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eld of dreams, trancending time & place, autobio in progress..

 

사랑이 깊으면 외로움도 깊어라 – 천경자

한국의 대표적 여류화가 千鏡子의 사랑과 소망의 에세이집

 

 

 

 

千鏡子

1924년 전남 고흥에서 출생.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 졸업. 1942년 선전(鮮展)으로 데뷰. 1955년 대한미협전에서 대통령상 수상. 문교부 문예상 본상, 서울특별시 문화상, 예술원상, 3-1 문화상 등 수상. 1963, 65년 동경에서 개인전, 1970년 남태평양 풍물전, 1973년 현대화랑 초대전, 74년 아프리카 풍물전, 79년 인도 중남미 풍물전 등을 가짐. 국전초대작가, 홍익대학교 미술대 교수와 국전심사위원 등을 지냈으며, 현재 예술원 회원이다. 작품으로는 <生態>외 1천여점. 저서는 <유성이 가는 곳> <언덕위의 양옥집> <한>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 등이 있다.

1986년 3월 10일 중판발행

자유문학사

 

괌 島 (1983)

오호츠크 海 (1983)

北海道 (1983)

待春 (1978)

6월의 신부 (1977)

신기루 (1977)

멀리서 온 여인 (1977)

괌 島 (1983)

 

千鏡子 대표 에세이

사랑이 깊으면 외로움도 깊어라

 

 

차례

 

제1장 서울 엘레지

화폭에 봄은 오는데

서울의 엘레지

어머니는 나의 가정이며 종교

인간상실

神 은 어디에

人間無情

母系家族

눈 뒤에 비

斷想 十一題

고향의 음식물

삼촌

묵은 편지

고향의 비

기념사진

 

제2장 엄마의 자장가

산을 바라보는 마음

恨 은 보라빛

자살환상

고독의 날개

아버지와 고독

엄마의 자장가

분홍꽃의 추억

화려한 슬픔

잊혀지지 않는 로크

잃어 버린 결혼식

 

제3장 소녀시절의 추억

소박한 한 아름의 꽃처럼

신기루같은 희망이

눈썹

계단

낙인

눈물

얼룩이

메리의 죽음

소녀시절의 추억

제2의 사춘기

추위의 낭만

딱딱이 소리

현실의 가치

감각의 형체

 

제4장 나와 장미

招雨

라일락

앵두꽃

우담화

相思草

무궁화

5월

소쩍새

나와 장미

여름밤의 환상

한여름의 뒤안길에서

또 여름은 가고

뜸부기 우는 계절

9월

가을인가요

황후가 되어보는 가을

 

제5장 어차피 인생은 여행

자화상

나의 화실

여인 소묘

외로운 畵想

생명을 확인하는 색

고갱과 타히티

만종의 추억

어린 꿈

양지의 꿈

슬픔처럼 피어오는 아름다움

강물에 흐르는 초현실의 빛

환각의 피서

어차피 인생은 여행

나의 인생 노트

 

 

제1장

 

화폭에 봄은 오는데

검은 감 잎 사이에서 풋 감들이 졸고 있는 바람 한 점 없이 정숙한 여름 밤에 봉창을 뚫고 들려오는 이웃집 영감님의 쿨룩쿨룩 기침 소리에 나는 가을을 느끼고 ‘아, 가을인가요’ 했다.

기침의 음색엔 분명히 가을빛이 섞이기도 했지만 무작정 세월만 가면 좋은 일 생기리라 기대하며 살았던 그 무렵이라 성급히 한여름에 가을을 느끼려고 나는 애썼고 어쩌다 뚝 떨어지는 포플러의 황엽(黃葉)만 보아도 가을이 온다고 반겼던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 숱한 세월이 흘러가 버렸다.

세월을 재촉하던 심사는 겨울의 문턱에 들어서기만 해도 뭔지 온통 누루한 녹색이 펼쳐지는 듯 빛깔이 보이기 시작하는 듯해 “아, 봄인가요” 했던 것이지만 나이를 더 먹어갈수록 어떤 기대나 희망은 차차 무뎌지고 석탄질화(石炭質化) 되어 가는 모양인지 그렇게 서둘렀던 감각이 이제는 정반대로 돌아가 버렸다.

3월로 접어든 엊그제, 별안간 눅은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바깥 경치를 보고 “아, 아직은 겨울이다” 하면서 조금은 남아 있을 성싶은 환절(換節)의 말미에 나는 부질없이 안심을 하고 있었다.

아네모네에 아이리스, 비닐봉지에 싸여 남불(南佛)에서 올라온 노란 솜뭉치 같은 미모사와 탁자 위에 그레이프 프루트 쥬스잔을 놓고 파리에서 맞이했던 조춘(早春)도 좋았지만 시골 논두렁 습지(濕地)에 파릇파릇 미나리 돋아나고 양광(陽光)이 부신 포구(浦口) 뱃전 가의 봄도 절묘했다.

봄은 정녕 사람을 미치게 하는가. 실성한 처녀가 속옷바람으로 뛰쳐나왔는데 지나가던 늙은 지게꾼이 “그랄만도 하제잉, 새큼새큼 하니 봄잉께 잉, 쯔쯔쯔” 혀 차던 고향의 봄을 잊을 수가 없다.

집밖으로 뛰쳐나와야 직성이 풀리는가, 미친 총각 미친 처녀가 유난히도 눈에 많이 띄었던 고향의 봄이었다.

약간 높은 지대에 있는 우리 집에서 환히 내려다보인 부잣집의 돌담 길을 느닷없이 ‘이힛’ 힘을 주고 잘 뛰어가던 평순이라는 미친 총간은 홀어머니와 살고 있었다. 씨름꾼같이 우람한 몸집의 평순이가 뜀박질치는 바람에 놀란 무릅 장수의 각시…

무릅을 캐서 진하게 고면 당분이 우러나 떫은 무릅잼이 되어 과자가 귀한 그 시대의 아이들은 먹고 싶어했다.

이중선(李中仙: 李花中仙의 여동생)의 창(唱)빛보다 더 고운 ‘물곳 사시요오…’ 외치는 각시의 목청이 봄 하늘에 퍼지자 절름발이 엿장수 아저씨가 엿판 팽개친 채 가위소릴 멈추고 목청에 흘린 듯 넋 나간 꼴로 서 있던 광경이 눈에 선하다.

 보리고개 때 신파(新派)로 <그 여자의 일생> <유랑 3천리> 를 펼쳐 읍 사람들을 울려놓고 떠나 버린 유랑악극단. 뭐가 그리 아쉽고 서운했던 것인지 선량한 건달패들 가슴 흔들어놓아 바람기 잘 줄 모르고 읍내가 우수(憂愁)에 흠뻑 젖었던 봄이었다.

그럴 때 우리 뒷집 초가에 또 한 사람의 미친 노총각이 살아 봄비에 날 궂으면 뭘 그리도 시부렁거리는지…

내 가슴 속에 커다란 감상(감상)의 주머니 하나가 붙어 있어 뭔가 주워 담아도 차지 않고 아쉽기만 한 풍토병은 그 무렵부터 생긴 것인지 오늘날까지 낫지 않고 때때로 앓고 있는 형편이다.

계절은 바야흐로 봄이지만 세월을 붙잡고만 있고 싶은 심정에서인지 아직 나는 봄의 전령을 듣지 못하고 있다. 요즘은 사시사철 아무데서나 볼 수 있는 수박과 토마토, 달래, 상치 향기 없는 꽃들은 시각 미각 할 것 없이 계절 감각을 마비시켜 버렸고 인간을 점점 말초적 감각만 남게 해 가고 있는 것 같다.

나는 호텔의 로비나 레스토랑, 승용차에서 주로 그 양식인간(養殖人間)을 발견하게 되지만 그 영양도(營養度)나 말투 차림새에서 금방 ‘자연’과 ‘양식’을 구별할 수 있는 것 같다. 그러니까 자기가 피나게 노력해서 터전을 마련하지 않고 무풍지대에서 서식한 덤덤한 인간을 일컬어 양식인간이라 부르고 싶다.

요즈음 굳이 봄기운을 찾아 본다면 도시락에서 찾을 수 있다. 그래서 나의 봄은 도시락에서부터 온다.

납작한 알루미늄 그릇 뚜껑에 약간 눌린 밥, 한쪽 그릇에다 콩자반, 풀치무침, 김무침, 삶은 계란, 장아찌 등을 고루 담아 나무젓가락과 함께 보자기에 사 두었다가 점심시간에 풀어서 더운 보리차를 마시며 먹을 때 비로소 야릇한 봄을 느끼기 시작한다.

나에게 다분히 또순이 근성이 도사리고 있지 않나 생각해 보기도 하지만 하루 세끼를 다 도시락을 먹고 산다 해도 질리지 않을 것만 같고 도시락의 서러운 향수는 가슴 속의 빈 주머니에도 뭔가를 채워 주는 듯하다.

나는 화실에서 도시락을 펴고 흘러간 노래를 듣고 좋은 시집이며 화집을 뒤적인다. 그것들을 듣고 읽고 보면서 인생의 진리를 느끼고 영원한 청춘을 찾는 듯해 시간과 세월에 대한 부질없는 초조감에서 잠시나마 헤어나는 것이다.

고호, 고갱 다 좋지만 보티첼리의 ‘봄’ 시리즈 중 ‘봄의 탄생’을 제일 좋아한다. 피렌체의 놀진 숲 속 비너스를 중심으로 좌측엔 삼미신(三美神)과 마르스, 우측에 봄의 여신, 꽃의 여신, 바람의 신(神)을 곁들인 아름다운 그림이다. 그 중에서도 꽃의 여신(女神)에서는 어떤 신비스러운 매력을 느낀다.

쏘는 듯 강렬한 여신의 눈초리와 웃는지 우는지 모호한 웃음, 현대의 히피를 연상케 하는 차림새에 앙긴 꽃들이 아름답다. 모델은 피렌체의 모든 사람들의 애도 속에 젊은 나이로 죽은 매디치가의 공주 시모네타를 보티첼리가 추상하면서 그린 작품이라고 한다. 이 대작은 현재 피렌체의 위지미술관에 걸작 ‘비너스의 탄생’과 함께 걸려 있다.

나는 15년 전 12월 께부터 파리에서 봄을 맞는 듯한 기분에 들떠 있으면서 유화로 아네모네, 아이리스, 미모사의 정물을 그리고 1월 달에 홀로 이태리 여행길에 올랐었다.

그러나 시모니타의 혼을 깃들이게 한 보티첼리의 꽃의 여신은 마냥 즐거웠고 숨으로 들이키는 공기가 그토록 맛이 있을 수 없었다. 좋은 작품을 볼 때마다 나는 그 완성의 바닥에 깔린 모체가 분명히 슬픔이요, 견딜 수 없는 외로움이요, 가난이라고 다시 확인하는 것이었다.

그 ‘완성을 위한 고통’을 확인하면서 ‘양식’아닌 ‘자연’을 느꼈다.

봄은 소생하는 계절이고 따스함이 감사 주는 계절이지만 한편 우수와 절망과 상실의 계절이기도 하다. 지난해 이 맘때 사랑했던 개 꽃순이을 잃어 남쪽 야산에 묻었고 30여 년 전 초 봄에도 사랑하는 여동생의 재를 강물에 뿌렸었다. 나는 죽은 그녀들이 살아 있을 때 문득 시모네타의 전생(轉生)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때가 있었다.

 

서울의 엘레지

거리의 체증을 뚫고 택시가 어렵게 3호 터널을 빠져 나오자 남 서울의 풍경이 환히 펼쳐지기 시작했다. 후유 – 한숨이 터진다. 거대한 라이터가 무수히 치솟은 듯한 고층아파트들의 원경은 흡사 뉴욕의 허드슨 강에서 바라보는 한쪽 도시를 연상시켜 준다. 서울이 이토록 발전한 데에 경탄은 하지만 한편 메마르고 살벌한 시야에서 막연한 불안감마저 느낀다.

창 밖을 스치는 실버들 가로수를 보며 시각을 통해서나마 쩍쩍 금이 간 가슴에다 촉촉한 푸르름을 흡수해 보려고 깊은 호흡을 하는 것도 일상사가 되어 버렸다. 그래도 차가 한강다리를 달릴 때의 기분은 잠시나마 상쾌하다. 그 지점에서 나는 동남쪽 강변에 솟은 반원형의 고층건물을 유심히 바라본다. 우리 가정이 있기 때문이다. 그 가정이라는 따스함도 고령의 노모가 살아 계실 동안만 지속된다는 걸 알고 있고 언젠가는 다가올 엄숙한 붕괴만이 남아 있을 것이다.  차창에서 보이는 그 아파트는 고대 로마시대에 기공되어 지금은 허물어져 동그랗게 반원형만 남아 있는 콜로세오를 방불케 했다.

영화 <쿼바디스>에서 생사를 걸고 장절한 검투를 벌였던 검사(劍士)의 모습들마저 상기되어왔다.  한 인간이 두뇌와 붓을 쥐고 오른팔 하나로 살아가는 생(生) 역시 검사와 다를 것 없이 처절하고 또한 스릴과 쾌락이 있다.

띵똥, 초인종 소리에 문 열어 주는 가족이 있고 비로소 아늑한 우리 집의 작은 세계가 얼어붙은 가슴을 녹여 준다. 미완성 화판에 그려진 사람들과 뭇 생물들, 그 친구들이 나를 외롭지 않게 맞아 주고 어머니의 신음에 가까운 숨소리가 쇤 기침소리까지 고소한 누룽지 같은 정감이 되어 나를 살게 해 주는 값진 생명수가 되어 준다. 그러나 우리 모녀는 사소한 일, 전라도 사투리로 꼬막(고막) 껍질로 하나도 못 되는 일들로 잘 다투며 살아왔고 지금도 여전하다.

어쨌든 추운 겨울날 폭풍우 속을 헤매다가 아늑한 찻집을 발견한다거나 밤중에 타기 힘든 빈 택시를 만난듯한 안도감 같은 것이랄까 촛불 같은 광명과 훈훈한 온기가 있다. 태어나서 오랜 세월을 나는 태반에서 탯줄을 빨듯 살아왔고 지금도 그렇게 묘한 인생이다. 젊은 시절에 해결할 수 없던 인생의 고통이랄 지 일해도 일을 해도 넉넉지 못했던 살림살이가 지겨워 무척이나 더디게 가는 것 같은 시간을 원망할 때도 있었지만 그런데 어느새 세월은 흘러, 지금 이 나이가 되어버린 자신을 돌이켜 볼 때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처음 어머니가 요안나로 세례를 받던 날의 기념사진을 보면 장미꽃 조화뭉치가 달린 면사포를 두른 어머니의 표정은 어색했던 때문인지 수줍은 표정이었지만 참 아름다웠다. 그분의 회갑이나 또 고희(古稀)조차 이런저런 이유로 충분한 잔치를 못해 드렸다. 고인이 된 명창 박초월씨를 초청하여 기쁘게 해드리고 싶었는데….

5월의 창경원의 푸르름, 나뭇잎만 보아도 쪼르륵 엽록소가 오관에 흡수되어와 뭇 작품에의 구상이 떠올랐지만 미숙해서 충분히 소화를 하지 못해 아쉬웠다.

그런데 지금 막 자신이 생길 만 하니까 나는 살아온 과거보다 훨씬 짧은 시간을 상아야 하는 소위 인생을 관조하는 나이가 되어 버린 것이다. 나는 옛날과 변함이 없는데 남들이 그렇게들 봐 주고 있는 것 같다.

정말 인생이란 번개같다.

지금 이 시점에서 생각해 볼 때 나의 지나친 생업에의 집념 때문에 역설일는지 모르지만 어떤 때는 차라리 평범한 촌부로 태어났으면 싶은 때도 있다. 어중간히 풍부한 감성의 소용돌이가 거추장스럽게 때문이다.  운명론자는 아니지만 젊은 시절에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 <노틀담의 꼽추> 를 읽고 그의 비극적 운명을 테마로 한 사상에 감명을 받았고 지금도 그렇다. 영혼은 반드시 있고 그 어느 영혼이 누구의 모체엔가 들어가 혈육이 되지 않는가 싶다. 결국 윤회전생설(輪廻轉生說)을 긍정하는 뜻이 되겠지만 한 세상 살다 보면 반드시 악연선연(惡緣善緣)이 있고 설령 상대가 좋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인연이 없으면 악연이 될 수도 있어 전생래세(前生來世)에까지 어려운 문제로 뻗쳐지게 되지만 살아오다 보니까 인연설에 한해서만은 인생에 절대성을 지니고 있다는 걸 환상이 아닌 실감으로 느끼게 될 때가 많았었다.

나는 둘째 딸을 참 아기자기 예쁘게 길렀다. 지금은 멀리 떨어져 사는 그는 어려서부터 나의 그림 모델이 되어 주기도 했다.

그가 스무 살이 넘고 스물네 살이 되던 해에 나는 공연히 안절부절 불안했고 스물다섯 살이 되자 비로소 마음이 놓이던 이유는 일란성 쌍동녀 같았던 여동생이 그 스물넷에 죽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너무나도 사랑했기에 생전에 다정했던 여동생의 외로운 영혼이 나의 모체에 들려 전생한 것이 아닐까 했던 부질없는 기우 때문이었다.

그 이전 나의 소위 세계일주 스케치 여행 때 나는 마지막으로 이태리의 피렌체에 들려 위지미술관에서 보티첼리의 <뷔너스의 탄생>등 작품을 보고 참 행복했었다.

또 그의 대표작인 <봄의 탄생>은 내가 좋아하는 그림 중의 하나였다. 맨 앞에 현세의 히피같이 꽃에 둘러싸인 모습의 신비로운 미소를 띄운 주인공 같은 여자에게 반했었다. 훗날 책에서 읽고 안 일이지만 그 모델의 주인공은 시모네타라는 이름의 당시 성주의 딸이었다는데 일찍 죽었다고 했다. 나는 또 전생의 여동생 문제가 해결되다 보니까 딸이 시모네타의 전생이 아닌가 하고 막연한 불안을 느끼기까지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나의 지나친 사랑에서 해방된 그녀는 미국에서 잘 살고 있다. 딸과 나와의 인연이 끊기다시피 되어 어떤 동화에 나오는 마술사에게 어린 딸을 빼앗긴 것 같아 시모네타의 환상이 현실화 되었음이나 다름이 없다. 그러나 죽지 않고 잘 살고 있으니 다행이다.

지금 이 순간 눈을 감지 않는데도 내 방에 있는 뭇 사물과 함께 노오란 기생(妓生) 코스모스라든가 썬세트(노을빛 코스모스), 라이락, 호박잎, 몇 그루의 상록수들 사이로 우리 개 꽃순이가 뛰어 놀던 서교동 집뜰 정경이 오버랩 해와 좁은 시야가 무척 번거롭기만 하다. 우리는 몇 달 전만 해도 그 집에서 살았고 결코 행복했다고 할 수 없는 그 시절이었지만 뜰이 있고 개도 있고 꽃도 피고 가족들도 많았던 그 시절엔 생활의 리듬이 있었다. 그런데 모든 사랑의 대상들이 차례차례 나에게서 떨어져나갔고 나는 노모와 함께 이 아파트 신세를 질 수밖에 없었다.

 그 후둑후둑 맥박이 뛰듯한 희비극이 소용돌이치던 서교동 생활을 청산하고 보니 이곳은 외부의 냉냉하고 시끄러운 소음 속에서도 너무나도 고요하기만 하다. 또 대인 공포증으로 사람이 싫어진 나로서는 안성맞춤의 환경 속에 들어앉아 버려 다행한 일인지 모르나 한편 서글퍼진다.

강변도로를 연해 솟은 도신의 현대식 건물들, 그리고 멀리 엷은 빛으로 펼쳐진 산들은 한 폭의 수묵화를 보는 듯하다.

 강변로에는 쉴 사이 없이 움직이는 자동차의 행렬이 있다. 어디에서 시작해서 어디로 가는 버스요 승용차들일까. 그 사이에 또 어디서 오고 있는지 하얀 전동차가 평화롭게 지나간다. 유선형으로 된 머리부분과 까만 점 같은 차창들이 꼭 누에같이 생겼다.

윤회 전생한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보이지는 않지만 각기 정해진 칸에 수용되어 저런 열차를 타고 언젠가는 종점에 닿아 일생을 마치는 것이 아닌지.

우등열차에 오른 인생, 그리고 정감서린 좋은 동승자들과 어울려 앉은 요행의 인생은 보다 쾌적한 여행을 할 수 있을 것이고 그 반대의 경우는 신고(辛苦)끝에 좌절되고 더러는 이겨내서 그 체험 때문에 깊고 완숙된 정신적 승리자가 될 것이다.

나는 어떤 열차를 탔을까, 가슴에 손을 얹어 생각해본다. 전자도 후자도 아닌 퍽 어정쩡한 완행열차를 타고 있고 어느덧 종점이 다가오는 시간을 달리고 있는 것만 같다. 그 짧다면 아쉽고 길다면 어차피 지나가 버린 사연들은 다시 붙잡고 싶지도 않는 미련 없는 과거일 뿐 이상하게도 담담한 기분이다.

그러나 ‘나’ 어떡하란 말인가. 무척이나 보고 싶은 얼굴들을 많이 잃었었다. 나는 사람은 죽으면 저승에 머무르는 동안 사랑하는 혈육이나 보고 싶은 얼굴을 만날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어느 학자 점술가의 말에 의하면 팔만대장경에 쓰여 있는 구절인데  저승의 시간대가 어떤 것인지는 몰라도 오백 년이 걸려도 만날까 말까라고 쓰여 있다고 했다. 정말 어떡하란 말인가…

궂은 일, 때로는 좋은 일들로 수다한 사연들을 안고 후려치는 바람막이 하느라 정신 차릴 수 없던 사이에 세월은 흘러갔고 살아 있는 혈육들마저도 뿔뿔이 너무나 먼 곳으로 흩어져 나가 있는 고독을 새삼스럽게 의식하게 된다. 저렇게 바라다 보이는 강 건너 수묵화같이 희미하게 보인 곳으로 말이다.

내가 타고 있는 인생열차의 칸에는 낯 설은 타인들로 꽉 차 있는 것만 같다. 그 속에서 내가 먼저 콜라나 담배를 권하며 친해 보려고 말 붙임 해 보려는 외로움…

그런데 어느 간이역에 열차가 잠시 멈췄을 때, 남자인지 여자인지 아들인지 딸인지 누군가 다른 칸에서 뭣을 들고 나를 향해 다가오더니 ‘엄마, 도시락 먹어. 엄마가 이 기차에 탄줄 몰랐네. 나는 쩌어기 앞칸에 타고 있었는데..’

나는 운명적으로 함께 나란히 앉은 든든한 자식은 없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비록 칸은 달라도 같은 방향을 가고 있는 자식 하나가 꼭 있다고 믿고 있다.

창 밖 저어 아래서 강변의 버들가지가 바람에 하늘거린다.

오늘따라 유난히 친근감이 더 느껴지는 버드나무, 내 친구.

아무튼 종착역까지 가는 시간까지 끈질기게 일하고 먼 후세에까지 평화롭게 누에 같은 자동차가 달리고 있을 수 있는 복된 세상이 무궁하게 지속되길 빈다.

요즈음 와서는 금요일이 기다려진다. 금요일 다음엔 토요일이 오기 때문이다.

금요일엔 장에 가서 이것 저것 골라 찬거리를 사온다. 토요일에는 기다려지는 혈육이 오기 때문이다. 며느리가 손자놈을 데리고 오면 나는 그놈을 안고 강 위를 훨훨 나르는 하얀 물세를 보여 준다.

무척 신난다는 표정의 그를 볼 때마다 ‘대부’의 돈 클레오네가 만년에 뜰에서 손자와 놀고 있는 장면이 떠올라 한없이 애수에 잠기기도 한다.

토요일엔 또 군복무가 얼마 남지 않은 막내가 오는 날이다. 그리고 일요일엔 부대로 돌아가 버린다. 워낙 친구들을 좋아해 불려나가 버리니 무정하게도 나와 대화를 나눌 시간은 거의 없지만 그래도 나는 그를 기다린다.

노모는 아침을 들지 않고 나는 저녁을 먹지 않기 때문에 서로 시간대가 뒤틀려 우리 식구들이 함께 식탁에 앉아 보기는 거의 없는 생활이다. 결국 제각기 혼자서 밥상을 받게 된다. 우리 집의 가정적인 고독은 여기에 그 근원이 있는 것 같다.

일각일각, 목각에다 칼집을 하듯 시간은 깎여 내려가는데 나는 커튼을 걷어 창 밖 경치를 바라본다. 휘황찬란한 강북(江北) 불빛 그림자가 물에 비치지 않는 것은 추위에 한강이 꽁꽁 언 탓인가 보다.

멀리 줄이어 달리는 자동차 불빛은 호박넝쿨 위를 나르는 뽀얀 반딧불같이 아름답다. 나는 이곳에서 사는 동안 무엇이든지 아름답게 나름대로 느끼며 답답하면 춘하추동 변하는 강물, 눈 오고 비 오고 때때로 안개 자욱한 강변풍경을 바라보면서 생업에 미쳐 살  길밖에 없다.

칠흙 같은 하늘에서 눈보라가 휘날리기 시작한다.

나는 갑자기 에밀리 브론테처럼 의젓한 자세로  창 밖을 응시한다.

브론테의 시야엔 공동묘지와 멀리 은백색으로 펼쳐진 폭풍의 언덕이 보였을 것이다.

내 시야엔 역시 어둠과 하얀 눈이 엉켜 은회색 하늘과 닿아 버린듯한 강건너 도시의 뿌우연 불빛 띠가 그지없이 묘하게 보인다. 눈 아래 강변로를 끊임없이 달리는 자동차 불빛 띠 역시 희한하다.

이런 상황은 나를 에밀리 브론테로 만들고 어떤 시대가 돼도 상관없는 어느 성주의 미망인으로도 만들어 버린다.

환상은 꼬리를 물어 먼 태고와 미지의 미래세계에서나 볼 수 있는 꿈같은 풍물이 보이는 듯해 앞으로의 작품을 위해 찰칵찰칵 가슴 속에 든 사진기 셔터를 눌러재킨다.

하염없는 환상을 깨듯, 어머니 방, 텔레비젼에서 흘러간 가수가 부르는 노래 ‘아, 아, 아 황혼의 엘~레~지…. ‘가 새어 나오고 있다.

 

어머니는 나의 가정이며 종교

당인리 발전소의 거대한 연통너머 하늘을 벌겋게 물들이고 해는 졌다.

동녘에서 떠오른 달은 북쪽으로 기울어간다. 오밤중인데 북창(北窓)이 환해 벌써 날이 샜는가 하고 내다보니 약간 축난듯한 만월(滿月)은 아직 남산(남산) 위로 가고 있다.

달도 서쪽으로만 간다는 게 내 관념이었는데 보는 각도에 따라 곡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4월이 오면 라일락이 피어 진한 향기가 집안에 진동했던 서교동 집에서 나는 꽤 오랜 세월을 보내다가 지난해 그 집이 팔려 우리는 강남 쪽 아파트로 이사를 왔다.

우리라고 했자 팔순의 노모와 단둘이다. 자식들이 하나 둘 성장하더니 각기 스스로의 길을 찾아 먼 곳으로 날아가 버렸고 언젠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면 세대주 나 혼자만 남게 되니 나는 가정 붕괴 직전의 싸늘한 상황에서 숨쉬고 있는 것이다.

  그 시절엔 라일락 그늘에서 개가 짖고 밥그릇 설거지 소리가 제법 요란하고 화려해 생활의 리듬이 있었다.

이렇게 많은 것이 바뀐 지금 남산에 걸려 있는 달을 바라보며 멀리 부에노스아이레스라든가 북해도의 어느 3류 호텔에서 눈을 붙이고 있는 듯한 착각을 하는데 그런대로 만족을 하고 있다. 예전부터 나는 일을 하다 말고 휑한 화실에서 그만 쓰러져 자 버리기 일쑤였다. 그리고 비몽사몽간에 가위에 눌린다. 웬일인지 서교동 시절엔 그것이 심했었다. 닫힌 방문이 저절로 활짝 열리고 혼이 구천세계(구천세계)를 날 때 들리는듯한 요음(요음)이 귓전에 울리더니 그리던 혈육의 모습이 머리 위에 우뚝 서 있는 것이었다.  나는 놀라 깨어났고 이어 헷 것을 보았구나 했다.

어느 날 이른 아침이었다.

“엄마아”

나는 누운 채로 창 너머 슬라브식 뒷집 베란다에 서 있는 여승을 보고 외쳤다.

중세기의 갈색 중 옷에다 하얀 차양이 달린 갈색 베일을 쓰고 염주를 들고 서 있는 여승은 분명히 30대의 우리 어머니의 얼굴이었다. 자애로운 쌍꺼풀 눈매는 나를 보고 있지 않고 우리 집을 보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무슨 조화인가 하고 눈을 찔끔 감았다가 다시 떠 보았는데 역시 환시(幻視)였다. 계단을 퉁퉁 내려가 안방에 들어가 보니 어머니는 푸우푸우 숨소리를 내고 잠들어 있었다. 그토록 선명했던 환시가 그 후 오래도록 마음에 걸렸지만 한 해가고 두 해가는 동안 불길한 생각은 시효가 지난 듯 차차 잊혀졌다.

계절이 겨울로 접어들자 안개가 자욱한 아침이 계속되는데 안개의 베일에 덮인 회색고층건물들 옥상의 돔 식 환풍기들은 바람개비가 되어 뱅뱅 돈다.

안개는 내가 UFO의 기지촌에 있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히게 하고 산소부족의 거실에 놓인 대나무 잎 같은 열대식물 화분이 마치 자화상처럼 느껴져 섬뜩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안개가 걷힌 밤에 북 창가에서 강북을 바라보면 멀리 하이야트 호텔의 네온이나 강 건너 외인(外人) 아파트의 불빛과 남산 전망 탑이 흡사 디즈니랜드를 방불케 하여 즐겁지만 옛날의 쇼크로 중심성결막염을 앓아 안경을 쓰지 않으면 불빛이 번져 보이는 까닭인지 모른다.

외출에서 집에 돌아오면 모진 추위에 어렵사리 택시 속에 들어 앉았을 때처럼 훈훈함을 느끼게 한다. 그것은 어머니가 살아 있다는 증명이기도 했다. 새벽에 일어나면 살며시 불을 켜고 어머니 방문부터 열어 보고 마음을 놓는다.

내 갓난아이 때 나를 재워놓고 자나 깨었나 살피시던 어머니처럼 말이다. 그 시절에 우리 아버지는 친구의 꾐에 빠져 양말 공장을 차렸다가 망해 어머니가 나를 안고 외가로 쫓겨가던 여객자동차에서 나는 몹시 보챘다고 한다. 어머니는 나를 달래느라 젖꼭지를 입에 물렸지만 젖은 나오지 않았었다. 한쪽 젖은 애려서 수술을 해 통보젖이 되었고 한쪽은 어느 여름날 밤 지네에 물려 커다란 흉터가 생겨 버렸었다. 그래서 나는 우유를 먹고 자랐다.

어머니가 조용한 숨소리로 아기처럼 잠들고 있는 아침, 곱빼기 커피잔을 놓고 담배를 피워 물고 오늘은 어디를 어떻게 그려갈 것인가, 세워진 화판을 바라보는 휴식 아닌 휴식시간이 그지없이 행복했다. 어느 날 갑자기 어머니가 지병인 기관지 천식으로 입원하게 되었다. 숨이 갤갤한 고령의 노인은 인정사정 없이 여러 가지 검사를 받고 의례적인 링게르(링거) 주사를 손등에 꽂은 채로 온몸이 부어 도리어 악화가 되어 버렸구나 하던 차 젊은 인턴이 보자 하기에 나는 그 인턴을 만났었다.

가슴 엑스레이에 희미한 솜털 같은 동그라미가 있으니 조직검사를 하지 않고는 확언은 할 수 없지만 폐암의 의심을 배제할 수가 없다. 암은 최후에 폐로 전이한다는 등, 청천에 벽력같은 말을 조심스럽게 일러 주는 것이었다. 설상 가상으로 또 간호원이 “의사선생님 만났지요. 기관지 천식만으로 그렇게 고통 받을 수 있나요. 그것이지… 이제는 가족들이 의논할 때가 됐지요” 하지 않는가. 나의 신앙은 어머니고 나의 종교는 어머니였다. 폐암으로 고통 받는 그를 어떻게 볼 것이며 정말 세상을 떠난다면 보고 싶어서 어떻게 살란 말인가…. 나는 복도에 나와 난로 같은 재떨이가 세워진 옆 의자에 기대어 흐느껴 울었었다.

다음날 아침에도 안개는 자욱해 역시 UFO 기지촌 같은 택시 정류장에서 다가오는 초록색 택시를 잡아 탔었다.

무척 뚱뚱한 중년 운전사에게 병원소재지를 또박또박 가르쳐 병원 이름을 댔었다. 그런데 반쯤 가다가 우회전을 해야 하는 지점에서 아차 하는 동안 좌회전을 해 버리지 않는가. 새벽이라 붐비지 않는 차 길을 가면서 서울시재 운전경력 20년이 됐지만 그런 병원이름 모른다며 투덜대는 운전사와 불에 가라앉은 듯한 소리로 나는 시비를 벌이다가 이윽고 병원 앞에 도착해서야 하도 미워서 “이놈아” 하고 소리를 질러 버렸다. 그러자 그는 나를 보고 “개 같은 X야~~” 광적으로 내뱉고 사라졌는데 오히려 내 속은 후련해지면서 12년 전에 기록화를 위한 10인의 월남 종군 파견 화가의 말석에 끼여 나트랑의 백마부대에서 하룻밤을 새울 때의 일이 상기되어왔다.

밤새도록 조그마한 도마 뱀 같은 수궁(수궁)이 벽을 기어 다니면서 짹짹 우는 방에 간헐적으로 우군이 쏘아 올린 대포소리가 울려왔다. 나는 무엇이 가슴에 맺혔길래 투웅 울리는 포소리가 기다려지고 징그러운 파충류의 모습까지 차차 귀여운지 가슴의 응어리가 차근차근 풀려가는 듯 시원했다. 좋은 인연을 만나기란 곡절 끝에 어떤 운명 같은 실오라기가 줄을 이어 준 것인지…

병세가 악화될 대로 되어 퇴원한 어머니는 새벽 앰뷸런스에 실려 K병원에 재입원했는데 명의(名醫) 이박사님의 덕분으로 많이 좋아졌다.

어머니는 폐암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살아계시다는 사실이 문득 문득 기쁨을 가져다 주고 어머니가 안방을 지키고 있는 한 내게는 따뜻하고 훈훈한 가정이 있을 것이다.

 

인간상실

지나고 나면 뭐 그다지 큰 일도 아닌 것을 그 당시에는 꽤 신경이 쓰이고, 몸과 마음이 괴로운 그러한 때 나는 곧잘 어린 시절을 회상해 본다.

나이 아홉 살 때 하루는 개천가에서 학교 동무들과 놀면서 물을 들여다보고 오싹했던 일, 불과 새끼손가락 길이 깊이밖에 안 되는 물속인데, 거기 비치는 구름과 개천가에 늘어선 나무들 때문에 그 물이 천길 만길이나 깊게 보인다. 한발만 자칫 잘못 디디면 저 천길 만길 물속으로 떨어져 들어가다가 요행히 치맛자락이 나뭇가지에 걸려 한번 뺑그르 돌아서 구름이 있는 곳까지 멀리 떨어져 내려갈 것만 같았다.

지금 또 하나 이런 것이 머리에 떠오른다. 해외여행 때 본 우주영화의 한 장면인데, 우주인이 도킹을 할 때 실패해서 끝없는 우주공간을 홀로 떠가는 그 처절한 광경.

마음이 괴로울 때 나는 어릴 때 물가에서 놀던 그 생각이 몸서리쳐지기도 하고 또는 내가 도킹에 실패한 우주인이 된 듯한 공포와 고독에 사로잡혀지는, 이것을 나는 내 나름대로 죽음에의 향수라 해 본다. 그러나 반드시 이렇게 비관적이지만은 않고 어떤 때는 이파리가 축 늘어진 느티나무만 보아도 금방 비타민같이 엽록소가 내 혈관 속으로 흡수되어 오는 것 같고 또 비 오는 날 거리의 비닐 우산들을 보면 활짝 핀 나팔꽃같이 보여 빌딩가가 아름다운 꽃밭처럼 느껴지며 공연히 행복하다.

이 세상, 정말 살고 싶다.

아무튼 어린 시절에 가슴이 오싹하게 저렸다는 개천물에 비치는 그림자나 영화에서 본 우주인의 죽음이나 그건 결국 죽음의 세계로 연결되는 환상들이 아닐까 싶다. 이렇게 죽음의 향수와 하찮은 일에 행복하기만 한 기분의 교차가 탯줄처럼 고여 무늬를 그리며 그럭저럭 살아가는 게 나라는 인간인데, 이러한 위인을 분명 건전하다고 할 수도 없지만 그저 사치스러운 감정이라고 웃어넘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물질문명 때문에 정신세계가 메말라 본래의 인간성이 상실되어가고 있을 때 나 같은 환상을 좇는 태도는 분명히 산소부족이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물질적인 만족에 도달한 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도 양상은 다르지만 나의 어릴 때 물가에서의 공포, 그리고 우주인의 고립과 같은 불안이 전혀 없지는 않지 않을까. 어떠한 사람이건 간에…

인간상실(人間喪失), 물질욕 때문에 인간이 산소부족을 일으키는 현실에서 비 오는 거리를 화원(花園)으로 착각케 하는 인간을 그저 멸시, 혹은 웃어넘기지 말고 서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정신의 세계로 이제 차차 되돌아가 주었으면…

 

神 은 어디에

우리 집 조상들은 대대로 유교사상의 전통을 받아왔는가 지극히 봉건적이었다.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면 조상숭배로 제사를 성의껏 지내는 것이어서 그날이 오면 흡사 무슨 축제를 방불케 했고 2월 초하루 날엔 때아닌 가뭄과 우박을 몰고 온다는 영동할머니가 하늘에서 내려온다고 콩 볶아 먹고 대나무 가지에다 색색의 천 조각을 달아 사립문 밖에 꽂고 일년 농사 잘되게 해 달라는 마귀 달래는 방술을 했는데 그 원색 천 조각이 참 아름다웠다.

또 내가 처음으로 부모 슬하를 떠나 여학교 기숙사 생활을 하는 일 학기 동안 어머니는 내 밥그릇에다 쌀을 부어놓고 하루하루 정한수 갈아 떠올려 정성을 드리고 있었다니 놀랐었다. 그때 어머니는 필경 어머니의 신인 천지신명께 기도 드렸음이 분명하다.

그 어머니는 기나긴 세월이 흐른 뒤 영세 받고 박 요한나로 지금은 독실한 신자가 되었다.

나는 이러한 어머니의 신앙을 이해하고 있고 나 자신 영혼의 존재를 부인하지는 않지만 종교와는 거리가 멀다.

그런 내가 옛날에 느닷없이 산기가 엄습해 왔을 때 그랬고, 육친이 세상을 뜰 때, 또 단 하나였던 사랑을 체념 못했을 때 누구나 처럼 하느님을 계면쩍게 불렀지만 내가 절규했던 하느님 소리는 공중을 메아리 쳐 하늘 가까이 퍼지지 않고 도로 내 몸 속으로 들어와 버리는 것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 나는 절망 속에서나 어떤 저주를 보았을 때 우선 그림을 계속 그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안 되면 어머니와 대화를 한다.

우리 어머니는 다른 사람들의 어머니처럼 건강하고 알뜰하고 현명한 어머니가 아니다. 그런데 어머니와 대화하면 이상하게도 일이 풀리고 체념해야 할 슬픔도 견딜 수가 있는 것이다.

하느님을 잘 모르고 신이 무엇인지도 모르지만 분명히 우주에 많은 신, 선신 미신 악신이 있는 것으로 나는 믿고 싶다. 때로는 눈부신 햇살, 소슬바람, 맛있는 공기, 코스모스에서도 신의 미소를 본 듯하고 어머니 속에서, 위대한 사람에게서, 그리고 일에 미칠 때, 멍청해 있을 때, 뜨거운 감격에 젖을 때 신의 숨결을 느낀다. 또 정직과 근면,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신의 힘과 자신을 얻는 듯하고 운명과 맞서 싸울 때 신의 시련과 승리를 인식할 수 있다. 악과 선, 죄와 벌은 스스로의 양심에 있을 것이다.

또 효심이 지극한 사람치고 못 되는 사람 보지 못했다. 나의 경우 거룩한 효심과는 거리가 멀지만 단지 어머니를 좋아하는 것뿐으로 신앙처럼 그림을 그릴 수 있고 버티어 살고 있는 것이 아닌지 모른다. 초가을 라일락 잎이 바람에 비벼대는 소리가 포플라 소리로 들리고 세종로의 화창한 가을날씨를 어느 날의 봄날씨로 착각했다가 ‘아니야’ 하고 섬뜩 정신을 차리는 게 요즈음 나의 다양한 심리현상이다.

오랜 ‘환쟁이’ 생활을 하다 보니 내 주위엔 조상신, 화신, 삼라만상의 신들, 심지어는 잡신까지 원시인이 되어 있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 같기만 하다. 아이고 힘도 겨워라. 

 

 

人間無情

어머니가 시골에서 돌아오신 밤이다.

검붉게 피주가 타신 어머니는 보따리 속에서 굴비와 오랜 시간을 묵힌 찰떡을 풀어 내놓으시며 ‘복주’가 고맙더라고 하셨다. ‘복주’는 어머니의 조카뻘이 되는 장년 壯年이다.

외할머니가 세상을 떠나게 된 것은 4년 전 봄이었다. 그리고 나의 아버지는 1년 앞당겨서 죽음 길로 가셨다.

불행한 우리의 모계 母系의 시발점과도 같은 80노인의 외할머니가 길을 찾아 가겠노라고 하시며 어머니의 조카인 손부 孫婦 밑에서 외롭게 돌아가신 것은 한편 어머니의 가슴에다 못을 박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버지는 그야말로 나의 경제적인 암흑시대에 약 하나 제대로 쓰지 못하고 돌아가셨으니 억지 죽음을 하신 것이다.

외할머니는 공동묘지로 아버지는 교회의 혜택을 받아 기독교 신자들의 공동묘지로 모셨던 것인데, 내가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무덤 앞에서 ‘아버지 죄송합니다’ 란 한마디를 올리고 돌아 온지도 5년이란 세월이 흘러갔다.

그때 달맞이꽃이 새벽 이슬을 마시고 노란 나비들처럼 꽃잎을 붙이고 있었다. 그리고 비탈길 옆으로 누워 있는 감자 밭에 뾰족이 보인 감자뿌리 하나가 나에게 야릇한 식욕을 돋구게 하는 것이었다.

한동안 내가 없이 살아와서 그 반발 작용으로 오는 것인지 나는 고향이 싫어서 떠난 후 한번도 아버지와 할머니를 찾아 보지 못하다가 ‘복주’ 오빠가 잘 되어서 큰 산을 샀으니 거기에다 할머니와 아버지의 유골을 이장할까 하니 내려오라는 기별을 받고 다녀오신 어머니이다.

‘지금쯤은 시원하니 시가를 바라다보시면서 옛사위 오순도순 할거라’는 얘기를 어머니는 계속하셨다. 그렇다면 생전에 할머니와 아버지의 사이가 좋았다는 것보다는 의리에서 오는 애정을 서로 퍽이나 지켰다는 것을 나는 어렸을 때부터 감득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눈을 뜬 채 숨을 거두실 때도 ‘이 사람아 원통히 생각 마소, 눈 감고 가소’라 부르짖으며 아버지의 눈을 만지어 고이 감겨 주신 할머니였다.

아버지의 유해는 고스란히 유골로 깨끗이 놀미하게 남아 있었으나 이상하게도 두개골이 좀 틀어져 있더라는 것이다.

그 동안 묏자리가 괜찮았던 모양이라는 둥, 그 후 어떻게 무덤이 많이 불어저 찾기에 어리둥절하다가 아버지의 무덤 옆에 선 작은 밤나무를 목표로 쉽게 찾아냈다는 둥, 할머니의 유해는 묏자리가 나빠서 육탈 肉脫이 덜 되었다는 둥 이야기가 계속되었다.

이야기만 들어도 그 광경이 내 눈앞에 선하였다.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나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신 후 눈물 한 방울을 떨어뜨리지 않았었다. 도무지 눈물이 나오지 않았고 서러움과 그들에 대한 연민 憐憫의 정을 후로 자꾸 밀어만 왔던 것이다.

나는 목이 잦은 소리를 내어 어머니와 아이들을 모두 만방으로 가라고 외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방바닥에 엎딘 채 베개 위로 얼굴을 대고 엉엉 울어댔다. 지나간 슬픈 일들이 꼬치꼬치 생각이 나왔지만 괴로워서 생각하고 싶지 않고 밀물처럼 눈물마저 후에 울기로 미루고 싶어졌다.

인간의 최대의 공포와 절망이 죽음이란 건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그러나 언제인가 한번은 가야 하는 길인 것도, 그 한번의 길이 마지막의 길이라는 것도 알면서 사람이란 그 길을 망각하고 살고 있고, 그 길이 다가서 오고 있는 것도 모르고 살기가 일쑤이다. 그러기에 영화와 부귀를 죽음의 순간까지도 꿈꾸는 것일 것인데 어찌 생각하면 그러한 마음이 서글프기 한이 없다.

영화도 부귀도 권문성세 權門盛勢 도 여기 다 남아 있는데 옛사람들은 다 죽음의 길을 가고 없다. 그런데 후인들은 풍수설 風水說 에까지도 마음을 의지해 보려고 하고, 선인 先人들이 쓰다 남은(?)  낡아빠진 영화와 부귀를 폐허에서 허둥대고 망설이고 있는 것이다.

옛사람과의 시간적 거리는 실상 유성이 흘러가는 것 같이 순간일지도 모르는데 나는 지금 무엇에 허둥대고 무엇을 망설이고 있는 것일까.

 

母系家族

‘쿠쿠쿳쿠쿳’

나는 암탉 같은 소리를 내어 웃었다. 내 웃음소리가 바람 한 점도 없는 무더운 여름 밤의 고요함을 깨뜨린 건 사실이다. 그러나 웃고 나니 허무가 공기처럼 내 머리를 휭휭 돌다가, 내 뇌수 腦髓를 배고픈 위장 胃腸처럼 텅 비게 해 버린다. 갑자기 현기증까지 난다. 8년 동안이란 긴 세월을 셋방살이를 못 면했던 내가 딴에는 넓은 집을 얻고, 이사한지 열흘째 되는 오늘밤이다. 새우처럼 허리를 못 펴고, 다리를 오그리고 자던 곡마단원 曲馬團員 같은 식구들의 넓은 방에서 마음대로 허리를 펴고, 팔자 좋게 다리를 뻗고, 숨을 쉬고, 잠꼬대를 하는 자연의 ‘하모니’가 나에게는 차라리 우습게도 보인다.

아랫목으로부터 81세의 외할머니, 어머니, 나, 이렇게 모계 모계로 3대, 그리고 다음에는 4대에 해당되는 내 딸이 누워있고, 그리고 그의 남동생인 백일점 白一點 이 내 옆에 끼여 누워 있다. 그 놈은 낮이고 밤이고 3대에 걸쳐 나오지 않는 젖을 빨기 좋아하는 놈이다. 새삼스럽게 여자가 많다는 걸 느꼈다. 딸의 딸, 도 딸의 딸, 공교롭게도 하나씩이 인계 引繼하는 형식으로 잔존하여 있다는 것에 내 웃음보는 또 한번 터지고 말았다.

외조부가 일흔 일곱에 돌아가셨으니, 청상과부란 불명예를 면할 수 있었던 외할머니는 지금도 정정하시오 밤마다 우물가에서 우리 식구들의 허리를 정성으로 문질러 주신다. 그 굵고 명랑하고 ‘모던’하던 선 線은 언제나 우리 가족의 ‘오아시스’이다.  우리 모계의 불행은 어머니가 외딸인 데서부터 시작되었다. 어머니가 남편 시하에서 친정 부모를 20여 년 동안 모셨다는 것은 말 못할 정신적인 고통과 깊은 비애의 뿌리가 되어 보라빛같은 금사망 金絲網 이 일생 베일처럼 어머니의 얼굴을 떠나지 않았다. 역사는 흐른다더니, 나는 10년 전 어머니로부터 그 보라빛 배턴을 받아 쥐었는지도 모른다. 종착점 없는 내 경주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다행히 나는 결혼에 실패했기 때문에 어머니가 맛보시던 아니꼬운 고통을 면할 수 있었으나, 그러나 나는 그보다도 몇 배 되는 고가 高價의 고통을 지불하고 비로소 자신의 자유를 사야 했다.

고독으로 미채 迷彩 된 삼림 삼림 속에 내가 꿈꾸는 예술의 전당을 짓기 위하여 나는 끊임없이 싸늘한 시간의 대리석을 쪼아야 했고, 또 앞으로도 쪼아야 한다. 오늘밤 내 귀에는 끌고 정을 맺는 그 대리석의 고요한 소리가 잠든 내 가족들의 숨소리에 반주 伴奏되어 더욱 또렷이 들린다.

 며칠 전까지도 외조모 外祖母를 모셨다는 핑계를 하고 싸우시던 아버지의 병석에서 신음하시는 소리가 사랑에서 들려온다. 돌아가시면 어떻게 할까 하는 불안이 갑자기 물밀듯 가슴에 부딪친다. 살아 계시는 어버이에게 마음껏 못해 들렸다는 자의식 自意識이 새삼스러이 눈물이 되어 솟는다. 어쨌든 돈을 벌어야 하겠다고 나는 느꼈다.  배턴을 놓치지 않고 죽도록 달려야 한다. 불행의 모계를 유전 遺傳치 않기 위하여…. 이조자기에 꽂은 아마릴리스가 제법 오래 간다. 꽃이나마 떨어뜨리지 않고, 방안을 꾸며 놓는다는 것은 나의 오랜 숙원 宿願이었다.  아버지의 신음하시는 소리, 개 짖는 소리, 지새는 밤은 요란하여 간다…. 어디선가 쿠쿠쿠, 나는 닭의 소리에서 나는 나의 터뜨린 내 웃음 소리를 연상했다. 그리고 그 울음 소리가 수탉일까 암탉일까 까지를 생각하였다.

 

눈 뒤에 비

제대로 격식을 갖춘 일기장도 아니요 가계부도 아니고 그렇다고 메모쪽지도 아닌, 사연이 복잡하게 암호처럼 뒤섞여 적혀 있는 넓적한 대학 노트 한 권.

그것은 나의 희비애환의 흔적이 흠씬 젖어 있는, 내 생활의 묘한 회의록 같은 것인지도 모르는데, 그게 꽤 오래 전부터 내게 붙어 안방에서 나하고 같이 살고 있다.

그다지 놀랄 것까지는 없는 이상 기후 때문에 철 아닌 궂은 비가 어느 여름 밤의 그때처럼 처마 끝을 요란하게 후려 때리는 밤이다.

시원한 빗소리를 들으며 이 비가 오기 전에 벌써 눈이 왔었지 않나 싶어 나는 내 옆에 있는 문제의 넓적한 노트를 뒤적여 보았다.

’11월 9일 (土), 초설 初雪’ 이라는 큰 글자가 씌어 있다. 그리고 ‘임 떠남’, ‘支拂 眼科 400원, 택시대代 140원, 빵 과자 200원’ ‘XXX’ – 그 정도로 간단하게 기록되어 잇는데, 그 가운데서 ‘XXX’, 이 세 X는 그날 있었던 일들 가운데 참으로 싫었던 것을 쓸 수도 없고 아니 적어 놓을 수도 없어 표시해 둔 것이다.

나는 아이 아버지를 아직도 임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니 나는 무엇 때문에 19년이라는 긴 세월을 두고 처음 임을 만날 때의 그 감정, 즉 연애감정을 나 혼자서 오래오래 간직하고 있으려는 것일까….

때로는 임을 별안간 ‘Q씨 氏’라 불러 ‘Q氏 떠남’, ‘Q氏로부터 00원 입 入’ 식으로 마치 타인처럼 바꿔 써놓은 기록도 있기는 있다.

나는 이런 말을 쓰기 위하여 보다는 눈(雪) 얘기를 하고 싶어서 노트를 뒤적여 보았을 뿐인데 어쩌다 임의 난에서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하기야 사람은 살다가 보면 눈(雪) 한가지 가지고 먼 훗날 임과 전연 관계가 없는 게 아닌 사연이 얽히기도 하지만…

눈, 첫째 내가 잊을 수 없는 초설 初雪은 만삭의 몸으로 시골로 신부리(신행)를 가던 밤의 일이다.

그때만 해도 제법 삼한사온 三寒四溫이 정확해서 바로 그날은 다행히 사온에 접어들기 시작한 날씨였다. 해방 직후여서 물자가 귀했고 오늘날 거리를 누비는 젊은 여인들의 화려한 옷감 같은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시대였다. 새색시인 나는 노색 老色이 잠긴 고동색 양단 두루마기에다 내가 털실로 짠 오동색 목도리를 머리 위까지 둘러 감고 십 리 길을 걸어갔다.

교통이 불편한 곳이라서 인력거마저 다른 사람에게 빼앗겼으니.

친정아버지하고 몇 사람의 친척과 신랑이란 사람의 친구들인 유달리 네모진 사각모를 쓴 대학생들이 이바지(선물)가 든 석작, 트렁크, 고리짝 등을 메고 따라오고 있었다.

날씨는 포근했지만 무겁게 쳐져 내린 회색 하늘에서 눈이 흰 나비가 날듯, 팔랑팔랑 날아오기 시작해서 그게 오동색 목도리를 감은 내 머리 위에 떨어져 살금살금 녹아 이마로 쪼르르 흘러내리는 게 어쩐지 즐거웠었다.

그날이 11월 25일, 초설 초설은 밤이 새도록 내려 온 마을을 희게 덮었다.

나는 신경과민으로 잠을 이룰 수 없었고 게다가 만삭으로 인해 십 분이 멀다고 뒤꼍 감나무 밑에 가서 오줌 때문에 주저앉았다가 방에 돌아오는 일을 밤이 새도록 되풀이했었다.

그 차고 조용한 시원한 흰 눈, 내 일생을 축복해 주지 않았던 그 흰 눈, 그러나 내 마음이 추울 때 털실보다 포근하게 감사 주는 듯했던 뜨거운 그 흰 눈의 인상.

 

그 후 초설의 감나무 집에 머무른 지 불과 수일 후, 잠시 떠난다고 생각했던 것이 영원히 나는 그 시집을 다시 가지 못하게 되는 인생 코스의 방향이 바뀌게 될 줄이야…

괘 오랫동안 나는 홀로 살았다.

그러다가 서울에 와서 얼마 후 지금의 국도극장에서 임이고 어떤 때는 Q씨라는 그와 <춘희>를 보았다. 유명한 그레타 가르보의 춘희가 아니라 미슈리느 프류엘 이라는 프랑스 여우가 춘희가 된 컬러 영화였다.

처지나 생리가 나와 춘희와는 천양지차로 다르지만 비련이라는 결말만은 나와 같다고 생각해서이지 나는 영화를 보면서 춘희가 된 마음으로 몹시 눈물을 흘렸다.

나는 평소에도 소리를 내지 않고 눈물을 영화배우처럼 주루루 흘리는 묘한 장기를 가지고 있는 듯했고 그걸 스스로 즐기기도 했었다.

임, 아니 Q씨와 나 두 사람은 영화관에서 나와 판자촌이 가득 늘어선 청계천변을 거닐었다. 산책이 아니라 집으로 돌아가는 코스였기 때문이다.

어느새 쌓였는지 판자촌 마을은 눈에 덮여 있고 아직도 함박눈이 쏟아지고 있는데 영화에서도 라스트 신이 눈으로 덮여 있었던 인상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때 우리 두 사람은 같이 나란히 걷지 않았다.

나였는지 그였는지 2미터쯤 뒤따라 걸어오고 있었는데, 춘희의 자극 때문이지 서로 저기압 속에서 걸었다.

눈을 맞으며 신행길을 걸어갔고, 또 눈을 맞으며 임과 춘희를 보고 나왔다는 것, 거기다가 춘희의 사연이 어떠한 불행이란 예감을 안겨 주었다고나 할까?

그런 데다가 느닷없이 그는 폭탄선언 같은 말을 하였다.

가질 것 다 지니고 있는, 어깨바라지가 쫙 핀 어글어글하게 생긴 사나이 모습의 그가 하는 소리가 어쩌면,

“내가 바로 춘희요!”

눈 내리는 길가에서 크게 외치더니 쏜살같이 가 버리는 것이었다.

나는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오직 그를 믿는 마음에서 초설이 내리는 날은 꼭 한번씩 ‘내가 바로 춘희요!’ 를 열심히 되뇌이며 무슨 뜻일까, 무슨 말일까 한 번씩 생각해 보았지만 정말 이해를 못한 채로 세월만 흘러갔다.

도대체 연애감정을 지속시킨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도 거느릴 것 다 거느린 사람과 연애한다는 건 나쁘게 말해서 그와 같은 연애의 타성, 혹은 내가 직접 당해봤대서 하는 말인지는 모르지마는 나대로의 나만이 느끼는 일방적인 순수성, 이것을 지금 생각하니 나라는 정신적인 구조 속의 하나의 혹과 같은, 그러나 이것을 떼어내면 육체의 어느 한 기관에 혹이 달렸다고 기관을 떼어 내버리면 사람의 생명이 위태하게 되는… 나에게는 그러한 감상적인 하나의 혹이 아닐까?

그러나 나는 너무도 덤덤하게 평생을 보내는 인생보다는 이 같은 어리석은 환상이나마 지니고 사는 사람이 행복자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도 나는 그림을 그렸기에 진짜 춘희가 아니 되었고 이러한 시행착오도 행복이라 느끼고 살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斷想 十一題

 

봄의 음성

누구던가, 슬픈 빛이라고 말했다는 보라 빛 스웨터가 방바닥에 구르고 겨울 동안 어두운 빛에 잠겼던 그림, 물감접시들이 찾아온 봄의 양광 陽光에 비쳐 눈부시게 활기를 띤 아침이다.

옥인동 꼭대기까지 올라간 코로나 택시의 클랙슨 소리와 고물장수의 가위소리, 그리고 ‘헌 화장품 갑이나 머리카락 파시요’  외치는 여인의 높은 소프라노가 봄빛을 타고 한층 생기 있게 메아리 쳐온다.

방안엔 아직도 난로가 타고 있다.

가만히 귀를 대면 금속에 부딪쳐 발산하는 불길이 쏴아하니 소나기소리 같은 향수를 부른다.

꿈을 쫓아 대기권 밖을 가는 듯했던 나의 반평생 속에는 홍역을 앓던 아이를 드립다 업고 허둥지둥 병원으로 달리던 청춘시절의 사연들이 괴어 있다. 그것들을 들추면 나의 가슴은 예외 없이 뻐근해진다.

나는 지금 뭔지 울먹이는 듯 울렁거리는 가슴을 잠시 달래며 후유 한숨을 내쉬어 본다.

봄은 분명 모든 생물체뿐 아니라 화폭과 물감접시까지도 밝게 소생시켜 주는 계절, 정지했던 고동도 살아날 것 같은 희망을 느끼게 한다.

칠순이 다가온 우리 어머니의 가슴에도 봄은 오고 있다. 어머니는 참 젊으시다.

어머니는 기타 반주의 노래를 좋아하신다. 그 노래를 들으면 몸이 들썽들썽 한다고 하신다.

그런데 유독 어머니가 싫어하는 재즈 싱거가 노래를 부르자, “지랄한다” 하고 엉덩이를 흔들면서 텔레비전 옆을 떠나버린다.

봄은 구성진 계절이기는 하지만 온갖 미지의 비극을 인간에게 잉태시켜 주기도 하는 계절이다. 그래서 슬기로운 사람들은 봄을 두려워하는가?

태양은 자비로운 미소를 쏟고 산고 마을은 온통 봄맞이 표정인데 지붕에서 후당땅 간짓대 부러지는 소리가 나를 놀라게 한다. 시새우는 바람이 한바탕 스쳐갔다.

그 후 봄빛을 타고 생기를 찾던 모든 소리가 파장을 이루듯 파르르 떨리는 것 같다. 나의 인생관, 예술관도 봄 하늘에서 떨고 있는가.

 

 

꽃과 비

우주인이 된 영화의 주인공은 우주선을 타고 처음 그 모습대로 수백 년을 맴돌다가 어느 위성에 내렸다.

 인류는 멸망하고 원숭이가 지배하는 세계였다.

그는 말을 할 줄 모르는 젊은 여인과 함께 그곳을 간신히 빠져나와 바닷가를 향해 가다가 넘어져 있는 자유의 여신상을 발견하고 거기가 바로 뉴욕이었구나 하며 통곡한다.

 

6개월간 발리 섬, 아프리카, 파리 여행을 하고 돌아온 나는 우리 집 뜰에 핀 한송이 보라빛 과꽃을 바라보며 엉뚱하게도 내 사연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그 영화 <혹성탈출>의 한 장면이 강렬하게 가슴을 스치는 것을 느꼈다. 이번 여행이 힘에 겨운 여행이긴 했지만 무의미한 건 아니었던 것 같다.

나는 그 여행을 다녀와서 한 송이 과꽃의 깊이를 알았고  엊그제 서울에 내린 비가 얼마나 정서적인 감각을 안고 잇는가로 되곱쳐 음미할 수 있게 되었다.

발리 섬 해안선의 꽃과 비, 케냐 광야의 꽃과 비, 콩고 산악에 후려치는 소나기, 모로코 평원의 꽃밭을 축이는 비, 어두운 파리 도심의 꽃과 비, 그리고 그 낙엽들…

광기마저 서린 듯 아름다웠다.

그것뿐인가, 여인들은 또 얼마나 아름다웠고. 그러나 우리 어머니 따라갈 사람 없듯이 꽃과 비도 한국의 것을 따라가지는 못한다는 걸 알고 왔다.

 

 

미모사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는 날, 잘 안 된다고 성화를 하다가 잠이 안 오고, 잘된 날은 잘된다고 기분 좋아하다가 또 잠이 안 온다. 사정이 생겨 그림 못 그리는 날은 또 일을 못했다 해서 잠이 안 온다.

이런 버릇은 몇 해 전 파리에 잠시 있을 때부터 생겼는데, 그때 나는 그림 때문에 잠이 안 오는 그게 나의 참된 생활이라고 느꼈고 돌아가서도 그림만의 세계가 있는 생활을 원했었다.

파리의 밤, 잠 못 우리고 있을 때 맥주병에 꽂힌 노란 방울 솜사탕 같은 미모사의 꽃 모습, 그 향기가 꼬박 나와 함께 있는 것같이 유정 有情해서 잊혀지질 않는다.

어린 시절에 본 뭇꽃들, 정원의 꽃, 지금 서울에 피는 꽃 그리고 슬픈 여인의 솜씨에 수 놓인 아름답게 절여진 꽃들을 사랑하고 나는 나대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꽃세계를 오락가락하며 꽃을 기르고 있다.

심한 더위가 시작될 무렵 저혈압증세가 악화되어 눕게 되었다.

육체가 지쳐서 눈을 감고 꿈을 꾸는데 그때 나는 파리의 미모사에게 편지를 띄우려고 했었다.

또 남태평양 타히티에 핀 지빠니에에게도 펴지를 썼다.

내 그림은 그림이 안 되거나 못 그리거나 잘되는 그런 고민이나 기쁨을 즐기는 마음 그대로를 나타내놓은 것 뿐이고 그게 생활화되어 버려 새삼스럽게 발표가 두렵다거나 하는 것은 없다.

옛사람이 이름도 없이 혼자 즐기고 또 거기에다 생애를 걸고 살았던 ‘장이’ 근성. 그것이 불행인지 다행인지 내게 스며들어 있다.

온 불덩이로 속이 타는지 단말마의 절규를 하며 당인리로 기차가 간다.

나는 절규하면서 매연을 통하고 가는 구식 기차의 모습을 내일도 보고 1년 후에도 10년 후에까지도 보고 싶다.

나도 나이를 먹지 않고 우리 어머니도 그대로고 아이들도 더 크지 않고, 시간이 잠시 낮잠을 자고 멈추는 공간에 하염없이 꽃을 기르고 싶다.

 

 

각시서대

무늬가 물결치듯한 깔깔이를 걸친 아가씨들, 그리고 눈길을 돌릴 때마다 선글라스의 사나이를 볼 수 있는 남도 항구의 거리는 야릇한 현대의 일면을 보여 주는 것 같다. 쉴새 없이 무수한 선박이 오가는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활짝 핀 무궁화는 그와 같은 현대 풍조와는 달리 무엇인지 서정과 아름다움을 호소한다.

염수 염수에 찌든 삼각형 백기 白旗, 홍기 紅旗를 나부끼며 들어오는 똑딱선 정경은 꿈속에서 보는 아름다운 회화 繪畵 같다. 선두에는 이글이글 탄 뱃사람들의 기세가 놓다.

똑딱선이라도 만선 滿船인 모양이다.

여수의 바닷물은 이름 그대로 맑고 깨끗하다.

생선도 이곳 생선이 맛이 있다고들 한다.

선창가는 서대, 황석어새끼들을 말리는 광경이 성시를 이루고 어부들은 가뭄은 아랑곳없다는 듯이 우선 고기를 말리기 위해 태양을 그리워한다. 여기저기 그 찌든 빛의 양산, 비닐 우산의 다양한 색채의 점점이 이채롭다.

서대 중에서 줄무늬가 있는 예쁜 어류가 있다. 이름을 물으니 아낙네들은 ‘가시서대요’ 하며 의미있는 미소를 입가에 띤다. 꽃각시, 풋각시, 팟각시, 각시서대 – 그리운 전라도의 방언을 오랜만에 들었다. 길게 꼬리를 잇는 전라도 방언의 여운은 뭔지 나의 여독을 풀어 주는 듯했다.

 

 

담천 曇天

금방 하늘에서 소나기가 쏟아질 것만 같은 날씨. 창문이 열려 있지 않나, 빨래가 널려 있지 않나 하고 집안 구석구석을 옛 습성대로 살펴 본다.

겨울철에 뇌성을 들은 기억은 없었던 것 같지만 옛날엔 이렇게 웅크린 겨울 날씨가 되레 포근했었다. 지각을 뚫고 솟아오르는 열기 속에 누구네 집에선가 메주 쑤는 냄새가 구수하게 스며왔던 기억도 살아있다. 그러기에 아직 음력 7월 달 같은 착각을 하게 되어 무엇인가 시간을 재촉 받는 듯 싶은 초조감에서 잠시 해방되는 맛도 있었다.

그런데 오늘의 회색 하늘은 예전과 같이 투명한 수묵 水墨 빛 하늘은 아니다. 자욱이 깔린 매연에 덮여 숨통이 막힐 듯 답답하다.

 메주콩 냄새도 사라져 버렸으니 정도 윤기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 하늘 아래 모진 목수의 국화송이가 처량하다. 병들고 메마른 국화꽃 모습이 스산하게만 보인다. 나는 이토록 아름답지 않는 자연을 불신하고 불안해 한다.

그 후로도 오랜 세월이 흐른 것 같다.

나는 왜 날씨나 계절에 병적으로 민감한 생리를 지녔을까. 저 국화 보습을 보면서도 시름시름 아픔을 겪는 것 같은 자신의 처지를 느끼는 것이다.

이렇게 어두운 날에는 그림을 그릴 수 없다. 우리 집 옆 빈터에 거창한 저택이 들어서서 태양을 막아 버린 탓이라고 핑계를 대보기도 하지만 그것은 핑계일 따름, 울적해져서 붓이 말을 듣지 않는다.

낮에는 식구가 나가고 없기 때문에 나는 노모와 함께 있으면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느닷없이,

“야이야 와 이것 잔 바아라.”

“토옴 토옴.”

어머니의 소리에 놀라 층계를 바삐 내려갔었다. 국화밭에는 중강강아지가 네 발을 올린 채로 나자빠져 입에 부글부글 거품을 피우고 있는 것이었다.

개는 순간에 훌딱 일어나더니 썩은 국화 밑으로 들어가 벌떡 나자빠진 채로 지랄병을 시작한다. 때마침 매연 구름을 찟고 우박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토옴은 흰 털이 잿빛이 되도록 흙탕물을 쓰고 후려치는 우박을 맞으며 지랄병을 계속했다.

노모와 나는 개가 지랄하는 꼴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단원 김홍도의 <상복도: 相撲圖>

서민 냄새가 물씬한 이 그림, 씨름 ‘귀경꾼’ 속에 우리 3대조 三代祖 외할아버지는 아니 계셨는지. 소위 야인 풍류객으로 평생을 풍류만 먹고 사시다가 가셨는데…..

또 당시에 갓쓴 플레이 보이 이기도 했다는데.

친가고 외가쪽이고 양반하고는 거리가 먼 모양이어서 그게 또 나로 하여금 이제 와서 조상을 들먹거리는 허전한 얼간이를 모면시켜 주는 것만도 다행함이라 하겠다. 내가 서민이 좋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그 속에 온갖 풍악 風樂이 있어 인생에 간을 맞춰 스미게 하고 예술도 피워주고 그리고 자유가 있기 때문일까.

씨름꾼이 기운 자랑해서 소 타고 뽑낸 건 말할 것도 없거니와 한바탕 씨름하고 나면 소나기를 맞은 듯 땀으로 몸과 마음이 시원해질테니 차라리 좋은 피서법이었나 보다. 그리고 시장기가 돌 것이고 구경꾼들 역시 마찬가지.

우리 고전에는 <흥부전>은 물론 타령 속에까지 ‘어서 방아 쿡쿡 찧고 점심 먹으러 가세’, 또 과객으로 변장한 이 도령 역시 춘향모에게 ‘오래간만에 온 사우 밥 좀 안 줄라요’ 등 밥 소리가 많이 나오는데 어지간히 들 시장하고 밥이 좋았던 모양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보니까 나 역시 시장끼가 돌면서 찬물에 만 식은 보리밥에 전라도 꽃게젓 생각이 간절해진다.

그림 속에 엿판을 멘 총각이 있는데, 나 어릴 때 엿을 한푼어치 사면 그 본전 주고 산 엿보다 맛보기(덤)가 그리고 맛있었는지…

엿장수치고 노래 못하는 사람 없었고, 엿판을 메고 구성진 가락 빼어 그 소리 여름 하늘 울려 퍼지면 동네 처녀 가슴 공연히 울렁대고 울타리 밑에 봉선화 붉게 희게 활짝 피고, 정말 서민의 애환이 흠뻑 담긴 그리운 시절이었다.

 

 

담배의 멋

‘춘향 아씨! 놀라지 마아요오오…. 나는…. 다른 귀신이 아니라 남원 옥사를 정두라는 귀신이요. 하소할 곳 없삽니다. 오늘 와서 하소를 하오오…. 이힛힛히히…’

머리를 헤풀고 온몸에 피칠을 한 사귀 귀신이 내일이면 죽을 춘향에게 넋두리하는 판소리를 들으면서 담배를 피워 물고 연기를 뿜는 기분은 더위를 잊게 한다. 이때 나는 담배의 미학분만 아니라 귀신의 미학 美學마저 깨닫기도 한다. 또 인간이 하찮은 욕망 때문에 저지르는 온갖 이니꼽고, 치사하고 더러움을 정화시키는 미학을 느낀다.

 뭇사람이 부지런하게 자기 일을 하면서 간간이 담배를 치워 무는 모습을 볼 적마다 인생을 즐기면서 달관할 줄 아는 그 무엇이 엿보여 좋다.

나의 경우 담배는, 그리는 과정의 삭막함과 고독함을 그것을 피우는 것으로 오히려 애절하게 씹어 보려는 재미와 보다 깊고 높은 차원을 찾아 살아보려는 사색을 위한 심사를 곁들인다. 어쩌면 담배 피우는 짓은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해오던 배냇짓을 어른이 되어 또 하는 그 배냇짓이 아닌가 생각해 보기도 한다. 그래서 담배를 피워 무는 것은 살고 있다는 것을 나 스스로 의식케 하는 하나의 거짓 없는 나의 생활 태도라고 할 수 있다.

 

 

나를 살고 싶게 하는 것

파라솔처럼 폈다갰다하는 아기방장 속에 내가 들어 있을 무렵이니까 아마도 한두 살 때의 일이 아닌가 싶다.

대청마루에 펴진 아기방장 안에 누워 있던 나는 잠에서 깨어 하늘의 흰 뭉게구름이 흐르는걸 보았다.

녹색의 아른거리는 뜰에서 빨래를 만지다가 내 곁으로 들어가 엄마가, ‘아~~ 나~~ 윽까~~’ 하였다. 푸른 하늘, 맑은 공기, 깨끗한 빨래풀 냄새, 꼬상꼬상한 흰 적삼 속에 감춰진 엄마 젖가슴, 그 꼭지에서 떨어지는 젖방울…

인간이 영원토록 원하는 생 生이 약동하는 순간이요, 행복감이요, 메마른 현세대의 삶을 갈구하는 끝없는 향수였다.

어떻게 한두 살 때 일을 그토록 정확하게 기억하느냐고 나도 나에게 묻고 싶다. 한두 살 때가 아닌지도 모르고, 또 그 기억이 내 마음 속에 살아온 환상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의식은, 그 삶의 향수는 기쁜 일도 없는데 공연히 나를 살고 싶게 한다.

첫눈이 내리는 소리를 들을 때, 공동 목욕탕 김이 자욱이 서린 유리창 무늬가 목포 인조견 木浦人造絹 을 상기시켜 줄 때, 기생 코스모스가 노랗게 필 때 그토록 살고 싶게 했다.

서울에 새 눈이 내리고, 내가 적당히 가난하고, 이 땅에 꽃이 피고, 내 마음 속에 환상이 사는 이상 나는 어떤 비극에도 지치지 않고 살고 싶어질 것이다. 나의 삶의 연장은 그림과 함께 인생의 고달픈 길동무처럼 멀리 걸어갈 것이다.

 

 

금이 간다

뿌연 하늘을 지나가는 봄바람에 라일락꽃이 하늘거린다. 그 짙은 보라빛이 먹고 싶은 생각마저 갖게 한다.

집집마다 라일락이 피어 동네가 온통 향기로 뒤덮이는데 우리집 라이락만 해걸이를 하는지 올해는 꽃이 피지 않아 뭔지 미안한 생각이 들게 한다.

라일락꽃 향기 속의 한나절….

라디오에서 ‘세레피아 아…’ 하고 울려나오자 어쩐지 전신이 노곤해지는 것 같다.

‘뚝….’

팽팽한 화판 畵板 위에 작은 날벌레가 떨어지는 소리, 나는 물감이 묻은 붓으로 벌레를 화판 위에서 건져내려고 했다.

불현듯 뚝 하는 소리는 어쩌면 나의 남은 인생에 금이 가는 소리같이 들렸다.

본래 사람이란 태어날 때 이미 보이지 않는 성냥갑만한 어떤 운명의 함 속에 들어가 태어나는 거나 아닌가, 이 함이 어떠한 함인지 자신이 전연 모르고 살다가 어떤 때에 가서 그 함이 뚝 소리를 내고 쪼개지면 그때서야 제 운명이 어떤 것인가, 어떤 것이었나를 알게 되는 것이 아닐지.

먹소 싶은 보라빛 라일락꽃과 그 향기, 거기에 세레피아의 메아리, 이때 뚝 소리를 내고 화판에 떨어지는 벌레의 신호는 이제 나의 일생의 남은 여정이 피곤할 거라는 예고를 해주는 것 같다.

어느날 저녁 그릴에서 식사를 하고 있을 때 그럴싸한 풍채의 중년 남자가 일행의 한 사람과 시비하는 걸 본 생각이 난다. 점잖게 생긴 사람이 술 때문에 외모와는 엉뚱한 추태를 보이고 있었다.

‘놔’ 하니까 못 놓겠다느니, 시비가 한창일 때 그 점잖은 분의 한 손에 꽉 쥐고 있던 커다란 노랑 봉투가 바닥에 뚝 떨어졌다. 그 봉투 속에서는 그분의 직업을 말해 주는 듯 강의용 노우트가 뛰쳐나왔다. 그리고 ‘따르르’ 소리가 나며 갓 사넣은 듯한 미원병이 한 개 구르는 걸 보았다.

나는 그렇게 밉고 상을 찌푸리게 했던 그 점잖은 사라의 추태가 어쩐지 밉지 않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분도 무엇인가 금이 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분식 扮飾

테네시 윌리엄즈 원자 <이 저주받은 땅> 이 < 우수: 雨愁>라는 제목으로 변하여 서울서 상영되고 있다.

나탈리웃의 누이동생이 된 메리 파담이 첫장면과 마지막 장면에서 콧노래를 부르며 나레이션을 엮어간다.

선량한 미친 소녀가 걸친 붉은 드레스는 갈래갈래 찢겨 있고 때묻은 머리카락부터 귀, 목, 팔까지 장난감같은 액세서리가 요란하게 시끄럽다.

그런 미친 여인을 환상적으로 말하면 멋장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어린 시절 그와 같이 시끄러운 치장을 한 늙은 광녀 狂女를 본 기억이 있기에 대조적 인상을 느꼈다.

동네사람들은 그 광녀를 홍진네라고 불렀다. 왜 그렇게 불렀는지는 모르지만 역시 선량하고 마음씨 좋은 미인 여자였다.

언제였던가, 내가 젊었을 때 뭔지 마음이 허전해서 두 개의 반지를 두 손가락에 끼었더니 어머니가 ‘너는 홍진네 같구나’ 하며 웃었다.

페션계에서도 액세서리의 필요성에다 여러가지 예술적 이유를 붙이고 있지만 내 소견으로는 그것이 인간의 자기 약점에 대한 힘없는 저항같은 것이 아닐까!

최근의 <보그>지誌를 뒤적거려 보니 홍진네를 능가하고 초월한 인공적인 광태가 유행의 첨단을 걷고 있는 듯 느껴졌다.

현대인은 옛날 사람들에 비해 그만큼 허전하고 고독한 것일까?

어쨌든 그와 같은 광기를 창조한 장본인들이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포드 아트니 하고 – 벌써 시대적 유물이 되었지만 – 그림도 마찬가지다.

나는 현대라는 인공적 광태를 외면하지 않고 소화하려고 애를 쓰면서 자기의 세계를 지키려고 한다.

그만큼 현대에서 호흡하고 살려니 힘도 든다.

그러나 거기에도 줄 말은 있다. 광기서린 분장이 자기 고독에서 오는 것이라면 그러한 유 類의 예술도 마찬가지다.

여기에 한술 더 떠서 그러한 유 類가 한국의 창작으로 잘못 알고 떠들어대는 매스컴도 안타깝다.

광기가 돌아도 자기 것, 예술의 순수성은 누가 뭐래도 지켜야 한다.

 

 

문풍지

창가에 한들한들 나부끼는 화초도 이제는 마지막 고비에 들어선 듯 호분 胡粉 을 칠한 북송화 北宋畵의 한 화폭처럼 아름답고 슬픈 빛을 발산하고 있다.

비단 꽃빛뿐만 아니라 가지나 이파리들이 저항하는 기색도 없이 고스란히 고개를 수그리고 자연의 섭리에 따르고 순환의 원리를 감수하는 모습이 유난히 아름답게 느껴진다.

그처럼 화초가 투명한 고운 빛을 아롱아롱 풍겨 주는 어느 날, 나는 정원으로 향한 문에다 문풍지를 발랐다.

겨울에 외풍을 막기 위해서 그러기도 했지만, 연탄가스의 공포를 막는다는 이유에서 아주 봉해 버렸다.

지나간 오랜 흐름을 돌이켜 볼 때, 문풍지가 주는 수많은 추억이 지금은 아름다운 동화 같은 사연이 되어 회상되어온다.

싸늘한 달이 뜨고 냉기만이 스며오는 조용한 밤보다 북풍이 휘몰아쳐 문창이 떨어질 듯 요란한 밤과 폭설이 퍼붓는 날은 오히려 기분적으로는 따뜻하고 포근한 것을 느껴왔다.

그런 속에서 조용히 숨쉬고 단잠을 자는 아이들의 얼굴을 지키며 막연한 기다림에 지치면서 외로운 감정을 원고지에다 메워보는 시간이 이상할만큼 터붓하고 행복했다. 그리고 그런 밤에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의 주인공 캐시의 유령을 생각하기도 했다. 문소리가 털커덕 하면 그와 같은 환상을 현실의 나의 처지로 돌려 사랑하는 사람이 바깥에서 부르는 줄 알고 공연히 문을 열고 나가 보는 것인데, 그때마다 고목의 라일락 가지가 바람에 시달리는 광경이 보였다.

어느 날 밤은 이런 일도 있었다.

미도파가 고열 高熱 때문에 눕게 됐다.

영원히 내가 악인이 될 수 없는 원인의 하나라고도 할 수 있는 때때로의 아이들의 질병의 과정은 그 완쾌와 함께 내 마음을 정화시켜 주는 작용을 했다. 누구 하나가 아파도 마찬가지였지만, 열기 熱氣에 헤매는 아이 앞에 나는 공수래 공수거 空手來空手去 라는 진공 속에서 기도하며 미도파의 이마에 목 언저리에 가슴에 팔다리에 땀이 솟아 주기만 기다렸다.

땀이 소고 정신을 찾아 엄마를 불러 줄 대는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했을 때의 환희와 심한 가뭄에서 단비가 퍼부어주는 반가움에도 비길 수 없을 만큼 기쁨에 찼다. 그 순간 순간의 맹세 때문에 나는 악인이 될 수 없을 것 같다.

땀을 후줄근히 흘리고 난 미도파는 기분 좋게 요 위에 앉아 나에게 말동무를 청하는 것이고 둘이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면서 미도파가 다시 잠들 때까지 나는 색종이를 오려 꽃과 새를 만들어 기쁘게 해준다.

유리창은 김이 서려 각양의 빙화 氷花 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나는 며칠 전 문풍지를 붙이던 날 쫑쫑이가 아파서 또 한번 세례 세계를 받는 가운데 다가선 겨울의 휘몰아칠 폭풍과 폭설을 연상했던 것이다.

 

고향의 음식물

고향의 맛있는 음식을 대라고 하면 우선 전라도 김치부터 소개하고 싶다.

김장 때의 배추, 무김치 등은 너무나 유명하니까 새삼스럽게 소개할 필요가 없고 이맘 때 미각을 돋구는 갓김치, 파김치, 상치동김치, 꼬들바구김치가 고향의 명물이다.

꼬들바구는 밭에나 논두렁에 야생하는 나물인데 그걸 멸치 국물에다 온갖 양념을 빚어 담궈 놓고 노르작하게 삭을 때 먹으면 삽싸름한 별미를 풍기는 반찬이다. 나는 그 맛을 본지 어언 20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그 맛을 잊지 못하고 있다.

겨울의 별미로는 파래김치가 있다.

고향은 동남서 東南西가 바다로 둘러싸여 오직 벌교 筏橋로 가는 북쪽만 육지로 연결이 되어 있는 고흥 高興 반도이므로 해산물이 많을 수밖에 없다.

파래 역시 바다에서 나오는 해초인데 그 파래에다 콩나물을 섞어서 김치를 담궈 먹는다.

김치 외에 김과 젓갈이 유명하다.

특히 게젓과 굴젓은 우리 고향의 명물이다. 게젓은 곷게젓 찔기미젓 등이 있고 여름철에 나온다. 꽃게의 모습은 작고 윤이 나는 검푸른 빛에 수놈엔 繡 실을 자르는 가위 같은 빨간 발이 달려 위엄을 보이고 있다.

겟자루에서 항아리에 옮길 땐 와삭와삭 게 군 群의 발소리들이 요란하다.

항아리를 빠져나온 놈 중엔 그 빨간 발을 시위하듯 세우고 기어가는 놈도 있다. 그때 아낙네들은 고추를 내고 옆에서 구경하고 있는 아이놈들이 물릴까봐 손을 크게 내어 젓는다.

여름날 점심때 반섞기 보리밥을 냉수에 툭툭 깨서 게젓을 먹던 추억의 에피소드가 살아난다.

나는 지금 그 일을 회상하며 고소 苦笑를 하고 있지만 까마귀만 날아가도 불러서 식사를 대접하는 미풍 美風이 있었다.

이웃에 ‘도시람댁’이라는 젊은 과부가 살고 있었다. 늘 도시람 지분거리는 버릇이 있어 그렇게 불리었던 모양이다.

어느 날 아버지가 사랑 舍廊에 계실 때 우리는 마루에서 게젓상에 반섞기 보리밥 점심을 먹고 있었다. 때마침 도시람댁이 와서 같이 밥을 먹게 되었는데 도시람댁은 빨간 게발을 씹으면서 자꾸 교교 嬌嬌한 웃음을 웃는 것이었다. 마치 암오리가 수놈을 보고 꽥꽥 소리를 내는 것처럼…

그 모습이 어린 나에겐 아주 인상 깊었던가, 두고두고 상기되는 사연의 하나가 되었다.

굴은 서쪽에서 많이 나온다.

굴젓의 국물을 간장을 달이듯 달여 여러 차례 붓는걸 되풀이하면 짙은 갈색으로 변한다. 그걸 진석화젓이라고 하는 것인데 값이 비싸서 어릴 때 보면 아버지 진지상 위에만 오를 정도였다.

어쩌다가 한번씩 먹던 진석화젓을 상치삼에 넣어 먹으면 한결 풍미 風味가 가득했다.

또 조개과에 속하는 고막이라는게 있다. 요즘에는 서울의 시장에서도 볼 수가 있지만 껍데기가 누비저고리처럼 줄이 져 있는 조개인데 그 맛은 양념을 하는 것보다 적당히 삶아서 그 자리에서 까먹는 것이 더 맛이 있다. 그런데 손톱으로 까는데 보통 기술로써는 어렵다.

어머니는 오도카니 쪼그리고 앉아 제비새끼처럼 입을 벌리고 기다리는 나에게 그걸 까서 입에 넣어 주었다.

마실 것으로는 콩나물국이 유명하다. 콩나물은 팔도강산 어디에 가도 흔한 것이지만 고향의 콩나물국은 아무것도 낳지 않는 소금으로 간을 맞출 뿐인데도 국이 식은 다음 마시면 시원하다.

동네 사람들은 이웃집에 경사가 있으면 콩나물국을 끓여서 양푼에 담아 부조하는 따뜻한 풍습이 있었다.

반찬으로서는 전라도 음식처럼 맛있는 것이 아직 없는 것 같다.

고향과는 거리가 있지만 굴비 역시 마찬가지다.

서울서 맛없는 연평 굴비를 ‘영광 굴비 사시오’ 하고 외치는 걸 보아도 알만하고 호남미 湖南米 를 경기미라고 파는 것도 서글픈 일이라고 생각한다.

 

삼촌

‘삼촌’ 하면 퍽 다정스런 어감을 풍긴다.

어린 시절 나는 자주 삼촌 방을 드나들었지만 인상적인 추억이라곤 별로 없고 모든 일이 희미하다. 다만 혼자 밥상을 받은 삼촌이 무뜽클을 씹던 모습만이 선하게 기억에 남아 있을 뿐이다.

어느 날 원인은 알 수 없었지만 아버지에게 삼촌이 야단맞는 걸 보았다.

아버지는 흥분하신 끝에 삼촌을 때리셨다. 도대체 내 동심은 어떻게 된 일인지 삼촌에게 손질을 하신 아버지 팔뚝에 매어 달려 악을 쓰고 울음을 터뜨렸다.

아버지는 일찍부터 나이 차가 많은 아우(삼촌)를 봐 줘야 했던 것이다. 어린 내가 보기에도 삼촌은 매력이 없는, 물 같은 성격에다 선량한지 좀 미련스러운지 분간할 수 없을 만큼 답답하고 비능동적이었다.

이러한 삼촌이 빚은 모든 실패가 아버지를 괴롭혔던 것이다.

 

어머니가 이웃 마을로 삼촌의 신부감 때문에 중매장이를 따라 선보라 가신 날은 몹시 쌀쌀한 동지달이었다.

꽁꽁 언 논도랑길을 휘몰아쳐오는 바람을 안으며 나도 어머니를 따라 같이 걸어갔던 일이 생각난다.

김씨네 집, 색시는 고동색 물감을 들인 명주부지에 숨뜸질을 하면서 어색하다는 듯 웃고 있었다.

색시의 얼굴은 피라밋을 거꾸로 세워놓은 듯 삼각형이었지만 내 눈에 이쁘게 보였다.

나는 그 웃는 얼굴의 눈매의 그늘을 보고 비단 갑사 무늬를 연상했다.

그러나 삼각형의 얼굴은 생선 가오리를 또 연상하게 했다.

우리 집에서 시집온 후에도 나는 아줌마가 마음에 안들 때마다 ‘가오리!’ ‘가오리!’ 하고 별명을 불러 주어 퍽 섭섭하게 해 주었다.

 

삼촌은 자기의 성격 때문에 노력은 해도 무슨 시험을 치르는 일에는 모조리 실패를 하게 되어 결국 출세와는 길이 먼 직업에 종사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작업 따라 일가 一家 를 몰고 ‘라로도’ 라는 섬에 업소 業所를 마련했다.

 

나는 여름방학 때 아버지에게 꾸중을 듣고 거길 찾아간 일이 있었다.

그 무렵에 만약 비틀즈가 등장해 있었더라면 나도 열광적인 팬이 되었을지 모른다. 그렇게 나는 폭탄을 안은 듯한 내성적인 소녀이면서 대담했다.

버스에서 내려 배를 바꿔 타고 라로도 삼촌네 집을 찾아가는데 낙조 落照를 받은 섬의 경치가 아름다웠다.

멀리 부둣가에 삼촌 같은 사람이 아기를 업고 근시안경 너머로 나를 의아스러운 태도로 바라보고 서 있었다.

아줌마는 내가 왔다고 생선국을 끓여 주었지만 눌러 담은 밥의 양이 어찌도 많은지 끼니 때마다 일종의 부담을 느꼈다.

나는 삼촌이 선물로 사 준 큰 도미 한 마리를 들고 집에 돌아왔는데, 갈고리에 꿴 채로 찰랑찰랑 흔들리는 도미의 몸무게에서 무엇인가 허전했던 내 마음은 흐뭇한 것을 느꼈었다.

오랜 세월이 흘렀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시고 암흑과 같은 경제적 시달림 속에서의 몇 해 동안 아무도 우리를 찾는 사람이 없었다.

삼촌과도 소식이 끊어진 지 20년이 가까워졌다.

오랜 전 일이지만 어느 날 아침 누추한 차림의 일행이 나를 찾아왔다.

남자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모습과 어딘지 닮았고 여자는 바싹 마른 가오리같이 생긴 일행, 드디어 삼촌 내외라는 걸 알았다. 게다가 어린 젖먹이까지 업고 있었다.

놀라기도 했지만 실은 반가웠다.

나는 처음으로 서울 구경을 온 삼촌 일행을 위해서 쇠고기 전골에다 극장, 창경원, 남산 등 촌사람이 동경하는 레퍼토리를 의무적으로 구상하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왜 자꾸 영화 <와룡 선생 상경기>의 김희갑 이를 연상했었는지 모를 일이다.

그럴수록 더욱 삼촌을 동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의무적으로 잘해 드리려고 하는 나의 호의에 삼촌은 관심이 없는 듯했다.

보다도 딴 데에 마음이 있었다는 걸 후에사 알았다.

삼촌은 한참 벼르다가 말을 꺼냈다.

‘향이’ 의 혼사일 때문에 의논하러 왔다는 것이었다. 향이는 25세가 넘은 혼기의 딸이다. 향이의 나이로 미루어 내가 소녀시절 반항심에 라로도를 찾은 것도 벌써 스물 다섯 해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신랑의 스프링 코우트도 해주어야겠고… 이부자리도…’ 하면서 구화 십만 환을 나에게 요구했다. 아줌마는 부부일체가 되어 옆에서 베이스를 넣는데 그럴싸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나는 금새 답답해지고 우울해졌다.

와룡 선생의 환영도 산산이 깨어지고 말았다. 주제에 딸을 못 여의었으면 못 여의었지 무슨 놈의 스프링 코우트냐 싶었다. 구태어 스프링 코우트를 요구하는 사위감을 고를 필요가 어디 있느냐 싶었다.

나는 무리를 해서 5만 환을 주어 삼촌 내외를 치송해 보냈다.

그 일을 잊어 버릴 만할 때 시집간줄 알았던 향이가 찾아왔다.

향이는 ‘내가 무슨 팔자로 시집을 가겠소, 거짓말이에요’ 했다. 어쨌든 삼촌이 사는 S시골과 나와의 구름다리는 세워진 셈이었다.

언제고 잊어 버릴 만 하면 초면인 사촌동생들 – 아줌마는 다산 多産 임 – 이 서로 교대로 같은 목적으로 나타나는 것이었다.

장마가 서울을 뒤덮은 최근에도 삼촌 내외는 왔다 갔다.

새롭고 거대한 요구의 슬로우건을 메고 그들은 나에게 지나친 환상적 기대를 거는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내가 라로도에 갔을 때 아이를 업은 근시의 삼촌이 석양놀을 지고 바다를 바라다보던 그 모습은 웬일인지 잊혀지질 않는다.

그 모습과 오늘의 레퍼토리와는 아무래도 연락이 되지 않으니 ‘무엇이 잘못되어서일까’ 하고도 생각해 보는 것이다.

 

묵은 편지

이 해는 윤달이 들어선지 추석이 예년에 비해 싸늘하다.

쫑쫑에게다 선물받은 잠바와 모자를 씌우고 보니 웬일인지 그 놈의 코 아래다 수염을 그려 보고 싶은 충동마저 생긴다.

미도파는 우연히 빨간 스커트에 빨간 베레, 게다가 양말, 신발 모두가 빨갛다.

나는 가족을 극장으로 몰아내고 혼자 남았다. 그리고 다락에서부터 온 집안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그대로 두어도 괜찮지만 내일이면 시골에서 돌아올 쫑쫑의 아버지 때문에도 한바탕 신을 냈다.

상자 속에 처박혀 있던 옛날의 펴지 뭉치가 나왔다. 나는 잠시 먼지 틈바구니 속에서 오래 묵은 편지를 꺼내어 보기로 했다.

쫑쫑의 아버지 것은 따로 간수해 두었기 때문에 물론 없었다. 다만 거기에 섞이어 옛날 어느 때의 쪽지가 한 장 나올 뿐이었다. 공간이 많은 쪽지에는 ‘안녕히 다녀오세요. 雪’ 하고 설자 설자에 동그라미가 사인처럼 그려져 있고 ‘안녕히 다녀왔읍니다. 素’라고 또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을 뿐인데 ‘다녀’는 눈물 자국인지 흐려서 알기 어려웠다.

벌써 십여 년이 흘러간 그 무렵 나는 ‘설야: 雪夜’, 그이는 ‘소영: 素英’, 서로 둘이서만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우연히 ‘설야’라는 다방이 생겨서 눈 오는 밤에 둘이서 같이 거길 가 보기로 했던 것이다. 그때만 해도 우리의 사랑에는 기항지를 가리키는 나침판도 없이 불행과 환희가 아지랭이처럼 가물거리고 있었다.

나는 쪽지에서 다른 편지로 옮겨 펼쳐 보기로 했다.

까마득한 옛날 내 청춘을 장식(?)해 주는 듯한 여러 군상으로부터의 편지가 공교롭게도 잔재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이국 땅에서 보낸 학창시절의 옛 친구들의 다정한 젊은 편지들.

그러나 이런 편지의 추억이 어디까지나 아름답고 담담하게 굽이쳐오는 까닭은 오로지 내가 그래도 인생을 후회하지 않고 살아온 오늘날의 작은 행복(?) 때문이 아닌가 했다. 쫑쫑의 아버지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내 인생은 한결 삭막하고 거칠었을지도 모른다.

엽서의 사연을 다시 들여다 보지 아니해도 나의 영원한 우정은 두 소녀뿐이었다. 둘이가 다 화학생 畵學生 인데다 성분은 다르지만 외면은 화려하고 내면은 쓸쓸한 원색계통 原色系統의 여자들이었다. 원색쪽은 거짓이 없고 정열적이기에 대게 속된 기준으로는 불행하다고 할 수 있으나 경우에 따라서는 보람 있는 생활을 한다.

두 소녀 가운데 나와 같이 있던 한 소녀는 어렸을 때 소아마비로 한쪽 다리를 유독 가느다랗게 끌고 다녔는데, 그 성격적인 매력으로 나를 끌었지만 그는 내가 어디가 좋아서 친했는지 궁금하였다. 그녀의 편지는 사연마다 귀국 중인 나에게 쓸쓸하니 빨리 돌아와 달라는 것인데, 지금 새삼스럽게 나를 센티멘털하게 만들어 주고 있는 것이다.

또 한 소녀는 멀리 요꼬스까 에서 통학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화가에게 나와 함께 지도를 받으러 다니며 친해졌다. 그 선생님은 이방인인 나에게 더 희망과 기대를 가진 모양이었다.

어느 일요일 우리는 과일 바구니를 들고 비바람을 맞으며 선생님 댁을 찾아갔다. 미리부터 옷이 함빡 젖어 형편없는 모습들이었다. 그 선생님 댁에 들어선 우리는 제각기 색다른 유까다로 갈아입고 나란히 덜덜 떨며 선생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던 추억도 새롭다.

그 두 소녀는 누구인가 사랑하기 시작했다는 편지 이후 오늘날까지 20년이 가깝도록 소식조차 모른다.

지금쯤 그 원색족은 그림을 벌써 그만두고 좋은 어머니가 되어 있는지, 그렇지 않으면 세상을 떠나 버렸는지 알 길조차 없다.

그러고 보면 그때 그때 인간의 필적처럼 영원하고 신비로운 건 없나 보다.

편지 뭉치를 다시 다락에 넣고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 보니 가을 하늘 높이 제멋대로 활개를 펼친 구름들이 마치 어린아이들이 희망도 希望圖 를 그리고 있는 것 같았다.

 

고향의 비

‘옥자가 왔다고?’

‘옥자가…’

6월도 저물어가는 산밑의 조그마한 마을, 성주동, 아담한 전원에 산의 그림자가 덮이는 시각이다.

소를 몰고 돌아오는 마을 사나이들 입에서, 혹은 아낙네의 입에서 ‘옥자가?’ 하는 느리면서 선량한 템포가 산림으로 번져가고 송아지 울음소리와 어떤 하모니를 이루어 흐른다. 20년이 흐른 지금 내가 비로소 성주동을 찾아 돌아왔다는 소문이 그들 마을사람들에게는 적이 신기했던 모양이다.

20년 전 외가집이 쩡쩡 울리게 살았다는 전설 같은 얘기 속에서 자란 어린 내가 그 동안 어떻게 자라서 변했나 하는 호기심과 그 옛날 제각기 누리고 살았던 빈한 貧寒한 추억의 실마리를 풀어 보려는 마음이 뜻밖에 바람같이 찾아온 나 때문에 그들의 가슴에 안긴 모양이다.

내가 이승에 태어나 첫눈에 아롱아롱 곱게 비추어 주선 홍매나무를 찾았으나 지금은 보이지 않고 뒤켠 밤나무 숲은 추억도 거짓말 같이 딴 사람의 손에 넘어간지가 오래라 한다. 무수히 떨어진 밤송이를 줍고 이웃집 조숙한 봉순이와 놀았건만 봉순이도 어디로 가 사는지 알 길조차 없다. 다만 남아있는 거라곤 얼마 후 외조부가 조용히 묻히실 선산 先山이 마을 밭들에 둘러싸인 집 건너편에 섬처럼 우뚝 솟아 있을 뿐.

한층 날카롭게 낚시바늘처럼 오그라든 매부리코의 과부 외숙모를 위시해서 그 자손들의 모습은 웬일인지 동화에 나오는 마귀할멈과 그 종들을 방불케 했다.

특히 외숙모가 오묵 吳墨을 칠한 듯한, 동백기름 냄새가 칙칙한 머리를 풀어 제치고 자녀들과 밥상을 받는 광경은 더욱 나에게 그러한 생각을 일으켜 주었으면 긴 손가락으로 고너리 젓갈을 뜯어 엄지손가락을 빨아 넘길 때도 그러했다.

아무튼 가난한 집에 웬 끼니는 그리도 자주 분주하게 돌아오는지 모른다.

아우와 나는 병풍 너머로 흰 홑이불에 둘러 씌워 안치되어 있는 외조부의 시체를 보며,

‘하르바니, 하르바니…’

하고 울었었다.

어떤 영혼의 나비 한 마리도 날아와 안길 것 같지도 않은 허망하고 찬 무기물 無機物로 화해 버린 외조부의 시체는 측은하게 누워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흔히들 인간은 죽은 다음 일을 생각하고 ‘먼저 간다’, ‘저승에서 만나자’는 말을 남긴다. 육체는 비록 멸망하더라도 저승을 나는 또 하나의 생명을 보유하리라는 희망을 갖고 이승과 저승을 연결하는 구름다리를 믿고 있는 듯하다.

나 자신 어렸을 때 나를 사랑해 준 육친이 죽으면 그 혼이 언제나 곁에서 나를 지켜 주고 내가 불행해지면 행복으로 이끌어 주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나는 화석 같은 외조부의 시체 앞에서 그러한 생각이나 믿음이 허무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간은 평소에 생명이라는걸 의식하려 들지 않는다. 그러나 병을 앓고 무엇인지 위기에 처함으로 해서 죽음을 생각하게 되고 새삼스럽게 생명의 존재를 의식하고 염려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경우 외조부의 죽음도 가엾고 슬프기만 할 뿐, 허탈된 기분에서 어느 커다란 의식이 남아 있다는, 그걸 치러야 되겠다는 부담만을 느끼게 했다.

그러나 살아 있는 동안에도 인간이 사랑에 빠져 있을 때는 문제가 다르다. 남녀의 사랑은 대개 비련이나 혹은 사련 邪戀에 빠질 경우가 많기 때문에 도인(?)들은 그 사랑 가체를 악마시하는 것이다.

죽은 한 사람을 사랑하는 동안에는 이승에서도 영감 靈感에서 사는 수가 있다.

한 밤중에 누워서 발소리가 들려 그리운 사람이 찾아오나 하고 귀를 기울이면 과연 사랑하는 사람이 우연히 나타나 주는 수가 있으니까, 그러니 영매 靈媒의 세계란 오직 한줄기 사모하는 정신에 살고 있는 것인지 모르고, 사랑이란 가장 인간적인 것이고 그렇게 때문에 인간 세계는 신 神보다 악마에게 더 친근감을 갖게 되는 것인지 모른다.

생각할수록 하르바니가 살아 계실 때 나를 유달리 귀여워해 주셨다는 건 고사하고라도 그 생애에 있어서 말년 末年이 불행했기에 가엾기 그지없다.

하르바니는 아들들이 있었지만 재취 再娶로 들어와 나의 어머니를 낳아 주신 외할머니와 함께 30년 전 시골 관리로 계신 나의 아버지, 즉 사위를 따라 성주동을 떠나셨기 때문에 어머니가 외조부를 모신 것이 된다.

아버지가 퍽 오래 전부터 경제적으로 몰락하시지만 않았더라도 하르바니는 구접스럽게 성주동까지 와서 돌아가시지 않았을 것이다.

어느 여름방학 일본에서 내가 돌아왔을 때만 해도 하르바니는 반신불수였지만 정신은 초롱초롱 맑았다.

그러나 이따금 비구름이 산허리를 휘어가는 양 머리가 몽롱한 데다 산사 山寺에서 땡땡이중이 숨가쁘게 목탁을 두드리는 괴괴 怪怪한 울림 같은 것이 하르바니의 마음을 때로는 불안과 공포적인 환상으로, 때로는 조용한 안도감으로 이끌어주는, 지금 말하자면 노이로제 기세 氣勢에 걸려 있었다.

내가 집으로 돌아오자 외할머니의 말씀이 며칠 전 하르바니가 ‘휴유’ 한숨을 내쉬고,

‘옥자가 애를 뱄다니…’

하면서 꿈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더란 것이었다.

멀리 일본으로 유학간 나에 대한 그러한 환상이 하르바니를 괴롭히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는 하르바니한테서 남국적 풍토의 여러 가지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중국의 고대소설 이야기부터 남도잡가의 애상 哀傷에 이르기까지… 그러나 그 섬세한 감각과 정열적으로 이루어진 태반 胎盤이 지금의 나와 같이 외로움을 타는 인간성을 만들게 했던 모양이다. 그러한 회상에 잠긴 채 나는 하르바니를 부르며 울었다.

 

상여가 나가는 날은 장마가 덜 개어 비가 오락가락 뿌리기 시작했다. 상여 뒤에는 그날의 주역인 하르바니의 아들과 며느리들 그리고 그 딸인 어머니가 노란 상복을 감고 따르고 여러 친척들로 보이는 박씨네 문중 사람들이 상건 喪巾을 쓰고 따랐다. 산에 가기 전 노전 路奠 을 지낼 때였다. 비는 본격적으로 주룩주룩 내리기 시작했다. 조기 弔旗와 상인들의 의복이 후줄근히 젖고 울긋불긋 원시적인 빛깔의 조화 造花로 꾸며진 상여는 비에 짓눌린 데다 아름다운 과육 果肉과 원색의 꽃들이 어떤 냉혹한 손에 뭉크러진 물체처럼 이상하도록 쌕쌕한 빛을 발산한다.

차일 아래 술상이 벌어지며 제사 제사가 시작되자,

‘아이 아이’

하는 절음 折音의 곡소리와 함께 여인네들의 높은 울음소리가 원색의 꽃뭉치와 노란 벌레들이 움직이는 추상회화 抽象繪畵나 모던 발레 같은 것을 연상케 했고 또 마치 맹꽁이 타령을 듣는 듯도 하며 전자음악 같은 느낌도 들었다.

바로 그때 어디선가,

‘히 흐흐 흑….’

흐느끼는 듯한 웃음소리가 그 요란한 분위기에 더 액센트를 강조한다. 육촌 아줌마뻘 되는 도시람댁 웃음소리다. 도시람댁을 내가 처음 본 기억은 산밑 성주동에서 읍내로 이사하게 되어 하르바니의 손목을 잡고 아장아장 따라온 때였다. 시냇가 다리 밑에서 그 아줌마는 꽃자주 저고리에 검은 치마를 걸치고 돌 위에 앉아 빨래를 하고 있었다.

‘옥 자 야…’

아줌마는 냉정하게 내 이름을 길게 빼서 멀리 들리도록 불러 주었다. 어린 눈에도 아직 젊은 아줌마가 유난히 주름살이 많고 예쁘지 않았다. 그렇지만 가난하고 아이도 못 낳고 불행한 여상 女像 을 지녔음에도 아줌마는 쾌활한 성격을 가진 잘 웃는 여자였다.

‘이 흐 흐 흐…’

‘아이고오, 흐흐흠…’

‘아 핫핫핫…’

참다 못해 나온 웃음소리들은 잠시 동안에 점점 확대되어 곡소리인지 웃음소리인지 분간할 수 없는 요란한 가운데,

‘예끼? 순, 들… 쯔쯔쯔’

사뭇 경멸하고 나무라는 분개에 찬 소리와 혀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또 웃음소리가…

그건 다른 소리가 아니었다.

제각기 우스꽝스럽게 생긴 박씨네 사나이들이 둘러쓴 상건이 비에 쪼그라져 그 생김생김에 알맞게 기묘한 모습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중에서도 하르바니의 조카뻘 되는 송자에 아배의 넓직한 얼굴 모습이 가장 웃음을 끌었던 것 같다. 송자네 아배는 집안의 어른이랍시고 ‘예끼, 순, 들’을 연상 퍼부었다. 그런 속에서 아까부터 내가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건 단 한 사람 양복차림에 곱다란 얼굴을 지닌 사돈에 청년이었다. 그는 진작부터 자칭 미남이라는 자부 때문인지 젊은 나를 가끔 흘끔흘끔 쳐다보더니 웃음바다가 물결치는 걸 기회라는 듯 또 나를 대담하게 쳐다보는 것이다. 그리고 둔한 그는 아직도 웃음소리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자신이 둘러쓴 홀랑 넘어간 상건을 모르고 눈을 굴리고 있었다.

끝없이 서글프기만 한 추억의 성주동에서의 일, 그 비.

그 후 내 이마에 주름이 잡히기 시작한 지금, 나는 거기를 모르고 하르바니의 무덤을 찾지 못하고 있다.

그 순박한 마을도 저절로 아프레 풍조에 젖었을지도 모르고 지금쯤은 나일론천과 코카콜라가 판을 치고, 어느 구석진 찻집에선 ‘대전 불루스’나 ‘네버 온 선데이’가 흐르고 있는지 모른다. 이와 같은 변천과 흐름 속에 십 수 년 전에 땅에 묻힌 박 참봉의 일도 마을 사람들 기억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그때 내리던 고향의 비가 건너편 산마루를 덮고 부시시 내리기 시작한다. 이따금 비치는 광선이 찬란한 은빛을 풍기는데 은실같이 가느다란 빗줄기지만 그것은 멀리 태고 太古의 회상을 이어오는 것 같기도 하고 이어가는 것 같기도 하다.

 

기념사진

학교의 일, 그림 그리는 일, 집안일들이 삼원색의 태극선 무늬처럼 얽혀 소용돌이치며 역겨운 시간이 흘렀다.

그 생활은 그대로 단조롭지 않다는 말이고 그림 그리는 동안은 끝없는 꿈을 펼치기도 하니 더욱 변화무쌍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소한 기쁨이나 슬픔, 그리고 노여움이 깃을 펴고 내 가슴에 앉으려고 해도 거센 삼원색의 소용돌이에 말려 거품처럼 사라져 버린다.

지난날의 일들을 돌아볼 때면 그대로 지금의 환경은 다행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나는 바쁘게 살면서 오직 그림만을 그릴 수 있는 생활을 꿈꾸어온 것이 아니냐고 새삼스럽게 느껴 본다. 나는 부자가 되기를 원했던 것도 아니다. 다만 그림을 계속해서 그릴 수 있는 세계로 뚫고 가고 싶었던 것이 나의 참된 꿈이요 운명이라는걸 지금 알아차린 것 같다. 그러나 그 일이 결코 순조로운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었다는 것도 동시에 느끼게 된 것이다.

그런 생각에 묻힐 때 나는 잠시 그것을 젖혀놓고 커피를 마신다.

‘엄마, 이것 봐…’

퉁퉁퉁 층계를 올라온 쫑쫑히가 엽서 같은 종이쪽지를 홀랑 내 앞에 던지고 간다.

쫑쫑이는 이따금 나를 놀리려고 소리 없이 층계를 올라와서 2층에 도사리고 앉아 있는 나에게,

‘왁, 하하하하….’

하고는 웃는다. 그리고 무슨 일이 생기면 신나게 올라와서 보고하기를 좋아한다.

미도파도 학교에서 돌아올 때마다 으레 찔레의 새순같이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엄마 있니?’

하고 들어오는걸 2층에서 들을 수 있다. 그러면 나는 그게 귀여워서 후다닥 층계를 내려가 미도파의 얼굴을 꼭 감싸쥐고,

‘엄마가 그리도 좋으냐?’

하고 묻는 것이다.

엽서가 아닌 종이쪽지는 사진이었다. 제각기 핸드백을 열심히 듣고 서 있는 네 여인의 사진에는 ‘영세기념 00성당’이라고 가로 흰 글자가 씌어 있다.

왼쪽엔 우리 집에 일이 생기면 잘 도우러 오는 착한 여인네가 진짜 인물보다 예쁘게 찍혀 있으나 검은 망사치마 아래 비치는 속옷이 그의 가난을 말해 주고 있는 듯했다.

그 옆에 장미의 조화가 달린 면사포를 쓴, 키가 큰 노부 老婦 나의 어머니가 바로 성모 마리아 상 像 아래 서 있고, 옆으로 어머니를 인도해준 이웃집 할머니가 서 있고 그 다음은 내가 모르는 젊은 여자가 서 있다.

기념사진 치고는 나도 옆에 있지 않고 혈육이라고는 아무도 없는 어머니 홀로 에다 친구가 몇 사람 끼었으니 외롭고, 무엇을 초월한 아름다움이 있다면 있는 그러한 인상을 풍겨준다.

발끝부터 무엇인가 더운 것이 치밀어 올라와 나는 커피를 꿀꺽꿀꺽 마셨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부터 행복하지 못했던 것 같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10년이 되었지만 어머니는 아버지를 그리워하신다거나 들먹거린 일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몇 해 전에 어느 회갑 잔치에 다녀오신 후의 일이다.

두 영감 할멈이 나란히 큰상을 받고 있는 광경이 부러웠던지 돌아오신 어머니의 표정은 몹시 우울했다. 그 후 또 데모 구경을 갔다 돌아오는 두 영감 할멈이 흡사 아기들처럼 서로 손을 맞잡고 걷는 모습을 보고 자극을 받았던지 가라앉은 표정을 하셨다.

지난해 어머니의 회갑날을 멀지 않게 두고 봄비가 연일 내리는데 나는 원인 모를 기침 때문에 자주 병원에 들락거리게 되고 수혈을 하는 등 경황이 없었다.

수원 수원에서 사는 아우의 집에서 어머니의 회갑을 모시게 되어 어머니는 한걸음 앞서 미리 회갑을 지내기 위하여 떠나시고 나와 쫑쫑이 아버지는 임박해서 출발했는데 비는 여전히 짓궂게 내렸다.

아우는 살림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고 월급장이지만 항시 내가 신경을 써왔던 큰 상을 제대로 마련되어 있었다.

그러나 타관이라 누구를 초대한 것도 아니고 아우의 친구와 노인네  몇 사람이 왔을 뿐, 지금의 이 사진과 비슷한 분위기였다.

어머니는 큰 상을 받고 우리가 차례차례로 절을 하기 시작할 때부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어머니 생각은 여러 가지가 얽혀 서글펐을 것이다. 그 중에도 마음 속으로 돌아가신 아버지를 원망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아버지에 대하여 사무치는 정을 못 이겨 서러웠을지도 모른다.

내가 일본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도 어머니는 나를 붙들고 어린아이처럼 또 울었다. 그런데 그 동안 어머니는 위장병으로 오래 고생을 하였다고 한다.

요즘에는 위장도 비교적 좋아졌고 허물어진 기둥처럼 남아 있는 치아도 홀랑 빼었다. 어머니는 치아가 없어 입술언저리가 주머니처럼 주름 잡혀 음식을 자실 때나 말이 빗나갈 때 그 선량함과 애처로움이 오히려 정다울 때가 있다.

병세의 후퇴와 의치 義齒로 어머니는 무엇인지 소생한 듯한 희망을 가진 모양 같았다.

한때 어머니가 금새 돌아가실 줄만 알고 영세를 받도록 서두르던 어머니의 친구 되는 할머니도 무엇보다 어머니의 의치와 건강을 축하해 주는 듯했다.

새벽에 잠이 깨어, 부엌에 커피를 끓이려고 들어가면 어머니 방에 불이 환히 켜 있고 어머니는 일찍 일어나서 성경책을 읽고 계신다.나는 그때마다 흐뭇한 정감에 묻히면서 가만히 주전자를 들고 방안으로 들어와 버린다.

가까운 지난날만 해도 그렇지 못했다.

그 시간에 어머니는 늘 배를 움켜쥐고 몰래 신음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쫑쫑이가 배달해온 어머니의 기념사진을 줄곧 들여다 보며 면사포를 쓴 선량한 어머니의 모습을 그립게 마음 속에 새긴다.

그리고 내가 그리는 그림에서 면사포를 쓴 마음씨를 선량하게 다듬으면서 어머니에게 언제까지고 효도할 것을 다짐하는 것이다.

 

 

제2장 엄마의 자장가

 

산을 바라보는 마음

어둠의 장막이 조용히 온 누리를 덮자 어디선가 바람이 옥양목 커튼을 열고 오래도록 갈망해왔던 비가 뚝뚝 포도 이파리를 때리며 제법 세차게 내리기 시작한다.

뜰에 핀 달리아와 봉선화, 그리고 담장 둘레를 따라 핀 일년생 화초들이 오늘밤 따라 요염한 자세를 보여 주는 것 같다.

그 동안, 다다미와 마룻장에 놓인 기름기 없는 소재 素材로 된 내 그림들이 건조해 있어 만지면 ‘셈베이’처럼 바삭바삭 소리를 내고 바스라질 것만 같고 어딘지 타는 듯한 냄새까지도 나는 것 같더니 이제는 높아가는 빗소리와 함께 윤기를 담뿍 마시는 것 같다.

멀리 높은 윗집에 솟은 안테나 줄이 반짝반짝 비에 젖어 무엇인지 슬픈 신호를 하는 양 내 마음에 비쳐온다.

그리고 비에 젖어 가로등이 여름철 호박꽃 속에 들어간 개똥불처럼 흐리다.

이사한지 얼마 안 되어서 나는 이층을 화실(?)로 꾸몄다. 화실이라고 했자 한쪽은 마룻장, 한쪽은 다다미가 깔려있는 8조 가량의 기다란 방이다.

나는 그 방에 앉아 새로 사온 악기를 조절하듯이 방과 친하기 위하여 창 밖을 바라보며 그림을 구상하고 여러 가지로 작품 하는 자세를 꾸며 보았다.

한가지 다행하게 생각되는 것은 서쪽 창 밖으로 확 터져 인왕산 仁旺山이 슬기롭게 바라다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숲이 우거진 기슭에 가느다란 줄을 긋다시피 오르막길이 있고 그 옆에 하늘색 칠을 한 조그마한 교회가 서 있다.

수요일과 일요일 새벽엔 가난한 교회라 비록 종소리는 금이 간 소리지만 그런대로 울려오는 것이 마음에 흐뭇한 주름을 잡아준다.

나는 언젠가 저 교회를 배경으로 아름다운 인생의 출발 같은 뜻으로 축일 祝日을 한번 그려 볼까 생각한다.

어렸을 때, 어느 교회에 놀러 가서 보았던 신부의 하얀 힐 굽을 덮고 날던 면사포 같은 회상을 작품으로 그려 보고도 싶은 것이다.

나는 비에 젖어 윤기가 감도는 산과 우거진 숲 사이를 기어가는 하얀 길을 바라다 보면서 부질없는 생각이지만 진작 나에게 이런 환경이 조성되었더라면 했다.

그러했다면 나는 화상 畵想 도 좀더 자유롭게 뻗어갔을 것이 아닌가 고 생각해 본다.

옛날에 여학교에서 교편을 잡기 시작한 그때, 직원실에서 그림을 그려 개인전을 열었고 납작한 집에서 아이들과 식구들의 통로로 되어 있는 마루방 바닥에 화구 畵具를 펴놓고 수작을 떨었던 것이다.

수많은 고개와 고비를 넘고 내 나이 40의 고개에 이르러 겨우 이층에 화실을 얻고는 고달픈 역경 속에 지금 나는 서글픈 행복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 눈물과 땀으로 해서 내 체내에는 수분이 말라 있는지도 모른다.

하늘 높이 무엇인가 신호를 하는 안테나 광선에 불안을 느끼는 것도 그러한 탓이겠지만 서기 瑞氣를 머금은 산의 맑은 공기는 내 몸에 윤기를 돋구어 주고 새 힘의 터전을 마련해주는 것 같다.

나는 다다미 위에다 커피 빛깔의 담요를 깔았다. 그리고 담요 위에다 여러 가지 화구를 놓고 우선 간단히 붓을 잡아 보았다.

지금 나는 지나간 날 어려운 고개를 넘기고 미래의 고개, 새 고개를 바라다보면서 정적 靜寂인 상태에 놓여 있는 것 같다.

폭과 농도 濃度와 조시적 造視的 인 면에서도…

화초밭에 날아든 뭇나비들이 어둠과 비를 피해서 어느 이파리 아래 깃을 재우고 잠을 자는지.

누군가 산 중턱에서 <나 혼자만이>를 부르고 있다. 은은한 소리가 산속으로 퍼지고 산 속으로 스며들고 있다.

여름이 오고 가을이 오고 산과 하얀 길과 교회와 나무가 흰 눈으로 덮이면 내 화실도 그때는 기름기와 윤기가 자르르 흐르고 내 건강도 좀더 좋아질 수 있다는 그런 환상을 해 본다.

아담한 이층 건물이 우뚝우뚝 솟은, 내 집이 있는 마을에 비가 내리는 밤 경치는 마치 동화의 세계 같기만 하다.

그래서인가, 그러한 세계에서 산을 바라보며 생각하는 일들은 산만한 대로 꿈보다도 아름다운 것이다.

 

 

恨 은 보라빛

동네 친척집에 경사가 나 타관에서 새색시가 온 날이면 어머니 농 속에서 남색과 적색 치마가 꺼내어져 나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일이 종종 있었다. 내가 본 어느 새색시는 단속곳 위에 남 藍치마를 먼저 두른 다음 붉은 치마를 두르고, 노랑 저고리를 맞춰 입고 어디서 빌려온 원삼 족도리를 걸고 차일 밑에서 폐백을 올렸었다. 모란 무늬가 띄엄띄엄 새겨진 갑사 갑사 치마라 남치마가 비치어 떨어져서 보면 깊은 샘 속에 깔린 듯한 신비한 보라빛으로 보였다.

지금 생각하니 무엇인지 그 빛깔이 한 恨과 인연이 있는 빛깔처럼 느껴진다.

물론 어머니의 농속에서 들려나갔다 돌아온 치마는 어머니가 아버지와 백년가약을 맺은 날 입었던 치마였다.

앞이마 위 머리가 유독 허렿게 센 팔순 가까운 어머니가 누워 계신 방으로 들어가 묻는 말이,

“엄마, 그 엄마 시집올 때 치매 말이시 남치매, 붉은 치매 있었제. 저구리는 안보이든디 노랑 저고리였고?”

“배추색 저구리에 반호장이제.”

상상만 해도 울고 싶도록 곱고 아름다운 빛깔이들이다.

지금의 어머니 목소리는 삭아 가라앉았고 내 목소리 역시 어느덧 그렇게 되어 버렸지만 어린시절 집안에 울려퍼졌던 엄마소리.

어느 초가을, 나는 아버지를 따라가다 목이 말라

“아부지, 물 묵고 자와…”

아버지는 이것 야단났다는 시늉을 하더니만 주위를 휘이휘이 훑어보고, ‘옳지’ 하는 표정으로 물외밭에 달려가 노오랗게 센 씨오이를 싸서 톡칵 부질러 주면서

“아나, 이 국물을 빨아 묵어라.”

목을 축여주었다.

내가 자라지 우리집은 몰락했고 해방이다, 6.25다, 또 나의 불행한 결혼에 이어 여동생의 죽음, 그 불운의 소용돌이에 말려 시련을 받고 있을 때 아버지는 약도 제대로 쓰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셨다.

나를 따뜻하게 감싸 주고 보호해 주었던 혈육들이 하나둘 세상을 뜨고 지금은 어머니와 동생이 있을 뿐이다.

한 恨이란…. 깊은 우물 속에 깔린 듯한 신비한 보라색, 파아란 담배 연기가 흩어지는 분위기, 홍두깨에서 돌돌 풀려 나온 빛깔, 다듬이 방망이 소리, 신경질이 섞여 화사하게 울려퍼진 목소리, 홍타령 곡조, 이제는 삭아 가라앉은 소리, 무턱대고 야산을 걸어 헤치느라 풀밟는 소리, 그 빛깔과 소리에서 어슴푸레 한을 느끼지만 한이 무엇인지, 좋은 것인지 슬픈 것인지 나는 아직 모른다. 나에게서 사라진 그들의 영혼들은 어디로 갔고 내 영혼은 어디에서 와서 한평생 살다 죽으면 어디로 갈 것인지…. 

 

 

자살환상

‘자살을 하고 싶을 때가 있다’ – 0

‘우리 아버지는 좋은 사람이었다’ – 0

‘집안에서 누가 나를 괴롭히는 자가 있다’ – ?

나에게 주어진 장황한 3백 80항목의 인성검사지에 긍정하는 0를 표시해 가다가 열일곱 번째의 문항에서는 잠시 망설이게 된다.

연야 連夜의 불면증에 시달리다가 끝내는 가위눌리기까지 했고 날이 새면 그래도 일밖에 없다는 신념으로 흡사 여수 女囚가 수를 놓듯 으깬 물감을 화판에다 문질렀다.

 

불현듯 함박꽃이 나타나 치마폭 같은 검은 꽃자락으로 달콤하게 이리 오라고 손짓하며 자살 권유를 하는 듯하다. 죽음은 아름답고 인생 마지막의 쾌락이라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찰나

“쏘지 말라….”

중세기 상의 喪衣를 휘감은 마상 馬上의 여장부의 고함이 총성을 멈추게 하고, 아들을 되찾기 위해 병정들을 동원했던 어머니는 아들을 잃어도 다치게 할 수는 없었다. 몽유병을 앓는 성주 城主이기도 한 아들이 집시 추장딸 싱고아라를 따라 어머니도 성 城도 버리고 집시 대열에 기어가는 장면이다.

“우리 아버지는 좋은 사람이었다” – 무엇을 갖고 아버지를 좋다 그르다고 해야 하는지, 타계하신 아버지를 불쌍타는 생각은 했지만 한번도 보고 싶지는 않았다. 생존시의 아버지를 나는 미워했다. 노상 남들도 자기 같은 줄 알고 믿었다가 속고 실패한 위대한 피해자였기 때문에 딸린 식솔들은 불행했다. 그러나 서슴없이 좋은 사람이었다고 0 표를 그리고 나니까 눈물이 구름같이 피어오른다.

열일곱 번째 항목에 이르러 나는 커피, 니코틴이 치석 齒石처럼 끼여 가늘어진 식도 식도에 거듭 갈색 액체를 들이켜면서 연기를 뿜어냈다.

샅샅이 뒤진다면 우리 아버지를 닮은 사람이 분명히 한 사람쯤 있을 것도 같은데 어쩌면 그건 나 자신인지도 모른다는, 이를테면 이 집의 여가장 女家長, 내가 이끄는 권솔들에게서 은근히 원망을 듣고 있을지도 모르는…. 나를 괴롭히는 자는 나 스스로인 것만 같아서 ‘기다’ ‘아니다’ 어느 쪽에 긍정 표시를 해야 좋은지 망설이고 있는 것이다.

나에게 이 숙제를 안겨 준 의사선생은 안팎 생활을 절대 분리시켜야 한다고 했지만, 그러니까 환상과 현실의 분리가 정신건강에 좋다는 것이었지만 아버지를 닮아 나는 연기 演技 가 서투르다. 오로지 나이를 먹은 공으로 세파를 간신히 헤쳐 넘어가고 있다고나 할까.

가난하게 살 때 ‘춘희’를 돌봐 준 백작같은 남자나 영화 <모로코>에서 선전수전 겪는 동안 젓갈같이 폭 삭아버린 무희 舞姬 말리네 디트리히를 끝까지 사랑으로 감싸 주던 품위있고 오만하지 않았던 중년 부호 신사 아돌프 멘주 같은 사람을 만나고 싶었었다. 그건 물론 나의 환상 부분에 속하는 것이었고, 그 비현실적인 환상이 초로 初老도 고비를 넘어 버린 나에게 속삭이듯 달콤하게 오라고 손짓하는 검은 함박꽃의 유혹으로 변장해서 솟아오르는 것일까. 또 그래야만 이 그림을 그리고 살 수 있는 것일까. 아니면 원을 풀지 못하고 일찍 죽은 나와 가까운 어느 망령이 나를 그리워하는 것일까.

‘아모오레…’

화장품 광고라기 앞서 영화 <형사>의 주제가를 상기시켜주는 젊은 여자 목소리가 전파를 타고 귓전에 들려왔다. 기분이 참 좋다.

마가레트가 하늘거리는 초원을 긴 머리를 휘날리며 소녀가 달려오고 있는 풍경이 눈에 선하게 어른거리고 몇 곱이나 심신이 젊어진 것 같아 거울을 들여다 본다.

‘아 모 레 —‘

머언 과거에서 들려오는 소리, 파릇파릇 봄이 오는 소리, 어여쁜 미래의 소녀가 외치는 소리, 날 살리려고 ‘쏘지 말라’는 커다란 어머니의 소리를 듣고 나는 행복한 여인상을 초원을 배경으로 그려보소 싶은 충동을 가슴 뿌듯이 안아 본다.

편지 몇 무더기 속에 국제우편이 한 장 끼어 있다.

장녀 長女 에게서였다. 지난해 그를 멀리 보내놓고 편지가 올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렸던 나다.

그녀 편지는 언제나 표범이 두 마리씩 그려진 카드같은 종이에 사연이 얽혀져 있었다. 이번에도 역시 표범이 그려져 있다. 황량한 광야를 흐트러진 머리에 맨발인 아라비아 공주가 표범을 몰고 가는 처참한 그림이었다.

가슴이 아프다. 나 젊었던 시절에 살기 위해 몸부림으로 뱀을 주제로 한 그림을 그렸지만 그때의 심경을 돌이켜 상기해 볼 때 딸아이의 마음은 나밖에 모를 것 같기만 하다.

징그럽고 무서운 뱀을 그림으로써 생을 갈구했고, 그 속엔 저항과 뜨거운 열기가 공존하는 저력이 심리의 저변에 깔려 있었다.

표범도 마찬가지다. 분수를 넘지 않게 보다 충족되리라는 미래를 보고 좋지 않은 여건에서 몸부림치는 그녀의 사정은 사연을 읽지 않아도 눈에 훤할 뿐이다.

살고 보자는 뜻이 얼마나 아름답고 힘겨운 일인가.

그런데 나는 왜 때때로 자살을 환상하는 것인가. 그랬다고 전파에서 새어나온 ‘아모레–‘ 세상 모든 사람이 흘려 버리고 마는 그 하찮은 ‘아모레’ 를 부르는 소리에 또 끝없는 희망의 나래를 펴고 살고 싶어하는지 모르겠다.

 

 

고독의 날개

심 봉사 심 학규는 ‘청’이가 불쌍하고 그리워 지난날 딸과 함께 놀던 망석대에 올라 보이지 않는 눈으로 싱그러운 녹음 방초와 첩첩한 산을 보며 통곡을 했다.

자연이 무성할수록 인간의 마음은 슬퍼지는 것일까.

나 역시 겹벚꽃이 방울방울 피기 시작하는 계절이 오면 심학규 못잖게 서러워지고 괜스레 짙은 우수의 올가미에 몸부림치는지.

올해도 예외없이 계절 알레르기로 아픈 나의 상처를, 흡사 선녀가 머큐롬을 발라 주듯 어루만져 주는 손길이 있었다.

하나는 외화 外畵 <속 대부: 續 代父>였고  또 하나는 세종문화회관 전시장의 ‘프랑스 후기인상파전’에 걸린 오딜롱 르동의 <날개 달린 사나이>라는 한 점의 소품이었다.

고독에 지친 사나이는 홀로 광명을 찾아 날고 싶은 몸부림에 헤매고 있었다.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한정된 인생여로에서 끝없는 발전에의 욕망 때문에 죽음을 망각하기도 하는 인간, 그것이 인생인지도 모르겠다.

사회와 가정에서의 고독 속에서 이해와 사랑으로 감싸 줄 사람이 없을 때 의지가 강한 사람일수록 자학하거나 이상향에 대한 바람이 강해져 신화 신화를 찾게 되고 뭇 괴기신 怪奇神 들과 대화하고 매력을 느끼게 되는가 보다.

르동의 초기 일련의 작품들, <날개 달린 사나이>를 위시해서 <일목거인 一目巨人> <아폴로의 전차> <천마 天馬>와 <칠두사 七頭蛇> 그리고 역시 날개가 달린 사나이를 그린 <스핑크스> 등에서 그 시절의 그의 상황과 심정을 너무나 잘 알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자화상 앞에 예수의 출현을 그린 기도하는 분위기의 작품은 환상적 작품의 일면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중기 中期까지 무척 고독했던 모양인지 이 시기의 그림을 보면 하나같이 악몽의 매력이라고 할까, 세계의 불가사의와 환영, 생명의 신비와 그 발아 發芽를 흡사 에드가 알랜 포우의 소설같은 괴기성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르동의 괴기성과 전육적 표현은 당시 파리 화단에서 냉시와 묵살밖에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던 르동은 40세 되던 해, 따뜻한 산 여신 女神을 만나 결혼하고 나서 비로소 날개가 필요없게 되고 스핑크스난 괴기신에게서 해방되었지만, 오히려 그 괴기성이 밑거름이 되어 몽환적이고 요요 妖妖 한 이향 異香이 가득한 꽃들, 아네모네, 라일락, 팬지, 미모사, 아스파라거스, 안개꽃 그리고 화병에 담긴 그 하이칼라 꽃들이 어두운 공간 속에 별처럼 태양처럼 반짝거리는 그림들이 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반 고호, 고갱 등 개성이 강한 화가들과 나란히 후기인상파 대열에 속해 있는 르동은 누구도 갖지 못한 그만의 세계 속에 묻혀 있었다.

파리 중심가 개선문이 있는 상젤리제에서 꽁꾸르 광장 가까이 걸어 내려가면 오른쪽 플라타너와 마로에니에가 우거진 도시의 숲속에 쁘띠 팔레 미술관이 있고 그곳 2층에 르동 만년의 꽃그림들이 많이 걸려 있다.

현대에도 눈에 번쩍 뜨이는 호화롭고 아름다운 꽃그림이 많이 있기는 하지만 르동의 작품에서처럼 섬뜩한 감동을 주는 몽환적 夢幻的인 요기성 妖氣性이나 영혼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화가의 일생이란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젊은 시절에는 가정과 인간에의 애정이 캔버스에 물감을 문지르는 고통과 황홀감과 공존하다가도, 깊이 외길로 빠져들다 보면 가정도 사랑도 혈육마저도 떨쳐버리게 되고 고독과 정면으로 마주보며 싸우게 되는 한평생이다. 또한 세월이 흘러 나이를 더하게 되면 새삼스럽게 만능 萬能의 괴기신이나 스핑크스, 자기를 위해 나타나신 듯한 예수를 원해 보지만 르동의 몽환적 매력이 불러일으키는 감동이 서린 그런 그림은 좀처럼 볼 수 없게 된다.

나 역시 쑥스러운 얘기지만 젊은 시절부터 건강한 탓으로 보통사람들처럼 결혼도 하고 사랑도 하며 덧없는 곡절도 겪으면서 인생이 피곤하고 고독해 50이 넘은 나이로 악몽에 시달리고 가위에 눌려 이불 속에서 뛰쳐나온 적이 한두 번이 아니지만, 그 괴이스러운 몽상을 화판에 옮겨 보려는 용기는 있어도 그림이 잘 되지 않는다.

르동은 내가 세상에 태어나기 8년 전에 고령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나는 지금 50이 넘은 나이로 그가 초기에 겪었던 그러한 고통속에 잠겨 역시 등위에 날갯죽지를 달고 꿈과 이상을 찾아 먼 하늘로 날아가고 싶어하는 것이다.

 

아버지와 고독

날씨가 으스스해지는 저녁 나절, 언제나 마찬가지로 전기도 가고 촛불을 켜 놓고 나는 뭔가 좀 생각하고 싶어서 홀로 앉아 있었다.

저녁을 먹고 골목길에서 한바탕 뛰고 돌아온 일곱 살 짜리 딸 아이가 내 곁으로 다가오더니 (이마에 건강한 땀이 망울망울 한 채) 내 목에 감겨 있는 마후라를 스르르 풀어서 엉뚱하게 제가 목에 감고 한 끝을 머리에 써 본다.

그 무심코 하는 딸 아이의 하는 짓이 문득 외할아버지, 그러니까 아버지 생각을 하게 하였다.

아버지께서는 그야말로 무골호인이어서 그저 평생을 손해만 보시다가 돌아가신 것 같다. 나는 그런 아버지를 늘 원망했고 미워했던 것이다. 그러나 요즈음에 와서 이따금 느껴지는 것은 아버지는 나에게 묘한 마음의 그림자를 심어 주시고 가신 것같이 느껴진다. 그 하나는 내가 어렸을 때, 아버지께서 카아키 빛깔의 양복을 새로 해 입으시고 ‘어떠냐?’ 고 어머니한테 묻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물어 보시던 일을 생각해보면 지금 내 생각으로는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그 무슨 고독(?)을 느끼고 계셨던 것 같다.

또 어느 날 뜰에 영산홍이 활짝 피어 있는데 홀로 양팔을 뒷짐을 지고 그 꽃가지 사이를 어슬렁어슬렁 거니시면서 콧노래를, 그것도 한이 많은 남도 노랫가락을 읊으시던 것이 어쩌면 아버지는 그때 고독에 잠기시어 외로와했던 것이 아닌가 하고 지금 생각해 본다.

차차 나이가 들고 세상 물정을 알게 될 때, 아버지는 경제적으로 몰락하셨고 그래서 아버지는 더욱 그의 마음은 외로움으로 어두워졌을 것이고, 그것을 보아온 나, 또한 그러한 기분을 이해하게끔 직업 (그림, 화가)에서 얻은 감상적인 예민성이 나도 부지불식간에 조성되어 왔다.

내가 첫 결혼에서 첫딸을 낳고, 그 애가 두 살 쯤 됐던 해인가 보다. 그 시절에 우리 집안은 물질적이거나 정신적인 여유가 도무지 없었다. 그렇기에 겨울날의 모진 북풍과 함께 우리 집에는 우울과 빈곤과 애수가 한꺼번에 휘몰아 들어왔었다.

이러한 비애의 바람을 피하기 위하여 나는 딸 아이에게 푸른 빛깔의 보자기를 씌워 줬더니 그때, 아버지는 아이를 안고 ‘핫하하…. 카츄사로구나’ 하시고 차디찬 웃음을 함빡 털어 놓으셨다.

옳다, 이럴 때나마 웃어 보자 하는 식으로 카츄샤의 생부 생부 톨스토이가 그린 위대한 인간성이나 사상성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이야기지만 아버지는 젊었을 때 그래도 신파 연극의 카츄샤쯤은 보실 수 있는 마음과 돈의 여유가 있었던 것, 그만한 멋은 알고 있다는 듯이 느껴지는 애처로움을 나는 느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그렇게도 마후라 한 장의 조그마한 일이 고리를 물고 이러한 옛일을 추억케 하는 것이 역시 어느 모로는 아버지의 몰락하시던 그때의 심경과도 비슷한 것이 있는 게 아닐까?

그러고 보니 제법 나이를 먹었나 보다, 공연히 아버지와 같은 애수를 스스로 향유하려는 것을 보니…

그러나 사람은 될 수 있으면 사색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을 것 같다. 가을에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지는데도 그야말로 마이 馬耳 에 동풍격인 것보다는 비록 값싼 감상이라도 좋으니 생각에 잠겨 보면 그만큼 괴로움이라도 얻는 것이 되고 거기서 어떤 탈피와 비약이 있을 성싶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내 조상의 누구한테서인지는 모르나 고집이라는걸 물려 받은 모양이다. 게다가 아버지의 고독까지도 … 만약 아버지의 선량하고 조용한 고독을 물려 받지 않았던들 그림을 못 그리게 됐을는지도 모를 일이고 그렇지 않으면 남이 보기에 행복할 것같이 보이는 내가 왜 아버지의 고독을 새삼스레 회상하면서 쓸쓸해 할 것인가.

지금 여기까지 쓰고 보니 위에서 말한 것 같은 그 영향력이 강했던 아버지를 나는 왜 그 시절 (아버지 생존시)에는 이해는커녕 저주했었는지 모르겠다.

이것은 오늘에 와서 나의 정말 숨김없는 고백이 되리라.

 

 

엄마의 자장가

‘손 선생님, 이 메주 같이 생긴 애를 좀 봐 주세요….’

나는 홍역 끝에 쇠약해진 후닷닷을 외할머니 등에 업혀 손 소아과롤 보낼 때 이런 사연의 글을 의사에게 보냈다.

멀쩡하게 생긴 아이를 메주 같다고 겸손 이 아닌 기묘한 자학을 하게 된 것은 후천적으로 내게 싹튼 가난이 가져다 준 비굴성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이와 같은 비굴감이 공연히 쓸데없이 우쭐거리는 사람들 앞에서 그 사람들의 자존심과 우월감을 비위 맞추어 주어 내 입장과 형편을 유리하게 만들어 주는 것을 알았고, 또 이 선 善도 아니요 악 惡도 아닌 선심이 가끔 어처구니없는 희비극 喜悲劇을 자아내게 하기도 하였다.

자기 제자의 아내를 보고 선뜻 ‘사모님’ 하고 불러 놓고는 아차 싶어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을 어쩔 줄 몰라 했던 일 같은 것.

사실 메주 같다는 후닷닷은 메주 같지는 않았다. 그 애가 겨우 마루를 엉금엉금 기어 다닐 때 이웃집 아저씨가 보고 귀엽다고 10환짜리를 손에 쥐어 주면서

“애가 매력이 있어요.”

했던 것을 보아도 그렇고,

“엇치어 엇치어.”

하며 재채기를 할 때 쌍꺼풀 눈을 가물거리면 어미된 내겐 비할 바 없이 예쁘게 보였다.

가정부 등에 업혀 마당 감나무 밑에 있는 애를 보고 부지깽이로 밥솥에 검부러기를 밀어 넣으며 나는

“후닷닷 —-“

하고 놀려 보았더니 아이는 이 소리를 듣고 나를 돌아보며 입을 한없이 벌리고

“께 께 게.”

하고 좋아한다.

“후닷닷—“

“께 께 께.”

포대기 속에서 홀랑 빠져나올 듯 뛰며 좋아한다. 그게 그만 “후닷닷”이 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그런 이 후닷닷은 어려서부터 시련만 겪었다. 네 살 때 외할머니가 어느 교회의 유치원에 데리고 가서 입학시험을 보게 했는데 애들에게 교실 안을 한 바퀴 달리기를 시켰을 때 후닷닷만이 두 바퀴 돌아서 모두가 웃었고, 등록하라는 쌀 두 말이 없어서 그만 포기하고 말았다.

국민학교 1학년 때 4학년인 누이 남미장과 함께 서울 매동 국민학교로 전학하게 되었다.

안개 같은 비가 내려 교정의 라이락꽃이 한결 애처로운 태를 보이던 때

“멀리 시골에서 온 학생이예요. 오늘부터 여러분과 동무가 되는거예요. 잘 부탁해요.”

담임 선생이 이렇게 말하면서 피부가 거무잡잡하고 목이 가는 남미장의 단발머리를 쓰다듬어 주었고

“삐약삐약 병아리 노란 병아리 —-“

손가락을 꼬아 돌리면서 삐약삐약을 외치는 후닷닷의 교실 분위기는 여자 선생의 음성과 표정이 소리없이 내리는 비 때문이지 나에게 모진 텃샘을 강요하는 것같은 고독감을 일으켜 주었다. 아버지없는 남미장과 후닷닷을 나 혼자서 서울 학교에 전학시켰다는 탓 때문일까.

쫑쫑이 태어나기 전에 우리는 누상동에 작은 초가집을 마련할 수가 있었다.

5월이 오면 아카시아꽃이 피어 서정적인 향취를 풍겨 주었지만 그 초가 지붕은 때대로 나에게 화끈한 콤플렉스를 일으켜 주었기 때문에 나는 아무에게도 내 집을 알리지 않았다.

쫑쫑이 아버지가 안방에서 미도파를 얼러 주는 소리가 나면 아버지가 없는 후닷닷은 할머니 방에서 팔베개를 하고 누워서 미도파의 웃고 웅얼거리는 명랑한 소리를 들으며 혼자서 웃고 있다. 그때 그 어진 눈빛은 아무도 저주하지 않는 악을 모르는 맑고 귀여운 것이었다.

봄이 오면 나는 멀리 우이동같은 곳에서 후닷닷을 데리고 동백꽃을 스케치하기도 하고, 맑고 쓸쓸한 공기를 흠뻑 둘이서 마시기도 했다.

나는 어릴 때 시골에서 자라면서 산에 올라가 진달래, 찔구, 손쿠 같은 맛과 향기 속에 묻힌 시간을 퍽이나 즐거워했다. 그리고 그게 후일 나로 하여금 그림을 기리게 하는 소인 素因이 됐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러한 생각을 하면서 진달래도 찔구도 없는 소나무 밭에서 잎의 향기와 바람을 마음껏 후닷닷에게 마시게 했다.

경쟁 의식이 강하고 공부 잘하는 남미장이나 뒤에 태어난 미도파보다 어딘지 나의 어린시절의 모습과 행동을 닮은 후닷닷은 나뭇가지에 걸린 허호아한 먼 하늘의 달처럼 언제나 내 마음에 불안과 연민의 정으로 걸리는 것이다.

후닷닷은 그림을 곧잘 그렸지만 그림에 몸서리가 난 나는 후닷닷의 고사리같은 손이 크레파스를 쥐고 잇는 것이 오히려 저주스러워서 고의적으로 그 소질을 뭉개 버리다시피 했다.

그가 중학교 입학 시험을 보았을 때 우리 집안에서는 처음으로 불합격이라는 기록을 세워 주었다. 그러나 아귀지옥의 문지가같은 얼굴들의 소위 사친회 간부들이 돈을 세는 사나운 분위기를 들여다보며 H 중학을 보결로 입학시켜 주었다. 그 무렵 나는 돈을 마련하기 위하여 여기저기 울고 다니다시피 했는데 뜻밖에도 동네에서 거래하고 있는 연탄 가게 영감님한테 가서 사정하여 거액의 수표를 잠시 빌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게 마감 5분 전의 일이라 나는 허둥지둥 치맛자락을 끌고 달음박질쳐서 담당자 코 앞에 수표를 밀어 대었던 것이다.

후일에 알았지만 후닷닷을 구해 준 수표는 남편에게 이혼을 당하고 위자료로 받은 어느 여인의 쓰디쓴 변놀잇돈이었으니 인생이란, 돈이란 참 요지경 속이다.

그 야속한 상처가 아물기 시작한 3년 후인 요즈음 또다시 후닷닷의 고등학교 불합격 소식이 들어왔다. 어릴 때 유치원 시대부터 한 번씩은 꼭 치러야 하는 불운이 웬일인지 후닷닷한테는 좋은 시련이 것 같게만 생각된다.

2차 시험을 보이려고 나는 후닷닷을 데리고 K대학이 바라다보이는 소나무 사이를 거닐었다.

잔설이 희끗희끗 언저리에 피어 있고, 거닐기엔 발이 시리지만 소나무 잎은 이른봄 뾰족이 움트는 시금치처럼 생기가 돈다. 맑은 공기를 실컷 마셔 본다.

힘에 겨운 돈을 구해야 하고 치욕적인 대접을 받아 가며 나의 후천적인 비굴한 모습이 또다시 벌거벗고 나서야 하는데도, 나 혼자의 힘으로 후닷닷을 고등학교에 넣어야 하고 또 3년 후 대학에도 되풀이될 이 고역을 미리 각오하면서도 그 애는 밉지 않다. 그것은 후닷닷이 메주 같이 생겼고 맑은 눈에 악이 엿보이지 않아서도 아니고, 끊을 수 없는 모정 때문도 아니고, 그 애의 아버지 없는 처지가 가여워서도 아닌, 그 애 별명을 후닷닷으로 지은 그때 이미 내 마음 속에 굳어진, 나로 하여금 그림을 그리게 한 그 소인 때문인 것이다.

 

분홍꽃의 추억

화려한 슬픔

잊혀지지 않는 로크

잃어 버린 결혼식

 

 

제3장 소녀시절의 추억

소박한 한 아름의 꽃처럼

신기루같은 희망이

눈썹

계단

낙인

눈물

얼룩이

메리의 죽음

소녀시절의 추억

제2의 사춘기

추위의 낭만

딱딱이 소리

현실의 가치

감각의 형체

 

 

제4장 나와 장미

招雨

라일락

앵두꽃

우담화

相思草

무궁화

 

 

5월

 

라일락이 향기를 잃어 버린 밤이다. 장미가 부풀었던 가슴을 헤치고 이제 요염한 자세를 일으키는지 화사한 날개로 숨소리를 덮는 듯 짓눌러 오는 밤, 내 심장의 고동이 어둠 속에서 이따금 날개를 터는 십자매(十姉妹)의 동작과 더불어 호수의 파동처럼 주름을 잡는다.

고요하고 화려한 환상도 무너지고 시든 라일락의 영혼마저 증발하는 것 같은 쓸쓸한 5월의 밤이다.

이렇듯 식물성(植物性)의 생명들이 시들어 가고 또 새로운 생명을 노래도 하고…

5월의 생리(生理)는 슬픔과 환희를 한꺼번에 쏟아 놓는다. 이 밤도 가고픈 옛날의 논두렁 길에선 개구리들이 녹색의 소리로 울어대고 있을 것인데 덧없는 인생이 취한 내 가슴엔 이슬 같은 것이 괴고 있다.

5월은 인생에서 어떤 피하지 못할 인과(因果)를 지어 주는 것 같다. 지열(地熱)에 익은 포플라가 상기한 풋냄새를 피우고 태양의 직사(直射)를 받아 떨어뜨린 선명한 그림자에 바람이 깃들면 5월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도 흔들리기 마련이다. 알지 못할 5월의 회화(會話)에 귀를 기울이고 풀지 못할 인과에 마음을 태워야 한다.

나는 5월이 오면 옛날의 추억을 더듬어야 했고, 내일을 위해서 화필(畵筆)을 들어야 했다.

5월을 불러 누구나 다 아름답다고 한다. 꽃들이 그 아름다운 자태를 견주는 것도 5월이요, 신록들이 바람에 하늘거리는 것도 5월이고 보면 5월의 자연은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들은 여인들의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했는지, 그리고 눈물도 얼마나 괴이게 했는지 모른다.

옛날 젊은 시절 어느 5월에 나는 여인네들끼리 가족적으로 들놀이를 가는데 권함을 받아 바람을 쐬러 따라간 일이 있었다. 지금 같으면 소풍을 갔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 무렵 나는 인생의 시련 같은 것을 단단히 믿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어떤 인연의 줄기가 나의 운명 앞으로 뻗어왔다는 것도 알 수가 있었다. 쉽게 말하자면 나는 사랑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인네들 가운데는 인텔리 오뎅집 마담 형제 일행과 인생면에서 나와 비슷한 환경의 직업 여성인 Y양도 나처럼 ‘옵서버’ 격으로 얼굴을 내놓고 있었다.

나무 위로 무척이나 왕개미 떼가 올라가는 송림(松林)의 구릉(丘陵)이 목적지었던가 그들과 나는 거기에 올라가서 잡초가 무성한 어느 무덤 위에 앉았었다.

화제는 어느덧 막연한 사랑 이야기로부터 시작하여 나중엔 두 여인이 서로 제각기 자기가 사모한다는 것보다 상대의 이성(異性)이 자기를 사모하여 늘 전화가 걸려온다는 등 아베크 하기에 여념이 없었다는 등의 이야기에 꽃을 피우고 있었다. 이야기라기보다 자기 자랑을 하는 것으로 그들의 표정은 해당화처럼 활짝 피어 있는 것이었다. 여인들이 이야기에 꽃을 피우고 있던 상대방 주인공은 아마도 동일한 남성인 것 같았고 Y양의 것이 농도가 더 짙은 모양이었다.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뒤로 구릉을 내려와 논두렁에서 와글거리는 개구리를 수십 마리 잡아서 손수건에 싸 들었다.

그 후 그 개구리들은 나의 화재로서 희생이 되었지만 나는 지금도 그 여인네들의 대화가 잊혀지지 않고, 그때의 감정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 얘기의 주인공은 나의 애인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때 개구리에 대해서 나의 슬픔을 호소(呼訴)하고 싶지는 아니했지만 개구리들의 녹색의 울음 소리가 나의 심경을 한결 더 구슬프게 울려 주었다. 나는 어쩐지 5월이 오면 개구리의 울음 소리와 함께 마음이 설렌다.

그러나 나는 이 밤에 시든 라일락의 향기를 슬퍼만 할 수는 없다.

내일 아침이면 화사하게 피어났을 장미의 붉은 정열과 견주기 위해서 이 밤이 있게 해야 하는 것이다.

 

** 지금도 ‘필사 筆寫’ 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소쩍새

나와 장미

여름밤의 환상

한여름의 뒤안길에서

또 여름은 가고

뜸부기 우는 계절

9월

가을인가요

황후가 되어보는 가을

 

 

제5장 어차피 인생은 여행

 

자화상

나의 화실

여인 소묘

외로운 畵想

생명을 확인하는 색

고갱과 타히티

만종의 추억

어린 꿈

양지의 꿈

슬픔처럼 피어오는 아름다움

강물에 흐르는 초현실의 빛

환각의 피서

어차피 인생은 여행

나의 인생 노트

 

 

** 지금도 ‘필사 筆寫’ 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Disclaimer: 여기에 실린 글은  copyright가 된 책, 기사를 ‘발췌, 전재’를 한 것입니다. 모두 한 개인이 manual typing을 한 것이고, 의도는 절대로 저작권 침해가 아닌, fair use의 정신을 100% 살린 것입니다. 의도적으로 ‘시간적인 제한, 독자층의 제한’을 염두에 두었고, 목적은 단 한 가지 입니다. 즉 목적을 가진 소수 group (church study group, bible group, book club) 에게 share가 되었습니다. password protected가 되었는데, 만일 이것이 실패를 하면 가능한 시간 내에 시정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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