스투스라도 보조 병사를 무급으로 일을 시켜도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럴 경우 즉시 속주의 반란을 초래한다. 그렇다고 해도 결코 군단 병사와 동일한 대우를 보증할 수는 없었다.

보조 병사의 급료를 나타내는 사료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아서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지만, 군단 병사보다는 상당히 적었을 것이다. 또한 군단 병사에게 지급되는 퇴직금도 아마 보조 병사에게는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군단 병사의 병역 기간은 20년이지만 보조 병사는 25년이었다.

이렇게 늘어놓고 보니 마치 속주민을 혹사시키고 있는 것 같지만, 실은 속주민에게는 보조 병사가 되는 것이 그래도 매력적인 일이었다. 그 이유는 보조 병사로서 25년간 복무한 뒤 만기제대를 한 자에게는 자동적으로 로마 시민권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로마 시민이 되면 속주세를 지불하지 않아도 된다. 또 이 경우의 시민권은 세습되는 권리이기 때문에 자식, 손자들까지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그것을 생각하면 병역 기간이 다소 길고 군단 병사에 비해 급여가 적어도 보조 병사가 되는 것은 속주민의 입장에서 ‘구미가 당기는’ 일이었다.

 

 

운명 공동체의 길

 

아우구스투스가 만기제대 보조 병사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기로 한 것은, 특별히 국고 지출을 수반하지 않는다는 즉 비용이 들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만은 아니었다.

일찍이 카이사르가 갈리아의 부족장들에게 시민권을 주고 원로원의 의석까지 개방했던 것도 속주민의 회유라는 눈앞의 목적에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로마 시민권을 준다는 것은 한때 패자였더라도 승자인 로마인과 동등하게 취급한다는 결의 표명과 같았다.

속주 출신의 보조 병사에게 아우구스투스가, 시민권을 주기로 한 것도 똑같은 이유에서였다. 원래 로마 시민의 역할인 국가 방위를 함께 맡아 준 것에 감사하는 형태로 시민권을 주고 로마 시민의 동료로 맞이한다는 것은 아우구스투스로서도 자연스러운 발상이었다.

‘패자도 동화시킨다’ 는 로마의 전통은 아우구스투스 안에도 살아 있었다는 증거였다. 이러한 구상이 속주민에게도 전해지지 않을 리가 없었다. 보조 병사를 정규병 으로 만듦에 따라 속주민들 사이에서도 ‘내 나라는 내가 지킨다’ 는 의식이 싹 떴던 것도 그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속주민은 직접세로 방위비를 부담하면 직접 병역에 나가야 할 의무가 없었다. 그러나 그 상태가 계속되어 가는 한, 속주민은 언제까지나 로마를 조국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지원제라는 형태로 방위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나오면 확실히 의식이 바뀌어 간다. 아우구스투스가 보조 병서 채용을 국가 정책으로 만든 것도 그것이 큰 이유 중 하나였다.

나아가 로마 시민의 군단 병사와 속주민의 보조 병사가 공동으로 국가방위에 헌신함으로써 양자의 융화가 이뤄져 나간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된다. 사실 군단 병사가 퇴직 뒤 현지 여성과 결혼함으로써 시대의 흐름에 따라 민족 사이의 혼혈이 진해돼 갔다.

속주민과 로마인이 시민권에서나 혈통에서 구별이 없어지면 ‘안의 평화’의 확립에 큰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아우구스투스가 보조 병사를 채용하기로 한 것은 로마제국을 하나의 운명 공동체로 만들겠다는 목적 때문이기도 했다.

 

 

로마 방위 체제의 구축

 

이렇게 해서 로마의 군사력은 군단 병사 15만 명, 보조 병사 15만 명의 체제가 되었다. 하지만 긴 국경을 따라 얇고 균등하게 이 30만 명을 배치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외적이 쳐들어왔을 때 거기에 병력을 집중해야만 상대를 격퇴할 수가 있다.

그래서 아우구스투스는 군단 병사를 주된 전력으로 활용하고, 보조 병사는 그 보조나 경계 임무에 돌리기로 한다.

아래의 그림은 그 개념도이다. 국경을 따라 배치된 파수용 요새에서는 현지에서 채용한 보조 병사가 경계 근무를 선다. 만약 적의 습격을 발견하면 즉시 봉화를 올리거나 말을 몰아 가까이의 보조 부대기지에 알린다. 통지를 받은 기지는 즉시 원군을 파견함과 동시에, 군단 기지에도 그 정보를 알려 주 전력인 군단 병사의 파견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즉 적의 습격은 우선 보조 병사가 어떻게든 막고, 적을 본격적으로 격퇴시키는 것은 군단 병사가 맡았다.

이때 관건이 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스피드였다. 만약 군단기지와 보조 부대 기지 사이의 연락 과정에서 시간이 걸리거나 혹은 군단 병사가 전장에 늦게 도착하면 방위선이 적에게 간단히 뚫린다.

그런 상황에서 도움이 된 것이 로마인의 공화정 시대부터 부지런히 구축해 온 도로망이었다. 고대 고속도로라고도 할 수 있는 로마 가도가 속주에 그물코처럼 뻗어 있는 덕분에, 로마군단은 기병이라면 하루에 100킬로미터 가까이 이동할 수 있었고 보병도 평균 시속 5킬로미터라는 빠른 속도로 이동이 가능했다.

로마의 이 같은 방위 체제의 아이디어는 현대의 각 나라 군대에서도 그대로 활용하고 있다. 최전선 기지에는 최소한의 군사를 배치하고 유사시에는 기동부대가 신속하게 바다나 하늘을 통해 이동해 원군으로서 대응하는 방식인데, 그것도 2,000년 전 로마인이 짜낸 방위 전략에 뿌리를 둔 것이다.

 

 

황제에게 부여된 말

 

암살로 인해 사업이 좌절되는 것을 두려워해 원로원이나 로마 시민 앞에서 ‘연기’를 계속했던 아우구스투스는 기원 14년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뜬다. 사랑하는 아내 리비아의 팔에서 맞이한 편한 죽음이었다고 서서는 전한다.

원로원 의원들을 환호하게 만든 공화정 복귀 선언으로부터 헤아려 42년에 걸친 치세 동안 과연 그가 바랐던 대로 ‘팍스로마나’ 를 실현시킬 수 있었을까?

그것에 대한 답은 로마인에게 정복당한 속주 사람들이 그가 죽기 얼마 전에 했던 말 속에 있다.

이때 아우구스투스는 나폴리 만을 배로 돌고 있는 중이었다. 거기에 우연히 정박하고 있던 이집트에서 출발한 상선의 승객과 선원들이 선상에서 휴식 중인 노 황제를 알아보고 황제를 향해 다음과 같이 외쳤다고 한다.

 

 

“당신 덕입니다, 우리의 생활이 유지되는 것도.

당신 덕입니다, 우리가 안전하게 여행을 할 수 있는 것도,

당신 덕입니다, 우리가 자유로이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것도.”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 은 “로마제국이 왜 멸망 했는지를 배우기보다 왜 로마제국이 그만큼이나 오래 지속되었는지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는 말을 남겼다. 로마제국이 멸망한 과정을 뒤따라가며 대저작 <로마제국 흥망사> 를 쓴 기번에게 이 말을 하게 만든 최대의 공로자는 이 아우구스투스인지도 모른다.

창조적 천재라고 하면 카이사르를 따를 수 없을지라도 아우구스투스 역시 질은 달라도 천재였다. 어쨌든 이후의 로마제국은 300년에 걸쳐 아우구스투스가 정한 기본 노선에 따라 계속 운영되어 팍스로마나를 유지해 나갔기 때문이다.

 

** 교양학과: 로마의 아이들은 어렸을 때는 ‘읽기, 쓰기, 주판’ 을 배우지만 성장하고 나서는 (1)라틴어와 그리스어 문법 (2)수사학 (3)변증학 (4)수학 (5)기하학 (6)역사 (7)지리의 일곱 학과를 습득하게 되어 있었다. 이것을 ‘교양학과'(직역하면 ‘자유학과’)라고 한다.

 

 

 

9장 로마에서 오늘의 우리를 돌아본다

 

어떠한 정치 시스템이든 처음부터 국민을 불행에 빠뜨리려고 만들어진 것은 없다. 처음 동기는 ‘훌륭한 것’ 즉 선이었을 것이고, 사실 그 시스템으로 잘돼 가던 시기도 있었다. 그래서 오랜 기간에 걸쳐 같은 시스템이 유지돼 온 것이다.

그러나 그 선(플러스)이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악(마이너스)으로 바뀌어 간다.

거기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 카이사르의 지적이었다.

 

 

‘구조 조정’ 의 명인들

 

기원전 753년 건국부터 시작해 대략 8세기에 걸친 로마의 역사를 이야기했는데, 그 과정에서 내가 새삼 통감한 것은 로마인이 ‘구조 조정’ 에 아주 뛰어난 민족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도 내가 말하는 구조 조정이란 현대사회에서 이뤄지고 있는 사업의 축소나 폐쇄, 인원 축소라는 소극적인 개량 방법이 아니다.

이 말의 본래 의미인 재편성이나 재구축이 여러 차례에 걸쳐 성공했기 때문에 로마는 1,000년이란 긴 역사를 가질 수 있었다. 같은 지중해 세계에 속하는 그리스가 문화나 정치, 경제에서 화려한 성공을 거두었어도 그 빛은 오래 지속되지 못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이 책에서 거론한 범위 내에서 로마인이 행한 정치 개혁 중에 가장 큰 것만도 3회나 된다.

최초로 이루어진 개혁은 왕정에서 공화정으로의 이행이다. 기원전 509년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등에 의해 제7대 왕 ‘오만왕 타르퀴니우스’ 가 추방당한 이후에는 한 명의 왕을 대신해 집정관을 매년 두 명씩 선출하고, 이 두 명의 집정관이 정치의 최고 책임자가 되었다.

두 번째는 기원전 390년에 일어난 ‘켈트 족 습격 충격’을 계기로 이루어진 공화정 체제 내부의 개혁이다. 귀족과 평민의 계급투쟁이 종지부를 찍고 로마의 부흥을 완수하기 위해 정부의 요직을 평민에게 개방하는 결단을 내린 것도 이때였다.

그리고 세 번째의 개혁은 제정으로의 이행이었다. 카이사르가 그 설계도를 만들고 아우구스투스가 그대로 돌을 쌓아 올림으로써 로마제국이 건설돼, 500년 동안 계속된 공화정도 과거의 것이 되었다.

로마가 실행한 개혁은 물론 여기서 거론한 세 가지뿐만이 아니다. 기원전 494년부터 시작된 호민관 제도, 포에니전쟁 후의 ‘혼미의 시대’ 에 그라쿠스 형제나 마리우스나 술라가 행한 여러 개혁 등 열거하자면 끝이 없을 정도이다. 말하자면 로마인에게 정치 시스템이란 로마가도를 보수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항상 보수 유지하는 것’ 이었다.

철학적 사고에 의해 진리를 추구하는 그리스인이나 일신교의 절대신을 믿는 유대교나 기독교 신자와 달리 로마인은 이런 종류의 ‘절대’에 친숙하지 않았다. 아무리 뛰어난 시스템이라도 인간이 만든 것은 반드시 결함이 숨겨져 있다는 현실적 감각을 그들은 항상 지니고 있었다.

 

 

‘게르마니아 철퇴’의 결단

 

이 책에서는 자세하게 언급하지 않았지만 아우구스투스가 생전에 행한 정책 중에서 유일한 실패하고 할 수 있는 것이 게르만민족이 사는 게르마니아 지방 원정이었다.카이사르가 정한 로마의 기본 방위선은 라인 강이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는 그것을 라인 강보다 훨씬 더 넓게 잡아 동쪽을 흐르는 엘베 강으로 옮기려고 게르마니아에 군대를 파병한다. 기원전 12년의 일이다.

아우구스투스는 정치에는 천재라고 해도 좋을 만큼 재능을 지닌 인물이었지만 군사상의 재능은 정치적 재능 수준에 미치지 못했다. 그런 그가 카이사르 암살 후의 내전에서 싸워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카이사르가 생전에 붙여 준 우수한 부관 아그리파 덕분이었다. 아그리파가 더 오래 살았더라면 아마도 아우구스투스는 게르마니아 원정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튼 게르마니아는 카이사르조차도 ‘단기적으로는 제압할 수 있지만 장기적인 점령은 불가능’ 하다고 본 땅이었다. 그런데 오랜 세월에 걸쳐 군사를 맡기고 있던 아그리파를 잃은 아우구스투스는 현지 상황을 충분히 파악하지 못한 채 원정 계획을 세워 실행에 옮겨 버린 것이다.

게르마니아 전쟁은 처음에는 잘되어 갔지만, 결과적으로는 진흙탕 싸움에 발을 디딘 형태가 된다. 서기 9년에는 게르만 인의 게릴라 전법으로 인해 로마는 단 한 번에 3만 5,000명의 군사를 잃는 타격마저 입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아우구스투스는 아내 리비아가 데려온 아들로 그 재능을 아끼던 청년 드루수스를 이 원정에서 잃었고, 또 하나 아들처럼 사랑했던 티베리우스도 작전상 의견 대립으로 그에게서 멀어져 버린다. 그런데도 아우구스투스는 죽을 ‘때까지 게르마니아 제패에 계속 집착했던 것 같다.

만약 이 게르마니아 원정이 그 후로도 계속되었다면, 로마제국의 역사는 크게 바뀌었는지도 모른다. 전선과 후방의 보급 기지 사이가 크게 벌어져 ‘로마군 은 병참에서 이긴다’ 라는 말을 들었던 로마군도 그들 본래의 전쟁을 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군대란 그들이 해 온 본래의 전쟁을 할 수 없게 되면 전투에도 패배하기 시작한다는 성질을 갖는다. 전투에서 계속 지게 되면 결국 제국의 멸망밖에 없다.

그런데 로마제국은 역시 달랐다. 제2대 황제 티베리우스는 서기 17년 게르마니아 지방에서 철퇴를 결정한다. 이에 따라 아우구스투스의 유훈이라고 할 수 있는 ‘엘베 강 방위선 구축’은 백지로 돌아가게 되었다.

국가뿐 아니라 어떠한 조직이라도 전임자가 정한 방침을 폐기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하물며 그 전임자가 창업자라면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티베리우스는 ‘위대한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정책마저도 뜻하는 대로 자주 전환했다.

이처럼 궤도 수정이 자주 이루어질 수 있었다는 것에 로마제국이 지속된 이유가 있다고 본다.

 

 

왜 로마인은 ‘법’을 찾은 것일까

 

‘시스템이란 끊임없이 보수, 개정해 나가는 것’ 이라는 로마인의 사상이 가장 잘 나타나 있는 것이 법률에 대한 그들의 태도일 것이다.

<로마인 이야기> 제1권의 서두 부분에서 나는 다음과 같이 썼다.

 

“인간 행동 원리의 규범을

종교에서 찾은 유대인,

철학에서 찾은 그리스인,

법률에서 찾은 로마인,

이 한 가지만으로도 이들 세 민족의 특징이 떠오를 정도이다.”

 

‘행동 원리의 규범’ 이란 알기 쉽게 말하면 무엇을 선악의 판단 기준으로 하는가 이다.

로마인이 종교도 아니고 철학도 아니고 법에 따라 스스로의 행동을 통제하려고 한 것은 로마인 특유의 정신세계인 ‘패자도 동화시킨다’는 특징과 많은 관계가 있다.

유일 절대신을 숭상하는 유대인에게 ‘동료’ 란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만 한정된다. 또한 그리스인이 말하는 철학은 분명히 훌륭한 것이지만, 추상적 사고를 이해하고 문제의식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은 인류 전체로부터 보면 어디까지나 소수파이다.

유대인이 예부터 자신들의 공동체 안에서만 생활하고, 또한 그리스인이 도시국가의 테두리에서 나오려고 하지 않은 것도 결국 그 때문이었다.

이에 대한 법은 다르다. 같은 신앙을 갖지 않아도, 같은 지적 수준이 아니더라도 법이라는 규칙을 지키는 한 함께 살아갈 수 있다.

왕정 시대부터 로마인은 다양한 민족이나 부족을 로마에 불러들여 그 안에서 공생했다. 거기에는 풍습의 차이에서 오는 문화적 마찰도 있었을 것이고, 믿는 신이 달라 갈등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로마는 ‘법’ 이라는 규칙을 필요로 했고, 그 필요성은 다문화, 다민족의 로마제국 시대에 접어들면서 더욱더 커진다.

속주민이 로마 시민권을 갖고 싶어 했던 것 중 하나는 직접세 면제였다. 또 하나 더 큰 이유는 시민권을 얻으면 로마의 법이 자신들의 생명이나 재산을 지켜 주리라고 안심할 수 있는 점이었다. ‘로마의 법’ 이란 인종이나 종교 등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에게 공정하고 평등한 권리를 보증하는 것, 그리고 거기에 따라 ‘공생’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로마에 성문법이 없었던 이유

 

로마인이 만들어 낸 ‘법치국가’ 라는 모델은 현대에도 그대로 계승되고 있지만, 로마에는 제대로 조문화된 법률, 즉 성문법의 체계가 없었다.

그렇다고 전혀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는 기원전 5세기에 만들어진 ‘십이동판법’ 이라는 법률이 하나 제정된 적이 있다.

이것은 심각해진 귀족과 평민의 대립을 해소하기 위해 당시 선진국인 그리스에 시찰단을 파견해 아주 요란하게 만들어진 법전이었지만, 조문 내용은 오늘날까지 3분의 1도 알려져 있지 않다. 왜냐하면 이 법전이 그 후로도 거듭 개정되었기 때문이다.

로마에서는 법률이 시대에 맞지 않게 되면 전부터 있던 법률 조문을 개정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법을 정해 대응하는 방법이 채택되고 있었다. 새로운 법률이 생기면 거기에 관련된 낡은 법의 규정이 자동적을 효력을 잃는다. 현대의 성문법 체계에 익숙한 우리로서는 로마의 이 방식은 그야말로 헐렁해 보인다.

계속해 새로운 법령이 시민회나 평민회에서 만들어져 갔기 때문에 로마법의 전체적인 모습은 법률 전문가라도 파악하기 힘들다. 사실 로마법이 정리, 집대성된 것은 6세기 동로마 황제 유스티니아누스에 의한 ‘로마법 대전’ 에 이르러서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로마의 방식에 이점도 있었다. 법률 조문 수정이라는 형태로 대응하면 아무래도 과거에 끌려가 버린다. 더구나 그 법률이 오래 사용되었다면 그만큼 큰 폭으로 바꾸지 않고 가능하면 최소한도의 개정에 그치려는 것이 인간의 심성이다.

이에 비해 완전히 새로운 법률을 만든다면 과거의 일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현재와 미래만을 생각해 거기에 적응하는 새로운 법을 만들어 내고, 이 새로운 법에 호환이 안 되는 옛 법은 자동적으로 소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로마의 정치 개혁을 되돌아보면 로마 사랑들의 구조 조정이 로마법의 개정과 같은 정신으로 이루어지고 있었음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왕정에서 공화정으로의 이행, 혹은 평민에 대한 문호 개방, 나아가 카이사르의 개혁 등 그들은 모두 기존의 시스템을 전폐하고 만든 개정은 아니었다.’

과거와의 정합성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현상에 대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 지에 대해서만 생각한다. 그것을 하지 못하면 개혁은 단순히 ‘개량’ 으로 끝나 버리고 이렇다 할 효과를 거둘 수 없다. 이 같은 대단한 장점이 있었기 때문에 로마라는 ‘국가’는 오래 계속될 수가 있었다.

 

 

역사와 전통을 무시한 개혁은 실패한다

 

그렇지만 단지 개혁이 명쾌하면 좋으냐 하면 결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각각의 국가나 조직에는 각각의 역사와 전통이 있는데, 이것을 무시한 개혁은 시행해도 잘될 리가 없기 때문이다.

자신이 소지한 카드가 무엇인지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그 중에서 현재도 통용되는 것과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 것을 분류한다. 그리고 지금도 통용되는 카드를 조합해 최대의 효과를 노린다. 나는 이것이 확실히 재구축이라는 의미의 진정한 구조 조정이라고 생각한다.

로마 사람들은 그 점에 관해서도 달인이었다.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이행했던 시대는 지중해 세계에서는 누가 뭐라 해도 그리스가 가장 타국을 압도한 선진국이었던 시기와 겹쳐진다. 정치와 문화, 그 밖에 군사력에서조차 그랬다. 그 중에서 아테네의 번영은 당시 로마인의 눈에는 별세계처럼 비쳤을 것이다. 하지만 로마 사람들은 그 아테네의 번영을 가까이에서 관찰하면서도 그리스의 정치체제를 직수입하려고 하지 않았다.

기원전 509년 공화정이 시작하는 것과 병행하면서 당시 로마에서는 귀족과 평민의 대립이 시작되었다. 그 대립은 해마다 격화되어 갔다. 그런데도 문제 해결책으로서 로마 사람들은 아테네의 민주정을 ‘직수입’ 하지 않았다. 이미 아테네에서는 기원전 6세기에 ‘솔론의 개혁’이 이루어진 뒤 민주정치가 오래 지속되었고 그로 인한 번영을 구가하고 있었는데도 그랬다.

로마의 평민들로서는 자신들의 정치적 요구가 통하게 하려면 민주정을 내세우는 것이 가장 간단했을 것이다. 실제로 아테네의 민주정은 귀족의 특권을 빼앗는 것부터 시작되었다. 하지만 로마의 평민들은 아테네를 모방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 최대의 이유가 역시 아테네 흉내를 내면 로마다움이 없어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들은 ‘민주정이라는 카드가 로마의 손 안에는 없다.’ 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개혁은 ‘과거의 부정’ 이 아니다

 

되돌아보면 로마의 개혁은 대담하면서도 당시까지 이어온 전통을 밝아 나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이행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로물루스가 창시한 왕정이 왕과 원로원 그리고 시민회의 세 기둥이건 것을 루키우스 브루투스는 집정관과 원로원과 시민회라는 공화정으로 재구축했다. 브루투스는 로마에 이제는 왕이라는 카드는 불필요하다고 생각했지만, 원로원이나 시민회라는 카드는 한꺼번에 버리지 않았다. 이 두 장의 카드는 아직도 유효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로마공화정이 그 후 500년에 걸쳐서 계속되었던 것도 이러한 정치 시스템이 로마인의 체질에 맞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이것이 다른 나라에서 ‘빌려 입은 옷’ 이었다면 역시 어딘가 무리가 있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카이사르가 설계도를 만든 로마제국의 통치 시스템도 마찬가지였다. 카이사르는 공화정을 폐지하겠다는 결단을 내렸지만 그가 행한 정책 속에는 로마의 전통을 무시한 것이 한 가지도 없었다. 속주 통치에서도 예로부터 전해지던 ‘패자도 동화시킨다’ 는 로마인의 전통에 복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칫하면 개혁이란 오래된 것을 부정하고 새로운 것을 내세우려는 것이라고 생각되기 쉽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성공한 개혁은 자신들의 현재의 모습을 다시 들여다 보고 그 속에서 유효한 것을 골라내어 그것이 최대한 효과를 거둘 수 있게 재구축해 나가는 작업이 아닐까? 로마 역사를 보고 있으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왜 ‘선의’ 가 해악을 초래할까

 

그러면 대체 왜 개혁은 재구축해야 할까? 드 대답은 카이사르의 다음 말에서 찾을 수 있다.

“현재는 아무리 나쁜 사례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시작된 원래의 계기는 훌륭한 것이었다.”

카이사르의 이 말은 1,500년 만에 ‘발굴’할 사람은 마키아벨리였다. 그는 자신의 저서 <정략론>에서 이 말을 소개했다. 거기에 “(카이사르의 말은) 전적으로 진실이다.” 라고 짧은 코멘트를 붙였을 뿐 그 이상은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 카이사르의 말이 인간세계의 진실을 너무 완벽하게 꿰뚫고 있기 때문에 마키아벨리도 그 이상의 해설은 불필요하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잘 알지는 못하지만 설명하자면 이런 말이 아니었을까? 위기에 직면했을 때 우리는 자칫하면 종래의 체제를 ‘나쁜 것’ ‘부정해야 할 것’으로 치부해 버리기 쉽다. 그래서 예로부터 내려온 이전의 시스템을 파괴하는 것이 개혁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어떠한 정치 시스템이든 처음부터 국민을 불행에 빠뜨리려고 생각하고 만들어진 것은 없다. 당초의 동기는 ‘훌륭한 것’ 즉 선이었을 것이고, 사실 그 시스템으로 잘돼 가던 시기도 있었다. 그래서 오랜 기간에 걸쳐 같은 시스템이 유지돼 온 것이다. 그러나 그 선(플러스)이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악(마이너스)으로 바뀌어 간다. 거기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 카이사르의 지적이었다.

예컨대 로물루스가 창시한 왕정도 당초는 로마에게 선이었으나, 그 왕정이 세월과 함께 악으로 바뀌어 갔다. 따라서 공화정으로 이행되었지만, 그 공화정 또한 당초의 선이 어느덧 악이 되어 버렸다.

그렇다면 대체 왜 선에서 악으로의 전환이 일어나는 것일까? 그 원인은 시스템 자체에 있다기 보다는 외부 환경 변화에 있다고 본다. 예컨대 시스템 자체는 옛날과 같이 운영되고 있어도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 격변해 버리면 그 효과도 역방향이 되어 버린다. 즉 국민을 행복하게 해 주기 위한 시스템이 오히려 국민을 불행하게 만들어 버린다.

그 가장 좋은 예가 공화정 말기의 원로원일 것이다. 아직 로마의 판도가 이탈리아 반도 안쪽에 머물러 있던 시대의 원로원은 로마의 두뇌로서의 기능을 충분히 맡고 있었다. 원로원에는 많은 인재가 있었고, 거기에서 적재적소의 방침으로 집정관이나 그 외의 요직에 인재를 보냄으로써 로마의 정치는 기능하고 있었다.

그런데 포에니전쟁 이후의 상황 변화가 그것을 바꾸어 버렸다. 이미 지중해 전역에 퍼진 로마의 통치를 원로원은 당당할 수 없게 되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혼란을 가져오게 되었다. 그것이 한세기 반에 걸친 ‘혼미의 시대’의 진상이다. 즉 시스템이 나빠 문제가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시스템의 운영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다. 시스템과 외부와의 조화가 나빠졌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따라서 낡은 통치 시스템을 전부 부정해 버리면 오히려 문제의 본질을 알 수 없게 된다.

중요한 것은 우선 자신들이 놓여 있는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한 다음, 현재 시스템의 어느 부분이 현상에 적합하기 않게 되었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그렇게 해 나가는 중에 ‘버려야 할 카드’ 와 ‘남겨야 할 카드’ 를 찾아낼 수 있다고 본다.

 

 

로마사상 손꼽히는 논전

 

고대 로마의 경우 공화정의 강점은 뭐니 뭐니 해도 원로원이 ‘인재의 총집합체’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포에니전쟁 이후의 원로원에도 결코 인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긴 ‘혼미의 시대’ 에도 원로원은 수준 높은 인재의 총집합체였다. 그러나 아무리 인재가 많아도 그것을 활용하는 메커니즘이 기능하지 않으면 결국은 인재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국가뿐 아니라 모든 조직이 쇠퇴하는 것은 인재의 소진 때문이 아니다. 인재는 어느 세상이나 어느 조직에도 있다. 다만 쇠퇴기에 접어들면 그 인재를 활용하는 메커니즘이 어긋나기 시작한다.

로마의 경우 그 징조는 이미 포에니전쟁 때 나타났는지도 모른다. 천재 한니발과 싸우기 위해 로마 원로원은 파비우스가 주창한 지구전 전략을 채택해 ‘이기지는 못해도 패배는 하지 않겠다’는 전법을 취할 것을 만장일치로 결정한다.

그 결과 로마군 은 한니발을 호되게 괴롭혀 마침내 이탈리아 남부에 가두는 작전에 성공한다. 그러나 지구전 전력으로는 역시 한니발을 지중해로 쫓아 버릴 수까지는 없었다. 결국 전황은 교착 상태에 빠진다.

그때 등장한 인물이 젊은 스키피오였다. 그는 “이젠 적극 전법으로 나갈 때가 되었다. 이쪽에서 먼저 카르타고에 쳐들어가면 한니발도 본국에 돌아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 역할을 내게 맡겨 달라.” 고 원로원에 간청한다.

그러나 그에 대해 단호하게 안 된다고 말한 사람이’일인자’란 칭호를 받고 있던 파비우스였다.

그는 “젊은이! 그대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으니까 잘 모르겠지만…” 하고 스키피오의 미숙함을 비웃고 나서, “한니발이 시나리오대로 카르타고 본국을 구하려고 돌아간다 해도 그를 이긴다고 보증할 수 있는가?” 라며 북아프리카로 출병하는 것이 얼마나 모험인지를 피력한다. 그리고 파비우스는 마지막에 이렇게 말하는 연설을 끝맺는다.

“아직 젊은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스키피오를 집정관으로 선출한 것은 로마와 이탈리아를 위해서이다. 그의 개인적인 야심을 충족시키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로마는 영웅을 필요로 하지 않는 국가이다.”

원로원에 의한 집단지도 체제야말로 로마가 강한 근원이라는 것이 파비우스의 확고부동한 신념이었다. 그러면 스키피오는 어떻게 반론했을까?

“파비우스 막시무스, 그리고 원로원 의원 여러분! 저는 제 의견에 대한 파비우스의 반대가 질투에 의한 것이라고는 절대로 생각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의 위대함을 넘보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나이는 어리지만 전쟁 경험만은 미숙하지 않은 제 판단으로는 지금까지 성공해 온 것일지라도 필요하면 바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지금이 그때라고 생각합니다.”

원로원의 전통을 중요시하는 70세와 개혁을 호소하는 30세의 언쟁은 바로 로마사의 백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원로원의 ‘선의’

 

이미 독자 여러분이 알고 있듯이 제2차 포에니전쟁은 스키피오에 의해 로마가 승리를 거둔다.

북아프리카에서 카르타고 군을 물리친 스키피오를 무너뜨리려고 한니발은 이탈리아에서 본국으로 귀환하고 이 둘은 자마 전투에서 부딪치게 된다. 그리고 한니발의 기병 전술을 완전하게 습득한 스키피오가 완벽한 승리를 거둔다. 그런데 이 스키피오의 북아프리카 공격은 원로원이 정식으로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방금 앞에서 소개한 논전에서 일인자 파비우스를 상대로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개혁의 신념을 호소한 스키피오의 논쟁은 분명히 원로원 의원들에게 감명을 주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파비우스의 ‘정론’ 또한 부정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원로원은 절충안을 냈다. 즉 스키피오에게 북부 아프리카 원정 군단은 주지 않고 시칠리아에 부임시킨다. 다만 시칠리아에서 지원병을 모집하는 것을 인정한다. 즉, ‘가고 싶으면 스스로 군사를 모아 북아프리카로 건너가라.’ 는 것이다. 물론 그 경우 스키피오의 행동은 원로원의 허가를 받은 것이 아니므로 실패하면 책임 추궁은 면하지 못한다.

그 후 스키피오의 눈부신 활약을 아는 우리가 보면 원로원의 태도는 뭔가 안타까운 느낌이 든다. 그러나 묵인이라고는 해도 젊은 스키피오에게 활약할 기회를 준 것을 보면 당신의 원로원은 아직 건전하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포에니전쟁이 끝나고 지중해에서 로마 패권이 확립되자 원로원은 유능한 인재의 등장을 허락하기는커녕 오히려 탄압하는 쪽으로 돌아섰기 때문이다.

티베리우스와 가이우스 두 그라쿠스 형제를 죽인 것은 다름 아닌 원로원이었다. 그 중에서도 동생 가이우스에 대해 원로원은 ‘원로원 최종 권고’ 라는, 말하자면 계엄령과 같은 것을 포고하면서까지 그를 말살했다.

그렇다고 해도 원로원은 자신들의 지위를 지키겠다는 이유로 그들을 죽인 것은 아니다. 로마의 개혁은 원로원에 의한 집단지도 체제만이 맡을 수 있는 것이지, 일부의 인간, 그것도 실적이 없는 젊은이가 자유롭게 주무르는 것은 로마의 국익에 어긋난다는 대의가 있었다. 즉 원로원은 원로원 나름의 ‘선의’ 때문에 그라쿠스 형제를 죽인 셈이다. 선의로 했던 것이 오히려 해악이 된다… 포에니전쟁 이후의 로마는 바로 그런 상황에 빠져 버렸다.

 

 

 

카산드라 의 비극

 

포에니전쟁 종결 이후 1세기 반에 걸쳐 계속된 ‘승자의 혼미’ 는 카이사르의 등장에 의해 간신히 수습되기 시작한다.

일찍이 파비우스가 “로마는 영웅을 필요로 하지 않는 국가이다.” 라고 단언한 것을 생각하면 뭔가 얄궂은 결과였다. 하지만 로마뿐 아니라 어떤 국가나 어떤 시대에고 개혁은 결코 회의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한 사람의 지도자가 나타나 스스로가 믿는 바에 따라 개혁을 단행하지 않는 한 체제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변하지 않고 지내는 동안 국력은 쇠미해져 갈 뿐이다.

그렇긴 해도 개혁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어떤 개혁이든 그에 따라 손해 보는 사람들이 반드시 나타난다. 이른바 기득권층의 존재이다. 이들을 말로써 이성으로 설득하려고 하는 것은 절망적이라고 해도 좋다. ‘얘기해 보면 알 수 있다’는 것은 민주주의의 이상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성공한 적은 거의 없다.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다시 카이사르의 말을 인용하면, “사람은 자신이 보고 싶은 현실만 보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개혁에 의해 기득권이 없어지는 것에 정신을 쏟고 있는 사람에게 개혁의 의의를 아무리 말해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들의 반대에 귀를 기울여 버리면 어떻게 될까? 결국 어떤 개혁도 대폭 수정이 돼 소폭의 개량으로 끝나 버릴 것이 뻔하다. 따라서 개혁을 하려면 결국 힘으로 돌파할 수밖에 없다.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인물이 술라였고 카이사르였다.

유럽에서는 아무리 올바른 주장을 해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람을 ‘카산드라’ 라고 한다. 고대 트로이의 왕녀였던 카산드라는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이대로 가다가는 트로이는 멸망한다.” 며 사람들에게 예언하고 다녔다. 그런데도 아무도 그 말을 믿어 주지 않았다. 결국 그녀의 예언은 맞아떨어져 트로이는 멸망한다.

나 같은 문필가나 평론가라면 카산드라가 되더라도 체념하고 말겠지만, 정치가는 카산드라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자신이 옳다고 믿으면 지금 해야 한다고 생각되는 일을 실행하지 않으면 정치가로서의 가치는 전무하다.

그래서 카이사르는 군사를 인솔해 루비콘 강을 건너기로 결단을 내린 것이다. 그것을 단행했기 때문에 로마의 국가 체제 개혁도 실행할 수 있었다. 많은 사람이 지혜를 모은 개혁은 이상으로서는 아름다워도 현실적인 방책이 아닌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개혁자는 고독하다

 

이런 내 의견에 대해 ‘그것은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생각이다.’ ‘독재자를 허용하려는 것인가?’ 등의 반론이 나올 수도 있다.

과연 그런 의견은 이치에 맞는 주장이다.

그렇지만 나는 무심코 ‘카이사르라면 뭐라고 대답했을까?’ 라고 생각한다. 카이사르라면 분명 ‘민주주의를 지키는 것은 좋지만 민주주의를 지켜도 나라가 멸망한다면 소용없지 않은가?” 라고 대답하지 않을까?

아직 민주주의는 다른 정치제도에 비해 훨씬 좋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것을 해결하는 만능의 신일 수는 없다. 정치의 목적이 최대 다수의 평화와 번영을 도모하는 것이라면 민주주의는 그것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상황에 맞추어 수단을 골라 쓰는 것이 오히려 건전한 태도가 아닐까? 적어도 로마의 역사는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독재자를 무조건 민의를 무시하는 존재라고 잘라 말할 수 있을까? 어떤 독재자라도 여론을 완전히 무시하고 정치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는 않더라도 아주 어렵다. 역시 자신이 생각하는 정책을 현실로 나타내고자 할 때 주위의 협력을 얻지 못하면 효과를 거둘 수가 없다.

이 점에서도 카이사르는 일류였다. 로마의 장래에 대한 생각에서는 카이사르와 반대 입장이었던 키케로조차 카이사르의 문장에 대해서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카이사르의 문장은 그것을 말로 하든 글로 쓰든 다음의 특징이 나타나는 것은 변함이 없다. 즉 품격 높고 빛나며 장려하고 고귀하며 무엇보다도 이성적이다.”

개혁은 자신들의 역경을 직시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므로 반성이나 자기비판이라는 소극적인 이야기가 되기 쉽다. 그렇게 되면 오히려 개혁을 실행할 의욕이 생기지 않는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개혁에 의해 사회가 바뀐다고 들으면 솔직히 환영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이며, 대부분 미래에 대해 불안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심리이다.

이런 점에서 카이사르의 연설은 비록 씁쓸한 현실을 말하고 있어도 청중은 이와 반대로 기운을 얻고 내일의 희망을 발견한 기분이었다고 한다. 물론 그 사람들 중에서 카이사르가 생각하는 개혁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극소수이거나 어쩌면 전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협력해 주려는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개혁의 진전은 완전히 다른 것이 된다.

새로운 시대를 만들 정도의 대 개혁은 누구에게든 이해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개혁자는 고독하고, 고독하기 때문에 지지자를 필요로 한다. 아우구스투스가 연기를 해서라도 원로원을 아군으로 삼으려고 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독재자는 민중을 무시하는 존재라고 생각하고 하지만 사실은 꼭 그렇다고만 할 수는 없다. 오히려 어중간하게 권력을 잡고 있는 정치가 쪽이 민의 같은 것을 신경 쓰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맡기는’ 것에서 오늘의 문제를 해결할 영웅이 탄생한다

 

일본의 영화감독 구로사와 아키라의 명작 <7인의 사무라이> 에서는 산적의 습격으로 곤경에 빠진 백성들이 일곱 명의 떠돌이 무사에게 격퇴해 줄 것을 의뢰한다. 보수는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쌀밥.

조금 교활한 인간이라면 자신들을 오래 고용하게 만들기 위해 적당하게 산적을 격퇴하면서 완전히 격파하지는 않을 것이다. 위협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으면 어절 수 없이 백성들은 떠돌이 무사를 계속 고용해야 할 것이므로 일자리 확보로서는 이것이 가장 ‘합리적’ 인 방법이다.

그렇지만 일곱 명의 떠돌이 무사들은 백성을 훈련시키고 계략을 세우는 동안 진지해져 버린다. 사무라이의 피가 되살아난 것이다. 그리고 결과는 산적을 완전하게 격퇴할 수 있었지만 일곱 명 가운데 네 명은 싸우다 죽는다.

이 결과를 보고 고용주인 백성들은 어떻게 했을까? 고맙다는 인사는 하지만 떠돌이 무사는 더 이상 필요가 없다. 따라서 그들은 해고당한다. 영화 마지막에 시무라 다카시가 연기한 떠돌이 무사가 말했듯이 “이긴 것은 백성”이고 사무라이들은 단순히 망아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영화가 명작인 이유는 떠돌이 사무라이들의 죽음은 단순한 망아지의 죽음이 아니라 사무라이의 피가 되살아난 남자들의 죽음이었다는 데 있다.

나는 정치가와 유권자의 관계도 결국 이 영화의 떠돌이 사무라이들과 백성들의 관계로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즉 정치는 정치의 전문가에게 맡기는 것이다. 그런 다음 일을 다 처리한 후에 해고한다. 물론 맡겨 봐서 아무래도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도중에 해고하면 된다.

로마제국의 황제와 유권자, 즉 로마 시민의 관계도 똑같았다. 다만 고대 로마제국은 민주주의 국가는 아니기 때문에 황제를 해고하려고 해도 선거로 떨어뜨릴 수는 없다. 그래서 이루어진 것이 암살이었다. 그 대표적 예가 제3대 황제 칼리굴라였다. 그가 살해당한 이유는 결국 유권자인 로마 시민이 그를 불신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현대의 우리는 정치가를 일부러 암살할 필요가 없다. 기대 이하라고 판단되면 선거로 떨어뜨리면 된다. 그 외에도 잘못된 점을 스캔들로 부각하여 퇴진하게끔 몰아넣는 방법도 있다.

이렇게 쓰면 ‘선거나 스캔들로도 해고시킬 수 없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라고 반론이 나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그만큼 공격을 받고도 끄떡없이 강건하게 살아남는다면 상당한 인재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어도 괜찮지 않을까?

어쨌든 마지막에는 ‘백성’이 이긴다. 그렇게 믿기 때문에 우리는 정치가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 아닐까? 물론 그럴 경우는 결과가 나올 때까지 외야에서 소리를 질러서는 안 된다. 그 과정에서 어쩌면 일하지 않는 ‘떠돌이’ 가 나타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무조건 단념해 버리면 더 이상 기회가 찾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현대의 민주주의 관점에서 보면 카이사르나 아우구스투스는 모두 독재자로 분류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있었던 덕분에 최종적으로 이득을 본 것은 로마 시민이었으며 속주의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그것을 편견에 사로잡히지 말고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오해 받아온 로마사

 

이 책에서는 주로 ‘개혁’을 키워드로 해서 제정 수립까지의 로마사를 이야기해 왔는데, 물론 로마사를 읽는 방법은 이것뿐만이 아니다. 1,000년 이상에 걸친 로마의 역사는 고래로부터 읽는 방법이 다양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현대에 접어들기까지 유럽에서는 로마사가 부정적인 이미지, 즉 좋지 못한 것의 본보기로서 읽혀 온 느낌이 든다. 그렇게 된 최대의 이유는 역시 무엇보다도 기독교에 있다.

기독교의 입장에서 보면 다신교도인 고대 로마인은 이교도였고, 더구나 로마제국은 기독교도를 박해한 ‘악의 제국’이 되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제5대 네로 황제는 기독교도를 무고한 죄로 죽인 ‘반기독교도’ 로서 비판 받아 왔다.

물론 이것은 기독교 측의 선전이라는 측면도 많아서 사실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예컨대 네로가 기독교도를 박해한 것은 사실이지만, 과대하게 과장돼 전해지는 부분이 상당히 많다. 이긴 측이 자신의 상황에 맞춰 놓고 패자를 재판하는 ‘승자의 정의’는 오늘날에 와서야 비로소 시작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지배에서 인간이 자유로워진 근대 이후 이러한 로마사 평가가 시정되었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특히 <로마제국 흥망사>를 저술한 기번 이후 서양의 역사가들은 ‘공화정 시대는 존경할 만하지만 제국이 되자마자 로마의 타락이 시작되었다.’ 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했다.

그 이유는 누구나 쉽게 상상할 수 있지만, 민주주의적인 견해와 많은 관계가 있다. 즉 공화정 시대에는 자유가 있었지만 제정이 되면서 자유가 없어졌고 따라서 로마는 타락했다. 그래서 로마가 멸망한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라는 것이다. 토인비 같은 학자조차 ‘아우구스투스의 업적은 로마의 쇠망을 조금 연장시켰을 뿐” 이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우리가 보면 비록 쇠망을 조금 연장했을 뿐이라고 해도, 그로부터 로마는 500년이나 이어졌으니 대단한 것이 아닐까? 그런데 서양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혹시 자신들의 서양만은 미래 영겁 하여 멸망과는 무관하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로마사가 인생의 ‘이정표’ 가 되기를 희망하며

 

이미 언급했듯이 로마제국은 사람들의 자유를 누르고 성립한 전제국가가 아니었다. 황제의 지위는 원로원과 로마 시민의 지지 없이는 가질 수가 없었다. 또한 로마 사람들의 생활은 ‘팍스로마나’ 라는 말이 의미하듯이 안전하고 풍족했다.

그 이전의 공화정에서는 국정을 결정할 자유를 만끽하던 사람들은 겨우 원로원 의원 600명뿐이고, 로마제국 전 국토의 주민은 6,000만 명이었다. 나라면 600명의 자유보다 6,000만 명의 행복 쪽이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로마사 전문가들은 오랫동안 그 같은 평가를 내리지 않았다.

물론 최근에는 로마사에 대한 더욱 공정한 평가가 전문가들 사이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전문가 세계에 머물러 있고, 아직껏 서양에서는 과거의 평가가 완고하게 살아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것이 상징적으로 나타나 있는 것이 엔터테인먼트의 세계이다. 몇 해 전에 오스카상을 수상한 영화 <글래디에이터> 가 그 전형이다. 이 영화 내용은 예전부터 있어 온 로마제국의 나쁜 이미지를 그대로 되풀이한 것인데, 선량한 주인공을 괴롭히는 악학비도인 황제가 등장한다. 웃음이 나올 것 같은 고루한 로마사관이다. 이렇게 지금도 로마제국의 나쁜 인상은 자꾸만 확대 재생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로마사가 불행한 방법으로 읽혀져 왔는지를 감지할 수 있다. 하지만 고대 로마 사람들과 교제해 오면서 내가 무엇보다 감탄한 것은 어떤 고난과 역경에도 그들이 약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켈트 족 습격 충격이나 포에니 전쟁이라는 국난에 여러 차례 부딪쳐도 로마인은 과거를 후회하지도, 멈춰 서지도 않고 항상 적극적으로 나아갔다. 문화면에서 그리스인에 미치지 못한 로마인이 고대 그리스보다 오랜 역사를 쌓아 올릴 수 있었던 것은 결국 그들이 그러한 기질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 책의 한정된 지면으로 그런 그들의 모습이 얼마나 전해졌는지 모르지만, 고대 로마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 향후 여러분의 인생에서 ‘이정표’가 되기를 희망하면서 일단 펜을 놓는다.

 

 

 

 

특별부록 저자에게 듣는 로마 영웅들의 성적

 

흔히 ‘이상적인 지도자’ 의 조건으로 인격의 원만함이나 덕성 들을 요구하지만, 인격이 고결한 것과 목적을 달성하는 것은 직접적으로 아무 관련도 없다.

비록 인격에 문제가 있더라도, 국민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큰 목적만 달성하면 그것이 좋은 지도자인 것이다.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자질은 다음의 다섯 가지이다.

지적 능력, 설득력, 육체적 내구력, 자기 제어 능력, 지속하는 의지.

카이사르만이 이 모든 것을 가지도 있었다.”

(이탈리아의 일반 고등학교에서 사용하는 역사 교과서에서)

 

 

 

이탈리아의 고등학교학생들은 학교에서 대단한 것을 배우는군요. 이탈리아의 고등학교는 대학에서 전문교육을 받는 데 필요한 기초, 즉 일반교양을 가르친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탈리아의 대학에는 교양과정이 없습니다. 역사나 국어는 물론이거니와 철학, 라틴어, 그리스어 같은 교양과목은 모두 고등학교에서 배우게 되어 있습니다. 대학은 전문교육을 하는 교육기관입니다. 영어는 교양이 아니라 실용 학문이라고 하여, 고등학교 중에서도 특히 고전 공부를 중시하는 ‘전통 있는 고등학교’ 에서는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국제어인 영어를 배우려면 여름방학을 이용해 영국에 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이탈리아의 고등학교 교육(5년)인데, 이탈리아 역사 교과서에서 위의 구절을 찾아냈을 때는 할 말을 읽을 정도였습니다.

 

이탈리아의 고교생은 역사 공부를 통해 그 같은 ‘지도자의 자질’을 배우고 있다는 말씀인가요?

 

그렇습니다. 조직을 이끌어 가는 지도자는 우리 보통 사람들, 즉 대중과는 완전히 다른 자질을 가진 존재이며, 만약 그렇지 않다면 시대를 바꿀 수가 없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이탈리아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는 이 다섯 가지 요소를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다섯 가지 요소를 백 퍼센트 충족시킬 수 있는 지도자는 카이사르 같은 지도자인데, 그런 인물을 쉽게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볼 때 고대 지중해 세계에서도 모든 것이 100점 만점인 리더는 카이사르와 그리스의 페리클레스 정도입니다.

 

‘로마사를 읽을 땐 황제가 되어 읽어라’

 

고작 두 명뿐입니까? 고대 지중해 세계에는 그 밖에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나 한니발 같은 대단한 인물들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시오노 씨가 좋아하는 술라도 굉장한 남자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들은 불합격입니까?

 

불합격은 아니지만 카이사르와 비교하면 부족합니다. 만점을 줄 수는 없습니다.

 

상당히 엄격한 시험관의 모습이군요.

 

괴테가 말했다고 합니다. “로마사를 읽는다면 로마 황제가 되어 읽어라.” 는 말이 있습니다. 물론 나 자신은 이 다섯 가지 자질 중 어느 것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만, 그런데도 로마사를 쓸 때는 그들과 같은 시점, 같은 기분이 되려고 항상 노력했습니다. 역사적인 위인들을 내 쪽으로 끌어당겨 쓰는 것은 그들에게 실례라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그들과 똑같이 될 수 없을지라도 내 쪽에서 그들에게 다가간다는 생각으로 쓰고 있습니다.

 

마치 원거리 결혼생활 같군요. (웃음)

 

바로 그런 기분입니다. 카이사르나 술라, 그라쿠스 형제 같은 남자들에게 비록 상상 속에서라도 매일 같이 오갈 수 있으니, 여자로서는 그런 대로 나쁘지 않은 삶의 방식이잖아요?

그 중에서도 카이사르는 가장 특별합니다. <로마인 이야기>에서는 그에 대해서만 단행본으로 꼬박 두 권 분량을 할애해 썼을 정도입니다. 그만큼의 시간을 카이사르와 교제했으니까 다른 남자들을 보는 눈이 엄격해졌다고 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엄격한 시선으로 로마 위인들의 성적표를 하나로 만들어 보면 어떨까요? 그들에게 어떤 점수가 주어질지 흥미롭습니다.

 

실은 이미 성적표 비슷한 것을 전에 몰래 만들었던 적이 있어요. 결국 <로마인 이야기> 에는 사용되지 않았지만요.

 

너무 아깝군요! 로마 위인들의 성적표 같은 것은 완고한 역사학자들은 절대로 만들 것 같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다시 한 번 성적표를 만들어 볼까요. 지도자의 자질을 생각한다면 역시 구체적인 예를 드는 편이 더 이해하기 쉬울 것입니다.

 

 

고대 로마 지도자 성적표

 

  지적 능력 설득력 육체적 내구력 자기 제어 능력 지속하려는 의지
알렉산드로 대왕 100 80 70 80

100

페리클레스 100 100 100 100 100
한니발 85 65 100 100 100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95 100 65 90 90
크라쿠스 형제 90 90 60 70 100
마리우스 60 70 100 45 50
술라 95 80 100 60 100
크라수스 40 30 50 30 30
폼페이우스 80 55 100 70 40
카이사르 100 100 100 100 100
키케로 80 80 50 50 40
브루투스 30 20 20 15 60
안토니우스 30 20 100 20 10
크레오파트라 30 20 60 10 70
아그리파 60 50 80 90 70
아우구스투스 95 80 85 100 100
티베리우스 90 50 100 70 100
칼리굴라 20 20 30 10 10
클라우디우스 80 70 60 70 80
네로 30 30 50 10 20
베스파시아누스 60 70 95 85 80
티투스 60 60 50 80 75
도미티아누스 75 55 80 50 75
네르바 70 60 70 80 85
트라야누스 80 85 100 100 100
하드리아누스 100 80 100 100 100
안토니누스피우스 75 90 70 100 85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85 70 60 100 100

 

 

 

 

 

 

 

동서고금에 손꼽히는 정치가 페리클레스

 

이것이 로마 위인들의 ‘성적표’ 입니까? 그런데 가장 시대가 빠른 인물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로군요.

 

스키피오 이전의 공화정 로마는 그야말로 파비우스가 말한 것처럼 ‘영웅을 필요로 하지 않는 국가’ 였습니다. 그래서 정치가가 활약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또한 공화정 이전의 왕정 시대에는 신뢰할 만한 사료가 너무 적습니다. 따라서 로마의 지도자라고 하면 역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최초입니다.

그 대신에 로마인은 아니지만 로마와도 관계 깊은 세 명의 남자들, 알렉산드로스 대왕, 페리클레스 그리고 한니발을 덧붙였습니다.

 

이들 비로마인 세 명 가운데서는 페리클레스가 카이사르와 대등한 100점 만점. 그에 비해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꽤 점수가 낮군요.

 

뭐니 뭐니 해도 페리클레스는 도시국가 아테네의 황금시대를 혼자서 구축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대 정치가입니다. 말 많고 질투심 많은 아테네 사람들을 상대로 민주정을 지키면서도 자신이 아테네에 필요하다고 생각한 정책을 적확 하게 실행해 간 그의 수완은 ‘대단하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습니다.

어쨌든 그의 치세는 30년에 이르렀습니다. 현대의 민주주의 국가라도 30년이나 지도자의 위치를 계속 지키는 인물은 지금까지도 없었고 앞으로도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페리클레스는 그것을 해 냈습니다.

더구나 그의 시대 때 아테네는 절정기에 이르렀으므로 만점을 줄 수밖에 없습니다. 지도자의 수완에 있어서도, 또 실제의 성과에 있어서도 페리클레스는 동서고금의 가장 뛰어난 정치가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민주정체에서 지도자로서 계속 지도해 나간다는 것은 말하자면 가느다란 로프 위를 걸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변하기 쉬운 민중의 마음을 능숙하게 지배하기 위해 지적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해 스스로를 제어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관철하는 강한 의지를 갖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니까 지적 능력, 자기 제어 능력, 지속하려는 의지에 대해서 문자 그대로 만점입니다. 또한 지도자로서의 격무를 30년이나 해내었으니까 육체적 내구력도 더할 나위 없습니다.

그리고 남은 한 가지, 설득력에 있어서도 페리클레스는 훌륭했습니다. 페리클레스가 연설을 하면 청중은 흰 것을 검다고 해도 믿을 정도였습니다. 플루타르코스는 “만약 수많은 관중 앞에서 페리클레스가 레슬링 시합에 지고서도 그가 ‘내가 이겼다.’ 고 주장하면 대중은 그것을 믿었을 것이다.” 라고 썼습니다.

따라서 페리클레스는 카이사르와 함께 만점을 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의외의 약점

 

이에 비해 알렉산드로스는 어떨까요?

 

분명히 ‘지적 능력’의 관점에서는 만점입니다. 당시 그리스 세계는 페르시아 전쟁에서 이겼다고는 하지만 항상 페르시아에게 공격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알렉산드로스는 그리스 탄생 이래 처음으로 페르시아에 쳐들어갈 계획을 실행으로 옮겼을 뿐 아니라,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기병을 활용하는 방법까지도 궁리해 냈습니다. 그리고 아군의 열 배가 넘는 규모의 페르시아 군과 싸워 압승했으니 확실히 천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지속하려는 의지’ 라는 관점에서도 트집을 잡을 게 없습니다. 알렉산드로스의 마케도니아는 당시 그리스에서는 동맹의 맹주였지만 동맹이 결코 굳건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의 동방 원정을 반대하는 의견도 세찼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켰습니다. 그건 굉장한 일입니다.

하지만 냉정하게 바라보고 엄격하게 말하면 알렉산드로스에게는 말로 설득하는 능력이 부족했습니다. 그렇다고 설득력이 전혀 없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에서 동방 원정에 소극적이던 사람들을 그 나름대로 처리했기 때문이지요.

그렇긴 하지만 역시 그는 말보다 행동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위험한 지역에는 스스로 나아가서 싸웠습니다. 물이 없어 병사가 괴로워하면 그 자신도 물을 마시지 않고 함께 괴로워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입니다.

 

그렇게까지 하면 부하는 뒤따른다. 과연 알렉산드로스로군요.

 

분명히 그러한 측면은 무장으로서는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그의 부하들은 멀리 인도까지 함께 갔습니다. 하지만 그런 모습의 알렉산드로스에게 심취하는 것은 그의 행동을 가까이서 보고 있는 사람에게만 한정됩니다. 행동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역시 수많은 인간을 움직이려면 말로 설득하지 않고서는 어렵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알렉산드로스에게는 100점 만점을 줄 수 없습니다.

또한 지적 능력이 뛰어나고 지속하는 의지는 강했어도 그는 자신의 비전을 실현하기도 전에 33세의 젊은 나이로 죽어 버렸습니다. 그 같은 의미에서 ‘육체적 내구력’은 100점 만점을 매길 수 없습니다. 먼 길의 원정에서 체력을 너무 많이 소모했을 것이라는 정상 참작의 여지는 있지만 70점입니다.

‘자기 제어 능력’ 에 대해서는 사실 100점 만점을 매기고도 싶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는 고대 그리스인의 통례와 다르지 않게 과음을 해 버렸습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술을 그렇게 좋아했습니까?

 

어쨌든 그리스인은 ‘포도주의 신’ 디오니소스를 섬긴 사람들이니까요. 고대의 포도주는 지금보다 훨씬 알코올 도수가 높아 물에 타서 마시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술을 좋아하는 것 자체를 크게 나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알렉산드로스의 경우는 가끔 자신을 제어하지 못할 만큼 취했습니다. 그래서 술에 취한 상태에서, 충고하려는 친구를 죽여 버렸다는 등 좋지 못한 이야기가 많이 남아 있습니다. 이러한 충동적인 일이 자주 되풀이되면 부하의 덕망도 줄어들겠지요. 그 점을 감안하면 자기 제어 능력은 80점이라고 판단됩니다.

 

 

한니발에게 결여된 것

 

비로마인의 세 번째 인물인 한니발은 지적 능력과 설득력에서 점수가 낮군요. 설득력은 접어 두고라도 그토록 로마를 휘저었음에도 불구하고 지적 능력이 85점밖에 안 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요?

 

알렉산드로스의 전법을 완전히 습득하여 그것을 전장에서 응용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는 분명히 한니발의 지적 능력은 높습니다. 또한 한니발은 정보가 중요하다는 점을 알고 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전쟁터에 나가기 전에 미리 적의 실정을 파악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은 것이 무모한 일로 보입니다만, 실은 사전에 다양한 정보를 모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를 넘는 일이 결코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이탈리아 반도에 쳐들어간 것은 다양한 정보를 종합한 다음 ‘이 정도라면 이길 수 있다.’ 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아주 신중한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처럼 치밀한 한니발이라고 해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 로마인의 ‘패자도 동화시킨다’ 는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한니발은 로마군 을 동맹국의 눈앞에서 완패시키면 반드시 동맹국은 로마를 배반하고 자신의 아군이 된다고 판단했습니다.

이탈리아 반도가 아니라면 그의 계산대로 성공했겠지요. 그러나 정보 수집에 여념이 없었던 한니발도 로마 연합이 하나의 운명 공동체에 묶여 있었다는 것은 간파하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한니발은 16년에 걸쳐 이탈리아 반도에서 계속 싸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라는 라이벌을 등장하게 만듭니다.

게다가 ‘자마 전투’에서 한니발은 스키피오에게 패배합니다. 스키피오는 한니발의 전법을 모방했기 때문에 스승에 해당하는 한니발을 이겼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겁니다.

한니발이 이탈리아 반도에서 고전하고 있었지만 결코 기세가 약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때 나이가 44세로, 그리 늙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젊고 경험이 없는 스키피오에게 졌으므로 아무래도 점수가 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한니발의 지적 능력은 85점이고 스키피오는 95점이군요?

 

스키피오와 한니발은 자마 전투 전말 밤에 회담을 합니다. 대결전이 있기 전에, 게다가 고대 명장 베스트 5에 들어가는 두 장군이 만났으니, 이것은 바로 역사적 사건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 담판에서 한니발은 연하인 스키피오에게 생각을 바꾸라고 촉구합니다. 요컨대 “이 싸움에서 지면 자네는 완전히 파멸할 것이네.” 라고 하였을 것이지만, 이 설득에 스키피오는 동요하지 않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스키피오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나는 당신에게 내일의 대규모 전투 준비나 잘하라고 권하는 것밖에 말할 게 없다. 왜냐하면 카르타고인, 아니 특히 당신은 평화 속에서 사는 것이 무엇보다도 서투른 것 같으니까.”

 

한 수 위라는 느낌이 드는군요.

 

어쨌든 스키피오는 로마 원로원이 ‘일인자’ 파비우스를 상대로 당당히 논전을 벌여 원로원 의원들의 마음을 움직일 만큼 설득력이 뛰어난 인물입니다. 결국 설득력이라는 것은 요컨대 적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정도의 힘입니다. 그 점에서 한니발은 아군을 고무시키는 힘은 있어도 적을 움직일 만한 설득력은 없었습니다.

만약 한니발에게 스키피오 정도의 설득력이 있었다면 로마 연합에서 이탈한 동맹구도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예는 끝내 없었으니까 역시 설득력은 아슬아슬 한 합격 점인 65점 밖에 줄 수가 없습니다.

 

 

‘좌파 인텔리’ 브루투스

 

이제 공화정 시대 로마인들이 성적표를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불합격 그룹부터 알아보기로 하죠. 우등생을 먼저 살피고 가는 것보다 이렇게 하는 것이 나쁜 본보기로서 참고가 될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카이사르를 죽인 마르쿠스 브루투스의 점수가 가장 낮군요. 그는 이 정도의 인물이었습니까?

 

현대인이 알기 쉽게 말하면 이 사람은 요컨대 좌파 인텔리였습니다. 자신은 확실한 비전이 없으면서도 타인이 하는 일에는 큰소리로 비판을 합니다. 즉 ‘비판을 위한 비판’ 입니다. 게다가 좌파 인텔리라면 좌파 인텔리답게 선동 연설을 한다면 그런 대로 낫겠지만, 그의 연설에서는 도무지 재미라고는 느껴지지 않습니다.

로마에서는 어느 정도 수준 있는 가정 자제라면 교양과목 중 하나로 사람을 설득하는 기술, 즉 수사학을 배웁니다. 브루투스의 경우 어렸을 때는 그리스인 가정교사에게 배웠고, 그 후에는 아테네, 페르가몬, 로도스 섬에서 공부합니다. 당시 로마인으로서는 최고의 유학 장소를 선택해 공부한 것입니다. 현대로 말한다면 자기 나라의 대학을 졸업한 다음 옥스퍼드, 예일, 소르본 등에 유학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교양만은 남아돌 만큼 갖추고 있었을 텐데 자신의 말로 상대를 설득하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 카이사르가 우연히 젊은 브루투스의 연설을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소감을 말해 달라는 청을 받은 카이사르는 이렇게 평가합니다.

“저 청년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강렬하게 요구하고 있다는 것만은 알겠다.”

 

강렬한 야유로군요.

 

나라면 자신이 쓴 글에 대해 그 같은 비평을 받았다면, 그야말로 밤에 잠도 자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카이사르의 비평은 옳았던 것 같습니다. 카이사르 암살을 결행한 다음날 브루투스는 많은 로마 시민들 앞에서 자신들은 국가 로마을 위해 카이사르를 찔렀다는 연설을 합니다. 이에 대한 청중의 반응은 전혀 없었습니다. 찬성은커녕 야유하는 소리조차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의 연설이 얼마나 지루했는지 짐작이 갑니다.

 

카이사르를 살해한 복고주의자들

 

설득력이 20점이라는 것은 이해가 갑니다. 그렇게 많은 학문을 연마한 인텔리인데 브루투스의 지적 능력이 30점이라는 것은 너무 낮지 않습니까?

 

지도자의 자질로서 ‘지적 능력’ 이라는 것은 학문을 통해 얻어진 ‘지식’ 과는 전혀 별개입니다. 브루투스는 지성을 갖췄다고 생각하지만 지적 능력이 부족했습니다.

그럼 지적 능력이란 무엇일까요? 지적 능력의 정의에는 열거 가지가 있지만,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지적 능력이란 현상을 정확하게 파악한 다음의 문제 해결 능력이라고 할 것입니다. 선견지명도 거기에 포함되겠지요.

이른바 인텔리 교육을 받았으니까 현상에 대한 비판은 나름대로 할 수 있습니다. 브루투스의 경우는 공화정이 옳다고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카이사르 한 사람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은 좋지 않다.” 고 주장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럼 이 격변하는 시대에 대응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 에 대해서는 아이디어가 전혀 없었습니다. 무작정 반대하는 입장만을 시종일관 밀고 나간 것입니다. 카이사르를 죽인 뒤의 계획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나쁜 것은 나쁘다’ 는 입장이었군요.

 

현대 이탈리아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에서는 브루투스와 그 동지들의 카이사르 암살을 ‘복고주의자의 자기도취가 가져온 무익과 유해뿐인 비극’ 이라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브루투스나 그 동료들에게는 ‘카이사르를 죽이면 공화정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공화정으로 돌아가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는 정도의 간단한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현실은 그렇게 간단한 것은 아닌데 말입니다.

실제 그들이 한 일은 로마에 혼란을 가져오기만 했습니다. 최종적으로는 카이사르의 유지를 계승한 옥타비아누스, 즉 아우구스투스가 내란을 수습합니다만, 거기에 이르기 전에 옥타비아누스 대 브루투스, 그 다음에는 옥타비아누스 대 안토니우스의 내전이 일어나 로마인은 피를 흘립니다. 그 원인을 제고한 것은 다름 아닌 브루투스와 그 동지들이었습니다.

따라서 브루투스에게는 좋은 점수를 줄 수가 없습니다. 비판만 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카이사르를 암살 했다는 점만은 다소 평가를 받을 수도 있기 때문에 ‘지속하려는 의지’ 에는 60점을 주었습니다만, 나머지는 전부 불합격입니다.

 

법정 변호사 키케로

 

브루투스와 동지들의 ‘공화정으로 돌아오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는 것은 ‘전쟁을 포기하면 평화가 온다’ 는 패전 뒤 일본 인텔리들의 주장과 닮았군요.

 

어느 시대라도 지식인은 현실에 대한 통찰 능력만큼은 우수합니다. 지금 세상의 어디가 잘못되어 있는지에 대한 비판을 하라고 하면, 그들은 몇 가지를 이야기하고 날카로운 말도 합니다. 하지만 거기서 더 나아가는 구체적인 제안은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그것이 지도자와 지식인의 큰 차이입니다.

그 점에 있어서는 브루투스보다 키케로가 훨씬 우수하지만 본질적으로는 똑같습니다. 키케로는 로마를 대표하는 지식인으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키케로도 현실 비판은 우수하지만 그 이상은 아닙니다. 키케로는 비평가나 언론인으로서는 초일류이지만 그의 논지는 ‘글로 써 놓았다’는 식의 이상주의에 지나지 않습니다.

결국 키케로는 ‘서재 속의 사람’ 이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가 남겨 놓은 문장은 분명히 훌륭하지만, 그것을 현실 생활에서 활용하는 문제에 이르면… 역시 전형적인 지식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키케로는 실생활에서도 웅변가였다고 합니다.

 

그 부분이 오해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이름을 날린 것은 오로지 법정 변호사로서의 활약입니다. 고대 로마 법정은 현대의 미국과 비슷해 배심원들이 있고 그들이 판결을 내립니다. 그러니까 그 배심원을 설득하는 것이 법정 변호사가 맡은 일인데, 정치가의 연설과 변호사의 연설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어디가 다른가 하면, 배심원은 적도 아니고 아군도 아닙니다. 판결을 내리는 것이 배심원의 역할인 만큼 이해관계가 있어서는 곤란합니다.

키케로는 그러한 ‘제삼자’ 를 설득하는 일에 능수능란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도자의 연설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아군을 포용력 있게 구슬리고 자신의 반대파도 설득해야만 처음 자신이 생각했던 정책을 펼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연설을 과연 키케로가 할 수 있었을지 나는 의문입니다.

키케로의 문장은 분명히 뛰어나지만 어딘지 모르게 감정적입니다. 저처럼 간결 명쾌하고 논리적인 문장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는 답답하다는 느낌마저 듭니다. 키케로는 역시 법정 변호사였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카이사르의 연설 능력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할리우드의 재판 영화를 보면 잘 알 것입니다. 미국의 법정 변호사가 하는 일은 검찰관을 논파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컨대 배심원의 동의를 얻으면 됩니다. 따라서 논리적으로 명쾌하게 변론하는 것도 중요합니다만, 그것보다 상대의 심정에 호소하는 편이 유리합니다. 키케로의 변호도 그런 타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정치가의 연설이 감정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말인가요?

 

당연하죠. 연설을 듣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그들의 현실적인 생활 문제가 관계되어 있습니다. 이 개혁을 시행하면 구체적으로 자신에게 어떤 이점이 있는지 그 말이 듣고 싶은 것입니다. 그것을 명쾌하게 전하지 못하면 아무도 납득하지 못합니다. 너무 무미건조해도 곤란하지만, 간결함과 명쾌함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키케로 자신은 연설을 잘하지 못했지만 명쾌하게 연설을 잘하는지 못하는지 평가할 수 있는 판단력은 있었습니다. 내가 키케로에게 비교적 후한 점수를 준 것은 그 점에서 두뇌가 명석하다는 것을 고려했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키케로는 카이사르를 높이 평가했습니다.

 

이 책에서도 소개했습니다만 키케로는 카이사르의 문장을 “그 이상일 수 없다.” 고 할 정도로 절찬했습니다.

“카이사르의 문장은 그것을 말로 하든 글로 쓰든 다음과 같은 특징이 나타난다. 즉 품격 높고 빛나며 장려하고 고귀하며 무엇보다도 이성적이다.”

 

카이사르의 연설을 실제로 들어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전적으로 동감입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등 후세에 전해지는 카이사르의 명구들이 많은데, 지식인이라고 평가 받는 키케로의 연설과는 달리 카이사르의 이야기는 누가 들어도 강렬한 인상을 받게 됩니다.

폼페이우스와의 내전이 끝난 후 카이사르 군단의 병사들이 보너스를 요구하면 파업을 합니다. 전쟁에 이긴 것은 자신들의 덕분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카이사르의 대리인으로 안토니우스가 나가 설득을 하지만 병사들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거기에 카이사르가 나타나 그들에게 한마디 말을 하자 스트라이크는 종결됩니다. 이때 그가 한 연설은 <로마인 이야기> 제5권에 소개돼 있습니다.

카이사르는 상대방이나 그 상황에 맞춰 거기에 적합한 연설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원로원이라면 원로원 의원에 어울리게, 또한 역전의 강자인 군단 병사에게는 그에 어울리는 어투를 구사할 줄 알았습니다. 게다가 그것은 연기가 아니라 극히 자연스럽게 이끌어갔습니다. 카이사르는 연설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검투사 수준’ 이라고 혹평 당한 안토니우스

 

마침 안토니우스의 이름이 나왔으니 그에 대해서도 듣고 싶습니다. 이 인물에 대해서도 아주 낮은 평가를 내렸군요. 육체적 내구력을 제외하고는 모두 최하의 점수에 가깝습니다. 적어도 옥타비아누스와 나란히 카이사르의 후계자 지리를 다투었고, 클레오파트라와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을 만큼 능력을 가진 남자였으니까 좀 더 좋은 점수가 나오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만.

 

키케로가 안토니우스에 대해 어떤 비평을 내렸는지 듣고 나면 표정이 바뀔 것입니다. 키케로는 그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기골만 장대할 뿐 교양이 없는 사람이며, 술에 취해 천한 창녀와 시시덕거리는 것밖에는 능력이 없는 검투사 수준의 남자였다.”

너무나도 정직하게 썼기 때문에 키케로는 나중에 안토니우스에게 살해를 당하고 펜을 드는 오른팔이 잘립니다. 그렇지만 나도 이 점만은 키케로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어차피 안토니우스는 군단장 급의 인재였습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군단장에게 요구되는 것은 최고 사령관이 지시한 작전만 충실히 이행하는 능력이며, 본질적인 지적 능력은 꼭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데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의 부관으로 발탁되었고, 그로 인해 자신을 사령관도 될 수 있는 그릇이라고 스스로 굳게 믿어 버린 것이지요. 실제로는 카이사르가 이미 안토니우스의 능력을 포기하고 있었지만, 본인은 그것조차 깨닫지 못했습니다. 자신이야말로 카이사르의 후계자라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비극을 넘어 희극적이기까지 합니다.

안토니우스는 설득력도 없고 자기 제어 능력도 없었습니다. 안토니우스가 카이사르 군단의 스트라이크를 수습할 수 없었던 이야기는 바로 앞에서도 했습니다만, 그 정도라면 그래도 괜찮습니다.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를 설득하려다 설득하기는커녕 오히려 클레오파트라에게 농락당해 버렸으니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재능을 겸비한 클레오파트라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하고 로마가 지배하는 지중해의 동쪽 반을 클레오파트라에게 주겠다고 선언합니다. 안토니우스보다 클레오파트라가 한 수 위였을까요?

 

내 입장에서 얘기하면 안토니우스도 클레오파트라도 결국은 서로 닮은 사람들입니다.

클레오파트라는 그리스어나 라틴어는 물론 이집트 민중의 말까지 이해할 정도로 재능이 뛰어난 여왕이었습니다. 하지만 바로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지성과 지적 능력은 다릅니다.

그녀가 만약 단순한 왕녀라면 그 교양은 매력이었겠지요. 그러나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의 여왕이었습니다. 즉 한 나라의 주인으로 백성을 책임져야 하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안토니우스를 조정(종?)만 하면 이집트가 지중해의 반을 지배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녀에게는 현실 인식 능력조차 없었다는 증거입니다.

원래 그녀가 여왕 자리를 어떻게 지킬 수 있었을까요? 사실상의 종주국인 로마가 그녀의 지위를 보장해 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로마는 언제라도 이집트를 정복해 로마의 속주로 만들 힘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이집트의 특수한 나라 사정을 고려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클레오파트라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특수한 나라 사정이란 무엇인가요?

 

이집트에서는 역대 왕은 모두 신이라고 여겨져 왔습니다. 이것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이집트를 정복하고 그리스 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되어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즉 이집트 국민에게는 왕이 신이었습니다. 그들에게 그것이 잘 어울렸습니다.

그 이집트를 로마가 지배하면 어떻게 될까요? 공화정인 로마에는 사람이 신이라는 사상이 없으니 당연히 문화 마찰이 일어날 것은 불 보듯 훤합니다. 그래서 로마는 이집트를 일부로 동맹국으로 남겨 두고 클레오파트라를 여왕으로 묶어 놓자는 판단을 내린 것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사정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이집트의 여왕이라면 지중해의 반을 넘겨 받아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녀에게는 현실 인식 능력조차 없었다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클레오파트라는 미인이었을까요?

 

엉뚱한 질문입니다만 클레오파트라는 정말로 미인이었을까요?

 

역시 남성은 그것이 궁금한가 보군요. (웃음)

 

파스칼은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더라면 역사가 바뀌었을 것이다.” 라고 했지만, 이에 대해 일본의 소설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茶川龍之介)는 “그런 입장에 있는 여성이라면 조금 코가 낮았어도 역사는 바뀌지 않았을 것이다.” 라고 반론하였습니다.

나는 아쿠타가와 의 의견에 찬성합니다. 실제 그녀의 초상이 조각으로 남아 있습니다만 그것을 보면 그다지 미인이었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성의 인상은 꼭 얼굴만으로 정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태도나 행동거지, 내면의 자아, 혹은 자신을 어떻게 보이게 하는가 하는 연출 등과도 많은 관련이 잇기 때문에 다소 코가 낮아도, 그녀의 경우는 상관없었을 것입니다.

안토니우스와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보라색 돛을 둘러친 금빛의 배를 타고 사랑의 여신 비너스로 분장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47세의 안토니우스는 이 연출만으로도 흥분했을 것입니다.

더구나 클레오파트라는 지도자에게 필요한 지적 능력은 없어도 교양은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지가 풍부한 대화도 나눌 수 있는 보기 드문 여자였겠지요. 당시의 지중해 세계에서는 매우 매력적인 여성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아무튼 한때는 카이사르마저 그녀에게 반했을 정도이니까요. 자, 그것은 어떻게 된 일일까요?

 

이집트의 왕위 계승 문제를 해결한 뒤 카이사르는 곧바로 로마에 돌아가지 않고 나일 강에 배를 띄우고 클레오파트라와 두 달을 함께 지냅니다. 그것을 보고 주위에서는 ‘카이사르가 클레오파트라에게 농락당한 것이 아닐까?’ 하고 걱정했습니다. 현대에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때의 카이사르는 갈리아 원정부터 시작해서 전투의 연속이었습니다. 폼페이우스와 치른 전쟁도 막 일단락되었으니 조금 휴식을 취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다행히 클레오파트라라는 알맞은 의논 상대도 있었던 정도가 아니었을까요?

게다가 이때 카이사르는 52세, 한편 클레오파트라는 아직 21세. 무엇보다도 젊은 여자는 젊다는 것만으로도 매력적인 존재이지요. 그러나 젊으니만큼, 카이사르로서는 자신이 반한 것처럼 클레오파트라를 착각하게 만드는 것쯤은 누워서 떡 먹기 였겠지요.

 

카이사르 쪽이 훨씬 능숙했다는 말씀이로군요.

 

야망과 프라이드

 

하지만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가 자신의 매력에 사로잡혔다고 굳게 믿습니다.

그것이 환상이었음을 그녀가 깨달은 것은 카이사르가 죽고 그의 유서가 공개되었을 때였습니다. 유서에는 클레오파트라도, 그녀와 카이사르 사이에서 생겼다고 하는 아들 카이사리온도 전혀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카이사르로서는 그녀나 아들을 언급하지 않는 편이 결과적으로 이집트에 도움이 되고 그녀를 위하는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지만, 그녀는 그렇게 맏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에게 배신당했으며 망신당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녀가 나중에 안토니우스와 결혼해 지중해의 반을 요구한 배격에는 틀림없이 이때의 굴욕감을 만회하겠다는 욕망이 담겨 있었을 것입니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 고 하지요.

 

그렇게까지 이야기를 왜소화시켜 버려도 좋을지 모르겠네요. 무모하다고는 해도 그녀는 이집트의 판도를 확대해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필적할 만한 대제국을 동방에 만들려는 야망을 품고 있었습니다.카이사르나 안토니우스에게 접근했던 것도 결국 그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지속하려는 의지’는 70점이군요.

 

하지만 그 야망도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연합군이 옥타비아누스에게 패한 순간에 무너져 버립니다.

안토니우스가 자살한 뒤 클레오파트라는 수도 알렉산드리아에서 옥타비아누스와 단둘이 마주합니다. 이때 39세의 여왕은 33세의 승자를 자신의 매력으로 유혹하려고 했을 것이라는 말도 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처럼 집념이 강한 클레오파트라라면 옥타비아누스에게 구애를 했다 해도 이상할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그것은 당신이 여자를 잘 모른다는 증거입니다.

고양이가 자신을 귀여워해 주는 인간을 식별하듯이, 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만난 순간 그 남자가 자신을 받아들일지 어떨지를 간파할 수 있습니다.

그녀는 옥타비아누스의 차갑고도 조용한 눈을 보는 순간, 그것을 바로 알아차렸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부질없는 일이라고 금방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추태를 부리는 행동 따위를 자존심 강한 클레오파트라가 했을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조상들이 잠든 사당 안에서 그녀는 독사를 풀어 놓아 자신을 물게 해서 자살합니다.

 

안토니우스와 함께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하죠? 생각해 보면 불쌍한 여성입니다.

 

분명히 한 사람의 여성으로서 본다면 동정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한 나라의 여왕이며, 그 행동이 이집트 백성의 모든 삶에 영향을 주는 존재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역시 그녀를 좋게 평가할 수 없습니다.

 

스키피오의 ‘아킬레스건’ 이란

 

그럼 이제 우등생 그룹 쪽으로 이야기를 옮기겠습니다. 우선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입니다. 로마를 망국의 위기에서 구한 영웅이니 모두 100점을 줘도 될 것 같은데요.

 

한니발과 결전을 벌인 시점만을 보면 분명히 스키피오에게는 만점을 주어도 좋습니다만, 유감스럽게도 그는 한니발과 전면적으로 대결한 뒤에는 타오는 후의 불꽃처럼 재만 남았다는 관점이 있습니다.

제2차 포에니전쟁 뒤 그는 원로원의 ‘일인자’ 가 되지만, 최후에는 탄핵 재판이라는 시시한 올가미에 걸려들어 버립니다. 그 재판에서 이유를 대고 얼마든지 벗어날 여지가 있었고, 실제로 그렇게 된 순간도 있었지만 결국은 그 자신이 재판을 포기해 버렸습니다. 반 스키피오 파의 음습한 방식에 진저리를 느끼는 그 감정이 인간적이라고는 생각합니다만, 그렇다고 은퇴해 버린다는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다만 그가 그런 선택을 한 데는 이유가 없지 않았습니다. 젊었을 때부터 여러 차례 큰 병을 앓은 탓에 탄핵 재판 때는 건강이 상당히 악화되었습니다. 반 스키피오 파가 그를 재판에 세우려고 한 데는 건강도 하나의 동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스캔들이란 그 사람이 건강하게 활약하고 있을 때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조금이라고 약점이 드러난 순간에 스캔들은 적의를 드러냅니다.

따라서 스키피오의 경우는 지적 능력이나 설득력, 자기 제어 능력, 지속하려는 의지에 대해서는 전혀 트집 잡을 때가 없습니다만, 육체적 내구력의 약함이 그의 다른 장점들을 방해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역시 지도자란 건강하지 않으면 안 되겠군요.

 

중요한 것은 체력이 강하다거나 운동 능력이 높다는 얘기가 아니라 얼마나 오래 통치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아우구스투스는 카이사르에 비하면 조금도 강건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병약했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육체가 약하다는 것을 숙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결코 무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77세까지 살 수 있었습니다.

스키피오의 경우, 탄핵 재판 당시 아직 48세였습니다. 한창 일할 나이였습니다. 건강 부진이 그에게 화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스키피오의 채점은 육체상의 내구력이 65점, 다른 네 항목도 만년이 좋지 않았으므로 조금씩 감점입니다.

 

 

시대를 뛰어넘는 그라쿠스 형제의 설득력

 

그라쿠스 형제의 고득점은 조금 뜻밖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그들은 분명히 ‘혼미의 시대’ 최초로 개혁을 제창하기는 했지만 결국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정치는 결과론’ 아닙니까?

 

분명히 지도자에게 중요한 것은 국가나 국민에게 결과적으로 선이었나 하는 것이며, 동기의 선악은 관계없습니다. 어떤 동기라고 좋은 결과를 남겼으면 좋은 지도자인 것입니다.

그라쿠스 형제의 경우는 그들이 살아 있을 동안에는 분명히 좋은 결과를 남길 수 없었습니다. 원로원의 방해로 마지막에는 살해당해 버리니까요.

그러나 좀 더 시간 폭을 길게 취해서 그들의 공적을 검증해 나간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 결과가 이 점수입니다.

티베리우스와 가이우스 두 인물은 호민관으로서 다양한 정책을 내세웠습니다. 그 중에는 소득 격차를 줄이기 위한 농지개혁도 있고, 실업대책으로서의 식민 도시의 건설, 시민권의 개혁도 있었습니다. 물론 이것들은 당시에는 모두 좌절돼 버리지만, 결국은 카이사르에 의해 모두 실현됩니다. 즉, 그들의 정책에 대해 시기상조라는 비판을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누구보다도 먼저 로마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간파하고 그 구체적인 대책을 명확히 내세운 것만은 인정해 쥐야 합니다. 그들은 지도자에게 꼭 필요한 ‘지적 능력’ 을 충분히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생존해 있을 동안에는 원로원을 설득할 수 없었다고 하더라고 그들의 주장은 1세기 후 로마인의 마음 깊이 남게 됩니다. 카이사르는 공화정을 부정하고 제정을 향해서 길을 열었습니다만, 그 카이사르의 원점이 되었던 것이 다름 아닌 이들 형제들이었습니다. 따라서 후세에 대해 설득력이라는 의미에서 그들의 공로는 아주 큰 것이었습니다.

이상의 이유에서 나는 그들의 ‘지적 능력’ 과 ‘설득력’ 에 90점이라는 점수를 주었습니다.

그렇지만 원로원을 공연히 자극한 것은 다소 확신범이라 할 수 있으며, 정치가로서 보았을 때 좋은 일이 아닙니다. 좀 더 시간을 들여 원로원 대책에 나섰다면 다른 결과가 일어나지 않았을까 하는 가정도 성립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자기 제어 능력은 약간 엄격하게 70점, 살해당했다고 해도 요절했으므로 육체적 내구력도 60점입니다.

그러나 당시의 로마에서 원로원을 적으로 삼을 각오를 하고 여러 개혁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게다가 동생 가이우스는 형이 참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형과 같은 길을 걸었습니다. 따라서 ‘지속하려는 의지’는 만점입니다.

 

 

적으로 삼고 싶지 않은 남자, 술라

 

술라는 이 책에서도 자주 카이사르와 대비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점수가 생각했던 것보다 좋지 않습니다. 특히 자기 제어 능력은 60점으로 아슬아슬하게 합격 점이로군요.

 

내가 보는 술라의 인상은 ‘지적 능력을 가진 맹렬한 남자’ 라는 이미지입니다.

그 자신이 직접 새긴 묘비명에 ‘아군에게는 술라 이상으로 좋은 일을 한 사람이 없고, 적에게는 술라 이상으로 나쁜 일을 한 사람이 없다’ 고 되어 있듯이, 적이 되어 버리면 그처럼 무서운 남자는 없습니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와 자웅을 가리게 됩니다만, 만약 폼페이우스가 아니라 그 우두머리에 해당되는 술라와 싸웠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간단하게는 결론이 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특히 술라는 싸움터의 사령관으로서는 최고의 인물이었지 않습니까? 그에게는 어떤 사태의 변화에도 즉시 대응할 수 있는 유연한 발상력 뿐만 아니라 부하를 파악하는 능력이 아주 뛰어났습니다. 만약 그가 럭비나 축구선수가 되었으면 ‘불세출의 넘버10’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 같은 술라의 지적 능력이 원로원의 부흥으로 향해졌습니다. 아무리 술라의 지략이라고 해도 시대의 흐름을 역전시키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만큼 감점해서 지적 능력에 대해 95점을 매겼습니다.

그럼 설득력은 어떨까요? 그것은 평가하기 어렵습니다.

원래 술라에게는 적을 설득하겠다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무리는 무조건 넘어뜨린다는 타입입니다. 바꿔 말하면 팬터마임을 쓰지 않습니다.

이런 인물은 아군에게는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습니다. 무엇보다 행동이 명쾌하기 때문이죠. 그러나 적의 입장에서는 무척 어려운 상대입니다. 교섭의 여지가 없기 때문에 백기를 내걸거나, 아니면 옥쇄할 각오로 철저 항전을 하거나 하는 양자택일밖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하지만 술라의 경우, 그가 너무 강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적들은 항복해 버렸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적을 설득하려고 하지 않는 것도 나쁜 것은 아니라는 결론도 나올 법합니다.

그것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 폰토스와의 싸움입니다. 동맹자 전쟁으로 로마가 혼란스러운 틈을 타서 소아시아의 폰토스 왕 미트리다테스가 그리스에 침입합니다. 그것을 술라가 맞서 싸웠고, 열세에 몰린 폰토스 쪽에서 강화를 제안합니다.

그때 술라와 미트리다테스의 정상회담이 이루어집니다만 술라는 퐅토스 왕에게 변명의 기회를 일절 주지 않았습니다. ‘변명을 듣고 있을 틈이 없다. 로마가 낸 강화 조건을 수용할 것인지 수용하지 않을 것인지 대답은 둘 중 하나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국왕을 위협했다는 것입니까?

 

그럴 때의 술라는 정말 무서웠습니다. 그가 나중에 독재관이 되었을 때 그를 향해 소리 높여 비난한 시민이 있었습니다. 그때 그는 어떻게 했을까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힐끗 노려보았을 뿐입니다. 그러자 아무도 말대꾸를 하지 못하고 조용해졌습니다.

 

으름장이 통하는 남자였군요.

 

일종의 연기력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상대는 압도당해 버립니다. 술라는 그런 재주가 가능한 남자였습니다. 그러니까 사내다운 매력은 충분합니다만 설득력은… 겨우 80점 정도입니다.

삶의 방식이 그랬으니, 목적을 위해서도 물론 자신을 억제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자기 제어 능력도 합격 점 한계인 60점입니다. 의지의 견고함, 육체적 내구력은 물론 100점입니다.

 

양지의 카이사르, 음지의 술라라고 했던가요? 확실히 이 두 사람이 직접 대결했다면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폼페이우스는 ‘모범생 타입’

 

폼페이우스도 술라의 애제자 라고 할 만큼 분명히 싸움터에서의 지략에는 뛰어났습니다. 특히 젊었을 때는 불과 40일 만에 지중해의 해적을 일소 해 버렸을 만큼 전략이 뛰어났습니다. 그러나 지도자에 올려놓고 보면 역시 술라보다 격이 떨어진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폼페이우스에게 부족했던 것은 지속하려는 의지입니다. 원래 그에게 ‘이렇게 하고 싶다.’ 는 의지가 있었을까요? 어쩌면 그런 의지가 아예 없지 않았을까 생각될 정도입니다.

 

카이사르와의 싸움도 원로원의 의뢰를 받았기 때문에 싸웠다는 느낌이 듭니다.

 

폼페이우스는 스스로 목표 설정을 하지 못하는 타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타인에게서 목표가 주어지면 그것을 능숙하게 해결할 수는 있지만, 스스로는 목표를 만들어 내지 못합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그는 일종의 ‘모범생’ 타입이었는지도 모르겠군요.

 

 

아우구스투스의 성적표

 

이제 드디어 황제편이로군요.

 

로마의 제국 시대 이야기는 이 책에서는 다루고 있지 않아서 초기의 아우구스투스나 티베리우스 이외의 황제의 점수에 대해 세세하게 설명하는 것은 여기서 생략하겠습니다. ‘범인을 미리 알아 버리고’ 추리소설을 읽은 결과가 되기 십상이니까요.

실제로 각 황제의 전기를 읽은 다음에 이 채점표를 다시 확인해 보고, 내가 왜 이 같은 점수를 주었는지를 생각해 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 치더라도 아우구스투스의 점수가 생각보다 낮은 것이 궁금합니다. ‘위대한 연기자’로서 고생고생하며 로마제국이 기초를 만든 인물인데 좀 더 좋게 평가해도 되지 않을까요?

 

아우구스투스의 자기 제어 능력과 지속시키려는 의지에는 말할 것도 없이 100점을 주어야 합니다. 현실을 직시하지 않는 원로원을 상대로 참을성 있게 술책을 펴 가며 마침내 제국을 이루어 냈으므로 자신을 억제하는 능력은 완벽에 가깝습니다. 또 그렇게 고생해서 자신이 로마의 사실상 지배자가 되었어도 그는 변함없이 사치도 하지 않고 게으름도 피우지 않았습니다. 권좌에 오른 후에도 싫증을 내거나 해이해지지 않고 제국의 기초를 다지는 데 힘을 기울였으므로 지속시키려는 의지에 대해서도 트집잡을 것이 없습니다.

지적 능력에서 그는 카이사르의 의도를 완벽하게 이해해 그것을 구체화시켜 나갔으니까 보통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카이사르처럼 독창성이 없다는 점에서 95점입니다.

또한 육체적 내구력에서도 이미 말했듯이 허약 체질이었음에도 77세까지 살았으니 이 점은 좋게 평가를 내릴 만합니다. 그는 자신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일체 허세를 부리지 않았습니다.

권력자는 대부분 나이보다 젊게 꾸며 자신의 체력을 주위에 어필하고 싶어 하지만, 그에게는 그런 점이 전무합니다. 체력을 소모하는 군사원정은 아그리파나 티베리우스에게 맡겼습니다. 그것은 모두 로마제국의 기초를 만들기 위해 일찍 죽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래서 육체상의 내구력은 85점입니다.

그렇다면 설득력 면에서는 어떨까요? 분명히 그는 원로원과 잘 교섭해 나갔지만, 연설은 결코 능숙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서툴렀다고 봐야 합니다. 아무튼 원로원에서 연설을 하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고 야유를 들었을 정도였습니다. 카이사르처럼 적을 감동시키는 말을 할 수 있는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설득력은 80점을 주었습니다.

 

 

인기몰이를 하지 않은 티베리우스

 

아우구스투스의 뒤를 이은 황제가 티베리우스입니다. 티베리우스는 설득력과 자기 제어 능력에 대한 평가가 낮군요.

 

로마제국은 카이사르가 설계도를 그리고 아우구스투스가 그 기초를 구축한 장대한 건축물이었다고 생각합니다만, 그 장대한 건축물도 무능한 지도자의 손에 넘어가면 불필요한 개조를 가하거나 해서 당초와는 전혀 다른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로마제국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은 그 뒤를 이은 티베리우스가 철저하고 강건하게 건축물을 지켜 준 덕분이었습니다.

티베리우스 다음에 칼리굴라라든가 네로라는 황제들이 나타나지만, 그들이 아무리 체계 없이 경영을 해도 로마제국은 ‘파산’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티베리우스 덕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티베리우스는 치세 기간 중 철저하게 긴축 재정을 실시하여 로마제국의 재정을 안정시켰고, 또한 아우구스투스가 실행에 옮겼던 게르마니아 원정을 취소하고 라인 강의 방위선을 지켰으며, 나가가 도나우의 방비도 굳혔습니다

이처럼 수수하면서도 내실 있는 일을 제대로 완수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지적 능력, 지속하려는 의지 그리고 육체적 내구력의 소유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티베리우스에게는 설득력이 없었습니다. 그렇다기보다 설득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즉 ‘자신만 확실히 일을 하고 있으면 자기편 따위는 없어도 괜찮다.’ 고 생각하는 남자였습니다.

 

황제인데도 수도 로마와 떨어져 카프리의 별장에 혼자 틀어박혀 일을 했군요.

 

로마의 황제는 중국 황제와는 달리 천명을 받아 오른 것이 아닙니다. 로마의 주권자인 원로원과 시민의 지지가 있어야 비로소 황제의 자리에 앉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로마의 황제는 단어 선택이 좋지는 않지만 ‘인기 전술’ 에 마음을 썼습니다. 그래서 가고 싶지도 않은 투기 장에 얼굴을 내밀어야 했습니다. 시민에게 친근감을 주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카이사르조차 결코 생활하기에 쾌적하지 않은 로마 중심부에 거처를 두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시민과의 상호 접촉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티베리우스는 그런 것을 염두에 두지 않았습니다. ‘이만큼 일하고 있으니까 아무한테도 불평을 듣고 싶지 않다’ 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관료적, 귀족적’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사실 그는 명문 귀족 출신이었으므로 그것과도 관계가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설득력’ 은 낙제점인 50점밖에 줄 수 없고, 또 ‘자기 제어 능력’ 도 70점 정도입니다.

 

 

고독한 황제

 

다만 여기서 개인적인 소감을 말하자면, 티베리우스가 카프리 은둔 생활을 한 것에 동정해야 할 점도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를 모질게 비난할 마음이 없습니다.

 

무슨 뜻인지요?

 

요컨대 이 사람은 너무 정직합니다. 그렇게 때문에 로마에서의 생활을 견딜 수 없어 카프리에 틀어박힌 것 입니다.

먼저 그의 귀족적인 정신에서 보면 원로원은 아주 형편없습니다. 로마에 대한 책임감 같은 것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는 데 급급해 있습니다. 이 같은 무리들을 상대로 쓸데없이 시간을 소비하는 일이 견딜 수 없었겠지요.

그리고 또 하나 그가 참을 수 없었던 것은 가족과의 관계입니다. 티베리우스는 밖에서도 고독했지만 가정 내에서도 고독한 사람이었습니다.

원래 티베리우스에게는 비프사니아라는 사랑하는 아내가 있었는데 아우구스투스가 억지로 이혼을 시키고 자신의 딸 율리아를 그의 아내로 밀어 넣었습니다. 아우구스투스로서는 이것도 로마제국의 평안을 위한 것이라고 할 만했지만, 티베리우스의 입장에서 보면 참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더구나 율리아와 티베리우스는 잘 맞지 않았습니다. 가정사이니까 원인은 알 수 없지만, 아마도 귀족 정신을 가진 티베리우스에게 율리아의 낮은 품격이 견딜 수 없었을 것입니다.

결국 이들의 결혼생활은 아내 율리아의 부정이 발각되고 아우구스투스가 그녀를 유배시키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그러나 티베리우스의 불행은 계속됩니다.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 일가의 혈통을 이어받은 게르마니쿠스를 양자로 맞이하여 자신의 후계자로 세웁니다. 친아들도 있었지만 로마의 안정을 위해서 양자로 하여금 뒤를 잇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게르마니쿠스가 죽은 뒤 그의 아니 아그리파나가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아들을 다음 황제로 만들려는 운동을 벌입니다. 그녀는 아우구스투스의 손녀였기 때문에 그 아들은 초대 황제의 증손이 됩니다. 그녀는 혈통으로 봐도 자신의 아들이 황제가 되어야 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물론 이러한 공작을 티베리우스가 허락할 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그리피나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가정은 더욱더 험악해질게 뻔합니다. 당연히 그런 집에서 가출하고 싶은 심정이었겠죠.

 

티베리우스의 카프리 은둔 생활이 가출이었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런 면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가출의 목적지를 카프리로 선택한 것을 보면 그야말로 티베리우스라는 생각이 듭니다.

카프리는 나도 가 보았으며, 아주 쾌적하고 풍광이 좋은 곳이었습니다. 지중해에는 무수한 섬이 있지만 은둔 생활지로서 보면 카프리는 최고일 것입니다. 이런 곳을 가출 뒤 찾아간 것만으로도 역시 그의 좋은 가정 환경, 뛰어난 센스를 느낄 수 있습니다.

 

 

어떻게 로마는 중흥기를 맞이할 수 있었을까

 

티베리우스의 뒤를 이은 황제가 악명 높은 칼리굴라인데, 그 이후의 로마제국은 얼마 동안 어지러운 시기를 맞이하는군요.

 

로마 시민에게 평판이 좋지 않았던 티베리우스의 뒤를 이은 칼리굴라는 이전 황제와는 반대로 시민의 환심을 얻는 데만 열중해 국고를 거덜 내 버립니다.

그것을 역사가이기도 한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아우구스투스 노선으로 되돌려 어떻게든 회복해 놓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예술적 센스는 있어도 지도자로서 능력이 부족한 네로가 황제에 오릅니다.

그리고 네로 사후에는 로마 황제 자리를 갈바, 오토, 비텔리우스 셋이서 서로 뺏기고 빼앗는 시대가 얼마간 계속됩니다. 이 혼란을 베스파시아누스가 일단 수습하고 그 이후의 황제가 로마를 다시 반성 위로 올리는 노력을 해 나갑니다.

 

그것이 <로마인 이야기> 제11권에서 다룬 ‘5현제 시대’로 이어지는군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칼리굴라 이후 황제들의 이야기는 이 책에서는 다루지 않았기 때문에 황제들 각각의 채점은 생략하겠습니다.

다만 여기서 지적해 두고 싶은 것은 칼리굴라나 네로처럼 지도자로서 실격인 황제들이 나타나고, 세 명의 남자들이 제위를 둘러싸고 싸우는 내란 상태에서도 로마제국은 붕괴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 내란 후에 로마제국은 전성기를 맞이합니다.

 

아우구스투스나 티베리우스가 대단히 강건한 ‘건축물’을 완성시켰다는 말씀이군요.

 

그에 덧붙여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베스파시아누스 이후의 황제들이 로마제국이라는 일대 건축물의 유지 보수를 게을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채점표를 봐도 알 수 있듯이 베스파시아누스 이후 네 명의 황제는 결코 뛰어난 자질을 가진 인물들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직무가 제국의 유지 보수에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그것을 착실하게 실행해 나갔습니다.

그래서 트라야누스와 하드리아누스라는 두 명의 뛰어난 황제가 나타났을 때 그들이 마음껏 실력을 발휘할 수 있었으며, 그들에 의한 ‘5현제의 시대’가 도래했던 것입니다.

 

‘천국에 가고 싶거든 지옥의 길을 알라’

 

지도자를 다섯 가지 각도에서 분석한 이 방법론은 단지 그리스, 로마사를 해독할 뿐만 아니라 다양하게 응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치가뿐 아니라 기업의 경영자를 이 다섯 가지로 채점해 볼 수도 있겠지요. 국가나 기업이나 조직의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성과를 거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말이 훌륭해도 성과를 거두지 못하면 지도자로서 실격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거기에는 우선 현실을 정확하게 파악한 뒤 자신이 생각하는 정책을 어떻게 실현시킬까를 생각해 내는 지적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반대파도 자기편으로 만들 만한 설득력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지도자의 일은 격무이므로 그것을 해낼 수 있을 정도의 육체적인 내구력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목적 달성을 위해서 지도자는 자신의 욕망이나 감정을 절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때의 성공에 들떠 초지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또 이와 반대로 어떤 어려움이나 저항에 부닥쳐도 초지를 관철해 나가는 강함 또한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이 자기 제어 능력이고 지속하려는 의지입니다.

 

그러고 보면 이 다섯 가지 요소는 모두 ‘목적 완수’ 라는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흔히 ‘이상적인 지도자’ 의 조건으로 인격의 원만함이나 덕성 들을 요구합니다만 인격이 고결한 것과 목적을 달성하는 것은 직접적으로 아무 관련도 없습니다. 비록 인격에 문제가 있더라도 국민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큰 목적만 달성하면 그것이 좋은 지도자입니다.

 

그렇군요. 그래서 ‘팍스로마나’를 실현한 카이사르나 아우구스투스가 명정치가 이겠군요.

 

자주 논의되는 ‘철인 정치가’는 제가 볼 때는 전혀 무의미합니다. 마키아벨리의 말대로 ‘결과만 좋으면 수단은 항상 정당화되는 것’ 이 정치이며, 그들은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천국에 가는 가장 유효한 방법은 지옥에 가는 길을 숙지하는 것이다.”

이것도 마키아벨리의 말입니다만 이 말을 내 나름대로 의역하면, 지도자가 되려는 사람은 자신이 지옥에 떨어지기를 각오해야만 국민을 천국으로 이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로마의 유명한 지도자들은 모두 지옥에 떨어지기를 각오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것을 알려 드리고 싶어 나는 로마인의 이야기를 계속 써 왔는지도 모릅니다.

 

 

옮긴이의 말

 

당신을 매료시킬 멋진 남자들의 로마

 

로마 역사상 최고의 창조적 천재라고 하는 율리우스 카이사르, 지혜로 권력의 칭호를 하나씩 얻어 가며 황제의 자리를 굳혀 간 아우구스투스 등 수많은 영웅들이 로마에는 즐비했다. 그 중에서도 원로원에 맞서지 않고 스스로 정치적 은퇴의 길을 택하는 스키피오에게는 영웅이라는 칭호를 뛰어넘어 진정한 남자의 모습마저 보여 반할 수밖에 없다.

로마의 황제들은 군림하지 않았다. 지금의 CEO 수준보다는 조금 위였다고나 할까. 황제가 평민보다 권력 면에서 그리 높지 않다고 생각하면 유쾌하지 않은가.

병역에서도 힘 있는 귀족이든 평민이든 똑같이 병역의 의무를 치렀다. 오히려 자산 정도에 따라 귀족들은 더 많은 부담을 졌다. 병역을 면제받은 사람은 재산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었다. 말하자면 로마는 시민의 나라였다.

로마 역사를 일관하는 인재의 총집합체인 원로원에는 평민도 우수하면 의원으로 선출되어 정치의 중심에 설 수 있는 평등한 기회가 주어졌다. 귀족도 직접 농사일을 했으니까.

‘로마인은 인간성에 대한 환상을 품지 않았기 때문에 스스로에 대해서도 환상을 품지 않았다.’

‘실패를 인정하는 순간 주저 없이 개혁을 단행하는 용기를 잃지 않았다….. 단순히 반성만 하지 않고 패배의 원인이 내부에 있다는 것을 찾았다.’

인류 최초이자 마지막 보편 제국이었던 로마제국은 문화의 차이, 종교의 차이를 모두 감싸 안고 다양성을 인정했다. 정복자와 피정복자의 구분도 없었고 황제도 속국에서 나올 정도였다. 무엇보다도 지금의 인류가 로마인만 같았다면 종교 분쟁이나 문화 차이로 인한 전쟁을 할 필요가 있었을까.

한 권으로 읽는 로마인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지만 이 책에서 저자는 고대의 로마와 현대를 비교하면서 논했다. 한 부분씩을 묶어서 정리했기 때문에 이 한 권으로 로마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로마 이야기가 이 한 권속에 다 들어 있는 셈이다.

 

번역을 하는 동안 로마인, 로마의 멋진 남자들에게 나 또한 황홀하게 빠져 버렸다. 번역을 마치고 나서도 얼마 동안 나는 로마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지냈다.

저자 시오노 나나미도 로마를 연구하게 된 이유를 ‘로마인만큼 재미있고 멋진 사람들은 없는 것 같아서’ 라고 했다.

지금 나는 로마가도를 돌며 광활한 로마 영토를 여행하고 멋진 그들과 만나는 상상을 한다. 막연하게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라고 알고 있던 그 로마를.

 

옮긴이 한 성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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