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eld of dreams, trancending time & place, autobio in progress..

 

 

루르드의 기적

폴 글린 지음

Paul Glynn

Healing Fire from Frozen Earth

(c) 1999 by Paul Glynn

Originally published by Marist Fathers Books, Austrailia

 

 

 

서문

 

삶의 궁극적 물음에 답을 얻기 위해 고민하는 여느 젊은이들처럼 나 또한 젊은 시절에 하느님의 존재와 ‘선하심’에 의문을 품고 고민한 적이 있었다. 폴 글린 신부의 부탁으로 이 서문을 쓰게 된 것을 큰 영광으로 생각한다. 글린 신부는 내가 항상 감탄하는 좋은 벗이기도 하지만 하느님에 대한 진지한 물음을 가지고 고민한 그의 경험담에 크게 공감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밤늦게까지 잠들지 못하게 한다. 나는 이 책의 원고를 들고 며칠간 계속된 회의에 참석했다. 회의 기간 내낸 더 이상 눈을 뜰 수 없을 때까지 매일 밤 원고를 읽었다. 나는 이미 폴 글린 신부의 저술을 통해 화해와 시편에 대하여 많은 것을 배웠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상처 입고 고통 받는 이 땅의 가장 가엾은 사람들을 치유하시는 하느님을 향해 내 마음과 영혼을 새롭게 열도록 도와주었다.

그는 의심과 마음의 고통, 외로움 때문에 결혼생활의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마음을 포기하거나 자살을 생각했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이 책에 담았다. 그는 마음의 평화와 희망을 잃어가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서적을 통한 조사와 연구에 만족하지 않고 1997년 프랑스, 폴란드, 포르투갈, 영국, 아일랜드, 멕시코 등 치유 기적이 보고 된 세계적으로 유명한 성지에서 3개월을 보냈다.

그리고 글린 신부는 기적적으로 치유 받은 사람들을 직접 만나 인터뷰했다. 내용을 보면 마치 내가 그들을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것처럼 매우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그는 그들의 가족과 친척, 의사들 그리고 교회 관계자들까지 만나보았다. 원고의 내용과 자료에 얼마나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기울였는지, 그는 한밤중에도 벌떡 일어나 원고와 씨름하며 고뇌했다. 그의 친구인 정신과 의사는 이런 말로 그를 위로했다고 한다.

“그렇다니 다행이군! 만은 사람에게 삶과 죽음에 관한 문제를 얘기하는데 그 정도도 고심하지 않는다면 그게 더 문제 아니겠어.”

 

폴 글린 신부님, 분명히 말하건대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은 많은 것을 얻을 것입니다. 스스로 불가지론자나 무신론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자신들의 불신에 대하여 다시 생각하게 될 것이고, 신앙인들은 그 신앙이 더욱 굳어질 것입니다. 벌써 혼란과 절망에 빠진 이들이 새로운 길을 찾고 있는 모습이 보이는 듯합니다. 신부님이 이 책을 통해 전하는 하느님은 ‘정말로 실재’하시며 성모 마리아는 진정 사랑 가득한 어머니요, 벗임을 새삼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폴 글린 신부의 책들은 하느님을 찾는 이들을 좀더 하느님께 가까이 인도하기 위해 쓰여졌다. 그의 책을 판매한 모든 수익금(50여 만 달러)은 제3세계 빈곤층을 돕는 데 사용되었다.  그 이후에도 1만5천 달러를 호주의 성빈센트뽈회 사업에 기부했으며 이 책의 수익금 또한 가난한 이들을 돕는 데 쓰여질 것이다.

 

데이비드 크레민 주교

 

 

 

 

차례

 

서문

머리말

  1. 마리 커스레이크 – 웨스트 박사의 억지 반론
  2. 마리온 캐럴 – 1989년 9월 3일 일요일, 낙크
  3. 데이비드 파크스 – 크론병, 그리고 파경 위기를 넘긴 이야기
  4. 파타 클라크 – ‘성모님, 귀 기울이지 않고 계시군요’
  5. 존 트레이노어 – 칼리폴리, 리버풀 그리고 루르드
  6. 리오 수사 – 사고뭉치 스위스인
  7. 세르지 페랭 – ‘죽는 법을 배우러 갔습니다’
  8. 알렉시스 카렐 박사 – 하느님을 찾아 나선 노벨상 수상자
  9. 어린아이들의 치유 사례
  10. 유태인 증언과 파스칼
  11. 잔 프레텔 – ‘가엾은 것, 죽고 말았어!’
  12. 피레르 드 러더 – 세인의 입에 가장 많이 오르내린 치유 사례
  13. 가브리엘 가르검 – 시체가 걷다
  14. 에밀 졸라의 ‘불쾌한 고뇌’
  15. 에밀 졸라가 꾸며낸 이야기 – 세 명의 가공인물
  16. 파티마 1917 – 태양의 기적
  17. 죄는 어찌 되었는가?
  18. 얼어붙은 땅에서 치유의 불길이

덧붙이는 글

 

 

 

머리말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유태인 그 선택된 백성은 수 차례 전쟁과 침략과 박해를 받았다. 많은 이들이 강제 추방, 강제 이주를 당했다. 그럼에도 그들이 믿음을 지키고 국가의 정체성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성지 순례를 반복하여 실천했기 때문이다. 시편 150편 중 15편은 ‘순례자의 노래’다. 이 시편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순례길에 노래한 것들이다. 시온 또는 거룩한 도시로 가는 길은 여럿 있었다. 이집트, 에티오피아, 비빌론, 시리아, 그리스 또는 로마에서 오는 길, 잘 닦인 길, 울퉁불퉁한 길, 사막길도 있었다. 오늘날 새 예루살렘 – 사랑이신 하느님에 대한 믿음 – 의 외곽까지 난 길은 아주 많다. 이 책은 단지 많은 길들 중 하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 길은 나의 순례길에 도움을 주었다. 그 길이 다른 이들에게도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세상만사가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을 때, 전능하고 사랑 가득하신 하느님을 믿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누구나 보편적으로 겪는 일은 아니지만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였다.  신문과 잡지는 아우슈비츠, 다카오, 드레스덴, 나가사키 등 전쟁포로 수용소에 대한 끔직한 기사와 사진이 실렸다. 폴란드, 헝가리, 발트해 주변국을 점령하고 있던 붉은 군대의 만행에 대한 기사도 있었다. 또 시베리아와 중국의 강제노동 수용소와 정치범 수용소에 관한 이야기도 들려왔다. 하느님은 더 이상 이 세상을 주관하시지 않는 게 아닐까, 아니면 그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과연 애초부터 존재하셨을까?

평소에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선하신 하느님’에 대해 나름대로 의문을 갖고 있었다. 여기서 그에 대한 간략하게나마 돌아보고자 한다. 무의식중에라도 믿음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독자들은 내 이야기에 공감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네 살 때 어머니를 잃었다. 어머니에 대한 유일한 기억은 어머니의 시신이다. 당시 열네 살이던 큰누이 에일린이 관 속에 누워계신 어머니에게 작별 키스를 할 수 있도록 나를 안아 올려 주었다. 나는 어머니가 왜 다시 내게 뽀뽀를 해주지 않는지, 어머니 볼이 왜 그리 차가운지 의아해했다. 그 후 수년간 무서워서 관이 놓여 있던 현관 입구의 방 쪽으로는 가지 않으려 했다. 당시에는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었지만 그곳은 마치 모든 것을 빨아들일 듯한 내 작은 우주 속의 블랙홀 같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우리와 매우 가깝게 지내던 막내이모 몰리가 약혼 반지를 빼버리고 우리와 함께 생활하기 시작했다. 우리 형제는 네 살부터 열여덟 살까지 모두 일곱 명이었다. 막내이모는 진짜 어머니 같았다. 그리고 우리는 이모를 무척 사랑했다. 이모의 약혼자는 다른 여자와 결혼했다.

다시 한번 비극이 찾아왔다. 최소한 나에게는 비극이었다. 내가 열한 살이던 1940년 어느 금요일 밤이었다. 큰누나와 형들은 외출을 했거나 기숙학교로 떠나고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몰리 이모는 내게 맛있는 저녁을 지어주었다. 그때 이모가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내일 너희 아버지가 새어머니를 데려오실 거야.” 그때의 충격은 아직도 내 기억에 생생하다. 이모는 다음날 아침 일찍 우리 집을 떠났고, 이후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다. 아버지는 내가 한번도 본 적 없는 새어머니와 함께 집에 오셨다. 그녀는 좋은 성품을 가졌고 외로워하던 아버지는 다시 행복해졌다. 하지만 내게는 단지 침입자에 불과했다. 그녀가 몰리 이모를 우리 집에서 내쫓은 것과 다름없었고 이모가 들려주던 우리 어머니, 니나 로즈에 대한 아름다운 이야기를 더 이상 들을 수 없게 되었다.

우리 가정은 독실한 가톨릭 집안이었고, 나는 가족을 따라 신자의 의무를 다하며 생활했다. 하지만 의혹의 씨앗은 이미 내 마음속에 뿌려졌다. 하느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면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하셨을까? 몰리 이모가 떠난 후 첫 성탄절 때가 기억난다. 우리 가족은 본디 해안으로 휴가를 떠났다. 태양이 먹구름에 가려 날은 매우 흐렸고 차가운 폭풍우가 몰려오고 있었다. 나는 해변 한쪽의 바위틈에 몸을 숨기고 앉아 있었다. 혼자 버려진 느낌이었다. 바위에 세차게 부딪치는 물보라 위로 서로를 애타게 부르며 날고 있는 갈매기들의 울음소리가 마음에 와 닿았다. 우리는 때로 그런 외로움의 순간에 삶과 삶을 주관하시는 분의 선한 의지에 대해 의혹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그런 순간에 또 다른 것을 느끼기도 한다. 옥스퍼드 대학의 정신과 교수였던 앤소니 스토르 박사는 ‘고독 Solitude‘ 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소외감을 동반하는 외로운 감정은 영혼의 깊은 곳을 들여다 보고 ‘피상적인 것을 너머… 우주 안에서 삶의 의미를 찾도록’ 이끌어 준다.”

나를 돌봐주는 전능하신 하느님에 대한 의심은 차츰 성서 (특히 복음서에 대한)에 대한 의심으로 옮아갔다. 성탄절이면 아이들을 즐겁게 해주는 사람이 되신 하느님 이야기, 그리고 유다와 갈릴래아를 돌아다니며 죄를 용서하고 병든 이들을 치유하시며 사랑의 순교자로 죽었지만 무덤에서 부활하여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신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 이 이야기들은 매우 아름답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사실일까? 그 일은 2천 년 전에 일어난 일이다. 어쩌면 이 이야기는 우는 어린이들에게 들려주는 동화처럼 인간의 마음속에 잇는 슬픔과 두려움을 덜어주기 위해 가슴 따뜻한 사람들이 여러 이야기를 짜맞춰 지어낸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편 육체적 질병이 즉각 치유되었다는 복음서의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하느님은 실재하시는 분이며 인간이 느끼는 희로애락보다도 더욱 분명하다. 만일 복음서의 치유 이야기와 부활 사화가 사실이라면 복음서는 피땀 흘리며 고통으로 힘겨워하는 사람들에게 정말로 기쁜 소식일 것이다. 나는 후자를 믿고 싶지만 확신할 수 없었다. 마치 꿈속에서 팔다리가 떨어지지 않아 움직이지 못하는, 그런 답답한 기분이었다.

그러던 중 루르드의 놀라운 치유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나는 그것을 조사해 보기로 마음먹고 관련 서적들을 읽기 시작했다. 책을 읽으면서 허점을 찾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했다. 혹시 증인들의 증언에 허점은 없는가? 그리고 치유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이나 모순된 점은 없는가? 하지만 치유 이야기들은 차츰 부정할 수 없는 사실로 다가왔다.

당시 나는 다른 책들도 읽고 있었는데, 어떤 철할 책에는 자신의 생각 외에는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철학자들의 논지가 담겨 있었다. 마치 잠자고 있는 동안 꿈속에서 등장인물이나 사건, 심지어는 자신의 정체성마저 마음대로 만들어 내듯, 어떠면 우리 몸을 포함하여 주변의 실재들은 우리가 만들어 낸 것이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비록 철학 교수들이 내세운 가설이지만 나는 그것을 부정하기로 했다. 모든 것을 통째로 문제 삼는 이런 식의 의심은 상식에 어긋난다는 확신이 들었다. 나는 실제로 존재한다. 그리고 나의 가족과 친구들도 실제로 존재한다. 우리의 정신은 진리를 분별할 수 있고, 우리의 감각과 상식은 실재를 경험하게 한다.

루르드에서 암이나 결핵 같은 질병들이 실제로 치유되고 있음을 차츰 확신하게 되었다. 그 확신은 내게 하느님과 그리스도가 실재하며 그분들은 분명 우리의 기도에 귀 기울이고 관심을 보이신다는 것을 의미했다. 루르드의 예언자 벨라뎃다 소비루가 받은 메시지 중의 하나는 우리의 삶이 종점이 아니라 하나의 여정이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긴 여정이 그렇듯 인생도 때로는 고통스럽지만 궁극에는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 안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이 여정 중에 겪는 모든 고생과 눈물과 고통을 가치 있게 만들어 준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만큼 뒤죽박죽이고 엉망이다. 뉴스는 폭력으로 가득하다. 발칸 반도의 인종 청소, 아프리카의 대학살, 약물 과용으로 인한 희생자들, 어린 시절에 학대 받은 원주민들의 가슴 아픈 이야기, 50퍼센트에 육박하는 이혼율과 어린 자녀들의 고통, 청소년들의 자살…

많은 사람들이 결혼생활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고 의심과 고통과 외로움만 경험하기에 가정을 지키려는 노력을 포기하거나 자살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마음의 평화와 희망을 잃어버린 상처 입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려고 이 책을 썼다. 자료를 준비하기 위해 1997년 3개월간 치유의 기적이 일어난 성지에 머물렀다. 프랑스의 루르드와 루두박, 포르투갈의 파티마, 폴란드의 체스터코바, 영국의 훨싱햄, 아일랜드의 낙크, 그리고 멕시코의 과달루페. 나는 이곳에서 강한 연대감과 사랑을 느꼈으며 관계자들의 아낌없는 협조를 받았다. 시드니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성지 관련 서적과 보완 자료들을 조사 수집해서 호주로 돌아왔다. 나는 진실을 찾고 있지만 깊이 연구 조사할 시간이나 방법이 없는 보통 사람을 위해 이 책을 기획하게 되었다.

몇 년 전 이집트 첼리아에서 죽은 (399년) 그리스인 수사 본투스의 에바그리오가 쓴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는 당시는 물론이고 이후에도 그리스도교 영성에 깊은 영향을 미친 사람이었다. 현명한 가르침과 날카로운 경고가 들어 있는 문장은 바로 이것이다. “탁월한 신학자는 진실한 기도를 하는 사람이다.” 하느님과 초자연에 대해 알고자 하거나 그에 관해 다른 이들을 가르치고자 한다면 먼저 자신이 진실한 기도를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성 아우구스티노도 그가 살던 4~5세기뿐만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그리스도교 사상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그는 열심히 노력하지만 방향이 잘못된 사람들에 관하여 글을 쓴 적이 있다. 또한 반성 없이 영적 오아시스를 향해 서둘러 들어가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경고했다. 그들은 결국 그 물을 혼탁하게 할 뿐이다. 이 책이 누군가에게 진정한 도움이 되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않으려 노력했다.

이 책을 쓰면서 자주 한밤중에 벌떡 일어나 원고 내용에 대해 고민한다고 정신과 의사인 친구에게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가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니 다행이군! 자네가 적정하지 않는다면 그게 더 문제 아니겠어. 자네는 지금 매우 중요한 문제들을 다루고 있네. 그야말로 절망에 빠진 많은 사람들이 삶이냐 죽음이냐를 결정하는 데 영향을 줄 수 있는 문제인데, 그렇게 고심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게 더 걱정스러운 일이지. 나는 자네가 하느님과 믿음 그리고 우리의 초자연적 운명에 관해 경솔하고 태평스럽게 피상적으로 쓰지는 않을 거라 믿네.”

그의 말은 내게 큰 위안이 되었다. 그는 찾아오는 많은 환자들에게 헌신적이며 현명하고 가슴 따뜻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때로 동그란 머리통을 나무에 기대며 한숨짓는 우스운 소년처럼 나 또한 결코 완벽한 사람이 아니다. 찰리 브라운처럼 여전히 내 연줄은 나뭇가지에 걸리고, 야구할 때도 공을 놓치기 일쑤이며, 많은 루시들에게 눈총을 받는다. 하지만 내가 쓰고 있는 내용이 사실이라면, 하느님이 실재하시며 우리를 하나하나 사랑하고 계시다면, 그리고 삶은 그분이 계신 본향으로 이끄는 하나의 여정이라면, 그렇다면 나뭇가지에 걸린 연이나 놓친 공 그리고 루시한테 듣는 비난은 아무것도 아니다. 아유슈비츠의 생존자 빅터 프랭클 박사가 이런 말을 자주했다. “그대에게 살아갈 이유가 있다면 온갖 고통도 참아낼 수 있다.” 또 이런 말도 했다. “그대는 삶의 의미를 만들어 내지 말라. 삶의 의미는 바로 거기에 있다. 찾아라!”

 

자크 마리탱은 20세기의 위대한 사상가다. 그는 철학, 예술, 사회학, 정치학에 관한 책과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찾는 길에 관한 많은 책을 저술했다. 60권 이상의 저서는 독자들에게 널리 읽혀졌다. 그가 소르본 대학에서 공부할 무렵에는 어린 시절부터 가지고 있던 그리스도교 신앙을 잃은 상태였다. 그는 대학에서 라이사 우만소프라는 여학생을 만났다. 그녀는 모국에서 일고 있는 반유다주의 운동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족과 함께 프랑스로 이민 온 러시아계 유태인이었다. 그녀 또한 어린 시절 간직했던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당시 소르본 대학 교수들은 “과학만으로도 현대인들의 마음과 영혼을 괴롭히고 있는 문제에 대해 답할 수 있다”는 믿음을 공개적으로 지지하고 있었다.

청년 자크와 라이사는 그에 대해 매우 불만스러워하며 자신들의 미래와 유럽의 미래에 대해 함께 진지하게 논의했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게 되었지만 그토록 고통스럽고 혼란한 이 세상에 아이를 태어나게 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했다. 두 사람은 베르그송의 강의를 듣기로 했다. 베르그송은 과학을 숭배하던 시류에 반대하는 지성인의 리더였다. 베르그송은 두 사람에게 무언가 더 깊은 것, 절대자를 찾으라고 격려했다.

그들은 1904년에 결혼했다. 그리고 프랑스 소설가 레옹 브료이를 만났다. 그는 젊은 시절 그리스도를 새롭게 발견한 사람으로, 베르그송이 말한 철학적 절대자를 인격적 하느님으로 재발견하려는 자크와 라이사의 노력에 도움을 주었다. 1906년에 자크 마리탱은 세례를 받았다. 두 사람은 60여 년 동안 함께 또는 각자의 이름으로 왕성한 집필 활동을 했다. 그들은 과학과 물질주의적 진보에 대한 맹신이 초래한 불행에 대해 경고했다. 이후 일어난 두 번의 세계대전은 그들의 경고가 옳았음을 증명했다. 자크 마리탱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로버트 케네디가 가장 즐겨 인용한 구절이다. 만일 마릴린 몬로와의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그에게 별 영향을 미치지 못했겠지만.)

“하느님을 버릴 만큼 교만해진 인간은 자기 영혼의 끈을 놓쳤다. 그는 헛되이 자신을 찾고, 자신을 찾으려 애쓰는 동안 우주를 거꾸로 뒤집어놓는다. 그는 가면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 가면 뒤에서 죽음을 발견한다.”

이는 교황 바오로 2세가 “죽음의 문화”라고 표현한 현대 사회와 꼭 닮지 않았는가?

너무 현학적 衒學的 으로 흐른 것 같다. 18세기 계몽주의 시대 이후 ‘구원하는’ 이론들이 너무 많았다. 그로 인해 현대인들, 특히 젊은 세대는 수많은 이론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이데올로기 장사꾼들에게 여러 번 사기를 당한 경험이 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실존 인물에 관한 이야기를 좋아한다. 이 책에는 즉각적인 질병 치유를 경험한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전반부에 소개한 사람들을 직접 만났다. 그 외에도 모두 실존 인물들로서 루르드 의무국의 문서 보관실에 있는 서류에서 발견한 사례들이다.

1885년 루르드 의무국이 설립된 이후 의사들은 의학적으로 불가해한 수많은 치유 사례의 과학적 자료를 신중하게 수집하여 보관해 왔다. 이에 대해서는 본문에서 자세히 다루겠다. 이 기적 치유들은 나를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께서 요한복음 5장 17절에서 하신 말씀이 증거가 된다. “내 아버지께서 언제나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요한 복음사가는 예수께서 병자들을 치유하시는 이야기를 전하면서 ‘기적’ 대신 ‘징표’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징표’는 증거가 아닐 뿐만 아니라 목적도 아니다. 그것은 갈 길을 알려줄 뿐이다. 뉴먼 추기경뿐 아니라 다른 훌륭한 분들이 말했듯이 그것을 징표라 부르든 기적이라 부르든 믿음으로 ‘강요’하지는 못한다. 믿음은 사랑과 마찬가지로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이다. 징표는 2+2=4 라는 수학적 진리처럼 부정의 여지없이 자명한 것은 아니다. 누구나 믿음을, 사랑을, 양심을 또는 온갖 도덕적 가치들을 거부할 힘을 가지고 있다.

 

본문에서 다루게 되겠지만, 후에 노벨 의학상을 받은 알렉시스 카렐은  루르드에서 심각한 질병의 치유 사례를 목격하고 이를 증언했다. 그 중 한 사례에 관해서는 책까지 썼는데, 그 치유 사례를 의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음을 자세히 소개했다. 그가 루르드의 기적들을 창조주의 역사하심으로 즉시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그는 수년간 아무 결론에 도달하지 못한 채 ‘안일하고 속 편한 불가지론의 영역’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그는 기도하기 시작했고 하느님한테서 신앙의 은총을 받았다. <리더스 다이제스트> 1941년 4월호 논평에서는 기도가 가져오는 “회복하는 힘… 기운, 생기, 정신적 지구력… 그리고 정신적 안정… 인간관계의 바탕을 이루는 실재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와 도의심” 등에 대해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기도를 통해 힘을 얻는다. 우리는 기도를 단순한 탄원이 아니라 좀더 그리스도를 닮기 위한 청원으로서… “라는 논평이 이어졌다. 그가 깨달은 이것이야말로 참된 기도다.

 

나는 오직 한 가지 목적으로 이 책을 쓴다. 하느님을 찾기 위한 여정에 오른 이들을 돕기 위해 그리고 사랑 안에서 그분께 더 가까이 가도록 돕기 위해. 독자 여러분이 그러한 여정에 매력을 느낀다면 이 책을 읽으면서 기도도 병행하기 바란다. 하느님의 존재에 대해 확신을 갖지 못했다 하더라도 기도할 수 있다. 일본 나가사키 의과대학의 나가이 박사는 무신론자였다. 그는 파스칼의 <팡세>와 자신이 만나본 몇몇 일본인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받고 일종의 실험으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물론 대학 연구소에서 하던 실험과 같은 의미의 실험은 아니었다. 그는 기도와 연구를 통해 하느님의 지속적인 현존을 체험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가사키 원폭 이후의 끔찍한 날들에 대하여 이렇게 썼다. “하느님께서 생존자들과 함께 나가사키라는 사막 – 원폭으로 사막이 된 – 을 걸으셨다.” 하느님께서 원폭 피해자들이 겪고 있는 고통에 대해 답을 주지는 않으셨으나, 나가이 박사에게 엄청난 용기와 힘과 마음의 평온을 찾아주셨다. 나가이 박사는, 사랑하는 아내 미도리가 새까맣게 타 죽은 채 발견된 자리에 작은 움집을 짓고 살았다. 이 ‘나가사키’의 성자를 만나기 위해 전후 일본의 ‘어둠의 계곡’을 지나 전역에서 사람들이 찾아왔다. 그의 깊은 사랑과 평온을 통해 사람들은 희망과 평화를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경험한 루르드의 기적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는데, 원폭으로 입은 치명적 상처가 의학적으로 불가해한 방법에 의해 즉각 치유되었다고 했다. 1945년 9월 8일의 일이었다. 그날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 성탄 축일로 그의 장모가 루르드 성소 –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가 나가사키에 지은 – 에서 떠온 물로 나가이의 입술에 십자를 그었을 뿐이었다.

 

 

 

1. 마리 커스레이크

웨스트 박사의 억지 반론

Marie Kerslake – And Dr. West’s Bitter Pills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여러 저서와 시집을 남긴 힐레어 벨록1의 인기는 지금도 여전하다. 그는 ‘뱃속의 불덩이’를 가지고 있다고 할 정도로 정열적인 사람이었다. 벨록은 가톨릭 집안에서 성장했으나 옥스퍼드 대학 밸리올 칼리지에서 고전을 공부하던 1893년, 복음서에 대한 믿음에 회의를 갖게 되었다. 그는 불가지론(不可知論)2과 ‘회의론의 지적 만족감’에 매력을 느꼈다. 한동안 신앙을 잃었으며 공개토론에서 회의론자들의 의견에 공감을 표명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1902년 비로소 신앙심을 회복하게 되었다. 이때 <로마로 가는 길 The Path to Rome> 이 출간되어 대단한 호응을 얻었다. 그는 1914년 요하네스 요르겐센 의 <루르드>라는 책의 서문을 쓰게 되었는데, 그때 자신의 의미심장한 발견에 대해 진술했다. “1904년 부활적에… 나는 루르드에서 신비로운 힘을 발견했다. 성모님은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계시다.” 그리고 루르드의 기적들을 “무지하고 순박한 사람들의 격앙된 감정의 결과일 뿐”이라고 치부한 어느 유력지 논평을 언급하면서, 의구심을 가진 이들에게 “직접 루르드로 가서 그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치유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라”고 권유했다. 그런 다음 “그것은 오늘날 경험할 수 있는 가장 강렬하고 뜻 깊은 경험이다” 라고 끝맺음 했다. 루르드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회복하게 된 많은 무신론자와 불가지론자 그리고 냉담자들은 이 진술이 전혀 과장이 아님을 알고 있다.

벨록과 아내 엘로디는 자녀들을 루르드로 데려갔다. 당시 열여섯 살이던 딸 엘레노어 는 그곳에서 치유의 기적을 목격했다. 그 놀라운 경험에 이어 루르드에 관한 책을 읽은 엘레노어는 깊은 인상을 받아, 후에 가톨릭 신자가 아닌 신랑 레지날드 제브를 설득하여 루르드로 신혼여행을 갔다. 그리고 아들 필립은 분도회 수사가 되어 다운사이드 대수도원에 들어갔으며, 내가 1997년 8월에 그곳을 방문했을 때는 부원장이 되어 있었다. “기적에 대해 조사하신다구요?” 그가 말했다. “그렇다면 이 길을 따라 몇 마일 내려가서 마리 커스레이크를 만나보시지요.” 나는 세계적으로 명망이 높은 신학자 세바스찬 무어 (다운사이드 대수도원 소속 분도회 수사)의 안내를 받아 그녀를 만나러 갔다.

마리 커스레이크 는 서머싯 프롬에 살고 있었다. 그녀는 친절했고 솔직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전혀 주저함이 없었으며, 재치 있고 매력적이었으며 유머 감각이 있었다. 이것은 수년 전 그녀가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었을 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었으리라. 그녀는 일곱 자녀를 둔 행복한 엄마요 아내였다. 그리고 테니스와 골프도 열심히 하는 활동적인 여성이었다. 그런데 1962년, 그녀에게 재앙이 닥쳐왔다. 처음에는 무릎 관절에 극심한 고통을 느끼기 시작하다가 점점 다리를 움직이기 어렵게 되었다. 가족 주치의 J. D. 콜로란 박사는 류머티스 관절염이라는 진단을 내리고 최신 의술로 치료를 시작했다. 그러나 상태는 악화되었고, 콜로란 박사는 근처 바스시에 있는 류머티즘 전문 병원인 왕립병원의 코쉬 박사에게 그녀를 보냈다. 코쉬 박사는 퇴행성 골(骨) 관절염이라는 진단을 내리고 전문적인 치료를 시작했다. 여러 가지 경구용 약과 함께 스테로이드제를 관절에 직접 주사하는 치료가 병행되었다. 그런데도 통증은 더욱 심해졌고, 관절은 점점 더 경직되어 갔다.

1977년에는 심장마비까지 일으키게 되었다. 콜로란 박사는 그녀를 가이 병원 심장 연구 센터에 입원시켰다. 심전도 검사(ECG)에서 그녀의 심장이 광범위하게 손상되었음이 나타났다. 콜로란 박사의 증언에 의하면, 심장 전문의들은 매우 부정적 소견을 보였다고 한다. “나는 그녀의 앞날에 관해 매우 비관적인 보고를 받았으며… 그로부터 두 달 후 그녀는 가슴 한가운데 극심한 통증을 호소했습니다.”

그러던 중 다운사이드 학교에 다니던 그녀의 아들에게서 벨록의 외손자 필립 제브 수사가 이끄는 루르드 성지 순례단에 관해 듣게 되었다. 다운사이드의 수사들은 대수도원 부속학교 출신들의 도움을 받아 런던의 노숙자들을 위한 무료 급식소와 장애 어린이들을 위한 여름 캠프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리고 환자들을 루르드까지 안내하는 순례단도 이끌고 있었다. 환자들은 ‘점뷸런스(Jumbulance)’ 라고 부르는 대형차량으로 이송했는데, 한 대에 12개의 침상과 28명의 자원봉사자를 수용할 수 있었다.

마리 커스레이크는 1978년 7월 순례단과 함께 점뷸런스를 타고 루르드로 향했다. 콜로란 박사는 당시 그녀의 모습을 이렇게 말했다. “매우 안쓰러운 모습이었습니다. 병이 그대로 진행된다면 1979년에는 전혀 움직일 수 없는 처지가 될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녀는 휠체어 위에서 생활하고 있었으며, 온몸의 관절과 척추의 극심한 통증 때문에 목 보호대를 착용해야 했습니다.”

 그녀와 함께 순례에 나섰던 톰 클리포드 – 지금은 클리포드 경(卿) – 는 영국의 정치적 격동기에도 가톨릭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던 귀족 가문의 후손이다. 다운사이드 출신인 그는 불의의 교통사고로 시력의 90퍼센트를 잃었다. 그는 마리 커스레이크와 한 조가 되어 그녀의 휠체어를 밀어주었고, 마리는 그의 눈이 되어주었다.

그들은 마침내 루르드에 도착했다. 마리는 자신의 치유를 위해서는 단 한 번도 기도하지 않았다. 그녀의 관심은 오로지 두 명의 동료 순례자들에게 집중되어 있었는데, 신경 근육 질환으로 고통 받고 있는 간호사 출신의 페기 힉스와 말기암 환자로 루르드에서 생을 마감하고자 순례에 나선 모니카 였다.

여러 번의 미사 참례와 행렬 그리고 기도 등 환자들에게는 매우 고된 일정이 계속되었다. 필립 제브 수사는 며칠 후 순례단을 이끌고 루르드 남쪽의 아름다운 피레네 산맥으로 소풍을 가기로 마음먹었다. 순례단은 미사를 드리기 위해 가바르니의 한 성당에 들렀다. 그곳은 프랑스에서 스페인의 콤포스텔라 까지 도보로 여행하는 순례자들을 위해 말타의 옛 기사들이 지은 성당이었다. 마리 커스레이크는 성당 앞의 안내판을 감탄하며 바라보았다. ‘콤포스텔라 까지 911킬로미터’. 그날은 1978년 7월 26일, 마리 커스레이크의 기억 속에 영원히 새겨진 날이다.

미사가 시작되었다. 마리는 휠체어에 앉아 있었고, 톰 클리포드는 그녀와 가까운 자리에 있었다. 성찬 전례 때 사제가 성체를 받들어 교우들에게 보여주었다. 그때 마리는 자신이 무슨 행동을 하는지 의식하지 못한 채 휠체어에서 몸을 일으켜 바닥에 무릎을 꿇고 성체를 향해 절했다. 흐릿하게나마 그녀의 모습을 본 톰은 걱정스러운 마음에 그녀를 말리려고 애썼다. “하지만 저는 무릎을 꿇어야만 했습니다.” 그녀가 내게 말했다. “그리고 미사가 끝난 후에 일어서서 톰에게 말했지요. ‘당신이 나를 볼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톰, 나는 걷고 있어요! 톰, 난 걸을 수 있다구요!’ 우리는 나란히 줄을 지어 성당을 빠져 나왔는데, 밖으로 나오자 손가락 관절이 부드러워진 것을 느꼈답니다. 너무 기쁜 나머지 저는 길가의 풀을 뜯으며 잊고 있던 손의 감촉과 자유로운 움직임을 만끽했지요.

저는 성당으로 다시 들어가 필립 신부님에게 말했어요. ‘보세요, 신부님, 저 이제 걸울 수 있어요.’ 그전까지는 목발에 몸을 의지해서 한 번 움직이려면 뻣뻣한 무릎으로 한 다리씩 차례로 빙 돌려가며 천천히 움직일 수밖에 없었답니다. 신부님은 제가 목발과 휠체어를 거부하자 갑자기 무리하여 크게 다치지 않을까 걱정했습니다. 중증환자인 제가 남편이나 가족, 어떤 보호자도 없이 순례 대열에 참여했으니 신부님은 책임감을 느꼈을 겁니다. 신부님은 걷는 것이 무리가 될까 봐 휠체어에 앉도록 당부했지요. 저는 그대로 따랐고 우리 일행은 버스를 타고 계속 구경을 했습니다.

저녁 행렬 예식 전에 저는 필립 신부님께 말씀 드렸죠. 두 다리로 걸어서 예식에 참여하고 싶다고요. 그런데 신부님은 무리하면 다칠지도 모른다는 말만 되풀이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어쩔 수 없이 휠체어에 앉아 행렬에 참여했답니다. 하지만 저는 걸을 수 있음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습니다. 예식이 끝난 후 저는 휠체어를 끌고 성모상 앞으로 가서 성모님께 길고 긴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제가 기도를 마치고 호텔로 돌아왔을 때는 매우 늦은 시각이었지요. 그때까지 저를 기다리고 있던 필립 신부님은 문 앞에서 걱정스러운 얼굴로 저를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저는 신부님을 발견하고는 곧바로 휠체어를 박차고 일어나 달려갔습니다. 달려오는 제 모습을 보고 신부님은 울음을 터뜨렸답니다. 저도 울었지요. 전 짐짓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목 보호대를 뜯어내고 목발과 휠체어를 저만치 밀쳐 버렸습니다. 아직 자지 않고 나와 있던 순례객들이 환호했습니다. 저는 그들 중 한 사람을 붙들고 춤을 추기 시작했답니다.

그것이 수요일 늦은 밤의 일이었지요. 7월 28일 금요일, 불어 통역을 맡은 분도회의 스테펜 올스 수사 일행이 저를 루르드 의무국으로 데려갔습니다. 의무국장 테오도르 만자판 박사는 곧바로 보고하지 않고 하루 늦게 찾아온 것에 대해 꾸중 아닌 꾸중을 했습니다. 우리 순례단을 돌봐주신 의사 선생님이 이틀 전까지의 제 상태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만자판 박사는 세부적인 사항을 기록하고 나서, 저의 치유 사례는 ‘조사해 볼 만한 가치가 있으니’ 일년 후에 다시 방문하여 그때에도 ‘치유 상태’가 지속되고 있는지 확인해 달라고 부탁했어요. 그리고 그 동안 저를 치료했던 의사들의 진단서와 앞으로 일년간의 건강상태에 관한 그분들의 소견서도 받아오라고 하더군요.

저는 건강한 모습으로 집에 돌아오게 된 것이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예전처럼 바느질, 뜨개질, 테니스 등을 다시 할 수 있게 된 것도 너무 기뻤습니다. 가엾은 남편은 어리둥절해하며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지난 5년간 궂은 일을 도맡아 해왔는데…. 감자기 더 이상 돌봐줄 필요가 없게 되었으니! 남편은 갑작스런 변화에 적응하느라 한동안 어쩔 줄 몰라 했답니다.

그 동안 저를 치료했던 의사들도 매우 기뻐하며 만자판 박사의 요청에 적극 협조해 주었습니다. 왕립병원에 보관되어 있던 엑스레이 사진과 병원 기록 등이 모두 모아졌습니다. 병원 측은 치유된 제 모습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확인하기 위해 새로 찍은 엑스레이 사진 비용을 받지 않았습니다.”

콜코란 박사는 보고서에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루르드에 가기 전, 그녀는 부분적으로 마비된 상태여서 집안에서 움직이기도 어려웠다. 집 앞에 있는 짧은 비탈기도 걸어 오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매우 활기차게 생활하고 있으며, 바로 그 비탈길을 뛰어서 오르내릴 수 있게 되었다. 나의 임상 경험 중에 그녀만큼 놀랍게 회복된 경우는 없었다.” 그리고 콜토란 박사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녀가 심장마비를 일으킨 후 그녀의 상태를 지켜본 심장 전문의는 생존 가능성에 대해 매우 비관적이었다.”

마리 커스레이크는 치유된 지 일년 후의 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로부터 일년 후에 루르드 의무국을 다시 방문했습니다. 그분들이 요구한 병원 기록과 엑스레이 사진 등은 미리 우편으로 보냈지요. 그런데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저의 병원 기록을 미리 검토한 14명의 의사가 마치 악마의 변호서처럼 제 주위를 둘러싸고 지켜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제게 옷을 벗으라고 하더군요. 전 탈의실을 찾느라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바로 그 자리에서 옷을 벗으라고 요구했습니다! 다행히 그들은 대부분 영어를 사용했어요. 그들은 팔과 다리 관절을 확인해 보느라 번갈아 가며 제 팔과 다리를 구부렸다 폈다 하더군요. 또 온갖 질문을 퍼부으며 제 증언에서 허점을 찾아내려고 신경을 곤두세우는 듯 했습니다. 특히 한 의사 때문에 매우 불쾌했는데, 그는 매우 적대적으로 반대심문을 했습니다. 후에 바스 신문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던 것처럼 그 의사는 마친 간첩을 심문하는 KGB 요원 같았어요. 엄격한 조사는 휴식시간도 없이 세 시간 반이나 계속되었고, 오후 5시 반에 다시 시작하자며 1차 검사를 마쳤을 때 저는 완전히 녹초가 되어 있었습니다.

5시 반에 의무국으로 다시 갔더니 의사가 25명으로 늘었더군요. 그들은 또다시 제 몸을 여기저기 만져보고, 체중과 갖가지 치수를 재고, 팔다리의 유연함을 확인하기 위해 당기고 구부리기를 반복했습니다. 그리고 전신의 근육 운동 검사뿐만 아니라 눈 검사까지 했습니다. 2차 검사는 두 시간 반 동안 진행되었습니다. 검사를 마치고 나서 그들은 일년 후에 다시 경과를 보자며, 일년간의 건강 상태에 관한 콜코란 박사의 보고서를 요구했습니다.

저의 치유를 믿지 못하겠다는 듯한 유별난 의사의 태도 때문에 저는 몹시 언짢은 기분으로 귀가했습니다. 훗날 텔레비전에서 기적을 주제로 한 토론회를 방영했는데, 그때 제 시선을 끄는 인물이 있었어요. 바로 그 의사가 토론회 패널로 나와 있더라구요! 기적 치유 사례를 직접 본 적이 있느냐는 사회자의 질문에 그는 그렇다고 대답하더군요. 그러고는 제 치유 사례를 들어 설명하는데, 그 순간 그분에 대한 저의 섭섭했던 감정이 씻은 듯 사라졌습니다. 그분은 의학적 확신을 얻기 위해 그렇게 지독하게 질문을 했던 것입니다. 하느님을 위해 일하는 악마의 변호인인 셈이지요!”

마리 커스레이크의 치유 사례는 패트릭 마안햄이 쓴 <루르드: 현대의 순례길  Lourdes: a Mmodern Pilgrimage> 이라는 책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마안햄의 접근방식을 일컬어 ‘신심 깊다’ 라고 말할 사람은 엇을 것이다. 그는 루르드의 기이함을 빠짐없이 지적해 내는 데 쾌감을 느끼는 듯했다. 그는 특히 ‘성지의 기념품’ 판매 행위를 불쾌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루르드의 본질을 사실대로 묘사한 것은 분명하다. 또한 유명한 기적들을 소개하면서, 그 기적들은 초자연적 신을 부정하고서는 결코 설명할 수 없다고 진술했다. 마안햄의 냉소적 기질은 경력을 통해 형성되었으며, 마침내 진짜가 아닌 것을 식별해 내는 악마의 변호인 역할을 하게 된 것이리라.

그는 옥스퍼드 대학의 코퍼스 크리스티 칼리지에서 법률을 전공하고 변호사 자격을 얻었다. 변호사 생활은 자연히 그를 의구심 많은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런 다음 그는 <카트만두로 가는 길 The Road to Katmandu> 이라는 책으로 작가의 입지를 굳히고 기고가로서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그는 <스펙테이터 Spectator>, <독서광을 위한 책 Books for Bookworms, <데일리 텔레그래프 The Daily Telegraph>등의 잡지에 정기적으로 기사와 논문을 실었다.

저널리스트가 초자연적 현상과 같이 논란의 여지가 많은 주제에 관해 글을 쓴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그는 마리 커스레이크와 콜코란 박사를 만나본 후 그녀의 치유에 관한 글을 잡지에 실었다. 여기에서 거만한 D. J. 웨스트 박사의 저서 <루르드의 11가지 기적 Eleven Lourdes Miracles> 의 내용도 인용했다. 웨스트 박사는 이 책을 통해 마리 커스레이크의 기적 치유 사례를 비난했다. 미국 뉴욕의 초심리학{3. 투시, 영감, 텔레파시와 같은 심령 현상을 실험적 방법으로 연구하는 심리학의 한 부문] 재단 후원으로 출판된 이 책에서 웨스트 박사는 루르드 의무국 조사 (마리 커스레이크의 사건을 포함한) 내용은 비과학적이므로 믿을 수 없다고 비난했다.

마안햄은 런던에 있는 성 토마스 병원의 가정의학교 교수 데이비드 모렐 박사에게, 루르드의 치유 사건들을 단순히 종교적 감성에서 비롯된 ‘히스테리증’3의 치유로 치부한 웨스트 박사의 글을 읽어보도록 청했다. 모렐 교수는 웨스트 박사의 설명이 기적 치유만큼이나 놀랍다고 했다. 피를 토하고 복벽(腹壁)과 질(膣)에서 고름이 흐르며, 다른 사람의 손을 거쳐야만 용변을 볼 수 있고, 중풍과 실명 등 고통이 따르는 기절성 질환으로 오랫동안 주치의의 각별한 관심을 받아온 환자들을 ‘단순한 히스테리증’ 환자로 치부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진술했다. 그는 웨스트 박사의 비판 내용이 오히려 비과학적이며 분별없다고 말했다.

필립 신부도 마리 커스레이크가 웨스트 박사가 말한 ‘단순한 히스테리증’ 환자가 아니었음을 확신하고 있다. 그는 마리 커스레이크의 건강 상태를 조사했던 의사들로부터 진료 기록 원본을 받아서 살펴보았다. 마리의 치유가 혹시 일시적인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도 했지만, 그는 그녀의 즉각적인 병상(병상)의 차도를 직접 목격하였을 뿐 아니라 그 이후 19년 동안 활기차고 건강한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는 또한 마리가 보통 상식을 갖춘 사람이며, 신경증이나 환상 등에 빠질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루르드에서 치유된 많은 사람들은 경제적 여유가 없어 매년 루르드를 방문하여 의무국 검사를 받지 못했다. 필립 신부는 스코틀랜드 인 짐 멕솔리를 들것으로 옮기며 두 번째 순례에 나섰던 일을 회고했다. 짐 멕솔리는 목 아래 전신이 마비된 환자였다. 필립 신부가 그를 각별하게 기억하는 이유는 지독한 스코틀랜드식 발음을 알아듣기가 무척 힘들었기 때문이다. 필립 신부는 물리치료를 위해 그를 욕탕에 눕힐 때마다 무척 애를 먹었다. 하루는 욕탕에 눕힌 지 두 시간 만에 멀쩡하게 병실 침대에 앉아 흥분한 의료진에 둘러싸여 자신의 손으로 환자식을 먹고 있는 모습을 목격했다. 그는 경제적 여유가 없어 6년 이상이나 루르드 의무국 검사를 받지 않아 치유자 명부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이런 이들이 많다.

루르드의 기적 치유가 웨스트 박사가 말한 것처럼 히스테리증의 자연스런 치유에 불과하다면 즉각적 치유라는 이 놀라운 사례들이 왜 루르드에서만 보고되는가? 마리 커스레이크의 사례와 즉각적 치유에 관한 정밀 보고서가 정신과 의사협회에서는 왜 발표되지 않는가? 전세계의 정신과 의사를 포함한 수많은 의사들이 매년 무수한 환자들을 다루고 있지 않은가?

루르드 의무국 의사들은 기적 치유 사례를 공개적으로 인정함으로써 그 동안 쌓아온 평판이나 명성이 추락할 것을 각오했다. 반면 그들이 얻는 것은 무엇인가? 주로 웨스트 박사 같은 사람들에게 빈정거림과 냉소적인 비판을 듣고 돈은 한푼도 받지 못한다. 의무국 의사들은 하느님을 섬기는 마음에서 자원봉사를 하거나 성실하고 진실된 마음으로 봉사할 뿐이다. 기적적으로 치유된 환자들을 직접 진료하고 진료 기록에 서명한 의사들 중에는 무신론자나 불가지론자들도 있다. 그들은 놀라운 회복의 원인은 이해할 수 없지만 자신이 목격한 치유에 대해서는 전문의로서 소견서에 서명할 만큼 정직하다.

모렐 교수는 웨스트 박사에게 루르드에서 일어난 것과 같은 즉각적 질병 회복 – 실명, 결핵, 각종 악성 종양 등 – 사례들이 다른 곳에서도 일어난 자료가 있으면 제시해 보라고 요구했다. 모렐 교수의 표현에 의하면, 웨스트 박사의 해석은 ‘독자의 신뢰를 악용’하고 있다. 웨스트 박사는 루르드의 치유 사례 중 대부분의 질병들은 회복 가능성이 있는 상태였으며 “단지 그 환자들이 주장하는 회복 속도와 방식은 주목할 만하다”고 서술했다. 하지만 바로 그 점이 핵심인 것이다. 즉각적 회복(치유!) 전세계 수많은 병원, 의원, 진료소에서 활동하고 있는 의사들의 임상 경험 중에 그 같은 즉각적 회복 사례가 어디 있는가. 1734년 ‘학자들의 교황’이라 불린 교황 베네딕토 14세는 복자품과 성인품에 필요한 기적에 관하여 집필하던 중 ‘치유’를 기적으로 받아들이는 데 필요한 일곱 가지 조건을 규정한 바 있다. 그 중 하나는 치유된 질병이 단순히 정신적 질환(우울증 등)이 아니라 기질성 질환(식별할 수 있는 암 등)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네 번째 조건은 ‘치유는 순간적인 것 – 즉각적 치유여야 한다’는 것이다.

프로테스탄트 저술가 루스 크랜스턴은 <루르드의 기적 The Miracle of Lourdes> 에서 육체적 질환의 즉각적 치유 사례를 소개하는 데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그녀는 ‘즉각성’이야말로 루르드의 기적 치유의 본질이라고 진술했다. 그리고 이를 하느님의 존재 근거로 그리고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에 대한 현대적 확증으로 제시했다. 나아가 크랜스턴은  인간의 존재 의미와 가치에 대한 의심(불활실성)의 치유가 루르드에서 일어난 육신의 치유보다 더 중요하다고 이해했다.

 

마리 커스레이크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세바스찬 무어 신부는 운전대를 잡은 채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 침묵이 좋았다. 시골길을 따라 펼쳐진 서머싯 들녘의 아름다운 모습을 차창 너머로 응시하며 흡족함을 느꼈다. 고요한 시골 풍경은 마리 커스레이크의 치유가 그랬듯이 내게 하느님의 선하심과 승리에 대해 그리고 삶의 고귀함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때 세바스찬 신부가 말문을 열었다.

“정말 감동적이지요! 하지만 하느님을 불신하고 부정하는 자세가 현대인들의 전형이 되었다는 사실은 서글픔을 넘어 두렵기까지 하지 않습니까! 과거와 현재의 역사에서 경험한 모든 실패를 보고 사람들은 움츠러들어 이렇게 말합니다. ‘그것 보시오. 이 실패들이야말로 하느님과 그리스도와 교회가 아무 근거도 없는 것임을 증명하고 있지 않소! 불신자들이여, 뭉칩시다! 그리하여 기적과 종교적 믿음이라는 사슬을 벗어 던져버리고 믿는 이들을 몰아냅시다!’ 이는 마리 커스레이크가 체험한 단순하고 희망 가득하며 기쁨 넘치는 경험과는 참으로 대조적이지요!”

“옳은 말씀입니다, 신부님. 오랫동안 신부님은 대학에서 전세계 독자들에게 믿음이 죽으면 희망도 함께 사라진다고 경고해 왔지요.”

마리 커스레이크의 치유 사건이 일어난 곳은 루르드에서 수 킬로미터 떨어진 가바르니 이며 피레네 산맥 남쪽에 있다. 이런 이유로 마리의 치유 사건은 루르드 의무국에 의해 ‘루르드의 기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의무국에 보고된 치유 사건을 하나하나 검토하고 재검토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낸다. 하나의 치유 사건은 보통 5년 이상 매년 반복해서 검토하고 조사한다. 의무국에는 치유 사건들이 끊임없이 보고되고 있다. 이제 의무국은 루르드 밖에서 일어난 치유 사건들, 예를 들면 가바르니 치유 사례 같은 것은 접수하지 않기로 원칙을 정했다.

 

 

 

2. 마리온 캐럴

1989년 9월 3일 일요일, 낙크

Marion Carroll – Knock, Sunday, September 3, 1989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하느님께서는 늘 기적을 행하고 계신다. 대 자연의 경이로움, 우리의 몸 또는 눈을 들여다보고 무수한 기적들을 발견하라. 불행하게도 우리는 경이감을 잃어가고 있다. 그래서 이따금 하느님께서는 비상하고 놀라운 방식으로 기적을 일으키신다” 라고 말했다. 루르드의 치유 사례들이 놀랍고 희망을 북돋아주는 사건이듯 치유의 은혜를 받은 이들과의 만남 또한 그렇다. 나는 그들에게서 넘치는 기쁨과 신선함, 단순함과 겸손함을 발견했다. 더블린 시에서 서쪽으로 20킬로미터 떨어진 애슬론 에 가서 마리온 캐럴을 만났을 때 바로 그런 소중한 자질들을 발견했다.

그녀는 1951년 애슬론에서 마리온 맥코맥이란 이름으로 태어났다. 이곳은 유명한 성악가 존 맥코맥 백작의 고향이기도 하다. (마리온 맥코맥 집안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그녀의 부모는 가난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어린 마리온을 친척집에 맡기고 영국으로 건너가 돈을 벌어야 했다. 1950년대 아일랜드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결핵은 치명적인 병이었는데, 마리온은 일곱 살 때 결핵에 걸렸다. 어린 마리온은 더블린에 있는 피본트 결핵 요양소에 보내졌다. 의사는 가족들에게 마리온의 생명이 위독하다고 알렸다. 자녀들에게 성인전을 자주 읽어주던 마리온의 아버지는 온 가족의 마음을 기도로 모아 성모님께 향하도록 이끌었다. 어린 마리온은 목숨을 건지게 되었고, 마리온의 아버지는 성모님의 간구가 딸의 목숨을 구해주었다고 확신했다. 그리하여 풍족하지 않은 살림이었지만 애슬론에 루르드의 성모상과 동굴을 지어 성모 마리아께 감사하는 마음을 표했다. 어린 마리온은 성모님에 대한 기도와 신심이 각별한 아이로 성장했다.

마리온은 학교 공부에는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열네 살까지 의무교육을 마친 후 진학을 포기하고 여공, 식당 종업원, 점원 들의 일을 하며 청소년기를 보냈다. 한때 록가수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에 열광하기도 했다 마리온의 어머니는 딸의 마음속에 성모님에 대한 신심 대신 록가수가 자리잡지 않을까 걱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그러던 중 엘비스 프레슬리를 까맣게 잊게 해주는 빨강머리 아일랜드 군인이 그녀 앞에 나타났다. 1970년 12월 어느 댄스 파티에서 처음 그를 만나 ‘진정으로, 열정적으로 깊이’ 사랑에 빠졌다.

당시 아일랜드 군인의 보수는 형편없었으므로 지미 캐럴은 집세를 마련하기 위해 중노동을 했다. 그런 다음 맥코맥씨를 찾아가 딸을 달라고 청했다. 마리온의 말할 수 없는 기쁨은 결혼식을 올린 지 얼마 되지 않아 사그라져 버렸다. 지미는 UN 평화유지군과 함께 사이프러스로 파병되었다.

1973년에 첫 아이 앤소니가 태어났다.  뒤이어 마리온의 건강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출산후유증으로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런데 자주 피로를 느끼게 되었고 한쪽 다리에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과 함께 발작적으로 격렬한 고통이 찾아왔다.  앤소니가 10개월쯤 되었을 때인데, 하루는 아기 침대에 다가가다가 느닷없이 침대 위로 힘없이 엎어지고 말았다. 의사는 연골 탈구라는 진단을 내리고 몇 주 동안 견인장치4를 하기로 했다. 하지만 차도는 없었으며 만성적 피로는 점점 더 심해졌다. 그리고 잠시 의식을 잃기도 했다. 지미는 다른 곳에 파병되어 있었으므로 곁에 없었다. 마리온이 통증을 호소하는 모습을 보고 한 친척이 그저 ‘신경과민이나 꾀병’으로 치부하자, 마리온은 더 이상 자신의 고통을 드러내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녀는 남편에게도 내색하지 않았다.

1976년 겨울, 둘째 코라가 태어난 후 마리온은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고 갑자기 손아귀의 힘이 빠지는 일이 잦아졌다. 그녀는 젖먹이 코라를 달랠 때도 떨어뜨리지 않을까 겁을 내며 침대에 눕혀 달래곤 했다. 마리온은 두 아이를 제왕절개 수술로 출산했는데, 그것이 신체적 기능 약화와 점점 심해져 가는 만성적 피로 원인이 아닐까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마리온은 점점 더 두통에 시달렸으며 어지럼증도 심해졌다.

마리온은 시아버지의 장례식 때 의식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 그녀는 툴라모어 병원으로 급히 후송되었다. 그녀가 눈을 떴을 때 세상은 온통 흐릿하고 몽롱하게 보였다. 주위의 소리도 잘 들리지 않았다. 담당 의사는 더블린시에 있는 큰 병원에 가서 뇌 단층 촬영과 신장 검사를 받도록 권유했다. 1978년의 일이었다.

마리온은 병원에 입원하여 며칠간 신경과 의사에게 검사를 받았다. 검사 결과를 본 의사는 병영에 있던 지미를 급히 병원으로 불렀다. 의사는 지미가 직접 병명을 알려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지미는 끔직한 병명을 손바닥에 받아 적었다. 지미가 머리맡에 다가서자 마리온은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챘다. 남편은 그저 잠시 병문안을 온 것이 아니었다. 지미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며 그녀를 안심시키려 했지만, 마리온은 지미의 손바닥에 무언가 적혀 있을 을 알아차렸다. 어쩌면 지미가 무의식 중에 자기 손바닥을 흘끗 쳐다보았는지도 모른다. 마리온은 애써 피하려는 남편의 손을 잡아 끌어 손바닥을 펴 보았다. 남편의 손바닥에는 다발성 경화증(MS)5 이라고 적혀 있었다.

아일랜드 작가 존 스캘리는 <마리온; 현대의 기적 Marion: A Modernday Miracle>의 저자다. 그는 이 책에, 마리온이 1978년 다발성 경화증 진단을 받은 때부터 1989년 낙크 에서 치유되기까지 긴 세월 동안 지속적으로 쇠약해져 가는 과정을 자세히 기록했다. 그녀의 건강이 점점 악화되어 두 개의 지팡이에 떨리는 몸을 의지하고 힘겹게 버티는 모습을 묘사한 부분을 읽다 보면 안타까운 마음에 가슴이 답답해진다.

지미는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혼인 서약의 의미에 대해 단순하면서도 바위처럼 굳은 신념을 가지 사람이었다. 그는 마리온을 정성껏 간호해 주었고, 정기적으로 전문의들에게 데리고 갔으며 ‘미국 의학계의 최신 의술’에 희망을 가져보자는 전문의들의 말을 되뇌며 마리온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그녀가 찻잔을 들 수 없을 정도로 수족을 떨자 그는 빨대를 꽂아 음료수를 마실 수 있게 도와주었다.

1983년에 그들은 다시 애슬론으로 이사했다. 패트릭 오미어라 박사와 그의 아들이며 의사인 존 박사가 그녀를 맡아 치료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큰 도움을 주었다. 1988년에는 마리온의 다리에 통증이 더 심해지고 더 쇠약해져 몇 차례 심하게 넘어지는 사고가 있었다. 오미어라 박사는 그녀를 애슬론 병원에 입원시켰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계속 침대에 누워 지내고 휠체어에 의지해야만 한다고 알려주었다.

마리온은 신장병이 재발되었고 발음이 흐려져 제대로 말을 할 수 없게 되었으며 목구멍(인후) 근육이 점점 오그라들었고 더 이상 고개도 들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오미어라 박사는 목 보호대를 채워주었다. 1989년의 일이었다. 그때부터 마리온은 대소변을 자제하지 못했다. “제게는 더 이상 인간의 존엄성이라고는 남아 있지 않았어요.” 당시를 회고하며 마리온이 말했다. “다발성 경화증이 그것마저 앗아갔지요.”

이제 그녀는 휠체어에 몸을 묶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띠로 묶지 않으면 휠체어에서 미끄러져 떨어질 정도였다. 그녀는 양다리를 쓸 수 없게 되었고 오른쪽 눈의 시력도 잃었으며 왼쪽 눈의 시력도 극도로 악화되었다. 음식물을 씹을 수 없을 정도로 턱 근육이 약해졌고 인후 근육도 전보다 더 악화되어 이제 모든 음식물을 즙으로 만들어 빨대로 먹어야만 했다. 그리고 신장, 갑상선, 탈장(脫腸)을 동시에 치료해야만 했다.

남편의 헌신적인 간호와 온 가족이 바치는 묵주기도는 암담한 현실 속에서 한줄기 빛이었다고 그녀는 회고했다. 남편이 몇 년 전 어렵게 장만한 승용차는 병원비 때문에 처분했다. 미사에 참석하기 위해 지미는 약 1킬로미터 떨어진 성당까지 아내의 휠체어를 밀고 다녔다.

마리온은 루르드에 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으나 어려운 형편 때문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9월 초 평소 마리온 부부와 친분이 있던 구급차 운전사 게리 글린이 찾아왔다. 그는 주일인 9월 3일은 쉬는 날이니 마리온을 낙크에 데려다 줄 수 있다고 했다. 마리온은 백 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여행할 엄두가 나지 않아 거절했다. 오미어라 박사도 그녀에게 다음 주에 있을 신장 수술은 대수술이니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일렀다.  그러나 지미와 게리는 낙크에 다녀오는 것이 그녀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주장했다. 심한 말다툼 끝에 그녀는 남편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어차피 곧 죽을 몸인데…’

게리는 구급차 침상에 마리온을 단단히 고정시키고 휠체어를 싣고는 낙크로 출발했다. 마리온의 상태가 심각했기 때문에 그는 각별히 조심하여 운전을 했다. 그렇지만 여행은 지미와 게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힘들었다. 마리온이 대소변을 자제하지 못하는 상태(실금)였으므로 목적지 낙크에 도착했을 때는 온몸이 ‘엉망’이었다고 회고했다. ‘낙크의 도우미들’이라는 봉사단체의 설립자이며 당시에도 책임자로 활동하던 주디 코인(그녀의 남편 리암 코인 판사는 낙크 성지의 역사에 관한 책을 썼다)은 마리온의 몸을 직접 씻겨주었다고 말했다.

 

1997년 나는 그녀를 만나 물어보았다.

“마리온 캐럴을 기억하십니까?”

“기억하느냐고요? 잊을 수가 없지요. 구급차 기사가 이곳으로 데려왔는데, 말도 마세요. 그녀의 상태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지요. 그녀를 씻기면서 보니 양다리는 마비되었고 양손은 쥘 수조차 없었죠. 한쪽 눈은 시력을 완전히 잃었고 나머지 한쪽도 희미한 상태였습니다. 웅얼거리는 말소리는 거의 알아들을 수가 없었구요. 저는 이곳 낙크에 찾아오는 환자들을 많이 보았고, 그 중에는 죽음을 앞둔 이들도 많았습니다. 저는 마리온이 애슬론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이곳에서 운명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노인인데도 여전히 정정한 주디 코인의 의식(儀式)이 시작되기 전까지 마리온이 낙크 도우미 회관에서 쉴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런 다음 봉사자들은 마리온을 휠체어에 묶어 바실리카 성당6으로 올라가 곧장 ‘낙크의 마리아상’ 앞까지 데려다 주었다. 그 이후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마리온에게 직접 들어보자.

“그 성모상은 제가 이제껏 본 어느 성모상보다도 아름답고 다정하게 느껴졌습니다. 저는 죽음을 앞두고 있었고 자식들에게 어머니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무엇보다 남편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17년간의 결혼생활 대부분을 저 때문에 고생만 했으니까요. 마음이 너무 복잡하고 착잡했습니다. 그런 제 마음을 이해해 줄 만한 여인에게, 또 한 가정 주부에게 털어놓고 하소연이라도 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성모님을 올려다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모님도 자식을 둔 어머니시니 남편과 아이들을 두고 떠나야 하는 제 마음이 어떤지 아시지요?’ 그것은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어떤 주장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한 여자가 다른 여자에게 털어놓는 푸념일 뿐이었습니다. 그런 다음 성모님께 기도했습니다. 남편과 아이들을 돌봐 달라고 청하면서, 저의 죽음을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그들에게 은총을 내려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콜린 오 라일리 주교가 묵주기도와 병자들을 위한 기도를 마쳤다. 주교는 여러 신부들과 함께 병자들에게 기름 바르는 의식을 행했다. 나는 애슬론에 있는 그녀의 집을 방문하여 인터뷰했는데, 그녀는 이야기를 매우 담담하게 들려주었으며 남편 지미는 그녀 곁에 앉아서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웃기만 했다. 그러다가 그녀의 목소리에 활기가 넘치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서 영성체를 했는데 그때 양쪽 발꿈치에 엄청난 통증이 왔습니다. 전에 없던 일이었지요. 잠시 후 통증이 사라지면서 다른 통증까지 모두 사라져 버렸습니다. 주교님의 선창으로 회중은 묵주기도를 한 번 더 바쳤고 이어 주교님의 강복과 병자들을 위한 축복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 손간 제 안에서 말할 수 없이 감격스러운 어떤 감정이 솟구쳐 오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제가 치유되었음을 알려주는 속삭임과도 같은, 너무나 감동스러운 느낌이었습니다. 기분 좋은 미풍처럼, 제 몸을 묶은 띠만 풀어 달라고 부탁한다 해도 곁에 있던 간호사가 제지할 거이 분명했으니까요. 그래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남편은 언제나 내 편이니까 집에 돌아가면 그이에게 부탁해야지.’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저를 괴롭혔습니다. ‘여기서 치유되었는데 이렇게 수동적으로 있다면 하느님께서 이 은총을 거두어 버리실지도 몰라!’

바로 그때 저와 친한 수알라가 안부를 물으러 다가왔습니다. 띠를 풀어 달라고 청하자 그녀는 곧 그렇게 해주었습니다. 저는 일어섰습니다. 꼿꼿하게 말이에요. 3년 만에 처음으로 혼자 일어선 거랍니다. 양팔과 손도 정상으로 돌아왔고 목도 더 이상 늘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도대체 알아들을 수 없었던 발음도 깨끗이 교정되었습니다.

도우미들이 저를 회관으로 안내해 주어 주디 코인 여사에게 치유 되었음을 알렸습니다. 시력도 회복되었느냐고 묻더군요. 그렇다고 했더니 낙크 성지 연감을 펼쳐 보이며 읽어보라고 했습니다. 글씨는 매우 또렷하게 보였고, 저는 펼쳐진 면의 첫 문장을 읽었습니다. 묵주기도가 그렇게 큰 효과가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저는 읽기를 멈추고 신이 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묵주기도는 우리 집의 기도랍니다. 가족들이 늘 묵주기도를 바치고 있어요. 그 덕분에 절망적인 세월을 견뎌왔답니다.'”

마리온은 큰소리로 연감 한 페이지를 모두 읽었다. 또 찻잔을 들고 빨대 없이 차 한 잔을 마셨다. 그녀는 특별한 기쁨을 느꼈다. 주디 코인 여사의 남편이 낙크의 기적에 관한 책을 낸 적이 있었는데, 그녀는 개정판에 마리온의 치유 사례를 싣기 위해 상세한 질문을 했다.

애슬론에서 오전 9시에 출발했는데 벌써 저녁 6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게리 글린은 마리온이 기진맥진해지기 전에 서둘러 집에 데려다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저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구급차 좌석에 등 한 번 대지 않고 꼿꼿하게 앉아서 왔습니다.” 장난을 좋아하던 마리온은 남편을 놀래주기로 마음먹고 게리에게 집에 도착하며 휠체어에 앉힌 채로 구급차에서 내려 달라고 했다.마중 나온 지미는 마리온의 휠체어를 밀고 집으로 들어가면서 낙크 성지에 다녀온 기분이 어떤지 물었다. 그녀는 무표정하게 대꾸했다. “그저 그랬어요. 도대체 사람들이 왜 그렇게 그곳에 가려고 하는지 모르겠다니까요!” 그러고는 집안 뜰로 들어서자 그녀는 휠체어에서 벌떡 일어나 이렇게 말했다.

“여보, 보세요. 저 이제 걸을 수 있어요.” “오, 이런… 맙소사… 마리온…” 그는 말문이 막혔다. “…. 그러지 마!” “저는 남편에게 다가 가 힘껏 끌어안았어요. 남자기 그렇게 큰소리로 우는 모습은 처음 보았답니다.”

두 사람은 패트릭 오미어라 박사에게 전화를 걸어 모든 것을 설명했다. 박사는 그들이 과장을 하는 게 아닌지, 혹은 낙크 성지에 다녀온 열정으로 인해 단순히 일시적 다행증(多幸症)” 7이 아닌지 걱정했다. 다음날 마리온을 찾아온 박사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마리온은 3년간 다리 근육을 전혀 사용하기 못했기 때문에 근육이 소실되어 걸을 수 없을 텐데, 그녀는 정상적으로 걷고 있었다. 그녀는 신장 이상 때문에 몸 속에 삽입한 도뇨관(導尿管)8을 통해 피고름을 받아내고 있었고, 이번 주에는 신장 수술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도뇨관의 분비물도 깨끗해져 있었다.

“마리온, 지금 금요일에 보았을 때만 해도 당신은 무척 심각한 상태였는데… 도대체 어찌된 영문인지는 몰라도 아주 잘되었소. 이런 일을 전에는 본 적이 없어서… 이를 어쩐다?”

박사는 일단 차분하게 경과를 지켜보자고 제안했다.

“매일 검진을 하러 올 테니 일단 침대에 누워 안정을 취하십시오.”

3일 후 박사는 더 이상 휠체어 신세를 지지 않아도 좋다고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도뇨관은 그대로 두라고 주의시켰다. 너무 오랜 기간 삽입되어 있던 관을 제거할 경우 수술이 필요할 수도 잇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2주 후에 오미어라 박사는 간호사를 보내 도뇨관을 제거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마리온은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도뇨관을 제거하는 데 문제가 생기면 어쩌나, 혹은 치유가 일시적이거나 부분적인 것은 아닐까?

“어찌할 바를 모를 때 저는 묵주기도를 바칩니다. 그때도 묵주기도를 바쳤지요. 그리고 간호사가 와서 무리 없이 도뇨관을 제거했고, 모든 기능은 정상이었습니다. 그 후 지금까지 신장에 아무 이상이 없습니다. 통증도 없어요. 저는 1989년 낙크 성지에서 치유된 이후 아스피린 한 알도 복용한 적이 없었어요.”

 

나는 마리온 캐럴을 만나기 전에 그녀에 관한 이야기도 많이 듣고 자료도 많이 읽었다. 존 스캘리가 쓴 <마리온: 현대의 기적>도 읽었다. 마리온은 그 후 콜린 오 라일리 주교의 축복과 권유를 받았고, 자신의 치유 경험을 듣고 싶어하는 이들 – 아일랜드뿐만 아니라 해외 – 의 초청에 응했다. 주교와 마리온은 그런 공개적 만남과 강연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이 현대사회에 만연한 반(反) 복음적 메시지에 대항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나는 그녀의 강의를 들어본 사람을 여러 명 만났다. 그들은 한결같이 그녀가 우쭐해 하거나 거드름을 피우지 않는다고 칭찬했다. 미국에서 판매 부수 1위를 차지하는 ‘내서널 인콰이어러’ 지는 1994년 11월호 표지에 마리온의 사진을 싣고 치유 기사도 실었다. 호주의 텔레비전 방송 채널 4는 마리온 특집 방송을 했다. 기적 치유 사건을 인터뷰하기 위해 세계 순회 여행을 떠나기 전, 나는 아일랜드의 ‘더 선데이 트리뷴(1997년 4월 6일자)에서 그녀의 기사를 읽었다. 나는 사전 지식을 충분히 가지고 1997년 8월, 편안한 마음으로 마리온과 지미를 인터뷰했다. 두 사람의 가정생활과 삶의 모습은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으며 매우 검소하고 소박했다. 마리온은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어디든 갔다. 지미는 가능한 한 아내와 동행했다. 내가 준비한 질문을 모두 답한 후 그녀가 말했다.

“물론 저도 많은 강연과 여행으로 매우 피로합니다. 하지만 성체조배를 통해 다시 힘을 얻습니다. 기도야말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참된 방법입니다. 너무 바빠서 기도할 시간을 내지 못하는 사제들을 보면 서글퍼집니다. 우리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제들의 성추행 문제도 분명 거기에 원인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제가 최근에 만난 한 사제는 자신의 외로움을 토로하며 사제들의 독신생활이 문제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분의 생각이 틀렸다고 지적하면서 보다 깊은 기도 생활을 통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솔직하게 조언했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저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습니다!”

나는 더블린으로 돌아가는 기차에 몸을 싣고 생각에 잠겼다. 많은 사람들이 마리온의 직설적인 이야기와 솔직함에 매료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변호사요 저널리스트이며 다소 냉소적인 패트릭 마안햄이 떠올랐다. 그는 <루르드: 현대의 순례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순례자들 안에서 보통 사람들의 종교가 살아 있음을 보았다. … 그것은 식자들의 가톨리시즘9, 곧 난해한 신앙, 타협하는 신앙, 에누리된 신앙에 도전한다. … 그리스도께서 구원하신 이들은 건강하고 굳센 믿음을 가진 이들이 아니었던가….”

마안햄은 사회의 위선과 거짓과 매스컴의 교묘한 속임수 등을 많이 보았기에 냉소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그가 루르드에서 전혀 다른 세상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는 루르드의 순박한 신앙인들과 순례자들의 단순하면서도 굳센 믿음과 마음 자세를 보고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고 진술했다. 고통에도 ‘의미와 쓰임’이 있음을 루르드에서 깨달았던 것이다. 그는 ‘환자들의 얼굴에서 묻어나는 강렬한 행복감’애 대해 이야기했다. 또 ‘한때는 기묘한 환영들이 나무하던 적막한 현장이었으나… 이제는 불치병으로 고생하는 많은 환자들에게 건강과 행복을 그리고 수많은 보호자들에게 위안을 주는 곳이 되었다’고 말했다.

수많은 이들에게 루르드와 낙크 같은 성지는 ‘하느님의 능력을 몸으로 체험하는… 그리고 확고한 신앙에로 열정을 다해 회귀하는 곳이 되었다. 마안햄 은 기적 치유를 공인하기 위해 의무국에서 시행하는 엄정하고도 면밀한 조사에 관해 상당한 지면을 할애하여 설명했다. “고의적으로 그리고 원칙적으로 무신론을 고수하는 이들에게는 기적이 논의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라는 뉴먼 추기경의 말을 인용하면서, 루르드의 기적 치유에 관한 연구조차 거부하는 의사들의 사례를 소개했다.

1966년 프랑스 북동부에 사는 르네 셰어라는 열여섯 된 소년이 루르드로 성지 순례를 왔다. 그 소년은 어릴 때 받은 수술이 잘못되어 시력을 잃었다. 렉스햄(영국 서부)의 폭스 주교가 성찬례를 거행하며 병자들을 위한 축복을 내리자 르네 셰어의 시력이 회복되었다. 루르드 의무국은 바로 그 날 치유 사례를 확인했다. 그러나 르네 셰어의 진료 기록을 가지고 있는 메츠 병원 연구소(시각 장애자들을 위한 전문연구소) 의사들은 르네의 기록을 요구하는 루르드 의무국의 공식 요청을 거절했다. 이처럼 기적은 있을 수 없다는 생각 때문에 루르드 의무국 조사에 협조를 거부한 의사들이 상당수 있었다.

콜리어 백과사전에는 파스칼10을 ’17세기의 가장 위대한 인물의 한 사람’을 17세기의 가장 위대한 인물의 한 사람’이라 기록해 놓았다. 그는 과학 분야에서 여러 가지 업적을 남겼다. 유체역학에 관한 원리 ‘파스칼의 원리’를 발견하고, 주사기와 유압기를 발명했으며, 기압계도 개량했고, 서구 세계의 첫 계산기를 만들었으며, 파스칼의 정리(기하학)를 수학에 적용했다. 그러나 파스칼은 ‘궁극적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 모든 연구를 그만두었다. 그는 1654년 11월 23일에 궁극적 진리를 경험했다고 확신했다. 그는 쪽지에 ‘불,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 철학자들과 학자들의 한님이 아닌 분명한 하느님, 확신, 가슴 벅찬 기쁨, 평화,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이라 적어서 1662년 죽을 때까지 늘 품에 지니고 있었다.

그 후 파스칼은 한편으로는 기도에 전념하면서 한편으로는 다른 이들을 신앙으로 이끌기 위해서 글쓰기와 토론에 전념했다. 궁극적 진리를 찾고자 한다면 과학적 연구에 생명(력)을 더해야만 한다고 그는 말했다. 또한 인간의 정신은 아무리 ‘과학적’이라 하더라도 왜곡되고 이기적이라고 지적해다. 궁극적 진리를 찾기 위해서는 정직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 파스칼은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인간의 마음은 이성이 알지 못하는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다.”

자신과 논쟁을 벌였던 이들의 속마음을 간파한 파스칼은 ‘팡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직 보기를 갈망하는 이들에게는 볼 수 있을 만큼의 빛이 주어지며, 그와 반대인 이들에게는 볼 수 없을 만큼의 어둠이 주어진다.”

 

나는 마리온과 인터뷰를 마치고 며칠 후에 낙크 성지로 향했다. 날씨가 험악했다. 돌풍이 불고 굵은 빗방울이 얼굴을 때렸다. 순례자들은 그런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우산을 들고 고개를 숙인 채 무리 지어 나지막한 목소리로 묵주기도를 바치면서 성모님 발현 성당 주위를 돌고 있었다.  그릴리 주교는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리고 질문에 답을 해준 다음 마리온의 치유에 대해 증언해 줄 두 사람을 소개해 주었다. 그 중 한 사람이 앞에서 언급한 주디 코인이었다.

또 한 사람은 다이아뭇 머레이 박사였는데, 낙크 성지 클리닉을 책임지고 있는 의사였다. 나는 그에게 마리온의 치유 사례에 대한 견해를 물었다.

“마리온이 병으로 고생하던 70년대와 80년대에는 오늘날과 같이 다발성 경화증을 백 퍼센트 정확하게 진단해 낼 수 있는 검사가 없었습니다. 어떤 의사들은 그녀가 다발성 경화증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환자였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 중 아무도 마리온을 직접 진찰한 사람은 없습니다. 마리온의 주치의 패트릭 오미어라 박사(저와 의대 동창입니다)와 제가 보기에 신체적 증상에 명확한 병명을 붙이는 것이 중요한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동안 의사들은 점진적으로 질병을 정의하고 그 윤곽을 그려왔을 뿐입니다. 오미어라 박사와 저는 마리온 캐럴의 순간적 회복이 의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사건이라고 확신합니다.

최근 유명한 한 호주 정치인에 대해 방송국의 시사해설가가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당신이 그에게 당신 재산을 강탈해 간 사실을 비난한다면 그는 다음과 같이 짐짓 엉뚱한 논점으로 되받아 칠 것입니다. ‘그렇지만 당신 개는 광견병에 결렸잖소!’ 그가 너무 호전적으로 그리고 진지하게 되받아 치는 바람에 그 논쟁은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강탈당한 재산 문제에서 당신의 개와 광견병 문제로 바뀌어 버리고 맙니다.”

나는 기적에 대한 반박 중에 이와 유사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고 있다. 여러 가지 반대 의견과 견해들이 기적 치유의 진상을 가리고 있다. 그러나 즉각적 치유라는, 이 설명할 수 없는 사실만큼은 가리지 못하고 있다.

 

 

 

3. 데이비드 파크스

크론 병 그리고 파경을 넘긴 이야기

David Parkes

 

나는 1997년 8월 19일과 22일에 전 국가대표 축구선수 데이비드 파크스 를 만났다. 먼저 그의 축구 인생에 대한 질문으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열두 살 때 축구에 매료되어 마침내 아일랜드 청소년 국가대표(16세 이하 팀과 18세 이하 팀)로 발탁되었지요. 온 세상이 내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그 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바비 찰턴과 조지 베스트 같은 선수들과 겨루기도 했고, 산토스의 펠레 와도 흥미진진한 시합을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아일랜드 국가대표 선수가 되었지요.

“그럼 가수는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요?”

“우연한 기회에 그렇게 되었습니다. 열두 살 때 축구에 마음을 빼앗기기 전까지는 소년 성가대에서 활동했습니다. 그로부터 10년 후 우연한 기회에 노래경연대회에 나가 1등을 했지요. 매형이 저와 상의도 없이 대회 예선에 제 이름으로 신청을 했던 겁니다! 그때 스물일곱 살이었고, 소년 성가대 이후 음악 레슨을 받은 적도 없었습니다. 어느새 제게는 제2의 프랭크 시나트라 라는 별명이 붙었고, 직업 가수로 활동해 보라는 권유가 있었습니다. 결국 저를 중심으로 밴드가 결성되었고, 우리는 벌링턴과 더블린에서 가장 규모가 큰 호텔 전속으로 활동했습니다. 이후 10년간 그 호텔을 무대로 디너 댄스와 카바레 쇼 등을 담당했습니다.

그 동안 저는 앤 맥그리스 와 결혼하여 아이 둘을 낳았습니다. 1977년 4월 7일 축구 시즌이 끝난 후 일주일쯤 지났을 때 처음으로 복부에 심한 통증을 겪게 되었습니다. 통증이 얼마나 극심했던지 서지도 앉지도 못하고 바닥에 뒹굴었습니다. 식사만 하면 구역질을 하기 시작했고 설사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처음 통증이 시작되었을 때 제 몸무게는 102킬로그램이었습니다. 6주 후에는 59킬로그램이 되었습니다. 결국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았는데, 크론병11이라는 진단을 받았지요.”

1932년에 크론 박사와 연구진에 의해 명명된 이 질병은 극심한 복부 통증, 설사 그리고 체중감소를 동반하며 대장염과 비슷하다.

“의료진이 약물치료를 시도했고 스테로이드까지 사용해 보았지만 통증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결국 몇 달 후에 회장(回腸) 제거 수술을 받았습니다. 회장루 형성수술12을 받고 2년 반 동안 외과용 비닐 주머니를 몸에 달고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수술 받은 지 3개월 후부터는 다시 가수로 일했습니다. 건강 상태가 좋아진 것은 아니었지만 우리 부부에게는 큰 돈이 필요했습니다. 둘째 아이 켄이 낭포성 섬유증13이라는 충격적인 질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그 병은 아이의 수명을 엄청나게 단축시키는 것이었죠. 아내는 저는 세 살 된 아틀 켄을 위해 무슨 일이든 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아내는 켄과 네 살 도니 딸 로나를 돌보느라 집에 있어야 했습니다. 저는 켄의 병원비를 벌기 위해 온 힘을 다할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밤에는 노래를 다시 시작했고, 낮에는 더블린 백화점 구매 담당원으로 일했습니다.

1977년 12월 저는 병원으로 급히 실려가 장폐색(腸閉塞) 관련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나마 축구선수 시절에 해둔 체력 훈련 덕분에 성탄절 전 직장에 복귀했습니다. 하지만 이듬해 1978년 11월 장폐색으로 다시 한번 수술대 위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1979년 6월, 의료진은 회장루 형성수술로 만들었던 인공 항문을 없애고 외과용 비닐 주머니도 제거했습니다.

그 후 2년간은 문제없이 잘 지냈습니다. 영적으로 무신론자가 되기로 결심했지요. 아무 죄도 없는 어린 아들은 낭포성 섬유증으로 얼아 살지 못할 운명이고, 아이를 돌보아야 할 아비마저 쓰러지게 버려두시는 하느님이 어떻게 전능하신 분이고 어떻게 사랑일 수가 있습니까? 저는 분노와 원망으로 괴로워했습니다. 주일미사도 참례하지 않기로 마음먹고, 아내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했습니다. 내 앞에서는 기도도 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습니다! 결국 아내와 말다툼이 잦아졌죠. 모두 제 잘못이었습니다.

1981년 6월 장(腸) 유착이 진행되어 또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1984년에도 장 유착으로 다시 수술을 받았는데, 그것이 다섯 번째 수술이었습니다. 그사이 셋째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저는 기뻐하기 보다 아내에게 화를 냈습니다. 켄과 저의 절망적인 상태 때문에 생긴 좌절과 욕구불만을 모두 아내에게 퍼부었던 겁니다. 저는 절망을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아내와 세 아이를 버렸습니다. 이런 말을 하기가 부끄럽습니다만, 그때 저는 다른 여자를 사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아내는 다시 새벽 미사에 나가 저를 위해 그리고 우리의 결혼생활을 위해 기도했지요. 제가 집을 나간 것은 1987년 8월이었습니다. 부모님은 아내 편을 들며 저를 호되게 꾸짖었습니다. 당연한 일이죠.

저는 그 해 11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변한 것이 없었습니다. 또다시 좌절과 욕구불만을 아내를 향해 분출했습니다. 하지만 아내는 놀랍게도 한번도 저를 탓하지 않았습니다. 1988년 1월 또 집을 나와 잠자리를 구걸하는 비참한 노숙자 생활을 했습니다. 갈 데까지 간 것이지요. 그 해 6월 가족들을 찾아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내는 원망하는 기색 없이 저를 다시 받아주었습니다. 저는 행운아라 해야겠지요!

저의 병세는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결국 복부 통증이 지속되었고, 먹기만 하면 구토를 하고 설사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아홉 시간에 걸친 수술을 받았습니다. 수술은 성공적이지 못했습니다. 수술을 받은 지 2주도 지나지 않은 1989년 1월 7일 또다시 열한 시간의 긴 수술을 받아야 했습니다. 수술 후 집도의는 대기실에서 불안해하는 제 아내를 찾았습니다. 아내는 의사에게 사실대로 말해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그는 길어야 8주 내지 10주 정도밖에는 살지 못할 거라고 했답니다. 참담해진 아내는 내게 말할 수가 없다며, 의사에게 대신 해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다음날 의사는 병실로 찾아와서 제 곁에 앉아 모든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거의 3일 동안 비통하게 울고 또 울었습니다.”

데이비드는 마음을 추스렸다.  그리고 하루도 빠짐없이 간병하면서 자신과 많은 시간을 보내는 동안 책망의 말 하마디 하지 않는 아내를 보고, 그녀가 얼마나 좋은 아내이며 얼마나 좋은 엄마인지를 깨닫기 시작했다. 그는 무안했지만 자신의 철없음을 아내에게 고백했다. 두 사람은 17년 전 유고슬라비아에서 보낸 행복한 신혼여행을 회상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여러 번 이렇게 이야기했다. “딱 한 번만이라도 그때처럼 다시 그곳에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는 불가능한 일임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과 아들 켄의 병원비를 감당하기에도 벅찬 형편이었기 때문이다.

데이비드의 밴드 단원들과 더블린 가요계의 많은 사람들이 그 끔찍한 소실을 듣게 되었다. 그들은 데이비드의 가정 형편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기에 자선 공연을 기획했다. 그런데 불쌍하게도 기획을 맡은 사람들이 하는 말을 데이비드가 우연히 듣게 되었는데, 그들은 공연에 대해 의논하면서 무심코 ‘장례식을 위한 자선 공연’이라는 말을 했던 것이다. 당시 데이비드는 이미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었지만 그런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이 몹시 상했다고 한다. 그는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내기를 꺼렸다. 당시 그의 체중은 44킬로그램으로 그야말로 피골이 상접해 있었고, 눈빛도 처연해 보여 마친 나치 포로수용소 희생자들을 연상시켰다.

1989년 2월 27일, 더블린의 그린아일 호텔 대형 리셉션 룸에는 아일랜드의 유명 연예인들이 대거 참석했다. 그들은 데이비드의 밴드가 더 많은 돈을 모금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자 했던 것이다. 그 중에는 로난 콜린스, 디스키 로쉬, 조 키디, 헬렌 조르단, 조지 헌터, 브라이언 다알시 등 유명 연예인들과 헤더 파슨즈가 있었다. 헤더 파슨즈는 가요계의 스타가 아니라 트럼펫 연주자와 결혼한 저널리스트였다. 그녀는 북아일랜드의 프로테스탄트 가정에서 태어났다. 몇 년 전 센데이 신문사에거 그녀에게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구 유고슬라비아)에 있는 메주고리예 성모상과 성지 순례자들에 관한 기사를 쓰라고 한 적이 있었다. 메주고리예의 성모 발현을 미신이라고 여기던 그녀는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취재에 나섰으나, 그곳에 가서 깊은 감명을 받고 가톨릭 교리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2년 전에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또한 그녀는 한 친구와 함께 메주고리예 성지 순례자들만을 위한 전문 여행사를 설립했다.

그녀는 부축을 받으며 공연장으로 들어오는 데이비드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한때 국가대표 축구선수였던 데이비드는 앙상하게 뼈만 남은 끔찍한 몰골이었다. 그녀는 데이비드를 반드시 메주고리예 성지에 보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데이비드와 앤 에게, 피터 루키 신부가 이끄는 성지 순례단과 함께 다녀올 수 있도록 왕복 티켓을 선물했다.

“저는 1982년에 이미 하느님과 절연했다고 아내에게 퉁명스럽게 말했지요. 저는 의식적으로 무신론자가 되기로 결심했거든요. 유고슬라비아에 다시 한번 가 보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습니다. 하지만 아내에게 제 뜻을 분명하게 알렸습니다. ‘여보, 이건 분명히 해두자고. 나는 기도니 미사니 교회니 하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

하지만 우리 부부는 순례단과 함께 4월 23일 메주고리예에 도착했습니다. 그때 저는 의사가 말한 ‘길어야 8주 내지 10주’는 넘긴 상태였지만, 너무 힘들어서 2주 정도 버티다 죽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의식적으로 루키 신부를 피했습니다. 더블린 공항에서 그가 다가와 말을 건넸지만 저는 그의 말을 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메주고리예에 도착할 무렵 버스 안에서 순례자들이 묵주기도를 합송하는 것을 큰소리로 반대했습니다. 기도를 강요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며 반발했습니다. 아내는 창피하게 굴지 말라며 제 옆구리를 찔러댔습니다.

민박시설이 너무 초라하고 비좁아 기분이 더 언짢아졌습니다. 옷을 걸어둘 곳조차 없었습니다. 저는 지난 3개월 동안 화장실 옆에서 살다시피 했는데 16명이 지내야 하는 그곳에 화장실이 하나밖에 없다고 해서 너무 놀랐습니다. 결국 저는 분을 참지 못하고 다음날 첫차로 그곳을 떠나겠다고 말했습니다. 두브로브닉 으로 가서 제대로 된 숙소를 찾겠다고 말이죠. 아내는 제발 한 번만 이사에 참석하자고 사정했습니다. 아내가 가족과 주위 사람들에게 체면을 세우기 위해 그러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마지못해 그러겠다고 했지요. 하지만 다음날 아침 바로 후회스럽더군요. 성당 안에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앉을 자리조차 없었습니다. 게다가 미사는 90분이나 걸렸습니다. 저는 성당에서 나오면서 심하게 투덜댔습니다. ‘난 이 정신 없는 곳에서 벗어나야겠어. 나 혼자서라도 가야겠다고.’ 아내가 말했습니다. ‘여보, 오후에 루키 신부님의 치유 의식에 참석하고 미사가 끝나는 대로 함께 돌아가요. 제발 그렇게 해요!”

데이비드는 혼자 돌아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므로 어쩔 수 없이 동의했다고 한다.

루키 신부는 성당에서 좀 떨어진 야외에서 2,3백 명의 교우들과 함께 치유 기도회를 열었다. 데이비드는 아내와 함께 기도회에 참석은 했지만 기도할 마음은 전혀 없었다. 그는 비디오 카메라를 들고 어슬렁거리며 시골 풍경을 촬영할 뿐이었다. 그리고 ‘기도회를 주관하고 있는 루키 신부를 화난 눈빛으로 흘겨보고’ 신부님의 강복을 받고 있는 ‘히스테리적인’ 신자들을 냉소적으로 노려보았다. 앤은 애원하는 눈빛으로 남편을 바라보며, 한 번만 앞으로 나아가 강복을 받으라고 부탁했다. 데이비드는 어처구니 없다는 듯 웃어넘겼으나 앤은 계속해서 사정했다. 지난날 아내에게 저지른 잘못과 아내가 입은 마음의 상처에 죄책감을 느껴 그녀의 뜻을 받아주기로 했다.

“루키 신부님이 저를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데이비드, 혹시 제게 하고 싶은 말 없나요?’ ‘없습니다., 신부님. 저는 극심한 고통 중에 있으며 앞으로 살 수 있는 날도 보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저도 모르게 속에 있는 말을 하고 말았지요. 그러자 신부님은 들고 있던 십자가를 제 손에 쥐어주고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고는 정신을 잃었는지, 눈을 떠보니 제가 바닥에 누워 있더군요. 정신이 든 다음 처음 눈에 띈 사람은 아일랜드 정치인 도니 캐시디 상원의원이었습니다. 그는 가요계와 관련이 있었기 때문에 전에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캐시디 의원과 다른 신자들이 바닥에 누워 있는 제 주위에 둘러서서 묵주기도를 바치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제가 물었지요. 캐시디 의원이 이렇게 말하더군요. ‘맙소사, 데이비드, 성령께서 개입하셨다네! 자네는 20분 동안 그분 안에 있었다네!’ 저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온몸이 타는듯한 뜨거운 열을 느꼈습니다. 난생 처음 경험하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정상적으로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구역질도 없어졌고 설사도 멈추었습니다. 지난 3개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저를 괴롭히던 증상들이죠. 이제 제 안에는 그런 고통 대신 깊은 평온이 자리했습니다. 그 평온은 오랫동안 누려보지 못했던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다음날 저는 몇 년 만에 처음으로 고해성사를 받으러 갔습니다. 그리고 아내와 함께 포드브로 언덕에 올랐습니다.  1981년 6월 유고슬라비아의 십대 아이들에게 성모님께서 발현하신 바로 그 언덕이지요. 2백여 명의 사람들이 바닥에 앉아 헝가리어로 묵주기도를 바치고 있었습니다. 아내와 함께 그들 곁에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기도하고 싶었지만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이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아내는 제가 난감해하는 것을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더군요. 제가 그 자리를 뜨고 싶어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저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내를 꼭 끌어안고 용서를 빌며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아내도 저를 부둥켜안고 울었습니다.

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소중한 평화를 가슴속에 담고 메주고리예를 떠났습니다. 만일 하느님께서 내게, 그 동안 겪었던 고통스런 크론병이 재발은 하겠지만 지금 누리고 있는 평화는 잃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면 저는 이렇게 응답하겠습니다. ‘주님, 제 안에 이 평화가 남아 있는다면 그렇게 되어도 좋습니다. 주님,저는 크론병이 재발해도 기꺼이 받아들여 제가 그 동안 아내와 부모님 그리고 처가 어른들께 드린 피해와 고통에 대한 보속으로 삼겠습니다.”

메주고리예를 떠난 지 이틀 후에 주치의를 찾아갔습니다. 그는 제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메주고리예에서 지낸 일주일 도안 제 몸무게는 약 2킬로그램 늘었고 굽었던 몸도 곧게 펴져 걸음걸이도 당당해졌습니다. 복부 통증도 구역질도 설사도 사라졌습니다. 주치의는 저를 입원시켜 여러 가지 검사를 한 후 결과를 전화로 알려주었습니다. ‘당신 몸 어디에도 크론병의 징후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1989년 중반이 되자 데이비드는 ‘풀타임’으로 일할 수 있을 만큼 건강해졌다. 낮에는 비디오 관련 회사에 근무하고 밤에는 연예인으로 일했다. 그들은 여전히 심한 적자 상태였고, 아들 켄도 차도가 없었다. 그 해 8월 중순 데이비드는 극적인 치유 경험을 노래에 담아 종교 프로그램에 방송하자는 제의를 받았다. 곧 음반 녹음에 들어갔다. 그는 메주고리예 성모님께 감사 드리는 마음에서 슈베르트의 ‘아베 마리아’를 대표곡으로 했다. 그리고 메주고리예를 방문하여 그곳에서 크리스마스 캐럴 음반 녹음을 했다. 미국 캘리포니아에 가서 무려 6천 여명의 청중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자신의 기적 치유 경험을 간증했다. 그가 이야기를 마쳤을 때 청중들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그에게 기립박수를 보냈다.

이를 계기로 데이비드의 새 인생이 시작되었다. 그는 카바레 가수 생활을 완전히 청산했다. 데이비드는 얼마 전 성음악 음반 5집을 냈다. 그는 캘리포니아 대회 같은 형식으로 아일랜드, 영국, 스코틀랜드, 미국, 뉴질랜드 그리고 호주에서 순회 강연을 했다. 나는 1997년 12월, 호주 시드니의 콩코드 웨스트에서 열린 강연에 참석했다. 실로 엄청난 청중이 모였다.

앤은 남편의 음성도 변했다고 말했다. 나이트 클럽에서 노래 부를 때는 들어보지 못한, 풍부한 가창력에 영적 분위기까지 물씬 풍긴다고 했다. 아내의 말에 데이비드는 빙긋 웃었다. “지금 나처럼 행복해진다면 누구든 음성이 그렇게 변할 거야.” 그리고 덧붙였다. “주님을 위해 노래하는 것이 즐겁습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은 그분의 것이며, 그분한테서 오는 것입니다. 복화술사가 자기 인형을 이용하듯, 하느님께서 저를 이용하시는 것이 매우 기쁩니다.”

데이비드가 순회 강연 초창기에 가장 힘들었던 부분은 아내와 아이들을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버렸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 수치스러운 부분까지 모두 이야기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꼈다고 한다. 이에 대해 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 충분히 짐작합니다. 하지만 그 부분이 결혼생활에 회의를 느끼고 갈팡질팡하는 사람들에게 특별한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영화와 텔레비전 드라마와 소실에서 불성실한 결혼생활을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것으로, 또는 그로 인한 상처가 보상될 수 있는 것처럼 그려내고 있지 않습니까? 이혼이 유일한 해결방법인 것처럼 묘사되고 있는데, 자녀들에게는 정말 끔찍한 짓이지요. 자신의 실패를 인정한 당신의 용기와 앤의 헌신적인 사랑과 용서는 결혼생활의 위기를 겪고 있는 다른 부부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복음서가 전하는 실패담 – 시몬 베드로, 의심 많은 토마, 창녀 막달라 마리아 등 – 은 우리에게 의미가 깊으며 용기를 북돋아 주는 이야기 아닙니까! 흔히 알코올 중독을 극복해 낸 사람들의 증언이야말로 알코올 중독으로 고생하고 있는 이들에게 용기를 주어 AA(단주모임)에 나오게 하는 데 가장 효과적이지 않습니까?”

데이비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파경 위기를 넘기고 우리 가정을 지키게 된 것과 우리 가족이 누리게 된 평화는 저의 육체적 치유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아내와 제가 메주고리예에서 더블린으로 돌아오던 밤, 우리는 양가 부모님과 친척들의 따뜻한 환영을 받았습니다. 가족 잔치가 벌어지고 있는데 우리 아이들이 갑자기 눈물을 흘리며 방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아내는 제게 그러더군요. ‘그냥 두세요. 아마 피곤해서 그럴 거예요.’ 그날 밤 늦게 아내에게 아이들이 왜 울었는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아내가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행복해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아이들도 행복한 마음에 울었다지 뭐예요.'”

 

 

 

4. 파타 클라크

‘성모님, 귀 기울이지 않고 계시군요’

Peader Clarke – “Mary, You’re Not Listening”

 

나는 호주 시드니에 머무는 동안 파타 클라크의 기적 치유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더블린에 도착하자마자 그가 있는 곳을 어렵지 않게 찾았다. 그는 이미 강연과 치유 경험에 관한 다큐멘터리 비디오로 잘 알려져 있었다. 파타(Paeder)는 베드로(Peter)를 게일어14로 표기한 것이며 ‘파타(Padda)’로 발음된다. 1997년 8월 화창한 여름날 아침, 나는 스테판 그린 공원을 가로질러 근처에 있는 파타 클라크의 사무실을 찾았다. 알고 보니 그의 사무실에서 조금만 더 올라가면 가르멜회의 큰 성당이 있었다.

나를 따뜻하게 맞아주는 그를 보자마자 호감을 느꼈다. 그는 사무실을 직원들에게 부탁하고 뒤쪽 조용한 방으로 안내했다. 파타는 전형적인 아일랜드인의 유머와 매력을 갖춘 사람이었다. “저는 가끔 담배 피우는 걸 즐깁니다.” 그가 양해를 구했다. “괜찮겠지요?” “그럼요. 괜찮습니다.” 능숙하게 담배를 마는 그를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최근에 치유 경험에 관한 강연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가 말을 이었다. “휴식 시간에 담배를 피웠지요. 그랬더니 연세 지긋한 수녀님 두 분이 저를 보고 깜짝 놀라시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안심시켜 드렸지요. 가끔 담배 피는 것에 대해서는 성모님이 아무 말씀 안 하셨다고 말이죠.” 그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제가 아홉 살 때 황달에 걸려 쓰러진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의사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어머니와 상의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고 나서 저를 격리 병동에 입원시켰죠. 수개월 동안 입원해 있었는데 제 생각에 그때부터 건강에 문제가 있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운동을 좋아했지요. 축구와 헐링15, 달리기 등 각종 경기를 즐겼지요 그런데 병원 신세를 진 후로는 뛰어다니다가 갑자기 다리에 힘이 빠져 쓰러지곤 했습니다. 가끔 손에 힘이 빠지고 감각이 이상해지는가 하면, 어지럽거나 눈의 초점이 흐려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의사는 단순히 현기증일 뿐이라고, 걱정할 것 없다고 해서 저도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버스 차장으로 일하던 중 테리 윌런을 만났는데, 첫눈에 반했지요! 윌런의 집안도 더블린 토박이였습니다. 그녀와 결혼하고 버스 차장 월급으로는 생활이 어려워 택시 운전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현기증이 점점 더 심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파타는 운전 도중 발에 경련을 일으켜 브레이크 페달이나 클러치 페달을 놓치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증세가 악화된 것을 아내가 눈치채고 다시 검사해 보자고 재촉했습니다. 저는 검사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두렵고 걱정스러워 아내의 권유를 외면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올 것이 오고야 말았습니다. 그날따라 운전하기가 무척 힘이 들었고, 특히 신호등 불빛을 알아보기가 어려웠습니다. 앞차와의 거리를 가늠하기도 힘들어 결국 몇 번 가벼운 추돌 사고를 내고 말았습니다. 나중에는 현기증까지 일어나 그만 귀가하기로 했지요. 집에 도착했는데, 글쎄 차에서 내리지를 못하겠더라구요!  간신히 몸을 기울여 클랙슨을 눌렀습니다. 그 소리에 아내가 달려 나와 부축해서 겨우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지요.

그때부터 더블린에 있는 뷰몬트 병원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세 번째인가 네 번째 병원에 갔을 때 간호사가 제 이름을 부르기에 대기실 의자에서 일어나려다 그만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습니다. 병원 직원들이 침대로 옮겨주어 여러 가지 검사를 받았습니다. 하루는 의사가 제 병실에 찾아와 다소 긴장되고 어색한 모습으로 도표와 그림을 그려가면서 설명하기 시작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먼저 ‘혹시 다발성 경화증에 걸린 거 아니냐’ 고 물어보았습니다. 의사의 어려움을 덜어주었지요. 그는 ‘그렇다’고 대답하고는 중요한 일이 있다면 황급히 나가버렸습니다! 아내는 충격을 받았지만 저는 이상하게도 오히려 안도감을 느꼈습니다. 아내에게는 다발성 경화증이 사형선고처럼 느껴졌겠지만 제게는 그저 ‘비참한 인생’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었습니다.

그것이 1988년의 일이었습니다. 이듬해도 계속 병원에 입원해 있었지만 상태는 급격히 악화되어 갔습니다. 말투도 어눌해졌고 심한 기억 착오까지 일으키기 시작했습니다. 아내가 병문안을 오면 ‘아는 사람인데,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어디서 봤지?’ 하고 고민하곤 했지요. 얼마 후부터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킬 수도 없게 되었고, 용변도 자제하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이들 부부는 결혼한 지 11년이 되었는데 아이가 없어 무척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성실하게 저축해 둔 돈도 모두 병원비로 써버렸기 때문에 테리는 남편 곁에서 간호를 해주고 싶었지만 일터로 나서야만 했다. 그녀는 더블린 공항 알사 스포츠클럽에서 음료수를 나르는 일을 했다. 테리의 동료들은 파타의 병과 그들의 처지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들은 모금운동을 벌여 루르드에 다녀올 수 있는 비용을 마련해 주었다. 테리는 뜻밖의 선물에 너무나 감동했다. 하지만 테리의 흥분과 감동은 이내 실망으로 바뀌었다. 의사들은 파타가 여행에 나선다면 살아 돌아올 수 없다며 루르드 성지 순례를 허락하지 않았다. 뷰몬트 병원의 숀 머피 박사는 다큐멘터리 필름을 통해 당시 그의 쇠약해진 상태를 자세히 설명했다.

테리는 파타의 의식이 맑아졌을 때 루르드 여행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어차피 죽을 목숨인데 못 갈 것도 없다면 찬성의 뜻을 표했다. 테리의 어머니 셰일라 윌런도 딸 부부를 돕겠다고 나서 세 사람이 함께 가기로 했다. 모녀는 파타를 데리고 파타의 어머니에게 작별인사를 하러 갔다. 파타의 어머니는 심장발작으로 말 한마디 못하는 반신 불수가 되어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그때 파타의 어머니가 움직일 수 있는 쪽 손으로 낡은 기도서를 들어 보였다. 그 모습에 파타는 크나큰 용기를 얻었다고 회고했다. “어머니는 하느님께서 저를 굽어살피시리라는 말씀을 하셨던 겁니다.”

비행장으로 가는 길에서부터 의사들이 경고했던 우울한 예측은 현실로 나타났다. 파타의 병세는 더욱 악화되어 그는 비행기로 여행한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아름다운 관을 쓰고 있는 루르드 성모상을 올려다보면서 의식이 돌아오기 시작했다고 한다.

“성모님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죽음에 대한 공포가 모두 사라졌습니다. 죽음이란 하느님이 계신 본향으로 돌아가는 것임을 깨닫게 되면서 저는 깊은 평화를 느꼈습니다. ‘아, 바로 이것이 내게 주어진 루르드의 기적이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후 며칠간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루르드에서의 마지막 날은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성모상을 모신 동굴에서 미사가 있었습니다. 우리 순례단의 마틴 라이언 신부님이 ‘사랑은 줄 때 비로소 사랑입니다. 그러니 자신을 위해 기도하지 말고 다른 이들을 위해 기도하십시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렇게 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내와 장모님이 울고 있는 모습을 보고 성모님께 청했습니다. 저들이 ‘무엇 때문에 울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울지 않게 해주십시오.’

그 다음에 기억나는 것은 순례단의 간호사 케이 호건이 하얀 돌들을 가리키고 있는 모습입니다. 하얀 돌들은 1858년 성모 발현 때 성 벨라뎃다가 무릎을 꿇고 있던 자리를 표시한 것이지요. 나도 그곳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싶어서 휠체어에서 미끄러져서라도 내려보려고 애를 썼습니다. 결국 땅바닥에 엎어지고 말았습니다.

간호사와 다른 순례자가 황급히 그를 안아 다시 휠체어에 앉혔다. 다큐멘터리 비디오를 보면, 호건 간호사는 기도하려는 파타의 열의에 깊이 감동했다고 회고하고 있다. 그녀는 성모상을 올려다보며 항변했다. “성모님, 무리한 요구를 하시는 거 아닙니까? 이 사람은 무릎을 꿇고 기도할 상태가 아니라구요.” 순례단이 성모 동굴을 떠나는데도 아내와 장모님이 여전히 울고 있는 모습을 본 파타는 성모님께 불평했다. “성모님, 제 기도를 듣지 않으셨군요. 저들이 아직도 울고 있지 않습니까!”

테리와 어머니는 기진맥진한 파타를 휠체어에 태우고 타라 호텔 3층 숙소로 돌아왔다. 그들은 파타를 씻겨 침대에 눕혔다. 파타는 그때의 일을 이렇게 설명했다. “온몸 구석구석에 통증이 매우 심했습니다. 뼛속까지 통증이 느껴졌습니다. 궤양으로 속도 무척 아팠습니다. 분명 지나친 약물 복용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저는 살고 싶다거나 고향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포기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마음은 평온했지요. 그것이 하느님의 선물이라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죽어야겠다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습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테리는 어쩌지? 내가 죽은 모습을 지켜보며 괴로워할 텐데. 방에서 나가라고 하고 조용히 죽어야겠어. 간호사가 환자들을 점검하는 시간에 나를 발견하면 테리 에게 조용히 알려주겠지.’ 그래서 저는 알아들을 수 없는 웅얼거림과 눈짓으로 아내와 장모님에게 혼자 있고 싶으니 나가 달라는 뜻을 전했습니다. 두 사람은 블라인드를 내리고 불을 끈 다음 다른 방으로 갔습니다.

저는 눈을 감고 자비로운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온몸에 경련과 발작이 일어나 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또 한번의 경련으로 목이 돌아가 벽에 걸려 있는 십자가를 똑바로 올려다보는 자세가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무서웠습니다. 왜냐하면 방은 무척 깜깜했는데도 십자가가 뚜렷하게 보였거든요. 그러다가 저는 기도는 아니었지만 예수님께 말씀 드렸습니다. ‘사는 쪽으로 한 번만 더 걸어보겠습니다.’ 그 순간 십자가 옆에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이 서 계신 것이 보였습니다. 아름다움이란 ‘온전히 죄 없음’이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그 여인은 제게 웃음을 지어 보였습니다. 저는 그분이 예수님의 어머니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약을 너무 많이 먹어서 지금 헛것을 보고 있는 거야’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지만 성모님은 여전히 그곳에 서 계셨습니다. 이번에는 백여 년 전의 발현 때처럼 벨라뎃다 성인과 함께 루르드의 동굴 앞에 서 계셨습니다. 루르드에서 더블린으로 돌아온 후 우연한 기회에 그와 유사한 그림을 보았습니다. 루르드에는 육체적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약물은 더 이상 그들에게 도움이 될 수 없으며, 오직 기도만이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때 성모님이 웃음을 거두고 십자가를 바라보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돌아서서 저를 바라보셨지요. 입술을 움직이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했습니다. ‘내 고통을 보아라.’

얼마 후 제가 서 있다는 것을 의식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조금 전에 침대에서 바닥으로 떨어졌는데…. 그리고 나 혼자서는 일어설 수도 없잖아? 지금 내가 죽은 것일까? 발을 내려다보니 글쎄, 발가락이 움직이는 것이었어요. 발도 움직일 수 있었답니다! 저는 문을 열고 복도로 걸어나가 아내가 있는 방문을 두드렸습니다. 장모님은 문을 열고 깜짝 놀라 말도 제대로 못하시더니, 어떻게 여기까지 왔느냐고 겨우 물으시더군요. 그러고는 복도 쪽을 두리번거리며 간호사와 휠체어를 찾는 눈치였습니다.

그때 아내도 방에서 나와 저를 보고는 어리둥절해했습니다. 두 사람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저를 방으로 데리고 들어갔습니다. 우리 세 사람은 무릎을 꿇고 묵주기도를 바친 다음 침대에 걸터앉았습니다. 아내는 제 몸에서 광채가 나는 것 같다고 했는데, 정말로 어떤 에너지가 몸 전체에 흐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로 인해 점점 몸이 강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때 장모님이 놀라며 말씀하셨습니다. ‘여보게, 상처가 없어졌네.’ 이틀 전, 몸을 씻던 중 발작을 일으키는 바람에 모난 곳에 이마를 부딪쳐 상처가 났습니다. 상처를 본 간호사가 여섯 바늘은 꿰매야겠다고 했지만, 저는 싫다고 했지요. 이미 너무 심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이틀 만에 상처가 말끔히 없어진 것입니다.”

다큐멘터리 비디오에서 테리가 그 다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저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로비에 있는 경비원을 찾았습니다. 그는 양손을 머리에 얹고 의자에 기대어 잠들어 있었습니다. 자정이 훨씬 넘은 시간이었어요. 제가 너무 다급하고 흥분된 목소리로 말하는 바람에 그가 잘 알아듣지 못했어요. 저는 그에게 아스토리아 호텔에 묵고 있는 호건 간호사에게 급히 연락을 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가 전화를 걸어주어 호건 간호사와 통화를 할 수 있었습니다. ‘남편이 당신을 찾고 있어요. 곧 와주실 수 있죠?’ 그녀는 다른 방에서 자고 있던 그녀의 형부 타미를 깨워 함께 왔습니다.”

테리의 이야기를 받아 장모 셰일라 윌런이 말을 이었다.

“테리가 경비원에게 부탁을 하러 간 동안 저는 사위에게 복도에 나가 얼마나 걸을 수 있는지 시험해 보자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사위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걸어요? 저는 달릴 겁니다.’ 그러고는 복도 한 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뛰어서 여러 번 왔다 갔다 하더라구요. 딸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제가 소리쳤습니다. ‘얘야, 네 남편 좀 보렴!’ 사위는 테리에게 달려가 그 애를 번쩍 안고 빙빙 돌았습니다.”

그 다음에는 호건 간호사가 흥분된 목소리로 증언했다.

“그런 다음 파타 씨는 저를 얼마나 세게 끌어안았는지 숨을 쉴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러고는 저와 타미를 방으로 안내하여 앉힌 다음 모든 일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이야기를 마친 후 파타 씨가 그러더군요. ‘자, 이제 모두 지하 카페에 가서 한잔하는 게 어떻습니까!’

그들은 함께 카페로 내려갔다. 테리는 기념 사진을 찍기 위해 사진기를 가지고 갔다.

“모든 것이 꿈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어요. 혹시 그 아름다운 꿈에서 깨어나게 될까 봐 조마조마했습니다. 남편이나 어머니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우리는 다시 잠자리에 들지 못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우리가 밖으로 나가자 남편의 치유 소식은 금방 퍼졌습니다.”

다큐멘터리 비디오에는 1989년 5월 7일 그 의미 깊은 날 밤에 찍은 사진들이 소개되어 있었다.

파타는 루르드 의무국에 보고했다. 그리고 주치의 숀 머피 박사가 서명한 진료기록도 제출했다. 의무국 의사들은 진료기록을 검토하고 파타를 검진한 후, 일년 후에 다시 한번 검사해 보자고 했다.

그들은 더블린으로 돌아오자마자 병원에 입원해 있는 파타의 어머니를 만나러 갔다. 그녀는 마치 모든 일이 당연하다는 듯 웃으며 손때 묻은 낡은 기도서를 높이 들었다. 파타는 자구 어머니를 찾아가 기도서의 기도문을 큰소리로 읽어드렸다. 파타 클라크의 어머니는 1989년 7월 20일 세상을 떠났다. “저는 어머니의 임종을 지켜보면서 주님께 편안하게 가시도록 놓아드릴 수 있었습니다.”

파타 클라크와의 첫 인터뷰는 두 시간 정도 걸렸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자 그는 나에게 아내의 사진을 보여주며 말했다.

“정말 미인이지요. 성격도 좋고 활달한 여자지요. 병원에서 회복 가능성이 없다고 했을 때 그냥 떠났더라면 그렇게 고생하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혼인서약을 지켰죠. 위기가 많았지만 그녀의 마음은 변치 않았습니다. 내게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고 원망의 눈빛이나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았습니다. 제가 회복 된 후 장모님께 들은 이야기인데,  아내는 울고 싶을 때면 장모님을 찾아가 소리 내어 실컷 울곤 했다는군요!”

치유된 후 그들 부부는 그렇게 원하던 자녀를 갖게 되었다. 첫째는 메리 벨라뎃다, 둘째는 루크였다.

파타 클라크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루르드의 기적 치유에 관한 책을 읽다 보면 간혹 이런 표현을 만나게 됩니다. ‘성모님이 주신 기념품’. 치유 받은 사람의 몸에 남겨진 상처 등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제 경우 기념품은 제법 큰 것이지요. 무릎과 골반에 남은 약간의 관절염입니다. 하느님께 감사 드립니다. 제가 감사하는 이유는 약간의 고통이 성모님으로부터 받은 제 사명을 잊지 않도록 해주기 때문입니다. 그 사명이란 고통 중에 있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을 도와주는 일입니다. 완벽하게 치유되어 통증이 전혀 없다면, 성모님의 요구를 쉽게 잊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제가 묵었던 호텔에서는 기념으로 방에 걸려 있던 십자가를 제게 주었습니다. 고통 중에 있는 이들이나 환자들과 함께 기도할 때, 저는 꼭 그 십자가를 몸에 지닙니다.

알고 계시듯 아내의 직장 동료들이 파산지경에 이른 우리 부부에게 루르드 행 티켓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아내와 저도 그렇게 하기로 결심했지요. 루르드에 가야 할 사람들을 위해 후원회를 조직했습니다. 첫해에 10명의 환자를 루르드에 데려갔습니다. 1997년에는 145명을 데려갔지요. 그들 중 한 환자가 생각납니다. 영국에서 온 젊은 아기 엄마였는데 암으로 죽어가고 있었지요. 그녀는 가톨릭 신자가 아니었습니다. 리메릭에 사는 그녀의 언니가 우리에게 도움을 청했어요. 루르드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오로지 자신의 고통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분노와 원망으로 가득 차 있었죠. 저는 매일 90분씩 그녀와 루르드의 메시지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녀는 차츰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자신보다 더 심한 환자들을 의식하게 되었고, 그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려 노력했습니다. 기도 모임에도 참석하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하느님뿐만 아니라 자신과도 화해하고 런던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녀 언니의 말에 의하면 그녀는 그렇게 하느님 안에서 평온하게 죽음을 맞이했다고 합니다.”

1996년까지 루르드 의무국에서 평생 일하다 은퇴한 로저 필론 박사는 ‘루르드 매거진’ 1996년 7월호에 이런 글을 실었다. (‘루르드 매거진’은 5개 국어로 연 10회 50쪽 분량으로 출간된다.)

“루르드 의무국에 매년 15건 정도의 기적 사례가 보고되고 있다. 치유 받은 사람들이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사례가 점점 늘고 있으며, 그 치유는 ‘다른 이들을 위한 봉사’로 상징된다. … 다른 이들에 대한 관심과 성모님께 대한 헌신을 통해, 부르심에 대한 그들의 확신을 확인할 수 있다. … 그 부르심은 하느님의 자비로우심에 대한 증거다. … 그런가 하면 치유 받지 못한 사람들 대다수는 다시 루르드를 찾아와 자신의 고통스런 인생 여정에 위안을 얻고 싶어한다. … 그들은 신앙 안에서 형제 자매들로부터 그리고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사랑 받고 있음을 확신하게 해주는 평온함과 신뢰를 경험한 것이다.”

 

나는 1997년 초여름 루르드에 머무는 동안 아일랜드 쿨스 타운에서 온 자원봉사자 메리 드네이를 알게 되었다. 청소년 시절 어머니와 함께 온 적이 있는 그녀는 아르마 지방의 한 농부와 결혼하여 딸을 낳았다. 그런데 딸을 얻은 것이 축복만은 아니었다. 갓난아기 때부터 신장에 문제가 생겨 신장의 반을 잘라내야 했다. 그리고 딸이 두 살이 되었을 때는 나머지 한쪽 신장에도 이상이 생겼다. 담당의사는 당장 신장 제거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우리 딸을 데리고 루르드에 다녀올 때까지만 기다려 주세요.” 메리는 애처로운 딸 아이를 품에 안고 곧장 루르드로 가서, 순례객들이 무릎으로 닦여진 길을 따라 성모 동굴 앞에 가서 절박한 믿음으로 기도했다. 루르드에서 돌아와 아이를 병원에 데리고 갔는데, 의사는 아이의 신장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했다. 벌써 20년 전의 일이었다. 딸아이는 매우 건강하게 성장했다고 한다. 그 후 메리는 자원하여 매년 한두 번씩 환자들을 돕기 위해 루르드로 돌아오고 있다.

“저는 아직 휠체어에서 벌떡 일어나는 환자를 목격하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간호사로 자원봉사하고 있는 제 친구 둘은 직접 목격했답니다. 저는 어머니들을 통해 가장 위대한 기적을 봅니다. 그들이 온갖 질병과 장애를 가진 어린 자녀를 데리고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는 그렇게 지치고 가슴 아파 보일 수가 없거든요. 그런데 집으로 돌아갈 때는 평온할 뿐만 아니라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답니다. 질병이나 장애로 고통스러워하는 어린 자녀를 돌보는 일이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특별한 소명임을 비로소 이해하기 때문이지요.”

 

내가 메리 드네이를 만난 다음 날 크리스티앙 브레이라는 프랑스 저널리스트가 최근 출간된 미국의 댄 웨이크필드의 ‘기적을 기대하라 Expect a Miracle‘를 빌려주었다. 이 프로테스탄트 작가는 매년 7만 명 이상의 환자 순례객들을 포용하는 도시 루르드에서 자신이 목격한 평온함과 기쁨의 모습을 자세히 소개했다. 그는 루르드에서 만난, 대학생으로 보이는 한 젊은 여성을 소개했다. 그녀는 무척 불만스러워 보였는데, 부모님의 성화로 마지못해 루르드에 봉사하러 왔다고 했다. 그녀는 이 미국 작가에게 그곳의 분위기와 기념품 가게들의 노골적인 상업성이 너무 역겹다며 성안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그녀는 하루빨리 우울하고 불쾌한 이곳에서 벗어나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웨이크필드는 그녀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만일 루르드를 떠나기 전에 그런 부정적 시각에 변화가 생긴다면 그 느낌을 글로 보내 달라는 것이었다. 얼마 후 더블린으로 돌아간 그녀한테서 편지를 받았다. 웨이크필드는 그 글을 책에 인용했다. 그녀는 루르드에서 환자 순례객들을 돕는 일에 참여하면서 점차 자신의 냉소적인 시각에 변호가 일어났다고 했다. 환자들이 욕탕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부축해 주고 기도 행렬에 데려다 주는 일 등을 했는데 거기서는 환자들이 가장 소중한 사람으로 칭송과 찬양을 받는 것이었다. 기도 모임에서 환자들은 거기 모인 사람들의 기도를 받고, 눈물의 위안도 받고, 주교의 강복도 받았다.

그녀는 매일 밤 많은 사람들이 촛불을 들고 성모님께 노래를 바치며 행렬하는 장엄한 모습에 매료되었다고 했다. 루르드의 성가 – 아베, 아베, 아베 마리아 -를 합창하며 다 함께 촛불을 높이 들어올리는 모습은 “마치 성모님께 축배를 제창하는 듯했습니다. 루르드에 가기 전에는 주일미사 때마다 혹시 같은 과 학생들을 만나게 될까 봐 고개를 푹 숙이고 다녔습니다. 루르드에서 돌아온 저는 이제 자랑스럽게 고개를 들고 미사에 참여합니다!”

파타 클라크씨가 기적적으로 치유되었다는 사실은 자신도 친구들도 그리고 나도 전혀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그 치유 사례에 대해 잘 알고 있고 또 기적으로 인정한 한 의사가 나에게 귀띔하기를, 루르드 의무국에서는 기적 치유로 인정하지 않을 거라는 것이었다. 이유는 그의 무릎과 골반에 남아 있는 관절염 때문이었다. 기적 치유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교황 베네딕토 14세가 1734년에 마련해 놓은 일곱 가지 조건에 맞아야 한다. 일곱 가지 조건은 다음과 같다.

 

  1. 매우 심각하고 치료하기 어렵거나 불가능한 질병이어야 한다.
  2. 회복 단계가 아니어야 한다.
  3. (질병 치유에) 효과적인 약물을 사용하지 않은 경우라야 한다.
  4. 치유가 즉각 이루어져야 한다.
  5. 치유는 완전해야 한다.
  6. 이전의 증상에서 주목할만한 저하 또는 당연한 귀결로서 설명이 가능한 ‘고비’가 없어야 한다.
  7. 치유가 영구적이다.

 

루르드 의무국 의사들은 정신적 원인일 가능성이 있는 질병의 치유 사례에 대해서도 조사하기를 거부한다. 오직 기질적 질병, 엑스레이, 조직검사 등 의학적 검사를 통해 증명된 치유 사례에 대해서만 조사 여부를 고려한다. 그렇다고 해서 정신질환, 정신 신경증 등은 루르드에서 치유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어쨌든 루르드 의무국은 오직 육안으로 식별할 수 있고 의학적으로 입증된 기절적 질병의 치유 사례만을 조사하는 것으로 제한하고 있다.

 

 

 

5. 존 트레이노어

갈리폴리, 리버풀 그리고 루르드

John Taynor – Gallipoli, Liverpool and Lourdes

 

존 트레이노어는 1883년 리버풀 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아일랜드인으로 자부심과 신념이 남다른 여성이었다. 그 자부심과 신념은 19세기 후반 기아와 퇴거, 축출, 그리고 8백만 인구가 5백만 명이 될 정도로 끔직했던 아일랜드의 격동기를 견뎌내며 더욱 강해졌다. 존 트레이노어는 어머니의 강한 자부심과 신념을 철저하게 물려 받아, 어린 시절에 어머니를 여의고도 그 자부심과 신념은 일생 동안 한번도 꺾이지 않았다. 열두 살 때까지는 리버풀에서 성 패트릭 초등학교를 다녔으나 가정형편이 어려워 학업을 포기하고 바다로 나가 산전수전 겪으며 인생 공부를 해야 했다. 열여섯 살 무렵에는 ‘아마존 강을 따라 1600킬로미터나 되는 거리’를 여행했다. 서른 살이 되었을 때는 중요한 바닷길은 거의 모두 항해했다. 그는 신체적으로나 영적으로나 매우 강한 사람이었다. “항구에 도착하면 나의 첫 임무는 성당의 위치를 파악하고 될 수 있는 한 많은 선원들을 주일미사에 데려가는 일이었지요.”

1907년 그는 영국 해군 예비대 기관원이 되었다. 1914년 8월 4일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곧바로 참전했다. 도싯에서 한 달간 훈련을 마치고 던커크로 파병되었다. 벨기에는 프랑스를 침공하기 위해 길을 내달라는 독일 정부의 요구를 거절했다. 독일은 벨기에를 침공했고 벨기에는 풍전등화 형세에 놓이게 되었다. 트레이노어의 보병대대는 벨기에군을 지원하도록 파병되었다. 그러나 성과는 좋지 않았다. 독일군의 엄청난 화력은 벨기에군의 방어선을 무참히 밟고 지나갔다. 트레이노어의 상관인 듀킨필드 라는 사람이 큰 부상을 입었다. 트레이노어는 그를 어깨에 짊어지고 수킬로미터를 달렸다. 브룩스에 거의 다다랐을 때 독일군의 포탄이 근처에 떨어졌다. 트레이노어는 머리에 파편을 맞았는데, 그때가 1914년 10월 8일이었다.

그는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이송되어 수술을 받았다. 5주가 지난 후에야 영국의 디일 병원에서 의식을 되찾았다. 얼마 후 퇴원한 그는 다시 부대로 돌아갔다. 그리고 1급 하사관으로 진급되어 이집트로 파병되었다. 그러나 수에즈 운하 동쪽 지역에서 벌어진 터키군과 교전하던 중 오른쪽 무릎에 총상을 입었다.

“관통상이었지요. 그러나 얼마 후 에 다시 귀대하여 리버클라이드 호를 타고 갈리폴리16로 향했지요.”

1915년 4월 25일 새벽, 그는 자동화기 부대장으로 상륙작전의 선두에 섰다. 터키군은 이미 전투태세를 갖추고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사상자기 많이 생겼다. 5월 8일, 트레이노어도 터키군의 참호를 향해 총검 돌격을 하던 중 적군의 기관총에 맞고 쓰러졌다. 두 발은 오른쪽 가슴 부위를 관통하여 심각한 손상을 입지는 않았으나 세 번째 총탄은 오른쪽 팔 안쪽을 뚫고 들어가 오른쪽 쇄골 아래에 박혔다. 그 총탄이 오른쪽 팔의 상완신경총(叢)17과 겨드랑이 부분의 넓은 신경조직을 끊어놓았다.  트레이노어의 치유 사례에 대해 연구하고 책을 펴낸 영국인 의사 프랜시스 이자아드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끊어진 신경들은 팔의 피부에 감각을 전달하고 근육에 명령을 전달하는 신경입니다. 트레이노어의 오른팔은 감각을 잃어 마비되었으며, 그로 인해 팔 위축증을 겪었습니다.”

일단 알렉산드리아로 철수한 트레이노어는 1차로 프레더릭 트레비스 경에게 수술을 받았다. 하지만 끊어진 신경을 봉합해 보려는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다. 영국으로 돌아가는 도중 전함 구르카 호 안에서 군의관 로스 대령에 의해 비슷한 수술을 받았지만 아무 성과도 없었다. 1915년 8월 항해 도중 트레이노어의 첫 발작이 일어났다. 이는 벨기에의 앙베르항에서 퇴각하던 중 머리 부상을 밉고 9개월이 지났을 때였다.

10월 2일, 하슬라 병원에서 다시 한번 신경봉합 수술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11월에 해군병원의 외과의사는 이제 사용하지 못할 팔이니 절단하는 편이 나을 것이라고 말했다. 트레이노어는 단호히 거절했다. 1916년 8월 5일 연금부에서 트레이노어에게 80퍼센트의 연금을 지급했다.

군에서는 제대 명령과 함께 워링턴 박사를 소개해 주었다. 두 사람은 맥머리에 박사에게 신경봉합 수술을 청했다. 이 네 번째 수술은 1916년 11월 27일에 있었으나 다시금 실패를 경험했을 뿐이었다. 경련과 발작은 점점 자주 일어나기 시작했고 모두들 그것에 관심을 집중하게 되었다. 1917년 10월에는 트레이노어의 연금이 백 퍼센트 지급되었다. 1918년에는 10개월 동안 체시어 브롬보로 에 있는 간질환자 수용소에서 지냈다. 그 후 아내와 자녀들이 살고 있는 리버풀의 알더로 이송되어 ‘북부병원’에 수용되었다. 1919년에는 알더 헤이 병원에서 전기치료와 오른쪽 팔 물리치료를 시도해 보기로 했다. 그러나 아무런 성과가 없었고 발작은 점점 더 심해졌다.

연금부의 지시에 따라 그는 스프링필즈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1920년 4월, 몬세랏 박사는 발작 증상이 외상과 첫 번째 부상 때문이라고 믿고 관상(관상)톱18으로 정수리 우측 부분을 뚫었다. 이로 인해 2.5 센티미터 크기의 구멍이 생겼지만 이 시술 또한 아무 성과도 없었다. 발작도 계속되었다. 때로는 하루에 세 번씩 발작을 일으켰다. 게다가 수술 후에 양다리가 부분적으로 마비되었고 내장은 기능을 거의 상실했다.

결국 그는 구급차에 실려 아내와 자녀들이 기다리고 있는 집(리버풀 그래프톤 가 121번지)으로 돌아갔다. 그는 일어서지도 걷지도 못했다. 이자아드 박사는 이렇게 설명했다.

“양다리가 부분적으로 마비되어 있었고, 방광과 직장을 조절하는 능력도 상실되었습니다. 발작에 이어 무의식 상태가 자주 일어났습니다. 오른쪽 팔은 위축되어 있었고, 두개골에 난 구멍으로 뇌의 맥박이 보일 정도였습니다. 기침을 하면 경뇌막(뇌를 덮고 있는 막)이 올라왔습니다. 두통이 심했고 기억상실도 보였습니다.”

영국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큰 손해를 보았기 때문에 정부는 연금으로 주당 2파운드 10펜스를 지급했다. 아내는 그의 수족이 되어야 했다. 1922년 8월에는 아주 적은 수당을 받았다. 연금부에서 그에게 휠체어와 욕창 방지용 공기 쿠션을 지급했다. 트레이노어는 이렇게 회고했다.

“팔다리의 모든 감각과 힘이 한꺼번에 없어졌습니다. 당시(1923년 7월 초) 저는 8년째 오른쪽 팔을 쓰지 못하고 있었지요.”

연금부에서 통보가 왔다. 7월 14일부로 모슬리 힐에 있는 불치병환자 전문병원에 입원할 수 있게 되었음을 알리는 통보였다. 트레이노어는 충격을 받았다. 불치병이라니! 하지만 커닝햄 부인의 문병을 받고 그의 우울함은 단번에 희망으로 바뀌었다. 부인의 말이 본당 신부가 그러는데 누구든 계약금 1파운드만 내면 루르드 성지 순례를 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총 여행 경비는 13파운드였다. 순례단은 7월 21일 출발하며 배와 기차를 이용한다고 했다.

트레이노어는 아내에게 지난번에 형님이 준 1파운드짜리 금화를 어서 가져오라고 일렀다. 그는 금화를 ‘비상금’으로 상자에 보관해 두었다. 아내는 처음에는 루르드 여행을 반대했지만 결국 금화를 본당 신부에게 전해 달라고 커닝햄 부인에게 맡겼다. 그런데 본당 신부는 트레이노어에게 와서 여행을 단념하라고 설득했다. 환자가 고집을 부리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존, 자네는 여행 도중에 죽게 될 걸세. 그렇게 되면 모두에게 슬픔만 남기게 되겠지, 안 그런가! 제발 단명하게나.”

하지만 트레이노어는 막무가내였다. “난 이미 계약금을 냈습니다. 꼭 갈 겁니다.” 치료를 담당하고 있던 의사와 연금부에서는 순례 여행 소식을 듣고 한 목소리로 단호하게 반대했다. 트레이노어는 후에 이렇게 기록했다. “본당 신부도 두 번이나 찾아와 제발 단념하라며 간곡히 부탁했다.”

그러나 트레이노어의 고집을 꺾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이제 아내와 친척 두 사람만이 반대했다. “결국 나머지 12파운드의 여행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우리는 몇 가지 가재도구를 팔고, 아내는 간직하고 있던 패물까지 저당 잡혔다.”

신문사는 논쟁거리가 되는 기사를 좋아하는데 그것이 교회 안의 갈등일 경우에는 말할 나위가 없었다. 결국 온몸이 마비된 퇴역군인의 순례 여행 이야기가 리버풀 신문에 실렸다. 존은 세인들의 관심이 못마땅했다. 그는 형 프랜시스가 밀어주는 휠체어를 타고 눈에 띄지 않는 뒷골목으로 역까지 갔다. 역에 도착하자 수많은 군중들 – 4백 명의 순례객과 그들을 배웅하러 나온 사람들까지 – 이 신문기사의 주인공 트레이노어 주위에 몰려들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휠체어 주위에 모여드는 바람에 급기야는 첫 열차를 놓치고 말았다. 그러자 본당 신부는 기차를 놓친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면서 여행을 단념하라고 다시 간청했다. “두 번째 열차도 있습니다.” 트레이노어가 대꾸했다. “그 열차는 꼭 탈 겁니다. 자리가 없다면 탄수차(炭水車)에라도 올라타고 갈 겁니다!” “가는 도중에 죽고 말 걸세.” 사제가 응수했다. “그렇다면 죽을 수 밖에요!”

여행은 트레이노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힘들었고, 다음날 (1923년 7월 22일) 루르드에 당도했을 때는 매우 지쳐 있었다. 그의 상태가 얼마나 나빠졌는지 순례객 중 한 사람은 트레이노어의 아내에게 남편이 살아서 돌아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편지를 보냈다. “리버풀을 떠난 이후 상처와 곪은 곳을 처치하지 못해 상태가 엉망이었지요.” 루르드에 와 있던 리버풀 출신의 한 간호사(프로테스탄트)와 그 언니는 고향에서 순례객들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마중을 나갔다. 자매는 트레이노어를 알아보고 간호를 자청했다. 그는 무일푼의 환자 순례객을 돌보는 에사일 병원에 수용되었다.

존은 상태가 몹시 나빠 보였지만 ‘성수탕’에 데려가 달라고 고집했다. 성수탕은 1858년 2월 25일 벨라뎃다 성인이 성모님의 지시대로 진흙을 파내자 물이 솟아났는데 그 샘에서 길어온 물을 받아놓은 곳이다. 성수탕을 두 번째로 찾아가던 도중 극심한 간질 발작이 일어났다.

“가슴에서 벌컥 하며 뭔가 터지는 느낌이었는데 곧이어 엄청난 양의 피를 토해내고 쓰러졌습니다. 긴장한 의사들은 내가 의식을 되찾자 – 의식은 금방 돌아왔다 – 분명히 또다시 쓰러질 것이라며 성수탕에 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나마 움직일 수 있는 왼손으로 휠체어의 브레이크를 고정시킨 채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결국 의사들이 두 손을 들고 말았지요. 욕탕에서 나온 후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안에 변화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경련이나 발작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 하지만 통증과 근육마비, 불면증은 성수탕에 아홉 번째 몸을 담글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몸을 담갔을 때 양다리에 무섭게 경련이 일어나는 바람에 욕탕의 물이 거의 쏟아졌습니다. 들것 드는 봉사자들과 다른 이들은 내가 또 발작을 일으키는 줄 알고 무척 놀랐습니다. 그들은 내 몸을 꼭 붙들었습니다. 나는 금방이라도 두 발로 일어설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마구 저항하며 왜 모두들 내 뜻을 억누르려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욕탕에서 나오자 극심한 피로를 느끼며 엉엉 울었습니다.”

봉사자들은 급히 트레이노어에게 옷을 입힌 후 들것에 뉘어 로사리오 성당 앞 광장의 성체 강복에 늦지 않도록 서둘렀다. 라임즈의 대주교가 들것이나 휠체어에 앉아 있는 환자들 사이로 성체 현시용 금빛 성광을 받쳐들고 걸어 들어갔다. 대주교는 트레이노어 앞에서 잠깐 멈추어 성광을 높이 들어 십자 모양을 긋고 지나갔다. 트레이노어는 당신의 일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주교님이 내 앞을 지나가신 직후 내 안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음을 깨달았습니다. 1915년 이후 마비되어 있던 오른팔에 심한 진동과 떨림이 느껴졌습니다. 나는 오른팔을 고정시켰던 붕대를 뜯어내고 성호를 그었습니다. 몇 년 만에 처음 그어보는 성호였습니다. 들것에서 몸을 일으켜 보려고 시도했지만 들것 드는 봉사자들이 나를 불안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고집불통으로 이미 악명이 높았나 봅니다. 그들이 내 몸을 붙들자 누군가가 내게 피하주사를 놓았습니다. 분명 그들은 내가 히스테리 증상을 보이며 난리를 피울 것이라 우려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서둘러 나를 에사일 병원으로 다시 옮겼습니다.”

트레이노어는 의사들과 간호봉사단들 사이에서 유명한 환자였다. 본당 신부와 의견 대립으로 다투었고 리버풀을 떠나기 전부터 신문기사 때문에 유명해졌기 때문이다. 또 여행 도중에는 상태가 너무 나빠서 병원이 있는 역에 정차해서 그를 입원시켰으면 하고 바라는 승객도 있었다. 발작 때문에 승객들은 모두 불안해했고, 대부분(트레이노어의 아내에게 편지를 썼던 그 여성을 포함하여) 루르드에 당도하기 전에 죽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가 하면 욕탕에 들어가기 전에 엄청난 양의 피를 토해낸 사건, 휠체어의 브레이크를 고정시켜 놓고 막무가내로 고집을 부린 사건, 그리고 양다리에 경련이 일어나 욕탕의 물을 거의 다 쏟아버린 사건도 있었다. 이제 트레이노어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의사들은 그가 또다시 발작을 일으키지 않을까 마음으로 졸였다.

“병원으로 옮긴 후 그들은 나를 1층의 작은 병실에 넣었습니다. 문제를 많이 일으키는 환자였기 때문에 엉뚱한 짓을 저지르기 않을까 걱정되어 들것 드는 봉사자들을 시켜 교대로 감시했습니다. 밤새 피하주사의 약효가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웠습니다. 새벽에 바실리카 성당에서 아베 마리아를 철금으로 연주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침대에서 바치던 묵주기도를 마저 끝냈습니다. 그러고는 문을 향해 돌진하여 감시하던 두 사람을 밀어젖히고 밖으로 달려 나갔습니다. 여기서 밝히자면 나는 1919년 이후에 두 다리로 걸은 적이 없었고 체중은 51킬로그램으로 줄어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이 글은 쓸 당시 그의 체중은 그 두 배였다.

“밖으로 나와서 곧장 성모 동굴 – 성모님께서 벨라뎃다 성인에게 발현하셨던 곳 – 쪽으로 달렸습니다. 성모 동굴은 에사일 병원으로부터 약 183미터 떨어져 있습니다. 길이 자갈로 포장되어 있었는데 저는 맨발이었습니다. 끝까지 달려갔지만 발에는 조그마한 상처도 나지 않았습니다. 나를 감시하던 이들이 뒤쫓아왔지만 따라잡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동굴 앞에 당도했을 때 나는 잠옷 차림으로 무릎을 꿇고서 성모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약 20분 동안… 로사리오 광장 저편 끝에는 왕관을 쓴 성모상이 서 있습니다. 성모님께 무언가를 청하거나 각별한 존경심을 표하고 싶다면 무엇이든 한 가지 희생을 바쳐야 한다고 어머님이 늘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마지막 남아 있던 몇 실링으로 아내와 이이들에게 선물할 묵주와 기념 메달을 사버렸기 때문에 바칠 돈이 없었습니다. 성모상 앞에 꿇어앉아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희생을 바치기로 했습니다. 담배를 끊기로 굳게 결심한 것입니다.”

루르드에서 기적적으로 치유되는 경우에 흔히 그렇듯 트레이노어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를 아직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병원으로 돌아온 트레이노어는 세면장으로 들어가 다른 이들에게 친절하게 아침 이사를 했지만, 그들이 어째서 “인사를 받아주지 않는지 의아해 했습니다. 그들은 그저 겁에 질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왜들 저러나… 나중에 커닝햄이라는 사람이 나를 찾아왔습니다. 그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듯 보였습니다. ‘정말 괜찮으세요?’ 내가 물었습니다. ‘밖에 있는 저 사람들 왜 저러는 겁니까?’ 그가 답했습니다. ‘저들은 그저 당신을 보고 반가워서 모여든 것입니다.’ ‘그래요? 고맙군요. 저도 반갑습니다. 하지만 나를 혼자 있게 내버려두었으면 좋겠군요.’ 그리고 커닝햄이 순례 여행을 반대했던 사제가 만나기를 원한가도 귀띔해 주었습니다. 신부님은 시대 호텔에 묵고 있었는데, 많은 군중들을 헤치고 여기까지 올 수 있을지 가 문제라고 했습니다.”

트레이노어가 밖으로 나서자 군중들이 그와 커닝햄을 둘러쌌다. 두 사람은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여러 번 사정을 한 후에야 겨우 그곳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군중을 헤치고 어렵게, 할말을 잃은 신부를 만났다. 트레이노어는 예의상 사제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그 신부님도 괜찮으냐고 물었습니다. 그가 그런 정감이 있는 인사말을 하다니, 의외였습니다. 나는 괜찮다고 답하고, 고맙다는 말과 함께 그의 안부도 물었습니다. 그는 내 앞에서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그날은 밀려든 군중과 흥분된 분위기로 악몽 같은 하루였습니다. 루르드에 있는 모든 사람의 관심이 내게 집중되어 있는 것 같았습니다.” 누군가가 트레이노어에게 신발을 구해주었다. “나는 4년 반 만에 처음으로 신발을 신었습니다.” 그날이 7월 26일이었다.

다음날 아침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를 타기 전에 트레이노어는 순례객들과 동행했던 세 의사가 입회한 가운데 루르드 의무국에서 검사를 받았다. 이 세 의사는 핀, 마알리, 아주르디아 로 순례단이 루르드에 도착해서 이틀이 지난 7월 24일 트레이노어를 이미 검사했던 사람들이다. 의무국은 그들이 이미 서명한 검사보고서를 의무국에 보관하도록 했다. 7월 24일자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리버풀 그래프톤 가 121번지에서 온 존 트레이노어는 아래의 병을 앓고 있었다.

  1. 간질성 발작(루르도로 오는 도중 몇 차례의 발작을 직접 목격했음)
  2. 오른쪽 손가락뼈 신경과 근(근) 척수신경, 그리고 정중(정중) 신경마비, 오른손은 ‘갈퀴’ 모양으로 으그라듦.
  3. 정수리 우측 부분에 관상톱으로 낸 개구부의 크기는 약 2.5센티미터. 뇌의 맥박이 육안으로 관찰됨.
  4. 양다리를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고 감각을 상실함.
  5. 변실금과 요실금

 

그리고 세 의사의 서명이 들어 있었다.

바로 이 세 의사가 7월 27일에 서명한 아래의 진술서가 의무국에 지금도 보관되어 있다.

  1. 보행 능력 우수
  2. 오른쪽 팔의 기능과 능력 회복
  3. 양다리의 감각 회복
  4. 정수리 개구부 상당히 축소

 

7월 27일 금요일, 트레이노어는 자신의 기적 치유에 관해 아직도 충분히 실감하지 못한 채 열차에 몸을 실었다. 그는 이렇게 증언했다.

“나는 여전히 멍하고 어리둥절한 상태였습니다. 어느 역에 정차했는데 객실 문이 열리자 놀랍게도 키팅 대주교님이 문 앞에 서 있었습니다. 나는 그분의 강복을 받기 위해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분은 나를 일으켜 세우며 말했습니다. ‘존, 오히려 내가 당신의 강복을 받아야 합니다.’ 그분이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나와 함께 침상에 걸터앉았습니다.(트레이노어가 사양했지만 사람들이 그를 일등 객석에 태웠다.) 주교님이 나를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존, 당신이 그 동안 얼마나 심하게 앓았는지 아시오?’ 그리고 성모님께서 당신을 기적적으로 치유해 주신 것을 알고 있소?’ 그때서야 모든 것이 한꺼번에 생각났습니다. 오랫동안 앓아 누웠던 일, 루르드 성지 순례 동중 고생한 일, 그리고 루르드에서도 얼마나 아팠는지, 모든 것이 생각났습니다. 나는 울음을 터뜨렸고 주교님도 눈물을 흘렸습니다. 우리 두 사람은 그렇게 걸터앉은 채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었습니다. 주교님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다시 침착한 기분으로 돌아왔습니다. 그제야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온전히 알게 되었습니다.

한편 기적 치유 소식이 리버풀 신문사에 전보로 전해졌습니다. 열차에서 누군가 – 퀸란 신부님이었는지 매킨리 신부님이었는지 – 가 아내에게 전보를 치라고 일러주었습니다. 야단법석을 떠는 인상을 주기 싫어서 간략하게 안부를 전했습니다. ‘많이 좋아졌고. – 존.’ 우리 본당 신부의 한 분인 도버 신부님이 신문기사를 보고 우리 집으로 달려갔답니다. 아내가 큰 충격을 받을까 염려해서였죠. 남편 소식을 들었느냐는 신부님의 물음에 아내는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순례단의 어떤 여자가 보낸 편지를 받았는데 아주 기분이 나빴어요. 편지에는 남편이 죽어가고 있으며 살아서 돌아가지 못할 것 같다고 쓰여 있었어요. 하지만 오늘 남편이 보낸 전보를 받았는데 많이 좋아졌다고 하더군요.’ ‘그럼 남편이 이제 몸을 움직일 수 있다 해도 트레이노어 부인, 너무 당황하거나 충격을 받진 않으시겠죠?’ ‘그럼요, 신부님! 그이가 좋아졌다면 오히려 기쁘지요.’ ‘남편이 정상적으로 걸을 수 있다 해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는 거죠?’ ‘신부님, 오히려 남편이 영영 걷지 못할까 봐 걱정이죠. 저에 대해선 걱정하지 마세요.'”

아내는 친구 라잇다익 부인과 함께 라임 역으로 마중을 나갔다. 리버풀에 사는 사람들이 다 모인 듯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모두들 석간신문에서 기적에 관한 기사를 본 것이었다. 역무원들은 승강장 입구로 밀려드는 사람들을 통제하느라 진땀을 흘리고 있었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많은 경찰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아내와 라잇다익 부인은 어렵게 인파를 뚫고 승강장 입구에 가서 역무원에게 신분을 밝히며 들어가게 해 달라고 했다. 역무원이 물었다. “글쎄요, 트레이노어 씨가 회교도인 모양이지요?  지금 승강장에는 이미 70, 80명의 부인들이 나가 있으니 말 예요!”

“한편 철도회사에서는 나머지 승객들의 안전을 위해 승강장에 도착하기 전에 그들을 하차시키기로 결정했습니다. 키팅 대주교님이 엄청난 인파를 향해 걸어갔습니다. 그리고 모인 사람들에게 질서를 지키도록 당부하면서 트레이노어 씨가 승강장에서 걸어 나오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만족하고 그만 해산할 것을 약속하자고 했습니다. 군중들은 그렇게 하겠노라고 답했습니다.

하지만 내가 승강장에 모습을 드러내자 곧바로 아수라장이 되어버렸습니다. 경찰은 내가 아내와 함께 인파를 뚫고 택시 있는 곳까지 갈 수 있도록 안내하느라 곤봉까지 휘둘러야 했습니다. 내 동생은 나와 함께 택시를 타기 위해 인파를 헤치고 따라오다가 머리 오른쪽을 곤봉으로 얻어맞기까지 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자 아내와 아이들이 얼마나 기뻐했는지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리버풀의 ‘포스트 앤 머큐리’ 지는 월요일판에 트레이노어의 기사를 실었다. 표제는 ‘루르드 성지 순례단 귀향: 전신마비 환자 걷게 되다’. 기사는 이렇게 시작했다. “토요일 밤, 라임 역에서 놀라운 사건이 목격되었다.”

존 트레이노어는 자신의 증언록에 이렇게 후기를 썼다.

“나는 현재 석탄 운반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4대의 트럭과 12명의 직원을 두고 있죠. 나는 직원들과 함께 90킬로그램이나 되는 석탄 부대를 들어올리며 정상인과 다름없이 일한답니다. 그럼에도 공식적으로는 여전히 장애자요 무능력한 환자로 분류되어 있습니다.”

전쟁연금부 에 트레이노어의 건강이 완전히 회복되었다는 보고서가 전달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 조치나 반응 없이 계속 연금을 지급하고 있다. 후에 이 사건을 철저하게 조사한 닥터 프랜시스 이자아드 는 연금부 에 트레이노어 사건에 관한 의료기록의 열람을 요구했다. 본인의 동의가 있다고 강조했으나, 연금부 는 아무 해명 없이 이를 거절했다. 그들의 어처구니없는 결정에 연민을 느낄 정도다. 의학적으로 증명된 기적 치유를 도무지 인정하기 싫었던 것이리라. 연금부 의사들은 그 사건을 그냥 못 본 척 무시해 버렸다.

본래 충성심이 깊은 트레이노어는 공식 보고서를 작성할 때 성 패트릭 초등학교 은사에게 철자법과 문법에 관해 도움을 청했다. 존 머레이 교사는 이에 동의하고 보고서에 트라이노어와 함께 서명했다.

독립심이 매우 강한 트레이노어는 후에 이렇게 회고했다.

“저는 몸이 불편했던 때도, 치유된 이후에도 다른 사람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않았습니다. 연금을 제외하고, 저는 루르드에서 무일푼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가족이 저의 치유 사건이나 그 유명세로 어떤 돈도 받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저는 지금 하느님의 돌보심으로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으며 자식들을 부족함 없이 키우고 있습니다. 치유 받은 후에 세 아이를 낳았는데, 딸의 이름은 벨라뎃다 입니다. 리버풀에서 많은 이들이 저의 기적 치유를 목격하고 개종했습니다. 저는 매년 루르드로 돌아가 들것 드는 봉사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한 절기에 두 번 또는 세 번 다녀온 적도 있습니다.”

봉사하는 일은 전적으로 자기 부담이다. 환자 순례객을 루르드로 안내하는 일에 보람을 느끼고 그 일을 영광으로 생각하는 자원봉사다.

루르드에서 치유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루르드 의무국은 24시간 내에 의무국으로 찾아와 검진받을 것과, 치유되기 이전에 치료를 담당했던 의사의 진료 보고서를 가지고 이듬해 의무국으로 돌아와 재검진 받을 것을 요구한다. 트레이노어는 이듬해 7월 다음의 진료 보고서를 가지고 의무국을 찾았다.

“존 트레이노어, 41세. 그래프톤 가 121번지 거주, 머리와 가슴 총상으로 인한 후유증, 간질병, 스프링필즈 병원에서 퇴원한 후 본인이 치료를 담당해 왔음.” (닥터 맥코엘 서명)

루르드 의무국은 트레이노어를 검사해 보고 보고서에 기재된 증상들이 모두 치유되었음을 확인했으나, 이듬해 또다시 찾아오라고 했다. 의무국은 결정적인 진술을 공표하기 전에 최소한 수년 때로는 그 이상을 두고 지켜본다. 만일을 위해! 사기행각 또는 의사의 실수가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마침내 트레이노어의 극적인 ‘부활’ – 그의 치유 사례를 연구하던 한 연구원의 표현 – 이후 만 3년이 되는 1926년 7월 7일 의무국은 공표할 준비가 되었다. 공식 보고서에는 의무국 국장 닥터 발렛과 첫 순례 여행 때 참여했던 세 의사의 서명이 들어 있었다 (닥터 핀, 닥터 마알리, 닥터 아주르디아). 그리고 보고서의 증인으로는 닥터 해링턴(랭카셔의 프레스턴 병원)과 닥터 무어켄(벨기에의 안트베르펜 병원)가 있었다. 공식 보고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오른손이 살짝 휘어졌으며 손가락뼈 사이의 근육들이 약간 위축 되었음. 오른팔 상부의 둘레는 왼팔보다 1.5센티미터 가늘고 흉근과 어깨근육의 위축은 사라졌음. 정수리의 개구부는 흔적도 없이 소실 되었고 만져보면 두개골 표면에 약간 요철이 느껴짐. 1923년에 치유된 이후 간질성 발작은 전혀 없음.”

닥테 발렛은 매우 건강한 이 사람이 루르드에 처음 왔을 때는 ‘병리학의 박물관’이었다고 설명했다. 1926년 10월 2일, 루르드 의무국은 ‘이 놀라운 치유 사례는 논리적 설명을 초월한다” 라고 발표했다.

 

오른손이 살짝 휘고 손가락뼈 사이의 근육이 약간 위축된 것과 두개골 표면에 약간 요철이 느껴지는 것이 문제되지 않는가? 만일 하느님이 트레이노어를 치유하셨다면 이런 흔적이 왜 남아 있는가?  1997년 6월에 만난 루르드 의무국의 닥터 미카엘 라살레 의 진술에 의하면, 의무국은 의학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2,500건의 치유 사례에 관한 진료 보고서가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이들 중 대부분 질병의 작은 흔적이 남아 있음을 확인했다. 루르드의 기적 치유 사례를 소개하는 작가들은 그것을 성모님께서 주시는 치유의 ‘기념품’ 이라고 부른다. 이는 선한 목적에 도움이 된다. 기적의 수혜자가 자신의 받은 은총을 상기시킨다.

물론 루르드에서 치유 받은 사람들도 예수께 치유 받은 이들과 마찬가지로 영구히 건강할 수는 없다. 결국에는 죽는다! 존 트레이노어는 1943년 12월 7일 숨을 거두었다. 가톨릭 교회 전례력으로 이날은 동정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대축일이다. (1858년 벨라뎃다가 세 번에 걸쳐 성모님께 이름을 알려 달라 간청하자, 마리아께서 그 비상한 표현을 사용하셨다. “나는 원죄 없이 잉태된 이니라.”) 트레이노어의 죽음은 이전에 앓던 질병과는 아무 관련도 없었다. 그는 감돈탈장19 으로 목숨을 잃었다. 내 추측으로는 운반, 견인사업을 하는 너그럽고 자신감 넘치던 그가, 예순 살이라는 나이에 90킬로그램이나 되는 석탄 부대를 들어올리는 일은 무리라는 젊은이들의 충고를 무시하다가 탈장을 일으킨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존 트레이노어의 치유 사례는 ‘교회법상의(교회법이 인정하는)’ 기적에 속하지 않는다. 루르드 의무국은 그의 치유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임을 공표하고 관련 서류를 리버풀 교구청으로 보냈다. 그런데 우편물이 분실되었다. 교구청에서는 우편물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우체국의 실수로 분실된 것일까, 아니면 교구청 사무실에서 분실된 것일까? 아무도 모른다. 어쨌든 많은 주교들은 이미 교회 안에서 교회법상의 기적이 많이 있다는 점과 합당한 조사를 하려면 시간과 비용이 많이 소요되므로 특별히 이 사건에 개입하려는 의지가 별로 없다.

 

 

트레이노어의 기적 치유에 관한 책들

 

I Met a Miracle: 1965년 London Catholic Truth Society에서 만든 16쪽짜리 소책자. 골롬반 사제이며 저널리스트 Patrick O’Connor지음.

The Meaning of Lourdes: Francis Izard 신부(분도회) 지음. 런던: Sands & Co., 1938

The Miracle of Lourdes: Ruth Cranston 지음. Doubleday Image, 1955. 1988년 재판 발행. 359쪽 개정판에 트레이노어의 이야기가 포함됨.

Our Lady of Lourdes: 몬시뇰 Joseph Derry 지음. 더블린: Browne and Nolan, 1957.

After Bernadette: Don Sharkey 지음. 밀워키: Bruce Publishing Co., 1945.

 

 

 

6. 리오 수사

사고뭉치 스위스인

Brother Leo – The Accident-Prone Swiss

 

1997년 6월 루르드에 머무는 동안 나는 49년째 루르드에서 봉사하고 있는 메리 패트릭 수녀의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다. 그는 간호를 맡고 있지만 불어를 능란하게 구사하여 통역이 필요할 때마다 사람들이 그를 찾는다고 한다. 나와 대화하는 중에도 그의 조언이 필요한 다른 봉사자들이 끊임없이 찾아왔다. 패트릭 수녀는 자신이 목격한 기적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저는 1952년 4월 리오 슈바거 수사님이 이곳에 막 도착했을 때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어요. 들것에 실려온 그는 몸이 마비되었을 뿐 아니라 의식도 거의 없었습니다. 죽을 떠먹였더니 반 이상 줄줄 흘려 수염이 다 젖었지요.”

리오 슈바거는 1942년 5월 19일생으로 8형제 중 일곱 번째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초등학생 때 대공황이 찾아왔다. 부친은 근처 성(聖) 갈 시(市)에서 자수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스위스 북동쪽에 위치한 이 도시는 614년에 그 지방으로 건너온 아일랜드인 수사 갈(Gall)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자수사업이 불황을 맞게 되자 슈바거 집안의 열 식구는 생활이 몹시 어려워졌다.

2년 후, 리오가 열 살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리오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져 사고를 당했는데, 후유증이 매우 심각했다. 기억착오를 일으키기 시작했고 수업시간에 집중하기가 무척 힘들어졌다. 의사는 당분간 휴학하고 안정을 취하라고 했다. 후유증이 지속되자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근처 플라우벌 농업학교에 입학할 것을 권유했다. 리오에게는 밭갈이와 젖짜기가 학교 공부보다 훨씬 쉬웠다. 그런데 집중력의 저하 때문인지 그저 운이 나쁜 탓이었는지 모르지만, 1945년 낙마사고로 그 자리에서 의식을 잃었다. 결과는 뇌 손상과 턱뼈 골절상이었다. 그 후 다시 디프테리아에 걸렸다! 연속되는 불운을 가족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리오는 스위스에 살면서, 제2차 세계대전으로 전쟁터에 나간 유럽의 다른 나라 젊은이들보다 더 많이 다치고 더 많이 고생하고 있었다.

스물한 살이 되던 해 오랫동안 마음에 두고 있던 선교사업에 도전해 보기로 결심했다. 학력이 모자라 사제의 길은 이미 막혔다. 하지만 몸으로 하는 일이라도 기꺼이 하겠다는 각오로 프라이부르크 에 있는 분도회에 지원하여 수련 수사로 입회하게 되었다. 주방 일에 만족하며 기쁘게 생활하던 중 또 건강에 문제가 생겼다. 1946년 말 간헐적인 복시(複視) 증상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러더니 1947년 후반에는 언어장애를 일으켰다. “마치 누군가가 숟가락으로 내 혀를 내리누르는 것처럼 느껴졌고 동료들은 내가 하는 말을 잘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의사는 낙마사고와 디프테리아를 앓은 것이 원인인 것 같다고 말하면서도 증상을 완화시키지는 못했다.

분도회 장상들은 그의 헌신적인 생활태도와 신실한 기도생활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리오가 수도 공동체의 짐이 될 수 있는데도 그들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대축일인 12월 8일, 그에게 첫 서원을 허락했다. 리오 수사는 장상들이 보여준 신뢰에 크게 기뻐했으며 열의와 확신을 가지고 앞날을 설계했다. 하지만 그 기쁨도 오래가지 못했다! 어느 날 갑자기 그는 반신불수가 되어버렸다. 몸 왼쪽이 완전히 마비되었다. 그는 의사들이 시키는 대로 열심히 노력했고 때로는 상태가 완화되는 듯했다. 그러다가 다시 악화되곤 했는데, 그때마다 조금씩 상태가 더 심각해졌다. 물론 리오 수사는 자신의 만성적 건강 악화 – 이는 그가 아무 일도 할 수 없음을 뜻했다 – 를 장상들이 수도 성소가 없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판단하지 않을까 걱정했다.

그러나 장상 노커 만하트 수사는 사람을 능력이나 쓰임으로 판단하지 않았다. 그는 리오 수사에게 “그저 하느님만 믿으라”며 용기를 주었다. 그리고 1950년 12월 8일, 리오 수사의 종신허원을 허락함으로써 그를 평생 분도회 수사로 받아들였다. 리오 수사는 기쁨에 넘쳤다. 연적으로는 원기 충천하였으나 육체적 건강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1951년 그는 취리히에 있는 병원에 입원하여 여러 가지 검사를 받았다. 담당의사 오트 박사는 수도원에 어두운 소식을 전했다. 다발성 경화증이 상당히 진행된 단계라는 것이었다. 다발성 경화증은 확실한 진단을 내리기가 어려운 질병이기 때문에 오트 박사는 환자를 신경외과 클리닉으로 이송했다. 그곳에서 크라이엔불 박사의 심도 있는 검사를 받았는데 오트 박사의 진단이 정확했음을 확인했을 뿐이다.

만하트 수사는 리오수사를 다시 수도원으로 데려왔다. 리오 수사는 후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상태는 눈에 띄게 악화되었다. 몸의 모든 기관들이 말썽이었다. …. 우리는 닥터 에비스의 다이어트도 해보았으나 아무런 차도가 없었다. 하루 식사는 참밀과 과일 주스, 약간의 꿀이었고 가끔 날달걀도 먹었다. 도뇨관은 영구히 달고 살아야 할 처지가 되었다. 키가 175센티미터인데 체중은 47킬로그램이었다. 몸이 극도로 허약해져 어린 아기처럼 다른 사람의 간호를 받는 처지가 되었던 것이다. 하루 종일 말 한마디 내뱉을 힘도 없었다.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이 가장 끔찍한 일이었다. 의사는 이런 상태로 계속 악화된다면 여름이 오기 전에 목숨을 잃을 것이라 예측했다.

1952년 3월 어느 날 아침, 장상이 침실로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리오 형제, 어젯밤에 좋은 생각이 났다네. 자네를 루르드로 보낼 생각이야.’ 그리고 나와 몇 마디 논의한 후에 다시 이렇게 말했다. ‘이제는 성모님께 중재를 통해 주님만이 자네를 도와줄 수 있네.'”

그런데 리오 수사는 곧 실망하고 말았다. 성지 순례 신청 기간이 지난 것이다. 장상은 순례단 책임자인 부셸 신부에게 의사의 절망적인 진단과 예측에 대해 설명하며 사정했다. “좋소. 그 불쌍한 녀석도 데려가지요!” 부셸 신부의 대답이었다.

1952년 4월 28일, 리오 수사는 프라이부르크에서 루르드로 떠나는 기차를 타고 24시간 이상 걸리는 여행길에 올랐다. 마리 패트릭 수녀는 거의 의식이 없는 스위스인 수사에게 죽이라도 먹여 보려고 애쓰면서 느꼈던 그 안쓰러운 감정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리오 수사는 스물여덟 살 청년이었지만 그의 모습은 노환으로 죽음을 앞둔 양로원 노인 같았답니다.”

리오 수사의 이야기를 계속 들어보자.

“4월 30일 아침 우리는 성모 동굴 앞에서 첫 미사를 드렸습니다. 성모님께서 벨라뎃다 성인에게 18번 발현하셨던 바로 그 자리에 제가 와 있다는 사실이 이루 말할 수 없이 행복했습니다. 미사 후에 봉사자들이 저를 성수탕에 눕혀주었지만, 통증이 완화되는 것은 전혀 느끼지 못했습니다. 점심식사 후에 다시 병자들을 모두 성모 동굴로 안내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거기서 묵주기도를 바치고 강론을 들었지요. 그러고는 병자들에게 성수탕에 다녀왔는지 물어보았습니다. 저는 말을 하지 못해 성수탕에 다녀오지 않은 병자 그룹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오후 4시쯤 다시 한번 ‘샘’에서 길어온 물에 몸을 담갔으나 아무 효과도 없었습니다. 심한 통증과 함께 속이 거북해졌습니다. 저는 봉사자에게 방으로 데려가 침대에 눕혀 달라는 신호를 계속 보냈지만 그 사람은 알아채지 못하고 저를 로사리오 광장으로 데려갔습니다. 다른 병자들은 이미 그곳에 모여 강복 받을 준비를 하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속으로 ‘좋아, 까짓것! 주님의 이름으로 조금만 더 참자!’  하고 다짐했습니다. 하지만 상태가 너무 나빠져 공동체 기도에 응답하는 시늉도 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 그 자리에 있을 뿐이었지요. 기억나는 것은 주교님이 제 앞에서 성체 강복을 베풀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때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몸 전체가 감전되는 듯했습니다. ‘잘됐다. 이제 평온한 마음으로 죽을 수 있겠구나.’ 그러곤 의식을 잃었는지 모든 게 희미해졌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제가 성체를 모신 채 주교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습니다. 마치 새로 태어난 것처럼 온몸에 생기가 느껴졌으며 모든 통증이 사라졌습니다. 스위스인 순례단과 함께 온 예거 박사가 급히 다가와 제 어깨를 꼭 잡았습니다. ‘리오 수사님, 어찌된 일입니까?’ ‘다 나았어요. 이제 건강해졌다구요!’ 그는 제 곁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저도 마음속으로 기도했습니다. ‘오, 인간의 머리로는 헤아릴 수 없는 하느님! 저는 보잘것없사오나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러고는 마리아의 기도인 마니피캇 을 암송했습니다.

주교님이 강복을 마치고 바실리카 성당으로 들어간 후 저는 누구의 부축도 없이 혼자 일어서서 예거 박사와 함께 숙소로 걸어갔습니다. 저를 보자 순례단 의사들이 다가와 검진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제게 일어난 일을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저의 불평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침대에 누워 있으라고만 했습니다. 저는 당장 성모 동굴로 달려가 기도하고 싶었습니다. 그날 밤, 자지 않고 밤새 주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새벽 미사를 드리려고 5시에 일어났습니다. 미사 후 그루닝어 박사가 다가와 간밤에 잘 잤는지, 또는 어떤 변화는 없었는지 안부를 물었습니다. ‘아니오. 저는 자지 않았습니다. 밤새 기도하며 주님께 감사 드렸지요. 그런데 이제 허기가 지네요. 뭘 좀 먹어야겠어요!’ 의사는 대뜸 주의를 주었습니다. ‘정상적인 식사를 해본 지가 너무 오래되었으니 위장이 적응할 수 있도록 단계적으로 시도해 봅시다. 조심해야 합니다.’ ‘하지만 너무 배가 고파 그냥 먹어야겠어요. 하느님께서 저를 살펴주셨는데, 아마 음식도 제대로 먹을 수 있도록 다 마련하셨을 겁니다!’ 그러고는 곧장 식당으로 달려가 손에 잡히는 대로 먹어 치웠습니다. 우유, 커피, 빵, 버터, 치즈, 소시지! 족히 4인분은 먹었는데도 아무 탈이 없었습니다.

저는 오후 8시에  의무국으로 불려갔습니다.  프랑수아 박사(1954년부터 의무국장을 역임하고 있다)와 18명의 의사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의사들은 4시간 동안 검진을 하며 여러 가지 질문을 했습니다. 1차 검진은 정오가 되어서 끝났고, 오후에 다시 한번 검진을 받았습니다. 의사들은 건강을 완전히 되찾았다며 축하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검진을 받는 중에 비로소 제게 일어난 일에 대해 자세히 들었습니다. 주교님 바로 뒤에 있던 의사와 제 가까이 있던 몇몇 병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제가 휠체어에서 갑자기 내던져져 곧바로 무릎을 꿇었다는 것입니다. 제가 휠체어에서 일어난 다음에 무릎을 꿇은 것이 아니라 휠체어에서 튕겨져 나가면서 무릎 꿇은 자세로 주교님 앞에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교님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저는 전혀 기억이 없었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제가 무릎을 꿇고 있었습니다.”

의무국은 기적을 곧바로 인정하지 않는다. 사기극일 수 도 있고 오진이나 미확정적 진단일 가능성도 있으며, 또 다행증으로 인한 일시적 현상일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치유 받은’ 환자들은 이듬해 주치의의 소견서 등을 가지고 의무국에 다시 와서 재검진을 받아야 한다. (루르드에 오는 환자들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그런 서류 등을 가지고 오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루르드에서 봉사하는 의사들도 환자의 진료 기록이 있으면 훨씬 효과적으로 돌볼 수 있다.)

리오 수사는 프라이부르크 로 돌아오자마자 곧장 주치의들을 찾아갔다. 그들은 그가 건강을 완전히 회복했음을 확인해 주었다. 리오 수사는 곧바로 수도원의 정상적인 노동 시간에 적응했다. 그리고 이듬해 주치의들의 진단서를 가지고 다시 루르드로 떠났다. 의무국에서 갖가지 상세한 질문에 대답하고 재검진을 받았다. 질병의 흔적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그는 의무국에서 나와 봉사단에 합류하여 들것 나르는 일을 하면서 루르드에 새로 도착한 병자들을 도왔다. 그는 매년 이 과정을 반복했다. 그가 치유 받고 7년 반이 지난 1958년이 되어서야 의무국은 그의 치유 사례를 기적으로 인정했다. 의사 디에반트 교수는 진료 보고서에서 “이 치유 사례는 의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고 진술했다.

 

나는 앞에서 1997년 여름에 루르드 의무국의 의사 미카엘 라살레 가 나에게 일어준 이야기를 언급했다. 그것은 1883년 의무국이 설립된 이래 ‘의학적으로 불가해한’ 치유 사례가 2,500건에 이르며, 그에 관한 자료가 모두 의무국에 보관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참고로 루르드 의무국 창립자는 뛰어난 의사요 언어학자이며 사학자인 생 마클루 박사였다. 그는 남작으로 노르만 귀족 계급의 후예였다.)

물론 프랜시스 이자아드 박사는 루르드에 관해 쓴 책에서, 치유 받은 많은 이들은 루르드를 방문하여 의무국에서 다시 검진을 받을 처지가 못 된다고 밝혔다. 또한 기적 치유 사례로 인정받을 만하더라도 환자를 처음 진료했던 의사들의 진단서가 엉터리로 작성되어 무효화 되기도 했다고 지적했다.

리오 슈바거 수사의 극적인 치유 이후 거의 8년 만에 루르드의 의무국에서 치유 사례를 인정하자, 몬시뇰 차리에르 는 ‘교회의 정식 조사’를 시작했다. 1908년 교황 비오 10세는 “기적이라는 어휘가 가볍게 발설되고 있음”을 경고하면서 심사위원회를 만들었다. 그 절차는 다음과 같다.

루르드 의무국에서 치유 사례에 관해 의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면, 치유 당사자가 속해 있는 교구의 주교가 다섯 사람을 임명하여 치유 사례를 재조사하도록 한다. 다섯 명 중 두 사람은 반드시 해당 질병 분야 전문의로서 명망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리고 두 사람은 그 사례에 대해 처음부터 끝까지 조사해야 한다. 그들은 치유 사례가 1732년 교황 베네딕토 14세에 의해 정해진 조건들(제4장 끝부분에서 이미 소개한)을 모두 충족시키는지의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다섯 명의 뛰어난 전문가에 의해 이런 단계를 엄밀하게 거친 다음 공개적으로 비웃음을 살 수 있다는 위험을 감수하고 결과를 공표하게 된다.

모든 과정에는 많은 시간과 경비가 소요된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루르드 의무국에서 내린 판결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이를 아는 많은 주교들은 일부러 그런 일을 하려 하지 않는다. 이것이 ‘교회가 인정하는 치유’ 사례가 단 65건뿐인 이유다!

프라이부르크 의 주교 몬시뇰 차리에르는 리오 수사의 치유 사례를 ‘정식 조사’ 하기로 결정했다. 1960년 12월 18일, 치유된 지 8년 10개월 만에 주교의 임명을 받은 다섯 명의 전문가들은 기적을 선언했다. 몬시뇰 차리에르 는 이 사실을 사목서한에 실어 전교구에 알렸고 본당 별로 성모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도록 당부했다.

리오 수사는 무엇이든 솔선 수범하는 열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 후 36년간 루르드 순례객들을 위해 들것 드는 봉사를 했는데, 그는 그 일에서 각별한 의미를 발견했다. 순례객들의 수는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

1952년 리오 수사가 치유된 후 프라이부르크 로 돌아왔을 때, 본당 신부가 이렇게 말했다.

“건강을 회복했다고 해서 천국행 공짜 티켓을 땄다고 생각지는 마십시오!” 치유 받은 지 36년 만인 1988년 리오 수사는 심장 때문에 병원에 입원했다. 또 1995년에는 혈소판 부족으로 인한 내출혈로 고생했다. 같은 해 다시 탈장과 극심한 신경통으로 고생했다. 하지만 그는 결코 하느님을 의심하지 않았으며, 루르드에 가는 일도 그만두지 않았다. 정작 벨라뎃다 성인은 천식을 치유 받지 못하고 골수 결행으로 고통스러워하다가 서른다섯 살에 죽었다는 사실을 그는 잊지 않았다. 그녀의 투병생활은 동료 수녀들의 표현에 의하면 “대야 한 가득 피를 토해냈다” 고 할 정도로 길고 고통스러웠다. 그럼에도 그녀를 간호했던 동료 수녀들에 의하면, 벨라뎃다는 자신을 위해서는 치유의 기적을 결코 청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녀는 ‘기도하지 않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병자로서 만족한다고 말한다. (로렌틴, ‘루르드의 벨라뎃다 Bernadette of Lourdes’, 166쪽) 죽음을 몇 주 앞두고 페브르 신부가 그녀의 치유를 위해 다 함께 기도하겠다고 하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치유를 위해 기도하신다구요? 안 됩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 – 등에는 살갗조차 남아 있지 않을 정도였다 – 속에서 죽어가면서도 원장 수녀 엘레노아 가 “성모님께 … 그대에게 약간의 위안을 주시도록 청하겠고”라고 말했을 때 그녀는 또 이렇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위안은 안 됩니다. 오직 고통을 견딜 힘과 인내를 … (청해주십시오).”

리오 수사는 치유된 지 36년 후에 찾아온 새 질병에 대해 결코 모순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벨라뎃다 성인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가시관을 ‘당신의’ 벗들에게 주십니다.”

 

 

 

7. 세르지 페랭

‘죽는 법을 배우러 갔습니다’

Serge Perrin – “I Went to Learn How to Die”

 

에네부 는 프랑스 낭트 시에서 서북쪽으로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브르타뉴 바로 아래에 위치해 있다. 페랭은 1929년 그곳에서 브르타뉴 지방 혈통으로 태어났다. 브르타뉴 사람들의 깊은 신앙심은 매우 유명하다. 널리 알려진 화학자요 미생물학자인 루이 파스퇴르20가 그들의 신앙심에 관해 유명한 말을 한 적이 있다.

“과학적 진리를 연구하고 발견하면 할수록 나의 신앙은 브르타뉴 농부의 신앙을 더욱 닮아간다.”

세르지는 그런 신앙 속에서 성장했다. 직업군인이던 아버지는 맏아들 세르지에게 규율과 예법을 엄격하게 가르쳤는데, 이는 세르지가 회계사라는 직업을 갖게 되었을 때 큰 도움이 되었다. 회계사 세르지는 수입도 좋았고 그 지방 아가씨와 결혼하여 세 자녀를 두었다.  그들의 앞날은 무척 밝아 보였다. 그들은 토고(Togo)출신의 흑인 아이를 입양하여 넷째 아이로 키웠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이들 가정 생활의 뼈대였다.

1964년 2월, 세르지가 아침에 일어나면서 두통을 느낀 것이 고통의 시작이었다. 그는 곧 낫겠지 하며 평소처럼 사무실까지 40킬로미터 정도를 운전하여 출근했다. 오전 중 세르지는 계산에 착오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말이 흐려지고 발도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직장 동료가 그를 집까지 바래다 주었고, 아내는 주치의 소오리스 박사에게 연락했다. 소오리스 박사는 그를 불완전 반신불수(오른쪽 부분 마비)로 진단하고 네버스에 있는 신경학자 르프랑 박사를 추천했다. 검사 결과는 우측 상부 근육 마비로 밝혀졌다. 이는 중추 신경계로부터 운동근육에 자극을 전달하는 신경이 손상되었다는 것이다. 오른쪽 다리가 특히 심했다. 오른손도 근육이 마비되었다. 그리고 콜레스테롤 수치도 높았다. 페랭 집안의 병력을 살펴보던 르프랑 박사는 집안 대대로 혈관 계통에 문제가 있었음을 발견하는 몹시 걱정했다. 그는 혈액순환을 순조롭게 하기 위해 혈관을 확장시키는 조치를 취하고 당분간 휴식을 하라고 당부했다. 그 조치는 효과가 있었다. 3개월 후 페랭은 다시 사무실에 출근했다.

4년 후인 1968년 12월 2일, 페랭은 아침에 일어나면서 또다시 두통을 느꼈으나 성실하고 반듯한 그는 그냥 출근을 했다. 자동차를 운전하고 있었는데 생각과는 달리 차가 엉뚱한 방향으로 나갔다. 지나가던 차들이 클랙슨을 울리고 상향등을 번쩍이며 화를 냈다. 그는 여러 번 차를 갓길에 세우고 정신을 가다듬으며 겨우 사무실에 도착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쓰러지고 말았다. 이번에도 동료들이 그를 집에 데려다 주었고, 아내는 다시 소오리스 박사에게 연락했다. 그는 전과 같은 진단을 내렸지만 이번에는 증세가 더욱 심각했기 때문에 즉시 르프랑 박사에게 데리고 갔다. 페랭은 부축을 받지 않고는 걸을 수도 없었고, 말을 하는 데도 어려움을 느꼈으며, 혈압은 150/100이었다. 뇌혈관이 문제였으므로 파파베린(동맥 평활근 진정제로 사용됨)이 처방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무 효과도 없었다. 두통은 계속되었고, 오른쪽 팔다리의 마비 증상은 더욱 심해졌으며, 왼쪽 눈 시력마저 잃어가고 있었다.

3개월 후인 1969년 2월, 페랭은 르네에 있는 신경외과 클리닉으로 후송되어 페키 교수에게 진찰을 받았다. 동맥혈관 촬영도에 나타난 원인은 왼쪽 경동맥 혈전증이었다. 수술은 위험 부담이 너무 커서 협착증을 혈관 확장제와 저지방 다이어트 프로그램으로 개선해 보려 했다. 그는 페랭을 안과 전문의 드레비롱 박사에게 보냈다. 드레비롱 박사는 왼쪽 눈의 기질적 문제와 ‘양쪽 눈의 동맥 혈압 감소’를 확인하고 혈전증의 영향으로 양쪽으로 분산시킬 것을 제안했다. 페키 교수는 혈관 확장 치토크롬21의 강도를 점차적으로 높여가는 집중 치료를 했다. 하지만 증세는 호전되지 않았다.

신중하고 꼼꼼한 회계사 페랭은 무슨 일이든 철저하게 계획을 세우고 부단히 노력하여 해결하는 데 익숙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이 심각한 질병에 의해 완전히 맥이 풀렸다. 오, 그렇지만 루르드가 있지 않은가! 그의 아내 메리는 5월 – 메리가 가장 좋아하는 달이며, 또한 브르타뉴 사람들도 특히 좋아하는 달 – 에 순례 여행을 하자는 남편의 제안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그는 가슴 가득 희망을 품고 열심히 기도하며 루르드로 떠났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떠나기 전과 달라진 것 없이 그대로 돌아왔다.

1969년 중반부터는 일시적 전신마비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순간적으로 온몸의 근육이 풀려버리곤 했는데 이상하게도 의식은 또렷했다. 의사는 ‘경동맥 협착으로 인한 대뇌 기능 정지’ 현상에 당황하면서 크게 걱정했다. 꼼꼼한 페랭은 점점 낮아지는 일시적 전신마비 증상 회수를 기록해 나갔다. 12월이 되어서는 한 달에 12번 나타났다. 전혀 예고 없이 찾아오는 전신마비 증상 때문에 더욱 걱정이 되 아내는 페랭을 혼자 두지 않으려고 각별히 신경을 썼다.

의료비는 계속 쌓여갔다. 결국 아내는 정부보조금을 신청했다. 보건국 의사들은 그를 검진한 후 ‘3등급 환자’로 분류했다. 3등급은 ‘일할 능력을 완전히 상실했으며 생명 유지를 위해 영구히 도움이 필요한’ 상태를 말한다. 그는 아내의 부축이나 지팡이에 의지하지 않고는 한걸음도 걸을 수 없었고, 시력은 말할 수 없이 저하되었으며, 대뇌 기능 정지로 인한 전신마비 빈도도 점점 늘어갔다.

안과 전문의 드레비롱 박사는 검진 결과 시력은 오른쪽 0.1, 왼쪽 0.05, 시야는 ‘거의 점으로 좁아졌다’. 그것은 마치 긴 터널을 바라보는 것과 같았다.

1970년 1월에는 오른쪽 다리와 손의 마비가 상당히 악화되었으며 안면근육까지 퍼져나갔다. 페키 교수는 이후 4개월에 걸쳐 빈카민22을 정맥 주사로 투여했으나 아무 변화도 효과도 없었다. 페랭은 지팡이를 짚고 발을 끌며 움직여 보려 했지만 그냥 넘어지기 일쑤였다. 페랭은 의사에게 단도직입적으로 증상이 완화될 가능성이 있는지 물었다. 그는 의사의 표정을 보고 당황했다. 자신의 생명이 어느 정도 남았는지 솔직하게 알려 달라고 했다. “잘해야 8월까지입니다.” 의사의 대답에 그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아내와 네 아이의 앞날은 어떻게 될 것인가? 이제 겨우 마흔 살인데, 아직 제대로 살아보지도 못했는데. 좌절감, 분노 그리고 절망감이 그를 괴롭혔다.

깊은 슬픔에 잠긴 아내는 다시 한번 루르드로 순례 여행을 가자고 했다.  후에 밝혔지만, 그때 그가 느낌 감정은 ‘깊은 반감’이었다. 이미 다녀왔지만 아무 효험도 없었을 뿐 아니라 상태가 더욱 악화된 몸으로 긴 여행을 한다는 것은 너무 힘든 일이었기 때문이다. 제대로 말을 하지는 못했지만 아내는 그의 뜻을 충분히 알아들었다. 절대로 가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여성은 남성에 비해 신앙과 인내심에 있어서 은근한 힘이 있다. 결국 페랭은 아내의 뜻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단지 ‘잘 죽는 법을 배우기 위해’ 가는 것이라고 못박았다.

1970년 4월 26일 밤, 그들은 앙주의 순례객들과 함께 루르드행 열차를 탔다. 예상했던 대로 긴 여행은 무척 힘들었다. 루르드에서 머무는 동안 이전과 마찬가지로 아무 변화도 경험하지 못했다. 5월 1일, 마지막 날이 되었다. 아내는 미는 휠체어에 앉아 비오 10세의 지하성당으로 마지막 미사를 드리러 가는데 말할 수 없이 피곤했다. 그 성당은 교황 요한 23세가 된 론칼리 추기경에 의해 1958년 세워졌다. 둥근 지붕의 대형 서까래를 이용하여 탁 트이게 지어 한꺼번에 2만 명의 신도를 수용할 수 있다. 이렇듯 독특한 기법이 돋보이는 건축물도 피로에 지친 페랭에게는 아무 감동을 주지 못했다.

미사 중 병자성사를 베푸는 순서가 되었다. 한 신부가 다가와 기도문을 외우며 페랭의 이마에 십자를 그었다.

“이 거룩한 기름 바름을 통해 주님께서 사랑과 자비 안에서 당신에게 성령의 은총을 베푸시길 빕니다.”

그러고 나서 신부가 페랭 곁의 병자에게로 걸음을 옮기는 순간 알 수 없는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후에 루르드 의무국에서 펴낸 39쪽짜리 소책자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전혀 감각이 없고 거의 죽어 있던 발가락에 이상한 온기를 느꼈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의 발이 정상으로 돌아오고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온기가 몸 전체로 퍼져나가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문득 발치에 있던 더운 물병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고는 무릎을 덮었던 담요를 들어보니 오른쪽 발목이 심하게 움푹 패인 것이 보였다. 그것이 심부전 때문이라고 여긴 그는 ‘이제 끝이구나!’ 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온기가 양다리로 퍼지면서 휠체어에 앉아 있던 그는 다리를 떨기 시작했다. 아내는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하는 줄 알고 조금만 참아 달라고 부탁했다. 그가 말했다.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자세히는 몰라도 앞으로 더 이상 지팡이 신제를 지지 않아도 될 듯한 기분이야. 이제 걸을 수 있을 것 같아!’ 그 온기는 10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미사를 마치고 아내는 페랭을 다시 병원으로 데려갔다. 병원으로 가던 중 그는 담요를 들추고 발목이 원상태로 돌아왔음을 확인했다. 병원에 도착하자 그는 휠체어에서 일어나 걸었다. 그 모습을 보고 아내뿐 아니라 거의 일주일 동안 그의 상태를 지켜봤던 자원봉사자들도 깜짝 놀랐다! 병실에서도 지팡이 없이 혼자 화장실에 다녀왔다.

점심시간이 되었다. 페랭의 상태를 아는 이들은 ‘신중을 기하기 위해’ 아직 말하지 말고 그냥 휠체어를 사용하는 게 좋겠다고 했다. 감동적인 전례의식과 많은 사람들의 성가 합창 그리고 감격적인 눈물 등으로 다행증이 일시적 에너지 파동을 일으켰을지도 모른다는 얘기였다. 루르드의 책임자들은 어설픈 연극을 싫어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점심식사 후 아내는 그를 휠체어에 태우고 마지막 기도 행렬에 참여하기 위해 로사리오 광장으로 내려갔다.

기도 행렬에 참여한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자리에 앉기를 기다리는 동안, 그는 무심코 안경을 벗었다. 그는 깜짝 놀랐다. 모든 것이 또렷하게 보이는 게 아닌가! 오른쪽 눈을 가리고 시력을 거의 다 잃었던 왼쪽 눈으로 순례단들이 들고 있는 깃발의 글씨를 읽기 시작했다. 그 넓은 광장에서 맞은편 표지판의 글씨까지 보였다. 울려 퍼지는 성가와 병자들을 위한 군중의 기도 – ‘주여, 제가 보게 해주시고 제가 걷게 해주소서’ – 내용이 페랭의 가슴을 뜨겁게 고통 치게 했다.

기도 행렬이 끝난 후 페랭이 속한 앙주 순례단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루르드 역으로 향했다.  페랭의 주치의 소오리스 박사도 순례단과 함께 루르드에 왔다. 그런데 자신의 환자가 치유되었다는 말을 우연히 듣게 되었다. 움직이는 기차 안에서 페랭을 검사하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그의 시력 회복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시력은 완전히 회복되어 있었다. 그리고 페랭이 누구의 부축도 받지 않은 채 혼자 경사가 심한 계단을 내려가 승강장까지 배웅하러 나온 자원봉사자들에게 인사하는 모습을 보고 소오리스 박사는 더욱 놀랐다.

밤 기차를 타고 집에 도착한 다음날, 소오리스 박사는 페랭을 철저하게 검진했다. 그러나 불과 일주일 전에 자신이 치명적이라 판단했던 병리적 증상들을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 일주일 후인 5월 12일, 페랭은 르네 시에 있는 페키 교수의 클리닉을 찾아갔다. 대동맥 혈과 촬영도에 협착증도 나타나지 않았고, 왼쪽 경동맥 혈전증도 나타나지 않았다. 혈액순환이 매우 원활한 상태였다. 완전한 회복이었다. 5월 30일 페키 교수는 페랭을 재검진했는데 결과는 같았다. 마찬가지로 안과 전문의 드레비롱 박사가 실시한 검사에서도 이전의 병리적 증상들이 모두 사라졌음이 확인이 되었다.

시력이 0.05였던 왼쪽 눈은 1.0이 되었고, 혈압은 135/90 이었다. 오른쪽 다리와 손도 완벽하게 제 기능을 했다. 졸라와 같은 비판자들은 루르드의 기적 치유가 모두 ‘히스테리 성 사례들’이라고 주장해 왔다. 나는 네 의사가 서명한 심리학적 평가서를 소개하고자 한다.

“세르지 페랭 씨는 회계사다. 정확성을 중요시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지만, 어느 면에서 보더라도 그것은 결코 신경증적인 거이 아니다. …. 그는 참착하고 매우 안정되어 있다. …. 정신병의 징후는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 그는 극적으로 표현하지도 않았고 자기 중심적 성향도 보이지 않았다. …. 우리는 그에게서 불안감의 징후 또한 발견하지 못했다.”

1973년 보고서에서 의사들은 페랭이 앵거스 교구청과 교구에서 운영하는 무주택자 보호시설에서 주당 20시간 회계업무를 보았다고 기록했다. “그는 이렇게 일하면서도 전혀 피로를 느끼지 않았다. 더 이상 두통이나 현기증, 근육경련 또는 팔다리 마비 증상도 나타나지 않았다. 기억력이나 말솜씨도 또렷하고 정확했다. 강의와 강연도 자주 다녔다. 그리고 밤이든 낮이든 운전하는 데도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이전에 발작적 마비 증상도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

마르셀 의과대학 교수이며 마르셀 시의 여러 병원에서 신경과 고문역을 맡고 있는 피에르 무렝 박사는 페랭의 치유 사례에 관해 루르드 의무국이 펴낸 소책자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세르지 페랭  씨의 뇌혈관 병변 病變 은 의학적으로 불가해한 방법으로 치유되었다.”

 페랭이 치유된 지 6년 후에 루르드 의무국은 프랑스 북동부의 트로에 시에서 여러 병원의 안과 고문역을 맡고 있는 도미니크 바르톨리 박사에게 페랭의 치유 사례를 재검토해 달라고 부탁했다. 바르톨리 박사는 소오리스 박사, 페키 교수 그리고 안과의사 드레비롱 박사가 수집한 진료 보고서를 건네 받았다. 자신의 전문 분야인 안과질환과 관련한 그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본인의 공식적 의견은 시신경 다발에 심각한 기절적 병변이 일어났으나 불가해한 방법으로 이제는 말끔히 해소되었다. 의학적 견지에서 볼 때, 특히 회복 속도와 회복의 총체적 성격을 고려한다면 더욱 불가해한 일이다.”

무렝 교수는 페랭의 회복이 의학적 견지에서 볼 때 불가해하다는 진술을 글로 남기면서, 동시에 루르드에서 치유의 은혜를 받은 많은 이들한테서 발견되는 그 무엇을 언급했다. 그것은 치유 은총에 대해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든 자신의 경험에 대해 이야기할 준비가 되어 있는 열의와 함께 평온함이 조화롭게 공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무렝 교수의 글을 인용하면 “페랭은 자신의 질병과 치유에 관해 사람들에게 알리는 일이 자신의 의무요, 심지어는 도덕적, 종교적 책임이라고 여긴다. 그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은 마지막 부분에서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서 페랭의 진술을 들어보자. “고작 4센티미터 정도의 동맥 혈관에 생사 여부가 달려 있었습니다. 1970년 여름을 맞이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의사들의 말을 들었던 터라 저와 가족들은 무척 기뻤습니다. 우리 앵거스 교구와 리옹 앵거스 본당에서도 영예로운 일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저의 치유를 통해 기름 바르는 의식(塗油式)은 종부성사의 의미보다는 병자성사의 의미가 훨씬 더 크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렇게 과분한 은총을 허락하신 주님과 성모님께서는 제게 무엇을 기대하실까요? 제가 그 기대에 잘 응답할 수 있을까요?  기적 치유에 관한 제 글을 읽으신 분들은 제가 항상 주님 은총의 증인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모든 일이 잘 풀리고 만족스러울 때 사랑이신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삶이 힘겨워지면 불신이 싹틀 수 있다. 호주인 봅 산타마리아에게서 좋은 예를 엿볼 수 있다. 그가 1998년 2월 82세의 나이로 운명했을 때, 패트릭 오파렐 교수는 그를 “20세기의 가장 훌륭한 평신도”라 표현했다. 클랜시 추기경은 그를 “이 시대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의 하나로서 교회와 국가에 훌륭한 발자취를 남겼다” 고 말했다. 전 국무총리 말콤 프레이저(프로테스탄트)는 이렇게 말했다. “선한 영향을 끼친 사람으로는 그에게 비할 자가 없다. … 그는 생활 속에서 가톨릭적 가치들을 실천했다.” 산타마리아는 분명 단순하면서도 깊은 신앙을 간직한 채 죽음을 맞이했다. 하지만 그도 신앙의 갈등을 겪었다. 그가 ‘시드니 모닝 헤럴드’  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하느님의 ‘존재 여부’ 에 대한 논쟁이 많습니다. 하지만 저는 악의 문제, 부당한 고통, 이유 없는 고통이 ‘은총과 자비를 베푸시는 분’으로서의 하느님에 대한 불신을 야기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게는 이 점이 가장 큰 고민거리였습니다.”

산타마리아의 장례미사에서 평소 그와 친분이 있던 펠 대주교는 그가 신앙의 갈등을 겪었던 시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함축적으로 표현했다.

“그의 깊은 확신은 고심과 고투 끝에 얻어진 것입니다. 그는 불가지론에 대한 유혹이나 하느님에 대한 문제들을 골치 아픈 것, 알 수 없는 것으로 제쳐놓고 싶은 유혹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이 정말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왜 더 쉬운 방법으로 하느님을 깨닫고 발견하도록 하시지 않는 것일까? 나는 이 문제에 대해 우리 시대 위대한 구약학자인 미국 예수고난회 소속 캐럴 스툴뮬러 수사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다. 그분이 이런 말을 했다. “‘하느님을 찾아’ 라는 표현 또는 이와 같은 의미를 갖는 표현이 성서에 165회나 등장합니다.

나는 ‘찾다(seek)’의 사전적 해설을 찾아보았다. “중세 영어 seken 에서 유래함. 인도유럽어족의 어간은 sag로 추적하다, 찾아내다 라는 뜻. 라틴어 어원 sagire는 냄새로 찾아내다, 인지하다 라는 뜻. <참조> 영어 sage(현명한) 는 라틴어 sapiens(지혜)에서 유래하며 그 뜻은 ‘알다’, ‘음미하다’ 이다. 찾다(seek)의 동의어는 try to find (애써 찾다), search for (탐구하다), explore (조사하다), try to discover (애써 발견하다), pursue (뒤쫓다, 추구하다)이다.”

‘찾다’에 이렇듯 의미심장한 뜻이 담겨 있다니! 하느님은 우리에게 ‘찾는 이’가 되라고 하신다. 이를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분을 찾는 과정에서 그분의 초월성과 사랑을 경험하게 된다. 갓 태어난 송아지는 본능적으로 곧장 어미소의 젖을 찾아간다. 갓난아기는 한없이 우월한 종임에도 그렇게 하지 못한다. 갓난아기는 점차적으로 자기 어머니가 누구인지를 깨달아 간다. 버질은 그의 ‘전원시 詩’에서 갓난아기가 ‘엄마의 웃음을 보면서 그가 자기 엄마라는 것을 차차 인지하게 되는 모습’을 그렸다. 어머니와 자식간의 사랑은 너무나도 소중하다!

그러나 그 소중한 관계는 바람 잘 날 없는 사춘기와 불안한 청년기를 거치면서 복잡하고 고통스러운 관계로 변한다. 결혼생활 초기, 배우자 자족과의 관계 또한 그렇다. 여러분은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성공한 사위 뒤에는 언제나 놀라 자빠질만한 장모가 있다.” 그리고 또 이런 말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결혼식과 함께 아버지는 딸을 떠나 보낸다. 그러니 어머니도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 진실된 가족 관계는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부단한 노력으로 ‘찾고 구함으로써’ 창조된다.”

일본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금언이 있다. “아끼는 자식은 멀리 여행을 보내라.” 가족을 그리워하는 마음 (그리고 자식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사랑을 깊게 하고 정화하고 더 성숙할 수 있도록 한다. 1948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T. S. 엘리엇 은 전세계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말을 남겼다. 그 말에는 진실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여정의 종착지는 우리가 처음 여정을 시작한 곳이 되로 것이며 그제야 비로소 그곳이 어떤 곳인지를 깨닫게 되리라.” 우리가 찾는다면, 진정으로 찾는다면 우리는 실재를 찾아낼 수 있다. 인간의 마음과 영혼은 부단히 ‘찾아 나서며’ 결국에는 찾아내도록 창조되었다. 우리 몸의 근육 또한 꾸준히 걷고 무거운 것을 들어올리는 일을 하면 성장하고 강해지지만, 그런 일을 하지 않으면 약해지고 감소되도록 만들어졌듯이.

문학과 철학으로 인류 사상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고대 그리스인들의 격언에 ‘고귀한 것은 힘들다’라는 말이 있다. 또 이것과 밀접하게 연관된 ‘상처 입은 의사만이 치유할 수 있다’라는 격언이 있다. 심층심리학자 융은 인간의 조건을 꿰뚫어본 매우 의미 깊은 통찰로 이 격언을 인용했다. 융은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자신의 설교에 확신과 신념을 갖지 못했던 아버지로부터 교육을 받고 성장한 융은 성인이 되어 하느님을 거부했다. 그는 정신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장애를 겪고 있는 사람들과 가까이 지낸 뒤 다시 믿음으로 돌아섰다. 오랫동안 고민하고 찾은 결과였다. 1959년에 있었던 BBC방송과의 인터뷰가 유명하다. 인터뷰 도중 그는 도전적인 질문을 받았다. “박사님은 도대체 하느님을 믿는 겁니까, 믿지 않는 것입니까?” 노박사는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나는 하느님을 믿는 게 아닙니다. 나는 그분을 압니다!”

1953년부터 1961년까지 유엔 사무총장을 지낸 대그 해머스콜드는 매우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부유함 때문에 치명적인 방황과 절망을 겪어야만 했다. 스웨덴 수상의 아들이었던 그는 젊은 나이에 대학교수가 되었고, 스웨덴 중앙은행 총재가 되었다. 그 후 명망 있는 외교관으로 조국에 봉사하다가 유엔 사무총장이 되었다. 그리고 그가 죽은 후 곧바로 노벨 평화상이 수여되었다. 그의 인생은 대단히 성공적이면서도 한편 매우 위태롭고 아슬아슬했다. 그런 속 사정은 그가 1961년 비행기 사고로 죽은 후 일기장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일기장에는 오랫동안 겪은 ‘두려움’, ‘고독’, ‘원망’ 과 자신의 ‘비겁함과 되풀이한 거짓말’에 대한 역겨움, 자시 혐오감 등이 담겨 있었다. 또 ‘가장과 위선’에 ‘지친 영혼’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한때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잃고 ‘스스로를 신으로 삼았다’.

일기장의 한 구절이다. “황량한 겨울 빙판을 가로질러 뒤쫓아오는 이리떼를 발견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란다!” 자살에 대한 끔찍한 메모도 두 번이나 있었다. ‘흔적들’이라는 제목으로 해머스콜드의 일기장을 영문으로 출판한 편집장 W.H. 어덴은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살을 생각한다는 것이 그에게는 생소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1953년 첫 메모에서부터 분위기가 극적으로 변화되었다. “지난 모든 일에 대해 감사! 앞으로 다가올 모든 일에 대해 예(Yes)!” 그는 하느님을 다시 찾았던 것이다. 그때부터 일기 내용은 자기 자신만을 믿고 섬겼으며 가시적인 성공만을 추구해 왔던 염세주의와 혐오스러운 자기 도취에서 탈피하게 되었다. 그리고 일기에는 시편과 신비가들에게서 인용한 문구들도 가득했다. 그는 16세기 스페인의 시인이요 예언자인 십자가의 성 요한을 세 번 인용했다. 그리고 ‘영혼의 깊은 밤’을 지나 이성적 사고 저 너머에 계신 하느님을 발견했다. 그에 대해 십자가의 성 요한은 이렇게 함축적으로 표현했다. “신앙은 하느님과 인간 영혼(the Soul)간의 결혼이다.” 여기서 영혼을 대문자로 표기했는데, 인간은 하느님 안에서 고유의 인격적 가치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해머스콜드는 십자가의 성 요한이 내린 신앙에 관한 정의에 크게 감격했다. 덧붙여 말하자면 열정(enthusiasm)이라는 단어는 그리스어 ‘en(안에)’ 와 ‘Theos(하느님)’에서 유래한다. 해머스콜드는 1953년 하느님을 다시 찾으면서 의구심과 불확실함에서 벗어났다.

 

나는 세르지 페랭의 치유에 관한 무렝 교수의 소책자를 인용하면서 이야기를 마무리하려 한다. “페랭을 누구보다도 잘 알며 그의 직업적 양심과 영적 건강을 보증하는 소오리스 박사와 함께 우리(루르드 의무국에 제출할 보고서를 작성하도록 파견된 전문의들)는 페랭의 집을 방문했다. 단순하면서도 짜임새 있는 살림살이들…. 매우 화목한 가정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기적 치유를 통해 위에서 사명을 받았다는 확신이 그의 삶의 의미요 주제였다.”

대부분 사람들은 어린 시절 즐거운 기억을 한두 가지쯤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내가 잊지 못하는 어린 시절의 기억 하나는 굼뜬 증기 기관차에 몸을 싣고 열아홉 시간을 버틴 일이다. 좌선은 딱딱했고 먹을 것이라고는 파이 두 쪽뿐이었다. 게다가 터널을 통과할 때면 닫히지 않는 창문으로 연기와 그을음이 들어왔다. 그것은 방학을 맞이하여 성 요셉의 헌터스힐 기숙학교에서 6백 킬로미터 떨어진 고향 리스모어로 가는 여정이었다. 수업, 공부, 기숙사에서 해방되는 것이었다. 우리는 창 밖으로 목을 길게 빼고 고향의 푸른 초원이 나타나기를 몇 시간씩 하염없이 기다렸다.

루르드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예수께서 말씀하셨듯이 “아직까지 내 아버지께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 메시지는 본질적으로 삶이란 편안히 안주할 오아시스 찾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삶은 길고 험난한 여정이다. 그 목적지, 곧 우리의 본향은 죽음 이후 하느님의 복된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다.

최근에 <길을 걸으며 나눈 신앙 Foi Diet en Passant> 이라는 멋진 책이 불어로 출간되었다. 이 책의 저자는 저널리스트 루크 에드리언 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미디어를 통해 보도되는 온갖 우울한 뉴스에 신물이 난 그는 30일간의 휴가를 내어 브레튼 해안 오레이 에서부터 스페인 접경 지역에 있는 프랑스 루르드까지 약 9백 킬로미터를 도보로 횡단했다. 배낭과 침낭을 짊어지고 울퉁불퉁한 시골길과 포도농장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소나기를 피하느라 숲 속으로 뛰어들기도 했다. 그렇게 걷는 동안 머릿속이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소음으로 가득한 도시와 귀에 거슬리는 온갖 ‘고통스러운 비명과 자살 관련’ 뉴스에서 멀어질수록 그는 현대 문명이 우리를 속이고 있음을 확실하게 깨달았다.  “현대 문명은 우리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위해 존재하며 지금 여기서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음성은 그 말이 거짓임을 일깨우려 한다. 그리고 우리 몸과 영혼은 이 세상 너머에 있는 본향, 곧 하느님께 나아가도록 창조되었음을 일러주려 애쓰고 있다. 그는 또 이렇게 덧붙였다. 창조주는 그 여정으로 우리가 나아가도록 격려하기 위해 영혼 깊은 곳에 본향에 대한 그리움을 심어놓으셨다. 도보 순례에 나선 철학자요 저널리스트인 에드리언 은 이렇게 말했다. “20세기 말, 현대인의 영혼이 겪고 있는 불안과 반항적 성향은 덧없는 세상과 물질적 실재라는 좁은 한계에 갇혀 있는 오늘에 대한 정상적 반응이다.”

루르드를 향해 걸으면서 에드리언 은 더 큰 통찰을 얻었다. 그것은 고기, 생선, 파, 마늘 등을 공급해 주며 비굴한 노예생활에 묶어 두려 했던 이집트의 감금상태에서 탈출하도록 부름 받은 이스라엘 백성의 비전이었다.   지도 한 장 없이 광야를 가로지르는 머나먼 여정은 고통스러운 일이며 자신의 이기심과 욕망을 포기해야 한다. 하지만 이는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 ‘잊지 못할 기쁨과 환희’를 누리게 되기 때문이다.

매년 550만 명의 순례객들이 루르드를 찾는다. 그 중 많은 환자들은 이미 다녀갔으나 치유 받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계속 루르드로 되돌아오는 이유는 에드리언 이 말한, 그 잊지 못할 기쁨과 환희를 그곳에서 얻기 때문이다.

 

 

 

8. 알렉시스 카렐 박사

하느님을 찾아 나선 노벨상 수상자

Dr. Alexis Carrel – A Nobel Laureat’s Unplanned Search for God

 

요즘에는 판매되지 않지만 ‘아빠’라는 상표의 비누가 있었다. 그 비누 광고 문구는 ‘아빠에게 맡기세요!’ 였다. 우리는 누구나 아버지의 말과 행동에 대한 향수 어러니 기억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내가 알렉시스 카렐 의 <루르드 여정 Journey to Lourdes>  을 처음 접한 곳이 바로 아버지의 침대 옆 책상이었다. 그 책이 내게 특별한 의미를 갖는 이유도 그런 인연이 있기 때문이다. 카렐은 기적에 대해 논하는 것 자체를 금기로 여기는 현대 과학자들의 풍조에 종지부를 찍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의 삶과 종교와의 관계는 믿음이란 과연 무엇인지를 설명해 주는 좋은 예가 된다. 여기에 관해서는 나중에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먼저 과학자 카렐을 소개하고자 한다. 1873년 리옹에서 태어난 그는 다섯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어머니 슬하에서 성장했다. 신심이 깊은 어머니는 그를 가까운 예수회 학교에 입학시켰다. 그러나 대학시절에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 매료되었다. 그 책은 우리가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실재들의 ‘원인’에 대해 어떤 확신을 갖는 것은 불가능함을 입증해 보이며 카렐을 유혹했다. 그러므로 칸트에게, 그리고 청년 카렐 역시 창조주 하느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카렐이 도덕성의 유일한 원천인 하느님에 대한 칸트의 ‘윤리적 논쟁’을 이해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결국 하느님은 오래된 이론적 문제일 뿐 인간의 삶에 실제적 관계나 의미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인간의 정신은 물질계를 벗어난 것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 없다고 보았다. 미래를 개척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과학자라고 결론을 내린 카렐은 열정적으로 의학 공부에 몰입했다. 이 시기를 회고한 글을 보면 ‘관대한 회의론자’가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빠짐없이 미사 참례를 하는 어머니의 ‘유아적이고 환상적인 희망들을 비웃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는 대학 재학시절에 프랑스 육군 산악부대에서 일년간 복무했는데 “종교에 대한 회의적 입장이 더욱 공고해졌다. 우리 부대원들은 초자연적 존재의 도움 없이도 모든 일을 잘 처리해 나갔다”. 그는 리옹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리옹 의과대학에서 해부학 강의를 하며 연구에 몰두했다. 1902년 스물아홉 살에 혈관 봉합 수술에 성공함으로써 의학계의 비약적 진보를 이루어 냈다.

카렐은 ‘연구에 대한 대학측의 편협한 자세’에 불만을 갖고 리옹 대학을 떠나 파리로 갔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1906년에는 뉴욕 록펠러 재단의 책임 연구원으로 일하기 시작, 1939년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1912년에는 그가 직접 계획, 지휘한 실험이 성공함으로써 세계 의학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그는 닭의 심장에서 떼어낸 생체조직을 실험관에서 지속적으로 유지시키는 데 성공했다. 생체조직은 1946년까지 산 채로 보존되었다. 그의 선구적 업적은 오늘날의 심장 수술, 혈관 봉합 수술, 장기 이식 수술 등을 가능하게 했다. 1912년에 카렐은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즉시 조국 프랑스로 돌아갔다. 그리고 록펠러 재단의 재정 지원을 받아 콤페네에 있는 군병원에 연구소를 만들었다. 전선의 병사들은 죽어가고 있었다. 상처 감염으로 절단수술이 필요했다. 카렐은 영국인 연구원과 함께 또 한번 의학적 개가를 오리게 되었다. 패혈성 상처를 치료할 수 있는 카렐-데이킨 용액을 개발했다. 이것은 곧 전세계로 전달되어 기본 의료 도구가 되었다.

그는 1915년 종전과 함께 다시 록펠러 재단으로 돌아가 찰스 린드버그와 함께 세계 최초의 인공심장23을 개발해 냄으로써 미디어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그리고 1935년에는 의학, 철학적 내용을 담은 <인간, 그 미지의 존재>를 출간하여 비상한 관심을 모았으며, 곧 18개국 언어로 번역되어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 책은 비인간화의 소외 문제를 경고하는 예언적 성격을 띠고 있는데, 그로부터 60년이 흐른 오늘날 우리가 절실하게 느끼고 있는 바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희망을 선포하는 책이기도 했다. 인류가 마르지 않는 ‘지혜’의 샘을 추구한다는 전제하에.

록펠러 재단의 새 책임자 허버트 가세르는 모든 직원의 정년을 예순다섯 살로 결정했다. 당시 카렐은 예순여섯 살이었다. 가세르는 예외를 인정하지 않아 1939년 카렐은 섭섭한 마음으로 록펠러 재단을 떠나게 되었다. 유럽에 전쟁이 터졌을 때 카렐은 동료들과 함께 새로운 과학윤리재단을 설립할 계획이었다. 그는 사랑하는 조국 프랑스로 돌아갔지만, 의료적 측면뿐만 아니라 모든 면에서 전쟁에 아무런 대비가 되어 있지 않은 현실에 충격을 받고 비타민, 의료장비, 지원금 등을 마련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카렐이 미국에 머무는 동안 프랑스는 항복했고, 국토는 독일군에 점령당했다. 친구들의 만류에도 그는 안전하고 안락한 생활이 보장된 미국을 떠나 스페인을 경유하여 프랑스로 돌아왔다. 비시24정부는 그에게 보건부장관을 맡으라고 압력을 넣었지만 거절했다. 대신 정부에 식량, 연료, 지원금을 제공하는 데 큰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파리에 과학윤리재단을 설립했다. 열악한 경제 형편으로 아내와 함께 냉방에서 힘들게 생활하며 자전거를 타고 다녀야 했다. 그의  건강은 점점 쇠약해져 갔다.

그는 고관들의 무능과 무책임을 비난함으로써 정부의 적이 되었다. 1944년 8월 연합군이 파리를 해방시키자 누군가가 카렐의 이름을 나치 협력자 명단에 올렸고, 신문은 그 내용을 그대로 기사화했다. 카렐은 큰 충격을 받았다. 연합군 최고사령관이었던 아이젠하워 장군이 친히 카렐에 대한 고발을 무효화하도록 명령했다. 하지만 카렐은 이미 정신적으로 깊은 상처를 입은 후였다. 1944년 5월 그는 두 번째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이제 카렐의 또 다른 면에 대해 알아보자. 1902년 젊은 의사요 의대 강사였던 카렐은 자신의 인생과 모든 인간 삶의 궁극적 의미를 찾아 나섰다. 당시 그는 의욕에 찬 연구원으로 결핵환자들을 많이 접했다. 스트렙토마이신25이 아직 없던 그때 결핵은 죽음의 신과도 같았다. 그는 병원 회진 때 유사 결핵환자를 발견하게 되었다. 겉으로는 결핵과 동일한 증상을 보이나 심리적으로 유발된 것임이 밝혀졌다. 그는 샤르코의 책을 통해 그런 현상에 대한 사전지식을 갖추고 있었다. 병리적 정신 상태가 유사 질병을 유발시킬 수 있으며 그것은 심리적 접근 방법을 통해 치유될 수 있다. 아들이 신앙을 잃은 것을 슬퍼하던 어머니는 카렐에게 루르드의 기적 치유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러나 루르드의 치유 사례들은 샤르코가 말한 ‘자기 암시’에 의한 것이라고 이해했다. 그는 이미 에밀 졸라의 <루르드>도 읽은 터였다. 에밀 졸라는 그 책에서 루르드의 기적 치유 사례에 대한 샤르코의 설명을 반복하여 인용하고 있다.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샤르코와 졸라의 의견과 상반되는 구스타브의 글을 접하게 되었다. 구스타브 박사는 ‘루르드 의무국’의 책임자였는데 질병의 즉각적 치유를 주장하고 있었다. 카렐은 더욱 엄격하고 정밀한 검사를 한다면 구스타브 박사가 말한 사례들도 모두 심리적인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리고 루르드의 치유 사례들을 살펴보는 것도 매우 흥미로운 작업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동료 의사가 루르드로 떠나는 5월 순례단의 의료봉사자로 참가하기로 했으나 개인 사정으로 갈 수 없게 되자, 카렐은 자신이 대신 가겠다고 나섰다. 그 결과 카렐 박사의 <루르드 여정>이 출간된 것이다. 다음의 내용은 기본적으로 이 책을 참고했다. 그리고 이 책의 내용과 카렐이라는 인물을 연구 조사한 프랜시스 이자아드 박사와 스탤린 잭키 신부의 글도 참조했다. (스탠리 잭키 신부는 종교, 과학 관련 서적을 30권이나 집필했으며 1987년 템플턴 상26을 받았다.) 카렐과 친분이 두터웠던 제임스 뉴턴의 책 <비범한 친구들> 중에 카렐에 관해서 쓴 부분도 참조했다. 마지막으로 루르드의 기록 보관소에 있는 카렐 관련 ‘기록 54’를 통해 얻은 자료들도 참조했다.

1902년 5월 26일 오후 1시, 리옹 역에서 순례객을 실은 기차가 출발했다. 들것으로 옮겨지는 환자 중에 마리 베일리 라는 여성이 있었다. 루르드 순례객 중 환자는 주치의의 서명이 들어 있는 상세한 진단서를 반드시 구비하도록 되어 있었다. 여행 도중 갑자기 상태가 나빠지기라도 하면, 동행하는 의료봉사단이 진단서를 참조하여 신속하고 적절한 조치를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진단서에 의하면 마리 베일리는 상당히 진행된 결핵성 복막염을 앓고 있었다. 당시 결핵성 복막염은 불치병이었다.

안경점을 운영하던 아버지 장 세레스탱은 마흔아홉에, 어머니 엘리자벳 지라드는 쉰둘에, 남동생은 스물네 살에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피를 토하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그녀를 결핵 요양소에 입원시켰다. 리옹 외곽에서 5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상트레 리옹에 있는 요양소는 한 수녀회(자비의 딸)에서 운영하고 있었다. 바실루스 결핵균이 그녀의 폐 속에 퍼져 있었다. 1901년, 배가 부풀어오르기 시작했다. 음식을 거의 먹지 못했으며 먹은 것마저 토해내기 일쑤였다. 요양소 의사 로이 박사는 말기 결핵성 복막염으로 진단했다. 그리고 배꼽 아래를 절개하면 수명을 ‘조금’ 연장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는 그녀를 리옹은 성 요셉 병원으로 이송했다. 그러나 외과 과작 굴리오 는 수술이 오히려 위험하다고 판단, 수술을 거절하고 다시 요양소로 돌려보냈다.

그녀는 극심한 통증에 시달렸지만 마음을 굳게 먹었다. 그녀는 기도를 많이 했다. 특히 리옹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중인 무신론자 친척을 위해 정성을 다해 기도했다. 그녀는 기도 중에 루르드까지만 갈 수 있다면 치유 받을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그리고 친척도 복음과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다시 회복하게 되리라는 믿음이 생겼다. 그녀는 다음 성지 순례단에 자신도 낄 수 있게 해 달라고 했다. 그러나 로이 박사, 수녀들, 가족 모두 그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다면 반대했다. 그녀는 끝까지 고집을 꺾지 않았고, 마침내 그들도 어차피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동의했다.

마리처럼 루르드에 대한 깊은 신심을 간직하고 있던 젊은 간호사 가브리엘 고이랑이 그녀와 동행하겠다고 자원했다. 가브리엘은 마리와 같이 생명이 위독한 환자는 순례단에서 제외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적당한 구실을 대고는 기차가 출발하기 직전에 마리를 몰래 태웠다. 병원으로부터 기차역까지 오는데도 마리는 매우 지쳐 있었고 통증도 심했다. 가브리엘이 좌석 두 개들 붙여 그 위에 매트리스를 올려놓은 다음 편안하게 눕혀주자, 마리는 창백한 웃음으로 고마움을 표시했다. 가브리엘도 웃음으로 답했지만 그 웃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흔들리는 열차에서 오랜 시간 시달리다 보니 마리의 상태가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새벽 3시가 되자 마리는 그만 혼수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기차가 어느 역에 잠시 정차하자 가브리엘은 카렐 박사의 객실을 찾기 위해 어두운 플랫폼을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가브리엘은 카렐 박사에게 도와 달라고 사정했다.

일기 형식으로 쓴 카렐 박사의 저서 <루르드 여정>에서 이 부분이 나오기 전가지 내용은 다소 명랑한 분위기였다. 순례자들의 모습과 5월의 아름다운 시골 풍경 등을 묘사해 놓았다. 그러나 그가 마리가 있는 객차에 도착하는 순간부터는 분위기가 극적으로 바뀐다. 그는 마리의 충격적인 상태를 보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간호사에게 마리의 최근 병력에 대해 들은 그는 모르핀을 주사했다. 그는 부풀어 오른 마리의 배를 만져보고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복부 팽창은 단단한 덩어리 때문이며, 배꼽 부분에 우묵하게 유동체가 느껴진다. 전형적 결핵성 복막염이다. 체온은 정상수치를 넘어섰고, 다리는 부어 있으며, 심장박동과 호흡은 매우 빠르다.

기차가 다시 정차할 때까지 카렐 박사는 자리로 돌아갈 수 가 없었다. 그렇게 위독한 상태에 있는 여성이 24시간 이상 걸리는, 그것도 아무 가망도 없는 순례 여행에 나섰다는 사실이 어이가 없었다. 그리고 여명이 밝아오면서 그 객차에 있는 다른 병자들의 모습이 하나 둘 눈에 들어오자 그는 메스꺼워지기 시작했다. “남루한 차림의 두 여자가 자식들을 데리고 있다. 한 아이는 무릎에 종양이 있었고 또 한 아이는 정신지체였는데 몸은 다 큰 처녀였다. 그 아이는 굳어버린 듯 자리에 꼼짝 않고 앉은 채 길게 늘어뜨린 혀를 힘없이 덜렁대며 짐승처럼 소리를 내고 있었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눈부신 5월의 풍경과 ‘병자들을 가득 실은 객차의 소름 끼치는 우울함’은 극적인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5월 27일 오후 2시가 다 되었을 때 멀리 가브(루르드의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보이자 사람들이 환호성을 울렸다. 그때 감정의 변화를 느끼고 스스로 놀란 카렐은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루르드의 가늘고 뾰족한 산봉우리와 우아하고 고결한 그 자태. 그리고 객차에서 다른 객차로 퍼져 나가는 아베마리아 합창소리. 그것은 교회 성가대 소녀들이 꾀꼬리 같은 소리로 부르는 판에 박은 듯한 합창이 아니라 바로 가난한 이들의 기도소리였다.”

루르드 역에서 기다리고 있던 들것 드는 자원봉사자들이 마리와 다른 병자들을 세븐 소로즈 병원으로 옮겼다. 카렐은 들것 드는 자원봉사자 가운데서 동창을 발견하고는 놀랐다. 카렐은 그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다만 A.B.로 불렀다. 후에 두 사람은 커피를 마시게 되었다. 카렐은 자신이 신자로서 그곳에 온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단지 “기도 안에서 하나로 뭉쳐 고양된 군중의… 그 놀라운 자기 암시의 효과”를 관찰하고 연구하러 왔으며 “자기 암시는 신경계통에 엄청난 효과를 가져다 줄 수 있지만 기질적 질병에는 전혀 효과가 없다”고 설명했다. A.B.는 기질적 질병이 즉각 치유된 공인된 사례들을 들어가며 즉시 반박했다. 그리고 러더씨의 경우가 대표적인 사례라고 덧붙였다. (이 사례는 다른 장에서 다루었다.) 카렐이 반박했다.

“신심에서 나온 종교적 주장일 뿐이며 객관적이고 과학적 조사가 부족하다. 만일 러더씨의 사례가 과학적으로 입증되었다면 그것은 진정 기적이며 하느님의 표징이며 초자연적인… 그런 사례들을 철저한 무신론 입장에서 접근하는 것이 나의 의무이며… 이전에는 치유될 수 없다고 판단되었던 전신마비나 관절염 등이 신경성 질병일 수 있고, 그런 것은 즉각 치유될 수 있음을 샤르코가 이미 입증하지 않았는가…. 그런 회복 사례는 이곳에서도 나오겠지만 진짜 기질적 질병들은 해당되지 않는다. 내가 돌봐주었던 마리와 같은 환자 말인데… 그녀는 결핵성 염증과 폐기능 장해가 있고 지난 8개월간 보르도의 유명한 외과의사에 의해 복막염으로 진단받고… 그녀에게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 만일 그녀가 치유된다는 나는 다시는 의심하지 않겠다. 아예 수사가 되겠다!”

A.B.는 껄껄 웃으면서도 성급한 맹세 따위는 하지 않는 게 좋다는 지적을 잊지 않았다.

카렐은 병원으로 돌아가서 마리에게 안부를 물었다. 그녀는 힘없이 카렐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눈 주의는 검게 변했고 초점은 흐릿했다. 말을 하려 했지만 창백한 입술에서는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맥박은 분당 150으로 불규칙하고…. 부풀어오른 복부는 여전히 단단한 덩어리가… 양다리는 부어 있고… 코끝과 양손은 얼음장 같이 차며… 귀와 손톱은 시퍼렇고…” 보르도 근처에서 개업하고 있는 한 의사가 병실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카렐은 그의 소견을 부탁했다. 주의 깊게 살펴본 의사가 속삭였다. “곧 죽겠어요.” 카렐은 병실 책임자 수녀에게 가서 마리를 성수탕으로 이동시킨다거나 촛불 기도 행렬 등에 참여시키는 것은 무책임한 짓이라고 일렀다. 하지만 수녀는 완강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가엾은 처녀의 마지막 소원을 거절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들은 마리를 들것에 실어 성모 동굴로 데려갔다. 고이랑 간호사는 곁에서 큰 양산을 펼쳐 들고 따가운 햇볕을 가려주었다. 카렐은 병리적으로 가망이 없는, 가엾고 비참한 병자들이 줄지어 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전에 없던 감정에’ 휩싸였다. …. 그리고 성모마리아라는 존재가 단순히 인간의 상상력이 빚어낸 매력적 허상이 아니기를, 그 가련한 병자들과 함께 믿어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그는 어느새 “심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마리를 위해 기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생명을 회복시켜 주고 자신에게는 믿음을 회복시켜 달라고 성모님께 청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고양된 감정’이 오래가지는 않았다. 그는 다시 “조리 있는 과학적 탐구 자세로 돌아가 객관적 시각에서 관찰할 것을 스스로 다짐했다.”

고이랑 간호사는 마리와 함께 성수탕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그들은 곧 나왔다. 간호사의 말에 의하면, 마리가 너무 기진맥진해 보여 성수탕으로 들어가는 대신 물을 떠서 그녀의 부풀어오른 배에 부어주었다고 했다. 카렐은 수첩에 그때 시각을 적어놓았다. 오후 2시 20분이었다.

그들은 마리를 다시 성모 동굴로 옮겼다. 들것 시세를 져야 하는 다른 환자들이 그녀의 뒤를 이었다. 마리는 제일 앞자리에 앉았다. 담요로 몸을 가렸지만 그녀의 배는 출산이 얼마 남지 않은 임산부의 배만큼 컸다. 젊은 사제가 병자들과 그 뒤에 모여있는 군중을 바라보며 큰소리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군중은 열광적으로 응답했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여, 사랑하올 예수 그리스도여…” 사제가 십자가 위의 예수처럼 양팔을 들자 많은 이들이 그대로 따라 했다. 카렐은 군중이 감정에 북받치는 모습을 보고 “마치 돌풍이 몰아치는 것 같았다” 고 서술했다.

그는 미리 눈여겨보아 두었던 병자들의 표정을 관찰했다. “특히 신경계통 환자들의 표정을 살폈는데, 그들 중에 갑자기 일어나 치유 받았다고 환호하는 환자가 나오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그런 사례는 한 건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실망했다. 열광적 기도와 고양된 분위기에 편승하여 자기 암시와 종교적 히스테리증에 의한 ‘치유’ 사례 한두 건은 목격할 수 있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그는 들것에 누워 있는 마리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에 화색이 돌고 가빴던 호흡도 안정되어 규칙적으로 숨쉬는 것을 확인했다. 그는 수첩에 오후 2시 40분이라고 적고 “자신의 관찰력을 총동원하여 그녀에게 집중했다. 그녀의 모습은 확실히 변하고 있었다.” 반쯤 감겨 있던 흐릿한 눈빛이 또렷해졌고 성모상을 ‘황홀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카렐의 수첩에는 또 다른 놀라운 변화가 기록되어 있다.

“오후 2시 55분, 부풀어올랐던 복부가 가라앉고 있다. 3시 10분, 완전히 가라앉았다! 환자에게 상태를 물어보니 ‘여전히 힘은 없지만 좀 나은 것 같다’고 대답했다.” 카렐은 자신의 “머릿속이 텅 비는 느낌이었고, 어떻게 생각을 정리해야 할지 몰라 미쳐버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고 덧붙였다.

자원봉사자들이 마리를 다시 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카렐도 따라갔다. 브와사리 박사는 카렐로부터 전후 사정을 들으면서 “전혀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의무국 원정은 마리가 기적 치유 사례로 인정 받는다 하더라도 결핵성 복막염 치유의 첫 사례는 아니라고 귀띔했다. 그리고 원한다면 의무국 기록실에 보관되어 있는 살바토르 신부의 치유 사례 문건을 보여주겠다고 했다.

살바토르 신부(카푸친27 수사)는 1898년 서른여섯 살에 폐결핵에 걸렸다. 2년 후 의사들은 장상에게 결핵성 복막염으로 죽음이 임박했으니 더 이상의 치료는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이 말을 전해 들은 살바토르는 의사들의 단호한 반대에도 루르드 성지 순례에 나서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브르타뉴의 디나르드에서 루르드까지의 열차 여행은 길고도 고통스러웠다. 6월 26일, 그는 거의 죽어가는 상태로 루르드에 도착했다. 자원봉사자들은 그를 즉시 성수탕으로 옮겼다. 그런데 그가 성수탕에서 나올 때 얼마나 “활기찬 모습이었는지, 자신이나 주위에 있던 사람들 모두 그가 치유되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고 의무국 공식 보고서에 기록되어 있다.

그날 밤 그는 마음껏 식사를 하고 다음날 의무국에서 검진을 받았다. 결핵의 징후는 말끔하게 사라졌다. 그 후 8년간 매년 검진을 받았으나 질병의 징후는 발견되지 않았다. 르네 교구의 듀보르그 주교는 의무국의 보고서를 자세히 검토한 후 사례를 연구, 조사하도록 신학자와 의사들로 구성된 위원회을 만들었다. 살바토르 수사는 그곳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위원회는 이 ‘심각한 기질적 질병의 즉각적이고 완전하며 결정적 치유’는 의학적으로 불가해하다고 규정했다.

1908년 7월 1일 대주교위원회는 살바토르 신부의 치유를 기적으로 인정했다. ‘교회가 인정하는 기적 치유’ 사례 목록 26번으로 등록되어 있다. 루르드 의무국 심사를 통과한 후 교회 당국의 공식 조사에 의해 인정된 사례라는 뜻이다. 1998년 위원회 의장인 T. 만자판 박사는 65건의 ‘교회가 인정하는 기적 치유’를 상세하게 소개한 책 서문에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루르드에서 일어난 모든 치유 사건을 교회가 인정하는 치유 목록에 포함시킬 수 없었다. 그렇게 하자면 백과서전 분량이 될 것이다. 오히려 그것으로도 부족할 것이다.”

 

다시 마리 베일리가 치유되던 날 카렐의 수첩에 기록된 내용으로 돌아가자. 그 엄청난 변화가 ‘성모 동굴에서의 종교적 열정으로 인한’ 일시적 현상일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그리고 기대하며) 그는 ‘긴장감과 불타는 호기심’으로 오후 7시 30분에 마리가 있는 병원으로 갔다. 그녀와 함께 의식에 참여했지만 치유 받지 못한 병자들 곁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그들의 행복해하는 표정’을 보고 놀랐다. 그는 실망스러운 표정이나 화가 난 표정을 예상했기 때문이다.

그가 병실에 들어섰을 때 그녀는 일어나 앉아 있었다. “생기 넘치는 맑은 눈으로…. 그녀에게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평온함이 느껴졌는데, 그로 인해 질병으로 가득했던 공간이 기쁨으로 채워지는 듯했다.” 그녀의 맥박은 분당 80회로 규칙적이었다. ‘희망과 두려움 사이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심정’으로 담요를 걷어본 그는 ‘작고 평평하고 살짝 들어간 젊은 아가씨의 배’를 확인했다. “배를 여기저기 눌러 보았는데도 통증이 없다고 했다. 단단하게 잡히던 덩어리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한 증상과 흔적이 악몽이었을 뿐이라는 듯 모두 사라져 버렸다. …. 다만 다리는 약간 부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심장이 무섭게 고동치고 있으며 식은땀을 흘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치 뒤통수를 둔기로 얻어맞은 듯했다.”

마리가 치유되기 전에 그녀의 상태를 점검했던 두 명의 의사와 함께 다시 검사해 보기로 했다. 그 결과 결핵성 복막염 말기 – 오진 가능성은 없었다 – 징후가 깨끗이 사라졌다는 데 동의했다. 이탈리아인 의사가 마리 가까이 서 있었다. 그는 최근 가톨릭으로 개종했는데 카렐에게 이렇게 말했다. “분명 기적입니다. 나는 당신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이 일로 인해 당신의 믿음이 회복될지도 모릅니다.” 카렐은 (자기답지 않게!)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두 번째 충격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비참함에서 빛과 자유 그리고 삶 그 자체로 구원된’ 젊은 여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마음속은 미래에 대한 희망찬 계획으로 흥분되어 있을 것이 분명했다. 24시간 전만 하더라도 그런 생각은 불가능했을 뿐 아니라 잔인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당연한 것이 되었고, 분명 미래 계획에는 결혼과 함께 단란한 가정을 이루는 것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기쁨으로 상기되어 있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제 다 나았으니 앞으로 뭘 할 생각인가요?”

“저는 성 빈센트 드 폴 자비의 수녀회에 들어가 병자들을 간호할 거예요.” 이 수녀회 수녀들은 자비의 딸이라고도 불리는데, 리옹 외곽의 요양소에서 마리를 돌봐준 바로 그 수녀들이었다. 세속적으로 성공하고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음으로써 얻게 되는 자기 성취감과 만족감이 행복의 필수조건이라고 생각하던 그에게, 마리의 결정은 큰 충격이었다. 카렐은 자신의 혼란을 들키지 않으려고 병실에서 슬며시 나왔다고 술회했다.

뒤엉킨 생각과 감정을 가라앉히기 위해 혼자 있을 공간과 시간이 필요했다. 그는 조용한 곳을 찾아 성모 동굴 뒤편으로 갔다. 그곳에서는 숲에서 부는 바람소리와 흐르는 강물 소리만이 들렸다.

한밤중에 횃불 기도 행렬이 시작되었다. 그는 멀리서 “많은 사람들이 목청 높여 부르는 음정도 가락도 맞지 않는 성가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사람들은 점점 뜨거워지는 열정으로 루르드의 성가 아베 아베 마리아를 합창하고 있었다”. 그들과 함께 성가를 부를 기분은 나지 않았지만 그는 “더 이상 근거 없는 희망과 기대를 거만한 미소로 비웃어 주고 싶은 마음은 없어졌다”.

높이 봉헌된 촛불 빛이 성모 동굴 너머 뒤편의 어둠을 어슴푸레 밝혀주었다. 그러자 A.B.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역시 조용한 곳을 찾아 그곳에 나와 있었다. 그는 카렐을 보고 부드럽게 웃었다. “이제는 납득할 수 있겠나? 이 의심투성이 철학자 양반!”

카렐은 아직 납득하거나 확신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었으므로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과학자는 초자연적 힘과 같이 확인되지 않은 원인을 쉽게 인정할 수는 없다네. 그 질병이 유사 복막염이 아니었다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겠나?”

“이보게, 너무 그러지 말게나. 바로 어제 자네 입으로 기질적 질병의 완벽한 예라고 하지 않았나? 그녀기 치유된다면 수도승이라도 되겠다고 하지 않았나!”

“성급한 맹세였다는 건 인정하네. 그러나 내가 의학적으로 판단을 내리는 데 실수를 했을 가능성도 있지 않은가.”

A.B.는 절대 그럴 리는 없지만 그것이 유사 복막염이었다고 하더라도 즉각적 치유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느냐고 되물었다. 그리고 마리의 경우처럼 그렇게 심각한 증상들이 짧은 시간 안에 사라진 경우를 본 적이 있느냐고 반문했다. 카렐은 A.B.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인정했다. 그는 또한 마리 베일리의 경우를 볼 때 루르드의 치유 사례들은 ‘단지 히스테리증과 자기 암시’로 치부하는 자세는 별로 설득력이 없다는 점도 인정했다. 그리고 “루르드의 성수에는 어떤 특별한 에너지가 있는 듯하니 반드시 조사해 보아야 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이에 A.B.가 반박했다. “그렇다면 루르드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어난 치유 사례는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예를 들면 벨기에의 피에르 드 러더의 경우 말일세. 드 러더씨를 직접 검진한 의사들이 서명한 서류를 의무국 기록 보관실에서 확인해 볼 수 있을 걸세.”

카렐이 대답했다. “이곳에서 엄청난 치유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의료계에 알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 내가 리옹의 동료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겠네. 의료위원회가 이곳에 와서 직접 확인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보네.”

만일 루르드의 치유 사례를 단지 ‘자기 암시’라고 설명한다면 그와 유사한 치유 사례를 다른 곳에서도 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고 카렐은 생각했다. 자신도 심인성 질병 사례들을 다루어 본 경험이 있지만 마리 베일리와 같은 즉각적 회복을 보인 적은 없었다. A.B.는 바보가 아니다. 물론 브와사리 박사는 말할 것도 없다. 그들은 루르드에서 그와 같은 즉각적 치유들이 많이 일어났다고 주장했다. 혼자 생각에 빠져 있던 카렐에게 A.B.는 다음날 새벽부터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먼저 들어가겠다고 했다. 그는 잘 자라는 인사와 함께 한마디 덧붙였다. “드 러더씨는 기도하는 동안에 치유되었다네….”

<루르드 여정>에서 다음의 다섯 페이지는 결단을 내리기까지 마음고생을 술회한 것이다. 자정이 되었다. 그는 “고독하고 혼란에 빠져버린 나약한 인간이었다. 그는 어둠 속에 웅크린 채 과학적 의혹들과 씨름하고 있었다”. 사태가 반전된 과정을 돌이켜보는 동안 그의 마음은 깊은 소용돌이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치는 사람처럼 절박했다. 루르드의 치유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그 무엇과 맞닥뜨리게 되더라도 자신 있다고 A.B.에게 말했다.  그렇게 확신에 차 있었건만 “기적이라는 문제에 직접 부딪히고 보니 비참할 정도로 난처해지고 말았다”.

루르드를 하나의 거대한 실험실이라 생각한다면 기적 치유도 과학적으로 조사할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전혀 다른 세계에 속하는 것일까? 그것은 과학의 영역을 넘어서는 것인가? 다시 말하자면 초자연적 세계도 자연세계처럼 실재하는 것일까? 하느님은 정말 존재하는 것일까? 그리고 과연 그 인격체는 현상계를 초월해 존재하면서도 현상계 안에서 의지를 가지고 활동하는 것일까? 루르드는 인간의 삶과 죽음의 의미, 그리고 죽음 이후의 문제까지 해답을 얻게 해주는 곳인가? 그의 “영혼의 갈등은 그칠 줄 몰랐다.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성모 마리아는 단지 상상력의 산물이 아님을 증명할 방법도 없었다. 어느 쪽도 증명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었다”. 5년 전에 세상을 떠난 파스퇴르가 그런 확신을 가진 근거는 무엇이었을까? 카렐은 깊은 사색에 빠졌다 과연 그는 하느님의 초자연성과 과학 사이의 거리를 극복했던 것일까?

카렐은 마리 베일리에게 일어난 일을 자신이 목격한 대로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 보았다. 그녀는 루르드의 성수에 몸을 담그지도 않았다. A.B.가 자신 있게 주장한 바에 의하면, 드 러더씨의 부러진 다리는 루르드에서 2천 킬로미터 떨어진, 루르드의 성모상을 본떠 만든 성소에서 홀로 기도하는 동안에 치유되었다.  기도! 그렇다면 “엄청난 규모의 군중이 열광적으로 기도할 때 어떤 미지의 자연적 힘이 발산되는 것일까?”

새벽 2시경 그는 ‘불안하고 비참한’ 심정으로 성모 동굴을 지나 바실리카 성당 앞 넓은 피아자 광장으로 걸어나갔다. 늦은 시간에 놀랍게도 성당 안에는 성가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계단을 올라가 성당 입구에 서서 “결론에 도달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진단은 정확하게 내려졌고 부정할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하지만 그 ‘기적’의 원인이 ‘하느님’이었다는 것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 어떤 결론이나 결정도 지금 당장 내릴 필요는 없다! 언젠가는 확실한 판단을 내리는 데 충분한 증거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 경솔한 결정은 내리지 말자! 하지만….

바실리카로 들어가자 전등과 촛불이 눈부시게 빛났으며, 1천여 명의 바스크인들의 아름다운 화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는 맨 뒷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양손에 얼굴을 파묻고 아름다운 화음에 귀를 기울였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순례자들처럼 기도를 하고 있었다. 이 현상계 너머의 진리를 찾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도가 필요하다고 했던 A.B.의 말처럼 그는 기도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자신이 “죄인이며…. 영적으로 불안정하며 허영을 좇느라 치쳐 있음”을 인정했다. (그는 이런 내용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줄 의도가 전혀 없었다. 이것은 그저 사적인 메모였다. 이 글은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아내에 의해 <루르드 여정>이라는 책으로 출간되었다).

카렐은 과학적 실증주의와 불가지론을 버리고 적극적으로 기도했다. 그것도 마치 낭만주의자처럼! 그는 하느님보다는 성모님께 기도 드리는 것이 한결 편하게 느껴졌다. “온화하신 성모여, 당신께 의지하는 이에게 도움을 베푸시니… 당신을 믿습니다. 당신은 나의 청원을 눈부신 기적으로 답해주셨습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여전히 의심이 남아 있어 아직도 명확히 볼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열정을 다해 의심 없이 믿고 싶은 마음 간절합니다. 더 이상의 분석과 의심 없이 온전히 믿고 싶습니다.” 그는 깊은 사색으로 기도를 마무리했다. “엄격한 지적 경계심 밑바닥에는 억눌린 꿈이 아직 남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여전히 꿈에 지나지 않는구나. 그럼에도 그것은 꿈 중의 꿈이요 가장 아름다운 꿈이니, 밝은 영혼으로 그분을 믿고 그분을 사랑하는 꿈이다.”

그는 ‘기도에 몰입한 채’ 천천히 걸어 숙소로 돌아갔다. 그것은 거의 잊혀진 경험이었다. 작은 탁자 앞에 앉은 그는 커다란 녹색 공책을 펼쳐놓고 새벽이 밝아올 때까지 의미 깊었던 그날 하루의 일을 기록했다. 그는 공책을 덮고 일어났다. 들어올 때 분명 닫았다고 생각했는데 방문은 열려 있었다. 문 밖으로 고요한 여명을 바라보는 순간 “일상의 모든 걱정, 가설, 추측 그리고 지적 의구심이 사라졌다”. 카렐은 ‘확신’을 얻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 다음에 일어난 일들을 따라가 보자.

1902년 5월 27일 목요일 아침, 마리 베일리는 상쾌한 기분으로 일어나 옷을 입고 미사에 참례했다. 그리고 의료단의 허락을 받고 자신이 그렇게 원하던 성수탕에 몸을 담그는 의식을 치른 뒤 봉사자들의 안내를 받아 의무국으로 갔다. 브와사리 박사와 카렐을 포함한 여러 의사들이 그녀를 검진했다. 그리고 주치의가 작성한 진단서에 결핵성 복막염 – 지난 4년간 그녀를 괴롭혔던 질병 – 의 흔적을 전혀 찾을 수 없다는 내용의 진술서를 작성했다.

카렐에 이어 폴 지오프레이 박사의 진술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그는 전날 본 마리의 상태에 대하여 “전신이 쇠약해진 상태… 뱃속에 크고 단단한 덩어리가… 금방이라도 사망할 것 같았다” 고 진술했다. 그녀가 성모 동굴에서 돌아온 지 몇 시간 후 직접 그녀의 상태를 살펴보며 발견했던 변화들을 진술한 다음 이렇게 마무리했다. “본인은 이 환자처럼 결핵성 복막염이 몇 시간 안에 치유되는 것을 본 적이 없다는 점을 추가 진술하며 서명한다.”

생기가 넘치는 마리는 리옹으로 곧바로 돌아가겠다고 카렐에게 말했다. 그는 그녀를 만류했다. “오랫동안 병으로 쇠약해졌으니 24시간이나 걸리는 열차 여행을 한다는 것은 무리입니다.” 그녀가 자신의 몸에 대해 잘 알고 있다며 만류를 뿌리치고 기차에 올랐다. 그리고 리옹역에 도착해서 다시 전차로 갈아타고 집으로 돌아가,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가족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다음날 그녀는 괘 오랜 시간 전차를 타고 장시간 걸어서 “전에 자신을 정성스럽게 돌봐준 수녀님들”을 찾아갔다.

그녀가 루르드로 가는 것은 자살 행위라며 극구 반대했던 로이 박사는 여전히 수척한 마리의 얼굴을 보더니 자신의 동료에게만 넌지시 소견을 밝혔다. 마리의 상태가 단지 종교적 ‘히스테리증’으로 질병의 진행이 일시 정지된 것일 수 있다며 그녀를 다시 요양소에 입원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매일 마리의 상태를 점검했다. 그런데 그녀의 체중이 일주일에 1킬로그램씩 증가했다. 그는 그것을 보고 아연실색했다. 6주 후인 7월 15일에는 이렇게 기록했다. ‘치료 완료’. 그리고 그녀의 심리 상태도 지극히 정상이라는 소견을 덧붙였다.

11월 27일 카렐은 마리와 인터뷰를 했다. 그리고 4년간의 투병생활, 루르드에서 겪은 일, 현재의 건강 상태 등을 상세하게 기록했다. 다음날 마리는 파리로 떠나 ‘자비의 딸’ 루두박 수녀원에 입회했다. 카렐은 정기적으로 수녀원을 방문하여 마리의 혈액 검사와 소변 검사를 할 수 있도록 허락 받았다. 검사 결과는 브와사리 박사에게 보내졌는데, 기록은 아직도 루르드 의무국에 보관되어 있다. 검사 결과는 모두 결핵 음성 반응이었다. 카렐은 또한 루두박 수녀원의 공동체 생활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얼마나 혹독하고 엄격한지 강조했다.

마리와 동료 수녀들은 새벽 4시에 일어나 한 시간 묵상하고 이어서 미사에 참례한다. 아침 식사 후에 영성 강좌를 듣고 나면 공부시간이 된다. 그 다음에는 중노동이 시작된다. 커다란 공동체가 자급자족할 수 있어야 하므로 상당히 많은 노동량이 필요하다. 마리는 빨래방에서 일했는데, 세탁기나 전기 다리미가 없던 시절에는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카렐은 마리가 일을 많이 해본 농촌 출신의 건장한 수녀들과 견주어도 결코 뒤지지 않는 체력을 보였다고 기록했다. 마리는 힘든 수련생활을 건강한 모습으로 수료하고, 허원한 후 1937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자비의 딸 수녀로 생활했다. 그 동안 한번도 건강 때문에 어려움을 겪은 일은 없었다.  ‘자비의 딸’ 수녀들은 궁핍한 사람들, 특히 도시빈민들을 위해 봉사했다. 수녀들의 생활은 매우 엄격했고 무엇보다도 검소했다.

이제 카렐이 루르드에서 리옹 대학 연구실로 돌아간 1902년 6월로 가 보자. 그는 자신의 놀라운 발견을 동료들에게 알리고 싶어서 흥분되어 있었다. 그런 기회는 곧 찾아왔다. 리옹 대학 의학부 주요 인사들이 회합이 있었다. 그는 마리 베일리의 사례에 대해 열정적으로 설명한 후 이렇게 마무리했다. “이 치유 사례는 초자연적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만한 여지가 있습니다.” 다른 의사들의 반응은 ‘싸늘한 침묵’이었다. 카렐은 다시 이렇게 덧붙였다. “제가 오늘 아침에도 그 환자를 보고 왔습니다. 그녀는 완전히 치유되었습니다.” 그러자 한 의사가 갑자기 “치유되다니요?” 하고 소리질렀다.

그 다음 이야기는 카렐에게 들어보자.

“C교수가 말했다. ‘어리석은 생각을 즐기시는 것 같군요. 카렐 박사. 우리 대학 연구소에는 더 이상 당신이 있을 자리가 없음을 알려드려야겠군요.”

카렐은 기가 막히고 화가 나 곧 리옹 대학에 사표를 내고 파리에 일자리를 찾으러 갔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리옹 대학과 마찬가지로 적대적 반응을 보였다. 1904년에 그는 배를 타고 캐나다로 건너갔다. 그로부터 8년 후 카렐이 생리학 분야의 노벨 의학상을 탔을 때 C교수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에 관한 기록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리옹 대학 의학부와 마찰이 있은 직후 리옹에서 또 다른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 또한 카렐을 매우 불쾌하게 했다. 앞에서 언급했듯 마리 베일리는 하느님께서 자신을 치유해 주시면 무신론자인 저널리스트 친척도 믿음으로 이끌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루르드로 갔다. 그녀가 리옹으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친척이 방문했다. 그녀가 열정적으로 루르드에서 경험한 일을 성서까지 인용하면서 들려주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일어난 기적을 가장 가깝게 목격한 증인으로 카렐 박사를 소개했다. 그는 <르 누벨리스트> 6월 8일자 신문에 그녀의 기사를 실었는데, 이때는 마리가 치유된 지 2주도 채 안 된 때였다. 내용은 과격하고 공격적이었다. 기사의 끝맺음은 이랬다. “부족한 믿음에 대한 죄책감을 덜고 싶다면 마리 베일리의 사건을 기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루르드 의무국은 마리 베일리 사례를 기적이라고 하기에는 시기상조라며 기사의 주장은 옳지 않다고 했다. 그 치유 사례를 영구적으로 받아들이기까지 그리고 기적이라고 인정하기까지는 보통 몇 년의 시간적 여유가 반드시 필요했다.

1902년 프랑스는 분열된 국가로서 가톨릭주의는 주요 논쟁거리였다. 1789년 프랑스 혁명 이전의 가톨릭주의는 내부적으로 분열되어 있었으나 황실의 특권에 의해 지탱되었다. 주교들은 서민들과 접촉하지 않는 귀족이었다. 프랑스 혁명 기간 동안 서민들은 분노를 교회에 퍼부었다. 이는 공동정치 시절에도 지속되었다. 혁명 이후에 지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지도력이 내리막길을 걷고 있던 가톨릭 교회는 나폴레옹 3세의 집권 시기인 1852년부터 1870년 사이 황제의 은전에 의해 다시 지지 기반을 얻었다.

반가톨릭 성향의 공화주의자들은 프러시아군에 의해 황제 나폴레옹 3세와 군주제가 무너지자 교회에 가혹한 복수를 했다. 공화주의자들을 가톨릭 교회를 새로운 과학적 진보와 민주주의를 거스르는 적으로 여겼다. 그리고 교회가 운영하고 있던 수많은 교육시설을 매우 위험한 것으로 여겼다. 여러 가지 법제화 과정을 통해 대부분 수도 단체를 몰아내고 그들이 운영하던 학교와 수도원 그리고 수녀원을 몰수했다. 가톨릭 신자들은 공화주의자들에게 군주제와 ‘앙시앵레짐’28 복구를 위해 선동하는 존재들로 비쳤다. 얀센주의29, 갈리아주의30 그리고 정적(靜寂)주의31의 집안 싸움으로 이미 쇠약해진 프랑스 가톨릭 교회는 사회 복지와 행복에 방해가 되는 존재요 시대에 뒤진 집단으로 비쳤고,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르 누벨리스트>의 인기 있는 칼럼이 카렐 박사의 말을 다르게 인용하여 그가 가톨릭으로 개종한 것처럼 알려졌다. 카렐은 몹시 분개했다. 자주적 사고를 사랑하던 그가 언론에 농간을 당하지 않으려고 어느새 의심과 경계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르 누벨리스트>에 반론의 글을 발표하면서 종교에 대한 광신이나 맹목적 공격은 매우 애석한 일이라고 지적하고, 당리당략에 따른 언론의 선별 보도로 많은 사람들이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현실을 지적했다. 또한 루르드의 기적같이 초자연적 현상으로 보이는 치유 사례를 통해 언젠가는 자연에 숨겨진 어떤 힘을 찾아낼 수도 있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또한 사건의 진상을 조사해 보지도 않고 루르드의 주장을 무시하고 외면해 버리는 과학자들의 자세를 비판했다.

그는 리옹을 떠나 파리에서 의학 연구를 계속했다. 파리에 있는 동안 유태인 철학자 베르그송의 영향을 받았다. 당시 베르그송은 드 프랑스 대학에서 인기 있는 철학교수였다. 베르그송도 후에 카렐처럼 노벨상을 수상했다. 그는 과학자들의 ‘과장된 과학주의와 기계적 진화론’을 비판했다. 카렐은 리옹 대학 의학부 교수들을 떠올리며 당시의 일을 회상했다. 베르그송은 그런 과학자들에게는 인간의 영적인 면을 소홀히 여기는 경향이 있고, 자연을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지배하려는 오만함이 있다고 지적하면서 그 안에 큰 위험이 내포되어 있다고 보았다. 그도 인간과 자연에 내재된 ‘생명의 약동’을 강조하면서 하느님을 (생명의)’원천’으로 이해했다. 그는 성인과 신비가들을 ‘위대한 영웅’으로 보았다. 카렐은 베르그송의 생각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과학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 파리도 리옹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카렐은 1904년 다시 신세계를 향해 떠났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그는 뉴욕 록펠러 연구소 의학부 연구원이 되었다. 그는 기존의 종교 제도에는 신중한 자세를 취하면서도 루르드에서 일어나고 있는 기적 치유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1909년과 1910년에 루르드를 다시 찾았다.

1910년 루르드 방문 기간 동안 다시 한번 놀라운 ‘기적’을 목격하게 되었다. 선천성 시각장애를 가진 18개월 된 아기가 완전히 시력을 회복한 것이었다. 당시 아이를 안고 있던 간호사의 이름은 안나 데 라 모테 였다. 그녀는 매년 루르드를 방문하여 자원봉사를 하고 있었다. 카렐은 아이에 관한 자세한 정보를 그녀에게서 전해 들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두 사람은 가까워졌고, 마침내 1913년 12월 26일 결혼식을 올렸다. 그녀는 그의 연구 활동의 든든한 후원자였고,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원고와 글을 일부 출판했다. 그녀의 진지한 기도생활은 그의 영적 여정에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그는 1911년 다시 루르드를 방문했다. 1912년에도 스톡홀름에서 노벨상을 받고 돌아오는 길에 루르드를 방문했다. 1914년에는 전쟁이 터졌다. 그는 즉시 뉴욕을 떠나 프랑스로 돌아갔다.

전쟁이 끝난 후 다시 록펠러 연구소로 돌아갔다. 그리고 1930년 다시 루르드를 방문했다. 이때 그는 루르드 의무국에 보관되어 있는 마르그리트 아담이라는 벨기에 여성의 서류에 다른 의사들과 함께 서명했다. 그녀는 폐결핵 환자로 1929년 루르드에서 치유되었는데, 이듬해 의무국으로 돌아와 재검진을 받았다. 그 결과 결핵 흔적이 전혀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1931년 카렐은 소피 노르토프-융 상을 수상했다. 1935년에는 대서양 횡단에 성공한 첫 비행사이며, 공기역학 개척자인 찰스 린드버그와 함께 세계 최초로 인공심장 펌프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이것은 심장 수술을 가능하게 만든 것으로 의료계에 큰 진전을 가져왔다. 같은 해 <인간, 그 미지의 존재>를 탈고했다. 그러나 프랑스 출판업자가 출판을 거부하며 이렇게 말했다. “대단한 내용입니다만 프랑스에서는 50명의 독자도 확보하기 어렵겠습니다.” 그러자 그는 원고를 하퍼 출판사에 넘겼다. 그 책은 곧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19개국 언어로 번역 출판되기에 이르렀다.

책의 어떤 점이 그렇게 큰 호응을 불러일으켰던 것일까? 카렐은 많은 이들이 눈뜨기 시작한 문제를 명확하게 지적하고 표현해 냈던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현대 과학문명의 기초가 무너지는 불길한 전조에 대한 견해가 많은 이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그가 지적한 문제들이 몇 십 년 후 환경운동으로 활기를 띠게 되었다. ‘도시의 공해문제, 화학비료의 남용으로 토양의 생명력 고갈, 유해물질의 혼합으로 인한 식품의 품질 저하, 자연미의 파괴’ 등, 그는 현대 과학문명이 인류에게 가져올 재앙을 미리 내다보았다. 그리고 현대 과학문명의 부정적 성격은 사회의 미래를 책임지고 있다는 지도자들(정치인, 법조인 등)의 생각마저 오염시키고 있다고 보았다.

젊은 카렐은 과학자야말로 휴머니즘과 인류의 행복을 찾아나서는 이 시대의 탐험가요 선구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많은 과학자들이 ‘인류를 위한 고상한 공익’보다는 ‘가장 안락하고 편리한 생활’을 지향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고 보았다. 많은 과학자들이 ‘삶에 대한 기계적이고 물리화학적 개념’이라는 유아적 믿음을 생각 없이 받아들였으며, 이는 불가피하게 ‘목표의 평범함과 편협함’을 초래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새로운 종(種)의 과학자인 심리학자들과 정신분석학자들은 ‘허황한 마음속 이야기’를 떠벌리고 있으며 “사회 안에 광기와 어리석음이 날로 증가하고 있다”.

프로이트는 사회에 큰 해를 끼쳤는데 그의 발견이 ‘주로 병자(정신질환자)들을 관찰하고 연구한 결과’로 받아들여지기보다 보편적 원리인 것처럼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은 “자신의 기호에 대한 어떤 절제도 거부하기 시작했으며…. 이기심, 무책임함, 산만함으로 치닫고 있으며… 그들은 개별적으로 그리고 인류라는 종(種)으로서도 퇴보한다”. 이 모든 것이 “가족의 해체, 도덕성 해이, 어린이들의 순수성 타락, 선진 과학 문명을 구가하는 국가들이 야만적 사회로 되돌아가는 것”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민주주의 국가들이 웃고 즐기는 동안 히틀러와 스탈린이 꾸민 음모를 생각해 볼 때, 마지막 언급은 얼마나 정곡을 찌르는 비평인가!) 그는 현대 사회에 소회 현상이 만연되고 있음을 탄식했다. “인간은 자신이 창조한 세계 안에서 이방인이 되었다.”

이어서 그는 ‘깊은 생각’을 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고동’이 필수적이며, 이는 우리 모두 경험으로 알고 있다고 전제한다. 그러나 오늘날 공격적, 침투적 성향을 지닌 대중매체가 사회 환경을 소음과 싸구려 오락으로 가득 채워 사람들은 ‘들뜨고 불안하고 혼란스럽게’ 하고 있으며, 사회를 ‘음산하고 저속하게’ 변모시켰다고 지적했다.

그는 서구 문명은 ‘종교가 가족과 사회생활의 바탕이었던 시절이’ 훨씬 건강했다고 확신한다. 거기에는 성직자들에게 많은 책임이 있다고 지적하면서, 오늘날에도 종교를 ‘너무 이성적으로’ 가르치며, 열렬하고 간절한 기도생활이 결핍되어 있다고 말한다. 카렐은 역사 속 성인들과 묵상가들의  핵심적 역할을 지적한 베르그송의 글을 상기하면서, 참된 기도생활이 “강한 의지, 빛, 사랑, 이루 말할 수 없는 평화”를 가져다 주며 “신비주의는 그 너비와 깊이가 너무 넓고 깊으니 인간의 가장 고결한 이상을 충족시킨다”고 했다. 그는 ‘절제하는 생활과 이타적인 삶’이 생명력 넘치는 기도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필요조건임을 지적했다. 부와 권력을 가진 이들은 가슴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를 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는 반면 “소박한 이들은 하느님을 마치 따스한 햇살이나 친구의 우정만큼 편안하게 느끼는 것 같다”고 했다.

<인간, 그 미지의 존재>와 함께 카렐에 대해 친구들이 쓴 글을 자세히 읽어보면, 카렐은 ‘살아 있는 기도’를 하지 못하는 자신의 내적 고충을 고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테면 그의 아내는 여전히 혼자 미사에 참례했다. 그는 분명 ‘하느님에 관한 물음’에 깊이 있고 진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지적 추구였다. 이는 그가 철학자 베르그송, 세르티랑 게스, 자크 마리탱 등과 벌인 토론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다. 매우 솔직했으나 엄밀한 철학의 틀 안에서 이루어진 토론이었다. 교회 성직자들이 ‘너무 이성적’으로 종교를 대한다는 것과 그들에게 기도생활이 부족하다는 점을 비판한 사람이 바로 자신임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1937년 여름, 브레튼 해안의 생 길다 섬에서 조용히 휴가를 보내고 있던 카렐은 시토 수도회32의 초대를 받았다. 수도회에서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를 닮은 알렉시스 프레세 수사와 만날 수 있도록 주선해 주었다.  카렐은 내키지 않았지만 아내의 권유 때문에 ‘할 수 없이’ 그를 만나러 갔다. 세련되지 못한 프레세 수사는 퉁명스러운 말투로 토론은 결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거리를 좁히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생활하신 하느님을 발견하는 유일한 길은 사랑입니다”라고 말했다. 카렐은 돌아오는 길에 조용히 중얼거렸다. “오늘 내가 살아 있는 성인을 만났구나.” 이후 프레세 수사와 대화할 기회가 여러 번 있었다. 그는 프레세 수사가 단지 ‘살아 있는 기도’에 관한 이론을 정립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기도하고 있다는 것에 주목했다. 카렐은 바야흐로 살아 있는 ‘신비가’를 벗으로 삼게 되었다.

<인간, 그 미지의 존재>에 대한 범세계적 호응에 깊은 인상을 받은 미국의 한 자선가는 좀더 나은 인류의 미래를 위한 과학적, 영적 연구를 주도할 ‘인간-미래 연구소’를 설립하는 데 천문학적 액수인 수백만 달러를 지원하겠다고 카렐에게 제안했다. 두 사람이 연구소 부지 확보에 숙고하는 동안 나치 독일이 조국 프랑스를 침공했다. 그는 서둘러 파리로 돌아갔다. 그러나 조국의 어려운 현실에 충격을 받고 원조금을 청하기 위해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다. 또한 나치 독일에 전쟁을 선포하도록 미국을 설득하는 일에도 마음을 기울였다.

파리가 무너지자 프랑스는 1940년 6월 22일 독일에 항복했다. 카렐은 친구들의 만류에도 프랑스가 겪게 될 치욕과 고난에 동참해야 한다며 조국으로 돌아갔다. 미국 전역을 순회하며 마련한 원조금과 의약품 등을 배에 싣고 1941년 2월 스페인으로 향했다. 프랑스 임시 정부는 그의 입국을 허용했고, 그의 명성을 감안하여 보건부장관직을 제안했다. 그러나 카렐은 이를 거절했고 더불어 넉넉한 식량과 통행증 등의 특권도 포기했다. 그는 아내와 함께 파리의 한 허름한 아파트에서 난방 없이 생활했다. 그녀는 다른 주부들처럼 배급을 타기 위해 줄을 서야만 했다. 이때의 힘든 생활로 건강이 급격히 악화된 그는 3년 후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카렐은 ‘인간-미래 연구소’를 설립하는 일에 온 힘을 기울였다. 나치가 지배하는 유럽에서 그것만큼 시급한 것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가 ‘현대 과학 선진국들이 자행하고 있는 야만적 행위’에 대해 <인간, 그 미지의 존재>에서 경고했던 내용이 현실로 나타났던 것이다. 그는 시토회 수사 프레세와 기회가 되는대로 만나 대화했다.  생활 조건이 열악하던 시기의 일기장에 ‘1942년’ 이라고만 쓰여진 날이 있다. “나는 하느님의 존재, 영혼 불멸, 계시 그리고 가톨릭 교회의 모든 가르침 – 핵심이 되는 희생에 관한 교의를 포함해 – 을 믿는다.”

그는 <인간, 그 미지의 존재>에서 인류사를 조망하면서 “희생은 진보를 위한 필요조건이라고 본다”고 지적하고 “고상한 목표와 넓은 시야를 가지면… 그리고 위대한 모험을 감행하고자 하는 열정만 있다면 희생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라고 했다. 그는 자기 주변의 많은 과학자들과 지성인들에게 그러한 비전과 영적 활력이 결핍되어 있음을 몹시 아쉬워했다.

그는 마침내 계시, 곧 성서 말씀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되었다. 예수께서는 처음으로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시몬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시몬 바르요나! 사람(직역하면 ‘살과 피’)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대에게 계시하신 것이다.” 살과 피 그것은 사람의 생각에 지나지 않으니 완전하고 무한한 분이신 하느님을 포착할 수 없으나… 하느님께서는 찾는 이의 마음속에 ‘계시’와 함께 들어오시니 이로써 그는 신앙의 은총을 입게 된다. 성서는 이 말을 달리 표현하며 어린이와 같은 마음을 가지로고 여러 번 촉구한다.

카렐은 정부 관료들과 보건 담당자들의 무능과 이기주의 그리고 가회주의적 태도 때문에 마음 고생을 많이 했다. 그는 그것을 그냥 무시하고 넘겨버릴 수가 없었다. 그들의 무책임을 호되게 비난했고 그 때문에 적이 많았다. 정신적 긴장, 불충분한 식사, 열악한 생활 환경 등이 카렐의 건강에 영향을 주었다. 1944년 8월, 그는 파리가 수복되기 직전 심장마비를 일으켰다. 연합군이 프랑스에서 독일군을 몰아내자 곳곳에서 나치 협력자에 대한 고소가 시작되었다. 카렐은 재판을 받아야 할 협력자의 명단에 자신의 이름이 올라 있다는 소식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연합군 최고사령관 아이젠하워 장군도 그 소식을 들었다. 그는 명단에서 카렐의 이름을 삭제하도록 명령했다. 몇 개월 후 카렐은 더욱 심각한 심장마비를 일으켰다. 그는 오래 전부터 가톨릭 신자로서 꾸준히 미사참례를 해왔기 때문에 종부성사(지금은 병자성사)를 청했다. 숨을 거두기 며칠 전 그는 몬시뇰 하모욘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이렇게 죽음을 앞두고서야 세상 모든 것이 허무함을 깨닫는가 봅니다. 저는 명성을 얻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저와 제가 이룬 이레 대해 칭찬합니다. 하지만 하느님 앞에서 저는 어린아이일 뿐입니다. 그것도 매우 부족한 어린아이 말입니다.”

프레세 수사도 카렐이 임종을 앞두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기차 화물칸을 이용하여 긴 여행 끝에 카렐을 찾아왔다. 심장병 분야 선구자로서 환자들에게 새 삶을 찾아준 카렐은 소중한 벗이 지켜보는 가운데 1944년 11월 5일 세상을 떠났다.

카렐은 루르드의 기적을 두 번이나 목격했다. 1940년까지만 해도 그는 과학적 발견을 통해 기적 치유에 관한 합리적 설명을 해낼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파스칼은 <팡세>에서 다음과 같이 조언했다. 하느님에 관한 물음에 해답을 얻고자 한다면 ‘(하느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고, 결국 카렐도 그렇게 했다.

캐럴 스툴뮬러는 해박한 지식과 사랑으로 많은 이들을 감동시킨 현대 성서학자다. 그는 특히 시편 131편에 큰 사랑을 가지고 있었다. 시편 저자는 ‘어미 품에 안긴 아기’처럼 ‘안정과 평온’을 찾았다고 노래했다. 의미론 전문가인 스툴뮬러에 의하면 시편 131편 저자는 “오랜 갈등과 고투를 통해 결국에는 자신의 헛된 야망을 버리고 안정과 확신을 얻게 된 사람이다. 이 시편의 부정어들이 이를 암시하고 있다. ‘야훼여, 내 마음은 교만하지 않으며, 내 눈 높은 데를 보지 않사옵니다. 나 거창한 길을 좇지 아니하고, 주제넘게 놀라운 일을 꿈꾸지도 않사옵니다…’ 시편 저자는 마치 하느님의 길을 파악할 수 있기라도 하다는 듯, 불가해한 하느님의 속을 파헤쳐 보려던 자신의 어리석은 고투를 포기한다”.

카렐은 시편 131편 저자와 다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정신적 능력으로 삶의 신비를 풀어보려는 모험을 감행했다. 그러나 폴 리큐어가 말한 ‘제2의 유년기’처럼, 그는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 배운 성서의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다시금 갖게 되었다.

 

 

 

9. 어린아이들의 치유 사례

Healing of Small Children

 

천둥은 바알 신의 음성이요, 번개는 그의 무서운 창이라고 페니키아 인들은 믿었다. 바알 신이 창으로 구름을 갈라 비를 내리게 한다는 것이다. 과학자들이 출현하면서 그런 종류의 ‘기적’들은 점점 사라졌다. 장 샤르코(1825~1893)는 신체마비 같은 질병 중 일부는 신경성 질환임을 입증한 바 있다. 그는 드모아젤 코린 의 혈관운동 신경마비 증세는 히스테리 증이 원인이므로 파리에 있는 프란치스코 부제의 무덤 앞에서 그녀가 치유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례는 결코 기적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샤르코는 루르드의 치유 사례들을 면밀히 검토하지도 않고 단지 심리적인 것 – 그가 조롱하는 뜻으로 지어낸 용어 ‘신앙 치료’에 의한 것이라고 – 으로 치부했다. 그의 판단은 매우 비 과학적이었다.

하지만 샤르코의 주장에도 분명 합리적인 점은 있다. 우리도 생소한 현상을 목격하데 되면 먼저 합리적 설명을 찾게 된다. 의사들은 의학에 문외한인 보통 사람들이 보면 놀랄 만한 회복 사례를 많이 목격하지만, 그것은 샤르코의 주장과 유사한 신경성 질병이 회복된 경우다. 정신적으로 건강한 성인의 마음과 신경계도 때로는 이해하기 힘든 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 그렇게 때문에 우리는 루르드에서 치유된 유아들의 사례에 각별한 관심을 갖는다. 어린아기들은 심리적 작용이 없기 때문이다.

루르드의 치유 사례를 연구하는 프로테스탄트 루스 크랜스턴 은 이를 잘 알고 있다. 그녀는 자신의 저서에서 20여 쪽을 할애하여 어린이의 기적 치유에 관한 네 가지 사례를 소개했다. 예를 들면 제라드 베일은 두 살 때 시력을 완전히 잃었다. 그로부터 6년 후인 1947년까지 맹아 교육시설인 아라스 학교에서 생활했다. 그 해 9월 26일 제라드의 어머니는 아들을 루르드로 데리고 갔다. 엄마와 손을 잡고 십자가의 길을 걷던 제라드가 갑자기 어머니를 올려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엄마! 엄마! 엄마, 정말 예뻐요.” 제라드의 부모는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들은 아이를 데리고 타라브에 있는 캠프 박사의 안과 병원을 찾아갔다. 캠프 박사의 진단은 너무도 놀라운 것이었다. “제라드는 맥락막염과 망막염으로 양쪽 눈의 시신경이 퇴화되었습니다. 앞을 보지 못합니다. 볼 수가 없지요.” 하지만 제라드는 분명 볼 수 있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제라드는 맹아학교에서 나와 던커크 에 있는 보통학교에 입학했으며, 여러 과목에서 우등상도 받았다.

루스 크랜스턴은 수소문 끝에 파리의 몽마르트르 에 살고 있는 이베 쥐코를 찾아갔다. 그의 부모는 외아들 이베 가 일곱 살 때 척수에 문제가 생겨 쓰러진 기막힌 사연을 회고했다. 주치의 가우페 박사는 이베 를 전문의에게 의뢰했는데, 그는 엑스레이 검사를 한 후 이베를 즉시 입원시켰다. 목뼈 두 개는 이미 퇴화되어 있었다. 그의 부모는 평소 이베의 고개가 항상 한쪽으로 기울었던 이유를 그제야 알게 된 것이다. 그들은 르보 박사에게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다. 이베는 포트병33으로 알려진 골수 결핵을 앓고 있어 2, 3년간 석고로 몸을 고정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희망이 있느냐고 물었다. 의사는 ‘불확실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베의 부모는 자세한 설명을 듣고 이베가 평생 전신마비 상태로 살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들은 가난했지만 (루르드에서 치유 받은 병자들 대다수가 그렇듯이) 아들을 루르드에 데려가기로 결심했다. 루르드에서 성체 현시와 성체 강복 행렬에 참여하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변화가 일어났다. 이베의 어머니는 그때의 감격을 자세히 설명했다. 이베가 갑자기 먹고 싶은 음식을 열거하고, 여러 가지 놀이도 해보고 싶어 하고, 오랫동안 하지 못했던 일들을 하고 싶다고 했다. 이베의 어머니는 아들이 포트병에 걸렸다고 진단했던 브레통 병원의 진단서도 보여주었다. 그 후 이베는 운동을 즐기는 활동적인 청년으로 성작했다. 그의 가족은 매년 이베가 치유된 8월에 루르드 순례 여행을 하고 있다.

루르드가 프랑스에 있기 때문에 순례객들 중 프랑스인들이 큰 비율을 차지하고 있으며, 치유 받은 이들 중에도 프랑스인이 많다. 프랑스어에 능통한 루스 크랜스턴은 치유 사례의 주인공들을 직접 방문하여 이야기를 들었다. 그 중 리옹 남서부에서 50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생 에티엔 에 기 레테트 라는 소년이 살고 있었다. 다섯 살까지 건강하게 자라던 기는 뇌수막염에 걸렸다. 그 후 기는 빈번하게 간질성 발작을 일으키며 대소변을 가리지도 못하고, 뇌손상으로 인한 마비 상태가 되었다. 기는 엄마도 알아보지 못했으며 스스로 음식을 먹지도 못했다. 낭랑하던 목소리 대신 상처 입은 짐승처럼 끙끙대는 아들의 고통스런 음성을 들으며 부모의 마음은 찢어지는 듯했다.

중산층인 기의 부모는 조금이라도 희망이 있다면 치료란 치료는 모두 받게 했다. 그렇게 2년 반 동안 아이의 치료를 위해 상당한 재산을 쏟아 부었다. 하지만 기의 상태는 변화가 없었고, 의사들은 결국 희망이 없다고 선언했다.

1946년 10월 6일, 기의 어머니는 무표정한 얼굴의 일곱 살짜리 아들을 안고 성수탕으로 들어갔다. 그 동안 기의 아버지는 성수탕 밖에서 무릎을 꿇고 절박한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기의 어머니는 자원봉사 간호사들과 함께 아이의 옷을 벗기고 뻣뻣하게 굳은 작은 몸뚱이를 천천히 물에 담갔다. 그녀는 차가운 물 (보통 13C) 때문에 기가 발작을 일으키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하지만 기는 발작을 일으키기는커녕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기의 어머니는 “기가 병에 걸리기 전 푹 자고 일어났을 때의 모습과 같았다”고 회고했다. 그런 다음 기는 엄마를 향해 두 팔을 내밀며 예전의 낭랑한 목소리로 “엄마를 부르면서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그녀는 서둘러 아이에게 옷을 입히고 남편에게 뛰어나갔다. 이후 기의 가족은 다시 깨어난 아이와 지난 2년간의 밀린 이야기를 나누며 가슴 벅찬 순례 일정을 보냈다. 기의 팔과 다리도 모두 정상으로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생 에티엔 으로 돌아오자마자 부부는 기를 주치의에게 보였다. 의사는 말일 잇지 못했다. 그로부터 1년이 채 되지 않아 기는 또래 아이들과 어울려 지낼 정도가 되었다.

이듬해 1947년 10월 26일, 부모는 기를 치료했던 의사들의 진단서를  루르드 의무국에 제출했다. 40명의 의사들이 참관한 가운데 소아과 전문의 데일리 박사가 두 시간 동안 각종 검사를 했다. 데일리 박사는 모든 검사의 결론을 다음 말로 매듭지었다. “이 아이는 정상입니다.”

당시 의무국장 프랑수아 로레 박사도 말했다. “이 환자는 오랜 기간 치료를 받았지만 사지마비 증세외 뇌기능 정지상태에 아무런 차도가 없었습니다.”

보르도 에서 온 의사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이 아이는 도대체 어떤 뇌로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 아이의 뇌는 뇌수막염으로 인해 부분적으로 파괴되었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또 다른 의사가 대꾸했다. “그 물음에 어떤 식으로 설명을 붙이든 이 치유 사례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의학 원칙에 위배됩니다.”

그때 한 의사가 케케묵은 물음을 제기했다. “하지만 라듐처럼 아직 발견되지 않았을 뿐이지, 아이가 치유된 원리를 설명해 줄 수 있는 미지의 자연력이나 매개물이 존재하는 게 아닐까요?”

파리에서 온 르롱 교수가 대꾸했다. “만일 뇌수막염으로 백치상태가 되었던 환자가 이 아이처럼 회복된 사례가 있다면 내 손에 장을 지지겠소.”

그러나 40명의 의사 중 누구도 기와 비슷한 사례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었다. 프랑수아 로레 박사와 H. 본 박사의 공저 <현대의 기적 치유들>(영문판, 1957년)에 그날 모임과 논의 내용이 흥미롭게 기록되어 있다. 루르드 국제의학협의회 1951년 7월 정기보고서에도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만일 자연 치료가 가능한 어떤 매개체가 존재한다면 세계 곳곳의 병원과 의원에 수용되어 있는 수많은 환자들 가운데서 그 매개체가 작용한 사례를 어째서 볼 수 없는 것일까? 루르드와 다른 성지에서 보고되는 즉각적 치유와 유사한 사례들이 의학보고서에 나오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

때로는 예기치 않게 암이나 다른 치명적 질병이 회복되는 사례도 보고되고 있으나 즉각 회복된 경우는 한번도 없었다. 1917년 루르드 의무국장을 지낸 외과의사 H. 르벡 박사는 <기적 치유의 의학적 증거> (영문 번역본, 1922년)라는 책을 썼다. 그는 루르드의 치유 사례 중 널리 알려진 몇몇 사례를 선택하여 그에 관한 엑스레이 사진 자료 와 환자들을 수년간 치료했던 의사와 병원에서 발급한 진단서 등을 공개했다. 그 중 르벡 박사가 직접 검진에 참여한 사례도 있었다. 그는 자신의 저서를 통해 다음과 같은 점을 여러 번 강조했다. 첫재, 치유는 즉각적(순간적)으로 이루어졌다. 둘째, 암세포와 암으로 인한 혈액의 독소, 결핵으로 인한 폐 손상, 괴사34 된 뼈, 정맥류 등이 병자의 신체 조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는 다른 의사들에게 이처럼 즉각적 치유가 일어난 사례가 있다면 제시해 보라고 제안했다.

르벡 박사와 루르드 의무국은 ‘즉각성’이라는 요인이 루르드에서 일어난 기적의 특징이며, 그것이 곧 하느님의 현존과 개입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이해했다. 만일 루르드에서 집단적 치유가 일어났다면, 르벡 박사 역시 루르드라는 특정 지역에 미지의 자연(치유)력이 존재하지 않을까 하고 의심했을지도 모른다.  르벡 박사는 루르드의 기적은 수가 비교적 적으며 서로 다른 장소에서 일어난다는 점을 지적했다. 기적은 성수탕에서, 미사 중이나 성체 강복 때 또 성모 동굴 앞에서, 심지어 루르드에서 1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일어나기도 했다.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중병 상태였거나 여행 경비를 마련하지 못할 만큼 극빈자였던 병자들은 자기가 있는 그곳에서 루르드의 성모님께 기도하여 치유되었다. 즉각적으로 그리고 완전하게.

1960년 벨기에 사람인 루이 몽덴 교수가 기적 치유에 관한 368쪽 분량의 보고서를 발표했다. 보고서는 에이버리 덜스에 의해 이 분야의 대작으로 꼽혔다. 영문판은 <기적과 경이로움 Signs and Wonders>이라는 제목으로 1966년 뉴욕에서 출간되었다. 루뱅 대학에서 종교학과 심리학을 연구하는 몽덴 교수는 현대의 기적에 대해 사례를 들어 자세히 소개하면서, 그 기적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신중한’ 기적들과 본질적으로 같다고 지적했다. 분명 육체적 치유이며 순간적 치유지만 언제나 신앙과 기도가 바탕이 된 영적 환경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기적들은 결코 화려하지도 않고 , 남의 이목을 끌려는 전시적 성격이나 무언가를 돋보이게 만들거나 증대시키려는 의도가 없으며, 치유된 사람들과 치유를 목격한 증인들에게 하느님 사랑의 징표가 된다.

몽덴 교수는 오랜 기간 열정적으로 연구했지만, 루르드와 같은 육체적 질병의 순간적 치유에 관해 과학적으로 실증된 치유 사례를 찾아내는 데 실패했다. 그는 1954년 그런 치유 사례를 찾아보려 했던 영국의학협회 실패담도 인용했다.

‘권위 있는’ 여러 집단이 루르드에서 일어난 기적의 초자연적 성격을 공개적으로 부정했다. 예를 들면 <오류 사전> (1978년)이 그렇다. 이 사전은 불신앙이라는 원리를 바탕으로 루르드의 기적을 설명했다. 그래서 모든 치유를 심리적 요인에 의한 것이라 결론지었다. 사건의 내용은 W. 웨스트 박사와 그의 저서 <루르드의 11가지 기적> 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나는 제1장에서 마리 커스레이크의 치유 사례를 소개하면서 런던에 있는 성 토마 종합병원의 데이비드 모렐 교수의 말을 인용했다. 모렐 교수는 루르드 의무국의 활동에 대한 웨스트 박사의 비판을 비과학적이라고 말한 바 있다.

웨스트 박사의 책은 1957년에 출간되었는데 이듬해 다른 의사가 웨스트 박사의 견해를 비과학적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호주에서 군의관을 지낸 F.B. 멕칸 박사로 1922년 시드니 의과대학 졸업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했다. 그는 루르드의 기적을 연구하며 루르드 의무국에 보고된 치유 사례에 관한 조사와 토론회에 참관한 의사였다. 맥칸 박사는 웨스트 박사의 책을 읽고 매우 불쾌해했다. 웨스트 박사의 책은 영국과 호주에서 어느 정도 호의적인 평가를 받았다. 멕칸은 1958년에 출간된 <성모님이 남긴 표시 Our Lady’s Signature>에서 웨스트 박사의 견해와 그에 대한 호의적인 평가는 “초자연적인 것을 수용하는 데 대한 극심한 혐오감”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웨스트 박사는 가톨릭 교회 당국자들은 뭐든지 쉽사리 믿는 어리석은 자들이라고 비난하면서 특히 루르드 의무국장 푸랑수아 로레 박사를 거론했다. 그는 로레 박사를 “더 큰 기적, 더 많은 기적을 찾아내기 위해 안달하며 그것을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인물”이라고 묘사했다. 이에 대해 멕칸은 웨스트가 한번도 로레 박사가 주도하는 회합에 참석한 적도 없으며 로레 박사를 만나본 적도 없음을 지적했다.

멕칸은 로레 박사를 “내가 만난 사람들 중에 가장 훌륭하고 존경스런 인물이며 매우 침착하고 노련한 분이다 그리고 그는 실제적인 분으로 어떤 치유 사례에 기적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납득시키기에 가장 어려운 사람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루르드 의무국에 대한 멕칸 박사의 첫인상은 ‘감정이나 히스테리’와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흥미 없는 민사 사건을 다루는 영국 법정의 차갑고 냉정한 예심(豫審)’과도 같았다.

멕칸은 루르드 의무국에 있는 의사들의 철저함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가톨릭 신자, 프로테스탄트, 불가지론자, 무신론자 등으로 다양하게 구성된 의사들이 엑스레이를 비롯한 갖가지 검사 결과와 연구실의 보고서 등을 얼마나 정성 들여 검사하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그리고 과학적 자료에 전문성이 결여되었을 경우에는 가차없이 치유 사례를 목록에서 제외시킨다는 것도 설명했다.

프랑수아 로레 박사와 루르드 의무국을 접해본 루스 크랜스턴 역시 멕칸 박사와 같은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의사들의 ‘열린 마음과 객관적 시각’이야말로 의무국의 보증수표라고 표현했다. 그들은 “헌신적인 과학자들과 베테랑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매년 빠짐 없이 의무국으로 되돌아오고 있다”. 로레 박사는 어느 모로 보나 “훌륭한 사람이다. 레지옹 도뇌르 훈장,35 십자무공훈장 등을 받았으며, 프랑스 의회의원, 의학교수 그리고 보르도의 대형 클리닉 원장을 맡고 있다.”

파리에 있는 성 요셉 병원 외과 과장이던 E. 르멕 박사가 1917년 루르드 의무국장이 되었다. 자신의 저서 <기적 치유의 의학적 증거>에서 르벡 박사는 6쪽에 걸쳐 이본 오메트르 의 치유 사례를 소개했다. 이본은 한 살 10개월 때 치유되었는데, 르벡 박사가 특별한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친구의 딸이었기 때문이다. 그 친구는 낭트시에서 개업의로 활동했다. 오메트르 박사는 딸이 치유된 후 자신이 서명한 3쪽 분량의 보고서를 남겼다. 아래의 내용은 그 보고서를 근거로 한 것이다.

먼저 오메트르 박사는 셋째 딸 이본이 양다리가 굽은 채 태어났을 때 받은 충격에 대해 진술했다. 1894년 당시 의학 수준으로는 그런 기형을 바로잡아 줄 방도가 없었다. 이본이 15개월 되었을 때, 낭트 시의 개업의이며 그의 친구였던 보펭 박사가 수술을 맡았다. “발의 위치를 교정하기 위해 아킬레스건 절단술을 시술했다.” 두 발과 두 다리 모양을 굳히기 위해 이음매가 있는 부목을 허벅지까지 부착했다. 전에는 무릎과 발이 일탈된 상태였다. “양다리와 발이 꼭두각시처럼 어느 쪽으로든 돌아갔다.”

그러나 결국 개선된 것은 아무것도 업었다. “부목과 피로를 가중시켰고 다리는 더 여위어 갔다. 그래서 나는 이본을 사케 박사에게 데리고 가 물리치료를 받게 했다. 나는 이본에게 나무로 밑창을 단 장화를 만들어 주었다. 장화 바깥부분은 다리의 위치를 교정하기 위해 쇠막대로 고정시켰다. 그러나 이런 보조기구를 부착하고 양쪽에서 팔을 잡고 부축해도 잠시도 서 있지 못했다. 다리가 제멋대로 돌아가는 바람에 그저 바깥쪽으로 다리를 질질 끌 분 스스로는 한 발짝도 내닫지 못했다. 1896년 6월 24일, 우리는 이본을 데리고 루르드로 갔다. 루르드에 도착하자마자 이본을 곧장 의무국으로 데려갔다. 그날 저녁 나는 아내와 함께 성모 동굴을 찾아가 간절한 마음과 믿음으로 기도했다. 우리 부부는 기도 중에 소리 없이 울었다.”

그들은 다음날 새벽 미사에 참례해 영성체를 하고 성수탕으로 향했다. 그의 아내와 간호사들이 아이를 물로 씻기는 동안 그는 밖에서 기도하고 있었다. 이본은 물속에서 큰소리로 울며 몸부림쳤다. 아이의 상태는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그날 오후 다시 한번 이본을 물레 담갔지만 아무 변화도 없었다. 의무국장 브와사리 박사는 간호사들과 엄마의 부축을 받으며 걷는 이본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본의 가냘프고 허약한 다리는 힘없이 무너질 뿐이었다. 그러나 이본의 부모는 기도를 멈추지 않았다. 루르드의 기적들 중 상당수는 수회에 걸친 순례 여행 끝에 일어났다. 여러 번 반복하여 물로 씻거나 미사 참례, 성체 강복, 촛불 기도 행렬 예식에 여러 번 참여한 후 일어난 경우도 많다.

“26일 아침 세 번째 목욕 후부터 이본에게 변화가 일어났다. 정상아들처럼 혼자서 차분히 걷기 시작했다. 첫발을 내디딜 때부터 균형을 잘 잡았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아이의 모습을 바라보는 우리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감동을 느꼈다. 낭트시 통상무역협회장을 지낸 장인 또한 깊이 감동했다.

그날 브와사리 박사는 이본이 혼자 힘으로 걷는 모습을 여러 번 지켜보았다. 이튿날 브와사리 박사는 우리를 의무국으로 불렀다. 브와사리 박사는 보조기구를 벗기고 혼자 걸어보라고 했다. 이본의 다리는 정상적으로 움직였다.

정리하자면 이 아이는 양다리와 발이 굽은 채 태어났으며 제 힘으로는 일어서지도 못했다. 그로 인해 다리 근육이 쇠퇴하여 말할 수 없이 가늘어져 있었다. 무릎 인대는 제 기능을 하지 못했으며 15개월이 되었을 때 수술과 물리치료를 받았지만 변화가 없었다. 그런 아이가 순간적으로 균형을 잡고, 또래 아이들같이 정상적으로 걷게 되었다. 동료 의사들은 이본이 앞으로 수년간 걷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22개월이 된 아이는 갑자기 언제 그랬냐는 듯 정상적으로 걷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의학적 관점에서 설명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본의 경우에는 걷고자 하는 의지, 자기 암시, 신앙 치료, 상상의 소산 등은 전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자기 암시에 관한 여러 이론도 적용될 수 없다. 이런 유아는 최면에 걸리지도 않는다.” (이 글은 샤르코가 루르드의 기적 치유들을 모두 ‘신경성’에 기인한 것으로 주장하던 당시 쓰여졌다.)

“너무도 감격스러운 이 치유 사례를 기록으로 남김으로써 루르드의 성모님께 감사 드리며, 이것이 그분을 세상에 알리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H. 르벡 박사는 <기적 치유의 의학적 증거>에서, 이본의 아버지이며 친구인 오메트르 박사가 서명한 이 진술서와 관련하여 몇 가지 강조했다. 첫째는 의학적 측면이다. 외과수술이 실패한 이유는 “다리 근육이 상당히 퇴화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외과적으로 할 수 있는 데까지 다했다.” 그는 이본이 만일 치유되지 않았다면 이후에도 여러 차례 수술을 시도했을 것이며, 새로운 근섬유가 형성되면서 점차 다리 근육이 재생될 수 있었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런 진전이 의학적으로 가능하다 하더라도 상당히 오랜 기간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본이 단 몇 시간 안에 치유되었다는 사실 (게다가 즉시 걸었다는 사실)은 “의학적으로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둘째, 그는 이본의 수술을 맡았던 보펭 박사와 오메트르 박사의 청을 받고 자문해 준 다른 의사들 중 항의나 이의를 제기한 사람이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당시 루르드에 관한 뜨거운 논쟁과 합리주의자들의 맹렬한 비판을 생각해 볼 때, 만일 이본의 치유와 관련된 객관적 정보 가운데 하나라도 오류나 거짓이 있었다면 낭트시 의사들의 비난을 피할 길이 없었다. 르벡 박사는 이본이 치유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책을 출간했고, 이본을 진찰한 모든 의사들의 실명을 실었다.

이런 치유의 사례가 극소수에 불과했다면 그다지 설득력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루스 크랜스턴 이 지적했듯 이와 같은 치유 사례들은 상당히 많다. 물론 루르드를 방문하는 병자들의 수와 비교하면 극소수이긴 하지만.

감리교회 감독의 딸인 크랜스턴은 극작가로 평생 프로테스탄트로 살았다. 그녀는 열아홉 살 때 처음 책을 출간했다. 후에 그녀의 기사와 논설 등은 <하퍼스 매거진 Harpers Magazine>, <센츄리 Century>등 유명 잡지에 실렸다.  그녀는 1928년에서 1938년까지 제니바에 있는 세계종교협의회에서 봉사했다. 또한 세계교회협회 회원이기도 한 그녀는 1930년대 초반부터 기적 치유에 각별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유엔 회원국들의 다양한 종교를 다룬 <세계의 신앙>이 1945년에 출간되었다. 그녀는 이 책을 바탕으로 기적 치유에 관한 책을 구상하기 위해 뉴욕의 정신과 의사 스마일리 브랜턴의 자문을 구했다. 그는 루르드에 가서 기적 치유에 관해 직접 연구해 볼 것을 제안했다. 자신도 동료 의사들과 함께 루르드에서 봉사한 경험이 있는데 매우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크랜스턴은 루르드에서 3년간 자료 수집을 하게 되었다. 그녀는 불어에 능통했기 때문에 루르드 의무국의 원본 서류들을 직접 조사했다. (크랜스턴의 언지 에델에 의하면 크랜스턴은 수천 건에 달하는 치유 사례 기록을 읽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1955년에 <루르드의 비밀> (초판 234쪽)을 출간했다. <리더스 다이제스트>, <시카고 뉴월드>, <맥콜스 매거진> 등은 같은 해 그 책의 다이제스트판을 냈다. 1988년 증보판 (358쪽)이 <루르드의 기적들>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루스 크랜스턴은 루르드 의무국장 푸랑수아 로레 박사가 1953년 8월에 한 말을 인용했다. “문서 보관실에는 1,200개의 불가해한 치유 사례와 관련하여 전문적으로 분류한 엑스레이 자료, 임상 보고서, 진단서 등이 첨부된 해설과 기록들이 정리되어 있다. 그리고 충분한 자료가 확보되지 않아 기적 치유로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기적 치유 사례임이 분명한 4천 개의 치유 사례 서류도 보관되어 있다. 치유 받은 당사자와 가족들은 그것이 기적 치유의 은총임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그 은총을 누리고 있다.”

루스 크랜스턴은 루르드에서 3년간 조사, 연구하고 기적 치유에 관한 광범위한 독서, 그리고 프랑스 전역을 돌며 치유 사례의 주인공들과 인터뷰한 내용과 경험을 바탕으로 개인 의견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루르드 성지가 생긴 지 백 년 동안 (곧 1953년까지) 최소한 2천 명이 루르드에서 치유되었다고 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녀가 글을 쓸 당시 루르드 성지 순례객 수는 2백만 명이었다. 1984년에는 무려 440만 명에 달했다. 내가 루르드에 머물던 1997년에는 550만 명이었다.

1998년 루르드 의무국장으로 임명된 패트릭 타일러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요즘에는 생각 있는 사람들이 더 많이 루르드 성지 순례에 나서고 있다. 이는 물질만능주의, 높아진 이혼율, 결혼 없는 동거 생활, 냉담자의 증가 등을 초래한 소비 지향적 사회에 대한, 그리고 분별없이 원칙을 무시하는 세태에 대한 반작용이다.  그리고 상대주의를 바탕에 깔고 있는 강론들은 기적의 본질과 가치를 희석시켰으며, 하느님을 심리학과 정신분석의 테두리 안으로 축소, 변형시키고 말았다.”

루르드의 기적은 진리를 찾는 이에게 하느님은 이상이 아니라 실재이며,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시며 천국은 결코 그림의 떡이 아님을 깨닫게 하는 증거다. 크랜스턴은 루르드의 기적이 성서의 진실성을 확인시켜 주었다고 고백했다. 그녀는 루르드의 기적 치유를 통해 복음이 증언하는 예수 – 인간의 육신과 영혼을 치유하신 – 를 대면했던 것이다. 그녀는 결론적으로 말했다. “루르드로 가는 길은 본향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 그리움을 안고 있는 모든 영혼의 본향, 곧 아버지의 집이다. 그 길의 끝에서 순례자들은 인종과 믿음을 초월하여 본향에 다다른다.”

 

 

 

10. 유태인의 증언과 파스칼

A Jewish Testimony – And the Child Pascal

 

1939년 9월 1일에 시작된 나치의 폴란드 침공은 수백만 폴란드인의 학살은 말할 것도 없고 아우슈비츠와 유태인에 대한 인종 청소라는 암울한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프란츠 베르펠 Franz Werfel (1890~1945년)은 오스트리아계 유태인으로 나치의 살생부 명단에 일 순위로 올라 있었다. 20대에는 독일 편에 서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으나, 젊고 유능한 친구들이 허무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는 환멸을 느꼈다. 그는 전쟁 후 유다교의 하느님을 재발견하고 곧이어 시인, 극작가, 소설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반전 성격의 글은 히틀러를 추종하는 사회주의자들의 원한을 사게 되었다.

1938년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하자 그는 아니 알마와 함께 프랑스로 탈출했다. 그러나 나치가 프랑스마저 점령하자 스페인 국경을 넘어 미국으로 도피하기 위해 남쪽으로 피난했다. 하지만 국경은 봉쇄되었고,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루르드에 숨어들었다. 루르드의 주민들은 그들에게 환대를 베풀었다. 1940년 6월이었다.

“우리는 루르드에 몇 주간 몸을 숨겼다. 두려움에 짓눌린 시간이었다. 영국의 라디오 방송은 내가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이미 살해되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매우 의미 깊은 때였다. 벨라뎃다 소비루의 경이로운 삶에 대해 알게 되었고, 또한 루르드의 기적 치유에 관한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무사히 탈출하여 안전한 미국 땅에 도착하게 된다면 만사를 제쳐두고 있는 힘을 다해 ‘벨라뎃다의 노래’를 부르리라 맹세했다.”

그는 무사히 미국으로 탈출했고 1941년에 출간한 <벨라뎃다의 노래>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리고 7개 국어로 번역 출판되었다. 20세기 폭스 영화사는 소설을 같은 제목으로 영화화 했다. 영화 ‘벨라뎃다의 노래’는 대성공을 거두었고, 벨라뎃다 역을 맡았던 여배우  제니퍼 존스는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책이나 영화를 본 많은 이들은 제2차 세계대전 말의 극악무도한 배경과 대비되어 더욱 감동적인 이야기로 이해했다. 베르펠의 말년 작품은 한결같이 선과 악의 갈등을 그리고 있다.

<벨라뎃다의 노래> 서문에서 베르펠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책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사건들 – 잊을 수 없는 중대한 – 은 모두 실제로 일어난 것이다. 사건의 시초는 기껏해야 80년 전이다. 그렇기에 현대사의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사건의 진실성은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적대적 사람들과 편견 없는 제삼자에 의해서도 받아들여졌다. 소설은 진실성을 그대로 담고 있다.”

프로테스탄트 작가들 (예를 들면 존 옥슨햄, 마거릿 그레이 블랜턴, 루스 크랜스턴)도 루르드 기적을 조사 연구했고 복음으로 증언된 기적에 대해 더욱 강한 확신을 얻었다. 끝까지 유다교의 믿음을 간직하고 있던 베르펠은 루르드에 관한 글을 쓰면서 “경멸과 분노와 무관심으로 우리 삶의 궁극적 가치들을 외면해 버린’ 시대에 ‘하느님의 신비와 인간의 고결함을 찬미’ 할 수 있음을 기뻐했다. 베르펠의 감성은 자신을 쫓는 나치 사형집행인들에 의해, 또 한편으로는 아브라함과 모세의 하느님에 대한 자신의 엄숙한 서약에 의해 더욱 정제되었다. 그는 참으로 대단한 열정과 재능을 가지고 벨라뎃다와 루르드에 대해 조사 연구했다.

1997년 나는 루르드에 영구 임명된 존 풀 신부와 <벨라뎃다의 노래>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풀 신부는 그 책에 벨라뎃다와 루르드에 관련된 주요 사건들을 일일이 조사하고 정성을 다한 연구 결과가 담겨 있다고 말했다. 유다교의 계율에 따라 생활하며, 하느님께서 자신과 아내를 나치의 손아귀에서 구해주셨다고 믿으며 그것을 증거하기 위해 책을 쓰겠노라고 하느님께 서약한 그가 정성을 다해 연구 조사한 사실을 왜곡할 리 만무했다. 가톨릭 성지에 관한 이야기를 유리하게 왜곡할 이유도 동기도 없다. 루르드에 대해 열정적으로 글을 썼던 다른 이들도 처음 루르드를 찾아갔을 때는 하느님이나 기적에 대한 믿음이 전혀 없었다.

한 가지만 더 언급하겠다. 벨라뎃다와 기적의 샘이 인정받기까지 루르드에는 거세고 때론 모진 갈등이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참상과 제2차 세계대전 때 히틀러의 나치 정권을 통해 악의 실체를 경험한 베르펠은 자신의 작품에서 벨라뎃다와 성령으로부터 받은 메시지를 매장시키려 했던 사람들의 불신행위를 폭로했다. 그는 또한 성모님의 네 번째 발현이 시작되었을 때 일어났던 오싹한 일에 대해서도 실감나게 묘사했다. 후에 벨라뎃다는 ‘악을 쓰며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군중의 소동과도 같은’ 엄청난 불협화음이 자신을 괴롭혔다고 했다. 그러더니 더욱 거세고 귀에 거슬리는 한 음성이 불협화음을 제압하고 벨라뎃다와 성모님을 향해 위협적으로 ‘불길을 내뿜듯’ 명령했다. “물러가라. 물러가라.” 그러나 성모님은 음성이 들려오는 근처의 가브36강을 바라보고 계실 뿐이었다.

그러자 군중의 고함소리가 일순간 침묵으로 잦아들었다. 베르펠은 “기세가 꺾인 이리처럼 복종하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성모님의 준엄한 표정은 “앞으로도 무찔러야 할 적이 남아 있는’ 사람의 표정이었다고 덧붙였다. 베르펠은 벨라뎃다가, 어떻게든 사랑과 희망과 선을 멸하려 하는 사악함의 화신, 곧 사탄과 악령들을 만났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베르펠은 벨라뎃다를 상식 있고 분별력과 판단력이 뛰어난 인물로 묘사했다. 다수의 역사가들과 작가들이 쓴 전기에도 그렇게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그렇게 지혜롭고 침착하며 고행으로 단련된 벨라뎃다도, 사람들이 ‘죄를 사랑한’ 결과를 성모님이 보여주셨을 때는 두려움에 창백해지면서 매우 괴로워했다. 베르펠에게 루르드는 우주적 갈등을 의미한다.

베르펠과 오랜 친구이며 의학박사였던 칼라 차위시도 베르펠 과 같은 시기에 루르드에서 피난생활을 했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루르드에 있는 동안) 베르펠의 내적 변화는 눈에 보일 정도였다. 나는 그가 그렇게 놀라고 당황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의 앞에는 새로운 세계가 열렸고, 그는 열정을 다해 그에 몰입했다.” 형이상학적인 선(성서의 하느님)과 죄를 의미하는 악의 매력에 대한 베르펠의 상념들이 <벨라뎃다의 노래>에서 집중적으로 표현되었다. 벨라뎃다의 고통과 고뇌는 바로 자신의 고통과 고뇌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하느님을 발견하게 된 그는 벨라뎃다와 함께 ‘구세주’를 찬양했던 것이다.

 

루르드에는 어린아이들의 치유 사례가 많다. 이 사례들은 루르드의 기적을 자기 암시나 군중 심리에 의한 히스테리증 정도로 여기는 소설가 에밀 졸라 같은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예를 들어 ‘교회가 인정하는 기적’ 목록 중 45번을 보자. 앞에서 언급했듯이 ‘교회가 인정하는 기적’이란 루르드 의무국의 검사를 통과하고, 치유된 자가 속한 심사위원회의 조사를 통과한 사례다.

1934년 10월 3일 프랑시스 파스칼은 뷰캐어(마르세유 서쪽 약 60킬로미터에 위치)에서 포도주 양조업을 하는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1937년 12월 전까지는 매우 건강하고 활동적인 아이로 자랐다. 세 살 때 갑자기 고열에 시달렸다. 눈에서는 끊임없이 눈물이 흐르고 사지가 마비되어 갔으며 시력이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의사 다르드 박사는 사지마비 증세를 보고 뇌척수막염을 의심했다. 파스칼은 아비뇽으로 후송되어 레브로 박사에게 요추천자(腰椎穿刺)37검사를 받았다. 그 결과 뇌척수막염이라는 진단이 확인되었다. 6월이 되자 사지가 완전히 마비되었다. 아를의 안과의사 폴게 박사는 시력을 완전히 잃었다는 침통한 진단을 내렸다. 파스칼은 빛에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다르드 박사는 ‘더 이상 의미가 없다며 치료를 중단’했다. 부모는 여러 병원을 찾아 다니며 다른 의견을 구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연례 행사인 프로방스 – 루르드 순례 여행이 8월로 결정되었다. 프랑시스의 부모는 순례단에 신청했고, 주최측은 아들의 진단서를 준비하라고 했다. 다르드 박사는 7월 19일자로 프랑시스의 진단서를 발급했다. 순례단 의료진 중 한 사람인 로망 박사는 여행이 시작된 8월 23일에 진단서를 읽고 몇 가지 사항을 덧붙였다. “아이는 누운 채 여행하고 있으며 시력을 완전히 잃었다.”

루르드에 도착하자 프랑시스의 어머니는 온몸이 마비된 아들을 품에 안고 성모 동굴을 찾아가 ‘강한 믿음으로’ 기도했다. “이 아이를 낫게 하시든가 아니면 차라리 죽도록 허락하십시오!” 어머니는 아이를 성수탕에 데리고 가서 몸을 씻겼지만 아무 변화도 없었다. 이튿날 다시 성수탕에서 몸을 씻긴 다음 아이를 유모차처럼 만든 이동침상에 눕혀 산책로를 가로질러 가고 있었다.  그때 프랑시스가 갑자기 손을 들어 다른 이동침상을 가리키며 “엄마, 엄마, 정말 이쁘지?” 하며 흥에 겨운 목소리로 말했다. 프랑시스의 어머니는 거의 주저앉을 뻔했다. 그녀는 아이를 데리고 서둘러 병원으로 돌아가 침대에 눕혔다. 아이는 신이 나서 팔다리를 움직이며 병동에 있는 물건의 이름을 엄마에게 확인했다. 병동에서는 로망 박사를 불렀다. 나흘 후에 가족은 집으로 돌아와 곧장 다르드 박사에게 갔다. 박사는 할말을 잃고 그저 아이를 바라볼 뿐이었다. 아이가 멀쩡하게 걷고 볼 수 있게 되다니! 그 후 수개월 동안 박사는 아이의 상태를 지켜보았다. 11월 9일이 되자 그는 보고서에 서명을 할 준비가 되었다고 했다. 보고서는 이듬해 8월 파스칼이 루르드 의무국을 다시 방문해 재검사를 받을 때 제출할 서류였다. 다르드 박사 증언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본인은 다음과 같이 단언한다. 나는 의사로서 만 4세인 프랑시스 파스칼을 1937년 12월 18일부터 1938년 6월 14일까지 지속적으로 지켜보았다. 타라숑의 쥘리앵 박사, 아비뇽의 바르 박사, 나임스의 뒤푸아 필스 박사, 그리고 아를의 폴게 박사의 진찰을 받은 결과 프랑시스는 그 동안 임파구 증가증에 의한 뇌척수막염을 앓았다. (아비뇽의 레브로 박사의 분석) 7월 말에 환자는 팔다리가 모두 마비되었다. 시력은 전무했다. 그는 빛에도 반응하지 않았고 밤낮을 구별하지 못했다.

아이를 루르드로 데려가기 전에 검진을 부탁 받았다.  그때 나는 6월에 이미 기록했던 것과 똑같이 ‘사지마비, 시력 전무’라고 기록했다.

루르드에서 돌아오자마자 (8월 28일) 파스칼 부인이 아이를 데려왔는데, 아이는 엄마 손을 잡고 서 있었다. 아이가 걷고 있었다! 나는 아이의 마비 증세가 사라지고 시력이 회복되었음을 기록했다. 그 후 상태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의학적으로 말하자면 이런 결과는 설명할 방도가 없다.” (드르드 박사, 1938년 11월 9일)

나치의 전운이 동쪽으로 몰리자 프랑스는 전시체제로 돌아섰고, 보통 사람들의 삶은 붕괴되었다. 독일 군대는 프랑스를 그대로 밀고 지나갔고 루르드 의무국은 폐쇄당했다.  그래서 프랑시스 파스칼의 사례는 전쟁이 끝나고 나서 조사받았다. 프랑시스의 어머니는 진료기록 등을 가지고 아이와 함께 의무국을 찾았다.  파스칼이 열두 살이 된 1946년 10월 2일, 루르드 의무국 검사실에서 12명의 의사가 프랑시스를 검사하고 준비해 온 서류들도 검토했다. 의사들은 파스칼 이 “훤칠한 키에 튼튼하고 근육이 고루 잡힌 소년으로 자전거를 즐겨 타며 학교에 잘 다니고 있다”고 기록했다. 그들은 또한 1938년 파스칼이 앓았던 질병은 심리적인 것이 아니라 분명 ‘기질적’인 것이었다고 덧붙였다. 요추수액 분석 결과와 눈 검사 결과 뇌척수막염을 증명하는 양성이었다.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질병의 지속적 진전으로 더 이상 개선에 대한 희망이 사라졌을 때 증상들이 갑작스럽게 중지되었다. 치유는 시력의 완전한 회복 그르고 다른 신체적 기능과 함께 걸을 수 있는 능력이 회복되었다. 치유는 이제 10년째 지속되고 있다. 질병과 증상이 순간적으로 사라진 현상에 대해서는 의학적으로 설명할 길이 없다.” 보고서에 서명한 12명의 의사 가운데 유명한 오귀스트 발레이 박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1898년 보르도에서 의학 공부를 할 때 오귀스트 발레이는 의대학장 피트레 교수가 다음과 같이 제안하는 말을 들었다. “여러분이 차후 루르드에서 기적 치유가 일어났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면, 그것은 인간의 어리석음을 이용한 수치임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발레이는 의대를 졸업한 후 프랑스 군병원에서 소령으로 복무했으며 제1차 세계대전 참전 훈장도 받았다. 그러나 그는 현대의 전쟁이 인간의 몸과 마음에 저지른 끔찍한 상처에 충격을 받았다. 수많은 병자들과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루르드가 주는 희망에 점점 더 관심을 갖게 되었고 루르드에서 감동을 받았으며 희망을 얻었다.

1927년, 루르드 의무국장이 된 그는 25개국 의사들을 회원으로 초빙하여 루르드 의무국을 국제 기구로 만들었다. 그리고 1928년, 1933년, 1938년에 외부 전문가들을 불러 치유의 유인(誘因)이 된 샘물을 분석하게 했다.  루르드를 반대하는 이들은 치유 사례가 많이 일어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게 되자, 물속에 방사성 원소가 있거나 전기적 저항성이 있다, 심지어는 페니실린이 섞여 있다는 등 근거 없는 주장을 했기 때문이다. 발레이 박사의 요청을 받고 교수들이 검사에 착수했지만 그런 물질들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물은 보통 샘물과 다를 바가 없었다.

발레이 박사는 20년간 의무국장을 지냈다. 그 동안 그는 루르드의 기적에 관한 몇 권의 책을 집필했고, 여러 나라를 방문해 강의도 했으며, 치유 기적에 관한 과학적 토론장으로 월간지 두 개를 공동 편집했다. 그는 ‘성모님의 비서’가 된 것이 한없이 기쁘다고 말했다.

프랑시스 파스칼의 치유 기록을 조사한 후 루스 크랜스턴은 그를 인터뷰하기 위해 1953년 뷰캐어를 방문했다. 치유된 지 15년이 지난 뒤였다. 그녀는 매우 건강하고 완벽한 시력을 가진 열아홉 살의 젊은이를 만났다. 프랑시스는 매우 활동적인 청년으로 성장했으며, 아버지의 뒤를 이어 포도주 양조업자가 되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매년 프로방스 순례단의 깃발을 들고 루르드에 가서 들것 봉사를 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기자나 저널리스트들의 인터뷰 요청을 받은 적이 많으며 각지에서 기적에 대해 묻는 편지를 받고 답장을 쓰느라 애를 먹는다고도 했다.

 

 

 

11. 잔 프레텔

‘가엾은 것, 죽고 말았어!’

Jeanne Fretel – “Poor Girl, She’s Dead!”

 

이 치유 사례는 매우 극적이어서 루르드에 관한 여러 책에 빠짐없이 실려 있다. 잔 프레텔은 1914년 5월 27일 프랑스 켈트족 지역인 브리타니 르네시에서 태어났다.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또래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고 있을 무렵부터 직업전선에 나서야만 했다. 식당 종업원을 시작으로 나중에는 르네 중앙병원(호텔듀 시립병원이라고도 함) 간호보조원으로 일했다. 그러던 중 1938년 1월 복통이 시작되었고, 비교적 간단한 맹장수술을 받았다.

 그 후 집에서 충분히 쉬었으나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보통은 다시 시작되었고, 8월에 다시 르네 중앙병원에 입원하여 자외선 치료를 받았다. 일시적으로 진정되는 듯했지만 이내 배가 부어 오르고 복부의 피부는 차고 질척해졌다. 끔찍한 결핵성 복막염이라는 진단이 내려졌다.

잔은 병원비를 낼 능력이 없었지만 병원 직원이었으므로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1939년 1월, 마루엘루 박사는 그녀의 난소에서 결핵성 낭포를 발견하고 제거 수술을 했다. 그리고 그 해 기복술을 받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복강 유착 – 복강내 장기의 염증이나 복부 수술 후유증으로 복막이 들러붙는 증상 – 이 진행되어 복통은 더욱 심해졌다. 얼음찜질 등도 아무 효과를 보지 못했다. 1941년 5월, 르네 중앙병원의 종신 의료진인 펠르 박사가 다시 한번 개복술을 실시했다. 그 과정에서 무언가가 잘못되어 잔은 분비물(대변)을 몸 밖으로 배출하기 위해 관을 달고 지내야 했다. 그 후에도 1941년 12월에서 1943년 9월까지 수술을 네 번 더 받았다. 그러나 배는 여전히 단단하게 부어올라 있었다. 결핵성 복막염의 전형적인 증상이었다. 마침내 결핵균이 온몸으로 퍼졌고, 그녀는 1946년 1월 지루드에 있는 결핵 요양소에 수용되었다. 3개월 후 결핵균은 턱뼈에까지 번졌다. 다시 랑테스에 있는 라벤 오세앙 요양소로 이송되어 세 차례 수술을 받았다. 그 결과 턱에 큰 구멍이 생겼고 치아는 9개밖에 남지 않았다.

1946년 12월 그녀의 체중은 44킬로그램밖에 되지 않았고 몸과 마음은 완전히 지쳐 있었다. 의료진은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결론짓고, 그녀는 폰테아일루 호스피스38로 보내졌다. 12개월간 침상에 누워서 지낸 그녀는 너무 쇠약해져 스스로 몸을 일으킬 힘조차 없었다. 그녀는 당시를 회고하며 “이제 죽을 때가 된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라고 말했다.

바로 그때 기적의 결핵약이라고 알려진 스트렙토마이신이 프랑스에 수입되었다. 르네 중앙병원의 펠르 박사는 1948년 4월부터 45일간 스트렙토마이신을 투여했다. 그러나 개선의 여지가 전혀 보이지 않아 6월에 약물치료를 중단했다. 잔의 체온은 아침, 저녁으로 40도에서 36도까지 변화의 폭이 컸고, 복부는 풍선처럼 부풀아 올라 손이 살짝 만 닿아도 통증이 심했다고 펠르 박사는 기록했다.  그녀는 아주 적은 양의 죽만 삼킬 수가 있었고, 발작적으로 검은 피를 토하는 기침을 했다. 대변에는 엄청난 양의 고름이 섞여 나왔다. 그녀는 매일 3, 4회 모르핀 주사를 맞아야 했다. 이와 같은 진료 기록은 루르드의 의무국에 보관되어 있다.

1948년 9월 29일, 원목 신부가 그녀에게 세 번째 병자성사를 베풀고 있던 시각에 평소 잔 과 알고 지내던 한 교우는 도미니코회 신부들이 이끄는 로사리오 성지 순례단에 자리를 예약했다. 루르드 의무국이 공식적으로 협조를 요청했을 때 펠르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결핵성 복막염이 최고조에 달한 상태에 수막염 증상까지 더해 극심한 고통 중에 있던 한 환자가 1948년 10월 4일 르네 역으로 출발했다. …. 환자는 완전 탈진상태였다!” 펠르 박사는 그런 환자를 루르드에 (어디든 마찬가지지만 특히 루르드에)  데려간다는 발상 자체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순례단 열차가 르네 역을 벗어나기도 전에 펠르 박사의 예측이 맞아떨어지는 듯했다. 이동에서 받는 스트레스 때문에 그녀는 이미 의식을 잃고 있었다. 의료봉사단의 하일리 박사는 650킬로미터를 가는 동안 모르핀을 두 번 주사했다.

이튿날 (1948년 10월 5일) 순례단 열차는 루르드에 도착했다. 순례객들은 유명한 루르드의 아베 마리아를 힘차게 합창했지만, 잔은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듣지도 보지도 의식하지도 못했다. 뿐만 아니라 루르드에 도착한 후 며칠간은 자신이 들것에 실려 성모 동굴, 성수탕 등 여러 곳으로 옮긴 것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러던 중 10월 8일 금요일이었다! 두 명의 자원봉사자가 여전히 의식을 잃은 잔을 들것에 눕혀 성 벨라뎃다 제단에서 거행되는 병자를 위한 미사에 참석시켰다. 움직이지 못하는 병자들 사이를 오가며 성체를 나누어주던 신부는 입에서 구토 분비물이 흐르고 콧구멍에서 검은 피가 흘러내리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는 영성체 하기에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잔을 지나쳐 다음 병자에게 옮겨가려 하자 잔을 데리고 온 봉사자가 깊은 동정심을 느껴, 성체를 쪼개어 작은 부스러기라도 그녀의 입에 넣어 달라고 신부에게 사정을 했다. 그 다음은 잔에게 직접 들어보자.

“나는 바로 그 순간에 의식을 되찾았습니다. ‘여기가 어디지?’ 혼자 중얼거리자, 누군가가 ‘루르드예요’라고 대답하더군요. 미사가 끝나자 봉사자 둘이 나를 들것에 태워 성모 동굴까지 데려다 주었습니다. 거기서 몇 분이 흘렀습니다. 누군가가 겨드랑이 사이로 손을 집어넣어 나를 일으켜 앉히려 한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어느새 저는 몸을 일으켜 앉아 있었습니다. 누가 나를 일으켜 주었는지 보려고 주위를 두리번거렸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나를 일으켜 주었던 그 손이 내 손을 잡아 배에 얹어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나는 도대체 어찌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어 어리둥절했습니다. 내가 치유된 것일까. 아니면 꿈을 꾼 것일까? 풍선처럼 부풀어 있던 배가 쑥 꺼져 있었습니다. 그러고는 견딜 수 없는 허기를 느꼈습니다!”

그녀는 의사를 만나야겠다고 했다. 봉사자들은 그녀를 구르간 박사에게 데리고 갔다. 잔은 배가 정상으로 돌아왔다고 말했다. 부기도 가라앉고 통증도 사라졌으며 무척 배가 고프다고 했다. 그리고 음식을 먹어도 되는지 물었다. 박사는 그녀를 검사하고 나서, 모든 장기가 정상이니 음식을 먹어도 좋다고 했다. 봉사자들이 병원 구내 식당에 가서 퓌레39와 송아지 고기 그리고 빵 세 조각을 가져다 주었다. 그녀는 음식을 모두 먹었다. 다시 잔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지난 두 달 동안 죽도 겨우 넘겼는데 그날은 과거 10년간 먹지 못했던 음식을 맘껏 먹었습니다. 봉사자들이 가져다 준 음식을 순식간에 먹어 치우고 더 달라고 했답니다. 처음과 같은 양을 갖다 주었는데도 여전히 양이 차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내게 후식과 쌀로 만든 푸딩까지 갖다 주었습니다.” 그녀는 양껏 먹고 나서 혼자 힘으로 일어섰다.

“그러고 나서 성수탕으로 걸어갔습니다. 지난 3년간 걷지 못했는데 자연스럽게 걸을 수 있었습니다. 성수탕에 가서 혼자 샤워도 했답니다. 전혀 피로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병원으로 돌아와 다시 괘 많은 양의 저녁 식사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또 배가 고파 밤 11시에 잠을 깼다. 수개월간 또는 수년간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만성적 질병을 앓던 이들이 치유되면서 엄청난 시장기를 느끼는 현상은 루르드의 기적 치유 사례에서 흔히 발견된다. 이론적으로 오랜 기간 거의 공복상태였던 환자가 갑자기 포식을 하는 것이 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순간적으로 정상 상태로 돌아온 사람에게는 식욕이 되살아난다. 그리고 며칠 내 또는 수주일 내에 빠른 속도로 정상 체중을 회복하게 된다.

치유된 다음날 (10월 9일), 잔은 루르드 의무국의 권유대로 검사를 받았다. 그녀의 치유 소식을 들은 의사들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 수척한 그녀의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들것에 타라고 권했다. 그녀는 들것에 실려 의무국 침상에 눕혀졌다. 낭트 의 귀용 박사가 대표로 그녀에게 환영 인사를 했다. 잔이 이미 걸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치유되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일어서서 한 번 걸어보시지요” 하고 제안했다. 몇몇 의사들은 그녀가 너무 안쓰러워 부축해주려고 다가갔지만, 그녀는 도움을 물리치고 혼자 일어섰다. 귀용 박사가 잡아주려 하자 그녀는 거절했다. 박사는 알았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체중계 쪽으로 서둘러 갔다. “그분의 걸음이 무척 빨랐습니다. 하지만 나도 그분만큼 빠르게 따라갔지요.” 강한 자신감이 온몸에 물결치고 있었다.

그녀의 체중은 44킬로그램이었다. 의사들은 세밀하게 검사했다. 그들은 그녀의 상태에 대해 의료봉사단 의사들이 르네 역에서부터 자세하게 기록한 보고서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가 정상으로 회복되었고 중병 증상이 모두 사라졌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모든 사항을 자세히 적은 다음 이듬해 르네 중앙병원의 진단서와 진료기록 등을 가지고 다시 오라 했다.

잔 프레텔은 루르드를 떠나 르네 로 돌아오는 동안 순례객들을 감동시켰다. 열차 안에서 거의 앉아 있지 않고 돌아다니며 병자들을 간호하고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한 간호사가 잔이 활발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진정제를 주사해 주겠다고 했어요. 나는 거절했지요. 내가 쉬고 싶을 때는 언제나 휴식을 취할 수 있었으니까요. 집에 돌아와서 곧장 직장에 복귀했습니다. 그 후 나는 여태껏 아스피린 한 알 복용한 적이 없습니다.” (이는 그녀가 치유된 지 5년이 되는 해 루르드로 돌아와 하루 종일 병자들을 위해 수고한 후 루스 크랜스턴과 인터뷰하면서 한 말이다. 루스 크랜스턴의 <루르드의 기적들> 209~216쪽 참조)

르네에 도착하자마자 잔 프레텔은 르네 중앙병원으로 갔다. 의료진은 깜짝 놀라 말을 잇지 못했다. 너무도 놀란 한 젊은 의사는 황급히 펠르 박사를 찾아가서는 자기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잔 프레텔이, 잔 프레텔이!” 그러자 펠르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가엾은 것, 결국 죽고 말았군.” 젊은 의사는 더욱 다급하게 재촉했다. “어서 와서 직접 보세요!”

동료들의 증언에 의하면 펠르 박사는 불가지론자로서 ‘종교에 반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루르드 의무국 서류에도 이 사항이 지적되어 있다. 그래서 펠르 박사의 증언은 각별한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장기간 잔을 치료했고, 그 동안 환자와 의사로서 서로를 존중했다. 그는 성실하고 양심적인 의사였다. 그 후 상당 기간 잔의 건강을 점검하고 또 점검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순례단 조직 위원회에서 요청한 보고서를 작성해 주었다. 치유 후에는 진료기록, 엑스레이 사진 등을 꼼꼼하게 챙겨 루르드 의무국에 제출해 주었다. 그는 도량이 넓은 사람이었다.

잔 프레텔은 치유된 지 일년 만에 펠르 박사와 르네 중앙병원이 발급한 최근 기록들을 가지고 루르드로 돌아왔다. 귀용 박사(낭트 시), 리쿠상 박사(몽펠리에 시), 텔리여 박사(베제 시), 델로이 박사(르네 시) 가 루르드 의무국에서 그녀를 검진했다. 그 외 18명의 의사가 동등한 자격을 가지고 검진에 참여했다. 그 결과 1949년 10월 5일 20명의 의사가 아래의 진술서에 서명했다.

“두드러진 병력과 관련 자료들을 모두 고려해 본 결과 (수많은 진단서와 진료보고서, 치유되기 이전과 이후의 것을 합하여 30개의 체온 기록부, 잔 프레텔을 진료했던 의사들과 루르드 순례 여정 동안 그녀를 보살피며 관찰한 의사들의 증언, 그리고 경이적인 치유 속도)등 본 치유 사례에 대해 어떤 의학적 설명을 제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본 치유 사례는 자연의 법칙을 초월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그 해 검사보고서에 잔의 체중은 56킬로그램, 배, 허리둘레는 73센티미터로 기록되어 있다. 정확하게 일년 전 의식을 잃은 채 르네에서 루르드로 실려왔을 때는 체중 44킬로그램, 배, 허리둘레 백 센티미터였다.

루르드 의무국은 의사들이 관리하고 있다. 그 중 많은 의사들은 루르드의 기적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발견했다. (냉담생활을 하던 중 신앙을 재발견한 의사들도 많았다.) 그들은 기적 치유 사례를 과학으로 엄밀히 조사해야 할 의무가 있음을 의식하고 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평판은 물론이고 과학과 그리스도교 신앙 모두 좋지 않게 비칠 수 있기 때문이다. 객관성을 보장하기 위해 의무국 자료는 의료행위를 허가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열람할 수 있다. (루스 크랜스턴은 1953년의 통계자료를 인용했다. 그 해 1,500명의 의사가 기록부에 서명하고 검사에 참여했다.)

루르드는 프랑스 최남단에 있다. 1947년 루르드 의무국은 더 많은 의사들이 의무국 활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파리에 루르드 전국 의료위원회를 설립했다. 의사들로 구성된 이 위원회는 루르드 의무국이 의학적으로 불가해하다고 판정한 사례의 서류와 기록들을 재조사한다. 1950년 3월 12일, 파리 위원회는 잔 프레텔의 건강이 지속적으로 유지되고 있고 즉각적 치유의 명백한 증거를 재확인하고, “이 치유 사례는 의학적으로 불가해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는 판정을 내렸다. 잔의 치유 사례는 비교적 짧은 기간 내에 내려졌다.

1950년 11월 20일, 르네 교구의 로크 추기경은 교구조사위원회 보고서를 받아보고 잔 프레텔의 치유 사례를 하느님의 징표요 기적으로 선포했다. 루르드의 성모님을 통해 일어난 ‘교회가 인정하는 기적’ 제52번으로 기록되었다. 독자 여러분은 이를 <루르드: 기적 치유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루르드 의무국장 T. 만자판 박사 지음, 1987년 초판 발행. 1997년 발행한 제3판 참조)

루스 크랜스턴은 직접 발로 뛰며 많은 기적 사례를 조사하고 당사자를 찾아가 인터뷰했다. 그런데 그들 중 세상의 이목을 끌고 싶어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는 점을 지적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선’하기 때문에 치유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공통된 특징은 정기적으로 루르드에 가서 병자들을 위해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크랜스턴은 잔 프레텔이 매년 루르드에 가서 최소한 일주일씩 봉사하고 있으며 르네 시로 돌아와서는 유럽 각지에서 – 그리고 전세계에서 – 온 편지에 답장을 보내느라 매우 바쁘게 지내고 있는 모습을 확인했다. 마음 좋은 그 여인은 어떤 편지든 답장을 하지 않을 권리는 없다고 말했다.

또한 잔은 추기경이나 의사들의 요청으로 공개 회합 등에서 자신의 치유 경험담을 수 차례 이야기했다. 이따금 추기경의 요청을 받고 믿음을 찾는 이들 – 하느님이 과연 계신지, 그리고 하느님이 우리에게 관심이 있는지 그에 대한 확신이 없는 이들과의 만남도 가졌다. 추기경은 그녀의 솔직함과 복잡하지 않은 접근방법이 그런 사람들에게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신앙생활을 돕기 위해 만든 영화에도 출연했다.

1993년 3월 프랑스의 MSM사에서 제작한 훌륭한 비디오가 있다. 루르드 성지 순례를 다녀온 로사리오 순례단의 여정을 촬영한 것이다. 로사리오 순례단은 도미니코회 신부들의 주최로 매년 10월(묵주기도 성월) 루르드를 다녀온다. MSM 다큐멘터리 비디오를 보면 잔 프레텔과 그녀의 입에 성체를 넣어준 도미니코회 신부가 등장하여 당시를 회고하는 부분이 있다. 두 사람 다 팔순 노인이 되었지만 매우 열정적이다. – “세월도 그들의 열정을 식히지는 못했다.” ‘루르드’ 1998년 10월호에는 치유된 지 50년이 된 해도 로사리오 순례단과 함께 루르드를 찾은 잔 프레텔의 멋진 사진이 실려 있다.

루스 크랜스턴은 1955년에 쓴 책 <루르드의 신비>에서 잔 프레텔의 이야기를 훌륭하게 기술했다. 크랜스턴은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1987년 루르드 의무국이 그 책을 새롭게 꾸며 증보판(358쪽)을 출판했다. (<루르드의 기적>) 잔 프레텔에 관해 여러 작가들이 글을 썼다. 그 중에는 조셉 디어리의 <루르드의 성모>와 미셸 드 생 피에르의 <벨라뎃다와 루르드>가 있다. 후자에는 르네 중앙병원에서 기록한 체온 기록부와 루르드 의무국 의사들이 서명한 보고서 사진 등이 실려 있다.

 

 

 

12. 피에르 드 러더

세인의 입에 가장 많이 오르내린 치유 사례

Pierre de Rudder – Lourdes’ Most-Discussed Miracle

 

어떤 이들은 루르드의 물속에 또는 공기 속에 미지의 자연력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1889년 마리 퀴리와 피에르 퀴리 부부가 역청 우라늄광에서 발견하기 전까지는 인류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라듐이나, 엑스레이 치료 시대의 도래를 알린 풀로늄처럼 말이다. 이 미지의 자연력을 밝히려 노력했던 이들은 피에르 드 러더의 치유 사례를 연구 조사하는 데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드 러더는 벨기에 서부 플랜더스 지방의 대부호 – 부르게스에서 오스텐드까지의 땅을 반 정도 소유한 – 부스 드 지시니에스 자작의 고용인이었다. 1867년 2월 12일 마흔다섯 살이었던 드 러더는 두 사람의 벌목꾼이 커다란 나무를 쓰러뜨리면 그것을 옮기는 일을 도와주고 있었다. 그런데 육중한 나무가 미끄러지면서 드 러더의 왼쪽 다리를 부러뜨린 것이다. 무릎뼈 아래 경골과 비골이 모두 으깨어졌다. 근방에 있는 루덴부르의 어피니어 박사가 으깨진 뼈들을 맞추어 단단한 붕대로 고정시켰다. 드 러더는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다. 몇 주 후 의사가 붕대를 풀어보니 조각난 뼈들이 엄청난 양의 고름 속에서 제멋대로 흩어져 있었다. 접합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의사는 뼛조각을 골라내고 다른 세 의사에게 진료를 요청했다. 의사들은 절단할 수 밖에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드 러더는 절단 수술을 거부했고, 일년간 자리에 누운 채 극심한 고통을 감수했다. 마침내 뼈 끝부분은 모두 검게 괴사했다. 고름이 괸 붕대는 하루에 세 번씩 갈아주어야 했다.

드 러더를 아꼈던 자작은 그가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었지만 계속 자기 땅에서 살도록 허락했고 임금도 주었다. 그는 스타힐르 에 사는 반 호스텐베르크 박사를 주치의롤 두고 있었는데, 1874년 12월 그를 불러 불구가 된 드 러더를 진찰하게 했다. 그때의 진료보고서에 의하면 끊어진 다리뼈의 양 끝부분이 벌어진 상처 부위로 드러나 있는데 2.5센티미터 가량 분리되어 있었다. 그는 암울한 사항들을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았다. “그는 이러한 골절상을 8년간 견뎠다. 부러진 다리 아래 부분은 어느 방향으로든 돌아간다. 뒤꿈치를 들어올리면 다리가 반으로 접힐 정도다. 발목을 뒤틀면 발가락이 뒤로 가고 뒤꿈치가 앞으로 왔다.”

그는 절단 수술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했다. 드 러더는 이번에도 거부했다. 몇 주 후 자작은 부룩스 의 베리스트 박사에게 진료를 요청했다. 환자가 또다시 수술을 거부하자 두 의사는 진료를 포기하겠다고 자작에게 알렸다. 수술 비용뿐 아니라 모든 치료비를 부담하겠다며 설득하던 자작에게 드 러더는 우스타커 에 있는 루르드의 성모 동굴까지 다녀올 여비를 도와 달라고 청했다. 자작은 쓸데없는 짓이라며 일축했다. 미신 행위 따위에 돈을 허비할 수는 없다고 했다.

1875년 4월 초 자작이 세상을 떠났다. 드 러더는 자작의 아들이며 후계자에게 우스타커 에 다녀올 여비를 청하러 성으로 찾아갔다. 새로 주인이 된 자작의 약혼녀와 자작의 사촌이 마침 와 있었다. 그들은 소문으로만 듣던 ‘돌아가는 다리’를 보고 싶다고 했다. 다리의 붕대를 풀어 보여주자 그들은 충격을 받았다. 젊은 자작은 허약해진 드 러더의 요청을 받아들여 여비를 부담하기로 약속했다.

순례 여행이 시작되기 전날인 4월 6일, 이웃 사람 셋이 드 러더의 집을 방문했다. 반후렌 집안의 두 남자와 마리 미티지크 라는 여자였다. 그들은 상처에 붕대 감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3주 후 고름으로 가득한 상처와 3센티미터 간격으로 분리된 다리뼈와 무릎 아래로 덜렁거리는 왼쪽다리에 대한 진술서에 서명했다.

4월 7일 아침, 기차역으로 출발하려는데 문지기 피에르 블롬 이 찾아왔다. 그는 고통스럽고 ‘무익한’ 여행을 포기하라고 끈질기게 설득했지만 소용없었다. “우스타커 에서 치유된 사람들이 분명 있다는데 나라고 안 될 이유가 무언가?”  드 러더는 막무가내였다.

그의 순례 여행에 동의하는 사람은 없었다. 피에르 블롬 은 문지기 초소에서 드 러더가 쉴 수 있게 해주고 기차역까지 바래다 주었으며 기차 안에까지 들어 옮겨주었다. 그때 역무원 재거와 구두 수선공 장듀클라스 도 도와주었다. 장은 후에 드 러더의 덜렁거리는 다리와 고름으로 흠뻑 젖어 아취를 풍기던 붕대에 관해 증언했다.

드 러더와 아내는 겐트에서 내려 우스타커로 가는 버스를 갈아탔다. 그때 억센 버스 운전기사가 그를 번적 들어 태워주었는데, 드 러더의 다리가 ‘덜렁거리는’ 것을 발견하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그는 정거장에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큰소리로 말했다. “여러분, 여기 좀 보시오. 이 사람 다리가 떨어지기 직전이에요.” 껄껄대며 웃던 기사는 드 러더의 다리에서 피고름이 버스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 안색이 변했다. 그는 화를 내며 고함을 쳤다. 후에 그 기사는 그때의 일을 자세하게 증언했다.

드 러더의 상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성모상 앞에 거의 다다랐으나 아내가 있는 힘을 다해 부축했음에도 그는 절뚝거리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겨우 마련된 자리에 도착하자 그는 힘없이 주저 앉았다. 아내가 물 한 잔을 갖다 주었다. 다른 순례객들이 그의 다리를 툭 건드리고 지나가는 바람에 다리가 제멋대로 덜렁거렸다.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는 엄청난 통증을 견뎌내면서 성모상을 바라보았다. “나는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면서 루르드 성모님께 빌었습니다. 아내와 자식들을 벌어 먹일 수 있도록 은총을 허락하시오 몸을 성하게 해 달라고 빌었지요.” 순간 그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정신이 아찔하면서 마음속이 출렁이는 파도처럼 흥분되었다. 지난 8년 간 손에서 놓아본 적이 없는 목발도 잊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 줄지어 앉아 있는 순례객들 사이를 걸어나가 루르드 성모상 앞에 무릎을 꿇고 있음을 깨닫고는 놀라 소리쳤다. “내가 무릎을 꿇고 있네. 오, 맙소사!” 그리고 다시 일어나 누구의 도움도 없이 스스로 걸었다. 그의 아내가 소리쳤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어떻게 된 거예요?” 그러고는 번개를 맞은 것처럼 기절하고 말았다.

순례객들이 쓰러진 아내와 넋을 잃은 듯 멍하게 서 있는 드 러더 주위로 모여들었다. 그는 근처의 성으로 옮겨졌다. 왼쪽 다리가 오른 쪽 다리만큼 온전해 보였다. 부은 것도 말끔하게 사라졌고 예전처럼 양쪽 다리의 길이도 똑 같았다.  검사를 받은 후에 드 러더는 다시 섬모상 앞으로 돌아가 감사기도를 드렸다. 그러고 나서 아내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그들은 성문 앞에 다다르자 문지기 블롬은 한동안 입을 벌린 채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자네, 내 말 안 듣길 참 잘했네!” 드 러더가 집안으로 들어서자 달 실비에(당시 열 다섯 살)가 그의 품에 안기며 흐느껴 울었다. 간밤에 드 러더 가족의 불행을 이야기하며 혀를 끌끌 차던 이웃들(반후렌 형제와 마리 미티자크)이  소식을 듣고 달려왔다. 그리고 누군가가 브뤼셀에 가 있던 자작에게 전보를 쳤다. 자작은 어머니와 약혼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기적 따위는 믿지 않았소. 만일 이 소식이 사실이라면 가톨릭 신자가 되겠소!”

드 러더와 알고 지내던 사람들과 이웃들은 며칠 만에 진술서를 작성했다. 자작도 진술서에 서명했다. 감사의 뜻으로 9일기도를 드리는 본당 신부의 제안으로 1,500여 명의 신자가 기도회에 참석했다. 드 러더의 다리를 처음에 치료했던 어피니어 박사는 드 러더의 소식을 듣고 우덴부르에서 찾아왔다. 그는 드 러더에게 평소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었는데 온전해진 다리를 살펴보더니 체면 불구하고 흐느껴 울었다. 그리고 드 러더에게 말했다. “복되신 동정녀께서 인간의 치료법으로는 불가능한 치유를 해주셨네!”

그는 스타힐르의 전문의 호스텐베르크 박사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스스로 ‘자유사상가40요 무신론자’임을 자부하던 호스텐베르크 박사는 드 러더는 결코 걸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러나 간청이 계속되자 자신의 옛 환자를 찾아가 보기로 했다. 그가 찾아왔을 때 드 러더는 집 앞에 있는 밭에서 괭이질을 하고 있었다. 의사가 미심쩍은 표정을 보이자 드 러더는 껄껄 웃으며 두 발로 껑충껑충 뛰어오르기를 해 보였다.  충격을 받은 의사는 러더의 다리를 검사해 보았다. 양다리는 길이가 똑같았다. 왼쪽 다리 근육은 8년간 사용하지 못해 퇴화되었지만 단단하고 강했다. 17년 후 호스텐베르크 박사는 프랑스의 소설가요 자유사상가인 에밀 졸라가 루르드를 방문하여 조사한 다음 그에 관한 책을 쓸 것이라는 신문기사를 보게 되었다. (그 책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다루겠다.)

호스텐베르크 박사는 루르드 의무국에 편지 한 통을 보냈다. 그리고 가능하면 자신의 편지를 졸라에게 보여주라고 부탁했다. 편지에는 드 러더의 치유 기적에 관한 이야기와 그 일로 말미암아 자유사상가요 무신론자였던 한 의사가 어떻게 새로운 전망과 인생을 찾게 되었는지 그에 관한 내용이 들어 있었다. ‘이후에도 가끔 의심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공부하고 기도했다. 지금 명예를 걸고 확언하건대 나는 전적으로 하느님과 기적을 믿으며, 그 믿음을 통해 전에는 알지 못했던 내적 평화와 기쁨과 행복을 발견했다.”

기적 치유가 일어난 1875년 4월 7일을 전후하여 드 러더를 본 사람들은 자신의 증언이 담긴 진술서에 서명했다. 그 사건은 여러 신문에 실려 벨기에 뿐 아니라 유럽 전역에 걸쳐 대중의 관심과 주의를 끄는 논쟁거리가 되었다. 1893년 프랑스에서 로여 박사가 드 러더를 찾아와 그를 재검사하고 증인들도 조사하고 싶어했다. 로여 박사는 플랜더시 지방 말을 몰랐기 때문에 M. 타페니어스 를 통역으로 고용했다. 타페니어스는 초자연 따위는 믿지 않는 사람이었다. 로여 박사는 타페니어스 같은 사람이라야 철저하게 객관적인 통역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기적 치유 증거들이 얼마나 강력했던지 통역자는 보고서의 부록에 자신의 반종교적 시각이 흔들렸다고 기록했다. “신께서 하신 것이라는 설명 외에는 달리 길이 없다!”

피에르 드 러더는 치유된 지 23년이 지난 1898년 3월 22일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얼마 후 호스텐베르크 박사는 유족들에게 무덤에서 고인의 시신을 꺼내어 다리 부분을 절단해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동의를 구했다. 유족들은 성모님에 대한 고인의 열정적 증언과 치유 이후에 있었던 열띤 논쟁의 배경과 과정을 잘 알고 있었기에 박사의 청을 받아들였다. 피에르 드 러더의 다리뼈는 지금도 루뱅 대학에 보관되어 있고, 구리고 된 복제품은 루르드 의무국에 보관되어 있다. 관심 있는 독자들은 그곳에서 확인해 보기 바란다.

브와사리 박사의 후임으로 루르드 의무국장이 된 르벡 박사는 성 요셉 병원에서 오랜 기간 근무한 파리의 유명한 외과의사다. 그는 <기적 치유의 의학적 증거>라는 책을 썼는데, 1922년 영문으로 번역 출간되었다. 이 책에서 르벡 박사는 드 러더의 치유 사례에 대해 언급했다. 그는 부러진 뼈가 3센티미터 간격으로 분리되어 있었다는 점을 지적했다. 게다가 부러진 부분은 ‘순간적인 접합’이 이루어지기 직전까지 양쪽 모두 괴사되어 검은 색을 띠고 있었다. 결국 치유는 5센티미터 정도의 뼈가 왼쪽 다리 경골과 비골에 순간적으로 더해졌음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그 정도의 벼를 만드는 데 소요되는 인산의 양은 5그램이다. 그러나 사람의 혈류 속에 있는 인산의 양은 1.6그램밖에 되지 않는다. 치유의 즉각성과 순간적으로 나타난 인산의 엄청난 양은 의학적으로 설명할 수가 없다. 그런 사례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또한 오랜 기간 동안 사용하지 않은 근육은 위축되게 마련이다. 의학적 견지에서 볼 때 드 러더가 어느 정도 정상적으로 걷기 위해서는 (없어진 5센티미터만큼의 다리뼈를 고려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장기간의 물리치료와 수치(水治)요법41과 전기자극치료 등이 필요했다. 어떤 물리치료사도 그 정도는 알고 있다. 그런데 거의 죽은 다리를 달고 있던 드 러더가 순식간에 힘차게 걸었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즉시 농장일을 시작했고, 그 후 23년간 일을 계속하면서 다리 때문에 문제가 된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기 치유된 다음날 어피니어 박사는 다리가 완전히 치유되었음을 확인했다.

 

 

 

13. 가브리엘 가르검

시체가 걷다

Gabriel Gargam – The Corpse That Walked

 

가브리엘 가르검은 서른세 살 된 우체국 직원이었다.  1899년 12월 17일, 그는 보르도-파리 행 열차 안에서 우편물 분류작업을 하고 있었다. 자정 즈음에 열차는 앙굴렘 근처 경사길에서 속도를 늦추며 서서히 정차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다른 열차가 시속 80킬로미터가 넘는 속도로 달여와 충돌하면서 끔찍한 사고가 일어났다. 동료 직원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고, 가브리엘은 이튿날 오전 7시경 눈 속에서 의식을 잃은 채 발견되었다.  그는 급히 앙굴렘 시립병원으로 후송되었고 의사들은 그의 목숨을 건지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20개월이 지난 후에도 그는 허리 아래가 완전히 마비된 상태로 여전히 병원에 누워 있었다. 체중은 35킬로그램밖에 되지 않았고 정상적인 영양 섭취도 불가능했다. 식도에 연결해 놓은 관을 통해 어렵게 영양을 공급받을 수밖에 없었다. 감각을 잃은 발에는 보기 흉한 괴저42가 생겨 살이 썩어가고 있었다.

가브리엘의 가족은 매년 3천 프랑의 연금을 지급하겠다는 오를레앙 철도회사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 결과 앙굴렘 병원장 데크라삭 박사는 재판정에서 세부적인 의학적 진술을 해주었다.

가브리엘은 육체적 건강을 완전히 잃은 상태였고 평생을 불구로 살아야 할 처지가 되었다. 혼자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지속적인 보호가 필요한 환자였다. 법원은 철도회사에게 가브리엘 측이 거액인 66만 프랑을 보상하고 추가로 매년 6천 프랑을 지불하도록 명령했다. 오를레앙 철도회사는 항소했으나 패소했다.

가브리엘의 상태는 더욱 악화되었고 병원에서는 척수 수술을 받지 않으면 목숨을 잃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는 수술을 거부하고 가족에게 집으로 데려가 달라고 했다.

가브리엘은 8년간 냉담생활을 해왔고 자칭 무신론자였다. 아들이 머지않아 죽게 될 것이라는 의사의 말에 어머니는 평소보다 아들을 위한 기도시간을 두 배로 늘렸다. 어머니는 가브리엘을 루르드에 데려가고 싶어 애원하며 설득했다. 다가오는 8월 마지막 주 순례단이 루르드로 출발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그는 한마디로 거절했다. 그래도 어머니는 포기하지 않았다. 아버지도 그를 다그쳤다. 병원에서도 너무 늦기 전에 수술을 받으라고 사정을 했다. 사방에서 다그치는 소리가 귀찮았는지, 그는 마침내 부모의 뜻에 따르기로 동의했다.

가브리엘은 들것에 실려 역으로 옮겨졌으나 역에 도착해서는 의식을 잃고 말았다. 순례 여행 담당자들은 그의 어머니와 간호사에게 환자를 집을 데려가는 게 좋겠다고 설득했다. 그의 어머니는 거절했다. 어느 사제가 그에게 화해성사를 베풀고 성체 한 조각을 입에 넣어주었다. 하지만 가브리엘은 별로 탐탁지 않게 여겼다.

기차가 루르드에 도착한 것은 오전 7시였다. (1901년 8월 20일 일이었다.) 가브리엘은 몸 상태도 좋지 않고 통증은 더 심해져 당장 모든 것을 집어치우고 싶었으나 어머니의 마음을 상해 드리고 싶지 않아 겨우 참았다. 자원봉자사들이 그를 들것에 태워 성모 동굴로 데려갔다. 그의 어머니와 간호사, 그리고 어머니의 친구는 들것 옆에 붙어 따라갔다. 영성체 시간에 가브리엘은 작은 성체 조각을 입에 넣었다. 그 순간 하느님이 실재하며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임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는 온 마음을 다해 진심으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의 생명을 성모님의 발 아래 맡기면서 말로 다할 수 없는 기쁨을 느꼈다. “그것은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순간이었습니다.”

오후 2시에 가브리엘은 성수탕으로 옮겨졌다. 당시 35킬로그램의 체중으로 해골 같았던 몸을 차가운 샘물에 조심스럽게 담갔다. 그런데 쇼크가 컸던지 그는 의식을 잃고 말았다. 그의 어머니는 핏기 없는 아들의 얼굴을 어루만져 보았다. 싸늘했다. “죽었어.” 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한참 후 슬픔에 잠긴 일행은 들것 드는 일들을 따라 병원으로 되돌아갔다. 가는 길에 성체 현지 행렬과 마주치게 되었는데, 성광을 모시고 가던 주교가 그들을 보더니 잠시 멈추어 가브리엘에게 성체 강복을 내렸다. 가브리엘은 창백한 얼굴을 천으로 가린 채 들것에 누워 있었다.

그때 가브리엘이 갑자기 꿈틀거리는 듯하더니 들것의 양쪽 막대부분을 움켜쥐었다. 말라빠진 손이 얼마나 가늘었는지 꼭 갈고리 같았다. 그는 일어나려 몸을 뒤척였다. “도와주세요. 걸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의 어머니는 울음을 터뜨리며 소리쳤다. “성모님, 들어보세요. 제 아들이 입을 열었어요. 지난 20개월간 말 한마디 하지 못했답니다!” 봉사자들이 부축하여 일으켜 세우자 그는 한 발짝씩 걷기 시작했다. 피골이 상접한 몸에 창백한 얼굴의 가브리엘이 긴 잠옷을 걸치고 걷는 모습은 마치 시체가 수의를 입고 걷는 듯했다. 형렬에 참여했던 군중들이 신기한 듯 그의 주위로 모여들었다. 봉사자들의 안내로 가브리엘 일행은 병원으로 돌아갔다. 거기서 그들은 또 한번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되었다. 장기간 정상적으로 식사를 하지 못하던 가브리엘이 왕성한 식욕을 보이며 엄청난 양의 음식을 먹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수프와 굴과 닭 한 마리 그리고 포도 몇 송이를 깨끗이 먹어 치웠다. 식사를 마치고 나자 사람들이 줄을 이어 찾아왔는데 그는 귀찮아하는 기색도 없이 자신이 경험한 것을 몇 번이고 거듭 이야기 해 주었다.

이튿날 아침 가브리엘은 의무국에 보고하러 가면서 새로 산 양복으로 말끔하게 차려 입고 당당하게 걸어갔다.  그의 치유 소식은 이미 널리 전해졌다. 60명이 넘는 의사와 많은 기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중 몇몇 기자들은 앙굴렘 병원에서 불구의 몸으로 죽어가던 젊은이와 무정하고 탐욕스런 철도회사간의 손해배상 소송사건을 기억하고 있었다. 철도회사가 재판에서 연거푸 패소하자 사람들은 환호했다.

가브리엘이 의사에게 보고하는 자리에 브와사리 박사도 있었다.  그는 당시 의무국 부국장이었고 향후 30년간 근무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는 1902년에 <루르드의 의료사(史)>를 발간했는데, 그 책에서 에밀 졸라와 장 샤르코 교수(루르드의 ‘기적’은 자기 암시에서 비롯된 현상이라고 주장한)에게 가브리엘의 치유를 한 번 설명해 보라며 도전했다.

브와사리 박사는 책에서 당시 가브리엘의 섬뜩한 외모를 “마치 유령 같았다”라고 묘사했다. 브와사리 박사가 주안점을 둔 설명 중에 다리 근육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정상적인 영양 섭취가 불가능한 상태에서 다리가 마비된 채 20개월간 누워 있었으므로 가브리엘의 다리 근육은 모두 쇠퇴했다는 것이다. “여러분!” 브와사리 박사가 말했다. “우리는 먼저 의학적 견지에서 가브리엘 가르검 씨는 다리 근육이 없으므로 걸울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해야만 합니다.” 가브리엘은 다시 한번 일어나 의사들 앞에서 자연스럽게 걸었다. 한 의사가 질병의 정확한 명칭을 문제 삼았다. 다른 의사가 대꾸했다. “이름이 지금 무슨 의미가 있겠소. 유기체가 파괴되었소. 그런데 회복 기간도 없이 환자가 멀쩡하게 일어나 걷고 있지 않소!” 의사들은 두 시간 동안 가브리엘을 검사했다. 1901년 8월 21일의 일이었다.

가브리엘은 고향으로 돌아갔다. 신문기사를 본 사람들이 그를 보기 위해 역마다 기다리고 있었다. 그 후 50년간 그는 매년 루르드에 가서 들것 드는 고된 일을 하며 병자들을 위해 봉사했다. 작가 게오르그 바트림 이 루르드에 관한 책을 쓰기 위해 그곳에서 자료 수집을 하고 있을 때였다. 그가 자원봉사단 책임자에게 급한 전갈을 보냈다. 자신이 지금 루르드에 머물고 있는데 시간이 없으니 그날 오전 중에 가브리엘과 인터뷰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부탁이었다. 동료 자원봉사자가 성수탕에서 병자를 돌보고 있는 가브리엘을 찾아냈다. 가브리엘은 지금은 바빠서 시간을 낼 수 없으니 저녁때까지 기다려 주면 좋겠다고 답했다. 병자가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루르드에서는 병자가 가장 중요한 사람이다.

가브리엘은 자신의 믿음과 루르드에 대한 애정을 이해해 주는 여성과 결혼했다. 그녀는 매년 남편과 함께 루르드를 방문하여 남편이 들것 드는 봉사를 하는 동안 자신은 병자들의 수발을 드는 도우미로 일했다. 가브리엘 가르검의 마지막 루르드 순례 여행은 1952년 8월이었다. 기적 치유 이후 51년째 되는 해였다. 그는 이듬해 3월 여든세 살로 세상을 떠났다.

나는 1951년 루르드에서 가슴 뭉클한 사진 한 장을 보았다. 성체 강복 행렬에 참여하고 있는 가브리엘의 모습이었는데, 여든 살이 넘은 나이에도 꼿꼿했다. 그는 들것 드는 봉사자들이 착용하는 가죽 어깨 끈을 메고 있었다. 얼굴에는 엄청난 불행 안에서 하느님을 만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평온함이 배어 있었다. 그리고 열정을 다해 봉사한 이의 겸손함이 그대로 내 가슴에 전해졌다.

 

 

 

14. 에밀 졸라의 ‘불쾌한 고뇌’

Emile Zola – “Frightful Pain”

 

원기 왕성한 토목기사였던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을 때, 겨우 일곱 살이던 에밀 졸라는 큰 충격을 받았다. 1847년의 일이었다. 그는 20대 초반까지 홀어머니와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며 고통스럽고 불안정한 시절을 견뎌냈다. 특히 그의 어머니는 기득권층에 대한 원망을 곱씹으며 불행한 나날을 보냈다. 자신과 어린 아들이 경제적 고통을 겪는 것은 남편이 죽은 후 마땅히 받아야 할 연금을 관청에서 가로챘기 때문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에밀 졸라는 저널리스트, 비평가 그리고 잘나가는 소설가로 성공한 후 지배층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통해 복수를 했다. 그로써 자신의 마음을 달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독설가로 유명해지자 소설도 불티나게 팔여 큰돈을 벌었다. 그에게는 교회도 지배층의 일부였다. 그의 깊은 반가톨릭주의적 성향은 <루르드>(1894년)와 <로마>(1896년) 같은 소설에 잘 드러난다.

루르드에 대한 그의 편견을 알아보기 위해 나는 888쪽이나 되는 <졸라의 생애>를 꼼꼼하게 읽어보았다. 이 책은 1995년 구겐하임 재단 후원으로 프레더릭 브라운이 출간했다. 졸라는 루르드를 ‘돈이 억수로 쏟아져 들어오는’ 곳 (특히 성직자들에게)으로 묘사했다. 그리고 “신들린 듯 강박적으로 합창하는 성가는… 신경성 광기의 상태를 유발하여” ‘겉보기에’ 신비스런 효과를 유도한다고 설명했다. “종교적인 마술… 그리고 주문 등이 신경성 기질을 가진 병자에게 놀랄만한 효과를 유도한다고 이를 경험하게 하지만, 결핵성 질병을 앓고 있는 가엾은 병자가 물에 들어가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며, 실제로 즉사하는 경우도 많다.” 이러한 주장을 듣고 브와사리 박사는 몹시 놀랐다. 그는 졸라에게 그런 주장의 구체적 근거를 제시해 보라고 촉구했다. 그러나 졸라는 거절했다.

졸라는 자신이 “베일에 싸인 극적 사건들을 파헤쳤으며… 루르드의 모든 비밀을 밝혀 그 정체를 드러냈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졸라는 루르드 기적의 발단이 된 벨라뎃다 소비루를 ‘정서적으로 심란한 소녀’이며 ‘히스테리적일 뿐만 아니라 바보 천치’라고 일축했다.

나는 교회를 비난하는 졸라의 마음은 이해할 수 있다. 그에게 교회는 당시 프랑스 정부의 일부분으로 간주되었고, 프랑스 정부는 졸라와 같이 가난에 허덕이던 수많은 국민들에게 아무 도움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벨라뎃다에 대한 평가에서 정직함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는 벨라뎃다에 관한 진술을 이름없고 유순한 루르드 주민 몇몇을 이용하여 그들이 직접 말한 것처럼 꾸몄다. 진술 내용이 발표되자 루르드 주민들이 직접 나서서 자신들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으며 지면에 발표된 내용은 조작이라고 부인했다. 졸라는 사실상 벨라뎃다의 성품이나 됨됨이에 대해 조사하지도 않았으며, 자신이 발견한 사실들을 의도적으로 조작했다.

그는 1892년(벨라뎃다가 죽은 지 13년째 되는 해) 8월 19일부터 9월 1일까지 13일간 루르드에 머물렀다. 스물두 살의 벨라뎃다가 느베르 수녀원에 입회하기 위해 루르드를 떠난 지 26년밖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그녀와 동시대에 살았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최초의 목격자들도 살아 있었다. 그들은 벨라뎃다에 관한 인터뷰에 기꺼이 응했다. 더구나 벨라뎃다에 관한 기록과 참고자료들도 얼마든지 쉽게 구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1874년에 발간된 도쥐 박사의 <루르드의 성모 동굴>이 있었다. 도쥐 박사는 루르드에 거주하는 의사로서 성모 발현을 목격했고 벨라뎃다의 정신 건강을 조심스럽게 검진했다.

그리고 1862년에 발간된 캐논 포케이드 의 <루르드의 성모 발현>이 있었다. 그는 로렌스 주교에 의해 소집되었던 ‘루르드 조사위원외’의 간사였다. 위원회는 결론을 공표하기까지 4년 동안 정성을 다해 조사했다. 1869년 법정 변호사인 앙리 라세르 는 <루르드의 노트르담>을 출간했다. 그는 로렌스 주교의 허락을 받아 교구청에 보관되어 있던 엄청난 양의 서류와 문서를 자유롭게 참조했다. 또한 예수회의 레오나르도 크로스가 철저하게 조사한 보고서가 후에 책으로 출간되었고 믿을 만한 기록으로 인정되었다. 벨라뎃다는 어떤 인물보다도 더 면밀히 조사되었고 철저히 분석되었다. 그런데 졸라는 자료를 조사해 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으며 의도적으로 증거들을 조작했다.

프랑스에 과학주의와 합리주의가 군림하던 1858년, 벨라뎃다와 열여덟 번의 성모 발현은 시당국을 곤혹스럽게 했다. 루르드 지역을 책임지고 있던 경찰서장 자코메 와 검사 두투워 그리고 지사 바롱 메시 는 모든 것이 짓궂은 장난이나 속임수였음을 인정하게 하려고 벨라뎃다에게 집요한 압력을 행사했다. 결국에는 의사 세 명을 보내어 그녀의 정신적 질병을 찾아내도록 지시했다. 세 의사 가운데 J. B. 발렌시에 는 후에 ‘조사’가 공정하지 못했음을 공개적으로 고백했다.

내 책상에는 벨라뎃다에 관한 책이 39권 놓여 있다. 졸라의 거짓말을 가장 인상 깊게 뒤집은 책은 영국인 B. G. 샌드허스트 의 <우리는 성모님을 보았어요 We Saw Her>이다. 군 출신인 샌드허스트는 제1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 편에서 싸웠고,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북아프리카에서 싸웠다. 그는 반격을 준비하는 유능한 지휘관처럼 증거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렬시켜, 합리주의의 깃발 아래 졸라와 같은 사람들의 맹렬한 공격에 대응했다. 합리주의자들은 기적은 일어날 수 없다는 생각을 원칙으로 삼고 있었다. 그들에 의하면 벨라뎃다와 루르드 성지는 위험한 속임수이며 타파되어야 했다.

샌드허스트는 벨라뎃다에 관한 모든 자료를 정리하고 생존해 있는 증인들, 예를 들면 중요한 증인 중의 하나인 방앗간 주인 니콜라씨의 며느리를 만나보았다. 제목에서 ‘우리’란 바로 이러한 증인들을 포함하여 광범위하게 일컫는 말이다. 그 증인은 다음과 같다.

 

  1. 벨라뎃다의 부모, 형제 그리고 직계 친척들.
  2. 경찰서장 자코메, 검사 두투워, 지사 바랑 메시. 이들이 남긴 공문서를 살펴보면 벨라뎃다가 속임수를 썼다거나 정신 이상이라는 증거를 만들어 냄으로써 성모 발현을 속되게 하려고 전력을 다했음을 알 수 있다.
  3. 본당 주임신부 페이라말 은 발현이 진짜가 아니라고 철저하게 외면했으며 세 명의 보좌신부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결국에는 발현 증거를 인정하게 되었고 그 후 시당국에 대항하여 벨라뎃다를 보호했다. 그는 벨라뎃다를 정신병원에 입원시키려 했던 이들의 계획을 직접 나서서 무산시켰다. 처음에는 벨라뎃다의 진실함을 의심했지만, 그녀의 정신건강에 대해서는 결코 의심한 적이 없었다.
  4. B. S. 로렌스 주교도 처음에는 본당 신부의 적대적 태도에 동조했다. 1858년 프랑스 천주교회는 많은 비판을 견뎌내고 있었다. 그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벨라뎃다를 두둔하고 격려했다가 만에 하나라도 사기행각으로 밝혀지면 교회가 받을 상처를 우려했던 것이다. 본당 신부 그리고 도쥐 박사 같은 권위자들이 벨라뎃다를 신뢰하게 되고, 사건 현장에서 좋은 결과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질병 치유 사례가 보고되자, 주교는 벨라뎃다와 사건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위원회를 소집했다. 위원회는 느긋했다. 그들은 루르드 지역과 파리에 있는 합리주의자들, 저널리스트들에 의해 벨라뎃다가 수없이 비웃음과 조롱을 받았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위원회는 4년에 걸쳐 벨라뎃다와 증인들, 그리고 보고된 기적을 조사한 후 벨라뎃다를 공식적으로 지지했고 일곱 가지 치유 사례 또한 의학적으로 불가사의한 것으로 공식 확증했다.
  5. ‘우리’ 중에 유명한 사람으로 J. B. 에스트라드 도 있었다. 세무서 간부 직원인 그는 루르드 주간지 ‘라비단’의 사설을 맡고 있었다. 그 역시 벨라뎃다의 이야기를 듣고 처음에는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일축했다. 2월 23일에 있었던 일곱 번째 발현을 보러 간 것은 자신과 친구들을 위해 샤프롱43이 되어 달라는, 누이 엠마누엘리트 의 청 때문이었다. 양가 규수들을 보호자도 없이 깜깜한 새벽길에 나서게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날 경찰서장 자코메가 찾아왔고 벨라뎃다를 엄중히 심문하는 자리에 에스트라드 도 있었다. 자코메 서장은 벨라뎃다에게 당장 허튼 짓을 하지 않으면 감옥에 가두겠다고 협박했다. 그런데 벨라뎃다는 여전히 당당했다. 경찰서장의 추궁을 받으면서도 대담하리만큼 침착함을 잃지 않는 벨라뎃다의 모습에서 에스트라드 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 또한 발현 도중 ‘무식한 가난뱅이 소녀’가 무아경에 빠져 변하는 모습을 목격하고 감동했다. 에스트라드는 <발현 Apparitions>에서 벨라뎃다를 양식 있고 강하며 깨어 있는 인물로 묘사했다. 이는 벨라뎃다를 ‘정서적’으로 심란하면… 히스테리적인 바보 천치’라고 단정한 졸라의 말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6. 샌드허스트는 또한 1858년 루르드 초등학교 교사였던 클라렌스 (후에 교장이 되었다)의 상세한 증언을 소개했다. 클라렌스는 철저한 무신론자였으며, 발현 장소에 간 것도 사기행각을 밝히겠다는 각오에서였다. 그는 2월 27일 토요일 열 번째 발현 현장을 목격했다. 그는 아이들의 속임수나 짓궂은 장난 따위는 쉽게 간파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나는 벨라뎃다의 이야기에서 허점을 잡아내 다시는 동굴에 가지 않도록 설득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벨라뎃다를 찾아가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누고 난 그는 오히려 자신의 ‘생각이 뒤집혔음을’ 깨달았다. 클라렌스는 결국 가톨릭 신앙을 갖게 되었다. 벨라뎃다에 대한 시당국의 압력이 거세어지자 직장에서 쫓겨날 것을 각오하고 지사 바롱 메시에게 벨라뎃다를 옹호하는 보고서를 보냈다. 그로써 벨라뎃다의 공개적인 지지자가 되었다. 그는 열여덟 번의 발현이 있고 3년 뒤인 1861년 벨라뎃다와 성모 발현에 관한 상세한 보고서를 출간했다.
  7. 샌드허스트는 <우리는 성모님을 보았어요>(228쪽)를 통해 벨라뎃다를 잘 아는 루르드 주민 36명의 증언을 정리하여 소개했다. 증언을 통해 드러난 벨라뎃다는 침착하고 통찰력과 기지가 넘치며, 정직하고 시골 소녀다운 상식을 갖추었으며, 전혀 과정이 없었다.

 

일찍이 보통 사람이나 서민 대중을 ‘바보 천치’라고 매도한 졸라는 가톨릭 신앙과 교리를 희망 없이 죽어 가는 ‘오컬티즘’44 으로 평가절하했다. 1864년 그는 ‘인구가 줄어든 천국’에 대해 글을 쓰고, 합리주의자들(졸라는 자신을 합리주의자들의 리더라고 여겼다)이 ‘유령을 쫓아낸 깨끗한 하늘’을 후대에 물려주었다며 자랑했다. 그는 <루르드>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강력하고도 신속한 공개 항의와 이의 제기에 깜짝 놀랐다.

유명한 작가 F. 파킨슨 키에즈 는 벨라뎃다의 전기를 쓰기 위해 루르드에 가서 프랑스어로 된 자료들을 조사한 여러 작가들 중 한 사람이다. 샌드허스트가 그랬던 것처럼 그녀 역시 생존해 있는 목격자, 예를 들면 벨라뎃다의 올케를 직접 만났다. <루르드의 벨라뎃다> 서문에서 키에즈는 영적 공주가 된 슬럼가의 신데렐라, 벨라뎃다의 ‘영혼의 광채’에 감동했으며, 그 매력에 깊이 빠졌음을 고백했다.

그녀는 벨라뎃다가 ‘총명하고 침착하고 매우 의연하다. 히스테리 증이나 소심함은 그녀의 천성이나 심성에 어울리지 않으며 그녀에게는 자신의 확신을 지킬 용기가 있었으니 온갖 반대를 받으면서도 추호의 흔들림도 없었다”고 말했다. 벨라뎃다로 하여금 ‘위험스런’ 성모 발현 ‘주장’을 철회하도록 하기 위해 시당국이 기울였던 엄청난 압력을 폭로했다. 그런 와중에서도 벨라뎃다가 섬세한 유머 감각과 장난기를 잃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더욱더 매력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녀는 수녀원의 병실에 누워 죽음을 앞두고 있으면서도 의사의 근엄하고 음울한 태도나 말투를 흉내 냄으로써 동료 환자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1890년 졸라의 모친 에밀리가 세상을 떠났을 때, 당시 마흔 살이었던 졸라는 모친의 장례식을 성당에서 치르는 것을 거북하게 여겼다. 그는 종교적 의식에 대한 ‘불쾌한 고뇌’를 앙리 세아드 에게 토로한 적이 있다. 벨라뎃다와 루르드에 대한 신뢰를 파괴하려 했던 그의 노력은 성서의 도덕적 가르침이 가져다 주는 ‘불쾌한 고뇌’를 마음 속으로부터 몰아내려는 노력이 아니었을까 그 도덕적 가르침은 벨라뎃다 소비루의 삶을 통해 그리고 성모님이 벨라뎃다에게 이르신 죄의 회개에 대한 메시지를 통해 다시 한번 강조되었다.

 

 

 

15. 에밀 졸라가 꾸며낸 이야기 – 세 명의 가공인물

Exposing a Zola Fiction – Three People of Straw

 

나치 정권하에서 국민 계몽 선전활동을 책임졌던 J. 괴벨스 (Joseph Geobbels) 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이었다.  그렇게 많이 배운 사람이 진실을 왜곡하는 일에 앞장섰다. 그는 위조, 변조, 속임수 그리고 역정보(거짓 정보)의 전문가였으며, 역정보를 이용하여 대중을 세뇌시켰다. 나는 루르드에 관한 숱한 거짓 정보를 발견했는데 졸라의 작품 <루르드>가 그 대표적 사례다.

졸라는 매스 미디어의 영향력에 대해 잘 알고 있었으며, 그것을 이용하려 애썼다. 그는 <르 피가로> 와 <길 블라>의 기자들에게 루르드에 관해 ‘있는 그대로 사실’을 밝히겠노라고 떠벌렸다. 그리고 그 일을 ‘아무런 악의 없이’ 진행할 것이니 가톨릭 신자들은 경계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덧붙였다. 그는 1892년 8월 19일부터 9월 1일까지 루르드에 머물렀다. 당시 의무국자 브와사리 박사는 졸라에게 모든 것을 공개했으며, 기적 치유를 주장하는 사람을 검진하는 자리에도 초대했다. 졸라는 8월 20일과 21일, 두 차례 참관했다. 졸라는 루르드에서 치유된 병자들은 ‘신경성 환자들’ 뿐이라는 주장을 기자들에게 이미 밝힌 터였다.  그래서 브와사리 박사는 기질성 질환 환자의 치유 사례를 졸라에게 소개했다. 나는 여기서 세 가지 치유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는 졸라가 <루르드>(영역본은 500쪽에 달한다)에 세 가지 사례를 심하게 왜곡하고 변조하여 소개했기 때문이다.

 

먼저 열다섯 살 된 클레멘타인 트루베 의 치유 사례를 보자. 그녀는 8월 20일 의무국에서 브와사리 박사를 포함한 20명의 의사에게 검진을 받았다. 졸라도 그 자리에 두 시간 동안 참관했다. 프랑스 비엔느 주 루유 마을에 살고 있던 클레멘타인은 열두 살 때부터 오른발 뒤꿈치가 썩어 들어가는 카리에스로 고통이 시작되었다. 그 지방 의사인 시벨 박사는 결국 종골(발뒤꿈치뼈) 결핵성 골막염 진단을 내렸다. 증상이 악화되자 박사는 수술을 했으나 상처에서는 계속해서 고름과 농이 흘렀다. 클레멘타인은 루지낭 병원에 4개월간 입원했다. 재수술과 계속 약물주사를 맞았지만 상태는 전혀 나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퇴원했지만 아이는 목발 없이 걷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

1891년 8월 초 시벨 박사가 다시 한번 상처에 칼을 댔다.  어머니 사르데트 부인은 통증으로 울부짖는 아이를 부둥켜안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여전히 고름과 농이 흘러나왔다. 8월 10일 루지낭 병원장이 상처를 검사해 보았고, 증상이 전혀 개선되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부모는 아이를 루유 마을 근처 푸아티에서 출발하는 루르드 순례여행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푸아티에로 이동하기 직전 어머니와 들레슈 부인과 이웃들이 클레멘타인의 여행을 준비해 주었다. 그때 거즈와 붕대도 깨끗한 것으로 갈아주었다. 후에 그들은 루르드 의무국에 보관된 진술서에 이렇게 서명했다. “상처 부위가 벌어져 피와 고름이 흐르고 있었다.” 진술서에는 순례단을 이끌었던 드 러데레 자작 부인의 증언도 들어 있다. 푸아티에 역에서 열차가 출발하기 전 자작부인은 보호자들이 클레멘타인의 상처에 거즈와 붕대를 새 것으로 갈아주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보았다. 그녀와 자원봉사 간호사들은 피와 고름이 계속 흐르는 것을 확인했다.

1891년 8월 20일, 순례객들을 실은 열차가 루르드에 도착했다. 다음날 봉사자들은 클레멘타인을 성수탕으로 옮겼다. 파리에서 온 코르넷 과 생스 에서 온 라이유 부인은 클레멘타인을 부축하여 씻기러 들어갔다. 두 사람은 클레멘타인의 붕대와 거즈를 떼어냈고 라이유 부인이 절름발이 소녀를 부축하여 물에 잠겨 있는 계단을 조심스럽게 내려가면서, 흔히 그렇듯 큰소리로 동정 마리아게 기도 드렸다. 그러나 그녀는 기도를 도중에 멈출 수밖에 없었다. “소녀가 갑자기 몸을 곧추세우며 소리쳤거든요. ‘나는 나았어요, 나았어요.’ 바로 그 순간 나는 아이의 발에 상처가 아무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습니다! 벌어진 살이 저절로 붙어버린 거예요!”

클레멘타인은 봉사자에게 고맙다는 말을 할 틈도 없이 급히 겉옷을 걸치고 목발을 집어 들고는 근처 성모 동굴로 달려갔다. 라이유 부인이 뒤따라가 보니 클레멘타인은 마치 목발을 봉헌하듯 성모상 앞에 내려놓고는 감사기도를 외치고 있었다고 한다.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라이유 부인은 클레멘타인을 설득하여 곧바로 루르드 의무국으로 안내했다. 브와사리 박사와 여러 의사들이 라이유 부인의 증언을 듣고 소녀의 발뒤꿈치를 살펴보았다. ‘성모님의 흔적 (또는 선물)’ 이라 부르는 상처가 어렴풋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치유 받은 거의 모든 이에게 작은 상처 – 통증은 전혀 없는 – 가 남아 있는데, 당사자들은 그것이 감사하는 마음을 새롭게 불러일으켜 준다고 고백한다.

브와사리 박사는 치유된 상태에 대해 일년 간격으로 의무국에 보고하도록 클레멘타인에게 일렀다. 그는 순례를 오기 전 클레멘타인의 상태에 대한 시벨 박사의 진료보고서 사본을 보관하고, 순례단 책임자 자작부인과 스무 명의 순례객, 그리고 라이유 부인의 증언을 기록해 두었다. 하루 모자라는 일년 뒤에 브와사리 박사는 의사들이 클레멘타인의 뒤꿈치를 검사하는 자리에 졸라를 초대했다. 썩어 들어가던 뒤꿈치뼈와 살은 어렴풋한 흔적만 남기고 완치되어 있었다.  졸라는 소녀가 귀엽다는 듯 이마에 가벼운 입맞춤까지 해가며 이것저것 질문했다.

그러나 돌연 태도를 바꾸어 브와사리 박사에게 따졌다. “당신은 그녀가 물에서 나온 후에야 발을 확인하지 않았소!” 박사는 대꾸했다. “하루에 천 명이 넘는 병자들이 그 물에 몸을 담그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들을 미리 조사할 수 있겠습니까!” 브와사리 박사는 자작부인 같은 사람들이 선서하고 진술한 증언과 시벨 박사의 진단서 등을 내보였다.  그런 다음 브와사리 박사는 <루르드의 치유 사례>에서 밝힌 바와 같이, 졸라에게 클레멘타인의 마을로 가서 시벨 박사와 클레멘타인의 부모와 이웃들 그리고 루지낭 병원장을 함께 만나보자고 했다. 두 사람의 대화에 촉각을 세우고 있던 기자들은 졸라의 답변을 듣고 의아해했다. 루르드에 관한 ‘진실을 남김없이 밝히겠노라’고 공언했던 그가 브와사리 박사의 요구를 거절한 것이다. 그는 시간이 없다는 핑계를 댔다. 하지만 상당한 지면을 할애하여 클레멘타인에 관한 이야기를 쓸 계획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것은 이해할 수 없는 핑계였다.

졸라는 이튿날 8월 21일에도 의무국에 들렀다. 마침 그때 마리 르마상드 가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며 들어와 방금 ‘치유’ 받았노라고 주장했다. 이 치유 사례의 배경은 다음과 같다.

 

마리는 프랑스 캉시(프랑스 서북부) 태생으로 대가족의 맏딸이었다. 십대 때부터 시름시름 앓더니 열여덟 살 되던 해 급기야 입원을 하게 되었다. 의료진은 양쪽 폐의 앞쪽이 결핵에 감염된 것을 발견했다. 몸에 커다란 종기가 나기 시작했다. 그것이 얼굴에까지 퍼지자 그녀는 심한 충격을 받았다. 병원장 라니일 박사는 심낭성 낭창45 이라는 암울한 소식을 전해야 했다. 당시에는 아주 무서운 질병이었다. 박사는 할 수 있는 조치를 다했으나 결핵성 증세는 점점 악화되었다.

7월 하순에는 양볼, 코, 윗입술이 보기 흉할 정도로 끔찍하게 부어 오르고 문드러진 피부에서는 농이 계속 흘러나왔다. 그녀는 이미 3개월간 피를 토하고 있는 상태였다. 밤마다 고열에 시달리는 그녀를 관찰하면서 라니일 박사는 그녀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예상했다. 마리도 이를 짐작하고 쇠약해진 몸과 수치심을 무릅쓰고 8월 중순 루르드로 떠나는 순례 여행단에 신청서를 내줄 것을 부탁했다. 라니일 박사는 순례단측에서 요구한 진단서를 발급해 주었다. 진단서에는 ‘양쪽 폐에 결핵, 각혈, 밤마다 고열에 시달림, 몸에는 종기, 얼굴에는 심낭성 낭창으로 인한 주먹만한 궤양’이라고 쓰여 있었다.

순례단을 실은 열차는 오후 늦게 루르드에 도착했다. 1892년 8월 20일 그녀는 얼굴에 베일을 쓰고 어머니의 부축을 받으며 열차에서 내렸다. 이튿날 자원봉사자들은 그녀를 성수탕으로 안내했다. 마침 입구 가까이 서 있던 옴브레 박사는 나중에 이렇게 진술했다. “비위가 상할 정도로 끔찍한 그녀의 얼굴을 보는 순간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양쪽 볼과 코, 윗입술은 고름으로 엉망이었다.”

순례단과 동행한 의사들은 도움이 필요한 경우를 대비하여 성수탕 입구에 머물러 있었다. 마리가 밖으로 나왔을 때도 옴브레 박사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완전히 달라졌지만 나는 그녀를 금방 알아보았습니다. 방금 전에 보았던 끔찍한 궤양은 감쪽같이 사라졌고  새살이 돋은 얼굴은 상기된 것처럼 발그스레했습니다. 그녀의 다리 종기도 완전히 가라앉았죠. 찬물에 몸을 담근 것뿐인데, 돌연한 변화에 경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심낭성 낭창은 어떤 치료에도 반응을 보이지 않는 매우 까다로운 질병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옴브레 박사는 그녀가 묵고 있던 병원까지 따라가 보았다. 그러고 나서 그녀를 의무국으로 데리고 갔다. 거기에는 졸라가 따라온 기자와 작가들이 줄지어 있었다. 옴브레 박사로부터 자초지종을 전해 들은 브와사리 박사는 신이 나서 졸라에게 말했다. “바로 당신이 보고 싶어하던 사례올시다!” (졸라는 전부터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루르드에서 일어나는 치유는 단지 신경성 질환들일 뿐이다. … 칼에 베인 손가락을 루르드 샘물에 담갔다가 온전하게 치유되는 사례라면 보고 믿겠다.”) 그의 책에 상당한 지면을 할애하여 마리의 사례를 다룬 것을 보면 졸라가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는 악의를 가지고 사실을 왜곡했으니, 이에 관해서는 이 장 후반부에서 지적하겠다.

마리는 캉시로 돌아와 라니일 박사를 찾아갔다. 그는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진술서에 서명했다. “본인은 초자연적인 치유 사례를 접하고 깊이 감동했다. 그녀의 양쪽 폐는 오랫동안 결핵이 진행되었고 얼굴과 다리는 심낭성 낭창으로 심각한 궤양을 앓았다. 그녀는 루르드 샘물에 몸을 씻음으로써 순식간에 치유되었다. 본인은 그녀가 돌아온 직후의 보습을 보았다. 처음에는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만큼 그녀의 용모는 변화되어 있었다. 우아한 젊은 처녀가 나를 찾아왔다고 생각했다. 불과 10일 전에 그녀는 끔찍하고 기괴한 얼굴에 엉망으로 망가진 모습이었다. 결핵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12년 후 라니일 박사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치유는 지속되었다!”

치유된 지 7년 만에 마리는 결혼을 했고 여덟 명의 자녀를 두었다. 루르드 의무국에 가 보면 그녀의 가족사진이 다른 유명한 치유 사례 사진과 함께 나란히 걸려 있다.

 

브와사리 박사는 8월 21일 또 하나의 인상적인 치유 사례를 졸라에게 소개했다. 주인공은 서른여섯 살의 여성 마리 르브랑슈 였다. 그녀가 끔찍한 결핵균에 감염되었다는 진단을 받았을 때 그녀의 부모는 이미 결핵으로 죽은 뒤였다. 처음 한동안 르네 중앙병원에 입원하여 제르맹시에 교수의 치료를 받다가 후에는 결핵환자들을 위한 파리의 네덜란드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10개월 후 그녀는 8월에 있을 루르드 순례 여행을 신청했다. (순례단에는 앞에서 언급한 마리 르마상드 도 등록되어 있었다.) 그녀의 주치의였던 마케지 박사는 순례단 책임자에게 마리 르브랑슈 에 관한 진단서를 보내주었다. “결핵이 상당히 진행된. 폐조직에 고름. 지속적으로 토해내는 피에 코흐46 바실루스 세균. 음식을 받아들이지 못함.” 그녀의 체중은 21킬로그램으로 줄어 있었다. 이런 여러 증상은 죽음이 다가왔음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루르드에 도착하자마자 그녀는 성수탕으로 옮겨졌다. 자원봉사자들은 그토록 쇠약해진 병자를 찬물에 씻어도 괜찮을지 망설였다. 그러나 마리의 의지는 확고했다. 그들은 그녀를 루르드 샘물에 조심스레 담갔다. 그녀는 물에서 나오면서 치유되었고, 기쁨에 넘쳐서 의무국으로 안내되었다. 그때 자리에 있던 20, 30명의 의사 중 대부분이 그녀의 검진에 참여했다. 마케지 박사가 기록한 질병의 흔적은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의사들은 이튿날 다시 그녀를 불러 조사해 보았으나 역시 아무런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다. 의사들은 ‘왕성한 식욕으로 음식을 양껏 먹고 있다’고 기록했다.

그녀는 졸라에게 호감을 보였고 집요한 질문에도 흥미를 보였다. 그녀는 파리의 루드 브루메유 에 있는 집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루드 브루메유 는 졸라가 사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자신의 질병이 완전히 치유되었는지 – 물론 자신을 그렇다고 확신하고 있었지만 – 확인하러 나중에 꼭 한번 방문해 달라고 졸라에게 부탁했다. 졸라는 “물론이지요.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마리는 순례 여행을 마치고 파리로 돌아갔다. 그녀는 이듬해 순례단의 일원으로 루르드를 다시 방문했고, 1895년과 1897년에도 그렇게 했다. 그녀는 그때마다 의무국에서 검사를 받았고 결핵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를 방문하겠다던 졸라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러고는 <루르드>에서 그녀가 루르드를 떠난 직후 병이 다시 도졌다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길게 늘어놓았다. 그녀는 결혼하여 위플리에 부인이 되었지만 자녀를 갖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았다.(치유 받을 당시 그녀는 서른여섯 살이었다.)

1908년 6월 6일 파리의 대주교 아메튼 는 뒤꿈치 카리에스를 앓았던 클레멘타인(성모승천수도회에 입회하여 마리 아녜스 수녀가 되었다) 과 심낭성 낭창을 앓았던 마리 르마상드와 함께 그녀의 이름을 교회가 인정하는 치유 기적 명부에 올렸다. 세 사람은 더할 나위 없이 건강했으며, 과거에 앓았던 질병의 증상은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졸라의 책 <루르드>는 1894년 초에 출간되었다. 4월 27일 파리의 트로카데로 궁에 운집한 4천 명의 열렬한 군중 앞에서 그는 발췌 내용을 낭독했다. 바로 그 달 <뉴욕 헤럴드>에 <루르드> 영문 번역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1897년 그 책은 <나나>와 <붕괴 La Debacle>를 제외한 졸라의 어떤 소설보다도 많은 판매 부수를 기록했다. 루르드에서 수집한 증거들을 졸라가 왜곡하고 날조했음에도 그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날조와 왜곡이 베스트셀러의 요인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제 왜곡되고 날조된 부분을 구체적으로 알아보자.

 졸라는 <루르드>에서 클레멘타인 (뒤꿈치 카리에스를 앓았던 소녀), 마리 르마상드 (심낭성 낭창), 그리고 마리 르브랑슈(결핵)를 각각 소피 쿠도초, 엘리제 루케, 그리고 라 그리보트 라는 이름으로 등장시켰다. 세 여성에 대해 아는 사람 – 의무국 의사들이나 함께 여행한 순례객들 – 이라면 누구나 졸라의 소설에서 그들을 금방 집어낼 수 있을 정도로 졸라는 세 여성을 구체적으로 표현했다. 19세기 자연주의 작가들은 독자에게 생생한 현실감을 주기 위해 실제 인물과 실제 사건 등을 소재로 글을 썼다. 그 문단의 대표적 인물인 졸라는 세 여성이 앓았던 애처롭고 극적인 질병을 리얼하게 표현함으로써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자연주의자의 대가임을 증명했으며, 프랑스뿐 아니라 미국 등 해외에서도 많은 독자를 확보했다.

졸락 루르드의 치유 사례를 터무니없이 왜곡한 이유에는 또 다른 요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다름아닌 상처 입은 자존심과 제멋대로인 성향이다.

졸라는 소설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루르드로 출발하기 전 자신을 빗대어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우리에게 필요한 인물은 자유로운 사고, 과학을 통해 비로소 발전되는 신앙, 독단적이지 않은 조사 등을 대변하는 사람이며, 미신에 맞서는 사람, 그리스도교적 정신 시대는 끝났다고 단정하는 사람이다.” 졸라는 소설가로서 명성과 부(富)와 강한 의지력을 이용하여 반대세력을 사정없이 밀어내는 데 익숙한 사람이었다.  그는 세 여성에 관한 사실을 왜곡하는 데 따라오는 위험 정도는 충분히 감수할 능력이 있다고 자신했던 것 같다. 그는 브와사리 박사나 루르드 공무원들이 공개적으로 도전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들의 거센 도전에 졸라는 매우 당황했다.

졸라는 <루르드>에서 자신의 대변인 격인 피에르 프로망 을 영웅으로 만들었다. 결국 신앙을 잃게 되는 사제 프로망은 뒤꿈치 카리에스의 치유에 관한 ‘소피(클레멘타인)’의 증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녀가 서서히 그리고 무심코 사실을 왜곡했을지 어찌 알겠는가? 그 치유가 즉각적이었는지 그렇지 않았는지 어찌 알겠는가? 어쨌든 샘물에 발을 담그기 직전과 직후에 발을 검사해 본 사람은 아무도 없지 않은가?” 졸라도 이는 사실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클레멘타인의 가족, 루지낭 병원장, 시벨 박사가 서명한 진술서는 그만두고라도 성수탕에서 자원봉사했던 라이유 부인, 러데레 자작부인, 그리고 여러 명의 동료 순례객들의 증언이 졸라의 이야기를 단호히 부정했다. 이들을 만나기 위해 비인 주로 함께 가자는 브와사리 박사의 요청을 졸라는 거절했다.(라이유 부인은 파리에 살고 있었다.)

다음은 낭창으로 고생한 마리 르마상드 다. 졸라는 책에서 그녀를 엘리제 루케라 이름했다. 그는 마리의 끔찍했던 얼굴 모습을 실감나게 그리고 정확하게 묘사했다. 하지만 폐결핵과 온몸 여기저기 부어 오른 궤양은 생략해 버렸다. 실제 마리 르마상드는 목격자인 옴브레 박사가 증언했듯이 즉각 치유되었다. 하지만 졸라는 엘리제 루케로 하여금 ‘아침부터 계속 반복하여 얼굴을 씻게’ 했다. 늦은 오후에 “그녀는 부기가 가라앉고 점점 창백해진다고 느꼈다. … 그리고 좀 덜 끔찍해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 다음날 낭창이 치유되는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 그녀는 기적의 샘에서 계속하여 얼굴을 씻었다. … 얼굴 상태는 점차 치유될 기미가 보였다.”
마침내 졸라는 피에르 프로망의 입을 통해 지지하게 말했다. “이 시대의 정통한 의학자들은 궤양 같은 질병들은 신경성에서 온다고 생각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신앙심이 정신적 치유뿐 아니라 몇몇 종류의 궤양 치료에도 영향을 줄 수 있음을 밝혀내기 시작했다.” 유명한 신경학자 샤르코의 영향을 받아 의학자들이 밝힌 연구 내용이란, ‘히스테리증에서 기인한’ 일부 질병들이 종교적 ‘신앙심’이나 최면에 의해 치유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이 분야의 가장 뛰어난 의학자는 H. 베른하임 이었다. (1889년 프로이트가 그의 의견을 듣기 위해 프랑스에 온 일이 있었다.)) 그러나 베른하임도 최면술에 관한 논문에서 “기질적 질병은 최면술을 통해 치료될 수 없다”고 분명하게 밝혔다. 결국 졸라가 말한 ‘정통한 의학자들’이란 그가 지어낸 가공인물에 지나지 않았다.

작가 J.K. 히스만 은 한때 졸라의 친구요 추종자였으며 그와 마찬가지로 무신론자였다. 그러나 인간성에 관한 졸라의 지론을 불신하게 되어 두 사람은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그리고 히스만 역시 프랑스의 중진작가가 되었다. 그의 마지막 작품은 루르드에서 조사한 내용을 바탕으로 쓴 <루르드에 모인 군중 The Crowds at Lourdes>이었다. 그 책은 졸라의 소설 <루르드>에 대한 신중한 응대였다. 히스만은 기질적 질병의 즉각적 치유 사례를 자세히 기술했다. 그는 마리 르마상드 의 (심낭성 낭창) 치유 사례를 다룬 졸라의 의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졸라는 질병의 진행과 정도 등을 꾸며내고 조작했다. 이는 마리의 순간적 회복이 자연의 법칙을 초월한 것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그런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 졸라의 이야기는 이처럼 의도적으로 왜곡되었다.”

그런 다름 히스만은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마리의 낭창이 신경증에서 왔다는 졸라의 기술 – 전적으로 부당한 – 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세포와 피부조직의 즉각적 회복은 자연과학의 법칙에 반하는 것이다.”

그는 기적 치유에 관한 합리적 설명이라고 내세운 졸라의 주장을 비난했다. 또 졸라의 슬로건식 해석 하나를 인용했다. “군중의 고조된 분위기와 그 안에 내재하는 미지의 힘.” 히스만 은 노벨상 수상자인 알렉시스 카렐이 루르드의 기적을 두고 한 말과 유사한 설명을 했다. “그 미지의 힘을 일컫는 이름이 있으니 곧 기도이다. … 그리고 이는 루르드에서 상당히 먼 곳까지 포함하는 것이니, 피에르 드 러더의 치유 사례처럼 철저하게 조사된 다른 사례의 경우가 그러하다. 드 러더는 멀리 벨기에에서 단지 루르드의 성모께 기도했을 뿐이다.”

마지막으로 히스만은 ‘기도와 하느님을 인정하지 않으려’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던 졸라에게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음을 넌지시 내비쳤다. 그리스도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곧 “육욕의 부정한 쾌락을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의견은 그가 졸라를 열렬하게 추종했던 젊은 시절, 졸라와 가깝게 지낸 경험에서 나왔다.

이제 졸리가 마리 르브랑슈를 어떻게 다루었는지 살펴보자. 소설에서 그녀는 라 그리보트라는 인물로 등장한다. 여기서도 졸라의 대변인은 페에르 프로망 신부다. 피에스 신부는 믿음을 잃고서도 계속 사목자로 살아간다. (프랑스에는 껍데기 사제들이 넘쳐난다고 졸라는 주장했다.) 성수탕에서 의무국으로 곧장 달려와 ‘기뻐 날뛰는’ 라그리보트를 목격하고 피에르 신부는 할말을 잊는다. 불과 하루 전 순례단 열차 안에서 그녀는 죽어가는 병자였다. 다음날 두 사람은 함께 열차를 타고 파리로 향한다. 그런데 열차가 루르드를 벗어나서 얼마 되지 않아 라 그리보트는 엄청난 양의 피를 토하기 시작하더니 창백한 모습으로 쓰러진다. 열차가 보르도에 도착할 즈음 급격히 쇠약해진다. 역장은 그녀를 보르도 병원으로 급히 후송하지만 병원에 도착하자 이내 숨을 거두고 만다. 이는 그야말로 얼토당토않은 묘사다. 마리 르브랑슈는 결핵이 완치되었고 졸라보다 훨씬 오래 살았다.

졸라의 책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고 여러 나라의 언어로 번역되었다. 브와사리 박사는 책이 출간되자마자 즉시 졸라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는 졸라의 거짓말을 비난하며, 목격 증인들을 비롯하여 자신과 공개적으로 토론하자고 강력하게 제안했다. 그러나 졸라는 묵묵부답이었다. 브와사리 박사는 루르드 의무국장으로서 하는 일이 많아 시간을 내는 것이 어려운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파리행을 결정했다. 루르드의 공식 순례 여행철은 겨울이 시작되는 10월에 끝난다.

브와사리 박사는 룩셈부르크외라 불리는 가톨릭계 그룹의 도움을 받아 1894년 11월21일 파리에서 공개 집회를 열었다. 그때 모인 1,500명의 인사 가운데는 페리 모로초니 주교, 의사와 변호사들, 그리고 우일과 좌익 신문사 기자들이 있었다. 브와사리 박사가 발표자였고 기질적 질병으로 고생하다 루르드에서 치유된 12명이 연단에 함께 자리했다. 그 중에는 마리 르브랑슈 도 있었다. 브와사리 박사는 그녀의 심낭성 낭창이 즉각 치유된 이야기를 자세히 설명한 다음 이어서 졸라의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를 낭독했다. 기자들은 다음날 신문에 그 기사를 실었다. 그러나 졸라는 침묵했다.

화가 난 브와사리 박사는 이듬해 다시 한번 파리로 달려가 졸라의 집으로 쳐들어갔다. 그러고는 졸라를 대놓고 비난했다. 소설가는 자신의 뜻대로 인물의 성격을 창작할 자유가 있다며 졸라는 반박했다. 브와사리 박사는 그건 그렇다고 인정하면서 “그러나 역사를 왜곡할 수 있는 것은 아니오!” 라고 응수했다. “라 그리보트는 보르도에서 죽지 않았소. 그녀는 건강하게 생활하고 있으니 직접 가서 확인시켜 드리리다.” 그러나 졸라는 브와사리의 도전에 역시 발뺌을 했다. 루르드로 돌아온 브와사리 박사는 베스트셀러 작가의 비뚤어진 신념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루르드에서 일어난 일이 모두 꾸며낸 이야기라고 믿는 데 대해 화가 치밀었다.

그 후 브와사리 박사는 졸라에 대해 다시 한번 환멸을 느끼게 되었다. 마리 르브랑슈 가 보내온 편지에 의하면 브와사리 박사가 졸라를 방문한 지 며칠 후 졸라가 찾아왔다고 했다. 그는 마리와 노무자인 그녀의 남편에게 제안을 했다. 두 사람이 벨기에로 이주한다면 금전적인 어려움을 해결해 주겠노라는 것이다. 마리는 잠시 마음이 끌렸다고 브와사리에게 솔직히 털어놓았다. 남편이 안정된 직업을 가진 것도 아니고, 그녀가 하루 종일 식료품점에서 일하고 있지만 급여는 쥐꼬리만 했기 때문이었다. 브와사리 박사는 자신의 책 <루르드의 활동 L’oeuvre de Lourdes>에 마리의 편지를 인용했다. 그는 책에서 졸라의 소설 <루르드>와 졸라가 왜곡한 사실에 관해 언급했다.

루르드에 관한 졸라의 책을 문제 삼은 또 한 사람은 파리의 아메트 대주교였다. 1908년 6월 6일 그는 클레멘타인 트루베, 마리 르마상드, 마리 르브랑슈의 치유에 관해 교회 입장을 공표했다. 치유 사례를 기적으로 선언하고 ‘교회가 인정하는’ 치유 기적 명부에 올리도록 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마리 르브랑슈에게, 졸라가 매수하러 왔던 일이 사실임을 맹세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맹세했다.

거짓 정보를 유포하기 위해 대중매체를 이용하는 졸라의 행태는 계속되었다. 1995년 뉴욕 주립대학 교수 프레더릭 브라운은 888쪽 분량의 <졸라의 생애>를 출간했다. 구겐하임 재단과 ‘인간성 개발을 위한 국민기금재단’에서 브라운의 연구와 집필활동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해 주었다. 나는 그 책을 정독했고 방대한 조사와 내용에 감탄했다. 그 책은 졸라 시대의 프랑스 문화와 문학 그리고 역사를 보는 시각에 있어서도 뛰어나다. 나는 또한 저자 브라운이 가톨릭주의에 대한 졸라의 강한 혐오에 공감하고 있음도 알게 되었다. 그에게 그럴 권리가 있다. 가톨릭 신자들이 과거 비난 받을 만한 일을 저질렀고 작금에도 그런 일은 여전히 발견된다. 그렇지만 그가 졸라의 책 <루르드>에 관해 자세히 소개하면서도 졸라의 진실성에 대한 공개적이고도 지속적인 문제 제기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세 가지 치유 기적에 대한 왜곡과 날조, 마리 르브랑슈를 매수하려 했던 일, 공개 집회를 통해 졸라에게 문제를 제기했던 일, 그리고 브와사리 박사, 철학박사 루세일, 당대의 저널리스트들을 포함한 여러 인사들의 공개적인 문제 제기 등…. 브라운의 작품 속에는 이런 사실들이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 다른 점에서는 꼼꼼한 전기작가가 가톨릭측의 문제 제기는 언급하지 않고 졸라의 자기합리화 발언만을 인용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

“그들(가톨릭계)이 용납하지 못하는 것은 루르드의 은밀한 각본을 내가 낱낱이 드러냈기 때문이다. … 그 보잘것없는 비밀들이 폭로되었다. 그것이 바로 가톨릭계가 분노하고 있는 정확한 이유다. G. K. 체스터턴47이 그 책을 읽었더라면 “닥치시오, 프레더릭 브라운!” 이라고 했으리라. 체스터턴은 우리가 미디어를 통한 거짓 정보라 부르는 것에 대해 여러 번 격분을 표현했다. 그는 잘못된 정보를 전하는 일에 대해 격한 언어로 비난했다.

 

 

 

16. 파티마 1917

태양의 기적

Fatima, 1917 – Miracle of the Sun

 

나는 1997년 3개월에 걸쳐 성모 마리아의 주요 성지를 방문하여 심각한 육체적 질병의 치유 사례를 조사했다. 그 해 한 여행사는 유럽 여행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은 종교 성지라고 발표했다. 루르드에는 매년 550만 명의 여행객들이 찾아오고, 파티마에는 그에 약간 못 미친다. 1998년 10월 3일자 <타블렛>에 의하면 이탈리아의 로톤도에 있는 비오 신부의 성지에는 매년 750만 명의 여행객들이 방문하고 있다. 폴란드의 체스토코바 에 있는 검은 마돈나 성지에는 매년 350만 명의 여행객이 찾아온다. 파리의 루두박 – 기적의 메달 성지 – 에는 평균 220만에서 250만 명이 찾아온다. (영국 왕실 다이애나 비도 사망한 해 진지한 자세로 그곳을 순례했다.) 아일랜드의 낙크 성지에는 매년 150만 명이, 멕시코시티에 있는 과달루페(1531년 성모 발현)에는 평균 1,300만 명의 순례객이 다녀간다.

루르드는 자연 경관이 매우 아름답다. 남쪽으로는 웅장한 산들이 위용을 자랑하고 있으며 초여름까지도 눈 덮인 봉우리를 볼 수 있다. 피레네 산중의 가브 급류 또한 장관이며, 여름이면 파릇파릇 우거진 목초지와 농작물 그리고 온갖 야생화들로 뒤덮인다. 하느님께서 영적 오아시스로 매우 아름다운 지역을 택하셨다.

파티마는 이와 전혀 다르다. 파티마를 둘러싸고 있는 거친 고원 지역은 마치 이스라엘처럼 돌이 많고 수목들도 왜소하며 수확을 내기가 매우 고생스럽다. 겨울에는 북쪽에서 얼음장 같은 폭풍이 휘몰아치고 여름에는 열기가 사람을 무력하게 할 정도다.

파티마의 성모 발현은 1917년에 일어났다. 전세계는 프랑스와 벨기에 전선에서 승자도 패자도 없는 전쟁에 휘말려 있었다. 파티마의 어린이 예언자들은 ‘성모님’으로부터 전쟁이 하느님의 법을 우롱하는 데서 비롯되었다는 말씀을 들었다. 그리고 전쟁은 곧 끝나리라는 말씀도 들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생활태도를 고치지 않는다면 더 무서운 전쟁이 일어날 것이며, 러시아가 전세계에 거짓과 파괴를 퍼뜨릴 것이라고도 했다. 러시아에 관한 이 경고는 레닌이 핀란드의 한 은신처에 숨어 있다가 공산주의 혁명을 일으키기 위해 그곳을 떠나 10월 20일 페트로그라드로 들어가기 직전에 나온 것이다.

그 후 전쟁과 러시아 주도의 공산주의 확장을 경고한 파티마의 예언에 관한 책들이 출판되었다. 그러나 나는 무신론자나 냉담자에게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일하시는 하느님, 인격적인 하느님에 대한 확신을 갖도록 도움을 주기 위해 이 책을 집필했다. 그러므로 파티마에서 일어난 비상한 한 사건에 집중하고자 한다. 그 사건은 ‘모든 이가 믿을 수 있도록 기적’을 보이겠다며 3개월 전부터 예고하신 ‘성모님의 말씀을 파티마의 어린이들이 되풀이하여 예언했던 일이다. 기적은 10월 13일 정오에 일어날 것이라고 ‘성모님’ 께서 여러 번 말씀하셨다.

험한 비포장길을 한참 달려야 하는 파티마에 매년 500만 명의 순례객이 찾아오는 이유 중 하나는 예고된 ‘더 무서운 전쟁’, 곧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즈음 일류작가들이 철저한 조사를 거쳐 쓴 일련의 서적들이 출판되었기 때문이다. 전쟁의 공포는 작가들로 하여금 파티마에 각별한 관심을 쏟게 했다. 파티마에서 신비로운 사건이 있은 지 30년이 채 지나지 않은 때라 주요 목격자들이 살아 있었고, 그들은 1917년 10월 13일의 사건에 대해 기꺼이 증언했다.

작가 중 윌리엄 T. 월시가 있었다. 그는 예일 대학 출신의 대학 교수로 이베리아 반도에 관해 아주 잘 아는 학자였다. 스페인어와 포르쿠갈어에 정통한 그는 증인들을 직접 만나 인터뷰했다. 그가 1930년에 출간한 학구적인 대작 <이자벨라>는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그 후 <필립 II>와 유명한 <아빌라의 성 데레사>를 집필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서방 세계가 파티마에 관해 진지한 관심을 갖게 되자 그는 여러 차례 포르투갈을 방문하여 생존해 있는 다수의 증인들을 만나 심도 있는 인터뷰를 함으로써 전체적으로 더욱 깊이 있는 조사를 했다. 그의 <파티마 성모님 Our Lady of Fatima>는 1947년에 출간되었다.

가톨릭으로 개종한 C. C. 마틴데일 은 옥스퍼드 대학의 학감이요 유명한 작가로서 대서양을 오가며 강단뿐 아니라 방송을 통한 강연 활동으로 60년간 가톨릭 신앙을 해설하고 설교했다. 그는 자신의 주장에 대한 근거를 확실히 해야 했다. 그러지 않을 경우 다른 생각과 신념을 가진 학자들과 저널리스트들의 비난과 공격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마틴데일은 파티마의 성모 발현을 조사하기 위해 여러 차례 파티마를 방문했으며, 1940년대 초 이미 조사를 끝낸 예수회 수사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예수회 수사 G. 폰세카는 포르투갈인으로 로마의 유명한 성서연구소 교수였다. 1943년에 발표된 폰세카의 독창적 연구는 학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

마틴데일의 <파티마의 메시지 The Message of Fatima>는 사제요 조각가인 토마스 맥글린(도미티코 회)의 <파티마의 비전 Vision of Fatima>을 참조했다. 토마스 맥글린 신부는 파티마의 어린이 예언자 중 리더 역할을 했던 루치아와 여러 번 인터뷰 – 당시 루치아는 수녀가 되어 있었다 – 하면서 유명한 파티마의 성모상을 조각했다. 맥글린 신부의 책은 1951년에 출판되었다. 그보다 8년 앞서 또 다른 도미니코 회 회원인 F. 라이언 주교는 누이 메리 라이언 박사의 도움을 받아 <파티마의 성모>를 발간했다.

라이언 주교는 초기에 만들어진 A. 피구에르도 박사의 자료를 참조하고, 1920년부터 파티마 지역의 주교이며 친구인 호세다 실바 주교를 통해 관련 문서 원본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호세다 실바 주교의 문서보관실에는 마누엘 포미아고 박사가 꼼꼼하게 기록한 문서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그는 마지막 세 번 성모 발현 사건을 목격한 어린 세 예언자들을 조사하도록 임명 받고 철저하게 의무를 수행했던 사람이다.

포미아고 박사는 1917년 10월 13일에 일어난 ‘태양의 기적’ (10분 내지 12분간 지속됨)을 목격했다.

존 I. 해퍼트는 평생 동안 파티마의 성모 발현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발로 뛰며 조사했다. 그는 ‘태양의 기적’을 목격한 200명을 직접 만나 인터뷰했다. 그리고 인터뷰 내용을 <목격자들의 증언 Meet the Witnesses> (1961년)이라는 책으로 출간했다. 가톨릭 대학 신학부(리스본)의 J. M. 알론소 교수는 1967년부터 1976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파티마의 역사와 문학, 파티마 성모 발현의 메시지 등 파티마에 관한 모든 것이 담긴 17권의 전집을 집필했다.

많은 이들이 ‘태양의 기적’을 부정해 왔다. 그들은 “기적은 일어날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구도 1917년 10월 13일 7만 명 이상이 목격한 사건에 대해 납득할 만한 설명을 내놓지는 못했다.

 

먼저 파티마에서 일어난 사건의 개요를 소개하겠다. 1917년 5월 13일 양떼를 몰고 나간 세 어린이는 ‘너무도 아름다운 젊은 여인’을 목격하고 깜짝 놀란다. 여인은 10월까지 매달 13일 정오에 그 장소로 오라고 아이들에게 일렀다. 가난한 농가의 아이들인지라 시계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으나 아이들은 시간을 짐작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가장 나이 많은 아이가 열 살이었으니, 도시인의 기준으로 볼 때 분명 어린 나이다. 그러나 마틴데일은 그들을 주의 깊게 관찰하면서 포르투갈 농촌 어린이들에게는 만만치 않은 의무와 책임이 맡겨져 있어, 그 일을 수행하면서 아이들은 빨리 철이 들고 성숙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틴데일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린이와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역설하신 예수님의 말씀도 강조했다. 어린 벨라뎃다나 파티마의 세 아이들이 선택 받은 일에서 복음의 심오한 상징적 의의를 발견했던 것이다. 그것은 풍요로운 서구 사회의 궤변과 억지 이론을 부끄럽게 하겠다는 강력한 교훈일지도 모른다.

세 아이 중 나이가 가장 많은 루치아 산토스는 친구 프란치스코 마르토와 그의 여동생 히야친타에게 침묵하도록 일렀지만, 히야친타는 입을 다물고 있을 수가 없었다. 결국 이야기는 루치아의 어머니 마리아 로사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고, 마리아는 꾸며낸 이야기라면 딸을 엄하게 꾸짖었다. 루치아는 사실임을 분명히 말했고 그 결과 호되게 매를 맞았다. 마리아 로사는 어떤 경우에도 거짓말은 용납하지 않았다. 다른 두 아이 프란치스코와 히야친타의 아버지 티 마르토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듣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족 중에서 아이들의 이야기를 그대로 받아준 사람은 아버지뿐이었다. 다른 이들은 모두 꾸며낸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마리아 로사는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축일인 6월 13일 즈음이면 루치아가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모두 잊어버리게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날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놀이와 축제를 즐기는 흥겨운 날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날이 되자 루치아는 축제를 뒤로한 채 두 친구와 함께 약속 장소로 향했다. 입소문을 듣고 그곳을 찾아온 어른들도 50면쯤 되었는데, 그들 중에는 세 아이의 가족이나 아이들이 사는 마을에서 온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들은 세 아이의 처신과 태도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50면의 목격자들이 돌아가 저마다 열정적으로 ‘성모님의 발현’에 대해 이야기하자, 본당 신부 마르케스 페레이라 는 걱정이 되었다. 당시 포르투갈은 가톨릭 교회에 대한 박해정책으로 진통을 겪고 있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을 주도했던 자들과 같이 반군주제, 반 가톨릭을 표방하는 포르투갈의 혁명 세력이 1908년 포르투갈 왕을 암살했다. 1910년에는 새 공화국 정부가 예수회를 비롯한 대부분의 수도회를 해체시키고, 고위 성직자들은 구금 또는 추방했으며, 교회 재산을 압류하고 본당 신부들에게는 설교 지침을 지키도록 강요했다. 정부는 본당 신부들이 공적인 자리에서 수단조차 입지 못하게 했다. 프리메이슨 의 우두머리인 마가해스 리마 는 자신만만하게 단언했다. “수년 안에 사제가 되고 싶어하는 포르투갈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를 앞당기기 위해 13세기에 설립된 코임브라 대학의 신학부를 해체시켰다.

가톨릭 교회와 성직자에 대한 분노는 프랑스 혁명과 마찬가지로 성직자들의 특전에 대한 원망에서 비롯되었다. 왕정체제의 한 부분이었던 사제들은 귀족으로 여겨졌고, 사실 사제들 스스로 귀족 행세를 하기도 했다. 박해와 특전의 박탈은 성직자와 수도자들에게 오히려 유익했으니, 그들은 가난한 예수처럼 살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반교권, 반성직 노선의 정부는 가톨릭주의 소멸을 목표로 했다. 1910년 새 공화국 정부는 법무부장관 알폰소 코스타 는 다음과 같이 단언했다. “포르투갈을 이렇게 비참하게 만든 가톨릭은 두 세대 안에 사라질 것이다.”

공화정부는 반 가톨릭 정책을 실행해 나갈 열성분자들을 동원하는데 도시보다는 시골에서 더 어려움을 겪었다. 파티마의 성모 발현 이야기도 처음에는 시골 사람들 사이에서 퍼져나갔다. 그들은 발현 사건이 정부의 반 가톨릭 노선에 대한 하늘의 응답이기를 내심 기대했다.

프랑스 혁명 당시 지롱드 당(黨)과 자코뱅 당(黨)이 서로 대립한 것과 같이 포르투갈의 공화당도 얼마 후 분열하여 피비린내 나는 정쟁으로 이어졌다. 1910년부터 1926년 사이 열여섯 번의 유혈혁명이 일어나 대통령이 여덟 번이나 바뀌었다. 본당 신부 페레이라 는 모든 폭력과 반 가톨릭주의를 걱정스럽게 지켜보았다. 그런 그에게 ‘성모발현’은 결코 달갑지 않았다. 얼토당토않은 발현사건은 공권력의 공격을 부추길 뿐이라고 생각했다.

6월 13일의 발현사건에 대해 열정적으로 이야기하는 증인들을 본당 신부는 무관심과 냉정함으로 대응했다. 사람들이 근거를 대자 그것은 사탄의 짓이라고 말했다. 루치아의 어머니는 페레이라 신부의 말을 듣고 더 이상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그녀는 당시 여러 가지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남편은 술값으로 가산을 탕진하고 있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남편 대신 일을 하던 외아들마저 징병으로 가장 위험한 전선에 투입될 예정이었다. 그녀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기진맥진한 상태였고, 의사가 지어준 심장약도 별 효과가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유일한 위안이던 막내딸이 성스러운 일을 두고 거짓말을 하다니! 게다가 페레이라 신부의 말에 의하면 자신의 딸이 사탄에게 이용되고 있는 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녀는 마침내 루치아 를 끌고 사제관으로 찾아가 신부님 앞에서 설득하려 애를 썼지만, 루치아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 일로 마리아와 페레이라 신부는 크게 화를 냈다.

7월 13일의 발현 때는 2천여 명의 군중이 모여들어 세 아이를 에워쌌다. 아이들이 군중에게 전한 메시지는 기도에 관한 것이었는데, 특히 묵주기도를 바치라는 것이었다. 군중은 아이들의 모습에 감동했다. 그런데 루치아의 가족은 군중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 특히 루치아의 아버지는 군중들 때문에 밭이 망가지는 것을 보고 몹시 불쾌해했다. 가족들은 다시 한번 루치아를 호되게 꾸짖었다. 그러던 중 메시지에 새로운 변화가 생겼다. 루치아가 가족들과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거짓말쟁이로 여긴다고 성모님께 투정하자, 성모님은 그 해 10월 13일 ‘모든 이들이 믿을 수 있도록’ 기적을 일으키겠노라고 약속하셨다. 그리하여 파티마의 성모 발현은 공개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날짜와 시간까지 구체적으로 밝힌 기적이 예고되었기 때문이다. 가톨릭 신앙을 간직한 이들에게 그것은 기쁜 소식과도 같았으니, 그들은 기적의 예고를 방방곡곡 전했다.

공화국 정부는 파티마 지역의 행정관 아르투르 산토스 에게 반동적 소동을 잠재우라고 명령했다. 산토스는 대장장이 출신으로 열정을 다해 혁명 정신을 신봉함으로써 쾌속 승진한 인물이었다. 그는 세 자녀를 두었는데, 아이들의 이름을 각각 민주주의 (Democracy), 공화국(Republic) 그리고 자요(Liberty)라 지었다! 그는 새 공화국의 영광스러운 목표를 위해서는 무슨 일을 해도 정당하다고 믿었다. 반동분자들의 권리 따위는 무시해도 좋다고 생각했다. 한번은 사제 여섯 명을 투옥한 일이 있었는데, 무려 8일간이나 외부와 연락을 단절시킨 채 독방에 감금했다. 파티마 미시 소동도 그때처럼 강력한 제재를 통해 신속하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자신했다.

그는 8월 13일 오전 파티마에 도착하여 세 아이를 방문하고 ‘초자연적 사건’에 깊은 관심을 표했다. 그리고 아이들을 마차에 태와 발현 장소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했다.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는 아이들을 마차에 태워 파티마에서 남서쪽으로 10여 킬로미터 떨어진, 그가 살고 있던 오우렘 을 향해 달렸다. 한편 파티마의 발현 장소에는 5천 명 이상의 군중이 모여 있었다.

그는 세 아이를 사무실로 데려가 직원들과 함께 협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이들이 꿈쩍도 하지 않자 이번에는 ‘끓는 기름 속에’ 집어넣겠다고 윽박질렀다. 그러자 아이들은 서로 눈물 어린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하지만 마음의 동요나 망설임의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그는 아이들을 감옥으로 끌고 갔다. 큰 감옥 안에는 좀도둑들이 가득했다. 세 아이가 그들에게 함께 무릎을 꿇고 묵주기도를 드리자고 청함으로써 그들을 당황하게 했다. 그들은 모두 아이들의 초대에 응했던 것이다!

8월 15일 산토스는 세 아이를 파티마로 돌려보내 사제관 앞에 내려놓도록 했다. 그는 페레이라 신부가 아이들을 거짓말쟁이라고 부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이들의 투옥 사건으로 루치아의 가족들은 잔뜩 겁을 먹고 있었다. 루치아의 어머니는 딸의 ‘거짓말’에 대해 더욱 야단을 쳤다. 그런데 발현 장소에 모였던 사람들은 아이들의 투옥사건을 듣고, 제자들이 박해를 받아 ‘회당과 감옥으로’ 넘겨질 것이라고 예고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상기했다. 그들은 파티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과 10월 13일로 예고된 기적을 열정적으로 알렸다. 마틴데일이 지적했듯이 세 아이는 놀라울 정도로 독립심과 의지력이 강했다. 그들은 납치와 협박과 투옥을 당하면서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단지 성모님과 만나기로 한 장소에 나가지 못해서 낙담하고 있었다. 성모님은 8월 19일, 양을 돌보고 있는 아이들에게 나타나 안심시키며 용기를 북돋아 주셨다. 아이들은 파티마를 찾아온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은밀히 전했다.

바야흐로 파티마 사건은 포르투갈 전역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전국 판매부수 1위의 친정부 신분 <오 세쿨로 O Seculo>는 ‘중세적 복고주의’에 바탕을 둔 ‘정신질환, 간질, 집단적 자기 암시’를 비난하는 논평을 냈다. 또 다른 친정부 신문 <오 문도 O Mundo> 편집장 호세 도 발레는 ‘예수회와 사제들’의 술책을 비난하며 ‘번영과 개명의 지지자들’에게 소동을 잠재울 것을 호소하는 팜플렛까지 배포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제들은 파티마 사건이 정부와 교회 간의 위태로운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까 봐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그들은 신자들에게 파티마 사건은 어떤 측면에서 보더라도 환상이나 망상에 지나지 않으니 관심을 갖지 말라고 말했다.

리스본 지역의 크루즈 신부는 문제의 세 아이를 만나보기 위해 파티마에 가기로 했다. 그는 수년 전 루치아에게 첫 영성체를 베풀었으므로 그녀를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루치아는 일곱 살이었다. 크루즈 신부는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첫 영성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자 루치아는 크루즈 신부를 찾아와 눈물로 호소했다. 자신은 교리를 모두 익혔으니 첫 영성체를 허락해 달라고 했다. 크루즈 신부는 문답 시험을 통해 그것이 사실임을 확인했다. 루치아의 어른스런 답변을 듣고 감동을 받은 크루즈 신부는 본당 신부를 설득하여 첫 영성체를 베풀었다. 이제는 나이도 많고 건강도 좋지 않은 몸으로 파티마로 향했다.  그리고 루치아와 다른 두 아이와 오랜 시간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 다음 리스본으로 돌아가 파티마의 성모 발현은 진짜라고 말했다. 크루즈 신부는 성인 같은 영적 지도자로 존경 받는 인물이었다.

포르투갈의 고위 성직자이며 리스본의 총대주교 벨로 추기경은 추방되어 국외에 있었다. 국내에 남아 있던 그의 측근이 파티마 성모 발현에 대해 크루즈 신부의 우호적인 입장을 보고했을 것이다. 파티마 사건은 이제 무시할 수 없을 만큼 널리 알려졌기에, 벨로 추기경은 유능한 두 신부를 시켜 9월 13일로 예고된 ‘성모 발현’을 조사하게 했다. 두 사람 중 하나는 추기경의 총대리48 몬시뇰 콰레스마 였고, 또 한 사람은 산타렘 신학교 교회법 교수이며 관구법관인 마누엘 포미아고 박사였다.

9월 13일에는 3만여 명의 군중이 발현 장소에 운집했다. 대다수 사람들과 리스본에서 온 두 신부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 포미아고 신부는 9월 27일 다시 파티마를 방문하여 세 아이를 만났다. 한 아이씩 따로따로 만났는데, 이는 아이들의 증언이 일치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성모님은 다시 한번 10월 13일에 있을 위대한 기적에 대해 예고하셨다. 이 즈음 루치아, 프란치스코, 히야친타 의 가족들은 기적이 일어나지 않을 경우 실망과 분노에 찬 군중이 세 사이와 자신들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어떤 이들은 아무도 모르게 아이들을 피신시키라고 조언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프란치스코와 히야친타의 아버지 마르토 는 굳은 믿음을 가지고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포미아고 신부는 동료 사제들로부터 별 호응을 얻지 못했다. 그들은 파티마의 세 어린이가 루르드의 성모 발현 사건을 흉내 내고 있는 것이라 여겼다.  포미아고 신부는 10월 11일 다시 파티마를 방문했다. 그는 아이들이 혹시 루르드의 발현 이야기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던 적이 있었는지를 물어보았다. 그렇지 않다는 답변이었다. 그리고 루치아의 가족들이 기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며 공포에 떨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에 대해 루치아에게 이야기했지만 루치아는 전혀 초조함이나 망설임을 보이지 않았다. 성모님이 기적을 약속하셨으니 기적은 반드시 일어날 것이라고 했다. 다른 두 아이들도 확신에 차 있었다.

모스의 본당 신부 포카스 도 신자 한 사람을 대동하고 찾아와 아이들을 무섭게 비난했다. 그는 이 모든 일이 속임수임을 알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당장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10월 13일이 되기 전에 사기꾼으로 고발하겠노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아이들이 전혀 동요하지 않자 이번에는 함께 온 남자가 나섰다. 그는 세 아이가 ‘마법’이라는 중죄를 저지르고 있다고 했다. 세 아이는 13일 성모님께서 기적을 보이시면 모두들 이해할 거라고 침착하게 대답했다.

10월 12일 파티마 주변의 고지대에는 얼음같이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그리고 안개가 자욱하게 뒤덮이더니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해거름에 이미 수많은 군중이 ‘코바 다 이리아’ (발현 장소로 원반 모양)에 운집하여 기다리기 시작했다. 세찬 비바람 때문에 우산도 소용이 없었다. 그러나 자리를 뜨는 사람은 없었다. 대부분 먼 거리를 며칠씩 걸어온 농부들이었다.

먹구름이 얼마나 짙었던지 사람들은 13일 새벽이 열린 줄도 몰랐다. 비가 억수같이 퍼붓기 시작했다. 땅은 곧 진흙탕으로 변했고 사람들이 입고 있던 옷과 두르고 있던 담요도 모두 젖어버렸다. 그러나 그들은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끊임없이 묵주기도를 바쳤다. 부유한 사람들은 자가용 안에서 기다렸다.

오전에는 불신자를 대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 중에는 조간 신문 <오 세쿨로> 편집장 겸 경영자 아벨리노 데 알마이다 도 있었다. 조간 신문에는 순박하고 무시한 이들이 기대하는 기적이라며 비꼬는 논평이 실렸다. 그리고 대다수 사제들이 파티마의 광란을 지지하지 않음에 아주 만족스러워했다. 또 신문에는 한 컷 짜리 만화도 실려 있었다. ‘발현’할 것이라고는 가난한 이들의 현실적 궁핍과 배고픔뿐일 것이다! 데 알마이다 와 사진기자 그리고 다른 기자들은 ‘실현되지 않은 예언’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쓰기 위해 현장에 온 것이었다.

몇 명의 학자도 있었다. 기적이 일어난 후 그들이 남긴 진술에서 알 수 있듯, 그들 중 몇몇은 가톨릭 신앙을 잃었음에도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가 실재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향수에 찬 기대를 하고 있었다.

정오가 되자 드넓은 코바 다 이리아 에는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코임브라 대학의 말에이다 가렛테 교수는 어림잡아 10만 명은 도리 거라고 추측했다. 그의 손목시계 바늘이 정오를 가리키자, 로만 칼라를 한 사람이 일어나 모든 것은 사기요 속임수라고 소리치면서 세 아이를 끌어 가려고 했다. 아이들은 단호히 거부하면서 성모님은 약속을 지킬 거라고 분명히 말했다. 군중은 그 사람을 외면했다. 후에 그에 대해 알아보려 했지만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사제가 아니라 정부요원이었던 것 같다.

그로부터 약 한 시간 후, 태양이 한가운데 이르렀을 때 루치아가 소리쳤다. “여러분, 모두 우산을 접으세요!” 아직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대다수 군중들은 그대로 따랐다. 세 아이는 여느 때처럼 무아경에 들어갔다.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 루치아가 “해를 보세요!” 라고 외쳤다. 후에 루치아는 자신이 소리쳤던 것을 기억하지 못했다. 사람들이 얼굴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는 동안 비가 그치고 먹구름이 걷혔다. 해가 나오면서 눈부시게 비쳤지만 사람들은 해를 직접 바라볼 수 있었다! 그로부터 10분 내지 12분간 해가 선회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편집장 데 알마이다 는 10월 15일 월요일 신문에 “해가 춤추기 시작했다”고 진술하고는 그 모습을 묘사했다. 먼저 해가 ‘캐서린 휠스’라 불리는 폭죽처럼 소용돌이치며 빙빙 돌았다. 그러고 나서 지그재그 모양으로 하늘을 가로질러 움직였다. 태양 광선, 스팩트럼의 무지갯빛이 태양으로부터 분사되기 시작하여 자리에 모여 있는 사람들과 땅을 각각의 색으로 물들였다.

가렛테 교수는 군중들로부터 백 미처 정도 떨어진 둔덕 위에 서 있었다.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아서 시들해져 버렸습니다. 그저 추위를 견디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 그때 군중들의 탄성을 지르는 소리를 듣고 바라보니 그들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습니다.” 가렛테 교수는 눈부시다는 느낌 없이 해를 똑바로 바라본 그때의 경험에 대해 설명했다. “어지럽게 회전하는 원반이 되어… 엄청난 속도로 소용돌이쳤습니다.”

갑자기 모든 것이, 아니 온 세상이 보라색으로 변했다. 가렛테 교수는 혹 시력에 이상이 생긴 것이 아닐까 걱정하며 양손으로 눈을 가렸다. 가렸던 손을 내렸는데도 온 세상은 여전히 보라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바로 그때 제 옆에 있던 농부가 이렇게 외쳤습니다. ‘성모님이 노란색이다!’ 그러고는 색이 다시 변했습니다. 이번에는 해가 피처럼 붉은색이 되어 엄청난 속도로 소용돌이치는가 싶더니 창공에서 떨어져 나와, 마치 거대하고 무서운 덩어리가 우리를 짓뭉개 버릴 듯 위협적으로 떨어졌습니다. 그 순간 우리는 공포에 질렸습니다.”

10월 15일자 <오 세쿨로> 논평에서 아벨리노 데 알마이다 는 태양으로부터 분사된 놀라운 색깔과 태양이 ‘기이하게 춤추는 모습’에 대해 진술하면서 그 사건은 ‘일체의 범우주적 원칙을 벗어난 것’임을 인정했다. 그는 논평으로 인해 동료 자유사상가들로부터 호된 비난을 받았다.

며칠 후 <리루스트라카오 프르투게자 Illustracao Portuguesa>지는 군중들이 넋을 잃고 태양을 올려다보는 극적인 사진을 실었다. 리스본의 <오 디아 O Dia>도 10월 17일자 신문에 그와 유사한 기사를 실었다. 기사는 데 알마이다 의 표현과 아주 비슷했다. 일간지 <오르덴 Orden>에도 그와 유사한 도밍고스 코엘로 기자의 기사가 실렸다. 이런 기사와 비에 흠뻑 젖은 두 장의 군중 사진 – 수많은 우산으로 지붕을 만든 군중의 모습과 우산을 접고 일제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군중의 모습 – 은 포르투갈 전 지역에 엄청난 충격을 몰고 왔다. 그 신문들은 며칠 전까지만 해도 공화국 정부의 반교회 정책에 동조하며 가톨릭의 입장을 무시하던 신문이었다. 그들은 기적의 예언이 실패할 것이라 생각하고 기자를 파견했던 것이다.

변호사 카를로스 멘데스 는 스물여덟 살에 토레스 노바스 의 지방의회 의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훗날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가 10월 13일 파티마에 가게 된 이유는, 프랑스 전선에 파병되었다가 잠시 휴가 나온 동생이 파티마에 가고 싶어했기 때문이었다. 그 역시 다른 목격자와 마찬가지로 태양의 기적 사건을 설명했다. 그는 특히 군중의 반응에 대해 자세히 언급했다. ‘태양이 마치 불로 된 관처럼 변하여 빠른 속도로 돌면서 하늘을 가로질러 움직이다가’ 땅으로 곧장 떨어지기 시작하자 군중들은 공포에 휩싸였다고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릎을 꿇고 기도했고, 많은 이들은 큰소리로 기도했다고 진술했다.

파티마에서 10킬로미터 떨어진 마을 학교에서 수업 중이던 아냐시오 페레이라 – 그는 훗날 신부가 되었다 – 는 밖에서 사람들의 탄성이 터지자, 선생님과 다른 학생들과 함께 교실문을 박차고 달려 나왔다. 그들은 모두 그 자리에 못박힌 듯 꼼짝 않고 서서 입을 딱 벌리고 태양의 괴이한 움직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리고 태양이 지그재그로 움직이다가 곧장 땅으로 떨어질 때는 모두 공포에 질렸다. 아냐시오 는 곁에 파티마로 가는 마을 사람들을 비웃던 불신자도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그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그는 온몸이 마비된 듯 넋을 잃은 채 하늘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서 있다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높이 들고 진흙탕에 무릎을 꿇고는 엉엉 울었다. ‘동정 마리아여! 동정 마리아여!” 이 증언은 1943년에 출간된 G. 다 포세카 교수의 책에 실려 있다.

훗날 레이리아 교구에서 사제품을 받고 교회법 박사가 된 요아킴 로렌코 도 같은 학교 학생이었다. 그 역시 페레이라와 선생님 그리고 전교생과 함께 놀라운 장관을 목격했다. 레제이라와 요아킴은 존 해퍼트의 책 <목격자들의 증언>에 등장한다. 그들은 해퍼트가 자료 수집을 하기 위해 인터뷰했던 2벽 명 중 두 사람이다.

10월 13일 오후 포미아고 신부는 세 아이의 가정을 차례로 방문하여 아이들에게 성모님이 하신 말씀을 물었다. 포미아고 신부는 10월 13일 놀라운 현상을 목격하고 동료 신부들에게 그 이야기를 전했다. 그들의 반응은 다소 부정적이었다. 한 신부는 이렇게 대꾸했다. “그것은 분명 집단 히스테리증이나 집단 환각에 의해 일어난 사건일 것입니다.”

포미아고 신부는 누구도 태양의 기적을 기대하거나 예상하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러한 기적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리고 포미아고 신부는 멀리 떨어진 마을에서도 성모 발현과는 관계없이 그 현상을 목격한 사람들의 증언을 수집했다. 그 중 많은 이들이 후에 공식적으로 교회 문서를 통해 증언했다.

포르투갈의 유명한 작가 마르키즈 데 쿠르즈는 1937년에 <파티마의 성모 The Virgin of Fatima>를 출간했다. 책에는 먼저 10월 13일 파티마에서 태양의 기적을 목격한 사람들의 증언이 실려 있다. 증언자 중에는 그의 누이도 있다. 그러고 나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1935년 10월 30일 저녁 천재시인 알폰소 로페즈 비에라 의 아름다운 저택 발코니에서 그와 함께 바람을 쐬고 있었다. 저택은 파티마로부터 48킬로미터 떨어진 상 페드로 데 뮤엘 에 있었다. 그때 그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1917년 10월 13일, 어린 세 목동의 예고에 관해서는 까맣게 잊고 있었지. 그런데 여기 서 있다가 우연히 하늘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네. 동시에 매료되기도 했네. 정말 놀라운 일이었지. 그 광경은 내 평생 비슷한 걸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장관이었다네.'” 그리고 마르키즈 는 이렇게 덧붙였다. “어린 시절부터 가까이 알고 지내던 이들과 개인적으로 신뢰를 가진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날 포르투갈 각지에서 파티마로 모여들었던 수많은 사람들이 엄청난 기적을 목격했다고 증언했네.”

기적은 목경한 사람들에게 깊이 작용했음이 분명하다. 만일 태양이 실제로 그렇게 움직였다면 태양계는 엄청난 혼돈에 빠졌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전세계 관측소에서는 놀라운 이변이 기록되었을 것이다. 더구나 그 이변이 태양광선의 기이한 현상으로 일어난 것이었다면 모든 사람이 같은 것을 목격했겠지만 실상 그렇지 않았다. 예를 들면 어떤 이들은 휘황찬란한 무지갯빛을 보지 못했다. 예수회의 물리학자 비오 시아티치 는 논리적 해명을 찾아보았으나 실패했다. 그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3개월 전부터 날짜와 시간까지 구체적으로 여러 번 예고된 태양 이변은 “역사상 가장 명백하고 놀라운 기적이다”. 물론 눈을 목격된 기적 중에 그렇다는 뜻이다. 부활과 같이 성서가 전하는 기적들은 목격되지 않은 것이다.

자유사상가들의 반격은 서투른 편이었다. 10월 23일 밤 비밀결사대 산타렘 지부 회원들이 성모 발현 장소에 세워진 작은 기도소를 급습했다. 그들은 십자가 두 개와 성모상을 빼앗아 산타렘의 신학교 근처 건물에서 구경거리로 전시했다. 다음날 밤에는 가톨릭 교회의 기도문, 응답송, 성가 등을 개작하여 조롱하듯 부르면서 거리를 행진했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는 오히려 불리한 결과를 가져왔다. 수많은 사람들이 항의하는 소동이 일어났고, 가톨릭에 대해 적대적이었던 신문도 그들의 유치하고 뻔뻔스러운 행위를 비난했다.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단체 행동이나 시위 등이 금지되어 있는 반면 반 가톨릭 세력에게는 그런 자유가 주어졌던 것이다.

포르투갈 자유사상가 연합은 파티마 사건을 ‘상업적 목적’에서 조직된 ‘반동, 보수 세력’의 뻔뻔스런 계략이요 음모라고 비난하는 팜플렛을 배포했다.  가톨릭 신자들이 주장하는 ‘기적’이란 단순히 ‘집단적 자기 암시에 의해 순박한 신자들이 속아넘어간’ 사건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반동주의자들의 공신과 미신과 … 쉽게 믿는 경솔함’에 대항하여 ‘진리, 이성 그리고 과학’을 옹호하기 위한 운동을 일으키자고 외쳤다. “우리는 파티마 이야기와 같이 조잡하고 우스꽝스러운 속임수에 넘어가는 어리석은  믿음뿐만 아니라 초자연적인 힘 또는 전지전능하며 무소부재 하다는 하느님을 믿는 경솔함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것은 대중의 경신(輕信)을 얻으려는 사기꾼들의 교활한 상상력의 도구이기 때문이다.”

1917년 12월 포르투갈의 신도노 파에스 대통령이 벨로 추기경을 국내로 불러들였다. 이를 계기로 가톨릭 교회의 처지가 숨통을 틔게 되었다. 그러나 파에스 대통령은 일년도 되지 않아 암살당했다. 1918년 12월부터 새 정부는 파티마의 기적 이야기에 종지부를 찍어야겠다고 결정했다. 점점 늘어나는 신심행위에 제동을 걸기 위해 성모 발현 장도세 무장군인들을 파견했다.

파티마 지역 신자들은 그곳을 찾는 순례객을 위해 작은 경당을 지었다. 그러나 본당 신부는 어떤 개입도 거부했다. 조각가 호세 페레이라 테아딤 이 파티마의 성모상을 조각하는 일에 착수했다. 그는 루치아와 세부적인 사항들을 의논하는 동안 성모 발현을 적극적으로 믿게 되었다. 성모님께 대한 헌신을 표현하기 위해 그는 내내 무릎을 꿇은 채 조각을 했고 그의 절묘한 작품은 ‘순례 성모상’이 되어 전세계 어려 나라에 전시되었으며, 수많은 성당과 성지에 복제 조각상이 모셔져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20세기의 새로운 이방인들에게 하느님께 돌아올 것을 간절히 호소하며 그 길만이 전쟁을 없앨 수 있다고 선포하시는 성모님의 선하심과 슬픔을 잘 표현했다고 칭찬했다. 성모상은 1920년 5월 초 작은 경당에 안치되었다. 성모상의 베일이 벗겨지자 루치아는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1919년 한 해 동안 순례객 수가 크게 증가했다. 3년 전 영장도 없이 세 아이를 감옥에 가두었던 산토스 행정관은 중앙 정부의 내무부 장관으로부터 ‘파티마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호한 일은 당장 중지되어야 한다. 이 지시에 따르지 않는 자들은 기소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5월 13일 산토스는 성모 발현 장소 주변에 대규모 무장군인들을 배치하여 어떤 종교 의식도 행하지 못하게 했다. 그곳을 찾아온 수많은 순례객과 군인 사이에 험악한 사태가 일어나려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본당 신부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포미아고 신부가 나서서 평화롭게 해산하도록 군중을 설득했다. 무장군인 한 사람이 그에게 다가와 고맙다며 임무에 불만이 많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파티마의 성모님이 자기 누이동생의 생명을 구해주었다는 이야기도 했다.

정부의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순례객들은 계속 파티마로 몰려들었다. 성모상은 낮에도 공개하고 밤에는 다른 집에 은밀히 모셨다. 벨로 추기경은 이미 힘든 옥살이를 이겨낸 터였고, 정부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파티마의 기적을 경솔하게 인정했다가 신자들에게 피해와 상처를 줄 까 봐 그것을 두려워했다. 1858년 루르드의 주교가 그랬던 것처럼, 벨로 주교는 파티마의 기적을 엄밀하게 조사하기 위해 전문가 일곱 명으로 구성된 특별위원회를 만들었다. 조사 기간을 단축하기보다는 철저하게 조사하도록 지시했다. 치유 사례들도 조사했는데, 기적 치유에 관한 판다는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어떤 치유가 영구적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데는 시간이 걸리게 마련이다.

1929년 4월 14일 위원회는 조사 결과를 주교에게 제출했다. 주교는 보고서에 대해 그리고 이후의 사태에 대해 나름대로 조사하기 위해 시간을 더 갖기로 했다. 1930년 10월 13일 벨로 주교는 파티마을 찾은 10만 명의 순례객 앞에서 마침내 공식 입장을 선포했다. 세 아이가 목격한 성모 발현은 믿을 만한 것이며, 파티마의 성모께 대한 신심은 교구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고 선포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은 파티마의 성모 발현을 사실로 받아들인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이렇다. 하느님은 실재하며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의 구원에 대해 깊이 염려하고 계시다. 그분은 마리아를 통해 당신 아드님의 메시지를 되풀이하신다. 우리가 사랑을 실천하며 악을 피하려 진심으로 노력했다면, 죽음은 우리를 그분과 함께하는 천상의 삶으로 인도할 것이다. 파티마는 삶이 ‘진짜 따먹기’ 놀이 – 구슬치기하는 어린이들이 딴 것을 돌려주지 않기로 하는 것 – 라고 말한다. 삶이 끝나갈 때 나는 잃어버린 내 구슬을 도로 챙겨갈 수 없다.

파티마 이야기에는 사소한 부분에서 일치되지 않는 점들이 있다. 예를 들면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 시기에 관한 말이라든가 연옥에 있는 어린이들에 관한 말이다. 성모 발현 이후 세 아이를 둘러싼 군중의 소란스러움을 감안한다면 사소한 불일치는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어떤 말은 잘못 전해지기도 한다. 예수님 부활에 관한 공관복음서 진술에도 사소한 불일치가 있지만, 사건의 핵심을 분명하다.

 

 

 

17. 죄는 어찌 되었는가?

 

붓다 가 된 인도의 싯다르타는 모든 인간은 타고난 어리석음과 집착을 끊어버려야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쳤다. 고대 로마 철학자들은 극단으로 치닫는 인류의 보편적 경향에 대해 경고했다. 인류의 역사가 붓다 의 지혜와 로마인들의 지혜를 증명하고 있다. 우리는 어떤 신비나 어떤 문제의 한쪽 면만을 받아들임으로써 양쪽 모두를 안고 살아갈 때 감수해야 하는 긴장감을 덜어내고 안심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오류이며 위험하기까지 하다.

50년 전 그리스도 인들은 죄와 죄의식 그리고 영혼을 잃어버릴 수 있는 위험에 대해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사랑에 관해서는 충분히 듣지 못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반대의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 잘못된 행위나 결정에 대해 영원히 책임져야 한다는 그리스도의 경고를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미국 캔자스 주에 있는 매닝거 정신의학 연구소의 칼 매닝거 박사는 이를 염려하여 1970년 중반에 감명 깊은 책 <죄는 어찌 되었는가?>를 출간했다. 그는 현 사회에 퍼져 있는 고의적 사악함 (또는 고의적 범죄)를 별일이 아닌 것으로 축소하거나 등한시하는 정신 의학계와 진보적 교회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리고 진정한 자아로부터의 소외, 이웃과 하느님으로부터의 소외를 죄로 정의했다. 그는 영혼의 본질적인 결함이 온갖 형태의 삐뚤어진 생각과 일그러진 생활을 일그러진 생활을 낳는다고 말했다.

몇 년 후 또 다른 미국의 정신의학자 M. 스콧 펙 박사가 <아직도 가야 할 길>을 출간했다. 이 책은 5년간 전미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웠다. 책 내용은 현대인에게 인기 있는 여러 주의 주장들을 신랄하게 비판한 것인데, 많은 이들이 거기에 진실이 담겨있다고 공감했음이 분명하다. 책의 제1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삶은 고달프다. 이는 가장 중요한 진리중의 하나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이 진리를 진실로 이해하기만 하면 그것을 초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가 책 전체를 통해 반복하여 주장하는 것은, 흔히 고통을 동반하는 부단한 노력 없이는 진정한 인격을 잦춘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나태함과 나르시시즘으로 나타나는 ‘원죄의 엔트로피’ (스콧 박사가 <아직도 가야 할 길>에서 우리 정신 속에 작용하는 성장을 방해하는 힘을 가리킨 말.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이것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이를 극복하기 위해 어려운 길을 선택할 본능도 가지고 있다고 함)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우리 사회에 괴로움과 불행이 많은 이유는 진실되고 사랑이 가득한 사람이 되기 위한 고투를 견뎌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 책을 읽으면서 나는 예수님의 분명한 두 가지 요구 – 사랑하라 그리고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라 – 를 상기하게 되었다.

스콧 펙 박사는 몇 년 뒤 악에 대해 침묵하고 있는 동료 정신의학자들을 비판한 <거짓의 사람들>을 출간했다. 그들은 악을 거론하는 것은 ‘결코 해서는 아니 될 일’이라고 한다. 그것은 가치판단이 되기 때문이란다. 스콧 펙 박사는 다년간 환자들 그리고 그들의 부모와 배우자들을 만난 경험을 통해 의도적인 악이 널리 퍼져 있으며, 그 악은 한 개인의 자아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을 파멸로 몰라간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는 성서적 진리를 받아들였다. “악은 인간의 자유 의지와 병존하는 부수적 실재이니, 그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소중한 선택 능력의 대가다. … 우리 각자에게는 궁극적으로 자신이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선택할 자유가 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부연한다. “악에 관한 심리학을 발전시키는 데는 분명 위험이 뒤따른다.” (그 위험이란 죄, 죄의식, 두려움 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경향과 지각 없는 판단 등을 뜻하는 것이리라.) 그럼에도 그는 또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악에 관한 심리학을 발전시키지 않는 위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거짓의 사람들>에는 처음부터 180쪽까지 임상 사례가 자세히 실려 있다. 그는 정신이상, 정신신경증49, 무력한 삶과 비참함을 겪는 환자들(때로는 그들의 가족 구성원까지) 에게서 악의 실재를 찾아냈다. 그런 다음 제5장에서 ‘신들림과 구마식에 대하여’를 다루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99퍼센트의 정신의학자들과 대다수 성직자들이 그렇듯 나 또한 악마가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폭넓은 임상 경험을 통해 그 가능성을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그 분야의 전문 서적을 읽고 전문가들을 찾아 다닌 결과 마귀 들린 사람들 – 그들이 겪는 고통은 심각하다 – 에게 행해지는 구마식에 여러 번 참관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다. “나는 사탄이 실재한다고 확신한다. 나는 거짓의 원천인 그를 만나보았다.” 그가 목격한 구마식은 ‘대단한 영적 전투’ 였다. 효과적인 무기도 기도, 사랑, 의식(儀式) 그리고 선하신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엄청난 신비’에 대해 논하고 있음을 인정했다.

삶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본 사람이라면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신비로 가득함을 깨닫는다. 인간은 왜 사랑에 빠지는가? 그리고 왜 사랑에 실패하는가? 우리는 왜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을 행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은 행하지 못하는가? 매일매일 보도되는 끔찍한 재판 사례들, 약물 중독과 알코올 중독, 엄청난 이혼율과 가정 폭력, 근친상간, 아동 학대와 페도필리아50 등은 인간이 얼마나 불가사의하고 기괴한 – 때로는 치명적으로 기괴한 – 존재인가를 말해준다.

성서, 2천 년 그리스도교의 전승, 성 요한 비안네와 M. 스콧 펙 박사와 같은 이들의 기록은 사탄과 악령이 존재하며 그것은 인간 문제의 일부라고 말한다. 이는 그야말로 불가사의한 신비다. 전능하시며 사랑이신 하느님이 어떻게 루시페르와 같은 존재를 허락하실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어떻게 그런 악마적 존재들이 악을 선택하고 계속 악의 세력으로 존재하도록 허락하실 수 있단 말인가? 더구나 자신과 타인을 파멸로 이끌고 갈 아담과 하와를 어떻게 창조하실 수 있었단 말인가?

4세기의 성 아우구스티노가 그랬듯이 스콧 펙 박사 역시 결정적 설명을 제시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다음과 같이 힘주어 말하고 있다. “현실을 직시하라. 당신은 자신 안에서 그리고 다른 이들 안에서 분명히 악을 경험한다.  그것에 저항하면서 사랑으로 창조적으로 당당하게 살아갈 당신의 자유를 받아들이고 열정적으로 실천하라. 자기 중심적인 집착, 불평불만 등으로 정력과 삶을 낭비하지 말라.” <거짓의 사람들>은 선택할 것을 제안한다. “두 가지 상태가 있을 뿐이다. 하느님께 순명 하든가 아니면 자신의 뜻 이외 어떤 것도 따르기를 거부하든가 – 그럴 경우 사람은 자동적으로 악의 세력의 노예가 되고 만다.” 그리고 별 이유 없이 악을 선택하는 사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그런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과 다름없다. ‘무엇이 옳은지는 안다. 하지만 도덕성이나 양심 따위로 제약을 받지는 않겠다!'”

프랑스 철학자 사르트르는 ‘전후 프랑스에서 가장 많이 논의되는 작가’가 되었다. 그는 무신론자였지만 만일 하느님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하느님이라는 관념이 우리의 자유를 부정하기 때문에’ 하느님을 부정하는 것은 필연적이니 일이라고 했다. 사르트르는 (피카소, 히틀러, 스탈린, 헨리 8세 등처럼) 도덕성과는 상관없이 왕성한 자기 학대 과정을 통해 권력과 부를 거머쥐었다. 사르트르에 의하면 존재하는 모든 것은 존재 이유도 의미도 없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불합리 (또는 부조리) 하며’ 우리는 ‘자신과 도덕적 가치들을 순간순간 창조해 냄으로써 스스로 하느님 노릇을 해야 하는 불합리한 사회’ 속에 살고 있다. 사르트르는 유명한 묵시적 의견을 “타인(他人)은 지옥이다”라고 피력하기도 했다.  사르트르는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주장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형성에 한몫을 한 셈이다. 스콧 펙 박사는 말한다. “나는 비로소 악의 특성 중 하나가 혼동을 일으키려는 욕구임을 알게 되었다.”

험티 덤티51는 이상한 나라 앨리스와의 뒤죽박죽 토론에서 다음과 같이 멸시하는 투로 결말을 짓고 자신이 이겼다고 생각한다. “내가 어떤 단어를 사용할 때 그 단어는 내가 원하는 의미를 갖는다.” 이는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견해나 사르트르 의 견해와 가깝다. 단어, 토론, 결론 등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무의미하다. 전적으로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아무 생각 없는 애시드 락52 음악이 베토벤 9번 교향곡에 비해 못하지 않다. 내가 그렇게 말하고자 한다면 말이다. 마약중독자나 어린이 성추행범이 마더 데레사에 비해 못한 것이 무엇인가? 이 말을 부정하는 것 역시 또 다른 판단일 뿐이다. 요즘에는 결코 해서는 안 될 일로 금기시되고 있다.

그러한 포스트모더니즘이 상식이나 성서의 명쾌한 판단을 수용하는 사람에 대해 도리어 확신을 가지고 판단하곤 한다. 그들은 성서가 명하는 것과 금하는 것 일체에 대해 분연히 반대한다. 그러나 우리의 삶과 자연은 명확한 경고와 판단으로 가득하다. 폭음과 폭식을 일삼는 사람들, 증오심, 욕망, 분노, 약물 등을 굴복하고 자신을 내맡기는 사람들, 강물과 대기를 오염시키는 사람들은 천벌을 내려 달라고 비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천벌 또는 자연의 심판은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

미국의 노트르담 대학 교수 마이란 크로우 는 현대 가톨릭 교회의 일부 설교자들과 성직자의 ‘감상적이고 연약한’ 모습이 걱정스럽다고 한다. 그녀는 “하느님이 우주적 산타클로스로 제시되고 있다. 그 하느님은 모든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용인하며 모든 이들이 강한 자부심을 갖기를 기대하신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그런 하느님은 “사람들을 더 나은 인간으로 변화시키지도 않고 단테, 십자가의 성 요한, G. M. 홉킨스, 마틴데일, C. S. 루이스와 같은 그리스도 추종자들을 당신의 영감으로 이끄시지도 않는다.”

단테는 천국, 지옥, 연옥을 다룬 대서사시 <신곡>에서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으며 그에 의해 선택을 하고, 그 선택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고 단언한다. 마리안 크로우 교수는 C. S. 루이스의 <스크루테이프의 편지>53를 인용한다. 지옥의 악령 중 하나가 다른 악령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우리를 믿으면 우리는 그들을 유물론자나 무신론자로 만들 수가 없다네.” 성서 특히 그리스도와 신약 전체는 악과 악마에 대해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기도를 통해 진심으로 구한다면 힘과 위로를 주시는 아버지 하느님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 T. S. 엘리엇은 참뜻을 이해했다. 그는 그리스도교 교회를 사랑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교회는 스스로를 엄하게 대하는 사람에게는 자애로우며 스스로 관대하게 대하는 사람에게는 엄하다.  …. 교회는 그들에게 악과 죄에 대해 알려준다.” 사랑이신 하느님을 알리는 일 못지않게.

대다수 사람들은 선하신 하느님이 창조한 세상 안에 악과 고통이 존재한다는 점을 납득하기 어려워한다. 흄 추기경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는 그 점에 관해 만족스러운 설명을 들어보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는 복음서의 가르침을 믿는다. 인간의 사고를 초월하여 신비를 계시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고린토 전서 2장에 기록된 사도 바오로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있다. 그리스인 청중들은 당연히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의 철학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사도 바오로는 그들에게 철학을 알리려고 온 것이 아니라 성서의 계시를 전하러 왔노라고 했다. 이는 사도 바오로가 여러 번 반복하여 강조한 것이며 또한 루르드, 파티마, 메주고리예가 전하는 메시지의 핵심 부분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두고 근본적인 선택을 해야 하며 그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루가복음 9장 25절 (마태 16, 26; 마르 8, 36)에서 경고하신 말씀의 의미이기도 하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거나 망해버린다면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여기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상실이나 손해란 이 세상의 것이 아니다. 그분의 경고를 듣고 있는 사람은 세상에서 부족한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

최근 들어 많은 이들이 판단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하느님의 심판과 그 결과 역시 전혀 언급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나는 이를 복음적 실재의 도피라고 본다. 그것은 또한 현대 사회가 도덕에서 멀어지게 된 요인이기도 하다.  두려움은 인간에게 유익한 면이 있으니, 그것이 생명을 구한다. 헌신적인 부모는 헤로인 등 약물 중독에 대한 두려움을 자녀들에게 되풀이하여 알려준다. 잠언 1장에서 성령은 “야훼를 두려워하여 섬기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깨우쳐 준다. 물론 그것은 시작에 불과하며 하느님에 대한 반성, 기도 그리고 마침내는 그분에 대한 깊은 사랑으로 이어져야 한다.

이사야서 63자 ㅇ10절과 에페소서 4장 30절은 하느님의 슬픔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로마인에 의해 함락될 예루살렘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셨다. “너는 하느님께서 구원하러 오신 때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루가 19, 44) 예수께서는 또한 단정적으로 판단하신다. 제1차 세계대전이 죄의 결과라고 말씀하신 파티마의 성모님도 그러셨다. “사람들이 죄짓는 것을 그만두지 않으면 더 끔찍한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

복음서에서 예수께서는 도시의 멸망이나 전쟁보다 더한 비극을 여러 번 경고하셨다. 파티마의 성모님도 이를 여러 번 반복하여 이르셨다. 그 비극이란 자기 자신을 가장 강하게 여기는 것이니 황폐한 자기 중심적 실존은 죽음 이후까지 영원히 계속된다. 예수님은 이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셨다. 그분은 당신 자신을 잃는 비극적 실존에 관해 마태오복음서에서만 15번 언급하셨다.

영국의 계관시인 테드 휴스는 1998년 10월 10일 세상을 떠났다. 3일 후 <시드니 모닝 해럴드> 신문은 테드 휴스의 인생에서 냉혹했던 면모를 1면에 실었다. “휴스는 신진 시인이었던 실비아 플라스와 열애 끝에 결혼했다. 그들은 켄트에 정착하여 양봉과 시작 활동을 하면서 두 자녀와 함께 여유 있는 생활을 했다. 그러다가 휴스는  어시아 웨빌이라는 여성과 외도를 하게 된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실비아는 충격을 받고 의욕을 잃었다. 1963년 2월 11일 그녀는 아이들에게 우유를 한 잔씩 따라주고 그 길로 나가 자살했다.

휴스와 웨빌도 동거를 시작했고 딸 슈라가 태어났다. 1969년에 휴스는 또 다른 여성과 외도를 했다. 웨빌은 딸과 함께 동반 자살했다.

그 후 오랫동안 휴스는 실비아 플라스의 이름이 언급되기만 해도 화를 냈다. 그가 보관하고 있던 실비아의 원고도 ‘분실’되었다. 1998년 암으로 쓰러진 그는 그간의 침묵을 깨고 ‘생일 편지’라는 작품에 실비아에 관한 글을 썼다. 실비아가 세상을 떠난 후 어린 두 딸이 엄마를 찾다가 서재로 들어와 ‘엄마 어디 갔어?’ 라고 묻던 일을 회고했다. 그는 한겨울의 쓸쓸한 정원으로 나가 단단하게 언 흙을 ‘움켜쥔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뒤에도 독서 중 언뜻언뜻 실비아가 곁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술회했다. 그는 ‘마치 생기 있는 음성에 답이라도 하듯’ 고개를 들어 허공을 응시했다. 그러고는 고개를 떨구고 독서를 계속했다. 그것은 단지 ‘하나의 이야기일 뿐이니까. 당신의 이야기. 나의 이야기.'”

예수께서는 우리는 스스로에게 또는 다른 이에게 저지른 무책임한 일을 잊어버릴 수 없다고 거듭 가르치신다. 그것은 단지 하나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며 결과에 대한 책임은 영속된다. 마태오 복음 25장 41절에서 임금은 사랑을 베풀지 않는 이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저주받은 자들이.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의 졸도들을 가두려고 준비한 영원한 불 속에 들어가라.”

자기 자신을 존재의 중심으로 선택한 악마와 그 졸도들은 영적 존재들이다. 영적 존재는 물질세계의 불 속에서 고통 받지 않는다. 그렇다면 41절의 불은 그들이 선택한 거짓과 비뚤어진 자존심에서 초래된 자기 혐오, 자기 도취 그리고 소외를 뜻하는 비유임에 틀림없다. 진 라플라스의 말에 의하면 그것은 ‘사랑 없는, 인간 관계가 없는 그리고 하느님이 없는’ 삶이다. 스콧 펙 박사의 환자 중에는 죽지는 않았지만 사랑 없이 지옥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불’ 속에서 사는 것으로 표현한 예수님의 말씀은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사용한 생생한 비유다. 사람이 자신의 영혼을 상실한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지옥을 ‘상상’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다. 죽음 이후 삶의 차원은 우리가 현세에서 경험하는 것과 다르다. 사도 바오로는 고린토 전서 2장 9절에서 내세의 실재를 “눈으로 본 적이 없고 귀로 들은 적이 없으며 아무도 상상조차 하지 모산 일”이라고 설명했다. 의사들은 뱃속의 태아가 감각을 가지고 있으며, 어느 정도 바깥  세상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부모가 심하게 다투거나 큰소리를 지르면 태아에게 해롭다고 한다.

태아의 청각과 지각 능력이 놀랍게 촉진되어 엄마가 말하는 내용을 뱃속에서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엄마는 태아에게 아빠 엄마의 생김새와 형제들의 잘생긴 모습 등을 설명하기도 하고 뒤뜰에 핀 울긋불긋한 꽃들과 아름다운 나무 등을 자세히 묘사해 주겠지만, 뱃속의 아기는 그런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형태나 색깔을 한번도 본 적이 없는 태아는 그 모습을 상상하거나 이해할 수 없다. 이는 지복직관 안에서 하느님과 함께하는 모습이든, 스스로 소외되어 하느님 없이 ‘불’ 속에서 고통 받는 보습이든 마찬가지다.

역사가 윌리엄 월시는 <파티마의 성모님>에서 성모님이 세 아이에게 보여준 환영 – 소외된 영혼에 관한 – 을 상세히 설명했다. 스페인의 신비가 아빌라의 성 데레사에 관한 그의 글에도 성 데레사가 경험했던 유사한 환영이 묘사되어 있다.

그것은 파티마의 세 아이에게 그랬던 것처럼 성 데레사에게도 진지한 반성을 촉구했다. 파티마는 예수님의 권고를 다시금 일깨워 주었다. 그것은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고 곧은 길을 택하고 사랑이나 평화가 없는 궁극적 실조의 넓고 편한 길은 피하라는 권고다.

산상수훈 중에 하느님을 신뢰하고 사랑하도록 호소하시는 말씀 다음에 그와는 상반되는 말씀이 이어진다. 양심을 속이는 일, 하느님과 이웃을 거부하는 일, “불붙는 지옥”(마태 5, 22)에 넘겨지는 일, 마태오복음에도 예수께서 이 경고를 여러 번 되풀이 하신 것을 볼 수 있다. (10, 28; 13, 42; 13,50; 18, 9; 22, 13-14; 25, 41) 3장 10절과 12절에서 세례자 요한은 단죄에 관해 언급했다. “꺼지지 않는 불”, 예수는 세례자 요한의 영감을 받아 당신을 앞서 온 이로 칭송했다. 신약의 서간들과 묵시록은 복음서의 준엄한 권고를 여러 번 그리고 분명하게 되풀이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잠긴 문도 통과하신다. 그처럼 죽음 이후의 ‘몸’은 지금의 몸처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음이 분명하다. 죽음 이후의 존재 양식은 전혀 다른 차원이다. 죽음 이후의 ‘시간’  역시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시간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 이후의 ‘시간 경과’를 상상해 보는 것은 소용없는 짓이다. 우리의 정신과 마음은 그러한 실재들을 이해할 수 없다.

계몽주의는 오늘날에도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19세기 계몽주의자들은 인간의 이성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무엇이든 불확실한 것으로 여겨 이를 거부했다. 모튼 켈시는 이러한 계몽주의자들의 사고를 유물론적 시 공간의 상자에 갇혀 있다고 해석했다. 상자 안에 담을 수 없는 것은 무엇이든 – 삼위일체, 육화, 성체, 원죄 없으신 이태, 내세 등 –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된다.

베드로라는 이름을 받기 직전 시몬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 (마태 16, 16)를 선포했다. 예수께서는 온화하게 말씀하셨다. “너에게 그것을 알려주신 분은 ‘사람(살과 피)’이 아니다.” 이 ‘살과 피’는 취약한 인간의 사고를 나타내는 성서적 표현이다. 그 믿음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대에게 계시하신 것’이니, 곧 우리를 창조하고 존재하는 모든 것을 창조한 하느님이시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고 사흗날에 부활하신 예수를 아버지께서 보내신 하느님의 아들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그분이 ‘계시’로서 가르치시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삼위일체, 성체, 하느님의 심판에 관한 가르침, 그리고 죽음 이후 각자가 영원히 짊어져야 할 책임 등 이해를 초월하는 신비들을 포함하여.

대우주(macrocosm)54는 우리의 이해력을 초월하는 신비로 가득하다. 현대 과학자들은 백만 분의 일초 비율로 진동하는 신경 단위세포, 2백억 년 전 빅뱅으로 인한 우주 탄생55의 가능성 등을 이야기하고 있다. 가장 우수한 두뇌들도 이러한 자연의 신비를 복제는 커녕 이해하는 것조차 어렵다. 그들은 소우주인 자기 자신조차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존재하는 모든 것의 제1원인이신 하느님의 신비는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신앙을 통해 그분에 관해 알 수 있으니, 그분이 성서 말씀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시기 때문이다. 단, 기도하면서 마음을 평온하게 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예수께서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 하신 말씀은 이를 두고 하신 말씀이다.

심오한 사색가 카를 라너는 진리를 추구하는 인간의 정신을 크게 신뢰했다. 그의 많은 저서와 논문이 그것을 말해준다. 지난 1975년 8월에 있었던 감동적인 강연을 통해 그 신뢰가 자신의 사고력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신앙 안에서 겪는 어두움이 기도하고 구하는 이에게는 성장을 촉진하는 힘이 된다. 거기에는 기본 전제가 있다. 형언할 수 없는 하느님의 신비로 인도하는 것은, 손쉬운 해결법이나 겉만 반지르르한 해결법이 아니라 바른 해결법이다.”

4세기의 수도자들에게 깊은 감명을 준 에바그리오 는 카를 라너의 의도를 이렇게 표현했다. ‘훌륭한 신학자는 기도를 잘하는 사람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지도자로 봉사했던 현대 신학자 콩가르 도 같은 말을 했다. 복음서가 증언하는 그리스도는 일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예수께서는 아버지께 기도 드리는 시간을 갖기 위해 가르치는 일과 치유하는 일을 접어두셨다.

복음서의 여러 곳에서 예수님의 이러한 면모를 언급했지만 루가복음 5장 15~16절이 가장 돋보인다. “예수의 소문은 더욱더 널리 퍼져서 예수의 말씀을 듣거나 병을 고치려고 사람들이 사방에서 떠지어 왔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때때로 한적한 곳으로 물러가셔서 기도를 드리셨다.”  겸손되이 아버지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이러한 자세가 바로 ‘어린이처럼’ 되는 것이다. 루가복음 10장 21~22절에 그 뜻이 담겨 있다. “예수께서 성령을 받아 기쁨에 넘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지혜롭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 …. 아들과 또 그가 아버지를 계시하려고 택한 사람만이 알 수 있습니다.'”

스콧 펙 박사는 신경증이나 정신병으로 인한 성격 결함의 원인을 과감하게 대면하고, 그것을 해결하려 노력할 때 그가 얻게 되는 새로운 자유와 평온함에 대해 언급했다. 내가 루르드에서 가장 깊이 감동한 점도 바로 이런 부분이었다. 루르드에 도착할 때는 원망과 분노와 자기 중심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던 중환자들이 자신의 질병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이며 그와 더불어 깊은 마음의 평화를 발견했다.

루르드의 성인 벨라뎃다도 그랬다. 그녀는 어린 시절 콜레라에 걸렸고 천식을 앓아서 평생 몸이 허약했지만 전혀 치유 받지 못했다. 수도생활 중에도 질병으로 오랫동안 고생했다. 평생 천식발작으로 고생했고 카리에스에 걸렸다. 오른쪽 무릎에 커다란 종양이 생겼고 몸에는 농양이 퍼졌다. 루르드에서 많은 이들이 치유 받았고, 멀리 떨어진 곳에서 루르드의 성모께 기도함으로써 치유 받기도 했으며 루르드의 샘물을 떠다 마시고 치유 받은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벨라뎃다 수녀에게 치유의 은총을 구할 것을 종용했다. 그녀는 오히려 하느님이 보내신 것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고통을 죄인의 회개를 위해 하느님께 바침으로써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처럼’ 되기를 원한다며 그들의 간청을 거절했다. 그녀는 카리에스로 더욱 쇠약해져 서른다섯 살에 세상을 떠났다. 일생의 대부분을 수도원 병실 침대에서 지냈지만 그녀는 주위 사람들에게 친근함과 평온함을 느끼게 하는 인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온화함과 끊임없는 유머 때문에 동료 수녀들은 그녀를 매우 좋아했다.

여기서 루르드, 파티마, 메주고리예의 ‘성모님’이 전한 메시지 중 하나를 알 수 있다. 그것은 하느님한테서 멀어진 이들의 회개를 위한 기도와 고행이다. 내가 방금 복음서를 보았는데, 예수께서 속죄를 위한 고행에 관해 열일곱 번이나 말씀하셨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매일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단식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사도행전을 보면 부활 이후에 그리스도를 추종하는 이들이 단식을 진지하게 여겼음을 알 수 있다.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느님과 화해시키신 일에 대해 역설했다. 골로사이서 1장 21절에서 그는 이렇게 증언했다. “여러분도 전에는 하느님으로부터 떨어져서 하느님께 적의를 품고 사악한 행동을 일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의 몸을 희생시키시어 여러분과 화해하시고 여러분을 거룩하고 흠 없고 탓할 데 없는 사람으로서 당신 앞에 서게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1장 24절에서 사도 바오로는 자신의 고난이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의 일부가 될 수 있다는 놀라운 주장을 했다.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기꺼이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으로 채우고 있습니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도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했다. 다른 이들을 위해 감수한 그의 고행은 손과 발과 옆구리에 그리스도의 상처와 동일한 형상의 성흔이 나타날 때 절정에 이르렀다. 성 프란치스코는 그리스도께서 겪으신 고통을 자신도 겪는 것을 기뻐했다.

루르드, 파티마, 메주고리예 에서 발현하신 성모님은 때로 슬픔에 잠긴 모습이었다. 그것은 많은 이들이 이웃에 대한 사랑과 하느님에 대한 사랑에서 멀어졌기 때문이었다. 성모님은 이들을 위해 기도와 희생을 바치라고 벨라뎃다와 세 어린 예언자들에게 당부하셨다. 17세기 프랑스에서 성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 에게 당신의 성심을 계시하신 예수께서도 같은 당부를 하셨다. 파티마의 성모 발현 때 중심 역할을 했던 루치아는 성모님이 당부하신 희생이 어떤 것이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충실하게 사는 데 따르는 고통들입니다.”

히틀러에 의해 처형된 프로테스탄트 목사 본회퍼 는 나치 정권하에서 많은 그리스도교인 들이 나약하고 소극적인 것을 보고 애석해했다. 그는 ‘거저먹기 식 은총’ 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음을 납득시키려고 애썼다. 그리고 진정한 제자됨이란 “많은 희생이 따르는 제자됨” 박에 없다고 역설했다.

파울로 코엘료의 <다섯 번째 산>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엘리야 예언자가 하느님은 우리로 하여금 싸우기 – 야훼 하느님과 ‘씨름’ 했던 야곱처럼 심지어는 당신과도 싸우기 – 를 바라고 계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내용을 기억할 것이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가장 위대한 선물”은 “선택하고 결정하는 능력이다. …. 비극적 사건은 형벌이 아니라 도전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 하느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운명에 순응하기보다는 선택하기를 바라신다.” 더 진보 하기를 원한다면 “훈련 중에 우리의 교관(하느님)과 싸워야만 하는” 전사와 같다고 그는 역설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다. “하느님과의 싸움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고 우리를 성장하게 하기 때문이다.”

뉴먼 추기경은 ‘유비(類比)의 원칙’에서 인간은 하느님에 대해 그리고 그분의 성서 말씀의 신비에 대해 오직 ‘이미지와 그림자’를 통해 아는 것이 전부임을 상기시켰다. “우리의 제한된 정신으로 파악하는 모든 것에는 빛과 어둠이 공존한다.” 뉴먼 추기경은 자신의 묘비에 적을 “그림자와 이미지로부터 나와 진리 속으로”라는 글을 라틴어 성서에서 택했다. 사도 바오로는 이를 고린토전서 13장 12절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지금은 우리가 거울에 비추어 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만.” 사도 바오로는 그 문장의 후반부를 천국에서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으로 마무리한다. 그때가 되면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할 것”이며 삼위일체 지복직관의 빛 안에서 온전히 인식하게 될 것이다.

 

 

 

18. 얼어붙은 땅에서 치유의 불길이

Healing Fire from Frozen Earth

 

벨라뎃다는 1844년 금실 좋은 소비루 부부의 맏딸로 태어났다. 그들은 벨라뎃다를 비롯하여 자녀들을 무척 사랑했다. 자녀들을 키우는 동안 변하지 않은 것은 ‘사랑’ 밖에 없었다. 다른 모든 상황은 어이없을 만큼 냉혹한 현실로 변했다.

벨라뎃다는 여섯 살 때 천식에 걸렸는데 그전까지는 통통하고 건강한 아이였다. 천식은 평생 그녀를 따라다녔다. 벨라뎃다의 부모는 신혼 때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 제법 규모 있는 제분소를 경영했다. 하지만 손님들의 비위를 맞추느라 손해를 감수했고, 회계장부 관리도 소홀히 했으며, 도구가 낡은 것을 손보지도 못했다. 결국 손님이 줄어 세를 못 내게 되자 제분소는 남의 손으로 넘어갔다. 부부는 깊은 모멸감을 안고 다 스러져 가는 집에서 셋방살이를 시작했다. 그리고 어떤 일이든 마다할 수 없는 잡역부 신세가 되었다.

벨라뎃다의 어머니는 이 집 저 집 다니며 빨래와 청소를 했다. 그때가 1854년, 벨라뎃다가 열 살 때였다. 그 해 말에 교황 비오 9세는 성모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를 교의로 선포했다. 원죄 없으신 잉태란 성모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적을 미리 부여 받아 어머니의 태내에 자리잡은 순간부터 ‘원죄’를 면했다는 선언적 교리다. 그 해 12월 소비루 부부는 네 자식을 먹여 살리느라 성모님의 원죄 없으신 잉태를 기념하는 본당 축제에도 가지 못했다. 부모가 잡역부로 맞벌이를 나가 있는 동안, 벨라뎃다는 하루 종일 어린 동생들을 돌보아야 했다. 정규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는 그녀는 문맹이었고 표준말도 사용할 줄 몰랐다. 그녀는 비고르 지방의 사투리밖에 몰랐다.

1855년 가을 유행성 콜레라가 비고리 지역을 휩쓸고 지나가면서 많은 어린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벨라뎃다도 끔직한 질병의 후유증을 얻게 되었고 평생 병약한 몸으로 지내야 했다. 달의 치료비 때문에 소비루 부부는 경제적으로 더 큰 어려움을 감수해야 했다.

1857년에는 더욱 가난해져 보잘것없는 셋방살이마저 할 수 없어 말 그대로 길바닥으로 쫓겨났다. 사촌이 그들의 처지를 가엾게 여겨 ‘카쇼’ 안의 가로 4미터, 세로 2.5미터의 방을 쓰도록 해주었다. 카쇼는 프랑스어로 감옥이라는 뜻이다. 한대 감옥이었던 이 건물은 관청에서 비위생적이라는 판정을 내리고 사촌에게 매도한 것이었다. 이런 저장실 방은 겨울에는 습기차고 냉랭했으며 여름에는 통풍이 되지 않아 찜통 같았다.  그리고 밖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퇴비 때문에 일년 내내 코를 찌르는 듯한 냄새가 진동했다. 카쇼에 살면서 벨라뎃다의 천식은 더욱 악화되었다.

1857년 3월 27일, 경찰 두 명이 수색 영장을 가지고 카쇼에 쳐들어와 벨라뎃다와 동생들은 공포에 떨었다. 메송그로스 제과점에서 밀가루 두 부대를 도둑맞았는데 제과점에서 잡일을 하던 벨라뎃다의 아버지가 용의자로 지목된 것이다. 경찰은 카쇼에서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다. 소비루 씨는 결백을 주장하며 항의했지만, 새로 지은 감옥으로 연행되어 심문을 받고 9일 동안이나 구금 당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처지에 9일이나 일을 하지 못했으니 이들에게는 엄청난 손실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손해는 평판까지 나빠졌다는 것이다. 증거 불충분으로 고소는 취하되었지만 그는 결국 ‘전과자’로 낙인이 찍혔다.

1858년 2월 11일 벨라뎃다의 열네 번째 생일이었지만, 그녀는 루르드에서 가장 가엾은 소녀였을 것이다. 콜레라 후유증으로 열네 살 된 벨라뎃다는 기껏해야 열한 살 정도로 보였다. 그녀는 호흡곤란 때문에 하나밖에 없는 창문에 기대어 바깥공기를 마시려 애를 썼다. 굶기를 밥 먹듯 했고 학교 근처에는 가 보지도 못했다.

그런데도 그녀는 명랑한 성품을 잃지 않았고 낡은 옷이지만 깨끗하고 단정하게 입었으며, 부모와 동생의 각별한 사랑과 신뢰를 받았다. 연약한 모습 뒤에 농촌 처녀의 억센 기질이 있었으며 하느님에 대한 강한 믿음이 있었다. 그녀가 아는 기도문은 주님의 기도, 성모송, 사도신경뿐이었지만 묵주기도를 바치는 데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항상 주머니에 간직하고 있던 싸구려 묵주로 기도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고 틈만 나면 근처 성당에 몰래 들어가 홀로 주님을 뵙고 둘만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어느 날 예고도 없이 하느님께서는 빈민촌의 보잘것없는 소녀에게 한줄기 빛을 내리셨다. 이제 곧 그녀는 루르드의 유명인사가 되고, 결국에는 전세계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게 될 것이다. 성모님은 이 세상 거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아름다움으로 벨라뎃다에게 나타나, 웃는 얼굴로 고개 숙여 인사하며 물었다. “나를 위해 앞으로 보름 동안 이 자리에 나와줄 수 있겠니?” 성모님은 다른 사람들이 벨라뎃다를 부를 때 거만한 투로 쓰는 ‘너(tu)’를 사용하지 않고 높임말인 ‘당신(vous)’을 사용했다. 그 후 검사, 경찰서장, 본당 신부, 수녀들, 가족, 마을 사람들 그 누구도 벨라뎃다를 막지 못했다. 네 번째 발현 때 강 쪽에서 악한 음성들이 벨라뎃다를 향해 “이곳을 떠나라!” 고 고함쳤다. 그러나 성모님께서 권위 있는 눈길로 한 번 바라보시자, 악한 음성들이 사라지고 동굴은 다시 조용해졌다.

추위가 뼛속까지 파고드는 사순 첫 주일 2월 21일, 여섯 번째 발현일 이었다. 냉담자였던  도쥐 박사가 처음으로 성모 발현을 보러 갔다. 그는 전날 밤 클럽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세인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 벨라뎃다는 분명 신경병 환자일 것이라고 말했다. 자신의 추측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벨라뎃다를 유심히 관찰하고 호흡과 맥박을 확인해 보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발현 도중에 그녀의 표정이 황홀한 기쁨에서 깊은 슬픔으로 변하면서 눈물이 흐르는 것을 보았다. 환시와 무아경의 상태가 끝난 후 박사는 왜 울었느냐고 물었다. 벨라뎃다가 대답했다. “성모님께서 저를 넘어서 먼 곳을 응시하셨습니다. 다시 저를 바라보셨을 때 슬퍼하시는 이유를 여쭈었습니다. 그분이 이렇게 대답하셨지요. ‘죄인들을 위해 하느님께 기도하여라.'” 속죄, 회개 그리고 고통에 관한 메시지의 시작이었다. 그날 오후 벨라뎃다는 처음으로 두투워 검사와 자코메 경찰서장에게 모진 심문을 받았다.

경찰 추산에 의하면 여덟 번째 발현이 있었던 2월 24일 수요일에는 4, 5백 명이 모여들었다. 발현 도중 벨라뎃다의 표정이 다시 한번 어두워지더니 울기 시작했다. 그녀는 들고 있던 묵주를 힘껏 잡고는 작은 소리로 “속죄, 속죄, 속죄!” 하고 중얼거렸다.

벨라뎃다가 전하는 메시지가 복음서와 다르지 않음을 확인한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신뢰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홉 번째 발현이 있던 2월 25일에는 환멸을 느꼈다. 그날 벨라뎃다는 무릎으로 사방을 기어 다니더니 – 사람들이 보기에 아무 목적 없이 헤매는 것 같았다 – 갑자기 단단하게 언 땅을 맨손으로 파기 시작했다. 그녀가 손으로 구멍을 파자 흙탕물이 스며들었다. 그녀는 양손으로 흙탕물을 떠서 마시고 얼굴에 발랐다. 군중들이 ‘미쳤다’고 수군거렸다. 후에 벨라뎃다는 이렇게 설명했다. “성모님께서 당신이 가리킨 샘에서 물을 떠 마시고 그 물로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군중들은 혐오감과 불신을 갖고 자리를 떠났다. 남아 있던 사람들은 벨라뎃다가 판 작은 구멍에서 물이 콸콸 솟아나는 광경을 보고 경탄을 금치 못했다. 물은 점점 더 세차게 흘러나와 하루에 수천 리터의 물을 쏟아내는 깊은 샘이 되었다. 채석장 인부였던 루이 브리트 는 19년 전 폭파사고로 한쪽 시력을 잃었는데, 샘 이야기를 듣고는 딸에게 샘물을 천에 적셔오라고 했다. 그리고 기도한 후 젖은 천을 눈에 대고 나서 보게 되었다. 그의 주치의였던 도쥐 박사는 할말을 잃었다. 그 치유는 의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도쥐 박사는 결국 하느님을 믿게 되었고, 벨라뎃다의 든든한 지원자가 되었다.

2월 27일 주일날에는 열 번째 발현을 보기 위해 8백여 명의 군중이 모여들었다. 벨라뎃다의 작은 손이 깊은 샘을 찾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의구심을 가졌던 사람들이 되돌아왔던 것이다. 벨라뎃다는 무아경 속에서 여러 번 허리를 굽혀 차갑게 언 땅에 입맞춤을 했다. 성모님이 죄인들의 속죄를 위해 그렇게 하라고 이르셨다는 것이다.

세 번째 발현까지는 기쁨과 평온함이 가득하여 벨라뎃다의 마음도 확신으로 가득 찼다. 그러나 이어서 참회의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성모님은 죄의 결과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얼굴에 깊은 슬픔과 근심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성모님은 어린 예언자에게 그리고 그녀를 통해 모인 군중에게 하느님에게서 멀어진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회개할 것을 호소했다. 루가복음 19장 41절에서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두고 눈물을 흘리셨다고 증언하다. 히브리서 5장 7절은 예수께서 “큰소리와 눈물로 기도하고 간구”하셨다고 증언하고 있다.

루르드의 성모 발현은 성서적 상징으로 가득하다. 산 아래의 광야, 새로운 샘, 겸손 된 귀 기울임, 물을 마시고 씻는 일 등. 벨라뎃다가 땅에 입맞춤한 행위 역시 의미심장한 성서적 상징이다. 성서는 흙으로 빚어진 아담의 창조 이야기로 시작된다. 흙에서 난 우리는 흙에서 나는 먹거리로 살아가다 죽어 흙으로 돌아간다.  재의 수요일 전례는 우리가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감을 극적으로 상기시킨다. 성모님은 벨라뎃다에게 동굴 앞의 언 땅 – 죽은 것 같아 보이는 – 에 입맞춤하라 이르셨다. 그 땅은 고대의 폭풍으로 암석과 흙이 무질서하게 섞였다가 빙하에 의해 계곡으로 운반되어 형성된 땅이다.

나는 성모님이 땅에 입맞춤하라 이르신 것은 삶의 기쁨뿐만 아니라 고통까지 포함하여 사랑 가득한 마음으로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이라는 뜻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상처받은 인류의 한 구성원으로서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이도록 초대받은 것이었다. 벨라뎃다는 성모님의 초대를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콜레라로 쇠약해지고 천식으로 고통 받는 육체 안에서, 카쇼의 지저분하고 모욕적이며 무기력한 삶 안에서 그 의미와 아름다움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성모님은 벨라뎃다를 예수님의 산상수훈 중 역설적인 ‘참된 행복’으로 인도하셨으니, 의로움을 위해 슬퍼하는 이들, 굶주리고 목마른 이들, 박해 받는 이들은 복되도다!

벨라뎃다는 훌륭한 여성으로 성장했다. 천식 때문에 자주 호흡곤란을 겪었지만, 하느님을 섬기고 동료들을 사랑하는 데 힘을 아끼지 않았다. 몇 년 후 카리에스 가 그녀의 몸을 서서히 파괴했다. 그녀는 서른다섯 살에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이미 영웅적인 성인으로 칭송 받았다. 왕세자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는 신데렐라가 된 것이다. 그 후 수백 명의 중견 작가들이 그녀의 삶을 다루었다.

매년 수많은 사람들이 프랑스의 니버 수도원을 방문하여 유리관에 모셔져 있는 그녀의 시신 앞에서 기도한다. 수도생활 중 한번도 나태해지거나 짜증을 낸 적이 없는 그녀는 화창한 봄과 풍성한 가을뿐만 아니라 혹독한 겨울까지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녀의 부모는 때로 아둔하고 무능했지만, 그녀는 그들을 무척 사랑했다. 루르드에서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운 어린 시절을 보냈으면서도 니버 수도원의 동료 수녀들에게 어린 시절에 거닐던 미루나무 숲에 대한 향수를 들려주곤 했다. 우리가 때로 경험하는 내적 슬픔을 그녀는 본향 – 지복직관의 신비 안에서 하느님과 함께하는 영원한 삶 – 을 그리워하는 향수로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루르드를 찾는 병자들은 대부분 치유 받지 못한다. 하지만 힘들고 고달픈 여정을 감수하면서 그들은 또다시 루르드로 돌아가려 한다. 그들이 루르드에 매력을 느끼는 이유는 그곳에서 얻는 마음의 평화 때문이며, 그곳에서 찾게 되는 고통의 의미 때문이다. 하느님은 실재하시며 가까이 계심을 깨닫는다. 우리의 삶은 최종 목적지가 아니라 하나의 여정이라는 성서의 가르침을 새롭게 깨닫는다. 그들이 앓고 있는 질병과 좌절은 더 심오한 지혜로 안내하는 ‘도구’이며, 하느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전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그들의 고통은 하느님의 소명이라는 숭고한 성격을 띠게 되며, 사도 바오로가 골로사이서 1장 24절에서 말했듯이 신비에 참여하라는 부르심이 된다.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기꺼이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으로 채우고 있습니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세상을 떠나기 2년 전인 1224년, 자신이 일으켰던 운동이 와해되는 것은 아닌가 하고 근심에 빠졌다. 그는 험준한 알베르노 산에 들어가 40일간 기도와 단식을 했다.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해 묵상하면서 두 가지 은총을 간주했다.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겪으신 고통을 자신도 경험할 수 있는 은총을, 그리고 우리를 위해 그토록 극심한 고통을 받게 한 사랑을 경험할 수 있도록 은총을 구했다. 하늘이 그의 간구를 들어 오상(五傷)을 허락하셨으니, 양손과 발과 옆구리에 예수님 같은 형상의 상처가 생겼다. 프란치스코가 상처를 감추려 애썼지만 수도회 형제들은 알게 되었다.

명랑하고 쾌활한 가운데 사춘기를 보낸 프란치스코는 전장의 패배와 감금생활 그리고 질병으로 목숨을 잃을 뻔했던 경험으로 인해 거의 황폐해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그리스도를 향해 마음을 돌렸다. 그러다 우연히 나환자를 만나게 되었는데, 모습이 너무나 처참하고 끔찍해서 도망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두려움과 혐오감을 극복하고 가엾은 나환자에게 다가가 포옹했다. 그로부터 여러 해가 지난 1224년 그는 인생에서 가장 큰 은총을 받는다. 그는 그리스도처럼 사랑하게 되었으니, 다른 이에게 자유와 구원을 가져다 주는 데 도움이 되는 고통마저 사랑하게 되었다.

많은 이들이 고통을 겪음으로써 좌절하고 세상에 원한을 품고 분노하거나 사기가 꺾여 체념한다. 때로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신앙심을 잃고 만다. 사랑이신 하느님이 왜 그토록 힘겨운 고통을 허락하신단 말인가? 성 프란치스코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주님을 묵상함으로써 그 문제의 답을 얻었다. 십자가는 본향 여정의 남은 길을 안내하는 이정표가 되었다. 그 이정표는 땅에 깊이 박힌 채 아버지 하느님을 가리키며 양팔을 벌려 모든 사람을 끌어안고 있다. 벨라뎃다의 경우에는 성모 마리아의 얼굴에 드리운 슬픔이 우리를 본향으로 인도하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뜻과 그분이 겪으신 고통의 신비를 깨닫도록 이끌어 주었다. 

심층심리학자 융56 은 전인적이기를 원한다면 우리의 ‘그림자 부분’을 받아들여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기도의 기술을 배우는 데 도움이 되는 두문자어(頭文字語)를 알고 있는데, 아마 융도 이에 찬성했을 것이다. 그것은 ‘SAP’라는 것인데 ‘S’는 ‘침묵(silence)’, ‘A’는 ‘지금 이순간을 받아들임(acceptance)’ 그리고 ‘P’는 ‘간구(pleading)’를 뜻한다.

고통은 땅을 한동안 쉬게 하고 또 기다리게 하는 겨울과 같다. 고통은 우리를 더욱 심오하고 확신을 가져다 주는 지혜로 인도한다. 이에 대한 아랍 속담이 있다. 항상 맑은 날씨만 계속된다면 세상은 온통 사막으로 변할 것이다. 일본학 교수 도널드 킨은 그기 번역한 수필집에서 신뢰할 수 없는 친구의 일곱 가지 유형을 나열해 놓았다. 그 중 세 번째 유형이 ‘하루도 병을 앓아본 적이 없는 건강한 사람’이다. 강하고 속 깊고 믿을 만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고통을 경험해 봐야 한다는 생각은 모든 문화권의 상식인 듯하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에게 설득력 있게 다가오는 단어는 ‘연민(compassion)’이다. 어원을 따져보면 라틴어로 고통을 뜻하는 ‘passion’이 들어 있다. 덧붙인 ‘com’은 ‘함께’라는 뜻이다.

현대 서구사회의 광고와 잡지들은 고통을 악한 것으로 치부하도록 부추긴다. 그로 인해 우리는 고통을 두려워하고 그것을 회피하게 된다. 이는 선진국에서 흔히 발견되는 질병의 주원인인 정신적 스트레스, 불안, 두려움 등을 초래한다. 그들은 현재의 삶이 유일하며, 지금 여기에서 완전하게 행복하고 충만하게 살 권리가 있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자신이 그렇게 행복하지 않음을 깨달을 때 기만 당했다는 느낌을 받는다! 죽음을 하나의 재앙으로 이해하면 사람은 그것을 두려워하고 원망함으로써 오히려 죽음을 재촉하게 된다. 오늘날 서구 사회의 많은 이들은 병적으로 걱정한다. 삶을 사랑했던 성 프란치스코는 ‘누님인 죽음’을 기쁨으로 노래했다. 현명한 누님은 어린 남동생을 잘 인도하여 본향으로 가는 길의 마지막 고비를 잘 넘도록 도와 준다. 벨라뎃다는 성모님을 한 번 뵙고 난 후 세상의 어느 것도 자신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다고 했다.

알렉시스 카렐은 불가지론이라는 사막을 40년간 방황한 끝에 기도하기 시작했고, 자신이 이룩한 과학적 진보보다도 더욱 만족하게 하는 무엇을 발견했다. 그는 1941년 4월호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기도가 힘’이라는 글을 통해 “회복하는 힘… 기운, 생기, 정신적 지구력… 그리고 정신적 안정” 등이 기도생활에서 비롯된다고 증언했다. 그리고 “그는 의학적으로 가능한 모든 치료가 실패로 끝났을 때 기도에 몰입함으로써 질병과 우울에서 벗어난 환자들을 직접 목격했다. 안타깝게도 많은 이들이 기도를 평가절하하고 있다. 기도를 단지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손에 넣기 위해 조르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비가 내려온 세상을 적시는 것은 정원의 작은 수반을 채우는 것으로 묘사하는 것과 같다. …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는 데 기도를 통해 큰 힘을 얻는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을 언급하며 글을 마무리했다. “오늘날 기도는 곡 필요하다. 종교적 관념을 소홀히 함으로써 세계가 파멸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카렐이 처음으로 하느님을 진지하게 생각했던 루르드는 무엇보다도 기도하는 곳이었으니, 기도를 통해 사람들은 물질적 세계를 넘어선 통찰력을 얻고 ‘그리스도를 닮으려는’ 열망을 키운다.

1960년대에 약물문화의 개막이 예고되었다. 열렬한 대변인들은 새로운 세대를 향해 자유로워지라고 외쳐댔다. 그들은 자신 있게 말했다. 실재성은 우리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 ‘우드스턱의 신(新) 복음’은 우리가 원하기만 한다면 마음대로 의미와 행복을 창조해 낼 수 있다고 선언했다. 대마초와 LSD가 고통을 치유하고 긴장을 해소시키는 새로운 성사(聖事)였다. 바이런 애플야드 는 약물문화의 열매를 ‘허무주의, 유아론(唯我論) 그리고 반사고(反思考)’로 요약했다. 유아론은 우리의 생각이 확실하고 유일한 실재라고 단언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어떤 것에도 확실성을 기대할 수 없다며 짐짓 엄숙하게 선언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조장한, 모든 것에 대해 의심하는 형태는 요즘 종교적 글 소에서도 적지 않게 발견되고 있다. ‘예수 연구회’ 사람들 – 매스컴을 이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 은 대부분의 성서구절에 마침표 대신 물음표를 붙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하느님, 부활사건, 도덕, 내세, 영원한 생명, 기도 등 모든 것이 결국에는 험티 덤티처럼 곤두박질치며 무너진다. 이러한 붕괴는 성서의 원저자인 하느님만이 바로잡으실 수 있을 것이다.

여러분은 학창시절에 하나의 주제를 놓고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명을 각각 주장하는 논쟁 수업을 받았을 것이다. 그 수업은 사고력을 키우는데 효과적이다. 또한 머리만 잘 쓴다면 어떤 주제든 그리고 찬성이든 반대든 이길 수 있다는 것을 경험했을 것이다. 그렇다. 이론은 흔하디 흔하다. 역사가 증명해 주듯 히틀러나 스탈린은 정교한 선전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에게 재앙을 가져다 주었다. 수많은 이론보다 하나의 사실이 더 확실하다. 루르드의 치유 사례 – 예수께서 보이신 치유 기적이 그랬듯이 – 는 전세계 수많은 사람들이 삶의 결단을 내리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들이 마음의 평화와 영적 활력을 얻었다는 또 하나의 사실은 그 결단이 옳았음을 확증해 준다.

1893년 세상을 떠난 후 곧바로 명예의 전당에 오른 미국 성공회 필립스 브룩스 주교가 기도에 관해 설득력 있는 글을 썼다. 그의 글은 수월한 것만 선택하려 하며 희생 없이 은총만 받으려는 현대 미국사회의 막 가는 문화(비판과 판단 없이 무엇이든 용납되는)를 바로잡아 줄 수 있는 그런 글이다. 그가 발견한 하느님은 독수리 같은 하느님이었다. 우리는 그분을 닮도록 부름 받았다. 폭풍우도 두려워하지 않는 독수리가 되면 미래를 전망할 수 있는 안목이 생긴다. 수월한 것만 선택하는 문화는 땅에 떨어진 찌꺼기를 쪼아대며 일생을 보내는 암탉을 만들어 낸다. 썩은 음식 찌꺼기라도 기분만 좋으면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암탉의 안목은 자기 부리 앞에 있는 한 뼘의 땅에 국한되어 있다.

필립스 브룩스 주교의 글에서 발췌한 내용을 소개한다. “편하고 안락한 삶을 위해 기도하지 말라. 더 강한 사람이 되도록 은총을 구하며 기도하라. 당신의 능력에 맞는 임무를 달라고 기도하지 말라. 당신의 임무를 수행해 낼 수 있는 능력을 달라고 기도하라. 그러면 당신이 이룬 일이 아니라 바로 당신 자신이 기적이 되리라. 하루하루 당신 자신에게 감탄하게 되고 하느님의 은총이 베풀어 주신 삶의 풍요로움에 감동하게 되리라!”

서기 230년에 세상을 떠난 테르툴리아노 도 그와 비슷한 권고를 남겼다. “기도가 고통을 피하게 하는 특별한 은총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고통 중에 있는 사람, 슬픔에 빠진 사람, 고난 받고 있는 사람들을 인내로 무장하게 해준다. 기도는 은총을 증대시킴으로써 주님께 받은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는 한편, 하느님의 이름을 위해 고난 받고 있음을 납득하게 한다.”

 

 

 

덧붙이는 글

 

1998년 호주의 여러 도시에서 ‘믿기 어려운 예술 종교 심상’이라는 작품 전시회가 열렸다. 이에 대해 유명한 미술평론가 존 맥도널드는 다음과 같이 비평했다. “현대 시인들처럼 현대 미술가들은 너무나도 믿고 싶은 열망과 그렇지만 믿지 못하는 아픔을 표현하려 노력해 왔다.” 그리고 영국 시인 C.H. 시손 의 시를 인용했다.

 

오, 십자고상…

그 눈물은 무슨 까닭이옵니까?

기뻐하오리까?

당신의 음성을 들을 수만 있다면

그리할 수 있으련만!

 

성 아우구스티노의 <고백론>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그가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 시손의 시와 같은 고뇌를 겪었다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세련되고 열정적인 젊은 철학자 아우구스티노는 재기 넘치고 교양은 있으나 흔히 방탕한 오늘날의 젊은이를 생각나게 하는 부분이 많았다. 그는 열여덟 살에 정부를 두고 있었고 마니교에도 관심을 가졌다. 마니교는 낙천적이었으며 고급스런 철학적 전문용어를 사용했다. 어떤 면에서는 요즘의 뉴에이지 운동과 비슷했다. 또한 도덕적으로도 해이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노는 거기에 만족하지 못했다. 그가 복음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되기까지는 오랜 갈등과 고투가 있었다. 그는 두 가지 장애물을 넘어야 했다. 지적 우월과 만족감에서 오는 복종하기 싫어하는 성향과 자신의 성적 부도덕성이 그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행복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는 심사숙고 끝에 겸손한 마음으로 암브로시오 주교의 신앙강좌를 듣기로 결심했다. 암브로시오 주교에게 세례를 받을 때 그는 나이가 서른셋이었다.

<고백록>에는 마침내 하느님과 자기 자신을 찾고 마음의 평화를 얻은 한 인간의 감동적 고백이 담겨 있는데, 그 책의 영향력은 오늘 날까지도 여전히 강력하다. “당신은 우리를 당신을 향한 존재로 만드셨으니, 우리 마음은 당신 안에 평안히 쉴 때까지 불안합니다. 당신을 너무 늦게 알았습니다. 오, 예로부터 영원하신 분. 오, 영원히 새로우신 분.” 시손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오늘날 많은 지성인들은 젊은 시절의 아우구스티노처럼 도덕적으로 혼란에 빠져 있고 영적으로 방황하고 있다. 자만심과 육욕이 그들 영혼의 눈을 흐리게 한다.

믿음을 방해하는 다른 장애물도 있다. 어떤 장애물은 그리스도인의 책임이며, 그것은 결코 작은 부분이 아니다. 처음에는 ‘신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했던 니체는 그리스도인이 구원받은 삶을 보여준다면 그리스도인을 좀더 진지하게 받아들이겠다고 말했다. 미지근한 신앙인이나 냉담자들이, 진정으로 하느님을 찾는 이들과 하느님 사이에 방해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카를 라너 역시 사랑 없이 옳고 그름을 설파하는 설교자들이 무신론자를 만들어 낸다고 말하기도 했다.

나는 믿지 않는 이들이 기도를 통해 하느님을 찾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루르드의 치유 기적과 파티마의 성모 발현 등을 소개했다. 그러나 루르드의 메시지는 믿는 이들을 위한 것이다. 그 메시지는 마음을 다해서 기도하고 헌신적으로 복음 말씀을 실천하라는 부르심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거듭 강조한 것이다. “나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이 불이 이미 타올랐다면 얼마나 좋았겠느냐?”(루가 12, 49) 루르드에서 예수님과 성모님은 인류의 현 상황에 대해 깊은 슬픔을 표현하셨다. 두 분은 뱃속에 불을 품고 우리를 부르신다.

이 책 서문에서 나는 20대 초반에 그리스도 교회와 ‘사랑이신 하느님’에 대해 의문을 가졌노라고 했다. 이제 내 나이 일흔 살이 되었다. 그리고 20대 때 내가 경험했던 것과 똑같은 문제를 오늘날의 미디어가 안고 있음을 본다. 많은 저널리스트들은 교회를 심한 풍랑과 태풍에 휩쓸려 파손되고 있는 한 척의 범선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분명 엄청난 위기를 겪고 있다. 나는 감히 이에 대한 진단을 내리고자 한다. 나는 수사 신부로서 이 글을 쓰고 있으며, 독자 여러분과는 시각이 다를 수도 있을 것이다.

지난날 사제들과 수도자들은 존경을 받았다. 그들은 혹독한 식민통치 시절에 아일랜드 국민과 함께 고통을 받았고 오랜 기근을 함께 견뎌냈다. 사람들은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고 그들의 권고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제 사정은 달라졌다. 사제들과 수도자들은 진실함과 역량을 스스로 입증해야만 한다.

영성 신학 박사인 마이클 휄런 신부는 최근 호주 교회의 모습에 대해 언급했다. 지난날 어려웠던 시절, 가톨릭 학교와 병원 그리고 단체를 이끌어 가기 위해 절제와 검약을 실천하며 노력했던 사제들과 수도자들의 노고와 명성을 되돌아보았다. 그러나 이제는 사정이 완전히 달라졌다. 프랑스와 포르투갈의 반가톨릭 운동과 관련해 언급했던 것처럼 성직자들의 특권에 대한 반감의 징후가 나타난 것이다. 사제들과 수도자들은 “호주 사회에서도 자신을 스스로 입증해 보여야만 한다”라는 휄런 신부는 결론지었다.

게리 애버클 신부는 수도자의 수가 현저하게 줄어버린 수도 공동체에 활기를 불어넣는 문제와 관련하여 일곱 권의 책을 썼다. 수도생활 지원자 수가 줄고 수도원을 떠나는 수가 증가하는 통계 수치만 보더라도 질병의 말기 증상과 같은 위기가 왔음을 알 수 있다고 그는 설명했다. 그는 뚜렷한 병적 증상 – 헌신적인 개인 기도생활이 줄어듦, 사도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서로에 대한 신뢰가 약해짐, 그리고 청빈서원을 실천하는 데 실패함 – 에 주목했다.

선교활동을 하다가 잠시 귀국한 두 명의 호주인 사제의 이야기를 듣고 걱정이 되었다. 내가 그들의 이야기에 특별히 관심을 갖는 것은, 그들은 제3세계의 가난한 이들과 함께 생활하며 성공적으로 사목활동을 수행해 낸 선교사들이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호주에 머무는 동안 여러 사제관과 수도원에서 지냈다. 인도에서 선교활동을 하다 온 신부는 “일부 사제들은 초저녁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하고 밤늦게까지 텔레비전을 시청하니 아침에 일어나는 시간도 늦어지게 된다. 그러니 개인 기도 시간이 거의 없는 것 같다”며 걱정했다. 필리핀에서 선교활동을 하다 온 신부도 “텔레비전 앞에서 기도하고 묵상하는 시간이 너무 많다”는 이야기를 했다. 예전의 호주의 성직자와 수도자들은 주님과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갖기 위해 빈번하게 성당이나 성체 조배실을 찾았다.

10년 전쯤 나는 필리핀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민다나오 섬에서 활동하고 있는 선교사들 – 대부분 뉴질랜드 출신이었다 – 과 엿새를 함께 지냈다. 선교 본부나 숙박소 어디에도 텔레비전이나 전화기조차 없었다. 그곳 신부들은 검소하게 생활했다. 한 사제관은 아주 지저분한 빈민굴 한가운데 있었다. 매우 비좁은 방안에는 침대는커녕 깔개도 없었다. 그들은 빈민들과 마찬가지로 마룻바닥에 얇은 담요를 깔고 잤다. 그토록 열악한 환경에서도 그들은 열정적이었고 ‘일어나 가자’는 영성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에 매료된 많은 젊은이들이 그들이 운영하는 신학원으로 몰려들었고 몇몇은 수품 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뉴질랜드, 호주, 영국에서 온 선교사들의 출신 지역 신학교 학생 수를 모두 합한 것보다 더 많은 신학생들이 허름한 신학원에서 열정을 불태우고 있었다.

그곳 선교사들이 검소하다는 것은 많은 시간을 빈민들을 방문하는 데 할애하고 돈을 대부분 빈민들의 의료비 – 의약품 구입 등 -로 내놓는다는 뜻이다. 본당 신자들도 그들의 자선활동을 본받기 시작했다. 또한 그들의 헌신적인 사목활동 소식을 듣고 해외 교우들은 가난한 필리핀 사람들을 돕기 위해 생활비를 줄이기 시작했다. 필리핀에서 지내는 엿새 동안 물질적 안락함과 걱정 없는 생활, 그리고 영적 무력함에 대한 반성과 심각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

내 마음을 움직인 또 한 사람은 도쿄의 상지대학 교수 윌리엄 존스턴 신부였다. 그는 일본에서 사목활동을 하고 있는, 나를 포함해서 여러 신부의 피정을 지도했는데 다음과 같은 그의 말에 우리는 충격을 받았다. “묵상하는 법을 가르쳐 주지 않고 세례를 베푼다면 여러분은 무책임한 사목자입니다. 묵상을 통해서 얻는 하느님의 깊은 사랑 없이 그리스도교의 대헌장인 산상수훈 말씀과 정신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진지하게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은 누구나 묵상을 할 수 있고, 묵상은 누구에게나 필수적인 것입니다. 우리를 염려하시는 하느님에 관한 성서 구절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사랑 가득한 마음으로 일기만 하면 됩니다.”

그 즈음 나는 신앙심 깊고 살아 있는 성인이라 알려진 미국의 성서학 박사 캐럴 스툴뮬러 의 강의를 들었다. 강의는 그리스도 교회 성직자들과 교사들을 위해 특별히 준비한 것이었다. 그는 시편 63편을 주해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잡념을 씻어내기 위해, 그리고 하느님을 떠나 생활할 때 경험하는 무력감을 ‘뼈저리게 느끼기’ 위해…. 그리고 영성생활에 대한 갈망을 자각하기 위해 기도생활에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 한결같은 기도생활을 통해 비로소 자신의 잠재의식을 간파할 수 있으며 하느님의 ‘비전’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스툴뮬러 신부와 존스턴 신부의 말은 분명 옳은 말이다. 나는 기도생활에 있어서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편으로는 현대 사회가 겪고 있는 신앙의 위기를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그 길도 알 것 같았다.

최근 나는 도쿄에 있는 프란치스코 수사들의 환대를 받으며 그들과 함께 지낸 적이 있다. 그때 우연히 아시시 성 프란치스코의 편지를 발견했는데, 13세기 이탈리아의 영적 위기에 관해 걱정하는 내용이었다. 성 프란치스코는 가장 부드럽고 온화하며 관대한 성품을 지닌 성인이다. 그럼에도 그는 하느님의 호의를 ‘악용하는’ 그리스도인들과 복음서가 지향하는 가치에 무관심한 성직자, 수도자들에게 쓴 소리를 했다. 내가 프란치스코 성인의 편지를 살펴보던 당시 성무일도의 독서는 요한묵시록 말씀이었다. 그 말씀은 미지근해진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겨냥한 것이었다. 사르디스 공동체에 전해진  쓴 소리다. “네가 살아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이름뿐, 실상 너는 죽어 있다. 깨어나라. 그리고 (아직은) 남아 있지만 죽어가고 있는 것57을 굳건하게 하여라.”

라오디게이아 공동체는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듣고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차라리 네가 차든지 아니면 뜨겁든지 하였으면 얼마나 좋겠느냐! 그러나 너는 이렇게 뜨겁지도 차지도 않고 미지근하기만 하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버리겠다. 너는 스스로 부자라고 하며 풍족하여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자신이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요한 묵시록 3장)

M. 스콧 펙 박사의 <아직도 가야 할 길>에서 요한묵시록 말씀과 성 프란치스코의 메아리를 듣는다. 스콧 펙 박사는 자포자기로 기울어질 수 있는 치명적 경향에 대해 여러 번 언급했다. 그러한 경향은 책임감을 가지고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우리의 소중한 능력을 서서히 포기하게 한다. 이것을 그는 수월한 길을 택하려는 인간 고유의 ‘나태함’이라고 분석했다. 쓴 소리와 엄격한 처방으로 가득한 이 책은 무려 5년간 전미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빠지지 않았다. 독자들이 보인 놀라운 반응은, 안일하고 느슨한 현 사회가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음을 감지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들은 진실을 원한다. 비록 처음에는 입맛에 맞지 않고 듣기 싫은 소리라 해도 말이다.

저자는 환자들을 성적으로 ‘이용’하는 동료 정신과 의사들을 가차없이 비난했다. 가톨릭 신자들도 최근 몇 년 사이, 교회 안에서 사제와 수도자에 의해 그런 사건이 일어난 것을 알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옛말이 틀린 것이 없다. 기도를 통해 하느님과 깊이 대화하며 하느님을 가장 가까운 벗 또는 동반자로 삼고 생활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이 독신생활을 선택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벨라뎃다 소비루는 고통스러운 카리에스로 고생하다가 1879년 4월 16일 세상을 떠났다. 30년 후인 1909년 9월 22일, 그녀를 성인품에 올리기 위한 조사가 시작되었다. 벨라뎃다의 관을 열어보았더니 전혀 부패되지 않은 상태였다. 벨라뎃다가 입고 있던 수도복은 습기로 인해 축축하고 묵주는 녹슬어 있었지만, 시신을 썩은 냄새조차 나지 않았다.

최근 일본의 요미우리 방송국에서 루르드와 벨라뎃다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 방송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을 위해 제작한 프로그램이 아니었다. 전체 인구 99.9퍼센트가 비그리스도인인 일본 시청자들이 대상이었다. 사전에 꼼꼼하게 정보를 수집한 해설자는 루르드에서 출발하여 벨라뎃다의 시신을 안치한 니버 수도원 성당까지 자세하게 안내했다. 극심한 고통 끝에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벨라뎃다의 평온하고 우아하며 아름다운 얼굴에 카메라의 초점이 맞추어 졌지만, 해설자는 목이 메어 말을 하지 못했다. 그녀는 흐느낌을 억누르려 애쓰며 이렇게 말했다. “벨라뎃다, 당신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시려는 겁니까?”

나는 질문의 해답을 생각하느라 몇 주간 고민했다. 나는 이 책에서 주로 루르드의 기적을 소개했다. 믿지 않는 사람들과 확신 없이 흔들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와 하느님을 만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게는 지난날 가슴 아픈 기억들이 있다. 많은 이들이 삶과 죽음의 의미를 깨닫는 데 도움을 받고자 나를 찾아왔지만 별 소득 없이 돌아갔다. 나는 그들을 납득시키지 못했다. 그 이유는 그들이 나를 통해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만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정부 고위 관리이며 가톨릭으로 개종한 사람이 최근 아픈 곳을 건드린 적이 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내가 다른 이들을 납득시키지 못한 이유를 들추어냈다. “요즘 대부분의 신부들은 권위와 감화력이 없습니다.” 그간 신자들을 무시하거나 그들의 청을 거절했던 잘못이 떠올랐다. 예수께서 기대하셨던 제자의 모습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었다.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거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주요 또 선생인 내가 여러분의 발을 씻겼다면 여러분도 마땅히 서로 발을 씻어주어야 합니다.”

영국 주간지 <타블렛>  1999년 5월 1일자에 실린 기고문이 또 다른 상처를 꼬집었다. 미사에 참여하는 신자 수가 줄고 신학교 신입생이 줄어든다는 기사를 보고 데이비드 맥과이어 신부가 보낸 글이었다. “오늘날 복음 말씀과 교회 공동체를 섬기며 봉사하고자 열정에 넘치는 신부들을 과연 찾아볼 수 있는가? 혹시 우리 신부들은 사제관에서 안락하게 생활하며 고급 승용차를 선호하고 이국적인 휴가를 즐기는 신부로 비춰지고 있지는 않은가? 나 자신을 돌아볼 때 ‘그렇다’고 인정할 수박에 없다!”

윌리엄 존스턴 신부는 산상수훈 말씀을 실제로 실천해야만 참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강의를 듣고 있던 우리를 날카롭게 바라보았다! 우리는 그의 생각을 짐작할 수 있었다. 사제의 본질적 임무는 산상수훈 정신을 실천하며 다른 이들도 그렇게 생활하도록 돕는 것이다. 만일 사제와 수도자 그리고 평신도들이 그렇게 생활하고 있다면, 굳이 치유 기적을 내세우지 않아도 될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 – 사제들을 포함하여 그리스도인들 – 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고 그분의 음성을 감지할 수 있다면 그들은 분명 하느님의 현존과 자신을 향한 그분의 사랑에 대해 확신하게 될 것이다.

체스터턴은 그리스도교 교회가 여섯 번 위기를 겪었다고 말했다. 부활의 기적은 헌신적인 성인들이 철저히 쇄신을 실천했디 때문에 일어났다. 나는 교회가 일곱 번째 위기에 처했다고 생각한다. 서구 문명 또한 같은 위기에 처해 있으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오늘날 서구 문명을 ‘죽음의 문화’라고 표현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현대 사회의 위기에 대한 응답으로서 성령의 책임 있는 결단이었다. 사제들과 수도자들에게 강력한 메시지를 선포했다. “산상수훈 말씀을 살아갔던 선조들의 정신으로 돌아가라.”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평신도들에게도 메시지를 선포했다. 지속적 개혁을 위해 복음 말씀을 실천하려는 부단한 노력이 요구된다는 뜻이다. 이는 바로 예수께서 첫 설교 때 하신 말씀이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루르드, 낙크, 파티마, 그리고 메주고리예는 단지 그 메시지를 거듭 전하고 있을 따름이다. 발현은 평신도들에게 일어났다. 평신도는 교회를 구성하는 대다수가 아닌가. 벨라뎃다와 같은 평신도 예언자들이 메시지를 헌신적으로 전했다.

19세기 인본주의자들은 미래에 대한 장밋빛 청사진을 가지고 있었다. 과학의 눈부신 발전, 만인의 교육, 자유 무역 등을 통해 20세기에는 인류의 주요 과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들은 그러한 20세기의 새벽에 살고 있음을 자축했다. 그리고 후손들은 20세기의 밝은 대낮에 살게 되리라 확신했다.

그러나 19세기의 잔재와 그보다 더한 악몽들이 진보한 20세기로 고스란히 넘어와 지속되고 있다. 나는 벨라뎃다를 우롱했던 19세기의 과학적 체계보다는 벨라뎃다가 훨씬 뛰어난 예언자였음이 증명되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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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프랑스 태생의 영국 작가, 시인, 문명비평가
  2. 의식에 주어지는 감각적 경험만이 인식되고, 그 배후에 있는 사물의 본질이나 실재 그 자체는 인식할 수 없다는 설
  3. 신경증의 일종. 격한 감정 폭발과 지각, 운동 기능의 장애가 특징임
  4. 근육, 기관 등을 분동(分銅) 따위로 계속 잡아당기게 함. 압력을 줄이는 것이 목적이다.
  5. 뇌, 척추에 경화 현상이 일어나는 신경증. 언어장애, 하지(下肢) 근력 저하, 정신적 황폐, 안구 진탕증 등이 나타난다. 주로 젊은 사람이 걸린다.
  6. 종교적 특권을 부여 받은 로마 가톨릭 성당
  7. 병적 감정의 격앙상태로 비현실적 행복감을 갖는다.
  8. 체내에 액체를 주입하거나 배설시키기 위해 삽입하는 관
  9. 가톨릭, 특히 로마 가톨릭의 신앙, 주의, 제도, 관행
  10. Blaise Pascal(1623~62): 프랑스의 철학자, 물리학자
  11. 급성 국한성 소장염
  12. 회장에 구멍을 내어 인공 항문을 만드는 외과 수슬
  13. 췌장, 폐 따위에 낭포가 생겨 점액이 괴어 섬유화가 일어나는 유전성 만성병. 유아기에 시작되며 소화, 호흡곤란이 나타나고 정상적으로 성장하지 못한다.
  14. 켈트어에 속하는 고대 아일랜드 언어
  15. 아일랜드 전통 공놀이
  16. 터키의 다르다낼스 해협 북서쪽에 있는 반다
  17. 신경, 혈관 따위의 그물 모양으로 된 부분
  18. 두개골에 둥근 구멍을 내는 데 쓰이는 수술 도구
  19. 갑자기 강한 복압(복압)이 가해져 복부의 내장이 좁은 출구에서 탈출하여 잘룩해지는 것. 출구에서 혈류(혈류)가 멈춰진다.
  20. 저온 살균법으로 유명한 과학자
  21. 동식물 세포 속에 존재하는 몇몇 종의 산화, 환원 효소. 세포 호흡에 중요한 구실을 함.
  22. 혈관 확장제의 일종, 퇴행성 과정 억제 효과가 있음.
  23. 심장 수술시 일시적으로 사용되는, 심장 기능을 수행하는 인공장치
  24. 프랑스 중부 도시. 제2차 세계대전 중 비점령지구의 임시정부 소재지
  25. 항생제의 일종으로 결핵 등의 특효약
  26. 세계 금융업자인 존 탬플턴이 제정한 것으로 세계적으로 하느님과 영적 이해를 돕는 데 기여한 사람들에게 주는 종교계의 노벨상
  27. 프란치스코회의 한 분파인 카푸친 수도회 수사
  28. 프랑스 혁명 이전의 정치 사회제도
  29. 인간의 자유의지 부정. 신의 예정설과 은총에 의한 구원, 초대 그리스도교의 엄격한 윤리 등을 주장
  30. 교황지상주의에 반대하여 프랑스 교회의 자율권을 옹호
  31. 몰리노스가 주장. 인간의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노력, 의지, 활동을 억제하고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수동적, 소극적 상태에서 완덕에 이른다는 신비주의의 한 형태. 이러한 상태에 이르면 절제도 성사도 필요 없다고 하여 이단으로 몰림.
  32. 분도회의 분파로 1098년 프랑스의 시토에 세운 수도회. 엄격한 규율로 유명함.
  33. 척추가 굽는 병. 보통 결핵으로 발병함.
  34. 생체내 조직이나 세포가 부분적으로 죽는 일
  35. 1802년 나폴레옹 1세가 제정한 프랑스 최고 훈장. 군사상, 문화상의 공로자에게 대통령이 직접 수여함.
  36. 피레네 산중의 급류
  37. 수액을 채취하거나 약액을 주입하기 위하여 요추부에서 척수막 하강에 긴 바늘을 찔러 넣는 것.
  38. 임종이 가까운 환자들에게 죽음의 고통을 완화시켜 주기 위한 의료, 간호를 베푸는 시설
  39. 야채, 고기, 과일 등을 삶아서 체에 거른 음식
  40. 특히 종교상의 권위나 전통에 구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사상을 가진 사람
  41. 물이나 광천(鑛泉)을 외용(外用)시키는 치료법
  42. 생체내 조직이나 세포가 국부적으로 죽어 환부가 탈락 또는 부패해 생리적 기능을 잃는 병
  43. 젊은 미혼 여성이 사교장 따위의 모임에 나갈 때 따라다니며 시중을 드는 들러리
  44. 일반적 현상을 넘어선 숨겨진 힘을 추구, 연구하는 일, 점성술, 강령술 등
  45. 피부 결핵의 일종. 보통 코와 귀 부근에 갈색의 결절이 생기는 것이 특징이다.
  46. Koch (1843~1910): 독일의 세균학자로 1905년 노벨 생리, 의학상 수상
  47. 영국의 가톨릭 수필가, 비평가, 소설가 (1874~1936)
  48. 교구 행정에 있어 주교를 보좌하기 위해 주교 직무 대행을 수임한 사제
  49. 정서가 혼란하여 불안감, 강박 관념, 강제 행동과 객관적 증상을 수반하지 않는 육체적 부조화가 여러 가지 모양으로 성격을 좌우하는 증상
  50. 이상 성욕의 하나. 어린아이를 성적 욕구의 대상으로 하는 성도착
  51. 동요집 <마더 구스 Mother Goose’s Melodies>에 등장하는 달걀 모양의 인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2편인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 등장함. 이 세상의 모든 시를 다 안다고 장담하다가 앉아 있던 담장에서 떨어져 박살이 난다.
  52. 가사나 음향이 환각제(LSD)의 영향을 연상하게 할 만한 황홀한 로큰롤 음악
  53. 스쿠르테이프 Screw tape는 마귀의 보좌관으로 인간의 영혼을 미혹하는 하급 마귀인 조카 웜우드에게 편지로 인간의 영혼을 철저히 파멸시키라는 31가지 지령을 전달한다는 내용의 소설
  54. 전체로서 본 우주 <-> 소우주(microcosm)
  55. 우주는 대폭발에 의하여 생겨났다는 빅뱅 이론. 이 대폭발에서 모든 물질, 에너지, 우주 공간과 시간이 창조되었다고 주장함.
  56. Carl Gustav Jung(1875~1961): 스위스의 정신병 학자, 심리학자
  57. 신앙 또는 그리스도교의 삶을 가리킴
September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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