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eld of dreams, trancending time & place, autobio in progress..

사랑의 말 – 김남조 – 1983년

 

차례

 

제1장  오늘 생각하는 사랑

시작의 의미

먼데서 오는 편지

문 앞에서

회신 없이 오고 간 편지들

경대 앞에서

구월, 그 서늘한 큰 손

오늘 생각하는 사랑

영혼의 추위를 앓는 이들에게

새의 영혼을 가지고만 있다면

 

제2장 그 먼 길의 길벗

나의 삶, 나의 글

진정한 것

나의 이력서

장미

친구여 화해하자

여름나무 같은 삶과 사랑을

그 먼 길의 길벗

 

제3장 가슴 안의 그 하나

기도 연습

백조 이야기

돌아오는 이를 위하여

마음의 얼음을 풀고

사랑으로 들어올리는 삶

시와 사랑

파지(破紙)를 내면서

결혼과 나

가슴 안의 그 하나

 

제4장 마음의 성소(聖所)

추운 시절 이야기

그 수평선을

마음의 성소(聖所)

사랑을 위하여

사월의 연가

신혼의 의미

잊을 수 없는 동화

 

제5장 영혼의 아픔을 겪는 이들에게

겨울새의 날개 위에

동일한 시대, 동일한 별에서

오늘을 사는 성인상(聖人像)

주의 영광을 앞세우는 기도

결혼에 대하여

아름다운 사람

칠월의 젊음들

영혼의 아픔을 겪는 이들에게

사랑의 큰 땅

시를 위하여

만들어 주는 삶

삶과 죽음 안의 정진(精進)

나의 매력남

신앙의 흐린 글씨

 

 

 

 

제1장 오늘 생각하는 사랑

 

 

시작의 의미

 

시작의 의미는 새벽의 의미와 동일하다. 밤중에라도 결정 짓고 즉시 시작한다면 그것은 홰를 치는 첫새벽이 되는 것이다.

정녕 그건 새벽이다.

무더운 여름 밤, 잠도 설치고 번민의 늪에서 허위적 거리던 당신이 땀에 젖은 긴 머리채를 냉수에 감아 헹구고 손을 모아 기도 드린다면 신은 필시 그 음성을 들으실 것이며, 당신이 소망과 결정을 들어 올린다면 그 또한 푸드득거리는 날개 짓으로 여명의 하늘을 가르며 날아오를 것이다.

겨우 한 발자국 내디딘 발걸음에 불과하다 해도 쉬지 않고 걷는다면 언젠가 목적의 땅에 다다르게 될 필연의 약속 임도 믿을 일이다.

신은 결과를 지배하시고 사람은 과정의 권리를 차지한다. 과정은 사람의 몫이나 최선을 다하는 이상의 인간적인 힘은 없다.

좌절할 밖에 없었던 여건을 다시 점검하고 넘어진 그곳에서 몸을 일으킬 때, 비록 또다시 좌절하는 한이 있더라도 거듭거듭 일어나 걸어갈 수 만 있다면 이는 새벽의 사람이요, 그 시간이 심지어 죽음과 인접한 것이라 해도 시작의 장한 의지는 굳건한 바위가 되어 남을 것이다.

물론 우리는 알고 있다.

사람이 절망하여 엎어질 때의 쓰디쓴 눈물의 맛을.

몇 번을 날아올라도 매서 시도는 헛되고 진흙에 박힌 수레와도 같이 겨우 손잡이만이 뽑아져 나온 참담한 경험도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손잡이를 건진 일은 전부를 당겨 올린 가능성의 시초이며 성취의 문을 열 열쇠도 되지 않으랴.

당신은 화해를 원한다.

그렇다면 그 사람이 있는 곳으로 향(向)을 잡아야 한다.

당신은 풍성한 추수를 꿈꾸고 있다. 그렇다면 농기구를 들고 남보다 먼저 밭으로 나가야 하고 더 충실히 거기서 일해야 한다. 당신은 어려운 확률의 과녁을 맞추는 능한 사수이고 싶다. 그렇다면 천 번 만 번의 실패를 감내하는 철저한 분발을 배워야 한다.

 

당신은 사랑을 원한다.

아아, 그 목마름…

당신은 사랑을 원한다. 낙타가 제 몸 속에 저장했던 물로 갈증을 푼다고 하듯이 최소한 당신 자신의 사랑으로 목을 축이며 힘을 내야 한다.

그리고 먼저 사랑해야 한다.

감자를 심으면 어미감자는 땅 속에서 풀어져 없어지고 보석 같은 햇감자들이 그 자리에 영글듯이 당신의 사랑도 먼저 허리를 구부리고 오랫동안 흙의 능력을 신앙해야 한다. 소망 중에 인내하며 봉사해야 한다.

아무리 늦은 시작이라도 결코 너무 늦은 건 아니다. 시작은 곧 새벽의 의미이거니 창창한 긴 날이 당신을 도와 온갖 보람을 솟아나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지금 시작하라.

 

 

 

먼데서 오는 편지

 

먼데서 오는 편지는 배달이 더디다. 그러나 마침내 우편함 속에 그것은 들어 있게 된다.

먼 땅의 햇빛과 바람이 배어든 보송한 종이 살갗을 두 손바닥 안에 꽉 잡아 쥐었을 때 온몸이 화끈해지는 기쁨.

기다림의 나날.

마치도 옥을 갈듯이 기다림의 지혜를 닦아야 한다.

목마름을 참아라.

정갈한 냉수사발을 받아 들고 맑고 냉쾌한 수분으로 전신을 적시는 복된 해갈을 얻으려면 아무 잔에나 입술을 대선 안 된다. 그대의 참 생수(生水)를 얻을 때까지 불 같은 갈증도 견디어라.

사람에겐 목마름이 중요하다.

배고픔 역시 중요하다.

왜냐하면 목마르거나 배고픔으로 하여 먹고 마시는 순서가 약속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있다.

배고픈 사람만이 음식의 참 단맛을 안다. 눈물 나는 고마움도 안다.

생각해 보라.

멀리 가는 새는 높이 날며 값진 만남은 충실한 예비가 차지하는 그 보답이다.

선택을 준비하는 큰 아기들아

선택의 예절 잘 가꾸기를 귀중한 과수밭에 공 들이듯이 하여라.

큰 아기들아

미혼의 하늘을 이고 그대들 뙤약볕에 서 있거니, 지금은 동서남북 어디를 살펴보아도 생애의 연분인 그의 모습이 보이지를 않는다. 하지만 조만간 에 눈앞을 가득 채우는 운명의 사람을 맞게 되리라. 만나면 즉시 알아볼 그대의 그 사람을…

큰 아기들아

만나기까지의 과정을 조바심하지 말고 만난 다음의 연분의 다난(多難)을 견뎌낼 수 있도록 준비하여라.

사랑하는 사람 사이 관계의 모습은 밋밋한 비단 허리띠 같은 게 아니고 순은의 고리와 고리가 하나하나 맛 물리듯 어렵게 정교한 성실의 것이다. 그 선택은 한 번에 그치지 아니하며 살아 있는 동안 거푸 몇 번이라도 되풀이되는 집요한 질문임을 명심하거라.

사실이다.

사람들은 얼마나 전력투구로 이 질문 앞에 몸을 내던져 맨살을 으깨는지.

‘이 여자가 내 영혼의 짝인가?’

‘이 남자가 내 몸의 절반인가?’

정녕 사실이다.

죽어도 이 한 가자, 진실의 속살을 들추고 싶다. 살 속으로 살 속으로 촛불을 들이대고 싶다.

‘이 여자가 나의 갈비뼈인가?’

‘이 남자가 나와 동일 혈육인가?’

사랑하는 사이에서 사랑함으로 하여 이리도 가혹하게 다가서는 물음.

큰 아기들아

그대는 선택의 관문을 다 뚫을 수 있겠는가. 줄곧 합격의 보장 위에 설 수 있겠는가. 시퍼런 작두 날이라도 밟고 서겠는가.

한 남자가 마지막 숨 거두는 자리에까지 그의 남김 없는 사랑과 의탁이 되어 주겠는가.

그의 영혼을 육체에서 갈라내어 공손히 신께 봉헌하는 그 자리 거기에 산 증인일 수 있는가.

탄생엔 그의 어머니가 함께 했듯이 죽음엔 그대가 자리를 지키며 모성의 이불자락을 덮어 주겠는가.

사랑만큼 무서운 건 없다.

사랑보다 더함 모서리는 없다.

그래도 사랑하겠는가.

 

이런 말이 있다.

‘진정한 결혼은 영원한 약혼자와 같은’ 성질이라고,

이 말에 대해 생각해 보자.

신이 한 분 이시듯 유일한 존재인 그, 혹은 그녀, 그에게 나아가며 더욱더 그의 것이기를 열망하는 불 같은 희구.

날마다 새 얼굴로 열리는 아침 하늘이나 밤 사이 새로 차오르는 단 샘물과도 같이 신선하며 무량하기 바라는 사랑의 염원이야말로 갈수록 더해질 처녀성의 심화일 듯 싶구나.

모래알보다 더 많은 세상 사람들, 그러면서 그 한 존재에마다 신비한 개별성을 부여하신 조물주의 섭리란 얼마나 오묘한가. 그의 신비의 전부를 열어 주는 그녀가 될 수 있겠는가.

서로를 공손히 끌어올리는 가운데 둘이 함께 높여지는 일이야말로 바람직하다.

 

사람에겐 사람의 길과 염원이 있으며 사람이기에 사람의 짝을 원하게 된단다. 따라서 이를 주실 수 있는 분, 모든 베풂의 근본이신 신께 갈구하며 신의 좌석을 두 연인 사이에 마련해 드려야 한다.

‘사랑은 서로 마주 보는 게 아니고 둘이 한 곳을 본다’는 말은 이래서 진실이 된다 할 것이다.

하나의 사랑은 하나의 성전을 쌓는 행위이므로 하나의 종교와도 같다. 그러므로 사랑의 모든 시간은 예배와 통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왜 그렇게 말하는가고?

그건 사랑에 빠질 때만이 이해하게 된다. 내 감히 말하리니 사랑할 때만이 사랑에 따른 온갖 내적인 음미가 가능한 법이다.

‘결혼은 사람의 품위를 훼손하지 않고 본능을 충족시키는 유일한 제도’라는 말이 생각난다.

품위란 도덕의 준수 같은 일에도 상관되겠으나 그보다도 인격과 인권에 대한 뜨거운 관심이며 그 용맹한 옹호일 듯 싶구나.

저편의 유익을 보장함으로써만 그 자신도 유익을 나누어 갖는다. 그는 먹이면서 함께 먹고 그를 기르는 가운데 함께 자라며 그의 모습을 정돈해 주면서 스스로도 아름다워진다. 활력의 불심지를 실하게 할 그때 둘이 모두 광명한 땅에 머무르게 될 것을.

큰 아기들아

꿈으로만 희구하는 사랑이나 행복은 화려한 꽃다발과 같아서 아름다우나 매우 허약하다. 걸어가고 달려가야 한다. 필요할 땐 사막도 가로질러야 한다. 우물이 마르면 샘의 밑바닥을 더욱 파헤쳐서 솟구치는 새 물줄기를 디밀어 올려야 한다.

큰 아기들아

첫가을의 바람이 분다.

흘려 보낸 무수한 밤하늘과 그 새벽과 불볕의 여름 한 시절을 지내어 철철 넘치는 강물처럼 청량한 구월의 바람이 불어 오는구나.

좌르르 드러눕는 억만 파도와도 같이 도시와 산촌을 가리지 않고 단번에 쏟아 넘치는 이 상쾌함.

큰 아기들아

영혼의 짝을 만나기까지 사람은 외로운 존재이다. 영혼의 짝을 만난 다음에도 사람은 역시 외로운 존재란다.

하지만 이래서 좋지 않으냐.

외롭기 때문에 묵상하게 되고 친구를 알아보게도 되느니, 연민과 축원에 눈 떠 겸손을 배우고 잠 못 이루는 심야의 묵상과 그 깊은 곳을 지나가시는 신의 신발 끄시는 소리까지도 듣게 되리라.

자주 심약해지고 상처만 잘 입는 인간의 참 모습, 그 숙인 얼굴의 눈물 자국을 일일이 살피시는 주의 자애를 깨달음으로 사람의 소명을 남김없이 들으리라.

삶엔 리듬이 있다.

긴장과 해이, 용납과 거부, 사랑과 미움 등의 상반심리가 가로 세로의 실로 얽혀 한 솔기의 무명을 짠다. 음정의 고저 장단도 한 곡의 음악 안에서 낱낱이 쓰임 있게 되느니, 이로써 리듬과 조화를 보태어 전체의 격조를 끌어올리게 되는 이치니라.

삶은 창조이다.

첫날의 탄생은 타력에 의해 생명이 비롯된 것이었으나 일단 우리 손에 삶의 운용(運用)이 넘어 온 다음부터는 우리들 각자의 기량에 맡겨진다.

능한 자는 창조한다.

삶을 통해 그대도 창조의 영광에 동참하고 싶으리라. 그렇다면 창조의 고통도 감내해야 한다. 과녁에 맞추어 화살을 겨냥하고 팽팽히 활시위를 당기는 때의 긴박감, 일심불란의 몰입에 속속들이 그대의 몸을 적셔야 한다.

사람을 그 안에 담아 넣는 삶이라는 집. 이는 벽돌과 철근으로 짓기에 앞서 인격과 협동으로 세우게 된다는구나.

큰 아기들아

혼자를 겁내지 말아라.

혼자의 내부에 친구가 있다. 여럿의 나다. 그러므로 그 모두를 한 질서에 통합시키면서 부단한 자아 점검, 성숙하는 가치관, 뿌리 내리는 신앙 등을 쌓아 가야 한다.

좋지 않으냐.

느리게나마 쉼 없이 자기를 형성하는 일이…

하여 부디 분발하거라.

불에 달궈지는 시금(試金)의 단련에서 도망치지 말지라. 정녕코 이를 이겨내는 사람들만이 서로 줄 거리를 갖게 되는 법이다.

큰 아기들아

미혼의 하늘은 창창하게 높고 그대들 때때로 서로 타인이라는 느낌에 붙들려 참담해지곤 한다. ‘타인이다 타인이다’ 라고 후련히 고함지르고 싶은 충동과, 실바람이 닿아도 피가 흐르는 과민 등은 그 모두 니네가 젊어 있는 탓인 것을.

그래서 좋지 않으냐.

사랑하는 큰 아기들아.

 

바라고 또 바라느니 여자이기 전에 인간이 거라. 행복보다 먼저 형성(靈性)의 꽃핌을 크나큰 지표로 삼아라.

첫 날의 만남은 묘목에 불과하니 비바람 고비고비를 굳건히 이겨내어 우람한 성목(成木)으로 키워내거라.

연분의 성목을 기필코 이루거라.

큰 아기들아.

 

 

 

문 앞에서

 

문 앞에 서면 묘한 느낌 이곤 한다. 얄팍한 문 한 겹을 사이에 둔 것뿐인데 그 안의 형편을 전혀 헤아릴 길 없는 무딘 내 눈이다.

심지어 아이들의 방문 앞에 섰을 때도 감정이 거북한 경우가 생긴다. 단지 느낌으로서만이 아니고 사실이 그렇다. 흉허물 없는 가족 사이라도 갑작스런 침입에 당황하는 표정을 읽게 될 때 피차가 민망스럽다.

“왜 엄마?”

분명코 왜 왔느냐는 질문이다. 용건이 없거나, 있더라도 긴급한 게 아니라면 다음으로 미루고 싶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그럴 만도 하다. 그 자신의 특별한 긴장에 감사여 손님을 맞을 마련이 못될 때가 사람에겐 있는 법이다.

나 역시도 그렇다. 사랑하는 자식들이긴 해도 불시에 방문을 열고 들어와서 모처럼 매만져 놓은 질서나 형편을 깨뜨려 버린 일을 경험한 바 있다. 일각이 아깝게 바쁜 글을 쓰고 있거나 할 땐 이만저만 짜증스럽지가 않다.

“왜 그러니?”

한 마디 짧은 말에도 거부의 가시가 느껴졌던지 말없이 문을 닫고 나가 버린다.

 문 앞에서 잠시 주저한다.

이 문은 나에게 열릴 것인가.

단지 물리적인 해결로서만이 아니고 양쪽의 심정이 순조롭게 통하게 될 내적 통로도 정녕 열릴 것인가. 서로의 진실이 과여 화락한 응답을 이루게 될 것인가.

사람은 어차피 남의 인생의 문 앞에 가서 노크한다.

자유로이 드나든다고 여김은 적잖이 착각일 때가 있고 열리지 않는 문의 차가운 나무판자에 머리를 부딪는 비참 감을 실지로 맛 보기도 한다. 화목하게 잘 지낸다고 보여지는 부부나 연인들 사이에 있어서도 한평생 언제라도 그 문이 열려 있다곤 결코 못할 것이다.

어설픈 육안으로서는 도저히 알아볼 수 없는 문의 비밀들.

때문에 문 앞에서 겁을 먹는 일이 생겨나곤 한다. 조심성이 늘고 마음도 추워진다. 거부의 문이라면 피해 가고 싶다는 타산마저 치 받는다. 두드려 보기도 전에 상처부터 입는 과민 현상인들 없지 아니하다. 갖가지로 묘하다.

어려서부터 보아 온 성화(聖畵) 중에 예수께서 문 앞에 서 계시는 그림이 있다.

문엔 손잡이가 그려져 있지 않으므로 안의 사람이 열어야만 들어가실 수 있다는 풀이인 바, 자못 의미심장하다.

그런데 문 안에 있는 건 나 자신일 수도 있다. 내가 문 안에서 빗장을 굳게 잠그고 이웃이나 형제 사이를 차단했을 수가 있다. 사람뿐이 아니고 외계의 모든 광명한 것을 떠밀어 내면서 껍질 속의 소라처럼 답답하고 숨막혀 하는 폐쇄적 상황들.

문을 여는 건 첫째로 정신의 관용이다. 서로 소통하고 채워 주면서 진정한 왕래를 가꾸어 감이 물론 바람직하다. 그러면서 다른 한편 아래의 각도에서 살펴봄도 무용하진 않을 것 같다.

나는 문 밖에 있고 문은 열리지 않는다. 이런 때 문 밖이라는 조건은 뒤집어 놓은 문 안이 되기도 함을 살필 일이다. 내 쪽에서 볼 땐 분명코 나의 문 안이다. 그러므로 내가 열어야만 양쪽의 소통이 가능해진다는 논법이 솟아난다.

문을 열자. 지나치게 개방적인 게 아닌 범위 안에서 서로의 울타리를 헐고 문을 열자.

사람들의 사이만이 아니고 모든 아름답고 풍요한 것과 그리고 으뜸으로는 신이 들어오실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자.

 

 

 

회신 없이 오고 간 편지들

 

선생님

꼭 16년을 문학을 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풋문인, 매사 서두르고 어렵습니다.

하지만 시인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진 선 미의 주인입니다. 시인을 만나면 마음이 밝게 개고 날 듯 꿈과 낭만이 부풀어 오릅니다.

오늘은 저 불우했던 나혜석의 ‘참회의 글’을 읽습니다. 쉬는 동안 많은 책을 읽었지만 나혜석의 솔직한 자기 고백의 글들은 저의 내면에 성숙을 가져 왔습니다. 그녀의 일생은 불우했지만 훌륭한 화가 지식인이었습니다.

 

편지의 묘미는 철저히 사신인 데에 있고 그 겉봉에는 친전이라고 또박이 적어 넣는다. 문갑 속에 간직하기조차 허술하다 여겨져서 명주 피륙 속 갈피에 끼워 넣고 장롱 밑바닥에 그것도 저편 구석에 꼭꼭 눌러 둔다.

편지에 적힌 사연들은 몇 년, 몇 십 년까지도 거기서 잠을 잔다. 유리병 속에 따라 넣고 깊은 바다 속에 가라앉히는 마술의 약품처럼 세월의 심연에서 무한정 묻혀지고 겹 절이는 사이 기묘한 화학작용을 거듭하면서 아주 다른 물질이 되기도 하리라. 그 편지를 꺼내는 순간 뽀얀 연기가 서려 올라 검은 머리를 하얗게 바꿔 놓는 따위로…

그러나 요즘 그런 편지는 퍽 드문 것 같다. 육체를 감싸는 의복에 있어서도 예사로 줄이고 잘라내는 노출시대이니만큼 마음의 속살도 애써 감출 까닭이 있겠느냐는 식의 세태임이 분명하다.

아침 신문을 전날 밤에 TV에서 읽어 주는 시대에야 편지보다 전화로, 그것도 인사 빼고 용건만 말해 주는 편을 더 좋아한다. 아니, 좋다 나쁘다 의 비교 의식조차 거르고 의당 그래야만 한다는 단일 답변이 나와 버리고 만다.

하지만 이런 시대이므로 해서 편지에의 향수를 골똘히 곱씹게 되는 면도 있다.

 

편지라는 그것.

나와 편지류와의 관계는 다소 기묘하고 어느 의미로 비극적이랄 수도 있다.

나는 여학교 시절부터 마음 속에 특별한 한 사람을 지니고자 했으며 그 허구의 인물에게 편지를 썼었다. 지금 생각하면 작게 접혀 있었던 내 마음을 광활한 외부로 열게 하는 필연의 촉매들이었다. 내 감정을 달갑고도 안식 없는 사역(使役)에 휘둘려져서 너덜너덜 닮아지는 것만 같았었다. 말하고 싶고 더하여 과녁을 쏘아 맞추든 사적(射的)의 적중을 원했었던 성싶다.

 

글에는 농도라는 게 있다.

가장 짙은 건 시인의 비장 수기(手記) 쯤에 가두어지고 중간 부류는 작품이 되어 독자의 손에 넘어가며 세 번째 쯤 탈색된 사연들이 봉투에 담아져 편지가 되는 건 아닌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조차 피 묻은 지문이 찍히곤 한다.

아니다. 사실은 지밀지순하고 으뜸으로 농도도 짙은 것을 편지에 채워 놓고 싶어 한다고 말해야 할 듯싶다. 더하여 별달리 공들이는 편지도 있다. 초안을 잡은 후 다음날까지 퇴고를 하여 다시 또 정서하는 경우겠는데 김 유정의 연서 등을 예로 든다면 거기엔 심성의 결정체들이 야문 왕모래 낱알처럼 박혀 있다.

송신조차 망설여질 경우도 있으리라.

벗은 칼날인 그것을 누구에게 들이대겠는가?

내 격정의 유혈을 무슨 권리로 남의 가슴에 떨구겠는가?

그렇게 해서 못 보낸 편지들의 과다한 염료를 빼내고 흐늑흐늑한 거품을 얼마 보태어 다른 형태의 글로 바꿔 놓는 일도 있으리라.

실지로 우송한 편지라고 한들 그 심정에 맞먹는 회답을 받는 일이 어디 쉽겠는가. 편지란 쓰는 그 자체가 목적일지도 모를 일, 써졌다는 사실의 어떤 충족감 외에 더 바랄 게 없는지도 모를 일이다.

보답 없는 편지를 쓰곤 하던 나는 어느 때부턴가 회답을 못 주는 수취인이 되어 오기도 한다. 글 쓰는 이는 누구나 독자의 편지라는 걸 받을 것이지만 나의 경우 유인물이 아닌 서신의 대부분이 독자나 후배 시인들, 또한 흩어진 옛 제자들의 편지이다.

글을 평해 달라는 내용이거나 그 자신의 처지를 충실히 설명한 다음 하등의 조언을 부탁하기도 한다. 이런 경우라면 회답을 쓸 수도 있겠는데 더러는 매우 아름답게 호의와 찬동의 뜻을 담아 보낸 분들의 것은 잘못 배달된 남의 편지처럼 거북하기만 하다.

사람 마음의 춥고 덧없음이여.

그들이 필요했던 건 그 자신의 감정을 열도록 도와 줄 작은 촉매였으리라. 꽉 막혀 답답한 가슴에 통풍을 가능케 하고 상쾌한 먼 수평선을 마음껏 보게 해줄 그 전환기에는 누군가 조력자가 필요한 법이다. 문제는 그 시의(時宜)1에 있으니 누구라도 있어야 했을 바로 그때 내가 그의 문 앞을 지나가고 있었던 것이라고 풀이할 수가 없다.

어느 땐 내가 받은 편지가 그 옛날 내가 띄워 보낸 편지의 산울림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바람과 구름 속을 오랫동안 배회하다가 문득 내가 사는 오늘의 주소로 되돌아 온 건 아니었나?

 

장미의 계절 유월입니다. 지금 제 울타리에는 붉은 장미가 가득 피어 온 골목을 환하게 비춰 주는 낮의 등불이 됩니다.

이 세상 삶의 고통을 가장 많이 깨달은 자가 시인이라기에 저 역시 살아서 시인될 꿈을 버리지 못하겠습니다.

거기엔 샘물 같은 생명수가, 거기엔 고통을 극복하는 소나무 같은 슬기가 있어서 앞으로 영원히 긍지를 가지고 다가설 것입니다.

 

글 머리에도 몇 구절을 실었듯이 이 편지를 한 젊은 시인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파르스름한 연두 빛 봉서였다. 잘 닦인 거울 속같이 명징한 시정이 그칠 줄 모르고 이어 담긴 긴 편지이다. 이런 땐 나의 책상 위에 공손히 얼마 동안 놔 두고 지낸다. 어쩌면 침묵으로 쓰는 나의 답장이 언저리에 자잘한 바람으로 밀리는지도 모를 일이다.

 

편지 중의 편지.

그건 시라노 드 베라지라크 의 편지이다. 17세기 프랑스의 실제 인물이었다고 전하는 그는 탁월한 검객이면서 칼보다 더 감하고 예리한 문필가를 겸하고 있었다. 가문의 질녀(姪女)인 미모의 록사느를 열애하면서도 록사느의 사랑이 크리스천에게 있음을 알고는 그를 도와 사랑의 편지를 대서해 준다.

그 편지 속에는 사랑의 모든 진실이 적히게 되었으며 사랑하는 이의 영혼에 선단(仙丹) 같은 향훈을 적셔 주어 록사느는 편지 때문에 더욱더 크리스천을 사랑하게 되었고 그가 전사한 후엔 수도원의 손님으로 적적한 여생을 보내는 그녀에게 그 편지는 아직도 부족 없는 말벗이 되고 있었다. 그녀가 받은 마지막 편지는 그녀의 품 속에 간직된 채 종이도 낡고 글씨조차 희미해져 갔다.

15년 후 암살자의 손으로 중상을 입은 시라노는 록사느를 찾아와 의식도 혼몽해 가는 중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심중의 말을 준다. 그녀 품 속에 감추고 있는 편지와 너무나도 일치하는 말들을…

록사느는 비로소 그의 사랑을 알게 되고 한평생에 두 번이나 그를 잃게 되는 비탄에 잠기며 운다. 시라노는 덧없이 숨을 거두고…

 

편지의 오묘함이여

스는 이의 인격 자체일진대 받는 이의 운명을 능히 바꿔 놓기까지도 하는 것이구나.

 

 

 

경대 앞에서

 

거울을 보면 한 여자가 그 안에 있다. 차가운 유리 속에 용케도 집어 넣은 한 장의 간지처럼 얇게 끼워져 있는 그녀.

젊지도 예쁘지도 않은 모습.

눈썹 언저리는 연한 지우개로 문지른 듯이 희끄무레하게 반 가량 지워져 탈색의 느낌을 준다.

그래, 확실히 얼마간의 색소가 줄어든 것이다.

수증기 모양 증발이라도 해버렸는가.

젊었을 때 나의 눈은 두 눈꼬리가 약간 치켜 올려지고 반질반질한 까만 속눈썹이 한 둘레 윤곽을 그어 지나갔으며 그 위엔 섬세한 가시처럼 빳빳한 눈썹들이 촘촘히 고르게 돋아 있었다. 그랬는데 오늘의 여자는 전혀 그렇지가 못하다.

거울 속엔 날마다 얼마큼씩 다른 여자가 다녀갔고 그리하여 오늘의 지금엔 이 여자가 와서 얇게 셀로판지의 두께로 끼워져 있음을 보는 일이라나.

묘한 기분이다.

얼굴을 돌리고 싶은 거부와 구석에까지 몰아붙여진 기 죽은 자아가 스스로에게도 난감하다. 그러나 잠시 후 내 마음은 나직이 말한다.

‘괜찮다 괜찮다’라고….

사실이다.

삶이란 쉼 없는 유전(流轉)이요 시시각각 변모하고 변질하면서 허락된 시간 동안 줄곧 흘러가는 그 유수인 것을. 그러므로 전날엔 남과 같이 젊은 시절을 지냈었고 오늘은 당연히 이쯤의 형편들을 감내해야 한다고, 나는 마음 속으로부터의 깊은 수긍을 스스로 권유하면서 머리를 끄덕인다.

오랫동안 친숙해 온 늙은 비애도 넌지시 내 어깨를 감사 안으며 동일한 말을 들려 준다.

‘괜찮다 괜찮다’ 라고….

 

아침이여

내 마음은 이 측은한 여자를 맞아 공감으로 대접의 상을 차려 주며 오늘의 일과를 평온한 심정으로 시작하기 원한다. 그 첫머리의 한 수서로서 화장을 시작한다.

거울 앞에 앉아 거울 속의 여자를 잠시 점검한다. 이런 때 햄릿 왕자의 대사 중에 ‘여자들은 신이 만들어 주신 얼굴 이외에 연지 곤지를 찍어 만든 또 하나의 거짓 얼굴을 가진다’던 구절을 퍼뜩 생각해내기도 한다.

타월로 물기를 닦아낸 얼굴에 콜드크림을 듬뿍 발라 몇 번 문지르곤 가제로 훔쳐낸다. 희부연 눈썹 외에도 종이처럼 바싹 하고 핏기 없는 입술이 또 한 번 신경을 거스르기도 하거니와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지쳐 있는 이 무력한 여자를 나 자신이라고 인정하는 데엔 용기가 필요하다.

가제의 깨끗한 쪽에 아스트린젠트를 방울방울 떨구어 얼굴을 축이고 그 다음 유액 성분의 언더메이크업을 한 겹 더 바르곤 머리 손질을 한다. 머리를 만지는 동안 로숀이 살결에 잦아들어 다음 순서에 알맞게 되려니 하면서,

좋은 기분은 아니지만 화운데이숀의 매우 작은 분량을 손 끝에 묻혀 얼굴에 고루 펴 바른다. 이 과정이 성가시므로 바쁠 땐 거르는 수도 많다. 가루분을 또 조금 쓴다.

세어 보자.

화장품의 수효가 몇 가지인지. 입술 연지만 하더라도 선물로 받은 것의 여벌이 늘 있곤 하여 여러 색상의 것을 동시에 내 놓고 번갈아 쓰는데 이렇듯이 사소한 선택 따위가 여자의 행복감을 얼마간 부풀릴 수도 있다.

입술 연지의 좀 탁한 것은 엷게 펴서 볼 연지로 쓰면 색깔이 자연스럽고 지속 시간도 긴 효과를 경험했다.

짙은 갈색 연필과 아이라이너로 눈의 윤곽이며 눈썹을 보충하고야 손을 뗀다. 그 사이 이십 분쯤 시간이 경과해 버렸다. 바쁜 아침 시간의 귀중한 이십 분이지만 그렇다고 할애치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제 거울 속의 여자는 얼마간 착색이 되어졌고 이에 따라 생기도 좀 돋아 보인다. 화장의 마술, 이야말로 그 자신이 만들어내는 여자의 거짓 얼굴임에 틀림 없다. 어이없어 그만 씁쓰레한 웃음을 짓는다.

밤에도 거울 앞에 앉으면 한 여자가 이미 그 속에 와 있다. 하루의 삶이 묻혀 온 보얀 먼지와 함께 그날의 아침 화장을 한꺼번에 지워 버린다. 크림으로 닦아내고 비누로 씻은 다음 역시 아스트린젠트를 바른다. 청결하고 촉촉한 감촉이 상쾌하다.

거울 속의 여자를 좀더 자세히 살펴본다. 힘겨운 수레를 옮기듯이 하루의 삶을 전력으로 끌고 다니다가 이제 그 등 뒤에 부려놓고 잠시 쉬는 그녀.

내일의 날씨는 더더욱 그녀에게 까마득한 미지요, 비록 오늘밤이라 한들 하등의 보장은 업지 않으랴. 주어진 여건에의 최선 그밖에는.

정녕 사람에겐 무슨 지혜가 있게 되나. 삶이 명하는 모든 과제를 충실히 섬기고 일하면 이로써 족할 것인가.

때때로 ‘괜찮다 괜찮다’고 나직이 자위할 것인가.

‘괜찮다 괜찮다’고 언제까지나 되풀이할 것인가.

손을 움직여 눈썹과 입술에 조금만 색소를 보태어 주고 얼마 동안 거울 속의 여자와 마주 앉아  이렇게 있어 본다.

이 지쳐 있고 불쌍한 여자와……. .

 

 

 

 

구월, 그 서늘한 큰 손

 

구월의 바람이 분다.

서늘한 큰 손이 더운 이마에 와서 얹히는 느낌이다. 늦은 밤에 먼 길을 온 의사를 대하듯 한 눈 바라만 봐도 느긋이 마음 놓인다.

연초록 풋고추를 불같이 붉고 매운 당고추로 익혀내는 그 뙤약볕에 냉쾌한 찬물을 쏟아 붓고 다니는 살수차(撒水車)의 이름, 9월.

이런 시절에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단지 생각날 뿐 아니라 해를 거듭할 수록 그를 닮고 싶다고 내 마음이 간절히 원한다. 우선 그에겐 정신의 휴식을 주는 별다른 힘이 있었다.

그의 거실은 지구 위의 한 작은 섬과도 같이 특별한 고요를 유지하고 있었다. 소박하고 평범한 사각의 공간에 불과하면서.

남 못지않게 어쩌면 남 이상으로 바쁜 소임을 맡고 있건만 방문객이 문을 열면 마치도 그 사람만을 기다리고 있었듯이 전적으로 맞아 준다.

푸근하고 안정된 그분의 옆자리.

묘하게 고향에라도 온 듯한 기분이 되어진다. 사살상 그는 이미 잔에 넘치는 이해와 위로를 마련하고 있으며 한 점 흐리지 않는 거울 속에, 너의 마음을 낱낱이 보고 있다고 말하는 것만 같다.

서서히 말문이 열린다.

서두를 이유가 없고 가식하거나 과장할 까닭도 전혀 없다. 참으로 놀라운 건 남의 얘기를 들어 줄 때의 그분의 태도와 분위기이다. 좋은 음악에 심취했을 때가 그런가 싶게 온 마음을 적시고 있는 몰입의 표정이다.

품질 좋은 흡인지처럼 이편의 말과 감정을 깊은 내면에까지 흡수해 들인다. 잘 설명할 순 없으나 꼭 그렇게 믿겨진다.

단 한 사람이건만 열 명 백 명이 합심해서 해줄 수 있는 청중의 예절로 대접해 준다. 추운 길을 온 사람이 따뜻한 방에 들어와 몸과 마음을 풀 때처럼 눈물겨웁기조차 하다.

정말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그분 앞에 있으면 서서히 나의 내부가 열림을 알 수 있었다. 나의 깊은 부분, 가둬 둔 부분, 작게 오므렸던 부분, 처음으로 새살이 돋아나는 신생의 부분까지를 열어 놓게 되곤 했다. 그러면서 한편 키가 큰 가로등처럼 어진 불빛을 부어 주던 그의 능력, 정녕 부러운 능력… .

그분은 나이 드신 성직자셨다.

옆에 읽던 책의 책갈피가 접혀져 있고 재떨이엔 한두 개비의 담배꽁초가 있었으나 그것조차 정갈해 보이곤 했다.

격렬하거나 감격적인 성질과는 거리가 멀었다. 기발하거나 재미있지도 않았다. 다만 누구도 준 적이 없는 안식과 평화를 나에게 주었으며 그 힘, 말하자면 그 인격을 오래도록 흠모하게 된다.

지친 영혼을 쉬게 하고 애증(愛憎)의 핏발선 눈길을 거두어 맑고 유순한 눈빛으로 바꿔 줄 그분의 고결한 품격.

사람은 부지불식 중에 그 자신이 얻을 것, 먹을 것을 생각한다. 그러나 주는 이가 없으면 받는 일이 생겨날 수 없다. 주면서 비로소 받는 관계, 그 바르고 아름다운 균형을 추구해야 하리라. 처음부터 줄 능력이 못 되었다면 남으로부터 받은 것을 내 안에 고이 키워 이를 또 다른 남에게 내어 주는 일이라도 반드시 이루어야 할 듯싶다.

오늘, 구월의 바람 불고 서늘한 큰 손이 더운 이마에 얹히듯 지난날 내가 받은 선물을 회상케 하매 사람의 아름다움을 먼 산처럼 다시금 바라본다.

 

 

오늘 생각하는 사랑

 

1. 사랑하게 두십시오

 

‘당신은 왜 사랑을 거부했습니까?’

이렇게 묻는다면 아마도 놀라서 반문할 테지요.

내가 언제, 또 무엇 때문에 주는 사랑을 마다했겠습니까 라고.

그러나 당신에겐 사랑을 거부한 무수한 사실이 있어 왔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사랑에 목 말라 하면서 한편으론 사랑을 낭비하고 차갑게 돌려 세웁니다. 아울러 그 자신도 거부의 쓰디쓴 잔을 수 없이 마셔 온 일을 숨길 수 없을 것입니다.

자식들은 어버이의 사랑을 부담 겨워하며 부부간에도 거부의 선을 그어 저편 이의 참견을 견제하는 일이 많습니다. 단순히 바라보기만 해도 엄마는 즐거운데 아들은 쏟아 붓는 눈길이 거북하여 다른 방으로 훌쩍 옮겨 버립니다. 닫겨 진 문 앞에서 방 안의 기척을 짐작하려 하는 쓸쓸한 모정(모정)쯤 오늘의 세태에선 흔한 사례입니다.

관심에 굶주리면서 관심은 푸대접합니다.

애정만으로는 행복하게 해줄 수 없는 이 시대, 다소의 어긋남이 끼어들면 휴지를 버리듯이 아깝잖이 호의를 내던져 버립니다.

받는 이의 겸손이나 감사의 태도가 전혀 자라나지 못했습니다.

감격하는 일이 적습니다. 감수성이 둔화되어 독선과 이기에 흐르고 있으며 어른이면서 소아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가슴이 작고 피가 식어져 인간적 위급에 떨어졌습니다.

 

사랑하게 두십시오.

사춘기의 첫 그리움을 일기장에 몇 줄 썼다고 해서 온 집안이 떠들썩하게 사건 시 마십시오.

지나가는 소나기를 피하여 잠시 당신의 추녀 밑에 들어섰다 해서 배타의 시선을 보내지 마십시오.

모처럼의 연정으로 편지나 선물을 보내 온 것뿐인데 아무 데서나 발설하여 까닭 없는 수모를 겪게 하진 마십시오.

자만하지 말며 과장하지도 말며 저편 사람이 외롭고 허약한 고비에 이른 것을 이해하십시오.

 참기 어려운 추위에 시달림으로 해서 조금만 당신의 불 화로에 언 손을 녹이려 하는 일을 연민하십시오.

돌림병과 같이 누구라도 이런 처지에 놓이게 됨을 수긍하십시오.

따스한 두 손으로 그의 시린 손끝을 공손히 녹여 주면서 당신 자신에게도 있어 온 옛 상처의 생생한 핏자국을 함께 바라보십시오.

어렸을 땐 강아지에게도 입맞추고 인형에게 털 스웨터를 입혀주며 햇솜처럼 동심이 포근했었는데 성장한 이후로는 이리도 사랑에 인색하고 겁먹게 되는 일을 슬퍼하십시오.

주었으므로 해서 오히려 피해 입은 사례들을 동정하십시오.

단지 사랑했었다는 이유 때문에 뭇사람 앞에서 치욕의 흙탕물을 뒤집어 쓴 이를 위로하십시오. 그 반대로 과도한 탐욕에 빠져 주고자 하는 손길에서 그 이상의 것을 뺏어 버리는 파렴치도 있었습니다. 이런 일을 자타간에 경고하십시오.

사랑하게 두십시오.

사랑하는 이가 기쁘고 보람되게 하십시오.

자신의 사랑이 자랑스럽도록 그 감정을 존중하고 자존심을 대접하십시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처럼 저편 이의 사랑도 귀하고 보배스러움을 인정하십시오.

사랑하는 일만이 사랑의 전부가 아님을 명심하며 사랑 받는 일에도 품위와 예절을 다하십시오.

사랑함과 사랑 받음, 이 두 가지 조화 안에서만 사랑의 능력을 꽃피울 수 있습니다. 나의 사랑이 결실을 바라듯이 다른 사람의 사랑도 그 성취를 도와 주십시오.

모든 것을 주는 이는 모든 것을 또한 바란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주고 받음의 조화를 도모하여 사랑의 광채가 부채살처럼 퍼져나가게 하십시오.

 

사랑의 첫 싹은 설명할 수 없는 신비이겠으나 푸르고 윤택하게 가꾸는 일은 오랜 염원과 애씀의 결실일 테지요.

단 한 번의 차가운 눈길 때문에 온 마음이 얼어붙는 일도 있습니다.

많이 바라지 않았는데 참아낼 수 없는 배고픔에 떠밀렸던 지난 날의 비참을 되돌아 보십시오. 내가 만들어낸 사랑, 온전한 내 것이던 사랑을 굳이 그의 완력으로 부숴 놓은 일도 있었습니다.

푸근하고 달갑게 주야로 미소 지을 수도 있었는데.

산을 옮길 수도 운명을 바꿀 수도 있었는데.

불시에 사랑이 죽었기 때문에 물거품으로 끝난 일도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게 두십시오.

당신의 인격을 해칠 일은 생겨나지 않습니다. 남의 이목에 오해를 좀 끼친다 하더라도 사람 하나의 진실을 대접함은 더 큰 가치가 됨을 명심하십시오.

그러나 감상으로 처리하진 마십시오. 섣불리 자홀 自惚2 하지 마십시오. 경건하고 공손히, 마음 속속들이 따뜻해져서, 생애의 보람으로 공들이고 추수하십시오.

주는 이의 어여쁨에 어울릴 만큼 진실로 받는 이의 아름다움을 꽃 피우십시오.

 

 

2. 사랑스러운 이가 되십시오

 

사랑은 철두철미 만들어야만이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스페인의 여관과 같아서 그 자신이 들고 온 물건만을 본다’ 고 어느 책에선가 말하고 있었듯이 사랑은 자기 자신 안에 미리부터 안고 있는 일종의 약속인 듯합니다. 사랑 받을 이유 내지는 사랑 받을 필연성을 지닌다는 뜻입니다.

사랑스러운 이가 되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한 번 뿐이 아니고 계속하여 사랑 받는 이가 될 수 있기 위해 부단히 성장하고 아름다워져야 합니다.

‘존경 없이는 사랑하지 못하는 사랑의 건강법’을 내세운 이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건강의 유지는 우리 각자의 인격과 양심에로 그 요구가 닿아 옵니다. 비록 어린 사람이나 못 배운 사람이라도 그 나름의 덕성과 품격을 지닐 있습니다.

동물이나 화초처럼 애완품이 되어선 안될 사람으로서, 사람들 사이에만 있을 수 있는 의미와 유익함의 성찬을 차려 서로를 대접해야 합니다.

함께 지낸 시간을 행복하게 여기게 만들어야 합니다.

사랑스러운 이, 사랑 받기에 합당한 그 사람이 되는 일이야말로 사랑을 창조하는 첫 번째 비결일 것입니다.

사람으로 하여 사랑하게 하는 일은 내가 사랑하는 일과 마찬가지로 능력의 개화인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두 사람 (혹은 여러 사람)의 중심엔 보다 더 높고 궁극적인 지향을 두는 일이 중요합니다.

‘서로 마주 봄이 아니고 둘이서 한 곳을 바라봄이 진정한 사랑’ 이라는 뜻이 옮음을 세월이 흐를수록 깨달아 갑니다. 둘만의 밀착은 오히려 함께 있는 성질을 깨뜨릴 수 있습니다.

칼릴 지브란 도 말한 바와 같이 신전의 두 기둥처럼 간격을 두고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관계만이 항구하고 완벽하게 둘의 공존을 성립시킵니다. 왜냐하면 ‘한 나무의 그늘에선 도 한 나무가 자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이란 서로를 키워 주며 나아가선 서로의 영혼을 찾아 주는 행위입니다.

그와 그의 신을 화친케 하면서 은총 안에 생애를 보낼 수 있도록 극진히 보살펴야 합니다. 이러한 배려가 나아가선 사랑 받기에 이르는 길잡이도 될 것입니다.

사랑 받는 이 되십시오.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는 그 사랑스런 사람이 되십시오. 우리 모두가 그렇게 될 때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워지며 삶은 오죽이나 영광되겠습니까.

 

 

3. 동가(同價)의 영혼을

 

영혼을 풀이할 수는 없으나 얼마간의 영성 체험은 누구에게나 있어 옵니다.

원하는 물량을 채운 후에도 못 견딜 공허감이 남아 돌거나 먹어도 가시지 않는 시장기는 영혼 안에 황량한 바람이 일고 있는 때문일 것입니다.

초현실-초자연의 향수처럼 치밀면서 이상한 기후의 멀미앓이처럼 우리의 느낌을 색다르게 할 때도 있습니다.

영혼에서 나오는 갖가지 탄원이 분명 있습니다. 영혼의 추위가 심각한 나머지 생명을 끊는 일조차 있습니다. 그렇다면 육체의 보건을 염려하는 정도로는 영혼의 보건에 유념해야 합니다.

 영혼이 아는 만남, 그 해후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누군가 네 영혼을 부르면 나도 대답해

소름 끼치며 처음 아는 영혼의 동맹’

 

이러한 실감도 드물게는 솟아나는 것입니다.

한 소명을 둘이서 듣는 일은 차라리 무서움과 통합니다. 깊이 침윤하면서 동일 혈육이 되어지는 예도 있을 것입니다.

뼛속에서, 더 깊은 데서, 기이한 전율이 차가운 지하수처럼 방울방울 뿜어나오는 일도.

사랑은 특별한 초대이기에 아주 많이 예비한 사람만이 초대받게 될 줄로 여겨집니다.

찾아서 만나는 인간 관계, 깊이 침잠하여 무르익는 인간성, 신 앞에서 동가인 영혼을, 그리하여 더욱더 그 영혼을 높이 끌어 올릴 때, 비로소 연분의 완성은 깃든다고 말하겠습니다.

그러나 너무나도 아득한 능력입니다.

쉬지 않는 이가, 겸허한 이가, 오래도록 인내하는 이가 이 축복된 성취에 다다를 것입니다.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사랑의 염원은 불변하며, 사랑의 보행자들은 끝없는 대열을 이어 걸어가고 있습니다.

 

 

 

영혼의 추위를 앓는 이들에게

 

겨울의 문턱에서 흔히들 겨우내의 긴긴 추위를 예감하게 되며 이 시각부터 한란계의 눈금은 줄곧 영하의 온도를 짚어 보입니다.

몸이 아니라 몇 곱절 영혼이 시리고 춥다고 말하는 당신에게 이 편지를 띄워 보냅니다.

가령에 살아 있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착잡한 연민을 의사의 눈빛 속에서 흘긋 읽었기라도 해서, 그때 깜깜하던 병원의 복도가 그로부터 주야로 눈앞에 펼쳐지기만 하는 사람 앞에서라며 무슨 말을 지니고 그 앞에 서겠습니까마는.

미지의 친구여,

고통이 무엇인가를 참으로 아는 사람과 고통에 미숙한 자가 마주 서게 될 때 누가 먼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정녕 고통을 알고 있는 그 편 사람이 아닐까요.

여기서 우리는 고통의 능력이라 할 어떤 ‘힘’을 보게 됩니다.

따라서 당신과 나의 경우에 있어서도 당신의 고통과 추위가 보다 더 우람하고 성인적일진대 부디 당신이 먼저 나의 손을 잡아 주십시오. 그러면 그 체온을 통해 어떤 신령한 치유를 함께 체험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나는 이 일을 믿습니다.

‘고통이야말로 가장 영웅적인 세례’라고 말한 파스칼의 주장에 당신도 찬동해 주실 수는 없을까요.

오늘 이 시대에 병폐는 고통 자체이기보다 그것의 기피 내지는 마비의 형상들일 것 같습니다. 강건하고 탄력 있는 생명력 속에선 상처입고 아물리고 또 상처입고 거듭 아물리는 역동이 없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믿으면서도 막상 그 현장에선 얼마나 몸부림치며 도망쳐 나오려고 했겠습니까.

‘타인들’의 틈서리에 춥게 발붙이고 있다고 여기는 자의식의 단정이 사람의 낮밤을 얼마나 더 외롭게 황막하게 만드는지 모릅니다. 위로란 언변이 아니고 살아 있는 행위여야 함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막상 누가 그것을 줍니까.

울음을 아는 이만이 남의 울음을 나눌 수 있고 화해에 목마른 자가 마침내 화해의 능동자가 됩니다. 하면 지금은 당신이 ‘그’가 되어 주십시오.

추위를 힘겨워하는 친구여.

당신의 영혼이 지쳐 쓰러졌을 때 누가 무슨 힘으로 그 다친 허리를 일으켜 세우겠습니까. 더 큰 고뇌와 한랭함과 갈증을 인내하는 이들이 있음을 깨닫고 스스로 맹렬히 힘쓰게 될 때만이 다시 곧은 허리로 일어나 걸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얼마 전 정신박약아들의 인물 사진전을 보았습니다.

두세 살 때 칭찬 받던 ‘쥐엄 쥐엄’의 장기를 지금껏 되풀이한다는 쉰 네 살 초로의 여인이나 이젠 그만하라는 말을 듣기까지는 온종일 동일한 ‘중얼거림’을 끊이지 않는다는 사람들의 무리 중에 하반신을 교통참사로 잃었다는 청년 하나가 함께 살면서 손으로 할 수 있는 이발사 노릇, 청소 담당, 채소밭 가꾸기 등 갖가지 봉사를 도맡고 있다는 것이었고, 전시장에 나붙은 그의 사진에선 건장한 상반신으로 베어진 나무의 밑 등걸을 쪼아내는 노동의 현장이 촬영되어 있었습니다. 그 사진을 보게 된 나에겐 거센 전류의 기이한 충격이 전신을 감돌았습니다. 어떤 의미의 공포, 어떤 의미의 분노, 그리고 어떤 의미의 영혼의 세척이었습니다.

영혼의 추위를 앓고 있는 벗이여,

당신의 추위가 과연 그 젊은이와도 맞먹는 것이거나 혹여 그조차도 압도될 만한 것이라면 부디 허약한 여러 사람들의 손을 잡아 주십시오.

당신의 통곡 앞에서 울음을 그치고 당신의 추위 앞에서 따뜻해지게 해 주십시오. 당신의 추위가 거세고 비통할수록 그 만큼에 어울리는 고통의 격조를 보여 주십시오.

눈을 뜬 사람에게도 위험한 도시의 대로변을 한 자루 지팡이 끝에 정신력의 집중을 몰아 조심스럽게 지나다니는 ‘눈먼 사람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암실에서 사진을 구워내듯이 어둠 속에서 ‘눈뜸’과 ‘봄’을 누리는 이들의 삶은 어떨까요.

그들의 크리스마스는 어떨까요.

점자(點字)로 읽는 성서와 점자를 더듬으며 노래하는 그네의 찬미가는 정녕 어떤 것일는지요. 이즈음 맹인 교회에는 눈뜬 사람들의 관람객(?)으로 붐빈다고 합니다. 눈으로가 아닌 마음으로, 마음으로가 아닌 영혼으로 조물주를 찬미하는 그네의 성가대를 보고 와서 깊은 감명을 얘기해 준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보태어 준 것은 없고 그들로부터 받아 온 감동이 그리도 컸다는 점에 오묘한 대비를 아니 살필 수가 없습니다.

얼마 전에 나는 대구행 기차 안에서 맹인 교회의 그 맹인 목사를 우연히 만났습니다.

소설이 되고 영화화되면서 더욱 퍼진 그에 관한 화제 중에서도 가장 놀라웠던 점은 실명한 그에게 희생의 굳은 의욕을 심어 준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불우고아들이란 사실입니다. 절망의 밑바닥까지 가라앉았던 그는 너무나도 가난한 그들 소년으로부터 뜨거운 사랑과 협력을 얻게 되었음을 계기로 그 낮은 땅으로부터 드높은 소망으로 치솟아 올랐고 이들로부터 채워진 생명의 충전으로 오늘날 맹인의 등불이 되고 눈뜬 이들의 머리 위에 참 신앙의 횃불을 들어 올렸습니다.

근래에 읽게 된 M. 링크 의 작은 책에서 아래의 구절을 인용하고 싶습니다.

 

기도가 우리 생활 속에 와 닿을 때, 기도하기 전까지는 할 수 없었던 일들을 시작하게 된다. 믿기 시작하고, 용서를 구하고, 결코 사랑스럽지 않던 이들을 사랑하게 된다.

기도는 그것 없이는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을 일어나게 만드는 힘이다. 예수께서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지 않으셨던들 십자가를 걸머지지 못하셨을 것이다.

 

마음 추운 친구여.

머리칼도 곤두서는 찬바람 속의 추위를 나도 얼마쯤은 압니다. 장갑도 벗은 열 손가락을 가지런히 빗살처럼 드러내 놓고 있으면 그 벗은 살결에 가지 돋치는 냉기, 그 추위를.

그러나 ‘기도하기 전까지는 할 수 없었던 일들’이 기도함으로 하여 얼마나 많이 솟아나고 꽃피는지에 대하여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가파른 비탈에 세워진 집에서나 하루 종일 자동차가 질주하는 도로변에서도 안전하고 어여쁘게 자라나는 어린이들이 있음을 압니다. 기도하는 방법을 배웠음으로 해서 평화로이 죽어 간 사형수의 얘기도 들었습니다.

영혼의 추위를 앓고 있는 친구여.

이 세상 어떤 고통이나 슬픔도 그분을 넘어설 수 없는 바로 그 이름이신 그리스도가 탄생하셨습니다.

온갖 고뇌를 그 수원지의 물로써 씻어내고 온갖 추위를 그 원자의 불화로에서 덥혀낼 그분이 그 위대한 봉헌의 삶을 살기 시작하실 첫날이 곧 성탄입니다.

 

1969년 7월 20일 일요일, 오후 3시 18분 정각에 지구를 떠난 최초의 유인 우주선이 흙먼지 덮인 달 표면에 내려 앉았다.

우주비행사 암스트롱과 앨드린이 특별히 마련된 캡슐을 달에 안치해 놓았다.

거기엔 시편 8 도 들어 있었다.

‘하느님 내 주시여. 온 땅에 당신 이름 어이 이리 묘하신고..’

 

영혼의 추위를 앓는

미지의 벗들이여,

진정히 바라노니 당신도 깊은 밑바닥에서 아득히 높은 정상까지 온전히 위안받고 거듭 나시기를, 낮은 목소리로 이에 덧붙이노니 ‘메리 크리스마스’

 

 

 

새의 영혼을 가지고만 있다면

 

그녀의 일과는 새벽이 아닌 그 전날 밤에 시작된다.

하루의 일을 마무리 짓고 다음날의 도시락 반찬도 대략 궁리가 잡힌 다음 잠시 빈 의자에 몸을 쉰다. 먼 길을 와서 이제야 도착한 심정이다.

이때가 몇 시인가.

몇 시 몇 분, 그런 건 상관이 안 된다.

어쨌건 이 시간 위에 내일의 삶이 얹히는, 말하자면 다음날의 그 발판인 데에 의미가 있다.

남편과 아이들은 무대 위의 연기자인 셈이고 그녀는 숨은 얼굴로 무대를 꾸려 가는 연출가이다. 꾸미지 않은 맨 얼굴과 허름한 옷매무시로 관객들의 관심 밖에 서서 전신이 땀에 젖는 그 연출가이다.

가정의 평온은 유지되고 있으며 내 집의 건강은 마음 놓을 만한가. 세면대는 청결하고 비품들은 정돈이 잘 되었는지. 또한 문단속은?

가족만이 아니고 그들과 이어진 둘레의 사람들까지 손바닥 안에 넣은 듯이 들여다 볼 수가 있다. 시댁의 무슨 날 무슨 날에 대비하며 애들 사일지라도 빠뜨려선 안 될 문병치레 등을 새 날의 계획 속에 일일이 짜 넣는다.

가슴 속엔 한 묶음의 열쇠꾸러미를 차고 있으며 그 열쇠들은 자주 쓰여져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가구류보다 더 많이 사람의 마음을 여는 데에 쓰이는 이 자잘한 열쇠꾸러미.

희고 가느다란 그녀의 열 손가락, 손 끝의 물기는 새벽녘까지도 마르지 않는다.

일하는 손과 깨어있는 가슴.

그녀가 바로 당신이다.

당신은 밤의 심연을 알고 있으며 그 아득한 밑바닥에서 홰를 치며 푸드득거리는 첫새벽의 탄생을 또한 안다. 태고에서 오늘까지 온 인류의 밤의 불침번은 당신들 여성이었음을.

비 오는 소리.

낙엽 뒹구는 소리.

만상에 이슬 내리는 그 들리지 않는 소리조차 능히 들으며 밤의 요람이 당신을 품어 안고 천천히 흔들어 줄 때 세상은 잠시 그대의 체중 아래에서 출렁거린다.

잠결에도 들리는 먼 종소리.

신의 밤나들이의 신발 끄시는 소리와 사랑하는 이들의 맥박 소리, 뒤척이며 돌아 눕는 그 가물한 기척까지도 낱낱이 아는 그대. 뜨겁고 성실한 관심은 오묘한 가얏고처럼 민감히 느끼고 울려내느니 포도주보다도 더 취하는 밤의 도취, 잠시 동안의 꿀 같은 안식에도 그대의 응감 쉬지 않는 것을.

 

그렇다. 삶이란 밑바닥까지 그 맛을 흔들어 깨우는 자가, 그리하여 이를 속속들이 맛보는 자가 주인이니 그러므로 당신이 곧 주인이다. 삶의 음미의 가장 아래 층계에서 맨 위의 층계까지를 헤일 수 없이 오르내리는 당신이야말로 가려진 모든 얼굴을 보는 사람이라. 한 뭉치의 열쇠꾸러미는 당신의 권리요 의무이니 즉 그것은 주인의 증표인 탓이다.

뜨겁고 소금 맛 나는 눈물,

수백 번 상처 입은 마음,

하고많은 밤을 내일에 대비하는 궁리와 결단으로 다지며 뼈아픈 진실과 인내를 깨쳐 가는 당신.

 그 가파로움 중에서 몸에 익히는 한 가닥 금동아줄의 신앙.

당신은 기도한다. 하루의 비롯함에 빌고 이날의 마침에도 빈다. ‘주여 함께 해 주소서’라고.

함께 함에 대한 갈구야말로 여자의 살을 가르고 나온 원초의 육성이며 오늘에 이르도록 날마다 새로이 발음되고 있음을.

‘함께 해 주소서

부디 함께 해 주소서’

이처럼 아뢰며 힘을 낸다. 실지로 힘이 솟아난다.

사람에겐 본능이 짚어내는 자구책이 있기 마련이며 자력으로 우물을 파서 청량한 단 샘물을 그 자신과 이웃에게 나누어 먹인다. 조금만 돕는 힘이 주어지면 일어나 다시 걸어갈 수가 있겠는 그 귀한 금싸라기의 촉매. 비록 겨자씨 만한 불씨일지라도 호호 입김불어 소중히 피워 올린다.

남자를 땅 위의 건물에 비교할 때 여자는 집을 세우게 하는 그 집터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지쳐 돌아올 때 어깨의 짐을 벗겨 땅 위에 놓지 않는가!

어느 날, 아직 돌아올 시간이 아니데 남편이 방문을 들어선다.

“여보 웬일이세요?” 물어보면

“그냥….. 열이 좀 있어서” 멋 적게 대꾸한다.

순간 그녀는 이만하기가 다행이라고 가슴을 쓸어 내린다. 사표라도 내던진 게 아니고 단지 몸이 아파서 시간을 앞당긴 것쯤이라면 이해가 가고도 남는다. 그녀는 비장의 우물에서 떠 온 단 샘물로 그의 목을 축여 주고 신열도 말끔히 씻어 내리게 한다.

물론 남성들이 주는 것도 많다.

‘남자는 그 정신에서 여자보다 높고 육체에서 여자보다 낮다’고 하였다.

많이 가진 건 나눠 주고 모자라는 것은 얻어서 채우는 보완의 성질로서 남녀의 균형을 바라볼 수 있다.

신부나 수녀들의 수도서원이 신의 소명이듯이 결혼도 일종의 소명이라는 말이 나돌고는 있으나 막상 그 투철한 인식이 뿌리 내리는 데엔 이만저만 굳건한 협동 없이는 안 되는 노릇이다.

성취의 어려움, 그 과정은 지루하고 가열한 법이다. 산 밑의 돌을 산의 정상에까지 뒹굴려 올리는 시지프스의 의지와 추진력이 있어야만 한다. 살갗이 벗겨지고 흥건히 피가 내배더라도 손을 결코 때지 않는, 이렇듯이 참담한 인내가 과연 가능하겠는가.

남성은 누구나가 여성의 아들이다. 예수조차 마리아의 아들이셨다. 여성 또한 모두가 남성의 딸들이다. 이 질기고 운명적인 혈통에서 살피더라도 진실로 같은 피, 같은 살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런데도 남녀의 현실은 어째서 그 거리를 좁힐 수 없는 것인지.

여심의 탄원, 살결에 문신 뜨듯 아픔 부르짖음…..

여인들이여

당신의 할말들을 후련히 뱉어내거라.

화려하지도 과장하지도 않은 그 진짜배기의 참말들을 남김없이 모두 말하여라. 말하여라.

 

그러나 복되다.

한쪽 문이 닫힐 때 다른 한쪽 문이 열리는 이치로 마음 추운 당신은 전심의 기도를 바칠 줄 알게 되었음을. 밤낮 없이 자라는 나무들과 땅을 적셔 흐르는 시냇물처럼 당신의 신앙도 나날이 순조롭게 자라고 있음을.

여인들이여.

침몰에 대해 겁먹는 당신의 공포야말로 심각하다. 어렵게 중심을 재며 한걸음 한걸음 걸어가고 있다가 아차 하는 사이에 발을 헛디디면 실로 어이없는 추락…. 그러나 당신은 다시 시작한다. 그 깊고 깊은 낭떠러지에서 본래의 위치에까지 복귀하는 당신.

잠시 몸을 쉬는 밤의 의자. 내일의 무대를 염려하는 연출가의 책임에 돌아와 머문다.

가슴 속엔 한 묶음의 열쇠꾸러미를 차고 있으며 그것들은 자주 쓰여져 반짝반짝 광택을 내고 있다.

다시 말하거니와 당신은 기도한다.

한 가정에는 보이지 않는 기도의 기둥이 있는 법이거늘 당신이 그 기도 기둥이다.

어쩌다 쉽게 살아지는 하루가 있어 이런 날 오히려 불안하다.

생명을 걸듯이, 오로지 절박하고 가파르게만 살게 되던 오랜 날의 습관엔 이리도 낯선 생리를 견디기 어렵다.

고독하지 않은 날의 부자연스러움,

이런 말조차 조금은 과장이 아닌 당신.

수년 전에 본 영화 중에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라는 것이 있었다.

그 끝 장면은 정신 병원을 탈출하는 흑인의 모습을 보여 주었었다. 희뿌옇게 동트는 여명을 배경 삼아 커다란 발걸음으로 달려가는 그이 새하얀 바지자락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동상처럼 검고 건장한 체구로 언제나 빗자루를 들고 병원의 출입문을 반쯤 막아 서곤 하던 그.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거인, 백치인 줄만 알았던 그는 사실상 모든 백인을 능가하는 지혜와 용맹을 감추고 있었다. 칼날보다 더 강하고 무서운 그의 날개를 꼭 필요한 때에 날기 위해 검은 육체 속 누구도 못 보는 곳에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 새벽 그는 날아올랐다.

백인들이 고작 창문으로 탈출을 계획하던 그 견고한 돌집의 정문을 단 일격에 분쇄하고 거칠 것 하나 없이 창공으로 날아오르던 그.

그렇다. 새는 무게와 상관 없다.

비록 탱크의 중량이더라도 원할 때 날 수만 있다면 그것이 곧 새다. 아주 완벽한 새다.

여인들이여

당신의 본질도 새라 이르겠거니 새의 갈망이며 새의 영혼이라 이르겠거니

새.

금빛보다 더 화려한 순백의 날개로 동트는 새벽 하늘을 물살 휘저으며 날아오르는 그 웅려한 날개짓.

그렇다. 새의 영혼을 가지고만 있다면 누구든 하늘을 날게 될 것이다. 나르는 것을 막는 자 없으리니. 진실로 창공을 제압하는 그 날개를 이 세상 어떤 힘이 꺾어 내릴 것인가.

사는 일엔 머무름이 있을 수 없다. 올라가거나 아니면 내려가는 일의 두 가지로서 전부이다.

상승하는 일.

숫돌에 칼을 갈듯이, 날려는 갈망의 칼날을 세우는 일.

검은 몸 속에 날개를 숨기고.

어느 날 순백의 두 날개를 펴서 높이 높이 하늘을 날아오르는 일.

날아오르는 일.

날아오르는 일.

당신은 그 일을 할 수 있다.

여인들이여

밤의 심연을 아는 그대, 그 아득한 밑바닥에서 홰를 치며 날아오를 일을 꿈꾸면서.

꿈꾸면서 견디자.

여인들이여.

 

 

** 지금도 ‘필사 筆寫’ 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Disclaimer: 여기에 실린 글은  copyright가 된 책, 기사를 ‘발췌, 전재’를 한 것입니다. 모두 한 개인이 manual typing을 한 것이고, 의도는 절대로 저작권 침해가 아닌, fair use의 정신을 100% 살린 것입니다. 의도적으로 ‘시간적인 제한, 독자층의 제한’을 염두에 두었고, 목적은 단 한 가지 입니다. 즉 목적을 가진 소수 group (church study group, bible group, book club) 에게 share가 되었습니다. password protected가 되었는데, 만일 이것이 실패를 하면 가능한 시간 내에 시정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1. 그때 사정에 맞는 요구
  2. 혼자서 황홀해함, 또는 자기도취에 빠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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