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eld of dreams, trancending time & place, autobio in progress..

 

Carlo Carretto at the Hermitage Beata Angela in Spello in the summer of 1971 – Wikipedia

 

Born

2 April 1910

Alessandria, Piedmont, Italy

Died

4 October 1988 (aged 78)

Spello

Nationality

Italian

Occupation

Little Brother of the Gospel

Known for

Catholic Author

 

까를로 까레또 지음

신상조 옮김

 

사막에서의 편지

1976년 초판

1979년 중판

 

CARLO CARRETTO

Lettere dal deserto

 

LA SCULOLA EDITRICE

 

 

 

차례

 

머리말

 

1. 큰 바위 밑에서

2. 당신의 사랑은 판단 받을 것이다.

3. 당신은 아무것도 아니다.

4. 누가 세상을 인도하는가?

5. 마음의 정화

6. 기도를 향한 길목에서

7. 기도의 시간

8. 관상기도(觀想祈禱)

9. 길에서의 관상

10. 영혼의 정화

11. 파벌주의(派閥主義)

12. 나자렛

13. 마지막 자리

14. 오, 이 길을 지나가는 자여!

15. 착한 이들의 반역

16. 불가능이 없는 하느님

17. 밤은 나의 연인

 

역자의 말

 

 

머리말

 

하느님의 부르심은 신비스러운 일이다. 그 부르심은 신앙의 어둠 속에서 들려오기 때문이다. 또한 그 목소리는 아주 가늘고 조심스러워 전적으로 내적 침묵이 요구된다. 그러나 이 지상에 사는 인간들에게 그보다 더 결정적이고, 더 마음을 뒤흔들어 놓으며, 더 믿을만하고 강력한 것은 없다.

이 부르심은 끊이지 않는다. 하느님은 언제나 우리를 부르고 계신다. 이 부르심을 듣는 때야말로 우리가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해 대답하도록 특별히 선택 받은 순간이며, 우리 인생의 비망록에 기록할 만한 순간이며,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아니 될 순간이다.

하느님의 첫 번째 부르심을 나는 열여덟 살 때 느꼈다. 바로 그때 나는 나의 소명을 결정하였다. 그 당시 나는 시골 어느 마을의 교사였는데 사순절 때 그 지방민을 위한 피정이 있었다. 나도 거기 참석하였었으나 시대의 뒤떨어진 지루한 강론이었다고 기억된다. 하여튼 그 강론은 나의 무감각과 과오를 조금도 일깨워주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죄를 고백하기 위해 늙은 신부님 앞에 무릎을 꿇었을 때 (그분의 맑고 순박한 눈길이 지금도 선하다) 나는 내 영혼의 깊은 곳에서 하느님이 지나가심을 느꼈다. 그날부터 나는 내가 그리스도인인 것을 느꼈으며 나의 인생이 바뀌었음을 알았다.

두 번째 부르심은 내가 스물 세 살 때에 있었다. 나는 결혼할 생각이었으며 내게 다른 길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나는 우연히 한 의사와 알게 되었는데 그는 나에게 교회에 대해, 또 이 세상에 살면서 교회에 봉사하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라는 얘기를 해 주었다. 그와의 이야기가 있은 후 며칠 동안 나는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모르겠다. 나는 머리 속에서 동요하는 생각의 소용돌이를 멋대로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다가 조용한 성당을 찾아가 기도를 드렸다. 그러자 전에 내가 신부님에게서 고백성사를 받았을 때 들었던 것과 같은 그 목소리가 들렸다. “너는 결혼하지 말고 너의 삶을 내게 바쳐라. 그러면 나는 영원히 너의 사랑이 될 것이다.”

나는 결혼을 포기하고 하느님께 나를 바치는 일이 어렵지 않았다. 내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변화하였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나의 생활을 그처럼 충족시켜 주신다는 데 한 젊은 아가씨에게 열중한다는 것이 내게는 오히려 이상하게 보였다.

열심히 일하고, 감격하고, 여러 사람들과 만나고, 큰 꿈을 키우는 동안 몇 년이 지나갔다. 그러나 내 안에서 아직도 정화되지 않은 채 타고 있는 난폭한 정열은 여전히 많은 과오를 범하게 하였다.

또 여러 해가 흘렀다. 그 동안 나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던 그 소리를 다시금 듣게 해 달라고 하느님께 빌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볼 때 나 자신도 놀랐다.

나는 마흔 네 살이 되었을 때에 그 소리를 다시 들었다. 그것은 나의 전 생애의 가장 엄숙한 부르심이었다. 즉 관상생활에 대한 부르심이었다. 그것은 밤이 절대적으로 우선하는 인간의 힘이 더 이상 개입할 수 없는 신앙의 가장 깊은 곳에서 들려왔다. “모든 것을 버리고 나와 함께 사막으로 가자. 나는 더 이상 너의 활동을 원치 않는다. 너의 기도를, 너의 사랑을 원한다.” 이번에도 나는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또 “예”라고 대답했다.

내가 아프리카로 떠나는 것을 보고 어떤 이들은 내가 절망의 위기를 맞아 도피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완전히 잘못 본 것이었다. 나는 낙담과 체념을 모르는 낙천적이고 희망에 넘치는 성격의 소유자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야말로 결정적인 부르심이었다. 1954년 성 까를로 축일의 저녁기도를 바치는 동안에 나는 그것을 확실히 깨달았으며 그때 나는 “예”라고 대답했던 것이다.

“나와 함께 사막으로 가자. 너의 활동보다 더 위대한 생활인 기도가 있다. 말보다 더 큰 효과가 있는 사랑이 있다.”

그래서 나는 사막으로 떠났다. <예수의 작은 형제회>의 규칙도 읽어보지 않은 채, 샤를르 드 푸꼬 가 누구인지 알지도 못한 채 그 수도원에 들어가 그의 제자가 되었다.

“여기 너의 길이 있다”고 말한 그 소리를 들은 것만으로 충분했던 것이다.

예수의 작은 형제들과 함께 사막의 길을 따르면서 이 길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알았으며, 푸꼬 신부를 따르면서 나의 길을 잘 달리고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그러나 내가 이 모든 것을 기록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

내가 수련생활을 하기 위해 엘 아비오드 시디 세이그 에 도착했을 때 나의 수련장은 20년간 사막에서 지내온 사람다운 더할 수 없이 침착한 태도로 내게 말했다. “까를로, 이제 끊어야 할 때가 되었다.”

나는 이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았다. 그래서 비록 그것이 내게 무거운 고통을 주는 일이었지만 끊어버리기로 결심하였다.

나는 가방 속에 친구들의 주소가 적혀있는 주소록을 갖고 있었다. 그 안에는 수천 개의 주소가 들어있었다. 그러나 주님은 인자하시어 우정의 기쁨을 결코 빼앗아 가지 않았으며, 내 인생의 작은 배는 참다운 사랑의 물결 위를 항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약간의 아쉬움이 있었다면 아프리카로 떠나 오면서 그들 각자에게 왜 내가 그들을 버리고 하느님의 부르심에 순명 했는지 설명할 수 없었던 점이며, 또한 비록 다른 곳에 있더라도 사도직을 하는 가운데 그들과 함께 투쟁을 계속할 것이라는 나의 뜻을 전할 수가 없었던 점이었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그 <단절>을 나는 하느님께 대한 깊은 신뢰와 용기로써 단행하였다.

나의 과거와 연결된 마지막 사슬과 같은 이 주소록을 태우기 위해 나는 피정 중의 어느 날 모래 언덕 뒤쪽으로 갔다. 사하라의 바람이 불어와 타버린 재를 날려버리자 속에서 미처 다 못 타고 남은 검게 그을린 노트의 형태가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주소록을 태우어버리는 것이 우정을 파괴함을 뜻하는 것은 아니며, 또한 누가 나에게 그것을 요구한 적도 없었다. 오히려 그와 정반대였다. 사막의 무인지경에서 나는 다른 어느 때보다도 나의 옛 친구들을 사랑하였으며 또한 그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였다. 나는 기도 속에서 그들의 모습을 다시 보았으며, 그들의 문제점과 고통을 직관하였으며, 이 직관은 그들과 떨어진 거리 때문에 더욱 날카로울 수 있었다.

그때부터 나의 친구들은 영원히 나에게 속하는 아주 순한 양떼가 되었으며, 나는 매일 그들을 기도의 샘으로 인도해야만 하였다. 나는 엘 아비오드의 아랍식 성당에 들어갔을 때나, 얼마 뒤에 푸꼬 신부님이 친히 지은 따만라셋과 아세그램의 유명한 초막에 들어갔을 때에도 내 주위에 함께 있는 그들을 생생하게 느꼈다.

기도는 나의 가장 크고 고된 일과가 되었으며, 소명을 통하여 우리의 기도 속으로  <다른 이들을 데려간다>는 말의 뜻도 이해하게 되었다.

또 몇 년이 지난 뒤 기도는 시간을 허비하는 것이 아니며, 사랑하는 자들을 돕기 위해서는 그보다 더 완전한 형태의 활동이 없다는 명백한 확신을 얻게 되었다. 나는 나의 임무대로 처신하였다고 말할 만하였던 것이다.

이미 태워버려서 주소록을 갖고 있지 않다는 문제가 있었으나 친구들과 소통하는 데는 다른 방법이 있었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었다.

나는 저녁 해가 질 무렵이면 사하라의 장엄한 경치 속에서 그들과 만난다. 1948년 9월의 잊을 수 없는 밤에 성 베드로 광장에서 우리 모두가 만났을 때처럼 지금도 모두와 만나는 것이다. 당신들도 그 일을 기억하리라 믿는다.

이곳은 등불이 필요 없을 만큼 하늘이 별빛으로 환하게 빛나고 있으며, 우리는 모래 위에 둘러앉아 지난 여러 해 동안의 흘러간 여정과 겪어온 시련을 밤새껏 얘기한다. 우리가 아직 얘기를 끝내지도 않았는데 벌써 새벽 별이 나타나 우리를 내려다 본다.

나는 이 <사막에서의 편지>에서 그러한 상황에서 말하고 싶었던 얘기들, 나 자신의 일부분이라고 분명히 느껴지는 그런 얘기들을 쓰고 싶었다.

사하라가 내게 준 가장 큰 선물이었던 기도의 주변에서 고독을 먹고 영글은 몇 가지 단상들을, 체계도 없고 별로 중요하지도 않겠지만 한 번 엮어본 것이다.

사랑하는 나의 옛 친구들이여, 내가 이 글을 쓴 것이 잘한 것인지 못한 것인지를 말해 줄 사람들은 당신들이다.

하지만 이 글이 적어도 한 가지 일에는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우리의 우정의 밑바닥에 깔린 문제를 새로운 체험에 비추어 다시 생각해 보는 데 도움이 되리라 믿는 것이다.

 

당신들의 작은 형제

까를로 까레또

 

 

1. 큰 바위 밑에서

 

태양의 하얀 궤도(軌道)가 하나의 불확실한 선을 그으면서 내 앞에 펼쳐졌다. 모래 위에 패인 대형 급유차의 바퀴자국 때문에 지프차 행들을 꽉 쥐었는데도 자꾸만 몸이 흔들렸다.

태양은 중천에 떠 있었다. 나는 벌써 피곤을 느꼈다. 지독한 열기다. 라디에이터의 물도 벌써부터 끓어올랐으나 바람이 식혀주어 차가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자주 시선을 지평선에 주었다. 이러한 지대에 큰 화강암 바위가 모래 위에 솟아있어 선선한 저녁 때까지 텐트를 치고 쉬기에 알맞은 그늘을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정오 때쯤 내가 찾고 있던 바위를 발견했다. 큰 바위들이 길 오른편에 나타났다. 가까이 가면 손바닥만한 그늘이라도 있으리라.

나의 추측이 조금도 어긋나지 않았다. 높이가 10미터쯤 되는 거대한 바위 북쪽에 엷은 그늘이 모래 위에 드리워져 있었다. 엔진을 식히기 위해 지프차를 바람 부는 쪽에 세워 두고서 천막장비를 내렸다. 돗자리, 식량자루, 담요 두 장, 불 피우기 위한 삼발이 등을.

그러나 그늘이 있는 암벽 가까이에 가니 벌써 먼저 온 손님들이 있었다. 살모사 두 마리가 뜨거운 모래 속에 또아리를 튼 채 그곳에서 꼼짝 않고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살모사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지프차로 가서 어떤 토인이 자기 양떼를 습격하는 굶주린 늑대를 잡아달라고 내게 빌려준 낡은 총을 집었다.

중간치 탄환 한 발을 재고는 한 발이라도 더 절약하기 위해 두 마리의 살모사를 단 한 발에 명중시키려고 물렀다.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자 구름 같은 모래 먼지 속에 두 마리의 뱀이 공중으로 솟구치는 것이 보였다. 피 묻은 모래와 살모사의 잔해를 치우면서 그 중 한 마리의 배 속에서 아직 소화되지 아니한 참해 한 마리가 나온 것을 보았다.

돗자리를 깔았다. 사막에서 이 돗자리는 유목민들에게 성당도 되고 식당도 되며, 침실과 응접실까지 겸하는 팔방미인이다. 나는 앉았다.

낮잠 잘 시간이었다. 먼저 성무일도를 바치기 위해서 기도서를 잡았다.

시편을 낭송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몹시 피로했기 때문에 주의를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시편의 구절 사이로 아직도 두 마리의 살모사가 살아있는 듯한 착각이 자꾸 끼어들어 더욱 어려웠다. 뜨거운 바람이 남쪽에서 불어와 두통을 일으킨다. 나는 일어서서 띧샘에 도착할 때까지 쓰기 위해 아껴둔 물을 조금 사용하기로 하였다. 산양가죽으로 만든 물푸대에서 반 되 가량의 물을 짜내어 머리에 부었다. 물은 두건과 목을 적시며 옷 속을 타고 내려가 불어오는 바람에 열기를 식혀준다. 기온이 잠시 동안 45도에서 27도로 내려갔다. 시원할 때 잠을 자기 위해 모래 위에 누웠다. 사막에서는 낮잠이 점심식사보다 앞서기 때문이다.

좀더 편안히 자기 위해 담요 한 장을 꺼내어 베개로 삼았다. 담요를 두 장 갖고 있었기 때문에 한 장은 쓰지 않고 곁에 두었다. 그것을 보자 어쩐지 마음이 개운치 않았다.

여러분에겐 이해가 잘 안 가겠지만 나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잘 알게 될 것이다.

전날 저녁 한 때 뚜아레그의 노예였던 흑인들의 조그마한 마을인 이라폭을 지나갈 때였다. 누가 마을에 도착하면 언제나 그러하듯 이때도 많은 사람들이 호기심과 또 사막의 신작로를 자주 지나다니는 이들의 주곤 하는 약간의 차(茶)와 약품, 편지 따위의 사소한 선물을 얻으려는 생각으로 허겁지겁 달려들 왔다.

그날 밤에 나는 늙은 카다가 추위에 떨고 있는 것을 보았다. 사막에서 추위에 대해 말하는 것이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사하라는 본시 태양이 내려 쪼일 때 몹시 뜨겁지만 해가 지면 기온이 급강하하는 추운 지방이다. 카다는 떨고 있었다.

나는 캠프 장비에서 두 장의 담요 중 한 장을 그에게 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곧 이러한 생각은 사라졌다. 나 역시 떨면서 지내야 할 밤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 안에서는 나 자신보다 그를 더 사랑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연약한 미덕이 내가 나중에 조금 떨더라고 그에게 내 담요 한 장을 주어야 한다고 간청했다. 그러나 예수의 작은 형제로서 떳떳지 못하게 나는 출발할 때 그 담요 두 장을 다시 지프차에 실었다. 그리고 지금 그 담요가 내 앞에 있는 것이다.

큰 바위 아래서 다리를 뻗고 잠들려고 애썼으나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한 달 전에 투아레그인이 낮잠을 자고 있다가 바위 덩어리에 깔려 죽었던 일이 생각났다. 일어나서 바위에 무너질 곳은 없는지 살펴보았다. 흔들리긴 했으나 위험해 보이지는 않았다.

나는 모래 위에 다시 누웠다. 만일 내가 꿈을 꾸었다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이상하게 보리라. 그러나 이상한 것은 내가 큰 바위 밑에 깔려있는 꿈을 꾼 것이다. 그러나 조금도 꿈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나는 바위가 움직이는 것을 보았고 그 돌덩어리가 내게로 떨어지는 것을 똑똑히 의식했다. 얼마나 무서운 순간인가!

그 일은 꼭 현실처럼 내게 일어났다. 나는 뼈가 부서지는 것을 느꼈고 죽는 줄 알았다. 아니 의식은 생생한 채로 내 몸은 돌덩어리 밑에 깔려 있었다. 그런데 조금도 아픈 데는 없었다. 다만 움직이지를 못할 뿐이었다 눈을 뜨니 이라폭에서 내 앞에 떨고 있었다 카다가 보였다. 나는 제일 먼저 그 담요를 생각했고, 이번에는 아주 주저도 없이 그것을 주려 했다. 그러나 나를 누르고 있는 바위덩이 때문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 순간 나는 연옥에서 영혼이 받는 고통이란 <생전에는 누구나 쉽게 할 수 있었고 또 했어야 할 일을 그곳에서는 할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을 분명히 깨달았다. 얼마나 오랜 세월 동안 이 불편한 몸으로, 결코 사라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나의 이기주의의 명백한 증거인 그 담요를 묵상해야 할 것인가.

 

 

2. 당신의 사랑은 판단 받을 것이다.

 

나는 그 큰 바위의 이야기가 하나의 꿈이었는지 또는 어떤 종류의 환상이었는지 아직까지도 여러분에게 명확히 말할 수 없다.

어쨌든 그것은 단지 꿈에 불과할 뿐이라고 넘겨버릴 수 없을 만큼 내 생각 속에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나의 사물을 보는 태도를 엄청나게 바꾸어 놓았다.

그것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띧에서 실레까지 펼쳐진 이 사막지대는 내 영혼이 하느님의 사정에 대해서 깊이 묵상하게 해 주는 나의 연옥의 장소가 되었다. 또 죽은 후에도 내가 일생 동안 완전한 사랑의 행동을 할 수 없었던 것을 속죄하기 위해 돌아오게 될 장소가 될 것이다.

나는 사하라의 눈부신 태양 아래에 있던 큰 바위, 뜨거운 모래 위의 한 조각의 그늘, 지평선까지 뻗었던 말라버린 강줄기, 지질학자들의 차가 남긴 자국을 다시 본다.

꼼짝할 수 없는 이곳에서 <너희의 사랑은 판단 받을 것이다>라는 말이 자꾸만 내게 들려 오고 있다. 나는 햇빛에 충혈된 눈으로 구름 없는 하늘을 멀리 바라 본다.

하지만 나는 절대로 나를 속이고 싶지는 않다. 나는 나를 속일 수 없다. 사실 나는 단순히 추운 밤을 두려워하여 카다에게 내 담요를 줄 수 없었을 뿐이다. 그러나 <남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하느님의 계명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형제의 몸보다 내 몸을 더 사랑한 것이다.

또한 그것은 하느님이 인간에게 하신 ,전력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신명기 6,5)는 구약의 첫째 계명에도 관계되는 문제이다.

더욱이 <내가 당신들을 사랑한 것처럼 당신들도 서로 사랑하시오> (요한 13,34)라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인해 나의 입장은 더욱 곤란하게 되었다.

나처럼! 그것은 하찮은 담요뿐만 아니라 생활 전체를 두고 하는 말이다. 따라서 완전한 사랑의 행위는 예수께서 하신 것을 하려는 각오가 되어있는 데 있다. 즉 카다를 위해, 나를 위해, 모든 이를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천국은 남을 위해 자기의 생명을 바치기까지 사랑을 실천했던 원숙한 사람들이 있는 곳이리라. 그것이야말로 완전하고 보편적인 사랑이요, 조그마한 적개심이나 반감이 없는 근본적인 무한한 사랑으로 불꽃처럼 타오르는 생생한 사랑이다.

이렇게 사랑하도록 준비되어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큰 바위를 본 후 나는 연옥에서의 나의 고통이 지독히 길게, 아마 고고학적 연대처럼 긴 세월 동안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지금 만지는 이 모래, 내 손가락 사이로 흐르는 이 모래는 고고학 제1기(紀)에 속하리라. 어떤 고고학자는 그것이 35억 년 전 것이라고 나에게 말해 주었다.

이 지방에 번식하고 있었던 옛 파충류의 동물 – 사하라의 깊숙한 지대에서 그 화석을 본 일이 있다 – 은 제 2기에 속한다. 즉 13억 년 전의 것이다. 니젤 강의 소금을 운반하는 이국적인 카라반의 대열, 지금 애 앞을 지나가는 이 낙타들의 원종(原種)은 제 3기에 속한다. 즉 7억 년 전부터 있어온 동물이다.

또한 인간은, 이렇듯이 위대하고 동시에 또한 미약하기 짝이 없는 이 인간은 얼마나 천천히 자기보다 앞서 살았던 동물들의 무덤 위를 걷고 있는가! 인간들은 제 4기, 즉 지금부터 5십만 년 전에 그 기원이 시작되었다.

하느님은 일을 하실 때 조금도 서두르시지 않으신다. 시간은 그분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분은 그의 신성에 참여하면서 하느님으로 변형되도록 연약한 피조물인 나를 부르셨다. 그리고 나를 변형시키는 것은 하느님의 내 존재 안에 놓아두신 사랑이다.

하느님 안에서 사랑이 서서히 나를 변형시킨다.

죄라고 하는 것은 이 변형에 저항하는 것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이 사랑에 대해서 <싫어요>라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자아주의 속에 산다는 것은 우리의 인간 상태에서 우리를 잡아 두고 하느님의 사랑으로의 변형을 거부하는 것을 뜻한다.

도 내가 사랑을 통해 신성에 <참여함으로써> 변형되지 않는 한 나는 <이 지상의 것>일 뿐 <천상의 것>이 되지 못할 것이다.

성세성사는 나를 초자연 상태로 들어올렸다. 그러나 이 상태를 우리는 완성시켜야 하며, 모든 생활은 바로 그 완성을 이루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졌다. 또 그것이 우리를 변형시키는 하느님의 사랑이다.

이 사랑에 저항했다는 것 즉 “네 형제에게 담요를 주어라”고 내게 말한 이 사랑의 호소에 응할 수 없었다는 것은 하느님과 나 사이에 연옥의 골짜기를 생기도록 한 크나큰 과오였다.

만일 이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성무일도를 염하는 것이, 미사에 참여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만일 이 사랑에 항거한다면, 모든 것을 버리고 모래와 타는 듯한 열기가 있을 뿐인 이곳으로 왔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는가?

우리와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는 이들에게 스캔들이 되었다면 아무리 진리를 변호하고, 신학자들과 교의를 토론한다고 해도 무슨 소용이 있는가? 긴 세월 동안 연옥에 있을 것이다.

<당신의 사랑은 판단 받을 것이다> 이것이 띧에서부터 실레까지 뻗어있는 이 사막지대가 내게 외쳐대는 말이다.

<당신의 사랑은 판단 받을 것이다>하고 큰 바위가 내게 말한다. 나는 그 큰 바위 밑에서 완전한 사랑이 네 안에 성숙될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 지상으로 가져 오시어 당신의 피와 보상으로 내게 주신 그 사랑이 성숙될 때까지. 그러나 큰 희망이 여기 있다. <내가 마지막 날에 당신들을 살릴 것입니다>(요한 6,40).

아! 이날이 너무 멀지 않기를!

 

 

3. 당신은 아무것도 아니다.

 

사막에서의 수련기간의 위대성은 의심 없이 침묵이라는 고독과 그 고독의 기쁨 속에 있다. 하나의 침묵, 그것은 어디든지 뚫고 들어가 모든 존재에 침투함으로써 게으른 인간은 알 수 없는 이상한 힘을 통하여 영혼에게 말해주는 것, 이것이 참다운 침묵이다.

사막에서 우리는 언제나 침묵 속에 살고, 또 거기에 대한 맛을 아는 것을 배운다. 즉 성당에서의 침묵, 독방에서의 침묵, 일할 때의 침묵, 내적인 침묵, 영혼의 침묵, 하느님의 침묵 등을.

우리에게 이 침묵생활을 배우게 하기 위해서 수련장은 <사막에서 며칠을 보내도록> 얼마 동안 우리를 떠나 보낸다.

빵이 가득 찬 상자, 몇 개의 대추 야자, 물, 성경을 가지고 한 나절을 걸어가면 동굴이 나온다.

신부 한 분이 계셔서 그곳에서 미사를 거행한 다음 그는 동굴 속 돌 제단 위에 성체를 모셔 놓고 떠난다. 이렇게 일주(一周) 동안 모셔 둔 성체 앞에 나는 혼자 남아있게 된다.

사막에서의 침묵, 동굴에서의 침묵, 성체 안에서의 침묵, 이 가운데에서 성체조배보다 더 어려운 기도는 없다.  인간본성이 모든 힘을 다해 저항하기 때문이다. 그 성체조배보다 불타는 태양 아래에서 조약돌을 나르는 것이 더 쉽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감각, 기억, 상상 등 모든 것을 극기해야 한다. 오로지 믿음만이 승리한다. 그러나 믿음은 힘들고 어둡고 종잡을 수 없는 구름같이 보인다.

빵의 모습을 취한 그리스도 앞에 머물면서 <그것이 생활하시는 참된 그리스도시다>고 말하는 것, 이것은 순수한 믿음의 행위이다.

이 순수한 믿음은 우리를 성장시켜 주며 또한 이 믿음 속에서의 기도가 참된 기도이다.

“성체조배? 그것은 무의미해” 라고 어떤 수련자는 말했다. 그러나 좋아하는 바를 억제하는 바로 그것이 기도를 견고하고 참되게 하는 길이다. 그것이야말로 감각을 초월하고, 상상을 초월하고 자연을 초월해서 하느님을 만나게 하는 길이다.

또한 거기에는 이탈의 첫째 단계가 있다. 나의 기도가 감정이 끌리는 대로 맡겨지는 한 그것은 변하기 쉽다. 즉 일시적인 감격 후에 낙심이 오고 우울 뒤에는 덧없는 열정이 따른다. 마치 치통을 앓게 되면 모두 날아가 버리는 탐미적인 충동이나 감정적인 흐름처럼 이 종교적인 열정이라는 것도 하잘 것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의 기도를 반성해야 한다”고 주의를 준 수련장은 기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기도는 단순하게 하고 지적인 것이 되지 말도록 해야 한다. 주님 앞에 아주 가난한 사람으로 너를 두어라. 너의 사상을 버리고 다만 믿음과 함께 나아가라. 아버지 앞에 사랑의 행동을 하면서 움직이지 말라. 이성으로 하느님께 도달하려고 하지 말라. 그러면 너는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사랑 안에서만 하느님께 도달할 수 있다.”

투쟁은 쉬운 것이 아니다. 자연은 보복해 오기 때문이다. 자연은 향락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것은 십자가 위의 예수와 일치하는 것과는 별개의 것이다. 이러한 정신훈련을 하면서 몇 시간 혹 며칠이 지나면 육신이 진정된다. 의지가 육신의 감각적인 쾌락을 거부한다는 것을 느끼게 되면서부터 육신은 쾌락을 더 찾지 아니하게 되면 수동적이 된다. 감각이 잠을 잔다. 단식, 오랜 철야기도, 겸손하고 끈질긴 기도는 영혼을 고요하고 평화스럽게 해준다. 감각이 잠을 잔다는 것은 십자가의 성 요한의 말을 빌려 더 잘 표현한다면 <감각의 밤>의 시작이다. 그러므로 기도하기가 설령 고통스럽고 무미건조하게 되더라도 진지한 것이 된다. 우리의 기도는 이렇게 진지한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될 때 영혼은 예수의 구원행동 속으로 들어간다.

예수님이 현존하시는 뜨거운 모래 바닥에 무릎을 꿇고 나는 이 세상의 악을 생각했다. 원한, 폭력, 비열, 불순, 거짓, 이기주의, 배신, 우상숭배, 간음 등, 내 주의에 있는 악의 동굴은 좀 더 넓어졌다. 나는 그 속을 들여다 보면서 이러한 악의 무리 아래 계시는 예수님을 관상했다.

제병(祭餠)은 외관 그 자체에서 볼 때는 하나의 납작하고 바수어지는 구운 빵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면 그분 옆에서의 나의 위치는 무엇인가?

몇 년 동안 나는 교회 안에서 <상당한 위치에 있는 자>라고 자부해 왔다. 살아있는 거룩한 건물인 교회는 신자들의 어깨로 받쳐진 크고 작은 여러 기둥으로 이루어진 성전(聖殿)이라고 보았으며, 나도 그 중 작은 기둥 하나를 떠받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물론 사실이다.

이것은 하느님이 인간을 필요로 하신다는 것과 또한 교회는 용감한 투사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강조해온 결과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게 된 것이다. 건물은 우리 어깨 위에 서 있는 것이라고.

하느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후 하루의 휴식을 취하셨다. 그리스도는 교회를 설립하신 후 하늘로 올라가셨다. 그리고 모든 일이 신자들에게, 특히 교회에 맡겨졌다. 세상 사람들이 당하는 일상의 모든 어려움을 짊어지고 있는 교회의 구성원인 우리들이라는 생각은 나를 좀더 열렬하게 만들어주었으므로 도저히 휴식도 가질 수 없었다. 나는 나 자신을 끊임없이 투쟁하고 있는 투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해야 할 일이 그렇게도 많았고, 언제나 시간이 모자랐다. 자주 모임을 갖고, 회합하고 사람을 만나고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해 나는 동분서주해야 했다. 점차로 기도는 성급히 끝내게 되었고, 대화는 짧아지고, 마음은 늘 해야 할 일로 들 떠 있었다.

모든 것이 내가 해나가는 데에 달렸다고 생각했으므로 잘 되지 않을 때는 당연히 불안감이 뒤따랐다.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활동의 길만이 옮고 또한 참되게 보였을 뿐이다.

우리가 소년시절이었을 때 무엇보다 먼저 ,왕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모든 것을 하라>는 말을 노래하도록 누군가 우리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청년이 되었을 때에는 <너는 지도자이다>라고 말한다. 어른이 되었을 때 <당신은 책임자입니다. 당신은 으뜸입니다. 당신은 사도입니다>하는 말이 우리에게 주어졌다. 그 결과 우리는 자기는 무엇이다 라고 자부하는 습관이 생기게 되었다. 따라서 <당신들은 보잘 것 없는 종에 지나지 않습니다.> <나 없이 당신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어야 합니다> 하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와는 다른 시대, 우리와는 상관이 없는 사람들에게나 해당되는 말처럼 우리에게 들렸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스며 들 수도 없었고 우리의 마음을 적시거나 감동케 할 수도 없는 생소한 말씀이 돼 버린 그것은 결국 우리 위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말았다.

내 인생의 구비는 아주 별스럽다. 맨 처음 만난 스승은 <왕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모든 일에 있어 첫째가 되어라>고 가르쳤는데 마지막 스승인 샤를르 드 푸꼬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께 대한 사랑으로 모든 일에 있어 말째가 되라>고 권고하였다.

또 이 두 가지 모두가 타당한 이유가 있는 말씀이다. 그러나 그 교훈을 잘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내 자신이 어리석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나는 교회의 축소판인 동굴의 모래 위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또 나는 여전히 투사로서 그 기둥의 무게를 내 어깨 위에 느끼고 있었다. 이것이 아마 이 문제를 가장 뚜렷이 본 순간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 순간 그 기둥 밑에서 내가 나와도 된다는 것을 느꼈고, 느낀 순간 나는 즉시 나를 해방시키기 위해 그 기둥 밑에서 비켜 섰다. 어떻게 되었을까? 이상하게도 모든 것은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나라는 중요한 받침대가 없어졌는데도 천정은 조금도 갈라지지 않았고, 삐걱거리는 소리조차도 들리지 않았다. 이제 25년이 지나고 나서도 내 어깨는 여전히 빈 채로 있는데도 건물은 끄떡 이 없었다. 결국 그 기둥이란 나의 상상과 허영에 의해 만들어진 허상이요, 거짓이요, 전혀 필요치 않는 비현실적인 것 뿐이었다.

세상의 모든 무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 놓여 있었다. 나는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 모든 것은 2천 년 전부터 내게 하신 예수의 <당신들도 명령대로 모든 일을 다 하고 나면 저희는 보잘 것 없는 종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하고 말하시오>(루가 17,10)라는 말씀을 믿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보잘 것 없는 종!

 

 

4. 누가 세상을 인도하는가?

 

이 사건이 내게 남긴 첫 인상은 자유에 대한 것이었다. 새롭고 넓고 정확하고 기쁜 자유.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조금도 책임이 없는 자였다. 이렇게 내가 중요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은 마치 방학을 시작한 어린이가 느끼는 기쁨에 비교될 만한 것이었다.

밤이 왔으나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나는 동굴에서 물러나와 별빛 아래 펼쳐져 있는 막막한 사막을 거닐었다.

“나의 하느님,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의 하느님,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는 유난스러운 경이를 느끼게 해주는 침묵 속에서 하늘을 향하여 외쳤다.

걷기에 지친 나는 모래언덕 위에 누워 푸른 골짜기처럼 내 위에 널려 있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 하늘에는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 반짝이는 별들이 얼마나 귀하게 느껴지고 또 얼마나 친근하게 느껴졌는지! 이렇게 여러 밤을 지내는 동안 별들의 이름을 무척 알고 싶어했던 나는 차차 그 별들의 모습과 자리를 익히게 되었다. 이제 나는 별의 그 색깔과 크기, 위치, 아름다움까지 모두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 별들의 방향과 위치를 환히 알게 되면서부터 나는 시계가 없어도 시간을 알 수 있었다.

직녀성과 이야기하고 있는 금강석처럼 빛나는 별은 백조좌이고, 사수좌(射手座)와 돌고래좌는 주위의 작은 별들에게 둘러싸여 겸허한 태도로 반짝이고 있다. 페가수스좌의 별들이 사변형의 모습을 하고 동쪽에서 올라오면 구슬 모양의 별은 서쪽으로 사라진다. 곧이어 붉은 아르고(Algol 페르시우스좌의 2등성)가 앞장서서 나타나는 뒤를 따라 페르시우스좌가 그 우아함을 드러낸다.

안드로메다좌가 있는 밤하늘은 너무나 청명하다. 그 옆으로는 은빛으로 빛나는 성운(星雲)이 흐르고 있다. 그것들은 지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천체로써 그 가운데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8십만 광년이라는 까마득한 거리이다.

이 엄청나게 멀리 떨어진 성운군들은 인마좌(人馬座)와 2년 만에 한번씩 나타난다는 4광년이란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는 프록시마성 사이에 4백억 개의 별무리가 은하수를 이루어 형성된 것이다. 그 은하수 가운데에 있는 작은 모래알 같은 지구에 우리가 소속되어 있는 것이다.

또한 안드로메다좌의 성운 저쪽에 있는 다른 수백 만의 성운과 눈으로 볼 수 없는 수천 억의 무수한 별들, 그 별들을 하느님은 창조하셨다.

이 세상을 지탱하는 작은 기둥이 내 어깨 위에 있지 않다는 것을 나는 왜 진작 깨닫지 못했을까? 또한 세상은 인간들에게 속해 있지 않다는 것을.

나는 너무 안일하게 생각하고 믿어왔다.

예수께서도 <당신들은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가르치시오>(마태오 29,19)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그러나 그분은 또한 <나를 떠나서는 당신들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요한 15,5)라고 덧붙이셨다. 성 이냐시오는 <모든 것이 당신께 속한 것처럼 하시오>라고 말하면서 <모든 것이 하느님께 속해 있기를 바라시오>라는 말을 덧붙였다.

하느님은 인산세계의 창조주이시면서 또한 우주의 창조주이시다. 하느님은 교회를 다스리시는 것처럼 이 별들의 세계도 다스리신다. 그분은 사랑 때문에 인간을 당신 협력자로 삼으신다 지만 인간능력의  한계는 전류와 전선의 관계처럼 매우 좁고 엄격히 제한되어 있다.

우리가 전선이라면 하느님은 전류이시다. 우리의 능력은 전류가 마음대로 통과하도록 할 때 비로소 완전히 발휘된다고 보겠다. 물론 우리는 그것을 정지시킬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이상의 것은 할 수 없다.

우리는 우리 안에서 무엇을 지탱하는 기둥의 모습을 보지 말고 전류를 전하는 전선의 모습을 생각하자.

그러나 전선과 전류는 전연 이질의 것이다. 전선이 아무로 높은 전압의 전류를 전한다 할지라도 전류의 본질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세상의 모든 일이 천체처럼 하느님의 착하신 손에 달려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진리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지상에서 모든 것이 잘 되기를 바라는 선량한 사람들에게 무한한 기쁨을 더해줄 것이다. 신앙과 희망, 특히 깊은 평화의 원천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하느님이 모든 것을 인도하시고 유지시키는데 내가 무엇을 두려워할 것인가? 좀더 흥미진진하고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길이 없는지 찾아보지 않고 왜 모든 문제의 책임이 인간이 나에게나 혹 내 형제들에게만 있는 것처럼 불안해야 하는가?

사실 세상의 모든 일에서 하느님의 직접적인 개입을 본다는 것은 어렵다. 그리고 이것이 이 비참한 세상에서 우리가 가장 많이 겪어야 할 가장 끈덕진 시련인 것이다.

성경은 바로 이 드라마를 보여준다. 구약의 선택된 백성의 역사란 결국 하느님이 소수의 인간들의 역사에 끊임없이 개입하시는 상황을 기록해 놓은 것이다.

 

<너는 나를 믿느냐? 나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하느님이로다. 나는 강한 팔로 너를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빼내어 사막으로 인도했고, 하늘의 만나로 너를 길렀으며, 바위에서 솟는 물을 네게 마시게 한 하느님이로다. 너를 위해 이집트인들의 맏아들을 쳤고, 너를 위해 권세 있는 왕을 짓눌렀다. 이러한 이적(異蹟)과 이러한 끊임 없는 도움에 보답하기 위해 너는 내게 무엇을 했는가? 너는 나무와 은의 우상을 세워 나를 버렸구나. 네 하느님인 나를…>

<너를 창조했고, 아주 높은 언덕 위에서 그리고 거룩한 나무에서 네 원수들로부터 여러 번 너를 구해낸 그분을 흠숭 하는 대신 이방인들의 신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신들 앞에 너는 향을 피웠도다.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고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그 목구멍은 소리도 내지 못하는 신들을> (시편 113 참조).

 

이것이 영원한 역사, 곧 이스라엘과 우리의 역사이다.

우리는 하느님을 믿고 기도한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영혼의 회심은 위대한 설교가들의 임무로 맡겨버리고, 하느님 나라의 확장을 위한 기도여야 하는 본연의 자세는 잃어버린 채 허황된 요구와 말이 많은 기도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생소한 하늘 밑에서, 신앙과 감상주의가 혼합된 비현실적인 암흑 속에서, 하느님과도 세상과도 멀리 떨어진 곳에서 우리의 비참한 종교생활은 기도와 모순과 타협으로 뒤범벅이 된다.

하느님은 유일하신 분으로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 이것이 진리이다. 또 나는 그것을 믿음으로써 더욱 깊이 깨닫게 된다.

하느님 홀로 우주를 다스리신다. 내가 언제 죽을 것인가 하는 것도 하느님만이 아신다.

하느님만이 중공(中共)을 회심시킬 수 있다.

왜 우리가 질 수도 없는 책임을 지려고 야단일까? 회교도가 그리스도를 아직 발견하지 못했고, 불교가 아무 위기도 없이 수억의 우리 형제를 지배하고 있다는 데 대해 왜 놀라야 하는가? 언젠가는 때가 올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나에게 달려 있지 않다.

그런데 하느님의 섭리가 모든 백성을 위한 역사 속에서 시간의 흐름과 함께 발전 내지 성숙했다고 할 수 있을까?

아브라함은 약속이 이행될 희망이 있을 때에만 그리스도를 알아보았다. 그리스도는 정말 성부로부터 버림받은 것은 아니다. 강생의 시기는 도래하지 않았다. 예수가 그때가 되어 오신 것은 영원한 지혜의 지시를 따랐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계획이 있고 또 그것은 고려되어야 한다. 그 다음에 인간의 계획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이 계획은 고려되지 않는다. 더구나 하느님의 계획과의 관계에서는 조금도 고려되지 않는다.

하느님은 인간을 앞선다. 만일 하느님께서 강생의 시기를 결정하여 알려주시지 아니하였더라면 마리아께서는 그리스도를 몰라보고 여전히 하느님이 오시기를 고대하는 가운데 죽어갔을 것이다. 만일 갈릴레아 사람들이 하느님이 그들을 부르셨을 때 가지 않았더라면 그들도 별일 없이 호수에서 고기를 낚으며 가파르나움 회당이나 드나들었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믿음에서 발견해야 할 진리이다. 하느님께 대한 기대와, 이러한 기대를 갖는 태도는 자연적으로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니다. 기다림 속에 머물면서 계획의 포기, <하늘을 향한 추구>, <침묵> 이것이 우리가 수행해야 할 가장 유익한 일들이다.

그 다음에 부르는 시간, 우리가 말해야 할 시간, 손으로 세례를 주어야 하는 피곤한 시간, 추수의 시간이 필경 올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이러한 놀라운 일들의 주역이거니 생각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하느님이 놀라운 일을 하기 위해 이렇듯이 불쌍하고 이렇듯이 가난한 우리를 다만 이용하는 것 뿐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이 아니다. 내게는 벌써 슬픈 의문이 고개를 쳐들기 시작한다.

의문이 생긴 것은 나의 착오이거나 믿음의 부족 때문이다.

“기도할 것인가, 활동할 것인가? 기다릴 것인가, 떠날 것인가? 자리에서 일어날 것인가, 성당에 들어갈 것인가?”

우리는 또 새로운 출발점에 서 있다. 사람은 모든 것을 의문으로 여기는 데에 조금도 염증을 느끼지 않는다. 하느님의 말씀을 실현하고자 하는 선의 보다 회기심이 더 강하다.

그러나 나는 오늘 그러한 문제에 대해 더 이상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다. 나는 말의 힘으로 한 사람을 설복시키는 위력을 더 이상 믿고 싶지 않다.

다만 나는 아프리카의 이 별 아래에서 잠잠히 내 하나님이신 주님을 흠숭하고 싶을 뿐이다.

그렇지만 내게 편지를 보낸 젊은 당신의 요청에 내가 옳다고 생각하고 또 체험한 것을 한 마디만 더 하겠다.

이 세상에서 사랑 하나만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의문이라는 것을 상기하라. 사랑만이 사랑으로 사는 이에게 해답이 된다.

나는 그것을 당신에게 말하고 싶다. 사랑으로 살아라. 사랑을 찾아라. 그것이 당신이 해야 할 일을 가르쳐 줄 것이다.

하느님 안에 있는 사랑이 당신이 달려야 할 길을 알려주고, 당신께 말해줄 것이다. “이제 무릎을 꿇어라” 혹은 ‘지금 떠나라” 고.

<사람들이 나의 활동을 필요로 하는데 무릎을 꿇고 몇 시간이나 기도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죽음으로 인해 모든 문명이 파멸하고 말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이때 하찮은 나의 활동은 아무런 쓸모도 없다. 이 두 가지 역설적인 사실을 정당화시켜주는 것도 역시 사물에 가치를 주고 있는 사랑인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의향에 가치를 주고 흩어졌던 것을 일치시키는 사랑이다.

사랑은 관상과 활동의 종합이다. 사랑은 하늘과 땅 사이를, 하느님과 인간 사이를 이어주는 점이다.

적극적인 활동과 사막에서 고요한 관상생활의 기쁨을 다 체험한 후 나는 성 아우구스띠누스의 말씀을 다시 되뇌어 본다. <사랑하라. 그리고 네가 원하는 것을 하라. 나의 형제여, 당신이 하는 일에 대해서 너무 걱정하지 말고 사랑하는 데에만 당신의 마음을 두어라. 나의 길이 무엇인가? 하는 불필요한 상념이나 천국에 대한 고민은 이제 그만 두고 오직 사랑하는 데에만 전력하라.>

당신은 사랑할 때 비로소 당신의 길을 발견할 것이며, 사랑할 때 바로 하느님의 소리를 들을 것이다. 사랑을 하면서 당신은 평화를 찾을 것이다.

사랑은 법의 완성이요, 모든 길의 척도요, 모든 문제의 해결이요, 모든 길의 척도요, 모든 문제의 해결이요, 모든 성덕의 충동이다.

<사랑하라. 그리고 네가 원하는 바를 하라.> 아니 내가 사랑하고 있다면 내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없다.

내가 사랑할 때 나는 그 사랑의 포로가 될 것이다. 사랑의 요구는 한정이 없다. 특히 이 사랑이 십자가 위에 계신 하느님을 대상으로 할 때 더욱 그렇다. 사랑을 할 때 나는 내 뜻대로 가 아니라 예수님의 뜻대로 즉 성부의 뜻대로만 하게 된다.

이렇게 내 뜻이 아닌 주님의 뜻만을 따르게 될 때, 나의 이 세상에서의 소명은 완전히 실현되는 것이며 나의 완덕이 단계도 드높여질 것이다.

바로 하느님의 뜻이 세상을 지배하고, 천체를 움직이고, 사람을 회개시키고, 생명을 되살리고 죽음을 주는 것이다.

또한 이 하느님의 뜻이 믿음의 아버지인 아브라함을 일으켰고, 모세를 불렀고, 다윗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마리아를 준비시켰고, 요셉에게 힘을 주었고, 그리스도를 강생케 했으며, 그 생명의 희생을 요구토록 했다. 그것이 교회를 세웠다. 또 그것이 세상 마칠 때까지 구원의 업적을 계속시킬 것이다.

하느님의 뜻은, 인간이 자신의 바른 의향과 착한 마음의 덕분으로 보이지 않는 영에 속하게 되 후에 즉 그들이 완전히 성숙을 끝마치는 순간에 눈에 보이는 몸인 교회로 하나씩 불러들일 것이다.

당신이 보속이나 혹은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래 위에 무릎을 꿇을 때, 가르치기 위해 교단에 있을 때, 만일 당신이 하느님의 뜻대로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무슨 가치가 있을까?

또 하느님의 뜻이 당신에게 가난한 자들을 찾아가 당신의 모든 재산을 주고 먼 지방으로 갈 것을 명한다면 그 이외의 것에 무슨 가치가 있을 수 있겠는가?

또 만일 하느님의 뜻이 당신에게 한 가정을 이루어 이 세상에서 어떤 역할을 하도록 호소한다면 왜 주저하겠는가?

In la sua volontade e nostra pace (그 분의 뜻 안에 우리의 평화가 있다)라고 단테는 말했다. 이 단테의 말이야말로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종속관계를 가장 잘 요약하여 표현한 것이 아닐까.

 

 

5. 마음의 정화

 

우리가 사랑하기 위해 창조되었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해야 한다는 것과 또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를 분별하기는 어렵다.

우리는 자연을 사랑한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또 이것은 우리의 목적에 위배된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이 사랑은 하느님을 사랑해야 하는 우리의 목적과 분명히 일치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피조물도 사랑하고 창조주도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볼 때 이 두 가지 사랑은 서로 양립할 수 없다. 한쪽을 사랑한다면 다른 한쪽을 사랑할 수 없게 된다. 왜 이처럼 대립되어야 할까?

그 이유는 우리에게 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한다.

우리의 마음이 고장 난 기계나 쓸모 없는 도구처럼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피조물을 사랑할 때 이 불행한 마음은 너무나 쉽게 균형을 잃어버린다.

인간은 어리석게도 피조물에게만 끌려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독점하고자 한다. 인간은 피조물에 이렇듯 정열적으로 애착하여 전체를 잊어버리기까지 한다. 거기다가 피조물과 어리석은 관계를 맺어 피조물들을 타락시키고 파괴하거나 노예화하며, 더욱 나쁘게는 그 피조물의 종이 되는 것이다. 특히 육체적 사랑은 질투와 이기주의 등의 그 모든 지독한 요소들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독특하게 드러난다. 그것은 어느 것보다 과격한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 마음이 평화와 평정과, 사물을 균형 있게 바라보는 안목을 가지지 못할 때, 최악의 경우 순결까지 잃어버리면서도 친구에게 애착하는 소위 독특한 우정도 마찬가지다.

재물에 대한 사랑도 그렇다. 재물에 대한 애착이 사랑을 눈멀게 하여 노예가 되게 하는 것을 우리는 무엇이라고 해야 할까?

일 그 자체에 대한 사랑도 그것이 덕이란 이름으로 가면을 쓸 때 그만큼 위험한 것이 된다. 주일날도 쉬지 않고 일하는 농부가 얼마나 많은가? 밭에서 거두어 들일 것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 얼마나 많은 실업가가 자기 생활을 지옥과 같이 만드는가! 사업의 경영에 휩쓸려서 말이다.

그러한 집념은 강하면 강할수록 나쁘게 된다.

지나친 연구심도 사람을 이기심의 괴물로 만들어 버린다. 수집에 취미를 가진 사람도 지나치게 열을 올리다 보면 취미의 노예가 되어버린다.

이러한 경우를 볼 때 피조물에 대한 사랑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에 반대된다는 것이 명백해진다.

이에 비해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보편적이며 순결하고 균형 잡힌 거룩한 것이다.

그의 나라에 머무는 자는 깊은 평화를 누린다. 그 사랑은 사물의 질서를 파괴시키거나 혼란케 하지 않고 자유가 무엇인지 알게 해준다. 그러나 그 사랑은 보다 철저한 것을 요구한다. 깊은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는 노력을 기울여 가꾸고 거름을 주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하느님은 정원사가 되시어 손수 사랑을 키워주신다.

이 사랑은 무엇보다 먼저 정화되어야 한다.

사랑을 정화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무질서한 감각과 유혹의 어둠으로부터 자유스러워짐을 뜻한다. 다른 말로 그것은 사랑을 <조건 없이> 베풀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죄를 짓고 또 너무나 자주 이기주의에 사로잡히는 약한 피조물인 우리에게 있어 사랑을 조건 없이 베푼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우리는 악의 깊이와 죄의 심연을 잊을 때가 많다.

나는 자신을 위해서만 재물을 모으는 부자나, 쾌락에 모든 것을 바치는 쾌락주의자나, 하느님께 올려야 할 유일한 향을 가로채려 하는 지배자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는 착하다고 하는 자들과 신심가라 불리는 자들,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며 <오 하느님! 저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아닌 것을 하느님께 감사합니다>(루가 18,11)하고 교만에 넘친 고백을 전능하신 분의 제단 앞에 서서 서슴지 않고 하는 자들의 이기심에 대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흔히 나는 다른 이들과 다르다고 믿는 만용을 은연중에 지니고 있다. 이것이 바로 제일 위험한 이기심 곧 정신적인 이기주의를 조장하는 가장 근본적인 위선이다. 이것 위에 우리는 스스로 만족하기 위해 신심과 기도를 이용하여 견고한 바벨탑을 쌓는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제단을 떠나고 싶어도 떠날 수 없게 되며, 성덕을 이루고자 하는 원의 조차도 완전히 거짓이 된다. 그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의 사랑과 모범을 본받는 것보다 자기의 영광을 더 추구한다. 즉 이기주의가 사랑을 대신한다.

나는 하느님을 찾도록 우리 영혼을 충동하는 원의도 대부분이 이기주의로 더럽혀졌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우리는 이기심 때문에 하느님께 자신을 바치고, 수도자가 되고, 병원을 세우고, 회두를 성공적으로 할 수 있었다.

이러한 거짓에는 한계가 없다. 그 길은 몹시 위험하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느님은 채찍을 드실 때도 있다. 이러한 하느님이 표면상으로는 무자비하게 보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를 깨우치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없다. 이것이 곧 고통의 길이다. 이기심으로 천국의 길을 기어올라 가려는 영혼은 틀림없이 추위와 갈증과 캄캄한 어둠에 부딪칠 것이다. 하느님은 그 사랑을 위해 위로를 고통으로, 기쁨을 슬픔으로 바꾸시는 것이다. 그 분은 영성생활의 주위을 온토오 가시밭으로 둘러싸이게 하고 모든 기도를 짙은 구름으로 차단되게 하신다.

그러나 때로는 것으로도 넉넉하지 않다. 실패, 병고, 환멸, 노쇠가 사납게 <주여 저는 다른 사람들과는 같지 않습니다>하고 확신에 차서 말했던 가련한 육신 위에 밀려든다.

두려워 울부짖으며 자신도 다른 사람들처럼 비겁하고 연약한 것을 깨달을 때, 자기만 유독 남들과는 다르다고 주장할 수 없을 것이다.

시편 87에서 탄원하는 인간의 목소리가 그러하다.

 

내 주 하느님,

낮이면 이 몸 당신께 부르짖고

밤이면 당신 앞에 눈물 흘리나이다.

내 기도 어전까지 높이 미치게 하사

부르짖는 소리를 들어주소서.

내 영혼은 불행에 가득 차 있고,

목숨은 무덤에 다가섰나이다.

구덩이로 내려간 자로 나는 간주되옵고

의지까지 없는 몸이 되어버렸나이다.

죽은 몸들 가운데 내 잠자리가 있어

마치도 피살되어 무덤에 누워있듯

당신의 기억에서 사라져버리고

당신의 손길에서 끊긴 몸이 되었나이다.

 

이렇게 사랑은 순수해지며 불은 우리의 옷을 태워버리고 알몸으로 있게 한다.

이때는 사랑이신 하느님 자신조차 아무 일도 해 줄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사랑 차체이신 하느님은 당신의 사랑이 알려질 때까지 즉 영혼이 보다 순수해질 때까지 기다리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십자가를 지는 고통만이 한 영혼을 자유롭게 해줄 수 있음을 아셨다. 성부는 인류의 구원을 위해 성자의 육신에 이 가혹한 수술을 감행하셨다. 이것이 십자가 없이는 <용서가 없다. 죄를 용서받지 못한다> (히브리 9,22)는 믿음의 교리이다.

그것은 신비이지만 현실이다. 고통이 사랑을 정화한다. 고통이 사랑을 진실하고 순수한 것으로 만든다. 고통이 괴로워하는 자 안에서 사랑이 아니었던 것을 제거해 준다.

고통은 인간의 모습을 상하게 하는 유혹의 가면을 벗기고 순수한 사랑만이 나타나게 해준다. 고통은 사랑이 요구하는 조건을 채워준다.

고통의 홍수가 영혼 위를 스쳐간 후 남아있는 것은 틀림없이 순수한 것이다. 분명히 정화된 이 영혼 안에는 가냘픈 가지처럼 새로운 움이 자라날 것이다. 그 가지는 영혼의 비둘기가 선물을 운반하며 쉴 수 있는 곳이다. 영혼은 눈물을 흘리며 “당신 뜻대로 이루어지소서”라는 기도를 드릴 뿐이다. 그러나 이 말에는 임종할 때 예수께서 힘차게 외치시던 말씀인 <아멘>의 뜻이 반향 되고 있다. 영혼은 하느님과 또 인간과 싸우기를 그친 어린이에 불과하나 하느님께서는 곧 그를 구해 주실 것이다.

그때에 인간은 조건 없는 사랑이 가능해진다. 그러나 곧이어 그는 다른 종류의 사랑을 견디기가 어렵게 된다. 그는 인간의 감상주의에 염증을 일으키고, 이기적인 사랑 앞에서는 심한 불쾌감을 느낀다. 마침내 그는, 이 지상의 사람에게는 가끔 비논리적으로 보이는 하느님의 논리 안으로 들어간다. 그것은 사랑의 무상성(無償性)을 잘 드러내는 비유적인 논리이다.

그것을 들어보자.

 

 하늘 나라는 다음과 같은 비유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어떤 포도원 주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을 얻으려고 이른 아침에 일찍 나갔습니다. 그는 일꾼들과 하루 품삯을 돈 한 데나리온으로 정한 다음 그들을 포도원으로 보냈습니다. 아홉 시쯤에 다시 나가서 장터에서 일거리가 없어 우두커니 서 있는 사람들을 보고 그들에게 “당신들도 내 포도원으로 가서 일하시오 그러면 정당한 품삯을 주겠소”하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그들도 갔습니다. 주인은 열두 시와 오후 세 시 쯤에도 나가서 이와 같이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오후 다섯 시쯤에 다시 나가보니 일없이 서있는 사람들이 또 있어서 “왜 당신들은 하루 종일 이렇게 일없이 서 있기만 하오?”하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아무도 우리에게 일을 시키지 않아서 이러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당신들도 내 포도원에 가서 일하시오”하고 말하였습니다. 날이 저물었을 때 포도원 주인은 자기 관리인에게 ‘일꾼을 불러 맨 나중에 온 사람들로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일꾼들에게 이르기까지 하나 하나 품삯을 치르시오” 하고 말하였습니다.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한 일군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 받았습니다. 그런데 맨 처음부터 와서 일한 일군들은 좀 더 많은 품삯을 기대했지만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 받았을 뿐입니다. 그들은 돈을 받아 들고 주인에게 투덜거리며 “맨 마지막에 와서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저 사람들을 하루 온 종일 찌는 듯한 더위 속에서 수고한 우리들과 똑같이 대우하십니까?”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그들 중 한 사람을 보고 “내가 당신에게 잘못한 것이 무엇이요? 당신은 나와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정하지 않았소? 당신의 품삯이나 가지고 가시오. 나는 이 마지막 사람에게도 당신에게 준 만큼의 삯을 주리고 한 거요. 내 것을 내 마음대로 처리해서는 안 된단 말이요? 내 선한 처사가 당신의 비위에 거슬린단 말이요?”하고 말하였습니다.(마태오 20,1-15)

 

악한 눈을 가진 우리는 이 비유를 쉽게 이해하지 못한다. 죽기 전에 그것을 이해하는 자는 행복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눈이 바른 것을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참다운 사랑의 나라인 무상의 나라로 들어갈 것이다.

 

 

6. 기도를 향한 길목에서

 

나는 기도하기 위해, 기도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이 사막에 왔다.

그런데 사하라는 내게 커다란 선물을 주었다. 그것은 사랑하는 모든 이에게 전해주고 싶도록 아주 훌륭한 것으로서 다른 모든 은혜를 요약하는, 내 생활에서 없어선 아니 될 선물이었다. 그것은 밭에 묻힌 보화였다. 시장에서 발견한 귀한 진주와도 같은 것이었다.

기도는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 있어야 하는 본질적인 요소이다.

우리의 신앙과 우리의 기도는 같은 의미를 갖는다. 우리의 희망은 우리의 기도에서 나오는 것이며, 우리 사랑의 열정도 바로 기도에서 근원 한다.

우리에게 시작이 있듯이 기도도 시작이 있었다. 그러나 기도는 끝이 없을 것이다. 기도는 영원까지 우리를 동반할 것이다. 기도는 하느님의 행복의 샘으로 물을 마시러 가도록 인도해 준다. 기도는 하느님께로 향한 황홀한 관상에서의 도취이며, 영원한 행복의 노래이다.

우리의 생활의 역사는 또한 기도의 역사이며, 무엇보다 먼저 개인적 기도의 역사이다.

꽃들은 각기 독특하다. 별들도 역시 서로 다르다. 사람들도 모두가 각기 다른 개성을 지니고 모습도 다르다. 이와 같이 하느님과 사람의 사이를 이어주는 기도도 그 사람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기도의 양상은 여러 가지다. 그리고 기도는 같은 소리와 같은 내용의 반복이더라도 할 때마다 새로운 것이 된다. 그 기도에 영감을 주는 주님의 영이 항상 새롭기 때문이다.

<성모송> 이외의 다른 기도를 몰랐던 수비루의 성녀 벨라뎃따와, 하느님만을 끊임없이 반복하던 신비가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가장 새롭고 변화가 많은 기도를 드린 것이다. 이 짧고 단순한 말이 성부와 그리스도의 영에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기도를 잘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하느님과 함께 말한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기도는 양극(兩極)을 일치시킨다. 즉 하나는 약하고 깨지기 쉬운, 아주 미소한 내 영혼과 무한하고 전능하신 하느님을 일치시켜 준다.

여기서 크게 놀라운 것은 무한한 그분이 이렇듯 작은 나와 함께, 즉 전능 자체이신 창조주인 그분이 하잘 것 없는 피조물인 나와 함께 이야기하기를 원하셨다는 사실이다.

기도를 원한 쪽은 내가 아니다. 그분이 나를 위해 그것을 원하신 것이다. 내가 그분을 찾은 것이 아니라 그분이 내게 온 것이다. 그분이 먼저 내게 오지 않으셨더라면 나는 그분을 찾지 못했을 것이다. 나의 기도의 근원은 하느님이 내 기도를 원하신다는 거기에 있다. 또 내가 그분의 부르심에 대답할 수 있는 것은 그분이 벌써 거기서 나를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이다. 만일 그분이 침묵과 고독 속에 그대로 머물러 계셨다면 나는 나의 침묵과 고독을 도저히 깨뜨릴 수 없을 것이다. 공간이나 나무나 별을 향해 길게 이야기할 인내를 갖지 못한 인간이다. 응답을 받지 못하는 이야기는 결코 길게 하지 못하고 즉시 끊어버리고 만다.

내가 하느님과 함께 일생 동안 이야기를 계속하는 것 같아도 실은 시작에 불과하다.

기도에 대해 한 가지 아직 더 말할 것이 있다. 기도는 하늘에서 오는 것이지 땅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느님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는 말도, 내 가슴이 부풀어 <하느님은 얼마나 위대하신고!> 하고 외치는 감탄의 함성도, 내 곁에 있는 회교도이며 소경인 파라기가 <하느님, 나를 용서하소서>하고 거듭 고백하는 눈물의 통회도, 우주의 불가사의 앞에 황홀한 감동으로 말을 잊는 과학자의 경탄도, 이 모두가 성령의 업적인 것이다.

건강한 육체와 감사에 넘친 마음을 하느님의 사랑에 맡기는 것이 우리의 의무인 것처럼, 예수의 성령의 힘을 입어 하게 되는 기도도 우리의 의무이다.

물론 우리는 그분에게 반항하고 거절할 수도 있다. 우리 마음에 흐르는 사랑의 전류를 모른 척하며 우리의 마음을 꼭 닫아버릴 수도 있다. 또 흔히 우리는 그렇게 한다. 그러나 우리가 부르심에 응할 준비만 되어 있었더라면 우리는 끊임없이 기도할 수 있었을 것이다.

덧붙여 말하건대 인간에게는 또 다른 기도 즉 인간의 마음속에서 자연적으로 우러나오는 기도도 있다. 이 기도는 대수로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영적인 수다스러움에 기인한다. 이 기도는 우리의 참다운 선(善)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을 청하게 할 때가 많다. 만일 그것이 우리에게 허락된다면 도리어 해가 될 것이다. 고독과 고통을 두려워하며 입술로만 경건한 말을 할 때가 많은데, 이것도 그러한 기도의 종류이다. 예수께서는 <여러분은 기도 할 때에 이방인들처럼 빈 말을 되풀이하지 마시오> (마태오 6,7)하고 말씀하심으로써 이러한 기도를 경계하셨다.

<영감을 받지 아니한 기도>라고 해야 할 그런 기도와, 주님의 영으로써 우리에게 지시된 참 기도의 가지를 명백히 하기 위해서는 하느님께 대한 철학자들의 말고 성서와 교회의 말씀이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다. 교회는 비록 인식의 어둠 속에, 믿음의 어둠 속에 있기는 하지만 하느님께 대하여 친밀하고 생기에 찬 정렬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이 <지상의>기도를 잘 알고 있으니 그것을 더 길게 분석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말로만 기도를 할 뿐 마음은 하느님의 영 에서 얼마나 멀리 있는가? 우리는 하느님의 영과 맞서고, 그분의 뜻을 피하기 위해 얼마나 자주 수다스러운 말 속으로 피신하였었던가!

우리는 귀찮은 방문객이나 가난한 이들의 하소연을 피하기 위해 성무일도를 핑계 삼아 성당으로 간다. 영혼에 해가 될 위험을 잘 알면서도 피하지는 않고 로사리오 기도만을 바친다. 우리는 부자가 되기 위해 제단에 초를 바치나 분심으로 가득한 마음은 예배하는 척하면서 머리를 숙일 뿐이다.

이러한 기도가 바로 하늘에서 오지 않고 땅에서 오는 것이다. 또 그것은 무익하고 거짓이므로 언제나 땅에 남아있다.

예언자가 <구름으로 당신 몸을 싸시고 기도를 못 통하게 하셨나이다>(애가 3,22)라고 한 것은 바로 이러한 기도를 말한 것이다. 우리의 이러한 기도는 눈을 감은 완고한 우리 마음에서 조금도 벗어날 수 없으므로 하느님은 구름으로 자기를 감추실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 우리의 소경 된 완고한 마음 – 그것은 언제까지나 계속될 수도 있다 – 은 아무 거리낌도 없이 허위에 찬 이중생활을 하게 한다. 윤리적인 타락에도 불구하고 가장 열심한 척 예배를 드리고, 묵주를 굴리나 마음속에는 이기주의와 물질에 대한 욕심으로 언제나 불안하다. 그러면서도 교회를 개혁해야 한다고 비판을 일삼아 현대판 바리사이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잘못을 울 수 있는 눈물도 마른 것 같다. 진리이시며 사랑이신 예수님께 우리가 바치는 거짓 기도와 거짓 사랑, 하느님의 뜻을 찾지도 않고 또 그 뜻을 외면해 버리는 우리의 사상과 활동과 말은 교회의 놀라운 힘과 참 모습을 덮어 버린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잘못을 울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참 기도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우리의 잘못을 알고 하느님의 뜻을 찾을 때 참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결국 사물은 단순하다. 극히 단순하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을 듣기만 하고 복음서의 말씀을 실천에 옮기기만 하면 넉넉하다.

역시 원하고 실천해야지 말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입김은 우리 안에 착한 마음을 불러 일으켜 주신다. 예수의 영은 그것을 원하는 자 안만 와주신다. 그분은 사랑이시며, 그 사랑 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상대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그 사랑을 원할 때 그분은 머뭇거리지 않으신다. 그분은 벌써 와 계셨다. 그분은 가련한 피조물인 나를 나보다 더 사랑하시기에 나도 그분을 사랑할 수 있다.

또 우리는 탕자처럼 행동으로써 사랑을 드러내야 한다. 탕자에게는 우선 일어서는 것이 문제이다. 돼지를 뒤로 두고 오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영혼은 진실하게 말해야 한다. <지금 떠나서 아버지에게로 돌아 가겠다> (루가 15,18) 라고.

 

 

7. 기도의 시간

 

기도는 말이요 낭독이요 노래이다.

 

주여 귀를 기울이시어 들어 주소서.

가난하고 불쌍한 이 몸이외다.

주께 바친 몸이오니

내 영혼 지켜 주시고

당신께 바라는 이 종

주여 살려 주소서.

(시편 85,1-2)

 

 

그것은 가끔 외침과 눈물과 탄식을 포함하고 있다.

 

내 주 하느님, 낮이면 이 몸 당신께 부르짖고

밤이면 당신 앞에 눈물 흘리나이다.

내 기도 어전까지 높이 미치게 하사

부르짖는 소리를 들어 주소서.

내 영혼은 불행에 가득 차 있고

목숨은 무덤에 다가섰나이다.

구덩이로 내려간 자로 나는 간주되옵고

의지까지 없는 몸이 되어버렸나이다.

죽은 몸들 가운데 내 잠자리가 있어

마치도 피살되어 무덤에 누워있듯

당신의 기억에서 사라져 버리고

당신의 손길에서 끊긴 몸이 되었나이다.

(시편 87,2-6)

 

 

때로는 행복의 폭발도 있다.

 

그지없이 사랑하나이다. 하느님 내 힘이시여

하느님은 나의 반석, 나의 생채

내 구원자시오니.

(시편 17,2-3)

 

 

그 업적의 황홀한 감탄일 때도 있다.

 

하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얘기하고

창공은 그 손수 하신 일을 알려 주도다.

(시편 18,2)

 

 

섭리의 감격적인 찬미일 때도 있다.

 

야훼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노라.

파아란 풀밭에 이 몸 뉘어 주시고

고이 쉬라 물터로 나를 끌어 주시니

내 영혼 싱싱하게 생기 돋아라.

주께서 당신 이름 그 영광을 위하여

곧은 살 지름길로 날 인도하셨어라.

죽음이 그늘진 골짜기를 간다 해도

당신 함께 계시오니 무서울 것 없나이다.

당신의 막대와 그 지팡이에

시름은 가시어서 든든하외다.

(시편 22,1-4)

 

 

하느님께 말씀 드리는 이러한 방법은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나 이어왔다. 영적 생활이 시작하고부터 그것이 끝날 때까지 인간은 이 방법을 사용할 것이다. 즉 창조주께 자기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말을 용한 것이다.

그러나 이 말에도 인간의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 있고 또 하느님의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 있다. 시작할 때는 말이 많으나 그것이 점점 줄어들고 뜻이 깊어져 단 한 마디로 자신의 감정을 모두 요약해 버릴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인간이 하느님을 발견하여 회심을 한다든가 수련을 할 때의 처음 몇 년간은 말을 많이 한다. 이때가 그 사람으로서는 가장 다감한 때이다. 새로운 감정, 영상, 예술, 정열, 이 모든 것이 기도를 꾸며준다.

또 하느님 편에서도 위로를 보내주신다. 이렇게 모든 것이 행복한 신혼생활처럼 흘러간다.

 

든든한 내 마음 하느님이여,

내 마음은 든든하니 노래하리이다.

거문고 청쳐서 읊으리이다.

내 영혼아 잠 깨어라,

거문고야 기타야 잠을 깨어라.

새벽을 흔들어서 나는 깨우리라.

주여, 나는 뭇 백성 가운데서 당신께 노래하리이다.

하늘이 닿도록 당신 사랑 크옵시기에

구름에까지 당신 진리가 비치시기에

하늘들 위에 하느님 나타나소서.

온 땅에 빛나소서 당신의 영광

(시편 107,2-6)

 

 

기도에는 또 <묵상기도>라는 것이 있다. 묵상기도는 때로는 말의 연속이 될 때도 있지만 주로 한 영혼이 사랑으로 무르익을 때 말 속에 삽입되어 조화를 이룬다. 또한 염경기도 다음에 오기도 하며 또 진리와 광명을 발견했을 때 오기도 한다.

묵상기도는 책을 읽으면서 다른 이가 하느님에 대해 말한 것을 인식하는 시간이며, 신학적으로 연구하며 또 연구한 것에 대해 깊이 성찰하는 열렬한 시간이다. 철학적으로 토론하며 다른 영혼들과의 만남을 갖는 멋진 시간이다.

만일 세상 사람들이 이 시간을 통해 한 그리스도인 안에 깃든 기쁨과 평화와 중용을 알았다면 얼마나 황홀해 했을까?

나는 이 시간을 알았다. 또 수백 수천 명의 다른 젊은이들 가운데 살면서 그 기회를 잡았었다. 하느님, 교회, 영혼들이 우리의 유일한 감격이었다. 매일 이른 새벽부터 새로운 마음으로 다윗이 골리앗을 쳐부수듯이 오류에 도전하며 우리는 새로운 세계를 구축해 나갔다. 우리는 같이 기도했고 하느님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밤을 새우고, 삼등 기차로 긴 여행을 하고, 시골길을 자전거로 달리면서도 피곤을 모르던 우리의 활동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이었는지! 일 년에 한번씩 피정하기 위해 돈과 휴일을 희생하는 것도 모두 감격스러운 기쁨이었다. 지금도 내 마음을 기쁨과 평화로 채워준다. 아마 내 일생에 아주 소중한 기억으로 남겨질 것이다.

묵상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 보자. 묵상에는 여러 방법이 있으나 각자가 자기의 경험을 통해 택하는 것이 좋다. 묵상해 가면서 자기에게 아주 잘 맞는 방법을 발견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서 나의 스승인 십자가의 성요한으로부터 배운 두 가지의 것만 말하고 싶다. 하나는 묵상의 방법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선택해야 할 책에 관한 것이다.

 

방법에 대하여

성요한은 묵상을 세 부분으로 나누었다. 이것까지는 흔히 많이 쓰는 방법이다.

 

1. (다시 자세히 말하면) 우리가 묵상하고자 하는 신비에 대한 상상력 제시.

2. 제시된 신비를 이성으로 관찰 (여기까지는 아무런 새로운 것이 없다.)

3. (여기에 중요한 점이 있다.) 이성의 문이 하느님의 계시로 열릴 때 결실을 거두기 위해 사랑과 주의를 다해서 하느님께 자기를 맡겨 드린다.

 

매우 인간적인 사랑에 넘친 이 노력을 하느님 앞에 밝은 인식을 얻을 때까지 끌어가야 한다. 요컨대 묵상은 단순하게 내적 침묵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선택해야 할 책에 대하여

모든 다른 서적 가운데 성서를 먼저 선택하라.

만일 가능하면 당신이 원하는 모든 묵상책을 읽으라. 그러나 이것은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성서를 읽고 묵상하는 것은 빠뜨려서는 아니 될 필수적인 것이다. 성서 없이 가톨릭 사상이란 없다. 성서의 바탕을 두지 않는 설교는 뼈대가 없는 설교이다. 복음의 토대가 없이는 종교교육도 있을 수 없다.

성서는 하느님께서 친히 수천 년 동안에 걸쳐 인류에게 보낸 편지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내림을 고대한 긴 탄식(구약)이요, 우리 가운데 그분이 오신 사건을 기록한 것(신약)이다.

예루살렘 성전이 불탈 때 그 성전의 첫째가는 보물이 무엇인지 들어온 유대인들은 모든 것을 화염 속에 포기했으나 성서만은 끄집어냈다. 성바울로는 성서를 다 암기했고, 성예로니모는 <성서에 대한 무식은 그리스도께 대한 무식>이라고 말했다.

말씀 자체이신 그리스도께서 말씀으로 이 지상에 오신 것이 성서이고, 그 말씀이 몸의 형상을 취하신 것이 공 성체이다. 나는 이 둘을 모두 제단 위에 모시고 그 앞에 무릎을 꿇는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요즘 우리들 사이에는 성서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번지고 있지만 우리가 성서에 드려야 할 공경은 아직도 멀었다.

나는 기도가 사랑의 경우와 같다고 위에서 말한 바 있다. 그리고 처음에는 토론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말이 많다가 침묵을 지키게 되고, 몇 마디만 말하더라도 이해하게 된다고 했다. 즉, 하나의 몸짓, 응시 따위의 사소한 것으로도 뜻을 전할 수 있게 된다. 서로 사랑하고 있다면 말이다.

말이 많던 시기가 지나면 묵상은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무겁게 된다. 이것이 단순한 기도의 시간이며, 영혼이 하느님과 이야기하는 시간이다. 또한 무미건조하고 고통스러운 사랑의 시간이기도 하다.

이 시기에 내용은 풍부해도 표현은 빈약할 수밖에 없어 똑같은 말을 한없이 되풀이하게 되는 호칭 기도가 시작된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여…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여…> <예수여,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단조롭고 단순한 호칭기도에서 영혼은 거리낌없이 하느님의 품에 고요히 안겨 있음을 느끼는 것은 얼마나 신비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이것이 가장 고상하고 가장 고무적인 기도이다. 우리가 이미 많이 하고 있는 가장 좋아하는 로사리오 기도를 바치는 시간인 것이다.

나는 구라파에 있을 때 로사리오 기도의 찬반(贊反)에 대한 열띤 토론에 참석하는 기회를 가끔 가졌다.

“이것은 묵상기도이다”라고 누가 말했다. 좋다! 그래서 신비의 묵상에서 성모송을 열 번이나 해야 되는 거추장스러운 반복에서 오는 분심을 한탄하는 젊은이들도 이유가 있는 것이다. <신비에 대한 충분한 묵상시간이 필요하다. 그것도 침묵을 통해서!>

“아니다. 그것은 찬미의 기도이므로 꼭 필요하다”라고 어떤 이들이 다시 말했다. 우리는 한 마디 한 마디를 정성스럽게 바치면서 그 신비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하다. 다섯 개나 되는 신비를 하나 하나 생각하며 성모송을 50번이나 외는 동안 어떻게 그 연결을 잃지 않고 기도할 수 있겠는가?

내 일생 동안 – 나는 때로는 참으로 노력을 했지만 – 로사리오 기도를 단 한 번도 분심을 하지 않고 마쳐 본 적이 없다. 그렇다면?

나는 이 사막에서 그것을 깨달았다. 즉 나 자신도 가끔 떠들어댔지만 로사리오 기도에 대해서 거론을 하는 자는 아직 이 기도의 정신을 이해 못했다는 것을.

로사리오 기도는 영혼의 관상적 기도를 조금 앞서거나 혹 동반하는 기도이다.

당신이 무엇을 묵상하던 안 하던, 다소 분심을 하던 안 하던 로사리오 기도를 좋아한다면, 만일 그것을 염하지 않고 하루를 보낼 수 없다면, 그것은 당신이 기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뜻한다.

로사리오 기도는 하느님의 바닷가로 밀려드는 파도소리와 같다. <ㅇㄴ총이 가득하신 마리아여 기뻐하소서…>

그것은 아기의 침대 위에 놓인 어머니의 손과 같다. 인간은 자기의 미약하고 가난함을 받아드리기 위해 기도에 대한 모든 어려운 논쟁을 멀리 할 것이다.

로사리오 기도는 출발점이 아니요 도달점이다. 벨라뎃따에게 있어 이 도달점은 거의 순간적으로 왔다. 그는 성모님을 이 세상에서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기도는 영적으로 무르익은 기도이다. 만일 어떤 젊은이가 로사리오 기도를 바치기를 좋아 하지 않는다면 그는 권태를 느끼기 때문이니 강요할 필요는 없다. 그럴 때에는 사색적인 기도를 하는 것이 더 좋다. 시골의 순박한 사람들, 신앙에 대한 지식은 없으나 마음으로 깊이 체험하고 있는 그들이 잘 이해하진 못하나 로사리오 기도를 바치기를 좋아한다면 기뻐하라. 기도의 영이 그들 마음속에 계시어 함께 기도하시기 때문이다. 로사리오 기도는 상식적인 것만을 찾는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기도이다. 더욱이 우리가 볼 수 없는 하느님께 하루에도 수십 번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는 화살기도를 하는 것도 상식적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 기도이다. 그러나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이니, 지상에서부터 <천국>에 살고 있는 이들에게는 로사리오 기도야말로 가장 완전히 이해되는 가장 아름다운 기도이다.

본래부터 관상적인 기질을 가진 동양인들은 로사리오 기도와 비슷한 호칭기도를 만들었고 그것을 예수의 기도라 부른다.

우리가 흔히 하는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라는 기도를 천천히 반복해 나갈 때 얼마나 깊은 평화로 이끌어 주는지 체험한 영혼은 잘 알 것이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동양인들 정신에 잘 맞는 일종의 영적 훈련 같은 기도이며 그들은 호흡이나 심장의 고동에 맞추듯 자연스럽게 이것을 염한다.

이것에 대하여 나는 <러시아 순례자>란 작은 책자와 러시아 정교(정교)의 계통인 셰브또느(Chevetogne) 수도회 수사의 저서인 <예수의 기도>를 읽고 크게 감명을 받은 일이 있다.

기도의 내용은 지나치게 풍부함에 비해 말이 너무 빈약하기 때문에 묵상은 몹시 무겁고 권태롭게 된다. 전에는 지적(知的) 만족을 얻었던 것이 이제는 무미건조하고 고통스러운 것이 된다. 우리는 자주 내적 생활이 중단되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된다. 우리는 전진이 아니고 후퇴만을 하고 있다고 때때로 생각한다.

  이렇게 될 때 하늘은 그 광채를 잃어버리고 회색 빛 대기가 나를 짙게 둘러싸버린다. 그러나 이때에 우리는 ,신앙의 사막을 전진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게 된다. 영적으로 순수해지는 이때에 좋은 지도자를 만나고, 또 지도하는 대로 자신을 온순 히 맡길 수 있는 겸손한 사람은 참으로 행복하다.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신이 지도를 받는다는 것을 느끼는 교만이 우리 마음속에 뿌리 박혀 있고 또 그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많고 큰 실패가 우리에게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묵상에서 우리가 느끼는 이 무미건조는 어디서 오는가? 영적 사물에 관한 우리의 생각에 마음을 닫는 이러한 반발을 우리는 왜 느끼는가? 그것은 우리가 범한 많은 과실, 무절제한 어떤 애착, 산만함, 좋은 씨를 자라지 못하게 하는 가시덤불이 우리 안에서 자라도록 버려두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묵상에서 당하게 되는 곤란은 하느님을 향한 영혼의 전진, 더 향상된 기도에로 나가려는 표지만은 아니다. 그러나 – 하느님의 은총으로 – 그것은 그러한 표지가 될 수도 있다. 그것을 어떻게 구별하는가?

이것에 대해 십자가의 성요한은 또 위대한 가르침을 주었다. 세 가지의 표지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기도가 산만한 기도가 아니라 관상적 기도에로 나가려는 긍정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1. 상상력의 작용은 흥미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오히려 방해를 받는다.

2. 상상과 감각은 개개의 사물에 대해서 아무런 매력을 느끼지 않는다. 피조물로부터 아무런 위안도 얻지 못할 뿐 아니라 그것이 어떤 것인지 알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3. 영혼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에게만 매력을 느껴 홀로 있기를 좋아하게 되고, 감각적인 쾌락을 떠나 내적 평화 속에서 쉬고 싶어한다.

 

이 세 가지 중에서도 마지막 상태에 있게 된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묵상하는 영혼 속에 이러한 것이 실현될 때 다른 두 가지까지도 가능하게 만들어 준다. 달리 말해서, 만일 내가 하느님의 사정을 묵상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고, 예수의 생애의 여러 가지 진리에 대해서 마음을 기울일 수는 없으나 침묵 중에 하느님 발 밑에 잠잠히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고 혼자 있고 싶어하는 사랑의 갈증을 느낀다면 그것은 위대한 일이다. 그리고 이것은 영적 생활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하겠다.

 

 

8. 관상기도(觀想祈禱)

 

우리는 지금 하느님의 가장 깊은 신비에까지 도달케 해주는 인간에게 허락된 가장 놀라운 계시인 기도가 무엇인지 살펴보고 있다.

예수께서는 잡히시던 날 밤에 이런 말씀을 하셨다.

 

당신들이 나를 사랑한다면 내 계명을 다 지킬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나 대신 다른 협조자를 당신들에게 보내주셔서 당신들과 영원히 함께 계시게 하실 것입니다.

그분이 곧 진리의 성령이신데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들은 그분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이 당신들과 함께 사시며 당신들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요한 14,15-17)

 

다음에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내 계명을 받아들이고 지키는 사람이 바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실 것이고 나도 또 그를 사랑하며 내 자신을 그에게 나타내 보이겠습니다

(요한 14,21)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잘 지킬 것입니다. 그러면 나의 아버지께서도 그를 사랑하시겠고 아버지와 나는 그에게로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입니다.

(요한 14,23)

 

하느님은 세 가지 차원에서 인간에게 자신을 주신다. 즉 자신의 영, 현존, 출현이다. 그런데 인간에게 이 세 가지 선물을 주시기 위해 그분은 인간에게 하나의 조건만을 내보이신다. 즉 <나를 사랑하는 사람.>

하느님을 사랑할 것을 받아들인 영혼 안에는 성삼의 현존과 영의 빛나는 활동이 있다. 하느님 편에서 자신을 나타내 보이시는, 즉 인간에게 자기 모습을 보이고자 하는 최고의 뜻이 들어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피의 대가로 또 성신강림 이후 우리에게 주어진 이 세 가지 현실은 모든 인간의 이상을 초월하는 위대함을 우리에게 부여해 준다. 첫째로는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가장 기본적인 관계인 우리의 기도에 침투해 들어오고, 그 기도를 한 없이 폭 넓게 아니 더 잘 표현해 본다면 천상적인 것으로 들어 높여 준다.

먼저 이 <현존>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자.

<아버지와 나는 그에게로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입니다.>

이 말씀이야말로 우리 영혼 안에 손님이 되어 주시는 성삼의 신비를 가장 잘 나타내준다. 이렇게 해서 이 땅이 하늘이 되는 것이다. 하느님이 이렇게 우리와 함께 우리 안에 계시는데 왜 별 저쪽에서 그분을 찾으려 하는가? 신비에 닫혀있는 하늘은 별이 깔려있는 창공에 지나지 않는다. 그분은 이렇듯 우리 안에 계시므로 언제 어느 때든지 함께 이야기하고 함께 살아갈 수 있으며, 흠숭 을 바칠 수 있는 것이다.

성령은 우리 안에 계신다!

그는 하느님과 우리의 일치를 완전히 굳혀 주시는 분이다. 그는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 일치시키는 분이다. 우리가 성부께 어떻게 말해야 할지를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분, <새로운> 영을 우리에게 불어 넣으시는 분,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이 탄식하며> 지존하신 분에게 간구해 주시는 분, 우리를 하늘의 높이로 들어올리시기 위해 우리의 미약한 노력에 영원한 가치를 주시는 분이다.

내가 마음속에 이러한 스승을 모시고 있는데 <누가 내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겠는가?>하고 어떻게 감히 말할 수 잇겠는가? 내 기도를 지탱하시는 분이 세상의 창조주 성령이신데 – 비록 빈약하고 혀짤배기 같지만 – 어떻게 내 기도의 힘을 의심할 수 있겠는가?

아니다. 나는 내 기도 속에서 나 자신을 찾지 않겠고, 가난한 나 자신에 관해서 회의하지 않겠다. 하느님의 성령이 내 마음속에 계신다는 것을 내 믿음이 발견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또 현존에 대해서, 성령의 활동에 대해서, <계시>에 대해서도 약속하셨다.

<나는 여러분에게 나를 드러내 보이리라.>

서로를 드러내 보이는 것이 사랑의 본능이요, 또 이런 일은 인간 동료끼리의 사랑의 경우에 있어서도 결코 없어서는 아니 된다. 사랑하는 자 안에서 발견해야 하고 알아야 할 어떤 <신비스러운> 것이 언제나 남아있기 때문이다.

또 이분이 하느님일 경우에는 <모든 것>이 발견되어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하느님께 대해서 어떤 명확한 점을 정해 두어야 하겠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알려질 수 없는 존재이다. 우리가 그분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분 자체가 아니다. 안다고 하는 것은 상징이나 부르심 같은 것이지 결코 하느님이 아니다. 하느님을 아는 이는 오로지 하느님 뿐이다. 인간에게 있어 이것은 어디까지나 <신비>로 남아있다.

그러나 하느님은 당신 사랑 때문에 인간에게 자신을 인식시키고, 또 자신을 나타내 보이시고자 하셨고, 그것을 표현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하고자 하셨다. 이 <계시>를 받아들이는 자는 말로가 아니라 다만 체험으로 그것을 알게 될 뿐이므로 그것을 반복해서 표현할 수 없다.

기도하는 법을 배우고자 하는 이는 이것을 알아야 한다.

나는 이 진리를 너무 늦게 인식했기 때문에 그 동안 시간을 너무 많이 허비했다. 그러나 복음 속에 명백히 나타나 있지 아니한가?

나의 기도는 전적으로 나 자신에 달려 있다고, 즉 나의 노력이나 내가 가지고 있는 훌륭한 책이나 하느님과의 대화 때 사용하는 미사여구에 달려 있다고 알고 있었다.

심지어는 나는 자신의 연구와 이성으로써 획득하는 하느님께 대한 인식이야말로 진정한 인식이라고, 유일하게 가능한 인식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단순한 상상이며 껍질일 뿐으로 순수하고 본질적이고 진실하고 초자연적인 것, 즉 하느님의 계시를 흉내 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때는 깨닫지 못했다.

하느님은 알려질 수 없는 분으로서 그분만의 전혀 독자적인 방법으로 모든 언어와 개념을 초월하여 자신을 나타내 보이신다. 그러므로 참다움 기도는 능동적이기보다는 수동성을, 말보다는 침묵을, 연구보다는 예배를, 운동보다는 휴식을, 이해보다는 믿음을 요구한다. 참된 기도란 하늘에서 땅에게, 성부로부터 성자에게, 신랑으로부터 신부에게, 가지고 있는 자로부터 갖고 있지 않는 자에게, 모든 것이 되시는 분으로부터 허무인 우리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라는 것을 나는 확실히 알았다. 그리고 모든 것이 되시는 하느님이 허무인 우리에게 접근하면 할수록 우리에게서는 더 많은 무지가 드러날 뿐이다. 높은 관상생활을 살고 있는 사람에게 우리는 가끔 이런 말을 한다. <그분에 대해서 우리에게 이야기해 주시오.> 이태리의 신비가 중의 한 사람인 폴리뇨의 안젤라의 말을 들어보자.

 

하느님은 영혼에게 자신을 소개하시고, 자신을 드러내 보이신다. 하느님은 영혼이 그전까지는 조금도 느껴보지 못한 은혜를 풍부히 주신다. 은혜를 받은 영혼은 모든 어둠으로부터 벗어난다. 어둠에서 벗어날수록 하느님께 대한 인식은 더욱 밝아져 어떤 방법으로든지 깊이 알고 싶게 된다. 그러나 하느님이 계속해서 그 영혼을 황홀하게 해주시지 않는다면 그는 여전히 그분에 대해서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그 영혼은 스스로 그분을 향해 다가갈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영혼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무엇을 말하고 표현할 아무런 능력도 없기 때문이다. 어떠한 생각으로도 어떠한 지혜로도 그곳에 도달할 수는 없다. 그것은 모든 것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사실 하느님은 어떤 것을 통해서도 설명될 수 없는 분이신 것이다.

성서는 이렇듯이 고상하여 이 세상에서 아무리 지식이 많은 자라도 그 지식이 성서를 초월한 만큼 완전하지 못하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타나심 에서 오는 이 말할 수 없는 천상작용에 대해서는 성서도 조금 더듬거릴 뿐이다 (폴리뇨의 복자 안젤라의 생애(P. Doncoer 역) 중에서).

 

폴리뇨의 복자 안젤라가 말한 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하느님을 위한 우리의 사랑이 더 강하게 될수록 그에 대한 인식이 우리 안에 더함을 느끼지만 그러나 우리는 이 인식의 내용에 대해서 조금도 말할 수 없다. 그것은 하나의 감미롭고 신비하고 개인적이요 불명확한 인식임을 우리는 알지만 그 이상은 한 마디도 보탤 수 없다.

<나는 내 자신을 당신에게 나타내 보이겠습니다.>

하느님이 인간에게 하신 이 계시는 <관상>이라는 기도의 혼이요 결실이요 호흡이요 영원한 생명을 미리 맛보는 것이다. 거기에 대해서 예수 친히 정의를 내리신 바 있다.

영원한 생명은 곧 참되시고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를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 17,3).

 

주여, 잘난 체하는 마음 제게 없삽고

눈만 높은 이 몸도 아니오이다.

한다한 일들을 쫓지도 않고

제게 겨운 일들을 하지도 않나이다.

차라리 이 마음은 고스란히 가라앉아

어미 품에 안겨있는 어린이인 듯

내 영혼 젖 떨어진 아기와 같나이다.

(시편 130,1-2)

 

이런 것이 관상기도의 시(詩)이다. 자기 존재의 근본을 향하여 나아가는 사람은 기도의 첫째 단계를 기어 올라간 후 인간적인 흥미나 자애심을 고통과 영적 무미건조 가운데 정화한 후 무한의 세계의 입구로 들어간다. 거기서는 묵상 자체가 불가능하게 되고 지금까지 흐르듯 나온 말조차 탄식의 말이 되어버린다.

영혼의 이 상태를 어머니 품에 안겨있는 어린이의 상태라는 아름다운 표현으로 요약해도 좋은 것이다. 그것이 또한 예수가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어린이와 같이 되시오. 그렇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마태오 18,3) 그러나 그때부터 영혼은 아주 작게 되고 무엇이든지 하느님으로부터 받는 자로서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아니 그는 이제 하나의 힘을 가지고 있다. 안다는 힘. 그러나…. 그러한 순간에 그것이 그에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인식을 가리는 구름>이란 기도에 관한 책의 작가는 이렇게 말하였다. <천사이건 인간이건 모든 지적인 피조물은 자기 안에 두 가지 중요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인식하는 능력이라 불리는 것, 다른 하나는 사랑하는 능력이라 불리는 것이다. 둘 다 하느님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러나 첫째 능력으로 언제나 하느님을 이해 못하더라고 둘째 능력에 의해 각자에게 다르기는 하지만 하느님을 파악할 수 있다. 그래서 사랑하는 영혼은 그 사랑의 힘으로 창조계의 모든 영혼과 모든 천사를 만족시키기에 족한 하느님을 파악할 수 있다.>

이것은 놀랄 일로 사랑의 기적이다. 그 작용은 결코 그칠 줄을 모른다. 하느님이 끊임없이 그 힘을 새롭게 하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사랑을 받아야 하는 분이지 생각으로 도달될 수 있는 분이 아니다. 사랑은 하느님을 잡을 수 있으나 생각은 그렇지 못하다.

그것은 처음은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이 진리만큼 하느님의 보편성과 하느님의 정의에 적합한 것은 없다. 하느님을 지혜로만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얼마나 의롭지 못할 것인가! 그것은 이 세상의 지자(智者)와 위인에게는 쉬울 것이나 작고 가난하고 무식한 자들에게는 어려울 것이다. 결코 그래서는 안 된다. 그분은 모든 이에게 평등하고자 의로운 방법을 택하셨다. 즉 그 계시는 사랑에서 이루어졌다. 이 능력 앞에 우리는 모두 평등하다.

여왕도 시골 부인도, 식자도 무식자도 하느님은 평등하게 사랑하신다.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 (마태오 11,25)

<여러분은 사랑 속에 머무시오.>

그러면 개념은 어떻게 되는가? 그것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이성의 본성에 모순될 것이다. 따라서 개념은 남지만 이것인가 저것인가 하는 개념은 모습을 감춘다. 올리브 산에서의 사도들처럼 그것은 잠자고 있다.

이것을 우리는 선천적 관상 혹 신비적 관상이라 부른다.

그 관상은 침묵으로 키워진다.

그것은 인식의 방법으로서 개념을 사용하지 않는다.

또한 그 인식은 하나의 새롭고 절대적인 뜻으로 소극적이다.

베긴 수도회 수녀 (12세기 벨지움의 리에즈에서 창립된 수도회의 회원, 재속인(在俗人)의 권리를 보유하면서 수도생활을 하였음) 헤드위크는 말했다.

순수하고 허식이 없는 진리는 어떤 이치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허공 속에 나를 두고 영원하신 분의 단순한 생활에 상응한 자 되게 해준다. 여기서 모든 말은 중단된다. 하느님 말씀을 이해 못한 이는 중개자나 가리우는 것도 없이 모든 이치를 초월해서 자신이 발견한 것을 설명하고자 하나 이는 영원히 헛수고를 하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원한다 해도 나는 무지 그 자체이므로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존재의 밑바닥에 있는 것을 말로 표현할 수 있다고 믿는 이는 자기의 무지를 드러낼 뿐이다.

오 하느님,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무엇 하나 이해 못하고 무엇 하나 보지 못한다는 것은 얼마나 큰 모험입니까! 내가 전에는 무엇을 알았다 해도 나는 지금 사랑에 의해 허무가 되었나이다!

그렇다. 사랑이 우리를 허무로 만들어버렸다. 나는 알고 있고,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허영은 사라졌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참된 영적 어린이가 된 것이다.

 

이 마음은 고스란히 가라앉아

어미 품에 안겨있는 어린이와 같나이다

(시편 130,2)

 

하느님의 팔에 안겨있는 어린이가 되는 것, 즉 침묵 가운데 사랑하며 환희를 느끼는 것, 이것이 기도의 가장 높은 단계이다.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하고 싶다는 윈의 때문에 입을 열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될 때 다음과 같이 하라. 즉 그분께 대한 사랑을 잘 드러내는 하나의 말, 하나의 작은 구절을 선택하고 난 다음 완성된 생각을 만들려고 애쓰지 말고 하느님 앞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라. 그분 앞에 고요히 있으면서, 그 작은 사랑의 말을 반복하면서 모든 것을 맡겨 드려라.

또 너는 이 말이나 이 구절로 너의 사랑을 상징하는 강철로 된 화살로 삼아 하느님을 인식하지 못하게 가리고 있는 두꺼운 구름을 뚫어 보라.

또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마음을 흩어버리지 말고 좋은 생각까지도 쫓아내라.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접근할 수 있는 관상의 가장 높은 단계는 모두 이 어둠 즉 인식 밖의 구름 속에 있다. 또 이것은 사랑의 순수한 비약과 맹목적인 시선으로써 하느님의 적나라(赤裸裸)한 유(有), 하느님 자신에게만 향하게 된다.

그래서 하느님을 목표로 하고 인식 밖의 구름을 뚫고자 하는 눈먼 사랑의 정열이야말로 다른 무엇보다도 당신의 영혼을 윤택하고 고상하게 해줄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과 하늘에 계시는 성인들과 천사들을 기쁘게 해주며, 특히 영적이나 자연적인 우정으로 당신이 사랑하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그들이 죽었든 살아있든 상관없이 유효하게 해줄 것이다(<인식을 가리는 구름>에서)

 

나의 형제여, 이것이 당신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요 또 사막이 내게 주었다는 선물의 내용이다.

형제여, 기도의 단계에 대해서 말한 이 페이지에서 내가 전례적 기도에 대해서 말하지 않은 것을 놀라지 말라. 그것을 내가 잊어버린 것이 아니다. 나는 그것보다는 기도의 이 마지막 단계에 관해서, 너무나 알려지지 않은 이 개인적 기도에 대해서 강조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영성생활을 위해 귀하고 결정적인 이 기도의 <단계>로 영혼을 인도해야 한다.

 

 

9. 길에서의 관상

 

“그러면 모두가 사막으로 가야만 하는가? 사회에서 활동하고 책임을 지는 일, 즉 세상에서의 누룩 역할은 가치가 없단 말인가? 사막은 멀다. 나는 도저히 갈 수 없는 곳이다.”

형제여, 나는 지금 약간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이러한 질문을 하고 있는 당신의 얼굴이 보이는 듯하다. 그리고 당신의 의문도 이해할 수 있다. 솔직하게 이 문제를 해명해 보자.

샤를르 드 푸꼬는 언젠가 이 문제에 대하여 글을 쓴 일이 있다.

<만일 관상생활이 수도원의 울타리 안에서나 사막의 침묵 속에서만 가능하다면 우리는 가정주부들에게 작은 수도원을 지어주어야 하고, 빵을 벌기 위해 도시의 소음 속을 떠날 수 없는 사람들에게도 작은 사막을 만들어주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그가 제일 심각한 위기를 느낀 것은 인류의 대부분이 불행하다는 현실을 깨달았을 때다. 그 위기를 체험한 다음 그는 수도생활에 대해서 가지고 있었던 최초의 사고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샤를르 드 푸꼬는 트라피스트의 수도자였다. 그는 그 당시 트라피스트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시리아의 아크베스 수도원을 선택하여 수도생활을 시작했다.

어떤 날 그는 원장의 지시에 따라 수도원 바로 옆에서 살던 신자가 죽어 그 뒤처리를 맡아 하게 되었다. 죽은 사람은 아랍인 계통의 그리스도교 신자였다. 그는 형편없이 더러운 집에 안치되어 있었다. 샤를르 수사는 그 시체가 있는 방에서 진정한 가난을 보았다. 그 시체 옆에는 굶주린 아이들과 가장을 잃은 부인이 있었는데 그들은 죽음의 슬픔보다는 당장 먹을 빵이 없어 울고 있었다. 이 상황 앞에서 샤를르 수사는 처음으로 심한 영적 위기를 느꼈다. 이 사건으로 해서 트라피스트 수도회를 나온 그는 다른 성소를 찾았다.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예수를 모방하기로 한 우리는 이 주민들이 겪고 있는 시련과 고통과 불안과 가난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너무나 안정된 편안한 이 수도생활을 더 이상 계속할 수 없었다. 나는 내일의 일자리와 빵을 찾는 데 위협을 느끼는 세상의 고통을 같이 나눌 수 있는 가난한 이들의 위안처가 되는 그러한 작은 수도원을 원했다.

오! 예수여, 당신이 우리 가운데 오셨을 때 하신 것처럼 나도 내 자신을 완전히 비우고 나자렛의 당신 집과 같은 작고 가난한 수도원에서 살기를 원합니다  (샤를르 드 푸꼬의 영성적 기록).

 

트라피스트를 나온 그는 사하라의 베니 아베스에, 그 다음에는 뚜아레그족(族)에 의해 그가 살해된 곳인 따만라셋에 그의 첫 형제회를 만들었다. 그 형제회는 그의 뜻대로 나자렛집을 닮았고, 또 세계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많은 가난한 집들과 닮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관상생활을 포기한 것이었을까? 그의 기도정신이 식어버린 것일까? 아니다. 도리어 한 걸음 더 나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길을 가면서도 사실 그는 바로 그 생활을 통해서 관상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물론 한층 더 어려운 일이다.

하느님은 온 인류가 그와 같은 걸음을 걷기를 원하신다.

이렇게 샤를르 드 푸꼬는 <하느님을 만유 위에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하신 주의 첫째 계명을 실제 생활에서 살리면서 많은 사람에게 관상과 활동을 일치시켜 나갈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열어주는 시대의 선구자 노릇을 하였다.

<길에서의 관상>, 이것이야말로 작은 형제들과 모든 가난한 자들을 위한 내일의 약속이다.

그러면 우리가 받은 사명의 수행을 위해서 꼭 먼저 거쳐가야 할 <사막>이라는 것의 요소를 분석해 보자.

우리가 사막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사막을 너의 생활 가운데 살려야 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반드시 사하라니 유대의 사막, 나일의 계곡에 가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일상생활에서 이탈할 수 없는 우리에게는 그러한 사막생활을 실제로 실행한다는 것은 일족의 사치인 것이다. 주님은 나를 진짜 사막으로 인도하셨는데 그것은 나의 굳건함을 믿으셨기 때문이다. 네게 있어 그것은 나의 굳건함을 믿으셨기 때문이다. 네게 있어 그것은 필요한 것이었다. 또 산 더미 같은 이 모래도 나의 영혼의 때를 없애기에는 부족했다. 마치 에제키엘의 가마솥이 그러하였듯이.

그러나 우리 모두는 다 같은 길을 가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당신의 만일 사막에 갈 수 없다면 당신의 생활 가운데 사막을 만들어야 한다.

그렇다. 당신의 생활 안에서 사막을 만들고, 때때로 사람들을 피해서 침묵과 기도 가운데 영혼을 재건하기 위해 고독을 찾도록 하라. 그것은 필요한 일이다. 그것이 바로 당신의 사막에서의 영성생활이 되는 것이다.

하루 한 시간, 한 달에 하루, 일 년에 8일, 필요하다면 그 이상의 시일을 당신 주변의 모든 것을 떠나서 하느님과 함께 고독으로 들어가야 한다. 만일 당신이 그런 것을 찾고 싶지도 않고 좋아하지 않는다면 생각도 하지 말라. 당신은 도저히 관상기도에는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하느님과의 일치를 맛보기 위해 고독하게 되기를 – 원한다면 가능한데 – 원하지 않는다는 것은 잘못이다. 그것은 사랑이시고 전능하신 분과 맺어야 할 친교의 첫째 요소를 결하고 있다는 표시이다. 또 사랑이 없는 곳에 그분이 계실 리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사막만이 결정적인 장소는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우리의 소명(召命)은 길을 가면서 관상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막에서 조금 쉰 다음 또 길을 걸어가야 한다.

내게 있어 그것은 큰 노력을 요구하는 일이다. 이곳 사하라에서 영원히 살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다. 그러나 언젠가 장상의 “까를로 형제여, 마르세이유로 가시오. 모로코로 가시오. 베네쥬엘라로 가시오. 디트로이트로 가시오”하는 분명한 명령이 내려질 것을 생각만 해도 서운해진다.

그러나 당신은 인간들 사이에 살기 위해 돌아가야 하고, 그들과 섞여야 하고, 그 도시의 소음 가운데서 하느님과의 친교를 살려야 한다. 그것이 더 어려울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러면 하느님의 은총이 그만큼 당신에게 부족이 없도록 할 것이다.

매일 아침 미사와 묵상 후 상점과 공장으로 일하러 가 하루의 빵을 얻는 모든 가난한 사람들처럼 당신도 피로에 지쳐 저녁에 돌아와 수도원의 작은 성당에 들어가서 오랫동안 기도할 것이다.

당신은 그 기도 중에, 8시간 동안 일한 매일의 수고와 피로의 보수를 받으면서 괴롭고 어둡고 때로는 죄스러운 이 세상을 당신의 어깨 위에 지고 갈 힘을 얻을 것이다.

<길에서의 관상>, 그것은 아름다운 말이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사막에 머물러있는 것이 분명히 더 쉽고 더 감미롭다. 그러나 그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닌 것 같다. 교회의 소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신비체 의  현실과, 신비체를 위한 사도직의 필요성을 알리기 위해 울려 퍼지고 있다. 그것은 신자들에게 경험에 의해 사랑을 깨달아 관상생활에 들어감으로써 사람 사이에서 증거하고 활동하도록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수도원의 벽은 점점 더 낮고 얇게 변모하고 있다. 세상에 살면서 동정생활을 하는 사람의 수가 점점 더 증가한다. 평신도들도 그 사명을 의식하고 그 영성을 찾고 있다. 그것은 새로운 세계의 여명이다. <길에서의 관상>을 표어로 삼고 실천하는 것은 미사여구가 아닌 실제 모범으로서 영향을 주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관상생활, 특히 그 관상생활이 세상에서 영위될 때, 그 생활의 근본적인 요소가 되는 청빈에 대해서 몇 마디 해야 될 필요성을 느낀다.

청빈은 오늘날 너무나 중요하다.

청빈이란 돈을 갖는다거나 갖지 않는다거나, 얼마나 가난하게 아니면 부유하게 라는 문제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청빈은 하나의 참된 행복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그것은 하나의 존재양식이고 사고방식이며 사랑의 표현이다. 그것은 성령의 은혜이다.

청빈은 이탈이며 자유이며 진리이다.

부유한 그리스도인들의 집에 들어가 보라. 어떤 점에서 이 청빈의 참된 행복이 결하고 있는지를 쉽게 알 것이다. 가구를 비롯해서 그 외의 물건이 모든 집에서 어쩌며 그토록 비슷한지! 그런 종류는 대개 유행이나 사치란 이름으로 갖추어져 있다. 필요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오래 되고 튼튼하고 편리하고 여러 가지 추억을 간직한 탁자가 있어도 그것은 지하실에 처박히게 된다. 그보다는 남에게 멋있는 것이라는 감탄사를 듣기 위해 새것을 들여 놓는다.

이 자유가 없는, 아니 이 유행의 노예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강하게 묶어버리는 악마이다. 그 악마의 제단 위에 얼마나 많은 돈이 낭비되는가! 달리 사용함으로써 얼마든지 선용할 수 있는 돈인데도! 달리 사용함으로써 얼마든지 선용할 수 있는 돈인데도!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무엇보다 먼저 유행이라 불리는 것으로부터의 해방이다. 그렇다. 청빈의 정신은 자유이다.

한 장의 담요라도 유행 때문이 아니라 필요하기 때문에 산다. 빵도 담요도 탁자도 불도 그 자체로 필요하다. 그것을 이용하는 것은 하느님의 계획을 실현하는 것이다. <다른 나머지는 악에서 온다.> 이 진리에 대한 예수의 표현은 그대로 들어맞는다. 이 <나머지>는 유행, 습관, 사치, 애착, 재산, 노예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사람은 참된 것을 찾지 아니하고 남에게 의합하는 것을 찾는다. 사람은 그러한 가면을 필요로 하고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러한 유행을 따르게 될 때 문제는 더 크다. 그 비용이 어마어마한 천문학적인 숫자가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루이 14세 풍이다. 이것은 순수한 바로크 풍이다> 등등.

이러한 유행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책임을 맡은 자들의 집안으로 들어갈 때 문제는 더 크다.

물론 여기에는 변명할 여지가 있으리라. 지난 수세기 르네상스 때부터 바로크 시대까지는 교회의 어떤 우월감이나 하느님의 영광을 높인다는 명분으로 정당화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경향이 참으로 극단의 사치와 허식 가운데 나타났던 것이다.

또 가난한 사람들까지 그러한 경향에 물들어 그 모든 찬란함에 마음을 빼앗겼다. 나는 가난한 내 어머니가 굉장한 주교관 건물과 그 앞에 세워둔 고위 성직자들의 미끈한 자가용차를 그리스도인들의 자랑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을 들은 일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의 사정은 달라졌다. 만일 나의 옛 친구인 주교가 사람들이 자기의 화려한 자가용차에 대한 신자들의 뒷소리를 들었다면 즉시 그는 회갈색의 실용적인 작은 차로 바꾸었거나 혹 자전거로 다녔으리라.

<가난한 자들의 교회>에 대해서 많이 말한다. 그러나 그것이 입술에서 맴도는 말뿐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오히려 이 말의 뜻에 대해서 잘 생각해야 할 것이다.

또한 교회 안의 가난에 대하여 말할 때 그것을 <청빈의 참된 행복>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이 참된 행복은 내적인 덕이다. 그러므로 내 형제 안에 그것이 있는지 없는지 판단할 수도 없고, 또 해서도 안 된다.

많은 재산을 소유하는 자라도, 황금의 제의를 걸치고 있는 교황이라도 청빈의 참된 행복을 가질 수 있고 또 가져야 한다. 그들은 마음으로 가난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 있는 자들을 아무도 판단할 수 없다. 그러나 교회의 가난이란 사회의 가난에 대한 관심과 가난한 자들에 대한 사랑, 가난한 자들에 대한 원조,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문제 등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음의 가난과는 아주 다른 것이다.

교회 안에서 청빈에 대해 말하는 것은 이웃과의 사회적인 관계에 대한 것이다. 즉 고린토 신자들의 생활양식에 대하여 성 바오로가 비난한 것과 같은 모든 가난한 이들까지 자기들의 생활에 대하여 반성해야 할 문제에 대한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갈라진 여러분이 한 자리에 모여서 나누는 음식은 주님의 성찬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음식을 먹을 때에 각각 자기가 가져온 것을 먼저 먹어버려 치웁니다. 그래서 굶주리는 사람도 생기고 또 술에 만취하는 사람도 생깁니다. 각각 자기 집에서 먹고 마시면 안됩니까. 그렇지 않으면 하느님의 교회를 멸시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창피를 주려고 그러는 것입니까?(1 고린토 11,20-22)

 

집세를 지불할 수 없도록 가난한 사람들을 볼 때 당신의 재산이나 재물이 부끄럽지 않은가? 내일 당장 일할 곳이 없어 빵의 곤란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에게, 경제적으로 아무 곤란도 느끼지 못하는 당신이 어떻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겠는가?

참된 행복으로서의 청빈은 진실과 자유와 정의만이 아니다. 그것은 사랑이다. 사랑에 머무는 것이며 그 한계는 무한하다.

그리스도의 가난과 사랑은 이 무한한 한계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예수는 부자가 될 수도 있었고, 그렇게 하는 데에 아무 부자유를 느낄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분은 스스로가 가난한 자가 되셨다. 이 세상의 가난한 이들과 똑같은 모습으로 빵이 없어 굶주려야 하는 딱한 현실과, 아무것도 갖지 못한 자들의 불안한 상태를 함께 체험하고 견디기 위하여 그분은 가난한 자가 되셨다. 그리고 이와 같이 사랑 때문에 스스로 가난한 자가 되는 청빈이야말로 복음에서 말하는 참된 행복인 것이다.

훌륭한 집에 살면서 창고나 찬장이 넘쳐 흐르고, 은행에는 예금이 넉넉할 때 청빈에 대해서나 신심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너무나 쉽다. 그러나 착각해서는 안 된다. 청빈은 청빈이다. 마음으로 가난한 자가 되기 위해서 청빈서원을 하는 것만으로는 넉넉지 않다.

오늘의 가난한 자들의 마음에 또 하나의 걸림돌이 되는 것을 없애기 위해 순결의 문제에 대해서도 언급해야 하겠다. 즉 그리스도인이 바라는 참된 행복의 모습을 더 강조해 둘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율법의 완성은 사랑의 완성에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이 완성은 나의 재산,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에도 미쳐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참된 행복을 알 수 없을 것이다.

만일 내게 사랑이 있다면, 내게 진실한 사랑이 있다면 인류의 삼분의 일이 아사 직전에 있다는 참상을 어떻게 예사로 볼 수 있겠는가?

내가 만일 나의 부유와 안일을 다행으로 여기며 편안히 살고 있다면, 설령 훌륭한 그리스도인이라 불린다 하더라도 천국에 들어가기는 어려울 것이다. 또 오늘날 훌륭한 그리스도인들은 과잉상태에 있으나 정작 세상이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은 성인이다. 경제적 불안정 속에서 당장 필요한 식량이 없어 걱정하면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는 상태에서 가끔 자신을 두는 것이 좋다.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아낌없이 내어주고, 또 특히 전능하신 하느님의 섭리에 생생한 믿음으로 언제나 마음을 여는 용기를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오늘 바로 그렇게 해야 한다.

지금까지 말한 청빈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흥미가 없었을 것이다. 사실 나 자신도 세상에서 살 때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집의 묵은 탁자를 아무 이유 없이 다른 것과 바꾼 것이 바로 나 자신이었다. 나도 <남에게 의합한다>는 거짓 가면 뒤에서 오랫동안 살아왔다. 나도 허영과 사치로 돈을 낭비하기도 했다. 그러한 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잠잠히 있을 수가 없다. 나는 재산의 유혹에 빠지지 않기를 나의 옛 친구들에게 간곡히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유혹은 오늘날 훌륭한 신자들>이 생각하고 있는 이상으로 위태로운 것이다. 사람들을 가끔 혼란케 하는 것은 그 위험을 과소평가하거나 혹 <선을 실천하기 위해>는 모든 것이 허락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재산은 의식할 수 없게 천천히 스며들어 와서는 차츰 성장을 하여 영혼을 마비시켜버린다. 즉 건강한 밀 틈에서 함께 자라는 가라지가 밀 이상이 팰 때 그 이상을 말라버리게 하는 것과 같다. 신심이 두터운 많은 남녀들도 어려운 고비를 다 넘기고 난 후 마지막 완성의 시기에 와서 악마의 희생물이 되곤 하지 않는가?

고독과 기도의 덕분으로 눈이 뜨인 지금에 와서야 나는 관상과 청빈은 나눌 수 없는 것임을 이해했다.

그리스도께서 장엄하게 선언하면서 당신의 생활 안에 살리셨던 청빈정신을 우리 자신 안에 구현할 수 없다면 우리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시고 또 피난을 가셔야 했던 예수, 나자렛에서 노동을 하시던 예수, 또 머리 둘 곳조차 없이 가난한 공생활을 하시다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야 했던 예수와 도저히 친근해질 수 없을 것이다.

이 감미로운 청빈의 지복은 갑자기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일생을 바쳐도 부족할 것이다. 그리고 청빈을 살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기도할 필요가 있다.

불가능을 모르시는 하느님이신 예수께서 우리를 도와주실 것이다. 그분은 필요하다면 비유말씀의 낙타처럼 병든 우리의 가난한 영혼이 바늘귀로 들어갈 수 있는 기적도 해주실 것이다.

 

 

10. 영혼의 정화

 

형제여, 지금 전세계에 유행처럼 떠돌고 있는 주장을 생각해 보자. 그 주장은 이렇게 외치고 있다. <번영하고 있는 구라파와 미국 두 대륙에서 비만증 치료나 미식(미식)으로 나빠진 위장의 치료비로 사용되는 돈을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영양실조에 걸린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사용한다면 그들에게 충분한 빵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탐식이 어떤 인간에게나 얼마나 큰 악습인가 하는 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이 탐식가들 중에는 한다한 지식인, 문화인뿐 아니라 가끔 종교인까지도 끼어있다.

예수는 우리에게 말씀하실 것이다. <….. 지극히 작은 일에 부정직한 사람은 큰 일에도 부정직할 것입니다> (루가 16.,10)

우리가 육신의 양식인 식탁에서 이렇듯이 탐욕적이었다면 영적인 식탁에서는 어떠했을까? 사탄이 그렇게 했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욕심대로 교만하게 하느님의 것을 차지해버리려 했을 것이다.

거듭 말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악에 병들고 균형이 잡히지 못한 감각적인 악한 자이다. 주의하라. 우리 모두가 다 그렇다.

예수는 정확하고 준엄한 판단으로 우리를 책하셨다. <여러분은 비록 악하지만…> (마태오 7,11).

또한 십자가 위에서도 똑같은 말씀을 하셨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소서. 그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루가 23,34).

우리는 악하고 미친 사람이었다!

작은 일에 있어서나 큰 일에 있어서 우리는 악하고 미쳤었다. 소화가 안될 정도까지 먹으면서 우리의 이웃이 죽어가고 있는 것을 모른 척했다. 기도하고 영적 생활을 한답시고.

그러나 천국을 습격하려는 우리의 위험한 걸음걸이를 막고, 우리의 정신상태에 탐식과 비만증이 끼어드는 것을 막기 위해 하느님은 독특한 이 방법을 사용하셨다. 즉 꾸밈이 없는 순수한 신앙심, 기억 없는 희망, 감미로움이 없는 사랑을.

영적 생활의 첫 발을 내디딘 사람은 기도하며 하느님께 일치하여 가는 이 투쟁의 길이 얼마나 험한가를 보고 놀란다. 나아갈수록 사방은 어두워지고, 걸어갈수록 모든 것은 쓰거나 맛이 없어진다. 그러므로 자연히 위로를 찾게 되고 특히 첫걸음을 내디뎠을 때 하느님이 그를 이끄시고 위해 주셨던 기쁨과 희열을 그리워한다. 그는 <그러나 주여, 만일 당신이 좀 더 우리를 도와주셨다면 당신은 더 많은 제자들을 얻었을 것입니다> 하는 어리석은 한탄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느님에게는 이런 소리가 맞지 않는다. 하느님은 당시의 계획대로 매력 대신에 권태를, 빛보다는 어둠 속으로 집어 넣는다. 이때가 바로 우리의 여정에서 진보하는지 퇴보하는지 알 수 없어지는, 아니 오히려 퇴보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되는 때인 것이다.

그러나 그때야말로 참된 투쟁이 시작되는 때이고 또 그 투쟁은 진지해진다. 그렇다! 또한 진지한 그 투쟁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참된 가치를 발견하기 시작한다. 즉 허무, 그것이 자신의 정체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관대하다고 믿었던 것은 이기적인 감정의 오류였다는 것도 발견할 것이다. 종교적 미학(美學)의 위선 속에서 우리는 기도할 줄 안다고 생각했으나 사실은 <아버지> 란 말 한 마디도 할 수 없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우리가 겸손하고, 남에게 봉사할 줄 알고, 온순함을 지니고 있다는 확신은 교만심을 우리 존재의 밑바닥에까지 뿌리 박히도록 했다는 것도 비로소 깨달을 것이다. 이 모든 것 때문에 기도, 인간관계, 사도직이 다 더럽혀졌다. 반드시 보고되어야 할 우리 삶에 대한 결산은 흑자가 아닌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몇몇 특전 받은 영혼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영혼들이 쓰라리고 고통스러운 경험을 하기 위해 불림을 받았다.

이러한 경험은 보통 40대 전후에 일어난다. 말하자면 인생에 있어서의 예배시간이란 위대한 순간이다. 성서적인 순간이면서도 한낮의 악마를 품고 있는 순간이며, 제2의 청춘시기, 진지한 시기이다.

 

사십 년 동안 그 세대에 싫증이 나버려

나는 말하였었노라.

마음이 헷갈린 백성이로다. 내 도를 깨치지

못하였도다 (시편 94,10)

 

그것은 하느님이 <긍정과 부정>의 장막 뒤에 도피하고 있던 인간을 궁지로 몰아넣기 위해 선택한 때이다.

많은 실패와 권태와 어둠을, 더욱 깊은 죄의 환상과 경험을 지나 사람은 자기가 무엇인가를 발견한다. 자기는 가련한 존재로서 연약과 비참과 교만과 인색으로 가득 차고, 항구하지도 못하고 태만하고 불합리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이 비참성은 한이 없고 또 하느님은 우리가 그것을 끝까지, 그 찌꺼기까지 다 마시도록 놓아 두신다.

이 상태에서는 은총의 도움으로 죄를 피하게 되 사람들에게까지도 무서운 현실이 그 모습을 나타낸다. 하느님, 인간, 죄라고 하는 적나라한 모습이다. 영혼은 위험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도 그 줄 밑에 있는 지옥에 자기는 몇 백 번이나 떨어졌을 것이나 하느님의 자비로 그것을 면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가 범할 수 없었던 죄는 하나도 없었다는 것도 깨달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 그것으로 넉넉하지 않다.

숨어 있지만 어떤 것보다도 더 큰 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은 벨테가 말한 득이 있는 나무 즙처럼 사람의 마음에 스며들어 사람의 생활 모두를 병들게 하는 마음의 자세이다.   이 죄는 표면으로 잘 드러나지 않게 가면을 쓰고 작용하므로 긴 세월이 지난 후 겨우 깨닫게 된다. 우리가 보통으로 죄라고 느끼어 고백하는 것들보다 훨씬 중대한 것이다.

나는 지금 대기처럼 우리의 일상(日常)을 감싸고 있으면서 우리의 행위와 의무를 소홀하게 만드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완전히 뿌리 뽑아 버릴 수 없게 깊이 숨어있는 죄로서 나태, 비겁, 거짓, 허영심 등이다. 그것은 기도에까지 숨어 있다. 우리의 존재 어디에든지 깊이 침투하여 많은 해를 끼치고 있는 것이다.

장난하고 희극을 벌이고 능변을 토할 그런 시간들은 이미 지나갔다. 이제 하느님으로부터 피조물을 갈라놓는 심연의 절벽에서 자기의 무지를 알아야 할 때가 왔다.

거기서는 지각할 수 없고 잡을 수 없는 은총만을 보아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의 모든 수단은 어리석었고, 모든 길은 결함 투성이였다. 측량할 수 없는 하느님의 밤이 우리를 에워싼다. 필요하고 지나쳐버릴 수 없는 무서운 고독이 우리를 둘러싼다. 모든 위로의 말은 다 거짓으로 돌리고, 하느님께는 버림받은 것 같은 절망 뿐이다.

고통스러운 이 상태에서 기도도 아무 맛이 없다. 그러나 어느 때보다도 진실하고 참되다. 영혼은 그 고독하고 고통스러운 가운데서 하느님께 속삭인다. 말은 점차로 적어지고 침묵이 온다. 더 깊은 참된 기도의 세계로 한 걸음 한 걸음 나가는 것이다. 인간의 언어에는 한계가 있지만 참된 기도에는 한계가 없다.

그러면 영적 탐욕은 어떻게 될까?

아! 그것은 언제나 남아있을 것이다. 불이 다 타버린 재 밑에 숨어있어 격하지는 않겠지만 더욱 강렬하고 흡인력이 강할 것이다.

이때 하느님은 새로운 위로로 영혼을 다듬어주신다. 이 버림받은 상태에서 사람은 살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가까이 오시어 영혼을 위안해 주신다.

영혼은 그를 감사로 이 받아들인다. 그러나 지금까지 시련을 맛본 영혼은 하느님께 더 무엇을 요구하지 못한다.

그보다는 하느님이 하시는 대로 따르면서 자신을 온전히 맡겨 드린다.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고 하느님만이 모든 것을 하신다는 것을 깊이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제는 진실하시고 굳센 하느님께 지탱되어 확고부동한 자세로 서 있게 된 영혼은 만사가 새로워지고 걸음걸이는 무겁기만 참된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안다.

이제야 사랑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빛이 어둠 다음에 오듯이 또 낮이 여명 후에 오듯이 그는 이제 밝아진 그 길을 갈 것이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다.

 

 

11. 파벌주의(派閥主義)

 

오늘 밤에도 압다라만은 성체조배를 하기 위해 성당으로 가고 있는 나를 따라왔다. 우리는 손을 잡고 함께 이야기하면서 2백 미터쯤 같이 걸었다.

압다라만은 여덟 살쯤 된 어린 회교도다. 내가 <쯤>이라 한 것은 이 지방에는 출생신고를 하는 제도가 없으므로 자기 나이를 정확히 기억하는 이가 아주 드물기 때문이다.

압다라만은 학교에 다니지 않았다. 물이 말라 버린 강 건너에 학교가 하나 있긴 하지만 그곳에 다니는 아이들이란 구라파계의 외국인 자녀들이나 그 지방 유지의 자녀들인 극소수의 모자빋 들이다. 그 아이가 학교에 가지 않는 것은 물론 그의 아버지 알렉이 금하기 때문이다.

나는 어느 날 알렉 에게 자녀들을 왜 학교에 보내지 않는지 물어본 일이 있었다.

알렉은 나를 빤히 쳐다 보더니 대답했다.

“까를로 수사님, 내가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는 것은 그들이 나쁜 아이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죠.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을 보세요. 그들은 기도도 하지 않아요. 부모의 말에도 순종하지 않지요. 그들은 그저 잘 입는 것밖에는 다른 배우는 것이 없어요.”

압다라만은 그 지방의 아이들이 다 그런 것처럼 벌거벗고 있었다. 그래서 햇빛에 익어버린 압다라만의 몸은 가무스름한 색깔로 칠해진 아름다운 작은 상(象, 코끼리)처럼 보인다. 그는 옛날에 노예로 이곳에 이주한 아프리카의 흑인종과 아프리카의 북쪽의 백인종들인 아랍, 벨베르, 뚜아레그 족 중 어느 한 종족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트기임이 분명하다.

압다라만은 회교도로서 이스마엘의 모든 자손들이 그랬듯이 할례를 받았고 또 율법을 엄격하게 지키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 알렉은 신앙심이 강한 친절한 사람으로 자녀들이 많았다. 라마단 달(月)이 되면 따만라셋의 강을 끼고 있는 밭을 계속 갈면서 새벽부터 저녁까지 단식한다.  알렉은 참으로 종교적인 사람이었다. 아브라함의 제삿날도 매년 잊지 않고 기념하여 양을 잡고, 그 기회에 자기 아이들에게도 부드러운 목면의 옷을 사주었다. 하느님께 대한 그의 믿음은 철저하여 극도로 가난하게 살면서도 절대로 남의 것을 탐내는 일이 없었다.  그는 운하를 만들기 위하여 강의 모래밭을 파내는 일을 주로 하면서 일주간에 세 번쯤 물을 주어야 하는 작은 밭을 일구어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한 번은 외인부대가 들어와 알렉의 밭에 물을 공급하는 세기아 운하를 따라 천막을 친 일이 있었다.

자연히 물이 부족하여 알렉의 보리는 마르기 시작했다.

나는 알렉에게 “이렇게 계속되면 당신의 보리는 완전히 말라버릴 거요. 세기아는 당신 것이니 대위한테 가서 천막을 다른 데 치도록 말하시오”라고 충고했지만 그는 강직한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알라는 위대한 신이기 때문에 내 아이들의 빵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겁니다.” 그의 대답이었다. 군인들이 트럭을 씻고 물에 뛰어 들어가 놀고 하는 사이 보리는 정말 말라버렸다.

다시 압다라만의 이야기를 계속해야겠다. 압다라만과 함께 성당으로 가는 가는 길은 해가 지자 바람이 시원해서 산책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했다. 자주 만나면서도 우리는 언제나 할 이야기가 많았다. 서로가 너무나 마음이 맞았기 때문이다. 매일 아침 그는 내 독방 앞에 와서 내가 묵상을 마치기를 기다렸다가 같이 차를 마시고 빵을 먹었다. 그는 특히 내가 만든 빵을 무척 좋아했다. 압다라만은 언제나 식욕이 왕성했지만 결코 무얼 달라고 먼저 말하는 법이 없기 때문에 언제나 내가 눈치껏 먼저 주어야 했다.

오늘 밤 그는 다른 날과 달리 좀 심각했다. 내가 묻는 말에 겨우 대답만 했다. 어떤 중대한 것을 말하고 싶으나 감히 말할 용기가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슬슬 묻기 시작했다.

“압다라만, 오늘 밤 어떻게 된 거야. 왜 말을 안 하지?”

“…………………”

“꾸스꾸스 (북아메리카 음식으로 찹쌀떡의 일종)를 안 먹겠니?”

“…………………”

“아빠께 꾸지람 들었니?”

“…………………”

“페넥이 장에서 도망갔니?”

“…………………”

오늘따라 그는 좀 끈질겼다. 나는 그가 말을 하지 않기 때문에 일부러 화를 내는 척했다.

“말을 하시 싫을 때는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나도 인제 이야기를 그만하겠다.”

내가 일어나려고 할 때 압다라만이 별안간 울음을 터뜨렸다. 그 아이는 몸까지 떨며 울어댔다. 그가 우는 것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커다란 눈물방울이 그의 벌거벗은 가슴과 배 위로 계속 흘러내렸다.

이제는 내가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그가 눈물을 그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나는 그의 손을 꽉 잡았다.

“압다라만, 왜 울지?” 그의 울음이 조금 진정됐을 때 나는 물었다.

“당신이 회교도가 되지 않기 때문이에요.” 나는 먼저 웃음이 터지려고 했지만 꾹 참고 심각한 얼굴로 다시 물었다.

“압다라만, 왜 내가 회교도가 되어야 하지? 나는 그리스도교 신자고 예수를 믿고 있어. 터처럼 하늘과 땅을 만드신 하느님께 기도하고 있는 거야. 우리의 믿음이 같기 때문에 기도도 같은 하늘로 가고 있어. 하느님은 한 분 뿐이셔. 나의 하느님이 또 너의 하느님이시고, 그분이 우리를 만드시고 기르시고 사랑하시는 거야. 그러니까 네가 네 의무를 잘 지키면서 양심을 따라 열심히 살면 천국에 가는 것처럼 나도 하느님이 명하시는 대로 잘 산다면 같은 천국으로 가는 거야. 슬플 일은 하나도 없다.”

“아니야, 아니야.” 작은 회교도는 완강하게 소리를 질렀다. “당신이 회교도가 되지 않으면 다른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처럼 지옥에 가는 거야.”

“누가 그런 말을 했니? 회교도가 아니면 다 지옥에 간다는 말을 한 사람이 누구야?”

“딸렙(코란을 가르치는 교사)이 그랬어. 나는 당신을 지옥에 보내고 싶지 않아.”

우리는 성당 가까이 왔다. 압다라만은 발을 멈추었다. 그가 언제나 그 이상 더 앞으로 나가는 일이 없었다. 성당에서 열 걸음쯤 되는 곳이었다. 그 이상 가면 작은 회교도들을 해칠 무서운 악마라도 있다고 믿는 모양이었다. 어떤 말로 달래고 수단을 써도 그를 움직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나에게 대한 그의 애정은 너무나 큰 것이었으나 이 성당 벽을 넘을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오늘 밤은 지옥이란 무서운 이름으로 그 벽은 더욱 높고 견고해졌다.

“압다라만, 하느님은 선하시기 때문에 우리 두 사람을 다 구원해 주실 거야. 너의 아버지도 물론 구원해 주실 거고. 우리는 모두 함께 천당엘 갈 거야. 내가 그리스도교 신자이기 때문에 지옥에서 벌 받을 거라는 생각은 잊어버려야 해. 나는 네가 회교도이기 때문에 지옥에 간다고 생각하지 않아. 하느님은 아주 선하신 분이다. 그러실 수가 없어. 아마 딸렙의 말씀을 네가 잘못 알아들었을 거야. 악한 그리스도교 신자는 지옥에 간다고 말했을지도 모르지. 이제 안심하고 집으로 돌아가서 너도 기도해라. 그리고 우리 기도할 때 이렇게 말씀 드리자. ‘주여 모든 사람을 모두 구하여 주소서.’ 자, 돌아가거라.”

나는 푸꼬가 친히 지은 흙 벽돌 건물인 작은 성당 안으로 들어왔다. 기분이 조금 우울해졌다. 푸꼬는 모두가 작은 형제가 되기를 바라면서 이 건물을 지었으나 알렉과 압다라만과 같은 무지스러운 광신자에게 피살되었다.

기도하기가 어려웠다. 나의 어린 친구의 단순하고 맹목적인 믿음과 애정은 내게 동요를 갖다 주었다.

가련한 압다라만도 미치광이의 희생물이 된 것이다. 생각이 자기와 다르다는 단순한 이유만으로 인류의 태반을 지옥에 보내려는 종교에 의해 <하느님의 사람들>이라 불리는 그들은 모순된 광신의 희생물일 뿐이다.

이 모든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을까? 나를 다른 형제와 묶어주는 사랑의 끈이 <하느님께 열심해야 한다>는 이유 때문에 끊어지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종교가 일치의 원인이 되는 대신 죽음이나 증오의 구렁텅이가 되어야 한단 말인가? 사람을 갈라놓는 그러한 종교라면 없는 것만 못하다. 그러한 믿음의 빛을 소유하기보다는 어둠 속을 더듬으며 사는 것이 더 유익할 것이다.

성체의 침묵 앞에서 내 가련한 영혼을 집중시키려 애쓰는 한 시간의 기도가 끝났을 때 나는 내 하얀 마후라에 눈물이 흐르는 것을 보았다.

내 영혼을 정화시키기 위해 양심성찰을 할 때 압다라만의 격렬한 파벌의식과는 또 다른 장면이 내 머리에 떠올랐다.

내 어린 시절의 기억이다. 압다라만과 꼭 같은 여덟 살 때의 일이었다. 나는 오래된 종탑이 있는 작은 마을에 살고 있었다. 그 마을 사람들은 종교심은 깊지 않았으나 극히 보수적이고 전통적이었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책을 팔기 위해 이 집 저 집 돌아다니고 있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성서>란 말을 들었다.

마을이 떠들썩했다. 여자들로부터 시작해서 모두 말들이 많았다. 종교적 열성과 또 체면이 깎인다는 의미에서 이 성서판매 행위는 지탄을 받았다.

창문에서 어떤 여자가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더러운 인간, 우리는 당신의 종교 같은 것은 필요치 않아. 빨리 가버려요!”

아이들도 동조하여 나서니 마을 분위기는 살벌하기까지 했다.

그 사람은 파랗게 질려 책이 든 검은 가방을 들고 빠른 걸음으로 마을 가운데로 뚫린 길을 걸어갔다.

한 여인이 방금 받은 책을 그에게 던졌다. 그 남자는 돌아 보지도 않고 몸을 굽혀 그 책을 주워 들었다. 어떤 아이가 던진 돌이 그 남자의 등에 맞았다. 그 남자는 걸음을 재촉했다. 마을 아이들이 손에 돌을 들고 그를 따라갔다. 나도 그 아이들 가운데 있었다.

그날 밤 성당에서는 성모성월이어서 성체강복이 있었다. 주임신부는 본당을 지켜준 신자들의 열성에 대해 고마워하며 우리를 칭찬해 주었다.

그것은 큰 일이 아니었으나 40년이 지난 오늘 밤에 새로운 의미를 가지고 기억에 생생히 떠오른다.

나는 아무 잘못도 없는 약한 사람에게 다만 종교적인 열심에서 돌을 던졌다. 그리고도 고백성사를 보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새삼스러이 그때의 자신을 단죄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당시의 상황이 새로운 사물을 받아들이는 데에 있어 얼마나 폐쇄적이었는가 하는 것을 보고 싶을 뿐이다.

그러나 반 세기가 지난 오늘의 사정은 달라졌다.

세계에는 나날이 새로운 것이 생겨나고 옛 것은 소멸되고 있다. 성령의 기운이 온 우주의 생성작용의 진폭을 넓히고 있다. 묵은 세계가 지나간 자리를 딛고 보다 새로운 세계가 머리를 내민다. 전혀 새로운 느낌, 새로운 요구가 우리를 항상 갈증에 놓아두고 있다. 우리는 새로운 시대의 여명에 살고 있는 것이다.

진리와 사랑이 다시 만나고자 가까워지고 있다. 인간에 대한 존경, 인간에 대한 찬미가 사방에서 울려 퍼지고 있다. 일치의 화목이 그 동안 엉키고 엉킨 매듭을 푼다. 서로를 알고 이해하고자 하는 원의가 자기만의 고립된 성 안에 안주하고 싶어하는 유혹을 극복해 준다.

인간은 이제 처음으로 친밀한 서로의 만남을 바라면서 무기 없이 나아가고 있다. 우정은 인간관계를 올바로 잡아주고 종교전쟁은 과거의 역사로서 깊이 매장되었다.

 

압다라만, 내 사랑하는 아이야! 두려워하지 마라. 우리는 서로 사랑한다. 그러므로 반드시 천국을 기다리지 않아도 언젠가 우리는 다시 만날 것이다.

 

 

12. 나자렛

 

샤를르 드 푸꼬는 귀족출신이었다. 그의 혈관에는 거만하고 명령하기 좋아하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인격에 매혹된 그의 열정은 그리스도께로 끌려오게 되었고,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인격과 생활을 복음에서 찾을 수 있었다.

예수를 완전히 모방하기 위해 예수의 생활을 세부까지 열렬히 파고 들었던 그런 사람은 이 세상에서 다시 만나기가 어려울 것이라 생각된다.

또 충실하고 능동적인 추구를 통해 샤를르 드 푸꼬는 예수가 일개의 가난한 노동자였다는 한 가지 사실을 새로이 발견하게 되어 특히 놀랐다.

여기 대해서 아무도 이의를 다는 이는 없을 것이다. 하느님의 아들이 스스로 선택할 수 없었던 것은 다른 누구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한 어머니와 한 민족을 선택했을 뿐 아니라 사회적 신분도 어떤 직업인이 되는 것도 스스로 택한 것이다.

목수일을 하는 노동자라는 직업이 귀족에게 주는 의미는 내가 느끼게 되는 뜻과 매우 다를 것이다. 샤를르 드 푸꼬에게 있어 노동자라는 사회적 지위를 택한다는 것은 자신을 최대의 겸손으로 낮추는 것이 된다. 그런데 예수는 중동의 작은 부락에서 숨어서 비참한 노동으로 가난한 생계를 유지하며 30년을 보내시고, 마침내는 무명의 죄인으로 처형당하는 것을 스스로 택하시고, 사랑으로 이 모두를 실천하셨다. 이 파격적인 예수의 삶은 개종한 귀족의 심금을 꿰뚫는 것이다.

왜 예수는 율법학자가 되지 않았을까? 그분은 왜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좀더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고귀한 가문에서 태어나지 않았을까?

샤를르 드 푸꼬는 하느님이시고 스승이신 예수가 이토록 비참한 삶을 선택하신 의도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열렬히 탐구하였다.

그 결과 모로코의 위대한 탐험가요 사하라의 신비가 가 일생을 두고 닦아나가야 할 수업이 된 다음과 같은 말을 절규하게 되었다.

<예수는 마지막 자리를 선택했다. 아무도 그 자리를 빼앗을 수 없었다.>

나자렛은 그 지방의 마지막 자리였다. 즉 가난하고 이름도 없는 비천한 노동자들이 빵을 얻기 위해 어려운 노동을 해가며 사는 지방이다.

그러나 아직도 더 놀라운 일이 있다. <거룩하신 하느님>이 그 성덕을 평범한 생활 안에서 실천해 가셨다는 점이다. 그의 생활은 평범한 노동자의 소박한 생활이었다. 뛰어나거나 찬란함이라곤 없이 몹시 단순하여 누구든지 따를 수 있는 그런 생활이었다.

 

하느님 나라의 완전성은 소박하고 단순하여 사람들은 어느새 그것을 경멸하고 흥미를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일반 대중들이 동경하던 것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푸꼬는 나자렛의 빛나는 영적 현실을 발견하자 깊이 감동되어 자신의 생활 안에 그 현실을 옮겨 보려는 노력을 시작했다.

그는 우선 나자렛의 집과 같은 작은 수도원을 설립할 생각을 가졌다. 그리하여 알려지지 않은 궁벽한 마을의 고요 가운데 자기를 감추고 일하는 예수를 모방하는 생활! 이름도 작은 형제들이라 불리는 그들은 가난한 이들과 똑같이 최저의 임금으로 혹사당하면서 세상에서 가장 끝자리를 찾아 다니며 살아가는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나자렛은 그러한 비참한 가난과 억압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나자렛을 모방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아무리 그 가난과 일을 모방하여 살아간다고 해도 인간사에서 피할 수 없는 근심과 증오와 불결과 탐욕과 때로는 실망이 밀려올 때, 이 모방은 쉽게 허물어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될 때 이 세상 어느 곳에든지 너무 많이 보이는 그 비참뿐인 가난한 이들과 조금도 다를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 나는 이것을 생각할 때 복음의 메시지가 얼마나 풍부하고도 완전한 행복을 제시해 주고 있는 가를 다시 깊이 깨닫게 된다. 같은 행위라도 하느님의 빛 아래서 한다면 인간과 가정과 사회생활을 전혀 다른 것으로 변형시키는 것이다.

기쁨과 슬픔, 평화와 전쟁, 사랑과 증오, 순결과 음란, 자비와 탐욕은 인간사회의 피할 수 없는 무서운 현실이며, 이 이율배반적인 상황은 인간의 내부구조마저 갈라놓고 마는 것이다. 매일 부지런히 일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생활은 성인을 낳게 할 수도 있지만 조금만 그 방향을 그르칠 때 악인으로 변해버리는 것이다.

나자렛의 예수는 하루를 성스럽게 살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을 가르쳤다. 하루의 모든 시간을 성부의 뜻을 따라 할 때 드높은 관상생활을 영위케 해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이 되기 위해 꼭 수도원에 들어가거나 자기 생활에 예외적인, 때로는 인간적인 면을 억압하는 이상한 시간표를 만들 필요가 없다. 생활에서 오는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노동도 이 현실의 하나이다. 모성, 자녀교육, 가족들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가정도 이러한 현실의 또 다른 면이다.

우리는 이 현실을 성화해야 하는 것이다. 서원(誓願)을 했다 해서 성인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금물이다.

영적 독서나 기도가 영성생활의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하는 이들, 그래서 일하는 시간이나 사회와 관계를 가져야 하는 귀중한 시간을 등한히 하는 이들은 잘못 생각한 것이다. 이 그릇된 생각이 심한 편견이나 고집으로 굳어버릴 때 빈혈이 심한 발육불량의 종교인들을 만들어 내는 근원이 되는 것이다.

인간은 무엇보다 복음적 메시지를 따라 변형되어야 한다. 무관심해도 좋다는 행동은 인간에게 있을 수 없다. 모든 것이 그를 성인으로 만들거나 멸망케 할 뿐이다.

나자렛은 한 인간, 한 가정의 생활을 이루는 활동의 본거지이다. 그것은 신(信), 망(望), 애(愛)의 정신으로 인간이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최대의 모습을 30년이라는 시간을 통해 보여준 최고의 것이다.

간디도 이 성덕에 관해서 명언 중의 명언을 남겼다.

즉 힌두의 위대한 신비가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손을 세수대야에 집어 넣을 때, 풀무로 불을 일으킬 때, 계리사로서 책상 위에서 숫자를 다룰 때,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시궁창에서 일할 때, 공장의 용광로 앞에 설 때의 수도원에서 기도하는 것과 같은 종교생활을 실현하지 않는다면 이 세상은 결코 구원되지 않을 것이다.>

적당한 수단과 방법과 돈이 없어 복음의 메시지를 전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자들을 위해서는 나자렛의 또 다른 면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

예수는 친히 메시지를 전한 자로서, 그것을 이해시키어 하느님의 계획을 실현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인지 누구보다 잘 알 수 있는 최고의 지혜자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무엇을 하였는가?

그분은 병원을 세우지도 않았고, 고아원을 시작하지도 않았다. 다만 한 백성을 선택해서 그 가운데에서 인간이 되시고, 누구보다 먼저 메시지를 자신의 생활에 옮겼다.

<Coepit facere… (그는 하기 시작하였다.)>

말보다 앞서 표양을 보이시고, 청중에게 설명하기 전에 <모범>을 주시는 것이야말로 예수가 취한 방법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방법을 왜 그렇게 쉽게 잊어버리는가.

많은 경우 선교는 <사실>이 아니고 <말>뿐이요, 개인의 성덕에 대한 관심사가 아니고 피상적인 강의가 되어버린다. 이것은 그 결과의 빈약과 신자들에게는 한탄과 권태만을 주게 된다는 것을 너무나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생명이 없기 때문에 설득력이 없고, 모범이 없기 때문에 생명이 없다. 모범이 없는 것은 신앙과 사랑 대신에 빈 말만을 나열하기 때문이다.

<나는 생활로 복음을 외치고 싶다.> 샤를르 드 푸꼬는 여러 번 말했다. 그는 가장 효과 있는 사도직의 방법은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설교를 듣기보다는 눈으로 보고 싶어 하는 회의적인 현대인들에게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

나자렛은 활동에 앞서는 준비와 기도와 희생의 기간이요, 긴 고독과 정화의 기간, 그리스도인이 되어가는 기간이다.

<사도>는 나자렛에서 나올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도>일까?

<사도>라는 이 단어는 우리 시대에 가장 흔하게 불리고 있다. 사도직이란 말도 분별없이 사용되고 있다. 모두가 사도가 되었다….. 의자 한 개를 옮기는 일도 사도직의 활동이라고 떠들고 있다.

본당이나 교구의 활동에 조금 더 활기찬 리듬을 주기 위해 거창한 말을 사용하는 습관이 생겼는지 모르겠으나 내용은 여전히 변함이 없고 말은 말대로 겉돌고 있을 뿐이다.

나는 <사도>라는 단어의 본 뜻을 분석하거나 <사도직의 분야>라고 부르는 것에 관하여 새로운 문제를 제기할 의향은 조금도 없다. 다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나자렛에 대하여 길게 묵상한 결과이다. 나는 그 고요한 묵상을 통하여 평신도와 사제생활의 차이와, 평신도와 사제의 사도직 사이의 상이점을 더 명백히 느끼게 해주는 광명을 찾았다는 것이다.

나의 시대는 조금 특수한 시대였다. 우리 젊은이들이 무능하고 삶에 대한 자세를 잘 갖추지 못했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현 시대가 지니는 역사적인 특수성도 인정해야 한다. 사실 집에 불이 났다면 여자도 불을 끌 수 있는 것이고 평시도도 주교에게 명령을 내릴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평상시에는 그렇게 할 수 없다. 또 평신도가 보좌신부 노릇을 하고, 사제가 정치에 전념하는 것도 정상이 아니다.

왜 정상이 아닌가?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자면 책을 한 권 써야 할 것이다. 머리를 멍멍하게 만드는 무더위 속에서, 내 독방에서 책을 갉아먹는 흰 개미와 함께 살고 있는 나에게는 나자렛을 생각하고, 예수, 마리아, 요셉의 생활에서 평신도의 영성이라 부르는 것에 대한 근본적인 암시를 찾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이 영성은 사제의 영성의 단순한 모방이어서는 안 된다. 하느님과 인간 앞에서 거짓이 없는 순수하면서도 독창적인 것이어야 한다. 사제의 직무는 정치가의 활동과는 다르다. 주임신부의 직분은 노동자나 가정의 아버지의 일과는 다르다.

영성이란 삶의 방법과 생각을 승화시키고 거룩하게 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평신도들의 영성이 사제나 노동자나 나라의 공무원과는 매우 달라야 한다는 당연한 결론도 나온다.

그것은 근본이 다르기 때문이다. 아르스의 주임신부나 성요셉 카파쏘를 생각하며 이 문제는 쉽게 풀린다.

평신도는 <신부 노릇>을 하기보다는 자신의 신분에 상응한 일과 가정과 복잡한 사회적 관계를 성화해야 할 것이다.

성베드로는 첫째 편지 2장 5절에서 평신도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여러분도 신령한 집을 짓는 데 사용된 산 돌이 되십시오. 그리고 거룩한 제관이 되어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만한 신령한 제사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드리십시오.>

세례를 받은 자에게는 순수한 사제직이 주어졌다는 데 대하여 모두가 동의한다. 본질적으로 신품성사로 주어지는 사제직과 크게 다르다. 그러나 평신도는 이 사제직을 통해 피조물의 세계를 해석하고 살리고 해방시키고 대표하는 것이다.

이것은 극히 중요하며, 이것을 깨닫지 못하는 평신도는 자기 사명을 저버리는 것이다.

노동자는 자신의 일에 있어서 사제이다. 가장(家長)은 가정에서, 공동체의 으뜸은 그 공동체 안에서, 농부는 논밭과 가축 또 들에 널린 온갖 것들에서 사제가 되는 것이다.

우리 시대에는 성 베드로가 편지에서 신자들에게 말한 왕다운 사제직의 관념에 대해서, 또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만한 신령한 제사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드린다>는 말에 대해서 우리가 너무 침묵하고 있었음을 느낀다.

그 때문에 우리는 오늘 평신도 사도직과 교회 안에서 그들의 위치에 대한 개념의 부족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평신도에게 피조물계의 사제이며 자연의 소리이며, 지상의 부(富)를 성화시키는 지상세계의 성인이라는 이 근본적인 특권을 고려해 주지 않는다면 무엇을 평신도의 영성이라 하겠는가?

이 논리가 무시될 때 평신도는 성화의 방법으로 늘 자기 앞에 있는 주임사제를 모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들은 항상 사제들을 <자기보다 영적으로 더 나아갔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렇게 될 때 평신도의 순수한 모습을 잃어버리고 반 사제, 반 평신도의 기형적인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될 때 이들은 본당 안의 열심이 부족한 신자들에게 훌륭한 모범은 될 수 없을 것이다.아직 영성의 제 궤도에 오르지 못한 이들일수록 순수한 영성을 갈망하게 되고, 그리스도인의 생생한 신앙생활을 통해서 세계의 문제까지 해결할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은 멀지만 우리는 쭉 뻗은 대로에 서 있는 것이다. 사제도 평신도라는 것을 인식하고 교회 안에서의 자기의 위치가 어디 있는지를 다시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가톨릭 운동의 앞장을 서는 이들은 우리와 같은 시대의 오류에 빠지지 않기를 원한다. 그 당시에는 사제들이 선거운동에 끌려 다니는 일도 있었으며, 평신도들은 교회의 행정문제로 주교에게 조언을 하는 일까지 있었다.

 

 

13. 마지막 자리

 

내가 <예수의 작은 형제>가 된 것은 하느님이 권하셨기 때문이다. 나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만일 이 길로 들어선 것이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면 나는 이 생활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사막에서의 은둔생활은 낭만적으로 보이기가 쉽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사막지대의 밤의 별빛이란 형용할 수 없이 아름다운 것은 사실이지만 매서운 추위와 모래바람은 그 아름다움을 삽시간에 문질러버린다. 그보다 더 어려운 것은 인간 이하의 생활을 하고 있는 주민들을 방문해야 할 때마다 참아야 하는 구역질 나는 악취와 불결한 집안이다.

이것은 사실 과거와의 절연이나, 문명이 다른 이국에서의 고립된 삶을 받아들여야 하는 시련보다 더욱 어려웠다.

이것을 설명하겠다.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작은 형제는 개인 사업체를 가질 수 없다. 학교나 병원도 안되거니와 소소한 약을 나눠주는 시약소나 자선을 베푸는 것도 금한다. 한 마을, 한 부락민을 선택해서 정착하여 그들이 사는 것과 똑같은 수준의 생활을 해야 하는데 특히 가장 가난한 사람처럼 되어야 한다.

이것은 지금까지 번성해온 구라파적인 수도생활체계와는 전연 다른 생활이다.

지금까지 이곳에 온 구라파의 군인, 선교사, 기술자, 관리들은 토착민 가운데에서 자기들의 생활 양식을 따른 집을 지었다. 그 생활수준도 그 지방의 생활수준이 아니라 자기 나라의 수준을 따르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과제는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고 도와주고 조직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문제까지도 구라파적인 문명과 방법과 사상으로 하였다. 그것은 물질적인 원조가 뒤따르는 가운데 신앙을 증거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것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아프리카와 아시아에는 그러한 사랑과 영웅주의의 행적이 잘 보존되어 있다. 교회, 병원, 시약소, 학교, 사회사업체가 고통을 덜어주고 죽음을 멀리할 뿐 아니라 후진국가의 문명을 촉진시키기 위하여 세워졌었다.

이것은 교회의 큰 선교사업이었고, 이것은 당시의 시대상(時代相)과 사회사정을 고려할 때 식민주의의 섭리적인 사업으로 아주 당연한 활동이었다.

하여간 그것은 백인종의 유색인종 사이로의 침입이요, 가난함 속에 뛰어든 부자, 비신자 가운데로 뚫고 들어간 그리스도인의 당당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 길이 언제나 올바른 것은 아니었다. 선교사가 항상 하느님의 사람이 아니었고, 관리가 관대한 사도가 되지 못한 것처럼 가난한 주님들도 모두 신자가 되지 못한 것처럼 가난한 주님들도 모두 신자가 되고 문명의 혜택자가 될 수는 없었다.

일일이 예를 들자면 얘기가 너무 길어지고 결국 과거를 심판하는 것으로 그칠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다만 최근에 정세가 아주 변하였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뿐이다.

아프리카의 교회들은 이제 그들의 존재를 인식하여 프랑스나 이태리나 화란의 교회를 모방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유색인종은 다만 식민주의를 견디지 못하는 것 뿐 아니라 그에 대한 반발로 백인들에게는 마음을 닫아 버렸다. 신뢰를 잃어버린 그들은 지배했던 종족들에 대하여 경멸과 증오를 푸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경우 사람은 균형을 잃어 잘못을 범하게 되고 과거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면만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지금이야말로 모든 형편을 근본적으로 재고해야 할 때이다.

포교지에 있어서의 교회의 미래활동을 생각할 때 샤를르 드 푸꼬의 업적 안에서 하나의 예언적 행동을 보아야 한다.

하느님의 사람이 그는 여러 가지 문제점보다는 성령의 힘과 빛에 끌려 식민주의가 만연하고 있던 아프리카로 갔다. 그는 아무런 대책도 없이 다만 벨베르족과 뚜아레그족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만 생각하였다. 그는 하느님의 빛 안에서 남이 이해 못하는 것을 이해하는 가운데 식민지 시대가 이미 끝난 것처럼 일했을 뿐이다.

그는 구호물자도 병원도 시약소도 학교도 돈도 없었다. 그는 다만 혼자 아무런 준비 없이 가난한 몸으로 그곳에 갔다.

그는 구라파인의 세력이 병원과 학교에서는 잘 나타나면서도 가난한 아프리카인이나 그들의 종교적인 면에서는 전연 볼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제는 옛날과 달랐다.

샤를르 드 푸꼬는 토착민 자신들은 비록 후진국민이긴 하지만 자기들보다 앞서 있는 문명인들이 믿고 있는 복음이라 해서 받아들여야겠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다른 길을 걸어야 한다. 모든 시대의 길, 복음에서 지시된 길을 걸어야 한다. 그리고 새로운 정화된 힘에 의해서 걸어가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작은 자의 길, 희생의 길, 가난의 길, 묵상의 길, 증거의 길이다.

이 명백한 사실은 토론의 여지가 없고, 또 가난한 나라라도 상관없다. 세력은 공포를 불러 일으킨다. 권세 있고 돈 많고 지배적인 교회는 오늘날 그들에게 겁을 준다.

기술개발로 인해 공포를 느낀 사람들은 아무 준비가 없는 빈약한 것에 오히려 기쁨을 느끼고, 마음을 기울인다. 지금도 웅변가가 큰 소리로 외칠 때 두려움을 느낄 사람이 있을 것이다. 샤를르 드 푸꼬가 얻은 인기의 비결은 여기 있는 것이다. 암살자들이었던 뚜아레그족에게 그는 무기도 없이 갔다. 그는 아랍옷을 입고 아랍 세상으로 들어갔다. 그는 구라파인들의 종들이었던 그들 사이에 살면서 그들은 주인처럼 존경하였다. 그는 기도의 집도 로마식이나 고딕식이 아니라 사하라의 회교사원의 소박한 형식을 따랐다.

가난한 자로서 나타나 그들과 똑같이 입고, 그들의 언어와 풍속을 따르는 겸손한 태도는 종족의 벽을 무너뜨렸고, 평등한 인간 사이의 참다운 대화의 광장을 만들었다.

나는 ‘그리스도를 아직 모르는 자들을 향하여 가라’ 고 하는 그 신기한 사랑의 계획을 극히 단순하게 묘사한 한 장면을 결코 잊어버리지 못한다.

나는 좀 더 고독하게 살기 위하여 어느 사막지대로 말을 달리고 있었다. 나는 그 길 도중에 공사현장을 지나가게 되었다. 50여명의 토인이 공병하사의 감독을 받으며 겨울 동안 비로 망가진 길을 수리하고 있었다. 그들은 뜨거운 태양 밑에서 언제나 변함없는 원시적인 방법으로 묵묵히 일하고 있었다. 더위와 먼지 속에서 온 종일 삽과 곡괭이를 사용해야 하는 일이 얼마나 피곤한 것인지 그들의 모습이 잘 보여주고 있었다.

길을 따라 늘어서서 일하고 있는 그들의 인사에 대답하며 나는 목마른 그들에게 내 물통의 물을 나눠주었다.

그때 내 물통의 물을 마시던 한 사람의 입술에 떠오르던 미소를 잊어버릴 수가 없었다.

땀에 젖은 더러운 누더기를 걸치고 있었던 그는 갈바리오의 고통을 생활에 옮기고, 복음의 비유처럼 밀가루 반죽을 부풀어 오르게 하는 누룩처럼 살기 위하여 이 공사장을 택한 바오로 수사였다.

그의 의복과 수염, 그리고 먼지와 햇빛으로 누렇게 된 회교도의 두건 밑에 있는 얼굴을 구라파인으로 볼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나는 그와 함께 수련기를 보냈기에 그를 잘 알고 있었다.

파리에서 기사(技士)였던 그가 주님의 부르심을 들었을 당시 그는 원자 자료 조사 위원회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는 그 모든 것을 버리고 작은 형제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 여기에 있다. 그가 기사였다는 것을 아무도 모른다. 다른 이들처럼 그저 가난한 사람일 뿐이다.

그의 서원식 때 그의 어머니가 수련원에 왔었다. 그때 그의 어머니의 말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까를로 수사님, 내 아들의 성소를 이해하도록 도와주세요. 나는 그 아이를 기사로 만들었는데 당신들이 노동자로 만들어버렸어요. 이유가 뭐예요? 적어도 내 아들의 기술을 인정해 주세요. 왜 노동자가 되어야만 해요? 어리석은 일이에요. 그가 기사로서 자신의 기술을 발휘한다면 교회는 많은 이익을 볼 것이고 효과도 더 크지 않겠어요?”

나는 대답하였다. “아주머니, 이 세상에는 지혜와 상식으로 이해 못하는 일이 있습니다. 신앙만이 그것을 비출 수 있습니다. 예수는 왜 가난한 자가 되기를 원하셨습니까? 그분은 신성(神性)과 권능을 감추시고 인간 찌끄러기 처럼 우리 가운데서 사셨습니다. 아주머니, 생명 자체이신 그분에게 십자가의 실패, 갈바리오의 망신, 죽음의 치욕이 웬일입니까? 아주머니, 교호가 필요로 하는 것은 또 한 사람의 유능한 기사가 아니고 땅 속에서 썩어버리는 밀씨입니다. 이 밀씨가 하늘과 태양의 열을 받아 생명으로 부풀 때 장래에 수확될 이익은 굉장한 것이 됩니다.”

이 세상에서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이 신비에 차있지 아니한가? 바오로 수사는 모든 것을 희생하고 하느님과 가장 버림받은 형제들을 사랑하기 위하여 자기의 학문과 모든 힘을 쏟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이해한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의 반발도 이해한다. 그의 어머니의 말대로 이처럼 훌륭한 과학도가 사하라의 모래 바닥에서 썩어버린다는 것은 정말 아깝다. 그는 교회를 위하여 더 큰 일을 할 수 있을 텐데…. 아깝다고 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며, 그렇게 말하는 그들은 또 그들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느님의 신비의 일부분인 인간의 신비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어떤 이들은 강력한 수단을 행사할 수 있는 능력 있는 교회를 꿈꿀 것이다. 또 어떤 이들은 가난하고 겸손한 교회를 원할 것이다.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교의 이상을 사상적으로 풍부하게 하기 위하여 생명과 지식과 연구를 바칠 것이며 또 어떤 이들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기 위하여 자신의 지식이나 연구를 희생할 것이다.

이것이 신앙의 신비이다.

바오로 수사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지불하는 것’, ‘꺼져버리는 것’ 으로 만족하였다. 다른 이들은 다른 길을 찾아 다른 방법으로 성덕을 실현할 것이다.

아름다운 성당과 포교사업과 장엄한 예배를 위하여 교회가 언제나 풍부하기를 원하는 나의 어머니의 신앙을 내가 의심할 수 있겠는가?

그의 아들로서 어머니와는 아주 반대로 더 소박한 예배, 더 의식적인 청빈, 특히 가난한 방법에 의한 사도직을 원하는 내게도 그만한 이유가 없겠는가?

남을 판단하기라 얼마나 어려운지! 예수는 이 문제를 너무 파헤치지 말기를 권하셨다. 그러나 언제나 지칠 때까지 주목해야 할 하나의 진리가 있다. 그것은 사랑이다!

가끔 정반대처럼 보이는 우리의 행동을 변하게 하는 것이 이 사랑이다. 율법의 완성은 사랑 뿐이다.

또 만일 바오로 수사가 사막 가운데에서 죽기를 선택한 것이 사랑 때문이라면 그것으로 충분한 구실이 된다.

돈 보스코와 꼬똘렌고가 학교와 병원을 세운 것이 사랑 때문이라면 그것으로 구실이 된다.

성토마스가 일생을 책과 더불어 지낸 것이 사랑 때문이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우리에게는 사랑의 차원이라는 문제만이 남으며 또 이 점에 대해서 예수는 명확히 대답하셨다.

‘당신들 중에서 제일 높은 사람은 제일 낮은 사람처럼 처신해야 하고 지배하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처럼 처신해야 합니다’ (루가 22,26).

‘벗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요한 15,13).

 

 

14. 오, 이 길을 지나가는 자여!

 

따이펟으로 향한 길은 아주 무서운 길이다. 나는 되도록이면 이 길만은 피하고 싶었다. 한없이 꼬불꼬불한 물이 말라버린 강(사하라 사막에 일시적으로 생긴)을 부드러운 모래로 매몰시키기 위하여 삽과 괭이로 바위 투성이 속에 길을 개척해야 하는 이 험한 골짜기보다 몇 킬로를 돌긴 하지만 언제나 이델레스와 이라폭을 지나는 길을 택하곤 했다.

그러나 이번만은 이 길을 피할 수 없었다. 나는 내 모든 용기를 다해서 이 길로 뛰어 들었으나 낮과 밤 사이의 기온의 차를 엄청나게 보여주는 한 주일 동안의 동남풍의 시련만으로도 그 용기는 흔적도 없어졌다.

하늘은 언제나 변함없이 구름 한 점 없이 맑았고, 태양은 아침 8시부터 저녁까지 뜨겁게 내려 쪼였다. 그러나 나는 그것에는 마음을 쓰지 않았다. 내게는 몰고 가는 덜커덩거리는 낡은 차체가 부드러운 모래밭에 한 번 빠지면 그대로 멎어버리는 엔진이 중요한 문제였다.

나는 어쨌든 앞으로 가야만 하였다. 이 길에서 나를 도와줄 사람이 누가 있을 것인가?

전날 밤 따즈룩의 샘에서 실을 수 있는 대로 물을 실었으나 그것도 모두 바닥이 나버렸다. 죽음과 영원한 침묵의 상징인 이 사막에서 나는 무력하기 짝이 없었다.

내가 믿는 건 오로지 이 엔진 뿐이었다. 요란한 진동과 소리가 이제는 아주 익숙해져 버린 이 엔진은 이때까지 한번도 나의 기대를 져버린 일이 없었다. 그러나 오늘은 어떻게 하면 좋을지? 뜨거운 모래뿐인 20킬로나 되는 물이 없는 따이펟 강이 한없이 뻗어있는 이 험한 골짜기를 나는 과연 빠져나갈 수 있을까?

9시…10시…11시…, 달아오른 엔진을 식히기 위하여 잠시 쉰데다가 다행히도 조금 단단한 모래 땅을 발견하여서 이 강 이름과 똑같은 이름의 따이펟 마을이 보이는 지점에 예정보다 빨리 도착하였다. 강 기슭에 있는 이 마을은 옛날 노예가 건설한 아름다운 곳이다.

나는 부드러운 모래 위에 열기가 다시 기승을 부리기 전에 재빨리 길에 올랐다. 더위는 질식할 것만 같았고, 라지에이터의 물은 다시 끓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도저히 오래 달릴 수 없다… 또 사실 속도를 내고 있었던 엔진이 부릉거리다가 멈추어버렸다.

나는 차와 함께 모래에 파묻혔다.

지프차에서 내렸으나 일사병에 쓰러지지 않기 위해 조심해야 했다. 모래에서 차를 꺼내야 하는데 삽을 잡을 힘도 없었다. 어디 그늘이 없는가 살펴 보았으나 물이 없는 강바닥 여기 저기에 댕댕이 덩굴(常春藤) 몇 포기가 있을 뿐이었다. 나는 가까이 가서 그 옆에 앉았다.

그 순간 왜 뜨거운 니니베의 마을 앞에서 햇볕을 피해 댕댕이덩굴 밑에 앉아있던 요나 예언자를 생각하기 시작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성서를 묵상할 시간도 없이 즉시 잠들었다.

내가 잠에서 깼을 때 낮은 웃음소리가 섞인 이야기 소리가 내 옆에서 들렸다.

나의 온 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눈을 떠 보니 따이펟 사람들이 미소를 띠고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들의 이는 어쩌면 그렇게 희고, 그 검은 얼굴은 어쩌면 그렇게도 반짝거리는 것일까!

그들은 약 스무 명이었는데 하던 일을 중단하고 나를 보러 온 것이었다.

그들은 댕댕이덩굴 밑에서 차를 끓이기 위해 불을 피우고 있었다. 그 따끈한 강장제의 음료가 나에게 어느 정도 기운을 회복시켜 주었다.

그들은 내게 꾸스꾸스도 권했다. 나는 지프차에 있던 모든 것들을 그들에게 주었다. 그들에게는 담배가 특히 인기 있는 물건이었다. 낮잠을 잠깐 잔 후 즐거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나 시간은 얼마나 짧은지! 해야 할 일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헤어져야 했다.

그들은 물이 없는 강으로 포가라라 불리는 지하운하를 파고 있는 중이었다. 그 운하는 해면처럼 모래 속으로 스며드는 물을 한 곳으로 모은다. 수확기가 다가온 바싹 마른 밀밭에 물을 대기 위해서이다. 갑작스러운 폭풍이 포가라를 파괴했기 때문에 그들은 그것을 조속히 고쳐야만 했다.

한 주일만 늦어도 수확은 위태롭게 되어 흉작을 면할 수 없다.

나는 큰 도움을 줄 수 없음을 알면서도 며칠 동안 그들과 함께 일을 했다.

이렇게 해서 나는 한 주일 동안 이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과 침식을 함께 할 수 있었다.

그 일은 새벽부터 시작하여 해가 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원시적은 도구로 물도 없는 강 바닥을 3미터 깊이로 단단한 모래 땅을 파헤쳐 운하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었다. 고랑 입구에 구멍을 향해 허물어진 모래를 삽으로 밖에 던졌다.

굴 속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더위에 시달리지는 않지만 매우 불편한 위치에서 일해야만 했다. 어떻든 대단한 노동이었다. 사람들은 일하면서 저녁과 음식과 휴식만을 목이 빠지게 기다린다.

저녁이면 모닥불을 둘러싸고 식사를 했다. 만일 미국의 영양학자들이 이 음식에서 취한 칼로리를 계산하러 와 보았다면 우리가 필요로 하는 최저한도의 칼로리보다 훨씬 부족한 상태를 언제라도 볼 수가 있을 것이다.

그 대신 구라파식의 식탁에는 매우 드물게 나오는 것을 먹는다.

첫날 저녁 우리는 꾸스꾸스와 함게 구운 메뚜기를 먹었고, 다음 날은 제르봐즈라 부르는 작은 쥐를 먹었다. 그 후 두 번을 돕브라 부르는 굵은 도마뱀을 잘라 먹었는데 그 맛이 굉장히 좋았다. 뚜아레그 사람들은 이것을 40여 가지의 귀중한 약재로 사용한다고 했다.

밤에는 오두막 옆에서 한 장의 담요를 덮고서 잠들기 전까지 오랫동안 하늘을 바라보았다.

빛나는 별과 내 앞에 놓인 이 비참한 상황, 그리고 끝없이 전개된 이 우주와 이곳 사람들의 극도의 빈곤 사이에는 무슨 관계가 있을까?

그것은 약간의 방을 얻기 위한 끊임없는 걱정으로, 나날이 새롭게 뜨는 태양을 보는 기쁨까지 빼앗긴 생활이다. 굶어서 죽는 삶, 이것도 동물처럼 비인간적으로 사는 사람들이 당하는 불행과 고통의 신비이다.

이렇듯이 능하시고 이렇듯이 착하신 하느님이 왜 이 복잡한 인간사를 간섭하지 않는가를 묻기에도 이젠 지쳤다. 그 대신에 우리를 쉽게 도와주는 <지상의 신들>, 즉 인간에게 돌아가는 것으로 만족 할 수밖에 없다.

이태리에 있는 제법 많은 내 친구들에게 원조를 청해 볼까? 그들은 이 정도의 운하라면 며칠 안 걸려 팔 수 있는 부르도저를 즉시 보내줄 것이다. 그들은 시멘트의 굵은 관(管)도 보내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견고해진 굴은 말랐던 강이 그대로 홍수로 넘치는 계절이 되어도 붕괴를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여기서 꼼짝하지 않고 별만 바라보고 있다!

나의 태만, 아니 이렇게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 나의 태도를 어떻게 정당화시킬 수 있을까?

이렇게 많은 일과 어려움 앞에서 나의 허약한 팔과 마음은 무슨 소용이 있었는가?

이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더 많은 수단과 방법을 찾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이것이 내가 가끔 제기한 문제이고, 도 가끔 나의 소명을 위해 계속적으로 유혹을 당하게 했던 문제였다.

내 안의 인간상식이 즉시 승리하는 것을 보기 위해서는 내가 살고 있는 신앙의 분위기에서 조금 눈을 돌리기만 하면 된다.

사하라의 길에서 자기 아들의 불필요한 희생을 이해하지 못했던 바오로 수사의 어머니의 상식, 트럭으로 재료를 운반해 주면 따이펟 사람들에게 내가 얼마나 환영을 받을까 상상하는 나의 상식, 돈만 있으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데 이렇게 고생하는 것을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인간들의 상식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러나 복음이 상식 위에 서는가? 온전히 신비 위에 서는 것이 아닌가?

예수가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사랑이신 그분은 모든 병자를 낫게 해주시고, 모든 가난한 자를 배부르게 해주시고, 모든 상처를 고쳐 주시고, 죽은 모든 이를 부활시킬 수 있지 아니 하였던가?

왜 이 세상을 부족하고, 괴롭고, 불의하고, 악한 그대로의 모습으로 넘겨 두었을까?

그분이 라자로와, 야이로의 딸과, 나임의 과부의 아들을 부활시키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모든 이를 부활시키실 의향이 없었다는 증거였다. 물론 그분은 많은 병자를 고쳐 주셨다. 비록 다시 걸린 병은 그대로 버려 두셨지만 지상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토록 잘 해주셨다.

아니 사물은 인간의 상식이 원하고 있는 만큼 명확하지 않다. 또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주의 깊고 예민한 눈만이 지닌 초자연적인 빛을 이용하여 믿음으로만 밝힐 수 있는 크고 깊은 신비가 있다.

그 신비란 예수 자신이시다. 예수를 신비라 하는 것은 하느님으로서의 초월성의 경우만이 아니라 인간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로 오시는 순간에도 그러하다. 하느님의 완전성, 하느님의 전능,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이 <우리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이 되셨다. <우리 가운데 계신> 이 신비는 특히 두 시기에 가장 빛나는 아름다움을 발휘하였다. 즉 베들레헴과 갈바리오에서.

예수님은 이 두 환경에서만큼 인간다웠던 때가 또 없었다. 무능(베들레헴)과 고통(갈바리오)은 피조물, 죄인으로서의 피조물인 인간조건의 본질적인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무능과 고통, 그리스도의 무능과 고통 사이에는 실질적인 차이가 있다. 전자의 경우에는 피치 못할 굴종 가운데 실현되고, 후자의 경우에는 사랑에 의해 자연적으로 실현된다. 예수는 인간 편에 서기 위해 오시고, 인간에게 당신의 무능 속에 살고, 사랑으로 사랑 안에서 고통을 견디는 법을 가르치신다.

그러므로 사랑은 인간의 두 가지 유산의 신비 위에 열린 커다란 창문이다.

예수는 가난 속에 잠기면서 고통으로 억눌린 인간들 사이에 살기를 원하셨다.

그는 인간을 돕기 위한 수많은 방법을 알았으나 그 가운데에서 가장 어렵고 가장 완전한 방법을 선택하셨다. 즉 인간처럼 되어 가능한 한 인간과 꼭 같이 사는 방법을 선택하셨다. <죄 외에는 모든 점에 있어서 우리와 같은 점에 있어서 우리와 같은 처지에 계셨다>  옛날 자기의 상처를 바라보며 잿더미 위에 앉아 우는 욥 옆에서 그의 친구인 신학자들이 그의 처지의 이 <왜> 에 대해서 토론하였다.

마침내 그들은 그를 판단하고 비난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네가 고통을 당하는 것은 네가 죄를 범했기 때문이야> 라는 가시 돋친 말만을 남기고는 가버렸다. 더욱 비참해진 욥은 <나의 난 날이 멸망하라, 사내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멸망하라> 고 한탄하기에 이르른다. (욥기 3,3)

그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자를 돕기엔 신학만으로는 부족하다. 그에게는 다른 희망이 있어야 한다.

내가 예수의 작은 형제가 되기 위해 처음으로 아프리카에 갔을 때 알제이에 있는 옛 친구 집에 며칠간 머문 적이 있었다.

 그때 내 마음은 뛰었다. 그리고 세상이 아주 새로운 빛으로 내게 전개되었다. 그 빛이란 지금부터 샤를르 드 푸꼬가 걸어간 사막의 발자취를 따르려는 나의 마음에서 생긴 직관(直觀)으로부터 파도처럼 용솟음쳐 나온 것이었다.

내 사고방식은, 재정적인 수단과 문명을 풍부히 가지고 남을 위해 무엇을 주고 무엇을 할 용의가 있는 구라파인의 사고방식과는 아주 다른 것이었다. 나는 빈털터리로 아랍인의 옷을 걸치고 가스바의 작은 길에 운집하는 가련한 회교도의 문명 군중 속에 나를 감추고 싶었다.

낮에 성채(城砦)처럼 우람한 집 앞에 늘어서있던 누더기를 입은 사람들의 긴 행렬을 보았다.

각자 손에 반합(飯盒)을 가지고 있었다. 문이 열리더니 깨끗한 흰 수건에 흰 수도복을 입은 수녀가 김이 무럭무럭 나는 큰 냄비를 들고 나왔다.

식사시간이었던 것이다. 이 가난한 사람들은 매일 방 한 조각과 뜨거운 국 한 그릇을 받아가는 것이다.

나는 환상을 보는 것처럼 이 행렬을 바라보면서 가난의 낙인이 찍힌 이 남녀들에 대한 연민으로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려 아프리카의 찬란한 하늘 밑의 마을 광경들마저 흐려졌다.

나는 이 모든 가난 가운데에서 내 위치를 찾았다. 나는 내 하느님께 나를 드리기 위해 나 자신을 비웠다. 나는 가난한 자들 가운데에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모습을 보고, 가장 버림을 받고 멸시당한 내 형제들을 위한 사랑 안에서 영원하신 분과의 일치를 더 발리 발견하고 싶은 원의 때문에 조국을 버렸다.

그래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도 진료소를 열고 이 가난한 자들에게 빵과 문화와 약을 주어야 하는가? 교회의 위대한 복음적 사업 안에서의 나의 위치는 어디일까?

나는, 나를 아프리카로 끌어당긴 그분, 즉 샤를르 드 푸꼬와 똑같은 위치에서 내 자리를 찾았다. 손에 반합을 든 가장 작고 가장 겸손한 그를 나는 이 행렬의 끝에서 본 것이다.

그는 남의 장소를 방해하고 사물을 복잡하게 한 것을 사과하기 위해 거기 있다는 듯이 엷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그때까지도 나는 고통에 대한 공포와, 남의 짐과 십자가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으나 내 자리는 거기에 있다는 것을 똑똑히 느꼈다. 나는 그 무리에 섞여 그들을 따라야만 한다는 것을 이해한 것이다.

교회 안에서 복음을 전하고, 건설하고, 굶주리는 이들을 먹여주고, 설교하는 사명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가난한 자 중에서 가장 가난한 자가 되고, 노동자들 중에서도 가장 비천한 노동자가 되라고 내게 명하셨다.

그렇다. 특히 노동자들 중에서도 가장 비천한 노동자가 되는 것이다. 오늘의 세상은 프란치스코 시대처럼 애긍을 청하는 세상이 아니라 노동과 정의를 찾는 세상이다.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은 모든 종족과 모든 백성의 가난이 유난히 두드러진 세상, 즉 노동을 매일의 희생으로 바쳐야 하는 세상이었다. 그러나 그 노동은 자기가 선택한 노동이 아닐 뿐 아니라 더럽고 노임이 싼 노동이기 때문에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이다.

따이펟에서 한 주간을 묵은 후 따란라셋으로 돌아왔다.

나는 쌓인 피로와 영양부족에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것이라고 느꼈다. 나는 저 가난한 자들보다 더 가난하게 되었다. 그들이 옛날부터 견디어 온 것을 나도 견딜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기도가 필요했다. 예수님 옆에서 마음을 열고 쉬고 싶었다. 그분이 밤낮 현시되어 있는 초가 삼간에 머물고 싶었다. 그에게 간청하고 싶었고, 그분 안에 나 자신을 감추고 싶었다.

특히 나는, 나를 더 작고 더 텅 비고 더 투명한 자가 되게 해달라고 그에게 빌고 싶었다.

그렇다. 내 생애의 마지막 나날을 보내기 위해 따이펟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들처럼> 오막살이 생활을 하는 것이다. <그들처럼> 이 물 없는 개천 위에 돗자리를 깔고, 담요 한 장을 덮고 생활하는 것이다. 우리의 노동을 조소하는 것 같은 이 무자비한 포가라에서 물을 조금씩 퍼 올려 밭으로 보내는 일을 더 계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예수를 공경하고 사랑하며 또 그분을 거역하거나 저주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매 순간의 부족을 즐거이 받아들이기 위해 내 오막살이 집에 숨어계시는 제병 속의 예수를 가진다는 점에서 <이 곳 주민인 내 형제들과는 다른 생활인 것이다>

나는 물기 없는 개천의 언덕 위에서, 누군가가 그들을 사랑하여 또 도와주러 오기를 기다리면서, 이들의 고독을 지켜주는 파수꾼 같은 댕댕이 덩굴의 작은 십자가를 키워갈 것이다.

 

 

15. 착한 이들의 반역

 

내가 성소로서 <마지막 자리>를 선택한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내 생애의 나날을 이 자리에 머물도록 노력하는 일이며, 이것은 무엇보다도 어려운 일이었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해를 거듭할수록 커지는 종기 같은 것이 있다. 이것은 희생자적 근성이라는 악이다. 아무도 이 악을 피할 수 없으며, 영혼은 너무 늦게서야 그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그것도 하느님이 원하신다면 언제든지 근절시킬 수 있다.

희생자적 근성이란 이웃과의 관계에서 정의만을 찾는 구약시대에서 잘 찾아볼 수 있는 인간의 고질적인 태도이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한 가정의 예를 들어보자.

힘든 일은 가끔 잘못 분배되어 가족 중에서도 특히 어떤 사람에게 치중되기 쉬운데 흔히 어머니가 이 짐을 짊어지게 된다.

여러 해 동안 그 짐을 지는 어깨는 수고로 굽어지지만 그 희생의 덕분으로 가족은 평화롭게 살게 된다.

그러나 그 굽어진 어깨 밑에 하나의 마음이 있고, 그 마음속에 희생자적 근성이 조금씩 자라는 것이다. 그것은 침묵의 긴 생활 가운데서도 자라난다.

이렇게 자라난 것은 갑자기 아주 뾰족한 침에 찔려 터지기라도 하면 그 독은 전신에 스며들어간다.

“너무하다. 정말로 너무하다! 나는 이때까지 여종처럼 수고해도 너희들은 본 체도 하지 않았다. 너희들이 놀고 있을 때 나 혼자만 뼈빠지게 고생했는데…”

이런 일은 수도원에서나 신심가들의 단체에서도 볼 수 있는데, 이런 곳에서의 폭풍은 더 심하다. 그래서 건물의 담까지 허물어지는 듯한 위험을 초래한다. 이것이 악한 표양을 주는 때이다. 번진 독은 아주 심하여 사랑 그 자체까지 꺼버리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어머니의 불평이 지당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정의의 관점에서 그 어머니는 자녀들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가족의 다른 이들은 안락하게 살았으나 그 어머니는 그렇지 못했다. 그는 아이들을 위해 일하며 아이들을 키우고 힘이 되어 주었다. 그러나 더 중대한 것이 있다. 그것은 어머니에게 고통을 주었다는 것이다. 어머니를 이해해 주지 않았고 그 희생을 몰라 본 것이다. 아무도 그가 침묵 중에 흘린 눈물을 보지 못했다.

우리 각자도 이렇게 우리의 역사를 이야기할 수 있다. 우리 각자가 이 어머니의 입장과 똑같음을 느끼면서 우리가 누구의 혹 어떤 일의 희생자였다는 것을 생각하는 것은 기묘한 일이다. 애정을 못 느낀 어린 시절을 보냈다. 수고에 대한 충분한 보수를 받지 못했다. 승진 때 불만이 있었다. 장관이 되지 못했다. 무죄했으나 입건되었다. 기침 때문에 이웃간에 결핵환자 취급을 받았다. 주교로부터 인정받지 못했다. 수도원 원장이 되지 못하고 부엌 일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주 놀라운 일은 우리 각자의 이유가 정당하다는 것이며, 내가 말한 것이 바르다고 생각하는 그것이다.

우리가 발버둥치며 사는 인생이 아무리 깊은 정글처럼 얽혔다 하여도, 불의한 사람들로부터 발로 차이거나 권총 세례를 받는 일이란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사소한 불의에 억눌리거나 고통을 당할 때 우리는 그것을 과장하여 희생자적 근성이 주는 황홀함을 느끼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실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다. 또 그것이 견디기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그 고통은 한 인간의 일부분만을 상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깊은 뿌리까지 상하게 하여 미래에 대한 희망까지 꺾으며 심지어는 하느님까지 포기하게 만든다.

매일 내 등에 얹혀 살면서도 오히려 무관심과 또 가끔 멸시밖에 주지 않는 내 형제를 어떻게 참으로 사랑할 수 있는가? 나와 같이 사는 자들이 내 참 인격을 고려해 주지 않고, 내 가치를 몰라주는 그러한 수도원에서 어떻게 참고 살 수 있겠는가? 무능한 장상 밑에서, 나날이 단조로운 그늘 속에 묻혀 나를 가두어 두는 일을 어떻게 열심히 할 수 있는가?

아니다. 그것은 할 수 없다. 사실 나는 사랑하지 않고 또 사랑할 수도 없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고 또 사랑할 수 없다는 그것이 문제이다. 그것이 나에게 불안을 준다.

누가 원하든 원치 아니하든 사랑하는 것은 삶의 목적이며 존재이유이다. 그것은 유일한 기쁨이지만 결코 스스로 만족할 수 없는 기쁨인 것이다.

또 사실 내가 사랑하지 않을 때부터 기쁨이 나를 떠났고, 내 평화 그 자체도 위험 중에 있는 것이다.

잠 못 이루는 밤, 독벌레가 오락가락하는 내 마음 깊은 곳을 침입하는 아픔을 느낀다. 그것이 나를 마비시킨다. 기도하려고 노력하지만 나의 기도는 고통스럽고 뜻이 없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때 하늘로부터 내게 주어지는 응답이 없다고 말할 것이다. 아주 절대적인 침묵은 절규하는 내 소리에 반대한다. 하늘 쪽에도 무언가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옛 법이나 지배하던 공식으로는 하느님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 정의의 하느님은 이제 영원히 정의의 페지를 닫아두셨다. 그 페지는 아름답고 진실되었으나 불완전했다. 그 페지는 특히 그 한없이 위대한 하느님의 폭발적인 힘이 없었다. 또 정의와 진리라는 출구가 없는 죄의 길을 헤맨 인간에게 구원을 갖다 줄 수 없었다. 이 이상의 무엇이 필요한 것이고 또 바로 그것이 하느님 품 속에 과거의 모든 세대에 감추어져 있던 비밀이었다.

예수가 우리 가운데 오신 것이다.

그러나 고향 사람들은 그분을 맞아주지 않았다. 그 거처에서 그분은 마치 속죄를 위한 고양(羔羊)처럼 사막으로 추방되었다.

온 인류가 그를 구타하고 얼굴에 침을 뱉고 그를 미워하였다.

그래서 홀로 무죄하시고, 참으로 무죄하신 예수는 얻어맞고 머리를 드리우셨다. 그는 정의에 호소하는 일이 없이 몸과 마음으로 모든 이의 죄값을 지불하셨다.

그때부터 정의를 훨씬 초월하는 용서와 자비와 사랑의 법이 세워졌다.

갈바리오의 형벌이 있은 후 인간들의 마음에는 평화가 심어졌다. 그것은 필요 이상으로 딱딱한 진리나 법정에서의 재판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를 대신하여 속죄하신 하느님의 갈기 갈기 찢긴 영혼 덕분으로, 즉 예수 그리스도 덕분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희생자적 시대는 끝났다. 예수는 <희생자>들의 왕국을 건설하러 오셨다.

그것은 참다운 희생, 침묵의 희생, 어린 양에 비할 수 있는 희생, 희생되기를 받아들이는 희생, 사랑의 불로써 부정(不正)의 숲(森)을 태워버리는 희생이다.

<하느님께서는 기쁜 마음으로 자기를 주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2고린토 9,7)라고 바울로 사도는 말했다. 희생이란 기꺼이 주는 것을 뜻한다.

하느님은 당신 아들 안에서 기쁘게 주시는 분이시다. 한번 주신 것을 도로 찾아가지 않으실 것이다. 그는 모든 죄를 영원히 용서하실 것이다. 그는 잃어버린 순결을 되찾으실 것이며, 죄인의 바수어진 뼈에 생명을 주실 것이다. 창녀를 마리아 막달레나로, 탕아를 성프란치스코로 변화시킬 것이다. 생명이 죽음을 이길 것이며, 봄은 땅 속에서 활기와 아름다움을 끌어 올릴 것이다.

<나는 세상을 이겼습니다>라고 그리스도는 당신이 희생을 바칠 때 외치셨다. 그래서 고민하는 우리 마음에 기쁨이 되살아날 것이다.

그렇다. 정의를 초월하여 나도 그렇게 할 것이다.

희생자적 근성의 암을 고치기 위해 나는 이 험한 산을 넘어야 한다. 예수처럼 나는 나의 고통의 가파른 길을 허덕이면서 올라가고, 용기를 내어 모든 내 형제, 특히 나의 병든 근시의 눈이 나의 불행의 원인인 것처럼 보는 그 형제들을 만나기 위해 내려와야 한다.

다른 해결이 없다. 그것이 참 평화와 예수와의 일치를 위한 필수조건이다.

나를 변명하기 위해 시간을 낭비한다면 나는 아무 공로가 없을 것이고, 참다운 크리스티아니즘 밖에 있는 것이 된다. 즉 예수를 마음속 깊이 알고 있지 않는 것이다. 나는 변명을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내 앞에서 또 자기 변명을 하는 형제를 언제나 발견할 것이며 또 이 변명은 한없이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용서한다는 것, 참으로 용서한다는 것은 우리가 이유 없이 당해야 했던 손해나 괴로움을 마치 우리에게 마땅한 것처럼 받아들이는 것이다. 더 좋은 것은 그것을 묵묵히 견디는 것이다. 예수가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바와 같이 행복은 정의를 위해 박해를 당하는 자들에게 허락되었다. 약간의 인간적 허영과 교만 때문에 그러한 귀한 순간을 잃어버리는 것은 미련한 짓이 아니겠는가.

만일 우리가 갈바리오로 가시는 예수를 따라 갈 때 그분이 발로 차는 자를 향해 분노하시면서 <내가 누구인지 아는가?> 하고 소리지르시는 것을 보았다면 무어라고 할 것인가.

아니다. 예수는 자신을 변명하기 위해 조롱하는 자들을 뒤돌아 보지 않으셨다. 그는 그를 십자가에 못박은 군중에게 자기가 무엇을 하였는지 자기가 누구인지를 말씀하지 않으셨으며, 특히 그 군중을 지금 당장 지옥에 처형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거나 속으로 미워하지 않으셨다.

예수의 사랑의 새로운 맛이 바로 거기 있다. 그는 그것을 이렇게 잘 가르쳐 주셨다. 루가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이제 나는 내 말을 듣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원수를 사랑하시오. 여러분을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해 주시오. 그리고 여러분을 학대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시오. 한쪽 뺨을 치는 사람이 있거든 다른 쪽 뺨마저 돌려대 주고 겉옷을 빼앗는 사람이 있거든 속옷을 빼앗아도 막지 마시오(루가 6,27-29)

 

예수의 정신은 비교할 것이 없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깊이 간직하는 자로서 그의 정신의 가장 훌륭한 해설자였던 바울로는 하느님과 세상 앞에서 그리스도인이 취해야 할 태도를 설명하면서 필립비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의 마음으로 간직하십시오.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을 같이 하셨지만 억지로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시지 않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모두 버리시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꼭 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셔서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립비 2,5-8)

 

이 말씀이 모든 덕과 모든 완덕을 나타낸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의 마음으로 간직하십시오.>

<이 예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 성부께 순종하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당신 자신을 낮추시고자 하신 그 갈망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걸작품으로서 언제나 남을 것이다. 진리와 정의는 항상 부족하다. 그래서 우리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도록 불리웠다. 예수를 모방하기 위해 낮추고 싶다고 원하면 원할수록 우리 마음이 겸손해질 것이며, 평화가 우리의 생활을 적실 것이다.

결국 지금 말한 몇 마디에 이 세상 사람의 모든 성덕을 해결해 주는 열쇠가 있다.

 

 

16. 불가능이 없는 하느님

 

사막 한가운데서 일어난 사고로 말미암아 나는 다리를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다. 8일 후 의사가 왔으나 때가 너무 늦어 나는 아마 평생을 절게 될 것 같다. 사하라의 오래된 성채 독방 멍석 위에 누워, 외인부대의 군인이 석회로 칠한 더러워진 벽을 올려다 보았다. 45도의 열로 정신은 멍한 상태였다. 나는 기도하고 싶었지만 이런 때에 기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묵묵히 누워만 있었다. 그리고 성체가 모셔져 있을 아랍형의 작은 <굽바>(성당)의 벽 저쪽으로 정신을 모았다. 형제들은 멀리 있었다. 그들은 밭이나 공장에서 일하고 있을 것이다. 무릎이 몹시 아팠지만 텅 빈 방에서 생각이 흩어지지 않도록 애써야만 했다.

나는 지난 알현 때 비오 11세가 우리에게 하신 말씀을 잘 기억하고 있다. <성체 안에서 예수는 무엇을 하시나?> 하고 물어 놓고는 젊은 학생들인 우리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때부터 수년이 지나간 오늘에도 나는 어떻게 대답할지를 모르고 있다.

<성체 안에서 예수는 무엇을 하시나?>

몇 번이나 나는 그 말씀을 생각했던 것일까!

예수는 성체 안에서 꼼짝도 않으신다. 그는 작은 흰 빵으로 고요히 계신다. 세상은 이렇게 그분을 필요로 하는데 그분은 아무 말씀도 안 하신다. 인간들은 그분을 이렇게 필요로 하는데 그분은 꼼짝도 안 하신다. 성체는 참으로 하느님의 침묵이요 하느님의 약점이다.

세상이 이렇게 시끄럽고 어지럽고 동요하고 있는 그 시간에 그분은 빵 속에 묵묵히 계실 뿐이다.

세상과 성체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가고 있다 해도 좋을 것이다.

무한이라 해도 좋을 만큼 서로 멀어져 있다.

그러므로 우리도 세상의 행진에 휩쓸려 들지 않기 위해서 용기가 필요하고, 그 흐름을 거슬러 성체께 가서 묵묵히 경배하기 위해 신앙과 의지가 필요하다.

어제는 갈바리오의 무능이요 패배이더니 오늘은 성체의 무능이요 패배인 것처럼만 보인다.

이것을 믿기 위해서는 아주 순수한 신앙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 약하고, 못박히고, 낮추신 예수는 불가능이 없는 하느님이요, 알파요, 오메가이며, 시작이요, 마침이다. 묵시록에서 요한이 묘사한 것처럼.

 

거기에는 흰 말이 있었고 ‘신의’와 ‘진실’이라는 이름을 가진 분이 그 위에 타고 계셨는데 그분은 공정하게 심판하시고 싸우시는 분입니다. 그분의 눈은 불꽃 같고, 머리에는 많은 왕관을 썼고, 그분밖에 아무도 알지 못하는 이름이 그분의 몸에 적혀 있었습니다. 그분은 피에 젖은 옷을 입었고, 그분의 이름은 ‘하느님의 말씀’이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늘의 군대가 희고 깨끗한 모시옷을 입고 흰 말을 타고 그분을 뒤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분의 입에서는 모든 나라를 쳐부술 예리한 칼이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분은 친히 쇠 지팡이로 모든 나라를 다스릴 것입니다. 그리고 전능하신 하느님의 분노의 포도를 담은 확을 밟아서 진노의 포도 주를 짜낼 것입니다. 그분의 옷과 넓적다리에는 ‘모든 왕의 왕’, ‘모든 군주의 군주’라는 칭호가 적혀 있었습니다. (묵시록 19,11-16)

 

 

예수는 불가능이 없는 하느님으로서, 불가능이 없는 것이 그분의 특색이다. 나의 무능은 하느님의 능력을 잘 드러내고 나 <피조물>의 빈약함이 창조주의 존재를 더욱 뚜렷이 한다.

옛날 욥이 자기가 처해있는 비참 때문에 하느님과 논쟁하려고 했을 때, 하느님은 신뢰의 행동을 요구하셨고, 그것을 얻기 위해 창조의 위대성을 보라고 하셨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하라.

누가 그 척도를 정하였는지 네가 아는가?

누가 거기 줄을 그었는가?

그 주초는 무엇 위에 세웠는가?

그 모퉁이 돌은 누가 놓았는가?

아침 별이 함께 노래한 그때 (욥기 38,4-7)

 

 

오늘의 피조물은 하느님께 하나의 의견도 줄 수 없다는 무능과 비교하여 창조주의 전능을 드러내는 이 유명한 이야기보다 복음서에 있는 예수의 말씀이 더 감동적이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 나가기가 더 쉬울 것입니다 (마태오 9,23)

 

 

사막의 길을 낙타가 지나가는 것을 볼 때마다 예수의 이 표현을 생각하고 미소를 금할 길이 없다. 왜 말이나 소 따위에 비교하시지 않고 혹이 있는 낙타와 비교하셨을까!

그렇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기는 과연 불가능하다.

창공을 창조하시는 것은 분명히 위대한 능력이 있는 표가 되지만,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 나가게 하는 것은 더 능한 일 같다. 거기 참으로 불가능이 있기 때문이다.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놀라 ‘그러면 구원받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고 소리 지르자 예수께서는 ‘그것은 사람의 힘으로 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무슨 일이나 가능하십니다’ 하고 조용히 대답하셨다” 겟세마니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성부께 예수는 “당신은 모든 것이 가능하십니다” 라고 하실 것이다. 전능이야말로 하느님의 특성이다.

그러나 미소하고, 미약하고, 비참하고, 무력한 것 그것은 참으로 내 것이다. 또 나는 그것만은 이렇게 많이 가지고 있기에 그것을 무엇에든 사용해야 할 것 같다.

이 거대한 자본을 가치 있게 이용해야 하겠다. 때로는 거대한 면적을 점령하기 위해 인간이 이 세상에 나타났을 때와 거의 때를 같이 해서 이 세상에 가져온, 죄라고 하는 황토도 하느님의 전능이 어떠한 형식으로라도 이용하신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피로, 노쇠, 병, 오류, 죽음 등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약점이 나를 억누르고 낮출 뿐 그 이상의 힘은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이 세상의 쇄암(풍화작용으로 생긴 암석의 파편)이 아무 소용이 없단 말인가?

악이 사랑의 하느님의 패배로 남을 것인가?

나는 밤에 양심성찰을 할 때 생각과 말과 행위로 지은 죄, 또한 자주 의무를 소홀히 한 죄를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적극적인 요소의 골자로 본다.

비록 내 영혼이 어떤 균형을 잡고 의식적으로는 하느님께 거역하지는 아니했다고 잠시 인정하더라도 나의 사랑을, 더욱이 아주 무능하다는 것을 인정할 때 무한히 작고 비참해지는 감정을 억누를 수가 없다.

카다에게 주기를 거부한 담요에 대한 생생한 기억이 언제나 내 머리에 스치고 있어 완전한 사랑의 행동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거의 기계적으로 하게 된다.

기도생활에서도 같은 불가능을 느낀다. 하느님의 도움 없이 내 힘으로는 “아빠, 아버지” 라는 말조차 할 수 없다는 이 현실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하느님이 우리 무능의 극단의 한계점까지 우리를 끌어 당기는 그때, 우리는 철저히 우리의 허무를 이해할 것이다.

여러 해 동안 나는 나 자신의 무능과 약점에 대해 투쟁해 왔다. 너무나 가끔 나는 그것을 감추고, 대신 자신 있는 사람의 가면을 쓰고는 남들 앞에 나타나곤 했다.

나의 교만이 무능을 거부하였다. 그러나 하느님이 조금씩 그것을 나에게 깨닫게 해 주셨다.

지금 나는 더 이상 투쟁하지 아니한다. 가면이 없이, 꿈도 없이 있는 그대로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노력한다.

거기에서 비로소 한 걸음 진보가 있었다고 나는 믿고 있다. 교리 책을 암송하면서 배웠을 때 만일 내가 그것을 알았더라면 이미 40년 전에 이만큼은 진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 나는 내 약점을 하느님의 전능 앞에, 나의 죄 더미를 그분의 자비의 태양 밑에, 나의 미소한 구렁텅이를 그의 위대한 심연에 두고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하나의 만남, 그와의 일치, 그분의 사랑의 충만을 알았다. 그렇다. 나의 비참이 그분의 전능을 끌어당겼다. 내 상처가 큰 소리로 그를 부르고, 나의 허무가 그분의 모든 것을 풍부히 다시 받을 수 있게 했다.

하느님의 모든 것과 인간의 허무 사이의 이 만남에서 창조의 가장 큰 불가사의가 있다.

그것은 가장 아름다운 일치이다. 자신을 주는 무상의 사랑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무상의 사랑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결국 그것은 하느님과 인간의 모든 진리이다.

또한 이 진리를 받아들이기에는 겸손이 있어야 한다. 그 때문에 겸손 없이 진리가 없고, 진리 없이 겸손도 없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비천한 여종의 처지를 돌보셨습니다” (루가 1,48) 라고 마리아는 자기 허무 위에 하느님의 본질적인 모든 사랑이 넘치도록 내려진 것을 보았고, 사람이 되신 말씀의 거처와 음식이 된 것이라고 말했다.

하느님의 모든 것을 끌어당기는 마리아의 이 허무는 얼마나 신기한지!

하느님으로부터 이렇듯이 멀리 있는 자기를 의식했던 마리아의 기도 속에 얼마나 큰 감미로움이 흐르고 있는가! 겸손이 있는 거기 다만 승낙뿐만 아니라 사랑의 요구도 있는 것이다.

자기 중심을 떠나 자기를 돌보지 않는 사랑하는 자의 위대성과 완전성에 대하여서만 명상하면서 황홀한 행복 가운데에 하느님께 의탁하는 것은 얼마나 평화스러운지!

이 이상 더 완전한 관계가 없다. 또 마리아는 어지러울 정도로 손이 닿지 않을 정도의 높은 곳에서, 하느님의 이슬로 적셔진 경건한 영혼이 가장 완전하게 받아들이는 모범을 우리에게 주었다.

이렇게 나는 수 년이 걸려 이 세상의 모든 우리의 문제를 해결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내 무능 전부를 손으로 만져 보았다. 사실 그것은 은혜였다.

나는 믿음과, 희망과, 사랑 속에서 하느님의 전능을 관상했다. 그리고 그것도 은혜였다.

하느님은 모든 것이 가능하고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러나 나의 기도를 통해 나의 허무를 사랑 속에서 하느님께 드릴 때 모든 것이 내 안에 가능하게 된다.

카다에게 담요를 주지 않았기 때문에 이기심에 눌려 연옥에 갇혀 있었던 큰 바위 밑에서의 사건을 나는 생각하고 있다.

그때는 완전한 사랑의 행위로 이룩한 갈바리오까지 예수를 따르고, 십자가 위에서 그를 위해 죽는다는 것은 내게는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몇 천 년이 지나도 그 상태가 변하리라고는 생각 못했다.

그러나 나는 복음에서 말하는 부자였기 때문에 나에게는 불가능해도 하느님에게는 아주 가능했다.

또 그분은 나를 변화시킬 은혜를 내게 주실 것이며 불가능을 변하게 하여 하늘 나라와 나 사이에 버티고 있는 바위를 들어낼 힘을 주실 것이다. 

나를 위해서는 기다리는 겸손과, 신뢰의 기도와, 그것을 인내롭게 거듭하는 일, 희망을 갖는 것 등이 문제이다.

그러나 불가능을 모르는 하느님은 나의 사랑의 호소에 귀를 막지 않으실 것이다.

 

 

17. 밤은 나의 연인

 

5년 전 사하라에 도착했을 때 나는 밤을 좋아하지 않았다. 구라파적인 생활양식에 너무 젖어 있었기 때문이다.

밤은 낮의 노동을 쉬게 해주는 때이지만 어떤 사람들은 낭비처럼 느낄 것이며,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불면이나 권태를 주는 괴로운 때일 것이다. 아무튼 모든 것은 인공적인 조명 하에서 전개되는 일들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사정이 다르다.

밤은 무엇보다 먼저 휴식, 참 휴식의 때이다. 해가 지면 자연은 소리를 그치고 하느님의 명령에 복종하듯 갑자기 동작을 중지한다.

온 종일 미친 듯이 소리 지르면서 우리를 따라다니던 바람도 즉시 잠잠해지고, 대기는 맑고 기온은 쌀쌀해진다. 세상과 사람과 낮과 태양과 더위가 모두 휴식에 들어가 주위에는 큰 평화가 넘친다.

그렇다. 이곳의 밤은 다른 곳과는 다르다. 밤은 자연의 아름다움과 신비성을 고스란히 지닌 채 고요히 침묵한다. 하느님이 창조하신 그 처음처럼 선(善)과 생명이 넘쳐흐르는 것이다.

그 가운데에서 일을 끝낸 사람들은 한 장의 담요 아래 누워 따뜻한 모래의 열기를 느끼며, 저주스럽도록 뜨겁고 끈끈한 바람이 아니라 피곤을 씻어 주는 산들바람을 힘껏 들이 마시며 잠이 드는 것이다.

이때야말로 기도에 가장 좋은 때이다. 나는 천막을 떠나 모래언덕 위로 간다. 유유히 흐르는 시간….. 나를 방해하거나 귀찮게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만 평화와 침묵이 있는 가운데 시간을 온전히 나의 것이 된다. 하늘의 별은 더욱 빛나고, 기도와 침묵 속에 마음은 풍요롭다.

사막에서 별을 본 사람이 아니면 그곳에서의 별이 어떤 것인가를 상상할 수 없다. 인공적인 조명은 전혀 없는 밤의 빛은 순전히 별 뿐이다. 멀리 뿌유스름한 박명아래 하늘과 땅이 맞닿은 지평선이 보이는데 온통 별빛이 땅으로 내리 쏟아질 것처럼 눈부시게 반짝인다.

하늘의 이 찬란한 빛에 천막의 약한 불빛도 흡수되어 버린다. 그 불 위에서 차(茶)가 끓여지고 빵이 구워진다.

나는 그 신비스러운 밤을 며칠 동안 보내고는 고향으로 급히 천문학과 천도(天圖)에 관한 서적을 청했다. 몇 달 동안 나는 이 우주의 심연에 쌓여 흠뻑 별빛에 취하며 자유로운 사색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모든 것이 기쁨이요, 기도의 소재가 돼주었다. 모래 위에 무릎을 꿇은 나는 아름다운 밤의 신비에 번번이 취해버렸다.

사막에서는 낮보다 밤이 더욱 정확한 방향을 제시해 준다. 별의 덕택이다.

처음으로 뚜아레그족의 천막이나, 기상 관측소를 찾아가던 나는 대낮의 태양의 열기와 모래바람 속에서 방향까지 잃어버려 헤매야 했다. 그런 때에는 더 이상 애쓰지 말고 밤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별의 정확한 방향은 잃어버린 길을 되찾게 해주는 훌륭한 안내판 구실을 해주었다.

사하라의 밤은 또한 영혼의 안식처다. 낮의 상상할 수도 없게 뜨거운 열기와 요란스러운 바람은 영혼의 문이란 문을 모두 열러 젖혀 태양 아래 바싹 메마르게 한다. 피곤을 느낄 뿐이다.

그러나 밤이 되면!

고요 속에 제대로 문이 닫혀진 영혼의 내부는 평온하게 되며, 주위를 조용히 관망할 수 있는 여유를 갖는다.

나는 사하라의 별이 빛나는 밤을 잊을 수 없다. 휘황한 별빛으로 점철된 밤은 내 가장 다정한 친구였다.

그렇다. 사랑의 빛으로 생명에 휴식을 주는 친구인 밤.

그 밤에 나의 내적 활동은 아주 장애 없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그 밤은 나의 내적 세계에 성숙과 풍요의 기쁨을 가져다 주었다.

친구인 밤은 내 영혼을 무한한 안식으로 이끌어 주었다. 밤은 내 편안한 작은 집이었다. 이렇게 몇 시간이고 머무르면서 시간이 모자란다는 걱정도 할 것 없이 내 안과 내 밖에 있는 진실들을, 하느님의 말씀을 상징하는 이 모든 것들을 깊이 생각하고 싶었다.

또한 사물의 정체를 감추어버리는 밤은 믿음의 상징이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보증해주고, 보이지 않는 사물을 확증해 주는 것” (히브리 11,1)이라고 바울로에 의해 정의된 하느님의 선물이다.

영원하신 분과 나와의 관계는 밤의 엄숙한 별빛 아래에서 더욱 잘 드러난다. 찬란한 빛으로 둘러싸인 무한한 공간에서 잃어버린 한 점에 불과한 내 미약한 존재가 환히 드러나는 것이다.

공간에서 잃어버린 한 점에 불과한 내 존재, 믿음의 밤은 나의 친구이며 별들은 하느님의 증거자 들이었다.

나의 믿음이 약하고, 종교적인 체험도 노력도 부족하던 때에는 이 모든 것이 이해될 수 없었다. 밤은 그저 두렵고 불안한 존재였다. 허나 밤하늘을 내 것으로 소유하게 된 지금은 바로 거기에서 믿음과 기쁨을, 바다 위를 거침없이 항해해 나가는 듯한 벅찬 희열을 맛본다.

밤의 어둠은 결코 두려운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어둠이야말로 초자연적인 신성이 깃들여 있어 기쁨을 준다.

때로 나는 눈을 감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별들은 제 자리에서 나의 영혼에게 천국을 증거하기 위해 반짝이고 있다. 나는 잠시 동안 어둠의 필요성을 새삼 느끼게 된다.

그렇다. 어둠은 필요하다. 우리가 하느님의 너무나 강한 빛에 상처를 입지 않기 위해 믿음의 암흑이 필요하다.

하느님에 대한 신비스럽고 냉철한 발견이 믿음이 될 수 없다. 하느님의 생명이 발전함에 따라 차차 그를 발견하기 위해 필요 불가결한 것이 곧 믿음이다.

“아무도 죽지 않고서는 하느님을 볼 수 없다” 고 성서는 말하는데 그것은 죽음의 문을 거치지 않고서는 하느님과 얼굴을 대할 수 없다는 뜻이다.

첫째 단계인 이 지상생활에서는 하느님의 신비의 빛은 이렇게 깊고, 인간성의 한계는 이처럼 얕아서 나는 조금씩 그 한계를 뚫어 나가야 한다. 처음에는 상징을 통해서 그 다음은 경험으로 그리고 지상에서부터 하느님의 사랑에 충실 한다면 “관상”을 통해서 이것은 서서히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큰 빛을 바라보도록 영혼의 눈을 적응시키려는 시초에 불과할 뿐이다. 그렇지만 하느님의 무한성이 거기 현존한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진보는 끝없이 계속할 것이며, 신비는 언제나 거기 남아있을 것이다.

사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에 무수한 유성(流星)이 산재하듯 현실에서 우리가 하느님의 이 신비를 발견하고 의식하고, 그 안에 들어가 관상하고 받아들이고 사랑하지 아니한다면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생활은 무엇인가?

“우리는 그분 안에서 숨쉬고 움직이며 살아간다” (사도행전 17,28)고 감히 말할 수 있겠는가?

신비는 하나 뿐이다. 이 신비에 모든 것이 달려 있고 그것을 우리는 피할 수 없다. 그리고 모든 공간을 채울 만큼 한이 없다. 인간의 아무리 큰 발전도 이 신비의 껍질을 벗길 수가 없다. 수천 년이 지나가더라도 “숨어 계시는 하느님”이라고 이미 이사야 예언자가 힘있게 표현했고 또 하느님 친히 불타는 숲 앞에서 무릎 꿇고 있었던 모세에게 “나는 존재하는 자”(출애굽기 3,14)라 선언하신 그 이상의 아무것도 보태지 못할 것이다.

아마 하늘은 현대인보다 아브라함과 유목생활을 하던 그 족속에게 더 밝고 친밀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신앙은 현대의 기술자보다 중세의 시인에게 더 쉬웠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과 하느님과의 위치는 변할 수 없고, 그 관계 역시 언제나 꼭 같을 것이다.

 각 개인에게 일어나는 일이 온 인류에게 일어나는 수도 있다. 사람이 성숙함에 따라서 감정과 시정(詩情)에서 탈피된 믿음이 요구된다. 그러나 지상의 마지막 날, 인간을 위한 그 길은 언제나 같을 것이다. 즉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다름아닌 우리의 믿음입니다”(요한 5,4).

하느님은 인간에게 당신께 신뢰하는 행동을 요구하시고, 이 행동은 창조주께 대한 피조물의 진정한 복종을 나타내는 것이다. 즉 겸손의 행동이요 사랑의 행동이다. 이 신뢰의 행동은 전능하신 분에 대한 믿음이며, 그 부성(父性)의 무한한 사랑의 바다를 알고자 하는 우리의 목마름을 채우는 것이다. 또한 하느님의 신비스러운 계획을 받아들이고, 하느님 말씀을 듣는 조용한 태도이며, 기다리는 마음이며, 지상의 인간이 응당 지녀야 할 사랑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만일 교만으로 인해 믿음의 좁은 길을 멀리하고, 하느님께 등을 돌리고, 별들의 증거 앞에서도 눈을 감는다면 어떠한 해결이 있겠는가? 우연하게 신비의 인식이 얻어질 수 있을까? 우리의 밤을 비추기 위한 빛이 다른 곳에 또 존재하고 있을까? 결국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느님과 말씀과 성체에 대한 것이 아니더라도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 물질적인 세계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죽은 후에는 어떻게 될 것인가? 남아있는 짐승들은 어떤 고통을 받을 것이며 사물들은 또 어떻게 될 것인가? 안드로메다 성운(星雲)에 어떤 변화가 생기고, 죽어가는 작은 영양(羚羊)은 어떻게 될 것인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거의 아무것도 없다. 게다가 그 조금 알고 있는 것마저 너무나 불확실하고 상대적이라서 가장 단순한 원인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새로운 발견을 할 때마다 “이제 겨우 그것을 알았는가?” 라는 말을 듣는다면 우리는 불안으로 질식할 것이다.

이것을 생각할 때 예수님의 훈계는 더욱 귀하게 여겨진다. “여러분이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믿음에 대해서 내가 말한 것은 모든 사람을 위해서도 마찬가지로 진실되다.

하느님의 선물인 이 현실 앞에서 아무도 빠져 나갈 수는 없다. 그러나 이 현실의 진가를 알기 위해서는 우리의 노력이 요구된다.

하느님은 배와 노를 우리에게 주시면서 말씀하신다. “이 노는 네가 저어야 한다.” 우리가 적극적인 믿음의 행위를 할 때, 그 행위는 믿는 그 능력을 훈련하는 것이 된다. 마치 체조로써 근육이 강화되듯이 그 훈련은 조금씩 믿는 능력을 강하게 한다.

다윗은 골리앗과 싸울 것을 결심했을 때 그 믿음이 강해졌다. 기드온은 주님께 양털에 이슬을 내리게 하는 기적을 청했을 뿐만 아니라 강적을 거슬러 몇몇 군사와 함께 전쟁을 일으킴으로써 그 믿음을 행동화하였다.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을 희생하는 순종의 행위를 둘러싼 어둠을 끝까지 받아들임으로써 믿음의 거인이 되었다.

성바울로는 히브리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옛사람들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인정을 받았던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믿음을 가지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서 더 나은 생명을 누리려고 석방도 마다하고 고문을 달게 받았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조롱을 받고 채찍으로 얻어맞고 심지어는 결박을 당한 채 감옥에 갇히기까지 하였습니다. 또 돌에 맞아 죽고 톱질을 당하고 칼에 맞아 죽기까지도 했습니다. 그리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몸에 두르고 돌아다녔으며, 가난과 고난과 학대를 겪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이 세상이 살 만한 곳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광야와 산과 동굴과 땅굴을 헤매어 다녔습니다.” (히브리 11,2.35-38)

 

 

그런데 믿음으로 살았던 모든 사람 중에서도 초인간적인 성숙에 도달한 뛰어난 두 사람을 볼 수 있다.

구약과 신약의 경계선에 살고 있는 이들은 하늘도 숨을 죽이고 두 사람의 대답을 기다렸을 정도로 위대한 소명을 받았다. 그 두 사람은 마리아와 요셉이었다.

마리아는 말씀의 어머니가 되어야 했다. 하느님의 아들에게 당신 육체와 뼈를 주어야만 했던 것이고 또 요셉은 예수가 당신 아들이라는 것을 모든 이가 믿도록 마리아 옆에 서서 이 신비를 감추어야 했다.

이 두 사람에게 있어 믿음의 밤은 다만 어둠만이 아니고 고통도 포함된 것이었다.

마리아의 약혼자인 요셉은 마리아가 잉태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 아이는 자신의 아이가 아니었다.

잉태한 아이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신비스러운 말 외에 이 약혼을 납득시킬 수 있는 말이 또 있겠는가?

요셉에게 믿음이 없었다면 어떠한 설명도 그에게 평화와 평정을 되돌려줄 수 없었으리라. 그러나 그의 믿음은 그의 영혼을 평온하게 해주었다.

허식이 없는 고통스러운 그의 믿음만이 이 위대한 사람에게 힘이 될 수 있었다. 하느님의 어머니 곁에 서서 그와 운명을 같이하고, 그 사명에 완전히 한몫 낄 수 있게 해주었다.

고통을 피할 수 없는 인간이지만 통고의 어머니란 이름을 받게 될 부인의 배필이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아기가 태어나셨다!

물론 몇몇 천사가 이 모든 어둠을 조금 없애주기 위해 왔으나 하늘은 얼마 있지 않아 더 큰 암흑으로 가려졌다. 한 마을의 모든 아이들이 이 아이 때문에 학살당해야 했으며, 요셉과 마리아는 피신하는 도중에 베들레헴 부인들의 울부짖음, 그 피의 난장판을 목격해야만 했다.

왜, 왜 전능하신 분은 침묵을 지키고 계실까? 왜 헤로데를 죽이지 않으셨을까? 아니다.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그래서 이집트로 피난 가 귀양살이를 하고, 도망자가 되고, 잔인과 불의가 승리하도록 버려두어야 한다. 이렇게 영원히 하느님은 자기 아들 옆에 부른 사람들에게 쉬운 길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이렇듯이 순수하고 생활한 믿음을 요구하셨기에 아주 겸손한 이들만이 그분의 부르심에 응할 수 있었다.

외아들의 모습으로 자신을 감추신 하느님으로서 30년을 지낸 생활은 어떠했을까? 그분과 함께 먹고, 마시고, 이야기하고, 힘들여 노동하는 것을 바로 곁에서 보며 살 수 있었던 행복은 어떠했을까?

이 모든 것은 평범하고 단순하였다. 그래서 다른 가정에서 흔히 생기는 일로 순례 중에 아이들 잃어버리기까지 하였다. 아무도 목수의 아들이 하느님의 아들이란 사실과, 말씀이 사람이 되셨으니 두 번째 아담이요, 땅에 내린 하늘이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오, 하느님, 이 얼마나 눈부신 믿음입니까!

마리아, 요셉, 당신들은 참으로 또 영원히 믿음의 스승이요, 완전한 모범입니다. 우리는 당신을 통해 우리의 행동을 비춰 보고, 잘못을 고치고, 우리의 약점에 힘을 얻어야만 합니다.

그 옛날 당신들이 예수 옆에 계셨듯이 지금은 우리 옆에서 우리를 영원하신 분에게 데려가 주시고, 일에 있어 우리는 작고 가난하다는 것을, 귀양살이에서의 인내를, 생활에서의 겸손을, 시련에서의 용기를, 기도에의 충실을, 사랑 속에 열망을 가르쳐 주소서. 

우리가 죽는 시각이 올 때, 우리의 친구인 밤이 가장 아름다울 때가 되게 해주시며, 또한 예수께서 우리 지상에 오실 때 밤하늘에 빛났던 별이 우리를 위해서도 빛나도록 해주소서.

 

 

역자의 말

 

<사막에서의 편지>의 저자 까를로 까레또 는 이태리의 가톨릭 운동의 기수로써 이름난 인물이다. 특히 젊은이들에게서 많은 호응을 받으면서 교수생활을 하던 그가 돌연 사하라 사막으로 잠적하였을 때에는 사회를 꽤 놀라게 했다.

그는 사하라 사막에 은둔하여 샤를르 드 푸꼬의 작은 형제회의 한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의 복음을 살고자 했다.

이 책에서는 특히 그가 사막에서 체험할 수 있었던 그리스도교적 애덕과 신념과 가난이 자연주의에 대한 초자연적인 주장으로 잘 드러나고 있다.

더욱이 시대와 국가를 초월하여 그리스도교적 가난의 탁월한 모습으로 살아간 작은 형제회의 샤를르 드 푸꼬의 정신이 잘 드러나고 있어 그를 알고 싶어하는 현대인들을 위해 한국말로 옮겨본 것이다.

불어의 유려하고 섬세한 표현이 얼마큼 우리나라 말로 표현될 수 있었는지 모르나 그리스도인의 삶을 충실히 살아간 저자의 정신과 신앙이 우리 믿는 이들의 신앙생활을 풍요롭게 채워주기를 바랄 뿐이다.

 

역자, 신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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