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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날에 저녁이 오듯이

지은이 – 홍윤숙(洪允淑)

 

 

여류문인 홍윤숙 여사

여류문인 홍윤숙 여사, 1970년 대

 

책 머리에

이것으로 여덟 번째 산문집이 되는 셈이다. 앞으로 또 한 권을 묶을 수 있을는지 아니면 이것이 마지막 책이 될지 예측할 수 없다. 하느님의 시간표를 누가 감히 엿볼 수 있을까. 생각하면 짧은 여름 밤에 긴 꿈을 꾸다가 깬 것 같은 지난 일생, 이만큼 살았으니 감사할밖에 없다. 그러나 한편 숱한 짐을 지고 걸어왔지만 막상 그 짐을 내려놓고 보니 쓸모 없는 허섭스레기들뿐 아무것도 건질 것이 없는 허망감에 가슴 시리다. 그뿐인가 마음은 아직도 철없이 햇빛과 구름과 푸른 초원, 초원의 작은 풀꽃들의 아름다움에 매여 놓여나지 못하고 있으니 일생의 결말을 위해 어른스럽게 마무리 짓는다는 것은 아무래도 가망 없는 일일 것만 같다. 아니 처음부터 시작도 끝도 하느님 뜻에 달려 있는 일, 오직 맡겨진 일생의 과정을 얼마나 열심히 살아냈는가 하는 것만이 나의 몫이다. 솔직히 말하여 이제 나는 떠날 준비를 하며 이 글을 묶고 있다. 그렇다고 고별의 의지가 서 있는 것도 물론 아니다. 다만 살아온 한 생애 동안 나는 많은 것을 알았고 느끼고 배웠다. 인생이 무엇인가를 겨우 깨달을 만하여 이제부터는 시행착오 없이 제대로 잘 살 것 같다고 생각한 순간 이미 종점에 닿아버리고 말았다. 이제 무엇을 더 어떻게 할 것인가. 길은 하나뿐 그저 마지막 시간까지 가던 길을 열심히 가는 일밖에는 별다른 길이 없다. 긴 말 줄이고 여기 한 편의 졸시로 서문을 대신하고자 한다.

 

인생은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습니다.
험한 산 깊은 계곡 우거진 수풀 지나는 법 별 하나 사랑하고 기다리고 끝내 이별하는 지혜를 다리를 놓아야 강을 건너고 비를 맞아야 무지개를 보는 것도 알았습니다.
가는 목 휘청이며 땅으로 낮게 낮게 질경이로 퍼져서 밟히고 다져지는 법도 배우고 무거운 마음의 진흙더미 털어내고 모습 없이 가벼운 바람이 되는 무소유의 자유도 일러주었습니다.
이제 그가 전해줄 마지막 말은 어두운 밤길 등불 없이 산을 넘어 어느 날 예고 없이 세상 끝에 닿는 일 그 마지막 가르침을 듣기 위해 나는 날마다 하늘로 귀 열어놓고 그슬린 창들을 닦습니다.
세상의 매운 연기 아직도 자욱해 닦으면 끄슬리고 끄슬리면 다시 닦고 그 한 가지 일에 온 날을 지샙니다.
슬프지도 않은 눈물 가끔 옷깃을 적시며

 

 

 해질녘의 대화

모든 날에 저녁이 오듯이 삶에도 저녁이 온다. 새는 날고 물고기는 헤엄 치고 해는 쉬지 않고 동쪽에서 서쪽으로 움직여 간다. 그처럼 사람도 일하기 위해 세상에 태어났다.일은 인간의 자연적 요구이며 일하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다. 일을 인간의 자연적 요구이며 일하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다. 일을 통하여 인간은 자기를 완성하고 실현하고 표현하며 나아가 세계 완성의 한몫을 담당한다고 믿는다.

“야훼 하느님께서 아담을 데려다가 에덴에 있는 이 동산을 돌보게 하시며” 라고 했듯이 일은 인간에게 주어진 의무이며 책임이다. 먹고 살기 위한 밥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밥 이상의 무엇이 일 가운데는 있다. 단순히 하루 세 끼의 밥 때문이라면 사람은 그다지 일하지 않고 고생하지 않아도 된다.

밥 이상의 것, 배고픔 이상의 것, 마음고픔. 그렇다, 그 마음고픔 때문에 인간은 잠자는 시간까지도 일에 골몰한다. 생각하면 나 또한 그 뿌리 깊고 질긴 마음고픔 때문에 이리 하찮고 부질없는 일에 한 생애를 탕진했다.

후회는 없지만 큰 보람도 없다. 그러나 이 일이 아니었다면 어찌되었을까 하는 생각에 그나마 주어진 역할에 감사한다. 이제 두려운 것은 이런 일이나마 내가 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남아 있을까 하는 불안감이다. 모든 날에 저녁이 오듯이 나의 삶에도 저녁이 오고 있다.

머지않은 겨울-죽음–을 바라보면서 이 가을이 주는 무겁고 짙은 우수에 나는 한없이 가라앉는다. 지난 시절 젊은 날에 느끼던 이 계절의 우수는 차라리 감미로웠다. 거기엔 무명솜처럼 보드랍고 따뜻한 질감이 있었다. 지금, 나를 감싸고 있는 이 두껍고 무거운 우수는 때로 융단처럼 숨막히고 때로 삼베처럼 살을 시리게도 한다.

노쇠도 죽음도 정중하게 받아들여야 사람은 혼자서 태어나 혼자서 죽어간다는 사실을 관념적으로는 누구나 알고 있다. 젊었을 때는 가끔 호기심처럼 나는 몇 년쯤 살 수 있을까,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죽을까 하는 따위를 감상적으로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나이를 먹고 노쇠의 여러 가지 징후를 실감하면서부터는 그렇게 말대로 죽음의 무게를 아름답게 견디어낸다는 일이 쉽지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의연해라, 게으르지 마라, 추하지 마라, 아름다워라, 스스로 마음의 채찍을 들고 등을 치지만 생각은 머리에서만 맴돌고 몸은 부서질 듯 기진하여 쓰러지고 만다. 그러면서 이렇게 한 시대가 끝난다는 적막한 감회의 한끝에서 다른 하나의 생각이 나를 일깨운다. ‘끝났다고 생각하는 그때가 바로 시작이다.’ 하는 말, 하여 나는 지금 인생의 마지막 전환기, 새로운 시작 앞에 서 있다는 다짐을 스스로 해본다.

그렇게라도 무너지는 자신을 일으켜 세워야 한다. 에덴을 돌보고 지키게 하신 내 창조주의 뜻에 따라 주어진 일을 해야 한다. 그리고 돌아가는 날 그분께 보고해야 한다. 세상에서 내가 한 일을, 나에게 맡기셨던 그 일에 얼마나 충실했던가 또는 게을렀던가를… 생각하면 내 생명은 내 것이면서도 내 것이 아니다. 고작 70년 아니면 80년 그분께 빌려서 살고 있는 것이다.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내가 가야 할 날도 나 스스로 알지 못한다. 건강도 질병도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젊었을 때엔 눈도 잘 보이고 귀도 밝고 이도 튼튼해서 무엇이든 먹을 수 있었고 몇 시간씩 걸어도 다리 아픈 줄을 몰랐었다. 그 모든 것들을 당연히 내 힘으로 하는 내 능력이라고 믿고 있었다. 건강도 시력도 청력도 모두가 자기의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았었다. 그러나 이제 그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라 그분으로부터 잠시 빌려 가지고 있던 것들임을, 그리고 그것들을 이제는 하나씩 주인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사실을, 돌려주고 이윽고 태어나기 이전의 무의 상태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생각하며 잠이 깬 듯 소스라치는 것이다.

내 주위의 모든 것들, 사랑하는 사람도 애완동물 하나도 화초 한 그루도 내 것이 아니다. 모두가 해 있을 동안에 누군가로부터 빌려 받아 잠시 나와 함께 머물러 있었던 것뿐인데, 젊어서는 그 모든 것을 내 것이라고 생각한 탓에 자신의 뜻과 어긋날 때엔 잃어버리고 빼앗긴다고 생각하며 미워하고 원망하고 슬퍼했었다.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원래 내 것이 아니고,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주인에게 돌려줘야 할 것임을 진실로 알지 못하였었다. 어찌할 것인가, 이 깊고 가슴 저린 가을날을.

옛날엔 참고 견디는 것만이 유일한 길이고 슬기로운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그것은 그렇게 깊고 가슴 저리게 지나가는 가을날도 내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가을이 실어오는 힘든 삶의 짐들을, 고독을 입술을 깨물면서 참고 견디기에 살이 내렸었다. 그러나 이 좋은 가을날도 내 것이 아니라면, 다만 내 앞을 잠시 지나가는 그 누군가의 발자국이라면, 나는 융숭히 그를 맞이하고 받아들여 잠시 내 곁에 머물게 하고 그리고 지체 없이 떠나 보내야 한다. 눈물 보이지 말고 허둥거리지 않으며 담담히 그리고 정중히 머리 숙여 보내야 한다.

이 가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내가 내 의자에 앉아 있는 일이다. 두어 번 우편함을 들여다보고 텅 빈 병원의 복도를 돌아가듯 잠잠히 내 안으로 돌아가는 일이다. 누군가 나날이 지구를 떡잎으로 말리고 곳곳에 크고 작은 방화를 지르고 하얗게 삭은 해의 뼈들을 공지마다 가득히 실어다 버리건만 나는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지 못한다. 나뭇잎 한 장도 머무르게 할 수 없다.

내가 이 가을에 할 수 있는 일은 내가 내 의자에 앉아 정오의 태양을 작별하고 조용히 하오를 기다리는 일이다. 정중히 겨울의 예방을 맞이하는 일이다. 그렇다. 나는 그저 겸손하고 정중하게 겨울을 맞이하여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거부할 수 없는 것 앞에 추하게 앙탈하고 탄식하며 어리석지 말아야 한다. 결국 노쇠도 죽음도 고독도 그리고 최종적으로 인생 그 자체도 거부할 수 없이 주는 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고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 나이에 와서야 나는 관념이 아닌 실제로 실감하는 것이다.

받아들인다 함은 누군가로부터 주어진 것을 순순히 받아 겸손하게 간직하고 순명 한다는 뜻이다. 하여 나는 내 앞에 닥쳐오는 고통 앞에서 생각한다. 이는 네가 원해서 택한 것이 아니라 그 누군가에 의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 주어진 것이니 때가 오면 반드시 네게서 걷어갈 것이고 그러면 너는 다시 편안하고 자유로워질 것이다. 그때까지 소리치지 말고 엄살하지 말고 지긋이 받아 안고 등 쓰다듬으며 불쌍히 여기라고.

그리고 기쁨 앞에서도 또한 나는 생각한다. 이 기쁨 또한 네가 원해서 너 스스로의 힘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그 누군가에 의해 그만한 이유가 있어 잠시 너에게 주어진 것일 뿐 언젠가는 다시 걷어 갈 것이니 너무 그 기쁨에 탐닉하지 말라고, 하여 기쁨이 사라진 뒤에 올 적막함에 대비해 들뜨지 말고 담담 하라고. 결국 나는 그 어떤 고통에도 다치지 않고 기쁨에도 동하지 않으며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것은 내가 생각하는 한의 가장 강한 삶의 방법이다. 슬픔에 다치지 않고 기쁨에 가벼워지지 않는 이끼처럼 질기고 강한 삶의 방법이다.

그러기 위해 나는 내 안에 나를 지탱해주고 지켜줄 힘 하나를 지녀야 한다. 언제든 내가 그것을 붙잡고 일어설 수 있고 매달릴 수 있는 것, 나의 방패, 나의 요새 하나를 지녀야 한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어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어느 누가 자기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그에게 돌을 주겠습니까? 또는 생선을 청하는데 그에게 뱀을 주겠습니까? 그러니 여러분은 악하면서도 여러분의 자녀들에게는 좋은 선물을 줄 줄 안다면,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께서야 당신에게 청하는 이들에게 얼마나 후하게 좋은 것들을 주시겠습니까!”(마태7,8-11)라고 하신 그분의 힘을. “하늘의 새들을 눈여겨보시오. 그것들은 씨를 뿌리지도 않고 추수하지도 않을 뿐더러 곳간에 모아 들이지도 않습니다. 여러분은 그것들보다 더 귀하지 않습니까?… 들의 백합꽃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관찰해보시오. 그것들은 수고하지도 않고 물레질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말하거니와, 그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그것들 가운데 하나만큼 차려 입지 못했습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이면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도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든 여러분이야”(마태6,26-30)하신 그분의 사랑을 나는 내 마음의 지주로 삼아야 한다.

그 힘, 그 사랑 없이는 나는 바람에 날리는 겨처럼 고통에 무너지고 허망한 생의 상실감에 마음 걷잡지 못할 것이다. 어차피 삶은 두 개의 골짜기에 걸린 가늘고 덧없는 외줄다리다. 한쪽 골짜기에서 기어 올라와 건너편 골짜기 죽음으로 떨어져 갈 한마당 짧은 다리 건너기 다. 해 있을 동안의 남은 다리 건너기에 성심성의를 다하는 것, 그 길만이 빌린 목숨의 빚을 갚는 우리의 의무이며 책임이다.

 

 

지친 이가 지친 이들에게 보내는 편지

우리말에 개미 쳇바퀴 돌 듯이라는 말이 있다. 꼭 같은 일, 변화 없는 일을 되풀이하여 반복한다는 뜻으로 지루하고 답답하고 암담함을 내포하는 말이다. 살아도 살아도 벗어날 수 없는 가난, 해도 해도 끝이 안 나는 일, 성과 없는 결과, 앞이 보이지 않고 희망도 없을 때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삶에 지치고 좌절감에 빠진다. 그러나 생각하면 그 개미 쳇바퀴 돌듯 하는 삶일지라도 거기 돌발적인 불행만 없다면 그래도 행복하고 다행한 일이다. 무사 안온하고 가족들 건강하며 아침, 저녁 얼굴을 볼 수만 있다면 그나마 복된 삶이라 하겠다.

우리 주변엔 그렇게 평화롭게 사는 사람도 많지만 불행에 직면한 사람도 얼마든지 있다. 딸 하나를 키워 출가시키고 허망에 빠진 어머니도 있고 아들 하나를 외국으로 보내놓고 주야로 울먹이는 어머니도 보았다. 그래도 살아 있음은 다행한 일이다. 20여 년 귀하게 길러 대학생이 된 아들을 산에서 추락사로 잃어버린 어머니를 나는 알고 있다. 열심히 파출부로 나가 근근이 벌어서 아들을 대학까지 넣은 그녀에게 아들은 삶의 전부였다. 남편도 없는 홀어미로서 아들마저 잃어버린 그녀는 한때 아들을 따라 죽을 생각까지도 했었다.

“지쳤다든가 슬프다든가 생각할 때는 아직 마음의 여유가 있을 때입니다. 정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이나 절망 앞에선 어떠한 생각도 말도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저 죽고만 싶었습니다.” 띄엄띄엄 술회하던 그녀의 말이 잊혀지지 않는다. 사실 마음속에서 이것은 시련이라든가 나는 지쳤다 라든가 생각할 수 있음은 그만큼 마음의 여유가 아직 있을 때인지도 모른다. 그 충격과 절망에서 얼마만큼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그녀는 시련의 의미를 생각하게 되었고 다시 살아갈 보람을 찾게 되었다. 그녀는 어느 고아원에서 고아들을 보살피는 일에 자신의 삶을 바치기로 결심했다고 들었다.

이같이 극단적인 사례가 아니고도 우리는 살아가면서 몇 번씩 벽에 부딪쳐 더는 일어설 힘조차 없을 만큼 기진맥진해버리는 일이 적지 않다. 열심히 살면 살수록 그리고 진실하게 살면 살수록 그런 벽에 부딪치는 강도도 크고 그때마다 느끼는 만신창이의 절망감도 크다. 따지고 보면 의식주 해결되고 별로 부족함이 없이 이른바 세속적인 행복의 조건을 갖춘 사람 가운데서도 그러한 삶에 대한 위기는 예외가 아니다.

앞서도 말했듯이 적당히 인생을 헤엄치듯 요령과 술수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닌 이상, 적어도 자기 삶에 책임을 지고 이마에 땀 흘리며 열심히 사는 이상엔 가다가 벽에 부딪치기도 하고 삶에 지쳐 주저앉을 때도 있게 마련이다. 열심히 뛴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피곤하고 헐떡거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산을 올라갔다 내려온 사람은 편안히 산 아래서 쉬고 있던 사람보다 다리가 아프게 마련이다. 요컨대 지친다는 것, 삶의 막다른 골목에 부딪쳐 지쳐 쓰려진다는 것은 그만큼 남보다 열심히 살았다는 증거이며 그렇게 열심히 살았건만 그 성과나 대가가 너무 적고 눈에 보이지 않는 데서 오는 허탈이며 좌절감일 것이다. 솔직히 말하여 나는 이러한 삶의 핍진(乏盡), 허탈, 좌절감을 수도 없이 겪으며 살아왔다.

지금도 나의 속 구석구석 숨어 있는 깊이 모를 허망 감이 잠시 한눈만 팔아도 나를 압도하고 쓰러뜨리고 만다. 더욱이 나이를 먹으면서 체험하는 이 막막한 위기감은 그대로 깊은 허망 감과 맞물려 끝도 모를 나락으로 끌고 간다. 특별한 병명도 없이 야금야금 좀먹어 들어가는 건강, 심신의 핍진, 아침이 되어도 자리를 털고 일어나 설 수 없는 무력감, 한번 누우면 그대로 나락으로 떨어져 내리는 듯한 탈진 감… 별수 없이 내가 지쳤구나 하는 것을 가슴 떨리게 느낀다.

이렇게 끝나가는가 생각하면 무서워지기도 한다. 인간의 고독 중에 가장 큰 것은 노쇠와 죽음이다. 나는 바로 그 노쇠와 죽음을 관념이 아닌 실체로 느끼고 생각해야 할 나이에 이르렀다. 내 앞의 아이들은 다 떠나서 내 손이 필요 없이 나를 잊어버리고 살 만큼 자신들의 삶에 골몰하고 있다. 나는 누구를 위해서 따뜻한 식탁을 준비하고 내의를 챙겨야 할 일도 없다.

저녁이 와도 대문을 열어놓고 기다릴 사람도 없고, 나갔다 들어와도 방문을 열고 반기는 사람 하나 없다. 이 집안에 차 있는 것은 죽음 같은 고요와 적막뿐이다. 나는 그 적막과 고독 속에 조금씩 말라가는 은화식물처럼 잎이 마르고 뿌리가 말라간다. 식욕부진, 소화불량, 불면증에 시달리며 인생의 마지막 고개를 응시하고 있다. 지쳐 허덕이는, 쓰러질 듯 가라앉은 자신의 황폐한 모습을 지켜본다. 글 한 줄 써지지 않는 무력감으로 넘어져 있는 핍진 한 영혼의 둥우리를 들여다본다.

이대로 무너질 것인가, 이렇게 끝나는 것일까, 암담한 나락 끝에서 안간힘 쓰는 나는 그러나 다음 순간 가슴 밑바닥에서 울려오는 하나의 목소리를 듣는다. ‘바보야, 일어나라. 이렇게 쓰러질 수는 없다. 자신을 구하는 건 오직 자신뿐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비슷한 좌절을 딛고 살아가는 것, 너만이라고 엄살 부리지 마, 응석 부리지마.’ 순간 나는 놀란다. 정녕 나는 누군가에게 응석을 부리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내 응석을 받아줄 아무도 없다. 그렇다면 나는 나 자신에게 응석을 부리고 엄살을 떠는 것이다.

결국은 스스로 다시 일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 그렇게나마 마음의 비명을 질러보는 것이다. 기진맥진한 나를 나 자신에게 던져 버리는 것이다. 포기는 응석이다. 나는 내 마음 안의 응석-포기하려는 무기력과 싸워야 한다. ‘자기와의 싸움’,이 세상에서 가장 크고 힘든 싸움은 바로 자기와의 싸움이다. 자신 안에 좀먹는 일체의 무기력, 허망, 나태, 좌절감 그 모든 내부의 병과의 싸움이다.

스물세 살에 열병을 앓고 청각을 잃은 여인이 있다. 그녀는 가르치던 교단을 떠나야 했고 몇 해 후엔 사랑하던 남편이 자식을 데리고 떠나버렸다. 죽음 그대로의 배신과 절망과 좌절 속에서 그녀에게 남은 것은 오직 하나 ‘자신과의 싸움’뿐이었다. 사느냐 죽느냐의 기로에서 치러낸 그녀의 눈물겨운 싸움은 마침내 하느님께 귀의하고 다시 일어서는 힘을 얻었다.’그대 피어라 하시기에’필 수밖에 없는 하느님의 깊은 뜻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고, 그래서 몸으로 우는 사과나무, 그대 피어라 하시기에 등 주옥 같은 수필집을 펴내기에 이르렀다.

그녀는 자기 내부의 어떠한 응석과도 타협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이 바로 시작이다.’라고 한다. 그녀에게 모든 것은 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끝이 새로운 시작을 마련한 것이다. 내가 지금 겪는 이 죽음 같은 심신의 탈진과 허망감도 내 인생의 한 고비를 마무리하는 끝이다. 그리고 그 끝은 새로운 시작을 촉구하는 하나의 시금석이 될 것이다. 나는 이 시금석으로 삶의 걸림돌을 딛고 넘어야 한다. “모든 시련은 하느님의 사랑의 얼굴이다.”라고 했듯이 생의 그 같은 걸림돌을 우리에게 더 큰 삶의 의미, 삶의 깊이를 알게 하시기 위한 하느님 사랑의 계획이신지도 모른다.

그 위험 신호 앞에서 잠시 자신을 돌아보며 새 힘을 기르도록 타이르시는 무언의 말씀인지도 모른다. 무거운 짐 당신께 맡기고 그 샘물 가에 잊었던 물맛 다시 맛보게 하시려는 사랑의 큰 뜻. 인간이 자신의 병을 혼자서 고치려 함은 잘못이다. 신체의 병에 의사가 필요하듯이 정신의 병에도 자신을 던져 믿고 의지할 의지처가 필요하다. 하여 나는 날마다 내 하느님께 매달려 이 허망과 좌절로부터 나를 구하소서, 새로운 시작을 마련할 힘 주소서 빌고 청한다. 지친 삶을 위한 약을 그밖에 나는 알지 못한다. 나 자신에게 타이르는 자기와의 싸움과 하느님께 매달리는 길 이외엔.

 

우물이 깊으면 수량도 풍부하다

급행열차로 서둘러 달려온 서쪽 베타니아 마을에선 때마침 짧은 겨울 해가 지고 있었다. …중략… 급행열차로 서둘러 달려와도 그 마을의 일몰엔 변함이 없고 다만 천천히 걸어온 이보다 쓸쓸한 일몰의 시간이 좀 길 뿐이다.(졸작”급행열차로”에서) 또 한 해를 헐떡이며 숨차게, 마치 급행열차로 달려온 것 같은 나날이다. 그렇게 달려온 저녁 마을엔 낯선 찬바람과 어둠이 줄지어 늘어서 지친 나그네의 마음을 더욱 쓸쓸하게 하고, 문득 발을 멈추고 돌아다보면 무수히 지나온 이름 모를 간이역들이 노을 속에 아름답게 떠오른다. 그곳은 해바라기, 달리아 등 원색의 꽃들이 눈부시게 피어 있던, 그러나 내릴 수 없었던 미지의 땅들이다. 그 내려보지 못한 미지의 지나쳐온 간이역들에 어쩌면 정작 내가 원하던, 해바라기, 달리아 같은 기쁨과 행복이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나는 급행열차를 타고 너무도 서둘러 바삐 달려왔기 때문에 정작 귀중한 것들을 잃어버리고 온 것은 아닐까. 그런 상실감에 잠기는 것도 바로 이 계절이다.

사람의 일생이란 한 가닥 외길이어서 날마다, 싫어도 앞으로만 가야 하게 되어 있고 다시 뒤돌아서 갈 수 없는 길이다. 우리는 그 길을 지나쳐놓고서야 아, 그때 그 일을 왜 하지 않았던가, 또는 왜 그런 짓을 했을까 하고 뉘우쳐보지만 소용이 없다. 인생이란 결코, 뒤돌아서 놓친 꽃을 다시 꺾으러 갈 수 있는 소풍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두 갈래 길이 내 앞에 있었다. 그 중 한 길을 나는 걸어갔고 나머지 한 길, 걸어보지 못한 길이 내 마음속에 아쉽게 남아 있다.” 는 누군가의 시도 있지만 한 번밖에 없는 삶이기에 우리는 지상의 모든 길을 남김없이 걸어보고 싶은, 후회 없는 삶을 살고 싶은 것인지 모른다. 생각하면 나의 인생은 이미 끝나가고 있다. 이제 나는 내 가족, 친지, 이웃들에게 무엇을 남기고 갈 수 있을까. 어떤 모습 어떤 추억을 그들의 기억 속에 그리게 할 수 있을까. 되도록 깨끗하고 기품 있고 따뜻한 추억으로 남아 있고 싶다는 생각을 나는 언제부터인가 하고 있다.

이제 내가 쓰는 원고지 한 장이라도 더 깨끗하게 더 정성 들여 써야 하고, 남에게 건네는 말 한마디에도 더 깊이 더 진실하게 닿을 수 있도록 생각하고 말을 고르리라. 결코 추하지 말고 의연해라, 외롭더라도 입으로 외로움을 말하지 말고 속으로 혼자 다스려라, 오는 이는 반가이 맞이하고 가는 이는 미련 두지 말고 잊어버려라, 세상사에 애착을 두지 말고 물질에 욕심 내지 말고 정에 집착하지 말고 남의 소문에 관심 두지 말고 초연해라, 담담해라, 너그러워라. 이렇게 자신에게 타이르고 타이르지만 역시 그것이 마음대로 되지 않고 자주 실수를 반복하며 후회를 남긴다. 다만 그런 마음가짐이라도 날마다 잊지 않고 자신에게 부과하고 있다는 작은 결의 하나를 소중이 여길 뿐이다.

인간의 모습은 사람 ‘인’자가 보여주듯이 두 다리로 대지를 딛고서 있는 모습이지 결코 땅 위에 누웠거나 쓰러져 있는 모습이 아니다. 여성의 경우 특히 누구를 사랑하거나 결혼을 해버리면 그날부터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남자에게 의지하고 매달려버리는 것이 아닌지. 적어도 우리들 어머니 시대의 여성상은 그래왔던 것이다. 전적인 의뢰심과 기댐으로 남자에게 자신의 전 중량을 맡겨버렸었다.

그러나 그러한 중량이 상대방에게 얼마나 큰 부담인가를 생각하지 못하고 오직 그 길만이 부덕이고 여성의 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때문에 그 부담에 못 견디어 싫증이 난 남편들이 잠시 받쳐주던 어깨를 슬쩍 빼기라도 하면 그 순간에 여성은 보기 흉하게 무너져 버리고 마는 것이다. 의지하고 기대며 전적으로 매달리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사실은 자신의 두 다리로 자신의 무게를 지탱하고 서 있는 긴장감과 의연함 속에 여성의 아름다움이 있는 것을 오늘의 여성들은 지혜롭게 터득하고 있는 것 같다.

존재로서의 자기를 확립하고 작으나마 독자적 세계를 가꾸어나가는 삶 가운데 그 사람만의 개성적 아름다움이 생겨날 것이다. 가령 갈색 양복을 입을 때 같은 색 계통의 머플러, 핸드백, 구두 등을 갖추어 차려 입는다. 그렇게 짙은 색 계통의 농담을 알맞게 배합하는 데 패션의 아름다운 조화가 있는 것을 대개는 알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외적으로는 세련된 감각을 보이면서도 정작 그 사람의 살아 있는 아름다움, 눈동자의 빛과 반짝이는 눈의 정기가 없다면 아마도 인형을 보듯 삭막할 것이다.

눈의 아름다움이란 아이섀도나 마스카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닦아서 우러나는 빛이니 그 사람이 지닌 인격과 개성의 표현이다. 하루아침에 화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랜 정신 연마의 소산이다. 결국 보석이나 치장은 여성을 근사하게 보이게 할지는 모르나 아름답게 만들지는 못한다. 사람을 아름답게 하는 것은 돈으로 살 수 없는 마음의 보석이라는 상식적인 말이 고금을 통한 진리인 것이다.

어떤 기회에 알게 된 성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한 신부님이 계시다. 그분은 지난해까지 큰 수도회의 원장으로 계셨으나 지금은 새로운 보직을 맡아 가신 곳이 경동시장 안에 있는 수도원 운영의 자선 무료식당이다. 말하자면 신부님은 식당의 주인인 셈이다. 말이 주인일 뿐 하루 150명씩 가난한 행려자들에게 손수 쌀을 씻고 밥을 지어 나르는 주방장인 것이다. 한 수도원의 원장으로 있을 때는 장으로서의 책임을 다하고, 이제 한 밥집의 일꾼이 되어서는 또 일꾼으로서의 모든 허드렛일을 맡아 최선을 다하며 사시는 그 신부님의 모습은 티 하나 없이 맑은 옥처럼 깨끗해 보였다.

속에서 우러나는 잔잔한 기품이 마치 성자를 보는 듯한 숙연함을 느끼게도 했다. 아, 이런 숨은 등불들이 있어 이 세계가 아직은 살아 있고 희망이 남아 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름다움이란 발로 그런 것, 외형이나 겉모습에 좌우되지 않고 내면에 간직한 꿋꿋한 신념에 의하여 어디서나 자신을 남김없이 바쳐가는 삶, 그런 삶에서 은은히 울려 나오는 인격의 향기이고 빛깔이구나 실감하기도 했다.

세상 사람들 같으면 한 수도원의 원장에서 시장 바닥의 밥집 주인으로 전락이 되었다면 좌천이다. 모욕이다, 법석을 떨 일일지 모른다. 아무리 수도자라 해도 인간이다. 깨끗하고 편하고 권위 있는 것이 나쁠 것은 없다. 다만 그런 가시적인 것에 삶의 가치를 두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 이 사회의 소금이 되고자 하는 드높은 정신이 그의 삶을 그처럼 아름답고 활기차게 만드는 것이리라.

언젠가 한국에 내한한 적이 있는 인도의 마더 데레사 수녀를 사진과 텔레비전 화면에서 보면서 나는 그 수녀님의 너무도 초라하고 주름진 모습에 놀랐었다. 그것은 이른바 우리가 말하는 여성적 미라는 개념과는 인연이 먼 처참할 만큼 늙고 상한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그녀가 인류의 가장 깊은 병, 천연두도 암도 아니면서 암처럼 무너져 가는 병, 거리에 버려진 수많은 병든 육신의 고독한 영혼을 어머니처럼 따뜻이 가슴에 버려진 수많은 병든 육신의 고독한 영혼을 어머니처럼 따뜻이 가슴에 품어 안아 희망을 주고 용기를 주어 눈감게 한 위대한 사랑의 아름다운 손을 지녔던 것이다. 태어나 단 한 번도 자신의 ‘존재의 축복’을 인정받지 못한 불쌍한 사람들, 이 세상에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 고독한 사람들이 마더 데레사의 손을 잡고 “감사합니다.”하고 눈물을 지으며 숨을 거둔다는 이야기, 그 짧은 감사의 말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목마름을 풀 수 있었던 기쁨의 표현이 아닐까 생각한다. 요컨대 앞서의 요한 신부나 마더 데레사 수녀는 우리가 상상도 못 할 깊고 무한량한 우물 같은 것을, 다른 말로 하면 사랑을 그 내부에 간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하여 그 깊은 우물에서 끊임없이 퍼 올리는 물로 자신은 물론 이웃까지 넉넉히 적셔줌으로써 그들을 대하는 모든 이들에게 살아가는 기쁨을 나누어주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 말하기를 현대는 ‘기쁨 지향’의 시대가 아니라 ‘즐거움 지향’의 시대라고 한다. 즐거움이란 자신의 쾌감, 쾌락을 중심으로 하는 데 비해 기쁨에는 무엇인가 타자에게 영향을 미치는 성질이 있는 것 같다. 가령 즐거움은 돈을 투자하면 얼마든지 살 수가 있다. 쇼핑, 외식, 낚시, 수영 등 모두가 즐거움의 대상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모두가 자본을 필요로 하며 자기 혼자의 낙으로 끝나고 만다. 그러나 기쁨은 아무런 자본 없이 혼자 마음속에서 싹터 나와 훈훈하게 이웃에게까지 미치는 힘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자기 마음속에서 빵의 누룩처럼 소리 없이 발효해서 부풀어 이윽고 빵이 되고, 그것을 나누어 주위의 사람에게 함께 먹게 하는 그런 힘이 있는 것이다.

참 기쁨이란 저 수도회의 요한 신부님이나 인도의 마더 데레사 수녀 님처럼 자신의 우물 안에서 퍼 올려 끊임없이 이웃을 적셔주는 그 같은 사랑의 삶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인지 모른다. 우리가 항용 말하는 마음의 기쁨이란, 고작 마르기 쉬운 얕은 샘에서 어쩌다 한 모금 퍼 올려 자신의 목도 못다 축이고 마는 빈약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하여 또 다른 기쁨을 찾아 헤매지만 대개는 얄팍한 즐거움 정도로 끝나 버리고 다시 목말라하는 어리석음을 어쩌지 못한다. 우물이 깊어야 수량이 풍부하다. 어떤 우물을 내 안에 파야 깊고 풍성한 우물이 될까. 다시 말하여 어떻게 살아야 마르지 않는 수량 같은 기쁨, 영속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을까.

이것이 나의 평생의 숙제이고 나의 삶의 목적이었다. 그러나 이 나이를 살고도 나는 아직 그 해답을 얻지 못하였다. 말로는 비단같이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깊은 우물 같은 삶이란 이런저런 것이라고… 문제는 행동으로 옮기는 실천이 뒤따르지 않는 것이다. 앞서 말한 요한 신부나 마더 데레사 수녀의 삶은 누구나 흉내 낼 수 있는 삶이 아니다. 특별한 소명을 받은 이들의 특별한 삶이다. 결국 그 밖의 범속한 인간들은 범속한 삶 가운데, 지극히 범속한 작은 기쁨의 조각들로 잠시 목 축이다 다시 새로운 목마름에 시달리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렇게 체념하며 살아왔다. 굳이 내가 나 자신을 위로한다면 그나마 피상적이고 감각적인 ‘즐거움 지향’의 삶에서 되도록 ‘기쁨 지향’의 삶을 살아보려고 애써 왔다고나 말할 수 있을까. 비근한 이야기로, 쓴다는 일 하나도 단순한 즐거움 때문이라면 결코 할 짓이 아니다. 그렇게 고통이 따르기 때문이다. 정신에 충일하는 기쁨을 얻고 싶기에 그 고통들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이지. 그러나 그런 것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마음의 공허를 평생 앓으며 살아왔다. 진실로 이제라도 사람이라 여인에게 하신 예수의 말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마시고 싶다. 아니 그런 우물 하나 내 안에 파고 싶다. 내 안에서 넘쳐 나와 이웃에게까지 나눌 수 있는 우물을. 그런 기적 같은 힘이 주어지기를 기도한다.

 

아직도 내 뜰에 모란은 피지 않고

삼월, 사월, 그리고 오월을 봄이라 했다. 그러나… 그 다음을 그는 말하지 않았다. 그저 덤덤히 먼산을 바라보며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나도 그 다음을 굳이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묻지 않아도 그 단 두 구절의 말에 너무도 많은 의미, 많은 아픔이 숨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 봄에 기어이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것이다. 오랜 병상에 있었지만 그래도 행여 하고 조바심 치던 아내를 끝내 ‘진달래 꽃 비 오는 서역 삼 만리 올 수 없는’나라로 떠나 보낸 것이다. 어쩌다 서두부터 이렇게 어둡고 슬픈 이야기가 시작되었을까. 바로 어제 나는 그 집에 문상을 갔었고 그저께 한식 날은 어머니 산소에 성묘를 갔었다. 한 이틀 죽음과 인접해 있다 보니 글조차 이리 어두 어지나 보다.

비좁은 한 뼘 뜰에 비비대며 얽혀서 쏟아져 나오던 진달래, 개나리도 끝물로 접어들고 목련도 어느덧 생기를 잃어간다. 그러고 보니 저 꽃들이 제 모습을 있는 대로 자랑하며 피어 있는 시간이란 고작 보름에서 스무날이다. 앵두 꽃은 겨우 사흘을 절정으로 하얗게 피었다 스러지기 시작한다. 참으로 그 짧은 개화를 위해 꽃들은 한 해를 기다리는 것이다. 한 해를 기다려 불과 며칠을 불사르고 다시 삼백육십 일을 뿌리로 어둠으로 돌아가야 한다. 허망하다든가 아쉽다든가 그런 생각도 이젠 별로 들지 않는다. 그저 아연할 뿐이다. 눈 한번 감았다 떠보면 세상이 달라져 있는 데에 놀라울 뿐이다. 보이지 않는 시간의 무성한 놀이에 그저 아연할 뿐이다.

긴 겨울 동안 그처럼 봄을 기다리고 기다렸음에도 그 봄을 봄 다이 제대로 느끼고 음미할 사이도 없이 매번 놓치고 지내버리는 것은 바로 저 봄의 너무도 빠른 변화, 빠른 걸음새 때문이다. 이 봄도 그렇게 나는 저만치 비켜서서 꽃잎 한 장 제대로 만져보지도 못하고 지나가고 있다. 날마다 부질없는 일에 쫓겨 뛰어다니고 있다. 그렇게 하루 해를 써버리고 돌아와 보니 먼 외지에 나가 있는 딸에게서 편지가 와 있었다. 눈물엔 면역도 없는지 울컥 가슴부터 메었다. 집 떠난 지 14년, 어느덧 30 중반에 접어든 그 아이도 이젠 중년의 나이다. 그럼에도 편지 속의 딸은 아직도 열 몇 살의 소녀로 내게 와 울먹인다.

“엄마, 그 뒤뜰의 목련나무 올해도 만발해서 창을 덮었겠지…” 그렇구나, 그 목련나무 꽃핀 것도 나는 제대로 보지 못했구나. 비로소 생각이 나서 뒤뜰에 나서보니 꽃은 어느새 시들시들 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언제였던가. 그 딸이 여고 2학년 때였던가 보다. 심한 봄 감기로 며칠을 앓아 누웠던 아이가 어느 날 창 밖에 한참 만발한 목련을 바라보다가 불쑥 이런 말을 했다. “엄마, 목련 꽃을 보고 있으면 꼭 장송곡이 들리는 것만 같다.” 나는 그때 “애고, 이상스럽게 왜 하필 장송곡이냐!” 하고 핀잔을 주었지만 이상한 전율로 가슴이 섬짓한 것을 느꼈었다. 그렇게 몸도 마음도 허약하던 아이는 대학을 나오자 스스로 집을 떠나 유학을 택했고, 이제 중년이 되어 그곳에 정착하여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내 마음엔 늘 보이지 않는 봇물 하나 터진 듯 그립고 안타까운 정, 병처럼 앓고 있다. 목련 꽃은 어느덧 내 마음속에서도 한과 정과 죽음으로 못박혀 갔다. 몸서리쳐지도록 요사한 흰빛은 그대로 온갖 정 한으로 엉키고 엉켜 차라리 돌처럼 화석(화)해 버린 영상 같기만 하고 그 탐스러운 꽃송이들 속에선 이를 데 없이 슬픈 곡성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하여 이렇게 나는 목련 꽃을 그리지 않을 수 없었다.

꽃인가 하고 보면 자욱한 구름이고 구름인가 다시 보면 흰 나비떼 앞산 뒷산 흔드는 소리 없는 요령소리 댕댕 울리며 사월의 하는 가득 메운 상여꾼 간다. 어느 지체 높은 청상과부 소복단장하고 한겨울 빈 마당 매섭게 수절하다 그 한 못다 풀어 이 봄에 미치는가 온 장안 마을 골목 하얗게 쏟아지는 낭자한 곡성 오늘도 부끄럽도록 무르익은 계절의 일광이 창 너머 뜰 메우고 있는데 밝을수록 어두운 창 이쪽에선 아직은 추운 겨울 강물이 흐르는 것만 같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하고 노래했던 옛 시인처럼 아직도 내 뜰에 모란이 필 날이 멀어서일까.

마음에까지 봄이 오기엔 멀고 아득하기만 하다. 그러나 기다리던 모란이 핀다 한들 그리고 그 옆의 작약이 또 핀다 한들 무슨 소용이랴. 결국은 작약도 지고 말 것을. 그리고 다시 삼백예순 날을 “하냥 섭섭해 울 것을.” 수십 년 반복해온 이 참담한 시간의 놀이에 나는 더 이상 견딜 기력이 없다. 나이 먹으면 감성도 무디어진다고 하던데 실제로 많은 부분에서 희로애락의 정도 엷어지고 희석되어버린 것 같은데 이상하게 계절의 변화, 시간의 무심한 놀이 앞에서만은 내 감성은 더욱 유리알처럼 예민해지고 허약해져서 감당하기가 힘들다. 생명 있는 것은 마침내 떨어진다는 사실 앞에서만은 내 감성은 잠들지 않고 시들지 않는다. 이윽고 나 또한 져야 하기 때문일까. 시멘트 바닥에 고인 마알간 물웅덩이를 문득 들여다보니 파란 하늘이 한 조각 떨어져 있다. 오, 그렇구나.

하느님도 이런 봄날엔 사람의 마을이 그리워서 저같이 호젓한 물웅덩이에 내려와 누워 계시는구나. 다시 한 번 들여다보니 파란 하늘 조각 속에 또 하나 낯선 사람의 얼굴이 잠잠히 나를 쳐다보고 있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얼굴인데 도무지 알아볼 수 없으리만치 나이를 먹어버린 얼굴이다. 누굴까, 저 나이 먹은 여자의 얼굴은. 섬짓하여 돌아서는 나의 등뒤에서 누군가 나를 부르고 있다. 돌아보니 그쪽은 더욱 가물가물 알아볼 수 없는 얼굴이다. 20년 전의, 20년 전의 나를 닮은 듯한 여자의 얼굴, 저것은 누구일까. 아니, 어디로 갔을까. 그 무성하던 푸른 날은, 내 스무 살은? 사람을 찾습니다. 나이는 스물 살 키는 중키 아직 태어나던 그대로의 분홍빛 무릎과 사슴의 눈 둥근 가슴 한아름 진달래 빛 사랑 해 한 소쿠리 머리에 이고 어느 날 말없이 집을 나갔습니다. 그리고 삼십 년 안개 속에 묘연 누구 보신 적 없습니까 이런 철부지 어쩌면 지금쯤 빈 소쿠리에 백발과 희한 이고 낯 설은 거리 어스름 장터 께를 헤매다 지쳐 잠들었을지도 연락바랍니다 다음 주소로 사서함 추억국 미아 보호소 현상금은 남은 생애 전부를 걸겠습니다.(졸작 “사람을 찾습니다”) 이렇게 애타게 찾아보지만 그날들은 결코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이윽고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지는 꽃을 바라보며

작약이 지고 인동초, 금은화가 지고 넝쿨장미가 지고 감 꽃이 지고 있다. 지는 꽃들을 바라보면서 쓸쓸하고 미안한 마음 그지없다. 나는 저들을 위해 한 바가지의 물을 준 적도 한줌의 거름을 뿌려준 일도 없다. 그렇건만 화목들은 뜰 한 구석 빈 자리를 지키며 저 혼자 혼신의 힘을 다하여 살아 있는 의무를 어김없이 수행하고 있다. 이윽고 때가 오니 모든 꽃들은 지체 없이 떨어지고 나무는 빛 바랜 푸른 색 일색으로 남아 다가올 삼복의 폭양과 가을의 조락을 견디어야 한다. 드리고 다시 얼어붙은 땅 밑에서 새 생명을 준비해야 하고.

꽃들의 짧은 생애를 바라보고 있으면 한 인간의 덧없는 생애가 미루어 짐작되어 불현듯 옛 시인의 시구처럼 ‘모란이 지고 나면 그만 나의 봄은 다 가고 하냥 쓸쓸해 울 수밖에 없는’ 심정이 되기도 한다. 나이 탓일까, 무엇을 보아도 쓸쓸하다. 꽃이 피는 것을 보아도 하염없고 지는 것을 보아도 적막하다. 동창이 밝으면 훤한 아침 빛이 가슴 시리고 일몰이 깃들면 짧았던 하루 해가 아쉬워서 도한 가슴에 바람이 분다. 거리를 흘러가는 군중의 얼굴들, 그 무표정하고 침울하고 지친 듯 힘없는 얼굴들이 나를 쓸쓸하게 하고, 무거운 가방을 메고 워크맨을 귀에 꽂고 공허한 눈으로 어두운 차창을 바라보고 섰는 청소년들의 축 처진 뒷모습이 나를 슬프게 한다. 현대 문명은 갖가지 생활의 편리함과 인간의 쓸쓸함을 잊게 하는 오락기구들을 가져다 주었고 인간의 수명을 몇 십 년 연장하는 기적도 만들었지만 그러나 한 가지 줄 수 없는 분야가 남아 있다.

그것은 ‘인생의 의미’,’인간의 행복’이다. 내 지갑 속에 지금 기십만 원의 돈이 있고 장 속에 새로 산 양복이 있다 한들 그것이 내 생명의 쓸쓸함과 허망함을 치유하지는 못한다. 하면 내가 최소한 쓸쓸함을 잊을 때는 언제인가. 떠난 가족들이 잠시나마 모여서 함께 있을 때, 마음이 통하는 이와의 만남, 나아가 나의 쓸쓸함을 나누어주고 위로 받을 수 있을 때, 결국 쓸쓸하다는 것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마음이다. 누구의 말이던가”쓸쓸함은 사랑하기 위해 주신 신의 선물”이라고. 그렇다. 사랑하기 위해, 사랑하고 또 사랑하기 위해 한없이 쓸쓸함은 솟아나는 것이다. 샘물처럼. 하여 나는 기다린다. 버스에서 지하철에서 기차에서 다방에서 내가 앉은 자리의 옆에 또는 앞에 나와 함께 앉을 사람을, 소매 한번 스치는 억겁의 인연. 그 신비를 기다린다. 사랑하기 위해서. 쓸쓸함을 위로 받기 위해서. 어쩌면 당신은 그렇게 기다렸음에도 당신의 앞 좌석이 비어있다고 탄식할지 모른다. 그러나 마음의 눈으로 보면 거기 “세상 끝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고 약속하신 동반자가 이미 그 빈 자리에 앉아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 것을 당신은 알리라. 그분은 잠시 다녀가는 가족이나 친구처럼 목마르지 않고 내가 원하는 한 나와 함께 영원히 같이 계실 분이시니, 진실로 그 마지막 동행자를 만나 사랑하기 위해서 그토록 깊은 쓸쓸함을 주셨던 것이다.

 

 백지와의 싸움, 그 고독한 놀이

 습관처럼 머리 밑에 백지와 볼펜을 놓고 자리에 든다. 그러나 아침에 일어날 때까지 백지도 볼펜도 간밤 놓였던 그 자리에 그대로 변동이 없다. 나는 다만 무슨 부적이나 수면제처럼 그것들을 하나의 타성으로 머리맡에 놓아둘 뿐 거의 손을 대지 못한다. 대어지지가 않는다. 주기적으로 몇 달씩 나를 강타하는 수렁 같은 무력감, 고질적인 무력증이다. 그렇게 몇 달을 보냈다. 보내면서 날마다 매시간 매 순간마다 기도했다. 다시 일어서기를, 일어서 걷기를, 죽음보다 두려운 무력감에서 벗어나 다시 날기를. 생각하면 이런 일이란 어제 오늘만의 일이 아니다. 지난 40여 년간 적어도 내가 내 삶의 현장에서 혼자 생각하는 갈대로 서기 시작한 이후로 줄곧 나를 침식해온 고질적이며 습관적인 병마다.

전처럼 조만간 나는 여기서 벗어나야 하고 벗어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왠지 두렵다. 어쩌면 영영 회복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예감 때문이다. 예감은 단순한 예감이 아닐는지도 모른다. 그만큼 나는 지금 극도로 정신적인 고갈, 육체적 핍진에 시달리고 있다. 두 다리가 잘린 듯한 실족 감, 허망 감에 빠져 있다. 고독한 자기 싸움, 무시로 덜미를 잡는 절망으로부터의 탈출, 돌아다보면 내 생애의 팔 할의 얼굴을 그 어두운 뿌리의 반란과의 싸움이었다. 어디 나뿐이랴. 모든 사람이 살아왔고 또 살아갈 것이다.

인간은 태어난 이상 고독하고 살아 있는 한 역시 고독하다. ‘생은 고해’라고 말하는 불교의 말이나 “인간은 이유 없이 태어나 까닭도 모르는 불행에 던져져 절망할-죽을-용기도 없이 목숨을 이어간다.”고 한 실존주의자들의 말이나 모두가 인간의 고독을 말해주고 있다. 은총과 구원의 종교인 기독교의 교리로 보아도 인간은 출발서부터 원죄라는 까닭 모를 고통을 숙명처럼 짊어진 고독한 존재다. 도시 은총이나 구원이니 하는 말부터가 인간의 고통, 비참, 고독을 전제로 한 말이 아닌가.

인간의 고독은 기독교적 교리에 의하면 신으로부터 분리 이탈되어 나옴으로써 비롯된다고 했다. 저 창세기 설화, 금단의 열매를 먹고 신을 배반한 인간이 어쩔 수 없이 신으로부터 분리되어 낙원에서 추방되고 그로부터 인간의 내부에 고독이 자리잡기 시작했다는 이야기. 그렇게 보면 고독은 신이 거주하던 자리, 신으로부터 떨어져 나옴으로써 비어 있는 공동이 된다. 하여 고독을 채울 수 있는 길은 세상의 물질이 아니라 오직 신에게로 돌아가 비어 있는 공동에 신을 모시고 일치 화해함으로써만 고독으로부터 구출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인간의 내부에 고독이란 공동을 남겨놓은 것도 어쩌면 신의 숨은 계획일지 모른다. 신을 배반한 인간이 언제든 신을 찾아서 돌아오도록 마련해둔 신의 섭리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명백한 논리도 나의 일상적 감성의 맹점 앞에선 무력하다. 다시 말하여 내 고독한 공동에 그분을 모시기엔 나의 믿음은 너무 허약하고 나의 갈망은 너무 세속적이다. 나는 좀더 고독의 뻘 속에 단련되어야 한다.

 

고독은 생명의 불이며 창조적 동력

흔히 사람들은 고독에 대하여 생각하기를 혼자이기 때문이라든가 마음이 비어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게 있어서 고독은 비어서도 혼자여서도 아니다. 인간의 내부에 타고 있는 생명의 불 때문이었다. 다시 말하여 살아 있기 때문이며 살아 있기에 겪어야 하는 갖가지 갈망, 곧 생명의 불 때문이었다.

고독은 다름 아닌 생명체의 본질이며 근원태다. 하여 생명의 불인 고독은 생명을 움직이는 힘, 동력이다. 인간의 생명을 타락 파멸도 시키고, 승화 발전도 시키는 불이다. 불이란 옳게 사용하면 약이 되고 잘못 사용하면 독이 된다. 성냥 한 개비로 온 곳간을 불살라 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인간의 가장 큰 고독은 노쇠와 구음이다. 하여 나이 먹은 사람은 자신의 노쇠와 죽음을 이기기 위해 운동으로 몸을 단련하고 보약으로 체력을 기르며 은행의 잔고를 불리느라 애쓴다. 인간이 태어나 결코 죽지 않는 존재라면 인간은 아무 일도 하지 않을 것이다. 언젠가는 노쇠하고 죽기 때문에 그 고독을 이기기 위해 끊임없이 움직이며 싸우는 것이다. 결국 고독은 존재의 병, 죽음에의 병인 동시에 그것을 이겨내기 위한 힘, 살아 있는 한 무엇인가를 이루고자 애쓰는 힘, 곧 창조적 동력이다. 모든 창조적 작업은 바로 인간의 고독한 음지에서 싹트는 꽃이다.

지난 수십 년 나를 움직여온 힘도 바로 내 안의 결핍감과 고독감이었다. 그 신산 한 고독의 불길이 나로 하여금 무슨 일엔가 열중하게 만들었고 열중하는 한 나는 내 안의 구멍 뚫린 결핍감을 메울 수 있었고 고독을 순화하고 다스릴 수 있었다. 순화하고 다스린다 함은 고독으로부터 도피하여 잊어버리는 일이 아니었다. 고독 속에 오히려 몸을 던져 친숙해지는 일이었다. 겸허하게 고독을 수용하고 고독과 화해하는 일이었다. 하여 나의 일은 바로 일차적으로 내가 안고 있는 숙명적인 병과 나아가 죽음이란 최대의 고독까지도 포함해서 고독과 친숙하고 그것을 자신의 분신으로 삼아 거느리고 나가는 일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같이 고독과 얼마간이라도 친숙해질 때 나의 삶은 오히려 밝고 평안해지며 이웃과 사물을 유심히 보게 되고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에도 따뜻한 눈길을 보내게 되던 것이다. 결국 고독의 참다운 인식은 모든 존재에 대하여 반항이 아니라 순명으로, 거부가 아니라 수용으로, 부정이 아니라 긍정으로 대응해야 하는 것임을 알 것도 같았다.

결코 완성할 수도 정복할 수도 없는…생텍쥐페리의 <바람과 모래와 별> 가운데 사랑에 대하여 이같이 말한 글이 있다. “아마도 사랑이란 진정한 당신 자신의 모습으로 당신이 스스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라고… 여기 ‘사랑’을 고독으로 바꾸어 생각해도 될 것 같다. 즉 ‘고독이란 나를 나 자신으로, 나의 본질, 나의 고유한 특성으로, 나의 원래의 진실함으로, 결국 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생명의 불’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거론하고 이제 이 나이에 이르러 생각하니 사람의 한 생애란 고독에서 출발하여 허망으로 끝나는 한마당 놀이에 불과한 것이다. 참으로 고통스러운 것은 그 고독이나 허망함이 몇 살쯤 되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한 목숨 있는 날까지 목덜미를 잡고 놓지 않는 일이다.

거울에 비친 물체의 모습처럼 자기 앞의 생을 거울에 비춰본다면 아마도 거기 자신의 생의 무게와 부피만한 고독과 허망이 떠오를 것이다. 생의 그림자는 고독이다. 그리고 그것을 진실로 깨닫는 것은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시간, 노년에 이르러서이다. 하여 지금 나는 나이 먹어 더욱 무거워진 생의 고독 앞에 만신창이로 던져져 있다. 그 숱한 그리고 어두운 생의 그림자들, 고독의 벼랑, 그 중에도 위험한 벼랑은 나의 시다. 아니 머리맡의 저 백지다. 밤마다 부적처럼 잠자리를 지키는 무위의 백지. 한밤중 백지를 대하고 있으면 나는 평생 단 한 줄의 글도 써보지 못한 여자처럼 막막하고 아득해진다. 모든 생각과 말은 해체되어버리고 온갖 사물의 운동은 정지해버린다. 보이지 않는 압착기로 살 속의 물이란 물이 한 방울도 남김없이 짜여지고 어느덧 내가 한 장의 백지, 물기 없이 마른 백지가 되어버린다. 백지의 고독, 백지의 절망, 이러한 놀이가 어디 어제 오늘의 일인가. 수없이 반복되고 거듭해온 일이다. 그래도 나는 그 놀이에 열중하여 밤새는 줄을 몰랐었다. 절망감에 며칠씩 또는 몇 달씩 달아나 버리기도 했었다. 그러나 달아나면 달아날수록 내 앞엔 더 큰 고독이 입을 벌리고 달려드는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다시 백지 앞에 돌아와 앉는다.

그리고 백지 속에 차라리 뛰어들어 고독과 씨름한다. 그렇게 하나가 되어 싸우다 보면 어느덧 조금씩 고독은 다스려지고 평화를 회복하게 된다. 고독, 쓴다는 그 무형의 고독에 나를 던져 넣어 피하지 않고 한데 어울림으로써 오히려 작으나마 결핍에서 충만으로, 불안에서 평안으로 소생하게 되던 것이다. 무언가를 쓴다는 일, 내게 있어 그 일은 참으로 거대한 고독이다. 결코 완성할 수도 정복할 수도 없는 절대고독의 아성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그 일엔 변함이 없다. 그러나 전에는 그 아성에 도전하여 대결할 수 있는 기력과 정열이 있었다. 그래서 호시탐탐 나를 괴롭히는 고독과 잠깐씩이나마 손잡고 화해할 수도 있었다. 그러던 것이 언제부터인가 나는 백기를 들고 그 앞에 앉아 있다. 이제 나는 고독과 친숙하여 그를 다스릴 여력이 없음을 느낀다. 다스리지 못하는 이상 그는 나의 적이 될 수밖에 없고 결국 그는 나를 가차없이 강타하여 쓰러뜨릴 것이다. 밤마다 머리맡의 흰 백지가 그렇게 고독의 비수를 갈며 나를 저미고 있다.

 

 가을의 거울 앞에서

 마지막 남은 불더위를 식히기라도 할 듯이 한 사나흘 밤낮으로 쏟아지던 빗줄기도 그치고 선뜻 처서의 문턱을 넘어서니 이제 완연히 가을의 기색이 천지를 뒤설레게 한다. 비좁은 뜰에 지난 봄 밭둑을 만들어 모종해서 가꾼 고추며 가지며 토마토 포기에도 이제 까실한 가을이 물들어 있고, 누릇누릇 쇠가는 호박넝쿨의 늙은 호박이 무거운 몸을 가누고 있는 모습에도 초가을의 그늘이 서려 있다.

세월이 이리도 빠른가, 참으로 초고속으로 달려온 특급열차처럼 그 숱한 나날의 작은 간이역들을 쉬지도 않고 지나쳐 어느덧 종점을 향해 가는 가을의 한 고갯길에서 길고 지친 기적을 울리고 있는 계절의 뒷모습을 본다. 문득 지나가는 바람소리에도 수수밭 서걱이는 소리 들리는 것 같고 콩서리하던 밭둑의 자욱한 연기도 번져 오는 것만 같다. 산더미같이 쌓인 과일들, 그 터질 듯한 풍만한 살집에 기름을 바른 듯 윤 나는 과일가게 좌판 앞에 서면 잠시나마 우리들 삶에서 가난이란 말을 잊게 하는 이 계절은 분명 즐거운 절기임에 틀림없다. 그뿐더러 그 팽만한 과일들의 감미로운 향기를 맡고 있으면 불현듯 열대여섯 살의 철부지가 되는 듯 가슴 뿌듯해지고 이상하게 설레는 환각으로 아득한 고향 텃밭이 떠오르기도 한다. 거기 주먹만큼씩 실하게 달린 사과밭의 발갛게 익은 사과나무들이 보이기도 하고, 고개 숙이고 무겁게 영근 수수이삭들 우수수 바람에 서걱이는 수수밭이 보이기도 한다.

누가 수수밭에 숨어서 기타를 치나봐. 모국어처럼 그리운 정음으로 솔솔솔 미미미 이리 나와봐. 얼굴 좀 보게 어쩌면 옛날에 띄어놓고 떠난 초록빛 연 하나 아직도 수수밭 머리에 걸려 바람에 와삭와삭 흔들리고 있나봐. 손 잡고 뛰어가던 외나무 다리 아래 그 개울물 발목 빠트리고 눈 시리게 웃던 아, 망초꽃 하얗게 지금도 피어 있고 헛간 담 밑에 숨어서 기다리던 가슴 콩콩 뛰던 첫 경험의 설레임 자욱한 수수밭에 바람으로 남아 저렇게 나를 기다리나봐. 우수수 우수수 달려오나 봐. 손 잡고 둘이서 숨어버릴까 봐. 아무도 모르게 수수밭 속으로 (졸작 “수수밭 연가”)

이런 다감한 시구도 생각나게 하는 9월, 가을의 문턱에 서 잠시 노자<도덕경> 제 16장을 읽어본다. “천지가 그 사이를 공허하게 함이 궁극에 도달하고 정적의 상태를 보수함이 짙어지면 만물은 일제히 일어나 생동한다. 나는 그 생동하는 만물들이 다시 정적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을 본다. 그 싱싱하고 무성한 수목의 꽃과 잎들이 조락하여 각기 뿌리로 돌아간다. 뿌리로 돌아가는 것을 정지라고 한다. 이것을 천명대로 돌아간다고 한다. 천명대로 돌아가는 것을 영원 불변의 법칙이라고 한다. 사람이 이 불변의 법칙을 아는 것을 명찰한다고 한다. 이 불변의 법칙을 알지 못하고 망동하면 불행을 초래한다. 이 영원 불변의 법칙을 알면 그 마음은 천지와 같이 커서 만물을 다 포옹하게 된다. 만물을 어느 것이나 포옹함은 곧 공평이요, 그 공평이 바로 왕도이며 왕도는 곧 하늘의 법칙이다. 하늘의 법칙은 바로 도인 것이다. 도는 영구한 것으로 그 도를 따르면 몸이 마칠 때까지 위태함이 없을 것이다.” 요컨대 자연의 순리를 깨달아 명찰하고 그 순리대로 살아가는 일이 곧 도이고 하늘의 법칙이며 그 법칙대로 살아갈 때 삶이 평안할 것이라는 뜻이다.

굳이 새겨보면 당연하여 아무것도 아닌 말이건만 이런 절기에 새삼스레 가슴에 와 닿는 까닭은 우리의 삶이 어디에선가 자연의 순리를 어기고 물의 흐름을 거스르듯 끊임없이 잘못 살아온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봄의 환각, 여름의 열병들을 치르듯이 인생의 각시기를 환상과 열기에 들떠서 피지 못할 꽃을 피우려고 애쓰고 맺지 못할 열매를 맺으려고 노심초사하지는 않았던가. 지는 해를 멈추게 하려는 듯 늙어가는 모습을 애써 감추고 화려하게 치장하며 떨어지는 잎을 가지에 붙들어 매는 심정으로 초조하게 살지는 않았던가. 문들 되돌아보고 뉘우치고 감추어진 속살을 본 듯 부끄러워지는 마음, 그것도 계절이 주는 성팔이리라.

그런 의미에서 자연은 인간의 최대의 스승이며 스스로를 비춰보는 마음의 거울이다. 가을이 그 중에도 맑은 거울이 될 수 있음은 모든 것을 조락시키고 비어 있음으로 해서 오는 명증한 사물 본연의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며 그 명증한 사물, 자연과 인간 안에 놓여 있는 길, 하나의 도가 비로소 떠오르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원래 그것의 이름을 모른다. 도라는 것은 그것의 이름이 아니다. 다만 그 이름을 모르기 때문에 이름 대신에 자를 도라고 지었다. 억지로 이름을 붙여 큰 것이라고 한다.”고 한 노자 25장의 말처럼 고요히 소리도 없고 형체도 없고 홀로 있으며 병들거나 소멸하는 일도 없으며 무한히 크고 무한히 멀고 그리고 언제나 갔다가도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 그 영구 불변하며 항존하는 만물의 어머니, 진실로 이름 지어 부를 수 없는 우주와 같고 대자연과 같은 그 길이 생성과 조락, 삶과 죽음, 나타남과 없어짐, 아침과 저녁, 젊음과 늙음, 겨울과 여름, 그 온갖 것을 다스리는 길, 창조주의 길이 이 가을엔 맑은 거울에 비치는 달처럼 보이는 것이다. 설사 다시 흐려지는 구름 속에 길을 잃을지라도 문득문득 자신으로 돌아가 자기의 시간 앞에서 얼마큼씩 경건해지고 쓸쓸해지고 고즈넉해지는 것도 바로 가을이란 맑은 자연의 거울 탓이리라 생각한다. 진실로 이 가을의 아름다운 거울 앞에서, 나는 누구인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어느 책에서 읽은 이야기 한 토막을 소개한다. “애인이 자기 애인의 문을 노크했다. ‘누굽니까?’하고 안에서 물었다. ‘나요.’ 하고 애인이 대답했다. ‘그러면 가세요. 이 집은 당신과 나의 것이 아니에요.’ 거절당한 애인은 사막으로 갔다. 거기서 몇 달 동안을 생각하였다. 애인의 말을 되씹으면서… 마침내 그는 돌아와서 다시 한 번 애인의 문을 노크했다. ‘누굽니까?’ 애인이 묻자 ‘당신이오.’하고 대답했다. 문이 즉시 열렸다.” 어쩌면 우리는 이 우화 속의 애인처럼 끝없이 ‘나요.’를 부르짖으며 살고 있고 그 때문에 우리 앞의 문은 열리지 않는지 모른다. ‘나’를 버리고 ‘당신’이 될 때 비로소 진정한 나를 찾을 수 있고 문은 열릴 것을.

 

어린 친구의 위로

어디선가 읽은 이야기 하나가 떠오른다. 한 신학생이 10여 년의 수련과 공부 끝에 마침내 사제 서품을 받아 처음으로 미사 집전의 허락을 받았다. 그날 성당에는 그의 첫미사를 축하하는 많은 신자와 하객들이 모여 와 있었다. 이제 막 사제로서 첫발을 내딛는 젊은 신부는 긴장하고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며칠 전부터 미사봉헌의 준비를 하고 첫 강론의 줄거리를 짜서 암기하다시피 머리 속에 정리해두기도 했다. 마침내 신부는 제대에 올라가 성스러운 미사를 집전했다. 모든 순서를 순조롭게 진행하고 이제 강론을 해야 할 시간이 되었다.

그는 강론 대 앞에 섰다. 그런데 그는 수많은 청중들 앞에서 너무나 긴장한 나머지 그만 말이 막혀버리고 말았다. “나는 지금부터 아버지의 집으로 갑니다.” 말하자면 거룩하고 험난한 사제의 길을 떠난다는 뜻으로 강론의 첫 테마를 말하고는 다음 말이 나오지가 않았다. 그는 또 한 번 되풀이해서 “나는 이제부터 아버지의 집으로 갑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여전히 그 뒤의 말이 계속되지 않았다. 전신에 식은땀이 흐르고 눈앞이 캄캄했다. 청중들은 물을 끼얹은 듯이 조용히 새 사제의 강론 실력이 어떤지 기다리고 있고 높은 제단 위에는 교구 어른이신 주교님도 와 계셨다. 새 신부는 떨리는 마음으로 세 번째 같은 말을 되풀이했으나 역시 다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참으로 딱한 일이었다. 그렇게 열심히 준비하고 준비했건만 머리 속이 텅 빈 것처럼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하는 수 없이 그는 고개를 떨구고 깊이 허리를 구부려 절하고는 강론대를 내려왔다. 수치심과 낙망으로 죽을 것만 같은 심정이었으리라. 더욱 큰 일은 주교님 앞을 지나가는 일이었다. 필시 불호령이 떨어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앞으로 교회 안에서 사사건건 백안시 당할지도 모르는 일이고… 몸이 오그라드는 것 같은 생각으로 주교님 앞으로 지나가는데 아니나 다를까 “여보게.”하고 주교님이 불러 세우는 것이었다. 새 신부는 발이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만장한 신자들 앞에서 이제 꼼짝없이 망신을 당했구나 하는 생각에 겨우 머리를 들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눈앞의 주교님이 환한 웃음을 만면에 띠고 “자네 집에 가거든 아버지에게 안부 전해주게나.”하시는 것이었다. 순간 좌중은 물론 웃음 바다였을 것이고 무엇보다도 위축될 대로 위축되었던 젊은 사제의 죽을 것만 같던 마음이 스르르 녹아 내리는 것 같았다. 미사는 오히려 우렁차게 진행되고 신자와 하객들의 새 신부에 대한 눈길은 따뜻한 위로의 정으로 넘쳤다고 한다.

주교님의 마음속엔 긴장하여 완전히 굳어버린 젊은 새 신부에 대한 깊은 이해와 위로의 정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자신의 젊은 시절을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따뜻한 자부와 같은 웃음과 위로 앞에 새 사제는 부끄러우면서도 큰 안도감을 느꼈을 것이고 그것을 깨달은 만장한 신자와 하객들은 그 넘치는 정에 함께 기뻐했을 것이다. 인간애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상대방 마음속의 수치심이나 상처를 슬쩍 덮어주는 너그러움과 유머, 그런 따뜻한 마음이야말로 우리들 삶에 보이지 않는 힘이 되고 격려가 되는 것이다. 만일 그때 주교가 새 신부에게 그 같은 인자한 유머 대신에 험악하게 책망이라도 했다면 그것이 어쩌면 새 신부에게는 낙망과 수치심에다 분노까지 겹쳐 평생 씻지 못할 오점으로 남아 괴롭혔을 것이다.

역시 이것도 어디선가 읽은 이야기다. 한 아이가 달음박질을 하다가 넘어졌다. 아이는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고 넘어진 채 울기 시작했다. 그의 친구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일어나라고 했지만 아이는 끝내 일어나지 않고 울기만 했다. 아이의 엄마가 와서 역시 일어나라고 했지만 아이는 들은 척도 안 했다. 일어나지 않으면 때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지만 아이는 꿈쩍도 하지 않고 더욱 큰 소리로 울어댔다. 그때 한 아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때구르르 구르며 넘어졌다. 넘어져서 우는 아이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방긋 웃으며 “같이 일어나자.”고 했다. 그러자 울던 아이는 울음을 그치고 피시시 웃었다. 두 아이는 함께 일어나 흙 묻은 옷을 털고 활짝 웃으며 달려갔다. 넘어져 운 아이는 다쳐서 아픈 게 아니다. 친구들 앞에서 넘어졌다는 일이 속상하고 어린 자존심이 상처를 받은 것이다. 상처받은 자존심은 위협이나 건성말로는 치유가 되지 않는다. 두 번째 일부러 넘어져 아이의 손을 잡아준 친구는 바로 그 아이의 상처를 가장 깊이 이해하고 다친 아이와 같은 처지, 같은 마음이 되어 그의 마음을 어루만져 준 것이다. 구경하고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처지가 되어 그를 위로하고 감싸준 것이다.

세상은 냉혹하다고 한다. 사촌이 땅을 사도 배가 아프고 옆집에서 갈비를 구워도 비위가 뒤집힌다고 한다. 친구가 승진하면 자존심이 상하고, 친구가 손해를 보면 겉으로는 안된 척하면서 속으로는 고소해하는 것이 인심인 것 같다. 그렇지 않아도 한평생 하는 일이 힘들고 고달픈데 우리를 에워싼 이웃의 인심조차 그처럼 각박하대서야 어떻게 살 것인가. 참으로 저 어린 사제의 곤경을 구해준 주교 같은 마음씨, 넘어져 우는 친구의 마음을 진심으로 헤아려 같이 울고 웃어준 어린이 같은 정. 인간애란 거창한 것도 거룩한 거도 아니다. 바로 우리 옆에 언제나 널려 있는 성냥개비 같은 것이다. 불만 붙이면 밝게 피어 오르는.

 

 몇 개의 얼굴을 가진 인생의 달인

샤로얀의 소설에 <웃는 샴>이라는 단편이 있다. 그가 어린 시절 만났던 한 소년의 이야기라고 한다. 소년은 잘 웃는 아이였다. 우스울 때는 말할 것도 없고 우습지 않을 때도 잘 웃었다. 짓궂은 아이들에게 얻어맞고도 웃고 옷이 찢겨지고 단추가 뜯겨져 나가도 낄낄 웃었다. 잉크를 뒤집어쓰고도 “아 하하하.”하고 웃었다. 한 번은 신문팔이로 거리에 서서 신문을 팔았다.

신문다발을 끼고 “석간이요, 석간. 고속도로에서 대형 자동차 사고요. 일가족 다섯 명이 사망!” 어쩌구 큰 소리로 외치면서 신문을 팔고 있었다. 그것을 본 사람이 말했다. “야 임마, 네가 파는 신문의 뉴스는 슬픈 사건인데 어떻게 싱글싱글 웃으면서 팔 수가 있단 말이냐.” 하자, 샴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내가 지금 웃고 있었어요?” 하고 오히려 되묻는 것이었다. 그제서야 샤로얀은 알 수가 있었다. 샴은 언제나 웃는 것 같지만 속으로는 울고 있었던 것을. 얼굴을 보면 웃고 있었지만 속마음은 언제나 울고 있었던 것을 말하지 않아, 아무도 샴의 속마음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샴은 소학교를 나와 취직을 하지만 사고로 엘리베이터에 끼여 죽고 만다. 샴은 직장에서 엘리베이터 나는 일이 죽기보다 싫었지만 주인이 엘리베이터로 물건을 나르라고 하면 “난 엘리베이터가 싫은데…” 하면서도 낄낄 웃고 있었다니 누구도 그가 얼마나 엘리베이터를 무서워하고 있었는지 알지 못했던 것이다.

 

몇 개의 얼굴로 사는가.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 해도 가령 부부나 부모자식지간 이라 해도 말하지 않는 이상 서로의 마음을 알 길이 없다. 세상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속마음을 한 번도 털어놓고 이야기해보지 못하고 벙어리 냉가슴 앓듯 혼자 앓으면서 살다 가는가. 샴의 경우는 극단적인 이야기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 비슷한 비애를 안고 살아가는 것이다. 입을 여는 일은 마음을 여는 일이다. 마음을 열게 하기 위해선 서두르지 말고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며 지그시 끝까지 들어주는 참을성이 필요하다.

그러나 아이들과의 대화에서 보면 흔히 어른들은 대충 듣거나 아니면 중도에서 중단시키고 때로는 명령하고 지시한다. 조언한다고 하면서 아이의 생각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를 강요하기도 한다. 결국 아이의 마음은 열리지 않고 열리기는커녕 점점 더 굳게 닫혀버리고 만다. 엘리베이터에 끼여 죽은 샴의 마음을 열어 그의 속 깊은 슬픔을 들어줄 귀가 없었기에, 그는 언제나 마음과는 달리 겉으로는 웃으면서 결국은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이들은 부모를 어떻게 보는가. 무엇을 요구하는가. 사회적으로 상당한 지위를 굳힌 한 사업가의 회고담이 생각난다. 어린 시절의 아버지는 친근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 지방의 유지였던 아버지는 여러모로 중압감을 느끼게 하는 두려운 존재였다. 마주 앉아 아버지하고 다정한 말 한마디 건네본 적이 없었다. 그러한 그가 장성하여 사회의 지도급 인사가 되고 마침내 고향인 그 지방 도시의 초청을 받아 천여 명의 청중을 앞에 놓고 강연을 하게 되었다. 강연을 하면서 그는 놀랍게도 ‘기어코 아버지를 뛰어넘었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솟구치는 쾌감에 가슴이 벅차더라고 했다. 젊은 시절 그처럼 무겁던 아버지의 중압감을 비로소 털어버리고 기어이 해냈다는 성취감에 뿌듯해지며 지금은 세상에 없는 아버지에게 ‘자, 보십시오. 당신의 아들을.” 하고 자랑하고 싶더라고도 했다.

 

거울아 거울아

자식들은 성장함에 따라 부모를 자신의 라이벌, 경쟁 상대로 의식하기 시작하는 것 같다. 글을 쓴답시고 바쁜 어미의 뒤통수를 하얀 눈으로 흘겨보던 딸들의 주눅든 마음을 가끔가끔 느꼈었으니 나 또한 내 아이들의 무언의 라이벌 이었음직하다. 아이들이 자신의 인생에서 느끼는 최초의 경쟁 상대는 부모다. 그것은 좋은 뜻에서 바람직한 일이다. 좋은 경쟁 상대는 삶의 동력이 되고 추진력이 되기 때문이다. 적당한 자극이 되며 스스로 목적을 정하는 척도가 되기도 한다.

결국 아이의 좋은 경쟁 상대가 되어주는 일이 부모의 첫 번째 과제가 아닐까 싶다. 손끝이 매운 어머니 밑에서 배운 딸은 어디가 달라도 다르게 마련이다. 그런 한편에서 아이들은 역시 부모에게 영원한 보호자이기를 원한다. 경제적으로 급하면 언제나 의지해오고 정신적으로 중요한 인생의 상담역이 되어주기를 바란다. 때로는 같이 놀아주는 놀이친구가 되어주어야 하고, 또 때로는 지도자로서의 능력을 요구하기도 한다.

 

보호자, 라이벌, 친구 그리고 지도자

그런 의미에서 부모란 인생의 달인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때와 경우에 따라 적절히 이 네 가지 역할을 구사해내야 한다. 가령, 보호자 역할이 지나치게 강해질 때 아이들은 반발하거나 허약해진다. 과보호란 방임과 다름없이 아이에게 유독한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라이벌 의식을 너무 노골적으로 보이는 것도 우스워진다. 보모자식간의 정이 끊어지고 적대감만 조장된다. 너무 엄격해도 아이들과의 사이에 벽이 생기고 너무 응석만 받아주어도 버릇이 없어진다. 부모가 무능력할 때 자식은 부모를 허술히 대하고 부모가 지나치게 권위적일 때 또한 자식은 부모를 경원한다. 참으로 복잡하고도 미묘한 부모자식의 관계다. 장성한 자식에겐 할말이 있어도 하지 못한다.

서운하고 섭섭한 일이 있어도 속으로 울고 겉으로는 웃어야 한다. 샴 처럼 웃는 얼굴만 보아온 아이들은 부모의 마음을 알 리 없다. 요컨대 부모는 몇 개의 얼굴을 번갈아 가면서 힘든 역할을 평생 동안 해내야 한다. 어찌 부모의 역할뿐이랴. 직장에 있어서 선후배 동료 사이에도 마찬가지다. 동료는 동료끼리 선후배는 선후배끼리 서로 몇 개의 얼굴을 요구하며 그 적절한 사용을 연구해야 한다. 사회에서 지도적 입장에 선 사람들은 어쩌면 그 몇 개의 얼굴을 갈아 끼는 데 숙달된 명인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안 될 때 고지식하게 한 가지 얼굴밖에 연출하지 못할 때 샴 처럼 엘리베이터에 끼여 죽을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생의 달인으로 몇 개의 얼굴을 가진 세상의 부모들이 나이를 먹고 늙어갈수록 마음속에 아무도 모르는 생각들을 숨겨두고 남 모르게 울고 있다고 생각할 때 다시금 인생의 막막함에 할말을 잃어버린다.

 

 개미처럼 바지런한 여자

젊은이들 몇이 모여 앉은 자리에서 ‘내가 좋아하는 여인상’이라는 화제가 나왔다. 한 젊은이가 “나는 청바지, 빨간 셔츠에 긴 머리 아가씨가 좋더라.”고 말하자 다른 젊은이가 “되게 야하고 섹시한 여자구나.”했다. 그러자 또 다른 젊은이가 “난 좀 달라. 뭔가 감춰져 있는 여자, 궁금증을 느끼게 하는 여자가 좋아.”했다. 그리고 세 번째 젊은이는 “분위기를 마쳐주는 여자, 도서관에 가면 열심히 독서하고 맥주 집에 가면 맥주도 마시고 산에 가면 엄살 없이 산도 잘 오르는 여자.”라고 했다. 그 다음부터는 중구난방으로 한마디씩 쏟아져 나왔다.”형제 사랑하고 부모님 공경할 줄 아는 여자”, “정조관념 강하고 참을성 있는 여자”,”바가지 긁지 않는 여자”,”돈에 대해선 절대로 모르는 여자”…와글 와글 와글…(어느 날 라디오에서 흘러 나온 이야기였다.) ‘맙소사, 누군지 모르지만 느네 들 장가가기 힘들것다.’라고 생각하며 나는 혼자 웃었다.

이야기는 좀 다르지만 얼마 전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들었다. 국민학교 3학년인 한 계집애 이야기였다. 학교 수업시간에 공부를 하다 말고 아이는 느닷없이 휘파람을 불었다. 휘파람을 불려고 분 것이 아니라 입을 오물거리다 저도 모르게 휘파람 소리가 나온 것이다. 선생님은 당연히 야단을 치셔야 했다. 남자 담임선생님은 아이의 코를 꼭 잡고 비틀었다. 그러나 아프게 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재미있는 것은 아이의 그 후 행동이다. 아이는 집에 돌아와 시간만 있으면 휘파람 부는 연습을 한다는 것이다. 아이의 엄마가 하도 이상해서 “그렇게 휘파람을 불어서 뭘 하려고 그러느냐?”고 묻자 아이는 생글거리며 “휘파람을 잘 불면 선생님이 또 코를 꼭 잡아줄 것 아냐!” 하더라는 것이다. 아홉 살짜리 여자아이의 그 섬세한 감성이 그냥 웃음으로 들어 넘길 수 없게 하는 이야기였다. 뭐라고 할까. 담임선생님의 관심을 끌기 위해 어린 마음에 수놓는 그 감정의 무늬가 너무도 예쁘고 귀엽다 못해 측은해지기조차 하던 것이다.

여자란 그렇게 어린 나이 때부터 이미 여자로서의 특이하게 섬세한 감성을 타고나는 것인가 싶어 공연히 가슴이 찐해지던 것이다. 여자란 원래 여자에게 가혹하다. 같은 일이라도 상대가 남자일 때에는 애교로 봐주면서도 같은 여성일 때는 용서 없이 비판하고 헐뜯는다. 절대로 관대하지 않다. 한 단체에서 회장을 선출하는데 입후보자는 남녀, 두 사람이었다. 보기엔 여성 입후보자가 유력해 보였다. 유권자 수만도 여성이 우세했다. 그러나 결과는 남성이 되었다. 표를 분석해보니 여성 유권자가 거의 남성 쪽에 투표한 것이었다. 같은 여성인데도 여성에 대해 인색하고 신뢰하지 않은 것이다. 질투도 몇 프로 가산되어 있는 듯했다. 협량하고 소견 좁고 인색하며 시기함이 어찌 여자뿐이랴 만 이런 여성들의 고질적 속성들이 결국은 다른 사람 아닌 자신들이 앞길을 가로막는 장애인 것을 좀 알았으면 싶다.

몇 해 전 일본에 갔을 때 어느 출판사에서 홍보용 포스터를 만들어 붙였는데 이런 내용이었다. “여성이여, TV를 끄라! 주간지를 덮어라!” 였다. 기발한 포스터의 글귀며 거기 찍힌 지적인 여성의 사진이며 매우 신선한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요컨대 여성이 정신적으로 성장하고 남성 못지않은 사회의 일원이 되려면 TV나 들여다보고 주간지나 뒤적거려서는 안 된다. 제대로 책을 읽어야 한다는 경고였던 것이다.

사실 일하기 싫고 만사 귀찮아 저녁마다 어린이 프로에서, 코미디, 연속극드라마, 뉴스, 논단 등 텔레비전 앞에 턱을 받치고 앉았다가도 그 포스터 생각이 나면 혼자 쑥스러워지고 마음이 불편해지는 것이다. 사실 나처럼 게으르고 두서없이 잘 잊어버리고 불규칙한 생활을 하는 여자로서 다른 여성들에게 요구할 자격이나 권리는 전혀 없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자신이 그렇게 철이 없고 부실하기 때문에 오히려 다른 여성들에게 당신들만은 그러지 말고 이러 이러 하라고 당부하고 싶어질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렇게 바라고 싶은 몇 가지 주문을 한마디로 집약해 말한다면 나는 개미처럼 바지런한 여자가 제일 좋다. 바지런하여 하루 24시간을 48시간쯤으로 늘려 쓰는 만큼의 효과를 거두는 여성이 제일 슬기롭고 아름다워 보이는 것이다. 새벽이면 자명종소리와 함께 자동인형처럼 발딱 일어나 가족들의 식사며 도시락을 챙기고 라디오의 FM 방송을 들으며 청소와 빨래를 손수 후다닥 해치운 다음 재빨리 화장하고 옷 갈아 입고 모임에 나가는 여자, 시장보기, 꽃꽂이, 서예, 문화강자 등에 바지런히 쫓아 다니는 여자, 모과차,유자차, 포도주, 살구주, 각종 밑반찬 제때 제철에 잘 만드는 여자(내가 절대로 잘 못하기 때문에), 아이들과 남편에게 가끔 편지로 속마음 열어 호소하는 여자, 남편의 늦은 귀가 시가엔 신경 쓰지 않고 그 시간에 소설 읽고 시 읽고 일기 쓰고 음악 들으며 생각하는 여자, 집안 어딘가에 늘 꽃 한 송이 떨어지지 않게 꽂아놓는 여자, 그리고 나이 오십을 넘어도 아홉 살짜리 계집애의 저 공명판처럼 섬세하게 울리는 감성을 지닌 여자, 나는 그런 여자가 좋다. 단순 소박하고 개미처럼 바지런한 여자, 그런 여자가 좋다.

내가 싫어하는 여자는 다음과 같다. 시들어 보기 흉한 꽃을 며칠씩 그대로 내버려두는 여자, 바늘 실의 준비성 없이 거리에서 튿어진 옷을 빈침으로 꽂고 다니는 여자(나도 가끔 그에 속하는 여자지만), 어깨에 허연 비듬이 떨어져 있는 여자, 긴 손톱에 때가 끼여 있는 여자, 눈썹에 너무 짙은 아이라인, 아이섀도로 얼굴을 가면처럼 만드는 여자, 몇 십만 원짜리 옷을 겁도 없이 카드로 척척 사는 여자, 신문 광고란의 바겐세일만을 골라 다니는 여자, 음식점에서 큰 소리로 웃고 떠드는 여자, 대중목욕탕에서 수도 꼭지를 처음부터 끝날 때까지 틀어놓고 철철 물을 내버리는 여자. 글세 어떨까, 이런 여성들은? 내 안에도 어쩌면 그 같은 속성이 숨어 있지 않을까? 이 글을 쓰면서 나는 적지 않은 대목에서 가슴이 뜨끔거리던 것을 솔직히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가면을 벗고 마음의 벌거숭이가 되어

“태양 속에서 압생트의 향기 속에서 은빛으로 철갑을 두른 바다, 야생의 푸른 하늘, 꽃으로 뒤덮인 폐허, 돌 더미 속에서 굵은 거품을 일으키며 끓는 빛… 어떤 시간에는 들판이 햇빛 때문에 캄캄해진다. 두 눈으로 그 무엇인가를 보려고 애를 쓰지만 눈에 잡히는 것이란 속눈썹 가에 매달려 떨리는 빛과 색체의 작은 덩어리들뿐, 엄청난 열기 속에서 향초들의 육감적인 냄새가 목을 굵고 숨을 컥컥 막는다. 도처에 부겐베리아꽃의 빌라들… 붉은 빛의 부용화가 꽃잎을 열고 크림처럼 두툼한 차향… 장미와 길고 푸른 붓꽃의 섬세한 꽃잎… 돌들은 모두 뜨겁게 단다…” 이렇게 끝없이 그리며 그 속에 빨려 들어 가게 하는 알베르 카뮈의 <결혼,여름>(김화영 옮김)중의 “티파사에서의 결혼” 첫 서두 부분이다.

여름, 그렇게 여름이 다가온다. 금잔화가 피고 달리아, 칸나, 해바라기가 피고 채송화, 백일홍, 나팔꽃이 눈웃음 치는 여름이 다가온다. 돌들이 뜨겁게 달고 양철지붕들이 모닥불을 끼얹는 여름, 불의 여름이 다가오고 있다. 이 여름도 사람들은 가족들을 이끌고 친구끼리 떼를 지어 산으로 바다로 떠날 것이다.

“여름에 우리는 바다로 간다. 파도와 바람과 은 모래와 태양과 춤추는 인어의 바다로… 금빛 투망에 걸린 여름의 신화를 주우러 간다. 마시다 남은 찻잔, 부엌의 설거지 그릇, 먼지 낀 책상, 공장의 열쇠 꾸러미들을 아무렇게나 던져두고 바다로 간다. 시시로 머리 속을 빠져 나와 바다로 간다. 일상과 권태를 학살하러 간다.” 이렇게 여름을, 여름의 바다를 노래하기도 했던 그 여름에 다시 온다. 사람들은 여름을 견디기 어려워하면서도 기다리고 즐거워한다. 그것은 계절이 갖는 거칠 데 없는 자유분방함과 그 풍성함 때문이다. 닫았던 창들을 열어젖히고 마음의 빗장을 풀어놓고 어디든 발 가는 대로 떠나고 싶게 하고 훨훨 입었던 옷들을 벗어 던지고 아무데서나 물 속으로 뛰어들고 싶게 하는, 말 그대로 자연으로 돌아가게 하는 힘 때문이다.

한마디로 여름은 인간을 가장 원시적 자연상태로 돌아가게 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작열하는 태양의 열기는 인간의 몸과 마음을 그처럼 벌거숭이가 되게 하는 것이다. 벌거숭이란 말은 얼마나 신선하고 순수한 정감을 자아내는 말인가. 할 수만 있다면 나는 24시간, 한 달 30일, 아니 일년 열두 달 벌거숭이로 살고 싶다. 스스로 아무런 구속도 주지 않고 거칠 데 없이 자기를 내어 보이는 삶, 마치 에덴 동산의 아담과 하와처럼 나뭇잎 한 장도 몸에 걸치지 않고 태어난 그대로의 자연으로 사는 삶, 그렇게 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날마다 얼굴에 가면을 쓰고 가면 속에 슬픈 또는 괴로운 자기 얼굴을 감추고 겉으로는 점잖음을 다정함을 재미있는 듯함을 허위로 가장하고 연출하지 않아도 되는 삶, 생각만 해도 자유롭고 숨구멍이 터질 것만 같지 않은가.

여름은 그같이 한 순간만이라도 휴가라는 한정된 시간을 얻어 자기를 방만하게 풀어놓고 벌거숭이가 될 수 있는 계절이어서 나는 좋아한다. 생각하면 우리는 얼마나 무수한 가면 속에 자기를 감추고 살아가고 있는가. 마음에 맞지 않는 상사 앞에서도 허리를 굽히지 성실의 가면을 써야 하고 동료나 후배 앞에선 아무리 지치고 고달파도 여유 있고 너그러운 모습으로 가장을 해야 한다. 우습지 않으면서도 남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웃어야 하고 재미 없어도 재미있는 양 가면을 쓰고 연기를 해야 한다. 유일한 안식처인 집에서도 마찬가지다. 가장으로서의 위엄을 보여야 하고 아버지 노릇, 아들 노릇을 하기 위해 몇 개의 탈을 번갈아 바꿔 써야 한다.

결국 남에게 보이는 부분만을 위해 온 신경을 쓰며 살아야 하고 고르다 보니 보이지 않는 부분인 진정한 자신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가면과 허세에 길들어져 살다 보면 어느 사이엔가 정작 자신의 본 얼굴이 어떤 것인지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존재에 자신이 없을 때, 사람들은 대체로 타인에 의해 자신의 존재를 위로 받는다. 나 역시 젊어서 그랬었다. 자신이 없음에도 고집스러웠고 완벽주의자였던 나는 사소한 증상에도 상처받고 어쩌면 나는 쓸모 없는 인간이 아닌가 하는 회의에 빠지곤 했었다.

그리고 상처받지 않기 위한 자위수단으로, 또는 스스로 비참한 생각에 빠지지 않기 위한 방어책으로 아예 처음부터 자신을 낮추고 비하함으로써 타인으로부터 받는 바람을 막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부자유스런 생활이었다. 끊임없이 남의 시선을 의식하며 남을 나의 행동의 가늠대로 삼았기 때문이다.” 어느 수도원의 한 수녀님의 말이다. 그러면서 그는 어느 날 우연히 읽은 책 속에서 발견한 한마디 말에 의해 이제까지의 자신의 삶을 바꾸게 되었다고 했다.

“참다운 겸손이란 자신을 비하하는 일이 아니라 절대자이신 신의 눈길에 비쳐지는 자기의 모습대로 남을 대하는 일이다.”라고. 그럴지도 모른다. 남의 시선만을 의식하고 마음 쓰고 있는 자기, 남이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에 따라 일희일비하며 전전긍긍하는 어리석음이 우리에게도 없지 않다. 그런 상태에서 마음의 평화란 있을 수가 없다.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론]속에서 “주여 당신 안에 안식하기까지 내 마음에 평화를 얻지 못하였나이다.”고 말하고 있듯이 인간의 마음은 어쩌면 인간 이상의 보다 큰 것과의 대화 없이는 평화를 얻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여름, 이 풍성하고 충만한 자연의 녹음 속에서, 산과 바다의 황홀한 대자연 속에서 모든 세상살이의 때묻은 가면을 벗고 마음의 벌거숭이가 되어 진정한 자기로 돌아가 볼 일이다. 그리고 인간 이상의 크고 우람한 대자연-신의 품에 안겨 그의 눈길에 비쳐지는 자신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한 번 생각해볼 일이다. 그리하여 참다운 마음의 평화를 이 여름에 누려볼 일이다.

 

 하루하루 맨발로 걸어서 가는 길

방 하나가 그 시절의 가장 큰 소망이었다. 책상과 책장 하나, 복사판 그림 한 장 벽에 걸려 있는 혼자만의 방이 그렇게 갖고 싶었다. 그런 방만 있으면 공부가 저절로 될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턱없는 꿈이었다. 시골 출신의 가난한 월급쟁이던 아버지에겐 그런 재력이 없었으니 나는 언제나 할머니와 함께 할머니 방에서, 잠도 할머니 곁에서 자고 공부도 할머니 곁에서 해야만 했다. 할머니는 내가 숙제를 할 때도 책을 읽을 때도 시험 공부로 밤샘을 할 때도 언제나 내 등뒤에 그림자처럼 앉아서 화투놀이를 하고 계셨다. 몇 시간씩 몇 시간씩 싫증 내는 일도 없이 가끔 “할머니 그게 그렇게 재미있어?” 하고 물을라치면 할머니는 희미하게 웃으며 “너는 공부가 재미있어서 하니?” 하고 야릇한 반문을 하셨다. 나는 말도 안 된다 싶은 생각이 들어 돌아앉고 말았다.

‘아무려면 화투패 떼는 것과 공부하는 일을 비교하다니 할머니도 참.’ 하며 속으로 혀를 차다가 문득, 할머니의 무료하고 할 일 없는 심심한 나날의 적막함이 코 끝에 찡하게 울려 얼른 눈길을 돌리곤 했던 것이다. 전등은 30촉짜리였다. 그나마 책상 위에 스탠드 같은 것은 생각도 못 할 일이었고(그런 것이 있는지조차 몰랐지만)높다란 천장 한복판에 달랑 매달린 알전등 이었다.

불빛은 꼭 안질이 나서 뿌연 막이라도 눈에 낀 듯이 희미하고 침침했다. 그런 불빛 밑에서 보는 자잘한 글자들은 두 개, 세 개로 번져 보이기도 하고 수없이 눈을 비비고 부릅떠야만 했다. 그나마도 밤 열 시가 넘으면 전기 값 많이 나오니 불 끄고 자라는 독촉을 수없이 받아야 했다. 여름 밤엔 열어놓은 방문으로 마음 놓고 공격해 오는 모기떼의 기습에 견디다 못해 불을 꺼야 했고, 겨울이면 대접해 떠다 놓은 물이 꽁꽁 얼어붙는 혹한에 이불을 뒤집어써야만 했다. 그리고 머리까지 뒤집어쓴 이불 속에서 어느덧 꼬꾸라지듯 잠에 떨어져 가곤 했다. 공부가 아니라 그것은 전쟁이었다. 더위 또는 추위 그리고 모기떼와 침침하기만 한 불빛과의 끝없는 싸움이었다. 그보다 더 큰 고통은 누구도 나의 공부를 장하다고 부추겨주는 사람도 없고 밤늦은 잠을 안쓰러워해 주는 이도 없다는 일이었다.

한마디로 나의 진학은 부모님에게 별 무관심이었다. 아니 공연한 짓이었고 보낼지 말지 하는 불확실한 미결정 사항이었다. 나는 부모님의 그런 탐탁지 않은 의증을 알고 있었기에 기를 쓰고 공부에 매달렸다. 우선 합격해야 한다. 합격해놓고 보면 부모님의 생각도 달라질 것이고 나도 떼를 쓸 이유가 생긴다고 생각한 것이다. 응원 없는 싸움, 고군분투라는 말이 그런 것이리라. 나는 아무도 밀어주지 않고 바라지 않는 오히려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입시공부를 혼자서 고독하게 치러야 했다.

그렇게 해서 첫해엔 보기 좋게 부모님의 소원대로 낙방이었다. 그 시절의 고등여학교(4년제) 입시는 지금의 대학입시만큼 치열했다. 경쟁률이 적어야 4~5대였고, 최고 12대까지 했으니 굉장한 경쟁률이었던 것이다. 인구도 진학률 지금에 비할 바가 아닌데 어찌 그리 경쟁률이 높았을까. 원인은 간단했다. 워낙 상급학교가 적었고 거기다 전국 각지에서 입시 생이 서울로만 모여들다 보니 그렇게 극심했던 것이다. 그렇게 경쟁률이 높으니 그때도 예외 없이 과외공부라는 것을 하긴 했다. 개인별 공부가 아니라 학급 단위로 담임선생님이 방과후의 몇 시간씩을 지도하는 단체 과외였다. 첫해에 낙방을 한 나는 며칠을 먹지도 않고 일어나지도 않고 울기만 했다. 보다 못한 어머니가 아버지 모르게 입학률이 좋다는 모 소학교 6학년으로 편입을 시켜주셨다. 나는 그때처럼 어머니에 대한 고마움을 느낀 적이 없었다.

그렇게 해서 나의 재수생활은 시작되었다. 70명이 넘는 반 학생의 거의 대부분이 편입해 온 재수생이었다. 도대체 서울 장안에 이런 곳이 있다는 것을 세상물정 모르는 나의 어머니가 어떻게 아셨을까, 신기한 일이었다. 어쨌거나 나의 재수 생활은 고달프고 평탄치가 못했었다. 우선 그 학교에도 교실에 전기시설이 없었다. 가을해는 짧아서 다섯 시만 되면 교실은 어두워졌고 이내 교과서나 공책의 글자는 어둠 속에 묻혀버렸다. 그때부터 우리는 구두시험 공부를 했다. 그 시절엔 구두시험이라는 것이 학과시험만큼 중요한 시험 중의 하나였다. 교과서 외의 일반 상식을 생물,역사,사회 등 그야말로 시험관 마음대로 물었고, 때문에 구두시험 문제집이라는 두툼한 부교재를 달달달 외워야 했던 것이다. 실제로 학과시험을 무사히 치렀어도 구두시험에 낙방하는 수가 얼마든지 있었다. 교실에 전기가 없으니 선생님 혼자 교탁 위에 손전등을 켜놓고 문제집의 문제를 질문한다. 지명된 학생은 대답을 해야 하는데 집에서 미처 외워 오지를 못했으니 대답을 못하고 쩔쩔맨다. 눈을 부릅뜨고 문제집을 들여다보지만 어둠 속에 ‘낫’자도 ‘닷’자 같고 ‘닷’자도 ‘낫’자 같기만 하다. 많은 아이들이 시력을 상했고 나도 2년간의 입시공부 중에 그 중에도 재수 중에 시력을 완전히 상했던 것이다.

당시 구두시험을 치러 들어간 시험장에서 있었던 잊지 못할 이야기가 생각난다. 시험장엔 보통 몇 사람이 같이 들어가 기다리고 섰다가 앞사람이 끝나면 다음 사람이 재빨리 그 자리에 가서 꾸뻑 절을 하고 질문을 받게 되어 있었다. 한 학생이 코끼리같이 덩치가 크고 목소리가 무서운 시험관 앞에서 완전히 압도당한 듯 떨고 있었다. “이 꽃이 무슨 꽃인가?” 하고 시험관이 물었다. 그의 책상 위에는 노오란 개나리가 항아리 가득히 꽂혀 있었다. 말문이 막힌 학생은 당황한 듯 떠듬거리며 “지, 진달래 꽃입니다.”고 대답했다. 경험이 없는 어린아이는 당황한 나머지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래 너의 집 마당엔 진달래가 노오랗게 피어 있겠구나! 됐다. 다음 학생!” 그 아이는 어이없게 구두시험에서 낙방하고 말았다.

나는 그때 13살의 꼬마 재수생이어서 떨리긴 했지만 비교적 침착했다. 나 역시 1년 전 시험지에 섰을 때는 시험관이 어떻게 생기고 그 책상 위에 무엇이 놓여 있는지 눈에 보이지가 않았다. 묻는 말도 가물가물 멀리서 떠도는 것 같았고 머리가 붕 떠서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이다.

한 번의 실수는 나를 그만큼 성장시키고 침착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남이 1년 걸려서 얻는 자신감과 침착성을 나는 갑절을 걸려서 얻은 셈이니 그리 좋은 머리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슬퍼하지는 않는다. 좋은 경험들은 약보다고 좋은 인생의 재산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시험이란 하루하루 맨발로 걸어서 올라가는 산길과 같다. 자동차를 타고 가는 식의 적당이나 요령은 용서되지 않는다. 쉬지 않고 발이 부르트도록 걸어서 정상에 도달해야 한다. 얼마나 빨리 올라가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빠짐없이 살펴서 산 전체를 아느냐가 중요하다. 그 고통스런 경험들이 쌓여 인생의 귀중한 밑거름이 될 것이다.

 

 삶에서 만난 하느님 나의 예수

아침에 일어나 창을 열면 기다렸던 듯이 창 하나 가득히 밀려드는 하늘이 있다. 몇 그루의 정원수와 화초들도 있다. 순간 나는 그 하늘과 나무들이 그곳에 그처럼 평화롭게 있다는 사실에 감동한다. 나는 밤 사이 까맣게 그것들을 잊고 지낸 것이다. 아니 잊고 사는 때가 어찌 밤뿐이겠는가. 온 시간 거의 하늘도 나무도 생각하지 않고 산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 하늘과 나무들이 그곳에 한결같이 나를 위해 있음에 놀라고 감동하며 서성거린다. 내 마음이 바로 하늘과 나무들을 향해 문을 여는 순간이다. 그처럼 나의 하느님도 내 앞에 언제나 하늘처럼 나무처럼 서 계심을 안다.

다만 나는 내 일상에 매몰되어 그분을 외면하고 잊어버리고 그냥 지나쳐버린다. 문득 문득 하늘을 쳐다보고 나무들을 바라보듯이 그분을 쳐다보고 스쳐 지나가면서 잊어버린다. 그분은 그저 그 자리에 서서 쳐다보고 스쳐 지나가는 나를 결코 부르지 않으신다. 나무라지도 탓하지도 않으신다. 그분은 그냥 묵묵히 서서 기다리고 계실 뿐이다. 내가 그분을 향해 문을 열고 부르기 전에는, 내가 그분을 알아보고 때로는 필요해서 목메어 부르기 전에는 그분은 묵묵히 한자리에 서서 기다리실 뿐이다. 나는 그분을 버려둔 채 온 세상을 떠돌아다니며 다치고 상처 져서 돌아온다. 어디에도 의지할 바 없는 마음이 되어 돌아올 때 나는 비로소 그분의 이름을 떠올리고 그 이름을 부른다. 그러면 그분을 소리 없이 한달음에 내게로 오신다.

마치 창을 열면 막혔던 하늘이 방 안으로 가득히 밀려오듯이 그렇게 잠겼던 내 마음의 문을 열고 그 이름을 부르면 지체 없이 내 안으로 들어오시어 그때부터 나와 함께 나의 고통 나의 슬픔을 나누어 져주신다. 여태까지 잊어버리고 아는 척하지 않았던 나의 무심을 전연 탓하지 않으시고 내가 원하는 만큼 원하는 모습으로 나와 함께 계셔주신다. 그러나 세상의 일에 쫓겨 나는 다시 그분을 잊어버리고 창문을 닫아걸고 그분과 멀어진다. 그분은 다시 문 밖에서 나를 기다리시고, 나는 그분이 언제나 그 자리에 기다리고 계심을 믿고 있기에 마음 놓고 세상 한 마당을 떠돌아다닌다. 영혼의 때를 묻히고 상처지면서.

돌아서면 까맣게 당신을 버리나니 버리고 그 문 밖에서 내가 떨거나 혹은 나의 문 저편에서 당신이 떨거나 우리는 그같이 서로 하나이기 원하면서 하나이지 못하는 G선상의 아리아 날마다 하나씩 늘어가는 죄목과 날마다 한 눈금씩 자라는 십자가를 지고 오늘도 나의 빈 영혼의 병실엔 바람 부나니 버리고 못 잊는 회한과 불망의 바람 부나니 서른세 살 청 무우 처럼 살다 간 한 사나이의 삶과 죽음의 아리아가 울리나니 나의 병실엔(졸작”나의 예수”) 이렇게 나는 구분을 버리고 다니지만 일찍이 시편에서 그분은, “그가 나를 따르기에, 나 그를 구하여주고, 그가 내 이름을 알기에, 나 그를 들어올리리라. 그가 나를 부르면, 나 그에게 대답하고 환난 중에 내가 그와 함께 있으리니 그를 해방하여 영예롭게 하리라. 내가 그를 장수로 만족하게 하고 내 구원을 그에게 보여주리.”(91,14-16)하시었다. 원하건대 이 시편의 노래대로 이루어지기를 나는 믿고 고대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를 때 달려와 나를 건져주시고 환난 중에 함께 계시어 위로해주시리라 믿으며 살아간다. 진실로 그분에 의해 지배되는 나날의 삶이 되기를, 어떠한 시련 속에서도 평정을 유지하고 고통이나 슬픔도 조용히 받아들일 수 있는 힘을 주시기 원한다. 크고 빛나는 일은 말고 벽돌 한 장을 쌓아 올리는 작은 일상의 일들을 통해 믿음의 집을 짓고 그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를 열어주시기 바란다. “주님, 저의 마음은 오만하지 않고, 저의 두 눈은 높지 않나이다. 저는 거창한 것들을 따라 나서지도, 주제넘게 놀라운 것들을 (찾아 나서지도) 않나이다. 오히려 저는 제 영혼을 가다듬고 가라앉혔나이다. 어미 품에 안긴 젖 뗀 아기 같나이다. 제 영혼은 저에게 젖 뗀 아기 같나이다.”(시편 131.1-2)

 

 천연의 성소 -치명자산 성지-

전주를 방문한 것은 우연한 일이었다. 부담 없이 가볍게 떠난 길은 날씨도 쾌청한 데다 고속도로 연변의 온 산마다 연녹두색 으로 자욱하게 피어 있는 밤꽃 향기로 하여 한층 풋풋하고 향기로웠다. 마침 시우 김여정 여사와 동행이 되어 더욱 즐거운 시간이 되었다. 우선 전주 성 바오로 서원에 계신 김 마리아 원장 수녀님을 만나 치명자산 순례를 이야기했더니 선뜻 안내해주시겠다며 앞장을 서시었다. 차에서 내려 15분쯤 걸어서 올라가는 산길은 결코 수월한 길이 아니었다. 처음 얼마간은 붉은 황톳길이 그래도 평평하더니 오를수록 차츰 길이 좁아지고 가파로워 지면서 잔돌과 굵은 돌이 뒤섞인 울퉁불퉁한 돌길이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정상으로 오르는 길은 특이한 천연 암석으로 된 좁고 험준한 바위 길이었다. 그것은 마치 깊이 숨겨진 비경을 찾아가는 듯한 신선함과 경건함을 느끼게 하는 경관이었다. 마침내 치명자산 성지, 한국 순교사의 두 꽃봉오리 같은 동정 부부 유 요한과 이 누갈다 묘지 앞에 섰다. 순결을 맹세한 젊은 부부가 결혼을 하고도 4년간 오누이처럼 동정을 지키며 요셉과 마리아처럼 순결하게 살다 마침내 순교한 것이 요한 23세, 누갈다 20세의 아직 꽃도 피지 않은 봉오리들이었다. 옥중에서 보낸 누갈다의 편지는 차마 끝까지 읽을 수 없을 만큼 애절하였다. 새로 신축되는 대성당의 골조들이 산 아래 웅장하게 보였고, 전주 시가지가 한눈에 바라보이는 치명자산은 바로 유 요한과 이 누갈다의 영원한 신앙과 사랑의 보금자리일 뿐 아니라 온 전주 신도의 마음의 보금자리가 되어 있는 것을, 끊이지 않고 올라가는 순례 객의 모습에서 알 수 있었다.

그런 감회와 감동을 새기며 우리는 시내로 돌아왔고 전동 성당에 잠시 들른 자리에서 본당 사목회장이신 안득수(의학박사)교수를 만났다. 그리고 안 회장으로부터 바로 우리가 다녀온 그 인상적이던 성지로 가는 길이 교구의 계획에 의해 대대적으로 개발 조성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잠시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천연의 바위 길이 깎이고 다듬어져 계단이 된다면 순례자의 걸음은 편할지 모르지만, 자연의 원형이 지녔던 천연의 성소와도 같던 신성함이나 신비로움은 느끼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중바위 성지의 특색은 바로 그 천연의 성소 같은 바위 길에 있는데 하는 생각으로 잠시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나는 문득 그리스 아테네에서 아크로폴리스로 가는 도중에 있던, 바울로 성인이 그곳에서 기도하시고 전도하셨다는 바위 산이 생각났다. 얼마나 많은 순례자들이 발에 닳고 닳았는지 반들반들하게 유리처럼 닦인 바윗돌, 자칫하면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질지도 모를 만큼 위험한 바위와 바위들이 연결된 길이었건만 자연의 원형 그대로를 보존함으로써 2천 년 전 초대 교회 시절을 방불하게 떠올려주던 것이다. 사실 나는 그때 바울로 성인이 그 바위 산 위에 서 계신 듯한 환상을 느껴볼 수 있었으며, 그것은 인공적으로 전연 개조되지 않은 자연의 원형이 바로 천지 창조의 한 순간을 연상할 수 있게 해준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진실로 천연의 성소라는 경외감에 옷깃을 여민 것은 나뿐이 아니었다.

치명자산 성지로 가는 바위 길도 바로 그 바울로 성인의 유적지를 방불케 하는 천연적 경관을 갖추고 있었다. 순례 객의 발길에 닳아 반들반들 길이 들고 윤이 나는 바윗돌의 매끄러운 감촉이 더한층 눈물겨움을 자아내게 하던 것이다. 성당을 아름답게 꾸미고 성지를 경건하게 조성하는 것은 우리의 당연한 의무다. 그러나 우리는 그 거룩한 일을 하기에 앞서 인간의 소망보다 먼저 하느님의 소망이 어떤 것일까 하는 것을 생각해보아야 할 것 같다. 가령 수십억을 들여 성전을 신축한다, 성지를 조성한다 하는 일이 하느님을 위해서라면 그분의 뜻에 맞게 그분이 ‘보아서 좋아야’할 것이다. 당신이 만드신 태초의 창조물에 함부로 망치를 대 깨트리는 것을 좋아하실는지, 가난한 말구유에서 태어나신 분이 번쩍이는 수십억짜리 호화 성전을 마땅하게 생각하실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일이다. 내 기억에 지금도 강렬하게 남아 있는 것은 ‘도미네 붜바디스’성당의 퇴락하고 황폐하던 작은 공소의 모습이다. 하느님은 가장 낮은 자리 자연스러운 곳에 계시리라고 나는 믿는다. 사실로 치명자산 성지의 특색인 저 천연의 성소인 바위 길을 오르내리면서 전주의 신자들은 태초 하느님이 창조하신 자연의 경이로움을 되새기며, 그 길을 걷는 작은 고행을 통해서나마 예수님과 순교자들이 가신 길을 묵상하고 있으리라 믿는다.

 

 보는 눈과 듣는 귀

마르코복음 8장 18절을 보면 “여러분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합니까?”라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는 말이 있다. 생각하면 이 말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모든 사람에게 던져지는 준엄한 심문이 아닐까 싶다. 날마다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 공개되는 청문회장의 광경을 지켜보면서 다시 한 번 이 말을 그들 증인들에게 던져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참으로 “어찌하여 당신네들 지난날 눈이 있으면서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으면서도 듣지 못하였느냐, 당신들의 잘못된 행적을 지켜보고 있는 국민의 눈, 역사의 눈, 신의 눈이 있음을 어찌 보지도 듣지도 못하였던가?” 라고. 흔히 ‘격동하는 시대’라는 말이 있다. 이러한 격동하는 시대일수록 사람들은 이성을 잃고 판단력을 그르치며 사물의 면목을 제대로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것 같다. 그것은 근시안적인 색안경으로 역사에 대한 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모든 사물을 아전인수 격으로 자기 척도에 맞추어버리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의 ‘눈을 맹목적으로 만들어버리고 마음을 굳게 닫아걸고 눈을 가지고도 보지 못하게 하고 마음으로 깨닫고 뉘우치지 못하는 것이다.’ (요한 12,40 참조) 만일 청문회장의 저들 증인이 지난날 조금만 보는 눈과 듣는 귀를 가졌더라면 그래서 온 국민이 희망이 무엇이고 뜻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옳게 판단만 했더라면 그리고 역사의 수레 바퀴가 결코 뒤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기만 했더라면 오늘 저 같은 불행을 초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생각하면 현대의 많은 사람들이 남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것은 능력이나 지식이 없어서가 아니라 알고자 하는 마음의 자세, 보고 듣고자 하는 타인에의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을 알고자 하는 태도는 대화 또는 인간적 교섭의 시작이고 상호간의 이해와 사랑의 출발점이다. 그럼에도 서로가 서로를 알려고 하는 노력은 하지 않고 젊은 세대는 기성 세대를 향해 ‘알아주지 않는다.’ 불평하고 어른들은 아이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개탄한다. 많은 사람들이 서로 ‘이야기가 통하지 않는다.’고 외면하고 ‘믿을 수 없다.’ 고 등을 돌린다. 사람이 있는 곳 어디에서나 화합보다는 분열이 있고 단절을 외치고 소외를 느끼며 고독에 빠져 방황하고 괴로워한다. 이런 현상을 놓고 지식인들은 ‘과학이 발전했기 때’이고 ‘사회가 복잡하기 때문’이며 ‘인간성을 상실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인간은 서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되며 대화와 나눔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물론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원인이나 이유가 아니라 마음의 자세다. 마음 가짐, 생각을 고쳐먹지 않는 한 어떠한 대화도 나눔도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의 일시적 속임수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보는 눈과 듣는 귀’를 갖는 일이다. ‘보는 눈과 듣는 귀’, 그것은 깨달아 알고 뉘우치고 시정하는 정신을 말함이다. 바로 ‘배우고 생각하는’사제다. 삶이란 끝없이 일을 가는 나그네와도 같다. 길을 가는 나그네란 개인이건 인류건 본질적으로 미래를 향해 결정 지워진 존재들이다. 말하자면 인간이라는 생명체는 앞을 향해 나가게끔 정해진 존재로 자신의 미래와 사회의 미래를 자기 나름대로 만들어가야 할 책임이 있다. 하면 미래란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이 걸어온 과거의 경험과 업적이 뿌리가 되어 거기서부터 이끌어져 나오는 것이다.

삶이란 누구나 수없이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오늘보다는 나은 내일을 창조해가는 일이다. 만일 지나온 과거가 잘못되었으면 잘못되었을 수록 솔직하고 용감하게 시인하고 뉘우치고 회심하여 바로 일어설 때 비로소 인간답게 살아갈 새 길, 미래가 열릴 것이다. ‘보는 눈과 듣는 귀’란 외부를 향한 것이기도 하지만 보다 더 자신의 내부를 향한 준엄한 채찍인 것이다. 자신의 잘못을 낱낱이 벗겨놓고 직시하는 성찰과 비판의 눈이며 스스로 회심하여 잘못을 사죄하는 마음의 질책을 듣는 귀다. 하여 참다운 의미의 보는 눈과 듣는 귀가 없다면 인간의 미래 또한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배우고 생각하지 아니하면 종잡을 데가 없고 생각하고 배우지 아니하면 또한 위태롭다고 한 논어의 ‘배우고 생각함’이란 말도 바로 노는 눈과 듣는 귀를 갖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사실 인간이 인간답게 살고자 노력한다면 주위의 올바른 견해나 진지한 이야기, 세상의 규범에 귀 기울이고 그 말들을 들을 줄 알아야 한다. 보고 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을 늘리고 그들의 말을 기록하는 일이 아니라 그것을 음미하고 자기 것으로 받아들여 실천하는 일이다. 하여 보는 눈과 듣는 귀는 바로 실천으로 이어지는 줄이어야 한다. 실천이 없는 다시 말하여 행동하지 않는 눈과 귀는 죽은 눈과 귀다. 그러기에 인간의 가치는 무엇을 생각했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실행했느냐에 있다고 말한다.

여담이지만 웃지 못할 일은 5공화국의 비리를 캔다는 정의의 사도 같은 의원들이, 여야가 사사건건 대립하면서도 세비 80프로를 인상한다는 문제에 한해서만은 일치단결로 합심이 되던 일을 어찌 보아야 할는지, 초록은 동색 그게 그거구나 하는 실망감을 금할 길이 없었다. 문득 지난 40년 민주화의 투사로 싸워왔다는 야당 인사들이 자리를 바꿔 집권당으로서 국정을 장악해왔다면 과연 그들은 오늘 저 같은 청문회 석상 증인의 자리에 서지 않을 만큼 바르고 깨끗한 정치를 해냈을까. 어쩌면 5공의 비리와 대동소이한 비리를 저지르지는 않았을까 의심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념과 실행의 차이를 단적으로 느끼게 하는 문제라 하겠다.

각설하고 이런 격변하는 사회일수록 우리는 올바르게 보는 눈과 듣는 귀를 갖고 실천에 임해야 할 것이다. 사실 남의 이야기를 잘 들을 줄 아는 태도 그것은 하나의 뛰어난 능력이다. 가령 상대방이 하는 말이 말 같지 않은 소리라 해도 조용히 들어내는 인내심을 가진 사람은 세상을 살아가는 데 조바심하거나 서두르지 않는다. 잘못 속단하거나 실수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그만큼 듣는 일을 통해 깊은 이해력과 통찰력이 훈련되어 있고 비판력이 생기는 때문이다.

나를 내세우지 않고 남의 말을 경청할 줄 아는 사람은 우선 상대방의 신뢰감을 얻는다. 무슨 말이든 의논할 수 있다는 편안함과 무슨 일이든 맡길 수 있겠다는 믿음을 갖게 한다. 현대는 PR 시대라 얼마만큼 나의 능력, 나의 자질을 남에게 알려주고 드러내 보여 인정받을 수 있을까에 만 마음을 쓰기 때문에 어디서나 열심히 자기를 선전하는 일에 전력을 기울인다. 그런 자기 선전의 피상적인 심리가 사물을 꿰뚫어보고 듣는 귀를 저해하며 참다운 의미의 배움과 사색의 길을 가로막는 요인이 되는 것이다. 진실로 보는 눈과 듣는 귀를 가진 사람은 설사 그것이 옳지 않은 말일지라도 그 말을 통해 배우게 된다. 즉 남의 얼굴에 묻은 때를 보고 내 얼굴을 씻듯이 남의 잘못을 거울삼아 나를 바르게 고치게 되는 것이다.

하여 5공의 비리가 컸기에 앞으로의 국정은 전철을 밟지 않고 과거를 거울삼아 내일을 설계할 것이라 믿어본다. 잘못을 치죄하고 규탄하고 밝혀내는 일도 중요하겠지만 끝없이 그 일에 유착되어 청문회만을 거듭하는 일도 능사가 아니라 여겨진다. 새해엔 새 마음 새 뜻으로 묵은 얼룩을 하루빨리 지워버리고 참신한 혁신에 국정을 기울여주었으면 싶다. 죄는 법으로 다스리면 될 일, 날마다 죽은 짐승 난도질하는 식의 심문도 보기 싫고 증인들의 비겁한 도회술도 더는 보기 싫다. 인간의 벌거벗은 치부들이 칼날을 쥔 자나 칼자루를 쥔 측이나 똑같이 추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의 성자라 할 수 있는 슈바이처는 “나는 저항하기보다는 창조를 택하겠다.”고 말한 바 있다. 진실로 이 시대 이 시점에 서서 우리가 다시 한 번 생각해볼 만한 말이 아닐까 여겨진다.

중요한 것은 상처를 치료하고 한시바삐 재건하는 일이다. 여야가 서로 반대하기 위한 반대, 비생산적 논쟁으로 귀중한 국정을 그르쳐서는 안 될 일이다. 요컨대 진실로 보는 눈과 듣는 귀는 개인도 국가도 우선 자기 내부로 눈과 귀를 돌려 자기 안의 미운 얼굴 잘못된 소리를 보고 듣는 눈과 귀를 의미한다. 올바른 눈과 올바른 귀는 바로 자신을 비판하고 깨우치고 반성하며 회심하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라 믿는다.

 

예수님과 만나는 길

정토진종이라는 일본의 한 불교 종파가 운영하는 사립소학교에 다니던 나는 일요일에도 주일학교에 나가 스님의 목탁소리와 설법을 듣는 착한 아기 불제자(?)였다. 말하자면 교회와는 인연이 먼 곳에서 이따금 성탄절 같은 때에나 지나가는 구경꾼처럼 교회 안을 들여다보았을 뿐이었다. 그러다 어떤 섭리에서였는지 마흔이 넘은 중년의 나이에 이르러 비로소 나는 교회의 식구가 되었고 하느님 백성이 되어 처음으로 성탄절 미사에 구경꾼 아닌 식구로 참석하게 되었다. 스물 몇 해전 일이다. 하면 어떤 계기로 하여 나는 스스로 내 발로 걸어서 교회에 가게 되었던가 생각해본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집은 공교롭게도 집을 가운데 놓고 위와 아래로 두 개의 성당이 있다. 위로는 교구 본당인 신당동 성당이 있고 아래로는 성 베네딕도 수도원의 성당이 있다. 나는 두 개의 성당 사이에서 40여 년을 살아왔다. 그럼에도 교회의 식구가 되기 전 20여 년 동안을 무심히 성당 앞을 지나다녔다. 어쩌다 그림에서라도 예수님의 고상을 보게 되면 본능적으로 얼굴을 돌려 외면했다. 끔찍한 모습이 등골이 오싹하도록 보기 싫었던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과는 멀고 먼 거리에 있었던 내가 어느 날 그분의 집으로 갈 결심을 하게 된 것은 순전히 남편의 권유와 부탁 때문이었다. 남편은 작고하신 고 장면 박사님과 각별한 사이였고 그분의 감화로 나보다 먼저, 나도 모르게 입교를 했다. 혜화동 성당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온 남편은 그 날부터 나를 교회로 끌기 위해 갖은 말로 권유하고 종용했다.

그러나 처음 얼마 동안 나는 완강히 거부했다. 8할은 남편에 대한 시위였고 나머지는 얼마간의 망설임과 불안이었다. 사실 한마디 상의도 없이 어느 날 세례를 받고 돌아온 남편에게 나는 심한 배신감을 느꼈고 때문에 일부러 그 앞에서 완강히 고집을 부리고 입교하기를 거부했던 것이다. 그렇게 얼마 동안을 버티면서 나는 어느덧 마음속으로 영세를 결심하게 되었고 기왕 세례를 받을 바에는 정식으로 과정을 거치고 싶어 명동성당에서 실시하고 있던 지성인을 위한 교리강좌에 출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6개월 후인 69년 12월 크리스마스 수일 전에 명동성당에서 꽃과 촛불과 축복 속에 미사보를 받아 머리에 썼던 것이다. 물과 기름으로 이마를 씻고 다시 태어나는 세례성사 때 무엇이든 간절한 소망 하나를 빌면 반드시 이루어주신다는 누군가의 귀띔을 들으면서도 나는 정신 없이 그 모든 성사를 그저 공중에 붕 떠 있는 것 같은 몽롱한 상태로 끝내고 말았다.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고 떠오르지도 않았다.

그렇게 아쉽고 안타깝고 너무도 짧게 모든 의식은 끝나 버리고 나는 첫 미사와 첫 영성체의 경험을, 역시 짧고 몽롱하게 치르고 말았다. 그것은 한 순간 꿈을 꾼 것 같은 비현실 감이었다. 그러나 그 기억은 강한 낙인처럼 내 기억 속에 깊이 찍혀 있고 그 날부터 무엇인가 내 생에 보이지 않는 변화가 싹트기 시작한 것만은 사실이었다. 세례성사를 치르기는 했으나 나의 외적 생활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고작 한 주일에 한 번 주일미사에 참석하는 정도일 뿐 신심은 그렇게 쉽게 자라는 것이 아니었다. 이제까지는 외면하고 부정하고 모르는 사람처럼 무심히 바라보았던 예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마음에 사람처럼 무심히 바라보았던 예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마음에 받아들이자고 결심하면서도 낯설고 서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나의 하느님, 나의 아버지. 하고 입으로는 불러도 마음에까지 와 닿지 않는 소원 감을 쉽사리 지울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내게 슬픈 일이나 괴로운 일이 생겼을 때는 달려가 예수님을 부르다가도 지나고 나면 까맣게 잊어버리고 돌아 다니는 이기적인 마음이 스스로도 싫었다. 예수님을 찬미하고 흠숭 하기보다는 끊임없이 보채는 아이처럼 필요한 것을 달라고 조르기만 하는 이것은 믿음이 아니다. 마치 마음 좋은 물주 하나 정해놓고 다급할 때면 쫓아가 무작정 떼쓰는 이런 것이 믿음일 수는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지금도 거의 마찬가지다.

돌아서면 까맣게 당신을 버리나니 버리고 그 문 밖에서 내가 떨거나 혹은 나의 문 저편에서 당신이 떨거나 우리는 그같이 서로 하나이기 원하면서 하나이지 못하는 G선상의 아리아 날마다 하나씩 늘어가는 죄목과 날마다 한 눈금씩 자라는 십자가를 지고 오늘도 나의 빈 영혼의 병실엔 바람 누나니 버리고 못 잊는 회한과 불망의 바람 부나니 서른세 살 청 무우처럼 살다 간 한 사나이의 삶과 죽음의 아리아가 울리나니 나의 병실엔 (졸작 나의 예수 )

이같이 끊임없이 흔들리며 깊어지지 않는 믿음의 슬픈 자화상을 그려보기도 하면서 어느덧 20여 년이 지났다. 어떻게든 좀더 가까이 다가서고 싶고 조르고 보채는 철없는 기도가 아니라 찬미하고 흠숭하며 그 앞에 앉기만 해도 기쁨이 되는 그런 신실한 믿음을 갖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한 기회를 만나 성령쇄신 기도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사실 나갈 때까지만 해도 어느 수녀님의 간곡한 권유를 뿌리칠 수가 없어 마지 못하는 기분으로 나갔던 것이다. 2박 3일의 일정은 허약한 나에겐 적지 아니 힘겨운 강행군이었다. 연속되는 강의 또 강의, 그룹대화, 기도, 미사 등이 아침 8시부터 밤 11시까지 계속되는 쉴 틈 없는 과정 속에서 쓰러질 것만 같은 피곤을 겨우겨우 이겨 나갔다. 끝나는 날 아침 강의를 마치고 곧 성당으로 모였다.

마침내 기다리던 성령기도의 시간이 되었다. 신부님과 봉사자들의 나직한 기도가 이어지면서 한 사람 한 사람 개별적인 안수기도가 시작되었다. 여기저기서 웅얼거리는 낮은 소음 같은 웅성거림으로 성당 안은 이상한 열기가 차 올랐다. 봉사자들의 부드럽고 간절한 목소리가 무상무념으로 마음을 열고 앉아 기도하는 사람들의 마을을 여린 감동과 따스함으로 채웠다. 모든 것을 어린이처럼 주 앞에 내맡긴 그들의 가슴에 어떤 변화가 오고 있는가. 나는 눈을 지그시 감고 나 자신의 동굴을, 오래 돌보지 않아 먼지 끼고 쓸쓸한 마음속 동굴을 들여다보았다. 아직도 조개껍질처럼 단단하게 닫혀 있는 고집스런 자아, 한구석에 웅크린 깨끗이 용서하지 못하는 미움의 잔해들 그리고 세상에 대한 작은 욕심들, 그런 것이 내 안에 남아 있는 한, 성령은 내게 임하시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나를 한없이 고독하게 하는 것이었다. 내 주위에선 놀랍게도 신비한 변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어떤 이는 전신을 잔잔히 떨기도 하고 어떤 이는 소리 죽여 눈물을 흘리며 울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입을 열어 이상한 언어를 말하기도 했다. 그 이상한 언어는 아직 어린이가 첫 말을 배울 때처럼 지극히 단순하고 동일한 음의 반복 같기만 했지만 그것은 이상한 열기와 멜로디를 타고 자기도 모르게 입을 통해 유출되는 듯했다. 백여 명의 기도 자들이 모인 작은 성당 안은 이상한 노래 , 이상한 말 과 그리고 소리 없이 흐르는 통회의 눈물과 가슴 떨림으로 삽시간에 하나로 일치된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루어나갔다. 그 중에도 이상한 노랫소리는 흡사 천상의 어느 한 순간을 방불케 하는 그런 맑고 경건하고 황홀한 음의 코러스를 이루어 모든 이의 가슴을 세례 때의 물과 기름처럼 촉촉이 스며들어 적시는 것이었다.

그것은 지극히 짧은 시간이었다. 지도 신부님은 결코 긴 시간을 그 같은 흥분과 고조된 상태를 허용하지 않으셨다. 모든 이의 갖가지 기도가 하나의 우렁찬 코러스를 이루어 강물처럼 도도해지는 순간 자칫 넘치려는 방만한 감성의 일탈을 한 순간에 정지시키고 다시 조용하고 나직한 기도와 침묵으로 이끌어 들이는 것이었다. 실로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감동의 코러스, 그것은 바로 사람과 성령이 일치하는, 영혼의 가장 순수 결합의 아름다운 순간임을 나는 보았다. 어떠한 이지러지고 때묻은 영혼도 그 성령의 불의 도가니에선 깨끗이 닦이고 씻기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은 황홀하고 감동적인 시간이었다. 그 성령쇄신 기도회를 마치고 이미 두 달이 지나고 내 마음은 또다시 세상사에 찌들고 때묻어 전처럼 불순해졌지만 그때의 그 기억을 되살리는 일만으로도 마음속에 청정한 샘물 한줄기를 간직하고 있는 듯 신선하고 그리워지는 것이다.

 

 성서의 여성들

성서에 보면 다윗은 흔히 영웅들이 그러하듯 호색했었던지 여러 처첩을 거느린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중에 우리야의 아내 바쎄바의 이야기는 다윗 가의 어두운 죄를 느끼게 하는 이야기로 널리 알려진 바 있다. 그러나 그가 아직 이스라엘 왕이 되기 전에 맞이했던 두 아내 미갈과 아비가일의 이야기는 더한층 여성의 입장을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미갈은 원래 사울왕의 딸로서 사울이 다윗을 회유하기 위한 일시적 수단으로 딸 미갈을 그의 아내로 내주어 이른바 부마를 삼았던 것이다. 그러나 사울은 결코 다윗에 대한 적개심을 버린 것이 아니었고 기회 있을 때마다 다윗을 죽여 없애려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침내 딸 미갈이 사는 집에 사람을 보내어 잠든 다윗을 죽일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것을 안 다윗의 아내 미갈은 남편의 침상을 위장하여놓고 다윗을 몰래 도망치게 함으로써 아버지 사울의 흉계로부터 구해내었다. 실로 아내 미갈의 헌신적 사랑이 아니었던들 다윗의 생명은 어떻게 되었을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다윗의 또 한 아내 아비가일은 원래 나발이라는 상당한 부호의 처로서 재색을 겸비한 여성이었다. 그러나 그의 남편 나발이란 사람은 가진 것에 비해 성품이 인색하고 거친 데다 생각 또한 모자라는 사람이었다. 다윗이 부하를 거느리고 광야에서 곤궁할 때 나발에게 사람을 보내어 얼마간의 도움을 청했지만 나발은 오히려 화를 내고 욕설을 퍼붓는다. 도대체 다윗이 누구냐? 이생의 아들이란 자가 누구냐! 요즈음은 주인에게서 뛰쳐나온 종놈들이 저마다 우두머리가 되는 세상이거든! 내가 마련한 음식들을 어디서 굴러 온지도 모를 놈들에게 어찌 주랴. 하며 거절했다.

이 말을 전해 들은 다윗은 격분하여 나발을 치러 가는데, 그때 이 사실을 미리 알게 된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이 남편을 대신하여 갖가지 음식물을 장만해 갖고 다윗 앞에 나아가 백배사죄하고 나발의 잘못을 비는 것이다. 결국 아비가일의 슬기로운 중재 역할로 남편 나발의 생명뿐 아니라 그 집안에 밀어닥칠 무서운 화를 사전에 막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다윗으로 하여금 공연한 살생을 저질러 피를 흘리는 불상사도 미연에 방지하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후 나발은 야훼의 벌을 받아 죽고 아비가일이 정식으로 다윗의 청을 받아 그의 아내가 된다. 이상의 두 여성의 경우는 남편을 위한 아내의 위치에서 그들이 어떻게 남편을 도와 지아비를 위기에서 구해내고 그럼으로써 남편의 앞길을 열어주었는가를 보여주는 지혜롭고 눈물겨운 이야기들이다.

그 밖에 성서엔 더 크게 국가적 위기를 구해낸 여성들의 이야기도 나온다. 가장 극적인 여성의 이야기로는 예리고의 창녀 라합의 이야기가 있지만 그 이야기는 전에 쓴 적이 있어 여기선 생략하고 유딧과 에스델의 이야기만을 언급하겠다. 유딧과 에스델은 여성이면서도 남성들이 할 수 없는 일을 해냄으로써 자기 편을 승리로 이끌어간 대단한 여성들이다. 유딧은 이스라엘의 백성 므라리의 딸로 아름답고 총명하며 하느님을 공경하는 정숙한 여인이었다. 이스라엘이 아시리아의 침공을 받게 되어 풍전등화의 위기를 당하게 되었다. 도성을 지키는 남자들은 할 바를 모르고 속수무책, 마침내 온 도성을 적군에게 내어줄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때 유딧은 단신으로 적진에 들어가 아름다운 용모와 뛰어난 화술로 계교를 꾸며 적장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쳐서 자루에 넣어가지고 무사히 도성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결국 아시리아군은 패배를 하고 이스라엘은 유딧이란 한 여성의 기지와 담력으로 위기를 극복한 것이다. 그녀의 행동을 지탱한 것은 물론 신앙의 힘이었다. 그녀는 제 겨레 앞에서 이렇게 말한다. 내 얼굴이 그를 유혹하여 그를 죽게 했으나 그는 나를 범하여 더럽히거나 욕을 보이지는 못하였다. (유딧 3,16)그녀가 얼마나 정절을 지켜온 대단한 여자인가 하는 것을 드러낸 말이다. 사실 그녀는 남편을 여의고 혼자 사는 과부로서 삼 년 동안 집 옥상에 천막을 치고 베옷을 입고 단식을 하며 수절해온 경건하기 이를 데 없는 여성이다.

다음 에스델 역시 아름답고 슬기로운 지혜로 왕의 총애를 받은 여성이다.

그녀는 바빌론에 포로로 사로잡혀 온 유대인 모르드개의 사촌 누이로 아하스에로스 왕의 왕비가 되었다. 왕의 신하 중에 하만이란 재상이 있어 전 유대인을 학살하려는 흉계를 꾸민다. 바야흐로 유대인들이 닥쳐올 박해를 목전에 놓고 괴로워할 때 에스델이 역시 용모와 슬기로 왕을 회유하여 유대 백성을 학살로부터 구해내는 것이다. 그녀의 힘 역시 신앙에서 오는 것이었다. 하면 이 두 여성은 앞의 다윗의 아내들과는 달리 나라와 겨레의 위기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한 몸을 죽음을 무릅쓰고 위험에 던져 넣은 위대한 여성들이다.

물론 그 성격은 조금씩 다를지 모르나 여성의 힘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그들 여성을 통해 우리는 아내로서 또는 부족이나 겨레의 일원으로서의 여성의 비극적이며 비장한 위치를 새삼 절감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여성의 역할이나 힘을 이렇게 거창하게 성서에서까지 끄집어내지 않아도 오늘날 모든 여성은 충분히 자각하고 또 실천하고 있다. 다만 요즈음 같은 난세에 온갖 악이란 악이 난무하는 시대에 그들 숱한 범죄자들의 뒤에 어머니가 있고 아내가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이다. 한 가정에서나 한 나라에서나 언제나 가장 위급한 순간에 가장 결정적인 행동을 결행해야 하는 여성, 아담의 가장 깊은 곳 가슴속에 숨어서 그 심장을 에워싸고 보호해야 하는 갈빗대, 다시 말하여 그들 생명을 지키고 보호하는 사명을 창조주로부터 부여 받은 여성의 역할이 오늘날처럼 힘들고 어려운 때가 일찍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여권은 신장되고 여성상위 시대라고는 하지만 여성의 능력, 여성의 힘이 오늘날처럼 무력하고 허약하게 느껴진 때도 일찍이 없었던 것 같다. 진실로 무슨 힘으로 이 시대의 난무하는 악을 다스릴 수 있을까.

 

 제자의 발을 씻어주는 예수

유명한 신학자이자 성직자인 토마스 아퀴나스 는 만년에 이르러 갑자기 글 쓰기를 중단하고 저작 중이던 신학 저술을 밀어놓고 말았다. 그런 아퀴나스를 안타깝게 생각한 비서가 여러 가지 말로 저술을 끝마치기를 권유하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레지날도 형제여, 몇 달 전에 전례(미사 집전)를 거행하는 도중 나는 하느님이 무엇인가를 몸소 겪었다네. 그날부터 글 쓰고 싶은 의욕이 싹 가지고 말았네. 사실 지금 나로서는 일찍이 내가 하느님에 관해 썼다는 그 모든 글들이 죄다 북더기 같이만 여겨질 뿐이라네. 이 이야기는 참 앎 이라 할까, 깨달음이 무엇인가를 단적으로 시사해주는 일화라 하겠다.

참으로 우리가 무슨 말로 신을 이야기하고, 인생을 말하고, 삶을 증언할 수 있을까, 어떠한 말도 참 깨달음 앞엔 하나의 허언이며 수박 겉핥기 밖에는 되지 않을 것을. 말하면 말할수록 희석되고 핵심에서 멀어지는 체험을 범상한 우리도 한두 번은 겪어본 터이다. 하여 차라리 아는 자는 말하지 않는다. 는 말도 나올 법한 것이다. 결국 우리는 모르기 때문에 수 없는 말을 겁도 없이 떠들고 있는 지도 모른다. 사실 우리가 안다는 것이 얼마나 얄팍한 지식이며 들은 풍월에 불과한 것인가를 먼저 우리는 알아야 한다. 누군가 말하기를 모른다는 것을 안다는 일이 참 앎의 시작이라고 했듯이, 나는 나 자신이 힘없고 약하고 아는 바 없는 지극히 가난한 자임을 깨닫는 일에서부터 우리의 삶은 시작되어야 하리라 믿는다. 때문에 모르는 것을 깨달아 알고, 못난 나, 가난하고 초라한 나, 힘없고 약한 나를 높이고, 강하게 하고, 크게 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염원할 때 인간의 발전, 인류의 문화도 성숙되어가리라 본다. 경영자의 삶도 바로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그 겸손과 참다운 무지의 지에서부터 출발할 때, 상하 좌우 동료간의 친화와 통솔이 이루어지리라 본다. 나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다는 깨 닮음은 인간이 갖는 참다운 생각의 기본이며, 바로 그 생각하는 힘이 인간의 위대함을 만든다는 파스칼의 말은 결코 낡은 고전이 아니다.

생각한다 함은 정신의 생명을 살게 하는 물과 같은 것이다. 한 포기 마른 갈대의 뿌리를 적셔주며 살게 하는 것은 물이다. 그 뿌리의 물을 한 방울씩 말려버린다면 갈대는 죽고 만다. 마찬가지로 우리 삶에 만일 생각하는 마음, 생각하는 능력이 없다면 우리는 밥 먹고 살만 찌는 동물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경영자의 삶은 끊임없이 생각하는 삶이어야 할 것이다. 얼마나 이윤을 남기고 얼마나 종업원을 교묘히 부리는가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단가를 줄이면서도 품질을 높이고 고객의 신용을 얻을 수 있도록 성실을 다하고 기술을 개발하느냐 하는 생각이다. 그리고 종사자는 관리자의 눈을 속이고 요령을 부리는가 하는 생각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내가 만든 물건이 완전에 가깝게 만족한 것이 될 수 있을까. 적어도 예술가가 작품을 만들 듯이 전심전력으로 일에 임하는 생각이다. 진실로 내가 맡은 일이 아무리 하찮은 일일지라도 그 일에 긍지와 책임을 느낄 때 일의 성과는 저절로 달라질 것이다.

연탄을 찍는 사람은 연탄 한 장 한 장에, 단추 구멍을 뚫는 사람은 단추 구멍 하나하나에 자신의 온 정신을 거는 자세, 그것이 바로 생각하는 삶이며 스스로 모른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오히려 최선을 다하는 삶이 되는 것이다. 안다고 생각하는 일은 자신 만만하기 때문에 대강대강 해치우게 되고, 따라서 실수가 생기기 쉽지만 모른다는 겸손한 마음은 어떠한 일 앞에서도 대강이란 허용이 안 되며, 따라서 성심 성의껏 최선을 다할 수 있는 법이다. 흔히 봉사라는 말을 많이 사용한다. 심지어 백화점 같은 데서도 대 염가 봉사 라는 말을 버젓이 쓰고 있다. 봉사란 글자 그대로 받들어 모시는 일이다. 우선 봉사엔 대가를 원하지 않는다. 무보수 무상의 행위이다. 이웃을 위해 가난한 이를 위해 지체 부자유한 이를 위해 대가 없이 도와주고 거들어주는 일을 뜻한다. 하면 직장에서의 자기 직무를 봉사라고 말할 수 있을까. 엄밀한 의미에서는 가당치 않을는지 모른다.

우선 경영자는 봉사자가 아니라, 사업주로서 고용인을 사역시키는 입장이니 봉사자가 될 수 없다. 고용된 근로자들은 일한 만큼의 보수를 그것도 되도록 많은 보수를 받기 원하는 입장이니 결코 봉사자가 될 수 없다. 그럼에도 그 직장이야말로 사회에서 가장 기본적인 봉사의 터전이 되어야 한다고 나는 본다. 봉사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남이 갖지 못한 것을 도와주는 일이다. 가령 물질적으로 혜택을 받고 있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을 자신의 물질로 도와주고, 건강을 혜택 받은 사람은 자신의 건강으로 병자나 불편한 사람을 도와주며, 시간이 남아도는 사람은 시간이 없어 바쁜 사람을 도와주는 일이다. 그렇게 생각할 때 한 기업체 안에서 경영주는 자신이 지닌 물질로 가난한 근로자들의 궁핍한 생활을 도와주고, 근로자들은 자신이 지닌 지식이나 기술 또는 노동으로 경영주를 도와 기업을 발견케 함으로써 도와주는 것이다. 말하자면, 상부상조하는 연대 관계 속에 서로 돕고 도움 받는 봉사 관계에 놓여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봉사정신을 갖고 서로 임할 때 적어도 저 불행한 노사분규의 문제는 끼여들 여지가 없을 것이다.요컨대 성서의 말씀대로 섬김을 받고 싶거든 먼저 섬기라. 고 한 말을 우리가 믿기만 한다면, 믿고 실행한다면 경영의 웬만한 어려움은 극복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다시 말하여 경영주는 섬김을 받고 싶거든, 즉 사용인들의 헌신적인 봉사를 받고 싶거든 먼저 그들을 헌신적인 봉사로 섬겨야 할 것이며, 마찬가지로 사용인 또한 경영주로부터 응분의 섬김, 봉사를 받고 싶거든 성심성의를 다해 맡은 일을 완수해내야 할 것이다.

나를 감동시키는 성서의 대목이 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예수의 이야기다. 해방 절 축제 전날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야 할 당신의 시간이 온 것을 아시고… (요한 13장)이렇게 시작되는 글은 예수께서 손수 대야에 물을 떠다 허리에 수건을 차고 일일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주요 또 선생인 내가 여러분의 발을 씻었다면 여러분도 마땅히 서로 발을 씻어주어야 합니다… 그렇다. 참 스승, 참 주인 다시 말하여 참된 윗사람의 모범이 어떤 것인가를 예수는 단적으로 보여주신 것이다. 이러한 정신, 이러한 자세야말로 바로 이 시대 경영인이 새겨야 할, 경영인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새겨야 하는 지침이고 정신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제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법을 배워야 할 때

나뭇잎이 떨어진다. 아득한 곳에서 내려오듯 하늘의 먼 정원이 시들은 듯 하늘하늘 거부하는 몸짓으로 떨어진다. 깊은 밤 무거운 대지가 온 별들로부터 정적 속에 떨어진다. 우리도 모두 떨어진다. 이 손도 떨어진다. 보라 다른 것들을, 만물이 낙하하는 것을 그러나 그 한 분이 있어 이 낙하를 한없이 부드러운 두 손으로 받아주신다. 가을이면 생각나는 릴케의 시 가을 이다.

점점이 떨어져 내리는 자연의 나뭇잎을 바라보면서 시인은 무엇을 생각했던가. 지상의 온갖 것은 마침내 떨어져 땅으로 돌아가는 것을, 생명 있는 모든 것은 마지막 낙하를 위해 예비되어 있는 것을 생각했던 것이리라. 그러나 시인의 눈에는 무거운 지구도 정적 속에 떨어지고 인간의 생명도 움직임도 언젠가는 소멸해가지만, 그 떨어짐은 단순한 소멸이 아니라 오히려 낙하 속에 종말적 사멸을 초월하는 하나의 구원이 있음을 감지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누구인지 모르는 그 한 분이 계시어 떨어지는 생명들을 한없이 부드러운 두 손으로 받아주고 계심을 증언하고 있다. 하여 릴케의 낙하는 죽음이 아니라 죽음을 넘어선 구원이며 자연과의 일치 승화가 된다. 그같이 온갖 사물 안에 내재한 신의 숨결을 감지하고 있는 것이다. 떨어져 흙으로 돌아가는 낙하를 소멸로만 생각하기엔 너무도 허망하고 고독했는지도 모른다.

아무려나 지는 나뭇잎을 바라보고 있으면 더없이 쓸쓸해진다. 발에 밟히고 흙에 묻혀 이윽고 사라져버리고 말 그 한 장의 나뭇잎이 사람의 마음을 천근의 무게로 내려 누른다. 종말을, 죽음을 생각하게 하기 때문이다. 보다 더 지난 여름의 화려했던 한 시절, 다시 돌아오지 않는 시간들을 되살리기 때문이다. 하여 사람들은 가을의 적막을 이기지 못하여 거리를 배회하고, 길을 떠나고, 밤늦도록 포장마차에서 독한 술로 목을 지지고 어두운 부엌에서 진한 커피를 끓이며 고독한 밤의 적막을 달랜다. 그리고 추운 마음에 등불을 켜듯 쇼윈도에 넘치는 그 많은 빛깔 중에 오렌지 빛 셔츠와 화려한 스카프를 고르기도 한다. 인간이 고독하다는 것은 슬픈 죄악이다. 아니 죄악의 불씨가 된다고 함이 옳겠다.

어젠가 오래 전에 있었던 일이다. 일본의 모 기업체에서 한 경리 여사원의 독직 사건이 있었다. 중년의 독신녀인 그녀는 별로 친구도 없이 고독한 처지였다. 나이를 먹으면서 점차로 젊었을 때와는 달리 인생에 대한 자신도 없어지고 남의 눈치와 열등감에 시달렸다. 그녀는 언제부터인가 그런 비굴 감과 열등감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으로 돈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의 재산은 적었고 결국 회사의 경리에서 빼내게 되었다. 그렇게 빼내기 시작한 돈은 어느덧 거액에 이르렀고 그녀는 그 돈으로 호사스런 모피 코트를 사고 거금을 뿌려, 한 여배우의 패트런이 되었다. 스스로 돈 많은 여인이 되어 화려한 은막의 여배우를 후견 하는 후견 자로 미모와 명성을 자신의 돈 앞에 무릎 끓게 함으로써 고독과 열등감을 잊으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같이 호사스런 몸치장을 하고 패트런의 연기를 하는 그녀의 속 실상은 너무나 쓸쓸했다. 작은 아파트의 일상생활은 식사에서부터 의복에 이르기까지 검소하기 이를 떼 없었고 오히려 초라했다고 하니… 결국 그녀는 패트런 이라는 보호자의 변신을 통해 이 사회의 약자로서의 자신, 끊임없이 시달리는 열등감으로부터 탈출해보려는 자기 탈출의 갈망을 그 같은 행동으로 실현해보려 했던 것뿐이다. 그것은 단순한 허영이라든가 또는 여배우에 대한 특별한 감정 같은 피상적 심리가 아니라, 중년 독신 여인으로서의 생에 대한 깊은 고독감이 그 같은 탈선으로 나타난 것이다. 극단적인 예이긴 하지만 고독은 이같이 인간을 잘못 탈선하게도 하고 때로는 황폐하게도 만든다. 고독이란 생각하면 지나친 자기 집착에서 온다.

자기만을 생각하고 자기 앞의 일만을 근시안적으로 보며 자신에게 없는 것, 부족한 것, 결핍, 불만족스러운 것만을 생각하고 집착하는 데서 그 병은 시작한다. 다시 말하여 너무 근시안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만을 생각하고 추구하는 데서 오는 폐쇄 감이라고 할 수 있다. 어쩌다 남산이나 높은 빌딩 옥상에 올라가 시내를 내려다보면 지상의 사람 모습이 개미처럼 작아 보이고 다닥다닥 붙어 있는 지붕들이 이상하게 눈물겹게 느껴지는 것을 경험한다. 이 작은 도시에 1천만이 넘는 인구가 서로 어깨를 부비며 살겠다고 아등바등하는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 측은해지는 것이다. 그럴 때면 아마도 하늘 높은 천상에서 인간 사회를 원망하며 굽어보시는 하느님의 시선도 어쩌면 그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하게도 된다.

오래 전 아폴로 호 우주비행사의 체험담이 생각난다. 처음으로 달나라에 가면서 우주선 창 밖의 암흑의 우주 공간을 나를 때 거기 비치는 에메랄드 그린으로 빛나는 물의 혹성, 아름다운 별들, 떠나온 지구를 멀리 바라보았을 때 지상의 인간들이 서로 싸우고 미워하고 한다는 일이 얼마나 어리석고 부질없는 일인가 생각되더라고 했다. 인간은 결코 지구라는 혹성의 주인이 아니라 너구리, 여우, 새, 곤충, 물고기, 꽃, 나무들, 그 밖의 수많은 것들과 함께 지구라는 작은 집에 세 들어 살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참으로 우주라는 피안으로부터 바라본 원시안적 체험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인간은 지난 수천 년 동안 지구에 세 들어 사는 세입자임에도 불구하고, 마음대로 지구를 개조하고 파괴하고 오염시키고 서로 전쟁과 약탈을 일삼으며 조용한 날이 없이 소란을 피워왔던 것이다. 언제 우주의 집주인으로부터 추방당할지도 모르는 짧은 생을 바둥거리며 뛰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인간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법을 배워야 할 때라고 누군가는 말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법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실재하는 것이든 실재하지 않는 것이든 간에, 현상에 나타난 것이 아닌 속에 숨어 있는 의미, 참뜻을 깨닫는 법이라고 하겠다. 가령 인류의 출현을 대체로 3백만 년 전쯤이라고 한다. 지구의 역사는 45억 년, 그리고 지구상에 여타의 생물이 출현한 지는 30수 억년, 그렇다면 그 길이를 1년의 길이에다 비교해놓고 볼 때 인류의 역사란 고작 제야의 종소리가 울려 퍼질 1분 전에 불과한 길이라고 한다. 이같이 보이지 않는 지구나 인류의 아득한 역사 저 편을 마음의 눈, 상상의 눈으로 더듬어본다면 어떨까. 상상력을 움직여 지구라는 아름다운 세계를 상상하고, 지구를, 우주를 움직이는 그 보이지 않는 창조의 손을 상상하고, 한 그루 나무의 보이지 않는 뿌리의 어두운 부분을 상상하고, 지는 나뭇잎이 떨어져 돌아갈 땅을 상상하며, 릴케의 가을 처럼 어디선가 다시 그것들을 부드럽고 따뜻하게 받아주는 보다 큰 사랑의 품이 있다고 상상해본다면 어떨까. 참으로 보이는 부분은 작고 초라한 것임을 깨달을 때, 그리고 보이지 않는 부분의 크고 우람함을 마음으로 깨달을 때 우리는 쓸데없이 목소리 높여 자기 주장을 내세우는 오만을 부리지도 못할 것이며 자신이 처한 처지가 아무리 미약한 것이라 할지라도 누군가 크고 넓은 가슴에 의해 받들어지고 있음을 알고 비관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법을 배워갈 때 지구라는 작은 혹성 위에 잠시 세 들어 사는 자신의 입장을 깨닫게 되고 해야 할 역할, 감내할 일들도 분명하게 보일 것이다. 인도나 아프리카 민중의 기아를 근심하고 수재민의 고통을 같이 아파할 마음도 생길 것이며, 직장 내 인사 이동이라든가 몇 푼의 보너스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일도 자제할 수 있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눈을 가질 때, 남이 입은 패션이나 유행 같은 보이는 부분보다 그의 내면 인간성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이게 될 것이다.

이웃의 마음속에 숨은 눈물을 헤아려 위로하는 마음도 솟아날 것이다. 진실로 내 몸이 어디서 왔는가 그 보이지 않는 부분을 볼 수 있다면, 그리고 이윽고 내 몸이 돌아갈 곳을 볼 수만 있다면 마시는 한잔의 차에도 감회 어리고 흔들리는 지하철의 혼잡 속에서도 눈물 나는 따스함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물드는 한 장의 나뭇잎, 한 솔기 바람에도 영원을 생각하는 깊은 눈이 트여오지 않을까.

돌아가야지 전나무 그늘이 한 겹씩 엷어지고 국화꽃 한두 송이 바람을 물들이면 떠나온 집으로 돌아가야지 가서 한 생애 버려뒀던 빈 집을 고쳐야지 수십 년 누적된 병인을 찾아 무너진 담을 쌓고 창을 바르고 상한 가지 다독여 등불 앞에 앉히면 만월처럼 따뜻한 밤이 오고 내 생애 망가진 부분들이 수묵으로 떠오른다. 단비처럼 그 위에 내리는 쓸쓸한 평화 한때는 부서지는 열기로 날을 지새고 이제는 수리하는 노고로 밤을 밝히는 가을은 꿈도 없이 깊은 잠의 평안으로 온다. 따뜻하게 손을 잡는 이별로 온다.(졸작 가을 집 짓기 ) 생각나면 나 또한 젊은 날은 보이는 것만을 쫓아 끝없이 번뇌하고 슬퍼하고 초라해하며 살아왔다. 한 발자국만 뒤로 물러서서 먼 시선으로 바라보았다면 그렇게 바둥거리지 않아도 되는 것을, 한 시간만 늦추어서 여유 있게 생각했다면 그런 실수는 저지르지 않았을 것을… 하는 후회와 자괴로 점철되어 있다. 인간은 어차피 그 숱한 시행착오, 상처를 딛고서야 비로소 눈이 열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성인이란 자신의 전기를 지워지지 않는 잉크로 쓰는 사람이다.

유치원 원아나 국민학교 학동들은 얼마든지 낙서도 할 수 있고 썼던 종이를 찢어버릴 수도 있다. 청소년 시대만 해도 초벌스케치로 지울 수 있는 시간이 있다. 그러나 어른이 되면 언제부터인가 지울 수 없는 잉크로 자신의 인생을 써야 한다. 추가시험도 허락되지 않으며 추가등록도 없다. 힌두교도들의 소박한 생각처럼 다시 태어난다는 일도 생각할 수 없다. 그런데 자신의 책임하에 자신의 일기를 써가고 있다는 그 사실의 중요함을 우리는 얼마나 깨닫고 있을까. 진실로 그 중요함을 깨달을 사람, 다시 말하여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눈을 갖는 사람이면, 적어도 무모하고 어리석은 시행착오는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어머니의 손을 잡고 걸음마를 배우고 선생님의 가르침으로 산수를 배워가듯 나를 만드신 그 한 분의 뜻을 물어 삶의 일기를 써갈 수 있다면, 내 일기에 붉은 잉크로 가위 표를 해야 할 부끄러움도 줄어 들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눈, 그것은 바로 내 몸, 내 지체를 살게 하고 있는 포도나무 그 큰 등걸을 생각하며 볼 수 있는 눈이기도 하다.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말고 오직…

미국에서 있었다는 이야기다. 어떤 회사에서 사원을 해고하기 위한 방법으로 꼬박꼬박 월급을 지급하면서 아무 일도 맡기지 않았더니 그 사원은 얼마 안 가서 스스로 퇴직하고 말았다. 우리 같으면 어떠했을까. 워낙 취직이 어려운 나라라서 굴욕이나 불편을 참고 견디어냈을지 모를 일이다. 이 이야기도 어디서 읽은 이야기인데 중증 신경증 환자를 치료하는 방법으로 어떤 정신과 의사는 환자를 한 주일 동안 독방에 눕혀 놓고 절대안정을 취하며 일체 외부의 자극을 차단하고 텔레비전 시청도 금지하고 목욕도 시키지 않으며 식사도 방으로 날라다 준다고 한다. 그런데 그런 절대격리와 안정 속에 일주일을 누워서 견딜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환자들뿐이고 정상적인 사람은 단 사흘도 못 견디고 튀어나오고 만다는 것이다. 가끔 병원의 수련의들에게 이 방법을 사용하여 환자의 체험을 시켜보는데 몇 달씩 밤잠도 못 자고 지칠 대로 지친 수련의들은 일주일 동안 아무 일도 안 하고 쉰다는 말에 처음엔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른다고 한다. 쉬면서 월급도 나오고 식사도 날라다 주고 편안히 누워서 뒹굴 수 있다니 웬 떡인가 싶어 좋아하지만 사흘이 못 가서 수련의들은 몸을 뒤틀고 일어나 나오지 못해 안달을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일주일을 지옥처럼 치르고 나온 후에 그들의 활동은 눈부시게 달라지며 아무리 힘이 들어도 다시는 그 같은 체험을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정상적으로 건강한 사람이라면 잠자는 시간 외엔 일어나 움직이며 무엇이든 일을 해야만 살 수 있는 것이 인간이다. 일주일씩 누워 있을 수 있는 사람이란 오직 정신 질환이건 신체 질환이건 환자일 경우뿐이다. 인간은 아니 식물이나 동물이나 생명이 있는 것은 생애의 욕구 로 해서 자기 표현을 위한 활동을 어떠한 형태로든 하지 않고는 살 수가 없다. 죽은 듯이 서 있는 겨울나무들이 봄이 오면 전신으로 뿜어내는 새싹들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삶이란 자기 표현이고 그 자기 표현은 일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다. 결국 인간은 놀기 위해서 또는 쉬기 위해서 일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일하기 위해서 쉬기도 하고 놀기도 하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일하기 위해서 쉬기도 하고 놀기도 하면서 사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세상에 왜 태어났는가 묻는다면 일하기 위해 태어났다고 해도 과히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그 중요한 일을 하면서 사람들은 의외로 행복하지 못한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자신이 하는 일에 큰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거나 또는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더 나은 직업을 찾을 수 없어 참고 견딘다든가 하는 경우, 마음은 딴 곳에 가 있고 몸만 기계적으로 움직이며 맡은 일에 열의가 없다면 그는 별수없이 정신적 실업자라 할 수밖에 없다. 자기 일에 기쁨과 희망을 갖지 못하고 오직 생활을 위해서만 일에 매달린다면 직업이 있으되 없는 거나 같은 정신적 실업자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입사 20년의 경력을 지닌 A씨는 회사의 중견사원으로 생활은 안정되어 있지만 마음은 항상 공허하다. 입사 초기와 같은 일에 대한 열의도 사라지고 의미 또한 퇴색하고 무엇보다도 정년 퇴직 후의 일을 생각하면 막막하기만 하다. 무언가 혼신으로 뛰어들어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정년에 매이지 않고 적성에 맞는 그런 일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직장을 때려치우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런가 하면 B씨의 경우는 젊어서 10년 가까이 잡지사 기자 생활로 뛰다가 그 일에 보람이 없다고 판단, 직장을 청산하고 작가 생활로 변신했다. 물론 좋아서 택한 길이긴 하나 생활의 보장이 없다. 다달이 일정한 수입이 있는 것도 아니니 불안하다. 일은 하고 있지만 노동의 실감도 별로 없고 마치 얇은 널빤지 한 장에 의지하여 캄캄한 한밤의 바다를 건너가는 듯한 느낌으로 막막해지기도 한다. 작가라는 직업엔 정년이 없지만 그 정년도 없다는 끝없음이 또한 마음을 쓸쓸하게 한다는 것이다. 결국 어느 경우나 정신적 실업자일 수밖에 없다. 생각하면 세상엔 이같이 일은 하고 있으면서도 마음의 충만과 안정을 얻지 못하고 정신적 실업에 빠져 있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그런가 하면 일에 대한 욕심이 지나쳐서 자신을 불행하게 하는 경우도 많다. 가령 어떻게 하면 더 빨리 그리고 더 좋은 성과를 얻을 수 있을까 노력하는 정신은 좋지만 그것이 동료에 대한 경쟁의식에서 출발한 것이라면 결코 일 자체에 대한 기쁨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일에 대한 경쟁의식은 어떤 경우라 해도 불행의 시작이다. 우선 상대를 이기려는 마음이 있는 한 내 마음의 평화는 없어진다. 일이 즐겁지도 행복하지도 않다. 앞 차를 앞지르면서 끊임없이 긴장해야 하고 고달퍼진다. 남이 뛰는 링에 올라가 자기를 비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남에게 이겨서 얻는 행복감은 얼마 못 가서 다시 뒤떨어지는 패배감으로 불행해지기 일쑤다. 요컨대 경쟁이라는 상대적인 감정에서는 절대로 마음의 행복도 평화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일이 바빠서 미치겠다고 비명을 지르는 사람은 무의식 중에 그 누군가를 의식하고 경쟁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스스로 점검해볼 일이다. 결국 누구에겐가 이기고자 애를 쓰는 한은 언제든 지게 마련인 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끝이 없이 자신을 소모하는 보이지 않는 싸움일 뿐이다.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 살아간다. 정신적 실업자의 경우이거나 지나치게 일에 욕심 내는 나머지 경쟁의식에 갇힌 사람이거나 모두 일의 본질, 일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느끼는 불행이다. 일이란 그 자체가 자신의 삶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성스런 업 이다. 그것은 내 존재를 존재케 해주는 절대적 방법이다 .만일 내 일을 내가 왜곡하거나 허술히 생각한다면 내 삶을 왜곡하고 허술하게 대하는 일이 되고, 또 내 일을 잘못 이용하여 과욕을 부리거나 술수를 쓴다면 내 삶을 치사한 욕심쟁이나 사기꾼의 그것으로 떨어뜨리게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일은 내가 나의 행복으로 도달하게 해주는 길이고 방법이다. 나는 그 길 없이는 다시 말하여 나의 일 없이는 어떠한 행복에도 도달할 수가 없다. 결국 내 일을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고 성스럽게 여기지 않는다면 나 자신을 포기하고 아무렇게나 내던지는 일과 같다. 일은 바로 나의 삶의 알파이며 오메가, 바로 모든 것이다. 진실로 나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마시고, 제게 정해진 양식(일)만을 허락하소서. (잠언 30,8)라는 말을 나는 좋아한다. 나를 위해 정해주신 일, 그 일에 감사하고 욕심 내지 않고 최선을 다하며 살아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 있게 되기를 나는 기도한다.

 

학예회에 뽑힌 어린아이처럼

여러분이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여러분을 택했습니다. (요한 15,16)

내가 소학교를 다니던 시절 일년에 한 번 학예회라는 것이 있었다. 독창, 합창, 무용들을 학년별로 발표했고, 그 중에도 연극이 가장 큰 관심거리였다. 우선 그 인선부터가 미묘한 열기를 띠었다. 대본을 모르니 무슨 역이 있는지 몇 사람이나 뽑힐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아이들은 더욱 긴장하여 술렁거렸다. 혹시나 자기 이름을 불러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마침내 호명이 되고 출연이 결정되었을 때 그 뽑혔다는 의식은 갑자기 유리구두를 신은 신데렐라라도 된 듯한 기분이 되는 것이다. 공연히 우쭐거려지기도 하고 고무풍선처럼 붕 떠오르기도 하고 이제껏 따분하던 수업시간이 갑자기 신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뽑히지 못한 아이들의 시선이 따갑게 느껴지고 누구에겐가 감시를 받고 있는 것처럼 행동이 부자유스럽기도 했다. 한마디로 마음에 불이 질러진 듯 편안하지가 못했던 것이다.

내가 요한복음의 여러분이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여러분을 택했습니다. 내가 여러분을 내세운 것은, 여러분이 떠나가서 열매를 맺고 그 열매가 남아 있도록 하려는 것이요, 그리하여 여러분이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다 그분이 여러분에게 주시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15,16)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전기에 감전이라도 된 듯 이상한 감동에 가슴이 찌릿했다. 내가 이 말씀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다. 나는 이 구절을 처음엔 예수님이 사제들(열두 제자)에게 주신 말씀으로 나와는 상관없는 것이라 여겼었다. 그러다 세례성사로 씻겨진 모든 신자(사도)들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알게 되면서 내 마음엔 이상한 희비와 갈등이 교차하는 것이었다. 날 저물어 지나가던 길목에서 깊은 생각도 없이 내가 그분의 문을 두드렸는데, 그것이 내 뜻이 아니라 나로 하여금 그날 그곳에 당도하게끔 섭리하신 하느님의 뜻이었다니, 마치 연극에 뽑힌 어린아이처럼 주님 대전에 점 찍혀 뽑혀 온 것이라니, 도시 나 같은 것을 무엇에 쓰시려고 뽑으셨을까. 남처럼 교회 내 활동을 하는가, 봉사를 하는가. 그저 나태하고 무능하고 가끔 회의적이고 투정이나 부릴 줄밖에 모르는 사람을. 잘못하면 연극을 망쳐버릴지도 모르는 어린아이처럼 주님 이름에 흠이 가게 할지도 모를 사람을 어쩌자고 부르셨단 말인가.

주의 말씀대로 어쩌면 의사는 건강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앓는 사람들에게 필요합니다. 나는 의인들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부르러 왔습니다. (마르 2,17)라고 하신 것처럼 허약하고 허물 많은 죄인을 구하려고 나를 부르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가슴이 뭉클했다. 부지불식간에 혹시나 잘못한 일이 없는가? 교만하지 않았는가? 게으르지 않았는가? 하는 식으로 자기를 돌아보게 되고 마치 어려운 숙제를 한 짐 안고 있는 것처럼 괴로웠다. 썩지 않는 열매를 맺기는커녕 쭉정이 하나도 맺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이 슬프기도 했다. 그러나 생각하면 그러한 자기 반성은 나를 부르신 데 대한 최소한의 응답으로 날마다 내 삶의 축을 받쳐주는 보이지 않는 힘이 되었다. 하여 학예회에 뽑힌 어린아이처럼 나는 기쁨과 긴장 속에 조금씩 설레며 살아간다.

 

 밟아온 길 돌아보며

해가 지다. 세계의 모든 거리 모든 창가에서 언제부터인가. 해가 저문다는 일이 이처럼 쓸쓸하고 막막하게 느껴진 것이… 그 허전함과 쓸쓸함 때문에 세밑이 되면 별일도 없이 허둥거리고 지척거리며 손에 일이 잡히지 않고 짧은 글 몇 줄도 끄적거릴 마음의 여유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런 엉거주춤한 감정의 줄다리기가 힘겨워 차라리 한달음에 새해가 와버렸으면 하는 심사가 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단 며칠만이라도 연기될 수 있다면 하는 어리석은 가정을 세워보기도 한다. 아무려나 부질없이 지척 이는 사람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때는 어김없이 제 궤도를 굴러가고 있다. 이제 몇 시간이면 이 해가 저물고 새해가 온다. 제야의 밤이 오고 그리고 자정을 알리는 서른 세 번의 인경소리가 울릴 것이다. 바로 한 해가 끝나고 다시 한 해가 시작되는, 아니 한 시대가 끝나고 다시 한 시대가 문을 여는 장엄한 축포와도 같은 인경소리가 숙연한 제야의 장안을 울릴 것이다. 그러면 … 모두들 한밤의 독신자처럼 /심야에 홀로 앉아/ 고독한 침묵을 길어 올리고/ 제야의 종소리를 들을 거이다./지는 해의 소리를 들을 것이다.. 더러는 승전고를 울리며 더러는 마지막 자행에/ 백기의 빈손/ 빈손의 절망으로 허기와 공복 같은 제야의 종소리를 들을 것이다.(졸시 중에서 인용) 생각하면 다사다난했던 한 해였다.

잠시 생각나는 사건만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시작으로 6월을 정점으로 하여 벌어진 민주화 대행진, 6.29선언이며 그에 잇달은 전국적인 노사분규 확산, 마침내 개헌과 총선, 야당의 명분 없는 분당 속에 제 13대 대통령 선출, 그 와중에 김남철 일가의 북한 탈출, KAL 기 공중폭파 참사며 마유미 한국 인도, 대형 경제사범에 에이즈 공포 소동 등 참으로 눈이 핑핑 도는 한 해였고 역사적인 사건들로 점철된 87년이었다. 도시 인간이 찍어내는 불행이 얼마나 더 계속되고 복사될 것인가. 옛날 칼과 창으로 싸우던 시절엔 상상도 못 하던 대형 사고, 대형 악들이 속출하고 있으니 인간은 끝내 자신이 만든 가스실에 스스로 걸어 들어가고야 말 것인가. …하늘과 땅이 능히 영원할 수 있는 것은 그것들이 스스로 자신이 살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사람도 자신이 하는 일을 뒤로 미룰 때 실은 자신이 앞서게 되고 자신의 이익을 제외할 때 실은 자신이 거기에 있게 된다. 그것은 사심이 없기 때문이며 사심이 없을 때 능히 그 자신의 이익이 성취되는 것이다.

노자의 [도덕경] 제 7장의 말이다. 생각하면 인간의 열정이란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는 아름다운 힘이다. 그러나 열정이 지나쳐 과열이 될 때, 자신의 눈에 과열된 집념의 불을 켤 때, 그는 자기 자신뿐 아니라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명분 없는 분당 행위로 과반수 국민의 신의를 배반한 야당의 인사들을 바로 자시의 목표물을 잃었을 뿐 아니라 더 큰 국민의 신망마저 잃어버린 실책을 진심으로 되새겨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인이면 누구나 알고 있는 말이 있다. 바로 모든 잘못을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 큰 탓이로소이다. 가슴을 치며 참회하는 겸소노가 통회, 바로 눈에 들보를 뽑아버리고, 과열된 집념의 불을 끄고, 사심을 버리는 마음이다. 곧 순리를 따르는 마음이다. 순리를 쫓고 순리를 따른다는 일은 결코 비겁이나. 도피가 아니다. 인간의 도리, 자연의 이치를 따르는 일이며 바로 정도를 걷는 일이다. 정도란 실패와 고난이 있어도 명분이 있고 후회가 없고 다시 후사를 기약할 수 있는 희망이 있다. 그것은 실패해도 떳떳한 실패이며 만장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영예로운 패배다. 사도의 그릇됨을 무언으로 역설하는 증거가 된다. 이제 정녕 해가 진다./세계의 모든 거리 모든 창가에서/ 창마다 기대선 추운 가슴에서/ 한 묶음의 꽃이 지듯/ 해가 진다./ 1987년 저무는 잿빛 일몰의 아름다운 피곤/ 줄지은 대열의 침묵을 보라./ 길은 아직 희미한 안개 속/ 우리가 올라온/ 구름의 계단도/ 다시 올라갈 내일의 산맥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다시 기다릴 수 있다. 새해란 어제나 지나온 어제, 잘못된 과거를 다시 고칠 수 있는 순백 영토, 신이 허락하신 용서와 화해의 유예된 시간이기에… 그리고 세계의 역사는 분명코 자유의 저변 확대를 향해 틀림없이 굴러가고 있음을 믿기에 서두르지 않고 기다릴 것이다. 이제 태어난 지 한 살밖에 안 되는 우리들의 어린 민주주의를 위해 무던히 참고 지켜보며 기다릴 것이다.

 

 닫힌 마음의 문을 열어야

어디선가 읽은 글에 이런 이야기가 있었다. 한 대학에서 미국인 영어강사가 회화를 지도하고 있는데 학생들에게 하우 두 유 두우. 를 제대로 말하게 하는 일이 그렇게 어렵더라는 것이다. 클래스의 학생들은 둘씩 짝지어, 마주서서 인사를 나누게 하는데 아무리 상대방의 눈을 바라보며 말하라고 해도 눈을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두 주일씩 연습을 하고도 아직 안 되는 학생이 있다고 탄식하면서 그 미국인 교사는 적어도 그 문제를 극복하지 않고선 외국어를 통한 커뮤니케이션은 불가능하다고 털어놓고 있었다. 다시 말하여 형식적인 인사치레, 마음이 없는 입으로만 하는 인사로는 사람 사이의 사귐이 이루어질 수는 없다고 했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인간 사이의 소통이나 이해, 교류에 관해 문득 삭막한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나도 그 비슷한 것을 한 주일에 한 번씩 주일마다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당의 주일미사 때 신부님이 서로 평화의 축복을 나눕시다. 하는 대목이 있다. 그러면 신자들은 서로 앞 뒤 옆에 있는 교우들과 허리를 굽혀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라고 인사를 나눈다. 간혹 잘 아는 사이에선 악수도 하게 된다. 그러나 거의 모르는 사람들이 섞여 있는 자리이고 보면 입으로는 축복합니다. 라고 말하며 허리를 굽히면서도 좀처럼 상대방의 얼굴을 쳐다보는 일이 없다. 쑥스럽고 거북해서 쳐다보지 못하는 것이다. 결국 나는 사랑과 믿음의 나눔을 다지는 미사 중에도 자기 혼자만의 껍질 속에 숨어 마음을 열지 못하는 것이다. 스스로 문을 닫아건 내 마음속엔 두 가지 이기적인 생각이 숨어 있다. 하나는 쑥스러움과 번거로움을 싫어하는 마음이고 또 하나는 그러한 이웃과의 교류를 별로 필요하다고 느끼지 않는 고독한 마음으로, 둘 다 이기적이고 폐쇄적인 생각임을 알고 있다. 이런 생각을 몰고 가다 보면 결국 인간은 고도에 갇힌 수인처럼 고독해진다. 그리고 고독 속에 점점 침잠하여 스스로 통로를 차단하고 외부와의 어떠한 교류도 거부하게 된다.그러한 차단과 폐쇄가 인간의 정신을 얼마나 황폐하게 망가뜨리는가 하는 것을 가끔 지상에 보도되는 청소년 자살사건이나 비행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최근에 일본에 있었던 충격적인 사건으로 한 젊은이가 연속적으로 어린 계집아이를 유괴하여 살해하는 사건이 있었다. 그 범인으로 지목된 청년은 별반 나무랄 데 없는 집안에 부모와 함께 살고 있었지만 놀랍게도 전연 부모와 교류 없이, 떨어진 외딴 별채에 혼자 기거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사회의 이목은 바로 그 사실을 중시하고 있었다. 요컨대 그 청년은 일체 외부와 단절된, 부모들까지도 거부한 자기 혼자만의 세계의 칩거하면서 고독과 단절의 무서운 병을 그같이 발산했다고 보는 것이다. 심리학적으로 이 같은 현상을 나는 설명할 수가 없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 비슷한 경우를 가까운 이웃에서도 경험한 적이 있다. 고등학교 2학년의 남학생이었다. 공부도 잘하고 성격도 남자다운 4남매 중의 장남이었다. 부모는 시장에서 큰 상업을 하고 있어 아침 일찍 나가 저녁 늦게야 돌아왔다. 아이는 자연히 집에 돌아오면 빈 집에 어린 동생들과 있게 되었다. 밤늦게 과외공부를 마치고 와도 부모는 집에 없고 여동생들과 할말도 없어 아이는 문을 잠그고 자기 방에 틀어박혀 혼자 있기 일쑤였다. 사춘기의 소년다운 우울증은 어느덧 학업마저 소홀히 하게 되어 학교 성적은 상위에서 하위로 떨어지기 시작하고 회복이 불가능해졌다. 그렇게 혼자서 괴로워하며 헤매던 아이는 마침내 고3이 된 늦가을 자살하고 말았던 것이다. 최근에는 그 비슷한 청소년의 자살사건이 잇달아 일어나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생각하면 복잡한 도시 생활에서 우리는 서로 마을 걸어 이야기할 기회를 점차 잃어가고 있는 것 같다. 버스를 타면 옛날엔 안내양의 낭랑한 목소리가 다음 정거장을 일러주고 내리실 분은 미리미리 준비하라고 일러주던, 메마른 목소리나마 살아 있는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자동문에 자동 벨, 기계가 지시하는 대로 대기하고 있다가 후다닥 뛰어 내리거나 타지 않으면 어느 귀신에 끌려가는지도 모르게 자동기계 문에 찢겨져 버릴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쫓겨야 한다. 대형 슈퍼의 장보기만 해도 그렇다. 철제 손수레를 끌고 묵묵히 필요한 물건들을 그 속에 던져 넣고 다시 묵묵히 계산대에 내놓으면 계산대에선 또 묵묵히 계산기로 계산해서 영수증을 내민다. 각종 자동판매기에선 동전을 넣으면 덜컹덜컹 금속성 소리를 내며 원하는 상품이 떨어져 나온다. 이렇게 말이 필요 없고 편리한 세상에서 기계하고만 대하고 살다 보면 물건과 대하고 사는 법은 알아도 사람과 대하고 사는 법을 잊어버리지 않을는지 의심스럽다. 그야말로 대화가 필요 없는 문명의 이기 속에서 생활에 필요한 필수품이 충족되고 긴 시간 일방통행인 텔레비전 에 매달려 사는 사람들에게 어쩌다 낯설게 상대방의 얼굴을 쳐다보며 정식으로 인사를 하라고 한들 그것이 쉽게 될 수는 없을 것 같다. 어쩌다 시장에 가면 지옥 같은 인파 속에 사람이 무서워진다. 같은 말을 쓰고 같은 서울 하늘 아래 사는 이웃이건만 시장에 모여든 그 파도 같은 사람의 떼는 도저히 한 민족 한 겨레 어쩌구 하는 정감을 느낄 수 없는 오히려 무섭고 낯선 이방인 같기만 하다. 그들과 무슨 공통의 말이 있을 것 같지도 않고 공통의 정서가 통할 것 같지도 않다. 하물며 서로의 눈 속을 들여다보며 천연덕스럽게 인사라니…, 하는 생각이 거짓 없는 오늘의 나의 심정이다. 영어를 정확하게 가르치기 위해선 끝없이 되풀이해서 반복할 수 있는 테이프 이상 가는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테이프로 안 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살 있는 사람의 목소리로 사람을 불러서 가르치는 일이다. 누군가 인간을 정의하기를 반복할 수 없는 존재 라고 말하고 있듯 바로 반복하는 일 밖엔 못 하는 기계와 결코 반복할 수 없는 존재의 차이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어찌할 것인가, 저 잠긴 문 아래 스스로 마음을 닫고 들어앉은 인간의 마음을 열지 않고는 이 시대의 불행은 끝없이 계속되고 확산되어갈 것을.

 

 40여 년의 긴장과 몰두

사람은 저마다 자기의 별 하나를 지니고 이 세상에 태어나며 그 별의 운세대로 일생을 살다 가게 되어 있다고 옛날 돌아가신 나의 할머니는 가끔 말씀하셨다. 그때 어린 마음에도 별이 총총한 밤이면 도대체 나의 별은 어느 것이며 그 별의 운세란 어떤 것일까 이상한 두려움과 설렘임으로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던 것이다. 나의 미지의 두려움은 얼마도 안 가서 현실이 되기 시작했다. 열두 살 나던 해 봄부터 나는 힘든 병을 앓기 시작했다. 그때로서는 백약이 무효한 결핵성이었다. 어머니는 병원으로, 한약방으로 나를 끌고 다니셨고 머리맡엔 한약과 양약 봉지가 늘 수북이 쌓여 있었다. 우유 한 대접에다 계란과 간유를 타서 먹이라는 의사의 지시에 따라 어머니는 아침마다 내 입에다 강제로 그 이상한 영양식(?)을 들이부으시던 것이다. 우유와 계란만이라면 그런대로 참을 만했지만, 간유 한 숟갈을 섞여놓으면 온통 고약한 생선 비린대로 오장육부가 뒤집히는 것 같았다. (그때는 아직 간유구가 없었다.)

코를 막고 숨을 멈추고 닭 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울컥울컥 토해내는 나의 등을 쓸어주시면서 할머니는 됐다, 됐어. 먹기 싫거든 먹지 마라. 너는 죽지 않는다. 명줄이 이렇게 분명한데 죽긴 왜 죽어. 하시던 것이다. 스무 살이 되기까지 세 차례씩이나 크고 작은 수술로 몸에 칼을 댈 때에도 할머니는 액땜이다. 사주에 천액이 들어서 어쩔 수 없이 초년엔 수술도 하고 앓기도 하지만 큰 일은 없다고 마치 점쟁이처럼 말씀하시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도 그 시절은 병마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한심한 나날이었다. 그렇게 골골거리며 청소년기를 보냈으니 나이 먹어선 건강해질 법도 한데 역시 그렇지가 못하다.

고질적인 소화기 장애로 평생을 한 끼도 편안한 날이 없이 살아왔다. 여름날 그 흔한 참외 한 개, 얼음 냉수 하나를 마음 놓고 마셔보지 못하였다. 한의사는 몸이 차서 따뜻하게 해야 한다고 했고, 양의사는 신경성이라고 했다. 그 두 말이 다 맞는 말이었다. 여름에도 손발이 시리고 조금만 신경을 써도 영락없이 체하곤 했다. 겸하여 불면증은 정신적, 신체적 고통을 배가했다. 열흘씩 보름씩 계속되는 불면을 신경안정제나 수면제로 달래보지만 신통치 않았다. 어려서부터 너무 많은 약에 시달려온 나는 약에 대한 일종의 공포증이 있었고 더구나 안정제니 수면제 따위를 다량으로 먹을 만큼 용감하지도 못하였으니 불면증은 세 때 밥보다도 하룻밤 숙면을 절실히 요구했다. 생각하면 지난 한평생이 남 모르는 신병과의 보이지 않는 싸움이었으니, 옛날 할머니 말씀대로 내가 타고난 별은 아마도 억세게 곤곤한 신액을 점지한 별이었던가 싶어 씁쓸해지는 것이다.그럼에도 명운은 길어 그처럼 골골거리면서도 이 나이에 이르렀으니 그저 감회롭기만 하다.

7년 가뭄에도 비 오는 날이 있고, 9년 장마에도 해 뜨는 날이 있듯이 그 고질적 질병 속에서도 나는 어찌어찌 여고를 졸업하고 그 시절로서는 입학이 힘들었던 경성여자사범학교 강습과에 진학했다. 1943년 봄이었다. 강습과 1년은 악몽 같은 시간이었다. 2차 대전 중반에 돌입한 일본의 전쟁 열기는 국민 총궐기로 사범학교라 해서 평온할 리가 없었다. 강의보다는 훈련 시간이 더 많았고 인고단련 이라는 심신무장을 위해 기본적인 군사훈련, 방공훈련, 사열식 등으로 날마다 뙤약볕에서 몇 시간씩 뛰고 달리는 맹훈련이 거듭되었다. 나는 그런 훈련을 이겨낼 체력이 없었다. 어느 날 연병장에서 사열식 도중에 졸도해버렸고 의무실로 실려갔다. 덕분에 그 후로는 요 양호자의 딱지가 붙어 모든 훈련에서 제외되는 특전을 받았으니 오히려 전화위복이 된 셈이다.

사범학교를 나와 부임한 곳은 경인선 부평에 있는 국민학교였다. 시골 국민학교의 교사 생활은 나의 오랜 꿈이었다. 아이들은 천진난만하고 수업시간은 즐거웠다. 그리고 아름다운 전원, 그러나 전쟁의 광풍엔 시골 국민학교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모내기, 김매기, 솔방울 따기, 송충이 잡기 등 힘에 부치는 작업량에 나는 또다시 쓰러지고 말았다. 1년간 휴직원을 내고 몇 달째 누워 있던 1945년 8월, 마침내 광복의 날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들끓는 해방의 열기 속에 불과 열아홉 살이던 나는 그때 할 바를 몰랐었다. 우선 한글부터 배워야 했다. 쓰고 읽기는 했으나 정확한 맞춤법도, 문법도 알지 못하였다. 2개월간 조선어학회 주최 한글강습을 받으면서 나는 다시 진학할 것을 결심했다. 경성여자사범이 대학으로 승격되어 있었고 나는 예과 2년으로 편입시험을 쳤다. 그리고 다음해 국립서울대 발족과 함께 남녀사범대학이 통합되었고, 나는 예과를 마치고 교육학과 1학년으로 진학했다.

그러나 그 시절의 대학가는 사회적 혼란으로 하여 참으로 어수선했다. 날마다 좌익 운동권 학생들이 데모로 지고 새는 대학은 수강거부, 등록거부, 가두데모로 강의실은 연일 비어 있고 학생들은 우왕좌왕 갈피를 잡지 못하였다. 그런 와중에 몇몇 학생들이 모여 연극부를 조직했고, 나는 남학생들의 알 수 없는 전략에 의해 초대 연극부 부장으로 지명되었다. 어찌 되었거나 연극은 우리들 젊은이들의 숨통이 되었고 교내 연극 공연은 비롯하여 처음으로 학생 방송극에 출연하기도 하면서 나는 자연스레 문학에 몰입해갔다. 다스릴 길 없는 젊음의 혈기를 쏟아내어 밤마다 깨알같이 노트장을 메워나가는 작업은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었다. 그저 그렇게 쓰고 싶어 썼고, 그러다 어떤 것들은 교내 학보에 발표하기도 하면서 47년 봄 나는 문단의 한 시인을 만나게 되었고 그에 의하여 시 가을 이 [문예신보]에 처음으로 발표되었으니 대외적인 작품 발표로서는 처음이었다. 뒤이어 [민성]에 산상에서 ,[신천지]에 낙엽의 노래 ,[예술평론]에 가마귀 ,[새한민보]에 환별 , 그밖에 지명을 잊어버린 모 신문에 강가에서 , 다시 강가에서 등을 발표하면서 나는 조금씩 시인으로서의 설레이는 꿈을 가꾸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6.25, 그 좌절과 수난을 겪으면서 나는 언제부터인가 그처럼 나를 괴롭히던 만성적 질환들이 자취를 감추고 잠복해버린 것을 알았다. 무슨 일에든 열중하고 긴장하는 일이 웬만한 신경성 질환들을 스스로 극복하게 했던 것 같다. 사실 쓰는 일이란 긴장과 열중의 연속으로 써지든 안 써지든 간에 한눈 팔 수 없이 심신이 하나로 집중되는 몰두와 극기의 초긴장 상태인 것이다. 그런 무아의 긴장 속에 몇 시간씩 몰입하다 보면 신통하게 불편하던 뱃속은 가라앉고 한 작품을 완성해낸 충만감에 신성한 공복감을 느끼게도 했다. 불면증도 어느덧 겁내지 않기로 스스로 작정했다. 잠이 오지 않으면 그 시간을 이용하여 책을 읽고 글을 쓰기로 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자신도 모르게 책을 읽다가, 또는 원고지 위에 엎드려 잠이 들기도 했다. 병은 마음에 있었고, 마음에서 생긴 여러 가지 신체의 실조증은 마음에 든든한 지주를 버티어주고 마음이 원하는 일에 매진할 때 자연히 치유되고 극복되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렇게 43년 쉬지 않고 달려왔다. 9권의 시집과 7권의 수필집, 장시, 희곡, 시극, 그리고 시를 위한 산문 등은 수적으로 결코 많은 작품은 아니지만 하나하나 최선을 다한 나의 분신들이다. 그간 상명여사대에 10여 년 출강도 하고 한국여류문학인회 회장을 거쳐 현재 한국시인협회 회장, 가톨릭문우회 대표간사직을 맡고 있는 일 따위 모두가 문학 외적 일이긴 하지만 그러나 나는 임기 동안 최선을 다했고 또 할 작정이다. 언제나 내 삶에,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후회를 남기지 않는 것이 나의 삶의 신조다. 결국 허약한 건강을 유지하는 길은 오직 문학에의, 일에의 긴장과 몰두를 늦추지 않는 일이다. 일만이 나의 건강한 비결이다.

 

 인생의 위기

10대는 병마와의 힘든 줄다리기였다. 열 살 때 여름,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다친 타박상이 빌미가 되어 무릎 마디가 쑤시기 시작했다. 사흘 날 사흘 밤을 열이 펄펄 끓게 알고서야 아버지는 나를 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세브란스에서 수술을 받고 일주일 만에 실은 뽑았지만 걷기까지는 꽤 여러 날이 걸렸다. 그 밖에도 자잘한 수술을 두어 차례 더 받았던 기억이 난다. 열두 살 무렵부터 이상한 병을 앓기 시작했다. 얼굴에 노랑 꽃이 피고 미열이 나고 식은땀이 흐르고 밥을 먹지 못하고… 신식 교육을 받지 못한 어머니는 한약국으로만 나를 데리고 다니셨다. 쓰디쓴 한약을 먹다가 수없이 토악질을 하고 병세는 더욱 악화됐다. 그제서야 양의사를 찾아 갔다. 소아 결핵이라 했다. 그 시절 결핵엔 별 약이 없었다. 영양제 주사 정도뿐, 학교도 쉬고 잘 먹고 편히 쉬는 일이 전부였다. 의사는 우유 한 대접에 간유를 한 숟갈(그 시절엔 간유구가 없었다.) 타서 매일 먹으라고 했다. 그 생선기름 냄새로 해서 내장에 있던 것까지 쏟아져 나올 만큼 구역질이 났다. 어머니가 내 코를 잡고 나는 숨을 멈추고 우유 아닌 간유 한 대접을 마시며 흘리며 토하며 날마다 엉엉 울었다. 여학교에 들어갔으나 주로 양호실 신세였다. 그리고 열여덟 살에 축농증을 수술하고 열아홉 살에 맹장을 수술했다. 이렇게 10대를 마지막까지 찬란하게 병마와 싸우고 20대로 넘어갔다.

20대는 광복과 함께 시작했다. 다시 들어간 대학, 그러나 질풍노도와 같은 대학의 좌우익 분규는 끊일 날이 없고 사회는 혼란의 암흑기였다. 마침내 6.25동란, 피난, 그 전란과 궁핍의 와중에 나는 무엇엔가 떠밀리듯이 살아 남기 위해 결혼을 하고 엄마가 되었다. 나를 닮은 탓인지 아이들은 나면서부터 허약했다. 감기, 편도선염, 홍역, 백일해에 수두까지 그때는 아직 홍역의 예방주사도 없었을 때다. 걸리면 꼼짝없이 앓으며 가슴이 찢어졌다.

돌도 안 되는 아이를 입원시키고 사선을 넘던 일, 고등학교 3학년짜리가 한 해에 두 번씩 입원을 해야 하는 기막힘, 날마다 한약을 보온병에 달여 들고 교실문 앞에서 기다리던 춥고 긴 시간들 모두가 통곡이라도 하고 싶은 안타까운 시간들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 그런 외적 고통이나 시련엔 알 수 없는 투지가 안에서 솟아 나오던 것이다. 쓰러지면 안 돼! 져서는 안 돼! 하는 자기 경고가 간단없이 약해지는 마음을 채찍질하는 것이었다. 또한 그러한 고통엔 끝이 있게 마련이다. 앓던 아이가 병석에서 털고 일어났을 때 이미 내 고통은 보상받고 행복해졌으니 말이다. 정작 무서운 시련은 내 마음에 나도 모르게 싹트기 시작한 병이었다. 여자 나이 40을 향해 가는 시기, 가정에서 아이들에게 얼마간 여유가 생긴 시간, 문득 자기를 돌아보고 거기 초라하게 마른 꽃처럼 쑤셔 박힌 자신이 삭막한 모습에 아연실색 놀라고 눈뜨는 시간이다. 하여 40 전후한 시기는 대체로 여자의 위기의 시간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삶의 즐거움이 벗어지고 활력이 사라지고 목적을 상실한다. 사물에 대한 가치관과 의미가 붕괴되고 세상이 잿빛으로 우울하고 암담하다. 놀라운 일도 없고 신나는 일도 없고 사람을 만나는 일도 시들하고 가족들만 아니면 며칠씩 꼼짝 않고 누워서 세상을 등지고 싶어지기도 한다. 염세, 허망, 좌절, 무기력 그런 낱말들만 유일하게 살아서 떠오르는 것이다. 여자가 장식을 하나씩 달아가는 것은 젊음을 하나씩 잃어가는 때문이다.

씻은 무 같다든가 뛰는 생선 같다든가(진부한 말이지만) 그렇게 젊은 날은 젊음 하나만도 빛나는 장식이 아니었겠는가. … 중략… 어디에 그 빛나는 장식들을 잃고 왔을까. 이 피에로 같은 생활의 의상들은 무엇일까. …중략… 꽃을 더듬는 내 흰 손이 물기 없이 마른 한 장의 낙엽처럼 쓸쓸해져 돌아와 몰래 진보라 고운 자수정 반지 하나 끼워 달래어본다. 그 무렵에 쓴 시다. 사라져가는 젊음, 잃어버린 난, 헛살았다는 좌절감 그 모든 정신적 허망감이 이성을 잃고 병들게 하는 것이었다. 마음만 아픈 게 아니라 실제로 몸이 아팠다. 여기저기 이름도 모를 병이, 이른바 신경성 질환이 속출했다. 약도 소용이 없었다. 중증 위장장애로 음식도 먹을 수가 없었다. 이대로 가면 죽을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이 문득문득 들었다. 참으로 어떻게 그 어려운 고비를 넘겼을까, 나도 모르겠다. 사람에겐 넘어지면 일어서고 궁지에 몰리면 빠져 나가려는 자구지념이 있는가 보다. 그런 고통스런 허덕임 속에서도 끊임없이 이래서는 안 된다, 일어서야 한다고 스스로 타일렀고 살아야지 하는 의지가 자신을 채찍질하는 것이었다. 결국 나는 그 의지에 지탱되어 일을 했다. 시도 쓰고 산문도 쓰고 글이 써지지 않을 때는 걸레를 들고 도를 닦듯 방을 닦고 풀을 뜯었다. 일밖에는 나를 구할 그 무엇도 없었다. 옛날 우리 어머니들이 시집살이의 설움과 남편의 외도를 스스로 달래며 긴긴 밤을 일로 지새웠듯이 나 역시 내 안의 병들을 다스리기 위해 일에 파묻혔다. 그렇게 훤히 밤을 새우고 밝아오는 창을 바라보노라면 무엇인가 가슴속에도 조금씩 밝은 빛이 드는 것 같았다. 나를 구한 것은 내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도 마찬가지다.

 

 늦어진 첫 시집

참 어려운 시절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턱없이 뜨겁고 황당한 혈기였다. 낮에는 연극으로 밤에는 깨알 같은 글씨로 까맣게 노트를 메우며 밤을 세우던… 마루타 (누구의 소설이었는지 모른다. 한 여인이 사회적 부조리에 희생되어 망가지는 이야기였다.)를 어머니 로 각색하여 학생 방송국의 연출과 주연을 겸하는 만용도 부렸고 몰리에르의 상민귀족 함세덕의 갈매기 등에 여주인공이 되어 연극에 미치기도 했었다. 생각해보면 그런 것이 나중에 [조선일보]신춘문예의 희곡을 던지기도 하고 시극을 쓰게 한 동기가 되었던 것 같다. 1947년 10월이던가 11월 [문예신보](고 김용호 선생이 주간이셨다.)에 처녀작 가을 이 처음으로 발표되고 그 후 [민성], [신천지], [예술평론], [민주일보], [상아탑] 등에 황혼 , 산상에서 , 낙엽의 노래 , 너의 장도에 (후에 환별 로 개제), 저주 ( 가마귀 로 개제), 강가에서 다시 강가에서 등을 발표하면서 나의 시의 출발은 소리 없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6.25사변과 길고 긴 피난 생활. 안타까운 것은 그때의 자료와 미발표 원고들을 1.4후퇴 당시, 인천에서 피난선을 타다가 조난을 당하여 모두 바다에 수장해버린 일이다. 그 중 [예술평론](48년 3-4월호)만은 이인수 선생이 여러 해 전 소장하고 계시던 것을 고맙게도 보내주시어 지금 간직하고 있다. 거기엔 저주(가마귀) 가 실려 있다. 가끔 들여다보면 옛날의 나를 보는 듯 반갑고 측은해진다. 몇 가지 문제에 부딪혀 본의 아닌 좌절과 실의에 빠지게 된다. 파난지 부산에서 52년 봄, 작고하신 송지영 선생의 적극적인 권유로 시집 출판을 계획하여 표지는 조능식 선생에게, 서문은 김광섭(작고) 선생에게 각각 부탁했다. 제목은 향가 로 정하여 표지화는 이미 도착해 있는데 서문이 오지 않았다. 여러 날이 지난 뒤에야 송지영 선생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원고만을 들고 오셨다. 머뭇거리며 너무나 경향성이 농후하여 서문을 쓸 수가 없다고 하시더라는 것이었다. 사실 학생 시절 나는 운동권 학생이었고 몇 편의 시들이 그 시절에 발표되고 그 중에도 환별 같은 작품은 발표 당시 적지 아니 문제가 되기도 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작품이 도시 몇 편이나 되는가, 그리고 설사 얼마간 경향적인 것이 있다손 치더라고 그것이 어떻다는 것인가. 나는 이미 운동권을 떠난 지도 오래일뿐더러 그런 시를 쓰지도 않지 않는가. 슬픔과 분노로 원고를 받아 들고 망연자실해버렸다. 송지영 선생은 위로하듯 그런 작품 몇 편을 뽑아내고 내자고 하셨다. 그러나 나는 마음으로 결코 용서가 되지 않았고 그렇게 궁색한 방법으로 시집은 내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그것들은 내 시의 출발이었을 뿐더러 삶의 소중한 궤적들이니 결코 버릴 수도 지울 수도 없는 영광의 상처들이었기 때문이다. 포기는 했으나 마음은 한없이 우울하고 암담했다. 가던 길을 잃어버린 듯 막막했고 기댈 데 없는 고독감에 두 번 다시 일어설 수도 없을 것 같은 실의에 빠져 자신을 가누지 못하였다. 상처는 오래 아물지 않았다. 시를 버릴까 생각도 했으나 그것조차 여의치 않았다. 제 마음인데도 제 마음대로 되지가 않았다. 그런 갈등 속에 서울 수복을 했다. 그리고 58년 신춘에 나는 희곡 원정 을 [조선일보]에 던졌다. 앞서도 말했듯이 희곡은 내가 시와 함께 관심을 가졌던 분야였고 그보다도 세상에 재도전해본다는 의지로 신춘문예에 응모를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때로서는 거금이었던 상금도 나는 필요했었다.

나는 그 상금으로 쌀과 연탄을 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더 큰 수확은 다시 시를 쓰리라는 결의와 힘을 얻었다. 이젠 좌절하지 않고 어떤 바람에도 쓰러지지 않으리라는 자신이 섰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나의 첫 지필은 늦게 늦게 47년 처녀작을 발표한 이후 15년 만인 62년에야 햇빛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제목도 붙이기가 힘들어 송지영 선생이 부산에서 지나가는 말처럼 지어주신 여사라는 호를 따서 [여사시집]이라 했다. 물론 서문 따위도 받지 않았다. 15년이란 긴 시간을 정리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출발점의 저 소슬한 애상과 젊음이 한 생활인으로서의 삶의 현실과 겹쳐져 결국 20대와 30대 두 세대에 걸친 정신사가 되고 말았다. 이어 두 번째 시집[풍차]를 64년에 펴냈다.

늦게 핀 꽃처럼 30대 중반을 넘어가는 여인의 위험한 감정의 무늬들이 절제 없이 원색적으로 표출된 시집으로 마치 숨겨진 치부처럼 혼자 부끄러워지는 마음의 비밀서라 할 수 있다. 세 번째 시집은 67년에 낸 [장식론]이다. 시집 제목이 말해주듯이 감정을 절재하고 보다 객관성을 지니면서 비로소 젊음을 작별한 현실적 생활 질서 속에 자신을 재발견하는 성찰과 지혜들을 추적해본 시집이다. 여자가 장식을 하나씩 달아가는 것은 젊음을 하나씩 잃어가는 때문이다… 이런 자아 발견은 점차 내 시의 새로운 방향을 열어주었고 생의 본질에 다가서는 출발점이 되었다. 말하자면 내 시적 변신의 첫 계단인 셈이다.

71년에 제 4시집 [일상의 시계소리]는 무의미하고 단조로운 일상 속에 참 삶의 의미와 기쁨을 깨닫는 이성적 관조가 주조를 이루고 있고 제 5 시집[타관의 햇살]에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생명의 일회성, 지상과 영원을 생각하기에 이른다. 이 시집으로 한국시인협회상을 받았다. 78년 제 6시집 [하지제], 내가 아끼는 몇 편의 시들로 역시 저버릴 수 없는 시집이고 83년 제 7 시집 [사는 법]으로 나는 대한민국 문화예술상을 받았다. 참으로 힘든 시절이었다. 80년에 야기되었던 광주 사건은 내 삶에 경악과 충격을 주었고, 이 어려운 시대를 어떻게 살아내야 할 것인가 다시 한 번 함께 생각해보아야 할 것 같았다. 그때까지 개인적 삶 안에 머물던 시적 인식이 비로소 밖을 향해 열리게 된 계기도 되었다. 사는 법 연작시는 참으로 자성과 결의의 아픈 정신사이다. 이어 제 8 시집 [태양의 건너마을]은 원래 내 의사대로 했다면 [지상의 양식]이라 제목 했을 것이다.

7편의 연작시 지상의 양식 과 3편의 연작시 급행열차로 그리고 감꽃 지는 감나무 밑에서 등 살아온 생의 역사를 통해 얻은 총체적 인식이 가톨리시즘의 종교적 신앙과 연계되어 내 생애의 한 산맥을 이루면서 깊은 골짜기의 평안과 은밀함을 내포한 고백서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제 9 시집 [경의선 보통열차]. 이 시집은 나의 출생과 성장과 망향과 사모곡으로 자전적 연작시집이다. 내 나이에 이른 사람의 생에 대한 자연스런 회고와 그리움, 불망의 기록인 셈이다.

끝으로 아직 묶지는 않았으나 언제든 묶을 수 있게끔 되어 있는 70여 편의 시편들 제목도 [놀이,시집가]로 이미 정해놓고 있다. 전연 상반된 이미지의 두 대상을 추적하면서 살아온 결과 내가 얻은 것은 그것들이 결코 두 개가 아니라 하나였음을 깨닫게 된다. 살아내기 위한 지상의 나의 놀이는 결국 십자가의 길이었음을 이제사 확인하는 것이다. 그 밖에 7권의 수필집 그리고 희곡과 시극과 장시 몇 편. 이에 대해서도 언젠가 이야기할 기회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운명처럼 만난 시

젊은 시절 애송하던 시가 어찌 하나 둘이랴. 푸르게 잎 피던 여린 감성을 공명판처럼 울려주던 감동의 시편들, 가령 소월의 진달래꽃 , 초혼 , 육사의 청포도 , 만해의 님의 침묵 , 유치환의 깃발 등등… 그러한 시편들이 나의 현실적인 삶과 무슨 관계가 있었던가 물으면 나는 대답할 말이 없다. 그러나 젊은이라는 열기에 방황하는 감성은 진달래꽃을 외우면서 고향 가까운 그러나 가보지 못한 영변의 약산을 그리워하고, 은쟁반의, 하얀 모시 수건 받쳐 얹은, 청포도의 이 시린 감각에 전율하기도 했었다. 그렇게 시는 내 감수성을 갈아주는 날 선 칼날이며 숫돌이었고 상상의 날개를 달아주는 행복한 주문이기도 했다.

그러한 감동의 시편들 가운데 하나만을 들라고 한다면 아무래도 박용철의 떠나가는 배 를 나는 들어야 하겠다. 슬프고 따뜻하고 그리고 비장한 시 떠나가는 배 를. 나두야 간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 거냐 나두야 가련다. 아득한 이 항군들 손쉽게야 버릴 거냐 안개같이 물 어린 눈에도 비취나니 골짜기마다 발에 익은 묏부리 모양 주름살도 눈에 익은 아아 사랑하던 사람들 버리고 가는 이도 못 잊는 마음 쫓겨가는 마음인들 무어 다를 거냐 돌아다보는 구름에는 바람이 회살짓는다. 앞대일 언덕인들 마련이나 있을 거냐 나두야 가련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 거냐 나두야 간다. 나는 이 시가 박용철이 몇 살 때 그리고 몇 년에 씌어진 시인지도 모른다. 그저 1930년대 시일 거라고 짐작할 뿐이다. 내가 이 시를 만나기는 52년이던가 부산 피난지에서였다. 그때 나는 고 김용호 선생이 주간하고 계시던 아동잡지 [파랑새] 편집을 돕고 있었다. 그 편집실에 쌓인 많은 잡지, 단행본, 잡동사니 속에서 어느 날 우연히 헌 잡지를 뒤적이다가 문득 이 시를 만나게 된 것이다. 그 잡지의 이름이 무엇이었는지도 지금 기억에 없다. 나는 몇 번인가 이 시를 읽다가 잡지째 들고 오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어 원고 용지에다 얼른 베껴 넣었다. 그날 이후 나는 시도 때도 없이 이 시를 꺼내 들고 읽고 또 읽었다. 나두야 간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 거냐/ 나두야 가련다. 우선 그 첫 연부터 내 마음을 잡고 흔들었다.

아직 20대 중반의 젊은 감성은 전쟁의 상처로 피 흘리고 있었다. 함박눈 쏟아지던 밤길을 쫓기듯 떠나 인천 앞바다에서 피난선을 타고 남으로 남으로 피난길을 떠나던 일이 어제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 두고 온 집 아늑하던 내 방의 남향한 창, 창 앞의 한 그루 푸른 소나무, 그 평화와 꿈과 소박한 행복들을 나는 모두 잃어버렸다. 언제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돌아가 그 창 앞에 다시 앉아볼 수 있을까. 가슴 미어지는 안타까움이고 그리움이었다. 가고 싶다. 폐허로 변한 거리일지라도 이제는 불빛 하나 보이지 않는 황막한 황도일지라도 그곳은 태양과 꽃들이 뜨겁게 포옹하는 원시의 수풀 꿈결에도 사무쳐 불러보는 목숨의 거리기에 …중략… 바람 부는 날엔 거리의 전선이 부엉이 울음 울고 소스라쳐 높이 솟은 가로수 가지엔 잿빛 작은 새들이 까맣게 모여오고 그러면 나는 얕은 창가에 턱을 고이고 긴 세월을 손꼽아 헤며 조용조용 그리운 이름들을 불러보곤 하였다. … 중략 … 한 번은 돌아가고 싶다. 폐허로 변한 거리일지라도 이제는 불빛 하나 보이지 않는 황막한 폐도일지라도 (졸작 돌아가고 싶다. 폐허로 변한 거리일지라도 ) 참으로 암담한 나날이었다. 희망도 없고 미래도 알 수 없는, 아니 당장 오늘의 삶에 허리가 휘던 찌들고 캄캄한 피난살이의 고달픔을 이러한 시로 달래보던 시절이었다. 나는 떠나가는 배 를 읽고 읽으면서, 어느덧 주문처럼 외우면서 비로소 무언가 눈에 가렸던 검은 포장이 벗겨져 나가는 것 같은 빛을 느꼈다. 그렇다. 가야 한다. 이 젊은 나이를 이대로 보낼 수 없지 않는가. 어디든 가자. 내게 닥치는 운명을 넘어 기어코 가자. 그런 결의 같은 것이 물방울처럼 가슴을 적시기도 했다. 한 편의 시를 그같이 운명처럼 뜨겁게 만났던 것을 나는 지금도 감사한다.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

몇 편의 시극과 희곡을 쓰긴 썼다. 그러나 거의 단막물인데다 별로 야심적인 것도 못 되고 보니 신나게 이야기할 것도 사실은 없다. 그런대로 우선 내가 쓴 두어 개의 작품을 소개해보겠다. 시극 여자의 공원 나는 여기서 한 여자의 실존을 쫓아 본질을 추적해봄으로써 그 정신의 현주소를 찾아보려고 했다.

 

현이라는 여자, 현이란 악기의 줄이다. 높고 낮고 가늘고 굵은 몇 가닥의 줄, 그 줄이 튕겨져 내는 각기 다른 소리들은 그대로 여자의 실존의 모습이며 생명의 소리였다. 현이는 그 몇 가닥의 줄을 남편과 자식의 옛 애인에게 걸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줄은 어느덧 하나씩 끊어졌다.

 

여자: 무서워요, 참을 수 없이 무서워요.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무너져 버린 빈터에 나 혼자 남았어요.

남자2(옛 애인): 웬일일까. 나무는 죽고, 꽃은 시들고 새들은 간 곳이 없으니.

여자: 모두들 가버렸어요. 지금은 빈 공원, 찾아올 사람이 없는 황혼이에요.

남자2: 내가 마지막 길손인가. 여자: 아마 그럴 거에요. 당신은 내 무서운 시간에 찾아온 마지막 손님, 그 문이 닫히기 전 내 남은 날을 걸어보는 마지막 줄이에요.

남자2: 그건 안 돼, 난 관객, 잠시 지나가는 관람객에 불과해.

여자: 가지 말아요, 난 길 잃은 새, 갈 바를 모르고 있어요.

남자2: 할 수 없지, 문을 닫고 조용히 기다릴 수밖에. 난 안돼.

 

이렇게 여자가 걸었던 줄은 죄다 끊어진다. 이제 걸어볼 줄도 없는 나머지 생명은 무엇을 어떻게 울릴 것인가. 줄이 없는 악기에서도 그 어떤 발성이 가능한가, 나는 그 소리가 듣고 싶었다. 그리고 가능하면 여자의 정신의 분명한 현주소까지를 밝혀보고 싶었다. 그러나 내 힘은 거기에 미치지 못하였고 따라서 현이는 저무는 공원에서 별수없이 방황하는 수밖에 없고 나 또한 현이 곁에서 함께 흔들리며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 분명한 종지부 하나를 찍어주기까지 나와 시극 속의 현이는 기다려야 한다. 또 하나 에덴 그 후의 도시 에서,

남자: 이제 어쩔 수 없는 내 차례가 되었군. 저 밝은 태양이 나를 쫓아오고, 숱한 시선이 나를 쏘아보고 막 뒤의 연출자가 나를 몰아내니 이제 어쩔 수 없는 내 차례가 되었어. …(사이) 피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 단말마의 막다른 골목, 막다른 골목에서 나는 움직인다. 싸운다. 질주한다. 피투성이가 된다. (사이) 날을 수도 숨을 수도 없는 싸움터, 발판도 손잡이도 없는 사닥다리, 오르지 않으면 죽음이 있고 올라간 끝에도 죽음이 있다. 운명의 연출자엔 손이 없지만 쉴 사이 없는 채찍이 있다. 선택은 금지된 행위, 나는 가기 싫어도 가야만 한다. 그것은 죽어가기 때문…

 기실 누군가의 말처럼 인생은 일 장의 연극인지 모른다. 막이 열리면 싫건 좋건 나가야 하는 연극, 그들은 거의가 현대 의학으로도 종교로도 치유할 길 없는 정신 분열자 들이다. 야망의 피에로이며 상식의 피해자들. 나는 여기서 그러한 피해자들의 희극적인 비극을 잡아보려 했다. 그러나 역시 능력 부족의 미숙성을 노정한 채 다음 기회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이제 앞으로 내가 써보고 싶은 소재, 아니 꼭 써야 할 소재가 하나 있다. 그것은 6.25의 비극이다. 아는 사람은 알고 있을 그 처절했던 전란의 체험이다.

남북의 하늘을 찌르던 포성, 아우성치며 물결 져 가던 피난민의 대열, 짐짝처럼 실려가던 피난민 열차, 자식을 잃고 어버이를 잃고. 천리길에 메아리 치던 호곡과 애통, 탈출, 시체, 처형의 살육, 그 아수라 같은 생지옥의 체험을 아는 사람은 안다. 나는 그때 보았다. 죽은 듯이 비었던 한여름의 서울, 외롭게 태양을 반사하는 검은 지붕들, 지붕 밑에 굳게 닫힌 잿빛 창들, 빗장 꽂은 집집마다 무겁게 고여 있는 죽음의 적막. 탱크와 따발총과 바리케이드와 카키색 살기 어린 행렬을, 골목이며 광장마다 걸레처럼 뒹구는 시체와 시체 위를 윙윙 도는 쉬파리와 미친 개와 까마귀 떼를. 세계의 한구석에 완전히 버림받고 완전히 격리된 채 한 시간 앞도 알 수 없는 불안 속에 시시로 엄습하던 공포와 절망을 나는 그때 손으로 만지듯이 보고 실감했다. 물론 6,25의 체험은 나만의 것이 아니다. 내가 체험한 만큼 나의 이웃들도 체험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꼭 써야만 한다는 책임까지 느끼고 있다. 그러면서 내가 아직 손대지 못하고 있는 것은 첫째로 내 게으름 탓이지만, 보다 더 그 소재가 너무도 크고 어려워서 쉽게 달려들 수 없는 두려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것은 내게 주어진 거의 절대적인 과제임엔 틀림없다.

그때 나는 대학에 있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정치보위부에 연행돼 갔었다. 바로 지금의 국립도서관 앞 빌딩 2층, 아니 거기까지 넘어가기 전에 얼마나 많은 고초를 겪었던지 도저히 그 이야기를 여기서 말할 수는 없다. 다만 나는 거기 시 정치보위부 심사과에 넘어가면서부터 비로소 내가 살아 있구나 하는 실감을 처음으로 느꼈고, 또 어쩌면 살 수 있으리라는 희망도 갖기 시작했던 것만 밝혀둔다. 나는 거기서 모모 연극인, 음악인, 대학 교수가 잡혀 와 있는 것을 보았고, 나보다 더 어린 여대생 후배가 갇혀 있는 것을 보았고, 하루에 한 번 변소에 가는 길에 지나가는 남자 수용소 안에서 백발이 하얀, 허리도 펴지 못하는 늙은 외국인 신부가 또한 끌려와 있는 것을 보았다. 발 하나 뻗을 자리 없는 집단 수용소 안에서 우리는 앉아서 밤을 세웠고 한밤중이면 불려 나가 심사를 받았다. 2층 창 밖으로 국립도서관 뜰의 전경이 한눈에 보였다. 얼마 전 그 도서관 문 앞에서 줄지어 서서 열람을 기다리던 자유롭던 모습이 꿈처럼 가슴을 메웠다. 딸의 행방도 모르고 울고 계실 어머니의 모습도 안타까웠다. 매일매일 수용소 안에서는 몇 사람의 모습이 사라졌고 대신 새 사람이 끌려왔다. 사라진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 석방되었을까, 북으로 끌려갔을까, 아니면 처형되었을까, 음악인 모씨가 나가던 날 맨발에 모시 적삼 차림인 나를 걱정하여 버선을 벗어주며 신으라 했다.

나는 그 버선을 발에 끼며 한없이 울었다. 내가 지은 죄가 무엇인가, 나는 내가 좋아했기에 연극을 했고 내가 좋아했기에 사람을 사랑했다. 그들이 주종하는 데모에 신나게 가담했고 데모에서 잡혀 고생도 했다. 샘솟는 젊음으로 시를 쓰고 각본을 써서 방송극을 하고 대학 문학의 밤에 시 낭독을 하고, 웅변을 하고, 그것뿐이다. 그렇게 젊음을 불태우던 일뿐이다. 그런데 나는 죄목도 모르는 죄목으로 잡혀 와 내일을 알 수 없는 유폐 속에 있다. 내게 죄가 있다면 단 하나, 오늘 이 시간, 이 땅에 태어나 살고 있다는 죄 밖엔 없다. 그것도 죄가 될 수 있는가, 죄가 될 수 있는가, 내 하느님 당신도 그렇게 무자비한 분인가, 지리하고 긴 나날을 나는 이런 생각들로 시간을 메웠다. 그리고 어느 날 실로 기적적으로 풀려 나왔고, 풀려 나온 지 한 주일 만에 국군 인천 상륙이라는 재생의 쾌보를 들었다. 그러나 우리의 불행은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국군이 입성하고 집집마다 감추었던 태극기를 게양하고 잠겼던 문들을 열어놓고 만세와 환호에 거리가 묻혔을 때 또 다른 살육이 피를 뿜었다. 곳곳에 보복과 징계, 학살과 처단이 살아 남은 생명을 유린했다. 선의의 피해자들은 또 다른 공포 속에 몰렸고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보복에 떨었다. 나 역시 동네 청년 자치단체에 연행되어 곤욕의 몇 시간을 감금되었다. 도시 무엇이 그처럼 인간을 말살하며 살인적인 위력으로 군림했던가, 어느 악마적인 영웅이던가, 살인적인 무기이던가, 정치 집단이던가, 생각하면 그 원흉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는 이념이라는 괴물이었다. 이념이라는 탈을 쓴 정신병자의 집단이었다. 집단이란 무엇인가, 이념이란 또 무엇인가, 그것은 모두 인간이 만든 인간의 굴레가 아닌가, 인간은 바로 그 자신이 만든 가스실로 자신이 걸어 들어가야 하는 배리의 모순체가 아닌가. 요컨대 나는 이러한 소재를 통해 한 시대의 불행을 짊어지고 어쩔 수 없이 집단과 이념의 희생이 될 수 밖에 없었던 한 인간의 무력한 실존을 그려보고 싶다. 신도 구원도 없고 현주소도 목적지도 없는 그런 인간의 절망을 절망 속에서도 버릴 수 없던 그 강한 생명에의 욕구를, 기실 사르트르의 말처럼 절망할 수조차 없이 약한 인간의 실존을 그려보고 싶다.

 

 깔끔하고 단정하며 뿌리처럼 단단하신 분

소영 박화성 선생님은 우선 깔끔하고 단정하신 분이시다. 즐겨 입으시는 색은 연보랏빛 아니면 연분홍빛 치마 저고리나 두루마기에 하얀 레이스 숄을 날아갈 듯이 두르시고 역시 하얀 레이스 장갑으로 손을 가리신다. 결벽증이지 싶을 만큼 깨끗한 것을 좋아하시어 어떤 좌석에서도 털썩 그냥 앉으시는 법이 없고 방석에 손수건을 펴놓고 앉으실 만큼 불결한 것은 못 견디셨다. 후배들에게 생전에 단 한 번도 흰 머리칼을 보이신 적이 없으시며 언제 어디서 즉석 축사나 인사를 부탁해도 막히는 법이 없이 유창하고 조리 있게 말씀을 잘 하시었다.

선생님은 갑작스런 방문을 싫어하셨다. 당신의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시기 싫어서이다. 때문에 찾아갈 일이 있으면 미리 기별하여 어느 날 몇 시쯤이라고 약속을 해야 한다. 그러면 선생님께서는 그 시간을 위해 옷도 갈아입으시고 집안도 치우시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기다리신다. 정확한 것을 좋아하시며 약속 시간에 늦으면 언짢아하신다. 그만큼 매사에 빈틈이 없으시며 충실하시다. 음식 솜씨도 대단하시어 언젠가 선생님 댁 회식에서 다양한 그 요리법에 감탄한 적이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먹어본 짚에다 말아서 구운 낙지 말이 양념구이 맛을 지금도 나는 기억한다. 정초엔 손수 밤, 대추, 호두 등 다섯 가지 열매를 고아 달여서 만든 오과차를 장만하시어 세배 오는 후배들에게 대접하시며 즐거워하신다. 그뿐 아니라 자녀들을 위한 선생님의 정성은 극진하시다.

아침이면 아무리 힘이 들어도 손수 자녀들의 신을 닦아주시면서 마음으로 하루의 무사함과 밝은 길을 비신다고 언젠가 하시는 말씀을 들었다. 그리고 당신의 용채를 꼭꼭 저축하시었다가 손주 아기들의 등록금을 손수 주신다고 자부인 이규희 여사로부터 들은 적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선생님은 여성 중의 여성, 어머니 중의 어머니셨던 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도 선생님의 성품은 꼿꼿하시고 의연하셔서 개인적인 일이거나 사회적인 일이거나, 불의와 부당한 일에 대해서 대단한 비판력을 가지고 계셨다. 때문에 옳다고 생각하시는 일엔 그것이 아무리 불리한 자리라 할지라도 과감히 당신을 드러내시기를 주저하지 않으셨으며 불의에 대해선 진심으로 분노하시고 슬퍼하셔서 그 연세에도 언성을 높여 지탄하였던 것이다. 그럴 때 선생님의 기상은 젊은이 못지않은 기개를 느끼게 하시었다. 선생님의 개인적 일상적 삶에선 매우 결벽증이 심하시어 받으신 것을 꼭 갚지 않고는 못 견디시는 밀연이 있으셨다.

그래서 찾아가는 후배들의 정을 그처럼 고마워하시면서 일일이 기억하시어 언젠가는 꼭 한 번 갚으신다면서 모 호텔 일급식당에서 성찬을 베풀어주신 적도 있으시다. 선생님은 또 대단한 정신력을 지니고 계시었다. 몇 해 전 필자가 여류문학인회 일로 동분서주하면서 처음으로 광주 지방에 세미나를 떠나게 되었을 때 선생님께 동행하실 수 있는지 여부를 여쭙자 선생님께서는 쾌히 승낙하시어 참석하실 것을 동의해주셨다. 사실 나는 말로는 동행해주실 것을 원하면서도 내심 걱정이 많았다. 80이 넘으신 고령이신 데다 별로 강건한 체질도 아니시고 댁에선 언제나 허리를 90도 각도로 구부리고 다니실 정도로 불편하신 몸으로 먼 기차여행이며 여러 가지 행사를 감당해내실 수 있을까 적이 염려스러웠던 것이다. 그러나 선생님께서는 그 피곤한 기차여행 끝에 세미나 장소에 도착하시어 쉴 사이도 없이 일장 강연까지 해주시고 끝까지 모든 일을 무사히 마칠 수 있도록 끄떡없이 도와주신 것이다. 참으로 정신력이 대단하심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한 선생님에겐 또 한없이 다정한 일면도 있으셨다. 손수 달이신 귀한 오과차를 당신은 안 드시고 두고 두고 찾아오는 후배들에게만 나누어주시던 정성이며 돌아갈 때면 아파트 앞 큰길에까지 나오셔서 사라져가는 사람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기까지 서서 배웅을 하시던 일, 이름 다른 생일을 모르고 지났다면서 봉투에 꼭꼭 정성을 담아 몇 달씩 가방 속에 넣어두셨다가 언젠가 찾아간 필자에게 꺼내주시던 일이며 모두가 선생님의 인정스러운 일면을 엿보게 하는 일들이 아닐 수 없다. 언젠가 강남 동원 아파트에서 뜰이 있고 꽃이 피는 나무가 있고 잔디가 푸르게 자라는 세검정 자택으로 이사를 하셨을 때 어찌나 좋아하시던지 아침마다 창을 열면 앞산이 내다보여 그리 좋을 수가 없다고 꼭 소녀처럼 들떠 기뻐하시던 모습에서도 선생님의 다정다감한 일면이 엿보여 함께 즐거웠던 것을 기억한다.

물론 나는 선생님의 젊은 시절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평생에 육식을 하시지 않은 선생님의 노년은 어쩌면 식물성 같은 연하고 깨끗함과 함께 오히려 식물만이 갖는 질긴 뿌리 같은 기개를 지니신 삶이 아니었던가 생각한다. 그리고 가정적으로는 여러 자제분들의 지극한 효성 속에 오복을 누리신 행복한 생애이셨던 것을 새삼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제 오직 천수를 다하시고 유명을 달리하신 선생님의 명복을 두 손 모아 빌 뿐이다.

 

 바쁘게 살다 간 천성의 자연인

내가 손소희 선생과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서 알고 지내게 된 것은 아무래도 1965년 무렵 한국여류문학인회가 창립되면서부터라고 하겠다. 그 전에도 선생을 가끔 우연한 장소나 공식적인 모임에서 만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아직 낯설어 먼 발치에서 인사를 보내는 정도에 불과하였다. 그러던 것이 한국여류문학인회가 창립되면서부터 우리는 한 달에 한 번씩 정기 월례회를 갖게 되었고 자연히 이제껏 어렵고 멀리만 하던 문단 선배들과 가까이 한 자리에 어울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선생은 바로 박화성, 조경희 선생들과 함께 한국여류문학인회 창립을 주도하신 한 분이기도 했다. 그러한 월례적인 모임은 서먹하던 선후배와 동료 사이를 비교적 가깝게는 했지만 그렇다고 처음부터 선생과의 친교가 시작된 것은 아니다. 몇 번인가 만나는 동안 공교롭게도 선생의 자택이 신당동이어서 내가 사는 장충동과는 매우 인접해 있음을 알게 되었고, 가끔 귀로를 동행하게 되면서부터 우리는 조금씩 가까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지리적 거리가 어느덧 심리적 거리를 좁히면서 가까이 대하기 시작한 선생의 인품은 매우 대범하고 통이 큰, 이른바 두령의 기질을 천성으로 타고난 분이었다. 소위 부드럽고 상냥하고 은근하고 세련된 여성 일반의 장식적인 매너에서 볼 때 선생은 얼마간 거칠고 직선적이며 어디서나 서슴지 않고 직언도 하는 전혀 꾸밀 줄 모르는 천성적인 자연인이었다. 누구하고나 쉽게 가까워지며 따뜻한 인정과 포용력을 가지고 있었고, 아무리 당신에게 잘못한 사람에 대해서도 끝까지 미워하지 못하는 약한 밀연도 지니고 계셨다. 사실 일상 생활에서의 선생은 많은 취약점을 지닌 분이었다. 우선 그분은 일반 여성들처럼 자신의 생활 공간을 정리 정돈하는 데는 거의 관심도 없고 소질도 없었다.

되도록 행동반경을 줄이기 위해 일상적으로 소용되는 물품들을 바로 앉은 자리 주변에 있는 대로 늘어놓고 살았으며 때문에 그분의 안방을 방문한 적이 있는 문우들은 그 어수선함에 처음에 놀라기도 했다. 월간지, 단행본, 기증본, 원고지, 일용할 커피, 설탕, 약품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소품들이 잡다한 방에서 그러나 이상하게 편안한 휴식감을 느끼게 되는 것을 경험했던 것이다. 그것은 꾸미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맨 살을 보는 듯한 스스럼없는 친근함이었다. 손이 크고 베풀기를 좋아하시어 찻값이나 밥값을 거의 당신이 도맡아 내시는 두령의 기질도 바로 그 인품의 크기를 뒷받침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기질은 그분의 타고난 천성이기도 하지만 또 하나 성장기에 형성된 후천적 기질일 것도 같다.

선생은 함북 경성군 회령면 수북리에서 소문난 대지주인 손주명씨와 이직단 여사의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집이 4천여 평 대지에 7,80칸이 넘는 대저택이었다. 양친은 일찍이 젊어서 기독교 사상을 수용할 만큼 진취적이고 개화된 분들이었다. 특히 어머니 이직단 여사는 뛰어난 기상의 여인으로 선생은 어머니의 천품을 이어받아 매사에 적극적이고 활동적이며 영민했다고 한다.

그같이 유복한 집안에 막내딸로 내어난 선생은 남부러울 것이 없는 풍족을 누리며 성장했고 부모님이 일찍 교회를 지어 마을에 바치고 이웃들에게 베푸는 것을 보고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크고 활달한 그릇으로 성장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선생은 병약하여 청소년기에 두 번씩이나 매우 위험한 투병 생활을 한다. 첫 번째는 여고시절, 결핵성 복막염을 앓는다. 45여 년 전 결핵성이란 죽음을 의미하는 중병이었다. 그러나 기적처럼 3년여의 투병과 어머니의 지극한 간병으로 회복되었으나 그 후 다시 척추 카리에스의 선고를 받는다. 재차 3년여의 병상 생활이 시작되니 선생의 청소년기는 그래도 죽음과의 싸움이었던 것이다.

선생이 후일 자신의 일상 생활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거의 무관심하게 돌보지 않은 것은 어린 시절 두 차례씩이나 죽음과의 싸움을 치르면서 가장 절박하고 큰 것은 생사의 문제일 뿐 그 이외의 자잘한 것에 마음을 쓸 여유도 필요도 느낄 수 없었던 때문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 손에 가방을 들면 다른 손의 카메라는 반드시 어딘가에 흘려버리는 선생의 고질적 실물(선생은 소지품을 수도 없이 잘 잃어버렸다.)도 단순한 건망증이 아니라 어쩌면 한 몸에 둘 이상의 짐을 감당하지 못하는, 다시 말하여 무엇이든 중요한 것 하나만을 겨우 간수하는 선생의 허약성도 바로 그런 데 기인하는 것이 아닌지. 당연히 선생은 쓰는 일인 문학(곧 생명)하나를 간수하기에 온 힘을 기울였고 그 밖의 자잘한 생활 주변의 정리 정돈 따위는 무의미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일에 대해선 그같이 소홀했던 선생도 일단 부군 김동리 선생을 위해선 참으로 지극한 내조자였다. 못 하나 박지 못한다. 고 스스로 말씀하시듯 집안일에 등한하신 동리 선생님을 평생 큰 아기처럼 수발을 드셨고 가내 대소사는 말할 것도 없고 보통 남자들의 일로 치부되는 관공소 출입까지도 도맡아 처리하셨다. 그만큼 동리 선생의 문학과 공적 생활을 중시해 그 밖의 일에 신경을 쓰지 않으시도록 정성으로 내조하셨던 것이다. 선생은 또 음식이나 옷에 대해서도 기호가 특이하였다. 앉은 자리에서 좋은 분위기이면 소주 두어 병의 실력을 과시하시는 선생은 취하면 흔쾌히 후배들의 청을 받아 여흥에도 서슴지 않고 한몫 끼신다. 그러나 노래는 부르지 않으시고 낭랑한 목소리로 시 낭송을 하시는 것이다. 외국어대학 재학 시절(선생은 일제 때 영생여고를 나오시고 1960년대 초에 만학으로 외국어대학 영문과를 졸업하셨다.) 배운 로봇 브라우닝의 시나 고전 속의 몇 대목을 마치 변사처럼 도도하게 감정을 넣어 암송하시는 것이다. 그럴 때 선생의 기억력은 한마디 틀림도 없이 완벽했다.

옷에 대해서는 더욱 기호가 두드러져 블라우스 하나를 맞추는 데도 이상한 자작 디자인을 주문하여 양장점 주인을 당황하게 하기가 일쑤였다.유행이나 상식과는 전연 상관없이 선생 자신의 기호에 의한 주문은 결국 이상한 옷이 되어 나오고 그런 옷을 좋아라 입으실 때도 있지만 대개는 마음에 들지 않아 몇 번씩 고치게 하다가는 나중엔 손수 당신이 뜯어고치기에 이른다. 또한 장신구를 유난히 좋아하시어 대개는 여행지에서 얻은 모조품들이지만 목걸이, 귀걸이, 반지, 팔지 등을 즐겨 달거나 걸고 다니셨다. 모임 때면 일부러 주렁주렁 목에 귀에 팔에 그것들을 걸고 나타나 좌중을 웃기신다. 후배들은 반은 장난으로 환성을 지르며 한마디씩 선생의 차림을 평한다. 나는 그렇게 어린 후배들의 장난 섞인 웃음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안쓰러워 언젠가 한마디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은 왜 일부러 자신을 우스꽝스럽게 만드십니까? 그러자 선생은 진지한 표정으로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생각해보세요. 내 얼굴이 네모져서 딱딱한 데다 나이도 먹고 무섭게 보일 테니 누가 나를 즐겁게 대해주겠어요. 그런 익살이라도 부려야 후배들이 그나마 허물없이 나를 대해줄 것 아니에요? 선생은 그처럼 깊은 생각을 가진 분이었다.

선생의 이러한 기질적이며 배려 깊은 해학성은 참으로 젊은 후배들에게 큰 기쁨과 즐거움을 주었으며 때문에 어떤 자리에도 선생이 안 계시면 재미가 없었고 판이 어울리지 않았다. 선생이 안 계신 자리에선 술 맛도 나지 않았고 이야기도 흥이 오르지 않았다. 선생은 그만큼 보이지 않는 힘으로 우리를 이끌어간 것이다. 사실 나는 선생의 젊었던 시절을 잘 모른다. 더욱이 6.25 당시 나는 아직 풋내기 문청 시절로 몇 편의 시를 지상에 발표하고는 있었지만 선생과의 교분이 있을 리 없고 어쩌다 먼 발치에서 스쳐 지나가는 선생의 아름다운 한복 차림(그때는 한복만을 주로 입으셨던 것으로 기억한다.)에 황홀해했던 기억뿐이다. 그 무렵, 주로 수복 후가 되겠지만, 그 무렵의 선생은 참으로 신비하도록 아름다웠다.

마치 희랍 조각처럼 드높은 콧날에 흰 살결이 차갑게 이지적이던 선생의 모습은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거리감을 주고는 있었지만 무언가 가슴 설레게 하는 힘이 있었다. 특히 선생의 인상을 두드러지게 한 것은 즐겨 입으시던 한복 색조의 특이한 배색이었다. 원래 한복이란 치마 색을 진한 것으로 하고 저고리를 엷은 색으로 하는 것이 기존의 전통적인 배합인데 선생은 그것을 완전히 뒤집어 역으로 이용한 것이다. 그러니까 치마를 눈처럼 흰 백색에 저고리를 진한 비취 빛으로 새파랗게 배색하여 입으시던 것이다. 후일 선생이 화필을 들고 물감을 고르며 색의 신비를 창출해내던 그것 역시 타고난 천분의 미적 소질이었을 것이다.

첫 창장집[이라기](1950년)가 문단의 깊은 관심과 격찬 속에 출판되었고 이어서 [현대문학]에 1957년 경 연재되던 태양의 계곡 에서 나는 비로소 손소희 문학에 대한 경탄과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작품의 내용은 잊었지만 뛰어난 문체와 섬세한 감각이 시처럼 아름다운, 문학성 높은 작품이었음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선생의 문학에 대한 열정과 집념은 참으로 놀랍고 무서웠다. 그처럼 일상적 주변 생활엔 무신경한 일면을 보이면서도 일단 문학에 이르러선 믿을 수 없으리만치 완벽주의자가 되신다.

빈틈 없는 논리로 자내는 완전한 구성, 한마디 한마디를 다듬어내는 무서운 언어의 마력, 선생의 어디에 그 같은 힘이 숨겨져 있었던가 놀라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이다. 진실로 선생은 문학을 위해 태어나 문학을 위해 살다 가신 분이었음을 새삼 실감한다. 그 좋은 예로 선생의 대작이신 [그 캄캄한 밤을](장편) [길갈마귀 그 소리](창작집) [우기의 해와 달](장편)이 모두 70년에서 80년에 이르는 사이에, 즉 이순이 훨씬 넘은 노년에 이룩해 내신 업적들인 것이다. 생각하면 60년대 초 독자를 사로잡았던 장편[남풍]이 주던 젊고 싱싱한 감동이 어느덧 민족사적 비극으로 성장하여 저 유명한 방위군 사건이며 일제하 독립군의 이야기들을 주제로 한 민족의 수난사를 대하적으로 엮어낸 선생의 문학적 역량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한국문학사에 반드시 기록되어야 할 업적이라고 나는 믿는다. 선생이 노년에 들어와 도자기며 그림 등 여가를 즐겨, 몇 차례인가 도예전이며 그림전을 연 적이 있는데 그런 선생의 외도를 비평하는 후배들에게 선생은 이런 말로 당신의 괴로운 심정을 고백하시던 것이다.

소설을 쓰고 싶어요. 소설을 써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오늘 쓰는 소설은 적어도 어제 쓴 것보다는 나아야 할 것이고, 그래서 더 좋은 소설을 쓰고 싶고 써야 한다고 원하지만 그것이 안 되니까 이 같은 외도로라도 나를 달래는 것이지요. 선생은 생존 중에 김동리 선생 문학관을 지어드리는 일과 당신의 전집을 내는 일이 큰 소망이었다. 그 일을 위해 우선 자금원을 확보할 일념으로 전 신당동 집 자리에 빌딩을 세우셨다. 적당한 시기에 빌딩을 처분하여 문학관 건립기금을 만드실 생각이었던 것이다. 욕심이라면 욕심이고 마지막 소망이라면 소망이었다. 그러한 일로 하여 최근 몇 해 동안 선생의 나날은 매우 바쁘고 고단했다. 고통을 달래시던 나날, 당신의 전집을 생전에 이루지 못함을 쓸쓸해하시고 부군 김동리 선생의 건강을 염려하시면서 마침내 당신의 죽음을 예감하신 듯 지난 12월 27일 새벽 5시 간병인에게 대필시켜 마침내 한 구절을 남기셨다. 불꽃 같은 내 생명의 연장을 아침이면 챙겨서 안고 점심이면 달래고 저녁이면 다시 챙겨 배겨주며 거두어 안고 돌아올 때 그때 목마름이여! 너 나에게 준 거이 무엇이더냐. 욕망밖에 없었다. 한줄기 하느님의 눈빛이 없었다. 지금 알았다. 너 다시 하느님의 눈빛으로 받아줄 때 그때 그리스도의 품에 안길 것이다.

그렇게 끝내 하느님에게로 돌아갈 것을 확인하면서 마침내 사랑하던 문학과 삶과 동리 선생님을 두고 이제 영원히 가셨다. 청담동 집의 그 빨간 목백일홍도, 실한 감나무도, 고목으로 자란 은행나무 (신당동 집에서 옮겨 심은 것이다.)도 다시 못 보고, 조석으로 손수 먹을 것을 챙겨주던 애견들과도 작별하고, 그처럼 병상에서도 걱정하시던 살림 걱정, 김장 걱정, 월동 걱정도 없는 곳으로 가셨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어디서도 그같이 따스하며 푸근한 한국적 인정의 누님 같고 어머니 같은 선생의 모습을 다시 보지 못할 것이다. 참으로…

 

 다시 3월에

내가 어렸을 때 3월은 봉원사 뒤뜰 깨어진 경신에 한 오백 년 묵은 상처나 슬슬 문지르며 헐벗고 굶주리고 피맺힌 강산에 목소리 죽이고 숨 죽이고 버선발로 살얼음판 기어서 울아버지 한밤중 싸리 바자울 아슬아슬 넘어오듯 그렇게 앞 뒤 입 막고 귀 막고 숨터지게 왔어요. 할아버지 여덟새 무명 동저고리 바람으로 만주 북간도 피멍들어 넘나들던 객관의 주막 서러운 봉놋잠 깨울까봐 깨어서 다시 불붙는 통한의 불기둥 될까봐 제국주의 창검 아래 썩둑썩둑 잘리는 생초목 될까봐 할머니 긴 밤 심지불 돋우며 아주까리 기름등잔 바작바작 태우던 근심으로 왔어요. 눈물 한숨 단근질로 왔어요. 그때 3월은 (졸작 “3월”에서)

그렇다. 그 시절 누가 감히 3월을 벙긋 입에라도 올려보았던가. 속앓이 체증처럼 깊이깊이 감추느라 나는 여학생이 되도록 그 빛나는 역사를 감감 몰랐었다. 알았던들 무엇하랴만. 나의 고등여학교 시절은 참으로 살아내기 힘든 시절이었다. 날마다 방공훈련, 근로봉사, 신사참배 그것은 약과였다. 반도학생들의 학도병 징용, 처녀들의 정신대 사냥으로 한반도는 쑥밭이 되고 있었다. 무엇이든 해야지 놀고 있으면 위험하다 하여 나는 피신책으로 사범학교 진학을 결심했었다. 사범을 나와 두메 산골 교사로라도 발령만 받으면 우선 징집에서 제외된다고 했기 때문이다.

경성여자사범학교 강습과 160명 중에 조선인 여학생은 20명, 그 20명에 들기 위해 꽤 힘든 수험준비를 했던 것을 기억한다. 전국은 물론 만주, 중국에서까지 수험생들이 몰려왔기 때문이다. 여학생이 되도록 3.1운동을 몰랐듯이 어른들의 수군거림 속에 불안해하면서도 정작 정신대가 무엇을 하는 것인지 아마도 군수공장이나 어디쯤 끌려가서 고생하는 것쯤으로 알았었다. 지도를 펴놓고 보면 한반도의 위치란 참으로 숙명적으로 외세 침략의 조건을 갖추고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북으로 만주, 중국, 러시아, 남으로 일본, 그 대국들 사이에 낀 작은 나라가 수세기 동안 큰기침 한 번 못하고 속앓이 해온 사정을 멀리 고려 시대만 보아도 성종, 목종, 현종 등 30년 동안 세 차례에 걸친 거란의 침입에 시달렸고 또다시 고종 18년(1231년)에 시작된 몽고의 침입은 전후 7차례에 걸쳐 혹심한 수탈에 국토가 유린되었다. 1만 령의 수달피, 2만 두의 말, 1만 필의 견, 백만 명분의 의복에다 수부, 공장에 어린 동남 동녀까지 뽑아 바쳐야 했던 참담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몽고는 후에 국호를 원으로 고치고 보다 강하게 고려를 예속 지배하기 위해 역대 왕은 원 왕실의 공주를 정비로 삼아야 했고 왕자는 원의 수도에 머물게 하는 인질 정책까지 썼다. 25대 충렬왕에서부터 30대 충정왕에 이르는 6대의 왕의 시호 첫 글자를 충자로 정했던 것도 고려 왕실의 원에 대한 충성을 표시하는 것이었다 하니 그 참상을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그리고 근세 조선에 이르러선 더 할말이 없다. 임진, 정유의 왜란, 청의 침략, 정묘.병자의 호란 등 끊임없는 외세 침략에 시달리다가 마침내 일제 강점에 의한 한일합방이라는 통분이 역사를 남기게 된 것을. 이러한 외세 침입 때마다 도탄에 빠지는 것은 백성이다. 왕실이나 귀족은 고려나 이조나 똑같이 내분과 정권 찬탈의 혼미 속에 민생의 고초를 돌볼 겨를이 없었다. 오늘날도 예외는 아니다. 광복 50년이 되어가건만 징용이나 학병, 정신대 사건 같은 겨레의 통분을 밝히고 나온 것은 국민 스스로였다. 정부도, 민을 대변한다는 야권도 하나같이 정권 장악과 자당의 이익을 위해서만 목소리를 높여왔을 뿐 겨레의 아픔, 상처를 씻어줄 그 어떤 일도 한 것이 없다. 적성국인 일이 자신이 전비를 뉘우치고 스스로 죄를 폭로, 사과하고 나와서야 비로소 사회문제가 되는 형편이다. 참으로 일본의 전 국토를 보상으로 받는다 해도 잃어버린 일생을 되찾을 수 없는 한 맺힌 생령들의 남은 여생이나마 위로 받을 수 있는 길이 하루속히 열리기를 빌어 마지않는다. 광복 50년, 진정으로 우리 모두가 선열들이 흘린 피의 의미가 헛되지 않게 3.1정신을 되새겨야 하지 않을까.

 

 핵가족 생활에 유감 있다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 미국 이민가족 실태를 소개하는 프로가 있었다. 그 중 기억에 남는 장면은 한 소년이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왔으나 열쇠를 잃어버려 문을 열지 못하고 직장에 나간 부모들이 돌아오기까지 거리에서 공원으로, 공원에서 다시 거리고 배회하면서 헤매 다니는 장면이었다. 이런 유의 이야기는 비단 멀리 미국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바로 우리 이웃 앞뒷집에 얼마든지 널려 있는 이야기다. 내가 아는 몇몇 주부들도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남은 여가를 선용하기 위해 자주 집을 비운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돌아오면 아무도 없는 빈 집에서 냉장고의 찬 음식이나 꺼내 먹으며 엄마가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어쩌다 열쇠를 전해 받지 못한 날은 잠긴 문밖에서 마냥 기다리거나 친구 집으로 헤매 다닌다. 오늘날과 같은 핵가족 생활에서는 이러한 일은 이제 당연한 일상사다.

한 집안에 할아버지, 할머니, 숙부, 숙모, 사촌들 여러 형제가 버글거리고 살던 시절 학교에서 돌아오면 저만치 할머니의 정다운 목소리가 마루 끝으로 달려 나오고 조카들의 재롱이 웃음꽃을 피우던 이야기는 이제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이 되어버렸다. 아들 딸 가리지 말고 둘만 낳아 기르자던 가족계획 구호는 이미 한 세대 전의 이야기다. 한 가정에 하나 이상의 출산을 억제할 수 밖에 없는 인구 정책 속에 태어나는 아이들은 그야말로 장중보옥 금지옥엽으로, 자랄 때부터 프린스 또는 프린세스로 키워진다. 애지중지하는 과보호 속에 넘치는 물질, 우유와 초콜릿과 산더미 같은 장난감과 양복과 신발이 주어지고 전용 옷장과 편안한 침대 속에 부족과 결핍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같이 자라난 아이들이 장성하여 부모의 보호를 벗어날 나이가 되면 어떻게 될 것인가. 지나친 과보호 속에 지극히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성격이 되지는 않을까.

형제가 없었으니 서로 부대끼며 모를 깎는 자기 극기나 인내심을 기를 일도 없고 협동심도 양보심도 배울 기회가 없을 터이니 자칫 오만하고 이기적인 성격이 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다. 더욱이 작은 어려움이나 결핍도 이기지 못하고 무엇이든 원하는 것이면 소유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이른바 제동이 걸리지 않는, 자제력 없는 젊은이가 될 수밖에 없을지 모른다. 옛날 엄한 할아버지 밑에서 회초리 맞아가며 자라던 시절의 아이들은 아픈 매 속에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고 매 속에 깃든 깊은 정을 새겨 인륜의 길을 배웠으며 바르고 엄한 가훈 속에 어른 공경하는 효심과 아랫사람 사랑하고 형제가 서로 돕는 우애를 키웠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단촐한 핵가족 사회에서 할아버지나 할머니의 자리란 아무런 의미도 없다. 한 달에 한 번이나 두 번 보는 얼굴, 크리스마스나 명절 때 선물이나 사주는 사람, 그래서 선물의 무게가 따라 무거워지기도 하고 가벼워지기도 하는, 그 나마의 능력도 없을 경우는 그저 짐스럽고 귀찮은 노인들일 뿐이다. 결국 기강도 가훈도 없는 가정이 된다. 가족의식은 사라지고 가문이나 전통 따위는 낡은 굴레처럼 의미가 없어진다.

이러한 생각은 급기야 부모를 경시하거나 내던지는 결과를 초래한다. 실제로 내가 아는 한 노인은 다섯 형제를 두었건만 일정한 거처가 없이 몇 아들의 집을 한 달씩 옮겨 다니며 살고 있다. 노인성 치매증에 걸린 부모를 누구도 혼자서 맡아 봉양하겠다는 자식이 없는 것이다. 이렇게 부모를 버린 사람들은 언젠가 자신들도 아이들로부터 버려질 것을 각오하고 살아간다. 그래서 “언제 자식 볼 거라고, 뼈 빠지게 길러봐야 소용없어. 나 살아야지…” 하는 자식에 대한 불신을 자연스럽게 터득해간다. 이러한 가족간의 가치 변질은 결국 무너진 가족제도, 스스로 버린 인륜의 반대급부로, 다시 말하여 핵가족 사회의 어쩔 수 없는 한 특징이 되고 있는 것이다. 핵가족 생활 속에 주부들은 아이들이 학교에 갈 정도의 나이가 되면 시간이 남는다. 하나나 둘뿐인 단촐한 가족 구성에 모든 생활은 전기화되고 자동화하여 기계적이 된다. 남는 시간을 어떻게 쓸 것인가 많은 주부들이 자기 생활을 갖기 위해 빈번히 외출하고 밤늦게 귀가한다. 아이들은 옛날 우리들 어머니처럼 추운 겨울엔 언 손을 부비며 장작불을 지피고 우물물을 긷는 모습을 보는 일도 없고 밤늦도록 뚫어진 양말짝을 꿰매는 모습도 보지 못한다. 소꿉장난 같은 전기밥솥에 스위치만 넣으면 밥이 되고 밑반찬이나 옷은 시장에서 구입만 하면 된다. 파출부나 가정부에게 살림을 맡긴 집에선 더구나 아이들 눈에 비친 어머니의 모습은 예쁘게 화장하고 화려한 홈드레스나 나들이 옷으로 단장한, 남처럼 서먹한 어머니의 모습일 때가 더 많다. 아버지 또한 가부장의 위엄이나 권위를 내세우기엔 너무도 허약하고 무절제한 본능을 노출할 때가 허다하다. 가끔 경로니 효도니 한국적 미풍양속의 재발견과 선양을 위한 행사나 구호를 볼 때가 있다. 그러나 효도란 가지 나무에 오이를 접목하듯이 인위적으로 접목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적어도 성장의 과정이거나 역사를 통해서 길고 긴 시간 안에 은연중에 배양되고 자라는 정신적 산물이다. 효심이란 샘물 같은 것이어서 물의 근원이 마른 곳에선 결코 샘은 솟아나지 않는다. 말하자면 자신을 위해 바쳐진 부모의 노고에 대한 기억과 아픔이 효심을 만드는 샘이 되는 것이다. 물론 자식을 위해 희생하지 않고 노력하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을까마는 자식의 기억 속에 부모에 대한 아픔은 그리 흔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화장이나 나들이 옷에서 온다기보다는 거친 손과 낡고 찢어진 평상복에서 모여 위엄 있고 명성 높은 이름에서보다는 경건하고 자상스런 헌신적 자애 에서 오는 것이다. 결국 핵가족 사회에서의 모든 부모들은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그것을 알고 있기에 자식의 효도에 대해 일단 포기하고 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핵가족 생활에 길들여진 주인공들이 결코 버릴 수 없게 맛들인 것은 자유의 실감이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간섭도 받지 않는 그 자유, 제삼자를, 틈입자를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로움이다. 결국 자유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아이들이 장성하여 성가를 하면 지체 없이 분가를 시킨다. 눈치를 보고 신경을 쓰며 자식의 봉양을 받기보다는 차라리 혼자서 자유롭게 살기를 택하는 것이다. 경제력이 있을 때는 말할 것도 없고, 없을 경우에는 자식들의 보조를 받으면서 한가롭게 따로 살기를 원하는 것이다. 하여 핵가족 사회에서 시급히 요청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양로원의 시설이 아닐까 싶다. 선진국 같은 편리하고 정결한 양로원의 시설이야말로 핵가족 사회가 해야 할 유일한 경로와 효도의 지름길일지 모른다.

 

 신뢰에의 길

사람을 소개하거나 천거할 때 먼저 묻는 말이 “그 사람 믿을 만한가.”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에 따르는 여러 가지 사항들 학벌, 고향, 부모, 형제 또는 친지, 교우관계 등에 이르기까지 묻거나 설명하게 되는데 그런 질문의 배경이 결국은 그 사람에 대한 믿음성, 신뢰도를 측정하기 위한 자료임을 알 수 있다. 현대를 흔히 불신의 시대라고 말한다. 산업화, 물질화 사회가 초래하는 비인간화 현상의 한 특징으로 소외와 불신의 풍조가 불가피한 시대적 징후로 드러나고, 더욱이 우리의 현실은 지난 수십 년 누적되어온 정치, 경제, 사회의 뿌리 깊은 여러 가지 비리가 콩으로 메주를 쑨대도 곧이 듣지 않게끔 극심한 불신 사회를 조성하여 갖가지 허세 부조리와 혼란을 야기해온 것이다.

생각하면 내가 어렸을 때 어머니가 학교에 오시는 것은 입학식과 졸업식 때뿐이었다. 그러면서도 스승의 그림자는 개도 밟지 않는다고 할 만큼 사제지도는 분명하고 엄격했었다. 비록 일제의 식민지 치하에서 가난하긴 했어도 사람들은 서로 의심할 줄 몰랐고 소 꼬리를 위조하거나 콩나물에 농약을 뿌리는 법도 없었다.그처럼 평화롭고 순박하던 마음들이 언제부터인가 이중 삼중의 자물쇠를 꽂아놓고도 마음을 못 놓아 맹견을 기르고 도난 방지기를 설치하고 담 높이 철조망을 둘러치고 살게 되었다. 초인종을 눌러도 주인은 문을 열지 않고 먼저 첩첩 한 저편에서 방문자의 신원부터 확인해야 한다. 참으로 번영 속의 불안, 불신을 우리는 날마다 체험하며 살고 있다. 하면 인간과 인간 사의의 신뢰는 어떤가. 앞서도 말했듯 한 인간의 신뢰도는 대개는 그 출신교, 본적지, 부모의 배경 등 눈에 보이는 조건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상식이다. 이같이 한 인간의 신뢰도를 그가 지닌 인격적 품성에서가 아니라 배경적 조건에 의해 결정짓는 풍조 역시 불신 시대의 즉물적 사고방식이 아닐 수 없다. 도시 한 인간의 신뢰도란 그 사람이 갖는 정신적 성실성과 사무적 능력의 복합된 표현이다.

다시 말해 삶이나 맡은 일에 대해 얼마나 진지하고 책임감이 있느냐에 따라 측정되는 인격적 자질인 것이다. 하비 콕스는 <세속화 시대의 인간>이란 그의 저서에서 현대인의 가장 큰 죄악은 ‘나태’라고 지적하면서 아담과 하와가 금단의 열매를 따 먹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라 뱀의 유혹에 넘어간 무책임과 허약함이 나쁘다고 말하고 있다. 요컨대 현대인은 스스로 결정하고 결단하는 힘이 타력에 의존하는 나태와 무책임이 바로 죄악이라는 이야기다. 사실 우리는 흔히 남들이 생각한 대로 따라 생각하고 남들이 행하는 대로 따라 행하며 쉽게 살고자 한다. 그러한 추종적 삶에 책임감이나 독창성이 있을 수는 없는 법이다. 역시 어떤 일이든 일단 자신의 삶 안에 주체적으로 받아들여 재삼 재사 숙고하고 결정하는 자주적 삶을 살 때, 그래서 자신이 저지른 일을 스스로 책임지고 타개해나가는 정신력을 보여줄 때 비로소 인간적 신뢰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겸하여 “구변으로 지를 꾸미지 아니하고 작은 지식을 농락하지 않으며 몸을 올바르게 하여 남 앞에 언제나 한 발자국 물러서 있는 겸허한 덕”이야말로 그 사람의 인격을 결정짓고 신뢰도를 높이는 길이 될 것이다. “강과 바다가 능히 모든 계곡의 왕자가 될 수 있음은 강이나 바다가 모든 계곡의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남의 위에 있고자 하면(신뢰를 얻고자 하면) 반드시 스스로 남의 아래로 내려가야 하며, 남보다 앞에 있고자 하면 반드시 자신을 남의 뒤에 두어야 한다.”고 한 노자[도덕경]의 말은 이런 시대일수록 더욱 깊이 새겨볼 말이다.

 

 달내강과 목화밭 마로니에나무 아래서

동숭동 대학로 마로니에 광장엔 잎이 커서 더욱 쓸쓸해 보이는 마로니에 둥근 잎들이 아라베스크로 원을 그리며 점점이 떨어져 내리고 있다. 한 꺼풀 엷어진 공기의 막이 손끝으로 스치기만 해도 부서져 내릴 듯 앙상하다. 다시 돌아온 가을. 이제 날마다 쏟아져 내릴 굵은 소나기 같은 낙엽의 비를 맞으면서 나는 또다시 이 거리를 헤맬 것이다. 문득문득 가슴을 치미는 알 수 없는 감회들을 주체하지 못하면서. 왜 이리 휘청거려질까. 갑자기 체중이 몇 킬로쯤 빠져버린 듯, 누군가 내 몸에서 힘이란 힘을 모조리 빼앗아버린 듯 허전하다. 발 밑에 커다란 구멍이라도 뚫린 것 같다. 마로니에 잎이 또 한 장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린다. 그 마로니에 둥근 잎 사이로 점점이 떠오르는 쓸쓸하고 따뜻하고 다정하게 채색된 몇 장의 그림들, 바로 여행지의 그림들이다. 가을은 나에게 지나간 여수의 그리움들을 불러일으키는 계절이다. 그 중에도 마로니에 둥근 잎들은 20년 전 처음으로 나의 영혼을 감동과 흥분으로 들뜨게 하던 파리의 풍경들을, 그 거리거리 골목길의 이국적 정취를 되살리며 한달음에 아득한 추억 속으로 이끌어간다. 여행지의 가을은 쓸쓸하다. 더욱이 바람이 스산하고 마로니에 나뭇잎들이 성긴 빗발처럼 후드득거리던 파리의 저녁 길은 쓸쓸하고 황막했다. 그런 가을날 저녁의 적막을 씹으며 숙소로 돌아가는 나그네는 넓고 환한 거리보다는 구석지고 아늑한 파리의 뒷골목을 찾았다. 그것은 숨을 데 없이 허전하고 큰 거리의 쓸쓸함을 피해 좁고 안전한 곳으로 몸을 숨기려는 본능적인 은신의 표현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찾아 든 이름도 모를 뒷골목엔 몇 세기의 날고 그을린 빛깔의 붉은 벽돌집들이 옹기종기 늘어서 있었고 그 사이사이 이끼 묻은 허름하고 고풍 한 가게들이 닫힌 유리문 아래 희미한 등불을 켜고 앉아 있었다. 그런 거리들은 서울의 어떤 뒷골목을 걷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할 만큼 이질적인 아무것도 없는, 그저 초라하고 낡은, 그래서 다정하고 친근함을 자아내는 골목이고 거리였다. 한 평의 뜰도 없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지붕 밑, 다락방 작은 창문들은 검게 때묻어 그을려 있고 이따금 한두 포기의 빨간 프리뮬러나 베고니아 화분들이 어스름 저녁 빛 속에 하늘거리는 창 틈으로 불쑥 귀 익은 샹송 가락이라도 들려올 것만 같은 다정함에 잠시 발을 멈추기도 했었다. 또 있다. 나그네의 설레고 들뜬 감정이 어디라 안정하지 못하여 아침 일찍 아무렇게나 코트를 걸치고 쌀쌀한 새벽 바람을 쏘이며 호텔을 빠져 나와 거리에 나서면 여기저기에 무더기 무더기 마로니에 잎들을 긁어 모아 놓고 불을 지피고 있는 평화로운 모습들이 눈에 띄었다. 활활 타지도 않으면서 속으로 프슥프슥 소리 내며 타 들어가는 가랑잎 더미에서 한줄기 띠처럼 피어 오르는 연희색 연기, 아침 바람을 타고 멀리멀리 퍼져나가는 그 매캐하고 구수한 냄새를 맡고 있으면 꼭 어린 시절 고향집 뜰에서 태우던 모닥불 냄새를 맡고 있는 듯한 정취에 젖는 것이었다. 20년 전 내가 묵었던 그 생미셸 거리의 호텔 뒷골목의 조그마한 가게. 지금도 그 날고 퇴색한 야채가게는 남아 있을까. 유리 미닫이문이 덜컹거리는 꼭 우리 동네 구멍가게와 다름없이 먼지 뽀얗게 뒤집어쓰고 앉은 허름한 가게. 그 좁은 좌판에 새벽이면 물이 뚝뚝 지는 신선한 야채와 싱싱한 청포도가 가득히 쌓여 있었다. 나는 그 씨도 없이 달고 싱그러운 청포도가 그리워 아침이면 골목길을 걸어 가게로 갔다. “봉주르 마담.”하고 가게 문을 들어서면 웃으면서 “봉주르 마담.”하고 마주 나오던 50대의 뚱뚱하고 소박한 가겟집 여주인, 그 이상의 불어는 한마디도 할 줄 모르니 그저 청포도를 가리키며 손가락 하나를 펴 보이면 고개를 끄덕이며 저울에다 1킬로를 무게보다 넘게 넉넉히 달아주던 그 여인. 서로가 말은 못 해도, 국적이 다르고 인종은 달라도 인정에 다를 것이 없었던 투박하고 부침 성 있어 뵈던 가겟집 여주인도 이제는 70대의 할머니가 되었으리라. 아니 어쩌면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는지도 모른다. 무상이란 말은 이런 때를 위하여 있는 말인가 보다. 가슴속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바람, 마로니에 나뭇잎들이 마치 누렇게 시든 노인의 손바닥처럼 앙상한 엽맥을 드러낸 채 무수히 떨어지고 있다. 내 머리 속엔 다시 파리의 거리들이 명멸한다. “사람들은 살기 위해 이 도시에 모여오는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여기서는 모든 사람이 죽어 간다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말테의 수기 첫머리에서 파리의 인상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는 파리를 왜 그같이 느꼈을까. 그의 어둡고 암담했던 젊은이 죽음을 생각하게 했던 때문일까.

불르바르 생미셸의 구석진 지붕 밑 다락방에서 그을린 난로와 추위에 떨면서 고독한 젊은 날을 보냈던 라이너 마리아 릴케. 어쩌면 그가 걸었을지도 모를 그 생미셸 거리며 골목길들을 다시금 머리 속에 떠올려본다. 스무 해 전의 아득한 세월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희미한 기억의 파편들을. 가슴에 불을 켜듯 떠오르는 몽마르트르의 언덕, 몽파르나스의 밤. 샹젤리제의 번화가, 세계의 박물관 루부르 며 화려하고 전아한 뤽상부르 공원. 브랑수아즈 사강이 드나들었다는 골목 안 카페며 사르트르와 그 일파가 저녁이면 모여 한때 사상의 온실이 되었다던 생제르맹 데프레 광장의 카페, 밤 끝에 무수히 부서지는 고엽을 밟으며 진한 커피 냄새에 이끌려 밤마다 찾아 들었던 거리의 이름도 없는 작은 카페까지 합쳐 내 머리 속의 파리는 따뜻하고 향기롭고 진한 카페의 도시로 사진 찍혀 있다. 어디서나 불쑥 들려올 것만 같은 줄리에트 그레코의 ‘어텀 리브즈’의 한 소절과 센 강변의 치잣빛 노을과 함께. 문득 그늘진 포도 위를 백발의 노인이 한 마리 늙은 개를 이끌고 천천히 걸어간다. 내 기억 속에 지금도 걸어간다. 흑색과 갈색이 섞인 얼룩개를 끌고 기다란 단장으로 또각또각 포도를 다지듯이 두들기면서… 그것은 마치 1세기를 끌고 가는 역사의 그림자처럼 무겁고 긴, 적막 그대로의 고요한 묵화였다. 그 쓸쓸하던 뒷모습이 20년이 지난 기억 속에 어쩌면 이리도 선명하게 떠오를까. 세상을 잊은 듯 그저 걷는 일 이외엔 아무것도 이 세상에서 할 일이 없는 듯 그렇게 걸어가던 백발의 노인, 그리고 그 뒤를 따르던 늙은 얼룩개, 이제 그들도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하얗게 백골이 되어버렸을 것이다. 잠시 나의 추억은 여기서 끊어지고 하얗게 바랜 백지가 되어버린다. 다시 마로니에 둥근 잎이 그리는 아라베스크, 그 꿈 같은 선회를 따라 파리의 다음 장을 넘겨본다. 파리에서 만났던 유일한 한국 청년, 동생이 친구라고 소개하던 그 얼굴이 창백하도록 희고 허약해 보이던 젊은이, 서울 모대학 재학 중에 운 좋게 유학의 길을 얻어 파리에 온 지 6년이라고 했다. 그러나 홀어머니뿐인 그는 고학을 해야 했다. 거리의 레스토랑에서 웨이터로 아르바이트를 했다. 아침 10시 서부터 다음날 새벽 2~3시까지, 고된 노동이었다. 그렇게 돈을 모아 다음 학기에 대학에 돌아갈 무렵엔 완전히 학업이 뒤떨어져 별수없이 낙오와 실의의 비애를 씹어야 했다.

그러나 모진 고투 끝에 간신히 학업이 따라갈 만큼 회복될 무렵엔 다시금 생활의 위협과 학비 문제에 부딪혔다. 결국 또다시 거리의 레스토랑으로 직업을 구해 나가야 했다. 그렇게 2_3년을 반복하다 보니 마침내 기진맥진 학업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더라고 했다. 이제는 고된 노동 속에 오직 돈을 번다는 한 가지 위안으로 살아간다는 그, 젊은 나이에 인생을 다 살아버린 듯 허탈하게 웃는 그의 눈은 불빛을 받아 번쩍거리는 물방울이 글썽대는 듯했다. 파리서민의 담배, 독하고 진한 ‘골루아즈’를 꼬나 물고 앉았던 젊은이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도 이제는 초로의 신사가 되었겠지. 어쩌면 백발이 나부끼는… 돈은 벌었을까? 가족을 거느리고 조그마한 야채가게라도 하고 있을까. 고국의 홀어머니는 아들의 얼굴도 못 보고 임종했겠지. 다시금 무상이라는 말이 머리 속에 맴돈다. 고작 그렇게 살다 그렇게 갈 뿐. 마로니에 둥근 잎이 인간의 미망을 깨우치기라도 하듯 발 밑에 내려와 앉는다.

 

 봄의 맛과 멋 그리고 정

봄은 비를 앞세우고 안개 속에 온다. 나직이 드리운 청회색 엷은 막을 뚫고 가늘게 걸러낸 분무 같은 빗발이 기름처럼 땅을 적신다. 살아 꿈틀대듯 번들거리는 흙, 검게 부풀어오른 밀반죽처럼 물렁한 지면을 뚫고 한 치는 넘어 자란 듯싶은 상사초의 넓은 잎이 섬뜩하도록 푸르다. 골목길을 올라가는 유치원 원아들의 꽃무늬 우산들도 무당버섯처럼 화려하고 기우뚱기우뚱 옆으로 넘어질 듯 기우는 우산대 옆으로 재깔거리는 목소리도 오늘은 연보랏빛 수채화처럼 빗속에 녹아 흐른다. 봄은 바로 저 아이들의 작고 가벼운 발 밑에서, 그리고 동동 떠오르는 풍선처럼 동그란 목소리 끝에서 물방울 지듯 툭툭 튀어나올 것만 같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봄은 역시 시장의 야채가게서부터 오는 것 같다.

아낙네들 대소쿠리에 무더기 무더기 담겨져 오는 달래, 냉이, 씀바귀, 그 파릇한 잎사귀며, 뿌리에서 풍겨나는 쌉쌀하고도 향기로운 흙 냄새, 바로 그 흙 냄새에서부터 봄은 시작한다. 그것은 다름아닌 깊은 겨울의 동면에서 잠을 털로 일어나는 봄의 냄새다. 추위에 짓눌려 쓸쓸하던 시장 안은 그 향기로운 봄의 냄새에 갑자기 들썩거리듯 흥겨워진다. 그런 흙 냄새 중에서도 한겨울 추위에 지친 텁텁한 미각을 신선하게 일깨워주는 쑥의 향기를 빼놓을 수는 없으리라. 쑥은 냉이, 씀바귀 등과 함께 우리나라 전역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지극히 향토적인 식용 야생초의 하나다. 사실 그 희고 뽀얀 털에 뒤덮인 파르스름한 어린 잎에서 어쩌면 그렇게 강한 향기를 뿜어낼 수 있을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진한 향기를 지니고 있다. 흡사 씁쓸한 한약 냄새를 방불케 하는 쑥 향기, 그것은 마치 한겨울 쌓였던 눈을 풀어 먹은 흙 냄새 같기도 하고, 따스한 태양의 열기에 피어나는 산야의 냄새 같기도 하다. 아무튼 쑥의 향기는 소박한 흙의 향기이며, 흙과 더불어 생각나는 고향의 향기라고 하겠다. 원래 벽촌의 농가 태생이신 나의 어머니는 봄이면 쑥을 재료로 하는 음식을 즐겨 만드셨다.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고향을 그리시며 봄이면 밀가루나 쌀가루에 어린 쑥을 버무려 밥솥에 쪄내는 쑥버무리, 쑥인절미, 쑥경단 등 그런 것들을 빚으시며 어머니는 망향의 시름을 달래시며 젊은 날을 회상하시곤 하셨다.

이제 어머니는 가시고 유산처럼 남겨주신 봄 쑥의 향기는 그대로 내 어린 날의 이야기가 되어 고향과 어머니로 직결되는 회상과 그리움의 샘이 되고 있다. 나는 오늘도 어린 봄 쑥을 밀가루에 무쳐 기름에 지진 쑥 전이며 맑은 토장에 모시조개를 넣어 끓인 애탕의 향기로운 저녁상을 준비하며 전설처럼 지나가 버린 나와 내 어머니의 그 쑥처럼 푸르던 시절들을 그리워하고 있다. 어디로 눈길을 돌려도 다시는 찾아볼 길 없는 어머니의 생전의 모습을 되새기며 있다. 어쩌면 살과 뼈 묻히신 묘지의 푸른 쑥으로 돋아나고 계신지 모를 어머니…

어머니가 남겨주신 봄의 미각 속에 또 하나 잊을 수 없는 것은 깊은 산 냄새 진한 풍미를 자랑하는 더덕이 있다. 더덕 역시 우리나라 전역 어디서나 깊은 산이 있는 곳이면 자연 생하는 덩굴 줄기의 괴근 만초다. 식용은 바로 그 뿌리 부분인 괴근이며, 물에 우려서 씁슬하고 아린 맛을 뽑은 뒤에라야 사용할 수 있다. 더덕 중에서도 특히 산청의 더덕을 치는 것은 그것이 소백산맥의 줄기를 이은 깊은 산간에서 자란 것으로 한층 더 깊은 향기를 지녔기 때문이다. 요즘 비닐 하우스에서 재배되어 나오는 것들은 향기도 덜하고 맛도 덜하니 이 역시 쑥과 더불어 자연의 흙과 산의 정기를 잃어버린 때문이리라. 더욱이 시장에 나도는 것들을 보면 하얗게 표백된 것같이 시어 버린 것들이 얼마나 오래 물에 담겨 우려졌는지 알 수 없을 만큼 향기를 잃은 것들이어서 도무지 더덕 같지도 않은 것이다. 좋기로는 흙이 묻은 채 벗기지 않은 괴근을 그대로 사다가 집에서 다듬어 손질하는 것이 더덕의 풍미를 상하지 않고 맛볼 수 있는 길이다.

이 역시 어머니가 만져주시던 더덕의 조리법 몇 가지가 있다. 우선 더덕을 결을 따라 가늘게 찢어 갖은 양념으로 무치는 더덕무침, 더덕과 쇠고리를 한 조각씩 맞붙여 구워지고 간장에 담갔다 먹는 더덕장아찌, 찹쌀풀을 발라 말려두고 기름에 지져 먹는 더덕자반, 쇠고기, 파 등과 함께 꼬치에 꿰어 기름에 지지는 더덕누름적 등. 그러나 역시 더덕의 가장 소박한 풍미는 알맞게 양념장을 바라가며 석쇠에 놓고 구워 먹는 더덕구이에 있을 것 같다. 까뭇까뭇 숯불에 타면서 풍겨내는 더덕의 향기를 그 누린내 나는 쇠고기에 비할 수는 없을 것이다. 더구나 향기에 곁들여 아작아작 이에 씹히는 상쾌함은 더 한층 미각을 돋우는 데 한몫을 하는 것이다. 이렇듯 우리의 봄은 흙 냄새, 산 냄새를 실은 미각에서부터 잠 깨어 일어난다. 우리들 어머니들의 손에서 손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사랑과 정성의 숨은 솜씨들, 그 솜씨에 길들여진 미각은 그대로 삶의 맛이 되고 멋이 되어 이 땅의 훈훈한 정이 되어 이어져 가고 있다.

 

 복조리, 그 추억 속의 그림

올해도 일찌감치 그믐날 대낮에 벌써 한 쌍의 복조리가 대문가에 던져져 있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적은 흰 쪽지를 꽂고 빨간 리본으로 묶은 푸른 대나무 조리, 나는 두 손으로 집어서 부엌 선반에 얹어 놓았다. 문득 하얗게 눈부신 쌀알 같은 복이 소복소복 그 속에 고일 것 같은 환상에 가슴 훈훈해지는 즐거움을 느낀다 . 복조리는 조그맣고 앙증맞아 장난감 같다. 거의 실용성이 없는 장식용으로 그 엮음새도 거칠고 볼품이 없다. 언제부터인가 복조리는 우리들 생활에서 멀리 밀려나 거의 불필요한 물건이 되어버렸다.

더욱이 대나무로 엮은 자연산 조리는 플라스틱으로 바뀐 지 오래고 그나마 우리네 부엌에서 사라져가고 있는 것이다. 옛날 그 정교하리만큼 얌전하고 톡톡하게 얽어내던 솜씨들은 어디로 갔을까. 어차피 복조리란 쓰는 물건이 아니라 상징적인 장식품일 뿐이니 이리 거칠게 만들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옛날엔 복조리를 사도 버리는 물건이 아니라 귀하고 요긴한 부엌의 살림기구로 애지중지 쓰이던 것이 이젠 먼지 뒤집어쓰고 얼마 동안 벽이나 선반에 걸렸다가 그대로 쓰레기 콩으로 버려지고 마는 것이다. 조리 하나에도 세월의 변천,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옛 글에 보면 “섣달 그믐날 저문 뒤에(또는 보름날 아침에) 복조리 파는 소리가 성안에 가득하다.”고 하였는데 요즈음 그 소리도 들을 길이 없다. 언제 넣었는지도 모르게 슬그머니 던져 넣고는 며칠 후 값을 받으러 온다. 삭막하기 이를 데 없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섣달 그믐날 밤이나 초하루 아침이면 맑은 공기를 흔들며 골목마다 “복조리 사아려.” 외치고 다니는 목소리가 구성지기도 했었다. 그러면 부엌에서 일하시던 어머니가 또는 안방에서 세배를 받으시던 할머니가 기다렸다는 듯이 뛰어나가 복조리를 사 들고 오시곤 했다. 대나무를 가늘게 키워 엮어 만든 조리는 탄탄하고 듬직했다. 요즘은 아예 정미 과정에서 깨끗이 돌이 제거되어 나오니 조리의 쓸모도 없어졌지만 옛날엔 그렇지 못하여서 조금만 잘못 쌀을 일어도 돌이 씹혔으니 조리는 중요한 살림 기구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그런 조리를 정초에 사서 벽에 걸어놓는 일은 마치 조리에 소복이 일어 담는 쌀이 쌓이듯이 복이 쌓이기를 기원하는 소박한 소망의 표시였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예로부터 벽에 채를 걸어두는 풍속이 있었다. 그것은 채의 눈구멍으로 비치는 빛에 의해 액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조리의 그 숱한 구멍도 바로 채의 구멍과 같이 빛을 받아들이는 것, 곧 광명을 상징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아무튼 농경 사회의 가장 중요한 산물은 쌀이었고 그 쌀을 씻어 건지는 조리는 그대로 서기로운 물건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신년제란 사실 풍요와 건강을 기원하는 제액초복의 소망에서 나온 것이다. 농사를 짓는 농민은 풍농을 원하고 고기를 잡는 어민은 풍어를 기원하면서 질병이나 횡액에서 벗어나 건강과 생존을 유지하고자 하는 인간의 소망이 이른바 새해의 갖가지 풍속들, 홍수막이, 귀밝이 술, 복조리, 다리밟기, 달맞이, 제웅치기, 부럼 등이 수많은 신년제 풍속들을 창출해냈던 것이다. 선반에 얹어놓은 한 쌍의 복조리를 바라면서도 문득 그 옛날 아침 저녁 부엌에 서 계시던 어머니의 젊디젊은 뒷모습이 떠오른다. 물 묻은 행주치마며 기름 먹여 까맣게 윤 나던 큰 솔, 반질반질 행주질로 길든 부뚜막, 어머니의 모습과 함께 이제 모두 추억 속의 그림들이다.

 

 젊은아 너는 쌓아 올렸다

허물고 다시 쌓아 올리고 젊은아 너는 지치지도 않고 쌓아 올리는 바닷가 모래성의 주인 귀밑머리 풀잎 같은 여름이다 바람이다 날마다 순금빛 햇살 찍어 허무의 땅에 그리는 너의 그림은 태양 빨간 종이태양 밤이 와도 떨어지지 않는 빨간 종이태양 밤이 와도 떨어지지 않는 빨간 종이태양 한 계절 시새우던 꽃들 빗속에 떠나고 집비둘기 날아간 빈 둥우리 얼어붙은 겨울 풍경에서도 밤마다 등피 닦아 어두운 허공에 태양처럼 거는 젊음아 너는 적도에 타는 모래밭 쌓아 올렸다 허물고 다시 쌓아 올리는 불의 사막의 주인이다.<졸작 “젊은아 너는”> 여름날 바닷가에서 우리들은 무수한 성을 쌓았습니다. 꿈이라는 희망이라는 이름의 성을. 모래성은 쉽게 무너져 내렸습니다. 쌓아 올리면 무너지고 쌓아 올리면 무너지고… 그러나 지칠 줄 모르던 우리들의 이름은 젊음이었고 그 젊음의 끈질김으로 하여 우리들의 가슴엔 무수한 성이 무수한 모습으로 쌓이고 허물 리며 스스로 슬픈 비극의 성주가 되기도 했던 것입니다.

밤이 오고 어둠이 덮여도 결코 지지 않는 빨간 태양 하나씩을 가슴에 달고 설사 그것이 종이 위에 그린 허망한 종이태양일망정 변경을 지키는 등불처럼 발갛게 타오르던 것을. 식을 줄도 꺼질 줄도 모르던 젊음의 불길 그 오뇌는 어쩌면 적도에 타는 모래밭 같았을까. 불의 사막의 주인이던 젊음.

 

 고향의 그 여름과 겨울

“평북 정주군 마산면 오봉산 기슭이라 했다. 초가 구옥 키 낮은 돌담, 삭은 비단처럼 좀먹은 문설주엔 녹슨 풍경 하나 잠들어 있었다. 음 사월 텃밭엔 큰이모 옥비녀 만큼씩 한 파꽃 대궁이, 장으로 가는 시오리 신작로엔 사철 미루나무 두 줄로 시를 쓰는 마을 남양 홍씨 민들레 풀꽃처럼 고실 고실 살았다.”(“약력 뿌리”에서) 이렇게 나는 내가 태어난 고향의 이야기를 시에 담아 써보았으나 사실은 그 마산면 오봉산 기슭이라는 마을에 대하여 아는 바가 없다. 어려서 세 살 때 할머니 등에 업혀 서울로 솔가에서 이사를 했으니 그리고 다시는 가본 일이 없으니 그곳의 기억이 남아 있을 리 없다. 그러면 나는 거짓말을 쓴 것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할머니에게 들은 이야기, 어머니에게서 흘러나온 이야기들을 주워 모으고 거기다 외갓집의 기억들을 더듬어 내 머리 속에 지은 한 채의 고향 집 고향 마을이 바로 내 고향의 이야기가 된다. 사실 외갓집은 해방 전까지 드나들었으니 그 기억들은 비교적 또렷하고 선명하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고향의 이야기는 외갓집 부근의 이야기가 된다. 외갓집은 평북 정주군 고덕면 월운동 속칭 달운리 마을이라 했다. 마산면은 거기서 한 삼십 리 떨어져 있는 곳이라 했고, 어려서는 어머니 치마꼬리에 매달려 다니고 커서 학교에 다니면서는 일가 집 오빠를 따라 또는 혼자서 여름방학 겨울방학을 귀성 열차에 흔들려 드나들었던 고향 외갓집.

뒤에는 천주산 앞에는 작은 사과 밭, 사과 밭 너머 크고 작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낮에도 별이 보일 듯 울창한 숲으로 들어찬 천주산 산기슭 아래로 펑퍼짐하게 비탈을 이룬 언덕 일대엔 가지도 무성한 수백 그루의 밤나무들이 밤낮으로 어두운 수만 개의 그물을 짜고 있었다. 바로 전주 이씨 외갓집의 대대로 내려오는 문중 산이었다. 4백여 그루의 밤나무 동산. 온 나뭇가지가 휘어지도록 주렁거리는 꽃송이들, 배틋한 젖 냄새 같은 향기를 뿜어대며 산야를 덮던 아카시아 꽃도 지고 희고 소담스럽던 울타리의 찔레꽃 무더기도 시들시들 마르다가 찔끔거리는 비에 흔적도 없이 떨어져 버리고 난 다음 어디선가 오관을 흔들며 풍겨오는 짙은 향수 냄새 같은 향기가 있다.

때로 정신이 혼미해지도록 취하게 하는 몰약 같은 냄새, 머리 속까지 파고들어 전신을 풀어 해치고 메슥메슥 헛구역질이 날 맡큼 진하고 강한 냄새, 바로 밤꽃 냄새다. 낮은 돌담으로 둘린 해묵은 외갓집 깊은 장지문 안에서도 그 냄새는 향을 피우듯 훈훈히 맴돌고 있었다. 한밤중 곤히 쓰러져 잠든 꿈결 속에서도 몇 번인가 그 냄새에 숨이 막혀 잠이 깨곤 했었다. 실제로 밀폐된 공간에선 밤꽃 향기에 질식해 죽는다고도 했다. 그렇게 온 산과 마을을 뒤덮고 요란한 향내를 뿜어내던 밤나무들. 그 밤나무의 꽃 향기 속에서 나의 유년은 눈뜨기 시작했다. 하여 나의 고향 이야기는 밤꽃 향기로부터 시작 할 수밖에 없다.

가을이면 수십 섬의 밤을 딴다고 했다. 제사에 쓸 가용을 남기고는 죄다 장에 내다 돈을 샀다. 그 돈은 문중의 고유 재산으로 시제며 봉제사에 충당한다. 전주 이씨 종부인 외할머니는 가끔 큰소리로 문중의 여러 여론을 제압하는 통솔력을 지니고 계셨다. “아들 딸 팔 남매를 관 머리에 앉혀놓고 사십 초반에 홀로 된 외조모는 기개부터 괄괄한 여장부였다. 삼재팔난 시름 탄식한 손으로 척척 접어 삼팔명주에 햇솜 받쳐 누빈 수건, 관처럼 머리에 쓰신 겨울 북방의 대륙적 기품은 한 치도 빠진 데 없는 전주이씨 문중의 종부였다. 쩌렁 대는 목소리도 겨울 눈 속의 동치미 맛처럼 쩡쩡하던 기상, 구한말 격랑의 뒤안길을 기미년 만세 통을 몸으로 누벼온 그 풍진 세상의 옹이진 세월들…” 이렇게 졸시 <망향사>에서 그려보았던 외할머니, 어쩌면 그 무덤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을 것 같다. 지금 북녘 땅엔…

자연은 어디나 비슷하지만 고향의 여름은 참으로 풍성하고 넉넉했다. 북국 특유의 짙은 녹음과 방향한 풀 냄새와 살가죽이 타는 듯한 태양의 염 열이 내리쬐는 더위 속에 열매와 벼 포기들이 툭툭 익어 터지는 소리 들릴 것만 같았고, 논두렁 밑의 작은 물웅덩이는 한낮의 뙤약볕에 펄펄 끓어 어쩌다 잘못 뛰어든 개구리가 기겁을 하고 네 다리를 쫙 뻗고 널브러지곤 했다. 기승스럽게 고막을 찢을 듯이 울어대는 매매의 울음소리도 유난히 크고 시원스럽던 마을 앞 정자나무며 개울가의 미루나무들. 키를 넘는 수수밭, 강냉이 밭, 오이, 가지, 호박들이 땅을 덮는 텃밭을 돌아가면 언제나 찰랑찰랑 넘칠 듯 고여 있는 얼음같이 찬 우물이 있었다. 여름날 저녁이면 그 우물로 만 오이, 가지 찬국에 먹던 구수한 강냉이(옥수수) 맛을 잊을 수가 없다. 어른의 팔뚝만큼씩이나 굵고 실한 여름 한철 강냉이는 기막힌 별식이면서도 빼놓을 수 없는 주식이었다. 원산지가 만주라는 그 강냉이들은 알이 굵고 살이 쫄깃거리며 달콤한 맛이 있었다. 저녁이면 함실 아궁이에 불을 지펴 한 솥씩 쪄서 소쿠리에 담아다 놓고 가지나 오이 찬국을 곁들여 배부른 줄도 모르고 그 큰 소쿠리가 빌 때까지 둘러앉아 먹었다. 멍석자리 옆에 웅크리고 앉은 강아지는 쿵쿵거리며 던져버린 강냉이 속을 쫓아가 앞발로 굴리다간 틀렸다는 듯이 컹컹 짖어대곤 했다. 초저녁 별이 하나씩 뜨고 어둑어둑해지면 기다렸던 듯이 모기들이 앵앵거리며 날아들었다. 외삼촌이 일어나 모깃불을 놓는다. 조목(조를 훑고 난 짚)이나 강냉이 속 말린 것들을 모아놓고 부싯돌로 불을 지피면 뽀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 올랐고 매캐한 냄새가 눈코 할 것 없이 마구 쑤셔대어, 연방 재채기를 터뜨리고 눈물 콧물을 흘리게 했지만 성난 모기떼의 공습보다는 그쪽이 견디기 쉬었다.

외할머니는 어두워진 멍석자리 위에 물레를 내다 놓고 스르릉 스르릉 물레를 돌리시며 실을 자으셨다. 외삼촌은 밤 마실을 가고 나와 막내이모는 공연히 입이 심심하여 강냉잇대를 잘라 껍질을 벗기고 속을 씹어 물을 빨아먹었다. 달콤한 물이 솔솔 입 속에 고이는 맛이 삶은 강냉이 맛과는 또 다른 맛이 있어 우리는 입이 부르트도록 강냉잇대를 잘근잘근 씹어 물을 빨아먹곤 했다. 그러다 언제 잠이 든 지도 무르게 잠이 들었고 어깻죽지가 선선하여 잠이 깨보면 모깃불도 꺼진 한밤중의 하늘엔 별이 총총했다. 얇은 베 홑이불이 선선할 정도로 고향의 여름 밤은 바람이 차고 서늘했다.

외가-고향에 대한 내 기억 속엔 가을이 없다. 언제나 방학 때라야 내려갔었으니 여름 아니면 겨울 이야기뿐이다. 그게 언제였는지 알 수는 없으나 50여 년 전, 이미 외가 망루엔 전깃불이 들어와 있었다. 저녁이 되면 천장에 매달린 30촉짜리 알 전등에 불이 켜졌다. 그리고 아침이면 감쪽같이 나가는 것이다. 전깃불이 켜지고 꺼지는 거승로 사람들은 시간을 재기도 했었다. 30촉짜리 전등불은 희미하여 갑갑할 것 같지만 촛불이나 남포 등에 비할 바가 못 되게 밝고 환하였다. 그 불빛 밑에서 외숙모는 바느질을 하고 삼촌은 책을 일거나 새끼를 꼬꼬 외할머니는 베를 짰다. 나도 그 불 밑에서 겨울방학 숙제를 했다. 시집 안 간 막내이모는 수를 놓고, 북국의 겨울은 길고 사나웠다. 한겨울 다섯 달을 눈에 싸여 산다. 외삼촌은 눈이 오는 날이면 꿩 사냥을 갔다. 그렇게 잡아온 꿩 고기로 만 국수장국을 먹는 날 밤은 잔칫집처럼 벅적거렸다. 닭보다 연 하다는 꿩 고기의 맛을 나는 잘 몰랐지만 그 긴 겨울 밤에 먹던 김치말이 밤참 맛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밤늦게 야학당에서 돌아오는 외삼촌들을 위해 마련하는 별것도 아닌 밤참이다. 그러나 입이 쩍쩍 붙는 것같이 싱싱한 동치미 국물에 국수나 찬밥을 말아 깨보숭이 살짝 뿌려주던 김치말이 맛을 무엇에다 비길까. 김치라야 통 무와 통 배추를 소금 국에 담근 별 것 아닌 국물김치건만 그렇게 입 안이 쩡하도록 시원하고 청청한 미각을 어디서도 찾을 길이 없다. 그건 그대로 북국의 자연의 맛이라고 할밖에 없다. 서울 손님이라고 어쩌다 밤 구덩이에서 꺼내다 주는 밤알은 어쩌면 그리도 클까. 아무리 한줌 가득 쥐어도 세 알을 쥐기가 힘이 들었다. 큰 외삼촌이 깎아주던 그 알밤 맛은 배 맛처럼 달고 연했다. 또 있다. 엿기름에 밥을 식혀 가마솥에 끓여낸 엿처럼 달던 감주(식혜)며 강냉이떡 강냉이묵, 모두가 서울에서는 못 보던, 보아도 전혀 맛이 다르던 그것들을 지금도 나는 그립게 떠올리곤 한다. 그러고 보니 내가 먹는 이야기만 쓴 것 같다.

그 시절 내 호기심을 자아내게 한 것은 야학당 이야기다. 겨울이면 공회당 빈 회관에 야학이 열렸다. 학생들은 나보다 어린 아이에서부터 말 만큼씩 한 처녀와 총각들이었다. 선생은 오산고보를 나와 잠시 일본에까지 갔다 왔다는 사과밭집 아들이라고 했다. 열여섯 살 사춘기 소녀였던 나에게 그것은 이상한 관심을 갖게 했다. 나는 일부러 그 시체(신식) 청년을 보기 위해 가끔 야학당 교실 뒤에 숨어 앉아서 어두운 석유등 밑에 모습도 분명치 않은 남자의 모습을 훔쳐보곤 했었다. 토탄불이 이글이글 타는 둥근 스토브의 빨간 불빛에 비춰진 그의 묵화 같은 검은 등은 운명처럼 어두워 보였다. 그리고 알 수 없는 동경을 자아내게 하던 것이다. 그 이목구비도 제대로 알 수 없던 남자의 어두운 등은 그 후에도 꽤 오랫동안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몇몇 그 마을의 친구들 중 지금 이름은 외우고 있는 친구는 오직 한 사람뿐이다. 창화. 나보다 두 살 위인 창화라는 이름의 소녀. 여자로선 그 망르에서 단 두 사람밖에 없는 고을 보통학교 졸업생이었다. 달구지 타고 삼십 리 길을 6년 동안 다녔다 했다. 서울 고등여학교에 진학하고 싶었지만 또 그만한 재력도 있었지만 어른들의 완고한 구식 생각에 묶여 별수없이 시집갈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신랑은 서울 오성전문 출신으로 어머니의 먼 촌 조카뻘 되는 젊은이였다. 창화는 솟을대문에 중문까지 달린 마을에서도 가장 큰 기와집에 돌담 높은 이참봉 영감님의 무남외동 손녀였다. 옛날 신선도의 신선처럼 머리도 수염도 하얗게 백발인 참봉 영감님은 그의 소유지인 마을 앞산 명당 같은 정자를 찾아가면 상투에 탕건을 쓰신 참봉 영감님은 필묵을 놓고 한시를 쓰고 계셨다. 우리를 보아도 결코 웃고 말씀하시는 법이 없었다. 지금 그들은 몇 남매나 낳고,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까. 한정된 지면이 다했으니 이제 나의 추억도 문을 닫아야 한다. 그렇게 생전에 고향을 그리다 끝내 가보지 못하고 눈을 감으신 어머니, 그 어머니 뜻을 받들어 내 남은 생애 안에라도 다시 한 번 그 땅, 그 길들을 밟아보았으면 그리고 만나보았으면 그 그리운 얼굴들을.

 

 달내강과 목화밭

옥수숫대의 껍질을 벗기고 하얀 속살을 잘근잘근 씹어 빨면 단물이 솔솔 나왔다. 그 비릿하니 들큰한 맛, 고향을 회상하는 일은 꼭 그같이 천연 감미료를 씹는 듯한 감미로움을 느끼게 한다. 내가 태어난 곳은 정확히 말해서 황해도 봉산 어디라고 들었다. 그러나 그곳은 부모님들이 잠시 이향해 있던 객지였고, 나는 태어나자마자 대대로 조상들이 뿌리 내리고 살아 계신 평북 정주군 마산면 신오리로 돌아갔다 하니 나의 고향은 아무래도 그곳 평북 정주군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곳도 고향이라 이름 붙이기엔 아쉬움이 크다. 그것은 내가 그곳에서 자란 것이 불과 몇 해, 발에 흙 묻힐 겨를도 없이 세 살 나던 해 가을 할머니 등에 업혀 서울로 올라왔으며 오늘까지 60여 년을 서울에서 살고 있으니 나의 고향은 차라리 서울이라 함이 옳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고향, 그 중에도 친가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다. 몇 개의 토막 필름 같은 장면들을 제하고는. 그러나 외가에 대한 기억은 너무도 뚜렷하고 선명하다. 어려서는 어머니 치마폭에 매달려 드나들고 커서 학교에 다니면서는 여름방학 겨울방학을 귀성 열차에 실려 마치 부모님이 계신 집으로 돌아가는 귀성 학생들처럼 그렇게 찾아가던 외가 정주군 고덕면 월운동, 속칭 달운리 마을에 대한 기억은 몇 권의 화집으로도 묶을 수 없을 만큼 갈피 짙고 무궁하다. 그 외가에 대한 진하고 숱한 기억들 때문에 나는 한평생을 서울에서 살면서도 서울이 고향이라는 생각을 결코 갖지 못하는 것 같다. 희미하나마 핏속에 흐르고 있는 친가의 몇몇 기억과 더불어… 생각하면 그 반쪽의 고향에 대하여 나는 참 많이 썼다. 더는 할말이 없을 만큼, 그럼에도 지금 나는 또 무언가를 찾아내고자 한다. 눈감으면 떠오르는 대형 화면 같은 그곳의 장면들, 우선 그 뒷산의 밤나무 동산이 솟아오른다. 4백~5백 주를 헤아리는 밤나무 숲이 빽빽이 들어서 있는 문중의 산이었다. 외조부는 40대에 이미 타계하시고 아들 딸 8남매를 거느리고 혼자 되신 외조모는 기개부터가 장부처럼 괄괄하신 전주 이씨 어느 대군의 가계인지는 모르지만 일가 문중의 종부로서 막강한(?) 실력자이셨던 것을 어린 시절에도 알 수 있었다. 흰 두루마기에 갓 쓴 백발의 할아버지들이 외조모 앞에 와서는 허리 굽혀 읍하고 공대말 쓰던 것을 기억한다. 삼팔명주에 햇솜 받쳐 접은 흰 머릿수건을 관처럼 접어 머리에 쓰고 앉아 계시던 외조모의 꿋꿋한 기상은 그대로 북방 여인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내 기억 속에 깊이 새겨져 있다. 여름 밤 모깃불 피워놓고 또는 겨울 긴긴 밤 등잔불 밑에 물레를 자으시고 베틀을 밟으시던 외조모의 모습이 조선 여인풍속도의 그림처럼 떠오른다. 그 외조모는 물론 그분의 딸인 나의 어머니도 이미 타계하셨다. 그리도 그리워하셨건만 끝내 귀향 열차를 타보시지 못하고… 분주의 산이던 그 밤나무 동산의 숱한 삽화 같은 추억과 더불어 내 기억을 자극하는 천연색 그림이 또 있다. 십 리나 떨어진 곳에 있는 넓은 목화밭이다. 이 목화밭에 목화 꽃이 필 무렵이면 이 세상이 온통 무릉도원처럼 변하는 것이었다. 담황색, 백색, 진분홍색 등 색색의 빛깔로 피어나는 꽃들의 군무, 나는 이 세상에서 그처럼 화려하고 아름다운 꽃은 다시 없을 거라고 믿고 있었다. 장미도 카네이션도 모르는 시절이었다. 알고 있었다 해도 내 생각에 변함은 없었겠지만… 눈 오는 겨울 밤에 외삼촌이 잡아 오던 꿩고기의 국사말이 밤참, 여름날 저녁 팔뚝 같은 강냉이에 오이 찬국 곁들인 자연 그대로의 미각도 내 기억 속에 싱싱하게 살아 있다. 도깨비바늘, 달개비꽃이 무리 지어 무릎을 감는 뒷산 골짜기 천주산 가는 길은 한낮에도 으슥하고 후미졌다. 시제를 지내는 당집 누각이 우거진 풀숲 사이로 언뜻 비치면 이상하게 등골이 서늘해지고 더는 앞으로 걸음을 옮길 힘이 없어지던 무서움증도 지금 신선하게 되살아난다. 둘째 이모가 시집가 사는 마산면 ‘이러니’로 가는 길엔 길고 위험한 철교가 있었다. 거친 철각 밑으로는 시퍼런 강물이 굽이치고 있었고. 어느 해 여름이던가 나는 그 이러니 마을로 외삼촌을 따라 나섰다. 삼십 리 길을 뙤약볕에 걸으면서 질러서 가는 길이라고 하여 간 길이 바로 까마득하게 하늘을 찌르는 철교 앞이었다. 나는 발 밑의 강물을 내려다보며 오금이 저려 무릎을 펼 수가 없었다. 지금도 그 시퍼렇게 굽이치던 철교 아래 강물이 뇌리에 박혀 있고 오랫동안 꿈속에서까지 나를 자지러 들게 하는 괴물이 되었다. 달내강이란 이름은 한국어가 갖는 가장 아름다운 영상의 이름인 것 같다. 때문에 남쪽 지방 어디에서도 같은 이름의 시내들을 가끔 만나게 된다. 내 고향에도 ‘달내’란 이름을 지닌 폭이 제법 넓은 시내가 있다. 가물 때엔 바닥의 자갈과 바위들이 그대로 드러나 건너 다니기에 불편이 없지만 장마철이 되어 비가 많이 온 뒤엔 시냇물이 갑자기 불어서 제법 도도한 물살을 일으키는 강이 된다. 하여 어른들은 고무신을 벗어 허리춤에 꿰차고 무릎을 걷어붙이고 그러고도 자칫 급류에 밀려 엉덩방아를 찧고는 흠뻑 물에 젖는 일이 허다하다. 그 달내강을 무슨 일로 외삼촌을 따라갔었는지 기억이 없다. 다만 물이 분 달내강 앞에서 주저앉은 나를 외삼촌이 업어서 건네주던 그 넓고 듬직한 혈연의 따뜻한 체온을 지금도 아련히 기억하고 있다.

그나마 단편적인 삽화 같은 고향에 대한 기억도 1943년 여름을 마지막으로 끝나 버리고 만다. 친가 쪽으로 거의 절손이 되어 한 분 계시던 오촌도 돌아가셨을 터이니 고향에 대한 그리움도 고작 잃어버린 어린 시절에 대한 향수 정도로 남아 있을 뿐이다. 그보다는 나의 어린 시절을 키워준 서울의 몇몇 마을이 훨씬 현실감을 갖고 나의 감성을 자극한다. 생각하면 선친은 대단히 과단성 있는 진취적인 분이셨던 것 같다. 약관 22세에 대대로 운명처럼 물려받은 논밭전지 가산을 정리하고 가족을 이끌고 서울로 올라올 결심을 하셨으니… 서울에서의 최초의 내 기억은 청파동, 그 시절의 이름으로 청엽정 1정목이었다. 대문을 열면 바로 청파동 큰길 역이고 큰길 건너편 우측으로는 기코망 간장공장이 있었고 왼쪽으로는 서울로 가는 후미진 뒷길에 검은 석탄장이 끝도 없이 널려 있었다.

집 앞을 지나가는 굴다리 위로는 서울의 남북을 잇는 철로가 길게 뻗어 수도 없이 울리는 기적소리에 해가 뜨고 밤이 깊는 마을이었다. 지금도 가끔 볼일이 있어 그 길을 차로 달릴 때가 있고 창 밖으로 내다보는 그 거리는 60년 전 거리와 별반 변한 것이 없는 것 같다. 그곳에 남아 있는 기코망 간장공장의 저택, 이국적인 정취를 자아내는 고풍 한 저택이(지금은 무엇으로 쓰이는지는 모르지만) 가슴에 잠자는 아득한 세월들을 깨워 일으킨다. 이미 백골이 되신 지 오래인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의 젊은 초상들이 그 마을에선 살아 숨쉰다. 나는 네 살배기 어린 계집애, 중국인이 한국 아이를 그 중에도 계집애를 업어간다는 소문으로 하여 한낮에도 꽁꽁 잠긴 대문 안에서 좁은 대문 틈으로 큰 길가를 내다보며 넓은 세상 밖을 꿈꾸거나 할머니 치마폭에 옛날이야기를 졸라대는 코흘리개 어린 계집애가 지금도 그 마을엔 살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서계동으로 그 슬프고 악몽 같은 서계동으로 떠난 것이 몇 살 때였는지…

 

 내 생의 가장 작은 부분이면서 가장 아픈, 아버지

아버지, 제가 아버지에게 편지를 쓰다니여. 이런 일을 언제 상상이나 했던 일입니까. 아버지께서도 살아 계시다면 이런 어이없는 일에 아마도 실소를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세상에 안 계신, 이미 시신도 없이 흙이 되어버렸을 아버지, 뼈 몇 조각으로 서울의 북쪽 하늘 밑 고향 가까운 공원묘지 중턱에 묻혀 계실 아버지에게 생전에 못 쓴 편지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쓰고 있습니다. 살아서 그처럼 할 말이 많았던, 한때는 원수처럼 미워했고 그 다음엔 남 보듯이 외면했고 나중 얼마는 다만 인간적인 연민으로 얼마간 가슴 쓰려했던 아버지, 그 아버지에게 제가 당신의 딸로서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아버지와 저희가 살아온 험난했던 시대를 돌아보며 그 슬픔과 한과 그리움과 눈물의 골짜기를 건너온 이야기를 조금만 아주 조금만 열어서 당신께 보여드리고자 이 글을 씁니다.

어느 무주공원 볕 바른 양지쪽에 한 솔기 연기 같은 혼백으로 나부끼며 지난 세상의 삶들을 돌아보고 계실지도 모를 아버지, 어쩌면 당신께선 이런 저를 담담한 눈길로 내려다보시며 기왕에 그럴 바엔 속의 말 훌훌 털어버리고 이제 그만 섭섭함 풀어버려라 쓸쓸히 웃으실지도 모릅니다. 사실 생각하면 아버지에 대한 미움도 원망도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그런 감정들이란 아주 어린 시절 그나마 아버지가 필요했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나 육친의 정이 남아 있었을 때 지녔던 그래도 애정과 관심의 한 표현이었습니다. 그나마 아버지의 힘이나 도움이 필요 없을 만큼 자란 후로는 나는 거의 아버지에 대한 아무런 관심도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기억은 그저 하얗게 표백된 망각 속의 한 사건처럼 내 생에 잠시 지나가 버린 흔적에 불과했습니다. 어쩌다 소식을 듣거나 대면해도 남을 보듯이 덤덤했고 아무런 정감도 일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아버지와 나는 멀리, 몸과 마음이 다 멀리 있었고 아버지가 나를 잊어버리고 사신 그 몇 갑절로 나는 아버지를 내 삶의 모든 울타리 밖으로 완전히 밀어내고 까맣게 잊어버리고 살았습니다. 그래도 된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하는 일에 아무런 가책도 받지 않았습니다. 오만하게 당신께 갚을 빚이 나에겐 없다고 속으로 단언했던 것입니다.

당신이 아니 계셨다면 ‘나’라는 한 생명이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그때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얼마나 당신께 무심했던가 그 실례로 나는 지금 아버지의 생신 날도, 돌아가신 날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나의 이런 오만과 무관심과 망각 속에 어느덧 당신은 늙어가셨고 이윽고 지척거리는 발걸음도 황량한 노년으로 몰락해가셨습니다. 나는 당신의 몰락을 바라보며 가슴속 어느 한편에선 잔인한 웃음을 흘리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비로소 눈뜨는 육친이란 본능적인 인연에 어느덧 나도 모르는 연민으로 가슴 시린 정을 느끼게 되던 것입니다. 그만큼 나이를 먹고 겨우겨우 어른이 되었던 것입니다. 불쌍한 사람, 늙은 호랑이. 한때는 맹수를 자랑하던 그 힘센 손톱 발톱 다 빠지고 이빨도 없고 기운 차리지 못하는 초라하고 노한 모습을 바라보며 어쩌면 그 모습은 20년이나 30년 후의 바로 내 모습일 거라는 추연한 생각에 한없이 당신이 측은하게 보였습니다. 그 옛날 서슬 푸르던 한창때의 당신 모습이 연상되어 인생의 무상함을 저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영고성쇠,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유행 가사 말대로 일장춘몽, 꿈같이 지나가 버리는 그래서 어느덧 “인걸은 간 데 없고 잡초만 푸르른” 옛 터전에 서 있는듯한 처량한 무상 감이 별수없이 당신에 대한 그 모든 맺혔던 감정들을 풀어버리고 씻어내게 하던 것입니다. 생전에 아버지와 마주 앉아 이야기 한 적이 거의 없는 나는 아버지의 고향이며 남양 홍씨의 뿌리, 이른바 족보에 대한 전연 들은 바가 없습니다. 사실 한때 나는 아버지의 딸이라는 사실조차도 거부하고 싶었던 때가 있었으니 남양 홍시 가계에 대해 알고 싶은 관심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나이라는 것이 참 이상한 감상으로 사람의 마음을 약하게 하는가 봅니다. 나는 당신이 돌아가신 후에야 비로소 너무도 소홀했던 자신의 지난 행적들을 조금은 뉘우치게 되었고 그 중에도 자신의 가계에 대해서 너무도 아는 바가 없는 것이 부끄럽게 여겨지기 시작했습니다. 생전에 그런 것이라도 좀더 물어둘 것을 하는 때늦은 아쉬움에 젖으면서 이리저리 수소문하여 내 뿌리 남양 홍씨 가계에 대하여 알아보았습니다. 원래 남양 홍씨의 족보상의 시조는 고려 공민왕의 외사촌으로 개국일등 공신 태사 홍은열이라 하며 아버지는 그 33대손이라 했습니다. 1904년 9월(날은 잊었습니다.) 홍자 대자 경자 홍대경 조부님의 독자로 평북 정주군 마산면 신오리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이 출생에 대해선 모두 작고하신 어머니의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 들은 것이니 만일 어머니의 아득한 옛날 기억이 잘못되어 있다면 아버지가 안 계신 지금 어디 가서도 그 잘못된 기억을 수정할 길이 없습니다.

하나 더, 어머니와 역시 돌아가신 할머니가 전하시는 말로 들은 조부님에 대하여 나는 오히려 깊은 관심과 그리움을 느꼈었습니다. 조부님은 마치 북방 기마족의 후예처럼 기골이 장대한 분이셨다고 합니다. 전국 시대를 누비던 저 아득한 고려국의 창건을 도모하던 시조 홍은열의 피를 받았는지도 모른다 싶었습니다. 젊어서부터 역마살을 타고나신 듯 농사엔 뜻이 없고 조선 8도는 말할 것도 없고 만주, 북간도, 일본 등지로 안 가신 데가 없이 떠돌아 다니셨다고 합니다. 그러다 기미년 3.1만세 통에 고을에 나갔다가 만세를 외치는 군중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쳤고 외경에 끌려가 피감탕이 되도록 매질을 당하고 마을 장정에게 업혀 돌아오셔서 그 길로 병석에 누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몇 해를 시름시름 앓으시다가 끝내 회생하지 못하시고 타계하셨다 합니다. 장년 50 미만의 한참 나이셨다고 할머니는 그때 일을 되새기며 서글퍼하시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 조부의 독자로 태어나신 아버지의 어린 시절을 유복하고 총명했다고 들었습니다. 신학문은 길이 멀었지만 서당에서 한학을 익히시고 나중에 일인에게서 일본어를 배우시어 그 시대 사람으로선 드물게 일찍 개화 사조를 탄 ‘양복쟁이’ 신사이셨다고 했습니다. 겸하여 아버지도 역시 조부님의 피를 받아 진취적인 기상을 타고나신 듯 이미 19세에 고향을 떠나 풍운의 꿈을 안고 서울로 상경했고 수삼 년 전전하시다 마침내 일본 모 대상사의 말단 직원이나마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가솔은 아직 고향에서 대대로 물려받은 작지만 오붓한 농터를 명줄처럼 끌어안고 허황된 혈기를 안타깝게 염려하며 귀향할 날만을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가솔이라야 조부께선 이미 오래 전에 타계하셨다고 손위의 누님은 출가한 뒤였으니 조모님과 동갑나기 아내와 어린 딸(필자) 세 식구의 단촐한 가족이었습니다. 그렇게 여자 둘이 지키는 고향 집으로 당신께선 모든 전답 정리하고 상경하라는 기별을 보냈고, 그때까지 주야로 노심초사하며 외아들 그리워 울고 지내시던 조모님은 눈이 번쩍 뜨여 한창 논배미의 벼들이 누렇게 익어가는 것들을 추수 때까지 기다리지도 못하시고 헐값으로 팔아 정리하여 선산을 버려둔 채 서울 아들 곁으로 한달음에 달려오신 것입니다. 내 나이 세 살 나던 해 늦은 여름이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서울 살림은 시작되었고 첫 거주를 정한 곳이 청엽 정 1정목 지금의 청파동 1가였습니다. 내 기억 속에 그 집은 안방과 대청마루와 건넌방, 안방에 붙은 부엌, 뜨락에 장독대와 작은 헛간이 있는 자그마한 한옥이었습니다. 대문을 열면 바로 큰길이고 큰길 건너에 똑같은 집들이 한 줄로 늘어서 있고 그 뒤로는 큰 개천이 (지금은 복개되어 서울 서부역 도로가 들어서 있음.) 흐르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서울 살림은 매우 순탄하고 별 어려움 없이 시작되었습니다. 아버지는 그때 약관 스물셋이라는 어린 나이였음에도 한 집안의 호주로서, 세대주로서 손색이 없는 당당한 가장이었습니다. 조부님을 닮아 아버지도 그 핏속에 선척적으로 북방민족의 특성인 진취적인 개척정신을 타고나신 것이라 여겨집니다. 낯설고 물 설은 객지였지만 할머니와 어머니는 미덥고 늠름한 가장의 보호 아래 평생 손에서 떠나지 않던, 운명처럼 무겁던 호미자루를 두 번 다시 들지 않게 된 것만도 꿈같이 놀랍고 행복한 일이었다고 회고하시던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때가 되면 고향이 그리워 어머니는 남 몰래 많이 우셨다고도 하였습니다.

아무튼 서울 생활은 편안했고 순탄했습니다. 적어도 그 일이 있기 전에는, 그 돌개바람 같은 아버지의 표변한 광기로 삽시간에 집안이 쑥밭이 되기 전까지는 지극히 안온하고 평화로운 나날이었습니다. 지금도 나의 기억 속엔 그 청파동 1가 시절의 몇 가지 단편적인 일들이 어느 아름다운 영화의 한 장면처럼 환희 떠올라 신기루처럼 눈에 어른거리다 사라지곤 합니다 .그것은 분명 신기루처럼 결코 닿을 수 없고 잡히지 않으며 실체 같지도 않은, 저 세상의 어느 한 순간들 같이 사라져버린 내 생의 삽화들입니다. 어느 여름날 밤이던가 아버지 어머니 손을 잡고 전깃불이 대낮처럼 밝은 종로 야시장에 나가 내 두 팔로는 들 수도 없을 만큼 무거운 바나나 다발을 사 들고 오던 일, 다섯 살인가 여섯 살 나던 해 겨울, 세모 가까운 어느 날 밤 ‘혼마치’ 진고개에 나가 ‘나마가시’ (생과자)를 먹고 ‘미츠코시'(지금의 신세계 백화점)에서 빨간 비로드 망토를 사 입고 하늘에라도 오른 것같이 황홀해하던 일. 그 시절의 아버지는 참으로 근사하게 멋있고 잘생기고(실제로 아버지는 미남형의 잘생긴 용모였습니다.)

세상에서 둘도 없이 자상하고 좋은 아버지였습니다. 내가 네 살 때인 겨울 어머니에게 말없이 할머니를 찾아(그때 할머니는 내가 낮잠을 자는 사이 서소문에 사는 고향 친구분 댁에 마실을 가셨었습니다.) 청파동에서 서소문까지 혼자서 갔던 일이 있습니다. 그때 집에서 아이가 없어진 것을 아신 어머니는 놀라서 온 마을을 찾다가 아버지 회사로 달려갔고 아버지는 놀라서 회사 일도 팽개쳐 두고 자전거를 타고 온 서울을 헤매 다니다 혹시나 하고 서소문 고향 분 네 댁에 가보니 그곳에 얌전히 할머니 무릎에 앉아 있더라고 하셨습니다.

집에 돌아온 저를 보자 어머니는 억 한 심정이 복 바쳐 무수히 내 등덜미를 쥐어박는데 아버지는 돌아서 눈물을 닦더라고 나중에 할머니는 그때 일을 회고하며 말해주었습니다. 그만큼 아버지는 마음이 약하고 어진 분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아버지와의 사이에 좋았던 일 즐거웠던 일만을 그대로 기억했다면, 적어도 그 이후의 돌변한 아버지의 폭군 같은 무서운 기억이 없이 좋았던 시절만을 기억할 수 있었다면 아버지는 이 딸의 더없이 큰 자랑이고 기쁨이고 그리움이 되어 이런 글을 쓰면서도 나는 수없이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그렇게 나의 유 소년기의 가장 행복했던 시절은 바로 열 살 저편의 꽃밭 같은 시절이었습니다. 할머니 등에 업혀 밤기차를 타고 서울에 올라와 낯선 땅에 뿌리 내리고 조금씩 낯익히며 자라가던 열살 저편의 시절, 밝고 환하고 작은 꽃밭 같던 시절 그러나 그 시절은 너무도 빨리 끝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언제 어떻게 옮겨 갔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 서계동 언덕 위의 큰 기와집, 안채와 바깥채가 따로 떨어져 있고 마당에 우물과 작은 밭이 있던 집, 그 집에서 마침내 우리의, 아니 나와 어머니의 불행은 시작되었습니다. 불행의 직접적인 원인은 어머니가 아들을 못 낳는 것, 그것이 가장 크고 또 타당한 이유가 되었습니다. 그 시절 아직도 여자의 칠거지악이 엄격히 지켜지던 때이고 보니 할머니는 노래처럼 손자타령을 하셨고 아버지 또한 나이 30이 되도록 아들을 보지 못하셨으니 불만을 품을 만도 했을 것입니다. 아들은 고사하고 어머니는 그때까지 필자인 딸 하나를 생산하시곤 10년이 되도록 포태하시지도 못하셨으니 실제로 가장 고민하고 고통스러웠던 것은 어머니였을 것입니다.

어쩌다 일년에 한 번쯤 어머니 치마꼬리에 매달려 고향 외갓집에 가면 외할머니는 어머니 일로 걱정하시며 한약을 달여 먹인다, 뜸을 뜬다 하시며 애꿎은 내게까지 “저것이 돌문을 닫고 나와 아우를 못 본다.”고 불통이 튀어오곤 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사실 그 시절 웬만큼 자기 앞 치러내는 남정네들이 소실 하나 둘 두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며, 오히려 그 짓 못 하는 남자는 남자 축에 들지 못하는 것처럼 생각하던 시절이니 아버지 같은 경우 아들을 보기 위해 측실 하나 둔다 해서 흠 될 일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당연지사였던 것입니다. 문제는 그 방법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의 처신, 적어도 조강지처에 대한 잘못된 처신에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나는 지금 그때 일을 입에 올려 말하기도 싫습니다. 그만큼 그것은 어린 마음을 한 순간에 무너뜨리고 난도질해버린 슬프고, 부끄럽고, 무서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어째서 그런 일이 벌어지는지도 모르면서 그저 벌벌 떨며 할머니 치마폭에 얼굴을 파묻고 울기만 했습니다. 왜 요새 텔레비전에 나오는 아이들처럼 영악하게 아버지에게 대들고 매달리지 못하였을까 안타깝고 억울하기도 합니다. 아마도 아버지는 그 밤의 그 참담했던 일들을 잊어버렸을지도 모릅니다. 가해자란 언제나 자신이 가해한 일에 대해선 관대하고 잊어버리기 쉽기 때문에 상대방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주었는가에 대해선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피해자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피해자의 위치란 받은 상처가 살 속에 낙인 찍히듯 찍혀서 남아 있기에 그 기억을 지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으로 나 역시 그 최초의 불행, 아버지가 어린 딸 앞에 보였던 최초의 작태에 대해서 결코 잊어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 무렵 아버지는 작첩을 하였고 그로 인해 어머니와 불화가 잦았습니다. 그날 밤도 나는 할머니와 안방에 있었고 아버지는 건넌방에서 어머니와 심한 말다툼을 하고 있었습니다. 고함소리와 울음소리가 섞여 들리다 급기야 방문이 요란하게 열리며 아버지는 우는 어머니를 끌어내다시피 하여 밖으로 데리고 나왔습니다. 어머니는 하얗게 소복으로 갈아입고 계셨고, 겁에 질려 말도 못 하고 할머니 등뒤에 숨어 있는 나를 와락 끌어안고 다시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그런 어머니의 등을 떠밀어 아버지는 어머니를 앞세우고 나를 부르더니 함께 가자고 했습니다. 그 길로 우리는 서울역으로 갔고 아버지는 차표 한 장을 사서 어머니를 고향으로 가는 열차에 태웠습니다. 그렇게 한밤중에 아버지는 어머니를 고향으로 쫓아버린 것입니다.

새 여자에게 정분이 난 남자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었나 봅니다. 갓 서른의 혈기왕성한 남자 그것도 타고난 호방한 바람기를 다스릴 길이 없었던 아버지는 결국 그렇게 밖에는 자신의 감정을 처리할 줄 몰랐었나 봅니다. 귀한 외아들로 자라 세상에 자기 밖에 모르는 자만과 이기심이 그 같은 폭군적 작태를 저지르게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해서 어머니는 갓 서른의 꽃 같은 나이에 시앗(남편의 첩)을 보았고 지아비를 잃어버린 청상 아닌 청상으로 철없는 딸 하나를 데리고 그늘지고 어두운 생애를 비탄으로 지새게 되었습니다. 내 나이 열 살 나던 해 봄이었습니다. 나는 그 후에도 가끔 그날 밤 일이 꿈속에 나타나 무서운 가위에 눌리곤 했습니다.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그날 밤의 어머니 모습, 닫혀진 차창 저편에서 얼굴을 파묻고 울고 계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평생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고 악몽처럼 남아 있는 것입니다. 나는 그 단 한 가지 기억만으로도 아버지를 결코 용서할 수 없으며 미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만큼 그것은 슬프고 절망적인 정경이었습니다. 열 살 난 계집애의 감성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던 충격이었습니다. 그 후 자라면서 나는 그 같은 작태를 자식에게 보여주는 아비는 아비의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우스운 일입니다. 그로부터 50여 년이 흘렀고 아버지의 육신이 백골이 되어버린 지금에도 그때의 일을 떠올리면 나는 이같이 가슴이 떨리고 흥분하게 됩니다. 하물며 어머니는 그 긴긴 생애를 어떻게 사셨을까 다시금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잘못은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후에 있었던 그 숱한 가지가지 일들을 지금 여기다 적을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 그 중에 한 가지만은 말하고 싶습니다. 이른바 아버지 없는 결손 가정에서 어머니와 단 둘만의 외딴 섬 같은 생활 속에 치러내야 했던 저 어둡고 암담했던 사춘기에 대해서만은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열 살 저편이 밝고 따뜻하고 햇솜처럼 포근한 세상이었다면, 열살 이편의 세상은 캄캄한 먹물처럼 어둡고 사철 눈 내리고 얼음 깔린 겨울처럼 춥고 스산한 세상이었습니다. 그런 속에서 나는 아버지에 대한 미움과 그리움을 애써 지우며 어느덧 타인 같은 무관심을 익히게 되어갔습니다. 내가 소학교를 졸업하고 여학교를 들어가고 다시 졸업을 해도 그것은 나와 어머니만의 기쁨이고 눈물이었을 뿐 아버지의 일은 아니었습니다. 내 삶의 어느 중요한 순간에도 아버지는 등장하는 법이 없었고 우리들의 생활과는 무관했습니다. 이미 아버지에겐 그처럼 기다리던 아들이 자라고 있었고 어린 딸도 생겼으니 머리 크고 뻣뻣하기만 한, 더구나 오래 헤어져 있어 정도없는 큰딸에게 관심이 있을 리 없었습니다. 여학교를 졸업하고 그렇게 반대하는 상급학교 진학을 기어이 단행하여 사범학교에 들어갔을 때 아버지는 비로소 처음으로 당신 딸의 존재를 조금 느끼시는 것 같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시절엔 이른바 2차 대전 말기여서 다른 전문학교는 모두가 여자청년훈련소라는 간판을 달고 단기 훈련을 해서 각 기관의 지도원으로 배치하던 때라 실질적으로 전문학교 구실을 하지 못했으며 따라서 국내에서 여학생이 진학할 수 있는 곳이란 여의전 과 경성여자사범학교 밖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자연 경쟁률은 높았고 겸하여 일본인 여학생과의 경쟁이라 한국인 여학생은 전체 합격자의 10퍼센트밖에는 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강습과 1백 60명 학생 중에 한국인 여학생은 2명도 되지 않았었습니다. 실제로 강습과 1백 60명 학생 중에 한국인 여학생은 20명도 되지 않았었습니다.

당신께서 근무하시던 일본인 대 상사 미츠이 물산에서도 여러 명의 상사와 직원의 딸들이 모두 일본인이었음에도 낙방했는데 유독 아버지의 딸 하나가 그것도 조선인의 딸이 오직 하나 합격했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만면에 기쁨을 참지 못하고 아버지가 나에게 하고 또 하던 것을 바라보면서 나는 이상한 생각에 잠겼었습니다. 이미 열여덟 살이나 된 나는 아버지의 그런 모습이 전연 생소하고 남처럼 서먹하기만 했습니다. 지난 10년 가까운 세월들이 명열 하기도 하고 다달이 몇 푼씩 던져주는 생활비를 타러 다니던 부끄럽고 한스럽던 일들이 순식간에 주마등처럼 스쳐가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아버지의 즐거워하는 모습이 싫지는 않았습니다. 처음으로 양복 한 벌과 시계를 사주시던 거리의 상점에서 나는 어쩔 수 없이 10여 년 전 까마득히 잊었던 일, 빨간 비로드 망토를 사주시던 언젠가의 밤을 떠올리곤 가슴이 뭉클해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생각하면 결국 나도 아버지도 서로를 잊었던 것도 아니고 또 잊을 수 있는 것도 아니란 것을 나는 훨씬 후에야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아니 그 후에도 오랫동안 나는 아버지에게 마음을 열지 않았으며 머리에 백발이 섞이는 나이를 바라보면서야 겨우 조금씩 아버지를 한 인간으로서. 실패하고 잘못 살아온 불쌍한 인간으로서 용서하고 이해하자는 마음을 갖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버지, 이제 이 글을 접으려 합니다. 두서없이 쓴 글이라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시 읽어보자니 겁도 나고 번거롭기도 합니다. 이제 제 나이도 옛날 아버지의 나이만큼 많이 먹고 보니 이런 일이 힘들고 뜻대로 잘 되지도 않습니다. 다시 쓸 엄두를 갖지 못하니 다시 읽어보지 않겠습니다. 아마도 다시 읽다 보면 틀림없이 부끄러움에 찢어버리고 싶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50여 년을 혼자 사시던 어머니도 이제 저승으로 떠나셨습니다. 어쩌면 그곳에서-그곳이 어딘지는 모르지만- 아버지는 어머니를 영혼으로나마 만나셨을지 모릅니다. 열다섯에 시집 와서 15년 부부라 이름 지어 사시다 헤어져 50여 년 혼자 사신 어머니, 그 알량한 호적 하나에 목을 걸고 남양 홍씨 문중의 귀신이 되신 어머니, 어쩌면 아버지와의 인연은 운명적으로 그것밖에는 되지 않았나 봅니다. 그러나 그 어머니 덕으로, 어머니의 힘 하나로 오늘 나는 이렇게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남양 홍씨 문중에 오점 남기지 않고 살 수 있었음을 어쩌면 아버지께서 주신 가혹한 교훈 덕분인지도 모릅니다. 역설이나 빈정거림이 아니라 나를 한 인간으로서 눈물겹게 한 발자국 한 발자국을 다짐하면서 존재하게 한 것은 첫째로 어머니의 힘에 의해서고 둘째로 아버지에 대한 미움과 오기의 힘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증오란 어떤 의미에서 가장 큰 힘이 되기도 합니다. 이제 그 증오가 없어지니 나는 일어설 힘도 없는 듯합니다. 아버지, 내 기억 속에 가장 작은 부분이면서 가장 아픈 부분을 이루고 있는 아버지, 세상의 인연도 별것이 아닌 바… 그러나 그 어쩔 수 없는 인연으로 묶여 한 세상을 버린 어머니의 고혼이나마 그곳에서 위로해주시기 바랍니다. 두 분의 명복을 빌면서 딸이 처음이자 마지막인 편지를 씁니다.

 

 나의 음주 실패기

어쩌다 모임이라도 있으면 맥주나 소주 몇 잔쯤 당연히 돌리는 것이 요즘 여성들이다. 여성의 사회 진출이나 여권 신장이니 하는 구호가 아니고 라도 개방된 사회에서 술은 남녀 공통의 기호 물이 되어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추세다. 사실 술에 대한 매력이나 호기심은 비단 남성에 국한된 것일 수는 없다. 여성도 남성들처럼 사회와 가정에서 받는 갖가지 스트레스를 풀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 술은 가장 손쉽고 간편한 방법이라는 점에서 남성과 다를 바가 없다. 다만 여성의 체질이라든가 습관이 남성들보다 술에 익숙하지 못한 점에서 여성과 술은 무 관계한 것처럼 잘못 인식되어온 것뿐이다.

나 또한 술에 대한 관심이나 호기심은 남만 못지않다. 사실 나의 선친께선 오래 전에 타계하셨지만 생전에 70 고령이실 때도 술 서 말을 지고 가지는 못하셔도 마시고는 가실 만큼 대단한 주량이고 애주가셨다. 결국 그 술로 하루아침 쓰러져 불귀의 객이 되고 마셨지만, 또 들은 말로는 생면하지 못한 나의 조부님께서도 역시 대단한 술고래이셔서 할머니가 생전에 고생하신 이야기 중에 제일 큰 부분이 할아버지 술 치다꺼리였다고 한다. 그 조부님도 끝내 술로 종신하신 셈이다. 그러고 보면 나도 그 피를 받아 술 몇 되쯤은 넉넉히 해낼 만할 터인데 그래서 그 아버지에 그 딸이 될 만도 한데 유감스럽게도 나는 거의 술을 하지 못한다. 하지 못한다기보다 하지 않는 것이다. 평생 위장이 약해서 하루 세 끼 기본적인 밥도 제대로 소화를 시키지 못하는 데다 심장신경증이라던가 뭔가 하는 알쏭달쏭한 증세로 술 몇 잔만 들어가도 가슴이 벌렁거려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여 어쩌다 사람들과 술자리에 앉았을 때 그들이 술을 마시는 동안 열심히 안주만 집어먹는 얌체가 될 수 없고 먼저 밥이나 시켜 먹는 멋없쑥이 되기도 싫고 해서 결국 슬그머니 일어나 꽁무니를 빼고 말게 된다. 그런데 그렇게 술에 대하여 능력이 없으면 생심을 말아야 하는데 사람이란 묘기 오기, 호기심의 동물이어서 감당하지도 못하는 것에 이상한 매력을 느끼고 이따금 욕심을 부리게 된다. 마치 남들이 다 갖는 것을 나만 갖지 못한 것 같은 쓸쓸함, 부러움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나의 술 이야기는 실패담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 실패담도 모두 오래 전의 일로 근래에 와선 실수를 할 만큼의 용기도 없으니 생각하면 쓸쓸한 일이다. 첫 번째 실수, 아마도 25~6년은 되었을 것이다. 내 나이 아직 한판 때였으니 그런 만용도 부려 봄직했겠지만 지금 생각하면 아슬아슬하기만 하다. 한국일보사에서 무슨 행사였는지 남이섬에서 맥주 마시기 대회를 열었었다. 평소에 술깨나 드신다는 남녀 문인들이 모두 출전하였다. 1분(시간은 확실치 않다.) 동안에 누가 제일 많이 마시는가 하는 내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여류문인 차례가 되어 여남은 여류가 나가는데 누군가에게 등을 떠밀려 나도 그 속에 끼어들었다. 테이블 위에는 맥주병이 즐비하게 놓여 있었다. 물론 나는 자신이 없었다. 등을 떠밀려 나와 앉았을 뿐 1등은 당연히 손소희 선생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 줄에 앉은 어떤 여성도 손소희 선생만큼의 주량을 가진 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신호와 함께 여성들은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나는 기왕에 나왔으니 죽으나 사나 한 번 마셔보자는 생각과 꼴찌는 면해야겠다는 오기로 벌컥벌컥 마시기 시작했다. 이윽고 시간을 알리는 호루라기가 울리고 마신 맥주병들을 보았을 때 놀랍게도 이변이 일어난 것이었다. 평소에 그처럼 술을 즐기시고 주량이 세던, 그래서 당연히 1 등을 할 것이라 예상했던 손소희 선생은 떨어지고 오히려 평소에 술 한 방울도 제대로 입에 대지 않았던 사람들이 1,2,3 등을 모두 차지했던 것이다. 내 기억으로 그때 1등은 방송 성우인 임 모씨 였고 2등은 동료 시인 김 모 여사였으며 내가 3 등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마신 술의 차이는 지극히 미세한 것으로 고작 한 모금 정도씩의 차이밖에는 없었으며 그 중에도 마시면서 술을 흘린 상태로 보아선 내 앞의 테이블이 가장 적게 젖어 있었으니 나는 혼자서 마음속으로 ‘진짜 1등은 나야!’ 하고 소리쳤던 것이다. 어쨌거나 생각하면 그것은 술을 마신 것이 아니라 젊은 기운과 만용으로 물을 마시듯 맥주를 마셔댔던 것뿐이다. 손소희 선생은 아무리 평소의 주량이 세었다 해도 젊은 기운의 여자들을 당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렇게 맥주 한 병 반을 1분 동안에 들어부었으니 문제는 그 후의 일이었다. 눈앞이 흔들흔들 발걸음이 제멋대로 놓이니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간신히 누군가에게 의지하여 배를 타고 버스를 타고 하는데 배도 버스도 그냥 하늘로 붕붕 떠오르는 것 같은 몽롱한 환각 상태였다. 상으로 무엇을 받았는지도 기억에 없다. 어쩌면 아무것도 없었는지 모른다. 이것이 나의 첫 번째 음주 기록이다.

두 번째 실수 담. 문공부 초청으로 충남 신탄진 지방의 산업시찰을 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오래 전 일이다. 공식일정이 끝나고 저녁식사 후 우리는 여럿이 호텔 라운지에서 맥주를 마셨다. 무르익은 분위기에 이끌려 술에 약한 나도 기분으로 맥주 한 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고 생전 처음으로 담배 한 대를 피워 물었다. 남들이 하는 대로 흉내를 낸 것이다. 그런데 어질어질 술기운이 오르는 데다 피울 줄 모르는 담배를 연기째 꼴깍 들이마시고 말았다. 그 순간 나는 테이블 위에 푹 꼬꾸라지고 말았다. 정신을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맥주 한 잔과 담배 한 모금으로 완전히 팽 돌아버린 것이다. 정신이 들었을 때는 내 방의 침대 위였다. 그 후 오랫동안 나는 문우들로부터 좋은 놀림감이 되었다.

세 번째 음주 행각 역시 10여 년 전의 일이다. 지금은 미국 뉴욕에 거주하고 있는 후배 시인 김 모씨 집에서 저녁 초대가 있었다. 역시 후배 시인인 K여사와 둘이서 갔다. 조촐한 안주와 함께 뚜껑도 따지 않은 조니워커 큰 병이 나왔다. K여사는 나와는 달리 평소 술을 즐기는 편이었고 주량도 세었다. 나는 처음 그녀의 친구를 하는 기분으로 조금씩 대작하던 것이 어느 틈에 조니워커 큰 병 하나를 바닥을 내고 말았다. 주인인 김 모씨는 교묘히 권하기만 하고 마시지 않았으니 나와 K여사 둘이서 그 큰 병 하나를 비워버린 것이다. 물론 나보다 K여사가 훨씬 더 많이 마셨겠지만 술을 못하는 내가 무슨 기운으로 그녀를 대작하여냈는지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돌아오는 밤길을 어떻게 걸어서 차를 잡았는지 발 밑의 땅이 계속 흔들려 그야말로 저절로 갈 짓자 걸음이 되는 것이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홀깃홀깃 쳐다보던 눈길의 따갑던 기억이 지금도 남아있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그날 밤 집에 돌아와서부터다. 선선한 바깥 공기에서 갑자기 더운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취기는 전신을 휩싸고 말았다. 나는 몇 번을 정신 없이 토하여 소동을 피웠고 밤새 머리를 싸매고 쩔쩔매었다.

아들이 편자환을 바수어 가루를 만들어주고 했지만 꼬박 이틀을 누워 앓았다. 한심한 듯 바라보는 남편의 눈길이 미안하고 부끄럽기도 했다. 생각하면 이런 실수도 모두 얼마큼 젊었던 시절에 부린 객기며 오기였었다. 이제 나는 그런 만용을 부릴 만한 기운도 없다. 남들이 마시는 술을 옆에서 바라보는 즐거움-확실히 그것도 즐거운 일이다-이나 혼자 음미할 뿐. 한 가지 더 술에 대해 이야기할 것은 한때 술을 약으로 삼고 마셨던 이야기다. 지금도 그렇지만 젊어선 특히 불면증으로 시달렸다. 더구나 조금만 긴장하거나 잠자리라도 바뀌면 영락없이 뜬눈으로 밤을 새우게 된다. 가령 내일 여행을 떠난다든가 어디서 강연이 있다든가 하면 그날 밤부터 잠을 자지 못한다. 이틀이고 사흘이고 그 일을 마치고 돌아와서야 비로소 잠들 수 있다. 수면제를 준비하지만 별 효과가 없다. 반 가면 상태에서, 잠이든 것도 아니고 안 든 것도 아닌 몽롱한 상태에서 몇 시간 붕 떠있다가 깨고 나면 한잠도 자지 않은 것처럼 머리 속이 띵하다. 숙면을 못 하기 때문이다. 불면증에 술이 특효라는 말을 들었다. 가끔 너무 심한 불면증에 시달릴 때엔 수면제에다 술을 타 마실까 하는 유혹을 강하게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수면제에다 술을 겸하면 죽는다는 말에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아 실행해보지는 않았다.

역시 오래 전 일인데 한 50여 일 간을 여행한 적이 있었다. 준비했던 수면제도 얼마 못 가서 떨어지고 낯선 여행지에서 밤마다 꼼짝없이 불안에 떨며 밤을 지새게 되었다. 애써 잠을 청해보지만 야속하게도 잠은 멀리멀리 달아나고 머리 속은 맑게 개어버리는 것이었다. 함께 동행하던 친구는 옆 침대에서 눕기만 하면 이내 잠이 들고 건강하게 코고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나는 아예 잠을 포기하고 일어나 호텔 앞의 카페로 내려와 버린다. 포도주 몇 잔을 들이키고 몽롱한 상태가 되어 방으로 돌아가 누우면 푸르르 선잠이 든다. 그러나 꼭 두 시간, 정확하게 두 시간이면 깨어난다. 하는 수없이 아예 술병을 끼고 있다가 다시 마신다. 그렇게 두어 차례 반복하다 보면 날이 훤히 밝는다. 참으로 고통스런 밤들이었다.

더욱이 그렇게 드는 잠은 잠이 아니었다. 깨고 나면 속이 불편하고 머리도 아프고 흐릿하며 정신이 들지 않았다. 심한 편두통이 하루 종일 왼쪽 골을 쑤셨다. 그 바람에 비행기를 잘못 타는 실수도 저지르고 하면서 50여 일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올 때쯤엔 제법 술을 배운 것도 같았으나 그렇게 마신 술은 술이 아니라 고통스런 독약이었다. 술로 인해 약한 위장이 더 나빠졌으니 말이다. 이같이 나와 술은 아무래도 인연이 없는 것 같다. 이따금 칵테일 한두 잔을 즐기기도 하지만 술에 빠져드는 즐거움을 나는 모른다. 가령 옛날 작고하신 손소희 선생 이야기에 흥겹게 빠져드셨다. 몇 잔의 술에 기분이 거나해지면 도도한 열변을 노하고 로버트 브라우닝의 영시 한 수를 낭랑하게 암송하기도 하셨다. 천천히 느긋하게 판을 차리고 소주 두어 병을 너끈히 혼자서 비워내시던 실력, 역시 술은 그 인간적 폭과 비례하는 것 인가보다.

누구도 선생의 파격적이며 일탈한 취흥을 따르지 못하였으며 동시에 그 여걸과 같은 보스 기질도 흉내내지 못하였다. 내가 잘 아는 여류문인들 중에 그런대로 술을 즐길 줄 알고 제법 실력을 지닌 여류들이 있다. 우선 시인 K여사, 소탈하고 걸걸한 성품에 확 트인 주도가 마주 앉아 있으면 여성이라는 성의 한계성을 무의미하고 왜소하게 느끼게 하는 이른바 당당한 실력 파다. 직장 관계, 문단 관계 등등으로 매일 저녁마다 적지 않은 주량을 소비하면서도 아침 일곱 시면 거뜬히 일어나 출근하는 실력파이다. 한때 B형 간염으로 병원 신세도 지고 술을 끊으라는 의사와 주위의 권고로 의가 소침하여 쓸쓸해하더니 어느 틈엔가 다시 겁 없이 마시기 시작한 술이 간염을 앓았던 전과 다름이 없이 대담해졌다.

신기한 것은 그렇게 마시면서도 그녀는 결코 어느 선 이상은 취하지 않는다. 나같이 바닥을 드러내고 뻗어버리거나 누워버리지 않는 것이다. 어쩌면 그럴 수 없는 것이 다음날 출근해야 할 직책상 언제나 자기를 절제하고 조절하는 것 같다. 그러면서 남이 보기엔 결코 인색하게 술잔을 속이거나 사양하는 법이 없으며 화수분으로 받아내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한마디로 자기절제의 안전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남 보기엔 무한정으로 넉넉한 분위기를 만드는 지혜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선천적인 그의 기질일지도 모른다.

나는 시단의 선배이지만 주도에 있어서 그의 새까만 후배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마시건 마시지 않건 그와 함께 소주잔을 앞에 놓고 앉으면 느긋해가지고 즐거워진다. 그 밖에도 소설가 L씨, 시인 K씨도 모두 예쁘고 애교 있는 술꾼들이다. 예쁘고 애교 있는 술꾼이라 함은 술 몇 잔으로 하여 그들이 마음을 열고 드러내 보이는 천진난만하고 꾸밈없는 말과 행동이 한마디로 귀엽고 예쁘다는 생각을 자아내게 하기 때문이다. 한 번은 소설가 B여사와 몇 사람이 술을 한 적이 있었다. B여사와는 사실 서먹한 사이여서 만나도 별로 깊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었는데 그날은 우연히 자리를 같이하게 되었다. 그녀의 소주 실력은 뜻밖에 양호한 편이어서 나는 내심 놀라면서 그의 취흥을 지켜보게 되었다.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마치 유치원 개구쟁이처럼 천진스러운 데다 평소에 말이 적은 그녀가 술기운으로 많아진 말이며 얼마간 어리광스러운 콧소리까지 겹쳐, 늘 차갑고 냉냉해 보이던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풀어진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나는 내심 즐겁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여 새삼 술이 갖는 이상한 매력, 이상한 힘을 실감했었다. 그날 이후로 그녀에 대한 벽이 허물어졌으니 술이란 그처럼 먼 사이도 가까이 만들어주는 비약이 되는 것이다. 너무 과하지 않게 분에 맞춰 마시는 술, 건강을 해치지 않을 만큼 마시는 술은 삶의 큰 위안이고 즐거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그것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나는 인생의 큰 즐거움 하나를 잃어버리고 사는 셈이다.

 

 구사일생의 위기를 넘어서

생명이란 평안할 때엔 별로 의식하거나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다가 어느 날 갑자기 위험에 부딪쳐 위협을 받게 되어서야 비로소 그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 것 같다. 평소엔 손가락 열 개가 있는지 없는지 의식조차 못 하다가 막상 다치거나 상처를 받고 나면 하찮은 새끼손가락 하나라도 없어서는 안 되는 신체의 중요한 일부인 것을 깨닫게 된다. 살아온 동안 생명의 위협을 느낀 적은 여러 번 있었다. 우선 젊어서 받은 몇 번의 수술 때마다 느끼던 그 긴장과 불안과 두려움을 빼놓을 수 없다. 수술 전야부터 금식을 당하고 시간이 가까워지면 이동 침대에 눕혀져 수술실로 실려가는 복도에서 어쩔 수 없이 방정맞은 생각, 불안 공포에 떨리던 것이다. 수술복 차림의 의사와 간호사들이 들락거리고 하얀 핀셋이며 메스들이 유난히 반짝거리고 천정에 달린 전등까지도 공연히 불안하게 커 보이던 것을 기억한다. 마침내 전신의 옷이 벗겨지고 수술대 위로 물체처럼 옮겨지고 달그락거리는 금속성 기구들의 부딪치는 소리가 빨라지고 그 여러 움직임과 소리들을 들으면서 죽은 듯 눈감고 누워서 기다리는 순간들의 침이 마를 것 같은 긴박감을 무어라 말할 수 있을까. 정작 악 소리를 지를 만큼 아픈 척추의 마취주사가 가물가물 의식이 없어지던 순간의 저 아득한 느낌은 차라리 편안하여 행복한 순간이었다.

생각하면 생명의 위협이나 공포는 결국 기다리는 시간, 의식이 있는 동안의 불안이고 두려움이지 정작 마취된 죽음과 같은 상태에선 아무런 생각도 없이 편안한 것이다. 그렇게 몇 시간의 긴장 몇 시간의 가사상태에서 깨어나 비로소 의식이 회복되고 서서히 몰려오는 생명감을 느끼는 순간의 감동을 또 무슨 말로 표현할까. 이제 살아났구나 하는 안도감과, 그 편안한 행복감을, 이윽고 수술 후의 고통스런 회복기를 며칠 또는 몇 주일 치러내고 마침내 정상의 몸이 되어 집으로 돌아가는 날의 기쁨을… 참으로 건강의 소중함을 생명의 기쁨을 금싸라기처럼 눈부시게 느끼던 순간들이었다. 다리를 다쳐본 사람이어야 건강한 보행의 고마움을 알고 눈을 앓아보아야 일상에 눈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실감하게 되듯이 건강을 잃어보아야만 건강의 소중함이 어떤 것인지 실감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생명의 위협을 정면으로 목전에서 겪은 것은 6.25 동란 중이었다. 공산 치하 3개월의 가슴 졸이는 90일을 어찌어찌 보내고 국군의 9.28 수복이 다가오던 무렵 날마다 하늘을 찢는 폭음과 함께 수 미터 앞에 떨어져 불바다를 이루던 폭격이 아비규환을 눈으로 목격하면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방공호로 뛰어들던 그 생지옥 같은 날들을 그래도 일루의 희망과 설마 내 집까지 폭격을 당하랴 싶은 여유가 있었다. 정작 죽음에 직면한 것은 1.4 후퇴 때의 일이다. 서울역에서 기차를 얻어 타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다행히 어떻게 아는 분의 주선으로 인천에서 배를 타고 피난을 가게 되었다. 부둣가엔 수만의 피난민이 연일 밤을 새우며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어떻게 간신히 차례에 끼여 탄 배는 조그마한 목조선 통통배였다. 기관실에서 통통거리는 소리를 따서 사람들이 그렇게 불렀던가 보다. 작은 배이니 5,60 명도 타지 않아 배는 초만원이 되었다. 선장과 선원들이 악을 쓰면서 기어오르는 사람들을 끌어내고 밀어버리면서 통통배는 무거운 몸을 뒤뚱거리며 부두를 떠났다. 바다 한복판에 정박하고 있는 1천 5백 톤짜리 큰 배까지 승객을 수송하는 거룻배였던 것이다.

그러나 부두를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전방에서 달려오는 (그때는 그렇게 느꼈었다.) 미군 L.S.T 철선이, 서로 피할 사이도 없이, 커다란 철선 머리로 작은 통통배의 옆구리를 들이받은 것이다. 목조선은 여지없이 커다란 구멍이 나고 물은 삽시간에 구멍으로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배는 한쪽으로 기울며 선창은 순식간에 물바다가 되고 갑판에까지 바닷물이 출렁거렸다. 수십 명의 승객들은 저마다 이불 보퉁이 옷 보퉁이를 이고 지고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악머구리 끓듯 했다. 선장과 선원들은 고래고래 악을 쓰며 승객들을 물에 아직 잠기지 않은 반대쪽으로 몰아붙이며 짐들을 버리라고 소리소리 질렀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무도 짐을 버리지 않았고 오히려 더욱 굳게 짐을 끌어안고 울며 고함 치며 아우성 치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바로 그것은 생지옥이었다. 이 세상에 지옥이 있다면 바로 그럴 것이라는 생각을 그나마 나중에야 했었다. 그때는 아무 생각도 없었고 오직 이제 여기서 죽는구나 하는 비장한 공포뿐이었다. 물론 구사일생으로 그 위기를 모면해서 살았으니 지금 이런 글도 쓰고 있지만 그때 바다에 빠트린 몇 개의 보따리 가운데 내 분신처럼 안고 떠난 원고뭉치가 들어있었으니 어쩌면 그것들이 나 대신 깊은 바다의 고혼이 되어버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흔히 사람들은, 생명은 자신의 것이니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엄밀히 따져서 목숨은 스스로 자신의 의지나 힘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말하자면 내 목숨이지만 내 것이 아닌 누군가에게 빌려서 맡아 간직하고 있는 귀중한 보관물이다. 그러기에 태어나는 것도 죽는 것도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기에 태어나는 나라도 부모도 집안도 선택할 수 없으며 또한 원하지도 않는 노쇠와 죽음을 맞이해야 하고 죽는 날도 스스로 정하지도 미리 알지도 못하는 것이다. 이같이 빌린다는 것은 우리들 생명의 주인이 있고 그 중인에게 언젠가는 돌려주어야 한다는 책임이 따르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주인에게 돌려주기 위하여 우리는 목숨을 목숨답게 잘 관리하고 손상 없이 지키다가 때가 오면 후회 없이 돌려줘야 하는 책임이 있는 것이다.

결국 오래 살기 위해서 보약을 먹는 것이 아니라 맡아 있는 목숨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 다시 말하여 목숨이 해야 할 일, 가치 있는 일들을 실현하기 위해서 우리는 건강해야 하고 때문에 보약도 운동도 필요한 것이 된다. 부질없는 놀이에 체력을 소모하기 위해 보약을 먹는 것은 생명에 대한 모독이지 보호가 아닐 것이다. 요컨대 생명이 소중한 것은 그 하나하나의 생명이 지니고 태어난 의미와 가치가 소중한 것이며, 따라서 그 의미와 가치를 충분히 발휘하고 실현해야 할 책임이 따르는 것이다. 학생은 학생으로서 사회인은 사회인으로서 정치가는 정치가로서 자신의 책임을 다하는 일이 바로 생명을 지키며 소중히 간직하는 길이 될 것이다.

 

 들뜬 세계의 자유항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밟은 바다 바깥 땅이 바로 홍콩이다. 카이탁 공항의 그 바다로 돌출해 나간 활주로의 위용이며 현대식 시설을 자랑하는 공항의 장관에서부터 모든 것이 눈부시게 새롭고 놀랍기만 하던 기억, 그 신선한 충격 속에 그저 어리둥절하기만 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것은 낯선 풍물에 처음으로 접한 감동도 감동이려니와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낯선 땅, 멀고 아득한 세계로 비상해왔다는 그 꿈같은 사실이 못내 믿기지 않아, 가눌 수 없이 마음을 설레게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 옛날 850여 년 전 당시의 황제가 아직 어렸던 시절, 구룡반도에 있는 여덟 개의 산을 보고 “여덟 마리의 용이 살고 있다.”고 말했다 한다. 고대 중국에선 산에는 용이 살고 있다고 믿었고, 황제 또한 용이라고 사람들은 믿어왔기 때문에 측근의 한 신하가 “폐하, 용은 아홉 마리옵니다.”라고 대답했단다. 구룡이란 바로 그 아홉 마리의 용에서 비롯한 말이라던가. 그 구룡의 시가는 좁고 지저분했으며 가는 곳마다 잡담을 이루고 있었다. 영국 식민지풍의 빌딩들과 현대적인 고층 건물이 아무렇게나 섞여 묘한 이질감을 드러내고 있었고, 그러한 이질감이 오히려 이상하게 이그조틱한 정취를 더 한층 돋우는 것이었다. 생각하면 이 영원한 영국 식민지 홍콩의 생태는 무엇일까. 말로는 영국이 홍콩섬과 구룡반도를 중국으로부터 할양 받아 99년간의 조차계약을 체결했다고 하지만, 1세기에 이르는 시간과 역사가 인간의 두뇌와 성격을 어떻게 변질시켜버릴 것인지는 아무도 짐작할 수 없는 것이다. 세계의 자유항인 화려한 상가의 호화찬란한 보석과 황금, 꿈 같은 환락, 그것은 모두 내일을 약속할 수 없는 나그네들이 들뜬 마음을 깃털처럼 가볍게 띄워 올리는 유혹의 애드벌룬이며 감미로운 미약이었다. 그래서 꼬기꼬기 싸 넣은 가난한 나그네의 안주머니에서, 또는 위세 좋게 호기를 부리는 젊은이의 불룩한 지갑에서 어쩔 수 없이 쏟아내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는 마력을, 마약 같은 마력을 지닌 도시다. 설사 내일은 무일푼의 나그네, 거리의 왕자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오늘은 우선 있는 대로 쏟아버리고 싶은 도시, 조금씩 사람을 미치게 하는 도시, 그런 도시에 풋내기 초행자인 내가 멋도 모르고 짐을 푼 것은 아무래도 잘못이며 모험이었다. 뭐니 뭐니 해도 홍콩은 밤의 천국이다. 몽코크, 커즈웨이 베이, 노스포인트 등의 네온이 빛나는 번화가이며, 한 코스에 열 가지 이상의 음식이 나오는 중국요리점, 라이치코크 어뮤즈먼트 파크에서 밤마다 상연되는 중국 가극, 그것들은 아마도 빼놓을 수 없는 홍콩의 재미들일 것이다. 더욱이 럼지 스트리트의 매립지에서는 밤마다의 야시장, 일명 ‘푸어맨즈 나이트클'(가난한 사람의 나이트클럽)이란 별명으로 불리는 이 뒷 거리에 이르러서는 그야말로 가지각색의 흥행사, 점술사, 이야기꾼, 장님 음악사, 거리의 낭송 시인, 그 밖의 각종 노점들로 성시를 이루는 중국의 가장 중국적인 면모를 아낌없이 보여주는 거리 중의 거리이다. 뭔가 괴기롭고 무시무시하여 초행자에겐 매우 불안한 인상을 주는 거리, 그러나 이곳의 홍콩 경시청은 ‘당신의 나라 거리를 걷고 있는 것보다는 안전합니다.’라고 그 치안의 안전을 보증한다니 한 번 용기를 내어 가볼 만하리라.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이곳 호텔마다 설치되어 있는 ‘투어리스트 에이전트’의 묘한 역할이다. 그들은 독신 여성의 여행자를 위해-물론 남성은 말할 것도 없고-그들의 요청이 있으면 언제든지 적당한 데이트 상대를 소개해준다는 것이다. 그 상대는 대개 같은 여행자 가운데서 주선하거나 아니면 홍콩에 거주하는 독신 남자 가운데서 요청하는 대로 적절히 물색하여 주선해준다니, 과연 세계의 자유항 홍콩 아니고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면임을 다시 한 번 수긍하지 않을 수 없다. 유감스럽게도 그 좋은 기회를 용감하게 행사해볼 용기도 시간도 갖지 못하여 혼자서 거리를 배회하다 말았지만 웬만큼 용기 있는 여성 여행자거든 한 번쯤 시도해봄도 무방하리라.

밤의 홍콩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역시 구룡반도의 끝에서 스타페리를 타고 홍콩섬으로 건너가는 그 한밤의 바다 풍경이며, 피크 트램에 흔들리며 올라가는 1,305피트 고지의 어질어질한 산길과 그리고 피크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전 홍콩과 구룡의 야경일 것이다. 밤 열한 시가 가까운데도 몇 분에 하나씩 떠나는 스타페리와 피크 트램은 사람의 물결로 혼잡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카페 피크는 그렇게 구룡에서 실려온 이 도시의 젊은이들과 낯선 나그네들로 하여 대낮 같은 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인파와 열대식물과 젊음과 여정에 묻힌 카페 피크, 흑공단같이 검은 바다가 하늘인지, 찬란한 네온의 거리가 바다인지 도무지 이상하게 하늘과 땅과 바다를 분간할 수 없는 피크, 1천 3백여 고지의 산상은 그대로 신비로운 요정의 나라며 몽환적인 도화경이었다. 누구도 하룻밤의 여정에 인색할 수 없는 그 자유와 방일과 충만과 희열로 하여 세계의 자유항 피크의 밤은 익은 술처럼 술렁거리고 검은 해면처럼 일렁거렸다. 열대식물이 우거진 가지 사이로 별처럼 흔들리는 오랜지빛 고풍한 랜턴들, 랜턴 그늘에 빛나는 눈동자들, 열대어같이 반짝이는 유리 술잔들, 그런 것들로 아롱지는 피크의 밤은 바야흐로 젊은이들의 뜨거운 열기로 끓고 나그네들의 감미로운 여정으로 끝도 없이 설레는 것이었다.

차가운 바닷바람도 거센 산바람도 그 뜨거운 생명의 열기를 식히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그것은 지심에서 불붙어 나오는 활화산처럼 생명의 밑바닥에서 피어 오르는 목숨의 불꽃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맞은 세계의 밤, 나는 완전한 고독 속에 자유와 환희를, 미답의 푸른 세계를 만끽했던 것이다. 열두 시가 넘어도 통금의 사이렌이 불지 않는 거리, 사람의 물결과 화려한 네온사인으로 하여 더한층 들뜨는 거리, 그 풍성한 과수원 같은 신천지를 나는 한 마리 새처럼, 크고 가벼운 날개를 단 한 마리 새처럼 비상했다. 무한히 자유롭고 또 무한히 외롭게… 홍콩은, 세계를 나는 에트랑제 인간의 후조들이 한 번은 지나가는 나루터 같은 곳인지 모른다. 불과 이틀 밤의 인연을 맺고 또다시 떠나는 카이탁 공항, 거기서 나는 홍콩에서의 마지막 실수를 또 한 번 연출했다. 다름 아닌 다음 행선지가 아테네이니 의당 아테네로 부쳐야 할 짐들을 방콕으로 부쳐버렸던 것이다. 실수의 발단은 여행사의 지나친 친절로 도중 내리지도 않고 통과해버릴 방콕, 카라치 등지의 경유지를 일일이 비행기표에 기재해 넣은 데서부터 시작됐던 것이다. 그러니까 공항 직원이나 수고스럽게 우리 짐을 모두 맡아서 부쳐준 그 H씨의 친지가 별로 의심 없이 방콕으로 우송해버렸던 것이다. 여하튼 일은 벌어지고 일행 H씨와 P씨, 그리고 나는 난처하게 되었다. 사람은 아테네로 가는데 짐은 도중 방콕에서 내려진다니 정말로 웃을 일이 아니었다. 아무튼 그때 겪은 그 막막하고 괴롭던 기억은 여기 새삼 기록할 수는 없지만 일금 4불인가 43불인가 하는 적지 않은 수수료를 치르고 짐을 다시 아테네로 재 우송하도록 수습하기까지 진땀을 뺀 이야기는 지금 생각해도 식은땀이 절로 흐를 것만 같다. 이렇듯 마지막 시간까지 실수를 계속한 실패의 연속 속에 나의 첫 나들이 홍콩의 기억은 그런대로 엷은 고소와 최초의 설레임이 뒤섞인, 적지 않은 즐거운 추억의 첫머리를 장식했던 것이다.

 

 내가 본 살아서 숨쉬는 지상

타이베이의 야시장 하루 24시간의 시간을 사람들은 얼마나 의미 있게 쓰고 있는 것일까. 쉽게 말해서 24시간 중 몇 시간이나 살아 있음을 실감 나게 확인하며 충만하고 가치 있게 살고 있는 것일까. 쫓기듯 일어나 쫓기듯 밥을 먹고 쫓기듯 일에 몰려 하루를 팽이 치다 폐마처럼 쓰러지는 밤까지 실로 우리는 그 귀중한 시간들을 아무런 흔적이나 기쁨도 없이 그저 덤덤히 흘려버리고 있는 게 아닌가. 그렇게 흘려버리고 죽어가는 하루 24시간을 단 한 시간도 헛되이 버리거나 죽이지 않고 살아서 뛰게 하는 길이 있다. 바로 여행을 떠나는 우리이다.

시시로 우리의 심신을 가득가득 채워 넣은 튜브처럼 팽팽하게 하고, 모든 죽었던 감성들을 새로 닦은 은그릇처럼 반짝반짝 빛나게 하는 시간, 여행은 그렇게 죽었던 나날을 갑자기 생동하는 소낙비 속으로 끌어들이는 살아 있는 현장이다. 여행은 보는 것만이 즐거운 것은 아니다. 건강하고 신선한 공복감으로 한없이 즐거운 저녁 시간, 하루의 노독을 왕성한 식욕으로 씻어내고 다시 주술에 풀려 가듯 어두운 거리로 풀려 나가는 이국의 밤 산책을 여행의 즐거움에서 빼놓을 수는 없다. 시간의 자투리까지도 버릴 것이 없는, 아니 오히려 하루 24시간이 갑절로 늘어난대도 좋을 것만 같은 싱싱한 설렘이 들뜬 나그네들을 어두운 밤시간까지도 바깥으로 바깥으로 끌어내는 것이다. 그렇게 끌려나간 타이베이의 야시장. 꼭 남대문이나 동대문 시장 안같이 바글바글 끓는 좁은 야시장 안은 흡사 서커스나 요술 놀음판이라도 벌어진 것처럼 들썩거렸다.

그야말로 오만 가지 잡탕, 별의별 음식들이 좌판에 쌓여 있고, 꿈틀거리는 물고기들이 어항 속에서 헐떡이고 있었다. 그런 속에서 정력적으로 생긴 뚱뚱한 대머리 사나이가 중국 무술이라도 하듯 웃통을 벗어 붙이고 땀에 절은 끈끈한 목청을 돋우어 호객을 하고 있었다. 가까이 가보니 커다란 뱀의 가죽을 산 채로 벗겨 회를 치는 것이었다. 그 앞엔 정력을 탐하는 남성들이 캄캄한 유령들처럼 서서 허리에 힘을 주며 지켜보고 있었고, 군데군데 으슥한 골목 안에선 야릇한 여자들이 둘 셋 무리를 지어 지나가는 남성들의 소매를 잡아 끌고 있었다. 문득 지상의 어둡고 음습한 인간의 생존이 독버섯처럼 검붉게 빛나며 진득거리는 것 같았다. 사실 언제 어디서나 빛나는 영광 옆엔 저런 어둠이 마치 빛과 그림자처럼 서로 이웃하며 공존해왔던 게 아닌가. 그리고 그러한 어둠으로 해서 빛은 더 드높아지는 것이고. 한낮의 태양 아래 위풍당당하던 국립 고궁 박물원이며 공자묘, 행천궁, 용산사 등 근엄한 유불선 전당들의 위압적인 얼굴들이 문득 만화처럼 풀어지는 야시장 골목 안을 우리 또한 무당버섯처럼 킬킬거리며 마치 생뱀의 회라도 한 접시 먹은 양 흔들거렸다. 만일 우리가 그 뒷골목 야시장의 어둡고 아름다운 음지를 보지 못하였던들 나는 살아서 피가 흐르는 생생한 인간의 체온을 만져보지 못한 채 예쁘게 차려 입은 마네킹의 얼굴이나 기웃거리다가 돌아왔을 것이다. 그만큼 웃통을 벗어 붙이고 생뱀의 가죽을 벗겨 회를 치던 야시장의 남자와 캄캄한 어둠 속에 불꽃처럼 타던 여자들의 눈은 살아 꿈틀거리는 명인의 그림처럼 나를 전율시켰던 것이다. 살아 있음의 생생한 실감으로. 르웨탄의 아름다운 풍경도 타루커 협곡의 대리석 비경도 아미족 소녀들의 춤과 노래와 저녁마다 사들이던 한 아름의 풍성한 바나나의 향연도 모두 잊기 어려운 것이긴 하지만, 역시 저 살아서 뛰는 진한 한 폭의 야생화 앞엔 별수없이 숨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아름다운 것은 아무래도 살아서 폭발하는 생명의 숨결이다.

방콕의 수상시장 간판마다 꼬불꼬불 이상한 부적 같은 글씨의 낯선 태국어만 아니면 사람도, 거리도 그대로 중국의 한 모서리를 옮겨다 놓은 것 같은 느낌이 방콕의 첫인상이었다. 우중충하고 지저분하고 무질서한 거리를 판자로 어리가리한 것같은, 창도, 문도 없이 나무의자에 3~4인씩 같이 타는 ‘둑뚝’이라는 이름의 괴상한 자동차, 이름만 자동차이지 꼭 모터가 달린 마차 같은 차들이 그야말로 이름 그대로 뚝뚝거리며 거리를 달리는 모습은 아직 개발 도상에 있는 나라의 어려운 생활상을 엿보게 하여 마음이 스산해지는 것이었다. 그 탐스럽고 먹음직스러운 바나나 다발도 여기서는 차림이 지저분한 행상 아낙의 소쿠리 안에서 볼품없이 식욕을 죽일 뿐이다. 검다는 것은 가난스럽게 보이는 것일까. 잿빛으로 거무스름한 그들의 피부는 아무리 씻고 새 옷을 입어도 정결한 느낌이 들지 않을 것 같다. 바나나 한두 그루면 양식 걱정이 없는 그들, 먹고 입고 때고(불을) 자는 데 걱정이 없는가보다. 그래서 중진국 대열에 끼기 위한 태국의 진통은 여러 가지로 큰 것 같다. 최소한의 기본 생활이 해결되어 있는 낙천적인 국민을 일깨우고 일으켜 세우는 일만도 어려운 일일 것이다. 한없이 선량해 보이긴 하나 이곳 토종산 바나나처럼 오종종하고 왜소한 체구의 27세 태국 청년 가이드는 벌써 처자를 거느린 가장이란다. 그의 말에 의하면 이곳 남성들은 부인을 두셋씩 거느리건만 아내들의 생활을 책임지는 부양의 의무를 지지 않는다고 한다. 일행 중 한 경험자의 고백으로 안 일이지만 각국에서 모여오는 관광객, 그 중에도 남성을 위한 이곳의 밤관광은 무릉도원 같은 환락 시설로 세계의 남성을 뇌쇄하고 있으며, 그것이 국책에 의해 실시되고 있는 공공업소라니 단순히 외화를 획득하기 위한 방법이라고만 생각해버릴 수 없는 무엇이 있는 것 같았다.

코코다이라 불리는 악어농장이 징그럽고 거대한 악어의 놀이, 코끼리의 재롱도 볼 만하지만 무엇보다 이른 아침 8시에 눈을 비비며 찾아간 수상시장의 정경은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배를 타고 올라가는 길고 긴 메남 강 운하 그 양안의 물 위에, 떠 있듯이 늘어선 그들의 주택이자 상가들은 세계의 관광객이 몰고 온 열기로 들썩거리며 활기에 차 있었다. 작은 조각배에 바나나, 망고, 파파이아, 코코넛, 이름도 모를 열매들을 싣고 오르내리며 호객하는 쪼그라진 백발의 할머니도 있고 취학 전같이 보이는 어린 소년, 소녀도 있었다. 크고 작은 점포마다 태국산 실크, 수, 그림, 기념물들을 쌓아놓고 이국의 풍물에 취한 나그네들의 마음을 호기심으로 설레고 들뜨게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렇게 메남 강 물 위에서 살며 그 물에 밥 짓고 빨래하고 미역감고 거기서 결혼하고 아기 낳아 기르며 대를 이어 산다고 한다. 그것은 글자 그대로 원시적인 생활같이 보였다. 빗물을 받아 저장하여 식수를 한다지만, 신기하게도 전염병 같은 것은 거의 없다는 이야기이다. 어쩌면 하느님은 도처에 사람이 살 수 있는 지혜와 은총을 원하는 대로 베풀어주시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결코 가난해서 강을 못 떠나는 것이 아니다. 이따금 적지 아니한 눈에 띄는 굉장한 저택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 부유한 사람들도 오랜 수상 생활이 몸에 배어 쉽게 다른 곳, 강에서 떨어진 도시로 들어가기를 꺼리며, 그대로 문명을 등진 채 물 위에 머물러 물위에서 산다는 것이다. 그들 가난하고 부유한 집들은 각기 그 나름의 농장을 집 뒤에 가지고 있어서 그들 농장을 가꾸며 사철 시원한 물과 바람과 숲과 세계에서 모여오는 이국의 나그네들을 맞이하고 보내며, 신명 나게 살아가고 있다. 태국같이 사철 더운 나라에선 수상 생활이란 어쩌면 그들의 가장 이상적인 생활인지도 모른다. 그러한 지상의 안락과 더불어 그들이 원하는 또 하나의 희망은 내세의 행복이다. 국교가 불교인 태국엔 수 없는 사찰이 있다. 사찰의 건물은 길서를 상징하는 뱀-용이 꼬리를 틀어 올려 흡사 승천하는 용의 모습을 방불케 하는 건축 양식으로 역시 가장 고귀한 색인 황금빛을 도금하여 사찰마다 금빛으로 눈부시게 번쩍거린다. 에메랄드 불상으로 유명한 ‘와트 푸라케오'(에메랄드 불상의 절이라는 뜻.)며 높은 탑으로 이름난 ‘와트 아룬’등 모두 그들의 신앙이 이루어놓은 불교 문화의 결정체라 하겠다.

사찰마다 넘치는 선남선녀의 무리, 범당 바깥 저만큼 떨어진 돌길에서부터 신을 벗고 무릎으로 걸어 들어가 합장 배례하고 예불삼매에 빠지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 태국을 좌우하는 종교의 힘이 어떤 것인지를 느끼게 한다. 인도에서 탄생하여 멀리 태국에 와서 정착한 불교가 지금 이 나라 국민이 정신적 지주가 되고 있음이 무엇인가 기이한 데다 겸하여 그들의 열광적인 신앙이 이상한 불안과 선망을 동시에 자극하는 것이다. “우리는 가난하지만 마음을 하나로 묶어주는 신앙이 있으니 그것이 우리의 힘이며 희망입니다.” 젊은 가이드 청년이 선량한 눈매로 자랑스럽게 하는 말을 들으며 하나로 묶을 것이 없는 우리네 비어 있는 마음, 구심점 없는 정신의 거처가 새삼 쓸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황의를 걸치고 지나가는 젊은 승려들의 박박 깎은 머리와 벗은 발이, 그러나 애처롭게 보이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이제 지척거리는 나의 여행기를 더 이상 끌어갈 지면이 없음이 아쉽다. 아름다운 공원 도시 싱가포르의 기억이며 마닐라 공항의 충격적인 인파에서부터 시작하여 보고 들은 갖가지 일들, 일상 속에서라면 그저 지나쳐버릴 수 있는 작은 일들도 여행이라는 낯선 풍경 안에선 새로운 의미를 갖고 다가서던 것을. 동남아시아를 걸으며 이른바 선진국이라 불리는 잘사는 나라들, 빛나는 문화, 경제적 부와 사회적 안정을 누리는 나라들의 그 번영과 질서에 비하면 아직도 빈곤과 무지와 어둠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이들 후진국의 힘겨운 숨소리가, 마치 내 자신의 숨결처럼 안타깝게 느껴지던 것은 바로 그들에 대한 동병상련의 친근한 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인간이 만든 지상의 불행과 비극, 즉 빈부, 흑백, 좌우, 동서, 그러나 그 양극의 비극을 넘어 어디선가 보이지 않는 보다 큰 의지가 이 세계의 아름다운 완성을 위해 지금도 쉬지 않고 역사하고 계실 것을 나는 다시 한 번 믿는다.

 갠지스 강의 비극 – 마지막 목적지인 인도에 도착했을 때, 순간 우리가 느낀 것은 여행지의 순서를 거꾸로 잘못 잡았다는 낭패감이었다. 그처럼 그곳은 그간의 우리들의 쌓인 피로에다 가일층 암울함을 얹어주는 중압감으로 가득 찬 곳이었다. 뉴델리의 위풍스럽고 당당한 넓이는 차라리 온 도시가 텅 비어있는 듯한 적막감으로 차 있는 데 비해, 한 발자국 올드델리에 들어서면 전연 별천지처럼 소음과 인파로 시끄럽게 붐볐다. 구질구질하고 지저분한 행상과 행인들로 득실거리는 그곳은 마치 난민촌처럼 궁핍스러웠다. 검은 피부란 그렇지 않아도 가난스럽게 보이는 데 겸하여 더러운 의복, 새까만 맨발, 늘어선 행상 리어카에 쌓인 밀가루떡과 하나같이 썩은 것 같은 과실 더미 위엔 파리떼가 다글다글 끓었다. 어디를 보아도 불결하고 지저분하고 궁기에 찬 모습들이다. 파리의 화려함과 아테네의 환영에 젖어 있는 일행에게 있어 그것은 삽시에 꿈이 깨는 듯한 그래서 현실에 태질당한 듯 황폐한 낭패감이 아닐 수 없었다. 인도의 기후를 누가 말하기를 “인도에는 3계절밖에 없다.”라고 했다지만 섭씨 30도 가까운 델리의 기온은 겨울철이라 습도만 없다 뿐 우리나라 여름철의 날씨처럼 더웠다. 남한의 33배나 된다는 광대한 국토, 6~7억을 헤아리는 인구, 50여 인종, 그 중에는 날 때부터 선조 대대로 범죄를 업으로 삼는 범죄부족도 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2백여 종의 언어, 그래서 자기가 사는 마을이나 지방을 떠나면 곧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일이 허다하며 방송 뉴스 시간엔 15개 이상의 언어로 방송되지만 그 중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얼마든지 많다는 것이다. 통용되는 언어는 22개어 지만 공용어는 힌두어와 영어. 그러나 영어를 해독하는 사람은 전 인구의 3퍼센트, 그리고 65퍼센트가 문맹자라고 하니 이들을 다스리는 인도 지도자들의 어려움을 알고도 남을 것 같았다. 그러나 오늘의 인도를 저 같은 후진으로 낙후시킨 것은 바로 힌두교와 카스트(신분제도)제도라고 세계는 입을 모아 말하고 있건만 그들 위정자들 자신이 오랜 힌두 정신에 뿌리박고 살아온 힌두교도들로서는 아직도 헌법에 소를 도살하지 못한다는 조항을 넣고 있다는 이야기이고 보면 그저 아연할 수밖에 없다. 어쩌면 그러한 운명적인 힌두정신이 영국의 3백 년 침략에 반항하면서도 간디의 비폭력 무저항의 저항운동을 낳게 했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그 기원을 알 수 없는, 다만 기원전 2천 년경에 인도에 침입한 아리아인의 가져온 자연 숭배의 사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짐작된다는 힌두교는 일반적 종교의 범위를 넘어 인도인의 생활 규범이며 신학이며 철학이며 사회 제도라고 한다. 그들은 어떠한 가난과 불행도 전생의 죄로 돌리고 불평하지 않으며 오직 내세와 윤회를 믿으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평생의 소원이 갠지스 강의 성수에 목욕하고 거기서 죽는 것을 가장 큰 소망으로 삼는다고 한다. 사실 나는 바라나시에 있는 힌두의 성지 갠지스 강가의 그 참혹한 광경을 목격했을 때 이것이 바로 인도의 비극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때마침 떠오르는 새벽 해를 바라보며 수많은 힌두의 성지 순례자들이 남자들은 옷을 벗고 여자들은 입은 채 갠지스 강물에 몸을 담그고 성욕을 하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갠지스 강은 시바 신(파괴와 재생을 상징하는 힌두의 중요한 신이다.)을 섬기는 시바교도들이 홀린 고행의 땀, 성수가 모여 흐르는 강이기에 성지인 것이다. 새벽 기온이 제법 쌀쌀해서 강물에 잠긴 사람들은 파랗게 질린 입술을 달달거리며 물 속에 몸을 세 번 머리까지 잠그고 세 번 좌우로 돌고 세 번 강물을 떠서 마시는 의식을 거의 광적으로 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쪽 모래밭에 장작더미가 쌓인 시체 소각장에선 때마침 시체 태우는 연기가 아침 굴뚝의 밥 짓는 연기처럼 피어 오르고 있었고 수십 마리의 까마귀 떼가 까악까악 시체 소각장 위를 맴돌고 있었다. 어디서 부르는 노래인지 구슬픈 가락의 염불 같은 노랫소리가 새벽 강상을 울리고 있었다. 그렇게 태워진 시체의 재는 갠지스 강에 뿌려지며 그 물에서 계속 사람들은 목욕하고 세수하고 빨래하고 그리고 성수로 떠다 마신다. 실제로 시체 소각장에서 떨어진 한쪽 강변에선 아낙네들이 빨래를 하고 있었고 아이들은 아침 세수를 하고 있었으며 한구석에선 궁둥이를 까고 자연스럽게 볼일을 보고 있는 남자도 있었다. 문득 사람들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분홍빛 천에 감긴 채 퉁퉁 물에 분 시체 하나가 둥둥 떠내려가다 배 밑창에 걸려 있는 것이 보였다. 성인이 되지 못한 어린아이는 죽으면 태우지도 않고 그대로 사리에 말아 강물에 띄운다는 이야기. 하면 저 시체는 썩어서 갠지스 강에 녹아들 것이고 고기밥이 될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그것을 본 후 호텔 식당에서 주는 어떤 생선요리도 손대지 않았다. 손을 대기는커녕 바라만 보아도 솟구치는 구토증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들 순례자들은 그 수많은 시체의 재와 썩은 시체의 물을 성수라고 떠서 마신다.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그곳에선 너무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갠지스 강의 비극, 아니 인도의 비극이 아닐 수 없었다. 내가 본 인도의 그 모든 찬란한 문화의 유적들, 가령 저 붉은 적사암의 성벽으로 둘러싸인 무굴 왕조의 번영을 나타낸 레드포트(붉은 성), 13세기 초 노예 왕조의 쿠타브가 승리의 기념으로 세웠다는 아름다운 쿠타브 미나르, 자므나 강가에 기적 같은 아그라 성이며 아크바르 능, 세계의 7대 불가사의 건물의 하나인 타지마할, 그 모든 오늘의 인도의 자랑, 인도의 부도 이 갠지스 강변의 비극 앞에선 한낱 떠오르다 사라지는 신기루처럼 허망한 가상에 불과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 찬란한 타지마할과 갠지스 강변의 비극이 같은 국토 안에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인도의 부와 빈, 극과 극을 그대로 나타낸 한 폭의 천국과 지옥의 대비도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인더스 강가 모헨조다로의 유적지 언덕에 서서 젊은 네루는 잡을 수 없고 규명할 수 없는 인도의 정신 인도의 깊이를 생각하면서 “내 손에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은 인도의 넓이도 그 다양함도 아니었다. 그 혼의 깊이였다.”고 술회했다지만 실로 5천 년의 문화를 그대로 간직하면서 어떠한 외래 문화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고 인도의 핏속에 흡수하여 키워왔다는 그 복잡하고 다양한 인도의 깊이를 잠시 지나가는 나그네가 어찌 알랴만 그처럼 죽음과 삶을 날마다 수없이 받아들이며 5천 년 인도의 역사를 혈맥처럼 지니고 흐르는 갠지스 강, 불가사의한 지옥과 천국의 두 세계를 그 속에 품고 말없이 흐르고 있는 저 도도하고 광대한 갠지스 강이야말로 바로 인도의 심장, 인도의 혼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다시 한 번 탁하고 어두운 강변을, 그 깊이 모를 수심을 들여다보았다. 눈에 비치는 한, 인도는 가난하다. 대부분의 거리는 어제 전쟁이 끝나고 오늘 수복을 시작하는 거리처럼 부서지고 어수선하고 무질서하며 더럽고 불결하다. 웬만한 길가의 집들은 문도 없고 방도 없고 그저 벽을 둘러 막은 움막 같은 곳에 침상인지 평상인지 알 수 없는 나무판자 하나 놓고 떨어진 냄비 조각, 그릇 몇 개, 화덕 하나가 전 가재도구다. 좌판에 벌여놓은 밀가루 떡, 먼지가 뽀얗게 앉은 음료수 몇 병 그것이 고작 그들이 파는 일용하는 상품이며 그나마도 집과 업을 가진 사람은 다행한 사람들이다. 더 많은 사람들, 더 많은 집 없고 직업 없는 사람들이 길에서 자고 유리 걸식으로 연명하고 있다.

관광지란 관광지엔 새까만 파리떼같이 꾀죄죄한 아이들이 떼 지어 모여들어 아우성 치며 구걸하고, 할아버지에서부터 아들 손자까지 손 잡고 걸식하는 일가족 걸인도 허다하다. 갠지스 강과 뒷골목엔 죽음을 기다리는 할머니들이 오그라 붙어 한줌만한 몸을 오송크리고 앉아 동전 몇 푼의 적선을 기다리며 눈감고 있는 모습도 있다. 사진 한 장을 찍고 나면 기어이 모델값을 청구하고 부탁하지도 않은 안내를 스스로 하고는 팁을 바란다. 그 발은 언제 씻어보았을까. 어른도 아이도 평생 벌거벗은 발은 새까만 갈퀴처럼 마르고 단단해 보인다. 신이라는 것을 모르는 그 원시적 가난, 뉴델리 이외의 곳에서 나는 자동차라는 것을 거의 본적이 없다. 그들의 교통 수단은 달구지이고 2인승 좌석을 뒤에 단자전거이다. 아무데나 앉아서 길을 막고 아무데서나 오줌 똥을 가리지 않고 누는 그들이 소는 왜 그리 흉물스러울까. 빛깔은 백색과 흑색뿐 우리나라 시골의 우공같은 저 부드러운 갈색의 소를 보지 못하였다. 그 중에도 흰 소의 눈은 교활하고 거만해 보여 사람을 쳐다보는 눈이 이상하게 차갑고 매서웠다. 오랜 시간 그렇게 사람보다도 귀하게 대접받아온 영예로운 지위에서 저절로 키워진 권위의 표정일까, 아니면 내 공연한 억측일까. 거리 한가운데 현대식 빌딩에 커다란 새 병원이 있을 만큼 사람보다도 동물이 대접받는다는 것은 도시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사실 인도에선 하리쟌(천민)으로 태어나기보다는 소나 원숭이로 태어나는 것이 훨씬 행복하다고 한다. 그것은 카스트라는 신분제도 때문이다. 말하자면 아무리 뛰어나도 노예의 자식은 노예일 수밖에 없고 농사꾼의 아들은 농사꾼이 되어야 한다. 아직도 결혼이나 취직 시에 자기 신분을 명시해야 하며 이 모든 카스트의 병폐가 바로 힌두교가 형성해온 사화 제도였던 것이다. 브라만(승려), 군인계급(왕족이나 귀족도 여기에 속한다.), 상인계급 그리고 노예로 불려지는 수드라, 그 밖에 ‘아웃 카스트’라 하여 위의 네 신분에도 낄 수 없는 이른바 불가축민, 즉 사람들이 가까이 상종하기도 싫어하는 불결한 계급의 사람이 있다. 그들은 소나 원숭이보다도 천대받는 동물 이하의 천민이다. 간디는 그들 천민을 ‘하리쟌(신의 아들)’이라 불러 그들의 사회적 지위를 끌어올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으며 사실로 인도의 현 헌법은 계급에 대한 차별 대우를 없애도록 법적으로 보장하고는 있다지만 실제로는 수천 년 쌓이고 굳어온 인간의 의식이 그렇게 쉽게 뜯어고쳐지지 않는 것이다. 한쪽에 이렇게 동물 이하의 취급을 받으며 가난과 천대 속에 허덕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거부들이 있다고 한다. 빈부의 차가 비단 인도뿐이랴 만 잠시 눈에 띄는 양상만으로도 그곳의 빈부의 차는 세계 어느 후진국보다도 격심한 것이 아닌가 느껴졌다. 거리에서 보는 그들의 인상은 거부와 극빈이 두드러지며 중산층의 형성이 희박해 보였다. 우리가 묵고 있던 호텔엔 수많은 종업원들의 이리저리 밀려다니며 공연히 객실을 두드려 청하지도 않은 서비스를 하는 양 하고는 팁을 뜯어가곤 했다. 6억의 인구를 수용할 만한 국력은 없고 그 많은 실업자, 넘쳐나는 인력을 고용하는 고용주가 결코 제대로 임금을 지불할 까닭이 없다.

그들은 형편없이 싼 임금으로라도 직업을 가져야 했고 그러자니 투숙객으로부터 부수입을 올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역사상 가장 커다란 인류의 실험이 지금 인도에서 진행되고 있으며 만약 그들이 정신적 부를 잃지 말고 물질적 번영과 기회의 균 등을 달성할 수 있다면, 토인비가 21세기의 가능성에 대하여 ‘정복당한 인도는 마침내 그들의 정복자를 정복하리라.’고 예언한 그대로 실현될 것이다.”라고 말하고는 있지만. 그리고 설사 네루의 말처럼 인도의 혼이 아무리 갠지스 강처럼 깊고 넓다고는 하지만 인도는 그 가난과 무지, 힌두이즘의 병폐, 바로 갠지스 강의 비극으로부터 해방되지 않고는 그 미래도 무망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끝으로 우리가 찾은 곳은 석가모니가 득도하여 처음으로 설법을 가졌다는 녹야원의 초라한 유적지였다. 석가가 자신이 태어난 인도의 땅에서 착시한 불교가 기원전 3세기 아쇼카 왕에 의해 인도전토에 보급되고 융성했었건만 12세기 이슬람의 침입으로 쇠퇴하기 시작하여 마침내 태어난 고향을 떠나 멀리 태국 등지에 가서 정착했다는 사실이 어쩌면 나자렛 예수가 태어난 고향에서 환영 받지 못하고 떠났던 사실과 일치되어 잠시 비감한 생각이 들었다. 만일 인도가 계속 불교 숭상하고 융성 시켰다면 오늘날과 같은 카스트 제도도 없었을 것이며 갠지스 강의 비극도 빈부의 차도 지금과는 달라졌을지 모른다. 사람은 평등하며 누구나 득도하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인간 평 등을 설파한 석가의 불교는 바로 저 같은 힌두이즘의 병폐를 깨닫고 거기에 반항하여 일어난 인간 본위의 종교였건만, 힌두의 강건한 뿌리는 결국 어떠한 진리도 무너뜨리고만 것이다. 인도의 힌두교는 어쩌면 영원히 인도를 지배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상한 두려움을 느꼈다. 끝으로 우리의 인도 여행을 위해서 수고를 아끼지 않으셨던 현지 인도 대학의 서경수 교수와 또한 우리에게 따뜻한 하룻밤을 베풀어 주셨던 대사님, 처음서부터 떠날 때까지 애써주신 서공보관 내외분에게 지면을 빌어 감사 드린다. 덥고 착잡하던 인도의 일정은 처음의 낭패감과는 달리 많은 것을 느끼고 생각하게 한, 무겁지만 값있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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