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eld of dreams, trancending time & place, autobio in progress..

사랑의 말 – 김남조 – 1983년

 

차례

 

제1장  오늘 생각하는 사랑

시작의 의미

먼데서 오는 편지

문 앞에서

회신 없이 오고 간 편지들

경대 앞에서

구월, 그 서늘한 큰 손

오늘 생각하는 사랑

영혼의 추위를 앓는 이들에게

새의 영혼을 가지고만 있다면

 

제2장 그 먼 길의 길벗

나의 삶, 나의 글

진정한 것

나의 이력서

장미

친구여 화해하자

여름나무 같은 삶과 사랑을

그 먼 길의 길벗

 

제3장 가슴 안의 그 하나

기도 연습

백조 이야기

돌아오는 이를 위하여

마음의 얼음을 풀고

사랑으로 들어올리는 삶

시와 사랑

파지(破紙)를 내면서

결혼과 나

가슴 안의 그 하나

 

제4장 마음의 성소(聖所)

추운 시절 이야기

그 수평선을

마음의 성소(聖所)

사랑을 위하여

사월의 연가

신혼의 의미

잊을 수 없는 동화

 

제5장 영혼의 아픔을 겪는 이들에게

겨울새의 날개 위에

동일한 시대, 동일한 별에서

오늘을 사는 성인상(聖人像)

주의 영광을 앞세우는 기도

결혼에 대하여

아름다운 사람

칠월의 젊음들

영혼의 아픔을 겪는 이들에게

사랑의 큰 땅

시를 위하여

만들어 주는 삶

삶과 죽음 안의 정진(精進)

나의 매력남

신앙의 흐린 글씨

 

 

 

 

제1장 오늘 생각하는 사랑

 

 

시작의 의미

 

시작의 의미는 새벽의 의미와 동일하다. 밤중에라도 결정 짓고 즉시 시작한다면 그것은 홰를 치는 첫새벽이 되는 것이다.

정녕 그건 새벽이다.

무더운 여름 밤, 잠도 설치고 번민의 늪에서 허위적 거리던 당신이 땀에 젖은 긴 머리채를 냉수에 감아 헹구고 손을 모아 기도 드린다면 신은 필시 그 음성을 들으실 것이며, 당신이 소망과 결정을 들어 올린다면 그 또한 푸드득거리는 날개 짓으로 여명의 하늘을 가르며 날아오를 것이다.

겨우 한 발자국 내디딘 발걸음에 불과하다 해도 쉬지 않고 걷는다면 언젠가 목적의 땅에 다다르게 될 필연의 약속 임도 믿을 일이다.

신은 결과를 지배하시고 사람은 과정의 권리를 차지한다. 과정은 사람의 몫이나 최선을 다하는 이상의 인간적인 힘은 없다.

좌절할 밖에 없었던 여건을 다시 점검하고 넘어진 그곳에서 몸을 일으킬 때, 비록 또다시 좌절하는 한이 있더라도 거듭거듭 일어나 걸어갈 수 만 있다면 이는 새벽의 사람이요, 그 시간이 심지어 죽음과 인접한 것이라 해도 시작의 장한 의지는 굳건한 바위가 되어 남을 것이다.

물론 우리는 알고 있다.

사람이 절망하여 엎어질 때의 쓰디쓴 눈물의 맛을.

몇 번을 날아올라도 매서 시도는 헛되고 진흙에 박힌 수레와도 같이 겨우 손잡이만이 뽑아져 나온 참담한 경험도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손잡이를 건진 일은 전부를 당겨 올린 가능성의 시초이며 성취의 문을 열 열쇠도 되지 않으랴.

당신은 화해를 원한다.

그렇다면 그 사람이 있는 곳으로 향(向)을 잡아야 한다.

당신은 풍성한 추수를 꿈꾸고 있다. 그렇다면 농기구를 들고 남보다 먼저 밭으로 나가야 하고 더 충실히 거기서 일해야 한다. 당신은 어려운 확률의 과녁을 맞추는 능한 사수이고 싶다. 그렇다면 천 번 만 번의 실패를 감내하는 철저한 분발을 배워야 한다.

 

당신은 사랑을 원한다.

아아, 그 목마름…

당신은 사랑을 원한다. 낙타가 제 몸 속에 저장했던 물로 갈증을 푼다고 하듯이 최소한 당신 자신의 사랑으로 목을 축이며 힘을 내야 한다.

그리고 먼저 사랑해야 한다.

감자를 심으면 어미감자는 땅 속에서 풀어져 없어지고 보석 같은 햇감자들이 그 자리에 영글듯이 당신의 사랑도 먼저 허리를 구부리고 오랫동안 흙의 능력을 신앙해야 한다. 소망 중에 인내하며 봉사해야 한다.

아무리 늦은 시작이라도 결코 너무 늦은 건 아니다. 시작은 곧 새벽의 의미이거니 창창한 긴 날이 당신을 도와 온갖 보람을 솟아나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지금 시작하라.

 

 

먼데서 오는 편지

 

먼데서 오는 편지는 배달이 더디다. 그러나 마침내 우편함 속에 그것은 들어 있게 된다.

먼 땅의 햇빛과 바람이 배어든 보송한 종이 살갗을 두 손바닥 안에 꽉 잡아 쥐었을 때 온몸이 화끈해지는 기쁨.

기다림의 나날.

마치도 옥을 갈듯이 기다림의 지혜를 닦아야 한다.

목마름을 참아라.

정갈한 냉수사발을 받아 들고 맑고 냉쾌한 수분으로 전신을 적시는 복된 해갈을 얻으려면 아무 잔에나 입술을 대선 안 된다. 그대의 참 생수(生水)를 얻을 때까지 불 같은 갈증도 견디어라.

사람에겐 목마름이 중요하다.

배고픔 역시 중요하다.

왜냐하면 목마르거나 배고픔으로 하여 먹고 마시는 순서가 약속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있다.

배고픈 사람만이 음식의 참 단맛을 안다. 눈물 나는 고마움도 안다.

생각해 보라.

멀리 가는 새는 높이 날며 값진 만남은 충실한 예비가 차지하는 그 보답이다.

선택을 준비하는 큰 아기들아

선택의 예절 잘 가꾸기를 귀중한 과수밭에 공 들이듯이 하여라.

큰 아기들아

미혼의 하늘을 이고 그대들 뙤약볕에 서 있거니, 지금은 동서남북 어디를 살펴보아도 생애의 연분인 그의 모습이 보이지를 않는다. 하지만 조만간 에 눈앞을 가득 채우는 운명의 사람을 맞게 되리라. 만나면 즉시 알아볼 그대의 그 사람을…

큰 아기들아

만나기까지의 과정을 조바심하지 말고 만난 다음의 연분의 다난(多難)을 견뎌낼 수 있도록 준비하여라.

사랑하는 사람 사이 관계의 모습은 밋밋한 비단 허리띠 같은 게 아니고 순은의 고리와 고리가 하나하나 맛 물리듯 어렵게 정교한 성실의 것이다. 그 선택은 한 번에 그치지 아니하며 살아 있는 동안 거푸 몇 번이라도 되풀이되는 집요한 질문임을 명심하거라.

사실이다.

사람들은 얼마나 전력투구로 이 질문 앞에 몸을 내던져 맨살을 으깨는지.

‘이 여자가 내 영혼의 짝인가?’

‘이 남자가 내 몸의 절반인가?’

정녕 사실이다.

죽어도 이 한 가자, 진실의 속살을 들추고 싶다. 살 속으로 살 속으로 촛불을 들이대고 싶다.

‘이 여자가 나의 갈비뼈인가?’

‘이 남자가 나와 동일 혈육인가?’

사랑하는 사이에서 사랑함으로 하여 이리도 가혹하게 다가서는 물음.

큰 아기들아

그대는 선택의 관문을 다 뚫을 수 있겠는가. 줄곧 합격의 보장 위에 설 수 있겠는가. 시퍼런 작두 날이라도 밟고 서겠는가.

한 남자가 마지막 숨 거두는 자리에까지 그의 남김 없는 사랑과 의탁이 되어 주겠는가.

그의 영혼을 육체에서 갈라내어 공손히 신께 봉헌하는 그 자리 거기에 산 증인일 수 있는가.

탄생엔 그의 어머니가 함께 했듯이 죽음엔 그대가 자리를 지키며 모성의 이불자락을 덮어 주겠는가.

사랑만큼 무서운 건 없다.

사랑보다 더함 모서리는 없다.

그래도 사랑하겠는가.

 

이런 말이 있다.

‘진정한 결혼은 영원한 약혼자와 같은’ 성질이라고,

이 말에 대해 생각해 보자.

신이 한 분 이시듯 유일한 존재인 그, 혹은 그녀, 그에게 나아가며 더욱더 그의 것이기를 열망하는 불 같은 희구.

날마다 새 얼굴로 열리는 아침 하늘이나 밤 사이 새로 차오르는 단 샘물과도 같이 신선하며 무량하기 바라는 사랑의 염원이야말로 갈수록 더해질 처녀성의 심화일 듯 싶구나.

모래알보다 더 많은 세상 사람들, 그러면서 그 한 존재에마다 신비한 개별성을 부여하신 조물주의 섭리란 얼마나 오묘한가. 그의 신비의 전부를 열어 주는 그녀가 될 수 있겠는가.

서로를 공손히 끌어올리는 가운데 둘이 함께 높여지는 일이야말로 바람직하다.

 

사람에겐 사람의 길과 염원이 있으며 사람이기에 사람의 짝을 원하게 된단다. 따라서 이를 주실 수 있는 분, 모든 베풂의 근본이신 신께 갈구하며 신의 좌석을 두 연인 사이에 마련해 드려야 한다.

‘사랑은 서로 마주 보는 게 아니고 둘이 한 곳을 본다’는 말은 이래서 진실이 된다 할 것이다.

하나의 사랑은 하나의 성전을 쌓는 행위이므로 하나의 종교와도 같다. 그러므로 사랑의 모든 시간은 예배와 통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왜 그렇게 말하는가고?

그건 사랑에 빠질 때만이 이해하게 된다. 내 감히 말하리니 사랑할 때만이 사랑에 따른 온갖 내적인 음미가 가능한 법이다.

‘결혼은 사람의 품위를 훼손하지 않고 본능을 충족시키는 유일한 제도’라는 말이 생각난다.

품위란 도덕의 준수 같은 일에도 상관되겠으나 그보다도 인격과 인권에 대한 뜨거운 관심이며 그 용맹한 옹호일 듯 싶구나.

저편의 유익을 보장함으로써만 그 자신도 유익을 나누어 갖는다. 그는 먹이면서 함께 먹고 그를 기르는 가운데 함께 자라며 그의 모습을 정돈해 주면서 스스로도 아름다워진다. 활력의 불심지를 실하게 할 그때 둘이 모두 광명한 땅에 머무르게 될 것을.

큰 아기들아

꿈으로만 희구하는 사랑이나 행복은 화려한 꽃다발과 같아서 아름다우나 매우 허약하다. 걸어가고 달려가야 한다. 필요할 땐 사막도 가로질러야 한다. 우물이 마르면 샘의 밑바닥을 더욱 파헤쳐서 솟구치는 새 물줄기를 디밀어 올려야 한다.

큰 아기들아

첫가을의 바람이 분다.

흘려 보낸 무수한 밤하늘과 그 새벽과 불볕의 여름 한 시절을 지내어 철철 넘치는 강물처럼 청량한 구월의 바람이 불어 오는구나.

좌르르 드러눕는 억만 파도와도 같이 도시와 산촌을 가리지 않고 단번에 쏟아 넘치는 이 상쾌함.

큰 아기들아

영혼의 짝을 만나기까지 사람은 외로운 존재이다. 영혼의 짝을 만난 다음에도 사람은 역시 외로운 존재란다.

하지만 이래서 좋지 않으냐.

외롭기 때문에 묵상하게 되고 친구를 알아보게도 되느니, 연민과 축원에 눈 떠 겸손을 배우고 잠 못 이루는 심야의 묵상과 그 깊은 곳을 지나가시는 신의 신발 끄시는 소리까지도 듣게 되리라.

자주 심약해지고 상처만 잘 입는 인간의 참 모습, 그 숙인 얼굴의 눈물 자국을 일일이 살피시는 주의 자애를 깨달음으로 사람의 소명을 남김없이 들으리라.

삶엔 리듬이 있다.

긴장과 해이, 용납과 거부, 사랑과 미움 등의 상반심리가 가로 세로의 실로 얽혀 한 솔기의 무명을 짠다. 음정의 고저 장단도 한 곡의 음악 안에서 낱낱이 쓰임 있게 되느니, 이로써 리듬과 조화를 보태어 전체의 격조를 끌어올리게 되는 이치니라.

삶은 창조이다.

첫날의 탄생은 타력에 의해 생명이 비롯된 것이었으나 일단 우리 손에 삶의 운용(運用)이 넘어 온 다음부터는 우리들 각자의 기량에 맡겨진다.

능한 자는 창조한다.

삶을 통해 그대도 창조의 영광에 동참하고 싶으리라. 그렇다면 창조의 고통도 감내해야 한다. 과녁에 맞추어 화살을 겨냥하고 팽팽히 활시위를 당기는 때의 긴박감, 일심불란의 몰입에 속속들이 그대의 몸을 적셔야 한다.

사람을 그 안에 담아 넣는 삶이라는 집. 이는 벽돌과 철근으로 짓기에 앞서 인격과 협동으로 세우게 된다는구나.

큰 아기들아

혼자를 겁내지 말아라.

혼자의 내부에 친구가 있다. 여럿의 나다. 그러므로 그 모두를 한 질서에 통합시키면서 부단한 자아 점검, 성숙하는 가치관, 뿌리 내리는 신앙 등을 쌓아 가야 한다.

좋지 않으냐.

느리게나마 쉼 없이 자기를 형성하는 일이…

하여 부디 분발하거라.

불에 달궈지는 시금(試金)의 단련에서 도망치지 말지라. 정녕코 이를 이겨내는 사람들만이 서로 줄 거리를 갖게 되는 법이다.

큰 아기들아

미혼의 하늘은 창창하게 높고 그대들 때때로 서로 타인이라는 느낌에 붙들려 참담해지곤 한다. ‘타인이다 타인이다’ 라고 후련히 고함지르고 싶은 충동과, 실바람이 닿아도 피가 흐르는 과민 등은 그 모두 니네가 젊어 있는 탓인 것을.

그래서 좋지 않으냐.

사랑하는 큰 아기들아.

 

바라고 또 바라느니 여자이기 전에 인간이 거라. 행복보다 먼저 형성(靈性)의 꽃핌을 크나큰 지표로 삼아라.

첫 날의 만남은 묘목에 불과하니 비바람 고비고비를 굳건히 이겨내어 우람한 성목(成木)으로 키워내거라.

연분의 성목을 기필코 이루거라.

큰 아기들아.

 

 

문 앞에서

 

문 앞에 서면 묘한 느낌 이곤 한다. 얄팍한 문 한 겹을 사이에 둔 것뿐인데 그 안의 형편을 전혀 헤아릴 길 없는 무딘 내 눈이다.

심지어 아이들의 방문 앞에 섰을 때도 감정이 거북한 경우가 생긴다. 단지 느낌으로서만이 아니고 사실이 그렇다. 흉허물 없는 가족 사이라도 갑작스런 침입에 당황하는 표정을 읽게 될 때 피차가 민망스럽다.

“왜 엄마?”

분명코 왜 왔느냐는 질문이다. 용건이 없거나, 있더라도 긴급한 게 아니라면 다음으로 미루고 싶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그럴 만도 하다. 그 자신의 특별한 긴장에 감사여 손님을 맞을 마련이 못될 때가 사람에겐 있는 법이다.

나 역시도 그렇다. 사랑하는 자식들이긴 해도 불시에 방문을 열고 들어와서 모처럼 매만져 놓은 질서나 형편을 깨뜨려 버린 일을 경험한 바 있다. 일각이 아깝게 바쁜 글을 쓰고 있거나 할 땐 이만저만 짜증스럽지가 않다.

“왜 그러니?”

한 마디 짧은 말에도 거부의 가시가 느껴졌던지 말없이 문을 닫고 나가 버린다.

 문 앞에서 잠시 주저한다.

이 문은 나에게 열릴 것인가.

단지 물리적인 해결로서만이 아니고 양쪽의 심정이 순조롭게 통하게 될 내적 통로도 정녕 열릴 것인가. 서로의 진실이 과여 화락한 응답을 이루게 될 것인가.

사람은 어차피 남의 인생의 문 앞에 가서 노크한다.

자유로이 드나든다고 여김은 적잖이 착각일 때가 있고 열리지 않는 문의 차가운 나무판자에 머리를 부딪는 비참 감을 실지로 맛 보기도 한다. 화목하게 잘 지낸다고 보여지는 부부나 연인들 사이에 있어서도 한평생 언제라도 그 문이 열려 있다곤 결코 못할 것이다.

어설픈 육안으로서는 도저히 알아볼 수 없는 문의 비밀들.

때문에 문 앞에서 겁을 먹는 일이 생겨나곤 한다. 조심성이 늘고 마음도 추워진다. 거부의 문이라면 피해 가고 싶다는 타산마저 치 받는다. 두드려 보기도 전에 상처부터 입는 과민 현상인들 없지 아니하다. 갖가지로 묘하다.

어려서부터 보아 온 성화(聖畵) 중에 예수께서 문 앞에 서 계시는 그림이 있다.

문엔 손잡이가 그려져 있지 않으므로 안의 사람이 열어야만 들어가실 수 있다는 풀이인 바, 자못 의미심장하다.

그런데 문 안에 있는 건 나 자신일 수도 있다. 내가 문 안에서 빗장을 굳게 잠그고 이웃이나 형제 사이를 차단했을 수가 있다. 사람뿐이 아니고 외계의 모든 광명한 것을 떠밀어 내면서 껍질 속의 소라처럼 답답하고 숨막혀 하는 폐쇄적 상황들.

문을 여는 건 첫째로 정신의 관용이다. 서로 소통하고 채워 주면서 진정한 왕래를 가꾸어 감이 물론 바람직하다. 그러면서 다른 한편 아래의 각도에서 살펴봄도 무용하진 않을 것 같다.

나는 문 밖에 있고 문은 열리지 않는다. 이런 때 문 밖이라는 조건은 뒤집어 놓은 문 안이 되기도 함을 살필 일이다. 내 쪽에서 볼 땐 분명코 나의 문 안이다. 그러므로 내가 열어야만 양쪽의 소통이 가능해진다는 논법이 솟아난다.

문을 열자. 지나치게 개방적인 게 아닌 범위 안에서 서로의 울타리를 헐고 문을 열자.

사람들의 사이만이 아니고 모든 아름답고 풍요한 것과 그리고 으뜸으로는 신이 들어오실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자.

 

 

회신 없이 오고 간 편지들

 

선생님

꼭 16년을 문학을 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풋문인, 매사 서두르고 어렵습니다.

하지만 시인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진 선 미의 주인입니다. 시인을 만나면 마음이 밝게 개고 날 듯 꿈과 낭만이 부풀어 오릅니다.

오늘은 저 불우했던 나혜석의 ‘참회의 글’을 읽습니다. 쉬는 동안 많은 책을 읽었지만 나혜석의 솔직한 자기 고백의 글들은 저의 내면에 성숙을 가져 왔습니다. 그녀의 일생은 불우했지만 훌륭한 화가 지식인이었습니다.

 

편지의 묘미는 철저히 사신인 데에 있고 그 겉봉에는 친전이라고 또박이 적어 넣는다. 문갑 속에 간직하기조차 허술하다 여겨져서 명주 피륙 속 갈피에 끼워 넣고 장롱 밑바닥에 그것도 저편 구석에 꼭꼭 눌러 둔다.

편지에 적힌 사연들은 몇 년, 몇 십 년까지도 거기서 잠을 잔다. 유리병 속에 따라 넣고 깊은 바다 속에 가라앉히는 마술의 약품처럼 세월의 심연에서 무한정 묻혀지고 겹 절이는 사이 기묘한 화학작용을 거듭하면서 아주 다른 물질이 되기도 하리라. 그 편지를 꺼내는 순간 뽀얀 연기가 서려 올라 검은 머리를 하얗게 바꿔 놓는 따위로…

그러나 요즘 그런 편지는 퍽 드문 것 같다. 육체를 감싸는 의복에 있어서도 예사로 줄이고 잘라내는 노출시대이니만큼 마음의 속살도 애써 감출 까닭이 있겠느냐는 식의 세태임이 분명하다.

아침 신문을 전날 밤에 TV에서 읽어 주는 시대에야 편지보다 전화로, 그것도 인사 빼고 용건만 말해 주는 편을 더 좋아한다. 아니, 좋다 나쁘다 의 비교 의식조차 거르고 의당 그래야만 한다는 단일 답변이 나와 버리고 만다.

하지만 이런 시대이므로 해서 편지에의 향수를 골똘히 곱씹게 되는 면도 있다.

 

편지라는 그것.

나와 편지류와의 관계는 다소 기묘하고 어느 의미로 비극적이랄 수도 있다.

나는 여학교 시절부터 마음 속에 특별한 한 사람을 지니고자 했으며 그 허구의 인물에게 편지를 썼었다. 지금 생각하면 작게 접혀 있었던 내 마음을 광활한 외부로 열게 하는 필연의 촉매들이었다. 내 감정을 달갑고도 안식 없는 사역(使役)에 휘둘려져서 너덜너덜 닮아지는 것만 같았었다. 말하고 싶고 더하여 과녁을 쏘아 맞추든 사적(射的)의 적중을 원했었던 성싶다.

 

글에는 농도라는 게 있다.

가장 짙은 건 시인의 비장 수기(手記) 쯤에 가두어지고 중간 부류는 작품이 되어 독자의 손에 넘어가며 세 번째 쯤 탈색된 사연들이 봉투에 담아져 편지가 되는 건 아닌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조차 피 묻은 지문이 찍히곤 한다.

아니다. 사실은 지밀지순하고 으뜸으로 농도도 짙은 것을 편지에 채워 놓고 싶어 한다고 말해야 할 듯싶다. 더하여 별달리 공들이는 편지도 있다. 초안을 잡은 후 다음날까지 퇴고를 하여 다시 또 정서하는 경우겠는데 김 유정의 연서 등을 예로 든다면 거기엔 심성의 결정체들이 야문 왕모래 낱알처럼 박혀 있다.

송신조차 망설여질 경우도 있으리라.

벗은 칼날인 그것을 누구에게 들이대겠는가?

내 격정의 유혈을 무슨 권리로 남의 가슴에 떨구겠는가?

그렇게 해서 못 보낸 편지들의 과다한 염료를 빼내고 흐늑흐늑한 거품을 얼마 보태어 다른 형태의 글로 바꿔 놓는 일도 있으리라.

실지로 우송한 편지라고 한들 그 심정에 맞먹는 회답을 받는 일이 어디 쉽겠는가. 편지란 쓰는 그 자체가 목적일지도 모를 일, 써졌다는 사실의 어떤 충족감 외에 더 바랄 게 없는지도 모를 일이다.

보답 없는 편지를 쓰곤 하던 나는 어느 때부턴가 회답을 못 주는 수취인이 되어 오기도 한다. 글 쓰는 이는 누구나 독자의 편지라는 걸 받을 것이지만 나의 경우 유인물이 아닌 서신의 대부분이 독자나 후배 시인들, 또한 흩어진 옛 제자들의 편지이다.

글을 평해 달라는 내용이거나 그 자신의 처지를 충실히 설명한 다음 하등의 조언을 부탁하기도 한다. 이런 경우라면 회답을 쓸 수도 있겠는데 더러는 매우 아름답게 호의와 찬동의 뜻을 담아 보낸 분들의 것은 잘못 배달된 남의 편지처럼 거북하기만 하다.

사람 마음의 춥고 덧없음이여.

그들이 필요했던 건 그 자신의 감정을 열도록 도와 줄 작은 촉매였으리라. 꽉 막혀 답답한 가슴에 통풍을 가능케 하고 상쾌한 먼 수평선을 마음껏 보게 해줄 그 전환기에는 누군가 조력자가 필요한 법이다. 문제는 그 시의(時宜)1에 있으니 누구라도 있어야 했을 바로 그때 내가 그의 문 앞을 지나가고 있었던 것이라고 풀이할 수가 없다.

어느 땐 내가 받은 편지가 그 옛날 내가 띄워 보낸 편지의 산울림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바람과 구름 속을 오랫동안 배회하다가 문득 내가 사는 오늘의 주소로 되돌아 온 건 아니었나?

 

장미의 계절 유월입니다. 지금 제 울타리에는 붉은 장미가 가득 피어 온 골목을 환하게 비춰 주는 낮의 등불이 됩니다.

이 세상 삶의 고통을 가장 많이 깨달은 자가 시인이라기에 저 역시 살아서 시인될 꿈을 버리지 못하겠습니다.

거기엔 샘물 같은 생명수가, 거기엔 고통을 극복하는 소나무 같은 슬기가 있어서 앞으로 영원히 긍지를 가지고 다가설 것입니다.

 

글 머리에도 몇 구절을 실었듯이 이 편지를 한 젊은 시인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파르스름한 연두 빛 봉서였다. 잘 닦인 거울 속같이 명징한 시정이 그칠 줄 모르고 이어 담긴 긴 편지이다. 이런 땐 나의 책상 위에 공손히 얼마 동안 놔 두고 지낸다. 어쩌면 침묵으로 쓰는 나의 답장이 언저리에 자잘한 바람으로 밀리는지도 모를 일이다.

 

편지 중의 편지.

그건 시라노 드 베라지라크 의 편지이다. 17세기 프랑스의 실제 인물이었다고 전하는 그는 탁월한 검객이면서 칼보다 더 감하고 예리한 문필가를 겸하고 있었다. 가문의 질녀(姪女)인 미모의 록사느를 열애하면서도 록사느의 사랑이 크리스천에게 있음을 알고는 그를 도와 사랑의 편지를 대서해 준다.

그 편지 속에는 사랑의 모든 진실이 적히게 되었으며 사랑하는 이의 영혼에 선단(仙丹) 같은 향훈을 적셔 주어 록사느는 편지 때문에 더욱더 크리스천을 사랑하게 되었고 그가 전사한 후엔 수도원의 손님으로 적적한 여생을 보내는 그녀에게 그 편지는 아직도 부족 없는 말벗이 되고 있었다. 그녀가 받은 마지막 편지는 그녀의 품 속에 간직된 채 종이도 낡고 글씨조차 희미해져 갔다.

15년 후 암살자의 손으로 중상을 입은 시라노는 록사느를 찾아와 의식도 혼몽해 가는 중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심중의 말을 준다. 그녀 품 속에 감추고 있는 편지와 너무나도 일치하는 말들을…

록사느는 비로소 그의 사랑을 알게 되고 한평생에 두 번이나 그를 잃게 되는 비탄에 잠기며 운다. 시라노는 덧없이 숨을 거두고…

 

편지의 오묘함이여

스는 이의 인격 자체일진대 받는 이의 운명을 능히 바꿔 놓기까지도 하는 것이구나.

 

 

경대 앞에서

 

거울을 보면 한 여자가 그 안에 있다. 차가운 유리 속에 용케도 집어 넣은 한 장의 간지처럼 얇게 끼워져 있는 그녀.

젊지도 예쁘지도 않은 모습.

눈썹 언저리는 연한 지우개로 문지른 듯이 희끄무레하게 반 가량 지워져 탈색의 느낌을 준다.

그래, 확실히 얼마간의 색소가 줄어든 것이다.

수증기 모양 증발이라도 해버렸는가.

젊었을 때 나의 눈은 두 눈꼬리가 약간 치켜 올려지고 반질반질한 까만 속눈썹이 한 둘레 윤곽을 그어 지나갔으며 그 위엔 섬세한 가시처럼 빳빳한 눈썹들이 촘촘히 고르게 돋아 있었다. 그랬는데 오늘의 여자는 전혀 그렇지가 못하다.

거울 속엔 날마다 얼마큼씩 다른 여자가 다녀갔고 그리하여 오늘의 지금엔 이 여자가 와서 얇게 셀로판지의 두께로 끼워져 있음을 보는 일이라나.

묘한 기분이다.

얼굴을 돌리고 싶은 거부와 구석에까지 몰아붙여진 기 죽은 자아가 스스로에게도 난감하다. 그러나 잠시 후 내 마음은 나직이 말한다.

‘괜찮다 괜찮다’라고….

사실이다.

삶이란 쉼 없는 유전(流轉)이요 시시각각 변모하고 변질하면서 허락된 시간 동안 줄곧 흘러가는 그 유수인 것을. 그러므로 전날엔 남과 같이 젊은 시절을 지냈었고 오늘은 당연히 이쯤의 형편들을 감내해야 한다고, 나는 마음 속으로부터의 깊은 수긍을 스스로 권유하면서 머리를 끄덕인다.

오랫동안 친숙해 온 늙은 비애도 넌지시 내 어깨를 감사 안으며 동일한 말을 들려 준다.

‘괜찮다 괜찮다’ 라고….

 

아침이여

내 마음은 이 측은한 여자를 맞아 공감으로 대접의 상을 차려 주며 오늘의 일과를 평온한 심정으로 시작하기 원한다. 그 첫머리의 한 수서로서 화장을 시작한다.

거울 앞에 앉아 거울 속의 여자를 잠시 점검한다. 이런 때 햄릿 왕자의 대사 중에 ‘여자들은 신이 만들어 주신 얼굴 이외에 연지 곤지를 찍어 만든 또 하나의 거짓 얼굴을 가진다’던 구절을 퍼뜩 생각해내기도 한다.

타월로 물기를 닦아낸 얼굴에 콜드크림을 듬뿍 발라 몇 번 문지르곤 가제로 훔쳐낸다. 희부연 눈썹 외에도 종이처럼 바싹 하고 핏기 없는 입술이 또 한 번 신경을 거스르기도 하거니와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지쳐 있는 이 무력한 여자를 나 자신이라고 인정하는 데엔 용기가 필요하다.

가제의 깨끗한 쪽에 아스트린젠트를 방울방울 떨구어 얼굴을 축이고 그 다음 유액 성분의 언더메이크업을 한 겹 더 바르곤 머리 손질을 한다. 머리를 만지는 동안 로숀이 살결에 잦아들어 다음 순서에 알맞게 되려니 하면서,

좋은 기분은 아니지만 화운데이숀의 매우 작은 분량을 손 끝에 묻혀 얼굴에 고루 펴 바른다. 이 과정이 성가시므로 바쁠 땐 거르는 수도 많다. 가루분을 또 조금 쓴다.

세어 보자.

화장품의 수효가 몇 가지인지. 입술 연지만 하더라도 선물로 받은 것의 여벌이 늘 있곤 하여 여러 색상의 것을 동시에 내 놓고 번갈아 쓰는데 이렇듯이 사소한 선택 따위가 여자의 행복감을 얼마간 부풀릴 수도 있다.

입술 연지의 좀 탁한 것은 엷게 펴서 볼 연지로 쓰면 색깔이 자연스럽고 지속 시간도 긴 효과를 경험했다.

짙은 갈색 연필과 아이라이너로 눈의 윤곽이며 눈썹을 보충하고야 손을 뗀다. 그 사이 이십 분쯤 시간이 경과해 버렸다. 바쁜 아침 시간의 귀중한 이십 분이지만 그렇다고 할애치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제 거울 속의 여자는 얼마간 착색이 되어졌고 이에 따라 생기도 좀 돋아 보인다. 화장의 마술, 이야말로 그 자신이 만들어내는 여자의 거짓 얼굴임에 틀림 없다. 어이없어 그만 씁쓰레한 웃음을 짓는다.

밤에도 거울 앞에 앉으면 한 여자가 이미 그 속에 와 있다. 하루의 삶이 묻혀 온 보얀 먼지와 함께 그날의 아침 화장을 한꺼번에 지워 버린다. 크림으로 닦아내고 비누로 씻은 다음 역시 아스트린젠트를 바른다. 청결하고 촉촉한 감촉이 상쾌하다.

거울 속의 여자를 좀더 자세히 살펴본다. 힘겨운 수레를 옮기듯이 하루의 삶을 전력으로 끌고 다니다가 이제 그 등 뒤에 부려놓고 잠시 쉬는 그녀.

내일의 날씨는 더더욱 그녀에게 까마득한 미지요, 비록 오늘밤이라 한들 하등의 보장은 업지 않으랴. 주어진 여건에의 최선 그밖에는.

정녕 사람에겐 무슨 지혜가 있게 되나. 삶이 명하는 모든 과제를 충실히 섬기고 일하면 이로써 족할 것인가.

때때로 ‘괜찮다 괜찮다’고 나직이 자위할 것인가.

‘괜찮다 괜찮다’고 언제까지나 되풀이할 것인가.

손을 움직여 눈썹과 입술에 조금만 색소를 보태어 주고 얼마 동안 거울 속의 여자와 마주 앉아  이렇게 있어 본다.

이 지쳐 있고 불쌍한 여자와……. .

 

 

구월, 그 서늘한 큰 손

 

구월의 바람이 분다.

서늘한 큰 손이 더운 이마에 와서 얹히는 느낌이다. 늦은 밤에 먼 길을 온 의사를 대하듯 한 눈 바라만 봐도 느긋이 마음 놓인다.

연초록 풋고추를 불같이 붉고 매운 당고추로 익혀내는 그 뙤약볕에 냉쾌한 찬물을 쏟아 붓고 다니는 살수차(撒水車)의 이름, 9월.

이런 시절에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단지 생각날 뿐 아니라 해를 거듭할 수록 그를 닮고 싶다고 내 마음이 간절히 원한다. 우선 그에겐 정신의 휴식을 주는 별다른 힘이 있었다.

그의 거실은 지구 위의 한 작은 섬과도 같이 특별한 고요를 유지하고 있었다. 소박하고 평범한 사각의 공간에 불과하면서.

남 못지않게 어쩌면 남 이상으로 바쁜 소임을 맡고 있건만 방문객이 문을 열면 마치도 그 사람만을 기다리고 있었듯이 전적으로 맞아 준다.

푸근하고 안정된 그분의 옆자리.

묘하게 고향에라도 온 듯한 기분이 되어진다. 사살상 그는 이미 잔에 넘치는 이해와 위로를 마련하고 있으며 한 점 흐리지 않는 거울 속에, 너의 마음을 낱낱이 보고 있다고 말하는 것만 같다.

서서히 말문이 열린다.

서두를 이유가 없고 가식하거나 과장할 까닭도 전혀 없다. 참으로 놀라운 건 남의 얘기를 들어 줄 때의 그분의 태도와 분위기이다. 좋은 음악에 심취했을 때가 그런가 싶게 온 마음을 적시고 있는 몰입의 표정이다.

품질 좋은 흡인지처럼 이편의 말과 감정을 깊은 내면에까지 흡수해 들인다. 잘 설명할 순 없으나 꼭 그렇게 믿겨진다.

단 한 사람이건만 열 명 백 명이 합심해서 해줄 수 있는 청중의 예절로 대접해 준다. 추운 길을 온 사람이 따뜻한 방에 들어와 몸과 마음을 풀 때처럼 눈물겨웁기조차 하다.

정말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그분 앞에 있으면 서서히 나의 내부가 열림을 알 수 있었다. 나의 깊은 부분, 가둬 둔 부분, 작게 오므렸던 부분, 처음으로 새살이 돋아나는 신생의 부분까지를 열어 놓게 되곤 했다. 그러면서 한편 키가 큰 가로등처럼 어진 불빛을 부어 주던 그의 능력, 정녕 부러운 능력… .

그분은 나이 드신 성직자셨다.

옆에 읽던 책의 책갈피가 접혀져 있고 재떨이엔 한두 개비의 담배꽁초가 있었으나 그것조차 정갈해 보이곤 했다.

격렬하거나 감격적인 성질과는 거리가 멀었다. 기발하거나 재미있지도 않았다. 다만 누구도 준 적이 없는 안식과 평화를 나에게 주었으며 그 힘, 말하자면 그 인격을 오래도록 흠모하게 된다.

지친 영혼을 쉬게 하고 애증(愛憎)의 핏발선 눈길을 거두어 맑고 유순한 눈빛으로 바꿔 줄 그분의 고결한 품격.

사람은 부지불식 중에 그 자신이 얻을 것, 먹을 것을 생각한다. 그러나 주는 이가 없으면 받는 일이 생겨날 수 없다. 주면서 비로소 받는 관계, 그 바르고 아름다운 균형을 추구해야 하리라. 처음부터 줄 능력이 못 되었다면 남으로부터 받은 것을 내 안에 고이 키워 이를 또 다른 남에게 내어 주는 일이라도 반드시 이루어야 할 듯싶다.

오늘, 구월의 바람 불고 서늘한 큰 손이 더운 이마에 얹히듯 지난날 내가 받은 선물을 회상케 하매 사람의 아름다움을 먼 산처럼 다시금 바라본다.

 

 

오늘 생각하는 사랑

 

1. 사랑하게 두십시오

‘당신은 왜 사랑을 거부했습니까?’

이렇게 묻는다면 아마도 놀라서 반문할 테지요.

내가 언제, 또 무엇 때문에 주는 사랑을 마다했겠습니까 라고.

그러나 당신에겐 사랑을 거부한 무수한 사실이 있어 왔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사랑에 목 말라 하면서 한편으론 사랑을 낭비하고 차갑게 돌려 세웁니다. 아울러 그 자신도 거부의 쓰디쓴 잔을 수 없이 마셔 온 일을 숨길 수 없을 것입니다.

자식들은 어버이의 사랑을 부담 겨워하며 부부간에도 거부의 선을 그어 저편 이의 참견을 견제하는 일이 많습니다. 단순히 바라보기만 해도 엄마는 즐거운데 아들은 쏟아 붓는 눈길이 거북하여 다른 방으로 훌쩍 옮겨 버립니다. 닫겨 진 문 앞에서 방 안의 기척을 짐작하려 하는 쓸쓸한 모정(모정)쯤 오늘의 세태에선 흔한 사례입니다.

관심에 굶주리면서 관심은 푸대접합니다.

애정만으로는 행복하게 해줄 수 없는 이 시대, 다소의 어긋남이 끼어들면 휴지를 버리듯이 아깝잖이 호의를 내던져 버립니다.

받는 이의 겸손이나 감사의 태도가 전혀 자라나지 못했습니다.

감격하는 일이 적습니다. 감수성이 둔화되어 독선과 이기에 흐르고 있으며 어른이면서 소아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가슴이 작고 피가 식어져 인간적 위급에 떨어졌습니다.

 

사랑하게 두십시오.

사춘기의 첫 그리움을 일기장에 몇 줄 썼다고 해서 온 집안이 떠들썩하게 사건 시 마십시오.

지나가는 소나기를 피하여 잠시 당신의 추녀 밑에 들어섰다 해서 배타의 시선을 보내지 마십시오.

모처럼의 연정으로 편지나 선물을 보내 온 것뿐인데 아무 데서나 발설하여 까닭 없는 수모를 겪게 하진 마십시오.

자만하지 말며 과장하지도 말며 저편 사람이 외롭고 허약한 고비에 이른 것을 이해하십시오.

 참기 어려운 추위에 시달림으로 해서 조금만 당신의 불 화로에 언 손을 녹이려 하는 일을 연민하십시오.

돌림병과 같이 누구라도 이런 처지에 놓이게 됨을 수긍하십시오.

따스한 두 손으로 그의 시린 손끝을 공손히 녹여 주면서 당신 자신에게도 있어 온 옛 상처의 생생한 핏자국을 함께 바라보십시오.

어렸을 땐 강아지에게도 입맞추고 인형에게 털 스웨터를 입혀주며 햇솜처럼 동심이 포근했었는데 성장한 이후로는 이리도 사랑에 인색하고 겁먹게 되는 일을 슬퍼하십시오.

주었으므로 해서 오히려 피해 입은 사례들을 동정하십시오.

단지 사랑했었다는 이유 때문에 뭇사람 앞에서 치욕의 흙탕물을 뒤집어 쓴 이를 위로하십시오. 그 반대로 과도한 탐욕에 빠져 주고자 하는 손길에서 그 이상의 것을 뺏어 버리는 파렴치도 있었습니다. 이런 일을 자타간에 경고하십시오.

사랑하게 두십시오.

사랑하는 이가 기쁘고 보람되게 하십시오.

자신의 사랑이 자랑스럽도록 그 감정을 존중하고 자존심을 대접하십시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처럼 저편 이의 사랑도 귀하고 보배스러움을 인정하십시오.

사랑하는 일만이 사랑의 전부가 아님을 명심하며 사랑 받는 일에도 품위와 예절을 다하십시오.

사랑함과 사랑 받음, 이 두 가지 조화 안에서만 사랑의 능력을 꽃피울 수 있습니다. 나의 사랑이 결실을 바라듯이 다른 사람의 사랑도 그 성취를 도와 주십시오.

모든 것을 주는 이는 모든 것을 또한 바란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주고 받음의 조화를 도모하여 사랑의 광채가 부채살처럼 퍼져나가게 하십시오.

 

사랑의 첫 싹은 설명할 수 없는 신비이겠으나 푸르고 윤택하게 가꾸는 일은 오랜 염원과 애씀의 결실일 테지요.

단 한 번의 차가운 눈길 때문에 온 마음이 얼어붙는 일도 있습니다.

많이 바라지 않았는데 참아낼 수 없는 배고픔에 떠밀렸던 지난 날의 비참을 되돌아 보십시오. 내가 만들어낸 사랑, 온전한 내 것이던 사랑을 굳이 그의 완력으로 부숴 놓은 일도 있었습니다.

푸근하고 달갑게 주야로 미소 지을 수도 있었는데.

산을 옮길 수도 운명을 바꿀 수도 있었는데.

불시에 사랑이 죽었기 때문에 물거품으로 끝난 일도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게 두십시오.

당신의 인격을 해칠 일은 생겨나지 않습니다. 남의 이목에 오해를 좀 끼친다 하더라도 사람 하나의 진실을 대접함은 더 큰 가치가 됨을 명심하십시오.

그러나 감상으로 처리하진 마십시오. 섣불리 자홀 自惚2 하지 마십시오. 경건하고 공손히, 마음 속속들이 따뜻해져서, 생애의 보람으로 공들이고 추수하십시오.

주는 이의 어여쁨에 어울릴 만큼 진실로 받는 이의 아름다움을 꽃 피우십시오.

 

2. 사랑스러운 이가 되십시오

사랑은 철두철미 만들어야만이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스페인의 여관과 같아서 그 자신이 들고 온 물건만을 본다’ 고 어느 책에선가 말하고 있었듯이 사랑은 자기 자신 안에 미리부터 안고 있는 일종의 약속인 듯합니다. 사랑 받을 이유 내지는 사랑 받을 필연성을 지닌다는 뜻입니다.

사랑스러운 이가 되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한 번 뿐이 아니고 계속하여 사랑 받는 이가 될 수 있기 위해 부단히 성장하고 아름다워져야 합니다.

‘존경 없이는 사랑하지 못하는 사랑의 건강법’을 내세운 이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건강의 유지는 우리 각자의 인격과 양심에로 그 요구가 닿아 옵니다. 비록 어린 사람이나 못 배운 사람이라도 그 나름의 덕성과 품격을 지닐 있습니다.

동물이나 화초처럼 애완품이 되어선 안될 사람으로서, 사람들 사이에만 있을 수 있는 의미와 유익함의 성찬을 차려 서로를 대접해야 합니다.

함께 지낸 시간을 행복하게 여기게 만들어야 합니다.

사랑스러운 이, 사랑 받기에 합당한 그 사람이 되는 일이야말로 사랑을 창조하는 첫 번째 비결일 것입니다.

사람으로 하여 사랑하게 하는 일은 내가 사랑하는 일과 마찬가지로 능력의 개화인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두 사람 (혹은 여러 사람)의 중심엔 보다 더 높고 궁극적인 지향을 두는 일이 중요합니다.

‘서로 마주 봄이 아니고 둘이서 한 곳을 바라봄이 진정한 사랑’ 이라는 뜻이 옮음을 세월이 흐를수록 깨달아 갑니다. 둘만의 밀착은 오히려 함께 있는 성질을 깨뜨릴 수 있습니다.

칼릴 지브란 도 말한 바와 같이 신전의 두 기둥처럼 간격을 두고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관계만이 항구하고 완벽하게 둘의 공존을 성립시킵니다. 왜냐하면 ‘한 나무의 그늘에선 도 한 나무가 자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이란 서로를 키워 주며 나아가선 서로의 영혼을 찾아 주는 행위입니다.

그와 그의 신을 화친케 하면서 은총 안에 생애를 보낼 수 있도록 극진히 보살펴야 합니다. 이러한 배려가 나아가선 사랑 받기에 이르는 길잡이도 될 것입니다.

사랑 받는 이 되십시오.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는 그 사랑스런 사람이 되십시오. 우리 모두가 그렇게 될 때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워지며 삶은 오죽이나 영광되겠습니까.

 

3. 동가(同價)의 영혼을

영혼을 풀이할 수는 없으나 얼마간의 영성 체험은 누구에게나 있어 옵니다.

원하는 물량을 채운 후에도 못 견딜 공허감이 남아 돌거나 먹어도 가시지 않는 시장기는 영혼 안에 황량한 바람이 일고 있는 때문일 것입니다.

초현실-초자연의 향수처럼 치밀면서 이상한 기후의 멀미앓이처럼 우리의 느낌을 색다르게 할 때도 있습니다.

영혼에서 나오는 갖가지 탄원이 분명 있습니다. 영혼의 추위가 심각한 나머지 생명을 끊는 일조차 있습니다. 그렇다면 육체의 보건을 염려하는 정도로는 영혼의 보건에 유념해야 합니다.

 영혼이 아는 만남, 그 해후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누군가 네 영혼을 부르면 나도 대답해

소름 끼치며 처음 아는 영혼의 동맹’

 

이러한 실감도 드물게는 솟아나는 것입니다.

한 소명을 둘이서 듣는 일은 차라리 무서움과 통합니다. 깊이 침윤하면서 동일 혈육이 되어지는 예도 있을 것입니다.

뼛속에서, 더 깊은 데서, 기이한 전율이 차가운 지하수처럼 방울방울 뿜어나오는 일도.

사랑은 특별한 초대이기에 아주 많이 예비한 사람만이 초대받게 될 줄로 여겨집니다.

찾아서 만나는 인간 관계, 깊이 침잠하여 무르익는 인간성, 신 앞에서 동가인 영혼을, 그리하여 더욱더 그 영혼을 높이 끌어 올릴 때, 비로소 연분의 완성은 깃든다고 말하겠습니다.

그러나 너무나도 아득한 능력입니다.

쉬지 않는 이가, 겸허한 이가, 오래도록 인내하는 이가 이 축복된 성취에 다다를 것입니다.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사랑의 염원은 불변하며, 사랑의 보행자들은 끝없는 대열을 이어 걸어가고 있습니다.

 

 

영혼의 추위를 앓는 이들에게

 

겨울의 문턱에서 흔히들 겨우내의 긴긴 추위를 예감하게 되며 이 시각부터 한란계의 눈금은 줄곧 영하의 온도를 짚어 보입니다.

몸이 아니라 몇 곱절 영혼이 시리고 춥다고 말하는 당신에게 이 편지를 띄워 보냅니다.

가령에 살아 있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착잡한 연민을 의사의 눈빛 속에서 흘긋 읽었기라도 해서, 그때 깜깜하던 병원의 복도가 그로부터 주야로 눈앞에 펼쳐지기만 하는 사람 앞에서라며 무슨 말을 지니고 그 앞에 서겠습니까마는.

미지의 친구여,

고통이 무엇인가를 참으로 아는 사람과 고통에 미숙한 자가 마주 서게 될 때 누가 먼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정녕 고통을 알고 있는 그 편 사람이 아닐까요.

여기서 우리는 고통의 능력이라 할 어떤 ‘힘’을 보게 됩니다.

따라서 당신과 나의 경우에 있어서도 당신의 고통과 추위가 보다 더 우람하고 성인적일진대 부디 당신이 먼저 나의 손을 잡아 주십시오. 그러면 그 체온을 통해 어떤 신령한 치유를 함께 체험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나는 이 일을 믿습니다.

‘고통이야말로 가장 영웅적인 세례’라고 말한 파스칼의 주장에 당신도 찬동해 주실 수는 없을까요.

오늘 이 시대에 병폐는 고통 자체이기보다 그것의 기피 내지는 마비의 형상들일 것 같습니다. 강건하고 탄력 있는 생명력 속에선 상처입고 아물리고 또 상처입고 거듭 아물리는 역동이 없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믿으면서도 막상 그 현장에선 얼마나 몸부림치며 도망쳐 나오려고 했겠습니까.

‘타인들’의 틈서리에 춥게 발붙이고 있다고 여기는 자의식의 단정이 사람의 낮밤을 얼마나 더 외롭게 황막하게 만드는지 모릅니다. 위로란 언변이 아니고 살아 있는 행위여야 함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막상 누가 그것을 줍니까.

울음을 아는 이만이 남의 울음을 나눌 수 있고 화해에 목마른 자가 마침내 화해의 능동자가 됩니다. 하면 지금은 당신이 ‘그’가 되어 주십시오.

추위를 힘겨워하는 친구여.

당신의 영혼이 지쳐 쓰러졌을 때 누가 무슨 힘으로 그 다친 허리를 일으켜 세우겠습니까. 더 큰 고뇌와 한랭함과 갈증을 인내하는 이들이 있음을 깨닫고 스스로 맹렬히 힘쓰게 될 때만이 다시 곧은 허리로 일어나 걸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얼마 전 정신박약아들의 인물 사진전을 보았습니다.

두세 살 때 칭찬 받던 ‘쥐엄 쥐엄’의 장기를 지금껏 되풀이한다는 쉰 네 살 초로의 여인이나 이젠 그만하라는 말을 듣기까지는 온종일 동일한 ‘중얼거림’을 끊이지 않는다는 사람들의 무리 중에 하반신을 교통참사로 잃었다는 청년 하나가 함께 살면서 손으로 할 수 있는 이발사 노릇, 청소 담당, 채소밭 가꾸기 등 갖가지 봉사를 도맡고 있다는 것이었고, 전시장에 나붙은 그의 사진에선 건장한 상반신으로 베어진 나무의 밑 등걸을 쪼아내는 노동의 현장이 촬영되어 있었습니다. 그 사진을 보게 된 나에겐 거센 전류의 기이한 충격이 전신을 감돌았습니다. 어떤 의미의 공포, 어떤 의미의 분노, 그리고 어떤 의미의 영혼의 세척이었습니다.

영혼의 추위를 앓고 있는 벗이여,

당신의 추위가 과연 그 젊은이와도 맞먹는 것이거나 혹여 그조차도 압도될 만한 것이라면 부디 허약한 여러 사람들의 손을 잡아 주십시오.

당신의 통곡 앞에서 울음을 그치고 당신의 추위 앞에서 따뜻해지게 해 주십시오. 당신의 추위가 거세고 비통할수록 그 만큼에 어울리는 고통의 격조를 보여 주십시오.

눈을 뜬 사람에게도 위험한 도시의 대로변을 한 자루 지팡이 끝에 정신력의 집중을 몰아 조심스럽게 지나다니는 ‘눈먼 사람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암실에서 사진을 구워내듯이 어둠 속에서 ‘눈뜸’과 ‘봄’을 누리는 이들의 삶은 어떨까요.

그들의 크리스마스는 어떨까요.

점자(點字)로 읽는 성서와 점자를 더듬으며 노래하는 그네의 찬미가는 정녕 어떤 것일는지요. 이즈음 맹인 교회에는 눈뜬 사람들의 관람객(?)으로 붐빈다고 합니다. 눈으로가 아닌 마음으로, 마음으로가 아닌 영혼으로 조물주를 찬미하는 그네의 성가대를 보고 와서 깊은 감명을 얘기해 준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보태어 준 것은 없고 그들로부터 받아 온 감동이 그리도 컸다는 점에 오묘한 대비를 아니 살필 수가 없습니다.

얼마 전에 나는 대구행 기차 안에서 맹인 교회의 그 맹인 목사를 우연히 만났습니다.

소설이 되고 영화화되면서 더욱 퍼진 그에 관한 화제 중에서도 가장 놀라웠던 점은 실명한 그에게 희생의 굳은 의욕을 심어 준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불우고아들이란 사실입니다. 절망의 밑바닥까지 가라앉았던 그는 너무나도 가난한 그들 소년으로부터 뜨거운 사랑과 협력을 얻게 되었음을 계기로 그 낮은 땅으로부터 드높은 소망으로 치솟아 올랐고 이들로부터 채워진 생명의 충전으로 오늘날 맹인의 등불이 되고 눈뜬 이들의 머리 위에 참 신앙의 횃불을 들어 올렸습니다.

근래에 읽게 된 M. 링크 의 작은 책에서 아래의 구절을 인용하고 싶습니다.

 

기도가 우리 생활 속에 와 닿을 때, 기도하기 전까지는 할 수 없었던 일들을 시작하게 된다. 믿기 시작하고, 용서를 구하고, 결코 사랑스럽지 않던 이들을 사랑하게 된다.

기도는 그것 없이는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을 일어나게 만드는 힘이다. 예수께서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지 않으셨던들 십자가를 걸머지지 못하셨을 것이다.

 

마음 추운 친구여.

머리칼도 곤두서는 찬바람 속의 추위를 나도 얼마쯤은 압니다. 장갑도 벗은 열 손가락을 가지런히 빗살처럼 드러내 놓고 있으면 그 벗은 살결에 가지 돋치는 냉기, 그 추위를.

그러나 ‘기도하기 전까지는 할 수 없었던 일들’이 기도함으로 하여 얼마나 많이 솟아나고 꽃피는지에 대하여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가파른 비탈에 세워진 집에서나 하루 종일 자동차가 질주하는 도로변에서도 안전하고 어여쁘게 자라나는 어린이들이 있음을 압니다. 기도하는 방법을 배웠음으로 해서 평화로이 죽어 간 사형수의 얘기도 들었습니다.

영혼의 추위를 앓고 있는 친구여.

이 세상 어떤 고통이나 슬픔도 그분을 넘어설 수 없는 바로 그 이름이신 그리스도가 탄생하셨습니다.

온갖 고뇌를 그 수원지의 물로써 씻어내고 온갖 추위를 그 원자의 불화로에서 덥혀낼 그분이 그 위대한 봉헌의 삶을 살기 시작하실 첫날이 곧 성탄입니다.

 

1969년 7월 20일 일요일, 오후 3시 18분 정각에 지구를 떠난 최초의 유인 우주선이 흙먼지 덮인 달 표면에 내려 앉았다.

우주비행사 암스트롱과 앨드린이 특별히 마련된 캡슐을 달에 안치해 놓았다.

거기엔 시편 8 도 들어 있었다.

‘하느님 내 주시여. 온 땅에 당신 이름 어이 이리 묘하신고..’

 

영혼의 추위를 앓는

미지의 벗들이여,

진정히 바라노니 당신도 깊은 밑바닥에서 아득히 높은 정상까지 온전히 위안받고 거듭 나시기를, 낮은 목소리로 이에 덧붙이노니 ‘메리 크리스마스’

 

 

새의 영혼을 가지고만 있다면

 

그녀의 일과는 새벽이 아닌 그 전날 밤에 시작된다.

하루의 일을 마무리 짓고 다음날의 도시락 반찬도 대략 궁리가 잡힌 다음 잠시 빈 의자에 몸을 쉰다. 먼 길을 와서 이제야 도착한 심정이다.

이때가 몇 시인가.

몇 시 몇 분, 그런 건 상관이 안 된다.

어쨌건 이 시간 위에 내일의 삶이 얹히는, 말하자면 다음날의 그 발판인 데에 의미가 있다.

남편과 아이들은 무대 위의 연기자인 셈이고 그녀는 숨은 얼굴로 무대를 꾸려 가는 연출가이다. 꾸미지 않은 맨 얼굴과 허름한 옷매무시로 관객들의 관심 밖에 서서 전신이 땀에 젖는 그 연출가이다.

가정의 평온은 유지되고 있으며 내 집의 건강은 마음 놓을 만한가. 세면대는 청결하고 비품들은 정돈이 잘 되었는지. 또한 문단속은?

가족만이 아니고 그들과 이어진 둘레의 사람들까지 손바닥 안에 넣은 듯이 들여다 볼 수가 있다. 시댁의 무슨 날 무슨 날에 대비하며 애들 사일지라도 빠뜨려선 안 될 문병치레 등을 새 날의 계획 속에 일일이 짜 넣는다.

가슴 속엔 한 묶음의 열쇠꾸러미를 차고 있으며 그 열쇠들은 자주 쓰여져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가구류보다 더 많이 사람의 마음을 여는 데에 쓰이는 이 자잘한 열쇠꾸러미.

희고 가느다란 그녀의 열 손가락, 손 끝의 물기는 새벽녘까지도 마르지 않는다.

일하는 손과 깨어있는 가슴.

그녀가 바로 당신이다.

당신은 밤의 심연을 알고 있으며 그 아득한 밑바닥에서 홰를 치며 푸드득거리는 첫새벽의 탄생을 또한 안다. 태고에서 오늘까지 온 인류의 밤의 불침번은 당신들 여성이었음을.

비 오는 소리.

낙엽 뒹구는 소리.

만상에 이슬 내리는 그 들리지 않는 소리조차 능히 들으며 밤의 요람이 당신을 품어 안고 천천히 흔들어 줄 때 세상은 잠시 그대의 체중 아래에서 출렁거린다.

잠결에도 들리는 먼 종소리.

신의 밤나들이의 신발 끄시는 소리와 사랑하는 이들의 맥박 소리, 뒤척이며 돌아 눕는 그 가물한 기척까지도 낱낱이 아는 그대. 뜨겁고 성실한 관심은 오묘한 가얏고처럼 민감히 느끼고 울려내느니 포도주보다도 더 취하는 밤의 도취, 잠시 동안의 꿀 같은 안식에도 그대의 응감 쉬지 않는 것을.

 

그렇다. 삶이란 밑바닥까지 그 맛을 흔들어 깨우는 자가, 그리하여 이를 속속들이 맛보는 자가 주인이니 그러므로 당신이 곧 주인이다. 삶의 음미의 가장 아래 층계에서 맨 위의 층계까지를 헤일 수 없이 오르내리는 당신이야말로 가려진 모든 얼굴을 보는 사람이라. 한 뭉치의 열쇠꾸러미는 당신의 권리요 의무이니 즉 그것은 주인의 증표인 탓이다.

뜨겁고 소금 맛 나는 눈물,

수백 번 상처 입은 마음,

하고많은 밤을 내일에 대비하는 궁리와 결단으로 다지며 뼈아픈 진실과 인내를 깨쳐 가는 당신.

 그 가파로움 중에서 몸에 익히는 한 가닥 금동아줄의 신앙.

당신은 기도한다. 하루의 비롯함에 빌고 이날의 마침에도 빈다. ‘주여 함께 해 주소서’라고.

함께 함에 대한 갈구야말로 여자의 살을 가르고 나온 원초의 육성이며 오늘에 이르도록 날마다 새로이 발음되고 있음을.

‘함께 해 주소서

부디 함께 해 주소서’

이처럼 아뢰며 힘을 낸다. 실지로 힘이 솟아난다.

사람에겐 본능이 짚어내는 자구책이 있기 마련이며 자력으로 우물을 파서 청량한 단 샘물을 그 자신과 이웃에게 나누어 먹인다. 조금만 돕는 힘이 주어지면 일어나 다시 걸어갈 수가 있겠는 그 귀한 금싸라기의 촉매. 비록 겨자씨 만한 불씨일지라도 호호 입김불어 소중히 피워 올린다.

남자를 땅 위의 건물에 비교할 때 여자는 집을 세우게 하는 그 집터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지쳐 돌아올 때 어깨의 짐을 벗겨 땅 위에 놓지 않는가!

어느 날, 아직 돌아올 시간이 아니데 남편이 방문을 들어선다.

“여보 웬일이세요?” 물어보면

“그냥….. 열이 좀 있어서” 멋 적게 대꾸한다.

순간 그녀는 이만하기가 다행이라고 가슴을 쓸어 내린다. 사표라도 내던진 게 아니고 단지 몸이 아파서 시간을 앞당긴 것쯤이라면 이해가 가고도 남는다. 그녀는 비장의 우물에서 떠 온 단 샘물로 그의 목을 축여 주고 신열도 말끔히 씻어 내리게 한다.

물론 남성들이 주는 것도 많다.

‘남자는 그 정신에서 여자보다 높고 육체에서 여자보다 낮다’고 하였다.

많이 가진 건 나눠 주고 모자라는 것은 얻어서 채우는 보완의 성질로서 남녀의 균형을 바라볼 수 있다.

신부나 수녀들의 수도서원이 신의 소명이듯이 결혼도 일종의 소명이라는 말이 나돌고는 있으나 막상 그 투철한 인식이 뿌리 내리는 데엔 이만저만 굳건한 협동 없이는 안 되는 노릇이다.

성취의 어려움, 그 과정은 지루하고 가열한 법이다. 산 밑의 돌을 산의 정상에까지 뒹굴려 올리는 시지프스의 의지와 추진력이 있어야만 한다. 살갗이 벗겨지고 흥건히 피가 내배더라도 손을 결코 때지 않는, 이렇듯이 참담한 인내가 과연 가능하겠는가.

남성은 누구나가 여성의 아들이다. 예수조차 마리아의 아들이셨다. 여성 또한 모두가 남성의 딸들이다. 이 질기고 운명적인 혈통에서 살피더라도 진실로 같은 피, 같은 살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런데도 남녀의 현실은 어째서 그 거리를 좁힐 수 없는 것인지.

여심의 탄원, 살결에 문신 뜨듯 아픔 부르짖음…..

여인들이여

당신의 할말들을 후련히 뱉어내거라.

화려하지도 과장하지도 않은 그 진짜배기의 참말들을 남김없이 모두 말하여라. 말하여라.

 

그러나 복되다.

한쪽 문이 닫힐 때 다른 한쪽 문이 열리는 이치로 마음 추운 당신은 전심의 기도를 바칠 줄 알게 되었음을. 밤낮 없이 자라는 나무들과 땅을 적셔 흐르는 시냇물처럼 당신의 신앙도 나날이 순조롭게 자라고 있음을.

여인들이여.

침몰에 대해 겁먹는 당신의 공포야말로 심각하다. 어렵게 중심을 재며 한걸음 한걸음 걸어가고 있다가 아차 하는 사이에 발을 헛디디면 실로 어이없는 추락…. 그러나 당신은 다시 시작한다. 그 깊고 깊은 낭떠러지에서 본래의 위치에까지 복귀하는 당신.

잠시 몸을 쉬는 밤의 의자. 내일의 무대를 염려하는 연출가의 책임에 돌아와 머문다.

가슴 속엔 한 묶음의 열쇠꾸러미를 차고 있으며 그것들은 자주 쓰여져 반짝반짝 광택을 내고 있다.

다시 말하거니와 당신은 기도한다.

한 가정에는 보이지 않는 기도의 기둥이 있는 법이거늘 당신이 그 기도 기둥이다.

어쩌다 쉽게 살아지는 하루가 있어 이런 날 오히려 불안하다.

생명을 걸듯이, 오로지 절박하고 가파르게만 살게 되던 오랜 날의 습관엔 이리도 낯선 생리를 견디기 어렵다.

고독하지 않은 날의 부자연스러움,

이런 말조차 조금은 과장이 아닌 당신.

수년 전에 본 영화 중에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라는 것이 있었다.

그 끝 장면은 정신 병원을 탈출하는 흑인의 모습을 보여 주었었다. 희뿌옇게 동트는 여명을 배경 삼아 커다란 발걸음으로 달려가는 그이 새하얀 바지자락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동상처럼 검고 건장한 체구로 언제나 빗자루를 들고 병원의 출입문을 반쯤 막아 서곤 하던 그.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거인, 백치인 줄만 알았던 그는 사실상 모든 백인을 능가하는 지혜와 용맹을 감추고 있었다. 칼날보다 더 강하고 무서운 그의 날개를 꼭 필요한 때에 날기 위해 검은 육체 속 누구도 못 보는 곳에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 새벽 그는 날아올랐다.

백인들이 고작 창문으로 탈출을 계획하던 그 견고한 돌집의 정문을 단 일격에 분쇄하고 거칠 것 하나 없이 창공으로 날아오르던 그.

그렇다. 새는 무게와 상관 없다.

비록 탱크의 중량이더라도 원할 때 날 수만 있다면 그것이 곧 새다. 아주 완벽한 새다.

여인들이여

당신의 본질도 새라 이르겠거니 새의 갈망이며 새의 영혼이라 이르겠거니

새.

금빛보다 더 화려한 순백의 날개로 동트는 새벽 하늘을 물살 휘저으며 날아오르는 그 웅려한 날개짓.

그렇다. 새의 영혼을 가지고만 있다면 누구든 하늘을 날게 될 것이다. 나르는 것을 막는 자 없으리니. 진실로 창공을 제압하는 그 날개를 이 세상 어떤 힘이 꺾어 내릴 것인가.

사는 일엔 머무름이 있을 수 없다. 올라가거나 아니면 내려가는 일의 두 가지로서 전부이다.

상승하는 일.

숫돌에 칼을 갈듯이, 날려는 갈망의 칼날을 세우는 일.

검은 몸 속에 날개를 숨기고.

어느 날 순백의 두 날개를 펴서 높이 높이 하늘을 날아오르는 일.

날아오르는 일.

날아오르는 일.

당신은 그 일을 할 수 있다.

여인들이여

밤의 심연을 아는 그대, 그 아득한 밑바닥에서 홰를 치며 날아오를 일을 꿈꾸면서.

꿈꾸면서 견디자.

여인들이여.

 

 

 

제2장 그 먼 길의 길벗

 

 

나의 삶, 나의 글

 

조춘의 바람은 차다.

밤글을 쓰다 피로하면 뜰에 나가 심호흡을 한다. 상쾌한 공기가 폐부 속까지 들어가 마치도 피의 순환처럼 돌아 나온다.

이런 때 하늘은 억만 생명을 보듬고 토닥이는 청남빛 이불이다.

밤에 주로 일하게 된다.

사념의 잔 가지들이 연한 순으로 자라나 실타래처럼 덩굴을 뽑아 올리곤 하나 밝은 날에 다시 보면 볼품 없는 마른 들풀일 적이 많다.

산다는 건 우선 느끼는 일이며 이 느낌을 말이나 글자로 풀어내는 작업에 나를 던졌다 하겠건만 이 단순한 형편 안에서조차 헤일 수도 없이 길을 잃고 실패와 허탈을 부둥켜 안는다고 말해야 한다.

사람이란 항용 넘어지고 상처 입는 부상병에 불과하단 말인가.

시인은 더욱더 그러한가.

그것도 그럴 것이 한 사람의 옹색한 사유와 진실로써 다른 열 사람에게 나누어 먹이려는 염원임에 비추어 너무나도 역부족인 현실 탓이다.

사실상 시는 있어도 살고 없어도 산다. 먹고 입고 거주하는 일과 같이 필수적인 항목이 아니면서 적어도 그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까지 필수적인 욕구와 충족이 되고 싶으면 아울러 고급한 갈증을 풀어 주는 고급한 음료이기를 감히 꿈꾸고 있다. 바로 이 점이 시인의 아이러니라 하겠고 그늘에 가려진 비통한 얼굴이 있게 된다.

나는 일본의 지방 도시에서 고등학교 과정을 치렀는데 입학에서 졸업까지 한국 학생은 나 하나뿐이었다.

복도를 지나갈 때도 작게 말하는 ‘죠센진’ 소리를 흔히 들었는데 ‘바로 저 애’라고 가리켜 주는 모양이었다.

건강이 좋지 않아 졸업학년에는 장기 휴학을 하는 등 잡다한 사정들이 유감한 사춘기에 상처를 주었던 성싶고 이에 따른 반작용으로 그리 되었는진 몰라도 마음 속에 맹렬히 명망있는 어떤 이가 되기를 꿈꾸었었다. 그 당시 가장 부러웠던 건 신문에 연재소설을 싣는 소설가이기도 했다.

대학에 들어가면서 문학지망의 뜻을 굳혔으나 나의 연대는 적잖이 모국어의 수난기였다.

문학작품의 우리말 번역은 없다시피 하여 읽기는 일본말로, 쓰기는 한국말로, 식의 기묘한 과도기에 해당했고 대학생들의 언어 소양은 매우 미숙한 수준에 머물렀다. 더욱 낙심하게 된 건 나에게 문학적 재능이 없다고 여기게 된 일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글을 힘들게 쓰고 지면에 내놓은 후에도 전혀 안도감을 누려보지 못한다.

대학 졸업반 때 6.25 사변이 일어났었는데 당시 대부분의 남학생들이 군에 입대, 또는 납북 등으로 흩어지고 피난지 부산에서 가지 서울대 제5회 졸업식에는 예정자의 반 정도도 졸업생이 나타나질 못했다. 참담한 전란의 온갖 충격을 피 묻은 체험으로 치르면서 나 나름으로 몇 꼭지의 작품을 추수하여 53년 정월엔 첫 시집 <목숨>을 펴내었다.

책 속엔 시대의 신음 소리와 전란기의 비통과 혼란이 뒤범벅이 담겨져 있다. 난만히 꽃 피는 철쭉꽃 더미와도 같던 젊은 그 앞뒤 좌우에 쌓이느니 죽음이요 이별이요 죄이던 그 시절….

졸업 후 고등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서울대, 숙명여대, 성균관대 등에서 강의를 맡았었는데, 55년에 이르러 숙명여대에서 전임강사의 발령을 내주어 그 후 조교수, 부교수, 교수의 과정을 밟으며 나로서 무척은 귀중한 학생들과의 만남이 잇따랐고 어느덧 세월도 많이 흘러 지금은 전체 교수 중 몇 번째로 꼽히는 고참자가 되어 있다. 숙대와의 연분은 내게 있어 그 중 길고 복된 것의 하나였다고 돌아보는 바이어니와.

두 번째 시집 <나아드의 향유 香油>에선 예수의 발에 기름 붓고 검은 머리와 샘솟는 눈물로 주의 발을 씻어드린 은총의 성녀 막달라 마리아를 주제로 쓰고자 했다. 처음엔 장시를 계획했으나 백 행 남짓으로 마무리지어 다른 작품들과 함께 묶었었는데 아무튼 이 무렵부터 어쭙잖은 이름 석자 위에 시인이란 관사가 얹어 왔다는 점, 과분하고 송구할 따름이다.

삼십여 년의 문필 생활 중에 글은 주로 밤에 서 왔었다. 낮 시간은 붐비는 대합실인 양 형편이 유동적이고 밤이 되어 깊은 물 속에서처럼 어둠에 가라앉아야 비로소 집중이 가능해진다. 밤바다 등대에 불빛을 담는 일이기는 한 듯이 작은 탁상등을 밝히고 더하여 음악이 흐르게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느지막이 당도한 밤시간은 너무나도 빨리 자리를 일어서는 속절없는 손님과도 같고 밤의 어망에 낚아 올린 걸 아침의 광명에 다시 보면 참으로 내버릴 게 많다. 명징과 응축과 발효가 더 있어야겠는 문학적 원리를 들이대면 내가 쓴 글줄들은 잠시만에 맥없이 죽어져 버리곤 한다. 다만 몇 오라기 실핏줄쯤에 희망을 걸고 나는 새로이 작업을 시도한다.

앞서도 말한 바 나에겐 재능과 학식 등이 모두 미흡하여 굳이 무엇인가를 취하잔다면 한 가닥 줄기찬 감수성이리라고만 여겨진다. 위대한 자연과 위대한 예술, 보다 더 위대한 종교에 대하여 근래엔 문화에 대하여 그리고 사람들에 대하여 수용의 문을 열어 두며 감격과 감동을 예비하는 점을 두고서 하는 말이다. 바라느니 나의 감수성은 모든 만남에게 신선하고자 하며 모든 연분과의 사이에 충실히 이를 나누고 싶다.

사람에겐 각기 다른 윤혜가 있을 것이고 나의 경우엔 이지 理智나 용맹이나 탁월한 영성 靈性 같은 게 모두 아니면서 오로지 ‘자라나는 감정’ 하나가 이에 해당하는 듯싶고 나 스스로도 감정을 기르는 일에 마음 쓴다고 말할 수가 있다.

‘사람의 전원 電源은 그 자신의 피땀으로 일구는 것이며 자기 안의 유산을 그 자신이 상속받음과 같다. 말하자면 자력의 충전이다. 때문에 어느 때 불이 꺼지면 또다시 작은 부싯돌을 들고 광야에 나가 불을 일구어야 한다. 여러 천만 번이라도 돌을 맞비벼야 한다.’

위와 같이 말한 적도 있거니와 그 자신의 육체를 먹이듯이 감정도 먹어야 한다는 지론을 펴 왔으며 가능한 한도까지 마음 안에 양분과 단맛을 비축하려 원하고 있다.

감정은 자라고 불어나며 종내 위험한 폭발물로 터지기도 한다.

‘날마다의 애환이 날마다 뼛속에까지 파고 들어 저리고 쓰라리다. 내 몸은 천만의 더듬이로 만들어지고 나의 살갗은 어디라 할 것 없이 정교한 감전대 帶로 입혀졌다’라는 자인식에까지 왔다. 그리고 좋다거나 나쁘다거나의 품평엔 아랑곳 없이 나의 이러한 생태를 스스로의 본질처럼 받아들이게끔 되었다.

시인으로서의 나와 교수로서의 나 외에도 주부로서의 내가 더 있고 보면 세 몫의 책임과 부담이 내 안에 공존하는 셈이고 가정에서의 나의 아내와 어머니와 주부의 소임으로 다시 쪼개져 쓰이게 된다.

내 능력과 시간을 엄청나게 상회하는 일거리들을 때로는 진흙창 맨땅에 내려 놓고 어디엔가 가서 깊이 숨어 버리고 싶기도 하다.

하건만 잠시 만에 관심과 집착을 회복하여 잡다한 노사 勞使에 일일이 대답한다. 하긴 일상 범사라 싶은 것도 하나하나 귀중할 것이건만 그렇다고 여기에만 머물러서도 안될 일을 이 어쩌랴.

글 쓰고 선생 노릇하고 가사를 담당하면서 되도록이면 그 이상의 의미와 가치를 잉태하고 해산해야 한다. 여러 가지를 고리처럼 이어 맞추면서 전체로는 고리 이상의 값어치에 다가서야 한다. 이 때문에 삶의 등반은 험준하며 사람 될 명분인들 결코 만만치 아니하다.

여자의 바람은 무엇인가.

그 중에서도 으뜸의 바람은 과연 무엇인가.

이에 대하여선 여러 가지 회답이 있을 수 있고 시대적, 사회적 여건에 따라 그 특징이 변용될 것도 같다. 그러나 보편적인 통론이 되는 건 ‘최상의 반려’를 갖고자 함이 아닐까.

‘너의 영혼을 나에게!’ 라는 요청에 ‘부르면 대답하는 또 하나의 나’를 만나려는 기원 사이의 그 간절한 욕구야말로 제일로 질기고 운명적인 여심의 동아줄일 것 같다.

이 심정의 공감들을 지켜보며 동지적 확신을 말이나 글로써 드러내는 일의 어느 몫을 감당하려 한다고도 하겠으면 서 한편으론 너무나도 비통하고 상처입는 심정 없지 아니하다.

 

지난 겨울엔 열 번째 시집인 ,빛과 고요>를 내 놓았으며 이로써 약 1만 매의 산문과 400여 편의 시를 발표한 셈이 된다. 나 나름으로 쉼 없는 두레박질을 해 왔긴 하나 깊은 수심에서 청옥빛 단 샘물을 뽑아 올리진 못했다는 부끄러움이 앞서고 있다.

장기랄 것도 없이 나의 장기는 긴긴 세월 쉼 없이 치받던 그리움 같은 것이었다. 어쩌면 맹목의 열중이기도 했을 세찬 격정의 염료를 온몸에 묻힌 채 오십 고개를 살고 있다.

돋보기를 쓰던 첫 강의 시간에 실없이 얼굴 붉히던 일도 이젠 묵은 책장의 한 페이지가 되었고 이즈음은 제자 문인들이 여인의 단심 丹心을 글로 짜내고 있으며, 이에 대한 나의 심정을 ‘곡식 창고의 열쇠꾸러미를 넌지시 밀어 붙이고 나의 새 땅을 찾아야 할 때’라고 표현한 바도 있다.

 사랑이란 말은 나에게 너무 화사한 듯한 싶고 연가 戀歌로 읊던 가락들은 기도가 기도가 의 율조로 변모 운운의 논평을 듣게도 되었다.

그 사이 아이들도 자라서 큰애는 외국 유학, 다음 애부턴 대학원과 대학에 재학 중이며 지금은 가슴 안의 모든 신열도 내린 듯 갖가지 쓰라림이 누그러져 편안하다.

더하여 이맘 때를 기다려 준 다음 순서가 있었으니 다름 아닌 자기 안의 대화자요 혼자 있어도 보슬보슬 이어지는 고즈넉한 자문자답이다.

그리고 이러한 성향을 신앙과 연결 지어 말하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나는 반론을 펴고도 싶다. 왜냐하면 신앙이란 인간사를 매듭짓고 들어가는 문이 아니고 그 관계들이 진정히 깊어진 때 내리 비치는 조명이 아닌가 싶다.

여태까지의 나는 너무나도 숨차고 궁박하고 피흘림으로 하여 쫓기는 자의 질주에 머물렀던 게 아닌가 회고하게 되며 이런 의미에서 이 정도 헐거워진 오늘의 삶에게 어떤 안도의 해석을 붙여 주련다.

너그러운 관조를 배우면서, 그 안에 철사줄처럼 뻗치는 탄력을 집어 넣으면서, 더 고요하게 존재의 소음을 통제하리라.

그렇다고 내 남은 생애에 격정과 곤혹이 없으리란 건 아니다. 삶이란 끝날까지 혼돈과 불균형의 상태일 것이며 지나친 침체에 따를 정신의 빈혈증을 또한 스스로 경고하지 않는 바도 아니다.

나의 문학 역시도 부절히 흔들리고 방황하게 될 것임으로 하여 길을 묻는 이들의 대열을 줄곧 뒤따를 일을 스스로 예상하기에 어렵지 아니하다.

시집의 후기에도 섰듯이

 

‘껍질에서 부풀지 말고 뿌리에서 차올라 오기를, 사랑과 시와 신앙, 셋이 한 근원에서 나왔듯이 하나에 귀납되어 남김 없이 봉헌되기를…’

 

위와 같이 거듭 원하고 거듭 다짐할 뿐이다.

 

 

진정한 것

 

우단으로 만든 장난감 토끼가 있었는데 톱밥으로 채워진 가슴 속은 진짜의 토끼가 되고 싶은 소망으로 들끓었다.

‘누군가의 사랑을 받는 날엔 그렇게 될 수 있지.’

지혜로운 가죽말이 가르쳐 준다. 누구라도, 이 세상 어떤 것이라도, 사랑을 받게 되면 으뜸으로 귀하여져서 ‘진정한 그것’으로 탈바꿈한다는 얘기이다.

토끼는 그 집 소년의 사랑을 받게 된다. 몇 해 후 우단은 낡아지고 털이 빠졌는가 하면 두 눈마저 망가지고 말았지만 토끼는 조금도 슬프지 않았다. 지금은 사랑 받음으로 하여 자랑스러운 그 진짜였기 때문이다.

병을 앓게 된 소년이 건강을 되찾아 바닷가로 휴양을 떠나게 되었을 때 병균이 묻었다는 이유로 헌 책과 낡은 장난감들은 불태워 없애라는 의사의 지시였고 이때 소년은 바다로 가는 흥분 때문에 토끼를 잊고 있었다.

내일 아침 불사르기 위해 뒤뜰에 던져진 우단 토끼는 난생 처음으로 차가운 흙바닥에 누워 눈물을 흘렸다. 그랬는데 눈물에서 꽃송이가 돋아나고 꽃포기 속에서 작고 어여쁜 요정이 나타난다.

“나는 버려진 장난감들을 돌보는 요정이란다. 이제 너를 진짜로 만들어 주겠어.”

“난 진짜가 아니었나요?”

“그 애한테만 진짜였지. 앞으로 모든 이에게 진짜가 되는 거야.”

그리하여 그 우단 토끼는 갈색의 부드러운 털을 가진 살아 있는 정말 토끼가 된다.

 

위의 얘기는 마조리 윌리엄즈의 동화이다.

사랑만이 능히 생명을 준다는 보편적 진리를 주제로 삼고 있으면서 매우 새롭게 충격과 감동을 자아낸다.

단지 아이들만의 동화가 아니고 어른들에게도 심장한 의미를 던진다. 혹은 상처와 참회 등도 일깨워 줄 것이다. 생애의 시간을 거의 서 버린 사람들에겐 삭막한 느낌이 씹혀질지도 모른다.

사랑했더라면 진정한 보람을 낳았을 텐데. 진정한 운명이 되고 창조가 되고 구원이 되었을 텐데, 심지어는 지선과 지복에도 이르렀을 일을.

묘한 노릇이다. 사람은 추구하면서도 그 기회를 외면한다. 저편 이가 스스로 사랑을 주는 경우에도 옹색하게 마음의 문을 닫아 붙인다. 가족간에도 그렇다. 자식이 원할 땐 부모가 다른 일에 붙잡히고 부모가 원할 땐 자식들이 둥지를 떠나가고 없다.

사랑의 시차, 사랑함으로 하여 사랑 받고 싶었던 뜨거운 바람들이 얼마나 무참히 무너져 갔는가. 사랑하게 놔 두기만 하였더라도 해원 같은 풍요로 부풀어 올랐을 일을 어째서 이유 없는 흙먼지를 끼얹었단 말인가.

단지 추위 때문에 잠시 동안 우리네 화롯가에 왔을 뿐인데 무엇 때문에 대전 對戰의 긴장으로 방어를 일삼았는지.

사랑하고 싶어서 절로 사랑이 샘솟던 그 눈부신 능력에게 우리의 두 손을 얹고 단 한 번 축원하는 일조차 못하고 말았다니. 심지어는 시합을 하듯이 서둘러 타인이 되어 놓고 저마다 자신을 연민하며 인생을 어두운 이름으로만 부르려 한다.

 

세모에 접어들어 몇 차례 눈이 왔다.

온 땅을 뒤덮는 거대한 순백은 용서와 화친을 일러 주는 순결한 언어였다. 진실로 돌이켜 보자. 이제 한 해의 시간은 다 사라지고 그릇의 밑바닥에 남은 건 과연 무엇인가.

그런데 어는 아침 또다시 눈이 내려 죽어 있던 모든 희열을 되살렸다. 백색의 치유라 할까. 깊고도 화평한 묵시로써 화해와 분발의 충동을 깨워 일으켰다. 새해는 이미 와서 출입문 저편에 조심스러운 손님으로 서 있다.

그 얼굴을 우리는 안다.

진짜이기를 원하는 동화 속의 그 우단토끼를.

 

 

나의 이력서

 

‘나의 이력서’ 란 감정의 이력서일 밖에 없다는 느낌이 앞서고 있고, 또한 나와 다른 사람들 사이에 얼마간 상이점이 된다고 하겠는 한두 가지의 형편들을 들추지 않고선 얘기의 진행이 잘 되어지지 않을 것 같다.

우선 나의 집안에선 너무나도 많은 죽음이 있어 온 사실과 이 일이 나의 심정에 어떤 자국을 새기게 되었는지를 빼 놓고선 글이 안될 것 같다. 그러면서 이 점이 적잖이 괴롭기도 하다.

원래 내 어머니는 4남매를 출산하였으나 정성하기 전에 모두 사망했고 부모도 오래 전에 타계하셨다. 어렸을 때 기억으로는 할아버지 집에 작은 할아버지 내외도 함께 사셨는데 네 분이 수년 사이에 모두 별세했으며, 더욱이 작은 할아버지는 느지막이 얻은 외아들을 재해로 잃고 부사라 할 최후를 마침으로써 그의 가문이 끊어지고 말았다.

아버지의 형님은 유복자를 남기고 젊어서 사망했으며, 그 아들은 자라서 혼인까지 했으나 20대에 내외가 죽고 외아들마저 역시 단명했다.

이러저러한 형편들의 틈바구니에서 결국 나 하나만이 생존자인 실정이며, 병풍처럼 에워싸는 죽음들에 대하여는 착잡한 감정이랄 밖에 없다. 그리고 이 점이 내 삶과 나의 문학에도 적잖은 상관을 맺어 오고 있으나 아무튼 여기에선 이에 관하여 더 부연할 이유가 없을 것 같다.

그 중에서도 나는 어머니의 죽음을 잊지 못한다.

두 아들과 두 딸을 낳아 둘은 죽고 둘은 살아 남았던 것을 6.25 사변 중 무더운 8월에 그 아들이 또한 죽었다.

그 당시 나도 혈담을 뱉곤 하던 참담한 병중이라 어머니 혼자서 미아리 공동묘지에 어린 아들을 파묻고 오셨는데, 서울이 두 번째 탈환된 1.4 후퇴에 모녀가 피난을 갔었다 가 몇 해 만에 정부의 환도를 따라 다시 돌아온 후 어머니의 치열한 집념은 아들의 묘소를 확인해내는 그 일이었다.

끝내 허사로 돌아가자 급격한 시력감퇴로 두세 번 안과 수술을 받아야만 했고 그 고통 중에 생애를 마치셨다.

어머니를 상기하는 일은 곧 내가 좌절에서 일어서는 그 의미를 이루어 온다. 도저히 감당 못할 중량으로 침몰해 버린 나의 집안, 그 불가사의한 불운들을 돌아다보면 필연코 그 무게를 조금씩 조금씩 들어 올리게 된다.

내가 손을 놔 버리면 영 그만이라는 비통감으로 없는 힘을 다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다행히도 결혼 후 가족을 갖게 되었으나 그들조차 이해 못할 비통한 서원 誓願 이 나의 핏속에 맹렬히 굽이치고 있음을.

 어머니는 내 미숙한 글의 첫 번째 독자이셨고 나의 목마른 연정 등속에도 동조자가 되어 주셨다. 앞서도 말한 바 나의 이력서는 감정의 이력서, 혹은 감정이 입은 부상들의 이력서나 다름 없다 하겠거니와 언젠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열병 상태에 나는 빠져 있었으며, 묘한 상황 아래에서만 마음이 불붙어 몇 달 몇 해 건강의 악화마저 겹치게 되었었다.

지금 생각하면 딸자식으로선 가장 구제불능의 문제아였건마는 어머니는 전후의 사정과 내 심정의 불가피를 소상히 짐작하시곤 지극한 연민으로 나와 함께 상심과 그 유혈을 나누셨다.

지금 쓰고 있는 ‘나의 이력서’라는 이 글은 여러 가지로 묘한 갈등을 일으킨다.

나를 벗길 것인가? 덮어둘 것인가?

이 점부터 해결하지 않고선 한 줄도 더 못 쓰겠기 만 하다.

젊었던 날, 나에게 비극이 많았었다.

전쟁과 이별, 모든 것의 잔혹한 분쇄, 그러나 보다 더한 비극은 감정의 배고픔에 있었다. 나의 ‘그’ 란 언제나 부재자였다. 그의 마음이 내 마음과 한 가닥 이어져 있었던 것밖에는 그의 머리카락 한 올도 나의 것일 수가 없었다. 이 운명적 공복감에 시달리고 지치다 못해 백 세의 고령자가 되는 듯한 심정이기도 했다.

서울대 사범 대학을 다니면서 어머니와 둘이 살아가는 생활 그 자체도 외롭고 가난했으나, 이에 더하여 남들이 쉽사리 지병이라고 이름 지어 주던 그 폐결핵과 위에서 말한 비극 의식 등속이 합쳐져 끝내 내 안에서 여지없는 몰락 현상을 빚어냈던 것 같다.

학교는 결석이 많아 성적이 좋지 못했고 예쁘지도 않았으며, 심한 불면증 환자였기 까지 해서 전적으로 엉망이었다. 편지를 대신 하여 서투른 시를 썼으며 꼭 한 사람의 독자를 염두에 두고 나로선 최선의 표현, 최적의 호소를 미칠 듯이 탐내었었다. 불타고 또 불탔던 그 참담한 인간 화재 火災…

6.25 사변이 일어난 1950년은 내가 대학 졸업반이 되던 해였다.

그 잿더미 속에서 몇 낱의 부스러기들로 꾸려진 피난 보따리와 함께 마산까지 흘러가 나는 졸업을 얼마 앞두고 고등학교의 국어선생이 되었다.

심히 남루한 상심의 상태에서 교단에 섰으며 당시엔 아직 알려진 범위가 좁던 윤동주의 시, 그 밖에도 교과서에 넣어져 있지 않던 여러 아름다운 시들을 학생들에게 떠 옮기고 있었다.

51년 9월, 부산의 남성여고 강당에선 서울대학교 제5회 졸업식이 있었는데 그날 마침 유가 드문 폭풍우의 날씨인데다 졸업 예정자의 반수도 못 채운 쓸쓸한 졸업식전이었고, 음대의 축가 순서에선 장내가 잠시 울음 바다이던 일들을 잊을 수가 없다.

소설가인 정한숙 씨가 나에게 축하 꽃다발을 주었는데, 나중에 보니 ‘축 졸업 전광용 군 祝 卒業 全光鏞 君’이란 글씨가 리본에 적혀있었다. 그날 함께 졸업한 전광용 씨를 위해 마련해 왔다가 생사도 몰랐던 나를 보고 즉시 회수하여 안겨 준 것이었는데 평생 처음으로 꽃다발을 받고 얼이 빠져 서 있는 나를 전광용 씨가 사진까지 찍어 줘서 지금도 가지고 있다. 그렇게 순수하고 귀한 친구들을 어디서 또 만날 수 있겠는가.

입대 중이어서 졸업식이 처지긴 했으나 정한모 씨도 동기였고, 그네들은 다시 ‘주막 동인 酒幕同人’을 결성하여 작품 발표도 하고 있었다. 또 한 사람 홍윤숙 띠도 당시의 좋은 친구였다.

환도 후 이화여고 교사를 거쳐 나의 짧은 강사 시절이 있은 다음 1955년 숙명여대의 전임이 되 이래 오늘까지 교수직의 한 자리에 있어옴은 고맙고 무거운 행운이라 하겠으며, 좋은 제자들과의 연분이 뒤이어 이루어졌으며 문인도 여럿이 나왔고 학문하는 제자도 여럿이다.

 

나는 1927년 경북 대구에서 태어났으며, 집안은 기독교였다. 부모가 일본을 건너 가게 되어 여학교 과정을 큐슈의 후꾸오까 에서 다녔는데 입학에서 졸업까지 한국인은 나 하나뿐이었다.

1944년에 서울에 와서 경성여자전문학교라는 곳에 입학을 했다. 학교명이 생소하지만 실은 이화전문이 전쟁 말기에 일인들의 정책에 따라 잠시 그런 이름으로 바뀌어졌을 때의 일이었다.

저들은 조선 혼의 싹을 자르기 위하여 도처에 삭막한 개혁 바람을 일구었었는데, 그 한 예가 되는 셈이다. 당시의 동급생 중엔 나영균(이대 교수)등이 있으며, 내가 들게 된 기숙사의 사감은 후일 총장이 되신 김옥길 선생이었다.

학교 구내에까지 군대가 주둔하여 실탄을 잰 장총을 휴대하고 있었으며, 학생의 표시가 멀리서도 잘 보이기 위해 우리는 카네이션 크기의 천으로 된 배지를 언제나 달고 있어야 만 했다. 도장을 찍은 무명 헝겊을 두꺼운 종이에 잘 밀착시킨 다음 가위로 잘라내어 옷핀으로 웃옷에 부착시켰다.

밤 10시는 소등 시간인데, 이 규칙이 참기 어려워서 방공용 두건 같은 두꺼운 재료를 창문에 잔뜩 이어 붙이곤 몰래 불을 켜고 책을 일거나 놀거나 했었는데, 한 번은 갑자기 출입문을 디밀고 사감 선생이 출현했었다. 건물 밖에서 유심히 살핀 결과 규칙을 위반하는 몇 개의 방을 집어내고 바로 찾아온 것이었다. 놀라기도 놀랐지만 너무나 부끄러워 슬프기까지 하던 기억이 지금껏 역력하다.

당시 어머니와 동생은 강원도 한 지방에 머물러 있어서 방학에 그곳으로 귀성하였다가 8.15 해방을 맞이했다.

이듬해 초봄에야 겨우 월남하여 이대에 나갔더니 문과계는 정지용 선생이 관할하고 계셨는데 하시는 말씀이, 학생은 출교가 너무 지체되어 학적은 일단 말소되었으며 회의에 붙여 방안을 찾아보겠으니 다음 주 월요일엔가 와 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해당 날짜에 여자사범대학에서 입시 入試 가 있게 되어 택일의 고민에 붙잡혔다.

시험을 치러 떨어지면 이화 쪽도 놓치게 되겠지만 이대에 가서 복교가 어렵다는 선고를 받는다면 입시 기회도 못 가지고 일 년간을 허탕칠 판이었다.

결국 나는 입시 쪽을 선택하기에 이르렀고 요행히 합격되어 오늘날의 사범계 출신이 되게 되었다.

그 후에 우연히 들었지만 정지용 선생은 문하에 여성 시인을 내고 싶으셨고 뜻을 이루지 못해 유감이라는 말을 했다는 거였는데, 연분이 닿아 그분의 손에서 자랐더라면 나의 문학적 개안도 얼마간 더 나은 형편이 되지나 않았을는지. 서울사대에는 영문학 교수이던 시인 임학수 선생이 계셨으나 그 앞에 감히 나서 본 적도 없이 6.25 때 납북되시고 말았다.

첫 시집을 낼 때 나는 마산에 살았었고 출판사는 부산이었으므로 주말에 올라와 교정을 보곤 했다.

어느 날 드디어 첫 책의 견본을 손에 들었을 때는 정말 혹한의 날씨였다.

영도 다리를 지나는데 너무 춥고 바람이 거세어서 걸음을 옮겨 놓을 수조차 없었다. 옷은 얇고 몸도 병약하여 그랬던지 뭔가 종착지같이 정말적이고 암담한 심정이 치받았다.

다리 난간을 붙들고 검은 강물을 굽어보았을 때 순간 ‘저기 떨어져야지!’ 하는 야릇한 충동이 치받았다. 거역하기 어려운 유인이었다. 순간적 광기였을까?

바고 그 시간에 따뜻한 방에서 편히 잠들고 있을 수많은 사람들에 비하여 뭔가 별다른 존재, 기형적 자의식이 통렬히 가슴을 쑤시고 있었다. 어느 의미에선 문하게 대한 나의 절망이 그날 밤 안에 시작되고 그날 밤 안에 끝났는지도 모른다. 내가 기억하는 한 그날처럼 시 詩가 치명적이고 절망적이던 때는 없었다.

나의 첫 책인 <목숨>에는 이헌구 선생께서 서문을 주셨지만, 그때 이후 나의 어느 책에도 다른 분을 번거롭게 만든 서문, 발문, 평론 등의 글을 한 줄도 실은 적이 없다.

돌이켜 보매 실로 아득하다.

가정도 문학도 교수직도 아직은 진행 중에 있다. 언젠가 끝내게 되겠고 한 부분도 보태거나 수정할 수 없는 가운데 손을 떼야 하는 일을 생각하면 엄청난 큰 공포에 휩싸이게 된다. 말하자면 좋은 마무리에 자신이 서지 않는다.

더하여 근래에 와선 또 하나의 책임을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그건 영혼의 성패라고 할 것에 대하여 나 자신 피할 수 없는 준열한 책임을 절감하게 되었다는 바로 그 점이다.

결국 나는 이와 같은 자각적 중심에 가진 것 없이 지금 서 있는 것이다.

 

 

장미

 

장미를 ‘나의 꽃’이라고 부르진 않는다. 간절히 원했으되 ‘나의 사람’이 될 수 없었던 어떤 만남같이 장미의 화려극치도 무한한 목마름의 어느 위치에 서 있게 할 뿐 근접이 쉽지 않았다.

촉광이 과할 때 오히려 눈을 돌리게 되듯이 장미 역시 내 마음을 열기엔 자의식의 초라함이 감당 못할 눈부심을 타곤 했다.

그러면서 이 꽃과 자주 만났다.

선물로 받은 백장미 한 다발이나 초대받은 식탁에 막 이슬을 털어낸 듯 꽂혀 있는 연연한 홍장미, 어느 땐 환한 촛불처럼 이 꽃을 가슴에 달아 주는 형편도 생긴다.

그러나 장미와 나의 전정히 깊은 만남은 꽃의 명시 名詩 등을 통해서였다.

시에서는 장미가 꽃의 영역을 넘어서서 한 성숙한 사상으로 자리하는 듯했으며 꽃의 순례자들은 거의 가 장미 앞에 이르러 여정 旅程을 그치는 것 같았다.

수면에 비치는 나무나 구름들처럼 시 속에 읊어진 간접의 장미를 바라보면서 내 좌석은 비로소 편안했고 장미의 내면, 어쩌면 그 심연이라고 할 깊이에로 이끌려 들어갔다.

 

‘한 송이의 장미

그것은 모든 장미이다

그리고 그 이상이다’

 

장미의 시인 ‘릴케’는 장미 가시에 찔린 상처의 악화로 죽었으며 유언을 통해 당부한 그 자신의 묘비명도 ‘장미, 오오 순수한 모순이여…’이던 사실을 모르는 이가 드물 정도이다.

은수자 隱修者 들이 돌을 갈듯이 시인들은 장미의 정혼 精魂 을 불러내려 애썼으나 그 신비는 훨씬 더 무궁하던가 보았다.

장미의 진미 眞美는 단지 5분간이라 한다. 그렇다면 그 전후의 시간들은 미의 정점을 쌓아 올리는 시간과 그 정점을 허물어 내리는 시간들이라고 보아야 한다. 한데 여기엔 나의 이론 異論이 있다.

진정히 아름다운 것은 시종 동일한 밀도의 진미일 뿐이고 그와 같이 사람의 삶도 능력의 전부를 꽃 피워 은총의 조명을 받는 한에서는 전생의 매일 매시가 절대의 의미를 완성한다고 나는 믿는다.

시드는 꽃 앞의 그 숙연감.

꽃핌 이전의 꽃의 보배스러움.

내게 있어 장미는 영영 줄어들지 않는 목마름이요, 언제까지나 젊디 젊은 갈망이다. 그리하여 이 아득한 연륜의 부피에 이르러 장미는 내 마음의 중심에 생금빛 씨앗 하나를 심어 주고 있다.

 

 

친구여 화해하자

 

봄 이라기엔 춥다.

어느새 초록이 적시기 시작하고 새순들이 치미는 이즈음인데 저만치 가던 겨울이 문득 옥양목보다도 흰 빙과 氷菓 낱알을 솰솰 쏟아 놓는다.

꽃을 시샘해 내린다 하여 꽃샘이라 부르는 그 눈이다. 그러나 차갑진 않고 알맞게 냉쾌한 수분으로 풀어진다. 조춘의 그 좋은 습도…. 무너가 가슴 속에서 간절해지면서 나이에도 어울리잖게 울음이 치받으려 한다.

아침에 본 수녀들의 화관 花冠 탓일까.

열 한 명의 수녀가 열 하나의 촛불처럼 가지런히 서서 종신서원의 예절을 바치고 있었다. 정결, 청빈, 순명의 세 가지 수덕 修德을 중심으로, 집전자인 추기경의 강론은 보석처럼 귀한 말씀이었다. 수녀들은 검은 머릿수건 위에 순백의 화관을 쓰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흰색의 프리지어와 백수선을 엮어 만들었으며 꽃과 줄기는 싱그럽다 못해 빳빳이 풀이 서 있는 듯했다.

내 마음을 채운 염원은 무엇이었나?

산을 오르내리고 벌판을 가로지르며 또는 도시의 추녀 밑이나 키 큰 가로등에도 투명한 허리띠를 휘감는 조춘의 바람들은 나에게 무엇을 권유해 주었나?

친구여, 우리 화해하자.

이것이 내게 있어 으뜸의 소망임을 이젠 말하련다.

너무 오래 차가운 간막이를 쳐 놓고 있었던 동안 으슬으슬 마음이 춥기만 하여 어디에 있어도 어설픈 과객 같고 밤이면 밤마다 잠도 메말라서 견딜 수 없었다.

봄 이라기엔  추운 싸락눈의 2월.

우리 화해하자. 부디.

친구여!

오늘 거룩한 미사에서 이 한 가지 기도말로 바쳤거니와

우리 화해하지 화해하지 친구여.

 

 

여름나무 같은 삶과 사랑을

 

 옛 시대에선 보고 싶은 마음을 가슴 안에 간직하며 사는 사람들이 많았던 듯합니다. 전화도 없던 그 시절, 밤을 지새워 간곡한 긴 편지를 쓰며 지우며 하면서 말입니다.

마음을 열고 막혀 있던 진실들을 드러냄이란 먼저 그 자신의 영혼을 거울 속에 비치는 일입니다.

구름밭 같은 안개를 뒤로 두르고 한 여자가, 혹은 한 남자가 가려진 모든 속마음을 헤쳐내어 전심의 가얏고를 울려내고 있습니다. 먼 길을 와서 이제야 당도한 듯한 그 귀의심 한가닥뿐입니다.

거울 속에 담겨진 자신의 모습은 어떠할까요.

더하여 또 하나의 사람이 함께 떠오름은 더욱 어떤 자태일지요.

그와 더불어 한 운명을 둘이 나누고자 원할 때 그 심정 오죽이나 절실한 것이겠습니까. 바로 이 자리 이 시간에 다다르기 위해 먼데서 오랫동안 왔으며 천만 사람 가운데서 그를 찾았다고 하겠는데 에서야 더 얼마나의 간절함이겠습니까.

하여 이제는 안주지에 이르렀다고 믿고 싶고 다시는 아무 데도 떠나지 않을 종착지의 확신을 다지고 싶습니다. 모름지기 위와 같이 희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웬일일까요.

온몸에 차오르는 건 목마름뿐입니다. 하기야 모든 사랑은 목마름과 더불어 솟아나며 마치도 열풍 속에 자라는 선인장과도 같습니다. 남녀간의 사랑인 때 더욱더 그 성질이 치열합니다.

참 이상도 합니다.

모든 여건에서 충족되고 축복에 감싸인 듯만 싶을 때도 사랑의 당사자에겐 평화가 없습니다.

모름지기 연애는 실연의 심정을 면치 못하며 갈수록 더 아쉽고 허기지고 비어 있는 땅만을 바라보게 됩니다.가장 잔혹하고 야만스런 예가 되겠습니다만 식인종의 어느 부족에선 사랑하는 사람을 먹어 버리는 일까지도 발생하였다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까지도 온전히 충족을 누려 보진 못했을 게 분명합니다. 소유란 단지 허무한 소멸일 뿐 사랑의 갈증을 푸는 데엔 아득히 못 미치는가 봅니다.

하면 무엇으로 그 목마름을 고치는가고 물으시렵니까.

모릅니다. 그러기에 우리 함께 그 해답을 의논하고 싶은 것이랍니다.

 

현대에도 ‘보고 싶음’과 ‘긴 편지’가 있겠는지요. 손 끝을 움직여 다이얼을 돌리거나 수첩에 서 넣은 하루치의 사무절차 속에 한 줄의, 혹은 한 글자의 약칭으로 비좁게 처리되는 그 사람의 이름.

 

차 한 잔을 나누는 동안에도 몇 번씩 시계의 분침을 살피는 인색한 시간 할애. 이런 식으로 돌아가는 각박한 세태에서도 활활 피어오르는 보고 싶음의 숯불이 있을까요. 그건 행복한 부담 쪽이기보다 고통의 멍에임에 틀림 없는데도 말입니다.

하지만 아마도 있긴 있을 거예요. 칠팔월 불볕에 아스팔트조차 검은 기름으로 녹아 진득거릴 때 열 개 그 이상으로 목이 타는 그리움이 사실상 존재함을 믿을 일입니다.

여름엔 신 神마저 잊어 버리게 된다고 누군가 말했듯이, 망각과 나태의 거대한 수렁을 지나가면서 한시도 헐겁게도 지닐 도리가 없는 과부담의 격정과 불망을 한아름 그득히 앓고 있는 이들에게 나는 이 글을 보내고 싶습니다.

어김없이 그네의 주소를 찾아 배달되는 우정과 조언의 편지이고자 합니다.

되도록이면 위안과 격려의 노크이고 싶으며 최소한 그 염원의 전달이기를 바랍니다.

몇 백만의 사람이 북적대는 대도시의 그것도 끓는 용광로 같은 불볕더위 안에서 한낱 사람 이름의 화인 火印으로 살갗에 문신을 새긴 그를 위하여, 흐르며 또 채워 넘치는 사랑의 수량을 위하여, 그 성실하고 풍요한 인간적 번뇌 앞에 나는 이 글을 보내고 싶은 거랍니다. 선풍기 바람을 쐬면서, 또한 슈베르트의 ‘독일 미사곡’을 나직한 볼륨으로 들으면서 말입니다.

아스팔트와 시멘트의 도시 안이라고 해서 삶의 본질이 바뀔 순 없을 테지요.

황량한 시대의 건조한 열풍 속에서도 들꽃를 심어 기르는 인간성의 녹지대를 믿어야 할 것이며 우리 모두 이 확신의 동지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람이 받은 공감의 축복이란 귀한 것이니까요.

 

바로 오늘 저녁 나는 여의도의 작은 찻집에서 한 친구와 마주앉아 얼음을 띄운 주스를 마시며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내 마음 흡족하고 다분히 감미롭기까지 했습니다.

얘기 중에 기쁨이란 단어가 섞이게 되면서 이상하게도 이 말을 감싸 두르는 부듯한 조명을 느꼈습니다. 신선하면서 이 말 한 마디가 빛의 실타래를 풀어내는 데에 놀라면서 하나의 싯귀를 떠올렸습니다.

 

돌아오라 다리 위에

그 여자 만약 돌아온다면

나는 말하리라

아아 기쁘다 라고

 

이는 프랑스의 시인 아폴리네르의 글귀입니다. 그의 생애는 외롭고 가난했으며 실연의 깊은 상처 외에도 머리에 총상을 입어 세 번이나 개두 開頭 수술을 받는 등 참담한 고통으로 일관되다시피 했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위의 시어는 더더구나 비통하고 아름답습니다.

만남은 곧 기쁨입니다.

만나기 전에 그가 이미 존재했다는 눈부심, 그와의 만남이 실현되었다는 감동, 여기서부터 기쁨은 자라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한 그루 묘목이 땅 속에 뿌리 내리기도 전에 사나운 기상 氣像은 사정없이 엄습합니다. 지나치게 가물거나 엄청난 장마가 퍼붓기도 합니다. 만나는 시간은 적고 부재의 시간만이 많아 가슴과 목을 마구 감아 죄는 명주 피륙이 되곤 합니다.

너무나 빨리 사랑의 목마름은 와 버리고 그저 암담한 자의식뿐으로 날이 새곤 또 날이 저뭅니다.

그러나 만남을 따라오는 찬란한 기쁨을 결코 의심해선 안됩니다. 아무리 비싼 대가라도 아깝잖이 치를 ‘만남의 축복’을 진흙에 내굴릴 순 없습니다. 태산 준령의 시련이 가로막더라도 기쁨의 복습만은 게을리하지 말아야 합니다.

특별한 만남과 운명의 사람, 이에 절대의 의미를 부여하는 이상엔 저절로 연분의 한 전형이 생겨나며 비록 한 연분을 가리고 새로운 연분이 문을 열 때라도 흙 속에 내린 나무의 핏줄을 끊어낼 수는 없습니다.

한 번 돋아난 것의 강건한 근력 위에서만 새로운 관계가 자라도 자랄 것이 바 어떤 여건 아래서도 귀중한 만남들은 깡그리 잊어지는 일이 생길 수 없습니다.

보십시오.

이즈음 과수에서 잘디잔 과일이 달리고 여린 과육 속엔 훗날의 과일 나무를 약속하는 시앗들이 깨알처럼 박혀 있습니다. 사람 속의 능력도 이처럼 오늘을 위한 몫과 후일을 예비하는 비축이 함께 있는 것입니다.

 

 

<전략>

부끄러운 건 사람

사랑이 모자라 서두른 이별과

세월이 남았는데

문닫은 마음

 

자연이여

사람 중에 떠나간 자를 용서하라

사람 중에 보낸 자도 용서하라

 

이 시는 발표 후 챙겨두지 못하여 까맣게 잊었다가 우연히 어느 분의 글 속에 인용되었음을 보고 얼마 전 찾게 된 것입니다.

돌아다보면 사람에 따라오는 아픔 따위에 섣불리 겁먹은 나머지 황량한 도시인의 습성을 따라 그저 종종걸음으로 바쁘게 살아오기만 했었습니다.

사랑의 어려움 중에 가장 어려운 건 ‘그 사람의 부재 不在’이겠지요. 사랑하던 사람끼리 맥없이 헤어지고 마는 까닭인들 함께 있지 못하는 아픔 탓에 그리 도는 경우가 대부분일 겁니다. 그러므로 이를 인내하고 고통을 품 속으로 거두어들이는 근력이야말로 성인적인 능력이라고 볼 만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영감과 촉매를 나눌 수 있습니다. 그가 준 것을 잘 가꾸어 꽃피워야 함이 사랑의 과제라 할 때 이 과제와 그의 부재 사이에 사랑의 험준한 계곡은 아득히 솟아 있는 것임을.

그러나 사랑은 그 자체가 이미 행운이며 축복이므로 하여 이에 더 보탤 선물까지를 꿈꾸어선 안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랑을 가졌으면서 충족과 독점을 더하여 탐내고 언제나 함께 있으려 하며 여기에다 영원 운운의 사치마저를 원하는 일은 과욕일 것도 같습니다. 그렇다면 사랑 그 본연의 광채만으로도 족하다 할 겸허를 배워야 하겠습니다.

사랑은 크고 너그러워야 합니다. 또한 사랑은 서로를 만들어 줍니다. 만들어 주면서 만들어지기도 하는 관계 사이의 균형에도 애써야 합니다.

내면적 유대, 내적 생명이 성숙한 개화란 그 자신의 최선이면서 관계 사이의 최선도 될 것입니다.

보고 싶음을 기르십시오.

사랑의 온갖 성실이 배어들어 저편 이의 내부에 단맛의 양분으로 차오르게 하십시오. 사랑엔 어차피 편안함이 없으니 안일과 타성의 살을 가르고 고통에 섞여 자라는 생명의 새 넝쿨을 뽑아내야 합니다.

가열한 사랑의 명령이 가슴 한가운데에 떨어져 올 때 조용히 일어서야 합니다. 온 마음으로 대답하면서….

여름 나무 같은 힘과 건강. 그 신선함과 초록빛과 가장 좋은 수분으로. 그리고 기도로써 말입니다.

 

 

그 먼 길의 길벗

 

오늘 내 영혼을 당신에게 연다.

이는 내 마지막 영역이다.

우리는 멀리 왔다. 얼어붙은 강 위에 떨어지는 백설을 바라보며 나는 이 생각을 했다. 우리는 멀리 왔고 그리고 앞으로 더욱 땅 끝과 하늘 끝이 맞붙은 그곳까지 가련다고.

사랑이란 참 어림없는 결단.

그것이 얼마나 아득한 도정인가를 지금에야 알겠구나. 이루 잴 수가 없는 내면의 충일과 감춰진 손의 무한량한 도야가 따르지 않고서는 갈 수 없는 길이다.

단순한 열정이기보다 단순한 기원이어야 하며 성급한 서약이기보다 맹세를 늦추는 신중한 사려 思慮, 그러면서 명백한 결단이어야 한다.

그건 감미로운 도취가 아니고 끊임없는 헌신의 가지 끝에 겨우 얼마간의 담백한 유열로 맺히는 그 이슬이요 눈물이다.

많이 바라면 그만큼 낙망을 더하게 되고 절제 속에 조금만 바람을 드러내면 매번 그 수급 受給 이 신선하고 흡족하리라.

이에 대해 경고하는 좋은 말이 있다.

‘사랑은, 저편으로부터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던 영혼의 경이에서 시작되고 모든 것을 탐내게 되는 자아의 실망에서 문이 닫긴다’고.

그러나 사랑하는 이에 대해 바람을 견제하는 일이 쉽겠는가. 언제나 주고 있으며 쉴새 없이 바라게도 되는 그 격정을 알맞게 조절하는 일이란 예사의 지혜가 아닐 것 같다. 어쩌면 훨씬 풍성한 지혜를 맞고 있는 자만이 가능할 것이리라.

덕성과 관용의 선수들만이.

 

얼어붙은 폭포를 본다.

옥빛의 모시가 빳빳이 얼어 가파른 바위에 입혀진 광경이다. 수정 판자 같기도 하다.

첫봄의 햇살이 몸을 풀어 주면 구슬 같은 물줄기로 우줄우줄 흘러내릴 테지. 덩어리로 굽이치는 물의 분류를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뛴다. 당신이 함께 이 설경을 본다면 좋았을 것을.

눈 위에 모닥불을 피워 놓고 광막한 벌판 한가운데 당신과 함께 있고 싶었다. 쩡한 대기와 안개처럼 서려 나오는 산 정기가 당신의 살결을 씻어내고 보이지 않는 두 팔로 간절히 안아 줄 거이다. 머리 위에 머무는 겨울 하늘은 우리의 마음을 얼마나 유연하게 해주려마는.

말은 띄엄띄엄 조금만 나눈들 그 뜻은 썩 잘 전해지고 깊이 스며들리라.

아니지. 말은 전혀 없은들 어떠랴.

대대로 사람은 침묵을 통해 동일한 사념과 한가지 바람의 그 일치를 얻게 된다. 그것은 말하지 않는 말, 말로써 나타내기엔 너무나도 말의 한계를 넘어서는 말임으로 해서이다.

‘진정한 충실은 한 번 태어난 이를 수없이 소생시키는 일이다’

이 말은 어디선가 인용한 기억이 있다.

사랑하는 이를 거듭 몇 번이라도 소생시키며 활력을 넘치게 함이 사랑의 첫 번째 의의요 의무이다.

자기를 다 주고 쉬임 없는 관심으로 돌본다고 해서만 사랑의 성취를 얻는 게 아니며 근본적인 충실은 근본적인 생명을 찾아주고 이를 도와 가꾸는 총명이며 그 성의 있는 지속, 통틀어 사랑할 줄 아는 능력이다. 또 이것이 전후 일관되어 있어야 한다.

사랑의 진실은 더 많이 그 오뇌에서 자라난다. 수없이 엎어지는 좌절이 자갈밭에서 어떠한 열망으로 이를 이겨내고 일어서는가의 그 준엄한 의지와 극기에 있다 할 것이다.

 

우리는 멀리 왔다.

우리는 과연 멀리 왔을까.

반은 긍정이요, 반은 부정이다.

이에 대해 당신의 말씀이 듣고 싶다.

겨울 강물은 얼어서 한 덩이가 되었다. 눈이 떡가루처럼 강 위에 떨어진다.

아무 소리도 없다.

이 침묵의 심연.

무언가 몸을 떨게 하는 게 있다.

어두운 전율이 아니고 한편 들뜬 흥분 같은 것도 아니다. 한없이 내려 눌리면서 어둑하게 솟구쳐 오르고 싶은 한 덩이의 감정이 줄곧 치받는다.

그러나 고요하게 땅 속에서 일어나는 일처럼 아무 소리도 없이.

정녕 당신의 외로움을 나에게 열어 주렴. 당신의 영혼을.

당신은 더 많이 고독을 알고 더욱 목마름에도 눈떠야 한다. 사람이 얼마나 철저하게 혼자인가를 알며 그래서 벗을 찾고 신을 부르는  간망에 일어서야 한다. 처음부터 복습하는 교과서처럼 우리도 진실의 첫 대목부터 시작하여 새로이 삶을 배우자.

당신의 가슴을 더 열어라.

나직한 맥동, 생명의 울림을 듣자. 나하고 함께 듣자.

사랑하는 친구여

몇 날 몇 밤을 당신 생각만 했다. 몇 달 몇 해, 나는 당신에게 열중하며 예까지 왔다.

아아 당신의 추위를 나에게 열어 주렴. 그 추위 속에서 우리의 포용 包容 을 다시금 거쳐 나왔으면 한다. 몇 날 몇 밤을 잠자지 않는 마술사처럼 깊은 겨울의 낮밤을 당신과 함께 나도 깨어 있고 싶다.

‘사랑에는 무게의 부담이 없다. 나의 나뭇가지가 부러질 때는 당신이 너무 기대어 온 그 탓이 아니고 당신이 나를 버렸기 때문이다’

당신의 무게를 나에게 주렴.

그건 당신이 더욱 나에게 의탁해 오는 일로써 이루어진다. 나에게 기대고 맡겨 주고, 내 안에서 안식을 누려 준다면 그 위에 무엇을 더 바라리.

나의 중량이 더하도록, 무게를 견디는 힘이 더욱 커지도록 그래서 끝내 우리는 가지도 휘어 굽어지는 청과의 충일을 갖자. 당신의 의탁, 당신의 신망은 내 난에서 살이 되고 피가 되리라.

한없이 당신을 품어 데려오고 싶다.

이루 말할 수도 없는 열망이란 바로 이것, 요약하면 이렇게 된다. 허나 다른 말로 한없이 나를 내어 주고 싶다는 그 뜻과 동일하다. 어느 쪽으로 말하건 우리가 함께 있어야 하겠다는 그 바람에 귀착하는 것이니까.

이별의 차가운 바람으로 잠깨는 일이 없는 충족과 안도의 긴 세월을 당신을 위해 마련하리라.

가난한 소유도 풍성한 소유도 내게 있어선 오직 당신이 자유롭게 재량한다. 당신은 권위 있는 자와 같이 나에게 임했으며 내 모든 영역을 관할하는 사람임을 내 어이 부인하리.

오늘 나는 당신을 청해 온다.

전적인 확신으로, 더는 들어갈 수 없는 깊은 내전에까지 당신을 모셔 들인다.

당신은 나의 행복한 포로가 되어 주겠는가?

당신의 의관 어느 실오라기 하나라도 나와 무연할 수는 없다. 하물며 당신의 모발 하나하나, 오죽이나 소중한가.

사랑하는 친구여

순수의 싸락눈, 운명의 싸락눈 뿌리는 천지간에 나는 그대를 본다. 내 생명 깊은 계곡에 신이 내어 걸으신 큰 축복의 계시가 바로 그대와의 만남이요 겨울에 태어나는 첫봄의 환희, 그게 곧 당신일 것을.

우리의 만남을 감사 드리며 서로의 외로움을 속속들이 쪼개는 이 손시린 영광….

내 말을 더 가라앉혀야 할 것 같다.

자못, 말이 지나치게 화사한 수식을 찍어 붙이게 될 일을 나는 경계한다. 미문은 때에 따라 글의 타락이 된다. 하고 싶은 말인들 더러는 마음에 담아두고 더러는 바람에 날려 보내며 그 일부만을 전하리라.

세월은 더욱 쌓이리.

행여 이 위에 더는 만나는 일이 없다 해도, 당신은 나에게 흡족해 주었으며 고귀한 걸 주었었다. 내 어설픈 사유의 틈서리에마다 온갖 양상의 촉매가 되어 주고 때때로는 분수에도 넘치는 영감의 불을 내 속에 당겨 붙였었다. 갖가지 애환 가운데서 나는 당신의 모습을 보았으며 당신의 이름은 언제나 내 입술에 묻어 떠나지 않았다.

간혹 글을 쓰다 밤을 밝히게 되면 아침엔 죽은 듯이 지치고 한없는 배고픔처럼 자신의 손을 물어 뜯는 그 절대의 고적감.

유리창엔 눈물이 맺혀 글썽이듯, 몇 오리가 밤이슬이 엉겨 내리고 조간 신문은 뜰의 한편에 눅눅히 습기를 머금고 내던져져 있다.

이럴 때 누군가 손을 잡아 주었으면 싶다.

 

절망의 유인은 왜 그리도 많은지.

나는 자주 내 삶의 돌 층계에 쓰려져 흐느낀다.

삶에선 끝없는 용기와 분발이 솟아야 하는데 이것이 미약하기 때문에 버려진 아이처럼 울음이 치받는다. 애들처럼 나도 돌아가신 어머니를 찾는다.

어머니!

이렇게 부르면 지체 없이 격렬한 전류가 온다. 아픈 전기이다. 아프고 뜨겁고 견딜 수 없는 전기이다. 이 전기를 당신도 수없이 내 안에 일구어 준다.

사랑하는 친구여.

그대를 부르면 지체 없이 전류가 온다.

서러운 전기, 사람의 외로움을 치명이 정도에까지 선동하는 전기, 이는 무참한 불이다.

사랑하는 친구여

나는 나의 핏줄에서 몇 번이라도 당신을 낳는다.

당신이 일구어 주는 그 불더미 속에서 구운 칼날처럼 당신을 끄집어낸다.

앞으로도 나의 저력의 그 근원지에서 당신과 더불어 살겠고 당신의 진실을 낱낱이 지켜 보겠다. 다만 어느 날 당신을 버려 두고 홀연히 내가 세상을 하직하게 될 그땐 오죽이나 죄스럽고 미진할 것인가.

 

눈이 닫길 때 귀가 열리리라.

보지 않고 알 때, 듣지 않고 느낄 때, 느끼지 않고 믿을 때, 비로소 시간마다 신을 뵈올 수도 있겠거니, 당신을 맞이할 수도 있겠거니, 이와 같은 봉별의 자율을 나는 심히 부러워한다.

그러나 한편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일수록 남김없이 다 내어 주어선 안 된다고 여겨진다. 서로 흡수하고 용해되어 마치도 한 사람의 내부와 같이 한계마저 없어지면 간혹 위급할 때 무슨 여력으로 그 어려움을 떨칠 수 있을 것인가.

또한 내부에서 생겨나는 붕괴도 있다.

권태나 타성 따위.

이럴 때 전혀 건강한 저항이 없다면 어떻게 그 시련을 넘어설 수 있겠는지.

사랑의 모순은 사랑의 신비와도 통하거니 전후의 모든 과정에 금싸라기 같은 지혜가 알맞게 따르지 않는다면 정녕 사람은 쓰임 없이 전락할 밖에 없다.

사랑의 필연성, 그건 바로 사랑의 운명이다. 그렇다. 운명으로 오는 것 그게 사랑이다.

친구여 우리는 멀리 왔다.

그리고 앞으로 더욱더 먼 길을 가야 한다.

오늘 내 영혼을 당신에게 열어 드리며 이제 막 시작하듯이 청신한 바람으로 한 가슴을 채운다.

당신의 길벗이고 싶은 그 갈망으로 이리 뜨겁게 나를 받치고 있다.

조용히 서두름을 누르며,

아주 간절하게.

 

 

 

제3장 가슴 안의 그 하나

 

 

기도 연습

 

1

이리 삭막함을 용서하소서.

비정함과 폐쇄, 서로 타인임을 용서하소서.

가족간에도 끼어드는 추위를 용서하소서. 사랑했는지 안 했는지 애매한 부부 사이를 용서하소서.

관계의 빈곤들을, 진흙에서 내굴린 금싸라기의 시간도 부디 용서하시옵소서.

불면을 용서하옵소서. 좋은 잠은 성성 聖性의 참여라고 했는데 밤마다 잠은 메마르고 두통과 귀울림이 잦은 일을 용서하옵소서.

화해를 허락하소서.

위안과 협동과 다시금의 분발을 허락하소서. 이른바 행복을 허락하소서.

충실과 조화에 나아가게 하소서.

삶을 소중히 꽃피우게 하시고 뜨겁지도 차지도 않은, 가장 좋은 따뜻함을 누리게 하소서.

알맞게 쓸쓸하게 하소서. 피차의 고독을 살펴 줄 건강한 시력을 주시옵소서.

명주실을 뽑기 전에 누에의 온몸은 유리처럼 얼비친다 했는데 저희도 투명하기 원하옵니다.

순수하기 원하옵니다.

신앙을 원하옵니다.

으뜸으로 당신을 원하옵니다, 주여.

 

2

마음의 소요가 불어나서 온세상을 채우니 하나님도 이를 어쩌지 못하십니다.

첫날의 부스럼을 죽기까지 못 고치는 존재의 암담함을 굽어살피시고 먹어도 먹어도 소용없는 비극의 위장, 골수까지 허기지는 굶주림을 살펴 주옵소서.

하오나 내 하나님.

진실로 아뢰오니 사람이 그 자신에게 절망하는 일과 사람끼리 서로 절망케 하는 일의 이 비참을 신이신 당신께선 도저히 알지 못 하시옵니다.

 

3

오늘은 아뢸 말이 없습니다.

마음이 굳게 닫혀 제 안의 수북한 할 말들이 그 안에 갇혀 버렸습니다.

말씀드려 봤자 제 기도는 동일한 되풀이일 것이옵고 보나마다 주시지 않을 것이라고, 미리부터 체념이 저의 기를 꺾어 버립니다.

생각해 보시옵소서. 주님이나 저나 얼마나 지루한 타성을 쌓아 왔습니까. 얼마나 쓸쓸한 숨바꼭질을 거듭했습니까. 오늘 저의 할말들은 돌의 살갗에 말라붙은 겨울 이끼와 같사오며, 겨우 이 사실만을 아뢸 수 있사옵니다. 이런 까닭으로 더 다른 말을 아뢰지 못하옵니다. 나의 주여.

 

4

아름다운 밀초에 불붙이고 성탄절 송가를 듣습니다.

눈물이 차올라 견딜 수 없사옵니다.

주의 자비여, 주의 자비여, 주의 자비가 곧 주의 권능이시옵고 주의 정의가 보로 주의 힘이시옵니다.

열끊는 비원 같이도 사납게 요동치는 감동, 진정히 아뢰오니 이 마음을 주의 손에 받아 주옵소서. 오직 받아 주심으로 하여 저는 추만하옵니다.

 

5

지난해엔 열심히 일했습니다.

집을 고쳐 세우는 흙먼지 속에서, 그리고 밤에는 흘러내리는 머리결을 쓸어 올리며 이슥토록 시를 주무르곤 하였습니다. 뙤약볕의 온종이로가 야반의 정적에서도 무시로 눈시울이 젖어 들면서 얼마든지 샘솟던 무량의 눈물.

어떤 의미론 형벌이었습니다. 주야로 형틀에 묶여 지내며 맨살에 찍히는 무수한 화인 자국을 감내했습니다. 그 마음은 언제나 사랑이었습니다.

하온데 올해의 여름은 다릅니다. 시원한 방에 편히 지내며 눈시울도 말라 있는 이 무서움.

이리도 값어치 없는 무사안일의 한없는 나태, 이거야말로 형벌입니다.

사랑과 고뇌는 주께서 측은히 여기시나 이별과 냉담에는 연민의 일별조차 머물지 않으심을 저희가 아옵기에 바라오니 인간적 몰락의 이 허약과 빈곤에 불의 진노를 내리시옵소서.

여름의 막바지 피를 토할 듯이 내 삶과 사랑의 불성취를 서더워, 또 서러워합니다.

 

6

그리도 제 기도를 외면하신 주님께 저의 승복을 아룁니다.

주님의 힘을 어찌 꺾겠습니까. 전능하신 분의 아집을.

하옵기에 돌층계에 엎드려 저는 패하옵고 지금은 조용한 미소를 드립니다.

강하신 주님. 당신은 이기시고 저는 졌다오니 이로써 주님과 제가 다시금 평온하기 바라옵니다.

 

7

며칠 기도 드리지 않아 며칠간 굶은 듯이 배고픕니다.

풀리지 않는 그리움의 멍울.

오늘 밤 기도하겠습니다. 그때까지 남은 일을 서둘러 치르겠습니다.

 

8

후끈하게 살아 생동하는 한덩이의 피가 중량을 가지고 내려앉습니다. 가슴 속의 낙뢰 落雷라 하올 것입니다.

 주님도 아시는 바 엄청난 일이 생겨났습니다. 사람 하나가 죽은 것과 진배 없습니다. 어쩌면 그 이상입니다.

주님, 저는 무력하오나 이 충격을 승인하겠습니다. 하나의 무대와 같이 시간이 다하여 막이 내리는 이치로 소용돌이치는 격량이 다하기를 기다리겠습니다.

아무리 긴 연극도 이윽고는 끝나도록 마련임을 아옵기에.

 

9

남이 제게 잘못한 일 잊게 하옵시고 제가 저들에게 잘못한 일 낱낱이 잊혀지게 하옵소서.

열 손가락 차례로 깨물어 붉은 피 점점이 흘리오리니 그 아픔 공손히 바치리니 내 안에 황황히 불 켜시고 주님 납시옵소서. 그 평화 바다같이 넘치옵소서.

 

10

서서히 그 순서가 다가오고 있으리니

성취보다도 완벽한 주님의 안배, 그 글씨가 읽혀지리니

여기가 내 믿음의 의지옵니다 주님.

 

11

양팔 기도라는 새 낱말을 배웠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주님의 형상대로 두 팔을 허공에 들어 올리고 돌바닥에 무릎 꿇어 장시간 청원을 고하는 세제, 수녀, 봉사자들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마침 불볕더위여서 목욕하듯이 많은 땀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저들은 아무 말, 어떤 권유도 저에게 해주지 않았습니다. 오직 침묵하면서 속죄 양처럼 그 자신을 바치고만 있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줄 밖에 세워진 어린이처럼 울음 울 것 같은 고독과 이때의 무력감도 당신은 밝히 살펴 주시는 것이옵니까.

 

12

구하옵니다. 주여.

바라오니 순수한 전념으로, 충실한 신뢰로, 다함 없는 분발로써 구하게 하여 주소서.

성숙한 탄원을 드리게 도와 주소서. 저로 하여금 기도에 능한 자 되게 하여 주소서. 무엇부터 또 어떻게 구하면 좋을지를 하나 하나 손잡고 가르쳐 주소서.

바라지만 말고 드리는 일도 알게 해 주소서. 어떤 봉헌이 저로서 가능하올는지 낙망 없이 추구하게 해 주소서. 그러기 위하여 저 자신의 풍요부터 힘쓰게 해 주소서.

구하옵니다, 주여.

청하거나 바치는 일들보다 더 우선하여 주님 안에 생활하는 복된 관습에 이르게 하소서. 호흡의 자연스러움처럼 자연스럽고 익숙해져서 저의 심신에 심히 당연하게 하여 주소서.

 

13

크리스천 적 인격 없이는 크리스천 적인 말을 알지 못하옵니다. 하옵기에 바른 말씨로 기도 드리지 못함을 살펴 주소서. 크리스천 적인 자양분을 먹지 않고서는 크리스천 적인 건강을 못 누리는 이치이옵기에 병약과 나태에 자주 머무름을 살펴 주소서.

이러므로 하여 저희는 죽기까지 혹은 죽은 그 다음에도 이마에 땀방울을 맺는 견습공들이옵니다.

 

14

거절하시려면 하시옵소서. 끝내 주시지 않으려면 그렇게 하소서.

허락이 없으신 그 만큼을 저희도 원하지 않으려 애쓰겠습니다. 아무것도 솟아나지 않았던 원초의 상태로 시계 바늘을 되돌리듯이 상황을 환원하고 주님과 저희가 단순히 얼굴을 마주 보게 하소서.

아아 바라 뵙는 일, 그것만으로 저희의 모든 해갈을 이루옵니다.

 

15

주님께 저 자신을 다 드리진 못했으나 형제 중의 봉헌자들을, 자매 중의 서원자들을, 주님 앞에 보내옵고 그 헌신과 서원을 숨어서 나누겠나이다. 행여는 자식 가운데도 사도의 길을 걷게 디기 바라나이다.

아직은 모릅니다만 위의 소망들 가운데서 몇 가지는 필히 하늘의 문을 열게 되올 것을 뜨겁게 믿고 바라나이다.

 

16

제 영혼은 천길 물 밑에 있사옵기에 영혼 속의 주님도 거기 계시옵니다.

투박한 철문 안에 갇혀 있사옵기에 주님께서 그 어둠에 머무시옵니다. 습한 당 고약 같은 진흙에 엎드릴 때도 나의 주님 함께 하시나이다.

사삼일 울고 지낼 때는 눈물에 젖어 밤낮을 보내시고 불화와 반목에 제가 빠지오면 저로 하여 갖은 곤욕을 치르시옵나이다.

주 앞에 바라오니 차라리 제 영혼을 버려 버리시고 밝은 땅, 위로 넘치는 곳에 나의 주님 부디 납시옵소서.

 

17

한 여인을 봅니다.

위안의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뙤약볕의 돌무지에 머리채를 풀어 헤지고 누워 신음하는 그녀를.

준열하신 하느님.

굳센 자일수록 치열한 불더미에 집어 넣으시는 당신의 완력은 저를 저항케 합니다. 그러면서 서럽고 절망적인 질투와 소외감이 저의 전령에 뭉쳐 폭발합니다. 지금 한창 그녀에게 내려 주실, 사납도록 치열하신 당신의 연민을 죽음과도 바꿀 만큼 저는 부러워합니다.

 

18

저의 불성취를 굽어보소서.

하오나 하늘의 허락은 이미 계셨는지도 모릅니다. 저희에게 닿기까지 기나긴 시간이 걸리는 것인지도, 하옵고, 끝내 주의 허락이 없으시다 한들 더 큰 테두리 그 안에서 균형과 조화가 잡혀지게 되올 것도 같사옵니다.

바라오니 주님의 선이 사람의 선 위에 장엄히 군림하시고 사람의 간망이 주의 섭리 아래 머리 수그리게 하여 주소서.

 

19

어제 비 오듯 하던 눈물이 지금은 걷혔습니다. 새 눈물 속에.

오늘은 오늘의 눈물로써 천지가 범람하오니 저로 하여 이 눈물에 침몰하여 죽어지게 하소서, 주여.

 

20

제 영혼에 불이 담아질 때.

은하 긴 성운 星雲 이 드러누울 때.

혼자가 아님을 알 때.

고맙고 서럽고 참 착해질 때.

납시옵소서, 주여.

제 앞에, 제 위에 아아, 전후좌우에, 그 둘레에까지 나의 주님 부디 납시옵소서.

 

21

주님은 제 마음을 유리 그릇처럼 투시하시니 갈 곳도 숨을 곳도 없사옵고 그 눈길에 못박혀 주야 사철을 지내나이다. 하오나 한편으론 심히 자유롭게 해주시어 저를 저로서 내버려 두시나이다.

주여! 라고 부르면 첫 만남 같은 설렘이 크고 둥근 파문으로 퍼져 나가게 하시나이다. 매번 신선하고 감격스럽게 해주시나이다. 전후가 신비하고 오묘하나이다.

 

22

시간이 모자랍니다. 바쁘고 바쁩니다.

이 중에서 가장 바쁜 일은 저의 기도이옵니다. 조물주와 피조물의 대면이옵니다.

주여, 피조물에겐 주물주께의 목마름이 질긴 철사줄처럼 들어있나이다. 전기 흐르는 본능이옵니다. 생명이 비롯하던 그날부터 가늘게 종소리를 울리는 그리움이었나이다. 사시사철 그러하였나이다.

다만 오늘에야 이 고백을 아룁나이다.

 

 

백조 이야기

 

당신은 가시투성이의 엉겅퀴 풀을 맨손으로 따야 하고 맨발로 밟아 짓이겨서 실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 실로 소매가 달린 열 한 벌의 옷을 짜서 마법으로 백조가 된 열 한 명의 왕자들에게 입혀야 합니다. 엉겅퀴풀은 마녀들이 모여 있는 무덤 위에 있습니다. 옷이 다 지어질 때까지 몇 년이 걸리더라도 결코 말을 해선 안 됩니다. 한 마디라도 말하게 되면 왕자들의 심장을 찌르는 칼이 되고 마니까요.

 

안데르센의 동화 중에 ‘백조’라는 작품은 계모의 마술에 걸려 백조가 된 오빠들을 구하는 엘리자 공주의 장한 이야기입니다.

그녀는 매우 아름답습니다.

커다란 들장미 울타리 사이를 바람이 불어 와 장미꽃를 보고

“당신보다 더 아름다운 게 있을까요?” 라고 물어보면

“있지요. 엘리자 공주님이지요.” 라고 대답할 정도니까요. 바람이 찬송가 책장을 넘겨 주면서

“당신보다 믿음이 깊은 이가 있을까요?” 라고 물으면

“있지요. 엘리자 공주랍니다.” 라고 장미는 다시 대답한답니다.

 

자아, 오늘은 당신이 엘리자입니다. 그러므로 그 어려운 일들을 지금 곧 시작해야 합니다.

왜 내가 그녀이냐고요?

잘 아시겠지만 사랑 때문입니다. 당신에겐 사랑하는 열 한 명의 오빠가 있고 당신 만이 그들을 도와 줄 수 있습니다. 물론 오빠라든지 열 하나란 숫자는 작품상의 상징이므로 특별한 뜻이 없습니다. 그가 누구건 간에 상황이 어떻든 간에 당신이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고 최선을 다해 그를 도와 주려 할 때 그대는 그 즉시에 엘리자가 됩니다.

잠들어 있는 동안에도 기도를 그친 일이 없을 만큼 간절히 염려했던 나머지 꿈 속에서 선녀를 만나 위에서 말한 바의 한 가지 대책을 알아 차리는 엘리자가 됩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곧 그녀라는 이치가 성립되는 거랍니다.

사랑하는 이는 용맹합니다. 어떤 어려움도 끝까지 참아냅니다. 결단을 망설이지 않으며 필요한 일을 지체 없이 시작합니다.

가시투성이의 엉겅퀴풀을 맨손으로 따고 맨발로 짓이겨 실을 뽑아냅니다. 불인두로 지지듯 하는 고통을 이겨내며 잠시도 일손을 쉬지 않습니다.

숲에서 왕을 만나 그의 아내가 된 엘리자는 밤중에 무덤을 찾아가 마녀들과 한 패가 되곤 한다는 나쁜 소문 탓에 사람들의 오해와 미움을 받게 되고 사랑이 깊던 왕까지도 그녀를 더는 두둔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사랑이 깊던 왕까지도 그녀를 더는 두둔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필연코 마녀의 화신일 것이라는 재판 결과에 따라 불에 태워 죽이는 사형이 정해졌으나 이 지경에서도 그녀는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아, 적어도 임금님한테만은 이 괴로움을 알려드리고 싶다.”

이렇게 생각하면 굵은 눈물 방울이 한없이 맺혀 떨어집니다. 왕궁이 아니 축축한 감옥에서 엉겅퀴풀의 베개와 거칠꺼칠한 엉겅퀴풀의 홑옷을 덮고 밤에도 아주 조금만 잠을 자곤 줄곧 일했습니다.

“오빠들을 구해야 한다. 이 불 같은 소망에 비하면 어떤 고통도 작고 가벼울 것이다.”

그녀는 더욱 더 부지런히 일손을 놀렸습니다. 이제 열 벌의 옷은 완성되고 나머지 하나도 거의 지어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도와 주신다. 언제나 도와 주시던 그 사랑으로 지금도 내 옆에 함께 계신다.”

 그녀는 절대로 낙담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용기와 믿음과 꾸준함을 낳아 줍니다. 어려움 중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진리를 잊지 아니합니다. 단지 거짓없이 진실한 사랑일 때만 말입니다.

도와 주는 자가 나타납니다.

조그만한 쥐가 마룻바닥을 돌아다니면서 엉겅퀴풀을 끌어다 주고 지빠귀새는 창살에 앉아서 그녀의 용기를 돋우려고 유쾌한 노래를 불러줍니다.

날이 밝아 사람들은 마녀의 화형을 구경하려고 구름떼처럼 몰려 들었으며 투박한 삼베 옷을 입은 왕비는 늙은 말이 끄는 수레를 타고 형장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녀의 손은 여전히 쉬지 않고 파란 실로 옷을 짜고 있습니다.

“저 마녀 좀 봐. 저러너 기분 나쁜 물건을 갖고 있다. 빨리 빼앗아서 찢어버리자.”

사람들이 몰려들어 그 옷들을 빼앗으려 할 때 열 한 마리의 아름다운 백조가 날아와서 수레 위의 왕비를 에워싸지 왕비는 커다란 열 한 벌의 풀옷을 백조 쪽으로 던졌습니다.

그러자 새들은 열 한 명의 훌륭한 왕자가 되었는데 맨 끝의 왕자만이 한 쪽 팔 대신 백조의 날개를 달고 있었습니다. 옷 소매 하나만 못 만든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때가 곧 성취의 시간입니다.

엘리자는 이제 침묵을 끝내고 말할 수 있게 되었으며, 나쁜 계모의 마술을 풀어 버리고 오빠들에게 본래의 모습을 찾아 준 기쁨과 자랑은 그녀의 차지가 되었습니다.

위의 이야기 속에는 수난과 구원의 관계가 풀이되고 있으며 사랑과 신앙을 다하여 모든 시련을 극복하는 사람에겐 기필코 승리의 월계관이 주어짐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현재 사랑하고 있는 당신, 바로 당신이 오늘의 엘리자이기에 용맹과 충실과 인내를 당신의 것으로 실히 지녀야 합니다. 그리고 승리도.

당신이 사랑을 위해 나는 충심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승리하십시오. 부디.

 

 

 

 

** 지금도 ‘필사 筆寫’ 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Disclaimer: 여기에 실린 글은  copyright가 된 책, 기사를 ‘발췌, 전재’를 한 것입니다. 모두 한 개인이 manual typing을 한 것이고, 의도는 절대로 저작권 침해가 아닌, fair use의 정신을 100% 살린 것입니다. 의도적으로 ‘시간적인 제한, 독자층의 제한’을 염두에 두었고, 목적은 단 한 가지 입니다. 즉 목적을 가진 소수 group (church study group, bible group, book club) 에게 share가 되었습니다. password protected가 되었는데, 만일 이것이 실패를 하면 가능한 시간 내에 시정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1. 그때 사정에 맞는 요구
  2. 혼자서 황홀해함, 또는 자기도취에 빠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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