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eld of dreams, trancending time & place, autobio in progress..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께서 이태리 레지오 단원들에게 하신 말씀

1982년 10월 30일

1 나는 여러분 한 분 한 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나는 우선 이태리 지역에서, 이렇게 많은 단원 여러분들이 이 자리에 오신 것을 보게 되니 정말 기쁩니다. 더구나 여기 오신 여러분이, 이렇게 많은 숫자임에도 불구하고, 지난 60년 동안 온 세계에 걸쳐 급속도로 성장한 저 거대한 사도직 운동 단체인 레지오 마리애의 작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할 때 더욱더 기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단체는 창설자인 프랭크 더프 씨가 세상을 떠난 지 2년이 지난 오늘날, 온 세계의 수많은 교구에서 활약하고 있습니다.
비오 11세를 비롯한 나의 선임자들께서도 레지오 마리애에 감사의 말씀을 드린 바 있으며, 나 자신도 1979년 5월 10일 여러분의 대표자들을 처음 맞이했을 때, 내가 과거에 레지오와 접촉하게 되었던 일들을 즐겁게 회상하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나는 파리, 벨지움, 폴란드에서 레지오 마리애와 함께 일한 경험이 있으며, 로마의 주교가 된 뒤에도 본당들을 사목 방문하는 길에 레지오 단원들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이 단체의 순례자 여러분을 맞이하면서, 교회 안에서 여러분의 영성과 생활 방식이 지니는 본질적 요소에 대해 강조하고자 합니다.

누룩이 되라는 소명
2 여러분은 믿을 통해서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이로써 개인 성화를 이루고자 열망하는 평신도 단체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고귀하고 성취하기 어려운 이상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오늘날 공의회를 통하여 모든 가톨릭 평신도들이 이 이상을 목표로 삼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즉, 평신도들이 거룩한 생활을 증거하고 극기와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왕다운 사제직에 참여하기를 바라고 있으며(제2차 바티칸 공의회문헌 :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10), 또한 교회는 평신도들이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가지고, 마치 육체 안에서 영혼이 활동하듯이 세상 안에서의 역할을 다해 주기를 요구합니다.(교의 헌장 38)
평신도로서의 소명, 곧 하느님 백성들 안에서 누룩이 되고, 현대 세계에 그리스도교적 이상을 부어 넣으며, 사제를 세상 사람들에게 모셔 가는 일들은 분명 교역자적인 임무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모든 평신도들이 이러한 교회의 부르심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주님과 더욱더 친밀히 결합하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만드신 모든 것을 자신의 것처럼 여기고 교회의 구원 사업에 적극 참여하며 교회의 살아 있는 도구가 되십시오. 특히 오늘날은 인구 증가나 사제의 감소 또는 예기치 못했던 문제들이 나타나는 등의 사회적 특성으로 인해서 교회가 적극적으로 활동하기에 더욱 어려운 때이므로, 여러분의 협조가 절실히 요청됩니다.(교의 헌장 33)
오늘날 평신도 사도직의 분야는 참으로 널리 확대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여러분이 이 주어진 소명에 자신을 맡기고 행동에 나서는 일이 더욱 절실히 요구되고 있으며 고무되어 마땅한 일입니다. 평신도의 활성화는 곧 교회의 활성화입니다. 그러므로 레지오는 더욱 활성화되어야 합니다. 레지오는 이태리 사회와 오랜 그리스도교 전통을 지닌 나라들에게 참으로 필요한 단체입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선배 단원들이 보여 준 레지오의 모범적이고도 빛나는 헌신 행위들-검은 대륙 아프리카에서 활약한 에델 퀸(Edel Quinn), 라틴 아메리카의 가장 후미진 곳에서 활동한 알퐁소 램(Alfonso Lambe) 그리고 아시아 지역에서 순교했거나 활동 전선에서 산화한 수천 명의 레지오 단원들- 을 보더라도, 단원 여러분들에게 맡겨진 임무는 더욱 막중한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성모님의 정신과 염원을 지닌 단체
3 여러분의 단체는 뚜렷하게 성모 마리아의 정신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는 레지오가 성모님의 이름을 그 선명한 깃발로 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레지오는 그 영성과 조직이 성모님과의 결합이라는 강력한 원칙과 성모님께서 구원사업에 깊이 관여하신다는 진리 위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모상인 모든 사람에 대하여 성모님의 정신과 사랑으로 봉사하고자 합니다.
공의회에서 선언되었듯이 우리의 유일한 중재자는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곧 ‘사람들에게 대한 마리아의 모성적 역할은 그리스도의 이 유일(唯一) 중재성을 흐리게 하거나 감소 시키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그리스도의 능력을 나타내는 것'(교의 헌장 60)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는 변호자, 협조자, 영원한 도움, 중재자, 교회의 어머니 등의 칭호로 동정 성모님의 도움을 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적 활동의 탄생과 성장은 성령의 그느르심으로 그리스도를 태어나게 하신 마리아에게 의존하고 있습니다. 성모님이 계시는 곳에는 또한 그 성자가 계십니다. 우리가 성모님으로부터 떠난 때는 조만간 성자로부터도 멀어지고 맙니다. 오늘날 세속 사회는 여러 분야에서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이는 동정 성모님께 대한 신심이 저하되었기 때문입니다.
레지오는 성모 신심을 통하여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알리고 확산시키는 임무를 수행하는 단체입니다. 그러므로 성모님께 대한 사랑을 통하여 세상 모두 이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성자를 더욱더 널리 알리고 더욱더 많은 사랑을 받으시게 하는 일을 가장 효과적으로 할 수 있는 단체가 바로 레지오입니다.
이러한 믿음과 사랑으로 나는 교황으로서 여러분을 진심으로 축복하는 바입니다.

레지오는 그 조직과 규율의 어느 한 부분이라도 삭제하거나 변경하면 균형이 깨져 무너질 수 있는 체계이다.

다음 시구는 바로 이에 대한 비유라 할 수 있다.

한 오라기 실 뽑으니
온 필베에 흠이 가고
헝클어진 화음 하나
온 선율을 거스르네.

— 휫티어 / Whittier

그러므로 이 책에 기록된 대로 정확하게 운영할 태세가 갖추어지지 않았다면, 아예 레지오를 시작하지 말아야 한다. 이 점에 대해서 제20장 [레지오의 조직과 규율은 바꿀 수 없다]를 주의 깊게 읽어 주기 바란다.

누구라도 (공인된 레지오의 평의회를 통하여) 레지오에 가입하지 않고서는 단원이 될 수 없다.

과거의 경험을 비추어 보아, 규칙대로 충실히 운영되는 레지오의 기관은 절대로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프랭크 더프

레지오 마리애 창설자

프랭크 더프(Frank Duff)는 1889년 6월 7일 아일랜드의 더블린에서 태어났다. 그는 18세에 공직 생활을 시작했으며, 24세에 빈첸시오 아 바울로 회에 입회하여 가톨릭 신앙을 실천하는 일에 투신하게 되었으며, 이 활동을 통하여 가난한 이들과 소외 계층을 위해서 일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기에 이른다.

일단의 가톨릭 자매들과 더블린 대교구의 마이클 토허 신부(Fr. Michael Toher)와 함께, 그는 1921년 9월 7일 레지오 최초의 쁘레시디움을 설립했다. 그 후 그는 1980년 11월 7일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전세계에 레지오를 확장하기 위하여 영웅적으로 헌신했다. 그는 평신도 참관인으로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는 구원의 계획 안에 복되신 동정 성모님께서 맡으신 역할에 대해 참으로 깊이 통찰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그의 통찰력은 교회의 사명에 동참해야 할 의무를 지닌 평신도들의 역할에 대해서도 똑같이 이어졌다. 이 교본은 이러한 그의 정신과 사상이 온전히 드러나 있는 작품이다.

레지오 마리애

“먼동이 트이듯 나타나고, 달과 같이 아름답고, 해와 같이 빛나며, 진을 친 군대처럼 두려운 저 여인은 누구실까?” (아가 6, 10)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루가 1.27)
“레지오 마리애! 이 얼마나 완전하게 선택된 이름인가!” (비오 11세)

제1장 명칭과 기원

레지오 마리애는 가톨릭 교회가 공인한 단체로서, 모든 은총의 중재자이시며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의 강력한 지휘 아래, 세속과 그 악의 세력에 맞서는 교회의 싸움에 참가하기 위하여 설립된 군대이다.

이 군대를 총지휘하시는 성모님은 ‘달과 같이 아름답고 해와 같이 빛나시며’ 사탄과 그 무리들에게는 ‘진을 친 군대처럼 두려운 분’ 이시다.

“개인이든 단체이든 인간의 모든 삶은 그 자체가 선과 악, 빛과 어두움 사이에서 벌어지는 투쟁이며, 그것도 매우 극심한 투쟁이다.” (사목 헌장 13)

레지오 단원 들은 충성과 덕행과 용기로써 위대한 하늘의 여왕이신 성모님께 자신을 맡기고 싶어한다. 바로 이 점이 레지오 마리애가 군대 형태로 조직된 이유이다. 이 군대의 형태는 본디 로마 군단을 본뜬 것이며, 명칭도 거기서 따 왔다. 그렇지만 레지오 마리애의 조직과 무기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니다.

레지오 마리애가 지금은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 시작은 아주 소박하였다. 이 군대는 치밀한 계획으로 조직된 것이 아니라 저절로 생겨났다. 규율을 비롯하여 활동이나 운영 방법 등도 미리 생각하여 만든 것이 아니라 단순한 제안에서 비롯되었다.

어느 날 저녁, 정해진 시간에 몇 안 되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앉았다. 그런데 막상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그들이 지극한 사랑의 섭리에 쓰일 연장이 되리라고는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 회합의 모습은 오늘날 세계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레지오 회합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그들이 둘러앉은 탁자 위에는 간단하게 제대가 차려져 있었고, 가운데에는 ‘기적의 패’ 모형의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상’ 이 놓여 있었다. 성모상은 흰 보 위에 모셔져 있었고, 꽃을 꽂은 두 개의 꽃병과 촛불이 켜진 두 개의 촛대가 양쪽에 놓여 있었다. 이처럼 훌륭한 분위기가 감도는 제대는 그 모임에 가장 먼저 온 사람의 영감에 의한 것이었는데, 이로써 레지오 마리애가 표상하는 모든 것을 뚜렷이 드러내고 있었다.

레지오는 군대이다. 그런데 모후께서는 병사들이 모여 오기도 전에 그 자리에 와 계셨다. 모후께서는 누가 이 군대에 등록할 올 것인지를 이미 다 알고 계셨으므로, 이들이 등록을 직접 받고자 기다리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이 모후이신 성모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성모님께서 이들을 택하신 것이다. 그 후 이들은 성모님과 굳게 결합하면 할수록 더욱 큰 성공을 거두게 되며 꿋꿋하게 나아갈 수 있음을 알고, 성모님과 함께 행진하며 세상의 악과 맞서 싸워 왔다.

이들이 맨 처음 취한 단체 행동은 무릎을 꿇는 일이었다. 신앙심 깊은 이 젊은이들은 머리를 숙여 성령께 기도를 바친 다음, 낮 동안 고달프게 일한 손에 묵주를 들고 가장 소박한 이 신심기도를 바쳤다. 기도가 끝났을 때 그들은 자리에 앉아서 마리아상으로 나타나 계신 성모님의 주관 아래, 어떻게 하면 하느님을 가장 기쁘게 해 드릴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서로 의견을 나누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보는 바와 같은 레지오 마리애가 태어난 배경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평범한 젊은이들이 그저 단순하게 시작한 일임을 미루어 볼 때, 그처럼 놀라운 하느님의 뜻이 바로 가까이에서 작용하고 있음을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충실하고 견고하게 운영되기만 한다면 세상의 새로운 힘이 될 조직체, 성모님 안에서 온 누리에 생명과 기쁨과 희망을 가져다 줄 힘있는 조직체를 자신들이 세우고 있다는 것을 그들 중 누가 짐작이라도 했겠는가! 그런데 그것은 사실로 드러나게 되었다.

이 레지오 마리애의 첫 번째 회합은 1921년 9월 7일 저녁 8시, 복되신 동정 마리아 성탄 축일 전야에 아일랜드 더블린 시 프란시스 거리에 있는 마이러 하우스(Myra House)에서 있었다. 이 모임의 모체가 ‘자비로운 성모(Our Lady of Mercy)’ 였기에, 한동안 ‘자비로운 성모회(the Association of Our Lady of Mercy)’ 로 알려져 왔다.

어쩌면 우연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상황 때문에 이 날짜가 결정되었는데, 당시에는 이 날짜가 그 다음 날보다 못하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불과 몇 년 안 가서, 성모님이 보여 주신 진정한 모성의 징표가 수없이 나타나 있는 것을 돌이켜 보고 나서야 비로소 레지오가 탄생하던 그 순간에 성모님의 지극히 오묘하신 손길이 함께 하셨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렇게 저녁과 아침으로 첫째 날이 이루어졌고(창세 1,5 참조), 복되신 동정 마리아 성탄 축일의 끝 부분보다는 처음 순간(전야)이 이 조직의 탄생에 더욱 잘 어울렸던 것이다. 왜냐하면, 이 단체가 처음부터 변함없이 추구하고 있는 목표는 성모님의 모습을 조직 안에 재현시키는 것이며, 이로써 주님을 더욱 확대하여 사람들에게 가까이 모셔다 드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모님은 구세주의 모든 지체들의 어머니이시다. 신자들이 교회 안에서 태어나도록 사랑으로 협력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성모님은 또한 하느님의 산 거푸집이시다. 하느님이시며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직 성모님 안에서만 신성을 잃지 않으신 채 태어나셨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도 이와 마찬가지로 성모님 안에 머물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푸시는 은총의 힘으로 인간 본성을 뛰어넘어 하느님의 모습에까지 가까워질 수 있는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노/ St. Augustine)
“레지오 마리애는 가톨릭 교회의 참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교황 요한 23세 / Pope John XXIII)

제2장 레지오의 목적

레지오 마리애의 목적은 단원들의 성화(聖化)를 통하여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데 있다. 단원들은, 교회의 지도에 따라, 뱀의 머리를 바수고 그리스도 왕국을 세우는 성모님과 교회의 사업에 기도와 활동으로 협력함으로써 이 목적을 달성한다.

레지오 마리애는 꼰칠리움의 승인과 그 공인 교본이 명시하는 규정의 범위 안에서, 해당 교구의 교구장과 본당 주임 사제의 지도에 따라, 레지오 단원들에게 알맞고 교회 복지에 유익하다고 판단되는 모든 형태의 사회 봉사와 가톨릭 활동을 전개한다. 그러나 레지오 단원들은 본당 주임 사제나 교구장의 승인 없이는 그와 같은 봉사 활동이 어떤 것이든 그 활동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

여기에서 교구장이란 현지 교구장, 다시 말하면 해당 교구의 주교 또는 다른 적법한 교회 당국자를 가리킨다.

“(가) 이런 조직체들의 직접 목적은 역시 교회의 사도적 목적이다. 즉,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성화하며 그들의 양심을 그리스도교적으로 육성하고 여러 단체와 여러 환경에 복음의 정신을 침투시키는 것이다.
(나) 각기 자기 나름으로 성직계(Hierarchy)와 협력하는 평신도들이 이런 조직체들을 운영함에 있어서나 또는 활동 계획을 수립하고 그것을 실천함에 있어서, 스스로의 경험을 제공하며 책임을 지고 실천한다.
(다) 교회 공동체가 보다 적절히 표현되고 사도직이 보다 효과적으로 수행 되도록 평신도들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활동한다.
(라) 성직 사도직과 직접 협력하며 활동하도록 권유를 받았거나 혹은 자발적으로 헌신한 평신도들이 주교를 최고 지도자로 모시고 활동한다. 주교는 이런 협력 단체를 공식적으로 인준할 수도 있다.” (평신도 사도직에 관한 교령 4장 20)

제3장 레지오의 정신

레지오 마리애의 정신은 성모 마리아의 정신이다. 레지오는 성모님의 깊은 겸손과 온전한 순명, 천사 같은 부드러움, 끊임없는 기도, 갖가지 고행과 영웅적인 인내심, 티 없는 순결, 천상적 지혜, 용기와 희생으로 바치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갖추고자 열망하며, 무엇보다도 성모님이 지니신 그 높은 믿음의 덕을 따르고자 갈망한다. 성모님의 이와 같은 사랑과 믿음에 감화된 레지오는 어떤 일이든지 모두 해보려고 하고 할 만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할 수 없다는 불평은 결코 하지 않는다.(준주성범 3:5)

“이와 같은 사도적 영신 생활의 완벽한 모델은 사도들의 모후이신 복되신 동정 성모 마리아이시다. 성모님은 한평생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일하고 집안 살림을 돌보는 일로 가득 차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늘 아드님이신 천주성자와 일치를 이루시고 구세주의 성업을 아주 독특한 방법으로 도와 드린다. 모든 신도들은 성모님께 대한 참된 신심을 지녀야 하며, 자신의 삼을 어머니로서 보살펴 주시는 성모님께 맡겨 드려야 하겠다.” (평신도 사도직에 관한 교령 1)

제4장 레지오의 봉사

1 하느님께서 주시는 무기로 완전 무장을 해야 한다 (에페 6, 11)

레지오 마리애가 그 이름을 따 온 로마 군단은 충성, 용맹, 규율, 인내 그리고 승리로 여러 세기 동안 명성을 떨쳤으나, 그러한 명성은 천박하고 세속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부록 4 로마군단 참조). 그런데 분명한 것은, 성모님의 군단인 레지오 마리애가 로마 군단보다 뒤떨어지거나 마치 보석이 떨어져 나간 장신구처럼 보잘것없는 이름을 성모님께 바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로마 군단이 지녔던 훌륭한 자질은 레지오 단원들이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자질일 뿐이다. 베드로 성인의 권유로 개종한 후에 바오로 성인과 함께 일했던 클레멘스 성인은 로마 군단을 교회가 본받아야 할 표본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우리의 원수는 누구인가? 그들은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는 악의 무리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싸움터에 과감히 뛰어들어 주님께서 내리시는 영광스러운 명령에 우리 자신을 내맡기자. 우리는 로마 군단의 지휘관 밑에 복무하는 장병들을 살펴보고 그들의 엄격한 규율과 복무 자세, 그리고 명령을 수행하는 복종심 등을 눈 여겨 보자. 그들 모두가 지방 장관이나 호민관, 백부장이나 오십부장 또는 하급 지휘관은 아니다. 그러나 장병 하나하나가 자기가 속한 계급에서 황제와 상관이 내리는 명령을 수행한다. 큰 것은 작은 것 없이 존재할 수 없으며, 작은 것은 큰 것 없이 존재할 수 없다. 하나의 유기적 결합체는 모든 부분을 한데 뭉치게 하여 각 부분이 서로 돕고 또 전체로부터 도움을 받는다. 우리의 몸을 살펴보자. 머리는 발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며, 이와 마찬가지로 발도 머리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 몸의 아무리 작은 부분이라 해도 몸 전체에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기관이다. 사실상 모든 부분은 서로 의지하면서 움직이고 몸 전체가 유익하도록 다 함께 순응한다.” <교황이며 순교자인 클레멘스 성인(St. Clement)이 쓴 ‘고린토인들 에게 보낸 편지’ 36장과 37장, 서기 96년>

2 세상을 본받지 말고 거룩한 산 제물이 되어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려야 한다(로마 12, 1-2)

충실한 레지오 단원의 영성의 샘에서는 그가 목표로 하는 덕성보다 훨씬 더 고상한 덕성이 솟아난다. 특히 성녀 소화 데레사의 뉘우침에 공감하는 고결한 마음이 그들의 영성 안에 메아리 칠 것이다. 성녀 데레사는 “그토록 많이 받고도 그처럼 적게 갚아 드리다니. 아! 이것이 나를 짓누르는 고통이로구나.” 하고 한탄하였다. 레지오 단원들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주님께서 바로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마지막 탄식과 마지막 한 방울의 성혈마저 바치셨다는 사실을 묵상하면서 자신의 봉사와 활동 안에 이러한 주님의 모습이 반영되도록 힘써야 한다.

“내가 포도밭을 위하여 무슨 일을 더 해야 한단 말인가? 내가 해 주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는가?” (이사 5, 4)

3 노고와 고통을 피해서는 안 된다(2 고린토 11, 27)

최근의 여러 사태에서 보듯이, 열심한 가톨릭 신자는 죽음이나 고문을 당할 준비를 해야 하는 경우가 늘 있다. 수많은 레지오 단원들이 이러한 영광의 문을 당당하게 통과해 왔다. 그러나 대개 레지오 단원으로서 열성적으로 활동하다 보면, 평범하면서도 드러나지 않게 참된 영웅적인 행위를 실천할 수 있는 알맞은 기회를 갖게 된다. 레지오는 신앙의 감화를 받지 못하고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나 선의의 방문을 꺼려 하는 사람들에게 접근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모두 주님의 품 안에 거두어 들일 수 있지만, 인내와 용기 없이 이 사도직을 실천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찌푸린 얼굴, 모욕과 무시, 비웃음이나 귀에 거슬리는 비평, 심신의 피로, 실패와 비열한 배신으로 입는 마음의 상처, 매서운 추위와 폭우, 더러움과 벌레들과 악취 풍기는 어두운 골목이나 불결한 주위 환경, 여가를 희생하는 일, 활동에서 겪는 숱한 괴로움, 신앙에 무관심한 사람들과 그들의 타락 행위를 떠올릴 때마다 받는 영혼의 고통, 마음으로 함께 나누는 온갖 슬픔 등, 이러한 모든 것들에서 매력이라고는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나 그러한 어려움을 달게 참아 내고 즐거움으로 여기며 끝까지 버티어 나간다면, 벗을 위해 제 목숨을 버리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고 하신 바로 그 사랑의 경지에 마침내 접근하게 될 것이다.

“야훼께서 베푸신 그 크신 은혜, 내가 무엇으로 보답할까?”(시편 116, 12)

4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것같이 사랑의 생활을 해야만 한다(에페 5, 2)

대인 관계에서 성공을 거두는 비결은 사랑과 이해심을 바탕으로 하는 개인적 접촉에 있다. 이러한 사랑은 단지 겉으로 드러내는 데에 그쳐서는 안 되며, 온갖 시련을 극복하는 참된 우정과 같은 것이어야 한다.
그 정도가 되려면 다소의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 때도 흔히 있을 것이다. 얼마 전까지 교도소 방문 활동의 대상자였던 사람을 점잖은 자리에서 만나 인사를 나누어야 한다던가, 때가 묻은 손을 다정하게 잡아 주어야 한다던가, 매우 가난하고 누추한 집에서 대접하는 음식을 먹어야 한다던가 하는 일은 사람에 따라서는 괴로운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을 회피한다면, 그것은 결국 우정 어린 태도가 가식이었음을 스스로 밝히는 것이 되고 만다. 이렇게 되면, 그들과의 접촉은 끊기고, 애써 끌어올리려던 영혼은 다시 환멸 속으로 가라앉아 버리고 말 것이다.
참으로 풍부한 열매를 맺는 모든 활동의 밑바탕에는 반드시 자기를 모두 바치려는 마음가짐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마음가짐이 없는 봉사 활동은 알맹이가 없다. 레지오 단원이 어느 한계선을 정해 놓고 ‘여기까지만 희생을 하고 그 이상은 하지 않겠다’ 고 한다면, 그는 비록 많은 수고를 한다 할지라도 하찮은 결과밖에는 얻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자기를 바치려는 마음가짐이 있다면, 자기 희생이 전혀 필요 없게 되거나, 또는 자기 희생이 거의 없을지라도 수없이 많은 일에서 풍성한 열매를 거둘 것이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겠단 말이오?” (요한 13, 38)

5 달릴 곳을 끝까지 다 달려야만 한다(2 디모 4, 7)

이처럼 레지오는 한계를 두지 않고 아낌없이 봉사하도록 부름을 받고 있다. 이것은 우리의 봉사 활동을 완전하게 하라는 충고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완전하게 해야 한다는 뜻이다. 최고의 목표를 겨냥하지 않는 단원은 오래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평생 사도직 활동을 꾸준히 지속하는 것 자체가 바로 영웅적 행위이며, 그러한 경지는 끊임없는 영웅적 활동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평생을 변함없이 사도직 활동에 몸 바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바로 은총이며, 이 은총은 지속적인 활동의 노고에 대한 보상이다.
그러나 단원 각 개인에게만 그러한 지속성이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레지오의 전반적 임무와 업무 하나하나에도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의지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물론 필요에 따라 변화가 있을 수 있으며, 각기 다른 장소와 사람들을 새롭게 찾아 다니며, 한가지 활동을 마치고 나면 또 다른 새로운 활동이 전개된다. 그런데 이러한 변화는 우리의 활동 중에 자연히 생기는 안정된 변화일 따름이며, 결코 흥미나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필요한 변화가 아니다. 만일 단원이 호기심이나 취미로 새로운 활동 거리를 찾아 나선다면, 그러한 기분에 따른 행위는 아무리 훌륭한 레지오 규율이라도 끝내는 깨뜨려 버린다. 이렇게 변화만을 좇는 정신을 염려하여 레지오는 좀더 엄격한 기풍을 지니도록 끊임없이 호소한다. 그리하여 레지오는 연속되는 회합을 통하여 단원들에게 이 정신을 ‘굳게 지키라’ 는 불변의 구호를 강조하면서 활동 임무를 배당하여 파견한다.
줄기찬 노력만이 참된 성공을 보장하며, 그것은 이기고 말겠다는 굳센 의지로부터 시작된다. 의지는 어떤 경우에도 굽히지 않아야 끝까지 지탱될 수 있다. 그러므로 레지오는 산하 조직체와 단원들에게 패배를 받아들이지 말고, 활동 내용에 대하여 ‘가망 있다, 가망 없다, 절망적이다’ 등의 등급 매김으로 실패를 합리화하는 것을 거부하는 일관된 태도를 취할 것을 강력하게 지시한다. ‘희망이 없다’ 는 낙인을 쉽사리 찍는 것은, 레지오의 입장에서 보면, 더없이 귀중한 영혼이 아무 거리낌 없이 지옥으로 치달아도 알 바 아니라고 선언하는 것과 같다. 무조건 활동의 다양성만을 추구하거나 활동의 결과가 빨리 드러나기를 바라는 얕은 생각은 더욱 중요한 활동 목표를 소홀히 다루게 한다. 이러한 결과는 씨를 뿌리자마자 수확을 보지 못하면 실망하고 조만간 일을 포기하는 태도로 나타난다.
다시 강조하지만, 어떤 활동에 대하여 ‘가망이 없다’는 낙인을 찍게 되면 자동적으로 다른 모든 활동에 임하는 단원들의 태도를 약화시킨다. 그렇게 되면,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모든 활동에 착수할 때마다 애써 해야 할 가치가 있는지를 의심하게 되며, 조금이라도 의심이 들게 되면 활동은 위축된다.
그런데 레지오 사업에서 무엇보다도 가장 불행한 일은, 단원들의 신앙심이 제대로 구실을 하지 못하고 배당 받은 활동이 이성적으로 용납될 때에만 하는 척하게 된다는 것이다. 레지오의 믿음이 이처럼 속박 받아 결단력을 잃게 되면, 억눌려 있던 본성적인 비겁함이나 인색함 그리고 세속적인 소심증이 당장에 고개를 쳐들게 된다. 그렇게 되면 레지오의 활동은 간간이 마음이 내킬 때에만 하게 되므로, 하느님께 드리기에는 너무나 부끄럽고 어설픈 봉사가 되고 만다.
그렇게 때문에 레지오는 활동 계획에 관한 것보다는 오히려 활동의 목적에 쏟는 열의에 더 관심을 갖는다. 레지오가 단원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재력이나 개인적인 영향력이 아니라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믿음, 눈에 띄는 행동이 아니라 느슨해지지 않으려는 노력, 재능이 아니라 시들지 않는 사랑, 거대한 힘이 아니라 한결같은 규율이다. 레지오 단원의 봉사는 지속적이어야 하며, 위기를 맞더라도 바위와 같이 튼튼하고 언제나 변함이 없어야 한다. 성공하기를 바라지만 일단 성공하면 겸손해야 하며, 성공 여부에 좌우 되어서는 안 된다. 실패하지 않으려고 싸워야 하나 실패하더라도 낙담하지 않으며, 계속 싸움을 벌여 마침내 실패를 이겨내야 한다. 또한 온갖 어려움과 단조로움을 딛고 일어서야 한다. 그리하여 이 모든 노력과 투지는 레지오 단원들로 하여금 굳건한 신앙심을 갖게 하며, 동시에 세속에 대항하는 끈덕진 싸움에 필요한 힘을 갖출 수 있게 해준다. 소집될 때를 대비하여 항상 준비하고, 소집되지 않더라도 마음을 흐트러뜨리지 않으며, 싸움이 없어 적이 눈앞에 띄지 않더라도 늘 하느님을 위하여 지칠 줄 모르는 빈틈없는 파수꾼 노릇을 해야 한다. 불가능한 것이라도 해내겠다는 마음을 지니고 보잘것없는 임무에도 만족해야 한다. 너무 커서 감당할 수 없는 일도 없고 너무 작아서 하찮게 보이는 임무도 없으므로, 매사에 똑같이 세심한 관심과 똑같이 지치지 않는 인내심과 똑같이 꿋꿋한 용기를 불어넣어야 한다. 모두 임무를 똑같이 황금 같은 끈기로 수행해야 한다. 늘 영혼을 돌보는 당직(堂直)이 되어, 나약한 이들이 당하는 어려운 순간들마다 그들이 벗어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 태세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완고한 이들을 빈틈없이 지켜보다가 그들의 마음이 수그러드는 기회를 틈타 접근하고, 방황하는 사람들을 찾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으며, 자신의 일에는 신경 쓰지 말고, 늘 다른 사람들의 십자가 곁에 서서, 할 일이 다 끝날 때까지 그 자리에 지켜 서 있어야 한다.
성실하신 동정녀께 봉헌되어 명예로울 때나 곤욕을 당할 때라도 그분의 이름을 지니고 있는 우리 레지오의 봉사에 실패란 결코 있을 수 없다.

제5장 레지오 신심의 개요

레지오 신심의 개요는 기도문에 나타나 있다. 레지오는 우선 하느님을 향한 깊은 믿음과 하느님께서 자녀인 우리에게 쏟으시는 사랑에 바탕을 두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이 쏟는 노력을 통하여 영광을 이끌어 내고자 하시며, 우리의 노력을 정화시켜 풍성한 열매를 맺고 꾸준히 지속하도록 해주신다. 때때로 우리는 열성이 지나친 나머지 초조해 하거나 또 어떤 때는 갑자기 무기력해지고 마는 양극단 사이를 오가고 있다. 그 까닭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활동과는 동떨어져서 방관만 하고 계신다고 여기는 우리의 잘못된 생각 때문이다. 그런데 명심해야 할 점은, 우리가 착한 행위를 지향하는 것은 오로지 하느님께서 그런 마음을 우리 안에 심어 주셨기 때문이며, 하느님께서 도와 주셔야만 우리의 선한 지향이 비로소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보다도 더 우리의 활동이 성공하기를 바라고 계시며, 우리의 활동 대상자들이 회개하는 것을 우리보다도 훨씬 더 갈망하신다. 우리는 성인이 되기를 바란다. 그런데 그것 또한 하느님께서 우리 자신보다 백만 배나 더 원하신다.
따라서 단원들은 레지오의 주요 과제인 자기 성화와 이웃에 대한 봉사 활동 안에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 늘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한다. 하느님을 믿는 것만이 성공의 지름길이다. 우리의 믿음이 충만하기만 한다면,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위해 세상을 정복하는 일에 우리들을 활용하실 것이다.

“하느님의 자녀는 누구나 다 세상을 이겨냅니다. 그리고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 (1 요한 5, 4)
“믿는다는 것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말씀인 진리에 ‘자기 자신을 내 맡기는 것’으로, ‘누가 그분의 판단을 헤아릴 수 있으며, 그분이 하시는 일을 이해 할 수 있겠는가'(로마 11, 33)라는 가르침을 알아듣고 겸손하게 인정하는 것이다. 마리아는, 가장 높으신 분의 영원한 뜻에 따라, 그 분께서 행하시는 ‘이해할 수 없는 일’과 ‘헤아릴 수 없는 판단’의 한 가운데에서 믿음의 빛을 지니고, 그 분의 뜻에 따라 정해진 자신의 모든 것을 기다리며 온전히 받아들인다고 말할 수 있다.”(구세주의 어머니 14)

1 하느님과 성모 마리아

레지오 마리애는 하느님께서 다스리시는 이 세상에서 ‘지극히 높으신 분의 형언할 수 없는 기적'(비오 9세)이신 성모 마리아께 대한 신심을 바탕으로 세워져 있다. 그렇다면 마리아는 하느님과 의 관계에서 어떤 역할을 맡고 있는가?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의 다른 모든 자녀들과 마찬가지로 마리아를 무(無)에서 창조하셨으며, 이루 헤아릴 수도 없고 상상할 수도 없는 은총의 경지까지 들어올리셨다. 그렇다 하더라도 마리아는 하느님께 비한다면 여전히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마리아를 다른 어떤 피조물보다도 더욱 공을 들여 만드셨기에 마리아는 가장 뛰어난 피조물이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마리아에게 하시는 일이 크면 클수록, 마리아는 하느님께서 손수 만드신 작품으로서 더욱더 위대해진다.
하느님께서는 마리아에게 참으로 큰일을 하셨다. 태초로부터 하느님께서는 아드님을 통하여 이 세상을 구원하시겠다는 계획과 더불어 이미 마리아를 구상하고 계셨다. 하느님께서는 은총을 베푸시는 여러 계획 속에 마리아를 깊숙이 관련시키심으로써 마리아를 당신의 아드님과 그 아드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참된 어머니가 되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이러한 일을 하신 이유는 첫째로 다른 모든 피조물에게서보다도 마리아 한 분에게서 더욱 큰 보람을 느끼시기 때문이며, 둘째로 우리로서는 제대로 헤아릴 수 없는 방법으로 우리들에게서 받으실 영광을 더욱 드높이고자 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어머니시고 우리가 구원받도록 도와 주시는 마리아에 대한 보답으로 마리아에게 기도와 사랑의 봉사를 바치는 것은 결코 하느님께 손실을 끼쳐 드리는 일이 아니다. 하느님께서 마리아를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더욱이 우리들이 마리아에게 드리는 것은 조금도 줄지 않고 틀림없이 모두 하느님께 바쳐질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욱 많이 불어나서 하느님께 바쳐진다. 그러므로 성모 마리아는 충실한 전달자 이상의 역할을 하는 분이시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은총 계획 안에서 활력소가 되도록 정해진 분이기에, 마리아가 있음으로써 하느님께서 받으시는 영광과 우리가 받는 은총이 더욱 커지게 되는 것이다.
영원하신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바치는 흠숭을 성모 마리아를 통하여 받으시기를 즐겨 하신다. 그러기에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무한한 자비와 전능으로부터 쏟아져 내리는 은총이 마리아를 통해 우리 인간에게 전달되도록 하셨다. 그리고 그 일은 우리의 참 생명이시요 구원이시며 사람이 되신, 천주 제2위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 세상에 보내실 때 성모 마리아를 통해서 보내시는 일로부터 시작하였다.

“내가 성모님께 매이기를 바라는 것은 천주 성자의 노예가 되기 위함이요, 내가 성모님의 소유물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이유는 하느님께 대한 나의 충성을 더욱 확실하게 바치기 위한 것이다.”(성 일데퐁소 / St. Ildephonsus)

2 모든 은총의 중재자이신 성모 마리아

레지오는 성모님을 한없이 신뢰한다. 성모님이 하느님의 안배하심으로 무한한 능력을 지니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성모님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모두 다 주셨으며, 성모님 또한 하느님께로부터 받을 수 있는 모든 은총을 풍성히 받으셨다. 즉, 하느님께서는 성모님을 당신의 은총을 전달하는 특별한 수단으로 삼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모님과 더불어 나아간다면, 더욱 효과적으로 하느님께 다가가 훨씬 손쉽게 풍성한 은총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는 성모님이 성령의 거룩한 짝이시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얻어 주신 모든 은총을 우리에게 전달하는 수로이시기 때문이다. 성모님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으시면 아무런 은총도 얻을 수 없다. 더욱이 성모님은 이 모든 은총을 단순히 전해 주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모든 것을 더욱 힘써 얻어내신다. 레지오는 이와 같은 성모님의 역할을 확신하고 있기 때문에 단원들에게 이를 특별한 신심으로 실천하도록 명령하는 것이다.

3 원죄 없으신 마리아

레지오 신심의 두 번째 특징은 성모님의 ‘원죄 없으신 잉태’에 관련된 것이다. 레지오의 첫 번째 회합에서 단원들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상’을 모신 작은 제대에 둘러앉아 기도하고 의논하였는데, 지금도 모든 레지오 회합에는 그 당시와 똑같은 성모상이 회합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더욱이 레지오의 첫 숨결은 성모님의 이러한 특전(원죄 없으신 잉태)을 기리며 바쳐진 단원들의 화살 기도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으며, 이 특전은 그 후 하느님께서 성모님에게 내리신 모든 영예와 특전의 바탕이 되었다.
이 ‘원죄 없으신 잉태’는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맨 처음 약속하신 말씀에 이미 나타나 있다. 즉, 마리아가 원죄 없이 잉태되리라는 것과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는 일, 구원 사업에서 뱀의 머리를 바수는 일 그리고 인간의 어머니가 되는 일 등, 하느님께서 성모님을 위해 마련하신 모든 일들이 예언되어 있다.

“나는 너를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리라. 또 네 후손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라. 너는 그 발꿈치를 물려고 하다가 도리어 여자의 후손에게 머리를 밟히리라.”(창세 3, 15)

레지오는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사탄에게 하신 이 말씀을 죄악과의 싸움에서 확고한 신념과 힘의 원천으로 삼는다. 레지오는 그 ‘여자의 후손’, 즉 성모 마리아의 자녀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 왜냐하면, 성모님의 자녀가 됨으로써 승리가 보장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레지오가 성모 마리아를 어머니로 모시는 정성이 크면 클수록 악의 세력에 대항하는 힘이 커지게 되어, 더욱 완벽한 승리를 거두게 되는 것이다.

“신,구약 성서와 존귀한 성전(聖傳)은 구원 계획에 있어서 구세주의 모친이 맡으신 역할을 점차 보다 명백히 드러내어 우리 눈앞에 제시해 주고 있다. 구약이 서술하는 구원의 역사 속에서 세상에 오실 그리스도의 내림이 천천히 준비되고 있다. 이 초기의 문서들은 교회 안에서 낭독되고 보다 상세하고 완전한 계시의 빛으로 이해되는 바와 같이, 구세주의 모친인 한 여인의 모습을 점차적으로 밝혀 주고 있다. 이 빛 속에서 본다면 죄에 떨어진 원조에게 약속된 뱀에 대한 승리(창세 3, 15) 안에 이미 예언적으로 그 여인의 모습이 암시되어 있다.”(교의 헌장 55)

4 우리의 어머니이신 마리아

만일 우리가 자녀로서의 상속권을 바란다면, 그 근본이 되는 모성을 존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성모님께 대한 레지오 신심의 세 번째 특징은 성모님을 우리의 참된 어머니로서 특별히 공경하는 데 있다. 성모님은 참으로 우리의 어머니이시다.
동정 마리아께서 천사의 인사를 받고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가 1, 38) 하시며 겸손하게 동의하신 순간,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되셨고 또한 우리의 어머니가 되셨다. 성모님이 우리의 어머니로 선포된 것은 그 모성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즉 구속 사업이 완성되는 순간이다. 갈바리아에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고통 중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성모님에게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하시고, 제자 요한에게는 “이분이 네 어머니이시다.”(요한 19, 26-27)라고 말씀하셨다. 주님께서는 요한 사도를 통하여, 선택된 모든 이들에게 이 말씀을 주신 것이다. 성모님은 이와 같이 인류가 영신적으로 태어나는 일에 동의하며 그 고통에 동참하심으로써 가장 완벽한 의미의 우리들의 어머니가 되셨다.
우리가 참으로 성모님의 자녀라면 이에 맞갖은 행동을 해야 하며, 어린이들처럼 어머니께 온전히 의탁해야 한다. 성모님이 우리를 먹여 주시고, 이끌어 주시고, 가르쳐 주시며, 병을 고쳐주시고, 슬픔에 잠겨 있을 때 위로하여 주시고, 의심이 들 때 깨우쳐 주시고, 방황할 때 붙들어 주시기를 바라야 한다. 성모님이 우리를 돌보시도록 우리 자신을 성모님께 온전히 맡길 때 우리는 우리의 맏형이신 예수님을 닮으며 자라나서, 죄악과 싸워 이기시는 주님의 사명에 한몫 거들 수 있게 될 것이다.

“성모님을 교회의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은 단지 그리스도의 어머니라는 이유나 또는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육화의 신비로 성모님으로부터 인성을 취하셨을 때 인류를 죄에서 해방시키고자 하셨던 하느님의 새로운 계획에 가장 친근한 협력자라는 이유뿐만이 아니다. 성모님은 ‘선택된 백성들의 공동체 안에 모든 덕의 모범으로서 빛나고 있다’는 점에서도 교회의 어머니이시다. 무릇 세상의 모든 어머니의 임무는 새 생명을 낳는 일에만 그치지 않는다. 어머니는 그 자식을 기르고 가르치는 일까지 맡지 않으면 안 된다. 복되신 동정 성모 마리아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성모님은 인류 구원 사업을 위한 희생 제사에 참여하신 뒤로 줄곧 하늘로부터 구원 받은 모든 영혼들 안에 하느님의 생명이 태어나서 자라나도록 보살피는 어머니의 역할을 하고 계신다. 이는 전지하신 하느님께서 허용하신 인류 구원의 신비 가운데 핵심을 이루는 부분으로서, 우리를 가장 흐뭇하게 하는 진리이다. 따라서 이러한 성모님의 역할은 모든 그리스도 신자들이 지녀야 할 신덕이다.”(바오로 6세 / Paul VI: 동정 성모께 대한 봉헌 / Signum magnum 1967년 5월 13일)

5 레지오의 신심은 레지오 사도직의 뿌리

레지오의 가장 소중한 의무 가운데 하나는 하느님의 어머니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신심을 보여 드리는 일이다. 이 의무는 단원들을 통해서만 이룰 수 있으므로, 모든 단원은 성모 신심을 진지하게 묵상하고 정성껏 실천해야 한다.
이 신심이 성모님께 드리는 진정한 공경이 되도록 하기 위하여 단원들은 주회합 참석이나 활동의 의무와 마찬가지로, 이 신심을 레지오의 본질적 부분으로 삼아야 한다. 즉, 모든 단원은 한마음으로 이 신심을 실천하는 일에 반드시 참여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요소이며, 단원 각자가 마음에 깊이 새겨 두어야 할 점이다.
그런데 이 신심에 대한 단원들의 일치는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단원들은 각자 나름대로 독특한 심심을 지니고 있으며, 오히려 그와 같은 신심의 다양성으로 인해 일치가 깨지는 수도 있다. 이 문제에 대하여 레지오 단원은 엄숙한 책임 의식을 지녀야 한다. 만일 단원들이 이 신심을 실천하지 않거나 ‘신령한 집을 짓는 데 쓰일 산 돌'(1 베드로 2, 5)이 되지 못한다면 레지오 조직의 중추 부분이 손상을 입게 된다. 또한 ‘산 돌’이 모자라면 모자랄수록 레지오 조직은 그만큼 허물어지기 쉬울 것이고 레지오의 자녀들을 보호해 줄 만한 피난처가 되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게 되면 레지오가 고상하고 거룩한 품위를 갖춘 집이 되는 일도, 또한 영웅적인 노력을 위한 발판이 되는 일도 더욱 어렵게 되고 만다.
그러나 단원들이 한 덩어리가 되어 레지오 봉사의 일치성을 적절히 드러낸다면 그 외의 더욱 큰 일치, 즉 정신과 목표와 활동에서의 일치라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게 될 것이다. 이 일치는 하느님께서 매우 소중하게 보시므로, 하느님께서는 이 일치를 이루는 이들에게 누구도 겨룰 수 없는 힘을 내려주신다. 그러므로 성모님께 대한 참된 신심이 단원 개개인에게 내려지는 은총의 특별한 수로(水路)라고 볼 때, 하물며 하느님께로부터 모든 것을 받으신 성모님과 일치하여 한마음으로 꾸준히 기도하고(사도 1, 14 참조), 성모님의 정신에 참여하며 또한 은총을 분배하는 일과 관련된 하느님의 계획에 적극적으로 뛰어드는 단체에는 더욱 놀라운 은총을 내리시지 않겠는가! 그러한 단체가 성령으로 충만(사도 2, 4 참조) 하지 않을 수 있으며, ‘놀라운 일과 기적’ (사도 2, 43)을 많이 나타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예루살렘 누각에서 동정녀께서는 사도들과 함께 기도하면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 말할 수 없는 정성을 쏟으셨다. 그때 성모 마리아는 교회 안에 영원히 넘치게 될 보화, 곧 그리스도의 최고 선물인 파라클리토 성령이 내려오시도록 하셨던 것이다.”(레오 13세 / Leo XIII : 묵주기도 / Jucunda Semper 1894년 9월 8일)

6 성모님을 알리자

훼이버 신부(Fr. Faber)는 몽포르의 루도비코 – 마리아 성인이 지으신 복되신 동정 성모님께 대한 참된 신심이라는 책의 머리말에서 이 책을 ‘레지오 마리애 영성의 원천’이라고 소개하였다. 그런데 그의 글은, 신앙 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 가운데 거의 절망적인 싸움을 벌이고 있는 사제들에게, 과연 레지오가 어떠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단체인가를 생각하게 만드는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그는 성모님을 제대로 알거나 사랑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으며, 이것이 결국 영혼들에게 슬픈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고 말했다.
“성모님께 대한 우리들의 신심은 너무나도 미약하고 초라하다. 한마디로 말하면, 믿음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 결과 예수님께서는 사랑을 받지 못하시고, 이단자들은 회개하지 않으며, 교회는 존경을 받지 못하고, 성인이 될 수 있는 영혼들은 시들어 줄어들고 성사의 은총을 제대로 받지 못하며, 영혼들에게는 열성적인 복음 전파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예수님께서 잘 드러나시지 않는 이유는 성모님을 뒷전에 내버려두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영혼들이 파멸되는 이유 또한 성모님을 그들에게서 멀리 떼어 놓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복되신 동정녀께 대한 신심’이라고 일컬어 온 것은 사실상 보잘것없고 가치 없는 한낱 그림자일 따름이었다. 그래서 그것은 모든 궁핍과 좌절, 죄악과 태만과 쇠퇴의 원인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성인들을 통한 계시를 믿는다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복되신 어머니에 대하여 우리가 더욱 크고 넓고 힘에 가득 찬 전혀 새로운 신심을 지니도록 요구하고 계심을 알게 될 것이다. 누구든지 이 신심을 지니도록 스스로 힘쓰면 이 신심이 가져다 주는 은총과 변화에 놀라게 되며, 이 신심이 영혼들의 구원과 그리스도 왕국 건설을 위한 방편으로 거의 믿기 어려울 정도의 놀라운 효력을 나타낸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동정녀에게 뱀의 머리를 바수는 힘을 주셨고, 그분과 결합하는 사람들에게는 죄악을 이겨내는 힘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확고한 희망으로 이를 믿어야 합니다.
천주의 성모님! 하느님께서는 저희들에게 모든 것을 주시고자 하십니다. 이제 모든 것은 저희들에게 달려 있으며 또한 모든 것을 받아서 간직하고 나누어 주시는 당신께 달려 있습니다. 하느님에게서 모든 것을 받으시는 성모님과 저희들이 얼마만큼 일치하는가에 모든 것이 달려 있습니다.”(그라트리 / Gratry)

7 성모님을 이 세상에 모셔 오는 일

성모님에 대한 신심이 그처럼 놀라운 결과를 가져온다면, 그와 같은 일을 하시는 성모님을 이 세상에 모셔 오는 일은 우리의 활동에서 가장 큰 목표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 일에는 사도직 단체를 이용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여기서 말하는 사도직 단체란, 수많은 평신도로 구성되어 어디든지 뚫고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적극적이고 온 정성을 기울여 성모님을 사랑하며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성모님께 대한 사랑을 심어 주도록 활동하는 단체, 그리고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모든 행동 능력을 활용하는 평신도 단체를 뜻한다.
그러기에 이런 단체는 성모님의 이름을 지니고 있음을 더 할 수 없는 자랑으로 여기며, 어린아이들처럼 끝없이 성모님께 매달리는 신뢰를 바탕으로 세워진다. 이런 단체는 구성원 하나하나의 마음속에 성모님께 대한 신뢰심을 굳게 심어 다지며, 그 결과로 충성과 규율의 완전한 조화 속에서 활동하는 구성원을 갖게 된다. 레지오는 이러한 요소들을 두루 갖추고 있으며, 교회가 온 세상을 얻고자 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활용해 주기만을 바라고 있다. 레지오는 성모님이 영혼들을 돌보시며 뱀의 머리를 바수는 당신의 영원한 사명을 완성하시는 일에 대리자로서 활용하시는 사도적 단체이다. 레지오는 이러한 사실을 하나의 가정이 아니라 뚜렷한 확신으로 여기고 있다.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마르 3, 35) 이 얼마나 놀랍고 영광스러운 일인가!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을 얼마나 높은 영광에로 들어올리셨는가! 여인들은 예수님을 세상에 낳아 주신 마리아를 지극히 복되다고 칭송한다. 그러나 그 여인들이 성모님과 같은 모성에 참여하는 일을 가로막는 것은 무엇인가? 이에 관하여 복음 성서는 새로운 세대, 새로운 어버이 상에 대해서 가르쳐 준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 St. John Chrysostom)

제6장 성모님께 대한 레지오 단원의 의무

1 레지오 단원은 성모님께 대한 신심을 진지하게 묵상하고 실천함으로써 이 신심을 드높여야 할 엄숙한 의무가 있다. 이 의무는 본질적인 것이며, 단원이 지켜야 할 모든 의무 가운데 가장 앞서는 것이다 (제5장 레지오 신심의 개요 및 부록 5 우리 마음의 여왕이신 마리아 신심회 참조)

레지오 마리애는 성모님을 이 세상에 모셔오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성모님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차지하시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도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모님을 자기 마음속에 모시지 않는 레지오 단원은 성모님을 이 세상에 모셔오는 일에 아무런 쓸모가 없으므로 레지오 마리애의 목표로부터 멀리 동떨어져 있게 된다. 이러한 단원은 마치 총 없는 군인이나 끊어진 고리 또는 몸에 붙어 있어도 마비되어 움직이지 못하는 팔과 같다.
어느 군대이든 지휘관의 작전 계획이 일사불란하게 수행되도록 하기 위해서 병사들을 지휘관과 일치시키는 방법을 쓴다. 이는 레지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군대는 하나로 뭉쳐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군대는 면밀하게 짜여진 훈련을 실시하고 엄격한 기강을 유지한다. 그뿐만 아니라, 역사에 기록된 위대한 모든 군대의 장병들은 지휘관에 대한 한결같은 충성심으로 지휘관과 혼연 일체가 되어 지휘관의 작전 계획에 따라 기꺼이 몸을 바쳤다. 위대한 군대의 지휘관은 병사들의 정신적 지주로서 그들의 마음속을 차지하며 그들과 하나가 되어 있었다. 이는 지휘관의 영향력이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잘 설명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세속 군대의 일치는 다만 정서적이고 기계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의 영혼과 그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과의 관계는 이와는 사뭇 다르다. 충실한 레지오 단원의 영혼 안에 성모님이 함께 계신다는 표현만으로는 실제로 그 단원과 성모님이 일치하는 모습을 제대로 나타낼 수가 없다. 교회는 이와 같은 일치의 본질을 ‘천상 은총의 어머니’ 또는 ‘모든 은총의 중재자’라는 호칭으로 집약하여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호칭들은 성모님이 우리 영혼의 생명을 지배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잘 드러내고 있으며, 세상에서 가장 밀접한 관계인 어머니와 뱃속의 아기의 비유로써도 충분히 설명될 수 없을 만큼 완벽한 것이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은총을 내리시는 과정에서 성모님이 차지하는 위치를 확실하게 이해하려면 다는 자연 현상들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피는 심장을 통하지 않고는 온몸을 돌 수 없다. 눈은 우리가 세상을 볼 수 있도록 우리와 세상을 연결시켜 준다. 또한 새는 아무리 날개짓을 해도 공기가 떠받쳐 주지 않으면 스스로 날아오르지 못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혼도 하느님께서 세우신 질서에 따라 성모님 없이는 스스로를 하느님께 들어올릴 수가 없고 하느님의 일을 할 수도 없다.
이처럼 우리가 성모님께 의존하게 되는 현상은 우리들의 이성이나 감정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섭리로 마련되는 것이므로 우리가 비록 의식하지 못하고 있더라도 그대로 존속된다. 그런데 우리가 이 섭리를 깨닫고 성모님께 의식적으로 다가간다면 성모님과의 일치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굳건해질 것이며, 또한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한다. 보나벤투라 성인(St. Bonaventure)은 성모님을 ‘주님의 거룩한 피를 분배하시는 분’이라고 불렀다. 이는 성모님과 굳건히 일치하게 되면 놀라운 개인 성화의 은총을 얻게 되며, 다른 영혼들에게도 엄청난 영향을 끼치게 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사도직 활동은 황금처럼 값진 것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죄의 사슬에 묶여 있는 사람들을 풀려나게 할 몸값으로 부족하다. 그러나 성모님이 이 단순한 황금 덩어리를 하느님께 주신 ‘주님의 거룩한 피’라는 보석으로 장식해 주신다면 모든 사람들을 풀려나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모님께 열렬히 봉헌하는 것을 시작으로 하여, “저의 모후, 저의 어머니시여, 저는 오직 당신의 것이오며, 제가 가진 모든 것이 당신의 것이옵나이다.”와 같은 봉헌문을 자주 되풀이함으로써 자신의 봉헌을 새롭게 하고, 성모님이 자신의 영혼 안에 항상 활동하고 계신다는 의식을 갖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레지오 단원들이 영혼은 몽포르의 루도비코-마리아 성인처럼 ‘몸이 공기를 마시듯 내 영혼은 성모님을 마신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생생하게 살아 움직여야 한다.
미사, 영성체, 성체 조배, 묵주기도, 십자가의 길 또는 그 외의 다른 모든 신심 행위를 통해서, 레지오 단원들은 늘 그러했듯이 자신의 영혼이 성모님과 일치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하며, 또한 비할 데 없이 높은 믿음을 지닌 성모님을 통해 이루어진 구원 사업의 신비를 묵상하도록 힘써야 한다. 성모님은 구세주와 더불어 그 신비를 생활하셨고, 그 신비 안에 없어서는 안 될 역할을 맡아 하셨기 때문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단원들은 성모님을 본받고, 성모님께 감사 드리며, 기쁨이나 슬픔도 성모님과 함께 나누고, 단테(Dante)의 말대로 성모님을 꾸준히 공부하고, 성모님께 크나큰 사랑을 드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모든 기도나 활동 또는 다른 신심 행위 중에 성모님께 대한 생각을 불러일으키며, 자신과 자신의 힘은 잊은 채 성모님께 의탁하는 레지오 단원의 영혼은 성모님의 모습과 생각으로 가득히 채워져 두 영혼은 하나의 영혼이 된다. 이렇게 성모님의 영혼 속에 깊이 깃든 레지오 단원은 성모님의 믿음, 겸손 그리고 티없으신 성모 성심과 이 성심으로부터 나오는 성모님의 기도의 힘을 나누어 가지게 되어, 결국 모든 삶의 궁극 목표인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바뀌어 가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 성모님은 당신의 단원들 안에서 단원들을 통하여 레지오의 모든 사업에 참여하시며, 어머니로서 그들의 영혼을 돌보신다. 그러므로 단원들은 성모님이 하느님이신 아드님의 실제 몸을 돌보시고 섬기셨듯이 고귀한 사랑과 정성으로 활동 대상자와 동료 단원들 하나하나의 영혼 안에서 주님을 뵙고 섬기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단원들이 성모님의 생생한 모습을 본받아 성숙해질 때, 비로소 레지오는 성모님의 사명에 온전히 일치하고 성모님의 승리를 보장받는 진정한 레지오 마리애, 성모님의 군단이 된다. 이러한 레지오는 세상 곳곳에 성모님을 모셔다 드릴 수 있게 되며, 마침내 온 세상은 성모님이 주신 빛으로 찬란히 빛나게 될 것이다.

“성모님과 더불어 즐겁게 살고, 성모님과 더불어 모든 시련을 견디어 내며, 성모님과 더불어 일하고, 성모님과 더불어 기도하고, 성모님과 더불어 여가를 즐기고, 성모님과 더불어 쉬어라. 성모님과 더불어 예수님을 찾아 나서서 그대의 팔에 예수님을 감싸 안고, 예수님 성모님과 더불어 나자렛에서 살 집을 마련하라. 성모님과 더불어 예루살렘으로 가서 십자가 곁에 머무르며, 그대 자신을 예수님과 함께 묻어라. 예수님 성모님과 더불어 부활하고, 예수님 성모님과 더불어 하늘나라에 올라, 예수님 성모님과 더불어 살고 죽으라.” (토마스 아 캠피스 / Thomas a Kempis: 수련 자들에게 주는 강론)

2 성모님의 겸손을 본받음은 레지오 활동의 뿌리이며 수단이다

레지오는 단원들에게 말할 때 군대나 전투 용어를 자주 쓴다. 레지오는 모든 사람의 영혼을 위해서 힘찬 싸움을 벌이고 계시는 진을 친 군대와 같은 성모님의 무기이며, 또한 밖으로 드러나 보이는 성모님의 작전을 수행하기 때문에 그러한 용어가 잘 어울린다. 더욱이 군사적 개념은 사람들에게 강한 호소력을 지닌다. 레지오 단원들은 자신이 군대의 일원이라는 것을 의식함으로써, 활동할 때에 스스로 군인과 같은 굳센 정신을 지닐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레지오 단원들의 싸움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니므로 하늘나라의 전략에 따라 수행되어야 한다. 참된 레지오 단원의 마음속에 타오르는 불길은 오로지 자신을 스스로 낮추며 세속적 가치를 멀리하는 영성의 잿더미 속에서 솟아오른다. 특히 이 잿더미 속에는 겸손의 덕이 들어 있는데, 세상은 이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도외시한다. 이러한 겸손의 덕은 고귀하고 굳세어, 이 덕을 구하고 실천하는 사람들에게 흔히 볼 수 없는 기품과 힘을 가져다 준다.
레지오 조직에서는 겸손이 매우 독특한 역할을 한다. 무엇보다도 겸손은 레지오 사도직 활동에 없어서는 안 될 도구이다. 레지오의 활동 중에는 대인 접촉이 많은데, 이 대인 접촉의 효과를 높이고 발전시키려면, 단원들이 활동 대상자들에게 부드럽고 소박한 태도를 보여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오로지 겸손한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온다. 겸손은 활동의 요람이며, 겸손하지 않고서는 효과 있는 레지오 활동을 할 수가 없다.
토마스 데 아퀴노(Thomas de Aquino) 성인의 말대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들에게 무엇보다도 겸손의 덕을 지니라고 당부하셨다. 예수님께서 바로 이 겸손으로 인류 구원의 가장 큰 장애요인을 제거하셨기 때문이다. 모든 다른 덕의 가치는 겸손의 덕을 바탕으로 한다. 하느님께서는 겸손이 있는 곳에 은혜를 베푸시며, 겸손이 사라지면 은혜를 모두 거두어 가신다. 모든 은총의 근원이신 주님의 강생도 겸손이 바탕이 되어 이루어졌다. 성모님은 ‘마니피캇'(Magnificat, 마리아의 노래)에서 하느님께서 당신 팔의 큰 힘을 떨쳐 보이셨다고 찬미하는데, 이 말은 하느님께서 동정녀 마리아 안에 전능의 힘을 보이셨다는 뜻이다. 성모님은 그 이유로, 하느님의 관심을 이끌어 내고 하느님께서 세상에 내려오시도록 하여 낡은 세상이 막을 내리고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도록 한 것은 바로 당신 자신의 미천함 때문이었다고 단언하신다.
그런데 성모님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완덕, 사실상 무한 경지에까지 이른 완덕을 갖추셨고, 당신 스스로도 그 점을 잘 알고 계셨다. 그런데 왜 성모님을 겸손의 표본이라 말하는가? 성모님은 자신이 어떠한 인간의 자손들보다도 더욱 완벽하게 구원되었음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겸손하실 수 있었다. 성모님은 자신이 지닌 상상할 수조차 없는 거룩한 빛 한 줄기 한 줄기가 당신 아드님의 공로임을 아시고, 또한 그러한 생각을 늘 마음속에 생생하게 간직하셨다. 성모님의 비할 데 없는 지성은 당신께서 누구보다도 많은 은혜를 받았으므로 하느님께 누구보다도 더 많은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그러므로 성모님의 비할 데 없이 우아한 겸손의 태도는 꾸밈이 없이 매우 자연스럽고 한결같았다.
그러므로 레지오 단원이 성모님의 태도를 두루 살펴본다면, 자신이 하느님 앞에 어떤 존재인가를 인정하고 솔직히 받아들이는 것만이 참된 겸손의 본질임을 알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아무런 가치가 없는 존재, 바로 그것이 우리 자신이라는 사실이다. 그 나머지 다른 것은 모두 하느님께서 무상으로 주시는 은혜이다. 그렇게 때문에 하느님께서 그 은혜를 늘리거나 줄이거나 또는 완전히 거두어 가실 수도 있는 것이다. 이에 자신이 하느님께 종속되어 있음을 깨닫게 되면, 미천하고 보잘것없는 일을 더욱 기꺼이 떠맡으며, 남의 멸시와 박대를 견디어 내어 “이 몸이 주님의 종입니다.”(루가 1, 38)라고 하신 성모님의 겸손한 태도로 주님의 뜻을 따르게 될 것이다.
레지오 단원은 반드시 그의 모후와 일치해야 한다. 이 일치는 바라기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그만한 자격을 갖추었을 때 비로소 이루어진다. 훌륭한 군인이 되어 보겠다고 결심을 한 사람이라도 군 조직의 톱니바퀴가 될 만한 자질을 전혀 갖추고 있지 못한 경우가 있다. 그렇게 되면 그는 지휘관과 효과적인 일치를 이루지 못하며, 결국 그것은 작전 계획을 수행하는 데 방해요인이 되고 만다. 이와 마찬가지로 레지오 단원이 그의 모후께서 세우신 계획 안에서 큰 역할을 맡기를 열망하지만, 막상 성모님이 주시고자 하는 은혜를 받을 만한 자격을 갖추고 있지 못한 경우도 있다. 세속 군대에서는 용기 지식 신체결함 등이 자격미달의 요건이지만, 레지오 단원의 경우 자격 미달은 바로 겸손의 덕이 부족한 데에 있다. 레지오의 목적은 단원들을 성화시켜, 그 성화의 빛이 영혼들의 세계에까지 발산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데 겸손하지 않고서는 성화될 수가 없다. 더구나 레지오 사도직은 성모님을 통하여 움직인다. 그러므로 성모님을 어느 정도 닮지 않고서는 성모님과 일치할 수 없으며, 성모님이 지니신 특별한 겸손의 덕을 갖추지 않고서는 성모님을 닮았다고 할 수 없다. 겸손은 모든 레지오 활동에 있어서 성모님과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 없어서는 안 될 요건이며, 활동이 뿌리라면 그 뿌리가 내리고 있는 땅이 바로 겸손이다. 따라서 흙의 질이 좋지 않으면 레지오의 생명은 시들고 만다. 그러므로 영혼들을 구하기 위한 레지오의 싸움은 반드시 각 단원의 마음 안에서부터 시작되어야만 한다. 단원은 마음속에 있는 교만과 이기심을 단호하게 물리치기 위하여 자신과의 싸움을 치러야 한다. 마음 안에 도사리고 있는 악의 뿌리를 몰아내려는 이 치열한 싸움, 이른바 생각과 행동을 순화하려는 끊임없는 노력은 얼마나 힘겨운 일이겠는가! 이는 평생 치러야 할 싸움이다. 이때 자신의 노력에만 의지한다면 실패를 거듭할 뿐이다. 자신을 물리치려는 이 싸움에서마저 오히려 이기심이 파고들기 때문이다. 모래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자신의 힘이 강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런 사람에게는 오직 단단한 발판이 필요할 뿐이다.
레지오 단원들이여, 여러분의 튼튼한 발판은 성모님이시다. 온전한 신뢰심으로 성모님께 의탁하라. 성모님은 여러분이 반드시 지녀야 하는 겸손의 덕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계시기 때문에 여러분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성모님께 전적으로 의탁하는 정신을 충실히 실천하면 가장 훌륭하고 단순하며 확실하게 겸손에 이르는 방법을 터득하게 될 것이다. 몽포르의 루도비코-마리아 성인은 이 방법이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은총의 비밀이며, 자신을 비우려는 작은 노력만으로 자신을 하느님으로 가득 채우고 완전하게 하는 길’이라고 말했다.
그 원리는 다음과 같다. 성모님께로 향하고 있는 레지오 단원은 필연적으로 자기 자신으로부터 멀어져야만 한다. 이때 성모님은 이러한 우리 마음의 움직임을 포착하시고 높이 들어올리시며, 우리의 자아가 초자연적으로 죽도록 하신다. 이는 가혹해 보이지만 결국은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는 크리스천의 생활 규범이다.(요한 12, 24-25 참조) 겸손하신 동정 성모님의 발꿈치는 ‘자아’라는 뱀이 지닌 다음과 같은 여러 형태의 머리를 바수어 버린다.

(가) ‘자기 현시’라는 뱀의 머리
교회가 ‘정의의 거울’이라고 부를 정도로 완덕을 갖추신 성모님은 은총 왕국의 무한한 능력을 물려받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가장 미천한 여종으로 무릎을 꿇으신다. 그렇다면 레지오 단원으로서의 우리의 위치와 태도는 어떠해야 할 것인가!
(나) ‘이기심’이라는 뱀의 머리
자신과 자신의 모든 영적, 물적 소유물을 성모님께 드려 성모님 뜻대로 쓰시도록 하는 레지오 단원은 완벽한 사랑의 정신으로 한결같이 성모님께 봉사를 계속한다.
(다) ‘자만심’이라는 뱀의 머리
마리아께 의지하는 습관은 필연적으로 자기 자신의 보잘것 없는 힘을 믿지 않게 한다.
(라) ‘자부심’이라는 뱀의 머리
성모님과 함께 일한다는 사실을 의식할 때 우리는 자신의 무능함을 깨닫게 된다. 이 협력 관계에서 레지오 단원은 뼈아픈 약점 외에 무엇을 보여 드릴 수 있겠는가?
(마) ‘자기애’라는 뱀의 머리
과연 우리 자신 안에 사랑할 만한 것이 있는가! 모후께 대한 사랑과 찬미에 여념이 없는 레지오 단원은 자신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
(바) ‘자기 만족’이라는 뱀의 머리
성모님과 하나로 뭉치면 더 높은 수준으로 오르게 되며 이러한 단원은 성모님을 본받고 티없이 순수한 지향을 열망하게 된다.
(사) ‘출세욕’이라는 뱀의 머리
우리가 성모님의 방식대로 생각할 때, 오로지 하느님만을 알려고 노력하게 되므로, 자신의 앞날이나 보상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
(아) ‘아집’이라는 뱀의 머리
성모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레지오 단원은 마음이 기우는 대로 행동하지 않고, 늘 은총의 속삭임에 열심히 귀를 기울인다. 진정으로 자아를 잊어버리는 레지오 단원은 성모님이 베풀어 주시는 모성적 영향을 받아들이는 데 아무런 장애가 없다. 성모님은 이러한 단원 안에 인간 본성을 초월하는 힘과 희생 정신을 길러 주시고, 그에게 맡겨진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열심히 봉사하는 그리스도의 훌륭한 병사가 되게 하신다.(2 디모 2, 3 참조)

“하느님께서는 무(無)에서 일하시는 것을 즐기시어 그 깊은 바닥으로부터 당신의 전능으로 지으신 창조물들을 이끌어 세우신다. 우리는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려는 열정에 넘쳐야 하지만, 동시에 하느님의 영광을 드높일 만한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 자신의 무가치함을 깊이 받아들이고, 그 심연 속에 잠겨 보도록 하자. 미천함이라는 짙은 그늘 밑으로 나를 숨겨 보자. 전능하신 분께서 우리의 적극적인 노력을 당신 영광을 위하여 사용할 만하다고 여기실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자. 이 목적을 위해서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흔히 짐작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법을 쓰시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 다음으로 복되신 성모님만큼 하느님의 영광에 이바지하신 분은 없었다. 그럼에도 성모님이 의식적으로 추구한 유일한 목표는 자신을 무로 돌리는 일이었다. 성모님의 겸손은 하느님의 계획에 장애가 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와는 정반대로 바로 성모님이 겸손하심은 하느님의 자비로우신 모든 계획을 쉽게 이루어지도록 만들었다.”(그루 / Grou: 예수와 마리아의 영성 생활)

3 성모님께 대한 참된 신심은 사도직의 의무를 요구한다

이 교본의 다른 곳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어느 것도 우리의 임의대로 취사선택(取捨選擇) 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고통과 박해의 그리스도를 우리의 삶 안에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오로지 영광의 그리스도만을 맞아들일 수는 없다는 뜻이다. 그리스도는 나뉘어질 수 없는 오직 하나의 실체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가 평화와 행복을 찾아서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다 보면 때때로 우리 자신이 십자가에 못박히는 일을 겪을 수도 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 안에는 이처럼 서로 반대되는 요소가 섞여 있어서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이를테면 고통 없이 승리가 없고, 가시관 없이는 왕좌가 없으며, 쓰라림 없는 영광이 없고, 십자가 없이는 왕관이 있을 수 없다. 하나를 얻고자 손을 뻗으면 다른 하나도 함께 딸려 오게 된다. 이 원리는 우리의 복되신 동정 성모님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성모님을 여러 부분으로 나누어 놓고, 그 중 우리 마음에 드는 부분만을 골라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모님이 겪으시는 고통을 함께 하지 않으면서 성모님이 누리시는 기쁨만을 함께 나눌 수는 없는 일이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 요한 성인이 했던 것처럼 성모님을 모시고자 한다면(요한 19, 27 참조), 성모님의 모든 면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성모님의 어느 한 면만을 받아들이려고 한다면, 성모님을 전혀 받아들이지 못하게 된다. 성모 신심이란 성모님의 고귀한 성품과 사명의 온갖 측면을 우리 삶 안에서 재현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중요하지 않은 일에 주된 관심을 두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본받아야 할 최상의 모범으로서 성모님을 우리 마음 안에 받아들이는 것은 값진 일이다. 그러나 그 이상의 노력으로 성모님을 따르려고 힘을 쏟지 않는다면, 결국 성모님께 대한 신심은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여 완전해질 수 없다. 성삼위께서 성모님을 맞아 그느르시고, 성모님 안에 뜻을 세우지고, 성모님으로 하여금 그 뜻을 드러내도록 하신 놀라운 일들을 알아듣고 기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성모님은 모든 존경과 찬사를 받아 마땅한 분이시지만, 그러한 우리의 찬미는 성모님이 당연히 받으셔야 할 몫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오직 성모님과의 일치만이 성모님께 대한 신심을 완성하는 것이다. 일치란 성모님과 더불어 사는 삶을 말하는데, 성모님의 삶은 찬미를 받는 데 있지 않고 은총을 전달하는 데 있다.
성모님의 한평생과 사명은 먼저 그리스도의 어머니, 그 다음으로는 인류의 어머니가 되시는 것이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St. Augustine)의 말처럼, 성삼위께서는 영원으로부터 깊이 생각하신 끝에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쓰시려고 성모님을 준비하시고 창조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성모님은 주님을 잉태하게 된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날부터 놀라운 일에 발을 들여놓으셨고, 그 후로 줄곧 집안 살림을 맡아 돌보는 바쁜 어머니가 되셨다. 성모님이 맡으신 이 일은 처음 얼마 동안은 나자렛 마을에 국한되었으나 이작은 집은 곧 온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당신의 아드님은 인류 안에 퍼져나갔다. 그리하여 집안 살림을 돌보는 성모님의 일은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으며, 나자렛으로부터 크게 번창한 구속 사업은 성모님 없이는 할 수 없게 되었다. 우리가 주님의 몸을 돌보아 드린다는 것은 단지 성모님이 하시는 일을 도와 드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사도직은 바로 이러한 성모님의 어머니 역할을 거들어 드리는 것이다. 이런 점을 미루어 볼 때, 성모님은 ‘나는 원죄 없는 잉태로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은 의미로 ‘나는 사도직이로다’라고 선언하실 수도 있을 것이다.
영혼들을 돌보는 어머니 역할은 성모님의 본질적 임무이고 성모님의 삶 자체이므로, 우리가 성모님의 어머니 역할에 동참하지 않는다면 성모님과 참으로 일치했다고 말할 수 없다. 따라서 다시 한 번 밝히고자 하는 것은, 성모님께 대한 참된 신심에는 영혼들을 위한 봉사가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어머니 역할을 하지 않는 성모님’과 ‘사도직 활동을 하지 않는 신자’는 일맥상통한다. 이 두 경우는 모두 불완전하고 비현실적이며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다.
따라서 레지오는 어떤 이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성모님과 사도직이라는 두 원리를 바탕으로 세워진 것이 아니라 성모님이라는 단일 원리 위에 세워져 있으며, 이 원리 안에 신자 생활의 모든 본질이 전체적으로 드러난다.
어떠한 일을 이루고자 할 때 행동은 전혀 하지 않고 마음속으로 바라기만 한다면, 이러한 생각은 아무 가치도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모님께 말로만 봉사를 드리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사도직 임무가 ‘내게도 일이 주어지겠지’ 하고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고 있기만 하면 하늘로부터 저절로 내려올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이렇게 태만한 신자들은 아무 일도 맡지 못하는 상태가 계속되는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 우리가 사도가 되는 단 하나의 효과적인 방법은 사도직 활동을 착수하는 것이다. 사도직 활동을 시작하게 되면 성모님은 곧 우리의 활동을 당신 품에 받아들이시고 당신의 어머니 역할 안에 넣어 주신다.
더욱이 성모님은 우리가 도와 드리지 않으면 어머니 역할을 수행하실 수가 없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성모님처럼 큰 힘을 지니신 분이 나약한 우리 인간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말이 납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다. 인간의 협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 하느님 섭리의 한 부분이며,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통하지 않고서는 구원 사업을 하지 않으신다. 성모님이 간직하고 계시는 은총의 보화는 넘쳐 흐르고 있지만, 우리가 도와 드리지 않으면 성모님은 그 은총을 나누어 주지 못하신다. 만일 성모님이 바라시는 대로 자신의 능력을 행사하신다면 온 세상은 눈 깜짝할 사이에 회두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성모님은 우리들이 협력할 때까지 기다리셔야만 한다. 따라서 우리가 도와 드리지 않으면 성모님이 어머니의 역할을 다할 수 없게 되어, 결국 영혼들은 굶주려 죽게 된다. 그러므로 자신을 마음대로 쓰실 수 있도록 내맡기는 사람들을 성모님은 누구라도 열렬히 환영하시며, 거룩하고 알맞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미약하고 부적절한 사람들까지도 모두다 활용하실 것이다. 이와 같이 어떠한 사람들이라도 다 쓸모가 있기 때문에 성모님으로부터 거절당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가장 미약한 사람이라도 성모님이 지니신 힘을 영혼들에게 전달할 수 있다. 그러나 좀더 나은 사람을 통하여 성모님은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하신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는 햇빛이 맑은 유리창으로는 눈부시게 들어오지만, 때가 잔뜩 낀 유리창으로는 제대로 들어오지 못하는 이치와 같다고 말할 수 있다.

“예수님과 성모님은 에덴 동산에서 우리의 조상이 범한 죄를 기워 갚기 위해서 십자가 나무를 고통과 사랑 속에 함께 지고 가신 새로운 아담과 하와가 아니신가? 예수님은 샘이시고, 성모님은 그 수로이시다. 이 은총으로 우리는 영신적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고, 우리의 천상 보금자리를 되찾게 된다.”
“주님께서 어머니를 받드셨듯이, 우리는 자비로우신 성모님을 우리의 모후로,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어머니로, 하느님 은총의 중재자로, 하느님 보화의 분배자 로 높이 받들자. 성자께서는 당신 왕국의 영광과 위엄과 권능으로 어머니를 빛나게 해주신다. 인류 구원의 위대한 사업에서 성모님은 하느님의 어머니와 협조자로서 순교자의 왕이신 예수님과 일치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성모님은 구원 사업에서 예수님과 영원히 함께 계신다. 성모님의 왕국은 성자의 왕국처럼 넓다. 따라서 성모님의 지배를 벗어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교황 비오 12세 / Pope Pius XII : 1940년 5월 13일 강론)

4 성모님께 봉사할 때는 온 힘을 다해야 한다

어떠한 경우에도 성모님께 전적으로 의탁한다는 구실로 노력을 게을리 하거나 조직에 결함이 생기도록 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정반대가 되도록 힘써야 한다. 레지오 단원은 성모님을 돕기 위해서 성모님과 더불어 완벽한 활동을 해야 하기 때문에 그가 성모님께 드리는 봉사의 선물은 가장 최고의 품질이어야 한다. 언제나 힘차고 능숙하며 꼼꼼하게 활동해야 한다. 그런데 가끔 통상적인 레지오 활동이나 확장 사업 또는 단원 모집 등에서 충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잘못을 저지르는 쁘레시디움이나 단원들이 눈에 띈다. 이에 대해서 때때로 단원들은 “나는 나 자신의 능력을 믿지 않기 때문에 성모님께 전적으로 의탁하며, 성모님이 뜻하시는 대로 좋은 성과가 나오기만을 기다립니다.” 라고 구구한 변명을 늘어놓는다.
이러한 변명은 대개 자신들의 소극적인 태도를 일종의 미덕으로 돌리려고 하는 신자들로부터 듣는다. 이들은 단체가 세운 규칙에 따라 자신의 노력을 바치는 일은 마치 믿음이 부족한 사람들에게나 필요한 일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듯하다. 또한 우리가 큰 힘을 지니신 성모님의 도구로 쓰이고 있으므로 하찮은 우리 인간이 기울이는 노력의 정도는 크든 작든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식의 인간적인 해석을 하거나 잘못된 결론을 내릴 위험성마저 있다. 이는 마치 백만장자와 동업을 하는 가난한 사람이 “무엇 때문에 내가 이미 넘쳐 흐르는 공동 기금에 몇 푼 더 보태려고 기를 써야 하느냐?”고 따지는 것과 같은 경우다.
그러므로 이제 레지오 단원들이 활동에 나설 때 그들의 자세를 좌우하는 기본 원리를 확실히 해 둘 필요가 있다. 즉, 레지오 단원들은 성모님이 쓰시는 단순한 도구만이 아니라, 인류의 영혼을 영신적으로 풍부하게 하고 구원하기 위해서 일하시는 성모님의 참된 협력자라는 점이 이 원리의 핵심이다. 이러한 협력 관계에서는 한쪽에서 모자라는 것을 다른 족이 보충해 준다. 단원은 자신의 활동과 자신의 모든 것을 성모님께 내어 드리고, 성모님은 당신의 모든 순결과 능력을 당신 자신과 함께 단원에게 내어 주신다. 성모님과 레지오 단원은 양쪽이 서로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 주어야만 하는 것이다. 단원 쪽에서 이러한 동반자 정신을 준수하면 성모님은 더 이상 아쉬울 것이 없게 된다. 그러므로 이 활동 사업의 성패는 오로지 레지오 단원 쪽의 태도에 달려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단원은 모든 지능과 능력을 세심한 방법과 인내심으로 가다듬어, 이 협동 사업에 온 힘을 쏟아야 할 것이다. 가량 단원들이 활동에 쏟는 노력과는 별도로 당신이 원하시는 성과를 이루고자 하시는 성모님의 뜻을 알아차린다 하더라도, 레지오 단원들은 모든 일이 전적으로 자신의 노력에 달려있는 것처럼 여기며 활동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성모님의 도우심을 끝없이 신뢰하고 언제나 최고도의 노력을 쏟아야 하며, 성모님을 신뢰하는 마음이 크면 클수록 단원들의 정성과 노력도 그만큼 깊어져야 한다. 이 말은 온전한 믿음과 열성에 찬 조직적 활동이 서로 뒷받침될 때 매우 큰 힘을 발휘하게 되는 원리를 설명한다. 이 원리에 대해서 성인들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즉, 우리가 기도드릴 때에는 마치 모든 것이 자신의 활동과는 상관없이 오직 기도를 얼마나 열심히 바치느냐에 달려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기도해야 하며, 또한 우리가 활동에 나설 때에는 마치 모든 것이 전적으로 우리의 노력에 따라 좌우된다고 생각하면서 활동에 온 힘을 쏟아야 한다는 것이다. 활동의 쉽고 어려움을 스스로 가늠하여 어느 정도의 노력을 기울일 것인가를 판단하는 등의 생각을 떠올려서는 안 된다. 세속의 일을 다루는 데도 그런 타산적인 정신으로는 늘 실패하기 마련이다. 영신적 사업에 그런 약삭빠른 정신이 스며들면 활동의 성패가 달려 있는 은총을 잃게 되므로 결국 실패하고 만다. 더욱이 인간의 판단은 믿을 수가 없다. 겉으로 보기에 결코 무너지지 않으리라 여겨지던 일이 일시에 무너지는가 하면, 손만 뻗으면 잡힐 듯한 열매를 끝내 손안에 넣지 못하고 결국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고 마는 경우도 있다. 영신 세계 안에서 이기적인 영혼은 점점 보잘것없이 작아져서 마침내는 아무런 결실도 맺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가장 확실한 해결책은 끝없는 노력뿐이다. 레지오 단원은 모든 임무에 최선의 노력을 쏟아야 한다. 가볍게 해낼 수 있는 활동거리인 경우, 그 일을 끝내는 것만이 유일한 목적이라면, 적은 노력만으로 충분할 수 있다. 시인 바이론(Byron)의 말처럼 ‘모기 한 마리 잡는 데 헤라클레스의 몽둥이를 휘두를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레지오 단원들은 그들의 활동이 직접적인 결과를 얻기 위한 것이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단원들은 일의 쉽고 어려움을 떠나서 맡은 일이 크든 작든 성모님을 위하여 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성모님의 전폭적인 협력을 얻어내, 필요하다면 기적까지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우리의 능력이 미치지 않는 일이라 해도 온갖 정성을 쏟는다면, 성모님은 큰 힘을 보태 주시어 우리의 미약한 활동이 막강한 힘을 발휘하도록 도와 주신다. 만일 단원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였는데도 할 일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면, 성모님은 그 남은 부분을 채워 주시어 단원과의 공동 사업이 이상적으로 끝나도록 해주실 것이다. 레지오 단원이 임무를 완수하는 데 필요한 것보다 열 배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하더라도 그 노력은 조금도 허비된 것이 아니다. 단원들의 모든 활동은 성모님을 위하여 또한 성모님의 거대한 계획과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바치는 것이 아닌가? 성모님은 이렇게 남는 노력을 기꺼이 받아들이시고 크게 불리시어, 그 은총을 주님의 가족 가운데 절실히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신다. 나자렛의 성실하신 주부의 손에 맡겨진 것은 무엇이든 조금도 유실되는 일이 없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레지오 단원의 노력이 성모님께 마땅히 바쳐야 하는 정도에도 미치지 못한다면 아낌없이 나누어 주시고자 하시는 성모님의 손은 묶이고 만다. 그리하여 이 공동선을 추구하는 독특한 은총의 계약은 단원의 무성의로 말미암아 뒷전으로 밀려나게 된다. 이렇게 되면 모든 일이 단원의 능력에만 의존하게 되므로, 영혼들은 물론 단원 자신에게도 얼마나 안타까운 손실이겠는가!
그러므로 어떤 단원이 자신은 성모님께 온전히 의탁하고 있다는 것을 구실삼아 자신의 불충분한 노력이나 허술한 활동을 정당화한다 해도, 이는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다. 또한 그러한 잘못된 방식으로 성모님께 의탁하여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하는 노력마저 위축시킨다면, 이는 나약하고 떳떳하지 못한 태도이다. 그러나 단원은 자신이 충분히 짊어질 수 있는 짐조차 성모님의 어깨에 떠넘기려 하는 것이다. 기사도 정신을 올바로 갖춘 기사라면 어느 누가 그런 이상한 태도로 귀부인을 모시려 하겠는가!
따라서 레지오 단원과 성모님의 협동에 관한 근본 원리에 대해서, 마치 새로운 주제를 다루듯이, 한 번 더 설명하고자 한다. 레지오 단원은 자신의 능력을 최대 한도 발휘하여 성모님께 바쳐야 한다. 성모님은, 단원이 바쳐야 할 것을 바치지 않고 있는데도 그것을 보충해 주시는 분이 아니다. 레지오 단원이 하느님의 은총의 보고에 바쳐야 하는 노력과 방법과 인내심 등을 성모님이 면제시켜 준다면, 이는 올바른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모님은 은총을 아낌없이 베풀고자 하시지만 오직 정성을 다하는 영혼들에게만 그렇게 하신다. 그러므로 성모님은 레지오의 자녀들이 당신이 간직하고 계신 무진장한 은총의 보화를 마음껏 꺼내 가기를 바라시면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마르 12, 30) 봉사하라 하신 당신 아드님의 말씀을 빌어 단원들에게 간절히 호소하고 계신다. 레지오 단원은 오로지 성모님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모자란 점을 보충하고 순화하며 완덕을 이해 노력하고 인간 본성을 거룩하게 변화시킴으로써 미약한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을 이루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변화는 위대한 힘이 된다. 이 힘은 결국 송두리째 산을 들어내어 바다를 메우고, 온 땅을 평탄하게 고르며, 굽은 길을 바르게 펴서 곧장 하느님 나라에 이어지도록 한다.

“우리는 모두 쓸모 없는 종들이지만 매우 알뜰하신 주인님을 섬기고 있다. 그분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이슬 한 방울로부터 우리 이마에 흐르는 땀 한 방울에 이르기까지 아무것도 낭비하시는 일이 없다. 나는 이 책이 어떤 운명에 놓이게 될지 알지 못한다. 내가 이 책을 다 마칠 수 있을는지, 아니면 나의 펜 밑에 펼쳐져 있는 이 한쪽만이라도 끝까지 다 쓰게 될는지 알지 못한다. 그렇지만 나는 나의 남은 힘과 여생을 많든 적든 이 책을 마치는 데 바쳐야 한다는 것만을 잘 알고 있다.”(프레데릭 오자남 / Frederick Ozanam)

5 레지오 단원들은 몽포르의 루도비코-마리아 성인의 ‘성모님께 대한 참된 신심’을 실천해야 한다

성모님께 대한 신심을 실천하는 레지오 단원들은 몽포르의 루도비코 -마리아 성인이 가르쳐 준 신심의 독특한 내용을 완전히 터득하고 몸에 배도록 해야 한다. 이 성인은 ‘참된 신심’ 또는 ‘마리아의 종’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성모 신심을 가르치고 있는데, <복되신 동정 성모님께 대한 참된 신심> 과 <마리아의 비밀> 이라는 두 저서를 통해서 그 내용을 더욱 알차게 설명하고 있다. (부록 5 참조)
이 신심은 성모님과 정식 계약을 맺을 것을 요구하는데, 자신의 모든 것, 즉 영신적이거나 현세적인 모든 생각, 행실, 소유물,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포함한 모든 것을 아무리 적고 사소한 것이라도 아낌없이 성모님께 바쳐 드리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자신의 소유물은 아무것도 없는 노예와 같은 상태가 되어, 전적으로 성모님께 의탁하고 성모님이 쓰시도록 자신을 철저히 내맡기는 것이다. 그러나 세속의 노예는 성모님의 노예보다는 훨씬 자유롭다. 세속 노예의 경우, 자신의 생각과 내면 생활은 스스로 다스리므로 자신에 관한 일에서는 자유로울 수가 있다. 그러나 성모님께 무릎을 꿇는 사람은 자신이 생각하는 모든 것, 즉 영혼의 움직임이나 숨겨 놓은 재산, 그리고 가장 깊숙한 자신의 속마음까지도 모두 성모님께 내어 드려야 하는 것이다. 마지막 숨을 쉬는 순간까지 성모님께 드려서 성모님이 하느님을 위해 쓰시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이는 일종의 순교 행위이며, 성모님을 제단 삼아 하느님께 자기 자신을 제물로 바치는 제사이다. 이러한 우리들의 제사야말로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제물이 되신 십자가상의 제사와 참으로 같지 않겠는가. 그리스도께서도 성모님의 태중에서 탄생하셨고, 성모님의 팔에 안겨 하느님께 봉헌되셨으며, 그 후 당신 일생의 매 순간을 통하여 성모님의 품에 안기셨고, 마침내 갈바리아 산상의 성모 성심의 십자가 위에서 제헌되신 것이다.
성모님께 대한 참된 신심은 예절을 갖춘 봉헌 식으로부터 시작 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봉헌 후에 어떠한 삶을 사느냐에 달려있다. ‘참된 신심’은 하나의 행위로서가 아니라 생활 안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상태로서 드러나야 하기 때문이다. 성모님이 우리의 삶 전체를 차지하지 못하고 겨우 몇 분 또는 몇 시간 동안만을 차지하는 데 그치시도록 한다면, 비록 성모님께 드리는 봉헌 식을 자주 반복한다 하더라도 이는 한낱 스쳐 지나가는 기도에 그치고 말 것이다. 이러한 성모 신심은 마치 땅에 심어지긴 했으나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는 나무의 경우와 같다.
이 말은 우리 마음이 항상 봉헌 행위를 의식하고 그것에만 매달려 있어야 함을 뜻하지는 않는다. 우리 몸은 호흡과 심장의 박동으로 생명을 유지하지만, 실제로 이러한 몸 안의 움직임을 느끼지 못하면서 살고 있다. 참된 신심의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비록 느끼지 못하더라고 이 신심은 우리들의 삶에 쉴새 없이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성모님이 우리를 차지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이따금 의식적으로 생각하고 행동이나 화살 기도 등으로 새롭게 떠올리기만 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자신이 성모님께 매어 있다는 사실을 변함없이 인정하며, 적어도 막연하게나마 늘 마음속에 간직하고 살아가며, 부딪치는 모든 환경 속에서 전반적으로 드러나도록 하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일에 열정이 솟는다면 더없이 좋은 일이다. 그러나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참된 신심의 가치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 때때로 열정은 오히려 일을 누그러뜨리고 믿을 수 없게 만들기도 한다. 분명한 것은 참된 신심이 열정이나 감상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열정이나 감상은 마치 고층건물처럼 때로는 햇볕을 받아 빛나지만, 땅속 깊이 묻혀 있는 건물의 기초는 그 아래 버티고 있는 바위처럼 차가운 것이다. 이성은 보통 냉철하다. 단호한 결심은 얼음장과도 같이 차가울 수 있다. 신앙 그 자체도 때로는 다이아몬드처럼 냉랭하게 느껴진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요소가 바로 참된 신심의 기초를 이룬다. 참된 신심이 이 세 가지 기초 위에 자리를 잡고 단단하게 뿌리를 내리면 산을 허물어뜨릴 만한 된서리와 폭풍이 닥쳐오더라도 오히려 더욱 굳세게 버틸 것이다.
참된 신심을 실천하는 데서 얻는 은총이나 이 신심이 교회의 신앙 생활 안에 차지하고 있는 비중을 미루어 보면 이 신심이 분명히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메시지임을 알 수 있다. 이 점이 바로 몽포르의 루도비코-마리아 성인이 주장한 내용이다. 성인에 의하면, 이 신심을 실천하는 이들에게는 많은 은총이 약속되어 있으며, 몇 가지 조건이 충족되기만 한다면 이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단언하였다. 이 신심이 일상 생활 안에서 일어내는 효과를 알아보려면,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것 이상으로 이 신심을 깊이 실천하는 사람들과 이야기해 보기 바란다. 이 신심이 가져다 준 은총에 대해서 그들이 얼마나 큰 확신에 차 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아마도 그들이 감정이나 환상에 사로잡혀 있지나 않은지 의심이 들 정도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한결같이 전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이야기할 것이며, 이 신심이 가져다 준 열매가 너무나 뚜렷하여 도저히 착각할 수 없는 일이라고 단호하게 말할 것이다. 이처럼 참된 신심을 가르치고 이해하고 실천하는 사람들이 경험한 은총이 모두 믿을 만하다고 볼 때, 이 신심이 내면 생활을 더욱 깊이 있게 만들어 우리들의 마음이 이기심을 떠나서 순수한 지향으로 채워지리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리하여 자신이 올바로 인도되고 보호받고 있음을 느끼며, 자신의 삶이 가장 유익한 일에 쓰이고 있다는 흐뭇한 확신을 갖게 된다. 또한 모든 것을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는 자세와 단호한 용기, 확고한 믿음을 지니게 되어 어떤 일을 맡든지 솔선 수범하여 이러한 능력을 적절하게 조절하는 유연성과 슬기를 지니게 된다. 더욱이 이 신심을 실천하는 이들 안에는 이 모든 은총과 덕행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겸손의 덕이 뿌리를 내린다. 이렇게 되면 어느 누구라도 신비하게 여길 수밖에 없는 은총이 내리게 되어 자신의 공로나 본연의 능력만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큰일을 하도록 부름을 받게 되는 일이 생긴다. 그리고 일단 일을 맡게 되면 영광스럽고도 막중한 책임을 실패 없이 해 내도록 도와 주시는 손길이 따른다. 한마디로, 참된 신심을 실천하며 자신을 성모님의 노예 신분으로 낮추는 값진 희생을 바치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영광이 더욱 크게 드러나도록 자신을 버린 사람들에게 약속된 수백 배의 상급을 그 대가로 받게 된다. 우리가 섬길 때 다스리게 되고, 베풀 때 받게 되며, 무릎을 꿇을 때 승리하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영신 생활을 순전히 개인적 이득이나 손실에 관련된 문제로 격하시킨다. 또한 그들이 가진 보화를 영혼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도 맡겨 드려야 한다고 권하면 불만스러워 한다. “만일 성모님께 모든 것을 드린다면 내가 이 세상을 떠나 심판대에 설 때 빈손이 될 터이니, 연옥에서 더욱 오래 머무르게 되지 않겠는가?”라는 등의 의심을 가진다. 그런데 이러한 의심을 품는 사람들에게는 “결코 그렇지 않다. 그대가 심판 받는 바로 그 자리에 성모님도 함께 계실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흔쾌히 대답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대답에는 깊은 뜻이 담겨져 있다. 성모님께 대한 봉헌을 반대하는 이유는 이기적인 생각에서보다는 대개 좀더 복합적인 동기에서 나온다. 가령 우리가 지닌 영신적 보화를 아낌없이 모두 성모님께 바치면, 우리가 거의 의무적으로 바치고 있는 기도, 즉 가족과 친구 또는 조국이나 교황 등을 위한 기도의 공로가 혹시 없어지는 것이나 아닌지 모른다고 걱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염려는 모두 떨쳐 버리고 과감히 자신을 봉헌하자. 성모님께 드린 것은 무엇이든 안전하다. 성모님은 하느님의 보화를 관리하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성모님은 또한 당신을 신뢰하는 사람들이 관심을 두는 일들도 돌보아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까지 쌓아 올린 공로와 앞으로 갚아야 할 빚, 즉 책임과 의무를 넓고 고귀한 성모 성심께 맡겨 드리자. 성모님은 그대를 대할 때, 마치 그대 외에는 다른 자녀를 두지 않으신 것처럼 대하실 것이다. 그대의 구원과 성화, 그대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전적으로 성모님의 관심사이다. 그대가 성모님의 지향을 위해 기도 바칠 때 성모님은 그대의 지향 속에 그대를 가장 먼저 넣어 주신다.
때때로 우리의 희생이 요구될 때가 있다. 이때 우리는 혹시 자신에게 손해가 돌아오지 않을까 따져서는 안 된다. 그러한 타산적인 생각은 봉헌 행위의 근본을 허물어뜨리며 봉헌의 가치를 좌우하는 희생의 특성을 없애 버린다. 이 점에 대해서는 그 옛적 광야에서 굶주리고 있던 만 명도 훨씬 넘는 많은 사람들을 모두 배불리 먹인 성서 이야기(요한 6, 1-14 참조)를 떠올리면 충분히 알아들을 수가 있을 것이다. 그처럼 많은 사람들 가운데 단 한 사람만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왔을 뿐이었다. 그것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 먹을 수 있도록 내놓을 수 있겠느냐고 묻자, 그는 선뜻 내놓았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그 몇 개 안 되는 보리떡과 물고기를 손에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올리신 다음 쪼개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마침내 그 많은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었고, 그 가운데는 자신이 먹을 보리떡과 물고기를 선뜻 내놓은 바로 그 사람도 들어 있었다. 먹고 남은 부스러기를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그런데 만일 그 사람이 “이렇게 사람들이 많은데 보리떡 몇 개와 물고기 몇 마리가 무슨 소용 있겠어요? 더구나 여기 함께 와 있는 제 가족들도 배고플 테니 이 음식을 내놓을 수가 없습니다.” 하고 거절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러나 그는 거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선뜻 내놓았기 때문에 그와 그의 가족들은 바친 것보다 훨씬 많은 기적의 음식을 받을 수 있었다. 또한 이 가족들이 원했더라면 주님께서는 열두 광주리의 남은 음식도 모두 가져가도록 하셨을 것이다.
예수님과 성모님께서는 자신이 가진 것을 아무런 조건 없이 기꺼이 바치는 착한 영혼들을 항상 이와 같은 방식으로 대해 주신다. 우리가 드리는 선물은 수많은 사람들의 소망을 채워 주는 데 쓰인다. 또한 우리가 바치는 희생 때문에 막상 우리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것과 뜻하는 바가 손해를 입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우리는 넘쳐나도록 되돌려 받으며,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까지도 하느님의 은총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제 우리의 보잘것없는 밀떡과 물고기를 가지고 달려가 성모님의 팔에 안겨 드리자. 그리하여 예수님과 성모님께서 그것을 더욱 크게 불리시어 이 세상 메마른 광야에서 굶주리고 있는 무수한 영혼들을 먹여 기르시도록 해 드리자. 자신을 봉헌한다 해서 평소에 바치는 기도나 생활 방식을 바꿀 필요는 없다. 평소의 생활은 그대로 이어지고 각자의 지향과 모든 특별한 목적을 위한 기도도 그대로 계속되며, 다만 이제부터는 성모님이 즐겨 받으시도록 마음을 향하기만 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성모님은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시중 드는 사람들에게 ‘무엇이든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 2, 5)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성모님의 분부대로 그 사랑과 희생의 항아리에 일상 생활에서 겪는 잡다한 일들, 즉 아무 맛없는 물을 쏟아 붓기만 한다면, 가나의 기적은 다시 일어나게 된다. 그 물이 맛 좋은 포도주로,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위한 최상의 은총으로 변화되는 것이다.”(꾸생 / Cousin)

제7장 레지오 단원과 성삼위

레지오 마리애가 맨 처음 취한 단체 행동은 성령께서 오시도록 호도와 기도를 바친 다음, 묵주기도를 통하여 성모 마리아와 그분의 성자께로 나아가도록 진행하는 것이었다. 이는 매우 뜻 깊은 일이었는데, 몇 해가 지난 후 벡실리움의 도안이 완성되었을 때 뜻밖에도 똑같은 특징이 나타났다. 성령께서 벡실리움 표장 안에 두드러지게 드러나 계셨던 것이다. 그런데 이 도안이 신학적 착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예술 작품임을 미루어 볼 때 기묘한 일이었다.

벡실리움은 비종교적 표상인 로마 군대의 깃발을 마리아 군단의 목적에 맞도록 변형시켜 만든 것이다.독수리 대신 비둘기를 넣고 황제나 집정관의 얼굴은 성모님의 모습으로 대치하였다. 이렇게 완성된 구도는 결국 성령께서 온 세상에 생명의 은총을 내리실 때 성모님을 그 수로로 삼아 레지오를 차지하고 계시는 모습으로 되어 있다.

그 후 뗏세라의 그림이 그려졌을 때에도 똑같은 신심의 자세가 드러났다. 성령께서 레지오를 품어 보호하시고, 악의 세력에 맞서는 끝없는 싸움은 성령의 권능에 힘입어 승리한다. 동정녀께서 뱀의 머리를 바수시며, 성모님의 군단은 예언된 승리를 향해 진군하는 것이다.

레지오의 색깔이 예상하던 푸른 색이 아니고 붉은 색이라는 것도 흥미 있는 일이다. 벡실리움과 뗏세라에 나타나는 성모님의 후광을 어느 색으로 정하느냐 하는 사소한 세부 사항을 마무리하는 과정에서 이 빛깔이 채택되었다. 레지오의 상징이 성령으로 충만하신 성모님의 모습이어야 한다는 점에서 성모님의 후광을 성령의 빛깔로 표현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와 같은 생각은 레지오의 빛깔 역시 붉은 색이어야 한다는 데까지 이어졌다. 뗏세라의 그림에서도 성모님은 성령과 더불어 휘황찬란하게 타오르는 성서 속의 ‘불기둥’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이 점 역시 동일한 발상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하여 레지오 선서문을 작성할 때에도, 처음에는 다소 의외로 생각되었지만, 선서는 성령께 하는 것이지 레지오의 모후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는 일관된 생각이 유지되었다. 이로써 이미 앞에서 살펴본 그 중대한 특성을 다시 한 번 드러내게 되는데, 세상을 새롭게 하시는 일로부터 가장 작은 은총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은 성령께서 베풀어 주시며 이 일을 대행하는 분은 언제나 성모님이시다.

성령께서 성모님 안에 역사하심으로써 영원하신 성자가 사람이 되셨다. 이로써 인류는 성삼위와 결합되었으며, 성모님 자신은 성삼위 각위와 각기 독특한 관계를 맺는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우리는 적어도 이러한 성모님의 세 가지 특별한 위치를 살펴보아야 한다. 하느님의 섭리를 이해하는 일이 특별히 선택된 은총이긴 하지만 우리가 전혀 파악하지 못하도록 하신 것은 아니다.

성인들이 강조하는 바에 의하면, 우리의 신앙 안에서 성삼위는 구분되어져야 하며, 각위는 각기 맞갖은 존경을 받으셔야 한다는 것이다. 아타나시오 신경은 이 점에 대해서 강경하고도 위압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 그 근거를 창조와 강생의 궁극 목적이 성삼위의 영광이라는 사실에 두고 있다. 어떻게 하면 이 알아듣기 힘든 신비를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분명한 것은 오직 하느님께서 비추어 주심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 은총은 성모님께 간청하여 얻어낼 수도 있다. 이 세상에서 맨 처음으로 성삼위의 교리를 확실하게 계시 받은 분이 바로 성모님이시기 때문이다. 그 계시는 마리아가 성령의 힘으로 구세주를 잉태하리라는 ‘천사의 아룀(the Annunciation)’을 듣는 바로 그 순간에 이루어졌다.

성삼위께서 대천사를 통하여 마리아에게 스스로를 드러내신 것이다. “성령이 너에게 내려 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감싸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나실 그 거룩한 아기를 하느님의 아들이라 부르게 될 것이다.”(루가 1, 35)

이 계시를 통해서 성삼위의 신비가 뚜렷이 밝혀졌다. 즉, 강생의 신비를 역사하신 성령, 강생하실 분의 아버지이신 지극히 높으신 성부 하느님, 그리고 ‘장차 위대한 분이 되어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릴'(루가 1, 32) 성자 그리스도가 바로 이 신비의 실체이다. 성삼위의 각위와 각기 독특한 관계를 맺고 있는 마리아의 특별한 위치를 묵상함으로써 우리는 성삼위의 각위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제2위 성자와 마리아 제2위이신 천주 성자께 대한 마리아의 관계는 우리가 가장 이해하기 쉬운 어머니로서의 관계이다. 그런데 성모님의 모성은 친밀성과 영원성, 그리고 보통 인간의 관계로서는 설명할 수 없는 무한한 초월성을 지닌다. 예수님과 성모님의 관계에서는 영혼의 일치가 으뜸이고, 육신적 일치는 그 다음이다. 그래서 성자께서 태어나신 후 육신적으로는 서로 갈라지셨지만, 두 분의 일치는 중단되고 않고 계속되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더욱 굳건히 맺어졌다. 그 결과로 교회는 성모님을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협력자, 즉 은총의 중재자로서 그리스도의 구속사업에 협력하시는 공동 구속자로서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리스도와 닮은 분’이라고도 선언할 수 있는 것이다.

성령과 마리아의 관계를 말할 때 우리는 흔히 성모님을 ‘성령의 궁전’ 또는 ‘성령의 지성소’라고 부르지만, 이러한 호칭도 그 실체를 나타내는 데에는 미흡하다. 성령께서는 마리아를 당신 다음으로 존귀하게 만드실 정도로 당신께 일치하도록 하셨기 때문이다. 성령께서는 이렇게 마리아를 들어올리셨으며 당신과 하나로 결합시키셨고 당신으로 말미암아 살게 하셨으므로, 성령께서는 성모님의 영혼이나 다름없이 되셨다. 따라서 성모님은 성령께서 활동하시는 데 쓰이는 단순한 연장이나 수로만이 아니다. 성모님은 지성과 자각을 겸비한 성령의 협조자이시며, 성모님이 어떤 일을 하실 때에는 성령께서도 함께 하시며, 성모님의 중재 없이는 성령의 중재도 바랄 수 없을 만큼 두 분은 하나 되어 계신다.

성령은 사랑, 아름다움, 힘, 지혜, 순결, 그 밖의 하느님의 본성 모두를 갖추고 계신다. 성령이 풍부하게 내리시면 모든 것이 부족함 없이 충족될; 수 있으며, 아무리 고통스러운 문제라도 하느님의 뜻에 맞도록 해결될 수가 있다. 그러므로 성령을 협조자로 모시는 이는 전능의 물결을 타게 되는 것이다. 성령의 도우심을 얻기 위한 조건 중의 하나가 성모님과 성령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이라면, 또 하나의 중요한 조건은 성령께서 실체적이고 개별적인 성삼위의 한 분으로서 우리를 위한 특별한 사명을 지니셨다는 점을 충분히 인식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가 성령께 대하여 올바른 이해를 하려면 우리 마음을 자주 성령께 향하도록 하는 방법밖에는 없다. 마음을 열어 성령께로 향하기만 한다면 동정 성모님께 바치는 우리의 모든 신심은 우리를 성령께로 쉽게 이끌어주는 넓은 통로가 될 것이다.
특히, 레지오 단원들은 묵주기도를 바칠 때 이를 활용할 수 있다. 묵주기도는 성모님께 바치는 주된 기도라는 이유만으로도 성령께 드리는 으뜸가는 신심 행위가 될 뿐만 아니라, 그 안에 담긴 15단의 신비는 구원 사업이라는 극적인 사건 안에서 성령께서 맡고 계시는 중요한 중재 역할을 찬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부와 마리아의 관계는 대개 아버지와 딸의 관계로 정의되고 있다. 이러한 칭호는 다음과 같은 뜻을 지닌다.

(가) ‘모든 피조물 중 으뜸으로 하느님께서 가장 마음에 들어 하시는 자녀로서 가장 가깝고 사랑스러운 이’ (뉴만 추기경)로서의 마리아의 지위.
(나) 예수 그리스도와의 온전한 일치로 마리아는 성부와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되며, 이로 인해서 ‘성부의 따님’이라는 신비스러운 칭호를 받게 됨.
(다) 마리아는 성부와 현저히 닮아, 사랑하올 성부께서 발산하시는 영원한 빛을 세상에 베푸시는 데 맞갖은 분임.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점에서 마리아는 성부와 일종의 인척 관계를 이룬다.” (레피시에 추기경 / Cardinal Lepicier)

그러나 ‘하느님의 따님’이라는 칭호만으로는 성부께 대한 마리아의 관계가 성부의 자녀요 동시에 마리아의 자녀인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마리아에게 당신 성자와 그 신비체의 지체들을 탄생시키는 능력을 주시기 위하여 피조물에게 허용할 수 있는 최대의 은총을 베푸셨다.”(몽포르의 성 루도비코-마리아) 성부께 대한 마리아의 관계는 모든 영혼 안에 생명이 흐르도록 하기 위하여 근원적으로 항상 있어야 하는 요소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베푸시는 은총에 대해서 우리가 감사와 협조로 보답하기를 바라고 계신다. 그러므로 생명의 샘인 이 결합의 관계를 늘 우리의 생각의 주제로 삼아야 한다. 레지오 단원들은 특히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 이와 같은 지향을 두어야 한다. 이 기도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지으셨으므로 올바른 것들을 가장 이상적인 방법으로 간구하는 기도이다. 이 기도를 가톨릭 교회의 정신으로 정성을 다하여 바친다면, 영원하신 성부께 영광을 드리고 성모 마리아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하느님의 넘치는 은총에 대하여 감사하는 목적을 완전히 달성할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성모 마리아께 대한 우리들의 신심이 얼마나 필요한가에 대해서는 성부 성자 성령께서 우리에게 몸소 보여 주신 바를 생각해 보면 잘 알 수 있다. 즉, 천주 성부께서는 성모 마리아를 통해서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인류에게 보내셨고 지금도 계속 보내고 계신다. 또한 천주 성부께서는 성모 마리아에 의해서만 당신의 자녀들을 만들어 내시며 당신의 은총을 내려 주신다. 성자께서도 성령과 온전히 일치하고 계신 성모 마리아를 통해서만 오늘날도 매일 탄생하시고, 각 영혼들 안에서 새롭게 나타나시며, 오직 성모 마리아를 통해서만 자신의 공로와 은총을 분배하신다. 성령께서도 성모 마리아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탄생시키시며, 성모 마리아에 의해서만 신비체의 지체를 만드시고, 당신 은총의 선물을 나누어 주신다. 이와 같이 천주 성삼께서 여러 가지 길로 확실한 표본을 보여 주셨는데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성모 마리아를 무시하거나, 성모 마리아를 통하지 않고 천주 성삼께 일치하려 하거나, 성모 마리아께 자신을 봉헌하여 스스로 성모 마리아의 소유물이 되지 않고서 천주 성삼께 봉사하겠다고 하니, 우리의 눈이 어두운 탓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몽포르의 성 루도비코-마리아:복되신 동정 성모님께 대한 참된 신심 140)

제8장 레지오 단원과 성체
1 미사 성제

레지오에서 단원의 성화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 강조한 바가 있다. 단원 자신이 성화되지 않고서는 값있는 활동을 하기 어려우며, 더욱이 레지오 단원이 다른 사람들에게 은총을 전달 할 때에는 자신이 지닌 은총만큼만 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레지오 단원은 마리아를 통하여 성령으로 가득 차고, 이 땅의 모습을 새롭게 하시는 성령께서 권능을 행사하시는 데 자신을 도구로 써 주시도록 간청하면서 단원 생활을 출발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간구하는 은총은 갈바리아에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부터 흘러나오며, 이 희생은 미사를 통하여 인류 가운데 계속된다. 미사는 단순히 과거를 상징적으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님께서 갈바리아에서 완성하시고 세상을 구원하신 그 숭고한 행위를 우리 가운데 실제로 있게 하는 것이다. 십자가상 제사와 미사를 비교하여 어느 한쪽이 다른 쪽보다 더욱 가치가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 두 제사는 오직 하나의 동일한 희생 제사이며, 다만 전능하신 분의 손길이 시간과 장소를 다르게 정해 놓으셨을 따름이다. 미사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께 바치신 모든 것과 인류를 위해 얻어 주신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고, 미사에 참례한 신자들이 바치는 제물은 그리스도께서 바치시는 위대한 제물과 하나가 된다.

그러므로 단원이 자신과 다른 이들을 위해 풍성한 구원의 은총을 나누어 받기를 원한다면, 그가 의지할 곳은 바로 미사이다. 레지오는 저마다 다른 형편과 사정을 고려하여 단원들에게 평일 미사를 의무로 부과하지는 않고 있다. 그러나 단원 자신과 자신의 활동을 위해 자주, 가능하면 매일, 미사에 참례하고 영성체 하기를 간곡히 당부한다.

레지오 단원들은 성모님과 일치하여 활동을 수행하며, 특히 성찬식에 참례할 때 성모님과 더욱 일치해야 한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미사는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라는 두 중요한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이 두 부분은 서로 너무나 밀접하게 연관되어 오직 하나의 흠숭 행위를 이루는 것이다.(전례 헌장 56)
그러므로 신자들은 하느님 말씀의 식탁과 그리스도 성체의 식탁이 함께 마련되는 미사에 처음부터 끝까지 참례함으로써, (말씀을 통해) 가르침을 받고 (성체를 통해) 영혼을 살찌게 한다.(전례 헌장 48, 51)

“미사 성제를 통하여 우리는 십자가의 희생을 단지 하나의 상징으로 기억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갈바리아의 제사는 시작을 초월하는 하나의 위대한 현실로서 바로 현재 안으로 들어선다. 시간과 공간은 사라지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그 예수님께서 여기에 현존하신다. 모든 신자들은 주님의 거룩하신 희생의 의지와 일치하여 자신 앞에 계신 예수님을 통하여 자신을 살아있는 제물로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봉헌한다. 그러므로 거룩한 미사는 엄청난 실체적 체험이며, 골고타를 현실로서 체험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슬픔과 통회, 사랑과 헌신, 영웅심과 희생정신의 물줄기가 제대로부터 흘러내려 기도하는 신자들을 적시며 흐른다.”(칼 아담 / Karl Adam : 가톨릭 신앙의 정신)

2 말씀의 전례

미사는 무엇보다도 믿음의 잔치이며, 이 믿음은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 안에 태어나고 성장한다. 여기서 우리는 미사 경본의 ‘총지침’에 나와 있는 말을 상기해 보기로 한다. “성당에서 성서가 봉독될 때는, 하느님 자신이 당신 백성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며, 말씀 안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선포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 말씀을 봉독하는 것은 전례의 가장 중요한 요소에 속하며, 참석한 모든 사람들은 경외심을 가지고 그 말씀을 경청해야 한다.”(미사 경본 ‘총지침’ 9) 강론 역시 매우 중요하다. 강론은 주일이나 축일 미사 때 필수적이지만, 평일 미사에도 강론이 있다면 바람직할 것이다. 사제는 강론을 통하여 미사에 참례하고 있는 신자들의 신심을 키우기 위해 교회의 가르침에 비추어 그 말씀을 설명해 준다. 우리가 말씀의 잔치에 참여할 때에는 성모님을 우리의 본보기로 삼아야 한다. 성모님은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정성을 다해 받아들이셨으며, 바로 그러한 믿음이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는 관문이요 통로가 되셨기 때문이다.(마리아 공경 17)

3 성모님과 일치하는 성찬의 전례

우리 주님께서는 어머니께 엄숙히 동의를 구하거나 흔쾌히 승낙을 받지 않고서는 당신의 구속 사업을 시작하지 않으셨다. 갈바리아에서의 구속 사업 역시 성모님이 주님 곁에 계셨고 동의해 주셨기 때문에 완성될 수 있었다. “성모님과 그리스도의 이와 같은 고통과 의지의 결합으로 성모님은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거룩한 피와 죽음으로 얻어 주신 모든 은총을 온 인류에게 나누어 주고, 잃어버린 세상을 되찾는 일을 맡으신 가장 가치 있는 분이 되신 것이다.”(교황 비오 10세 AD 9) 성모님은 온 인류를 대표하여 갈바리아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서 계셨고, 지금도 새로운 미사가 봉헌될 때마다 똑같은 상황에서 구세주의 봉헌이 이루어지고 있다. 성모님은 전에 십자가 곁에 계셨던 것처럼 지금 제대 곁에 서 계신다. 성모님은 태초에 예언된 뱀의 머리를 바수는 여인으로서 늘 제대 옆에서 예수님을 돕고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미사에 올바로 참례하기 위해서는 미사 중에 반드시 성모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곁들여야만 한다.

갈바리아에는 성모님과 더불어 로마 군단을 대표하는 백인 대장과 그의 병사들도 있었다. 그들은 그들이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고(1 고린토 2, 8) 있다는 사실은 정녕 모른 채, 주님께서 자신을 제물로 바칠 때 슬픔을 느끼며 거기 함께 있었다. 그런데 놀랍고도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들 위에 은총이 쏟아져 내린 것이다. 이 일에 대하여 베르나르도 성인(St. Bernard)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보라, 신앙의 눈은 백인 대장으로 하여금 죽음 속에서 생명을 볼 수 있게 하였으며, 꺼져 가는 숨결 속에서마저 그분이 바로 지극히 높으신 분이심을 알아볼 수 있게 한 것이다.”

그들 손에 희생된 처참한 시신을 보면서 로마 병사들은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었구나!”(마태 27, 25) 하고 부르짖었던 것이다.
사납고 거칠기로 소문난 로마 병사들의 이러한 회두는 성모님의 기도가 거둔 뜻밖의 순간적인 결실이었다. 이들은 인류의 어머니가 갈바리아에서 처음으로 맞아들인 별난 자녀들로서, 어머니께서 ‘레지오’라는 이름에 호감을 가지게 된 것은 틀림없이 이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레지오 단원들이 성모님의 의향과 일치된 협조자로서 매일 미사에 참례할 때, 성모님은 이들을 당신께로 불러 모으시어, 신앙의 예리한 눈을 갖게 해 주시고 넘쳐 흐르는 어머니의 사랑을 베풀어 주신다. 그러므로 단원들은 갈바리아의 숭고한 희생 제사가 실제로 다시 펼쳐지는 미사에 진실된 마음으로(무한한 은총을 느끼며) 참례해야 할 것이다.
레지오 단원들은 미사 중에 하느님의 아들이 제물로 봉헌되시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들 자신을 성자와 일치시켜 오직 하나의 제물이 되도록 해야 한다. 미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임과 동시에 단원 자신의 산 제사이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단원들은 그리스도의 흠숭하올 성체를 받아 모셔야 한다. 이 거룩한 희생 제사의 열매를 완전히 거두어 들이기 위해서는 제물이 되신 그분의 거룩한 몸을 반드시 사제와 함께 나누어야 하기 때문이다.

레지오 단원들은 이 거룩한 신비 속에서 새로운 하와이신 성모님의 본질적 역할, 즉 ‘사랑하는 당신 아드님께서 십자가의 제대 위에서 인류 구원 사업을 완성하고 계실 때, 어머니께서는 아드님 곁에 서서 함께 수난을 겪으시고 함께 구속 사업을 수행하고 계셨음'(비오 11세)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레지오 단원이 미사를 마치고 제대를 떠난 후에도 성모님은 단원들과 함께 하시며, 은총을 나누어 주는 사업에 단원들을 참여하게 하시어, 단원들이 만나서 활동하는 모든 영혼에게 무한한 구원의 보물을 아낌없이 나누어 주게 하신다.

“그리스도 교인들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신 그리스도의 몸이 현존하는 성찬의 전례, 즉 구원의 신비를 기념하는 전례를 통하여 성모님의 모성을 특별히 이해하고 체험하게 된다. 그리스도 교인들의 신앙심은 복되신 동정 성모님께 대한 신심과 성체 신심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언제나 바르게 이해해 왔다. 이러한 사실은 서방 교회와 동방 교회의 전례나 수도 단체들의 진통을 통해서 또는 젊은이들을 위한 영성 운동을 비롯하여 현대의 여러 다양한 영성 운동과 성모 성지에서의 독특한 전례 행위 등을 통해서도 역력히 드러난다. ‘성모님은 신자들을 성체께로 인도하신다.'”(구세주의 어머니)

4 우리의 보화인 성체

성체는 은총의 중심이며 원천이다. 그러므로 성체는 레지오 조직의 머릿돌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아무리 열성적으로 활동을 한다 해도, 레지오 활동의 주목적이 성체께서 모든 이의 마음을 다스리시도록 해 드리는 것이라는 사실을 한 순간이라도 잊는다면, 우리가 설사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활동하였다 하더라도 가치 있는 일을 한 것은 아무것도 없게 된다. 왜냐하면, 성체께서 사람들의 마음 안에 계시며 그 마음을 다스리실 때 비로소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을 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세상 사람들에게 당신을 나누어 주시어 그들을 당신과 하나가 되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이 나눔은 주로 성체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 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요한 6, 51)

성체는 무한한 은총이다. 예수님께서 나자렛 성가정이나 예루살렘의 다락방에 계셨던 것과 똑같이 이 성체성사 안에 실제로 계시기 때문이다. 성체는 단순히 예수님을 상징하거나 주님께서 권능을 행사하시는 데 쓰시는 도구가 아니라, 실체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낳으시고 기르신 성모님은 “흠숭하올 성체 안에서 태중의 복되신 아드님을 다시 뵈옵고 성체성사 속에 현존하시는 주님과 일치하는 삶 속에서 베들레헴과 나자렛에서의 행복했던 시절을 항상 새롭게 하셨다.”(성 베드로 율리아노 에이마르 / St. Peter Julian Eymard)

예수님을 특별한 힘을 지닌 사람보다 조금 더 나은 존재로밖에 여기지 않는 사람들조차도 예수님을 존경하고 본받으려 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그러니 만약 이러한 사람들이 주님을 좀더 높이 받든다면 주님께 더 많은 것을 드릴 것은 분명한 일이다. 그렇다면 신앙을 지닌 우리들은 과연 무엇을 해 드려야 하는가?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신앙을 실천하지 않는 가톨릭 신자들이 무슨 변명을 할 수 있겠는가? 가톨릭 신자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숭배하는 주님을 성체 안에 살아 계시는 모습으로 언제라도 자유로이 모실 수가 있다. 이와 같이 신자들은 언제라도 주님께 나아갈 수 있으므로 매일이라도 영혼의 양식으로 주님을 받아 모실 수 있으며, 또한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한다.

이러한 점들을 미루어 볼 때, 우리가 그처럼 빛나는 유산을 소홀히 함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 성체에 대한 믿음을 지닌 이들은 죄짓지 않도록 힘써야 하며, 지각 없는 행동으로 그들이 영혼에 절대로 필요한 생명소를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우리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첫 순간부터 마음속에 넣어 두셨던 생각이 바로 이 영혼의 양식을 마련하시는 일이었다. 베들레헴(‘빵의 집’이란 뜻)에서 태어나셨을 당시 주님께서는 갓난아이로 밀짚 위에 누워 계셨는데, 주님 자신이 바로 ‘하늘의 밀’이셨기 때문이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을 당신과 하나 되게 하고 당신 신비체 속에서 일치를 이루게 하기 위해서 하늘의 빵이 되시도록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성모님은 이 신비체의 어머니이시다. 일찍이 성모님은 그리스도이신 아기 예수님을 돌보는 일에 여념이 없으셨던 것처럼 이제는 그 신비체의 어머니로서 전과 다름없이 지체(枝體)들인 우리를 양육하고 싶어하신다. 하늘의 빵으로 양육되어야 할 당신의 아기들이 성체를 받아 모시지 않아 영적으로 완전히 굶주리고 심지어는 죽기까지 하는 것을 보실 때, 어머니의 마음은 얼마나 고통스러우시겠는가. 영혼을 돌보시는 성모님의 모성에 동참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성모님과 일치하여 어머니이신 성모님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 성체를 받아 모시지 않는 현상을 없애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레지오 단원들은 성체성사에 대한 지식과 사랑을 일깨우고 인간을 성체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죄와 냉담을 없애기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하여 활동해야 한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받아 모시는 성체는 참으로 헤아릴 수 없는 큰 은혜가 된다. 이처럼 성체는 영혼 하나하나를 통하여 전체 그리스도 신비체를 양육하며 신비체의 지체들인 우리의 ‘몸과 지혜가 날로 자라면서 하느님과 사람의 총애를 더욱 많이 받게'(루가 2, 52)하는 것이다.

“구원 사업에 있어서 어머니와 아드님의 일치는 갈바리아에서 그 절정에 이릅니다. 그 곳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하느님께 올리는 ‘흠 없는 제물'(히브 9, 14)로 내어 놓으셨고, 성모님은 십자가 곁에 서서(요한 19, 25 참조) 당신 외아드님과 함께 심한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성모님은 아드님의 희생 제사에 모성애로 동참하셨고, 당신 자신이 낳으신 아드님을 제물로 봉헌하는 데 사랑으로 동의하셨으며, 당신 자신마저도 영원하신 아버지께 봉헌하셨던 것입니다. 거룩하신 구세주께서는 십자가의 제사를 영원히 지속시키기 위하여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는 성체성사를 세우셨고, 이를 배필이신 교회에 맡기셨습니다. 그리하여 교회는 특히 주일마다 신자들을 불러 모아 주님께서 다신 오실 때까지 주님의 파스카를 거행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늘의 성인들, 특히 복되신 동정녀와의 통공 안에서 이 파스카를 거행하며, 이로써 그분의 불타는 사랑과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본받게 되는 것입니다.”(마리아 공경 20)

제9장 레지오 단원과 그리스도 신비체
1 이 교리는 레지오 봉사의 기초이다

맨 처음 레지오 단원들이 가진 회합에서는 그들이 시작하고자 하는 봉사 활동이 단순한 선행의 차원을 넘어서서 초자연적인 성격을 지녀야 한다는 점이 강조되었다. 레지오 단원이 사람들을 접촉할 때에는 당연히 친절해야 하나, 단지 그 정도에 머물러서는 안 되며, 그들이 만나는 사람들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뵐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5, 40) 하신 주님의 말씀에 따라, 그들이 활동 중에 만나게 되는 사람들, 가장 약하고 미천한 이들에게 베푸는 것이 바로 우리 주님께 베풀어 드리는 것이라는 점을 인식하도록 했다.

첫 회합 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레지오에서는 이 점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기며, 모든 단원들이 이 활동의 초자연적 동기를 바르게 이해하고 레지오 봉사의 기초로 삼도록 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 원리를 바탕으로 레지오는 규율을 유지하고 단원들간에 서로 조화를 이루게 된다. 또한 이 원리 안에서 레지오 단원은 간부와 동료 단원들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뵙고 존경하게 된다. 이 놀라운 변화의 진리, 즉 인간과 인간 사이의 행위를 하느님께 드리는 행위로까지 높여 주는 이 원리를 단원들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 두기 위해 레지오는 이를 상훈(常訓)에 넣어 쁘레시디움의 매달 첫 주회합에서 낭독하도록 하고 있다. 이 밖에도 상훈은 레지오의 또 다른 중요한 활동 원리에 대해 강조하고 있는데, 단원들이 활동을 할 때는 반드시 성모님과 일치하겠다는 정신으로 나서야 하며, 성모님이 실제로 단원들을 통해 활동하신다는 원리를 말하고 있다.

레지오 조직의 기초가 되는 이 원리들은 그리스도 신비체 교리에서 나온 것이며, 신비체 교리는 바오로 성인이 쓴 서간문의 주제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이 교리는 주님께서 바오로 성인에게 직접 가르쳐 주셨으며, 그를 개종까지 시키지 않으셨던가!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번쩍 하자,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바오로는 앞이 보이지 않아 땅에 쓰러졌다. 그때 그는 놀라운 음성을 들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사울이 “당신은 누구십니까?” 하고 물으니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라고 대답하셨다.(사도 9,4-5) 이 말씀은 놀랍게도 바오로 사도의 영혼에 불을 놓았고, 그가 이 말씀의 진리에 대해 항상 말하고 글로써 쓰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바오로 성인의 가르침에 따르면, 그리스도와 세례를 받은 신자들의 일치는 마치 한 몸에 붙어 있는 머리와 그 지체(枝體)들이 일치하고 있는 것과 같다. 각 부분은 저마다 독특한 기능과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어떤 부분은 더 귀중하고 어떤 부분은 그보다 못할 수 있다. 그러나 신체의 모든 부분은 서로 의존하며, 하나의 생명이 신체의 모든 부분을 함께 살린다. 다른 모든 부분이 아무리 훌륭해도 어느 한 부분이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면 전체가 어려움을 겪게 되고, 반대로 어느 한 부분이 뛰어나면 다른 모든 부분은 그 덕을 본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만물을 완성하시는 분의 계획이 그 안에서 완전히 이루어진다.”(에페 1, 23) 즉, 그리스도는 이 몸의 머리요 우두머리이시며 없어서는 안 될 완전무결한 부분으로서, 다른 모든 부분은 이 곳으로부터 힘과 생명을 나누어 받는다. 우리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더할 수 없이 밀접한 관계로 그리스도께 결합된다. 그러므로 이 신비체를 비현실적인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성서에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듯이,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이다.”(에페 5, 30) 지체와 머리, 그리고 지체와 지체 사이에는 서로 사랑하고 섬겨야 하는 신성한 의무가 있다.(1 요한 4, 15-21 참조) 우리 몸에 붙어 있는 모든 부분들이 각기 어떤 일을 맡아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면 그리스도 신비체 안에서 지체들인 우리가 이행해야 하는 의무를 생생하게 알 수 있게 되며, 알았다면 이미 절반 정도는 이 의무를 이행한 셈이다.

이 신비체 교리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 교리이다. 신자들의 영성 생활과 그들이 누리는 모든 은총이 그리스도께서 당신 구원 사업을 통해서 얻어 주신 열매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교회가 함께 하나의 신비체를 이루고 있으므로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속죄 행위, 즉 십자가 수난의 무한한 공로가 지체들인 우리 믿는 이들에게 돌아온다는 사실이 구원 사업의 바탕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 주님께서 인간을 위해 고통을 당하시고 당신이 범 하지도 않은 죗값을 치르시게 된 이유이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몸인 교회의 구원자로서 그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것'(에페 5, 23)이다. 그러므로 신비체의 활동은 그리스도 자신의 활동이며, 그 지체인 신자들은 그리스도 안에 융합되어 그 안에서 살고 고통 받고 죽으며 그리스도의 부활로 다시 살아난다. 세례성사는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거룩함이 그 지체들의 영혼 안으로 흘러 들어가도록 긴밀하게 맺어 준다. 그러므로 영혼은 세례성사를 통해서 거룩하게 변화된다. 다른 성사들, 그 중에서도 특히 성체성사는 신비체의 지체와 머리이신 그리스도 사이의 일치를 더욱 강화시키는 일을 한다. 그 밖에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더욱 깊게 해주는 요소로서 믿음, 사랑의 실천, 교회 공동체 안에서의 상호 봉사와 일치, 올바르게 바쳐진 수고와 고통, 그리고 그리스도 신자다운 생활 속의 모든 행위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일들을 성모님과 한마음이 되어 행한다면 그 효과는 훨씬 더 확대될 것이다.

성모님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시며, 동시에 그 지체들의 어머니이시기 때문에 가장 훌륭한 일치를 이루도록 만들어 주신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이다.”(에페 5, 30) 그러므로 우리도 그리스도의 실질적이며 완전한 어머니이신 성모님의 자녀들이다. 성모님이 존재하시는 유일한 목적은 ‘전체 그리스도’를 잉태하여 탄생시키는 것이다. ‘전체 그리스도’란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 각 지체가 자기 구실을 다함으로써 각 마디가 서로 연결되고 얽혀 있는 신비체(에페 4, 15-16 참조)를 가리킨다. 성모님은 이 신비체의 생명이시며 영혼이신 성령의 협조와 권능으로 이 일을 성취하신다. 그리하여 우리의 영혼은 어머니이신 성모님의 품 안에서 보살핌을 받으며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나고, “성숙한 인간으로서 그리스도의 완전성에 도달하게 된다.”(에페 4, 13)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서 성모님은 다른 어떤 존재와도 구별되는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신다. 성모님은 그리스도 신비체의 지체들 가운데서 당신만의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고 계시는데, 그것은 머리이신 그리스도 다음의 자리이다. 하느님의 섭리하심으로 이루어진 ‘전체 그리스도’ 안에서 성모님은 그 몸 전체의 생명과 밀접히 관계되는 기능을 수행하신다. 즉 성모님은 신비체의 심장이시다. 그런데 베르나르도 성인의 말에 의하면, 성모님은 신비체 안의 머리와 몸을 연결시켜 주는 목과도 같은 역할을 하신다. 이러한 비유는 신비체의 머리와 그 지체들 사이에서 중재하시는 성모님의 보편적인 역할을 매우 적절하게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목이라는 말은 성모님이 지니신 막중한 영향력이나 우리 안에 초자연적 생명이 움직이도록 하는 데 있어서 하느님 다음 가는 능력을 지니신 성모님의 역할을 적절히 표현하기에는 심장보다는 못하다. 목은 다만 연결시켜 주는 부분에 지나지 않으며, 생명을 주도하거나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못한다. 이와는 달리 심장은 먼저 생명을 풍부히 받아들인 다음 온몸에 고루 분배하는 생명의 저장소이다.”(뮈라 / Mura : 그리스도 신비체)

2 성모 마리아와 그리스도 신비체

성모님은 아들이신 예수님을 실제로 기르고 보살피고 사랑하는 일을 직접 맡아 하셨다. 지금도 성모님은 가장 미소한 형제로부터 신분이 높은 사람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 신비체의 모든 지체들을 일일이 돌보는 일을 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모든 지체가 서로 도와'(1 고린 12, 25) 일치를 이룰 때, 우리가 혹 무지하거나 소홀하여 성모님의 존재를 미처 깨닫지 못할 경우가 있더라도 결코 성모님과 떨어져서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신비체를 위해 온 힘을 쏟으시는 성모님의 일에 지체로서 자신의 노력을 합치는 것이다. 성모님은 이미 신비체의 지체들을 보살펴 오셨다. 예수님을 잉태하신 순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성모님은 이 일을 하시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시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하자면, 레지오 단원들이 성모님께 도움을 청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모님이 당신의 일을 도와 달라고 단원들을 부르시는 것이다. 영혼을 보살피는 일은 성모님의 특별하고 고유한 일이므로, 성모님이 은혜로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사실상 아무도 그 일에 참여할 수가 없다. 이웃을 위해 봉사하려는 이들 가운데 아직도 성모님의 지위와 특권을 좁게 생각하는 이가 있다면, 이 신비체 교리에 나타난 논리적인 결론에 주목하기 바란다. 더욱이 이 그리스도 신비체 교리는 성서를 받아들인다고 고백하면서도 하느님의 어머니를 무시하거나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교훈을 준다. 이러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어머니를 사랑하셨고 어머니께 순종하셨으므로(루가 2, 51), 우리 또한 신비체의 한 지체로서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모범을 본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너희는 ……… 부모를 공경하여라.”(출애 20, 12)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이 분부를 받들어 우리 모두는 성모님께 자녀로서의 효성을 드려야 하며, 성모님을 복되다고 일컬어야 한다.(루가 1, 48 참조)

성모님과 함께 하지 않고서 어느 누구도 이웃을 위해 올바로 봉사할 수 없듯이, 성모님이 의도하시는 바를 어느 정도라도 따르지 않고서는 이 봉사의 의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가 없다. 성모님과 가까워질수록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섬기라(1 요한 4, 19-21 참조)는 하느님의 가르침을 더욱 완벽하게 실천할 수 있게 된다.

그리스도 신비체 안에서 레지오 단원들이 특별히 담당해야 하는 역할은 이웃을 인도하고 위로하며 깨우쳐 주는 일이다. 그런데 이러한 역할은 신비체로서의 교회의 위치를 바르게 알지 못하고는 제대로 수행할 수가 없다. 교회의 입장과 특권, 일치, 권위, 성장, 고통, 기적, 승리, 은총과 죄의 용서 등, 이 모든 것을 올바로 이해하는 길은 오로지 그리스도께서 교회 안에 살아 계시며 교회를 통하여 당신의 사명을 계속 수행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삶과 그 삶 안에 펼쳐졌던 모든 것을 그대로 다시 보여 준다.

신비체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의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신비체 안에서 각자 주워진 역할 을 다하라고 부르신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사도적 권고’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민족들로부터 불러 모으신 형제 자매들에게 당신의 성령을 주시어 그들로써 신비로이 당신 몸을 형성하셨다. 이 몸 안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이 신자들에게 나누어지는 것이다. ….. 사람 몸의 지체는 여럿이지만 모든 지체가 한 몸을 이루듯이, 신자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그러하다.(1 고린 12, 12 참조) 즉, 그리스도께서 신비체를 건설함에 있어서도 모든 지체들은 서로 다르고 그 기능 역시 각기 다른 것이다. —- 이와 같이 주님의 영은 서로 다른 지체들에게 극히 다양한 은사(恩赦)들을 주시어, 신비체 안에서 각기 다른 형태의 봉사와 직무를 맡도록 우리들을 초대하신다.”(평신도 그리스도인 20)고 밝히고 있다.

레지오 단원들이 이 신비체의 생명 안에서 어떤 특별한 기능을 맡아 해야 하는가를 알아보려면 성모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성모님은 그리스도 신비체의 심장이시기 때문이다. 우리 몸 안에서 심장이 맡아 하는 역할처럼 성모님은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피를 정맥과 동맥을 통하여 신비체의 모든 부분에 고루 보내시고, 이로써 신비체가 생명을 얻고 자라게 하신다. 성모님은 무엇보다도 사랑으로 이 일을 수행하신다. 그러므로 레지오가 성모님과 일치하여 사도직을 수행할 때, 단원들은 그리스도 신비체의 심장으로서 이토록 중요한 역할을 하시는 성모님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

“눈이 손더러 ‘너는 나에게 소용이 없다’고 말할 수도 없고, 머리가 발더러 ‘너는 나에게 소용이 없다’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다.”(1 고린 12, 21) 이 말씀을 통하여 레지오 단원들은 사도직 안에서 자신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아야 한다. 단원들이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고 의지하는 것처럼, 신비체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도 참으로 레지오 단원들에게 의지하신다. 그러므로 주님이신 그분이 단원들에게 “내가 영혼을 구하고 성화 시키는 일에 그대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씀하고 계실 것임이 틀림없으리라. “나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으로 채우고 있다.” (골로 1, 24)는 바오로 성인의 말은 바로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몸인 우리들에게 의지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이다.이 놀라운 표현은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일이 어떤 면으로든 완전하지 못하다는 뜻이 아니라, 다만 신비체의 각 지체는 자신의 구원과 다른 영혼들의 구원을 위해 각자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필립 2, 12 참조)는 원리를 강조하는 것이다.

레지오 단원들은 이 원리로부터 단원 각자가 그리스도 신비체 안에서 담당하고 있는 숭고한 소명이 무엇인지 깨달아야 한다. 그 소명이란 주님께서 당신 사명을 수행하시는 데 필요로 하시는 것을 우리가 채워 드리는 일이다. 어둠 속에 있는 이들에게 빛과 희망을, 괴로워하는 이들에게는 위로를, 죄로 죽은 영혼들에게 생명을 가져다 주는 일에 그리스도께서 우리 레지오 단원들을 쓰시려 하시다니, 이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인가? 두말할 나위 없이 우리 레지오 단원들은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어머니께 바쳤던 그 숭고한 사랑과 순종을 정성껏 본받아야 하며, 또한 이를 신비체 안에서 그대로 실천하도록 힘써야 한다.

“바오로 성인이 그리스도의 고난을 자신의 몸으로 채우고 있다고 확언하였으니, 우리도 다음과 같이 진실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이며 그리스도와 은총으로 일치하고 있는 참된 크리스천은 모든 행동을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 평온히 지내시는 동안에 몸소 하셨던 행동을 지속시키며 완성한다. 그러므로 신자들이 이 기도를 바치는 행위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사시는 동안 바치셨던 기도를 이어 바치는 것이며, 신자들의 활동은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의 삶과 말씀을 통하여 미처 다 하시지 못한 일들을 보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가 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수없이 많은 그리스도가 현세의 우리 안에 생활하고 활동하며, 거룩하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예수님의 정신을 실천하며 수난을 겪어야 한다.”(성 요한 유드 / St. John Eudes : 예수님의 왕국)

3 신비체 안에서 겪는 고통

레지오 단원은 활동 중에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특히 고통 받는 이들과 긴밀히 접촉하게 된다. 그러므로 단원들은 세상이 ‘고통’이라고 하는 문제에 대해서 깊이 알고 있어야 한다. 평생 동안 고통의 짐을 지지 않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그러나 모두가 고통을 거부하며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친다. 그러다가 혹 그것이 불가능한 일임을 알게 될 때, 영혼은 때때로 고통에 짓눌리고 급기야는 좌절하게 되며, 구원 계획도 차질을 빚게 된다. 옷감을 짤 때 씨실과 날실이 교차하며 서로 보완하듯이, 모든 성공적인 삶에도 고통의 자리가 있게 마련이다. 현실의 고통이 인간의 삶을 가로막고 방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인간은 이 고통을 통해서 완성에 이른다. 성서의 가르침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을 특권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해서 고난까지 당하는 특권, 곧 그리스도를 섬기는 특권을 받았으며”(필립 1, 29) 또한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으니 그분과 함께 살 것이고, 우리가 끝까지 참고 견디면 그분과 함께 다스리게 될 것”(2 디모 2, 11-12)이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는 순간을 잘 드러내고 있다. 신비체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리며 구원 사업을 마치셨다. 십자가 아래에는 너무도 상심하여 더 이상 삶을 지탱하기도 힘들 것처럼 보이는 한 여인이 서 계신다. 이 여인이 바로 구원을 주시는 그리스도의 어머니요 동시에 구원받는 이들의 어머니이시다. 십자가의 피는 오늘날 온 세상에 아낌없이 뿌려져 있으며 결국 이 피로써 세상은 구원받았다. 그런데 이 피는 당초 이 여인의 혈관으로부터 흘러나온 것이다. 이제 이 고귀한 성혈은 신비체를 통하여 흐르며 신비체의 모든 빈자리를 생명으로 채워 넣는다. 그러나 우리가 이 은총을 누리려면 성혈의 흐름이 어떤 결과를 가져다 주는가를 올바로 이해 해야만 한다. 고귀한 성혈이 영혼 안에 흘러 들어오면 영혼은 그리스도를 닮게 된다. 여기에서 말하는 그리스도는 온전한 그리스도이시다. 즉, 베들레헴이나 타보르에서 드러나신 환희와 영광의 그리스도이실 뿐만 아니라 갈바리아에서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 가신 고통과 희생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모든 면을 받아들여야 하며, 자신의 취향대로 그리스도 안의 어느 한쪽 면만을 골라 선택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성모님은 환희 속에서 주님을 잉태하시던 순간에 이미 이 사실을 온전히 깨닫고 계셨다. 성모님은 당신이 오직 기쁨의 어머니로서만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니라 슬픔의 여인이 되리라는 것도 아셨다. 그러나 성모님은 언제나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맡겨 왔으므로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렇듯 성모님은 하느님의 섭리하심을 충분히 알고 계셨으므로, 당신의 몸을 통해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탄생이 드러내는 모든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셨다. 아드님과 함께 기쁨을 주리는 것은 물론 고통도 기꺼이 함께 하셨다. 그 순간 두 분의 성심은 하나가 될 만큼 온전히 일치하여 신비체 안에서 신비체를 위하여 두 분의 맥박은 함께 고동치고 있다. 성모님은 모든 은총의 중재자, 곧 우리 주님의 지극히 고귀한 성혈을 받아 담으시고 나누어 주시는 영신적 그릇이 된 것이다. 우리는 성모님의 자녀로서 성모님이 보여 주신 모든 것을 그대로 따라야 한다. 어떤 사람이 하느님께 어느 정도 쓸모 있는 사람인지를 알아보려면 그가 예수 성심께 얼마나 가까이 일치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된다. 성혈의 원천은 예수 성심이며, 예수 성심과 일치함으로써 예수 성심으로부터 성혈을 퍼 올려 다른 영혼들에게도 나누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그리스도 생애의 두 요소(고통과 영광) 중 어느 한쪽 면만을 받아들여서는 그리스도께 온전히 일치할 수가 없다. 그리스도의 성심 성혈과의 일치는 오직 당신 생애의 모든 요소를 동시에 받아들임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왕의 모습은 환영하면서 십자가 위에서 고통 받는 인간 예수의 모습을 외면한다면, 이는 헛되고 가치 없는 일일 따름이다. 이 두 다른 모습이 합하여 오직 한 분이신 그리스도를 이루기 때문이다. 고통의 인간 예수와 함께 하지 않는 사람은 주님의 구원 사업에 아무런 역할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뒤에 이어질 영광도 차지하지 못하고 만다.

그러므로 고통은 언제나 하나의 은총이다. 고통은 (신체적으로) 병을 고쳐 주거나, (정신적으로) 힘을 북돋아 준다. 고통은 결코 죄에 대한 벌이 아니다. “고통은 병을 고치는 특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우리가 고통을 겪을 때 벌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고 아우구스티노 성인(St. Augustine)은 말했다. 한편, 우리 주님이 겪으신 고통은 죄 없는 사람과 성스러운 사람들의 몸 안으로 흘러 넘쳐 들어가 그들이 더욱 완전히 그리스도를 닮도록 측량할 수 없는 특전을 베풀어 준다. 이처럼 고통을 함께 섞고 나누는 일은 모든 고행과 보속의 근본이 되는 것이다.

쉬운 예로, 사람 몸 안에서 피가 움직이는 것을 보면 왜 고통이 필요하며 그 역할이 무엇인지 더욱 뚜렷이 알 수 있다. 손목에서 뛰고 있는 맥박은 바로 심장의 고동이다. 심장으로부터 흐르는 더운 피가 손안에 흐르는 것이다. 즉, 손은 몸의 일부로서 몸과 하나를 이루고 있다. 손이 차가워지면 혈관이 수축되어 피의 흐름이 지장을 받게 되며, 손이 더욱 차가워지면 혈관이 수축되어 피의 흐름이 지장을 받게 되며, 손이 더욱 차가워지면 동상에 걸리게 되고 세포가 죽기 시작하여 손은 생기를 잃고 쓸 수 없게 된다. 그런 손은 죽은 것과 같아서 그대로 두면 결국 썩어서 잘라내야 한다. 이와 같이 동상에 이르는 여러 단계는 그리스도 신비체의 지체들에게 일어날 수 있는 여러 가지 신앙 상태를 잘 보여 준다. 신비체의 지체가 거기서 흘러나오는 고귀한 성혈을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차가워지면, 썩어서 잘라내야 하는 팔다리처럼 죽을 위험에 놓여 있는 것이다. 동상에 걸린 손발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누구나 다 잘 알고 있다. 물론 다시 생기를 찾게 하기 위하여 피를 순환시켜 주어야 한다. 수축된 혈관에 피를 밀어 넣는 일은 고통스러운 과정이지만, 그것은 바로 희망과 기쁨의 징조이다. 신앙 생활을 하는 대부분의 신자들은 사실상 동상을 입지 않은 팔다리와 같다. 설사 다소 차가운 상태에 있는 신자의 경우라도 대부분 자만심 때문에 자신들이 동상을 입었다고 여기는 일이 거의 없다. 이들은 주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만큼 주님의 성혈을 충분히 받지 못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이들에게 당신의 생명을 억지로라도 밀어 넣어 주시는 것이다. 주님의 성혈이 흘러 들어가면서 이들의 오므라진 혈관을 억지로 넓히게 되므로 고통이 따른다. 이것이 바로 삶의 고통이다. 그러므로 고통이 가지는 이러한 의미를 알게 된다면 그 고통을 기쁨으로 바꿀 수 있지 않겠는가? 고통을 느낀다는 것 자체가 그리스도께서 내 가까이 현존하심을 느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겪어야 할 고통을 모두 겪으셨다. 당신이 받아야 할 고통은 조금도 모자람이 없이 다 받으셨다. 그렇다면 주님의 고통이 다 끝났다고 할 수 있는가? 그렇다. 머리로서의 고통은 끝났다. 그러나 몸의 고통은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러므로 몸의 고통을 아직도 겪고 계시는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위한 당신의 속죄 행위에 우리도 함께 참여하기를 바라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함께 참여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지체이므로, 머리가 겪는 고통을 지체들도 당연히 참고 견뎌야 하기 때문이다.”(성 아우구스티노 / St. Augustine)

제10장 레지오 사도직

1 사도직의 존엄성

레지오 마리애가 단원들에게 이해시키고자 하는 사도직의 존엄성과 그 사도직이 교회에 대하여 지니는 중요성을 설명하는 데는 다음과 같은 권위 있는 선언보다 더 힘찬 말씀은 없다.

“평신도의 사도직 수행에 따르는 권리와 의무는 머리이신 그리스도와의 일치로부터 솟아난다. 평신도는 세례성사로써 그리스도 신비체의 지체가 되고 견진성사로써 성령의 힘을 받아 굳건해지므로, 그들에게 사도직 사명을 내리시는 분은 주님 자신이시다. 평신도가 거룩한 백성, 왕의 사제(1 베드 2, 4-10 참조)로 축성됨은 그들의 모든 행위를 제물로 봉헌하고 세상 어디서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게 하기 위해서이다. 모든 성사, 특히 성체성사는 사도직을 수행하는 모든 영혼 안에 사랑을 심고 자라게 한다.”(평신도 교령 3)

“교황 비오 12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자들은, 더 정확히 말해서 평신도들은, 자신들이 교회 생활의 일선에 서 있음을 인식하고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 교회는 인간 사회에 활력을 불어 넣는 근본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평신도들은 그들이 교회에 속해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 자신이 바로 교회라는 사실을 더욱 명확히 의식하고 있어야 한다. 교회는 모든 신자들의 으뜸인 교황과 교황을 따르는 주교들의 인도를 받는 지상의 신자 공동체이다. 즉 평신도와 주교와 교황, 이 모든 요소가 바로 교회이다.”(평신도 그리스도인 9)

“성모님은 인류에게 도덕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신다. 우리가 그분의 영향력을 보다 바르게 헤아리려면 자연 질서 안에서의 물체와 그 구성 부분을 이어주는 인력, 친화력, 응집력과 비교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 우리는 성모님께서 우리들을 통하여 사회 생활과 그 사회의 참된 문명을 만들어내는 모든 위대한 운동에 참여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고 있다.”(페치탈로 / Petitalot)

2 가톨릭 공동체와 평신도 사도직

가톨릭 공동체는 사도직 정신을 실천하는 평신도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만큼 건전하다고 말할 수 있다. 사제와 같은 안목을 지니고 사람들을 사제에게로 이끌어 들이며 그들을 가까이에서 지도할 수 있는 평신도들이 많을수록 건전하다는 것이다. 사제와 신자들 사이에 이와 같은 온전한 일치가 이루어질 때 가톨릭 공동체는 더욱 튼튼해진다.

사도직의 근본 정신은 교회의 복지와 교회가 펴는 사업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관심은 참여 의식이 없이는 마음속에서 우러나기가 어렵다. 따라서 사도직 단체는 사도들을 만들어 내는 거푸집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공동체 안에 사도직 정신을 꾸준히 길러 놓지 않으면 교회에 대한 모든 관심과 책임감이 점점 부족하게 되어 다음 세대에 가서는 심각한 문제가 일어난다. 그러한 성숙하지 못한 가톨릭 정신으로부터 무슨 좋은 열매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세상이 평온하여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몰라도, 그와 같이 어린 가톨릭 정신으로는 교회를 안전하게 지키기도 힘들 것이다. 역사를 보면 가톨릭 정신으로 무장되어 있지 않은 무기력한 무리들은 사나운 이리떼가 쳐들어와 그들의 목자들이 짓밟혀도 꽁무니를 빼거나, 아니면 그들 자신이 쉽게 이리떼의 밥이 되고 말았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다. 뉴만 추기경(Cardinal Newman)은 “어느 시대에 있어서나 가톨릭 정신의 잣대는 평신도였다.”라고 그 원리를 밝힌 바 있다.

“레지오 마리애의 위대한 기능은 평신도의 성소 의식을 일깨우는 것이다. 우리 평신도들이 교회를 성직자나 수도자와 동일시하여 하느님께서 그들에게만 성소를 주셨다고 생각하는 것은 위험 천만한 일이다. 평신도들은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를 한낱 이름없는 군중으로 여겨 최소한의 규정된 의무를 지키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주님께서 당신의 양들을 하나하나 불러내어 데리고 나가신 것(요한 10, 3)을 잊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처럼 주님께서 수난 당하신 갈바리아의 현장에 있지 않았던 바오로 성인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또 나를 위해서 당신의 몸을 내어 주신 하느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갈라 2, 20)라고 한말을 잊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은 예수님처럼 동네 목수이거나 아니면 주님의 어머니처럼 검소한 주부로서 모두 성소를 받아,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느님께 사랑과 봉사를 드리고 어떤 일을 맡아 하도록 개별적으로 ‘부르심’을 받고 있다. 이렇게 각자에게 맡겨진 일은 설사 남이 더 훌륭히 해낼 수 있는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남이 대신해 줄 수는 없는 일이다. 나 이외에는 아무도 나의 마음을 하느님께 드릴 수가 없고, 나의 일을 대신할 수가 없다. 이것은 신앙에 대한 매우 소중한 개인적 자각이며, 레지오는 단원들에게 바로 이러한 올바른 신앙관을 심어 준다. 따라서 각 단원은 결코 수동적이거나 기계적인 자세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각자는 하느님을 위한 존재가 되어 무엇인가 해야 한다. 아무리 평범한 인생이라 하더라도 이제 신앙은 옆으로 미루어 놓을 문제가 아니라 그의 삶에 영감을 불어넣어 주는 중요한 요소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각자가 부르심을 받았다는 확신이 서게 되면, 사도직 정신으로 채워지고, 그리스도의 사업을 도우려는 열망으로 스스로가 또 하나의 그리스도가 되어 그분의 가장 보잘것 없는 형제들 안에서 주님을 뵈옵고 섬기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레지오는 수도 단체에 갈음하는 평신도 단체로서, 평신도 생활 속에 완덕을 향한 그리스도교적 이상을 불어넣어 오늘날 세속 세계 안에서 그리스도 왕국을 확장하고 있는 것이다.”(몬시뇰 알프레드 오래힐리 / Msgr. Alfred O’Rahilly)

3 레지오와 평신도 사도직

다른 여러 원리와 마찬가지로 사도직도 그 자체로서는 다소 냉정하고 추상적인 것이다. 그래서 사도직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하고 평신도들은 그들에게 맡겨진 거룩한 사명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하여, 심한 경우에는 사도직을 수행할 능력이 없다고 생각할 위험성마저 있다. 그렇게 되면 교회가 펴고 있는 싸움에서 평신도가 반드시 맡아야 할 고유한 역할을 포기하는 비참한 결과를 낳게 된다.

이러한 문제를 올바로 판단할 수 있는 분으로서 아프리카 주재 교황 사절이었고 그 후 중국에서 교황 대사를 지낸 리베리 추기경(Cardinal Riberi)의 말씀을 들어 본다.

“레지오 마리애는 참으로 매력적인 형태의 사도직 활동이다. 레지오는 활기에 찬 모습으로 모든 사람들을 끌어들이며, 교황 비오 11세가 정하신 방법, 즉 하느님의 동정 성모께 온전히 의지하는 방법으로 활동을 수행하고 있다. 레지오는 단원의 질적인 면을 중시하여 이를 밑바탕으로 삼으며, 단원 수를 늘리는 데에도 요긴하게 이 방법을 활용한다. 레지오 마리애는 많은 기도와 자기 희생, 정밀한 조직 체계, 그리고 사제와의 온전한 협력을 통하여 튼튼해진다. 레지오 마리애야말로 현 시대의 하나의 기적이다.”

레지오는 정해진 규율에 따라 사제에게 존경과 순명을 드리지만, 단순히 그 정도로 그치지는 않는다. 이는 레지오 사도직이 사제가 집전하는 미사와 성사를 가장 중요한 은총의 수로로 삼고 있음을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레지오의 모든 노력과 활동의 방법은 병들고 굶주린 이들에게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생명의 양식을 가져다 주려는 데 있다. 그러므로 레지오 활동의 근본 원리는 이러한 사람들에게 사제를 모셔다 드리는 일이 되어야 한다. 물론, 항상 사제를 직접 모셔 가기는 사실상 힘들고 거의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레지오가 할 일은 사제의 영향력이 어느 곳에나 미치도록 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사제가 하는 일을 이해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레지오 사도직의 기본 사상이다. 레지오는 평신도를 그 단원으로 삼아 사제들과 일치하고 사제들의 지도를 받아 사제들과 전적으로 똑같은 관심을 지니고 활동하게 한다. 레지오는 사제들의 노력을 보완하고 사람들의 삶 속에 사제가 차지하는 자리를 넓혀, 사람들이 사제를 받아들임으로써 마침내 이들을 보내신 하느님을 받아들이도록 온갖 열성을 다 바치는 것이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내가 보내는 사람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 들이고 또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인다.”(요한 13, 20)

4 사제와 레지오

일손을 돕고자 모여든 열심한 신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사제의 모습은 바로 우리 주님께서 보여 주신 모습이다. 주님께서는 온 세상을 회개시키려고 준비하실 때 당신이 뽑은 사람들을 주위에 불러 모아 가르치시고 당신의 정신을 넣어 주셨다.

이와 같이 주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사도들은 그 가르침을 배운 대로 실천에 옮겨, 그들을 도와서 영혼을 구하는 일에 나설 사람들을 모두 불러 모았다. 비싸르도 추기경(Cardinal Pizzardo)이 지적한 바와 같이, 가장 먼저 로마에 예수 그리스도를 알려 로마가 어머니 교회로 자리 잡도록 씨를 뿌린 사람들은 아마도 성령께서 내려오시던 날 사도들의 강론을 들은 ‘로마에서 온 나그네들'(사도 2, 10)이었을 것이다. 그 뒤 베드로와 바오로 두 분 성인이 로마에 가서 정식으로 교회를 세우게 된 것이다.

“만일 열두 사도들이 ‘우리는 하늘의 보화를 간직하고 있고. 이 보화를 두루 전파하는 일을 도와 주시오.’라고 말하면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불러 모으지 않았더라면, 사도들만으로는 이 드넓은 세상에서 아무런 일도 하지 못하였을 것이다.”(교황 비오 11세 / Pius XI)

온 세상을 회두 시키는 일에 주님과 사도들이 보여 주신 모범을 모든 사제들이 그들의 작은 세계, 이를테면 본당, 교구 또는 특수 사목 활동 등을 통해서 본받아야 한다는 것을 다른 교황님의 일화를 들어 강조하고자 한다.

“어느 날 추기경들과 함께 한 자리에서 성 비오 10세 교황께서는 ‘지금 이 세상을 구원하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오?’라고 물으셨다. 추기경 한 분이 ‘가톨릭 학교를 세우는 일입니다.’라고 대답하자 다른 추기경이 ‘아닙니다. 성당을 배로 늘리는 일입니다.’라고 말했다. 세 번째 추기경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제 양성을 위해서 신학생 모집 인원을 늘리는 일입니다.’라고 주장하였다. 그러자 교황은 ‘아니오, 그렇지 않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각 본당에 덕망 있고 명석하고 결단력과 참다운 사도직 정신을 지닌 평신도들이 있어야 하는 것이오.’라고 말씀하셨다.

이 교황은 그의 말년에 이르러, 열심한 평신도들을 훈련하여 말과 행동으로 좋은 표양을 보이게 하며 사도직을 수행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세상을 구원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분은 교황이 되기 이전에 여러 교구에서 사목하는 동안, 본당 신자 교적부 보다는 사도직을 수행할 능력이 있는 신자 명단을 더욱 중요시하였다. 이분은 어느 계층에서든지 이런 선택된 평신도들을 모을 수 있다고 믿고 있었으며, 사제들을 평가할 때 그들이 이 점에 쏟은 열성과 노력으로 얻은 성과를 기준으로 삼았었다.”(쇼타르 / Chautard : 사도직의 정신)

“사람이 되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신비체를 이 세상에 남겨 둘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셨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주님의 사업은 갈바리아에서 끝나고 말았을 것이다. 주님의 수난은 인류에게 구원을 얻어 줄 수 있는 가치를 지녔지만, 막상 십자가로부터 생명을 가져다 줄 교회가 없었더라면 과연 몇 사람이나 하늘나라를 얻을 수 있었겠는가? 그리스도께서는 특별한 방식으로 당신을 사제와 일치시키신다. 사제는 영혼들 안에 초자연적 생명의 피를 퍼 올려 주는 보조 심장과 같다. 사제는 그리스도 신비체의 각 지체들을 영신적으로 서로 연결시켜 주는 데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부분이다. 만일 사제가 실수하게 되면 그 연결 체계가 막히게 되어, 사제에게 의지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주시려는 생명을 받지 못하게 된다. 사제와 신자들과의 관계는 일정한 범위 안에서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와 같아야 한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또 다른 모습이며, 결코 단순한 고용인이나 추종자나 문하생이나 후원자가 아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지니고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활동을 거들어 드린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같은 마음으로 모든 것을 대해야 한다. 사제들은 가능한 모든 면에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당신을 위해 신비체를 이루는 것이 필요하다고 여기셨으므로 사제도 이와 똑같이 해야 한다. 그러므로 사제 역시 자신을 위해 하나로 일치하고 있는 신자들이 있어야 한다. 자신과 일치를 이루고 있는 살아 있는 신자들이 없는 사제는 활동이 보잘것없게 되고, 고립되어 아무런 희망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눈이 손더러 너는 나에게 소용이 없다고 말할 수도 없고, 머리가 발더러 너는 나에게 소용이 없다고 말할 수도 없다.'(1 고린토 12, 21)

그러므로 만일 주님께서 그리스도 신비체를 영혼들에게 이르는 당신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원리로 삼으셨다면, 이와 동일한 질서가 새로운 그리스도인 사제를 통하여 정확히 작용하게 될 것이다. 만일 어느 사제가 에페소인 들에게 보낸 편지(4, 12 참조)에서 처럼 그리스도 신비체를 완전히 세우는 일에 맡은바 열성을 쏟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의 생명이 영혼들 안에 들어가 결실을 맺는 일이 줄어들게 될 것이다.

더구나 그러한 사제는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하게 되고 만다. 머리가 하는 일은 몸에 생명을 주는 일이지만 머리는 몸의 생명 때문에 살아 있으므로 결국 머리의 생명은 몸의 생명이 커지면 더불어 커지고, 몸이 시들면 더불어 쇠퇴하여 아무런 힘을 쓸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사제 직분의 이런 원리를 파악하지 못하는 사제는 평생 그의 능력의 일부밖에는 쓰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 안에서 부여 받은 참된 사명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땅 끝까지 헤쳐 나가는 일이 아니던가.”(뤼플리 신부 / Fr. F. J. Ripley)

5 본당에서의 레지오

“현재의 상황으로 볼 때 평신도들은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으므로, 비신자들 및 신앙을 포기하거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생활을 소홀히 하는 사람들을 향한 공동체적 선교 열정을 다시 일깨우기 위해 각자의 본당에서 참다운 친교의 성장에 매우 힘써야 한다.”(평신도 그리스도인 27)

레지오 마리애를 설립하게 되면 본당 안의 참된 공동체 정신이 크게 성장한다. 레지오를 통하여 평신도들은 본당 안에서 사제와 일치하여 사목적 활동에 동참하는 일에 익숙해진다. 정기적인 주 회합을 통하여 여러 가지 본당 활동을 조절하는 것은 그 자체로서 이점이 있다. 그런데 특히 강조하는 바는, 본당 활동에 참여하는 신자들을 레지오 단원으로 만들어 영적인 성장을 통해 본당이 성체를 중심으로 한 공동체임을 알게 한다면, 이들은 이러한 본당 공동체의 건설을 위하여 지역 안의 모든 사람들을 보다 체계적인 방법으로 찾아 나서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본당에서 레지오 사도직을 수행하는 방법은 제37장 [활동의 예와 방법]에 설명되어 있다.

“사제들은 평신도 사도직을 자신들이 수행하는 사목 활동의 확고부동한 부분으로 여겨야 하며, 신자들은 이를 크리스천 생활의 의무로 여겨야 한다.” (교황 비오 11세 / Pius XI)

6 높은 이상과 진취적 행동의 견인차인 레지오

진리의 수호자인 교회가 몸을 사리고 틀에 박힌 모습만을 보인다면, 이로써 교회는 오히려 진리를 위태로운 상태로 몰아넣게 되는 것이다. 젊은이들이 그들의 순수하고 활동적인 이상을 순전히 세속적인 단체나 심지어 반종교적인 조직에서 찾으려는 습성에 물들게 되면 무서운 해악을 입게 되며, 다음 세대에까지 영향을 주게 된다.

이에 레지오는 조직의 사업 계획을 수행하는 데 진취적인 노력과 희생 정신을 발휘하여 이상과 행동이라는 두 낱말이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쓰여지도록 힘써 도와야 한다.

그런데 이기주의로 가득 찬 요즘 세상에 레지오 단원으로서의 무거운 짐을 지려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라는 반대 의견이 나올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옳지 않다. 하찮은 활동에는 많은 사람들이 쉽게 응답하지만 대부분 곧 식어 버려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으나, 큰일을 하도록 부름 받고 이에 응하는 사람은 비록 소수이지만 그들은 끝까지 견뎌내 그 정신은 다른 삶들에게 점점 널리 알려지게 된다.

레지오의 쁘레시디움은 이러한 점에서 사제를 돕는 강력한 단체이며, 사제가 돌보아야 할 사람들, 즉 복음화하는 일에 쓸 힘센 도구의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제는 일주일에 한 번씩 주회합에 참석하여 단원들을 지도하고 격려하며 영성을 높이는 데 사용하는 한 시간 반 정도의 시간으로, 모든 물리적 제약을 초월하여, 단 한 번으로 여러 곳을 방문하여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려 다양한 이야기를 듣고 그들 모두에게 영향을 주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쁘레시디움을 지도하는 데서 얻는 효과만큼 사제의 열성이 확실한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사제가 레지오 단원들로 무장을 하게 되면 (단원들이 비록 막대기, 가죽 주머니, 돌팔매 끈, 자갈 따위의 볼품 없는 도구에 지나지 않을지는 모르나, 성모님이 그들을 하늘의 무기로 만드셨기에) 사제는 또 하나의 다윗이 되어, 죄악과 불신이라는 교만한 골리앗을 반드시 무찌를 수 있다는 확신을 지니고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여러분의 신앙을 확고히 하고 승리를 보장하는 것은 물질적 힘이 아니라 영신적인 힘이다. 위대한 사람만이 큰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보라, 베들레헴 성지는 얼마나 작은 마을이었던가! 그런데도 온 세상을 굴복시켰다. 아티카(Attica)는 얼마나 초라한 고장이었던가! 그런데도 훌륭한 여러 현인들을 배출하지 않았는가! 모세, 엘리아, 다윗, 바오로, 아타나시오, 레오가 바로 그분들이다. 은총은 몇 안 되는 사람들의 공로로써 얻어진다. 이 몇 안 되는 사람들의 날카로운 통찰력, 확고 부동한 신념, 굽힐 줄 모르는 의지력, 순교자의 피, 성인들의 기도, 영웅적인 행위, 집중적으로 쏟아내는 한마디 말이나 시선의 힘이 바로 하늘나라가 쓰는 도구인 것이다. 그러니 작은 이들이여, 두려워하지 말라. 여러분 가운데 계시는 하느님께서는 전능하신 분이시고, 여러분을 위하여 큰일을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뉴만 추기경 Cardinal Newman : 가톨릭 신자의 현 위치)

7 단원 양성을 위한 도제 제도

사도 양성을 거론할 때면 일반적으로 강의를 듣고 교재를 공부하는 정도로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레지오는 활동이 따르지 않는 사도 양성이란 있을 수 없다고 믿는다. 실제로, 활동을 떠나서 사도직을 논하는 것은 그 의도와는 반대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활동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논의할 때에는 먼저 활동의 어려움을 설명해 주고, 어려운 만큼 높은 정신력이 요구된다는 사실을 알게 하며, 동시에 수준 높은 활동이 어떠한 것인지를 제시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새로 입단한 단원들에게 활동을 소개할 때, 실제 모범을 보여 줌으로써 그들의 능력으로 충분히 해낼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지는 않고 말로만 설명한다면, 그들로 하여금 두려움을 갖게 하여 활동을 못하게 만들 뿐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강의 제도는 이론이나 지식의 힘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배출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대개 보잘것없는 일이나 개인 접촉을 꾸준히 해야 하는 일에 몸 바치기를 꺼려하게 된다. 그러나 사실상 평신도 사도직의 모든 일들이 대개 이렇게 사소해 보이는 실질적인 활동에 달려 있기 때문에, 레지오는 이러한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것이다.

레지오가 단원 양성에 쓰는 방법은 도제제도(徒弟制度)이다. 이 제도는 어떤 직종이나 기능 분야에서도 예외 없이 쓰이는 이상적인 훈련 방식이라고 레지오는 주장한다. 지루한 강의 대신 스승이 제자에게 활동거리를 내놓고, 시범을 통하여 활동하는 방법을 터득하게 하고, 실제로 함께 해 나가면서 드러난 여러 가지 상황에 대하여 설명해 준다. 제자는 스스로 그 활동을 계속해서 수행하는 가운데 고쳐 나가게 된다. 이러한 훈련을 통하여 유능한 단원을 배출하게 되는 것이다. 단원들을 교육하기 위한 강의가 실시될 때에는 모든 강의는 활동 그 자체를 바탕으로 하여 진행되어야 하며, 강의 내용 한마디 한마디가 실제 활동과 연결되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 강의 제도는 결실을 맺지 못한다. 강의 내용을 기억하기란 쉽지 않다. 정규 학생들마저도 강의 내용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실정 아닌가?

또 다른 측면에서 볼 때, 강의 제도를 이용하여 신자들을 사도직 단체에 이끌어 들이고자 한다면, 가입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몇 안 될 것이다. 사람들은 대개 학교를 졸업하면 공부가 끝난 것으로 생각하고 있고, 특히 단순한 사람들은 비록 종교를 강의하는 곳이라 하더라도 교실 같은 장소로 돌아가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이러한 점이 사도직 학습 제도가 널리 호응을 받지 못하는 이유이다. 레지오는 이보다 더 간단하고 심리적인 방법을 이용한다. 그 방법은 단원들이 ‘우리가 하는 일에 참여하여 함께 일해 봅시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강의실로 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과 비슷한 사람들이 이미 하고 있는 일에 참여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기들도 능히 할 수 있음을 알게 되어, 그 단체에 쉽게 가입하게 된다. 가입한 후 선배 단원들이 활동하는 모습을 보고 들으며 스스로 참여함으로써 가장 좋은 활동 방법에 대한 여러 가지 의견을 배우고 익혀, 얼마 가지 않아서 능숙한 솜씨를 발휘하게 된다.

“레지오는 가끔 그 단원들의 경험이 부족하던가 또는 단원들에게 열심히 공부하도록 강조하지 않는다는 비난을 듣는다. 이에 대한 대답은 다음과 같다. (가) 레지오는 더 유능한 단원들이 공헌할 수 있도록 이들을 조직적으로 활용한다. (나) 레지오는 극단적으로 공부를 강조하지는 않으나, 단원들이 각자의 고유한 사도직에 알맞게 쓰이도록 힘쓴다. (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목표는 레지오가 일반 신자들에게 ‘자, 어서 레지오에 들어와 당신의 재능을 조금만 보여 주시오. 그러면 우리는 그것을 성모님을 통하여 더욱 크게 하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쓰이도록 가르쳐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 주는 것이다. 레지오가 역량 있는 사람들의 단체일 뿐만 아니라, 낮고 힘없는 사람들의 단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토마스 오프린 신부 / Fr. Thomas P. O’Flynn, C.M. / 꼰칠리움 전 지도신부)

제11장 레지오의 기본 요소

1 개인 성화 – 그 목적과 방법

레지오 마리애가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보편적이고도 필수적인 방법은 단원 한 사람 한 사람의 봉사이다. 각기의 단원들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얻게 되는 하느님의 은총을 원동력으로 맡은 활동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레지오는 이 봉사를 통하여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일과 영혼들을 구원하는 일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는다.

그러므로 개인 성화야말로 레지오가 단원들에게 적극 권장하는 으뜸가는 실천 방법이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누구든지 나에게서 떠나지 않고 내가 그와 함께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요한 15, 5)

“이 거룩한 공의회가 교회의 신비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듯이, 교회는 틀림없이 거룩하다. 성부와 성령과 더불어 ‘홀로 거룩하시다’고 칭송 받으시는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당신의 신부로 삼아 사랑하셨고, 교회를 거룩하게 하기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셨으며(에페 5, 25-26),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교회를 당신과 결합시켜 당신 몸으로 삼으시고 성령의 특은으로 가득 채워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뜻은 여러분이 거룩하게 되는 그것입니다.'(1 데살 4, 3 ; 에페 1, 4 참조)하신 사도 바오로의 말씀대로 성직자나 성직자의 사목을 받는 평신도가 모두 다 성화의 성소를 받은 것이다. 교회의 이 거룩함은 성령께서 신자들 안에서 만들어 주시는 은총의 열매로서 끊임없이 나타나고 있으며 또한 나타나야 한다. 거룩함은 신자들이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중에 사랑의 완덕을 지향하면서 남들이 거룩하게 자라도록 도와 주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나타나는데, 흔히 ‘복음화’라고 불리는 교회의 권유를 실천하는 데에서 특히 그 독특한 모습을 드러낸다. 성령께서 움직이시는 대로 많은 크리스천들이 개인적인 생활 형태를 통해서 또는 교회가 인정하는 생활 형태 안에서 복음적 권유를 실천하는 일은 이러한 거룩함을 증거하고 모범을 보여 주는 것이며 또한 마땅히 그래야 한다.”(교의 헌장 39)

2 강력한 질서 체계

엄청난 힘을 만들어 내는 천연 자원이라도 그대로 버려두면 아무 쓸모가 없게 되고 만다. 이와 마찬가지로 열성을 바르게 조절하지 못하거나 정열을 방임하게 되면,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큰 성과를 기대할 수 없으며 오래 지탱하지도 못한다. 레지오는 이러한 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단원들에게 활동을 수행하라고 강조하기에 앞서 삶의 방식을 제시하고 있다. 레지오는 규칙의 힘을 바탕으로 강력한 질서 체계를 마련하여 단원들이 모두 세부 규칙을 철저히 지켜 나가는 정신을 지니도록 하고 있다. 바로 이것이 다른 단체에서 조직원들에게 단순히 규칙을 지키라고 권장하거나 알아 둘 사항 정도로만 여기는 것과는 아주 다른 레지오만의 특징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레지오는 단원들이 크리스천의 완덕을 꾸준하고 뚜렷하게 쌓아 나가도록 바탕을 마련해 준다. 여기서 말하는 크리스천의 완덕이란 믿음, 성모님께 대한 사랑, 대담성, 자기 희생, 형제적 우애, 기도하는 마음, 신중, 인내, 복종, 겸손, 기쁨, 그리고 사도적 정신이다.

“‘평신도 사도직’이 발전하는 현상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 시대의 두드러진 특징이며, 이에 참가하는 신자들의 수만 보아도, 무한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큰 운동을 위해 마련되어 있는 규정들은 충분치 않다. 세속을 떠날 수 있는 신자들을 위해 세워진 훌륭한 수많은 수도회에 비하면 세속에 머물러 있는 평신도들을 위한 단체는 아무리 조직이 잘되어 있다 하더라고 그 차이가 너무나 크게 드러난다. 한쪽은 깊이 있고 정확한 지식으로 수도 생활을 택한 이들은 높은 신앙의 경지로 이끄는데, 이와는 대조적으로 다른 한쪽은 그 규정이 얼마나 초보적이고 피상적인가! 대부분의 평신도 단체는 회원들에게 약간의 봉사를 하도록 요구하기는 하지만, 한 주간에 한 번 정도 봉사 활동에 나서도록 하는 정도일 뿐, 그 이상의 보람을 가질 수 있는 역할을 권유하려는 노력은 거의 찾아 볼 수가 없다. 그러므로 평신도 단체 역시 차원 높은 개념 설정이 필요하다. 무릇 믿는 이들의 단체는 회원들이 이 세상을 순례하는 데 필요한 지팡이, 즉 영성 생활을 떠받치는 받침대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수도 단체는 활동하는 일반 신자들의 표본이 되어야 하며, 평신도 단체의 경우도 추구하는 이상이 대부분 수도 단체와 같기 때문에 규율이나 규칙이 수도회의 개념에 가까울수록 활동의 수준도 향상된다고 볼 수 있다. 다만 회원들이 지켜야 할 규칙을 어느 정도의 수준으로 정하느냐 하는 어려움이 뒤따른다. 규율이나 규칙은 능률을 올리기 위해서는 필요하지만 지나칠 정도로 엄격하게 될 위험성이 있으며, 그로 인해 단체의 매력을 줄어들게 만든다. 꼭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은, 우리가 달성하려는 평신도 단체의 목표란 영구적인 평신도 단체이지, 어떤 새로운 수도 단체나 간혹 역사에서 보아 왔듯이 결국 수도회로 그 모습이 변해 버린 그런 단체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의 목표는 오로지 평범한 생활을 하는 평신도들이 참여하여 효과적인 사도직 활동을 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즉, 평신도들의 생활은 순전히 신앙적인 측면 이외에도 다양한 취미와 욕구가 허용되어야 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이러한 평신도들의 특성에 알 맞는 잘 조직된 단체를 만드는 것이 우리의 목표이어야 한다. 규칙의 수준과 범위는 단체에 가입하려는 일반 신자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이어야 하며 물론 그 이하의 수준이 되어서도 안 된다.”(미카엘 크리든 신부 / Fr. Michael Creedon : 레지오 마리애 꼰칠리움 초대 영적 지도자)

3 이상적인 단원

레지오는, 단원이 훌륭한 자격을 갖추고 있는가를 평가할 때, 레지오 조직에 대한 확고한 충성을 기준으로 삼는다. 따라서 레지오는 단원이 수행한 활동의 결과가 만족스럽다거나 혹은 밖으로 드러나는 성공의 정도가 크다거나 하는 것으로 그 단원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삼지 않도록 바라고 있다. 쁘레시디움의 영적 지도자와 단장은 이러한 단원 평가 기준에 대하여 모든 단원들이 항상 명심하도록 앞장 서야 한다. 조직에 대한 충성은 능력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누구나 달성할 수 있는 이상이다. 충성이라는 이상이 실현될 때 비로소 단조로움을 벗어나 활동의 재미를 느끼게 되며, 실제로 부딪치거나 또는 예상되는 실패를 극복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처음에는 가장 유망하게 보이던 사도직 활동이라도 어쩔 수 없이 막다른 벽에 부딪치게 되고 만다.

“성모님께 대한 우리의 봉사는 우리가 어떠한 직책을 맡고 있느냐에 따라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성모님께 대한 초자연적인 정신의 깊이와 열성도에 따라 평가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이 말을 우리에게 맡겨진 임무가 아무리 미천하고 드러나지 않는 것이라 하더라도 순명으로 헌신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마리아 회 편찬: 성모학 소론)

4 으뜸가는 의무

레지오는 조직 안에서 단원이 지켜야 할 으뜸가는 의무가 회합에 참석하는 것임을 가장 우선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회합과 단원의 관계는 마치 돋보기 렌즈와 태양 광선의 관계와도 같다. 돋보기 렌즈의 초점이 태양 광선을 집중시키면 불을 일으키고 가까이 있는 모든 것을 불붙게 만든다. 레지오를 있게 만드는 것은 바로 회합이다. 회합을 통한 결속이 끊기거나 존중 받지 못한다면 단원들은 떨어져 나가고 활동을 올바로 수행할 수 없게 된다. 이와는 반대로 단원들이 회합을 소중하게 여길 때, 레지오 조직의 힘은 굳세어진다.

레지오 초창기에 지적되었던 사항들이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되는데, 레지오의 조직과 이 조직의 핵심인 회합의 중요성에 관해 밝힌 다음과 같은 레지오의 견해가 그러한 예이다.

“레지오 조직 내에서 각 단원은 개인적으로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톱니바퀴의 역할에 만족한다. 각각의 톱니는 독자성을 포기할 때 다른 톱니와 더불어 서로 한 몸을 이루게 되며, 전체 기계의 동작에 따라 움직이게 된다. 이로써 각각의 톱니는 수백 배의 작업 성과를 올린다. 이와 마찬가지로, 개인으로서는 능률을 내지 못하고 우두커니 서 있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일지라도 한데 어울리게 되면 적극적으로 변하게 된다. 각자는 조직 안에서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기 보다는 오히려 장점에서 나오는 열정과 능력으로 조직에 이바지하기 때문이다. 아직 화롯불에 얹어 놓지 않은 숯 덩어리들과 화로 안에서 뜨겁게 타고 있는 숯 덩어리들을 비교해 보면 개인과 조직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레지오 안에서 단원과 조직의 관계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잘 조직되어 있는 단체는 그 단체를 구성하는 개개인을 떠나서도 스스로 지탱하는 뚜렷한 생명력을 지닌다. 그리고 이러한 특성은 새로운 단원들을 끌어들일 때, 그 단체가 펴고 있는 활동의 매력이나 필요성을 보여 주는 것보다도 오히려 더 큰 자석의 역할을 한다. 레지오 조직은 전통을 세우고 충성심을 갖게 하며 존경과 순명을 바치는 단원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준다. 단원들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면 그들이 마치 지혜로운 노모에게 의지하듯이 조직에 의탁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는 당연한 일이다. 레지오가 단원들을 온갖 함정에서 구해 주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함정이란 지나친 열성이 가져오는 경솔한 행동, 실패로 인한 낙심, 성공이 만드는 교만, 자신의 의견이 지지를 받지 못했음에도 끈질기게 집착하는 행위, 외로움에서 오는 소심증, 그리고 대개의 경우 경험 부족으로 인한 온갖 경솔한 행동 등이다. 레지오는 착한 의향을 지닌 신자들을 근본으로 하여 이들을 가꾸고 교육시키며 정상적인 사업 계획에 따라 활동을 하게 함으로써 성장하고 발전한다.” (미카엘 크리든 신부, 레지오 마리애 꼰칠리움 초대 영적 지도자)

“마리아회는 회원인 우리들과 관련시켜 보면, 천상의 모후이신 성모님을 널리 퍼뜨리고 눈에 보이도록 해 드리는 단체이다. 성모님은 당신의 사랑으로 가득 찬 품에 우리들을 안아 주듯이 우리들을 본회에 받아 주시어 예수님과 닮도록 만들어 주시고, 성모님의 특별한 대우를 받는 자녀가 되게 하셨다. 아울러 성모님은 우리들에게 사도직 활동을 맡겨 주시고, 당신께서 맡고 계시는 사명에 우리가 영혼들의 ‘공동 구원자’로서 한몫 거들도록 해 주신다. 본회의 목적과 이익은 성모님 자신의 목적과 이익에 부합된다.”(마리아회 편찬 : 성모학 소론)

5 쁘레시디움 주회합

쁘레시디움은 풍성한 기도와 신심에 찬 말씨, 감미로운 우애의 정신이 깃든 초자연적인 분위기 속에서 주회합을 갖는다. 또한, 주회합을 통해서 활동을 배당하고 동시에 수행한 활동에 대한 보고를 듣는다. 주회합은 레지오의 심장이며, 이 곳으로부터 생명의 피가 모든 동맥과 정맥의 혈관으로 흘러 들어간다. 주회합은 레지오를 밝히는 전력과 동력을 생산하는 발전소이며, 레지오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들을 제공해 주는 보화의 곳간이다. 주회합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단원들과 더불어 앉아 계시는 위대한 공동체의 수련 도장이며, 주회합을 통해 그분은 우리의 활동에 필요한 독특한 은총을 베풀어 주신다. 또한 각 단원은 쁘레시디움 주회합을 통하여 절제된 신앙 정신이 몸에 배게 되어, 우선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개인 성화에 힘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이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달성하는데 최선이라고 판단되는 레지오에 마음의 눈을 돌려, 자신의 취향을 억누르고 배당 받은 활동을 수행하게 된다. 그러므로 레지오 단원들은 주회합에 참석하는 일이 레지오의 으뜸가는 의무이며 가장 신성한 의무라고 생각해야 한다. 이 주 회합 참석의 의무는 무엇으로도 대신 채울 수가 없다 주회합 참석에 소홀한 단원들의 활동은 마치 영혼이 없는 육체와 같다. 이 으뜸가는 의무를 게을리 하게 되면 어떠한 활동도 성과를 거두지 못하게 되고 곧 레지오 대열에서 탈락하고 만다는 사실은 이치로 보아도 그렇고 이미 경험상으로도 잘 드러나 있다.

“성모님과 더불어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사람들을 향하여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대가 잘 달리기는 하나, 바른길에서 벗어나 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성모님을 소홀히 한다면, 우리가 도달하는 끝은 어디이겠는가?”(페치탈로 / Petitalot)

제12장 레지오의 외적 목표

1 실제 다루어야 할 일

레지오는 어떤 특별한 일을 하는 데 목표를 두지 않고 단원들을 성화시키는 일을 그 으뜸가는 목적으로 삼고 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레지오는 무엇보다도 먼저 단원들이 레지오의 여러 회합에 참석하도록 하는 방법을 사용한다. 레지오의 회합은 기도와 신심이라는 두 요소가 조화를 이루며 동시에 드러나도록 잘 짜여져 있다. 레지오는 단원들을 성화시키기 위하여 독특한 방법을 사용한다. 즉, 단원 각자의 신심이 활동을 통해 얻게 되는 사도적 열성과 결합되어 더욱 뜨거워져서, 각자의 내면으로부터 그 거룩함을 스스로 발산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 말은 레지오가 단원 한 사람 한 사람이 이미 쌓아 올린 신앙의 힘을 단순히 이용하려 한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신앙의 열정은 발산하면 할수록 – 일종의 상승 작용에 의해서 – 더욱 커진다. 이 원리에 따라 레지오는 단원들이 스스로 성화되도록 하려는 것이다. 사도직 정신은 사도직 활동을 통하여 가장 뚜렷하게 향상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레지오는 쁘레시디움이 배당하는 주간 활동을 적극적으로 수행하는 것을 대단히 중요한 의무로 부과하고 있다. 활동은 순명 하는 몸가짐에서부터 비롯된다. 쁘레시디움은, 뒤에 설명하게 될 예외적인 경우를 빼놓고는, 적극적으로 활동한 것이면 무엇이든 해당 단원이 주간 활동 의무를 채운 것으로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레지오는 현실적으로 필요한 일,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일을 주간 활동으로 배당하기를 바란다. 단원들을 열성적으로 활동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활동의 대상도 그 열성에 알맞게 선택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탐탁지 않은 활동은 달갑지 않은 반응을 일으킨다. 그렇게 되면, 영혼들을 위해 자신을 바치고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 이웃을 사랑하며 주님의 고난과 죽으심에 노력과 희생으로 보답하려던 단원들의 마음은 얼마 가지 않아서 움츠러들고 미지근하게 되고 말 것이다.

“내가 다시 태어날 때에는 처음 태어날 때처럼 그렇게 쉽지가 않았다. 하느님께서는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셨다. 그래서 처음에는 나를 단 한마디 말씀으로 만드실 수 있었다. 그러나 나를 다시 만드실 때에는 말씀도 여러 차례 하셨고, 기적도 여러 번 보여 주셨고, 숱한 어려움마저 겪으셔야 했다.” (성 베르나르도 / St. Bernard)

2 더 멀고 큰 목표 – 지역 사회의 누룩이 되는 일

단원들이 수행하는 주간 활동이 무엇보다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레지오는 그 의무의 완수만이 단원들이 펴는 사도직 활동의 궁극적인 목표가 이루어졌다고 여기지 않는다. 그러한 활동을 위해서 레지오 단원들은 대체로 한 주간에 두세 시간 또는 그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레지오는 단원들이 활동에 바치는 이러한 시간적 제약을 넘어서서 한 주간의 모든 시간을 레지오의 벽난로에 타오르고 있는 사도직 불꽃으로 밝혀 주기를 희망한다. 영혼들에게 사도직의 불꽃을 나누어 주는 레지오는 이 세상 방방곡곡에 막강한 군단을 투입해 놓고 있다. 사도직 정신은 우리들의 마음을 지배하는 주인이 되어 우리들의 생각과 말과 행실을 모두 다스리며, 시간이나 장소에 구애 받지 않고 스스로 그 불꽃을 밖으로 드러내 보인다. 사도직 정신이 타오르면, 남을 감화시키는 능력이 다소 부족한 사람이라도 그 능력을 얻게 되므로, 비록 그가 의식적으로 사도직을 추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죄와 냉담이 사도직 열성이라는 더 큰 힘에 눌려 사라지고 말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수많은 경험을 통해서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장군이 중요한 전투 거점을 장악한 후 만족해 하듯이, 레지오는 가정, 가게, 공장, 학교, 사무실 그리고 그 밖의 일터와 유흥 장소에 까지도 참된 레지오 단원이 적재 적소에 배치되는 것을 보며 흐뭇해 한다. 타락과 불신앙이 최악의 상태로 뿌리 박고 있는 지역이라도, 이른바 또 하나의 ‘다윗의 탑’이 버티고 있는 한, 죄악은 더 이상 뻗어 나가지 못하며 패배하여 소멸되고 만다. 사도직 정신은 부패가 자라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으며, 그것을 바로 잡으려고 노력한다. 부패를 보면 슬퍼하고 기도하며, 단호하고 줄기찬 싸움을 벌임으로써 마침내 승리를 거두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레지오는 우선 단원들을 회합에 한데 모아, 모후이신 성모님과 함께 한마음으로 기도를 바치면서 꾸준히 노력할 것을 다짐한다. 그런 다음 죄악과 슬픔에 찬 곳으로 단원들을 파견하여 좋은 일을 하게 하며, 이렇게 활동하는 동안 사도직 열정에 불이 붙어 더욱더 큰일을 하도록 만든다. 마침내 레지오는 더욱 영광스러운 사명을 완수하기 위한 목표로 일상 생활의 크고 작은 길들을 모두 살핀다. 레지오는 한정된 인원으로 이미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더욱이 레지오 대열에 동참할 만한 인재들이 앞으로도 수없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레지오는 알고 있으므로, 만일 교회의 사목자 들이 레지오를 활발히 이용하기만 한다면, 레지오는 죄로 물든 세상을 깨끗하게 만드는 데 신기할 정도로 효과적인 도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레지오는 단원의 수를 여러 배로 늘려서 군단이라는 그 이름에서도 드러나듯이, 단원의 수가 끝없이 불어나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
우리들의 지역 사회는 대개 적극적으로 활동을 하는 이들과 보조적으로 봉사하는 이들 그리고 그러한 활동의 대상자로서 남아 있는 이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중 신앙 생활이 나태하거나 타성적 수준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도 모두 끌어올려 열심한 신자로 만들 수 있다. 이러한 변화가 마을이나 도시 전체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칠까 생각해 보라. 이 변화의 힘은 단지 교회 안에서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한 고장 전체를 이끄는 강력한 힘이 되며, 직접적으로나 또는 성인들의 통공을 통하여 그 충격을 땅 끝까지 보낼 수 있게 된다. 하느님을 위하여 모든 주민들을 조직화한다는 것은 얼마나 이상적인가! 그런데 이 일은 단순히 이상으로만 머무르지 않는다. 이 이상은 우리가 눈을 들어 한 동안 하늘을 보며 마음을 모아 두 팔을 벌린다면 현실 세계에서 가장 실현 가능성이 높은 일이 될 것이다.

“평신도는 진정으로 ‘선택된 백성, 거룩한 사제’이며, 아울러 ‘땅의 소금’이며 ‘세상의 빛’이 되도록 불리었습니다. 평신도들에게 주어진 명확한 성소와 사명은 그들의 삶을 통하여 복음을 선포하고, 그들이 살아가며 일하고 있는 세상의 현실 속에 복음의 누룩을 집어 넣는 것입니다. 정치, 언론, 과학, 기술, 문화, 교육, 산업이나 직장 등 세상을 이루는 큰 세력들이야말로 바로 오늘날의 평신도들이 그들의 사명을 수행하기에 알 맞는 활동 영역입니다. 이러한 세력들이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들이며, 동시에 세속 해당 분야의 지식과 기술을 갖추고 있는 평신도들에 의하여 인도된다면, 세상은 참으로 그리스도의 구속 은총 안에서 변화하게 될 것입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1979년 10월 아일랜드 리메릭에서 행한 연설 중에서)

3 모든 이를 하나로 만드는 일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마태 6, 33) 우리 모두가 영혼들을 위하여 직접 나서야 한다는 이 주님의 말씀은 레지오의 사명을 온전히 드러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레지오는 그 외의 다른 역할도 함께 해오고 있는데, 레지오가 지니고 있는 사회적 가치가 그 한 예이다. 이 가치는 국가적으로는 자산이 되며, 그 나라의 국민들에게는 정신적인 혜택을 가져다 준다.
사회라는 기계가 성공적으로 작동되려면, 일반 기계들이 그렇듯이, 모든 구성 부분들이 조화를 이루며 협동해야 한다. 따라서 기계의 각 부분처럼 각기 다른 역할을 하는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다른 시민들과의 마찰을 최소한으로 줄이면서 자신이 맡은 일을 정확히 해 나가야 한다 . 그렇지 못할 경우, 불필요한 힘의 낭비가 생겨 균형이 깨어지고 기계의 모든 톱니바퀴들이 서로 어긋나게 되고 말 것이다. 이렇게 되면 고장의 원인이나 상태를 파악하기가 매우 어렵게 되므로 수리가 불가능해질 뿐만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는 데 더 많은 인력과 비용이 들게 된다. 더욱이 이렇게 얽힌 문제들을 시정하려다 보면, 순수하게 봉사하려는 마음이나 자발적인 협동 정신에 상처를 주게 되어 점점 더 잘못되어 가는 일도 생긴다. 공동체는 그 자체로서 생명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가령 구성원의 절반이 제대로 역할을 다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계속 기능을 발휘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러한 공동체는 엄청난 빈곤과 좌절감, 그리고 불행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또한 힘의 원천이어야 할 구성원들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게 되므로 그러한 공동체를 제대로 움직이도록 하기 위해서는 돈과 노력을 쏟아 부어야 한다. 게다가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많은 문젯거리나 혼란 또는 위기만 가득하게 된다.
이러한 일들은 오늘날 질서가 가장 잘 잡혀 있다고 하는 나라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이기주의가 개인의 생활을 지배하고 있고, 증오심은 많은 사람들을 무서운 세력으로 변질시키고 있다. 이에 새로운 나날을 맞이할 때마다 다음과 같은 말이 생생한 진리로 떠오른다. “하느님을 부인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배반하는 사람이며, 하느님께서 만드신 모든 사람들과 만물, 즉 땅 위와 천상에 있는 모든 것에 대해서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브라이언 오히긴스 / Brian O’Higgins)
국가란 개인의 삶을 합해 놓은 집합체일 따름이다. 따라서 각 개인의 삶이 그렇게 잘못되어 있다면, 그런 개인들이 모여 이루어진 나라가 어찌 높은 수준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나라 자체가 위기와 어려움에 처해 있는데, 그런 나라가 혼돈 이외에 이 세상에 내놓을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런데 이러한 위기의 공동체 안에 남을 위해서 희생하고 이웃 사랑이라는 이상을 실천하는 한 무리의 새로운 힘이 일어난다고 생각해보라. 이 새로운 정신과 이상이 마치 공기처럼 공동체의 모든 사람들에게 퍼져 나가게 된다면 얼마나 큰 변화가 일어나겠는가! 염증은 치유되고 삶은 차원이 달라지게 될 것이다. 한 나라가 발전하여 삶의 질이 높아지고, 국민들이 신앙을 생활화하여 모든 문제를 신앙 안에서 해결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그러한 나라는 틀림없이 세상을 비추는 찬란한 빛이 될 것이며, 세상은 그 나라를 본받으려고 몰려올 것이다.
레지오가 평신도에게 신앙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게 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는 점과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강렬한 이상을 전파하는 힘을 발휘한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레지오는 그들이 접촉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세속의 분열과 차별이나 상호 반목을 벗어나 오직 인류를 위하여 일하고 사랑하려는 열망으로 활기를 띠게 한다. 이러한 열망은 신앙 안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므로 단순한 감상에 그치지 않으며, 모든 일을 봉사라는 관점에서 생각하도록 만들고 위대한 희생 정신을 이끌어 내며, 영웅적인 경지에까지 이르게 한다. 이 이상은 어느 순간 갑자기 증발해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왜 그럴까? 레지오는 단원들의 활동에 확실한 동기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모든 힘은 반드시 그 원천에 있다. 그리고 레지오는 사회 공동체를 위하여 봉사하겠다는 강력한 동기를 지니고 있다. 이는 예수님과 성모님께서 일찍이 나자렛 마을의 주민이셨다는 사실로부터 유래한다. 이 두 분은 깊은 신앙심으로 자신들의 마을과 나라를 사랑하셨다. 유다 민족에게 신앙과 조국은 신비롭게도 오직 하나로 결합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과 성모님은 그 고장의 평범한 주민으로서 모든 면에서 어긋남이 없는 생활을 하셨다. 두 분은 고장 사람들과 풍물 하나하나를 모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대하셨다. 예수님과 성모님께서 어느 것 하나 무관심하셨거나 등한히 하셨다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오늘날의 세상은 바로 이 두 분의 나라이며, 어느 곳이나 두 분이 사셨던 나자렛 마을이다. 더욱이 믿는 이들의 공동체에서는 이 두 분과 주민들과의 관계가 혈육의 관계보다도 더욱 밀접하게 맺어진다. 다만 이제는 이 두 분의 사랑이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 신비체를 통하여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신비체의 지체들인 우리가 자신의 고장을 위해 봉사하겠다는 정신을 드러내기만 하면, 예수님과 성모님께서도 우리 고장에 오시어 영혼들뿐만 아니라 모든 주위 환경에 풍성한 은총을 내려 주신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눈에 띄게 향상되고 문제는 줄어든다. 이러한 진정한 개선 효과는 예수님과 성모님이 아닌 다른 어느 누구로부터도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지역 사회 안에서 믿는 이로서의 의무를 다하려는 마음가짐은 조국에 대한 애국심을 더욱 튼튼하게 만든다. 이 조국이라는 낱말은 지도에 나타나 있지 않은 영토를 가리킨다. 그렇다면 참된 애국심이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이 세상에는 애국심을 나타내는 지도나 모델이 없다. 애국심과 비슷한 것이라면 전쟁 중에 드러나는 충성과 자기 희생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사랑보다는 미움으로부터 출발하여 파괴를 일삼고 있다고 말함이 타당하다. 따라서 순수한 애국심의 올바른 유형을 마련하는 일이 중요하다.
레지오가 ‘조국에 대한 참된 충성’이라는 제목으로 단원들에게 강조하는 바는 사회 공동체를 위하여 바치는 영성적인 봉사이다. 이러한 봉사는 신앙이 동기가 되어 우러나야 할 뿐만 아니라 그 봉사와 봉사를 통한 모든 접촉 기회를 신앙심을 높이는 데 이용해야 한다. 물질적인 면에 치중하는 봉사 활동은 ‘조국에 대한 참된 충성’의 전체 취지를 그르치게 한다. 그러기에 뉴만 추기경은 이 충성의 근본 취지를 말하면서, ‘도덕성이 뒷받침되지 않은 물질적 진보는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위험한 것’이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따라서 양자는 반드시 균형을 유지하며 발전해야만 한다. 이 주제에 관한 소책자는 꼰칠리움에서 구할 수 있다.
세상 사람들이여, 보라! 레지오야말로 하느님의 숭고한 사업을 위해 모든 사람을 하나 되게 하는 신비의 기사단이 아닌가? 레지오는 이 기사단을 언제라도 부릴 수 있게 준비해 두고 있지 않은가? 시인 테니슨 은 아더 왕의 무용담에 나오는 기사들의 봉사 정신을 가리켜 “각기 다른 세상의 곳곳에서 기사들을 불러들여, 원탁의 기사로 함께 모았네. 영광의 무리, 사나이들의 꽃, 세상을 가꾸는 무리들의 모범이며, 한 시대를 여는 보람찬 출발이여!”라고 아름답게 읊었다.

“교회는 ‘볼 수 있는 영적 공동체’로서 전 인류와 함께 같은 길을 걸으며 세상과 운명을 함께 한다. 교회는 누룩이 되고자 하며, 언제나 그랬듯이 그리스도에 의하여 하느님의 가족으로 새롭게 변화하는 인류 사회의 영혼이다.
본 공의회는 크리스천들이 하늘나라와 이 땅의 백성으로서 복음 정신에 따라 그들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도록 간곡히 권고한다. 우리는 이 땅 위에 영원한 나라를 가지지 못했으며, 장차 올 나라를 기다리고 있음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 때문에 현세의 임무를 등한시해도 좋다고 생각한다면 잘못이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신앙은 각자가 부여 받은 사명에 따라 지상에서의 임무를 충실히 이행하도록 강력히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사목 헌장 40, 43)
“공의회 교령에서 강조하는 이러한 필요성과 의무에 대한 실제적인 대답은 1960년에 시작된 ‘조국에 대한 참된 충성’으로 알려져 있는 레지오 운동에서 볼 수 있다. 이 운동은 이미 상당한 성공을 거두고 있고, 앞으로도 발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러나 레지오가 현세에 제공하는 것은 특수한 지식이나 뛰어난 기술이 아니고, 일꾼의 숫자가 많은 것도 아니며, 오직 영성적인 활력이라는 것을 강조하고자 한다. 이것이 레지오를 세계적인 단체로 이끌었고, 어떤 분야에서 일하는 하느님 백성이라 해도 그들이 레지오를 올바로 이해하는 안목과 양식을 지니고만 있다면, 그들의 명성을 높이는 데 레지오를 이용할 수 있다. 다만 모든 것은 반드시 레지오에서 정한 규율과 규칙을 지키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레지오는 세속적인 것을 부추기는 일은 모두 멀리하지만, 위에 언급한 공의회 교령의 가르침에 비추어, 세속에서 일어나는 일에 늘 마음을 써야 한다. 사람은 물질 속에서 살아야 하기 때문에 구원도 물질 세계와 큰 관련을 맺고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토마스 오프린 신부 / Fr. Thomas P. O’Flynn 꼰칠리움 전 영적 지도자)

4 하느님을 위한 고귀한 사업

오늘날처럼 신앙이 위기에 처해 있을 때에는 기사도 정신이 절실히 필요하다. 세속의 물질주의와 무 종교적 세력들이 거대한 힘을 가진 선전 매체의 도움으로 온 세상을 휩쓸고 삼켜 버릴 것처럼 보인다. 이처럼 엄청난 세력에 비한다면 레지오는 얼마나 온순한 작은 양떼에 불과한가! 그러나 바로 이 점이 우리에게 용기를 준다. 레지오는 지극히 큰 능력을 지니신 동정녀와 결합하고 있는 단원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레지오는 훌륭한 원리 위에 세워져 있으며, 그 원리를 효과적으로 응용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전능하신 하느님께서는 레지오 안에서 레지오를 통하여 큰일을 이루고자 하신다고 말할 수 있다.

레지오 마리애가 목표로 하는 것은 ‘오직 한 분이신 지배자시며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유다 1, 4)를 부인하는 다른 무리들이 목표로 하는 것과는 정반대이다. 레지오의 목적이 하느님과 신앙을 모든 영혼들에게 가져다 주는 일임에 반하여, 다른 세력들은 그와는 정반대의 일을 성취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레지오가 그러한 불신앙의 제국에 대항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계획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아 둘 필요가 있다. 그보다는 훨씬 단순한 동기로 시작되었다. 작은 무리의 사람들이 성모상 둘레에 모여 앉아 “저희를 이끌어 주십시오.” 하고 기도 드렸다. 성모님과 일치된 그들은 도시의 어느 큰 병원을 방문하기 시작했고, 그 곳에서 그들은 질병으로 신음하고 인생의 파탄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로하면서, 그들 한 사람 한 사람 안에서 성모님이 사랑하시는 아드님을 만났다. 그들은 또한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 안에도 주님께서 계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들 안에 계시는 아드님을 위하여 성모님이 하시는 어머니 역할에 함께 나서기로 하였다. 그들은 처음에 이와 같은 방법으로 성모님과 손잡고 소박한 봉사 활동을 펴기 시작하였는데, 어느덧 군단을 이룰 정도로 크게 성장하였다. 이제 레지오는 온 세상에 뻗어 나가 모든 이들 안에 계시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또한 하느님을 위하여 모든 이들을 사랑하는 소박한 활동을 펴고 있다. 이 사랑의 실천은 어느 곳에서나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사로잡는 힘을 드러내고 있다.
세속주의자들도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을 위하여 봉사한다고 선언하기는 매한가지이다. 그러나 그들은 겉만 번듯한 형제적 사람이라는 거짓 복음을 퍼뜨리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말을 믿고 있으며, 오히려 자신들이 지니고 있던 올바른 신앙을 무력하다고 생각하여 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아직 절망적인 상황은 아니다. 이렇게 다른 길로 빠져 나간 수많은 사람들을 다시 신앙으로 돌아오게 하고 또 다른 많은 영혼들을 구하는 길이 있기 때문이다. 세상을 다스리는 큰 원리를 적용해 보면 이러한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아루스의 성자 요한 마리아 비안네 성인(St. John M. Vianney)은 “세상을 가장 사랑하고 그 사랑을 증거하는 사람이 이 세상을 차지한다.”고 말하였다. 세상은 이제, 인류를 위해 보여 주신 예수님의 진정한 사랑을 통해 자라난 참된 신앙을 보며,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세상을 가장 사랑한다는 사실을 확신시켜라. 그러면 그들은 모든 것을 물리치고 참된 신앙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들은 참된 신앙을 위해서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게 될 것이다.

평범한 사랑으로는 사람들의 마음을 그처럼 사로잡지는 못한다. 미지근한 신앙 생활로 자기 자신도 돌보지 못하는 신자 역시 아무런 일을 하지 못한다. 주님이신 그리스도를 온전한 마음으로 사랑하고, 어떠한 계층의 사람들을 보더라도 그들 안에 계시는 주님을 뵙고 사랑하는 사람만이 다른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 대한 이러한 지극한 사랑의 실천은,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단지 몇 사람의 훌륭한 가톨릭 신자가 보여주는 일시적인 선행 정도로 받아들이게 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되며, 그 선행이 진정한 가톨릭 교회의 특성이라고 인정할 수 있게 될 만큼 적극적인 것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 사랑은 신자들의 일상 생활 속에서 드러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처럼 교회가 신자들을 온통 충천하는 정신으로 불붙게 하는 일은 가능성이 없는 일인가? 과연 그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많은 장애가 앞길을 가로막고 있고, 세속에 젖은 무리의 숫자가 워낙 많아서, 강심장을 지닌 용기 있는 사람이라도 좌절하고 말 지도 모른다. 그러나 성모님은 레지오의 심장이시며, 이 심장에는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믿음과 사랑이 담겨져 있다. 따라서 레지오가 성모님을 생각하면서 세상을 바라다보면, 곧 희망이 솟구친다. 세상은 세상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 차지한다. 레지오는 처음부터 항상 그렇게 해 왔듯이 ‘저희를 이끌어 주소서’하며 위대하신 모후께 간청하고 있는 것이다.

“레지오는 세속주의와 무종교주의라는 적대 세력과 서로 대결하고 있다. 이 적대 세력은 신문, 텔레비전, 비디오 등을 통한 끊임없는 선전과 광고 활동으로, 낙태나 이혼, 임진 중절이나 마약 등 온갖 유해하고 잔인한 내용을 각 가정 깊숙이 내보내고 있다. 그 결과로 순수하고 때묻지 않은 아이들이 이러한 파괴적인 영향으로부터 무방비 상태에 놓여 있다.
이러한 해로운 영향력을 막기 위해서는 가톨릭 신자들이 모두 나서는 길 밖에 없다. 레지오 마리애는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완벽한 조직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충분한 추진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그 조직 자체만으로는 아무 쓸모가 없게 된다. 레지오의 추진력은 성령과 그 배필이신 복되신 동정 성모님께 대한 ‘참된 신심’을 깊이 깨닫고 의지하며 생명의 떡인 성체로 양육되는 레지오의 영성으로부터 나온다.
이 두 세력이 대결하게 되면 레지오의 정신이 승리할 것이다. 단원들이 매일 주님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오늘날 우리 사회를 좀먹고 있는 무사안일주의와 타협주의 그리고 우유부단과 효과적인 싸움을 벌여 최후의 승리를 걷게 될 것이다.”(이든 맥그래드 신부 / Fr. Aedan McGrath, S.S.C)

제13장 단원의 자격

1 레지오 마리애는 다음과 같은 가톨릭 신자라면 누구에게나 단원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고 있다.

(가) 신앙 생활을 충실히 하는 사람
(나) 레지오 단원으로서 평신도 사도직을 실천하려는 의욕이 있는 사람
(다) 레지오의 행동단원으로서 모든 의무를 완수하려는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

2 레지오에 입단을 원하는 신자는 쁘레시디움에 입단 신청을 해야 한다.

3 18세 미만의 후보 단원은 소년 쁘레시디움에서만 받아들일 수 있다.

4 입단 신청을 받은 해당 쁘레시디움의 단장은 그 신청자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아야 하며, 가입 요건을 갖추었다고 인정할 수 있을 때까지 입단을 보류할 수 있다.

5 예비단원은 적어도 3개월의 수련 기간을 거친 후 정 단원으로 등록될 수 있다. 그러나 예비단원은 처음부터 레지오 활동에 온전히 참여할 수 있다.

6 예비단원에게 뗏세라를 지급해야 한다.

7 예비단원이 정단원이 되려면, 반드시 단원 선서를 한 후 쁘레시디움 단원 명부에 그의 이름이 개재되어야 한다. 레지오 선서문은 제15장에 실려 있으며, 낭독하기 쉽게 되어 있다.

교황 바오로 6세는 그가 몬시뇰 이었을 당시 교황 비오 12세를 대신하여 쓴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사도직 선서이자 성모님께 드리는 서약문인 레지오의 선서는 온 세상에 그리스도 왕국을 세우기 위하여 싸우는 레지오 단원들, 특히 신앙 때문에 박해를 받는 단원들을 한층 더 굳세게 만들어 주었다.”

이 선서문의 해설서로는 쉬넨스 추기경(Cardinal L. J. Suenens)의 <사도직 신학>이 있는데, 이미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되어 있다. 이 소중한 책을 단원들은 항상 가까이 지녀야 하며, 또한 책임 있는 가톨릭 신자라면 모두 읽어야 한다. 이 책에 크리스천 사도직에 관한 여러 원리가 훌륭히 설명되어 있기 때문이다.

(가) 예비단원이 수련 기간을 만족하게 끝냈다고 판단되면 적어도 일주일 전에 입단을 사전 통보하여 준비시킨다. 이 준비 기간 중 예비 단원은 선서문의 내용과 뜻을 익혀야 하며, 실제로 입단 선서를 할 때에는 그 뜻을 새기면서 진지하게 선서를 바치도록 해야 한다.

(나) 선서는 쁘레시디움 주회합에서 실시한다. 정해진 주회합의 순서에 따라 까떼나를 바치고 난 다음, 모든 단원들이 서 있는 상태에서 선서할 예비단원 곁으로 벡실리움을 옮겨 놓는다. 그런 다음 예비단원은 선서문을 왼손에 들고, 지정된 대목에 자신의 이름을 넣어 큰소리로 낭독한다. 선서문의 셋째 단락에서 “레지오 단기를 손에 쥐고’를 낭독하면서 벡실리움 깃대를 오른손으로 잡고 선서가 끝날 때까지 손을 떼지 않는다. 선서가 끝나면 영적 지도자( 사제 참석 시)가 선서한 단원에게 강복을 준다. 그리고 그 단원의 이름을 정식으로 단원 명부에 올린다.

(다) 선서가 끝나면, 단원들은 자리에 앉아 훈화를 들으며, 회합은 평소의 순서대로 진행된다.

(라) 만일 쁘레시디움에 벡실리움이 준비되어 있지 않은 경우, 예비단원은 벡실리움의 그림을 대신 손에 들어야 한다. 이 경우 벡실리움 그림이 들어 있는 뗏세라를 사용한다.

8 일단 예비단원이 자격을 갖추었다고 인정되면 입단 선서를 미루어서는 안 된다. 두 사람 이상의 예비단원이 한꺼번에 선서를 할 수는 있다. 그러나 여러 명이 한꺼번에 바치는 선서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선서하는 단원의 수가 많을수록 각자가 선서를 통해서 느끼는 엄숙함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9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에게는 선서식이 마음의 부담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의식이 엄숙하고 진지할수록 앞으로 그가 단원 생활을 해 나가는 데 더욱 큰 효과가 있을 것이다.

10 예비단원을 따뜻이 받아들여 임무를 가르쳐 주고, 수련 기간과 신 단원 생활을 하는 동안 돌보는 일은 주로 부단장의 임무에 속하지만 단원 모두가 함께 거들어야 한다.

11 만일 어떤 사유로 예비단원이 입단 선서를 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수련 기간을 3개월간 연장해 줄 수 있다. 한편, 쁘레시디움으로서는 예비단원이 적격성에 대한 확신이 설 때까지 입단 선서를 연기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 마찬가지로 예비단원에게도 결심을 하는 데 충분한 기회를 주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3개월의 연장 기간이 끝나면, 예비단원은 선서를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쁘레시디움을 떠나야 한다.

만일 어떤 단원이 입단 선서를 한 후에도 마음속에 거부감이 생기면, 도의상 쁘레시디움을 떠나는 것이 옳다.

수련 기간과 선서는 레지오에 들어오는 관문이다. 레지오 단원으로서 적합하지 않은 사람들이 레지오에 들어와서 레지오의 수준을 떨어뜨리고 그 정신을 약화시키는 일이 벌어지는 이유는, 바로 이 관문을 통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2 영적 지도자는 선사할 의무가 없다. 그러나 영적 지도자도 선서할 수 있으며, 만일 선서를 한다면 쁘레시디움으로서는 기쁨과 영광이 될 것이다.

13 선서문은 다른 목적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아치에스나 기타 행사 때의 봉헌 행위로 사용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단원의 사사로운 신심 행위에 이 선서문을 사용하는 것은 무방하다.

14 그럴 만한 사정이 있어서 쁘레시디움에 출석하지 못할 때에는 상당한 이해심을 가지고 지켜보아야 한다. 특히 몸이 아파서 결석하는 경우에는, 비록 주회합 불참이 오랫동안 불가피한 경우라 하더라도 가볍게 퇴단 시켜서는 안 된다. 그러나 어떤 단원이 퇴단하여 그의 이름이 단원 명부에서 정식으로 삭제되었을 경우, 그가 다시 입단하려면 3개월의 수련 기간을 거치고 선서를 다시 해야 한다.

15 레지오에서는 동료 단원들에게 ‘형제’ 또는 ‘자매’라는 호칭을 사용한다.

16 필요한 경우 꾸리아의 허가를 얻어서, 남성이나 여성, 소년이나 소녀 또는 혼성 쁘레시디움을 만들 수 있다. 레지오는 맨 처음에 여성들의 조직체로 태어났으며, 그로부터 8년이 지난 뒤에 첫 남성 쁘레시디움이 설립되었다. 그러나 레지오는 남성들의 단체로서도 알맞은 기틀을 갖추고 있으며, 현재는 남성 쁘레시디움과 혼성 쁘레시디움이 아주 많이 운영되고 있다. 미국과 아프리카 그리고 중국에서는 첫 번째 쁘레시디움이 남성으로 이루어 졌었다.

이처럼 레지오에서는 여성이 영예로운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나, 이 책에서는 남성 대명사가 남녀 단원을 가리키는 데 쓰이고 있다. 이는 법률상의 관례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 또는 그 여자’라는 번거로운 되풀이를 피할 수 있게 된다.

“교회 창립의 목적은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스도 왕국을 전세계에 펴고, 모든 사람을 구원에 참여케 하며, 또한 그들을 통하여 전세계를 그리스도께로 향하게 하는 일이다. 이 목적을 위한 신비체의 활동을 모두 ‘사도직’이라고 부른다. 교회는 모든 지체들을 통하여 이 사도직을 여러 가지 모양으로 실천한다. 사실, 그리스도 신자로 부르심 받는 것은 본질적으로 사도직에 부르심 받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살아 있는 몸의 모든 지체가 그저 단순히 피동적이 아니고 모름지기 몸의 생명과 활동에 참여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도 ‘우리의 몸은 각 부분이 자기 구실을 다함으로써 각 마디로 서로 연결되고 얽혀 있으므로'(에페 4, 16), 자신의 능력대로 교회 발전에 기여하지 않는 지체는 교회를 위해서나 또 그 자신을 위해서나 아무 쓸모 없는 지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평신도 사도직 교령 2항)

제14장 쁘레시디움

1 레지오 마리애의 기본 단위 조직은 쁘레시디움(Praesidium)이다. 이 명칭은 라틴말로서 특수 임무를 수행하던 로마 군단의 파견대를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전방의 한 분대, 요새(要塞)로 쓰는 진지, 수비대 등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쁘레시디움이란 용어는 레지오 마리애의 기초 조직을 가리키기에 적합한 말이다.

2 쁘레시디움의 이름을 지을 때는 ‘자비의 모후’ 처럼 성모님의 칭호를 따를 수도 있고, ‘원죄 없으신 잉태’와 같이 성모님의 특전을 드러내거나 또는 ‘엘리사벳을 찾아보심’처럼 성모님의 행적을 가리키는 말에서 따 올 수도 있다.
호칭 기도 안에 들어 있는 성모님의 칭호만큼 많은 쁘레시디움의 레지오 단원들이 자신의 교구 내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는 주교의 마음은 얼마나 흐뭇하겠는가!

3 쁘레시디움은 소속된 모든 단원들을 통솔하고 단원들의 활동을 관리하는 권한을 갖고 있다. 단원들은 쁘레시디움의 모든 정당한 명령에 충실히 복종해야 한다.

4 쁘레시디움은 직접적으로나 또는 평의회를 통해 간접적으로 꼰칠리움(Concilium Legionis)에 가입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 경우 레지오에 소속되어 있다고 볼 수 없다. 따라서 꾸리아나, 가까이에 꾸리아가 없는 경우에는 그 상급 평의회, 또는 최상급기관인 꼰칠리움의 정식 인가를 받지 않고서는 새로운 쁘레시디움을 설립할 수 없다. 쁘레시디움은 반드시 그와 같은 관리 기관에 직속되어야 한다.

5 본당 안에 쁘레시디움을 설립할 때는 본당 주임신부나 교구장의 승인을 얻어야 하며, 쁘레시디움 창립식에는 본당 신부나 교구장을 초빙해야 한다.

6 쁘레시디움은 매주 회합을 가져야 하며, 주회합은 교본 제18장 [쁘레시디움 회합의 순서]에서 설명한 방식대로 진행되어야 한다.
이 규칙을 절대로 변경할 수 없다. 매주 회합을 갖기 어려운 여러 가지 그럴듯한 이유를 내세우면서, 한 달에 한 번 또는 두 주일에 한 번만 회합을 가져도 목적을 달성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제안이 거듭해서 나올 것이다.
이런 제안에 대한 답변은 다음과 같다. 레지오는 어떠한 경우에도 주회합 이외에는 승인할 수 없으며, 어떤 평의회에도 이 규칙을 변경하는 권한이 주어지지 않았다. 쁘레시디움이 단원들의 활동을 관리하는 기능만을 가지고 있는 경우라면, 설사 주간 활동을 바르게 통제하기는 어렵다 해도, 한 달에 한 번의 회합만으로도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회합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매주 함께 모여 기도하는 것이므로, 이러한 목적이 주회합을 통하지 않고서 이룰 수 없다는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매주 회합에 참석하려면 자기 희생이 따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레지오가 확신을 가지고 이 같은 자기 희생을 요구할 수 없다면, 레지오라는 조직을 서 있게 하는 그 원동력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는가?

7 쁘레시디움은 사제를 영적 지도자로 모셔야 하며, 단장, 부단장, 서기, 회계를 둔다. 그들은 쁘레시디움의 간부로서 꾸리아에서 자신의 쁘레시디움을 대표한다. 간부들의 임무에 대해서는 34장에 설명되어 있으나 그 첫째 임무는 일반 단원으로서의 활동 의무를 다하여 모든 단원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8 간부들은 꾸리아 월례회의에 참석하고, 그 회의 내용을 쁘레시디움 주회합을 통해서 단원들에게 보고함으로써 단원들이 토의된 모든 내용들을 잘 알고 있게 해야 한다.

9 영적 지도자는 본당 주임신부 또는 교구장이 임명하며, 임명권자의 뜻에 따라 직무를 수행한다. 영적 지도자는 한 개 이상의 쁘레시디움을 지도할 수 있다.
영적 지도자가 쁘레시디움 회합에 참석할 수 없을 때에는 다른 사제나 수도자, 또는 특별한 경우에, 자격을 갖춘 레지오 단원을 지명하여 그 임무를 대신하게 할 수 있다. 이렇게 지명된 단원을 트리뷴(Tribune)이라 부른다.
쁘레시디움은 영적 지도자에게 회합의 개최를 알려야 한다. 그러나 영적 지도자가 실제로 회합에 참석하지 않더라도 회합은 성립된다.
영적 지도자는 쁘레시디움의 간부 직위에 있으며, 레지오의 모든 합당한 권위를 인정하고 밑받침 해 준다.

10 영적 지도자는 쁘레시디움 회합에서 제기된 신앙이나 윤리에 관한 문제에 대하여 결정권을 갖는다. 또한 본당 주임신부나 교구장의 결정을 얻어야 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진행 중인 쁘레시디움의 활동이나 기타 업무 등을 잠정적으로 보류시킬 수 있다.
“이 유보 권한은 반드시 필요한 무기이다. 다만 모든 무기라 그러하듯이, 이 무기는 조직을 보호하는 목적으로 사용해야 한다. 그러므로 어떠한 경우에도 이 유보 권한이 파괴성 무기로 바뀌지 않도록 매우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어느 단체이든 조직이 잘되어 있고 올바른 지도를 받고 있는 단체라면 이런 무기는 전혀 쓸모가 없을 것이다.”(치바르디 / Civardi : 가톨릭 운동 지침서)

11 영적 지도자를 제외한 쁘레시디움 간부들은 모두 꾸리아가 임명한다. 꾸리아가 설립되어 있지 않은 지역에서는 바로 그 위 상급 관리 기관이 쁘레시디움 간부를 임명한다.
당사자가 참석한 자리에서 간부가 될 만한 사람의 능력에 관해서 공개적으로 논의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므로 간부 중에 결원이 발생하면 다음과 같은 절차에 따르는 것이 관례이다. 즉, 꾸리아 단장은 간부 후보자에 관해서 – 누구보다도 해당 쁘레시디움의 영적 지도자에게 – 신중하게 알아본 다음, 가장 적격자로 확인되면 꾸리아에 그 단원의 이름을 제출한다. 꾸리아는 그 단원이 적격자라고 인정되면 그를 간부로 임명한다.

12 영적 지도자를 제외한 모든 간부는 임기 3년이며, 한 번의 임기를 연장할 수 있으므로 계속해서 총 6년간 동일 간부직을 맡을 수 있다. 6년의 임기가 끝난 간부는 어떠한 경우에도 계속해서 동일 직책을 맡을 수가 없다.
간부가 다른 직책으로 옮기거나 다른 쁘레시디움에서 동일한 직책을 맡는 경우는 새롭게 임명된 것으로 간주한다.
임기를 마치고 나서 3년이 경과된 후에는 같은 쁘레시디움의 같은 직책을 다시 맡을 수 있다.
간부가 어떤 사유에서든 3년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그만 두었을 경우에는 그 직책을 그만둔 날짜로 3년 임기를 마친 것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그 단원을 다시 간부로 임명하려면 다음과 같은 일반 규칙에 따라야 한다.

(가) 만일 그가 첫 번째 임기 중에 간부직을 떠났다면, 그 첫 번째 임기가 미처 끝나지 않은 때라도 동일한 직책의 두 번째 임기에 임명될 수 있다.

(나) 그러나 그가 두 번째 임기 중에 간부직을 그만두었다면, 그 직책을 떠난 날부터 3년이 지난 다음에야 동일 직책에 다시 임명될 수가 있다.

“간부의 임기 문제는 일반 원칙에 따라 다루어야 한다. 어떤 단체에서든, 특히 자발적인 신심 단체에서, 항상 명심해야 할 사항이 있다. 그것은 바로 단체가 화석화되는 일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실로 큰 문제이다. 우리가 맞서 싸워야 할 악은 끊임없이 변화된 모습으로 공격해 오는데, 악에 대항하여 싸우는 우리의 열정은 시작이 흐르면서 타성에 젖어 시들해지고, 결국 판에 박은 듯한 방법만을 쓰게 되는 것이 우리들의 일반적인 경향이기 때문이다.

이런 퇴보가 계속되면 활동은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무관심으로 치닫게 되어 마침내 그 단체는 가장 바람직한 회원들을 끌어들이지도 못하고 붙잡아 두지도 못하게 되어, 결국 빈사 상태에 놓이게 된다. 레지오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 모든 평의회와 모든 쁘레시디움에서 열정의 샘이 끊임없이 솟아오르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레지오는 먼저 열정의 원천이어야 할 간부들에게 관심을 쏟지 않을 수 없다. 간부들이 처음에 지녔던 열정을 항상 유지하도록 만드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간부를 교체하는 것이다. 간부가 잘못되면 모든 것이 시들어 버린다. 간부들이 열기와 정열을 잃으면 이들이 관리하는 단체도 같은 길을 걷게 된다. 더욱 경계해야 할 일은, 단원들이 이런 잘못된 현상에 길들여져서 안주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때에, 외부의 도움이 없다면 치유될 가망도 없다. 이론상으로는, 간부의 임기를 주기적으로 갱신하는 규칙이 있으므로 이것이 하나의 해결책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러한 규칙이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하는 이유는, 평의회조차도 소속 쁘레시디움이 침체되어 있음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임기 연장을 자동적으로 허용하는 일이 실제로 발생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장 확실한 방법은 능력이나 사정에 개의치 않고 간부를 바꾸는 제도일 것이다. 레지오는 이 제도를 마련하면서 수도 단체에게 채택하고 있는 방식을 참고로 하였다. 즉, 첫 번째 3년의 임기를 마친 후 연임 요청이 있을 때 한 번에 한하여 연임을 허락하며, 총 6년으로 간부의 임기를 제한한다.”(간부 임기를 제한하는 제도에 대한 레지오의 결의)

13 “나쁜 장교가 있을 뿐, 나쁜 사병은 없다.”고 나폴레옹은 말했다. 사병은 장교가 이끄는 대로 따라간다는 사실을 지적한 말이다. 레지오의 경우에도 일반 단원들은 간부들이 불어넣어 주는 정신과 활동의 수준을 뛰어넘기는 힘들 것이다. 훌륭한 간부를 찾는 일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일꾼이 응분의 품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면, 레지오 단원들도 훌륭한 간부들의 지도를 받는 것이 마땅한 일이 아니겠는가!
훌륭한 간부가 대대로 임명된다면 쁘레시디움의 질적 수준은 끊임없이 향상된다. 왜냐하면, 새로 임명된 간부는 자신의 쁘레시디움을 현재 수준 이하로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힘쓸 것이고, 자신만이 독특한 방법으로 쁘레시디움에 공헌하여 하나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서 노력할 것이기 때문이다.

14 특히 단장을 임명하는 일은 신중히 다루어야 할 과제이다. 단장을 잘못 임명하게 되면 쁘레시디움이 무너질 수도 있다. 단장을 선택할 때는 제34장 2절에 나와 있는 단장의 자격 요건에 비추어서 각 후보자를 살펴본 후 결정해야 한다. 그런 자격 요건을 갖추지 못한 단원은 비록 다른 방면에 뛰어난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단장으로 선택되어서는 안 된다.

15 꾸리아에서 문제 있는 쁘레시디움을 개편할 때,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단장도 함께 교체해야 한다.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 쁘레시디움이 잘못되는 원인은 단장이 직무를 게을리 했거나 통솔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16 성인 쁘레시디움에서 수련 중에 있는 단원도 임시로 간부직을 대행하거나 또는 간부 서리(임시 간부)로서 직책을 맡을 수 있다. 수련 기간이 끝났을 때에도 그 직책을 계속 맡아 해 오고 있었다면, 그는 선서와 동시에 정식 간부가 되며, 수련기 동안의 임시 간부직도 3년 임기의 일부로 계산한다.

17 한 단원이 다른 쁘레시디움으로 소속을 옮기고자 할 때에는, 반드시 현 쁘레시디움 단장의 사전 허기를 받아야 한다. 전입하는 쁘레시디움에서는 교본의 규정과 새 단원 입단 규칙에 따라 절차를 밞으며, 다만 수련기와 선서는 필요치 않다. 쁘레시디움을 옮기겠다는 신청이 있을 때, 이를 이유 없이 거절해서는 안 된다. 이 문제로 말썽이 생겼을 때에는 꾸리아에 그 해결을 요청할 수 있다.

18 쁘레시디움 단장은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판단될 때에는, 다른 간부들과 의논하여, 단원의 자격을 정지시킬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 그러나 그와 같은 자신의 결정에 대하여 쁘레시디움에 설명할 필요는 없다.

19 꾸리아는 쁘레시디움 단원을 제명하거나 자격을 정지시킬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 해당 단원은 꾸리아 바로 위의 상급 평의회에 제소할 수 있으며, 그 상급 평의회의 결정은 최종적이다.

20 쁘레시디움 사이에 활동 분담 문제로 서로 의견이 대립되는 경우에는 꾸리아가 판정한다.

21 쁘레시디움이 주변에 굳건한 협조단원들을 조직하고 돌보는 것은 그 본질적인 의무이다. 우수한 장교의 지휘 아래 용감하고 완벽하게 훈련된 무장한 병사들의 충천하는 사기를 보라! 하지만 장병들의 용맹성만으로는 이 부대의 힘을 오랫동안 유지시킬 수 없다. 매일 매일 탄약과 식량, 피복, 의료품 등 여러 가지 지원을 받아야만 한다. 만일 이런 지원이 끊어진다면, 아무리 훌륭한 군대라도 과연 며칠이나 전선에서 버틸 수 있겠는가!
보급 부대와 전투 부대 사이의 관계는 협조단원과 쁘레시디움 사이의 관계와 같다. 협조단원은 레지오 조직의 한 부분이며, 협조단원이 없는 쁘레시디움은 불완전한 쁘레시디움이다. 협조단원을 돌보는 데 있어서 가장 좋은 방법은 개인적으로 접촉하는 것이다. 회람을 만들어 돌리는 것만으로는 이 중요한 의무를 충실히 채우지 못한다.

22 군대는 각종 훈련소나 군사 학교를 운영함으로써 장래에 항상 대비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각 쁘레시디움에서도 소년 쁘레시디움을 운영하는 것을 그 조직 체계의 필요한 한 부분으로 삼아야 한다. 두 사람의 성인 단원을 소년 쁘레시디움의 간부로 파견하는데, 소년 단원들을 지도하려면 특별한 소양이 있어야 하므로 간부 선책에 신중을 기해야 하며, 아무에게나 소년 쁘레시디움의 간부를 맡겨서는 안 된다. 소년 쁘레시디움의 성인 간부는 그 직책을 수행함으로써 성인 쁘레시디움의 주간 활동 의무를 채울 수 있다. 그들은 꾸리아에서 그 소년 쁘레시디움을 대표하며, 소년 꾸리아가 설립되어 있는 경우에는 그 소년 꾸리아에 간부로서 참석해야 한다.
소년 쁘레시디움의 나머지 두 간부 직책은 소년 단원이 맡는다. 이들은 간부직을 통하여 놀라울 만큼 책임감에 대한 훈련을 받게 될 것이다. 이 두 소년 간부는 소년 꾸리아에서 소년 쁘레시디움을 대표한다. 그러나 소년 간부들은 성인 꾸리아에 참석하지 않는다.

“태양에서 나오는 광선을 여럿이지만 그 빛의 근원은 하나이다. 나무의 가지는 많지만 그 줄기는 하나이며, 그것은 흔들리지 않는 뿌리에 단단히 매어있다.”(성 치프리아노 / St. Cyprian : 교회의 일치)

제15장 레지오의 선서문

지극히 거룩하신 성령이시여, 저(성명과 세례명)는(은)
오늘 레지오 마리애 단원으로 등록되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그러나 저 스스로는 합당한 봉사를 드릴 만한 능력이 없사오니
저에게 오시어 저를 당신으로 채워 주소서.
제가 하는 보잘것없는 일들을 당신 힘으로 받쳐 주시며
당신의 위대한 목적을 이루는 도구가 되게 해주소서.

당신은 이 세상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하려고 오셨으나
성모 마리아를 통하지 않고서는 역사하지 않으시고
저희 또한 성모 마리아 없이는 당신을 알아 뵈올 수 없고
사랑할 수도 없음을 아옵니다.
당신은 저희에게 모든 재능과 성덕과 은총을 내려 주시오나
성모 마리아를 통하여, 성모 마리아가 원하시는 사람들에게,
성모 마리아가 원하시는 때에, 성모 마리아가 원하시는 만큼,
성모 마리아가 원하시는 방법으로,
베풀고 계심을 제가 아옵니다.
또한 제가 레지오 단원으로서 충실하게 봉사하는 비결은
당신께 완전히 하나 되어 계시는 성모 마리아와 온전히 일치하는 것 임도
잘 알고 있나이다.

그러므로 이 모든 사실을 우리 눈앞에 드러내 보이는
레지오 단기를 손에 쥐고 (선서하는 단원은 이때 벡실리움 깃대를
자신의 오른손에 잡고, 선서가 끝날 때까지 그대로 유지한다.)
저는 지금 성모님의 병사요 자녀로서 당신 앞에 서서,
성모님께 온전히 의탁함을 선언하나이다.
성모님은 제 영혼의 어머니시옵니다.
성모님의 마음과 제 마음은 하나이오며,
이 하나인 마음으로
‘주님의 종이오니’라고 다시 사뢰오니,
당신은 성모님을 통하여 큰일을 하시고자 다시 오시나이다.

지극히 거룩하신 성령이시여,
당신의 권능으로 저를 감싸 주시고 제 영혼 안에 사랑의 불을 놓으시어
이 세상을 구하고자 하는 성모님의 사랑과 뜻에 일치하게 해주소서.
당신의 권능으로 티 없이 되신 성모님 안에서 저 또한 깨끗하게 하시고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제 안에서도 자라시게 해주소서.
그리하여 저 또한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과 함께
이 세상과 영혼들에게 그리스도를 모셔다 드리게 해주시고
그들과 제가 이 세상 싸움에서 이긴 다음 성모님과 함께
복되신 성삼위의 영광 안에서 영원히 살게 해주소서.

오늘 저는, 당신께서 저를 받아 주시고 저를 써 주시며
저의 나약함을 굳센 힘으로 만들어 주시리라 확실히 믿으며 다짐하나이다.
저는 감히 레지오의 대열에 한 자리를 차지하여 충실하게 봉사하겠나이다.
저는 레지오 규율에 온전히 복종하겠나이다.
이 규율은 동료 단원들과 저를 하나로 묶어
군단을 이루도록 하며,
또한 성모님과 함께 진군하는
우리의 대열을 가다듬어,
당신의 뜻을 이루고 은총의 기적을 일으키게 하나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땅의 얼굴은 새롭게 되고
온 누리에 하느님의 나라가 펼쳐지게 될 것이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레지오의 선서는 성령께 바쳐야 한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일반적으로 볼 때 가톨릭 신자들이 성령께 드리는 신심은 너무나 미약하다. 그러므로 레지오 단원들은 성령께 각별한 사랑을 드려야 한다. 레지오 단원이 펴는 활동, 즉 자신과 그리스도 신비체의 다른 모든 지체들을 성화시키는 일은 성령의 권능과 활동에 의존하고 있으므로, 성령과 일치해야 한다. 이 일치에는 두 가지 요소가 반드시 필요한데, 성령께 대한 깊은 공경과 성령과 불가분의 일치를 이루어 일하시는 성모님께 대한 신심이다. 성령께 관한 많은 책과 강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령께 대한 참된 신심이 일반적으로 부족한 까닭은 성령께 대한 신심 부족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성모님께 대한 신심이 부족하기 때문으로 보아야 한다. 레지오 단원들은 이미 그들의 모후이신 성모님을 열렬히 사랑하고 있다. 단원들이 성모님께 대한 사랑을 성령께 대한 확고한 신심과 결합시킨다면, 이 땅을 새롭게 하는 사업에 성령과 성모님이 일치하고 협동하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계획에 가장 완전하게 참여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레지오 단원은 자신이 현재 기울이고 있는 노력보다도 더욱 큰 힘을 쏟지 않더라도 실패하지 않고 오히려 성공을 거두게 될 것이다. 레지오 단원들이 맨 처음 바친 기도는 성령께 대한 호도와 기도였고, 그 다음은 묵주기도였다. 그 후 오늘날까지 모든 레지오 회합을 시작할 때마다 같은 기도를 바치고 있으므로, 레지오 단원으로서 출발하는 입단식도 이처럼 성령의 주관하에 거행하는 것이 가장 적적하다. 이러한 입단식은 성령 강림을 연상시켜 준다. 그때 성령께서 베푸시는 은총이 성모님을 통하여 내려졌던 것처럼 성모님을 통하여 성령의 은총을 간구하는 레지오 단원들은 많은 은총을 입게 되며, 이 은총 중 한 가지는 성모님이 단원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스스로 밝혀 주시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레지오의 선서문은 레지오 단기에 나타나 있는 레지오 신심과 잘 어울리고 있다. 단기에는 비둘기 모상의 성령께서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활동하는 레지오와 그 사업을 성모님을 통하여 주관하시는 모습으로 잘 나타나 있다.”(레지오 마리애 꼰칠리움 제88차 월례회의 회의록에서)

[위 인용문은 레지오 단원 입단 선서문의 일부가 아님]

제16장 일반 행동단원 이외의 단원 등급

레지오에는 일반 행동단원 외에 다른 두 등급의 단원이 있다.

1 쁘레또리움 단원

쁘레또리움 단원(Praetorian)이란 일반 행동단원보다 높은 등급의 단원을 말하는데, 단원으로서의 통상적인 의무 이외에 다음과 같은 신심 행위를 추가로 실천한다.

(1) 뗏세라(Tessera)의 모든 기도문을 매일 바친다.

(2) 매일 미사에 참례하고 매일 영성체 한다. 그러나 매일 미사와 영성체 의무를 지키지 못할까 두려워서 쁘레또리움 단원이 되는 것을 망설일 필요는 없다. 이 같은 의무를 엄격히 지키는 일은 아무도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주일에 한두 번 이상 빠지지 않는다면 누구든지 확신을 가지고 쁘레또리움 단원으로 등록할 수 있다.

(3) 교회가 공인한 일과(Office)를 매일 바친다. 특히 성무일도나 성무일도의 주요 부분인 아침 기도와 저녁 기도 또는 성모소일과 처럼 아침 기도, 저녁 기도, 끝기도로 짜여진 소성무일도 를 바쳐도 된다.

간혹 일과를 바치는 대신 묵상을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의견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제안은 그리스도 신비체의 공직인 기도 행위에 레지오 단원을 일치시키고자 하는 쁘레또리움의 근본 취지에 어긋난다. 레지오 단원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일은 교회의 공식적인 사도직에 참여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단원에게 쁘레또리움의 자격을 주는 것은 그 단원이 교회 공동체와 함께 하는 삶 속으로 더욱 깊이 들어가도록 만드는 데 목적이 있다. 미사와 영성체야말로 그리스도의 숭고한 희생을 날마다 새롭게 하는 교회의 중심 전례이므로, 쁘레또리움 단원은 매일 미사와 매일 성체를 모셔야 하는 의무를 마땅히 지켜야 하는 것이다.

성무일도는 교회가 바치는 공동체 기도로서, 그리스도께서도 이 기도에 함께 참여하신다. 그리하여 성무일도는 교회의 전례에서 미사 다음가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시편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성무일도는 성령께서 감도(感導)하신 기도문을 사용하므로, 우리는 이 성무일도를 통해 하느님께서 가장 즐겨 받으시는 공동체 기도에 깊이 젖어 들고 다가서게 된다. 이 점이 바로 쁘레또리움 단원에게 묵상이 아닌 성무일도를 의무적으로 바치라고 요구하는 이유이다.

린(Leen) 대주교가 레지오 단원들에게 말했듯이 “은총을 많이 받을수록 우리의 사랑도 새로운 형태로 확대되어야 한다.” 만일 성무일도 전체를 바칠 수 있는 형편에 있는 단원이 이를 실천에 옮긴다면, 그는 자신의 영혼 안에서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더욱 확장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 된다.
다음의 몇 가지 사항을 유의해 주기 바란다.

(가) 쁘레또리움 단원은 레지오 마리애 단원의 한 등급일 따름이며 결코 독립된 별개의 조직이 아니다. 그러므로 쁘레또리움 단원만으로 구성된 별도의 쁘레시디움을 조직해서는 안 된다.

(나) 쁘레또리움 단원 자격은 단원 자신의 개인적인 약속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다) 쁘레또리움 단원을 확보하기 위한 어떠한 강요도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쁘레또리움 단원 자격을 갖도록 권고할 수 있고 또 자주 그렇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특정 단원을 지칭하거나 공개적으로 거명해서는 안 된다.

(라) 쁘레또리움 단원은 별도로 마련된 쁘레또리움 단원 명부에 이름이 오르면 자격을 얻는다.

(마) 영적 지도자와 단장은 쁘레또리움 단원 수를 늘리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만, 기존 쁘레또리움 단원들이 기사도적 정신으로 자신의 의무를 게을리 하지 않도록 돌보는 것 역시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만일 영적 지도자가 자신의 이름을 기꺼이 쁘레또리움 단원 명부에 올리도록 허용한다면, 그는 레지오 간부로서의 자격을 더욱 견고히 하고 자신이 지도하는 쁘레시디움과 더욱 밀접하게 자신을 결합하는 것이며, 그 쁘레시디움의 쁘레또리움 단원 증가에도 분명히 좋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레지오가 쁘레또리움 단원들에게 기대하는 바는 매우 크다. 쁘레또리움 제도는 단원들로 하여금 기도를 통하여 하느님께 더욱 가까워지는 삶을 살도록 이끌어 주기 때문이다. 이는 레지오 조직 안에 ‘기도하는 심장부’를 하나 더 마련하는 것이며, 이로써 점점 더 많은 단원들이 그 안에 들어와 기도 생활에 깊이 젖어 들게 만들어 준다. 그렇게 되면 이 심장부는 레지오의 몸에 영성이라는 혈액을 제대로 순환하게 만들어, 레지오가 수행하는 모든 활동 안에서 기도에 의존하는 신심이 자라게 한다. 그리하여 레지오 단원들은 레지오의 으뜸이요 궁극적인 목표가 단원의 성화임을 훨씬 더 완전히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대는 성장해야 한다. 나는 이것을 확실히 알고 있다. 이것이 그대의 운명이며 가톨릭 신자의 필수적 요소이다. 성장은 또한 사도직을 물려받은 우리들의 특권이다. 그러나 도덕적인 성장 없이 물질적인 성장만 있다면 그것은 상상하기조차 끔찍한 일이 될 것이다.”(뉴만 추기경 / Cardinal Newman : 가톨릭 신자의 현 위치)

2 협조단원

사제나 수도자 또는 평신도 모두가 레지오의 협조단원이 될 자격이 있다. 협조단원은 행동단원의 임무를 수행할 수 없지만 레지오의 이름으로 바치는 기도로써 레지오에 협력하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협조단원의 자격은 다음 두 등급으로 나누어져 있다.

(가) 기초 등급: 단순히 협조단원이라 부른다.
(나) 상위 등급: 특별히 아듀또리움 단원(Adjutorian)이라 부른다.

협조단원의 경우 나이 제한은 없다. 협조단원의 기도는 직접 레지오를 위해서 바칠 필요는 없고, 다만 복되신 동정 성모님께 바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런데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어쩌면 레지오가 협조단원으로부터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더욱이, 협조단원들의 기도가 오히려 다른 곳에 더 도움이 된다면 레지오가 굳이 이들의 도움을 받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협조단원이 바치는 기도가 근본적으로 레지오의 기도인 만큼, 레지오의 모후께서는 레지오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를 알아서 배려하실 것이다.

따라서 협조단원의 봉사와 그 밖의 다른 모든 레지오의 봉사를 성모님께 남김없이 바쳐 드릴 것을 강력히 권고하며, 성모님이 원시는 곳에 쓰시도록 해 드려야 마땅한 일이다. 이렇게 하면 우리는 훨씬 더 여유 있는 마음으로 봉사하게 될 것이며, 우리가 드리는 봉사의 가치 또한 더욱 높아질 것이다.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협조단원은 “티 없으신 마리아, 모든 은총의 중재자시여, 저에게 허락된 기도와 수고와 고통을 바치오니 당신 뜻대로 쓰시옵소서.”와 같은 기도로써 매일 지신을 봉헌함이 바람직하다.

이 두 등급의 협조단원은 레지오의 양쪽 날개와 같다. 그러므로 협조단원이 많을수록 레지오는 그만큼 넓고 큰 날개를 갖게 되며, 그들이 충성스럽게 바치는 힘찬 기도의 날갯짓으로 레지오는 초자연적인 이상과 더 큰 봉사를 향해 높이 치솟아 오른다. 이로써 레지오는 가고자 하는 곳 어디든지 재빠르게 갈 수 있고, 아무리 높은 산도 이를 막을 수 없다. 그러나 만약 이 두 날개가 접힌다면, 레지오는 볼품 없이 뒤뚱거리며 땅 위를 기다가 조그마한 장애물에도 완전히 멈춰 버리고 말 것이다.

기초 등급 : 협조단원

기초 등급의 협조단원은 그냥 협조단원이라 부르며, 레지오 기도 군단의 왼쪽 날개와 같다. 협조단원은 매일 뗏세라에 있는 기도문, 즉 성령을 초대하는 호도(呼禱)와 기도를 시작으로 묵주기도 5단과 그 뒤를 잇는 호도, 그리고 까떼나를 바친 다음 마침 기도로 끝을 맺는다. 이 기도는 사정에 따라 하루 중 몇 번에 걸쳐 나누어 바칠 수도 있다.

이미 어떤 지향을 두고 매일 묵주기도를 바치고 있는 사람은 협조단원이 된 후 추가로 묵주기도를 더 바칠 의무는 없다.

“기도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영혼을 돕는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지식과 의지를 지닌 그의 영혼은 다른 이들의 영혼을 세속으로부터 이끌어내 구해 주는 영혼의 자석(磁石)과 같다. 그는 바오로 성인이 우리에게 특별히 당부하는 기도와 청원과 감사를 모든 영혼을 대신하여 행하고 있는 것이다. ‘쉬지 말고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언제나 성령의 도움을 받아 기도하십시오.'(에페 6, 18 참조) 그러므로 만일 여러분이 자신을 잘 살피지 않고 간절히 기도하지 않거나 노력하지도 않아 결국 굳건히 버티지 못하고 만다면, 만사가 해이해져 세상은 타락할 것이며, 여러분의 형제들은 의지할 데를 잃고 힘없이 늘어지고 말지 않겠는가? 분명 그렇게 될 것이다. 우리들은 각자 주어진 몫에 따라 어느 정도는 자신의 힘으로 세상을 떠받치고 있다. 따라서 자신의 몫을 다하지 않는 사람들은 결국 자신의 일을 남에게 떠넘기고 있는 셈이다.”(그라트리 / Gratry : 원천)

상위 등급 : 아듀또리움(Adjutorium) 단원

이 등급의 협조단원은 기도하는 레지오 군단의 오른쪽 날개와 같다. 아듀또리움 단원은 다음과 같은 신심 행위를 한다.

(가) 뗏세라의 모든 기도문을 매일 바친다.
(나) 매일 미사에 참례하고 매일 영성체 한다. 또한 교회가 인정하는 일과(성무일도나 성모소일과)를 바친다.

성무일도의 특별한 가치에 대해서는 ‘쁘레또리움 단원’ 항목을 참조하기 바란다. 아듀또리움 단원과 일반 협조단원의 차이는 쁘레또리움 단원과 일반 행동단원의 차이와 같다. 그러므로 아듀또리움 단원에게 추가되는 의무 또한 쁘레또리움 단원과 동일하다.

아듀또리움 단원의 경우에도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 이 의무를 이행하지 못했다 해서 의무 이행에 실패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소속 수도회의 규칙에 따라 성무일도를 바치지 않아도 되는 수도자의 경우에는 아듀또리움 단원이 된 후에도 성무일도를 바치지 않아도 된다.

아듀또리움은 단원들을 참된 삶의 길로 이끌어 주므로, 일반 협조단원이 아듀또리움 단원으로 등록하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레지오는 사제와 수도자들이 아듀또리움 단원으로 등록해 주기를 특별히 바라고 있다. 이들은 신자들을 기도의 삶으로 이끌어 하느님과의 관계를 친밀하게 해주는 특별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며, 교회 안에 영적인 힘을 일으키는 발전소의 역할을 하도록 부름 받은 축성된 분들이다. 레지오는 이러한 성직자 수도자들과 일치를 이루기를 소망하며, 이 영적 발전소에 효율적으로 연결만 된다면 레지오라는 기관은 아무도 당해 낼 수 없는 거대한 힘으로 고동치게 될 것이다.

사제나 수도자들이 아듀또리움 단원이 되는 경우, 이미 바치고 있는 성무일도 외에 추가되는 의무 사항이 그리 많지 않다. 까떼나와 레지오의 기도문, 그리고 호도 등 불과 몇 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 기도들이 고작이다. 그러나 레지오와 유대를 맺은 이분들의 기도는 강력한 추진력이 되어 레지오를 끌어 준다.

일찍이 아르키메데스(Archimedes)는 “나에게 지렛대와 받침 목을 주면 지구를 들어올리겠다.”고 말하였다. 레지오와 하나된 아듀또리움 단원들은 그들이 바치는 기도가 긴 지렛대라면 그 지렛대를 받쳐 주는 버팀목이 바로 레지오임을 알게 될 것이다. 이로써 그들의 기도는 엄청난 힘이 되어 이 세상의 짓눌린 영혼들을 들어올리고, 산처럼 쌓인 많은 문제들을 해결해 내는 능력을 갖게 될 것이다.

“성령께서 강림하시어 교회를 굳건히 세우신 그 다락방에서, 성모님은 함께 있던 사도들과 제자들 가운데에서 그 후로도 계속 은밀하고 친근하게 행사하셨던 어머니의 역할을 뚜렷이 보이기 시작하셨다. 성모님의 역할은 사람들의 마음을 기도 속에서 일치시키고, 당신의 힘있는 중재로써 영혼들에게 생명을 나누어 주시는 일이다. ‘그 자리에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비롯하여 여러 여자들과 예수의 형제들도 함께 있었다. 그들은 모두 마음을 모아 기도에만 힘썼다.'(사도 1, 14)” (뮈라 / Mura : 그리스도 신비체)

협조단원이 알아 두어야 하는 일반 사항

(1) 주어진 의무보다 더 많이 봉사하자. 레지오는 두 단계의 협조단원들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한다. 즉, 협조단원으로서의 기본 의무를 봉사의 최대치로 받아들이지 말고 오히려 최저치로 생각하여, 동일한 지향을 두고, 여러 가지 다른 기도와 신심 행위도 함께 실천하기를 바라고 있다. 레지오는 아듀또리움 단원인 사제들이 모든 미사 중에 성모님의 의향과 레지오를 위해서 특별히 기도 바쳐 주기를 부탁 드리며, 동시에 같은 지향으로 때때로 미사를 봉헌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 평신도 협조단원들도 미사 예물이 다소 부담이 되더라도 가끔 이와 같은 지향으로 미사를 봉헌한다면, 이는 레지오에 대단히 유익한 일이 될 것이다.

협조단원들이 레지오를 위해 많이 기도를 바친다면 그들은 곧 백 배, 천 배, 아니 백만 배를 되돌려 받는다. 그것은 레지오가 행동단원들뿐만 아니라 협조단원들에게도 성모님이 얼마나 위대한 분이신지를 가르쳐 주고, 성모님의 군사로서 복무하도록 해주며, 성모님을 올바로 사랑하도록 이끌어 주기 때문이다. 이 은총은 너무나 커서 ‘몇 백만 배’라는 등의 인간의 말로는 알맞게 표현할 수가 없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 은총의 힘으로 한층 더 높은 차원의 영성 세계로 올라서게 되며, 더욱이 영원한 삶을 보장 받게 될 것이다.

(2) 성모님이 내리시는 이러한 선물을 마다할 사람이 과연 있을까? 성모님은 레지오의 모후이시며 동시에 온 세상의 모후이시다. 따라서 성모님은 세상 모든 분야의 일과 사건을 관장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인가를 성모님께 바친다는 것은 그것을 가장 필요로 하는 곳에 보내 주는 것과 같으며, 우리가 바치는 기도가 가장 큰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곳으로 가게 됨을 의미한다.

(3) 은총의 창고를 맡아 관리하시는 티 없으신 성모님은 우리의 일상 생활과 의무 수행에 무엇이 필요한지를 배려하여 은총을 나누어 주신다. 그런데 이러한 의문이 나올 수가 있다. “협조 단원이 되고 싶기는 하지만, 나는 이미 내가 가진 것을 몽땅 털어서 성모님께, 연옥 영혼들에게 또는 선교 사업에 바쳤다. 이제 레지오를 위해서 드릴 만한 몫이 남아 있지 않으니 협조단원이 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에 대한 레지오의 대답은 이렇다. “당신처럼 헌신적인 사람을 얻었다는 것만으로도 레지오로서는 큰 은총이다. 레지오를 돕고 싶어하는 마음 자체가 하나의 기도이며, 당신이 매우 순수한 지향을 지닌 사람이라는 것을 확실히 증명해 주고 있다. 따라서 당신의 기도는 하느님의 보화를 관리하는 무한히 자비로우신 성모님으로서는 물리치실 수 없는 청원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당신이 레지오에 참여한다면 성모님은 틀림없이 응답해 주실 것이며, 당신이 지금까지 기도를 바칠 때 지녔던 지향은 조금도 유실되지 않은 채 새로운 지향이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이는 우리의 지극히 놀라운 모후이신 성모님이 기묘한 능력을 지니셨기 때문이다. 성모님은 우리가 바친 영신적 보화를 이용하여 다른 사람들을 아낌없이 도우실 뿐만 아니라, 신기하게 우리 자신마저도 더욱 풍요롭게 해주신다. 성모님이 어떤 일을 중재하실 때는 그 일을 통하여 다은 일들마저 중재의 은총을 입는 놀라운 현상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몽포르의 루도비코-마리아 성인은 이를 두고 ‘은총의 비결’이라 불렀고, “우리의 선행이 성모님의 손길을 거치면 더욱 순수해져서, 그 선행이 지향한 바에 따라 공로가 커지며, 속죄와 청원의 힘이 더욱 커진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선행이 성모님의 정결하고 너그러운 손길을 거치지 않았을 때보다 연옥에 있는 영혼들을 더 많이 위로할 수 있게 되고 죄인들을 더 많이 회개시킬 수 있게 된다.”고 설명하였다.
모든 생명은 이같이 놀라운 능력의 손길을 필요로 하고 있다. 성모님은 우리가 드린 것을 필요한 곳에 알맞게 쓰신 다음, 오히려 우리가 드린 것보다 더 크게 불려서 되돌려 주시는 은총의 손길을 지니고 계신다. 그런데 충실한 협조단원이 성모님께 드리는 기도 속에서도 이 놀라운 힘을 발견할 수 있다.

(4) 레지오가 접촉하는 영혼들 가운데는 대개 고통 받고 있는 이들이 많기 때문에, 아마도 성모님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만드는 당신 능력의 일부를 당신의 군사들인 레지오에 나누어 주시는 듯하다. 그렇기에 레지오 단원들은 별로 어렵지 않게 주위 사람들을 협조단원으로 봉사하도록 입단시킬 수 있고, 그들로부터 활력을 얻으며, 협조단원 자신 또한 매우 유익한 은총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이렇게 하여 협조단원은 행동단원과 함께 레지오의 대열에 서서 레지오의 모든 기도의 사업에 한몫을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5) 레지오의 협조단원이 되어 기도하는 대열에 참가하게 되면 행동단원과 똑같은 이상(理想)을 품게 된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전에는 매일 묵주기도 바치는 일을 엄두도 내지 못하던 신자들이 이제는 뗏세라에 실린 모든 기도를 매일 바치며 협조단원으로서 의무를 다하고 있다. 병원에 입원 중이거나 사회복지기관 등에 수용되어 삶에 대한 애착을 잃어버린 신자들이 레지오의 협조단원이 되면서부터 삶의 흥미를 되찾는 경우가 수없이 많다. 주위 환경 탓으로 미지근한 신앙 생활을 하던 신자들이 협조단원이 되면서부터 자신들도 교회에 쓸모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고, 우연히 마주치는 교회 소식을 관심 있게 읽으면서 어느새 자신이 레지오에 애착을 가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또한 그들은 어디에선가 벌어지고 있는 영혼을 구하는 레지오의 싸움에 자신들도 동참하고 있음을 알게 되고, 더욱이 그 싸움의 승패가 자신의 기도에 달려 있다는 사실마저 깨닫게 된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영혼 구제 활동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단조롭던 그들의 삶은 그 이야기들로 활기를 되찾고, 그들의 영적 상상력은 자신이 마치 십자군에라도 참가하고 있는 듯한 생각으로 뿌듯해 하며, 과거와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바뀐다. 아무리 경건한 삶을 사는 사람들일지라도 이러한 신앙의 자극은 필요한 법이다.

(6) 쁘레시디움은 주변의 모든 신자들을 협조 단원으로 입단시키도록 힘써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레지오의 다른 여러 사도직을 수행하기에 좋은 터전이 마련된다. 협조단원을 모집하기 위한 목적으로 친교 방문을 하면 대개의 경우 상당한 호응을 얻는다.

(7) 다른 가톨릭 단체나 교회 활동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을 협조 단원으로 끌어들일 수만 있다면, 그들의 활동을 한데 묶어 바람직한 방향으로 일치시키는 효과를 얻게 될 것이다. 즉, 그들이 레지오의 협조단원이 됨으로써 성모님의 주관 아래 함께 기도하고, 신앙의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해 함께 기도하고, 신앙의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해 함께 협동하며, 일치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이때 자신이 속해 있는 단체의 고유 활동이나 특성은 조금도 손상되지 않으며, 협조단원으로서 이들이 바치는 기도도 결코 소속 단체와 동떨어지지 않는다. 그 까닭은, 협조단원의 기도는 레지오를 위해서 바치는 것이 아니라 복되신 동정 성모님의 영광을 위하여 바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8) 가톨릭 신자가 아니면 협조단원이 될 수 없다. 그러나 비신자라 할지라도 매일 레지오의 모든 기도를 기꺼이 바치겠다고 하는 사람이 가끔 있는데, 이런 사람들을 만났을 때는 이들에게 뗏세라를 주고 그 넒은 마음씨를 격려해 주며, 계속 접촉할 수 있도록 특별히 그의 이름을 적어 두어야 한다. 분명히 복되신 어머니께서는 그들의 영혼이 무엇을 원하는지 귀 기울여 주실 것이다.

(9) 협조단원은 기도를 통하여 레지오에 봉사한다. 그러나 어떤 한정된 지역의 레지오를 위해 봉사한다기 보다는 전세계의 영혼을 대상으로 펼치는 레지오의 싸움과 구원 사업을 지원하기 위해 봉사한다. 그러므로 협조단원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 주어야 할 것은 다음과 같은 점이다. 즉, 협조단원들은 비록 일선 전투대열에 속해 있지는 않지만, 마치 탄약 공급이나 물자 보급을 담당하는 부대와 같은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따라서 협조단원이 없으면 레지오의 전투 능력은 그만큼 약해져, 전쟁에 질 수밖에 없게 될 정도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는 사실이다.

(10) 너무 가볍게 협조단원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먼저, 협조단원이 지켜야 할 의무 사항들을 충분히 숙지시킨 다음, 이 의무를 충실히 이행할 수 있을 것이라는 어느 정도의 확신이 선 후에 입단시킨다 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11) 협조단원이 기도 봉사에 더 많은 관심을 갖도록 하려면,

가) 먼저, 신심을 더욱 돈독히 하여 꾸준히 유지하도록 도와 준다.
나) 그런 다음, 레지오의 활동에 대해 바르게 이해하도록 돌봄으로써 궁극적으로 이들을 아듀또리움 단원이나 행동단원으로 인도하도록 힘써야 한다.

(12) 협조단원들의 기도와 레지오에 대한 관심을 바르게 지속시키려면, 끊임없이 접촉하며 돌보아야 한다. 그런데 어떤 단원들은 협조단원을 접촉하고 이끌어 주는 활동이 자신의 성향에 잘 맞기 때문에 좋은 활동거리로 받아들인다.

(13) 모든 협조단원들에게 로사리오 회 회원이 되었을 때 받을 수 있는 은혜가 얼마나 큰지 알려 주어야 한다. 협조단원은 로사리오 회에서 요구하는 것보다 더 많은 묵주기도를 이미 바치고 있기 때문에, 이 회에 가입하기 위해서는 단지 이름을 등록하는 것 이외에 다른 의무가 추가되지 않는다.

(14) 성모님의 예비군인 협조단원을 바르게 육성하려면, 적어도 복되신 동정 성모님께 대한 참된 신심(the True Devotion to the Blessed Virgin)이나 또는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성모님께 봉헌하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를 설명해 주어야 한다. 이 경우, 아마도 많은 협조단원들은 하늘의 보화를 관리하도록 이미 하느님의 명을 받으신 성모님께 자신의 영신적 보화를 기쁜 마음으로 맡기려 할 것이다. 성모님의 의향은 어디까지나 주님의 성심을 받드는 것이므로, 성모님께 바쳐진 어느 것도 결코 헛되이 쓰이지 않는다. 성모님은 교회가 원하는 모든 것, 모든 사도직과 모든 세계를 지향하신다. 그뿐 아니라 성모님의 지향은 연옥에서 때를 기다리고 있는 영혼들에게도 내려간다. 그러므로 성모님의 지향이 이루어지도록 열성을 다하여 돕는 일은 결국 주님의 몸에 필요한 모든 것을 돌보아 드리는 일이 된다. 왜냐하면, 성모님은 나자렛에서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여전히 자상한 어머니이시기 때문이다. 성모님의 뜻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우리의 최종 목표인 하느님의 뜻을 향해 곧바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각자 제멋대로 나아간다면 꼬불꼬불한 길로 들어서게 될 것이므로, 과연 언제쯤 그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성모님께 대한 참된 신심은 영성이 깊은 사람만이 실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몽포르의 루도비코-마리아 성인은 이제 막 죄의 사슬에서 벗어난 사람들이나 그 동안 잊고 있던 교리의 기초부터 다시 일깨워 주어야만 할 사람들을 대상으로 묵주기도를 가르치고, 성모 신심이나 또는 성모님께 기꺼이 사랑의 노예가 된다는 것이 우리 신앙에 어떤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는지를 널리 알리고, 실천하게 하라고 독려했다.

(15) 협조단원들에게 자유로운 분위기의 조직체를 만들어 주어 자체적으로 모임을 가지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이는 실제로 필요하다. 공동체 안에 이러한 조직망을 갖추게 되면 레지오의 사도직 활동과 기도의 이념이 공동체 안에 스며들어, 오래지 않아 공동체 전체가 레지오의 이념을 실천하는 변화를 가져올 수도 있다.

(16) 협조단원으로 신심 단체를 만든다면 다른 어떤 단체에도 뒤지지 않는 훌륭한 단체가 될 수 있다. 더욱이 레지오의 따뜻함과 색채를 고루 갖춘 레지오다운 단체가 될 것이다. 이러한 단체가 정기적으로 모임을 가진다면 그 구성원인 협조단원들이 레지오의 정신과 레지오에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게 되어 더욱 열심히 기도를 바쳐 줄 것이다.

(17) 모든 협조단원들을 빠뜨리치안 회에 가입시켜 두 조직이 서로 이상적으로 도와 주도록 하는 일은 대단히 중요하다. 빠뜨리치안 회합은 협조단원들이 정기적으로 모이는 기회를 만들어 주며, 그들이 레지오와 꾸준히 접촉함으로써 여러 면에서 중요한 발전을 할 수 있게 한다. 한편 빠뜨리치안 회원이 협조단원으로 가입한다면, 그들 역시 한 단계 위로 끌어올려지는 신앙의 발전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18) 협조단원에게 일반 레지오 활동을 시켜서는 안 된다. 그들을 활동에 활용하자는 제안은 얼핏 그럴듯해 보이고, 또 그들 자신으로 볼 때도 활동하는 것이 하지 않는 것보다 좋은 일인 것처럼 생각될 것이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그러한 행위는 레지오 회합 없이 레지오 활동을 하는 매우 위험한 잘못을 범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행동단원의 필수 요건이 되는 주회합 참석을 무시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19) 협조단원들도 꾸리아의 판단과 결정에 따라 아치에스 행사에 참석시킬 수 있다. 아치에스는 그들에게 매우 인상적인 행사가 될 것이며, 동시에 행동단원들과 접촉할 수 있는 기회도 마련해 주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봉헌 행위를 할 의향이 있는 협조단원은 행동단원들의 봉헌 사열이 끝난 다음 그 뒤를 이어 봉헌할 수 있다.

(20) 협조단원이 뗏세라의 마침 기도문을 바칠 때, 성모님께 대한 호도는 “티 없이 깨끗하신 마리아, 모든 은총의 중재자시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이다.
(21) 레지오는 단원들에게 ‘영혼들을 위해 언제라도 활동에 나설 태세를 갖추도록’ 요구하는데, 이러한 요구는 협조단원들에게도 해당된다. 즉, 행동단원과 마찬가지로 협조단원도 다른 신자들을 레지오 봉사에 참여시키기 위해 전력을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고리(행동단원)와 고리(협조단원)가 연결됨으로써 까떼나 레지오니스(Catena Legionis), 즉 레지오의 고리는 전세계를 에워싸는 거대한 황금의 기도망을 이루게 될 것이다.

(22) 시각 장애인이나 글을 모르는 사람 또는 어린이들도 협조단원이 되어 쉽게 기도에 참여 할 수 있도록 기도문을 줄이거나 바꾸어야 한다는 의견이 가끔 나온다. 그런데 의무라는 것은 확고하게 주어지지 않으면 구속력이 약해지기 마련이다. 더욱이, 한 번 변경이 허용되기 시작하면 또 다른 변경을 불러오게 되고, 이렇게 되면 기도문을 바꾸는 일이 다반사처럼 되어, 심지어는 조금밖에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사람이나 시력이 약한 사람 또는 아주 바쁜 사람들을 위해서도 특별한 기도문을 별도로 만들어야 하는 경우마저 생기지 않겠는가!
결코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 레지오가 바라는 것은 레지오의 기준에 맞는 봉사를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준에 맞는 봉사를 수행할 수 없는 사람은 협조단원이 될 수 없다. 하지만 그러한 사람들마저도 레지오 밖에서 나름대로 레지오를 위해 기도함으로써 레지오의 사업에 대단히 소중한 도움을 줄 수 있다. 따라서 행동단원들은 이들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격려해 주어야 한다.

(23) 협조단원에게 뗏세라나 회원증 대금 지불을 요구할 수는 있지만, 협조단원 자격과 관련된 어떠한 종류의 회비도 징수할 수 없다.

(24) 협조단원 명부에는 아듀또리움 단원과 일반 협조단원으로 구분하여 이름과 주소를 기재해야 한다. 이 명부는 쁘레시디움에서 보관하며, 꾸리아 간부나 꾸리아가 지명한 방문자의 요구가 있을 때 열람하도록 한다. 열람자는 명단에 제대로 기재되어 있는지, 새로운 단원을 열심히 모집하고 있는지 또는 기존 협조단원들을 수시로 방문하여 그들이 ‘쟁기를 잡고 뒤를 자꾸 돌아다 보지 않는지'(루가 9, 62) 등을 세심히 살펴보아야 한다.

(25) 협조단원은 쁘레시디움의 협조단원 명부에 이름을 올림으로써 자격을 얻는다. 협조단원 명부는 부단장이 관리한다.

(26) 협조단원 후보자의 이름은 3개월의 수련 기간 동안 임시 명부에 올렸다가, 수련 기간이 끝나고 후보자가 단원으로서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했다고 쁘레시디움이 확인하면 정식 협조단원 명부에 이름을 기재한다.

“착한 일을 해서 쌓은 우리의 모든 공로를 성모님의 손을 통해 예수님께 완전히 바치는 것은 영웅적인 행동이며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 놓는 행위이다. 이러한 행위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과연 어떻게 갚아 주실까?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세속의 재산과 명예를 버리는 사람들에게 이미 이 세상에서 백배나 갚아 주신다. 그렇다면 주님을 위해 자신의 내적이고 영신적인 보화까지도 아낌없이 바치는 이들에게는 과연 그 백배의 은총이 얼마나 크겠는가?”(몽포르의 성 루도비코-마리아 / St. Louis-Marie de Montfort)

제17장 세상을 떠난 레지오 단원들의 영혼

세상에서 싸움이 끝나면 레지오 단원은 고귀한 죽음을 맞이한다. 마침내 단원으로서 그가 해 온 일들은 확인 받는 것이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레지오가 그에게 영원한 세상을 맞이할 준비를 하도록 하였으므로, 이제 그는 그 영원의 세상에서도 레지오 단원으로 남아 있게 될 것이다. 레지오는 그에게 영신 생활의 바탕이요 거푸집이었다. 그뿐 아니라, 모든 행동단원과 협조단원이 “저희 레지오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시 모일 수 있도록 해주소서.” 하며 날마다 열심히 바치는 기도의 힘으로 그는 한 평생 먼 길을 온갖 위험과 고난 속에서도 잘 견디어 낼 수 있었다. 이러한 생각은, 먼저 우리 곁을 떠난 단원들에게나 남아 있는 모든 단원들에게 얼마나 큰 기쁨을 주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당장은 친구와 동료를 잃은 슬픔을 겪지만, 세상 떠난 우리 전우가 한시라도 빨리 연옥의 형벌을 면하도록 기도를 바쳐야 한다.

쁘레시디움은 행동단원이 세상을 떠나면 그 영혼을 위해 지체 없이 미사 한 대를 봉헌해야 한다. 또한, 단원들은 먼저 떠난 동료의 영혼을 위해 묵주기도 5단을 포함한 레지오의 전 기도문을 적어도 한 번은 특별히 바쳐야 한다. 그러나 단원 가족이나 친척이 세상을 떠났을 경우에는 이러한 기도의 의무는 없다. 해당 쁘레시디움뿐 아니라 다른 쁘레시디움에서도 가능한 한 많은 단원들이 장례 미사에 참례해야 하며 유족과 함께 장지까지 가야 한다.

장지에서의 모든 예절이 진행되는 동안 묵주기도와 그 밖의 다른 레지오 기도문을 바친다. 이러한 레지오의 기도는 교회의 공식 하관 예절에 바로 뒤이어 바칠 수 있다. 장지에서 바치는 레지오 단원들의 기도는 세상을 떠난 이에게 큰 유익이 될 뿐만 아니라, 슬픔에 잠겨 있는 유족과 동료 단원들과, 그리고 그 자리에 참석한 고인의 모든 친구들에게도 큰 위안이 될 것이다.

입관을 준비하는 동안에도 시신 곁에서 레지오의 기도문을 바치게 되지만, 이렇게 예절 중에 바치는 기도만으로 세상을 떠난 이에 대한 추모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며, 단원들은 그를 위해 지속적인 기도를 바쳐야 한다.

매년 11월 위령 성월에 모든 쁘레시디움은 세상을 떠난 레지오 단원들의 영혼을 위해 미사 한 대를 봉헌해야 한다. 이 경우에도 세상을 떠난 단원들을 위해 기도하는 다른 모든 경우와 마찬가지로, 단원 구분이나 등급에 관계없이 모든 행동단원과 모든 협조단원의 영혼을 위해 미사를 봉헌하는 것이다.

“연옥도 마리아 왕국의 일부이다. 연옥에도 성모님의 자녀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윽고 사라질 고통을 참아 받으며, 영원히 계속될 영광으로 다시 태어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빈첸시오 페레리오, 시에나의 베르나르디노, 루도비코 볼로와 등 많은 성인들은 성모님이 연옥의 모후이심을 명백히 선언하고 있다. 특히 몽포르의 루도비코-마리아 성인은 우리의 모든 생각과 행동이 이러한 믿음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우리가 바치는 기도와 보속의 공로를 성모님의 손에 맡길 것을 당부한다. 그렇게 함으로서 우리가 직접 기도 드리는 것보다 훨씬 더 풍성한 구원의 은총이 우리가 사랑하는 영혼들에게 돌아가게 될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는 것이다.”(루모 / Lhoumeau : 몽포르의 성 루도비코-마리아의 영성 생활)

제18장 쁘레시디움 회합의 순서

1 쁘레시디움 회합의 차림은 어디에서나 같은 모양이어야 한다

탁자의 한쪽에 작은 제대를 차려 놓고 단원들은 그 주위에 둘러 앉는다. 제대 차림은 넉넉한 크기의 흰 보를 깔고 그 위에 은총을 나누어 주고 계시는 모습의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상’을 모신다. 성모상의 높이는 약 60cm라야 하며, 그 양 옆에 꽃병 두 개와 불을 켠 촛대 두 개를 각기 하나씩 갈라 놓고, 성모상으로부터 조금 떨어진 앞쪽 오른편에는 벡실리움을 세워 놓는다. 벡실리움에 관해서는 제27장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제대의 차림새의 사진은 이 교본의 176쪽과 177쪽 사이에 실려 있다.
성모상은 모후께서 당신을 따르는 군사들의 한 가운데에 함께 계시는 모습을 드러내야 하므로, 제대를 회합 탁자로부터 분리시켜 차린다거나, 둘러앉은 단원들의 바깥쪽에 별도로 차려 놓아서는 결코 안 된다.

하늘에 계신 어머니께 드리는 우리의 사랑을 드러내기 위해서 제대의 기물과 꽃은 되도록 좋은 것으로 장만해야 한다. 기물을 장만하는 비용은 한 번의 지출로 끝이 난다. 어떤 이의 기증이나 그 밖의 다른 우연한 기회에 은으로 만든 꽃병이나 촛대를 마련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단원들은 벡실리움과 꽃병과 촛대 등을 늘 깨끗하게 간수하고, 쁘레시디움의 비용으로 꽃과 초를 알맞게 장만하는 일을 자랑스런 의무로 여겨야 한다.

생화를 전혀 구할 수 없는 경우에는 조화를 이용할 수도 있다 다만, 생기를 불어넣기 위해 산 나뭇잎을 곁들여야 한다.

촛불이 꺼지지 않도록 가릴 필요가 있을 경우에는 맑은 유리나 둥근 갓을 초의 위 부분에 씌울 수 있으나, 초 자체의 모습을 가려서는 안 된다.

탁자에 까는 흰 보에는 Legio Mariae(레지오 마리애)라는 글자를 새겨 넣을 수는 있으나 쁘레시디움 이름을 새겨서는 안 된다. 구별보다는 일치를 더욱 중시하기 때문이다.

“사실상 성모님의 중재 역할은 성모님의 모성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결국 성모님의 중재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중재 역할에 참여하는 것이지만, 성모님만이 지니고 계신 어머니로서의 특성 때문에, 그리스도의 유일한 중재에 단지 종속적으로 참여하는 다른 피조물들의 중재와는 구별된다. 실제로 ‘어떠한 피조물도 혈육을 취하신 말씀이시며 구세주이신 그리스도와 결코 대등한 위치에 설 수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와 동시에 ‘구세주의 유일한 중재는 피조물의 협력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피조물들 가운데에서 이 유일한 원천을 공유하는 여러 가지 협력이 우러나도록 만든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유일한 선이 피조물들에게 서로 다른 모양으로 널리 퍼지게 된다.'”(구세주의 어머니 38)

2 정해진 시각에 회합을 시작한다

단원들은 정해진 시각에 어김없이 정해진 장소에 모여 회합을 시작해야 한다. 회합의 정시 시작은 쁘레시디움의 능률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데, 이는 간부들이 미리 와서 필요한 준비를 해 놓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어떠한 쁘레시디움도 활동 계획서라고 하는 기록된 사전 계획 없이 회합을 시작할 수 없다. 쁘레시디움 단장은 매번 회합에 앞서 이 계획서를 반드시 작성해야 하며, 작성된 계획에 따라 활동을 배당해야 한다. 단장은 이 계획서에 쁘레시디움이 추진하는 모든 활동 내용을 자세히 기록하고, 그 오른편에 활동을 배당 받은 단원의 이름을 기입한다. 활동을 종류별로 매번 회합 때마다 똑같은 순서로 다룰 필요는 없으나, 두 사람 또는 그 이상의 단원들이 함께 활동을 하였더라도 한 사람씩 호명하여 각자 별도의 활동 보고를 하도록 해야 한다.

단장은 회합이 끝나기 전에 단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다음 주간에 해야 할 활동을 반드시 배당해야 한다.

단장은 매주 계획하고 배당한 활동들을 한데 묶어 보관하는 활동 계획서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아무리 열렬하고 매력적인 이상(理想)일지라도 막연하고 비현실적인 감동을 주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된다.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이냐시오 성인의 천재성은 신앙의 힘을 치밀하고 조직적으로 활용한 데 있었다. 증기는 실린더 안에서 피스톤의 왕복 운동으로 동력을 생산해 내지 못한다면 아무런 쓸모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해를 끼친다. 얼마나 많은 영신적 열성들이 주의 깊게 검토되지 않거나 적극적으로 활용되지 않기 때문에 덧없이 허비되고 있는가! 휘발유를 잘못 사용하면 자동차를 폭발시킬 수도 있으나, 조심스럽게 잘 사용하면 자동차를 산꼭대기까지 올라가게 할 수도 있다.”(알프레드 오래힐리 몬시뇰 / Msgr. Alfred O’Rahilly : 윌리암 도일 신부의 생애)

3 회합 시작

회합의 시작은 성령께 드리는 호도(呼禱)와 기도로써 이루어진다. 성령께서는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은총과 생명과 사랑의 샘이시므로, 우리는 성령께서 이 모든 은총을 성모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내려 주심을 믿으며 기뻐한다.

“성모님은 하느님의 성자를 태중에 잉태하신 순간부터 성령께서 이 세상에서 하시는 모든 일에 대하여 일종의 권리나 관리권을 지니게 되셨다. 그리하여 성모님의 중재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하느님의 은총을 받을 수 없게 되었다. ….. 성령께서 내리시는 모든 은혜와 덕성과 은총은 성모님이 원하시는 사람들에게, 성모님이 원하시는 때에, 성모님이 원하시는 만큼, 성모님이 원하시는 방법으로 베풀어지고 있다.”(성 베르나르디노 / St. Bernardine : 예수 성탄에 관한 강론 중에서)

[주: 윗글의 뒤쪽 부분과 거의 같은 내용이 베르나르디노 성인보다 200년 전에 살았던 대 알베르토 성인(St. Albert the Great)의 글(Biblia Mariana, Liber Esther I)에도 쓰여 있다.]

4 묵주기도 5단을 바친다

1단, 3단, 5단은 영적 지도자가 선창하고, 2단과 4단은 단원들이 선창한다. 묵주기도를 소리내지 않고 바치는 단원이 있어서는 안 된다. 또한 성모상이 놓인 그 자리에 성모님이 은총을 내려 주시는 모습으로 실제 서 계시는 것과 같이 여겨, 엄숙하고 존경하는 마음가짐으로 묵주기도를 바쳐야 한다.

성모송을 바칠 때, 전반부가 미처 끝나기도 전에 후반부를 시작하는 일이 없도록 하고, 예수님의 거룩한 이름은 경건히 불러야 한다.

묵주기도는 레지오 단원 생활에 매우 중요한 부분이므로 각 단원은 로사리오 회(the Rosary Confraternity 부록 7 참조)에 회원으로 등록하기를 바란다.

교황 바오로 6세는 묵주기도가 반드시 잘 보존되어야 할 기도라고 강조한 바 있다. 이 기도는 순수한 기도이며 뚜렷이 성서적이다. 즉, 전체 구원의 역사가 묵주기도 안에 효과적으로 집약되어 있으며, 그 역사 안에서 성모님이 맡아 하시는 여러 역할을 잘 드러내고 있다.

“기도 드리는 여러 방법 중에서 묵주기도보다 더 뛰어난 기도는 없다. 이 기도는 우리가 성모님께 드려야 하는 모든 공경을 한데 모아 놓고 있다. 이 기도는 우리의 모든 악을 치료해 주며 또한 모든 축복의 근원이다.”(교황 레오 13세 / Pope Leo XIII)
“모든 기도 가운데 묵주기도는 가장 아름답고 은총이 가장 풍부하며 지극히 거룩하신 동정 성모님을 가장 기쁘게 해 드리는 기도이다. 그러므로 묵주기도를 사랑하고 날마다 열심히 바치기 바란다. 이것이 나의 유언이니, 이로써 나를 기억해 주기 바란다.”(성 비오 10세 / St. Pius X)
“그리스도인에게는 성서가 으뜸이며, 묵주기도는 실제로 성서를 요약해 놓았다.”(라코르데르 / Lacordaire)
“수 많은 사람들의 기도가 단 하나의 기도 안에 합쳐진다면, 그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을 리가 없다.”(성 토마스 데 아퀴노 / St. Thomas de Aquino : 마태오 복음 18장에 대하여)

5 묵주기도가 끝나면 곧바로 영적 독서를 한다

영적 독서는 영적 지도자가 낭독하며, 불참시에는 단장이 대신한다. 영적 독서의 길이는 5분 정도로 제한하며, 그 내용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쁘레시디움 설립 후 초기 몇 년 동안은 교본을 영적 독서로 채택할 것을 강력히 권고한다. 이는 단원들 교본의 내용에 좀더 익숙해지고, 교본을 진지하게 공부하도록 격려하기 위함이다.

영적 독서가 끝나면 단원들은 함께 성호를 긋는다.

“‘당신을 낳아 젖을 먹인 여인은 얼마나 행복합니까!’ 의심할 바 없이 성모님은 육체적으로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셨다는 사실만으로도 축복받으시기에 합당하다. 특히 성모님은 천사가 아뢸 때, 이미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고 받아 들이셨으며, 그 말씀을 마음속에 깊이 새기어 간직하셨고'(루가 1, 38-45 : 2, 19-51 참조) 당신 삶을 통하여 그 말씀을 이루셨기 때문에 마땅히 축복받으셔야 할 분이시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축복이 군중 속에 있던 어떤 여인이 이야기한 축복과 상치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다만 ‘주님의 종'(루가 1, 38)이라고 부른 동정녀 어머니께서 지니신 축복과 일치된다고 말할 수 있다.”(구세주의 어머니 20)

6 전주(前週) 회의록을 낭독한다

앞선 회합의 회의록을 낭독한 후 출석한 단원들의 승인을 얻으면 단장은 서명한다. 회의록은 너무 길거나 짧지 않도록 알맞게 작성해야 하며, 각 회합마다 일련 번호로 차수를 매긴다.

회의록의 중요성은 서기의 임무라는 항목에 강조하였다. 회의록 낭독은 회합의 진행 순서 중 가장 앞 부분에서 이루어지므로, 이를테면 전략적 중요성이 크다. 그러므로 회의록 작성 요령과 낭독 방법에 따라서 그 뒤에 이어지는 모든 순서에 좋든 나쁘든 영향을 미치게 된다.

훌륭한 회의록은 훌륭한 모범을 보여 주는 것과 같다. 하지만 정성이 부족한 조잡한 회의록은 나쁜 본보기를 보이게 된다. 아무리 훌륭하게 기록된 회의록이라 해도, 서툴고 분명치 않거나 성의 없이 아무렇게나 낭독된다면 나쁜 회의록이 되고 만다는 점 또한 명심해야 한다. 회의록 낭독이 단원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대단히 클 뿐만 아니라 단원들의 정신 집중과 보고 방법까지도 영향을 주게 된다. 따라서, 회의록 내용과 낭독 방법이 좋으냐 나쁘냐에 따라 회합 진행이 잘 될 수도 있고 잘못 될 수도 있다. 회합의 질적 수준이 높으냐 낮으냐에 따라 단원들이 수행하는 활동의 질이 높아지기도 하고 낮아지기도 한다.

그러므로 서기는 회의록을 작성할 때, 남이 잘 알아주지 않는 일이지만, 이와 같은 점에 유의해야 하며, 쁘레시디움 역시 능률적인 운영을 위하여 이러한 점들을 바르게 보살펴야 한다.

“만일 ‘세속의 자녀들이 자기네들끼리 거래하는 데는 빛의 자녀들보다 더 약다.'(루가 16, 8)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기서 입증된다면, 이는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세속의 자녀들이 자신이 맡은 일을 매우 부지런하게 해내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들은 받을 것과 줄 것을 세심하게 따져 보고 장부를 정확히 기록하며, 손해를 보면 매우 안타까워하여 이를 메우려고 열심히 뛰어다닌다.”(교황 성 비오 10세 / Pope St. Pius X)

7 상훈

아래 적힌 상훈(常訓) 은 활동 계획표 안에 함께 적어 넣거나 별도로 간직하여, 낭독할 때 손쉽게 찾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상훈은 매월 첫 번째 회합에서 단장이 회의록에 서명을 마친 직 후 낭독한다.

— 상 훈 —

단원이 지켜야 할 레지오의 의무는 :

첫째, 쁘레시디움 주회합에 규칙적으로 정각에 출석하여, 자신이 한 활동에 대하여 알맞고 또렷한 보고를 한다.

둘째, 까떼나를 매일 바친다.

셋째, 믿음의 정신으로 성모님과 일치하여, 실질적이며 적극적으로 활동을 수행하며, 그 활동 대상자와 동료 단원들 안에서 주님의 어머니 마리아께서 우리 주님을 다시금 뵙고 섬기시듯이 한다.

넷째, 회합에서 토의된 사항이나 레지오 활동과 관련하여 알게 된 모든 일에 대하여 반드시 비밀을 지킨다.

“성모님은 나를 통하여 내가 접촉하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계시는 예수님을 사랑하시기를 원하신다. 나의 사도직 활동과 끊임없는 기도가 그들의 마음속에 사랑의 불을 놓아 예수님께서 사시게 하기 때문이다. 내가 성모님과 온전히 일치할 때, 성모님은 은총과 사랑으로 나를 가득 채워 주시며, 나 또한 넘쳐 흐르는 시냇물처럼 다른 이들의 영혼을 가득 채울 수 있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성모님은 나를 통해서 예수님께 사랑을 드리고 예수님을 기쁨에 넘치게 해 드릴 뿐만 아니라, 나와 일치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통해서도 그렇게 하신다.”(드 야아헬 / De Jaegher : 신뢰의 미덕)

[이 인용문은 상훈의 일부가 아니므로 상훈과 함께 낭독하지 않는다.]

8 회계 보고

회계는 쁘레시디움의 수입과 지출 및 잔고를 매주 쁘레시디움 회합에서 보고해야 한다.

“때때로 자금이 부족하여 영혼을 잃는 경우가 있다. 그러므로 자금 지원은,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사도직에 대한 더욱 완전한 협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제임스 멜레 신부 / James Mellet, C.S.Sp.)

9 활동 보고

단원들은 자리에 앉은 채 활동을 보고하며, 수첩에 기록해 놓은 활동 내용을 참고로 하여 반드시 구두로 보고한다.

쁘레시디움은 단원이 활동 의무를 이행치 않았을 때 이를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단원이 활동을 하지 못한 경우에는, 가능하면 그 이유를 설명해야 한다. 활동도 없고 해명도 하지 않는다면 의무를 게을리 했다는 인상을 풍겨, 동료 단원들에게 좋지 못한 본보기만을 남기게 된다.

단원들이 어느 정도 진지한 태도로 활동을 수행하고 있다면 굳이 변명을 늘어놓을 필요는 없을 것이며, 그것이 가장 바람직한 모습니다. 그러나 쁘레시디움 회합이 단원들의 변명을 듣는 분위기로 변하게 되면, 모든 단원들의 열성과 규율은 곧 시들고 만다.

활동 보고를 할 때에는 단장만을 향해 말해서는 안 된다. 말하는 사람의 심리적 작용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즉,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개별적으로 말할 때는, 자동적으로 말소리가 두 사람 사이의 거리에 알맞도록 조절되어 그 이상 커지지 않는다. 따라서, 단장 한 사람만을 향해 보고하게 되면 자연히 말소리가 작아지므로, 멀리 떨어진 자리에 앉아 있는 단원들은 알아 듣게 힘들게 된다.
활동 보고와 이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토의는 회합 장소 어디서나 들을 수 있도록 목소리를 높여 말해야 한다. 아무리 충실한 보고라 하더라도 참석한 단원들 가운데 여러 단원이 알아듣지 못한다면 회합 진행에 나쁜 영향을 준다. 그런 보고는 차라리 안 한 것보다 나을 것이 없다. 어떤 이들은 작은 목소리로 말하는 사람은 얌전하거나 겸손해서 그렇다고도 하지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어느 누가 감히 성모님보다 더 겸손하며 얌전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성모님이 조그만 소리로 우물거리거나 가까이 앉아 있는 사람조차도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를 정도로 이야기하신다는 것은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레지오 단원들이여! 다른 모든 경우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말하는 태도에 있어서도 우리의 모후이신 성모님을 본받자.

단장은 알아듣기 힘든 보고는 받아들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선 단장 자신부터 그러한 비난을 받지 않도록 큰 목소리로 말해야 한다. 단장의 어조(語調)는 그 회합의 어조를 결정짓게 마련이다. 단원들은 대개 단장보다 낮은 목소리로 말하므로 단장이 그저 보통 대화하는 어조로 말하면 단원들의 활동 보고는 속삭이는 어조로 떨어지고 만다. 단장이 부드럽게 말하는데 어떤 단원이 혼자 큰소리를 낸다면, 자기 혼자 소리를 지른다는 느낌이 들어, 결국 그 단원의 목소리는 겨우 들릴까 말까 할 정도로 낮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단원들은 단장을 비롯한 모든 단원이 큰 목소리로 말할 것을 요구해야 한다. 영적 지도자는, 마치 의사가 처방을 내리듯, 모든 단원들이 잘 들을 수 있게 큰소리로 말하는 것이 쁘레시디움을 건강하게 만드는 결정적 요소라는 점을 지적해 주어야 한다.

활동 보고는 기도와 마찬가지로 회합의 중요한 요소이며, 기도와 보고는 서로를 보완해 주므로 쁘레시디움 회합에서 핵심을 이룬다.

보고는 각 단원의 활동을 쁘레시디움에 연결시키는 기능을 한다. 그러므로 활동 보고를 통해서 각 단원이 어떠한 활동을 했는가가 분명하게 나타나야 한다. 마치 영화의 장면처럼 생생하게 표현하여, 보고를 듣는 다른 단원들이 마음속으로 그 활동에 참여하고 판단하며 논평하고 배우도록 해야 한다. 따라서, 보고할 때에는 어떤 활동을 시도했고 어떤 결과를 얻었는지, 그리고 어떤 정신으로 활동에 임했으며 소요된 시간은 얼마이고, 어떤 방법을 이용하여 활동을 수행했는지를 자세히 설명해야 한다. 또한, 달성하지 못한 활동은 무엇이며, 아직 접촉하지 못한 사람은 누구인가 하는 등의 내용도 밝혀야 한다.

회합 분위기는 밝고 명랑해야 한다. 그러므로 활동 보고는 회합에 정보를 제공해 줄 뿐만 아니라 단원들의 흥미를 불러일으켜야 한다. 회합이 너무 지루하면 쁘레시디움이 건강하지 못하다는 증거이며, 이런 쁘레시디움이 젊은 단원들을 붙들어 둘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다.
어떤 활동은 그 내용이 다양하므로 훌륭한 보고를 하기가 쉬운 반면, 어떤 보고는 너무 단순하여 다양한 보고를 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그러므로 이런 경우에는 비록 사소한 것이라 해도 흔히 볼 수 없는 특징을 파악해 두었다가 보고 자료로 활용하면 좋을 것이다.

활동 보고는 너무 길어도 안 되고 너무 짧아도 안 된다. 무엇보다도 판에 박은 듯한 보고가 계속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한 보고는 그 단원이 자신의 의무를 게을리 하고 있음을 스스로 나타내 줄 뿐만 아니라, 다른 단원들도 그 단원이 의무를 게을리 하도록 동조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 된다. 이러한 태도는 쁘레시디움으로 하여금 단원들의 활동을 감독하도록 한 레지오의 기본 사상에 큰 타격을 가하는 것이다. 단원들이 수행하는 활동에 대해서 쁘레시디움이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면 활동을 관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레지오의 활동은 매우 어렵기 때문에 회합에서 단원들의 노고를 세심하게 이해해 주고 북돋아 주지 않으면 단원들은 점차 몸을 사리는 방향으로 기울게 된다. 이러한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단원들은 힘닿는 대로 좋은 일을 많이 해 보겠다고 레지오에 입단했지만, 사실상 이들의 활동을 필요로 하는 곳은 인간 본성적으로 접근하기 꺼려지는 곳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레지오는 주로 회합을 통하여 단원들이 이러한 본성적인 약점을 극복하고 성공적인 활동을 해낼 수 있도록 이끌어 나가야 한다. 그런데 보고 내용이 실제 활동 상황을 확실하게 드러내지 못한다면, 쁘레시디움은 단원의 활동에 대해 단지 막연한 감독밖에는 할 수 없다. 이렇게 되면 쁘레시디움은 단원을 제대로 격려할 수도 안전하게 지켜 줄 수도 없게 된다. 결국 그 단원은 쁘레시디움의 관심과 지도를 받지 못해 더 이상 올바른 단원 생활을 지탱하기 어려워진다. 이와 같이 레지오의 규율의 손길이 단원들에게 미치지 못하면 모든 면에서 불행한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다.
잘못된 보고는 다른 단원들까지도 쉽게 물들이게 하므로, 성실하지 못한 보고야말로 레지오를 통해서 봉사의 삶을 살고자 진실로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비극적인 해악을 끼치고 만다.

레지오 단원은 훌륭한 보고를 하는 것만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목표를 좀더 높이 세우고 완벽한 활동을 위해 전력을 다할 뿐만 아니라 쁘레시디움에서 모범적인 보고를 하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활동 수행 방법뿐만 아니라 보고 방법까지도 서로 가르치고 배운다.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는 “훌륭한 모범이야말로 사람들을 가르치는 최고의 학교이다. 사람들은 모범을 통해서 가장 바르게 배운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한 단원이 모범을 보임으로써 쁘레시디움 전체가 최고수준으로 끌어올려질 수도 있지 않겠는가? 활동 보고가 회합의 전부는 아니지만, 마치 중추신경처럼 쁘레시디움의 다른 모든 업무 진행에 공감 작용을 일으켜 전체를 좋게 만들기도 하고 나쁘게 만들기도 한다.

앞에서 보고할 때의 자세를 설명하면서 성모님을 떠올리라고 지적한 바 있다. 그런데 어떠한 경우라도 ‘성모님은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하셨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면, 그러한 생각만으로도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 활동 보고 시작 전에 쁘레시디움 소 제대에 모셔진 성모상을 한 번 바라보라. 성모님이 보고를 하신다면 어떻게 하실까를 상상하면서 좋은 보고를 하려고 힘쓰는 단원은 어느 면에서나 불성실한 보고를 하는 일이 절대로 없을 것이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성모님을 한없이 순결하고 아름다운 분이시며 지구 역사상 가장 상냥하고 온화한 여인이시라고 보지만, 그 이상으로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러한 생각은 성모님에 대하여 단지 감상적인 신심에 빠지게 하거나, 만일 그러한 사람들이 강인한 성격을 지녔다면 성모님에 대하여 거의 매력을 느낄 수 없게 하는 위험마저 있다. 그들은 그토록 자상하시고 온화하신 동정녀요 어머니이신 마리아가 누구보다도 꿋꿋한 불굴의 여인이시며, 또한 그 누구보다도 훌륭한 인격을 갖춘 분 이시라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뇌베르 / Neubert : 교리로 보는 성모 마리아)

10 까떼나

회합 진행 도중 일정한 시간에 단원들은 모두 일어서서 까떼나(Catena Legionis)를 바친다.(제 22장 [레지오의 기도문] 참조) 대개 단장의 회의록 서명과 회합이 끝나는 시간 사이의 중간 시간이다.(보통 한 시간 반이 걸리는 쁘레시디움 회합에서 시작한 지 한 시간 정도 지난 후이다.)

후렴은 참석자 전원이 합송한다. ‘마리아의 노래'(Magnificat)는 영적 지도자(부재 시에는 단장)와 단원들이 구절마다 번갈아서 바친다. ‘기도’ 부분은 영적 지도자(부재 시에는 단장)가 혼자서 바친다.

까떼나를 시작할 때는 성호를 긋지 않고, ‘마리아의 노래’ 첫 구절에서 다 함께 성호를 긋는다. 까떼나의 ‘기도’가 끝난 후에도 성호를 긋지 않는다. 바로 이어서 훈화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레지오에서 단원들이 까떼나를 함께 바치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다. 쁘레시디움이 기쁨에 넘쳐 있거나 실망에 빠져 있을 때, 혹은 판에 박은 듯한 단조로운 길을 힘겹게 걷고 있을 때, 까떼나는 마치 하늘나라에서 불어오는 산들바람처럼, 단원들로 하여금 백합이며 장미이신 성모님의 향기에 젖어 들게 하여, 신기하게도 새롭고 산뜻한 분위기로 바꾸어 준다. 이것이 단순한 묘사가 아님을 레지오 단원이라면 누구나 다 잘 알고 있는 일 아닌가!

“나는 마니피캇(Magnificat, 마리아의 노래)이 특별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찬가는, 널리 알려진 사실은 아니지만, 동정녀 마리아께서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신 은총을 드러내는 중요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천사가 마리아께 아뢴 순간부터 지극히 거룩하신 동정녀는 그리스도와 온전히 일치하시어 자신이 인류의 대표자가 되었음을 선언하시고, ‘온 인류’와 세세 대대로 긴밀하게 결합하시어, 당신의 참된 자녀가 되는 모든 이들과 운명을 함께 하신다. 이 성모님의 찬가는 성모님의 영성적 모성을 노래하고 있다.”(도미니코 회 베르나르도 신부 / Bernard : 성모 마리아의 신비)
“특히 이 찬가는 마리아의 기도이며, 옛 이스라엘과 새 이스라엘의 기쁨이 한데 어우러져 있는 메시아 시대의 노래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성 이레네오(St. Irenaeus)가 말했듯이, 이 찬가는 구세주를 미리 뵈옵고 기뻐했던 아브라함의 환희(요한 8, 56 참조)가 새롭게 들려 오며, 교회의 예언자적 음성이 이 찬가 안에서 함께 울려 퍼진다. …… 실제로 ‘마리아의 노래’는 세상에 널리 퍼져 나가서 언제나 온 교회의 기도가 되어 왔다.”(교황 바오로 6세의 권고 : 마리아 공경 18)

11 훈화(알로꾸시오)

단원들이 다시 자리에 앉으면 영적 지도자가 짤막한 훈화(Allocutio)를 한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훈화는 교본에 대한 해설 형식으로 하여 단원들이 교본 내용을 완전히 익히도록 해야 한다. 훈화의 가치는 매우 크며, 단원들을 성장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레지오는 단원들을 영성적으로 발전시켜야 하는 책임이 있으므로 단원들이 지닌 모든 잠재력을 이끌어 내지 못한다면 결국 단원 자신에게나 레지오에 대하여 부당한 행위를 저지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단원 각자가 자신이 몸담고 있는 레지오 마리애라는 단체에 대하여 충분히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교본 연구도 이러한 목적에 크게 이바지할 수 있으나, 그것으로 훈화를 대신할 수는 없다. 교본을 주의 깊게 두세 번 읽은 것으로 교본 연구를 끝냈다고 생각하는 단원이 있을지 모르나, 열 번 스무 번을 읽는다 해도 레지오가 바라는 수준의 교본 지식을 쌓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단원들이 교본에 담겨 있는 모든 뜻과 사상을 완전히 익힐 때까지, 매주 지속적이며 체계적으로 설명하여 점차 수준을 높여 가야 한다.
영적 지도자가 참석하지 못한 경우에는 단장이나 또는 단장이 지명하는 단원이 교본을 해설하는 형식으로 훈화를 대신한다. 이때 교본이나 다른 문헌에 실린 글을 단순히 읽기만 하는 것으로는 충분한 훈화가 될 수 없다.

훈화는 5~6분을 초과 하지 않도록 배려해야 한다.
훈화를 철저히 하는 쁘레시디움과 그렇지 않은 쁘레시디움의 차이는 훈련된 군대와 훈련되지 않은 군대의 차이와 꼭 같다.

“나는 오랫동안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해 왔다. 즉, 세상이 급격히 사악해지고 하느님께서 사람들의 마음을 더 이상 붙드실 수 없게 되었으므로, 하느님께서는 아직도 당신께 충실한 사람들만이라도 더 큰 일을 해주기를 더욱 간절히 원하고 계실지도 모른다. 이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깃발 아래 거대한 군단을 모으실 수는 없을지 모르나, 적어도 당신의 군단에 속해 있는 사람들만이라도 모두가 무조건 사랑하는 마음으로 당신께 헌신하는 ‘영웅’이 되기를 바라신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이처럼 아낌없이 자신을 바치는 이들의 신비의 대열에 들어가기만 한다면, 하느님께서는 마음속으로부터 열렬히 바라고 계시는 사업, 즉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인 성화를 돕기 위해 필요한 모든 은총을 우리에게 주실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몬시뇰 알프레드 오래힐리 / Msgr. Alfred O’Rahilly : 윌리암 도일 신부의 생애)

* ‘알로꾸시오’는 로마 군단의 장군이 부하 장병들에게 행한 연설을 일컫는 말이다.

12 훈화가 끝난 후

모든 참석자는 성호를 긋는다. 이어서 활동 보고를 계속하거나 다음 순서로 이어진다.

“성모님이 하신 말씀이 뛰어나게 세련된 여성의 말솜씨라는 것은 역사적으로 알려진 사실이다. 성모님의 타고난 재능은 시인이 되기에 충분했다. 성모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은 실제 시처럼 운율을 이루었다. 성모님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는 언어 예술가의 표현처럼 아름다웠다.”(로드 / Lord: 현대 세계에서의 성모 마리아)

13 비밀 헌금 주머니

훈화가 끝나면 곧바로 비밀 헌금 주머니를 돌리며, 단원들은 각자 형편대로 헌금한다. 헌금을 하는 목적은 쁘레시디움의 여러 가지 경비를 지불하고, 꾸리아와 그 위의 평의회에 헌금하기 위한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해 두지만, 위에 말한 여러 상급 평의회들은 쁘레시디움에서 보내 주는 헌금이 없다면, 레지오를 관리하고 확장하거나 지원할 만한 재정적인 능력을 잃어버리게 된다.(제35장 [자금] 참조)
헌금 때문에 회합이 중단되어서는 안 된다. 비밀 주머니는 눈에 띄지 않게 단원들에게 차례로 돌려야 하며, 단원은 비록 헌금을 할 수 없는 경우라 해도 일단 헌금 주머니에 손을 넣어야 한다.

쁘레시디움은 적절한 비밀 헌금 주머니를 마련해야 한다. 장갑이나 봉투 사용은 적당치 않다.

쁘레시디움에는 금전적으로 여유 있는 단원과 그렇지 못한 단원 사이에 차별이 있을 수 없으므로 비밀 헌금은 말 그대로 비밀리에 이루어져야 한다. 따라서, 헌금할 때는 비밀 원칙을 존중하여 자신이 얼마를 헌금하는지를 다른 단원들에게 드러내지 않도록 해야 한다. 또 한 가지 강조할 사항은, 쁘레시디움뿐만 아니라 전체 레지오 운영이 단원 각자가 비밀 주머니에 넣는 헌금에 달려 있다는 사실이다. 헌금을 단순히 형식적인 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아무런 부담도 되지 않을 정도의 적은 금액을 헌금해 놓고 헌금 의무를 다했다고 할 수는 없다. 사실상 헌금을 통하여 각 단원은 더 폭넓은 레지오의 사명을 나누는 특권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레지오의 기금에 헌금할 때에는, 각자 책임감을 느끼며 아낌없이 봉헌하는 자세를 지녀야 한다.

단원의 헌금 액수는 비밀로 해야 하지만 헌금 총액을 발표할 수 있으며, 반드시 장부를 사용하여 수입과 지출을 기록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이 과부는 구차하면서도 가진 것을 전부 바친 것이다.'(루가 21,4)라고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셨을 때, 아마도 당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떠올리셨으리라.”(올시니 / Orsini : 복되신 동정녀 전기)

14 회합을 마침

각 단원에게 활동을 배당하고 출석을 점검하는 등 모든 업무가 끝이 나면, 레지오의 마침 기도와 사제의 강복으로 회합을 마친다.
쁘레시디움 주회합은 한 시간 반이 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내가 다시 말한다. 너희 중의 두 사람이 이 세상에서 마음을 모아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는 무슨 일이든 다 들어주실 것이다. 단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 19~20)

제19장 회합과 단원

1 회합을 존중하자

자연계의 질서를 유지시켜 주는 힘은 그 힘을 받아 각 분야에 전달하는 연결 고리가 얼마나 튼튼한지 그 여부에 따라 크게 좌우된다. 이런 현상은 레지오 조직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조직의 어느 한 부분에서 연결이 끊기면 조직 전체에 치명적인 장애를 가져올 수 있다.

회합에는 열심히 참석하면서도 레지오의 생명이라 할 수 있는 이른바 영성적 감화나 힘을 거의 또는 전혀 받지 못하는 단원의 경우가 바로 그런 예이다. 회합과 단원 사이에는 일치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단원 쪽에서 단지 기계적으로 회합에 참석한다면 이런 일치는 이루어질 수 없다. 회합과 단원을 효과적으로 연결 시키려면 반드시 필요한 요소가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바로 회합을 존중하는 마음이다. 레지오 조직의 모든 것은 회합을 존중하는 단원들의 정신을 바탕으로 세워져 있다. 다시 말하면, 단원들은 순명과 충성으로 회합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을 지녀야 하는 것이다.

2 쁘레시디움은 존경 받도록 힘써야 한다

어떤 쁘레시디움의 수준이 전체 평균에 미치지 못한다면, 이는 그 쁘레시디움을 이끌어 갈 본질적 요소인 지도력 결핍을 의미한다. 이 경우 쁘레시디움에 대한 단원들의 존경심은 오래 지속될 수 없다.

3 쁘레시디움은 규율을 지켜야 한다

단원들이 쁘레시디움을 존중하는 마음이 크면 클수록, 그 만큼 그 단원은 레지오의 영성적 생명력을 더 많이 받게 된다. 레지오 정신의 핵심은 최고의 수준에 오르려는 노력에 있으므로, 쁘레시디움 자체가 단원들에게서 최고의 존경을 받도록 하여, 이를 통해 다시 단원을 감화시켜야 한다. 만일 쁘레시디움이 레지오의 규율을 지키지 않으면서 단원들에게만 규율을 지키라고 강요한다면, 이는 모래 위에 집을 지으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회합 순서나 전반적인 회의 진행 절차를 규정대로 엄격히 따를 것을 교본의 곳곳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4 쁘레시디움은 성실함의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

레지오는 회합에서 사용하는 말이나 행동 하나하나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하며, 흠잡을 데 없는 회합의 모습이 열심한 단원에게까지도 모범을 보여 줄 만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레지오가 지닌 다양한 생명력은 사실상 그런 역할을 할 수 있게 해준다. 단원들은 때때로 질병이나 휴가 또는 그 밖에 피치 못할 사정으로 주어진 의무를 다하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러나 쁘레시디움의 경우에는 모든 단원이 한꺼번에 결석하는 일은 없으므로 개별 단원의 경우와 같은 제한을 받지는 않으며, 실질적으로 회합을 가질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어떤 이유로도 주회합을 걸러서는 안 된다. 만약 정해진 날짜에 도저히 회합을 가질 수 없는 경우에는 다른 날로 옮겨서라도 주회합을 열어야 한다. 단원 대다수가 결석했다고 해서 그것이 회합을 가질 수 없는 이유가 될 수 없다. 단 두세 명이라도 회합을 하는 것이 전혀 회합을 갖지 않고 넘어가는 것보다 낫다. 물론 이렇게 출석률이 낮은 회합에서 다루어지는 안건은 적을 수밖에 없겠지만, 쁘레시디움으로서는 적어도 가장 중요한 의무를 스스로 이행하는 것이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후의 회합에서는 더 많은 성과를 거두게 된다. 왜냐하면, 단원들은 자신들이 나약함과 실수와 기타 잡다한 세속 일에 얽매여 있는 동안에도 의연하게 임무를 계속하고 있는 쁘레시디움을 보게 되며, 그로써 회합에 대한 그들의 존경심은 더욱 커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로써 쁘레시디움은 희미하게나마 교회의 중요한 특성을 반영하게 되는 것이다.

5 난방과 조명

회합 장소는 밝고 쾌적한 온도를 유지해야 한다. 이런 준비가 미흡하게 되면 유쾌해야 할 회합 분위기가 괴로운 자리로 변해, 쁘레시디움의 장래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준다.

6 좌석 배치

단원들이 앉을 1인용 의자나 긴 의자를 마련해야 한다. 만일 단원들을 학생용 책상에 여기저기 앉게 하거나 좌석 배치를 산만하게 하면 무질서한 분위기가 조정되어, 질서의 정신이라 할 수 있는 레지오의 정신이 길러지지 않는다.

7 주회합 시간은 단원들이 편리한 시간으로 정한다

대부분의 단원들이 낮에 일을 하므로 회합은 대개 저녁 시간이나 일요일에 열리게 된다. 그렇지만 저녁이나 야간에 일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으므로, 이런 단원들 형편에 맞는 회합 시간도 마련해야 한다.

또한 교대근무자들, 즉 근무 시간이 주기적으로 바뀌는 사람들도 배려해야 한다. 이들을 단원으로 받아들이려면 주회합 시간이 서로 다른 두 쁘레시디움이 협력하면 된다. 이때 교대 근무자들은 비번 시간에 맞추어 두 쁘레시디움의 주회합에 번갈아 참석한다. 이런 단원의 출석과 활동을 바르게 지속시키기 위해 해당 두 쁘레시디움은 서로 긴밀한 협조 관계를 유지해야 할 것이다.

8 회합은 정해진 시간 안에 끝낸다

회합은 한 시간 반 이상을 넘지 않도록 한다. 회합을 능률적으로 운영함에도 불구하고 시간 내에 회합을 마치기 위해 안건을 줄이거나 서둘러야 할 때가 자주 있게 되면, 이는 쁘레시디움의 업무가 너무 많다는 적신호이므로, 이때를 쁘레시디움의 분단을 고려해야 할 시기로 받아들여야 한다.

9 회합 시간의 길이

회합 시간이 적어도 몇 분 이내로 끝나서는 안 된다. 하한선에 대한 규정은 없지만 (기도, 영적 독서, 회의록 낭독, 훈화에 소요되는 30분을 포함하여) 매번 한 시간도 채 안 되어 끝나게 된다면 이는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다. 그 원인이 결석한 단원이 많아서든지, 아니면 단원들의 활동이 거의 없어서든지, 혹은 단원들의 보고 방법에 문제가 있어서든지, 어떠한 경우라도 즉시 바로잡아야 한다. 산업계에서는 제품의 판매 시장이 열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생산 시설을 최대한으로 가동하지 않는 경우, 아마도 이를 중대한 잘못으로 단정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레지오 조직 역시 최대한으로 가동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영신적 은총의 산물을 최대한으로 생산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10 지각 또는 조퇴

기도가 시작된 후에 출석한 단원은 묵주기도 앞부분의 기도문(뗏세라의 앞 부분)과 그 뒤에 이어지는 호도를 무릎을 꿇고 혼자서 소리내지 않고 바친다. 그렇게 하더라도 쁘레시디움의 묵주기도에 함께 하지 못한 손실을 메울 수는 없다. 회합이 끝나기 전에 조퇴해야 할 단원은, 회합 시작 전에 먼저 단장의 허가를 얻어야 하며, 조퇴할 때에는 무릎을 꿇고 마침 기도 (거룩하신 천주의 성모님…)와 그 뒤에 이어지는 호도를 바친 후 조용히 자리를 뜬다.

어떤 경우라도 단원이 습관적으로 늦게 오거나 조퇴하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 물론 지각하거나 조퇴를 하더라도 활동은 할 수 있고 보고도 할 수는 있다. 그러나 회합의 시작 기도와 마침 기도를 가볍게 여기고 태만히 하는 것은 레지오의 기도의 정신에서 멀어지는 것이며, 심지어는 거역하는 행위로 비쳐질 수도 있다. 이러한 단원은 좋은 열매는커녕 해로운 열매만을 맺게 될 것이다.

11 바른 질서는 규율의 뿌리이다

레지오는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단원들 안에 규율을 지키는 정신을 기른다.

(가) 회합의 차림은 규정에 따라야 한다.
(나) 하나하나의 임무를 질서 있게 이어나가도록 한다.
(다) 규정에 따라 안건을 정확히 처리한다.
(라) 질서의 원천이신 성모님의 정신이 스며들게 한다.

이러한 규율의 정신이 없으면, 회합은 마치 머리는 명석하나 몸은 마비된 것처럼 힘을 잃게 된다. 쁘레시디움 회합이 힘을 잃어버리면, 단원들을 다스리거나 밀고 나가지 못하며, 그들이 레지오의 조직 안에서 영성적으로 성장하는 데 전혀 도움을 주 수 없게 된다. 규율이 없으면 단원들은 인간의 본능대로, 될 수 있는 한 통제를 피해 혼자 활동하려 하거나, 순간적이고 변덕스러운 충동에 따라 제멋대로 행동하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환경 속에서는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없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신앙 안에서 무언가 이루어 보고자 헌신하는 마음으로 스스로 규율에 매이도록 만든다면, 세상에서 비할 데 없이 큰 힘이 그 안에 항상 작용하게 된다. 그리하여 신앙단체의 규율이 지나친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도 질서 있게 운영되며, 특히 교회 당국자로부터 따뜻한 호응을 받을 수 있다면, 그것은 아무도 저항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힘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레지오는 보화를 지니고 있으며, 그 보화는 바로 규율의 정신이다. 레지오는 이 보화를 외부에 나누어 줄 수 있는 능력도 갖추고 있다. 오늘날 세상은 억압과 자유 방임의 두 극단 사이에서 방향을 잃고 있다. 이렇게 어지러운 현대 세계에서 레지오가 제공하는 규율의 정신은 그 가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귀중한 보화가 아니겠는가. 내적 규율이 없더라도 전통이나 강력한 외적 규율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개인이나 단체가 외적 규율에만 의존하고 있다가 위기가 닥쳐와 그 규율이 무너지면 개인도 단체도 곧 함께 무너지고 만다. 이와 같이 내적 규율이 외적 규율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외적 규율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사실상 양자는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고 있다. 이 두 가지 규율이 감미로운 신앙적 동기 안에서 서로 얽히어 적절한 비율로 결합될 때, 우리는 성서에서 말하는 ‘쉽게 끊어지지 않는 세 겹의 강한 동아줄'(전도 4, 12)을 갖게 되는 것이다.

12 시간을 지키자

시간을 정확히 지키지 않고서는 “네 왕실의 기강을 바로잡아라.”(이사 38, 1)고 하신 주님의 명령에 따를 수 없다. 어떤 단체가 조직원들을 무질서에 젖도록 잘못 훈련한다면, 그러한 단체는 조직원들을 근본적으로 삐뚤어지게 만드는 것이며, 더욱이 모든 올바른 교육과 규율의 바탕이 되는 단체에 대한 존경심을 없애는 것이다. 생명처럼 소중한 것을 쉽게 줄 수 있는데도 이를 게을리 한다면, 이는 마치 ‘배를 칠하는 데 드는 몇 푼의 돈을 아끼려다가 배를 썩히고 만다’는 속담처럼 너무나도 어리석은 일이 된다.

때때로 탁자 위에 시계가 놓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시계가 회합 진행에 아무런 구실을 하지 못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또 어떤 경우에는, 회합의 시작과 중간 그리고 마침 시간을 지킬 때만 시계를 보고, 그 외에 활동 보고나 다른 순서를 진행할 때는 전혀 시간을 고려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시작 기도에서부터 회합이 끝날 때까지의 모든 진행 순서에 시간과 질서를 엄격하게 지키는 원칙이 적용되어야 한다.

만일 간부들이 이 점을 지키지 않는다면 단원들이 충고를 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단원들 역시 잘못을 거들어 돕는 결과를 빚고 만다.

13 기도는 정성스럽게 바치자

성급한 성격을 가진 사람들은 기도를 바치는 데도 침착하게 하지 않고 서두른다. 그리하여 기도를 잘못 이끌어 가는 한 사람의 부주의가 전체 쁘레시디움으로 하여금 경건하지 못한 태도로 기도를 바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온다. 사실상 일반화되어 있는 잘못 한 가지를 지적한다면, 그것은 기도를 너무 빠르게 바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잘못은, 성모상이 모셔진 자리에 실제로 성모님이 단원들과 함께 계시는 것처럼 여기며 기도하라는 레지오의 지시를 무시하는 행위이다.

14 기도는 회합과 한 덩이가 되어야 한다

회합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성체 앞에 함께 모여 묵주기도를 바친 다음, 각 쁘레시디움 회합실로 가도록 하자는 제안이 나온 일이 있었다. 회합에 대하여 레지오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대원칙은 통일성이다. 따라서 이 원칙에 어긋나는 어떠한 제안도 받아들일 수 없다. 회합이 하나의 모습으로 통일되어야만 회합에서 다루는 모든 것이 기도의 특성을 지니게 되며, 이 통일된 힘으로 영웅적인 활동과 노력들이 더욱 두드러지게 실천에 옮겨진다. 그러므로 만일 주회합 장소가 아닌 다름 곳에서 기도를 바친다면, 레지오의 통일된 힘으로부터 나오는 이러한 기도의 특성을 잃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회합의 성격을 전반적으로 바꿔 놓게 되고, 회합을 바탕으로 세워진 레지오 조직의 특성 그 자체를 변질시킨다. 따라서 이처럼 변질된 조직체는 제아무리 큰 성과를 올린다 하더라도 이미 레지오 마리애가 아닌 것이다. 앞서 설명한 바를 토대로 할 때, 어떠한 경우를 막론하고 쁘레시디움 회합에서는 묵주기도를 비롯하여 기도문 중 어느 하나라도 생략하는 것을 결코 허용해서는 안 된다. 사람의 몸이 살아 있게 위해 숨을 쉬어야 하는 것처럼, 레지오 회합에서의 묵주기도는 없어서는 안 될 절대적인 요소이다.

15 다른 신심 행사 중에 바쳐진 레지오 기도문

설사 쁘레시디움 회합을 열기 전에 본당 공동체의 다른 행사에서 레지오의 기도문을 바쳤다 하더라도, 쁘레시디움 회합에서는 모든 레지오의 기도문을 새롭게 다시 바쳐야 한다. 그 이유는 이미 설명한 바와 같다.

16 회합에서 레지오의 기도문 외에 다른 특별한 기도를 바치는 문제

회합에서 바치는 기도에 어떤 다른 특별한 지향을 둘 수 있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고 있다. 이에 대한 해석이 구구하여 혼란을 가져올 수 있으므로, 다음과 같이 그 원칙을 명확히 해 두고자 한다.

(가) 레지오 회합의 통상 기도문을 특별한 지향으로 바치는 문제: 회합에서 바치는 기도는 반드시 레지오의 모후이신 복되신 동정 성모님의 지향을 위해서 바쳐야 하며, 다른 지향을 둘 수 없다.

(나) 다른 기도문을 레지오의 통상 기도문에 덧붙여 특별한 지향을 두고 바치는 문제: 레지오의 기도문 자체가 이미 상당히 길기 때문에 다른 기도문을 덧붙여 바칠 수 없다. 다만 간혹 레지오와 관련된 일로 특별한 기도를 바쳐야 할 때가 있으므로, 이러한 경우에 한하여 통상 기도문에 덧붙인 다른 짧은 기도를 바칠 수는 있다. 그러나 추가 기도는 극히 제한적이어야 하며 자주 있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해 둔다.

(다) 어떤 특별한 지향을 위하여 기도를 바쳐야 할 필요가 있을 경우에는 , 이를 단원들에게 알리어 단원들의 개인적인 신심 행위를 통하여 그 지향을 위해 기도해 줄 것을 권장한다.

17 성실한 보고가 겸손에 어긋나는가

어떤 단원들은, 선행을 스스로 내세우는 것을 겸손의 덕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알맹이 없는 보고를 합리화한다. 그러나 그러한 태도는 한마디로 겸손을 가장한 교만이다. 시인들은 이러한 잘못된 겸손을 일컬어 ‘마귀의 기분을 맞추는 죄’라고 읊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단원들은 이렇게 가장된 겸손이 자신의 생각 속에서 교묘히 작용하지 못하도록 경계해야 하며, 쁘레시디움의 세심한 지도를 벗어나려는 욕구가 암암리에 자신의 마음속에 스며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만일 그러한 잘못된 행위가 다른 단원들에게 번지게 되면, 그 쁘레시디움은 결국 무너지고 만다. 따라서 참된 겸손이라면 결코 그러한 잘못된 행위를 드러내도록 요구하지는 않을 것이다. 절대로 그러한 일이 일어나도록 놓아 두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순수성은 단원들이 그와 같은 특출한 행동을 삼가고 조직체의 규율과 준수 사항을 기꺼이 따르며, 단원 한 사람 한 사람이 회합을 발전시키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그들의 개인적 역할을 다하도록 요구한다.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활동 보고는 그 하나하나가 회합을 쌓아 올리는 한 장의 벽돌이다.

18 화합은 일치의 표시이다

회합이란 단체 활동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의 정신이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므로 무엇보다도 큰 힘을 발휘한다. 레지오에서 말하는 능률도 결국 화합의 정신으로부터 비롯된다. 아무리 훌륭한 성과를 거두었다 해도 회합을 깨뜨리면서 얻어낸 것이라면 그 진정한 의미를 잃어버린다. 레지오에서는 화합의 정신과 근본적으로 배치되는 결점들을 마치 전염병을 피하듯이 적극 멀리 해야 한다. 독선을 부리거나 흠잡거나 화를 내거나 비꼬거나 잘난체하는 등등의 결점이 회합에 끼여 들면 회합의 분위기는 즉시 사라져 버린다.

19 동료 단원의 활동에 모든 단원들이 관심을 갖자

회합은 기도로써 시작되므로, 기도를 바치는 동안 단원들은 모두 동등한 자격으로 회합에 참석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느낌은 회합을 마치는 순간까지 이어질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단원들은 회합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 사사로이 잡담을 나누거나 웃거나 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회합에서 발표하는 활동 보고 하나하나는 그 활동을 맡았던 단원 한 사람이나 두 사람만의 관심사가 아니라, 모든 단원들이 함께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점을 일깨워 주어야 한다. 이를테면, 보고를 듣고 있는 동료 단원들이 보고를 하고 있는 단원과 함께 활동 대상자를 직접 방문하고 있는 모습을 마음속에 떠올릴 정도로 쁘레시디움이 모든 활동에 관심을 쏟아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노력이 없을 때, 단원들은 동료 단원이 어떤 활동을 어떻게 했는지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흥미로운 활동 보고에만 관심을 쏟을 것이 아니라 회합의 매 순간이 친밀한 동료 의식과 단원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인적인 관심으로 넘치도록 만들어야 한다.

20 반드시 비밀을 지켜야 한다

매달 한 차례씩 되풀이해서 단원들에게 들려주는 상훈(常訓)은 레지오 조직에서 비밀을 지키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 주고 있다.

군인은 용기가 부족하면 부끄러운 일로 여기지만, 반역 행위는 용기 부족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나쁜 행위로 본다. 쁘레시디움 회합에서 알게 된 사실을 외부에 퍼뜨리는 것은 레지오에 대한 반역 행위이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다소 열성이 지나친 단원들 가운데에는, 가령 냉담자 방문 활동을 보고할 때, 활동 대상자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들의 이름이나 사정을 쁘레시디움에 보고하지 않아야 하며 그것이 바로 이웃 사랑의 정신이라고 엉뚱한 주장을 펴는 단원이 있다. 모든 일에는 분별력이 요구된다. 즉, 이러한 논리는 얼핏 듣기에 그럴 듯하지만 그 안에는 큰 잘못이 들어 있다. 이러한 잘못된 논리 안에서 쁘레시디움은 결코 만족할 만한 기능을 수행할 수 없으며, 결국 레지오는 그 생명마저 위협받기에 이른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가) 그러한 주장은 우선 단체의 일반적인 관례에 어긋난다. 무릇 단체란 모든 문제와 안건에 대한 조직원들의 활발한 논의에 의해서 발전한다.

(나) 그러한 주장을 논리적으로 분석 해 보면, 결국 공동 방문자들끼리도 서로 비밀을 지켜야 한다는 모순이 나온다.

(다) 레지오에서 활동을 수행하고 활동 대상자들에 대한 정보를 나누고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등의 행동 단위체는 단원 개인이나 한 쌍의 공동 방문자가 아니라, 모든 것은 오직 쁘레시디움을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통상 활동은 그 내용이 모두 쁘레시디움에 보고되어야 한다. 만일 단원들이 보고를 하지 않는다면 쁘레시디움은 무용지물이 되어, 결국 이웃 사랑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 아래 참된 사랑의 열매가 상처를 입게 되는 것이다.

(라) 이 문제는 사제가 개인의 비밀을 지켜 주어야 한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이다. 성직자로서의 사제의 기능은 레지오 단원과는 그 차원이 다르다. 레지오 단원이 방문 활동을 펴면서 알게 되는 일들은 대개 주위의 사람들이 이미 아는 내용을 크게 벗어나지 않으며, 이웃에 사는 사람들이나 동네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경우도 허다하다.

(마) 활동을 보고하는 의무를 없애 버리는 것은 단원들을 일일이 지도하고 감독하는 기능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중대한 문제가 된다. 쁘레시디움이 단원들을 적절하게 충고하고 지도하고 논평할 수가 없게 되면, 쁘레시디움의 기본 이념이 상처를 받게 되며, 활동 보고를 바탕으로 단원들을 교육하고 보호하는 기능도 불가능해진다. 쁘레시디움이 단원들의 주간 활동 보고를 세밀히 검토하지 못하게 되면, 틀림없이 여러 가지 무분별한 일들이 일어나게 되어 레지오는 해(害)를 입는다.

(바) 이상한 일은, 단원들이 쁘레시디움에 자신의 활동을 제대로 보고하지 않는 경우에 오히려 비밀 유지가 더 어려워진다는 사실이다. 현재 놀라울 정도로 잘 지켜지고 있는 레지오의 비밀 엄수 의무는 단원들의 활동을 쁘레시디움이 일일이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장악하는 힘이 약해지면 ‘비밀의 띠’도 느슨해진다. 한마디로, 쁘레시디움은 이웃 사랑을 실천하고 비밀을 지켜야 하는 단위체일 뿐만 아니라, 이 두 가지를 지탱하는 기둥이다.

단원들이 쁘레시디움 회합에서 보고할 때에는 가족들이 모여 앉아서 집안 비밀을 의논하는 것과 같이 해야 한다. 비밀이 새어 나가는 일이 발생하지 않는 이상, 또는 실제 그런 일이 발생할 때까지는, 누구라도 똑같이 자유롭게 발언하도록 해야 한다. 설사 비밀이 밖으로 새어 나갔다 하더라도 보고를 제한할 것이 아니라, 의무마저 배반하는 단원이 다시는 생겨나지 않도록 노력함으로써 그 해결책을 찾아야 할 것이다.

물론 전적으로 개인의 비밀을 지켜 주어야 하는 예외적인 경우가 가끔 있을 수 있다. 이러한 경우에는 즉시 영적 지도자(만날 수 없을 때는 다른 능력 있는 분)와 의논하여 그분으로 하여금 결정을 내리도록 하는 것이 옳다.

21 발언의 자유

회합의 진행 방법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해도 되는가? 쁘레시디움의 분위기는 군대식이 아니라 가족적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단원들의 ‘공정한 논평’은 환영해야 한다. 다만 도적적인 어조를 띤다던가 간부들에 대한 존경심을 저버리는 태도가 되어서는 안 된다.

22 회합은 단원 생활을 지탱하는 근본이다

인간의 본성은 눈에 드러나는 성과를 올리고자 갖은 애를 태우다가도, 일단 성과가 드러나면 곧 마음이 변하여 얻은 성과에 만족하지 못하게 된다. 그런데 성과가 눈에 보인다 해서 반드시 활동이 성공을 거두었다고 확신할 수는 없는 일이다. 어떤 단원은 단 한 번 접촉하여 쉽게 성과를 얻는가 하면, 어떤 단원은 영웅적인 인내심을 발휘하며 꾸준히 노력해도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는 수도 있다. 헛된 노력을 한다는 생각이 들게 되면 활동을 포기하게 되므로 단순히 결과만을 놓고 활동을 평가하는 것은, 마치 모래밭이 단단한 밑받침이 될 수 없는 것처럼, 단원 생활을 바르게 지속시키는 데 필요한 밑받침이 되어 주지 못한다. 단원들에게는 받쳐 주는 힘이 꼭 필요하다. 단원들은 매주 쁘레시디움 회합에 참석하여 함께 기도하고, 독특한 회의 진행과 분위기 속에서 자신이 수행한 활동을 보고하고, 축복 속에 동료애를 나누고, 강력한 규율의 힘에 의지하며, 활발한 토론과 정연한 질서로 이어지는 회합에서 자신을 받쳐 주는 영적인 힘을 얻는다.

쁘레시디움 주회합은 활동에 대한 단원들의 자세를 느슨하게 풀어 주는 것이 아니라, 단원들로 하여금 레지오 조직 안에서 더욱더 열심히 하겠다는 각오를 새롭게 하도록 떠받쳐 준다. 회합이 정해진 궤도를 따라 끊이지 않고 이어져 나갈 때, 단원들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이 조직이 원래의 목적을 위해 원활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되며, 마침내는 성공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지니게 된다. 동시에 그들은 그와 같은 조직의 성공이 결국 그들 각자가 단원 생활을 얼마나 성실하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제 레지오 단원들은 좀더 생각을 넓혀서, 성모님이 당신의 아드님 나라를 확장하는 싸움에 쓰시는 여러 가지 무기가 우리 레지오 조직 안에 있음을 알아보아야 한다. 우선, 단원 자신이 성모님께서 쓰시는 무기가 아닌가, 그런데 이 무기의 성능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단원들이 충실하게 활동하면 성모님의 무기가 완벽한 성능을 발휘하는 것이 되므로, 성모님은 그 무기로써 원하시는 성과를 거두실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성과는 완전한 것이 된다. ‘오로지 성모님만이 지극히 높으신 분의 가장 큰 영광이 어디 있는지 완전히 아시기 때문'(몽포르의 성 루도비코-마리아)이다.

23 쁘레시디움은 성모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곳’이다

여기서는 신자 개개인을 하나의 조직체 안에서 더욱 완전하게 결속시켜 교회의 공식적이고 사목적인 사도직 활동에 두루 활용하는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교회의 공동체적 사도직과 개인 사도직의 관계는 전례와 개인 기도의 관계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교회의 공동체적 사도직은 성모님이 그것을 당신의 모성과 결합하여 어머니로서 보살펴 주심에 의해 유지된다. 성모님은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며 생명 자체이신 성자를 세상에 낳아 주셨고, 이 위대한 임무에 합당한 권능을 하느님께로부터 받았기 때문이다.”(교의 헌장 56) 성모님은 당신께 기꺼이 협력하고자 하는 신자들의 봉사 활동을 통하여 당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계속 수행하신다. 쁘레시디움은 성모님의 임무를 돕고자 열망하는 한 무리의 사랑스런 영혼들을 성모님이 쓰시도록 맡겨 드리고 있다. 그리고 성모님이 쁘레시디움 단원들의 협력을 받아들이고 계심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성모님이 쁘레시디움을 통하여 당신의 특별한 은총을 보여 주시고 당신의 모성을 새롭게 드러내고 계시므로, 쁘레시디움이 있는 곳에 성모님도 함께 계신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 이념에 충실한 쁘레시디움은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생명과 쇄신, 치유와 문제의 해결을 보여 줄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레지오는 문제가 있는 곳에 반드시 이 영신적 원리를 활용해야 할 것이다.

“네 발을 마리아의 족쇄로 채우고 네 목에 마리아의 칼을 써라. 네 등을 구부려 마리아의 짐을 지고, 그 속박에 짜증을 내지 말아라. 네 정성을 다하여 마리아를 따르고, 네 전력을 기울여 마리아의 길을 지켜라. 그때 마리아의 족쇄는 너에게 견고한 방패가 되고, 네 목에 쓴 칼은 영광스런 의상이 되리라. 마리아의 멍에는 황금의 장식이 되고, 그 밧줄은 고귀한 옷술이 된다.” (이 글은 교회가 집회서 6, 24-30의 말씀을 마리아께 적용시킨 것이다.)

제20장 레지오의 조직과 규율은 바꿀 수 없다

1 레지오의 규율이나 활동에 대한 규정은 마음대로 바꿀 수가 없다. 이 교본에 적혀 있는 규율과 규정은 레지오의 제도이다. 아무리 사소한 사항이라도 하나하나 바꾸기 시작하면 다른 데도 손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렇게 되면 레지오는 얼마 안 가서 이름만 남을 뿐 알맹이가 빠져 버린 무익한 단체로 바뀌고 만다. 이렇게 변질된 레지오가 비록 보람 있는 활동을 수행한다 하더라고 레지오는 이런 지체(肢體)를 주저 없이 버릴 것이다.

2 때때로 단체의 이름이 갖는 의미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이른바 ‘현대화된 단원들’이 레지오라는 이름만 남기고 거의 모든 것을 바꾸려고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들의 구상을 기존 단체의 제도에 덧붙이거나 변경하는 것을 막으면 이를 횡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는 레지오가 쌓아 올린 지위와 그 단원들을 자신의 소유물로 바꾸어 놓으려는 불법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더욱이 그러한 행위는 영신적 질서 안에서 저질러지는 것이므로, 불법 행위 중에서도 가장 질이 나쁜 약탈 행위임을 알아야 한다.

3 레지오의 조직과 규칙을 바꾸려는 시도는 일부 단원들뿐 아니라 때때로 지역 단위로도 나타난다. 그들은 자기 지역이 다른 지역과 다르므로 실정에 맞게 특별한 규율을 만드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느 특정 지역이 당면하고 있는 이른바 특수 사정에 알맞도록 레지오 조직을 융통성 있게 운영해야 한다는 제안이 가끔 들어오고 있다. 그렇지만 그런 제안대로 레지오 조직을 변경한다면 불행한 결과를 낳게 될 뿐이다. 레지오는 이미 어떤 지역에서나 잘 적용된다는 사실이 입증되고 있으므로 , 그러한 요구는 대개 필요성보다는 그릇된 독립심에서부터 나오는 것이다. 또한 그러한 움직임은 하늘로부터 특별한 강복을 받지 못하고 언제나 탈락자만을 만들어 내고 만다. 그렇다고 이 점을 모든 단원에게 항상 주지시킨다는 것도 사실상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레지오의 제반 규율과 관련하여 개인적 판단을 행사할 권리가 있다고 잘못 생각하는 단원들에게 말해 두고자 한다. 즉, 그들의 잘못된 생각이나 행동을 레지오의 이름으로 옹호하려는 행위를 중단하는 것만이 그들이 신앙 안에서 바르게 설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이다.

4 더욱이, 한 단체의 조직이나 규율을 부분적으로 교묘히 뽑아 내어 이리저리 엮어 쓰는 지나치게 약삭빠른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이 경우 레지오 본래의 특성과 영성은 결코 드러나지 않는다. 따라서 그러한 외과 수술로는 대개 시체를 남길 뿐이며, 기껏 잘되어 보았자 허울 좋은 기구에 지나지 않게 된다. 이런 단체가 결실을 맺지 못하면 결국 막중한 책임 문제만 뒤따를 뿐이다.

5 레지오가 여러 계층의 평의회를 두는 주된 목적은 레지오의 제반 제도를 본래의 모습대로 정확히 보존하려는 데 있다. 따라서 각급 평의회는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반드시 맡겨진 관리 업무를 충실히 수행해야 한다.

“레지오 마리애의 조직은 가장 훌륭한 것이다.”(교황 요한 23세 / Pope John XXIII)
“여러분은 전체를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전체를 거부해야 한다. 축소하면 약해지고, 절단하면 불구가 된다. 각 부분이 결합되어 전체를 이루므로, 어느 한 부분을 빼놓고서 전체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뉴만 추기경 / Cardinal Newman : 발전에 대하여)

제21장 나자렛의 성가정

그리스도 신비체에 관한 교리는 레지오의 모든 회합, 특히 레지오 조직의 심장인 쁘레시디움 회합에 가장 알맞게 적용된다. 주님께서 “단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는 나도 함께 있다.”(마태 18, 20)고 말씀하셨다. 이는 주님께 봉사하기 위해서 모이는 그리스도 신비체의 지체(肢體)들의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주님께서 그 지체 안에서 드러내시는 영향력이 더욱 커진다는 사실을 다짐해 주시는 말씀이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권능을 온전히 드러내시는 조건으로 지체들의 숫자를 거론하신 것이다. 이렇게 지체들이 함께 모여야 한다는 것을 조건으로 내세우시는 이유는 아마도 우리 각자가 지니고 있는 부족함 때문일 것이다. 즉, 개인의 덕성은 매우 한정되어 있으므로 어느 한 사람만을 통해서는 당신의 참 보습을 전부 드러내실 수 없기 때문이다.

간단한 자연 현상을 예로 들어 보면 더욱 명확히 알 수 있다. 한 장의 색 유리는 그 색과 똑같은 생의 빛만 통과시키고 다른 빛은 모두 차단해 버린다. 그러나 제각기 다른 색을 가진 여러 장의 색유리가 한꺼번에 각각의 빛깔을 투사하면 이 여러 색의 빛깔들은 모두 합쳐져서 완전한 하나의 빛을 만들어 낸다. 이와 마찬가지로 신자들이 주님의 사업을 도우려고 함께 모이면 각자가 지닌 여러 다른 능력들이 서로 보완되므로, 주님께서는 이 무리를 통하여 당신의 완전하심과 권능을 더욱 충실하게 나타내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레지오 단원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주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쁘레시디움에 모이게 되면, 주님께서도 단원들의 열정에 상응하는 힘있는 모습으로 단원들과 함께 하신다. 그리하여 레지오의 힘이 회합에서 단원들과 함께 하고 계신 주님으로부터 뻗어 나간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마르 5, 30 참조)

또한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는 이 작은 레지오 가족 모임에는 성모님과 요셉 성인도 함께 계신다. 이 두 분은 아드님과 똑같은 관계를 쁘레시디움과도 맺고 계시므로, 쁘레시디움은 나자렛 성 가정을 반영하고 있다. 이는 단지 신심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사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베릴르(Berulle)는 “우리는 예수님에 관한 일이나 신비를 과거에 있었다가 없어진 일로 볼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현재의 것으로, 그리고 영원한 것으로 여겨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레지오 단원들은 쁘레시디움이 회합 장소로 쓰고 있는 방과 기물을 마치 나자렛 성가정의 집과 가재 도구를 대하는 것처럼 경건한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 쁘레시디움의 비품과 집기를 다루는 단원들의 태도를 보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들 가운데 살아 계시고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베풀어 주시며 우리를 통하여 활동하신다는 사실을 단원들이 어느 정도나 인식하고 있는가를 가늠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생각을 떠올리면, 쁘레시디움을 가정적 분위기로 만들어 주는 모든 기물에 대해 세심한 관심을 기울여야 하겠다는 마음이 들게 될 것이다.

레지오 단원들이 회합 장소를 마음대로 관리할 수는 없겠지만, 책상이나 의자 또는 제대나 책 등 회합에 쓰이는 기물은 성실하게 간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자렛의 성가정인 쁘레시디움의 어머니께서 오래 전 갈릴래아에서부터 모든 정성을 다해 돌보아 오신 살림살이를 계속하시도록 해 드려야 하지 않겠는가? 성모님은 단원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시는데, 막상 단원들은 이를 외면하거나 소홀히 하는 경우가 있다. 그렇게 되면 그리스도 신비체를 위해 애쓰시는 성모님의 수고는 빗나가게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레지오는 단원들에게 성모님이 집안 살림을 과연 어떻게 하셨겠는가를 상상해 보도록 권해야 한다.

나자렛 성가정은 비록 가난하고 가재 도구도 좋은 것은 아니었겠지만 틀림없이 가장 아름다웠을 것이다. 성모님은 모든 주부나 어머니들 중에서도 가장 독특하고 고상한 취향을 지니셨고 깔끔하셨으므로, 집안의 모든 살림살이에 성모님의 성품이 그대로 나타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소박한 살림살이나마 어딘가 모르게 사랑이 배어 있거나, 보통 물건 하나하나에도 눈길을 끄는 매력이 깃들여 있었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그런 물건들을 모두 만드셨고 사람이 쓰도록 해주신 것이므로, 성모님은 오직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사랑으로 그 모든 물건들을 사랑하셨을 것이기 때문이다. 성모님은 살림 도구 하나하나를 조심스럽게 다루고 깨끗이 닦고 윤기가 나게 하고 훌륭하게 만들어, 어느 것 하나 완벽하지 않은 것이 없도록 하셨을 것이다. 성가정의 모든 살림살이는 어느 것 하나 조화를 깨는 것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러한 것이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 작은 성가정은 다른 어느 가정과도 비교할 수 없는 보금자리였기 때문이다. 나자렛의 성가정은 구원 사업의 요람이었으며, 세상의 주인이신 주님을 위한 터전이었다. 성가정 안의 모든 물건들은 만물을 창조하신 주님을 돌보기 위한 목적으로 특이하게 쓰였다. 따라서 모든 물건은 그러한 숭고한 목적을 이루기에 알맞아야 했고, 성모님이 쏟으신 정성으로 깨끗이 정돈되고 빛이 나며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고상한 품위를 지녔을 것이다.

쁘레시디움에 관련된 모든 물건은 단원들을 육성하는 데 이바지해야 하므로, 단원들이 예수님과 성모님을 반영해야 하듯이 쁘레시디움은 성가정의 모든 특성을 반영해야 한다.

어떤 프랑스 작가는 <내 방 둘러보기> 라는 책을 썼다. 단원 각자는 자신이 속해 있는 쁘레시디움을 차근차근 둘러보며 눈에 들어오고 귀에 들리는 모든 것, 이를테면 마루, 벽, 창문, 집기, 제대용 비품, 그 중에서도 이 가정의 중심이며 어머니이신 성모상을 세심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회합에 임하는 단원들의 태도와 그들이 어떻게 회의를 이끌어 가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만일 쁘레시디움에서 보고 듣는 모든 것이 나자렛 성가정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면 그러한 쁘레시디움은 나자렛 성가정의 정신이 깃들여 있니 않은 쁘레시디움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한 쁘레시디움은 죽은 것보다도 못한 상태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간부들이 마치 잘못된 부모처럼 되어, 잘 보살펴 주어야 할 단원들을 오히려 그르치는 수가 가끔 있다. 거의 모든 경우 쁘레시디움의 결함을 짚어 올라가 보면 그 원인이 간부에게 있음을 보게 된다. 단원들이 시간을 잘 지키지 않거나 출석률이 저조하고 활동 내용이 부실하고 주회합에 참석하는 태도가 성실하지 못한 원인은 간부들이 그러한 잘못된 행동을 용납하고 단원들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데 있다.

이런 모든 바람직스럽지 못한 일들을 나자렛 성가정과 견주어 보기 바란다. 성모님이 살림살이를 그처럼 소홀히 하셨거나 아드님께 그런 올바르지 못한 교육을 시키셨겠는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지만, 성모님이 불결하고 나약하고 믿을 수 없고 무관심한 분이 되어 나자렛 성가정을 파탄에 빠뜨리고 이웃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는 광경을 머리에 떠올려 보라! 물론 이것은 터무니없는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많은 간부들이 그들의 성가정인 쁘레시디움을 성모님처럼 잘 관리하겠다고 다짐하면서도, 실상 아무렇게나 내버려 두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모든 것이 완벽하게 관리되어 쁘레시디움의 신심이 입증된다면, 우리 주님께서는 말씀하신 대로 몸소 쁘레시디움 회합에 참석하신다. 성가정의 정신은 나자렛이나 유다 지방이나 또는 어떤 특정한 장소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쁘레시디움의 정신도 어느 한계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하느님의 어머니께 대한 가톨릭 신자 대부분의 사랑에는 가위 칭찬할 만한 예술가적 감각만 나타나는데, 이는 성모님의 나자렛 생활에 대하여 세세히 알아보려는 노력이 없기 때문이다. 나자렛 마을에는 인간적 경험이나 이해를 초월한 성가정의 생활이 있었다. 그 두 분의 초인적인 생활, 즉 예수님과 성모님의 몸가짐과 감정과 소망이 가장 확실하고 완전하게 조화를 이루었던 삶의 모습을 한 폭의 그림으로 모두 그려낼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있을 수 있겠는가? 나는 나자렛 언덕에 올라, 한 여인이 머리에 물동이를 이고 우물로 내려가는데 열댓 살 난 한 소년이 그 옆을 따라가는 장면을 상상해 본다. 이 두 분 사이에는 하느님 대전에 살고 있는 천사들 사이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사랑이 깃들여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그 이상을 볼 수 있는 자격이 없다는 것도 안다. 그 이상을 보게 된다면 너무 놀라고 황홀하여 정신을 잃고 말지도 모르기 때문이다.”(보니에 / Vonier : 하느님의 어머니)

제22장 레지오의 기도문

레지오 마리애의 모든 회합에서는 다음과 같은 순서에 따라 기도를 바쳐야 한다. 단, 개인적으로 바칠 때에는 이 순서를 따르지 않아도 된다. 협조단원은 이 기도문을 매일 바쳐야 한다. 시작 기도와 마침 기도의 처음과 끝에 성호경을 바친다. 기도문을 나누지 않고 모두 바칠 때에는 맨 처음과 끝에만 성호를 긋는다.

1 시작 기도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소서, 성령님, 저희 마음을 성령으로 가득 채우시어 저희 안에 사랑의 불이 타오르게 하소서.

주님의 성령을 보내소서. 저희가 새로워지리이다. 또한 온 누리가 새롭게 되리이다.

기도합시다.
하느님, 성령의 빛으로 저희 마음을 이끄시어 바르게 생각하고 언제나 성령의 위로를 받아 누리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주님, 제 입술을 열어 주소서.
제 입이 주님을 찬미할 것입니다.
하느님, 저를 도와 주소서.
주님, 어서 오시어 저를 도와 주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모후이시며 사랑이 넘친 어머니, 우리의 생명, 기쁨, 희망이시여,

당신 우러러 하와의 그 자손들이 눈물을 흘리며 부르짖나이다.
슬픔의 골짜기에서.

우리들의 보호자 성모님, 불쌍한 저희를 인자로운 눈으로 굽어 보소서.
귀양살이 끝날 때에 당신의 아들 우리 주 예수님 뵙게 하소서.
너그러우시고 자애로우시며, 오! 아름다우신 동정 마리아님.

천주의 성모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시어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기도합시다.
하느님, 외 아드님이 삶과 죽음과 부활로써 저희에게 영원한 구원을 마련해 주셨나이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와 함께 이 신비를 묵상하며 묵주기도를 바치오니 저희가 그 가르침을 따라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이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티 없이 깨끗하신 마리아 성심이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성 요셉,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사도 성 요한,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몽포르의 성 루도비코-마리아,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 레지오 까떼나

회합의 중간에 바치며, 모든 단원은 매일 의무적으로 바친다.

<후렴> 먼동이 트이듯 나타나고, 달과 같이 아름답고, 해와 같이 빛나며, 진을 친 군대처럼 두려운 저 여인은 누구실까?

내 영혼이 + 주님을 찬송하며, 나를 구하신 하느님께 내 마음 기뻐 뛰노나니, 당신 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로다.

이제로부터 과연 만세가 나를 복되다 일컬으리니 능하신 분이 큰일을 내게 하셨음이요, 그 이름은 ‘거룩하신 분’이 시로다.

그 인자하심은 세세 대대로 당신을 두리는 이들에게 미치시리라.

당신 팔의 큰 힘을 떨쳐 보이시어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도다.

권세 있는 자를 자리에서 내치시고, 미천한 이를 끌어올리셨도다.

주리는 이를 은혜로 채워 주시고, 부요한 자를 빈손으로 보내 셨도다.

자비하심을 아니 잊으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도우셨으니

이미 아브라함과 그 후손을 위하여 영원히 우리 조상들에게 언약하신 바로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후렴> 먼동이 트이듯 나타나고, 달과 같이 아름답고, 해와 같이 빛나며, 진을 친 군대처럼 두려운 저 여인은 누구실까?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님.

당신께 매달리는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기도합시다.
저희를 하느님 아버지께 이끄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님, 주님의 어머니 동정 마리아를 저희 어머니가 되게 하시고, 저희의 전구자로 세우셨나이다. 비오니, 성모 마리아의 전구를 들으시어, 저희가 주님께 간구하는 모든 은혜를 받아 누리게 하소서.

아멘.

3 레지오의 기도문(마침 기도)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거룩하신 천주의 성모님, 저희를 지켜 주시고 어려울 때 저희가 드리는 간절한 기도를 물리치지 마소서. 또한 온갖 위험에서 언제나 저희를 지켜 주소서.

영화롭고 복되신 동정녀여.
티 없이 깨끗하신 마리아, 모든 은총의 중재자시여.
<다만 주회 때에는 이를 쁘레시디움의 이름으로 바꾼다.>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성 미카엘과 성 가브리엘,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성모님의 천상 군단, 모든 천사들이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세례자 성 요한,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주님, 마리아의 깃발 아래 모여 봉사하는 저희에게 주님께 대한 온전한 믿음과 마리아께 대한 굳은 신뢰심을 주소서. 이로써 저희는 세상을 정복하렵니다. 사랑으로 불타는 힘찬 믿음을 저희에게 주소서. 이 믿음으로써 주님을 사랑하는 순수한 지향으로 저희의 모든 사명을 완수하고, 이웃 안에서 항상 주님을 뵙고 섬기렵니다. 바위와 같이 튼튼하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저희에게 주소서. 이 튼튼한 믿음을 통하여 삶의 십자가와 노고와 실패 속에서도 평온하고 꿋꿋하게 나아가렵니다. 저희 힘을 북돋우는 용감한 믿음을 주소서. 이 용감한 믿음에 힘입어, 하느님의 영광과 영혼들의 구원을 위해 큰일을 서슴지 않고 떠맡아 완수하렵니다. 저희가 한데 뭉쳐 나아가며,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의 불을 온 누리에 밝히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 밑에 있는 모든 이를 깨우치렵니다. 또한 미지근한 이들을 열정으로 불태우고, 죄로 죽은 영혼들을 다시 살아나게 하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한평생 싸움이 끝난 다음, 저희 레지오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주님의 사랑과 영광의 나라에서 다시 모일 수 있도록, 저희의 발걸음을 평화의 길로 인도하는 믿음을 주소서. 아멘.

세상을 떠난 저희 레지오 단원들과 세상을 떠난 모든 신자들의 영혼이 하느님의 자비로 평화의 안식을 얻게 하소서.

아멘.

<곧 이어 사제의 강복을 받는다. 사제가 불참한 때는 성호경만 바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성모님의 믿음은 모든 사람과 모든 천사들의 믿음보다 뛰어나셨다. 섬모님은 베들레헴의 마구간에서 아드님을 보고 그분께서 이 세상의 창조주이심을 믿으셨다. 아드님께서 헤로데의 박해로부터 몸을 피하시는 것을 직접 목격하면서도 그분께서 왕중의 왕 이시라는 믿음에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으셨다. 그 아드님께서 자신의 몸을 통해서 태어난 것을 알면서도 그분께서 영원한 존재이심을 믿으셨다. 가난하여 일상 용품마저 없이 지내시는 것을 보고도 그 아드님께서 바로 온 우주의 주인이심을 믿으셨다. 아드님께서 짚 더미 위에 누워 계신 모습을 보고도 그분께서 바로 모든 권능을 지니신 분이심을 믿으셨다. 한마디 말씀조차 없으셨음에도 성모님은 그분께서 영원한 지혜 그 자체이심을 믿으셨으며, 아드님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그분께서 바로 낙원의 기쁨이심을 의심치 않으셨다.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에 매달리어 온갖 모욕을 당하며 돌아가실 때, 다른 모든 사람들은 믿음이 흔들렸지만, 성모님은 아드님께서 하느님이셨다는 믿음을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굳건히 지키셨다.”(성 알퐁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 St. Alphonsus Maria de Liguori)

[이 인용문은 레지오 기도문의 일부가 아님.]

제23장 레지오 기도문은 변경하지 못한다

레지오의 기도문은 변경할 수 없다. 기도문 중에서 성인께 대한 호칭 기도 역시 국가나 지방의 성인 또는 어느 특정 성인을 추가하거나 바꿔서는 안 된다. 그러한 교체나 추가가 거론될 만한 사유가 있는 지역이라 하더라도 예외는 없다.

이러한 규칙은 희생을 요구하지만, 이미 가장 큰 희생을 바탕으로 세워진 규칙이다. 레지오의 모든 규칙을 만든 나라가 아일랜드이고, 아일랜드의 주보(主保)인 파트리치오 성인이 국민들로부터 얼마나 뜨거운 사랑을 받고 있는지를 아는 사람이라면, 다른 국가나 지역에서 왜 이 같은 희생을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쉽게 납득하게 될 것이다.

특정 성인께 대한 호칭 기도를 용인하는 것 그 자체는 레지오 단원이 공통적으로 바치는 기도문을 크게 달라지게 만들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안에는 레지오 조직 체계를 흐트러지게 할 싹이 들어 있어, 레지오로서는 그러한 어린 싹마저도 염려하는 것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레지오의 정신은 그 기도문에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어느 나라말로 바치든 가장 정확하고 통일된 공통 기도문을 바치는 것은 레지오의 깃발 아래 모여 봉사하는 모든 단원들의 정신과 규율이 완전히 일치되어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자녀이듯 또한 로마의 자녀이다.”(성 파트리치오 / St. Patrick)
“사랑하는 주님, 제가 간구하는 바를 얻기 위해서 노력하는 은총을 주소서.”(성 토마스 모어 / St. Thomas More)

제24장 레지오의 수호 성인들

1 성 요셉

레지오의 기도문에는 예수 성심과 성모 성심께 대한 호칭 기도 다음에 요셉 성인(St. Joseph)이 나오는데, 이는 요셉 성인이 하늘나라에서 예수님과 성모님 다음가는 자리를 차지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요셉 성인은 성가정 안에서 예수님과 성모님을 위하여 가장으로서의 기본적인 역할 이외에 특별한 임무까지도 맡아 수행하셨다. 성인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요셉 성인은 성가정 안에서 하셨던 일보다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똑같은 임무를 그리스도의 신비체와 이 신비체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을 위하여 지금도 수행하신다. 요셉 성인은 교회의 존재와 활동이 올바로 유지되도록 도와 주신다. 따라서 레지오 역시 이 성인의 돌보심에 의존하고 있다. 이 성인의 보살핌은 우리에게 활기를 주며, 어버이의 사랑을 듬뿍 느끼게 한다. 이러한 요셉 성인의 능력은 성모님 다음가는 영향력을 지니게 되므로, 레지오는 이 성인의 돌보심을 올바로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요셉 성인의 사랑을 우리 안에 가득히 받아들이기 위하여 우리는 이 성인이 우리에게 쏟으시는 헌신적인 사랑에 보답하는 자세로 우리의 마음을 완전히 열어 놓아야 한다. 예수님과 성모님도 늘 요셉 성인에 대해 마음을 쓰셨고, 성인이 두 분을 모시느라 쏟은 온갖 정성스러운 노력에 대하여 성인에게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지니고 계셨다. 그러므로 레지오 단원들도 요셉 성인을 언제나 정성껏 모셔야 한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축일은 3월 19일이다.
노동자 성 요셉 축일은 5월 1일이다.

“역사 안에서의 예수님의 삶과 그리스도 신비체인 교회 안에서 지속되고 있는 요셉 성인의 신비적 삶을 서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여러 교황들이 요셉 성인을 교회의 수호자로 선언한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시대와 방법의 변화 속에서도 요셉 성인의 임무는 항상 변함이 없다.그리스도 교회의 수호자로서 이 성인이 하시는 일은 세상에서 하셨던 일에 못지않다. 나자렛 시대 이후 하느님의 가족은 꾸준히 불어나 땅 끝까지 퍼져 나갔다. 이에 따라 요셉 성인은 새로운 아버지로서의 역할까지 맡게 되었는데, 이는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아버지가 되도록 해 주겠다고 하신 약속을 능가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다루시는 섭리는 변함이 없고, 한번 계획하신 일을 다시 생각하시거나 임의로 바꾸지도 않으신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은 한결같고 질서정연하며 일관성 있고 지속적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양부이신 요셉 성인은 모든 세대를 통하여 예수님 형제들의 양부이시기도 하다. 예수님을 낳으신 성모님의 배필 성 요셉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 신비체의 지체들이 교회의 신비적 탄생을 계속하는 동안 줄곧 성모님과 신비스럽게 일치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이 땅에 하느님의 왕국인 교회를 확장하기 위하여 활동하는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이 갓 태어난 교회인 나자렛 성가정의 가장이었던 요셉 성인의 특별한 보호를 바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쉬넨스 추기경 / Cardinal L. J. Suenens)

2 사도 성 요한

복음 성서에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로 나타나 있는 사도 성 요한(St. John, the Evangelist)은 예수 성심께 대한 신심의 표본이다. 이 성인은 끝까지 주님께 충실하여 예수 성심의 고동이 멎고 창에 찔려 숨을 거두시는 순간까지 곁에서 지켜보았다. 그 후 요한 성인은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께 대한 신심의 모범으로 등장하게 된다. 그는 천사처럼 순수하여 예수님께서 하시던 일들을 대신 맡아 하였고, 성모님이 세상을 떠나실 때까지 아들로서 꾸준히 효성을 드렸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신 세 번째 말씀에는 복되신 어머니께 드린 지극한 효성 이상의 깊은 뜻이 담겨져 있다. 주님은 요한 성인을 통하여 온 인류에게 말씀하셨고, 그 중에서도 믿음으로써 당신께 매달리는 사람들을 향하여 그와 같이 말씀하신 것이다. 주님은 이 말씀을 통하여 성모님을 인류의 어머니로 선포하셨고, 당신 자신은 수많은 형제들의 맏이가 되신 것이다. 요한 성인은 이와 같이 새롭게 태어난 자녀들의 대표자로서 하늘나라의 첫 번째 상속자로 올랐고, 그의 뒤를 따르는 자녀들의 모범이었으므로 레지오가 가장 친근하게 공경하는 성인이다.

요한 성인은 교회와 교회 안의 모든 영혼들을 사랑하였고, 교회가 펴는 봉사 활동에 온 힘을 쏟았다. 그는 사도이자 복음 사가 였으며, 한평생 주님을 위해 희생함으로써 순교자와도 같은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요한 성인은 성모님을 끝까지 모신 성모님의 후원자였다. 그러므로 레지오 마리애를 돌보며 성모님의 모습을 생생하게 본받으려고 노력하는 모든 영적 지도자들의 특별한 수호 성인이기도 하다.

사도 성 요한의 축일은 12월 27일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서 있는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먼저 어머니에게,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하시고 그 제자에게는 ‘이분이 너의 어머니이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때부터 그 제자는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셨다.”(요한 19, 26-27)

3 몽포르의 성 루도비코-마리아

“어떤 특정 성인이나 지역의 수호자를 레지오의 수호 성인으로 받아들이지 않기로 한 결정에 비추어 볼 때 몽포르의 복자 그리니용을 포함시키는 것은 얼핏 논란의 소지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레지오 발전에 이분만큼 큰 역할을 한 성인이 없다. 레지오 마리애 교본은 이분의 정신으로 가득 차 있고, 레지오의 기도문들은 바로 이분이 하신 말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이 분은 사실상 레지오의 스승이므로 레지오가 이 성인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거의 도의적으로 당연한 의무이다.”(몽포르의 성 루도비코-마리아의 이름을 호칭 기도에 넣기로 한 레지오의 결의문)

이 성인은 1947년 7월 20일에 시성 되었으며, 축일은 4월 28일이다.

“성 루도비코-마리아는 수도회의 창립자일 뿐만 아니라 선교사였다. 또한 그는 선교사 이상의 다른 면도 있는데, 교회의 박사와 신학자로서 그때까지 아무도 착상하지 못한 성모학을 우리에게 널리 보급하였고, 우리에게 현세에 일어난 모든 성모 발현을 미리 알려 주었다. 즉, 루르드로부터 파티마에 이르는 모든 성모 발현과 성모님의 원죄 없으신 잉태에 관한 교의 선포로부터 레지오 마리애의 출현에 이르기까지 예언한 분이다. 그는 성모님을 통하여 하느님의 왕국이 이 땅에 오고 있음을 알리는 데 힘 썼으며, 때가 차 하느님의 동정 성모님이 티 없이 깨끗하신 성심으로 인류가 목말라 하는 구원을 세상에 가져다 주신다는 사실을 전해 주었다.”(훼데리고 테데스키니 추기경 / Cardinal Federigo Tedeschini 성 베드로 대성전 주임 사제 : 1948년 12월 8일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행한 몽포르의 성 루도비코-마리아 동상 제막식 강론)
“나는 성난 짐승 같은 무리들이 미칠 듯이 달려와서 그 사나운 이빨로 이 작은 책과 성령께서 이 책을 쓰도록 하신 사람을 갈기 갈기 찢어 버리거나, 아니면 적어도 이 책을 궤짝의 암흑과 침묵 속에 묻어 버려 다시 나타나지 못하도록 하리라는 것을 뚜렷이 내다본다. 그 무리들은 심지어 이 책을 읽고 실천하는 사람들까지 공격하고 박해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그러한 일이 일어나면 일어날수록 오히려 더 좋은 것이다! 이러한 일들을 생각할 때마다 용기가 솟아나고, 더욱더 크나큰 성공을 하리라는 희망을 갖게 된다. 다신 말하면, 앞으로 다가올 가장 위태로운 시대에 마귀와 세속과 부패와 싸울 막강한 군단, 즉 예수님과 성모님의 용감 무쌍한 남녀 병사들로 이루어진 대군단이 나타날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몽포르의 성 루도비코-마리아 / St. Louis-Marie de Montfort 1716년 선종 : 복되신 동정 성모님께 대한 참된 신심)

4 대천사 성 미카엘

“성 미카엘은 천상 궁정에서 으뜸가는 대천사이지만, 성모님을 공경하고 또한 성모님이 공경 받으시도록 하는 일에 가장 열성적인 천사이다. 그는 성모님께 봉사하는 이들을 찾아가 도와주라는 성모님의 분부가 내려지기를 기다리며 항상 대기하고 있다.”(성 아우구스티노 / St. Augustine)

성 미카엘은 신.구약 시대를 통틀어서 항상 선택된 백성들의 수호자로 있다. 그는 언제나 교회를 충실히 수호하였으며, 유다 민족이 등을 돌렸다 해서 그들을 보호하는 임무를 중단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 임무를 더욱 강화하였는데, 유다 민족은 보호를 절실히 필요로 했고, 또한 예수님과 성모님 그리고 요셉 성인이 바로 유다 혈족이시기 때문이었다. 레지오는 미카엘 대천사 밑에서 활동한다. 레지오는 그로부터 영감을 받아 주님께서 영원한 사랑의 계약을 맺은 백성들이 다시 되돌아오도록 하는 일에 애정을 기울여 온 힘을 쏟아야 한다.

‘주님의 만군 사령관'(여호 5, 14)인 성 미카엘 대천사 축일은 9월 29일이다.

“계시에 따르면, 영광의 빛에 싸인 성삼위의 삶 속에 참여하고 있는 천사들은 하느님의 섭리가 정하신 인류 구원사의 중대한 순간순간마다 그들에게 주어진 역할을 맡아 하도록 부름 받고 있다.
‘천사들은 모두 하느님을 섬기는 영적인 존재들로서 결국은 구원의 유산을 받을 사람들을 섬기라고 파견된 일꾼들이 아닙니까!'(히브 1, 14) 하며 히브리인들 에게 보낸 편지의 저자는 묻고 있습니다. 교회는 성서를 근거로 하여 이를 믿고 가르치는데, 착한 천사들이 맡은 일은 하느님 백성을 보호하고 백성들이 구원되도록 관심을 기울이는 것입니다.”(교황 요한 바오로 2세 1986년 8월 6일 일반 알현에서)

5 대천사 성 가브리엘

어떤 전례서 에는 성 미카엘과 성 가브리엘 두 대천사를 천상의 귀공자이며 용맹한 투사로서, 그리고 천상 군단의 지휘관이요 천사들의 우두머리이며,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는 시종이요, 우리 인간을 지켜 주는 수호자이며 안내자로서 칭송하고 있다.

성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 구세주를 잉태하게 되리라는 소식을 전한 대천사이다. 그는 성삼위께서 마리아에게 보내시는 인사를 전달하였고, 삼위 일체의 신비를 처음으로 인간에게 알려 주었다. 성자께서 사람이 되어 이 세상에 내려오신다는 사실과 성모님의 원죄 없는 잉태를 선포하여 묵주기도의 첫 번째 신비를 밝혀 주었다.

미카엘 대천사가 유다 민족을 돌보았다는 사실은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가 있다. 가브리엘 대천사의 경우에는 회교도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두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회교도들은 그들에게 신앙을 전해 준 분이 가브리엘 대천사라고 믿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비로 근거는 없지만, 그에 대한 회교도들의 관심을 엿볼 수 있게 해주며, 가브리엘 대천사 역시 적절한 방법으로 그들의 관심에 보답하려고 힘쓸 것이 분명한 일이다. 그 방법이란, 자신이 수호하는 그리스도교의 계시를 회교도들에게 일깨워 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분 혼자의 힘만으로는 회교도들의 회두를 실현시킬 수 없기 때문에 언제나 우리 인간이 그 역할의 일부를 맡아서 가브리엘 대천사를 도와야 한다.

회교 경전 코란(Koran)에는 예수님과 성모님께서 두드러지게 눈에 뜨일 정도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계시며, 복음서와 거의 같게 설명되어 있으나, 다만 그 두 분께서 맡으신 역할은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성모님께서는 회교도들에게 당신 자신들이 어떤 분 이시라는 것을 밝히실 수 있도록 누군가가 와서 도와 주기를 기다리고 계신다. 레지오는 이와 같은 일을 도울 수 있는 능력을 부여 받았고, 또한 회교도들이 레지오 단원들을 따뜻이 받아들이고 있음이 이미 증명된바 있다. 코란의 가르침에는 우리가 나서서 덧붙여 설명해 주어야 할 내용들이 너무나 많이 들어 있다.

성 미카엘, 성 가브리엘, 성 라파엘 대천사의 합동 축일은 9월 29일이다.

“성서는 가장 높은 품의 천사 한 분이 인간의 눈에 띄는 모습으로 파견되어 마리아께 강생의 신비를 알려 주는 장면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천사가 마리아께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리라고 아뢴 것은 마리아가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어 모든 천사들 위에 군림하는 권한과 힘과 지배권을 가지시기 때문이다. 교황 비오 12세는 회칙 ‘하늘의 모후'(Ad Coeli Reginam)에서 ‘대천사 가브리엘은 마리아의 고귀한 임무를 알리는 최초의 하늘나라 사신이었다.’고 말했다. 성 가브리엘은 하느님을 위해서 중요한 사명을 수행하는 사람들이나 중요한 소식을 전하는 사람들의 수호자로 공경 받고 있다. 그분이 하느님의 말씀을 마리아께 전달하는 순간, 마리아는 온 인류를 대표하였고, 가브리엘 대천사는 모든 천사들을 대표하였다. 세상 끝날 때까지 우리 영혼 안에 영감을 불어넣어 줄 이 두 분의 대화로 하늘과 새로운 땅을 일으켜 세우는 조약이 맺어졌다. 이렇게 볼 때, 하느님의 말씀을 마리아께 전한 그 천사는 얼마나 훌륭한 분인가! 그가 단지 수동적인 전달자의 역할을 맡은 분이라고 과소 평가한다면 잘못된 일이 아닌가! 성 가브리엘은 모든 사정을 훤히 알고 있었으므로 마리아가 하느님의 뜻을 헤아릴 수 있도록 가능한 근거를 여러모로 제시해 드렸으며, 또한 하느님의 대변인으로서 마리아의 질문에 공손한 태도로 충실히 답변했다. 이렇게 하여 성 가브리엘과 성모님의 만남에서 창조 사업이 새롭게 시작되었다. 첫 번째 하와가 완전히 허물어뜨린 것을 새로운 하와가 와서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이다. 천사들을 포함하는 그리스도 신비체의 머리이신 주님은 새로운 아담으로서 우리 인간뿐만 아니라 배반한 천사들 때문에 더럽혀진 모든 천사들의 명예까지도 회복시켜 주셨다.”(미카엘 오캐롤 신부 / Dr. Michael O’Carroll C.S.Sp.)

6 성모님의 천상 군단인 모든 천사들

“레지나 안젤로룸(Regina Angelorum)! 천사들의 모후! 우리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서 언제나 천사들의 군단에 둘러싸여 호위를 받고 계시는 모습을 상상해 보니 너무나 황홀하여 마치 하늘나라를 미리 보는 듯 하구나!”(교황 요한 23세)
“성모님은 하느님 군단의 총사령관이시다. 천사들은 진을 친 군대처럼 두려운 성모님의 지극히 영광스러운 병사들이다.” (부돈 / Boudon : 천사들)

레지오 기도문에는 처음부터 천사들의 도움을 바라는 다음과 같은 호도가 들어 있었다.

대천사 성 미카엘,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우리의 거룩한 수호 천사들이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초창기에는 천사들과 레지오의 밀접한 관계가 지금처럼 뚜렷이 밝혀져 있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레지오가 이 기도문을 바치고 있었기 때문에 천사들의 인도를 받아 왔다고 생각해야 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천사들에게 의지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사실이 점차 분명해졌는데, 이는 천사들이 바로 레지오의 싸움을 지원하는 하늘나라의 동맹군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동맹군은 각기 서로 다른 분야를 맡아 싸우고 있다. 레지오의 모든 행동단원과 협조단원에게는 곁에서 치열한 싸움을 거들어 주는 수호 천사가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 싸움이 레지오 단원들보다 오히려 천사들에게 더 큰 뜻이 있는데, 천사들은 하느님의 영광과 불멸하는 영혼의 가치에 대한 인간들의 무지가 이미 위태로운 상태까지 이르렀음을 뚜렷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천사들의 관심은 높을 수밖에 없으며, 그들은 결코 실수하는 일이 없다. 그런가 하면, 천사들의 싸움에는 다른 천사들도 모두 관심을 가지고 함께 나선다. 예를 들면, 레지오가 활동 대상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도 그들을 지켜 주는 수호 천사가 있어 그들의 수호 천사들 역시 레지오의 수호 천사들이 이기도록 힘써 도와준다.

그뿐 아니라, 천상 군단 모두가 싸움터로 서둘러 달려온다. 태초부터 천사들은 사탄과 그의 졸개들을 맞아 전투를 벌이고 있는데, 이제는 레지오가 그 싸움의 일부를 떠맡아 수행하고 있으므로 천사들은 레지오 단원을 도우려고 달려오는 것이다.

구약과 신약 성서에서 천사들은 매우 인상 깊은 자리에 배치되어 있으며, 천사들에 대하여 언급된 구절도 수없이 많다. 천사들이 마귀와 벌이는 인간의 싸움에 어깨를 나란히 하여 가까이에서 보호하는 임무를 띠고 있는 것으로 설명되어 있다. 그들은 중요한 대목마다 등장하는데, 그때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천사를 보내시어’라는 구절이 반복된다. 모두 9품으로 분류되는 천사들은 다양한 수호 임무를 띠고 있다. 그들은 각 개인이나 장소나 도시 또는 나라를 수호하고 자연을 보호하며, 때로는 동료 천사들을 지켜주기도 한다. 성서에 따르면, 이교도 왕국들도 각기 수호 천사가 있다고 한다.(다니 4, 10-20; 10, 13) 천사의 품급은 천사, 대천사, 지품천사, 치품천사, 역품천사, 능품천사, 좌품천사, 주품천사 및 권품천사이다.

따라서 천사들은 마치 공군이 지상군을 지원하듯 집단적으로나 개별적으로 도와 준다. 결국 레지오가 초기에 사용하던 천사들에 대한 호칭 기도는 이와 같은 천사들의 보편적 보호 역할을 충분히 나타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다음과 같은 결정이 내려졌다.

(가) 호칭 기도를 좀더 나은 형태로 고친다.

(나) ‘레지오'(군단)라는 말을 천사와 연관시킨다. 주님께서도 ‘레지오’라는 말을 직접 사용하시어 이 말을 축복하셨고, 몸소 천사들에게 적용하셨다. 즉, 주님을 잡으러 온 무리로부터 위협을 받고 계실 때, 주님께서는 “내가 아버지께 청하기만 하면 당장에 열두 군단(레지오)도 넘는 천사를 보내 주실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느냐?”(마태 26, 53)라고 말씀하셨다.

(다) 호칭 기도에 성모님의 이름을 넣는다. 성모님은 천사들의 모후이시다. 성모님은 정녕코 천상 군단의 총사령관이시므로 ‘천사들의 모후’라는 뜻 깊은 칭호로 인사 드리는 것은 우리 레지오가 누리는 새로운 은총이 될 것이다.

모든 레지오 조직을 통하여 오랫동안 논의한 끝에 레지오는 1962년 8월 19일 다음과 같은 새로운 호칭 기도를 채택하였다.

“성모님의 천상군단, 모든 천사들이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이 천상 군단의 축일은 10월 2일이다.

‘필란젤리'(Philangeli)라고 부르는 단체가 있다. 이 단체는 천사에 관한 지식과 천사들에 대한 신심을 보급하는 사업을 하는데, 본부는 영국 미들섹스 하로우 윌드 시 (129 Spencer Road, Harrow Weald, Middlesex HA3 7BJ, England)에 소재하고 있다.

“성모님께 ‘천사들의 모후’라는 칭호를 드리는 것을 단지 명예를 드리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성모님의 직분은 모든 피조물에 대하여 예외 없이 절대적인 지배권을 행사하시는 그리스도의 왕직에 참여하는 것이다. 성모님이 왕이신 그리스도와 어떤 방식으로 공동 지배권을 행사하시는지 에 관하여 아직 완전한 신학적 설명이 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성모님의 모후로서의 직분은 행동의 원리이며, 그 행동의 효과는 볼 수 있는 세계와 볼 수 없는 세계에 두루 미치고 있음이 분명하다. 성모님은 착한 영혼들을 다스리고 악한 영혼들을 꼼짝 못 하도록 만드신다. 성모님을 통하여 인류와 천사의 두 공동체가 끊을 수 없는 동맹 관계를 이루어 모든 피조물을 성삼위의 영광이라는 진정한 목표로 인도한다. 성모님이 천상의 모후 되심은 곧 우리의 방패 되심이다. 우리를 보호하시는 성모님이 천사들에게 우리를 도우라고 명령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계시기 때문이다. 모후로서의 성모님의 직분은 아드님과 적극 협력하여 인류를 괴롭히는 사탄의 제국을 허물어뜨리고 멸망시키는 역할인 것이다.”(미카엘 오캐롤 신부 / Dr. Michael O’Carroll, C.S.Sp.)

7 세례자 성 요한

세례자 성 요한(St. John, the Baptist)이 1949년 12월 18일에야 비로소 레지오의 수호 성인으로 정식 인정되었다는 것은 쉽게 해명할 수 없는 이상한 일이다. 그는 요셉 성인을 제외하고는 다른 어느 수호자보다도 레지오의 신심 체계와 가장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분이기 때문이다.

(가) 세례자 성 요한은 모든 레지오 단원들의 모범이다. 그는 선구자로서 주님보다 먼저 와서 주님의 길을 고르게 하였다. 그는 자신의 사명을 다하려는 굳센 힘과 신심의 표본이었고,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으며, 끝내 순교하였다.

(나) 더구나 세례자 성 요한은 그에게 주어진 사명을 다하도록 하기 위해 성모님이 친히 보살피셨던 분이다. 이는 레지오 단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암브로시오 성인(St. Ambrose)은 성모님이 엘리사벳을 찾아가시어 오랫동안 머무르신 목적은 엘리사벳이 나이 들어 얻은 이 어린 대 예언자를 양성하시고, 그에게 사명을 정해 주시기 위한 것이었다고 설파하였다. 레지오는 성모님이 세례자 성 요한을 양성하시는 순간을 단원들이 매일 의무적으로 바치는 까떼나를 통하여 기념하고 있다.

(다) 성모님께서 엘리사벳을 방문하신 이야기는 우리의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처음으로 보여 주신 것이며, 세례자 성 요한이 첫 번째로 그 혜택을 입었다. 그러므로 그는 처음부터 레지오 단원들의 수호 성인이었으며, 레지오의 접촉 활동과 방문 활동을 비롯한 모든 레지오 활동의 특별한 수호자였음이 드러난다. 레지오가 펴는 모든 활동은 성모님의 중재자 역할을 협력해 드리는 데 지나지 않는 것이다.

(라) 세례자 성 요한은 우리 주님께서 당신의 사명을 수행하시는 데 반드시 필요한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주님의 사명을 실현 시키려는 조직체의 소속원은 그 조직 안에서 각자의 역할을 찾아야 한다. 선구자인 세례자 요한은 지금도 여전히 필요하다. 만일 이분이 예수님과 성모님을 우리에게 소개해 주지 않았더라면, 아마 두 분은 등장하시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레지오 단원들은 세례자 성 요한의 이러한 특별한 위치를 깨닫고 신뢰하며, 이분이 자신의 사명을 이행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만일 예수님께서 끊임없이 ‘오실 분’이라면, 세례자 성 요한은 언제나 주님에 ‘앞서 오는 분’이다. 역사 속의 그리스도 강생은 지금도 그리스도 신비체 안에서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다니엘루 / Danielou)

(마) 세례자 성 요한의 호칭이 들어가기에 적당한 자리는 마침 기도에서 수호 천사 다음이 알맞다. 호칭 기도의 마침 기도문은 성모님을 통하여 불기둥처럼 나타나는 성령의 그느르심 밑에 레지오가 전진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이와 같이 레지오가 전진하는 것은 천상의 군단과 이를 지휘하는 미카엘과 가브리엘 두 대천사가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전진하는 대열 앞에는 정찰원과 선구자로서의 사명을 받고 이를 늘 완수하는 세례자 성 요한이 앞장 서고, 그 뒤를 레지오의 두 장군인 베드로와 바오로 성인이 따르고 있다.

(바) 세례자 요한 성인에게는 두 축일이 있는데, 탄생 축일은 6월 24일이고, 순교 축일은 8월 29일이다.

“나는 세례자 성 요한의 신비가 오늘날에도 이 세상에서 여전히 실현되고 있다고 믿는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라면 누구나 세례자 요한의 정신과 덕행을 자신의 영혼 안에 받아들여, 주님 앞에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마음속의 거친 길을 바로잡고 매끄럽게 닦아야 할 것이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세례자 성 요한의 정신과 덕행은 여전히 주님의 오심을 앞질러 예비하는 것이다.”(오리겐 / Origen)

8 성 베드로

“사도들의 으뜸인 베드로 성인(St. Peter)은 사도직 단체의 탁월한 수호자이다. 이분은 초대 교황이었고, 역대 교황으로부터 현 교황에 이르기까지의 빛나는 계보를 대표한다. 우리는 베드로 성인에게 호칭 기도를 바침으로써 믿음의 중심이며 권위와 규율과 일치의 원천인 로마 교황에 대한 레지오의 충성을 표현한다.” (레지오가 성 베드로를 호칭 기도에 넣기로 결정한 결의문)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의 축일은 6월 29일이다.

“잘 들어라.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여 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도 풀려 있을 것이다.”(마태 16, 18-19)

9 성 바오로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구하려면, 바다처럼 크고 넓은 영혼을 가져야 한다. 세상을 회두 시키려면, 세상보다 더 큰 영혼을 지녀야 한다. 하늘로부터 내려친 빛이 갑자기 그를 에워싼 날부터 바오로 성인(St. Paul)은 바로 그런 분이 되었다. 빛이 그의 영혼을 꿰뚫고 들어가자, 그의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이름과 믿음으로 세상을 가득 채우려는 열망이 불타올랐다. 바오로 성인을 ‘이방인의 사도’라고 부르는데, 이 호칭은 그의 업적을 말해 준다. 사형 집행인의 칼날이 그의 굴하지 않는 영혼을 하느님께로 보내는 순간까지 그는 지칠 줄 모르고 활동하였으며, 성인의 글은 그의 사명을 지속시키기 위해 살아 남았고 또한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다.
교회는 기도문에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를 함께 넣고 있는데, 이는 참으로 잘한 일이며, 또한 이 위대한 두 분의 사도가 모두 순교를 통하여 로마를 봉헌하였으므로 합당한 일이다.

교회는 이 두 성인의 축일을 같은 날(6월 29일) 지낸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들입니까? 미친 사람의 말 같겠지만, 사실 나는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는 그들보다 낫습니다. 나는 그들보다 수고를 더 많이 했고 감옥에도 더 많이 갇혔고 매는 수도 없이 맞았고 죽을 뻔한 일도 여러 번 있습니다. 유다 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를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고 몽둥이로 맞은 것이 세 번, 돌에 맞아 죽을 뻔한 것이 한 번, 파선을 당한 것이 세 번이고, 밤낮 하루를 꼬박 바다에서 표류한 일도 있습니다. 자주 여행을 하면서 강물의 위험, 강도의 위험, 동족의 위험, 이방인의 위험, 도시의 위험, 광야의 위험, 바다의 위험, 가짜 교우의 위험 등 온갖 위험을 다 겪었습니다. 그리고 노동과 고역에 시달렸고 수 없는 밤을 뜬눈으로 새웠고 주리고 목말랐으며 여러 번 굶고 추위에 떨며 헐벗은 일도 있었습니다.”(2 고린 11, 23-27)

제25장 레지오의 그림

1 이 교본의 표지에 레지오의 그림이 들어 있다. 더블린의 한 유능한 젊은 화가가 레지오를 위해 그린 이 작품은 축소된 사본에도 뚜렷이 드러나듯이 매우 아름답고 영감이 넘쳐 흐른다.

2 이 그림에는 레지오 신심의 개요가 놀랄 만큼 완벽하게 나타나 있다.

3 이 그림에는 레지오의 기도문이 한눈에 드러나 있다. 시작기도는 성령께 대한 호칭 기도와 본 기도, 그리고 묵주기도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는 빛과 사랑의 불로 성모 마리아를 그득 채우시는 성령을 상징하는 비둘기로 표현되어 있다. 레지오는 이 시작 기도로써 모든 시대 가운데 정점을 이루는 순간, 즉 동정녀 마리아가 사람이 되시어 이 세상에 오시는 하느님을 받아들임으로써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시고 은총의 어머니가 되신 그 순간을 찬미한다. 성모님의 자녀들인 레지오 단원들은 묵주기도를 통하여 자신을 성모님과 결합시키며, “묵주기도를 바치는 군단 하나만 있으면 세상을 정복할 수 있다.” 하신 교황 비오 9세의 말씀을 마음에 새긴다.
또한 이 그림에는 성령 강림이 암시되어 있는데, 교회의 견진성사라고 부를 수 있는 이 성령 강림의 은총이 성모 마리아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 됨을 드러내고 있다. 성령께서는 당신의 교회를 사도직 열정으로 가득 채워 땅의 모습을 새롭게 하시고, 볼 수 있는 징표로서 온 세상에 선포하셨으며, ‘새로 태어난 교회가 구세주의 영신적 은총을 풍부히 받게 된 것은 오직 성모님의 강력한 전구 때문'(비오 12세 그리스도의 신비체)이었다. 성모님의 전구가 없었더라면 성령의 불꽃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타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4 까떼나(Catena)는 그 이름에 걸맞게 이 그림의 사방 둘레에 고리로 그려져 있다. 또한 성모님의 모습은 ‘먼동이 트이듯 나타나고, 달과 같이 아름답고, 해와 같이 빛나며, 진을 친 구대처럼 두려운 분’이라는 까떼나의 후렴을 정확히 표현하고 있다. 성모님의 이마에 빛나는 별은 성모님의 참된 샛별, 즉 구원의 은총을 가장 먼저 받으신 분이시며 구원의 새벽을 알리는 분이심을 드러낸다. ‘마니피캇(Magnificat, 마리아의 노래)’은 그 첫 구절,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며(Magnificat Anima Mea Dominum)’를 성모님의 머리 위에 붉은 라틴어로 써넣어 성모님이 주님을 찬미하는 마음을 항상 간직하고 계심을 나타내고 있다. 이 마니피캇은 성모님의 겸손하심이 거둔 승리를 노래한 것이다. 나자렛의 겸손한 동정녀에게 의지하여 세상을 정복하시려는 하느님의 뜻은 지금도 그때처럼 아무 것도 달라진 것이 없다. 하느님께서는 성모님과 일치하고 있는 신자들을 통하여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고자 지금도 꾸준히 큰일을 하고 계신다.
까떼나의 계와 응은 성모님이 자신을 원죄 없이 잉태되게 하신 하느님께 감사 드리는 기도로서 레지오의 으뜸가는 신심 기도이며, 성모님이 뱀의 머리를 바수시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의 둘레에 자리한 “나는 너를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리라. 네 후손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라. 너는 그 발꿈치를 물려고 하다가 도리어 여자의 후손에게 머리를 밟히리라.”(창세 3, 15) 라는 말씀도 같은 내용이다. 한마디로 이 그림은 성모님과 뱀 사이, 성모님의 자녀들과 뱀의 후예들, 즉 레지오와 악의 세력 사이에 벌어지는 끊임없는 싸움에서 악의 무리가 멸망하여 흩어짐을 나타내고 있다.
까떼나는 모든 은총의 중재자, 하느님의 어머니이시며 인류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의 기도이다. 이 그림의 맨 위 부분에는 모든 은혜를 베푸시는 성령께서 자리하고 계시고, 아래 부분에는 온 세상의 모든 이들, 즉 선한 사람들과 악한 사람들로 에워싸인 지구가 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는 은총이 가득하신 성모님이 사랑으로 불타올라 우리를 위해 모든 은총을 중재하고 베풀어 주는 모습으로 서 계신다. 그러나 성모님은, 사도 성 요한이 그랬던 것처럼, 예수 성심 안에 성모님을 어머니로 모시는 가장 충실한 자녀들에게 우선적으로 풍부한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 그림의 아래쪽 가장자리에는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 19, 26-27)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새겨져 있다. 이와 같이, 갈바리아의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성모님이 모든 이의 어머니가 되심을 명백히 밝히고 계신다.

5 레지오의 마침 기도는 이 그림의 대열 하나하나로 나타나 있다. 레지오의 수없이 많은 단원들이 모후이신 성모님의 지휘 아래 전투 대열을 갖추고, 성모님의 깃발을 들고 전진하고 있다. 그들은 ‘오른손에는 십자가, 왼손에는 묵주를 들고, 마음속에는 예수님과 성모님의 거룩한 이름을 새기며, 그리스도의 겸손과 고행 극기를 행동으로 실천하는'(몽포르의 성 루도비코-마리아)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들이 바치는 기도는 모든 본능과 행위를 초자연적으로 승화시키는 믿음을 얻게 하여, 왕이신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일에 용감히 나서서 해내고야 말겠다는 결심인 것이다. 불기둥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는 이 믿음은 모든 단원들의 마음을 녹여 한 덩어리가 되게 하며, 그들을 승리와 약속의 땅으로 인도한다. 또한 이 불기둥은, 그림의 왼쪽 밑 가장자리에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루가 1, 45)라는 성서의 말씀이 드러내듯이, 온 세상을 믿음으로 구원하신 성모님 자신이다. 성모님은 당신을 복되다고 일컫는 사람들을 바른길로 이끄시어, 우리 주 하느님의 영광의 빛이 그들 위에 비출 때까지 어두움을 헤치고 나가신다.

6 레지오의 기도문은 단원들이 세상에서의 수고를 마친 후 천국에 들기까지의 과정을 보여 주는데, 충실한 단원들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영원한 월계관을 받기 위해 어깨를 나란히 하며 천국에서 다시 모이게 될 것이라는 기도로써 끝을 맺는다. 또한 한평생 싸움이 끝난 다음 영광스러운 부활이 기다리고 있는 선종 단원들과 동료 단원들의 통공 기도를 필요로 하는 연옥에 있는 단원들의 영혼을 위한 기도도 포함되어 있다.

“구약 성서에는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에집트에서 구출하여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는데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출애 13, 21) 인도하셨다는 말씀이 있다. 때로는 구름으로, 때로는 불로 변하는 이 신비로운 기둥이야말로 성모님을 상징하는 것이며, 성모님이 우리를 위하여 수행하시는 여러 가지 임무를 나타내는 것이었다.”(성 알퐁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 St. Alphonsus Maria de Liguori)

(1) “Inimicitias ponam inter te et mulierem et semen tuum et semen illius ; ipsum conteret caput tuum.”
(2) “Mulier, ecce filius tuus : …. Ecce mater tua.”
(3) “Beata quae credidit.”

제26장 뗏세라

레지오의 모든 행동단원과 협조단원에게는 레지오의 기도문과 레지오의 그림이 들어 있는 뗏세라(Tessera)를 지급해야 한다. 뗏세라는 라틴어로서 친한 사람들 사이에서 그들 자신이나 그들의 후손들이 언제든지 서로 알아보게 하기 위해 나누어 지녔던 신표(信標) 또는 비표(秘標)를 일컫는 말이었다. 군사 용어로는 로마 군단 내에서 통용되는 암호가 기재된 네모난 표찰을 가리켰다. 레지오 마리애에서는 이 용어를 레지오의 기도문과 레지오의 그림이 실린 낱장의 인쇄물을 가리키는 데 쓰고 있다. 뗏세라는 다음과 같은 뜻이 담겨져 있다.

(가) 세계의 모든 레지오 조직 내에서 두루 통용된다.

(나) 레지오의 참된 암호인 기도문을 싣고 있다.

(다) 모든 단원들 사이의 일치와 형제애를 드러낸다.

이와 같은 레지오의 범세계적인 공통성은 레지오 조직의 특징을 말해 주는 다른 10여 개의 라틴어 용어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이러한 용어들은 레지오 조직 내에서 상호 교류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그러므로 라틴어 용어들이 레지오에 이질감을 준다는 반대 의견은 받아들일 수 없다. 이 용어들은 이제 레지오의 용어로서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에, 쓸모 있고 특색 있는 이러한 표현 수단을 버린다는 것은 레지오로서는 큰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 된다.

“이 험한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 나그네인 우리 모두는 너무 나약하기 때문에 도중에 쓰러지지 않도록 서로서로 형제들의 팔을 붙들어 주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구원과 은총을 얻기 위하여 모두 하나로 뭉칠 것을 특별히 요구하신다. 기도는 우리 모두의 마음과 목소리를 하나 되게 해준다. 우리가 한 덩어리가 되어 바치는 기도 속에 우리의 힘이 들어 있고, 그 힘은 막강하여 아무도 당해 낼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어서 우리의 기도와 노력과 소망을 한데 뭉치도록 서두르자. 이 모두는 각기 스스로의 힘을 지니고 있긴 하지만, 서로 뭉치어 하나 될 때 누구도 당해 낼 수 없는 더욱 강력한 힘이 될 것이다.”(라미에르 / Ramiere)

제27장 레지오의 벡실리움

레지오의 단기

레지오의 벡실리움(Vexillum Legionis)은 로마 군단의 군기를 본 따서 만든 것이다. 이 군기의 맨 위쪽에 놓여 있는 독수리는 성령의 상징인 비둘기로 바꾸었다. 비둘기 밑에는 Legio Mariae(레지오 마리애)라는 우리 단체의 이름이 적힌 표장이 있다. 이 표장과 깃대 사이에는 성모님의 원죄 없으신 잉태를 나타내는 타원형 패(기적의 패)가 자리 잡고 있으며, 장미와 백합이 그 사이에 장식되어 있다. 깃대는 지구본 위에 세워져 있고, 지구본 아래쪽은 네모진 받침대가 받쳐 주므로 벡실리움을 탁자 위에 세울 수 있게 되어 있다. 단기의 전체 구도는 성령께서 성모 마리아와 그 자녀들을 통하여 활동하심으로써 온 세상을 차지하시는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가) 레지오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제반 양식에는 반드시 벡실리움의 표장이 나타나 있어야 한다.

(나) 레지오의 모든 공식 회합이 열릴 때에는 언제 어디서나 반드시 레지오의 소제대를 차려야 하며, 이때 벡실리움의 위치는 성모상의 앞쪽으로 약 15cm(6인치) 그리고 오른쪽으로 15cm(6인치)이다. 탁자 위에 세워 놓는 벡실리움의 높이는 받침대를 포함하여 약 32cm(12 3/4 인치)이다. 벡실리움 사진은 224쪽과 225쪽 사이에 실려 있다. 금속과 마노석으로 만들어진 벡실리움은 꼰칠리움이나 세나뚜스에서 구입할 수 있다.

(다) 대형 벡실리움은 행렬이나 아치에스 행사 때 사용한다. 대형 벡실리움의 높이는 2m(약 6피트 반)이며, 그 중 지구본 아래 쪽으로 약 60cm(2피트) 정도의 깃대를 세운다. 이 아래쪽 깃대를 제외한 지구본까지의 벡실리움 본체 부분은 탁자용 벡실리움의 12배 정도의 크기로 만들면 된다. 아치에스 행사 때나 들고 다니지 않을 때는 받침대(단기의 일부가 아님)에 세워 놓아야 한다. 대형 벡실리움은 꼰칠리움에서 공급하지 않으나 각 지역에서 손쉽게 만들 수 있다. 이 단기를 좀 더 훌륭하게 만들고자 나무 이외의 재료를 쓸 수 있으며, 이 도안을 바탕으로 하여 얼마든지 예술적 작품을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라) 벡실리움은 저작권 보호가 되어 있으므로, 꼰칠리움의 허가를 받아야만 제작할 수 있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 깊은 뜻이 담겨 있는 레지오 마리애의 단기인가!”(교황 비오 11세 / Pope Pius XI)

레지오의 벡실리움

레지오의 단기

“몽포르의 루도비코-마리아 성인은 성모님을 성령으로부터 떼어내어 생각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하게 인식하였다.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은 이러한 두 분의 일치에 대한 성인의 가르침을 완전한 확신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성령에 대한 교리를 좀더 깊이 이해하고자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로렌틴 / Laurentin)

제28장 레지오의 관리

1 모든 관리 기관에 적용되는 사항

1 레지오의 관리는 해당 평의회가 담당한다. 평의회가 관할 지역 내에서 수행하는 임무는 레지오 마리애의 일치를 확립하고 본래의 이념을 수호하며, 레지오 마리애의 공인 교본에 명시되어 있는 레지오의 정신과 규칙 및 관례를 보존하고 조직을 확장하는 일이다.
레지오의 발전은 해당 평의회가 얼마만큼 노력을 쏟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2 모든 평의회는 정기적인 회합을 가져야 하며, 적어도 한 달에 한 번 월례회의를 열어야 한다.

3 평의회의 기도문, 제대 차림 및 회합 순서는 쁘레시디움의 경우와 동일하다. 다만 평의회는 (가) 회의 시간에 제한을 받지 않고 (나) 상훈 낭독이 없으며 (다) 비밀 주머니 헌금은 임의로 결정한다.

4 평의회의 으뜸가는 의무는 바로 위 상급 평의회에 충성을 바치는 일이다.

5 어떠한 쁘레시디움이나 평의회도 해당 상급 평의회 또는 꼰칠리움 레지오니스의 정식 허가와 관할 교구장의 인가 없이는 설립할 수 없다.

6 관할 교구장 및 꼰칠리움 레지오니스는 기존 쁘레시디움 또는 평의회를 해체할 수 있는 권한을 공동으로 보유한다. 해체된 쁘레시디움이나 평의회는 그 순간부터 레지오 마리애 조직의 일부분이 아니다.

7 각 평의회는 관할 교구장이 임명하는 영적 지도자가 있어야 하며, 그 임기는 임명권자의 재량에 따른다. 영적 지도자는 평의회에서 제기된 도덕이나 신앙에 관련된 모든 문제에 관해서 결정할 권한을 지니며, 또한 임명권자의 재가를 얻어야 할 필요가 있을 때는 모든 의결 사항에 대한 승인을 유보할 수 있다.
영적 지도자는 평의회의 간부이다. 따라서 그는 레지오의 모든 정당한 권위를 옹호해야 한다.

8 각 평의회는 또한 단장, 부단장, 서기, 회계를 두어야 하며, 바로 위 상급 평의회가 그 필요성을 인정한 경우에는 다른 보조 간부들 둘 수 있다. 간부는 3년을 임기로 선출하는데, 동일 직책에 한해 재선출될 수 있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동일 직책을 연이어 6년을 초과하여 맡을 수 없다.
간부가 어떠한 이유로든지 첫 번 3년 임기를 마치지 못하고 도중에 퇴임하는 경우, 그는 퇴임하는 날로써 3년의 임기를 마친 것이 된다. 그가 퇴임한 첫 3년 임기 중의 남아 있는 기간 동안 동일 직책에 다시 선출되는 경우, 그는 두 번째 3년의 임기를 시작하는 것이 된다. 연임한 간부가 그의 두 번째 임기를 마치지 못하고 퇴임하는 경우, 그는 퇴임하는 날로써 두 번째 3년 임기를 마친 것이 된다.
연임한 간부가 반드시 3년이 지난 후라야 동일 평의회의 동일 직책에 선출될 자격을 갖게 된다. 동일 평의회의 다른 직책이나 다른 평의회에서 간부로 선출되는 경우에는 이 3년의 간격을 적용할 필요가 없다.
평의회의 간부는 반드시 쁘레시디움의 행동단원이어야 하며, 상훈을 준수해야 한다.

9 평의회가 승격되더라도(이를테면, 꾸리아에서 꼬미씨움으로 승격되는 경우라도) 기존 간부의 임기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10 평의회의 간부는 해당 평의회의 월례회의에서 평의회 의원들(즉, 직속 쁘레시디움 간부, 직속 평의회 간부 및 해당 평의회 간부들)이 선출한다. 모든 레지오의 행동단원은 소속 평의회의 간부로 선출될 자격이 있다. 해당 평의회의 의원이 아닌 단원이 간부로 선출되면, 그는 직권에 의한 의원이 된다. 선거의 결과는 바로 위 상급 평의회의 승인을 받아야 하며, 일단 선출된 단원은 승인을 받을 때까지 간부로서의 직무를 수행할 수 있다.

11 평의회는 의원들에게 선거의 실시와 후보자 추천에 대해서 반드시 사전에 알려야 하며, 가능하면 그 전 회합에서 알리는 것이 좋다. 그리고 후보자가 반드시 해당 직무를 확실히 알고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12 후보자가 적절하다는 의견을(물론 조심스럽게) 발표하는 것은 허용된다. 또한 평의회의 간부들이 특정 후보자가 적절하다고 의견 일치를 보았을 경우에는 그를 공천한다고 발표할 수 있다. 다만, 그러한 공천이 다른 후보자의 추천을 막거나 선거를 올바로 실시하는 데 나쁜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된다.

13 선거의 방법은 비밀 투표이며 그 진행 절차는 다음과 같다. 선거는 직책 순위대로 각기 별도로 실시한다. 각 후보자의 이름은 공식적으로 동의(動議)가 있어야 하며 재청(再請)이 뒤따라야 한다. 후보자가 한 명인 경우에는 물론 투표를 실시할 필요가 없다. 두 명 이상의 후보가 동의되고 재청이 있을 경우에는 투표를 실시 한다. 평의회 출석 의원 중 투표권을 가진 의원(영적 지도자 포함)에게 투표 용지를 한 장씩 나누어 준다. 평의회 의원에게만 투표권이 있으므로 자격 여부를 확인해야 한다. 각 의원은 마음속으로 정한 후보의 이름을 투표 용지에 기입한 후, 잘 접어서 선거 관리 위원이 걷도록 한다. 투표 용지에 투표한 의원의 이름이 나타나서는 안 된다.
집계 결과 후보자 중 한 사람이 절대 다수 표를 얻은 것으로 밝혀지면 그 후보자가 당선되었음을 선언한다. 절대 다수 표란 다른 후보자들이 얻은 표 수를 모두 합친 것보다 더 많은 표 수를 말한다. 그러나 절대 다수 표를 얻은 후보자가 없으면, 집계 결과를 발표한 후, 같은 후보자들을 놓고 재투표를 실시한다. 재투표 집계 결과 역시 절대 다수 표를 얻은 후보가 없는 경우에는, 표를 가장 적게 얻은 후보자를 제외한 나머지 후보자들을 놓고 다시 한 번 투표를 실시한다. 만일 이 세 번째 투표에서도 당선자를 내지 못한 경우, 최소 득표자를 차례)로 제외시키면서 투표를 거듭 실시하여, 한 후보자가 절대 다수 표를 얻을 때까지 계속한다.
영신적 단체의 간부를 뽑는 선거라고 해서 가볍게 취급해서는 안 된다. 선거는 엄격하고 올바른 방식으로 실시해야 하며 투표지의 비밀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평의회 회의록에는 간부 별 선거 실시 상황을 충실히 기록하여 상급 평의회가 간부 승인 신청서를 검토할 때 참고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선거 실시 기록에는 (후보자가 단일 후보가 아닌 경우) 후보자 별 동의자 및 재청자의 이름과 득표 수를 기재해야 한다.

14 평의회에 보내는 쁘레시디움의 대표는 간부들이며, 바로 위 상급 평의회에 보내는 평의회의 대표 역시 그 평의회의 간부들이다.

15 경험에 따르면, 상급 평의회는 먼 거리에 있는 소속 평의회에 대한 감독 기능을 원활히 수행하기 위하여 통신원을 임명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통신원은 담당 평의회와 주기적으로 접촉하며 매월 접수하는 보고서를 토대로 필요한 때에 상급 평의회에 보고서를 제출한다. 통신원은 상급 평의회 회합에 참석하여 의사 진행에 참여할 수는 있으나, 해당 상급 평의회의 의원이 아니므로 투표권은 없다.

16 단원 또는 단원이 아닌 사람들도 평의회의 허가를 얻어 회합에 참관인 자격으로 참석할 수 있으나 투표권은 없다. 참관인은 회합의 비밀을 지켜야 한다.

17 레지오의 평의회는 꾸리아, 꼬미씨움, 레지아, 세나뚜스 그리고 꼰칠리움 레지오니스가 있다.

18 각종 평의회의 라틴어 명칭은 해당 평의회가 수행하는 기능을 아주 잘 드러내고 있다.
성모님은 레지오의 모후이시다. 성모님은 당신의 레지오의 용사들을 영광스러운 싸움터로 불러 모아 싸움을 지휘 격려하시며 몸소 진두에 서서 승리로 이끄신다. 그러므로 모후께서 당신의 특별한 평의회, 이른바 레지오 마리애의 세계 평의회인 꼰칠리움이 현실적으로 당신을 대표하고 당신의 권한을 대행하게 하여 다른 모든 레지오 관리기관을 감독하도록 마련하신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조치이다.
지역 평의회는 실질적인 대표 기관이며, 평의회가 상급으로 갈수록 대표성이 약해진다. 그 이유는 광범한 지역의 대표로 구성되는 중앙 평의회의 정기 회합에 평의회들이 전원 참석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꾸리아, 꼬미씨움, 레지아 및 세나뚜스라는 명칭은 각 조직체 별 특성과 지위를 나타내며, 각기 관할하는 지역의 크기를 알맞게 표현하고 있다.

19 상급 평의회는 자체의 고유 기능과 더불어 하급 평의회의 기능을 병행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세나뚜스는 꾸리아로서의 기능도 수행해야 한다. 두 평의회의 기능을 병행시키는 것은 매우 바람직하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가) 대개 같은 단원들이 상급 평의회와 지역 평의회 양쪽을 관리하는 일에 관계하고 있다. 따라서 한 번 회합으로 두 가지 목적을 이루게 된다면 그만큼 단원의 수고를 덜 수 있을 것이다.
(나)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상급 평의회 의원들은 흩어져 있는 넓은 지역의 대표자들이므로 상급 평의회가 반드시 정기적으로 열어야 하는 월례회의에 항상 전원 참석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려울 수 있다. 그 결과, 소수의 열심한 단원들이 무거운 책임과 많은 업무를 떠맡아야 하는 부담을 안게 된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많은 업무가 무성의하게 다루어지거나 아예 다루어지지 못하고 마는 경우가 발생하며, 이로써 레지오는 중대한 손상을 입고 만다.
상급 평의회의 기능을 하급 평의회의 기능과 합치게 되면 항상 높은 평의원 출석률을 확보할 수 있다. 또한 하급 평의회의 평의원들은 하급 평의회의 고유한 임무를 수행할 뿐 아니라 상급 평의회의 업무에도 흥미를 갖고 배우게 된다. 이렇게 되면 레지오의 관리, 확장, 행정 업무 등 상급 평의회의 중요한 제반 분야에 그들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방법은 작은 지역 평의회에 불과한 조직체에 그보다 훨씬 큰 지역의 레지오 조직을 관리하도록 맡기는 결과가 될 것이라는 반론을 가져올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견해는 오해일 따름이다. 지역 평의회는 그 지역을 관할하는 상급 평의회의 핵심이며, 모든 평의회의 간부들은 상급 평의회의 월례회의에 참석할 의무가 있고 또한 최선을 다하여 이 의무를 이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어떤 이들은 상급 평의회를 연간 네 번 정도의 회합만으로 별도 운영하자는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아마도 이로써 평의원들의 높은 출석률을 보장할 수 있을지는 모른다. 또한 이 대안이 평의회 관리에 유익하다고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월례회의 간격이 길어지면 평의회는 다만 명목상으로 관리업무를 수행하는 것이 되고 만다. 그렇게 되면 의원들은 얼마 안 가서 책임 의식이 무디어지고 평의회 업무에 대해 흥미를 잃게 된다.
더구나 띄엄띄엄 드물게 회합을 열게 되면 평의회의 월례회의라기 보다는 하나의 행사처럼 되어 버려 지속적인 관리 능력을 지니지 못한다. 사업의 운영과 문제점들에 대하여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이고 마음으로 가까이 느끼는 것이 관리 능력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20 레지오 단원은 누구라도 자신이 속한 꾸리아나 또는 어느 상급 평의회와도 개인적으로 통신을 교환할 수 있다. 평의회는 이러한 통신 사항을 신중하게 다루어야 하며,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지만, 하급 평의회의 입장과 권리를 존중하면서 처리해야 마땅하다. 단원은 자신이 속한 조직체, 곧 쁘레시디움이나 또는 꾸리아를 통하여 상급 평의회와 통신하는 것이 정상적인 계통이므로 이를 벗어나는 것은 신의 없는 행위라는 반론이 나올 수 있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여러 가지 이유로 간부들이 상급 평의회에 보고해야 할 사항을 때때로 움켜쥐고 보고하지 않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다른 통신 수단이 열려 있지 않는 한 해당 상급 평의회는 알아야 할 일을 알지 못하게 된다. 각급 평의회는 관할 지역 내에서 실제 일어나는 일들을 알 권리가 있으며, 이러한 권리 없이는 평의회를 적절히 운영할 수 없다. 따라서 상급 평의회의 이 ‘알 권리’는 반드시 보호되어야 한다.

21 레지오의 모든 기관은 바로 위 상급 기관에 헌금할 의무가 있다. 이에 관하여는 제34장 [쁘레시디움 간부들의 임무]와 제 35장 [자금]을 참조하기 바란다.

22 레지오 평의회의 본질은 그 업무와 문제들에 대하여 솔직하고 자유롭게 토의하는 장소라는 것이다. 평의회는 단순히 감독하고 결정을 내리는 기관이 아니라 간부들을 교육하는 학교이다. 그런데 만일 아무것도 논의하지 않거나 레지오의 원리나 이상 등에 관계되는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면 어떻게 교육이 될 수 있겠는가? 더구나 이러한 논의는 모든 의원들이 함께 참여하는 것이어야 한다. 어떠한 평의회도 불과 몇 명의 배우가 말없이 쳐다 만 보는 관객을 상대로 흥행을 하는 극장과 같은 모습이 되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 평의회는 참석한 평의원 전원이 기여를 할 때에만 그 기능을 온전하게 발휘한다. 그러므로 평의원이 평의회에서 적극적으로 자신의 몫을 다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평의원은 평의회의 발전에 아무런 공헌도 하지 못하는 것이다. 평의회에서 남의 발언을 들으면 얻는 것은 있겠지만, 막상 자신이 평의회에 기여한 것은 아무것도 없게 된다. 뿐만 아니라, 매사에 적극성을 잃으면 기억력마저 무디어진다는 심리학적인 사실에 비추어 볼 때, 평의회에서 남의 말을 듣기만 하는 평의원은 아마도 마음이 텅 빈 상태로 돌아갈는지도 모른다. 평의회에서 입을 다물고 앉아 있는 것이 습관화된 평의원은 사람의 뇌나 몸 안의 활성화되지 못한 세포와 같아서, 인체가 필요로 하는 것을 대주지 못하고 존재 목적을 거부하여 결국 생명마저 위태롭게 하는 세포의 역할밖에는 하지 못할 것이다.
레지오의 기관을 그러한 위험에 떨어지게 한다면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적극적인 참여가 절실히 요구되는 때에 소극적 태도를 보인다면 이는 퇴보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며, 이러한 퇴보의 현상은 즉시 번지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어떤 평의원도 소극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철칙으로 삼아야 한다. 모든 평의원은 단순히 출석해서 남의 발언을 듣는 데 그치지 않고 자기의 의견을 발표하여 조직체가 활성화 되도록 힘껏 공헌해야 한다. 요컨대 모든 평의원은 적어도 일년에 한 번은 발언해야 한다. 이 말은 좀 이상하게 들릴지는 모르나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 내성적인 사람들은 불필요한 생각들의 방해로 발언하려는 마음이 꺾이고 만다. 그러나 이런 주저 하는 마음을 반드시 극복해야 하며, 레지오가 단원들에게 어떠한 경우에나 요구하고 있는 용기가 바로 이때에 그 일부나마 발휘 되어야 할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반론이 있을 수 있다. 즉, 모든 평의원들이 발언하면 회합 시간이 모자라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실제 상황에 부딪쳤을 때 해결하면 된다. 대부분의 경우, 문제는 그 반대편에 있다. 이를테면 몇 안 되는 목소리 큰 평의원들만 발언하고 대다수의 다른 평의원들은 토의에 참여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전체의 침묵이 때때로 소수의 웅변에 의하여 가려지고 만다. 더구나 단장이 발언을 지나치게 독차지함으로써 다른 평의원들의 발언을 억눌러 버리는 일이 너무 잦다. 한 사람이 지나치게 많은 발언을 하여 다른 사람들이 발언할 수 없도록 만드는 현상을 크게 경계해야 한다. 이에 대해서 어떤 단장은 자기가 이야기하지 않으면 죽은 듯한 침묵만 흐르게 될 것이라고 변명한다. 아마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침묵의 순간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다. 이 침묵이야말로 평의원들로 하여금 자신도 이제 무언가 발언을 해서 평의회에 활기를 불어넣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이 침묵의 순간은 다소 소심한 평의원들로 하여금 입을 열어야 할 때이며, 무엇을 이야기한다 해도 결코 다른 사람의 발언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확신시켜 주는 순간이 된다.
단장 자신은 단 한마디라도 불필요한 말은 하지 않겠다는 것을 확고한 신조로 삼아야 한다. 단장은 이러한 관점에서 자신이 어떻게 회의를 진해하고 있는 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23 회의가 잘 진행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도발적인 발언을 삼가야 한다. 무턱대고 질문을 하지 말고 답변할 수 있는 실마리를 주면서 질문해야 한다. 또한 어려운 문제를 제기할 때에는 동시에 그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도 함께 보여야 한다. 부정적인 태도로 일관되어 있는 발언은 파괴적인 침묵보다 별로 나을 것이 없다.

24 어떤 레지오 회합에서나 일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는 충분한 토의를 거쳐 찬성을 얻어내야 하며, 당장 표결에 부쳐 결판을 내는 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일을 성급하게 결정하면 소수의 진 편과 다수의 이긴 편으로 갈라지게 되고 반감이 생겨 의견의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굳어 버리고 만다. 이와는 반대로 인내심을 가지고 검토하고 충분한 의견 교환을 거쳐 일을 결정하면 모든 이가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이러한 정신으로 일이 처리될 때, 진 편은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보람을 느끼며 이긴 편 역시 승리와 함께 잃는 것이 없게 된다.
그러므로 의견의 차이가 드러났을 때, 틀림없이 다수 편에 든다고 생각되는 평의원들은 끝까지 인내심을 보여야 한다. 다수의 의견이 틀릴 수도 있으며, 따라서 표결에 의한 성급한 결정이 중대한 착오를 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가능하면 다음 회합 때 까지 그 결정을 미루고, 또한 미룰 수 있는 한 최대로 미루어서 면밀하게 검토해야 한다. 평의원들로 하여금 기도를 통해서 해답을 구하고 모든 각도에서 검토하도록 지도해야 한다.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고 승리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안건에 대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겸손하게 찾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만 처리한다면 대개의 경우 만장 일치로 결정을 내릴 수 있게 될 것이다.

25 의견 차이가 거의 일어나지 않는 쁘레시디움에서조차 조화를 이루도록 조심해야 한다면, 평의회에서는 얼마나 더 세심한 배려가 있어야 하겠는가.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가) 평의원들은 대개 서로 가깝게 일해 본 경험이 없으므로 함께 일하는 데 익숙하지 못하다.
(나) 의견의 차이는 늘 있는 일이며, 그것을 조정하는 역할이 바로 평의회에 주어진 주된 임무 중의 하나이다. 새로운 사업을 검토하고 단원의 수준을 높이는 일 또는 규율에 관련된 제반 사항이나 개선해야 할 점 등을 다루는 모든 안건은 불가피하게 의견 차이를 일으킬 수 이는 소지가 있으며 또 바람직스럽지 않은 방향으로 나갈 가능성도 있다.
(다) 평의원의 의원 수가 많다 보면, 일은 훌륭하게 잘해 내지만 ‘고집쟁이’로 불린 만한 평의원들이 얼마간 섞여 있게 마련이다. 이런 평의원들은 회합에 매우 좋지 않은 영향을 준다. 그들은 웬만큼 능력이 있으므로 추종자도 거느리고 있다. 그들은 회의 도중에 불쾌한 논쟁의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그리하여 상호 우애의 정신을 실천하고 모든 업무를 질서 있게 처리하여 산하 조직체에 모범을 보여 주어야 할 평의회가 오히려 나쁜 표본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 결과 인체의 심장과도 같은 평의회가 치명적인 독(毒)을 뿜어 내어 전체 레지오의 혈관에 흘려 보내게 되는 것이다.
(라) 그릇된 충성심이 너무 자주 등장한다. 이를테면, 이웃 평의회나 상급 평의회가 권한을 남용한다든지 또는 일 처리가 올바르지 못하다는 식의 공격적인 발언이 그것이다(이런 종류의 공격 거리를 만들어 내어 남의 공감을 얻어내기란 얼마나 쉬운 일인가!)
(마) “많은 사람이 한자리에 모이게 되면, 각 개인 안에 잠재되어 있던 격정이나 고집, 불신감 등이 불타오르듯 강렬해져서 모임의 한 구성 요소처럼 되어 버린다. 신자들만의 종교적 집회에서조차도 사람들은 집단을 이루면 얼마 안 가서 인간 본연의 약점을 드러내고 만다. 그리하여 그들이 보여 주는 정신이나 행위, 발언하고 회의를 진행하는 모습 등은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이 지녀야 할 순박함이나 솔직함과는 큰 차이를 보이게 된다. 이러한 모습이 바로 영성 학자들이 말하는 ‘세속’이며, 우리가 이 세속에 물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이유이다. 이런 세속적인 모습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신분이 높은 사람, 낮은 사람, 민족, 직업, 평신도, 성직자를 가릴 것 없이 모든 인간 집단이나 파벌 안에 드러나 있다.”(뉴만 / Newman : 세속의 모습)
이 글은 참으로 놀랍긴 하지만 매우 깊은 사상가에게서 나온 말이다. 나지안스의 그레고리오 성인(St. Gregory Nazianzen)도 표현은 다르지만 같은 내용의 가르침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이 성인의 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된다. 즉, ‘세속’에는 사랑이 결핍되어 있다. 우리가 지닌 사랑은 약하다. 이렇게 강하지 못한 사랑은 소수의 사람들 안에서는 연고 관계, 친밀성, 우정 등으로 어느 정도 메울 수는 있다. 그러나 사람 수가 많아지고 비판과 의견의 차이가 드러나기 시작하면 우리가 지닌 허약한 사랑은 지극히 불행한 결과를 맞는다. 베르나르도 성인(St. Bernard)도 “하느님과 사랑은 오직 하나이며 동일체이다. 사랑이 깃들지 않은 곳은 육신의 격정과 욕정이 지배한다. 사랑이 불로 타오르지 않는 믿음의 횃불은 우리가 영원한 행복으로 인도되는 순간까지 계속 타오르지 못할 것이다……. 사랑이 없는 참된 덕이란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레지오 단원들이 위에 인용한 성인들의 경고를 읽고 나서, ‘그런 일이 우리에게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고 장담해도 그 효력은 거의 기대하기 어렵다. 회합에 참석한 단원들이 사랑을 드러내지 못하고 초자연적인 믿음의 정신이 약해지면 그러한 일은 항상 일어날 수 있고 또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결코 경계를 늦추어서는 안 된다. 역사를 보면, 로마 군단은 장거리 진군을 할 때 천막을 치고 참호를 파고 용의주도하게 경계태세를 갖추지 않고서는 결코 야영하지 않았다. 단지 하룻밤만을 야영할 때에도, 설사 적의 진지가 멀리 떨어져 있을 때라도, 심지어는 평화 시에도 치밀하게 대비했다. 레지오 마리애도 이처럼 엄격한 규율을 확립하여 ‘세속’ 정신이라는 위험한 적이 레지오의 진지(회합)를 침략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 사랑을 해치는 말씨나 태도를 몰아내고, 기도의 정신과 레지오의 신심으로 가득한 회합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바로 적의 침략을 막는 방법이다.

“은총의 세계에도 자연 본성과 마찬가지로 감정과 애정이 있다. 즉, 은총은 초자연적인 사랑과 열성과 희망과 기쁨과 슬픔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인간 본성적 삶보다는 은총에 의한 삶을 살아가신 성모님께는 언제나 이러한 은총의 ‘느낌들’이 가득 차 있었다. 대부분의 신사들은 은총의 삶 속에 잠겨 있다기 보다는 단지 은총을 받을 수 있는 최소한의 자격을 갖춘 상태에 머물러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신자들과는 달리 동정 성모님은 한평생 늘 은총 속에 계셨다. 아니, 은총 속에 계셨다기 보다는 은총의 삶을 살아가시면서 이 세상에 사셨던 동안 그 삶을 완성하는 가운데 서 계셨다.”(지비외프 / Gibieuf : 십자가 밑에서 고통 받는 성모님)

2 꾸리아와 꼬미씨움

1 어떤 도시나 마을 또는 지역에 두 개 이상의 쁘레시디움이 설립되면 꾸리아(Curia)라고 부르는 관리 기관을 개설해야 한다. 꾸리아의 평의원은 해당 지역의 쁘레시디움 간부 전원(영적 지도자 포함)으로 구성한다.

2 어떤 꾸리아에게 고유한 직능 이외에 하나 또는 몇 개의 꾸리아를 관할하는 권한을 맡길 필요가 있을 때에는, 그러한 상급 꾸리아를 꼬미씨움(Comitium)이라는 독특한 형태의 평의회로 만들어야 한다.
꼬미씨움은 새로운 평의회가 아니다. 꼬미씨움은 관할 지역 내에서는 꾸리아의 기능을 계속 수행하며 소속 쁘레시디움들을 직접 관리한다. 이러한 본래의 기능에 추가하여 하나 또는 그 이상의 다른 꾸리아를 관리하는 것이다.
꼬미씨움에 직속된 각 꾸리아와 쁘레시디움은 꼬미씨움 월례 회의에 대표자를 보낼 자격이 있다.
꾸리아 간부가 꾸리아 회합에 참석하는 것 이외에 꼬미씨움 회합에 매번 참석하는 것이 꾸리아 업무에 지장을 줄 정도로 부담이 되는 경우, 그는 두 번 또는 세 번에 한 번씩만 꼬미씨움 회합에 참석할 수도 있다.
꼬미씨움은 대개 한 교구 이상의 넓은 지역을 관할할 수 있다.

3 영적 지도자는 꾸리아(또는 꼬미씨움)가 소속되어 있는 교구의 교구장이 임명한다.

4 꾸리아는 레지오의 단헌에 따라 소속 쁘레시디움을 관할한다. 꾸리아는 쁘레시디움의 간부(영적 지도자 제외)를 임명하고 그들의 임기를 점검해야 한다.
간부 임명 방법에 관해서는 제14장 [쁘레시디움] 11절을 참조 하기 바란다.

5 꾸리아는 쁘레시디움과 그 단원들이 규율을 철저히 지키도록 감독해야 한다.
꾸리아의 주된 임무는 다음과 같다.

(가) 쁘레시디움 간부들이 그들의 의무를 충실히 지키고 쁘레시디움을 바르게 운영하도록 교육하고 감독하는 일.
(나) 각 쁘레시디움으로부터 적어도 1년에 한 번씩 보고를 받는 일.
(다) 쁘레시디움의 활동 경험을 서로 교환하도록 주선하는 일.
(라)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고 검토하는 일.
(바) 모든 단원이 활동 의무를 완수하도록 독려하고 확인하는 일.
(사) 쁘레시디움 확장과 협조단원 모집에 힘쓰도록 격려하는 일(협조단원을 돌보고 그들이 모임을 주선하는 일 포함).

그러므로 꾸리아가 평의회로서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기 위해서는 꾸리아 전체, 특히 간부들에게 높은 수준의 정신적 용기가 명백히 요구된다.

6 레지오의 운명은 꾸리아의 손에 달려 있으며, 그 미래는 꾸리아의 발전 여하에 달려 있다. 어느 지역이든 그 지역에 꾸리아가 설립되기 전에는 레지오가 불안정한 상태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7 18세 미만의 레지오 단원은 성인 꾸리아에 참석할 수 없다. 그러나 꾸리아의 판단에 따라 소년 꾸리아를 설립하여 성인 꾸리아에 소속시킬 수 있다.

8 꾸리아의 간부, 특히 단장은 소속 단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처신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렇게 함으로써 공개적으로 논의할 수 없는 애로 사항이나 건의 사항 또는 그 밖의 여러 문제들을 의논할 수 있기 때문이다.

9 꾸리아의 간부, 특히 단장은 그 책임이 막중하므로 다양한 직무를 수행하는 데 상당한 시간을 바칠 수 있는 단원이 선출됨이 바람직하다.

10 꾸리아에 소속된 쁘레시디움의 수가 많으면 꾸리아 회합에 참석하는 평의원 수도 많아진다. 이렇게 되면 많은 인원을 수용하는 문제나 관리를 철저히 한다는 측면에서 볼 때는 불편을 겪을 수도 있다. 그러나 레지오는 이러한 불편을 다른 측면에서 충분히 보상받을 수 있다고 확신한다. 레지오는 꾸리아가 단순히 관리 기구라는 임무 이외에 다른 임무를 수행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 꾸리아는 그 소속 쁘레시디움의 심장이며 머리이다. 꾸리아는 일치의 구심점이기 때문에 각 쁘레시디움과 연결하는 유대의 줄(곧 평의원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일치는 더욱 튼튼해지며, 쁘레시디움은 레지오의 정신과 체계를 더욱 확실하게 드러내게 된다. 레지오의 본질과 관련되는 사항들을 충분히 논의하고 교육하는 곳은 꾸리아 회합뿐이다. 꾸리아 회합을 통하여 쁘레시디움은 이 모든 것을 배우고, 배운 것을 모든 행동단원들에게 확산시킬 수 있는 것이다.

11 꾸리아는 정기적으로, 가능하면 일년에 두 번씩, 각 쁘레시디움을 방문하여 쁘레시디움을 격려하고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는지 살펴야 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트집을 잡거나 허물을 들추어내는 식으로 방문이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그렇게 하면 꾸리아가 방문하는 것을 두려워하게 되고 충고를 달갑지 않게 여기게 된다. 이와는 달리 애정과 겸손한 마음가짐으로 쁘레시디움을 방문하여, 가르치기 보다는 배운다는 자세를 보인다면 매우 좋은 성과를 얻게 될 것이다.
쁘레시디움을 방문하려고 할 때는 적어도 1주일 전에 그 쁘레시디움에 알려 주어야 한다.
쁘레시디움 방문을 마치 ‘외부 간섭’ 처럼 여겨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가끔씩 들려 온다. 이러한 태도는 레지오를 존중하지 않는 태도이다. 쁘레시디움은 레지오의 지체(肢體)이며, 충성스러운 지체이어야 한다. 손이 머리더러 ‘나는 너의 도움이 필요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쁘레시디움 하나하나가 바로 그러한 ‘외부 간섭’에 의존하여 세워져 있는 만큼, 이를 거부하는 태도는 고마움을 모르는 태도이다. 그러한 태도는 평의회로부터 유리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은 기꺼이 받아들이는 쁘레시디움의 태도와도 모순이 되며, 보편적 경험에 의하여 쁘레시디움에 유익하다고 판명된 것들을 쁘레시디움 스스로 차단하는 것이므로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모든 조직체는(종교나 사회 또는 군사 조직을 가릴 것 없이)정신과 능률을 유지하기 위하여 ‘중앙 지도 체제 원리’ 를 실질적이며 필수적인 사실로 흔쾌히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중앙 기관이 단위 조직체를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것은 이러한 원칙을 적용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된다. 따라서 유능한 관리 기관은 이러한 의무를 결코 게을리 하지 않는다.
꾸리아의 쁘레시디움 방문은 쁘레시디움의 건전한 발전을 위해서 꼭 필요하다. 그러나 이에 앞서 모든 쁘레시디움이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실은, 그것이 바로 레지오 규칙의 한 부분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꾸리아 역시 쁘레시디움을 방문하는 의무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방문자를 정중하게 맞이해야 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꾸리아가 방문할 때에는 각종 단원 명부, 서기의 회의록, 회계 장부, 활동 계획서 및 그 밖의 쁘레시디움 조직에 관한 사항을 반드시 점검하여 모든 문서와 장부가 올바로 기록 보관되고 있는지 살피고, 아울러 단원들이 규정된 수련 기간을 마치면 제때에 선서를 실시하고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이 점검은 꾸리아가 지명하는 두 사람의 대표가 수행한다. 꾸리아 간부에 국한하지 않고 경험 많은 레지오 단원이면 누구라도 꾸리아 대표로서 방문할 수 있다. 방문을 마친 후에는 쁘레시디움 방문 보고서를 꾸리아에 제출해야 한다. 보고서 양식은 꼰칠리움에서 얻을 수 있다.
쁘레시디움 방문을 통하여 발견된 결함은 처음부터 쁘레시디움이나 꾸리아 회합에서 공개적으로 논의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우선 해당 쁘레시디움의 영적 지도자 및 단장과 의논하고, 그래도 시정되지 않으면 비로소 꾸리아에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12 꾸리아와 평의원들의 관계는 쁘레시디움과 소속 단원들의 관계와 많은 점에서 동일하다. 따라서 단원들이 쁘레시디움 주회합에서 갖추어야 할 출석에 대한 자세나 회합 중의 태도에 대한 설명은 쁘레시디움 간부들이 꾸리아 회합에서 지녀야 할 정신이나 태도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쁘레시디움 간부들이 꾸리아 월례회의에 성실하게 출석하지 않는다면 다른 면에서 아무리 열성을 다한다 해도 충분하지 못하다.

13 꾸리아 회합은 바로 위 상급 평의회의 허가를 얻어 꾸리아 자체에서 결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열어야 한다. 꾸리아 회합은 가능한 한 매월 적어도 한 번은 열어야 한다. 회합을 자주 열어야 하는 사유에 대해서는 제19장 [회합과 단원] 1절을 참조하기 바란다.

14 회의 안건은 서기가 단장과 의논하여 미리 준비한 후, 꾸리아 회합 직전의 쁘레시디움 주회합에 앞서, 영적 지도자와 쁘레시디움 단장에게 배부해야 한다. 쁘레시디움 단장은 이 안건에 대하여 쁘레시디움의 다른 간부들에게 꾸리아 회합 전에 알려야 할 의무가 있다.
회의 안건은 잠정적인 것이어야 하며, 따라서 평의원들이 꾸리아 월례회의에서 자유로이 안건을 추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15 꾸리아는 쁘레시디움이 물질적인 원조 활동에 말려들어 참으로 유익한 온갖 레지오 활동에 상처를 입히지 않도록 세심하게 살펴야 한다. 꾸리아가 방문을 통하여 정기적으로 회계 장부를 점검하면 그러한 잘못을 사전에 막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16 단장은, 물론 다른 간부들도 마찬가지이지만, 아주 흔히 있을 수 있는 잘못, 이를테면 극히 작은 일까지도 반드시 자신의 손을 거쳐야 한다고 생각하는 잘못에 빠져 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러한 태도는 일을 더디게 만드는 결과를 빚는다. 더구나 할 일이 많은 상급 평의회에서는 그런 태도가 전체 조직체를 마비시킬 수도 있다. 병목이 좁을수록 병 속에 들어 있는 것이 더디게 나올 것이므로 사람들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병목을 깨뜨려 버리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다.
그런데 또 하나 더욱 중대한 잘못은, 일을 맡을 만한 적절한 단원이 있는데도 그 단원에게 책임을 맡기지 않는 일이다. 이러한 자세는 자격을 갖춘 그 단원에게 뿐만 아니라 레지오 전체에 손실을 가져온다. 어느 정도의 책임을 맡겨 일을 수행하게 하는 것은 개인의 뛰어난 자질을 발전시키는 데도 필요한 요소이다. 책임은 참으로 모래를 금으로 바꾸어 놓는 힘을 지니고 있다!
서기는 서기의 일에만 업무를 국한시켜서는 안 되며, 마찬가지로 회계도 장부만 다루도록 해서는 안 된다. 모든 간부를 비롯하여 고참 단원과 장래가 촉망되는 단원들에게는 어느 범위 안에서는 앞장 서서 통솔하는 일을 맡겨야 한다. 물론 그러한 일은 상급 간부의 지시에 따라 수행해야 하며 스스로 책임을 지도록 해야 한다. 궁극적인 목표는 영혼들을 구원하는 강력한 수단인 레지오의 확장과 발전을 위하여 단원들로 하여금 책임 의식을 갖고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도록 만드는 일이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모든 사업은 일치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그 모든 사업을 당신 자신 위에 세우셨으며, 그분은 놀라우리 만큼 단순하시고 가능한 모든 일치 위에 계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오직 ‘한 분’ 이시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속성과 행동이 비록 우리 안에서 여러 다양한 모습으로 드러난다 하더라도 그분의 본질은 바로 질서와 조화이다.”(뉴만 / Newman : 일치의 증거와 수단인 질서)

[이 인용문과 다음에 이어지는 세 절의 인용문은 원문에서는 한 구절이다.]

3 레지아

1 레지아(Regia)는 넓은 지역의 레지오를 관장하도록 꼰칠리움으로부터 지정된 평의회이다. 레지아는 그 크기에 있어서 세나뚜스 다음 가는 평의회이다. 레지아가 꼰칠리움에 직속되어야 하는지, 아니면 세나뚜스에 직속되어야 하는지는 꼰칠리움이 결정한다.

2 기존 평의회가 레지아로 승격되면 레지아로서의 새로운 임무 이외에 본래의 기능을 계속 수행해야 한다. (이 장의 1절 19항 참조)
레지아의 평의원은 다음과 같이 구성한다.

(가) 레지오에 직속된 모든 레지오 기관의 간부.
(나) 레지아로 승격된 평의회의 간부(해당되는 경우).

3 레지아의 영적 지도자는 레지아가 관할하는 교구의 교구장들이 승인을 받아야 한다.

4 레지아에 직속되어 있는 평의회의 간부 선거 결과는 레지아의 승인을 받아야 하며, 평의원들은 (거리와 같은) 부득이한 사정이 없는 한 반드시 레지아 회합에 참석할 의무가 있다.

5 경험에 따르면, 레지아가 먼 거리에 소재하는 직속 평의회에 대한 감독 기능을 완수하는 가장 유효 적절한 방법은 통신원을 임명하는 것이다. 통신원은 담당 평의회와 정기적으로 연락을 취하며, 매달 접수하는 회의록을 토대로 필요에 따라 레지아 회합에서 발표할 보고서를 작성한다. 통신원은 레지아 회합에 참석하여 의사 진행에는 참여하나, 레지아의 평의원이 아니므로 투표권은 없다.

6 레지아 회합의 회의록 사본은 레지아가 직속되어 있는 평의회에 제출해야 한다.

7 레지아 월례회의의 평의원 참석률에 영향을 미칠 만한 어떠한 레지아 구성 개편안이라도, 그 제안 당사자인 레지아가 꼰칠리움에 소속되어 있든, 아니면 세나뚜스에 소속되어 있든, 꼰칠리움의 승인 없이는 그 개편안을 시행할 수 없다.

8 레지아는 로마 시대에 로마 황제의 궁정과 집무실을 일컫는 말이었으나, 그 이후에는 왕의 도읍이나 왕궁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하느님의 속성은 다양하고 뚜렷이 구분되지만 결국에는 오직 하나로 귀착된다. 곧 하느님은 거룩함, 정의로움, 진리, 사랑, 능력, 지혜 그 자체이시며, 이러한 그분의 속성은 마치 그것뿐이고 그것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각기 완전한 하나로서 존재한다. 이 말은 무한히 탁월하고 전혀 파악할 수 없는 질서가 천주성 안에 존재함을 암시한다. 그리고 이 질서는 하느님의 다른 속성처럼 경이로운 것이며, 다른 모든 속성의 결과이기도 하다.” (뉴만 / Newman : 일치의 증거와 수단인 질서)

4 세나뚜스

1 한 나라의 레지오 마리애를 관리하도록 꼰칠리움으로부터 그 권한을 위임 받은 국가 평의회를 세나뚜스(Senatus)라고 부른다. 세나뚜스는 꼰칠리움에 직속되어야 한다.
국토의 크기 또는 다른 이유로 인해서 하나의 세나뚜스로서는 불충분한 경우에 둘 또는 그 이상의 세나뚜스 설립을 승인할 수 있다. 이때 모든 세나뚜스는 꼰칠리움에 직속되어야 하며, 꼰칠리움이 배정한 지역에 소재하는 레지오를 관장해야 한다.

2 기존 평의회가 세나뚜스로 승격되면, 세나뚜스로서의 새로운 임무 이외에 본래의 기능을 계속 수행해야 한다. (이 장의 1절 19항 참조)

세나뚜스의 평의원은 같이 구성한다.

(가) 세나뚜스에 직속된 모든 레지오 기관의 간부.
(나) 세나뚜스로 승격된 평의회의 간부(해당되는 경우).

3 세나뚜스의 영적 지도자는 세나뚜스가 관할하는 교구의 교구장들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4 세나뚜스에 직속되어 있는 평의회의 간부 선거 결과는 세나뚜스의 승인을 받아야 하며 평의원들은, 거리상의 문제와 같은 부득이한 사정이 없는 한, 반드시 세나뚜스 회합에 참석해야 할 의무가 있다.

5 경험에 따르면, 세나뚜스가 먼 거리에 있는 직속 평의회에 대한 감독 기능을 완수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통신원을 임명하는 것이다. 통신원은 담당 평의회와 정기적으로 연락을 취하며, 매달 접수하는 회의록을 토대로 필요에 따라 세나뚜스 회합에서 발표할 보고서를 작성한다. 통신원은 세나뚜스 회합에 참석하여 의사 진행에는 참여하나, 세나뚜스의 평의원이 아니므로 투표권은 없다.

6 세나뚜스는 매달 회의록 사본을 꼰칠리움에 제출해야 한다.

7 세나뚜스의 구성 개편에 관련하여, 평의원의 월례회의 참석률에 영향을 미칠 만한 어떠한 새로운 제안도 꼰칠리움의 공시 승인 없이는 시행할 수 없다.

“하느님은 무한한 능력, 지혜, 사랑이시며 또한 무한한 정의이시다. 더욱이 질서는 종속의 개념을 내포하고 있다. 만일 하느님의 속성 중에 질서가 들어 있다면, 그 속성은 상호 관계를 갖고 있음이 확실하다. 각기의 속성은 그 자체로서 완전하지만, 다른 속성의 완전성을 손상시키지 않도록 작용하며, 특별한 경우에는 나머지 다른 속성에 종속하는 것처럼 보여야만 하는 것이다.” (뉴만 / Newman : 일치의 증거와 수단인 질서)

5 꼰칠리움 레지오니스 마리애

1 레지오에는 꼰칠리움 레지오니스 마리애(Concilium Legionis Mariae)라는 이름의 최고 통솔권을 부여 받은 중앙 평의회가 있다. 꼰칠리움만이 – 이 교본의 규정과 교회 권위의 정당한 요구에 순명 하면서 – 레지오 규율의 제정, 개정, 해석, 지역을 불문한 쁘레시디움과 소속 평의회의 설립 및 해산, 레지오 방침의 결정, 분쟁과 제소, 단원 자격 심사 및 활동 또는 활동 수행 방법의 적합성 등에 대하여 결정하는 권한을 가진다.

2 꼰칠리움은 매월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월례회의를 갖는다.

3 꼰칠리움은 직무의 일부를 직속 평의회 또는 개별 쁘레시디움에 위임할 수 있으며, 또한 언제라도 위임한 직무의 범위를 변경할 수 있다.

4 꼰칠리움은 그 자체의 직무와 더불어 하나 또는 여러 개의 직속 평의회 직무를 겸할 수 있다.

5 꼰칠리움은 그 산하에 직속되어 있는 레지오 기관의 간부들로 구성해야 한다. 더블린 대교구의 성인 꾸리아 간부들은 꼰칠리움 회합의 핵심 평의원이 된다. 거리 상의 이유로 대부분의 직속 평의회 평의원들이 꼰칠리움 월례회의에 정기적으로 참석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꼰칠리움은 더블린 꾸리아의 대표자 수를 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

6 꼰칠리움의 영적 지도자는 아일랜드의 교회 당국이 임명한다.

7 직속 평의회의 간부 선거 결과는 꼰칠리움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8 꼰칠리움은 통신원을 임명하여 먼 거리에 있는 직속 평의회에 대한 감독 기능을 수행한다. 통신원은 담당 평의회와 정기적으로 연락을 취하며 접수하는 월례회의 회의록을 토대로 필요에 따라 꼰칠리움 월례회의에 참석하여 의사 진행에는 참여하나, 꼰칠리움의 평의원이 아니므로 투표권은 없다.

9 정식으로 권한을 위임 받은 꼰칠리움의 대표는 레지오의 관할 지역 어느 곳이나 들어갈 수 있고, 그 지역의 레지오 조직체를 방문할 수 있으며, 홍보 성격의 활동을 수행할 수 있고, 아울러 꼰칠리움에 부여되어 있는 일반 직무를 수행할 수 있다.

10 꼰칠리움만이 레지오의 단헌과 규율에 따라, 교본을 개정할 수 있는 권리를 지닌다.

11 개정된 레지오의 규정은 대다수 레지오 기관의 동의 없이는 효력을 발생하지 못한다. 규칙 개정안이 나오면 관련된 평의회를 통하여 레지오 조직체에 통보한 후, 그 개정안에 대하여 의견을 밝힐 수 있도록 충분한 시간을 주어야 한다. 규칙 개정안에 대한 견해는 꼰칠리움 회합에 대표자를 직접 파견하거나 또는 서면을 통하여 표명할 수 있다.

“하느님의 권능은 참으로 무한하지만 당신의 지혜와 정의에 종속되어 있고, 하느님의 정의는 무한하지만 당신의 이루 말할 수 없는 거룩함에 종속되어 있다. 하느님의 속성과 속성 사이에는 상호 깊은 이해가 흐르므로 서로 간섭하지 않는다. 각기의 속성은 그 자체의 세계 안에서는 최고 정점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수없이 많은 무한성이 각기 스스로의 질서 안에서 작용하여 하느님의 무한히 단순한 일치성 안에서 결합한다.” (뉴만 / Newman : 일치의 증거와 수단인 질서)

제29장 레지오 단원의 충성

조직의 기본 개념은 많은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것이다. 따라서 레지오 역시 일반 행동단원으로부터 최고 간부에 이르기까지 전체를 하나로 묶는 결속의 원칙이 있어야 한다. 결속이 약화되면 조직의 생명마저 위협받기 때문이다.
자원(自願) 단체에서는 충성이 결속의 접착제 역할을 한다. 레지오에서 충성이란 쁘레시디움에 대한 단원들의 충성, 꾸리아에 대한 쁘레시디움의 충성을 비롯하여, 꼰칠리움 레지오니스에 이르는 모든 상급 기관에 대한 충성과 교회 권위에 대한 충성을 말한다. 참된 충성은 단원이나 쁘레시디움 또는 평의회로 하여금 조직의 결속을 해치는 독자적인 행동을 경계하게 한다. 의문점이나 애로 사항이 있을 때, 또는 모든 새로운 활동이나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때는 직속 상급 평의회의 지도와 승인을 요청해야 한다.
충성의 열매는 순명이다. 순명은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이나 결정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달갑지 않은 것을 선뜻 받아 들이고 마음으로부터 순명하는 일은 언제나 쉽지 않다. 때때로 순명은 인간 본성을 뛰어넘는 영웅적인 행위를 요구하므로, 일종의 순교와 같다고 할 수 있다.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St. Ignatius of Loyola)는 “아낌없는 노력으로 순명 하기를 결심하는 이들은 큰 공로를 쌓는다. 순명은 희생이 따른다는 의미에서 순교와 비슷하다.”고 말하였다. 레지오는 모든 자녀들이 조직의 정당한 권위에 대하여 영웅적이고도 유순한 순명의 정신을 지니기를 바라고 있다.
레지오는 하나의 군대이다. 그것도 지극히 겸손하신 동정 성모님의 군대이다. 따라서 레지오는 날마다 수행하는 활동을 통해서, 세속 군대가 보여 주는 수많은 영웅적 행위와 희생보다 더욱 값진 것을 보여 주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레지오 단원은 항상 치밀한 성격을 지녀야 한다. 비록 단원들이 이 세상의 군인들처럼 신체에 부상을 입거나 전사하는 경우는 드물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정신적인 면에서는 좀더 영광스러운 자리에 오르도록 힘을 쏟아야 한다. 간부나 상급 기관의 요구가 있을 때, 단원은 자신의 감정, 판단, 독립심, 자부심 또는 의지에 상처를 입게 되더라도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칠 각오로 순명 해야 하는 것이다.
시인 테니슨(Tennyson)은 “순명은 결속을 보장해 주지만, 불순명은 큰 상처를 남길 뿐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고의적인 불순명만이 레지오의 생명선을 끊는 것은 아니다. 간부들이 주회합이나 월례회의 참석 의무를 소홀히 하거나 통신의 의무를 게을리 함으로써 쁘레시디움이나 평의회가 레지오 조직의 흐름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면, 이로써 레지오의 생명선은 끊기고 만다. 또한 회합에 참석하는 간부나 단원이 어떠한 이유로든 분열을 일으킬 수 있는 태도를 보일 때, 레지오는 깊은 상처를 입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께 순종하셨다. 복음 사가들은 예수님께서 마리아와 요셉과 더불어 지내신 나자렛에서의 생활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부모에게 순종하셨으며…… 몸과 지혜가 날로 성숙하셨다.'(루가 2, 51-52 참조) 혹시 이 성서 말씀에 그리스도의 신성과 모순되는 점이 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말씀이 인간의 육신을 취하신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는 죄짓는 일을 제외하고는 우리와 똑같은 인성을 취하실 정도로 자신을 스스로 낮추셨고,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마태 20, 28)고 말씀하셨으며, 마침내 ‘죽기까지 순종하시기 위하여'(필립 2, 8) 오셨다고 말씀하셨다. 바로 이 점이 주님께서 어머니께 순종하고자 하신 이유이다. 예수님께서는 나자렛에서 마리아와 요셉, 곧 하느님께서 당신과 가까이 지내도록 특전을 내리신 두 분께 순종하셨다. 마리아는 아드님의 인성에 대한 성부의 권능에 어느 정도 참여하고 계신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드린 ‘나는 언제나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한다.'(요한 8, 29)는 말씀을 어머니 마리아께도 똑같이 할 수 있으셨던 것이다.”(마르미용 / Marmion : 영혼의 생명이신 그리스도)

제30장 행 사

꾸리아는 소속 레지오 단원들을 정기적으로 한자리에 모아 서로 어울리도록 하여 단원과 단원 사이의 친교를 도모하고 일치의 정신을 기르도록 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이를 위하여 실시하는 레지오의 행사는 다음과 같다.

1 아치에스

레지오 마리애는 성모님께 대한 신심을 중요하게 여기므로, 단원들은 해마다 성모님께 자신을 봉헌해야 한다. 개인 및 단체 봉헌으로 이루어지는 이 봉헌식은 3월 25일을 전후해서 개최하는데, 이를 아치에스(the Acies)라 부른다. 아치에스는 라틴어인데 ‘전투 대형을 갖춘 군대’라는 뜻이다. 따라서 이 말은 레지오 단원들이 단체로 레지오의 모후이신 성모님께 대한 충성을 새로이 다짐하고, 성모님으로부터 앞으로 한 해 동안 악의 세력과 맞서 싸울 힘과 축복을 받기 위해서 모이는 의식을 가리키기에 적당한 말이다. 더 나아가, 이 용어는 쁘레시디움이라는 명칭과도 좋은 대조를 이룬다. 쁘레시디움이라는 명칭은 레지오가 연합 진용을 풀고 작은 부대들로 나뉘어져서 각기 다양한 특정 분야의 임무를 수행하는 모습을 생각하게 하기 때문이다.
아치에스는 레지오에서 가장 크고 중심을 이루는 연례 행사이므로, 모든 단원이 빠짐없이 이 행사에 참석해야 함은 강조되어 마땅하다. 레지오의 근본 이념은 모후이신 성모님과 일치하고, 성모님께 의탁하여 활동하는 것이다. 이 근본 이념 위에 레지오의 모든 것이 세워져 있다. 바로 이러한 성모님과의 일치와 의탁을 엄숙하게 표현하는 것이 아치에스 봉헌식이다. 이 봉헌식을 통하여 단원들은 개인 및 단체로서 성모님께 대한 충성을 새롭게 다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단원이 능히 참석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불참한다면, 그는 레지오 정신이 아주 희박하거나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한 단원은 레지오에서는 필요한 존재로 보지 않는다.
아치에스 진행 절차는 다음과 같다.
아치에스 봉헌식을 거행하기로 정한 날 단원들은, 가능하면 성당에 모여야 한다. 적당한 위치에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상’을 모시고 꽃과 촛불로 꾸민다. 성모상 앞에는 대형 벡실리움 모형을 세워 놓는다. 벡실리움에 관한 설명은 제27장에 실려있다.
의식은 성가로 시작하며, 이어서 시작 기도와 묵주기도를 바친다. 그 다음 사제가 성모님께 대한 봉헌의 중요성에 대해서 강론을 한다. 강론이 끝나면 성모상을 향하여 봉헌 행진을 시작한다. 제일 먼저 영적 지도자들이 한 줄로 나가고, 이어서 단원들이 역시 한 줄로 그 뒤를 따른다. 단원 수가 많을 때는 두 사람씩 짝을 지어 나갈 수도 있다. 벡실리움 앞에 이르면 각 단원(또는 짝을 이룬 두 단원)은 멈추어 선다. 그리고 벡실리움의 깃대를 잡고 개별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며 자신을 성모님께 봉헌한다.

“저의 모후, 저의 어머니시여, 저는 오직 당신의 것이오며, 제가 가진 모든 것이 당신의 것이옵나이다.”

봉헌이 끝나면 벡실리움에서 손을 떼고 가볍게 절을 한 후 자리로 돌아간다. 단원 수가 많을 때는 이런 개별적 봉헌 행위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다. 그러나 의식 자체가 깊은 인상을 심어 주므로, 잃는 것보다는 얻는 것이 더욱 클 것이다. 단원들의 봉헌 행진이 계속되는 동안 오르간 연주가 곁들여진다면 의식에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
벡실리움을 한 개 이상 설치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한 편법으로 봉헌 예절의 진행 시간을 줄일 수 있을지는 모르나 일치의 아름다움은 무너지기 때문이다. 더욱이 서두르는 듯한 인상은 의식의 조화를 깨뜨릴 것이다. 아치에스의 특징은 질서와 엄숙한 분위기를 잃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단원들이 제자리에 돌아와 앉으면, 사제가 단원들을 대표하여 성모님께 대한 봉헌 기도문을 다시 한 번 큰소리로 바친다. 이어서 단원 모두가 일어서서 까떼나를 바친다. 그 다음, 가능하면, 성체 강복 예절을 가진 후 마침 기도와 성가로써 아치에스를 마친다.
물론 아치에스 행사에 미사를 포함시킬 수 있다면 바람직스러운 일이다. 이 경우에는 성체 강복 예절 대신에 미사를 봉헌하며, 나머지 절차는 변동 없이 그대로 진행한다. 미사는 아치에스 행사를 더욱 뜻 깊고 완전하게 할 것이다. 파스카 신비를 기념하는 미사는 ‘주님의 너그러운 협조자요 겸허한 여종'(교의 헌장 61)이신 성모님의 손에 방금 놓아 드린 모든 봉헌과 영적 선물을 받아들여 하나 되게 하며, ‘유일한 중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영원한 성부께 바쳐진다.
위에 인용한 “저는 오직 당신의 것이오며……”라는 봉헌문을 기계적으로 또는 아무 생각 없이 바쳐서는 안 되며, 그 내용을 온전히 이해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곁들여야 한다. 이러한 마음의 준비를 위해서 부록 11 [성모 마리아께서 맡으신 역할에 대한 개요]는 도움을 줄 것이다. 이 개요에는 성모님이 구원 사업 안에서 맡으신 독특한 역할이 설명되어 있으며, 우리 각자가 성모님께 갚아 드려야 할 빚이 어느 정도인가를 밝히고 있다. 아치에스 행사 바로 앞에 열리는 쁘레시디움 주회합에서 영적 독서와 훈화의 주제로 이 개요를 선택할 수도 있으며, 또한 아치에스에서 단체 봉헌문으로 사용해도 좋을 것이다.

“성모님은 지옥의 세력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시며 ‘진을 친 군대처럼 두려운 분’이시다 (아가 6, 10 참조). 왜냐하면, 성모님은 현명한 사령관처럼 적을 혼란에 빠뜨리고,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유익하도록 당신의 힘과 자비와 기도를 활용하는 방법을 잘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성 알퐁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 St. Alphonsus Maria de Liguori)

2 연차 총 친목회

꾸리아는 가능한 한 성모님의 ‘원죄 없으신 잉태 대 축일'(12월 8일)에 가까운 날에 모든 단원들이 자리를 함께 하는 연차 총 친목회를 열어야 한다. 이 행사는 필요에 따라 성당 안에서의 의식으로부터 시작할 수 있다.
이 행사에는 친교의 시간이 마련되어야 한다. 만일 성당 내 의식 때에 레지오의 기도문을 바치지 않았을 경우에는 뗏세라의 기도문을 보통 회합 때처럼 세 부분으로 나누어 바쳐야 한다.
연차 총 친목회의 참가 범위는 레지오 단원으로 한정시키는 것이 좋다. 여흥 순서에 곁들여 레지오와 관련된 이야기나 글을 발표하는 순서가 있어야 한다.
이 자리에서 단원들이 너무 격식에 얽매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특히 많은 단원들이 참석하고 있을 때 더욱 그러하다. 이 행사의 취지는 참석한 단원들이 모두 서로 낯을 읽히고 친숙해지도록 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단원들이 돌아다니며 이 사람 저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순서를 짜야 한다. 진행을 맡은 사람들은 단원들이 끼리끼리 무리를 이루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미 잘 알고 있는 단원들이 자기들끼리 무리를 지어 있게 되면 레지오 가족의 단결과 우애의 정신을 북돋우려는 이 행사의 취지를 살릴 수 없게 된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어떠한 처지에서도 기뻐하였으며, 이 기쁨으로 그의 영신적 기사도 정신은 한층 더 감미로운 매력을 더해 주었다. 참된 그리스도의 기사로서 그는 주님의 신하임을 기뻐하고, 주님께 봉사하며, 주님의 청빈과 수난을 본받는 것을 비할 수 없는 즐거움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는 이처럼 주님을 위하여 봉사하고 주님을 본받고 주님의 고통을 함께 나눔으로써 얻는 기쁨을 온 누리가 두루 알도록, 하느님의 음유 시인이 되어 노래하였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일생은 이러한 기쁨의 노래로 충만하였다. 그는 자신과 하느님을 향하여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을 고요하고도 충만하게 노래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영혼이 안팎으로 언제나 즐거운 분위기에 싸여 있도록 하기 위해 항상 노력하였다. 또한 형제 수도자들과 함께 순수한 기쁨을 나누는 방법을 알고 있었으며, 그 기쁨을 극대화시켜 공동체의 모든 형제들이 함께 하늘나라에 올라가는 듯한 아름다운 분위기를 느끼도록 만들 줄도 알았다. 이러한 천상적 기쁨은 그가 형제 수도자들과 나누었던 대화 속에도 가득히 스며 있다. 고행하기를 요구하는 그의 강론은 결국은 기쁨의 찬미가로 바뀌었으며 그가 모습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모든 사람들은 마치 축제와도 같은 기쁨을 누리는 것이었다.”(휄데르 / Felder :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이상)

3 야외 행사

야외 행사는 레지오의 초창기부터 시작되었다. 이 행사는 의무적인 것은 아니지만 바람직한 것이다. 소풍, 성지 순례 또는 야외 모임의 형태로 실시한다. 꾸리아의 결정에 따라 꾸리아가 주관하는 행사로 할 수도 있고, 또는 쁘레시디움이 단독으로 실시 할 수도 있다. 후자의 경우에는 몇 개의 쁘레시디움이 모여서 합동 행사로 할 수도 있다.

4 쁘레시디움 친목회

레지오는 모든 쁘레시디움이 ‘복되신 동정 마리아 성탄 축일'(9윌 8일)을 전후하여 친목회를 갖도록 강력히 권고한다. 많은 쁘레시디움이 있는 곳에서는 필요에 따라 몇 개의 쁘레시디움이 함께 모여 공동 행사로서 치를 수도 있다.
레지오 단원이 아니라도, 마땅한 신자가 있으면, 단원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그를 초청할 수 있다.
쁘레시디움 친목회에서는 쁘레시디움 주회합에서 하듯이 뗏세라의 전 기도문(묵주기도 포함)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바칠 것을 권고한다. 기도 바치는 데 드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으나, 성모님께 바치는 이 짧은 기도는 행사를 더욱 성공적으로 이끌어 주는 값진 보상을 받게 된다. 레지오의 모후는 ‘우리 즐거움의 원천’이시므로 이 행사를 특별한 즐거움의 자리로 만들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노래 등의 여흥 순서 가운데는 레지오에 관한 간단한 담화 하나 정도는 곁들여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단원들이 레지오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더 배우게 될 것이며, 진행 순서 역시 다채로워질 것이다. 여흥만 계속되면 싫증이 날 수도 있다.

5 토론 대회

레지오 최초의 토론 대회는 1939년 부활 주일에 클레어 꾸리아(아일랜드)가 개최하였다. 이 첫 대회의 성공을 계기로 하여 다른 곳에서도 점차 열리게 되었으며, 토론 대회는 이제 레지오 조직 안에서 자리를 굳히기에 이르렀다.
토론 대회는 꼬미씨움 또는 꾸리아에 한하여 개최할 수 있다. 대회의 규모를 더 넓게 잡으면 이 대회의 근본 취지와 맞지 않을 뿐더러 기대하는 성과를 거두기 어렵다.그러므로 그와 같은 큰 모임을 열 수는 있겠지만 토론 대회라는 이름을 붙이거나 토론 대회에 갈음하는 모임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그러나 다른 지역의 평의원들을 토론 대회의 참관인으로 초청할 수는 있다.
꼰칠리움이 규정한 바에 따르면, 이 토론 대회는 2년에 한 번으로 제한되어 있다. 이 대회는 온전히 하루를 바쳐야 한다. 피정의 집 같은 장소를 빌릴 수 있다면 많은 어려움이 해결될 것이다. 진행 절차는 가능하면 미사로 시작하고, 영적 지도자 또는 다른 사제의 짤막한 강론이 있어야 하며, 성체 강복으로 끝을 맺는다.
하루를 몇 등분하여 여러 차례의 회합으로 나누고, 매 회합마다 하나 또는 그 이상의 주제를 다룬다. 각 주제에 대한 토론은 미리 준비한 사람의 간략한 주제 발표로부터 시작된다. 중요한 것은 참석자 모두가 토론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이가 토론에 적극 참여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따라 이 대회의 성공여부가 결정된다.
다시 강조하지만, 진행을 맡은 간부들은 결코 발언을 독점해서는 안 되며, 토론이 진행되는 동안 끊임없이 개입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한다. 토론 대회도 평의회 회합과 같은 의회 방식으로 진행해야 한다. 즉, 의장은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는 방향으로 토론을 이끌어 나가야 하는 것이다. 어떤 의장은 토론하는 사람의 발언에 대해서 사사건건 논평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이 토론 대회의 취지에 어긋나는 행위이므로 그대로 묵과해서는 안 된다.
레지오의 상급 기관을 대표하는 단원이 특별한 역할, 이를테면 사회나 주제 발표 등을 맡아 토론 대회를 지원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웅변은 때때로 과장된 분위기를 자아내므로, 웅변을 통해서 어떤 효과를 거두려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한 분위기는 레지오다운 것이 아니며, 그러한 방식으로는 아무런 감동도 줄 수 없고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토론 대회는 전 단원을 참가 대상으로 하는 경우와 쁘레시디움 간부들만으로 한정하는 경우가 있다. 모든 단원을 대상으로 하는 경우에는 첫 번째 토론 시간에 한하여 참가자들을 간부와 평단원으로 나눈다. 그런 다음 간부는 직책별로 다시 나누고 평단원은 단일 분과로 놓아 둔다. 이로써 각 분과는 고유한 임무와 필요 사항을 다룰 수 있게 된다. 또 다른 방식으로는, 참가 단원들을 그들이 수행하고 있는 활동의 유형에 맞추어 나누는 방식이다. 그러나 이러한 분과 구분은 다만 임의 결정 사항일 따름이며, 어떠한 경우라도 두 번째 토론 시간부터는 분과 별로 나누어서는 안 된다. 단원들을 한자리에 소집해 놓고는 대부분의 시간을 서로 떨어져 있게 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기 때문이다.
간부의 임무는 직책상 주어진 통상 업무보다 그 폭이 훨씬 넓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이를테면 서기가 자신의 업무 한계를 회의록을 작성하는 일만으로 묶어 둔다면 그는 간부로서 결함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쁘레시디움 간부들은 꾸리아의 평의원이므로 이 대회의 분과 별 토론을 통해서 꾸리아의 실제 회합 및 일반 관리 업무와 관련된 꾸리아의 제반 업무를 더욱 원활하게 하는 방법들을 모색해야 하는 것이다.
토론 대회가 관리상 세칙이나 질의 사항들만을 다루어 통상 꾸리아 월례회의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 좀더 근본적인 문제들을 손대야 한다. 그러나 물론 이 대회를 통해서 새롭게 알게 된 모든 것은 꾸리아가 실천에 옮겨야 한다.
토론의 주제는 레지오의 기본 원칙과 연관된 것이어야 하며, 대체로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가) 레지오의 신심 체계: 여러 측면으로 나타나는 레지오의 신심을 단원들이 상당한 깊이까지 파악하고 있지 못하다면 레지오를 올바로 이해했다고 볼 수 없다. 또한 이 신심이 활동의 동기와 정신을 이루어 적극적 활동과 밀접하게 연결되지 않으면 레지오가 올바로 운영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마치 영혼이 육신에 생명을 불어넣듯이, 레지오의 신심이 레지오가 펼치는 전체 활동에 생명을 불어넣어야 한다.
(나) 레지오의 질적 수준 및 이를 높이는 방안.
(다) 레지오의 운영 방법 : 회의 진행 방법이나 단원들의 활동 보고 방법 및 논평하는 기술 등 주요 사항.
(라) 레지오 활동: 기존 활동 방법에 대한 개선 방안이나 레지오가 모든 사람에게 접촉할 수 있는 새로운 활동 계획 등.

토론 대회의 순서 가운데는 레지오의 신심이나 이상 또는 의무에 관한 영적 지도자나 능력 있는 단원의 특별 강연이 들어 있어야 한다.
매번 토론 시간을 시작하고 끝낼 때마다 기도를 바쳐야 한다. 그 중 세 번은 레지오의 기도문을 바칠 수 있을 것이다.
이 대회를 진행함에 있어서 시간을 정확히 지키는 일이 대단히 중요하다. 이를 소홀히 하면 결국 하루 전체를 망치게 된다.
같은 지역에서 연이어 토론 대회를 개최하는 경우에는 대회마다 다른 주제를 다루어야 한다. 한 대회에서 다룰 수 있는 주제는 한정되어 있으므로, 해가 거듭됨에 따라 새로운 문제들을 발굴해 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 한 곳에만 머물러 있다는 느낌을 주어서는 안 되므로 변화 자체를 위한 변화가 있어야 한다. 셋째로, 대회가 성공을 거두면 다음 대회에도 전과 같은 행사 계획을 그대로 추진하자는 의견이 자연히 나오게 마련이다. 그러나 대회가 성공을 거둔 이유 가운데 하나는 대회에서 다룬 주제가 참신했기 때문이었음이 분명한 일이다. 그런데 그 주제는 이미 다루었으므로 당연히 새로운 주제가 요구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주제의 참신성이 토론 대회를 성공으로 이끄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고 볼 때, 매번 새롭고 독창적인 계획을 마련하는 일은 토론 대회의 필수 요건이다.

“성령을 맞이하기 위하여 어떻게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것인지를 알고자 한다면, 사도들이 함께 모여 있던 예루살렘 누각을 상상해 볼 필요가 있다. 사도들은 주님께서 명하신 대로 계속 기도를 바치면서 하늘로부터 큰 힘이 내려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 큰 힘은 그들 위에 내리시어, 그들 앞에 펼쳐져 있는 성스러운 싸움에 대비하도록 그들을 무장시킨다. 고요와 평화가 깃든 이 거룩한 집에서 존경에 가득 찬 우리의 눈길은 주님의 어머니이시며 성령의 걸작품이시며 살아 계신 하느님의 교회이신 성모님께 쏠린다. 동일한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마치 엄마의 뱃속에서 아기가 태어나듯이, 악과 싸우는 교회가 성모님으로부터 태어날 것이다. 새로운 하와이신 성모님은 이 ‘싸우는 교회’를 대표하시며, 이 교회를 아직도 당신의 태중에 품고 계신다.” (게랑게 / Gueranger : 전례력년)

제31장 레지오 확장과 단원 모집

1 레지오를 확장하는 일은 상급 평의회에만 주어진 의무가 아니며 꾸리아 간부들만의 의무도 아니다. 그것은 꾸리아 평의원 한 사람 한 사람의 의무일 뿐만 아니라 일반 행동단원 모두에게 주어진 의무이다. 따라서 모든 단원은 이러한 사실을 깨닫고 있어야 하며, 때때로 이 의무를 이행하고 있는지 스스로 살펴보도록 해야 한다. 사람들을 직접 만나 권유하거나 또는 서신으로 접촉하는 것은 이 의무를 실천에 옮기는 방법의 하나이지만, 그 밖에도 각자에게 알 맞는 독특한 방법들을 동원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여러 레지오 기관에서 레지오 확장을 위한 추진 본부의 역할을 담당할 수만 있다면, 아마도 레지오는 곧 세상 모든 곳에 퍼지게 될 것이며, 주님의 농장에는 서로 일하겠다고 몰려드는 일꾼들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루가 10, 2 참조) 그러므로, 단원들이 레지오 확장과 단원 모집이라는 중요한 이 두 과제에 대해서 관심을 갖도록 수시로 촉구하여, 단원들로 하여금 각자 이 의무를 마음에 깊이 새겨 두도록 해야 한다.

2 올바르게 운영되는 쁘레시디움은 수없이 많은 선행의 원천이 된다. 따라서 쁘레시디움을 하나 더 설립한다는 것은 좋은 일을 두 배로 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간부들만이 아니라 단원 모두가 이처럼 바람직한 성과를 올리기 위해서 노력을 쏟아야 한다.
쁘레시디움 주회합을 정해진 시간 안에 끝내려고 단원들의 활동 보고나 다른 회합 순서를 늘 단축해야 하는 형편이 되면, 이제 쁘레시디움을 나누어야 할 단계에 이른 것이다. 이 경우의 분단은 ‘하면 좋고 하지 않아도 괜찮은 것’이 아니라 ‘꼭 필요한 것’이다. 이때 분단을 미루면, 쁘레시디움은 포화 상태가 되어 레지오의 생명을 확대시키는 힘을 잃게 될 뿐만 아니라 자체의 존립까지도 어렵게 된다.
어느 특정 지역에 또 하나의 쁘레시디움을 세우자는 제안이 있을 때, 현재의 쁘레시디움들만으로도 모든 일을 충분히 해낼 수 있다는 주장을 종종 듣는다. 이런 주장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점을 강조해 줄 필요가 있다. 즉, 레지오의 으뜸가는 목적은 단원 한 사람 한 사람을 성화시키는 것이며, 이러한 개인 성화를 통하여 전체 지역 사회가 성화되도록 만들려는 것이기 때문에, 단원의 숫자를 늘리는 것 자체가 주요한 목표가 된다는 사실이다. 작은 지역에서는 새로 가입한 단원들에게 활동거리를 마련해 주는 일에 다소 어려움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새 단원을 계속 받아들이고 또한 계속 찾도록 해야 한다. 레지오는 단원수를 제한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현재 레지오 대열에 들어와 있는 단원들보다 더 우수한 일꾼들이 들어오는 것을 막을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이미 드러난 활동거리에 대한 배당을 마쳤다면 주위를 한 번 더 깊이 살펴보라. 기계를 움직이려면 일거리가 있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레지오라는 기계를 작동시키기 위해서는 활동거리를 찾아내야 하며, 그 활동거리는 찾으면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쁘레시디움을 분단할 때는, 기존 쁘레시디움으로부터 간부나 신입 단원을 적정한 비율로 신생 쁘레시디움에 전속시킴으로써 양 지단(支團)이 균형을 유지하도록 해야 한다. 기존 쁘레시디움은 단원 중 가장 훌륭한 재목을 새로 설립되는 쁘레시디움에 보내는 것을 큰 영예로 여겨야 한다. 이것이 가장 건전한 형태의 접붙이기이다. 새 쁘레시디움에 단원을 내주어 단원수가 줄어든 기존 쁘레시디움은 그 빈자리가 곧 채워질 뿐만 아니라 그와 같은 올바른 사도직 정신은 더욱 많은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
쁘레시디움이 설립되어 있지 않은 고장에서는 레지오 경험이 있는 단원을 찾기가 쉽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경우에는 창설 단원들이 무엇보다도 교본을 철저히 공부하고 해설서를 참고하여 쁘레시디움을 운영해야 한다.
새로운 고장에 쁘레시디움을 처음 설립하는 경우에는, 될 수 있는 대로 여러 가지 활동을 다양하게 펴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렇게 함으로써 회합이 더욱 흥미로워지고, 나아가 쁘레시디움을 건전하게 만들어 주며, 더욱이 단원들의 다양한 능력과 소양을 올바로 키울 수 있게 된다.

3 단원 모집과 관련하여 한 가지 유의할 점이 있다. 입단의 자격 요건을 지나치게 엄격하게 만든다면, 그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라는 것이다. 상당한 기간 레지오 단원 생활을 한 사람들의 수준은 일반 신자들보다 자연히 높아진다. 이 점을 새 단원 모집에서 고려해야 한다. 즉, 새로 입단하려는 사람에게 이미 오랜 단원 생활을 통해 도달한 수준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한 일이기 때문이다.
쁘레시디움은 흔히 마땅한 사람이 없기 때문에 단원 모집 실적이 나쁘다는 변명을 늘어놓지만, 모든 상황을 두루 살펴본다면, 이러한 변명은 거의 타당성이 없다. 오히려 대부분의 경우 쁘레시디움 자체에 문제가 있음을 보게 되는데, 그 문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가) 단원을 모집하려는 진지한 노력이 없다. 이는 단원들이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단원의 의무를 게을리 하는 것이다.
(나) 쁘레시디움이 단원 모집에서 지나치게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는 잘못을 저지른다. 즉, 창설 단원이나 일반 기존 단원조차도 대부분 떨어져 나가야 할 만큼 엄격한 잣대를 가지고 입단을 어렵게 만드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이 점에 대해서 책임자들은 부적격자를 가입시키는 위험을 막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몇 안 되는 신자에게만 단원이 되는 혜택을 베풀고 그 밖의 대다수의 신자들을 거절해서는 안 된다. 너무 엄격한 것과 너무 느슨한 것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전자의 경우가 더욱 큰 실수를 저지르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잘못은 일꾼을 부족하게 만들며, 일꾼이 모자라면 사도직 활동은 위축되기 때문이다. 단원 자격을 너무 느슨하게 풀어놓는 것도 옳은 일은 아니지만, 이 경우의 잘못은 바로잡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쁘레시디움은 중용의 길을 걸어야 하겠지만, 어느 정도 모험적인 요소를 전혀 없앨 수는 없다. 단원의 적격성을 확인하는 유일한 방법은 실제로 그 사람과 함께 활동해 보는 것이다. 부적격한 사람은 입단하더라도 활동이 부담스러워 곧 탈락하게 될 것이므로, 이것이 모험에 대한 안전 장치이다.
군대를 편성하는 과정에서 혹시 무능한 사람이 끼게 될지 모른다는 걱정 때문에 포기했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일이 있는가? 군대의 조직은 수많은 보통 사람들을 단련시키고 통솔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레지오도 군대인 이상, 많은 숫자의 단원 확보를 목표로 삼아야 한다. 물론 레지오도 단원의 자격 요건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선량한 보통 신자들이 통과하지 못할 정도가 되어서는 안 된다. 레지오의 영신적이고 치밀한 조직은 단련과 규율이 필요한 신자들을 단련하고 통솔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지, 결코 초인간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보통의 평신도들에게서는 쉽게 찾아 보기 힘든 높은 덕성과 분별력을 지닌 사람들만을 단원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문제는 레지오 단원이 되기에 적합한 신자가 많지 않은 것이 아니라, 단원이 된 후 짊어져야 하는 부담을 기쁜 마음으로 떠맡겠다는 신자가 적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을 고려해야 할 필요가 있다.
(다) 자격이 충분한 신자가 입단하지 않는 이유는 쁘레시디움의 분위기가 너무 딱딱하거나, 너무 가라앉아 있거나, 또는 그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레지오는 단원 자격을 젊은이에게만 한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특별히 젊은이들을 찾아 그들이 마음을 사도록 해야 한다. 레지오가 젊은이들에게 매력을 주지 못한다면, 그 목적 달성에 큰 차질이 생긴 것이다. 왜냐하면, 젊은이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는 어떠한 운동도 그 영향력을 널리 펴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젊은이들은 미래를 짊어질 열쇠가 아닌가. 그러므로 젊은이들의 합당한 취향을 이해하고 허용해 주어야 한다. 젊은이들에게 맞지 않거나 그들의 흥미를 떨어뜨리는 기준을 설정함으로써 밝고 너그럽고 정열적인 젊은이들이 레지오로부터 떨어져 나가게 해서는 안 된다.
(라) 흔히 ‘시간이 없다’는 핑계를 대는데, 아마도 그 말이 사실일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간에 쫓기고 있다. 그러나 신앙 생활 때문에 바쁜 것이 아니며, 정작 신앙과 관련된 일은 맨 마지막 순위에 들어 있다. 따라서 사람들이 그릇된 가치 척도에 따라 살고 있음을 깨닫도록 도와 주는 것은 사실상 그들에게 영원한 선물을 주는 것과 같은 일이다. 사도직 활동은 우리 생활의 최우선 순위이어야 한다. 그리하여 다른 일들은 사도직에 자리를 내주고 그 다음 차례로 물러서게 해야 한다.

“모든 신심 단체가 지녀야 하는 기본 법칙은 영속성을 지니고, 사도직 활동을 온 누리에 확장시키며, 가급적 많은 영혼들을 접촉하는 것이다.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퍼져서 땅을 정복하여라.'(창세 1, 28) 이 생명의 법칙은 신심 단체 회원 각자에게 부과되는 의무이다. 뻬르 샤미나드(Pere Chaminade)는 이 법칙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우리는 복되신 동정녀를 위하여 영혼들을 손에 넣어야 한다. 우리와 함께 사는 사람들로 하여금 성모님을 의지하고 따르는 것이 얼마나 감미로운 것인지를 깨닫게 하여, 많은 사람들이 우리와 더불어 힘찬 행진에 참여하도록 이끌어야 한다.”(마리아회 편찬 : 성모학 소론)

제32장 예상되는 반대 의견

1 여기에는 레지오가 필요 없다

새로운 지역에서 레지오 마리애를 시작해 보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우리 지역에는 레지오가 필요 없다’는 주장을 하며 반대하는 사람들이 나타날 수도 있다. 레지오 마리애는 어떤 특정한 한 가지 사업만을 하는 단체가 아니라 가톨릭의 열성과 정신을 필요로 하는 모든 경우에 쓰일 수 있도록 육성시켜 주는 단체이다. 따라서 어떤 지역에 레지오 마리애가 필요 없다는 말은 그 지역에 가톨릭의 열의와 봉사가 필요 없다는 말과 같게 되므로, 그러한 주장은 스스로 모순을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쁠뤼(Pere Raoul Plus) 신부의 정의대로, “그리스도 신자란 자신의 이웃을 돌보도록 하느님께로부터 위탁 받은 사람들이다.”
이러한 힘찬 사도직은 어느 곳에서나 예외 없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 이유는 첫째, 평신도 사도직을 수행할 능력을 지닌 신자들에게 마땅히 사도직 생활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둘째, 오늘날 종교가 타성에 젖거나 물질 만능주의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사도직 활동을 통하여 일반 대중을 일깨워야 한다. 셋째, 인생의 좌절을 겪고 있거나 죄의 길로 빠지기 쉬운 사람들을 바르게 인도하기 위해서는 참을성 있게 열성적으로 일할 수 있는 사도직 일꾼들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신앙의 선배들은 자신들이 돌보아 주어야 할 사람들의 영성적 자질을 바르게 개발시켜야 할 책임이 있다. 그렇다면, 그들 안에 그리스도 신자로서의 인품을 형성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사도직 정신을 불어넣어 주는 것은 마땅한 일이 아닌가? 이를 위하여 우선 사람들을 사도직에 참여하도록 불러들여야 한다. 그러나 사도직의 부름에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가를 제시해 주지도 않고 막연히 사도직을 수행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보다 나을 것이 없다. 부르는 소리를 듣고 찾아온 사람들 중에 스스로 사도직 활동의 방법을 찾아낼 능력이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사도직 활동을 조직적으로 키워 낼 수 있는 기구가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2 단원이 될 만한 사람이 없다

이러한 반대 의견은 대개 단원의 자격에 대하여 잘못 알고 있는 데서 나온다. 일반적으로 모든 사무실이나 가게 또는 일터에는 레지오 단원이 될 만한 자격을 갖춘 사람들이 많이 있다.
많이 배운 사람이거나 그렇지 못한 사람, 노동 일을 하는 사람, 시간적인 여유가 많이 있는 사람이거나, 혹은 일정한 직업이 없는 사람 등, 어느 누구라도 레지오 단원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은 있다. 레지오는 어느 특정 피부색이나 인종 또는 특별한 신분을 가진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레지오는 이러한 발굴되지 않은 숨은 인재들을 끌어들여, 그들 안에 잠재해 있는 사랑의 능력을 개발하여 교회의 사업에 봉사하도록 만드는 특별한 은총을 받았다. 알프레드 오래힐리 몬시뇰(Mgr. Alfred O’Rahilly)은 한 때 레지오 활동을 연구한 일이 있는데, 그는 자신의 연구 결과에 감동되어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나는 위대한 것을 발견했다. 아니, 오히려 위대한 것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남성과 여성들 안에 영웅적인 정신이 숨어 있으며, 어딘가 확실히 알 수 없는 곳으로부터 힘을 얻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단원의 자격 기준은 역대 교황님들이 생각했던 범위를 넘어서서는 안 된다. 즉, 교황님들은 어떠한 계층의 신자라도 뛰어난 인재로 만들 수 있고, 훈련을 통해서 훌륭한 사도로 양성할 수 있다고 단언했던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제31장 [레지오 확장과 단원 모집] 3절 (나)항과 제40장 7절 ‘선교사의 도구로서의 레지오’에서는 새로 태어나는 교회 공동체는 레지오 단원을 많이 늘려야 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레지오 단원으로 이끌어 들일 만한 사람을 찾기가 어렵다는 말은 그 고장의 영적 수준이 낮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런 곳이야말로 활동이 필요치 않은 곳이 아니라, 오히려 레지오의 지단 하나를 세워서 좋은 누룩의 구실을 하도록 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누룩은 우리 주님께서 영적 수준을 높이는 데 쓰시는 처방약이라는 사실을 바르게 새겨 두기 바란다.(마태 13, 33 참조) 또한, 쁘레시디움은 네 다섯 명 정도의 적은 단원으로도 설립될 수 있음을 기억해 두기 바란다. 그리하여 먼저 활동에 착수한 몇 안 되는 단원들이 더 많은 단원이 필요하다고 느끼게 될 때, 이들은 합당한 미래의 단원들을 찾아 나서서 레지오를 알리고 그들을 이끌어 들이게 될 것이다.

3 레지오 단원의 방문을 꺼려 할 것이다

실제로 이러한 경우가 발생한다면, 단원들과 지역 사회에 도움이 되는 많은 가능성을 지닌 레지오의 이상을 포기할 것이 아니라, 방문 이외의 다른 활동거리를 선택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어느 고장에서도 레지오의 방문 활동이 심각한 방해나 극심한 어려움을 겪은 일이 없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혀 두고자 한다. 레지오 사도직의 참된 정신으로 방문 활동을 해보면, 신앙에 무관심 하거나 무지한 사람일수록 방문 활동을 하는 레지오 단원들에게 더욱 냉담한 태도를 보이게 됨을 알 수 있다. 이는 결국 레지오 단원들이 찾아오는 것을 가장 꺼리는 곳이야말로 단원들이 더욱더 힘을 쏟아야 하는 곳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첫 방문 때에 어려움을 겪었다 해서 방문 활동을 중단해서는 안 된다. 얼어붙은 장벽에 용감하게 맞섰던 단원들은 한결같이 그 장벽을 녹일 수 있었고, 레지오를 배척하는 보다 근본적인 원인까지도 제거할 수 있었다. 각 가정이야말로 영신적인 전략의 거점이라는 것을 중시해야 한다. 가정을 정복해야 사회를 정복할 수 있다. 그런데 가정을 정복하려면 그 가정을 찾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4 젊은이들은 낮 동안 열심히 일하므로 휴식 시간이 필요하다

이 말은 그럴듯하게 들리겠지만, 실제로 이 말이 지켜졌다면 세상은 이미 종교적 황무지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교회 사업은 한가한 사람들이나 하는 것이 아니다. 더욱이 혈기 왕성한 젊은이들은 그들에게 주어지는 자유 시작을 순수하게 휴식을 위해 쓰기 보다는 대개 무절제한 오락으로 소모하지 않겠는가? 낮에는 고되게 일하고 저녁이 되어 쾌락을 즐기는 생활이 서로 교차 반복되다 보면 누구라도 물질주의에 빠지기 쉽다. 이런 생활이 여러 해 계속되면 젊은이들은 이상이 없는 텅 빈 가슴만 남게 되고, 훌쩍 지나가 버릴 젊음을 위해 자신을 소모하며, 그 동안 소중하다고 배워 온 모든 가치들도 젊음과 함께 사라져 버릴 것이다. 어쩌면 이보다 훨씬 불행한 종말을 맞을지도 모른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St. John Chrysostom)은 “이웃의 구원을 위해 아무 것도 한 일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자신의 영혼을 구할 수 있겠느냐?”고 묻고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자신의 자녀들에게 레지오 단원으로서 그 자유 시간의 첫 열매를 주님께 바치도록 권유하는 것은 참으로 현명한 일이다. 첫 열매는 그들의 일생에 감동을 주고, 마음과 얼굴까지도 맑고 싱싱하게 지켜 줄 것이다. 그런 다음에도 휴식의 시간은 얼마든지 있으며, 두 가지 일을 함께 하였으므로 기쁨도 두 배가 될 것이다.

5 레지오는 같은 이념과 사업 계획을 가진 여러 단체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단체들마다 나름대로 이념이 있고, 종이와 연필만 있다면 금방이라도 그럴듯한 사업 계획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따라서 레지오가 영혼을 구하기 위한 숭고한 싸움과 사업을 계획하여 제시하는 여러 단체 중 하나라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레지오야말로 사도직을 좀더 확실하게 실천하는 몇 안 되는 단체들 중의 하나이다. 막연한 이념만을 내걸고 소속 원들로 하여금 각자 처한 주변 환경에서 좋은 일을 하라고 부르짖는다면, 활동에 임하는 소속 원들의 태도도 결국 막연해질 수밖에 없다. 이와는 달리 레지오는 뚜렷한 영성과 정해진 기도, 주간 활동 의무와 이에 따른 보고의 의무화 등으로 명확한 틀을 제공하기 때문에, 막연한 이념에서 발생할 수 있는 불필요한 수고를 덜어 주어 확실한 성공을 거두도록 이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모든 레지오 마리애의 조직과 활동의 체계는 성모 마리아와의 일치라는 살아 있는 원리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6 레지오가 펴는 사업들은 이미 다른 단체들이 하고 있으므로 서로 충돌할지도 모른다

이러한 말은 대개 주민의 태반이 신앙 생활을 하고 있지 않거나 가톨릭 신자가 아니거나, 또는 영신적인 발전이 거의 없는 고장에서 들려 오는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이는 마치 헤로데(Herod)로 하여금 왕좌를 차지하게 하면서도 주님과 어머니는 초라한 마구간으로 쫓겨난 채 사시도록 해야 한다는 말과 같으니, 우리가 이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인가!
레지오에 참여하는 것을 가로막는 이러한 말들은 실질적인 활동도 없이 이름만 내걸고 있는 단체를 두둔하는 셈이다. 그러한 단체들은 존재하기는 하나, 결국 한 번도 적을 제대로 무찔러 보지 못한 군대와 같다.
그뿐만 아니라, 활동이란 제대로 하지 않으면 안 한 것만 못한 것이 된다.수백 명 혹은 수천 명을 필요로 하는 사도직 활동에 단지 몇 십 명의 사람만이 참여한다면 활동이 제대로 될 수가 없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러한 경우를 흔히 보게 된다. 또한 그처럼 적은 인원 수가 말해 주듯이, 어느 단체이든지 튼튼한 조직을 갖추지 못하면 그 단체의 사도직 정신과 활동 방법도 자연히 불충분해지고 만다.
레지오에게 작은 활동거리라도 맡겨서 시험해 보라. 그러면 그 성과를 보고 확신을 갖게 될 것이다. 몇 명 안 되는 단원이, 마치 보리빵 다섯 덩어리가 수천 개로 불어났던 것처럼(마태 14, 26-21 참조), 필요한 것을 모두 채우고도 넘쳐 나게 만들 것이다.
레지오는 특정한 활동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다. 전혀 새로운 활동을 구상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가 그 동안 해 왔던 활동 중에서 짜임새 없이 이루어졌던 활동들을 새롭게 계획하고 다듬어서 짜임새 있는 활동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는 마치 전에 손으로 하던 일을 전력을 이용하여 효과를 높이는 것과 같다.

7 단체들이 이미 너무 많다. 그러므로 레지오를 새로 설립하는 것보다는 기존의 단체를 활성화하여 레지오가 계획하는 활동을 맡기는 것이 옳은 일이다

이는 지나치게 보수적인 주장이다. 우리 주변의 대부분의 것들이 사실상 ‘너무 많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새로운 것이 나왔을 때, 그것이 단지 새롭다는 이유만으로 배척당하지는 않으며, 때로는 새로운 것이 커다란 발전을 가져오기도 한다. 그러므로 단체들이 너무 많다고 할 것이 아니라 레지오에게 스스로의 능력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 만약 레지오가 ‘그저 그런 또 하나의 단체’가 아니라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면, 그런 단체를 문 앞에서 돌려보낸다는 것은 얼마나 큰 손실인가!
또한 위의 주장은 현재 그 고장에서는 문제의 활동들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상황에서, 다른 고장에서 능력을 인정받은 새로운 단체를 거부하는 것은 지혜로운 판단도 아니요, 통상적인 관례에도 어긋난다. 만일 어떤 지역에 비행기를 도입하는 문제에 대해 ‘이 곳은 이미 자동차가 많이 있기 때문에 비행기는 필요 없다. 그 대신, 자동차를 하늘에 날 수 있도록 개발하는 것이 좋겠다’고 한다면 이 얼마나 괴상한 논리인가!

8 여기는 작은 고장이므로 레지오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이런 반대는 대개 지역이 크지는 않으나 그리 달갑지 않은 소문이 난 곳에서 들려 온다.
간혹 어떤 마을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좋은 풍습을 가지고는 있으나, 여러 면에서 침체되어 있는 경우를 본다. 이런 곳은 풍습이나 도덕성이 약화되어 주민 상호간의 관심마저 점차 사라지게 되므로, 젊은이들은 생활의 재미를 잃고 그 고장을 떠나, 도덕적 지주도 없이 사람들만 북적대는 도시로 가 버린다.
이러한 문제는 사람들의 마음에 종교적인 바탕이 마련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데, 이 경우 사람들은 단순히 기본적으로 주어진 의무만 할 뿐, 더 이상은 나서지 않으려는 사고 방식으로 변한다. 종교적 이상이 사라지면 신앙의 사막만이 남을 뿐이다. 그리고 이렇게 신앙의 사막으로 변하는 곳이 비단 젊은이들이 떠난 시골 마을들뿐만은 아니다. 이제 이 사막에 다시 꽃을 피우려면 반대 과정을 밟아야 한다. 즉, 조그마한 사도직 모임을 만들어 그 정신을 주민들 안에 널리 펴고 새로운 행동 목표를 채우는 것이다. 이로써 그 고장에 적합한 활동이 시작되고, 생활은 밝아지며, 빠져 나가려는 사람들의 발길은 멈추게 될 것이다.

9 레지오 활동 가운데 어떤 것들은 영신적인 것이므로 그 성질상 사제의 직분에 속한다. 다만 성직자가 손댈 수 없을 때에만 평신도에게 배당해야 한다. 사실 나는 일년에 몇 차례씩 신자들을 방문하는데, 그것으로 만족스런 결과를 얻고 있다

이러한 반대 의견에 대해서는 제10장 [레지오 사도직]에서 전반적으로 대답을 하고 있으나, 여기서도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그러나 미리 지적하여 둘 점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되는 일은 아예 시작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세상에 아무리 거룩한 도시라 해도 자세히 살펴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죄악과 타락이라는 병을 앓고 있으며, 현대의 물질 문명이 가져온 심각한 문제로 들끓고 있다. 그러므로 방문의 성과가 아무리 좋다 하더라도 일년에 서너 번의 방문만으로 안심해도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 만일 본당 공동체의 모든 이들이 신앙 생활을 제대로 하고 있다고 할 때, 많은 신자들이 매일 미사에 참례할 것이고, 그보다 더 많은 신자들이 일주일에 한번 또는 적어도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미사 참례를 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일주일에 네다섯 시간 정도의 고해성사에 참여하는 극히 제한된 신자의 숫자와 미사에 참례하는 전체 신자의 숫자를 비교해 보자. 과연 충분한 사목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겠는가? 이처럼 심한 불균형은 어떻게 해서 일어나는가?
사제가 자신에게 맡겨진 각각의 영혼에 대해 사목적 의무를 다하려면 과연 어느 정도의 친밀감이나 개별적인 접촉이 필요할까? 성 가를로 보로메오(St. Charles Borromeo) 주교는 하나의 영혼은 자신이 맡고 있는 교구 전체에 비교될 만큼 중요하다고 이야기하곤 했었다. 잠깐 계산해 보아도, 사제가 한 영혼에게 쓰는 시간은 일년에 반시간도 채 안 된다. 이 반 시간만으로 충분히 돌볼 수 있는가? 막달레나 소피 바라 성녀(St. Madeleine Sophie Barat)는 어려움에 처한 어떤 한 영혼을 돌보기 위해 그 영혼을 수없이 만났을 뿐만 아니라 200여 통이나 되는 많은 편지를 보낸 일도 있었다고 한다. 지난 수십 년간 레지오는 수없이 많은 활동을 수행해 왔으며, 지금 이 순간에도 레지오의 활동은 계속되고 있다. 만일 일에 지친 사제가 그 반 시간조차도 영혼에게 할애하지 못할 때, 레지오가 열성에 찬 대리자를 보내 사제를 돕는다면, 사제는 하나이지만 대리자는 많아지며, 대리자들은 사제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에 순명하고, 사제의 도움으로 뚜렷한 분별력을 지니게 되어, 개인이나 가족을 접촉하는 일에 사제만큼 능숙해지게 된다. 또한 대리자들은 영혼을 고상하게 만드는 능력까지 허락 받게 되며, 사제가 일상적인 수준을 넘어선 열성으로 영혼들에게 봉사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마련해 준다. 따라서 이러한 도움을 마다하는 사제가 있다면 자신의 직무나 그 사제 자신에게 옳은 일을 하는 것이라 볼 수 있겠는가?

“레지오 마리애는 사제에게 두 가지 은총을 가져다 준다. 이 두 은총은 서로 똑같은 가치를 지니고 있는데, 첫 번째 은총은 레지오는 성령의 권능을 드러내는 표지가 찍힌 승리의 무기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어찌 이 신성한 무기를 소홀히 할 수 있겠는지 자문해 본다. 둘째는, 레지오 마리애가 우리의 내적 생활을 온통 새롭게 해줄 능력이 있는 생명수의 원천이라는 점이다. 이렇게 맑고 깊은 생명의 샘을 주시니, 이 물을 마시는 것이 나의 의무가 아닌가!”(뀌이노 신부 / Fr. Canon Guynot)

10 단원들이 무분별한 행동을 하지 않을까 걱정된다

이는 실상을 잘못 파악했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이 말은 마치 벼를 베다가 혹시 잘못해서 벼 이삭 몇 알을 상하게 할까 두려워 벼 베기를 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과 같다. 위험에 처한 영혼들을 지금 당장 거두어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가난하고 힘없고 눈멀고 절름거리는 영혼들, 이들의 숫자는 너무도 많아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고 자칫 포기할 위험마저 있다. 그러나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되며, 주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동네로 가서 한길과 골목을 다니며'(루가 14, 21-23) 영혼들을 찾아 나서야 한다. 이렇게 방대한 추수를 위해서는 사실상 평신도들을 동원하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는 일이다. 이 과정에서 혹시 무분별한 행동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열정과 활기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곳이라면 어디서든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일 따름이다. 무분별한 행위를 막으려면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수치스럽지만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엄격한 규율 밑에서 일을 하게 하는 방법이다. 병든 영혼들에 대해 주님께서 품으셨던 애절한 마음을 함께 나눌 줄 아는 사람이라면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앉아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고통 중에 있는 영혼들을 거두어들이는 일에 자신의 몸을 던져 모든 힘을 쏟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레지오의 역사를 살펴보건대, 중대한 시행착오가 발생한 일도 없었고 일부 무분별한 행위가 빈번히 발생한 것도 아니다. 따라서 앞으로도 그와 같은 심각한 착오는 발생하지 않으리라고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적어도 레지오 마리애에는 엄격한 규율이 서 있기 때문이다.

11 시작하는 데는 언제나 어려움이 따른다

이 점은 레지오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어떠한 일이든지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때마다 어느 정도 굳은 각오가 필요한 것을 보면, 시작의 어려움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처음에는 엄두가 나지 않겠지만, 이는 마치 숲과 같아서, 멀리서 볼 때 견고해서 뚫고 들어갈 수 없을 것처럼 보이지만 일단 가까이 다가가면 들어가기가 어렵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다음과 같은 말을 마음에 새겨 두자. 즉, “표적은 겨누고만 있으면 결코 맞출 수가 없으며, 모험 없이는 성공도 없다. 늘 안전하기만 을 바란다면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는 일이다. 우리가 어떤 일을 바르게 할 수 있다는 것은 그 동안 겪은 숱한 실패의 대가로 얻게 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뉴만 추기경 / Cardinal Newman)
하느님의 은총을 펴는 사업을 의논할 때, 세속적으로 지나치게 계산만 하다가 결국 은총의 존재를 소홀히 다루는 잘못을 범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반대 의견이나 예상되는 어려움만을 말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이 가져다 주는 여러 가지 도움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한다. 레지오는 기도와 영혼들에 대한 봉사 활동을 바탕으로 세워졌으며, 전적으로 성모님께 속해 있는 단체이다. 그러므로 레지오에 대해서 의논할 때에는 인간의 잣대를 가지고 말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잣대를 가지고 이야기해야 한다.

“성모님은 독특하시고 어느 누구와도 닮지 않은 동정녀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모님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는 인간의 잣대로 말하지 말고 하느님의 잣대로 이야기하십시오.”(보쉬에 / Bossuet)

제33장 레지오 단원의 의무

1 쁘레시디움 주회합에 규칙적으로 정각에 출석해야 한다 (제11장 레지오의 기본 요소 참조)

(가) 이 의무는 몸이 편안할 때보다는 고단할 때, 날씨가 좋을 때보다는 나쁠 때, 그리고 흔히 어딘가 가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 지키기가 어렵다. 그러나 어려움이 없는 시련이 어디 있으며,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지 않고서 어떻게 참된 공로를 쌓을 수 있겠는가?
(나) 활동 보고를 하기 위해서 주회합에 참석하는 것보다는 활동을 하는 것이 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주회합에 참석하는 것이야말로 으뜸가는 의무이다. 주회합을 뿌리라고 한다면 활동은 꽃이다. 뿌리 없이 꽃이 필 수 없듯이 주회합 없는 활동은 있을 수 없다.
(다) 먼 길을 왕복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출석의 의무를 충실하게 지키는 단원은 그가 영신적인 안목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 인간적인 상식으로 볼 때는 쁘레시디움의 주 회합에 참석하기 위해 왕복 시간을 허비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그 시간을 더욱 가치 있는 다른 일에 사용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낭비된 시간이 아니다. 주회합에 오고 가는 데 사용한 시간은 단원이 수행한 전체 활동의 일부분이며, 그것도 매우 가치 있는 일부분이 된다. 성모님이 엘리사벳을 만나려고 먼 길을 다녀오신 것을 시간 낭비였다고 할 수 있겠는가?

“성녀 소화 데레사는 자신이 지니고 있던 여러 덕성 외에도 굽힐 줄 모르는 용기의 덕도 지니고 있었다. 성녀는 ‘불평하기 보다는 힘닿는 데까지 끝까지 전력을 다하는 것’을 삶의 원칙으로 삼았었다. 현기증과 심한 두통으로 고통 받으면서도 성녀는 아침 기도에 빠진 적이 거의 없었다. ‘저는 아직 걸을 수 있으니 마땅히 맡은 일을 해야 합니다.’ 이러한 불굴의 용기의 덕으로 성녀는 영웅적인 일을 해냈던 것이다.”(리지외의 성녀 소화 데레사 / St. Therese of Lisieux)

2 주간 활동의 의무를 완수해야 한다

(가) 주간 활동은 ‘실질적’인 것이어야 한다. 즉, 레지오 단원은 한 주간에 두 시간을 실제로 활동에 바쳐야 한다. 물론 두 시간이라는 숫자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 사실 많은 레지오 단원들이 이 최소한도의 활동 시간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활동에 바치고 있고, 여러 날 또는 매일 활동하는 단원들도 많이 있다. 그런데 이 주간 활동은 단원들이 개인의 기분에 따라 선택하거나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쁘레시디움으로부터 배당 받은 활동을 수행해야 하는 것이다. 기도나 그 밖의 신심 행위를 아무리 많이 했다 하더라도 그것으로는 활동의 의무를 채우지 못하며, 활동의 일부로도 인정하지 않는다.
(나) 활동은 형태를 달리한 기도이다. 그러므로 기도의 규칙이 활동에도 적용된다. 초자연적인 기도의 영성이 밑받침되지 않은 활동은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배당 받은 활동이 너무 쉬우면 곧 지루해질 것이고, 흥미를 끌 만한 일은 대개 어려워서 좌절하기 쉬울 뿐만 아니라 성공하지 못할 것 같은 생각에, 단원들은 용기를 잃을 수도 있다. 그 어느 쪽이든 인간적인 사고 방식으로 볼 때는 차라리 포기하고 손대지 않는 것이 편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레지오 단원은, 이렇게 활동의 의지를 흐려 놓는 인간적인 판단이라는 안개를 뚫고 초자연적인 활동의 참모습을 볼 수 있는 훈련을 쌓아야 한다. 그러므로 맡겨진 활동이 십자가처럼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그 가치는 더욱더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다) 레지오 단원은 군인이다. 따라서 세속의 군인들 못지않게 레지오 단원이 지켜야 할 의무도 엄격하다. 숭고하고 자기 희생적이며 기사도 정신을 갖춘 강인함이 군인의 특성이듯이, 레지오 단원은 참된 성모님의 군인으로서 이러한 특성들을 최고의 수준으로 갖추어야 하며, 자신이 하는 활동을 통해 이러한 특성들이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
군인은 때때로 목숨을 바쳐야 하는 경우도 있으며, 지루한 보초 근무나 내무반 청소를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의무의 내용이 아니라 의무 그 자체라는 것이다. 어느 경우이든 의무는 한결같은 충성심으로 지켜야 하며, 성공이나 실패가 의무에 대한 단원의 자세에 영향을 끼쳐서는 안 된다. 레지오 단원은 주어진 의무를 해내려는 정신이 확고부동해야 하며, 지키기 어려운 의무이든 쉬운 의무이든 모든 일에 철저한 태도로 임해야 한다.
(라) 레지오 활동은 성모님과 가장 가깝게 일치해서 수행해야 한다. 그뿐 아니라, 활동 대상자들에게 성모님과 성모님의 참된 사랑을 알려 주어, 그들 또한 어떠한 형태로든 성모님께 봉사하도록 인도하는 것을 본질적인 활동의 목표로 삼아야 하는 것이다. 성모님을 알고 성모님께 신심을 바치는 일이야말로 영혼의 건강과 성장에 꼭 필요한 요소이다. “성모님은 하느님 신비의 협력자이며 그 수호자이시기 때문이다. 성모님은 예수님 다음으로 숭고한 신앙의 기틀이시므로, 온 세대의 믿음이 성모님께 그 기초를 두고 있다. …. 존귀하신 성모님께 대한 신심이 한 영혼 안에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되면, 그때 비로소 그 영혼을 위해서 일하던 사람은 자신의 노력에 상응하는 덕성과 성화의 열매가 그 영혼 안에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성 비오 10세)

“여러분은 지금 우리 주님께서 갈바리아에서 하셨던 것처럼 승리의 싸움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주님께서 날카롭게 날을 세워 놓은 무기를 두려워해서는 안 되며 주님께서 받으신 상처를 나누어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도 말라. 설사 승리가 우리 세대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해서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되는가? 끈기 있게 수고하는 전통을 이어가고, 나머지 일은 주님께 맡겨라. 성부께서 당신의 권능으로 정하신 시간과 순간을 알아내는 것은 우리의 일이 아니다. 여러분보다 앞서간 고귀한 영혼들이 지녔던 불굴의 용기로 무장하여, 기사로서의 임무를 완수하도록 하자.”(가반 더피 : 동터오는 날의 대가 / T. Gavan Duffy : The Price of Dawning Day)

3 회합에서 구두로 활동 보고를 해야 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의무이며, 단원들이 흥미를 가지고 자신의 활동을 지속시켜 나가는 데 도움을 주는 주요 실천 사항 중의 하나이다. 보고는 이처럼 활동에 대한 흥미를 지속시켜 주는 목적이 있지만, 동시에 회합에 정보를 제공하는 목적도 있다. 레지오 단원의 능력을 알아보려면, 보고를 준비하기 위해서 쏟는 정성과 보고하는 태도를 살펴보면 된다. 활동 보고는 그 하나하나가 주회합이라는 건물의 벽돌이다. 따라서 보고가 제대로 이루어지는 회합만이 레지오의 온전한 주회합이다. 보고가 부족하거나 잘못되어 있으면 레지오 조직의 생명의 원천인 주회합이 큰 타격을 입는다.
보고는 단원들을 훈련시키는 중요한 방법 중의 하나인데, 보고를 통해서 다른 단원들의 활동 방법을 배울 수 있고 또한 자신의 보고에 대해 경험 있는 단원들의 의견을 듣고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고 내용이 불충분하면 보고를 하는 사람에게나 듣는 사람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보고의 방법 등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제18장 [쁘레시디움 회합의 순서] 9절을 참조하기 바란다.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해 도와 주고 마음을 쓰며 기도하라’고 하신 바오로 성인의 권고를 기억하라.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며….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자신을 모든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바치셨기'(1디모 2, 6) 때문이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St. John Chrysostom)도 인류 구원 사업에 있어서 그리스도인들이 짊어져야 할 의무와 대상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그리스도 신자들이여, 여러분들은 자신뿐만 아니라 온 세상에 대해서도 답변해야 할 것이다.”(그라트리 / Gratry : 원천)

4 비밀을 엄격히 켜야 한다

레지오 단원은 회합에서 들었거나 활동 중에 알게 된 사실에 대해서 엄격히 비밀을 지켜야 한다. 그러한 사실은 레지오 단원이기 때문에 알게 된 것이다. 따라서 그것을 누설하는 단원은 레지오에 대하여 용서받지 못할 배신 행위를 하는 것이다. 물론 활동 보고는 반드시 쁘레시디움 회합에서 해야 하지만, 이때에도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이 문제는 제19장 [회합과 단원] 20절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그대가 맡은 것을 잘 간수하시오.”(1 디모 6, 20)

5 모든 단원은 활동 수첩을 가져야 한다

레지오 단원은 자신의 활동에 대해 간결하게 기록해 두는 수첩을 지녀야 한다.

(가) 일을 능률적으로 처리하려면 기록해 둘 필요가 있다.
(나) 지나간 활동이나 아직 끝마치지 못한 활동을 잊지 않기 위해 수첩에 기록해 둔다.
(다) 기록 없이는 적절한 보고를 하기 어렵다.
(라) 일을 정리하는 습관을 갖게 해준다.
(마) 어떤 활동에 대해 구체적으로 기록해 두면, 필요한 때에 그 기록을 통해 과거를 돌아보고 현재의 실패를 바로잡을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그러나 이 기록은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자신만이 아는 부호를 사용하는 등의 방법으로 비밀이 유지되도록 해야 하며, 관련된 당사자가 보는 앞에서는 절대로 기록을 해서는 안 된다.

“다만 나는 여러분이 모든 일에 점잖게 또 질서 있게 처리해 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1 고린 14, 40)

6 모든 단원은 까떼나(레지오의 고리기도)를 매일 바쳐야 한다

까떼나(Catena)는 그 주요 부분이 성모님 자신의 기도인 마니피캇(Magnificat, 마리아의 노래)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기도는 교회의 성무일도 중에 저녁 찬가로서, “모든 찬가 중에서 가장 겸손하고 감사에 넘치며 가장 뛰어나고 가장 숭고한 노래이다.” (몽포르의 성 루도비코-마리아 / St. Louis-Marie de Montfort)
그 이름이 드러내듯이, 까떼나는 레지오와 모든 단원들(행동단원 및 협조단원)의 일상 생활을 연결하는 고리로서, 단원과 단원 사이뿐만 아니라 단원들과 복되신 성모님을 결합시켜 준다. 까떼나라는 말에는 매일 바쳐야 하는 기도라는 의미가 암시되어 있다. 즉, 고리와 고리가 연결되어 하나의 완전한 사슬을 만들어 내듯이, 레지오 단원이 이 기도의 의무를 소홀히 한다면 그는 결국 레지오의 기도 사슬에서 떨어져 나간 고리가 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일깨워 준다.
불가피한 형편으로 행동단원을 그만둔 단원이나, 혹은 특별한 이유 없이 레지오 대열을 떠난 단원들도 이 아름다운 기도를 바치는 습관을 계속 유지하여, 그가 살아 있는 동안 한 번 맺은 레지오와의 유대만큼은 끊지 않고 보존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과 더불어 친밀하게 말씀을 나눌 때, 나는 성모님의 이름으로 말씀을 드리거나 어느 정도는 성모님의 몸이 되어 말씀을 나눈다. 그때 성모님은 나를 통하여 그 옛날 나자렛에서 당신의 사랑하는 아드님과 함께 하셨던 감미롭고 이루 말할 수 없이 다정했던 나날들을 되살리고 싶어하신다. 성모님은 이러한 나의 도움으로 다시 한 번 아드님과 다정한 이야기를 나누시고, 옛날 나자렛에서처럼 아드님을 품에 끌어안으시는 것이다.”(야아헬 / De Jaegher : 신뢰의 덕)

7 단원들 사이의 유대 관계

레지오 단원들은 일반적으로 동료 단원들을 사랑하는 의무를 지킬 준비가 잘되어 있는 사람들이지만, 사랑이라는 말속에는 동료의 허물까지도 관대하게 받아들이는 자세가 포함된다는 사실을 가끔 잊는다. 이 점이 잘못되면 쁘레시디움은 은총을 잃게 되고, 결국 단원들이 레지오를 떠나게 되는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한편, 모든 단원은 자신이 단원 생활을 하는 이유가 단장이나 동료 단원들이 마음에 들고 안 들고 하는 것과는 별개라는 사실을 깨달을 만한 분별력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자신이 무시당하고 있다고 혼자 생각하거나 혹은 실제로 무시당하는 경우라도, 또는 자신이 인정, 비난, 동의를 받든 안 받든, 이런 등등의 것들과 자신의 단원 생활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확실히 깨닫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제력이야말로 모든 공동 작업의 기초가 된다. 자제력이 없이는 아무리 훌륭한 단원이라도 단체를 위기에 빠뜨릴 수 있다. 그러므로 자신의 개성을 부드럽게 다듬어 조직에 가장 완전하고 조화롭게 적응하는 단원이야말로 레지오에 가장 큰 도움을 주는 단원이 된다. 반대로, 레지오의 특징을 이루는 온화함을 깨는 발언이나 행동을 하는 단원은 마치 사람 몸의 동맥을 끊는 것처럼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단원은 공동체의 한 가운데로 뭉치도록 행동해야 하며, 레지오 공동체의 중심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레지오 단원이 동료 단원에 대해 지녀야 하는 태도를 논할 때는 ‘사소한 질투심’이라는 문제를 특별히 다룰 필요가 있다. 우리는 흔히 이 말을 특별한 의미를 두지 않고 가볍게 말하지만, 사실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다. 질투 중에 사소한 질투란 없기 때문이다. 질투는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 있는 산(酸)과도 같아서 모든 인간 관계에 끼어들어 독을 퍼뜨린다. 특히 악의를 품은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질투심은 격렬하고 광포해서 무서운 힘을 발휘하여 어떠한 것도 해친다. 또한 질투심은 민감하고 다정한 사람들의 사심 없고 순수한 마음을 뚫고 들어가기도 한다. 남에게 자신의 지위를 빼앗기거나 덕행과 실천 면에서 남보다 뒤질 때, 그리고 젊은이들에게 밀려 소외 당한다든지 하는 경우에 받는 마음의 상처가 얼마나 크겠는가? 자신이 빛을 잃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마음이 얼마나 쓸쓸하겠는가?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이러한 속앓이를 경험하게 되며 자신의 나약함에 새삼스레 놀라게 된다. 이러한 쓰디쓴 경험을 하게 되면 증오심이 가슴에 쌓여 거의 파괴적인 폭발력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이 모든 일들을 잊으려고 힘쓴다면 한결 마음이 가벼워질지는 모른다. 그러나 레지오 단원이라면 단순히 마음이 편해지는 상태 이상의 것에 목표를 두어야 한다. 레지오 단원은 승리밖에는 그 어느 것에도 만족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 말하는 승리란, 전쟁이라도 터뜨릴 것같이 굳어진 마음을 과감히 깨뜨리고 증오심에 가까운 질투를 그리스도적 사랑으로 완전히 변화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어떻게 이런 놀라운 일을 해낼 수 있을까? 그것은 우리가 동료 단원들과 주위에 사람들에게 레지오 단원으로서의 의무를 철저히 이행하기만 하면 해낼 수 있는 일이다. 레지오 단원은 동료 단원들이나 그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 안에서 주님을 뵙고 섬기듯이 하라고 배워 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질투심이 발동할 때마다 다음의 말을 생각하라. “저 사람이 나보다 잘되는 것을 보니 마음이 쓰리다. 그런데 저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주님이 아니신가. 그러니 나는 세례자 요한과 같은 마음을 지니도록 하자. 예수님께서 나의 희생으로 더욱 드러나시니 내 마음이 기쁨에 넘친다. 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이러한 태도는 거룩하고 영웅적이며, 한 영혼의 앞날을 결정 짓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이러한 태도는 성모님께도 얼마나 영광스러운 기회를 드리는가! 성모님은 이런 귀한 영혼을 모든 헛된 것으로부터 해방시켜 다른 이들에게 ‘그 빛을 증언하도록'(요한 1, 7) 하실 것이다. 그리하여 성모님은 ‘주님의 길을 미리 닦아 놓는'(마르 1, 2) 또 하나의 욕심 없는 일꾼(레지오 단원)을 쓰실 기회를 맞으시게 된다.
선구자는 언제나 그가 내세웠던 이에게 자리를 내주고 스스로 물러나기를 바라야 한다. 주님의 사도는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성장하는 것을 늘 흡족한 마음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자신의 성장에 나쁜 영향을 끼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될 때에 한해서만 남들이 잘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올바른 사도라 할 수 없다. 질투심 많은 사람에게는 자신이 관련된 일에서 언제나 자신이 최우선이지만, 진정한 사도에게는 자신이 언제나 가장 꼴찌가 된다. 두말할 나위 없이 질투심은 진정한 사도직과 공존할 수가 없다.

“마리아는 엘리사벳에게 드린 존경과 사랑의 첫인사로써 주님께서 보여주신 첫 번째 성화의 은총을 그들과 함께 나누셨다. 이로써 그들의 영혼은 순화되어, 그 순간 세례자 요한은 거룩해지고 엘리사벳 또한 들어올려졌다.
그 첫 번째 말씀이 이토록 큰일을 이루었다면, 그 뒤 몇 달, 몇 주일, 몇 달 후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겠는가? 마리아는 언제나 주시고……. 엘리사벳은 받는다. 아니, 아무런 질투심 없이 받는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 하느님께서는 엘리사벳에게도 마리아와 마찬가지 방법으로 어머니가 되는 기적을 주셨는데, 엘리사벳은 자신이 주님께 선택되지 않은 것에 대해 조금도 섭섭한 마음을 품지 않고 나이 어린 사촌 앞에 고개 숙여 인사를 한다.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질투하지 않았고, 그 후 마리아도 당신 아드님이 사도들을 사랑하시는 것을 질투하지 않았다. 세례자 요한도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 자신의 곁을 떠날 때 예수님을 질투하지 않았다. 조금도 섭섭한 마음을 지니지 않고 자신을 떠나는 제자들을 보면서 오직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위에서 오신 분은 모든 사람 위에 계신다.'”(요한 3, 30-31) (페르로이 / Perroy : 겸손하신 동정 성모 마리아)

8 함께 활동에 나선 단원과의 관계

레지오 단원은 함께 활동에 나서는 단원에 대하여 지켜야 할 특별한 의무가 있다. 여기에 ‘둘’이라는 신비의 숫자가 있다. 이 숫자는 풍부한 열매를 맺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조건인 사랑을 상징한다. 주님께서는 당신에 앞서서 “미리 둘씩 짝지어 보내셨다.”(루가 10, 1) 그러나 이 ‘둘’이라는 숫자는 단순히 함께 일을 하게 된 두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다윗과 요나단의 영혼처럼 일치된 하나를 나타낸다. 두 사람은 서로를 자신의 영혼처럼 사랑했다.(1 사무 18, 1 참조)
“(저들은 저마다) 곡식 단을 안고서 노랫소리 흥겹게 들어오리라.”(시편 126, 6)
함께 활동에 나서는 단원들 사이의 관계는 사소한 일에서부터 일치를 보일 때 올바른 관계로 발전할 수 있다. 약속을 어긴다거나 잊어버리거나, 시간을 안 지킨다거나, 생각이나 말속에 사랑이 없고, 예의가 없거나, 잘난 체하는 등의 행동은 두 사람 사이에 깊은 도랑을 파는 것과 같다. 이럴 때 일치를 이룬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수도 공동체에서 규율 다음으로 축복과 번영을 보장하는 가장 소중한 요소는 형제적 사랑과 일치이다. 모든 형제들은 성모님이 선택하신 자랑스러운 아들로서, 우리는 예외 없이 그들 모두를 사랑해야 한다. 성모님은 우리가 이들 하나하나에게 보여 주는 사랑을 당신과 당신 아드님께 바치는 것으로 여기신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 안에서 성모님의 참된 아들이 되라는 부르심을 받고 있는 것이다.”(마리아회 편찬 : 성모학 소론)

9 새 단원 모집

새 단원을 모집하는 일은 모든 레지오 단원들에게 주어진 의무 가운데 하나이다. 주님께서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태 19, 19)고 명령하셨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레지오 단원 생활을 통해서 은총을 받았다고 생각한다면, 그러한 은총을 다른 사람들도 받을 수 있도록 마땅히 도와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단원이 수행하는 활동을 통해서 많은 영혼들이 향상되고 있음을 본다면, 그러한 사업을 더욱 확장하려고 노력해야 하지 않겠는가?
만일 레지오가 단원들로 하여금 성모님을 더욱 사랑하게 하고 성모님께 더욱 많은 봉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고 생각 한다면, 어찌 모든 단원이 새로운 단원을 모집하는 일에 힘을 쏟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예수님 다음으로 성모님을 사랑하고 성모님을 위해서 봉사하는 것은 우리가 한평생을 살아가면서 받는 가장 큰 축복이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마리아를 그리스도께 종속 시켜 그리스도와 떨어질 수 없게 만드셨으며, 이로써 마리아를 우리 신앙의 뿌리로 삼게 하시고, 그것이 자라나 꽃을 피우도록 하셨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높은 곳에 이르는 길’을 찾아 헤맨다. 그러나 막상 누가 다가가서 권유하지 않으면 선뜻 그 길로 들어설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지내게 된다. 이 ‘높은 곳에 이르는 길’이야 말로 그 길에 들어서는 사람들에게 큰 축복일 뿐만 아니라, 그들을 통하여 더 많은 사람들에게까지 참으로 놀라운 축복을 가져다 준다.

“누구에게나 길은 열려 있다네.
한 가닥 외길, 여러 갈래 길.
또 다른 길이,
착한 영혼은 높은 길을 오르고
낮은 영혼은 낮은 길을 더듬네.
다른 영혼들은
이리저리 헤매네,
저 안개 낀 들판 사이를.

길은 열려 있다네, 누구에게나.
높은 길과 낮은 길이.
그대는 골라야 하리,
제 영혼이 가야 할 길을.”

(죤 옥센함 / John Oxenham)

10 교본 공부

모든 단원은 교본을 철저히 공부해야 할 의무가 있다. 교본은 레지오의 공식 해설서이다. 이 교본은 단원들이 성모님의 군사로서 반드시 갖추고 있어야 할 중요 사항들, 곧 레지오 조직의 원리와 규칙, 운영 및 활동의 방법, 레지오의 정신 등에 관해서 가능한 한 간결하게 설명하고 있다. 교본을 공부하지 않고서는 레지오 활동을 올바르게 수행할 수 없다. 특히 간부들의 경우에, 교본을 모르는 상태에서 레지오 조직을 제대로 운영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반면에, 교본을 많이 알면 알수록 능률적으로 레지오를 운영하게 되고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큰 흥미를 느끼게 되므로, 교본에 대한 지식이 양적으로 커짐에 따라 단원의 질적 수준도 동시에 높아지는 신기한 현상이 나타난다.
‘교본이 너무 길다!’ 하며 불평하는 소리가 흔히 들린다. 그런데 이해하기 힘든 일은, 교본의 주요 부분을 다 읽을 수 있을 만한 시간을 매일 신문을 읽는 데 바치고 있는 사람들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너무 길다! 지나치게 자세하다!’라고 말하기 전에 한번 생각해 보라. 법률이나 의학 또는 군사학을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 레지오 교본과 비슷한 정도의 부피밖에 되지 않는 전공 분야의 교재에 대해서 그러한 불평을 말하겠는가? 결코 그러한 말이나 생각조차도 하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그는 불과 한두 주일 안에 교재의 내용은 물론 전문 용어들까지도 모두 외워 버릴 것이다. “세속의 자녀들이 자기네들끼리 거래하는 데는 빛의 자녀들보다 더 약다.”(루가 16, 8) 는 성서의 말씀을 새겨 둘 일이다.
다음과 같은 반대 의견도 있다. 즉 ‘교본은 어려운 사상과 고상한 주제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청소년 단원들이나 교육 수준이 낮은 단원들은 거의 이해하기 힘들다. 따라서 이런 단원들을 위해서 좀더 쉽게 쓴 교본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의견은 교육의 제1원칙, 즉 학생을 점차 미지의 세계로 이끌어 가야 한다는 교육의 기본 원리에 어긋나는 것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이미 모두 터득하고 있는 것이라면 구태여 가르칠 필요가 없는 일이며, 더 이상 새로운 지식을 제공하지 못한다면 교육 과정은 이미 다 끝이 난 것이다. 학생이 처음 받은 교재를 공부도 하지 않고 그 내용을 이해할 수 없음이 당연 하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어찌 단원들이 교본을 공부도 하지 않고 당장 이해하기를 기대하는가? 지금까지 확실히 알지 못하고 있던 것을 터득하고 그것을 지식으로 삼도록 만드는 것이 학교의 기능이며 교육을 실시하는 본래의 뜻이다.
‘낱말도 어렵다!’고 불평을 한다. 그렇다면 배워도 알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낱말을 교본에 썼단 말인가? 교본에 쓰인 어휘는 그리 높은 수준이 아니다. 누구에게 묻거나 사전을 찾아보면 그 뜻을 쉽게 알 수 있는 정도이다. 실제로 그러한 어휘는 우리가 읽는 일간 신문 정도의 수준이다. 신문을 쉽게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을 들어 본 일이 있는가? 모름지기 레지오 단원이라면, 단원으로서나 가톨릭 신앙인으로서, 레지오 영성의 원리를 비롯하여 다른 신앙의 원리들을 설명하는 데 쓰인 낱말들을 당연히 익혀야 하지 않겠는가?
교본의 어휘에 관해서 말한 것은 교본의 정신과 내용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교본의 어느 내용도 모호한 것은 없다. “교회의 가르침에는 너무 어려워서 단지 극소수의 사람만이 터득할 수 있을 만큼 깊숙이 숨겨져 있는 교리란 있을 수 없다.”(맥쾌이드 대주교 / Archbishop John Charles McQuaid) 수없이 많은 소박하고 평범한 수준의 레지오 단원들이 교본을 완전히 파악하여 삶의 양식과 자양분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더구나 교본의 사상은 결코 불필요한 것이 아니다. 사실상 사도직을 제대로 수행하려면 교본의 사상을 마땅히 알아 두어야 한다. 그것은 사도직의 일반 원리, 즉 사도직의 생명소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원리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사도직은 그 참된 의미 곧 정신적 뿌리를 잃게 되며, 그 결과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릴 권리마저 상실하고 만다. 그리스도인의 사도직 활동과 ‘선행’을 위한 막연한 운동과의 차이는 하늘과 땅 사이만큼 큰 것이다.
그러므로 단원들은 교본에 실려 있는 사도직의 정신과 내용을 바르게 터득해야 하며, 이를 위해 쁘레시디움은 스승의 역할을 맡아야 한다. 쁘레시디움은 영적 독서와 훈화를 통해서, 그리고 단원들이 교본을 체계적으로 읽고 터득하도록 격려함으로써, 이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지식은 이론으로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교본에 제시되어 있는 정신과 사상은 각기 적극적인 활동과 연결되어져야 하며, 각기의 활동은 그 활동에 걸 맞는 정신과 영성적 배경이 뒷받침 되도록 해야 한다.
언젠가, 토마스 데 아퀴노 성인(St. Thomas de Aquino)은 ‘어떻게 하면 학식을 높일 수 있느냐’는 질문을 받고 이렇게 대답했다. “우선 한 권의 책을 읽으시오. 그리고 읽거나 들은 것은 잘 이해하도록 힘쓰시오. 혹시 의문이 생기거든 확실히 알 때까지 노력하시오.” 이 학문의 대가는 여기서 어떤 특정한 책을 지정해 주려 하지 않고, 다만 지식을 전해 줄 수 있는 책이라면 어느 것이라도 괜찮다고 말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레지오 단원들은 이 성인의 말을 ‘교본 한 권만이라도 철저히 공부하라’는 당부로 알아들어도 좋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교본은 교리서로서의 가치도 지니고 있다. 즉, 레지오 교본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the Second Vatican Council)의 가르침에 바탕을 둔 가톨릭 교리를 포괄적이고도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

“보나벤투라 성인(St. Bonaventure)은 지식을 내면적인 깨우침의 결과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는 지식을 얻으려면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점을 잘 깨닫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공부에 대해 설명할 때 그레고리오 성인(St. Gregory)의 말을 인용하여,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의 기적을 예로 들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은 빈 독이 술로 가득 차게 되는 기적을 보여 주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하인들에게 먼저 빈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명령하셨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령께서는 자신의 항아리(각자의 영성의 그릇)에 먼저 물(신앙 안의 공부를 통해 얻은 것들)을 채우지 않는 사람에게는 영신적 지식과 이해력을 허락하지 않으신다. 노력을 쏟지 않고서는 빛을 발할 수 없다. 영원한 진리를 터득한다는 것은 사실상 그것을 공부하기 위해 바친 노고에 대하여 보상을 받는 것이다. 어느 누구라도 노력 없이 학문을 쌓을 수는 없다.”(제멜리 / Gemelli : 세상에 보내는 프란치스코의 호소)

11 항상 복무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레지오 단원은 일상 생활의 모든 면에 레지오 정신이 깃들이도록 하기 위해서 가능한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하며, 또한 레지오의 전반적 목적을 성취시킬 수 있는 기회를 잡기 위해 늘 주위를 살펴야 한다. 그 목적이란 죄악의 왕국을 쳐부수고 그 뿌리를 뽑아, 그 자리에 왕이신 그리스도의 깃발을 세우는 것이다.
“거리에서 성냥불을 청하는 사람이 있거든, 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시오. 그러면 그 사람은 10분이 채 지나기 전에 하느님에 대해서 물어 올 것입니다.”(뒤아멜 / Duhamel) 그렇다면 왜 우리가 먼저 성냥불을 청해서, 그 ‘생명을 전해 주는 접촉의 기회’를 확보하려 하지 않는가?
그리스도교 신앙을 좁은 의미로만 받아들이고 행동하는 경향이 짙어져서 거의 습관으로 굳어질 만큼 되어 있다. 즉, 자기 자신의 이익만을 목표로 하는 개인주의적 신앙으로 치닫고 있으며, 다른 이들의 선익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는 신앙 자세로 굳어져 가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교황 비오 11세(Pope Pius XI)가 ‘반쪽 그리스도교 신자 생활’이라고 책망한 내용이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라.”(마태 22, 37)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마태 22, 39)고 하신 주님의 말씀은 많은 사람들의 귀에 들려 오고는 있으나, 사람들은 막상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
이처럼 크게 잘못된 신앙의 자세는 때때로 레지오 단원들의 경우에도 뚜렷이 드러난다. 즉, 레지오의 기준만이 올바른 기준이며, 이 기준은 오로지 선택된 영혼들만을 위해 마련된 성화의 길이라고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레지오가 정한 기준은 그리스도교 신자의 기본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떻게 그 기준에도 훨씬 못 미치는 수준의 신앙생활을 할 수가 있으며, 또 그런 부족한 상태에서 어떻게 주님께서 주신 이웃 사랑이라는 위대한 계명을 실천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웃사랑은 하느님 사랑의 한 부분이므로, 이웃 사랑 없는 그리스도교 사상은 알맹이가 빠진 것이 되고 만다. “우리는 다 함께 구원을 받아야 한다. 그리하여 다 함께 하느님 대전에 나아가야 한다. 만일 우리들 가운데 어떤 이가, 다른 이들과 함께 가지 않고, 자기 혼자만 주님 앞에 나타났다고 한다면,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과연 무엇이라고 말씀하시겠는가?”(페기 / Peguy)
우리는 우리 주위의 사람들을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아무런 차별을 두지 않고 아낌없이 사랑해야 한다. 감정에서 나오는 단순한 사랑이 아니라, 의무감과 봉사정신 그리고 자기 희생으로부터 솟아나는 의지적인 사랑이다. 레지오 단원은 이러한 크리스천 정신으로 빛나는 사람이어야 한다. ‘참된 빛’은 그 빛이 지닌 무수한 가닥의 광선을 통해 모든 사람들 앞에 뚜렷이 드러나게 되어 있다. 즉,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란 모든 면에서 모범을 보이고 주위 사람들 앞에 뚜렷한 빛이 되는 생활이다. 만일 그렇지 못할 때 자신의 신앙이 쉽게 위협받게 될 뿐만 아니라 공동체적 삶에도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게 된다. 이런 신자들은 겨우 지옥이나 면할 수 있을 정도의 최저 수준으로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 그리하여 종교는 그 특성인 사랑의 정신을 잃게 되고, 우리의 신앙심은 본 모습과는 정반대로 흉한 꼴이 되고 만다. 이런 종교는 아무도 끌어들일 수 없고 아무도 붙잡아 둘 수 없다.
의무는 곧 규율이다. 항상 복무하는 자세를 유지하는 것은 항상 규율을 지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말씨, 옷차림, 태도, 행동 등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결코 남의 눈에 거슬리게 해서는 안 된다. 세상 사람들은 종교 활동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의 허물을 찾아내려고 적극적으로 노력한다. 그래서 여느 사람의 경우에는 별것도 아닌 것을 레지오 단원에게는 큰 허물로 쳐서, 결국 다른 이들을 위해 좋은 일을 해보겠다는 단원의 의지를 꺾어 버리고 만다. 그렇다고 이러한 세상의 눈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른 이들에게 좀더 고상한 삶을 살도록 권유하는 레지오 단원에게 한 단계 높은 수준을 요구하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점에 있어서도 다른 모든 경우와 마찬가지로 올바른 분별력이 필요하다. 선행을 하겠다는 좋은 뜻을 지닌 사람이, 자신의 부족한 점을 지나치게 의식한 나머지 사도직 활동을 포기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만일 포기한다면, 모든 사도직 활동은 끝장이 나고 말 것이다. 자신의 완덕을 지니기 못했다 해서 다른 이들이 완덕을 쌓도록 도와 주는 일마저 위선이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 이 문제에 대해서 프란치스코 드 살 성인(St. Francis de Sales)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아닙니다! 우리가 실제로 행동하는 것보다 더 훌륭한 것을 말한다고 해서 위선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그러한 일이 위선이 된다면, 오 하느님!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우리는 그저 침묵을 지키고 있을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레지오 마리애는 단순히 정상적인 가톨릭 신자 생활을 목표로 하고 있다. ‘평균적’ 신앙 생활이 아니라 ‘정상적’ 신앙 생활을 말한다. 요즈음 자기 형제들의 구원 문제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관심을 쏟지 않고,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한 신앙 생활을 하는 신자를 ‘정상적’ 신앙인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참된 가톨릭 신자를 우롱하는 잘못된 판단이며, 나아가 가톨릭 신앙 자체를 잘못 본 결과이다. ‘평균적’ 가톨릭은 ‘정상적’ 가톨릭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가 흔히 ‘훌륭한 신자’ 또는 ‘열심한 신자’라고 쓰는 말의 뜻도 다시 검토하여 고칠 필요가 있다. 최소한도의 ‘사도직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신앙 생활을 하는 신자를 가톨릭 신자라고 부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사도직 수준이란 ‘최후의 심판’ 때 우리를 같음 하는 기준으로서, 이른바 ‘열심한 신자’들 가운데 대다수가 이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참담한 우리의 현실이며, 참신앙에 대한 우리의 잘못된 인식이 바로 이것이다.”(쉬넨스 추기경 / Cardinal Suenens : 사도직 신학)

12 레지오 단원은 활동과 더불어 기도를 바쳐야 한다

레지오가 행동단원들에게 매일 의무적으로 바치도록 요구하는 기도는 비록 까떼나(Catena Legionis) 하나뿐이지만, 그들이 매일의 일과 중에 뗏세라(Tessera)의 모든 기도문을 넣어 바쳐 주기를 진정으로 바라고 있다. 협조단원은 이 모든 기도를 매일 의무적으로 바치고 있는데, 행동단원들이 그 수많은 협조단원들이 바치는 기도보다 훨씬 적게 바친다면 사실상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협조단원들은 실제 활동에 나서지 않기 때문에 당연히 많은 기도를 바쳐야 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활동은 하면서 기도를 바치지 않는 행동단원보다는 기도를 많이 바치는 협조단원이 오히려 레지오의 모후께 더 큰 봉사를 드리고 있음이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현상은 레지오가 의도하는 것과는 전적으로 반대가 된다. 왜냐하면, 레지오는 행동단원을 창 끝으로 여기고, 협조단원은 단지 손잡이일 뿐이라고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협조단원들이 열성과 인내심을 가지고 기도를 바치는 것은, 그들보다 훨씬 더 많이 희생하고 영웅적으로 봉사하는 행동단원들을 자신의 기도로써 뒷받침하고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이런 또 하나의 이유 때문에라도 행동단원은 협조단원에게 모범을 보여야 하며, 협조단원들에게 영신적인 자극이 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만일 행동단원이 바치는 기도가 협조단원보다 적어서 어느 쪽이 레지오를 위해서 더 많이 봉사하는지 알 수 없을 지경에 이른다면, 어찌 협조단원들을 영신적으로 북돋아 주는 행동단원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행동단원이나 협조단원을 가릴 것 없이 레지오 단원들은 모두 ‘로사리오 회(Confraternity of the Most Holy Rosary)’에 가입해야 한다. 이 회의 회원으로 가입하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막대한 은총을 받게 된다.(부록 7 참조)

“모든 청원 기도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라는 기도문을 꼭 소리 내어 표현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최소한도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님의 이름을 우리의 기도 중에 암암리에 부르게 된다. 예수님은 중재자이시고, 우리의 청원을 먼저 들으셔야 할 분이시기 때문이다. 더욱이 우리가 성모님의 거룩한 이름을 부르지 않고 성부께 직접 기도를 드리거나, 또는 어느 천사나 성인에게 청원을 할 때에도, 예수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복되신 동정녀께서 우리의 청원 기도를 함께 들으신다. 이는 예수님께서 유일한 중재자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 속에서 예수님의 이름을 자신도 모르게 부르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과 결합되어 계시는 복되신 성모님의 이름도 예수님의 이름과 더불어 모든 기도를 바칠 때 암암리에 마음속으로 부르게 되는 것이다. 결국 하느님께 바치는 우리의 기도는 사실상 성모님께 드리는 기도도 된다. 사람이신 그리스도께 청원을 드릴 때에도 성모님께 청원 드리는 것이며, 성인에게 부탁을 드려도 성모님께 간청하는 것이다.”(캐니스 버크 / Canice Bourke : 성모 마리아)

13 레지오 단원들의 내적 생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 20)라고 바오로 사도는 말했다. 내적 생활이란 각자의 생각이나 욕구 또는 애착 등이 오직 우리 주님께로 집중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내적 생활의 완벽한 모형이 바로 복되신 동정 성모님이시다. 성모님은 성덕을 키우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셨으며, 무엇보다도 특히 관용과 사랑의 정신을 고양시키는데 힘쓰셨기 때문에, 성모님의 애덕은 전 생애를 통해서 더욱 크게 자라났다.
“모든 그리스도 신자들은 그 누구라도, 신분과 계급에 관계없이, 그리스도인다운 생활과 사랑의 덕을 완성시키도록 불림을 받았으며…..성덕을 추구하고 각자 자신의 삶을 완전하게 이끌어야 할 의무를 지닌다.”(교의 헌장 41, 42) 거룩함이란 실제 삶의 노력으로 얻게 되는 것이다. “모든 성덕은 하느님을 향한 사랑 안에 존재하며, 하느님께 대한 모든 사랑은 그분의 뜻을 따름으로써 실현된다.”(성 알퐁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 St. Alphonsus Maria de Liguori)
“우리의 삶 안에서 주님의 뜻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언제나 다음과 같은 노력들이 필요하다. 즉, 하느님의 말씀과 교회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자 귀 기울이며,열심히 또한 끊임없이 기도하고, 지혜롭고 호의에 넘치는 영적 지도를 따르며, 자신이 살아가는 다양한 사회적, 역사적 상황뿐만 아니라 하느님께서 내려 주시는 은사와 재능을 세속적인 것들로부터 구분하는 올바른 분별력을 갖추고자 힘쓰는 일 등이 바로 그것이다.”(평신도 그리스도인 58)
단원들이 쁘레시디움 차원에서 레지오의 영성적 틀을 제대로 익힐 수만 있다면, 단원 각자의 개인 성화는 빠르게 성장할 수 있다. 다만 이때 단원들에게 주어지는 영성 지도는 그 대상이 쁘레시디움이라는 하나의 집단이라는 사실에 유념해야 한다. 즉, 각 단원은 각기 독특한 개성을 지닌 개인이고 각자 다른 욕구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집단적인 영성 지도에 덧붙여서 개별적으로 ‘지혜롭고 호의에 넘치는 영적 지도'(앞에 인용한 구절과 같음)를 받을 수 있게 한다면, 이는 단원들의 개인 성화를 위해서 매우 바람직한 일이 될 것이다. 올바른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필요한 세 가지 요소가 있다. 그것은 기도와 보속과 성사 생활이다. 이 세 가지는 각기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있다.

(가) 기도
기도는 개인 기도와 공동체 기도로 구분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인간 본성의 이중성(二重性) 때문인데, 즉 인간의 개인적 측면과 사회적 측면이 바로 그것이다. 예배의 의무는 기본적으로 각 개인에게 부과되어 있지만, 사회적 유대감으로 연결되어 있는 전체 공동체의 예배 행위 역시 의무에 속한다. 미사나 성무일도 같은 전례는 교회 공동체의 예배 행위이다. 기도에 대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은 다음과 같다. “그리스도 신자는 비록 공동으로 기도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하더라도, 방에 들어가 은밀한 곳에서 성부께 기도 드려야 하며, 더욱이 사도의 가르침을 따라 끊임없이 기도해야 할 의무가 있다.”(전례 헌장 12) 개인적으로 바치는 기도에는 “묵상(또는 묵상 기도), 양심 성찰, 피정, 성체 조배, 그리고 복되신 동정 성모님께 드리는 특별한 신심,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묵주기도가 있다.”(전례 헌장 186) “이러한 개인 기도는 그리스도 신자의 영성 생활을 살찌게 하고 모든 공동 의식에 참여하여 큰 혜택을 입게 하며 전례 기도가 공허한 형식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아 준다”(전례 헌장 187)
개인 영적 독서는 그리스도 신자로서의 신앙에 대한 확신을 키워 줄 뿐만 아니라 기도 생활을 크게 도와 준다. 영적 독서는 우선 신약성서로부터 시작하되, 가톨릭 교회가 인정하는 주해서와 함께 읽어야 하며(계시 헌장 12 참조), 그 외에는 각자의 필요와 능력에 따라 영적 고전 문헌 중에서 선택하면 된다. 일반적으로, 영적 독서를 선택할 때는 ‘현명한’ 사람의 지도를 받는 것이 특히 중요하다. 성인전을 읽음으로써 영적 독서에 맛을 들이는 것도 바람직한 방법이다. 성인들의 삶은 우리로 하여금 착하고 영웅적인 생활로 들어서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성인들은, 거룩함이 무엇이며 어떻게 하면 거룩해질 수 있는가를 우리가 실제로 볼 수 있게 해주는 분들이다. 그러므로 성인들과 친숙해질 때, 우리는 그들의 훌륭한 자질을 닮을 수 있게 된다.
레지오 단원은 가능한 한 해마다 한 차례씩 봉쇄 피정에 참여해야 한다. 피정과 묵상은 생활 속에서 각자에게 주어진 성소를 뚜렷이 깨닫도록 만들어 주며, 그 성소를 충실히 따르겠다는 마음을 더욱 환하게 열어 준다.

(나) 금욕과 극기
금욕과 극기란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실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비우는 행위이며, 그분의 삶을 좀더 온전히 나누어 가짐을 의미한다. 이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또한 그분의 뜻에 따라 다른 이들을 사랑하기 위해서 자신을 단련시키는 것이다. 이 단련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다. 원죄로 인하여 우리의 지력은 흐려져 있고 의지는 나약해졌으며 정욕은 우리로 하여금 쉽사리 죄악 쪽으로 기울게 하므로, 자신을 단련함은 곧 자신을 지키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우선 교회가 설정한 속죄의 날과 때를 잘 지키겠다는 다짐과 함께 어떻게 지킬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레지오에는-만일 올바로 따르기만 한다면-극기하는 데 귀중한 훈련을 쌓을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어 있다.
다음으로, 하느님께서 몸소 내려 주시는 ‘십자가’와 ‘삶의 수고와 좌절’을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렇게 하려면 우리의 감각 기관을 통제해야 하는 문제가 따르는데, 그 중에 특히 보고 듣고 말하는 행위를 절제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의 내면 감각을 통제하므로, 불필요한 기억이나 상상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고 순화시키는 역할을 해준다. 또한 금욕은 나태함이나 즉흥적인 행동 또는 이기적인 태도를 극복하는 것도 포함한다. 극기 생활을 하는 사람은 가정과 일터에서 함께 생활하는 이들을 예의 바르게 대하며 그들에게 즐거움을 안겨 줄 것이다. ‘개인적인 사도직’이란 결국 다른 이들과 우정의 관계를 쌓는 일인데, 이는 상대방의 삶을 바르게 이끌어 주기 위해 항상 친절하고 세심하게 돌보는 노고가 따르기 때문에 자기 희생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어떤 사람을 대하든지 그들처럼 된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 중에서 다만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한 것입니다.”(1 고린 9, 22)라고 바오로 성인은 말했다.
위험한 쪽으로 빠지지 않는지 보살피는 일과 좋은 습관을 기르기 위한 노력은 그리스도 신비체 안에서 우리 자신의 죄와 다른 이들의 죄를 보속하는 것이다.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지은 죄로 인해서 고통을 받으셨다면 지체(肢體)인 우리가 그분과 함께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지은 죄를 대신 갚으셨으니 우리 죄인들도 그분을 위해서 무언가 해야 하지 않겠는가? 훌륭한 그리스도 신자는 죄의 싹이 눈에 띌 때마다 그것을 잘라내기 위해서 즉시 행동한다.

(다) 성사
그리스도와의 일치는 세례성사에서 비롯되어 견진성사로서 성숙하며 성체성사 안에서 양육되고 완성된다. 칠성사에 대해서 이 교본 다른 곳에서 다루고 있으므로, 여기서는 그리스도께서 가톨릭 사제들로 하여금 당신을 대리하여 집행하도록 하신 자비와 용서의 성사인 고해성사에 대해서만 언급하고자 한다.
고해성사는 회개의 성사 또는 화해의 성사 등 여러 가지로 불리어진다. 우리가 죄지었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 고백이고, 우리가 변화되었음을 드러내는 것이 회개이며, 죄를 고백한 사람이 이 성사를 통하여 하느님과 교회 그리고 전 인류와 화해하게 되므로 화해의 성사를 통하여 하느님과 교회 그리고 전 인류와 화해하게 되므로 화해의 성사라고 부르는 것이다. 고해성사는 성체성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용서의 은총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죽음으로부터 비롯되며, 성체성사는 바로 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재현하고 경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레지오 단원들은 이 화해의 성사로 초대하는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응하여, 자주 또는 정기적으로 주님을 찾아 뵈어야 한다. 그리하여 “나쁜 습관을 뿌리 뽑고, 영신적인 나태와 냉담을 예방하며, 양심을 정화하고, 의지는 굳건해져서 바른 신앙 생활을 하게 되므로, 이와 같은 성사 자체의 효과에 의해서 하느님의 은총은 더욱 커지게 된다.”(교황 비오 12세의 회칙 ‘그리스도 신비체’ 87) 이렇게 단원 스스로가 먼저 이 화해의 성사를 통해 은총을 체험할 때, 그는 다른 신자들도 자주 이 성사에 참여하도록 더욱 열심히 활동하게 될 것이다.
요약하여 말한다면, 영혼을 구하고 성화시키며 이 세상을 그리스도 왕국으로 바꾸는 일은 그리스도께서 영혼 안에 사실 때에만 가능하다. 사실상 이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없다.
“마리아 ‘영성’ 또는 마리아 ‘신심’을 추구하는 노력은 개인의 신앙 안에서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다양한 민족과 국가들 안에 존재하는 그리스도 신자 공동체의 역사 속에서 그 근원을 수없이 찾아볼 수 있다. 이 영성을 스스로 생활하고 가르친 많은 분들 중에서 몽포르의 루도비코-마리아 성인을 빼놓을 수 없는데, 그는 그리스도 신자들이 세례성사를 통해 약속한 대 로 충실히 살아가면서 자신을 성모님을 통해 그리스도께 봉헌해야 한다고 가르쳤다.”(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회칙 ‘구세주의 어머니’ 48)
“영성 생활과 교리는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교리는 우리가 걷는 신앙의 길을 비추는 빛과 같은데, 그 빛은 세속의 어두운 길을 걷는 우리를 비추어 안전하게 지켜 준다. 다른 한편으로, 만일 우리기 바르게 살고 있다면, 우리의 지성과 마음은 활짝 열리어 신앙의 교리가 비추는 빛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89)

14 레지오 단원과 크리스천 성소

레지오는 무조건 활동 우선 주의가 아니라, 단원들에게 삶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레지오는 단원 생활의 전반적인 흐름을 훈련을 통해서 올바르게 이끌어 주려고 노력한다. 단원이 주회합에 참석하고 있는 동안이나 활동을 수행하고 있을 때에만 단원답다면, 그는 레지오의 정신대로 살고 있다고 볼 수 없다.
레지오의 목적은 단원들과 그들이 접촉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 신자로서의 성소대로 충만한 삶을 살도록 도와 주는 데 있다. 크리스천 성소의 근원은 세례성사이다. 세례로써 “우리 각자는 또 다른 그리스도가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 된 것이다.”(성 아우구스티노 / St. Augustine)
거룩한 세례로 그리스도가 되었으므로, 교회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은 그리스도의 사제직, 예언직, 왕직을 그리스도와 함께 나누어 갖게 된다.
우리는 개별적으로 또는 공동체로서 전례에 참여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동참한다. 가장 고귀한 예배는 자신을 제물로 바치는 것이다. 영신적인 희생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의 모든 행위를 아버지 하느님께 제물로 바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평신도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다. “만일 평신도들의 일이나 기도, 사도적 활동, 결혼 생활이나 가정 생활, 일상의 업무나 심신의 휴식 등, 이 모든 것을 성령 안에서 행하며, 더욱이 생활 속의 고통을 인내로이 참아 받는다면, 그들이 행하는 모든 행위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 드리는, 하느님께서 받으실 만한 신령한 제물이 될 것이며(1 베드 2, 5 참조), 이 제물은 성체성사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과 함께 성부께 정성스럽게 봉헌될 것이다. 이와 같이 평신도들은 어디에서나 그들의 일상을 거룩하게 생활함으로써 이 세상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이다.”(교의 헌장 34)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의 예언직(교도직)에 동참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생활의 증거와 말씀의 힘으로 성부의 나라를 선포하셨다.”(교의 헌장 35) 평신도로서, 우리는 복음 말씀을 믿고 받아 들이며 말과 행동으로 그 말씀을 선포하는 능력과 책임을 부여 받았다. 그리고 우리가 세상 사람들에게 베풀 수 있는 가장 큰 봉사는 신앙의 진리를 전해 주는 일이다.
즉, 하느님은 어떤 분이시고, 영혼이란 무엇이며, 인생의 목적은 무엇인지, 죽음 후에 인간은 어떻게 되는지 등에 대해 말해 주는 일이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주님을 전해야 한다. 이 모든 의문에 대한 해답을 갖고 계시는 그리스도를 전해야 하는 것이다. 논쟁을 하거나 증거를 대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우리 자신이 먼저 알고 실천하고 있는 이 진리가 가져다 준 변화를 사람들에게 성실하게 이야기해 주고 그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며, 그들 스스로 신앙의 진리를 더욱 자세히 알아보려고 노력하게 만들어야 한다.
레지오 단원 생활은 신앙에 대한 지식을 향상시킬 수 있는 기회를 주며, 그 지식을 바르게 생활하는 방법을 터득하게 해준다. 또한 레지오 단원이 되면 낯 모르는 사람들에게 신앙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 경험도 쌓게 된다. 그런데 우리 단원들이 가장 먼저 이 사랑의 사도직 활동을 펼쳐야 할 대상은 바로 우리들의 가족, 학교 친구들, 직장 동료들과 사업상 자주 대하는 사람들, 단체 활동이나 동호회 등에서 빈번히 얼굴을 대하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대상은 일반적으로 비록 레지오가 주간 활동 대상자로 배당하는 사람들은 아니지만, 늘 우리가 돌보아야 할 사람들이다.
또한,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 있는 죄악의 권세를 물리침으로써, 그리고 우리 이웃에게 봉사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왕직에 동참한다. 다스린다는 것은 곧 섬기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마태 20, 28)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섬기는 마음으로, 무엇보다도 우리의 가정 안과 밖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활동이 무엇이든 올바르게 해냄으로써 왕직을 수행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명에 동참하게 된다.
이로써 우리는 지속적으로 하느님의 창조 사업에 한몫을 담당하게 되며, 이 세상을 더욱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드는 일에 협조하게 되는 것이다. 잠깐 사이에 지나갈 세상의 일들을 충만한 복음 정신으로 완성시키는 일은 평신도 그리스도인들에게 부여된 특별한 임무이다.
우리는, 레지오 선서를 통해서, 성령의 위대한 목적을 이루는 연장이 되겠다고 서약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는 일은 언제나 신앙적인 동기가 바탕이 되어야 하며, 우리의 본성을 가능한 한 온전히 성령의 도구로 쓰이도록 내어 드려야 한다.
그리스도는 하느님 위격 중의 한 분이시지만, 그 분의 인성(人性)은 행동과 지성, 말씀이나 눈길 등에서 우리와 똑같은 모습을 보이셨다. 어린아이들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들은 그 분과 함께 어울리기를 좋아했다. 사람들은 주님께 식사를 대접하는 것이 소원이었다.
프란치스코 드 살 성인(St. Francis de Sales)은, 몸가짐과 태도가 너무나 훌륭해서, 수많은 영혼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했다. 이 성인은 사랑을 실천하려는 사람들에게 그가 소위 ‘작은 덕행’이라 부르는 덕목을 권했는데, 그것은 바로 우정 어린 마음씨와 예의를 갖춘 바른 행동, 인내와 배려, 그리고 이해, 특히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감싸 주는 일이었다.

“예수님과 성모님께서 같은 피를 나누었다는 사실은 두 분의 체격이나 외모, 성향이나 취미나 덕행이 비슷하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그러나 단지 피를 나누었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면에서 두 분의 유사성이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성모님이 주님의 어머니 되심은 비할 수 없이 큰 초자연적 은총의 결과였다. 이 은총이 자연의 일반 원리를 장악하고 그것을 성모님 안에서 발전 시켜, 어느 모로 보나 성모님이 아드님의 생생한 모습을 닮게 하셨다. 그리하여 누구든지 성모님을 뵙는 사람은 성모님을 통해서 완벽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고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두 분의 관계는 가정 공동체 안에서 두 분의 친교를 굳건히 했을 뿐만 아니라, 마음을 터놓고 은밀한 생각까지도 서로 나누는 사이로 발전해 갔다. 이렇게 해서 성모님은 예수님의 온갖 생각, 감정, 소원, 계획 등을 반영하는 거울이 되었고, 예수님께서는 더욱 뛰어난 방법으로 성모님의 영혼인 순결과 사랑과 신심과 한없는 애덕 등의 온갖 경이로운 모습들을 마치 티 없이 맑은 거울에 온전히 비추듯이 드러내셨다. 그러므로 성모님은 ‘이교도의 사도’인 바오로 성인보다도 더 당당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께서 내 안에 사신다’라고 말씀하실 수 있는 것이다.”(드 콘칠리오 / De Concilio : 성모님에 대한 이해)

제34장 쁘레시디움 간부들의 임무

1 영적 지도자

레지오가 그 성공 여부를 판단할 때는, 단원들이 영성적으로 얼마만큼 개발되어 있으며, 그 영성의 결실이 활동을 통해서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를 본다. 따라서 단원들의 영신적 자질을 높이는 일을 주된 임무로 맡고 있는 영적 지도자야말로 쁘레시디움의 힘의 원천이다. 영적 지도자는 회합에 참석하여 단장을 비롯한 다른 간부들과 더불어 레지오의 규율이 잘 지켜지도록 보살피고, 조직이 영성적으로나 실질적으로 바르게 운영되도록 돌보아야 한다. 영적 지도자는 모든 잘못된 행위를 막아야 하며, 모든 정당한 레지오의 권위를 뒷바침 해 주어야 한다.
자신이 지도하는 쁘레시디움이 훌륭히 제 몫을 해내고 있다면, 그는 남다른 열성과 잠재력을 지닌 평신도들을 자신의 본당 안에 확보해 놓은 셈이 된다. 그러나 쁘레시디움이 좀더 가치 있고 어려운 활동에 나서도록 만드는 것은 영적 지도자의 역량에 달려 있다. 또한 쁘레시디움은 내부의 소극적인 태도와 외부의 장애를 헤치며 나아가야 하는데, 이것 역시 영적 지도자의 격려와 선도에 따라 크게 좌우된다. 레지오는 영적 지도자가 쁘레시디움의 영성적 원동력이 되어 주기를 바라고 있으며, 사실상 모든 쁘레시디움이 영적 지도자의 지도에 크게 의존한다. 교황 비오 11세의 말처럼 ‘나의 운명은 그대의 손에 달려 있다’고 말할 정도이다. 그러므로 영적 지도자가 단 한 번이라도 단원들의 신뢰를 무너뜨린다면 그것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무리 작은 모임이라도 하느님과 성모님과 영혼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 봉사하겠다고 나선 신자들을 목자 없는 양떼처럼 내버려 둘 수 있겠는가! 양떼를 내버려 두는 영적 지도자에게 최고의 목자이신 주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시겠는가? “그 단체의 영혼이 되고, 모든 선한 활동에 영감을 주며, 열성의 근원이 되라.”(교황 비오 11세)고 하시지 않겠는가?
영적 지도자가 쁘레시디움을 돌볼 때에는 수도회의 수련장이 수련 자들을 돌보듯이 해야 하며, 단원들의 영신적 안목을 높이고 그들의 활동과 영성이 레지오 마리애에 맞갖은 수준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힘써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단원들의 영성은 목표로 하는 수준만큼 올라가게 된다. 그러므로 영적 지도자는 최고 수준의 덕성을 단원들에게 제시하여, 영웅적인 덕성이 있어야만 실천할 수 있는 일을 단원들에게 맡기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불가능한 일도 은총 앞에서는 무릎을 꿇게 되며, 은총은 구함으로써 얻을 수 있다. 다만 영적 지도자는 단원들이 그들이 지켜야 할 의무의 사소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충성심을 발휘하도록 강조해야 한다. 이러한 충성심은 큰 성과를 이루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기본 요건이기 때문이다. 모든 일의 성과는 결과를 통해서 드러나지만, 그 결과는 그때까지의 작은 일들이 차근차근 쌓여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영적 지도자는 단원들이 이기적인 생각으로 활동에 나서지 않도록 돌보고, 성공했다고 자만하거나 겉으로 보기에 실패했다고 낙담하지 않도록 하며, 마음에 내키지 않거나 받아들일 수 없는 임무라도 일단 명령이 내리면 수백 번이라도 다시 나서겠다는 자세를 갖추도록 지도해야 한다.
영적 지도자는 단원들이 기도와 희생을 통해 주어진 활동을 두려움 없이 적극적으로 수행해 나가도록 보살펴야 하며, 인간적인 생각에서 실패로 판단되거나 가망이 없어 보이는 때라도, 어머니이신 레지오의 모후께 확실한 신뢰심을 갖고 도움을 청하면 승리로 이끌어 주신다는 사실을 단원들에게 가르쳐 주어야 한다.
영적 지도자의 필수적 임무는 모든 단원들의 마음을 하느님의 어머니께 대한 뚜렷하고 열렬한 사랑으로 가득 채우고, 특히 레지오가 존중해야 할 성모님의 여러 가지 특전에 대해 각별한 애정을 갖게 하는 일이다.
그 결과로, 돌 하나하나를 쌓아 올리듯이 단원들을 끈기 있게 지도하는 레지오의 영적 지도자는 그 무엇으로도 깰 수 없을 만큼 강인한 정신적 요새를 단원 각자의 마음속에 세우게 된다.
영적 지도자는 쁘레시디움의 일원으로서 업무 처리나 토의 또는 기획에 관여하며, ‘필요에 따라 교사나 조언자 또는 안내자’ (교황 비오 10세)의 역할을 한다. 그러나 영적 지도자는 단장의 임무까지 맡아 하는 일이 없도록 유의해야 한다. 그러한 경향은 쁘레시디움에 나쁜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영적 지도자는 사제로서의 권위와 인생사에 대한 폭넓은 지식으로 단원들에게 압도적인 영향을 주게 되어있다. 따라서 영적 지도자가 주회합을 맡아서 진행하거나 지나치게 개입하면 업무의 내용면에서 질을 높일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회합의 전체 분위기는 영적 지도자와 그의 진행에 깊이 참여하는 일부 단원 사이의 대화로 위축되므로, 단장이나 그 외의 단원들은 아무런 역할도 할 수 없게 된다. 그들이 하고 싶은 발언이 있어도 혹시 자신의 발언이 영적 지도자의 판단에 간섭한다는 인상을 줄까 봐 입을 다물고 말 것이다. 어떤 사안에 대해 전체 단원이 자유롭게 논의하는 길이 막히게 되면, 회합은 사람을 끌어들이는 힘을 잃게 되고, 단원을 교육하는 힘과 건전한 발전의 기반도 상실하고 만다. 이러한 쁘레시디움은 영적 지도자가 불참하게 되면 아무런 일도 처리하지 못하고 그가 다른 곳으로 옮겨가면 무너질 수도 있다.
“영적 지도자는 단원들과 마찬가지로 회합에서 논의되는 모든 일에 대해서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여야 하지만, 말끝마다 자신 견해를 주입하는 일은 피해야 한다. 쁘레시디움이 영적 지도자의 조언이나 지식을 요청하면 당연히 개입해야 한다. 그러나 이때에도 단장을 무시하거나 회합 분위기를 휘저어 놓아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 반대로, 단원들이 영적 지도자인 자신에게 보다는 활동 자체에 관심을 갖도록 모범을 보여 주어야 한다.”(햄싱 주교 / Bishop Helmsing)
영적 지도자는 쁘레시디움이 영성에 관한 공부를 하겠다고 할 때, 그 책을 선정하는 과정에 참여해야 한다. 단원들이 읽을 책을 세심하게 살펴서 교회의 기본 원리에 완전히 부합되지 않는 책은 어떠한 것도 단원들에게 허용해서는 안 된다.
영적 지도자는 회합에서 레지오의 까떼나를 바치고 나면 곧 짤막한 훈화를 하되, 가급적이면 레지오 마리애 공인 교본의 한 부분을 해설하는 것이 바람직하다.(제18장 [쁘레시디움 회합의 순서] 11절 ‘훈화’ 참조) 영적 지도자 불참 시에는 단장이 훈화를 한다.
회합의 마침 기도가 끝나면 영적 지도자는 단원들에게 강복을 준다.

“그리스도께서는 사제를 임명하실 때 당신의 대리자로서 임명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사제는 어떤 의미에서는 주님 자신이시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임명하신 사제를 통하여 하느님으로서의 능력을 행사하신다. 그러므로 사제를 받들고 존경하는 것은 영원한 사제이신 그리스도를 직접 흠숭 하는 행위이며, 사제는 그리스도께서 지니신 인성(人性)의 몫을 담당한다.”(벤슨 / Benson : 그리스도의 우정)

“사제는 포도밭의 관리인이 되어 주님의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얻기 위해 아침부터 저녁까지 온종일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을 찾아 나서야 한다. 사제의 부름이 없다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하루 종일 빈둥거리면서 서성거리고 있을 것'(마태 20, 6 참조)이다.”(치바르디 / Civardi)

2 단장

1 단장의 주 임무 가운데 하나는 꾸리아 회합에 반드시 참석하는 일이다. 단장은 이 의무와 그 외에 주어진 다른 방법으로 자신의 쁘레시디움이 레지오의 중앙 기구와 항상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도록 해야 한다.

2 단장은 쁘레시디움 회합에서 의장이 되어 업무를 처리한다. 단장은 활동을 배당하고, 그 활동에 대한 단원들의 보고를 받는다. 단장은 쁘레시디움의 세부적인 모든 면까지 충실하게 운영할 책임을 레지오로부터 위임 받은 것이다. 따라서 그가 위임 받은 책임을 완수하지 못한다면, 이는 레지오에 대한 배신 행위가 된다. 세속 군대에서는 이러한 배신 행위를 반역이라 부르며 범법자로서 엄벌에 처한다.

3 단장은 정시에 회합이 시작될 수 있도록 회합실의 조명이나 난방 또는 좌석 배치 등이 잘 갖추어져 있는지를 확인할 일차적 책임이 있다.

4 단장은 정시에 정확히 회합을 시작하고 적절한 시간에 회합의 진행을 중단하고 까떼나를 바치며, 규정된 시간 안에 회합을 마치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 탁자 위에 시계를 놓아 두면 도움이 될 것이다.

5 영적 지도자가 참석하지 않은 경우에는 단장이 대신 훈화를 해야 하며, 간혹 다른 사람을 지명할 수도 있다.

6 단장은 다른 간부들을 지도 감독하여 각자 직무를 올바로 수행하도록 돌본다.

7 단장은 자신이 맡고 있는 쁘레시디움이나 다른 쁘레시디움의 간부직에 결원이 생길 때를 대비하여 꾸리아에 추천할 수 있는 우수한 단원을 항상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8 단장은 영성적인 면에서나 열성에서 동료 단원들에게 모범을 보여 주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단원들이 해야 할 일을 단장 자신이 떠맡아 하는 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 단장이 단원들의 일까지를 하게 되면, 자신의 열성을 보여 주는 데는 성공하겠지만, 정작 자신의 모범을 보고 배워야 할 단원들로부터 실천의 기회를 빼앗게 되므로 결국 그러한 열성은 모범이 될 수가 없는 일이다.

9 작은 목소리나 분명치 않은 보고는 회합의 적이다. 그러므로 단장은 자신이 먼저 회합실 전체가 울릴 만큼 큰 목소리로 말해야 한다. 단장이 이 점을 소홀히 하며 단원들 역시 애써 들어야만 겨우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보고하게 되어 회합은 즉시 맥이 빠지고 만다.

10 단장은 단원 한 사람 한 사람의 보고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살펴야 하며, 아직 익숙하지 못하거나 부끄러워하는 단원에게는 적절한 질문을 하여 이끌어 주고, 아무리 훌륭한 보고라 해도 시간을 너무 많이 차지하면 조정해 줄 의무가 있다.

11 단장이 회합을 제대로 이끌어 가려면 발언을 되도록 적게 하는 것이 좋다. 이 말은 양극단을 피해야 한다는 뜻이다. 양극단의 한쪽은 확인이나 격려의 말 한마디 없이 회합이 스스로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다. 그 결과 어떤 단원은 너무 간단한 보고로 끝내는가 하면, 어떤 단원의 보고는 끝도 없이 길어진다. ‘너무 짧은 보고’와 ‘너무 긴 보고’를 합쳐서 반으로 나누면 계산상으로는 제시간 안에 업무를 처리한 것처럼 보일지는 모른다. 그러나 혼란을 덮어 놓았다 해서 완전한 질서가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정확하지 않은 것들을 한데 모아 놓았다 해서 정확한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 또 다른 극단은 말을 너무 많이 하는 경우이다. 어떤 단장은 이야기를 할 때마다 너무 열을 올리기 때문에 (가) 단원들이 발언할 시간까지 단장이 차지하거나 (나) 쁘레시디움은 강의하는 자리가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의 사업'(루가 2, 49 참조)에 대해 의논하는 자리라는 본래의 취지를 어기게 되며 (다) 더욱이 단장이 말을 많이 하게 되면 단원들은 입을 다물게 되어 회합은 해이해지고 만다.
위에 설명한 두 가지의 극단적인 경우는 그 어느 것도 단원들을 교육한다는 측면에서 볼 때 달갑지 않은 것이다.

12 쁘레시디움 안에 형제적 사랑의 정신이 없으면 모든 것이 사라지고 만다. 단장은 이 점을 명심하여 단원들 가운데 형제애가 북돋아지도록 항상 힘써야 한다. 이를 위하여 단장은 단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깊은 사랑을 쏟고 겸손한 태도를 지녀야 한다. 단장은 “너희 사이에서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한다.”(마태 20, 27)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

13 단장은 단원들이 자신들에게 맡겨지지 않은 활동에 대해서도 의견을 말하고 자진해서 돕도록 권장해야 하며, 쁘레시디움이 펴는 모든 활동에 흥미를 가지고 적극적인 태도를 지니도록 단원들을 이끌어야 한다.

14 단장은 단원들의 활동이 다음과 같은 점에 부합되는지 살펴야 한다.

(가) 올바른 정신으로 활동하고 있는가?
(나) 올바른 노선을 따르고 있는가?
(다) 레지오가 거두고자 하는 성과가 단원들의 활동을 통해서 실제로 나타나고 있는가?
(라) 전에 했던 활동을 가끔씩 다시 점검하고 있는가?
(마) 새로운 활동을 개척하려는 진취적 정신이 단원들 안에 살아 있는가?

15 단장은 단원들이 할 수 있는 한 최고의 노력과 희생을 바치도록 그 바탕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유능한 단원에게 하찮은 활동을 맡기는 것은 영원한 삶을 준비하고자 노력하는 그 단원에게 결코 정당한 배당이 될 수 없다. 쉬운 일을 맡기는 데 싫어 할 사람은 없다. 그러므로 단장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최대한으로 능력을 발휘하기를 바라신다는 점을 단원들에게 깨우쳐야 하며,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노력과 희생을 극대화시키도록 독려해야 한다.

16 쁘레시디움이 잘못되는 것은 대개 단장에게 결함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단장이 쁘레시디움의 결함을 바로잡으려고 노력하지 않고 방관한다면, 그와 같은 잘못은 되풀이될 뿐만 아니라 결국 점점 더 커지게 된다.

17 단장은 연간 대략 50여 회의 쁘레시디움 주회합을 주관하게 된다. 단장도 사람인 이상 때로는 기분이 언짢은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단장은 어떠한 경우에도 그와 같은 자신의 감정을 단원들 앞에 드러내지 않아야 한다. 언짢은 기분만큼 전염성이 강한 것은 없다. 특히 윗사람의 기분이 언짢게 되면 곧 전체 분위기를 해치고 만다.

18 쁘레시디움이 활동을 하지 않고 표류하거나 사기를 잃었다고 생각될 때, 단장은 개인적으로 꾸리아 간부들과 의논하여 적절한 방안을 찾아야 한다. 만일 꾸리아에서 단장에게 평단원으로 옮기는 것이 좋겠다는 권고가 나오면 그 결정을 겸손하게 받아 들여야 한다. 이러한 겸손의 태도는 자신에게 커다란 축복이 될 것이다.

19 단장은 다른 간부나 단원들과 마찬가지로 쁘레시디움의 주간 활동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 이 규율을 새삼스럽게 강조함이 부질없는 일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경험에 비추어 보면, 단장이 주간 활동 의무를 수행하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20 끝으로 단장은, 평신도 사도직에 관한 한 최고 권위자인 비싸르도 추기경(Cardinal Pizzardo)이 강조한 것과 같이, 평신도 사도직 운동의 지도자가 특별히 지니고 있어야 할 특성을 모두 갖추어야 한다. 그 특성이란, 교회 권위에 대하여 순명하고, 자기를 버리며, 조직 안의 모든 다른 단체나 단원들을 사랑하고 화합하는 정신이다.

“영혼을 보살피는 일이 제게 주어진 순간부터 저는 제 임무가 저의 능력을 벗어나는 것임을 한눈에 알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마치 아기가 놀라며 아빠의 어깨에 얼굴을 숨기듯이 급히 주님의 품 안으로 숨어 들어가 주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제가 당신의 어린 자녀들을 돌보기에는 너무나 미약하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십니다. 저를 통해 영혼들에게 알 맞는 것을 주시고자 하신다면 제 손을 먼저 가득 채워 주십시오. 그러면 저는 이렇게 당신 품 안에 숨어서 얼굴을 묻은 채로, 제게 영혼의 양식을 구하러 오는 이들에게 당신의 보화를 나누어 주겠습니다. 영혼들이 양식을 받고 기뻐한다면, 그것은 제게 고마워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향해 감사 드리는 것임을 제가 알겠습니다. 만일 양식이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그들이 푸념을 한다면, 저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그 양식이 당신께서 주시는 것임을 그들이 알도록 타이르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당신께서 주시는 양식 이외에는 그 어느 것도 그들에게 주지 않겠습니다.”(리지외의 성녀 소화 데레사 / St. Therese of Lisieux)

3 부단장

1 부단장은 꾸리아 회합에 참석할 의무가 있다.

2 부단장은 단장 유고시 쁘레시디움 회합의 사회를 맡아야 한다. 그러나 단장이 공석일 때 그 자리를 승계하는 권한은 없다.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회의 운영 지침서에서 인용한 다음과 같은 규정은 쁘레시디움의 부단장에게도 적용된다.
“회장 유고시, 특히 장기간 유고시, 부회장은 회장의 모든 권한을 가지고 전적으로 회장의 직무를 대리한다. 한 회원의 유고로 전체 운영이 침체되어서는 안 된다. 회장이 유고 중이라 해서 회원들이 아무런 활동도 하려 들지 않는다면 그것이 바로 이런 경우에 해당된다. 따라서 회장 유고시 부회장이 회장 직무를 완벽히 수행하는 것은 그의 권리일 뿐만 아니라 도리상의 의무로서, 회장이 돌아왔을 때 자신이 부재중이었기 때문에 모든 것이 침체되었다는 느낌을 받지 않도록 해 놓아야 한다.”

3 부단장은 쁘레시디움 운영이나 사업 전반에 걸쳐서 단장을 보좌한다. 흔히 부단장의 직무가 단장 유고시에만 시작되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이러한 잘못된 생각은 부단장 자신에게나 쁘레시디움 전체에 매우 나쁜 영향을 준다. 부단장의 역할은 단장이 하는 일을 긴밀히 보좌하는 데 있다. 쁘레시디움 안에 단장과 부단장은 가정에서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관계, 또는 군대에서의 사령관과 참모장 사이의 관계와도 같은 것이다. 즉, 부단장은 활동적이고 적극적이어야 하며, 결코 수동적이거나 예비적인 역할을 하는 간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 회합 중에 부단장이 맡아 하는 독특한 기능은 단장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여러 업무를 보살피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기능이 제대로 발휘될 때 쁘레시디움은 올바르게 운영될 수 있는 것이다.

4 부단장은 특히 단원들을 보살피는 임무를 지니고 있다. 부단장은 회합에 처음 참석하게 되는 새 단원과 미리 낯을 익혀 두었다가 그를 쁘레시디움에 영접하고 회합이 시작되기 전이나 또는 회합이 끝난 후 동료 단원들에게 소개한다. 부단장은 새 단원이 활동 배당을 받도록 주선해야 하며, 까떼나를 매일 바쳐야 하는 의무를 비롯한 단원으로서의 의무를 설명해 주고 쁘레또리움 단원의 자격 요건에 대해서도 알려 주어야 한다.

5 부단장은 회합 중 출석을 부른다.

6 부단장은 행동단원, 쁘레또리움 단원, 아듀또리움 단원의 명부를 관리하며, 각각의 명부를 정 단원과 수련 단원으로 구분 관리한다. 부단장은 수련 기가 끝나게 되는 협조단원들을 방문하여, 그가 협조단원으로서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면 정식으로 협조단원 명부에 옮겨 기재해야 한다.

7 부단장은 수련 기에 있는 행동단원의 수련 기간이 끝날 무렵이 되면 미리 알려 주어 그가 선서를 준비하도록 해주어야 한다.

8 부단장은 회합에 결석하는 단원을 잘 돌보아야 하며, 서신이나 그 밖의 방법으로 안부를 묻고 관심을 보임으로써 그 단원이 레지오의 대열을 떠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단원들 중에는 분명히 레지오 단원 생활을 줄기차게 할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적성에 맞지 않아 곧 떨어져 나갈 사람도 있다. 이 두 종류의 단원들 중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많은 중간층 단원들은 외부 여건이나 우연한 사정에 따라 단원 생활의 지속여부가 좌우되기 때문에, 간부들이 각별히 관심을 기울여야 할 대상도 바로 이들이다. 새로운 단원을 모집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기존 단원을 잃지 않는 일은 더욱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단장이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하면, 수많은 훌륭한 활동 실적과 더불어 영신적 성공을 거두게 되며, 새로운 쁘레시디움 설립이 앞당겨진다. 따라서 부단장의 임무 그 자체가 매우 특별한 형태의 사도직이 되는 것이다.

9 부단장은 쁘레시디움 단원들이 세상을 떠난 모든 레지오 단원들을 위한 기도의 임무를 등한히 하지 않도록 살펴야 한다. 이 의무에 관해서는 별도 항목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다.

10 부단장은 병환 중에 있는 단원을 직접 방문하거나 다른 단원들이 방문하도록 배려한다.

11 부단장은 단원들이 협조단원, 특히 아듀또리움 단원을 모집하고 돌보는 일에 힘쓰도록 지도한다.

“수련 수녀들은 데레사 성녀가 자기들의 깊은 마음속을 꿰뚫어 보는 것을 알고 놀라서 성녀께 물었다. 이에 대해 성녀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그 비결은 이렇습니다. 저는 언제나 동정 성모님께 기도를 바친 후에 여러분을 관찰합니다. 여러분에게 어떤 말을 들려주는 것이 가장 좋은지 저를 깨우쳐 주시도록 성모님께 부탁 드립니다. 사실 제가 여러분에게 가르쳐 준 내용에 대해 저 자신도 가끔 놀라곤 합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말하고 있는 동안에도 예수님께서 제 입을 통해 말씀하고 계신다는 확신에 조금도 의심을 품지 않습니다.”(리지외의 성녀 소화 데레사 / St. Therese of Lisieux)

4 서기

1 서기는 꾸리아 회합에 참석해야 한다.

2 서기는 쁘레시디움의 회의록을 작성하고 보관할 책임이 있다. 서기는 회의록을 작성할 때 정성을 다해야 하며, 회합에서 회의록을 또렷한 목소리로 읽어야 한다. 회의록은 낭독하는 방법과 그 내용에 따라서 회합에 중대한 영향을 준다. 회의록을 너무 길지도 않고 나무 짧지도 않게 작성하는 데는 상당한 수고를 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렇게 알맞게 작성된 회의록을 알맞게 낭독하면, 회합을 원활하게 진행하는 데 뚜렷한 길잡이가 되어 회합의 능률도 크게 높아진다.

3 서기가 회의록을 훌륭히 작성하려면 필기 도구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서기가 아무리 훌륭해도 연필이나 망가진 펜으로 질 나쁜 종이에 회의록을 작성하게 되면 좋은 기록을 남기기 어렵다. 그러므로 회의록은 품질이 좋은 잉크로 쓰거나 타자기로 작성해야 한다.

4 서기가 서기로서의 직무를 수행한다 해서 쁘레시디움의 주간 활동 의무를 채우는 것은 아니다.

5 서기는 꾸리아가 요구하는 모든 자료와 보고를 신속히 처리해야 하며 쁘레시디움의 전반적인 통신 업무를 맡아 한다. 또한 서기는 쁘레시디움의 사무용품이 적절히 보급되고 있는지도 살펴야 한다.

6 단장은 서기 직무 중 일부를 쁘레시디움의 다른 단원에게 위임할 수 있다.

“복음서에는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 속에 간직하였다.'(루가 2, 51)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화가 보띠첼리(Botticelli)는 마리아가 그 모든 일을 왜 양피지에 써서 기록으로 남기지 않으셨을까? 하는 의문을 가졌다. 그는 이 문제를 더 이상 깊이 파고들지는 않았다. 그 대신 감사와 기쁨에 넘치는 가장 완전한 찬미가를 그림으로 그려 놓았다. 그의 그림에는 천사가 오른손에 잉크 병을 받쳐 들고 왼손으로는 원고를 들고 서 있다. 그런데 그 원고에는 동정 성모님이 그때 막 빛나는 고딕 글씨체로 마니피캇(Magnificat 마리아의 노래)을 써 놓고 계신다. 토실토실한 아기 예수님은 예언자의 모습을 하고 계시는데, 그 조그마한 손으로 어머니의 손가락을 이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손가락은 플로렌스의 화가 보띠첼리가 성모님을 그릴 때마다 항상 빼놓지 않고 그려 넣은, 그 섬세하고도 감성이 풍부하며 마치 사색하는 듯한 손가락이다. 잉크 병도 의미를 지니고 있다. 황금 병도 아니고 천사가 떠 받치고 있는 왕관처럼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지도 않지만, 이 잉크 병은 주님의 겸손한 여종이신 성모님이 당신이 누리시게 될 영광에 대해 예언하신 내용을 세상 끝날까지 확신시키기 위해서 인간의 기록으로 남기고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울로베르크 / Vloberg)

5 회계

1 회계는 꾸리아 회합에 참석해야 한다.

2 회계는 쁘레시디움의 수입과 지출에 대한 책임을 지며, 회계 장부를 완벽하게 기입하고 보관하는 의무가 있다.

3 회계는 쁘레시디움 회합 때마다 비밀 헌금 주머니를 돌린다.

4 회계가 지출을 하려면 쁘레시디움의 지시가 있어야 하며, 쁘레시디움 명의로 쁘레시디움이 지정하는 방법에 따라 보유 기금을 예치해야 한다.

5 회계는 제35장 [자금]에 실려 있는 예치된 자금에 관한 권고 사항을 유념하고, 이에 관하여 때때로 쁘레시디움 회합 중에 거론함으로써 모든 단원들이 그 내용을 알고 있도록 해야 한다.

“성모님은, 성삼위께서 지니신 모든 보화를 관리하시므로, 성령의 포도주를 주고 싶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만큼 따라 주신다.”(성 대 알베르토 / St. Albert the Great)

“성모님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보화를 관리하는 분이시다. 즉, 성모님이 간직하고 계신 보화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성모님이 우리에게 내어 주시는 보화도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성 에이마르 / St. Peter Julian Eymard)

제35장 자 금

1 레지오의 모든 기관은 상급 평의회를 유지시키기 위해 헌금을 해야 한다. 레지오의 모든 기관은 이 의무와 다음에 규정하는 사항을 전제로 자체의 운영 자금을 관리하는 권한을 지니며, 동시에 그 기관의 부채에 대해서도 독자적인 책임을 진다.

2 각급 기관은 헌금을 일정 비율로 한정시키거나 헌금 액을 최저 수준 정도로 규정해서는 안 된다. 쁘레시디움은 소요 경비 지출 후 남는 자금을 액수에 관계없이 전액 꾸리아에 보내어 레지오의 전반적 목적을 위해 쓰이도록 해야 한다. 다른 사항에서와 마찬가지로 자금 문제에 있어서도 쁘레시디움과 꾸리아의 관계는 자녀와 어머니의 관계처럼 되어야 한다. 어머니는 자녀들을 위해 온갖 정성을 다하며, 자녀들은 어머니의 수고를 덜어 드리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도움을 다 드려야 한다.
쁘레시디움의 비밀 헌금이 전체 레지오 조직을 운영하는 자금이 된다는 사실을 충분히 깨닫지 못하는 쁘레시디움들을 자주 보게 된다. 이런 쁘레시디움들은 결국 꾸리아가 최저 수준의 운영 자금으로 겨우 지탱할 정도만 보내거나, 때로는 그런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의연을 하고 있다. 그 결과 꾸리아는, 레지오를 확장하고 새로운 지단을 설립하거나 방문하는 등의 조직을 운영하는 상급 평의회의 필요한 자금 조달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레지오의 기능은 마비되고 마는데, 이러한 중대한 차질은 결국 단순하고 무심한 태도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니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3 새로운 지출 항목이 발생하면 쁘레시디움은 꾸리아에 문의하여 꾸리아로 하여금 그 지출이 잘못된 것이 아닌지 판단하도록 해야 한다.

4 꾸리아는 쁘레시디움에 보조금을 지급할 수는 있지만, 쁘레시디움이 수행 중인 활동에 연관된 재정적인 문제에 대해서 어떠한 책임도 져서는 안 된다. 그러한 책임은 쁘레시디움 스스로 져야 한다. 이 규정은 반드시 필요하다. 만일 이러한 규정이 없다면, 클럽이나 호스텔 또는 기타 이와 유사한 사업을 벌이고 있는 어떤 단체가 레지오 조직을 이용할 목적으로 쁘레시디움을 설립한 후, 기존 쁘레시디움들로 하여금 자기들이 설립해 놓은 쁘레시디움의 사업을 돕는다는 명목으로 모금하게 하는 경우도 생길 수 있다.
따라서 선의의 도움을 받는 경우라면 몰라도, 어떠한 쁘레시디움도 다른 쁘레시디움이나 꾸리아에 기금을 모으는 일에 협조를 요청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5 쁘레시디움이 자체적으로 펴는 특별한 활동에 비밀 헌금을 지출하거나 또는 그 반대로 특별 사업을 통해서 생긴 자금을 쁘레시디움 회계에 입금시키는 것 이외의 자금 전용은 꾸리아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6 쁘레시디움이나 평의회가 해산되거나 또는 레지오 조직체로서의 기능이 정지된 경우, 그 자금과 자산의 소유권은 직속 상급 평의회에 귀속된다.

7 영적 지도자는 자신이 직접 권유하지 않은 사업에서 발생한 부채에 대하여 금전상의 책임을 지지 않는다.

8 회계 장부는 일년에 한 번씩 회계 감사를 받아야 하며, 쁘레시디움이나 평의회에서 회계 직책을 맡지 않고 있는 두 단원을 지명하여 실시한다.

9 성모님의 살림살이에 낭비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모든 레지오 조직이 그 자산과 자금을 조심스럽게 아껴서 다루어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온 인류는 한 몸을 이루며, 그 하나의 몸 안에서 각자는 서로 주고받는다. 생명은 살아 움직이는 것이며 순화해야 한다. 생명은 모든 이들에게 주어지지만, 순환을 멈추는 이는 생명을 잃는다. 그러나 자신의 생명을 내어 놓고 순환을 받아들이는 이는 생명을 다시 찾게 된다. 하나의 영혼이 살려면 스스로의 영혼을 다른 영혼 안에 쏟아 넣어야 한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모든 선물은 그 하나하나가 힘이 되어, 다른 이들에게 넘겨 줄 때마다 잘 보존되고 더욱 불어난다.”(그라트리 / Gratry : 성모성월)

제36장 특별한 언급이 필요한 쁘레시디움

1 소년 쁘레시디움

1 18세 미만의 청소년들을 위한 쁘레시디움은 꾸리아의 승인을 얻어서,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특별한 조건에 따라 설립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본 교본 제14장 22항을 참조하기 바란다.

2 레지오를 제대로 익히는 유일한 방법은 레지오 조직 안에서 실제로 체험을 쌓는 길뿐이다. 젊은이들은 학교 강의를 통해서 사회에 진출하면서 사도직 활동에 참여해야 한다는 말을 가끔 듣지만, 그런 강의는 아무리 훌륭하다 해도 실천적 경험이라는 살아 움직이는 몸에 비한다면 한낱 앙상한 뼈에 지나지 않는다. 그뿐 아니라, 어느 정도 실제 훈련을 거치지 않고서는 사도직 활동을 시작해 보겠다는 의지와 정열은 큰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 경험이 없으면 실패하기 쉽고, 설사 경험 없이 자기 방식대로 활동을 시작한다 해도 예외 없이 곤경에 빠지고 만다.

3 소년 쁘레시디움의 필수 요건으로서, 적어도 단장만은 성인 레지오 단원이 맡아야 한다. 또한 단장이 결석하는 경우와 앞으로 그 소년 쁘레시디움이 확장할 경우를 대비해서 또 한 사람의 성인 단원이 간부로 봉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들 성인 단원들은, 만일 그들이 성인 쁘레시디움에 소속되어 있는 상태에서 소년 쁘레시디움의 간부가 되어 봉사하고 있다면, 그것만으로 성인 쁘레시디움 단원으로서의 주간 활동 의무를 채울 수 있다. 그러나 성인 단원들이 소년 쁘레시디움에만 소속되어 있는 경우라면, 성인 단원으로서 알 맞는 실질적인 활동을 적극 수행해야 할 것이다. 가능하다면 성인 간부는 레지오 조직을 완전히 이해하고 또한 경험이 있는 단원이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다 해도 최소한 레지오가 어린 단원들을 위한 쁘레시디움을 세운 목적을 달성하는 데 알 맞은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소년 쁘레시디움을 세우는 목적은, 당장 어떤 유익한 활동을 펴는 것을 위주로 하기 보다는, 어린 단원들을 훈련하고 영성을 불어넣어 그들이 학교 교육을 마친 후 일반 레지오 단원 대열에 참여하여 활동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것이다.

4 소년 쁘레시디움에서는 훈화(Allocutio)가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대부분의 소년 단원들은 교본에 실려 있는 내용을 스스로 깨우칠 만한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적 지도자(또는 단장)의 훈화는 항상 교본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교본에서 짤막한 부분을 뽑아 읽은 후 모든 단원이 충분히 이해 할 수 있도록 자세하고 쉽게 설명해야 한다. 이처럼 주회합 때마다 교본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룬 다음에는 다시 처음부터 되풀이한다. 그러나 소년 단원으로 있는 기간은 매우 빨리 지나가기 때문에, 한 단원이 교본을 두 번 반복할 만한 기회는 그리 많이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훈화 내용이 충실하지 않으면 기회를 놓치게 되어 돌이킬 수 없는 손실을 보게 된다.

5 교본을 부록 10 [신앙 공부]에서 제시하는 방법에 따라 체계적으로 연구하면 ‘학교 숙제’ 같은 느낌이 들지 않고 매우 유익한 공부가 될 것이다. 이는 장차 성인 레지오의 기둥이 될 소년 단원들을 훈련시키는 가장 훌륭한 방법이기도 하다.

6 성인 쁘레시디움이 펴는 활동은 소년 쁘레시디움에는 맞지 않는 것도 있으므로, 소년 단원 각자의 능력에 알 맞는 실질적인 활동거리를 매주 마련하는 능숙한 솜씨가 필요하다. 그러나 상당수의 소년 단원들은 성인 단원의 활동으로 여길 만한 활동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그러므로 이미 16세에 도달한 소년 단원에게는 성인 단원들이 활동으로 여기지 않을 정도의 하찮은 활동을 배당해서는 안 된다. 우선 쁘레시디움은 다양한 활동거리를 마련해야 한다. 다양한 활동을 통해서 많은 가르침을 얻기 때문이다. 다만 단원 한 사람이 한꺼번에 모든 활동을 할 수는 없으므로, 동료 단원이 하는 활동을 서로 보고 배우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이렇게 하면 쁘레시디움의 회합도 더욱 흥미롭게 진행되는 효과를 얻게 된다.

7 소년 단원은 일주일에 적어도 한 시간의 활동, 즉 성인의 절반에 해당하는 활동을 하면 된다.

8 소년 단원들에게 적합한 활동의 예는 다음과 같다.

(가) ‘기적의 패’를 나누어 주는 일. 주회합 때마다 단원들에게 기적의 패를 일정하게 하나 또는 두 개씩 나누어 준다. 단원은 이 패를 성모님의 군사로서 적군에게 가장 큰 타격을 주는 탄약으로 삼아, 가능한 한 신자가 아닌 사람이나 또는 신앙 생활을 태만히 하는 신자에게 나누어 준다. 이 활동은 단원들로 하여금 여러 가지 생각을 떠올리게 하며, 동시에 희생의 가치를 알게 해 준다. 단원들에게는 예상되는 질문에 대답하는 방법과 접촉을 시작할 때 이 패를 이용하는 요령 등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나) 협조단원을 모집하는 일. 이 활동은 모집한 협조단원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고, 주기적으로 방문하여 꾸준히 기도할 수 있게 돌보는 일이다.
(다) 가톨릭 전례 및 행사에 참석하도록 인도하는 일. 가령, 매일 미사 참례나 신심 행위 또는 신심 단체에 참여하는 일, 기도회 등 가톨릭의 신심 단체에 매주 한 사람씩 가입하도록 활동을 배당한다.
(라) 어린이들을 미사 또는 다른 성사에 참여시키는 일
(마) 미사 복사
(바) 어린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거나 교리 반에 안내하는 일
(사) 입원 중이거나 사회 복지 시설에 수용되어 있는 어린이 또는 일반 가정의 어린이를 찾아 보는 일
(아) 환자나 시각 장애인 등을 방문하여 그들이 필요로 하는 일을 돕는 일

9 모든 소년 쁘레시디움은 예외 없이 위의 마지막 세 가지 활동(바, 사, 아 항목)에 각각 적어도 두 명의 단원을 배치해야 한다. 이 세 가지 활동은, 올바르게만 실시된다면, 소년 단원들에게 매우 귀중한 훈련의 기회를 주며, 쁘레시디움의 다른 활동에 대해서도 단원 스스로 알 맞은 기준을 세울 수 있게 해 준다.

10 소년 단원은 성인 쁘레시디움이 파견한 성인 단원과 함께 한 조를 이루어 활동할 수 있다.

11 교내 쁘레시디움의 경우, 단원들에게 교외의 활동을 배당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다만 교내의 모든 일에 책임이 있는 교장이 학생들의 교외 활동으로 다른 부작용이 따르지 않을까 염려할 수도 있다. 그러한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해 볼 필요가 있다.

(가) 만일 단원들이 학교 밖에 있는 소년 쁘레시디움에 소속되어 있다면, 그들은 학교 밖에서 똑같은 활동을 통상적으로 수행할 것이다.
(나) 청소년들의 장래는 어떤 훈련을 쌓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만일 지금 청소년들에게 자유를 주지 않는다면, 그들은 얼마 안 가서 얻게 될 무제한의 자유에 대비하는 훈련은 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교외 활동은 학교와 레지오라는 각기 다른 두 단체의 규율로 동시에 관리되기 때문에, 단원들의 장래를 위해서 매우 이상적인 예비 훈련이 될 것이다.

12 방학 중에 학생들이 고향에 내려가기 때문에 그 기간 동안 회합을 열 수 없는 학교의 경우에도 쁘레시디움을 세울 수가 있다. 방학 동안 단원들은 고향에 있는 쁘레시디움에서 활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13 소년 쁘레시디움의 성인 간부는 개인 성화가 레지오의 주목적일 뿐만 아니라 레지오 활동의 원천이 된다는 사실을 단원들이 잘 깨닫도록 해주어야 한다. 이를 위해 쁘레시디움은 단원들로 하여금 쁘레시디움이 정한 지향에 따라 기도하고 희생하는 정신을 기르도록 격려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영성 수련을 활동의 의무로 배당해서는 안 되며, 또한 회합 때 보고를 하게 해서도 안 된다. 다시 강조하는 바이지만, 영성 수련은 활동이 될 수 없으며, 그것은 단지 행동단원의 활동에 덧붙여서 수행하는 부수적인 신심 행위일 따름이다.

14 단원들은 활동 보고를 준비하는 데 특별한 정성을 쏟아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성인 간부에게서 보고하는 방법을 열심히 배워야 한다. 소년 단원들의 활동은 대개 그 성질상 흥미롭고 상세한 보고 내용이 그리 많지 않다. 그러므로 회의 진행을 재미있고 다채롭게 하기 위해서 특별한 노력이 따라야 할 것이다.

15 성인 레지오는 때때로 어렵고 위험한 환경에서도 원대한 활동 계획을 실천에 옮기며 주님의 싸움에 동참하고 있다. 소년 단원들이 이러한 성인 레지오와 조직 안에서 일치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면, 그들이 비록 활동 면에서 다소 부족하다 해도 활기를 잃지 않을 것이며, 젊은이다운 상상력을 발휘하여 더 큰 일치를 위해서 노력하게 될 것이다. 이는 레지오 조직 안에서 모든 구성 요소들이 서로 돕고 보완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하나의 본보기이다. 이렇게 해서 종교를 ‘억지로 주어진 생활 습관’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하고 있는 젊은이들의 생각은 달라지게 되고, 또한 그들을 통하여 다른 많은 젊은이들도 생각을 바꾸기에 이른다. 감수성이 예민한 나이에 종교에 대한 그릇된 생각이 일단 뿌리를 내리게 되면, 그 해악은 어떠한 훌륭한 학문의 업적으로도 보상받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16 소년 단원들에게는 수련 기에 관한 규정을 적용하지 않으며, 레지오 선서도 없고, 성인 꾸리아에도 참석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밖에 레지오의 기도문, 조직과 회합, 비밀 주머니 헌금 등에 있어서는 성인 쁘레시디움의 경우와 똑같다.
소년 단원에서 성인 단원으로 올라갈 때에는 반드시 정상적인 수련 기를 거쳐야 한다.

17 소년 쁘레시디움에서 봉사하는 성인 단원이 성인 쁘레시디움에서 선서를 한지 않았다면, 자신이 맡고 있는 소년 쁘레시디움에서 선서를 해야 한다. 소년 단원들은 그들이 눈 앞에서 펼쳐지는 선서 의식을 보면서 깊은 감명을 받게 될 것이며, 그들 자신이 장차 선서를 통하여 완전한 레지오 단원이 되는 날을 고대하게 될 것이다.

18 어린이들도 단원이 될 수 있도록 기도문을 바꾸어야 한다는 제안이 가끔 있었다. 그러나 이 제안은 받아들일 수 없다. 이 장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소년 단원은 성인 단원과 거의 같아야 하기 때문이다. ‘소년’이라는 말이 ‘사소함’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소년 단원들에게 활동과 신심이라는 높은 이상을 제시해 줌으로써 그들이 다른 젊은이들을 이끌어 가는 역할을 맡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레지오 기도문을 가르쳐 주어도 그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어린이들이 아직 이 수준에 도달할 수는 없는 일이다.

19 이와 비슷한 제안으로서 소년 단원에게 알 맞는 쉬운 교본이 있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이에 대해서는 제33장 [레지오 단원의 의무] 10절을 참고해 주기 바란다.

20 소년 레지오가 발전하려면 단원들의 부모나 관계된 모든 어른들의 관심과 협력이 뒤따라야 한다. 소년 단원으로 봉사하는 젊은이들은 몽포르의 루도비코-마리아 성인의 예언대로, ‘앞으로 닥쳐올 가장 위험한 시대에 세속과 마귀와 타락한 사람들에 대적할 예수님과 성모님의 용감한 군단’으로 훈련되고 있는 중이다. 도르래나 지렛대처럼 원리와 구조가 간단한 기구가 힘을 여러 배로 늘리듯이, 레지오 마리애는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이 단원들 안에서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게 하며, 그 힘이 그리스도 신앙이 목표로 하는 모든 일의 원동력이 되게 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그 힘은 때때로 즉시 효력을 내기도 하는데, 소년 단원들로 하여금 수업시간이나 노는 시간, 집에 있는 시간이나 그 밖의 모든 시간을 쁘레시디움을 통해 습득한 레지오 정신으로 생각하고 처신하며 행동하는 실천적 이상으로 가득 차게 한다. 그리하여 어린 단원들은 모든 사물을 새로운 안목으로 바라보기 시작하며, 이로써 그들은 다음과 같은 새로운 세계관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가) 교회에 대하여: 소년 단원들은 자신이 교회를 지키는 군인이 되었음을 인식하고, 이 교회의 싸움에서 자신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와 교회 발전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게 된다.
(나) 일상 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하여: 한 점의 작은 불빛이 온 방을 밝히듯, 레지오 단원으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작은 임무가 일주일 내내 새로운 의미를 불어넣어 준다. 그리하여 소년 단원들은 쁘레시디움을 통하여 배우고 습득함 바를 일상 생활 속에서 실천하고자 노력한다.
(다) 이웃에 대하여: 이웃 안에서 그리스도를 뵙고 섬기라는 가르침을 배운 대로 노력한다.
(라) 가정에 대하여: 나자렛 성가정의 분위기가 자신의 집안에 감돌게 하기 위해 노력한다.
(마) 집안이나 학교에서: 성모님을 닮으려는 레지오 정신으로 남을 돕는다. 무슨 일이든 피하지 않고 찾아 나서며, 사람들이 가장 꺼려 하는 일을 택하여 세세한 데까지 정성을 쏟는다. 늘 상냥하고 신중하며, 항상 예수님을 위하여 일하고, 예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느낌을 지니게 된다.
(바) 학교에 대하여: 어느 정도 레지오의 이상이 몸에 배게 되면, 학교나 선생님 또는 교과서나 학칙, 공부 등을 바라보는 눈이 새로워진다. 따라서 소년 단원들은 학교 생활을 통해서 다른 학생들이 얻지 못하는 것을 얻게 된다. 그러므로 설령 레지오가 공부 시간을 빼앗는 것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 대개 이것이 자녀들의 레지오 입단을 꺼리는 부모님들의 주장이지만 – 사실은 얻는 것이 훨씬 크다.
(사) ‘의무’와 ‘규율’에 대하여: 이 두 가지는 대단히 중요한 요소이지만,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용어가 주는 딱딱한 느낌 때문에 이를 기꺼이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러나 이 두 용어를 각각 ‘성모 마리아’와 ‘레지오’라는 두 낱말과 연관시켜 생각하게 하면 그들은 즉시 알아듣고 아름다움마저 느끼게 된다.
(아) 기도에 대하여 : 기도가 한낱 습관적으로 바쳐야 하는 일거리가 아니라 영신적인 힘의 원천으로서 활동을 뒷받침하여, 레지오와 전체 교회의 창고에 영신적 보화를 쌓는 행위임을 깨닫게 된다.

21 소년 쁘레시디움을 바르게 운영함으로써 청소년들에게 최대의 교육적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주장은 위의 설명만으로도 지나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소년 쁘레시디움은 단원들에게 그리스도 신자로서 갖추어야 할 모든 인격적 특성을 길러 준다. 또한 소년 레지오는 신심이 깊고 신뢰할 수 있는 젊은이들을 만들어 내는 거푸집의 역할을 하여, 부모와 어른들에게 기쁨을 주고, 교회의 기둥이 되는 훌륭한 인재를 많이 배출해 낼 것이다.

22 그러나, 만일 소년 쁘레시디움이 단원들에게 알 맞은 활동을 제시하지 못하거나 규율을 소홀히 한다면, 위에 설명한 모든 계획과 희망은 수포로 돌아간다. 그런 쁘레시디움은 불량품을 만들어 내는 거푸집이며, 단원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레지오에 대하여 잘못된 인식만을 심어줄 뿐이다. 그런 쁘레시디움은 차라리 없는 편이 레지오에 도움이 된다.

“젊은이들을 단순히 교회의 사목적 관심의 대상으로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실제로 젊은이들은 복음화의 주역이며 사회 개혁의 동참 자로서 교회를 대신하여 행동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또 그렇게 행동하도록 격려해 주어야 한다. 젊음은 강렬한 ‘자기’ 발견과 ‘인생 선택’의 시기이다. 소년 시절은 ‘몸과 지혜가 날로 자라면서 하느님과 사람의 총애를 더욱 많이 받아야 할'(루가 2, 52) 성장의 시기이다.”(평신도 그리스도인 46)

2 신학교 쁘레시디움

“새 사제들에 관하여 특히 중시해야 할 일은 그들의 사목 생활에서 평신도와의 협조가 반드시 필요함을 알리고 미리 준비시키는 일입니다. 공의회는 ‘사제들은 평신도의 말에 귀를 기울여 평신도의 소원을 형제처럼 생각해 주고, 그들이 사회 여러 분야의 활동을 통해서 습득한 경험과 적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최근에 열린 시노드(synod)에서도 평신도에 대한 사목적 배려를 촉구한 바 있으며 ‘신학생들은 평신도, 특히 젊은이들에게 여러 길의 성소가 있음을 제시하고 소개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 무엇보다도 젊은 평신도들이 그들에게 주어진 소명 안에서 복음의 빛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도록 가르치고 도와 주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평신도들의 임무를 인정하고 그들의 활동에 경의를 표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교황 요한 바오로 2세 : 현대에서의 사제 양성 1992년)
바야흐로 모든 사제가 레지오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될 때가 왔다. 레지오에 대한 학문적 지식은 실제 단원 생활을 체험함으로써 얻는 지식에 비하면 미약할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신학교나 수도원 안에 쁘레시디움을 세우는 일을 매우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단원들은 쁘레시디움에서 레지오의 이론과 실천에 대한 토대를 철저히 닦아, 이른바 완벽한 신앙적 행동 철학을 확립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장차 그들이 본당 사목이나 해외 선교 사업에 진출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신자들을 쉽사리 동원하는 방법을 잘 아는 전문가가 되어 있을 것이다.
신학교에 설립하는 쁘레시디움은 특히 다음과 같은 사항을 유의해야 한다.

(가) 주회합을 진행할 만한 충분한 시간을 낼 수 있어야 한다. 한 시간 이내에 주회합을 모두 마치기는 어려우므로, 좀더 많은 시간을 낼 수 있도록 여러모로 힘써야 한다. 이 교본에 설명되어 있는 회합 순서를 정확히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나) 주회합에서 다루어야 할 가장 중요한 사항은 실질적인 활동을 배당하는 일이다. 실질적인 활동 없이 쁘레시디움은 바르게 존립하지 못한다. 신학생으로서 시간이 한정되어 있고, 학교 안에서 적절한 활동거리를 찾기란 쉽지 않은 일이며, 또한 교본 연구에 특히 비중을 두어야 하는 점을 감안하여, 주간 활동 의무는 적어도 한 시간으로 한다. 다양한 활동을 펴기는 어렵겠지만, 그러한 단점은 풍부한 정신으로 보완해야 한다. 배당 받은 활동은 그것이 어떠한 것이든지 성모님과 일치해서 수행한다는 점에 유념하여 완벽하게 이끌어야 한다.
활동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는 신학교라는 특수 사정을 고려해야겠지만, 다음과 같은 활동이 참고가 될 것이다. 이를테면 가정이나 병원 및 사회 복지 시설 방문, 개신교 신자나 예비신자를 지도하는 일 등을 들 수 있다. 어떤 활동을 정하든, 신학교 당국이 세운 사제 양성 계획과 연관되도록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다) 쁘레시디움 주회합에서 판에 박은 듯한 활동 보고를 해서는 안 된다. 보고는 생동감이 넘치고 흥미로워야 한다. 이 점에서 성공하면 신학생 단원들은 보고하는 기술이 뛰어나게 향상되어, 장차 사제가 되어 쁘레시디움을 지도할 때 그 기술을 가르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게 된다.
(라) 신학교의 규율을 확립하기 위한 임무나 단순히 감독하는 성격의 활동을 배당해서는 안 된다. 그러한 활동은 동료 신학생 사이에 레지오 단원이나, 더 나아가서는, 레지오 자체에 대한 인기를 떨어뜨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마) 단원 가입은 전적으로 자발적이어야 한다. 강제성을 띠는 기미가 보인다든지 또는 이를 신학교의 관례로 여기게 되면, 달갑지 않은 결과를 빚게 될 것이다. 레지오 단원 가입의 자발성을 강조하는 뜻에서 자유 시간을 이용하여 쁘레시디움 회합을 갖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바) 쁘레시디움 회합과 활동이 신학교의 일과나 규칙에 조금이라도 지장을 주지 않도록 운영해야 한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레지오의 행동단원이 갖추어야 할 조건을 변경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일단 변경하기 시작하면 쁘레시디움의 설립 목적을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신학교 쁘레시디움이 성실하게 운영되기만 한다면, 실제로 성소나 학습 진도 또는 규율 확립 등의 측면에서 신학생들의 태도가 한층 향상될 것이다.

제37장 활동의 예와 방법

이 장에서는 레지오가 활동 의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서 경험상 특히 풍성한 결실을 거둘 수 있다고 생각하는 방법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 방법들은 다만 권장하는 활동 방법일 따름이며, 활동의 성격이나 내용에 따라 다른 특별한 방법을 사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레지오는 모험이 따르는 어려운 활동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레지오는 그러한 활동을 탄복할 정도로 잘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보잘것없는 활동을 펴게 되면 레지오의 정신에 바람직하지 않은 역효과를 낼 뿐이다.
원칙적으로 모든 쁘레시디움은 영웅적이라고 일컬을 만한 어떤 활동을 펴고 있어야 한다. 처음 활동을 시작할 때에 진지한 자세로 모험적 활동을 해보겠다는 뜻을 지닌 단원 두 사람 정도를 확보하는 일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두 단원에게 활동을 배당하고 그들의 활동이 돋보이게 되면, 동료 단원들은 그들의 모범을 본받아 자연스럽게 같은 방향으로 따라 나서게 될 것이다. 이 방법이 어느 정도 정착되면, 처음 활동을 시작했던 두 명의 용기 있는 단원은 또다시 다른 새로운 영웅적 활동을 찾아 나서도록 한다. 이와 같이 활동 분야를 점진적으로 개척하는 것이 단원들의 수준을 끊임없이 끌어올리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초자연적 영신 세계에서는 자연적 한계라는 것이 있을 수 없으며, 하느님께 더 가까이 나아갈수록 시야는 더욱 넓게 트이고 가능성은 더욱 커진다.
그러나 이에 반대하는 의견이 있을 수 있다. 신앙을 위해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는 것에 대해 사람들은 부담스럽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말도 안 된다’ ‘신중하지 못하다’고 외쳐댄다. 그러나 이 세상이 그처럼 무기력한 사람들로만 채워져 있는 것은 아니므로 레지오 단원들은 의기소침할 필요가 없다. 영혼들을 돕기 위해 활동을 펼쳐야 하고, 크리스천 공동체의 정신을 세상 안에 실현시키기 위해 높은 이상을 설정할 필요가 반드시 있다면, 이 일을 성취하기 위해 먼저 취해야 할 태도는 조심성보다는 용기이다. 피에 추기경(Cardinal Pie)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중한 태도가 판을 치면, 용기 있는 태도는 도저히 발 붙일 곳이 없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지나치게 신중하기만 하다가 결국 죽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지나치게 조심만 하다가 레지오를 죽여서는 안 된다.

1 본당에서의 사도직 활동

레지오 단원들은 다음과 같은 활동을 통해 본당 안의 참된 공동체 정신을 높이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가) 가정 방문 (다음 2절을 참조할 것)
(나) 미사 드릴 사제가 없는 지역에서 주일과 의무 축일에 준 전례 의식(말씀의 전례)을 거행하는 일
(다) 교리 반 지도
(라) 몸이 성하지 않은 사람들이나 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 또는 노인들을 찾아가 돌보고, 필요하다면 사제가 직접 방문하도록 주선하는 일
(마) 철야 기도회나 장지에서 묵주기도를 주도하는 일
(바) 신자들이 가톨릭 단체나 본당 단체에 회원으로 가입하도록 권유하고 기존 회원이 이탈하지 않도록 돌보는 일
(사) 본당인 주관하는 모든 사도직 활동이나 선교 활동에 협력하여 영혼들을 교회의 보호 망 안으로 이끌어 들여, 개인과 공동체가 다 함께 안전하도록 만드는 일

이 밖에도 여러 다양한 본당 활동 중에는 중요하기는 하지만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성인 단원들의 활동으로 간주할 수 없는 것들도 있다. 그런 종류의 활동으로는 제대회 및 보(補) 미사회, 성당 청소, 미화 작업, 전례 협조, 미사 복사 등이다. 이러한 활동들은 성인 단원의 활동 의무를 채워 주지는 못하지만, 참가하는 신자들에게는 축복을 받을 수 있게 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레지오 단원들은, 필요하다면 이러한 의무를 맡아 할 수 있는 신자들을 조직하고 관리하는 일에 나설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레지오 단원들은 영혼들을 직접 접촉하는 좀 더 어려운 다른 일들에 전념할 수 있게 된다.

“저도 은총의 어머니처럼 하느님을 위하여 일하고 싶습니다. 성서에 나오는 마카베오 사람들처럼, 저 자신과 온 세상의 구원을 위해 저의 수고와 희생을 바쳐 하느님 사업을 도와 드리고 싶습니다. 마카베오 사람들은 거룩한 열성이 넘치는 용기로 자기 자신들만을 구하려고 하지 않고, 될 수 있는 한 많은 동포들을 구하려고 힘썼습니다.”(그라트리 / Gratry : 성모 성월)

2 가정 방문 활동

가정 방문은 비록 레지오가 가장 먼저 시작한 활동 분야는 아니지만 전통적으로 즐겨 수행하고 있는 활동이며, 어디에서나 할 수 있고 또한 가장 큰 수확을 거둘 수 있는 활동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가정 방문 활동은 레지오의 특성을 잘 살릴 수 있는 활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단원들은 가정 방문을 통하여 수많은 사람들과 접촉할 수 있고, 교회가 모든 사람들과 모든 가정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전할 수가 있다. “교회의 사목적 관심이 단지 주변에 있는 몇몇 신자 가정에만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의 마음과 조화를 이루면서 저변을 확대하고, 모든 가정들 특히 어려움에 처해 있거나 혼인 조당 등이 비정상적인 처지에 있는 가정들을 위해서 더욱 적극적인 관심을 보여야 한다. 교회는 모든 가정에 진리, 선(善), 이해, 소망의 말씀을 전하고, 역경에 처해 있는 가정에는 깊은 위로를 베풀어야 한다. 이로써 교회는 모든 가정을 공평하게 도와 주어, 창조주께서 ‘한 처음에’ 의도하셨고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구속 은총으로 새롭게 하신 가정의 모형에 가깝게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회칙 ‘가정 공동체’ 65)
쁘레시디움은 가정에 접근할 수 있는 전략을 구상해야 한다. 가정을 방문하는 레지오 단원들은 우선 자기 소개를 한 후 찾아온 목적을 밝힌다. 가정 방문을 통한 활동으로는, 다음 절에서 설명하고 있듯이, 예수 성심상을 모시도록 권유하거나 본당의 교세를 조사하거나 교회 출판물을 보급하는 일 등이 있다.
이 활동을 통하여 신자 생활을 잘하고 있는 사람들을 비롯하여 모든 사람들을 레지오의 사도직 활동 영역 안으로 끌어 들일 수가 있다. 이때 가톨릭 신자가 아닌 개신교인들이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 또는 냉담 교우들과도 접촉하게 될 것인데, 앞서 언급한 혼인 조당에 걸려 있는 사람들이나 교리 반에 등록 시켜야 할 사람들, 외로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나 몸이 성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특별히 관심을 쏟아야 한다. 즉, 모든 가정에 빠짐없이 봉사한다는 마음으로 돌보아야 하는 것이다.
레지오 단원이 가정 방문을 할 때에는 무엇보다도 태도가 겸손하고 순수해야 한다. 방문 받는 사람들 중에는 단원들이 찾아와서 잔소리를 늘어놓을 것이라고 잘못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오해를 떨쳐 버릴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은 그들에게 먼저 말을 많이 하는 것보다는 점잖은 태도로 참을성 있게 우선 그들의 말을 들어 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단원들도 곧 그들에게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자연스럽게 찾게 될 것이다.

“평신도들이 펴는 복음화 사도직 활동 가운데 가정 복음화 활동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교회의 역사상 여러 번에 걸쳐서, 그리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도 역시, 가정은 ‘가족 교회(domestic church)’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받았다. 이 이름은 신자 가정이라면 어느 가정에서나 교회의 모습을 지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정은 교회처럼 반드시 복음을 전파하고 복음이 빛을 발하는 곳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사명을 의식하고 있는 가정은 그 구성원 모두가 복음화 활동에 나서고 있는 것이며 동시에 복음화되고 있는 곳이다.
부모는 자녀들에게 복음을 전해 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녀들이 복음적으로 생활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자녀들로부터 복음을 바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가정은 다른 많은 가정뿐만 아니라 자신의 가정이 속한 고장 전체를 복음화한다. 관면 혼배로 이루어진 가정 역시 자녀들에게 그리스도를 알려야 할 의무가 있다. 이는 신자인 부모가 자신이 받은 세례성사를 완성하기 위함이다. 더욱이 이런 가정은 부부간에 우선 신앙의 일치를 이루어야 하므로 다른 가정보다도 더 어려운 임무를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현대의 복음 선교 71)

3 가정에 예수 성심상 모시기

가정에 예수 성심상을 모시는 신심을 전파하는 활동을 펴게 되면, 이 활동이 여러 가정과 남다른 우정을 트고 나누는 길임을 알게 될 것이다.
이 활동의 필요성을 뚜렷하게 밝혀 주는 목표와 그 실천 방법은 제39장 [레지오 사도직의 주안점]에 실려 있는데, 할 수 있는 한 어느 한 가정이라도 건너뛰어서는 안 되며,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가족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다 영신 생활을 한 단계 한 단계 높여 갈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이고 끈기 있게 돌보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 활동을 배당 받은 단원들은 예수 성심께서 허락하신 열 두 가지 은총을 스스로 충만 히 입도록 해야 한다. “나는 사제들에게 아무리 굳어진 마음이라도 감동시키는 은총을 내릴 것이다.”(열 번째 은총)라고 말씀하셨으니, 이는 사제의 대리자로 방문하는 단원들에게도 해당되는 주님의 말씀이다. 레지오 단원들은 이러한 은총에 힘입어 철저한 확신을 가지고 ‘희망이 없는 사람’이라고 낙인 찍힌 대상자를 만나 활동을 하기 위해 나서야 한다.
예수 성심을 공경하는 신심을 전파하기 위한 방문 활동은 사람들과 사귀는 방법들 중에 가장 훌륭한 결실을 맺을 수 있는 방법이다. 처음 방문할 때부터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정성을 전달하여 무리 없이 친교를 맺을 수 있게 된다면, 그 후에도 계속 방문할 수 있는 길을 터놓게 되어 레지오 활동은 수월하게 전개될 것이다.
성모님의 역할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다스리시도록 도와 드리는 데 있으므로, 성모님의 군사들이 예수 성심상을 각 가정에 모셔다 드리는 일은 (성령의 특별한 은총을 받게 되므로) 지극히 합당한 활동이다.

“가정을 사랑한다는 것은 가정의 가치와 능력을 알고 항상 훌륭하게 발전시켜 나가는 것을 말한다. 가정을 사랑한다는 것은 가정에 위협이 되는 위험 요소와 악을 찾아내어 극복하는 것을 말한다. 가정을 사랑한다는 것은 가정이 발전할 수 있는 좋은 환경을 만들려고 노력하는 것을 말한다. 현대의 그리스도 신자들의 가정은 어려운 일들이 싸여 감에 따라 고민하고 체념에 빠지기 쉽다. 따라서 가정 그 자체에 대한 신뢰, 가정이 지니는 본성과 모든 가정에 내리는 은총으로 인한 풍요로움, 그리고 하느님께서 가정에 맡기신 사명 때문에 가정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야 하는 이유를 확인시켜 주는 것은 훌륭한 사랑의 실천이다. ‘오늘의 가정은 진정 그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 가정은 그리스도를 따라야 한다.'(Acts of the Apostolic See 72)” (가정 공동체 86)

4 본당 교세 조사

이 활동은 돌보아야 할 가톨릭 신자들이나 쉬는 교우들, 이른바 교회와 모든 관계를 끊은 사람들을 접촉하는 매우 좋은 방법이다. 이 조사 활동은 사제의 이름으로 하며, 집집마다 방문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방문을 받은 사람들은 신앙 문제에 관한 여러 가지 질문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대부분 기꺼이 대답을 해준다. 방문을 하다 보면 사제와 레지오 단원들이 장기적으로 관심을 쏟아야 할 대상자들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발견은 단지 시작에 불과하며, 그것도 매우 손쉬운 시작일 따름이다. 이렇게 찾아낸 사람들 하나하나를 교회로 되돌아오게 하려면, 하느님께서 이 일을 레지오에 맡기신 사명으로 기쁘게 받아들여 불굴의 정신으로 추진해 나가야 한다. 비록 그 싸움이 아무리 오래갈지라도, 아무리 힘이 든다 하더라도, 아무리 반발이 심하더라도, 그 사람의 마음이 아무리 굳어져 있고 아무리 절망적으로 보인다 해도, 레지오는 하느님께서 맡기신 일을 완수하는 데 실패해서는 안 된다.
이에 덧붙여 강조할 것은, 쉬는 교우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사랑으로 대해야 한다는 점이다.

“교회가 사도직 사업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우리는 공적인 사명을 부여 받고 있으며, 하느님께서 이끌어 주시는 활동의 방법과 각자가 지닌 자신만의 독특한 무기를 가지고 있다. 이 말은 우리가 영혼을 구하는 활동을 할 때 성모님의 이름으로, 성모님의 보호를 받으며 하게 된다는 말이며, 따라서 사도직 활동을 통해서 만나는 모든 영혼들이 성모님에 대하여 어린아이와 같은 순진한 사랑으로 가득 차게 하도록 모든 힘을 기울여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마리아회 편찬 : 성모학 소론)

5 병원 방문(정신병원 포함)

레지오가 처음으로 착수한 활동은 극빈자 치료를 목적으로 운영하는 병원을 찾아가 봉사한 것이었다. 한동안은 이것이 유일한 활동이었는데, 이 활동은 갓 태어난 레지오 조직에 하느님의 은총이 넘치게 만들어 주었다. 그러므로 레지오는 모든 쁘레시디움이 이 활동에 늘 각별한 관심을 가져 주기를 바라고 있다. 다음의 글은 레지오 초창기에 쓰여진 것인데, 이 활동의 성격을 특징 지워 주는 정신이 어떠한 것인가를 잘 드러내고 있다.
“한 여성 단원이 이름을 부르자 그 단원은 활동 보고를 시작했다. 활동 내용은 병원 방문에 관한 것이었다. 보고는 짤막했지만 환자들과 매우 친숙한 사이가 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단원은 다소 어색해 하면서 환자들이 이미 자신의 친형제 자매들의 이름까지 모두 알고 있다고 말했다. 뒤이어 공동 방문자의 보고가 있었는데, 이로써 두 단원이 짝을 지어 활동했음을 할 수 있었다. 조(組)활동은 사도직 활동의 모범을 보여 줄 수 있을 뿐 아니라, 매주 한 차례 실시하는 병원 방문 활동을 미루지 않고 할 수 있게 만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보고는 계속되었다. 어떤 병동에서 새로운 일이 생겼기 때문에 보고가 길어진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활동 보고는 짧고 간결했다. 재미있는 내용도 많았고 감동을 주는 이야기도 많이 있었다. 환자들을 통해서 단원들이 실제로 어떤 분을 만나 뵐 수 있었는지를 뚜렷이 깨닫고 있었음이 활동 보고를 통해서 여실히 드러났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단원들은 가장 보잘것없고 불쌍한 이웃들을 위해서 이렇게 선뜻 나서서 스스럼없이 활동을 하고 있지만, 아마도 자신을 위해서라면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디 때문이다. 단원들은 환자들을 일일이 돌아보면서 자상하게 보살필 뿐만 아니라 편지를 대신 써 준다든지, 친구나 친척을 대신 찾아가 준다든지, 심부름을 해준다든지 하는 등의 많은 일을 해준다. 아무리 귀찮거나 사소한 부탁이라도 기쁜 마음으로 들어 준다.
회합 중에 편지 한 통이 낭독되었다. 어떤 여자 환자가 자신을 방문해 주는 두 레지오 단원에게 보낸 편지였는데, 그 글 중에 ‘두 분이 제 삶 안으로 들어오신 후부터’라는 구절이 있었다. 마치 통속 소설에 나오는 구절 같아서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나는 병원 침대에 외롭게 누워 있는 사람에게 이 말이 얼마나 큰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인가를 깨닫고 나서 가슴이 뭉클해졌다. 또한 이 이야기가 어떤 한 사람의 이야기이지만, 결국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조직의 힘은 참으로 놀랍다. 레지오는 사람들을 한 곳으로 불러 모아 놓은 다음 그들에게 천사와 같은 임무를 주어, 세상 사람들이 돌보지 않는 수없이 많은 생명들에게 파견하는 참으로 놀라운 힘을 지니고 있다.”(미카엘 크리든 신부 / Fr. Michael Creedon 꼰칠리움 초대 영적 지도자)
병원 방문 활동의 목적은 환자들에게 그들이 겪는 고통의 참 된 의미를 일깨워 주고 올바른 정신으로 고통을 이겨내도록 도와 주는 데 있다.
아픈 이들은 견디기 힘든 고통을 통해서 실제로 그리스도를 닮는 기회를 맞게 되므로, 고통은 그 자체로서 큰 은총이 된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어야 한다.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St. Teresa of Avila)는 “하느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성자의 삶을 우리도 살도록 허용해 주셨으니 이보다 더 큰 은혜가 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사람들로 하여금 이러한 고통의 은혜를 이해하도록 만드는 일은 어렵지 않으며, 일단 깨닫게 되면 고통은 반으로 줄어든다.
베드로 알칸타라 성인(St. Peter of Alcantara)은 오랜 기간 동안 고통스러운 병을 훌륭하게 견디어 낸 어떤 환자의 놀라운 인내에 탄복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이 성인의 말을 환자들에게 자주 들려주는 것도 그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당신은 정말 복 받은 분이십니다. 당신이 그 큰 고통을 참아 내면서 얼마나 큰 영광을 쌓아 올렸는지를 하느님께서 내게 보여 주셨습니다. 당신은 다른 사람들이 단식과 철야 기도와 고행 그리고 그 밖의 여러 가지 힘든 수행으로 얻을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공로를 세웠습니다.”
이렇게 환자는 고통을 참아 낸 공로로 영신적 보화를 얻게 되는데, 이 보화를 사용할 때는 폭넓게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 더구나, 그러한 보화를 환자 자신만을 위해서 쌓아 둔다면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레지오 단원은 환자들에게 ‘고통의 사도직’에 대해서 설명해 주어야 한다. 환자들로 하여금 온 세상의 영신적인 문제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도록 가르쳐, 그들이 겪는 고통으로 얻은 보화를 필요한 모든 사람들에게 봉헌하도록 일깨워 주어야 한다. 환자들이 겪는 고통은 그 즉시 기도가 되고 보속이 되기 때문에 이루 말할 수 없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하느님께 향한 손들은 적을 직접 공격하는 손들보다 더 많은 적군을 쳐부순다.”고 보쉬에(Bossuet)는 부르짖는다.
만일 환자들이 자기가 무엇을 위해 기도하는지 알게 된다면, 더욱더 꾸준히 기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특별히 그들의 기도가 필요한 일이나 활동(특히 해당 레지오 단원이 현재 수행중인 활동)을 그들에게 명확하게 설명해 주는 것도 중요하다.
우선 환자들을 협조단원으로 만들고, 그 다음 아듀또리움 단원이 되도록 이끌어야 한다. 이러한 협조단원들이 모임을 갖도록 하면, 그들이 스스로 새 단원을 모집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 밖의 여러 가지 다른 방법으로도 환자들이 서로 도울 수 있도록 돌보아야 한다.
이와 같이 환자들이 협조단원이 될 수 있다면 행동단원이 되지 못할 이유도 없다. 이미 여러 정신병원 안에 입원 환자들만으로 구성된 쁘레시디움이 설립되어 있다. 이처럼 쁘레시디움이 병원 안에 생기게 되면 쁘레시디움은 누룩의 역할을 하여 병원에 활기를 준다. 이들 단원들은 다른 환자들을 대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시간이 충분하므로, 이로써 그들 자신도 수준 높은 영성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치료 효과나 병세 회복 면에서 부진 했던 환자들이 레지오에 입단하여 활동함으로써 뚜렷한 진전을 보이기 때문에 어느 곳에서나 병원의 의료진들은 이를 인정하며 권장한다.
환자들이 이처럼 새로운 인생관을 가지게 되면, 지금까지 자기는 한낱 쓸모 없고 부담스러운 존재라는 생각으로 참담한 처지에 빠져 있다가 하느님께서 자신들을 쓸모 있는 존재로 여기신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최고의 기쁨을 맛보게 된다.
레지오 단원들이 활동을 통하여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 고통의 일부를 떠맡고 있는 것처럼, 환자들 역시 자신의 고통을 통하여 인간 세상의 고통의 일부를 떠맡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레지오 단원과 환자 사이에는 반드시 ‘성인의 통공’이 힘차게 작용한다. 만일 모든 사람이 자신이 지은 죄의 몫을 스스로 고통으로 짊어져야 한다면, 세상 사람 모두가 환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이 제대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 그 중 일부는 자신의 몫보다 더 많은 고통을 짊어지는 특권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눈으로 볼 수 없는 이 거래에서 레지오 단원들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 환자가 스스로 그리스도 신자로서의 사도직 임무를 수행할 수 없기 때문에 – 그리고 때로는 그러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 레지오 단원은 그가 신자로서의 자신의 몫을 병상에서 나마 다 할 수 있도록 도와 주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양자는 서로의 희생을 교환함으로써 기쁘게 은총을 나누어 갖는다. 그렇지만 이것은 수지 규형이 적당히 들어맞는 그런 평범한 교환이 아니다. 베푼 것보다 백배나 더 많이 받게 되는 그리스도교의 원리에 따라, 각자는 잃은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얻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리스도의 밀이다. 그러므로 나는 하느님의 맞갖은 빵이 되도록 사자의 이빨에 갈려 곱게 가루가 되어야 한다.’라고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성인(St. Ignatius of Antioch)은 말했다. 우리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 가운데 가장 훌륭한 십자가, 곧 가장 틀림없고 가장 거룩한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우리와 의논하지 않고 정해 주시는 십자가라는 것을 의심하지 말아라. 나자렛이라는 틀로 찍어 낸 성인들이 특히 좋아하는 이 가르침에 대한 믿음을 더욱 굳건히 하여라. 하느님께서 직접 내려 주시는 온갖 역경과 시련을 맞이하면서 하느님을 경배하고 축복하고 칭송하고 자신의 본성에 대한 혐오감을 극복하며, 마음으로부터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Fiat).’라고 외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제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나이다.(Magnificat)’라고 부르짖으면 더욱 좋을 것이다.”(마태오 크롤리-부뷔 / Mateo Crawley-Boevey)

6 가장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활동

이 활동은 가장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 즉 하숙집이나 간이 숙박 시설 또는 유치장 등을 방문하거나 레지오 단원이 상주 또는 출퇴근하면서 수용 시설을 운영하는 활동일 수도 있다.
풍부한 경험과 능력을 갖춘 단원들이 확보되기만 하면, 레지오는 즉각 그리스도의 보잘것없는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들을 위한 활동을 시작해야 한다. 이 점을 등한시 하는 경우가 자주 있어서 가톨릭의 이름을 욕되게 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길 잃은 양들을 찾아 나선 레지오가 뚫고 들어가지 못할 험난한 곳이란 있을 수 없다. 우리에게 가장 큰 장애물은 쓸 데 없이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두려움이 근거가 있든 없든 누군가는 이 일을 해야 한다. 결국 많은 기도와 조직의 보호를 확실하게 받고 있는 유능하고 훈련된 레지오 단원들이 할 수 없다면, 이 일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만일 어느 중요한 위치에 있는 레지오 조직이 단원들을 통하여 그 지역의 가장 불우한 이웃 하나하나를 확실하게 파악하고 있지 못하거나, 그들과 여러 방면에서 다양하게 접촉하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다면, 그것은 이 활동이 아직 충분히 발전되지 못한 상태임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 지역 레지오는 더욱 열심히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세상의 온갖 귀하고 값진 것들을 찾아 나서는 사람들의 열성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레지오 단원들이 불행한 사람들을 찾는데 쏟는 열성에는 비할 수 없을 것이다.단원들이 벌이는 이러한 탐색 방문 활동은 불우한 이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의 세계로 들어서는 단 한 번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 평소에 이들은 선의의 사람들에 의해서 감화를 받을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레지오 단원의 방문을 받을 수 있는 감옥이나 이와 유사한 수용 시설이 그들에게는 오히려 축복의 장소가 되는 경우가 자주 있다.
더구나 이러한 활동에 나서자면 단원들은 전투에 임하는 병사와 같은 마음가짐을 지녀야 한다. 난처한 일에 부딪치거나, 폭언으로 ‘돌팔매질’을 당하거나 또는 그보다 더 심한 횡포를 경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총알’ 같은 주먹이나 ‘대포알’ 같은 폭행이 덮칠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것들은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운 일이겠지만, 그렇다고 결코 겁을 내거나 당황해서는 안 된다. 그 동안 레지오 단원들은 성모님의 군사로서 모든 임무를 완수하겠다고 여러 번 서약했고 또 마음속으로 다짐해 왔으므로, 이제 자신의 서약이 얼마나 튼튼한지가 여기에서 입증되는 것이다.
단원들은 줄곧 이러한 싸움과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들을 찾아 나서는 일에 대해서 말해 왔다. 그러니 막상 이제 그런 사람들을 찾았는데 불평을 한다면 이치에 맞지 않는다. 못된 사람이 못된 행동을 하고 가장 악한 사람이 악한 행동을 하는데 새삼스러이 놀랄 이유가 없지 않은가?
요컨대, 특별히 어려운 상황이나 위험에 처할 때마다 레지오 단원은 ‘이제 싸움이 시작되었다!’라고 마음속으로 다짐해야 한다. 이 말은 싸움에 지친 사람들에게는 거슬리는 말이겠지만, 영혼을 구하는 싸움에 뛰어든 레지오 단원들을 굳세게 만들어, 다른 이들이 모두 단념하더라도 끈기 있게 활동을 지속하도록 용기를 북돋아 준다.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고귀한 영혼들을 구할 가능성이 있다면 그들을 위해 어떠한 대가라도 치를 용의가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떤’ 대가를 ‘누가’ 치러야 할 것인가? 이에 대한 대답은 이렇다. 만일 어떤 ;위기를 맞아 평신도들이 나가 싸워야 할 때, 성모님의 군사라는 이름에 맞갖은 활동에 몸을 바쳐 온 레지오 단원들이 아니라면 나설 사람이 누구이겠는가? 만일 평신도들이 큰 희생을 떠맡아야 한다면, 갈바리아에 계셨던 성모님께 봉사하려고 자발적으로 레지오에 입단한 단원들 말고 또 누가 있겠는가? 일단 부름을 받으면 레지오 단원들은 지체 없이 달려간다.
그러나 때때로 지도자가 단원들을 잘못 인도하여 활동을 그르치는 수가 있다. 그러므로 영적 지도자와 모든 간부들은 콜로세움(Colosseum)의 순교자들에 비교할만한 정도로 단원들의 수준을 설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오늘날과 같은 타산적인 시대에 이러한 권고가 비현실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콜로세움 역시 계산적이었다. 그것은 성모님의 군사인 레지오 단원들보다 결코 더 강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더 약하지도 않았던 수많은 훌륭한 신앙 선조들이 보인 계산이었다. 그들은 “사람은 자신의 영혼을 위해 어느 정도의 대가를 치러야 하는가?” 하고 스스로 물었던 것이다. ‘콜로세움’은 이 교본이 제4장 [레지오의 봉사]를 통해서 표현하고자 한 바를 한마디로 요약해 준다. 그것은 단순히 감상(感傷)만을 표현한 것이 아니다.
사회에서 버림받거나 방치된 계층의 사람들을 위한 활동에는 항상 어려움이 따르게 마련이며 시간이 많이 걸린다. 그러므로 이 활동의 열쇠는 인내심이다. 수없이 넘어졌다가 겨우 다시 일어서려는 그런 종류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들을 대하면서 처음부터 규율을 내세운다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다. 엄격한 방식을 쓰면 얼마 안 가서 치료하려고 했던 대상자들을 모두 놓쳐 버리고, 별로 치료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만 환자로 남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 활동은 가치 역순의 원리에 따라 수행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이 활동은 낙관론자조차도 전혀 가망이 없다고 손들 만한 사람들, 마음이 삐뚤어지고 반응마저 보이지 않아 아무리 타일러도 소용 없을 것 같아 보이는 사람들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거칠고 심술궂은 사람, 공연히 밉살스런 사람, 사회에서 배척 받은 사람, 감시 대상에 오른 사람, 도시의 퇴물 등, 이런 사람들을 단원들은 모두 끝까지 보살펴야 한다. 반발에 부딪치거나 거부를 당해도, 실패와 배은망덕의 괴로움을 겪는다 해도, 단호한 결심으로 활동을 지속해야 한다. 대체로 이러한 활동들이 레지오 단원들의 평생 과제이다.
이러한 활동을 수행하려면 영웅적인 자세와 초자연적인 안목이 꼭 필요하다. 그리고 이처럼 힘겨운 노력에 대하여 단원들이 받게 될 보상은, 마침내 그들이 하느님과 화합한 가운데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을 보는 것이다. 이 크신 하느님의 사업에 우리가 협력할 수 있다니 얼마나 기쁜 일인가!

오랜 세월을 참아 내시며
진흙으로 생명을 빚어
당신을 찬미하게 하시네!

(뉴만 / Newman : 제론씨우스의 꿈)

이러한 특수 활동을 자세하게 다루는 이유는, 이 활동들이야말로 레지오의 정신과 깊숙이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러한 활동들은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봉사 활동 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 이유는 이 활동들이 가톨릭의 원리를 드러내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미천한 사람이라도, 즉 그들의 가치가 어떠하든 또는 그들이 지닌 생각이 우리들의 생각과 전혀 같지 않다 하더라도,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은 우리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 영신적 질서 안의 원리이다. 다시 말하면, 이러한 활동들을 통해서 우리는 그들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알아 뵙고 흠숭하며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랑의 진실성은 시험을 통해서 입증된다. 그 결정적 시험은 인간 본성으로서는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을 사랑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에 대한 참 사랑과 거짓 사랑을 가려내는 시금석이요 신앙의 핵심이며 그리스도 신앙의 결정적 요체이다. 왜냐하면, 이런 사랑은 가톨릭적 이상이 깃들어 있지 않으면 아예 존재할 수조차 없기 때문이다. 그 의미와 생명을 주는 뿌리를 떠나서 그런 사랑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환상이다. 오직 인간 자체만을 위하는 것을 신조로 삼는다면, 세상 만사를 대할 때 과연 그것이 인간에게 쓸모가 있는가 없는가라는 관점에서만 판단할 수 있으며, 결국 인간에게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인정되는 것은, 마치 그리스도교 계명에서 죄를 보는 시각처럼,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무조건 제거되어야 할 대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잘못 된 생각이다.
그러므로 자기를 희생하면서까지 그리스도인의 사랑을 숭고하게 드러내는 신자들이야말로 교회에 가장 큰 봉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대는 악한 사람을 다루기 힘들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대가 말한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리는 그 사람을 헌신적으로 사랑해야 한다. 그대의 목표는 그 사람을 죄의 길에서 벗어나 덕행을 하도록 인도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그대는 그대가 해주는 말을 그 사람이 듣지 않고 그대의 충고를 그가 따르지 않는다고 말한다. 어떻게 그것을 확신하는가? 그대는 그를 잘 타이르고 그의 마음을 돌려 보려고 정녕코 노력했는가? 가끔 그를 설득했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렇다면 몇 번이나 그런 시도를 했는가? ‘여러 번’이라고 대답하겠지만 그 정도로 충분했다고 생각하는가? 비록 평생 그 일을 계속하게 되더라도 노력을 게을리 하거나 포기해서는 안 된다. 하느님께서 우리들을 타이르시는 것을 보라. 그분은 당신의 예언자들을 통하여, 사도들을 통하여, 복음 사가들을 통하여 우리들을 끊임없이 타이르고 계시지 않은가? 그런데도 그 결과는 어떤가 우리의 행실이 모두 올바르다고 할 수 있는가? 우리는 모든 면에서 하느님께 순명하고 있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순명과는 동떨어지는 행동을 하고 있다. 그런데도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타이르시는 일을 결코 멈추지 않으신다. 왜 그렇게 하시는가? 영혼만큼 귀중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마태 16, 26)”(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 St. John Chrysostom)

7 청소년들을 위한 활동

“어린이들은 분명히 예수님의 따스한 사랑을 아낌없이 받는 대상이다. 예수님은 어린이들을 축복해 주셨고, 더 나아가서 어린이들에게 하늘나라를 약속해 주기까지 하셨다.(마태 19, 15-15 ; 마르 10, 14 참조) 특히 예수님께서는 어린이들이 하느님 나라에서 차지하는 실제적인 역할을 드러내 보여 주셨다. 어린이들은 하나의 고귀한 표상으로서, 오직 주님만을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상징하며,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도덕적, 정신적 조건이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생각을 바꾸어 어린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하늘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은 자신을 낮추어 이 어린이와 같이 되는 사람이다.'(마태 18, 3-5 ; 루가 9, 48 참조)” (평신도 그리스도인 47)

만일 젊은이들을 때묻지 않은 순수한 신앙 안에 끝까지 머물러 있게 할 수만 있다면 우리의 장래는 얼마나 빛나겠는가! 그렇게 된다면 교회는 마치 원기를 되찾은 거인처럼 온 힘을 쏟아, 믿지 않는 이들을 변화시키는 교회의 사명을 단시일에 완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오히려 내부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 더 많은 노력이 소모되고 있다.
잘못된 뒤에 바로잡는 것보다는 잘못되기 전에 보호하는 것이 더 쉽다. 물론, 이 두 가지 경우가 다 중요하므로 레지오는 양쪽 일에 똑같이 힘을 쏟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두 가지 일 가운데 더 쉬운 쪽, 즉 청소년들을 순수하게 보존하는 일을 절대로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훗날 타락한 어른 한 사람을 되돌려 놓기 위해서 기울일 수고를 지금 쏟는다면 수많은 청소년들을 불행에서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청소년들을 위한 활동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가) 어린이 미사 참례: 어떤 주교가 레지오 단원들에게 제시한 활동 계획서에는 어린이들의 주일 미사 참례 운동이 으뜸가는 활동으로 올라 있었다. 이 주교는 어린이들이 미사에 빠지는 것을 후에 발생할 모든 불행의 근원으로 보았던 것이다. 어린이들의 명단을 주일학교 출석부 등에서 알아내어 주일 아침에 그들의 집을 방문하면 큰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린이들이 스스로 나빠지는 일은 거의 없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어린이들이 가톨릭 신자의 기본 의무를 지키지 않고 있다면, 분명 그 부모가 신앙에 무관심하거나 나쁜 영향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레지오의 사도들은 이 활동을 할 때에는 이와 같은 외부적 요인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어린이들의 경우에는, 성인들의 경우와는 달리, 하다 말다 하거나 또는 짧은 기간의 활동으로는 거의 또는 전혀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
(나) 어린이 가정 방문 : 어린이들을 집으로 방문할 때 한 가지 알아 두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여러 가지 이유로 접근하기 어려웠던 가정도 어린이를 찾아왔다고 말하면 쉽게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이다. 부모가 자녀에게 지니는 본성적인 애정이 자신을 스스로 돌보는 열성보다도 훨씬 크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신에 관한 일에는 무신경해도 자녀에게 유익한 것은 소중히 여긴다. 아무리 매몰찬 사람이라도 자식을 생각하면 마음이 부드러워진다. 이러한 자식에 대한 뿌리 깊은 본능은 설사 자기 자신은 신앙적으로 쇠퇴해 있다 해도 아이들마저 자기와 똑같은 처지에 놓이게 되는 것을 바라지 않으며, 아이들 안에 은총이 흐르고 있음을 느낄 때 본능적으로 기뻐한다. 따라서 단원이 그들을 직접 찾아갔을 때에는 거칠고 난폭하던 부모들도 그들의 자녀를 찾아왔다고 하면 똑같은 단원이 방문했는데도 집안으로 들어오게 한다.
유능한 레지오 단원들은 일단 어느 가정에 들어갔을 때 그들이 수행하고 있는 사도직 활동을 모든 식구가 느끼도록 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자녀에게 진지하게 관심을 쏟으면 부모는 대개 호의적으로 받아들인다. 이 점을 잘 활용한다면 부모들의 마음 안에 초자연의 씨앗이 자라나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어린이는, 부모의 집을 들어갈 수 있게 하는 열쇠였듯이, 부모의 마음의 문, 영혼의 문을 여는 데도 열쇠의 역할을 한다.
(다) 어린이 가톨릭 교리 지도 : 어린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는 일은 매우 중요한 활동인데, 여기에 가정 방문을 곁들인다면 더욱 큰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교리 반 출석률이 그리 좋지 않은 어린이들의 가정을 방문하거나 열심한 어린이의 가정까지도 개인적인 관심을 가지고 방문하면, 다른 가족들과도 접촉할 수 있게 된다. 이와 더불어 레지오는 가톨릭 교리회의 지회(支會) 역할을 맡아 할 수도 있다. 이에 대해서는 부록 제8항을 참조하기 바란다.
다음에 소개하는 것은 신자수가 많은 본당에서 레지오 조직을 활용하여 주일학교를 운영한 성공 사례이다. 사제가 강론 등을 통하여 주일학교의 중요성을 열심히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주일학교 어린이는 불과 50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때 새로 설립된 쁘레시디움에서 어린이들을 가르치는 활동 외에 어린이 가정 방문 활동을 추가로 실시하였다. 일년 후 평균 출석 인원이 600명으로 늘어났다. 그렇지만 이 놀라운 숫자 안에는 같은 기간 동안 평소 신앙에 무관심했던 수많은 성인(成人) 가족들에게 베풀어진 영신적 혜택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레지오 단원들은 이러한 모든 활동 중에 ‘성모님이시라면 당신의 어린이들을 어떻게 보살피실까’를 늘 생각해야 한다. 특히 주일학교를 돕는 활동을 할 때 더욱 그러하다. 어른들은 어린이를 대할 때 대체로 참을성이 모자라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이보다 더 나쁜 것은 어린이들에게 단지 사무적이고 세속적인 분위기로 교리를 가르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어린이는 교리 수업을 단지 학교 공부의 연장 정도로밖에는 여기지 않게 되며, 결국 예상된 수확의 10분의 9는 놓치고 만다. 그러므로 한 번 더 생각하라. ‘이 어린이들 하나하나 안에서 당신의 사랑하는 아드님을 보시는 성모님은 이 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치실까?’ 하고.
젊은이들을 가르치는 데는 암기 보조 자료와 시청각 기재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교리 교재를 선택할 때에는 교회의 가르침에 정확히 부합하는 것을 고르도록 신중을 기해야 한다. 교리를 지도하는 사람과 교리를 배우는 사람은 한(限)대사를 받을 수 있다. (대사 목록 및 대사 관리규정 20)
(라) 비가톨릭 학교 또는 공립 학교 : 가톨릭 학교에 다니지 않는 어린이들의 생활은 늘 위기에 처해 있다고 할 수 있으며, 이로부터 발생하는 미래의 여러 문제들을 예방하는 일 또한 쉽지 않다. 각 지역의 교회 당국이 문제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그 대책을 마련하고 있는 것처럼, 레지오에서도 온 힘을 다해 이에 대한 대책 마련에 나서야 한다.
(마) 젊은이들의 신심회 : 좋은 학교에 다니는 어린이들도 학교를 졸업할 때쯤 되면 위기를 맞게 된다. 그때쯤 해서 그들은 학교에서 받는 건전한 감화나 보호 차원의 규제 또는 세심한 보살핌으로부터 스스로 풀려난다. 청소년들 중에는 가정에서 종교적 지도나 규제를 전혀 받지 못하고 오직 학교가 마련하는 보호 수단에만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던 학생들도 있을 것이다.
더구나 이들이 학교의 품을 떠나는 시기는 도덕적으로 바르게 보호받기 가장 어려운 시기이고, 불행하게도 이들은 성년이 채 되기 전에 소년기를 벗어난다. 따라서 이런 과도기에 놓인 청소년들을 위한 적적한 대책을 세우기란 쉽지 않으며, 결국 아무런 대책 없이 그냥 지나치는 경우가 많다. 설사 어른들이 아직 들을 돌본다 해도 일단 이 과도기가 지나면 대개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 그들이 이미 자유가 주는 위험한 매력을 맛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학교에서 받던 지도 감독이 졸업 후에도 어떤 방법으로든 반드시 지속되도록 해야 한다. 그 한 가지 방법으로는 레지오의 주관 아래 청소년 신심 단체를 두거나 일반 신심 단체 안에 청소년 관련 분과를 두는 일이다. 청소년들이 학교를 졸업할 무렵 관계자들이 대상 청소년의 명단을 레지오 단원들에게 넘겨 주면, 단원들은 그 명단에 있는 청소년들의 가정을 방문하여 친분을 맺고, 신심회에 참여하는 태도가 그리 좋지 않은 청소년들을 특별 방문한다.
각 단원에게 청소년 신심회 모집 인원을 일정 수 배당하여 그들을 책임 지도하게 하는 것도 좋다. 신심회의 회합이 열리기에 앞서 회원들을 찾아가 참석 의무를 일깨워 주고, 가능하면 연차 피정(될 수 있는 한 봉쇄 피정) 및 연차 총 친목회 등을 청소년 신심회의 주요 행사로 삼는다.
청소년들을 선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들이 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자주 규칙적으로 영성체 하도록 인도하는 것이며, 실제로 이보다 더 좋은 다른 방법이 없다.
소년원이나 고아원을 나온 청소년들의 경우에는 더욱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 보살펴야 한다. 그들은 부모가 없거나 나쁜 부모의 희생물인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바) 청소년 단체, 보이 스카웃, 걸 스카웃, J. O. C(가톨릭 노동 청년회)분회, 양재 교실, 아동 복지회 지부 등의 설립 및 지도: 이런 활동은 대개 쁘레시디움 전체의 활동으로서 보다는 일부 단원들에게 개인 활동으로 배당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한 쁘레시디움이 위에 설명한 특수 활동 중 어느 한 가지 활동에만 전념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다만 이런 경우에도 쁘레시디움은 주회합을 결코 걸러서는 안 되며 완전한 레지오의 규칙대로 회합을 진행해야 한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단원들이 특별 활동의 일부로서 함께 모여 기도하고 회의록을 낭독하고 몇 가지 간단한 보고를 했다고 해서, 이들 쁘레시디움의 주회합으로 볼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런 방식은 비록 회합의 기본 골격은 갖추었다고 할지는 모르나, 교본 제11장 [레지오의 기본 요소]에서 확실하게 설명하고 있듯이, 레지오 규율의 정신이 전혀 반영되지 않은 하나의 편법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레지오는 단원들이 이러한 ‘특수 활동’으로 청소년 단체의 모임을 주관할 때 시작과 중간과 끝 부분으로 3등분하여 레지오의 기도문을 바칠 것을 바라고 있다. 만약 묵주기도를 바칠 수 없는 경우라면 뗏세라에 실린 기도문 만이라도 바쳐야 한다.
(사) 레지오의 청소년 지도 지침: 청소년 신심회나 기타 청소년 단체의 운영을 맡고 있는 레지오 단원들에게는 지도 원칙을 제시해 줄 필요가 있다. 전반적인 운영은 담당 단원 개인에게 맡겨져 있으므로 다양한 방법이 있을 수 있다. 매일 또는 매주 한 번씩 모이는 등 모임의 횟수도 다양할 것이고, 순수한 오락이나 기술 강습에서부터 종교적인 모임에 이르기까지 모임의 양상도 여러 가지일 것이다. 이렇게 다양한 단체들은 분명 다양한 성과를 거두게 되지만, 그렇다고 항상 최고의 성과만 거두는 것은 아니다.
가령, 전적으로 오락 프로그램만을 제공하는 모임이라면, 비록 청소년들이 말썽을 일으키지 않게 하는 효과는 있겠지만, 그들을 바르게 수련시키는 데 도움이 될지는 의문이다. ‘졸지 않고 공부만 하는 아이는 바보가 된다’는 격언이 있다. 그러나 이 격언은 이미 ‘공부하지 않고 놀기만 하는 아이는 쓸모 없는 인간이 된다’는 좀더 교훈적이고 사실에 들어맞는 또 다른 격언으로 재치 있게 바뀌어 있다.
쁘레시디움 조직은 어떤 종류의 대상이나 그 활동에도 적합한 조직임이 입증되었다. 그렇다면 이와 비슷한 형태로 청소년들에게 알 맞는 간단한 조직 체계를 마련할 수 있지 않을까?
다음에 제시하는 사항대로 청소년 단체를 운영한 결과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고 한다. 따라서 청소년 단체를 맡고 있는 쁘레시디움은 다음 사항들을 참고하기 바란다.

(1) 나이는 최고 21세, 최하는 제한을 두지 않는다. 나이 별로 구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2) 회원은 정규 주회합에 참석해야 한다. 만일 모임을 일주일에 한 번 이상 갖는 경우, 이 규칙의 적용 여부는 임의로 정한다.
(3) 회원은 매일 레지오의 까떼나를 바친다.
(4) 주회합 때 레지오의 제대를 차린다. 쁘레시디움 회합 때처럼 탁자 위에 차리거나, 좀 떨어진 곳 또는 안전하게 높은 곳에 차릴 수도 있다.
(5) 회합 때마다 묵주기도를 포함한 레지오의 전 기도문을 쁘레시디움 주회합처럼 세 부분으로 나누어 바친다.
(6) 전체 회합 시간은 한 시간 반 이내가 되어서는 안 되나, 초과할 수는 있다.
(7) 적어도 반 시간은 단체의 업무 또는 교육을 목적으로 사용해야 한다. 나머지 시간은 필요하다면 오락에 쓸 수도 있다. 여기에서 ‘업무’란, 예를 들어 축구 또는 그 밖의 스포츠 클럽 등을 운영할 때,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업무를 처리하는 것을 말하며, ‘교육’이란 종교적 혹은 세속적인 것에 대한 훈련이나 교육을 실시하는 것을 말한다.
(8) 회원은 적어도 한 달에 한 번 이상 영성체를 해야 한다.
(9) 레지오 단원은 회원들에게 레지오의 협조단원이 되도록 권유하고, 이웃과 공동체를 위한 봉사 정신을 마음에 새기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요한 보스코 성인(St. John Bosco)의 뛰어난 활동적 삶을 통해서 많은 교훈을 얻게 된다. 그 중 특이하고 기억에 오래 남은 중요한 교훈 하나를 소개한다. 그것은 초,중,고등학교, 대학 또는 신학교에서 스승과 제자, 윗사람과 아랫사람 사이에 존재해야 하는 관계에 대한 것이다. 이 성인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거리를 두는 태도를 특히 싫어했다. 스승이나 윗사람이 지나치게 권위를 내세워 원리 원칙만을 고집하거나 무관심하고 이기적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맡기신 제자들이 그들에게 접근하기 어렵게 만드는 태도를 성인은 맹렬히 비난했다. ‘너는 연회석의 주관자가 되면 거만하게 굴지 말아라. 너도 손님 중의 한 사람으로 자처하여라. 또 손님들을 보살피고 나서 네 자리에 앉아라.'(집회 32, 1)라는 성서 말씀을 요한 보스코 성인은 늘 마음에 간직하고 있었다.”(부르느 추기경 / Cardinal Bourne)

8 이동 문고

레지오 단원들은 번화한 거리나 공공 장소에서 이동 문고를 운영할 수 있다. 그 동안 경험한 바에 따르면, 이동 문고 운영은 상당히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는 레지오 활동임이 입증되었다. 이 활동은 선량한 사람이나 그렇지 못한 사람들, 또는 교회에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 등 모든 이들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대단히 효과적인 사도직 활동이다. 그러므로 레지오는 모든 지역 평의회의 중심지에 적어도 하나 이상의 이동 문고가 설치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이동 문고는 책의 제목이 가급적 한 권이라도 더 많이 보일 수 있게 진열해야 한다. 비싸지 않은 영성 서적이나 교회의 정기 간행물 등을 풍부히 갖추어 놓고, 레지오 단원들이 직접 맡아 관리한다.
이동 문고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찾아온다. 처음부터 책을 사기 위해 훑어보는 이들도 있고, 같은 교우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찾아오는 신자들, 특별한 생각이나 관심 없이 그저 둘러보는 사람들, 심심해서 또는 호기심으로 찾아온 사람들, 교우는 아니지만 가톨릭에 조금은 관심이 있는 사람들, 교회에 관심은 있지만 직접 접촉을 꺼려 하던 사람들 등, 참으로 다양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이동 문고 주위에 모여들 것이다. 예의 바르고 다정한 레지오 단원들은 이러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그러므로 단원들은 여러 가지 질문에 대답하고 서적을 판매하는 데 필요한 사전 준비를 하여 이런 다양한 사람들과 친숙한 접촉을 할 수 있도록 훈련되어 있어야 한다. 이 접촉을 통하여 단원들은 그들의 생각과 행동을 한 차원 높은 수준으로 끌어 올리는 활동의 기회를 얻게 된다. 상대방이 교우라면 그가 ‘가톨릭적인 일’을 하도록 끌어들일 수 있을 것이며, 교우가 아니라 해도 가톨릭을 이해하도록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들 중 어떤 이는 이동 문고를 둘러보고 나서면서 매일 미사와 영성체를 하겠다는 결심을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또 어떤 교우는 레지오의 행동단원이나 협조단원 혹은 빠뜨리치안 회원이 되겠다는 이도 있을 수 있다. 하느님과 화해를 하겠다고 결심하는 사람, 또는 심경의 변화를 느껴 입교하겠다는 회심의 씨앗을 마음 속에 간직한 채 이동 문고를 떠나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레지오 단원들은 사람들이 이동 문고를 찾아올 때까지 피동적으로 기다리고만 있어서는 안 되며, 직접 그들을 찾아 나서야 한다. 이는 물론 개인 접촉 활동을 위해서일 뿐 책을 판매하기 위한 목적이어서는 결코 안 된다.
이동 문고를 시작하자는 제안이 나오면, 이 일을 맡을 만한 교리 지식을 갖춘 단원이 없다는 이유로 반대 의견에 부딪치곤 한다. 교리 지식을 많이 갖출수록 유리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교리 지식이 모자란다고 해서 활동을 시작하는 데 장애가 되는 것은 아니다. 친화력이 더욱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뉴만 추기경의 말처럼 “좋은 인품은 우리를 감화시키고, 부드러운 목소리는 우리의 마음을 녹이며, 상냥한 모습은 우리를 가라앉히고, 실천적인 행동은 우리도 함께 따라 나서게 만든다. 무수한 사람들이 신조에 따라 살거나 죽거나 하지만, 결론을 얻어내기 위해 몸을 던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시 말하면, 성실성과 온화한 마음이 깊은 지식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어설픈 지식은 때때로 사람들을 밑도 끝도 없는 깊은 물속이나 뒤틀린 수로로 이끌고 가지만,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알아봐 드리겠습니다’라고 자신의 무지를 솔직히 고백한다면, 오히려 그것이 튼튼한 기초가 되어 대화를 돕게 된다.
대화 중에 나오는 질문들은 대부분 교회에 대한 무지에서 오는 것이므로, 보통의 레지오 단원들이라도 충분히 대답할 수 있는 것들이다. 혹시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라면, 쁘레시디움이나 영적 지도자에게 물어 보면 되므로 걱정할 일이 아니다.
교회가 못마땅한 행위를 저질렀다던가 일종의 박해를 가했다던가 혹은 열성이 부족하다는 등, 비난의 소리가 그치지 않고 계속될 수도 있으며, 이로 인해 문제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주장은 사실을 근거로 하기 때문에 혼란을 더욱 부채질하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적개심에 찬 비난이 쏟아질 때에는 어떠한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다 하더라도 완전히 만족시킬 수는 없는 일이다. 이때 레지오 단원이 취할 태도는 그 논쟁을 되도록 단순한 것으로 되돌리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에 진리의 말씀을 남겨 주셨는데, 사람들은 이를 종교라 부른다. 이 종교는 하느님의 말씀이므로 오직 하나이며, 명백하고, 한결같고, 그르침이 없으며, 하느님의 권위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종교의 특성은 유일하게 가톨릭 교회에서만 온전히 찾아볼 수 있다. 다른 단체나 조직은 이런 특성을 가졌다고 감히 주장하지 못한다. 가톨릭 교회 이외에는 모순과 혼란이 있을 뿐이므로, 뉴만 추기경이 힘주어 말했듯이 “가톨릭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세상을 이 세상에 드러내 보인다. 따라서 가톨릭이 제 몫을 다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확실하고 진실되게 가르쳐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게 될 것이다.”
참된 교회는 오직 하나이며, 하나이어야 한다. 가톨릭 교회가 아니라면 그러한 참된 교회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는가? 진리에 대해 이와 같이 단순하게 접근하는 것은 마치 한 곳을 향해 집중 공격을 가하는 것처럼 큰 위력을 발휘한다. 특히 순수한 사람들에게 그 위력은 더욱 뚜렷이 드러난다. 한편, 지식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교회의 잘못에 대한 어떠한 변명도 받아 들여지기 어렵다. 이 경우에는 그의 비난이 너무 지나치다는 사실만을 간결하고 부드럽게 알려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가 가톨릭 교회에 퍼붓는 비난은 다른 종교 단체에 대한 비난과 특별히 다를 바가 없다. 만일 그가 가톨릭 신자들의 좋지 못한 행동을 보고 가톨릭 교회가 잘못되었다는 논리를 편다면, 결국 이 세상에는 그가 생각하는 참된 종교가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알려 주어야 할 것이다.
개신교 신자들이 자신의 교파만이 진리를 독차지하고 있다고 주장하던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지금에 와서 그들은 모두 교회가 진리의 일부 또는 일면을 지니고 있다고 다소 온건한 주장을 편다. 그러나 일부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그러한 주장은 결국 진리가 무엇인지 모르며 어떻게 진리를 찾아야 하는지 그 방법을 모른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교회의 교리가 어떤 것은 참되고 어떤 것은 참되지 않다면, 어떻게 참과 그름을 가려 낼 것인가. 더욱이 진리가 아닌 교리를 선택할 위험마저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이 모든 교리 가운데 어떤 것은 분명 진리이다’라고 주장하는 교회가 있다면, 그러한 교회는 참된 길로 나아가는 데 아무런 도움도 길잡이도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논리가 몸에 배일 때까지 되풀이해 익혀야 한다. 진정한 교회는 오직 하나이며, 가르침에 모순이 없고, 모든 진리를 두루 갖추고 있으며, 참된 것과 그릇된 것을 구분해 줄 수 있어야 한다.

“성모님보다 더 힘있는 협조자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사도들, 예언자들, 순교자들, 증거 자들, 동정녀들 그리고 훌륭한 협조자들이 있어서는 그분들에게 기도합니다. 그러나 저의 모후이신 성모님은 이 모든 중재자들보다 더 높으신 분이십니다. 그들은 모두 성모님과 함께 해야만 무엇을 이룰 수 있으나, 성모님은 그들 없이도 홀로 하실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성모님이 우리 구세주의 어머니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이 침묵하고 계시면, 아무도 기도하지 않고 아무도 우리를 도우러 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모님이 기도하시면, 모든 사람들이 함께 기도 하게 될 것이며 남을 도와 주게 될 것입니다.”(성 안셀모 / St. Anselm : 강론 중에서)

9 군중 속에서의 접촉 활동

사도직 활동은 교회의 풍부한 보화를 모든 사람에게 가져다 주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 사도직은 한 영혼의 온정(溫情)을 다른 영혼에게 개별적이며 지속적으로 전달하는 활동을 기본으로 삼고 있는데, 레지오에서는 이를 ‘접촉 활동’이라는 전문 용어를 사용하여 부른다. ‘접촉 활동’이 미약해지면 그만큼 영향력도 줄어들게 된다. 사람들이 모여 군중을 이루면, 군중은 영혼 대(對) 영혼의 접촉을 피하게 되며 ‘접촉 활동’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그러나 군중이란 수많은 개인이 한데 모여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따라서 군중은 무한한 가치를 지닌 영혼들의 집합체이다. 군중 속의 한 사람 한 사람은 각자 다른 사생활을 가지고 있지만, 이런 저런 모습으로 군중 속에서 무리를 이루며 대부분의 시간을 그 속에서 보낸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군중을 개인으로 되돌려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과 접촉해야 한다. 성모님이시라면 이 군중을 어떻게 보실까? 성모님은 무리를 이루고 있는 영혼 한 사람 한 사람의 어머니이시다. 성모님은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주시려고 애태우실 것이며, 그들을 보살피는 어머니의 일에 누군가가 나서서 도와 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계실 것이다.
공공 장소에서 이동 문고를 운영하는 것이 큰 효력이 있다는 것을 이미 설명한 바 있지만, 군중을 대상으로 하는 종합적인 사도직 활동은 이동 문고와는 별개의 활동으로 따로 실시할 수 있다. 그리하여 군중 속의 영혼들에게 예의를 갖추고 접근하여 신앙에 대한 문제를 생각해 보자고 제의한다면 만족스러운 성과를 얻을 수 있다. 거리에서, 공원에서, 공공 장소에서, 철도나 지하철 역에서, 버스 정류장에서, 그리고 사람들이 많이 모인 장소라면 어디에서든지 이 활동을 실천에 옮길 수 있다. 특히 이러한 접근 방식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잘 받아들이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 활동에 임하는 레지오 단원은 자신의 말씨와 태도가 가장 중요한 접촉의 수단임을 명심하여 언제나 겸손하고 예의 바르게 행동해야 한다. 대화를 나눌 때에는 상대방과 다투거나, 설교하는 듯한 인상을 풍기거나, 법을 내세우거나, 또는 우월감을 드러내는 듯한 태도를 보여서는 안 될 것이다. 단원들은 다만 ‘사도들의 모후’이신 성모님이 자신의 빈약한 말솜씨에 힘을 넣어 주시고, 단원들이 펴는 사도직 활동이 풍성한 열매를 맺기를 간절히 바라고 계신다는 사실을 굳게 믿어야 한다.

10 신자 가정부를 보살피는 활동

이 활동은 앞에 설명한 ‘군중 속의 개인 접촉 활동’의 일부로서나 또는 특별 활동으로서 수행할 수 있다. 신앙에 관심이 없거나 탐탁지 않게 여기는 가정에 가정부로 들어가는 신자들을 자주 볼 수 있다. 그들은 시골에서 도시로 올라와 단순히 기계 취급을 받으며, 친구도 없이 외롭게 지내므로, 불행으로 빠뜨릴 사람들과 사귀기가 쉽다. 따라서 이러한 처지에 있는 가정부들을 접촉하고 보살펴 주는 일은 매우 훌륭한 사도직 활동이 된다.
이런 가정부들에게 레지오 단원들이 매주 주기적으로 찾아와 그들이 잘되기를 바라며 함께 기도해 준다면, 그러한 단원들의 활동은 그들에게는 마치 한 줄기의 밝은 빛이 될 것이다. 방문하는 목적은, 가정부로 일하는 여성들을 성당의 신심 단체나 모임에 가입시켜 친교를 맺게 하는 데 있지만, 레지오에 가입하도록 이끌어 주어야 한다. 이 활동은 많은 사람을 안정시키고 성화시키며 새로운 행복의 길로 나아가도록 도와 준다.

“얼핏 생각하면, 하느님의 위대한 어머니이신 성모님의 지상 생활은 적어도 어느 한 기간 동안은 위풍당당하고 위엄이 넘치는 모습이 아니었을까 하고 상상하기 쉽다. 그렇지만 하느님께서 섭리하신 성모님의 실제 생활 모습은 너무나도 달랐다. 성모님은 가난하게 살면서 마루를 닦고, 빨래하고, 음식을 차리고,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우물을 오가는 등, 험한 일을 하셨다. 이처럼 예수님, 성모님, 그리고 요셉 성인께서 보여 주신 모범적 생활은 감히 비천하다고 부를 수밖에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성모님의 두 손은 고된 살림으로 빨갛게 거칠어졌을 것이고 때때로 지치고 과로에 시달리셨을 것이다. 노동하는 남편의 아내라면 누구나 갖는 걱정거리를 성모님도 늘 지니고 계셨을 것이다.”(봣살-필립 / Vassal-Phillips : 그리스도의 모친)

11 군인 또는 직업상 자주 이동하는 사람들을 돌보는 활동

이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은 주거지를 자주 바꾸는 생활 환경 때문에 신앙 생활을 게을리 하거나 유혹에 빠지기 쉽다. 그러므로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사도직 활동의 필요성은 매우 절실하다.

(가) 민간인은 군사 시설 출입이 쉽지 않으므로, 장병들을 돌보는 활동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는 방법은 장병들로 조직된 쁘레시디움을 설립하는 것이다. 이미 여러 곳에서 군인 쁘레시디움이 설립되어 큰 성공을 보이고 있다.
(나) 선원들을 돌보는 활동으로는 선박을 방문하거나 육상에서 여러 가지 편의를 제공하는 방법 등이 있다. 이 활동을 착수하려는 쁘레시디움은 ‘해양 사도회(Apostolatus Maris)’라는 국제 단체에 가입해야 한다. 이 단체는 거의 모든 해양국에 지부를 두고 있다.
(다) 레지오 단원들은 군대나 선상 규율을 세심하게 존중하는 태도를 지녀야 하며, 그들의 규정이나 관례를 거스리는 행동을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사실 레지오 단원은 자신이 수행하는 사도직 활동이 널리 인정받도록 해야 한다. 즉, 단원들은 레지오가 수행하는 사도직 활동이 국군 장병이나 선원들을 모든 면에서 향상시키며 큰 보탬이 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단순한 도움의 차원을 넘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봉사 활동이라고 인정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라) 출장이 잦은 사람들, 집시, 서커스 단원들도 늘 이동하는 부류의 사람들이므로 레지오 사도직 안에서 보살펴야 할 사람들이다. 이민자와 난민도 이 활동 대상에 속한다.

“현대 세계의 큰 변화들 중에서 이주(移住)는 새로운 현상이다. 이주로 인해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국가 안에 비 그리스도인의 수가 늘어나고 있다. 이들은 새로운 접촉과 문화 교류의 기회를 제공하지만, 또한 교회를 향해 친절한 대접과 대화와 원조, 즉 우애를 요구한다. 이주민 가운데에서도 피난민은 특수한 처지에 놓여 있기 때문에 각별한 관심이 필요하다. 오늘날 세계에는 수백만 명의 피난민이 있고, 그 수는 점점 증가하고 있다. 그 들은 정치적 억압이나 비인간적 빈곤과 질병, 기아와 절망적인 가뭄을 피해 떠나 온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들에 대해서도 사목적 관심을 가져야 한다.”(교회의 선교 사명 37)

12 가톨릭 출판물 보급 활동

일반적으로, 히포의 아우구스티노 성인(St. Augustine of Hippo)이나 로욜라의 이냐시오 성인(St. Ignatius of Loyola)을 비롯한 수많은 훌륭한 사람들의 생애를 보면, 그들의 삶을 높은 경지에 까지 이끌어 주었던 힘은 그들이 즐겨 읽었던 정평 있는 좋은 책들부터 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가톨릭 출판물을 보급하는 활동을 하다 보면 다양한 여러 계층의 사람들과 접촉할 수 있게 되므로,그들과 가톨릭 신앙에 대하여 쉽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성인들을 위한 상설 교리 반이 충분히 운영되지 않고 있는 형편에서는 교회 밖에 사는 사람들에게 교회의 가르침을 제대로 전해 줄 수가 없으며, 결국 그들은 교회의 가르침과는 동떨어진 세상에서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결과로 세속의 목소리가 교회의 목소리보다 더 크게 들려 온다. 이러한 불균형을 시급히 바로잡아야 한다. 그리스도 신자의 의무는 세속을 정복하여 그리스도께 되돌려 드리는 것이다. 이러한 임무를 완수하려면 먼저 올바른 가치관과 자세를 지녀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인으로서의 가치관과 자세를 말한다.
다른 정보 전달 매체를 경시해서가 아니라, 책을 통해서 무언가 배워 보겠다는 진지한 자세로 책을 대한다면, 그러한 독서는 삶을 풍부하게 하고 감화를 주는 다양한 사상의 원천이 된다. 가끔씩 기분이 내킬 때마다 한꺼번에 많은 양의 독서를 하는 것보다는 규칙적으로 꾸준히 하는 독서가 훨씬 효과적이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종교 서적을 읽히는 일은 쉽지 않다. 우선 흥미를 유발시켜야 하고, 흥미가 식지 않게 하려면 책을 쉽게 구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 활동 역시 레지오 단원들이 수행해야 할 좋은 활동의 대상이 된다.
교회 서적이나 홍보물 이외에 가톨릭 신문과 잡지가 발간되고 있는데, 이 정기 간행물들의 발간 목적은 다음과 같다.

(가) 시사 문제에 대한 합리적인 분석과 평가를 제공한다.
(나) 편견이나 계산된 침묵을 바로잡는 소중한 역할을 한다.
(다) 신문이나 방송의 프로그램을 평가하고 소개한다.
(라) 보편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하여 건실한 자부심과 관심을 갖도록 유도한다.
(마) 신자 생활에 길이 도움이 될 내용을 읽는 즐거움을 제공한다.

인쇄 매체 이외에도 시청각 자료가 신앙을 불어넣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종교에 관한 어떤 자료를 이용하기 전에 반드시 먼저 해야 할 일은 그 내용이 교회의 가르침과 일치하는지에 대해 믿을 만한 곳의 확인을 받는 일이다. 그러므로 이름만 그럴듯한 사이비 가톨릭 출판물들은 그 이름에 걸맞은 내용을 게재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 St. John Chrysostom)의 말처럼 “내용을 믿게 만드는 것은 이름이 아니며, 이름을 믿게 만드는 것은 내용이다.”
지금까지 시도된 가톨릭 출판물 보급 방법을 보면 ; (1) 가가호호 방문하여 구독을 권유하는 방법 (2) 신문이나 정기 간행물을 가정에 배달하는 방법 (3) 성당 내 성물 판매소 운영 (4) 이동 문고 또는 공공 장소에서 간이 서적 판매소 운영 (5) 빠뜨리치안 회원에게 좋은 책을 추천하는 방법 등이 있다.
도시 진열대는 눈길을 끌도록 아담하게 차리고 잘 관리해야 한다. 가톨릭 교회를 홍보하는 데는 대충대충 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레지오 단원들이 교회 출판물을 보급하기 위해 가정을 방문할 때에는 모든 가족들에게 감화를 주는 방향으로 활동하려고 힘써야 한다.

“성모님은 예수님과 뗄 수 없는 동반자이시다. 언제나 어디에서나 성모님은 당신 아드님 곁에 계신다. 우리를 하느님과 결합시켜 주시고 우리에게 하늘나라의 보화를 주시는 분은 그리스도만이 아니라 복되신 두 분, 바로 성모님과 아드님이시다. 그러므로 믿음의 경배 행위에 있어서 성모님을 예수님으로부터 떼어놓는 것은 하느님께서 몸소 세우신 질서를 깨뜨리는 것이다.”(테리앙 / Terrien : 인류의 어머니)

13 매일 미사 참례 및 성체 조배 권장 활동

“되도록 많은 신자들이 매일 미사에 적극적으로 참례하여 순수하고 거룩한 마음으로 성체를 영(領)함으로써 나날이 새로워져, 주 그리스도의 이 위대한 선물에 대해 감사 드려야 한다. 우리가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할 말씀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는 모든 그리스도 신자들이 매일 거룩한 잔치에 나아가기를 바라고 있다. 이같이 염원하는 까닭은, 그들이 이 성사를 통해 하느님과 결합되고, 이 성사로부터 힘을 얻어 탐욕을 억제하고, 일상의 가벼운 과오들을 씻어내며, 인간의 나약함으로 말미암아 범하게 되는 좀더 중대한 죄악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성 비오 10세의 가르침(교령 AAS 38, 401면)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교회의 전례 법은 성당 안에 성체를 모실 때 최대의 존경심으로 가장 중요한 위치에 보존되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신자들은 기회 있는 대로 성체조배를 해야 한다. 성체 조배는 성체 안에 현존하시는 주 그리스도께 대한 합당한 흠숭의 실천이요 감사의 뚜렷한 표시이며 사랑의 맹세이다.”(신앙의 신비 66)
매일 미사 참례와 성체 조배는 독립된 레지오 활동으로서 실천하기 보다는 레지오의 한 부분이요 한 묶음으로서 늘 마음에 새기고 열심히 생활하도록 해야 한다. 더 자세한 내용은 제8장 [레지오 단원과 성체]를 참조하기 바란다.

“제사이며 성사인 성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하느님께 바친 모든 것, 그리고 그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 인간이 얻은 모든 것을 풍성히 간직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성체는 갈바리아에서 흘리신 성혈이며, 동시에 하늘의 이슬이다. 성체는 자비를 간구하는 성혈이며, 시들어 가는 식물을 소생시키는 생명의 이슬이다. 성체는 우리를 위해 치르신 대가이며,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이다. 성체는 생명이며 또한 그 생명의 대가이다. 십자가도, 최후의 만찬도, 혹은 이 둘을 모두 합친다 해도 성체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 되지는 못한다. 성체 안에 모든 것이 지속되며, 성체 안에 모든 인류의 희망이 걸려 있다. 이러한 이유로 미사가 믿음의 신비라고 불리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교의 전체 교리 – 아담으로 인한 타락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의 교리 – 가 미사 안에 요약되어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갈바리아의 성극(聖劇), 곧 인간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최고로 드러내 보이시고 인간이 잃어버린 것에 대해서 넘쳐나게 보상을 해 주셨던 그 영웅적 행위가 미사를 통해 우리 안에 지금도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몸소 이루셨던 일들이 단순한 상징으로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미사를 통해 실제로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드 라 타이으 / De la Taille : 신앙의 신비)

14 협조단원 모집과 돌봄

기도의 힘을 확실하게 깨닫고 있는 쁘레시디움이라면 협조단원 명부를 가득 채우려고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협조단원을 모집하고 돌보는 일은 레지오 단원의 의무이다.
자신의 영혼이 호흡하는 귀중한 순간의 일부를 레지오를 위하여 내어 놓은 협조단원들의 너그러운 마음씨를 생각해 보라. 이로써 그들이 얼마나 큰 덕을 쌓고 있는지를 쉽게 알 수 있지 않은가. 레지오는 협조단원들에게 한없이 많은 빚을 지고 있다. 이 빚을 제대로 갚으려면 협조단원들을 완덕으로 이끄는 길 밖에 없다. 행동단원과 협조단원은 모두 레지오의 자녀들이다. 행동단원은 형제 중에 맏형 격이므로, 레지오의 어머니께서는 모든 가정에서처럼 아우들을 보살피시는 일에 형들이 도와 주기를 바라고 계신다. 성모님은 형이 아우를 돌보는 일을 단지 감독하실 뿐만 아니라 더욱 효과 있게 만들어 주시며, 그로써 이 활동이 성모님과 행동단원 모두에게 기쁨이 되게 하신다. 협조단원의 영혼 안에 성덕의 전당이 세워지면, 그들을 돌본 행동단원에게는 그 성덕의 전당을 지은 건축가가 받는 보상이 주어질 것이다.
이와 같이 협조단원을 돌보는 활동은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영성적 수준이 높은 단원들이 ‘맏이’의 정신으로 이 활동을 도맡아 할 필요가 있다.

“무서운 죄악과 하느님께 대한 미움이 가득한 요즈음, 우리 주님께서는 영혼들을 뽑아 당신의 군단(Legion)을 조직하시어 당신 주위에 두고자 하실 것이 틀림없다 이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주님과 주님의 사업을 위해서 헌신하므로 주님께서는 언제나 이들로부터 도움과 위안을 얻으신다.
이들은 ‘얼마나 도와 드려야 할까?’ 하고 묻지 않고 ‘주님의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나는 얼마나 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한다. 이들은 베풀기만 할 뿐, 대가를 따지지 않는다. 그토록 많은 것을 베풀어 주신 하느님을 위해 조금이라도 더 도와 드릴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하느님께 조금 더 드리고 싶으나 드릴 것이 없고, 하느님을 위해 조금 더 고통 받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한마디로 이들은 여느 사람들과 같지 않으며, 세속의 눈에는 바보로 비칠 것이다. 이들의 신조는 자신의 편안이 아니라 희생이기 때문이다.”(알프레드 오래힐리 몬시뇰 / Msgr. Alfred O’Rahilly : 윌리엄 도일 신부의 생애)
“그 때는 자비로운 사랑의 희생자들인 소박한 영혼들의 군단(Legion)이 ‘하늘의 별과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헤아릴 수 없이 많아 질 것이다. 사탄은 이들을 보고 두려움에 떨 것이며, 이 소박한 영혼들의 군단은 성모님을 따라 교만한 사탄의 머리를 완전히 바스러 뜨리고 말 것이다.”(리지외의 성녀 소화 데레사 / St. Therese of Lisieux)

15 선교회를 돕는 활동

선교에 대한 관심은 참된 그리스도 신자 생활의 필수 요소이다. 각자의 형편에 따라 기도나 물질적 후원 또는 선교사 성소 육성 등에 관심을 둘 수 있다.
예를 들어, 레지오 단원들은 어린이 전교회의 지부를 운영하면서 많은 어린이들에게 외방 선교에 대한 관심을 북돋아 주는 활동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또는 레지오의 행동단원이 되기에는 어려운 사람들을 모아서 (가령, 협조단원 등급의 모임을 만들어) 선교회를 위해 재봉일이나 제의를 만드는 일 등의 봉사 활동을 하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활동을 통하여 레지오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일을 한꺼번에 성취한다.

(가) 단원 자신이 성화된다.
(나) 다른 사람들이 스스로 성화하도록 도와 준다.
(라) 선교회에 실질적인 도움을 준다.

이 활동과 관련하여 다음 두 가지를 특별히 강조할 필요가 있는데, 이는 다른 활동에도 일반적으로 적용된다.

(가) 쁘레시디움은 어떤 목적을 위해서든 단순한 금품 접수 기관으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
(나) 재봉일에 봉사하는 사람들을 관리하고 감독하는 일로써 충분히 활동 의무를 채울 수 있다. 그러나 단원이 직접 재봉일을 했을 때에는, 신체 장애 등의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면, 성인 단원의 실질적인 활동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전교회(Propagation of the Faith), 베드로 사도회(St. Peter the Apostle), 어린이 전교회(Holy Childhood), 전교 연맹(Missionary Union) 등 4개 기구는 하느님의 백성 안에 보편적 선교 정신을 굳게 심어 준다는 공통된 목적을 가지고 있다. “(교회의 선교 사명 84)

16 피정 참가 권장 활동

레지오 단원들은 피정의 은혜를 직접 체험하고 있으므로, 그 중요성을 널리 알리고 다른 이들을 위하여 피정을 마련해 주며, 아직 피정을 해보지 못한 지역에서는 이를 실시하도록 이끌어 주어야 한다.
이는 교황 비오 11세의 권고 사항이기도 하다. “가톨릭 봉사단체의 활동을 통하여 성직자들의 사목 활동을 보좌하려는 일단의 열심한 평신도들은 거룩한 피정에 참여해야 한다. 이로써 그들은 영혼의 진정한 가치를 명확히 알게 되고 영혼들을 돕겠다는 열망으로 불타게 될 것이다. 그 결과로, 도움을 받은 영혼들도 사도직의 열렬한 정신을 터득하게 되며 사도직을 수행하는 이들의 성실함과 용기 있는 행동을 보고 배우게 된다.”
위대한 교황께서 사도직 일꾼 양성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사도직 일꾼들이 많이 배출되지 않고 있는 이유는 이를 달성하기 위한 노력이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우에는 피정을 제대로 실시했는지 점검해 보아야 한다.
마땅한 숙소를 마련할 길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피정을 널리 알리려는 레지오 단원들의 노력이 위축되어서는 안 된다. 실제 경험에 따르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단 하루 동안 실시하는 피정도 큰 성과를 거둔다. 한번에 많은 사람들에게 피정의 기회를 주려면 이 방법밖에는 없다. 어떤 건물이든 대개 하루의 피정 행사를 위해서 사용할 수 있으며, 그리고 한두 끼의 간단한 식사를 마련하는 비용은 그리 큰 부담이 되지는 않는다.

“하늘의 스승이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도들을 우정 어린 침묵의 피정에 초대하기를 갈망하셨다. ‘따로 한적한 곳으로 가서 함께 좀 쉬자.'(마르 6, 31) 주님께서는 이 슬픔의 세상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실 때, 바로 그 사도들과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의 다락방에서 갈고 닦아 완전하게 되라는 말씀을 남기고 떠나셨다. 그래서 열흘 동안 ‘그들은 모두 마음을 모아 기도에만 힘써'(사도 1, 14) 성령을 받을 수 있었다. 결코 잊을 수 없는 이 다락방의 피정 안에 성령께서 처음으로 작용하심으로써 교회는 거룩하고 영원히 변치 않는 힘을 받게 된 것이다. 이 다락방에는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동정 성모님이 함께 계셨고, 성모님의 도우심으로 그 자리에 있던 사도들과 제자들은 우리가 마땅히 가톨릭 활동의 선구자라고 부를 만한 자가 되었던 것이다.”(교황 비오 11세의 권고 : 피정 – 1929년)

17 예수 성심 단주회 회원 모집 활동

쁘레시디움이 수행하기에 매우 훌륭한 활동의 하나가 예수 성심 단주회(Pioneer Total Abstinence Association of the Sacred Heart)의 회원을 모집하는 일이다.
이 단체의 주목적은 금주와 절제를 권하는 활동을 통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데 있다. 이 목적을 달성하는 방법은 기도와 자기 희생이다. 회원들은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으로 감화되어

(가) 음주를 일체 금하고 선행을 하며
(나) 스스로 지은 죄악과 방종에 대해 보속하고
(다) 과음하는 사람들과 음주로 인한 질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와 희생으로 은총과 도움을 받도록 한다.

회원의 기본 의무는

(가) 평생 동안 모든 알콜성 음료를 마시지 않아야 하고
(나) 하루에 두 번 ‘영웅적 봉헌 기도문’을 바치며
(다) 단주회의 휘장을 착용한다.

‘영웅적 봉헌 기도문’은 다음과 같다.

오, 예수 성심이시여,
더욱 큰 영광과 위안을 받으소서.
저는 당신을 위해 좋은 표양을 보이고 극기하오며,
술을 절제하지 못한 죄와
무절제하게 음주하는 이들의 회심을 위해
보속하오며,
평생 동안 술을 끊기로 약속하나이다.

이 활동을 하기 위해 쁘레시디움에서는 다음과 같이 준비한다.

(가) 단주회의 중앙 회장으로부터 지부 설립 승인을 받는다.
(나) 지부가 이미 설립되어 있다면, 기존 지부의 동의를 얻어 사업을 추진하고 회원을 모집한다. (부록 9 참조)

18 지역별 특수 활동 실시

레지오 단원들은 지역의 특성에 맞는 활동이나 레지오의 관리기관에서 승인한 특수 활동을 수행하기 위해서 여러 다양한 방법을 동원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방법은 어디까지나 교회 당국의 지침과 일치하는 것이라야 한다. 어떤 새로운 활동을 착수하려면 항상 기획과 용기가 필요하다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하는 바이다.
가톨릭의 깃발 아래 이루어지는 모든 영웅적인 활동은 지역 주민의 사고 방식에 가위 충격적인 효과를 발휘한다. 심지어는 비 신자들도 깜짝 놀라 깨어나, 믿음에 대하여 새롭고 진지한 태도를 보일 것이다. 이렇게 영적 수준이 달라지면, 주민들의 생활 방식도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두려움을 떨쳐버리자. 우리 가운데 겁쟁이는 없어야 한다. 그런데 ‘두려워하지 말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계속 되풀이할 필요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사도직과 관련된 경우이다. 두려움은 활동하려는 마음과는 걸맞지 않으며 바르게 판단하는 힘을 빼앗아 간다. 그러므로 다시 말하거니와, 한 가지 두려움만을 제외하고 모든 두려움을 몰아내어야 한다. 그 한 가지 두려움이란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하느님을 두려워한다면, 여러분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고, 세속의 모든 영들을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이다.
신중함에 관하여 말한다면, 성서가 명확히 정의를 내리고 있는 신중함 –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는 그런 신중함 – 을 지녀야 한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선택한 이들이 보여 준 신중함, 영적인 신중함이다. 나약하고 게으르고 어리석으며 이기적이고 비참한 육 적인 신중함이어서는 안 된다. 사실 그러한 것들은 신중한 것이 아니다.”(교황 비오 11세 / Pius XI : 1931년 5월 17일 강론)

제38장 빠뜨리치안 회

빠뜨리치안 회(Patricians)는 1955년에 설립되었다. 이 회의 목적은 사람들에게 종교에 대한 지식을 늘려 주고, 자신의 생각을 남에게 밝히는 방법을 가르쳐 주며, 그들이 사도직 활동에 참여 하도록 격려하기 위한 것이다. 빠뜨리치안 회의 교육 방법은 최초에 시험적으로 마련한 것이었는데, 오늘날까지 계속 바뀌지 않고 사용되고 있다. 초기에는 교리 강습이나 일반 강의 또는 질의 응답과 같은 기존의 방법들이 제시되었으나 채택되지 않았다 그러한 방법들은 그 나름대로 필요한 기능을 지니고는 있지만, 교회가 안고 있는 근본 문제, 이를테면 교리 지식을 전혀 갖추지 못한 성인(成人)들의 문제나, 혀가 굳어진 평신도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었다. 빠뜨리치안 회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효과가 있다는 것을 입증해 주고 있으므로, 이 회는 변질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유지 발전시켜야 한다. 이 회의 교육 방법은 균형이 아주 잘 잡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마치 라디오 주파수가 조금만 흔들려도 다른 방송이 나오는 것과 같이, 약간만 손을 잘못 대면 전혀 다른 형태로 바뀌어 버릴 가능성이 있다.
기존의 방법이란 한 사람 또는 여러 사람의 전문 강사가 많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강의 하는 방식이다. 이와는 달리 빠뜨리치안 회는 레지오 마리애가 쓰고 있는 공동 접근 방법을 이용하는데, 이는 회합에 참석한 모든 회원이 신앙 문제를 놓고 적극적으로 토론함으로써 종교에 대한 지식을 쌓아 가는 공동 작업이다.
분석 결과에 따르면, 빠뜨리치안 회는 레지오의 여러 특징적 요소들을 지니고 있으며, 레지오의 조식 체계를 적용시켜 신앙 교육을 이끌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 회의 회합은 성모님이 주관하신다. 예수님을 모셔다가 이 세상에 주신 분은 성모님이시다. 그리하여 성모님은 예수님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는 모든 뒷일을 맡아 하신다. 이러한 성모님의 탁월한 지위는 레지오의 소 제대가 잘 드러내 보여 준다. 따라서 빠뜨리치안 회합도 레지오의 제대를 그 중심으로 삼아야 한다. 빠뜨리치안 회원들은 성모님 주위에 모여 앉아 교회의 모든 문제들에 대한, 다시 말하면, 약속대로 그들 한가운데 함께 계시는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이 회합은 그 자체로서 차원 높은 기도의 형태를 취하게 되며, 다양한 순서로 진행되기 때문에 지루하게 느껴지지도 않는다. 평상시에 두 시간 동안을 계속해서 기도를 바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점이 바로 빠뜨리치안 회가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영성을 높여 주는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쁘레시디움 회합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단원들로부터 구두 보고를 받는 일이다. 빠뜨리치안 회합 역시 참석한 회원 한 사람 한 사람으로부터 구두 발언을 이끌어 내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목표가 된다. 따라서 회합실을 준비하거나 회합을 진행하는 일 등의 모든 것은 이 목표를 이루기 알맞게 이끌어져야 한다. 회합은 화기애애하고 이해심이 넘치는 가족과 같은 분위기를 유지해야 한다. 아마도 몇몇 사람은 다른 이들보다 더 많이 발언에 나서겠지만, 결과적으로 한 사람도 빠짐없이 자신의 의견을 발표할 수 있는 분위기라야 한다. 그런데 이런 좋은 분위기는 그것을 해치는 방해 요인들이 제거됐을 때 가능하다. 만일 빠뜨리치안 회합에서 일반 대중들의 모임에서나 볼 수 있는 공격이나 비난 또는 상대방에 대한 비웃음 등으로 시간을 허비하게 된다면, 회원들은 모두 떠나고 말 것이다
‘가장 미약한 사람들’도 편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 형제애가 느껴질 때, 빠뜨리치안 회는 자리를 잡았다고 할 수 있다. 한 사람의 발언은, 마치 쇠사슬의 고리가 다른 고리를 끌어당기듯이, 다른 사람들도 발언하도록 이끄는 도화선의 역할을 한다. 이렇게 토론을 벌이다 보면 회원들은 미처 몰랐던 지식을 얻게 되고, 산발적이고 개별적으로 알고 있던 가톨릭 교리 지식을 체계적으로 정리할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새로운 지식과 흥미가 더해 갈수록 회원들은 그리스도 신비체와의 일치 속으로 더욱 깊이 젖어 들게 되고, 그 신비체의 생명을 받게 된다.
그 밖의 여러 면을 살펴보더라도, 빠뜨리치안 회가 레지오의 이론과 기술을 응용하고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레지오 단원들은 이 점을 충분히 인식하여, 쁘레시디움에 대하여 확신을 갖는 것처럼 빠뜨리치안 회를 운영하는 일에도 뚜렷한 소신을 지녀야 한다. 이러한 소신은 이 회를 이끌어 가면서 부딪치는 문제들에 대하여 충분히 대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도록 해줄 것이다.
가톨릭 신자들이 교회 울타리 밖에 있는 사람들이나 교회 공동체 안의 신자 상호간에 신앙 문제에 대해 거의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다는 사실은 매우 슬픈 일이다. 이러한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잘못된 태도를 지적하는 용어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침묵주의(Mutism)’라는 말이다. 이 용어를 처음 사용한 쉬넨스 추기경(Cardinal Suenens)은 “우리는 흔히 성당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이 신앙에 대해 우리가 하는 이야기를 귀담아 들으려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 가톨릭 신자들이 이야기조차 꺼내지 않는 것이 문제이다.”라고 지적하였다. 대개 가톨릭 신자들은 신앙적인 면에서 남을 도우려고 나서지 않는 것이 사실인 듯하다. 진지하게 물어 오는 사살들에게조차 올바른 대답을 해주지 못하는 형편이니, 결국 가톨릭 신자들은 믿지 않는 일들을 복음화하는 일에 관심이 없다는 좋지 않은 인상을 주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잘못된 현상이 널리 퍼지게 되면,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 그 자체를 위태롭게 만든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그와 같은 이기주의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은, 우리가 보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다. 신앙 문제로 대화를 나누어야 할 경우에 신자들이 입을 꼭 다물고 있거나 무관심한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대개 대화를 이끌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가) 이러한 신자들은 자신의 교리 지식이 부족하다는 것을 지나치게 의식한 나머지, 자신의 약점이 드러날 만한 기회는 무조건 피하려 든다.
(나) 교리 지식은 상당한 정도 갖추고는 있지만, 마치 교리 문답의 해답처럼 따로따로 떨어져서 정리가 되어 있지 않은 경우이다. 이런 지식들은, 마치 자동차의 부품이나 인체의 각 부분이 긴밀히 연결되어 있어야 하는 것처럼 각자의 신앙 안에서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상태로 남아있는 것이다. 더구나 몇몇 중요한 교리 항목에 대해서는 충분한 지식을 갖추지 못한 경우도 있으므로, 이런 때에는 교리에 대한 지식이 전체적으로 균형을 이루지 못한다. 따라서 비록 토막 교리 지식들을 한데 모아 놓는다 해도, 부품들이 올바로 연결되어 있지 않은 기계처럼 제 기능을 발휘할 수가 없는 것이다
(다) 더 많은 경우에, 너무나 아는 것이 없기 때문에 믿음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신자들도 흔히 볼 수 있다. 이를테면 ‘반쪽 믿음’의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에서, 믿음은 종교와 거리가 먼 환경과 부딪치게 되면 쉽게 무너지고 만다.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이상과 같은 문제들을 소홀히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빠뜨리치안 회는 레지오가 관장하는 모임이다. 각 지회(支會)는 하나의 쁘레시디움에 소속되어야 하며, 반드시 그 쁘레시디움의 행동단원이 진행을 맡아야 한다. 하나의 쁘레시디움이 몇 개의 지회를 관장할 수 있다. 각 지회는 쁘레시디움의 영적 지도자가 승인하는 별도의 영적 지도자를 모셔야 한다. 수도회의 수사나 수녀가 영적 지도자가 될 수 있으며, 또한 교회 당국이 허용하는 경우에는 평신도도 가능하다.
‘빠뜨리치안’이라는 이름은, 대부분의 레지오 고유 명칭이 그러하듯이, 고대 로마에서 쓰던 용어를 따 온 것이다. ‘빠뜨리치안’은 귀족(Patricians)과 평민(Plebs)과 노예(Slaves)로 구분되는 고대 로마의 사회 계층 가운데 가장 높은 계층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그러므로 우리의 빠뜨리치안 회는 모든 사회 계층을 하나의 영신적 귀족으로 결속시키고자 열망한다. 그뿐 아니라, 본래 빠뜨리치안 귀족들은 애국심이 투철하고 조국의 번영을 위해 책임감이 넘쳐야 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빠뜨리치안 회원들도 그들의 영신적 조국인 교회를 떠받드는 사람들이어야 한다. 이 회의 규칙에는 모든 회원이 반드시 신앙심이 깊거나 본분을 잘 지키는 신자라야 한다고 제한하고 있지는 않다. 다만 가톨릭 신심을 지닌 신자라면 누구든지 회원이 될 수 있다. 그렇지만 반 가톨릭적인 성향이 뿌리 깊은 신자들은 입회 대상이 될 수 없다.
주교가 특별히 허가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가톨릭 신자가 아닌 사람은 이 회합에 참석할 수 없다.
빠뜨리치안 회합은 한 달에 한 번씩 열린다. 회합 시간을 엄격히 지키고 회합은 매달 꾸준히 열어야 한다. 도저히 회합을 열 수 없는 특별한 사정이 있지 않는 한 회합을 걸러서는 안 된다. 그러나 회원이 매 회합마다 반드시 출석해야 하는 의무는 없다. 다만 모든 회원들에게 다음 회합을 알리는 연락망을 마련해 놓을 필요는 있다.
한 지회의 회원 수는 50명이 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50명 정도만으로도 모든 이가 발언에 참여해야 한다는 면에서 볼 때 진행에 어려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좌석의 배치

극장처럼 무대와 객석이 별도로 배치되는 식은 피해야 하며, 그렇다고 무질서한 분위기가 되어서는 더욱 안 된다. 가급적이면 좌석을 반원형으로 배치한 후 그 앞쪽 공간을 탁자로 채워 둥글게 만드는 것이 바람직하다. 탁자 위에는 레지오의 제대를 차리는데, 반드시 벡실리움이 있어야 한다.
회합실은 조명이나 온도 또는 안락한 의자 등 모든 필요한 준비물을 잘 갖춤으로써 매력을 느낄 수 있도록 꾸며야 한다.
운영 경비는 비밀 헌금으로 충당하고, 회합 때마다 회계 보고 를 해야 한다.

회합의 순서

1 회합은 빠뜨리치안 기도문을 모두 서서 함께 바침으로써 시작된다.

2 평신도의 주제 발표나 담화는 15분으로 엄격히 제한되어 있다. 물론 제한 시간을 다 채우지 않아도 된다. 어느 모임에서나 마찬가지이지만, 제한 시간을 지키지 않으면 회합에 차질이 생기게 마련이다. 주제 발표는 굳이 그 방면에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 맡아야 할 필요는 없다. 그런 이들의 발표는 때때로 너무 학문적이거나 길어지게 되므로, 회합 첫머리부터 순조로워야 할 진행을 오히려 그르쳐 놓을 가능성이 있다. 한편, 주제 발표 자체가 필요 없다는 의견이 있었으나, 토론 주제에 대하여 어느 정도의 사전 공부가 필요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런 공부는 미리 어떤 회원을 지명하여 연구해 오도록 부탁하면 효과적으로 준비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밖의 다른 토론의 자료를 참석한 회원들에게 나누어 주는 일은 필수적이다.

3 주제 발표가 끝나면 회원들이 토론을 시작한다. 회합의 다른 부분은 모두 이 토론을 위한 것이므로, 활발히 진행되도록 잘 이끌어야 한다. 참석하고 있는 모든 회원이 토론에 참여하지 않고서는 진정한 토론이 될 수 없다. 빠뜨리치안 회의 과제는 자신의 의견을 발표할 만한 능력이 없거나 발언하기를 꺼리는 신자들을 발언하도록 만드는데 있다. 이는 그 사람 자신을 위해서나 교회의 건전한 발전을 위해서 반드시 풀어야 할 과제이다.
그러므로 모든 이가 발언하는 데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온갖 배려를 다해야 하겠지만, 그 반대의 경우가 될 만한 일은 모두 없애야 한다. 잘못되거나 어리석은 발언이 수없이 나올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그런 발언에 대해서 꾸짖는 듯한 태도를 보여서는 절대로 안 된다. 그와 같은 자세는 회원 한 사람 한 사람을 감싸고 달래서 발언하도록 만드는 빠뜨리치안 회의 목적을 꺾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의사를 자유롭게 발표하도록 이끄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가령 엉뚱한 발언이라도 자신의 생각을 몽땅 털어놓도록 격려해 주어야 한다. 염두에 두어야 할 일은, 그런 잘못된 지식들은 공개된 후 토론을 통해 자연스럽게 바로잡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다른 장소에서 이 잘못된 지식들을 마치 노래하듯이 되풀이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중요한 점은 발언 그 자체이며, 발언을 잘한다던가 또는 내용이 정확하다던가 하는 점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완벽한 발언이 빛날지는 모르지만, 평범한 발언이 가장 많은 성과를 거둔다. 평범한 발언이야말로 자신의 의견을 제대로 발표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입을 열도록 훈련시켜 주기 때문이다.
심리적으로 볼 때, 발언은 회합의 중심을 이루는 사람들을 향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회원 전체를 향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가령 전체를 향해서 발언하게 되면, 듣는 이들은 발언한 사람의 말이 끝났을 때 그가 마치 자신과 단둘이 대화한 것처럼 느끼게 되므로, 상대방의 발언 내용에 대해서 무엇인가 한마디 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고 발언을 준비한다. 빠뜨리치안 회가 의도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만일 회원들의 마음이 분산되어 있는 분위기라면, 이러한 심리적 균형은 깨지고 만다. 예컨대, 사회자가 발언에 대해서 논평을 곁들인다든지, 또는 칭찬을 한다든지 해서 회원들의 주의를 자신에게 쏠리게 한다면 회원들의 마음은 흐트러지고 말 것이다. 또는, 이미 발언한 사람이 자신이 제기한 문제점을 되풀이해서 다루려고 또다시 발언하거나, 영적 지도자가 어려운 문제가 나올 때마다 이를 해결하려고 매번 발언에 끼여 들어도 똑같은 현상이 일어난다. 이렇게 되면 토론을 하는 본래의 뜻을 그르치게 되며, 몇몇 회원이 질문하고 전문가 몇몇이 답변하는, 이른바 ‘전문가 토론회(panel discussion)’로 모습이 바뀌고 만다. 그러므로 소심한 사람들이 발언하도록 분위기를 이끄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사회자는 주제와 관련이 없는 발언이 나오더라도 참을성을 발휘해야 한다. 발언을 제대로 하라고 주의를 주는 행위는 자칫 회합 전체를 위태롭게 만들 수 있다. 다만 빗나간 발언으로 다른 회원들까지 궤도를 벗어나는 발언을 하게 만들 때는 사회자가 바로잡아 주어야 한다.
발언할 때는 자리에서 일어나야 한다. 앉은 채로 이야기하면 더 자연스럽게 말할 수는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토론이 단순히 대화하는 말투가 되며 무질서하게 묻고 대답하는 식으로 변질될 위험이 있다.
발언의 횟수가 한 번으로 제한되어 있지는 않지만, 이미 발언을 한 회원보다는 아직 발언을 하지 않은 회원에게 우선권을 주어야 한다.

4 회합을 시작한 후 한 시간이 지나면 토론을 잠시 중단하고 휴식 시간을 가져야 한다. 이 휴식 시간에 앞서서 회계 보고를 하고, 동시에 비밀 헌금이 있음을 예고한다. 즉, 회합이 다시 시작되어 영적 지도자의 훈화가 끝난 뒤, 곧 이어 비밀 헌금 주머니를 돌린다는 것을 미리 알리는 것이다.

5 휴식 시간을 위해서 간단한 다과를 준비한다. 이는 회합의 중요한 요소이며, 다음과 같은 중요한 기능을 발휘하므로 빠뜨려서는 안 된다.

(가) 회원들이 서로 사귀고 친목을 도모하는 기회를 마련해 준다.
(나)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 준다.
(다) 다과를 즐기며 잠시 쉴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 준다.
(라) 회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사도직 활동의 기회를 마련해 준다.

휴식 시간에 다과를 생략하고 그 시간을 다른 목적에 쓰도록 하자는 제안이 있었다. 그러나 다과를 베풀지 않고 휴식 시간을 적절히 사용하기란 사실상 쉽지 않은 일이다. 휴식 시간은 15분 동안 계속된다.

6 회합이 다시 시작되면 영적 지도자의 훈화가 15분 동안 있게 된다. 이 시간까지 진행된 모든 토론의 내용은 사실상 훈화를 통해서 정리되므로, 모든 회원은 이 훈화를 주의 깊게 들어야 한다. 훈화는 회합의 필수 요소로서 토론한 내용을 마무리하고 올바른 형태로 가다듬어 최고의 수준으로 끌어올린다. 그리하여 회원들이 하느님께 더욱 많은 사랑과 봉사를 바치도록 북돋아 준다.
훈화 시간을 회합의 끝 부분으로 옮겨, 토론을 거친 더 많은 내용들을 종합하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는 의견이 있었다. 그러나 훈화는 앞으로 더 계속될 토론을 위해서 자료를 제공한다는 의도가 들어 있다. 따라서 회합이 끝날 즈음 훈화를 하게 되면 이러한 의도를 살릴 수 없게 된다. 또한 다소 수준이 낮은 회원들은 회합 시간 중간에 훈화를 들음으로써 큰 도움을 받는다. 훈화의 내용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회원의 경우라도 훈화에 이어 계속되는 토론을 통해서 ‘해석의 원리'(뒤에 설명함)에 따라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7 영적 지도자의 훈화가 끝나면, 다시 일반 토론을 계속하다가 폐회 시간 5분 전에 토론을 끝낸다.

8 이어서 회합의 끝부분을 다음과 같이 진행한다.

(가) 사회자는 전체를 대표해서 주제 발표자에게 간단한 감사의 뜻을 전한다. 그러나 박수를 치는 등의 전체적인 감사의 표시는 하지 않는 것이 좋다.
(나) 다음 회합의 토론 주제를 결정한다. 토론의 주제는 종교에 관한 문제라야 하며, 순전히 학술적이거나 문예나 문학 또는 경제 등에 관한 주제는 피해야 한다.
(다) 그 밖의 공지 사항을 발표한다.

9 모두 일어서서 마침 기도로 사도신경을 함께 바친다.

10 회합은 사제의 강복으로 끝이 난다. 강복은 무릎을 꿇지 않고 서 있는 채로 받는 것이 좋다.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의자 사이에 무릎을 꿇을 때 일어나는 혼란을 피하기 위함이다.
이렇게 해서 전체 소요 시간은 모두 두 시간이 되도록 한다. 회합 순서 전반에 걸쳐 정확히 시간을 지키는 일이 중요하다. 한 순서라도 정한 시간을 넘기게 되면 다른 순서에 영향을 미치게 되므로 회합의 균형이 깨진다. 회합의 각 부분과 할당 시간을 간략히 보여 주는 회합 순서는 405쪽에 실려 있다.
전체 토론 내용을 요약할 필요는 없으며, 어떤 중요한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더라도 낙담할 필요가 없다. 다음 모임이 계속 열리므로 언젠가는 완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빠뜨리치안 회원은 활동의 의무가 없다. 회합에서 활동을 배당해서는 안 되며, 가외로 활동하도록 부담을 주어서도 안 된다. 그러나 친밀한 개인 접촉을 통하여 그들을 여러 방면으로 이끌어 주어야 하며, 특히 레지오의 행동단원, 협조단원 또는 아듀또리움 단원이 되도록 권유함이 마땅한 일이다. 빠뜨리치안 회를 슬기롭게 이용하면 지역 사회의 모든 주민들에게 도움을 주는 강력한 힘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빠뜨리치안 회의 몇 가지 원칙

1 집단 심리를 활용하자.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자연히 집단을 이루게 된다. 그런데 만일 그 집단이 훌륭한 정신과 규칙을 지니고 있다면 그에 맞는 큰 영향력을 구성원들에게 행사하게 된다. 각 개인은 자신이 속해 있는 집단에서 뒤쳐지지 않으려고 나름대로 힘껏 노력하는데, 이러한 노력은 때로는 좋은 방향으로, 때로는 좋지 않은 방향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즉, 각 개인은 완전히 수동적으로 집단을 따라만 가는 것이 아니라 그 집단을 움직이는 생명체로서 참여하며, 일단 집단 안에서 자리를 잡고 안정을 얻으면 곧 힘을 발휘한다.
이러한 원리를 빠뜨리치안 회에 적용하면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온다. 즉, 드러나 보이지는 않으나 억제할 수 없는 집단의 힘이 가장 뒤쳐져 있는 회원을 포함한 모든 회원을 움직여서, 그들이 이 회합을 통해 듣고 배운 바를 받아들이고, 또한 그 밖의 다른 면에서도 함께 어울리도록 작용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정도의 성과를 내고도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는 집단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빠뜨리치안 회는 높은 수준의 정신을 지닌 간부들과 그 밖의 사람들이 새롭고 훌륭한 의견들을 끊임없이 제공하고 보장해 주므로 그와 같은 일은 일어날 수 없다. 또한 이러한 집단 심리의 작용으로 회원들은 새로운 의견과 사상을 제대로 흡수하게 된다. 따라서 빠뜨리치안 회는 항상 질적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2 괴로운 침묵의 순간을 참고 기다리자. 토론 중 발언이 오랫동안 끊기면 괜히 불안해진다. 그때 사회자는 회원들에게 발언을 재촉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러나 재촉은 옳은 방법이 될 수 없다. 재촉에 의해 생기는 긴장감은 회원들로 하여금 오히려 발언하려는 마음이 없어지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가족들끼리는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 필요를 별로 느끼지 않는다는 점을 상기하라. 따라서 이따금 대화가 멈출 때 오히려 마음이 편해지는 것이다. 발언이 끊기면, 집안에서 가족들이 하듯이 모두 잠자코 앉아 있도록 하는 것이 좋다. 잠잠한 분위기는 곧 깨진다. 그리고 다물었던 입이 일단 열리면, 대개 이야기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자유롭고 편안한 분위기로 변한다.

3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게 하자.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대체로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전문가에게 곧바로 해답을 얻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스스로 문제를 풀고자 노력하는 방법이다. 전문가의 의견을 듣는 방법은 직접적이고 간편한 방법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대부분의 교육이 이 방법에 의존하고 있다. 그런데 이 방법의 단점은 학생들이 전문가의 해답을 절반 정도 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실력과 책임감이 향상되지 않는 또 다른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스스로 문제를 푸는 두 번째 방법은 힘이 더 든다. 이 방법은 학생들에게 문제를 내맡김으로써 그들 스스로 해답을 얻게 하는 것이다. 학생들이 서툰 해답을 마련하면, 전문가가 나서서 지도해 준다. 그 다음 다시 학생들 스스로의 힘으로 좀더 나은 방안을 찾도록 한다. 이와 같이 남의 도움을 받아서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통해서 얻게 되는 성과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제시된 문제의 내용과 해답을 확실하게 깨닫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서서히 노력하여 문제를 풀었으므로, 배운 것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마음에 새겨 자신을 갖게 된다. 바로 이것이 빠뜨리치안 회가 사용하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어떤 정확하지 않은 발언이 나오더라도 지도자가 이를 즉시 바로 잡으려고 할 일이 아니라 그대로 토론에 내맡겨 두어야 함을 알려 준다. 만일 그것이 끝까지 해결되지 않고 크게 잘못된 상태로 남게 되는 경우에는 물론 다른 방법을 써서라도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발언한 당사자가 창피를 느끼지 않는 방법이라야 한다. 이런 경우, ‘성모님은 당신의 아드님을 가르치실 때 어떻게 하셨을까’ 를 생각해 본다면 도움이 될 것이다.

4 질문을 하지 않도록 하자. 일반 강의에서는 청중의 반응이 질문을 통해서 나타나므로 질문을 환영한다. 질문을 하면 즉시 강사가 답변을 하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빠뜨리치안 회에서는 질문을 반기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토론을 중단시키는 것으로 여긴다. 이를 마친 전기(電氣)의 경우에서 누전을 일으키는 현상과 같다고 보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의견을 발표하여 토론에 기여할 생각은 하지 않고 처음부터 질문만 하려 하고, 질문에 일일이 답변하다 보면 토론은 타격을 입게 되며, 결국 토론의 장(場)이 강의실로 바뀌고 만다. 이런 강의실에는 회원들이 끝까지 앉아 있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는 꼭 지켜야 할 황금률이 있다. 그것은 질문하는 사람이 반드시 자신의 의견(해답)을 덧붙여서 질문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질문은 대개 토론의 흐름을 바꾸지 않고도 적절히 합류시킬 수 있음이 경험을 통해 입증되어 있다.

5 빠뜨리치안 회의 형성 원리 벽돌 한 장 한 장을 쌓아 올려 놓듯이 지식을 쌓아 올리는 것은 좋은 방법이다. 그런데 빠뜨리치안 회원은 단순한 덧셈이 아니라 곱셈을 한다. 빠뜨리치안 회에서는 이른바 살아 있는 벽돌을 쌓아 올린다. 새로운 의견 하나 하나가 이미 발표된 다른 모든 의견들과 상호 작용을 일으키면서 서로 영향을 미치고 또 다른 의견들을 생산해 낸다.즉,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여러 의견이 수정되고 새로운 사상이 싹트는 것이다. 특히 은총으로 이루어지는 이 복잡한 상호 작용은 각 사람의 마음에 풍부한 열매를 맺는 누룩의 역할 을 하게 되며, 집단 전체에도 공동 효과를 가져온다. 이는 마치 밀물과도 같다고 할 수 있는데, 회원들의 각기 다른 성격이나 생각들을 한데 모아서 같은 방향으로 흐르게 하는 추진력을 발생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침체된 믿음과 소극적인 신앙에 강한 추진력과 더불어 방향까지 제시해 주면, 삶은 틀림없이 변화를 가져온다.

6 주관자의 역할 쁘레시디움의 운명이 간부들의 손에 달려 있는 것처럼 빠뜨리치안 회도 주관자들에 따라 크게 좌우된다. 주관자는 자신의 역할이 지나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주관자가 너무 드러나게 행동하면 할수록 일반 회원들의 역할은 그만큼 줄어든다. 그렇게 되면 학교 교실과 같은 분위기로 빠져 들고 만다. 영적 지도자, 사회자 및 주제 발표자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시간과 그 밖의 규정들을 잘 지켜야 한다. 참석한 회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보통 사람들은 전문가나 권위자 앞에서는 불편을 느낀다. 그러므로 이 회를 주관하는 사람들은, 회원들에게 지식을 성공적으로 전달하기 위하여, 주님께서 진리를 가르칠 때 쓰신 방법을 따라야 한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마태 11, 29) 토론이 진행되는 동안 주관자들이 두드러진 행동을 하지 않을수록 토론은 더욱 자유롭게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말은 주관자들이 꼭 정해진 시간에만 제한적으로 발언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주관자들도 일반 회원과 마찬가지로 토론에 참여할 수 있다. 다만, 되도록이면 자제하라는 뜻이다.

7 해석의 원리 빠뜨리치안 회의 특성 가운데 가장 뀌어난 것은 ‘해석의 원리’이다. 토론 중에 대다수의 회원들은 이런 저런 이유로 발언 내용을 완전히 파악하지 못하는 수가 있다. 그런 경우에 이 해석의 원리는 회원 모두가 발언 내용을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 이는 아무리 수준 높은 사상이나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 발표되었다 하더라도, 마지막 단계에서는 토론을 거치면서 보통 회원들도 모두 이해하게 된다는 뜻이다.
학식이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서로 다 이해할 수 있는 공동의 발판을 마련하는 능력은 값비싼 보석처럼 귀중한 것이다. 이제 이처럼 귀중한 일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가령, 주제 발표 (또는 어떤 다른 발언) 내용이 수준이 너무 높아서, 참석한 회원 가운데 10%만이 그것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고 하자. 만일 일반 강의의 내용이 그처럼 어려웠다면 그 강의는 헛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빠뜨리치안 회합에서는 내용을 이해한 10%의 회원 가운데 몇 명이 그 발언을 놓고 토론을 벌이기 시작한다. 실제로 그들은 대다수의 회원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수준으로 토론을 벌이기 때문에, 어려웠던 내용이 일반적인 수준으로 낮아진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다른 회원들도 발언에 참여하게 되고, 마침내는 밀을 갈아서 고운 밀가루를 만들어 내는 결과가 나온다. 당초 발표된 내용에 들어 있던 불명확한 점이 풀이가 되고 설명이 가해져서 모든 회원들은 자신의 지적 수준에 알맞게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을 통하여 빠뜨리치안 회에서는 누가 무슨 발언을 하든, 어느 것 하나 잃어버리는 것이 없다.

이러한 빠뜨리치안 회의 특성은 선교 활동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지역에서 매우 독특한 가치를 발휘한다. 이 곳에서 선교사들이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은, 언어가 다르고 사고 방식이 전혀 다른 현지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면 가톨릭 교리를 충분히 이해시키느냐 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경우에, 빠뜨리치안 회의 ‘해석의 원리’는 마치 깊은 구렁에 다리를 놓는 것과 같은 큰 힘을 드러낼 것이다.

8 하느님께 일거리를 드리는 일 이 일에는 단순히 벽돌을 쌓아 집을 짓는 것 이상의 현상이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은총의 원리이다. 즉, 은총은 우리의 자연적 본성을 초월하여 우리가 가진 재료와 능력으로 지을 수 있는 집보다 훨씬 더 큰 집을 지을 수 있게 해준다.
계시 종교에서는 신앙에 관한 어떤 문제에 대하여 아무도 완전한 해답을 제시할 수 없다. 모든 일에 초자연적인 믿음과 은총이 늘 개입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훌륭한 토론이었다 하더라도 항상 아쉬움은 남게 마련이다. 하물며 토론이 다소 충분치 못했다고 느껴지면, 흔히 그 토론이 아무 쓸모 없는 것이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하느님께서는 지극히 미천한 우리의 노력마저도 당신 손에 받아 주시고 써 주시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풀 수 없을 것처럼 보였던 문제가 의외로 해결된다. 과연 그 문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사소한 것이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문제의 정도에 비추어 우리의 노력이 훨씬 컸던 것인지, 혹은 하느님께서 모자란 부분을 대신 채워 주셨기 때문인지,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그렇지만 일은 우리가 바랐던 대로 완성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항상 우리의 철학으로 삼아야 할 내용이다. 물론 이 철학은 단지 빠뜨리치안 회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 철학을 통해서 빠뜨리치안 회합에 참석하는 모든 이들이, 자신의 능력으로는 훌륭한 발언을 하기에 역부족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발언에 나서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미약한 노력이라도 전혀 노력하지 않는 것보다 훨씬 낫다. 그러므로 온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은 결국 가톨릭 신자들이 얼마만큼 노력을 기울이느냐 기울이지 않느냐에 달려 있는 문제인 것이다. 그런데 모든 가톨릭 신자들이 ‘잘 알지도 못하는 내가 차라리 가만히 앉아 있는 편이 낫지’ 하며 우물거리기만 하는 한, 그러한 노력은 기대할 수 없다. 가톨릭 신자 공동체에 이미 널리 퍼져 있는 현상이 이러하므로, 빠뜨리치안 회는 바로 이러한 현상을 치유하는 도움의 손길이 되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빠뜨리치안 회 기도문

(다 함께 서서 바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사랑하올 주님,
빠뜨리치안 회를 축복해 주소서.
저희는 빠뜨리치안 회원으로서
주님께 가까이 가고자 하오며,
또한 주님의 어머니시며 우리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 다가가려 하나이다.
저희가 가톨릭 신앙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 주소서.
그리하여 진리가 저희들의 삶을 변화시키고
주님께서 항상 저희와 가까이 계심을 깨닫게 해주소서.
이로써 저희가 주님 안에서 생활하고
주님 안에서 서로 의지하며,
저 한 사람의 방심이 형제들을 고통스럽게 하고
멸망케 할 수도 있음을 깨닫게 해주소서.
저희에게 내려 주신 짐이 비록 무겁지만
영광임을 알게 해 주시고,
주님을 위해 기꺼이 인내하게 하소서.
저희가 어떤 인간의 무리인지,
또한 저희 본성이 얼마나 게으른지 잘 아옵기에,
저희는 주님께 저희의 두 어깨를 바치기에도 합당치 않음을
고백하나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저희의 연약함보다는
저희의 믿음을 소중히 여기시어,
불완전한 저희를
주님의 도구로 불러 써 주심을
또한 잘 알고 있나이다.
이에 저희는 어머니이신 마리아의 기도에
저희들의 목소리를 합하여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주님께 간절히 청하오니,
저희에게 성령의 은총을 내려 주시고
저희와 함께 머무르시며
생명의 말씀을 주시고
저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베풀어 주소서.
그리하여 저희가 풍부하게 받은 것을
아낌없이 나누도록 해주소서.
이 길이 아니고서는
주님의 강생과
처절한 십자가의 죽음이 얻어 주신 은총의 열매를
온 제상이 받지 못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옵니다.
주님, 그토록 크신 당신의 노고와 수난이
저희 안에서 헛되지 않게 해주소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회합 순서

0:00
빠뜨리치안 회 기도문 (다 함께 서서 바침)
평신도 주제 발표(15분 이내)
0:15
토론
0:59
회계 보고
영적 지도자 담화 후 비밀 헌금이 있음을 예고
1:00
다과, 휴식 시간
1:15
영적 지도자 담화(15분 이내)
1:30
토론 계속
헌금(비밀 헌금 주머니를 돌림)
1:55
공지 사항(주제 발표자에 대한 감사 표시 및 다음 회합
일자와 주제 등을 알림)
2:00
사도신경(다 함께 서서 바침)
사제의 강복(선 채로 받음)

대학 및 청소년 지회

정상적인 방식으로 회합을 갖기가 전혀 불가능한 경우, 예컨대

(가) 대학 및 기타 교육 기관에 지회가 설립되어 있거나
(나) 회원 모두가 18세 미만의 젊은이들로 구성된 지회의 경우에는 다음과 같이 단축된 진행 방식(소요 시간 1시간 30분)을 허용한다.

0:00
빠뜨리치안 회 기도문 및 평신도 주제발표(5분 이내)
0:05
토론(40분)
0:45
휴식 시간(10분) (다과를 생략할 수 있음)
0:55
영적 지도자 담화(10분)
비밀 헌금은 생략할 수 있음
1:05
토론 계속(20분)
1:25
공지 사항(일반 지회의 경우와 같은)
1:30
사도신경 및 강복(일반 지회의 경우와 같음)

“빠뜨리치안 회는 가정적이다. 우리 모두에게 관련되는 문제에 대해 마음을 터놓고, 솔직하고 진실하게 대화를 나누는 것은 가정 생활에서 맛보는 즐거움 중의 하나이다. 우리 믿는 이들은 그리스도의 형제들이므로 하느님의 가족에 속한다. 옛날 갈릴래아에서 사도들이 주님과 함께 하루의 선교 활동을 마치고 나서, 그날 주님께서 주신 가르침을 놓고 이야기 꽃을 피우던 바로 그 정신을 본받아, 우리의 믿음을 생각하고 믿음을 이야기하며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방법을 놓고 토론하는 것 – 이것이 빠뜨리치안 회의 정신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더없이 훌륭하고 사랑에 찬 선생님이시고 스승이시며 주님이심을 안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주님께서 마련하신 구원의 신비 속에 우리의 마음을 적시어, 마치 우리가 우리의 자녀나 가정이나 직장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듯이, 우리의 믿음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 아주 편안함을 느껴야 한다는 뜻이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진리를 꿰뚫어 볼 수 있는 통찰력을 주신다. 우리는 이 통찰력을 빠뜨리치안 회합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서로 배운다. 빠뜨리치안 회합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증거자가 되며, 그리스도께서 우리 이웃의 입을 통해서 들려주시는 말씀을 들으며, 우리의 가슴은 활활 타오른다.
빠뜨리치안 회합 안에서 그리고 빠뜨리치안 회합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오시고, 하느님의 진리를 가슴속에 더욱 깊이 새기게 해주신다. 이로써 우리의 일터인 교회가 우리 안에서 더욱 확실하게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하여 마음은 마음으로부터 빛을 얻고 가슴은 믿음으로 타올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들 안에서 자라시는 것이다.”(브로피 신부 / Fr. P. J. Brophy)

제39장 레지오 사도직의 주안점

1 성모님과 함께 가지 않으면 영혼들에게 접근할 수 없다

성모님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의 잘못된 생각에 영합하려고 간혹 성모님을 뒷전에 감추는 일이 있다. 이러한 방법으로 가톨릭 교리를 좀더 쉽게 받아들이도록 만들려는 의도는 인간적 사고 방식에는 맞을지 모르나, 결코 하느님의 뜻을 드러내지는 못한다. 구원 사업에 있어서의 성모님의 역할을 경시하는 태도는 마치 그리스도를 빼놓고 그리스도교 신앙을 전파하는 것과 같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 예수님에 대하여 미리 알려 주시고, 예수님을 보내시어 인류에게 주시며, 세상에 드러내시는 모든 일에 언제나 성모님을 개입시키셨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이 모든 일들을 성모님이 함께 하심으로써 이루어지도록 섭리하셨기 때문이다.
태초부터, 세상 창조 이전부터, 하느님께서는 마리아를 이미 마음 속에 두고 계셨다. 하느님께서는 마리아에 관해서 몸소 가장 먼저 말씀하시고, 더할 나위 없이 진귀한 운명을 마련해 주셨다. 성모님의 모든 위대함은 아득히 먼 옛날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이전부터 비롯되었다. 영원하신 성부께서는 태초부터 구세주에 대한 구상을 하실 때마다 마리아도 함께 염두에 두셨다. 이로써, ‘왜 하느님께서 마리아의 도움을 받아야 하셨는가?’라는 의문을 품는 사람들에게 일찌감치 대답을 마련해 두셨던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시지 않고서도 당신의 뜻을 이루실 수 있는 분이시다 따라서 마리아 없이도 하느님께서는 무슨 일이든지 하실 수가 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흡족하다고 여기시는 구원 계획 속에는 마리아가 들어 있었고, 구세주를 이 세상에 보내시기로 정하신 순간부터 구세주의 옆에는 마리아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하느님의 계획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하느님께서는 마리아를 구세주의 어머니로 삼는 데 그치지 않으시고, 필연적으로 구세주와 일치하는 사람들의 어머니까지 되도록 마련해 주신 것이다.
이처럼 성모님은 태초부터 모든 피조물 가운데 유일하게 드높은 자리를 차지하셨으며, 가장 위대한 이들조차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특별한 하느님의 섭리 안에 독특하게 마련되셨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사탄에게 가장 먼저 구원에 대한 당신의 계획을 말씀하시면서, “나는 너를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리라. 네 후손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라. 너는 그 발꿈치를 물려고 하다가 도리어 여자의 후손에게 머리를 밟히리라.”(창세 3, 15)고 선포하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장차 있을 구원 사업에 관해서 하느님께서 몸소 밝히신 요지이다.
성모님은 분명히 당신에게 주어진 지위를 차지하기에 합당한 분이시다. 성모님은 태어나시기 전이나 그 이후에도 영원히 사탄과는 서로 원수가 되는 분이시다. 성모님은 피조물이지만 구세주 바로 다음 자리에 계시며, 구세주와 비슷한 분(창세 2, 18 참조)이시며, 다른 모든 피조물들을 월등히 능가하는 분이시다. 어떤 예언자도, 심지어는 세례자 요한까지도, 성모님처럼 주님과 함께 하지 못하였다. 어떤 제왕도, 어떤 지도자도, 베드로와 바오로를 비롯한 어떤 사도나 복음 사가도, 어떤 위대한 교황이나 사목자나 교회 박사도, 어떤 성인도, 다윗이나 솔로몬이나 모세나 아브라함도, 성모님처럼 주님과 가까이 있지 못한다. 그 모든 위대한 이들 가운데에도 성모님처럼 하느님께 가까이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피조물 가운데에서 오직 한 분, 성모님만을 구속 사업의 공동 사업자로 지정하셨다.
예언자를 통하여 생생하고 확실하게 계시되었다. 예언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동정녀’, ‘동정녀와 아기’, ‘여인’, ‘여인과 아기’, ‘임금님 오른편에 앉아 계신 모후’ – 이런 예언의 말씀들은 한 여인이 우리 구원의 으뜸 ;요소가 될 것임을 끊임없이 되풀이해서 확인시켜 준다. 이 예언은 장차 그 여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 것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일까? 그 여인과 관련된 어떤 위대한 일이 마땅히 일어날 것처럼 생각되지 않는가? 그리스도교 안에서 성모님이 차지하시는 지위에 관한 문제와 관련된 이런 예언이 얼마나 결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를 우리는 거의 깨닫지 못하고 있다. 예언은 닥쳐올 일의 그림자이며, 공간 대신 시간을 꿰뚫어 보는 것이며, 먼 광경에 대한 희미한 윤곽이다. 필연적으로 예언은 그것이 가리키는 현실보다는 생생하지 못하고 불명확하며 비현실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예언은 당연히 그 언급된 현실과 서로 잘 어울리는 대응 관계를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예언은 사탄의 머리를 바수는 여인과 그 여인의 후손이 함께(다른 사람은 없이) 구속 사업을 이룬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만일 ‘그 여인’이 보이지 않는 곳에 감추어진 채 어떤 형태로든 구원 사업이 실제적으로 일어난다면, 근본적으로 모순이 생긴다. 따라서, 만일 예언이 진실된 것이라면, 또한 (교회와 성서가 함께 선언하는 바와 같이) 구원 사업이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과 죽음을 인간 영혼의 본성 안에 일생을 통해 실현시켜 나가는 것이라면, 그리스도교 체계 안에서 성모님은 항상 예수님과 함께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성모님은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에 있어서 따로 떼어놓을 수 없는 새로운 하와이시며, 그리스도께 매어 계시지만 그리스도께 꼭 필요한 분이시다. 성모님이야말로, 가톨릭 교회가 그 은총에 넘치는 임무를 한마디로 요약해서 부르는 것처럼, ‘모든 은총의 중재자’ 바로 그분이시다. 그러므로 만일 예언이 비추는 준 바가 참으로 하느님의 나라라면, 성모님을 소홀히 대하는 자들이야말로 하느님 나라의 이방인들이다.
마찬가지로 ‘천사의 아룀’은 성모님의 막중한 지위를 나타낸다. 이제 예언은 절정에 다다른다. 이미 오랜 세월 동안 마리아 안에 다져진 하느님의 뜻은 바야흐로 열매를 맺으려 하고 있다.
하느님의 자비에 넘친 계획으로 이루어지는 저 놀랍고도 감동적인 장면을 생각해 보라.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저 ‘평화 회담’에 참가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이루어지는 이 평화 회담을 ‘천사의 아룀'(the Annunciation)’이라고 부른다. 이 회담에서 하느님 편은 한 분의 대천사가 대표하였고, 인간 쪽은 우리 레지오가 영광스럽게도 그 이름을 받들어야 할 특권을 지닌 한 여인이 대표하였다. 그 여인은 얌전한 처녀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날 온 인류의 운명은 그 여인에게 달려 있었다. 천사는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소식을 가지고 왔다. 구세주를 잉태하게 된다는 소식이었다. 그런데 천사는 단지 일방적으로 소식을 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여인에게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주었다. 인류의 운명이 어느 쪽으로 기울어질지 전혀 알 수 없는 순간이었다. 하느님께서는 인류 구원을 열망하셨고 계셨다. 그러나 이보다 사소한 문제를 다루실 때에도 그러하셨듯이, 이 중대한 일에 있어서도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자유 의지를 강제로 꺾으려 하지 않으셨다. 하느님께서는 한없는 은혜를 내려 주고자 하시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인간 쪽이므로, 인간에게 그 은혜를 거절할 자유마저 주셨다. 인류 운명의 순간은 그렇게 다가왔다. 그 순간이야말로 그때까지의 모든 시대의 사람들이 기다렸던 순간이며, 그 이후의 모든 세대가 돌이켜보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 순간은 모든 시대 가운데 위기의 순간이었다. 한 동안 침묵이 흘렀다. 여인은 즉시 수락하지 않은 채 질문을 했고 대답을 들었다. 또 한 차례의 침묵이 흐른 뒤 그 여인은 응답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가 1, 38) 이 응답은 하느님을 이 땅 위에 모셔 왔으며, 이로써 인류의 위대한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던 것이다.
성부께서는 구원 사업이 마리아에게 매이도록 하셨다. 마리아의 응답이 가져온 결과에 대하여 바르게 깨닫고 있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대부분의 가톨릭 신자들마저도 성모님이 맡으신 역할의 중요성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다. 교회 박사들에 따르면, 만약 동정 마리아가 주님의 어머니 되기를 거절했다면 성자께서는 동정 마리아로부터 육신을 취하지 못하셨을 것이다. 그러므로 마리아의 응답은 얼마나 장엄한 일인가! “하느님께서 나자렛의 여종이 말한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는 한마디에 구제주의 등장이 좌우되도록 하신 것을 생각해 보면,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마리아의 응답으로 낡은 세상은 끝이 나고 새 세상이 열렸으며, 모든 예언들이 완성되었고, 세상은 새로운 전기를 맞아 정의의 태양이 떠오름을 미리 알리는 샛별의 첫 반짝임을 보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의 의지가 달성할 수 있는 한계 안에서 하늘나라가 땅 위에 내리도록 하고 인류를 하느님께로 들어올리는 결속의 관계를 이루어 낸 것이다!”(헤띵겔 / Hettinger) 이 얼마나 장엄한 일인가! 이는 성모님이 인류의 유일한 희망임을 말해 준다. 결국 인류의 운명은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인 성모님의 응답으로 안전하게 되었다. 이 점에 대해서 비록 우리가 충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더라도, 그 응답은 성모님이 아니고서는 이 세상 어느 시대 어느 누구도 이룰 수 없는 가장 영웅적인 행위였음이 틀림없다. 이 응답으로써 구세주께서 성모님에게 오셨는데, 오직 성모님에게만 오신 것이 아니라, 성모님을 통하여 성모님이 대표하는, 절망에 빠진 온 인류에게도 오신 것이다.
성모님은 구세주와 더불어 우리의 믿음이 의미하는 모든 것을 함께 가져다 주셨다. 믿음은 바로 참된 생명이다. 그 밖의 것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믿음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 믿음을 얻기 위해서는 어떤 희생이라도 치러야 한다. 이 세상에서 가치가 있는 것은 오직 믿음뿐이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지나온 모든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믿음과 앞으로 이 세상을 이어갈 무수한 사람들의 믿음을 생각해 보라. 이 모든 이들의 믿음은 그 동정녀의 말씀 한마디에 매여 있는 것이다.
성모님 없이는 참 그리스도교가 있을 수 없다. 온 인류는 성모님이 가져다 주신 이 무한한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마땅히 동정 마리아를 복되다 일컬어야 한다. 이 땅 위에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져오게 하신 성모님이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공경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성모님을 소홀히 여기거나 가볍게 보거나, 또는 그보다 더 나쁘게 대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그런 사람들은 그들이 받은 모든 은혜가 성모님으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이 있을까? 만일 그날 밤 마리아가 자신의 응답에서 그런 사람들을 제외시켰더라면, 그들을 위한 구원 사업은 이 땅에서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 아닌가? 응답에서 제외된 사람들은 구원 밖의 영역으로 밀려나고 말았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런 사람들은 날마다 온종일 ‘주님! 주님!’ 하고 부르짖더라도 결코 그리스도인이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마태 7, 21 참조) 그런데 그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생명의 은총이 그들에게도 전달되어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성모님이 그 은총을 얻어 주셨기 때문이며, 성모님의 응답 안에 그들도 함께 포함시켜 주셨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나게 하는 세례성사는 동시에 성모님의 자녀로도 태어나게 한다.
그러므로 성모님께 감사를 드리는 일은 – 무엇보다도 말과 행동으로 감사를 표시하는 태도는 – 모든 그리스도인의 특징이 되어야 한다. 구원은 하느님 아버지와 성모님께서 공동으로 마련해 주시는 선물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 감사를 드릴 때에는 성모님께 감사하는 마음도 우러나야 한다.
성자께서는 언제나 당신의 어머니와 함께 계신다. 마리아 없이는 은총의 나라를 세우지 않겠다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었다. 하느님께서는 그 밖의 다른 일들도 역시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셨다. 하느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에게 예수님보다 앞서 오는 사명을 준비시키실 때에도 복되신 성모님의 사랑에 넘치는 방문을 통해 그를 성화시키셨다. 아기 예수님이 태어나시던 날 밤 성모님을 문전에서 되돌려 보낸 사람들은 사실상 예수님을 되돌려 보낸 것이다. 그들은 성모님을 내쫓으면서 그들이 기다리고 있었던 구세주도 함께 내쫓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선택된 백성을 대표하는 목동들이 ‘모든 백성에게 약속된 분’을 찾아냈을 때, 그분은 성모님과 함께 계셨다. 만일 목동들이 성모님에게서 등을 돌렸더라면 예수님을 찾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주님의 공현(公顯) 때, 주님은 세 사람의 동방 박사를 통하여 세상의 이방 민족들을 맞아들이셨다. 그런데 그때에도 그들은 성모님을 찾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뵐 수 있었다. 만일 그들이 성모님께 가기를 꺼려 했다면 주님께 가까이 가지 못했을 것이다.
나자렛에서 그 동안 눈에 안 뜨게 진행되던 일들이 마침내 성전에서 공적으로 확인되기에 이른다.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성부께 봉헌하셨을 때, 어머니의 팔에 안겨 어머니의 손을 빌려 봉헌하셨다. 아기는 어머니에게 딸려 있게 마련이므로, 어머니 없이는 이 봉헌이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더 나아가 교부들의 가르침에 의하면, 주님께서는 성모님의 동의 없이 공적 생활에 들어가지 않으셨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갈릴래아의 가나 촌 혼인 잔치에서 성모님의 요청으로 물을 술로 변화시킨 예수님의 기적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사명을 스스로 입증하는 첫 신호였으며 위대한 행위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예수님과 아담, 성모님과 하와, 십자가와 나무. 구원 사업이라는 장엄한 극의 마지막 장면이 갈바리아에서 막을 내릴 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나무 위에 매달려 계셨고, 그 십자가 밑에는 성모님이 서 계셨다. 그런데 성모님은 단순히 자식을 사랑하는 어머니로서만 서 계셨던 것이 아니다. 또는 우연한 계기로 거기 계셨던 것도 아니다. 성모님은 구세주 강생(the Incarnation)에 참여 하셨던 때와 똑같은 자격으로 그 자리에 서 계셨던 것이다. 성모님은 모든 인간을 위해 당신의 성자를 바치는 데 동의하시면서 인류를 대표하여 그 자리에 계셨다.우리 주님께서는 모든 자녀들을 대신하는 성모님의 동의와 봉헌 없이 당신 자신을 성부께 봉헌하지 않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예수님의 제사이자 동시에 그 두 분의 제사였다. 교황 베네딕토 15세에 따르면, “성모님은 참으로 고통을 당하셨으며, 고통 속에서 돌아가신 당신의 성자와 거의 죽음을 같이할 정도로 고통 받으셨다. 또한 성모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성자께 대한 어머니로서의 권리를 포기하시고, 당신의 힘이 닿는 한 하느님의 정의의 심판을 가라앉히기 위해 성자를 제물로 바치셨다. 그러므로 성모님은 그리스도와 함께 인류를 구원하셨다고 말할 수 있다.
성령께서는 항상 성모님과 함께 일하신다. 성령께서 강림하신 날을 조금 더 생각해 보자. 이 날이 바로 교회가 그 사명을 실천하기 위하여 첫걸음을 내디딘 위대한 날이다. 성모님도 그 자리에 함께 계셨다. 성령께서는 성모님의 기도로 신비체 위에 내리시어 당신의 ‘모든 위엄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1 역대 29, 11)를 지니시고 그 안에서 사신다. 성모님은 그리스도의 실제 육신을 돌보셨던 것처럼 그리스도 신비체를 돌보신다. 이러한 법칙은 새로운 공현이라 할 수 있는 성령 강림에 있어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주님 공현 때 성모님이 필요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성령 강림 때에도 성모님이 계셔야 한다. 그러므로 성모님은 하느님의 모든 일에 끝까지 필요한 분이시다. 성모님이 빠진 상태에서 하느님의 계획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무리 기도하고 활동하고 노력한다 하더라도, 성모님과 함께 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성모님이 안 계신 곳에는 은총이 베풀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를 압도하는 저항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의문이 있을 수 있다. “성모님을 무시하거나 모욕하는 이들은 정말 아무 은총도 받지 못하는가?” 그런 사람들도 사실은 은총을 받는다. 성모님에 대해서 너무도 몰랐기 때문에 성모님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라고 생각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느님께는 얼마나 죄송스러운 일이며, 우리를 항상 도와 주시는 성모님께 이 무슨 푸대접이 되겠는가! 더구나, 이렇게 얻는 은총은 풍성히 넘쳐 흐르는 은총의 작은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그런 이들의 일생의 신앙 생활은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마는 것이다.
우리는 성모님께 어떤 지위를 드려야 하는가? 어떤 이들은, 일개 피조물인 성모님이 그토록 엄청난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믿는 그 자체가 하느님을 경시하는 것이 아닌가 하며 의아스러워 한다. 그러나 만일 성모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오히려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일이 된다면, 그것이 어떻게 하느님의 엄위 하심을 경시하는 것이 되는가? 만유인력의 법칙이 하느님의 권능을 손상시키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얼마나 우스꽝스럽게 들리겠는가? 이 중력의 법칙은 하느님으로부터 비롯되어 전체 자연계를 통하여 하느님의 목적을 달성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은총의 세계에서 성모님께 그만한 힘을 드리는 것이 불경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해야 하는가? 하느님께서 자연계를 위해서 정하신 법칙이 하느님의 권능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하느님께서 성모님을 위해 정하신 법칙이 하느님의 선하심과 전능하심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성모님의 지위를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그 방법과 정도의 문제는 아직 남아 있다. ‘성모님께 대한 기도, 성삼위께 드리는 기도, 또는 성인들에 대한 기도는 각기 어떤 비율로 나누어 바쳐야 하는가?’ 하고 묻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성모님께 바치는 기도가 어느 정도라야 많지도 적지도 않게 정확히 바치는 것인가?’ 하고 묻기도 한다. 게다가 ‘성모님께 직접 기도를 드리면 하느님께는 등을 돌리는 것이 아닌가?’라고 말하면서 반대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이런 종류의 의구심들은 모두 하늘나라의 일을 세속적 사고방식으로 생각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 그리고 성모님과 성인들을 떠올리면서, 마치 그 분들의 성상이 한곳에 여기저기 모셔져 있을 때 그 중 한 분의 성상을 향해 예의를 갖추면 자연히 다른 분들에게는 등을 돌리게 되는 것과도 같은 경우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이를 올바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예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간단하고 거룩한 해결책은 ‘하느님께 모든 것을 드리되, 성모님과 함께 드리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성모님께 대한 지극한 신심을 바르게 지니게 되면, 따지고 셈하는 곤욕을 치르지 않아도 된다.
모든 행실은 성모님의 ‘피앗(Fiat : 뜻대로 이루어지소서)’의 정신으로 해야 한다. 그 근거는 ‘천사의 아룀’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천사가 마리아께 아뢰는 순간 모든 인류는 그들의 대표자인 마리아와 결합되어 있었다. 마리아가 천사에게 하신 말씀에는 전 인류의 말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어떤 의미로는 마리아가 당신의 말씀 안에 전 인류를 포용하고 계셨다. 하느님께서는 마리아를 통해서 인류를 바라보셨다. 이제 그리스도인의 일상 생활이란 그리스도 신비체의 일원인 자신 안에 오직 주님을 모시는 일밖에는 다른 일이 없는 생활이어야 한다. 그런데 성모님 없이 이 일은 할 수가 없다. 이는 주님의 강생으로 이미 드러나 있는 사실이며 강생의 한 부분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성모님은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신 것과 마찬가지로 참으로 그리스도 신자들의 어머니가 되신다. 각각의 영혼 안에서 그리스도가 나날이 자라시게 하려면, 그리스도께서 처음 성모님 안에서 인간의 육신을 취하셨을 때처럼, 성모님의 동의와 모성적 돌보심이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모든 사실은 그리스도인과 어떤 연관을 맺고 있을까? 여기에는 여러 가지 중요한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 중 한 가지를 들자면 다음과 같다. 천사의 아룀에서 비롯되어 십자가에서 완성된 구속 사업이라는 희생적 봉헌에 있어서 성모님이 맡으신 인류 대표자로서의 위상을 그리스도인들은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전폭적으로 인정해야만 한다. 즉, 그리스도인들은 그 당시 성모님이 그들 자신을 대신해서 하셨던 일들을 승인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성모님으로 인해서 자신이 받는 무한한 은총을 부끄럼 없이 온전히 누릴 수가 있게 된다. 그러면 그 승인이란 어떤 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또한 한 번 승인으로 충분한 것인가? 위에서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 일생의 모든 행실이 성모님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로서의 행실로 변화되었다는 사실에 비추어서 이에 대한 해답을 찾아보자. 결국 우리의 행실 하나하나에 성모님께 대한 보은과 감사의 정이 깃들이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고 옳은 일이 아니겠는가? 따라서 해답은 이미 주어진 대로 ‘모든 것을 성모님께 바쳐야 한다’는 것이다.
성모님과 더불어 주님을 찬미하라. 간단한 방법으로라도 늘 마음속에 성모님을 떠올리도록 하자. 나날의 모든 행동과 기도를 성모님의 지향과 뜻에 일치시키도록 힘쓰자. 어떤 경우라도 성모님을 빼놓아서는 안 된다. 성부께 기도를 바치든, 성자께 기도를 바치든, 성령께 기도를 드리든, 또는 어떤 성인에게 기도를 하든 항상 성모님과 일치해서 바쳐야 한다. 성모님은 우리와 함께 우리가 바치는 기도를 따라 해주신다. 성모님의 입술과 우리의 입술은 동시에 똑같은 기도를 만들어 내며, 어떤 일이나 함께 거들어 주신다. 이와 같이 성모님은 우리 곁에 계시는 정도가 아니라, 항상 그러셨듯이 우리 안에 계신다. 우리의 삶이란 우리가 성모님과 공동으로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을 하느님께 함께 바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성모님과 함께 하는 신심을 지닐 때, 우리는 비로소 구원 사업에 성모님이 수행하셨고 지금도 계속 수행하고 계시는 성모님의 역할을 올바로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성모님께 대한 신심을 가장 손쉽게 실천하는 방법이다. 올바른 성모 신심은 ‘성모님에게는 얼마만큼 바쳐야 되느냐?’ 또는 ‘성모님에게 바치는 것만큼 하느님께 바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망설이거나 의아해 하는 사람들의 염려도 해결해 준다. 그러데 이를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하는 신자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것이 어떤 점에서 건전한 이성에 배치된다는 것인가? 또한 성모 신심이 어떤 점에서 전능하신 하느님의 권능을 부정하고 있다는 것인가? 특히 후자와 같은 잘못된 생각은 흔히 다음과 같은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다. 그들은 하느님의 권능을 받든다고 말하면서도 하느님께서 정하신 계획을 스스로 실천에 옮길 생각은 없으며, 성서가 하느님의 거룩하신 말씀이라고 주장하면서도 ‘하느님께서 마리아에게 큰일을 하시어 이제로부터 온 백성이 마리아를 복되다 일컬으리라'(루가 1, 48-49 참조)고 노래하는 성서 구절은 귀에 들리지 않는 사람들이다.
이렇게 의심을 품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풍성하고 온전한 이 신심을 알아 듣도록 설명해 주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사실상 우리 레지오 단원들이 성모님에 대하여 무슨 다른 말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주의할 일은, 성모님에 대하여 말할 때 결코 소극적인 태도를 취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즉, 성모님을 소홀히 생각하는 듯한 태도를 보인다거나 깎아 내리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성모님을 더욱 알 수 없게 만들 뿐이다. 성모님을 일종의 그림자나 감상적(感像的) 개념 정도로밖에 보지 않는다면, 이는 반(反) 가톨릭적인 잘못된 인식으로서 성모님을 무시하는 자들의 주장만 정당화시킬 뿐이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성모님이 차지하시는 본질적인 위상과 권리에 대해서 바르게 설명해 준다면, 아직 얼마간의 은총이라도 남아 있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힘이 살아나, 그를 올바르게 이끌어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성모님의 역할에 관해서 조용히 살펴보게 되고, 결국 성모님의 발 아래 무릎을 꿇게 되는 것이다.
레지오의 목적은 성모님을 거울처럼 비추는 것이다. 그러므로 레지오가 이러한 이상을 충실하게 이행한다면, 신앙을 갖지 못하고 어둠 속을 헤매는 사람들의 마음에 빛을 던져 주시는 성모님의 더없이 큰 은총을 나누어 주는 것이 된다.

“토마스 데 아퀴노 성인(St. Thomas de Aquino)의 위대한 스승인 대 알베르토 성인(St. Albert the Great)은 복음 성서의 ‘천사의 아룀’ 부분에 관한 해설에서 명쾌한 말씀을 남겼다. 즉, 성자께서 당신의 어머니를 무한히 존귀한 존재로 만드셨다는 것이다. 열매 속에 무한한 완전함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그 열매를 맺게 한 나무에도 어느 정도 무한한 완전함이 존재함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가톨릭 교회는 실제로 하느님의 어머니를 은총의 세계에서 무한한 권능을 지니신 분으로 공경한다. 성모님은 당신 은총의 보편성으로 인해서 구원받은 모든 이의 어머니가 되신다. 성모님은 하느님의 어머니이시기 때문에, 성삼위를 제외하고는, 하늘과 땅에서 가장 크고 가장 효율적이며 가장 보편적인 초자연적 힘을 지닌 분이시다.”(보니에 / Vonier : 하느님의 어머니)

2 무한히 값진 영혼들을 끝없는 인내와 친절로 돌보아야 한다

레지오 단원은 활동을 수행할 때 딱딱하다는 인상을 주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따뜻한 마음씨와 다정한 태도로 사람들을 대하지 않고서는 활동에 성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버림받은 사람이나 죄지은 사람들을 만날 때 더욱 그러하다. 일상 생활 속에서 우리는 남을 자주 공격하거나 비난하지만, 그런 것들조차 특별한 경우에는 필요한 것이라고 스스로 합리화시킨다. 그렇지만 얼마 못 가서 곧 후회하고 만다. 거의 모든 경우에 이런 잘못과 후회가 계속되고 있다. 이렇게 누구나가 겪게 되는 잘못된 언행의 반복은, 물론 나름대로 타당한 이유야 있겠지만, 결국 평소에 생각 없이 내놓는 거친 말씨로부터 비롯된다는 사실을 왜 미리 깨닫지 못하는가! 꽃은 부드럽고 따뜻한 곳에서는 활짝 피어나지만 쌀쌀한 공기 속에서는 움츠러든다. 훌륭한 레지오 단원이 따뜻한 마음씨를 지니고 사람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고민을 들어주고 정성껏 도와 주겠다는 자세로 활동에 임한다면, 그것은 어느 누구도 거절할 수 없는 힘을 발휘한다. 그리하여 가장 완고한 사람의 굳어진 마음마저 무너뜨려, 5분도 안 되어 마음의 문을 활짝 열도록 만든다. 이런 결과는 훈계와 잔소리로는 일년 동안 활동해도 거두기 힘든 성과이다.
다루기 힘든 사람들은 대개 곧 분노를 터뜨릴 듯한 태도를 보인다. 이들을 더 자극하면 오히려 죄를 짓게 하고 반항심만 키우게 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람들을 도우려면 우선 자극을 주는 일을 피해야 한다. 오직 끝까지 참고 존중하는 마음을 지니고 그를 대함으로써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나의 추억은 꿀보다 더 달고, 나를 소유하는 것은 꿀 송이보다 더 달다.”(집회 24, 20) 이 말씀은 우리 교회가 복되신 성모님께 드리는 말씀이다. 모든 레지오 단원은 이 말씀이 자신의 영혼 안에서 불타오르도록 해야 한다. 물론 레지오 단원이 아닌 사람들이 레지오 단원들보다 더욱 적극적인 방법으로 선행을 쌓을 수도 있다. 그러나 레지오 단원이 하느님의 일을 하는 데는 오직 한 방법만 있을 뿐이다. 그것은 따뜻한 마음씨와 다정한 태도이다. 단원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이 방법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 이를 벗어나면 아무 결실을 거두지 못하며 오히려 해를 끼치게 된다. 레지오 단원들이 성모님의 영역 밖에서 헤맨다면, 그들이 펴는 활동의 성패를 좌우하시는 성모님과의 유대가 끊기게 된다. 그렇게 되면 그들이 무슨 성과를 거둘 수 있겠는가?
맨 처음 설립된 쁘레시디움의 이름이 ‘자비의 모후’였는데, 그렇게 이름을 정한 것은 이 쁘레시디움이 처음 착수한 활동이 자비의 수녀회(Sisters of Mercy)가 운영하는 병원을 방문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단원들은 자신들이 쁘레시디움의 이름을 선택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실상 성모님이 그 이름을 지어 주셨다는 것을 누가 의심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해서 성모님은 레지오가 지향해야 할 특성을 처음부터 밝혀 주셨다.
일반적으로 레지오 단원들은 죄에 물든 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열심히 찾아 나선다. 완고하게 거부하는 사람들을 지칠 줄 모르고 쫓아다니다 보면 몇 년의 세월이 지나는 수도 있다. 때로는 단원의 믿음, 소망, 사랑의 정신에 오히려 시련을 가져다 주는 사람들을 만나는 수도 있다. 이러한 사람들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죄악에 물든 사람들의 범주를 벗어나 있다. 즉, 이들은 극도로 사악하고 이기심의 화신이고 끝없이 배신하며 하느님께 대한 증오심과 종교에 대한 반항심으로 가득 차 있다. 이들에게서는 부드러움이란 찾아 볼 수 없으며, 은총의 빛이나 영적 생활의 흔적도 없으므로, 하느님도 염증을 느끼실 것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혐오감을 주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는 이처럼 추악한 사람들 안에서 도대체 무엇을 보시어, 성체를 통해서 그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으려 하시며 하늘나라로 그들을 데려가려고 하시는 것일까?
이런 사람들을 그대로 내버려두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인간의 마음이다. 그러나 레지오 단원은 결코 그러한 생각을 품어서는 안 된다. 그러한 인간적인 사고 방식은 모두 잘못된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사악하고 추악한 영혼을 참으로 원하고 계신다. 그 영혼을 너무나 소중히 여기시므로 당신의 성자, 우리가 지극히 사랑하는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셨고, 예수님께서는 지금 바로 그 추악한 영혼과 함께 계신다.
레지오 단원이 이런 경우에 꾸준히 참고 견디어 나가야 하는 이유를 벤슨 몬시뇰(Monsignor R. H. Benson)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만일 어떤 죄인이 자기가 범한 죄로 그리스도를 쫓아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 영혼을 그대로 내버려둘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가 우리에게 들려준 놀라운 가르침에 따르면, 그 죄 많은 영혼은 그리스도를 붙잡아 아직도 십자가에 못박아 놓고 욕을 보이고 있으므로(히브 6, 6 참조) 그런 영혼을 그냥 내버려둘 수는 없는 일이다.”
이 얼마나 충격적인 말인가! 우리의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아직도 원수의 손아귀에 붙잡혀 계시다니! 이러한 사실이야말로 우리의 활동에 확고한 근거를 준다. 주님께서 겪으시는 고통이 멈추도록 하기 위해서 회개시켜야 할 영혼들을 평생 지칠 줄 모르고 찾아 나서야 하는 이 유례 없는 치열한 싸움에서 우리는 이 말씀을 구호로 삼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죄인들의 사악한 영혼 안에 못박혀 계신 주님을 뵙고,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 곁에 있는 거센 불길과 같은 믿음을 행동으로 옮길 때, 모든 세속적이고 인간적인 생각들은 불타 없어지고 말 것이다. 아무리 단단한 강철이라 하더라도 풀무질로 타오르는 불길에는 견디지 못해 녹아 떨어지듯이, 사람의 마음이 아무리 완고하더라도 꺼질 줄 모르는 사랑의 불길에는 견디지 못하고 부드러워지게 마련이다.
어떤 대도시에는 극도로 타락한 죄인들을 많이 다룬 경험이 있는 레지오 단원에게 그 동안 전혀 가망이 없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는 레지오 단원으로서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 꺼렸던지, 지독한 죄인들은 많았으나 가망이 없는 사람은 없었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그에게 여러 번 다그쳐 물으니, 마침내 그는 가망이 없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딱 한 사람 있다고 인정했다.
바로 그날 저녁 그 단원은 심한 죄책감을 느껴야 했다. 그는 그날 자신이 가망 없다고 말한 그 사람과 우연히 길거리에서 마주쳤다. 그리고 3분 동안 대화 끝에, 가망이 없다던 그 사람이 완전히 회개하는 기적이 일어났던 것이다.

“막달레나 소피 바라 성녀(St. Madeleine Sophie Barat)의 전기에는 한 영혼을 충실히 돌보는 모습을 매우 감동적으로 그린 일화가 있다. 성녀는 하느님의 섭리로 만나게 된 한 여인을 23년 동안이나 한결같은 사랑으로 대했다. 성녀가 아니었다면, 이 한 마리 길 잃은 양은 우리를 찾지 못했을 것이다. 쥴리아(Julie)라는 이 여인은 자신은 자신의 신상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마다 내용이 달랐기 때문에, 그녀가 어디에서 왔는지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쥴리아는 외롭고 가난할 뿐만 아니라 성질이 까다롭고 무엇이든 제멋대로 하는 습성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여느 사람과는 하나도 닮은 데가 없다고들 하였다. 또한 거짓말을 잘하므로 믿을 수 없었고 천박하고 성미가 난폭하였다. 그러나 성녀는’착한 목자’께서 위험한 지경에 처함 이 영혼을 찾아 돌보도록 맡겨 주신 것으로 생각하여 정성껏 보살폈다. 성녀는 그 여인을 양녀로 삼아, 200통 이상의 편지를 써서 보냈으며, 그 여인으로 인해 수없이 많은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그런데도 쥴리아는 성녀를 중상하고 여러 번 배은망덕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성녀는 참고 견디고 용서에 용서를 거듭하면서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 결국, 쥴리아는 성녀가 선종한 지 7년 후에 하느님의 평화 속에서 세상을 떠났다.” (모나한 / Monahan : 성녀 막달레나 소피 바라)

3 레지오 단원의 용기

어떤 일에나 그 일이 요구하는 독특한 용기가 필요하다. 그래서 세속에서도 용기가 없는 사람은 별 쓸모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레지오에서는 단원들에게 도덕적 용기를 특별히 요구한다. 레지오가 수행하는 활동은 대부분 사람들을 접촉하여 그들이 하느님께 좀더 가까이 다가가도록 이끄는 것이다. 때때로 이러한 활동은 여러 가지 형태의 반감이나 오해와 부딪치게 된다. 그렇다고 그것이 전쟁터에서 쏟아지는 포탄처럼 위험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정면으로 대결하려 들지 않고 피해 가는 레지오 단원들을 흔히 볼 수 있다. 비 오듯 쏟아지는 포화 속을 용감하게 헤치고 전진하는 수많은 단원들이 있는가 하면, 욕을 먹거나 비웃음을 당하지나 않을까, 비난을 받거나 이상한 눈총이나 받지 않을까, 또는 사람들이 설교가나 성인이라도 된 척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몸을 사리는 단원들도 있다.
이들의 태도는 ‘예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하게 된 것을 특권으로 생각하고 기뻐한 사도들'(사도 5, 41)과는 달리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무엇이라고 수군댈까?’ 하고 걱정하며 움츠러든 모습이다.
흔히 체면이라고 부르는 이런 소심한 태도가 그대로 통용되도록 방치하면, 영혼들을 위한 모든 활동은 보잘것없이 되고 만다. 주위를 돌아보면 이런 비극이 쉽게 눈에 띈다. 어디를 가나 가톨릭 신자들은 수많은 이교도나 비 가톨릭 신자나 또는 냉담자들에 둘러싸야 살고 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개별적으로 가톨릭 신앙을 알려 주려고 진지하게 노력한다면, 첫 번째 시도에서 100명 중 다섯 사람은 입교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다섯 명은 장차 많은 사람들을 입교시키는 직접적인 계기를 마련해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신자들은 그러한 노력조차 보이지 않고 있다.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마음은 가지고 있으나, 체면이라는 치명적인 독소가 실천으로 옮기는 힘을 마비시키고 있기 때문에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다. 이 독소는 각기 다른 이름을 지니고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 즉, ‘좀더 신중하자’ ‘남의 의견을 존중해야 한다’ ‘노력해 보았자 소용없다’ ‘누가 먼저 착수하기를 기다리는 중이다’ 등등의 그럴듯한 이유가 그것이다. 이렇게 변명만 늘어놓다 보면 막상 행동으로 옮기기는 어렵다.
그레고리오 타우마툴구스 성인(St. Gregory Thaumaturgus)의 일화 중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임종이 가까웠을 무렵 성인은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교구 안에 신자가 아닌 주민이 몇 명이나 되느냐고 물었다. 어떤 사람이 즉시 “열 일곱 사람뿐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죽음을 앞둔 성인은 그 숫자를 곰곰이 생각하더니, “내가 이 곳 주교가 되었을 때의 신자 수와 똑같은 숫자로군.” 하고 말했다. 이 성인은 신자 수가 단지 열 일곱 명밖에 없을 때 주교가 되어, 열 일곱 명 외의 모든 주민을 신자로 만들었을 만큼 온갖 수고를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결실인가! 그 후 수세기가 지난 오늘날에도 하느님의 은총은 메마르지 않았다. 오늘날에도 그레고리오 성인이 이룬 업적을 똑같이 해낼 수 있는 믿음과 용기를 하느님의 은총으로 얻을 수 있다. 대체로 믿음은 모자라지 않은데 용기가 부족한 것이 문제이다.
레지오는 이러한 점을 깊이 깨달아, 단원들 사이에 체면을 앞세우는 그릇된 정신이 퍼지지 않도록 적절한 계획을 세워 이를 막아야 한다. 우선 건전한 규율의 힘으로 체면만 생각하는 마음을 억제하도록 한다. 둘째로, 군인이 비겁한 행동을 경멸하듯이 레지오 단원에게도 체면을 앞세우는 행동은 경멸 받아 마땅함을 교육을 통해 알려야 한다. 무엇보다도 체면을 차리려는 충동을 억누르며 활동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그리하여 만일 그들이 참된 희생과 용기로써 활동에 나서지 않는다면, 사랑도 충성도 규율도 결국 아무 쓸모가 없이 되고 만다는 사실을 그들 스스로 깨닫도록 만들어야 한다.
용기 없는 레지오 단원! 베르나르도 성인(St. Bernard)의 다음의 표현은 바로 그러한 단원을 두고 한 말이 아니겠는가? 즉, “머리이신 주님은 가시관을 쓰셨는데 지체인 나는 이토록 나약하다니, 참으로 부끄럽구나!”

“싸울 준비를 갖추었다고 생각될 때만 싸움에 나선다면 무슨 공로를 쌓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전정 용기 있는 사람처럼 행동한다면, 실제로 용기가 없다 한들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실밥 한 가닥 줍는 일 조차도 귀찮게 느껴질 때 예수님을 위해서 그 실밥을 줍는다면, 열성이 넘칠 때 하는 훌륭하고 고상한 행동보다도 훨씬 더 큰 공로를 쌓게 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여러분이 자신의 약점을 깨닫도록 만들어 주심으로써 훨씬 더 많은 영혼들을 구원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십니다. 이는 괴로워할 일이 아니라 오히려 기뻐할 일입니다.”(리지외의 성녀 소화 데레사 / St. Therese of Lisieux)

4 상징적 행동

활동에 대한 레지오의 기본 원칙은 단원들이 어떤 종류의 활동을 맡든지 자기가 할 수 있는 한 모든 노력을 쏟아야 한다는 것이다. 쉬운 일이든 어려운 일이든 반드시 성모님의 정신으로 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가 있다. 영혼을 구하는 사업에서는 얼마만큼의 노력을 쏟아야 하는지 미리 알아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영혼을 돌보는 일에 어는 선을 정해 놓고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물며 그 일이 어려운 일이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때때로 우리는 어려운 일에 부딪치게 되면, 그 어려움을 과장하며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대부분의 활동은 실제로는 전혀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근면함과 능숙함 앞에는 불가능한 일이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일이 어렵고 불가능한 일이라고 지레 짐작하면, 그런 우리의 태도로 말미암아 그 일은 정말로 불가능하게 되고 만다.
그런데 우리는 때때로 정말 불가능한 일에 부딪친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일의 경우가 바로 그러한 예이다. 이때 우리 자신의 능력에만 의존한다면, 우리의 판단으로 불가능하다고 느끼는 일이든, 아니면 실제로 불가능한 일이든 간에 활동해도 소용 없는 일이라고 생각될 것이므로, 몸을 움츠리고 말 것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해야 할 중요한 활동 가운데 3/4는 손도 대지 못한 채 버려 두는 결과를 가져오며, 결국 과감하게 나서야 할 그리스도인들의 큰 싸움을 하나의 전쟁 흉내 정도로 변질시키고 만다. 그러므로 레지오의 원리는 노력을 으뜸 가는 원칙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떠한 상황에서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온갖 노력을 기울여 활동하라는 것이다. 자연적으로나 초자연적으로 불가능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만이 가능으로 이끄는 열쇠가 된다. 오직 이러한 태도를 지닐 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러한 자세는 하느님과 함께 하는 정신이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면 불가능한 일이란 있을 수 없다는 복음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산이 바다가 되게 하는 믿음’을 요구하시는 우리 주님의 말씀에 확실히 응답하는 것이다.
자신을 갈고 닦아 불굴의 정신을 지니려고 노력하지 않으면서 영신적인 이득만을 꿈꾸는 것은 순전히 환상일 따름이다.
레지오는 이러한 원리를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단원의 정신 무장을 우선적으로 강조하는 것이다.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일이 무엇이든 그것을 39단계로 나누어 놓으면, 그 하나하나의 단계는 가능한 것이 된다.” 얼핏 모순되는 것처럼 들리는 이 말은 레지오는 조직의 한 구호로서 선언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사고 방식은 매우 슬기롭고, 성공으로 이끌어 주는 기반이 되며, 성공 철학의 요점이라 할 수 있다. 언뜻 보기에 불가능하다고 생각되어 우리의 마음이 무디어지면, 몸도 마음처럼 해이해지고 결국 활기를 잃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는 조금만 어렵게 느껴져도 무조건 불가능한 일로 판단해 버린다. 따라서 어떤 어려움에 처하게 되면, 앞서 소개한 슬기로운 구호가 말해 주듯이, 그 어렵다고 생각되는 일을 여러 단계로 나누어 한 단계씩 정복해야 한다. 단 한 번 뛰어서 지붕에 오를 수는 없으나 계단을 통해 한 계단씩 올라가면 마침내 꼭대기에 도달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려움에 부딪치게 되면 우선 한 계단만 올라서라. 그 다음 계단에 대해서는 미리 걱정하지 말고 첫 번째 계단을 오르는 일에만 정신을 집중하면 된다. 이렇게 첫 번째 계단을 오르면, 두 번째 계단이 바로 이어서 나타나거나 아니면 얼마 안 있어 곧 나타날 것이다. 두 번째 계단을 오르면 세 번째 계단이 나타날 것이고, 이렇게 끝내는 맨 위 계단까지 이어지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치다 보면, 아마도 위의 구호가 말하는 39계단(이는 어떤 연극의 제목을 따 온 것임)을 모두 오르기도 전에 불가능이라는 관문을 이미 통과하여 약속의 땅에 들어섰음을 스스로 알게 될 것이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은, 우선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 할지라도 우선 그 첫 발걸음을 내디뎌야 한다. 될 수 있는 한 효율적인 방법으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그런 효과적인 방법이 어떤 것인지 잘 떠오르지 않을 때, 그보다 덜 효과적인 방법을 써서라도 첫걸음을 내디뎌야 한다. 그렇게도 할 수 없는 경우, 우선 적극적인 자세만이라도 드러내야 한다. 이는 단지 기도를 바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으며 일종의 행동을 포함한다. 이러한 행동은 비록 실제적 가치가 뚜렷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라 하더라도, 적어도 그 목적을 지향하거나 또는 그 목적에 관련된 것이라야 한다. 이처럼 마지막으로 취하는 도적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를 레지오는 ‘상징적 행동’이라고 불러 왔다. 이 상징적 행동에 따라 우리는 스스로 상상 속에서 만들어 낸 ‘불가능’을 쳐부술 수 있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 이 상징적 행동은 믿음으로 무장된 우리의 정신 안으로 들어와서, 실제로 우리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한 영신적인 문제와도 극적인 싸움을 펼칠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예리고’의 성벽은 마침내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일곱 번째 사제들이 나팔을 불자,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외쳤다. ‘고함을 질러라! 야훼께서 저 성을 너희에게 주셨다.’ ….. 백성들은 고함을 지르고 나팔 소리는 울려 퍼졌다. 나팔 소리가 울리자 백성은 ‘와 ~~’ 하고 고함을 질렀다. 그 순간 예리고 성벽이 무너져 내렸다. 그러자 백성은 일제히 성으로 곧장 쳐들어가 성을 점령하였다.”(여호 6, 16-20)

5 적극적으로 활동하자

레지오의 근본 정신이 올바로 박혀 있지 않은 레지오는 생명력이 약한 다른 단체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단원들을 크게 변화시키는 레지오의 정신은 아무나 들이마시라고 여기저기 공중에 떠다니는 것이 아니다. 단원들에게 생명과도 같은 이 레지오 정신은 오직 노력을 통해서 얻게 되는 은총의 산물이다. 이 정신은 단원 한 사람 한 사람이 수행하는 활동의 질적 수준과 방법에 따라 좌우되기 때문에, 꾸준히 노력하지 않으면 깜박거리다가 결국 꺼져 버리고 만다.
적극적으로 활동을 펴지 못하는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가) 어렵다고 생각되는 활동은 시작하기조차 꺼려 한다.
(나) 어디에나 활동거리는 많이 있지만, 이를 찾아내는 능력과 적극성이 부족하다.
(다)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반대와 혹평에 대한 두려움이 가장 큰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러한 잘못된 생각들 때문에, 때때로 쁘레시디움에서도 적극적 활동을 기피하거나, 또는 단원들에게 별로 뜻도 없는 활동을 배당하는 경향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단원들이 명심해야 할 점은, 레지오는 실질적이고 적극적인 활동을 관장하도록 조직되었다는 사실이다. 실질적이고 적극적인 활동을 수행하지 않는 레지오는 있어야 할 이유가 없는 레지오이다. 군대가 전투에 참가하기를 거부한다면 군대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있겠는가! 마찬가지로, 어떤 형태로든 적극적으로 활동을 수행하지 않는 쁘레시디움의 단원들이 있다면, 이들은 레지오 마리애 단원이라는 이름을 지닐 자격이 없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거니와, 영신적 신심 행위만으로는 적극적인 활동을 수행해야 하는 레지오 단원의 의무를 채우지 못한다.
활동을 하지 않는 쁘레시디움은 ‘강력한 사도직 실천’이라는 레지오의 목적에 충실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조직에 심각한 상처마저 입힌다. 그런 쁘레시디움은 레지오라는 단체가 어떤 사업을 맡아 하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인상을 사람들에게 심어주게 되는데, 이는 결코 사실과 다르다. 레지오 조직 자체는 충분한 능력을 갖추고 있으나, 다만 그 능력이 활동에 투입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그릇된 인상을 심어 주는 것이다.

6 활동은 쁘레시디움이 주관한다

활동은 쁘레시디움이 배당한다. 단원들은 자신에게 알맞다고 생각되는 활동거리가 있더라도, 그것을 임의대로 골라서 레지오의 이름을 내걸고 수행할 수 없다. 그렇다고 이 규칙을 너무 엄격하게 해석하여, 선행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바로 앞에 놓여 있는데도 활동을 하지 않는 일이 있어서도 안 된다. 사실상 레지오 단원은 어떤 의미로는 항상 복무 중이라는 생각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우연히 찾아내어 수행한 활동이라도 그 다음 주회합에서 보고할 수 있으면, 쁘레시디움이 인정하면 정상적인 레지오 활동이 된다. 다만 이런 자유 활동을 처리할 때 쁘레시디움은 신중히 판단해야 한다. 바른 뜻을 지닌 단원들 중에도 많은 단원들이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활동은 제쳐놓고 다른 일을 택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단원들은 쁘레시디움이 배당한 활동은 하려 하지 않고 여기저기 다른 일을 찾아 헤매며, 결국 레지오에 도움을 주기 보다는 해를 끼친다. 따라서 이러한 행위를 통제하지 않을 때 레지오의 규율은 파괴되고 만다.
단원은 쁘레시디움에 대하여 책임감을 지녀야 한다 즉, 단원은 쁘레시디움으로부터 확고한 지시를 받는 심부름꾼으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성심 성의껏 수행하고 그 결과를 쁘레시디움에 보고하는 책임이 있다. 그런데 만일 이 점이 흔들리게 되면 얼마 안 가서 활동이 중단되거나, 아니면 어떤 형태로든 쁘레시디움을 위태롭게 하는 싹이 자라게 된다. 그리하여 멋대로 수행한 활동으로 인해 중대한 잘못이 생기게 되면, 비록 그것이 레지오 조직을 무시한 단원 개인의 소행이기는 하지만, 결과적으로 레지오 전체가 비난을 받게 된다.
남달리 열성적인 단원들 중에도 규율이 너무 많아서 오히려 활동을 수행하려는 노력을 억제한다고 불평하는 이들이 있다. 이러한 경우에도 역시 위에서 설명한 논리에 따라 분석해 보는 것이 옳은 일이다. 다만 이러한 종류의 불평은 별로 근거가 없다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규율의 근본 취지는 단원들로 하여금 활동을 수행하도록 박차를 가하려는 것이지, 결코 억제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레지오 활동의 정당성을 보장해 주는 규율의 취지를 오직 단원들이 자유롭게 행동하지 못하도록 막거나 규제하는 것으로 잘못 생각하고 있는 듯 하다.

7 짝을 지어 방문 활동을 하는 것은 레지오의 규율을 보호한다

방문은 두 사람씩 짝을 지어 해야 한다. 레지오가 이러한 규정을 정한 것은 다음과 같은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첫째, 레지오 단원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대개 이런 보호 장치는 거리에서 보다는 가정 방문의 경우에 더욱 필요하다.
둘째, 짝을 지어 방문 활동을 하면 서로 힘을 합칠 수 있다. 냉대를 피하기 어려운 장소나 가정 방문의 경우에 흔히 있을 수 있는 체면치레나 수줍음을 이겨내는 데는 짝을 지어 방문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셋째, 활동에 관한 규율을 지키도록 해준다. 두 단원은, 짝지어 활동하므로,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서 만나 약속된 활동을 충실히 할 수 있게 된다. 혼자일 때는 쉽게 활동 시간을 바꾸거나 아예 미루어 놓고 하지 않을 때도 있을 것이다. 다른 단원과 시간 약속을 해 놓지 않은 상태에서는, 몸이 피곤하거나 날씨가 나쁘거나 특히 마음 내키지 않는 방문을 해야 하는 경우, 자연히 꺼리는 마음이 일어나는 등 온갖 부정적 심리가 고개를 쳐들게 된다. 그렇게 되면 방문은 무질서해지고 불규칙하게 되며, 따라서 별 성과도 나타나지 않으므로, 마침내 활동을 완전히 포기하게 된다.
한 단원이 공동 방문자와 약속한 시간을 지키지 못할 때에는 다음과 같은 통상 관례를 따르는 것이 바람직하다. 배당 받은 활동이 이를테면 병원 방문이나 그 밖의 위험성이 전혀 없는 활동일 때는, 혼자서라도 활동에 나설 수 있다. 그러나 방문자가 어려운 처지에 놓일 가능성이 있거나 방문해야 할 곳의 환경이 염려되는 곳이라면 단독 방문을 중지해야 한다. 그러므로 위에서 단원 혼자라도 방문할 수 있다고 한 것은 예외적인 경우임을 알아야 한다. 짝을 이룬 두 단원 중 한쪽이 연거푸 약속 시간을 지키지 않는 경우, 쁘레시디움은 이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어야 한다.
두 단원이 짝을 지어 방문해야 한다는 규정은 그 두 사람이 반드시 같은 대상자를 함께 방문하라는 뜻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이를테면 병원을 방문하는 경우, 두 단원이 각기 다른 병실을 맡아 각기 다른 환자들을 찾아 다니며 돌보는 것은 규칙에도 맞는 일이며 방법상으로도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8 레지오 활동의 본질은 친밀한 관계를 이루는 것이다

레지오는 지나치게 과격한 사회 개혁주의자들에게 이용당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레지오의 활동은 본질적으로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감추어진 행동이어야 한다. 그것은 각 단원의 마음속에서부터 시작되어 열정과 사랑의 정신으로 발전해 나간다. 단원들은 꾸준하고도 직접적인 접촉을 통하여 전체 공동체의 영신적 수준을 끌어올리는 활동을 수행하며, 모든 활동을 조용하고 신중하고 침착하게 수행한다. 레지오는 세상의 죄악을 직접 억눌러 없애려는 활동보다는 가톨릭 신앙의 원리와 가톨릭적 온정을 공동체에 스며들도록 만들어, 죄악이 자라기에 알맞은 토양을 제거함으로써, 저절로 소멸되도록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레지오는, 비록 속도가 느리더라도, 열심한 신자로서의 생활과 가톨릭적 이상을 사람들 안에 꾸준히 퍼뜨리는 데 참된 승리가 있다고 본다.
레지오 방문의 본질은 활동 대상자들과 친밀한 관계를 이루는 것이므로, 이 점을 조심스럽게 가꾸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만일 레지오 단원들이 상대방의 결점이나 들추어내고 다닌다는 소문이 퍼지게 되면 레지오 방문 활동 자체가 지속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가정을 방문하는 활동이나 그 외의 전반적인 단원들의 움직임이 의심의 눈총을 피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일단 의 심을 받기 시작하면, 세상 사람들은 레지오 단원들을 신뢰할 수 있는 친구로서가 아니라 마치 조직을 위해서 정탐 활동을 하는 사람들처럼 오해를 하게 되어 단원들의 방문을 꺼려 하게 될 것이므로, 레지오의 참된 가치는 더 이상 찾을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레지오의 활동을 관리하는 간부들은, 어떤 활동이 레지오의 본질과 공통점이 없다고 판단될 때는, 그 활동의 목적이 아무리 좋다고 하더라도 레지오의 이름을 결부시키지 않도록 해야 한다. 오늘날 여러 특수 사업 단체들이 사회에 만연해 있는 악과 싸움을 치르고 있다. 레지오 단원들은 필요한 경우에 이런 단체들을 활용하기도 하고, 또는 개인 자격으로 도와 주는 것도 좋은 일이다. 그렇더라도 레지오는 그 자체로서 독자적인 전통과 고유한 활동 방법을 충실히 지켜 나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9 집집마다 방문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레지오 단원들은 호별 방문을 할 때, 그 집에 어떤 사람들이 사는가 하는 것은 마음에 두지 말고, 가능한 한 집집마다 빠짐없이 방문해야 한다. 만일 몇몇 집만 골라서 방문한다면, 그 사람들은 레지오 단원들이 자신의 집만 골라 찾아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게 만든다고 반발할지도 모른다.
교우 가정이 아니더라도, 방문해서는 안 될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된다. 성당을 다니지 않는 가정을 방문할 때에는, 신앙을 강요하는 자세보다는 단지 우정의 발판을 마련하겠다는 마음을 지녀야 하며, 가족들과 서로 알고 지내려고 모든 가정을 방문하고 있다고 설명하면 교우가 아닌 가정에서도 대개는 친절하게 맞이해 준다. 이와 같이 방문 활동을 통하여 개인접촉이 이루어지면, 하느님께서는 이 활동에 섭리하시어 ‘새로운 양떼들’을 당신 품 안으로 불러들이는 은총의 계기로 삼으시는 것이다.한편, 사도직을 실천하고자 하는 뜻을 지닌 가톨릭 신자들을 방문하여 우정을 맺으면 온갖 편견이 줄어든다. 또한 가톨릭 신자들에게 호감을 느끼게 된 비 신자들은 틀림없이 가톨릭 교회를 존중하는 마음을 지니게 된다. 그리하여 단원들은 가톨릭 신앙에 대하여 묻거나 책자를 요청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이러한 모든 일에서부터 더욱 중요한 성과가 나타나게 될 것이다.

10 물질적인 도움을 주는 활동은 금지한다

물질적 원조는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절대로 베풀어서는 안 된다. 경험에 따르면, 헌 옷가지를 가져다 주는 행위도 물질적 원조의 범주에 해당된다는 사실을 밝혀 둘 필요가 있다.
레지오가 이러한 규율을 정했다고 해서 어려운 이들을 물질적으로 돕는 행위 그 자체를 가볍게 여기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레지오로서는 구호 활동을 직접적으로 실시할 수 없다는 점을 밝힐 따름이다. 가난한 이들에게 도움을 베푸는 것은 착한 행위이며, 더구나 초자연적 동기에서 그러한 일을 한다면 더욱 가치 있는 선행이다. 구호 사업을 하는 여러 훌륭한 단체, 특히 세상에 널리 알려진 빈첸시오 회(the Society of St. Vincent de Paul)는 바로 이러한 원리를 바탕으로 설립되었다. 레지오는 빈첸시오 회가 보여 준 모범과 그 정신에 힘입은 바가 매우 크다는 것을 기꺼이 밝힌다. 사실상 레지오의 뿌리는 빈첸시오 회라고 말 할 수 있을 정도로 레지오는 이 단체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레지오는 빈첸시오 회와는 전혀 다른 분야의 사명을 부여 받고 있다. 레지오 조직은 사람들에게 (물질적 도움이 아닌) 영신적 선물을 가져다 준다는 원리를 바탕으로 설립된 것이다. 이렇게 영혼을 대상으로 하는 활동은 물질적 구호 활동과는 실질적인 면에서 함께 어울릴 수 가 없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가) 물질적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들은 구호 단체 회원들의 방문을 반기지 않을 것이다. 그런 방문을 받는 사람들은 자신이 이웃 사람들에게 물질적 도움의 대상으로 비쳐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지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레지오의 쁘레시디움이 물질적 원조를 하는 단체라고 알려지게 되면, 즉시 그 활동 범위가 극도로 좁아진다. 물질적 도움은 다른 단체들에게는 닫힌 문을 여는 열쇠가 될는지 모른다. 그러나 레지오의 경우에 그것은 오히려 열린 문을 스스로 잠그는 자물쇠가 될 뿐이다.
(나) 물질적인 도움을 받으리라고 기대했다가 실망한 사람들은 불만을 품게 되며, 그로 인해서 레지오의 감화력은 효력을 잃게 된다.
(다) 물질적 원조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의 경우라도, 레지오는 물질로써 영혼을 구하려 해서는 안 된다. 그러한 활동은 구호 사업을 맡아 하도록 특별한 은총을 부여 받은 단체들이 나서서 수행하도록 넘겨주어야 한다. 분명한 것은, 레지오 단원이 레지오 안에서 물질적 선행을 베푼다 해도, 그 선행을 통해서 은총을 기대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레지오의 규율을 어기는 일이기 때문이다. 쁘레시디움이 이 점에 있어서 잘못 이끌리면 곧 복잡한 사정에 휘말리게 되고, 결국에는 레지오에 아픈 상처만을 남겨 주게 될 것이다.
어떤 단원들은 누구나 각자 능력에 따라 자선을 베풀 의무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은 레지오 단원 자격으로 도움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단지 개인 자격으로 돕는다고 버티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을 분석해 보면 그가 생각하는 것처럼 문제가 그리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흔히 있는 일이지만, 레지오에 입단하기 전에 물질로써 남을 도운 일이 없었던 단원들을 놓고 생각해 보자. 그는 레지오 활동 중에 물질적인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는 방문 활동을 수행하는 동안에는 아무런 도움도 베풀지 않는다. 그러다가 다른 날 ‘개인 자격’으로 다시 찾아가서 물질적인 도움을 베푼다. 이 경우 그는 분명코 물질적 원조에 관한 레지오의 규칙을 어기는 것이며, 같은 활동 대상자를 두 번에 걸쳐 방문한 것은 단지 규칙 위반을 면해 보려는 구실을 만들려고 한 것 뿐이다. 그는 맨 처음 레지오 단원으로서 방문하였고, 레지오 단원으로서 그 활동 대상자의 딱한 사정을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도움을 받은 사람은 당연히 그를 레지오 단원으로 알고 있다. 따라서 이 경우, 규칙 위반에 대한 어떠한 적절한 구실도 마련될 수 없는 일이다. 결국 도움을 받은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그 단원의 물질적 원조는 단순히 레지오 활동의 한 부분으로 생각하게 될 것이며, 레지오로서는 그들의 생각이 옳다고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이처럼 단원 한 사람이 규율을 어기고 분별 없는 행위를 저지르면 쁘레시디움 전체가 상처를 입는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물질적으로 도움을 베푼다는 소문은 쉽게 퍼져 나간다. 여러 번 반복해서 도와 주어야만 소문이 퍼지는 것이 아니라, 한두 번 정도만 그런 일이 있었다 해도 소문은 널리 퍼지게 마련이다.
레지오 단원이 어떤 사정으로 꼭 물질적 도움을 주어야 하는 특별한 경우가 생겼다면, 레지오의 규칙을 어기고 레지오를 난처한 입장에 빠뜨리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겠는가? 가령, 친구를 통하여 익명으로 물품을 전달하거나 또는 적당한 구호 기관을 통하여 자신이 나서지 않고서도 도와 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방법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방법을 이용하지 않는다면, 결국 그는 자신의 선행에 대하여 하늘에서 보상받기 보다는 현세에서의 보상을 더 바라고 있다고 볼 수 밖에 없는 일이다.
그러나 레지오 단원들은 활동 중에 만나게 되는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의 처지에 무관심해서는 안 된다. 단원들은 그러한 이들의 딱한 사정을 적절한 원조를 해줄 수 있는 다른 단체에 알려 주어 관심을 갖도록 만들어야 한다. 때로는 레지오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쏟았는데도 불구하고 필요한 만큼의 도움을 얻어 주지 못했을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경우에도 레지오가 그 모자란 부분을 메우기 위해서 직접 나서서는 안 된다. 그것은 물론 레지오의 사업이 아닐 뿐만 아니라, 현대 사회에서 그렇게 딱한 사람을 돌보아 줄 만한 개인이나 단체가 전혀 없다고는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두말할 나위 없이, 우리가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 줌으로써 동정하는 마음을 표시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크게 칭찬하시는 일이다. 그러나 진리를 가르쳐 주고 일깨워 주는 활동을 통하여, 현세의 일시적 유익이 아닌 영원한 선(善)을 영혼들에게 베풀려는 열성과 노력이 훨씬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을 어느 누가 부인할 수 있겠는가?”(교황 비오 10세 회칙 ‘그리스도교 교리 교육’ 1905)
이 물질적 원조에 관한 규칙이 너무 지나치게 좁은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다는 점이 그 동안 많은 사례를 통해서 밝혀졌다. 따라서 한 가지 사실을 분명히 하고자 한다. 즉, 봉사 활동은 물질적 원조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봉사 활동은 오히려 적극 권장해야 마땅하다. 때때로 레지오가 신앙에 대한 문제에는 민감하지만, 막상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현실적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을 쏟지 않는다는 비난을 받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이때 단원들의 봉사 활동은 이러한 불필요한 오해와 비난을 이해와 협력으로 바꾸어 놓는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레지오 단원들은 허용되는 모든 방법을 다하여 사랑을 쏟고 봉사 활동에 열성을 다함으로써 그들이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말이 진실하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한다.

11 돈을 걷는 일

돈을 걷기 위한 목적으로 레지오 단원의 방문 활동을 이용하는 것은 물질적 원조와 같은 범주에 속하므로, 이를 금지한다.
모금 행위로 돈을 걷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영신적 선을 이루는 분위기는 결코 얻을 수가 없다. 이는 ‘한 푼에는 약삭빠르나, 한 냥에는 어리석다’는 격언의 좋은 본보기라 할 수 있다.

12 레지오는 정치에 개입할 수 없다

레지오의 모든 기관은 어떤 정치적 목적이나 특정 정당을 돕기 위하여 그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장소를 제공하는 일이 있어서는 결코 안 된다.

13 하나하나의 영혼을 찾아서 이야기를 나누자

종교적 활동의 핵심은 가능한 모든 사람을 접촉하여, 그들 모두가 사도로서 활동할 수 있도록 이끌어 들이는 노력이다. 즉, 쉬는 교우나 신자 가정, 가난한 사람이나 타락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을 활동 대상자로 삼아 찾아 나서는 일이다.
아무리 완고한 냉담자라 해도 레지오 단원들의 의지를 꺾지 못한다. 아무리 버림받고 가망 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라 해도 레지오 단원이 용기와 믿음으로 끈질기게 노력한다면 반드시 결실을 맺는다. 그러나 레지오가 중대한 죄악에 대해서만 관심을 기울인다면, 레지오에 주어진 사명의 뜻을 지나치게 좁게 만드는 것이므로 바람직스럽지 못하다. 레지오는 길 잃은 양이나 도둑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양들을 찾는 일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하지만, 동시에 다음과 같은 사실을 외면해서도 안 된다. 즉,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거룩한 삶 에로 부르고 계시지만, 수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기본 의무만을 겨우 이행하는 정도에 머물러 있다. 이러한 사람들이 헌신적으로 열심히 활동하도록 이끌려면 많은 인내심과 지속적인 돌봄이 필요하다. 이 돌봄이 바로 레지오 단원들에게 주어진 의무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훼이버 신부(Fr. Faber)가 말하기를 “한 분의 성인은 보통 신자 백만 명과 대등한 가치가 있다.”고 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St. Teresa of Avila)도 “성인은 아니더라도 성인이 되고자 힘쓰는 한 영혼이 평범한 삶을 사는 수천 명보다 하느님 앞에서 소중한 존재이다.”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평범한 삶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향해 첫 발걸음을 내딛도록 도와 주는 우리 레지오 단원들의 삶은 얼마나 충만한 삶인가!

14 전혀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나쁜 사람도 없고, 완벽한 사람도 없다

방문 활동을 통하여 만난 사람 가운데 어느 한 사람이라도 처음 만났을 때와 똑같은 수준에 머물러 있게 놓아 두어서는 안 된다.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다가가도록 힘쓸 필요가 없을 정도로 훌륭한 사람이란 있을 수 없다. 레지오 단원은 활동 중에 자신보다 훨씬 더 훌륭한 사람들을 만나게 될 때가 자주 있을 것이다. 이런 경우에도 단원들은 ‘과연 내가 저렇게 훌륭한 분을 위해 어떤 좋은 일을 할 자격이 있는가?’ 하는 의문을 가져서는 안 된다. 레지오 단원들은 그런 이들에게 새로운 생각과 새로운 신심을 전해 주어, 판에 박힌 그들의 신앙생활에 활기를 불어넣어야 한다. 단원들이 사도직 생활을 활발하게 실천한다면 틀림없이 사람들의 덕성을 더욱 높일 수 있다. 그러므로 단원들은, 성인을 다루든, 죄인을 다루든, 똑같은 확신을 가지고 나아가야 한다. 무엇보다도 단원들이 사람들을 방문할 때는, 빈약한 영성을 지닌 한 사람의 신자로서가 아니라 성모 마리아 군단의 대표로 나선다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 이 성모 마리아의 군단은 ‘그들의 사제들과 주교들과 교황, 그리고 그리스도와 연합한'(비오 11세 : 1922년 12월 23일 회칙) 군단인 것이다.

15 막연한 사도직은 진정한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어떤 활동을 수행하든 그 활동의 목적은 중요하고도 뚜렷한 선행을 실천하는 것이다. 할 수 있는 한 ‘많은 선행을 많은 사람들에게’ 베풀어야 하며, 만일 그것이 어렵다면, ‘많은 선행을 적은 수의 사람들에게’ 베풀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결코 ‘적은 선행을 많은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이 후자의 길을 따르는 레지오 단원은 사실상 다른 이들에게 해를 끼치고 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 단원이 이미 끝마쳤다고 생각하고 있는 활동은, 레지오의 이상에 비추어 보면, 이제 겨우 시작한 정도에 불과하고, 또한 그로 인해 다른 단원이 그 활동에 참여하는 것조차 막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보잘것없는 선행을 베푸는 것은 사실상 아무에게도 별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자연히 들게 마련이므로, 스스로 좌절감을 느낄 위험마저 있다. 그리하여 자신이 레지오 단원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에 이르면, 결국 단원 생활 자체가 위기를 맞게 된다.

16 감화의 비결은 사랑이다

레지오 단원은 자신이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과 반드시 친밀한 우정의 관계를 이루어야 한다. 그것만이 실질적이며 광범위한 레지오의 활동에서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는 방법이다. 친교가 없는 활동은 그 성과가 알맹이가 없거나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특히 예수 성심께 대한 가정 봉헌 운동을 추진하기 위해 방문 활동에 나설 때, 단원들은 이 점을 명심해야 한다. 비록 이 운동은 그 자체로서 훌륭한 활동이고 은총의 원천이기는 하지만, 이 운동의 성과를 올리는 것만을 방문 활동의 주목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예수 성심께 가정을 봉헌하도록 권유하기 위해 찾아간 후에 그 가정을 다시 방문하지 않는다면, 이는 레지오의 관점에서 볼 때, 의도했던 결실을 거의 거두지 못하는 것이다. 많은 가정을 각기 여러 차례 방문하려면 많은 시간이 소요되므로, 따라서 더 많은 레지오 단원들과 쁘레시디움들이 이 방문 활동에 투입되어야 한다.

17 레지오 단원은 활동 대상자 한 사람 한 사람 안에서 그리스도를 뵙고 그리스도께 봉사한다

어떤 장소나 어떤 경우를 막론하고 단원들의 방문 활동이 단지 불행한 이들에 대한 박애 정신이나 순전히 인간적인 동정심만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면, 이는 잘못된 것이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5, 40)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가르침을 가슴에 새기고, 이웃 안에서 – 차별 없이 모든 이웃 안에서 – 우리 주님을 뵙고 합당한 봉사를 드려야 한다. 악한 사람, 배은망덕한 사람, 어리석은 사람, 괴로움을 겪고 있는 사람, 멸시당하는 사람, 버림받은 사람, 천성적으로 극도의 혐오감을 주는 사람 등, 모든 사람을 새로운 눈으로 보아야 한다. 그들은 분명 그리스도의 보잘것없는 형제들이므로,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대로 마치 왕자와도 같이 공손한 대접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다.
레지오 단원이 방문 활동에 나설 때에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찾아가는 듯한 태도나 동등한 입장에서 방문한다는 자세여서는 안 된다. 어디까지나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또는 종이 주인을 찾아 뵙는 마음가짐이어야 한다. 방문자가 은덕을 베푸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이런 정신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마치 은인이라도 된 듯한 태도로 방문을 해서는, 초자연적으로나 인간 본성적으로 아무런 성과도 얻기 어려울 것이다. 이러한 태도로 방문하면, 아마 선물이라도 들고 가야 겨우 참고 만나 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겸손한 태도로 문을 두드리는 얌전하고 호감이 가는 레지오 단원들은, 비록 물질적인 선물은 손에 들고 있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그들을 반가이 맞아들일 것이며, 곧 참된 우정의 발판이 마련된다. 레지오 단원들은 옷차림이나 말씨도 검소하고 단순 소박해야 한다. 그와 같은 자세야말로 그의 방문을 받는 사람들과의 사이에 장벽을 허무는 일임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18 성모님은 레지오 단원을 통하여 당신의 아드님을 사랑하고 보살피신다

어떤 레지오 단원이 불유쾌하고 힘들었던 방문 활동에서 마침내 성공을 거둔 후, “이제 그 사람들이 우리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이 말은 레지오 단원의 활동 방법을 잘 요약해 준다. 상대방의 애정을 일깨워 주기 위해서는 이쪽에서 먼저 사랑을 보여 주어야 한다. 즉, 단원들은 자신이 방문하는 사람들을 먼저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이 방법 이외에는 그들을 진정으로 감화시키는 다른 방법도 수단도 비결도 없다. 아우구스티노 성인(St. Augustine)도 이와 똑같은 생각을 다른 말로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먼저 사랑하라. 그런 다음 그대가 하고 싶은 일을 하여라.”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성인(St. Francis of Assisi)의 전기에서 체스터톤(Chesterton)은 이 독특한 그리스도교 신앙의 원리를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표현하고 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을 다양한 모습으로 받아들였으며, 결코 단순한 존재로 보지 않았다. 인간은 언제 어디서나 변함없이 인간이므로, 밀집된 군중 속에 있든지 아니면 사막 한가운데 있든지, 하느님을 닮은 인간의 모습은 변질되지 않는다고 그는 생각했다. 성인은 모든 인간에게 경의를 표시했는데, 이 말은 모든 사람을 사랑했을 뿐 아니라 존경했다는 뜻이다. 이 점에 있어서 그는 매우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교황으로부터 거지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궁전에서 호사하는 시리아의 군주로부터 숲 속에 숨어 사는 누더기 차림의 산적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은 프란치스코의 타는 듯한 갈색 눈을 들여다보면서 프란치스코야말로 진정으로 ‘나’에게 관심을 가져 주는 사람이며, 요람에서 무덤에 이르기까지 ‘나’의 사사롭게 내면적인 생활까지도 보살펴 주는 사람으로 느꼈다. 결국 그분만이 ‘나’를 소중하게 여겨 주며 진심으로 대해 주는 분이라고 확신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프란치스코 성인처럼 사랑을 베풀 수 있을까? 물론 가능하다.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 안에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뵈올 수만 있다면, 우리의 주님을 뵙고 있다는 생각을 우리의 의식 속에 항상 떠올릴 수만 있다면, 우리의 사랑은 불붙게 된다. 성모님도 당신이 그리스도의 실제 몸에 쏟으셨던 그 사랑이 이제 우리들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신비체 위에 쏟아지기를 바라고 계신다. 이 점에 있어서도 성모님은 당신의 레지오 단원들을 도와 주실 것이다. 사랑의 불꽃이 단원들의 마음 안에 희미하게나마 타오르기 시작하면, 성모님은 그 불꽃이 활활 타오르도록 부채질을 해주실 것이다.

19 겸손하고 정중한 레지오 단원에게는 어느 집이나 문이 열린다

경험이 없는 단원은 첫 번째 방문을 불안해 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신입 단원이든 경험이 많은 단원이든, 앞 절에서 설명한 교훈을 마음에 간직하고 있다면, 그는 모든 가정의 대문을 여는 열쇠를 이미 손에 쥐고 있는 셈이다.
방문하는 단원은 무슨 권리가 있어서 그 집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집주인의 호의로 들어가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모자를 벗어 손에 들고, 마치 높은 어른을 찾아 뵈올 때와 같은 정중한 몸가짐이어야 한다. 이처럼 겸손한 태도로 방문 용건을 말하고 잠시 대화를 나눌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면, 대개는 문이 활짝 열리고 들어와 앉으라는 권유를 받게 될 것이다. 이때 레지오 단원들이 유의해야 할 점은, 이 집에 찾아온 목적이 무엇을 가르쳐 주거나 또는 여러 가지 질문을 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직 서로 얼굴을 익히고 점차 영신적인 감화를 줄 수 있는 길을 열기 위해 친교의 씨를 뿌리고자 찾아 왔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사랑이 내뿜는 향기는 남을 이해하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이 어두운 세상에서 사랑보다 더 소중한 선물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버림받고 있다는 느낌으로 괴로워하고 있다. 손을 내밀어도 아무도 잡아 주지 않고, 믿는 마음을 내보여도 아무도 받아 주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이 불행하다고 느끼는 것이다.”(뒤하멜 / Duhamel)
처음에 어려움을 당하더라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아야 한다. 비록 어떤 사람이 일부러 무례하게 굴더라도 온순하게 굽히고 들어가면, 오히려 그 사람이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고, 결국에는 결실을 거두게 될 것이다.
가정을 방문하였을 때 어린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이면 쉽게 이야기의 실마리를 풀 수 있다. 처음부터 어른들에게 신앙 생활에 대한 질문을 던지면 반발할 수도 있으므로, 우선 자녀들이 교리 공부를 잘하는지 또는 성사를 잘 보고 있는지 등을 묻는다면 좋을 것이다. 어린이들을 통하게 되면 부모들에게도 효과적인 가르침을 줄 수 있다.
방문을 마치기 전 다시 방문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아야 한다. 즐거운 시간이었다고 간단히 인사하면서 다시 한 번 만났으면 한다고 말하면 자연스런 작별 인사가 될 뿐만 아니라 다시 방문할 수 있는 길을 효과적으로 마련하는 것이다.

20 공공 시설을 방문할 때의 몸가짐

레지오 단원이 공공 시설을 방문할 때는, 마치 개인 집을 방문하는 손님처럼, 그 곳 책임자의 호의로 방문이 허용되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공공 시설의 관계자들은 방문객이 비록 자선을 베풀기 위해서 찾아왔다 하더라도, 그가 직원의 안내를 무시하거나 규정을 지키지 않을까 해서 늘 방문객을 살피게 된다. 레지오 단원들은 이러한 점에서 결코 잘못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 규정된 시간 외에 방문해서는 안 되고, 약품이나 그 밖의 금지된 물품을 환자에게 가져다 주어서도 안 되며, 간혹 그 공공 시설에 내부 분규가 있을 때 어느 한편을 지지해서도 안 된다. 수용되어 있는 사람들 중에는 직원이나 다른 환자들이 부당하게 대우한다고 하소연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비록 그런 하소연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들의 고충을 없애는 일에 레지오 단원이 나서서는 안 된다. 물론 단원들은 그들의 어려움을 동정심을 가지고 들어 주고 때때로 그들을 진정시키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렇지만 대개 그 정도에서 그쳐야 한다. 만일 레지오 단원이 이런 면에서 격한 분노의 감정을 드러내는 일이 발생하면, 쁘레시디움은 이 문제를 공식 논의함으로써 마땅히 안전 장치의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즉, 쁘레시디움은 상황을 완전히 검토한 후, 필요하다면 그 단원이 올바르게 행동하도록 조언해 주어야 한다.

21 레지오 단원은 남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

레지오 단원은 외적으로 드러나 보이는 자세뿐만 아니라 이 민감한 문제에 대한 지침을 마음속에서 명확하게 새겨 두어야 한다. 단원이 이웃 사람들을 판단하거나, 자신의 생각과 행동이 마치 다른 모든 이들이 따라야 하는 표준이나 되는듯한 태도를 보인다면, 이는 레지오의 사명에 비추어 볼 때 매우 모순된 일이다. 자신과는 여러 면에서 다른 사람들, 또는 자신이 내놓은 의견을 받아들이기를 꺼려하거나 반대하는 사람들을 모두 쓸모 없는 사람들이라고 몰아 붙여서는 안 된다.
비판을 받을 만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기는 하지만, 레지오 단원은 그들을 지탄하는 비평가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 사람들 가운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도 없이 억울한 비난을 받았던 많은 성인들과 같은 처지에 놓여 있는 이들도 흔히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설사 어느 누가 심각한 악습에 젖은 생활을 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의 마음을 꿰뚫어 올바로 판단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시다. 그라트리(Gratry)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어렸을 때 초등교육의 혜택마저 받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도덕적 유산을 지니지 못하고 태어났기 때문에, 이 힘든 삶의 여정에 필요한 정신적인 음식이라고는 보잘것 없는 격언 몇 개와 얻어 들은 몇 마디 이야기밖에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 중 어느 누구에게도 그가 받은 것 이상의 것을 요구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한편, 자신의 부유함을 과시하며 절제와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요즘 사람들은 대개 이런 무리들을 비판적으로 본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도 레지오 단원들은 한 번 더 생각해 보는 여유를 가져야 한다. 이런 사람들도 니고데모를 닮을 수 있는 가능성이 항상 있기 때문이다. 어느 날 밤 그는 남몰래 주님을 찾아와서 도와 드렸으며, 여러 친구들을 주님께 소개 했고,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했고, 끝내 주님의 장례를 돕는 특전을 누렸던 것이다.
판단하거나 비평하는 것은 레지오 단원의 역할이 아니다. 단원들은 성모님의 부드러운 눈길이 그러한 모든 종류의 환경과 모든 종류의 사람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계실까 하는 것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에델 퀸(Edel Quinn 1907-1944)은 남의 결점이 눈에 띄었을 때 반드시 성모님과 의논하는 것을 하나의 생활 습관으로 삼았었다.

22 악평에 대한 태도

이미 이 교본 여러 곳에서, 착한 지향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악평을 받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단원들이 제대로 활동을 수행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원리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레지오의 주요 목표 가운데 하나는 단원들의 생각과 행동의 수준을 높이는 것인데, 이 목표에 접근하면 할수록 레지오는 더욱 폭넓은 성과를 거두게 된다. 레지오 단원은 사도직 생활을 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평신도의 모범이 되고 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보고 감명을 받았을 때, 본능적으로 자신도 그 행동을 따라 해보려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그리하여 각자의 삶 안에서 각자가 지닌 독특한 모습으로 그 모범적 행동에 가깝게 접근하고자 노력하게 된다. 이때 만일 많은 사람들이 선한 마음으로 그 모범을 따르고자 힘쓰는 모습들을 보인다면, 그것은 그 모범이 바르고 훌륭한 것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더 흔히 볼 수 있듯이, 사람들이 다른 이들의 모범이 될만한 행동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다른 의견을 말하거나 비평을 가한다면, 이는 그 모범이 완전치 못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즉, 수준이 낮은 모범에 대해서 일반 대중은 쉽게 자극을 받고 불평을 털어놓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러한 이견과 불만을 결코 나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와 같은 일반 대중의 불만은 건전한 반응이기 때문이다. 즉, 불만을 위한 불만이 아니라 발전을 위한 불만이며, 실제로 이 불만이 곧 향상을 가져온다. 따라서 만일 어떤 모범이 아무런 반응도 일으키지 못했다면, 결국 그 모범이 훌륭한 본보기가 되지 못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레지오 단원의 활동이 다소의 비평을 불러일으킨다 하더라도, 그 방법상의 잘못 때문에 비난을 받는 것이 아니라면 그다지 염려할 필요가 없다. 사도직 노력을 지배하는 다음과 같은 또 하나의 큰 원리를 항상 마음속에 새겨 두도록 하자. 즉, “오직 사랑과 친절만이 사람을 정복하는 길이다. 자존심을 다치게 하거나 강요하지 않으며, 조용하고 슬기롭게 모범을 보여 주어야 한다. 오직 사람들을 정복하겠다는 생각만으로 공격을 가한다면 반발만 살 뿐이다.”(죠수에 보르시 / Giosue Borsi)

23 결코 낙심할 필요는 없다

때때로 영웅적이라 할 수 있을 만큼 오랫동안 정성을 다해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결심을 맺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레지오 단원들이 눈에 보이는 성과를 바라며 활동하는 것은 아니지만, 혹시 아무런 성과도 나타나지 않는다 하여 불만에 차 있게 되면, 결코 자신의 선익을 위해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단 한번의 죄를 막는 것조차도 사실상 한없이 큰일을 이루는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그 작은 죄 하나가 또 다른 불행한 결과들을 연달아 일으켜, 이 세상에 수 많은 더 큰 죄악들을 퍼뜨리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원들은 그러한 생각으로 위로를 느끼며 스스로 용기를 내어 더욱 열심히 활동에 나서야 한다. “우주 공간에서는 아무리 작은 질량(質量)이라 해도 별들이 균형을 이루는 자연 법칙에 한몫을 해냅니다. 그러므로 주님, 종이 위를 달리는 저의 이 작은 펜이 일으키는 지극히 미세한 파장마저도, 당신만이 아시고 헤아리시는 방법으로, 우주의 동작과 연결되어 함께 공헌하며 그 일부를 이룹니다. 그런데 그와 똑같은 현상이 지성의 세계에서도 일어납니다. 사상은 지성의 세계 안에 살아 있으며, 참으로 복잡한 현상을 보입니다. 이 지성의 세계는 물질의 세계보다 훨씬 위대하고, 광대하고, 풍부하며, 그리고 가장 다양한 복합체 안에서 통일되어 잘 짜여져 있는 세계입니다. 물질의 세계와 지성의 세계가 이러하다면, 이 두 세계보다 무한히 위대한 도덕의 세계에서도 모든 것은 오직 당신께서 헤아리시는 방법으로 움직여짐을 잘 알고 있습니다.”(죠수에 보르시) 죄는 이 도덕의 세계를 흔들어 놓을 뿐만 아니라, 그 세계에 속한 사람들의 영혼에 상처를 입힌다. 물론 그 상처는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죄로 끌고 들어갈 때, 때때로 그 연결 고리의 첫 매듭이 우리의 눈에 띄기도 한다. 그리고 그 고리의 다음 매듭이 설사 우리 눈에 띄지 않는다 해도, 죄는 죄를 낳는다. 이와 똑같은 원리로, 하나의 죄를 막으면 자연히 그 죄의 연결 고리를 끊게 되므로 다른 죄도 막는 것이다. 그리하여 두 번째 고리로 연결되지 못한 죄는 세 번째 고리로의 연결도 막히게 되며, 마침내는 모든 죄악의 연결 고리가 끊어지고, 온 세계가 온통 깨끗한 세상으로 바뀌어 나가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죄인 한 사람이 착한 삶으로 되돌아온다면, 그는 자신의 뒤를 따라오는 큰 무리의 선량한 사람들이 하늘나라를 향해 함께 행진하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이를 너무 지나친 말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단 한 번만이라도 대죄를 막는 일은 지극한 정성으로 평생을 바쳐 노력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 한 사람의 노고로 모든 다른 영혼들은 더욱 큰 은총을 느끼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단 하나의 죄를 막는 일이 때때로 한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는 계기가 되고, 영적으로 성장하는 실마리를 제공하여, 그가 하느님을 모르는 삶에서 성덕의 삶으로 옮겨 갈 수 있게 해준다.

24 십자가의 표지는 희망의 징표이다

레지오가 대결하고 있는 세력들의 저항이 아무리 세차더라도, 그것이 단원들을 좌절하게 하는 가장 큰 위험 요소가 될 수는 없다. 오히려 믿고 의지할 수 있으리라고 여겼던 도움과 형편이 여의치 않을 때, 단원들은 마음이 괴롭게 낙담한다. 친구도 좋은 이웃들도 주위에서 멀어지고, 연장은 무디어지고, 그리하여 의지하던 모든 것이 우리가 누리던 평화를 깨뜨릴 때 절망하게 된다. ‘낫이 이처럼 무디어지지 않았더라면, 자신의 진영에 이토록 부족한 것이 없었더라면, 그리고 우리를 짓누르는 십자가가 없었더라면 얼마나 훌륭한 수확을 거둘 수가 있었을까!’ 하고 한탄하는 것이다
이처럼 마음이 초조해질 때, 영혼들을 위해서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은 좁아지며, 바로 이것이 우리가 조심해야 할 위험한 태도인 것이다. 결국 이러한 초조가 좌절을 부르는데, 우리가 대항하는 세력이 우리를 이렇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허약함 때문에 좌절로 빠지는 것이다.
주님의 사업은 주님 자신의 표지(標識), 즉 ‘십자가’ 표지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한다. 이 ‘십자가’ 표지가 찍히지 않으면 활동의 초자연적 특성이 흐려지며, 참된 성과를 얻기도 힘들다. 쟈네트 스튜아트(Janet Erskine Stuart)는 이 원리를 다음과 같이 바꾸어 표현한다. “만일 당신이 거룩한 교회의 역사를 살펴보거나, 혹은 연륜을 더해 가며 쌓이는 당신 자신의 체험을 돌이켜 본다면, 하느님의 사업은 결코 이상적인 조건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으며 우리가 상상하고 바라는 쪽으로도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이는 참으로 놀라운 말이다! 다시 말해서, 한정된 인간의 시각으로 볼 때, 주위의 환경이 결코 이상적인 조건이라 할 수 없고, 그로 인해 성공 가능성마저 없어져 버린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이런 악조건들은 성공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공의 전제 조건이 되어 준다는 것이다. 상처가 아니라 성공을 보장해 주며, 우리의 노력을 억제하는 무거운 짐이 아니라 목적 달성을 위해 우리의 노력을 더욱 불타오르게 하는 연료의 구실을 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불가능 속에서 성공을 이끌어 내시고, 불완전한 연장으로 당신의 위대한 사업을 일구어 내심으로써 당신의 권능을 기꺼이 드러내고자 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레지오 단원들은 다음의 중대한 사항에 유의해야 한다. 즉, 우리가 겪는 어려움들이 유익한 열매를 맺으려면, 그 어려움이 당초 자신들의 태만으로 인하여 발생한 것이 아니어야 한다는 것이다. 레지오는,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스스로 저지른 결함을 지닌 채 은총을 기대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25 성공은 기쁨이며, 실패는 늦추어진 성공일 따름이다

활동은 끊임없이 샘솟는 즐거움의 원천이어야 한다. 활동이 성공했다고 느낄 때는 기쁨에 넘친다. 실패는 일종의 보속이며 믿음을 단련하는 기회를 준다. 그러므로 생각이 깊은 레지오 단원에게 실패는 오히려 한 차원 더 높은 기쁨일 따름이다. 왜냐하면, 실패란 그들에게는 단지 더욱 큰 결실을 위해 잠시 늦추어진 성공이기 때문이다. 방문을 고마워하며 반가운 미소로 맞아 줄 때, 단원들은 자연히 기쁨과 위로를 느낀다. 그러나 그 반대로, 방문에 대한 반발과 의혹의 눈길로부터도 레지오 단원은 한층 더 깊은 위로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지금껏 우리는 바로 이 점을 소홀히 해 왔다. 단원들의 활동 경험에 따르면, 참된 가톨릭적 바탕을 지닌 사람들은, 설사 그의 신앙생활이 쉬는 상태에 있더라도, 찾아온 단원들을 따뜻한 마음으로 대해 준다. 그러므로 방문을 받은 사람이 이와는 정반대의 반응을 나타낸다면, 그것은 바로 그 영혼이 위기에 처해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26 쁘레시디움과 단원들의 결점을 보는 태도

쁘레시디움이나 단원의 결점에 대해서는 참을성을 발휘해야 한다. 열성이 부족하고, 향상될 가능성도 없고, 세속적인 결함마저 뚜렷하게 보이더라도 실망해서는 안 된다. 다음과 같이 생각 해 보자. 즉, 레지오라는 조직이 이끌어 주고 있고, 기도와 조직의 영성이 틀림없이 쁘레시디움과 단원들을 감화시키고 있을 터인데도 불구하고 그들의 결점이 눈에 띈다고 했을 때, 만일 레지오가 없었더라면 그들의 영적 수준은 과연 어떠했겠는가? 더욱 이 좋은 쁘레시디움 하나를 만드는 데 필요한 쓸모 있는 일꾼 몇 사람도 길러낼 수 없는 공동체라면, 그 공동체의 영적 수준은 어떠하겠는가?
분명한 것은, 이러한 사람들의 영적 수준은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향상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 일을 해낼 수 있는 최선의 – 사실상 유일한 – 방법은, 사도직이라는 누룩을 그들 안에 집어 넣어 그들 모두가 ‘온통 부풀어 오르도록'(마태 13, 33) 만드는 일이다. 그러므로 끈질긴 인내와 온화한 태도로 활용할 수 있는 많은 사도직 일꾼들을 양성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가톨릭 정신은 서서히 성장한다. 그러니 어찌 사도직 정신이 당장에 성숙하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실망하면, 이 유일한 치유법마저 사라지고 만다.

27 사리 사욕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레지오는 단원 개인의 물질적 이익을 도모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 한편 레지오 단원은, 레지오 안이나 밖에서 단원으로서의 신분을 부당하게 악용한다는 비난을 받는 일이 있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

28 단원들에게 금품을 주어서는 안 된다

레지오의 기관은 어떠한 경우에도 소속 단원들에게 금품이나 그와 상응한 선물을 주어서는 안 된다. 그러한 행위를 묵인하게 되면, 횟수가 잦아지고 재정적 부담을 가져오게 된다. 이 규칙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특히, 레지오가 기꺼이 단원으로 맞아들이는 사람들 가운데는 경제적으로 별로 여유가 별로 없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비추어 볼 때 더욱 그러하다.
따라서 쁘레시디움이나 기타 모든 레지오 조직체가 소속 단원과 관련된 특별한 행사에 대해서 축복이나 위로를 표시하고자 할 때에는 영적 꽃다발로 대신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29 레지오 안에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

일반적으로 레지오는 지역의 특정 계층이나 특정 집단에 한정된 단원들만으로 쁘레시디움을 설립하는 데 반대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가) 단원 자격을 제한하면 쁘레시디움은 배타적으로 흐르게 되어, 결과적으로 공동체의 형제애를 위태롭게 만든다.
(나) 새 단원 모집을 보면, 대체로 단원이 친구를 입단시키는 경우가 제일 좋은 방법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쁘레시디움이 특정 부류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배타적이 되면, 이러한 친구들의 입단이 어렵게 된다.
(다) 각기 다른 생업에 종사하는 단원들로 구성된 쁘레시디움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사실이 거의 예외 없이 입증되고 있다.

30 다리를 놓는 일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레지오는 세상의 분열을 일삼는 자들이나 수없이 많은 악의 세력들과 맞서 싸우는 일에 그 뚜렷한 목표를 두어야 한다. 이 싸움은 레지오의 기본 단위인 쁘레시디움 안에서부터 먼저 시작되지 않으면 안 된다. 레지오 안에서도 일치를 이루지 못하면서 바깥 세상의 대립 위에 다리를 놓아 보겠다고 나서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레지오는 신비체의 일치와 사랑을 바탕으로 생각하고, 그 정신에 따라 조직하려고 힘써야 한다. 세상에서 서로 멀리하던 사람들을 한데 불러 모아 쁘레시디움의 동료 단원으로서 결속시켜 놓았다면, 그런 레지오는 참으로 위대한 일을 해낸 것이다. 이렇게 사랑의 접촉이 이루어지면, 그 사랑으로부터 거룩한 힘이 온 누리에 퍼져 나가, 세상에 만연하는 악의 소용돌이를 잠재우게 될 것이다.

31 레지오 단원은 조만간 아주 어려운 활동을 다루어야 한다

활동거리를 선택할 때 주저하는 마음이 앞서는 때가 있다. 특히 다루기 어려운 일에 대해서, 사제는 설립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쁘레시디움에 그 일을 맡기기조차 꺼려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소극적인 태도가 일반화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사도직을 가로막고 있는 가장 큰 장애물은 착한 이들의 소심증, 더 정확히 표현해서 비겁한 태도에 있다.”고 지적한 성 비오 10세의 가르침이 우리에게 해당되도록 해서는 안 된다. 만일 그래도 주저하는 마음이 없어지지 않으면, 처음 한동안은 활동의 강도(强度)를 늦추며, 쁘레시디움으로 하여금 쉬운 활동부터 다루도록 해야 한다. 회합이 거듭되고 경험이 쌓이면, 단원들 가운데 누군가가 극히 어려운 활동도 해낼 수 있는 능력을 보이게 된다. 그러면 그때 그런 단원들에게 처음에 주저해 왔던 활동거리를 배당하고, 다른 단원들 역시 능력에 따라 차차 어려운 활동을 처리하도록 배당한다. 비록 두세 명의 단원만 어려운 일거리를 맡는다 하더라도, 그들의 활동은 나머지 단원들에게도 활기를 불어넣은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32 위험한 활동을 대하는 태도

레지오 단원들이 활동을 할 때에 일어날 수 있는 위험의 가능성은 매우 적지만, 혹시 어떤 중요한 활동에는 위험 요소가 따를 수도 있다. 그런데 냉정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온다.

(가) 레지오가 활동하지 않으면 영혼들을 구원하는 활동이 전체적으로 또는 부분적으로 실현되지 못한 채로 남아 있게 된다.
(나) 모든 가능한 활동을 안전 위주로만 수행하다 보면, 결국 일부 제한된 활동만을 골라서 하는 결과가 된다. 이웃 사람들이 파멸의 길을 치닫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레지오 단원들이 그저 무감각하게 바라만 보고 있다면, 그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무지한 자들의 고요 속에 머물게 하지 않으시며, 겁쟁이들의 비겁한 평온 속에도 놓아두지 않으신다.”(드 가스파랭 / De Gasparin)

33 레지오는 교회가 벌이는 싸움의 최전방에 서야 한다

레지오 단원들은 당신 아드님의 승리를 온전히 믿고 의지하는 성모님의 신앙을 함께 나눈다. 그 신앙은 아드님께서 십자가상의 죽음과 부활로써 세상의 모든 죄의 세력들을 정복하셨다는 믿음이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성모님과 맺고 있는 일치의 정도에 따라서, 악과 싸우는 교회의 전투에서 이 승리가 얻어 준 은총의 힘을 쓰시도록 허락하신다. 레지오 단원들은 이 점을 마음 깊이 새기며, 용기와 신뢰로써, 세상의 모든 악과 문제들에 맞서 싸우는 교회의 지표(指標)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교회가 무엇을 위해서 싸우는지를 올바로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이 싸움은 단지 교회를 확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영혼들을 그리스도와 일치하도록 이끌어 들이려는 싸움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이 싸움이 적을 물리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적을 위하여 싸우고 있다는 사실이다. ‘적’이라는 용어 자체부터 조심해서 쓰지 않으면 안 된다.
믿지 않는 사람도 믿는 이들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으며, 불멸의 영혼을 지닌 존재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사람을 위해서도 목숨을 바치셨다. 그러므로 그가 아무리 교회나 그리스도를 맹렬히 비난할지라도, 우리의 목표는 단순히 그를 패배시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변화시키는 데 있다.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사실은, 그가 우리 편이 되기를 원해도 마귀는 그를 지옥으로 끌고 가려고 하므로, 우리는 마귀와 싸워 그를 구해야 하는 것이다. 때때로 위기에 처한 한 사람의 영혼이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그와 직접 대항해야 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것마저 그의 영혼을 구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성령의 힘으로 싸움을 펴야 하며, 성령께서는 곧 성부와 성자의 사랑이시다. 혹시라도 교회의 병사들이 증오심을 지닌 채 악에 대항한다면, 성령께서는 오히려 증오에 찬 교회 병사들의 마음을 돌려놓기 위해 분투할 것이다.”(쉬드 / E. J. Sheed : 신학 입문)

34 레지오 단원은 가톨릭적인 것이면 무엇이나 전파해야 한다

레지오 단원들은 교회가 공인한 ‘성의'(聖衣, 스카플라), ‘메달’, ‘뱃지’를 활용하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성물들을 보급하고 그 신심을 널리 전파하면 은총의 수로가 뚫리게 되며, 이 수로를 통해서 – 이미 숱한 예가 보여주듯이 – 하느님께서는 풍성한 은총을 내려 주신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뜻이다.
특히 레지오 단원들은 성모님의 옷인 ‘갈색 성의(Brown Scapular)’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어떤 이들은 ‘세상을 떠날 때에 이 성의를 몸에 지니고 있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메시지의 내용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인다. 특히 끌로 드 라 콜롬비에르 성인(St. Claude de la Colombiere) 같은 분은 이 말을 달리 해석하는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았다. 그는 ‘죽는 순간 갈색 스카플라를 착용하고 있는 사람은 구원을 받는다. 이 성의를 몸에 늘 지니고 있었으나 마지막 순간에 잃어버린 사람도 마찬가지이다.’라고 말했다.”(플뤼 / Pere Raoul Plus)
또한 레지오 단원들은 신자들로 하여금 가정에 십자가와 성상을 모시고, 벽에는 성구(聖句)와 성화를 걸고, 성수를 준비하고, 기도로써 대사를 받을 수 있도록 축성된 묵주를 마련하라고 권면함으로써 가정의 신심을 북돋우어야 한다. 교회의 준성사를 경시하는 가정은 장차 성사 생활까지 포기하는 위험에 놓일 수 있다. 특히 아이들은 외형적으로 신심을 북돋아 주는 성물에 대한 감수성이 예민하므로, 성상이나 성화를 모셔 놓지 않은 가정에서는 아이들이 신앙의 참되고 친숙한 모습을 익히기가 어렵게 된다.

35 동정 마리아는 모든 이의 어머니이시므로, 모든 이에게 성모님을 알려야 한다

교황 레오 13세가 즐겨 말하던 주제는, 성모 마리아는 모든 사람들의 어머니 시라는 것이었다. 즉, 성모님은 당신을 미워하거나 모르는 사람들까지 포함한 모든 사람들의 어머니이시므로, 하느님께서는 이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성모님을 사랑하는 씨앗을 심으셨다는 것이다. 이 씨앗은 점점 자라게 될 것이므로, 다른 재능과 마찬가지로 적절한 환경을 마련해 준다면 바르게 키울 수가 있다. 그러므로 레지오 단원들은 영혼들에게 접근하여 성모님이 맡고 계시는 어머니 역할에 관해서 이야기해 주어야 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성모 마리아가 전 인류의 어머니이심을 선포했고(교의 헌장 53) 성모님은 사도직의 원천이시며 모범이시기 때문에 교회는 모든 인간을 구원하려는 노력에서 성모님께 의지해야 한다(교의 헌장 65)고 선언했다.
교황 바오로 6세는 어디에서나 특히 가톨릭 신자가 아닌 사람들이 많이 사는 곳에서, 성모님의 모성적 임무에 관해서 신자들에게 충분히 가르쳐, 성모님을 모르는 이들에게 지식의 보화를 나누어 주도록 하라고 권고한 바 있다. 더구나 교황은, 사랑으로 불타는 성모 성심에 전 인류를 맡겨 드려, 성모님이 모든 영혼을 그리스도께 향하도록 만드시는 사명을 완수하시도록 도와 드리라고 당부했다. 이 권고 끝에 교황님은 모든 인간 가족들에 대한 성모님의 어머니로서의 역할과 화합의 임무를 뚜렷이 드러내기 위해서, 성모님께 ‘일치의 어머니’라는 뜻 깊은 칭호를 바쳤다.
따라서, 성모님이 개종을 가로막는 장벽이므로 격하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뼈아픈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다. 성모님은 은총과 일치의 어머니이시므로 성모님 없이 영혼들은 바르게 나아갈 길을 찾지 못한다. 레지오 단원들은 입교 권면 활동을 할 때에 이 원리를 한결같이 적용해야 한다. 곧, 모든 사람들에게 성모님께 대한 신심을 설명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가끔 이 신심을 성모님께 대한 레지오의 신심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는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성모님께 대한 참된 신심은 레지오의 전유물이 아니라, 원래 교회의 가르침에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동정 마리아를 모든 신자들이 본받아야 할 모범으로 제시해 왔습니다. 성모님이 생활하신 모습이 모범적이었다거나, 또는 오늘날 찾아 보기 힘든 당시의 사회 문화적인 배경 때문만은 더욱 아닙니다. 성모님은 자신에게만 주어진 특별한 삶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그리고 책임 있게 받아들이셨습니다.(루가 1, 38 참조) 성모님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천하셨으며, 오직 사랑과 봉사의 정신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행하셨던 것입니다. 성모님을 본받아야 할 이유는, 성모님이야말로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온전히 그리스도를 따르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성모님은 영원하고 보편된 모범으로서의 가치를 지니시게 되는 것입니다.'(마리아 공경 35)

제40장 모든 사람에게 이 복음을 선포하여라

1 주님의 마지막 유언

사람의 마지막 유언은, 비록 이미 육신이 쇠잔하고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말한 것이라 해도, 누구나 엄숙히 받아들인다. 그렇다면 우리는 주님께서 사도들에게 내리신 마지막 명령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옳은가? 주님은 유언이자 마지막 당부의 말씀을 저 시나이 산에서 십계명이 내려질 때보다도 더 엄숙한 순간에 선언하셨다. 하늘에 오르시기 직전, 주님께서는 당신이 행하신 지상에서의 모든 가르침을 완성시키시려는 듯, 성삼위의 위엄을 갖추시고 마지막 분부의 말씀을 남기신 것이다. “너희는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모든 사람에게 이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 15)
이 말씀은 그리스도교 신자 생활의 기본 방향이 어떤 것인지를 제시해 주고 있다. 주님을 믿는 신자라면 꺼지지 않는 열의를 가지고 모든 사람들을 찾아 나서야 한다. 그런데 이 본질적인 신앙의 요건이 때때로 저버림을 받고 있다. 교회의 울타리 안에서나 밖에서 사람들을 찾아 나서지 않고 그대로 버려두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주님께서 승천하실 때 내리신 이 마지막 명령을 저버린다면, 결국은 비싼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은총의 흐름이 막히어 믿음은 식어지고, 급기야는 그 열기가 완전히 사라지고 말 것이다. 주위를 돌아보라. 얼마나 많은 곳에서 이미 이런 무서운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가.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에게’라고 말씀하신 것은, 진실로 세상의 모든 사람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인류 한 사람 한 사람을 눈앞에 그리시면서 그들 하나하나를 위해 가시관을 쓰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셨으며, 창에 찔리시고, 온갖 수모와 설움을 당하시고,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으로 여러 번 기절하시고, 마침내 갈바리아 언덕 위에서 목숨까지 바치셨다. 이처럼 위대한 주님의 수난을 헛되게 해서는 결코 안 된다. 주님은 우리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 당신의 고귀한 성혈을 아낌없이 흘리셨으므로, 우리는 이를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야 한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찾아 나서는 일이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우리가 받은 사명이다.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들, 훌륭한 사람들, 가까이 또는 먼 곳에 사는 사람들, 보통 사람들, 극히 사악한 사람들, 먼 속에 외따로 있는 판자집에 사는 사람들, 고통 받는 이들, 악마 같은 자들, 외로운 등대지기, 나병 환자들, 잊혀진 사람들, 술과 악습에 젖은 사람들, 위험한 부류의 사람들, 숨어 지내는 사람들이나 떠돌이들, 전쟁터의 군인들, 찾아가기 꺼려지는 곳, 달동네, 얼어붙은 황무지, 불볕 같은 사막, 울창한 밀림, 음침한 늪 지대, 지도에도 없는 작은 섬, 미개한 부족 마을, 사람이 살고 있는지 조차도 알 수 없는 미지의 땅, 그리고 무지개가 걸린 땅 끝까지라도 찾아 나서야 한다! 온유하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보고 눈살을 찌푸리지 않으시도록,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찾아가 돌보아야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 레지오는 주님이 주신 이 마지막 명령에 온통 사로잡혀 있어야 한다. 레지오는 어디에서나 어떠한 형태로든 영혼들과 접촉하는 일을 제일의 원칙으로 삼아야 한다. 이 일은 일단 착수하기만 하면 이루어지므로, 시작만으로도 주님의 명령은 이미 완성의 길로 접어드는 것이다.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사실이 있다.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명령을 내리실 때, 모든 사람을 변화시켜 놓으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단지 접촉하기를 요구하셨다는 점이다.모든 사람을 변화하게 만드는 것은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일이겠지만, 접촉하는 일은 결코 불가능하지 않다. 그런데 만일 모든 사람을 포용하고 차별 없이 접촉하는 일이 이루어졌다면, 그 다음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어떤 결과가 나타나리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주님께서 아무런 가치 없고 불필요한 일을 하라고 명령하셨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접촉하는 일은 적어도 하느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다. 바로 이 상태까지 이르는 것이 중요하다. 그 다음에 일어날 일은 아마도 성령께서 오시어 우리를 새롭게 타오르게 만드시는 일일 것이다.
많은 열심한 신자들은 자신의 힘닿는 데까지 수고하고 나면, 그것으로써 하느님께서 기대하시는 만큼 다 해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혼자서 쏟는 노력은 안타깝게도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더구나 주님께서도 그런 외로운 노력을 기쁘게 여기지 않으실 뿐더러, 미처 끝맺지 못한 채 남겨진 일을 기꺼이 돌보아 주지도 않으신다. 그러므로 영혼을 구하는 사업을 착수할 때에는, 혼자서 하기 힘든 다른 일을 할 때와 마찬가지로, 함께 일할 일꾼들이 넉넉히 확보될 때까지 신자들을 동원하고 조직하여, 충분한 힘을 갖춘 후에 시작하도록 해야 한다.
이 공동 사업의 원리, 즉 개인의 노력을 공동체의 노력에 연결 시키는 행위는 모든 이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매우 중요한 의무이다. 이 의무는 고위 성직자나 본당 사제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모든 레지오 단원들과 모든 신자들에게 주어진 의무이다. 이를 통하여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은 제각기 한줄기의 사도직 물결을 이루며, 이 물결들이 합쳐져서 마침내 온 누리에 넘쳐 흐르는 대홍수를 이루게 될 것이다.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열망과 믿음이 크면 클수록, 믿음을 실천하고자 하는 우리의 행동의 힘도 함께 커진다. 하늘에서 내려 주시는 은총은 지상의 것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은총에 무슨 조건이나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은총의 샘은 항상 넘쳐 흐르고 있으며 아무런 제한도 없고, 그 물줄기를 통제하는 일정한 수로도 없다. 우리는 단지 이 생명의 물을 목말라 하며 마음을 활짝 열고 이 물을 받아 마시자. 우리의 믿음을 키워서, 이 생명의 물이 우리 안에 가득히 넘치도록 힘쓰자.”(카르타고의 성 치프리아노 / St. Cyprian of Carthage)

2 레지오는 영혼 하나하나를 겨냥해야 한다

“이른 아침 평일 미사의 제대 앞에 많은 신자들이 모여 든다 하여 그와는 정반대 되는 무서운 세속 현실이 있음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온통 잘못된 가정과 그 가족들, 주민 전체가 타락하여 미움의 대상이 된 동네, 악의 세력과 그 패거리들이 군림하는 곳들을 소홀히 생각해서는 안 된다. 둘째로, 한 곳에 밀집되어 있는 죄악 못지않게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죄들도 세상을 타락 시킨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셋째, 우리는 그런 곳에서 잘 익은 – 사해(死海)와도 같은 – 죄악의 열매를 보지만, 사실상 그러한 죄악은 온 세상 구석구석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영혼을 돌보지 않는 나태와 일상의 죄악들이 고개를 드는 곳에는 어디에서나 더럽고 추악한 큰 죄들이 그 싹을 드러내 보인다. 그러므로 일꾼이 있는 곳에는 언제라도 해야 할 일이 있게 마련이다. 가령, 할 일이 정말 마땅치 않다면, 병원을 찾아가 불쌍한 노인들을 위로해 주거나 어린아이들에게 성호 긋는 법을 가르쳐 주면서 ‘누가 세상을 만들었지?’ 하고 묻고, 그 아이들이 혀 짧은 소리로 대답하게 만들어 보라. 여러분은 거의 의식하지 못하고 있겠지만, 이런 단순한 행동만으로도 죄악의 전체 조직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는 것이다. 넷째로,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은 무서운 죄악과 무질서도 치유가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죄악이 판치는 모습을 보며 좌절하는 사도직 일꾼들에게는 희망의 복음이다. 이런 경우에 그 치료법은 단 하 가지뿐인데, 그것은 바로 교회의 신심 조직을 강력하고도 꾸준하게 활용하는 것이다.
얼핏 듣기만 해도 몸서리 칠 만큼 타락한 생활 속에서도 때때로 선(善)을 갈망하는 마음이 찾아 들 때가 있다. 이럴 때 누군가가 옆에서 달래고 격려하고 착한 생활에 대해 이야기해 주며, 옛날의 평범한 삶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 주면, 가장 불행한 죄악의 희생자들도 사제에게 인도하여 성사를 받게 할 수 있다. 일단 성사를 받게 되면 변화를 가져오므로, 전과 같은 완전한 죄악의 상태로 되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이 세우신 이 성사를 통해 그들의 삶을 바꾸어 놓으시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때때로 ‘현대의 작은 아우구스티노 성인이나 막달라 마리아 성녀가 새로이 태어나는 기적’을 바라보면서 그저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의 경우에는 치유가 그다지 뚜렷하게 드러나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오랫동안 젖어 있던 악습이나 과거의 인연들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기가 힘에 겨워, 넘어지고 일어서는 일을 되풀이하게 된다. 이러한 사람들을 이른바 모범적인 시민이 되게 만들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에게 내린 초자연적인 은총은 그들로 하여금 마침내 새로운 삶 안에 정착할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 이로써 위대한 목표는 달성되기에 이른다.
사실상 용감하고 순수한 레지오 단원은, 아무리 암담하고 사악한 곳에서 활동을 한다 해도, 실패하는 일이 거의 없다. 그 원리는 단순한데, 단원들은 ‘개인 접촉’을 통해서 성사를 받는 사람의 수를 늘리고 그들이 꼭 지녀야 할 신심을 널리 전파하는 활동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이로써 죄악이 자연히 눈앞에서 사라지게 된다. 어디에서나 선행을 행하여라. 그대의 선행은 모든 이를 향상 시키며, 사람들이 영신적으로 향상될 때 죄악의 전투 대열은 무너지고 만다. 다만 여러분이 지니고 있는 무기를 필요에 따라 적절히 사용해야 한다. 가령 어떤 가정에 여섯 식구가 사는데, 미사와 성사를 멀리하고 아무리 타일러도 받아들이지 않는 냉담 상태에 있다고 하자. 이럴 때에는 우선 식구 중 한 사람을 설득한다면 그로부터 약간의 도움을 얻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 가정을 예수 성심께 봉헌하도록 만든다면, 이미 승리의 날은 보장된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 사람은 스스로 점차 나아지게 되고 다른 가족들도 그를 따라 향상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지금까지 나쁜 행동으로 서로를 타락의 길로 이끌던 사람들이 드디어 좋은 방향으로 나가려고 서로를 격려하기에 이르는 것이다.”(미카엘 크리든 신부 / Fr. Michael Creedon)

“이 도둑이 드디어 낙원을 훔쳤구나! 이 사람보다 앞선 사람들도 일찍이 아무도 그런 약속을 받은 사람은 없었다. 아브라함도, 이사악도, 야곱도, 모세를 비롯하여 많은 예언자들과 사도들 가운데에도 그러한 약속을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이 도둑은 그들을 모두 제치고 앞서고 말았구나! 이 사람의 믿음이 예언자나 사도들보다 더 뛰어난 것이었구나! 이 도둑은 고통을 겪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도 영광 중에 계시는 것처럼 흠숭을 드렸다. 이 도둑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계시는 모습을 보고도 예수님께서 마치 왕좌에 앉아 계시기라도 하듯이 자신의 소원을 말씀 드렸다. 이 도둑은 예수님께서 사형 선고를 받으시는 모습을 보고도 임금님께 애원하듯 은총을 베풀어 주시기를 간청했다. 오, 찬탄해 마지않을 도둑이여! 그대는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을 보고서 그분이 바로 하느님이심을 선포하였구나.”(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 St. John Chrysostom)

3 정교(동방교회) 전통을 지닌 자매 교회들과의 특별한 유대 관계

교황 바오로 6세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는 일은 ‘교회가 반드시 해야 할 역할(현대의 복음 선교 14)로서,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이들이 서로 화해하고 일치하도록 힘써야 할 교회의 또 다른 중요한 과제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말했다. “이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이 사람들도 우리들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 그러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될 것입니다.”(요한 17, 21)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의 가르침에 따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일치는 오늘날 가톨릭 교회가 시급히 해결해야 할 일 중의 하나가 되었다. 이에 따라 이 공의회는 “그리스도인들의 분열은 명백히 그리스도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며, 세상에 추문을 남기고,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해야 할 가장 신성한 목적을 손상한다.”(일치 운동에 관한 교령 1)고 지적한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다음에 인용하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사도적 서한 ‘동방의 빛(Orientale Lumen)’은 동방의 모든 그리스도인과의 일치를 회복하려는 가톨릭 교회의 노력을 지원하기 위한 것으로서 중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동방 교회 안에 이어져 내려온 존귀한 전통은 사실상 그리스도가 세우신 교회의 필수적인 유산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가톨릭 신자들이 해야 할 일은 먼저 동방 교회의 전통에 친밀감을 가지고 접근하여 그들의 전통으로부터 자양분을 얻고, 일치를 이루려는 교회의 노력을 각자에게 가장 적합한 방법으로 지원하는 것입니다. 동방 가톨릭의 형제 자매들은, 그리스 정교회의 형제 자매들과 함께, 이러한 전통의 계승자들임을 확실하게 인식하고 있습니다. 라틴 교회의 전통을 이어받은 로마 가톨릭의 신자들 역시 이 소중한 교회의 유산을 인정하여, 자신의 전통만을 고집하거나 다른 공동체를 거스리는 행위를 억제함으로써 교회의 보편성을 회복하고, 이를 교회와 세상에 명백히 드러내고자 하는 교황의 강렬한 열망에 부응해 주기를 바랍니다. 또한 우리 모두는 서방 교회뿐만 아니라 동방 교회의 생명 안에서 보존되고 성장해 온 이 유산이 하느님께서 계시하신 것임을 이해하고,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임을 받아들이며, 온전히 맛들여야 할 것입니다.”(동방의 빛 1)

이어서 교황은 정교회(正敎會)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을 계속 하신다.

“우리는 그들과 특별히 가깝게 결속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거의 모든 면에서 서로 공통점을 지니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일치를 진정으로 열망하고 있다는 점에서 서로 같습니다.”(동방의 빛 3)

정교회는 이와 같이 진정한 우리의 자매 교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치를 원하시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르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일치 운동에 관한 교령’을 지침으로 삼아, 회해와 일치를 위한 온갖 가능한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이 장(章)에 는 가톨릭 신자가 아닌 사람들의 개종에 대해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정교회에 속해 있는 우리의 형제 자매들에게는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4 입교자를 찾아 나서자

“교회가 존재하는 오직 하나의 이유는 그리스도의 왕국을 온 세상에 확장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구원의 은총을 나누어 주려는 것이다.”라고 교황 비오 11세가 엄숙하게 선언한 바 있다. 그러므로 가톨릭 신자들이 교회에 속하지 않은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살면서 그들을 교회에 이끌어 들이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 때로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만을 돌보는 문제에 너무 치중하다 보니, 막상 교회 밖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신경 쓸 겨를조차 없는 현상이 벌어지는 것이다. 결국 교회 안의 신자들도 제대로 간수하지 못하고 교회 밖의 사람들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결과가 빚어진다 해서 놀랄 일이 아니지 않은가?
여기에 잘못이 있어서는 안 된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 신앙에 관심을 갖도록 우리가 나서야 한다. 세상 사람들에게 신앙이라는 선물을 전하는 가장 훌륭한 의지를 실천에 옮기려면, 소심하고 수줍은 마음이나, 체면, 또는 그 밖의 이런 저런 어려움들을 모두 이겨내야 할 것이다. 복음은 모든 사람들에게 반드시 전파되어야만 한다. 이 목적을 위해서 열성을 바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St. Francis Xavier)은 말한다. 그러나 신중하게 행동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물론 해야 할 행동을 못하게 막거나 그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라면 신중해야 한다. 하나의 조직체 안에서 신중함이 담당하는 올바른 기능은 ‘브레이크’, 곧 제동 장치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신중함이 ‘엔진’, 곧 기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데서 잘못이 빚어 지는 것이다. 이러한 잘못의 결과는 활동이 멈추게 되는 것인데, 그제서야 사람들은 놀란다. 과연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는 사람이 필요한 세상이다. 이기적인 생각으로 몸을 사리거나 쓸데없는 두려움을 초월하여 사는 사람, 교황 레오 13세가 잘못된 양극단이라고 낙인 찍은 바 있는 ‘분별 없는 행동’이나 소위 ‘지나친 신중’이라는 두 가지 오류에 빠지지 않는 사람이 절실히 필요한 때이다. 많은 영혼이 지금 이 순간에도 시간이라는 급류에 휩쓸려 떠내려 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떠내려 가 버린 영혼들을 구할 수는 없다. 영원한 깊은 심연이 그 영혼들을 삼켜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뒤늦게나마 노력을 기울여 다른 영혼들을 구해야 하지 않겠는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면, 결국 우리 자신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준비를 갖추지 못하게 되고 만다.”(쉬넨스 추기경 / Cardinal L. J. Suenens)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의혹의 바다에서 이리저리 떠다니며 그 곳에서 마음의 평안을 얻고자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먼저 그들에게 다가가서 참다운 믿음과 평화가 교회 안에 있다는 사실을 납득시켜야 한다. 누가 설명해 주지 않는다면, 그들이 어떻게 그 진리를 알 수 있겠는가?(사도 8, 30-31 참조) 만일 가톨릭 신자들인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해서 꼼짝 않고 입을 다물고 있다면, 그들의 엄청난 오해를 어떻게 풀 수 있겠는가? 교회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가톨릭 신자들의 냉랭한 겉모습을 보고 그 마음속에 들어있는 믿음의 따스함을 어떻게 짐작이나 할 수 있겠는가? 열성을 보인 일이 거의 없는 우리 가톨릭 신자들의 믿음을 보며, 믿지 않는 자신들과 별로 또는 전혀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해서 그들을 나무랄 수 있겠는가?
가톨릭의 교리나 주장을 대중 홍보 매체나 공공 집회를 통하여 알리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선교 방법도 개인 접촉으로 뒷받침되지 않으면 효과가 적어질 수밖에 없다. 만일 홍보 매체를 통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접촉하는 선교 방식이 효과가 있다면, 홍보가 과학적으로 이루어지는 현대는 그야말로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교회로 쏟아져 들어오는 시대라야 한다. 그러니 실상은 교회의 울타리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조차 그대로 유지하기가 어려운 형편이다.
참으로 효과적인 선교 방법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개별적으로 친밀하게 접촉하는 것뿐이다. 방송이나 출판 매체는 ‘믿지 않는 양들’을 ‘착한 목자’에게로 인도하는 과정에서 그들을 일깨워 주거나 도와 주는 역할을 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일의 중심이 되는 활동은 개인적인 접촉과 호소를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프레데릭 오자남(Frederich Ozanam)은 “한 영혼을 끌어 올리려면 다른 또 하나의 아름다운 영혼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영신세계를 지배하는 법칙이다”고 말했다.
다시 말하면, 영혼을 구하는 일에는 반드시 사랑의 법칙이 작용해야 하므로, 주는 사람이 없으면 받을 수도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그래도 나는 어쩔 도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의 편견과 무지가 깊이 뿌리 내리고 있기 때문에 도저히 움직이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한 편견이 사실상 널리 퍼져 있을 뿐만 아니라 전통적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으며, 거의 선천적이고, 더욱이 교육을 통해서 굳어져 있다는 사실이 인정된다. 과연 이러한 상황에서 일반 가톨릭 평신도가 앞에 나서서 싸울 수 있는 수단이 있겠는가? 그러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우리 교회의 교리 속에는 훌륭하고 빛나는 값진 보검이 있다. 이 보검의 성능에 관해서 뉴만 추기경(Cardinal Newman)은 “나는 진리의 힘과 승리에 대해서 강력한 확신을 가지고 있다. 진리에는 하느님의 축복이 함께 하신다. 그러므로 사탄이 설사 이 진리의 힘과 승리를 줄이거나 더디게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결코 막을 수는 없는 일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 외에도 우리 가톨릭 신자들이 늘 명심해야 할 또 하나의 원리가 있는데, 이 원리를 우리 신자들이 생활 속에서 바르게 증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진리는 오류와 싸울 때 결코 화를 내지 않으나, 오류는 진리와 싸울 때 절대로 조용한 법이 없다.”(드 메스트로 / De Maistre)는 가르침이다. 앞서 되풀이해서 강조된 바와 같이, 입교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을 접촉할 때에는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하실까?’ 하는 생각을 떠올리면서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논쟁을 벌이는 태도나 고압적인 자세를 보여서는 안 된다. 말 한마디 한마디에 겸손과 사랑, 그리고 성실함이 깃들어 있어야 한다. 말 뿐만 아니라 행동에 있어서도 하나의 본질적인 요소가 드러나야 하는데, 그것은 우리의 언행이 순수한 믿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상대방이 느끼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심한 반발이 나올 리가 없고, 틀림없이 깊은 인상을 심어 주게 되므로, 마침내 우리의 선교 대상자가 입교할 가능성이 한결 높아지게 된다.
버밍검의 대주교였던 윌리암스 박사(Dr. Williams)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믿음은 배우는 것이 아니라 체험을 통해서 스스로 붙드는 것이다. 믿음은 한 사람으로부터 다른 사람에게 옮겨 가는 불길이다. 믿음은 오직 사랑으로만 전파되며, 그 밖의 다른 방법으로는 믿음을 전파할 수 없다. 믿음은 오로지 자신을 친절하게 대해 주는 사람으로부터만 전해 받는다. 자신에게 무관심하거나 적대감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으로부터는 믿음을 전해 받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처럼 개인 접촉 활동이 꼭 필요하다고 볼 때, 한 사람의 일꾼이 여러 사람을 대상으로 제대로 돌보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결국 입교자를 많이 얻으려면 많은 일꾼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레지오 단원은 더욱더 많아져야만 하는 것이다.

활동 계획을 세울 때에는 다음과 같은 점들을 유의해야 한다.

(가) 공부가 필요하다. 논쟁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지한 질문에 성실하고 바르게 답변함으로써 상대방을 인도하기 위함이다.
(나) 새로 입교한 교우들이 기존 신자들의 우정 어린 도움을 받도록 보살피고, 알맞은 사람이면 레지오에 입단하도록 이끌어야 한다. 그러한 교우들이 레지오에 입단하면, 입교하기 전의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겪는 어려움을 해결해 주는 활동에 적격자가 될 것이다.
(다) 교리 반에 나오다가 중단한 사람들의 명단을 교리 교사로부터 확보하여 연락을 취한다. 예비신자들이 교리를 중단하는 이유는 입교 영세하려는 마음이 식은 것이 아니라, 참석할 수 없을 만한 돌발적인 사정 때문인 경우가 보통이다. 이렇게 불가피하게 한두 번 결석하다 보면 부끄러운 마음도 들고, 또는 차일피일 미루다가 다시 출석할 기회를 잃어버려 탈락하게 된다.
(라) 레지오 단원이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자연스럽게 행동한다면, 가톨릭 신자가 아닌 사람들과 효과적으로 접촉할 수 있는 기회는 얼마든지 생긴다. 신자들의 경우에도, 마음속에 괴로움이나 슬픔을 지녔거나 그 밖의 어떤 어려움에 부딪친 사람들에게는 기도를 바치도록 권하거나, 도움이 될 만한 영성 서적을 읽도록 돌보아 주고, 그들과 함께 하느님의 사랑과 성모님의 모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눔으로써 그들을 위로하고 용기를 북돋아 주어야 한다. 이러한 활동의 방법은 생활 속에서 시련을 겪고 있는 믿지 않는 이들을 대상으로 활동할 때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데, 실제로는 거의 활용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그 이유는 활동 당사자인 단원들이 믿지 않는 사람들을 접촉할 때 신앙에 관한 이야기는 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잘못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단지 세속적인 일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나눈다. 이렇게 되면 활동 대상자에게 전혀 위안을 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믿음도 보여 주지 못하고, 성과도 거두지 못한다. 그러므로 레지오 단원들은 이러한 접촉의 기회를 십분 활용해야 한다. 이러한 때, 즉 생활 속의 시련으로 인해서 평상시 신앙 대화를 가로막고 있던 장벽이 흔들릴 때, 사람들은 영적인 대화를 고맙게 받아들이며, 그로부터 활동의 풍부한 열매를 맺도록 발전시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마) 신자가 아닌 사람들을 위한 하루 피정이 여러 곳에서 열린 바 있다. 피정의 기본 순서는 미사 봉헌, 세 차례의 강의, 질의 응답, 점심 식사 및 다과, 성체 강복 등으로 짜여지며, 때때로 해설을 곁들여서 영화를 보여 주기도 한다. 수도원에서 피정을 실시하면 이상적인 분위기가 마련될 것이며, 믿지 않는 사람들이 평소에 지니고 있던 오해와 편견을 씻을 수 있게 된다.
피정을 준비하려면 우선 날짜와 장소를 정하고, 진행 순서가 적힌 초대장을 인쇄하여 그 지역의 레지오 단원이나 다른 가능한 모든 경로를 통해 신자가 아닌 주민들에게 보내고, 피정의 취지를 설명한다. 이 초대장을 올바로 활용하면 심리적으로도 효과를 거두게 된다. 그러므로 어느 경우를 막론하고 초대장을 마치 광고 전단을 돌리는 식으로 마구 뿌려서는 안 된다. 초대할 사람들의 명단을 작성해 놓고, 그들의 초대장을 받은 후 그것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살펴야 한다. 초대장은 피정에 참석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보이는 사람에게만 발송한다.
초대장을 인수한 레지오 단원이나 그 밖의 협조자는 피정에 참석할 사람들을 찾아내는 임무도 띠게 된다. 자신이 위임 받은 초대장을 다 돌려야만 임무를 완수하는 것이며, 초대장이 남아 있다는 것은 아직 임무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일깨워 줄 따름이다.
믿지 않는 이들을 피정에 참가시킬 때는 대개 그를 피정으로 이끈 가톨릭 신자 친구가 데리고 오는 것이 관례이다. 그렇게 하면 그들이 낯선 피정의 집에 와서 서먹서먹하게 느끼지 않을 뿐더러, 그들의 질문에 대답도 해주고, 피정하는 동안 사제를 만나 보도록 권할 수도 있을 것이다. 피정 중에 반드시 침묵을 지키도록 할 필요는 없다. 피정 대상자는 남녀 제한이 없다. 이러한 특수한 피정은 그 자체의 목표에 충실해야 하므로, 이미 영세한 교우나 냉담 신자는 함께 참석시키지 않도록 해야 한다.
피정에 초대할 만한 사람들을 많이 접촉하면 할수록 참석자 수는 많아질 것이며, 참석자 수가 많을수록 입교자 수도 그만큼 늘어나게 될 것이다. 실제 이와 같은 방식으로 입교자의 비율이 증가된다는 사실이 경험을 통해서 밝혀졌다. 따라서 접촉 대상자의 수를 배로 늘리면(이 일은 확실히 우리 자신들이 얼마나 힘을 쏟느냐 하는 데 달려있다) 입교자 수도 배로 증가하게 될 것이다.

“아버지, 이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이 사람들도 우리들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요한 17, 21)
“복음 성서 속에서 복되신 동정 마리아에 대해 기록된 부분이나 마리아가 신앙을 증거하신 장면들을 제외시켜 보라. 이로써 단순히 쇠사슬의 고리 하나만 빠지는 것이 아니라, 쇠사슬 전체가 망가지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전체 쇠사슬 가운데 고리 하나가 균열되거나 부분 파손을 입는 것이 아니라, 근본이 무너지는 것이다. 강생의 신비에 대한 믿음, 세세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믿음, 온 세상에 두루 퍼져있는 그리스도교의 믿음은 오직 이 한마디의 증언 –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서 가브리엘 천사에게 주신 그 한마디 말씀 – 위에 바탕을 두고 있다.”(와이스만 추기경 / Cardinal Wiseman : 신약성서 주제)

5 개종시키려면 성체를 설명하라

때때로 논쟁에 너무 많은 시간을 소비하는 경우를 본다. 그러나 그러한 논쟁으로는, 설사 합당한 논리로 교회를 증거한다 해도 상대방을 교회로 이끌어 들이지는 못한다. 믿지 않는 이들을 찾아가 대화를 나눌 때는 그들로 하여금 단지 교회가 간직하고 있는 보화를 엿볼 수 있도록 만드는 일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그렇게 하는 데는 성체 교리를 설명해 주는 것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이 없다.
예수님에 대해서 어렴풋이 알고 있거나 또는 잘 모르고 있던 사람들까지도 예수님의 성체에 대해서 설명해 주면 예수님을 열렬히 찬미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들은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들과 함께 사시면서 보여 주신 기적들, 즉 죽은 이를 살려 내시고 예수님의 명령 한마디에 병마가 사라지는 등의 기적에 대해 이야기를 들으며, 예수님께서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초자연적 권능을 행사하신 분이시고 모든 자연의 힘이 그분께 복종했음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권능으로 이 모든 기적을 직접 행하셨고, 인간이셨지만 동시에 영원하신 하느님 자신이시며, 만물을 창조하셨고, 말씀이 바로 권능이시기 때문이다.
성서는 하느님이시며 사람이신 예수님께서 직접 행하신 그 무수한 기적 가운데서, 특히 성체라는 사랑에 넘치는 기적을 세우신 사실을 전하고 있다. “예수께서 빵을 들어 축복하시고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며 ‘받아 먹어라. 이것이 내 몸이다’.”(마태 26,. 26)라고 말씀하셨다. 이 얼마나 가슴 벅찬 주님의 말씀인가! 그런데도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렇게 말씀이 어려워서야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요한 6, 60) 예수님의 몇몇 제자조차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반대하는 사람들의 편에 서 있었으니, 이러한 불신이 교회의 역사 속에서 수도 없이 많은 영혼들을 잃어버리게 한 원인이 되었다. “이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내어 줄 수 있단 말인가?”(요한 6, 52) 제자들은 그들 가운데 서 계신 예수님의 참모습을 알아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불신은 용서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이고 그분이 하느님이시며 전능하신 분이심을 인정하면서도, 예수님의 성체를 석연치 않게 여기는 사람들은 도대체 왜 그럴까? 그들이 인정하는 그리스도께서 단순한 마음을 지닌 제자들을 향해서 엄숙하게 “이것은 내 몸이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설마 당신의 몸이 아닌 것을 ‘내 몸’이라고 하셨겠는가? 만약 그렇게 하셨다면, 이야말로 그리스도께서 사람을 속이신 것이니, 어찌 상상이나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파스칼의 준엄한 논리는 바로 이러한 불신의 무리들을 향해 외친 말이다. “성체를 믿지 않는 어리석은 자들을 내가 얼마나 경멸하는지 아는가? 복음이 진실하다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이시라면, 성체를 받아들이는 것이 무슨 문제가 되는가?”
그러므로 우리를 압도하는 예수님의 성체에 대해 의심을 품는 사람들을 우리가 그저 무관심하게 지나칠 수는 없는 일이다. 성교회의 지고(至高)한 빛이신 성체를 우리의 갈라져 나간 형제들이 바라볼 수 있도록 그들 앞에 끊임없이 들어올려야 한다. 그들의 마음을 움직여 성체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리하여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이 신비를 바르게 깨닫고,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나는 지금 얼마나 끔찍한 손해를 보고 있는가!” 하고 갈등을 겪게 될 것이며, 처음으로 ‘참된 집’을 그리워하는 마음의 충동을 느끼게 될 것이다.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이끌고자 노력하는 사람들 중의 많은 이들은, 그들 자신은 교회 밖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성서를 읽고 묵상을 하고 때로는 기도하면서 낡고 희미한 역사 속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찾아내고자 노력한다. 그러다가 때때로 그들의 마음 속에 사랑에 찬 주님의 모습을 생생하게 떠올리며 기쁨에 넘친다. 그렇다면, 만일 이 사람들이 교회 안에 성체의 신비가 존재하고 있음을 깨닫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성체를 받아 모심으로써 예수님의 원래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즉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지니신 예수님을 총체적으로 그들의 삶 안으로 모셔 오게 됨을 그들이 깨닫게 된다면, 또 만일 그들이 성체를 통하여 예수님과 접촉하고 예수님과 이야기하고 예수님을 생각하고 또는 베타니아에서 예수님과 가까이 지냈던 예수님의 사랑하는 친구들보다도 훨씬 더 가깝고 친하게 예수님께 열중할 수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어떠한 변화가 일어나겠는가? 그뿐만이 아니다! 성모님과 일치하여 성체를 받아 모심으로써, 그들은 어머니께서 예수님의 거룩한 몸을 온갖 사랑으로 돌보셨던 것처럼, 어머니와 함께 예수님을 돌보아 드리게 되는 것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베풀어 주신 모든 은혜에 대한 맞갖은 감사를 드리게 되는 것이다. 교회 밖에 머무르고 있는 사람들이 빛을 그리워하도록 만들려면, 오직 비할 수 없는 성체의 은총을 설명해 주기만 하면 된다. 우리가 그렇게만 하면, 그 다음은 예수님께서 직접 당신에 관한 모든 일을 그들이 깨닫도록 해주실 것이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뜨거운 감동을 느꼈던 것처럼, “너희는 받아 먹어라. 이것은 내 몸이다.”라는 그 ‘어려운 말씀’의 뜻을 그들이 명확히 깨닫도록 해준다면, 그들의 마음도 뜨거운 감동으로 달아오를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의 눈이 열리고 거룩한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실 때에 예수님을 알아보게 될 것이다.(루가 24, 13-35 참조)
이렇게 성체에 대하여 바르게 인식할 때, 하늘나라로 향하는 마음을 어둡게 하던 오해와 편견은 타는 듯한 햇볕 아래 눈송이처럼 녹아 없어질 것이고, 이때까지 앞을 보지 못하고 걸어온 그들은 뿌듯한 마음으로 이렇게 외칠 것이다. “다만 내가 아는 것은 내가 앞 못 보는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잘 보게 되었다는 것뿐입니다.”(요한 9, 25)

“성체의 동정 성모’란, 모든 은총의 분배 자로서의 성모님의 자격 안에 직접적이고도 간접적인 성체의 모든 은총에 대한 완전하고도 절대적인 분배 권이 포함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이 성체성사는 가장 효과적인 구원의 수단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져다 주신 구속 사업의 가장 뛰어난 열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성사를 통하여 예수님을 알리고 사랑 받으시도록 만드는 것이 성모님이 하시는 일이다. 성체를 온 세상에 전파하는 것도 성모님의 임무이고, 교회를 배로 늘리고 믿지 않는 이들 사이에 교회를 세우는 것도 성모님의 임무이며, 또한 이단과 불신앙의 무리들로부터 성체께 대한 신심을 옹호하는 것도 성모님의 임무이다. 영혼들로 하여금 성체를 받아 모시도록 준비시키는 일도 성모님의 일이며, 자주 성체를 찾아 뵙고 조배 하도록 권장하는 일도 성모님이 하신다. 성모님은 성체가 지니고 있는 모든 은총의 성체께로 우리의 마음을 이끄는 모든 은총, 그리고 성체로부터 흘러나오는 모든 은총을 관리하는 분이시다.”(테스니에 / Tesniere : 성체의 성모 성월)

6 믿음이 식은 사람들

종교가 없는 사람들의 숫자가 엄청나게 불어나는 현상은 큰 문제이다. 세계의 여러 인구 밀집 지역에서, 그 지역 전체 인구가 명목상으로는 가톨릭 신자이지만, 미사나 성사는 물론 기도까지도 그들의 생활에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 가운데 어떤 지역에서는 전체 인구가 2만 명인데, 그 중 신자로서의 의무를 다하고 있는 사람은 75명에 불과하다는 통계가 나와 있다. 또 다른 두 지역에서는 3만 명 중 400명 그리고 90만 명 중 4만 명만이 신자로서의 의무를 다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와 같이 믿음이 없거나 식어 버린 신자들이 아무런 돌봄도 받지 못하고 방치되는 현상이 일반화되고 있다. 어는 곳에서도 노력다운 노력이 눈에 띄지 않는다. 오히려 어떤 이들은 직접적인 방법을 쓰면 효과를 거두지 못하거나 주민의 반발을 사게 되고 위험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더욱 이상한 일은, 선교사들이야말로 당연히 땅 끝까지라도 믿지 않는 이들을 찾아가서 위험과 죽음을 무릅써야 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조차 그러한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지역에서 무엇보다도 슬픈 일은 성직자가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길이 막혀 있고, 한편 타락한 주민들은 사제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레지오가 그 독특한 가치를 발휘해야 할 곳이 바로 이러한 지역이다. 레지오가 사제를 대리하여 사제의 사목 계획을 실천에 옮겨야 하는 것이다. 레지오는 사제가 아닌 일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사제로부터 멀어진 사람들도 레지오를 거부하지는 않는다. 레지오 단원은 일반인들과 똑같은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므로, 믿음이 없는 주민이라도 그들의 활동을 파괴하거나, 레지오 단원의 접근을 속임수 등의 연막 전술로 막을 수는 없다. 사제나 수도자처럼 하느님께 바친 서약에 매어 있는 특별한 분들에게는 그러한 것들이 쉽게 통하겠지만, 레지오 단원에게는 그렇게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사람이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마르 8, 37) 우리는 이웃의 영혼을 위해서 어느 정도의 노력을 바쳐야 하는가? 최고의 노력 – 만일 필요하다면 죽을 위험을 무릅쓸 정도의 노력 – 을 쏟아야 한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렇게 믿음이 식은 사람들이 많은 지역에서 활동에 나설 때에는, 멀리 떨어진 곳으로 선교 활동을 떠날 때 이상의 굳은 의지를 가지고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
‘절망적’이라고 부르짖거나 ‘위험하다’고 외치는 사람들의 의견을 전적으로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아마도 그런 사람들의 의견이 레지오 활동의 성공과 안전에 기여하는 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그들의 말이 레지오의 적극적 활동을 마비 시키는 결과를 가져와서는 안 된다. 태산 같은 죄악을 물리치려면 그만큼 큰 믿음을 드러내지 않으면 안 된다. 이냐시오 성인(St. Ignatius of Loyola)은 그와 같은 믿음을 지닌 분이었다. 그는 하느님께 대한 신뢰가 너무 컸기 때문에, 노도 없고 돛도 없는 쪽배를 타고 깊은 바다로 나갈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고 말했다.
레지오 단원 앞에 놓여 있는 것은 어떤 순교 행위가 아니라 빛나는 성공이다. 실제로 수많은 영혼들은 레지오 단원이 자신을 직접 찾아와서 인도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접근 방법. 이상과 같이 믿음을 잃은 상황, 다시 말하면 신앙인의 가장 기본적인 의무가 무시되고 있는 상황에서 레지오 단원들이 가장 먼저 힘써야 할 활동은 신자의 기본의무 가운데 가장 핵심인 미사 참례를 강조하는 것이다. 미사의 가치와 은총을 설명하는 간단한 인쇄물을 마련하고, 특히 색깔을 넣어 그 주제를 강조하면 더욱 큰 효과를 보게 될 것이다. 단원은 이러한 홍보물로 무장하고 집집마다 방문한다. 그것을 받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한 장씩 건네주면서, 가능하다면, 미사 성제에 대한 신심을 되찾도록 상냥한 자세로 권유한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지극히 온화하고 참을성 있는 태도를 지녀야 한다. 이런 저런 쓸데없는 일을 물어 보거나 신자의 의무를 게을리 한다고 나무라는 태도를 보이는 일을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처음에는 거절당하는 경우도 여러 번 있을 것이다. 그러나 즉석에서 성공을 거두는 때도 많이 있으므로, 그것으로 위로를 삼을 수 있다. 이렇게 일단 첫 방문이 이루어지면, 이어서 레지오의 통상적 방문 활동이 뒤따라야 한다. 첫 방문의 근본 목표가 방문 대상자와 참된 우정의 관계를 맺으려는 노력의 시작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일단 친밀한 관계가 맺어지면 거의 모든 일을 이룬 셈이다.
한 사람의 냉담자가 신앙을 되찾게 되는 일은 마치 군인이 전쟁터에서 고지 하나를 점령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하나의 고지가 그 다음 고지를 점령하기 위한 거점이 되는 것처럼, 믿음이 식은 사람을 열심한 신자로 변화시킨 하나의 성공 사례는 곧 이어 또 다른 성공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성공적인 활동이 계속되면 그 고장의 여론이 달라진다. 주민들이 레지오 단원들을 눈여겨보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레지오 단원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때로는 비평하기도 하고, 생각하게 되고, 마침내 차가웠던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지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해를 거듭하면서 신심을 되찾는 신자가 늘어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 몇 해 동안은, 사람들의 변화가 그렇게 두드러지게 드러나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다가, 마치 개미가 파고 든 집이 튼튼하게 보이다가도 한 번 슬쩍 건드리면 폭삭 무너지는 것처럼, 그 사람들의 마음도 이제 어떤 작은 일이 계기가 되어 주면 즉시 하느님께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노력의 성과. 어느 도시의 인구가 5만 명 정도였는데, 그 중 신자의 의무를 충실하게 지키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할 만한 형편에 있었다. 이런 냉담한 생활과 더불어 온갖 비정상적인 일들이 한데 어울려 상황은 더욱 복잡해졌다. 심지어 길 가는 사제에게 모욕적인 언사를 퍼붓기가 일쑤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쁘레시디움 하나가 믿음의 정신으로 설립되어,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희망이 없다고 생각되던 가정 방문 활동을 시작했다. 놀랍게도 곧 성과가 연이어 나타났다. 레지오 단원 수가 늘어나고 활동의 경험이 쌓임에 따라,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그 성과가 더욱 두드러졌다. 사람들은 모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러한 예상외의 성공을 거두면서 3년이 지났을 때, 교회 당국은 그 도시의 모든 남자들에게 성체를 모시라고 대담하게 호소하기에 이르렀다. 대략 200명 정도는 호응하겠지 했는데, 실제 영성체에 참여한 남자의 숫자는 무려 1,100명이나 되었다. 3년간의 레지오 활동이 이 도시의 온 주민을 발칵 뒤흔들어 놓았던 것이다. 활동의 결말은 이렇게 확실하게 드러났다. 이 도시의 다음 세대들은 새롭게 변모된 환경과 질서 속에서 태어나게 될 것이다. 한때 미사를 거부하고 사제를 모욕했던 이 고장에, 이제 거룩함이 깃들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비슷한 상황에 있는 다른 고장에서도 동일한 방식으로 해결책이 마련되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느님을 믿어라. 나는 분명히 말한다. 누구든지 마음에 의심을 품지 않고 자기가 말한 대로 되리라고 믿기만 하면 이 산더러 ‘번쩍 들려서 저 바다에 빠져라’ 하더라도 그대로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 말을 잘 들어 두어라. 너희가 기도하며 구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았다고 믿기만 하면 그대로 다 될 것이다.”(마르 11, 22-24)

7 선교사의 도구로서의 레지오

선교 현황. 여기서 말하는 선교 활동이란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거나 믿지 않는 사람 또는 집단을 대상으로 선교에 나서는 활동을 말하며, 교회가 아직 뿌리를 내리지 못하여 그리스도교가 현지 문화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고 있는 지역의 주민을 대상으로 수행하는 선교 활동을 말한다.
이러한 지역에는 문화나 교육 또는 사회적 환경 등에서 주민 계층간에 수준의 차이가 심하기 때문에 선교 활동이 어려움을 겪는다. 한 나라 안에서도 인구가 밀집된 도시 지역과 주민이 흩어져 살고 있는 농촌 지역으로 나뉘어 있고, 빈부의 차이나 교육 수준의 차이 또는 다양한 종족과 언어 집단 등으로 갈라져 있다.
세상 전체를 놓고 볼 때,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보다는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수가 더 빠르게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이처럼 방대한 세상의 곳곳에 선교사들이 진출한다. 그들 중에는 사제나 수도자들도 있고 평신도들도 있다. 선교사는 다른 나라에서 오므로,민족이나 언어 또는 문화의 차이로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러한 어려움은 훈련이나 경험으로 어느 정도는 해결 할 수 있겠지만 완전히 극복하기는 어렵다.
선교사의 임무는, 새롭게 개척된 지역 안에 신자 공동체를 세우고, 그 곳 주민들로 하여금 신앙적으로 자립하도록 도와 주며, 그들 스스로 복음화 사업에 나설 수 있게 기초를 닦아 주는 일이다.
선교사는 먼저 현지 주민과의 광범위한 접촉을 통해 가장 빠른 시간 내에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주민들과 사귀려고 노력한다. 할 수만 있다면 현지에 필요한 학교나 진료소 등을 세워 그리스도 신앙을 증거하고, 현지 주민과 쉽게 접촉하도록 한다. 또한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신자들 중에서 교리 교사나 교회에서 일할 일꾼들을 뽑는다.
선교사나 현지 교리 교사는 배우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만 교리를 가르칠 수가 있다. 그런데 사실은 사람들을 교리 공부에 참여하도록 하는 것이 바로 그들을 변화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람들의 이러한 변화는 하느님의 그늘 밑에서 그들이 가톨릭의 한 평신도와 접촉함으로써 계기를 갖게 되며, 그런 다음 사제와의 만남을 통해 더욱 깊어진다. 우정과 신뢰가 점차 굳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성당에 찾아온 그들은 곧잘 “천주교 신자를 알기 때문에 성당에 나오게 되었습니다.”라고 사제에게 입교 동기를 말하게 된다.
레지오는 격무에 시달리는 선교사들에게 자신을 도구로 쓸 수 있도록 내어 놓는다. 레지오는 이미 검증을 거친 확실한 도구로서,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알리고 그들의 신앙 생활을 충실히 하도록 도와 주는 일에 크게 쓰이는 도구이다. 현지 주민을 단원으로, 그리고 선교사를 영적 지도자로 모신 후, 레지오는 신입 교우를 가르치고 양성하여 그들을 체계적이며 지속적으로 복음화 시킨다. 레지오 단원은 그 고장 사람들이므로, 선교사처럼 외부에서 들어와 그 사회를 새로 파고 들지 않아도 된다. 따라서 레지오 단원들을 올바르게 양성하기만 하면, 초대 교회의 신자들처럼, 그 고장의 빛과 소금과 누룩의 역할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레지오 확장. 레지오 단원의 숫자가 늘어나고 질적으로 향상되면, 단원들에게 적절한 훈련을 시켜야 할 필요가 있게 된다. 이 훈련의 방법은 다름 아닌 쁘레시디움의 수를 늘리는 것이다. 이때 한 사람의 영적 지도자가 한 개 이상의 쁘레시디움을 동시에 맡아야 하는 경우도 생길 수 있다. 또는 교리 교사나 다른 경험 있는 신자들로 하여금 단장직을 맡게 하여, 단원들을 교육하고 정신을 고취시키는 역할을 담당하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 개의 쁘레시디움은 신앙으로 무장한 10명 내지 20명의 병력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쁘레시디움의 수를 늘리는 작업이 성공했다는 것은 그 지역의 사제가 수많은 사도직 일꾼들을 조직하고 활용하는 일에 성공을 거두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로써 사제도 그 직무와 기능면에서 교구의 주교가 수행하는 일과 거의 같은 일들을 맡아 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는 주교의 입장에서 볼 때도 신앙을 위해 봉사하는 강력한 사제 단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이 보유하게 되는 것이며, 그는 이 사제 단을 통하여 교구 내 모든 주민들에게 빠짐없이 복음을 선포할 수 있게 된다.
이와 같이 우리 레지오가 제시하는 선교 계획이란, 전에 한 번도 해본 일이 없는 새로운 것이 아니라, 각기 다른 조건과 상황 밑에 놓여 있는 여러 선교 지역에서 다년간 실시하여 거둔 복음화 운동의 성공과 경험을 토대로 하고 있다.

각 단원에게 확고한 임무를 배당하자. 레지오가 제시하는 선교 계획 안에는 단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명확하게 활동을 배당하도록 되어있다. 쁘레시디움은 각기의 활동 분야를 조사하여, 단원들에게 배당되는 개인별 활동을 알맞게 조정한다. 이로써 각 단원은 자신이 맡은 활동을 올바로 수행해야 하는 책임을 지게 된다. 레지오 단원이 명심해야 할 일은, 자신의 의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사제의 지시에 순명 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제를 통하여 단원들은 교회의 선교 사명에 참여하게 된다. 레지오 조직의 기본 목표 중의 하나는 각 단원에게 이러한 책임을 맡김으로써, 그 책임을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일꾼을 만드는 것이다.
선교 지역에서 레지오 단원이 할 수 있는 활동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가) 선교사의 주기적 공소 방문을 준비한다.
(나) 예비 신자 교리 반을 지도하며, 새로운 예비신자를 찾아 나서고, 교리 반에 빠짐없이 출석하도록 돌본다.
(다) 신자 생활을 소홀히 하거나 믿음이 식어 버린 신자들이 올바른 신앙 생활로 돌아오도록 돌본다.
(라) 공소 예절을 주관한다.
(마) 임종을 앞둔 신자들을 신앙적으로 보살피고 교회 장례를 돌본다.

이 밖에도 현지 사정에 알맞게 정신적 협조나 노력 봉사로써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길이 많이 있을 것이다.

레지오 단원들의 신앙 지식은 높은 수준이어야 하는가? 단원이 갖추어야 할 수준은 그가 어떠한 활동을 수행하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믿지 않는 이들에게 입교를 권면하고 새 영세자를 보살피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교리 지식만으로도 충분하다. 초대 교회 당시 교회의 성장 속도가 대단히 빠르게 퍼져 나갔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해 준다. 당시 대부분의 복음 전파는 권세 있고 부유한 사회 계층으로부터 억압받고 있던 힘없고 미천한 사람들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신앙 지식을 많이 배우고 안다는 것은 물론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최상의 보화를 다른 사람의 마음에 쏟아 넣으려는 노력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영신 세계의 일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두드러진 효과를 보이지만, 설사 사회적인 신분이 서로 다르다 하더라도 쉽게 극복할 수 있다는 사실이 경험을 통해서 밝혀졌다. 뚜렷한 믿음을 지닌 신자는 비록 교리 지식을 완벽하게 갖추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그 믿음을 마음속 깊이 새기고 있으므로, 이를 자신이 전하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옮길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 신자들도 어떤 조직의 힘이나 또는 강한 충격에 의해 움직이지 않고서는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레지오 조직은 이런 신자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사도직 활동을 배당함으로써 그들이 움직일 수 있는 원동력을 불어 넣는다. 그리하여 그들이 점차 레지오 안에서 훈련되고 성장함에 따라 스스로 자신의 믿음을 다른 이들에게 전파하는 기회를 찾아 나서게 되는 것이다.

레지오는 활동하시는 성모님을 드러낸다. 레지오를 도입하면 선교 활동을 하는 데 다음과 같은 두 가지 큰 힘을 얻게 된다.

(가) 체계적인 조직이 발생시키는 힘. 조직은 항상 조직원들의 관심과 힘을 집중시켜 주기 때문이다.
(나) 어머니이신 성모님의 영향력. 이는 가장 강력한 요소인데, 성모님의 영향력은 당신 자신의 조직인 레지오 안에서 풍부히 드러나며, 레지오 단원들의 힘찬 사도직을 통해서 영혼들에게 아낌없이 베풀어진다.
사실상 성모님이 힘을 합쳐 주시지 않는다면 믿음의 빛을 전파할 수가 없다. 성모님의 도움 없이 우리의 힘만으로 쏟는 노력은 마치 기름이 떨어진 등잔과 같다. 오늘날 믿음의 빛나는 승리가 드문 현상은 바로 이 점을 충분히 깨닫지 못하는 데서 오는 것 같다. 초대 교회 당시에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지체 없이 그리스도를 믿겠다고 입교하였다. 431년에 열린 에페소 공의회(the Council of Ephesus)에서 치릴로 성인(St. Cyril of Alexandria)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시는 분은 바로 성모님이시라고 주저 없이 선언하였다. 더욱이, 선교사들의 주보(主保)인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St. Francis Xavier)은 자신의 경험담을 들려 주면서, 구세주의 십자가를 세운 후 바로 그 십자가 밑에 성모상을 모시지 않은 곳에서는 어디서든, 그가 복음 말씀을 전할 때 주민들의 반발이 있었다고 말했다.
만일, 레지오 사도직을 통하여, 가장 풍부한 열매를 맺는 성모님의 활동이 선교 지역에서 그 힘을 제대로 발휘할 수만 있다면, 치릴로 성인이 선언한 그 시절이 이 세상에 다시 한번 오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그렇게만 된다면, 모든 지역과 나라가 잘못을 털어 버리고 그리스도 신앙을 품에 안게 되는 시절을 다시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어부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한낱 허망한 공상 이었는가, 아니면 하느님이 내리신 최상의 영감이었는가? 여기서 잠시 그 어부들이 이룬 일들을 생각해 보자. 어떤 왕자도, 제국도, 공화국도, 그처럼 숭고한 계획을 마음에 품은 일은 일찍이 없었다. 사람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분명한 기회가 전혀 마련되어 있지 않았는데도 이 갈릴래아 어부들은 미래의 정복을 위해서 온 세상을 갈라놓았던 것이다. 그들은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모든 기성 종교를 개혁하려는 확고한 계획을 세웠다. 이를테면, 그릇된 종교이든 부분적으로만 참된 종교이든, 또는 유다인이든 이방인이든, 모두 개혁하려는 것이었다. 그들은 새로운 예배, 새로운 제사, 새로운 율법을 세우고자 했다. 그들은 그 이유로서, 예루살렘에서 사람들이 십자가에 못박은 바로 그분이 그렇게 하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했다.”(보쉬에 / Boussuet)

8 그리스도를 위한 외지 순방 활동(P.P.C)

모든 영혼을 접촉하겠다는 큰 뜻을 펴려면 우선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접촉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러나 그 정도에서 그쳐서는 안 되며, 일반 사람들의 생활 범주를 훨씬 넘어서는 상징적인 단계로까지 지속되어야 한다. 이러한 뜻을 이루려고 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위한 외지 순방 활동(Peregrinatio Pro Christo)’이라고 일컫는 레지오의 운동이다. 이 이름은 몽따랑베르(Montalembert)의 불후의 고전 작품인 ‘서방의 수도자들(The Monks of the West)’이라는 선교 서사시에서 유래한 것이다. 무적의 큰 무리를 이룬 사람들이 ‘그들의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창세 12, 1) 6세기로부터 7세기에 걸쳐 유럽 대륙을 횡단하여, 로마 제국의 멸망과 함께 쇠퇴하였던 그리스도교 신앙을 재건하였다.
레지오의 외지 순방 운동도 이와 똑같은 이상(理想)을 가지고 여러 무리의 레지오 단원들을 파견한다. 이 운동에 참여하는 단원들은 종교적 상황이 좋지 않은 먼 지역을 찾아가서 일정 기간 머무를 만한 시간과 여유를 가진 단원들이라야 한다. “이는 그리스도가 세상의 구원자이심을 드러내는, 어렵고도 미묘하며 인기가 없는 선교 사명을 수행하기 위한 것이다. 이 일이야말로 신자들이 해야 할 일이다.”(교황 바오로 6세) 이러한 외지 순방 활동은 가까운 지역은 해당되지 않는다. 가급적이면 외국을 활동 대상 지역으로 정해야 한다.
한 주일 또는 두 주일간의 짧은 활동 기간이지만, 이처럼 믿음을 전하려고 외국을 찾아가 활동하는 원리를 내세우는 이유는 우선 단원들이 지니고 있는 고정 관념을 바꾸기 위함이며, 동시에 모든 이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함이다.

9 마리아 정신의 외방 선교 활동(I.M)

참으로 열심한 단원들이 한두 주일 정도 봉사하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않고 좀더 실효를 거둘 수 있는 오랜 기간 동안 외국에서 활동하고 싶어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자신이 염두에 두고 있는 곳에서 스스로 생계 수단을 해결할 수 있고 자신의 가정이나 다른 사업에 지장 없이 6개월이나 일 년 또는 그 이상의 기간을 머물 수 있는 단원은 꼰칠리움이나 세나뚜스 또는 레지아로부터 적당한 기간 외방 선교 활동 임무를 부여 받을 수 있다. 물론 현지 교회 당국자와의 협의가 있어야 한다. 이 활동에 자원 봉사하는 단원을 ‘인꼴래 마리애(Incolae Mariae)’라 부른다. 이 말은 마리아를 통하여 희생을 바친다는 정신으로 먼 지역에서 임시 머무르며 선교 활동에 나선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10 주일 선교 활동(E.D)

‘주일 선교 활동(Exploratio Dominicalis)’은 ‘작은 순방 활동(mini Peregrinatio)’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데, ‘주일을 이용하여 영혼들을 찾아 나서는 활동’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레지오는 온 세계의 모든 쁘레시디움이 가능하면 적어도 1년에 한 번씩 주일을 이용하여 조 활동이 아닌 쁘레시디움 전체 활동으로 다른 고장을 찾아가서 선교 활동에 봉사할 것을 강력히 요청한다.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는 지역을 방문지로 정하고, 내왕하는 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지 않는 곳을 선택하기로 권한다. 이 활동은 하루에 그치지 않고 이틀이나 사흘 동안 수행할 수도 있다. 이 활동을 통하여 쁘레시디움 단원의 대다수(대개는 모든 단원)가 모험에 찬 활동을 경험할 수 있다. ‘주일 선교 활동’은 쁘레시디움 단원 전원이 참여할 수 있는 활동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앞에서 설명한 ‘그리스도를 위한 외지 순방 활동’은 아무리 그 뜻이 훌륭하다 해도 쁘레시디움 단원 대다수가 참가하기는 불가능하다고 본다.
경험에 따르면, 이 활동은 근본적으로 쁘레시디움이 중심이 되는 사업이다. 이 점에 대해서 꼰칠리움도 되풀이해서 역설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평의회나 쁘레시디움들은 이 활동을 기획할 때에 반드시 이 점을 명심해야 한다.

제41장 이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입니다(1고린 13, 13)

성모님은 온전히 사랑으로 충만한 분이셨으므로, 사랑 자체이신 예수님을 잉태하여 이 세상에 모셔 오는데 손색이 없는 분이셨다. 레지오 마리애는 성모님께 드리는 신심과 성모님을 닮으려는 노력으로부터 그 생명력을 얻고 있다. 따라서 레지오는 성모님이 지니신 사랑과 똑같은 정도의 강렬한 사랑을 그 특징으로 삼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레지오는 사랑으로 충만해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세상에 사랑을 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지침을 세심하게 지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1 레지오 대열에 참여할 때

레지오 대열에서는 사회적 신분이나 인종이나 국적 또는 피부색 등의 차별 대우가 있어서는 안 된다. 레지오 단원으로서의 적격성 여부만이 유일한 검토 대상이다. 레지오의 사도직은 행동단원으로서 수행하는 직접적인 활동보다는 사회 공동체 안에서, 이를테면 누룩의 역할처럼 간접적인 활동을 통해서, 더욱 많은 결실을 맺을 수 있다. 따라서 하나의 지역 공동체 전체를 레지오의 활동 영역 안에 두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면, 각 계층과 구역을 대표하는 신자들을 레지오 대열 안에 단원으로 확보하고 있어야 한다.

2 레지오 대열 안에서

레지오 대열 안에서는 단원들 사이에 가식 없는 순수성과 진솔한 동료애만이 깃들여져야 하며, 단원들 사이에 어떠한 차별이 있어서도 안 된다. 레지오 단원으로서 자신이 돌보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기에 앞서 우선 동료 단원들을 사랑해야 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다. 사람을 차별하는 행위는 레지오 단원으로서의 으뜸가는 자격 요건인 사랑의 정신이 빠져 있음을 보여 주는 증거이다. 레지오의 정신과 이상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강렬한 사랑과 동정심이다. 따라서 이러한 뜨거운 열기를 밖으로 내뿜으려면 우선 레지오 안에 있는 화로(火爐)에서부터 활활 타올라야 한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 35)
레지오 대열 안에서 단원들이 사랑을 실천하면, 이윽고 그 사랑은 널리 밖으로 옮겨져 많은 이들을 대상으로 퍼져 나가게 된다. 단원들 사이에 벌어진 틈을 사랑의 다리로 잇는 행위는 세상 사람들 사이에 벌어져 있는 수없이 많은 틈을 사랑으로 잇는 행위의 첫걸음이다.

3 다른 단체와의 관계

레지오는 교회의 선교 사명과 부합되는 목적으로 설립된 교회 단체의 일에 협조하고 지원하겠다는 정신을 갖추어야 한다.
레지오 단원이 되는 조건이 그리 쉽지가 않기 때문에 가톨릭 신자 모두를 레지오 대열에 참여시킬 수는 없지만, 모든 신자들이 어떤 형태로든 교회의 사업에 참여하도록 권장하는 일은 할 수 있다. 단원들은 사도직 활동이나 개별적 접촉을 통하여 이를 추진해야 한다. 다만 유의할 점은 다른 단체와 어떠한 협조 관계를 맺고 있든 간에 자신이 레지오 단원으로서 수행하는 활동 자체가 위축 받을 정도로 부담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어떤 단체에 어느 정도로 어떤 형태의 지원을 제공해야 하는가를 판단하는 올바른 분별력이 있어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교본 제39장 6절 ‘활동은 쁘레시디움이 주관한다’와 8절 ‘레지오 활동의 본질은 친밀한 관계를 이루는 것이다’를 참조하기 바란다.

4 교회 사목자에 대한 자세

레지오 단원은 교회의 사목자들을 영신적인 아버지이며 목자로서 공경해야 한다. 단원들은 사목자의 걱정거리를 나누어 짊어지고 기도와 적극적 활동을 통해서 도와야 하며, 사목자들이 어려움을 극복하고 직무를 한층 더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협조해야 한다.
교회의 사목자들은 하느님의 진리를 전하고 성사를 집행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그러므로 레지오 단원들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선물을 보관하고 있는 사목자들과 접촉하도록 힘써야 하며, 혹시 사목자와의 관계가 손상되어 있는 사람을 보게 되면 이를 회복시키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러한 활동은, 그 이유가 타당하든 타당하지 않든, 성직자와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을 돕는 특별히 필요한 활동이다.
중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은 의사의 진단을 받는 것을 매우 꺼려 하므로 때로는 배우자나 가족 또는 친구들이 레지오 단원을 도와 함께 나서도록 할 필요가 있다.
영신적으로 병들어 있을 때에는, 대개 주위에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어떠한 사랑으로 얼마만큼의 정성을 쏟느냐에 따라 크게 좌우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레지오는 사제와 영혼들 사이에서 그들을 도와 그들을 서로 연결시키는 일에 앞장 서며, 이를 위해 빈틈없이 모든 노력을 바친다. 이는 특출한 사랑의 발로이다. 레지오 단원들은 세례를 통하여 주님의 사업을 돕도록 불리었으며, 모두 착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인들이다.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로 말하고 천사의 말까지 한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울리는 징과 요란한 꽹과리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내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할 수 있다 하더라도, 온갖 신비를 환히 꿰뚫어 보고 모든 지식을 가졌다 하더라도, 산을 옮길 만한 완전한 믿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비록 모든 재산을 남에게 나누어 준다 하더라도, 또 내가 남을 위하여 불 속에 뛰어든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모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사욕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성을 내지 않습니다. 사랑은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를 보고 기뻐하지 아니하고 진리를 보고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사랑은 가실 줄을 모릅니다. 말씀을 받아 전하는 특권도 사라지고, 이상한 언어를 말하는 능력도 끊어지고, 지식도 사라질 것입니다.”(1 고린 13, 1-8)

부록 1: 역대 교황들께서 레지오 마리애에 보내 온 서한 및 메시지

교황 비오 11세 께서 레지오 마리애에 보내신 서한
1933년 9월 16일

“나는 이 아름답고 거룩한 사업을 펴고 있는 레지오 마리애에 특별한 축복을 보냅니다. ‘마리아의 군단’이라는 그 이름이 바로 모든 것을 말해 주며, 단기에 새겨진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의 모습이 높고 거룩한 일들을 수행하는 레지오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복되신 동정 성모님께서는 구세주의 어머니이시며 우리 모두의 어머니이십니다. 성모님께서는 십자가 아래서 우리의 어머니가 되셨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되도록 도와 주십니다. 올해는 교회가 성모님께서 구원의 협력자이시며 모든 인류의 어머니 되심을 선포한 지 100주년 되는 해입니다.

여러분이 이미 착수한 기도와 활동의 사도직을 더욱 성실히 수행하도록 여러분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여러분이 이 사도직 활동을 성실히 수행할 때, 하느님께서는 여러분도 또한 구원의 협력자로 삼으실 것입니다. 이것이 구세주께 감사를 드리는 가장 훌륭한 방법입니다.”

교황 비오 11세

교황 비오 12세 께서 레지오 마리애에 보내신 서한
1953년 7월 22일

아일랜드 더블린 시
레지오 마리애 꼰칠리움
프란치스 M. 더프 귀하

친애하는 더프 씨,

교황 성하의 분부에 따라, 약 30여 년 전 가톨릭의 옥토인 아일랜드에서 창설된 레지오 마리애에 축하와 격려의 말씀을 전하게 됨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성하께서는 자애로운 아버지의 사랑으로 오늘날 레지오가 온 세상에서 악의 세력과 싸우는 충성스럽고 강력한 성모님의 군대로 발전해 온 것을 지켜보셨으며, 이제 이 세상 어느 곳에서나 레지오의 깃발이 꽂혀 있는 것을 보시고 귀하와 더불어 기뻐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모님의 군사인 레지오 단원들이 그 동안 쌓아 올린 훌륭한 공적에 대해서 성하로부터 치하의 말씀을 듣게 됨은 마땅한 일일 것입니다. 아울러 이 치하의 말씀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께 모든 사람을 인도하는 성스러운 교회의 사명에 레지오 단원들이 더욱 열심히 협력하라는 격려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사도직에 대한 레지오 단원들의 기여도는 주로 단원들의 건전한 영적 수련 정도에 따라 평가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단원들이 영적 지도자의 현명한 지도를 받아 참된 사도직 정신을 튼튼히 하고, 수행하는 모든 활동을 통해 교황 성하의 가르침에 순응하며, 현지 교구장의 지시를 충성스럽게 따르는 모습이 드러나야 합니다. 레지오 단원들이 이처럼 참된 평신도 사도로서의 영신적 특성을 지니게 될 때, 그들은 성화된 용기를 지니고 어둠의 세력과 영적 싸움을 펴는 교회의 강력한 지원군 역할을 계속 수행하게 될 것입니다.

성하께서는 온 세계 레지오 단원들을 위하여 성모님의 전구를 기원하십니다. 또한 귀하와 모든 영적 지도자들, 그리고 모든 행동단원과 협조단원들에게 특별한 사랑의 표시로 교황 강복을 내리셨습니다.

경의와 믿음을 보내오며,

그리스도 안에서
<<친필 사인>>
교황청 국무장관 서리, J.B. 몬티니

교황 요한 23세 께서 레지오 마리애에 보내신 편지

온 세계의 레지오 마리애 간부들과 단원들에게, 아버지로서의 사랑을 표시하고, 또한 여러분이 수행하고 있는 보람찬 활동이 더욱 풍성한 영적 결실을 거두리라는 확신을 가지며 마음으로부터 특별한 교황 강복을 베풉니다.

바티칸에서 1960년 3월 19일

레지오 마리에는 가톨릭 교회의 참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프랑스 레지오 단원들에게, 1960년 7월 13일

<<친필 사인>>
교황 요한 23세

교황 바오로 6세 께서 레지오 마리애에 보내신 서한
1965년 1월 6일

레지오 마리애 꼰칠리움
프랭크 더프 단장 귀하

친애하는 더프 씨,

교황 성하께서는 귀하가 최근에 올린 충정 어린 서한을 읽으시고 매우 기뻐하며 만족해 하셨습니다. 성하께서는, 이 서한을 통해, 가톨릭의 나라 아일랜드의 신비로운 풍토에서 창설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각 대륙에 유익한 활동을 펼친 레지오 마리애에 치하와 격려의 말씀을 보내고자 하십니다.

성하께서는 레지오가 이 같은 치하를 마땅히 받아야 할 단체라고 생각하고 계십니다. 그 이유는, 레지오가 신심 깊은 목적을 지니고 수많은 사업을 매우 슬기롭게 창안하고 발전시켜, 가톨릭 사도직 활동에 크게 이바지하였고, 이로써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고 확장하는 데 놀라운 힘을 발휘하는 조직체임이 입증되었기 때문입니다.

성하께서는 전에 국무성에 봉직하고 계실 때, 귀하와 여러 차례 만났던 일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계십니다. 특히 그 당시 귀하와의 대화를 통해, 레지오 운동의 생명력과 활력의 비결인 레지오 정신에 대해서 완전히 이해했다고 말씀하십니다. 레지오 마리애의 정신은 단원들의 굳건한 내면 생활, 레지오의 규율, 이웃의 구원을 위한 헌신적 노력 및 교회에 대한 확고부동한 충성심으로부터 풍부한 영양분을 받고 성장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레지오 정신은 복되신 동정 성모님께서 맡고 계신 임무에 대한 확고한 신뢰를 바탕으로 삼고 있다는 점이 또 하나의 뚜렷한 특징입니다. 그리하여 레지오는 모든 단원들의 모범이시고 인도자 이시며 기쁨이시고 후원자이신 성모님을 모시고 온갖 훌륭한 활동을 수행합니다. 성모님은 이 세상에 그리스도를 모셔 와 인류를 위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에 밀접하게 협력하고 계시므로, 우리는 레지오를 통해서, 모든 사도직 활동이 성모님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격려와 감화를 받아야 하는가를 깨닫게 됩니다.

성하께서는 세계 곳곳에서, 특히 신앙이 침해 당하고 박해 받는 곳에서, 이미 많은 열성적인 사도들과 영웅적인 그리스도의 증거 자들을 길러 낸 레지오 정신을 크게 신뢰하고 계십니다.

성하께서는 레지오가 이미 이룩한 성과로 보아, 단원들의 정열과 사도직 노력은 줄어들지 않고 꾸준히 늘어가리라고 확신하고 계시며, 귀하와 동료 단원들에게 깊은 감사의 뜻을 전하십니다. 아울러 성하께서는 레지오 단원 모두가 항상 교회에 대하여 변함없는 사랑을 지니고 사도직을 수행하기 바라시며, 특히 주교들의 뜻에 따르고 다른 모든 가톨릭 단체들과 적극 협력하는 정신을 지니도록 간곡히 당부하십니다.

성하께서는 레지오의 모든 각급 단원들을 복되신 성모님의 자모적 보호에 맡기시며, 단장님을 비롯한 모든 레지오 단원들과 영적 지도자들, 그리고 레지오가 펴고 있는 모든 활동에 아버지로서의 특별한 교황 강복을 베푸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진심으로 경의를 표하면서

추기경 A. G. 차코냐니
<<친필 사인>>

부록 2: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LUMEN GENTIUM)발췌문

이 헌장은 반드시 내용 전체를 읽어야 한다. 그 이유는, 이 헌장이 그리스도 신비체에 대한 이해를 더욱 깊게 해 주며, 이로써 교회에 더욱 확실하고 웅장한 생명력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다음에 이 헌장 중 레지오의 본질에 특별히 관계되는 부분, 즉 성모님께서 신비체의 어머니라는 부분을 발췌하여 싣는다. 그러나 이 발췌 부분만으로 헌장의 모든 내용을 요약하고 있다고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이 헌장은 성모님을 새로운 배경 안에서 드러내 보인다. 성모님은 신비체 안에서 그리스도 다음으로 첫째가는 가장 존귀한 구성원이시다. 교회의 전체 구조가 바르게 균형이 잡히도록 하려면, 성모님을 교회와 떼어놓을 수 없는 한 부분으로 모셔야만 하는 것이다.

제 60 조 “하느님은 한 분뿐이시고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중재자도 한 분뿐이신데, 그분이 바로 사람으로 오셨던 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 그분은 자기 자신을 모든 사람을 위해 대속물로 바치셨습니다.”(1 디모 2, 5-6)라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대로 우리의 중재자는 한 분뿐이시다. 사람들에 대한 어머니로서의 마리아의 역할은 그리스도의 이 유일(唯一) 중재성을 흐리게 하거나 감소시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의 능력을 나타내는 것이다. 사실 인간 구원에 유익한 복되신 동정녀의 온갖 영향은 어떤 필연성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 호의에서 기인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넘치는 공로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중재 역할에 근거를 두고, 거기에 속하며 거기서 전적으로 힘을 얻는 것이다. 따라서 믿는 이들과 그리스도와의 직접 결합을 절대로 방해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도와 주는 것이다.

제 61 조 하느님의 말씀의 강생과 함께 하느님의 모친으로 예정된 복되신 동정녀는 하느님 섭리의 계획을 따라 세상에서 하느님이신 구세주의 좋은 어머니로서 남보다 각별히 친절한 주님의 동반자요 겸손한 종이셨다. 그리스도를 잉태하시고 낳으시고 성전에서 성부께 바치시고 십자가에서 운명하시는 그 아드님과 함께 수난하시며 순명과 믿음과 희망과 불타는 사랑으로써 영혼들의 초자연적 생명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온전히 독자적인 방법으로 구세주의 구세 사업을 도와 드리셨다. 이 때문에 마리아는 은총의 세계에서 우리의 어머니가 되셨다.

제 62 조 은총의 계획 안에서 마리아의 모성은 천사의 아룀을 듣고 충실히 동의하신 그 순간부터 – 이 동의는 십자가 밑에서도 망설임 없이 지속되었다 – 뽑힌 이들의 수가 찰 때까지 영구히 끊임없이 계속된다. 하늘에 올림을 받으신 후에도, 이 구원의 역할을 그치지 않으시고 계속하여 여러 가지 당신 전구로써 영원한 구원의 은혜를 우리에게 얻어 주신다. 당신 모성애로써 당신 아드님의 형제들이 지상 여정에서 위험과 고통 중에 있는 것을 돌보시어 복된 고향으로 인도해 주신다. 그 때문에 교회에서는 복되신 동정녀를 변호자, 보조자, 협조자, 중재자라는 명칭으로 부른다. 그러나 이것은 유일한 중재자 그리스도의 지위와 효능을 조금도 감하지도 가하지도 않는다는 의미로 알아들어야 한다.

제 65 조 교회는 복되신 동정녀로 말미암아 이미 완덕에 도달하여 티나 주름이 없는 교회가 되었지만(에페 5, 27), 그리스도 신자들은 아직도 죄를 극복하고 성덕에 자라도록 더욱 노력한다. 따라서 신자들은 뽑힌 이들 공동체 전체에서 덕행의 모델로 빛나고 계신 마리아를 바라본다. 교회는 자녀다운 효심으로 마리아를 생각하고, 사람이 되신 말씀(성자)의 빛을 받아 마리아를 직관하며, 위대한 강생의 신비를 경건하게 파고 듦으로써 신랑이신 그리스도를 보다 완전히 닮아 가는 것이다. 과연 마리아는 구원의 역사 속에 깊이 참여하시므로 신앙의 최대 요소들을 어떤 의미로 자신 안에서 종합하여 반영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마리아를 알리고 공경할 때 마리아는 당신 아들과 아들의 희생과 성부의 사랑에로 우리들을 부르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추구하는 교회는 계속적으로 신앙과 희망과 사랑에 진보하여 만사에 하느님의 뜻을 찾아 따름으로써 그 탁월한 전형인 마리아와 비슷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 사도직 활동에 있어서도 그리스도를 낳으신 마리아를 바라보며, 바로 성령으로 잉태되시어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신 그분이 교회를 통하여 신자들 마음속에도 탄생하시어 성장하시기를 바라는 것이다. 과연 마리아는 그 생애를 통하여 교회의 사도적 사명으로 사람들을 재생시키는 데에 협력하는 모든 이가 지녀야 할 모성애의 모범이 되셨다.

“마리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