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eld of dreams, trancending time & place, autobio in progress..

 

사랑이 깊으면 외로움도 깊어라 – 천경자

한국의 대표적 여류화가 千鏡子의 사랑과 소망의 에세이집

 

 

 

 

千鏡子

1924년 전남 고흥에서 출생.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 졸업. 1942년 선전(鮮展)으로 데뷰. 1955년 대한미협전에서 대통령상 수상. 문교부 문예상 본상, 서울특별시 문화상, 예술원상, 3-1 문화상 등 수상. 1963, 65년 동경에서 개인전, 1970년 남태평양 풍물전, 1973년 현대화랑 초대전, 74년 아프리카 풍물전, 79년 인도 중남미 풍물전 등을 가짐. 국전초대작가, 홍익대학교 미술대 교수와 국전심사위원 등을 지냈으며, 현재 예술원 회원이다. 작품으로는 <生態>외 1천여점. 저서는 <유성이 가는 곳> <언덕위의 양옥집> <한>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 등이 있다.

1986년 3월 10일 중판발행

자유문학사

 

괌 島 (1983)

오호츠크 海 (1983)

北海道 (1983)

待春 (1978)

6월의 신부 (1977)

신기루 (1977)

멀리서 온 여인 (1977)

괌 島 (1983)

 

千鏡子 대표 에세이

사랑이 깊으면 외로움도 깊어라

 

 

차례

 

제1장 서울 엘레지

화폭에 봄은 오는데

서울의 엘레지

어머니는 나의 가정이며 종교

인간상실

神 은 어디에

人間無情

母系家族

눈 뒤에 비

斷想 十一題

고향의 음식물

삼촌

묵은 편지

고향의 비

기념사진

 

제2장 엄마의 자장가

산을 바라보는 마음

恨 은 보라빛

자살환상

고독의 날개

아버지와 고독

엄마의 자장가

분홍꽃의 추억

화려한 슬픔

잊혀지지 않는 로크

잃어 버린 결혼식

 

제3장 소녀시절의 추억

소박한 한 아름의 꽃처럼

신기루같은 희망이

눈썹

계단

낙인

눈물

얼룩이

메리의 죽음

소녀시절의 추억

제2의 사춘기

추위의 낭만

딱딱이 소리

현실의 가치

감각의 형체

 

제4장 나와 장미

招雨

라일락

앵두꽃

우담화

相思草

무궁화

5월

소쩍새

나와 장미

여름밤의 환상

한여름의 뒤안길에서

또 여름은 가고

뜸부기 우는 계절

9월

가을인가요

황후가 되어보는 가을

 

제5장 어차피 인생은 여행

자화상

나의 화실

여인 소묘

외로운 畵想

생명을 확인하는 색

고갱과 타히티

만종의 추억

어린 꿈

양지의 꿈

슬픔처럼 피어오는 아름다움

강물에 흐르는 초현실의 빛

환각의 피서

어차피 인생은 여행

나의 인생 노트

 

 

제1장

 

화폭에 봄은 오는데

검은 감 잎 사이에서 풋 감들이 졸고 있는 바람 한 점 없이 정숙한 여름 밤에 봉창을 뚫고 들려오는 이웃집 영감님의 쿨룩쿨룩 기침 소리에 나는 가을을 느끼고 ‘아, 가을인가요’ 했다.

기침의 음색엔 분명히 가을빛이 섞이기도 했지만 무작정 세월만 가면 좋은 일 생기리라 기대하며 살았던 그 무렵이라 성급히 한여름에 가을을 느끼려고 나는 애썼고 어쩌다 뚝 떨어지는 포플러의 황엽(黃葉)만 보아도 가을이 온다고 반겼던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 숱한 세월이 흘러가 버렸다.

세월을 재촉하던 심사는 겨울의 문턱에 들어서기만 해도 뭔지 온통 누루한 녹색이 펼쳐지는 듯 빛깔이 보이기 시작하는 듯해 “아, 봄인가요” 했던 것이지만 나이를 더 먹어갈수록 어떤 기대나 희망은 차차 무뎌지고 석탄질화(石炭質化) 되어 가는 모양인지 그렇게 서둘렀던 감각이 이제는 정반대로 돌아가 버렸다.

3월로 접어든 엊그제, 별안간 눅은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바깥 경치를 보고 “아, 아직은 겨울이다” 하면서 조금은 남아 있을 성싶은 환절(換節)의 말미에 나는 부질없이 안심을 하고 있었다.

아네모네에 아이리스, 비닐봉지에 싸여 남불(南佛)에서 올라온 노란 솜뭉치 같은 미모사와 탁자 위에 그레이프 프루트 쥬스잔을 놓고 파리에서 맞이했던 조춘(早春)도 좋았지만 시골 논두렁 습지(濕地)에 파릇파릇 미나리 돋아나고 양광(陽光)이 부신 포구(浦口) 뱃전 가의 봄도 절묘했다.

봄은 정녕 사람을 미치게 하는가. 실성한 처녀가 속옷바람으로 뛰쳐나왔는데 지나가던 늙은 지게꾼이 “그랄만도 하제잉, 새큼새큼 하니 봄잉께 잉, 쯔쯔쯔” 혀 차던 고향의 봄을 잊을 수가 없다.

집밖으로 뛰쳐나와야 직성이 풀리는가, 미친 총각 미친 처녀가 유난히도 눈에 많이 띄었던 고향의 봄이었다.

약간 높은 지대에 있는 우리 집에서 환히 내려다보인 부잣집의 돌담 길을 느닷없이 ‘이힛’ 힘을 주고 잘 뛰어가던 평순이라는 미친 총간은 홀어머니와 살고 있었다. 씨름꾼같이 우람한 몸집의 평순이가 뜀박질치는 바람에 놀란 무릅 장수의 각시…

무릅을 캐서 진하게 고면 당분이 우러나 떫은 무릅잼이 되어 과자가 귀한 그 시대의 아이들은 먹고 싶어했다.

이중선(李中仙: 李花中仙의 여동생)의 창(唱)빛보다 더 고운 ‘물곳 사시요오…’ 외치는 각시의 목청이 봄 하늘에 퍼지자 절름발이 엿장수 아저씨가 엿판 팽개친 채 가위소릴 멈추고 목청에 흘린 듯 넋 나간 꼴로 서 있던 광경이 눈에 선하다.

 보리고개 때 신파(新派)로 <그 여자의 일생> <유랑 3천리> 를 펼쳐 읍 사람들을 울려놓고 떠나 버린 유랑악극단. 뭐가 그리 아쉽고 서운했던 것인지 선량한 건달패들 가슴 흔들어놓아 바람기 잘 줄 모르고 읍내가 우수(憂愁)에 흠뻑 젖었던 봄이었다.

그럴 때 우리 뒷집 초가에 또 한 사람의 미친 노총각이 살아 봄비에 날 궂으면 뭘 그리도 시부렁거리는지…

내 가슴 속에 커다란 감상(감상)의 주머니 하나가 붙어 있어 뭔가 주워 담아도 차지 않고 아쉽기만 한 풍토병은 그 무렵부터 생긴 것인지 오늘날까지 낫지 않고 때때로 앓고 있는 형편이다.

계절은 바야흐로 봄이지만 세월을 붙잡고만 있고 싶은 심정에서인지 아직 나는 봄의 전령을 듣지 못하고 있다. 요즘은 사시사철 아무데서나 볼 수 있는 수박과 토마토, 달래, 상치 향기 없는 꽃들은 시각 미각 할 것 없이 계절 감각을 마비시켜 버렸고 인간을 점점 말초적 감각만 남게 해 가고 있는 것 같다.

나는 호텔의 로비나 레스토랑, 승용차에서 주로 그 양식인간(養殖人間)을 발견하게 되지만 그 영양도(營養度)나 말투 차림새에서 금방 ‘자연’과 ‘양식’을 구별할 수 있는 것 같다. 그러니까 자기가 피나게 노력해서 터전을 마련하지 않고 무풍지대에서 서식한 덤덤한 인간을 일컬어 양식인간이라 부르고 싶다.

요즈음 굳이 봄기운을 찾아 본다면 도시락에서 찾을 수 있다. 그래서 나의 봄은 도시락에서부터 온다.

납작한 알루미늄 그릇 뚜껑에 약간 눌린 밥, 한쪽 그릇에다 콩자반, 풀치무침, 김무침, 삶은 계란, 장아찌 등을 고루 담아 나무젓가락과 함께 보자기에 사 두었다가 점심시간에 풀어서 더운 보리차를 마시며 먹을 때 비로소 야릇한 봄을 느끼기 시작한다.

나에게 다분히 또순이 근성이 도사리고 있지 않나 생각해 보기도 하지만 하루 세끼를 다 도시락을 먹고 산다 해도 질리지 않을 것만 같고 도시락의 서러운 향수는 가슴 속의 빈 주머니에도 뭔가를 채워 주는 듯하다.

나는 화실에서 도시락을 펴고 흘러간 노래를 듣고 좋은 시집이며 화집을 뒤적인다. 그것들을 듣고 읽고 보면서 인생의 진리를 느끼고 영원한 청춘을 찾는 듯해 시간과 세월에 대한 부질없는 초조감에서 잠시나마 헤어나는 것이다.

고호, 고갱 다 좋지만 보티첼리의 ‘봄’ 시리즈 중 ‘봄의 탄생’을 제일 좋아한다. 피렌체의 놀진 숲 속 비너스를 중심으로 좌측엔 삼미신(三美神)과 마르스, 우측에 봄의 여신, 꽃의 여신, 바람의 신(神)을 곁들인 아름다운 그림이다. 그 중에서도 꽃의 여신(女神)에서는 어떤 신비스러운 매력을 느낀다.

쏘는 듯 강렬한 여신의 눈초리와 웃는지 우는지 모호한 웃음, 현대의 히피를 연상케 하는 차림새에 앙긴 꽃들이 아름답다. 모델은 피렌체의 모든 사람들의 애도 속에 젊은 나이로 죽은 매디치가의 공주 시모네타를 보티첼리가 추상하면서 그린 작품이라고 한다. 이 대작은 현재 피렌체의 위지미술관에 걸작 ‘비너스의 탄생’과 함께 걸려 있다.

나는 15년 전 12월 께부터 파리에서 봄을 맞는 듯한 기분에 들떠 있으면서 유화로 아네모네, 아이리스, 미모사의 정물을 그리고 1월 달에 홀로 이태리 여행길에 올랐었다.

그러나 시모니타의 혼을 깃들이게 한 보티첼리의 꽃의 여신은 마냥 즐거웠고 숨으로 들이키는 공기가 그토록 맛이 있을 수 없었다. 좋은 작품을 볼 때마다 나는 그 완성의 바닥에 깔린 모체가 분명히 슬픔이요, 견딜 수 없는 외로움이요, 가난이라고 다시 확인하는 것이었다.

그 ‘완성을 위한 고통’을 확인하면서 ‘양식’아닌 ‘자연’을 느꼈다.

봄은 소생하는 계절이고 따스함이 감사 주는 계절이지만 한편 우수와 절망과 상실의 계절이기도 하다. 지난해 이 맘때 사랑했던 개 꽃순이을 잃어 남쪽 야산에 묻었고 30여 년 전 초 봄에도 사랑하는 여동생의 재를 강물에 뿌렸었다. 나는 죽은 그녀들이 살아 있을 때 문득 시모네타의 전생(轉生)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때가 있었다.

 

서울의 엘레지

거리의 체증을 뚫고 택시가 어렵게 3호 터널을 빠져 나오자 남 서울의 풍경이 환히 펼쳐지기 시작했다. 후유 – 한숨이 터진다. 거대한 라이터가 무수히 치솟은 듯한 고층아파트들의 원경은 흡사 뉴욕의 허드슨 강에서 바라보는 한쪽 도시를 연상시켜 준다. 서울이 이토록 발전한 데에 경탄은 하지만 한편 메마르고 살벌한 시야에서 막연한 불안감마저 느낀다.

창 밖을 스치는 실버들 가로수를 보며 시각을 통해서나마 쩍쩍 금이 간 가슴에다 촉촉한 푸르름을 흡수해 보려고 깊은 호흡을 하는 것도 일상사가 되어 버렸다. 그래도 차가 한강다리를 달릴 때의 기분은 잠시나마 상쾌하다. 그 지점에서 나는 동남쪽 강변에 솟은 반원형의 고층건물을 유심히 바라본다. 우리 가정이 있기 때문이다. 그 가정이라는 따스함도 고령의 노모가 살아 계실 동안만 지속된다는 걸 알고 있고 언젠가는 다가올 엄숙한 붕괴만이 남아 있을 것이다.  차창에서 보이는 그 아파트는 고대 로마시대에 기공되어 지금은 허물어져 동그랗게 반원형만 남아 있는 콜로세오를 방불케 했다.

영화 <쿼바디스>에서 생사를 걸고 장절한 검투를 벌였던 검사(劍士)의 모습들마저 상기되어왔다.  한 인간이 두뇌와 붓을 쥐고 오른팔 하나로 살아가는 생(生) 역시 검사와 다를 것 없이 처절하고 또한 스릴과 쾌락이 있다.

띵똥, 초인종 소리에 문 열어 주는 가족이 있고 비로소 아늑한 우리 집의 작은 세계가 얼어붙은 가슴을 녹여 준다. 미완성 화판에 그려진 사람들과 뭇 생물들, 그 친구들이 나를 외롭지 않게 맞아 주고 어머니의 신음에 가까운 숨소리가 쇤 기침소리까지 고소한 누룽지 같은 정감이 되어 나를 살게 해 주는 값진 생명수가 되어 준다. 그러나 우리 모녀는 사소한 일, 전라도 사투리로 꼬막(고막) 껍질로 하나도 못 되는 일들로 잘 다투며 살아왔고 지금도 여전하다.

어쨌든 추운 겨울날 폭풍우 속을 헤매다가 아늑한 찻집을 발견한다거나 밤중에 타기 힘든 빈 택시를 만난듯한 안도감 같은 것이랄까 촛불 같은 광명과 훈훈한 온기가 있다. 태어나서 오랜 세월을 나는 태반에서 탯줄을 빨듯 살아왔고 지금도 그렇게 묘한 인생이다. 젊은 시절에 해결할 수 없던 인생의 고통이랄 지 일해도 일을 해도 넉넉지 못했던 살림살이가 지겨워 무척이나 더디게 가는 것 같은 시간을 원망할 때도 있었지만 그런데 어느새 세월은 흘러, 지금 이 나이가 되어버린 자신을 돌이켜 볼 때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처음 어머니가 요안나로 세례를 받던 날의 기념사진을 보면 장미꽃 조화뭉치가 달린 면사포를 두른 어머니의 표정은 어색했던 때문인지 수줍은 표정이었지만 참 아름다웠다. 그분의 회갑이나 또 고희(古稀)조차 이런저런 이유로 충분한 잔치를 못해 드렸다. 고인이 된 명창 박초월씨를 초청하여 기쁘게 해드리고 싶었는데….

5월의 창경원의 푸르름, 나뭇잎만 보아도 쪼르륵 엽록소가 오관에 흡수되어와 뭇 작품에의 구상이 떠올랐지만 미숙해서 충분히 소화를 하지 못해 아쉬웠다.

그런데 지금 막 자신이 생길 만 하니까 나는 살아온 과거보다 훨씬 짧은 시간을 상아야 하는 소위 인생을 관조하는 나이가 되어 버린 것이다. 나는 옛날과 변함이 없는데 남들이 그렇게들 봐 주고 있는 것 같다.

정말 인생이란 번개같다.

지금 이 시점에서 생각해 볼 때 나의 지나친 생업에의 집념 때문에 역설일는지 모르지만 어떤 때는 차라리 평범한 촌부로 태어났으면 싶은 때도 있다. 어중간히 풍부한 감성의 소용돌이가 거추장스럽게 때문이다.  운명론자는 아니지만 젊은 시절에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 <노틀담의 꼽추> 를 읽고 그의 비극적 운명을 테마로 한 사상에 감명을 받았고 지금도 그렇다. 영혼은 반드시 있고 그 어느 영혼이 누구의 모체엔가 들어가 혈육이 되지 않는가 싶다. 결국 윤회전생설(輪廻轉生說)을 긍정하는 뜻이 되겠지만 한 세상 살다 보면 반드시 악연선연(惡緣善緣)이 있고 설령 상대가 좋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인연이 없으면 악연이 될 수도 있어 전생래세(前生來世)에까지 어려운 문제로 뻗쳐지게 되지만 살아오다 보니까 인연설에 한해서만은 인생에 절대성을 지니고 있다는 걸 환상이 아닌 실감으로 느끼게 될 때가 많았었다.

나는 둘째 딸을 참 아기자기 예쁘게 길렀다. 지금은 멀리 떨어져 사는 그는 어려서부터 나의 그림 모델이 되어 주기도 했다.

그가 스무 살이 넘고 스물네 살이 되던 해에 나는 공연히 안절부절 불안했고 스물다섯 살이 되자 비로소 마음이 놓이던 이유는 일란성 쌍동녀 같았던 여동생이 그 스물넷에 죽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너무나도 사랑했기에 생전에 다정했던 여동생의 외로운 영혼이 나의 모체에 들려 전생한 것이 아닐까 했던 부질없는 기우 때문이었다.

그 이전 나의 소위 세계일주 스케치 여행 때 나는 마지막으로 이태리의 피렌체에 들려 위지미술관에서 보티첼리의 <뷔너스의 탄생>등 작품을 보고 참 행복했었다.

또 그의 대표작인 <봄의 탄생>은 내가 좋아하는 그림 중의 하나였다. 맨 앞에 현세의 히피같이 꽃에 둘러싸인 모습의 신비로운 미소를 띄운 주인공 같은 여자에게 반했었다. 훗날 책에서 읽고 안 일이지만 그 모델의 주인공은 시모네타라는 이름의 당시 성주의 딸이었다는데 일찍 죽었다고 했다. 나는 또 전생의 여동생 문제가 해결되다 보니까 딸이 시모네타의 전생이 아닌가 하고 막연한 불안을 느끼기까지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나의 지나친 사랑에서 해방된 그녀는 미국에서 잘 살고 있다. 딸과 나와의 인연이 끊기다시피 되어 어떤 동화에 나오는 마술사에게 어린 딸을 빼앗긴 것 같아 시모네타의 환상이 현실화 되었음이나 다름이 없다. 그러나 죽지 않고 잘 살고 있으니 다행이다.

지금 이 순간 눈을 감지 않는데도 내 방에 있는 뭇 사물과 함께 노오란 기생(妓生) 코스모스라든가 썬세트(노을빛 코스모스), 라이락, 호박잎, 몇 그루의 상록수들 사이로 우리 개 꽃순이가 뛰어 놀던 서교동 집뜰 정경이 오버랩 해와 좁은 시야가 무척 번거롭기만 하다. 우리는 몇 달 전만 해도 그 집에서 살았고 결코 행복했다고 할 수 없는 그 시절이었지만 뜰이 있고 개도 있고 꽃도 피고 가족들도 많았던 그 시절엔 생활의 리듬이 있었다. 그런데 모든 사랑의 대상들이 차례차례 나에게서 떨어져나갔고 나는 노모와 함께 이 아파트 신세를 질 수밖에 없었다.

 그 후둑후둑 맥박이 뛰듯한 희비극이 소용돌이치던 서교동 생활을 청산하고 보니 이곳은 외부의 냉냉하고 시끄러운 소음 속에서도 너무나도 고요하기만 하다. 또 대인 공포증으로 사람이 싫어진 나로서는 안성맞춤의 환경 속에 들어앉아 버려 다행한 일인지 모르나 한편 서글퍼진다.

강변도로를 연해 솟은 도신의 현대식 건물들, 그리고 멀리 엷은 빛으로 펼쳐진 산들은 한 폭의 수묵화를 보는 듯하다.

 강변로에는 쉴 사이 없이 움직이는 자동차의 행렬이 있다. 어디에서 시작해서 어디로 가는 버스요 승용차들일까. 그 사이에 또 어디서 오고 있는지 하얀 전동차가 평화롭게 지나간다. 유선형으로 된 머리부분과 까만 점 같은 차창들이 꼭 누에같이 생겼다.

윤회 전생한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보이지는 않지만 각기 정해진 칸에 수용되어 저런 열차를 타고 언젠가는 종점에 닿아 일생을 마치는 것이 아닌지.

우등열차에 오른 인생, 그리고 정감서린 좋은 동승자들과 어울려 앉은 요행의 인생은 보다 쾌적한 여행을 할 수 있을 것이고 그 반대의 경우는 신고(辛苦)끝에 좌절되고 더러는 이겨내서 그 체험 때문에 깊고 완숙된 정신적 승리자가 될 것이다.

나는 어떤 열차를 탔을까, 가슴에 손을 얹어 생각해본다. 전자도 후자도 아닌 퍽 어정쩡한 완행열차를 타고 있고 어느덧 종점이 다가오는 시간을 달리고 있는 것만 같다. 그 짧다면 아쉽고 길다면 어차피 지나가 버린 사연들은 다시 붙잡고 싶지도 않는 미련 없는 과거일 뿐 이상하게도 담담한 기분이다.

그러나 ‘나’ 어떡하란 말인가. 무척이나 보고 싶은 얼굴들을 많이 잃었었다. 나는 사람은 죽으면 저승에 머무르는 동안 사랑하는 혈육이나 보고 싶은 얼굴을 만날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어느 학자 점술가의 말에 의하면 팔만대장경에 쓰여 있는 구절인데  저승의 시간대가 어떤 것인지는 몰라도 오백 년이 걸려도 만날까 말까라고 쓰여 있다고 했다. 정말 어떡하란 말인가…

궂은 일, 때로는 좋은 일들로 수다한 사연들을 안고 후려치는 바람막이 하느라 정신 차릴 수 없던 사이에 세월은 흘러갔고 살아 있는 혈육들마저도 뿔뿔이 너무나 먼 곳으로 흩어져 나가 있는 고독을 새삼스럽게 의식하게 된다. 저렇게 바라다 보이는 강 건너 수묵화같이 희미하게 보인 곳으로 말이다.

내가 타고 있는 인생열차의 칸에는 낯 설은 타인들로 꽉 차 있는 것만 같다. 그 속에서 내가 먼저 콜라나 담배를 권하며 친해 보려고 말 붙임 해 보려는 외로움…

그런데 어느 간이역에 열차가 잠시 멈췄을 때, 남자인지 여자인지 아들인지 딸인지 누군가 다른 칸에서 뭣을 들고 나를 향해 다가오더니 ‘엄마, 도시락 먹어. 엄마가 이 기차에 탄줄 몰랐네. 나는 쩌어기 앞칸에 타고 있었는데..’

나는 운명적으로 함께 나란히 앉은 든든한 자식은 없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비록 칸은 달라도 같은 방향을 가고 있는 자식 하나가 꼭 있다고 믿고 있다.

창 밖 저어 아래서 강변의 버들가지가 바람에 하늘거린다.

오늘따라 유난히 친근감이 더 느껴지는 버드나무, 내 친구.

아무튼 종착역까지 가는 시간까지 끈질기게 일하고 먼 후세에까지 평화롭게 누에 같은 자동차가 달리고 있을 수 있는 복된 세상이 무궁하게 지속되길 빈다.

요즈음 와서는 금요일이 기다려진다. 금요일 다음엔 토요일이 오기 때문이다.

금요일엔 장에 가서 이것 저것 골라 찬거리를 사온다. 토요일에는 기다려지는 혈육이 오기 때문이다. 며느리가 손자놈을 데리고 오면 나는 그놈을 안고 강 위를 훨훨 나르는 하얀 물세를 보여 준다.

무척 신난다는 표정의 그를 볼 때마다 ‘대부’의 돈 클레오네가 만년에 뜰에서 손자와 놀고 있는 장면이 떠올라 한없이 애수에 잠기기도 한다.

토요일엔 또 군복무가 얼마 남지 않은 막내가 오는 날이다. 그리고 일요일엔 부대로 돌아가 버린다. 워낙 친구들을 좋아해 불려나가 버리니 무정하게도 나와 대화를 나눌 시간은 거의 없지만 그래도 나는 그를 기다린다.

노모는 아침을 들지 않고 나는 저녁을 먹지 않기 때문에 서로 시간대가 뒤틀려 우리 식구들이 함께 식탁에 앉아 보기는 거의 없는 생활이다. 결국 제각기 혼자서 밥상을 받게 된다. 우리 집의 가정적인 고독은 여기에 그 근원이 있는 것 같다.

일각일각, 목각에다 칼집을 하듯 시간은 깎여 내려가는데 나는 커튼을 걷어 창 밖 경치를 바라본다. 휘황찬란한 강북(江北) 불빛 그림자가 물에 비치지 않는 것은 추위에 한강이 꽁꽁 언 탓인가 보다.

멀리 줄이어 달리는 자동차 불빛은 호박넝쿨 위를 나르는 뽀얀 반딧불같이 아름답다. 나는 이곳에서 사는 동안 무엇이든지 아름답게 나름대로 느끼며 답답하면 춘하추동 변하는 강물, 눈 오고 비 오고 때때로 안개 자욱한 강변풍경을 바라보면서 생업에 미쳐 살  길밖에 없다.

칠흙 같은 하늘에서 눈보라가 휘날리기 시작한다.

나는 갑자기 에밀리 브론테처럼 의젓한 자세로  창 밖을 응시한다.

브론테의 시야엔 공동묘지와 멀리 은백색으로 펼쳐진 폭풍의 언덕이 보였을 것이다.

내 시야엔 역시 어둠과 하얀 눈이 엉켜 은회색 하늘과 닿아 버린듯한 강건너 도시의 뿌우연 불빛 띠가 그지없이 묘하게 보인다. 눈 아래 강변로를 끊임없이 달리는 자동차 불빛 띠 역시 희한하다.

이런 상황은 나를 에밀리 브론테로 만들고 어떤 시대가 돼도 상관없는 어느 성주의 미망인으로도 만들어 버린다.

환상은 꼬리를 물어 먼 태고와 미지의 미래세계에서나 볼 수 있는 꿈같은 풍물이 보이는 듯해 앞으로의 작품을 위해 찰칵찰칵 가슴 속에 든 사진기 셔터를 눌러재킨다.

하염없는 환상을 깨듯, 어머니 방, 텔레비젼에서 흘러간 가수가 부르는 노래 ‘아, 아, 아 황혼의 엘~레~지…. ‘가 새어 나오고 있다.

 

 

** 지금도 ‘필사 筆寫’ 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나의 가정이며 종교

인간상실

神 은 어디에

人間無情

母系家族

눈 뒤에 비

斷想 十一題

고향의 음식물

삼촌

묵은 편지

고향의 비

기념사진

 

 

제2장 엄마의 자장가

 

산을 바라보는 마음

恨 은 보라빛

자살환상

고독의 날개

아버지와 고독

엄마의 자장가

분홍꽃의 추억

화려한 슬픔

잊혀지지 않는 로크

잃어 버린 결혼식

 

 

제3장 소녀시절의 추억

소박한 한 아름의 꽃처럼

신기루같은 희망이

눈썹

계단

낙인

눈물

얼룩이

메리의 죽음

소녀시절의 추억

제2의 사춘기

추위의 낭만

딱딱이 소리

현실의 가치

감각의 형체

 

 

제4장 나와 장미

招雨

라일락

앵두꽃

우담화

相思草

무궁화

 

 

5월

 

라일락이 향기를 잃어 버린 밤이다. 장미가 부풀었던 가슴을 헤치고 이제 요염한 자세를 일으키는지 화사한 날개로 숨소리를 덮는 듯 짓눌러 오는 밤, 내 심장의 고동이 어둠 속에서 이따금 날개를 터는 십자매(十姉妹)의 동작과 더불어 호수의 파동처럼 주름을 잡는다.

고요하고 화려한 환상도 무너지고 시든 라일락의 영혼마저 증발하는 것 같은 쓸쓸한 5월의 밤이다.

이렇듯 식물성(植物性)의 생명들이 시들어 가고 또 새로운 생명을 노래도 하고…

5월의 생리(生理)는 슬픔과 환희를 한꺼번에 쏟아 놓는다. 이 밤도 가고픈 옛날의 논두렁 길에선 개구리들이 녹색의 소리로 울어대고 있을 것인데 덧없는 인생이 취한 내 가슴엔 이슬 같은 것이 괴고 있다.

5월은 인생에서 어떤 피하지 못할 인과(因果)를 지어 주는 것 같다. 지열(地熱)에 익은 포플라가 상기한 풋냄새를 피우고 태양의 직사(直射)를 받아 떨어뜨린 선명한 그림자에 바람이 깃들면 5월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도 흔들리기 마련이다. 알지 못할 5월의 회화(會話)에 귀를 기울이고 풀지 못할 인과에 마음을 태워야 한다.

나는 5월이 오면 옛날의 추억을 더듬어야 했고, 내일을 위해서 화필(畵筆)을 들어야 했다.

5월을 불러 누구나 다 아름답다고 한다. 꽃들이 그 아름다운 자태를 견주는 것도 5월이요, 신록들이 바람에 하늘거리는 것도 5월이고 보면 5월의 자연은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들은 여인들의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했는지, 그리고 눈물도 얼마나 괴이게 했는지 모른다.

옛날 젊은 시절 어느 5월에 나는 여인네들끼리 가족적으로 들놀이를 가는데 권함을 받아 바람을 쐬러 따라간 일이 있었다. 지금 같으면 소풍을 갔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 무렵 나는 인생의 시련 같은 것을 단단히 믿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어떤 인연의 줄기가 나의 운명 앞으로 뻗어왔다는 것도 알 수가 있었다. 쉽게 말하자면 나는 사랑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인네들 가운데는 인텔리 오뎅집 마담 형제 일행과 인생면에서 나와 비슷한 환경의 직업 여성인 Y양도 나처럼 ‘옵서버’ 격으로 얼굴을 내놓고 있었다.

나무 위로 무척이나 왕개미 떼가 올라가는 송림(松林)의 구릉(丘陵)이 목적지었던가 그들과 나는 거기에 올라가서 잡초가 무성한 어느 무덤 위에 앉았었다.

화제는 어느덧 막연한 사랑 이야기로부터 시작하여 나중엔 두 여인이 서로 제각기 자기가 사모한다는 것보다 상대의 이성(異性)이 자기를 사모하여 늘 전화가 걸려온다는 등 아베크 하기에 여념이 없었다는 등의 이야기에 꽃을 피우고 있었다. 이야기라기보다 자기 자랑을 하는 것으로 그들의 표정은 해당화처럼 활짝 피어 있는 것이었다. 여인들이 이야기에 꽃을 피우고 있던 상대방 주인공은 아마도 동일한 남성인 것 같았고 Y양의 것이 농도가 더 짙은 모양이었다.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뒤로 구릉을 내려와 논두렁에서 와글거리는 개구리를 수십 마리 잡아서 손수건에 싸 들었다.

그 후 그 개구리들은 나의 화재로서 희생이 되었지만 나는 지금도 그 여인네들의 대화가 잊혀지지 않고, 그때의 감정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 얘기의 주인공은 나의 애인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때 개구리에 대해서 나의 슬픔을 호소(呼訴)하고 싶지는 아니했지만 개구리들의 녹색의 울음 소리가 나의 심경을 한결 더 구슬프게 울려 주었다. 나는 어쩐지 5월이 오면 개구리의 울음 소리와 함께 마음이 설렌다.

그러나 나는 이 밤에 시든 라일락의 향기를 슬퍼만 할 수는 없다.

내일 아침이면 화사하게 피어났을 장미의 붉은 정열과 견주기 위해서 이 밤이 있게 해야 하는 것이다.

 

** 지금도 ‘필사 筆寫’ 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소쩍새

나와 장미

여름밤의 환상

한여름의 뒤안길에서

또 여름은 가고

뜸부기 우는 계절

9월

가을인가요

황후가 되어보는 가을

 

 

제5장 어차피 인생은 여행

 

자화상

나의 화실

여인 소묘

외로운 畵想

생명을 확인하는 색

고갱과 타히티

만종의 추억

어린 꿈

양지의 꿈

슬픔처럼 피어오는 아름다움

강물에 흐르는 초현실의 빛

환각의 피서

어차피 인생은 여행

나의 인생 노트

 

 

** 지금도 ‘필사 筆寫’ 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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