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eld of dreams, trancending time & place, autobio in progress..

 

Carlo Carretto at the Hermitage Beata Angela in Spello in the summer of 1971 – Wikipedia

 

Born

2 April 1910

Alessandria, Piedmont, Italy

Died

4 October 1988 (aged 78)

Spello

Nationality

Italian

Occupation

Little Brother of the Gospel

Known for

Catholic Author

 

까를로 까레또 지음

신상조 옮김

 

사막에서의 편지

1976년 초판

1979년 중판

 

성바오로 출판사

 

CARLO CARRETTO

Lettere dal deserto

 

LA SCULOLA EDITRICE

 

 

 

차례

 

머리말

 

1. 큰 바위 밑에서

2. 당신의 사랑은 판단 받을 것이다.

3. 당신은 아무것도 아니다.

4. 누가 세상을 인도하는가?

5. 마음의 정화

6. 기도를 향한 길목에서

7. 기도의 시간

8. 관상기도(觀想祈禱)

9. 길에서의 관상

10. 영혼의 정화

11. 파벌주의(派閥主義)

12. 나자렛

13. 마지막 자리

14. 오, 이 길을 지나가는 자여!

15. 착한 이들의 반역

16. 불가능이 없는 하느님

17. 밤은 나의 연인

 

역자의 말

 

 

머리말

 

하느님의 부르심은 신비스러운 일이다. 그 부르심은 신앙의 어둠 속에서 들려오기 때문이다. 또한 그 목소리는 아주 가늘고 조심스러워 전적으로 내적 침묵이 요구된다. 그러나 이 지상에 사는 인간들에게 그보다 더 결정적이고, 더 마음을 뒤흔들어 놓으며, 더 믿을만하고 강력한 것은 없다.

이 부르심은 끊이지 않는다. 하느님은 언제나 우리를 부르고 계신다. 이 부르심을 듣는 때야말로 우리가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해 대답하도록 특별히 선택 받은 순간이며, 우리 인생의 비망록에 기록할 만한 순간이며,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아니 될 순간이다.

하느님의 첫 번째 부르심을 나는 열여덟 살 때 느꼈다. 바로 그때 나는 나의 소명을 결정하였다. 그 당시 나는 시골 어느 마을의 교사였는데 사순절 때 그 지방민을 위한 피정이 있었다. 나도 거기 참석하였었으나 시대의 뒤떨어진 지루한 강론이었다고 기억된다. 하여튼 그 강론은 나의 무감각과 과오를 조금도 일깨워주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죄를 고백하기 위해 늙은 신부님 앞에 무릎을 꿇었을 때 (그분의 맑고 순박한 눈길이 지금도 선하다) 나는 내 영혼의 깊은 곳에서 하느님이 지나가심을 느꼈다. 그날부터 나는 내가 그리스도인인 것을 느꼈으며 나의 인생이 바뀌었음을 알았다.

두 번째 부르심은 내가 스물 세 살 때에 있었다. 나는 결혼할 생각이었으며 내게 다른 길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나는 우연히 한 의사와 알게 되었는데 그는 나에게 교회에 대해, 또 이 세상에 살면서 교회에 봉사하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라는 얘기를 해 주었다. 그와의 이야기가 있은 후 며칠 동안 나는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모르겠다. 나는 머리 속에서 동요하는 생각의 소용돌이를 멋대로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다가 조용한 성당을 찾아가 기도를 드렸다. 그러자 전에 내가 신부님에게서 고백성사를 받았을 때 들었던 것과 같은 그 목소리가 들렸다. “너는 결혼하지 말고 너의 삶을 내게 바쳐라. 그러면 나는 영원히 너의 사랑이 될 것이다.”

나는 결혼을 포기하고 하느님께 나를 바치는 일이 어렵지 않았다. 내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변화하였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나의 생활을 그처럼 충족시켜 주신다는 데 한 젊은 아가씨에게 열중한다는 것이 내게는 오히려 이상하게 보였다.

열심히 일하고, 감격하고, 여러 사람들과 만나고, 큰 꿈을 키우는 동안 몇 년이 지나갔다. 그러나 내 안에서 아직도 정화되지 않은 채 타고 있는 난폭한 정열은 여전히 많은 과오를 범하게 하였다.

또 여러 해가 흘렀다. 그 동안 나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던 그 소리를 다시금 듣게 해 달라고 하느님께 빌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볼 때 나 자신도 놀랐다.

나는 마흔 네 살이 되었을 때에 그 소리를 다시 들었다. 그것은 나의 전 생애의 가장 엄숙한 부르심이었다. 즉 관상생활에 대한 부르심이었다. 그것은 밤이 절대적으로 우선하는 인간의 힘이 더 이상 개입할 수 없는 신앙의 가장 깊은 곳에서 들려왔다. “모든 것을 버리고 나와 함께 사막으로 가자. 나는 더 이상 너의 활동을 원치 않는다. 너의 기도를, 너의 사랑을 원한다.” 이번에도 나는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또 “예”라고 대답했다.

내가 아프리카로 떠나는 것을 보고 어떤 이들은 내가 절망의 위기를 맞아 도피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완전히 잘못 본 것이었다. 나는 낙담과 체념을 모르는 낙천적이고 희망에 넘치는 성격의 소유자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야말로 결정적인 부르심이었다. 1954년 성 까를로 축일의 저녁기도를 바치는 동안에 나는 그것을 확실히 깨달았으며 그때 나는 “예”라고 대답했던 것이다.

“나와 함께 사막으로 가자. 너의 활동보다 더 위대한 생활인 기도가 있다. 말보다 더 큰 효과가 있는 사랑이 있다.”

그래서 나는 사막으로 떠났다. <예수의 작은 형제회>의 규칙도 읽어보지 않은 채, 샤를르 드 푸꼬 가 누구인지 알지도 못한 채 그 수도원에 들어가 그의 제자가 되었다.

“여기 너의 길이 있다”고 말한 그 소리를 들은 것만으로 충분했던 것이다.

예수의 작은 형제들과 함께 사막의 길을 따르면서 이 길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알았으며, 푸꼬 신부를 따르면서 나의 길을 잘 달리고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그러나 내가 이 모든 것을 기록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

내가 수련생활을 하기 위해 엘 아비오드 시디 세이그 에 도착했을 때 나의 수련장은 20년간 사막에서 지내온 사람다운 더할 수 없이 침착한 태도로 내게 말했다. “까를로, 이제 끊어야 할 때가 되었다.”

나는 이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았다. 그래서 비록 그것이 내게 무거운 고통을 주는 일이었지만 끊어버리기로 결심하였다.

나는 가방 속에 친구들의 주소가 적혀있는 주소록을 갖고 있었다. 그 안에는 수천 개의 주소가 들어있었다. 그러나 주님은 인자하시어 우정의 기쁨을 결코 빼앗아 가지 않았으며, 내 인생의 작은 배는 참다운 사랑의 물결 위를 항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약간의 아쉬움이 있었다면 아프리카로 떠나 오면서 그들 각자에게 왜 내가 그들을 버리고 하느님의 부르심에 순명 했는지 설명할 수 없었던 점이며, 또한 비록 다른 곳에 있더라도 사도직을 하는 가운데 그들과 함께 투쟁을 계속할 것이라는 나의 뜻을 전할 수가 없었던 점이었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그 <단절>을 나는 하느님께 대한 깊은 신뢰와 용기로써 단행하였다.

나의 과거와 연결된 마지막 사슬과 같은 이 주소록을 태우기 위해 나는 피정 중의 어느 날 모래 언덕 뒤쪽으로 갔다. 사하라의 바람이 불어와 타버린 재를 날려버리자 속에서 미처 다 못 타고 남은 검게 그을린 노트의 형태가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주소록을 태우어버리는 것이 우정을 파괴함을 뜻하는 것은 아니며, 또한 누가 나에게 그것을 요구한 적도 없었다. 오히려 그와 정반대였다. 사막의 무인지경에서 나는 다른 어느 때보다도 나의 옛 친구들을 사랑하였으며 또한 그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였다. 나는 기도 속에서 그들의 모습을 다시 보았으며, 그들의 문제점과 고통을 직관하였으며, 이 직관은 그들과 떨어진 거리 때문에 더욱 날카로울 수 있었다.

그때부터 나의 친구들은 영원히 나에게 속하는 아주 순한 양떼가 되었으며, 나는 매일 그들을 기도의 샘으로 인도해야만 하였다. 나는 엘 아비오드의 아랍식 성당에 들어갔을 때나, 얼마 뒤에 푸꼬 신부님이 친히 지은 따만라셋과 아세그램의 유명한 초막에 들어갔을 때에도 내 주위에 함께 있는 그들을 생생하게 느꼈다.

기도는 나의 가장 크고 고된 일과가 되었으며, 소명을 통하여 우리의 기도 속으로  <다른 이들을 데려간다>는 말의 뜻도 이해하게 되었다.

또 몇 년이 지난 뒤 기도는 시간을 허비하는 것이 아니며, 사랑하는 자들을 돕기 위해서는 그보다 더 완전한 형태의 활동이 없다는 명백한 확신을 얻게 되었다. 나는 나의 임무대로 처신하였다고 말할 만하였던 것이다.

이미 태워버려서 주소록을 갖고 있지 않다는 문제가 있었으나 친구들과 소통하는 데는 다른 방법이 있었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었다.

나는 저녁 해가 질 무렵이면 사하라의 장엄한 경치 속에서 그들과 만난다. 1948년 9월의 잊을 수 없는 밤에 성 베드로 광장에서 우리 모두가 만났을 때처럼 지금도 모두와 만나는 것이다. 당신들도 그 일을 기억하리라 믿는다.

이곳은 등불이 필요 없을 만큼 하늘이 별빛으로 환하게 빛나고 있으며, 우리는 모래 위에 둘러앉아 지난 여러 해 동안의 흘러간 여정과 겪어온 시련을 밤새껏 얘기한다. 우리가 아직 얘기를 끝내지도 않았는데 벌써 새벽 별이 나타나 우리를 내려다 본다.

나는 이 <사막에서의 편지>에서 그러한 상황에서 말하고 싶었던 얘기들, 나 자신의 일부분이라고 분명히 느껴지는 그런 얘기들을 쓰고 싶었다.

사하라가 내게 준 가장 큰 선물이었던 기도의 주변에서 고독을 먹고 영글은 몇 가지 단상들을, 체계도 없고 별로 중요하지도 않겠지만 한 번 엮어본 것이다.

사랑하는 나의 옛 친구들이여, 내가 이 글을 쓴 것이 잘한 것인지 못한 것인지를 말해 줄 사람들은 당신들이다.

하지만 이 글이 적어도 한 가지 일에는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우리의 우정의 밑바닥에 깔린 문제를 새로운 체험에 비추어 다시 생각해 보는 데 도움이 되리라 믿는 것이다.

 

당신들의 작은 형제

까를로 까레또

 

 

 

 

1. 큰 바위 밑에서

 

태양의 하얀 궤도(軌道)가 하나의 불확실한 선을 그으면서 내 앞에 펼쳐졌다. 모래 위에 패인 대형 급유차의 바퀴자국 때문에 지프차 행들을 꽉 쥐었는데도 자꾸만 몸이 흔들렸다.

태양은 중천에 떠 있었다. 나는 벌써 피곤을 느꼈다. 지독한 열기다. 라디에이터의 물도 벌써부터 끓어올랐으나 바람이 식혀주어 차가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자주 시선을 지평선에 주었다. 이러한 지대에 큰 화강암 바위가 모래 위에 솟아있어 선선한 저녁 때까지 텐트를 치고 쉬기에 알맞은 그늘을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정오 때쯤 내가 찾고 있던 바위를 발견했다. 큰 바위들이 길 오른편에 나타났다. 가까이 가면 손바닥만한 그늘이라도 있으리라.

나의 추측이 조금도 어긋나지 않았다. 높이가 10미터쯤 되는 거대한 바위 북쪽에 엷은 그늘이 모래 위에 드리워져 있었다. 엔진을 식히기 위해 지프차를 바람 부는 쪽에 세워 두고서 천막장비를 내렸다. 돗자리, 식량자루, 담요 두 장, 불 피우기 위한 삼발이 등을.

그러나 그늘이 있는 암벽 가까이에 가니 벌써 먼저 온 손님들이 있었다. 살모사 두 마리가 뜨거운 모래 속에 또아리를 튼 채 그곳에서 꼼짝 않고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살모사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지프차로 가서 어떤 토인이 자기 양떼를 습격하는 굶주린 늑대를 잡아달라고 내게 빌려준 낡은 총을 집었다.

중간치 탄환 한 발을 재고는 한 발이라도 더 절약하기 위해 두 마리의 살모사를 단 한 발에 명중시키려고 물렀다.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자 구름 같은 모래 먼지 속에 두 마리의 뱀이 공중으로 솟구치는 것이 보였다. 피 묻은 모래와 살모사의 잔해를 치우면서 그 중 한 마리의 배 속에서 아직 소화되지 아니한 참해 한 마리가 나온 것을 보았다.

돗자리를 깔았다. 사막에서 이 돗자리는 유목민들에게 성당도 되고 식당도 되며, 침실과 응접실까지 겸하는 팔방미인이다. 나는 앉았다.

낮잠 잘 시간이었다. 먼저 성무일도를 바치기 위해서 기도서를 잡았다.

시편을 낭송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몹시 피로했기 때문에 주의를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시편의 구절 사이로 아직도 두 마리의 살모사가 살아있는 듯한 착각이 자꾸 끼어들어 더욱 어려웠다. 뜨거운 바람이 남쪽에서 불어와 두통을 일으킨다. 나는 일어서서 띧샘에 도착할 때까지 쓰기 위해 아껴둔 물을 조금 사용하기로 하였다. 산양가죽으로 만든 물푸대에서 반 되 가량의 물을 짜내어 머리에 부었다. 물은 두건과 목을 적시며 옷 속을 타고 내려가 불어오는 바람에 열기를 식혀준다. 기온이 잠시 동안 45도에서 27도로 내려갔다. 시원할 때 잠을 자기 위해 모래 위에 누웠다. 사막에서는 낮잠이 점심식사보다 앞서기 때문이다.

좀더 편안히 자기 위해 담요 한 장을 꺼내어 베개로 삼았다. 담요를 두 장 갖고 있었기 때문에 한 장은 쓰지 않고 곁에 두었다. 그것을 보자 어쩐지 마음이 개운치 않았다.

여러분에겐 이해가 잘 안 가겠지만 나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잘 알게 될 것이다.

전날 저녁 한 때 뚜아레그의 노예였던 흑인들의 조그마한 마을인 이라폭을 지나갈 때였다. 누가 마을에 도착하면 언제나 그러하듯 이때도 많은 사람들이 호기심과 또 사막의 신작로를 자주 지나다니는 이들의 주곤 하는 약간의 차(茶)와 약품, 편지 따위의 사소한 선물을 얻으려는 생각으로 허겁지겁 달려들 왔다.

그날 밤에 나는 늙은 카다가 추위에 떨고 있는 것을 보았다. 사막에서 추위에 대해 말하는 것이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사하라는 본시 태양이 내려 쪼일 때 몹시 뜨겁지만 해가 지면 기온이 급강하하는 추운 지방이다. 카다는 떨고 있었다.

나는 캠프 장비에서 두 장의 담요 중 한 장을 그에게 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곧 이러한 생각은 사라졌다. 나 역시 떨면서 지내야 할 밤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 안에서는 나 자신보다 그를 더 사랑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연약한 미덕이 내가 나중에 조금 떨더라고 그에게 내 담요 한 장을 주어야 한다고 간청했다. 그러나 예수의 작은 형제로서 떳떳지 못하게 나는 출발할 때 그 담요 두 장을 다시 지프차에 실었다. 그리고 지금 그 담요가 내 앞에 있는 것이다.

큰 바위 아래서 다리를 뻗고 잠들려고 애썼으나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한 달 전에 투아레그인이 낮잠을 자고 있다가 바위 덩어리에 깔려 죽었던 일이 생각났다. 일어나서 바위에 무너질 곳은 없는지 살펴보았다. 흔들리긴 했으나 위험해 보이지는 않았다.

나는 모래 위에 다시 누웠다. 만일 내가 꿈을 꾸었다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이상하게 보리라. 그러나 이상한 것은 내가 큰 바위 밑에 깔려있는 꿈을 꾼 것이다. 그러나 조금도 꿈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나는 바위가 움직이는 것을 보았고 그 돌덩어리가 내게로 떨어지는 것을 똑똑히 의식했다. 얼마나 무서운 순간인가!

그 일은 꼭 현실처럼 내게 일어났다. 나는 뼈가 부서지는 것을 느꼈고 죽는 줄 알았다. 아니 의식은 생생한 채로 내 몸은 돌덩어리 밑에 깔려 있었다. 그런데 조금도 아픈 데는 없었다. 다만 움직이지를 못할 뿐이었다 눈을 뜨니 이라폭에서 내 앞에 떨고 있었다 카다가 보였다. 나는 제일 먼저 그 담요를 생각했고, 이번에는 아주 주저도 없이 그것을 주려 했다. 그러나 나를 누르고 있는 바위덩이 때문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 순간 나는 연옥에서 영혼이 받는 고통이란 <생전에는 누구나 쉽게 할 수 있었고 또 했어야 할 일을 그곳에서는 할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을 분명히 깨달았다. 얼마나 오랜 세월 동안 이 불편한 몸으로, 결코 사라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나의 이기주의의 명백한 증거인 그 담요를 묵상해야 할 것인가.

 

 

 

2. 당신의 사랑은 판단 받을 것이다.

 

나는 그 큰 바위의 이야기가 하나의 꿈이었는지 또는 어떤 종류의 환상이었는지 아직까지도 여러분에게 명확히 말할 수 없다.

어쨌든 그것은 단지 꿈에 불과할 뿐이라고 넘겨버릴 수 없을 만큼 내 생각 속에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나의 사물을 보는 태도를 엄청나게 바꾸어 놓았다.

그것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띧에서 실레까지 펼쳐진 이 사막지대는 내 영혼이 하느님의 사정에 대해서 깊이 묵상하게 해 주는 나의 연옥의 장소가 되었다. 또 죽은 후에도 내가 일생 동안 완전한 사랑의 행동을 할 수 없었던 것을 속죄하기 위해 돌아오게 될 장소가 될 것이다.

나는 사하라의 눈부신 태양 아래에 있던 큰 바위, 뜨거운 모래 위의 한 조각의 그늘, 지평선까지 뻗었던 말라버린 강줄기, 지질학자들의 차가 남긴 자국을 다시 본다.

꼼짝할 수 없는 이곳에서 <너희의 사랑은 판단 받을 것이다>라는 말이 자꾸만 내게 들려 오고 있다. 나는 햇빛에 충혈된 눈으로 구름 없는 하늘을 멀리 바라 본다.

하지만 나는 절대로 나를 속이고 싶지는 않다. 나는 나를 속일 수 없다. 사실 나는 단순히 추운 밤을 두려워하여 카다에게 내 담요를 줄 수 없었을 뿐이다. 그러나 <남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하느님의 계명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형제의 몸보다 내 몸을 더 사랑한 것이다.

또한 그것은 하느님이 인간에게 하신 ,전력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신명기 6,5)는 구약의 첫째 계명에도 관계되는 문제이다.

더욱이 <내가 당신들을 사랑한 것처럼 당신들도 서로 사랑하시오> (요한 13,34)라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인해 나의 입장은 더욱 곤란하게 되었다.

나처럼! 그것은 하찮은 담요뿐만 아니라 생활 전체를 두고 하는 말이다. 따라서 완전한 사랑의 행위는 예수께서 하신 것을 하려는 각오가 되어있는 데 있다. 즉 카다를 위해, 나를 위해, 모든 이를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천국은 남을 위해 자기의 생명을 바치기까지 사랑을 실천했던 원숙한 사람들이 있는 곳이리라. 그것이야말로 완전하고 보편적인 사랑이요, 조그마한 적개심이나 반감이 없는 근본적인 무한한 사랑으로 불꽃처럼 타오르는 생생한 사랑이다.

이렇게 사랑하도록 준비되어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큰 바위를 본 후 나는 연옥에서의 나의 고통이 지독히 길게, 아마 고고학적 연대처럼 긴 세월 동안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지금 만지는 이 모래, 내 손가락 사이로 흐르는 이 모래는 고고학 제1기(紀)에 속하리라. 어떤 고고학자는 그것이 35억 년 전 것이라고 나에게 말해 주었다.

이 지방에 번식하고 있었던 옛 파충류의 동물 – 사하라의 깊숙한 지대에서 그 화석을 본 일이 있다 – 은 제 2기에 속한다. 즉 13억 년 전의 것이다. 니젤 강의 소금을 운반하는 이국적인 카라반의 대열, 지금 애 앞을 지나가는 이 낙타들의 원종(原種)은 제 3기에 속한다. 즉 7억 년 전부터 있어온 동물이다.

또한 인간은, 이렇듯이 위대하고 동시에 또한 미약하기 짝이 없는 이 인간은 얼마나 천천히 자기보다 앞서 살았던 동물들의 무덤 위를 걷고 있는가! 인간들은 제 4기, 즉 지금부터 5십만 년 전에 그 기원이 시작되었다.

하느님은 일을 하실 때 조금도 서두르시지 않으신다. 시간은 그분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분은 그의 신성에 참여하면서 하느님으로 변형되도록 연약한 피조물인 나를 부르셨다. 그리고 나를 변형시키는 것은 하느님의 내 존재 안에 놓아두신 사랑이다.

하느님 안에서 사랑이 서서히 나를 변형시킨다.

죄라고 하는 것은 이 변형에 저항하는 것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이 사랑에 대해서 <싫어요>라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자아주의 속에 산다는 것은 우리의 인간 상태에서 우리를 잡아 두고 하느님의 사랑으로의 변형을 거부하는 것을 뜻한다.

도 내가 사랑을 통해 신성에 <참여함으로써> 변형되지 않는 한 나는 <이 지상의 것>일 뿐 <천상의 것>이 되지 못할 것이다.

성세성사는 나를 초자연 상태로 들어올렸다. 그러나 이 상태를 우리는 완성시켜야 하며, 모든 생활은 바로 그 완성을 이루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졌다. 또 그것이 우리를 변형시키는 하느님의 사랑이다.

이 사랑에 저항했다는 것 즉 “네 형제에게 담요를 주어라”고 내게 말한 이 사랑의 호소에 응할 수 없었다는 것은 하느님과 나 사이에 연옥의 골짜기를 생기도록 한 크나큰 과오였다.

만일 이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성무일도를 염하는 것이, 미사에 참여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만일 이 사랑에 항거한다면, 모든 것을 버리고 모래와 타는 듯한 열기가 있을 뿐인 이곳으로 왔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는가?

우리와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는 이들에게 스캔들이 되었다면 아무리 진리를 변호하고, 신학자들과 교의를 토론한다고 해도 무슨 소용이 있는가? 긴 세월 동안 연옥에 있을 것이다.

<당신의 사랑은 판단 받을 것이다> 이것이 띧에서부터 실레까지 뻗어있는 이 사막지대가 내게 외쳐대는 말이다.

<당신의 사랑은 판단 받을 것이다>하고 큰 바위가 내게 말한다. 나는 그 큰 바위 밑에서 완전한 사랑이 네 안에 성숙될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 지상으로 가져 오시어 당신의 피와 보상으로 내게 주신 그 사랑이 성숙될 때까지. 그러나 큰 희망이 여기 있다. <내가 마지막 날에 당신들을 살릴 것입니다>(요한 6,40).

아! 이날이 너무 멀지 않기를!

 

 

 

3. 당신은 아무것도 아니다.

 

사막에서의 수련기간의 위대성은 의심 없이 침묵이라는 고독과 그 고독의 기쁨 속에 있다. 하나의 침묵, 그것은 어디든지 뚫고 들어가 모든 존재에 침투함으로써 게으른 인간은 알 수 없는 이상한 힘을 통하여 영혼에게 말해주는 것, 이것이 참다운 침묵이다.

사막에서 우리는 언제나 침묵 속에 살고, 또 거기에 대한 맛을 아는 것을 배운다. 즉 성당에서의 침묵, 독방에서의 침묵, 일할 때의 침묵, 내적인 침묵, 영혼의 침묵, 하느님의 침묵 등을.

우리에게 이 침묵생활을 배우게 하기 위해서 수련장은 <사막에서 며칠을 보내도록> 얼마 동안 우리를 떠나 보낸다.

빵이 가득 찬 상자, 몇 개의 대추 야자, 물, 성경을 가지고 한 나절을 걸어가면 동굴이 나온다.

신부 한 분이 계셔서 그곳에서 미사를 거행한 다음 그는 동굴 속 돌 제단 위에 성체를 모셔 놓고 떠난다. 이렇게 일주(一周) 동안 모셔 둔 성체 앞에 나는 혼자 남아있게 된다.

사막에서의 침묵, 동굴에서의 침묵, 성체 안에서의 침묵, 이 가운데에서 성체조배보다 더 어려운 기도는 없다.  인간본성이 모든 힘을 다해 저항하기 때문이다. 그 성체조배보다 불타는 태양 아래에서 조약돌을 나르는 것이 더 쉽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감각, 기억, 상상 등 모든 것을 극기해야 한다. 오로지 믿음만이 승리한다. 그러나 믿음은 힘들고 어둡고 종잡을 수 없는 구름같이 보인다.

빵의 모습을 취한 그리스도 앞에 머물면서 <그것이 생활하시는 참된 그리스도시다>고 말하는 것, 이것은 순수한 믿음의 행위이다.

이 순수한 믿음은 우리를 성장시켜 주며 또한 이 믿음 속에서의 기도가 참된 기도이다.

“성체조배? 그것은 무의미해” 라고 어떤 수련자는 말했다. 그러나 좋아하는 바를 억제하는 바로 그것이 기도를 견고하고 참되게 하는 길이다. 그것이야말로 감각을 초월하고, 상상을 초월하고 자연을 초월해서 하느님을 만나게 하는 길이다.

또한 거기에는 이탈의 첫째 단계가 있다. 나의 기도가 감정이 끌리는 대로 맡겨지는 한 그것은 변하기 쉽다. 즉 일시적인 감격 후에 낙심이 오고 우울 뒤에는 덧없는 열정이 따른다. 마치 치통을 앓게 되면 모두 날아가 버리는 탐미적인 충동이나 감정적인 흐름처럼 이 종교적인 열정이라는 것도 하잘 것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의 기도를 반성해야 한다”고 주의를 준 수련장은 기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기도는 단순하게 하고 지적인 것이 되지 말도록 해야 한다. 주님 앞에 아주 가난한 사람으로 너를 두어라. 너의 사상을 버리고 다만 믿음과 함께 나아가라. 아버지 앞에 사랑의 행동을 하면서 움직이지 말라. 이성으로 하느님께 도달하려고 하지 말라. 그러면 너는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사랑 안에서만 하느님께 도달할 수 있다.”

투쟁은 쉬운 것이 아니다. 자연은 보복해 오기 때문이다. 자연은 향락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것은 십자가 위의 예수와 일치하는 것과는 별개의 것이다. 이러한 정신훈련을 하면서 몇 시간 혹 며칠이 지나면 육신이 진정된다. 의지가 육신의 감각적인 쾌락을 거부한다는 것을 느끼게 되면서부터 육신은 쾌락을 더 찾지 아니하게 되면 수동적이 된다. 감각이 잠을 잔다. 단식, 오랜 철야기도, 겸손하고 끈질긴 기도는 영혼을 고요하고 평화스럽게 해준다. 감각이 잠을 잔다는 것은 십자가의 성 요한의 말을 빌려 더 잘 표현한다면 <감각의 밤>의 시작이다. 그러므로 기도하기가 설령 고통스럽고 무미건조하게 되더라도 진지한 것이 된다. 우리의 기도는 이렇게 진지한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될 때 영혼은 예수의 구원행동 속으로 들어간다.

예수님이 현존하시는 뜨거운 모래 바닥에 무릎을 꿇고 나는 이 세상의 악을 생각했다. 원한, 폭력, 비열, 불순, 거짓, 이기주의, 배신, 우상숭배, 간음 등, 내 주의에 있는 악의 동굴은 좀 더 넓어졌다. 나는 그 속을 들여다 보면서 이러한 악의 무리 아래 계시는 예수님을 관상했다.

제병(祭餠)은 외관 그 자체에서 볼 때는 하나의 납작하고 바수어지는 구운 빵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면 그분 옆에서의 나의 위치는 무엇인가?

몇 년 동안 나는 교회 안에서 <상당한 위치에 있는 자>라고 자부해 왔다. 살아있는 거룩한 건물인 교회는 신자들의 어깨로 받쳐진 크고 작은 여러 기둥으로 이루어진 성전(聖殿)이라고 보았으며, 나도 그 중 작은 기둥 하나를 떠받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물론 사실이다.

이것은 하느님이 인간을 필요로 하신다는 것과 또한 교회는 용감한 투사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강조해온 결과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게 된 것이다. 건물은 우리 어깨 위에 서 있는 것이라고.

하느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후 하루의 휴식을 취하셨다. 그리스도는 교회를 설립하신 후 하늘로 올라가셨다. 그리고 모든 일이 신자들에게, 특히 교회에 맡겨졌다. 세상 사람들이 당하는 일상의 모든 어려움을 짊어지고 있는 교회의 구성원인 우리들이라는 생각은 나를 좀더 열렬하게 만들어주었으므로 도저히 휴식도 가질 수 없었다. 나는 나 자신을 끊임없이 투쟁하고 있는 투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해야 할 일이 그렇게도 많았고, 언제나 시간이 모자랐다. 자주 모임을 갖고, 회합하고 사람을 만나고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해 나는 동분서주해야 했다. 점차로 기도는 성급히 끝내게 되었고, 대화는 짧아지고, 마음은 늘 해야 할 일로 들 떠 있었다.

모든 것이 내가 해나가는 데에 달렸다고 생각했으므로 잘 되지 않을 때는 당연히 불안감이 뒤따랐다.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활동의 길만이 옮고 또한 참되게 보였을 뿐이다.

우리가 소년시절이었을 때 무엇보다 먼저 ,왕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모든 것을 하라>는 말을 노래하도록 누군가 우리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청년이 되었을 때에는 <너는 지도자이다>라고 말한다. 어른이 되었을 때 <당신은 책임자입니다. 당신은 으뜸입니다. 당신은 사도입니다>하는 말이 우리에게 주어졌다. 그 결과 우리는 자기는 무엇이다 라고 자부하는 습관이 생기게 되었다. 따라서 <당신들은 보잘 것 없는 종에 지나지 않습니다.> <나 없이 당신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어야 합니다> 하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와는 다른 시대, 우리와는 상관이 없는 사람들에게나 해당되는 말처럼 우리에게 들렸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스며 들 수도 없었고 우리의 마음을 적시거나 감동케 할 수도 없는 생소한 말씀이 돼 버린 그것은 결국 우리 위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말았다.

내 인생의 구비는 아주 별스럽다. 맨 처음 만난 스승은 <왕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모든 일에 있어 첫째가 되어라>고 가르쳤는데 마지막 스승인 샤를르 드 푸꼬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께 대한 사랑으로 모든 일에 있어 말째가 되라>고 권고하였다.

또 이 두 가지 모두가 타당한 이유가 있는 말씀이다. 그러나 그 교훈을 잘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내 자신이 어리석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나는 교회의 축소판인 동굴의 모래 위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또 나는 여전히 투사로서 그 기둥의 무게를 내 어깨 위에 느끼고 있었다. 이것이 아마 이 문제를 가장 뚜렷이 본 순간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 순간 그 기둥 밑에서 내가 나와도 된다는 것을 느꼈고, 느낀 순간 나는 즉시 나를 해방시키기 위해 그 기둥 밑에서 비켜 섰다. 어떻게 되었을까? 이상하게도 모든 것은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나라는 중요한 받침대가 없어졌는데도 천정은 조금도 갈라지지 않았고, 삐걱거리는 소리조차도 들리지 않았다. 이제 25년이 지나고 나서도 내 어깨는 여전히 빈 채로 있는데도 건물은 끄떡 이 없었다. 결국 그 기둥이란 나의 상상과 허영에 의해 만들어진 허상이요, 거짓이요, 전혀 필요치 않는 비현실적인 것 뿐이었다.

세상의 모든 무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 놓여 있었다. 나는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 모든 것은 2천 년 전부터 내게 하신 예수의 <당신들도 명령대로 모든 일을 다 하고 나면 저희는 보잘 것 없는 종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하고 말하시오>(루가 17,10)라는 말씀을 믿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보잘 것 없는 종!

 

 

 

 

4. 누가 세상을 인도하는가?

 

이 사건이 내게 남긴 첫 인상은 자유에 대한 것이었다. 새롭고 넓고 정확하고 기쁜 자유.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조금도 책임이 없는 자였다. 이렇게 내가 중요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은 마치 방학을 시작한 어린이가 느끼는 기쁨에 비교될 만한 것이었다.

밤이 왔으나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나는 동굴에서 물러나와 별빛 아래 펼쳐져 있는 막막한 사막을 거닐었다.

“나의 하느님,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의 하느님,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는 유난스러운 경이를 느끼게 해주는 침묵 속에서 하늘을 향하여 외쳤다.

걷기에 지친 나는 모래언덕 위에 누워 푸른 골짜기처럼 내 위에 널려 있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 하늘에는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 반짝이는 별들이 얼마나 귀하게 느껴지고 또 얼마나 친근하게 느껴졌는지! 이렇게 여러 밤을 지내는 동안 별들의 이름을 무척 알고 싶어했던 나는 차차 그 별들의 모습과 자리를 익히게 되었다. 이제 나는 별의 그 색깔과 크기, 위치, 아름다움까지 모두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 별들의 방향과 위치를 환히 알게 되면서부터 나는 시계가 없어도 시간을 알 수 있었다.

직녀성과 이야기하고 있는 금강석처럼 빛나는 별은 백조좌이고, 사수좌(射手座)와 돌고래좌는 주위의 작은 별들에게 둘러싸여 겸허한 태도로 반짝이고 있다. 페가수스좌의 별들이 사변형의 모습을 하고 동쪽에서 올라오면 구슬 모양의 별은 서쪽으로 사라진다. 곧이어 붉은 아르고(Algol 페르시우스좌의 2등성)가 앞장서서 나타나는 뒤를 따라 페르시우스좌가 그 우아함을 드러낸다.

안드로메다좌가 있는 밤하늘은 너무나 청명하다. 그 옆으로는 은빛으로 빛나는 성운(星雲)이 흐르고 있다. 그것들은 지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천체로써 그 가운데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8십만 광년이라는 까마득한 거리이다.

이 엄청나게 멀리 떨어진 성운군들은 인마좌(人馬座)와 2년 만에 한번씩 나타난다는 4광년이란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는 프록시마성 사이에 4백억 개의 별무리가 은하수를 이루어 형성된 것이다. 그 은하수 가운데에 있는 작은 모래알 같은 지구에 우리가 소속되어 있는 것이다.

또한 안드로메다좌의 성운 저쪽에 있는 다른 수백 만의 성운과 눈으로 볼 수 없는 수천 억의 무수한 별들, 그 별들을 하느님은 창조하셨다.

이 세상을 지탱하는 작은 기둥이 내 어깨 위에 있지 않다는 것을 나는 왜 진작 깨닫지 못했을까? 또한 세상은 인간들에게 속해 있지 않다는 것을.

나는 너무 안일하게 생각하고 믿어왔다.

예수께서도 <당신들은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가르치시오>(마태오 29,19)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그러나 그분은 또한 <나를 떠나서는 당신들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요한 15,5)라고 덧붙이셨다. 성 이냐시오는 <모든 것이 당신께 속한 것처럼 하시오>라고 말하면서 <모든 것이 하느님께 속해 있기를 바라시오>라는 말을 덧붙였다.

하느님은 인산세계의 창조주이시면서 또한 우주의 창조주이시다. 하느님은 교회를 다스리시는 것처럼 이 별들의 세계도 다스리신다. 그분은 사랑 때문에 인간을 당신 협력자로 삼으신다 지만 인간능력의  한계는 전류와 전선의 관계처럼 매우 좁고 엄격히 제한되어 있다.

우리가 전선이라면 하느님은 전류이시다. 우리의 능력은 전류가 마음대로 통과하도록 할 때 비로소 완전히 발휘된다고 보겠다. 물론 우리는 그것을 정지시킬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이상의 것은 할 수 없다.

우리는 우리 안에서 무엇을 지탱하는 기둥의 모습을 보지 말고 전류를 전하는 전선의 모습을 생각하자.

그러나 전선과 전류는 전연 이질의 것이다. 전선이 아무로 높은 전압의 전류를 전한다 할지라도 전류의 본질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세상의 모든 일이 천체처럼 하느님의 착하신 손에 달려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진리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지상에서 모든 것이 잘 되기를 바라는 선량한 사람들에게 무한한 기쁨을 더해줄 것이다. 신앙과 희망, 특히 깊은 평화의 원천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하느님이 모든 것을 인도하시고 유지시키는데 내가 무엇을 두려워할 것인가? 좀더 흥미진진하고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길이 없는지 찾아보지 않고 왜 모든 문제의 책임이 인간이 나에게나 혹 내 형제들에게만 있는 것처럼 불안해야 하는가?

사실 세상의 모든 일에서 하느님의 직접적인 개입을 본다는 것은 어렵다. 그리고 이것이 이 비참한 세상에서 우리가 가장 많이 겪어야 할 가장 끈덕진 시련인 것이다.

성경은 바로 이 드라마를 보여준다. 구약의 선택된 백성의 역사란 결국 하느님이 소수의 인간들의 역사에 끊임없이 개입하시는 상황을 기록해 놓은 것이다.

 

<너는 나를 믿느냐? 나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하느님이로다. 나는 강한 팔로 너를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빼내어 사막으로 인도했고, 하늘의 만나로 너를 길렀으며, 바위에서 솟는 물을 네게 마시게 한 하느님이로다. 너를 위해 이집트인들의 맏아들을 쳤고, 너를 위해 권세 있는 왕을 짓눌렀다. 이러한 이적(異蹟)과 이러한 끊임 없는 도움에 보답하기 위해 너는 내게 무엇을 했는가? 너는 나무와 은의 우상을 세워 나를 버렸구나. 네 하느님인 나를…>

<너를 창조했고, 아주 높은 언덕 위에서 그리고 거룩한 나무에서 네 원수들로부터 여러 번 너를 구해낸 그분을 흠숭 하는 대신 이방인들의 신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신들 앞에 너는 향을 피웠도다.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고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그 목구멍은 소리도 내지 못하는 신들을> (시편 113 참조).

 

이것이 영원한 역사, 곧 이스라엘과 우리의 역사이다.

우리는 하느님을 믿고 기도한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영혼의 회심은 위대한 설교가들의 임무로 맡겨버리고, 하느님 나라의 확장을 위한 기도여야 하는 본연의 자세는 잃어버린 채 허황된 요구와 말이 많은 기도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생소한 하늘 밑에서, 신앙과 감상주의가 혼합된 비현실적인 암흑 속에서, 하느님과도 세상과도 멀리 떨어진 곳에서 우리의 비참한 종교생활은 기도와 모순과 타협으로 뒤범벅이 된다.

하느님은 유일하신 분으로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 이것이 진리이다. 또 나는 그것을 믿음으로써 더욱 깊이 깨닫게 된다.

하느님 홀로 우주를 다스리신다. 내가 언제 죽을 것인가 하는 것도 하느님만이 아신다.

하느님만이 중공(中共)을 회심시킬 수 있다.

왜 우리가 질 수도 없는 책임을 지려고 야단일까? 회교도가 그리스도를 아직 발견하지 못했고, 불교가 아무 위기도 없이 수억의 우리 형제를 지배하고 있다는 데 대해 왜 놀라야 하는가? 언젠가는 때가 올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나에게 달려 있지 않다.

그런데 하느님의 섭리가 모든 백성을 위한 역사 속에서 시간의 흐름과 함께 발전 내지 성숙했다고 할 수 있을까?

아브라함은 약속이 이행될 희망이 있을 때에만 그리스도를 알아보았다. 그리스도는 정말 성부로부터 버림받은 것은 아니다. 강생의 시기는 도래하지 않았다. 예수가 그때가 되어 오신 것은 영원한 지혜의 지시를 따랐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계획이 있고 또 그것은 고려되어야 한다. 그 다음에 인간의 계획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이 계획은 고려되지 않는다. 더구나 하느님의 계획과의 관계에서는 조금도 고려되지 않는다.

하느님은 인간을 앞선다. 만일 하느님께서 강생의 시기를 결정하여 알려주시지 아니하였더라면 마리아께서는 그리스도를 몰라보고 여전히 하느님이 오시기를 고대하는 가운데 죽어갔을 것이다. 만일 갈릴레아 사람들이 하느님이 그들을 부르셨을 때 가지 않았더라면 그들도 별일 없이 호수에서 고기를 낚으며 가파르나움 회당이나 드나들었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믿음에서 발견해야 할 진리이다. 하느님께 대한 기대와, 이러한 기대를 갖는 태도는 자연적으로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니다. 기다림 속에 머물면서 계획의 포기, <하늘을 향한 추구>, <침묵> 이것이 우리가 수행해야 할 가장 유익한 일들이다.

그 다음에 부르는 시간, 우리가 말해야 할 시간, 손으로 세례를 주어야 하는 피곤한 시간, 추수의 시간이 필경 올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이러한 놀라운 일들의 주역이거니 생각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하느님이 놀라운 일을 하기 위해 이렇듯이 불쌍하고 이렇듯이 가난한 우리를 다만 이용하는 것 뿐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이 아니다. 내게는 벌써 슬픈 의문이 고개를 쳐들기 시작한다.

의문이 생긴 것은 나의 착오이거나 믿음의 부족 때문이다.

“기도할 것인가, 활동할 것인가? 기다릴 것인가, 떠날 것인가? 자리에서 일어날 것인가, 성당에 들어갈 것인가?”

우리는 또 새로운 출발점에 서 있다. 사람은 모든 것을 의문으로 여기는 데에 조금도 염증을 느끼지 않는다. 하느님의 말씀을 실현하고자 하는 선의 보다 회기심이 더 강하다.

그러나 나는 오늘 그러한 문제에 대해 더 이상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다. 나는 말의 힘으로 한 사람을 설복시키는 위력을 더 이상 믿고 싶지 않다.

다만 나는 아프리카의 이 별 아래에서 잠잠히 내 하나님이신 주님을 흠숭하고 싶을 뿐이다.

그렇지만 내게 편지를 보낸 젊은 당신의 요청에 내가 옳다고 생각하고 또 체험한 것을 한 마디만 더 하겠다.

이 세상에서 사랑 하나만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의문이라는 것을 상기하라. 사랑만이 사랑으로 사는 이에게 해답이 된다.

나는 그것을 당신에게 말하고 싶다. 사랑으로 살아라. 사랑을 찾아라. 그것이 당신이 해야 할 일을 가르쳐 줄 것이다.

하느님 안에 있는 사랑이 당신이 달려야 할 길을 알려주고, 당신께 말해줄 것이다. “이제 무릎을 꿇어라” 혹은 ‘지금 떠나라” 고.

<사람들이 나의 활동을 필요로 하는데 무릎을 꿇고 몇 시간이나 기도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죽음으로 인해 모든 문명이 파멸하고 말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이때 하찮은 나의 활동은 아무런 쓸모도 없다. 이 두 가지 역설적인 사실을 정당화시켜주는 것도 역시 사물에 가치를 주고 있는 사랑인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의향에 가치를 주고 흩어졌던 것을 일치시키는 사랑이다.

사랑은 관상과 활동의 종합이다. 사랑은 하늘과 땅 사이를, 하느님과 인간 사이를 이어주는 점이다.

적극적인 활동과 사막에서 고요한 관상생활의 기쁨을 다 체험한 후 나는 성 아우구스띠누스의 말씀을 다시 되뇌어 본다. <사랑하라. 그리고 네가 원하는 것을 하라. 나의 형제여, 당신이 하는 일에 대해서 너무 걱정하지 말고 사랑하는 데에만 당신의 마음을 두어라. 나의 길이 무엇인가? 하는 불필요한 상념이나 천국에 대한 고민은 이제 그만 두고 오직 사랑하는 데에만 전력하라.>

당신은 사랑할 때 비로소 당신의 길을 발견할 것이며, 사랑할 때 바로 하느님의 소리를 들을 것이다. 사랑을 하면서 당신은 평화를 찾을 것이다.

사랑은 법의 완성이요, 모든 길의 척도요, 모든 문제의 해결이요, 모든 길의 척도요, 모든 문제의 해결이요, 모든 성덕의 충동이다.

<사랑하라. 그리고 네가 원하는 바를 하라.> 아니 내가 사랑하고 있다면 내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없다.

내가 사랑할 때 나는 그 사랑의 포로가 될 것이다. 사랑의 요구는 한정이 없다. 특히 이 사랑이 십자가 위에 계신 하느님을 대상으로 할 때 더욱 그렇다. 사랑을 할 때 나는 내 뜻대로 가 아니라 예수님의 뜻대로 즉 성부의 뜻대로만 하게 된다.

이렇게 내 뜻이 아닌 주님의 뜻만을 따르게 될 때, 나의 이 세상에서의 소명은 완전히 실현되는 것이며 나의 완덕이 단계도 드높여질 것이다.

바로 하느님의 뜻이 세상을 지배하고, 천체를 움직이고, 사람을 회개시키고, 생명을 되살리고 죽음을 주는 것이다.

또한 이 하느님의 뜻이 믿음의 아버지인 아브라함을 일으켰고, 모세를 불렀고, 다윗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마리아를 준비시켰고, 요셉에게 힘을 주었고, 그리스도를 강생케 했으며, 그 생명의 희생을 요구토록 했다. 그것이 교회를 세웠다. 또 그것이 세상 마칠 때까지 구원의 업적을 계속시킬 것이다.

하느님의 뜻은, 인간이 자신의 바른 의향과 착한 마음의 덕분으로 보이지 않는 영에 속하게 되 후에 즉 그들이 완전히 성숙을 끝마치는 순간에 눈에 보이는 몸인 교회로 하나씩 불러들일 것이다.

당신이 보속이나 혹은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래 위에 무릎을 꿇을 때, 가르치기 위해 교단에 있을 때, 만일 당신이 하느님의 뜻대로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무슨 가치가 있을까?

또 하느님의 뜻이 당신에게 가난한 자들을 찾아가 당신의 모든 재산을 주고 먼 지방으로 갈 것을 명한다면 그 이외의 것에 무슨 가치가 있을 수 있겠는가?

또 만일 하느님의 뜻이 당신에게 한 가정을 이루어 이 세상에서 어떤 역할을 하도록 호소한다면 왜 주저하겠는가?

In la sua volontade e nostra pace (그 분의 뜻 안에 우리의 평화가 있다)라고 단테는 말했다. 이 단테의 말이야말로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종속관계를 가장 잘 요약하여 표현한 것이 아닐까.

 

 

 

5. 마음의 정화

 

우리가 사랑하기 위해 창조되었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해야 한다는 것과 또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를 분별하기는 어렵다.

우리는 자연을 사랑한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또 이것은 우리의 목적에 위배된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이 사랑은 하느님을 사랑해야 하는 우리의 목적과 분명히 일치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피조물도 사랑하고 창조주도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볼 때 이 두 가지 사랑은 서로 양립할 수 없다. 한쪽을 사랑한다면 다른 한쪽을 사랑할 수 없게 된다. 왜 이처럼 대립되어야 할까?

그 이유는 우리에게 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한다.

 

 

 

 

 

 

 

6. 기도를 향한 길목에서

7. 기도의 시간

8. 관상기도(觀想祈禱)

9. 길에서의 관상

10. 영혼의 정화

11. 파벌주의(派閥主義)

12. 나자렛

13. 마지막 자리

14. 오, 이 길을 지나가는 자여!

15. 착한 이들의 반역

16. 불가능이 없는 하느님

17. 밤은 나의 연인

역자의 말

 

 

** 지금도 ‘필사 筆寫’ 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Disclaimer: 여기에 실린 글은  copyright가 된 책, 기사를 ‘발췌, 전재’를 한 것입니다. 모두 한 개인이 manual typing을 한 것이고, 의도는 절대로 저작권 침해가 아닌, fair use의 정신을 100% 살린 것입니다. 의도적으로 ‘시간적인 제한, 독자층의 제한’을 염두에 두었고, 목적은 단 한 가지 입니다. 즉 목적을 가진 소수 group (church study group, bible group, book club) 에게 share가 되었습니다. password protected가 되었는데, 만일 이것이 실패를 하면 가능한 시간 내에 시정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May 2018
S M T W T F S
« Apr    
 12345
6789101112
13141516171819
20212223242526
2728293031  
Categories
Archiv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