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eld of dreams, trancending time & place, autobio in progress..

 

사랑이 깊으면 외로움도 깊어라 – 천경자

한국의 대표적 여류화가 千鏡子의 사랑과 소망의 에세이집

 

 

 

 

千鏡子

1924년 전남 고흥에서 출생.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 졸업. 1942년 선전(鮮展)으로 데뷰. 1955년 대한미협전에서 대통령상 수상. 문교부 문예상 본상, 서울특별시 문화상, 예술원상, 3-1 문화상 등 수상. 1963, 65년 동경에서 개인전, 1970년 남태평양 풍물전, 1973년 현대화랑 초대전, 74년 아프리카 풍물전, 79년 인도 중남미 풍물전 등을 가짐. 국전초대작가, 홍익대학교 미술대 교수와 국전심사위원 등을 지냈으며, 현재 예술원 회원이다. 작품으로는 <生態>외 1천여점. 저서는 <유성이 가는 곳> <언덕위의 양옥집> <한>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 등이 있다.

1986년 3월 10일 중판발행

자유문학사

 

괌 島 (1983)

오호츠크 海 (1983)

北海道 (1983)

待春 (1978)

6월의 신부 (1977)

신기루 (1977)

멀리서 온 여인 (1977)

괌 島 (1983)

 

千鏡子 대표 에세이

사랑이 깊으면 외로움도 깊어라

 

 

차례

 

제1장 서울 엘레지

화폭에 봄은 오는데

서울의 엘레지

어머니는 나의 가정이며 종교

인간상실

神 은 어디에

人間無情

母系家族

눈 뒤에 비

斷想 十一題

고향의 음식물

삼촌

묵은 편지

고향의 비

기념사진

 

제2장 엄마의 자장가

산을 바라보는 마음

恨 은 보라빛

자살환상

고독의 날개

아버지와 고독

엄마의 자장가

분홍꽃의 추억

화려한 슬픔

잊혀지지 않는 로크

잃어 버린 결혼식

 

제3장 소녀시절의 추억

소박한 한 아름의 꽃처럼

신기루같은 희망이

눈썹

계단

낙인

눈물

얼룩이

메리의 죽음

소녀시절의 추억

제2의 사춘기

추위의 낭만

딱딱이 소리

현실의 가치

감각의 형체

 

제4장 나와 장미

招雨

라일락

앵두꽃

우담화

相思草

무궁화

5월

소쩍새

나와 장미

여름밤의 환상

한여름의 뒤안길에서

또 여름은 가고

뜸부기 우는 계절

9월

가을인가요

황후가 되어보는 가을

 

제5장 어차피 인생은 여행

자화상

나의 화실

여인 소묘

외로운 畵想

생명을 확인하는 색

고갱과 타히티

만종의 추억

어린 꿈

양지의 꿈

슬픔처럼 피어오는 아름다움

강물에 흐르는 초현실의 빛

환각의 피서

어차피 인생은 여행

나의 인생 노트

 

 

제1장

 

화폭에 봄은 오는데

검은 감 잎 사이에서 풋 감들이 졸고 있는 바람 한 점 없이 정숙한 여름 밤에 봉창을 뚫고 들려오는 이웃집 영감님의 쿨룩쿨룩 기침 소리에 나는 가을을 느끼고 ‘아, 가을인가요’ 했다.

기침의 음색엔 분명히 가을빛이 섞이기도 했지만 무작정 세월만 가면 좋은 일 생기리라 기대하며 살았던 그 무렵이라 성급히 한여름에 가을을 느끼려고 나는 애썼고 어쩌다 뚝 떨어지는 포플러의 황엽(黃葉)만 보아도 가을이 온다고 반겼던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 숱한 세월이 흘러가 버렸다.

세월을 재촉하던 심사는 겨울의 문턱에 들어서기만 해도 뭔지 온통 누루한 녹색이 펼쳐지는 듯 빛깔이 보이기 시작하는 듯해 “아, 봄인가요” 했던 것이지만 나이를 더 먹어갈수록 어떤 기대나 희망은 차차 무뎌지고 석탄질화(石炭質化) 되어 가는 모양인지 그렇게 서둘렀던 감각이 이제는 정반대로 돌아가 버렸다.

3월로 접어든 엊그제, 별안간 눅은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바깥 경치를 보고 “아, 아직은 겨울이다” 하면서 조금은 남아 있을 성싶은 환절(換節)의 말미에 나는 부질없이 안심을 하고 있었다.

아네모네에 아이리스, 비닐봉지에 싸여 남불(南佛)에서 올라온 노란 솜뭉치 같은 미모사와 탁자 위에 그레이프 프루트 쥬스잔을 놓고 파리에서 맞이했던 조춘(早春)도 좋았지만 시골 논두렁 습지(濕地)에 파릇파릇 미나리 돋아나고 양광(陽光)이 부신 포구(浦口) 뱃전 가의 봄도 절묘했다.

봄은 정녕 사람을 미치게 하는가. 실성한 처녀가 속옷바람으로 뛰쳐나왔는데 지나가던 늙은 지게꾼이 “그랄만도 하제잉, 새큼새큼 하니 봄잉께 잉, 쯔쯔쯔” 혀 차던 고향의 봄을 잊을 수가 없다.

집밖으로 뛰쳐나와야 직성이 풀리는가, 미친 총각 미친 처녀가 유난히도 눈에 많이 띄었던 고향의 봄이었다.

약간 높은 지대에 있는 우리 집에서 환히 내려다보인 부잣집의 돌담 길을 느닷없이 ‘이힛’ 힘을 주고 잘 뛰어가던 평순이라는 미친 총간은 홀어머니와 살고 있었다. 씨름꾼같이 우람한 몸집의 평순이가 뜀박질치는 바람에 놀란 무릅 장수의 각시…

무릅을 캐서 진하게 고면 당분이 우러나 떫은 무릅잼이 되어 과자가 귀한 그 시대의 아이들은 먹고 싶어했다.

이중선(李中仙: 李花中仙의 여동생)의 창(唱)빛보다 더 고운 ‘물곳 사시요오…’ 외치는 각시의 목청이 봄 하늘에 퍼지자 절름발이 엿장수 아저씨가 엿판 팽개친 채 가위소릴 멈추고 목청에 흘린 듯 넋 나간 꼴로 서 있던 광경이 눈에 선하다.

 보리고개 때 신파(新派)로 <그 여자의 일생> <유랑 3천리> 를 펼쳐 읍 사람들을 울려놓고 떠나 버린 유랑악극단. 뭐가 그리 아쉽고 서운했던 것인지 선량한 건달패들 가슴 흔들어놓아 바람기 잘 줄 모르고 읍내가 우수(憂愁)에 흠뻑 젖었던 봄이었다.

그럴 때 우리 뒷집 초가에 또 한 사람의 미친 노총각이 살아 봄비에 날 궂으면 뭘 그리도 시부렁거리는지…

내 가슴 속에 커다란 감상(감상)의 주머니 하나가 붙어 있어 뭔가 주워 담아도 차지 않고 아쉽기만 한 풍토병은 그 무렵부터 생긴 것인지 오늘날까지 낫지 않고 때때로 앓고 있는 형편이다.

계절은 바야흐로 봄이지만 세월을 붙잡고만 있고 싶은 심정에서인지 아직 나는 봄의 전령을 듣지 못하고 있다. 요즘은 사시사철 아무데서나 볼 수 있는 수박과 토마토, 달래, 상치 향기 없는 꽃들은 시각 미각 할 것 없이 계절 감각을 마비시켜 버렸고 인간을 점점 말초적 감각만 남게 해 가고 있는 것 같다.

나는 호텔의 로비나 레스토랑, 승용차에서 주로 그 양식인간(養殖人間)을 발견하게 되지만 그 영양도(營養度)나 말투 차림새에서 금방 ‘자연’과 ‘양식’을 구별할 수 있는 것 같다. 그러니까 자기가 피나게 노력해서 터전을 마련하지 않고 무풍지대에서 서식한 덤덤한 인간을 일컬어 양식인간이라 부르고 싶다.

요즈음 굳이 봄기운을 찾아 본다면 도시락에서 찾을 수 있다. 그래서 나의 봄은 도시락에서부터 온다.

납작한 알루미늄 그릇 뚜껑에 약간 눌린 밥, 한쪽 그릇에다 콩자반, 풀치무침, 김무침, 삶은 계란, 장아찌 등을 고루 담아 나무젓가락과 함께 보자기에 사 두었다가 점심시간에 풀어서 더운 보리차를 마시며 먹을 때 비로소 야릇한 봄을 느끼기 시작한다.

나에게 다분히 또순이 근성이 도사리고 있지 않나 생각해 보기도 하지만 하루 세끼를 다 도시락을 먹고 산다 해도 질리지 않을 것만 같고 도시락의 서러운 향수는 가슴 속의 빈 주머니에도 뭔가를 채워 주는 듯하다.

나는 화실에서 도시락을 펴고 흘러간 노래를 듣고 좋은 시집이며 화집을 뒤적인다. 그것들을 듣고 읽고 보면서 인생의 진리를 느끼고 영원한 청춘을 찾는 듯해 시간과 세월에 대한 부질없는 초조감에서 잠시나마 헤어나는 것이다.

고호, 고갱 다 좋지만 보티첼리의 ‘봄’ 시리즈 중 ‘봄의 탄생’을 제일 좋아한다. 피렌체의 놀진 숲 속 비너스를 중심으로 좌측엔 삼미신(三美神)과 마르스, 우측에 봄의 여신, 꽃의 여신, 바람의 신(神)을 곁들인 아름다운 그림이다. 그 중에서도 꽃의 여신(女神)에서는 어떤 신비스러운 매력을 느낀다.

쏘는 듯 강렬한 여신의 눈초리와 웃는지 우는지 모호한 웃음, 현대의 히피를 연상케 하는 차림새에 앙긴 꽃들이 아름답다. 모델은 피렌체의 모든 사람들의 애도 속에 젊은 나이로 죽은 매디치가의 공주 시모네타를 보티첼리가 추상하면서 그린 작품이라고 한다. 이 대작은 현재 피렌체의 위지미술관에 걸작 ‘비너스의 탄생’과 함께 걸려 있다.

나는 15년 전 12월 께부터 파리에서 봄을 맞는 듯한 기분에 들떠 있으면서 유화로 아네모네, 아이리스, 미모사의 정물을 그리고 1월 달에 홀로 이태리 여행길에 올랐었다.

그러나 시모니타의 혼을 깃들이게 한 보티첼리의 꽃의 여신은 마냥 즐거웠고 숨으로 들이키는 공기가 그토록 맛이 있을 수 없었다. 좋은 작품을 볼 때마다 나는 그 완성의 바닥에 깔린 모체가 분명히 슬픔이요, 견딜 수 없는 외로움이요, 가난이라고 다시 확인하는 것이었다.

그 ‘완성을 위한 고통’을 확인하면서 ‘양식’아닌 ‘자연’을 느꼈다.

봄은 소생하는 계절이고 따스함이 감사 주는 계절이지만 한편 우수와 절망과 상실의 계절이기도 하다. 지난해 이 맘때 사랑했던 개 꽃순이을 잃어 남쪽 야산에 묻었고 30여 년 전 초 봄에도 사랑하는 여동생의 재를 강물에 뿌렸었다. 나는 죽은 그녀들이 살아 있을 때 문득 시모네타의 전생(轉生)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때가 있었다.

 

서울의 엘레지

거리의 체증을 뚫고 택시가 어렵게 3호 터널을 빠져 나오자 남 서울의 풍경이 환히 펼쳐지기 시작했다. 후유 – 한숨이 터진다. 거대한 라이터가 무수히 치솟은 듯한 고층아파트들의 원경은 흡사 뉴욕의 허드슨 강에서 바라보는 한쪽 도시를 연상시켜 준다. 서울이 이토록 발전한 데에 경탄은 하지만 한편 메마르고 살벌한 시야에서 막연한 불안감마저 느낀다.

창 밖을 스치는 실버들 가로수를 보며 시각을 통해서나마 쩍쩍 금이 간 가슴에다 촉촉한 푸르름을 흡수해 보려고 깊은 호흡을 하는 것도 일상사가 되어 버렸다. 그래도 차가 한강다리를 달릴 때의 기분은 잠시나마 상쾌하다. 그 지점에서 나는 동남쪽 강변에 솟은 반원형의 고층건물을 유심히 바라본다. 우리 가정이 있기 때문이다. 그 가정이라는 따스함도 고령의 노모가 살아 계실 동안만 지속된다는 걸 알고 있고 언젠가는 다가올 엄숙한 붕괴만이 남아 있을 것이다.  차창에서 보이는 그 아파트는 고대 로마시대에 기공되어 지금은 허물어져 동그랗게 반원형만 남아 있는 콜로세오를 방불케 했다.

영화 <쿼바디스>에서 생사를 걸고 장절한 검투를 벌였던 검사(劍士)의 모습들마저 상기되어왔다.  한 인간이 두뇌와 붓을 쥐고 오른팔 하나로 살아가는 생(生) 역시 검사와 다를 것 없이 처절하고 또한 스릴과 쾌락이 있다.

띵똥, 초인종 소리에 문 열어 주는 가족이 있고 비로소 아늑한 우리 집의 작은 세계가 얼어붙은 가슴을 녹여 준다. 미완성 화판에 그려진 사람들과 뭇 생물들, 그 친구들이 나를 외롭지 않게 맞아 주고 어머니의 신음에 가까운 숨소리가 쇤 기침소리까지 고소한 누룽지 같은 정감이 되어 나를 살게 해 주는 값진 생명수가 되어 준다. 그러나 우리 모녀는 사소한 일, 전라도 사투리로 꼬막(고막) 껍질로 하나도 못 되는 일들로 잘 다투며 살아왔고 지금도 여전하다.

어쨌든 추운 겨울날 폭풍우 속을 헤매다가 아늑한 찻집을 발견한다거나 밤중에 타기 힘든 빈 택시를 만난듯한 안도감 같은 것이랄까 촛불 같은 광명과 훈훈한 온기가 있다. 태어나서 오랜 세월을 나는 태반에서 탯줄을 빨듯 살아왔고 지금도 그렇게 묘한 인생이다. 젊은 시절에 해결할 수 없던 인생의 고통이랄 지 일해도 일을 해도 넉넉지 못했던 살림살이가 지겨워 무척이나 더디게 가는 것 같은 시간을 원망할 때도 있었지만 그런데 어느새 세월은 흘러, 지금 이 나이가 되어버린 자신을 돌이켜 볼 때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처음 어머니가 요안나로 세례를 받던 날의 기념사진을 보면 장미꽃 조화뭉치가 달린 면사포를 두른 어머니의 표정은 어색했던 때문인지 수줍은 표정이었지만 참 아름다웠다. 그분의 회갑이나 또 고희(古稀)조차 이런저런 이유로 충분한 잔치를 못해 드렸다. 고인이 된 명창 박초월씨를 초청하여 기쁘게 해드리고 싶었는데….

5월의 창경원의 푸르름, 나뭇잎만 보아도 쪼르륵 엽록소가 오관에 흡수되어와 뭇 작품에의 구상이 떠올랐지만 미숙해서 충분히 소화를 하지 못해 아쉬웠다.

그런데 지금 막 자신이 생길 만 하니까 나는 살아온 과거보다 훨씬 짧은 시간을 상아야 하는 소위 인생을 관조하는 나이가 되어 버린 것이다. 나는 옛날과 변함이 없는데 남들이 그렇게들 봐 주고 있는 것 같다.

정말 인생이란 번개같다.

지금 이 시점에서 생각해 볼 때 나의 지나친 생업에의 집념 때문에 역설일는지 모르지만 어떤 때는 차라리 평범한 촌부로 태어났으면 싶은 때도 있다. 어중간히 풍부한 감성의 소용돌이가 거추장스럽게 때문이다.  운명론자는 아니지만 젊은 시절에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 <노틀담의 꼽추> 를 읽고 그의 비극적 운명을 테마로 한 사상에 감명을 받았고 지금도 그렇다. 영혼은 반드시 있고 그 어느 영혼이 누구의 모체엔가 들어가 혈육이 되지 않는가 싶다. 결국 윤회전생설(輪廻轉生說)을 긍정하는 뜻이 되겠지만 한 세상 살다 보면 반드시 악연선연(惡緣善緣)이 있고 설령 상대가 좋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인연이 없으면 악연이 될 수도 있어 전생래세(前生來世)에까지 어려운 문제로 뻗쳐지게 되지만 살아오다 보니까 인연설에 한해서만은 인생에 절대성을 지니고 있다는 걸 환상이 아닌 실감으로 느끼게 될 때가 많았었다.

나는 둘째 딸을 참 아기자기 예쁘게 길렀다. 지금은 멀리 떨어져 사는 그는 어려서부터 나의 그림 모델이 되어 주기도 했다.

그가 스무 살이 넘고 스물네 살이 되던 해에 나는 공연히 안절부절 불안했고 스물다섯 살이 되자 비로소 마음이 놓이던 이유는 일란성 쌍동녀 같았던 여동생이 그 스물넷에 죽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너무나도 사랑했기에 생전에 다정했던 여동생의 외로운 영혼이 나의 모체에 들려 전생한 것이 아닐까 했던 부질없는 기우 때문이었다.

그 이전 나의 소위 세계일주 스케치 여행 때 나는 마지막으로 이태리의 피렌체에 들려 위지미술관에서 보티첼리의 <뷔너스의 탄생>등 작품을 보고 참 행복했었다.

또 그의 대표작인 <봄의 탄생>은 내가 좋아하는 그림 중의 하나였다. 맨 앞에 현세의 히피같이 꽃에 둘러싸인 모습의 신비로운 미소를 띄운 주인공 같은 여자에게 반했었다. 훗날 책에서 읽고 안 일이지만 그 모델의 주인공은 시모네타라는 이름의 당시 성주의 딸이었다는데 일찍 죽었다고 했다. 나는 또 전생의 여동생 문제가 해결되다 보니까 딸이 시모네타의 전생이 아닌가 하고 막연한 불안을 느끼기까지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나의 지나친 사랑에서 해방된 그녀는 미국에서 잘 살고 있다. 딸과 나와의 인연이 끊기다시피 되어 어떤 동화에 나오는 마술사에게 어린 딸을 빼앗긴 것 같아 시모네타의 환상이 현실화 되었음이나 다름이 없다. 그러나 죽지 않고 잘 살고 있으니 다행이다.

지금 이 순간 눈을 감지 않는데도 내 방에 있는 뭇 사물과 함께 노오란 기생(妓生) 코스모스라든가 썬세트(노을빛 코스모스), 라이락, 호박잎, 몇 그루의 상록수들 사이로 우리 개 꽃순이가 뛰어 놀던 서교동 집뜰 정경이 오버랩 해와 좁은 시야가 무척 번거롭기만 하다. 우리는 몇 달 전만 해도 그 집에서 살았고 결코 행복했다고 할 수 없는 그 시절이었지만 뜰이 있고 개도 있고 꽃도 피고 가족들도 많았던 그 시절엔 생활의 리듬이 있었다. 그런데 모든 사랑의 대상들이 차례차례 나에게서 떨어져나갔고 나는 노모와 함께 이 아파트 신세를 질 수밖에 없었다.

 그 후둑후둑 맥박이 뛰듯한 희비극이 소용돌이치던 서교동 생활을 청산하고 보니 이곳은 외부의 냉냉하고 시끄러운 소음 속에서도 너무나도 고요하기만 하다. 또 대인 공포증으로 사람이 싫어진 나로서는 안성맞춤의 환경 속에 들어앉아 버려 다행한 일인지 모르나 한편 서글퍼진다.

강변도로를 연해 솟은 도신의 현대식 건물들, 그리고 멀리 엷은 빛으로 펼쳐진 산들은 한 폭의 수묵화를 보는 듯하다.

 강변로에는 쉴 사이 없이 움직이는 자동차의 행렬이 있다. 어디에서 시작해서 어디로 가는 버스요 승용차들일까. 그 사이에 또 어디서 오고 있는지 하얀 전동차가 평화롭게 지나간다. 유선형으로 된 머리부분과 까만 점 같은 차창들이 꼭 누에같이 생겼다.

윤회 전생한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보이지는 않지만 각기 정해진 칸에 수용되어 저런 열차를 타고 언젠가는 종점에 닿아 일생을 마치는 것이 아닌지.

우등열차에 오른 인생, 그리고 정감서린 좋은 동승자들과 어울려 앉은 요행의 인생은 보다 쾌적한 여행을 할 수 있을 것이고 그 반대의 경우는 신고(辛苦)끝에 좌절되고 더러는 이겨내서 그 체험 때문에 깊고 완숙된 정신적 승리자가 될 것이다.

나는 어떤 열차를 탔을까, 가슴에 손을 얹어 생각해본다. 전자도 후자도 아닌 퍽 어정쩡한 완행열차를 타고 있고 어느덧 종점이 다가오는 시간을 달리고 있는 것만 같다. 그 짧다면 아쉽고 길다면 어차피 지나가 버린 사연들은 다시 붙잡고 싶지도 않는 미련 없는 과거일 뿐 이상하게도 담담한 기분이다.

그러나 ‘나’ 어떡하란 말인가. 무척이나 보고 싶은 얼굴들을 많이 잃었었다. 나는 사람은 죽으면 저승에 머무르는 동안 사랑하는 혈육이나 보고 싶은 얼굴을 만날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어느 학자 점술가의 말에 의하면 팔만대장경에 쓰여 있는 구절인데  저승의 시간대가 어떤 것인지는 몰라도 오백 년이 걸려도 만날까 말까라고 쓰여 있다고 했다. 정말 어떡하란 말인가…

궂은 일, 때로는 좋은 일들로 수다한 사연들을 안고 후려치는 바람막이 하느라 정신 차릴 수 없던 사이에 세월은 흘러갔고 살아 있는 혈육들마저도 뿔뿔이 너무나 먼 곳으로 흩어져 나가 있는 고독을 새삼스럽게 의식하게 된다. 저렇게 바라다 보이는 강 건너 수묵화같이 희미하게 보인 곳으로 말이다.

내가 타고 있는 인생열차의 칸에는 낯 설은 타인들로 꽉 차 있는 것만 같다. 그 속에서 내가 먼저 콜라나 담배를 권하며 친해 보려고 말 붙임 해 보려는 외로움…

그런데 어느 간이역에 열차가 잠시 멈췄을 때, 남자인지 여자인지 아들인지 딸인지 누군가 다른 칸에서 뭣을 들고 나를 향해 다가오더니 ‘엄마, 도시락 먹어. 엄마가 이 기차에 탄줄 몰랐네. 나는 쩌어기 앞칸에 타고 있었는데..’

나는 운명적으로 함께 나란히 앉은 든든한 자식은 없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비록 칸은 달라도 같은 방향을 가고 있는 자식 하나가 꼭 있다고 믿고 있다.

창 밖 저어 아래서 강변의 버들가지가 바람에 하늘거린다.

오늘따라 유난히 친근감이 더 느껴지는 버드나무, 내 친구.

아무튼 종착역까지 가는 시간까지 끈질기게 일하고 먼 후세에까지 평화롭게 누에 같은 자동차가 달리고 있을 수 있는 복된 세상이 무궁하게 지속되길 빈다.

요즈음 와서는 금요일이 기다려진다. 금요일 다음엔 토요일이 오기 때문이다.

금요일엔 장에 가서 이것 저것 골라 찬거리를 사온다. 토요일에는 기다려지는 혈육이 오기 때문이다. 며느리가 손자놈을 데리고 오면 나는 그놈을 안고 강 위를 훨훨 나르는 하얀 물세를 보여 준다.

무척 신난다는 표정의 그를 볼 때마다 ‘대부’의 돈 클레오네가 만년에 뜰에서 손자와 놀고 있는 장면이 떠올라 한없이 애수에 잠기기도 한다.

토요일엔 또 군복무가 얼마 남지 않은 막내가 오는 날이다. 그리고 일요일엔 부대로 돌아가 버린다. 워낙 친구들을 좋아해 불려나가 버리니 무정하게도 나와 대화를 나눌 시간은 거의 없지만 그래도 나는 그를 기다린다.

노모는 아침을 들지 않고 나는 저녁을 먹지 않기 때문에 서로 시간대가 뒤틀려 우리 식구들이 함께 식탁에 앉아 보기는 거의 없는 생활이다. 결국 제각기 혼자서 밥상을 받게 된다. 우리 집의 가정적인 고독은 여기에 그 근원이 있는 것 같다.

일각일각, 목각에다 칼집을 하듯 시간은 깎여 내려가는데 나는 커튼을 걷어 창 밖 경치를 바라본다. 휘황찬란한 강북(江北) 불빛 그림자가 물에 비치지 않는 것은 추위에 한강이 꽁꽁 언 탓인가 보다.

멀리 줄이어 달리는 자동차 불빛은 호박넝쿨 위를 나르는 뽀얀 반딧불같이 아름답다. 나는 이곳에서 사는 동안 무엇이든지 아름답게 나름대로 느끼며 답답하면 춘하추동 변하는 강물, 눈 오고 비 오고 때때로 안개 자욱한 강변풍경을 바라보면서 생업에 미쳐 살  길밖에 없다.

칠흙 같은 하늘에서 눈보라가 휘날리기 시작한다.

나는 갑자기 에밀리 브론테처럼 의젓한 자세로  창 밖을 응시한다.

브론테의 시야엔 공동묘지와 멀리 은백색으로 펼쳐진 폭풍의 언덕이 보였을 것이다.

내 시야엔 역시 어둠과 하얀 눈이 엉켜 은회색 하늘과 닿아 버린듯한 강건너 도시의 뿌우연 불빛 띠가 그지없이 묘하게 보인다. 눈 아래 강변로를 끊임없이 달리는 자동차 불빛 띠 역시 희한하다.

이런 상황은 나를 에밀리 브론테로 만들고 어떤 시대가 돼도 상관없는 어느 성주의 미망인으로도 만들어 버린다.

환상은 꼬리를 물어 먼 태고와 미지의 미래세계에서나 볼 수 있는 꿈같은 풍물이 보이는 듯해 앞으로의 작품을 위해 찰칵찰칵 가슴 속에 든 사진기 셔터를 눌러재킨다.

하염없는 환상을 깨듯, 어머니 방, 텔레비젼에서 흘러간 가수가 부르는 노래 ‘아, 아, 아 황혼의 엘~레~지…. ‘가 새어 나오고 있다.

 

어머니는 나의 가정이며 종교

당인리 발전소의 거대한 연통너머 하늘을 벌겋게 물들이고 해는 졌다.

동녘에서 떠오른 달은 북쪽으로 기울어간다. 오밤중인데 북창(北窓)이 환해 벌써 날이 샜는가 하고 내다보니 약간 축난듯한 만월(滿月)은 아직 남산(남산) 위로 가고 있다.

달도 서쪽으로만 간다는 게 내 관념이었는데 보는 각도에 따라 곡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4월이 오면 라일락이 피어 진한 향기가 집안에 진동했던 서교동 집에서 나는 꽤 오랜 세월을 보내다가 지난해 그 집이 팔려 우리는 강남 쪽 아파트로 이사를 왔다.

우리라고 했자 팔순의 노모와 단둘이다. 자식들이 하나 둘 성장하더니 각기 스스로의 길을 찾아 먼 곳으로 날아가 버렸고 언젠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면 세대주 나 혼자만 남게 되니 나는 가정 붕괴 직전의 싸늘한 상황에서 숨쉬고 있는 것이다.

  그 시절엔 라일락 그늘에서 개가 짖고 밥그릇 설거지 소리가 제법 요란하고 화려해 생활의 리듬이 있었다.

이렇게 많은 것이 바뀐 지금 남산에 걸려 있는 달을 바라보며 멀리 부에노스아이레스라든가 북해도의 어느 3류 호텔에서 눈을 붙이고 있는 듯한 착각을 하는데 그런대로 만족을 하고 있다. 예전부터 나는 일을 하다 말고 휑한 화실에서 그만 쓰러져 자 버리기 일쑤였다. 그리고 비몽사몽간에 가위에 눌린다. 웬일인지 서교동 시절엔 그것이 심했었다. 닫힌 방문이 저절로 활짝 열리고 혼이 구천세계(구천세계)를 날 때 들리는듯한 요음(요음)이 귓전에 울리더니 그리던 혈육의 모습이 머리 위에 우뚝 서 있는 것이었다.  나는 놀라 깨어났고 이어 헷 것을 보았구나 했다.

어느 날 이른 아침이었다.

“엄마아”

나는 누운 채로 창 너머 슬라브식 뒷집 베란다에 서 있는 여승을 보고 외쳤다.

중세기의 갈색 중 옷에다 하얀 차양이 달린 갈색 베일을 쓰고 염주를 들고 서 있는 여승은 분명히 30대의 우리 어머니의 얼굴이었다. 자애로운 쌍꺼풀 눈매는 나를 보고 있지 않고 우리 집을 보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무슨 조화인가 하고 눈을 찔끔 감았다가 다시 떠 보았는데 역시 환시(幻視)였다. 계단을 퉁퉁 내려가 안방에 들어가 보니 어머니는 푸우푸우 숨소리를 내고 잠들어 있었다. 그토록 선명했던 환시가 그 후 오래도록 마음에 걸렸지만 한 해가고 두 해가는 동안 불길한 생각은 시효가 지난 듯 차차 잊혀졌다.

계절이 겨울로 접어들자 안개가 자욱한 아침이 계속되는데 안개의 베일에 덮인 회색고층건물들 옥상의 돔 식 환풍기들은 바람개비가 되어 뱅뱅 돈다.

안개는 내가 UFO의 기지촌에 있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히게 하고 산소부족의 거실에 놓인 대나무 잎 같은 열대식물 화분이 마치 자화상처럼 느껴져 섬뜩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안개가 걷힌 밤에 북 창가에서 강북을 바라보면 멀리 하이야트 호텔의 네온이나 강 건너 외인(外人) 아파트의 불빛과 남산 전망 탑이 흡사 디즈니랜드를 방불케 하여 즐겁지만 옛날의 쇼크로 중심성결막염을 앓아 안경을 쓰지 않으면 불빛이 번져 보이는 까닭인지 모른다.

외출에서 집에 돌아오면 모진 추위에 어렵사리 택시 속에 들어 앉았을 때처럼 훈훈함을 느끼게 한다. 그것은 어머니가 살아 있다는 증명이기도 했다. 새벽에 일어나면 살며시 불을 켜고 어머니 방문부터 열어 보고 마음을 놓는다.

내 갓난아이 때 나를 재워놓고 자나 깨었나 살피시던 어머니처럼 말이다. 그 시절에 우리 아버지는 친구의 꾐에 빠져 양말 공장을 차렸다가 망해 어머니가 나를 안고 외가로 쫓겨가던 여객자동차에서 나는 몹시 보챘다고 한다. 어머니는 나를 달래느라 젖꼭지를 입에 물렸지만 젖은 나오지 않았었다. 한쪽 젖은 애려서 수술을 해 통보젖이 되었고 한쪽은 어느 여름날 밤 지네에 물려 커다란 흉터가 생겨 버렸었다. 그래서 나는 우유를 먹고 자랐다.

어머니가 조용한 숨소리로 아기처럼 잠들고 있는 아침, 곱빼기 커피잔을 놓고 담배를 피워 물고 오늘은 어디를 어떻게 그려갈 것인가, 세워진 화판을 바라보는 휴식 아닌 휴식시간이 그지없이 행복했다. 어느 날 갑자기 어머니가 지병인 기관지 천식으로 입원하게 되었다. 숨이 갤갤한 고령의 노인은 인정사정 없이 여러 가지 검사를 받고 의례적인 링게르(링거) 주사를 손등에 꽂은 채로 온몸이 부어 도리어 악화가 되어 버렸구나 하던 차 젊은 인턴이 보자 하기에 나는 그 인턴을 만났었다.

가슴 엑스레이에 희미한 솜털 같은 동그라미가 있으니 조직검사를 하지 않고는 확언은 할 수 없지만 폐암의 의심을 배제할 수가 없다. 암은 최후에 폐로 전이한다는 등, 청천에 벽력같은 말을 조심스럽게 일러 주는 것이었다. 설상 가상으로 또 간호원이 “의사선생님 만났지요. 기관지 천식만으로 그렇게 고통 받을 수 있나요. 그것이지… 이제는 가족들이 의논할 때가 됐지요” 하지 않는가. 나의 신앙은 어머니고 나의 종교는 어머니였다. 폐암으로 고통 받는 그를 어떻게 볼 것이며 정말 세상을 떠난다면 보고 싶어서 어떻게 살란 말인가…. 나는 복도에 나와 난로 같은 재떨이가 세워진 옆 의자에 기대어 흐느껴 울었었다.

다음날 아침에도 안개는 자욱해 역시 UFO 기지촌 같은 택시 정류장에서 다가오는 초록색 택시를 잡아 탔었다.

무척 뚱뚱한 중년 운전사에게 병원소재지를 또박또박 가르쳐 병원 이름을 댔었다. 그런데 반쯤 가다가 우회전을 해야 하는 지점에서 아차 하는 동안 좌회전을 해 버리지 않는가. 새벽이라 붐비지 않는 차 길을 가면서 서울시재 운전경력 20년이 됐지만 그런 병원이름 모른다며 투덜대는 운전사와 불에 가라앉은 듯한 소리로 나는 시비를 벌이다가 이윽고 병원 앞에 도착해서야 하도 미워서 “이놈아” 하고 소리를 질러 버렸다. 그러자 그는 나를 보고 “개 같은 X야~~” 광적으로 내뱉고 사라졌는데 오히려 내 속은 후련해지면서 12년 전에 기록화를 위한 10인의 월남 종군 파견 화가의 말석에 끼여 나트랑의 백마부대에서 하룻밤을 새울 때의 일이 상기되어왔다.

밤새도록 조그마한 도마 뱀 같은 수궁(수궁)이 벽을 기어 다니면서 짹짹 우는 방에 간헐적으로 우군이 쏘아 올린 대포소리가 울려왔다. 나는 무엇이 가슴에 맺혔길래 투웅 울리는 포소리가 기다려지고 징그러운 파충류의 모습까지 차차 귀여운지 가슴의 응어리가 차근차근 풀려가는 듯 시원했다. 좋은 인연을 만나기란 곡절 끝에 어떤 운명 같은 실오라기가 줄을 이어 준 것인지…

병세가 악화될 대로 되어 퇴원한 어머니는 새벽 앰뷸런스에 실려 K병원에 재입원했는데 명의(名醫) 이박사님의 덕분으로 많이 좋아졌다.

어머니는 폐암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살아계시다는 사실이 문득 문득 기쁨을 가져다 주고 어머니가 안방을 지키고 있는 한 내게는 따뜻하고 훈훈한 가정이 있을 것이다.

 

인간상실

지나고 나면 뭐 그다지 큰 일도 아닌 것을 그 당시에는 꽤 신경이 쓰이고, 몸과 마음이 괴로운 그러한 때 나는 곧잘 어린 시절을 회상해 본다.

나이 아홉 살 때 하루는 개천가에서 학교 동무들과 놀면서 물을 들여다보고 오싹했던 일, 불과 새끼손가락 길이 깊이밖에 안 되는 물속인데, 거기 비치는 구름과 개천가에 늘어선 나무들 때문에 그 물이 천길 만길이나 깊게 보인다. 한발만 자칫 잘못 디디면 저 천길 만길 물속으로 떨어져 들어가다가 요행히 치맛자락이 나뭇가지에 걸려 한번 뺑그르 돌아서 구름이 있는 곳까지 멀리 떨어져 내려갈 것만 같았다.

지금 또 하나 이런 것이 머리에 떠오른다. 해외여행 때 본 우주영화의 한 장면인데, 우주인이 도킹을 할 때 실패해서 끝없는 우주공간을 홀로 떠가는 그 처절한 광경.

마음이 괴로울 때 나는 어릴 때 물가에서 놀던 그 생각이 몸서리쳐지기도 하고 또는 내가 도킹에 실패한 우주인이 된 듯한 공포와 고독에 사로잡혀지는, 이것을 나는 내 나름대로 죽음에의 향수라 해 본다. 그러나 반드시 이렇게 비관적이지만은 않고 어떤 때는 이파리가 축 늘어진 느티나무만 보아도 금방 비타민같이 엽록소가 내 혈관 속으로 흡수되어 오는 것 같고 또 비 오는 날 거리의 비닐 우산들을 보면 활짝 핀 나팔꽃같이 보여 빌딩가가 아름다운 꽃밭처럼 느껴지며 공연히 행복하다.

이 세상, 정말 살고 싶다.

아무튼 어린 시절에 가슴이 오싹하게 저렸다는 개천물에 비치는 그림자나 영화에서 본 우주인의 죽음이나 그건 결국 죽음의 세계로 연결되는 환상들이 아닐까 싶다. 이렇게 죽음의 향수와 하찮은 일에 행복하기만 한 기분의 교차가 탯줄처럼 고여 무늬를 그리며 그럭저럭 살아가는 게 나라는 인간인데, 이러한 위인을 분명 건전하다고 할 수도 없지만 그저 사치스러운 감정이라고 웃어넘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물질문명 때문에 정신세계가 메말라 본래의 인간성이 상실되어가고 있을 때 나 같은 환상을 좇는 태도는 분명히 산소부족이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물질적인 만족에 도달한 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도 양상은 다르지만 나의 어릴 때 물가에서의 공포, 그리고 우주인의 고립과 같은 불안이 전혀 없지는 않지 않을까. 어떠한 사람이건 간에…

인간상실(人間喪失), 물질욕 때문에 인간이 산소부족을 일으키는 현실에서 비 오는 거리를 화원(花園)으로 착각케 하는 인간을 그저 멸시, 혹은 웃어넘기지 말고 서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정신의 세계로 이제 차차 되돌아가 주었으면…

 

神 은 어디에

우리 집 조상들은 대대로 유교사상의 전통을 받아왔는가 지극히 봉건적이었다.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면 조상숭배로 제사를 성의껏 지내는 것이어서 그날이 오면 흡사 무슨 축제를 방불케 했고 2월 초하루 날엔 때아닌 가뭄과 우박을 몰고 온다는 영동할머니가 하늘에서 내려온다고 콩 볶아 먹고 대나무 가지에다 색색의 천 조각을 달아 사립문 밖에 꽂고 일년 농사 잘되게 해 달라는 마귀 달래는 방술을 했는데 그 원색 천 조각이 참 아름다웠다.

또 내가 처음으로 부모 슬하를 떠나 여학교 기숙사 생활을 하는 일 학기 동안 어머니는 내 밥그릇에다 쌀을 부어놓고 하루하루 정한수 갈아 떠올려 정성을 드리고 있었다니 놀랐었다. 그때 어머니는 필경 어머니의 신인 천지신명께 기도 드렸음이 분명하다.

그 어머니는 기나긴 세월이 흐른 뒤 영세 받고 박 요한나로 지금은 독실한 신자가 되었다.

나는 이러한 어머니의 신앙을 이해하고 있고 나 자신 영혼의 존재를 부인하지는 않지만 종교와는 거리가 멀다.

그런 내가 옛날에 느닷없이 산기가 엄습해 왔을 때 그랬고, 육친이 세상을 뜰 때, 또 단 하나였던 사랑을 체념 못했을 때 누구나 처럼 하느님을 계면쩍게 불렀지만 내가 절규했던 하느님 소리는 공중을 메아리 쳐 하늘 가까이 퍼지지 않고 도로 내 몸 속으로 들어와 버리는 것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 나는 절망 속에서나 어떤 저주를 보았을 때 우선 그림을 계속 그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안 되면 어머니와 대화를 한다.

우리 어머니는 다른 사람들의 어머니처럼 건강하고 알뜰하고 현명한 어머니가 아니다. 그런데 어머니와 대화하면 이상하게도 일이 풀리고 체념해야 할 슬픔도 견딜 수가 있는 것이다.

하느님을 잘 모르고 신이 무엇인지도 모르지만 분명히 우주에 많은 신, 선신 미신 악신이 있는 것으로 나는 믿고 싶다. 때로는 눈부신 햇살, 소슬바람, 맛있는 공기, 코스모스에서도 신의 미소를 본 듯하고 어머니 속에서, 위대한 사람에게서, 그리고 일에 미칠 때, 멍청해 있을 때, 뜨거운 감격에 젖을 때 신의 숨결을 느낀다. 또 정직과 근면,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신의 힘과 자신을 얻는 듯하고 운명과 맞서 싸울 때 신의 시련과 승리를 인식할 수 있다. 악과 선, 죄와 벌은 스스로의 양심에 있을 것이다.

또 효심이 지극한 사람치고 못 되는 사람 보지 못했다. 나의 경우 거룩한 효심과는 거리가 멀지만 단지 어머니를 좋아하는 것뿐으로 신앙처럼 그림을 그릴 수 있고 버티어 살고 있는 것이 아닌지 모른다. 초가을 라일락 잎이 바람에 비벼대는 소리가 포플라 소리로 들리고 세종로의 화창한 가을날씨를 어느 날의 봄날씨로 착각했다가 ‘아니야’ 하고 섬뜩 정신을 차리는 게 요즈음 나의 다양한 심리현상이다.

오랜 ‘환쟁이’ 생활을 하다 보니 내 주위엔 조상신, 화신, 삼라만상의 신들, 심지어는 잡신까지 원시인이 되어 있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 같기만 하다. 아이고 힘도 겨워라.

 

人間無情

어머니가 시골에서 돌아오신 밤이다.

검붉게 피주가 타신 어머니는 보따리 속에서 굴비와 오랜 시간을 묵힌 찰떡을 풀어 내놓으시며 ‘복주’가 고맙더라고 하셨다. ‘복주’는 어머니의 조카뻘이 되는 장년 壯年이다.

외할머니가 세상을 떠나게 된 것은 4년 전 봄이었다. 그리고 나의 아버지는 1년 앞당겨서 죽음 길로 가셨다.

불행한 우리의 모계 母系의 시발점과도 같은 80노인의 외할머니가 길을 찾아 가겠노라고 하시며 어머니의 조카인 손부 孫婦 밑에서 외롭게 돌아가신 것은 한편 어머니의 가슴에다 못을 박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버지는 그야말로 나의 경제적인 암흑시대에 약 하나 제대로 쓰지 못하고 돌아가셨으니 억지 죽음을 하신 것이다.

외할머니는 공동묘지로 아버지는 교회의 혜택을 받아 기독교 신자들의 공동묘지로 모셨던 것인데, 내가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무덤 앞에서 ‘아버지 죄송합니다’ 란 한마디를 올리고 돌아 온지도 5년이란 세월이 흘러갔다.

그때 달맞이꽃이 새벽 이슬을 마시고 노란 나비들처럼 꽃잎을 붙이고 있었다. 그리고 비탈길 옆으로 누워 있는 감자 밭에 뾰족이 보인 감자뿌리 하나가 나에게 야릇한 식욕을 돋구게 하는 것이었다.

한동안 내가 없이 살아와서 그 반발 작용으로 오는 것인지 나는 고향이 싫어서 떠난 후 한번도 아버지와 할머니를 찾아 보지 못하다가 ‘복주’ 오빠가 잘 되어서 큰 산을 샀으니 거기에다 할머니와 아버지의 유골을 이장할까 하니 내려오라는 기별을 받고 다녀오신 어머니이다.

‘지금쯤은 시원하니 시가를 바라다보시면서 옛사위 오순도순 할거라’는 얘기를 어머니는 계속하셨다. 그렇다면 생전에 할머니와 아버지의 사이가 좋았다는 것보다는 의리에서 오는 애정을 서로 퍽이나 지켰다는 것을 나는 어렸을 때부터 감득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눈을 뜬 채 숨을 거두실 때도 ‘이 사람아 원통히 생각 마소, 눈 감고 가소’라 부르짖으며 아버지의 눈을 만지어 고이 감겨 주신 할머니였다.

아버지의 유해는 고스란히 유골로 깨끗이 놀미하게 남아 있었으나 이상하게도 두개골이 좀 틀어져 있더라는 것이다.

그 동안 묏자리가 괜찮았던 모양이라는 둥, 그 후 어떻게 무덤이 많이 불어저 찾기에 어리둥절하다가 아버지의 무덤 옆에 선 작은 밤나무를 목표로 쉽게 찾아냈다는 둥, 할머니의 유해는 묏자리가 나빠서 육탈 肉脫이 덜 되었다는 둥 이야기가 계속되었다.

이야기만 들어도 그 광경이 내 눈앞에 선하였다.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나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신 후 눈물 한 방울을 떨어뜨리지 않았었다. 도무지 눈물이 나오지 않았고 서러움과 그들에 대한 연민 憐憫의 정을 후로 자꾸 밀어만 왔던 것이다.

나는 목이 잦은 소리를 내어 어머니와 아이들을 모두 만방으로 가라고 외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방바닥에 엎딘 채 베개 위로 얼굴을 대고 엉엉 울어댔다. 지나간 슬픈 일들이 꼬치꼬치 생각이 나왔지만 괴로워서 생각하고 싶지 않고 밀물처럼 눈물마저 후에 울기로 미루고 싶어졌다.

인간의 최대의 공포와 절망이 죽음이란 건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그러나 언제인가 한번은 가야 하는 길인 것도, 그 한번의 길이 마지막의 길이라는 것도 알면서 사람이란 그 길을 망각하고 살고 있고, 그 길이 다가서 오고 있는 것도 모르고 살기가 일쑤이다. 그러기에 영화와 부귀를 죽음의 순간까지도 꿈꾸는 것일 것인데 어찌 생각하면 그러한 마음이 서글프기 한이 없다.

영화도 부귀도 권문성세 權門盛勢 도 여기 다 남아 있는데 옛사람들은 다 죽음의 길을 가고 없다. 그런데 후인들은 풍수설 風水說 에까지도 마음을 의지해 보려고 하고, 선인 先人들이 쓰다 남은(?)  낡아빠진 영화와 부귀를 폐허에서 허둥대고 망설이고 있는 것이다.

옛사람과의 시간적 거리는 실상 유성이 흘러가는 것 같이 순간일지도 모르는데 나는 지금 무엇에 허둥대고 무엇을 망설이고 있는 것일까.

 

母系家族

‘쿠쿠쿳쿠쿳’

나는 암탉 같은 소리를 내어 웃었다. 내 웃음소리가 바람 한 점도 없는 무더운 여름 밤의 고요함을 깨뜨린 건 사실이다. 그러나 웃고 나니 허무가 공기처럼 내 머리를 휭휭 돌다가, 내 뇌수 腦髓를 배고픈 위장 胃腸처럼 텅 비게 해 버린다. 갑자기 현기증까지 난다. 8년 동안이란 긴 세월을 셋방살이를 못 면했던 내가 딴에는 넓은 집을 얻고, 이사한지 열흘째 되는 오늘밤이다. 새우처럼 허리를 못 펴고, 다리를 오그리고 자던 곡마단원 曲馬團員 같은 식구들의 넓은 방에서 마음대로 허리를 펴고, 팔자 좋게 다리를 뻗고, 숨을 쉬고, 잠꼬대를 하는 자연의 ‘하모니’가 나에게는 차라리 우습게도 보인다.

아랫목으로부터 81세의 외할머니, 어머니, 나, 이렇게 모계 모계로 3대, 그리고 다음에는 4대에 해당되는 내 딸이 누워있고, 그리고 그의 남동생인 백일점 白一點 이 내 옆에 끼여 누워 있다. 그 놈은 낮이고 밤이고 3대에 걸쳐 나오지 않는 젖을 빨기 좋아하는 놈이다. 새삼스럽게 여자가 많다는 걸 느꼈다. 딸의 딸, 도 딸의 딸, 공교롭게도 하나씩이 인계 引繼하는 형식으로 잔존하여 있다는 것에 내 웃음보는 또 한번 터지고 말았다.

외조부가 일흔 일곱에 돌아가셨으니, 청상과부란 불명예를 면할 수 있었던 외할머니는 지금도 정정하시오 밤마다 우물가에서 우리 식구들의 허리를 정성으로 문질러 주신다. 그 굵고 명랑하고 ‘모던’하던 선 線은 언제나 우리 가족의 ‘오아시스’이다.  우리 모계의 불행은 어머니가 외딸인 데서부터 시작되었다. 어머니가 남편 시하에서 친정 부모를 20여 년 동안 모셨다는 것은 말 못할 정신적인 고통과 깊은 비애의 뿌리가 되어 보라빛같은 금사망 金絲網 이 일생 베일처럼 어머니의 얼굴을 떠나지 않았다. 역사는 흐른다더니, 나는 10년 전 어머니로부터 그 보라빛 배턴을 받아 쥐었는지도 모른다. 종착점 없는 내 경주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다행히 나는 결혼에 실패했기 때문에 어머니가 맛보시던 아니꼬운 고통을 면할 수 있었으나, 그러나 나는 그보다도 몇 배 되는 고가 高價의 고통을 지불하고 비로소 자신의 자유를 사야 했다.

고독으로 미채 迷彩 된 삼림 삼림 속에 내가 꿈꾸는 예술의 전당을 짓기 위하여 나는 끊임없이 싸늘한 시간의 대리석을 쪼아야 했고, 또 앞으로도 쪼아야 한다. 오늘밤 내 귀에는 끌고 정을 맺는 그 대리석의 고요한 소리가 잠든 내 가족들의 숨소리에 반주 伴奏되어 더욱 또렷이 들린다.

 며칠 전까지도 외조모 外祖母를 모셨다는 핑계를 하고 싸우시던 아버지의 병석에서 신음하시는 소리가 사랑에서 들려온다. 돌아가시면 어떻게 할까 하는 불안이 갑자기 물밀듯 가슴에 부딪친다. 살아 계시는 어버이에게 마음껏 못해 들렸다는 자의식 自意識이 새삼스러이 눈물이 되어 솟는다. 어쨌든 돈을 벌어야 하겠다고 나는 느꼈다.  배턴을 놓치지 않고 죽도록 달려야 한다. 불행의 모계를 유전 遺傳치 않기 위하여…. 이조자기에 꽂은 아마릴리스가 제법 오래 간다. 꽃이나마 떨어뜨리지 않고, 방안을 꾸며 놓는다는 것은 나의 오랜 숙원 宿願이었다.  아버지의 신음하시는 소리, 개 짖는 소리, 지새는 밤은 요란하여 간다…. 어디선가 쿠쿠쿠, 나는 닭의 소리에서 나는 나의 터뜨린 내 웃음 소리를 연상했다. 그리고 그 울음 소리가 수탉일까 암탉일까 까지를 생각하였다.

 

눈 뒤에 비

제대로 격식을 갖춘 일기장도 아니요 가계부도 아니고 그렇다고 메모쪽지도 아닌, 사연이 복잡하게 암호처럼 뒤섞여 적혀 있는 넓적한 대학 노트 한 권.

그것은 나의 희비애환의 흔적이 흠씬 젖어 있는, 내 생활의 묘한 회의록 같은 것인지도 모르는데, 그게 꽤 오래 전부터 내게 붙어 안방에서 나하고 같이 살고 있다.

그다지 놀랄 것까지는 없는 이상 기후 때문에 철 아닌 궂은 비가 어느 여름 밤의 그때처럼 처마 끝을 요란하게 후려 때리는 밤이다.

시원한 빗소리를 들으며 이 비가 오기 전에 벌써 눈이 왔었지 않나 싶어 나는 내 옆에 있는 문제의 넓적한 노트를 뒤적여 보았다.

’11월 9일 (土), 초설 初雪’ 이라는 큰 글자가 씌어 있다. 그리고 ‘임 떠남’, ‘支拂 眼科 400원, 택시대代 140원, 빵 과자 200원’ ‘XXX’ – 그 정도로 간단하게 기록되어 잇는데, 그 가운데서 ‘XXX’, 이 세 X는 그날 있었던 일들 가운데 참으로 싫었던 것을 쓸 수도 없고 아니 적어 놓을 수도 없어 표시해 둔 것이다.

나는 아이 아버지를 아직도 임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니 나는 무엇 때문에 19년이라는 긴 세월을 두고 처음 임을 만날 때의 그 감정, 즉 연애감정을 나 혼자서 오래오래 간직하고 있으려는 것일까….

때로는 임을 별안간 ‘Q씨 氏’라 불러 ‘Q氏 떠남’, ‘Q氏로부터 00원 입 入’ 식으로 마치 타인처럼 바꿔 써놓은 기록도 있기는 있다.

나는 이런 말을 쓰기 위하여 보다는 눈(雪) 얘기를 하고 싶어서 노트를 뒤적여 보았을 뿐인데 어쩌다 임의 난에서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하기야 사람은 살다가 보면 눈(雪) 한가지 가지고 먼 훗날 임과 전연 관계가 없는 게 아닌 사연이 얽히기도 하지만…

눈, 첫째 내가 잊을 수 없는 초설 初雪은 만삭의 몸으로 시골로 신부리(신행)를 가던 밤의 일이다.

그때만 해도 제법 삼한사온 三寒四溫이 정확해서 바로 그날은 다행히 사온에 접어들기 시작한 날씨였다. 해방 직후여서 물자가 귀했고 오늘날 거리를 누비는 젊은 여인들의 화려한 옷감 같은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시대였다. 새색시인 나는 노색 老色이 잠긴 고동색 양단 두루마기에다 내가 털실로 짠 오동색 목도리를 머리 위까지 둘러 감고 십 리 길을 걸어갔다.

교통이 불편한 곳이라서 인력거마저 다른 사람에게 빼앗겼으니.

친정아버지하고 몇 사람의 친척과 신랑이란 사람의 친구들인 유달리 네모진 사각모를 쓴 대학생들이 이바지(선물)가 든 석작, 트렁크, 고리짝 등을 메고 따라오고 있었다.

날씨는 포근했지만 무겁게 쳐져 내린 회색 하늘에서 눈이 흰 나비가 날듯, 팔랑팔랑 날아오기 시작해서 그게 오동색 목도리를 감은 내 머리 위에 떨어져 살금살금 녹아 이마로 쪼르르 흘러내리는 게 어쩐지 즐거웠었다.

그날이 11월 25일, 초설 초설은 밤이 새도록 내려 온 마을을 희게 덮었다.

나는 신경과민으로 잠을 이룰 수 없었고 게다가 만삭으로 인해 십 분이 멀다고 뒤꼍 감나무 밑에 가서 오줌 때문에 주저앉았다가 방에 돌아오는 일을 밤이 새도록 되풀이했었다.

그 차고 조용한 시원한 흰 눈, 내 일생을 축복해 주지 않았던 그 흰 눈, 그러나 내 마음이 추울 때 털실보다 포근하게 감사 주는 듯했던 뜨거운 그 흰 눈의 인상.

 

그 후 초설의 감나무 집에 머무른 지 불과 수일 후, 잠시 떠난다고 생각했던 것이 영원히 나는 그 시집을 다시 가지 못하게 되는 인생 코스의 방향이 바뀌게 될 줄이야…

괘 오랫동안 나는 홀로 살았다.

그러다가 서울에 와서 얼마 후 지금의 국도극장에서 임이고 어떤 때는 Q씨라는 그와 <춘희>를 보았다. 유명한 그레타 가르보의 춘희가 아니라 미슈리느 프류엘 이라는 프랑스 여우가 춘희가 된 컬러 영화였다.

처지나 생리가 나와 춘희와는 천양지차로 다르지만 비련이라는 결말만은 나와 같다고 생각해서이지 나는 영화를 보면서 춘희가 된 마음으로 몹시 눈물을 흘렸다.

나는 평소에도 소리를 내지 않고 눈물을 영화배우처럼 주루루 흘리는 묘한 장기를 가지고 있는 듯했고 그걸 스스로 즐기기도 했었다.

임, 아니 Q씨와 나 두 사람은 영화관에서 나와 판자촌이 가득 늘어선 청계천변을 거닐었다. 산책이 아니라 집으로 돌아가는 코스였기 때문이다.

어느새 쌓였는지 판자촌 마을은 눈에 덮여 있고 아직도 함박눈이 쏟아지고 있는데 영화에서도 라스트 신이 눈으로 덮여 있었던 인상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때 우리 두 사람은 같이 나란히 걷지 않았다.

나였는지 그였는지 2미터쯤 뒤따라 걸어오고 있었는데, 춘희의 자극 때문이지 서로 저기압 속에서 걸었다.

눈을 맞으며 신행길을 걸어갔고, 또 눈을 맞으며 임과 춘희를 보고 나왔다는 것, 거기다가 춘희의 사연이 어떠한 불행이란 예감을 안겨 주었다고나 할까?

그런 데다가 느닷없이 그는 폭탄선언 같은 말을 하였다.

가질 것 다 지니고 있는, 어깨바라지가 쫙 핀 어글어글하게 생긴 사나이 모습의 그가 하는 소리가 어쩌면,

“내가 바로 춘희요!”

눈 내리는 길가에서 크게 외치더니 쏜살같이 가 버리는 것이었다.

나는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오직 그를 믿는 마음에서 초설이 내리는 날은 꼭 한번씩 ‘내가 바로 춘희요!’ 를 열심히 되뇌이며 무슨 뜻일까, 무슨 말일까 한 번씩 생각해 보았지만 정말 이해를 못한 채로 세월만 흘러갔다.

도대체 연애감정을 지속시킨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도 거느릴 것 다 거느린 사람과 연애한다는 건 나쁘게 말해서 그와 같은 연애의 타성, 혹은 내가 직접 당해봤대서 하는 말인지는 모르지마는 나대로의 나만이 느끼는 일방적인 순수성, 이것을 지금 생각하니 나라는 정신적인 구조 속의 하나의 혹과 같은, 그러나 이것을 떼어내면 육체의 어느 한 기관에 혹이 달렸다고 기관을 떼어 내버리면 사람의 생명이 위태하게 되는… 나에게는 그러한 감상적인 하나의 혹이 아닐까?

그러나 나는 너무도 덤덤하게 평생을 보내는 인생보다는 이 같은 어리석은 환상이나마 지니고 사는 사람이 행복자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도 나는 그림을 그렸기에 진짜 춘희가 아니 되었고 이러한 시행착오도 행복이라 느끼고 살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斷想 十一題

 

봄의 음성

누구던가, 슬픈 빛이라고 말했다는 보라 빛 스웨터가 방바닥에 구르고 겨울 동안 어두운 빛에 잠겼던 그림, 물감접시들이 찾아온 봄의 양광 陽光에 비쳐 눈부시게 활기를 띤 아침이다.

옥인동 꼭대기까지 올라간 코로나 택시의 클랙슨 소리와 고물장수의 가위소리, 그리고 ‘헌 화장품 갑이나 머리카락 파시요’  외치는 여인의 높은 소프라노가 봄빛을 타고 한층 생기 있게 메아리 쳐온다.

방안엔 아직도 난로가 타고 있다.

가만히 귀를 대면 금속에 부딪쳐 발산하는 불길이 쏴아하니 소나기소리 같은 향수를 부른다.

꿈을 쫓아 대기권 밖을 가는 듯했던 나의 반평생 속에는 홍역을 앓던 아이를 드립다 업고 허둥지둥 병원으로 달리던 청춘시절의 사연들이 괴어 있다. 그것들을 들추면 나의 가슴은 예외 없이 뻐근해진다.

나는 지금 뭔지 울먹이는 듯 울렁거리는 가슴을 잠시 달래며 후유 한숨을 내쉬어 본다.

봄은 분명 모든 생물체뿐 아니라 화폭과 물감접시까지도 밝게 소생시켜 주는 계절, 정지했던 고동도 살아날 것 같은 희망을 느끼게 한다.

칠순이 다가온 우리 어머니의 가슴에도 봄은 오고 있다. 어머니는 참 젊으시다.

어머니는 기타 반주의 노래를 좋아하신다. 그 노래를 들으면 몸이 들썽들썽 한다고 하신다.

그런데 유독 어머니가 싫어하는 재즈 싱거가 노래를 부르자, “지랄한다” 하고 엉덩이를 흔들면서 텔레비전 옆을 떠나버린다.

봄은 구성진 계절이기는 하지만 온갖 미지의 비극을 인간에게 잉태시켜 주기도 하는 계절이다. 그래서 슬기로운 사람들은 봄을 두려워하는가?

태양은 자비로운 미소를 쏟고 산고 마을은 온통 봄맞이 표정인데 지붕에서 후당땅 간짓대 부러지는 소리가 나를 놀라게 한다. 시새우는 바람이 한바탕 스쳐갔다.

그 후 봄빛을 타고 생기를 찾던 모든 소리가 파장을 이루듯 파르르 떨리는 것 같다. 나의 인생관, 예술관도 봄 하늘에서 떨고 있는가.

 

꽃과 비

우주인이 된 영화의 주인공은 우주선을 타고 처음 그 모습대로 수백 년을 맴돌다가 어느 위성에 내렸다.

 인류는 멸망하고 원숭이가 지배하는 세계였다.

그는 말을 할 줄 모르는 젊은 여인과 함께 그곳을 간신히 빠져나와 바닷가를 향해 가다가 넘어져 있는 자유의 여신상을 발견하고 거기가 바로 뉴욕이었구나 하며 통곡한다.

6개월간 발리 섬, 아프리카, 파리 여행을 하고 돌아온 나는 우리 집 뜰에 핀 한송이 보라빛 과꽃을 바라보며 엉뚱하게도 내 사연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그 영화 <혹성탈출>의 한 장면이 강렬하게 가슴을 스치는 것을 느꼈다. 이번 여행이 힘에 겨운 여행이긴 했지만 무의미한 건 아니었던 것 같다.

나는 그 여행을 다녀와서 한 송이 과꽃의 깊이를 알았고  엊그제 서울에 내린 비가 얼마나 정서적인 감각을 안고 잇는가로 되곱쳐 음미할 수 있게 되었다.

발리 섬 해안선의 꽃과 비, 케냐 광야의 꽃과 비, 콩고 산악에 후려치는 소나기, 모로코 평원의 꽃밭을 축이는 비, 어두운 파리 도심의 꽃과 비, 그리고 그 낙엽들…

광기마저 서린 듯 아름다웠다.

그것뿐인가, 여인들은 또 얼마나 아름다웠고. 그러나 우리 어머니 따라갈 사람 없듯이 꽃과 비도 한국의 것을 따라가지는 못한다는 걸 알고 왔다.

 

미모사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는 날, 잘 안 된다고 성화를 하다가 잠이 안 오고, 잘된 날은 잘된다고 기분 좋아하다가 또 잠이 안 온다. 사정이 생겨 그림 못 그리는 날은 또 일을 못했다 해서 잠이 안 온다.

이런 버릇은 몇 해 전 파리에 잠시 있을 때부터 생겼는데, 그때 나는 그림 때문에 잠이 안 오는 그게 나의 참된 생활이라고 느꼈고 돌아가서도 그림만의 세계가 있는 생활을 원했었다.

파리의 밤, 잠 못 우리고 있을 때 맥주병에 꽂힌 노란 방울 솜사탕 같은 미모사의 꽃 모습, 그 향기가 꼬박 나와 함께 있는 것같이 유정 有情해서 잊혀지질 않는다.

어린 시절에 본 뭇꽃들, 정원의 꽃, 지금 서울에 피는 꽃 그리고 슬픈 여인의 솜씨에 수 놓인 아름답게 절여진 꽃들을 사랑하고 나는 나대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꽃세계를 오락가락하며 꽃을 기르고 있다.

심한 더위가 시작될 무렵 저혈압증세가 악화되어 눕게 되었다.

육체가 지쳐서 눈을 감고 꿈을 꾸는데 그때 나는 파리의 미모사에게 편지를 띄우려고 했었다.

또 남태평양 타히티에 핀 지빠니에에게도 펴지를 썼다.

내 그림은 그림이 안 되거나 못 그리거나 잘되는 그런 고민이나 기쁨을 즐기는 마음 그대로를 나타내놓은 것 뿐이고 그게 생활화되어 버려 새삼스럽게 발표가 두렵다거나 하는 것은 없다.

옛사람이 이름도 없이 혼자 즐기고 또 거기에다 생애를 걸고 살았던 ‘장이’ 근성. 그것이 불행인지 다행인지 내게 스며들어 있다.

온 불덩이로 속이 타는지 단말마의 절규를 하며 당인리로 기차가 간다.

나는 절규하면서 매연을 통하고 가는 구식 기차의 모습을 내일도 보고 1년 후에도 10년 후에까지도 보고 싶다.

나도 나이를 먹지 않고 우리 어머니도 그대로고 아이들도 더 크지 않고, 시간이 잠시 낮잠을 자고 멈추는 공간에 하염없이 꽃을 기르고 싶다.

 

각시서대

무늬가 물결치듯한 깔깔이를 걸친 아가씨들, 그리고 눈길을 돌릴 때마다 선글라스의 사나이를 볼 수 있는 남도 항구의 거리는 야릇한 현대의 일면을 보여 주는 것 같다. 쉴새 없이 무수한 선박이 오가는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활짝 핀 무궁화는 그와 같은 현대 풍조와는 달리 무엇인지 서정과 아름다움을 호소한다.

염수 염수에 찌든 삼각형 백기 白旗, 홍기 紅旗를 나부끼며 들어오는 똑딱선 정경은 꿈속에서 보는 아름다운 회화 繪畵 같다. 선두에는 이글이글 탄 뱃사람들의 기세가 놓다.

똑딱선이라도 만선 滿船인 모양이다.

여수의 바닷물은 이름 그대로 맑고 깨끗하다.

생선도 이곳 생선이 맛이 있다고들 한다.

선창가는 서대, 황석어새끼들을 말리는 광경이 성시를 이루고 어부들은 가뭄은 아랑곳없다는 듯이 우선 고기를 말리기 위해 태양을 그리워한다. 여기저기 그 찌든 빛의 양산, 비닐 우산의 다양한 색채의 점점이 이채롭다.

서대 중에서 줄무늬가 있는 예쁜 어류가 있다. 이름을 물으니 아낙네들은 ‘가시서대요’ 하며 의미있는 미소를 입가에 띤다. 꽃각시, 풋각시, 팟각시, 각시서대 – 그리운 전라도의 방언을 오랜만에 들었다. 길게 꼬리를 잇는 전라도 방언의 여운은 뭔지 나의 여독을 풀어 주는 듯했다.

 

담천 曇天

금방 하늘에서 소나기가 쏟아질 것만 같은 날씨. 창문이 열려 있지 않나, 빨래가 널려 있지 않나 하고 집안 구석구석을 옛 습성대로 살펴 본다.

겨울철에 뇌성을 들은 기억은 없었던 것 같지만 옛날엔 이렇게 웅크린 겨울 날씨가 되레 포근했었다. 지각을 뚫고 솟아오르는 열기 속에 누구네 집에선가 메주 쑤는 냄새가 구수하게 스며왔던 기억도 살아있다. 그러기에 아직 음력 7월 달 같은 착각을 하게 되어 무엇인가 시간을 재촉 받는 듯 싶은 초조감에서 잠시 해방되는 맛도 있었다.

그런데 오늘의 회색 하늘은 예전과 같이 투명한 수묵 水墨 빛 하늘은 아니다. 자욱이 깔린 매연에 덮여 숨통이 막힐 듯 답답하다.

 메주콩 냄새도 사라져 버렸으니 정도 윤기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 하늘 아래 모진 목수의 국화송이가 처량하다. 병들고 메마른 국화꽃 모습이 스산하게만 보인다. 나는 이토록 아름답지 않는 자연을 불신하고 불안해 한다.

그 후로도 오랜 세월이 흐른 것 같다.

나는 왜 날씨나 계절에 병적으로 민감한 생리를 지녔을까. 저 국화 보습을 보면서도 시름시름 아픔을 겪는 것 같은 자신의 처지를 느끼는 것이다.

이렇게 어두운 날에는 그림을 그릴 수 없다. 우리 집 옆 빈터에 거창한 저택이 들어서서 태양을 막아 버린 탓이라고 핑계를 대보기도 하지만 그것은 핑계일 따름, 울적해져서 붓이 말을 듣지 않는다.

낮에는 식구가 나가고 없기 때문에 나는 노모와 함께 있으면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느닷없이,

“야이야 와 이것 잔 바아라.”

“토옴 토옴.”

어머니의 소리에 놀라 층계를 바삐 내려갔었다. 국화밭에는 중강강아지가 네 발을 올린 채로 나자빠져 입에 부글부글 거품을 피우고 있는 것이었다.

개는 순간에 훌딱 일어나더니 썩은 국화 밑으로 들어가 벌떡 나자빠진 채로 지랄병을 시작한다. 때마침 매연 구름을 찟고 우박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토옴은 흰 털이 잿빛이 되도록 흙탕물을 쓰고 후려치는 우박을 맞으며 지랄병을 계속했다.

노모와 나는 개가 지랄하는 꼴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단원 김홍도의 <상복도: 相撲圖>

서민 냄새가 물씬한 이 그림, 씨름 ‘귀경꾼’ 속에 우리 3대조 三代祖 외할아버지는 아니 계셨는지. 소위 야인 풍류객으로 평생을 풍류만 먹고 사시다가 가셨는데…..

또 당시에 갓쓴 플레이 보이 이기도 했다는데.

친가고 외가쪽이고 양반하고는 거리가 먼 모양이어서 그게 또 나로 하여금 이제 와서 조상을 들먹거리는 허전한 얼간이를 모면시켜 주는 것만도 다행함이라 하겠다. 내가 서민이 좋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그 속에 온갖 풍악 風樂이 있어 인생에 간을 맞춰 스미게 하고 예술도 피워주고 그리고 자유가 있기 때문일까.

씨름꾼이 기운 자랑해서 소 타고 뽑낸 건 말할 것도 없거니와 한바탕 씨름하고 나면 소나기를 맞은 듯 땀으로 몸과 마음이 시원해질테니 차라리 좋은 피서법이었나 보다. 그리고 시장기가 돌 것이고 구경꾼들 역시 마찬가지.

우리 고전에는 <흥부전>은 물론 타령 속에까지 ‘어서 방아 쿡쿡 찧고 점심 먹으러 가세’, 또 과객으로 변장한 이 도령 역시 춘향모에게 ‘오래간만에 온 사우 밥 좀 안 줄라요’ 등 밥 소리가 많이 나오는데 어지간히 들 시장하고 밥이 좋았던 모양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보니까 나 역시 시장끼가 돌면서 찬물에 만 식은 보리밥에 전라도 꽃게젓 생각이 간절해진다.

그림 속에 엿판을 멘 총각이 있는데, 나 어릴 때 엿을 한푼어치 사면 그 본전 주고 산 엿보다 맛보기(덤)가 그리고 맛있었는지…

엿장수치고 노래 못하는 사람 없었고, 엿판을 메고 구성진 가락 빼어 그 소리 여름 하늘 울려 퍼지면 동네 처녀 가슴 공연히 울렁대고 울타리 밑에 봉선화 붉게 희게 활짝 피고, 정말 서민의 애환이 흠뻑 담긴 그리운 시절이었다.

 

담배의 멋

‘춘향 아씨! 놀라지 마아요오오…. 나는…. 다른 귀신이 아니라 남원 옥사를 정두라는 귀신이요. 하소할 곳 없삽니다. 오늘 와서 하소를 하오오…. 이힛힛히히…’

머리를 헤풀고 온몸에 피칠을 한 사귀 귀신이 내일이면 죽을 춘향에게 넋두리하는 판소리를 들으면서 담배를 피워 물고 연기를 뿜는 기분은 더위를 잊게 한다. 이때 나는 담배의 미학분만 아니라 귀신의 미학 美學마저 깨닫기도 한다. 또 인간이 하찮은 욕망 때문에 저지르는 온갖 이니꼽고, 치사하고 더러움을 정화시키는 미학을 느낀다.

 뭇사람이 부지런하게 자기 일을 하면서 간간이 담배를 치워 무는 모습을 볼 적마다 인생을 즐기면서 달관할 줄 아는 그 무엇이 엿보여 좋다.

나의 경우 담배는, 그리는 과정의 삭막함과 고독함을 그것을 피우는 것으로 오히려 애절하게 씹어 보려는 재미와 보다 깊고 높은 차원을 찾아 살아보려는 사색을 위한 심사를 곁들인다. 어쩌면 담배 피우는 짓은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해오던 배냇짓을 어른이 되어 또 하는 그 배냇짓이 아닌가 생각해 보기도 한다. 그래서 담배를 피워 무는 것은 살고 있다는 것을 나 스스로 의식케 하는 하나의 거짓 없는 나의 생활 태도라고 할 수 있다.

 

나를 살고 싶게 하는 것

파라솔처럼 폈다갰다하는 아기방장 속에 내가 들어 있을 무렵이니까 아마도 한두 살 때의 일이 아닌가 싶다.

대청마루에 펴진 아기방장 안에 누워 있던 나는 잠에서 깨어 하늘의 흰 뭉게구름이 흐르는걸 보았다.

녹색의 아른거리는 뜰에서 빨래를 만지다가 내 곁으로 들어가 엄마가, ‘아~~ 나~~ 윽까~~’ 하였다. 푸른 하늘, 맑은 공기, 깨끗한 빨래풀 냄새, 꼬상꼬상한 흰 적삼 속에 감춰진 엄마 젖가슴, 그 꼭지에서 떨어지는 젖방울…

인간이 영원토록 원하는 생 生이 약동하는 순간이요, 행복감이요, 메마른 현세대의 삶을 갈구하는 끝없는 향수였다.

어떻게 한두 살 때 일을 그토록 정확하게 기억하느냐고 나도 나에게 묻고 싶다. 한두 살 때가 아닌지도 모르고, 또 그 기억이 내 마음 속에 살아온 환상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의식은, 그 삶의 향수는 기쁜 일도 없는데 공연히 나를 살고 싶게 한다.

첫눈이 내리는 소리를 들을 때, 공동 목욕탕 김이 자욱이 서린 유리창 무늬가 목포 인조견 木浦人造絹 을 상기시켜 줄 때, 기생 코스모스가 노랗게 필 때 그토록 살고 싶게 했다.

서울에 새 눈이 내리고, 내가 적당히 가난하고, 이 땅에 꽃이 피고, 내 마음 속에 환상이 사는 이상 나는 어떤 비극에도 지치지 않고 살고 싶어질 것이다. 나의 삶의 연장은 그림과 함께 인생의 고달픈 길동무처럼 멀리 걸어갈 것이다.

 

금이 간다

뿌연 하늘을 지나가는 봄바람에 라일락꽃이 하늘거린다. 그 짙은 보라빛이 먹고 싶은 생각마저 갖게 한다.

집집마다 라일락이 피어 동네가 온통 향기로 뒤덮이는데 우리집 라이락만 해걸이를 하는지 올해는 꽃이 피지 않아 뭔지 미안한 생각이 들게 한다.

라일락꽃 향기 속의 한나절….

라디오에서 ‘세레피아 아…’ 하고 울려나오자 어쩐지 전신이 노곤해지는 것 같다.

‘뚝….’

팽팽한 화판 畵板 위에 작은 날벌레가 떨어지는 소리, 나는 물감이 묻은 붓으로 벌레를 화판 위에서 건져내려고 했다.

불현듯 뚝 하는 소리는 어쩌면 나의 남은 인생에 금이 가는 소리같이 들렸다.

본래 사람이란 태어날 때 이미 보이지 않는 성냥갑만한 어떤 운명의 함 속에 들어가 태어나는 거나 아닌가, 이 함이 어떠한 함인지 자신이 전연 모르고 살다가 어떤 때에 가서 그 함이 뚝 소리를 내고 쪼개지면 그때서야 제 운명이 어떤 것인가, 어떤 것이었나를 알게 되는 것이 아닐지.

먹소 싶은 보라빛 라일락꽃과 그 향기, 거기에 세레피아의 메아리, 이때 뚝 소리를 내고 화판에 떨어지는 벌레의 신호는 이제 나의 일생의 남은 여정이 피곤할 거라는 예고를 해주는 것 같다.

어느날 저녁 그릴에서 식사를 하고 있을 때 그럴싸한 풍채의 중년 남자가 일행의 한 사람과 시비하는 걸 본 생각이 난다. 점잖게 생긴 사람이 술 때문에 외모와는 엉뚱한 추태를 보이고 있었다.

‘놔’ 하니까 못 놓겠다느니, 시비가 한창일 때 그 점잖은 분의 한 손에 꽉 쥐고 있던 커다란 노랑 봉투가 바닥에 뚝 떨어졌다. 그 봉투 속에서는 그분의 직업을 말해 주는 듯 강의용 노우트가 뛰쳐나왔다. 그리고 ‘따르르’ 소리가 나며 갓 사넣은 듯한 미원병이 한 개 구르는 걸 보았다.

나는 그렇게 밉고 상을 찌푸리게 했던 그 점잖은 사라의 추태가 어쩐지 밉지 않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분도 무엇인가 금이 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분식 扮飾

테네시 윌리엄즈 원자 <이 저주받은 땅> 이 < 우수: 雨愁>라는 제목으로 변하여 서울서 상영되고 있다.

나탈리웃의 누이동생이 된 메리 파담이 첫장면과 마지막 장면에서 콧노래를 부르며 나레이션을 엮어간다.

선량한 미친 소녀가 걸친 붉은 드레스는 갈래갈래 찢겨 있고 때묻은 머리카락부터 귀, 목, 팔까지 장난감같은 액세서리가 요란하게 시끄럽다.

그런 미친 여인을 환상적으로 말하면 멋장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어린 시절 그와 같이 시끄러운 치장을 한 늙은 광녀 狂女를 본 기억이 있기에 대조적 인상을 느꼈다.

동네사람들은 그 광녀를 홍진네라고 불렀다. 왜 그렇게 불렀는지는 모르지만 역시 선량하고 마음씨 좋은 미인 여자였다.

언제였던가, 내가 젊었을 때 뭔지 마음이 허전해서 두 개의 반지를 두 손가락에 끼었더니 어머니가 ‘너는 홍진네 같구나’ 하며 웃었다.

페션계에서도 액세서리의 필요성에다 여러가지 예술적 이유를 붙이고 있지만 내 소견으로는 그것이 인간의 자기 약점에 대한 힘없는 저항같은 것이 아닐까!

최근의 <보그>지誌를 뒤적거려 보니 홍진네를 능가하고 초월한 인공적인 광태가 유행의 첨단을 걷고 있는 듯 느껴졌다.

현대인은 옛날 사람들에 비해 그만큼 허전하고 고독한 것일까?

어쨌든 그와 같은 광기를 창조한 장본인들이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포드 아트니 하고 – 벌써 시대적 유물이 되었지만 – 그림도 마찬가지다.

나는 현대라는 인공적 광태를 외면하지 않고 소화하려고 애를 쓰면서 자기의 세계를 지키려고 한다.

그만큼 현대에서 호흡하고 살려니 힘도 든다.

그러나 거기에도 줄 말은 있다. 광기서린 분장이 자기 고독에서 오는 것이라면 그러한 유 類의 예술도 마찬가지다.

여기에 한술 더 떠서 그러한 유 類가 한국의 창작으로 잘못 알고 떠들어대는 매스컴도 안타깝다.

광기가 돌아도 자기 것, 예술의 순수성은 누가 뭐래도 지켜야 한다.

 

문풍지

창가에 한들한들 나부끼는 화초도 이제는 마지막 고비에 들어선 듯 호분 胡粉 을 칠한 북송화 北宋畵의 한 화폭처럼 아름답고 슬픈 빛을 발산하고 있다.

비단 꽃빛뿐만 아니라 가지나 이파리들이 저항하는 기색도 없이 고스란히 고개를 수그리고 자연의 섭리에 따르고 순환의 원리를 감수하는 모습이 유난히 아름답게 느껴진다.

그처럼 화초가 투명한 고운 빛을 아롱아롱 풍겨 주는 어느 날, 나는 정원으로 향한 문에다 문풍지를 발랐다.

겨울에 외풍을 막기 위해서 그러기도 했지만, 연탄가스의 공포를 막는다는 이유에서 아주 봉해 버렸다.

지나간 오랜 흐름을 돌이켜 볼 때, 문풍지가 주는 수많은 추억이 지금은 아름다운 동화 같은 사연이 되어 회상되어온다.

싸늘한 달이 뜨고 냉기만이 스며오는 조용한 밤보다 북풍이 휘몰아쳐 문창이 떨어질 듯 요란한 밤과 폭설이 퍼붓는 날은 오히려 기분적으로는 따뜻하고 포근한 것을 느껴왔다.

그런 속에서 조용히 숨쉬고 단잠을 자는 아이들의 얼굴을 지키며 막연한 기다림에 지치면서 외로운 감정을 원고지에다 메워보는 시간이 이상할만큼 터붓하고 행복했다. 그리고 그런 밤에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의 주인공 캐시의 유령을 생각하기도 했다. 문소리가 털커덕 하면 그와 같은 환상을 현실의 나의 처지로 돌려 사랑하는 사람이 바깥에서 부르는 줄 알고 공연히 문을 열고 나가 보는 것인데, 그때마다 고목의 라일락 가지가 바람에 시달리는 광경이 보였다.

어느 날 밤은 이런 일도 있었다.

미도파가 고열 高熱 때문에 눕게 됐다.

영원히 내가 악인이 될 수 없는 원인의 하나라고도 할 수 있는 때때로의 아이들의 질병의 과정은 그 완쾌와 함께 내 마음을 정화시켜 주는 작용을 했다. 누구 하나가 아파도 마찬가지였지만, 열기 熱氣에 헤매는 아이 앞에 나는 공수래 공수거 空手來空手去 라는 진공 속에서 기도하며 미도파의 이마에 목 언저리에 가슴에 팔다리에 땀이 솟아 주기만 기다렸다.

땀이 소고 정신을 찾아 엄마를 불러 줄 대는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했을 때의 환희와 심한 가뭄에서 단비가 퍼부어주는 반가움에도 비길 수 없을 만큼 기쁨에 찼다. 그 순간 순간의 맹세 때문에 나는 악인이 될 수 없을 것 같다.

땀을 후줄근히 흘리고 난 미도파는 기분 좋게 요 위에 앉아 나에게 말동무를 청하는 것이고 둘이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면서 미도파가 다시 잠들 때까지 나는 색종이를 오려 꽃과 새를 만들어 기쁘게 해준다.

유리창은 김이 서려 각양의 빙화 氷花 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나는 며칠 전 문풍지를 붙이던 날 쫑쫑이가 아파서 또 한번 세례 세계를 받는 가운데 다가선 겨울의 휘몰아칠 폭풍과 폭설을 연상했던 것이다.

 

고향의 음식물

고향의 맛있는 음식을 대라고 하면 우선 전라도 김치부터 소개하고 싶다.

김장 때의 배추, 무김치 등은 너무나 유명하니까 새삼스럽게 소개할 필요가 없고 이맘 때 미각을 돋구는 갓김치, 파김치, 상치동김치, 꼬들바구김치가 고향의 명물이다.

꼬들바구는 밭에나 논두렁에 야생하는 나물인데 그걸 멸치 국물에다 온갖 양념을 빚어 담궈 놓고 노르작하게 삭을 때 먹으면 삽싸름한 별미를 풍기는 반찬이다. 나는 그 맛을 본지 어언 20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그 맛을 잊지 못하고 있다.

겨울의 별미로는 파래김치가 있다.

고향은 동남서 東南西가 바다로 둘러싸여 오직 벌교 筏橋로 가는 북쪽만 육지로 연결이 되어 있는 고흥 高興 반도이므로 해산물이 많을 수밖에 없다.

파래 역시 바다에서 나오는 해초인데 그 파래에다 콩나물을 섞어서 김치를 담궈 먹는다.

김치 외에 김과 젓갈이 유명하다.

특히 게젓과 굴젓은 우리 고향의 명물이다. 게젓은 곷게젓 찔기미젓 등이 있고 여름철에 나온다. 꽃게의 모습은 작고 윤이 나는 검푸른 빛에 수놈엔 繡 실을 자르는 가위 같은 빨간 발이 달려 위엄을 보이고 있다.

겟자루에서 항아리에 옮길 땐 와삭와삭 게 군 群의 발소리들이 요란하다.

항아리를 빠져나온 놈 중엔 그 빨간 발을 시위하듯 세우고 기어가는 놈도 있다. 그때 아낙네들은 고추를 내고 옆에서 구경하고 있는 아이놈들이 물릴까봐 손을 크게 내어 젓는다.

여름날 점심때 반섞기 보리밥을 냉수에 툭툭 깨서 게젓을 먹던 추억의 에피소드가 살아난다.

나는 지금 그 일을 회상하며 고소 苦笑를 하고 있지만 까마귀만 날아가도 불러서 식사를 대접하는 미풍 美風이 있었다.

이웃에 ‘도시람댁’이라는 젊은 과부가 살고 있었다. 늘 도시람 지분거리는 버릇이 있어 그렇게 불리었던 모양이다.

어느 날 아버지가 사랑 舍廊에 계실 때 우리는 마루에서 게젓상에 반섞기 보리밥 점심을 먹고 있었다. 때마침 도시람댁이 와서 같이 밥을 먹게 되었는데 도시람댁은 빨간 게발을 씹으면서 자꾸 교교 嬌嬌한 웃음을 웃는 것이었다. 마치 암오리가 수놈을 보고 꽥꽥 소리를 내는 것처럼…

그 모습이 어린 나에겐 아주 인상 깊었던가, 두고두고 상기되는 사연의 하나가 되었다.

굴은 서쪽에서 많이 나온다.

굴젓의 국물을 간장을 달이듯 달여 여러 차례 붓는걸 되풀이하면 짙은 갈색으로 변한다. 그걸 진석화젓이라고 하는 것인데 값이 비싸서 어릴 때 보면 아버지 진지상 위에만 오를 정도였다.

어쩌다가 한번씩 먹던 진석화젓을 상치삼에 넣어 먹으면 한결 풍미 風味가 가득했다.

또 조개과에 속하는 고막이라는게 있다. 요즘에는 서울의 시장에서도 볼 수가 있지만 껍데기가 누비저고리처럼 줄이 져 있는 조개인데 그 맛은 양념을 하는 것보다 적당히 삶아서 그 자리에서 까먹는 것이 더 맛이 있다. 그런데 손톱으로 까는데 보통 기술로써는 어렵다.

어머니는 오도카니 쪼그리고 앉아 제비새끼처럼 입을 벌리고 기다리는 나에게 그걸 까서 입에 넣어 주었다.

마실 것으로는 콩나물국이 유명하다. 콩나물은 팔도강산 어디에 가도 흔한 것이지만 고향의 콩나물국은 아무것도 낳지 않는 소금으로 간을 맞출 뿐인데도 국이 식은 다음 마시면 시원하다.

동네 사람들은 이웃집에 경사가 있으면 콩나물국을 끓여서 양푼에 담아 부조하는 따뜻한 풍습이 있었다.

반찬으로서는 전라도 음식처럼 맛있는 것이 아직 없는 것 같다.

고향과는 거리가 있지만 굴비 역시 마찬가지다.

서울서 맛없는 연평 굴비를 ‘영광 굴비 사시오’ 하고 외치는 걸 보아도 알만하고 호남미 湖南米 를 경기미라고 파는 것도 서글픈 일이라고 생각한다.

 

삼촌

‘삼촌’ 하면 퍽 다정스런 어감을 풍긴다.

어린 시절 나는 자주 삼촌 방을 드나들었지만 인상적인 추억이라곤 별로 없고 모든 일이 희미하다. 다만 혼자 밥상을 받은 삼촌이 무뜽클을 씹던 모습만이 선하게 기억에 남아 있을 뿐이다.

어느 날 원인은 알 수 없었지만 아버지에게 삼촌이 야단맞는 걸 보았다.

아버지는 흥분하신 끝에 삼촌을 때리셨다. 도대체 내 동심은 어떻게 된 일인지 삼촌에게 손질을 하신 아버지 팔뚝에 매어 달려 악을 쓰고 울음을 터뜨렸다.

아버지는 일찍부터 나이 차가 많은 아우(삼촌)를 봐 줘야 했던 것이다. 어린 내가 보기에도 삼촌은 매력이 없는, 물 같은 성격에다 선량한지 좀 미련스러운지 분간할 수 없을 만큼 답답하고 비능동적이었다.

이러한 삼촌이 빚은 모든 실패가 아버지를 괴롭혔던 것이다.

 

어머니가 이웃 마을로 삼촌의 신부감 때문에 중매장이를 따라 선보라 가신 날은 몹시 쌀쌀한 동지달이었다.

꽁꽁 언 논도랑길을 휘몰아쳐오는 바람을 안으며 나도 어머니를 따라 같이 걸어갔던 일이 생각난다.

김씨네 집, 색시는 고동색 물감을 들인 명주부지에 숨뜸질을 하면서 어색하다는 듯 웃고 있었다.

색시의 얼굴은 피라밋을 거꾸로 세워놓은 듯 삼각형이었지만 내 눈에 이쁘게 보였다.

나는 그 웃는 얼굴의 눈매의 그늘을 보고 비단 갑사 무늬를 연상했다.

그러나 삼각형의 얼굴은 생선 가오리를 또 연상하게 했다.

우리 집에서 시집온 후에도 나는 아줌마가 마음에 안들 때마다 ‘가오리!’ ‘가오리!’ 하고 별명을 불러 주어 퍽 섭섭하게 해 주었다.

 

삼촌은 자기의 성격 때문에 노력은 해도 무슨 시험을 치르는 일에는 모조리 실패를 하게 되어 결국 출세와는 길이 먼 직업에 종사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작업 따라 일가 一家 를 몰고 ‘라로도’ 라는 섬에 업소 業所를 마련했다.

 

나는 여름방학 때 아버지에게 꾸중을 듣고 거길 찾아간 일이 있었다.

그 무렵에 만약 비틀즈가 등장해 있었더라면 나도 열광적인 팬이 되었을지 모른다. 그렇게 나는 폭탄을 안은 듯한 내성적인 소녀이면서 대담했다.

버스에서 내려 배를 바꿔 타고 라로도 삼촌네 집을 찾아가는데 낙조 落照를 받은 섬의 경치가 아름다웠다.

멀리 부둣가에 삼촌 같은 사람이 아기를 업고 근시안경 너머로 나를 의아스러운 태도로 바라보고 서 있었다.

아줌마는 내가 왔다고 생선국을 끓여 주었지만 눌러 담은 밥의 양이 어찌도 많은지 끼니 때마다 일종의 부담을 느꼈다.

나는 삼촌이 선물로 사 준 큰 도미 한 마리를 들고 집에 돌아왔는데, 갈고리에 꿴 채로 찰랑찰랑 흔들리는 도미의 몸무게에서 무엇인가 허전했던 내 마음은 흐뭇한 것을 느꼈었다.

오랜 세월이 흘렀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시고 암흑과 같은 경제적 시달림 속에서의 몇 해 동안 아무도 우리를 찾는 사람이 없었다.

삼촌과도 소식이 끊어진 지 20년이 가까워졌다.

오랜 전 일이지만 어느 날 아침 누추한 차림의 일행이 나를 찾아왔다.

남자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모습과 어딘지 닮았고 여자는 바싹 마른 가오리같이 생긴 일행, 드디어 삼촌 내외라는 걸 알았다. 게다가 어린 젖먹이까지 업고 있었다.

놀라기도 했지만 실은 반가웠다.

나는 처음으로 서울 구경을 온 삼촌 일행을 위해서 쇠고기 전골에다 극장, 창경원, 남산 등 촌사람이 동경하는 레퍼토리를 의무적으로 구상하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왜 자꾸 영화 <와룡 선생 상경기>의 김희갑 이를 연상했었는지 모를 일이다.

그럴수록 더욱 삼촌을 동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의무적으로 잘해 드리려고 하는 나의 호의에 삼촌은 관심이 없는 듯했다.

보다도 딴 데에 마음이 있었다는 걸 후에사 알았다.

삼촌은 한참 벼르다가 말을 꺼냈다.

‘향이’ 의 혼사일 때문에 의논하러 왔다는 것이었다. 향이는 25세가 넘은 혼기의 딸이다. 향이의 나이로 미루어 내가 소녀시절 반항심에 라로도를 찾은 것도 벌써 스물 다섯 해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신랑의 스프링 코우트도 해주어야겠고… 이부자리도…’ 하면서 구화 십만 환을 나에게 요구했다. 아줌마는 부부일체가 되어 옆에서 베이스를 넣는데 그럴싸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나는 금새 답답해지고 우울해졌다.

와룡 선생의 환영도 산산이 깨어지고 말았다. 주제에 딸을 못 여의었으면 못 여의었지 무슨 놈의 스프링 코우트냐 싶었다. 구태어 스프링 코우트를 요구하는 사위감을 고를 필요가 어디 있느냐 싶었다.

나는 무리를 해서 5만 환을 주어 삼촌 내외를 치송해 보냈다.

그 일을 잊어 버릴 만할 때 시집간줄 알았던 향이가 찾아왔다.

향이는 ‘내가 무슨 팔자로 시집을 가겠소, 거짓말이에요’ 했다. 어쨌든 삼촌이 사는 S시골과 나와의 구름다리는 세워진 셈이었다.

언제고 잊어 버릴 만 하면 초면인 사촌동생들 – 아줌마는 다산 多産 임 – 이 서로 교대로 같은 목적으로 나타나는 것이었다.

장마가 서울을 뒤덮은 최근에도 삼촌 내외는 왔다 갔다.

새롭고 거대한 요구의 슬로우건을 메고 그들은 나에게 지나친 환상적 기대를 거는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내가 라로도에 갔을 때 아이를 업은 근시의 삼촌이 석양놀을 지고 바다를 바라다보던 그 모습은 웬일인지 잊혀지질 않는다.

그 모습과 오늘의 레퍼토리와는 아무래도 연락이 되지 않으니 ‘무엇이 잘못되어서일까’ 하고도 생각해 보는 것이다.

 

묵은 편지

이 해는 윤달이 들어선지 추석이 예년에 비해 싸늘하다.

쫑쫑에게다 선물받은 잠바와 모자를 씌우고 보니 웬일인지 그 놈의 코 아래다 수염을 그려 보고 싶은 충동마저 생긴다.

미도파는 우연히 빨간 스커트에 빨간 베레, 게다가 양말, 신발 모두가 빨갛다.

나는 가족을 극장으로 몰아내고 혼자 남았다. 그리고 다락에서부터 온 집안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그대로 두어도 괜찮지만 내일이면 시골에서 돌아올 쫑쫑의 아버지 때문에도 한바탕 신을 냈다.

상자 속에 처박혀 있던 옛날의 펴지 뭉치가 나왔다. 나는 잠시 먼지 틈바구니 속에서 오래 묵은 편지를 꺼내어 보기로 했다.

쫑쫑의 아버지 것은 따로 간수해 두었기 때문에 물론 없었다. 다만 거기에 섞이어 옛날 어느 때의 쪽지가 한 장 나올 뿐이었다. 공간이 많은 쪽지에는 ‘안녕히 다녀오세요. 雪’ 하고 설자 설자에 동그라미가 사인처럼 그려져 있고 ‘안녕히 다녀왔읍니다. 素’라고 또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을 뿐인데 ‘다녀’는 눈물 자국인지 흐려서 알기 어려웠다.

벌써 십여 년이 흘러간 그 무렵 나는 ‘설야: 雪夜’, 그이는 ‘소영: 素英’, 서로 둘이서만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우연히 ‘설야’라는 다방이 생겨서 눈 오는 밤에 둘이서 같이 거길 가 보기로 했던 것이다. 그때만 해도 우리의 사랑에는 기항지를 가리키는 나침판도 없이 불행과 환희가 아지랭이처럼 가물거리고 있었다.

나는 쪽지에서 다른 편지로 옮겨 펼쳐 보기로 했다.

까마득한 옛날 내 청춘을 장식(?)해 주는 듯한 여러 군상으로부터의 편지가 공교롭게도 잔재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이국 땅에서 보낸 학창시절의 옛 친구들의 다정한 젊은 편지들.

그러나 이런 편지의 추억이 어디까지나 아름답고 담담하게 굽이쳐오는 까닭은 오로지 내가 그래도 인생을 후회하지 않고 살아온 오늘날의 작은 행복(?) 때문이 아닌가 했다. 쫑쫑의 아버지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내 인생은 한결 삭막하고 거칠었을지도 모른다.

엽서의 사연을 다시 들여다 보지 아니해도 나의 영원한 우정은 두 소녀뿐이었다. 둘이가 다 화학생 畵學生 인데다 성분은 다르지만 외면은 화려하고 내면은 쓸쓸한 원색계통 原色系統의 여자들이었다. 원색쪽은 거짓이 없고 정열적이기에 대게 속된 기준으로는 불행하다고 할 수 있으나 경우에 따라서는 보람 있는 생활을 한다.

두 소녀 가운데 나와 같이 있던 한 소녀는 어렸을 때 소아마비로 한쪽 다리를 유독 가느다랗게 끌고 다녔는데, 그 성격적인 매력으로 나를 끌었지만 그는 내가 어디가 좋아서 친했는지 궁금하였다. 그녀의 편지는 사연마다 귀국 중인 나에게 쓸쓸하니 빨리 돌아와 달라는 것인데, 지금 새삼스럽게 나를 센티멘털하게 만들어 주고 있는 것이다.

또 한 소녀는 멀리 요꼬스까 에서 통학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화가에게 나와 함께 지도를 받으러 다니며 친해졌다. 그 선생님은 이방인인 나에게 더 희망과 기대를 가진 모양이었다.

어느 일요일 우리는 과일 바구니를 들고 비바람을 맞으며 선생님 댁을 찾아갔다. 미리부터 옷이 함빡 젖어 형편없는 모습들이었다. 그 선생님 댁에 들어선 우리는 제각기 색다른 유까다로 갈아입고 나란히 덜덜 떨며 선생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던 추억도 새롭다.

그 두 소녀는 누구인가 사랑하기 시작했다는 편지 이후 오늘날까지 20년이 가깝도록 소식조차 모른다.

지금쯤 그 원색족은 그림을 벌써 그만두고 좋은 어머니가 되어 있는지, 그렇지 않으면 세상을 떠나 버렸는지 알 길조차 없다.

그러고 보면 그때 그때 인간의 필적처럼 영원하고 신비로운 건 없나 보다.

편지 뭉치를 다시 다락에 넣고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 보니 가을 하늘 높이 제멋대로 활개를 펼친 구름들이 마치 어린아이들이 희망도 希望圖 를 그리고 있는 것 같았다.

 

고향의 비

‘옥자가 왔다고?’

‘옥자가…’

6월도 저물어가는 산밑의 조그마한 마을, 성주동, 아담한 전원에 산의 그림자가 덮이는 시각이다.

소를 몰고 돌아오는 마을 사나이들 입에서, 혹은 아낙네의 입에서 ‘옥자가?’ 하는 느리면서 선량한 템포가 산림으로 번져가고 송아지 울음소리와 어떤 하모니를 이루어 흐른다. 20년이 흐른 지금 내가 비로소 성주동을 찾아 돌아왔다는 소문이 그들 마을사람들에게는 적이 신기했던 모양이다.

20년 전 외가집이 쩡쩡 울리게 살았다는 전설 같은 얘기 속에서 자란 어린 내가 그 동안 어떻게 자라서 변했나 하는 호기심과 그 옛날 제각기 누리고 살았던 빈한 貧寒한 추억의 실마리를 풀어 보려는 마음이 뜻밖에 바람같이 찾아온 나 때문에 그들의 가슴에 안긴 모양이다.

내가 이승에 태어나 첫눈에 아롱아롱 곱게 비추어 주선 홍매나무를 찾았으나 지금은 보이지 않고 뒤켠 밤나무 숲은 추억도 거짓말 같이 딴 사람의 손에 넘어간지가 오래라 한다. 무수히 떨어진 밤송이를 줍고 이웃집 조숙한 봉순이와 놀았건만 봉순이도 어디로 가 사는지 알 길조차 없다. 다만 남아있는 거라곤 얼마 후 외조부가 조용히 묻히실 선산 先山이 마을 밭들에 둘러싸인 집 건너편에 섬처럼 우뚝 솟아 있을 뿐.

한층 날카롭게 낚시바늘처럼 오그라든 매부리코의 과부 외숙모를 위시해서 그 자손들의 모습은 웬일인지 동화에 나오는 마귀할멈과 그 종들을 방불케 했다.

특히 외숙모가 오묵 吳墨을 칠한 듯한, 동백기름 냄새가 칙칙한 머리를 풀어 제치고 자녀들과 밥상을 받는 광경은 더욱 나에게 그러한 생각을 일으켜 주었으면 긴 손가락으로 고너리 젓갈을 뜯어 엄지손가락을 빨아 넘길 때도 그러했다.

아무튼 가난한 집에 웬 끼니는 그리도 자주 분주하게 돌아오는지 모른다.

아우와 나는 병풍 너머로 흰 홑이불에 둘러 씌워 안치되어 있는 외조부의 시체를 보며,

‘하르바니, 하르바니…’

하고 울었었다.

어떤 영혼의 나비 한 마리도 날아와 안길 것 같지도 않은 허망하고 찬 무기물 無機物로 화해 버린 외조부의 시체는 측은하게 누워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흔히들 인간은 죽은 다음 일을 생각하고 ‘먼저 간다’, ‘저승에서 만나자’는 말을 남긴다. 육체는 비록 멸망하더라도 저승을 나는 또 하나의 생명을 보유하리라는 희망을 갖고 이승과 저승을 연결하는 구름다리를 믿고 있는 듯하다.

나 자신 어렸을 때 나를 사랑해 준 육친이 죽으면 그 혼이 언제나 곁에서 나를 지켜 주고 내가 불행해지면 행복으로 이끌어 주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나는 화석 같은 외조부의 시체 앞에서 그러한 생각이나 믿음이 허무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간은 평소에 생명이라는걸 의식하려 들지 않는다. 그러나 병을 앓고 무엇인지 위기에 처함으로 해서 죽음을 생각하게 되고 새삼스럽게 생명의 존재를 의식하고 염려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경우 외조부의 죽음도 가엾고 슬프기만 할 뿐, 허탈된 기분에서 어느 커다란 의식이 남아 있다는, 그걸 치러야 되겠다는 부담만을 느끼게 했다.

그러나 살아 있는 동안에도 인간이 사랑에 빠져 있을 때는 문제가 다르다. 남녀의 사랑은 대개 비련이나 혹은 사련 邪戀에 빠질 경우가 많기 때문에 도인(?)들은 그 사랑 가체를 악마시하는 것이다.

죽은 한 사람을 사랑하는 동안에는 이승에서도 영감 靈感에서 사는 수가 있다.

한 밤중에 누워서 발소리가 들려 그리운 사람이 찾아오나 하고 귀를 기울이면 과연 사랑하는 사람이 우연히 나타나 주는 수가 있으니까, 그러니 영매 靈媒의 세계란 오직 한줄기 사모하는 정신에 살고 있는 것인지 모르고, 사랑이란 가장 인간적인 것이고 그렇게 때문에 인간 세계는 신 神보다 악마에게 더 친근감을 갖게 되는 것인지 모른다.

생각할수록 하르바니가 살아 계실 때 나를 유달리 귀여워해 주셨다는 건 고사하고라도 그 생애에 있어서 말년 末年이 불행했기에 가엾기 그지없다.

하르바니는 아들들이 있었지만 재취 再娶로 들어와 나의 어머니를 낳아 주신 외할머니와 함께 30년 전 시골 관리로 계신 나의 아버지, 즉 사위를 따라 성주동을 떠나셨기 때문에 어머니가 외조부를 모신 것이 된다.

아버지가 퍽 오래 전부터 경제적으로 몰락하시지만 않았더라도 하르바니는 구접스럽게 성주동까지 와서 돌아가시지 않았을 것이다.

어느 여름방학 일본에서 내가 돌아왔을 때만 해도 하르바니는 반신불수였지만 정신은 초롱초롱 맑았다.

그러나 이따금 비구름이 산허리를 휘어가는 양 머리가 몽롱한 데다 산사 山寺에서 땡땡이중이 숨가쁘게 목탁을 두드리는 괴괴 怪怪한 울림 같은 것이 하르바니의 마음을 때로는 불안과 공포적인 환상으로, 때로는 조용한 안도감으로 이끌어주는, 지금 말하자면 노이로제 기세 氣勢에 걸려 있었다.

내가 집으로 돌아오자 외할머니의 말씀이 며칠 전 하르바니가 ‘휴유’ 한숨을 내쉬고,

‘옥자가 애를 뱄다니…’

하면서 꿈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더란 것이었다.

멀리 일본으로 유학간 나에 대한 그러한 환상이 하르바니를 괴롭히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는 하르바니한테서 남국적 풍토의 여러 가지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중국의 고대소설 이야기부터 남도잡가의 애상 哀傷에 이르기까지… 그러나 그 섬세한 감각과 정열적으로 이루어진 태반 胎盤이 지금의 나와 같이 외로움을 타는 인간성을 만들게 했던 모양이다. 그러한 회상에 잠긴 채 나는 하르바니를 부르며 울었다.

 

상여가 나가는 날은 장마가 덜 개어 비가 오락가락 뿌리기 시작했다. 상여 뒤에는 그날의 주역인 하르바니의 아들과 며느리들 그리고 그 딸인 어머니가 노란 상복을 감고 따르고 여러 친척들로 보이는 박씨네 문중 사람들이 상건 喪巾을 쓰고 따랐다. 산에 가기 전 노전 路奠 을 지낼 때였다. 비는 본격적으로 주룩주룩 내리기 시작했다. 조기 弔旗와 상인들의 의복이 후줄근히 젖고 울긋불긋 원시적인 빛깔의 조화 造花로 꾸며진 상여는 비에 짓눌린 데다 아름다운 과육 果肉과 원색의 꽃들이 어떤 냉혹한 손에 뭉크러진 물체처럼 이상하도록 쌕쌕한 빛을 발산한다.

차일 아래 술상이 벌어지며 제사 제사가 시작되자,

‘아이 아이’

하는 절음 折音의 곡소리와 함께 여인네들의 높은 울음소리가 원색의 꽃뭉치와 노란 벌레들이 움직이는 추상회화 抽象繪畵나 모던 발레 같은 것을 연상케 했고 또 마치 맹꽁이 타령을 듣는 듯도 하며 전자음악 같은 느낌도 들었다.

바로 그때 어디선가,

‘히 흐흐 흑….’

흐느끼는 듯한 웃음소리가 그 요란한 분위기에 더 액센트를 강조한다. 육촌 아줌마뻘 되는 도시람댁 웃음소리다. 도시람댁을 내가 처음 본 기억은 산밑 성주동에서 읍내로 이사하게 되어 하르바니의 손목을 잡고 아장아장 따라온 때였다. 시냇가 다리 밑에서 그 아줌마는 꽃자주 저고리에 검은 치마를 걸치고 돌 위에 앉아 빨래를 하고 있었다.

‘옥 자 야…’

아줌마는 냉정하게 내 이름을 길게 빼서 멀리 들리도록 불러 주었다. 어린 눈에도 아직 젊은 아줌마가 유난히 주름살이 많고 예쁘지 않았다. 그렇지만 가난하고 아이도 못 낳고 불행한 여상 女像 을 지녔음에도 아줌마는 쾌활한 성격을 가진 잘 웃는 여자였다.

‘이 흐 흐 흐…’

‘아이고오, 흐흐흠…’

‘아 핫핫핫…’

참다 못해 나온 웃음소리들은 잠시 동안에 점점 확대되어 곡소리인지 웃음소리인지 분간할 수 없는 요란한 가운데,

‘예끼? 순, 들… 쯔쯔쯔’

사뭇 경멸하고 나무라는 분개에 찬 소리와 혀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또 웃음소리가…

그건 다른 소리가 아니었다.

제각기 우스꽝스럽게 생긴 박씨네 사나이들이 둘러쓴 상건이 비에 쪼그라져 그 생김생김에 알맞게 기묘한 모습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중에서도 하르바니의 조카뻘 되는 송자에 아배의 넓직한 얼굴 모습이 가장 웃음을 끌었던 것 같다. 송자네 아배는 집안의 어른이랍시고 ‘예끼, 순, 들’을 연상 퍼부었다. 그런 속에서 아까부터 내가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건 단 한 사람 양복차림에 곱다란 얼굴을 지닌 사돈에 청년이었다. 그는 진작부터 자칭 미남이라는 자부 때문인지 젊은 나를 가끔 흘끔흘끔 쳐다보더니 웃음바다가 물결치는 걸 기회라는 듯 또 나를 대담하게 쳐다보는 것이다. 그리고 둔한 그는 아직도 웃음소리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자신이 둘러쓴 홀랑 넘어간 상건을 모르고 눈을 굴리고 있었다.

끝없이 서글프기만 한 추억의 성주동에서의 일, 그 비.

그 후 내 이마에 주름이 잡히기 시작한 지금, 나는 거기를 모르고 하르바니의 무덤을 찾지 못하고 있다.

그 순박한 마을도 저절로 아프레 풍조에 젖었을지도 모르고 지금쯤은 나일론천과 코카콜라가 판을 치고, 어느 구석진 찻집에선 ‘대전 불루스’나 ‘네버 온 선데이’가 흐르고 있는지 모른다. 이와 같은 변천과 흐름 속에 십 수 년 전에 땅에 묻힌 박 참봉의 일도 마을 사람들 기억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그때 내리던 고향의 비가 건너편 산마루를 덮고 부시시 내리기 시작한다. 이따금 비치는 광선이 찬란한 은빛을 풍기는데 은실같이 가느다란 빗줄기지만 그것은 멀리 태고 太古의 회상을 이어오는 것 같기도 하고 이어가는 것 같기도 하다.

 

기념사진

학교의 일, 그림 그리는 일, 집안일들이 삼원색의 태극선 무늬처럼 얽혀 소용돌이치며 역겨운 시간이 흘렀다.

그 생활은 그대로 단조롭지 않다는 말이고 그림 그리는 동안은 끝없는 꿈을 펼치기도 하니 더욱 변화무쌍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소한 기쁨이나 슬픔, 그리고 노여움이 깃을 펴고 내 가슴에 앉으려고 해도 거센 삼원색의 소용돌이에 말려 거품처럼 사라져 버린다.

지난날의 일들을 돌아볼 때면 그대로 지금의 환경은 다행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나는 바쁘게 살면서 오직 그림만을 그릴 수 있는 생활을 꿈꾸어온 것이 아니냐고 새삼스럽게 느껴 본다. 나는 부자가 되기를 원했던 것도 아니다. 다만 그림을 계속해서 그릴 수 있는 세계로 뚫고 가고 싶었던 것이 나의 참된 꿈이요 운명이라는걸 지금 알아차린 것 같다. 그러나 그 일이 결코 순조로운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었다는 것도 동시에 느끼게 된 것이다.

그런 생각에 묻힐 때 나는 잠시 그것을 젖혀놓고 커피를 마신다.

‘엄마, 이것 봐…’

퉁퉁퉁 층계를 올라온 쫑쫑히가 엽서 같은 종이쪽지를 홀랑 내 앞에 던지고 간다.

쫑쫑이는 이따금 나를 놀리려고 소리 없이 층계를 올라와서 2층에 도사리고 앉아 있는 나에게,

‘왁, 하하하하….’

하고는 웃는다. 그리고 무슨 일이 생기면 신나게 올라와서 보고하기를 좋아한다.

미도파도 학교에서 돌아올 때마다 으레 찔레의 새순같이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엄마 있니?’

하고 들어오는걸 2층에서 들을 수 있다. 그러면 나는 그게 귀여워서 후다닥 층계를 내려가 미도파의 얼굴을 꼭 감싸쥐고,

‘엄마가 그리도 좋으냐?’

하고 묻는 것이다.

엽서가 아닌 종이쪽지는 사진이었다. 제각기 핸드백을 열심히 듣고 서 있는 네 여인의 사진에는 ‘영세기념 00성당’이라고 가로 흰 글자가 씌어 있다.

왼쪽엔 우리 집에 일이 생기면 잘 도우러 오는 착한 여인네가 진짜 인물보다 예쁘게 찍혀 있으나 검은 망사치마 아래 비치는 속옷이 그의 가난을 말해 주고 있는 듯했다.

그 옆에 장미의 조화가 달린 면사포를 쓴, 키가 큰 노부 老婦 나의 어머니가 바로 성모 마리아 상 像 아래 서 있고, 옆으로 어머니를 인도해준 이웃집 할머니가 서 있고 그 다음은 내가 모르는 젊은 여자가 서 있다.

기념사진 치고는 나도 옆에 있지 않고 혈육이라고는 아무도 없는 어머니 홀로 에다 친구가 몇 사람 끼었으니 외롭고, 무엇을 초월한 아름다움이 있다면 있는 그러한 인상을 풍겨준다.

발끝부터 무엇인가 더운 것이 치밀어 올라와 나는 커피를 꿀꺽꿀꺽 마셨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부터 행복하지 못했던 것 같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10년이 되었지만 어머니는 아버지를 그리워하신다거나 들먹거린 일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몇 해 전에 어느 회갑 잔치에 다녀오신 후의 일이다.

두 영감 할멈이 나란히 큰상을 받고 있는 광경이 부러웠던지 돌아오신 어머니의 표정은 몹시 우울했다. 그 후 또 데모 구경을 갔다 돌아오는 두 영감 할멈이 흡사 아기들처럼 서로 손을 맞잡고 걷는 모습을 보고 자극을 받았던지 가라앉은 표정을 하셨다.

지난해 어머니의 회갑날을 멀지 않게 두고 봄비가 연일 내리는데 나는 원인 모를 기침 때문에 자주 병원에 들락거리게 되고 수혈을 하는 등 경황이 없었다.

수원 수원에서 사는 아우의 집에서 어머니의 회갑을 모시게 되어 어머니는 한걸음 앞서 미리 회갑을 지내기 위하여 떠나시고 나와 쫑쫑이 아버지는 임박해서 출발했는데 비는 여전히 짓궂게 내렸다.

아우는 살림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고 월급장이지만 항시 내가 신경을 써왔던 큰 상을 제대로 마련되어 있었다.

그러나 타관이라 누구를 초대한 것도 아니고 아우의 친구와 노인네  몇 사람이 왔을 뿐, 지금의 이 사진과 비슷한 분위기였다.

어머니는 큰 상을 받고 우리가 차례차례로 절을 하기 시작할 때부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어머니 생각은 여러 가지가 얽혀 서글펐을 것이다. 그 중에도 마음 속으로 돌아가신 아버지를 원망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아버지에 대하여 사무치는 정을 못 이겨 서러웠을지도 모른다.

내가 일본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도 어머니는 나를 붙들고 어린아이처럼 또 울었다. 그런데 그 동안 어머니는 위장병으로 오래 고생을 하였다고 한다.

요즘에는 위장도 비교적 좋아졌고 허물어진 기둥처럼 남아 있는 치아도 홀랑 빼었다. 어머니는 치아가 없어 입술언저리가 주머니처럼 주름 잡혀 음식을 자실 때나 말이 빗나갈 때 그 선량함과 애처로움이 오히려 정다울 때가 있다.

병세의 후퇴와 의치 義齒로 어머니는 무엇인지 소생한 듯한 희망을 가진 모양 같았다.

한때 어머니가 금새 돌아가실 줄만 알고 영세를 받도록 서두르던 어머니의 친구 되는 할머니도 무엇보다 어머니의 의치와 건강을 축하해 주는 듯했다.

새벽에 잠이 깨어, 부엌에 커피를 끓이려고 들어가면 어머니 방에 불이 환히 켜 있고 어머니는 일찍 일어나서 성경책을 읽고 계신다.나는 그때마다 흐뭇한 정감에 묻히면서 가만히 주전자를 들고 방안으로 들어와 버린다.

가까운 지난날만 해도 그렇지 못했다.

그 시간에 어머니는 늘 배를 움켜쥐고 몰래 신음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쫑쫑이가 배달해온 어머니의 기념사진을 줄곧 들여다 보며 면사포를 쓴 선량한 어머니의 모습을 그립게 마음 속에 새긴다.

그리고 내가 그리는 그림에서 면사포를 쓴 마음씨를 선량하게 다듬으면서 어머니에게 언제까지고 효도할 것을 다짐하는 것이다.

 

 

제2장 엄마의 자장가

 

산을 바라보는 마음

어둠의 장막이 조용히 온 누리를 덮자 어디선가 바람이 옥양목 커튼을 열고 오래도록 갈망해왔던 비가 뚝뚝 포도 이파리를 때리며 제법 세차게 내리기 시작한다.

뜰에 핀 달리아와 봉선화, 그리고 담장 둘레를 따라 핀 일년생 화초들이 오늘밤 따라 요염한 자세를 보여 주는 것 같다.

그 동안, 다다미와 마룻장에 놓인 기름기 없는 소재 素材로 된 내 그림들이 건조해 있어 만지면 ‘셈베이’처럼 바삭바삭 소리를 내고 바스라질 것만 같고 어딘지 타는 듯한 냄새까지도 나는 것 같더니 이제는 높아가는 빗소리와 함께 윤기를 담뿍 마시는 것 같다.

멀리 높은 윗집에 솟은 안테나 줄이 반짝반짝 비에 젖어 무엇인지 슬픈 신호를 하는 양 내 마음에 비쳐온다.

그리고 비에 젖어 가로등이 여름철 호박꽃 속에 들어간 개똥불처럼 흐리다.

이사한지 얼마 안 되어서 나는 이층을 화실(?)로 꾸몄다. 화실이라고 했자 한쪽은 마룻장, 한쪽은 다다미가 깔려있는 8조 가량의 기다란 방이다.

나는 그 방에 앉아 새로 사온 악기를 조절하듯이 방과 친하기 위하여 창 밖을 바라보며 그림을 구상하고 여러 가지로 작품 하는 자세를 꾸며 보았다.

한가지 다행하게 생각되는 것은 서쪽 창 밖으로 확 터져 인왕산 仁旺山이 슬기롭게 바라다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숲이 우거진 기슭에 가느다란 줄을 긋다시피 오르막길이 있고 그 옆에 하늘색 칠을 한 조그마한 교회가 서 있다.

수요일과 일요일 새벽엔 가난한 교회라 비록 종소리는 금이 간 소리지만 그런대로 울려오는 것이 마음에 흐뭇한 주름을 잡아준다.

나는 언젠가 저 교회를 배경으로 아름다운 인생의 출발 같은 뜻으로 축일 祝日을 한번 그려 볼까 생각한다.

어렸을 때, 어느 교회에 놀러 가서 보았던 신부의 하얀 힐 굽을 덮고 날던 면사포 같은 회상을 작품으로 그려 보고도 싶은 것이다.

나는 비에 젖어 윤기가 감도는 산과 우거진 숲 사이를 기어가는 하얀 길을 바라다 보면서 부질없는 생각이지만 진작 나에게 이런 환경이 조성되었더라면 했다.

그러했다면 나는 화상 畵想 도 좀더 자유롭게 뻗어갔을 것이 아닌가 고 생각해 본다.

옛날에 여학교에서 교편을 잡기 시작한 그때, 직원실에서 그림을 그려 개인전을 열었고 납작한 집에서 아이들과 식구들의 통로로 되어 있는 마루방 바닥에 화구 畵具를 펴놓고 수작을 떨었던 것이다.

수많은 고개와 고비를 넘고 내 나이 40의 고개에 이르러 겨우 이층에 화실을 얻고는 고달픈 역경 속에 지금 나는 서글픈 행복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 눈물과 땀으로 해서 내 체내에는 수분이 말라 있는지도 모른다.

하늘 높이 무엇인가 신호를 하는 안테나 광선에 불안을 느끼는 것도 그러한 탓이겠지만 서기 瑞氣를 머금은 산의 맑은 공기는 내 몸에 윤기를 돋구어 주고 새 힘의 터전을 마련해주는 것 같다.

나는 다다미 위에다 커피 빛깔의 담요를 깔았다. 그리고 담요 위에다 여러 가지 화구를 놓고 우선 간단히 붓을 잡아 보았다.

지금 나는 지나간 날 어려운 고개를 넘기고 미래의 고개, 새 고개를 바라다보면서 정적 靜寂인 상태에 놓여 있는 것 같다.

폭과 농도 濃度와 조시적 造視的 인 면에서도…

화초밭에 날아든 뭇나비들이 어둠과 비를 피해서 어느 이파리 아래 깃을 재우고 잠을 자는지.

누군가 산 중턱에서 <나 혼자만이>를 부르고 있다. 은은한 소리가 산속으로 퍼지고 산 속으로 스며들고 있다.

여름이 오고 가을이 오고 산과 하얀 길과 교회와 나무가 흰 눈으로 덮이면 내 화실도 그때는 기름기와 윤기가 자르르 흐르고 내 건강도 좀더 좋아질 수 있다는 그런 환상을 해 본다.

아담한 이층 건물이 우뚝우뚝 솟은, 내 집이 있는 마을에 비가 내리는 밤 경치는 마치 동화의 세계 같기만 하다.

그래서인가, 그러한 세계에서 산을 바라보며 생각하는 일들은 산만한 대로 꿈보다도 아름다운 것이다.

 

恨 은 보라빛

동네 친척집에 경사가 나 타관에서 새색시가 온 날이면 어머니 농 속에서 남색과 적색 치마가 꺼내어져 나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일이 종종 있었다. 내가 본 어느 새색시는 단속곳 위에 남 藍치마를 먼저 두른 다음 붉은 치마를 두르고, 노랑 저고리를 맞춰 입고 어디서 빌려온 원삼 족도리를 걸고 차일 밑에서 폐백을 올렸었다. 모란 무늬가 띄엄띄엄 새겨진 갑사 갑사 치마라 남치마가 비치어 떨어져서 보면 깊은 샘 속에 깔린 듯한 신비한 보라빛으로 보였다.

지금 생각하니 무엇인지 그 빛깔이 한 恨과 인연이 있는 빛깔처럼 느껴진다.

물론 어머니의 농속에서 들려나갔다 돌아온 치마는 어머니가 아버지와 백년가약을 맺은 날 입었던 치마였다.

앞이마 위 머리가 유독 허렿게 센 팔순 가까운 어머니가 누워 계신 방으로 들어가 묻는 말이,

“엄마, 그 엄마 시집올 때 치매 말이시 남치매, 붉은 치매 있었제. 저구리는 안보이든디 노랑 저고리였고?”

“배추색 저구리에 반호장이제.”

상상만 해도 울고 싶도록 곱고 아름다운 빛깔이들이다.

지금의 어머니 목소리는 삭아 가라앉았고 내 목소리 역시 어느덧 그렇게 되어 버렸지만 어린시절 집안에 울려퍼졌던 엄마소리.

어느 초가을, 나는 아버지를 따라가다 목이 말라

“아부지, 물 묵고 자와…”

아버지는 이것 야단났다는 시늉을 하더니만 주위를 휘이휘이 훑어보고, ‘옳지’ 하는 표정으로 물외밭에 달려가 노오랗게 센 씨오이를 싸서 톡칵 부질러 주면서

“아나, 이 국물을 빨아 묵어라.”

목을 축여주었다.

내가 자라지 우리집은 몰락했고 해방이다, 6.25다, 또 나의 불행한 결혼에 이어 여동생의 죽음, 그 불운의 소용돌이에 말려 시련을 받고 있을 때 아버지는 약도 제대로 쓰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셨다.

나를 따뜻하게 감싸 주고 보호해 주었던 혈육들이 하나둘 세상을 뜨고 지금은 어머니와 동생이 있을 뿐이다.

한 恨이란…. 깊은 우물 속에 깔린 듯한 신비한 보라색, 파아란 담배 연기가 흩어지는 분위기, 홍두깨에서 돌돌 풀려 나온 빛깔, 다듬이 방망이 소리, 신경질이 섞여 화사하게 울려퍼진 목소리, 홍타령 곡조, 이제는 삭아 가라앉은 소리, 무턱대고 야산을 걸어 헤치느라 풀밟는 소리, 그 빛깔과 소리에서 어슴푸레 한을 느끼지만 한이 무엇인지, 좋은 것인지 슬픈 것인지 나는 아직 모른다. 나에게서 사라진 그들의 영혼들은 어디로 갔고 내 영혼은 어디에서 와서 한평생 살다 죽으면 어디로 갈 것인지….

 

자살환상

‘자살을 하고 싶을 때가 있다’ – 0

‘우리 아버지는 좋은 사람이었다’ – 0

‘집안에서 누가 나를 괴롭히는 자가 있다’ – ?

나에게 주어진 장황한 3백 80항목의 인성검사지에 긍정하는 0를 표시해 가다가 열일곱 번째의 문항에서는 잠시 망설이게 된다.

연야 連夜의 불면증에 시달리다가 끝내는 가위눌리기까지 했고 날이 새면 그래도 일밖에 없다는 신념으로 흡사 여수 女囚가 수를 놓듯 으깬 물감을 화판에다 문질렀다.

 

불현듯 함박꽃이 나타나 치마폭 같은 검은 꽃자락으로 달콤하게 이리 오라고 손짓하며 자살 권유를 하는 듯하다. 죽음은 아름답고 인생 마지막의 쾌락이라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찰나

“쏘지 말라….”

중세기 상의 喪衣를 휘감은 마상 馬上의 여장부의 고함이 총성을 멈추게 하고, 아들을 되찾기 위해 병정들을 동원했던 어머니는 아들을 잃어도 다치게 할 수는 없었다. 몽유병을 앓는 성주 城主이기도 한 아들이 집시 추장딸 싱고아라를 따라 어머니도 성 城도 버리고 집시 대열에 기어가는 장면이다.

“우리 아버지는 좋은 사람이었다” – 무엇을 갖고 아버지를 좋다 그르다고 해야 하는지, 타계하신 아버지를 불쌍타는 생각은 했지만 한번도 보고 싶지는 않았다. 생존시의 아버지를 나는 미워했다. 노상 남들도 자기 같은 줄 알고 믿었다가 속고 실패한 위대한 피해자였기 때문에 딸린 식솔들은 불행했다. 그러나 서슴없이 좋은 사람이었다고 0 표를 그리고 나니까 눈물이 구름같이 피어오른다.

열일곱 번째 항목에 이르러 나는 커피, 니코틴이 치석 齒石처럼 끼여 가늘어진 식도 식도에 거듭 갈색 액체를 들이켜면서 연기를 뿜어냈다.

샅샅이 뒤진다면 우리 아버지를 닮은 사람이 분명히 한 사람쯤 있을 것도 같은데 어쩌면 그건 나 자신인지도 모른다는, 이를테면 이 집의 여가장 女家長, 내가 이끄는 권솔들에게서 은근히 원망을 듣고 있을지도 모르는…. 나를 괴롭히는 자는 나 스스로인 것만 같아서 ‘기다’ ‘아니다’ 어느 쪽에 긍정 표시를 해야 좋은지 망설이고 있는 것이다.

나에게 이 숙제를 안겨 준 의사선생은 안팎 생활을 절대 분리시켜야 한다고 했지만, 그러니까 환상과 현실의 분리가 정신건강에 좋다는 것이었지만 아버지를 닮아 나는 연기 演技 가 서투르다. 오로지 나이를 먹은 공으로 세파를 간신히 헤쳐 넘어가고 있다고나 할까.

가난하게 살 때 ‘춘희’를 돌봐 준 백작같은 남자나 영화 <모로코>에서 선전수전 겪는 동안 젓갈같이 폭 삭아버린 무희 舞姬 말리네 디트리히를 끝까지 사랑으로 감싸 주던 품위있고 오만하지 않았던 중년 부호 신사 아돌프 멘주 같은 사람을 만나고 싶었었다. 그건 물론 나의 환상 부분에 속하는 것이었고, 그 비현실적인 환상이 초로 初老도 고비를 넘어 버린 나에게 속삭이듯 달콤하게 오라고 손짓하는 검은 함박꽃의 유혹으로 변장해서 솟아오르는 것일까. 또 그래야만 이 그림을 그리고 살 수 있는 것일까. 아니면 원을 풀지 못하고 일찍 죽은 나와 가까운 어느 망령이 나를 그리워하는 것일까.

‘아모오레…’

화장품 광고라기 앞서 영화 <형사>의 주제가를 상기시켜주는 젊은 여자 목소리가 전파를 타고 귓전에 들려왔다. 기분이 참 좋다.

마가레트가 하늘거리는 초원을 긴 머리를 휘날리며 소녀가 달려오고 있는 풍경이 눈에 선하게 어른거리고 몇 곱이나 심신이 젊어진 것 같아 거울을 들여다 본다.

‘아 모 레 —‘

머언 과거에서 들려오는 소리, 파릇파릇 봄이 오는 소리, 어여쁜 미래의 소녀가 외치는 소리, 날 살리려고 ‘쏘지 말라’는 커다란 어머니의 소리를 듣고 나는 행복한 여인상을 초원을 배경으로 그려보소 싶은 충동을 가슴 뿌듯이 안아 본다.

편지 몇 무더기 속에 국제우편이 한 장 끼어 있다.

장녀 長女 에게서였다. 지난해 그를 멀리 보내놓고 편지가 올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렸던 나다.

그녀 편지는 언제나 표범이 두 마리씩 그려진 카드같은 종이에 사연이 얽혀져 있었다. 이번에도 역시 표범이 그려져 있다. 황량한 광야를 흐트러진 머리에 맨발인 아라비아 공주가 표범을 몰고 가는 처참한 그림이었다.

가슴이 아프다. 나 젊었던 시절에 살기 위해 몸부림으로 뱀을 주제로 한 그림을 그렸지만 그때의 심경을 돌이켜 상기해 볼 때 딸아이의 마음은 나밖에 모를 것 같기만 하다.

징그럽고 무서운 뱀을 그림으로써 생을 갈구했고, 그 속엔 저항과 뜨거운 열기가 공존하는 저력이 심리의 저변에 깔려 있었다.

표범도 마찬가지다. 분수를 넘지 않게 보다 충족되리라는 미래를 보고 좋지 않은 여건에서 몸부림치는 그녀의 사정은 사연을 읽지 않아도 눈에 훤할 뿐이다.

살고 보자는 뜻이 얼마나 아름답고 힘겨운 일인가.

그런데 나는 왜 때때로 자살을 환상하는 것인가. 그랬다고 전파에서 새어나온 ‘아모레–‘ 세상 모든 사람이 흘려 버리고 마는 그 하찮은 ‘아모레’ 를 부르는 소리에 또 끝없는 희망의 나래를 펴고 살고 싶어하는지 모르겠다.

 

고독의 날개

심 봉사 심 학규는 ‘청’이가 불쌍하고 그리워 지난날 딸과 함께 놀던 망석대에 올라 보이지 않는 눈으로 싱그러운 녹음 방초와 첩첩한 산을 보며 통곡을 했다.

자연이 무성할수록 인간의 마음은 슬퍼지는 것일까.

나 역시 겹벚꽃이 방울방울 피기 시작하는 계절이 오면 심학규 못잖게 서러워지고 괜스레 짙은 우수의 올가미에 몸부림치는지.

올해도 예외없이 계절 알레르기로 아픈 나의 상처를, 흡사 선녀가 머큐롬을 발라 주듯 어루만져 주는 손길이 있었다.

하나는 외화 外畵 <속 대부: 續 代父>였고  또 하나는 세종문화회관 전시장의 ‘프랑스 후기인상파전’에 걸린 오딜롱 르동의 <날개 달린 사나이>라는 한 점의 소품이었다.

고독에 지친 사나이는 홀로 광명을 찾아 날고 싶은 몸부림에 헤매고 있었다.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한정된 인생여로에서 끝없는 발전에의 욕망 때문에 죽음을 망각하기도 하는 인간, 그것이 인생인지도 모르겠다.

사회와 가정에서의 고독 속에서 이해와 사랑으로 감싸 줄 사람이 없을 때 의지가 강한 사람일수록 자학하거나 이상향에 대한 바람이 강해져 신화 신화를 찾게 되고 뭇 괴기신 怪奇神 들과 대화하고 매력을 느끼게 되는가 보다.

르동의 초기 일련의 작품들, <날개 달린 사나이>를 위시해서 <일목거인 一目巨人> <아폴로의 전차> <천마 天馬>와 <칠두사 七頭蛇> 그리고 역시 날개가 달린 사나이를 그린 <스핑크스> 등에서 그 시절의 그의 상황과 심정을 너무나 잘 알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자화상 앞에 예수의 출현을 그린 기도하는 분위기의 작품은 환상적 작품의 일면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중기 中期까지 무척 고독했던 모양인지 이 시기의 그림을 보면 하나같이 악몽의 매력이라고 할까, 세계의 불가사의와 환영, 생명의 신비와 그 발아 發芽를 흡사 에드가 알랜 포우의 소설같은 괴기성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르동의 괴기성과 전육적 표현은 당시 파리 화단에서 냉시와 묵살밖에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던 르동은 40세 되던 해, 따뜻한 산 여신 女神을 만나 결혼하고 나서 비로소 날개가 필요없게 되고 스핑크스난 괴기신에게서 해방되었지만, 오히려 그 괴기성이 밑거름이 되어 몽환적이고 요요 妖妖 한 이향 異香이 가득한 꽃들, 아네모네, 라일락, 팬지, 미모사, 아스파라거스, 안개꽃 그리고 화병에 담긴 그 하이칼라 꽃들이 어두운 공간 속에 별처럼 태양처럼 반짝거리는 그림들이 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반 고호, 고갱 등 개성이 강한 화가들과 나란히 후기인상파 대열에 속해 있는 르동은 누구도 갖지 못한 그만의 세계 속에 묻혀 있었다.

파리 중심가 개선문이 있는 상젤리제에서 꽁꾸르 광장 가까이 걸어 내려가면 오른쪽 플라타너와 마로에니에가 우거진 도시의 숲속에 쁘띠 팔레 미술관이 있고 그곳 2층에 르동 만년의 꽃그림들이 많이 걸려 있다.

현대에도 눈에 번쩍 뜨이는 호화롭고 아름다운 꽃그림이 많이 있기는 하지만 르동의 작품에서처럼 섬뜩한 감동을 주는 몽환적 夢幻的인 요기성 妖氣性이나 영혼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화가의 일생이란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젊은 시절에는 가정과 인간에의 애정이 캔버스에 물감을 문지르는 고통과 황홀감과 공존하다가도, 깊이 외길로 빠져들다 보면 가정도 사랑도 혈육마저도 떨쳐버리게 되고 고독과 정면으로 마주보며 싸우게 되는 한평생이다. 또한 세월이 흘러 나이를 더하게 되면 새삼스럽게 만능 萬能의 괴기신이나 스핑크스, 자기를 위해 나타나신 듯한 예수를 원해 보지만 르동의 몽환적 매력이 불러일으키는 감동이 서린 그런 그림은 좀처럼 볼 수 없게 된다.

나 역시 쑥스러운 얘기지만 젊은 시절부터 건강한 탓으로 보통사람들처럼 결혼도 하고 사랑도 하며 덧없는 곡절도 겪으면서 인생이 피곤하고 고독해 50이 넘은 나이로 악몽에 시달리고 가위에 눌려 이불 속에서 뛰쳐나온 적이 한두 번이 아니지만, 그 괴이스러운 몽상을 화판에 옮겨 보려는 용기는 있어도 그림이 잘 되지 않는다.

르동은 내가 세상에 태어나기 8년 전에 고령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나는 지금 50이 넘은 나이로 그가 초기에 겪었던 그러한 고통속에 잠겨 역시 등위에 날갯죽지를 달고 꿈과 이상을 찾아 먼 하늘로 날아가고 싶어하는 것이다.

 

아버지와 고독

날씨가 으스스해지는 저녁 나절, 언제나 마찬가지로 전기도 가고 촛불을 켜 놓고 나는 뭔가 좀 생각하고 싶어서 홀로 앉아 있었다.

저녁을 먹고 골목길에서 한바탕 뛰고 돌아온 일곱 살 짜리 딸 아이가 내 곁으로 다가오더니 (이마에 건강한 땀이 망울망울 한 채) 내 목에 감겨 있는 마후라를 스르르 풀어서 엉뚱하게 제가 목에 감고 한 끝을 머리에 써 본다.

그 무심코 하는 딸 아이의 하는 짓이 문득 외할아버지, 그러니까 아버지 생각을 하게 하였다.

아버지께서는 그야말로 무골호인이어서 그저 평생을 손해만 보시다가 돌아가신 것 같다. 나는 그런 아버지를 늘 원망했고 미워했던 것이다. 그러나 요즈음에 와서 이따금 느껴지는 것은 아버지는 나에게 묘한 마음의 그림자를 심어 주시고 가신 것같이 느껴진다. 그 하나는 내가 어렸을 때, 아버지께서 카아키 빛깔의 양복을 새로 해 입으시고 ‘어떠냐?’ 고 어머니한테 묻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물어 보시던 일을 생각해보면 지금 내 생각으로는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그 무슨 고독(?)을 느끼고 계셨던 것 같다.

또 어느 날 뜰에 영산홍이 활짝 피어 있는데 홀로 양팔을 뒷짐을 지고 그 꽃가지 사이를 어슬렁어슬렁 거니시면서 콧노래를, 그것도 한이 많은 남도 노랫가락을 읊으시던 것이 어쩌면 아버지는 그때 고독에 잠기시어 외로와했던 것이 아닌가 하고 지금 생각해 본다.

차차 나이가 들고 세상 물정을 알게 될 때, 아버지는 경제적으로 몰락하셨고 그래서 아버지는 더욱 그의 마음은 외로움으로 어두워졌을 것이고, 그것을 보아온 나, 또한 그러한 기분을 이해하게끔 직업 (그림, 화가)에서 얻은 감상적인 예민성이 나도 부지불식간에 조성되어 왔다.

내가 첫 결혼에서 첫딸을 낳고, 그 애가 두 살 쯤 됐던 해인가 보다. 그 시절에 우리 집안은 물질적이거나 정신적인 여유가 도무지 없었다. 그렇기에 겨울날의 모진 북풍과 함께 우리 집에는 우울과 빈곤과 애수가 한꺼번에 휘몰아 들어왔었다.

이러한 비애의 바람을 피하기 위하여 나는 딸 아이에게 푸른 빛깔의 보자기를 씌워 줬더니 그때, 아버지는 아이를 안고 ‘핫하하…. 카츄사로구나’ 하시고 차디찬 웃음을 함빡 털어 놓으셨다.

옳다, 이럴 때나마 웃어 보자 하는 식으로 카츄샤의 생부 생부 톨스토이가 그린 위대한 인간성이나 사상성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이야기지만 아버지는 젊었을 때 그래도 신파 연극의 카츄샤쯤은 보실 수 있는 마음과 돈의 여유가 있었던 것, 그만한 멋은 알고 있다는 듯이 느껴지는 애처로움을 나는 느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그렇게도 마후라 한 장의 조그마한 일이 고리를 물고 이러한 옛일을 추억케 하는 것이 역시 어느 모로는 아버지의 몰락하시던 그때의 심경과도 비슷한 것이 있는 게 아닐까?

그러고 보니 제법 나이를 먹었나 보다, 공연히 아버지와 같은 애수를 스스로 향유하려는 것을 보니…

그러나 사람은 될 수 있으면 사색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을 것 같다. 가을에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지는데도 그야말로 마이 馬耳 에 동풍격인 것보다는 비록 값싼 감상이라도 좋으니 생각에 잠겨 보면 그만큼 괴로움이라도 얻는 것이 되고 거기서 어떤 탈피와 비약이 있을 성싶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내 조상의 누구한테서인지는 모르나 고집이라는걸 물려 받은 모양이다. 게다가 아버지의 고독까지도 … 만약 아버지의 선량하고 조용한 고독을 물려 받지 않았던들 그림을 못 그리게 됐을는지도 모를 일이고 그렇지 않으면 남이 보기에 행복할 것같이 보이는 내가 왜 아버지의 고독을 새삼스레 회상하면서 쓸쓸해 할 것인가.

지금 여기까지 쓰고 보니 위에서 말한 것 같은 그 영향력이 강했던 아버지를 나는 왜 그 시절 (아버지 생존시)에는 이해는커녕 저주했었는지 모르겠다.

이것은 오늘에 와서 나의 정말 숨김없는 고백이 되리라.

 

엄마의 자장가

‘손 선생님, 이 메주 같이 생긴 애를 좀 봐 주세요….’

나는 홍역 끝에 쇠약해진 후닷닷을 외할머니 등에 업혀 손 소아과롤 보낼 때 이런 사연의 글을 의사에게 보냈다.

멀쩡하게 생긴 아이를 메주 같다고 겸손 이 아닌 기묘한 자학을 하게 된 것은 후천적으로 내게 싹튼 가난이 가져다 준 비굴성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이와 같은 비굴감이 공연히 쓸데없이 우쭐거리는 사람들 앞에서 그 사람들의 자존심과 우월감을 비위 맞추어 주어 내 입장과 형편을 유리하게 만들어 주는 것을 알았고, 또 이 선 善도 아니요 악 惡도 아닌 선심이 가끔 어처구니없는 희비극 喜悲劇을 자아내게 하기도 하였다.

자기 제자의 아내를 보고 선뜻 ‘사모님’ 하고 불러 놓고는 아차 싶어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을 어쩔 줄 몰라 했던 일 같은 것.

사실 메주 같다는 후닷닷은 메주 같지는 않았다. 그 애가 겨우 마루를 엉금엉금 기어 다닐 때 이웃집 아저씨가 보고 귀엽다고 10환짜리를 손에 쥐어 주면서

“애가 매력이 있어요.”

했던 것을 보아도 그렇고,

“엇치어 엇치어.”

하며 재채기를 할 때 쌍꺼풀 눈을 가물거리면 어미된 내겐 비할 바 없이 예쁘게 보였다.

가정부 등에 업혀 마당 감나무 밑에 있는 애를 보고 부지깽이로 밥솥에 검부러기를 밀어 넣으며 나는

“후닷닷 —-“

하고 놀려 보았더니 아이는 이 소리를 듣고 나를 돌아보며 입을 한없이 벌리고

“께 께 게.”

하고 좋아한다.

“후닷닷—“

“께 께 께.”

포대기 속에서 홀랑 빠져나올 듯 뛰며 좋아한다. 그게 그만 “후닷닷”이 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그런 이 후닷닷은 어려서부터 시련만 겪었다. 네 살 때 외할머니가 어느 교회의 유치원에 데리고 가서 입학시험을 보게 했는데 애들에게 교실 안을 한 바퀴 달리기를 시켰을 때 후닷닷만이 두 바퀴 돌아서 모두가 웃었고, 등록하라는 쌀 두 말이 없어서 그만 포기하고 말았다.

국민학교 1학년 때 4학년인 누이 남미장과 함께 서울 매동 국민학교로 전학하게 되었다.

안개 같은 비가 내려 교정의 라이락꽃이 한결 애처로운 태를 보이던 때

“멀리 시골에서 온 학생이예요. 오늘부터 여러분과 동무가 되는거예요. 잘 부탁해요.”

담임 선생이 이렇게 말하면서 피부가 거무잡잡하고 목이 가는 남미장의 단발머리를 쓰다듬어 주었고

“삐약삐약 병아리 노란 병아리 —-“

손가락을 꼬아 돌리면서 삐약삐약을 외치는 후닷닷의 교실 분위기는 여자 선생의 음성과 표정이 소리없이 내리는 비 때문이지 나에게 모진 텃샘을 강요하는 것같은 고독감을 일으켜 주었다. 아버지없는 남미장과 후닷닷을 나 혼자서 서울 학교에 전학시켰다는 탓 때문일까.

쫑쫑이 태어나기 전에 우리는 누상동에 작은 초가집을 마련할 수가 있었다.

5월이 오면 아카시아꽃이 피어 서정적인 향취를 풍겨 주었지만 그 초가 지붕은 때대로 나에게 화끈한 콤플렉스를 일으켜 주었기 때문에 나는 아무에게도 내 집을 알리지 않았다.

쫑쫑이 아버지가 안방에서 미도파를 얼러 주는 소리가 나면 아버지가 없는 후닷닷은 할머니 방에서 팔베개를 하고 누워서 미도파의 웃고 웅얼거리는 명랑한 소리를 들으며 혼자서 웃고 있다. 그때 그 어진 눈빛은 아무도 저주하지 않는 악을 모르는 맑고 귀여운 것이었다.

봄이 오면 나는 멀리 우이동같은 곳에서 후닷닷을 데리고 동백꽃을 스케치하기도 하고, 맑고 쓸쓸한 공기를 흠뻑 둘이서 마시기도 했다.

나는 어릴 때 시골에서 자라면서 산에 올라가 진달래, 찔구, 손쿠 같은 맛과 향기 속에 묻힌 시간을 퍽이나 즐거워했다. 그리고 그게 후일 나로 하여금 그림을 기리게 하는 소인 素因이 됐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러한 생각을 하면서 진달래도 찔구도 없는 소나무 밭에서 잎의 향기와 바람을 마음껏 후닷닷에게 마시게 했다.

경쟁 의식이 강하고 공부 잘하는 남미장이나 뒤에 태어난 미도파보다 어딘지 나의 어린시절의 모습과 행동을 닮은 후닷닷은 나뭇가지에 걸린 허호아한 먼 하늘의 달처럼 언제나 내 마음에 불안과 연민의 정으로 걸리는 것이다.

후닷닷은 그림을 곧잘 그렸지만 그림에 몸서리가 난 나는 후닷닷의 고사리같은 손이 크레파스를 쥐고 잇는 것이 오히려 저주스러워서 고의적으로 그 소질을 뭉개 버리다시피 했다.

그가 중학교 입학 시험을 보았을 때 우리 집안에서는 처음으로 불합격이라는 기록을 세워 주었다. 그러나 아귀지옥의 문지가같은 얼굴들의 소위 사친회 간부들이 돈을 세는 사나운 분위기를 들여다보며 H 중학을 보결로 입학시켜 주었다. 그 무렵 나는 돈을 마련하기 위하여 여기저기 울고 다니다시피 했는데 뜻밖에도 동네에서 거래하고 있는 연탄 가게 영감님한테 가서 사정하여 거액의 수표를 잠시 빌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게 마감 5분 전의 일이라 나는 허둥지둥 치맛자락을 끌고 달음박질쳐서 담당자 코 앞에 수표를 밀어 대었던 것이다.

후일에 알았지만 후닷닷을 구해 준 수표는 남편에게 이혼을 당하고 위자료로 받은 어느 여인의 쓰디쓴 변놀잇돈이었으니 인생이란, 돈이란 참 요지경 속이다.

그 야속한 상처가 아물기 시작한 3년 후인 요즈음 또다시 후닷닷의 고등학교 불합격 소식이 들어왔다. 어릴 때 유치원 시대부터 한 번씩은 꼭 치러야 하는 불운이 웬일인지 후닷닷한테는 좋은 시련이 것 같게만 생각된다.

2차 시험을 보이려고 나는 후닷닷을 데리고 K대학이 바라다보이는 소나무 사이를 거닐었다.

잔설이 희끗희끗 언저리에 피어 있고, 거닐기엔 발이 시리지만 소나무 잎은 이른봄 뾰족이 움트는 시금치처럼 생기가 돈다. 맑은 공기를 실컷 마셔 본다.

힘에 겨운 돈을 구해야 하고 치욕적인 대접을 받아 가며 나의 후천적인 비굴한 모습이 또다시 벌거벗고 나서야 하는데도, 나 혼자의 힘으로 후닷닷을 고등학교에 넣어야 하고 또 3년 후 대학에도 되풀이될 이 고역을 미리 각오하면서도 그 애는 밉지 않다. 그것은 후닷닷이 메주 같이 생겼고 맑은 눈에 악이 엿보이지 않아서도 아니고, 끊을 수 없는 모정 때문도 아니고, 그 애의 아버지 없는 처지가 가여워서도 아닌, 그 애 별명을 후닷닷으로 지은 그때 이미 내 마음 속에 굳어진, 나로 하여금 그림을 그리게 한 그 소인 때문인 것이다.

 

눈이 내리는걸 보면 공연히 흐뭇해지면서 술 생각이 난다. 그러나 진정 술을 나누고, 마시며 즐거워하고 마음 놓고 울분을 토로할 만한 벗도 없다.

외풍이 들어와서 손이 시리고, 침침한 방안에서 작품을 구상하다가도 아이 울음소리와 여러 잡음이 들려오면 구상은 여지없이 개어지기 일쑤이고, 광막한 광야에 홀로 서 잇는 듯한 외로운 마음은 발을 구르며 울고 싶어지기까지 한다. 그럴 때마다 집을 뛰어나와 술을 마신다. 그러나 웬일인지 취해 본 기억은 거의 없다. 취해 보고 싶어도 취해지질 않는 것이다.

내가 아주 바보술을 배우기 시작한 것은 난리가 나고 수복한 후, 이렇달 벌이가 없을 때였다. 그것이 바로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진 눈 내리는 계절이었다고 기억된다. 고등학교를 다니던 아우는 의용경찰이라 하여 긴 총을 어깨에 메고 항시 집을 비웠고, 누이동생은 줄곧 병상에 누워 있어야 했다. 게다가 나는 그 지방에서 ‘종군 從軍 화가단’ 부단장이란 괴상한 감투를 쓰고 실속없이 파마 머리에다 군복까지 걸치고 다녀야 했다. 그때 일과가 아침부터 막연히 돈을 구하기 위해 용기를 내어 나서보기는 하나 결국 귀착지는 치과의 S의 널따란 안방이었다.

S치과의 부인이 치과의요, 주인은 같은 화가인 종군화가 단원이었다. 그들 내외는 자식이 없는데다 경제적으로 유복했기 때문인지 심심풀이로 매일처럼 손님을 청하여 술 파티를 열었다.

그 무렵 모인 인간들의 표정에는 누구 하나 희망이나 환희의 빛이라곤 지니고 있지 않았다. 오직 지쳐서 마지막 상태에 있는 감각 속에서 술을 마시고 악을 바락바락 쓰고 노래를 부를 뿐이었다.

나는 어둠이 닥쳐오면 술기운이 주는 용기로, 다시 내일 어디든 가서 돈 말을 해보려고 하고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어느 날 누이동생이 기침만 멈추면 살 것 같다고 했다. 나는 그 처방이 고양이를 잡아 먹이면 효과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막상 고양이를 구하려 드니 그 흔한 줄만 알았던 고양이마저 흔적도 없이 나의 손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럴 무렵, 어느 경찰관이 친구로부터 요리집 부뚜막에서 자란 고양이를 잡아두었으니 찾아 쓰라는 기별을 보내왔다.

나는 고양이를 맡겨두었다는 S서점으로 달려갔다. 연일을 내려덮인 눈이 나의 버선바닥을 적셔 축축하고 사늘한 습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작음 표범같은 암코양이는 나의 손에 목덜미를 눌려 간드라딘 소리로 이따금씩 ‘야옹 야옹’ 울었다.

정신없이 걸어갈 때였다. 어디선지 ‘누우…’하는 소리가 들렸다. 흘끗 돌아보니 경찰의 보초로 낡은 무명의 군복을 입은 아우가 눈이 배어 하얀 ‘지까다비’의 발목을 교차로 구르며 떨고 서 있는 것이 아닌가.

S치과의 교수가 거들어 준 고양이의 시체를 싸들고 ‘어머니, 꿩을 구해왔습니다’ 하며 ‘꿩’에 다 액센트를 넣었더니 방안에서 ‘성…’ 모기같은 누이동생의 소리가 들려왔다.

누이동생의 죽음은 가까이 다가오고, 나의 주량 酒量은 늘어만 가고…

그러나 그러한 비극 속에 실오라기만한 환희도 내게 따랐던 모양이다. 환희라기보다 ‘서글픈 환희’라고 하는 것이 오히려 적합할는지 모른다.

나는 무슨 생각에선지 꽃과 해골을 작품화한 일이 있는데, 무언가 한가지 모자라는 듯한 불만에서 작품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때 나를 따르는 소년과 친구 집에 초대를 받아 뜰에서 뜯은 시금치 나물에다 막걸리를 대접받게 되었다. 비록 막걸리일망정 유쾌한 그 좌석에서 내가 작품 때문에 신경을 쓰고 있는 줄 아는 그 소년은 ‘나비’를 안기게 하면 어떠냐고 했다. 나는 나비 소리에 하고 반가와서 소년의 싱싱한 볼을 꼬집어뜯고 모두 웃었던 것이었다.

눈이 내리면, 그리고 술을 마시게 되면 한번은 꼭 내 머리 속을 스쳐가고야 마는 추억들의 하나이다. 그래서 나는 취하지 않는지 모른다.

 

그림을 그리다가 막힐 때 좀더 머리를 짜내기 위한 휴식으로 ‘판소리’를 틀어놓고 듣는 버릇이 있다.

창 唱을 들으면서 담배 한 개비를 피워 물고 연기를 길게 뿜어내면 기분이 나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러는 동안 무너가 머릿속이 시원하게 확 트여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얼른 말해서 창을 듣고 있다가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눈시울이 뜨끔해질 때 짤막한 순간이지만 숨이 꽉 막히는 것 같다가 마치 긴 한숨 모양 담배연기와 함께 숨을 내쉬고 나면 내 마음 속 내 머릿속에 쌓였거나 가라앉았던 찌꺼기가 다 밖으로 배출되는 것 같다.

소리판이라곤 박 초월 창으로 된 한 장이 있을 뿐, 그 곳에 <육자배기>, <심청가> 중의 <망사대를 찾아가>, <춘향전> 의 <이별가>가 들어 있다. 늘 그것만 듣는데도 아직은 싫증이 안 난다.

마디마디 전라도 사투리로 엮어진 사설들, 세상을 원망하거나 울며 하소연하는 듯한 그 애처로운 호소, 이것이 창의 아름다움이요 한 恨의 극치가 아닌지 모르겠다.

망사대를 찾아가서 비문을 안고 “아가 청 淸아” 하고 부르며, “이 애비를 생각허거든 어서 잡어가거라 살기도 나는 귀찬허고 눈뜨기도 내사 실타” 통곡하는 심 봉사의 사연은 그저 짙은 한에 젖어 있다고 하겠다.

그런 심 봉사도 심 봉사려니와 본래 세 남매를 두셨고, 여동생이 애처롭게 일찍 죽어, 나와 남동생이 남아 있는 우리 어머니가 “살기도 나는 귀찬허고…” 식으로 살아가시는 것을 보고 있으려면 나는 심 청이처럼 효성스럽지 못한게 한이된다.

성품이 조용하신 어머니는 옛날에 죽은 여동생 생각을 가끔 하시면서 가버린 여동생이 살아 있었던들, “그 애는 나를 진심으로 생각해 줄 효녀였을 텐데…”하고 한숨을 내쉬시지나 않으시는지.

그런 허상 때문에 더 한스러운지 모른다. 차라리 어머니께서 차분하고 말수 없고 남색을 나타내지 않으시는 그런 어머니이기보다 <심청전>의 뺑덕어멈처럼 주착부리고 “너는 ㅙ 심 청이처럼 나한테 효도로 안허냐” 하셨으면 하고 뺑덕어멈에 대한 향수를 느껴 보기도 한다.

창에 나오는 뺑덕어멈과 심 봉사 사이의 한 대목을 들으면 “심 봉사가 황성맹인 황성맹인 잔치에 가기 위하여 어느날 자사에게 노자 스무 냥을 받고 좋아라 뺑덕네에게 같이 ‘황성귀경’을 가자고 했을 때 내내 같이 죽겠다고 하던 뺑덕어멈니 ‘오뉴월 보리단술’ 변하듯이 변해가지고 “못가것소 안 갈라요, 나는 나는 안 갈라요, 호아성 처얼리 머헌 기럴 누구를 보려고 내가 가요. 영감은 눈이 어두시니 응당 잔치 참려를 허려니와 멀뚱하게 눈뜬 년이 맹인 잔치가 쓸디 있소, 나는 나는 안갈라요” 했다.

이 대목을 들으면 뺑덕어미가 좀 악녀 같으면서도 눈뜬 사람이 오히려 장님 잔치에서 소외될 것을 쓸쓸히 여기는 그러한 한스러운 것이 오히려 웃음을 자아내게도 하는데, 이런 것을 그리워하는 것도 내가 그만큼 생활에 피로를 느끼고 있는 까닭일 것이다.

그러고 보면 뺑덕어멈은 가장 현대적인 요소(?)를 품은 귀여운 여성 같기도 하다. 그런 여인은 많은 사람을 웃길 수 있는 제스처와 사고 思考, 타산 打算을 갖고 있기 때문에 교육만 받았더라면 부러운 현대 여인상이 되었을지 모른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내가 아직 처녀일 때부터 멋장이였던 외조부님의 영향을 받아 유성기에서 흘러나오는 판소리에 일찍 친근했었고, 그래서 명창 名娼 고 故 임 방울 林 芳蔚 의 팬이 되기도 했었다. 그것도 어머니가 좋아하셨기 때문에 나도 같이 좋아했던 것인지 모르나 임 방울의 창은 관능적이고 분명 매력이 있다. 요즘 영화에서도 배우의 목소리가 임 방울의 목소리 같은 매력을 지닌 것이 있는데 가령 007 시리즈의 주인공 숀 코넬리라든가 로렌스 올리비에, 리처드 버튼, 마론 부란도는 목소리에 여인의 마음을 사로잡는 듯한 매력이 있다.

어머니가 기분이 좋은 날 가끔 푸념하실 때가 있다.

“나는 좋은 사우(사위) 하나 얻을까 했더니 그 꿈이 깨어졌다”는 것인데, 그가 어머니의 한 恨 중의 하나라면 당사자인 나는 어떨까 하고 자문할 때가 있다.

나는 보통 사람이 한 번밖에 경험 못하는 결혼을 두 번 치렀으니 그만큼 인생을 풍부하게 살았다고(?)도 하겠지만 어떤 면으로는 아주 평범한 가정주부로서 행복을 의식 치 못하면서 평온하게 사는 그러한 인생을 경험 못 한 한이 늘 내 가슴에 어려 있다.

내가 그림을 그리다 잘 안 되어서 답답해지면 창을 듣고 때로는 울기도 하고 마음 속에 긴 가스를 배출한다고 했던 대로 내 그림 속에다 아름답다 못해 슬퍼진 사상 思想, 색채 色彩 를 집어넣으려고 애쓰고 있는 것이 바로 한 恨 그것이다. 왜냐하면 내 인생이 어쩌고 저쩌고 식의 그런 범상 凡常 한 하이 아닌, 예나 지금이나 어쩔 수없이 불쌍하고 아름답고 슬픈 혈육관계의 한 같은 것 – 그런걸 내 그림으로써 아름다운 자연에 곁들여 승화시키고 싶어서이다. 그러니까 창도 그렇고, 소설이나 전설 역시 그렇고, 모든 예술이 모두 한을 승화시켰을 때 향기가 있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공연한 ‘후유 — ‘ 소리, ‘죽고 싶다’, ‘아이고…’ 등, 듣기만 해도 피곤하고 매력이 없다.

현실이란 슬퍼도, 제아무리 한 맺힌 일이 있어도 그걸 삼켜 넘겨 웃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럴 때 한이란 것이 생긴다.

이게 인생으로서의 매력이다. 이런 매력 속에서 죽을 때가 되면 아무에게도 폐 끼치지 않고 웃고 죽는 것이 현대의 한이다. 그것을 나는 그림 속에 담으려 한다. 그게 잘 안 될 때 나는 판소리의 한에서 내 머리 속의 한을 끄집어낼 수 있는 것이다.

 

햇볕이 고루고루 쬐고 양지 바른 곳에 서 있는 아담한 양옥을 보면 지금도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이 부러워진다.

나의 지난날을 회상해 보면, 내가 화가라는 숙명의 탓인지는 모르지만 다분히 거센 물결을 거쳐왔다고 할 수 있고 다라서 무던히 이사도 많이 했고 집도 많이 갈아치웠다.

그렇지만 한번도 제대로 마음에 맞는 집에서 살아 본 기억은 없다. 거의 무엇엔가 쫓기다시피 별수없이 살아왔었다.

그래 나는 언제나 어릴 때 태평하게 살았던 옛집을 아쉽게 그리워하여 그 모습을 서울의 어느 위치에다 세우고 나의 살림살이와 그림을 배치해 보기도 하고 그 주방을 마음으로 드나들고 그 정원을 산책해보는 등 환상에 잠겨 보는 때가 있다.

그러면서 현실의 답답한 환경에서 숨가쁘게 일하고 숨쉬다가 그 환경에서 벗어나려고 무진 애를 써왔다.  그러니까 어떻게 새로이 이상적인 집을 마음으로 설계해 본다거나 하는 그러한 허황한 공상을 좇을 수도 없을 뿐더러 오직 더 좀 나은 곳으로 안주 安住하고 싶었던 것인데 물결에 밀리고 밀린 소라껍질처럼 지금 양옥도 아니요 한옥도 아닌 소위 국민주택이라는 곳으로 낙착되었다.

실상 내가 항상 따지고 계산하는 수학이란 엉뚱한 고등수학이 되어서 늘 하찮은 것도 손해(?) 보기 마련이지만 내가 꿈이나마 이상적인 저택을 꿈꾸지 않는 이유도 거기에 있겠고, 또 설사 돈을 많이 벌어서 희망이 성취될 수 있는 처지가 된다고 하더라도 큰 저택에서 무엇인가 오밀조밀 장식품을 진열해놓고 사는 식은 도무지 취미가 없다.

그러나 그림세계에 있어서는 클레오파트라도 잠시 멈춰 가고 싶어할 꿈의 궁전을 그리고 싶다. 말하자면 허술한 공방 工房에서 화폭에다 끝없이 꿈을 펼쳐 모든 아름다움과 바다와 같은 욕망을 채우겠다는 심사일 것이다.

다만 그 공방에서 산이 바라다보인다거나 숲이 보인다거나 조망 眺望 할 수 있는 창이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영화 <태양은 가슴마다>의 한 장면에 헨리 폰다가 집을 짓기 위하여 기둥을 세우기 시작한 현장에서 아들을 보고, “이것이 너의 어머니 방이 된다. 어머니가 산을 바라볼 수 있게 여기 창을 만들었다”고 하는 대사 臺詞가 있었는데 나는 거기에서 퍽 공감을 느끼고 마음이 포근했다.

중년 남자의 처에 대한 애정 묘사를 헨리 폰다는 잘 표현해 주었는데, 그토록 창은 외로운 인간의 호소를 잘 받아들이는 숨구멍이 되어 줄 수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철철이 커튼을 갈아 보는 마음도 즐거움의 하나일 것이다.

나는 흰 레이스 커튼을 좋아한다.

저녁 나절 가볍게 레이스 커튼을 젖히고 창밖을 바라보는 마음은 무엇인지 경건한 기분까지 들게 해 준다. 그래서 나는 모든 희로애락을 커튼 너머 산의 표정이 지어 주기를 기다려 보기도 하는 것이다.

눈 내리는 날의 표정, 비오는 날이 표정, 슬픔에 질린 듯한 가을의 표정 등 아름다운 변화가 내 마음 속을 거쳐 화폭에 흡수되어 오는 혜택이란 고마운 일이다. 그리고 층계가 있는 이층이 그 방이라면 더욱 좋겠다. 층계를 올라가는 과정이 좋다.

이층에서 일할 때 미도파와 쫑쫑이가 펄펄 날아 올라오는 발소리가 듣고 싶다.

커피를 끓여 쟁반에 얹고 올라오는 식모의 발걸음 소리도 기다려진다.

반가운 전화가 오면 퉁 퉁 퉁 튀밥이 구르듯 가볍게 뛰어 내려가서 전화를 받은 즐거움도 재미있을 것이다.

그리고 넓지도 않고 좁지도 않은 뜰이 있으면 좋겠다.

이른 봄, 움이 트고 일찍 피는 앵두꽃이나 매화가 봄비에 젖는 정서 情緖에서 라일락의 향기로 바톤을 이어 받고 덩굴장미, 여러 빛깔의 여름 화초가 차례차례로 피어 주는 그런 정원이 있었으면 화상 畵想도 생활도 한층 즐거울 것이다. 이러한 소망은 내가 그림을 그리기 위한 고등수학적인 주택의 설계도일지 모르나 그것만 갖추면 나는 만족할 수가 있을 것이다.

주방은 대개가 아직 불편하지만 나는 어쩐지 아직도 그 불편한 부엌에 향수를 느낀다. 지난번 검부러기를 모아 불을 지펴 밥을 지었더니 연탄이나 가스불의 것이 따를 수 없는 고실고실하고 맛있는 밥을 먹을 수 있었다.

궁전이나 저택은 화폭 속에 담기로 하고 현실적으로 과히 불편을 느끼지 않을 정도의 햇볕이 쬐는 아담한 보금자리와 그림 그릴 수 잇는 이층방이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지금의 집에서 당분간 떠나고 싶지 않다. 아니 영원히 그럴지도 모른다.

 

분홍꽃의 추억

무슨 꽃이었는지 그 이름은 지금도 모르겠으나 돌담 위를 덩굴이 뻗어올라 연두빛 감도는 잘잘한 흰 꽃이 피어 있었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왜 그런지 나는 그 꽃이 퍽 인상적이어서 잊을 수가 없다.

어렸을 때 초여름이면 우리집에서 그 꽃을 보았지만 얼마 안되어 우리는 딴 곳으로 이사하게 되어 그 꽃과는 하직을 했다.

그 후부터는 영 그 꽃을 보지 못했고 그리고 오래도록 잊어버리고 말았던 것인데 내 작품의 경향이 순사실 純寫實 에서 자기류 自己流로 돌아온 데서부터 그 꽃이 무척 눈에 선하게 떠올라오게 되었다.

호분 胡粉 을 섞은 듯이 푸른 하늘이 한층 부드럽게 깔린 밑을 그 하얀 꽃이 조랑조랑 피어서 꽃 파티를 벌이고 있었다.

동무하고 사기그릇 깨진 조각에다 꽃잎을 따다 동도깨비를 했던 기억이 난다. 물론 초여름이라 뭇 벌레 떼가 꽃 그늘을 배회했으리라 믿지만 어렸을 때 인상이란 오직 푸른 하늘 아래 하얗게 비친 예쁜 꽃이라는 기억뿐이다.

가끔 외국 패션 잡지에서 면사포를 쓴 신부의 하얀 손에 쥐어진 조화 造花가 그와 같은 인상의 꽃을 방불케 해 주었지만 내 기억 속에 살아 있는 꽃은 아니다.

그림을 그릴 때는 많이 생각하게 되고 기억 속에 새겨진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추적해야만 한다.

그러나 나에게는 같은 시각 視覺에서 받아들인 것임에도 형상보다는 색채적인 것이 더 강렬하게 느껴져 색채만이 뚜렷하게 기억에 남고 꽃의 모습이라든가 하는 것은 흐릿하게 흘러가 버리기가 일쑤다.

모란꽃을 보는 인상이 어렸을 때와 성장해서와 가 판이하게 다르기도 하고 실망하기도 했던 것이 그 하나의 예다.

6월이면 하늘을 보고 희게 피기 시작한 그 꽃이 있던 뜰에 또 모란꽃도 피었다. 진홍 眞紅의 모란이었다.

그 후로부터 나는 모란이라는 꽃은 진홍의 탐스러운 꽃잎이 잎사귀도 없는 가지에 은행잎처럼 매달려 피어 있는걸 로만 알았더니 후에 다시 보았을 때 내 기억에 착각이 있었던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 집에서 빤히 바라다보이는 동산에는 고을의 부자가 세운 누각이 하나 있었다. 그들이 성세 盛勢를 이루고 잇는 동안에는 누각도 성황 했고 화초도 성화 성화를 늘 이루었으나 부잣집 영감님이 죽고 그의 동상이 누각 앞에 세워진 후부터 비가 부슬부슬 내려 그 동상을 적시는 날이면 동네 사람들은 동산에 올라가는 것조차 꺼려했다.

그런데 내 기억에 사라지지 않는 것은 초여름이면 누각 앞에 구름같이 피어 오르기 시작한 꽃이다.

석양 노을에 장미꽃보다 짙고 짙은 구름이 피어 오르듯 진분홍 꽃이 피었다.

아낙네들은 그 꽃이 지고 피고 지고 하여 세 번 피면 햅쌀을 먹게 된다고 말했다. 그 꽃은 ‘오리정’에 있는 우리 콩밭가는 공동묘지 부근에도 몇 그루 피어 있었다.

오랜 후 동경 유학을 마치고 고향에 돌아온 나는 어렸을 때 내 발자국이 새겨진 그 길을 이따금 홀로 산책했다.

푸른 하늘에는 솜 무더기가 찢어진 것 같은 흰구름이 깔려 있고 주위에는 맥풍 麥風 이 초록으로 소용돌이치며 치마폭까지 안아갈 듯했다.

무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아진 묘지 부근에 노을빛 구름처럼 피어 오른 꽃도 옛 과 다름이 없었다.

그 꽃은 알고 보니 백일홍이라는 꽃이었다.

지금 나는 일사천리 일사천리, 20년 가까운 옛날을 더듬어 홀로 산책했던 그 무렵의 들길, 꽃, 고향, 젊은 날의 나를 부질 없이 회상하며 세월이라는 걸 새삼스러이 서글프게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 꽃도 이젠 꽃을 피울 차림을 할 것이다.

6월이 다가왔다.

올해는 어느 영혼이 돌아와서 그 꽃을 피우게 할 것인지. 그 꽃과 더불어 쉬고 갈 구름과 바람과 낮과 밤들의 고향의 옛터에는 살고 있는 것이다.

꽃이건, 애정이건 아름다움이란 마음 속에 오래도록 살아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때로는 환멸이 샘처럼 치밀어 올지라도….

 

화려한 슬픔

눈이 녹아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소리가 마치 여름 장마 때처럼 쿵쿵 울려와 잠시 이상한 감정을 일으켜 준다.

자연을 즐기는 편인 나에게는 꽃이 피기 시작한 계절에 눈보라가 치고 집과 나무들이 희게 눈을 얹고 있는 광경이 적어도 시 詩 일수 있고, 그림일 수 있으며, 또한 마음의 사치일 수 있는 것이다.

폭군 네로나 진시황제가 제아무리 세상 천지를 뒤흔들었다 해도 내가 누리는 이 마음의 사치를 맛볼 수 있으랴 하는 생각을 해보면 나는 나대로 흐뭇해지기도 한다. 그래 나는 때아닌 눈보라가 휘날리는 요즘의 날씨에 산기슭의 숲을 바라다보면서 은근한 재미를 보고 있는 것 같다.

실속 없이 마음만 한량없이 부유한 나는 그것을 밑천으로 해서 그림을 그리고, 또 구질구질한 세속에서 벗어나 보려고 애쓴다.

“엄마, 사람이 죽었대. 그래서 시청에서 사람이 나와서 치웠대.”

골목길에서 놀다 들어온 쫑쫑이 정색을 하고 이렇게 말한다.

어느 때인가는 산불이 났다고 헐레벌떡 가쁜 숨을 내쉬면서 달려와 주었고, 지난해 이른 봄에는 이 종태를 산에서 잡아갔다는 뉴스도 알려 주었다.

그토록 동네 안에서 일어나는 잔잔한 비극을 쫑쫑을 통해서 이따금 알 수 있는 만큼 내 생활은 세속과는 멀리 떠나 꿈같은 것만 생각하고 살아오나 보다.

그저 눈에 뜨이는 것만으로 판단하여 평지 주택에서 사는 사람들은 비교적 여유있는 생활을 하고, 산 기슭에 게딱지처럼 붙어 살고 잇는 판잣집 속의 사람들은 답답한 나날을 보내고 있을 거라는 정도는 알고 있다.

쫑쫑이 말한 시체는 결국 게딱지 속에 사는 한 처녀가 죽었다는 것이다.

 

꽃피는 봄을 등지고 처녀가 자살했다는 사연은 유행가 같은 이야기이고 화려한 비극 같기도 하지만 원인이 생활고라니 화려한 환상과는 인연이 먼 이야기다.

그래서 시체가 길옆에 오래도록 누워 있다가 시청에서 사람이 나와 겨우 장사 지내주었다는 것이, 마치 이탈리아 영화의 처자식이 있는 피에트로 제르미에게 사랑을 쏟아온 가난한 처녀가 드디어 자살해 버리는 그 라스트 신을 연상케 한다.

빈민굴의 동네 아저씨, 아낙네들이 불상하다고 눈물을 흘리면서 동전을 한푼 한푼 모아 넋이 빠져 있는 처녀의 부모 앞에 갖다 주는 정경이 왜 그런지 내 마음을 아프게 했는데 나는 지금 그 영화 장면이 자꾸 떠올라 우울해지는 것이다. 그러면서 여자의 일생, 여심 女心, 여자가 자살하는 동기… 이런 것에 공연히 잡념이 꼬리를 물고 이리저리 방황한다.

그 중에서 문득 내가 지난번 일본에 가 있을 때 신세지던 집 안주인의 경우가 생각난다.

교포로서 그리 잘 살지는 못하나 그전에는 제법 잘 살았기 때문에 지금도 허영심만 잔뜩 부풀어 남아 있는 그 집 주인의 부인인 문제의 여자가 공연하게 나를 이리저리 살피고 화가라는 내 직업마저 여자가 그림을 다 그리나 하는 식의 눈초리로 내 일거일동을 관심이 아니고 시기심으로 넘겨보는 게 싫어서 나는 그 집을 하직하고 호텔로 옮긴지 불과 며칠이 지나서 뜻밖에도 한국에서 쫑쫑의 아버지가 날아왔다.

쫑쫑의 아버지와 집주인은 그 전부터 좀 아는 사이였다.

집주인은 쫑쫑의 아버지가 왔다고 우리 두 사람을 자기 집에 초대했다.

방석이 네 개, 나와 그 집 안주인이 마주 앉고, 불타오르는 장미꽃병의 바싹 앞엔 주인, 그 맞은편에 쫑쫑의 아버지가 앉았다.

안중ㄴ은 쫑쫑의 아버지와 주인을 자꾸 바꿔 앉으라고 했지만 둔한 그 집 주인은 전혀 눈치가 없었다.

안주인은 화운데이션으로 피부를 곱게 가꾸어 진한 화장을 하고 머리도 정성들여 빗어 올렸으나 옷차림은 고의로 쉐터에 스커트, 그리고 그 위에 에이프런을 걸치고 맨다리에 흰 커버를 신은 차림이었다.

그녀는 나의 생활을 모르기 때문에, 예술가란 집에서 그저 아침 저녁으로 붓대만 잡고 에이프런도 입을 줄 모를 뿐더러 남편과 어린애 시중도 하지 않는 것인 줄 착각하나 모양 같았다.

그래서 쫑쫑의 아버지에게 가정주부란 이런 것이오 하고 은근히 나를 골려 주려는 게 환히 나타나 보였다.

그러면서도 여윈 나의 목덜미와 양 손목 언저리에 검게 감긴 하찮은 토끼털 블라우스에 넌지시 눈총을 주는 것이다. 그 주인은 솟아오른 덧니가 말해 주듯이 무책임한 표정이지만 호인이라고 해 두자.

주인은 쫑쫑의 아버지를 “형님…” 하고 부르면서 작은 정종잔을 자꾸 권하는데, 그럴 때마다 커프스가 식탁 위에 놓인 홍장미를 건드리곤 해서 까닥하면 화병이 넘어질 것도 같은데 그것이 안주인은 사뭇 염려스럽다는 듯 장미에 신경의 침을 꽂는다.

그날 밤 따라 쫑쫑의 아버지는 목이 아파서 목쉰 소리로 말하는 게 더욱 의젓한 느낌을 주었다.

내가 옆에서 바라다보는 마음이나 그 여인이 지켜보는 마음이나 잡힐 것 같으면서 잡히지 않는 먼 세계의 꿈처럼, 말하자면 쫑쫑의 아버지의 모습은 원효대사와 같은 매력을 풍기고 있었다.

물론 그 델리킷한 여심들을 두 남성들은 알 까닭조차 없는 것이다.

이러한 네 사람의 모습과 식탁 위의 진홍빛 장미꽃은 어딘지 어울리지 않으면서도 두 여인의 마음의 암투를 상징하고 있는 듯 싶었다.

인간의 호기심이란 독신자에게보다도 오히려 임자 있는 사람에게 어린애가 없다든가, 조강지처가 아니라든가, 무엇인지 두 사람 사이에 냉기가 돈다든가 하는 약점을 뚫고 남의 남자나 여자에게 막막한 애정을 느껴 보는 심술이 자기도 모르게 싹터 오르는 성 싶다.

도대체 우리가 이 야릇한 초대를 받은 까닭의 표면상 이유는 내가 한 달 동안 그 집에서 신세를 지다가 호텔로 옮겨간 지 불과 수일이 지나고 게다가 쫑쫑의 아버지가 오고 했으니 그 동안 내게 거듭 실례와 무례를 한 걸 사과하기 위한 초대라고 되어 있다.

생각하면 후천적으로 나에게 지녀진 겸손과 선량(?)과 정직(?)과 인내를 가지고도 나는 한 동안 그 여인 때문에 몹시 나의 신경을 혹사했던 것 같다. 나는 참다 못해 쫑쫑의 아버지를 기다리지 못한 채로 그만 그 집을 뛰쳐나와 버렸던 것이다.

장미가 지켜 보는 식탁에서 두 남성의 취기 醉氣가 높아 갈수록 노상 화제는 여인과 나 사이에 있었던 것, 즉 서먹서먹한 감정을 부드럽게 한다는, 말하자면 두 여자 사이를 화해시켜 주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가 가져다 준 것은 그 여인은 곱게 화장하고 아무렇게나 입은 맵시대로 가정 주부로서의 매력을 과시하는 효과만 노렸고, 반면에 나는 아주 고약하고 그림만 아는, 한 아내로서는 악처가 되고 만 것이다.

원효대사처럼 앉아 있는 쫑쫑의 아버지는 기분이 나쁠 때 술이 취하면 으레 그렇듯이 그날도 나를 어지간히 미워하는 눈치였다.

그 여인은 하나도 잘못이 없는데 내가 그 여인을 싫어하고 호텔로 나왔다 해서 쫑쫑의 아버지는 나를 지독하게 미워하는 눈치였다.

내 귀의 환각인지 어디서 꼭 “뇌 병원으로 가라” 하는 것만 같았다.

나는 언젠가 본 <아라비아의 로렌스>에서 아라비아 왕자의 옷을 걸친 로렌스가 정신병자 수용소에 끌려가 로렌스를 몰라본 하사관에게 마구 두들겨 맞고 어이가 없어서 눈물어린 소리로 껄껄 웃어 대며 정말 미쳐 버린 장면을 생각했다.

그 화려하고 슬픈 드라마를 보잘것 없는 나의 인생과 견주어 보며 나는 서러워했다.

나는 그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왔다.

집주인이

“형수…..(?)”

하면서 나를 붙잡는다.

식탁에서는 쫑쫑의 아버지가 일어서려고 한다.

“오빠(?)”

여자가 부르며 쫑쫑 아버지의 늠름한 몸에 가까이 다가가 무엇을 애원하는 모양이다.

“형수….(?)”

남자는 박차고 나오는 나의 여윈 몸을 부둥켜 안고 못 가게 한다.

진홍의 장미는 어질러진 식탁에 아랑곳없이 그대로 곱게 피어 있었다.

 

매력 없는 내 육체를 그래도 만져 보려는 집주인과 호기심과 “오빠” 하며 쫑쫑 아버지 앞으로 다가서는 그 여인의 심정, 이런 것들로 인해 나는 그 여인과 나의 여자로서의 애타는 가슴, 그리고 그 순간의 서글픔이 생활고로 자살한 처녀의 자살 직전의 심정과 경우는 다르나 본질적으로 상통하는 그 무엇을 느낀다.

 

잊혀지지 않는 로크

때때로 나는 동물이 귀엽다고 생각하기는 하지마는, 막상 기르게 된다거나 누구에게로부터 물려받게 되며는 곤란을 느끼는 일이 많다. 그리고 으레 어떤 동물이건 죽어 버리거나 집을 나가서 행방불명이 되는 수가 많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동물과 나와는 인연이 없는 것이 아닌가도 싶다.

하긴 자식들이 매어달리는 바람에 동물에까지 손끝 발끝이 닿을 사이가 없을 지경으로 바쁘다.

한 가지 예로 내가 어렸을 때부터 우리집에선 여러 종류의 개를 길렀으나 한번도 재미를 보지 못한 데다가 으레 종막이 불행으로 그치는 것이 일쑤였다.

가까운 옛날까지도 나는 그들 개와 우리 집과 인연이 없어서 그런 거라고만 혼자서 생각하고 있었는데 따지고 보면 그러한 것은 핑계에 불과한 것 같다. 우리는 진실로 개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개를 길러서 도둑이나 지키라고 이용할 생각뿐이지, 이렇다 할 세심한 애정을 기울인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개와 인연이 없다는 걸 깨달은 우리가 또다시 오랜만에 개를 기르기 시작한 것은 바로 올해 초여름 어느 날부터였다.

내가 교편을 잡고 있는 H 대학의 여학생이 나를 보고 퍽이나 인자(?)하게 보이니 강아지 한 마리를 선사하겠다고 하기에 나는 그걸 고맙게 받아들였다. 그 여햑생은 강아지를 무분지 상자에 담아서 얼굴만 내놓고 비단보자기에다 싸서 들고 왔다. 거무세레한 잿빛털이 부드럽게 뽀얀 복술강아지였다.

발목에는 국화형의 비스켓이 하나 침이 묻는 채 들어 있었다.

그때 내 머리엔 강아지를 잘 길러야겠다는 생각에 앞서 막내동이가 처음으로 움직이는 완주(강아지)를 보고 얼마나 신통하게 여기며 좋아할 것인가를 상상하고 즐거운 미소를 띄웠던 것이다.

나는 상자 속에서 강아지를 꺼내서 그대로 안고 학교의 전용 버스에 올랐다. 그때 강아지는 주둥아리를 자꾸 내밀어 나의 가슴팍을 파고드는 것이었는데 아마 막내동이가 찾을 젖이 뭍은 유방에 향수를 느낀 모양이었다.

강아지는 수일 동안 우리 방구석에서 밤을 새우게 되고 몹시 깽깽거렸다. 그리고 적당한 이름이 없어서 식구대로 ‘오요 오요’ 했다.

그 놈이 세파트의 새끼요 숫놈이라서 처음에 ‘씨이자’라고 명명했던 것인데, 그 이름이 너무 거창하다 해서 생각하다가 ‘로크’라 부리기로 했다. 로크라는 이름은 물론 미국 영화배우 ‘로크 하드슨’이 귀에 익어서이었지만 내가 하드슨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막연한 어감에서 나온 이름이다.

아무튼 우리 집에선 ‘로크, 로크’ 하고 강아지 부르는 소기가 시끄러웠지만 누구 하나 진정으로 개를 사랑하는 사람은 없었으니 밤에 깽깽거리면 ‘저 놈의 개새끼!’ 하고 욕을 퍼붓는 것이었다.

로크는 상이 제법 귀족적이고, 관록있는 조상을 가진 모습과 어떤 위엄까지 있고 짖는 소리도 근사했다.

로크가 짖기 시작할 무렵 이웃집의 중강아지가 놀러 오기 시작했다. 로크는 그 못난 똥개만 보면 반가와하며 사죽을 못쓰고 좇아서 따라나가는 것이었다. 그러더니만 어느덧 로크의 입에도 똥이 묻어 들어오는 때가 많았다.

무더운 어느 날 점심 때 식모가 하는 소리가 들을 만했다. 이웃집 똥개가 건강 상태가 나빠서 요즈음 주로 빵식을 한다는 것이다.

그 후 수일이 지난 어느 날 해질 무렵 그 똥개는 숨을 거두어 골목 가에 가마니로 덮인 채 쓰러져 있었다.

똥개가 죽자 로크는 똥개로부터 습관을 물려받은 양 밥을 먹지 않았다. 하두 답답해서 방을 사다 주었더니 먹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구 발톱으로 땅바닥에 구덕을 파는가 하면 구석으로 들어가서 아무리 불러도 잘 나오지 않았다. 게다가 홍역까지 하는 모양이었다.

식구대로 로크가 귀찮아졌다. 그러나 죽어가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었고 견족 犬族에 대하여 죄를 짓고만 있는 것 같은 뉘우침마저 일어났다. 그렇다고 해서 개 병원이 어디에 있는 줄도 모르고 명륜동 어귀에서 간판을 본 기억은 있으나 폭양 하에 아픈 개를 안고 걸어서 거기까지 갈 용기도 일어나지 않고 ‘왜 개까지 나를 못살게 구는가’ 하는 역정도 일어났다.

로크는 주사 몇 대와 약 몇 알에 꿈같이 회복하였다.

로크가 회복하자 우리는 또 이사하게 되었다.

그때 우리가 들 집엔 이사 준비가 못되어 보름만 이사를 연기해 달라는 바람에 짐만 옮겨 놓고 염천 하에 어느 이층 마루방을 임시로 얻어 고생하게 되었다. 남의 집 이층에서 보름 동안 셋방살이하는 처지에 개까지 데리고 간다는 것은 지극히 곤란하였다. 무엇보다 곤란한 것은 로크가 주전부리가 사나왔기 때문에도 같이 재울 수는 없었다. 이것저것을 핥고 다닐 것을 생각하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던 차에 잘 아는 복덕방 영감이 자진해서 맡아 주겠노라고 해서 로크는 우리가 이층 마루방으로 이사하던 날 밤 누룽지를 얻어먹고는 복덕방 영감 집으로 끌려가고 말았다.

바로 그 이튿날 로크는 행방불명이 되어 버렸다. 밤을 울다가 지쳐서 도망가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 후 나는 몹시 쓰라린 마음으로 로크를 찾았다.

길가에 중강아지가 꼬리를 흔들고 지나가도 로크하고 불러 보면 사람들의 눈이 묘하다는 듯 내게로 집중하였다.

제일 가슴이 쓰리게 한 환상은 개장집에 끌려가지나 않았나 하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어느 애견가 愛犬家 에 따라갔다면…  이렇게 생각을 돌리고 이따금 그를 축복해 주곤 한다.

생각하면 아무 인연도 없는 것 같으면서도 사람이건 동물이건 마음이 통하지 않는 동체에까지도 인연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서로 만나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떨어져 있고, 아무런 관계도 없는 위치에 서로 만났고 하더라도, 인연은 있는 것같이만 생각이 든다. 그 놈의 로크와 나도 실상 인연이 깊었는지도 모른다.

 

잃어 버린 결혼식

가을이 낙엽을 재촉하자 행복이 소리없이 오붓한 나의 주위에 스며들어온 것 같았다. 이제는 진공 眞空의 숨통에서 뿜어나오듯 하던 한숨도 나올 리 없겠다.

쫑쫑의 시원한 볼 위에 이마를 눌러 비비면 그렇게도 솟구쳐 올라오던 눈물도 나오지 않을게다. 그리고 그 놈의 주먹 쥔 손을 십자가처럼 내 가슴에 얹고 싸늘한 기도를 자세히 취할 필요도 없겠다. 그처럼 쫑쫑의 존재가 나의 마음의 등대였나 보다고 새삼스럽게 느껴지는 것도 행복이란걸 다시 찾은 가을부터였다. 소위 행복이라는 포근하고 막연한 것이 가을이 짙어갈수록 내 마음에 담담한 선 線을 그어갔다.

이 긴 순간에 슬픔이라든가 절망이 나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는 것처럼 먼 세계의 일로 생각하게만 됐다. 더욱이 꼬장꼬장한 신경작용이나 노기 띤 표정같은 그러한 암담한 것들을 망각하고 있는 나였다.

나는 아이놈들에게, 뭇사람들에게, 쥬리나 십자매에게까지도 관음보살같은 부드러움을 짓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꽃 항아리에다 열심히 물을 갈고 국화를 끈기있게 꽂고 끼니때는 매니큐어와는 인연이 없는 손톱의 손가락으로 나물을 주무르며 무치는 것도 즐거운 것이었다. 그러하나 까닭에 불면 중에서 해방된 나는 대낮에도 눈가가 아지랭이처럼 아물거려서 쫑쫑을 안고 풀리는듯이 한잠을 이루고 말 때가 많았다.

쫑쫑이가 가벼운 감기나 소화불량쯤은 제법 저항할 수 있는 체질을 저축하고 있는 것도 나의 막연한 행복의 원인의 하나라고도 할 수 있을게다. 그러나 어딘지 피부나 입술색이 우유빛으로 버무려 놓은듯 아직 젖냄새가 가시지 않은 감각이 그 놈에게 살아 있다.

어느 날 밤이었다. 무서리를 부르는 듯 비구름이 별을 몰아 붙이는걸 보고서 우리는 산보를 나가기로 했다. 술이 거나해진 쫑쫑의 아버지는 미도파의 손목을 잡고 앞장을 서서 한 방울씩 떨어지는 비를 맞고 가자고 하는 것이었으나 나는 무거운 양산을 찾아내어 들었다.

우리가 번화한 시장을 지나 내수동 쪽으로 발을 옮겼을 적에 비는 실없이 멎고 말았다.

나는 영화라도 보고 싶었으나 시시한 것 다음에 오는 실망을 맛보기 싫다고 그냥 돌아가자는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미도파는 약간 기대에 어긋났다는 듯 시무룩했으나 쫑쫑은 무수히 지나가는 택시를 보고 환성을 자구 올렸다.

어느덧 우리는 큰 백류 百柳 가 서 있는 신축의 어마어마한 교회 앞을 지나게 되었다. 그는 교회의 문으로 아이들과 같이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나 나는 신자도 아니요, 같이 교회에 동행해 본 일도 여태껏 없었다. 이따금 표연 飄然 히 기분적인 것을 좋아하는 그의 성미를 잘 알기 때문에 나는 묻지도 않고 뒤를 따랐다.

어떤 신사가 부흥회에 왔느냐고 묻자 그는 서슴지 않고 그렇다고 대답해 버렸다.

미도파와 쫑쫑은 딸가닥딱가닥 계단을 올라가기가 무슨 경주처럼 즐거운 모양이었다.

맨 앞으로 한가운데 무게있는 가만 십자가가 세워져 있고 피아노의 찬송가에 맞추어 주로 노파군 老婆群 이 성경책을 끼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와 나는 두 아이를 끼고 나란히 앉았다. 어떤 비대한 사나이가 피아노 가까이 다가서서 큰 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이날 밤 교회에 온 것은 우연이었지만 그 우연이 내 마음에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낙인 烙印을 찍어주었다. 실은 그를 따라서 온 것이었지만 거나하게 시종 유쾌하고 이따금 요설을 아끼지 않는 그와, 자식들을 앉히고 하느님 앞에 꿇어앉아 있는 우리가 처음엔 우스웠다. 그러나 나는 그 기회를 이용하여 잠시 동안 나 혼자만의 어떤 희비극을 연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불행하게도 여태껏 결혼식을 못 올리고 있었다.

한때는 그 형식에 대한 동경이나 애착 때문에 집요한 그 무엇에 고문을 당하는 듯했지만 이제 와서는 그나마 체념으로 낡아 버린 것이다. 그런데 하느님은 필연코 이날 밤 우리를 부르신 것이 틀림없다. 집에 돌아와서도 나는 그 야기를 그에게도 하지 못한 채 미도파와 나란히 숨쉬는 쫑쫑의 떡잎처럼 너풀거리는 생명감 속에 묻혀 보이지 않게 두 영혼이 꿈나라에서 추는 듯한 환상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제3장 소녀시절의 추억

소박한 한 아름의 꽃처럼

뽀야니 구름처럼 피어오는 살구꽃은 도심 都心에서도 아름답다.

몇 해 전 누상동에서 살 때, 나는 창 밖으로 목을 길게 빼고 이웃집 살구꽃을 바라보았다. 봄비가 흐뭇이 내리는 날은 한층 쌕쌕하고 아름다운 티를 보이고 있었다.

어릴 때 우리 집 옆에는 돌바우집이라 불리는 가난한 초가집이 있었다.

돌바우와 그의 처, 아들인 만석이 (나의 어린시절의 친구) 그리고 동생인 돌쇠와 그 누이, 노인 신 생원, 여섯 식구가 살고 있었다. 그 집엔 뜰 대신 큰 바윗덩어리가 비스듬이 누워 있었다. 그래서 돌바우라 이름 부르게 된 성싶다.

바위 사이로 몰묵등 여러가지 재래종의 화초가 여름이 오면 초라하게 피었다. 울타리는 탱자나무로 되어 있고 큰 느티나무가 한 그루 성 있는데 삼동엔 갈가마귀떼가 조석으로 집단을 이루어 시끄러웠고 마을에서 누가 죽으면 송장까마귀가 ‘까아 가아…’ 울다 지쳐 그 느티나무 가지에 안기는 것이다.

느티나무 바로 옆에는 늙은 살구나무가 서 있어 이른봄엔 연보라가 감도는 흰 살구꽃이 핀다.

내가 10월 태생이고 보면 아마도 생후 처음으로 보고 감각한 꽃이 그 살구꽃이 아닌가도 싶다.

돌바우는 일자무식 一字無識이고 게으른데다 품팔이 노동자인지라 만석이는 동네 아이들에게 기어 논다거나 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하필이면 상냥한 그의 어머니를 닮지 않고 구석구석 빈틈없이 돌바우만 닮아서 충충하고 귀염성 없는 모습이었다.

꽃이 피면 그 언저리에서 물목각시를 만들며 나는 만석이 고모되는 예쁘지 않은 처녀에게 끌려 놀았다.

꽃이 지고 살구가 열기 시작하면 그 집안은 활기를 띈다. 마치 충충한 구름에 덮인 달이 어쩌다 구름 사이로 가렸던 모습을 보인 듯한 그러한 찰나적인 활기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비록 난은 하지만 단 농가에서 추곡을 거두어들일 때 모양으로 평소에 기가 죽어 있던 식구들은 여름 농사에 잠시 밝아진다.

어느 겨울철에 만석이 할아버지 신 생원이 배가 고파서 복어 알을 먹었다가 죽고 말았다.

돌바우집 돌마당이 떠들썩하니 동네 사람들이 차 있었지만 돌바우는 장사 지낼 능력이 없어서 신 생원의 시체는 오래도록 방치 放置 되다시피 했고 돌바우네는 남의 집에 가사 한탄을 하며 울고 있었다. 어느 때는 돌쇠가 부엌에서 가리나무 잎으로 찧다가 간질병이 발작하여 흰거품을 입가에 뽀각뽀각 뿜어내며 쓰러져 발이 불꽃이 피는 아궁이 속으로 들어가 보기에도 딱한 일이 있었다. 다만 바지런하고 상냥한 돌바우네가 이집 저집 가서 일을 해주고 식구들을 먹여 살리다시피 했다.

보석같은 개똥불이 호박꽃 언저리를 술술 나는 저녁 나절 모기장 창으로  그 집을 살면서 넘겨다보면 보리밥 끼니를 마친 만석이는 덕석 위에 우두커니 앉아 먼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만석아! 개똥불 잡아서 호박초롱 만들자.”

해도 안 들리는 양 멍하니 무엇을 쳐다보고 앉아 있기만 했다.

만석이는 나보다 두 살인가 아래였다. 그런데 보통학교 입학이 늦어 나보다 여덟 살이나 아래인 동생과 같은 학년으로 보통학교를 마쳤다.

그 무렵 우리 집은 잘 살았기 때문에 아쉬운 것이 없었다.

후일에 내가 가장 고생스러울 때, 잘 살았던 때의 일을 회상하며 그때마다 어머니와 나는 만석이네 집일을 생각하곤 했다.

다정한 여자, 남편 잘못 만나서 고생한 여자 돌바우네의 칭찬을 어머니는 곧잘 하였다. 그녀는 해방 후에 돌바우를 따라 구주 탄광에 가서 복막염으로 죽었다.

그 사연을 돌바우로부터 들은 것은 해방되던 바로 그 해 가을이었다.

커다란 총각이 된 만석이는 돌바우를 따라와 수줍은 모습에다 ㅊ미울한 눈빛으로 미소짓고 있었다. 그러나 그 눈빛은 깊은 늪 속에 깔린 유리처럼 안타깝게 타오르고 있었다.

가을이라 호박시루떡을 만들어 어머니는 그들 부자 父子에게 대접했다.

그들은 시루떡을 맛있게 먹으면서 그 진저리나게 못살던 옛날을 그리워까지 했다. 일본에서 돌아와 반들한 옷을 걸치고는 있었지만 사철 비극이 찾아오던 그 살구나무집은 딴 사람의 손에 넘어간지 오래라고 했다.

오랜 세월이 흘렀다.

우리는 그들 부자의 일을 까마득히 잊고 살았다.

그런데 2, 3년 전 일이다.

신문 사회면 기사에 커다란 살인 사건의 범인이 신만석 申萬碩이라 밝혀 있어 어머니와 나는 혹시 만석이가 아닌가 하고 놀랐다.

그러더니 지난해 가을 난데없이 나에게 엽서 한 장이 날아왔다.

송신인이 ‘서대문 형무소 신만석’이라 되어 있어 가슴이 털컥 내려앉고 이상한 쇼크를 받았다.

서두가 ‘누님….’ 으로 시작되어 사형수로서 억울한 죽음을 호소한 사연이 얽힌 가운데 <새길>이라는 책에서 내 수필을 읽고 주소를 알았노라고 하면서 목마른 사람에게 책 한 권 보내달라고 첨부되어 있었다.

유창한 글, 아름다운 필적이었다.

나는 <유성 流星이 가는 곳>이라는 나의 하찮은 수필집을 차입시켰다. 거기엔 나의 어린시절 우리의 이야기가 실려 있어 만석이의 고독과 분노와 향수를 잠시 달래 줄 것이라 믿었기에…

그리고 수원에 사는 동생에게 만석이의 소식을 알리고 일본 여행을 떠났다. 동생과 그는 그 후 수 차례나 편지 왕래가 있었다고 한다. 동생 말에 의하면 무척 답답하고 무료한 끝에 자꾸 뭐가 먹고 싶었던지 편지 귀절귀절 먹을 것 이야기가 써 있었다고 한다.

“규식이 자네 집 동지 팥죽은 건더기도 많고 맛있었네. 자네 아버지가 돈 2전 줘서 자네하고 같이 눈깔사탕 사서 뚝 깨물던 그 맛을 못 잊겠네….”

그렇듯 먹는 이야기만 수두룩하게 써 있더라는 것이다. 그리고 처자가 보고 싶어도 서울 올 차비가 없을 테니 못 보게 되고 그냥 죽어 가겠다는 말도 써 있더라는 것이다.

어느 날은 자기의 목숨이 3, 4개월은 갈 것 같으니 그 동안 열심히 억울한 죽음을 수기로 써 보겠으니 자기가 죽은 후라도 누님에게 말해서 어디다 실어 달라는 청을 간곡히 했다고 한다. 동생 내외는 음식이라도 장만해서 차입해 주려고 우선 편지를 냈으나 되돌아와 버렸다고 한다.

만석이는 그 최후의 희망인 수기도 완성 못한 채로 목숨을 거두어 버린 것이다. 만석이는 악인이 아니었다. 술을 마시고 무의식 중에 울컥 살인을 저지르고 만 것이다.

인생이란 순간적으로 감정이나 치욕적인 행패를 당할 때 누구나 마음으로 살인을 감행하지만  그걸 실행 못하는 것뿐이다. 결국 운수가 사나워서 참을 기회를 놓쳐 버린 것뿐이다. 자살 自殺 역시 마찬가지다. 누구나 때때로 죽고 싶은 때가 있다. 그러나 기회를 놓쳐 보려 죽지 못한 것뿐이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만석이의 죽음과 생애는 안타깝고 어두워서 마음이 아프다. 만석이는 대를 이은 그 살구나무의 저주를 받아 비극의 독화 毒花를 씹은 것은 아닐까. 올 봄에 도 그 살구꽃은 아름답게 피리라.

이른봄 빠끔히 꽃망울을 벌리고 성급히 피어나는 살구꽃, 금년에는 그 꽃을 누가 바라볼 것인가.

 

신기루같은 희망이

“눈이 마을과 한강 漢江을 하얗게 뒤덮는 가운데도 뭔지 벌써 봄기운을 느껴요….”

한강이 바라다 보이는 곳으로 이사를 해서 얼마 안 된다는 K씨의 말이다.

나는 산도 강도 보이지 않을 뿐더러 뜰도 없는 데서 살기 때문인지 K씨와 같은 그러한 포근한 봄을 느끼는 기분은 나지 않는다.

그러나 지난번 함박눈이 조용히 내리던 저녁 나절 부엌에서 비로소 나는 이른봄 냄새 같은 걸 맡았다. 참나무 장작이 새파란 불빛을 내면서 팔락팔락 타는 냄새가 어쩌면 그렇게도 봄 냄새 같은 걸 느끼게 하는지 모르겠다. 마치 상기한 걸 뿜으며 봄쑥이 타는 듯한 그런 후각 嗅覺이 코를 스쳐가는 것이었다.

애들이 떠드는 소리가 무척 가까이 오고, 이따금 수도에서 물이 졸졸 내리는 소리도 협화음 協和音처럼 봄이다 하고 살짝 일러 주는 것 같았다.

생각해 보면 서울에 돈지도 벌써 8, 9년이 되지만 서울 와서는 아직까지 진정 봄 같은 것의 기분을 느껴 본 적이 없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시골서 살 때, 나는 웬일인지 꽉 막힌 듯하면 바구니를 찾아 들고 들로 뛰어나가 들판에서 보리 잎을 뜯고 있는 동네 아이들 틈에 끼어 나도 아무 잡념 없이 그 애들 하는 대로 보리 잎을 뜯고는 하였다.

내가 앉아 있는 금잔디에는 은빛의 봄털로 덮힌 할미꽃이 고개를 숙인 채 뽀족이 아물고 있었다. 나는 그 꽃을 꺾어 무심코 봉오리를 갈기갈기 찢으며 어떤 여인을 연상해 보기도 했다. 그 여인의 남편은 오랜 동안 돈벌이를 하러 멀리 나가는 일이 많았다.

항상 집에서 혼자 있는 그 여인은 남편이 돌아온다는 소식을 들을 때면, 찰나적으로 여학교 때 익혀 둔 ‘가도리루’ 춤을 벌렁벌렁 추며 마루로 올라가지 않았던가.

이런 것을 생각하면서 나는 홀연히 ‘날 버리고 가시난 님은…’ 하고 아리랑조로 불러 보았다.

수겹으로 구릉 丘陵이 파도 치는 저 멀리 산기슭을 거짓말 같이 기적 汽笛이 뛰이 울리며 사라진다. 그 기적 소리는 언제나 가슴에 신기루처럼 희망을 암시해 주는 듯도 했다.

아직 이파리가 어린 봄, 쑥보리잎에 가린 쪼백이들을 칼머리로 하나씩 하나씩 캐는 소리는 마치 싸악싸악 붓으로 화폭을 쓰다듬는 것과도 같이, 혹은 바늘을 쑤실 때와도 같이 고독의 침울 속에서 간신히 그 무슨 행복 같은 것을 느끼게 하여 주었다.

그러나 지금 서울 한복판 내 집에서 느끼는 봄은 어느 하늘을 쳐다보며 숨쉬어 보아도 아직 멀기만 하다.

다만 날카로운 신경으로 신경질적인 금속성음 金屬性音이 교차하고, 또 신경질적인 색광들이 번뜩이는 것들을 듣고 보고 하는 동안에, 봄이 오고 난 뒤에 아, 봄이 왔구나 하는 아주 신경이 둔한 채로 봄을 알게 되어 버렸다.

그러면 지금이라도 시골서처럼 교외로 나가서 구릉이 있는 잔디밭에 청승맞게 안자 보면 자연에서 봄을 느끼며 쪼백이 나물이라도 캐면 되지 않느냐고 스스로 물어 보고 싶기도 하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나는 그 고독의 침울에서 행복을 느끼던 그러한 마음의 구세주에게서 버림을 받았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 고독이 무서워진 속물이 되어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않으면 방안에서 그저 계절이 오고가고, 또 오게 내버려두는 삶의 게으름뱅이가 되어 집에 마당이나마 넓어야 봄도 느껴 보지 하는 따위의 책임전가만 일삼을 만큼 벌써 마음이 늙어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빠 빨 루야…’ 가까우면서도 멀리 울려오는 ‘종우’란 놈의 창가소리가 ‘할렐루야’ 하는 것으로 들리는 것이 그저 우습기만 한 것이 아니고, 위에 말한 것을 더욱 입증해 주는 것 같다.

어디서 듣고 배웠는지 기분이 좋을 때, 신이 날 때, 그 놈은 집이 무너지라고 ‘빠 빨 루야…’ 를 소리질러 부른다.

그럴 때마다 개마저 귀를 쫑긋쫑긋하는데 그 놈이 외치는 ‘빠 빨 루야…’ 에서 장작이 타는 냄새보다도 더 강열하고 맛있는 봄을 느끼려고 했다.

미처 봄이 오기  전인 이맘 때면 옛날 시골 잔디에서 기적소리를 들으며 신기루같이 희한하고 허망한 희망을 어슴프레나마 느끼던, 그리고 옛 친구가 남편이 돌아온다고 좋아서 추던 ‘가도리루’ 춤 같은 것이 지금 내 마음과 팔다리에도 전염되어 가는 것 같다.

그러나 지금의 심경은 그저 아이놈과 같이 하늘의 저 먹구름이 비가 되어 내리도록 ‘빠 빨 루야…’ 를 크게 소리 질러 보고 싶을 뿐이다.

 

눈썹

외할머니 눈썹은 초승달처럼 둥그런 데다 부드럽게 송글송글 겹쳐진 편이었다.

어머니의 눈썹은 외할머니의 초승달같은 눈썹을 산산이 싹 뿌려놓은 듯 눈두덩까지 부드러운 털이 더욱 송글송글한 편이었으나 인생을 호소하는 듯 고운 눈빛은 하나의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모계 母系를 닮은 것을 내가 깨닫게 된 것은 여학교를 갓 나오던 때였다.

그 무렵부터 나는 얼굴에다 화장을 하기 시작한 것으로 기억되는데 무엇보다도 화장용 크레용으로 눈썹을 그리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스스로 숱이 적은 눈썹에 대하여 어떤 열등감을 느꼈다든가, 눈썹이 솔밭처럼 짙은 딴 여성을 부러워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발관에 가서 면도를 할 때마다 눈썹을 지우지 말아달라고 부탁을 해야 했고 집에 돌아와서는 으레 세수를 다시 해야 했던 것이다.

내가 정작 눈썹에 대한 열등감을 느끼게 된 날이 다가온 것은 한 사람을 사랑하기 시작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결합이 된 날부터였다.

동이 터올 무렵엔 나는 아름답게 보이기 위하여 눈썹을 그려야 했고, 그 때문에 눈보라 친 겨울날에도 얼음을 깨고 세수를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내가 눈썹에 대한 저주 같은 생각마저 해야 했던 것은 아버지와 누이동생을 여윈 후였다. 생존경쟁의 마라톤의 바톤을 잡고 고달픈 경주를 시작해야 했던 나는 한편으론 처절한 고독감에 젖어 있었던 것인데 그때 어느 관상가의 막연한 말에 무척 신경을 기울였던 것이다.

‘눈썹이 약하니 형제선이 없고 고독하리라…’는 말이었다.

세월은 흘러가고, 흘러가는 세월 따라 크레용도 무수히 나의 눈썹을 거쳐 사라져 갔다.

서로 만나기도 십여 년… 사이에 두 아이까지 있으면서 나는 여전히 세수를 하고 난 얼굴을 남편에게 다 보인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그리고 버젓이 눈썹을 그리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싫었다.

오랫동안 나는 남편의 사랑을 받아왔으나, 타고난 자학적 自虐的 인 성품 때문이지 그 사랑은 척도를 완전히 수학적으로 재기까지는 불안이 따르고 있었다.

도대체 사랑의 척도를 수학적으로 잰다는 생각부터가 어리석고 욕심장이같은 이야기인지 모르나 감각적 感覺的 인, 구상적 具象的 인, 또 그 이상의 사랑을 느낀다고 하더라도 안심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설령 안심이 된다고 하더라도 순간적인 안심에 불과했다. 나는 눈썹 그리는 것과 더불어 긴 세월을 그렇게 사랑의 척도를 수학적으로 풀어 보지 못한 채 언제나 척도 尺度 한 수학이 풀리기를 원하며 살아왔다.

 

어느 날이었다.

남편과 나는 오래도록 거리를 거닐어서 온 얼굴에 먼지가 뿌하였다.

그날은 유난히 날씨도 차고 해서 식모보고 타월을 더운 물에다 짜 오라고 하여 거추장스러운 세수를 정리하였다.

그때 남편은 그 후의 내 얼굴을 닦아 주겠노라며 전례 없는 친절을 베풀어 주었는데 나는 쑥스럽게는 생각했지마는 젖은 타월을 남편의 손에 맡기고 말았다. 얼굴의 어느 부분에 타월의 감촉이 올 것이지도 걱정스러웠지만 눈썹 일이 걱정스러웠다.

남편은 먼지가 덜 닦인 부분의 먼지를 두어 번 씻은 후 눈썹이 있는 자국에 가서는 엄지손가락 위에다 수건을 걸치고 마치 화공 畵工 이 그림을 그릴 때처럼, 크레용만 내놓고 교묘하게 그 부근을 닦아 주는 것이었다. 그 순간 나는 비로소 사랑의 척도니 뭐니 하는 것이란 이만저만 어리석은 자학심이 아니란 것을 느꼈고, 그 자학심이 스륵스륵 무너져, 가슴 깊이 눈물조차 괴는 것이었다. 평소에 무뚝뚝한 편의 사람이었기에 나의 느낌은 한결 더 강했을지도 모른다.

그때 나는 눈물을 억제하고 타월을 다시 받아 내 손으로 남편 앞에서 눈썹에 그린 크레용을 용감히도 싹싹 문질러 버렸다.

사랑이란 미태 眉態 나 미태 媚態에 있는 것이 아니고 마음 속에 부단한 생명력을 저축하면서 살아 있는 것이라는 것을 알 것 같았다. 사랑을 척도할 수학은 영원히 풀리지 아니해도 영원한 사랑은 마음 속에 존재한다는 것도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자학이란 자존 自尊의 편린 片鱗일 것이라는 것과 수학으로 척도할 수 있는 사랑이란 윤기 없는 사랑이 아닐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던 것이다.

 

계단

청단 靑丹의 고전 古典이 서 있는 그 옆에 계단이 있다. 물을 머금은 수양버들가지가 제법 느근거리는 계절이라, 계단을 오르내리는 강렬한 색소 色素의 멋들어진 의상들의 교차도 거의 쉴 새가 없다. 그런데 나는 먼 옛날의 환상을 바라보는 것과 같은 착각을 느꼈다. 그것은 아마도 청단의 고전적 색조 色調의 반영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 다은 순간 그 계단을 헤아려 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고, 그 계단이 말해 주는 것 같은 얘기를 듣기 시작했다.

 

나는 어렸을 적에 시골에서 법당 法堂 앞의 돌계단을 기어올라갔던 것과 교회당의 나무계단을 밟았던 것을 기억한다. 그러나 나는 거기서 어떠한 영향을 받은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국 異國의 도심 都心의 계단, 치장된 대리석의 계단도 밝았고, 가까이는 부산서의 영주동으로 통하는 40계단도 밟았다.  그러나 나는 계단이라는 것에서, 하나의 단순한 도정 道程 이라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것을 느껴 본 적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계단이 말해 주는 것 같은 얘기를 듣고 있는 것이다.

 

저 계단을 올라서면 어디로 가는 것일까? 20개의 층계…. 이것을 곱해도 40이니 짤막한 수명이다. 그러나 이 계단을 밟은 사람 가운데에는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도 많을 것이다. 올라만 갔던 사람이라고 해서, 인생의 도정을 다 간 것도 아니고, 내려오기만 했던 사람이라고 해서 인생의 하락 下落 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나는 회화 繪畵의 구도 構圖를 잡듯이 인생의 계단, 예술의 계단을 마음 속에 그려보았다. 그 계단의 얘기가 바로 그것이었던 것이다.

인생에 계단이 있다고 하면, 과연 멫 계단이나 잇는 것일까? 한 층계가 하나의 연륜이라고 하며는 60, 욕심을 부려서는 70까지는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나는 몇 층계에 와 있을까? 그리고 저 계단을 오르내리는 ‘하이힐’, 흑색 다생의 힘찬 발굽들은 또, 저 지팡이와 고무신들은 몇 층계에나 가 있을까? 그러나 계단을 오르내리는 행렬은 무심하기만 한 것 같다.

 

인생의 계단이란 올라서 버리면 그만이다. 내래서 보려 해도 그것은 끝이다. 그러니 중턱에서 언제까지나 머물러 있어야 할까! 그러나 인생의 도정에는 휴식이 없다. 상념 想念이 여기에 이르렀을 때, 나는 서글픔에 몸을 흔들었다. 이러한 진리를 24시간 머리에 넣고 살아야 하는 인생이란 얼마나 고역인가? 그 고역을 피하기 위해서는 망각이라는 것이 얼마나 인생을 아름답게, 그리고 보람있게 성립시켜 주는 것인지 모른다.

나의 인생도 망각에서 성립되고, 나의 과거도 망각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엄격한 현실에 부딪친 지금, 나는 계단의 중턱에서 몸부림을 쳐야 할 것인가? 한 장의 뜬 구름이 인생을 가져온 것이라고 하며는, 뜬 구름이 꺼질 때, 나의 인생도 종지부를 찍는다. 영화 <천국의 계단>은 계단을 넘어섰을 때 천국이 있었고, 그 천국에는 철학도 있었다. 또한 그의 천국에는 계단은 속세로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길이 있었다. 그러나 나의 인생의 종부지는 그것도 구름 한 장이 꺼지는 시간으로 마련되어 있는 계단의 통과를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일까.

인생의 단계 너머에는 반드시 천국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닌 것이다. 천국에도 인생이 있다는 보장도 없다는 보장도 없다. 가량 그러한 보장이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것을 믿을 수가 없다. 더욱이 인생의 계단이 영화 <천국의 계단> 처럼 자유로이 천국과 지상을 오르내리는 것이 아닌 바에야 나는 이 중턱의 계단에서 마지막 계단에 이르는 동안 무한한 예술의 계단을 창조해야 할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 중턱의 계단은 숙명적인 위치일지도 모른다.

인생의 계단에서 예술의 계단으로! 그리고 인생의 계단을 예술의 계단으로 연장시킨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공정 工程은 아닐 것이다. 저 계단을 밟듯이 밟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인생은 저 계단을 밟고 있는 동안 저물어만 간다. 저 계단에 황혼이 깃들 때에는 이미 인생에서는 죽음의 만가 挽歌가 읊어질 것이니, 나의 도정은 바쁘기만 하다.

 

낙인

어머니와 아들을 제외하고 내 혈육이란 지금 일선에 가 있는 육군 중위의 남동생 하나뿐이다. 그 중위가 가끔 배급 난 건빵을 가지고 집에 오면, 평소에 녹이 쓰는 듯한 어머니의 표정은 기름을 부은 것처럼 자름한 변화가 있고, 온 집안이 겨울 밤에 켜진 등불에 방안이 가득 찬 듯한 따뜻한 분위기가 흐르는 것이었다. 그처럼 아우의 존재는 광막한 나의 인생 여로에 유일한 벗이며 든든한 그림자이기도 했다.

어느덧 아우의 이야기가 먼저 나와 버렸지만, 옛말에 부모가 죽으면 하늘에 별이 보여도 형제가 죽으면 별이 보이지 않는다 했는데, 그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누이동생이 죽을 때 나는 비로소 실감으로 느꼈다. 누이동생은 어머니의 모체에서 나올 때부터 숙명적으로 ‘보’를 쓰고 나왔다는 둥 이상한 말이 퍼졌으며, 열 상 안에 두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던 것인데, 그 첫 번째는 내가 이직도 철이 없던 해에 어머니가 잠시 자리를 비우고 안 계신 틈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까무라치게 우는 아이의 울음 소리에 놀라 쫓아와 본즉 나는 멍하니 마루에 주저앉아서 울고 있고 방안에서 동생이 이불을 머리 위까지 덮어 씌운 채 숨이 자지러지게 울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뛰어나올 구멍조차 없도록 사방을 베개로 괴어 놓았다는 것이었다. 그때 어머니가 조금만 더 늦게 돌아오셨더라면 틀림없이 누이동생은 생후 수개월 만에 숨을 끊었을 것이며, 나는 살인범이 될 뻔했었다. 또 한번은 내가 철이 든 몇 해 후의 일이었다.

아버지가 ‘금향’이란 기생에게 반해서 집에 잘 들어오시지 않을 때, 동생이 급한 병으로 생명이 위독하게 되었었다. 나는 아버지를 찾아서 금향이의 집으로 가서 눈에 익은 아버지의 흰 가죽구두를 가리키며 아버지를 불러 달라고 부탁했으나, 그 집 사람들은 끝내 안 왔다고 잡아떼기에 울고 돌아왔던 기억이 있었다. 그러나 다행하게도 동생은 한 많은 십여 년을 더 살다가 죽으려고 그때 무사했었다.

동생과 나와는 네 살 차이지만 남들이 쌍둥이 같다고 말할 정도로 콩나물처럼 비슷한 키와 생김생김이었고, 그런 일이 있은 후로는 우리 둘 사이는 춘풍에 나부끼듯 다정하게 지냈다. 그리고 하두 사이가 좋았기에 밤이면 나란히 누워서 서로 뺨을 떡 주무르듯 주무르며 웃기도 하고, 내가 동경 東京 에서 고생할 때는 지성 至誠으로 ‘건 乾 빠나나’와 비단 양말을 소포로 보내 주곤 하였다.

그 후 우리 집안의 경제적 몰락과 괴로운 6.25 동란을 거치고, 동생은 24세를 일기 一期로 악성 결핵으로 죽고 말았다. 그때 동생을 사랑하는 나머지 나의 비애는 터무니없는 약값과 영양가 營養價를 구하기 위하여 반 미치광이처럼 헤매었으며, 마지막에는 몸이라도 팔고 싶은 충동까지 느꼈으나 무엇에 감사를 드려야 할 일인지 그때 나에게 창부 娼婦의 길문은 열리지 않았으며 ‘엄마 성이 배고파 밈찌깨기 주어’ 한마디로 영원히 눈을 감아 버린 내 동생.

4년 전에 우리 집 강아지의 죽음을 통하여 누이동생을 부르고 통곡한 일이 있는 내가 지금 또 이 글을 통하여 새삼스럽게 눈물방울을 떨어뜨리고 있다.

나의 인간성에서 우러난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적요 寂 寥 한 낙인 烙印은 누이동생 때문에 박힌 슬픔의 표적인지 모른다.

 

눈물

사소한 일로 우리는 유쾌하지 못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래서 그이는 날 미워라고 비바람 속인데도 굳이 아침 비행기로 내려가겠노라고 고집을 부렸다. 결국 비행기는 비 때문에 뜨지 못했지만.

고집은 하루 종일 가고, 끝내는 밤 급행열차로 기어이 내려간다 하고, 조금씩 차근차근히 흘러가는 시간은 나를 초조한 마음으로 만들고 겉으로는 화해하는 수밖에 없게 되어 차 시간까지 둘 이는 역전 어느 중국요릿집에 마주앉아, 나는 물만두 한 그릇, 그이는 배갈만 마구 마시는 것이다. 내가 앉은 자리에서는 거리의 가로수 밑에 무수히 우산들이 오가는 풍경이 내다보였다.

“당신이 심신 양면으로 쇠약한 이유는 밤에 수면을 제대로 취하지 못한데 있소. 공연스레 글까지 쓴다고 잡을 못 자는데 원인이 있단 말이요. 우선 잠을 자도록….”

나를 생각해서 주의시켜 주는 말이었지만 비 오는 분위기는 그 말을 몹시도 부드럽게 내 마음 속에 스며들게 하였다.

이럴 땐, 나는 혹시 감상적이 되는 건지는 모르지만, 그이를 보고 ‘아버지’ ‘오빠’ 하고 부르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한다.

그러고 보니 나는 아직도 아버지와 오빠의 애정을 모른다. 사람이 고달플 때, 불안할 때, 얼마나 부르고 싶은 그리운 칭호냐. 그러기 때문에 나는 남편의 애정을 받고 느낄 때, 길들지 않은 야생동물처럼 간혹 내 동작이 퍽이나 원시적이고 거칠어 그이에게 부질없는 마음의 빈곤과 괴로움을 주기도 하지 않았던가.

나는 그이를 알고 그이의 사랑에 매혹되어 가면서도, 왠지 모르게 언제나 불안했다. 그래서 언젠가는 나는 그의 본심이랄까 아무튼 그 무엇을 알아 보려고 그이한테도 눈물이 있나 없나를 찾았다. 그러나 그런 기회는 영 썩 오지가 않았다.

아이가 생겼다.

아이가 생기자 우리는 서로 원망하고 헤어져야 할 운명에 부딪쳤다.

헤어진 대로 일 년이 흘러갔다.

일 년 동안을 안 만나고 버티고 살았음인지, 고독한 것이 무서웠던지, 나는 모든 자존심을 팽개치고 영양 부족의 아이를 안고 그를 찾아가기로 했다. 아이는 돌 옷으로 만들어 준 노란 갑사 저고리에 붉은 치마를 입어 촌스럽게 보이는 데다가 왠 일인지 머리가 잘 자라지를 않아서 그대로 중머리에다 빨간 댕기를 밥티로 붙여 주었다.

처음엔 그는 우리 모녀를 절대로 만나 주지 않으려고 했던 모양이다. 그런걸 나의 옛 친구의 남편이 나를 측은히 생각했던 것인지 중간에서 힘을 써 주어 나는 중머리의 아이를 안고 아이 아버지인 그이와 어떤 요릿집에서 술상을 앞에 놓고 마주앉게 되었다. 그때였다. 그이는 미리 술을 좀 모시고 와서 그런지 우리 모녀를 보자 발광하듯 울기 시작했다.

난 당황했으나 그 동안 보려고 벼르고 별렀던 그의 눈물을 하필이면 이런 경우 뜻하지 않았던 데서 전주 前奏의 아무것도 없는 데서 돌발적으로 보게 되는가.

그때 아이는 요리상 위에 놓여 있는 글라스에 부어진 맥주를 다른 그릇에다 부었다 다시 글라스에 옮겼다 하며 무심히 놀고 있었다.

나는 자기 자신에게 부닥치고 있는 비극을 그렇게도 담담하게 객관적으로 바랄 수 있는 나, 그리고 애인의 눈물을 보아야만 안심할 수 있다는 기묘하고도 독살스럽다고 할까 잔인하다고 할 나, 이 두 나를 또 하나의 즉 그이를 아버지라고 오빠라고 부르려는 나로서 서글프게 바라다 보고 앉아 있었다.

 

얼룩이

창 窓에 얼룩이 졌다. 여인의 눈물과도 같이 냉각 冷却 된 얼굴이, 밤새도록 모진 서리를 못이긴 것이다. 살벌한 정원이나마 전망 展望의 매개 媒介가 되던 창, 얼룩이 가시면, 그리고 황혼이 깃들면 내 그림자를 아름답게 비춰 주기도 했다.

저 희미한 햇볕이 뜨거운 포옹인 양, 씻어 주기까지에는 주객의 경우, ‘해장’ 한잔의 시간은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시간이나 약속되어 있다.

한밤 동안 내 가슴에 핀 얼룩이는 누가 씻어 줄 것이냐.

바람이 이는 성 싶다. 아니 바람은 분명코 지나가고 있다.

창밖에 매어 달린 색조 色調를 잃은 나뭇잎이 둘셋 구슬픈 비명을 울린다.

엊그제 안국동 네거리의 저녁 노을을 밟았을 제, 하나씩 둘씩 인도 위에 떨어지는 낙엽을 바라보고, 낙조 落照와 대조해 보았던 나는 지금 앙상한 나뭇가지에서 떨어지지 못해 맴도는 나뭇잎의 몸부림을 보는 것이다. 역시 떨어져야 할 것은 떨어져야 하나 보다. 그러나 계절의 회전에 따라 그에게는 춘일 春日이 있다.  연륜이 가해지는 것은 마찬가지라고 하더라도 회전이 없는 인생이란 얼마나 적막한 것인가. 여기에 인간의 감상이 있고,나의 비극도 엮어지는 것이다. 상념 想念의 자연계로부터 인생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또 하나의 앙상함을 느낀다. 그것은 자화상이다.

창의 얼룩이는 북풍을 예고하고, 내 마음의 얼룩이는 인생의 고달픔을 말하여 주는데, 입은 말이 없다. 결국 나도 겨울을 걱정해야 할 자격이 있어서일 것이다. 얼마 아니면 겨울은 채관을 얼리고, 채관을 든 손목도 얼릴 것이다. 그러나 나의 가슴의 피야 얼릴까 보냐. 내 가슴에 핀 얼룩이는 내 마음으로밖에 씻을 수 없는 나이기에 김장도 마음 속에, 구공탄도 마음 속에 저장해야 한다.

마음 속에 지피는 구공탄은 자칫하면 까무러질 뻔 하는 나의 정열을 일깨워 줄 것이다. 나의 정열은 나의 생명력이요, 예술이기도 하기에, 그 정열을 겨울 앞에 떨릴 수는 없다. 포근한 광선이 창의 얼룩이를 씻어 주고 있다. 아름다운 선이다. 무게와 매력을 아울러 간직한 색조 色調 이기도 하다.

바람도 자는 듯 나뭇잎의 비명도 그쳤다. 남은 건 내 가슴의 얼룩이뿐이냐.

저 창이 황혼을 배경으로 거울 鏡 을 이루기 전에 내 가슴의 얼룩이도 씻어야 한다. 누구를 위한 것이 아니더라도 내일을 위해서는 내 마음을 곱게 단장해 놓아야 한다.

 

메리의 죽음

메리의 시체 屍體를 붙들고 들에 가서 땅을 필 것을 생각하니, 잠이 오지 않았다. 동생이 죽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을 때도 울지 않던, 울 수가 없었던 나는 강아지 한 마리의 주검 앞에서 이렇게 슬피 울고 있는 것이다.

어제 저녁 뒤안 나무청에서 메리의 시체를 발견하고, 터전에다 끌어 옮기기 전까지도 메리가 집을 찾아 들어오려나 하고 기적 奇蹟을 꿈꾸고 있었던 나였다.

메리의 할머니는 우수한 진도개 珍島犬 였다고 한다. 내 방에서 찍찍 오줌을 깔리고 울어대던 그 놈의 검정털이 한 달 가까이 우리집 물밥을 먹더니, 제법 놀미해지고, 눈 밑에 희끗희끗 회색털이 돋아나서 그 얼굴이 우스꽝스레 되었다.

할머니는

“메~로 메!로, 아야 자녀러 것이 재둥이 될랑가부다아!”

하시고, 그 놈의 솜털 얼굴이 코티분 바른 것 같다고 식구들도 모두 웃었다.

비 오는 날 훈이가 좋아라 안고 다니면, 능청스럽게도 어린 애만 귀찮게도 안아 준다는 듯이 불안한 표정으로 말뚱말뚱 앉아서 나를 바라보던 그였다. 식전에 솥뚜껑 소리가 나면, 일어나기가 바쁘게 사람이 그리웠다는 듯이 달려들어 우두커니 부뚜막 앞에 앉아 있던 그였기도 하였다. 나는 그 놈을 잘 길러서 버젓하게 되면 사생 사생 하러 갈 때, 시장에 갈 때, 어디든지 데리고 다니며 마음의 호사 호사를 할 수 있으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일에 쫓기어 그 놈을 잘 길들이고 가르칠 시간적 여유가 별로 없었다. 그래서이지 점점 귀도 일어서고 고리도 기분 좋게 휘감기어지고 진도개의 독특한 모습을 지니게 되면서도 그 놈의 주둥이는 항시 먹을 것을 찾아 땅을 쓸고 다니기에 자세가 바를 때는 드물었다. 언젠가 훈이가 창이 훤히 트인 새벽에 돌담 밑에다 고이 쌓아 놓은 한 무더기를 그대로 서슴지도 않고, 그 놈이 감식을 하는 꼴을 보았을 때, 그 놈에 대한 내 기대는 더 한층 어긋나고 말았다.

때로는 훈련을 시키려고 돌을 던져 보았다. 그럴 때마다 돌이 떨어지는 곳을 향하여 달려가긴 하나, 먹을 것이 아닌 줄 알고, 입만 대어보고는 그대로 실망 失望한 듯 돌아와 버리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밥값을 하는 것인지 제법 웡! 웡! 하고 짖기는 하였다.

밖을 내다보면 흔히 이웃집 똥개가 능청능청 들어오는 것이었다. 이웃집 똥개란 털이 온통 면도질한 수염처럼 번들번들 몽그라진데다가, 아무튼 깍정이 같이 잔상스럽게도 비열 卑劣 해 보이는 노전대사 路 田大師를 연상케 하는 그러한 족속이었다. 더욱이 밥 때면 으레 메리의 밥을 뺏어먹으려 슬금슬금 넘어보며 들어오는 것이었다.

메리는 그 아니꼬운 동지 同志 에게 곧잘 물려 깽깽거렸다.  바로 없어지던 날 아침, 부엌에서 우두커니 바라보는 메리의 얼굴은 그 한쪽 눈이 가무러져 있었다. 나는 제법 토실토실 한 몸뚱어리와 그 가무러진 눈을 대조해 보고 있노라니, 기억의 화살이 갑자기 내 뇌세포의 한틈을 찌르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생리 生理 시간 실험대로 올라 있던 개의 모습. 그때 그 개의 눈은 비타민 C의 결핍으로 괴혈병에 걸려 까무러져 있었다. 그 기억과 함께 능금, 우유, 계란 야채… 이러한 비타민의 영양소가 한동안 내 머리 속을 빙빙 돌아 나갔다. 나는 苦笑고소 하였다.

“이것 봐라 그 놈의 개에 물려 눈까지 가무러졌구나…”

그러나 어머니의 이러한 말에 나도 설마 괴혈병은 아니려니 하고 마음을 놓았던 것이다. 그랬던 것이 그날부터 메리는 종적을 감추었고, 식구들은 그 행방을 몰라 모두 궁금히 지냈다. 밤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할머니가 메리를 들먹이면 어머니가 그만두라고 화를 냈다.

틀림없이 누가 꼬느고 있다가 팔아 먹었든지, 그렇지 않으면 속없이 따라가다가 길을 잃었지 하고, 화를 내던 어머니가 도리어 들먹이면 그만두라고 이번에는 내가 화를 냈다. 미련이 크면 클수록, 깊으면 깊을수록 그 놈이 미련하였다느니 똥개였다느니 하고 제각기 그 놈의 험점을 지적하는 것으로 자위하려 하였다. 그러면서도 한편 기적을 바라는 마음이 없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어제 저녁 뒤안 나무청에서 메리의 시체가 발견되었던 것이다.

뻣뻣한 시체를 보면서

“불쌍해라. 내 복 福에 개냐!”

어머니는 옆에서 중얼거렸다.

잠을 이룰 수 없는 밤이었다.

나는 울었다. 아무도 없는 방에서 흐느껴 울었다. 무엇 때문에 메리의 죽음은 나에게 이렇게까지 슬픈 것인가? 그러나 메리의 죽음을 통하여 우는 내 눈물의 뿌리는 너무도 깊은 것이 있는 것만 같다. 울음이 계속될 시간은 아직도 요원한 것만 같다. 먼 곳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려온다. 새삼스럽게 또 쓸쓸하여진다.

 

소녀시절의 추억

무척 나를 사랑해 줄줄 모르는 아버지였으나 그래도 단 한번 나를 목마에 태우고 동구밖 시냇가에 나갔을 때의 일이었다. 아버지는 미소를 띄우며 유달리 큰 손으로 항라조끼 호주머니에서 백로지 쪽지를 꺼내더니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호주머니에 크레용이 들어 있었다는 것도 기적에 가까운 우연이었고, 그 완성된 그림을 나에게 보여 주었다는 것도 그러하다.

그 그림이란 한발짝 거리로 놓여진 돌다리 옆의 수백의 연륜을 되사렸을 팽나무를 그린 것이었다.

그 그림이란 한발짝 거리로 놓여진 돌다리 옆의 수백의 연륜을 되사렸을 팽나무를 그린 것이었다. 고목에는 신이 들린다고 하거나 잠시 왔다가는 인생의 기복 부침과 더러는 그 고목의 언저리에 둘러앉아서 주고받았을 나그네들의 속세의 얘기가 신화로운 미지의 세계까지도 말해 줄 듯도 한 고목이었으니, 아버지의 표현은 단조로운 배추색 선을 질서없이 그러놓은 것이었다.

그때 나는 그 우연의 선물보다도 아버지 손등의 굵직한 색이 더 관심을 가졌고, 집에서 참외를 사놓고 기다릴 어머니의 옆이 더 마음을 잡아당겼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후 장성할수록 그 고목의 배추색 선이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인상과 아울러 하나의 강렬한 향수 같은 것을 내 가슴에 뿌리 깊이 사겨진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것은 아버지에게서 받은 그 고목의 그림을 봄 여름 가을의 세 철을 통하여 상기하게 되고 배추밭을 지날 때마다 그 선의 색이 머리에 떠올라 견딜 수 없는 그리움을 감각하게 되는 것이었다.

함박눈이 퍼붓는 어느 날 밤, 평소에 원만치 못한 사이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를 사이에 두고 그림놀음을 하고 있었다. 오죽묵 吳竹墨 을 갈아 묵 일색의 가느다란 선으로 국화를 그리고 잎사귀와 가시도 놓았다. 방죽에서 고개를 배어든 연꽃도 그려져 있었다. 나는 지금도 그 눈 오던 밤의 포근한 분위기를 추억할 때마다 괴로움조차 느끼거니와 내가 그림에 마음을 뜨기 시작한 것도 그날 밤 분위기의 작용이었을 것이다.

갓을 쓴 외할아버지의 팔목에 매어달려 향리의 보통학교에 입학한 나는 그 후, 며칠 되지 않아서 내가 그린 석유등 石油燈이 급내에서 제일이라는 치하를 받았다. 그 그림을 교실벽에 붙였을 때의 기쁨은 헤아릴 수 없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세계 미술전에 입선한다고 해서 그와 같은 기쁨이 솟아나기 만무할 일이다. 그러한 기쁜 소식을 어머니 앞에 엎디어 보고할 셈으로 학교에서 한숨에 달려갔던 나는 어머니가 눈물바람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때의 미어질 듯하던 내 가슴은 지금도 표현할 도리가 없다.

화단에 만발한 백일초를 사생하는 것을 장기로 하고, 그림을 제일 잘 그리기로 유명하던 H선생의 미소와 ‘오오사마:王樣’라고 씌어진 크레용의 향기도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그러나 만약 지금의 내가 화단 앞에 섰다고 하면, 백일초를 그리되 만발한 것은 피했을 것이다. 오오사마의 경우도 도안은 어떻다 할망정 그리고 H선생의 미소도 그림과는 별로 관련이 없음을 알 수가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소박한 착각을, 교내를 털어서 무슨 학과가 마음에 맞느냐고 조사를 하다시피 할 때, 도화라고 선뜻 답하지 못하고 다른 생도들과 같이 국어라고 답하게 되는 의식적인 착각을 범했을 것이다.

00고을에서 전학해온 군수 郡守의 딸이 무조건 급장이 되었다. 나는 급장 되기를 생각조차 아니했기 때문에 급장이란 것에 대하여는 요즈음 말로 하등의 매력을 가져 보지 못하였지마는 그 군수의 딸의 단발머리가 부러운 것은 어찌 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의 사랑이 뜬 대신에 어머니를 따르는 마음은 지극하였다. 어머니와 함께 잠시를 뒤적이다가 그때 한창이던 양명주 養命酒 광고 견본이 된 여인의 사진판을 보았다. 그것은 양귀비라고 상상할 수도, 클레오파트라라고도 상상할 수도 있는 단발머리의 아름다운 여인의 상이었다. 그 여인의 상에서 시선을 띠지 않는 나를 바라보던 어머니는 ‘너도 미술학교에 가면 그러한 머리를 할 수 있다’라고 일러 주었다.

나는 거기서 갈피를 잡지 못하는 동경 憧憬의 마음에 불을 태웠고, 도화라는 것이 미술일 수 있다는 것도 직감적으로 느꼈다.

논마지기라도 가졌기 때문에 지주 지주 라고 이름이 붙은 아버지가 여고보 女高普 를 보내 주었고 4년간의 기숙사 생활을 한 것은 그 후의 일이었다.

나는 G라는 자수과 刺繡科 의 여선생에게는 예쁨을 받지 못하였으나, 도화에 있어서는 갑 甲이라는 애호를 받았다. 그 선생도 혼기를 당하여 향리로 돌아갔고, W라고 하는 처녀의 선생이 사감 舍監을 겸하여 들어왔다. 그는 나를 퍽 사랑하여 주었는데 열렬한 가톨릭 신자였으며, 쌍꺼풀의 눈시울에 슬픈 얼룩이 끼어 있었고 그 위에 18도의 안경이 걸려 있었다.

지금이사 C선생의 경우나 W선생의 경우도 놓칠 수 없는 화가 畵架의 대상이다.

입이 뾰족하기 때문에 ‘휘파람’이라고 별명이 붙은 W선생을 통해서 서양화와 동양화의 구별을 하게 되었고, 내가 동양화를 택한 것은 섬세해 보겠다는 내일과 섬세하다고 믿고 있었던 당시의 심경에서였다.

그 후 이른바 동경의 유학이라는 게 시작되었다. 동경여자 미술전문학교 재학 중에도 늘 생각한 일이지마는, 동경 유학을 간다는 것에 공연히 반대하고 나서던 일인 日人 K라는 선생의 심리와, 진학을 적극 후원해 준 휘파람 선생의 심리를 대조하여 가슴이 뭉클함을 느끼고 느껴왔던 것이다. 다만 휘파람 선생의 절대적인 교훈이던 ‘남학생과의 교제는 하지 말라…’ 이것을 지켜왔든 가에 대하여는 의문이다. 그 교훈을 그대로 받았다고 하면 나는 결혼을 하지 아니했어야 할 일이 아닌가?

미전 미전을 나온 지 십여 성상, 환희도 고난도 수다했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소녀시절의 순정한 그것에 비할 수 있을 거이냐. 나의 과거를 토막 지어 과거의 십여 성상을 헤아린다고 하면 환희나 고난의 사실 史實이 다 작품으로 엮어졌을 것이다.

 따라서 인생의 항해도 거기서부터 시작되었고 항해의 집타 執舵 는 작품 하는 정신일 따름이다.

나는 지금 여기 남아 있는데 K, W, H의 선생들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도 세상을 버리셨다. 종착점을 바라보는 나의 항해도 거칠기만 하다.

 

제2의 사춘기

요즈음은 가까이 가서 꽃향기를 맡아 보거나 자세히 들여다 보기 전에는 생화인지 조화인지 구별하기 어려울 만큼 조화의 기술이 늘었다 할 수 있다.

도 생화도 온실 재배의 인공기술 향상으로 제철의 구별이 없어졌고, 특히 국화 같은 꽃은 연중 중단 없이 꽃집에 가면 볼 수 있다.

이것이 비단 꽃세계뿐만 아니고 모든 세계가 진짜인지 인공인지 분별하기 어려운 시대가 온 것이 아닌지.

상록수가 없는 우리집 뜰은 누렇기만 하다. 바람에 날리는 라일락의 황엽, 거기다 황국의 노란색이 눈부시게 번쩍이어, 보이는 눈이 아찔할 때가 있다.

우리집 뜰에 핀 조화 같은 노오란 국화꽃에다 코를 대어 본다. 엷은 향기가 간질간질 코 언저리를 감쳐 주지만 옛날에 피던 꽃들보다 향기가 약하다.

오랜 전에 나는 국화 향기를 맡을 때마다 어머니의 젖꼭지를 생각했었다. 다섯 살 먹을 때까지 어머니의 젖을 빨았다는 나는, 그때 언젠가 한번은 어머니의 젖을 빨다가 어떤 이상한 맛을 느끼고는 저절로 젖먹는 것을 끊은 생각이 지금도 난다. 그런데 그것은 어머니가 귀찮아서 씀바귀잎을 찧어서 젖꼭지 언저리에 바른 것이었다.

그 씁쓸한 씀바귀 맛과 젖맛이 한데 합쳐져 야릇했던 맛, 향기 – 그걸 나는 후일에 국화 향기를 맡을 때부터 느꼈다.

그런데 요즈음 조화 같이 피는 국화는 배기가스의 영향 때문인지 옛날과 같이 강렬한 향기를 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색깔마저 은은했던 색채가 조화처럼 선명하기보다는 강렬해진 것 같다.

색채와 더불어 살면서도 나는 요즘 강렬한 색채를 보면 강박감에 억눌리고 만다.

창문을 열 때마다 그 황색들이 무수한 기관지천식 벌레같은 노란 가루나 티처럼 되어 날아올 것만 같다. 그럴 때마다 나는 호흡을 가다듬고 가슴을 누르는 심장을 달래는 시늉을 한다.

노란색이 난무하는 뜰을 바라보면 뭇인간과의 감정이 단절되어가는 현대의 비정을 그대로 느끼게 되기도 한다.

이러한 나의 노란색의 강박감은 곧 인간의 정이 메마르고 인생의 향기를 잃어가는 현실 속에서 미라 나 조화처럼 살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리라.

그러면서도 머지 않아 나는 46회 생일을 맞게 된다. 도저히 그럴 수가 없다는 억울한 생각밖에 안 드는데, 나는 젊은 시절에 40대나 50대의 여인의 심경이 몹시 궁금했던 것 같다.

그야말로 미라 처럼, 욕망도 패기도 없이 산송장같은 기분에서 남편과 자녀의 기분을 맞추며 산다고 나는 느꼈고, 그 가운데서 어떠한 생각, 이를테면 체념같은 것을 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이 몹시 궁금했었다.

이제 내가 40을 넘고 50이 가까우면서 나를 생각해 보니까 나는 그렇지가 않다. 어쩌면 생화와 조화를 구별하기조차 힘든 현대에서 살고 있고 또 화가이기에 그러한지 모르겠으나 나는 지금 겉모양은 중늙은이 그대로면서도 대답하게 청자담배를 피우고, 글을 볼 때는 노안경을 눈에 걸치면서도, 꿈은 지나가 버린 나의 사춘기 때와 조금도 다름이 없다.

예술, 인생에 대한 막연한 기대와 불안을 느끼고, 지우고, 생각하고, 그리고 어떤 의욕도 가져 보고 하면서 오늘의 중늙은이를 감쪽같이 잊고 살고 있다. 단 그것이 추하지 않게 자연스럽게 세련이 되어있다면 나의 인생은 제2의 사춘기의 출발이라고 기대를 할만 한 것이 아닐까 싶다.

 

추위의 낭만

오래 전에 <싱고아라> 라는 영화를 감명 깊게 본 일이 있다.

몽유병에 걸린 미남의 성주 城主와 집시 처녀의 비련을 그린 드라마인데 잊을 수 없는 장면이 있었다.

성주와 집시의 사랑이 축복받을 수 없는 건 드라마의 정석 정석 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더욱 애닳게 스미고 전개된다.

모든걸 버리고 성주는 집시의 대열에 끼이게 된다.

그런데 싱고아라를 짝사랑하는 집시 청년 아심은 싱고아라의 물병에 독을 풀어 성주를 실신시켜 대열에서 떨어뜨린다.

성으로 돌아가게 된 성주는 싱고아라를 저주하면서 딴 여자와 결혼을 하나 싱고아라를 잊지 못하고 밤마다 숲 속을 헤맨다.

10년이 흐른 어느 날 표류하듯 성 안으로 들어온 집시 소년을 종으로 삼았는데 기구하게도 그는 싱고아라의 소생인 자기 자식이었다.

소년은 어머니 싱고아라와 아버지가 만나도록 해 주려고 계획을 꾸민다.

어느 날 밤 두 사람은 해후하게 되지만 성주는 몽유병으로 정상적인 정신이 아니어서 실제의 싱고아라를 환상이라고 생각하나 저주하지 않고 그리운 듯 얼굴을 매만진다.

“날씨가 추워지면 그대는 어디에 있었는가? 추워서 떨지나 않았는가?”

하면서 싱고아라의 얼음장같은 뺨을 매만지면서 운다.

소년은 멀리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집시의 딸이라 날 때부터 따뜻한 방안 치레를 못했을 것이므로 추위가 가장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그 영화를 보던 무렵 나는 물론 젊었다. 그리고 마음도 늘 추웠다.

나는 쫑쫑의 아버지가 성주와 같은 관심을 가져 주기를 원했다.

최근이다.

난로도 있고 이따금 석유 난로까지 피우는데도 나는 웬일인지 전례에 없이 추위를 타게 되어 일에도 능률이 오리지 않아 답답할 때가 있었다.

그럴 때 시골에 내려가 있던 쫑쫑의 아버지에게서 편지가 왔다.

“추운 날씨이니 당신 몸조심 하오”

 

딱딱이 소리

내가 소망하는 조그마한 물건이 하나 있다.

그걸 꼭 내 몸 가까이 지녀야 하나는 것은 아니지만 근래에 와서는 집요한 추억과 함께 내 눈에 삼삼거려 그 물건이 그리워지기까지 한다.

소학교 시절 내 어린 시각을 현혹시키고 아름다운 동경의 대상이기도 했던 여선생들의 통치마자락과 그 빛깔과 무늬들은 지금도 사라지지 않는다

줄무늬의 보이루, 이파리 무늬의 오빠루, 벤베르크, 메린스 등 수없는 문의의 추억이 물결쳐 오지만 가장 강렬하게 떠오르는 것은 잿빛과 코발크가 섞인 보라색 구름무늬 위에 좁쌀 같은 흰꽃이 활짝 깔린 싸구려 인조견이 벤베르크 천이다.

그건 어머니의 경대보로도 되어 있었다.

야경꾼 소리가 ‘딱, 딱…’ 울려 어떤 여운을 남길 때 처음으로 가설된 전등불빛 아래 경대보는 조그마한 무대의 막처럼 조용히 내려 있었다.

나는 그때마다 뭔가 그 꽃무늬의 보자기와 대화를 나누었던 것 같다.

어머니는 아침마다 그 보자기를 걷고 단정히 빛치개로 가르마를 타고 머리를 빗으셨다.

그러나 워낙 싸구려 천이라 얼마 후 퇴색해서 경대보는 다른 천으로 바뀌었다.

그 후부터 나는 야경꾼의 딱딱이가 여운을 남겨도 꽃구름 사이를 거닐던 그 기분과 대화를 잃고 말았다.

무수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나는 그 잔잔한 추억은 물로 경대보의 모습마저도 상기해 보았던 일이 없었다.

그러나 지난 해부터였던가, 내 그림의 테마가 여자와 꽃이 많아졌고 코발트와 보라빛을 많이 쓰게 된 이후부터 그때의 그리움과 추억을 찾게 되었다. 어머니의 젖을 만지작거리며 무심코 바라보던 무지개 빛 인상들의 어린 눈에 영상 映像이 되어 오랫동안 묻혀 있다가 다른 사물의 현상과 함께 훗날 재생되는 것을 느낀다.

이러한 일들은 미래의 꿈과 일치되어 어떤 창작의 터전이 되어 주는 것이 아닌가도 싶다.

현관에서 쑥 들어간 길가 방으로 자리를 옮긴 후, 어느 날 밤 나는 뜻밖에도 옛날과 똑같은 딱딱이 소리가 고요를 뚫고 흐르는 것을 듣고 가늘게 환성을 올리며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다. 그리고 실의와 아우성의 도가니 속에 있는 일부 현실을 망각하고 태평성세 太平聖歲처럼 딱딱이 소리를 풍류적으로 즐길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딱딱이 소리 때문에 3, 4년 간의 주름이 펴진 것이 아닌가도 생각했다.

그리고 물밀듯 벤베르크의 떼구름, 떼꽃들을 상기하고 창작의 불을 태워 보았다.

그 후 어머니에게 그 경대보 이야기를 물었지만 어머니는 까마득히 잊고 버리고 계셨다.

오늘 밤도 딱딱이 소리가 지나갔다. 지나간 지 퍽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딱딱이 소리는 여전히 가까이서 들리는 것만 같다.

 

현실의 가치

‘가을에 제일 먼저 생각나는 사람…’ 을 묻는 사람이 있었다. 나는 하필이면 ‘추어탕’ 이라고 했더니 묻는 편이 기대에 어긋난 듯 멍하니 이해가 안 가는 모양이었다.

여름의 누런 낙엽만 보아도 세월이 가는가 하고 기뻐 좋아 했던 나의 청춘시절 어느 가을날, 누이동생과 함께 추어탕을 맛있게 먹던 일을 잊을 수가 없다. 그때만 해도 생활이 어려워서 더욱 맛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래서 나는 ‘누이 생각’ 이리고 할까 했지만 ‘추어탕’이 먼저 미끄러져 나와 버렸다.

누이동생과 나는 기막히게도 서로 좋아 지냈지만 그녀는 24세라는 젊은 나이에 죽었다. 그보다 네 살 위인 내가 지금까지 만 17년을 더 살고 있다. 앞으로 몇 해 더 살지, 장차 저승에서 서로가 만나게 된다고 하면 누이동생의 모습은 예 그대로고 이 나는 노파가 되어 있을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리고 이승과 저승 사이의 수많은 세월의 공백을 저승에서 어떻게 처리할 것이며 밸런스를 맞출지도 문제이다.

이런 생각에 잠겼을 때 지난번 내한 내한 한 바 있는 노벨상 수상자인 00 박사가 ‘인간의 생명체는 무기물질 無機物質이 근원 根源’이라고 설파 설파한 것을 듣게 되어 뭔지 한대 맞은 듯한 느낌이었다.  그 설은 특히 종교에 종사하는 분에게 크게 실망과 분노까지도 느끼게 했을지 모르지만 저승에서의 일을 걱정하는 나의 경우는 차라리 홀가분하고 시원한 체념을 일으켜 주었다. 그러나 그 설엔 인간의 생명체에 대한 종말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으니 한 가닥 의문이 남지 않은 것은 아니다.

여하건 이승이건 저승이건, 생각하는 생명체인 우리 인간은 고달프나마 눈부신 태양 아래 영광의 생을 누리고 잇는 것만은 틀림이 없다. 그러니까 현실이라는 시간을 일각 일각 능력껏 쌓아 올리며 후회 없는 생을 살아야 할 것 같다.

결과보다는 현실의 과정이 중요하다는 의미가 여기에 있는 것 같고, 죽어서 편히 쉬는 것보다는 살아서 고된 일을 하는 것이 가치 있는 일일 것 같다.

 

감각의 형체

사람의 두뇌는 엷은 석류빛의 아름다운 과실 모양으로 셀로판으로 싸놓은 것같이 생겼고, 그 뇌는 주름이 많으면서 깊이 패어져 있을수록 그 사람은 머리가 영리하고 좋다는 이야기를 의학하는 분한테서 들은 것 같은데 나의 두뇌는 아주 밋밋하고 그저 둥글둥글하기만 할 것같이 느껴진다.

어째서 그러한 생각을 하느냐고 물어볼 여지도 없을 것이, 나는 아주 미련하고 둔하기 때문이다.

또 머리가 둔하니까 척 이런 생각도 해 본다.

두뇌가 그렇게 셀로판으로 싼 아름다운 과실 같다면 감정이나 감각은 뇌가 형체가 있듯이 머릿속 어디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나 아닌 지, 그렇지 않으면 뇌 속에 어떤 세포의 형체로 틀어박혀 있는 것인지. 그런데 나 자신 둔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오랜 세월을 그림을 그리면서 살아왔다는 건 내 생각 같아서는 두뇌하고는 상관없고 그것은 오직 잠을 잘 못 자는 습성의 덕택인가 싶다.

 아주 젊은 시절부터 잠 못 이루는 잠자리에서 흘러간 옛일들이 아름다운 빛깔로 바뀌어 머리 속을 스쳐가는 것이 나로 하여금 그림을 구상케 하고 그러다가 깜박깜박 잠이 들게 해준다.

아주 잠을 못 이루는 건 병이지만 나 같은 정도라면 예술가의 경우는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만일 내가 시익시익거리며 잠을 잘 잤더라면 그나마 나는 그림을 못 그렸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젊은 때의 불면증마저도 노화해서 그런지 잘까 하고 누우면 금방 잘 수 있으나 그러다가 그림을 구상하는 기회마저 잃어버릴까 걱정이 된다.

오랜만에 라일락을 적시는 밤비 소리를 들었다.

비는 후적후적 흐느끼는 소리로 내 방 창문을 노크하는 것 같았다.

그 빗소리를 들을 때 나는 나이를 먹은 지금을, 또는 나의 처지를 아니 어느 무엇이고 외롭다거나 불만스럽게 생각지를 않았다.

나의 두뇌가 아주 밋밋한 둔한 것이고 잠 못 이루는 기나긴 삶을 살아왔다 할지라도 나는 한밤에 나만이 두뇌의 형체처럼 감각의 형체를 만들어 보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4장 나와 장미

招雨

무거운 구름이 하늘을 짓누르는 장마 때가 되면 달콤한 향기를 풍기는 오동꽃이 생각난다. 그리고 꼭 내 뇌리에 언제까지나 살고 있는 그 두꺼비가 한번씩은 나타나 그때의 일을 회상시키는 것이다.

웬일인지 나는 곤충이나 동물을 그리는데 흥미를 가졌다. 그러한 반영 反映으로 탐탁하지도 않은 내 작품 속에는 무수한 나비와 잠자리 등이 제물 祭物처럼 등장되었다.

어린 시절을 시골서 보내온 나는 보리 ‘가실’을 할 무렵이면 모든 곤충과 함께 두꺼비를 많이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어린 마음에도 그 놈이 괴기한 동물이란 걸 느꼈고, 귀엽다 하고 보기에는 너무나 거리가 멀고 괜히 농락해보고 싶고 때로는 학대까지 하고 싶어지는 감정을 주는 그러한 추물 醜物이었다. 그러나 비를 부르는 두꺼비, 촌색시의 순정 같은 봉선화와 백일홍의 인상과 함께 살고 있는 두꺼비에 정서 情緖와 그 놈의 표정과 엉금엉금 기어가는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유머러스하고 사색 思索이 있어 보였다.

비가 내리는 날에는 어머니의 친구인 동리의 부인들이 우리 집 안방에 모여서 화투놀음이 벌어진다. 그리고 발딱 나자빠진 두꺼비가 있는 ‘비 광’이란 짝이 소중한 점수를 부른다는 것도 알았고 패하는 사람이 돈을 내면 으레 내가 눈깔사탕을 사러 가는 것이었다. 나는 또 그걸 기다리기 위하여 오도카니 어른들 옆에 끼여 앉아 있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두꺼비는 어렸을 때, 내가 많이 본 동물이기에 그 놈을 생각할 때마다 향수 같은 것이 가슴을 채우곤 하였는데 고향을 떠난 후 나는 오랜 동안에 두꺼비를 잊어 버리고 있었다.

십 년 전 내가 K시에서 처음으로 교편을 잡고 있을 무렵이다. 고목 古木이 있는 방죽 옆의 관사 官舍가 우리의 집이었고 가족은 온종일 나만을 기다렸다.

어느 날, 학교에서 직원들에게 미군 군화가 배급되어 나오 나의 몫으로도 특대 特大 같은 것이 하나 배당되었다. 아무 소용에도 닿지 않는 군화였지만 나는 외로운 가족들의 기를 돋궈 주기 위해서 군화건 뒷동산의 산딸기건 뭐든지 물건이라면 죄다 집에 갖고 들어가기를 좋아했다.

특대 군화가 내 책상 위에 놓여진 그 시간에 바로 교정에서는 왁자하니 남학생들이 두꺼비를 놓고 둥글게 서 있었다. 그리고 서로 발로 차고 막대기로 하얀 배를 누르기도 하고 마음껏 조롱하는 것이었다. 나는 학생들을 만류하고 두꺼비를 달라고 해서 손수건에 쌌다.

오줌 싼 두꺼비와 헌 군화…

대조 對照 라면 허전하기 그지없는 대조요, 무겁기만 한 선물이었다.

나는 두꺼비의 밭에다 흰 삼합사 실을 친친 감아서 내 방 책상다리에 매어 놓았다. 두꺼비는 움직이지 않았다.

두꺼비를 여러 모로 보고 그린 나는 두꺼비를 놓아 주려고 실을 풀려 했다. 그러나 되게 맨 실은 좀처럼 풀어지질 않고 험상궂은 촉감이 어떻게 싫었던 것인지 그냥 그대로 감나무 밑에다 던져 버리고 말았다.

나는 그 두꺼비는 벌써 잊어 버리고 두꺼비를 통한 어린 시절의 향수를 그리기 위해서 고민했었다.

그러던 중 어영어영 해가 바뀌고 새봄이 왔다. 따라서 장마가 가까와지기도 햇다.

어느 날 아침의 산책에서 달콤한 향기에 취한 나는 발을 멈추고 실컷 낭만을 마신 듯한 표정에 잠겼다.

그 향기로 비로소 두꺼비의 작품 구상이 완성됨을 느끼고 그날부터 오동꽃이 떨어진 땅에 두꺼비 한 쌍이 있는걸 작품화했고 그 후 <초우>라 이름 붙였다.

비가 내릴 듯한 어느 날의 해질 무렵이었다.

우리 집 감나무 밑으로 무언가 유령처럼 형태가 분명하기 않은 것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마치 고목의 한 가지가 걸어가는 양 보이기도 했다.

그건 바싹 메마른 두꺼비의 모습이었다. 왼편 다리에는 잿빛으로 삭아가는 실이 아직도 묶인 채 달려 있었고 두꺼비의 걸음걸이는 삭은 실마저 무거운 모양이었다.

내 작품의 제물 祭物이 된 두꺼비는 긴 시간을 어디선지 말라가며 살고 있다고 지금 내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실을 풀어 줄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는 메말라가는 채 뜨거운 양광 陽光 밑에서나 으슥진 그늘 속에서 비를 부르고 있을 것이다. 그 비가 일년에 또 한번 내릴지라도 초우의 영혼 靈魂으로 돌아갈 것이고 나는 비가 내릴 때마다 그 두꺼비의 파리한 모습을 회상할 것이다.

 

라일락

지난해 봄에 우리 집은 향기로 가득 찼었다. 네 그루의 라일락이 한꺼번에 흡사 보랏빛 비누거품처럼 피어 바람이 불면 뭉게구름이 흩어지듯 향기마저 뿜으며 하늘거렸다.

서울서 살기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자기집 뜰에서 생긴 장관이기에 그것이 여간 신통하지 않았다.

이제는 나도 라일락을 볼 수 있는 조그마한 정원을 가졌노라고 한편 흐뭇하기도 하고, 그것이 더 이전에 소파라든가 전화가 필요해서 애를 쓰다 간신히 마련했을 때의 기분과 꼭 같았다.

어느 날 아침 나는 ‘라일락….’ 하는 남자 소리를 들었다.

나에게 하는 소리는 아니고 그저 인간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감탄사였었다.

그 소리가 지금도 내 귓전에 선하고 왠지 그 말소리가 그리워진다.

다시 봄이 왔다.

물목 수선화들이 파릇파릇 자라나기 시작하고 앵두나무를 비롯해서 홍도 紅桃, 라일락 가지에 새싹이 돋기 시작했다.

나는 이번이야말로 그 희한 한 라일락에 젖은 내 흐뭇함을 마음껏 즐기려고 기대하고 있었는데 어쩐 일인지 라일락은 꼭 두 송이밖에 피지 않았다.

밥하는 처녀는 그걸 ‘해걸이’를 한다고 했지만.

바쁘게 살다 보니 그만 거름을 주는걸 놓쳐 버린 때문일까.

어쨌든 간에 수선화도 그렇고 뭇꽃잎들의 길쪽길쪽 커만 가지 꽃을 피울 기색이 보이지 않아 이상했다.

나는 되레 나의 본연의 분수를 되찾을 반성의 계기를 마련해 주는 것이라 생각하고 마음을 편히 가져 버렸다.

왜냐하면 내 집 뜰에 꽃이 만발하고, 더우기 창가에서 라일락을 즐긴다는 풍류 (혹은 사치)가 내 분수에는 넘치는 과분한 나의 운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는 택시를 타고 지나가면서 남의 집 울타리에 피는 꽃을 넘어다보든가 입장권을 사서 고궁 古宮에 들어가서 봐야 하는, 그래야 제대로 내 격에 맞게 산다는 것이고 그렇지 않고는 무슨 불행이 올 것만 같다.

옛날에 시골 우리 집에 흰 나리꽃이 무성히 피었었다. 그것은 마치 네델란드의 튜울립 밭의 일부 같았고, 그 향기가 동네까지 번져 나비떼가 몰렸었다. 그때 여 女 와 남 男 사이의 불행이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또 우리 집에 라일락이 만발하여 향기가 진동했던 지난 봄 역시 나는 그와 같은 불행은 또 한번 치렀기 때문이다.

 

꽃 흉년이 든 이번 봄, 어느 날 화가 한 분이 찾아왔었다.

홀로 여가장 女家長 노릇을 하고 있는 나를 측은히(?) 여겼던 모양인지 꽃거름 한 봉지와 가위를 들고 왔었다.

그러고 보니 가지가 제멋대로 뻗은 라일락은 마치 곱슬머리 수양버들처럼 보였다.

부드러운 양광 양광이 내려 쬐는 오후에 토각토각 가지 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는 그 소리에 취해서 1세기 전 후기 인상파가 태동했던 시대에 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그러한 환각의 시대에 살고 있는 듯 한 착각 속에서 나는 밀레의 <이삭줍기> 그림이 박힌 수틀이 있는 방으로 들어서려는데 잘려내려 흐트러진 나무 가지를 주워 모으면서

 “우머, 이 가지 말려서 녹두밥 비어먹으면 맛있겠네…”

“응? 하 하 하”

하는 소리가 마당에서 가위 소리에 맞춰 봄 하늘에 울려 퍼졌다.  그것은 어쩌면 여 와 남의 소리 같기도 해서 나는 겸연쩍어 공연히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나는 내가 시간을 초월한 어느 공간에서 나무 가지를 줍고 있는 또 하나의 현세 현세의 나의 육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 묘한 실감에 젖어 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영원한 공간의 세계가 현실보다는 그리운 세계처럼 느껴졌다.

지난번 여럿이서 교회에 나들이 갔었을 때만 해도 가지를 치고 있는 이 화가는 투망 투망 을 들고 정신 없이 개천을 처벅처벅 올라가기만 했었는데… 그분은 그런 일에 잘 열중 하는 취미가 있는 것 같고 나 역시 주워 모으는 취미가 있었던 모양인지 같이 허위적이면서 개천을 따라 올라가 가끔 걸리는 새끼손가락만한 피라미새끼를 비닐 봉지 속에 주워 담았다.

개천에는 물고기가 없어서 투망을 거둘 때마다 돌과 밉게 생긴 물개구리가 걸려들어 왔었다.

 

가위질에 열중한 나머지 화가는 수선화 잎과 물목을 질끈 밟아 버렸다.

이파리들은 둥근 부챗살처럼 누워 버렸다. 나는 그가 모르고 있는 것이 다행이라고 여겼는데, 그걸 지켜보고 있던 밥하는 처녀는 뭐가 우스운지 웃음을 참더니 기어가다시피 방으로 들어가서 데굴데굴 구르면서 웃는 것이었다.

나 혼자 사는 집에 와서 화가인 그 남자가 라일락 가지에 가위질하는 것을 밥하는 처녀는 처녀대로 어떤 상상력을 발휘해 보고 웃었는지도 모르고 길 밖에서 이 광경을 힐끗 보며 지나가는 사람도 나와 그 화가라는 여와 남을 “아, 라일락” 대신 참 행복스러운 여와 남으로 보고 지나갔을지도 모르겠다.

 

앵두꽃

우리 집 장독대 옆에 조그마한 앵두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이른봄에 꽃이 피길 기다렸는데 때아닌 봄장마 때문에 그 고운 꽃을 보지 못한 채로 벌써 이파리가 돋아나고 말았다. 옛날에 살림이 줄어들어 생가 生家를 팔고 공원 아래 있는 어느 고가 古家로 이사간 일이 있었다.

그때 나는 동경에서 학교를 마치고 돌아와 무럭무럭 자라는 몰묵처럼 건강하였다.

보잘것 없는 집 모습에 마당은 한없이 넓어 보였으나 그건 살던 사람들 역시 경황이 없었던지 상치씨 하나 뿌려 있지 않고 잡초만 엉성히 푸릇푸릇 움터 있는게 여름이 되면 뱀, 귀뚜라미, 지네, 뭇벌레 떼가 향연을 이룰 것 같은 인상이었다.

그런 가운데 단 하나 장독대 옆에 큰 앵두나무 한 그루가 있어 흰 꽃이 레이스처럼 피어 올라 그 때문에 집안이 환하게 보이고 그 반면 초가집은 더욱 초라하게만 보였다.

그 무렵 나를 둘러싸고 여러 군데서 혼담이 꽃을 피우듯 활짝 피었지만 부모의 마음에 찬 곳이라곤 한 자리도 없었던 모양이고, 나 역시 어디고 시집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동네에 소문난 호인인 아버지를 졸라 나를 함락시키려던 청년이 두 사람 있었다.

한 사람은 국민학교 교사이고, 한 사람은 면의 면작계 주사 綿作係 主事였다. 그런데 두 사람 다 학벌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어머니가 반대하셨다.

어느 날 아침, 역시 결혼 문제 때문에 아버지에게 꾸중을 듣고 세수도 않은 나는 뒤란 마루에 걸터앉아 앵두꽃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무엇인지 강렬한 시선이 나를 쏘아보아 눈이 부시는 것 같아서 무심코 공원 쪽을 바라보았더니 담 너머로 진한 회색 양복 차림을 한 안경 쓴 젊은 사나이가 벌써부터 나의 거동을 살피고 있었던 것이다. 면작계 주사였다.

세수도 하지 않은 나는 몹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땅바닥에 납작하게 엎드려 기어서 장독 앵두나무 그늘에 숨었다.

“이제는 갔겠지?”

하고 레이스 같은 꽃 사이로 살며시 보노라니 청년은 얼굴에 웃음초자 띠지 않고 정색한 얼굴로 나의 거동을 조금도 놓치지 않은 채 우뚝 서 있다.

상당한 장기전을 치른 끝에 나는 겨우 앵두꽃 그늘에서 부엌 문으로 빠져 나오게 되었다.

그 청년은 지금 어디서 어떻게 잘 살고 있는지 궁금하다.

 

우담화

한때 나는 신경이 날카롭게 솟아 잠 못 이루는 밤을 허다히 보냈다. 그럴수록 신경은 더욱 병적으로 날카로워지기만 했는데 하나의 곤충이나 날짐승에 대한 혐오증과 공포에 가까운 증세가 나를 괴롭혔다. 따라서 대낮에도 모기가 울면 기어코 잡아야만 안심할 수 있을 만큼 신경이 무장되어 있어 다른 일에 지장이 많았다.

어느 날 색시거미 같은 분홍모기가 추욱 둔하게 내려와 스케치 북에 앉았다.

어느 날 색시거미 같은 분홍모기가 추욱 둔하게 내려와 스케치 북에 앉았다.

나는 당장에 손바닥으로 쳐서 죽일 수밖에 없었는데 모기는 얼마 전 사람에게서 흡혈한 핏자국을 남기고 뭉그러져 쓰러졌다. 나는 뇌염모기인지 아닌지 검사해 볼 양으로 한참 동안 살폈지만 나의 희박한 생물 지식으론 알아낼 수가 없어 후닷닷을 불렀다.

후닷닷은 층계를 올라 능청능청 큰 키를 꾸부리며 걸어 들어왔다.

근시 안경 아래 동자를 굴리며 모기의 시체가 있는 스케치북을 이리저리 돌려가면서 모기의 정체를 잡느라고 한참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후닷닷은 뇌염모기가 아니라는 시원한 소리를 듣고자 하는 나의 기대를 어기고

“엄마는 지독하게 죽여 버려서 가려낼 수가 없다”는 싱거운 말만 남기고 긴 허리를 펴고 층계를 도로 내려가 버린다. 그날 오후부터 나는 빨갛게 얼굴이 상기되고 열이 오르는 듯 했다. 아까 모기에 물려 뇌염균이 내 혈관을 도는 듯한 환상 때문에 적어도 쫑쫑이 대학을 마칠 때가지는 살아야겠다는 평소의 소신을 되새기며 병원으로 달렸다.

의사는 나의 증세에 대한 진술을 한참 듣고 나서 얼굴에 묘한 웃음을 띠며 체온기를 옆으로 획획 뿌리고 나서 내 앞으로 내민다. 열은 35도였다. (내 체질은 어떻게 된 셈인지 35도가 평온이다). 그런 일이 있은 후 나는 그림을 그리다 다시 그와 같은 증세가 재발하였다.

파리의 모습과 흡사한, 초라한 벌 한 마리가 채색 접시 언저리를 뱅뱅 돌고 있었지만 나는 신경을 쓰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런데도 나의 신경은 벌에만 쏠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벌은 한참 돌다가 기둥의 못자국 구멍 속으로 날개를 접고 쓰윽 들어가 버린다. 아마도 그의 아지트인 것 같았다.

벌은 잠시 동안 나오지 않았다. 하필이면 주위에 산도 있고 나무도 많은데 남의 집 화실의 기둥에다 보금자리를 만들었을까? 하는 괘씸스러운 생각마저 들었다.

여름아 가고 가을에서 겨울로 접어들자 신경이 둔해졌는지 정상적인 수면을 하게 되었고 작업하는 재미로 시간을 아깝게 생각할 만큼 열심히 일을 했다. 그러나 사이에 곤충들에 대한 신경이 무장도 풀린 모양이었다. 바로 며칠 전 일이다.

“어머! 이게 뭘까?”

자지러질 듯 놀라는 남미장의 소리를 듣고 가 보니 화실도어 문지방 위에 처음 보는 희한한 꽃이 피어 있었다. 바닷가의 말미잘 같은, 가는 명주실 같은 것이 무수히 둥글게 자라나 꽃수실을 이루고 꼬타리에는 하양 점들이 박혀 있었다. 꽃치고는 신기하고 숨결이 들리고 맥박이 울려올 것만 같은 괴기하고도 고상한 꽃이다. 나는 그게 싫고 붙일 맛이 없었지만 스케치를 했다.

범어 梵語 에 나오는 상상화 想像畵 인 우담화 優曇華 를 상기했다. 싹이 트기 천 년, 순이 자라나기 천 년, 꽃이 피기 천 년, 3천 년 만에 한 번 피는 우담화, 그렇게도 귀한 꽃이라 인간 세상에는 불 수 없는 것이요, 만일에 그걸 보는 일이 있다면 틀림없는 길조라는 이야기를 어린 시절에 귀동냥한 기억이 있다.

오랜 전이지만 내가 고달플 때, 불행하다고 생각할 때 나는 낡은 전등불이 히뿌여니 삭아서 필라멘트가 하얀 민들레 씨처럼 솟아난걸 보고 내 마음 속에 피는 길화 吉花 우담화라고 보도 싶을 때가 있었다. 그리고 우담화를 보았으니 이 이상 괴롭거나 불행한 일이 없을 거라고 자기에게 타일러 주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도 내가 그때와 같은 마음에서 살고 있다면 이 기괴한 꽃을 보고 한층 더 어리석고 부질없는 환상을 실감 있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의 감정은 어느 의미로는 많이 속화되고 현실화되어 버린 모양 같다.

우담화를 눈 앞에 보면서도 그게 길조이고 파랑새가 찾아올 것이라는 기대가 마음 속뿌리부터 가져지지 않을 뿐더러 도리어 사양하고 싶은 생각부터 든다.

슬픔이나 불행은 역시 긴 세월을 두고 꾸준히 개척해 나갈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우담화가 피었다고 해서 내 그림이 갑자기 천재가 될 수 없고 하늘에서 벌꿀이 쏟아질 리도 만무하다. 보다도 그 동안 지나온 세월이 얼마나 충실한 것이었던가 가 더 중요하고 문제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지금의 경우 설령 찬란한 미래가 또 있다고 하더라도 비 오지 않은 가문 봄 날, 움트려고 파닥거리는 라일락 나무 같이 과거에 대한 애착이 더 강하다.  잠시 후 나는 그게 필경 어떤 벌레의 알 일거라는 현실적인 느낌이 들자 불현듯 내가 이제까지 살생한 수많은 날벌레들의 시체가 상기되어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우담화의 정체는 바로 그게 아닌가 싶었다.

후닷닷이 삐뚜름한 자세로 열심히 사전의 페이지를 넘기다가 환성을 올린다.

“여기 있네! 여기!”

실잠자리과에 속한, 여름에 나무 그늘에서만 스윽 날다 죽어 가는 하루살이 같이 박약한 일종의 잠자리 알임을 알았다. 그리고 한편 우담화 라고도 씌어 있기도 했다.

나는 후닷닷을 시켜 우담화를 뜯어 내게 했다.

무엇인가 생물이 산다는 슬픔이 나에게 괴어 오기 시작했지만 그러나 그 괴기한 꽃의 정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相思草

이층 커튼을 젖히면 하늘색 지붕의 아담한 교회가 내려다 보인다.

맨 처음 그걸 나는 퍽이나 아름다운 정경으로 바라보았던 것이고 산과 더불어 맑은 기분으로 흠뻑 호흡하다시피 하였다. 그리고 종소리가 울려올 때마다 종의 모습과 흡사한 더덕 꽃을 유정 有情 하게 굽어보았다.

지난해 내 기침병을 고쳐 주겠다고 하며 대한민국엔 자기밖에 명의가 없노라고 장담하던 그 얄궂은 한의사가 어느 날 약 보따리를 들고 나가면서 쉰 목소리로,

“호, 더덕이구나….”

하며 날을 듯한 더덕을 기우뚱 치켜보고 갈 때 나는,

“호, 저 이도 어릴 때는 순진했었구나.”

하는 생각이 까닭 없이 들었다.

그 후 교회는 날로 발전한(?) 모양이고 주위의 작은 지붕 밑의 사람들이 어느새 거의 신자가 된 모양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 집 부근은 마치 어떤 신앙촌이 되다시피 변했다.

특히 종소리 대신 스피커 장치를 하고 작은 교회 치고는 감당 못할 만큼 그 큰 찬송가 소리가 온 동네를 불안하게 진동시키는데 신자가 아닌 나로서는 시대가 다르지만 영화 <쿼바디스> 나 <테미트리우스>의 한 장면을 보는 듯 착각을 일으킬 때가 있다. 그렇게 말하는 나의 입장을 ‘폭군 네로’ 나 폭정의 재상이라고 그들은 말할는지도 모르지만….

스피커의 파장으로 귀청을 뚫을 듯한 소리는 한 시간만큼 씩 약 10분간 계속되는데 그 동안 나는 무슨 고문을 당하듯 붓을 놓고 귀를 막다시피 하여 요란스런 스피커 소리가 그치기를 기다린다.

가족들은 서로 이야기를 하다가도 10분 동안은 멍하니 앉아 잇어야 하기도 한다.

바로 우리 앞집인 닭집만 하더라도 벌린지 얼마 되지 않은 가게를 일요일이 되면 지성으로 문을 닫는다.

이러한 지성과는 정반대되는 생활, 마음씨, 태도 등을 보게 되는 것도 우울하다.

물론 아주 작은 일부분에서 일어나는 서글픈 피해이지만 그건 곰곰 생각해보면 어쩌면 그렇게도 철저하게 부지하고 철저하게 공덕심이 없는 것일까?

그러나 34, 5도의 더위가 쨍쨍하니 타오를 때마다 나는 위선적인 설교보다도 그 더위가 도리어 시원해서 좋고 모든 주위의 구질구질한 것이 타 없어질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화초 잎이 맥없이 늘어지는 더위를 오히려 정화작용 淨化作用 으로 생각하는 나는 그림을 그리며, 쫑쫑이 아버지를 위한 믹서를 돌리며, 화가로서 여자로서의 오붓함을 때때로 가슴 깊이 안아 볼 때가 있다.

미도파와 쫑쫑이가 층계를 오르락내리락하며 지르는 건강한 개구장이 소리의 코러스도 달게 미소 지으며 받아넘긴다.

그럴 때는 세상에 미운 것이 없다. 있다면 미움보다 가련함과 안타까움이 있다.

나는 분명 마음의 폭이 넓어져가고 있는 모양이다.

 

목욕탕에 들어가서 냉수를 끼얹는다.

억지 냉방장치의 호화 속에 잠시 들어있는 것보다 상쾌한 맛이다.

나는 찬물을 끼얹으면서 화초 밭에서 옥비녀 같이 뾰족이 일어난 것을 본다.

보라 빛 입술을 뾰족이 내밀다시피 머문 상사초 相思草 다.

이른봄에 사다 심어본 물목이 길 머리칼 같은 잎이 지더니만 지난 장마 틈에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줄기가 일어나 꽃을 피운 것이다.

잎이 홀로 피었다가 먼저 가고 곷이 나중에 홀로 피기 때문에 누가 그 아쉬움을 상사초라 부르게 되었다는 그 꽃.

그 꽃은 옛날 뒤 곁 큰 앵두나무 옆에도 피었었다.

그때의 꽃은 더 탐스럽고 요요 妖妖 하고 아름다웠다. 화려하지도 않고 풀꽃처럼 친근감도 없는, 어느 색시의 고혼 孤魂 이 깃든 듯 신비와 빛깔이 꽃 모습이었다.

꽃줄기는 순식간에 자라고 지금은 활짝 화잠 花簪 같이 피었다.

“이것 보세요. 글쎄 컸다니께…”

나는 쫑쫑이 아버지가 세수할 때마다 누차 대견한 것처럼 뇌까렸다. 그러나 반응이 없어 허전해 하면,

“도대체 그 말을 몇 번 해….”

그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쏘아붙여 버린다.

내 신경과 감각은 병적인 영양과잉으로 자랐는데…. 그 불필요한 것들을 쫑쫑이 아버지는 오랫동안 정리해 주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툭 쏘아 붙이는 순간을 노렸는지도 모른다.

나는 때대로 지나친 환상 속에 묻히려는 때가 있다. 남이 나에게 불친절할 때도 그렇고, 제비나 벌이 우리 집 추녀에 집을 지어도 그렇고, 누구에게 얌체를 당할 때도 그렇고, 별안간 상사초가 피어도 그렇다.

만약에 쫑쫑이 아버지가 그렇게 쏘아붙이지 않았던들 나는 벌써 지나친 표현이지만 정상을 잃었을는지 모른다.

그때도 상대방이,

“어머나, 그래. 꽃도 묘해라.”

따위의 대꾸를 해 주었더라면 나는 옛날의 일들을 부질없이 생각하고 그걸 따지고 지금의 행복을 부정했을지도 모른다.

지금 이렇게 다행한데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또 무슨 불행의 씨가 자라고 있지나 않나 하는걸 오직 상사초 만이 알고 있을 거라는 따위의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찌는 듯한 더위, 북창 북창으로 뻗은 아카시아의 검푸른 숲은 그림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다만 누군가의 별장이었다는 성 같은 집에 파아란 기가 바람도 없는데 팔랑팔랑 나부끼며 신호하듯 한다.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작품들이 오후가 되어서 그런지 쌕쌕하다. 쫑쫑이가 비눗물에 묻혀 멱감는 소리가 아래층에서 들려온다.

교회 스피커에서는 또 노래가 요란스럽게 들려온다.

나도 10분을 기다리는 자세를 가누기 시작해야 한다.

 

무궁화

보라빛과 진한 바다빛, 이 두 가지 색의 크레파스를 섞어 문질러본다.

아름다운 대조다.

어릴 때 시골 초가집 울타리에 피던 보라빛 꽁의 정서를 나는 잊을 수가 없다.

지금 말로는 해수욕인데 그때는 촌사람들이 물맞으러 간다고들 했던 것 같다.

외할머니와 어머니와 나는, 이웃집 큰애기 여옥이와 ‘사구시’라는 마을로 물맞으러 갔다.

여옥이는 목소리가 좋아서 노래를 잘 불렀고 걸을 때마다 곱게 따은 숱 많은 머리채에 치렁치렁 댕기가 나부껴 모두가 아름답다고 칭찬이 자자하였다.

사구시를 찾아가려면 2, 30리 길을 걸어가야 했는데도 나는 도시락을 이고 앞장서서 걸어가는 여옥이 치렁치렁 흔들리는 머리를 바라보며 다리 아픈 줄 몰랐다.

마을에 도착하여 무궁화꽃이 울타리에 많이 핀 초가집 마루에서 쉬게 되었다.

그 마을에서 먹을 거라고는 큰 까마귀참외 뿐이었다.

참외를 먹으면서 나는 보라빛이 나는 무궁화를 생전 처음 바라다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보라빛을 멀리 한없이 넓게 펼쳐진 바다와 잘도 빛깔이 어울려 어쩌면 그렇게도 내 눈에 아름답게 보였는지 신비스러울 정도였다. 무궁화는 필경 바다가 있어 더 곱게 보였던 게 아닌가 싶다.

물 맞는다고 바다에 들어갈 때는 애나 어른이아 그 모습이 참 원시적이고 모두 우스꽝스럽게만 보인다. 아낙네들은 삼베고쟁이를 허벅다리까지 걷어올리고 윗도리도 완전히 벗어 붙여 유방이 털렁털렁 그대로였고 여옥이는 수줍은 듯이 따로 싸온 적삼을 걸치고 조용히 물 속에 서 있었다.

멀리 돛대를 달고 작은 놀이배가 온다.

 

순풍에 돛을 달고

뱃머리를 돌려서

외로이 저어가니, 외로이이 이이, 외로이 저어가니…

 

유행가가 잔잔한 파도를 타고 밀려온다.

여옥이는 그 노래가 흥겨우면서도 부끄러운 모양 같았다.

노래를 부르는 주인공은 사구시에 살며 이따금 읍내에 나와 읍내 처녀들의 가슴을 울렁거리게 했던 건달 청년이었다 그리고 그 청년은 일 년에 한 번씩 읍내에 찾아오는 신파 연극의 굿장이들처럼 어린 내 마음에도 황홀한 꽃을 피우기 위한 작은 멍울을 싹트게 해줬던 것 같다.

배가 가까이 온다.

청년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여옥이를 흘끗 보는데 여옥이는 몹시 당황해 하며 내외를 한다.

여옥이는 웬일인지 오래 살지 못했다.

눈속으로 파고들듯 강렬한 바다빛 위에 서 있던 여옥이는 없어졌어도 아직도 내 가슴엔 그때 그 시골집 울타리 옆에 서 있던 무궁화의 보라빛과 바다를 잊지 못한 채 그 아름다운 색깔들을 나의 화폭에 올려 보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다.

한 색 한 선을 그을 때마다 나는 이런 생각, 저런 추억이 되살아와 그림을 그린다는 일을 한없이 꿈의 세계로 끌고 들어가는 양 즐겁게만 해준다.

 

5월

라일락이 향기를 잃어 버린 밤이다. 장미가 부풀었던 가슴을 헤치고 이제 요염한 자세를 일으키는지 화사한 날개로 숨소리를 덮는 듯 짓눌러 오는 밤, 내 심장의 고동이 어둠 속에서 이따금 날개를 터는 십자매(十姉妹)의 동작과 더불어 호수의 파동처럼 주름을 잡는다.

고요하고 화려한 환상도 무너지고 시든 라일락의 영혼마저 증발하는 것 같은 쓸쓸한 5월의 밤이다.

이렇듯 식물성(植物性)의 생명들이 시들어 가고 또 새로운 생명을 노래도 하고…

5월의 생리(生理)는 슬픔과 환희를 한꺼번에 쏟아 놓는다. 이 밤도 가고픈 옛날의 논두렁 길에선 개구리들이 녹색의 소리로 울어대고 있을 것인데 덧없는 인생이 취한 내 가슴엔 이슬 같은 것이 괴고 있다.

5월은 인생에서 어떤 피하지 못할 인과(因果)를 지어 주는 것 같다. 지열(地熱)에 익은 포플라가 상기한 풋냄새를 피우고 태양의 직사(直射)를 받아 떨어뜨린 선명한 그림자에 바람이 깃들면 5월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도 흔들리기 마련이다. 알지 못할 5월의 회화(會話)에 귀를 기울이고 풀지 못할 인과에 마음을 태워야 한다.

나는 5월이 오면 옛날의 추억을 더듬어야 했고, 내일을 위해서 화필(畵筆)을 들어야 했다.

5월을 불러 누구나 다 아름답다고 한다. 꽃들이 그 아름다운 자태를 견주는 것도 5월이요, 신록들이 바람에 하늘거리는 것도 5월이고 보면 5월의 자연은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들은 여인들의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했는지, 그리고 눈물도 얼마나 괴이게 했는지 모른다.

옛날 젊은 시절 어느 5월에 나는 여인네들끼리 가족적으로 들놀이를 가는데 권함을 받아 바람을 쐬러 따라간 일이 있었다. 지금 같으면 소풍을 갔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 무렵 나는 인생의 시련 같은 것을 단단히 믿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어떤 인연의 줄기가 나의 운명 앞으로 뻗어왔다는 것도 알 수가 있었다. 쉽게 말하자면 나는 사랑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인네들 가운데는 인텔리 오뎅집 마담 형제 일행과 인생면에서 나와 비슷한 환경의 직업 여성인 Y양도 나처럼 ‘옵서버’ 격으로 얼굴을 내놓고 있었다.

나무 위로 무척이나 왕개미 떼가 올라가는 송림(松林)의 구릉(丘陵)이 목적지었던가 그들과 나는 거기에 올라가서 잡초가 무성한 어느 무덤 위에 앉았었다.

화제는 어느덧 막연한 사랑 이야기로부터 시작하여 나중엔 두 여인이 서로 제각기 자기가 사모한다는 것보다 상대의 이성(異性)이 자기를 사모하여 늘 전화가 걸려온다는 등 아베크 하기에 여념이 없었다는 등의 이야기에 꽃을 피우고 있었다. 이야기라기보다 자기 자랑을 하는 것으로 그들의 표정은 해당화처럼 활짝 피어 있는 것이었다. 여인들이 이야기에 꽃을 피우고 있던 상대방 주인공은 아마도 동일한 남성인 것 같았고 Y양의 것이 농도가 더 짙은 모양이었다.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뒤로 구릉을 내려와 논두렁에서 와글거리는 개구리를 수십 마리 잡아서 손수건에 싸 들었다.

그 후 그 개구리들은 나의 화재로서 희생이 되었지만 나는 지금도 그 여인네들의 대화가 잊혀지지 않고, 그때의 감정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 얘기의 주인공은 나의 애인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때 개구리에 대해서 나의 슬픔을 호소(呼訴)하고 싶지는 아니했지만 개구리들의 녹색의 울음 소리가 나의 심경을 한결 더 구슬프게 울려 주었다. 나는 어쩐지 5월이 오면 개구리의 울음 소리와 함께 마음이 설렌다.

그러나 나는 이 밤에 시든 라일락의 향기를 슬퍼만 할 수는 없다.

내일 아침이면 화사하게 피어났을 장미의 붉은 정열과 견주기 위해서 이 밤이 있게 해야 하는 것이다.

 

소쩍새

나의 청춘 시절이라고 할까, 그 무렵은 K시에 다방이라곤 두 곳이 있을 뿐이었다. 지금 프랑스에 가 있는 고암 顧庵 화백 부처가 K시에 와서 개인전을 열었다고 기억하는데 그 두 사람을 빙자로 ‘신성’이라는 다방에 처음으로 간 일이 있었다.

그리고 누군지 잊었지만 그때 몇몇 여자 친구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별안간

“오호호홋….”

하고 웃음의 코러스가 높이 실내를 뒤흔들었다. 특히 고암 화백 부인의 교교한 웃음소리는 비단을 째는 듯한 이색적인 웃음소리였다.

까닭은 커피가 나왔을 때 고암 화백이 소박하고 무딘 손으로 수저를 된장국 젓듯 휘저어 훌짝홀짝 떠 마시는 폼이 흡사 된장국 떠 마시듯 해서 그게 모두 우스웠던 것이다.

내가 커피를 마신 역사도 그로부터 시작되었다.

그 후 나는 서울로 이사 오게 되었는데 그 해 나는 퍽이나 커피적(?) 인 향수에 젖었던 것 같다.

이른봄의 감각에서 오는 빛깔이라고 할까, 죽은 풀잎이 싱그럽게 소생하기 시작하는 빛깔. 나는 그러한 빛깔의 저고리를 해 입고 무언가 한시름 놓은 기분이었다.

어쩌면 커피와 같은 향기에 젖어 있었는지 모른다.

앞으로 헤쳐나갈 도시 생활과 나의 새 생명체에 대한 꿈을 막막하나마 한아름 안고 있었던 것 같다.

그 미도파가 어느덧 자라서 지금 두 오누이가 나란히 누워 잠꼬대를 하며 발을 동생 턱 위에 얹고 천진난만하게 숨을 쉰다.

그 오붓한 행복감을 느끼면서 진한 갈색의 레텔이 붙은 커피병, 바닥이 난 설탕병, 쌍화탕빛 얼룩이 진 빈 찻잔, 스케치 북, 소반 등이 반사하는 기묘한 무드에 묻혀 있다.

바람이 숲을 스치는 소리, 새 소리, 시냇물 소리는 오늘 방 따라 가야금 산조 散調 를 듣는 듯 구슬프다.

 멀리서 꾹꿍새가 울고 가까이서는 잡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린다.

그걸 가벼운 터치로 뭉개 버리듯 지나가는 바람 소리가 새소리를 잠시 지워준다. 그림을 그릴 때 다음의 색조 色調를 위하여 어느 색깔을 가볍게 지우듯이…

이럴 때도 커피의 향기를 감각할 수 있다. 향기의 감각 이라기보다도 향기의 인상일지 모르나 따끈한 그 맛이 식도로 들어가면 가벼운 파라솔을 폈다 갠 것처럼 기분이 시원하다.

“소쩍 소쩍…”

악마에 쫓기듯 쇳소리를 지르며 날아가는 새, 언젠가 어머니가

“저 소쩍새 울음 소리…”

하시던 그 새 울음 소리가 별안간 산조와 같이 은은한 숲 속의 음조 音調에 금을 낸다.

그 소리에 나도 무슨 환상 같은 것에서 갠 것처럼 소쩍새 같은 슬픈 울음 소리가 터져나올 것같이 느껴졌다.

그러면서 나는 어떤 절박한 희망을 압축하듯이 죄어 본다.

가느다란 시계바늘 소리가 혈액을 수혈할 때 뽀닥뽀닥 떨어지는 생명수의 소리로 들리고 열띤 전구 電球 언저리를 빙빙 도는 부나비 새끼가 천사의 손길처럼 느껴지는 것은 미적 감각의 변질이라고 할까?

이와 같은 모순과 언밸런스를 나는 커피의 향기에다 붙여본다. 커피의 향기는 늘 마음의 안전을 주기 때문이다.

우스워도 우는지 모르지만 또 한번 소쩍새가 울고 지나간다.

그러나 멀리서 우는 소리, 가까이서 지저귀는 소리의 조화는 다시 돌아와 숲 속의 은은한 산조는 언제까지고 흐르고 있다.

 

나와 장미

보리가 익어가는 무렵, 미나리꽝에서 개구리가 처량하게 울 무렵이면 장미가 피어 있었던 기억을 더듬게 된다. 보리밭의 익은 빛깔을 보던 것도 개구리 울음 소리를 들은 것도 퍽이나 오래 되었으니 벌써 옛날 이야기다.

지금 내 안막 眼膜 깊숙이 탐스럽게 피어 오른 장미 빛 꽃송이가 하늘거린다. 그러더니만 가슴이 물결처럼 출렁거리고, 나의 심장과 폐와 위와 장들은 제각기 분리되어 물결과 같이 출렁거리다가 녹아 버리는 허전함과 죽음같이 조용한 것이 나를 견딜 수 없게 하는 것이다.

장마로 접어들었는지 궂은비는 연인일 퍼붓고 있었다. 나는 일정한 수입이 없었으므로 살아나가기가 고되고 거칠었다.

그 무렵, 나는 반가운 사람을 만나게 될 때나 신세 끼친 어른에게 보내야 할 선물로써 장미를 보냈다.

그리고 장미를 꺾어 들고 집에서 과자를 생각하고 있는 아기의 이름을 부르며 용감히 들어가기도 했다.

잠시라도 장미가 내 몸에 붙어 있지 않을 때는 허전하기만 했고, 장미는 나의 재산목록에 들어 있는 것 같기도 했고, 또 장미를 의지하고 숨쉬며 사는 여인처럼 되어 있었다.

하필 내가 장미를 택했던 이유는 나의 사촌오빠뻘 되는 집 울타리에 장미가 무진장으로 피어 있었던 것이다. 때로는 형님께 허기를 받아 얻어 갔고, 때로는 슬쩍 꺾어 치마폭 속으로 숨겨 나오기 때문에 꽃잎이 엉클어지고 치마폭 아래로 한 잎 두 잎 꽃잎이 떨어지기도 했다.

또 하나의 이유는 빈한 貧寒한 생활에서 오는 어떤 반발작용 反撥作用 에서 마음마저 사치奢侈 않을 수 있느냐 하는 데서 오는 것이기도 하였다.

장미는 언제나 선녀의 베일 같이 엷은 분홍빛이었다.

십여 년 전의 그와 나와 해 저문 철로의 갈림길에서 만날 때도 장미를 꺾어서 들고 그의 품속에 바쳤다.

어떤 날은 장미를 든 채 혼자 미륵처럼 우두커니 밤이슬을 맞으며 기다린 채 돌아오기도 했다. 그는 오지 않고…. 그러나 나는 그에게 장미 같은 애정을 바쳤으나 무수히 가시 같은 걸 그의 가슴에다 찌르지 않았나 한다.

비는 내리고 있었다.

어느 날 나는 두툼한 편지를 안고 양재 학원을 시작한 친구를 찾았다. 친구는 낡은 양옥을 얻어 이층을 교실로 사용하고 아래층에서는 젖먹이를 데리고 살림을 붙이고 있었다.

그 양옥집의 붉은 벽돌담에서 지붕 위에까지 장미가 뻗어서 꽃수레처럼 피어 있고, 비가 내려도 벌들이 잉잉거렸다.

친구는 장미가 엉킨 그늘을 스치며 장독대에 간장을 푸러 왔다 갔다 점심을 짓겠노라고 서둘러댔다.

장미가 엉킨 그늘을 친구의 옷자락이 스쳐갈 때마다 꽃잎에 머물렀던 빗방울이 또닥또닥 떨어졌다.

나는 두툼한 편지를 화끈거리는 가슴에 안은 채 멀거니 장미를 바라보며 진공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러다가도 나의 온 혈구 血球가 역전 逆轉 하는 듯 복잡한 심정은 불발탄같이 조용하면서 내 가슴을 마구 기총소사하는 듯하였다. 장과 위와 폐를 쏘고 마지막 심장에 부딪치면 다시 진공으로 돌아가는 것이 자꾸 반복되는 것이었다.

그럴 때 아무것도 모르고 장독대 부근을 부지런히 오가는 친구의 존재는 정 情이라는 것일까…

나는 장미를 눈이 뚫어지게 보았다. 그대로 화석 化石처럼 되어 버렸으면 좋을 것 같기도 했다. 나는 긴 사연의 실연 失戀의 편지를 가락가락 찢었다.

편지 조각은 장미꽃잎이 작은 조각배처럼 뜬 빗물에 떠서 내려갔다. 그러나 어떠한 여운을 남기고…

그 후 나는 장미의 가시 같은 것이 가슴을 채우고, 내 가슴 속에서 장미의 가시는 서식 棲息 하는 듯했던 것인데 마침내 그 가시 속에서 안타까운 것이 있으나 꽃이 피었다.

이제 나는 그 장미가 가시였을 때의 일을 회상하면서도 가시에서 핀 꽃을 안고 살아야 한다.

 

여름 밤의 환상

철을 망각한 귀뚜라미 울음 소리가 찌는 여름 밤을 고요하게 금을 긋는다.

그 소리가 퍽 시원하다.

한낮의 지열 지열이 생물 생물을 삶아 버릴 듯한 포도 포도 위에 파란 포플라 잎이 떨어져 있는걸 밟을 때도 가을을 연상케 해 주어 마음이 시원하다. 그러나 가을은 아직도 아득한 거리에 있다. 또 가을이 오기까지는 허다한 여름의 불행과 싸울 과정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여름이 싫다.

아버지가 여름에 돌아가시고 그 무서운 6.25와 거기 따라서 여러 불행을 여름에 겪었으니 그러한지도 모르겠다.

일년 감이 포릇포릇 커가는 걸 보면 벌써 여름을 겪어야 하는 공포심이 가슴을 싸늘하게 한다.

웬만한 경제적인 여유가 생기면 맨 끝의 아이만 데리고 뚝 떨어진 바다나 산으로 피해 생활이라도…하고 꿈꾸어 보지만 어느 해나 막상 여름이 돌아오고 보면 언제나 이글이글 끓는 서울 복판에서 여름의 불행한 직사격 直射擊을 받고 말게 된다.

지난 해만 해도 초여름에 어머니가 병환으로 대학병원에 입원하셨다가 가을이 돼서야 퇴원을 하였는데, 올 여름엔 또 무슨 불행이 나를 엄습할는지 적이 궁금하고 답답하다.

뜰에선 귀뚜라미가 울고, 방에선 모기란 놈이 웽 하며 스쳐가는 부조화가 질식할 듯한 한밤의 교향악을 이룬다.

옛날에 점심을 먹고 도랑 가에 놀러 갔을 때는, 모기 우는 소리를 퍽 서정적으로 들었는데 요즈음은 모기 소리가 마치 요마 妖魔 의 소리같이 들리기도 한다. 게다가 그 놈이 가져다 주는 뇌염을 생각하면 소름이 끼치기까지 한다.

여러 해를 두고 여름이면 아이들이 좀 체해서 열만 올라도 그만 뇌염 노이로제로 허둥지둥하는 나 자신이 우스울 정도이니까…

밤중 세 시. 총총해지기만 하는 눈으로 커튼을 제치고 밤 하늘을 바라다본다.

별은 없고 소나기라도 한 줄기 몰아올 것같이 하늘은 먹구름에 덮였다. 무엇 때문에 잠 못 이루는지는 모르지만 밤이 깊어갈수록 내 몸에서 피가 한 방울 한 방울 말라가고 온 몸의 피부가 바삭바삭 소리가 날 것같이 말라가는 것 같다.

요전까지도 그렇게 지저귀던 새 소리도 오늘 밤에 들리지 않는걸 보니 새는 죽었거나 그렇지 않으면 멀리 다른 곳으로 날아가 버린 모양이다.

우리 집 부근엔 나무라고는 앞집 노화가 老畵家 댁에서 있는 큰 살구나무와 멀리 작은 숲이 좀 있을 뿐인데 새는 밤마다 호루라기를 부는 것같이 울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새 소리에 늘 잠을 깨었다. 그 새 소리는 한밤중 유독 나만이 듣고 있는 것 같고 무슨 불행의 예고인 것처럼 무섭기도 했다.

‘장화’가 파랑새가 되어 ‘홍련’을 부르러 오는 그런 환상을 일으킬 때도 있었다. 그러나 동리 桐里 사람들이 모두 새 소리가 들린다고 말한 다음부터 한참 동안 나는 새 울음 소리를 잊고 버리고 있었다.

우연히 오늘 밤 그 새가 울지 않은 것을 알게 된 그 대신 벌써 귀뚜라미가 울고 있는걸, 그리고 그 소리로 나는 맑은 하늘과 뜰에 헤뜨러져 피는 국화와 가을이 오면 이루어질 수 있을 것 같은 여러 가지 희망을 안아 보기도 한다.

이 가운데서도 모기는 위잉 하며 저공 비행을 하는데 나는 파리채를 들고 새로운 전투 태세로 일어났다.

마치 희망을 싣고 새로 올 가을을 위한 정중한 손님 대접 모양으로.

 

한여름의 뒤안길에서

‘사막의 야자수 빛은 좀더 푸르겠지…’

비에 젖어 싱싱해진 수목들을 바라보며 나는 엉뚱한 생각을 하고 이글이글 타는 사막에 파랗게 솟은 야자수 빛을 상상해 본다.

그렇게 강렬한 녹색이 마음 속에 다양하게 흡수되어 오는 감정을 나는 퍽 즐겁게 느낀다.

그러면서도 “영영 그림쟁이가 되어 버렸구나…” 하는 속정 俗情에 대한 미련이 웬일인지 마음 한구석을 지키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스스로 둔하고 평범해 보고 싶어하는  마음이 남아 있다는 건 나의 처지에서 한 가닥의 모순일 수도 있지만 따지고 보면 신경을 낭비하지 않고 더 오래오래 살고 싶다는 욕망일는지도 모른다.

나는 천재가 아니기 때문에 이제 와서야 비로소 자연의 모습과 빛깔이 서로 이야기하듯 나에게 흡수되어 오늘 걸 느끼게 되었다. 그 이야기는 끝없는 꿈을 펼쳐 준다. 이것은 화가로서 다행한 일이겠지만 그러한 감각이 나의 체력과 밸런스가 맞지 않을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오로지 작품을 위하여 생명을 연소 燃燒 시킨다는 결과를 생각하게 되고 그럴 때마다 쾌감과 공포가 엇갈리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내가 20세기 후반기의 인간이기 때문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의 인간 자체에 순수치 않은 바이러스가 물들어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내가 더 젊었을 때에도 수목이나 꽃은 아름답게 내 마음으로 전해 왔었다.

그러나 나는 그걸 진짜로 받아들이지를 못했던 것 같다. 그보다 일과 생활과 인생면 人生面 에서 나무 한 그루 제대로 바라보지 못할 만큼 숨가쁘게 살아왔던 것이다.

작품 생활의 환경도 그렇다. 작품이 쌀밥이라면 축축히 젖은 나무나 연탄으로 밥이 끓을 때까지 부채질을 하는 지나친 노동력을 소비해 왔던 것만 같다. 여름이 와도 귀찮고 싫었다.

노오란 여름의 낙엽이 날리는데 귀뚜라미가 비굴한 자세로 덥석 뛰면 나는 그걸 집어서 부지런히 창 밖으로 내던졌다.

옥수수도 아직 멀었는데 노오란 병든 잎과 벌써 모습을 나타낸 귀뚜라미를 보고 가을을 생각하고 답답한 여름날을 잊으려고 했다.

모든 것이 윤택하지 못했고 숨가빴던 탓이라고 이제 와서 생각해 본다.

산기슭의 나무를 보고 사막의 야자수 빛까지 작품에의 꿈이 번져가는 즐거움을 망각하고 살아온 것 같다.

화실 畵室에 틀어박혀 즐거운 화상 畵想의 세계에서 사는 맛과 멋을 느껴 보지 못했던 것이다.

오늘도 노오란 병엽 病葉이 한들한들 내리지만 나는 가을을 상상하지는 않는다. 보다도 이글이글 타는 태양 아래 야자수 이파리를 보고 싶어하는 마음의 폭 幅이 있다.

해가 지면 이따금 윙하고 달아나는 모기 소리를 들어도 한때의 공포였던 뇌염 노이로제를 느끼기보다도 어린시절 아버지가 사 주신 은가락지를 찾으러 시냇가에 갔던 일을 회상하고 그 시냇물 소리를 느낄 수 있다.

그날 저녁 얼룩모기가 어찌나 많던지 나는 가락지를 단념하고 말았다. 짙은 회색 풍경에 얼룩모기떼가 윙윙 울며 나는데 마치 소창포지 小倉布地 로 막을 친 것 같았지만 눈을 감고 생각하니 눈보라가 치던 것 같아 서정적인 정경 情景으로 인상이 전환된다.

미 美와 추 醜와 슬픔과 기쁨이 칵테일 되어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이 될 수 있다는 것은 모든 자연이 그렇게 흡수되어 꿈으로 펼쳐가는 경지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그와 같은 경지나 정열이 나의 생명에 기름을 부어 주지만 지친 체력을 지나치게 연소시킨다는 것은 한편 생각해 볼 문제라고 나의 인체에 스며든 바이러스는 말해 주는 것 같나.

 

또 여름은 가고

살랑 바람이 창구멍으로 스며 들어온다. 어느 해나 이맘때 느끼는 감촉은 어느 해나 이맘때 느껴야 했던 감회를 일으켜 준다.

아이들은 자라고 나의 젊음은 저물어가기만 하고, 그만큼 죽음이란 것도 자꾸 거리가 가까워지겠지만 여름 동안에 겪어야 했던 괴로운 생리를 생각하면 그래도 가을이 반갑다.

가슴 속을 헤치고 보면 마치 어느 치열한 포화가 오고 간 전쟁터처럼 허무하다. 줄기차게 저항하느라고 원색의 깃발을 휘날리던 그 숨가쁜 소리도 거짓말 같이 고요하기만 한 밤이다.

20여 평 되는 손바닥만한 집안에서 여러 식구들이 여름의 직사광선을 받아가며 생활하고 때로는 신음했다.

미도파의 홍역은 학질이라는 병까지 물어왔고 쫑쫑에게도 홍역을 물려 주었다. 쫑쫑이 고열이 나자 그 놈이 어려서 열이 심할 때 바람기를 하는데 놀란 일이 있는 나는 좀처럼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어머니와 나는 문을 꼭 닫고 땀을 주룩주룩 흘려가며 무더움과 궁색스러움을 원망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언제나 무거운 부채 負債처럼 짊어지고 왔던 홍역을 한번에 나란히 해버린 것은 마음 가뿐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때를 같이하여 이웃집 초가 草家에서는 초상이 났다. 그 집은 10평도 채 못 되는 오막살이지만 죽은 영감은 아들딸도 많고 형제도 동네에 진을 치고 사는 서울 토착민들이다.

신익희 씨 같은 이가 돌아갔을 때 구질구질하니 비마저 뿌리는데 초가집의 장사가 5일장이라는 데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시시각각으로 악을 쓰듯 하는 울음소리는 그래도 참을 수가 있었지만 마당이 비좁으니까, 막다른 길을 이용하여 우리 집과 건넛집 차양에다 차일을 치고 노름과 싸움으로 날을 지새고 새벽부터 코를 골고 즐비하게 드러누워 있는 꼴을 볼 때마다 구역질이 날 지경이었다.

어쩌다 외출할 때 그 그물을 뚫고 지나가노라면 상가 喪家가 아니라 어떤 결혼식장처럼 큰 테이블을 길가에다 놓고 사나이가 열심히 주판질을 하며 손님 오는걸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5일장은 말고 10일장의 효성도 부릴 법하다.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서 새로이 이따금 무섭게 나에게 엄습해오는 것은 다름이 아닌 쫑쫑의 아버지에 대한 기묘한 나의 질투적인 환상이었다.

어느 희극영화에서 여자가 결혼 상대를 고르는데 백만장자만을 찾고 있었다. 그러니까 사람과 결혼하는 게 아니라 물질과 결혼한 셈이다. 그 여자가 말하기를, 물질이라는 것은 언제까지나 변할 줄을 모르지만 사람의 마음이나 애정이란 언제 변할지 모르니 믿을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그것은 사랑한다는 고뇌와 회의를 풍자한 것에 지나지 않겠지만 아무튼 질투심의 환상이란 서글픈 일이다.

마치 가슴에다 백기를 높이 올리고 인생에게 항복하라는 슬픈 자기 명령을 내리는 것처럼.

그러나 가을. 꽃이 다시 피고 지친 생명체가 소생하는 것으로 깨우쳐지는 결실을 안아 본다. 나와 같은 생리는 확실히 신경을 파먹는 불행한 환상보다 현실이 더 희망적일 때가 많기 때문에, 비록 팍팍한 현실일망정 창문을 활짝 열고 여름에 일어난 모든 착잡한 감정을 토사하고 새로운 가을을 맞이하려는 긴 심호흡을 했다.

 

뜸부기 우는 계절

뜰 아래 송글송글 피어 오른 포도꽃은 저물어가는 5월의 오후를 색다른 훈기 薰氣로 감싸 준다.

얼마 전 녹음의 선물로 사온 셔츠와 바지를 쫑쫑에게 입히고 여름 모자를 씌웠다. 이제부터 백화점에 가서 신발만 사면 되는 것이다.

택시를 잡아 탔다. 쫑쫑은 언제고 운전대 옆에 앉기를 좋아하므로 나는 왼팔로 그 놈의 어깨를 안고 간신히 몸을 부지했다.

모자 모자가 뭣을 사러 나간다는 즐거움과 오붓한 마음이 쫑쫑을 안고 있는 팔목을 타고 가슴에 스며든다. 창 밖에 타오르는 녹색은 은빛으로 반짝거리고 가로수의 투명한 빛이 차 바퀴를 따라 길게 선을 그어가고 있다.

백화점엔 비단 신발이 산더미를 이루고 동화의 세계를 방불케 했다.

언젠가 쫑쫑은 그 앞에서 새 신을 사달라고 나를 몹시 졸라대지 않았던가. 지난날의 노래

 

뜸북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뻐꾹 뻐꾹새 들에서 울제

우리 오빠 말타고 서울 가시며

비단 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가 세상이 달라진 오늘날 내 머릿속에 소용돌이쳐 오더니 찡하니 내 눈시울은 안개에 묻히는듯했다.

동심을 사는 과자, 사과, 노리개, 모든 것이 다 그렇지만 비단 구두를 동경하고 잠깐 외출하신 어머니, 멀리 떠나신 어머니, 아주 멀리 가 버린 어머니를 기다리는 어린 마음은 한층 깊고 슬프고 애절하다.

6백 환짜리 국산 신발을 꺼냈으나 쫑쫑의 부드러운 발을 자극시킬 것 같지 않았다.

말끔히 빠진 외래품의 고운 신발 값을 물었다. 3천 환. 나는 속으로 “에잇…” 하고 힘을 주면서 그걸 정하기로 했다. 큰 마음을 먹은 것이다.

쫑쫑을 걸리고 어느 서점 앞을 지날 때 자식이 많은 어느 화가가 아는 체했다.

쫑쫑에게 인사를 시켰더니 그 놈은 나붓이 고개를 수그리는 것이었다.

화가는 귀엽다는 듯이 입을 벌리고 껄껄 웃어댔다. 위아래로 줄줄이 정열한 금니가 그로테스크한 위력을 보여 주어서 나는 그 금니를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쫑쫑은 나에게 “엄마 그 사람이 누구야?” 한다.

기왕 한가한 기분에서 <사라져 가는 대초원>이라도 보여줄까 하는 생각도 들었으나 우리는 결국 얼음집에 들어가고 말았다.

쫑쫑은 컵에 둥그렇게 놓인 크림이 몹시 사랑스럽다는 표정으로 아끼며 핥기 시작했다. 그걸 바라보고 있는 나는 모든 착잡한 세계에서 잠시 신경을 휴식 시킬 수 있었다.

귀가하자 먼 친척 소년이 미리 약속해 둔 강아지를 몰고 와 있었다. 귀가 축 쳐진 포인터종의 까만 놈이 방바닥에 도사리고 앉아 있었다.

이름을 로스라고 부르기로 정했다. 쥬리는 오래 전에 우리 집에서 사라졌는데 나는 아직도 쥬리의 행방을 모른다.

 

9월

어디서 날아왔는지 나팔꽃 씨가 우리 집 마당에 움을 틔우고 그게 자라서 지금은 아침마다 ‘사파이아’를 뿌려 놓은 양 눈을 반갑게 해 준다.

 아침에 방문을 열고 내다보면 팔잠자리가 스윽스윽 꽃 언저리를 맴도는 게 얼핏 시골 호박덩굴을 생각나게 한다. 이 맘 때면 호박덩굴은 으레 초가을 바람을 받아 초조하고 바쁘게 덩굴을 뻗어 새끼호박을 조랑조랑 쳐가는데 어머니가 그 순을 뜯어 실가리국을 끓여 주시면 퍽이나 따뜻하고 좋았었다.

가을 아침은 뭔지 포근한 기다림을 주는 것 같다.

나는 긴긴 여름해를 보내기 위하여 이 여름철을 표시하는 색채사진 색채사진이 붙은 달력 위의 하루하루의 숫자에다 수십 개의 동그라미만 그리고 있었다. 세월아 가라 가라….하고. 하도 지리하니까 어떤 대는 영화 <타임 머신>의 “80만 년 후의 세계”의 화면을 상기해 보았고, 그 우스꽝스럽게 생긴 삼륜차 같은 것을 회상해 보기도 했다. 그만큼 여름은 싫고 가을을 기다렸다.

그러나 막상 팥 잠자리가 나팔꽃 언저리를 날고 기왓장 너머 푸른 하늘과 설설 부는 바람이 잔서 殘暑 사이를 휘젓고 내 품 안에 스며들어도 내 주변은 항상 답답하기만 하다.

플라타나스에 밀수입 密輸入 벌레떼가 모질게 매달려 나뭇잎을 갉아먹어 아직 가을도 오기 전에 병든 낙엽을 보게 하는 것처럼 나한테도 무수 무한의 흰불나방들이 옛부터 내 몸, 마음을 깎아 내려오고 나는 못내 그 독소 毒素에 지쳐 파리한 모습으로 봄 여름 가을 겨울 할 것 없이 힘없고 괴로워만 했었나 보다.

 나는 책상머리에 앉아서 9월의 달력 사진을 바라본다. 화면 앞으로 빨간 금어초 金魚草가 피고 언덕엔 노란 개량종 改良種 코스모스의 숲이 우거져 있는데 그 사이의 가느다랗게 뻗은 길은 걸어 보지도 못한 길이지만 그리움을 느낀다.

내 인생과 같은, 내 나이와 같은 9월, 저렇게 아침이면 아름답게 사파이아 빛 꽃을 피우다가는 저녁 전에 시들어 버리는 나팔꽃의 가냘픈 생명이 또 얼마 아니면 이파리에 붉은 물이 스며들어 시들어야 할 터인데도 한쪽으로는 최후 발악으로 덩굴을 뻗어가는 것이 어쩌면 내가 나팔꽃과 같은지도 모르겠다.

사파이아 빛과 같이 아름다운 광채의 그림을 많이 그리기 위하여 그 빛의 행복을 찾기 위하여 내 욕망은 오히려 흰불나방이 되어 내 몸을 갉아먹게 하는 것이 아닌지…

사람은 제각기 다 그 정도의 욕망과 포부를 갖고 애를 쓰지만 그에게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라는 것을 인생의 9월인 지금에서야 겨우 알았으니, 이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느냐. 나는 무엇보다도 내 몸에 붙어 있는 흰불나방을 떼어 내야 하겠다.

맑고 높은 저 하늘에 둥실 떠 있는 하얀 구름을 집어삼키면 오죽이나 시원하랴. 별똥을 주워 먹으면 오죽이나 ‘칼슘’ 분이 많이 들어 있을까? 어렸을 때, 이런 구미 口味를 동경해 보던 꿈속으로나마 어리석게 돌아가 볼 것인가.

귀뚜라미가 긴 수염을 버티고 어디론가 기어가는 순간 건넌방의 남동생 내외가 소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다정하고 포근한 그 방안의 공기는 아직도 가을을 못 알아차리는 것 같았다.

 

가을인가요

싸늘한 가을빛이 마을에 깃들자 산도 나무도 집들도 모진 시련을 겪은 뒤의 여인의 살결처럼 한층 투명하고 개운해 보인다.

무더운 여름날을 더욱 덥게 해 주던 아낙네들의 고함소리도 어느덧 집 안으로 스며들어가고 교회의 시끄러운 종소리도 전과 같이 요란스럽지가 않다.

아침이면 뜰에서 화초를 가꾸는 데 재미를 느끼신 어머니는 이제는 허리를 구부리고 양지가 그립다는 듯 오래 햇볕 아래 앉아 계시길 좋아한다. 한여름 밤을 신이 나게 울려 주던 기타 소리는 임자가 군에라도 들어갔는지 그 가랑비 줄기같이 구슬픈 선율도 지금은 들려오지 않는다. 다만 어느 집에선가 볼륨이 높은 라디오의 음악이 멀리서 들려올 뿐 가을은 고요하기만 하다. 이토록 조용하게 가을이 흐르는데 나는 어금니가 뜨끔거려 잠시 고생을 했다.

이가 아픈 게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중년이 되어 간다는 서글픔보다는 때로는 치통이 여자에게 관록을 붙여 주는 거라고 생각해 보면 그대로의 정취가 없는 것도 아니다. 내가 다니는 치과는 비록 좁은 병원이기는 하지만 노안경 老眼鏡이 잘 어울리는 의사도 믿음직스럽거니와 으리으리한 곳보다 이상하게도 나와 같은 사람에게는 마음 편한 곳이다. 치료 받을 때의 내 시야는 언제나 창 밖 플라타너스 너머로 자동차가 왕래하는 움직임 속에, 그리고 그 소음 속에 있다. 그러나 모색 暮色이 덮인 창가에 너풀거리는 커튼을 바라보는 날은 ‘크래오’라는 여자의 호나상이 아른거려 내가 마치 크래오와 같이 거리를 거니는 듯한 애상에 잠기는 것이다.

22세의 블론드 머리를 가진 아름다운 크래오는 자기가 암이 아닌가 하고 죽음의 공포에 떨면서 오후 7시의 검진 결과를 기다리다 못해 5시부터 7시 사이에 세느 강변을 홀로 초조하게 거닌다. 결국 최후에 의사에게서 2개월 동안 렌트겐 치료를 받으면 낫는다는 선고를 받고 희망의 웃음을 띠었지만 그게 꼭 암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 없는 게 아닐까?

나는 그 영화를 보지 못했지만 그 스토리와 아름다운 세느 강변을 배경으로 전개되는 우수 어린 크래오의 몸부림치는 사진들을 어느 외지 外誌에서 보았다. 그런데 크래오와 같은 불안의 심리는 건강한 사람의 경우에도 흔히 작용될 수 있는 것이다. 한세상 살아 보겠다고 태어난 인간인 이상 죽음을 무서워하는 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치과 의자에 앉아서 크래오로부터 죽은 나의 여동생에게로 애상의 그림자가 착잡하게 번져가지만 나는 그와 같은 애상을 나도 모르게 또한 조용히 즐기고 있다는 얄궂은 모순을 느낀다.

여동생은 크래오와 같은 나이에 죽었다.

그가 죽기 수일 전 일이다.

나는 여동생을 어떻게라도 해서 살리고 싶었다.

그러나 생활 환경이 엉망이어서 결국 결핵과 죽음 앞에 저항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어떻게라도 해 보겠다는 생각으로 연일 나는 용감하게 어디론가 나가 보았지만 뾰족한 수가 있을 까닭이 없었다 언제나 같은 코스를 밟은 끝에 허탈 상태에 빠져 친구 집에서 트럼프 노름에 끼고 말았다.

그런데 오동색 치마를 입은 여동생이 병색이 짙은 모습으로 죽음 수일을 앞두고 나 있는 곳을 찾아왔다. 자리를 튀어나와 무슨 기운으로 걸음을 걸었는지 이상했다. 그것도 크래오의 심경과 같은 기분으로 크래오보다 더 절박한 처지에서 공포에 쫓겨 나를 찾느라고 여러 군데를 거쳐 나타난 것이다.

죽음의 사자는 껄껄 웃으며 으스스 냉기가 스며오는 거리를 팔랑팔랑 나부끼는 여동생의 쌕쌕한 치맛자락에 매달려 있었을 것이다. 쓸쓸한 동생과 눈에 안 보이는 죽음의 사자와 함께 우리는 트럼프를 계속했다. 청춘을 모르고 가야 하는 동생은 옥잠화같이 긴 손가락으로 카드를 힘없이 떨어뜨린다. 너무도 힘이 없어 ‘다이아의 퀸’이 낙엽처럼 깔린다.

그리고 때로는 핏기 없는 얼굴로 “으흐흐…” 웃기까지 했다.

그게 여동생의 이 지상에서의 마지막 놀이가 되고 말았다.

나는 의자 위에서 크래오의 환상을 빌려 여동생을 측은하게 생각하며 그때의 찬란한 슬픔을 회상해 본다. 이와 같은 예상과 드릴은 비단 치과에서만 느끼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붐비는 거리에서도, 목욕탕 속에서도, 꽃집을 지나갈 때도 따라다니는 것이다.

그건 가을이 짙어온 까닭인지도 모른다. 빨갛게 익은 감빛만 보아도 나는 슬퍼질 때가 있다. 김이 오른 추어탕 鰍魚湯 그릇을 보면 그리운 사람 생각이 난다.

가을은 혈육이 그립기 마련이라 그토록 여동생 생각에 묻히는 것인데 올해는 웬일인지 더욱 사무친다.

나는 치과에서 나와 모퉁이 꽃집엘 들어가서 붉은 맨드라미 몇 송이를 샀다. 꽃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담배를 피워 물 때의 그 맛보다도 성냥불을 태우는 멋을 즐기듯이 꽃송이를 골라 드는 순간의 어느 흡족감을 위해서였다.

 

황후가 되어보는 가을

서울 북쪽 산기슭에 우리 집이 있다. 우리 집만 빼놓고 앞뒤, 옆집의 비슷비슷한 양옥 지붕에는 너도나도 시새우듯 텔레비전 안테나들이 솟아 있는데 거센 바람이라도 불 때는 그 꼬다리에 바람개비를 달아 뱅뱅 돌려 복 싶은 동심 童心을 일으켜 주기도 한다.

우리 집 벽돌담엔 넓죽한 진홍 진홍의 나팔꽃이 비단 이불을 펼친 양 피어 오르고 조종 조종 같이 생긴 보라 빛 더덕꽃이 조랑조랑 피어 내리는데 석양 무렵 교회의 종소리가 울리면 제법 꽃이 흔들려 거기서 땡그랑땡그랑 종소리가 울리는 기분을 맛보기 위하여 나는 꽃 가까이 귀를 대어 보곤 한다.

집집마다 담 위에 철조망을 두르는 야박한 풍조에도 이맘때면 나팔꽃, 콩꽃, 여러 덩굴꽃들이 철조망을 가리고 도리어 꽃병풍을 두른 듯 아름답기만 한데, 꽃덩굴이 텔레비전 안테나까지 뻗어 올라가 그게 또한 아름다운 동화의 세계로 비쳐오는 것이다. 그래 이곳은 네 계절 중에서 가을이 가장  사람의 마음을 부드럽게 안아 주는 아름다운 계절이라고 해두어도 좋겠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억지고 초라한 아름다움이긴 하지만…

게다가 무허가 건축이 부스럼 딱지처럼 번져 산 위로 기어올라가고, 옛날 어떤 귀족의 집이었다는 것이 지금은 형무소처럼 우뚝 우리 집 앞에 서 있다. 낡은 고층 건물 방 房 한 칸 한 칸이 6.25 이후 개인에게 불하되어 일요일이나 오후가 되면 우리 집 앞 길은 국민학교 운동장인 양 애들이 밀려나와 심할 때는 아귀지옥 속에 들어 있는 것 같은 현기증마저 든다.

산은 푸르고 묵직하게 앉아 비가 내리거나 안개가 자욱이 끼는 때면 그래도 어떤 자연 自然이 자애 慈愛와 산의 위엄을 보여 주지만 무엇인가 마을에서는 어떤 격전을 치를 자국같이 상처투성이의 흔적이 느껴지는 것이다. 아마도 부스럼 딱지 같은 무질서한 건물들이 자연에 항거하는 듯 최후의 발악처럼 산으로 치솟아 오르는 것이 나와 그 소굴에서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을 불건강하게 만드는 것이 아닐는지…

그러나 비가 묻어오거나 눈이 내린 때는 모든 주변이 조용하고 경건한 기도의 시간처럼 마음이 가라앉고 그럴 때 나의 화상 畵想 과 나 자신의 생활 자세도 맑아지는 것 같다.

나는 어째서 그런지는 몰라도 가을이 오면 이유없이 기침이 성해지는 것 같다. 그러기에 나팔꽃이 피기 전에, 귀뚜라미가 울기 전에 가을을 알아차리는 게 벌써 3년.

기침은 쇼팽의 피아노 환상곡 幻想曲처럼 바튼 기침이 여러 날을 계속하다가 베토벤의 <운명>과 같이 클라이맥스에 올라가 숨이 가빠진다.

이렇게 나는 오랜 동안 교향악이 연주되듯 기침과 숨가쁨과 싸우며 꿈의 세계 같은 그림을 그리고 아이들을 귀여워하고 남편에겐 아직도 사랑을 받으려 한다.

가을을 예고하는 것이 신기하다고 기침병을 그대로 둔다는 것은 나 자신을 자학 自虐 하는 어리석음이기에 지난 봄엔 본격적으로 치료를 받아 보려고 우선 가슴에 X레이를 찍어 보았으나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아 도리어 허전한 감마저 느꼈던 것이다. 그런데도 기침은 여전히 잊어 버릴 만하면 찾아오는 식으로 간간이 계속한다.

그 무렵 우연한 기회에 어느 명사 명사의 소개로 천하명의 天下名醫 한 분을 알게 되었다. 그는 금강산에서 10년간 수도하며 철리 哲理 를 공부했고 그 약효가 특이하여 30년 묵은 난치병도 2주일을 치료하여 나았다는 증인도 있고 이번 대통령 선거에 입후보할 뻔한 어떤 대 정치가께서도 그 명의의 치료를 받고 있다는 증거까지 나타났다. 그래서 나는 최대의 존경과 기대로써 그 명의에게 치료를 받기로 했다.

명의의 심각한 표정으로 내 손을 쥐고 맥을 재더니 심장이 나쁘다고 첫마디에 단언한다.

내가 심장이 나쁘단 말은 금시초문이었지만 내 혼자 생각해 보아도 반평생 살아온 몸이니 강할 것은 없을 것은 틀림없다. 그러면서 지금 혹시 무슨 약이라도 먹느냐고 묻기에 ‘지네로 만든 환약’을 복용하고 있다고 했더니 그는 대경실색 노발대발하면서 심장이 약한 사람에게 지네를 먹인 도둑놈의 한의 漢醫가 어디 있느냐 하면서 그 약을 당장 끊고 자기 약을 먹으라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지네약을 먹은 후 웬일인지 소화가 잘 되지 않는 것 같기도 해서 나는 지네약 장수를 소개해준 R화백을 잠시 원망까지 했다.

지네로 만든 환약을 3, 4개월만 먹으면 완치된다기에 나를 도우면 도왔지 해롭게 할 리 만무한 R화백의 권유라 우선 나 살고 보자고 기르던 세퍼드를 7천 원에 팔아 그 환약을 샀던 것이다. 옛 전설에 지네가 사람이 되고 싶어 둔갑했다고 고운 지네각시같은 지네의 요정이 R화백에게 일지 씌어 있었던 것이 아닌가도 생각해 본다.

그 명의는 의원을 차리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 분을 만나려면 으레 H다방으로 가야만 했다.

명의의 약을 먹기 시작한지 불과 이틀 되던 날, 그는 다방에서 내 맥을 짚어 보더니 당장에 하는 소리가 어제보다 훨씬 맥이 잘 뛰니 약효가 있다고 하는 것이었고, 옆에 앉은 나를 소개해 주신 명사 역시 그렇다는 것이다. 그 후 매일같이 문안 드리듯 약 효과가 어떠냐고 귀찮을 정도로 전화를 거는 데 말끝마다 그는, “….히히히 힛…” 하고 웃는 것이었다. 나는 모처럼 경건한 자세로 약을 먹기 시작했는데 그 웃음소리는 어딘지 꺼림직한 예감을 불러일으키게 하였다.

아닌 게 아니라 그 약을 복용한 후 나는 어찌 된 셈인지 구미가 당겨 음식을 많이 먹게 되었고 또한 기침도 나오지 않을 뿐더러 컨디션이 좋아졌다. 친구들도 어쩌면 화색이 그렇게 좋아졌느냐고 묻길래 자연 두어 사람 소개까지 해주지 않았던가.

명의는 어떻게 알았는데 우리 집을 알아내 약보따리를 들고 하루는 찾아와 등어리에 뜸질을 하면 더욱 빨리 나을 것이며 내 병을 고칠 사람은 천하에 자기밖에 없노라고 장담을 해댔다.

그러면서 장롱에 길게 붙은 거울에다 고개를 빼고 가끔 자기의 모습을 흘끗흘끗 비춰 보는 심리가 환자 대 의사 회에도 그 무엇이 섞인 것이나 아닌지 의심스럽기도 했다.

나이 50이 넘어 보이는 머리는 빠진데다 더욱이 까닭 없이

“…..히히히 힛….”

깡그라진 웃음소리가 건평 20여 평 됨직한 우리 집을 뒤흔들어놓는 것이 불길하게까지 느껴지는 것이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누상동 합승에서 내려 터덕터덕 집으로 돌아오면 그는 그 시간을 맞춰 큰 느티나무가 서 있는 구멍가게에 앉아 활활 부채질을 하면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히히히 힛” 웃음을 터뜨리면서 내 방까지 따라와 뜸을 떠 준다.

처음 나는 쫑쫑이 아버지에겐 이걸 비밀로 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명의는 웬일인지 쫑쫑이 아버지를 두려워하는 눈치였다.

어느 날 말이 많은 그는 내 등뒤에서 파란 선향 線香에다 불을 댕기고 오른손으로 요리조리 약쑥에 불을 붙이면서 하는 소리가,

“선생님은 대한민국에서 제일 미인입네다.”

하는 하도 어이가 없어서 웃지도 못할 만큼 벙벙하게 앉아 있어야 할 텐데 그 살마의 나를 대하는 수작이 그 사람대로 의 단순함과 유치함이 들여다보여 어떻게 귀여운지 웃음이 복받쳐 올라와 깔깔 웃어 버렸다.

내가 웃으니까 좋아서 웃는 줄이나 알았는지 그는 다시 말을 이어,

“관상학적으로 보아서 말씀입네다, 히히히 힛.”

“연미상….. 황후가 될 상입네다.”

이제는 정색을 하고 덧붙였다.

나를 보고 미인이라고 하는 명의도, 평소의 살려는 시달림 때문에 오는 피로와 그림을 그리려는 정신적 착란 때문에 나도, 잠시 머리가 돌아 환상 속에 묻힌 듯했고 어느 꿈나라 아방궁전에서 시녀들을 거느리고 궁전 전의 典醫에게 치료를 받고 있는 듯한 기분으로 나도 모르게 의젓한 자세와 음성이 튀어나오려  해서 속으로 그걸 삼키느라고 무한 애를 썼다.

그 후 그 명의는 내가 아무 불유쾌한 빛도 보이지 않고 돈도 꼬박꼬박 주었는데도 스스로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물론 내가 심장이 약하다는 것도 엉터리이며 내 병을 고쳐 준 것도 아닌 것 같다. 듣자니 그의 치료를 받은 일이 있는 P 여사도 그에게 천사와 같다는 칭호를 받고 기분이 과히 나쁘지 않더라는 이야기이다.

 

지금 시각은 정오 – 하늘은 흐리고 산은 가을의 미소, 귀찮게 굴던 동네 아이들도 점심밥을 먹으러 들어갔는지 잠시 골목 안은 조용하다. 나는 이층 내 방에서 그리다 둔 그림을 바라보며 조그마한 우리 집이라는 무대와 지나간 희비극을 더듬어보며 앞으로 또 있을 희비극을 맞이할 마음의 준비를 해 본다. 회색이 흐르는 하늘은 “윙~~” 폭음을 울리고 산봉우리 위로 흰불나방 같은 제트기가 날아가고 있다.

 

 

제5장 어차피 인생은 여행

 

자화상

쥐 소리조차 나지 않는 밤이란 말이 있다. 지구상의 모든 물상 물상이 정지해 버린 듯 그렇게 조용하다.

무서운 적막에 대구의 ‘이리’ 같은 뇌수 腦髓 는 오그라질 대로 오그라져 묵은 출혈 出血처럼 엉켜 버렸다. 그림 한 폭이 걸리지 않는 벽면 壁面을 비추며, 짓눌린 것만 같은 나를 빈약하게 타오르는 석유 불이 관 棺을 지키는 철야 徹夜의 여윈 불빛처럼 지켜 줄 뿐이다. 숨가쁜 방안에는 지난 해에 실없이 깨어져 금나간 경대 瓊臺를 비롯하여, 양복장에 달린 거울 등, 웬 많은 거울들이 빤득빤득 위협하듯 반사하고 있을 것이다.

오래도록 망각해 버렸던 ‘달리아’는 석회질만 남은 할머니처럼 서글픈 실내 풍경을 가진 밤이다. 그리고 괸 눈물은 오관 五官의 모세관 毛細管 틈틈에까지 스며들어, 빵을 구하기 위하여 어린 것을 집에 두고 일터에 있는 어머니의 젖가슴처럼 아파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던 나였다. 목놓아 울어 보았으면….했다. 그러나 약한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내 아들이 불쌍해지니, 나는 눈물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혹시 친구가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에 소용없는 남에게 자존심을 팔게 되고 싶지는 않았다.

엎디어 머리를 젖히고 왼손 끝머리로 내 눈썹을 만지어 본다. 짙지 않은 엷은 눈썹이 송글송글 포개져 누워있다. 눈썹, 손, 눈썹, 손, 얄궂은 촉감을 매만지고 있노라니, 내가 스물의 고개를 넘어 어머니를 따라서 궁합을 보러 갓을 때 일이 생각난다. 궁합을 본 그 노파는 내게 “눈썹이 적으니 형제연 兄弟緣이 없고, 고독하리라. 손이 어여쁘니 기생, 첩 팔자를 못 면하리라” 하던 지난날의 환멸이 되살아나려 한다. 내가 고독하다는 건 이미 내 손으로 송장을 두 번이나 치렀으니, 그 불명예를 감수하기로 치더라도 다행인지, 불행인지 손에 그려진 그러한 팔자만은 오늘날까지 아니 영원히 있을 것 같지도 않다.

노랑색, 파랑색, 분홍색 빛깔을 한참 ‘페파’에 문지르고 나면, 향기처럼 코를 찌르던 초 [蠟] 냄새 풍기는 그리운 ‘오오사마 [王樣] 크레용’ 시절부터 미쓰보시 수채화구 [三星水彩畵具]를 거쳐 좀더 넓은 하늘을 꿈꾸고 군청 群靑, 녹청 녹청, 황토 黃土, 주 朱를 매만질 수 있는 오늘날까지 무척 물감도 으깨고 주무른 손이다. 그래도 내 방에 내 작품 하나 없는 서글픔…허울 좋게 딴 사람들처럼 화실에다 차곡차곡 재어 둘 형편은 못되고, 언제나 일용할 양식을 위해 호남 호남 일대를 돌아다니며, 내 자신 화상 畵商 노릇을 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 결과가 이것이다. 그리고도 그림 한 폭의 거래에서 받은 정신적인 부채는 내 몸뚱이를 천절만절 千切萬切 내더라도 오히려 부족할 만큼 시원스럽게 갚아 버릴 수가 없다.

어두컴컴한 방에서 불을 들고, 파경을 향하여 가는 나는 사옹극 沙翁劇 의 어느 주인공이 되어 있는 것처럼…. 자신의 비애와 분노를 즐기며, 예술을 구가하고 싶은 이상한 정신의 여백을 느낀다.

30이란 연륜을 내 몸에 휘감고 뚜렷이 거울 속에 박힌 자화상을 바라다 본다. 나에게 예술에서 오는 ‘딜렘마’는 아직도 많고, 또 전도가 요원할수록 그것은 더 많아져야 할지도 모른다. 생활에서 오는 ‘딜렘마’는 나를 뱀을 그리게까지 할 때가 있었다. 뱀이란 주제 主題 가 나의 생명과 예술을 연장시켜 준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연필을 들고, 처음으로 뱀을 가까이 했을 때, 그 뱀의 눈깔이 내가 상상해 보았던 것과는 너무도 다르고, 개구리 새끼의 눈깔처럼 둥글둥글, 오히려 사랑스러운 인상을 주는 것이 되려 나를 실망케 해 버렸던 일을 나는 기억하였다. 어디선지 소리가 들린다. 일각 일각 다가드는 숨가쁜 정숙 靜淑 속에서 뱀이 천장을 뚫고  들어오는 소리를 들어 보려고 하였다. 딱…뽀닥…뽀닥…딱. 별안간 들리는 소리에 돌처럼 고체 固體 가 된 나는 공포 속에서 숨을 주였다. 딱…뽀닥…뽀닥…, 그러나 나는 다음 순간 그 소리를 들으며 그리움과 실망에 함께 젖었다 그 소리는 조용히 내리는 밤비가 낙엽을 적시는 소리였던가 보다. 그리운 누님의 발자취 소리와도 같은 그 소리였다.

석회질 石灰質 의 자화상을 안고, 열없이 앉았던 나는, 그리움이 오는 곳을 찾아 문을 열고 고달픈 동자 瞳子로 어둠을 향하여 응시하였다. 천태 만태의 원자 原子 같은 까만 누리 앞에 내 눈이 삼삼하여졌다.

나는 무엇인가 그리움에 호소하듯 실컷 울고 싶었다. 뽀닥…..딱….뽀닥…. 바람도 없는 고요한 밤에 빗소리는 그칠 줄 모르고 내린다. 아침에 쬐어 주는 태양빛보다도 더 다정한 그 소리였다.

 

나의 화실

동창 東窓 이 잿빛으로 물들어오는걸 보니, 이 밤도 가는 모양이다.

눈을 번적 뜨고 보면, 어느 틈으로 날아왔는지 한밤 동안 나를 괴롭히던 ‘날짐승’ 들이 무수히 정사 情死 하고 있다. 아직도 이불 위에는 병색이 떠나지 않은 아이가 눈을 다 감지도 못한 채 지쳐서 누워 있다. 내가 입어야 할 의복들이 벽면 한쪽을 그림 대신 점령한 듯 죽죽 선을 그으며 그 밑으로 그림들이 서로 엎어져 있다. 행여나 티가 묻을까 봐 보이라는 그림을 걸지 못하고, 서로 맞추어 놓는 버릇이 나는 있었다. 화선지 畵仙紙 그림접시들이 정돈 못된 그대로 한쪽에 쌓여져 있는 건 엊그제 시작한 작품이 중단된 탓일까? 바로 이것이 나의 화실이라면, 누구나 창이 있고 그림, 책상, 의자, 항아리, 과실, 꽃 등 풍부한 화재 畵材가 가득 차 있는,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넓고 조용한 방을 상상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화실이 없고 또 아직도 화실을 원하는 마음이 요심한 나는 작품의 테마나 구상은 거의 쉴새 없이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나의 생활의 주변에서 찾고 있다. 그러나 작품을 만들 때는 화실이 필요하다. 아무도 나의 영역을 침해할 수 없는 분위기가 있어야 한다.

끼니 때는 식구대로 앉아서 밥을 먹어야 하고, 밤이 되면 침구를 펴야만 하는 그 방에서 작품을 해야 된다는 것은 적어도 화가에게는 고충이다. 더군다나 여류 화가의 경우, 자식과 생계를 도맡고도 차라리 자식을 빼앗기고, 남에게 생계를 의뢰한다는 비굴 비굴 보다야 낫다는 서글픈 자존심에서 살고 있는 분이 하나 둘은 아닐 것이다. 뽀죽뽀죽 앞니가 나기 시작한 ‘운’이가 앙앙 울고 보채면, 어머니가 업고 문밖으로 나가야 한다. 태교 태교를 잘못 받은 탓일까? 왜 모두 이리 신경질이냐. 그래도 나는 그들이 귀엽다. 파리 한 마리라도 날아올까 봐 5, 6월 염천 炎天에 문을 닫아야만 되는 것도 참아야 하는 나의 괴로움이다. 도대체 나에게서는 복이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모양 같다. 그러나 나는 수평의 호사스러운 화실에서 일하는 고독한 예술가들에 비해 이렇듯 즐거움과 괴로움이 교차하는, 모두 없어서는 안 될 나의 귀중한 보이지 않는 화실의 장식이 있기 때문에 고독하지 않아서 좋다. 비록 비좁은 화실 아닌 방에서 보이지 않는 장식물이 놓인 분위기에 싸여서 화가 畵架를 대상으로 정열을 뿜고 있다.

그리고, 다행히도 어머니의 깊은 사랑과 이해는 끊임없이 나의 아무도 의뢰 않고, 내 자신을 사랑하는 신앙에 격려를 주고 있다. 예술가가 되려면, 누구를 막론하고 깊은 사랑과 이해자가 필요하다는 건 말할 것도 없다. 중단된 작품을 다시 꺼내서 보기로 한다. 이 작품이 완성될 때까지는 아직도 시간이 있기 때문에 더 마음의 여백을 느끼고, 희망이 솟는다. 그러나 현실 문제에 있어서 작품을 완성할 때까지의 과정은 냉혹하기만 하다. 작품이 다 된들 어떻다는 말이냐. 다만 또 새로운걸 시작하기 위한 완성일 뿐이다. 생각할수록 허무하다. 그러나 이러한 허무에서도 나를 진실로 이끌어 준 예술의 세계가 나와 더불어 호흡하고 있다.

나는 아직도 누구나 상상할 수 있는 화실을 원치 않는다. 석양 노을 벌판을 무대로 노래하고 광무 하는 집시의 처녀처럼 어떠한 환경, 어떠한 고충이라도 받아 넘기고 창작할 수 있는 신앙과 정열을 가지면 된다.

 

여인 소묘

멋을 부리자고 하면 ‘아트리에’라고 하고 싶으나 그렇지 못한 세 칸의 우리 집, 여기서 남서 南西를 향하여 5분을 채 못 가면 황금탕 黃金湯이 나선다.

극장과 다방과 화장품 점 등 제법 부드러운 주위의 분위기에 단장하고 있는 그 목간통의 큼직하고 둥근 콘크리트 굴뚝은 공휴일을 제외하고는 언제나 정오가 가까워지며 는 잿빛 연기를 푹푹 뿜으며, 하늘을 바라보고 호흡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여인들은 제각기 의 생리적 운명을 지니고 인생 극장이라고 도 할 이곳 목간통의 문을 밀고 달아나곤 한다.

인생의 주역이 따로 있다며는 엑스트라일 수많은 여인들이 드나들고 있는 것인데, 나도 그들에 섞이어 혼자거나 아이들을 데리고 자주 그 이동 무대에 출입을 하는 것이었다.

세전 歲前까지도 한 사람이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수부 受付를 지키고 있던 주인네는 어느새 그 역할을 사용인에게 인계하고, 요즈음은 제법 신사의 차림새로 다방 출입을 하는 것은, 그 목간통이 번창하다는 것을 말해 주는 듯하다.

어디서나 뒹굴듯이 볼 수 있는 풍경을 그린 펭키화, 그리고 김에 서린 거울을 배경으로 한 목간통 안은 낡은 크림과 고급 화장품 냄새가 조화되지 않은 채 코를 찌른다.

통과 통이 맞부딪치는 소리, 쏘오~ 하고 물 나오는 소리, 어린애 울음 소리, 때로는 싸우는 소리, 그리고 귀를 기울인다면은 오줌 싸는 사리도 들을 수가 있다.

이리하여 하나의 인생축도 人生縮圖 가 구성되는 것이었다.

가물에 콩 나듯 이브같이 아름다운 처녀의 분홍빛 살결과 탄력성 있는 육체가 나의 심미안 審美眼 에 걸려들면서 오히려 나도 모르게 유혹을 받았다.

그러나 유자 柚子를 확대한 듯 한 통알배에 퍼져 버린 골반의 중년 여인이 앞을 가로막을 때에는 유혹은 여지없이 깨어지는 것이었다.

뽀오얗게 익은 갓난 천사를 안은 마리아 같은 젊은 어머니, 만삭이 다 되어 씩씩거리며 오리처럼 아장거리는 내일의 어머니, 수줍은 듯 젖가슴을 감추려 드는 알지 못 할 어머니, 이와 같은 대조 속에 어머니로서 위치해 있는 나를 문득 발견하는 것이었다.

더운 물이 두려워 수조 水槽 가로만 피해 달아나는 어린 놈을 붙잡아서 담그면, 이잉 하는 울음 소리와 풍당거리는 소리가 합주를 이룬다.

화끈하게 더운 김이 몸에 스며들며는 어린시절부터 느껴지던 향수 같은 감정에 잠기게 된다.

나는 여기서 김이 뭉개뭉개 오르는 목간통 속을 바라보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현실이 아닌 또 하나의 세계를 그려보는 것이다.

백화 白樺 숲, 우거진 이국의 호반에 즐기는 처녀의 군상, 다음에는 일망무변 一望無邊 의 광야에서 자줏빛 노을을 바라보며 노래하는 ‘집시’, 그러나 그것은 나의 세계는 아닌 양 잡힐 듯 하면서도 내 안막 眼膜 속에 들어오지는 아니했다.

이러한 상념이 꼬리를 이을 때, 문이 열리고 소리가 나고, ‘사모님’ 이라 부르는 소리가 거의 동시각에 울렸다.

내가 사모님일 까닭이 없기에 나의 시선은 이동은 않았으나, 청각을 몹시 날카롭게 작용하여 대화의 주인공들이 스무 살도 채 넘지 않은 병아리 부인들인 것까지도 알 수가 있었다.

나는 조숙하지 못했던 탓으로 15세가 넘어서야 어느 유명한 소설가의 작품에서 사모님이라는 어의 語意를 알았고, 사모님이라고 하면은 최고의 경사 敬辭 인 것도 알았다.

그러나, 지금 내가 듣고 있는 ‘사모님’과 그리고 해방 이후 무던히도 들어왔던 ‘사모님’은 나의 기억을 반전 反轉 아니면 상실케 한다.

사모님이라는 어의 語意속에 깃든 아름다운 감정마저, 지금 파괴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청각의 작용이 모든 상념을 무너뜨리게 하고, 인생 축도의 현실 세계에 나의 시선을 돌리게 했다.

거기에는 금팔찌가 요염한 광채를 발산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나는 직각적으로 그 색채가 나의 채관 彩管에 있을 수 있는 색채가 아님을 느꼈고, 그 다음 순간 노기 老妓의 야윈 팔목에 매어달려 있는 그 금팔찌의 운명이 안타깝기만 느껴졌다. 아니 그보다도 그 야윈 손목의 익사가 안타까울 것만 같이 느껴졌다.

그것은 금팔찌가 손목에 매어 달려 있는가? 손목이 금팔찌에 매어달려 있는가를 더욱 엄격히 따져서 구분을 짓는다며는, 금팔찌의 운명과 야윈 손목의 역사의 어느 편이 더 안타가운 것인가를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거기까지 파고 들어갈 용기를 잃었다.

그 노파가 너무도 그 금팔찌를 소중히 여기는 듯 하였기 때문이다.

그 야윈 손목의 역사를 더듬어 본다면은 눈물과 웃음과 허위와… 그리고 그 금팔찌의 운명은 여러 성분이 혼성으로서 여러 주인을 거쳐야 했을 것을 미리 짐작이 갔기 때문이다.

더우기 그러면서도 그 노기 老妓는 더 무겁고 두터운 근량 근량의 금팔찌를 원하고 구하고 있을 것이 아닌가…하는 데가지 나의 상상력이 미쳤기 때문이다.

인생은 속아서 산다고 한다.

오늘보다도 내일이 행복스러울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을 갖고 살아간다.

그 노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돈 있는 사람은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 예술가는 더욱 더 좋은 작품을 창작하기 위해서 속아 사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 본연의 욕구인 바에야, 그리고 그러한 미래의 희망을 가질 수가 없는 것이라면, 내일이라는 것이 성립이 되지 않을 바에야, 어찌 노기 老妓의 경우를 안타깝게만 볼 것인가.

목간통 문을 나서는 나의 양 뺨으론 5월의 석양풍 夕陽風 이 스쳐갔다.

보드라운 녹색 綠色 같은 바람이다. 나는 반응적으로 내 가슴에 매어 달린 반 카랄도 못 되는 인조 진주의 부로치를 어루만지며 속아 살아도 좋은 내일의 예술을 위하여 채관을 잡기에 종종 걸음을 쳤다.

 

외로운 畵想

화사한 남도잡가 南道雜歌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온다.

간드러지게 넘어가는 곡조가 멋을 부리더니 어느덧 흐느끼는 애곡 哀哭으로 변하여 구비구비 한 恨을 남긴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남도 소리를 많이 듣고 귀에 배어서 지금까지 좋아하는 것 같다.

웬일인지 나의 감수성은 성장해서보다 오히려 유년시절이 강해 그때의 자연과 인정이 더 뚜렷이 머릿속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나와 같은 인간성은 요즈음과 같이 사나운 사바 娑婆를 헤쳐 나가기에는 비상한 노력이 필요하게 되는데 한가지 다행한 것은 내가 화가라는 점일 것이다.

나는 그림을 구상할 때마다 오랜 시간을 처음으로 내 시각 속에 배인 자연의 푸른 빛깔이라든지 무슨 꽃인지 하얀 꽃들의 인상을 좇아 황홀한 행복을 느끼고, 그 무렵의 아름다운 인정을 그리워하게 되고, 비가 내리거나 함박눈이 내리는 날 산과 마을이 희뿌연 회색으로 물들어 가는 때 가장 행복감을 느낀다.

언젠가 이런 일도 있었다.

빨갛게 핀 연산홍 앞에서 아버지는 뒷짐을 지고 ‘노류장화를 꺾어 들고…’ 하는 애조 哀調의 콧노래를 부르셨다.

그리고 나는 그 시대의 하이칼라적인 것에 마음이 끌리는 성미여서 어느 유치원에서 결혼식이 있다는 소문을 들으면 꼭 구경을 갔고 그 희게 너울거리는 면사포와 하얀 힐굽을 볼 때마다 무한히 아름다운 꿈을 지녔던 것이다. 그리고 그 무렵의 구식 하이칼라 신사들의 모습이 향수 鄕愁 같이 밀려올 때도 있었다.

내 작품에는 내 머릿속에 박힌 그 무렵의 신부와 신사의 화신 화신 같은 것이 많다.

나는 그걸 그릴 때 괴로울 때도 많았지만 즐거운 시간도 많았다.

학자나 화가들이 동양적인 고유의 풍속이나 민속적인 것, 그리고 신라 문화를 희고 찬양하는 것도 좋다고 생각하지만 동양화의 테마나 표현에 있어서 반드시 그러한 냄새를 계산에 넣어 둠으로써 동양화를 동양적인 것으로 합리화시키려는 것은 내 생각에서 본다면 우스꽝스러운 때가 많다.

나는 남도 잡가가 좋다.

내 생활에 배인 노래들이기 때문에 좋은 것이다. 사발가나 서도 민요가 좋다 해도 나에겐 정이 들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외국의 노래가 다 싫다는 것은 아니다.

아르헨티나나 탱고나 스페인 민요, 아일랜드의 창가곡 唱歌曲 등도 남도 잡가 못지 않게 다 좋다. 그리고 시대적으로 1925년 대의 전후가 나는 가장 아름다운 시대라고 생각한다. 그 시대의 인정과 낭만, 그 시대의 서양풍 유행의 서정은 어린 나의 가슴에 선명하게 배어 이미 인간성의 절반을 구성하고 말았다고 할까.

창경원에 벚꽃이 만발했다고 하지만, 구경꾼들이 많다고 하지만, 그 청초함과 아름다움을 정말 감상하는 사람은 몇 사람 될 것인지. 그저 들떠서 인파에 묻혀 쏠리는 것이 고작이 아닐는지.

젊은 화가가 해마다 불어가고 인정은 변했지만 자연은 아직도 변하지 않는다.

고운 빛이나 아름다운 꽃을 소재로 하는 화가가 없는 것은 아니나 그 아름다움을 얼마나 소화했는가는 의문이 없지 않다. 그것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도 모르는 초추상 超抽象 으로 변덕 같지 않은 변덕을 부리는 것은 화상 畵想의 과잉에서 오는 것일까.

나는 이러한 생각을 갖기 때문에 화상이 외로운지 모른다. 이러한 생각은 남도 잡가 속에 깃든 한 한 과 통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그 한이 발산하는 애련하고도 감상적인 맛을 어려서부터 잊은 적이 없다. 때로는 감미롭기도 한 그 한과 더불어 나는 그림을 생각하고 그림과 더불어 삶을 이러 가는 것이다.

 

생명을 확인하는 색

배추밭 풍경을 보면서 무엇인가 나는 살고 있구나 하는 지상에서 노스탤지어가 한없이 그 배추색 빛깔에 흡수되어가는 것을 느낀다. 또 자기의 생명을 확인이라도 했다는 기분에 취한다.

한 인간이, 한국사람으로서 한국에 살고 있다는 그 희한한 생각을 노스탤지어라 해 보는 것이 때로는 미국으로나 이민 가고 싶은 막연한 생각, 죽음 길로 더 가까이 떠나 보려는 영원한 휴식의 유혹이 내 감정을 스치고 갈 때도 있다. 이럴 때 내가 두려운 것은 자기가 영원히 이 땅에서 사라지는 슬픔, 다시 말해서 사람이 평소에 지상의 현상 같은 것에 무관심한 상태에 있다 해도 실은 그 모든 내용을 무의식 속에 간직하고 있는 것이지 결코 아주 망각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내가 자라서 살고 있는 내 고향 산천을 영영 떠나 버린다는 것은 확실히 슬프고 죽음에 보다 가까운 길목이 아닐 수 없고, 그렇다면 일종의 자기 상실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내가 살고 있는 나라에서 유독 그 배추색에 예민한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그 빛깔의 저고리나 스웨터를 걸치고 있는 사람을 볼 때도 마찬가지로 노스탤지어 같은 것에 사로잡혀 버린다.

지난 유럽 여행 때 로마의 어느 ‘펜션’에다 여장을 풀었을 때의 일이다.

나는 그 식당에서 홀로 식사로 하게 되었는데 이름이 귀에 익은 스파케티 한 가지만을 주문했었다. 그러나 스파게티에는 으레 비프스테이크 아니면 닭고기가 따르기 때문에 포식을 하지 않을 수 없었고 곁들여 마신 포도주도 맛이 좋았다.

그런데 그걸 나르는 미소년 美少年 이 눈부신 배추색 스웨터 속에다 하얀 와이셔츠 칼라를 내고 검은 바지를 입고 있었다.

검은색과 배추색, 그리고 흰색 칼라가 뽀족히 보이는 복장의 무드는 무어라고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나는 그 소년이 서비스해주는 음식을 먹으면서 문득 어린시절을 회상했다.

내가 소학교를 다닐 무렵에 문화자수 文化刺繡 라고, 서양에서 들어와 리리앙 실을 풀어 주사바늘과 흡사한 수 바늘에 꿰어 콕콕 쑤시면 수 繡가 되어 꽃이 되고 풍경이 되는 그걸 가지고 나는 서양 풍경의 호숫가에 있는 나무를 수놓던 걸 생각했는데 그 수에서 나는 배추색 리리앙 실을 신나게 마냥 많이 썼던 것이다.

그토록 그 빛깔을 나는 좋아했다.

다소 불량성이 깃들어 보이는 명랑한 이탈리아 소년은 휘휘 휘파람을 불면서 식탁 사이을 왔다갔다 했다. 그런데 그 아름다운 복장이 시각을 즐겁게 해주면서도 누에고치가 타는 듯한 겨드랑 냄새가 진동해서 나는 간혹 코를 막기도 했었다.

가을로 접어 들기 시작한 얼마 전에 나는 M화랑에 간 일이 있었다.

그날 화랑 주인은 검은 바지에 웃저고리를 벗고 있었다. 그런데 흰 와이셔츠 칼라에 배추색 실크 넥타이가 멋있게 철렁거렸다.

나는 또 그 곱고 즐거운 빛깔 속에 흡수되어 마음이 부풀었었다. 넥타이 때문에 그런 행복한 기분을 받게 된 나는 또 그 무엇인지 살고 있구나 하는 노스탤지어에 안기게 되어 그 기념으로라도 친한 분과 함께 맥주라도 마시지 않을 수 없었다.

넥타이, 그래 넥타이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오래 전부터 나는 넥타이가 걸린 쇼윈도 를 들여다보는 취미가 있었다. 그리고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서 사가지고 나오는 재미, 그걸 옷장 넥타이 걸이에 걸어두는 재미가 몸에 배어 있었다.

또 넥타이의 주인이 될 사람이 아주 덤덤한 표정으로 그 넥타이를 매고 나가는 것도 그때의 나로서는 흐뭇하기만 했다.

넥타이가 매는 사람의 품위와 교양도을 표시해 주고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어떠한 넥타이라도 소화할 수 있는 남성은 무던한 축에 들어갈 것이고, 화랑이든가 극장이라든가 파티의 분위기에 맞춰 맬 수 있고 그 장소와 환경에서 대인관계의 매너로 고상하다면 그 사람도 매력 있는 사람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넥타이는 하나의 멋진 사치품으로 믿고 있었다.

사랑에 풋사랑이니 뭐니 하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는 듯 싶다. 거기에, ‘넥타이 사랑’ 이라는 것은 없을 것인지…

한쪽이 넥타이 같은 악세서리가 되어 주는 그러한 사랑 말이다.

사랑을 선물하는 여자가 넥타이일 때 그 넥타이를 덤덤하게 걸치고 다니는 남자가 있다면 이목과 넥타이는 어울리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엊그제 추석 전날, 나는 서울시가가 환장하다시피 들썩거리는 거리를 서글픈 마음으로 거닐었다. 물론 볼일 때문이었지만 반도아케이드를 잠시 들렸었다.

넥타이도 여전히 많이 걸려 있었는데 시원한 여름 넥타이들이 짙은 빛깔의 겨울 넥타이로 바뀌어 걸려 있었다. 나는 그걸 구경하면서 과거의 습관대로 “이것 얼마요” 하려던 찰나 곧 주춤해 버렸다. “참 그렇지 이제는…” 말끝을 입 속으로 어름어름해 버리면서 나는 넥타이 파는 진열장 앞을 떠났다.

그러나 거기에는 어떤 아쉬움이나 감상 따위는 쥐꼬리만큼도 없이 그저 담담한 심정이니 그게 늙은 탓이라면 그것도 이해가 되겠지만 내 경우는 뭔가 세례를 받은 후 같은 개운한 감이었으니…

어쨌든 간에 배추색만 보며 그저 새삼스럽게 생명을 확인하는 듯 하는 기쁨을 느끼는 마음만은 변함이 없고, 그래서 나는 영원히 늙지 않는다는 정신력을 그 배추색에서 흡수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고강과 타히티

9월의 남태평양섬은 꽃향기로 가득 차 있다. 나는 그 향기 속에서 골똘히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이비스카스, 레드진자 (생강꽃)가 남태평양의 강렬한 태양을 받아 선명한 붉은 꽃잎을 하늘거리고 꽃 중에서도 여왕이라는 지파니의 감미로운 향기가 나를 자꾸 에덴의 세계로 이끌어가고 있는 것 같은 환상에 젖기도 했다.

그 언저리의 풍물은 비록 근대화되어 있긴 하지만 근대화 된 옷차림의 토착민 土着民[마리오족]이 지파니를 머리에 꽂고 느릿느릿하게 걸어가는 모습을 볼 때마다 역시 여기는 ‘지상의 에덴’이 아닌가 싶었다.

나는 빠뻬에떼에서 뿌나아위야에 가기 위해서 택시를 하나 잡았다.

운전사의 이름은 오거스트라는 불란서식 이름인데 마오리 족과 중국인의 혼혈 같은 40대.

쾌적한 아스팔트 길을 달리며 뿌나아위야로 가는 도중 야자수, 우루,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열대식물의 원색과 가지가지의 꽃들이 펼쳐진 원시적인 평야가 차창을 파노라마처럼 스친다.

2, 30분을 달렸을까, 지금은 모던한 방갈로식 주택으로 변모된 집이 띄엄띄엄 선 작은 마을 뿌나아위야가 보이기 시작한다.

1897년 두 번째로 타히티에 상륙한 포올 고강은 여기 뿌나아위야에다 땅을 마련해서 원시의 초가를 짓고 뽀오라라는 이름의 마오리족 젊은 가시를 얻어 살았다.

지금은 그 초가가 허물려 그 자리에 빨간 지붕의 문화주택이 서 있는데, 마오리족의 엔지니어가 살고 있다.

하이비스카스의 울타리에 싸인 주택의 뒤뜰에 야자수, 울루, 바나나, 열대식물이 우거져 있고 연안에는 비를 머금은 남태평양의 파도가 로맨틱하게 밀려와 조용하게 철썩거린다.

나는 60여 년 전 이 뜰에 바나나, 망고 등 과일을 놓고 원색의 요포 腰布 를 두른 뽀오라를 밝은 색채로 미칠 듯이 그린 고강의 정열을 상상했다.

 전기 傳記에는 때로는 돈이 떨어져 뽀오라가 담수 淡水에서 잡아온 물새우만으로 연명했다고 씌어 있다. 그리고 코펜하겐에서 딸 아리느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멍하니 서 있었다고 한다. 화상 火傷을 입은 때처럼 처음에는 아프지 않다가 잠시 후에 심한 통증을 느끼는 것같이.

“아리느의 무덤은 먼 피안에 있고 꽃으로 장식되었겠구나. 그러나 너의 무덤은 여기 내 가까이 있다. 내 눈물만이 산 꽃이다” 하면서 고강은 발광했다고 한다.

고강의 본처 메트는 악처 악차 였던 모양인데, 악처에 시달린 남자는 유독 딸을 사랑하는 법인가. 젊은 시절 나는 고강 전기에서 그 구절을 읽으면서 울었었다.

나는 별안간 ‘봉쥬르 고강’, ‘봉뉘이 고강’ 하면서 고강의 혼을 불러 본다.

고강은 여기서 최후의 거작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란 뭔가. 우리는 어디고 가는가> 를 그렸다.

지병 持病인 심장병, 습진, 게다가 파리의 창부에게서 물려받은 병의 재발 때문에 모진 고생을 했던 것 같다.

뽀오라가 낳은 아들 에밀은 지금 시카고에 가 있다고 하는데, 상당히 모자라는 영감이라고 들었다.

고강은 근대 문명이 파고드는 빠뻬에떼가 싫어지고 식민지의 관리들과 다툰 끝에 자기가 갈구하던 원시의 에덴을 찾아 마르케사스 제도 諸島의 도미니카 섬으로 들어갔다. 뽀오라하고도 헤어지고. 그 섬에다 또 집을 짓고 스스로 ‘향락 享樂의 집’이라 불렀다. 그는 그 집에서 작품 생활에 불을 태우려 했지만 여전히 빈곤과 지병과 너무나 정직해서 팔팔한 성품 때문에 식민지의 관리들과 싸워 소송사건이 그치지 않는 가운데 55세를 일기로 1903년 파란 많은 생애를 거두었다.

타히티의 고강의 전설이 없었던들 나는 꿈의 나라 남태평양 섬을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타히티는 상륙해서 15일간쯤은 망향병에 걸리지만 그러나 한 달이 지나면 풍토와 원시적인 향수에 정이 들어 빠져나올 수가 없게 된다고 한다.

운전수 오거스트는 나에게 그런 의미의 말을 써가며 열심히 지껄였다. 오거스트는 엔지니어의 집에 들어가 검은 우산을 빌어와 가지고 스케치를 하고 잇는 내 뒤에 서서 받쳐주는 친절을 베푼다.

9월의 남태평양 일기는 금새 찬란한 볕이 쪼였다가도 뇌성 雷聲도 없이 먹구름이 깔려 하얀 소나기가 퍼붓는다.

비가 오면 푸른 바다빛은 뿌우옇게 그레이가 섞인 옥색으로 변하고 지파니의 향기는 짙게 가슴에 스며온다. 그러나 이 둔박스럽고 친절한 오거스트의 알로하 샤쓰는 후줄후줄하게 젖어 있고 그가 웃을 때마다 보이는 18금니는 에덴의 사탄의 사자 使者처럼 느끼게도 했다.

지금도 조용하게 철썩 이는 남태평양의 파도를 타고 고강의 전설은 살고 있는 것이다.

 

만종의 추억

내가 아직 유치원에 다닐 때 어떤 날 아버지가 고을에는 단 하나밖에 없는 이발소에 나를 데려가셨다. 그때 거울 속에서 어떤 서양 풍경화를 처음으로 보았다. 그날 집에 돌아와서는 어머니에게 매를 맞고 사립문 밖으로 쫓겨났었다.

어머니는 비단상자를 만들어놓고 그 안에 어머니가 수놓은 것들을 집어넣어 두셨는데 나는 어머니가 안 계실 때면 몰래 그 수를 꺼내보곤 하였다.

아버지를 따라 이발소에서 돌아왔을 때도 수 상자가 제 자리에서 움직여졌다면서 내가 또 만졌다고 매를 맞았는데 다음날 나는 유치원에 가서 이이들에게 우리 엄마는 의붓어미라고 소문을 내었다.

소학교 5학년 때 교실 벽에 붙은 두 장의 그림 중의 하나가 앞서 말한 그 그림이었다. 담임 선생님이 그 그림을 밀레라는 유명한 화가가 그린 것이라고 말해 주면서 그림의 제목까지 가르쳐 주었다. 그것은 <이삭 줍는 여인들> 과 <만종>이었는데 이발소에서 본 그림은 <만종>이었다.

어린 마음에도 화면의 전체 색조와 이삭 줍는 여인의 머리에 쓴 수건의 색과 조화에 그저 황홀한 마음으로 앉아 있었다. 그때 옆의 아이가 재잘거리며 말을 걸어와 무심코 좀 대꾸를 했다가 느닷없이 담임선생님의 회초리를 맞아 새끼 손가락을 다쳐서 옥도정기를 발랐었다. 이상하게도 밀레의 명화를 보았다 하면 무슨 기념처럼 매를 맞는데, 이것뿐만이 아니다.

장성해서 일본에 가 본격적으로 미술 공부를 하게 되어 미전 [美專: 지금의 동경여자미술대학]에 들어갔다. 그때 그 학교에서는 니시다 마사이끼 西田正秋 교수의 미학 美學 강의가 인기있었다.

어느 날 <만종>을 가져와서 “경건히 기도 드리는 두 남녀 어깨 조금 아래로 펼쳐진 지평선을 보라. 만약에 이 지평선이 인물의 어깨 더 아래로 내려갔다든가 더 위로 올라갔었어도 이 종소리 울리는 듯한 경건한 분위기는 말살되고 말았을 것이다” 라고 풀이해 주다가 카이젤 수염을 실룩 움직이더니 느닷없이 나를 손가락질하면서 자기가 방금 뭐라고 그랬는지 그대로 말해 보라는 것이다. 이것은 과년한 처녀를 때리지는 못하고 대신 면박을 준 것인데 왜 나보고 그랬는지는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나는 그 선생의 강의를 절대 열심히 듣고 있었는데…

세월이 흘러갔다.

나는 인생에 있어서 젊었던 시절은 아주 칠흑 같이 불행하고 가난했던 세월이었다.

어느 해 가난 속에서 수술을 받으러 병원에 갔었다. 텅 빈 입원실 초라한 침대 위에 누운 내가 마취에서 깨어나니 이상한 향기가 가슴에서 틀어 올라와 입안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 같아서 입을 벌리자 입에서 많은 꽃이 쏟아져 나왔다.

물망초, 무꽃, 오랑캐꽃, 보라색 꽃들이 마법의 항아리에서 나오는 것처럼 내 입에서 토해져 비누방울처럼 가볍게 벽에 부딪쳐 사라져가는 것이었다.

확실히 의식을 되찾고 보니 병원 벽에는 단 하나 퇴색된 <만종>이 걸려 있을 뿐이었다.

나는 반가워서 미친 사람처럼 그림하고 대화를 했다. 그림의 말은 나의 온갖 굴욕과 시련, 또 아픈 세례를 달래 주고 오붓한 평화를 되찾게 해주어 나는 눈물을 흘릴 수 있었다.

이렇게 내게 많은 추억을 안겨다 준 밀레의 그림이 지금 서울에 왔다.

며칠 전에 전람회장에 갔다가 문득 겁이 났다. 아니 복사된 인쇄된 밀레의 그림을 보기만 해도 회초리 매를 맞거나 손가락을 다쳤는데 이 진짜 밀레의 그림을 보면 이번엔 큰 몽둥이찜질을 당하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다.

 

어린 꿈

나는 화가 화가가 되어 버렸고 그 밖엔 아무 재주가 없는 사람이지만 실은 내가 어릴 때 동경했던 것은 연극배우였다

그것도 욕심도 많아 히로인을 맡아 하는 스타를 꿈꾸었다.

그런데 불행히도 어릴 때부터 나는 키가 컸다.

그리고 국민학교의 성적은 언제나 30명 중 5, 6 번째에서 맴돌고 있었다.

국민학교의 학예회란 으례껏 공부를 잘하는 아이를 뽑았고 히로인은 키가 작은 소녀가 뽑히는 것으로 정해놓다시피 했으니까 학예회의 히로인은 나보다 성적이 우수한 자에게 뺏겼고 또 좀 괜찮다 싶은 배역은 나보다 성적 등수가 아래라도 연극에 소질이 있는 자에게 넘어갔다.

크리스마스 날, 예배당에서의 연극에서도 나는 키 때문에 히로인을 못 얻어 했다. 그런데 어느 해 학예회 때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을 상연(?) 했을 때 일이다.

나는 극중 劇中 문지기로 뽑혔다.

대사라곤 하나도 없고, 창인지 칼인지 긴 몽둥이를 들고 낮잠을 자다가 기지개를 키고 일어나는 것뿐인데도 나는 매일같이 연습에 참가해야 했었다. 참 어이없는 일이었다.

여학교에 들어가서도 나의 연극에의 숙명은 비운이었다.

제명 題名은 잊었지만 모처럼의 학예회 때 나는 수많은 수정 水精의 역중 役中 한 사람이 되어 물색 치마를 팔랑거리며 무대를 스쳐갔을 뿐이다.

 그러한 아쉬움 속에서 나는 스스로 분격했던 것인지 다음과 같은 일을 저지르기도 했다.

여학교시절 기숙사생들만이 교사를 모시고 졸업생 송영회를 학교 강당에서 벌였을 때이다.

나는 그 행사가 만만했고  뭔지 이제야 자기의 재능을 발휘할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혼자 연극을 할 수는 없고 해서 후지하라 요시에 가 부른 어떤 감미로운 노래를 자신이 안무 按撫 하고 춤을 추기도 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손수 등신대 等身大 의 후지하라의 초상을 그려서 두꺼운 보르지에 붙여 오려서 무대에 세워놓고 그 앞에 고장 난 마이크를 세워 나의 춤의 리얼리티를 강조하고자 했던 것이다.

정작 그날이 와서 상연(?) 하니, 엄숙하기만 한 교사들에게 아무 감동을 주지 못했다. 다만 동료들 사이에 박수갈채를 받은 것 같은데 그것은 일제 日帝 의 군국주의적 교육을 반항하려는 사춘기 여학생들의 낭만에 다소나마 점화 點火 된 감정이 아닌가 싶었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그때의 용기와 넌센스가 참 부끄럽기도 하지만 웬일인지 나에겐 그와 같은 행동의 액센트가 후에도 내 예술과 인생에 크게 작용하고 있지 않나 생각했다.

내가 만약 그림을 그리지 않고 연극배우가 되었다면 나는 지극히 페시미즘에 젖은 인생을 걸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어쩌면 한국의 후랑소아즈 로제나 에드비즈 휠엘이 되었을는지 누가 아느냐 말이다.

최근에 극단 산하의 <베케트>를 구경하다가 그 극 중에서 대사 한마디 없이 창을 들고 무대에 서 있는 어느 문지기를 보고 내 어린 시절 들끓었던 연극에서 정열과 그때의 서글픔을 회상하고 혼자 마음 속으로 얼마나 웃었는지….

 

양지의 꿈

아침나절에 눈이 살풋이 내리더니 날씨가 포근하고 어느덧 하늘은 코발트 그레이로 개이며 햇볕이 쪼여든다.

오랜 동안 난로 온기에 생명을 유지해오던 고무나무와 포인세티아 분을 햇볕이 쏘이는 곳으로 옮겨 주었다.

포인세티아는 이파리가 다 지고 후리후리한 키에 빨간 꽃을 이고 있는데, 바람이라도 불면 바람개비 [風車]가 되어 뱅뱅 돌 것만 같다.

뜰의 작은 장미나무는 뿌리 언저리에 덮어 준 노란 왕겨와 그 위에 아직 녹지 않아 힐낏힐낏 햇볕을 받고 흰 빛깔로 반짝거리는 눈을 이불 삼아 잠자고 있는 듯 섰어도 어딘지 봄 냄새를 풍긴다.

좁은 마당 한복판에 함지를 내놓고 더운 물을 붓고 거기다 가루비누를 풀고 빨래를 했다.

늘 방구석에 화분처럼 앉아서 그림만 그리거나 무슨 생각에 잠겨만 있다가 이렇게 포근한 양지쪽에서 빨래를 주무르니 따뜻한 것이 오붓하게 마음으로 번져오고 기분이 상쾌하다.

포글포글하게 올라오는 하얀 버큼에 손을 담그고 메리야스 샤쓰를 주무르면 엷은 비누 냄새가 그 무엇이 그리운 것처럼 코에 스며온다. 그리고 하얀 런닝샤쓰의 목 언저리를 일부러 코에다 대면 그 독특한 머리기름 냄새가 엷게 올라와 그가 지금 금방 어디서 전화라도 걸어 줄 것만 같은 착각이 잠시 마음 속을 감돌다가 사라진다.

벌써 퍽 오랜 동안 헤어져 있는 아이 아버지의 내의들을 빨래하고 있는 나는 한없이 무엇인가 그립고 아쉬운 생각에 사로잡히면서도 손을 여전히 움직이며 위와 같은 착각에서 꼬리를 이어 꿈에 잠긴 듯이 눈을 감아 버렸다.

발레의 이야기인 <백조의 호수>를 생각해 본다. 마술에 걸린 공주가 날이 새면 백조가 되어 숲으로 여러 마리의 새들과 함께 날아가 버린다. 공주를 사랑하는 왕자는 그걸 슬퍼하고…

또 <화조 火鳥>라는 춤이었던가, 마술사 때문에 돌이 된 왕자를 구하려고 공주는 화조의 빨간 날개 한 죽지를 얻어 왕자를 구하려고 하는 그 춤에서 화조는 정열의 화신처럼 불덩이가 구르듯 날개를 발발 떨고 춤추는 모습이 떠오른다.

어째서 그러한 아름다운 이야기들만이 떠오르는지는 모르겠지만 또 나는 공주도 아닌데도 나는 아이 아버지의 지금의 처지를 위의 발레들에 나오는 마술사에게나 끌려간 것처럼 생각해 보기도 한다.

금싸라기가 내린 듯이 따스한 햇볕 아래서 나는 부질없이 이런 생각에 잠겼다가 굳어지는 아픈 고개를 쳐들어 하늘을 바라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이 개인 하늘, 거기서 나는 어젯밤에 꾼 꿈을 찾아 헤매었다.

성좌 星座 의 전설은 잊었지만 태양이 없는 하늘에 백조좌 白鳥座 처럼 하얀 백로가 나는, 아니 하늘에 판박이처럼 그대로 박혀 있는 꿈이었다.

이게 흉몽 凶夢이건 길몽이건 간에 지금 바라보는 따뜻한 하늘이 아니고 차디찬 코발트 하늘에 하얀 레이스로 된 새가 날고 있는 광경은 냉혹한 지성과 화가의 그림을 몇 겹 아름답게 다듬어놓은 그대로였다. 날개의 레이스 구멍 속에는 날개를 거둔 백로들이 한 마리씩 앉아 있는 게 무수한 작은 별들처럼 보였다.

나의 그림세계와는 너무나 대조적인 그 차디차고 아름다운 광경은 하늘에서 그야말로 화석화 되어 버린 운명을 이야기 하는 듯했다. 그리고 나는 화조 火鳥 의 털만 가지면 어떠한 소원이라도 이룰 수 있다는 꿈과 같은 착각으로 화조 아닌 먼 하늘에 떠 있는 맑고 너무도 싸늘한 백조의 모습을 안타깝게 여기는 것이다.

 

쫑쫑이 대문을 힘차게 열고

“엄마 어디 갔어?”

하며 나를 찾는 소리에 나는 깜짝 백일몽에서 깨어 빨래를 다시 주무르기 시작했다.

이런 대로 머지 않아 봄이 올 것만 같다.

 

슬픔처럼 피어오는 아름다움

귓밥 꼼꼼히 치고 수 繡를 잘 놓으셨던 어머니는 짜치 비단조각, 서양에서 들어온 레이스가 든 담양 潭陽 상자를 다른 사람은 손도 못 대게 하였다.

어느 날 집 잘 보라고 당부하고 나들이가신 틈을 타서 나는 몰래 상자를 열고 어느 바다에선가 밀려온 파도의 거품 같은 레이스를 손에 걸고 아기자기 즐기다가 누르스름히 바랜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누구네 집 뜰인지 대밭이 보이고 처녀들 여럿이 파초 芭蕉 옆에 앉거나 서 있었다. 우리 엄마도 갑사 甲紗 치마에 짧은 저고리를 입고 중간쯤 보였는데, 훗날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 사진 속의 어머니 모습은 혜원 蕙園 의 그림에서 튀어나온 여자 같았다.

밤나무가 많은 땅촌 마을에도 수 잘 놓는 각시가 살고 있어서 다달이 돌아가는 수계 繡契가 땅촌에서 있을 때 어머니를 졸라서 따라갔었다.

여인네들은 점심 먹고 종일 수를 놓는다. 더러는 목청 좋은 각시가 소리를 뽑아,

“이 몸언 처응산 靑山 이요오 으, 임에 정 情은 녹수 綠水 라, 으 녹수야아 으 흐르건먼 처응산이야 허 변헐소냐 아이고 데고…” 흥타령을 불렀다.

나는 동네 애들과 어울려 밤도 줍고 놀면서 엄마를 기다렸었다.

어머니가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좋게 보여 현실이 몽환적 夢幻的 으로 아름답고 생기가 차 향일성 向日性 의 식물이 빛을 흠뻑 마시며 살고 있는 듯한 행복감에 젖어 있었다.

어머니에게 내가 처음으로 환멸을 느낀 건 소학교 5학년 때다.

내가 뭘 잘못해서 미웠던가 느닷없이 <장한몽>의 심순애를 들어 “백만장자가 준 금강석에 흘긴 허영심 많은 새끼가 될래!” 히스테리칼하게 야단을 치니 신파 연극에서의 연애장면이 떠올라 쑥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또 삼촌이 장가들어 촌에서 온 동서와 같이 살게 된 무렵, 동서가 해왔다는 유난히도 길고 빤딱거리는 인조견 공단 저고리를 입어 줘 어머니는 ‘낙지장사’같은 꼴이 되어 시각적으로 나를 고문했다.

곱고 아름다운 건 노상 있는 것이 아니고 춘하추동 사시철의 변화처럼 왔다가 환명과 슬픔, 불행, 고통으로 바뀌어 지워져 버리고 그것이 되풀이되는 동안 세월을 가고…

어릴 때 어머니 품 안에서 가슴 설레이며 보았던 서커스, 그 서커스가 막을 내리고 떠나버린 날 그리워서 걷잡을 수 없이 허전했던 슬픔, 그토록 아름다웠던 서커스도 내일 없는 방랑 생활의 밑바닥 인생축도 人生縮圖 인 것을 알았다. 내 인생 역시 줄을 타고 떨어지지 않으려고 아슬아슬 곡예도 해야 했고 말이나 개, 꽃과도 대화하고픈 고독을 몇 백 번 씹었던가. 지그시 눈을 감으면 한번 앓은 적이 잇는 중심성 망막염 때문이지 또는 노쇠현상인지 검은 색에 다색 茶色이 감친 수 많은 나선형 螺旋形이 소용돌이치다 한 사나이의 희미한 얼굴을 그려낸다. 어둠 속에서도 눈빛만 강한 얼굴이 무서워 나는 눈을 뜬다. 동양 사람 같지 않고 곱슬머리가 악성 樂聖 헨델이나 바하의 머리 모양을 방불케 해 필경 서양 사람이고 옛날 사람 같은 모양이었다. 마음이 약할 때는 저것이 4차원 세계에서 내려온 사자 使者가 아닌가 하고 나는 섬뜩해 지는 것이다.

단 한번 나선형의 월계 月桂 가지를 두른 창백한 얼굴의 미남자를 그린 적이 있어서 나는 한참 응시했지만 역시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 싸늘한 미남자는 먼저 하인이라도 시켜 내려 보내고 나중에 무엇 때문에 기억해 두라고 나타났을까.

7년 전에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 3, 4일을 묵었었다. 그곳은 옛날 분위기 그대로여서 나는 타임머신 작용에 걸려 먼 중세기 시대로 돌아간 느낌을 받을 정도였다. 눈을 감을 때 단 한번 나타난 사나이처럼 보이는 젊은이를 따라 레스토랑에 들어갔었다.

나는 영화나 사진에서만 보았던 페치카에서 타오르는 포근한 불빛을 처음 보았다. 불빛은 탁자 위 유리병에 꽂힌 한 송이의 흰 카네이션을 묘한 분홍색으로 만들었다.

르네상스 예술이 총망라되다시피 진열되어 잇는 위지미술관.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미켈란젤로는 다른 예술가들보다 더 심오한 고독과 싸워 예술을 승화시킨 위대한 사람이었는지 그를 작품의 여상 女像 은 남상 男像 적인 얼굴을, 남상은 반대로 여성적인 무드가 깔려 아름다움이란 차원을 넘어서 요요 妖妖하고 신비스러웠다.

나는 그 감동을 안은 채로 보티첼리의 유명한 <봄> 앞에 한참 동안을 서 있었다. 귤나무인지 싸리나무인지, 숲 속 한 가운데 애를 잉태한 듯 배가 뽈록한 비너스가 서 있고 양쪽엔 4월의 정 精, 5월의 정이라고 할까, 아름다운 요정들이 춤을 추고 있고 희랍신화의 마르스 신을 방불케 하는 남자도 있었다. 그 오른쪽에 미묘한 우수를 품은 화신 花神이 보인다. 머리에 꽃을 듬뿍 쓰고 목에도 꽃을 걸고 손에도 꽃을 받쳐들고 꽃무늬가 박힌 시퐁 같은 천으로 휘감긴 몸이 바람에 날아갈 듯한 모습은 허무한 감상마저 느끼게 해준다.

나는 현대의 여자 히피족 차림을 연상하고 쓴웃음도 지었지만 보티첼리는 <봄>을 그리기 위해 귀족의 딸 시모네타 를 모델로 썼다는 설 說이 있다. 시모네타는 일찍 죽었다고 하니 아마도 폐결핵이 아니었던가 하고 나 혼자 상상해 본다.

인생의 애상 哀傷, 운명적인 비극은 봄이라야 어울리는가.

햄릿의 애인 오필리아도 들꽃 듬뿍이 꺾어 헤풀어진 머리카락 위에 얹어 미쳐 헤맸고, 역대로 기구한 운명의 미녀들,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지기 전 옥사 獄舍너머로 바라다보이는 오랑캐꽃이 무척이나 부러워했을 것이다.

 나는 지금 슬픔과 아름다움을 쪼아먹고 사는 직업을 택한 인과 인과로 달을 모델로 쓸 때마다 그리는 동안 웬일인지 전후의 맥락도 없이 슬퍼지고 시모네타가 연상되어오며 그때에 한해서 윤회설 輪廻說 같은 것을 믿게 되는 것이다.

나를 소중히 여긴 나머지 고운 정 미운 정 쏟아 주시고 때로는 일란성 一卵性 쌍동아처럼 같이 싸우고 토라져 울고 웃던 어머니와의 인생이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그게 내가 세상에 태어나 받은 단 하나의 복 福인지도 모른다.

 

강물에 흐르는 초현실의 빛

축 늘어진 회색 灰色 구름에서 전류가 흘러 칼끝 같은 신경을 건드리니 마치 고문당하듯 피학쾌감 被虐快感 이 더운 열기를 품었다가 흩어지고, 무엇인지 조춘 早春 의 불쾌지수를 느끼게 하는 어제 오늘의 날씨다.

이런 오후 나는 어느 처녀가 내민 한 점의 인쇄된 그림을 보고 맑고 미묘한 대기 속에서 있는 양 깊은 심호흡을 몇 차례 하면서 멀리 회상의 나래를 폈다.

나는 바로셀로나발 파리행 새벽 특급열차에 올랐다. 옆자리에 앉은 수다스런 스페인 여인들이 지껄인 말 중에 귀에 익은 <베사메 무초>가 잠깐 맴돌다가 들여온다.

지중해 연안을 달리는 기차의 흔들림을 요람의 흔들림으로 느꼈는가, 어느덧 여인들의 곯아떨어져 잠을 잘 때 남불 南佛 의 풍물이 무시게 쏟아지는 듯한 광선 光線에 보라빛 그림자를 남기면서 여창 旅窓을 스쳐갔다.

그 생동감 넘치는 향수적인 풍물에서 자연의 숨소리와 맥박 뛰는 소리가 리듬을 타고 들려오는 것 같기만 했다.

“이 지점에서 아를르는 어느 만큼의 거리일까”

나는 혼자 중얼거리며 종잡을 수 없이 낯선 곳 아를르 지방을 상상하고 1백 년 전의 반 고흐와 고갱을 생각했다.

그와 같은 풍토에서 화가들의 시각인상 視角印象 은 광입자 光粒子의 신비한 몽환극 夢幻劇 을 찾아 색채의 사도 使徒가 되어 미치고 발광하여 필사의 제작을 위해 살을 깎고 피를 흘리며 몸부림쳤을 것이다.

또 프랑스의 꽃 미모사는 분명히 대지의 온도와 습기와 포근한 모체같이 뿌리를 감싸는 겨울철에 남쪽에서 피어 짙은 향기와 함께 가지, 꽃이 파리로 실려와 즐거운 꽃시장을 이루어 주고 있는 것이리라.

우리는 젊은 시절에 보다 스케일이 컸던 고대, 중세기 명화들에 앞서 드가, 모네, 보나르, 르노와르, 피사로의 따뜻한 색채의 아담한 작품에 더 친밀감을 느껴왔던 것이 아니었던가.

그러니까 루블 미술관에서 인상파 이전의 명화를 보는 것도 좋았지만, 그 광막한 분위기가 때로는 무겁고 피곤해 돌다가 지쳐서 다 못보고 나올 때가 있었다. 그 발길을 돌려 공원길을 거닐다 벤치에 앉아 잠시 쉬고 인상파 미술관에 들어설 때의 기분은 향수가 서려오고 반가웠다.

고강이나 고호의 광기 어린 작품들은 한마디로 누가 흉내 낼 수 없는 강령하고 개성적인 것이어서 인상파 미술관에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두드러지게 시선을 끌었다.

마네의 낙선작으로 유명한 대작 <풀밭 위의 식사>는 볼수록 인물들이 불안감을 주었다. 그리고 도대체 화성 畵 聖 세잔느의 작품은 내가 좋아하는 생리적 요구와는 너무나 거리가 멀 뿐이었다.

모네는 여한 餘恨 없이 86세까지 살았으니 부러운 화가다. 만년의 작품인 <노로안 등 藤>, <노오랗게 비친 아이리스>, 마지막 연작 連作 인 <수련 睡蓮>은 흡사 무화과 無花果 가 무르익을 대로 익어 단물이 뽀닥뽀닥 흘러내릴 듯한 경지를 이루어 작가가 갈구하는 열반세계 涅槃世界 에 도달한 느낌마저 준다.

또 거슬러올라가 그의 중기 中期 에 그린 풍경화의 생동하는 필족의 리듬은 흡사 은어 銀魚 새끼들이 뛰는 듯, 더러는 바람이나 날 나뭇잎들이 비비고 속삭이듯 하는 물결의 간지러운 웃음을 방불케 한다.

인상파는 그와 같은 프랑스의 풍토와 광음 光陰 속에서 구도 求道 하고 있고 탐구한 화가들의 마술적인 색채로 인해 탄생했다. 좋은 그림은 보고 싶어하는 사람에게는 빛을 주고 기쁨과 슬픔을 주고 또 위안을 주고 삶의 희망을 준다.

내 지난날의 즐거웠던 여행을 돌이켜 준 그림은 바로 모네의 아르장퇴이유 시절에 그린 풍경화 <아르장퇴이유의 세느강> 이었다.

화가의 일생은 초기, 중기, 만기 晩期의 3기로 쪼개어 볼 수 있다. 초기는 보인 그대로 자연을 묘사하게 되고, 중기에는 비로소 느낌을 표현하는 경지에 이른다면, 마지막으로 보이는 것을 통해 꿈과 상상의 우물을 파 그걸 표현하는 완숙기에 들어갔다가 죽는다고 나 할까? <아르장퇴이유의 세느강>은 바로 모네의 중기에 속하는 깨끗하고 시원한 그림이다.

산소로 가득 찬 어느 날 봄 풀 같은 가을풀잎이 촉촉한 땅 위에, 파아란 황엽 황엽 이 되어 떨어진다는 운명을 알고 있는 포플러의 마음 자체가 하늘빛과 함께 강에 비친다. 복잡한 현대에 살고 있는 사람 눈에는 그 옛날 그림이 도리어 현실에서는 볼 수 없는 꿈의 세계 같고 거꾸로 초현실적으로 보이는 것이다. 초현실파적인 작품은 중세기에도 있었지만 인상파 이후에 사람들의 인기를 끌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지금 악몽을 되풀이 생각나게 해 주는 그림보다는 맑은 금 같은 인상파 그림이 한 없이 그립다.

 

환각의 피서

어쩌다 잠을 잘라고 일어나 아침엔 처녀지 處女地가 빗물을 빨아들이듯 목 속에 커피가 맛있게 흡수된다. 나는 연거푸 커피잔을 갈아치우면서도 은하수 한 개비를 길게 피워 물었다.

이런 날은 그림도 그 리듬을 타고 술술 풀려가게 마련이다.

저녁 때 일을 마치고 나서 나는 하루를 보람있게 살았다는 표시로 가계일기 家計日記 에다 크로우버의 마아크를 그려 넣는다.

물감을 으깨고 붓을 놀리고 하는 것이 나의 일상생활이니 노상 꿈을 파먹고 산다고 할만도 하다. 웬일인지 해가 갈수록 성미가 더 꼼꼼해져서 한 작품을 완성하기까지는 무던히도 맴돌고 헤매어야 한다. 나의 타고나지 못한 비천재 非天才의 탓을 한탄도 해 보지만 그러나 나일론 깔깔이 같이 기계에서 쉽게 다량으로 쏟아져 나온 것보다는 누에가 뽕을 먹고 자라 실오라기를 뿜어내어 누에고치가 되어 명주나 비단이 자여 나오는 식으로 모체 母體의 태반 胎盤 냄새가 나는 것이라야 한다고 나는 늘 자위해 보는 것이다.

그림을 명주에 비유한 것은 언젠가 장난 삼아 당사주 唐四柱 를 보았을 때 유년 流年 의 그림 속에 내가 가난한 초가집 방으로 뒤돌아 베를 앞에 앉아 있는 여인네가 되어 나오고 그 옆에 영감인지 무엇인지 웬 남자가 책을 읽고 있는, 서로 외면하고 있는 그림이 나와 있었는데, 그 장면을 보고 무척 충격을 받았던 까닭이라고 변명하고 싶다.

말년 末年 운수는 지금 내가 살고 있는 환경을 방불케 하는 그림 장면이 나와 있었지만 붉은 도포를 걸치고 있는 남자가 대문 밖에 서 있고 방안엔 퇴색한 남색 치마를 입은 여인네가 내 옆에 나란히 앉아 있는 색다른 장면도 있었다.

내 나름대로 풀이하자면, 남치마의 여인은 나의 인생파탄을 부채질하는 살귀신이라고 볼 수 있고 혹은 나를 화가가 되는 운명으로 끌어 주기 위하여 언제나 채찍질을 해주는 수호신 같은 고마운 귀신 아니면 옛날에 돌아가신 몇 대조 외할머니인지도 모를 일이다.

조금이라도 언짢은 일이 생긴다든지 근래에 즐겨 읽는 환상괴기소설 幻想怪奇小說 에 자정을 넘겨 잠을 설치는 날은 온몸이 나른하고 사막처럼 돼 버린 아침을 맞아야 한다. 그런 날은 초조하고 우울하고 불안하다. 푸른 치마의 쪽찐 각시가 나타나 내 이불을 걷어 젖히고 침노하려는 환각에 시달리다 깨어날 때도 있다.

여름을 무척 타는 슬라브 식 건물 2층에서 살아온 지도 어언간 5, 6년이 된 것 같다.

그래도 나는 계절 중 여름이 제일 일의 능률이 오른다. 이따금 창문을 꼭 닫고 판소리를 틀어 인생의 진리 같은 것을 음미하면 눈물이 땀과 함께 주룩주룩 흘러내리고 마음이 후련해진다.

고인 故人이 된 동향 同鄕 김연수 金演洙의 창대 唱代는 털털하고 구수하고 들을수록 멋이 있다.

신이 날 땐 나는 거기에 맞춰 춘향모처럼 엉덩춤을 춘다. 그러니까 봄가을과는 달리 여름은 줄곧 집에서만 보내는 셈이 된다. 지난 봄 딸과 함께 오붓했던 3박 4일의 제주도 여행은 퍽 노스탤지어 적인 추억을 남겨 주어 이 여름의 식량이 되기도 한다.

“에헤라 모르겠다, 기왕이면” 하고 제주 K 호텔에 투숙한 모녀는 깐에 호유 豪遊를 한답시고 클럽에 들어가 테이블에 맥주 두 병을 놓고 밴드에 맞춰 처음으로 고우고우 라는 걸 추었다.

나는 물론 집에서 판소리 가락에 맞춰 춘 일이 있는 엉덩춤에다 팔로 실꾸리 감는 시늉을 했을 뿐이지만 딸은 한삼자락을 훨훨 넘기는 동작을 되풀이하는 묘한 춤을 추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도 춤은 리듬에 맞아 들어가고 있어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요것이 어디서 그런 고우고우를 배웠든고 물었더니,

“엄마아, 탈춤 아니야. 그것밖에 배운 것이 있어? 으흐흐…” 했다. 그때 웬 아저씨가 서슴지 않고 다가오더니 이 자리에서 서로 만난 기념으로 같이 춤 한번 추자고 청해왔다. 망설여졌지만 나는 그 고우고우의 선수와 춤 시합을 하게 됐다.

그 처녀는 이따금 신난다는 듯이 양팔을 허리에 얹는 포옴을 재면서 춤에 희열을 느끼는 눈초리를 했다. 사이키 조명 효과의 정지상태에서 그 눈초리는 마치 뱀이 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때의 제주도는 유채화 油菜花 의 계절이라 온통 노란빛에 싸여 있었다. 돌담만 없다면 모로코의 초원을 방불케 하는 그립고,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그뿐인가. 부둣가 용궁 龍宮에서의 식도락 食道樂도 잊을 수가 없다. 바다에서 끌어댄 물을 커다란 통에 채워놓았는데, 전복, 소라, 닭게, 귀달린 뱀장어, 흑도미, 각시도미들이 바다로 착각하고 놀고 있었다. 긴 다리를 오므렸다 폈다, 흡사 무슨 발레라도 하는 듯 춤추는 문의 동작이 볼만했다.

나는 이 여름을 상상과 환상과 추억의 피서로 즐기는 중이다. 먼 사막 길을 가는 낙타가 못 속에 물을 저장하듯 많은 추억들을 저장했다가 삭막한 현실에 윤색 潤色 을 하는 것이다.

이야기가 통하는 미도파, 기가 찰 때 같이 깔깔 웃어줄 줄 아는 미도파, 고소한 인간미를 지니고 있어 딸이라기보다 친구 같은 미도파와의 즐거웠던 사연들이 그림 속에 풀려 나왔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어차피 인생은 여행

지난 여름은 유난히 더워 밤하늘의 별마저 열기에 빛을 잃고 뻘거니 불덩이로 보일 정도였다. 그 나날은 견디기 어렵도록 고고 孤孤 했다. 기왕 고독이 몸에 배어 버린 사람이 때로는 그걸 달게 씹으며 일과 씨름하곤 하지만 그 쇠쇠한 고독의 바람소리, 미역줄기를 씹는듯한 맛, 그 냄새가 우리 집 성주총왕 城主寵王 에까지 미쳤는가, 뜰에 핀 과꽃마저도 청승맞게 몽땅 짙은 보라색뿐이다. 뭔지 집안에 냉기가 감돌고 있는걸 느낀다.

가끔 붓 빨 물을 길러 꽃밭을 스치고 수돗가에 나가면 지하실에서 석유난로를 피워놓고 날염 捺染에 열중하고 있는 맏딸 모습이 아른거리지만 서로 말도 걸지 않은 채 돌아서 버린다.

“쯧쯧쯧, 좋은 사람 만나 요즈음 말로 데이트라고 하느라 바쁘다면 어미 마음도 편할 텐데…”

중얼거리면서 제멋대로 뻗은 보라색 가지를 사뭇 신경질적으로 걷어차고 현관에 들어서면 우선 물그릇을 내려놓고 후유 한숨이 나온다.

나갈 때는 방문을 잠그는 둘째 딸 방이 궁금하여 오랜만에 들여다 보았다. 그는 3년 전에 자진 영문과를 택해 대학에 들어갔다. 속된 말로 다른 사람들 딸들처럼 박사 학위(?)도 따고 좋은 사람 만나, 미국도 왔다갔다하며 평범하게 살아주었으면 하는 게 나의 소망이었다. 그런데 방문을 열자 텔레핀 냄새가 코를 찌르고 언제 마련했는지 멱에 기대어진 캔버스며 깡통에 꽂힌 붓이며 파레트며 늘늘이 늘어져, 50호 가량되는 화판에는 항록색 배경에 늑대가 세 마리 웅크리고 있는 매우 충격적인 그림이 8부쯤 되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딸은 제 비밀이 발견되었다는 듯 어색한 표정을 짓더니만 멍한 나를 보고 씨익 웃는다.

나는 안 방문도 열어 보았다. 노안경 老眼鏡을 쓴 어머니는 붕어형으로 조각된 나무 소반 위에다 두툼한 책을 놓고 읽으시느라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으신다.

요즘엔 아침을 안 먹는 것이 나의 습관이 되었지만 도대체 이 집 살림살이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20세의 밥하는 처녀 봉순이가 주부노릇을 하고 있는지라 부엌은 인기척 없이 써늘했다. 죽을 때까지 벗을 길 없는 나의 멍에도 무거운데 식구들 나름대로의 고독까지 덤으로 같이 지니고 살지도 모른다는 미래의 고달픔에 기가 찰 뿐이었다.

노상 이웃집에서 들려오는 피아노 소리는 음치까지 겸해있는 나로써는 훌륭한 솜씨인지 아닌지조차 분별할 수 없지만 그러나 답답할 때는 그 피아노 소리를 반주로 ‘육자배기’ 가락을 불러질러 속풀이를 하기도 했다.

“구름같이 흐르는 이글 번개처럼 뻔뜻 간다. 이 갈길 오락가락 구름처럼 흩어지니 심중은 바람같이 한숨이 안개처럼 흩어져라, 아이고 데고 허어어…”

이렇게 노래라기보다는 악을 쓰고 나면 허무 虛無가 되레 마음을 가라앉혀 주고 슬픔은 눈물이 되어 괴어 와 비로소 붓을 잡게 되는 것이었다.

긴 여름을 그렇게 보내고 나니 신경만이 달팽이 촉각처럼 곤두세워져 가을 바람에 으례[으레]  따르는 허무감을 넘어서 무엇인지 막막하다.  나는 이 막막함 속에서 자기 살길과 재간이라곤 그뿐인 그림을 그리고 있다. 맏딸도 날염을 하고 있고 둘째 딸도 심각하게 자화상을 그리고 있는 모양이다. 노모 老母는 겨울을 타는 생리라 초가을부터 자리에 눕게 되시는데 누우신 채로 책을 읽고 계신다.

학교 연구실에서 월급을 받고 있어 얼굴 보기조차 힘 드는 바보같이 순한 큰아들, 대학입시 때문에 부대끼는 짠한 내 새끼 막내아들, 제각기 할 일도 많아 이토록 냉랭한 분위기 속에 조석으로 ‘봉순아, 봉순아’ 만만한 봉순이 찾는 소리만 화려하다.

현대의 고독은 호젓한 곳보다는 주택의 밀집지대, 비 오는 날 다방이나 거리에 나붙은 톰 존스, 엘비스 프레슬리의 사진에 있고 우리 집 같이 일가 총동원되다시피 예술을 위해 심각하고 혼자 있기를 좋아하여 총화를 이루지 못한 아픔, 그 속에서 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속에서 나는 왕년의 인기 TV 극 <아씨>에 나오는 진산댁 같은 사람을 그리워한다. 그러나 진산댁도 내 옆에 오면 나보다 더 골초가 되어 쪼그리고 앉아 연기를 뿜어대고 막판엔 신세 타령이 나올 테니….

어쩌다 시내를 나가면 날아드는 운석 隕石 에 부딪치듯 낯설고 정 情 마른 사람들 속에 휩쓸려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다. 그러나 하얀 옷의 간호원 같은 여인들이 테이블에 몰려 있는걸 보고, 그래 예방주사 맞은 지도 오래 되었지 하며 다가갔다가 가족계획 상담이라 써 붙인 걸 보고 ‘아차’ 하고 쓴웃음 짓던 일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작은 실수가 상처에 머큐롬 이라도 바른 듯  고독한 사람을 흐뭇하게 달래 준다.

어차피 인생은 여행에 불과하고 나는 결혼이라는 의식에서 벗어나, 풍매 風媒 작용으로 씨를 잉태한 식물처럼 자식이라는 가지를 쳐 홀로 피었다 지는 신세지만, 두 딸들은 또 어쩌자고 나와 같은 길을 가려 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도 잘못 갔다면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중이가 될 것이고 세상에 뭇 전공분야에서 인간공해 인간공해는 어중이들이 일으키고 있는 것을. 우리 3대 모녀들도 다른 유성체 流星體 에다, 아니 그래도 이 그리운 지구에 다른 육체를 빌어 좀더 편하게 다시 태어날지 모른다는 막막한 희망을 안아 본다.

어디서인가 라디오에서 <황혼의 엘레지>가 흘러나온다. 억지 기운찬 멜로디보다는 애수 서린 곡조에 더 살고 싶은 욕망을 갖는 내 생리가 이상하다고 느껴진다.

 

나의 인생 노트

 

1

뭔가 가득 머리에 인 여인네 등에 업혀 나는 고갯길을 가고 있었던 것 같다.

고개를 드니 막막하고 희뿌연 하늘색 세계가 흡사 비닐 하우스에서 숨쉬는 겨울 배추같이 연약한 내 안막 속으로 생소하게 스며든다.

등에 업힌 나는 뽀얗게 보이는 꽃나무 옆을 지나 어느 집 사립문을 열고 들어간 것 같다. 그것이 내가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본 하늘이요 꽃이요 자연이었다.

어느 봄날 할아버지 제사 祭床에 올렸던 음식을 골고루 담은 고아주리를 인 건네뱅이언니 등에 업혀 외가에 따라간 것이다.

그 꽃은 살구꽃이었다고 더 좀 커서 나는 알게 됐다. 누이 동생이 생기고 제사 날도 여러 차례 돌아오고 지나갔다. 외할머니의 회갑 잔치, 숙모의 결혼식도 성숙해가는 눈으로 보았다.

회오리 바람에 꽃보라가 날리는 듯한 누군가의 상여가 동네를 떠나가는 광경, 큰 불이 나 불덩이가 운석 隕石처럼 튀어 오른 공포, 마을을 휩쓴 홍수, 그 잊혀지지 않는 일들과 인생의 의식 儀式들, 그리고 꽃, 무지개, 새, 뱀, 나비 등 아름다운 자연과 노여움에 얽혀 내 어린 시절의 시각은 커갔다.

마을에 곡마단과 유랑극단이 들어오면 나팔소리가 메아리 쳐 우리 집 안방까지 흔들어 놓는다. 나는 그 트럼펫 소리에 두근거리는 가슴을 쥐어짜며 수를 놓았었다. 그래도 어느덧 비단 바닥이 황홀한 꽃이 되고 새가 되어간다. 그 무렵 철 따라 유행한 옷감 무늬와 뾰족구두 (하이힐), 포마드 향기, 당시의 하이칼라가 가슴을 부풀게 해 주었다. 아라비아 (아랍) 사막과 달을 노래하는 노래가 유행했었고 동요로도 널리 퍼졌었다. 그런 것들이 무척 좋아서 내 딴에는 비애, 감상 같은 것에 젖기도 했다. 한없이 새롭게 펼쳐지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마시며 어른들이 풍기는 하이칼라 향기 속에 어린 시절을 보낸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곡절 많았던 나의 인생의 디딤돌이 되었을는지 모른다.

여학교 4학년 때 혼담이 오고 갔으니 그때는 웬일인지 죽고만 싶었다.

나는 화가가 될 결심을 하고 동경유학을 꿈꾸고 있었지만 아버지는 승낙하시지 않고 공부를 더 하겠다면 의학을 택하라고 하셨다. 그 계통 공부에 자신이 없는 내가 의학전문학교 시험을 치른다 해도 불합격이 될 건 뻔했다. 그래서 나는 어느 관상가를 찾아갔었다. 그 중년 사나이는 나를 보더니 “쯫쯫쯫….” 하고 몇 번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의사가 되거나 산파, 아니면 변호사가 되어 뭇사람을 돕는 직업을 가져야 운명이 풀린다고 판단을 내렸다.

“왜 내가…. 어쩌면 전생에 나쁜 죄를 짓고 태어난 것일까?”

그 당시에 공부에 미친 한 청년이 학생복을 구해 입고 영어를 중얼거리며 거리를 쓸고 다닌 일이 있었는데, 나는 거기서 무슨 힌트 같은 것을 얻었었는지 하루는 아버지로부터 유학건으로 꾸중을 듣다가 다듬잇돌 위에 앉아 “히히, 하하하” – 미친 시늉을 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마늘모 모양의 놀란 눈으로 나를 슬프게 쏘아 보셨다. 미친 시늉을 하던 나는 정말 울음이 터져 통곡해 버렸다.

그 연극이 효과를 보아 나는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에 갈 수 있었다.

그 후 그것을 알게 되신 아버지는 노하시어 학비조차 잘 대어 주시지 않았다. 어머니가 눈물을 짜내시며 패물을 팔아 몰래 보내 주신 학비로 학창시절을 보내게 되었다. 그런 사연을 모르는 좁은 고을에서는 아무개가 논 팔아서 딸자식 유학보냈다는 뜬 소문이 자자해 아버지는 그게 창피해서 친구들조차 만날 수 없다고 머리를 싸매고 눕는 등 여러 고을이 시끄러웠던 동경유학이었다.

처음 여름방학 때 나는 자신이 디자인 한 원피스를 걸치고 차양이 달린 모자, 히이힐 – 어린 시절에 신여성들이 신고 다녔던 뾰족구두를 갖고 싶어 그것과 같이 생간 돼지발, 소발을 부럽게 처다 본 일이 있다 – 을 신고 관려 關麗 연락선에 올랐었다.

갑판에서 현해탄을 보며 계단을 내려가다가 재수없이 만원 선실 복도에서 뒹굴어 힐 굽이 한 짝 떨어져나가 버렸다.

육지에 올라 여수항에서 출발한 기차를 놓쳐 버린 것은 힐 굽을 다시 갈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가방을 들고 여수역에서 출발하는 다음 편을 타기 위해 그쪽을 향해 걸어갔다.

“오오이 오오이” 부른느 소리에 걸음을 멈추니까 일경파출소에서 누군가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경찰관은 입가에 야릇한 웃음을 띠며 신체제시대 新體制時代 에 옷차림이 뭐냐고 하면서 스파이인 줄만 알았다며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고흥에 가면 경찰서에 가서 여수의 아무개가 안부전하더라고 하다고 당부하면서 나를 풀어 주었다.

집에 당도했을 때 또 아버지는 내 차림새가 못마땅하셔서 뜰 안을 왔다갔다하시다 말고 느닷없이 간짓대를 찾아 들고 휘둘러 나를 치시며 자탄 自歎 하시는 것이었다.

여름방학을 보내고 동경으로 건너간 나는 나의 모든 생활이 벽에 부딪친 듯한 느낌 속에 고민을 했다. 유학이라는 것이 부담스러워진데다 왜 그런 생각만 자꾸 들었던 것인지 모두 다른 학생들이 나보다 낫게 그림을 그리는 것 같고 나는 아주 소질조차 없는 것 같은 열등감에 사로잡히게 됐다.

차라리 변호사가 될까 하고 명치대학 법과에 편입을 결심하기도 했다.

그 사연을 쓴 편지를 아버지께 올렸더니 간단한 회신이 왔다.

내용인즉 참 잘 생각했다는 서두에 이어 도시, 미술이란 오뉴월 쇠불알 떨어지기 같은 것이라고 씌어 있었다.

며칠 안 가서 나는 변호사의 꿈을 버리고 아버지를 배신했다. 역시 그림을 그려야 하겠다고 마음을 다졌다. 2학년이 되자 나는 열심히 공부를 했다. 그리고 고바야 가와기요시 라는 화가를 찾아가 가르침을 받게 됐다. 그는 어느 해 장마로 정원에 있는 연못이 넘쳐 잉어가 땅바닥에서 뛸 때 부인이 이것 야단났다고 수다를 피울 때도 “좋지 뭐냐” 한마디로 거들떠보지 않고 붓에 몰두하고 있었다.

학생시대에 나는 그분의 영향을 받아 공교롭게도 노인들만 등장한 그림 <노점 露店>, <조부상 祖父像>, <노부 老婦> 등 세 점의 대작을 그렸고 날로 치열해진 전쟁 때문에 종전을 눈앞에 두고 귀국해 버렸었다. <노점>은 ‘선전 鮮展’에 처녀 출품했다가 낙선의 고배를 마셨고 <조부상, <노부>는 22회, 마지막 23회 선전에 입선했었다. <노부>는 특선 후보에 올랐으나 모발 毛髮이 너무 희다는 것이 흠이 되어 입선으로만 그쳤었다.

아~~, 지나간 시절들, 낙선 소식을 듣고 홀로 기숙사에서 울었던 슬픈 낭만 같은 회상들이 밀물처럼 가슴을 채운다.

 

2

나는 전쟁, 해방이라는 시류 時流에 말려 흔히들 말하는 행복한 결혼을 하지 못했고 부딪쳐오는 어두운 운명에 저항해야 했다. 말이 운명이지 그 시대에 내가 겪어야 했던 소위 고생은 인과응보였다고 할까, 앞서 말한 비에 서린 감상, 끝없이 새롭게 펼쳐진 자연을 너무 사랑했던 나머지 현실을 보는 눈이 초현실이었다고 할까, 꿈과 현실을 분간하지 못했던 것이다.

때를 맞추어 친정까지 몰락해 논밭, 집을 팔게 되니 고향에서 살 수 없게 되었다. 항간의 소문에는 우리집의 몰락이 딸 동경유학 때문이라고 번지기도 했고 내가 모든 것을 홀랑 뒤집어쓰고 친정을 돌봐야 할 처지가 되었다.

나는 모교인 지금의 전남여고의 미술교사가 되었는데 첫 월급 탈 때 기묘하고 어설프고 부끄럽던 것…

태열로 가려워서 볼이 뻘겋게 된 딸애를 어머니가 업고 젖먹이는 시간을 맞춰 학교에 찾아오시면 숙직실에서 분 젖을 양재기에 짜내고 젖을 먹였었다.

그러면서도 이러한 슬픈 처지가 내 일 같지가 않았고 먼 피안의 이야기, 스크린 속에서나 일어나 사연같이 느껴져 편리했다.

나는 직원실 자기 책상에서 쉬는 시간에 그림을 그렸었다. 요즈음 세상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요, ,당장 쫓겨날 것이지만 그 좋은 시대엔 되레 부지런하고 얌전하고(?) 착한 선생님이란 평을 받았다.

그러나 그때 나는 어쨌든 서울에 나오고 싶었었다. 딸애는 어머니에게 맡기고 외할머니와 함께 누이동생과 어린 아들만 데리고 사돈댁 신세를 지며 동화백화점 화랑 (지금의 신세계)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요즈음은 여류 투성이지만 그 시대엔 여류라면 몇 사람 손꼽을 정도였고 여류라는 감투가 대견한 시대였다.

개인전은 성공을 했다.

그림도 팔리고 누이동생이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 합격되었지만 누군가가 해방 전 구제 舊制 여고만 나왔다고 투서를 보내 합격이 취소되었고, 생긴지 얼마 안 되는 홍익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

굳이 누이동생이 왜 또 그림공부에다 뜻을 두게 됐는가 하면, 원래 소질이 나보다 나았던 그녀가 뜻밖에 폐환을 앓기 시작해 결혼을 늦추려는 까닭에서였다.

개인전이 끝날 무렵 별거 중이던 좀 심약 心弱한 애들 아버지 주변의 인물들에게서 그림을 때려부수러 오겠다는 협박이 왔었다. 가슴 죄어 그 사태를 기다리며 불안해 했지만 그런 일은 없이 무사히 넘어갔다. 그뿐만 아니라 내 자식들을 뺏으러 온다는 소동이 벌어져 애들을 친척집에다 숨기는 등 발을 펴고 잘 수 없는 나날이었다.

그러다가 한 해 후의 전란으로 그가 유명을 달리한 후 그와 같은 희비극은 막을 내렸다.

그 무렵 나는 어린 시절에 멀리 떨어져서 많이 본 일이 있는 뱀의 동작이 퍽 유머러스 한 친구처럼 느껴졌던 기억과 함께 뱀을 생각하고 있었다.  찔레꽃 향기 밑을 스치는 두 마리의 실뱀, 비단 허리띠 같은 독사, 어린 시절 같은 반 친구 화자 花子 가 산나물 캐러 갔다가 뱀을 갑띠(허리띠)인 줄 알고 주우려다 그만 물려 죽은 일이 있었다.

그 아름다운 화문 花紋이 햇살에 빤득거리며 꽃향기를 거느리고 스쳐가는 정경을 구상하면서 스케치 북을 들고 뱀집을 찾아 드나들었다. 그런 속에서 누이동생이 죽고 아버지도 세상을 떠나셨다. 의학을 공부 못했던 까닭으로 오만가지의 저주를 받았던 것이고 두 사람을 저 세상으로 보낸 나는 악이 받쳤던가, 꽃향기 찾아 스치는 뱀 두 마리로는 마음이 차지 않아 수십 마리의 무더기 뱀을 그림으로써 살 용기와 길을 찾으려고 몸부림쳤다.

그 시절에 센티멘털 자니가 아닌 센티맨털 곡마단장 같은 환상을 나는 보았다. 사람인지 환상인지, 어슴프레한 뱀띠의 사나이였다.

화폭의 뱀이 거의 끝날 무렵 도대체 몇 마리가 들어 있는가 하고 헤기 시작했지만 하도 많아 엇갈리고 손가락으로 헬 수 없어 성냥개비를 그림 속 뱀머리에 하나 하나 놓았다가 화투짝처럼 쓸어 모아 헤어 보니 서른 세 마리였다.

나는 다시 두 마리를 더 그려 넣어 뱀띠 사나이의 나이에다 맞췄다. 그 후부터 나는 곡마단장 같든 환상을 짝사랑했다. 워든지 그가 바란다면 말도 타고 춤도 추고 공중 그네라도 타고, 그가 하라는 대로 말을 잘 들어 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 환상이 나비가 되면, 먼 무지개 너머 세계로 사라지게 된다면 나도 같이 나비가 되고 싶었다. 어느 때인가는 그의 숨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 같아 훼데리코 훼리니의 영화 <길>의 주인공 제르소미나처럼 가슴에다 귀를 대고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듣고 안도의 숨을 내쉬기도 했다.

지금 한 장의 노랗게 바랜 사진이 남아 있다. 5월의 창경원인지 모란이 활짝 핀 배경에 지금의 나보다 더 안 예쁜 파마 머리가 고불꼬불한 젊은 내가 서 있고 앞에 값싼 나일론 원피스에 나일론 모자의 여아 女兒와 풍선을 든 점퍼차림의 사내아이, 두 오누이인 내 아이들, 세째, 네째의 모습이 있다. 또 신사모를 쓴 남자도 같이 내 옆에 나란히 서 잇다 아이들과 나는 현세의 과거로 살아 있지만 같이 서 있는 신사는 그 곡마단장 같은 환상의 모습대로 희미하다.

오랫동안 나는 뭇 제약과 의식을 무시했다기보다는 무시당하고 곡예놀이 같은 생활을 했었다. 그 환상에서 깨어난 지 5년이 된다.  동화처럼 신통한 꿈에서 개어난 기분이었다. 동화의 주인공들은 손바닥에 대개 보물이 놓였거나 했지만 나는 두 남매를 얻은 것이다. 어쨌든 지금 나는 휴우! 하고 긴 한숨을 내려 쉰다.

나의 흘러간 인생여로의 희로애락은 이제는 구시대에 속해버린 것들이고 당시의 감상이나 자존심, 희생정신은 앞으로의 변화돼가는 세대에는 볼 수 없을 마지막 소중했던 미덕(?) 이었는지 모른다.

 

3

문득 눈을 떴다.

실내는 아직 어두웠지만 커튼이 젖혀진 창가가 뽀얗게 밝아오고 있었다.

불 꺼진 석유난로, 숨을 죽인 라디오의 금속성 장식이 새벽 광선을 받아 프라치나 빛을 발산하기 시작한다.

노상 수면이 아쉬운 나는 어쩌다가 긴 잠을 잔 것 같아 기분이 상쾌했다.

때를 맞춰 겨울 비가 밝아오는 창문을 적셔 주니 물뿌리개에서 뿜는 물을 맞는 여름 화초가 된 기분마저 든다.

그 긴장에서 끼어나기 전 나는 꿈의 세계에서 스톡홀름의 어느 호텔 로비에 있었다.

한번도 가 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간다는 기약조차 없는 스톡홀름에 왜 내가 가 있었을까.

호텔을 보는 꿈은 홀로 사는 여인이 잘 꾸게 된다는 어느 해몽책에 씌어 있는 걸 본 일이 있었는데, 그래서일까. 내 딴에는 혼자서 산다는 것을 그런대로 대견스럽게, 흡족하게도 느끼면서 살아왔었는데, 마음 한구석에는 외로움, 서글픔 같은 잠재의식이 깔려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두컴컴한 로비 테이블 앞에 나는 낯선 안경 쓴 일인 日人 남성과 같이 마주보고 있었다. 테이블 위엔 두 권의 책이 놓여 있었고 나는 그 책을 일인에게 집어 주었는데 <아프리카 기행화문집>이었다.

책이란 타의에 의해 출판된 것이 좋긴 하지만 나의 경우는 정신적으로 여유가 있을 때 자비 출판하는 것이 더 편리하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나는 언제나 출판사의 뜨세 의해 책을 냈고 인세도 받았었다. 그러나 결국은 인사용으로 책이 나가기 마련이어서 인세는 책값으로 거의 날아가 버리고 남는 것이라곤 피로와 한 권의 책만이 서가에 꽂혀진다.

추운 겨울날 아침에는 잠에서 깨어나도 일어나기가 싫어 눈만 깜빡 깜빡 하며 이불 속에 움츠리고 있을 때가 많다. 이럴 때는 누운 채로 이런 일 저런 일을 생각하고 그 생각은 꼬리를 물고 한없이 뻗어간다.

옛날 방에 불기가 없는 셋집에서 살 때의 일이다. 어머니는 어린 손자 놈을 꼭 껴안고 주무시는 버릇이 있으셨다. 날이 샐 무렵 그 놈이 오줌을 싸서 오줌이 어머니 치마에 배서 김이 무럭무럭 나는 치마와 요를 말리며 어머니는 “그 놈의 새끼가…” 하고 짜증을 내시면서도 그 이튿날 또 손자 놈을 품고 주무셨다가 그 일을 되풀이 당하셨다.

날이 새기는 새는 모양인데, 꽤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방안은 아직 어둡다.

“어음마아~ 식사~~~” 아래층에서 둘째 딸이 부른다. 나는 아침식사가 이렇게 이를 리가 없다고 이상히 여기면서 내다보니 바깥은 더욱 캄캄해지고, 날이 샌 것이 아니라 바야흐로 밤이 오고 있었다. 아까 일을 끝내고…. 피곤해서 잠깐 자리에 누운 것이 어쩌다 잠이 들어 그만 아침이 온 것으로 착각을 한 것이다. 유리창에 눈물처럼 흐르는 찬 겨울 비가 나의 착각을 씻어 준다.

나는 이런 일상생활 속에서 그림을 그리고 학교에서 돌아올 애들을 기다린다.

그리고 밤이 오면 음악을 틀어놓고 책을 읽으면서 잠을 청한다.

한동안 나는 환도 후의 거리의 플라타너스처럼 잔가지가 뻗을 대로 자라 원줄기를 가눌 수 없도록 복잡한 자신의 초상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5년 전의 남태평양 여행을 비롯해서 지난해의 아프리카 여행으로 말미암아 많은 정신적인 영양소를 저축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어슴푸레하게나마 내가 앞으로 나아갈 길도 정해진 것같이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스스로 고립한 자신의 처지나 생활에 후회보다는 보람 같은 것을 느끼고 있다.

두 번째 파리 여행에도 화학도 畵學徒 로 돌아가 생활할 수 있게 된 일을 나에게 기분이나마 잃어 버렸던 청춘을 되찾은 것 같기도 했고, 일분일초의 시간이 보석에 비할 바가 아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날마다 이 보잘것없는 살풍경한 화실이지만 여행에서 얻어온 마음의 보석들을 가득 재어놓고 있다.

지엽 枝葉들을 쳐서 토르소 조상 彫像이 되어 버린 듯한 자신의 초상이지만 마음은 화려한 꽃과 보석을 양팔에 무겁도록 끼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러나 그것은 그림을 그리는 자신에 한해서이고 여정 旅情이 사라지지 않는 동안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림을 그리려고 몸부림치고 그 생활을 떠나서는 하루도 못살 것만 같다.

 어머니는 날로 쇠약해져 가시고 노년성 우울증세가 때때로 보인다. 그 동안 치렀던 아이들의 입학식이나 졸업식, 심지어는 담임선생을 만나는 일까지도 나에게는 하나의 무거운 의식 儀式이었고 수많은 개인전 개최 역시 의식이었다. 내 그림이 팔리지 않던 그 시대에 속수무책으로 아버지와 누이 동생을 저 세상으로 보내면서 어린 시절 회오리바람에 날아간 꽃상여의 의식조차 치르지 못했던 사연을 생각하면 한이 맺힌다.

꿈의 스톡홀름 로비에서 만난 낯선 사나이와의 대화처럼 세월이 흘러 흘러 환상에 불과했던 의식 없이 치른 나의 결혼도 그러했다.

나 혼자 황홀하게 찬란한 보석을 차고 그림을 그리고 있다고는 했지만 내가 두려워하고 내가 가장 싫어하는 뭇 의식들이 또 닥쳐오지 않을까.

무지개, 저 하늘에 뜬 무지개처럼 여러 가지 빛깔을 뛰어넘느라 아슬아슬하게 삶을 이어온 나다. 노랑, 파랑, 붉은 색이 띠 빛이 나에게서 사라진 진 오래고 지금 나는 잿빛에 가까운 보라색 띠를 딛고 있는지 모른다. 은방울같이 굴러온 “어음마아 식사~~” 소리에 나는 긴 명상에서 깨어났다. 빗소리와 아래층의 분위기는 역시 새롭고 생활의 리듬을 느끼게 한다.

라디오를 켰다. 누구인지 자신만만하게 여행담을 늘어놓는 게 듣기 싫다. 라디오를 껐다. 창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애조를 띠며 한 옥타브 높아진다.

 

 

 

후기

넘보라와 넘빨강의 물감으로 나는 영혼을 그리고 싶다. 캔버스의 배경은 음성우주 陰性宇宙, 4차원의 세계, 유계 幽界 따위이면 좋겠다. 날이 저물면서 부쩍 이러한 화상 畵像은 나를 들볶는다.

떠나기 전에 그려야 할 그림. 여태껏 있었던 소산 所産을 깡그리 잃고라도 맞이하고 싶은 출산욕 出産 欲 이다.

그 산고 産苦 가 두려워 나는 글을 쓰는지도 모른다. 어쩔 수 없어 싣고 있는 글이 끝나면 다시 붓을 잡지 않으리라는 마음을 다지고 있다. 하여, 날이 지기 전에 나는 갈 길을 서둘러야 한다. 우담화 優淡畵의 장엄한 개화를 위하여.

근래 타의에 의하여 써진 몇 가지를 곁들여 이미 펴냈던 글들을 여기에 정리하였다. 얼키고 설킨 실타래를 풀어 곱게 감으려는 노력이 있었음을 나의 독자에게 바라고 싶다. 또한 앞 부문에 실린 나의 그림들은 편집자의 안목에 맡기어 선정된 것임을 밝혀둔다.

나는 글 쓰기를 사랑한다.

그러나 나는 그림 그리기를 더욱 사랑한다.

글 없는 나는 있을 수 있어도 그림 없는 나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1984년 4월

천 경 자

 

 

** 지금도 ‘필사 筆寫’ 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Disclaimer: 여기에 실린 글은  copyright가 된 책, 기사를 ‘발췌, 전재’를 한 것입니다. 모두 한 개인이 manual typing을 한 것이고, 의도는 절대로 저작권 침해가 아닌, fair use의 정신을 100% 살린 것입니다. 의도적으로 ‘시간적인 제한, 독자층의 제한’을 염두에 두었고, 목적은 단 한 가지 입니다. 즉 목적을 가진 소수 group (church study group, bible group, book club) 에게 share가 되었습니다. password protected가 되었는데, 만일 이것이 실패를 하면 가능한 시간 내에 시정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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