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eld of dreams, trancending time & place, autobio in progress..

사랑의 말 – 김남조 – 1983년

 

차례

 

제1장  오늘 생각하는 사랑

시작의 의미

먼데서 오는 편지

문 앞에서

회신 없이 오고 간 편지들

경대 앞에서

구월, 그 서늘한 큰 손

오늘 생각하는 사랑

영혼의 추위를 앓는 이들에게

새의 영혼을 가지고만 있다면

 

제2장 그 먼 길의 길벗

나의 삶, 나의 글

진정한 것

나의 이력서

장미

친구여 화해하자

여름나무 같은 삶과 사랑을

그 먼 길의 길벗

 

제3장 가슴 안의 그 하나

기도 연습

백조 이야기

돌아오는 이를 위하여

마음의 얼음을 풀고

사랑으로 들어올리는 삶

시와 사랑

파지(破紙)를 내면서

결혼과 나

가슴 안의 그 하나

 

제4장 마음의 성소(聖所)

추운 시절 이야기

그 수평선을

마음의 성소(聖所)

사랑을 위하여

사월의 연가

신혼의 의미

잊을 수 없는 동화

 

제5장 영혼의 아픔을 겪는 이들에게

겨울새의 날개 위에

동일한 시대, 동일한 별에서

오늘을 사는 성인상(聖人像)

주의 영광을 앞세우는 기도

결혼에 대하여

아름다운 사람

칠월의 젊음들

영혼의 아픔을 겪는 이들에게

사랑의 큰 땅

시를 위하여

만들어 주는 삶

삶과 죽음 안의 정진(精進)

나의 매력남

신앙의 흐린 글씨

 

 

 

 

제1장 오늘 생각하는 사랑

 

시작의 의미

시작의 의미는 새벽의 의미와 동일하다. 밤중에라도 결정 짓고 즉시 시작한다면 그것은 홰를 치는 첫새벽이 되는 것이다.

정녕 그건 새벽이다.

무더운 여름 밤, 잠도 설치고 번민의 늪에서 허위적 거리던 당신이 땀에 젖은 긴 머리채를 냉수에 감아 헹구고 손을 모아 기도 드린다면 신은 필시 그 음성을 들으실 것이며, 당신이 소망과 결정을 들어 올린다면 그 또한 푸드득거리는 날개 짓으로 여명의 하늘을 가르며 날아오를 것이다.

겨우 한 발자국 내디딘 발걸음에 불과하다 해도 쉬지 않고 걷는다면 언젠가 목적의 땅에 다다르게 될 필연의 약속 임도 믿을 일이다.

신은 결과를 지배하시고 사람은 과정의 권리를 차지한다. 과정은 사람의 몫이나 최선을 다하는 이상의 인간적인 힘은 없다.

좌절할 밖에 없었던 여건을 다시 점검하고 넘어진 그곳에서 몸을 일으킬 때, 비록 또다시 좌절하는 한이 있더라도 거듭거듭 일어나 걸어갈 수 만 있다면 이는 새벽의 사람이요, 그 시간이 심지어 죽음과 인접한 것이라 해도 시작의 장한 의지는 굳건한 바위가 되어 남을 것이다.

물론 우리는 알고 있다.

사람이 절망하여 엎어질 때의 쓰디쓴 눈물의 맛을.

몇 번을 날아올라도 매서 시도는 헛되고 진흙에 박힌 수레와도 같이 겨우 손잡이만이 뽑아져 나온 참담한 경험도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손잡이를 건진 일은 전부를 당겨 올린 가능성의 시초이며 성취의 문을 열 열쇠도 되지 않으랴.

당신은 화해를 원한다.

그렇다면 그 사람이 있는 곳으로 향(向)을 잡아야 한다.

당신은 풍성한 추수를 꿈꾸고 있다. 그렇다면 농기구를 들고 남보다 먼저 밭으로 나가야 하고 더 충실히 거기서 일해야 한다. 당신은 어려운 확률의 과녁을 맞추는 능한 사수이고 싶다. 그렇다면 천 번 만 번의 실패를 감내하는 철저한 분발을 배워야 한다.

 

당신은 사랑을 원한다.

아아, 그 목마름…

당신은 사랑을 원한다. 낙타가 제 몸 속에 저장했던 물로 갈증을 푼다고 하듯이 최소한 당신 자신의 사랑으로 목을 축이며 힘을 내야 한다.

그리고 먼저 사랑해야 한다.

감자를 심으면 어미감자는 땅 속에서 풀어져 없어지고 보석 같은 햇감자들이 그 자리에 영글듯이 당신의 사랑도 먼저 허리를 구부리고 오랫동안 흙의 능력을 신앙해야 한다. 소망 중에 인내하며 봉사해야 한다.

아무리 늦은 시작이라도 결코 너무 늦은 건 아니다. 시작은 곧 새벽의 의미이거니 창창한 긴 날이 당신을 도와 온갖 보람을 솟아나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지금 시작하라.

 

 

먼데서 오는 편지

먼데서 오는 편지는 배달이 더디다. 그러나 마침내 우편함 속에 그것은 들어 있게 된다.

먼 땅의 햇빛과 바람이 배어든 보송한 종이 살갗을 두 손바닥 안에 꽉 잡아 쥐었을 때 온몸이 화끈해지는 기쁨.

기다림의 나날.

마치도 옥을 갈듯이 기다림의 지혜를 닦아야 한다.

목마름을 참아라.

정갈한 냉수사발을 받아 들고 맑고 냉쾌한 수분으로 전신을 적시는 복된 해갈을 얻으려면 아무 잔에나 입술을 대선 안 된다. 그대의 참 생수(生水)를 얻을 때까지 불 같은 갈증도 견디어라.

사람에겐 목마름이 중요하다.

배고픔 역시 중요하다.

왜냐하면 목마르거나 배고픔으로 하여 먹고 마시는 순서가 약속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있다.

배고픈 사람만이 음식의 참 단맛을 안다. 눈물 나는 고마움도 안다.

생각해 보라.

멀리 가는 새는 높이 날며 값진 만남은 충실한 예비가 차지하는 그 보답이다.

선택을 준비하는 큰 아기들아

선택의 예절 잘 가꾸기를 귀중한 과수밭에 공 들이듯이 하여라.

큰 아기들아

미혼의 하늘을 이고 그대들 뙤약볕에 서 있거니, 지금은 동서남북 어디를 살펴보아도 생애의 연분인 그의 모습이 보이지를 않는다. 하지만 조만간 에 눈앞을 가득 채우는 운명의 사람을 맞게 되리라. 만나면 즉시 알아볼 그대의 그 사람을…

큰 아기들아

만나기까지의 과정을 조바심하지 말고 만난 다음의 연분의 다난(多難)을 견뎌낼 수 있도록 준비하여라.

사랑하는 사람 사이 관계의 모습은 밋밋한 비단 허리띠 같은 게 아니고 순은의 고리와 고리가 하나하나 맛 물리듯 어렵게 정교한 성실의 것이다. 그 선택은 한 번에 그치지 아니하며 살아 있는 동안 거푸 몇 번이라도 되풀이되는 집요한 질문임을 명심하거라.

사실이다.

사람들은 얼마나 전력투구로 이 질문 앞에 몸을 내던져 맨살을 으깨는지.

‘이 여자가 내 영혼의 짝인가?’

‘이 남자가 내 몸의 절반인가?’

정녕 사실이다.

죽어도 이 한 가자, 진실의 속살을 들추고 싶다. 살 속으로 살 속으로 촛불을 들이대고 싶다.

‘이 여자가 나의 갈비뼈인가?’

‘이 남자가 나와 동일 혈육인가?’

사랑하는 사이에서 사랑함으로 하여 이리도 가혹하게 다가서는 물음.

큰 아기들아

그대는 선택의 관문을 다 뚫을 수 있겠는가. 줄곧 합격의 보장 위에 설 수 있겠는가. 시퍼런 작두 날이라도 밟고 서겠는가.

한 남자가 마지막 숨 거두는 자리에까지 그의 남김 없는 사랑과 의탁이 되어 주겠는가.

그의 영혼을 육체에서 갈라내어 공손히 신께 봉헌하는 그 자리 거기에 산 증인일 수 있는가.

탄생엔 그의 어머니가 함께 했듯이 죽음엔 그대가 자리를 지키며 모성의 이불자락을 덮어 주겠는가.

사랑만큼 무서운 건 없다.

사랑보다 더함 모서리는 없다.

그래도 사랑하겠는가.

 

이런 말이 있다.

‘진정한 결혼은 영원한 약혼자와 같은’ 성질이라고,

이 말에 대해 생각해 보자.

신이 한 분 이시듯 유일한 존재인 그, 혹은 그녀, 그에게 나아가며 더욱더 그의 것이기를 열망하는 불 같은 희구.

날마다 새 얼굴로 열리는 아침 하늘이나 밤 사이 새로 차오르는 단 샘물과도 같이 신선하며 무량하기 바라는 사랑의 염원이야말로 갈수록 더해질 처녀성의 심화일 듯 싶구나.

모래알보다 더 많은 세상 사람들, 그러면서 그 한 존재에마다 신비한 개별성을 부여하신 조물주의 섭리란 얼마나 오묘한가. 그의 신비의 전부를 열어 주는 그녀가 될 수 있겠는가.

서로를 공손히 끌어올리는 가운데 둘이 함께 높여지는 일이야말로 바람직하다.

 

사람에겐 사람의 길과 염원이 있으며 사람이기에 사람의 짝을 원하게 된단다. 따라서 이를 주실 수 있는 분, 모든 베풂의 근본이신 신께 갈구하며 신의 좌석을 두 연인 사이에 마련해 드려야 한다.

‘사랑은 서로 마주 보는 게 아니고 둘이 한 곳을 본다’는 말은 이래서 진실이 된다 할 것이다.

하나의 사랑은 하나의 성전을 쌓는 행위이므로 하나의 종교와도 같다. 그러므로 사랑의 모든 시간은 예배와 통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왜 그렇게 말하는가고?

그건 사랑에 빠질 때만이 이해하게 된다. 내 감히 말하리니 사랑할 때만이 사랑에 따른 온갖 내적인 음미가 가능한 법이다.

‘결혼은 사람의 품위를 훼손하지 않고 본능을 충족시키는 유일한 제도’라는 말이 생각난다.

품위란 도덕의 준수 같은 일에도 상관되겠으나 그보다도 인격과 인권에 대한 뜨거운 관심이며 그 용맹한 옹호일 듯 싶구나.

저편의 유익을 보장함으로써만 그 자신도 유익을 나누어 갖는다. 그는 먹이면서 함께 먹고 그를 기르는 가운데 함께 자라며 그의 모습을 정돈해 주면서 스스로도 아름다워진다. 활력의 불심지를 실하게 할 그때 둘이 모두 광명한 땅에 머무르게 될 것을.

큰 아기들아

꿈으로만 희구하는 사랑이나 행복은 화려한 꽃다발과 같아서 아름다우나 매우 허약하다. 걸어가고 달려가야 한다. 필요할 땐 사막도 가로질러야 한다. 우물이 마르면 샘의 밑바닥을 더욱 파헤쳐서 솟구치는 새 물줄기를 디밀어 올려야 한다.

큰 아기들아

첫가을의 바람이 분다.

흘려 보낸 무수한 밤하늘과 그 새벽과 불볕의 여름 한 시절을 지내어 철철 넘치는 강물처럼 청량한 구월의 바람이 불어 오는구나.

좌르르 드러눕는 억만 파도와도 같이 도시와 산촌을 가리지 않고 단번에 쏟아 넘치는 이 상쾌함.

큰 아기들아

영혼의 짝을 만나기까지 사람은 외로운 존재이다. 영혼의 짝을 만난 다음에도 사람은 역시 외로운 존재란다.

하지만 이래서 좋지 않으냐.

외롭기 때문에 묵상하게 되고 친구를 알아보게도 되느니, 연민과 축원에 눈 떠 겸손을 배우고 잠 못 이루는 심야의 묵상과 그 깊은 곳을 지나가시는 신의 신발 끄시는 소리까지도 듣게 되리라.

자주 심약해지고 상처만 잘 입는 인간의 참 모습, 그 숙인 얼굴의 눈물 자국을 일일이 살피시는 주의 자애를 깨달음으로 사람의 소명을 남김없이 들으리라.

삶엔 리듬이 있다.

긴장과 해이, 용납과 거부, 사랑과 미움 등의 상반심리가 가로 세로의 실로 얽혀 한 솔기의 무명을 짠다. 음정의 고저 장단도 한 곡의 음악 안에서 낱낱이 쓰임 있게 되느니, 이로써 리듬과 조화를 보태어 전체의 격조를 끌어올리게 되는 이치니라.

삶은 창조이다.

첫날의 탄생은 타력에 의해 생명이 비롯된 것이었으나 일단 우리 손에 삶의 운용(運用)이 넘어 온 다음부터는 우리들 각자의 기량에 맡겨진다.

능한 자는 창조한다.

삶을 통해 그대도 창조의 영광에 동참하고 싶으리라. 그렇다면 창조의 고통도 감내해야 한다. 과녁에 맞추어 화살을 겨냥하고 팽팽히 활시위를 당기는 때의 긴박감, 일심불란의 몰입에 속속들이 그대의 몸을 적셔야 한다.

사람을 그 안에 담아 넣는 삶이라는 집. 이는 벽돌과 철근으로 짓기에 앞서 인격과 협동으로 세우게 된다는구나.

큰 아기들아

혼자를 겁내지 말아라.

혼자의 내부에 친구가 있다. 여럿의 나다. 그러므로 그 모두를 한 질서에 통합시키면서 부단한 자아 점검, 성숙하는 가치관, 뿌리 내리는 신앙 등을 쌓아 가야 한다.

좋지 않으냐.

느리게나마 쉼 없이 자기를 형성하는 일이…

하여 부디 분발하거라.

불에 달궈지는 시금(試金)의 단련에서 도망치지 말지라. 정녕코 이를 이겨내는 사람들만이 서로 줄 거리를 갖게 되는 법이다.

큰 아기들아

미혼의 하늘은 창창하게 높고 그대들 때때로 서로 타인이라는 느낌에 붙들려 참담해지곤 한다. ‘타인이다 타인이다’ 라고 후련히 고함지르고 싶은 충동과, 실바람이 닿아도 피가 흐르는 과민 등은 그 모두 니네가 젊어 있는 탓인 것을.

그래서 좋지 않으냐.

사랑하는 큰 아기들아.

 

바라고 또 바라느니 여자이기 전에 인간이 거라. 행복보다 먼저 형성(靈性)의 꽃핌을 크나큰 지표로 삼아라.

첫 날의 만남은 묘목에 불과하니 비바람 고비고비를 굳건히 이겨내어 우람한 성목(成木)으로 키워내거라.

연분의 성목을 기필코 이루거라.

큰 아기들아.

 

 

문 앞에서

문 앞에 서면 묘한 느낌 이곤 한다. 얄팍한 문 한 겹을 사이에 둔 것뿐인데 그 안의 형편을 전혀 헤아릴 길 없는 무딘 내 눈이다.

심지어 아이들의 방문 앞에 섰을 때도 감정이 거북한 경우가 생긴다. 단지 느낌으로서만이 아니고 사실이 그렇다. 흉허물 없는 가족 사이라도 갑작스런 침입에 당황하는 표정을 읽게 될 때 피차가 민망스럽다.

“왜 엄마?”

분명코 왜 왔느냐는 질문이다. 용건이 없거나, 있더라도 긴급한 게 아니라면 다음으로 미루고 싶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그럴 만도 하다. 그 자신의 특별한 긴장에 감사여 손님을 맞을 마련이 못될 때가 사람에겐 있는 법이다.

나 역시도 그렇다. 사랑하는 자식들이긴 해도 불시에 방문을 열고 들어와서 모처럼 매만져 놓은 질서나 형편을 깨뜨려 버린 일을 경험한 바 있다. 일각이 아깝게 바쁜 글을 쓰고 있거나 할 땐 이만저만 짜증스럽지가 않다.

“왜 그러니?”

한 마디 짧은 말에도 거부의 가시가 느껴졌던지 말없이 문을 닫고 나가 버린다.

 문 앞에서 잠시 주저한다.

이 문은 나에게 열릴 것인가.

단지 물리적인 해결로서만이 아니고 양쪽의 심정이 순조롭게 통하게 될 내적 통로도 정녕 열릴 것인가. 서로의 진실이 과여 화락한 응답을 이루게 될 것인가.

사람은 어차피 남의 인생의 문 앞에 가서 노크한다.

자유로이 드나든다고 여김은 적잖이 착각일 때가 있고 열리지 않는 문의 차가운 나무판자에 머리를 부딪는 비참 감을 실지로 맛 보기도 한다. 화목하게 잘 지낸다고 보여지는 부부나 연인들 사이에 있어서도 한평생 언제라도 그 문이 열려 있다곤 결코 못할 것이다.

어설픈 육안으로서는 도저히 알아볼 수 없는 문의 비밀들.

때문에 문 앞에서 겁을 먹는 일이 생겨나곤 한다. 조심성이 늘고 마음도 추워진다. 거부의 문이라면 피해 가고 싶다는 타산마저 치 받는다. 두드려 보기도 전에 상처부터 입는 과민 현상인들 없지 아니하다. 갖가지로 묘하다.

어려서부터 보아 온 성화(聖畵) 중에 예수께서 문 앞에 서 계시는 그림이 있다.

문엔 손잡이가 그려져 있지 않으므로 안의 사람이 열어야만 들어가실 수 있다는 풀이인 바, 자못 의미심장하다.

그런데 문 안에 있는 건 나 자신일 수도 있다. 내가 문 안에서 빗장을 굳게 잠그고 이웃이나 형제 사이를 차단했을 수가 있다. 사람뿐이 아니고 외계의 모든 광명한 것을 떠밀어 내면서 껍질 속의 소라처럼 답답하고 숨막혀 하는 폐쇄적 상황들.

문을 여는 건 첫째로 정신의 관용이다. 서로 소통하고 채워 주면서 진정한 왕래를 가꾸어 감이 물론 바람직하다. 그러면서 다른 한편 아래의 각도에서 살펴봄도 무용하진 않을 것 같다.

나는 문 밖에 있고 문은 열리지 않는다. 이런 때 문 밖이라는 조건은 뒤집어 놓은 문 안이 되기도 함을 살필 일이다. 내 쪽에서 볼 땐 분명코 나의 문 안이다. 그러므로 내가 열어야만 양쪽의 소통이 가능해진다는 논법이 솟아난다.

문을 열자. 지나치게 개방적인 게 아닌 범위 안에서 서로의 울타리를 헐고 문을 열자.

사람들의 사이만이 아니고 모든 아름답고 풍요한 것과 그리고 으뜸으로는 신이 들어오실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자.

 

 

 

회신 없이 오고 간 편지들

 

선생님

꼭 16년을 문학을 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풋문인, 매사 서두르고 어렵습니다.

하지만 시인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진 선 미의 주인입니다. 시인을 만나면 마음이 밝게 개고 날 듯 꿈과 낭만이 부풀어 오릅니다.

오늘은 저 불우했던 나혜석의 ‘참회의 글’을 읽습니다. 쉬는 동안 많은 책을 읽었지만 나혜석의 솔직한 자기 고백의 글들은 저의 내면에 성숙을 가져 왔습니다. 그녀의 일생은 불우했지만 훌륭한 화가 지식인이었습니다.

 

편지의 묘미는 철저히 사신인 데에 있고 그 겉봉에는 친전이라고 또박이 적어 넣는다. 문갑 속에 간직하기조차 허술하다 여겨져서 명주 피륙 속 갈피에 끼워 넣고 장롱 밑바닥에 그것도 저편 구석에 꼭꼭 눌러 둔다.

편지에 적힌 사연들은 몇 년, 몇 십 년까지도 거기서 잠을 잔다. 유리병 속에 따라 넣고 깊은 바다 속에 가라앉히는 마술의 약품처럼 세월의 심연에서 무한정 묻혀지고 겹 절이는 사이 기묘한 화학작용을 거듭하면서 아주 다른 물질이 되기도 하리라. 그 편지를 꺼내는 순간 뽀얀 연기가 서려 올라 검은 머리를 하얗게 바꿔 놓는 따위로…

그러나 요즘 그런 편지는 퍽 드문 것 같다. 육체를 감싸는 의복에 있어서도 예사로 줄이고 잘라내는 노출시대이니만큼 마음의 속살도 애써 감출 까닭이 있겠느냐는 식의 세태임이 분명하다.

아침 신문을 전날 밤에 TV에서 읽어 주는 시대에야 편지보다 전화로, 그것도 인사 빼고 용건만 말해 주는 편을 더 좋아한다. 아니, 좋다 나쁘다 의 비교 의식조차 거르고 의당 그래야만 한다는 단일 답변이 나와 버리고 만다.

하지만 이런 시대이므로 해서 편지에의 향수를 골똘히 곱씹게 되는 면도 있다.

 

편지라는 그것.

나와 편지류와의 관계는 다소 기묘하고 어느 의미로 비극적이랄 수도 있다.

나는 여학교 시절부터 마음 속에 특별한 한 사람을 지니고자 했으며 그 허구의 인물에게 편지를 썼었다. 지금 생각하면 작게 접혀 있었던 내 마음을 광활한 외부로 열게 하는 필연의 촉매들이었다. 내 감정을 달갑고도 안식 없는 사역(使役)에 휘둘려져서 너덜너덜 닮아지는 것만 같았었다. 말하고 싶고 더하여 과녁을 쏘아 맞추든 사적(射的)의 적중을 원했었던 성싶다.

 

글에는 농도라는 게 있다.

가장 짙은 건 시인의 비장 수기(手記) 쯤에 가두어지고 중간 부류는 작품이 되어 독자의 손에 넘어가며 세 번째 쯤 탈색된 사연들이 봉투에 담아져 편지가 되는 건 아닌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조차 피 묻은 지문이 찍히곤 한다.

아니다. 사실은 지밀지순하고 으뜸으로 농도도 짙은 것을 편지에 채워 놓고 싶어 한다고 말해야 할 듯싶다. 더하여 별달리 공들이는 편지도 있다. 초안을 잡은 후 다음날까지 퇴고를 하여 다시 또 정서하는 경우겠는데 김 유정의 연서 등을 예로 든다면 거기엔 심성의 결정체들이 야문 왕모래 낱알처럼 박혀 있다.

송신조차 망설여질 경우도 있으리라.

벗은 칼날인 그것을 누구에게 들이대겠는가?

내 격정의 유혈을 무슨 권리로 남의 가슴에 떨구겠는가?

그렇게 해서 못 보낸 편지들의 과다한 염료를 빼내고 흐늑흐늑한 거품을 얼마 보태어 다른 형태의 글로 바꿔 놓는 일도 있으리라.

실지로 우송한 편지라고 한들 그 심정에 맞먹는 회답을 받는 일이 어디 쉽겠는가. 편지란 쓰는 그 자체가 목적일지도 모를 일, 써졌다는 사실의 어떤 충족감 외에 더 바랄 게 없는지도 모를 일이다.

보답 없는 편지를 쓰곤 하던 나는 어느 때부턴가 회답을 못 주는 수취인이 되어 오기도 한다. 글 쓰는 이는 누구나 독자의 편지라는 걸 받을 것이지만 나의 경우 유인물이 아닌 서신의 대부분이 독자나 후배 시인들, 또한 흩어진 옛 제자들의 편지이다.

글을 평해 달라는 내용이거나 그 자신의 처지를 충실히 설명한 다음 하등의 조언을 부탁하기도 한다. 이런 경우라면 회답을 쓸 수도 있겠는데 더러는 매우 아름답게 호의와 찬동의 뜻을 담아 보낸 분들의 것은 잘못 배달된 남의 편지처럼 거북하기만 하다.

사람 마음의 춥고 덧없음이여.

그들이 필요했던 건 그 자신의 감정을 열도록 도와 줄 작은 촉매였으리라. 꽉 막혀 답답한 가슴에 통풍을 가능케 하고 상쾌한 먼 수평선을 마음껏 보게 해줄 그 전환기에는 누군가 조력자가 필요한 법이다. 문제는 그 시의(時宜)1에 있으니 누구라도 있어야 했을 바로 그때 내가 그의 문 앞을 지나가고 있었던 것이라고 풀이할 수가 없다.

어느 땐 내가 받은 편지가 그 옛날 내가 띄워 보낸 편지의 산울림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바람과 구름 속을 오랫동안 배회하다가 문득 내가 사는 오늘의 주소로 되돌아 온 건 아니었나?

 

장미의 계절 유월입니다. 지금 제 울타리에는 붉은 장미가 가득 피어 온 골목을 환하게 비춰 주는 낮의 등불이 됩니다.

이 세상 삶의 고통을 가장 많이 깨달은 자가 시인이라기에 저 역시 살아서 시인될 꿈을 버리지 못하겠습니다.

거기엔 샘물 같은 생명수가, 거기엔 고통을 극복하는 소나무 같은 슬기가 있어서 앞으로 영원히 긍지를 가지고 다가설 것입니다.

 

글 머리에도 몇 구절을 실었듯이 이 편지를 한 젊은 시인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파르스름한 연두 빛 봉서였다. 잘 닦인 거울 속같이 명징한 시정이 그칠 줄 모르고 이어 담긴 긴 편지이다. 이런 땐 나의 책상 위에 공손히 얼마 동안 놔 두고 지낸다. 어쩌면 침묵으로 쓰는 나의 답장이 언저리에 자잘한 바람으로 밀리는지도 모를 일이다.

 

편지 중의 편지.

그건 시라노 드 베라지라크 의 편지이다. 17세기 프랑스의 실제 인물이었다고 전하는 그는 탁월한 검객이면서 칼보다 더 감하고 예리한 문필가를 겸하고 있었다. 가문의 질녀(姪女)인 미모의 록사느를 열애하면서도 록사느의 사랑이 크리스천에게 있음을 알고는 그를 도와 사랑의 편지를 대서해 준다.

그 편지 속에는 사랑의 모든 진실이 적히게 되었으며 사랑하는 이의 영혼에 선단(仙丹) 같은 향훈을 적셔 주어 록사느는 편지 때문에 더욱더 크리스천을 사랑하게 되었고 그가 전사한 후엔 수도원의 손님으로 적적한 여생을 보내는 그녀에게 그 편지는 아직도 부족 없는 말벗이 되고 있었다. 그녀가 받은 마지막 편지는 그녀의 품 속에 간직된 채 종이도 낡고 글씨조차 희미해져 갔다.

15년 후 암살자의 손으로 중상을 입은 시라노는 록사느를 찾아와 의식도 혼몽해 가는 중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심중의 말을 준다. 그녀 품 속에 감추고 있는 편지와 너무나도 일치하는 말들을…

록사느는 비로소 그의 사랑을 알게 되고 한평생에 두 번이나 그를 잃게 되는 비탄에 잠기며 운다. 시라노는 덧없이 숨을 거두고…

 

편지의 오묘함이여

스는 이의 인격 자체일진대 받는 이의 운명을 능히 바꿔 놓기까지도 하는 것이구나.

 

 

경대 앞에서

거울을 보면 한 여자가 그 안에 있다. 차가운 유리 속에 용케도 집어 넣은 한 장의 간지처럼 얇게 끼워져 있는 그녀.

 

 

 

** 지금도 ‘필사 筆寫’ 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Disclaimer: 여기에 실린 글은  copyright가 된 책, 기사를 ‘발췌, 전재’를 한 것입니다. 모두 한 개인이 manual typing을 한 것이고, 의도는 절대로 저작권 침해가 아닌, fair use의 정신을 100% 살린 것입니다. 의도적으로 ‘시간적인 제한, 독자층의 제한’을 염두에 두었고, 목적은 단 한 가지 입니다. 즉 목적을 가진 소수 group (church study group, bible group, book club) 에게 share가 되었습니다. password protected가 되었는데, 만일 이것이 실패를 하면 가능한 시간 내에 시정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1. 그때 사정에 맞는 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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