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마태오 저, 사랑의 지도, 1968년

 

서부 전선 ‘사천강 전투’ 때, 신부 되기를 결정한 직후, 1952

원산 상륙작전 당시 1950년 10월

카나다 연방정부 복합문화성 장관 스텐리 하이다스와 함께, 1976

<사랑의 지도> 출판기념, 카나다 몬트리올에서 교포들과, 1965

 

 

제10장

숙( 淑)의 편지

 

주일 날 성당에 찾아가 보니 신부님은 안 계셨고, 상당한 수의 남녀 교우들이 모여 주일 첨례를 보고 있었다. 성당의 일부는 폭격 맞아 허물어졌고 게다가 오래 동안 공산군이 군용 건물로 사용했으므로 성당 같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해방 이래 공산주의 하에 종교의 자유를 빼앗기고 박해를 받아 온 그분들이라 첨례 보는 그들의 신앙과 신심의 경건성이란 참으로 장한 것이었다. 그분들의 얼굴에서 나는 신앙의 기쁨을 찾아 봤다. 나는 그분들처럼 신앙의 박해를 받지는 않았으나 죽음 앞에서 다시 찾은 내 신앙은 그분들의 감격과 기쁨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주일 첨례를 보고 부대로 돌아올 때 나는 우연히 한 젊은 여 교우와 함께 길을 걷게 되었다.나와 함께 성당 문을 나왔고 손에 까맣고 조그마한 책 한 권을 들고 있는 것을 보고 나는 그녀가 교우임을 곧 확인했다.

같이 길을 걸으며 어쩌다 우리는 시선이 마주치자 조용한 미소와 눈으로 서로 인사하고 얼굴을 붉혔다.

“교우십니까?”

그녀에게 첫 말을 건넨 내 목소리는 평시의 자연스런 음성이 아니었다고 지금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네” 하고 대답하던 그녀의 목소리는 조용히 맑게 내 귀에 들려 왔다. 그리고 우리 둘이는 한참 말 없이 걸었다. 뭐라고 그녀에게 말을 자꾸 하고 싶어도 무슨 말을 할지를 몰랐다.

“여기가 고향이십니까?”

나는 그녀의 옆 얼굴을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

“아뇨, 몇 년 전에 이곳에 이사 왔어요.”

그녀는 앞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지난 해에 고생 많으셨겠습니다. 특히 전쟁 중에…”

“피난살이하느라고 고생이야 했습니다만 전쟁하는 군인의 고생에다 비할 수야 없겠지요.”

그리고 우리는 또 한참 말 없이 걸었다. 말 없이 걷는 것이 안타까웠으나 갑작스레 만난 이 여인에게 나는 대화의 재료를 갖고 있지 못했다. 한참 후 나는 다시 말을 계속했다.

“주일 첨례를 보던 여러분들의 경건함과 힘에 찬 태도에 나는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어린 시절 고향에서 참례한 주일 첨례를 생각했습니다.”

“고향이 어디세요?’

“개성 부근인 촌입니다.”

“어린 시절에 고향에서 참례한 주일 첨례라고 말씀하시는데 고향 떠나신 지 오래 되나요?”

그녀는 내 얼굴을 잠잠히 쳐다보며 동정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이 내 마음에 고맙게 여겨졌다.

“2년 전입니다.”

“그럼 요즘도 고향 소식 듣고 계시나요?”

“전쟁이 시작되자 나는 늘 일선에 있었고 내 고향은 한 동안 공산군에게 점령당하고 보니 자연 소식을 듣지 못하게 됐지요.”

우리의 대화는 여기서 또 끊어졌다.

그녀는 나에게 무슨 말을 할 듯 할 듯 했으나 조용히 걸으며 이따금 두 눈을 반짝이며 나를 쳐다보곤 할 뿐이었다. 한참 걷다가 우리 둘이는 어떤 음식점 앞을 지나게 되었다.

갑자기 시장하기도 하고 그녀와 좀 더 오래 있고 싶어 나는 물어 보았다.

“시간이 있으시면 여기서 식사하고 가실 수 있을까요?”

그리고 처음 만난 처녀를 식당으로 초대하는 것이 좀 이상하다고 나는 생각했다.

“난 빨리 집에 돌아가야 해요. 집에서 어머니가 기다리고 계세요. 시장하세요?”

그녀는 나의 제안을 거절했으나 어감은 다정하고 친절했다.

“아뇨, 별로 시장하지는 않습니다만 이북의 밥맛이 어떨까 하는 호기심에서…”

사실 나는 시장했었다. 그러나 본의 아니게 딴 말을 했었다.

“시장하시면 우리 집에 들르셔서 식사하시고 가실 수 있어요. 같은 교우니까 어머니께서도 이해하실 수 있을 거예요.”

처음 만난 처녀를 식당에 초대한 나의 태도도 좀 대담할지 모르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처음 만난 남자에게 자기 집에 갈 수 있느냐고 하는 그녀의 말도 대담하다고 생각되었다. 이북 여자들은 이남 여자들보다 활발하고 솔직하고 대담하다는 말을 들은 바 있는데 그 말이 사실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리고 나에게 호의와 신뢰심을 주는 이 아름다운 젊은 여인을 나는 무척 고맙게 여겼다. 집에 갈 수 있다는 그녀의 말을 나는 환영했고 그녀를 따라 그 집에서 놀고 싶은 마음이야 간절했으나 선뜻 여자의 뒤를 따라가는 것이 서먹서먹해서

“부대에 가서 식사하지요.” 하고 내 마음과는 정반대의 대답을 했다.

부대에 가겠다고 대답을 하면서도 내 욕심은 그녀가 다시 자기 집에 갈 수 있다고 말해주길 바랬다. 그러나 그녀는 묵묵히 걸었다. 그때 나는 어쩐지 섭섭함을 느꼈다. 그녀의 집이 부대 가는 방향이라 우리 둘이는 같이 걸었다. 얼마 후 그녀는 어떤 큰 집 앞에 멈추더니 그 집이 자기 집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안녕히 가세요.”

내게 인사를 깍듯이 하고는 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갔다. 별안간 나는 가슴이 텅 비는 듯한 외로움을 느꼈고 그녀에게 인사도 채 못했다.

그날 부대에 돌아오자 그녀로부터 받은 인상과 그녀의 모습을 잊지 않으려고 일기장에다 다음과 같이 썼다.

<보통 이상으로 아름답고 표정은 냉정한 듯했으나 그녀의 맑은 얼굴 전면에는 높은 지성미가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성격은 매우 쾌활한 듯했으며 그녀의 말소리는 명랑했다. 머리는 단발도 아니며 파마도 아닌 머리. 항상 생글생글 웃는 듯한 눈이 매우 인상적 얼굴은 갸름하고 몸도 상하가 알맞게 균형 잡힌 건강한 몸. 한 아름다운 여인을 뜻 밖에 발견. 그녀를 보고 싶다.>

3일 후 나는 그녀의 집을 방문했다.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녀를 보고 싶은 충동이 나를 가만히 부대에 남아 있게 하지를 않았다. 부대를 나와 막상 그녀의 집 앞에 도착하니 길가에서 한 번 만난 남의 집 처녀를 찾아간다는 것이 어쩐지 어색해졌다. 그래서 얼마쯤 망설이다가 용기를 내어,

“계십니까?” 하고 대문을 두들겼다.

문을 열어 주는 분은 50세 쯤 되어 보이는 여인이었다. 그분은 나를 보자

“우리 아기가 성당에서 만난 교우 군인입니까?” 하고 물었다.

“네. 지난 주일 댁의 따님과 함께 집까지 걸어온 군인입니다.”

“어서 들어오우. 그 애가 마침 없는데 곧 돌아올 거요. 그렇지 않아도 그 애가 늘 말하던 참인데 잘 오셨수.”

어머니의 이 말씀을 듣고 남의 집 처녀를 이유 없이 방문했다가 달갑지 않은 거절이나 당하면 어쩔까 하던 염려를 털어 내고 나는 기뻐했다.

“고향이 개성이라는데 고향 소식 듣고 있수? 형제분들은 어떻게 살구 있소? 전쟁 중에 얼마나 고생했우?”

이런 어머니의 질문을 받고 답하고 있는데 이윽고 그녀는 자기 친구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그녀가 돌아오자 자연스럽던 좌석이 어색해지는 듯한 감을 받았다.

“지나가는 길에 잠깐 들렀습니다.”

나는 그녀에게 멋적게 웃으며 거짓말을 했다.

“잘 오셨어요. 그러지 않아도 어머니께서 보고 싶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녀는 친근한 말로 내 방문을 환영해 주었다. 그날 잠깐 들렀다고 말한 나는 두 시간 동안이나 앉아 이런 얘기 저런 얘기에 꽃을 피우며 놀다가 부대에 돌아왔다. 그 후 빨래를 해 줄 테니 집에 갖고 오라는 어머니의 고마운 청도 있어 핑계도 마침 좋아 몇 번 그녀의 집을 방문했다. 그러던 사이에 그녀와 나와 우리 둘 사이는 꽤 친해졌다. 그래서 만나면 즐겁고 기쁘며 헤어지면 서운하고 외로움을 느끼곤 했다. 그리고 자꾸자꾸 보고 싶어졌다.

그 무렵 나는 그녀를 생각하는 것이 내 하루 일과의 전부였다.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거의 대부분의 시간이 그녀를 생각하는 시간이었다. 신병들에게 훈련이나 기타 일반 교육을 시킬 때는 그녀의 모습이 내 눈 앞에 떠올라 왔다. 그녀를 생각할 때마다 내 앞에 나타나는 그녀의 맑은 두 시선과, 얼굴 전면에 번져 나타나는 아름다움과, 또 그녀의 고운 마음은 나에게 끝없는 애정을 갖게 했다. 그리고 스무 살의 내 젊은 마음에 한 없는 사랑의 신비와 행복과 기쁨을 속삭여 주었다. 나에게 끝 없는 행복과 기쁨을 속삭이던 그녀의 얼굴을 생각하면 할수록 인간의 얼굴은 하나의 신비가 아닐까 생각했다.

인류가 창조된 이래 오늘까지 수억만의 인간이 단 하나의 얼굴이라도 자기 얼굴과 똑같은 얼굴을 가진 사람을 만나 보진 못했으리라. 이처럼 나라는 인간됨의 표현과 남과 나와 를 식별시켜 주는 것은 역시 얼굴을 통해서가 아닐까를 생각했다.

말하자면 수십 개의 손이나 다리를 잘라 섞어 놓으면 내 다리 내 손을 찾기가 어려울 것이다. 나는 수만의 인간 속에서도 그녀의 얼굴만은 쉽사리 찾을 있다고 확신했다. 이처럼 타고난 나를 남에게 알리고 말해 주는 것은 내 얼굴이지 내 손발이 아닌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내가 숙이란 한 젊은 여인을 찾아 알아보는 것도 그녀의 얼굴을 통해서다. 도 내가 숙을 생각할 때 그녀의 얼굴 모습을 내 눈 앞에 그리는 것도 사실이었다.

만일에 그녀가 아름다운 얼굴 모습을 갖고 있지 않았다면 나는 그녀의 얼굴에서 사랑의 신비와 행복과 기쁨의 소리에 내 귀를 막았을지도 모른다. 이와 같이 한 여인의 얼굴을 통해 그녀의 사랑스러움과 인간됨을 발견한 나는 얼굴이 인간의 인격 자체라고 말하지 않으나 적어도 얼굴은 각 개인 인격의 <명함> 역할을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사리를 판단할 줄 아는 사람은 남의 얼굴을 한 번 보고 그의 인격과 교양 정도와 인간됨을 짐작할 수 있다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얼굴을 제외한 인간 육체에서는 남녀의 성(性)만을 구별해 주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나 바다의 깊이는 알 수 있어도 인간의 마음 속은 알 수 없다는 옛말이 있듯이, 한 사람의 인간됨이 얼굴에 나타난다 하더라도 얼굴이란 인간의 속마음을 말해주는 편지도, 또는 있는 그대로의 마음을 비추는 거울도 아닐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얼굴은 경우에 따라 참을 감추는 허위와 가면을 쓰고 있다는 것도 일상생활을 통해 경험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인간의 인상이 남을 속일 수 있는 요소를 다분히 갖고 있다 하더라도 나는 숙의 얼굴에 나타나는 그녀의 <참>을 믿을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은 내 행복과 기쁨의 상징이기도 했다.

그녀와의 접촉의 횟수가 늘어날수록 그녀는 더욱 예뻐 보였다. 그리고 그녀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그녀의 성실성과 친근감에 나는 끝 없는 애정을 느끼곤 했다. 그녀는 얼마 전에 여고를 나와 사변 전에 교육대학에 다니고 있었으며 지금은 집안을 돌보고 있었다. 성격이 단순하고 쾌활했고 우리들이 서로 만나 이야기할 때 내가 부자연스러움을 안 느끼도록 화제와 좌석을 적절히 꾸밀 줄 아는 지성적인 여인이었다.

어느 날 나는 그녀의 집에 초대되어 잘 먹고, 잘 쉬고, 잘 놀고 온 일이 있었다. 그 시절엔 사람들이 흔히 만나면 이남 이야기, 혹은 이북 이야기, 또는 전쟁 이야기가 아니면 피난살이 이야기를 하는 게 고작이었다. 그때 그녀와 그녀의 친구가 이남 여학생들의 학교생활과 남녀 학생들의 교제를 포함한 학생 사회에 대해 이야기를 해 달라고 내게 청했다.

학교 경력이라야 소학교 출신이요, 여학생과의 교제란 전혀 없던 나로서는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차마 거짓말을 할 수 없어서 매우 부끄러운 일이지만, 나는 촌사람이며 학교는 소학교 밖에 다니지 못한 사람이라 남녀 학교 사회에 대해서는 글자 그대로 무지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녀들은 내 말이 거짓말이라고 받아 주며 학생 문제를 자꾸 꺼냈다. 그녀들은 적어도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했을 것이라고 단정했다. 그래서 나는 하는 수 없이 내 어린 시절 이야기로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의 내 생애를 하나도 빠짐 없이 그녀들에게 말해 줬다. 내가 말하고 있는 동안 그녀들은 내 말을 들으며 정신 없이 웃기도 했고, 시적이라고도 말했고, 또는 나를 깊은 동정의 눈으로 보기도 했고, 울기도 했다. 이런 일이 있은지 며칠 후 어머니가 정성껏 빨아 준 빨래를 찾아 가지고 부대에 돌아왔을 때 나는 빨래 속에서 소설과도 같은 장문의 편지 한 통을 발견했다.

그녀가 쓴 편지였다. 여학생 시절엔 앞으로 작가가 되려고 소설도 무던히 많이 읽었고 자기 혼자 글도, 시도 서 봤다는 그녀의 글 솜씨는 매우 예쁠 뿐만 아니라 잡말 없는 맑고 깨끗한 글이었다. 밤을 새우며 나는 몇 번이나 그녀의 편지를 읽어 봤다. 이미 10년이 훨씬 넘은 오늘인지라 지금 그녀 글의 전문을 기억해 낼 수야 없으나 다음 몇 마디만은 지금도 잘 기억하고 있다.

<태오씨의 말을 들으면서 태오씨 안에서 나는 의지의 인간, 투지의 인간, 이상에 사는 인간을 발견했어요. 그리고 가끔 울었어요. 내 눈물은 값싼 동정의 것이 아니예요. 태오씨가 불쌍해서 운 것도 아니예요. 뜻하지 않았던 마음의 벗… 태오씨의 동의 없이 함부로 말한 이 ‘벗’이란 말을 용서해 주세요. 그러나 실인즉 우리들 그리스도 신자는 예수님 안에 다 형제며 또 벗이 되지 않겠어요. 서로 이해할 수 있는 벗을 발견한 데서 오는 기쁨의 눈물이기도 해요.

따라서 내 눈물은 흔히 여성들에게 있을 수 있는 가벼운 정(情)의 것이 아니고 마음의 것이기도 해요. 그리고 뜻하지 않았던 마음의 벗을 발견한 데서 받는 내 기쁨은 이기적인 것이 아니고… 물론 그렇다고 순수한 것이라고 자부할 수 없으나… 남을 도와 줄 수 있고 남의 기쁨을 사랑할 수 있는 데서 받는 기쁨이에요…. 전쟁 전까지 나는 이성을 그리워하면서도 나는 결혼 의식을 떠나서 이성을 한갓 친구처럼 여겨 왔어요. 그래서 나는 여성이란 남성에게 곡 의존해서 살아야만 하는 부속물 같은 존재가 아니라고 친구들에게 호언장담을 했지요. 그래서 학교에 다닐 때 가끔 친구들과 가정에 있어서의 여성의 지위 문제나 기타 일반적인 여성 생활에 대해 토론을 할 때 나는 왜 여자가 됐는가를 자문했어요. 왜냐하면 가정에서나 사회에서 여성들의 지위란 남성들의 지위보다 열등하며 말하자면 같은 일을 해도 월급이 적다는 등등… 그리고 가정에 있어서의 어머니의 생활을 따져보면… 물론 젊은 아내도 포함해서…  잠시도 쉴 수 없는 고역스러운 일들이었어요. 주일 날 아버지나 오빠들은 집에서 달가운 휴식을 누리는 반면 어머니는 주일 날의 휴식마저 없이 일하는 것을 볼 때 여자로 태어난 것을 원망스러워했어요. 그리고 또 부모님들이 자기 아들보다는 딸들에게 대해 행동상의 자유를 주지 않으며 세심한 주의나 간섭을 하는 것을 살펴볼 때 정말이지 여자가 된 것이 후회스러웠지요. 물론 여자들은 남자들처럼 군대생활이나 일선에서 총을 들고 싸운다든지 또는 가정의 생계를 위해 힘든 노동을 한다든가 하는 것을 면제받는 혜택도 없지 않아 있긴 하지만… 하여튼 나는 구차한 가정 살림에 얽매여 <노예>처럼 살기가 싫었어요. 그래서 나는 결혼을 떠나 자유로이 내 생활을 개척하며 살려고 했지요. 그런데 전쟁이 시작되자 미군들의 항공 폭격이 시작되었고 한편 여자 의용군을 공산군이 모집하기에 시골에 계시는 외할아버님 댁에 가서 숨어 살았어요. 태오씨처럼 부상당해 죽음의 고개바지에서 뼈에 사무치는 공포와 외로움을 받았다고는 말할 수 없으나 나도 무척 외로운 나날을 다정했던 친구들과 헤어져 지냈어요. 친구 없는 고독한 촌집에 외롭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여 몇 번 울기도 했지요.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이 전쟁, 남한을 거의 다 점령했다고 공산군이 보도하면 할수록 잦아지는 미군들의 항공 폭격, 세상이 어떻게 돼 가고 있는지를 모르는 이 전쟁 판국에서 나는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몰랐어요. 그리고 내가 갖고 있던 장래에 대한 이상도, 내일에 대한 희망도, 점점 내게서 멀리 사라져 가는 것을 느꼈어요. 이상도 희망도 내게서 없어지자 나는 하루 하루 사는 것조차 무서워졌고 별안간 나는 고독의 심연에 빠졌어요. 그리고 그때 나는 여성이란 남성 없이 살 수 있다는 종전의 나의 주관을 버려야만 했어요. 왜냐하면 고독은, 여성이란 남성에 의지해 살게 마련인 연약한 존재란 것을 내게 깊이 인식시켜 줬어요. 성경 말씀 대로 남자의 갈빗대에서 생명을 받은 것이 여자라서 그럴까요…

그리고 나는 그때 여성해방을 부르짖으며 수 없는 젊은 여자들을 공장이나 혹은 직장으로, 심지어는 군대에까지 끌어들이는 공산당을 미워하기 시작했어요. 할 수 있다고 무슨 일이나 다할 수 있겠어요? 조물주이신 천주님께서 주신 사명이 따로 있고 여자들에게 주신 사명이 따로 있을 것이 아니겠어요? 우리 여자들에게 고유한 이 신성한 사명을 무시하고 여자들을 남성화시키려는 공산주의자들에게 커다란 죄가 있다고 봐요. 물론 여성 해방이란 이 말 자체에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정도를 지나치는 방법에 잘못이 있겠지요. 천주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 안에 있는 천주님의 모습을 존중하기 위해 남녀평등이란 좋은 말이나 조화가 없는 평등이란 질서를 파괴하는 악일 것이에요. 남녀평등이란 우리 남녀들에게 각각 고유한 사명을 존중하고 실행하는 조화 안에서 성립되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때 나는 천주님께서 주신 우리 여성들의 사명이 무엇일까를 생각했지요. 그리고 나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어요.

 여자들의 기본적 사명은 무엇보다 앞서 아내가 되고 어머니가 되는 것. 따라서 여자들이 아내가 되고 어머니가 되는 것을 방해하는 어떠한 교육이나 제도를 우리는 단호히 단죄해야 하며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 물론 사회 봉사나 높은 신성한 이상을 위해서 예외적인 일이야 있을 수 있으니 예를 들면 수녀가 된다는 것. 남녀평등을 성립시키기 위한 방법 중의 하나는 먼저 우리 여성들의 사명을 올바르게 이식시켜 주는 여성 교육의 급선무. 여성들이 각자 자기 교양을 높이고 남성들의 생활에 여성들이 불가피한 존재라는 것을 남성들에게 인식시켜 줄 것. 물론 성생활(性生活)에 있어 불가피하다는 것만이 아니라 남성들에게 고유한 성질상의 제반 특징을 완전히 발전시키는 데 여자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것. 왜냐하면 결국 인간은 남녀가 결합하여 하나의 완전체가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따라서 남녀가 서로 떨어져 있으면 반쪽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 그리고 우리 여자들의 사명인 아내가 되고 어머니가 되는 이 의무를 살리기 위해 우리 여자들은 우리에게 고유한 성격으로 나타나고 있는, 말하자면 희생과 봉사에 대한 사랑, 애정, 자비 등을 잘 인식하고 기를 것. 희생한다는 것, 봉사한다는 것, 사랑한다는 것, 부드럽다는 것, 사랑스럽다는 것, 남을 염려해 준다는 것, 또 남을 위로해 준다는 것은 우리들 여성의 고유한 성격에 속한다는 것.

이런 것들을 생각하자 나는 남성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됐고 가정생활에 대한 이상도 갖게 되었지요. 그리고 나의 온 마음과 온 몸을 완전히 의지하고 오래 오래 행복하게 살 수 있는 한 남자의 힘센 모습과 보호를 그리며 고적한 시골 피난살이를 자위했지요. 여성들이란 체질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남성들보다 약한 탓에서 오는 것인지 모르나 하여튼 어떤 어려움을 당할 때 남성들의 힘센 보호와 지지를 본능적으로 바라지 않나 하고 나는 생각해요. 내 경험으로 봐 남성들의 힘 있고 자신 있는 보호와 의지를 바라는 여성들의 이러한 본능이 여성으로 하여금 결혼을 원하게 하는지도 모르지요. 종전의 내 인생관(말마디가 좀 거창합니다만)을 버리고 새로운 생활관을 가졌을 때 나는 매우 기뻤으나 이 새로운 생활관을 실현시키는 데는 시대가 준 내 주위 환경이 너무나 외로웠어요.

젊음의 이상을 실현시키기 전 남을 위해 곱게 가다듬은 피 끓는 청춘의 향기를 발산하기 전에 별안간 찬 서리를 맞아 땅에 떨어져 없어져야만 한 청춘의 꽃송이를 손에 들은 태오씨의 격분과 슬픔을 나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자신해요. 그리고 깊이 동정해요…. 여성들을 힘 있게 또 외롭지 않게 보호해 주며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이 남성들의 본분이라면 남성들에게 기쁨을 주며 남성들로 하여금 자기 일에 충실하고 성공하도록 힘써 도와 주는 것이 여성, 특히 아내들의 본분이겠지요. 전쟁 중인 지금 보호란 자기 본분을 다하기 위해 가정과 정든 사람을 떠나 일선에 나선 남성들도 외롭겠지요. 그러나 후방에서 집을 지키며 일선에 나선 이들을 염려하며 살아야 할 여성들의 외로움도 정말이지 큰 것이에요. 하여튼 전시 하에 후방에 남아 있는 여성들이란 일선에서 싸우는 남성들이 상상하기 어려운 고독을 갖고 있다고 난 생각해요. 한 가지 일에 자기 자신을 잊을 수 있는 남성들의 마음에 단순과 깊이가 있다고 하면 여러 가지를 바라보며 마음 쓰는 여성들의 마음은 복잡하고 넓이가 있지 않나 저는 생각해요. 결국 이 넒은 인생의 벌판에서 자기 자신을 수습하지 못할 때 여자들은 외로운 법인지 모르지요.

같은 교우로서, 같은 시대, 같은 환경 속에 사는 사람으로서 서로의 의견을 기탄 없이 교환할 수 있는 한 마음의 벗으로서 나는 태오씨와 이러한 대화를 마음 놓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이 글을 올리는 것이에요. 바쁜 군인의 몸, 태오씨로부터 서신을 통한 답을 받기에는 내 욕심이 너무 크다고 볼 수 있으니, 이 다음 집에 오실 때 내 글에 대한 비판을 해 주세요.>

 

당시 내 천박한 지식으로 그녀의 이 “생(生)의 철학(哲學)”을 충분히 이해했는지 의문되나 그녀의 편지는 대략 이상과 같은 내용의 것이었다.

밤을 새우며 나는 몇 번이고 그녀의 편지를 읽었고 그 다음 날 또 읽었다. 그리고 이 편지가 하나의 사랑의 고백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전에 나는 그녀의 젊은 나이에 비해 넓은 지식과 깊은 교양에 놀랐다. 그녀의 요구대로 그녀의 편지를 비판하기엔 너무도 천박한 내 지식이라 그녀의 편지를 읽으며 나는 지적 열등의식을 느낀 것도 사실이었다. 참을 사랑하고 성실한 그녀의 마음의 벗, 우정의 벗은 내가 될 수 있는 듯했으나, 그녀의 지성을 만족시켜 줄 수 있는 대화의 벗은 도리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그녀와 나 사이엔 그 어떤 지적(知的) 간격이 확실히 놓여 있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배우지 못해서 무식할 뿐이지 이 무식을 메울 수 있는 소질을 나는 갖고 있다는 자존심을 내세워 보았다. 그리고 진과 선과 미 앞에 방망이질하는 내 마음의 소리를 갖고 그녀와 대화할 수 있다고 자위하며 나는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보낼 답장을 몇 번 썼다. 그러나 글 내용도 글 모양도 제대로 되지 않아 결국 나는 그 답장을 찢어 버리고 말았다. 앞으로 우리 둘이의 우정이 깊이 들어가기 전에 나는 그녀에게 무식한 있는 그대로의 나를 알릴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고 또 편지를 썼으나 결국 불살라 버리고 말았다. 그 무렵 나는 그녀와 그녀의 편지를 생각하는 이외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심정이었다. 나 자신을 짐짓 반성하고 사실을 숙고해 보기는 내 생전 이번이 두 번째!

나는 지금 <참> 앞에 내 자신의 자세를 바로 잡아야 된다는 엄숙한 느낌을 가졌다. 사랑엔, 특히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선 저열한 야심을 버려야 한다고 나는 생각했다. 하여튼 그녀가 있는 그대로의 나를 알고 뒤에 후회하고 나를 멀리 하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나는 그녀에게 성실히 나의 있는 전부를 보이고 알려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기가 사랑하는 한 여인 앞에 자기의 무능, 무식, 천박함을 드러내 놓는다는 것은 마음 아픈 일이었다.

사병들에게 제정된 교육과 훈련을 시키고 한가한 시간만 있으면 나는 그녀의 편지를 되풀이해 읽었다. 그리고 그녀의 편지는 단순한 우정의 범위를 떠나 미래를 설계하는 일종의 사랑의 고백이라고 생각했다.

이 편지가 그녀의 사랑의 고백이라면 실은 그녀가 내게 사랑을 먼저 고백한 것은 아니다. 나는 벌써 빈번한 그녀의 집 출입과 친근한 내 행동을 통해 그녀에게 무언의 사랑을 고백했고 도 사랑을 호소한 것도 사실이다. 더구나 지금까지의 내 생의 솔직한 이야기가 그녀로 하여금 나를 동정하게 했고 또 사랑하게 한 나머지 이 편지를 쓰게 했다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녀에게 아무런 소식도 전해 줄 여유 없이 또 며칠이 지났다. 어느 날 한가한 오후 나는 그녀의 집을 방문했다. 그녀를 봤을 때 나는 이전에 내가 갖고 있던 자연스러운 태도와 음성을 잊고 있었다. 내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고 어딘지 모르게 부자연스러움을 느꼈다. 그녀도 역시 나를 보자 얼마간 당황한 듯 뺨을 불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전례 없이 그녀는 쌀쌀해 보였다. 일시적 흥분을 참지 못해 구애(求愛) 비슷한 편지를 써 보내고 1주일이나 답장이 없어 그녀의 자존심이 상한 탓인지 모르나 하여튼 그녀의 태도는 침착했고 냉정했다. 실인즉 자존심이란 여자들에게 생명과도 같은 것이다. 남녀 간의 교제에 있어서 특히 애인인 한 여인의 감정을 상해 주지 않게 말과 행동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은 물론이며 도 교만을 떠난 애인의 자존심을 존중해 주는 것이 사랑하는 사람의 예의인 것이다. 나는 맥 없이 앉아 있다가 그녀의 집을 나오며 그녀의 편지에 대해 내가 얼마나 큰 관심을 갖고 있는지를 알려 주기 위해 다음과 같은 미련한 말을 했다.

“요 앞서 편지 감사합니다. 실은 요즈음 부대 내에서 바빴습니다. 주신 편지를 읽으며 내 생전 처음으로 인생철학 교과서를 읽는 듯한 감을 가졌습니다. 근 1주일 간이나 열심히 읽고 공부했습니다. 그러나 두 번 다시 그런 철학적인 편지는 내게 쓰지 마십시오. 그런 편지 두 번 다시 읽고 공부하다간 본래 배움이 없는 무식한 내 머리통은 열에 달아 터지고 말 것 같습니다.”

나는 흔히 농담 속에 진담을 말하는 습관을 갖고 있어서 숙이란 이 여인과 이야기를 할 때도 번번이 숙이 잘 알아듣지 못할 정도의 농을 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웃었다.

부대에 돌아온 나는 몹시 쓸쓸했다. 그때 문득 내 친구의 다음과 같은 말을 생각해 냈다.

“여자들이란 예쁘고 귀여우면서도 얄미운 동물이거든. 왜나하면 남자의 마음 속에 꺼질 수 없는 불을 질러 놓고 살짝 옆에 비켜서서 팔짱 끼고 방관만 하고 있단 말야.”

사실인즉 지금 나는 그녀를 만나고 싶고 이야기하고 싶은 범위를 넘어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의 편지가 내 가슴 속에 새로운 사랑의 불을 질러 놓은 것도 사실이라고 스스로 긍정했다.

 

 

 

 

제11장

사랑의 대화

 

이성으로부터 처음 받아 보는 이 강력한 사랑에 대한 정열은 나를 불사르고 있었다. 결혼! 그녀와의 결혼을 생각했을 때 내 마음은 무척 격동했고 행복이 무엇인지를 알아들을 듯한 느낌을 가졌다. 그날 나는 일기장에 다음과 같이 썼다.

<우연히 만난 아름다운 여인. 내 마음에 항상 그리던 이상(理想)의 여인, 나를 위로해 주고 힘도 주는 마음의 여인. 나에게 얼마간의 열등감을 주는 젊은 여자로서는 평범 이상의 지식을 가진 여인, 만나면 나를 즐겁게 해 주며 가끔 내 빨래도 손질해 준다는 어머니와도 같고 누나와도 같은 여인, 아내로 맞이하고 싶은 여인, 그녀의 웃음에서 생의 기쁨과 힘을 느끼고, 그녀의 두 눈에서 높은 이상의 빛을 발견하는 나. 도 그녀의 얼굴에서 맑고 깨끗한 순진 그대로의 어린이의 모습을 찾아내고 그녀의 온 몸에서 침범할 수 없는 고매한 처녀의 생명인 순결의 향기를 맡는 나. 그녀의 행복을 위해선 만사를 희생하고 싶은 내 마음. 심지어는 내 생명마저 아끼지 않고 그녀를 위해 주저하지 않을 나. 간단히 한 마디로 말해서 그녀의 사랑을 위해 미치고 있는 나.>

그러나 젊은 남녀가 서로 만나서 사랑한다고 아무렇게나 결혼할 수는 없는 법이다. 결혼엔 사랑이 본 바탕이 되고 있으나 사랑만으로 결혼이 성립되는 것은 아닐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녀와의 결혼을 성립시키기 위해선 시대적 환경과 내 현재 생활 조건이 구비되어 있지 않았다. 첫째로 나는 언제 어디로 출동 명령을 받고 일선에 나가야 할지 모르는 군인의 몸이었다. 게다가 내일의 생사 여부를 모르는 전시 하의 전투원이고 보면 한 여인을 나만의 욕심을 위해서 사랑할 수는 없었다. 그 뿐인가, 결혼 후 그녀에게 경제적 보장을 할 수 없는 말단 하사관이란 점은 그녀와의 결혼을 거의 불가능하게 보이게 했다. 따라서 정신적으로는 그녀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어도 물질적으로는 그녀를 불행하게 해 줄 것이 사실이었다. 그녀의 지식이 내게 맞지 않게 높다는 점도 염려되었다. 그리고 전쟁이 언제 끝날지 모르니 언제까지나 서로 떨어져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 둘 서로를 위해 참을 수 없는 고통이란 점을 생각했을 때 결혼이란 되는 대로 하는 것이 아니란 것을 알았다.

전쟁의 혜택으로 우연히 알게 된 이 이상(理想)의 여인을 전쟁으로 말미암아 사랑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생각할수록 이 전쟁이 한 없이 한스러웠다. 전쟁시가 아닌 평화시에 이런 여인을 만나 우리 둘이 지금과 같은 사랑을 마음으로부터 하고 있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그녀와 결혼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말대로 시골에 가서 땅을 파며 살아도 좋다. 인간의 행복이란 물질의 풍요나 명예나 하는 것 등에 속하는 것이 아니고 서로의 마음과 마음이, 영혼과 영혼이, 몸과 몸이 합쳐 아낌 없이 서로 사랑할 때 느끼는 감정이라고 말한 그녀를 무슨 일을 하더라도 진정 나는 행복하게 해 줄 것 같았다. 그러나 이상과 현실엔 일정한 거리가 있는 것이다.

그녀와의 결혼이 불가능하다고 다시 결론을 내리자 나는 그녀와 나와의 우정의 한계를 확실히 그어 놓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외로운 내 객지생활을 위안받고자 그녀를 찾아 다닌다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이기적 행위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그녀의 순정을 모욕하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어느 날 나는 그녀가 보고 싶어 또 그녀의 집을 방문했다. 그때 그녀는 불원간 결혼하게 될 자기 친구 이야기를 했다. 마침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나는 그녀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용감한 사람이군요.”

“용감하다니… 왜요?”

“이런 전쟁 통에 결혼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갖고 있으니, 그분들이 얼마나 용감합니까?”

“전쟁 중엔 결혼하지 말라는 법이 있나요?”

그녀는 거의 항의조로 내게 말했다.

“국가에서 정한 법이야 없겠으나 사리를 판단하는 지성을 가진 인간에게는 양심의 법이 있거든요.”

“그 양심의 법이 뭣이에요?”

“양심의 법이요? … 내가 말하는 양심의 법은 언제 무든 일이 우리들 생명 위에 떨어질지 모르는 이런 전시 하에 남에게 힘에 겨운 지독한 고통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법이겠죠.”

나는 내가 생각하는 바를 숙에게 솔직히 알려 주고 싶었다.

“전시 하에 사랑하고 결혼한 사람이 서로 헤어져 있을 때 받을 고통이 단지 여자들의 것이라고만 볼 수 있을까요? 그 고통이 쌍방이 서로 느끼는 것이 아니고 일방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때 그녀는 나를 정면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물론 그렇지는 않습니다. 사랑하는 이를 후방에 두고 일선으로 떠나는 남자들의 마음도 앞으로 다시 만날 보장이 없이 남편을 일선으로 떠나 보내는 한 아내의 고통만큼 클 것입니다. 그러나 숙씨의 말대로 전시 하의 여인들이란 전쟁하는 남자들보다 더 외롭고 무섭다는 원칙 하에 남편을 일선으로 떠나 보내는 여인들의 고통이 더 클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이런 뜻에서 내가 당하는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을 남에게 쥐서는 안 된다고 난 생각하지요. 말하자면 일선에서 죽은 남편은 자기 죽음과 함께 만사가 그만이 되겠으나 후방에 살아남은 아내의 고통이란 시간과 함께 계속되는 것이 아닙니까?”

“왜 그런 극단의 악(惡)을 생각하세요?”

그때 그녀는 얼마간의 분노 비슷한 표정을 짓고 이마에 주름을 잡았다. 그리고 나는 나대로 좀 지나친 말을 했다고 이내 후회했다.

“좀 지나친 예를 들어 실례했습니다만 실은 이 전시 하에 누구나가 다 그런 가능성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하여튼 전시 하의 사랑이란 그 자체가 하나의 고통이겠죠.”

“결국에 있어 사랑이란 전시나 평화시를 막론하고 하나의 고통이 될지도 모르죠 사랑이란 기쁨만을 대상으로 한 것도 아니며, 행복을 바라다보고 있을 때 사랑의 고통은 행복의 바탕이 되고 있거든요. 고통이 없는 행복이란 일종의 쾌락을 뜻한 것이며 이런 종류의 행복이란 지속성이 없는 것이에요. 말하자면 부모들이 자식들을 위해 당하는 수고는 자체가 하나의 고통이라고 볼 수 있겠죠. 그러나 부모님들은 이런 고통을 통해 자기들의 행복을 건설하고 있거든요. 왜냐하면 자식을 위해 당하는 고통은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이죠. 그리고 태오씨의 말대로 농촌에서 더운 여름 햇볕 아래 땀 흘리며 결국에 가서 코피를 쏟고 지게를 진 채 땅에 쓰러졌을 때 그것이 고통이라고만 생각하시지 않으셨겠죠. 땅을 사랑하고 가족을 사랑하고 이상을 사랑한 나머지 그런 힘에 겨운 일을 하시지 않으셨어요? 나는 고통에 두 가지의 종류가 있다고 봐요. 노예적인 것과 사랑의 것. 결국 누구든지 보다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더 큰 고통을 받는 것이 되겠죠. 무엇 때문에, 누구를 위해 고통을 참아 받은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라고 난 생각해요. 사랑이신 천주님께로부터 조성함을 받은 인간은 사랑하게 마련이고 십자가상에서 받아 예수님의 속죄적 고통과 죽음을 통해 구원된 우리들 인간은, 특히 그리스도 신자는 고통과 희생을 통해 남을 사랑하고 살려 줘야 할 것이라고 난 생각해요. 인간의 존재 이유와 가치는 사랑하고 남을 위해 고통을 달게 참아 보는 데 있다고 봐요. 이와 같이 사랑은 고통이란 희생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사랑엔 용기가 필요해요. 앞으로의 고통과 희생이 두려워 사랑할 수 없다면 그것은 스스로 자기 존재 이유와 인간적 가치를 포기하는 것이며 또 하나의 비겁이죠. 그런 태도는 진정한 뜻에 있어서 사랑이 아니라고 난 생각해요.”

주일날 신부님의 강론 같은 말을 한참이나 그녀는 얼굴에 열을 띠우고 내게 말했다. 그녀의 이런 말을 들으며 나는 그녀의 말이 옳다고 긍정했다. 그러나 나는 또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다.

“그러면 사랑이란 단지 사랑하는 사람을 기쁘게 해 주는 데 있지 않고 사랑하는 남을 살리는 데 뜻이 있다고 말하지 않았어요. 이러한 원칙 아래 사랑하는 사람의 참된 행복을 위해 진정 그를 사랑하면서도 그를 사랑할 수 없다면 이런 일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실 나는 숙에 대한 열등감 때문에 그녀를 사랑하기를 주저하고 있었다. 나는 이러한 나에 대한 그녀의 의견을 듣고 싶었다.

“진정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할 수 없다면 그것은 말이 아니에요. 사랑은 본래 결합을 지향하고 있으며 이 결합 안에 사랑이 결실되는 것이거든요. 이와 같이 결합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난 봐요. 난 태오씨의 그 말의 뜻을 잘 알아 듣지 못했는데 한 가지 예를 들어 보세요.”

그녀는 자기의 의견을 거침 없이 말하며 나의 심정을 살펴 보고 있는 듯했다.

“그것에 대한 구체적인 예는 들 수 없으나 말하자면 시대의 영향, 가정의 영향, 재산이나 지위나 명예에서 올 수 있는 영향, 혹은 교육의 정도 차이에서 생기는 영향 등등…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을 위해 나는 멀리 떠난다고 흔히 소설 같은 데서 말하지 않아요?”

“물론 사랑이나 결혼도 외부적 조건에 영향을 많이 받을 수 있으나 참된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의 태도에 달렸다고 난 봐요. 사랑은 용기가 필요하다고 아까 말했듯이 정말이지 사랑의 결합을 방해할 수 있는 외부적 조건을 물리칠 수 있는 힘이 필요해요. 용기와 노력 없이는 인간은 행복을 가질 수 없다고 봐요. 그리고 외부적 조건이 영향을 받아 성립된 사랑은 온전한 사랑으로서 성립되려면 매우 힘들 것이에요. 그리고 설사 그런 사랑이 성립되고 행복하다 하더라도 그 사랑과 행복이 그 어떤 어려움을 당하게 되면 결렬되기 쉬운 위험성을 늘 갖고 있게 돼요. 왜냐하면 사랑의 바탕인 마음의 옳은 태도가 거기에 없었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을 위해 멀리 떠나간다는 말은 아무 데나 적용시킬 수 없고 그 말이 사실이 될 때가 따로 있겠지요. 사람은 아무나 사랑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에요. 이미 자유가 없는, 말하자면 결혼한 남의 사람을 사랑해서는 안되지요. 사랑에는 질서가 있어야 하고 윤리가 있어야 해요. 한 사람이 남을 지극히 사랑한다 하더라도 그 사람이 이미 남의 사람이 되었을 때 그를 사랑해서는 안돼요. 만일 그 사람이 불행한 결혼생활을 설사 하고 있더라도 그 사람의 결혼을 파괴하는 그 어떤 기회와 동기를 줘서는 안돼요. 그것은 죄예요. 그런 경우엔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과 그의 가정을 위해 스스로 멀리 떠나갈 수 있는 윤리적 용기가 있어야겠지요. 그러나 자유로운 두 남녀가 서로 깊이 사랑하면서도 그 어떤 외부적 조건에 구애되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멀리 떠나간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고 그런 말은 아까 말한 것처럼 하나의 비겁이며 도피에요.”

숙은 그 어떤 자신감을 갖고 나에게 말했다. 그리고 그녀의 말 속에는 나를 위로해 주고 격려해 주며 또 자기 앞에 열등감을 갖고 있는 내 마음을 상해 주지 않으려는 깊은 배려가 있었다.

그때 마침 그녀 친구의 방문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이런 대화는 여기에서 끝났다. 그녀의 친구는 우리 둘의 긴장된 모습을 보자 자기의 방문을 얼마간 미안스럽게 여기고 있는 듯이 보였다. 우리는 화제를 돌려 다른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다.

그날 밤 나는 일기장에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숙을 진정 사랑한다. 숙의 행복이라면 나는 어떠한 고통도 희생도 무슨 일이라도 참아 받을 용기를 갖고 있다. 그런데 우리 둘을 둘러싸고 있는 이 시대적 환경과 아직 자립할 수 없는 이 무능한 나 자신과 그녀에게 지적 만족을 줄 수 없는 나의 무식, 이러한 조건 밑에 그녀와 결혼할 수 없다면, 아니 내가 결혼을 거부한다면 그것이 정말 그녀를 위한 것일까 혹은 그녀의 말대로 하나의 비겁이며 도피라고 볼 수 있을까? 그리고 만일 그녀가 모든 면에서 나보다 좋은 조건을 갖고 있는 남자를 만나 서로 사랑하고 그와 결혼한다면 진정 내 마음은 편안할 것인가? 또 그들의 행복을 위해 천주님께 기구할 만한 용기를 갖고 있을까? 물론 솔직히 말해 내 마음이 편안할 수야 없겠지만 나는 그들의 행복을 위해 기구할 아량과 용기를 갖고 있다고 자신한다. 그리고 만일 그녀 앞에 두 애인이 있어 사랑의 싸움이 있다고 가상해 보자. 즉 나 아닌 다른 애인이 나보다 만사에 있어 더 훌륭하다면 나는 그들을 위해 사랑을 깨끗이 포기할 것이다. 그러나 숙이 만일 사랑 없는 불행한 결혼생활을 한다면 그녀 앞에서 나를 감출 만한 용기가 내게 있는지 의문이다.>

나는 그때 결혼이란 특히 여자들에게 제2의 운명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미온의 처녀는 출생 이전의 인간 운명과도 같은 것이 아닌가를 생각해 봤다. 출생 이전의 인간들이란 귀천의 차이도, 사회적 계급도, 빈부의 차이도 없는 동등한 상태에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출생 이전에는 누구나가 왕의 아들로, 학자의 아들로, 영웅의 아들로, 무식한 사람의 아들로, 부자의 아들로, 혹은 가난한 사람의 아들로 태어날 가능성을 다 갖고 있다. 그런데 귀천의 차이, 사회적 계급의 차이, 빈부의 차이 등은 한 특정된 사람의 자녀로 태어났을 때 우선 제1차적으로 생겨지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가난한 한 농부의 아들로 이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에 가난과 함께 이 세상의 첫날을 맞이했던 것이다. 내가 만일 왕자로 태어났으면 후에 내 운명이 어찌 되었든 나는 왕자로서 이 세상의 햇빛을 보았을 것이다.

이처럼 결혼은 여자들에게 제2의 사회적 운명을 주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숙이란 여인이 제 아무리 총명하다 하더라도 나와 결혼하면 후에 내가 부자가 되든 혹은 유명한 사람이 되든 결혼 초엔 군의 일개 말단 하사관의 아내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이와 반대로 숙이 한 고급 장교나 또는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과 결혼한다고 가상하면 그녀는 자기 남편의 신분에 따라 남의 존경과 부러움의 대상이 되며 나로부터도 사모님이란 경칭을 받을 수 있는 부인이 된다는 것도 사실이었다.

남녀가 서로 사랑할 때 여자는 남자의 시선과 마음을 포착하는 힘을 갖고 있지만 한 남자로부터 선택을 당해야만 결혼할 수 있고 또한 남자의 운명에 자기의 운명을 동화시켜야만 할 여인들의 운명이 어쩐지 불쌍하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진정 숙과 결혼할 수 있을까를 생각했을 때 숙은 내 아내가 되기엔 너무나 아깝도록 내가 무능하다는 것을 다시금 자각했다. 숙이 말한 것처럼 사랑하려면 용기가 있어야 할 것도 사실이지만 정도를 넘은 모험이나 야심을 가져도 안 된다고 나는 생각했다. 만일 전쟁시가 아닌 평화시에 우리가 서로 만났다면 숙은 과연 나에게 애정을 줄 것인지 냉정히 생각해 봤다. 그리고 전쟁 중의 불안한 사회 환경이 또 피난살이에서 겪은 그녀의 심한 고독이 그녀로 하여금 자기 앞에 누군가 나타나기 전에 불쑥 나타난 나를 사랑하게 했는지도 모르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자리에 누워 내 친구들의 하루살이 사랑을 생각해 봤다. 어떤 친구는 한 여자를 자기 생명 이상으로 사랑한다고 큰 소리 치더니 다른 부대로 전속된 다음 자기 애인을 감쪽같이 잊고 또 다른 여인에게 똑같은 말을 하는 것을 봤다. 그래서 이미 머지 않아 어머니가 될 그 친구의 전 애인은 실신했다는 말을 들은 일이 있었다. 또 어떤 친구는 전자와는 반대로 지극히 사랑하던 자기 애인의 배신으로 말미암아 너무도 상심한 나머지 부대를 떠나 도망병 생활을 하다가 헌병에게 붙들려 영창생활을 하고 있다.

나는 그 친구를 잘 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남녀가 서로 지극히 사랑하다가 아무런 미련 없이 서로 헤어지는 것도 봤다. 그리고 내가 잘 알고 있던 어떤 선임 하사관은 한 여자를 짝사랑하다가 실현할 수 없는 사랑 앞에 드디어 자살하고 말았다. 또 어떤 친구는 한 여인을 사랑할 때 자기 애인의 마음을 매료할 수 있는 최대한의 명사와 형용사를 써 가며 편지를 하고 후에 그 여자와 얼마 동안 같이 살다간 그 여자를 떠난 일도 있었다. 그때 그 여인이 그의 편지를 가져다 보여 주며 책임을 추궁할 때 그 친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편지가 내가 쓴 편지임은 시인하지만 이 편지의 말마디의 뜻이 진정 내 마음이었다고는 생각지 않소.”

이런 내 친구를 생각하며,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는 상신을 영원히 사랑할 것입니다. 나는 내 생명을 바쳐 가며 당신을 행복하게 해 드리지요. 당신은 내 생명이며 내 전부입니다.> 하는 따위의 사랑을 속삭이는 말마디 속에 과연 얼마나 성실성이 있을까를 생각해 봤다. 그리고 이런 사랑의 속삭임 속엔 흔히 자기의 정욕적 이기심 도는 자기 애인의 몸에서 받을 수 있는 쾌락만을 위주로 한 저속한 욕망만이 숨어 있지 않나를 생각해 봤다. 물론 나는 성실한 사랑 속에 성실한 결혼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더 많이 알고 보기도 했다. 그러나 인간의 말 속엔 경우에 따라 허위의 가면을 갖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었다. 인간 누구나가 다 진리나 심오한 철학을 탐구할 수 없으나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진리를 말하며 성실히 자기 말과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 후 어느 날 오후, 나는 그녀를 또 방문했다. 11월 하순인데도 북한의 날씨는 매우 추웠다. 사람은 혹 가다 예술적 극치의 감정을 느끼는지 모른다. 내가 그녀의 집을 들었을 때 넓은 방안에는 두 여인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창문의 하얀 창호지를 통해 들어온 늦은 오후의 맑은 햇빛은 나의 무능한 글의 표현과 사상을 초월하는 화려하고 신비로운 빛으로 이 두 여인이 앉아 있는 방에 비치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신비라는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신비를 느꼈고 동시에 미술적인 깊은 감명을 받았다. 따뜻한 온돌방 아랫목에 앉아 나는 조용히 이 두 여인을 바라보았다. 어머니는 흰 치마 저고리를 입고 바느질을 하고 계셨고 숙은 까만 치마에 빨간 스웨터를 입고 빨래 손질을 하고 있었다. 노란 장판과, 자주 빛 옷장과, 가지가지의 꽃무늬가 있는 사면의 벽과, 천정 종이와, 숙이 입은 빨간 스웨터에 반사된 초겨울의 늦은 오후 햇빛은 방안에 희다 할까, 노랗다 할까, 불그스레하다 할까 뭐라고 딱 잘라 말할 수 없는 색의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이 화려하고 신비스러운 색의 조화 속에 앉아 있는 두 여인의 모습은 아름답다는 정도를 넘어 그 어떤 종교적 정서를 다분히 띠고 있다고 할 만치 아름답고 거룩해 보였다. 그때 나는 정신을 잃은 사람모양 이 두 여인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무엇을 그렇게 바라다보며 생각하고 계세요?”

숙이 한참 후 침묵을 깨뜨렸다. 황홀한 미의 세계에서 문득 깨어난 나는,

“미술을 감상 중이었습니다.”

나는 엄숙한 어조로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숙은 일손을 멈추고 맑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만일 화가였더라면 이 방안에 비친 이 색의 조화를 그림으로 그렸을 것이며, 내가 만일 조각가였다면 두 분은 내 걸작의 모델이 됐을 것이며, 내가 만일 시인이었다면 내 마음에 커다란 감동을 준 이 화려하고 신비스러운 빛으로 장식된 방안에 앉아 계신 두 분의 아름다운 모습을 시로 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저것도 할 수 없는 나이고 보니 두 분을 그저 이렇게 바라보고만 있지요.”

두 여인은 내 말에 웃었고 나도 따라 웃었다. 그리고 그녀들은 자기 일을 그냥 계속했다. 그때 나는 문득 장난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래서 나는 주머니에서 휴대용 작은 거울을 꺼내 내 발 밑에 창문의 유리를 타고 들어와 떨어진 하얀 광선을 거울을 통해 숙의 옆 얼굴에 반사(反射) 시켰다. 숙은 가만히 웃으며 움직이지 않고 내 장난을 받아 주고 있었다. 불그스레한 얼굴에 흰 광선을 받으니 그녀의 뺨이 투명한 유리알처럼 보였다가 빨갛게 익기 시작하는 토마토 색깔로 변했다. 티 하나 없이 맑은 얼굴, 내 거울에 비친 광선 속을 춤추고 있는 무수한 먼지들이 그녀의 맑은 얼굴을 더럽힐까 염려되는 고운 얼굴. 닦고 씻은 내 손이라 하더라도 그녀의 뺨을 만지면 흠이나 때가 묻을 것만 같은 순결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때 나는 형언할 수 없는 행복감을 느꼈다. 나는 이 집을 출입하는 제3자도 아니며, 손님도 아니며, 친구도 아미며, 이 두 연인은 내 어머니요, 내 아내며, 나는 숙의 남편인 이 집의 주인이란 느낌을 별안간 강력히 받았다.

“미술 감상, 시 감상 다했으면 이젠 장난 그만 하세요.”

그녀는 웃는 낯으로 이렇게 말하고 눈을 흘겼다.

“그냥 내버려 두려무나. 네가 추울까 봐 햇볕을 보내 주는데… 그 정성도 모르고…”

농담 같은 말씀을 어머니께서 하셨다. 그리고 빨래를 들고 밖으로 나가셨다. 거울을 군복 주머니 속에 넣으며,

“누가 내게 인간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느끼고 깨닫고 감탄할 수 있는 동물, 즉 진.선.미를 알고 사랑하는 동물이라고 나는 서슴지 않고 답할 것이야. 그리고 인간에 있어 무엇보다 불행한 일은 진.선.미를 보고 알고 감탄할 줄 모르는 것이 아닐까 나는 생각해. 왜냐하면 그들은 볼 수 없고, 느낄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말할 수도 없고, 감탄할 수도 없는 암흑의 세계를 거닐고 있는 것과 다름 없는 것이니까 말이야. 이런 점으로 보아 진(眞)을 사랑하는 철학가나, 선(善)을 사랑하는 도덕가나, 미(美)를 사랑하는 예술가는 일부 지정된 인간에게만 속해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가 다 될 수 있고 또 인간은 생활을 통해 하나의 철학가, 도덕가, 예술가가 되어야 한다고 나는 지금 생각했어. 그리고 진.선.미의 세계를 자유로이 활보할 수 있는 시인들의 생활이 인간생활의 이상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나는 이러한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그 무렵 어머니나 다른 사람이 없으면 우리 둘이는 다정한 고향 친구 사이처럼 경어를 쓰지 않았다. 그때 어머니가 다시 방에 들어오자 두 사람은 정색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럼 지금 그 거울을 통해 진.선.미를 감상하셨단 말이에요?”

숙은 만족스러운 감정으로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추상적인 진.선.미가 아니라 진.선.미의 실체를 감상했지요.”

나는 좋은 기회라 생각하며 숙에 대한 내 진심을 고백했다.

“태오씨는 전보다 많이 달라졌어요. 이상안 말만 자꾸 하시고… 부대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요?”

“그 애는 학교에 다닐 때 공부 잘하고 얌전하고 예쁜 애로 알려졌었다우.”

어머니는 우리 이야기를 불쑥 가로채어 딸 자랑을 하셨다.

“그것 봐요. 공부를 잘한 것은 진을 사랑한 것이라 볼 수 있고, 얌전한 것은 선과 통하고, 예쁜 것은 미 자체라고 볼 수 있고… 내 말이 틀렸어요? 공부를 못했어도 사람은 볼 줄 알아요.”

나는 무엇인가 신이 난 사람처럼 기분 좋아 자신 있게 말했다.

“사람 그만 놀리세요.”

숙은 나에게 곱게 눈을 흘겼으나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만족스러워 보였다. 그녀의 그러한 모습에 나도 기뻤다.

그러는 사이에 늦은 오후의 해는 서산에 기울어 석양의 햇빛이 이웃집 지붕에 가려졌다. 그리고 방안의 색의 조화는 다시 생명을 잃었고 침침해진 방은 옛 자세로 되돌아 왔다. 그러나 숙의 아름다운 모습만은 내 감각 속에, 내 마음 안에 또 내 앞에 살아 남아 있었다.

이 무렵에는 중공군으로부터 포위를 당해 난전에 난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이미 우리가 주둔하고 있는 이 원산시에도 상당한 수의 유엔군이 철수해 왔는지 반격을 위해 증원해 온 부대인지 알 수 없으나 주둔하고 있었다. 항간에서 들리는 말에 의하면 불원간 유엔군이 이곳을 철수하고 원자탄으로 공산군을 전멸시킬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또 불원간 유엔군의 대부대가 이곳에 와 이 항구도시를 수비할 것이며 막대한 항공력을 이용하여 곧 공산군을 격퇴할 것이란 말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 주일 날 아침, 나는 성당에 가는 길에 숙의 집에 들렀다. 숙은 자리에 누워 있었는데 3일 전에 심한 감기에 걸려 고생했으나 이제 다 나았다고 했다. 숙의 흰 얼굴은 그 동안 더 희어졌고 열로 두 뺨이 발갛게 물들어져 있었다. 나는 성당 가는 것을 그만두고 숙과 함께 주일 첨례(주일 기구)를 집에서 보기로 했다. 그때 나는 생전 처음으로 주일첨례 경문을 읽었다. 어머니와 숙이 경문을 선창했고 나는 혼자서 그 뒤를 따라 읽었다. 어머니와 숙은 첨례 경문의 한 토막 한 토막을 똑똑히 잘라 명랑한 음성으로 읽었다. 그러나 나는 경문을 더듬더듬 읽을 뿐 아니라 선창하는 이 두 여인의 음성의 고저와 장단에 내 음성을 맞출 수 없었다. 내가 경문 읽는 것은 마치 음의 조화를 잃은 피아노 소리같이 되고 말았다. 첨례 경문을 읽는 방법이 있는데 당시 나는 그 방법을 모르고 있었다. 제멋대로 소리 내는 무뚝뚝하고 멋대가리 없는 내 음성은 두 여인의 웃음을 폭발시키고 말았다. 숙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정신 없이 웃고 있었다. 결국 첨례 경문 읽는 것을 그만두고 주의 기도, 성모송을 몇 번 외우기로 했다. 기도가 끝나자 그녀는 다시 웃기 시작했다.

“그만 웃어. 자꾸 웃으면 내가 무안하지 않아.”

그때 정말이지 나는 무안했었다.

“안 웃을께. 하두 웃었더니 이젠 가슴이 다 아파.”

“가슴 아프면 내가 가슴 좀 쓸어 줄까?”

나는 무심코 말한 것이다.

“안돼.”

숙은 마치 내가 정말로 자기 가슴을 만지려는가 싶은지 두 손으로 자기 가슴을 가리며 말했다.

“가슴을 쓸어 줄까?” 한 내 말이 그녀와 나에게 이상하게 들렸고 또 자극시켰다. 나는 생각 없고 조심성 없이 함부로 말한 것을 이내 후회했다. 나는 얼굴을 붉혔다. 우리는 말문이 막혔고 좌석 분위기도 이상해졌다. 그때 다행히 어머니께서 들어오셔서 우리는 자연스런 분위기를 되살려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얼마 후 어머니께서는 점심 식사를 준비하러 밖에 나가셨다.

“언젠가 숙이가 말한 것처럼 가정에 있어서의 어머니의 수고는 정말이지 지극해. 여자들의 행복은 남에게 봉사하는 데 있다고 말한 숙의 말을 지금 이해할 수 있어.” 하고 나는 말했다.

“이 세상에 있는 말마디를 다 합쳐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애정을 찬양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어머니의 애정을 보답할 수 없을 거야.”

“여자들은 남의 보호와 귀여움을 받은 약한 사람들처럼 보이지만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의 힘만큼 강한 것은 이 세상에 다시 없을 거야.”

“남자들이 만일 자기들의 어머니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것처럼 여자들을 대하고 존경하고 사랑한다면 여자에 대한 남자의 만행이나 아내에 대한 남편의 불성실과 생활의 문란 등이 있을 수 없을 거야.”

숙은 뜨개질하던 손을 멈추고 나에게 교훈이나 주는 듯이 엄숙하게 말했다.

“어머니 말이 났으니 말이지, 여자들에겐 일면 성스러운 모습이 있어. 어머니란 거룩한 이름의 주인공들이라서 그럴까… 그리고 나는 이따금 숙의 모습과 행동에서 내 어머니의 모습을 발견할 때가 있어.”

정말이지 나는 그녀의 모습에서 어머니의 일면을 늘 보고 있었다.

“어떤 모습과 어떤 행동 속에서?”

숙은 재미가 나는 듯, 소녀 같은 장난기를 띤 얼굴을 내게 돌리며 말했다.

“모습 전체와 행동 전체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나를 볼 때마다 내 건강에 대한 염려와 세심한 관찰, 언젠가 색깔이 비슷해서 양말짝이 바뀐 줄 모르고 신고 온 것을 대뜸 지적해낸 그런 세심한 관찰 말이야. 그리고, <날씨가 추운데 몸 편안했었어요?> 혹은 <손이 꽁꽁 얼었네요> 도는 <몸이 쇠약해진 것 같아요> <요즈음 식사 잘 하세요?? 등등의 말들은 내 어머니께서 살아 계실 때 내가 학교에서나 여행에서 돌아올 때 으레 하시던 말씀이었거든.”

그때 그녀는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내가 정말 그런 말 했던가?”

“아무렴, 본인 앞에서 내가 거짓말 할까.”

숙은 가만히 천정만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런 숙의 상냥한 염려와 친절한 말을 들을 때마다 무척 기뻤고 어머니를 그리워하기도 했지. 그리고 우리 둘이 앉아 얘기하고 있을 때 나는 즐겁고 숙한테서 모성적 애정을 느끼지… 때로는 숙이가 엄마 같기도 하고 누나 같기도 해.”

숙은 여전히 조용했다. 공연히 이런 말을 해서 남을 벙어리로 만들었는가 생각되어 나는 그녀를 웃기고 싶었다. 그래서

“엄마가 보고 싶을 땐 숙이를 엄마라고 부를까?”

그녀는 내 말에 어이가 없어서인지 진짜 우스워서인지 모르나 한바탕 웃고 나서

“어디 불러 봐.”

라고 웃으며 말했다. 그때 그녀의 모습은 정말이지 귀여웠다. 사랑스러운 그녀의 모습에 내 마음도 기뻤다.

“엄마, 엄마.”

하고 내가 정말 어린애처럼 그녀를 부르자 그녀는 포복 대소했다.

“애야, 고만 웃어라. 요즘 아이들은 왜 웃기를 그리 잘하노. 어제도 하루 종일 밥을 안 먹었는데 너무 웃으면 기운이 없어진다.”

부엌에서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나는 그녀의 웃음을 지극히 만족스럽게 여겼다.

“어제 밥 굶었어?”

“응 밥맛이 없어서.”

“지금 배고파?”

“응, 배고파. 그런데 밥 먹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어.”

그녀는 기운 없는 목소리로 나직이 말하며 뜨개질을 계속했다.

“무엇이 먹고 싶어?”

“먹고 싶은 것은 별로 없고 너무 웃어 이젠 먹을 기운도 없어.”

“무엇이든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말해 봐. 내 구해다 주지.”

“북극 얼음판에 열린 감이라도 구해다 줄 테야?”

“그런 상상적인 것이야 어떻게 구해다 줘? 그러나 북극에 다녀오라면 다녀오지.”

“정성이 지극하군.”

“정성 뿐이겠어. 그럼 이 땅 위에 열린 과일을 사다 줄께.”

“날씨가 꽤 추운 것 같은데 밖에 나갈 용기 있어?”

“사람을 어떻게 취급하는 거야? 정성의 표시로 내 몸을 찬 바람에 한참 얼리지. 내 곧 다녀 올께.”

나는 그녀에게 과일을 한 아름 사다 주었다.

점심 때 그녀는 만족스레 식사를 했다. 그때 어머니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며칠 전 부터 시내가 매우 소란해졌어. 소문엔 중공군이 이 전쟁에 개입을 해서 국군과 유엔군이 부득이 남한으로 일단 철수한다고 하는데 정말이우? 그리고 북한 땅에다 원자탄을 떨어뜨린다고들 하는데 어쩐지 요즈음 마음이 불안해. 시내에 미군이 자꾸 밀려오고… 촌에 계신 부모님이 병환 중이니 찾아 뵈러 가야겠고…”

그때 어머니의 의아스런 표정에는 불안이 겹쳐 있었다.

실은 나도 이런 말을 몇 번 들은 일이 있었고 부대 내에서도 전쟁이 악전되는 경우 남한으로 철수할 것이라고들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쉽사리 며칠 후에 아군 부대가 이곳을 철수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를 안심시키려고 말했다.

“어머니 그런 소문은 거짓말입니다. 유엔군이 굉장한 군장비를 갖고 있고 또 중곤군에 없는 강력한 항공력을 갖고 있는데 그래 그 시시한 장개석 군대의 유물인 중곤군에게 내쫓겨 철수하고, 북한 땅에 원자탄을 떨어뜨리면 이 좁은 한국땅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한국 땅 전체가 몽땅 불바다가 될 텐데 그런 자살 행위를 할 수 있다고 보겠어요?”

“하여튼 공산군이 이곳에 다시 들어오면 우리는 살아 남지 못할 거야. 그땐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남한으로 국군 따라 철수해야 해. 세상이 하두 어지러워 아들이 둘이나 있지만 그 놈들의 생사마저 모르고…  만약에 국군이 철수한다면 숙이 혼자라도 데리고 남한으로 가 주구려. 서울에 친척도 있으니 가기만 하면 살 수 있을 테니까. 나야 시골 가서 늙으신 부모님 모시고 살지.”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난 엄마하고 함께 있지 나 혼자는 아무 데도 안 가. 태오씨, 만일에 부대가 철수하는 경우 엄마하고 나를 데리고 갈 수 있어요? 해군은 아무래도 선편 이용을 쉽게 할 수 있을 테니까.”

숙은 좀 불안해하는 기색으로 밥을 먹다가 멈추고 말했다. 그리고 그녀의 두 눈에는 무엇인가 애원하는 빛이 있어 보였다.

“선편 이용이 잘 안 되는 경우 두 분을 업고라도 달아나야지.”

“정말?”

“정말이구 말구.”

나는 자신 없고 무책임한 큰 소리를 했다.

 

 

 

 

제12장

이상과 현실 사이

 

식사 후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하던 끝에 나는 숙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말하자면 지식의 차이, 또는 사회적 지위의 차이로 한 남자가 사랑하는 자기 애인 앞에 열등감 같은 것을 느낀다면 그 못난 사나이를 어떻게 생각해?”

좀 쑥스러운 말이었으나 나는 성실한 마음으로 솔직한 내 심정을 고백하고 싶었다. 그때 그녀는 웃으며 나를 잠깐 바라보다가,

“그런 것을 느끼고 생각하면 안 된다고 난 생각해.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열등의식이고 빈부의 차이고 지식이나 계급의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 법이야. 사랑은 모든 것을 초월하는 것이야.”

그녀는 친절감이 흐르는 말로 자신 있게 말했다.

“전시 하에, 게다가 내일의 생사를 모르는 한 전투 사병이 한 여자를 사랑할 수 있을까?”

“왜 못해”

“만일 그들이 서로 사랑한다면 무척 괴로울 거야. 그리고 사랑이란 말은 함부로 아무에게나 아무렇게나 할 수 있는 범속한 말이 되어서는 안될 거야. 사랑이란 적어도 영원성을 갖고 있어야 하며 결합을 지향하고 있어야 해. 한데 언제라도 상관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고 일선에 출동 할 태세를 늘 갖추고 있어야 할 전투원이 결합의 보장 없는 사랑을 할 수 있다고 봐?”

“물론 나는 태오씨의 말을 잘 이해해. 정말이지 태오씨의 말처럼 사랑을 위한 내일의 희망과 안전을 가질 수 없는 이런 어지러운 난리통에 사랑한다는 것이 괴로운 것만은 사실이겠지. 내일의 행복과 가정생활이 설사 약속된다 하더라도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도 힘에 겨운 일일 거야. 그리고 극악의 경우를 생각해서 만일에 <을>이란 한 아내나 애인이 <갑>이란 자기 남편 혹은 애인을 전쟁 때문에 잃었다면 그것은 상상조차 하기 힘든 고통일 것이야.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갑>이란 남자나 <을>이란 여자만 에 주어진 운명이 아니고 우리들 모든 남자와 여자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 아니겠어?”

그녀의 말을 들을 때 아직도 머리에 생생히 떠오르는 지난 날의 병원생활, 그것은 모두 이즈러진 영상(映像)이었다.

포탄을 맞아 아주 묵사발이 된 친구의 몸, 팔팔 뛰던 옆 친구의 몸뚱아리가 싸늘해지던 것, 팔 다리가 부러진 불구자, 가지가지의 흉한 상처를 입은 병원의 동료들, 그리고 이미 죽은 또는 상처입은 자기 아들, 남편, 애인 또는 오빠, 동생 앞에서 흐느껴 울던 그 여인들의 슬픔,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서로 떨어져 느끼는 고통과 외로움이 내 머리 속에 떠올라왔다.

“물론 남녀는 서로 만나면 사랑하고 결혼하여 한 가정을 이루는 것이 창조주의 의사겠지.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어떠한 시대에도 남녀는 서로 사랑하겠지. 그렇지만 자기가 옳다고 판단한 것을 존중하는 뜻에서 한 남자가 방금 숙이 말한 시대적인 운명의 피할 수 없는 무수한 예 중의 하나가 되기를 원치 않는다면…”

내 말을 들으며 그녀는 웃었으나 그녀의 말 중엔 얼마간 노기가 숨어 있다는 것을 나는 느꼈다.

“그런 남자는 독선적이거나 고집장이일 거예요. 그리고 천주님께 대한 우리들의 취할 바 태도는 천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분의 사랑의 섭리에 완전히 우리를 맡기고 주어진 환경 속에 주어진 기쁨과 고통과 희생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난 생각해요. 일선에서 싸움한다고 다 죽는 법도 아니며 후방에 남아 있다고 다 산다는 보장도 없거든요. 생명의 주인이신 천주님의 섭리에 모든 것을 일임하고 그분의 창조적 사업을 우리는 여하한 시대나 환경 속에서도 계속해야 된다고 봐요.”

숙은 내게 경칭을 쓰며 말했다. 그 화법으로 보아 그녀는 내 말에 짜증을 느끼고 있는 듯 했으며 이제는 이런 대화를 하지 말자는 신호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나는 말했다.

“나는 항상 숙의 말이 옳고 성실하다고 긍정해.”

이와 같이 말하며 나도 이제는 이에 대해서 더 이상 말하지 않기로 했다. 그때 나는 나에게 대한 그녀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했다.

시장에 다녀오신 어머니께서는 또 중공군 개입과 국군의 전세가 불리해졌다는 소문을 듣고 오셨다. 그러나 숙과 나, 둘이는 그런 것을 먼 나라의 남들의 일들처럼 생각하며 실감을 갖고 있지 않았다. 불과 며칠 후면 우리 둘이는 기약 없이 헤어져야 할 운명의 문 앞에 있었으나 우리는 그것을 예측 못하고 사랑에 취해 있었다. 잠시 후 어머니께서는 또 나가셨다. 그때 숙이 갑자기 무엇을 생각해 낸 듯,

“참 이상해.”

하고 말했다.

“뭣이 이상해?”

“우리 둘이 서로 만나 알게 된 것 말이야. 난 태오씨를 처음 만났을 때 어디서 본 사람 같은 느낌을 가졌고 친근감도 느꼈어….”

“나두… 그런데 처음 나를 본 인상이 어땠어?”

나는 나에 대한 숙의 관심도를 알고 싶었다.

“첫 인상이라구? 젊은 군인이 기특하다는 것.”

“어떤 점이?”

“거치른 이런 전쟁판에서도 주일을 잊지 않는 신자의 본분과 성당 안에서 기구하고 있던 태도.”

“성당 안에서 나를 봤어?”

“그럼 내가 바로 옆에 있었는데.”

“기구를 안 하고 나만 쳐다봤군 그래.”

“몇 번 쳐다봤지. 몸이 큼직하고 뚱뚱한 군인이, 게다가 처음 보는 이남 군인이고 보니 자연 사람의 시선을 끌게 되지 않아.”

숙은 나에 대한 재미나는 비밀이라도 알고 있는 듯이 눈가에 웃음을 띠며 말했다.

“남은 열심히 기구하고 있었는데 시장의 구경꾼처럼… 그래 그때 내 태도가 좀 미련해 보였지?”

나는 숙의 마음을 슬쩍 떠보고 싶었다.

“그 때 눈을 딱 감고 묵묵히 앉아 있는 태오씨의 모습을 봤을 때 언젠가 절간에서 본 부처님 같다고 생각하며 마음 속으로 많이 웃었지.”

나는 숙의 말을 들으며 다소 실망했다. 그녀의 말은 내가 호기심을 갖고 기대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 그러지 않아도 어렸을 때 중을 따라 입산하고 삭발이나 할까 했던 일도 있었는데 그럼 난 중이 될 소질을 갖고 있는 모양이지…. 중이 될까. 살기 힘들고 괴로운 이 속세를 떠나…”

나는 숙에 대한 애정의 감정을 감추고 일부러 딴 말을 시작했다.

“왜? 세상이 성가시고 괴로워?”

뜻밖에도 숙은 신중한 태도로 말했다.

“아니 별로 그런 것도 아니지만… 병원에서 퇴원할 무렵, 상처입고 한 번 죽음의 고개 바지를 올라가던 혼난 일도 있고 해서 세속을 떠나 수도자가 될까 하고 생각해 본 일이 있었지.”

“이 세상이 무섭다든가, 살기 괴롭다든가, 혹은 세상이 우리들에게 고통과 괴로움만을 주어 세상을 원망하게 될 때 우리는 이 세상을 피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 이러한 현상을 가진 세상 앞에 선 그리스도 신자들의 태도란 세상을 원망하고 비관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이 세상을 위해 무엇을 했나를 엄중히 반성하고 또 이 세상을 보다 더 살기 좋고 평화롭고 행복하게 할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해야 할 것이라고 나는 믿어. 결국 우리 그리스도 신자들의 사명이란 악이 성하는 이 세상에 선을 심고,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의 씨를 뿌리고, 불화가 있는 곳에 평화를 주며, 분열이 있는 곳에 통일을 가져 오고, 혼란이 있는 곳에 질서를, 불의가 있는 곳에 정의를 세워야 된다고 나는 생각해.”

엉뚱하게도 종교성을 띤 심각한 대화가 전개되자 나는 흥미 없어 잠잠히 있었다.

“…….”

“이런 뜻에서 아무리 세상이 싫고 괴롭고 살기 어렵더라도 입산하여 중이 된다는 건 옳은 태도가 아니라고 봐. 그런 행동은 각자에게 부여된 사회적인 의무를 저버리는 이기심이라고 보고 싶어. 그리고 그것은 비겁한 현실 도피야. 중이나, 신부나, 수사나, 수녀가 되기를 원할 때 만일에 그 지원자들이 이와 같은 부정적 태도를 가지면 그들은 결국에 가서 불행한 사람이 되기 쉽다고 봐. 중이나 신부나 수도자가 된다는 것은 천주님을 사랑하고 위하며 도 남을 위한 봉사를 목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긍정적 태도가 먼저 있어야 된다고 난 생각해. 신부나 수도자나 중은 이 거칠고 힘든 사회의 낙오자들이 아니며, 따라서 이 세상에서 살 자신이 없는 사람은 신부나 수도자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해.”

“동기가 불순하고 부정적이었다 하더라도 수련 도중에 이것을 깨닫고 자기 태도를 고치면 수도생활을 성공시킬 수 있는 일이 아니겠어? 우리들의 신앙생활이나 완덕생활도 결국 우리의 신앙 자세를 필요할 때마다 바로잡고 주께 회심(回心)하고 회개하는 데서 성장되는 법이니까…”

숙의 말을 받아 주지 않는 것이 그녀에 대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되자 나는 신중하게 내 나름대로의 의견을 말했다. 그때 그녀는

“머리 아픈데 그런 복잡한 얘기는 이 다음에 해.” 하며 화제를 바꾸었다.

“내가 태오씨에 대한 첫인상 얘기를 했으니까 이젠 나에 대한 첫인상 얘기를 해 봐.”

“첫인상 얘기라… 그렇지 그날 나는 부대에 돌아오자 성당문에서 만나 같이 길을 걸은 그 아름다움 여인의 모습을 잊지 않으려고 일기를 썼지…..”

“아니 매일 일기를 써?”

숙은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매일이야 아니겠지만 내 개인 생활에 무슨 변동이나 특기할 만한 일이 생기면 가끔 쓰지.”

“내게 대한 말을 쓰면 안돼.”

숙은 자기 비밀의 일부가 폭로되어 불안해하는 사람처럼 정색을 하며 말했다.

“안 된다는 법이 어디 있어…. 쓰고 안 쓰고는 내 자유야.”

“물론 그것이 자유라 할지라도 남에 대한 말을 남의 동의 없이 쓰면 안 돼.”

이렇게 말하며 그녀는 내 손등을 꼬집었다.

“남이 하지 말라는 일은 기 쓰고 더 하고 싶은 고약한 성격이 내게 있거든. 오늘 부대에 돌아가면 숙이란 한 처녀가 내 손등을 꼬집었다고 난 써야겠는걸.”

“태오씨도 역시 남자라 남자에게 공통된 짓궂은 면이 있어. 하여튼 내 이름을 일기장에 쓰면 안돼” 하며 그녀는 웃었고 눈을 흘겼다.

“남이 내 일기를 읽으면 무슨 얘기인지 알 수 없어. 대부분의 경우 나만 알 수 있는 가명으로, 또 나를 제삼자의 입장에 놓고 일기를 쓰니까.”

“그래 내 이름을 일기장에 뭐라고 썼어?”

“그녀, 혹은 성당 아가씨, 또는 보고 싶은 그녀가 아니면 간단히 숙이라 썼지.”

“자, 그럼 내게 대한 첫인상을 뭐라고 썼어? 빨랑 말해 봐.”

“나는 남이 나에게 무슨 일을 강요한다거나 빨랑 하라고 하면 일부러 느릿느릿 하는 사람이야.”

나는 웃으며 말했다. 그때 그녀는 내 손을 잡아 흔들었다.

“하여튼 태오씨도 여간 짓궂은 남자가 아니야. 남을 살살 놀려 주기만 하구…”

나는 그녀의 그런 모습과 말이 더 귀여웠고 재미있었다. 심각한 인생 문제를 토론할 때는 철학교수처럼 보였으나 그녀에게는 역시 소녀다운 귀여움이 있었다.

“그럼 느릿느릿 내 첫인상 얘기를 해 봐.”

그녀는 웃었다.

“그럼 난 빨랑빨랑 말하지. 첫째로 머리는 단발도 아니며 파마도 아닌 머리, 생글생글 웃는 눈이 매우 인상적. 그녀의 음성은 맑고 깨끗했고 얼굴에서는 지성의 빛이 감돌고 갸름한 얼굴에 몸의 균형이 알맞게 조화된 미인. 그리고 건강한 몸에다 고매한 품위를 풍기는 아름다움 한 처녀를 길가에서 우연히 발견. 보고 싶고 이야기하고 싶은 여인… 별안간 만난 한 미녀 앞에 벌벌 떨며 말도 제대로 못한 나는 그녀의 이름도 모르고 있다. 그러나 그녀의 집을 알고 온 것이 하나의 다행이며 그것이 앞으로 그녀와의 무슨 인연이라고 될까… 대략 이 정도지.”

나는 마치 책이라도 읽듯 단숨에 말해 버렸다.

“시인이 눈이 멀었군 그래.” 하며 그녀는 만족스러움을 얼굴 전면에 띠고 웃었다.

“나는 시인이 아니야. 그러나 숙 앞에서 시인도 되고 미술가도 되지. 그리고 누가 말하는데 미술가나 시인의 눈은 정말로 멀어야 한대 왜냐하면 이들은 인공적으로 암흑 속의 빛을 통해 이 현상을 초월하여 그 뒤에 숨어 있는 참을 바라다보고 지각하기 때문이래. 마치 하늘의 넓이와 깊이를 알려면 밝은 햇빛이 있는 대낮보다는 별이 총총한 밤하늘을 바라보아야 그 넓이와 깊이를 볼 수 있듯이. 이처럼 우리도 한 현상의 참된 모습을 알려면 그 현상 앞에 눈을 감고 암흑 속의 빛을 통해 그 현상을 관찰할 때 비로소 그 실체를 알 수 있다고 난 생각해. 이런 점으로 보아 사물을 보면서도 눈이 먼 철인이나 미술가나 음악가나 시인들이 파악한 인식이 진리 자체라고도 볼 수 있잖아. 그리고 나는 숙을 위해서는 위대한 시인이나 예술가도 될 수 있어. 숙은 나에게 무한한 시정(詩情)과 예술 감정을 깨우쳐 주었어.”

나는 이 기회를 이용해 그녀에게 나의 참마음을 고백하고 있었다.

“약 장사를 해 봤는지 말은 구수하게 잘 하는데.”

그녀는 이렇게 말하며 또 웃었다. 그러나 그녀의 웃음은 내 심정을 알아 주는 그러한 웃음이었다.

“열심히 말하는 사람 대접이 그래 약 장사란 말과 그 웃음 뿐 야?” 하며 나도 그녀를 따라 만족하게 웃었다.

“아까 태오씨가 나를 놀려 주었으니까, 나도 태오씨를 한번 놀려 준 것이지. 마음 상했어?”

“마음이 무척 상해 분통이 터질 지경이야.”

“그래?…. 어디 화내 봐. 태오씨가 화내는 모습이 보고 싶은데…. “

여전히 그녀는 나를 놀렸다.

“내가 화내면 무서워.”

“어디 한 번 화를 내 보든지 또는 화난 모습을 해 봐.”

나는 그때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다물고 이마에 주름을 잡고 그녀를 내려다 보았다.

“자 무섭지? 애 얼굴이.”

그녀는 여전히 웃으며

“영화배우가 될 소질이 없구먼. 무섭긴 뭐가 무서워. 오히려 우습기만 하구만.”

이 말 끝에 그녀는 자기 손가락으로 내 코끝을 쳤다.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논리적인 말보다는 상대방에게 자기 사랑을 느끼게 해주는 그 어떤 행동의 표시가 더 인상적이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서로 놀려 주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전쟁이 끝나면 영화배우가 될까 했더니 그럼 그만 두어야겠군 그래.” 하며 나도 웃었다.

“아니 전쟁이 끝나면 뭣이 하고 싶어?”

“글쎄, 영화배우나 될까 했는데 소질이 없어 안 되겠고… 전쟁이 끝나는 대로 난 곧 제대할 거야. 인젠 군대생활이 싫어졌어.”

“군대에서 제대하면 뭣을 할 테냐 말야?”

“우선 야학교에 다니며 공부라도 하고 싶고, 배운 것이라고는 농사 일 밖에 없으니 농촌에 내려가 목축을 하며 땅이라도 파고 싶어. 과수원을 경영하며 양계라든가 돼지라도 기르며 농사라도 할 수 밖에…”

“그런 생활이 재미 있겠는데… 과수원을 경영하며 양계장을 벌이고 농사 일 할 때 어머니와 날 초청할 테야?”

“암 초청하구 말구. 남편하고도 같이 내 집에 놀러 와..  그때 뿌옇고 맛 좋은 찹쌀 막걸리에 만반진수의 농촌 음식을 대접하지.”

“내 남편이 어디 있어?” 하며 그녀는 눈을 흘겼다.

“하여튼 일생을 독신으로 지내지 않는 한 앞으로 남편이 있을 것 아니야. 석 달 동안 농촌에서 피난살이 할 때 밤낮으로 생각했다는 그 사람이 지금도 숙의 마음 속에 있을 것 아니야?”

나는 능청맞게 이야기하며 이번에는 내가 숙을 놀려 주고 싶었다.

“내가 언제 밤낮 남자를 생각하며 피난살이 했다구 말했어…. 하여튼 남자들이란 능구랭이구 짓궂거든…. 너무 놀리지 마…”

“내가 말 잘못했단 말이야?”

나는 여전히 그녀를 놀려주었다. 그때 그녀는 내 팔을 꼬집었다. 나는 그것이 더 재미 있었다.

“나를 자꾸 놀려 줄 테야, 안 놀려 줄 테야?”

“자꾸 놀려 줄 테야.”

사랑의 감정이란 참 이상한 면을 갖고 있었다. 사랑스러우면 더욱 더 상대방을 놀려 주고 싶은 본능이 사람에게 있는 것 같았다.

“그럼 이번에는 내가 화낼 테야. 진짜 화를…”

“어디 한 번 진짜 화내 봐.”

“화나면 난 울어.”

“어디 울어 봐.”

“정말?”

“정말!”

그랬더니 그만 그녀는 우는 것이 아닌가.

“아니 정말 울어?” 하며 나는 놀랐고 한편 우스웠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앉아 있었다.

말 없고 슬픈 빛마저 돌고 있는 그녀의 조용한 얼굴을 바라다볼 때 나도 갑자기 슬퍼졌다. 그리고 너무 놀려 주었구나 하고 나는 이내 후회했다. 두 눈을 감은 그녀의 두 뺨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도 울고 싶어졌다. 그때 나는 가만히 내 손으로 그녀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러자 그녀는 나를 보고 웃더니 돌아앉아 눈물을 닦았다. 그때 나는 영문을 몰라서

“아니, 울다가 또 웃기는?” 하며 나도 덩달아 웃었다.

“그만하세요. 정말 울고 싶어요.”

숙은 정말 울고 싶은 마음인 것 같았다. 왜 울고 싶어 했을까… 눈물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어야만 되는 것이 아니라 해도 숙은 왜 눈물을 흘렸을까.. 숙은 눈물을 닦으며 건넌방으로 나갔다. 나도 일어서려 하다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엉거주춤하고 주저앉았다. 숙이 아마 혼자 있고 싶은 모양이다 라고 생각하며. 숙이 나간 방안은 텅 빈 것만 같고 내 마음도 쓸쓸해졌다. 잠시 후 숙은 방으로 돌아왔다. 얼굴에는 눈물기가 가시었으나 그녀의 두 눈은 아직도 불그스레 물들어 있었다. 숙은 좀 멋 적은 듯 픽 웃더니 금세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숙은 좀 더 성숙해 보였다. 눈물이란 일종의 인간적 고독과 슬픔은 사람을 성숙하게 만드는지 모른다. 아니 눈물 속에 흘러간 잠시의 고독과 고통이 그녀를 성숙하게 보이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때 숙은 내 옆에 가만히 다가와 앉으며 작은 소리로

“미안해요 태오씨, 눈물을 다 보여서…..” 하고 말했다.

그때 나는 얼마나 그녀를 끌어 안아주고 싶었는지… 다만 그녀의 두 손을 잡고 손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숙, 아냐, 내가 더 미안해. <눈물은 인간의 가장 순수한 진리>라고 누군가가 말했잖아. 오늘 숙의 그 눈물, 난 잊지 않을 거야.”

“태오씨, 감사해요. 웬일인지 울고 싶었어요. 여지껏 단 한 번도 남에게 눈물을 보인 적이 없었는데 오늘은… 그러나 태오씨를 원망해서나 싫어서가 아니에요.”

“나도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으나 마음 안에서 울고 있었어. 우리 둘이는 다 같이 오늘 운거야. 숙만이 운 것이 아니야. 나는 이 눈물 속에서 숙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고 숙에 대한 어떤 책임감 같은 것을 느꼈어.”

“태오씨 고마워요. 그런데 국군이 정말 남한으로 철수하면 엄마와 나를 데리고 갈 수 있겠어요?”

“염려 말어. 만일 우리들이 이곳에서 철수하게 되면 무슨 일을 해서라도 데리고 갈게.”

나는 자신 없고 무책임한 말을 또 했다. 만약에 우리가 남한으로 철수한다면 말단 하사관인 내가 무슨 수로 이 두 여인을 남한으로 데리고 갈 수 있을 것인가…

“그런데 만약에… 극단의 경우를 생각해서… 태오씨가 군인이란 신분에서 오는 공적 의무와 우정이나 사랑에서 올 수 있는 개인적 의무가 대립되어 이 두 의무 중의 하나를 부득이 선택해야만 할 경우를 당한다면 태오씨는 어떤 의무를 택하실 것 같아요?”

“참으로 어려운 질문인데… 지금 말한 이 두 의무 중에 하나를 선택하고 다른 하나를 거부하게 될 때 이 두 개의 의무 중에 보다 더 절대적이며 이성적인 의무를 사람은 택해야만 되겠지…. 그러나 어느 족이 더 절대적이고 이성적이며 또 어느 것은 먼저 선택해야 할 것인지를 생각할 때… 나에겐 그런 힘에 겨운 일이 닥치지 않길 바래…”

“그러나 만약에 그런 경우를 당하게 된다면?”

“공을 받들고 사를 버리라는 입장에 선다면 국민의 공적 의무인 국가를 위해 우리는 봉사하고 희생해야 되겠지…. 그러나 국가 자체가 항상 진리 자체라고는 볼 수 없어. 말하자면 제2차 세계대전의 원인이 되고 있는 일본이나 독일의 경우가 있지 않아. 만일에 국가가 진리와 정의를 사랑하지 않고 만행을 한다면 나는 이런 국가에 봉사하고 싶지 않아. 정의와 진리와 사랑을 앞세우고 자기 방위를 하려는 국가에겐 목숨을 바칠 각오가 있으나 악독한 짓만 하는 국가에겐 나는 그들을 위해 악의 공범자가 되고 싶지 않아. 그리고 국민 대다수의 가결에 따른다는 원칙을 목표로 하는 민주주의 국가도 항상 이상적이며 진리 자체라고 나는 보지 않아. 진리란 항상 다수 편에만 있는 것이 아니니까. 진리이신 예수님을 못박은 것도 다수결 원칙을 실행한 빌라도 총독의 사이비 민주주의가 가져온 죄악이었거든… 하여튼 어떠한 형태의 국가이든 간에 진리와 정의와 사랑의 맑은 양심을 거스르면 나는 단호히 그 국가를 떠날 테야.”

“결국 국가에 봉사한다는 국민 된 공적 의무가 아내나 애인이나 가정을 위한 사적 의무 앞에 서야겠군.”

숙은 좀 섭섭한 표정으로 말했다.

“국가에 봉사한다는 것은 전국민의 의무이고 아내나 애인이나 가정을 위해 일하고 봉사한다는 것도 의무이겠으나 이 의무는 개인적 사적 의무가 아니겠어? 숙이 말한 것처럼… 그러나 국가를 위해 나 자체라고 볼 수 있는 아내나 애인을 거부하게 될 경우를 내가 당하면 진정 나는 방금 내가 말한 대로 공을 위해 내 아내나 애인을 쉽사리 거부하리라고는 난 지금 자신 못해…. 일은 그때 당해 봐야 알겠지… 하여튼 이런 사실은 이 세상에 있을 수 있는 고통 중에서 가장 크고 어려운 고통일거야. 반면에 천상적 기쁨이란 이와 같은 선택이나 거부 없는 진리 자체의 향유가 아닐까 방금 생각이 돼…”

“남한으로 철수하면 꼭 어머니와 나를 데려가 줘.”

그녀는 이 말을 되뇌며 애원하듯 내 손을 잡았다. 나는 그녀의 따뜻하고 보드라운 손등을 쓸어 주었다.

겨울의 짧은 해는 벌써 저녁 무렵이 돼 가고 있었다. 부대의 저녁 식사 시간이 되었기에 나는 부대로 돌아가야겠다고 그녀에게 말했다.

“벌써 가?”

숙은 가지 말라는 듯 내 팔을 잡고 물었다.

“벌써 가 뭐야. 하루 온 종일 여기 이렇게 앉아 있었는데.”

“그래도 좀 더 있다 가. 나 때문에 즐거운 주말마저 희생하고… 오늘 우리 집에서 심심했지?”

“내가 심심한 것처럼 보여?”

“그럼. 좀 더 놀다 가… 부대에 저녁 식사 시간까지 꼭 들어가야 할 일이 없다면….”
“꼭 부대에 들어가야 할 일이야 없지만 어젯밤 늦게까지 술을 마셨더니 졸려서 그래…”

“어머니 술 마셔? 술 좋아해?”

숙은 좀 놀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술 좋아하지.”

나는 그것이 무슨 자랑거리나 되는 것처럼 떳떳이 말했다.

“술을 좋아해도 너무 많이 마시지 말어. 난 술 마시는 사람들이 싫어… 내 친구의 아버지는 술만 마시면 집에 돌아와 어머니를 때려 주든가 세간살이를 부순다는 말을 친구한테 들은 일이 있어.”

“어젯밤 한 친구가 술 두 병을 들고 와서 새벽까지 마시고 놀았는걸.”

“아니 그러고도 오늘 아침에 성당에 가려고 했어?”

“왜 성당에 못 가?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이 세상에 오시지 않고 나와 같은 술꾼과 죄인을 살리러 오셨거든…. 죄인일수록 성당 출입을 자주 해야 하며 성당도 결국 나 같은 술꾼이나 죄인들을 위해 있는 법이야. 그런데 내 집과 다름 없는 성당에 왜 못 가?”

“그래도 술은 나빠.”

“물론 나는 술 회사의 선전부장은 아니야. 따라서 나는 사람들에게 술을 마셔야 한다고 장려는 안 해. 그러나 나는 술을 일방적으로 단죄하고 싶지 않아. 술이 어떤 때는 우리 생활에 좋을 때가 있거든.”

“예를 들면 어떤 때?”

“경사스러운 일이 있을 때, 그리고 지금 갑자기 생각난 것인데 술이란 우리들 생활에 말하자면 음식물의 양념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해. 엄격히 말해서 우리들 식(食) 생활에 있어 양념이 절대적으로 불가결한 것은 아니거든. 양념이 우리들에게 영양소를 주는 본질적인 것이 아니니까. 단지 우리 구미를 자극시켜 식욕을 돋구며 적절히 음식을 섭취케 함으로서 우리들의 건강을 잘 보존하는데 양념의 역할이 있거든. 그런데 양념이 정도를 지나치면 음식 맛이 변해 먹지 못하게 되지 않겠어? 술도 이런 거야. 우리 생활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건 아니지만 우리 인간의 고달픈 생활을 부드럽게 해 주며 용기를 돋구고 기분을 살려 주거든. 그러나 지나치면 해로운 것이야. 뭣이든 정도 문제지. 중용을 잃으면 무슨 일이든지 해로운 법이야.”

“태오씨의 말에는 일리가 있으나… 내가 제일 보기 싫어하는 사람은 술 취한 사람들이야. 그러한 사람들의 꼴이란 정말…”

“그러나 술을 단죄하지 말아. 술은 우리 같은 말단 군인생활에 필요한 때가 종종 있어. 그런 경우를 여기서 구체적으로 얘기할 수는 없으나 하여튼 그럴 때마다 그 답답한 것, 울화가 터질 듯 화나는 것, 슬픈 것 등을 속마음에 곡 담아 두면 속마음이 앓아 곪아 썩는 법이야. 그럴 대마다 예방주사식으로 술 한 잔 마시고 고함을 지르며 천하 지상엔 나 하나 뿐이란 허세를 한 번 부리면 마음이 한결 후련해지지. 그리고 속마음의 지저분한 것을 청소해 버릴 수 있거든.”

“그래 태오씨도 술 마시고 그런 고함과 허세를 부려 봤어?”

“응, 꼭 두 번. 언젠가 내 친구 졸병과 싸구려 막걸리 몇 병 마시고 밤중에 군가를 부르며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헌병에게 붙들려 따귀 몇 대씩 얻어맞은 일이 있었지…”

“그땐 술 마신 것을 후회하지 않았어?”

“왜 후회를 하겠어?”

“남에게 따귀를 얻어맞는다는 것은 자기 인격을 스스로 모독하는 일이나 다름 없다고 생각되지 않어?”

“그러나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내 마음껏 했을 때 설사 그 일이 실패했다 하더라도 난 내가 한 일을 후회하지 않아. 친구들과 술 마신 것은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이었고, 노래 부르며 밤거리를 다닌 것은 내가 내 마음껏 한 것이었고, 따귀를 얻어맞은 것은 결과로 나타난 하나의 실패라고 볼 수 있겠지…. 하지만 울화가 터질 것 같은 심사가 사라졌고 슬픔도 없어졌고, 답답하던 내 마음을 시원스레 목욕시켜 준 음주를 나는 후회하지 않어.”

“궤변이 상당하군.”

숙은 말을 언짢게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궤변이라고만 해석해선 안 돼.”

“하여튼 술은 나뻐.”

“그래 술이 나쁘다고 하더라도 악이 잠자던 선을 충동시켜 줄 때가 있듯이 술이 어떤 때 어떤 사람에게는 좋은 때가 있다는 것을 알아 두어… 예를 들면 소크라테스의 아내 잔디페와 같은 미련하고 멋 없고 게다가 주책 없이 매일 바가지만 긁는 마누라를 가진 불쌍한 남편에겐 술이 서로를 위해 좋을 때가 있지.”

그때 나는 갑자기 그녀를 놀려 주고 싶은 생각이 들어 이와 같이 말했다. 그리고 나는 웃었다.

“또 사람 놀리기야? 여자들을 그와 같이 무시하기야? 미련하고 둔하고 술꾼이고 고집장이인… 이젠 말을 이 이상 안 해야지.”

숙의 마음이 좀 상한 듯 생각되어 나는 놀리는 것을 멈추었다.

“그래 술은 나뻐. 술이 때로는 악의 위험성을 다분히 가지고 있어 나쁘다고 하겠지만 술 자체는 그렇게 나쁜 것이 아니야. 악이란 술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술을 마시는 인간의 악한 소행 속에 있는 법이야.”

“그렇다고 하더라도 태오씨는 술을 많이 마시지 말어. 술을 많이 마시면 동물성이 이성을 마비시키고 나쁜 짓을 하게 되거든.”

“염려 말아. 나는 고달픈 생활 속에서 기회가 주는 기쁨을 친구들과 함께 나누며 잠시의 시간을 즐기는 애주가나 호주가 지, 폭주가나 광주가 는 아니야.”

“술을 그렇게 좋아하면서 우리 집에 올 때마다 술 사 달라는 말을 왜 안 했어?”

“술을 마실 때와 장소 그리고 술 동무가 따로 있는 법이야. 말하자면 말동무 또는 마음의 동무가 따로 있잖아. 나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숙이와 얘기한 여러 종류의 이야기를 남들과 한 일이 없어. 숙이는 내 친한 동무이며 마음의 벗이거든. 이처럼 술 동무는 따로 있는 법이야. 말동무도 마음의 벗도 아닌 엉뚱한 사람과 이야기할 때에 지루함을 느끼듯 이 술 동무가 아닌 다른 사람과 술 마시면 술 맛 마저 없어지는 법이야.”

“그러면 술 동무가 없는 우리 집에 올 때마다 태오씨는 무척 심심하고 쓸쓸하겠네.”

숙은 좀 빈정대는 말투로 말했다.

“그렇게 볼 수 없지. 술 친구는 때와 환경이 마련해 준 기분상의 동무라고 본다면 마음의 벗이란 기분을 초월해 있지 않아? 술상에서 갖는 기분은 변하나, 마음은 특히 사랑하는 친구들의 마음은 부동불변한 것이며 거기에는 평화가 있는 것이 아니겠어?”

“술 동무와 마음의 벗 중 어느 편을 태오씨는 더 소중히 여겨?”

“술동무도 마음의 벗도 내겐 다 같이 소중해. 그러나 가치의 순서를 가려야 한다면… 만반지수의 요리상이 있고 또 아가씨들의 노래와 춤이 있는 가운데 술동무와 함게 마시는 술보다 한 벗의 옆에 앉아 있는 이 자리를 나는 서슴지 않고 더 중히 여기지. 술 좌석을 위해 난 이 자리를 떠나지 않을 거야.”

나는 숙의 마음을 즐겁게 해 주고 싶었다. 사실 나는 숙과 함께 있는 이 자리를 무엇과도 바꾸지 않을 것이다.

“이 다음 우리 집에 올 때 내가 술 한 잔 사다 줄 께.”

그녀도 내 마음을 알아차린 듯 다정하게 말했다.

“사다 주는 술 한 잔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마시겠으나 두 잔까지는 안 마시지.”

“왜?”

“한 잔의 술은 아무하고나 마실 수 있는 예의적인 것이겠지만 두 잔의 술은 아무하고나 같이 마셔서는 안 되는 것이야.”

“술에도 그런 예법이 있나?”

“있구 말구. 반드시 있어야 하며 일상생활의 예법보다 더 엄격해야 되지.”

그때 어머니께서 돌아오셨다. 어머니는 무엇인가 초조한 기분인 것 같았다. 이번에는 서너 명의 아주머니들과 함께 오셔서 건넌방에서 말씀들을 하고 계셨다. 숙이 건넌방에 잠깐 다녀오더니 어머니께서 집 살림을 정리하고 계신 것 같다고 말했다. 값이 될 만한 패물이나 옷감 등을 팔고 계시더라는 말이었다. 어머니께서는 국군이 원산에서 철수하리라는 것을 짐작하시고 계셨던 모양이다. 그래서 만약의 경우를 위해 준비하고 계셨던 것이다.

숙도 염려스러운 표정으로 또 국군의 철수문제를 끄집어내어 말했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것이 실감 있게 들려오지 않았다. 다만 숙과 한자리에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무한정 즐거울 뿐이었다. 요 며칠 전만 하더라도 우리 부대에서 백여 명이 함흥 전선으로 출동되어 갔으나 그런 것은 다 나에게는 남의 일처럼 멀리만 느껴졌다.

 

 

 

 

 

제13장

사랑한다. 그러나….

 

당시 내가 소속해 있던 원산 해군 전진기지부대는 명목상으로는 해군이었으나 함흥 전선을 담당하고 있는 해병대 지원 부대 역할을 하고 있었다. 해병대가 필요로 하면 우리는 언제나 전선으로 출동해야 할 태세를 갖추고 있어야만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해병대가 해군에 예속 되어 있었고 따라서 해병대 인사 행정도 해군 본부가 관할하고 있었다.

부대에 돌아가고 싶은 생각도 없으면서 저녁 식사 시간 전에 부대에 가겠다는 나를 붙잡으면 숙은 말했다.

“좀 더 앉아 놀다 저녁 먹고 가. 어머니께서 오늘 저녁엔 맛있는 것 하신대.”

“오늘같이 추운 날 어머니께 고생만 시킬 게 아니라 부대에 빨랑 들어가야겠는 걸.”

“아무래도 부대 안에 예쁜 애인이 있는 모양이지… 고집만 부리며 부대로 가려고 하니…”

“애인? 물론 부대 안에 애인은 없어. 그러나 애인들이 있지. 나와 생사의 운명을 같이 나누는 애인 이상의 애인들이지.”

“애인과 애인들이 어떻게 달라?”

“애인이란 남녀 간에만 있을 수 있는 나에 대한 2인칭 단수인 <너>라고 하면, 애인들이란 국한된 어떤 환경 속에, 또는 사회 안에 예를 들면 전시 하의 군인이란 공통된 운명이 맺어 준 인연을 갖고 있는 나에 대한 3인칭 복수인 <그들>이지.”

“그래 <그들>이 <너> 보다 더 좋단 말이야?”

“그럼.”

“정말이구 말구. <애인>은 서로 서로 기쁨을 주며 사랑하고 또 결혼하여 같이 산다는 것이 원칙이나 <애인들>이란 서로 서로 기쁨을 준다고는 엄격히 따져 말할 수 없어. 왜냐하면 그들의 생활 속엔 자의 아닌 또 강요당한 존경과 사랑이 있기 때문이지…. 우리는 서로 만나 한 부대 안에서 같이 살자는 약속도 선택도 없이 어쩌다 같이 모여 살지만 남녀 간의 애인들처럼 같이 행복하게 산다는 것이 그들의 원칙은 아니거든. 고통 속에 얼마 동안 같이 살다가 영원히 같이 죽는다는 것이 그들 생활에 밑받침이 되고 있거든… 그래서 같이 산다는 것보다는 죽음이란 미지의 세계를 향해 모험을 같이 나눈다는 것이 더 강한 것이 아니겠어? 그리고 애인은 경우에 따라 또 다른 애인이 있을 수도 있지 않겠어. 그러나 같이 죽는 애인들이란 그들의 죽음으로 그들은 영원히 결합되어 영원한 애인들이 되는 것이 아니겠어? 이런 점에서 서로 사랑하다 헤어질 가능성이 있는 애인인 <너>보다는 미워도 같이 고생하고 도 같이 죽을 ,그들>을 더 좋아해야 할 일이 아니겠어?”

그때 숙은 내 말을 잠잠히 듣고 있었고 나는 천정 한 구석을 바라보며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런 말을 수에게 할 때 내 친구들의 하루살이 사랑 생활의 추억이 내 머리 속을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몇 분 간의 침묵이 흐른 후 부대에 돌아가려고 한 것도 아닌데 나는 무심코 내 옆에 있던 군모를 집어 내 머리에 얹었다. 그러자 숙은

“엄마, 태오씨가 부대에 돌아가려는데 못 가게 해. 내가 저녁 먹고 가래도 내 말은 안 들어.”

부엌에 계시는 어머니를 향해 소리를 쳤다. 그러자 어머니가 행주치마에 손을 씻으며 방으로 들어오셨다.

“아니, 오늘은 밤 열 시까지 외출이라면서 벌써 가력 그래. 아직 다섯 시도 안 됐는데. 그러지 않아도 만두국을 좋아한다구 했기에 사랑방에서 만두를 빚어놨는데. 내 곧 끓여 줄테니 좀 있다가 먹고 가우.”

어머니는 내가 가려는 것을 말리셨다.

“추운 날에 괴로움만 자꾸 끼쳐 죄송스럽습니다. 그럼 저녁 먹고 가겠습니다.”

“엄마, 태오씨가 상당한 애주가래. 술 한 잔 사다 줘.”

“아니 무슨 술을…”

어머니는 다소 놀라신 말씀이다.

“우리 집엔 술동무가 없어서 술을 두 잔까지는 안 마셔도 한 잔은 달게 받아 마신대.”

“어머니, 술은 그만 두세요. 괜히 오늘처럼 추운 날 어머니를 왜 자꾸 심부름을 시키려 해?  술 마시고 싶을 때 내가 술 한 병 사가지고 오면 되잖아? 정말 술은 그만 두세요.”

어머니는 부엌으로 나가셨다.

“오늘 저녁에 술 마시고 뗑깡 부리면 어쩔려구 술 사 오라고 말했어?”

“뗑깡? 무슨 말이야?”

“뗑깡이란 말은 군대의 특수 용어인데 술 마시고 발광한다는 말이야.”

“어머나! 술 마시고 발광을 해?”

“그럼 발광하지.”

“그래도 태오씨가 술 마셨다고 어머니와 나를 때려 주지야 않겠지…. 그래 뗑깡을 한 번 부려 봤어?”

“한 번 뿐만 아니야. 백 번도 더 했지.”

“거짓말! 언젠가 술 마시고 밤중에 군가 부르며 다녔다고 하더니 그런 것이 땡깡이야?”

“그런 것쯤은 뗑깡이라고 말할 수도 없지. 술 마시고 밤중에 군가 부르며 다닌 것쯤은 누구나가 다 할 수 있는 일이야. 그러나 뗑깡은 질이 달라… 뗑깡이란 것은 아무나 할 수 없고 시시한 졸장부가 아닌 그야말로 남자다운 영웅형의 사람이 하는 짓이야…”

“그래 태오씨가 진짜로 뗑깡을 해 봤어?”
“불행히도 나는 졸장부가 되어 남이 하는 멋진 뗑깡 한 번 하지 못했어.”

“다행한 일이지 뭐야…”

“실은 지금까지 난 한 번도 뗑깡을 안 했지만 그러나 인간은 선과 악, 천신과 마귀란 두 면을 갖고 있는 동물이기 때문에 누구나가 악을 할 수도 있고 또 마귀가 될 수도 있지… 나는 그런 인간 속의 한 사람이니까….”

“왜 그런 지독한 말을 해… 하여튼 남자들의 세계… 특히 젊은 군인들의 생활은 겁나기도 하나 재미있기도 해.. 태오씨가 지금까지 여러 가지로 내게 말해 준 군대생활 속엔 일반인이 인식하지 못한 자연적인 인간의 면모가 있는 듯이 보여. 내가 만일 태오씨의 입장에 있었다면 태오씨가 지금까지 만나고 겪은 모든 사람과 사건을 소재로 소설이라도 쓰겠네.”

“그럼 내가 겪어온 생활이 소설의 소재가 될 수 있다고 숙은 생각해?”

“물론. 훌륭한 소설의 소재가 될 수 있다고 난 생각해. 소설을 연구한 것은 아니지만 내 생각엔 소설이란 별다른 것이 아니라 시대성(時代性)을 띠고 있는 한 사람의 생애나 한 사건의 진실을 그려내는 것이 아닌가 싶어. 그래서 소설의 주인공이나 또 내용이 조금도 거창해야 할 필요 없다고 난 생각해. 이런 뜻에서 태오씨가 보물처럼 갖고 다닌다는 십여 권의 일기책을 그대로 책으로 세상에 내놓아도 난 그것이 훌륭한 문학 작품이 될 것이라고 생각해.”

“하하하…. 그래 무식한 촌사람의 일기가 훌륭한 문학 작품이 된다고… 하하하…” 나는 우스워 정신 없이 웃었고 숙은 그때 정색을 하고 내 팔을 잡아 흔들며 말했다.

“우스운 일이 아니야.”

“하하하…. 나 참 웃지 않고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어? 촌사람의 그것도 자기 나라의 국어인 한글의 철자법마저 제대로 모르는 사람의 일기가 소설이 되고 또 문학이 될 수 있다고…. 그런 말은 내 생전 처음으로 듣는 말이야. 하하하…”

“사람이 갑자기 실성을 했나? 웃긴 왜 그리 웃어? 내 말 좀 들어 봐.”

숙은 또 내 팔을 잡아 흔들었다.

“자기가 남을 실성시켜 놓고 남 보고 실성했다고 야단이야. 내 일기는 불쌍하고도 미련한 한 사나이의 발자취야. 나는 내 주변 또는 내 신변에 일어난 것을 성실히 일기장에 기록한 것은 사실이나 나는 그것을 앞으로 그 어떤 소설이나 혹은 문학의 대상으로 여겨 쓴 것은 아니야. 그리고 거기엔 문학의 향취라고는 하나도 없어. 내 일기는 한 무식하고 미련한 사나이가 자기가 겪은 기쁜, 고통, 멸시, 슬픔, 외로움, 비참, 패배, 반항 등 남들이 무시하고 문제시하지 않는 것들의 연쇄 뿐이야.”

“촌사람은 촌사람대로, 무식하면 무식한 대로 소설의 소재가 될 수 있고 문학이 될 수 있어. 촌사람의 생활도 인간생활이고 사람이 무식해도 인간이 아니겠어? 그들의 생의 이면에 그들만이 걸어온 발자취의 매듭 매듭마다 그들만의 기쁨, 그들만의 슬픔, 그들만의 웃음, 그들만의 울음, 그들만의 고통, 그들만의 생의 권태, 심지어 그들만의 자조(自嘲) 속엔 한 인간만이 갖고 있는 삶의 역사가 있는 법야. 다시 말하면 한 인간의 삶의 혼(魂)이 있는 법이야 한 영혼이 걸어온 발자취가 크든 작든, 넓은 좁든, 그리고 찬란하든 찬란하지 않든 그것이 문제될 것 아니야. 한 삶의 역사의 주인공이 성인이든, 왕이든, 한 농부의 아들이든, 학자이든, 범인이든 간에 그들 각 개인의 생의 역사는 우리에게 말해 주고 또 남겨 줄 긍정적 가치를 다 갖고 있는 법이야. 그들 각 개인은 남이 갖고 있지 않는 그들 각자에게만 고유한 여가의 한 주인공이야. 그 고유한 것을 세상에 알리란 말이야. 소설 이란, 아니 문학이란 인간이 생활한 <삶>이어야 한다고 봐. 생명 없는 것은 문학이 될 수 없어. 한 사람이 걸어온 발자취는 그 뒤에 남아 있는 한 <삶>이거든.”

“아니 아까는 나보고 약장사를 했느냐구 묻더니 아무래도 자기가 약장사를 해 본 모양인데. 남이 알아듣기 힘든 까다로운 말을 곧잘 하는 것을 보니 학교에 다닐 때 공산당 선전부장을 하지 않았어?”

이런 무식한 농을 한 번 하고 나는 또 웃었다. 그때 숙은 하도 어이가 없는지,

“나 참 기막혀.”

한 마디 내게 토하고 나를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등을 벽에 기대고 천정 한 모퉁이를 주시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정색을 하고 열심히 말하다가 갑자기 조용해진 그녀의 얼굴을 바라볼 때 공연히 지나친 농을 했구나 하고 나는 곧 내 경솔한 행동을 후회했다. 그리고 나는 내 손을 그녀의 어깨에 얹고 그녀의 머리 끝을 만지고 있었다. 그때 그녀는 눈 한번 깜박하지 않고 천정만 바라보고 있었고 내 지나친 농으로부터 받은 자극이 아직 가시지 않은 탓인지 숨을 크게 색색 쉬고 있었다.

“숙 미안해, 용서해. 내가 또 주책 없이 지나친 농을 했어.”

“농도 좋지만 남의 열성과 성의를 그와 같이 몰상식하고 무자비한 말로 무시해 버리기에요?”

“결국 내 농이 본의 아닌 무시가 된 모양이군. 나는 숙을 무시하려고 고의로 그런 농을 한 건 아니야. 나는 숙의 마음을 상해 주거나 혹은 괴롭혀 주려는 생각은 조금도 없었어. 남이 나를 이해해 주고 그와 친해지면 나는 무식한 탓인지는 모르나 정도를 지나치게 단순해지고 아무튼 조심성 없이 말을 막 하는 버릇이 있어. 이런 결점을 바로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으면서도 자제하지 못하고 잘못을 되풀이하고 있어. 숙, 용서해 줘… 이런 결점의 원인은 설령 부모 형제의 지극한 애정 속에서 땅을 사랑하며 지낸 내 농촌생활이 내게 행복을 주었다 하더라도 어딘지 모르게 자라나는 내 어린 마음의 욕구를 만족시켜 주지 못했던 데 있는지 몰라. 그리고 엄격히 말해 인간적 교육이 결여된 군대생활에서 가끔 얻은 불만과 반항의식, 결국 나 자신의 무능해 할 수 없이 느끼게 되는 외로움과 자조의 탓인지 몰라. 남들이 나보고 유쾌한 군인이라고들 해. 그리고 나 자신도 하루 하루를 즐겁게 지낸다고 자신하나 고요한 밤 일기장을 앞에 놓고 내가 막 지나온 길을 정리하려 할 때 나는 늘 내 자신이 불쌍하게도 생각되고 또 어리석게 생각되기도 하며 외롭기도 해. 그래서 남이 나를 이해해 주고 나에게 각별한 친근감을 표시할 때 전후를 생각하지 않고 나는 그의  우정을 남용하기도 하고 역용하기도 하지. 그래서 나에게 친했던 친구가 실망하고 나를 떠난 사람도 몇 있어…. 이 결점이 내 본의가 아니란 점을 난 확신해… 이것은 비참한 일이야.”

나는 몹시 외로와졌다. 이 세상에서 단 하나인 벗이며 애인인 숙의 마음을 상해 주고 그녀를 괴롭혀 주었다는 생각은 항상 잘 알면서도 번번이 실수하는 이 지나친 경솔에 대해 내 마음을 채찍질하고 있었다. 내 잘못으로 말미암아 내 애인이 상심할 때, 잘못으로 말미암아 나를 이해해 주고 사랑해 주는 이기에 실망을 줄 때, 내 잘못으로 말미암아 나를 신뢰하던 사람의 호의와 성의가 오해 받고 무시당할 때… 나는 이에 대한 책임을 져야만 하다. 땅바닥에 쏟아진 물을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듯이 일단 저지른 실수는 실수대로 나아 우리 둘 사이에 하나의 흠으로 오래 오래 존재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교양 없고 부족한 나 자신이 한없이 저주스러웠고 무척 외로왔다.  그리고 또 울고 싶었다. 내 오른 손을 숙의 어깨에 얹어 놓은 채 여전히 나는 묵묵히 앉아 있었다. 뭐라고 더 이상 말을 계속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자 숙은 자기 한 손으로 자기 어깨에 얹어 놓은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태오씨 화나셨어요?”

나지막하면서도 애정이 담뿍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화났느냐는 그의 물음에 뭐라고 대답할 줄 몰라 나는 여전히 묵묵히 앉아 있었다.

“태오씨 용서하세요. 태오씨의 호의적인 농을 경솔히, 또 악의로 받아들인 나를 용서하세요. 나는 좀 성급한 탓으로 반응이 심해 결국 태오씨의 농을 잘못 받아들였어요.”

우리 둘이는 이처럼 언쟁도 아니며 싸움도 아닌 뜻하지 않았던 약간의 충돌 끝에 다시 자세를 바로잡고 우리 둘의 결점을 서로 고백하고 있었다.

“태오씨 말씀해 주세요. 내가 잘못했어요.”

숙의 말끝이 흐려졌다. 그때 저녁 해가 서산 너머로 떨어지자 곧 문과 창가에만 밝은 빛이 들고 있을 뿐 방안은 점점 침침해졌다.

“내가 잘못했어요.”

그녀의 말끝이 흐려짐을 느끼자 나는 무심코 그녀의 뺨에 손을 갖다 대고 몇 번 쓸어 주었다. 그때 나는 그녀를 힘껏 안아 주고 싶은 충동을 받았다. 그리고 그녀의 밤이 촉촉히 젖어 있는 것을 알았다. 말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은 속에게 무자비한 일인 듯 느껴져 나는 뭣이든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무슨 말을 해야 하나? 웃을 수도, 울 수도 없고 참 딱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쉴 새 없이 종알종알 둘이 마주 앉아 하던 이야기였으나 무슨 말부터 어떻게 다시 시작해야 할지를 몰랐다. 그러나 나는 무슨 말이든 말을 시작해야 했다.

“숙 용서해 줘, 내가 잘못했어….”

우리 둘이는 벌써 마음으로부터 서로를 용서해 주고 있었다. 새삼스럽게 용서해 달라고 다시 말할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이런 말은 딱닥한 분위기를 더욱 딱딱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나는 이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어야겠다고 하면서도 한다는 소리가 <용서해 줘. 잘못했어> 란 말이었다. 숙은 조용히 앉아 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자기가 잘못했으니 용서해 달라고 말한 그녀에게 나는 나대로 내가 잘못했으니 용서해 달라고 말을 거듭하고 있으니 그녀가 내게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 그때 나는 말이란 참으로 하기 힘든 것임을 알았다. 그리고 말주변 없고 또 내가 사랑하는 여인의 마음을 기쁘게 해 줄 줄 모르는 내 무능과 비참을 절실히 인식했다. 나는 적당한 화제를 찾으며 그녀의 젖은 뺨을 쓸어만 주고 있었다.

“숙 아까 말 계속해 봐. 정말 지나간 내 생활이 소설의 소재가 될 수 있을까?”

쩔쩔매며 찾아낸 화제란 것이 겨우 우리들의 긴장된 이 분위기를 만들게 한 그 화제의 계속이었다. 이미 김 빠진 말을 계속한다는 것은 쑥스러운 일이었으나 숙 역시 더 이상 말을 안 할 수 없어서 억지로 내 말을 받아 주는 것 같았다.

“나는 좋은 소설의 소재도 될 수 있고 또 태오씨의 신변이나 신상에 일어난 여러 가지 문제나 사건들의 성분을 잘 분석해 글을 쓰면 훌륭한 문학 작품도 될 수 있다고 생각해.”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열의 있던 숙의 목소리에 비해 지금 그녀의 음성은 맥이 없고 힘이 없었다.

“나는 지금까지 내가 앞으로 문학가가 되겠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가져 본 일이 없었어. 국민학교에 다닐 때 작문 시간에 글 잘 썼다고 선생님으로부터 특별히 칭찬을 받아 본 일도 없었어. 내가 지금까지 읽어 본 책이라고는 국민학교 교과서 정도이며 그 외 몇 권의 일본말 중학 강의록과 소설 몇 권 정도야. 게다가 우리 국어인 한글마저 제대로 배우지 못해 글의 표현이나 철자법이 형편 없어.”

“상관 없어. 태오씨의 어색한 글의 표현 속엔 가공적 인물의 생애가 씌어 있지 않고 기쁨을 알고 사랑하고 외로와하고 슬퍼하고 싸우고 화내고, 태오씨 말대로 실수하고 반항하고 참아온 한 산 실존적 인간의 삶 자체가 있는 거야. 이처럼 소설의 내용이란 태오씨가 걸어온 그런 삶 이상의 것일 수도 그 이하의 것일 수도 없을 거야. 사실 문학이란 한 삶이나 어떤 사건들을 구성하고 있는 여러 가지 현상에 대한 표현이 아니겠는가 말야. 즉 있는 것을 있게끔 제자리를 찾아 주는 사실(事實)의 표현이 아니겠느냐 말이야. 문학기 뭐니 뭐니 논의하는 것이 나에게도 처음이며 지금까지 문학을 나 혼자 좋아해 왔으나 단 한번도 신중히 생각해 본 일은 없어. 내 말이 틀릴 수도 있을 거야….. 하긴 소설이 태오씨의 일기처럼 구체적인 한 사람의 일기는 물론 아닐 거야. 그러나 태오씨가 자라난 세상, 태오씨가 보고 느낀 세상, 태오씨에게 기쁨을 주기도 하고 슬픔도 준 세상, 태오씨에게 고통을 준 세상, 태오씨를 이해해 주고 사랑한 사람, 태오씨가 미워하고 반항한 세상, 그대로 과장하지도 말고 또 줄이지도 말고 있는 그대로를 글로 쓰란 말이야.”

어느새 숙은 자기 말에 열을 띠기 시작했고 내 앞에 마주 앉아 있었다.

“내가 살아 오고 겪어온 내 과거를 있는 그대로 글로 쓰라고… 숙의 말대로 내 과거의 삶을 기록한 일기장이 소설의 소재가 될 수 있다 하더라도 문학이란 언어의 산물(産物)이니 만큼 언어의 실력과 또 이 언어를 구사하는 기교가 있어야 되지 않겠어. 그런데 나는 이런 언어와 그런 기교를 갖고 있지 못해.”

“물론 문학이란 언어의 작업인 것만은 사실이야. 그러나 태오씨는 언어와 그 기교를 배우면 되지 않겠어. 문학에 대한 소견이겠으나 태오씨는 문학하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사물을 보는 눈과 사건을 조리하는 판단력과 사물에 대한 감정이라 할 수 있는 정서와 상상력을 갖고 있으니 태오씨가 인생을 살아 오며 경험한 모든 사건에게 뜻이라는 생명을 붙여 살려내면 하나의 좋은 문학이 될 수 있다고 난 생각해.”

“소설이란 것이 한 사실의 뜻을 밝혀내고 또 여러가지 현상을 표현해 줌으로써 있는 것을 있게끔 해주는 것이라 해도 거기에는 인생의 심오한 진리 같은 것이 있어야 되지 않겠어? 물론 소설이 하나의 철학 교과서나 도덕 교과서가 아니라 해도 거기에는 독자들에게 줄 만한 가치와 교훈으로서의 진리 같은 것이 있어야 하지 않겠어? 그런데 내 과거는 그런 종류의 것이 못돼….”

“그런 것이 아니야. 같은 말을 자주 되풀이하는 것 같은데 진리라는 것, 교훈적이란 것, 또는 인간적인 것 등등은 오히려 촌사람이나 무식한 사람들… 이런 표현을 용서해… 그들 편에 더 많이 있을 수 있어. 무식자에 반대되는 유식한 사람들은 교양이나 명예란 이름 아래 자기들의 약점, 결점들을 고잘 감추거든. 김일성을 위한 허위적인 찬사나 시나 노래가 어디서 생겼어? 그런 것은 글깨나 안다는 사람들의 아첨과 약아빠진 계산에서 생긴 허위가 아니겠느냐 말이야. 나는 김일성이 왜정을 거스려 민족과 조국을 위해 투쟁한 한 혁명가임을 인정하나 신문이나 소설이나 잡지에서 읽게 되는 그 숱한 찬사나 시나 노래나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라고 생각해. 그리고 소위 말하는 유식한 사람들의 좌석이나 축하식 같은 데 가 봐. 그들의 말 속엔 교양이나 예의란 이름을 모독하고 남용하는 허위와 위선이 얼마든지 있어…. 학교 선생님이 새로 오고 또 갈려 갈 때마다 사람들은 그들이 마치 흠 없는 완전한 인간인 것처럼 없는 장점마저 만들어 찬양하거든. 그와 반면에 좀 무식하고 야만스러우면서도… 내가 자꾸 말을 막 하는데… 어딘지 모르게 단순하고 소박하고 직접적인 군인들의 생활이 더 인간적이라고 할지 몰라. 배고파 남이 먹다 남은 밥을 손으로 집어먹기도 하고 하다 못해 변소간에 들어가 누룽지를 먹는다든지, 친구들 사이에 화나고 기분 상하면 이유를 해명하기 전에 우선 주먹이 몇 번 왔다갔다한 다음 막걸리 몇 잔에 화해하고 지난 일을 깨끗이 잊는다는 것, 허세도 부리고 실수도 하고 뗑깡도 부리고 하다 못해 기합을 받고서도 ‘감사합니다.’ 하며 경례까지 한다는 그런 인간 생활 속엔 소위 교양이란 명찰이 붙은 인간들이 모르는 참된 인간성의 한 자세가 있을 거라고 난 생각해.”

“인간성의 자세라구? 오늘은 우리의 화제가 점점 까다로와지는데 인간성의 자세란 것을 나는 어떻게 알아들어야 할지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엔 강약의 생존경쟁이 심한 이 세상에서 지내온 내 과거는 인간성의 자세라고 하기보다는 한 인간의 패배며 비참 밖에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해. 농촌 생활 중 코피를 쏟고 땅에 쓰러진 것, 나무장사 할 때 받은 멸시, 배고픈 것, 욕 얻어 들은 것, 싸움한 것, 허제를 부린 것, 술 마신 것, 뗑깡을 부린 것, 시수한 것, 이 모든 것은 이 계급 사회에서 패배한 한 인간의 비참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해…”

그때 어머니가 방에 들어오시면서,

“방안이 어두운데 불도 안 켜고 무슨 말들을 그리 조랑조랑하고 있어? 아프다는 것도 멀쩡한 거짓말이군…”

웃으시면서 말씀하셨다.

“엄마, 이젠 안 아파. 다 나았어.”

숙이 말하자 어머니는 부엌으로 밥상을 가지러 나가셨다. 얼마 후 우리 셋은 김이 무럭무럭 나는 만두국상을 사이에 두고 즐겁게 식사를 했다. 나는 행복했다. 식사 중에 어머니께서는 우리들을 놀리셨다.

“그래 이젠 싸움 다 끝났나?”

“엄마 그게 무슨 말이야. 언제 우리가 싸움 했어?”

“아까 부엌에서 둘이 싸우는 말소리 다 들었다.”

여전히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문학에 대한 토론을 했는데 우리가 언제 싸웠어…”

숙은 여전히 항의했다.

“한참 동안이나 큰소리로 마치 싸움이나 하듯이 말하더니 내가 잘못했으니 용서하라고 둘이 번갈아 가며 말하는 것을 들었는걸.”

어머니는 얼굴 모습이나 성격이 숙과 같았다. 어머니는 항상 명랑하셨고 가끔 우리 둘에게 농도 하시는 재미있는 분이었다.

“한창 신나게 얘기할 때 놀려 줬더니 화를 내잖아요. 한 편으로는 화내고 말 안 하는 모습이 귀엽고 재미 있기도 했지만 불쌍하기도 해서 내가 잘못했으니 용서하라고 빌었지요. 그랬더니 또 자기가 잘못했다고 말하잖아요…”

내가 미처 말을 끝맺지도 않았는데 숙이 내 말을 막았다.

“진짜 싸움을 한 번 해 보고 싶은 모양이지…. 하여튼 태오씨도 여간 능글능글하지 않아.”

“싸움을 하려면 밥이나 먹은 다음 하려무나. 밥상을 가운데 놓고 싸워서는 안 돼.”

어머니의 이 말씀에 우린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셋은 기쁜 가운데 만족히 저녁식사를 끝냈다.

저녁 후 숙은 바람을 쏘이고 싶다고 했다.

“아직도 감기가 다 낫지 않았는데 찬바람 쏘이면 어떻게 할려구 그래?”

내가 말하자 그녀는,

“염려 말아요. 내 하고 싶은 것을 하게 그냥 내버려 두세요. 미안하지만 잠깐 밖에 나가계세요.”

“저녁 먹고 가라고 나를 붙잡더니 이젠 나를 밖으로 내쫓는구먼…”

한 마디 농을 하고 나는 부엌으로 나왔다. 숙도 얼마 후 부엌으로 나와 따뜻한 세숫물을 떠 들고 다시 방안으로 들어갔다. 어머니는 부엌에서 그릇을 닦고 계셨다. 나도 행주를 들고 그릇을 닦으면서 서로 얘기를 주고 받았다.

“그래 군인은 총에서 소학교 밖에 못 다녔수?”

“네… 소학교 졸업. 그것도 5년 간 학교에 다녔을 뿐입니다.”

“군인은 촌사람 같지 않고 무식한 사람 같지 않아. 내 아들들은 10여 년간이나 학교에 다녔어도 군인만 못한 것 같아…”

“어머니두… 등잔 밑이 어둡다는 옛말이 있잖아요. 늘 같이 사셨으니 아드님들의 잘난 점을 모르셨지요….”

“아니야. 숙은 늘 말하는 군인이 성실하고 똑똑한 사람이라고 말하더구먼. 남들처럼 공부만 하면 군인은 일깨나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그 애가 늘 말해. 그리고 정식으로 학교에 다니지 못한 것이 불쌍하다구… 아직 나이 스무 살이니 군인은 공부할 수 있잖우?”

“이런 전쟁통에 공부가 무슨 공부입니까.”

여기서 몇 분간의 침묵이 흘렀다. 얼마 후

“군인을 내 아들 겸 이제부터는 자네라고 부르겠네.”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아무렴요. 해라 하세요. 벌써부터 해라 하시라고 말씀 올렸잖아요.”

“그리고 늘 생각해 온 일인데 아무래도 자네는 내 딸을 앞으로 돌봐 주어야겠네. 지금 무엇을 숨기겠나? 우리 애가 자네를 사랑하고 자네도 그 애를 좋아하는 것은 사실이니 둘이 결혼하면 되잖아?”

어머니의 이 말씀을 들었을 때 별안간 나는 긴장되어 있었고 내 심장은 마구 방망이질을 하기 시작했다. 당신의 내 감정을 뭐라고 지금 표현할지 모른다. 숙과의 결혼, 그것은 한편 내가 무서워하면서도 무척이나 바라던 것이었다.

숙을 사랑하고 아내로 맞이하고 싶으면서도 나를 둘러싼 시대적 환경과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없는 무능하고 보잘 것 없는 일개 말단 하사관이라는 내 신분을 생각했을 때 숙과의 결혼이란 감히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다. 1개월 전에 숙을 알게 된 후 일기장 위에 내 양심의 자세를 바로잡고 숙을 생각했고 또 그녀에 대한 막을 수 없이 성장하는 내 사랑을 살펴 볼 때마다 나는 한없이 내 마음을 울려 주던 다음과 같은 몇 마디 말을 일기장에 쓰곤 했다.

<숙과의 결혼을 생각지 말자. 무모한 짓을 피하라…. 군의 일개 졸병도 사람이요, 사람은 누구나가 다 애정을 느낀다. 그래 일개 졸병은 사랑을 해서는 안 된단 말인가?>

일기장에 이런 말을 쓰고 나선 숙과의 결혼을 은근히 바랐던 것이다. 오래 전부터 내 희망과 생의 주인공으로서 내 마음 속에 존재하던 이 이상의 여인인 숙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또 나의 아내로 맞이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을 성싶었다. 그러나 내 마음을 항상 괴롭혀 주던 이 한스런 말마디 <그러나>는 지금까지 <사랑한다>란 단 한 마디의 말을 숙에게 못하게 했다. 그래서 나는 숙이 먼저 고백이나 또는 결혼에 대한 말을 해 주기를 은근히 바랐던 것이다.

숙과 결혼하라는 어머니 말씀! 한 편 겁이 나면서도 무척 바라던 이 말씀! 하여튼 당해야 할 일이 내게 왔던 것이다. 나는 숙이란 여인과 결혼을 하든 안 하든 이 두 가지 중의 하나를 언젠가는 선택해야만 했다.

 

 

 

 

 

제14장

내일의 설계

 

오랜 전부터 이 두 개의 사실 앞에 갈팡질팡해 온 나는 이제 드디어 하나를 선택하게 됐던 것이다. 그것을 선택했을 때 나는 기뻤다. 사랑의 기로(岐路)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던 나는 갈 길을 선택했을 때 내 앞에는 전진해야만 할 하나의 길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숙이 말한 것처럼 인생은 그 자체가 하나의 모험인지도 모른다. 앞으로 무슨 일이 있든 돌아보지 않고 내가 택한 이 새로운 길을 전진하고 또 전진해야만 했다. 하여튼 나는 무척 기뻤다.

“딸 자랑하는 것 같지만 숙은 똑똑하고 얌전해 살림도 알뜰히 잘할 걸세.”

어머니께선 말씀을 계속하셨다.

“부질 없이 제가 집에 자주 출입해서 죄를 졌는가 봅니다, 어머니.”

“이 사람아 죄가 무슨 죈가? 절은 사람들이 서로 만나 알고 사랑하면 결혼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윽고 우리는 부엌 일을 깨끗이 정리했다. 그리고 어머니와 내가 방안으로 들어왔을 때 나는 깜짝 놀랐다. 우리가 부엌에서 일하고 있는 동안에 숙은 나들이 옷인 듯 멋진 새 옷에다 곱게 화장까지 하고 있었다. 새 옷에 화장까지 한 그녀는 시집가는 새색시처럼 건강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그때 그녀는 정말 아름다웠다.

“아니 얘야! 아닌 밤중에 웬일이냐?”

어머니의 놀라신 말씀이다.

“밖에 나가 바람 좀 쏘이고 오겠어요, 엄마.”

염려스러운 빛이 어머니 얼굴에 나타났다.

“태오씨가 나 때문에 하루 종일 불쌍하게 붙잡혀 있었는데 그 답례로 내가 태오씨를 저만큼 데려다 줄 테야요.”
숙은 엉뚱한 이유를 들어가며 자기 주장을 내세웠다.

“그만 둬요. 찬바람에 감기가 또 들면 어떻게 할려구 그래요. 나 혼자 부대에 들어갈 테니 염려 말아요.”
내가 말했다.

“염려 마세요. 나 대문 밖까지만 갈 테야요. 늦어 기합 받고 나를 원망하지 말고 어서 빨리 부대에 가세요.”

숙은 일어나 방문 쪽을 걸어갔다. 숙의 말 속엔 거절할 수 없는 명령적 어감이 있었다. 어머니도 나도 더 이상 말 못하고 나는 어머니께 인사한 다음 숙을 따라 나섰다.

“곧 집에 들어오너라.”

어머니의 걱정스런 말씀이 뒤에서 들려왔다. 찬바람 속을 우리 둘이는 묵묵히 걸었다. 나는 숙에게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몰랐다. 게다가 부엌에서 하신 어머니의 말씀이 내 마음과 생각 전체를 꽉 잡아 나는 말의 실마리를 잡을 만한 정신적 여유가 없었다.

“8.15 해방 직후 어머니께서 나를 위해 사 두신 옷감이데 작년에 옷을 지어 놓고서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입어 보지 못했어.”

숙이 먼저 자기 옷자랑을 하며 말을 시작했다. 그녀가 먼저 자기 새 옷에 대해 말하기 전에 그 새 옷이 좋고 아름답다는 정도의 말을 내가 먼저 했어야만 옳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때 숙은 내가 센스가 무딘 인간이라고, 아니 전연 무감각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숙, 춥지 않아?”

자기 옷자랑을 하는 그녀에게 나는 엉뚱한 질문을 했다.

“아니.”

“숙, 날씨가 추운데 집에 들어가라구. 어머니께서 염려하시며 혼자 계시는데, 오늘 밤에는 나 혼자 걸어 부대로 들어갈 테야.”

숙과 결혼하라는 어머니의 말씀과 이에 대한 책임감이 나로 하여금 숙 앞에서 부자연스럽게 만들었다. 그리고 혼자 이 문제를 다시 생각하고 싶었다.

“왜, 나와 함께 걷는 것이 싫으세요?”

“아내, 싫기는. 그러나 오늘 밤엔 나 혼자 있고 싶어서 그래.”

“무슨 고민이라도 있어요?”

숙은 조용히 물었다.

부질 없이 내가 숙의 집에 자주 출입했나 봐.”

“나 만난 것을 후회해요?”

숙의 음성은 좀 냉정해졌다.

“아니, 후회하기는.”

“그럼?”

숙과 이야기할 때에 숙은 나에게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고 늘 다그쳐 묻는 습관이 있었다.

“후회하기엔 너무나도 시기가 늦을 만큼 숙과의 우정이 가까워졌다는 사실이 한편 겁나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고…”

“…….. “

“숙, 나도 한 영혼 , 한 생명, 한 여인을 책임지고 사랑하고 돌봐 주며 아내로 맞이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는 남자라고 볼 수 있을까?”

“사랑하기 위한 능력이 뭔데?”

“난 몰라.”

“………”

“숙, 사랑한다는 것이 뭐야? 그리고 결혼한다는 것이 뭐야? 둘이 서로 사랑하면서 둘이의 사랑이 순수하고 성실하다고 자신하면서 그 어떤 외부적 조건 때문에 그 사랑을 향해 등을 돌리는 것이 옳은 일일까?”

내 음성엔 열이 올라 있었고, 나는 숙에게 내 진심을 말했다.

“사랑은 자기의 목적인 결합을 방해하는 모든 조건을 굴복시키는 용기와 힘의 원천이 아닐까. 두 남녀가 서로 순수하게 또 성실하게 사랑한다면 난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해. 그리고 그런 사랑은 사랑으로 족하며 사랑 이외에 아무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법이니까.”

숙은 조용히 말했다. 그러나 그녀의 말은 나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친절로 충만 되어 있었다.

“숙, 고마워.” 하며 나는 그녀의 장갑 낀 손을 잡았다. 우리 둘이는 침침한 길가에 멎었다. 한참을 묵묵히 서 있었다. 몇 사람이 우리 옆을 지나갔다.

“숙, 우리 둘 사이에 사랑한다는 새삼스런 고백이 필요할까?”

“………..”

숙은 잠잠했다.

“난 숙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무척 하고 싶은 마음을 지금까지 억제하고 참아온 것이 초인간적이었다고 여길 정도로 숙을 사랑해 왔어. 그러나 내 무식과 일개 만단 하사관이란 무력한 내 신분을 생각했을 때 숙을 사랑하고 숙과 결혼하고 싶은 거이 내 지나친 욕심이 안가 생각되었어. 그래서 숙의 행복을 위한다는 내 마음의 진실한 태도를 갖고 나는 숙을 우정으로만 대하려고 했어. 남녀 간에는 순수한 우정이 성립되지 않는다고 언젠가 숙이 말했잖아. 숙의 그 말 긍정하면서도 그리고 나는 확실히 숙과의 우정의 범위를 넘어 숙에게 접근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난 숙을 자꾸 방문했지. 내 마음이 명령하는 대로 숙의 행복을 위해선 숙 앞에서 멀리 떠나야 할 것이었어. 그러나 나는 죽을 보지 않고서는 또 사랑하지 않고서는 불행하게 될 것만 같이 생각되었어.

그리고 솔직한 말로 나는 숙이 나보다 훌륭한 남자와 결혼하기를 바란 것도 사실이야. 이 세상엔 나보다 잘난 사람이 얼마든지 있거든. 그래서 전쟁시가 아닌 평화 시에 또 숙이 피난살이의 고독을 가져 보기 이전에 나보다 모든 면에 뛰어난 어떤 사람과 지금 있는 그대로의 내가 함께 숙 앞에 나타났다는 가상도 여러 번 해 봤어. 그때 과연 숙은 사랑에 대한 선택을 내게 내렸을 것인가도 생각해 봤지. 지금 나는 숙이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해. 그러나 어지럽고 불안정한 이 전쟁 중에 또 숙이 가진 바 있는 그 피난살이의 고독이 숙으로 하여금 나를 동정하게 했고 또 사랑하게 했는지도 몰라…”

숙에 대한 내 진심을 털어놓고 보니 내 마음도 후련해졌다. 마치 갚기 힘든 빚을 청산한 것 같은 후련한 기분이었다.

“……………….”

숙은 여전히 침묵을 지켰다.

“나를 사랑하는 숙을 난 가끔 불쌍하게 생각했어. 바른 말로 숙은 내 아내가 되기엔 아까울 정도로 다방면으로 훌륭한 성품을 갖고 있어. 숙은 훌륭하고 유능한, 장래성 있는 남자의 좋은 반려자가 될 수 있어. 인간은 누구나가 부족과 결점을 가진 불완전한 동물이라고는 하지만 나는 그 부족한 인간 중에서도 가장 부족한 인간이니까.”

처음으로 숙에게 진심을 고백했다. 말 없는 그녀의 표정에서 나는 자신이 공연히 비굴해지는 것같이 느껴졌다.

“사람은 자기가 생각하는 것만큼 잘나지도 못했고 못나지도 않았어. 인간은 누구나 다 부족하며 따라서 결점 없는 사람을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겠어? 자기의 부족과 결점을 고백하고 확실하고 성실한 입장에서 서로가 사랑한다는 것만이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 있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 그래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는 것이 사랑하는 사람의 진실한 태도일까?”

숙의 말 속에는 나를 다소 나무라는 어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러나 나를 이해해 주는 그녀의 마음이 진정 고마웠다. 그때 그녀의 말 끝은 울음으로 젖어 있었다. 여자는 애 울기를 잘하는 걸까? 내가 그녀의 두 손을 잡았을 때 그녀는 자기 얼굴을 내 가슴에 갖다 댔다.

“숙, 난 지금 모든 것을 결심했어. 숙이 아까 말한 사랑하기 위해서 용기와 자신이 필요하다고 한 그 용기와 자신을 충분히 갖고 있어. 숙을 위해, 나 자신을 위해, 나는 숙을 사랑하고 앞으로 같이 살 거야. 숙에게 사랑을 고백하려면 할수록 내 마음을 번거롭게 하던 일체의 장해물을 물리쳤어. 사랑은 사랑만으로 만족한다는 숙의 말을 난 충분히 이해했고 또 고맙게 여겨.”

이때 몇몇 사람이 우리들을 바라보며 옆을 지나갔다. 얼마 후 나는 숙에게 저녁식사 후 부엌에서 어머니와 주고받은 이야기를 빠짐 없이 말해 주었다. 그러는 사이에 우리 둘은 장갑을 뺀 맨손과 맨손을 잡고 밤길을 걷고 있었다. 겨울 찬 바람이 손에 스치나 서로 잡고 있는 이 두 맨손 사이에는 사랑의 열이 따뜻하게 피어 오르고 있었다.

“엄마는 항상 태오씨를 칭찬하며 나보다 태오씨를 더 사랑하셔.”

숙의 음성은 명랑한 자기 본연의 음성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웃기도 했다.

“그럴 리가 있을라구. 어머니나 숙은 나를 과대평가하지. 부대에 들어가면 잘못하고 운 나쁘면 상스러운 욕도 얻어먹고 경우에 따라서는 빼터도 얻어맞고 남이 하라는 대로 일해야만 되는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는 일개 말단 군인이야.”

그때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본의 아닌 비굴한 말을 나는 또 했다.

“그만 말해! 그런 따위의 얘기 다시는 내 앞에서 않겠다고 약속해. 빨랑 약속해.”

숙은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내 손을 잡아 흔들었다. 번번이 말해 왔다. 얼마 전에도 나는 이런 따위의 이야기를 함으로써 숙을 울려 놓고 그녀가 자기의 명랑성을 찾은 지 불과 몇 분이 안 되어 나는 그녀를 또 화나게 했다. 여자와 사랑에 대한 경험이 없는 나는 별안간 만난 이 아름답고 지나치게 똑똑한 여인 앞에서 어떻게 처신할 바를 몰랐다. 숙을 기쁘게 해 주자고 애쓰면서도 나는 번번이 그녀를 괴롭혀 주었다. 한 여인을 사랑한다는 것, 애인을 갖는다는 그 자체가 실로 쉬운 일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했다.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엔 허위란 것이 있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 그러나 사랑에는 질서와 절제와 성실과 또 행동과 말의 적절한 기술이 있어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성품과 취미를 잘 알고 그의 감정에 마찰되는 일을 가급적이면, 아니 적극적으로 피해야 한다. 물론 사랑하는 사람을 즐겁게 해 주기 위해 없는 사실을 조작해 말해서도 안 된다. 하여튼 진실과 성실에 바탕을 둔 행동과 말의 적절한 기술이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나는 이런 기술을 갖고 있지 못했다. 나 자신에 대한 자조적인 말을 자기 앞에서 하지 않기를 약속하라는 숙의 말엔 다소의 노기가 숨어 있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고 느꼈다. 그때 나는 지금 우리 둘 사이의 긴장된 사랑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기 위해서는 잘못했다고 사과해서도 큰 효과가 없으며 또 나 자신에 대한 본의 아닌 자조적인 말을 하게 되는 원인을 숙에게 말해서는 더욱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태연한 태도로 숙의 왼손을 내 왼손으로 바꿔 잡고 내 오른손을 그녀의 어깨에 얹으며 말했다.

“약속하지. 다시는 그런 말 않기로 약속하지!”

“정말로 약속해야 돼.”

금세 숙의 음성은 명랑해졌다.

“정말이구말구. 꼭 약속하지.”

“그리고 말야. 앞으로 우리 둘 사이에 태오씨가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한 것, 또 내가 태오씨에 대해 생각한 것을 기탄 없이 이야기하기로 해.”

“그것 참 좋은 말이야. 서로 인격 수양을 위해…. 보다 견실한 사랑을 위해서도.”

“나는 태오씨에 대해 당장 말할 것이 있어.”

“말해 봐, 뭔데.”

“내 말을 듣고 태오씨가 화를 내도 할 수 없지만 나는 이 말을 태오씨를 위해 꼭 해야만 된다고 생각했어.”

“좋아, 무슨 말이라도 달게 듣지. 빨랑 말해 봐.”

우리 둘의 음성은 명랑했고 마음도 명랑했다.

“가끔 태오씨가 자기 자신에 대한 자조적이 말을 하는데 말야. 그 원인이 오늘 오후에 태오씨가 자신이 말한, 부모형제의 애정 속에 살면서도 충만 되고 고른 마음의 성장을 갖지 못한 데서 오는지도 모르지. 그리고 또 태오씨의 인격과 양심을 모욕하고 흠내는 이 험악스러운 사회생활로부터 어쩔 수 없이 받게 되는 패배감이 태오씨로 하여금 태오씨 자신을 자조하게 하는지 몰라. 그러나 그 자조의 원인은 여기에만 있다고 난 생각지 않어. 그 자조의 원인은 패배를 만족하는 생의 체념 속에, 또 패배를 만족하는 태오씨의 교만 속에… 어감이 너무 강하나 이 교만이란 말을 용서해 줘… 있다고 봐. 우리는 패배를 만족하게 여기며 생을 체념해서는 안 돼. 그리고 그런 생을 체념해서도 안 돼. 그리고 그런 교만 속에 팔짱 끼고 생을 방관해서도 안 돼. 자조적인 행위는 자기 자신의 인격을 파괴하는 행위야. 우리는 우리들 자신의 인격을 스스로 파괴해서는 안 돼. 인격이나 양심이란 엄격히 말해 그 어떤 외부적 조건으로 침해를 받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 외부로부터 내게 오는 악에 굴복되고 협조할 때 우리들은 우리들 자신의 인격이나 양심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내 인격과 양심을 모독하는 것은 나 자신이지 남이 아니야. 예를 들면 순교자들은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칼날에 쓰러졌으나 그들은 악의 피해자이긴 하되 악에 굴복한 자는 아니거든. 그들은 악을 쳐 이긴 승리자야 그리고 그들은 갖은 모욕을 받고 죽었다 하더라도 그들의 인격과 양심은 추호의 흠도 받은 것이 아니야. 오히려 찬란한 빛을 낸 결과가 됐어. 이런 뜻에서 제 아무리 악한 사회나 환경 속에서도 우리들은 얼마든지 양심의 자세를 바로잡을 수 있어. 또 인격을 보전할 수 있을 거야. 패배를 만족하는 그런 교만이나 생의 체념은 우리들 특히 천주님의 전능 전선을 믿는 신앙인의 생활태도가 아니야. 어떠한 사회에서나 환경 속에서도 우리는 올바르게 산다는 것만이 필요해 그것만이 우리들의 인격과 양심을 살리는 길이야. 올바르게 살려고 힘쓰다가 실수를 해도 우리는 그것을 실망만 하고 있어서는 안 돼. 실수나 실패를 하여 땅에 쓰러졌으면 도 일어나 걷고, 남이 열 발 걸을 때 단 두 발을 걸어도 상관 없어. 아무튼 우리는 앞으로 걸어가야 돼. 그런데 앞으로 앞으로 부단한 전진을 계속하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무능과 패배를 자조만 하고 있어서는 안 돼. 그리고…”

“잠깐만.”

나는 숙의 말을 끊었다.

“잠깐만 내 말 좀 들어 봐.”

“무슨 말인데?”

한참 열변을 토하다가 갑작스러운 나의 제지에 숙은 좀 놀라는 표정이었다.

“지금 숙이 말한 것은 사실이야. 지금까지 나 자신도 나 자신에 대한 자조적 행동과 말을 해온 데 대해 전연 모르고 있던 것은 아니야. 그리고 그 자조의 원인도 어렴풋이 나는 짐작해 왔는데 지금 숙은 그 원인의 정체를 내게 확인시켜 줬어. 이에 대해 나는 수에게 감사해. 그리고 나는 지금 우리 둘이 밤거리에서 이런 뜻 있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을 얼마간 후회했어.”

“왜?”

“왜냐하면 만일 우리 둘이 지금 밝은 방안에 있다고 하면 숙이 방금 말한 여러 가지 말 중에서 몇 마디를 내 수첩에 기록해 두고 싶었어. 그러니 요다음 기회 있을 때 우리 다시 말을 하고 또 끝까지 계속하기로 하면 어때?”

“생각이란 났을 때 후딱 해 버려야 마음도 시원스럽고 또 말 속에 숨어 있는 생각, 즉 말의 생명이 살아있는 법이야. 이 다음에 이 말을 다시 하면 그때는 김빠진 밥처럼 돼서 맛이 없을 거야.”

“숙은 자기다운 이론을 내세웠다. 그리고 그녀는 내 손을 힘주어 잡으며 웃었다.

“그래? 그럼 말을 계속해. 내 명심해 두지. 오늘 밤엔 숙의 말을 무진장 듣기로 하지. 오늘밤엔 신난다.”

 

나는 그때 정말 신나고 즐거웠다. 나 자신에 대한 숙의 예리한 관찰과 그 정확성에 나는 탄복했다. 그리고 나의 지능과 학식과 인간됨을 초월하는 애인 앞에 열등의식을 느끼는 내가 이미 아니었다. 그리고 그때 나는 애인 사이에는 그들의 지능이나 학력이나 사회적 지위 등의 차이로부터 받을 수 있는 열등의식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뿐만 아니라 만일 애인 중의 한 사람이 자기 애인 앞에서 열등의식을 느낀다면 그것은 아직 자기 애인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 증거가 아닐까도 생각해 봤다. 애인이 애인으로만 남아 있지 않고 결혼을 할 때 그때는 내 것 네 것이 없어지는 것이다. <두 몸이 합쳐 한 몸이 되리라>한 성경 말씀대로 결혼한 부부 간에는 나 너의 구별이나 간격이 없어지는 법이다. 내 것이 네 것이 되고 네 것이 내 것이 되는 그때에는 애인의 탁월한 성품이나 지능이나 인격이 남의 것이 아닌 내 것이 된다. 그리고 내 무능, 무식, 부족, 결점, 이 모슨 것이 내 것으로만 남아 있지 않고 내 애인 즉 내 아내의 것이 되는 것이다. 이런 사실 앞에 내 이인인 숙이, 장차 내 아내가 될 여인이 사실상 나를 초월한다 하더라도 나는 그녀 앞에 열등의식을 가질 필요가 없고 또 가지면 안 된다. 자기 애인이나 자기 아내 앞에서 열등의식을 갖는다면 그것은 자기 애인이나 아내가 자기의 애인이나 아내가 되지 않은 증거다. 또 자기 애인이나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 증거다. 간단히 말해서 애인 간이나 부부 간에 갖는 열등의식은 일종의 이기적 시기심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라고 나는 그때 생각했다. 인간은 내가 못 갖고 있는 것을 남이 갖고 있을 때 그것을 부러워하며 탐내며 시기한다. 내가 바라는 것이 내 것이 아니고 남의 것으로 남아 있을 때 사람은 그것을 질투한다. 그러므로 이미 두 몸이 아닌 함 몸으로 된 부부 간에는 열등의식이란 것이 있어서는 안 된다.

내게 부족된 것을 내 애인이나 내 아내가 갖고 있을 때 나는 그것을 좋아하고 아끼고 사랑해 줘야 한다. 이런 뜻에서 나는 숙이 갖고 있는 모든 것을 좋아하고 아끼고 사랑한다. 그리고 나는 내 부족을 숙의 풍족 속에서 충당한다. 내가 바라던 것, 내가 부러워하던 것, 내가 시기하고 심지어는 질투까지 한 것을 지금 나는 송두리째 차지하고 있으니 즐겁고 신이 났다. 그러나 별안간 숙 안에서 발견하고 갖게 된 내 부족의 충족과 그녀의 풍부함의 내 소유는 마치 내가 한 물건을 내 주머니 속에 넣고 내 것으로 여기고 있을 때 갖게 되는 물질적 소유의식과는 전연 그 뜻이 다르다. 여하한 방법으로써도 인간은 인간을 소유하지 못한다. 인간은 하나의 물건이 아니고 인격적인 것이다. 숙이란 한 여인의 훌륭한 지능과 인격과 인간됨에서 내게 지금까지 부족했던 것이 충족 받았을 때 갖게 되는 소유의식은 인격적 존재인 한 인간과 인간의 결합 속에 순화되고 동화된 형이상학적 소유 의식인 것이다. 인격적 결합 속에 순화되고 동화된 애인 사이의 상호 소유에는 상대되는 두 개의 사물 속에 존재하는 평등의식을 훨씬 초월하는 조화가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는 평등을 찾아선 안 되며 반면에 조화를 찾아 창조해야 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왜냐하면 평등에는 너, 나의 대립된 구별이 있기 쉬우나 조화란 너, 나의 구별이나 차이가 없는, 전체로 하나인 생명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자의 마음 속에는 본능적으로 재배 의식이 섞여 있지 않을까 생각도 해 봤다. 만일 남자에게 지배의식이 있다면 남녀가 서로 사랑할 때, 특히 한 여인이 한 남자를 사랑할 때 그녀가 애인인 남자 앞에 지나치게 자기의 우월감을 보여 준다는 것은 서로의 사랑을 위해 현명치 못한 일이 아닐까도 생각해 봤다. 왜냐하면 자기보다 뛰어나고 현명한 여인을 남자는 자기 아내로 맞이하기를 두려워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가 지배당하기를 싫어한다. 이 세상엔 공처가란 말도 있지만 아내가 남편을 지배해서는 안 되며 그렇다고 남편이 아내를 지배해서도 안 된다. 부부 간엔 사실 지배란 말이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나는 생각했다. 지배란 복종이란 것을 상대로 하고 있으며, 또 상하와 장유의 구별에서 생기며, 또 계급 사회에서만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부부 간엔 상하와 장유와 계급이 있을 수 없는, 두 몸 아닌 한 몸이 있을 뿐이다. 부부 각자에게 고유한 사명의 분야를 서로 잘 지키고 남의 것을 존중해 주고 서로 협조할 때 부부생활의 조화가 이루어 지며 거기엔 지배도 복종도 계급도 없어지는 법이다.

“숙, 잠자코 있지 말고 빨랑 말을 계속해 봐.”

나는 숙에게 말하기를 재촉했다.

“글쎄, 방금 내가 말하던 것은 태오씨의 간섭으로 김이 빠졌어. 그래서 싱거워졌어.”

“김이 빠졌으면 그 김 바진 밥을 좀 덥혀 봐. 그럼 또 김이 들 것 아냐?”

나는 웃었다.

“벌써 때가 늦었어. 김 빠진 밥은 맛 없는 밥이 돼 버리고 말았어. 지금 불을 때면 그 김 빠진 밥은 타 버려 그나마 소용 없게 돼.”

숙은 어린 소녀처럼 웃었다.

“그럼 새로운 김이 돌 수 있는 밥을 다시 시작해 봐. 그럼 일이 잘 될 것 아냐?”

“그럼 우리 밥을 다시 짓지.”

우리 둘이는 한꺼번에 웃기 시작했다. 때마침 우리 옆을 지나가던 한 젊은 사람이 발걸음을 멈추고 우리를 한참이나 서서 바라다봤다. 아마도 그는 우리를 부러워하고 있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내 머리에 스치자 나는 별안간 승리자가 된 듯한 쾌감을 느꼈다. 나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그 사람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몰랐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젊은 사람은 나에게 사랑의 경쟁자처럼 아무런 근거도 없이 느껴졌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또 신나게 웃어댔고 의기양양했다. 그리고 곧 나는 부질 없는 생각과 고상치 못한 쾌감을 가졌다는 것을 알았다. 이런 심리적 작용 즉 나와 아무런 상관 없는 사람 앞에 근거 없는 승리감을 갖는 이런 심리적 작용이 심리학상 혹은 철학적으로 뭐라고 불리어질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이런 심리적 장용은 지금까지 내게 무시와 지배를 준 이 사회에 대한 불만과 또 패배감 그리고 은연 중 내 마음 속에 잠재하고 있는 정체 불명의 복수심의 산물이 아닐까를 생각해 봤다. 장교로부터 꾸지람이나 기합을 받은 하사관이 죄 없는 졸병을 모아 놓고 화풀이를 하듯이 우연히 캄캄한 밤거리에서 만난 이 정체 불명의 한 젊은 사람에게 나는 무시를 선사했고 나는 그로부터 승리감을 받았던 것이다. 이런 심리적 사실로 말미암아 이 세상엔 무수한 죄 없는 사람들이 근거 없이 희생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때 나는 이에 대해 숙에게 말하고 싶었으나 그날 밤엔 숙의 말만을 듣기로 했다.

“숙, 그럼 밥을 빨랑 다시 지어 보라고.”

여전히 나는 웃으며 숙에게 말했으나 이미 내 웃음은 우리 뒤에 멀어져 가는 그 젊은 사람에 대한 조소로, 쓸 데 없는 내 승리감에서 온 것도 아니었다.

“급히 서둘지 말어. 밥 거리를 먼지 준비해야 될 것 아냐?”

“밥 거리가 충분치 못해 시장에 가야 된다면 시간이 없는데 집에 남아 있는 것으로 우선 빨랑 밥을 지어 봐. 만반진수의 찬란한 식사가 아니라도 좋아. 조밥이나 꽁보리밥에 김치 깍두기 정도의 식사랃 좋으니 우선 따뜻한 밥, 김이 들 수 있는 밥을 짓기로 해. 숙고가 함께 먹는 밥은 뭣이든 맛있어.”

“그럼 할 수 없어. 조밥에 김치 한 사발 정도의 식사를 하기로 하지. 밥맛이 없어도 참아 받아야 해.”

“염려 말어. 음식이란 항상 맛 좋은 것만 먹으면 음식 맛마저 잊게 되는 법이야. 못난 놈이 있어야 잘난 놈이 빛나는 법이고, 추한 게 있어야 아름다움이 귀해지는 법이 아니겠어. 이처럼 우리는 음식물의 감상법을 잘 보전하기 위해선 가끔 텁텁한 조밥에 김치 정도의 거칠은 식사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그러니 염려 말고 발리 아궁이에 불을 지펴.”

“태오씨는 가금 말단 하사관이니 계급이니 하는데 그 게급에 대해 잠깐 말할 테야.”

“과연 조밥 냄새가 벌써 나기 시작하는군… 나를 또 꼬집어 말하는 것을 보니, 좋아. 이미 조밥 먹기로 각오한 나니까 염려 말아. 빨랑 밥을 지어.”

나도 웃었고 숙도 웃었다.

“오늘은 내가 조밥을 해 주지만 내일이나 이 다음 만나는 날엔 태오씨가 좋아하는 만두국을 해 주지.’

“신난다!”

“그런데 말이야. 계급이란 한 사회를 형성하기 위해 필요한 질서이지 그것이 사람 각 개인이 가지고 있는 불가침의 인격적 가치로 나타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 질서가 요구한 계급은 한 사회를 위해 우리에게 부과된 말하자면 외적 조건이겠으나 인격이란 각 개인의 인간됨을 나타내는 내적인 것이 아니겠어? 그리고 계급이란 내가 속해 있는 그 계급사회를 떠날 때 내게서 없어지는 것인데 인격이란 내가 무엇을 하나, 어디 있으나, 나와는 불가분의 것이야. 나는 태오씨 자신마저 무시하는 태오씨의 그 계급을 사랑하지 않고 태오씨의 성실하고 의지적이고 이상을 위해 싸우는 인간됨을 사랑해. 사람이라는 것은 인격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지 결코 외부의 그 어떤 조건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야. 물론 계급이라든가, 재산이라든가, 지식이라든가 하는 것은 우리들의 인간생활에 필요한 것만은 사실이며 또 우리들에게 기쁨이나 편의를 주는 것도 사실이야. 그러나 그런 것들이 인간적 행복의 근본 토대가 되어 있다고 난 말할 수 없어. 인격 없는 계급, 윤리 없는 재산, 천주 없는 지식을 가진 사람보다는 남들로부터 천시되고 가난하다는 말을 듣고 또 무식하다는 말을 들을망정 자기 일에 충실하고 근면하며 또 남을 사랑하고 천주님을 섬길 줄 아는 사람이 난 좋아. 그리고 나는 소설을 쓰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소설 안에서 올바르게 살고 선을 위해 악을 거스려 싸워 고생하는 행복한 소설의 주인공이 되고 싶어. 은행 금고의 문지지가 되기보다는 동전 단 한 푼이라도 그 금고에 저금을 하는 사람을 난 더 존경하고 사랑해. 그리고 화려한 박물관의 소유자가 되기보다는 변변치 않은 것이나마 내 능력껏 내 양심껏 한 가지 작품을 창작해 그 박물관 한 구석에 진열해 두는 작가가 되고 싶어.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이나 지위나 명예도 좋기야 하겠으나 생의 능력 없는 재산이나 지위보다는 생의 능력 있는 맨주먹이 난 더 좋아. 소비하는 것보다는 내 힘으로, 내 피와 땀으로 하나라도 건설하는 것이 우리들 인간이 할 일이며 또 우리 인간의 삶의 보람이 아니겠어? 토질이 박하고 메마른 땅이라도 좋으니 우리 둘이 합심해서 곡식의 낟알을 하나씩 심고 가꾸고 키우자는 거야. 나는 태오씨가 태오씨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만큼 무능하다고는 생각지 않으며 또 태오씨가…. 솔직히 말해서…. 한 시대의 풍운아나 주인공으로 등장할 만한 위대하고 유명한 인물이 될 소질을 갖고 있다고도 생각지 않아. 그러나 생사를 좌우하는 그 어떤 생의 모험 앞에서도 서슴지 않고 또 굴복이나 단념 없이 진(眞)과 선(善)과 애(愛)에 바탕을 둔 자기 이상을 건설하기에 필요한 충분한 용기와 의지를 태오씨는 갖고 있다고 생각해. 한 사람이 장군이 될 때, 또는 장관이 될 때, 학자나 부자와 대통령이 될 때 비로소 사람 구실을 다했다고는 말할 수 없어. 장군이 된다는 것, 대통령이 된다는 것 등은 그 사람의 노력의 소산이라고도 볼 수 있겠으나 그것은 생의 기술에 속하는 범위의 것이라고 생각해. 인생은 하나의 예술이라고 말하듯 인생을 예술의 걸작으로 만들려면 기술이 필요한 것만은 사실이야. 그러나 인생살이에 필요한 이 기술이 우리들 인간생활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목적을 위해 불의한 수단과 방법을 정당화시켜서는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소위 출세를 위해 불의한 기술을 정당화시켜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나는 부정한 방법을 사용해서 목적을 달성한 사람보다는 정상적인 방법을 사용하고 목적을 달성치 못한, 말하자면 의를 위한 패배자를 더 존경하고 사랑할 테야.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 지성의 능력이 허락한 최대한의 기술, 즉 의와 불의를 가리지 않는 기술을 이용하여 출세한 사람보다는 가난해도, 또 지위가 천해도 참되게, 양심껏, 또 성심껏 자기 생활 이념을 존중하며 아끼며 사는 사람의 아내 되기를 나는 서슴지 않을 테야. 난 태오씨가 크게 성공하거나 또 출세할 능력이나 기술을 가진 사람이라고는 생각지 않아. 그러나 태오씨는 의와 사랑을 위해 아까 말한 것처럼 모험을 감행한 사람이고 또 심지어는 생의 패배마저 달게 받아들일 만한 아량과 용기와 의지를 갖고 있다고 난 봤어. 바로 거기에 정말 인간답게 산다는 삶의 보람과 가치가 있지 않겠어? 특히 우리들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위해서는… 우리 신자들의 생의 성공이란 의와 사랑을 위한 생의 패배일지도 몰라. 순교자들의 생활처럼… 성공이라든가, 출세란 것이 인생의 목적이 아닌 이상 지금 태오씨가 갖고 있는 군의 말단 계급을 서러워할 필요도 없고 또 부끄러워할 필요도 없어. 사람은 자기가 처해 있는 환경이나 사회적 계급을 원망하고 부끄러워할 때 그 환경과 사회적 계급의 노예가 되는 법이라고 생각해. 우리는 여하한 환경이나 계급의 노예가 되어서도 안될 거야. 태오씨가 가끔 자기 스스로를 낮추어 말단 하사관이니, 혹은 군의 일개 졸병이니, 상스로운 욕도 듣고 심지어는 기합도 받으며 남이 하라는 대로 하는 허수아비와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고 말하는데 나는 왜 태오씨가 그런 말을 하는지 그 심정을 잘 이해해. 그러나… 그러나 자기 애인인 내 앞에서 태오씨가 이후로는 그런 말을 안 해주기 바래. 내가 태오씨의 그 계급을 싫어하거나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태오씨 자신을 위해서야. 한 여인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끼며 사랑에 대해 추호의 불순한 야심 없이 모든 면에서 자기보다 뛰어난 남자를 내가 사랑하기를 바라는 태오씨의 마음 앞에 나는 울고 싶었어. 아까 그 말을 들으며 내 마음은 사실상 울고 있었어. 나는 태오씨가 나를 생각해 주는 만큼 잘나지도 못하고 못나지도 않았어. 오늘은 이만 말하고… 지금까지 내가 순서 없이 막 말한 것은 그 어떤 불순한 생각을 갖고 태오씨에게 말한 것이 아니야. 다만 얼마 전부터 태오씨를 위로해 주고 도 격려해 주고 싶었던 것 뿐이야. 지금 태오씨는 한 여인의 마음의 위로와 격려를 필요로 하고 있다고 생각했어. 나는 태오씨의 생활 이념을 실행시키기 위해 태오씨를 사랑하고 아내가 될 테야. 그리고 내가 태오씨를 사랑하는 것은 내가 태오씨를 동정한 데서 기인하지 않았는가 하는 뜻의 말을 태오씨가 말했는데 태오씨에 대한 내 사랑은 사랑이지 동정이 아니야….”

숙의 이런 말을 들으며 나는 다시 한 번 놀랐다. 놀려 주면 화내고 울던 이 20세의 젊은 여인의 마음 속에 깊은 생의 철학과 의지가 있었다는 사실 앞에 나는 다시 한번 숙을 높이 평가하고 기뻐했다.

 “숙, 고마워. 지금까지 숙이 말한 것을 전적으로 받아들이며 숙의 말을 되풀이하거나 또는 한 마디의 말도 덧붙이지 않을 테야. 내가 할 바, 아니 우리 둘이 할 바는 이처럼 둘이 손잡고 합심해 우리 둘이의 공동생활을 이상을 위한 향해 전진하는 것 뿐이겠지. 여하한 어려움이나 장애물도 우리의 이 이상과 사랑을 방해하거나 굴복시키지 못할 거야. 그리고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지금 새삼스러이 굳게 했어.”

“태오씨는 공부하려면 공부할 수 있는 소질과 능력을 다분히 갖고 있다고 생각해. 전쟁이 끝나면 공부해.”

숙은 언제나 나를 격려해 주었다.

“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리기 전에 지금부터 공부를 짬짬이 할 예정이야. 숙과 얘기할 때 나는 적지 않은 것을 배워. 숙은 내 선생이기도 해. 오늘 밤에 내게 말한 것은 아무나 내게 말해 주지 못하는 성격의 것이었고 훌륭한 하나의 철학이었어.”

“내 말이 철학이라고까지는 말할 수 없으나… 철학이란 기실 별다른 것이 아니고 참을 사랑하고 말하는 것이 아니겠어? 하여튼 공부해. 나도 공부할 테야. 태오씨 말대로 공부란 비단 학교에서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야. 그런데 이 다음에 뭣을 할 테야?”

숙은 늘 나의 장래에 대해 궁금히 여기고 있는 것 같았다.

“숙이 원하는 것.”

“과수원과 양계장을 가진 농장생활을 하고 싶다고 오늘 낮에 말했지 않어. 나도 그런 생활이 좋을 것 같애.”

“숙이 농장생활을 할 것 같아?”

“왜 못해? 밭애 나가 김도 매고 채소도 가꾸고 난 뭣이든지 다 할 것 같애.”

어느 새 우리 둘이는 방금 전까지의 딱딱하고 신중했던 토론조의 방법과 음성이 아닌 웃음과 농이 섞인 말투로 돌아가 있었다.

“난 농촌생활이 좋아. 자가기 갖고 있는 힘과 지식으로 일하며 남을 속이는 일 없이 백 원어치 노동해서 백 원 버는 농촌생활이 난 좋아. 살기 위해 남과 내 양심을 속이고 마음에 없는 말과 행동을 하는 것보다는 내 힘과 내 양심의 공정가격으로 밥벌이하고 생활하는 농촌생활이 좋아. 단순하고 소박한 농촌 사람들과 이웃사촌들의 후덕스러운 인정 속에서 난 살고 싶어. 살기 위해 진리와 내 양심을 속이며 선을 배반하며 살아야만 하는 그런 생활이 난 싫어… 물론 산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난 생의 노예가 되고 싶지 않아. 그리고 부지런하면 우리들은 얼마든지 우리가 이상 하는 바의 농촌생활을 할 수 있어. 고향에서 경험한 것인데 농촌 사람이 잘 못 사는 이유가 정부 시정 방침의 결여도 있겠지만 내가 본 바에 의하면 농촌 사람들이 자기들의 생활 향상 방법을 연구하지 않는 데 있었어. 그리고 또 농업기술개선을 그들 자신이 게을리하고 있는 사실도 그들이 잘 못 사는 원인 중의 하나일 거야. 할아버지가 아버지에게 넘겨 준 그대로 또 인계해 주고 있는 형편이거든….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이 가난해도 왜 자기들이 가난한가를 알려 하지도 않고 모르고 있어. 가난한 이 사실이 내 탓이 아니고 시대의 탓, 토질이 박한 탓, 남의 탓으로 알고 있는 편이 보통이야. 하여튼 그들은 자기들의 지능을 잘 이용하려 하지 않어. 내 집이 가난한 것만도 내가 보기엔 생활 향상을 위한 노력과 연구를 하지 않고 또 게으른 탓이었다고 난 생각해. 말하자면 긴 겨울 동안 별로 하는 일 없이 놀기만 하거든. 쓸 데 없이 동네 말방에들 모여 앉아 잡담이나 혹은 술내기 도는 국수내기 화투놀음이나 하며 긴 겨울을 보내고 있거든. 물론 힘든 농촌생활이라 겨울 한 철을 푸근히 쉬어야 한다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으나 간단한 부업을 얼마든지 할 수 있어. 하여튼 첫째 부지런하고 도 생활 방법이나 농사 기술을 잘 연구하면 가난한 농촌생활을 얼마든지 면할 수 있다고 난 자신해. 내가 5년 동안 경험한 바에 의해 그렇게 믿어.”

“재산이라고까지야 말할 것은 안 되나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재산을 팔아서 자그마한 농장이라도 마련해서 우리 힘껏, 이상 껏 살아 봐. 엄마 못시구..”

우리 둘이는 벌써 내일의 설계를 구상 중이었고 숙은 이미 농부의 아내가 될 된 것처럼 말했다.

“농사 일이란 쉬운 일이 아니며 또 일이 우리 뜻대로 이상대로 항상 되는 것이 아니라 해도 아까 숙이 말한 대로 우리 모험을 같이 하기로 해… 물론 어머니 모시구…”

“농사 일이 힘든 일이란 것은 사실이겠으나 언젠가 태오씨가 말한 것처럼 농촌생활이란 재미있고, 시적 또 종교적 기쁨을 가질 수 있는 인간적 직업이 아닐까, 나도 그렇게 생각해. 나도 밭에 나가 김도 매고 남이 하는 일 다 할 테야.”

“나는 숙이 농사 일 하는 것을 원치 않어”

“그럼 날 뭘 해?”

“내가 할 일 따로 있고 숙이 할 일이 따로 있지.”

“그것이 뭔데?”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밭에 나와 나를 도와 줄 때도 없지 않아 있겠으나 숙이 농촌에서 할 일은 따로 있어. 우리들이 농촌에서 살고 싶다고 하는 것은 단지 우리 둘이의 이상이나 행복을 위한 것에만 그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우리 둘의 모범적 농촌생활을 통해 남들이 모르고 있는 것을 깨우쳐 주잔 말이야. 이 세상에서 나만이 잘 살겠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겠지. 그런데 농촌에서는 내가 보고 겪은 경험을 통해 보면 농촌 부녀자들에 대한 계몽사업이 시급하기도 해. 그러니 숙은 그 여성계몽사업을 맡아 하란 말이야.”

우리는 벌써 부부가 된 양 앞날에 할 일을 하나 도식화(圖式化)시키며 그려 나가고 있었다.

“그 계몽사업이 어떤 종류의 것이야?”

“아내가 된다는 것. 가정에서 아내가 남편에게 또 자녀에게 할 일이 있을 것이 아니겠어? 가령 하루 온 종일 가정을 떠나 밭에서나 혹은 직장에서 일하고 집에 돌아오는 남편들이 바라는 것은 깨끗이 정돈해 놓은 가정 살림이라든가 평화와 행복과 애정이 깃든 가정과 아내가 아니겠어? 아내로부터 받은 따뜻하고 애정 어린 대접, 즉 사랑에 찬 미소라든가 친절한 위로의 말이라든가 깨끗이 차려다 주는 밥상이라든가 등등. 그리고 그 외 또 있을 수 있는 애정 표현 등. 남자들은 이와 같은 가정적 평화와 기쁨과 애정 속에서 밭이 나 또는 직장에서 얻은 하루의 피곤과 사업상의 고민이라든가 또는 번뇌 등을 다 잊고 힘과 용기를 얻어 내일의 자기 일에 충실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어?”

“아내의 역할을 나보다 태오씨가 더 잘 알고 있군.”

숙이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이것도 고향에서 듣고 본 경험인데 명랑한 남자가 무뚝뚝하고 멋 없는 여자와 결혼하면 남자가 자연 침울해지며 말도 적어지더군. 반대로 무뚝뚝한 남자가 명랑하고 상냥스러운 여자와 결혼하면 남자도 명랑해지는 것을 봤어. 그리고 부지런한 아내를 가진 남자들의 옷은 비교적 항상 깨끗한 반면에 게으른 아내를 가진 남자들은 옷마저 깨끗이 입지 못하고 있었어. 아내는 이처럼 자기 남편을 새 사람으로 만드는 창조적 힘을 갖고 있나 봐. 이상한 일은 여자란 남자로부터 선택을 당해야 결혼할 수 있는 것도 사실이야. 그러나 자기를 선택한 남자를 자기에게 동화시키는 신비로운 힘을 여자들은 갖고 있어. 그뿐만 아니라 남편들에게 생활상의 윤리적 바탕을 두고 있는 것도 아내들이라고 생각해. 그리고 이것도 역시 고향에 있을 때 본 것인데 말야. 남편이 밭에서 돌아오면 따뜻한 세숫물을 갖다 주고 밥도 깨끗이 차려다 줄 줄 알아야지 애기만 자기 무릎에 앉혀 놓고 도리도리나 짝짝꿍만 시키고 있는 아내들을 혹 가다 볼 때 내 일이 아니면서도 딱하게 보이더군… 우리 동네 어떤 사람은 자기 아내와 말하지 않고 지내는 날이 말하는 날보다 더 많다고 들은 일이 있어.”

“어머니… 그게 정말이야?”

숙은 깜짝 놀라는 표정을 했다.

“그럴 수 밖에. 왜냐하면 좁은 집에 사람은 여럿이고 게다가 아내는 무뚝뚝하고 멋 없고 남편이란 사람은 하루 종일 밭에 나가 일하다가 저녁 늦게 돌아오고, 밤엔 동네 말방에 가서 잡담이나 하거나 아니면 벽에 등을 대고 꾸벅꾸벅 졸다가 밤 늦게 돌아오면 아내는 벌써 세상 모르게 잠들고 있으니 그럴 수 밖에. 숙은 농촌생활을 아직 해 본 일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숙이 상상 못할 정도로 생활 방법을 개선할 점이 농촌에는 많이 있어. 그리고 집 구조도 앞으로 개량해야 될 문제라고 생각해. 밖에서 돌아온 젊은 남편이 밤에 집에 남아 아내와 말을 하거나 여러가지 의논도 하고 싶어도 자기들만의 시간과 장소를 가질 수 없거든. 이러한 점이 가정생활 제도상, 또 한국식 건축 구조상 피할 수 없는 하나의 사실이란 것도 거짓말은 아니야. 하여튼 젊은 남편들이 젊은 아내를 집에 두고 말방 에 가서 밤 늦게까지 앉아 잡담을 하거나 졸고 있는 것을 볼 때 참 딱하게 보였어. 물론 말방에 모여 앉아 이야기하며 노는 것도 도시에서 맛볼 수 없는 농촌적 정서라 할 수 있으나 결혼한 사람에겐 말방보다 가정이 더 중히 여겨져야 할 일이 아니겠어? 그들을 볼 때마다 나는 가끔 그들 생활의 기쁨이나 재미가 과연 무엇이며 또 그들은 자기 생활에 대한 기쁨이나 재미를 갖고 있을까 하고 반문도 해 봤지. 농촌 사람이 다 방금 내가 말한 그런 사람이란 것은 아니야. 내 고향 농촌 사람들 중엔 젊은 부부가 재미있고 행복하게 또 알뜰히 잘 살고 있는 사람들이 내가 말한 딱한 사람들보다 더 많아. 그러나 아직도 개량할 거이 많이 있고 우리들이 할 일이 거기에 있다고 봐.”

“나이 어린 사람이 언제 그렇게 세심히 가정생활을 관찰해 뒀어? 어떤 때는 두 뺨이 불그스레한 동안(童顔)을 한 태오씨를 보면 십 오륙 세 가량의 한참 자라는 중학생처럼 보이는데 또 어떤 때는 가정생활에 경험깨나 있는 장년으로 보여.”

숙은 웃으며 내게 좀 빈정거리는 태도로 말했다.

“놀려 주면 울고 웃고 하는 숙을 보면 십 이삼 세 철부지 귀엽기만 한 소녀처럼 보이다가도 또 어떤 때는 철학교수, 또 어떤 때는 할머니처럼…. 하하하…”

나는 그때 말을 미처 끝내지 못하고 웃고 말았다. 그때 나도 갑자기 숙을 놀려 주고 싶었다.

“어머나! 내가 그래 할머니처럼 보인단 말야?”

숙은 잡은 내 손을 흔들며 말했다.

“응 할머니의 할머니처럼 보여. 하하하..”

숙의 놀라는 표정이 재미있어 소리 내어 웃었다.

“어떤 때 내가 할머니처럼 보여? 바른대로 말해 봐. 웃지만 말고 빨리 바른대로 말해봐.”

숙은 잡고 있던 내 손을 계속 흔들어 댔다.

“나보고 중학생 같으니 장년 같으니 하며 놀리니까 한 마디 복수한 거야. 거기에 무슨 뜻이 있었던 것은 아냐?”

“내 말 끝에 한 번도 지지 않으려구 하지…”

“하여튼 이 다음에 우리 둘이는 싸움깨나 할 것 같아. 싸움도 가끔씩 하는 것은 재미있을 것 같아.”

“말 말아. 싸움하면 힘이 약한 여자가 항상 남성적 폭행의 피해자가 되겠지… 그러니 여자가 불쌍해.”

이런 말을 하면서도 숙은 웃었다.

“부부싸움에 여자들이 피해자가 된다구? 말 말아. 부부싸움에서 해 받은 것은 여자가 아니고 남자들이래. 여자들은 악착같고 앙큼스러워 앙갚음을 기어이 한다 거든. 반면에 여자 앞에 싱겁고 줏대 없는 것은 남자들이라 결국에 가서는 여자 앞에 고개 숙이고 해 받는 것은 남자들이래. 그러니 남자들이 불쌍하지… 앙갚음을 하는 자기 아내를 위해 하루 온 종일 밖에서 일하고 또 술 한 잔 제대로 마시지도 못하면서도 멋 없는 아내의 치마 저고리를 해 주어야만 하고. 그래도 제대로 아내로부터 애정표시는 고사하고 웃음 한 번, 친절한 말 한 마디 받지 못하는 남자가 불쌍하지.”

“고만 말해.”

말을 끝내기 전에 숙은 또 잡은 내 손을 흔들었다.

“아니 오늘 밤엔 그렇게 여자들 흉보기야? 무뚝뚝한 여자니, 멋없는 여자니, 악착같으니, 앙큼스러우니.. 나도 남자들에 대한 흉을 얼마든지 갖고 있어. 이 다음에 만날 때…”

“숙, 잠깐만…”

나는 숙의 말을 막았다.

“뭣이 잠깐만야?”

“그것 봐. 내가 말 잘못한 게 있어? 여자들은 해 받는데 대해 기어이 복수한다고 내가 말했잖아? 그것 봐. 숙에게도 그 복수심이 있거든.”

이렇게 꼬집었더니

“이유 없이 부당한 해를 받을 땐 피동적인 피해자로 남아 있으면 안 되는 법이야. 가해자의 부정과 불의를 깨우쳐 주기 위해서라도 정당한 복수를 해야 되는 법이야. 이와 같이 만일에 태오씨가 나를 부당하게 놀려 주고 해를 주면 나는 적절한 기회를 이용해 복수할 테야.” 하고 숙은 웃으며 항변해 왔다.

“남자들은 여자 앞에서 싱겁고 줏대가 없다고 아까 내가 말했으나 모든 일에 예외란 것이 있듯이 나는 그 숱한 남자들 속에서 예외인 사람이야. 숙이 만일 나를 놀려 주고 또 내게 앙갚음을 하려고 하면 나는 숙의 집에 안 갈 테야. 그리고 이 다음 결혼을 한 후에라도 한 달이고 두 달이고 멀리 여행이나 하면서 밖에서 살 테야.”

“공갈이 여간 세지 않은데… 그것이 말하는 뗑깡식 공갈이야?”

“공갈이나 뗑깡보다 더 무서운 진실이지… 내가 화내고 집에 놀러 가지도 않고, 오랫동안 여행이나 하면 숙이 내게 잘못했다고 말할 것이 아니겠어?”

“태오씨도 은연 중에 군대식 계급 사회의 영향을 상당히 받았어. 말 끝마다 남을 지배하려는 뜻이 보이거든… 그리고 남자들에게는 야만스럽고 무자비한 일면이 있어. 자기 애인이나 아내를 놀려 주며 좋아하고 또 낮에 내가 정말 울고 싶어서 울고 싶다고 말했더니 어디 울어 보라고 천연스럽게 말하고, 내가 우니까 좋아서 싱글벙글 웃기만 하고… 하여튼 태오씨도…”

숙은 빈정대는 말투로 내게 말했다.

“숙을 놀려 주는 것이 재미있는 것은 숙이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그래.”

“말 말어.”

나는 그때 잡고 있던 숙의 손을 힘껏 쥐었다.

“아야. 내 손 으스러져!”

“아파?”

“그것 봐. 남자의 폭력의 피해자는 여자지. 힘을 너무 남용하지 말어.”

숙은 자기 이론의 정당성을 발견이나 한 듯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아프지?” 하며 나는 숙의 손을 쓰다듬어 주면서 그녀 손등에 따스한 내 입김을 호호 불어 주었다.

“물론! 그러나 괜찮아.”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엔 논리적 법칙이 없다. 무엇을 말해도 재미있고 또 그들의 입에선 구슬 같은 말이 쉴 새 없이 흘러나온다. 본래 다변가(다변가)가 아닌 나였으나 숙을 알게 된 후 그녀와 함께 앉아 있으면 나 자신이 놀랄 정도로 다변가가 되었다. 그리고 내 생전 단 한 번도 남과 토론을 하거나 말해 본 일이 없는 신중한 인생문제를 숙과 이야기할 때 나는 숙의 어려운 말마디를 이해할 수 있었고 나도 그녀에게 답할 수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은 시인이 되고 <창조자>가 된다는 말이 있듯이 숙에 대한 내 사랑과 나에 대한 숙의 사랑은 무식했던 내 지능을 얼마간 깨우쳐 주어 사물을 보고 감상하며 판단할 수 있는 지식, 창조적 힘을 내게 주었다고 그때 나는 확신했다.

잠깐 동안 우리는 묵묵히 걸었다.

 

 

 

제15장

사랑은 생명처럼

 

그때 4, 5명의 미군이 야비스러운 말을 지껄이며 휘파람을 휘익 불며 우리 옆을 지나갔다. 그러자 나는 숙과 함께 걷고 있는 길의 방향이 가야 할 부대 쪽이 아닌 것을 알았다.

“아니, 숙, 우리가 지금 어디 있어?”

초저녁 밤 하늘에 조랑조랑 매달린 수만의 별보다 더 많은 사랑의 말마디를 주고 받으며 사랑에 취해 우리 둘이는 방향 없이 정신 없이 밤거리를 걷고 있었던 것이다.

“가만 있자. 나도 잘 모르겠는걸.”

숙도 어리둥절했다. 한참 동안 사방을 살펴 보더니

“인제 알았어. 아까 저기서 길을 잘못 들었어. 이 길을 부대에 가는 길이 아냐.”

“그럼 뒤로 돌앗!” 하며 나는 숙을 돌렸다. 숙은 아무 말 없이 웃었다. 그리고 우리 둘이는 말 없이 한참 걸었다. 찬바람이 뺨에 스치며 인적 드문 밤거리엔 우리 둘이 걷고 있는 발소리와 숙의 길다란 나들이 새 옷 치마폭이 스치는 소리만이 밤의 정적을 깨뜨리고 있었다. 그때 나는 숙이 입은 새 옷이 생각났다.

“아까 새 나들이옷을 입은 숙을 방안에서 봤을 때 옷이 숙에게 잘 어울리고 숙이 참 아름다웠어. 그리고 숙하고 춤이라도 한 번 추고 싶었지.”

“춤 출 줄 알아?”

숙은 의외라는 듯 좀 놀라는 기색이었다.

“조금 배웠지. 춤 출 줄 아는 친구를 우연히 사귀게 됐는데 그 친구가 내게 춤을 가르쳐 줬어.”

“그러면 춤 추러 다녔겠군?”

“꼭 네 번 갔었지. 돈이 있어야 춤을 추러 다니지. 그리고 춤에 취미를 붙이니까 사람 망하기 쉽겠더군…”

“하여튼 무식한 농촌사람이니 졸병이니 하면서도 별의별 경험을 다 갖고 있구먼…”

숙은 얼마간 시기하는 듯했다.

“내게 돈만 있었더라면 별의별 경험을 다 해 봤을 거야. 그리고 멀리 세계 유람이라도 하러 떠돌아 다닐 거야. 돈 없는 것이 한스럽지…”

나는 웃었다.

“한스럽긴 뭣이 한스러워? 다행이지.”

숙도 따라 웃었다.

“실은 다행한 일이야. 그러나 살기에 필요한 돈이 없으면 사람은 죄를 범할 수 있는 기회를 더 갖게 되지 않을까?”

“말하자면 어떤 경우?”

“말하자면 아까 내가 춤을 취미로 가지니까 사람 망하기 쉽다고 말했잖아.”

“그래서?”

“그래서 말야. 춤을 조금 배우니까 춤추러 가 보고 싶은 생각이 점점 더해지는 게 아니겠어. 그러나 돈이 있어야지. 마침 몇 푼 안 되는 월급에다 어떤 장교가 책이나 한 권 사 보라고 준 돈을 합쳐 공부하라는 책은 안 사고 내게 춤 가르쳐 준 친구와 함께 춤을 추러 갔지. 공개되지 않은 비밀 댄스홀 이란 곳으로 춤을 추러 갔어. 사람은 남이 하지 말라는 일은 억지로 하고 싶은 나쁜 의지를 따로 갖고 있는 모양이야. 그리고 비밀이라면 기어코 알고 싶어하는 옳지 못한 호기심을 갖고 있는 모양이야. 하여튼 그 친구 따라 댄스홀에 가보니 변변한 댄스홀도 아닌 엉터리였어. 얼떨떨한 기분 가운데서 약 한 시간 반쯤 춤을 추다가 돌아왔지. 그런데 그 후 자주 춤추러 가고 싶어지지 않겠어. 그래서 마침 해군 단화 배급 나온 것을 팔아 그 돈으로 친구와 함께 또 춤추러 두 번 갔지. 돈이 또 떨어지지를 않겠어. 보급창에서 일하는 한 친구의 연애 편지 써 주고 그 대가로 해군 단화를 받았지. 그것을 또 팔아 춤추러 갔었어. 팔아서 돈을 만들 수 있을 만한 것도 변변치 못해 나쁜 생각도 들기 시작하지 않겠어. 연애 편지 대서소를 차릴 처지도 못되고. 그래서 며칠 동안 잘 생각한 후 앞으로는 일체 춤을 추러 가지 않기로 결심하고 그 친구도 만나지 않았어. 가난한 사람이 댄스란 사치를 부리다가는 갈 곳이 영창 밖에 없을 것 같애 아예 내 생활이나 환경에 지나치는 일을 안 하기로 했어. 이처럼 필요한 돈이 없으면 국가에서 신으라고 주는 군 단화마저 팔아먹는 옳지 못한 일을 하게 되거든… 국가가 내게 준 것이지만 국가의 뜻을 거스려  국가의 것을 부정하게 사용한 것은 내 생전 이 해군 단화 두 켤레 팔아먹은 것 밖에 없어. 내 친구 중의 어떤 이는 군대 창고 보급계원으로 일하다가 물욕(物慾)의 유혹을 이기지 못해 군대 보급 물자를 부정하게 팔아먹다 들켜 영창생활을 하는 걸 봤지. 가난한 사람이 그 어떤 물건이나 금전의 필요를 느끼고 있을 때 그 손 앞에 있는 물건이나 금전으로부터 받는 유혹이란 참기가 힘들 거야. 그래서 가난한 사람은 실수하기가 쉽지 않을까 생각해.”

“영창이란 것이 뭐야?”

“영창이란 군대 감옥소를 말하는 거야.”

“태오씨가 말한 것처럼 가난이 어떤 때는 악의 동기가 되기 쉬울 때도 있겠지. 그리고 악이라고도 할 수 있을 거야. 그러나 부(富)가 선 자체는 아니거든. 하여튼 가난 때문에 물질의 유혹에 넘어가 실수를 하게 되로 때 악이 형성될지 모르나, 우리는 그 악은 인정하되 그 악을 할 수 없이 범한 사람은 동정해 줘야 할 거야.”

“가난한 사람에게 정신적 동정이란 별로 장한 것이 못 된다고 생각해. 물질의 빈곤을 받고 있는 사람에겐 물질적 동정이 있어야만 돼. 돈 한 푼 달라는 사람에게 당신을 깊이 동정합니다 란 말보다 아무 말 없이 돈 한 푼 주는 것이 더 적절한 일이라고 생각해. 방금 말한 친구의 경우 가난에 희생된 당신을 동정합니다 란 말보다는 앞으로 나쁜 짓 하지 말라고 말하며 그를 영창에서 석방시켜 주는 것이 그를 위해 더 좋은 일이 될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 그리고 어떤 때 가만히 생각해 보면 계급이란 강자의 영광을 위해 있고 법이란 약사를 구속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듯한 생각을 하게 돼…. 세상살이를 가만히 살펴보면 법의 피해자는 약자의 경우가 더 많은 것 같애. 가량 아까 그 보급계원의 경우를 또 들어 봐도 솔직히 말해 정부의 고관이나 군의 고급장교들 중에 몇 푼 안 되는 국가의 물건을 팔아먹은 그 보급계원보다 더 결백한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될지 생각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일 거야. 내 친구인 그 보급계원을 재판한 사람들도 어쩌면 내 친구보다 덜 결백할지도 몰라. 법이란 강자의 폭행을 제어하고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있다고 하나 실은 약자가 법의 피해를 더 받아… 이런 뜻에서 강한 놈은 귀하고 약한 놈은 천하고 죄스럽고…”

그때 나는 그 친구를 생각하며 공연히 일종의 반항의식과 분노를 가습 속에 느끼고 있었다.

“그건 그릇된 생각이야. 선이나 의란 것은 강한 사람 편에만 있는 것은 아니야. 천하고 남으로부터 죄인이란 손가락질을 받는 사람 편에 사실상의 선과 의가 더 있을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리고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이 오히려 감옥 박에 살고 있는 우리보다 더 결백할 수 있고, 이미 그들은 자기 죄를 보상하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해.”

“숙의 논리는 현실적이라기보다 종교적이야. 구체적인 인간의 사회생활을 살펴 보면 일단 감옥생활을 한 번 한 사람은 그 사실로써 이 인간 사회에서 죽을 때까지 죄인이란 이름을 갖고 살게 될 게 아냐. 그 반면에 국가의 돈을 무더기로 집어먹고 팔아먹고 그 밖에도 다른 나쁜 짓을 했다 하더라도 기술것 일을 잘 처리해서 감옥생활을 면했다면 그 사람은 선인(善人)으로서 이 인간 사회에 존재할 거야.  이런 것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천당과 지옥이 꼭 있어야 한다고 믿게 돼. 이 모순 덩어리의 사회를 살펴 볼 때 천주님께서 천당과 지옥을 마련하신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해.”

그러는 사이에 우리 둘이는 아까 사랑에 취해 길을 잘못 들어선 교차로에 다시 되돌아왔다.

“오른 쪽 길로 가.”

숙이 말했다.

“숙, 인제 집에 돌아가.”

“조금만 더 걸어.”

“오늘 밤엔 그만 둬. 밤이 늦으면 안돼.”

“아직 여덟 시도 안 됐는데 무슨 밤이 늦었다구 그래?”

“좀 더 걷고 싶으면 집에까지 되돌아가.”

“염려 말아. 집에는 나 혼자 돌아갈 테니 조금만 더 걸어.”

숙은 정말이지 더 오래 나와 함께 걷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또 길가에서 싸움을 하고 싶은 모양이지…. 그러지 말고 오늘 밤엔 그만 걷고….. 그리고 난 숙을 밤거리에 혼자 남겨 두고 부대에 갈 수 없어.”

“왜? 염려 말라니까. 한두 살 먹은 어린아이가 아니야.”

“한두 살 먹은 어린아이가 아니니까 난 더 염려 돼. 나이 많은 처녀가 혼자 밤거리를 걸으면 좋지 않아.”

“별말을 다 하네.”

“별말이 아니야. 이제부터는 난 숙을 정말 보호해 주고 숙의 몸과 생명에 대해 책임져야 할 숙의 보호병이야. 그러니까 내 책임상 컴컴한 밤거리에 내 사령관을 혼자 남겨 두고 나대로 갈 수 없어. 자, 어린애 같은 소리 그만하고 저 편으로 돌아갓!”

이와 같이 큰소리치며 나는 숙을 왼 편으로 돌려 그녀를 끌고 집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너무 빨리 사람을 끌고 달아나지 말어. 남이 보면 총각이 남의 집 처녀 붙잡아 간다고 볼 것 아냐.”

웃으며 그녀는 말했다.

“내 말 안 들으면 진짜 붙잡아 갈 테야.”

“붙잡아 가도 좋지만 좀 천천히 걸어…. 아까 태오씨는 내 호위병이라고 말했잖아. 그러면 나는 태오씨의 사령관이 아니겠어?”

“그래서?”

“그럼 호위병은 사령관의 말을 들어야 할 것 아니겠어?”

“경우에 따라서 들을 말이 따로 있고 안 들어도 상관 없는 말이 따로 있지.”

“그런 법이 어디 있어?”

“그런 법이 없다면 우리 둘 사이에 법 하나 만들면 되잖아. 법이란 사람이 만든 것이니까… 그리고 여자 사령관의 말을 너무 들으면 안 돼.”

나는 좀 짓궂게 말했다.

“뭣이 안 돼. 여자들을 어디까지나 깔보기야?”

“여자들을 깔보지 않고 존경해 줘도 여자 말을 너무 들으면 안 되는 것을 어떻게 해!”

“싸움을 또 하고 싶은 모양이지? 아무튼 태오씨도 여간 아니야. 그리고 오늘 밤엔 왜 이다지도 여자 흉이 심해? 나이 어린 사람이 여자에 대해 알면 얼마나 안다고… 여자가 어쩌구 저쩌구 야단이야.”

숙은 여전히 웃으며 농담조로 말했다.

“흥, 내가 나이 어리다구… 너무 사람을 깔보지 말아. 나이 어려도 남의 말을 듣고 남이 하는 일을 보면 뭣이 옳고 그른 것쯤은 알 수 있지. 그리고 군대생활 1년만 해 봐. 배우는 것은 여자에 대한 공부 밖에 없어.”

“그게 무슨 말이야?”

“부대에서 군인들의 화제란 건 5분의 3이 여자에 대한 이야기나 가정생활에 관한 이야기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군인들은 여자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좋아하지. 그들 중엔 결혼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 도 연애 중에 있는 사람, 또 다른 종류의 사람들, 가지가지의 사람들이 있거든. 그리고 군인 사회처럼 솔직한 사회는 없을 거야. 모여 앉아 이야기를 시작하면 솔직히 사실들을 말하지. 대로는 과정도 많이 하지만 사실을 감추지는 않아. 그리고 그들의 대부분의 화제 내용이 소설이나 또는 영화나 혹은 자기 상상력을 이용해 그려 내놓는 실체성이 없는 이야기도 없지 않아 있어. 그렇지만 그 중엔 들어 두고 알아 둘 이야기도 전연 없지는 않아. 이와 같이 잡담 속에도 진리란 것이 없는 법은 아니야.”

“그래 그것이 여자에 대한 공부란 말이야? 부대에서 하라는 일은 안 하고 여자 이야기만 하고 있는 모양이지?”

“내 친구 중의 한 사람은 군대생활을 가리켜 <여성문제 연구소>라고 까지 말한 일이 있어…. 그리고 부대에선 여자 이야기만 하며 시간을 소비하는 것은 아니야. 그러나 군대생활이란 남자만으로 된 극히 단조로운 생활 환경이니 우리들의 화제의 대상은 자연히 이색적인 것이 아니겠어? 생각해 봐. 가령 군함을 타고 며칠이고 몇 주일이고 바다 위에서만 살아 봐. 매일 만나는 사람들 사이에 화제의 자료는 그다지 풍부하지 못하거든. 그리고 바다생활은 고독한 법이야 그래서 심심풀이로, 또 바다 사람의 거칠고 외로운 생활을 잠시나마 부드럽게 만들기 위해 자연 말하게 되는 것이 여자 이야기지. 아파서 이맛살을 찌푸리고 있던 사람도 여자 이야기를 들으면 웃음을 얼굴에 띨 정도로 좋아하지. 이처럼 여자들이란 결혼한 남자이건 도는 총각이건 간에 무진장의 기쁨과 신비를 남자들에게 주는 존재야. 다섯 명이면 다섯 명, 열 명이면 열 명이 다 모여 여자 이야기를 할 때 그곳엔 여자에 대한 정의가 동일하지 않고 각자 독특한 정의를 내리지. 이만큼 여성 세계는 남성들에게 미지와 신비의 세계인가 봐.”

나는 무슨 진리라도 말하는 것처럼 장황하게 떠들어댔다.

“하여튼 남자들은 엉큼하기 짝이 없어.”

“엉큼한 것이 아니라 솔직하다고 봐야겠지.”

“남자들은 짓궂어.”

“여자들은 깍쟁이구.”

“그럼 내가 깍쟁이란 말야?” 하며 숙은 내 손등을 꼬집었다. 그리고 웃었다.

“그럼 내가 엉큼하고 짓궂단 말이야? 난 내가 보고 듣고 느낀 것을 그대로 숙에게 말한 것 뿐이야.” 하며 이번엔 내가 숙의 손을 힘있게 잡아 쥐었다. 그리고 나도 웃었다.

“아야! 아무튼… 아무튼…”

“만사엔 예외란 것이 있다고 말했잖아. 따라서 전체를 일반화시켜서는 안 되지. 온 세상의 여자가 깍쟁이라 할지라도 숙은 거기에서 예외야.”

“설탕 바른 얘기 그만 해. 사람을 놀려 줄 대로 마음껏 놀려 주고…”

숙은 내 손등을 또 꼬집었다.

“오늘 밤엔 싸움 그만하기로 해. 벌써 몇 번째야…. 결혼도 하기 전에 싸움만 하면 어떻게 해… 그런데 춥지?”

“아니, 춥지 않어.”

“난 염려 돼. 오늘 밤엔 내가 너무 숙을 끌고 다녔지?”

“괜찮아. 염려 말아.”

“집에서는 어머니께서 숙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계실 거야. 빨리 집에 돌아가기로 해.”

숙은 잠자코 있었다. 그리고 한참 동안 우리 둘이는 묵묵히 걸었다. 인적 없는 밤거리를 말 없이 둘이 조용히 걷고 있을 때 나는 별안간 쓸쓸한 감정을 느꼈다. 그리고 나는 숙이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은근한 힘으로 그녀의 손을 쥐었다. 그때 숙은 자기 몸을 내 몸에다 바싹 갖다 댔다.

“언제 전쟁이 끝날 것 같애?”

숙은 말을 이었다.

“글쎄….”

“전쟁은 왜 해?”

“누가 전쟁을 하고 싶어서 하나?”

“난 전쟁을 단죄해.”

“물론 전쟁은 단죄해야지. 하여튼 전쟁이란 악이니까. 그런데 세상 일은 이상하거든.”

“뭣이 이상해?”

“숙은 내 얼굴을 쳐다보며 말했다.

“우리가 지금 단죄하는 이 전쟁 덕택으로 우리 둘이 서로 만나 사랑하게 됐지 않아?……”

“그럼 우린 이 전쟁을 고맙게 여겨야 하나?”

“전쟁을 고맙게 여긴다는 것은 전쟁을 찬성하는 태도가 아니겠어? 악인 전쟁을 고맙게 여길 수야 있나.”

“그럼 전쟁에 대한 우리들의 태도는 무엇이야?”

“난 그런 철학은 몰라. 그러나 내 생각엔 전쟁을 단죄하고 전쟁을 안 하도록 우리는 적극 노력해야 된다고 봐. 그리고 전쟁의 원인을 가만히 살펴 보면 국민은 전쟁을 원치 않지만 몇몇 위정자들이 자기들의 정치적 야망을 위해 죄 없는 국민을 선동해 전쟁에 몰아 넣는 경우가 허다하거든… 이 점으로 봐도 전쟁의 피해자는 전쟁의 직접 원인이 되고 있는 몇몇 위정자가 아니라 죄 없고 불쌍한 백성들이야… 불쌍하고 어리석은 것은 배우지 못하고 무시당하는 백성 뿐이야.”

“그것은 그렇다고 하고 전쟁이 우리에게 사랑을 주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전쟁이 우리의 사랑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다고는 말할 수 없어. 전쟁이 우리에게 사랑의 외적 기회를 주었다고 는 볼 수 있으나 우리 둘이 서로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준 것은 전쟁이 아니라 천주님이라고 생각하고 믿어. 악인 전쟁이 사랑을 주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할 일이 아니겠어? 지금까지 내가 만난 수 없이 많은 여인들 중에 단 한 사람과도 애정을 주고 받지 못했으나 숙에게만은 그렇지 않았거든. 결국 우리 둘이 서로 이해하고 사랑하게 된 것은 천주님의 섭리가 아니겠어? 악인 전쟁을 통해, 다시 말하면 악을 행하는 우리들 인간에게 사랑을 주시는 천주님께 감사해야지. 악인 전쟁은 파괴하지만 사람은 건설하거든. 그리고 말이 좀 이상하지만 전쟁이 내게 준 지독한 고통과 시련이 나로 하여금 사람 되게 했고 사랑을 갖게 했다고 생각해. 정말이지 부상당해 받은 병원생활이 아니었더라면 지금쯤 나는 신앙생활 간소화를 여전히 실천하며 뭣을 하고 있을지 몰라. 따라서 오늘 내가 자부하는 숙에 대한 사랑의 순수성도, 사랑의 윤리도 모르고 막 살고 있을 거야. 그리고 오늘의 내가 아닌 이전의 나를 숙이 만났다면 과연 숙이 나를 사랑했을까 도 의문이야. 병원에서 경험한 죽음은 참되게 올바르게 또 맑고 깨끗하게 살라는 교훈을 내게 주었어. 우리의 사랑이 올바르게 성장하고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절제할 것은 절제하고 서로의 정결을 존중하고 사랑해야 되리라 믿어.”

숙에게 이런 말을 할 때 인간의 육신은 성신의 궁전이며 우리들의 몸은 주 예수님의 속죄적 죽음의 비싼 값으로 구제되었고 또 예수님의 지체라고 말한 바울로 사도의 말씀이 생각났다. 그리고 얼마 전에 캄캄한 해상 상륙정 갑판 위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던 내 모습이 내 눈 앞에 환히 나타났다. 내 몸이 성신의 궁정이라면 숙의 몸도 성신의 궁전일 것이다. 나를 위해 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 돌아가셨다면 숙을 위해서도 주 예수님께서는 피를 흘리셨던 것이다. 현재로는 내 이인이나 장차 내 아내가 될 숙이란 여인도, 내가 영혼을 책임지고 구원을 해야 함과 같이, 자기의 영혼도 책임지고 구원해야만 한다.  결혼한 사람은 자기 한 영혼만 책임져서는 안 되며 자기의 아내 혹은 남편의 영혼 사정에 대해 공동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우리 둘이는 사랑 속에 힘을 합쳐 부부란 공동 영혼 구령을 위한 성화의 길을 걸어야 할 것이다. 나와 손을 마주 잡고 밤거리를 걷고 있는 이 여인의 영혼은 천주님께서 내게 맡겨 주신 영혼이며 나로 하여금 그녀와 함께 구원을 받도록 한 영혼이란 것을 알았다. 성신의 궁전이며 예수님께서 죽기까지 사랑하신 이 여인의 영혼이 나로 말미암아 구령 사정에 해를 받아서는 안 되며 예수님의 지체인 이 여인의 몸과 영혼을 나는 죄악으로부터 보호해야만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는 사이에 우리 둘이는 숙의 집 앞에 도착했다.

“어머니께서 지금 숙을 염려하고 계실 거야.”

“무슨 염려?”

“밤에 집을 나갔으니 염려가 될 것 아니겠어?”

“우리 둘인데 무슨 염려를 해. 혹시 내가 혼자라면 몰라도…”

“우리 둘이 나갔으니까 더 염려하실지 모르지…. 부모님의 마음은 우리의 생각을 훨씬 넘는 것이거든.”

“어머니는 그런 분이 아니야.”

“어머니는 참 훌륭하시고 재미있으신 분이야. 그런데 오늘 추웠지?”

싸늘한 숙의 뺨을 쓰다듬으며 나는 말했다.

“아니 이렇게 옷을 잘 입고 외투까지 입었는데 춥긴 왜 추워?”

“감기로 아팠던 몸이 찬바람을 너무 쏘여 난 숙이 염려돼.”

“감기는 다 나았다고 말했잖아. 염려 마. 내가 자리에 누었나 안 누웠나를 확인하고 싶으면 내일 집에 와 봐.”

“건강이란 무리를 피해 현명하게 몸을 보살피는 데 있는 법야. 아무튼 무리는 하지 말아.”

“내 몸이 약해 보여?”

“아니. 그러나 일에 무리하고 몸을 잘 보살피지 않으면 우리는 내일의 건강을 장담 못해. 내가 알고 있는 한 장교의 아내는 몸이 약해 자칫하면 약을 먹어야 하고 병원 출입도 해야만 했어. 그래서 사랑하는 아내의 건강에 대한 걱정 때문에 아무 일도 못하다가 결국 살림마저 망친 경우를 봤어. 아내나 어머니의 건강이 가정적 평화와 윤리의 커다란 바탕이 되고 있다고 생각해. 난 숙이 항상 건강하기를 바래. 하여튼 우리는 서로 서로 몸조심해야 될 줄 알아. 특히 서로를 위해서.”

“내 몸은 염려 말고 태오씨의 손이 꽁꽁 얼었는데 방에 들어가 잠깐 녹이고 가.”

숙은 나를 자꾸 붙잡아 두고 싶은 것 같았다.

“그럴 시간이 없어.”

“내일 집에 올 테야?”

“약속은 못해. 그러나 시간 있으면 올께.”

“부대에서 뭘해?”

“신병들 훈련시키고 교육도 시키며 일해야지.”

“언제 집에 꼭 올 테야?”

“확실한 것은 이 다음 토요일이나 주일 날.”

“어머니께서 시골 계신 외조부모님 병문안 같이 가자고 말씀하셨는데. 이번 주에 시골에 다녀올지 몰라. 시골에 가도 주일 날 이전으로 돌아올게.”

“나도 이번 주간에는 좀 바쁠 것 같아.”

“이 다음 주일부터 하루에 한 번 씩 집에 와서 식사할 수 없어? 내 밥해 줄께.”

“군인이란 그렇게 시간이 여유가 있고 자유스러운 사람이 아냐.”

실인즉 나는 하루 한 번 정도 숙의 집에 와서 식사라도 할 수 있었다. 나와 함께 일하는 하사관들은 나보다 외출이 더 심했고 밤에 잠도 밖에서 자고 오는 일이 있었다. 한 여인을 지극히 사랑하면서도 애인 없는 다른 하사관보다 더 고지식하게 나는 부대에 남아 있었다. 부대에 남아 일만 하며 항상 평온한 태도를 갖고 있는 나보고 어떤 친구는 사내가 박력 없고 너무 고지식하고 여자 앞에 정감이 통할 줄 모르는 목석이라고까지 말했다. 그리고 또 예수님을 믿으면 황소 같은 남자도 여성화되어 젊은 남자의 재미를 모르니 예수님을 믿어도 이 다음 늙었을 때 믿겠다고까지 그 친구는 말했다. 그 친구 뿐만 아니라 다른 친구들도 내가 한 아름다운 여인을 사랑하고 있고 또한 사랑을 열렬히 받고 있다는 사실을 전연 몰랐다. 사랑이란 외적으로 덤비고 통하기 전에 내적으로 이해하고 서로 존경해야 한다.

“숙, 빨리 집에 들어가. 난 숙이 방안으로 들어가 문 닫히는 소리 듣고야 이 자리를 떠날 테야.”

“오늘 밤엔 무진장 걷고 싶어.”

“이 다음 농촌에서 살 때 우리 둘이 밝은 달이 비치는 벌판을 무진장 걷기로 해. 그리고 그 벌판에서 춤도 추고….”

“추운데 내 장갑 줄까?”

“내 장갑 여기 있잖아. 내일 집에서 일할 때 찬바람에 손이 얼지 않도록 장갑 갖고 있어.”

“시간만 있으면 부대에서 식은 밥에 된장국만 먹지 말고 언제든지 좋으니 집에 와서 식사하도록 해.”

“다 다, 시파 시피.” (그래 고마와 의 소련말)

숙은 집에 냉큼 들어가려 하지 않고 내게 자꾸 말을 걸었다. 나도 단 몇 분 간이라도 더 그녀와 함께 있고 싶었고 계속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 밤중에 그녀를 무작정 붙잡고 있을 수는 없었다.

“부대까지 혼자 그 먼 길을 걸어가?”

“염려 말어. 난 혼자 길을 걸을 때 신공을 올리거든. 그럼 무서운 생각도 지루한 감도 없어져. 부대까지 가는 동안에 숙을 생각하고 숙을 위해 기구해 줄께.”

“늦어도 오는 주일에는 집에 오겠지? 나도 만약 시골에 간다 해도 주일 이전으로 꼭 돌아 올께.”

“주일 날 꼭 집에 올께. 자 그럼 빨리 집으로 들어가. 그리고 숙, 오늘 밤엔 내가 숙을 너무 놀렸어. 용서해…. 내가 숙을 놀려 줘도 거기엔 악의가 없고 사랑만 있다는 것을 알아 줘.”

“염려 말어. 잘 알고 있어.”

숙은 내게 웃어 줬다.

“자, 그럼 나 집에 들어갈께……”

그때 나는 그녀의 두 손을 내 두 손으로 받아 들고 그녀의 싸늘한 두 손등 위에 내 따뜻한 입김을 불어 줬다. 그리고 숙은 아무 말 없이 대문 안으로 들어섰고 그때 ‘숙이냐’ 라는 어머니의 말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렸다. 조금 후 두 여인의 몸이 방안으로 사라지자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내 고막을 때렸다. 그때 나는 별안간 집안으로 뛰어 들어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리고 심한 고독감을 느꼈다. 한참 동안이나 나는 숙의 집 대문 밖에 서서 찬 바람에 몸을 식힌 다음 정신을 가다듬고 부대를 향해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숙으로부터 느끼는 내 강한 애정을 조절하자. 그녀를 자주 방문하지 말자. 설사 그녀가 나를 사랑하고 우리 둘이 서로 깊이 사랑한다 하더라도 숙을 자유롭게 해 두자. 단순한 우정만으로 그녀를 대하자. 전쟁이 끝날 때까지 내 생의 내일이 안전 히 보장될 때까지 나는 그녀와 앞날에 대한 어떠한 약속도 하지 말자. 숙과 결혼한다는 것, 그것은 내겐 지나친 호강이며 또 야심일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숙의 장래를 위해 그녀로부터 나를 멀리하자.>

숙이란 이 여인을 알게 된 이래 그녀로부터 강한 저항할 수 없는 애정을 느껴온 나는 이상과 같은 말들을 일기장에 수없이 수없이 되풀이해 적었던 것이다. 오늘 아침 숙의 집에 들를 때까지, 어머니가 부엌에서 숙의 장래에 대한 책임을 내게 부탁할 때까지 나는 숙과의 장래를 약속할 생각을 갖고 있지 않았다. 숙이란 이 여인을 자주 만나지 말자 하면서도 저항할 수 없는 힘에 끌리어 나는 번번이 그녀를 방문했었다. 그러나 사랑의 고백이나 결혼 약속이란 경계선 앞에 나는 내 가슴 속에 타고 있는 기 강한 사랑의 불길을 지지하고 또 제지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 밤에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이 여인 앞에 내 양심의 고독은 두 손 들어 항복하고 넘지 말자는 사랑의 경계선을 넘어섰다. 나는 숙과 장래를 약속했다.

한 여인을 사랑한다는 것, 나는 20년 동안의 내 생애를 통해 이성에 대한 애정 비슷한 감정을 여러 번 느꼈다. 어릴 적에 학교 소녀 동무에게 각별한 호의를 주고 싶어하던 감정도 하나의 애정인지도 모른다. 농촌에서 동네 처녀들의 노래나 얘기를 들으며 밭에서 김매기를 좋아하던 당시의 내 심리 상태도 하나의 애정의 형태인지 모른다. 신애에 대한 나의 동정도 일종의 애정 감정이었을 것이다. 고향을 떠난 이래 혹은 거리에서 혹은 기차 안에서 혹은 전차 안에서 혹은 버스 안에서 심지어는 싸구려 술 한 잔을 친구들과 마시던 술집에서 또는 댄스홀에서 만난 수많은 여인들… 그녀들을 한 번 더 바라보고 싶던 내 충동도, 어쩌다 말이라도 한 마디 같이 하게 될 때 받은 기쁨도 애정 감정이라고는 할 수 있을 것이다. 또는 쌀쌀히 내 옆에 지나간 미지의 여인으로부터 이유 없이 느낀 외로운 감정, 이 모든 감정이 애정의 형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여튼 나는 이성에 대해 무감각한 사람이 아니고 한 여인을 사랑할 수 있는 애정의 힘을 충분히 갖고 있다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성으로부터 받은 내 감정을 표면화한 일은 없었고 <사랑>이란 이 말마디를 한 여인에게 고백해 본 일도 없었다. 이성에 대한 괴롭도록 심한 애정과 고독을 번번이 느끼고 또 가져 왔으나 <사랑>이란 이 말마디는 마치 내 생명처럼 단 한 번도 내 마음으로부터 떠난 일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 밤에 나는 지금까지 내 생명처럼 아껴 오던 <사랑>이란 이 말마디를 숙이란 여인에게 처음으로 썼고 그녀의 마음 속에 새겨 놓았다.

사랑합니다 란 사랑의 고백, 결혼합시다 란 장래에 대한 약속. 인류의 원조 아담이 하느님께서 자기 생의 반려자로 정해 주신 인류의 첫 여인 하와를 보자 <이는 내 뼈이며 이는 내 살이다> 란 인류의 첫 사랑을 노래한 이래 오늘까지 내 상상적 숫자를 초월하는 무수한 남녀들이 사랑을 고백했고 결혼해 왔다. 인류가 시간을 초월하여 사용하고 있는 허다한 말과 행동 중에 인류의 역사와 함께 시작한 사랑이란 이 말마디와 행동보다 더 오래고 더 흔한 것은 다시 없을 것이다. 사물의 가치는 흔하면 천해진다 한다. 높은 지능이나 명예나 영광이나 재산이나 건강이나 계급 등은 누구나가 다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런 것은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대상이 되고 있으며 귀한 대접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누구나가 다 할 수 있고 또 하는 이 사랑이란 말과 행동 만큼 귀한 것은 다시 없을 것이다. 위로는 대통령으로부터 아래로는 시정(市井)의 일개 필부에 이르기까지, 공자님의 삼강오륜을 설교하는 도학자로부터 거리의 불량배에까지, 성인으로부터 파렴치한 죄인에 이르기까지 누구나가 수없이 사용한 흔해 빠진 <사랑>이란 말을 내 생전 처음으로 숙이란 여인에게 했을 때 나는 남들이 단 한 번도 사용치 않았던 순수한 그야말로 일 점의 티 없는 막고 새로운 말을 발견하고 내 마음과 입을 통해 음성화시킨 듯한 장엄한 감정을 가졌다. 원조 아담이 자기 여인에게 ,이는 내 뼈이며 내 살이다>라고 사랑을 고백했을 때 그들에게 사랑의 사회가 형성되었고 또 새로운 생의 존재 양식이 시작되었던 것처럼 숙과 내가 서로 사랑을 고백했을 때 거기에는 우리 둘이를 위한 사랑의 사회가 형성되었고 새로운 또 하나의 생의 존재 양식과 생명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그리고 사랑한다는 내 사랑의 고백과 우리 둘의 사랑의 장래를 약속한 이 말마디는 비록 종이 위에 성문화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숙과 나의 양심과 마음 속에 영원히 새겨져 있어야 하며 우리 둘의 사랑은 남들이 하는 흔해빠진 사랑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불보다 더 뜨겁고 하늘보다 더 넓고 바다보다 더 깊고 물보다 더 맑고 꽃보다 더 아름답고 향보다 더 향기롭고 금보다 더 귀하고 산보다 더 높고 꿀보다 더 달고 공중에 자유롭고 행복하게 나르는 새들보다 더 자유롭고 행복한 사랑을 나는 숙이란 이 여인고 함께 합심하고 노력해 기어코 실현할 것이라고 자신만만해했다. 이런 생각을 하며 사막과도 같은 부대를 향해 캄캄한 밤거리를 걷고 있는 지금의 나는 사막을 향해 걷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낙원을 향해 걷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내가 숙을 사랑하는 한, 또 앞으로의 결혼을 약속한 나에게는 세상은 이미 사막이 아니었고 그 옛날 아담과 하와가 살았던 에덴 동산이 되었다. 나는 행복했다. “숙, 나는 숙을 사랑해” 하며 별이 총총한 겨울 찬 밤하늘을 향해 숙을 불러 보았을 때 숙이란 여인과 나를 합쳐 <우리>라고 불렀고 정신상 우리 둘이는 이미 남과 남이 아닌 하나의 결합체임을 알았다.

결혼, 그것은 남녀의 사랑의 결과로 나타나는 육체적 관계만을 뜻하지는 않으며 육체적 관계가 결혼생활의 시작은 아니라고 난 생각했다. 실인즉 정신적 윤리적 결합 없는 순 육체적인 남녀 결합은 <사랑>이란 이 말을 모독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랑이 주는 결혼에는 육체적 결합에 앞서 먼저 정신적 결합의 보증이 있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랑한다는 이 말마디를 숙에게 한 사실로서 내 이 몸과 이 마음은 내 것만이 아니고 숙의 것이기도 하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나는 내 몸을 잘 보살펴 숙을 행복하게 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 여인에 대한 책임 있는 보호 뿐만이 아니라 영혼의 구령 문제에 대한 신성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때 새로이 발견하고 막 맞이한 이 사랑의 세계에서 나는 애 인간 존재의 이유와 기쁨을 엄숙히 느끼기도 했다. 그리고 갑자기 어른이 된 듯한 강한 느낌을 가졌다.

그때 나는 인간은 사랑할 때, 또는 사랑에 대한 신성한 책임을 느끼고 이를 이행할 때 인감으로서 성숙하며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실인즉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의 사랑에 의해 창조된 인간은 사랑하기 마련이라고 한 숙이 말대로 인간은 사랑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 그리고 사랑 속에 자기의 지상 생명의 과업을 마치는 것이 인간의 길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사랑한다는 것, 그것은 바로 인간의 삶의 본질이기도 한 것이다. 만일 사람이 인간 삶의 본질인 사랑을 하지 않고 사랑 속에 자기의 지상 과업을 완수치 않는다면 그 사람은 자기 인간 존재를 거부하는 행위를 하는 것과 다름 없다고 생각했다. 사랑한다는 것, 그것이 인간의 삶의 본질이 되는 만큼 사랑은 삶을 뜻하며 삶은 또 행동 즉 건설을 뜻한다고도 생각했다. 따라서 우리는 사랑에게 하나의 삶을 부여해야 하고 이 사랑을 건설해야 한다. 사랑의 세계를 건설할 때 사람은 피곤이나 권태를 모르며 거기엔 땀과 용기와 기쁨과 희망만이 있고 그 사람은 일할 보람을 가질 것이라고도 생각했다. 일할 보람을 갖는다는 것, 그것은 바로 사는 기쁨을 갖는다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리고 또 사람은 일거리를 갖고 있을 때 굶어 죽지 않을 생계를 이루며 의, 식, 주의 실업자가 되지 않는 것처럼 사랑을 할 때 비로소 삶의 실업자가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사랑은 나에게 사랑하여야 할 한 여인, 건설해야 할 한 가정, 주 예수님 안에 구령되어야 할 한 영혼을 주었으며  나를 이들의 책임자로 삼고, 사는 보람을 가질 수 있는 많은 일거리를 주었던 것이다. 바로 이 사랑과 이 책임이 나를 인간으로서 성숙시켰고 또한 성숙한 어른으로 느끼게 했던 것이다.

아무튼 나는 지금 이 사랑의 세계의 주인이었다. 영원한 행복과 연결된 이 사랑의 세계의 주인인 나는 내 앞에 널려 있는 이 지상 세계의 온갖 영화를 준다 해도 나는 숙이 있는 이 사랑 세계와 바꾸지 않으리라 마음 먹었다. 숙은 내 우주이며 내 전체며 행복 자체이며 영원이기도 했다. 이런 일들을 생각하며 길을 걷고 있는 동안 어느덧 나는 부대에 도착했고 얼마 전에 숙에게 약속한 기도를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은 것을 알았다. 그래서 찬바람 속에 모자를 벗고 숙의 집을 향해 이마와 앞가슴과 양 어깨에 크게 십자성호를 긋고 <안녕> 한 마디 인사를 했다.

사무실 난롯가에 모여 앉아 잡담하기에 여념이 없는 내 친구들을 피해 내 방에 들어가 나는 숙과 나 사이에 일어난 사랑의 일대 사건을 기록하려고 일기장을 펼쳤다. 우선 일기를 쓰기 전에 눈을 감고 이 사랑의 사건을 처음부터 순서를 따라 정리해 보았다. 써야 할 내용이 너무 많았다. 숙과 나와 교환해 온 말마디 전부와 그간 내가 느낀 감상들을 모두 적는다면 소설 한 권이 되고도 남음이 있으리라 생각되었다. 나는 생각을 고쳐 이 다음 한가한 때 상세히 쓰리고 하고 우선 숙과 교환한 화제의 순서를 따리 이야기의 줄거리만을 적어 두기로 했다. 이야기의 줄거리를 다 적고 나니 어느새 새벽 세 시가 넘었다. 그러나 조금도 피로하지 않았다. 자리에 누워도 잠은 오지 않고 앞으로의 일에 대한 계획이 나의 모든 생각을 사로잡고 있었다.

 

 

 

 제16장

비밀의 선물

 

긴 초겨울 밤 눈 한 번 감아 보지 못한 채 나는 새 아침을 맞이했다. 날이 밝기 시작하자 나는 잠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뛰어나와 찬바람을 가슴 가득히 들이켰다. 이 아침의 찬 공기는 그 맛이 여느 때보다 한결 신선했다. 어둠 속에 자태를 보이기 시작하는 자연은 생전 처음 보는 것처럼 신기스러웠고 아름다워 보였다. 모든 것이 새롭고 아름답고 행복하고 힘 있게 보였다. 사랑은 내게 한 여자만을 발견시켜 준 것이 아니라 일상의 평범한 현상 속에 숨어 있는 자연의 새로움과 선과 미와 힘을 내게 발견시켜 주었다. 그리고 하루 밤쯤 잠 못 잤다고 피로해 할 내가 이미 아니었다. 어젯밤 찬 바람을 너무 쏘인 죽이 염려되어 그날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나는 숙의 집에 달려갔다. 숙의 십에 갔을 때 어머니는 부엌에서 점심 준비를 하고 계셨다.

“어머니, 숙이 좀 어때요?”

나는 어머니께 밤새 안녕하셨느냐는 인사를 올리기 전에 숙의 건강 여부를 물었다. 당시 숙은 내 생각의 전부였다.

“아니 이 사람아, 며칠 전에 감기로 앓은 애를 데리고 밤 늦게까지 산보한단 말인가? 철도 없지…”

농을 하시는지 화를 내시는지 알 수 없는 어조로 어머니는 내게 말씀하셨다.

“걷다가 보니까 밤이 늦었어요.”

나는 변명도 아닌 변명을 했다.

“집에 돌아오자 그 애는 자네하고 한 얘기를 내게 다시 하느라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고 나도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네… 요즘 아이들은 도무지 숨기는 것이 없어….”

어머니의 말씀은 이전처럼 명랑하고 재미있어졌다. 여자들은 말을 많이 한다고들 하지만 정말로 여자들 사이에는 비밀이 없을 만큼 말을 많이 하는구나 하고 나는 나대로 생각했다.

“내 아버지께서 편치 않으시다는 소식이 온지 며칠 되는데 내일이고 모레고 그 애를 데리고 시골에 다녀와야겠네. 그래서 하루쯤 더 푹 쉴 겸 잠자라고 했지. 아직도 세상 모르게 자고 있는 모양이야.”

가만히 문을 열고 방안에 들어가니 숙은 깊은 잠에 취해 있었다. 그녀는 아무렇게나 하고 있어도 예뻤다. 흐트러진 그녀의 머리카락은 그녀의 이마 한 쪽을 덮고 있었다. 나는 가만히 그녀의 머리숱을 만져 보았다. 보드라운 촉감을 받았다. 잠들어 있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니 한없이 사랑스러웠고 귀여웠다. 가만히 사알살 내 입바람을 그녀의 얼굴 위로 날렸다. 그녀의 이마를 더고 있는 머리숱이 하들하들 흔들렸다. 나는 혼자 미소 지었다. 그녀의 콧등에 좁쌀알보다 더 작은 땀방울들이 조랑조랑 열려 있었다. 한 없이 사랑스럽고 귀엽다. 가만히 입이라도 맞추어 주고 싶은 충동을 받았다. 그녀의 입술을 보니 아직 열이 있는 탓인지 어젯밤 잠을 잘 못 잔 탓인지 말라 있었다. 정말 내 마음이 안타까웠다. 그녀의 마른 입술을 물로 적셔 주고 콧등의 땀을 닦아 주고 싶었으나 그녀가 잠을 깰까 봐 그만 두었다.

그녀의 머리맡에는 <부활>이라고 지금 생각되는 일본어로 번역된 톨스토이 소설 한 권이 놓여 있었다. 나는 이 소설을 좀 읽다 만 일이 있었으나 이 소설에 대해 여러가지 얘기를 들은 바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일기장 같은 공책도 두 권 놓여 있었다. 별안간 그 일기장을 읽어 보고 싶은 호기심이 끓어 올랐으나 그만 두었다. 그녀는 여전히 깊은 잠에 들어 있는 듯 숨을 쌕쌕 쉬며 잠자고 있었다. 잠자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니 철 없는 소녀만 같아 보였다. 까다로운 말을 하던 어젯밤의 성숙한 숙처럼 보이지 않았다. 숙을 떠나 부대에서 일하고 있을 때 고의적이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혹 가다 숙에 대한 나쁜 생각을 하게 될 때가 있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숙의 육체에 대한 불순한 생각을 하게 될 때가 있었다. 그러나 숙 옆에 앉아 그녀의 말을 듣든가 그녀를 바라볼 때는 도부지 그녀가 귀엽기만 했다. 그리고 그녀에 대한 불순한 생각은 전연 일어나지 않았다.

잠자는 그녀를 바라보고 있으니 그녀가 앞으로 내 아내가 될 애인이 아니고 내 누이동생이었다 하더라도 좋다는 생각이 후딱 내 머리 속을 지나갔다. 그녀의 머리맡에 있던 소설을 들고 읽지도 않으며 한 장 두 장 넘기고 있으려는 숙이 눈을 떴다.

“어머나, 누구라고?”

그녀는 놀랐다.

“나야. 몸이 불편해? 그것 봐. 어젯밤 찬바람을 너무 많이 쏘인 탓이야.”

“아냐, 아무렇지도 않아. 그냥 낮잠 잔 거야.”

잠에서 아직 맑아지지 않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며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 나보고 밖에 나가 10분만 있다가 들어오라고 했다. 방에 다시 들어와 보니 그녀는 잠자리에서 일어나 앉아 있었다. 낮잠의 탓인지 그녀의 얼굴은 좀 부어 있는 것 같았다. 흐트러진 머리를 빗질하며 그녀는 느닷없이 내게 말했다.

“태오씨는 깍쟁이야.”

“또 공박이 시작되는군… 어떤 점에서 내가 깍쟁이야?”

나는 숙의 마음을 알 길이 없었다.

“꿈 속에서 나를 본 일 있어?”

“아니.”

“난 몇 번 꿈 속에서 태오씨를 봤지.”

“그래?…. 그런데 난 단 한 번도 숙을 꿈에서 보지 못했어.”

“정말?”

“정말이야.”

“섭섭한데.”

숙은 정말 섭섭한 표정을 지었다.

“왜?”

“왜라니… 나에 대한 꿈을 꾸지 않았다는 것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 증거야.”

“꿈 속에서 숙을 만나보고, 현실화할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숙과의 사랑을 꿈 속에서나 실현해 보력 얼마나 바랬는지 몰라. 그건 그렇고 방금 꿈 속에서 나를 만났어?”

무슨 말을 하나 건너다 보았더니

“꿈 속에서도 나를 놀려 주고 골탕을 머이니 말야.” 하며 숙은 웃었다.

“정말 꿈 속에서 나를 만났어?”

“그럼. 어딘지 모르는 벌판을 방향 없이 둘이 걸으며 태오씨는 나를 놀려 주지 않겠어… 그러다가 깜짝 놀라 깨어났지. 그리고 곧 잠이 또 들었는데 이번엔 나를 뒤에 두고 자기 혼자 달음질쳐 가잖아. 태오씨를 따라가려고 아무리 뛰어도 여자의 걸음이 남자의 빠른 걸음을 따를 수가 있어야지…. 이렇게 나를 놀려 주고 골탕만 먹이니 깍쟁이가 아냐?”

숙은 여전히 웃으며 말했다.

“아까 숙을 보고 싶어 부대에서 여기까지 뛰어오는 나를 꿈에서 본 모양이로군…. 내가 뛰어 달아나면 어디로 가겠어? 숙에게로 오지…” 하며 나는 숙의 손을 잡고 손등을 몇 번 가볍게 두들겼다. 그때 숙이,

“태오씨는 어젯밤 잠 잘 잤어?” 하고 말했다.

“눈 한 번 감아 보지 않았어.”

“거짓말!”

“농이라도 난 거짓말이란 그 말은 듣기 싫어.”

“그럼 잠자지 않고 뭐했어?”

“어지 우리에게 일어난 일대 사건을 일기에 정리하다 보니 날이 밝지 않겠어?”

“지독하군… 실은 나도 일기를 쓸까 하다 그냥 잤지.”

“난, 숙의 일기 다 읽어 봤어.”

나는 웃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정말? 내 일기책이 어디 있는데 그것을 읽어 봤다구 그래?”

“여기 있잖아. 누구를 보고 싶으니, 어쩌구 저쩌구 하는 글을 다 읽어 봤지… 재미있던데.”

나는 그녀의 일기책을 집어 주며 알했다. 그러자 숙은 일기장을 받으며,

“남의 것 함부로 읽으면 나쁜 사람이야.”

“내가 봐서는 안 될 비밀이 상당히 많이 있더군. 내가 다 알지…”

“듣기 싫다는 그 거짓말이란 말을 사용 안 하려도 부득이 사용하게 돼. 멀쩡한 거짓말만 하니까 말야. 그래 무슨 비밀을 일거 봤는지 말해 봐.”

“도둑이 제발 저리다는 옛말이 있지… 아무래도 비밀이 있는 모양이지.. 악착같이 덤비는 것을 보니까…”

“제발 그만 놀려. 내 일기책 갖다 봐도 상관 없어……” 하며 숙은 자긴 일기책을 내게 주었다. 나는 숙이 주는 일기책을 받아 들고

“그럼 비밀을 하나 찾아낼까?” 하고 말했다.

“어디 찾아 봐. 만약에 내 비밀을 찾아내지 못하면 내게 거짓말한 데 대해 사과해야 돼.”

나는 그녀의 일기책을 펴 들고 일기에도 없는 글을 생각나는 대로 읽었다.

<서기 1949년 4월 28일 맑음. 마음 태우고 기다리던 그의 편지를 받았다. 내 마음 속에서 내게 냉정하던 그를 보고 울고 또 울었다. 이 꿈에 대한 불길한 예감이 내 생각을 사로잡아 나는 학교에 가서도 도무지 공부를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정신 없는 사람처럼 먼 산만 바라 보았다. 그런데 그의 뜨거운 사랑의 편지를 받으니 내 어찌 기쁘지 않으랴! 오늘만 해도 벌써 나는 다섯 번째 그 편지를 읽었다. 읽으면 읽을수록 그의 사랑은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나는 그이를 사랑해… 행복한 나…>

“자 어때, 이것이 내게 대한 비밀이 아니겠어?” 하며 나는 웃었다.

“비밀이 모두 그것 뿐이야?”

숙도 웃었다.

“그럼 계속해서 읽어 볼까?”

“어디 읽어 봐.”

“아무튼 숙은 상당히 무정한 사람이야.”

“왜?”

“자기의 현재 애인 앞에, 지난날의 아니, 지금도 사랑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애인에 대한 일기를 읽으라니 그건 너무 무정하잖아… 그러나 내 계속해 읽지.”

나는 또 다음과 같이 일기에 없는 것을 생각나는 대로 읽었다.

<서기 1949년 5월 10일 맑음. 화창한 봄 날씨다. 그이를 사랑하는 내 마음처럼! 사랑과 더불어 맞이하는 올해의 봄철은 내게 여러 모로 깊고 행복한 뜻을 주었다. 그이를 생각하며 바라다보는 이 자연의 봄은 여느 때 없니 아름다워 보였다. 오늘 아침부터 나는 마음이 들뜨고 있었다. 왜냐하면 오늘 오후에 그이를 만나 함께 교외에 소풍 가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그이 옆에서 그이의 믿음직스럽고 사랑스러운 말을 들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내 심장은 기쁘고 즐거워 마구 방망이질을 했다. 그이를 만나기 위해 하는 수 없이 부모님께 친구네 집에서 숙제를 하겠다고 거짓말을 했다. 사랑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려서는 안 된다. 그이를 위한 사랑 때문에 하게 되는 거짓말은 거짓말이 아니다. 사랑에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그이를 만났다. 우리 둘이는 서로 웃었다. 웃음 속에 우리는 마음과 마음, 사랑과 사랑을 교환했다. 언젠가는 수백 명의 청중을 울려 주던 위대한 공산당 선전부장인 대웅변가이며 지금도 내 귀에 쩡쩡 울려오는 힘 있고 남성적인 음성을 가진 그였으나 내게는 항상 양처럼 순했다. 나는 그이를 사랑해…. 우리 둘이는 꽃동산에 왔다. 따뜻한 양지쪽 벤치에 앉아 손과 손을 마주 잡고 사랑의 속삭임을 소곤소곤…> “자 어때?”

나는 숙의 일기장을 방바닥에 놓고 웃어 보였다.

“아무튼 상당한데… 아무래도 자기가 연애 경험이 있는 모양이지… 멋지게 연애소설이나 하나 써 봐.”

그녀도 따라 웃으며 내게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연애소설이나 하나 써 볼까 하고 숙에게서 느끼는 내 애정 감정의 동태나 우리 둘이 주고 받은 일체의 말들을 일기장에 적어 두었어.”

“우리 둘이의 사랑이 순수하고 어젯밤 둘이 말할 때는 감동적이었다 하더라도 우리 둘의 사랑의 역사는 연애소설의 주제가 될 만한 것이 아직 못 된다고 생각해.”

“우리의 사랑과 연애소설에 나오는 사랑과 어떻게 구분해?”

“연애소설이 그 어떤 구체적 사실을 주제로 했다 하더라도 소설에 나오는 사랑의 역사에는 굴곡이 있어야만 해. 그래 태오씨는 우리 둘을 포함한 젊은 남녀들이 서로 사랑할 때 소설에서 읽어 보는 그대로의 사랑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

“이 넓은 세상에 살고 있는 수 없는 젊은 남녀들 중에는 소설 같은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 연애소설이란 것이 반드시 비극을 전제한 <안나카레니나>나 또는 <로미오와 줄리에트> 같은 비극이 아니라도 되잖아. 순수하고 단순한 사랑이야기도 일종의 연애소설이 될 수 있잖아.”

“그러나 우리 둘의 사랑을 소설화하려면 우리 둘의 사랑의 과정이 너무 짧고 또 취급해야 할 사건들이 적어…. 소설화하려면 거기엔 적어도 심각한 장면이나 울음이나 웃음이나 기쁨이나 슬픔 등 복잡한 사건들이 있어야 해. 그리고 연애소설이라는 것은 흔히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비극을 주제로 삼고 있잖아?”

“어제 숙이 울고 웃지 않았어? 그것만으로도 재료가 충분하지 않을까?”

나는 웃으며 숙에게 말했다.

“어제 내가 울었다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숙이란 여인이 내 앞에서 울었다>라고 써 봐. 그것은 싱거운 말이 되지.”

그녀도 따라 웃었다.

“내가 만일 그것을 쓰게 되면 단지 <숙이란 여인이 내가 놀리니까 울었다>라고 만 쓰지 않고 왜 숙이 울었는지를, 숙이 울게 된 심리 작용과 주위 환경과 또 울음의 멀고 가까운 원인 등을 잘 분석해서 쓰지.”

“그럼 어제의 내 심리적 변화 등을 일기장에 썼어?”

“아직 세밀히 쓰지 않고 요점만 대강 써 놓았지. 오늘 오후이고 내일이고 시간 있을 때 다시 상세히 쓸 예정이야.”

바로 그때 어머니께서 밥상을 들고 방으로 들어오셨다. 그리고 웃으시며

“어제 밤처럼 또 싸움을 하는 모양이지? 말소리들이 높은 것을 보니…” 하고 말씀하셨다.

“엄마는 공연히 우리들이 싸움한다고 해. 글쎄 태오씨가 연애소설을 하나 쓰겠대. 그래서 지금 그 문제를 토론 중이었어.”

숙은 변명 아닌 변명을 했다. 그리고 나는 함께 점심식사를 했다. 사랑하는 사람은 식욕도 좋은지 방금 부대에서 밥 한 사발을 먹고 왔으나 어머니가 주시는 밥 한 사발을 또 깨끗이 비웠다.

“시골에 다녀오신다는데 언제 내려가세요?”

식사하며 나는 어머니께 물었다.

“글쎄, 내일이나 모레쯤 갈까 해 우선 집을 지켜 줄 사람을 구해 놓고 가야지. 연세 많으신 아버지께서 병환이 중하신가 봐. 돌아가실 연세야 되었으나 이 겨울이 지난 다음에 돌아가셨으면 좋겠어.”

식사가 끝나자 나는 곧 부대로 돌아왔다. 숙이 시골에 내려가면 며칠 동안 그녀를 볼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이 며칠 동안이 몇 년이나 되는 듯 느껴졌다. 그 다음 날 일과 후 별로 부대에서 할 일이 없어 혹시 숙이 아직 안 내려갔을까 생각하고 그녀를 찾아갔다. 그리고 숙에게 농촌생활을 할 때 틈틈이 쓴 몇 권의 내 일기장을 주려고 들고 갔다. 앞으로 농촌생활을 하게 될지도 모르니 우선 단편적인 농촌생활에 대한 지식에 불과하나마 내 일기를 통해 그녀에게 농촌생활을 인식시켜 주고 싶어서였다. 숙의 집에 와 보니 숙은 머리에 수건을 쓰고 행주치마를 허리에 두르고 자기 옷이 아닌지 몸에 잘 맞이 않는 헌 흰치마 저고리를 입고 부엌에서 저녁밥을 짓고 있었다. 숙은 나를 보자 “어머나” 하며 기쁨 속에 놀란 듯했다. 나는 몸에 맞지 않는 헌 흰 치마 저고리를 입고 있는 숙의 몸가짐이 우습기도 하고 한편 대견스럽기도 해 그저 웃고 있었다. 그러자 숙은 얼굴을 붉히며 머리에서 수건을 벗고 허리에 두른 행주치마를 풀었다. 그리고

“지금 내 이 꼴이 너무 우습고 흉하지…. 할머니 같지 않어?”

말하며 웃었다. 여자들이란 남들을, 특히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기쁘게 해주려는 세심한 관심을 갖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여자들이 옷차림이나 화장에 대해 상당히 마음을 쓰고 있는 것도 결국 남들의 시각이나 감정을 기쁘게 해 주려는 그들의 본성적 성질의 하나 인지도 모른다. 지금 숙이가 자기 옷차림을 본능적으로 염려하고 있는 것도 결국 나를 위한 것이 아닐까 나는 생각하고 어디까지나 나를 기쁘게 해 주려는 숙을 무한히 고맙게 여겼다.

“아니 조금도 우습지 않어. 숙은 아무렇게나 하고 있어도 아름다워. 오히려 지금 그 옷차림이 가정부인다와 더 좋아.”

나는 숙에게 부드럽게 말해 주었다. 그리고 부엌 문지방에 앉아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본래 담배를 피우지 않던 나였으나 요즈음 한두 대씩 피우기 시작했다. 그때 숙은 성냥을 그어 내 담배에 불을 붙여 주며

“어머니는 시골에 내려갈 준비하러 밖에 나가셨는데 곧 돌아오실 거야. 내가 봐도 아무래도 이 옷차림은 흉해. 부엌 일 끝나면 내 옷 갈아입을 테야.”

명랑한 표정이다.

“시파 시퍼” (감사하다는 소련 말)하며 나는 기뻐 웃었고 숙도 즐거워 웃었다.

“오늘 숙에게 줄 선물 하나 들고 왔어.”

“무슨 선물?”

숙은 밥 짓던 일손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다.

“앞으로 농부의 아내가 될 숙에게 가장 적절한 선물. 어디 알아 맞춰 봐.”

“글쎄…. 그게 뭘까? 모르겠는걸.”

“농촌에 있을 때 틈틈이 내가 쓴 일기책.”

“아니 일기장이 선물이야?” 하며 그녀는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보다 더 좋은 선물이 이 세상에 따로 있을 것같아? 이 몇 권의 일기책은 내 소년시절로부터 군에 입대할 때가지 쓴 건데 있는 그대로의 내 생활이 들어 있는 거야.”

“그 일기책들을 내게 맡기면 내가 읽어 봐도 좋단 말야?”

“물론 읽으라고 주지, 보관하라고 줄까…. 시간 있는 대로 읽어 봐. 글씨를 막 써서 읽기 힘들겠으나… 그러나 농촌생활에 대한 단편적인 지식이나마 내 일기를 읽으면 알 수 있을 거야. 내가 일하고 본 농촌생활이 무엇이었는가를 숙이 알 수 잇지. 그리고 앞으로 어머니가 될 사람에게도 도움이 될지 몰라. 이 일기 속에는 나의 성장 과정이 기록되어 있을 테니까. 그 외에도 남성에 대한 숙의 상상적 지식과 구체적인 내 생활 과를  비교해 봐도 좋아.”

“벌써부터 아내 교육, 어머니 교육을 시키는군…..” 하며 숙은 웃었다.

“아무렴. 부지런히 배워야지. 그런데 참 어저께 농촌소설 쓰고 싶다고 말했지. 내 일기를 주제로 삼아 마음대로 하나 써 봐. 난 연애소설 쓸께….”

나도 웃었다. 숙과 함께 있으면 말이 쉴 새 없으며 나는 다변가가 된다.

“뭣 좀 도와 줄까?”

“준비할 건 다 준비해 놓았어.”

“밥 짓는 것이 이번이 몇 번째야?”

“몇 번 되지.”

“그럼 이젠 밥은 안 태우겠군 그래.”

이렇게 말하며, 행주치마를 두르고 밥 짓고 있는 숙을 보니 한없이 그녀가 기특하게 보였다. 숙은 어제 낮에 콧등에 구슬땀을 흘리며 낮잠을 자던 귀엽기만 한 소녀가 아니고 훌륭한 가정부인으로 보였다. 그리고 숙은 지금 내 아내로서 자기 할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나는 기쁘고 행복해 내 입가에는 웃음이 꽃피고 있었다.

“왜, 웃기만 하고 있어? 아무래도 이 옷차림이 우스운 모양이지…  이 다음에 나보고 할머니라고 놀리지 말어.”

“아냐, 숙은 이젠 콧등에 땀을 흘리며 잠자던 귀여운 소녀가 아니라 훌륭한 가정부인으로서 자기 할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기뻐서 웃어.”

“이제부터는 어머니께서 부엌 일과 빨래 일을 내게 가끔 맡기시겠대.”

“무엇이든 부지런히 배워야지.”

“여학생 시절에는 빨래나 부엌 일을 하기 싫어 여러가지 핑계를 대고 피해 왔는데 이제부터는 그런 일이 자꾸 하고 싶어. 재미있을 것 같아. 이 다음에 나 살림을 멋지게 꾸며 볼 테야.”

사랑은 나에게 살아 존재하는 이유와 가치와 애인 즉 아내의 행복과 구령에 대한 깊고 무거운 책임감을 가르쳐 주고 느끼게 했듯이 숙에게는 여성으로서의 천부적 사명인 가정 일에 대한 기쁨을 인식시켜 주었던 것이다. 아내에 대한 남편의 사명은 자기 아내의 삶의 안전을 지켜 주며 행복을 보장해 주는 데 있다고 본다면, 남편에 대한 아내의 사명은 남편과 가정을 보살펴 주는 데서 오는 봉사적 희생을 기쁨으로 갖는 것이 아닐까. 난 그때 생각해 보았다. 숙은 여전히 말을 계속했다.

“8.15 해방 이전에 우리 집에 식모 언니가 한 사람 있었어. 그 언니가 집안 일을 전부 했지. 그런데 해박과 함께 공산주의 정부가 수립되자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부르조아라고 우리 집을 욕하고 비난하므로 그 언니는 부득이 우리 집을 떠나게 됐어. 그래서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 부엌 일도 몇 번 했지. 부엌 일은 실은 하기 좋은 일은 아니지만 요즘은 그런 이를 하고 싶어졌어. 그리고 오늘 아침 어머니가 말씀하시는데 가정에 있어서의 남편들의 역할이란 가정을 보호하고 가족에게 안전감을 갖게 해 주는 것이래. 그리고 아내들의 임무란 피로한 하루의 일을 끝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남편에게 위로와 함께 힘과 휴식과 가족적 기쁨을 주는 것이래.”

나는 이 같은 숙의 말을 들었을 때 커다란 기쁨과 행복감을 느꼈다. 그때 나는 나에게 등을 돌리고 열심히 밥짓고 있는 숙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숙, 나 좀 봐.”

“왜?” 하며 그녀가 내게 얼굴을 돌렸을 때 그녀는 나에게 조용하고 행복한 미소를 지어 보였으나 나는 그녀 두 눈에서 몇 방울의 눈물을 발견했다. 그때 나는 일어나 그녀의 곁에 다가서 그녀의 머리를 내 두 손으로 잡았다.

“숙, 지금 울었어?”

“아니, 우는 것이 아니야. 방금 찌게 국물 묻은 손으로 눈 등을 만졌더니 눈물이 나.”

“내 눈물을 닦아 줄까?”

“응. 내 손은 지게 국물이 묻어서… 눈물 좀 닦아 줘.”

나는 내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두 눈에 서린 <이슬>을 닦아 주었다. 내 얼굴 바로 밑에 두 눈을 감고 조용히 미소 짓고 있는 그녀의 얼굴은 한없이 귀엽고 아름다웠다.

그때 문득 그녀에게 키스하고 싶은 강한 충동을 받았으나 참았다.

“숙, 숙의 얼굴은 참 예쁘고 귀여워… 나는 지금까지 나에게 무한한 기쁨과 사랑의 신비를 주는 숙의 얼굴처럼 아름다운 얼굴을 만져 보지 못했어.”

“태오씨의 얼굴도 인상적이야. 나에게 커다란 신뢰감을 주는 태오씨의 얼굴을 나도 무척 좋아해. 그런데 지금 몸이 피곤하지 않으면 장작 좀 뻐개 줄래?”

이윽고 나는 숙의 집 안마당에서 장작을 뻐개기 시작했다. 숙은 가끔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그녀가 나를 보면 더욱 신나 장작을 뻐갰다. 잠시 후 나는 숙을 좀 놀래 주고 싶은 짓궂은 생각을 했다. 그래서 손수건으로 오른쪽 눈을 가리고 숙을 향해 고함을 쳤다.

“숙, 사람 살려 줘. 눈알이 하나 빠졌어.”

“뭐, 뭐라고?”

숙은 부엌에서 뛰어나와 내 앞에 섰다.

“눈알이 하나 빠졌다니까 그래….”

“어떻게 하다 눈을 다쳤어?”

“장작을 뻐개는데 나무쪽이 눈에 튀어 들어 눈알을 뽑아갔어…”

그때 나는 진짜로 눈을 다친 사람처럼 몸을 비비 틀며 아파했다. 숙은 진짜로 내가 눈을 다친 줄 알고 있는 성싶었다.

“그건 내 탓이야. 태오씨를 가만히 앉아 쉬게 할 것을… 공연히 일을 시켰어. 그런데 이렇게 있을 것이 아니잖아….. 빨리 병원에라도 가야 되잖아…”

숙이 완전히 내 장난에 속은 줄 알자 나는 손수건을 눈에서 떼며 웃기 시작했다. 그대 숙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 나를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숙, 장난이야, 숙을 좀 놀래 주려고 장난을 했어.”
“뭐? 장난이었다구?”

“응, 장난이었어. 성한 내 두 눈을 봐.”

이와 같이 말하며 나는 웃었다. 그리고 마루에 와 앉았다. 숙도 내 곁에 와 앉았다.

“태오씨, 장난이 너무 심해요. 난 태오씨가 정말 눈을 다친 줄 알고 있었어요. 그것이 장난이었기에 다행이지… 참말이었다면…. 아직까지 심장이 마구 뀌어…”

그래? 심장이 뛰어 달아나면 어떻게 해? 심장이 뛰어 달아나지 않도록 빨리 붙잡아.”

이렇게 말하며 나는 무의식 중에 숙의 가슴 위에 손을 갖다 댔다. 그때 그녀는 마루에서 벌떡 일어나 정색을 하고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숙의 엄숙한 표정을 보자 그녀에게 좀 지나친 장난을 했다는 것을 깨닫고 나도 웃음을 멈추었다. 우리 둘 사이에 이상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는 것을 마음 속에 느꼈을 때 다행한 일은 부엌에서 밥 타는 냄새가 났다. 숙은 아무 말 없이 부엌으로 뛰어갔고 나도 그녀의 뒤를 따라 뛰어갔다. 숙이 밥솥 뚜껑을 열었을 때 밥 타는 냄새가 진하게 코를 찔렀다. 나는 아궁이의 불을 빨리 옆 아궁이로 옮겼고 나머지 불을 껐다.

“아직 밥 짓는데 견습생이군.”

내가 웃으며 말하자 숙은 여전히 성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태오씨, 장난이 심해요. 그래요. 밥 탄 것이 누구 죄인 줄이나 아세요?”

“죄는 누구 죄야… 불 놈의 죄지.”

“아니 이렇게 능글맞게 굴기에요?”

“능글맞긴… 지금 나는 진리를 말하고 있는 중이야. 그래, 아궁이에 있는 불이 밥을 태웠지 누가 밥을 태웠단 말야?”

“더 이상 말 안 할래.”

“화났어?”

“화났어요. 하여튼 태오씨 장난이 너무 심해요.”

“숙이 화내면 더 이상 그런 장난 안 할께.”

얼마 후 어머니께서 돌아오셨고 우리 셋은 저녁식사를 같이 했다. 식사 후 어머니께서는

“자네 약 한 시간 동안 집에 남아 있을 수 있겠나?”

내가 물었다.

“왜요?”

“시골에 내려가 있을 동안 집 봐 줄 사람을 데리러 가야겠는데 약 한 시간 후에 돌아옴세.”

어머니께서는 다시 밖으로 나가셨다. 숙과 나는 지금 내가 군인이란 현실적 의식을 떠나 한 여인의 남편으로서 가정생활을 하고 있다는 행복감에 취해 있었다. 숙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가정생활이 퍽 재미 있을 것 같아.”

숙도 행복감에 취해 있는 것일까.

“어저께 숙이 말한 것처럼 인생의 보람과 기쁨을 위로부터 받은 것을 보관만 하고 소비하는 데 있지 않고 작은 것이나마 내 것을 가지고 하나라도 창조하고 건설하는 데 있다고 말하잖았어. 이처럼 맨주먹으로 꾸며 나갈 우리의 가정이 바로 그 건설적인 것이 아닐까 생각해.”

숙은 내 말을 조용히 들으며 부뚜막 위를 행주질하고 있었다. 그때 별안간 숙에게 장난을 하고 싶은 생각이 또 들었다. 그래서 찬장을 정리하는 척하고 손가락을 찬물에 찍어 숙의 옆 얼굴을 향해 몇 방울 던졌다.

“아얏!”

숙은 자기의 물 묻은 손을 뺨에 갖다 대며 내게 얼굴을 돌렸다.

“그게 뭐에요? 뭣을 내게 던졌어요?”

숙은 놀란 표정을 하고 내게 물었다.

“찬 물방울이야” 하며 나는 숙의 놀란 표정을 재미 있게 보고 있었다.

“하여튼 잠시도 나를 가만히 안 두는구먼.”

숙은 내게 곱게 눈을 흘겼다.

우리 둘은 서둘러 설거지를 끝냈다. 나는 방으로 돌아왔고 숙은 자기 할 일이 남아 있다고 하며 밖에 남았다.

그녀의 책상 위에 널려 있는 책 한 권을 들어 읽지도 않으면서 한 장 두 장 넘기고 있었다.

 

 

 

 

제17장

달빛의 흰 얼굴

 

한참 후 숙은 싱글벙글 웃으며 방에 들어왔다.

“일 다 마쳤어?”

아무런 대답 없이 그녀는 내게 다가오더니 날름 자기 두 손을 내 뺨에 갖다 댔다. 그때 나는 내 두 뺨에 불덩어리가 닿는 듯 했다.

“아 뜨거워. 웬일이야?” 하며 그녀의 손을 잡자 숙은 깔깔 웃기만 했다. 실은 숙의 두 손이 불덩어리처럼 뜨거운 것이 아니라 얼음처럼 차가왔다.

“난 불덩어리가 뺨에 닿은 줄 알았더니 얼음처럼 찬 손이었군 그래.” 하며 그녀의 두 손 위에 내 따뜻한 입김을 불어 주었다. 그때 나는 숙의 얼음같이 찬 손을 쓸어 주며 뭐라고 딱 잘라 말할 수 없는 기쁨이라 할지 행복감이라 할지 이름 모를 즐거움을 느꼈다. 숙을 떠나 있으면 섭섭하고 외롭고 숙과 같이 있으면 즐겁고 또 그녀의 손이라도 만지면 격한 기쁨을 갖게 된다. 그리고 자꾸 숙의 손을 만지고 싶어진다. 그때 나는 사랑이란 두 남녀의 자주 있는 접촉에서 생겨 상호 동정, 이해, 우정, 존경, 신뢰의 과정을 통해 육체적 접촉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애인으로서의 사랑을 결론지으며 부부로서의 새로운 형태의 사랑의 출발인 성적 관계라는 사랑의 개화를 갖게 되고 부부 사랑의 결실인 자녀를 갖게 되는 이 과정이 사랑의 정상적 과정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둘이 같이 벽에 등을 기대호 앉았다. 그때 숙은

“오래간만에 부엌 일을 했더니 피곤해” 하며 자기 머리를 내 어깨에 기대었다. 숙의 머리카락이 내 뺨에 닿아 간지럽혔다. 내 손 안에 있는 숙의 손은 여전히 차다.

“왜 손이 이렇게 차지?”

“태오씨를 혼내 주려고 일부러 물기 있는 손을 찬 바람에 한참 쏘였지.”

웃으며 숙이 말했다.

“이런! 남을 혼내 주려고 그런 맹꽁이 같은 짓을 해. 감기라도 또 들면 어떻게 하려구.”

“아까 내게 찬물을 뿌렸잖아…. 그래서 복수를 하려고 일부러 그랬지…”

숙이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난 숙이 현명한 여자인 줄 알았더니 맹꽁이야. 맹꽁이. 자기 애인을 골려 주고 혼내 주는 것도 재미 있는 일이지만 그래 그것을 하기 위해 자기 몸에 해로운 짓을 한단 말야? 그러지 않아도 얼마든지 <아내다운 지능>을 활용하며 그보다도 고상하고 재미 있는 골탕을 남편에게 줄 수도 있을 것 아냐?”

“남편을 골탕 먹이는 그 ,아내다운 지능>을 내게 좀 가르쳐 줘 봐.”

“그건 자기가 생각해야지. 내가 그 골탕을 미리 알게 되면 재미 없을 것 아냐. 난 숙을 얼마든지 골탕 먹일 수 있어.”

“큰 소리 치지 말고 그것 좀 가르쳐 줘 봐. 태오씨가 말하는 대로 복사하지 않고 응용할 테니…”

“싫어. 누가 자기가 골탕 당할 것을 남에게 가르쳐 준담.”

“그럼 좋아. 오늘 밤에 찬물에 목욕하고 내일 앓아 누워 있으면 태오씨가 나를 간호해 줄 것 아니야…”

숙은 철 없는 소녀처럼 말했다.

“그런 짓 하면 숙은 진짜 맹꽁이야.”

“사람들이 어떤 이 보고 자꾸 바보라고 말하면 진짜 바보가 돼 버리는 것처럼 나보고 자꾸 맹꽁이라고 하면 나도 진짜 맹꽁이가 될 테야. 내가 맹꽁이가 되는 것이 좋아?”

“자기 이인이 맹꽁이 짓 하는 것을 좋아할 사람이 이 세상에 어디 있어. 그럼 다시는 그런 말 안 할께.”

“실은 말이야. 내가 손을 일부러 얼린 것이 아냐. 설거지 한 손으로 빨래를 챙겼더니 그새 손이 얼었어.”

“그럼 그렇겠지.”

내 말이 끝나자 갑자기 숙은 자기 손으로 또 내 뺨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이번엔 깔깔대며 웃고 있었다.

“갑자기 정신이 돌았나 왜 이렇게 웃어?”

“어저께 태오씨가 부처 같다고 말했지?”

“그래서?”

“그런데 말야, 수학여행 때 본 그 부처상이 아주 인상적이었어. 둥글둥글하고 복스러워 보였고 인자하게도 보였고, 또 성실하고 믿음직스러워 보였지. 그때 동무하고 둘이서 그 부처님한테 반해 남몰래 부처님의 뺨을 몇 번 쓰다듬은 일이 있었지.”

“아니… 하여튼 여자들이란…”

“여자들이 어떻단 말이야?”

“더 말 안 할 테야… 하여튼 여자들이란… 아니 그래 금녀(禁女)의 부처님 뺨을 쓰다듬어 주었단 말야? 몹쓸 사람들 같으니…”

“그러니까 지금 그 일을 생각하면 우습잖아… 중들이 우리들을 볼까 봐 남몰래 후딱 몇 번 반들반들한 부처님 뺨을 만져 봤지. 그리고 아까 방에 들어올 때 그 부처상이 태오씨 같다는 생각이 별안간 나서 태오씨 뺨을 만져 본 거야.”

“하두 깔깔 웃기에 난 또 무슨 신기한 일이나 생긴 줄로 알았지… 그런데 그 부처상이 살아서 다행한 일이지…”

우리 둘은 손을 마주잡고 한참 웃었다.

“그런데 말야, 여자들이 남자들을 볼 때 남자들의 모습에서 미와 추를 식별할 수 있어?”

“왜?”

“나에겐 모든 남자들이 그 놈이 그 놈처럼 보이고 용모상으로 봐서 잘난 놈도 못난 놈도 없는 성싶어. 그러나 내가 여자들을 볼 때는 확실히 미와 추를 구별할 수 있지. 그리고 많은 군인 친구들 중엔 유독 내 마음을 끌고 우정을 나누고 싶은 사람들이 따로 있기는 해. 그러나 그 친구들이 용모가 잘나서가 아니라 그들이 지니고 있는 교양이라든지 성실이라든지의 인간됨이 내 마음을 끌어. 그런데 여자들을 대할 때는 우선 용모의 아름다움이 먼저 내 시선을 끌고 말아. 교양이나 기타의 것은 제2차적 문제가 돼. 용모가 아름다운 데다가 높은 교양과 지식의 향취마저 갖고 있다면 그런 여자 앞에 무조건 항복하고 싶지.”

“여자들에게도 모든 남자들이 똑같이 보이진 않아.”

“그럼, 어떻게 보여?”

“각 사람의 사람 보는 취미에 따라 다르겠으나 나에겐 우선 용모와 풍채가 훤하고 시원스럽고 몸도 큼직하고 건강하고 힘 있고, 의지가 강한 정신적인 인상과, 너그럽고 성실하고 믿음직스러운 인상을 주는 사람이 내가 보는 남자형이지. 그리고 제2차적으로 알 맞는 교양과 넉넉한 지능만 갖고 있으면 사회적 지위나 재산 등은 문제 외의 것이야.”

“거기엔 아름답다 란 형용사가 없군 그래.”

“미남이란 말은 어색하지 않아도 아름다운 남자라 하면 어감이 흉하지 않아?”

“여자들도 남자 보고 미남이란 말을 사용하나? 남자들이 여자 보고 미녀라 하듯이….”

“그럼. 신수가 훤하고 몸집이 말쑥하고 시원하게 생겼으면 <흔히 저이는 미남이다>라고 여자들은 말하지. 그러나 나는 조각품처럼 깍아 놓은 듯 말쑥한 사람보다는 복스럽게 믿음직스러운 인상을 주는 사람이 좋아. 그리고 재미 있는 대화의 상대이며 다소의 점잖은 사교성을 갖고 있는 사람, 풍채가 제 아무리 좋고 몸집이 말쑥하다 하더라도 사람이 야비하다거나 멋이 없다든가…. 태오씨 말대로 무뚝뚝하면 그런 사람과 살 맛이 있겠어? 산다는 것이 같이 행동하고 말하고 하는 것이 아니겠어?”

“여자는 미의 상징이고 남자는 힘의 상징이라고 남들이 말하기에 난 미란 여자들만의 것인 줄 알았더니 남자에게도 얼마간 해당되는군… 미남이란 말이 다 있구… 그럼 숙은 나에게 실망했겠네?”

“왜?”

“왜라니…. 내가 숙이 좋아하는 남자형의 조건을 구비하지 못했으니 말야.”

나는 슬며시 떠 봤다. 그랬더니

“자기가 잘났다는 말을 나로부터 듣고 싶은 모양이지…”

멋진 대꾸다.

“숙이 좋아하는 그 남자형의 조건을 완전히 갖추고 있는 남자를 내가 숙에게 소개해 줄까?”

나는 웃으며 숙에게 빈정거리기 시작했다.

“그래, 빨리 그 남자를 소개해 줘. 하여튼 말끝마다 나를 놀리기야?”

숙은 화낸 표정을 하며 내 팔을 꼬집었다.

“염려 말아. 내 팔 꼬집으면 진짜 이 다음에 그 친구를 데리고 집에 올 테야. 내 인물이 백점 만점에 60점이라면 그 친구는 95점이지…”

“내 한 번 태오씨의 인물 점수를 매겨 볼까?”

“어디 한 번 점수를 매겨 봐.”

“태오씨는 어머니한테 백점 만점에 백점이고 우리집에서 몇 번 만난 현옥이 있잖아.  그 애는 남자만 보면 가만히 있는 애가 아냐. 그런데 태오씨는 그 애에겐 85점이고 나에겐 75점이야. 어때 실망했어? 그리고 나를 심술궂게 자꾸 놀리면 점수가 깎이지.”

숙은 이런 말을 하며 어린 소녀처럼 좋아했다.

“실망은 왜 실망이야…. 숙은 나에게 75점의 야박한 점수를 주고 현옥이란 여자는 85점을 내게 주었겠다. 그럼, 나는 현옥이란 그 여자와 결혼해야겠는걸…”

나는 숙처럼 싱글거리며 숙을 놀려 주었다.

“오늘 밤엔 내가 태오씨 말에 항상 지고 들어가는 걸. 태오씨 말솜씨가 센데… 그런 말 그만하고… 태오씨는 아름다운 여자 많이 만나 봤어?”

“무진장 만나 봤지.”

“어디서?”

“고향에서 학교 다닐 때, 농사 질 때, 해군에서 군함 타고 팔도강산 유람할 때, 기차간에서, 전차간에서, 길거리에서 수없이 만났지.”

“아름다운 여인을 볼 때 태오씨는 무슨 생각을 해?”

떠보자는 걸까?

“무슨 생각을 하느냐고? 갑자기 고해소 안에 계시는 신부님이 되었나… 남의 생각의 비밀까지 알려 하고.”

“어디 솔직히 말해 봐.”

“솔직히란 말… 어떻게 해석해?”

“솔직히란 말… 말하자면 아무 것이나 분별 없이 막 말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생각한 대로 거짓 없이 말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내가 지금 신부님이라 가정하고 솔직히 말한 대로 거짓 없이 말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내가 지금 신부님이라 가정하고 솔직히 말해 봐. 고해소에 있는 태도로…”

“자기 생각엔 남자들이 여자들을 볼 때는 나쁜 생각만 하는 줄 아는 모양이지… 고해성사 보는 식으로 말하라고 하니… 고해소에서는 죄에 대해서 얘기하지만 아름다운 여인을 볼 때 순간적으로 느끼는 감정은 예술적 감정, 즉 미의 감상법에 속하는 것이지, 죄의 성질에 속하는 것이 아니야.”

“오늘 밤엔 내가 말의 실수를 많이 하는데….”

“이 세상 사람들 중에 아름다움을 싫어하는 사람은 다 ㄴ한 사람도 없을 거야. 그리고 아름다움이란 것은 사람의 감정을 기쁘게 해 주는 것을 자체의 사명으로 갖고 있지 않나 생각해. 그래서 아름다운 여자를 보면 난 즐거워져. 또 그녀와 어쩌다 말이라도 한 마디 하게 되면 기쁘기도 해. 그리고 몸이 균형이 잘 잡힌 날씬하고 아름다운 여인의 아름다운 얼굴은 이 세상에 있을 수 있는 여러가지 아름다운 것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아닐까 생각해. 가만히 생각해 보면 사람의 얼굴이란 여러 면으로 신비스러워… 나는 사람들의 얼굴을 가만히 보기를 좋아해. 이런 얘기는 이 다음에 하기로 하고… 하여튼 아름다운 여자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남자들은 즐거워하지… 아마 남자들은 싱거워서 그런지 몰라. 그리고 여자 용모의 아름다움엔 남자 마음을 끄는 힘이 숨어 있고 다라서 남자들은 그 아름다움을 소유하려는 본능적 욕심을 갖고 있다고 생각해. 그래서 거리에서 지나치며 본 아름다운 여인이 내 사람이 아닌 그림의 떡 격인 여인이라고 생각하면 섭섭한 감을 갖게 돼. 나에게는 세 가지 종류의 아름다운 여인상이 있는데, 하나는 마음을 자극시키고 어지럽히고 고독감을 느끼게 하는 형의 아름다운 여인과, 또 하나는 마치 시 감상이나 음악 감상을 할 때 마음의 평화를 느끼듯 마음을 평화와 기쁨으로 가득 차게 하는 아름다운 여인이 있지. 전자는 소나기처럼 격하며 동적이나 일시적이며 후자는 말고 높은 하늘 아래 단풍으로 물든 가을의 풍경처럼 맑음과 성숙과 깊이의 평온을 느끼게 하는 정적인 형이지. 그리고 세 번째 형은 전자와 후자의 조화체인 즉 동과 정의 결합체인 여인상이지. 달밤에 먼 물체를 바라볼 때처럼 신비스러우나 선명치 못해.”

숙은 관심 있는 듯 두 눈을 반짝이며 내 말을 듣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어떤 여자는 한 남자에 대한 아내로서는 적당하나 가정부인으로서, 어머니로서 가져야 할 부덕(婦德)을 갖고 있지 못한 여자가 있거든. 그와 반면에 가정에서 살림을 잘 보살피며 자녀 교육도 솜씨 있게 해 나가나 아내가 남편을 위해 가져야 할 고상하고도 사랑스러운 미덕이라 할까 생활 기술이라 할까 하는 것이 결여된 여자가 있어. 그리고 전자와 후자와의 알 맞는 조화를 갖고 있는 여자가 있지…”

“그럼 태오씨는 나에 대해 실망하겠군….”

“갑자기 앵무새가 되었나? 방금 재가 말한 것을 되풀이하고…”

하며 나는 숙의 손을 툭 쳤다.

“오늘 밤엔 이상하다. 내가 자꾸 지는데. 아까 내가 태오씨에 대해 점수를 매겼잖아. 어디 나에 대해 점수를 줘 봐.”

“이 세상에는 백점 만점에 백점이란 점수는 없는 법야. 왜냐하면 백점이라 하면 그것은 완전 그 자체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완전한 것이라고는 이 세상에 없는 법야. 그래서 나는 숙에게 95점을 주지…”

“나보다 인심이 좋은데. 인색하지 않은 점수를 주고…”

“사실을 말해서 숙이 나보다 모든 점에서 우위야. 학력을 제쳐놓고 우리 둘의 지능을 비교해 봐도 숙의 지능이 더 높다고 난 봐. 그리고 숙은 언젠가 나보다 이상을 위해 어려움 앞에 굴치 않는 의지의 소유자라고 말했지만 나는 숙의 의지가 더 성숙하고 깊이를 갖고 있다고 생각해. 인물로 봐도 숙의 용모는 세련되고 성숙한 미를 갖고 있어.”

“비행기 태우지 말아.”

“아니야. 사실이야. 어젯밤 얘기를 되풀이하지 않겠으나 사실이야. 숙은 농부의 아내가 되기에는 아까워.”

“그런 말 않기로 했잖아. 그런 말 그만 해.”

그때 나는 숙의 음성이 갑자기 쓸쓸해진 듯한 인상을 받았다. 숙의 얼굴을 바라보니 외로움에 젖은 표정을 하고 방향 없이 흐트러진 시선으로 방 구석을 바라보고 있는 듯했다. 숙이 쓸쓸해 보였다. 나도 갑자기 쓸쓸한 감을 받았다. 그리고 숙의 모습이 내 앞에서 멀어져 가는 듯했다.

“참, 숙의 사진 한 장 줘.”

갑자기 숙의 모습을 가지고 다니고 싶었다.

“사진이 필요해?”

“결혼 전까지는 숙과 같이 있는 시간보다 떨어져 있는 시간이 더 많을 것 아냐? 그리고 난 사람의 얼굴을 잘 기억 못하는 습관이 있어.”

“그래도 아무려면 자기 애인의 얼굴을 잊을 수 있을라고.”

“혹시 누가 알아. 내일이라도 내가 일선에 출동하여 몇 년 간 헤어져 소식 없이 지내다가 서로의 얼굴 모습마저 잊은 후 다시 거리에서 만났다 해도 내가 숙을 못 알아 볼지…”

“난 유심히 한 번 본 사람의 얼굴은 잊지 않아. 하여튼 내 사진 한 장 주지.”

숙은 서랍에서 사진첩을 꺼내 그 많은 사진 중에서 마음에 드는 것 하나를 고르라고 내게 말했다. 자기 친구와 둘이서 천진스럽게 웃는 사진이 내 마음에 들었다. 난 숙의 웃는 모습을 더 좋아했다. 그러나 숙은 나보고 자기 독사진을 가지라고 했다. 학교 졸업 때 찍은 사진인데 긴장된 탓인지 몰라도 수심 있는 듯한 모습의 사진이었다. 그러나 숙이 가지라는 대로 그 사진을 받았다. 그리고 이 다음 만날 때 내 사진을 갖다 주겠다고 약속했다. 사진첩을 다시 서랍에 넣고 숙은

“할아버지 병세가 중하신가 봐. 엄마가 할아버지 병세에 따라 여러 날 시골에 있게 될지 모른다고 말씀하셨어.”

“숙도 어머니하고 같이 시골에 이다 돌아올 테야?”

“글쎄. 그런데 지금 갑자기 시골에 가기 싫어지는데… 엄마 혼자 시골에 다녀오시라고 그럴까?”

“어머니를 모셔야지….”

바로 그때 어머니께서 60세 가량의 할머니와 같이 돌아오셨다. 약 30분 간 그분들과 이 이야기 저 이야기를 하다가 나는 부대에 돌아가기 위해 일어났다.

“아버지 병세를 보고 될 수 잇는 대로 빨리 돌아오겠네.”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두 분께 인사를 하고 밖에 나오니 숙이 외투를 걸치며 나를 따라 대문까지 나왔다.

“손님이 없으면 어젯밤처럼 길을 걷고 싶어.”

“방에 들어가 손님 모셔야지. 그리고 오늘 밤엔 숙이 상당히 피곤한 것 같아. 기운이 없어 보여. 그보다도 산보하기엔 날
씨가 너무 추워.”

“나 혼자서라도 늦어도 주일 전으로 집에 돌아올 테야.”

“아무튼 몸 조심해. 내 생각엔 숙의 감기 기운이 아직 있어 보여. 조용한 시골에서 며칠 쉬는 것도 몸에 좋을 거야.”

이같이 말하며 나는 숙의 손을 꼭 쥐었다.

“손 아파?”

“아니.”

“정말?” 하며 나는 숙의 손을 더 힘껏 쥐었다. 숙은 희미한 달빛 아래 가느다란 미소를 입가에 띠고 있었다.

“이래도 안 아파?”

“아픈 것이 도리어 인상적이야.”

“나는 번번이 숙에게 힘을 남용하지. 용서해.” 하며 내 손 안에 오무라들었던 숙의 보드라운 손을 주물러 주었다.

“숙, 자 그럼 추운데 빨랑 들어가. 난 부대에 갈 테야.”

숙은 여전히 서 있었다. 어깨에 걸친 그녀의 외투를 바로 여며 주며,

“숙, 날씨가 추워. 밖에 너무 오래 서 있지 말아…”

“주일날 곡 집에 와. 그때 나 집에 와 있을 테야.”

“그래 꼭 올께. 밖에 너무 오래 서 있지 말아.”

“태오씨가 저만치 갔을 때 들어갈 테야. 아까 정신이 좀 어찔어찔했는데 찬 바람을 조금만 쏘일 테야.”

나는 장갑 낀 손으로 숙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때 내 얼굴 아래 치켜들은 그녀의 흰 얼굴에 달빛이 비쳐 더욱 희게 보였고 나는 그녀를 포옹해 주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꼈다. 그렇지만 다만 “잘 있어” 라는 간단한 말을 죽에게 던지고 밤길을 걷기 시작했다. 뒤를 돌아보지 않고 곧장 걸었다. 한 발 두 발 발걸음을 옮겨 놓을 때마다 나는 숙으로부터 멀어져 갔고, 이 멀어져 간다는 거리 의식은 나에게 고통스러운 심한 고독을 가져다 주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나 나는 발길을 돌려 숙의 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걸음은 점점 빨라져 나는 뛰고 있었다. 숙을 다시 한 번 보고 싶어서였다. 달빛에 비친 그녀의 얼굴이 한없이 쓸쓸해 보여서 나는 숙을 곡 위로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숙의 집이 보이고 대문이 보이는 곳까지 왔을 때 나는 깜짝 놀랐다. 숙은 아직 대문 벽에 등을 기대고 서 있었다.

“숙! 아니 웬일이야. 아직 이곳에서 찬 바람을 쏘이고 있다니…”

“여기 있고 싶어서 그래.  그리고 걸어가는 태오씨의 뒷모습이 무척 쓸쓸하게 보였어. 태오씨 불쌍해. 그리고 태오씨가 저만큼 어둠 속으로 사라질 때 눈을 감으니 갑자기 태오씨가 사람 없고 길 없는 험한 벌판을 지게에 짐을 잔뜩 지고 마냥 걷고 있지 않겠어. 그리고 나는 나대로 집과 함께 자꾸자꾸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것 같았어. 태오씨를 쫓아가려 해도 힘이 있어야지…. 그래서 이렇게 여기 있어…. 태오씨가 나무 쓸쓸해. 그리고 불쌍해… 나 시골 안 내려갈 테야.”

오늘 밤엔 숙이 이상한 말을 한다고 생각하며 대문 벽에 등을 기대고 서 있는 숙의 얼굴을 바라다 보았을 때 다시 한 번 깜짝 놀랐다. 겨울 찬 밤, 조각달의 희미한 달빛에 비친 숙의 얼굴은 희다기보다 차마 볼 수 없을 정도로 창백했다. 파리한 얼굴에 까만 두 눈동자만이 빛나고 있었다. 나는 숙의 창백한 이 얼굴이 보기 싫었고 무서웠다. 그래서 숙 앞에 바싹 다가 서서 그녀의 얼굴에 비치는 달빛을 내 몸으로 막았다. 내 몸의 그림자 속에 가려진 숙의 얼굴은 어두워졌다가 차츰 밝아졌고 평상시 숙의 얼굴 빛으로 되돌아 왔다. 벽에 머리를 대고 말 없이 서 있는 숙의 얼굴을 나는 조용히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숙은 나보고 쓸쓸하고 불쌍하다고 했으나 숙의 얼굴이 차마 곁을 떠날 수 없을 만치 쓸쓸해 보였고 불쌍해 보였다. 그 후 얼마나 지났는지 모른다. 발 아래 떨어져 있는 숙의 외투를 집어 그녀에게 입혔을 때 나는 숙을 포옹한 것을 알았다. 그리고 둘이 같이 벽에 기대고 우리는 말 없이 서 있었다. 그때 한 할머니가 어린 손녀를 데리고 우리 앞을 지나갔다. 얼마 후

“나 시골에 안 내려갈 테야. 어머니 혼자서 다녀오시라고 할 테야.”

숙이 말했다.

“숙이 상당히 피곤했어. 아까 방에서 숙이 피곤하고 이상하다는 것을 난 알았어. 아직 감지가 다 낫지 않았는가 봐. 그리고 신경과민이 된 것 같아. 시골이 가서 푹 쉬고 정양하는 것도 좋을 거야.”

“요즘 잠이 잘 안 와. 그리고 자꾸 시골에 내려가기 싫어져. 이상한 일이 아까부터 태오씨가 지게를 진 모습이 보여. 언젠가 태오씨가 시골에 있을 때 코피를 흘리며 지게 지고 땅에 넘어졌다고 했지… 그 모습이 자꾸 눈에 보여. 난 시골에 내려가기 싫어. 집에 남아 있을 테야.”

이같이 기운 없는 소리로 말하며 숙은 내 손을 더듬어 잡았다. 나는 그대 숙의 손이 얼음같이 찬 것을 느꼈다. 그래서 나는 내 장갑을 숙의 두 손에 기어 주고 내 마후라로 그녀의 목을 싸 주었다. 그리고 나는 얼마 후 도 숙을 포옹한 것을 알았다.

“태오씨 오늘 우리 얼마 동안만 같이 걸어.”

감기의 남은 증세가 아직 있고 피곤하고 또 신경이 매우 날카로워져 있는 숙의 몸을 생각해서라도 숙이 더 이상 찬 바람 부는 겨울 밤을 걸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숙의 말을 거절할 수 없었고 숙을 기쁘게 해 주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해 주고 싶었다. 또 나는 숙을 떠나가기 싫었고 떠날 수도 없었다. 방 안에라도 좋고 아무 곳이나 숙과 같이 있는 곳이라면 나는 밤이 밝도록 숙과 함께 있고 싶었다.

“여기 너무 오래 서 있지 말아. 그럼 우리 조금만 같이 걸어.”

우리 둘이는 걷기 시작했다. 말 없이 걸었다.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방향 없이 걸었다. 그리고 혹 가다가 우리의 시선이 마주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우리 둘은 웃었다. 그러나 웃음이 시작할 무렵 네 개의 시선이 마주쳐 직결한 순간 우리의 미소는 행복했으나 미소가 우리의 입가에서 사라지고 하나가 된 시선이 서로 떨어질 대 우리는 쓸쓸했다. 우리는 여전히 말 없이 걸었다. 그리고 한참 후 우리는 4, 5명의 무장한 미군과 마주쳤다. 그 무렵 시내는 미군들이 소란하게 돌아다니고 있을 때였다. 그러자 나는 내가 군인이었다는 것을 자각했고 우리는 지금 전쟁 중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때 불길한 예감이 내 등에 소름을 끼치게 했고 이유 모를 반항심이 내 마음 속에 소스라쳐 일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나는 별안간 부대에 돌아가기 싫어졌고 전쟁하는 이 조국을 멀리 떠나 도망하고 싶은 강한 충동을 받았다. 구속 없는 자유와 평화와 기쁨과 행복만 있는 먼 나라로 멀리 멀리 숙과 함께 도망하고 싶었다. 우리는 여전히 가끔 서로 마주 쳐다보며 미소하고 말 없이 걸었다. 얼마 후 숙이 기침을 여러 번 했다. 그러자 나는 숙이 더 이상 이런 밤길을 걸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숙, 그만 집으로 돌아가.”

나는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숙의 몸을 돌렸다. 숙은 순순히 내 말을 들었고 우리는 되돌아 걷기 시작했다.

“왜 미군들이 점점 더 시내를 소란하게 돌아다녀? 미군이 무서워…”

“증원 부대로 새로 도착한 모양인가 봐.”

“시내에서 무장한 군인들을 보는 것이 무섭고 싫어. 전쟁에 대한 공포가 점점 더 심해져. 태오씨 일선에 나가지 말어.”

“해군은 일선 생활을 안 해. 해군의 일선생활은 해상 생활인데 난 해상생활을 이젠 안 할 것 같아.”

“전쟁하는 남자들이 불쌍해…. 그리고 후방에 있는 여자들도 불쌍해.”

나는 그때 숙에게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몰랐다. 그래서 우리 둘은 또 말 없이 걸었다. 이번에는 서로 마주 바라다 보지도 않고 고개를 숙여 땅만 보고 걸었다. 얼마 후 우리는 숙의 집 대문가에 왔다.

“숙, 이젠 집에 들어가.”

“나 시골에 안 갈 테야. 시골에 내려가지 말라고 내게 명령해 봐.”

“명령은 무슨 명령이야?”

“난 이제부터 태오씨가 좋아하는 것만 할 테야. 시골에 가지 말라면 엄마를 설복시키고 집에 남아 있으라고 내게 말해 봐.”

“난 몰라. 하여튼 숙은 현명하니 숙이 생각해서 좋을 대로 해. 그러나 내 생각엔 시골에 가서 조용히 쉬다 오는 것이 숙의 몸을 위해 좋을 것같이 생각돼.”

“태오씨가 쓸쓸하고 불쌍해.”

“난 숙이 가엾고 숙의 몸이 염려돼.”

“이상해.”

“뭣이 이상해?”

“시골이란 말을 들을 때마다 지게에 짐을 잔뜩 지고 가는 태오씨 모습이 보여.”

숙은 자기 얼굴을 내 가슴에 묻으며 말했다.

“언젠가 숙이 말하기를 사람이 사랑할 때는 또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수고도 땀도 고통도 희생도 달다고 했잖아. 내가 지게를 지는 것도 숙과 우리 둘의 가정을 위해 지는 것이 아니겠어?”

“태오씨가 처음에 농촌 이야기 할 때는 농촌생활이 재미있어 보였고 지게를 진 태오씨의 모습이 힘있고 믿음직스러워 보였는데 아까부터는 왜 그런지 지게를 지고 있는 태오씨의 모습을 차마 볼 수 없고 생각할 수도 없어. 태오씨가 너무 고통스러워 보여. 너무 불쌍해.”

그때 숙의 말소리에는 울음이 섞여 있었다.

“숙이 오늘 밤에는 이상한 말을 너무 많이 해. 아무래도 잠을 충분히 자지 못해서 오는 신경과민인가 봐. 그러니 내일 어머니 모시고 시골에 내려가 푸근히 쉬는 것도 몸에 좋을 거야.”

“그래, 시골에 내려가라고 하면 내일 시골에 내려갈께.”

“더 이상 이 추운 밤에 서 있지 말고 빨리 집으로 들어가.”

“태오씨가 먼저 가.”

“나 가는 것을 보지 말아. 난 숙이 집안에 들어가야 이 자리를 마음 놓고 떠날 테야.”
“그래. 그럼 집으로 들어갈게. 그런데 난 태오씨가 자꾸 쓸쓸하고 불쌍하게 생각돼.”

숙은 드디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왜 내가 불쌍하고 쓸쓸해 보여? 난 행복해! 난 기쁘고 즐거워… 숙, 나에게 한 이전같이 기쁨에 찬 웃음을 줘 봐.” 하며 나는 그녀의 앞에 다가섰다. 그때 숙은 다물었던 입술을 벌리고 내게 커다란 미소를 지어 주었으나 그녀의 미소는 내 마음이 아프도록 쓸쓸해만 보였다. 숙은 내 두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고 나는 내게 쓸쓸한 미소를 보내 주고 있는 그녀의 입술을 바라보고 있었다. 숙의 백설보다 더 흰 이들이 이미 앞집 지붕너머로 막 기울어지려는 희미한 달빛에 비쳐 가지런히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숙의 몸을 내게 당겨 얼음처럼 찬 그녀의 얼굴 위에 내 얼굴을 갖다 대었다. 그때 나는 숙을 포옹하고 있다는 것을 똑똑히 의식했고 내 두 팔 안에 조여들은 숙의 몸이 심히 경련하는 것과 점점 가파라지는 그녀의 숨소리도 똑똑히 의식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른다.

“숙, 이젠 집으로 들어가.”

“그래 집으로 들어갈게. 조금만 여기 더 있다가 들어갈 테야.”

그때 나는 숙의 외투 깃을 바로 잡아 주고 그녀의 흐트러진 머리를 내 손으로 빗질해 주었다.

“내일 시골에 갔다가 주일 이전으로 돌아올 테야. 주일 날 꼭 집에 와. 그리고 같이 성당에 가.”

“그래 곡 올게.”

“그리고 어저께는 태오씨가 나를 위해 밤길을 걸으며 기구해 주겠다 했지. 오늘 밤엔 내가 태오씨를 위해 기구할게.” 하며 부대에서 식사할 때 가슴에 남몰래 조그만 십자형의 성호를 긋는 식으로 나는 숙의 앞가슴에 내 오른 엄지 손가락으로 조그마한 성호를 그어 줬다. 그러자 숙은 아무 말 없이 내게 한 번 미소를 짓고는 대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때 나는 숙의 두 뺨에 흐르는 눈물을 발견했다.

숙은 집으로 들어갔고 나는 한참 동안 대문가에 남아 서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얼마 후 나는 군대 잠바 단추를 끄르고 밤거리를 뛰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나는 지금쯤 방 안에서 울고 있을지도 모르는 숙을 다시 한 번 보고 싶은 충동을 잊고 싶었고 또 나는 부대에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때문이다. 찬 바람 부는 바람 밤거리를 뛰고 있을 때 찬바람은 내 맨 주먹과 벗은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때야 비로소 나는 내 마후라와 장갑을 숙에게 주었고 숙은 그대로 집에 들어간 것이 생각났다. 나는 쉬지 않고 자구 뛰었다. 몸은 점점 더워져 왔고 등에서는 땀이 나기 시작했다. 마후라 없는 벗은 목을 통해 찬 바람이 들어와 땀 나는 등과 앞가슴 그리고 배에까지 시원한 느낌을 주었다. 나는 뒤를 두 번 돌아보았다. 한참 뛰다가 나는 돌에 발부리를 채여 공공 얼어붙은 땅 위에 넘어졌다. 땅에서 일어나 다시 한 번 숙의 집 쪽을 바라다 보고는 주저앉아 담배 한 대를 서서히 피워 물고 이마에 흐르는 땀을 식혔다. 부대에 돌아오니 사람들은 벌써 잠들어 있었고 불침번만 졸린 눈을 비비며 총을 들고 한 구석에 서 있었다.

널판쪽으로 칸을 막아 방이라고 부르기가 부끄럽게 초라한 내 방에 돌아와 초에 불을 켰을 때야 내 두 손바닥에서 피가 흐르는 것을 알았다. 몇 개의 잔 모래알이 손바닥에 박혀 있었다. 촛불을 끄고 옷 벗을 정신적 여유마저 없이 담요를 뒤집어 쓰고 자리에 누웠다. 그러자 별안간 웬일인지 엉엉 소리 내어 울고 싶었다. 그때 실제로 울었는지도 모른다. 컴컴한 방안 고달픈 대원들의 코고는 소리가 이따금씩 들려오는 조용한 방안. 방안의 암흑을 향해 내 두 눈을 크게 떴을 때 무섭도록 창백했던 숙의 얼굴이 보였고 숙이 말한 대로 내가 지게에다 힘에 겹도록 짐을 지고 길 없고 사람 없는 허허 벌판을 뚜벅뚜벅 걷고 있는 환상을 보았다. 지게 진 내 골아 하도 흉하고 보기 싫어 나는 담요를 머리 위로 치켜 올려 내 얼굴을 덮었다.

며칠 후, 주일 날 함께 성당에 가자던 약속을 지키기 전에 우리 부대는 돌연 출동명령을 받았다. 우리 부대는 함흥지구에 있는 해병대에 전원 편입하라는 명령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사실을 아직 모르고 있었다. 나는 이 명령에 깜짝 놀랐다. 출동 준비로 부대는 복작거렸고 외출 금지령이 내렸다. 나는 내 일을 빨리 정리한 다음 숙의 집으로 달려갔다. 예상한 대로 집 지키는 할머니 한 분만 계셨다. 숙을 보지 못하고 일선으로 출동해야 할 내 마음은 극도로 혼란되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할머니에게서 우선 종이 한 장을 얻어 몇 마디 글을 썼다.

<숙, 시골에서 조용히 또 만족히 몸을 쉬었는지? 나는 숙의 몸이 항상 염려돼. 잠시도 내가 숙을 생각 안 한 시간이 없어. 이 다음에 만나는 날 이전과 같이 건강하고 기쁨에 찬 숙을 볼 것을 희망해. 지금 나는 숙 없는 숙의 집 마루에서 이 몇 줄의 글을 쓰고 있는 중이야. 방금 우리 부대는 전원 일선 출동 명령을 받았어. 오늘 밤에 출동. 나는 우리 부대가 어디로 가는지도 몰라. 싸움하는 것이 우리 군인들의 사명이라 일선 출동은 당연한 일이겠지. 나에 대해서는 조금도 염려 말아. 숙을 위해 나는 매사를 현명하게 처리할 테야. 아군의 전황이 호전되는 대로 나는 이곳으로 되돌아올 테야. 그때 일선에서 내가 겪은 여러가지 일들을 숙에게 얘기하지. 일기를 계속해서 써서 갖다 줄게. 그 때까지 안녕. 오늘도 날씨가 퍽 추워…. 발가벗은 나뭇가지 사이를 달음질치는 바람 놈의 휘파람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시골은 더 추울지 몰라. 거듭 몸조심. 어머니 안녕하세요. 저 곧 다녀오겠습니다. 태오 씀.

추이.

숙을 보지 못하고 출동하는 내 마음과 손이 무척 떨려 글 모양이 엉망진창야. 내 글을 알아 읽을 수나 있겠는지… 숙, 다시 한 번 안녕히.>

나는 이 글을 쓴 종이를 접었다가 다시 펴 다음과 같이 몇 마디 또 첨부했다.

<추이의 추이.

숙, 지금 나는 숙에게 무진장 말하고 싶어. 이 글을 쓴 종이를 접어 할머니에게 주었다가 다시 달래서 또 쓰고 있는 거야. 숙에게 무진장 말하고 싶은 이 무진장의 말을 어떻게 정리해서 조리 있게 쓸지를 모르겠어. 이 다음에 만나서 같이 이야기하지. 나를 만날 때까지 조용한 시간 속에 몸 정양하며 애인 골탕먹이는 방법을 잘 연구해 둬. 나도 숙을 골탕먹이는, 놀려주는 방법을 무진장 연구해 갖고 올게. 그리고 숙, 다음의 말은 숙을 직접 만나서 같이 이야기하고 싶었으나 글로 미리 한 마디 해 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아. 간단히 한 마디 해 둘게. 그날 밤 내가 숙에게 무리한 짓을 했다고는 말하지 않겠지?  그날 밤 내가 숙을 포옹한 때 나는 추호의 불순한 생각도 야심도 또는 남성적 충동도 갖고 있지 않았어. 나는 내 행동을 똑똑히 의식했고 이 행동만이 숙에게 표시할 수 있는 숙에 대한 내 마음과 몸의 사랑의 표현이라고 생각했어. 우리는 서로 서로 더 이상의 애정의 범위를 넘지 않기로 해. 앞으로 있을 결혼을 위해 마음과 몸을 깨끗이 갖고 청아한 사랑 속에 종전처럼 즐겁게 지내기로 해. 나는 내가 갖고 있는 신앙대로 행동하고 살고 싶어. 숙이 말하는 그 <참>대로… 거듭 안녕히.>

편지 쪽지를 할머니에게 맡기고 대문 밖에 나서니 이상한 일은 숙에게 진짜 말해야 할 것은 안 한 듯 여겨졌다. 그래서 다시 집안으로 들어가 할머니에게 방금 맡긴 편지를 다시 달래서 읽어 보았다. 할 말을 다 한 듯했으나 무엇인가 마음이 불안스럽고 도 곡 해야 할 말이 있는 듯 느껴졌다.

<더 이상 생각하지 말고 발리 부대로 돌아가자> 혼자 중얼거리며 편지를 접으니 그때 꼭 해야 할 말이 생각났다. 그래서 나는 편지 쪽지 한 모퉁이에 다음과 같이 썼다.

<곱배기 추이. 전쟁 사태가 수상해 이 편지 쪽지를 할머니에게 맡기고 밖까지 나갔다가 다시 되돌아와 이 글을 쓰고 있는 거야. 내가 이곳에 없는 사이에 아군의 전황이 불리해 철수하는 경우 지체 말고 남하해. 꼭 어머니 모시고. 만약에 우리 둘이 엇갈려 서로의 거처나 소식을 모르는 경우 숙이 먼저 해군본부 인사과에 가서 내 소속 부대를 찾도록 해. 내 거처를 알 수 있는 방법 중에서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을 거야. 서로 소식 없이 헤어지는 경우 나는 숙을 기다리고 있지. 일선 출동하는 내 몸 조금도 염려 말고 숙 거듭 몸조심해, 늘 건강을 보존하려면 현명해야 돼. 만사에 무리를 말고. 천주님의 사랑의 지혜로우신 섭리에 우리를 온전히 맡기고 서로 기구 중에 잊지 않기로… 숙, 다시 한 번 안녕히… 어머니, 부디 안녕하십시오. 태오는 항상 두 분을 위해 기구하겠습니다. 태오 씀>

할머니가 불안스러운 표정으로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으나 나는 웃으며 아무 일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찬물 한 사발 달래 단숨에 마시고 부대로 뛰어 돌아왔다. 부대는 완전히 출동 준비를 완료했고 필요 없는 서류나 물품을 소각하고 있었다.

그날 오후 다섯 시에 우리는 출동 준비를 완료했다. 그러나 어디로 가는지를 우리는 모르고 있었다. 우리를 태운 트럭은 원산 시내를 달리고 있었다. 하늘에는 회색 구름이 군데 군데 덮여 있어 불길한 징조같이 보였다. 이미 시내는 어둠 속에 잠기기 시작했고 행인들은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우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들은 만세를 부르며 우리들을 환송하고 있었고 군인들은 길가의 아가씨들에게 휘파람을 불며 소리를 지르고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나는 숙을 생각하고 있었고 마음 속으로는 그녀에게 속삭였다. <사랑하는 숙 용기를 내요. 기구 중에 우리 서로를 잊지 말아요.>

우리를 태운 10여 대의 군 트럭은 시내를 빠져 나와 인적 없는 들판을 달리고 있었다. 노래 소리도 휘파람 소리도 바람 따라 사라졌고, 우리 모두는 잠잠해졌다. 다만 트럭의 엔진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하늘에는 희미한 빛의 조각달이 걸려 있었고 며칠 전 그 달빛 아래 비친 숙의 흰 얼굴이 나타나 멀어졌다 다가왔다 하며 내 시야에 어른거리고 있었다. 얼마 후 그 조각달이 검은 구름에 가려지자 자연은 어둠 속에 잠기고 숙의 흰 얼굴도 사라졌다. 나는 성호를 그으며 숙의 보호를 천주님께 부탁 드렸다.

 

이 소설은 일단 여기에서 끝날 수 밖에 없다.

인생이 미해결이듯이 이 소설도 미해결인 채 끝날 수 밖에 없다. 아니 어쩌면 끝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아무튼 나의 <사랑의 지도>는 이처럼 채 완성되기 전에 얼룩지고 드디어는 갈갈이 찢기고 말았다. 그러나 나의 인생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새로운 시련 속을 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전쟁 속의 인간> 을 내 체험을 통해 다음 편 <예수 없는 십자가>에 그려 보려는 것이다.

 

 

 


 

여기에 실린 글은  copyright가 된 책, 기사를 ‘발췌, 전재’를 한 것입니다. 모두 한 개인이 manual typing을 한 것이고, 의도는 절대로 저작권 침해가 아닌, fair use의 정신을 100% 살린 것입니다. 의도적으로 ‘시간적인 제한, 독자층의 제한’을 염두에 두었고, 목적은 단 한 가지 입니다. 즉 목적을 가진 소수 group (church study group, bible group, book club) 에게 share가 되었습니다. password protected가 되었는데, 만일 이것이 실패를 하면 가능한 시간 내에 시정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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