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eld of dreams, trancending time & place, autobio in progress..

 

산, 바람, 하느님 그리고 나

김정훈 유고집

 

 

책 머리에

아깝게 간, 사랑하는 정훈이를 추모하는 동창 신부들이 그의 자취를 보존하고 싶은 마음에서 그의 유고집을 내게 되었습니다.

그의 글들을 이렇게 책으로 내는 것을 정훈이가 원할는지 조차 우리는 미심쩍습니다. 사제품을 목전에 두기까지 자신에게 얽혀 들어 오는 문제들과 고뇌들을, 그리스도를 직시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해결해 보려고 노력하면서 쓴 너무도 솔직한 그의 자취이기 때문입니다.

글을 읽어볼 때, 정훈이가 죽기 1, 2년 전 사고 思考 가 열리면서 많은 문제점들을 깊이 바라보며 해결하려고 노력하였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결국 그는 미완성인 채 주님 곁으로 갔습니다. 그 많은 것을 종합하기에 그의 생은 너무 짧았습니다. 이 점을 우리는 안타까워 하면서 이 유고집을 냅니다. 정훈이가 좀더 살아 우리와 함께 있었다면 하는 바람이 지금 모든 동창 신부들 마음에 박힌 슬픔이요, 아쉬움입니다.

이 글은 그가 남긴 것이긴 하지만, 김정훈이란 사람이 이러한 글로써 헤아릴 수 있고 인식되기에는 너무나 큰 현실이라는 것은 말할 나위가 없겠습니다.

 

1978년 5월 동창 신부들이

 

 

 

서문

정훈이가 죽었다는 뜻밖의 소식에 충격도 컸지만 나는 마치 귀한 자식을 잃은 것 같은 슬픔을 금할 길 없었다. 주교에게 젊은 신부들이나 신학생들은 사실 모두 아들 같이 느껴진다. 하지만 한 젊은이의 죽음에 이렇게까지 가슴에 아픔을 느껴본 적은 처음이다. 차라리 내가 갈 것이지 왜 하필이면 젊은 그가 가야 했는가 하는 생각도 들고, 나 때문에 사제서품이 미루어져서 결과적으로 그를 죽게 한 것 같은 죄책감마저 들었다.

내가 이 비보에 접한 것은 작년 6월 초, 분망한 미국여행 때였다. “누가? 어떻게 됐다구? 정훈이가 죽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도무지 믿어지지 않아서 이 소식을 장거리 전화로 전해 준 필라델피아의 안상인 신부에게 나는 몇 번이나 되풀이하여 물었다.

결국 김정훈 부제가 – 사제품을 불과 몇 달 앞둔 그였는데 – 오지리 인스브루크 어느 산에서 불의의 조난으로 돌아오지 않는 몸이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인스브루크에 있는 그의 모교에 전화로 장례일정을 확인한 후, 바쁜 여행 중에 정말 무리한 짓이었지만 왕복 이틀의 틈을 내어 대서양을 건너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잠든 모습이라도 볼 수 있었으면 한고 갔던 것이나 장례식 직전에야 도착했기 때문에 이미 굳게 닫힌 관 속에 있는 그를 볼 수는 없었다. 즉시 학장 신부와 유학 중인 우리 신부들을 만나서 다시 사고경위를 자세히 들을 수 있었지만 말하는 이들이나 듣는 나나, 그것은 슬픔의 재확인뿐이었다. 신학교 전체가 모두 그의 돌연한 죽음에서 많은 충격과 애도에 잠겨 있는 것 같았다. 그만큼 정훈이는 그이 인품으로 말미암아 많은 이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고, 또 깊은 정감을 모든 이이게 주고 떠난 사람이었다.

특히 스위스에서 온 그의 은인인 본당 신부는 그를 잃은 아쉬움을 어떻게 표현할 바를 몰라 흐느끼면서 말을 잇지 못하였다. 정훈이가 각별히 사랑하던 누이동생 아녜스와 마주쳤을 때에 나는 할 말도 없어 그저 손을 잡고 어깨를 감싸 안은 채, 이국 땅에서 하늘 같이 믿던 오빠를 갑자기 [빼]앗긴 그에게 슬픔의 상처가 너무 크지 않기를 빌 뿐이었다. 다행히도 아녜스는 자기 나름으로 이 비극을 소화시키려고 애쓰는 양 평온을 지키고 있었으나 그럴수록 더 애처롭게 보였다.

 

정훈이와 내가 각별한 친분을 맺은 것은 아니다. 단지 오지리 유학 중이었기 때문에 내가 외국 여행 중에 국내에 있는 신학생들보다 단 둘이서 이야기를 나눈 기회가 한두 번 더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정훈이는 말이 적으면서 인상을 깊게 남기는 젊은이였다. 그는 늘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사람이었고, 언제나 참된 것을 찾는 철학도로 보였다. 진실을 추구하는 사람은 고독한 법이다. 그러기에 그는 남달리 산을 좋아했던 것 같다. 오지리 티롤 Tirol 지방의 눈 덮인 산들, 알프스의 높이 솟은 줄기는 정말 아름답다. 맑은 인품에다가 고독과 사색 속에 진선미를 찾는 사람은 그 수려한 산들과 대자연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가 떠나간 날 함께 등산했던 신부가 들려준 말에 의하면 언젠가 역시 함께 산에 갔을 때, 정상에 오른 정훈이는 백설 위에 “산, 바람, 하느님, 나 베드로…” 이렇게 손가락으로 천천히 글씨를 쓰면서 깊이 생각에 잠기더라는 것이다. 눈 덮인 그 산 위에서 바람소리 따라 정훈이는 어디서보다도 하느님을 더 가까이 체험했던 게 아닐까! 아마도 이른바 형이상학적 체험이었을 것이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생각해 주시며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보살펴 주시나이까?” (시편 8,5)

 

이 구절은 사제품을 앞두고 기념상본에 쓰기 위해 그가 택한 성구 聖句이다. 하느님의 위대함과 인간에게 향한 그 분의 한없는 사랑을 가슴 깊이 체험한 사람만이 이 성구의 심오한 뜻을 깨닫고, 이를 또한 기도로서 바칠 수 있는 것이다. 김정훈 부제는 사색과 기도를 통해서, 눈 덮인 산 위에서의 초월적 체험을 통해서 하느님의 위대하심과 그 사랑을 깊이 깨달았던 것 같다. 그러기에 그 분의 사랑, 그 분의 부르심에 충실하기를 원했다. 온갖 갈등과 번뇌, 인간적 사랑의 갈증을 느끼면서도 김 부제는 이 하느님의 부르심에 전인격적 결단을 내렸다. 그리하여 모든 것을 끊고 참으로 그리스도를 닮은 사제되고자 굳게 결심하였다.

이제 곧 그의 일주기를 맞이하게 된다. 우리들 눈 앞에서 그는 갔으나 우리들 마음 속에는 오히려 더욱 깊은 의미로 그는 살아 있다. 비록 김 부제는 사제품을 받지 못했으나 하느님과의 만남의 장소인 그 산에서 스스로를 깨끗한 제물로 바쳤으니 보다 값지게 그리스도의 영원한 사제직에 동참하고 있을 것이다. 그는 우리 모두를 위해서, 그의 사랑하는 어머니, 형제, 자매, 친구들을 위해서, 조국과 세계를 위해서 언제나 거기서 기도할 것이다.

 

밀알은 썩음으로 많은 결실을 가져온다. 때문에 나는 정훈이가 지녔던 사제성소에 대한 그 가식 없는 태도, 그리스도를 진정 닮은 사제되고자 하였던 그 티없이 맑은 정신은 우리들 안에 반드시 많은 성소를 움트게 하는 씨앗이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하여 정훈이의 내면 생활의 깊이를 엿보게 하는 이 일기들이 읽는 이들에게 순결한 그의 영혼과의 만남과 더불어 그리스도와의 만남, 하느님과의 만남으로 승화되리라는 것을 믿어 마지않는다.

 

낮이면 푸른 하늘 아래, 밤이면 은하수 아래, 산과 바람, 하느님과 정훈이는 언제나 함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와도 함께 있을 것이다.

 

 

1978년 5월 하순

고 김정훈 부제 일주기를 맞으면서

추기경 김수환

 

 

차례

 

책 머리에

서문

I 추모의 글

김 베드로의 죽음에

경애하올 김 여사님

친애하는 김정훈에게

김 베드로를 생각하며

사랑하는 친구 정훈 영전에

 

II 일기

1972년

헌사

새로운 시작

아버지를 생각하며

나의 길의 근본

동서의 피안

인스브루크 행의 결정

 

1973년

교회에 머물되 참 眞 만을

미해결의 문제

J와 인생

 

1974년

애별리 愛別離

인스브루크, 내 존재 저 밑바닥

이렇게 끝까지 와서

나의 근본문제

빈에서 – 단절과 나약성

한여름의 오지리 지방

리프프라우엔회에의 생활

힘겹게 얻은 이 안정

생활의 악순환

성탄절, 피정의 집

 

1975년

동물 인간

시종직

인간적 나약성

조건 없는 사랑

바움가르트너 신부

당신께밖에는

교회적이 아닌 신부

공산주의에 대하여

미사 보는 사람

 

1976년

부제품

발터 씨 댁

존재론적 질서

여행과 열린 마음

삶은 시험

 

1977년

나의 백서

신부행, 진리행

나의 사제상

 

III 메모와 편지

송별답사

사랑한다는 것

참된 인간화

하느님을 안다는 것

나는 어디까지 와 있는가?

하느님은 나를 나로 만들었다

믿는다

친해하는 비오 신부님

어머님께

조정헌 신부님께

현기호 신부님께

이성만 신부 앞

그리운 창준에게

라희균 선생님께

책을 엮고 나서

 

 

 

I 추모의 글

 

 

김 베드로의 죽음에

나는 베드로와 함께 두 차례 등반을 한 일이 있다. 그는 나와 동행했던 누구보다도 훌륭하고 침착한 등산인이었다.

숙명적인 목요일, 우리가 갔던 코스는 내게 아주 익숙한 곳이었다. 지난 6년 동안에 적어도 열 번 이 코스를 올라갔었고, 그 때마다 동행하는 사람들이 달랐지만, 그들 중에는 베드로보다 등반 경험이 적었던 사람들도 있었다.

베드로는 유명한 노르 케테 Nord Kette에도 여러 번 올랐던 경험자였고, 어려운 난관에 부딪치더라도 잘 극복해 내곤 하였다. 그런데 왜 그날 그는 아무런 어려움도 없었던 장소에서 실족하여 다시는 일어날 수 없게 되었을까?

단 한 번의 확실치 않은 발걸음은, 촉망되던 발전의 길을 가던 젊은 목숨을 그대로 무너지게 만들었다.

왜 라는 물음은 우리 모두에게 던져져 있다. 서로 나누는 우리의 이 이야기 속에도 이 물음은 명확히 제기되어 있다.

그러나 나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고백할 뿐이다. 단지 인간이 무엇이고, 하느님이 누구인가에 관하여 한 번 더 숙고하도록 요청되고 있음을 느낄 뿐이다.

김 베드로가 서품 기념 상본을 위해 택했던 성구가 떠올느다. 이 성구는 그와 늘 함께 생활했던 생명의 말씀이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생각해 주시며,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보살펴 주십니까” (시편 8,5)

 

인간은 무엇인가?

이것은 단지 하나의 물음뿐인가? 또는 비관적이고 체념적인 단정인가? 인간이 무엇인가 – 무 無.

시편 작가를 통해서 볼 때, 우리는 이 물음 속에서 해답이 있을 수 없는 물음이나 비관적인 냉정이 아니라 경탄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주 하느님의 무한성 앞에서의 무상 無常과 무력함의 체험, 그리고 하느님이 우리를 생각하고 보살피신다는 위대성과 존엄성의 체험이다.

엄청난 놀라움! 인간이 무엇인가? 그리고 인간을 이토록 받아들여 주시는 하느님은 어떠한 분인가?

베드로가 자신을 위해 택했던 말씀, 밝고 어두운 소식처럼 어찌할 바를 모르는 말씀, 그를 위한 생명의 말씀 – 예감, 체험, 소망, 대망, 경탄 – 그리고 만사에 있어서의 깊은 동경.

 

“하느님 성전 뜰 안을 그리워하여 내 영혼이 애태우다 지치옵니다. 나의 마음 나의 이 몸이 살아 계신 하느님께 기쁜 소리 지르옵니다.” (시편 84,2). (브람스, 독일 연미사, 4 악장)

 

사고가 발생하고 구조를 기다리는 사이, 나는 2시간을 베드로 곁에 있었다. 나는 그에게 격려의 말을 건네고, 그 역시 등의 아픔과 갈증과 한국인들에 관하여 이야기하였다. 그 사이에도 그는 손을 모으고 기도를 드렸다. 나는 그의 자세를 조금 편하게 하기 위해 나의 웃옷을 그의 등 밑에 깔고 배낭을 머리 밑에 놓아 주었다. 나는 그가 가파로운 계속에서 더 이상 미끄러지지 않도록 단단히 그를 붙들고 있어야 했다. 이러는 가운데 내 모든 물건은 피에 젖었다. 이것을 훨씬 후에야 보게 된 나는 ‘이 옷들을 아주 없애 버리리라. 나를 괴롭힐 이 물건들을 내 손에 닿지 않게 아주 없애 버리리라’고 결심하였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달라지게 되었다. 나는 집에 돌아오자 더러워진 옷과 물건들을 세탁소와 수선소에 보내었다. 그리고 나는 그날 입었던 등산복과 속옷, 그리고 배낭도 소중히 간직하기로 했다.

나는 그날의 기억을 잃어버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삶의 한 부분처럼 그것들을 간직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베드로에 대한 모든 것도 잊지 않을 것이다. 함께 등반하는 기쁨을 나누려던 베드로를 잊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나 혼자의 생각이 아니라 베드로를 알고 있던 모든 이들의 생각일 것이다.

이제 베드로는 갔다. 그에 대한 기억들이 이제는 단절된 하나의 단편으로 남겨졌다. 그는 우리 곁에서 절실한 하나의 생명의 증거로서 소중하게 살아 있을 것이다.

우리가 그에 대한 기억을 보존한다는 것은 그가 자신의 삶을 통해 이루려고 하였던 바를 이해하고, 추구하고, 받아들여 계속 이끌어 가는 것을 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가 우리와 함께 살아 주었다는 감사와, 이제는 더 이상 우리 가운데 있지 않다는 아픔과 슬픔이 이 기억 속에 언제나 머물러 있을 것이다.

매일 조금씩 더 무감각해지려는 노력 가운데 슬픔과 아픔을 교묘히 숨기면서, 죽음 같은 것은 금기 禁忌 처럼 여기는 사회 속에서 오히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죽음과 고통의 참 실재를 보여 주는 하나의 증거로 내세우려 한다. 다음의 주님의 말씀은 언제나 우리를 위로해 준다.

 

“슬퍼하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마태 5,4). (브람스, 독일 연미사, 1악장)

 

물론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왜 사람들은 어리석게 항상 사고가 생기는 산에 가는가?”  이 비난 섞인 물음에 대답하기는 어렵다. 다만 나와 베드로에게 이 산행 山行이 대단히 많은 것을 의미하였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를 산으로 이끌어 낸 것은 산이 지닌 낭만이나, 항상 오랜 시간 앉아서 책을 봐야 하므로 운동을 하기 위한 것도, 또는 위대한 정복에의 충동도 아니었다. 이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할 수도 있겠으나 그를 충동시킨 것은 다른 어떤, 아주 깊은 것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나는 이러한 점에서 베드로를 이해하였다고 믿는데, 그와 산과의 관계는 극히 원초적인 것으로 보였다. 산은 그에게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실재였다. 산은 단순히 신체적인 힘을 겨루는 것을 넘어선 형이상학적인 차원에 있는 현실이었다.

우리는 별이 총총한 밤에 세르레스 Serles에 등반하였던 적도 있었다. 우리는 아직 동이 트기 전인 엷은 어둠 속에 거대한 산정의 십자가 밑에 서 있었다. 동녘으로부터는 서서히 새날이 빛이 밝아오고 있었지만, 계곡에서는 아직도 방의 불빛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베드로는 이 모든 것에 깊이 감동된 듯 한 마디의 말도 없었다. 그의 눈에는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오랫동안 서서 위대한 자연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그것은 베드로에게, 매번 인간적인 거처의 제약과 협소성으로부터 탈출하여 근원적인 세계에로의 잠입과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위대한 자유와 무한의 넓이의 예시였으며, 거룩한 세계에의 체험이었다.

베텔불프 Bettel Wurf 정상 정복자가 된 우리는 그곳의 방명록에 우리들의 이름도 기록하였다. 베드로는 이름뿐만 아니라 한국 말로 무엇인가 썼다. 내가 무엇을 썼는지 그에게 묻자 그는 독일어로 그 밑에 주를 달았다.

“산, 바람, 하느님과 나, 김 베드로.”

이처럼 베드로는 단순한 산에의 낭만주의뿐만 아니라 그때 그때의 깊은 종교적 느낌 속에서 산을 찾고 만나고 있었던 것이다.

베드로는 산이 자기를 초대해 주는 온화한 면만을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갑자기 일기가 바뀌거나, 안개가 내리거나, 길을 잃었을 때 별안간 난폭하고 무시무시한 변모로 변하는 산의 생리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럴 때에도 산은 베드로에게 하느님 자신을 알려 준 것이다. 산은, 사람을 한없이 친절하게 맞아 주는 분이면서도 예측할 수 없는, 이질적이고 이해할 수 없는 분으로 때로는 거절하는, 매력적이면서 동시에 두려움을 일으키는 신비 Mysterium fascinosum et tremendum 로서 드러나는 하느님을 체험케 해 주는 매개체가 되어 준 것이다.

그 목요일은 특히 아름다운 날이었다. 제그루베 Seegrube는 늦은 봄의 꽃들로 덮여 있었다. 그 가운데를 걷는 기쁨은 특별한 것이었다. 그러나 우람한 바위들로 이루어진 산에서 예기치 못했던 거절이 뒤따랐다. 잘못 디딘 걸음! 오를 때 의지가 되었던 우람한 바위들이 그에게 돌이킬 수 없는 깊은 상처를 주었다.

나는 베드로가 그의 최후의 시간에 이 불가사의한 체험을 받아들였다고 믿는다. 그것은 이 불가사의함을 포함하고 있는 커다란 신뢰 속에로, 즉 그가 믿었던 최종적 해방이며 사랑의 신비인 하느님께 바치는 신뢰에로 이끌어 갈 수 있었다고 믿는다.

베드로는 그가 의식이 있던 동안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손을 모아 기도를 하였고, 그러는 가운데 세상을 떠났다.

 

“이제부터는 주 안에서 죽은 사람들이 복되다.”

(사도 14,13). (브람스, 독일 연미사, 7 악장)

 

Stefan Hofer 신부

등반 사고 시 현장에 있었던 신학교 영적 지도 신부

 

 

경애하올 김 여사님

여사님께 이 서한을 쓴다는 것이 무척 힘이 듭니다. 저는 영적 지도신부로서 베드로와 친밀한 사이였습니다.  그와 함께 자주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 이야기를 통해 저는 그가 그의 재능과 겸양을 통해 자기 나름의 올바르고 좋은 일을 많이 할 사람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누구보다도 베드로가 받게 될 사제품과 첫 미사를 기뻐하였으며, 사제가 된 그가 고국에 돌아가서 좋은 일을 많이 행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모든 것은 달리 이뤄졌습니다.

베드로가 산을 좋아했으므로 저는 여러 번 그를 초대하여 함께 등반했습니다. 밤에 세르레스로 올랐던 일도 있어 밤새도록 산길을 걸어 태양이 떠오르기 전에 산정에 도착하기도 했었습니다. 이 특별한 등반은 베드로에게 많은 감동을 주었던 모양으로 눈물만을 흘리던 모습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여사님, 저는 헌정 獻呈 하고 싶은 영상 映像 이야말로 바로 그때의 것입니다.

베드로는 산과 깊은 관계를 가짐으로써 하느님과 깊은 만남을 찾고 또 발견했다고 믿습니다. 베드로는 십자가가 세워진 베텔불프의 정상에서 방명록에 한국어와 독일어로 이렇게 썼습니다. “산, 바람, 하느님 그리고 나”.

저는 강의가 없던 6월 2일 목요일, 베드로와 그이 친구 임요셉에게 노르 케테에 오르자고 초대하였습니다. 유난히 아름다운 날씨였고 우리는 기쁨으로 충만했습니다. 산을 오르는 길도 힘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길에서 베드로는 눈에 미끄러져 계곡 밑으로 굴러 떨어지고 만 것입니다. 우리는 중상을 입은 채 계곡에 누워있는 그를 발견하자 요셉은 즉시 도움을 청하러 가고, 저는 그와 함께 있었습니다. 그는 아직 의식이 있었고, 몹시 힘이 들었지만 말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잔등이 몹시 아프다고 하면서 마실 것을 찾았습니다. 그러는 중에도 그는 기도를 하기 위하여 두 손을 모았습니다. 우리는 함께 열심히 기도하였습니다. 그가 조용해졌을 때 나는 할 수 있는 데까지 그를 위로하면서 곧 도움이 올 것이니 더 기다리자고 했습니다. 약 한 시간 뒤에 헬리콥터가 와서 그를 병원으로 옮겨갔습니다.

우리는 따로 하산을 해서 오후 2시에 병원으로 갔습니다. 의사는 그가 대단히 열이 있어서 먼저 정상 체온으로 돌아와야 한다면서 신체 기능들은 정상적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3시간 뒤에 우리는 한 한국인 간호사로부터 그가 신장 파열과 뇌출혈로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병원의 사제로부터 병자 성사도 받았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의 죽음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지금도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그의 장례식에는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였고, 그들은 진정으로 슬퍼했습니다. 그가 생전에 얼마나 많은 친구들을 갖고 있었고, 또 사랑을 받았는지를 잘 알 수 있는 광경이었습니다. 특히 젊은이들은 그가 서품식 기념 상본에 쓰기로 했던 시편 말씀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당신이 그를 생각하시나이까?”

우리는 그이 생명이 너무나 갑자기 이 세상에서 떠나 버렸다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제 하느님 안에서의 삶 가운데서 그처럼 찾으려고 애쓰던 모든 것을 발견하였으리라고 믿습니다. 우리 가운데에서도 그는 결코 떠나간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가 이 세상에서 마치지 못했던 것들을 대신하려고 합니다. 그도 우리들 사이에 머물러 있으면서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힘이 되어 주리라고 생각합니다.

경애하올 김 여사님, 우리는 여사님께 당신의 아들 베드로를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고, 이 유럽의 땅에까지 오게 해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또한 그가 한국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것을 당신과 함께 진심으로 애도하면서 우리가 드릴 수 있는 초대의 위로를 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저의 어머님께도 이 불상사를 편지로 알려 드렸습니다. 어머님도 대단히 놀라고 슬퍼하면서 이런 편지를 보내 주셨습니다. “이 편지를 받은 오늘부터 나는 베드로의 어머님께서 그 무거운 희생을 잘 지고 나갈 수 있는 많은 은총을 받으시도록 매일 그분을 위해서 기도하겠다.”

여사님! 제 어머님만이 아닙니다. 베드로를 알고 있던 많은 사람들이 모두 여사님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저도 여사님을 위해 기도하며, 저의 모든 동료들의 이름으로 인사를 드립니다.

 

스테파노 호퍼 신부 드림

인스브루크 1977년 6월 26일

 

 

친애하는 김정훈에게

이 사진에서처럼 너는 우리들이 기억에 언제나 머물러 있을 것이다. 이 사진은 안명옥 신부의 첫 미사 때라고 기억한다. 그때부터 너는 자주 제단에 서서 우리에게 복음을 선포하였다. 나는 옆 방에서 성서 봉독을 준비하기 위해 소리 내어 읽는 연습을 하던 너의 목소리를 지금도 듣는 듯하다.

너는 첫 미사에 뒤따를 세 가지 기쁨을 내게 편지로 알려 준 일이 있었다.

“나의 주교님인 한국의 김 추기경님께서 제 서품식에 주례자로 오실 것이 첫째 기쁨입니다. 둘째 기쁨은 나의 어머님께서 오신다는 것이며, 셋째 기쁨은 제 뜻 깊은 서품식이 신부님의 아름다운 성당에서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네가 한국을 위한 사제로서 준비하고 있다는 너의 말을 듣고 진심으로 기뻐하였다. 김 추기경님께서도 사도예절 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베드로는 죽음을 통하여 서품되었습니다.”

너의 사랑하는 어머님은 한국에서 너를 애도하며 울고 계신다. 그분은 일찍이 고매한 법관이셨던 남편의 상 喪을 당하셨고, 너의 누이 아녜스도 남편의 관 棺 옆에 섰던 일이 별로 오래지 않았다. 1977년 4월 30일 내게 주었던 글을 읽으면서 몹시 슬퍼하던 기억이 떠오른다.

“저는 신부님께서 저의 아버지처럼 이 모든 것을 해 주신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인스브루크의 너의 장례식에서 “사랑하는 사람이 죽을 때 자신의 마음 한 조각도 같이 죽는 것입니다.”라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지금에야 비로소 아버지가 자기 아들을 잃을 때 얼마나 고통스러운가를 깨닫는다.

지난 가을에 우리는 티롤에 있는 세르레스 산에 오르자고 했었다. 너는 이 산이 마치 거대한 제단처럼 인스브루크 위에 우뚝 솟아 있다고 말하면서 몹시 가고 싶어했지만 일기가 나빠 함께 오를 수는 없었다.

후에 너는 드디어 그 산에 올라갔었다면서 내게 카드 한 장을 보냈었다.

“마리아 발트라스트 (세르레스 산 밑에 있는 수도원)에서 신부님과 신부님의 사랑스러운 본당을 위해서 기도하고 나서 신부님을 생각하며 세르레스 산에 올라갔습니다.”

나는 이제 왜 네가 너의 첫 미사 후에 함께 이 산을 오르자고 하였는지를 알 것 같다.

“산, 바람, 하느님 그리고 나.” 위대한 자연 앞에서 이렇게 기록했던 너의 그 아름다운 장엄한 체험을 다시 나와 함께 나누고 싶어했던 것이다.

베드로! 나는 너를 위해서 기도할 수 없다. 다만 나와 나의 본당을 위해서 너에게 기도한다.

너는 내게 이런 편지도 보낸 일이 있었다.

“나는 좀더 순수하고 단순하게 되어야 한다고 느껴집니다. 내게 무엇인가가 주어진다면 그것은 오직 기도 속에서만일 것입니다.”

베드로! 너는 단순하고 순수하였다. 그래서 하느님은 너를 네가 사랑했던 산에서의 죽음으로 당신께로 일찍 데리고 가신 것이리라.

 

너의 비오 바움가르트너 본당 신부

발렌슈타트, 1977년 7월 9일

 

 

김 베드로를 생각하며

(이 편지는 스위스에 사는 이루마 여사가 김 부제의 죽음 후에 그에 대한 추억을 적어 보낸 글이다)

 

“그래요, 김 베드로는 사랑스러운 생생한 기억 속에서 떠오르는 사람입니다.”

베레나와 카스파도, 언제나 감사하는 그의 겸손하고 조용한 태도를 몹시 칭찬했습니다.

인스브루크와 벨렌슈타트 간을 여행하는 도중에 나를 방문하곤 하던 그는 나를 그렇게 만날 수 있는 것을 몹시 기뻐했습니다. 여행을 자주하던 그였기에 나는 무명으로 ‘슬피핑 백’을 만들어 준 일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꼭 가지고 다녔기 때문에 그가 와도 새로운 시트를 준비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처럼 그는 조심성이 많았습니다. 그가 마지막 방문을 했을 때는 토요일이었다고 기억합니다. 그는 북스 역에서 내려서 우리 집까지 걸어오는 것입니다. 그날도 그는 가방을 방에다 두고는 부엌에 있는 내게 다가와서는 만족한 듯이 웃었습니다.

“아, 내 편안한 집으로 겨울 돌아왔습니다.” 하면서.

우리는 자주 산책을 했습니다.

산책을 하는 동안 우리의 대화는 대개 하느님이 만드신 아름다운 자연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런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하곤 했는데, 그것은 고국에 있을 때부터 훌륭하신 아버님과 함께 자주 산책을 했었을 때 몸에 익힌 것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어느 날 우리와 함께 앉았던 그는 갑작스럽게 말했습니다. “오늘은 우리 아버님께서 돌아가신 지 꼭 10년 되는 날입니다.” 그의 얼굴은 담담했지만 우리는 그날이 베드로에게는 잊을 수 없는 날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1975년 11월 7일자 편지에서 그는

“나는 산에 오를 때마다 당신과 카스파 씨를 생각하고 감사드리게 됩니다. 이유를 아십니까?

당신들이야말로 제게 등산이란 것이 무엇인지를 깨우쳐 주셨고, 등산 방법까지 배워 주셨기 때문입니다.

나는 당신들을 통해서 산과 산에 오르는 것을 사랑할 줄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어제 나는 혼자 케마러(2,482m)에 올라갔었습니다. 산이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그 아름다운 감동을 흠뻑 맛볼 수 있었습니다. 제발 맡은 짙은 안개로 완전히 뒤덮여 아무것도 볼 수 없었으나 머리 위로는 찬란한 햇빛이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나는 언제까지나 그 자리를 떠나고 싶지 않았습니다. 주께서는 찬미를 받으실지어다.”

베드로에게는 등반이 힘든 공부로부터의 가장 좋은 휴식이었고, 또 새롭게 살아 나가도록 이끌어 주는 힘찬 활력소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카스파와 베레나, 또 나도 그가 보내 주는 독일어 편지가 횟수가 거듭함에 따라 놀라운 진보를 보이는 데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들은 사실 차원이 높은 영적 대화에 대한 지식은 아주 부족했습니다. 그런데도 베드로는 집에서나 또는 함께 길을 걸을 때에도 조심스러운 태도로 우리의 이야기를 조용히 듣기만 하는 귀여운 경청자였습니다. 그가 우리 집에 머무는 동안 나는 하루에 두 끼쯤은 쌀밥으로 식사를 준비하곤 했습니다. 베드로는 이것을 몹시 기뻐했고 맛있게 먹는 듯 했습니다. 그는 식사 기도로 “해 뜰 때부터 해 질 때까지 주의 이름은 찬미를 받을지어다.”라는 시편이나 혹은 다른 기도문을 노래로 불렀습니다.

어느 곳에서나 그렇겠지만 특히 저희 지방에서는 네 잎 또는 다섯 잎 클로버들이 드물기 때문에 일생 동안 한 번도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산책 길에서 나는 몇 개나 발견했기에 이 희귀한 클로버를 베드로에게 주었습니다. 그는 웃으면서 그 클로버를 수첩 안에 소중히 간직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이상한 모양의 아름다운 돌들을 모으는 취미도 같았습니다. 그래서 라인 강 연안의 외길을 따라서 걷노라면 이런 돌들이 많은 곳에 이르게 되는데, 그때마다 우리는 아이들처럼 돌들을 주워 오곤 했습니다. (이 돌은 10월 31일 그의 무덤에 갔었을 때 그의 무덤 곁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는 <티롤에 있는 약수터>라는 책을 대단히 흥미 있어 했지만, 다가오는 사제 서품을 위해 정신을 집중해야 한다면서 이 책을 다시 돌려 보낸 일도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 책이 나의 다른 책들과 함께 꽂혀 있는 것을 봅니다.

 

“인간이 무엇이길래 당신은 그를 생각하시나이까..”

 

베드로가 선택한 이 성구의 의미는, 한 개의 돌이나 또는 광물 鑛物의 연륜을 관찰하노라면 더욱 절실하게 느껴집니다. 하나의 수정이 되기까지 오천만 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주께서 우리의 베드로를 불러 내신 세계는 얼마나 풍요하고 행복한 곳인지! 그의 마지막 카드가 돼 버린 성신강림 축하 카드에 그는 이렇게 쓰고 있었습니다.

“다시 뵈올 때까지 안녕.”

그래요.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되기를 희망하고 기다립니다.

 

Schaan 1977년 11월 7일

이루마 아주머니

 

 

사랑하는 친구 정훈 영전에

너를 담은 관도 없는 가운데 너의 장례 미사를 드리고, 아직도 너의 죽음을 실감하지 못한 채 너를 영결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니 말문이 막힐 따름이다

세상에 이런 날벼락이 어디 있겠니!

지난 8일 추기경님 앞으로 날아온, ‘김 베드로 등반 사고로 사망’이라는 전보가 정훈이 너였을 줄이야! 매사에 침착하고 조심성이 많던 네가 이같이 큰 슬픔을 네 가족과 우리 모두에게 주고 홀연히 가 버리다니..

너의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로 온갖 괴로움과 슬픔을 그렇게도 잘 견디신 너의 어머님이시지만 이 슬픔을 어떻게 감당하시라고 너 혼자 가버렸니? 너의 어머님께서 땅을 치시고 통곡하시면서 말씀하셨듯이 “산에는 뭣 하러 갔니? 산에 갔더라도 눈이 오고 미끄러운데 왜 조심을 못했니?”

너는 너의 가족들이 기도하며 바랐던 대로, 평소에 너를 아끼고 사랑 했던 사람들과 친구들이 기대했던 대로, 너의 훌륭한 재능과 착하고 인간미 넘치는 성품이 더욱 닦아지고 완성되어 이 한국 교회를 위해서 많은 일을 했어야 하는데…이제 겨우 서른 해를 넘기고 가다니…

정말로 하느님의 섭리는 우리가 헤아리기엔 너무 심오하구나.

정훈아, 너와 함께 지냈던 지난 일들이 그립고 애틋해질 뿐이다.

네 나이 서른, 비록 짧은 생애였지만 우리에게 넘겨 준 너의 인상과 체취는 얼마나 강하고 짙은 것인지 너는 모를 거다.

우리들이 너를 처음 만난 것은 입학 시험 날이었다. 유난히도 키가 크고 삐쩍 마른, 한눈에 봐도 착해 빠졌으면서도 안경 너머로는 총명이 넘쳐 흐르는 너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신학생으로 뽑히어 누구보다도 자랑스러운 젊은이가 되었지. 사제직이 얼마나 어려운 것이고, 사제라는 신분이 무엇을 의미하고, 어떠해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우리는 자라났다. 특히 너는 훌륭하게 자랐지. 그 까다로운 신학교 규칙을 어기는 일도 없이 기쁘게 생활했지. 특히 저녁 시간이면 오솔길을 거닐며 대화를 나누거나 로사리오 기도를 드리는 것을 너는 얼마나 즐거워했니… 네가 소화 데레사 성녀를 유난히 사랑했던 것도 우리들은 잘 알고 있었다. 소화 데레사 자서전을 몇 번이고 일거 책이 다 닳을 정도였고, 도 책 속에는 깨알 같은 글씨로 주를 달았던 것을 지금도 잘 기억한다. 너는 순진하고 단순하면서도 깊이가 있는 사람이었어. 너의 신심 생활의 진보는 언제나 앞서 있었고, 너의 정신적인 사고력은 언제나 예리하게 우리를 압도했었지.

책 읽기를 그렇게나 좋아하고, 깊은 명상과 기도의 생활을 너는 얼마나 사랑했었니? 그러면서도 네 마음은 언제나 뜨거운 인정이 넘치고 있었다. 친구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아낀 너였는지 우리는 잘 안다. 모든 친구들에게 한결같이 잘 해 주었어. 특히 괴로운 일을 당하고 있는 친구들에게는 어떻게 해서라도 도와 주고 싶어하던 너였지. 너의 특징인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머리를 긁적거리면서 두 눈을 껌벅거리던 너. 어떻게 해서라도 그 괴로움을 나누고 싶어 너는 애썼지. 너는 얌전해 보이면서도 무척 장난을 좋아했지. 언젠가는 뒷산에 있는 버찌를 잔뜩 따 가지고 와 친구들에게 나눠 주어 그걸 먹고는 온통 배탈이 나서 소동이 나고 그 일 때문에 혼도 나고 미안하기도 해서 의기소침해 있던 네가 생각난다.

너는 또 우리에게 여유와 멋을 느낄 줄 아는 소중한 것을 가르쳐 주었다. 매일 단조로운 생활이 반복되는 권태로운 신학교 생활을 유쾌하고 멋있게 보낼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끌어 준 것이다. 고달픈 군대 생활에서도 자신의 생활만으로도 힘겨울 텐데 잘 지내고 힘내자는 격려를 자주 주었고, 외국으로 유학을 가 있는 몸이면서도 늘 긴 편지를 통해서 우리의 생활을 반성하자는 얘기와, 후배들에게 좋은 말을 못 해 주고, 좋은 선배 노릇을 못 해 주고 와 미안하니 대신 해 달라는 글을 보내 주던 자상한 너였다. 또한 신품받고 사제생활을 하고 있는 친구들에게 열심히 잘 살라는 걱정과 격려의 편지를 보내 준 너였지.

그러기에 친구이면서도 우리는 너를 존경하였고, 우리를 대신해서 큰 일을 해 주리라 믿었다.

그러나 이제는 네가 세상을 떠났다는 엄숙한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너의 짧은 생애의 의미와, 그 동안 우리와 함께 지냈던 짧은 인생을 통해 네가 실천했던 것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남겨준 모든 것들을 우리 생활 안으로 끌어들여야 하겠다. 그것만이 네가 남기고 간 모든 것일 거고, 너의 희망일 테니까. 분명히 너의 삶은 값진 것이었다. 어떤 이보다 성실하고 진실된 것이었고, 아직 인생 도정을 걷고 있는 우리에게 특히 사제로서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훌륭한 표본이 되리라.

우리는 먼 이국에서 보냈던 너의 괴로웠던 시간과 생활과 노력을, 우리 모두가 대신해서 훌륭한 사제로서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살아감으로써 네 몫까지 다 하겠노라고 약속하고 다짐한다.

착하고 아름답게 산 너의 영혼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백 배의 보상을 틀림없이 천국에서 받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너와 영결하는 이 마지막 순간을 기쁘게 받아들이겠다.

부디 편안히 쉬거라.

천국에서 너의 가족들과 우리 모두를 지켜 봐주기 바란다.

 

1977년 6월 7일

우리의 귀중한 친구 정훈이를 보내며

친구를 대표해서 기헌이가

 

 

 

II 일기

 

1972년

 

헌사

하느님, 당신은 이렇게 길을 보여 주시며, 실천하는 길로 나아가게 해 주셨나이다.

이렇게 힘찬 내적 충동을 만들어 주시며, 불을 켜 주심을 감사하나이다.

당신은 이렇게 해결할 수 있는 방도를 주셨나이다.

이것을 어떻게 잘 간직하며, 크게 하고, 보존할 수 있는지 열심을 다하여 노력해야 할 줄 아오며, 불을 질러 주심과 마찬가지로 보존해 주실 줄도 아나이다. 당신은 나 혼자가 아니라 친구들과 같이 하게 하심으로써 훨씬 힘을 더 낼 수 있게 하셨고, 용기를 얻을 수 있게 하셨나이다.

앞으로 또 틀림없이 약해질 때가 있을 것이고, 또 깊은 혼란에 빠져 앞길이 캄캄할 때가 있을 줄 아나이다. 그렇더라도 당신은 우리를 결코 돌아보지 않으실 리 없나이다. 아니 계속 우리를 밀어 주실 줄 확실히 아나이다.

당신의 무한하신 깊이에 보다 더 맛들이고 빠져들게 하시고, 또한 외적으로도 빛을 줄 수 있게 해 주소서. 이를 기화로 새로 세를 받은 것처럼 참신해지도록 해 주소서.

 

1972년 4월 28일

 

 

새로운 시작

 

1972년 4월 30일

주여, 이렇게 해서 시작하려 합니다. 이렇게 부족한 채로 시작하려 합니다.

오늘 동생들과 어머니, 매형, 누나와 같이 관악산에 다녀왔습니다. 주님, 지금 곧 자러 가야 하므로 그 얘긴 그만 쓰고 오경무 씨 얘기를 해야겠습니다. 저를 정신차리게 해 준 – 그의 고귀한 글로써 – 당신이 도구로 삼으셨던 그를 당신은 오늘 불러 가셨습니다. 그것은 피가 튀는 참혹한 모습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당신을 탓할 수는 없지요.

이만 자러 내려가겠습니다. 요새 머리가 쭉 아픈데 잘 잠들게 해 주십시오. 참, 그리고 아까 깜깜한 성당 안, 흐늘거리는 성체 불 앞에서 다시 한 번 “이제 결코 망설이지 않겠노라.”고 다짐 드렸음을 아시겠지요?

 

 

1972년 5월 6일 土

예수님, 며칠째 벼르다가 이제사 씁니다. 방금 춘천 홍 수녀님께 편지를 썼어요. 요새 샤르댕과 장자를 읽는 중이라서 더 그럴 생각이 났나 봅니다.

당신은 오늘 아침부터 당신을 생각할 수 있는 빛과 길을 주셨습니다. 얼마나 감사할 노릇인지요.

예수님, 그만 내려가 자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아져 이만 줄이고 내려가겠습니다.

항상 계시고 항상 나의 것이신 예수님. 아, 예수님!

 

 

1972년 5월 9일

누나 매형 결혼 2주년. 주여, 예수님이시여, 오늘 아침에는 당신이 또 특별한 시선을 보내 주시고, 아니 그보다 저로 하여금 그 시선을 느끼게 하여 주셨음을 감사하나이다. 그것은 마치 이 파아란 5월에 싱그러이 피어나는 잎새들과 같이, 이 맑은 아침 당신은 그렇게 저를 찾아 오셨나이다. 그저께부터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제논의 거북이처럼, 얼마 전까지 당신을 믿지도 안 믿지도 않으면서 관념의 유희를 수없이 거듭해 왔나이다. 이것은 실로 작다면 작고 크다면 엄청나게 큰 것이 아닙니까? 그 모든 것의 해결은 실제로 한 걸음만 뛰어 보면 당장 드러날 것이었는데 관념상으로는 도저히 헤어날 길이 없었습니다. 이제 당신은 확실히 제가 그것에서 헤어나게 하셨나이다. 나로서 어떻게 감사해야 하리이까. 당신은 저를 훠콜라레에 참석하게 하심으로, 또 오경무 씨의 묵상을 읽어 보게 하심으로써 해결해 주신 겁니다. 도 이 모든 것을 지상 최대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고, 헌신짝처럼 내버릴 수도 있다고 하신 데레사 말가리다 수녀의 말씀을 읽게 하심으로써 큰 도움을 받게 하셨나이다.

하나부터 열까지 만드시고, 움직이게 하시고, 다스리시고, 보존하시는 주여, 저를 타는 눈송이로 계속 있게 하소서.

 

 

1972년 5월 9일 火(같은 날)

예수님, 그냥 내려가 자기가 꺼림칙해서 다시 올라왔습니다. 그런데도 신선한 느낌 속에 당신이 그려지지는 않습니다.

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차분히 자기를 들여다봄과 당신을 생각함 없이 그냥 쫓기듯 일거리다, 공부다, 주체를 못 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마음을 가지고 당신 대전에 부복하기가 심히 난처스럽습니다. 매양 이 타령이니 큰 변화가 일어날 징조도 없고 – 아, 그 해답을 어느 정도 알기는 합니다. – 다만 나의 확실한 행동, 한 걸음, 그게 그렇게 어려운 것입니다. ‘확실한 행동, 한 걸음’, 그럴 힘을 주소서.

 

 

1972년 5월 18일 木

어떤 답을 주실 만도 하였는데 당신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나이다. 오늘같이 광풍이 심히 부는 날.

그 대신 당신은 근본적인 데로 다시 돌아가게 하셨나이다. 즉 모든 것은 당신을 위해서이지 결코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을 위해서, 당신만을 위해서, 당신 원하시는 대로 결코 나를 위해서, 즉 내 명예나, 명성이나, 나의 재미나, 나의 욕심으로 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하셨나이다.

오늘같이 큰 바람이 일고 나무가 휘청대는 밤에, 당신은 그것을 알게 하셨나이다. 이 노트를 도서관으로 가져다 놓았습니다. 이제 좀더 차분히 당신을 생각할 수 있게 되었나이다.

 

 

1972년 5월 19일

예수님, 늦었습니다. 성당에 올라가서 잠깐 뵙겠습니다. 내일은 집에 가서 좀 쉬고 딸기를 먹으려 합니다. 말가리다 수녀님을 부르셔서 저와 만나게 해 주세요. 참 저는 지독히 못나고, 자기 안에 꽁꽁 매여 있다는 것이 거듭거듭 밝혀집니다. 그러니 계속하게 해 주소서. 드릴 말씀 많기도 하지만, 참, 데레사 말가리다 수녀님 전기를 다 읽었습니다.

 

 

1972년 5월 24일

예수님, 크고 넓게, 용기 있게 살게 해 주소서.

 

 

1972년 6월 9일

이[齒]를 했습니다. 9천 원 들었는데 잘 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하고 느낀 점: 집에 돈 2만 원을 척 갖다 쓰는데, 선뜻 여기까지 가져다 주시는 어머니. 생각하며 너무 고맙습니다. 그러나 그걸 무엇으로 보답하지요? 공부 잘하는 것? 결국 결론은 그것입니다. 당장 드러날 수 있는 외적 표시이니까요.

고백 성사를 봄: 일이 안 될 대를 은총의 때로 알고 힘을 내라. 그래요, 예수님?

 

 

 

아버지를 생각하며

 

1972년 6월 11일

일기를 안 쓴다는 건 그만큼 자기를 회피하고 산다는 얘기다. 조금 전에 나가이 다카시의 <만리무영>에서 여러 대목을 읽었는데 그기는 점이 많다. 우선 그 글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차분하고, 원만하고, 노력을 기막히게 많이 한 신앙인인 것을 알게 해 준다. 내게 특히 좋게 여겨지는 것은 그 글의 분위기와 저자가 바로 돌아가신 아버지를 연상시키는 까닭이다. 무엇보다 진지하고 신념에 찬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도 그러하고, 어투며 그 상황까지 어쩌면 그렇게 흡사할까. 공감하는 점이 정말 많다. 자식에 대한 배려 아내 생각 등도 아버지 경우와 같다. 동시에 그 사람의 아들들은 어떨까 하는 호기심이 부쩍 동하는데, 많은 사람이 우리 집안이나 나에 대해 갖는 기대와 주시도 그런 종류일 것이다. 불쌍하신 아버지, 죽음을 앞두고 아내를, 자녀들을 그대로 놔두고 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무슨 생각에 젖으셨을까? 얼마나 우심 憂心 이 크셨을까? 이제 나는 비교적 제 궤도에 올라 있는 것 같은데, 다른 아이들은? 염려되고 걱정된다.

신약성서 공부 계속하련다.

 

 

1972년 6월 12일

참 볼수록 생각할수록 못난 나다. 지금 9시 5분인데 아까 술 먹고 들어와서 자느라고 미사 참여를 못 했다. 몹시 답답했던 오후 – 그건 바로 내가 만든 것으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도록 나는 그 올무에 스스로 몸을 던진 것이다. 이제까지의 내가 모조리 허물어져 버려, 소위 원자 벌판처럼 모든 것의 의미가 사라져 버린 느낌이다. 참 무섭도록 처참하고 암울하기 그지없다. 무얼 믿고 어떻게 재건해야 하나. 삭발례를 앞두었다는 것이 더욱 나를 내리누른다. 내일이 13일, 피정이다.

 

내일 (13일) 계획

1. <만리무영>: 많이 읽을 것.

2. 로사리오 기도: 10단 바칠 것.

3. 일찍 기상: 산보 – 성당에서 묵상.

4. 오전 1회, 낮 1회, 밤 1회, 성체조배

 

왜 이렇게 하는지 당신은 아시나이다.

 

 

1972년 6월 15일

성당에서의 그 좋은 시간을 더 오래 갖지 못하고 손에는 우산을 든 채 그냥 나왔다. <만리무영>을 다 읽었다. 그 사람과 아버지 – 내 관심을 끄는 중요한 점이다. 아버지도 병석에서 그 책을 읽으시고는 얼마나 좋아하셨던가. 그처럼 좋아하실 수 없었다.

이제 어떤 일도 다 뜻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나가이 다카시 선생이 자기의 아들에게 주는 글은 정말로 내게 주는 글 같았다. 나가이 다카시 – 그분의 모습이 그대로 보이는 듯. 동시에 아버님 모습도 떠오르면서 아버님이 늘 지니셨던 그 분위기마저 느끼게 된다. 진실, 진실에의 투철하려는 박력을 그곳에서 본다. 교육학 시험을 보았다. 여유를 잃지 말 일이다.

 

다시 한 번 나가이 다카시 선생과 아버지를 생각한다. 따라서 나의 위치도 많이 밝아졌다. 그 신선하고 진실된 박력.

 

 

1972년 7월 1일

시험 끝내고 곧 이어 방학 계획에 골몰.

예수님, 감사합니다.

 

 

1972년 7월 9일

예수님, 이렇게 의미심장한 날, 저는 또 들뜬 기분에 당신의 마음은 헤아릴 생각도 못하고 꺼떡꺼덕 건방지게 보냈나이다.

예수님, 당신은 제게 수단을 입게 해 주셨습니다. 당신 앞으로 크게 한 걸음 다가서게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건 순전히 외적인 것이고, 과연 얼마 만큼 큰 성과와 보람이 있는가는 두고두고 제가 노력하는 것에 달려 있을 줄을 잘 아나이다. 이 모든 것을 잘 깨닫도록 해 주시고, 노력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예수님, 당신을 똑바로 바라다봅니다. 당신 마음 속을 보고 싶습니다. 그럴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미사 중의 추기경님의 말씀은

“인간적 존경이나 권위, 과시…(아, 어림없는 일입니다). 우리 자신을 남한테 음식으로 떼어 주는 것, 바로 예수님이 하신 그것처럼 해야 한다.

무서운 각오로 제2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한다.”

 

축하해 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예수님!

 

입학 때 이렇게 썼었다. “10년 후 그날도 축복받을 수 있을지 떨리는 순간…”

이제 크게 내디딘 결정적인 한 걸음. 삭발례를 받고 수단을 입어 성직자 聖職者 가 되다. 계속 노력하는 거다.

오늘이 분수령.

 

“아버님, 기뻐해 주십시오. 순전히 당신 덕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생존해 계시지는 않지만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나는 안다. 아마 그러셨을 게다.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시며 “야, 잘 했다. 더 잘해 보도록 하자.”

아버님, 그렇지 않습니까? 저는 아버지를 조금도 멀게 느끼지 않습니다. 그래서 외롭지도 않습니다.

 

 

 

나의 길의 근본

 

1972년 7월 16일

내일 아침 훠콜라레 가입 신청을 잊지 말고 해야겠다.

 

 

1972년 8월 19일

K 형네 집에 가서 놀다 왔다. 이렇게 오래간만에 일기를 꺼낼 생각을 한건 그만큼 느낌이 강렬했기 때문이다. K 형은 나와 비슷한 점이 많아 그를 보면서 확연치 않은 내 상태를 많이 정리할 수 있었다.

 

여러 몸의 다각적 사고 – 모든 것을 받아들여라 – 깊은 혼란 -뭐가  뭔지 모르겠다 – 유일한 탈출구 – 뛰어야만 된다 – 그것이 어렵고 이루어질 가망이 없다.

1. 본질적인 것에 대한 추구가 없는 ‘나’

2. 역시 비약을 해야 한다.

 

 

1972년 8월 20일

어제에 이은 비슷한 결론, 요는 역시 주저하지 말고 한 우물을 파는 것. 그 길만이 유일한 길이다. 절대로 그래야 한다.

지금 법사님이 옆에서 자고 있다. 그 친구는 내게 많은 걸 생각하게 해 준다. 순수한 그 친구가 몹시 부럽고, 그 앞에서는 할 말이 없다. 교회와 그의 종교, 종단과 그의 종교, 그의 고민은 그 점에 있다고. 근본적인 것은 모두 같단다. 그 경지에 서면 다 통하리라는 것. 그런데 나는 그의 식대로 일차적인 문제는 생각할 의향마저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은 왜일까?

그 까닭을 규명하기로 하면 길고도 복잡해진다. 다 생략하고, 아버지의 마지막 글대로 꿈을 불태우고 간직해 보려고 했던 때가 있었으나 이제는 실족 失足의 화 禍를 면하려 함인가. 홍역이나 몸부림 없이도 그럴 수가 있는가. 각설하고, 그러고 싶으므로 정말 한 우물만 깊게 파련다.

한 우물을 파는 첫 걸음. 우선 독어 공부다. 아침 미사, 묵상에 충실.

하느님이시여, 절대자이시며 주재자이신 주님이시여, 그럴 수 있게 해 주소서. 당신은 지금까지 그렇게 해 주셨나이다.

 

 

1972년 8월 25일

기독교를 전혀 모르고도 잘 살 수 있는 이런 사람들. 그렇다면 절대의 필요성이란 무슨 얘긴가. 우리는 불교를 모르고도 아무렇지도 않을 수가 있다.

명지산 明智山 상봉에서 잠깐 있었던 얘기.

“하느님이 이처럼 멋있게 조화를 이뤄 놓으셨다….”고 그렇다면 결국 조물주이신 하느님의 영역 안에서 석가모니는 구경하고 감탄하면서 어떤 기존 旣存의 길을 찾아낸 것이 아닌가?

짧은 얘기였고 농조의 한 마디였으나 내게는 크게 느껴졌던 순간이다. 석가모니의 제자들은 그 엄청나고 머나먼 각고의 길을 제 나름껏 힘껏 걸어왔지만 결국 하느님 영역 안에서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존재 자체의 문제를 내건다면 불가에서는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이 점은 확실하게 느껴진다. 이 문제는 워낙 이 큰 문제이기 때문에 끝을 보여 줄 수가 없고, 혼자만의 걸음으로는 도달할 수가 없는가 보다.

몹시 고요하다. 인적이 없는데 밖에 줄기차게 쏟아지는 빗발은 뽀얀 포말을 그린다. 세상 천지에 나 홀로 있다는 절실한 느낌. 이것이 바로 태초의 상태가 아니겠는가.

내가 절을 좋아하는 것은 첫째로 그 분위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선암사 仙巖寺에서 그 절대의 분위기를 다시 느끼게 해 주던, 태곳적부터 있어 온 듯한 물 소리와 풀벌레 소리, 바위 위로 어스름한 달빛이 흐른다. 얄팍한 인위적인 조작이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나는 비로소 느낄 수가 있고 숨쉴 수가 있는 것이다.

둘째는 사람들이다. 이곳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나는 깊은 동류의식을 느낀다. 이곳 사람들과 나는 태어난 바탕이 같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교리까지 좋아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그러한 것을 향하여 정진하는 그들의 성실한 태도와 용기를 진심으로 감탄하며 높이 평가한다.

분명히 있는, 그들과 우리와의 차이점은 양보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 점을 명확히 인식한다는 것은 내가 한 걸음 더 나갔다는 표지이리라. 결국 이 점은 양측이 냉철히 솔직하게 인정해야 하리라.

교리 이전의 인간은 정말 고귀한 동일한 것. 아, 이 절대의 분위기, 나는 그래서 절을 사랑한다. 저 물 소리, 저 풀벌레 소리, 전등 아닌 촛불 밑의 이 밤.

 

 

1972년 8월 27일

산소에 다녀왔다. 비가 오는데도. 내일은 아침 미사에 가야겠다. 그리고 열심히 기도해야겠다.

 

그렇게도 쉽고 평화롭게 보이는 집안일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그럴 수 없이 복잡하고 어려워 보인다.

 

 

1972년 9월 1일

드디어 개학 날이 되어 학교로 돌아왔다. 다시 ‘혼자’가 되었다. 집에서 그렇게 여럿이서 있다가 혼자가 되었다. 이것이 바로 신부 神父이다. 혼자서 사는 것.

새 숙사에서 모든 것이 새 것인데 내 정신은 그렇지가 못하다. 별다른 각오도 없다. 각오를 가질 생각도 나지 않는다. 아, 어떻게 한담? 점점 깊이 박혀 가는 뿌리인데. 이젠 근본은 그냥 덮어둔 채 생활해 나가기 위하여 예수님을 찾고 얄팍한 영합을 해 보려는 속셈일까? 근본을 찾으려던 굳세고도 변함 없는 기백은 어디로 가 버렸을까!

추기경님 말씀은 남을 위해서 기도할 줄 알아야 한다고… 내일 일직 최 신부님 찾아 뵈야지. 집에 계신 엄마와 아이들이 걱정된다. 할머님의 그 걱정스럽고 스산해 하시던 표정.

 

 

1972년 9월 2일

<시몬느 베이유>를 읽고 있는 중.

내게 문제되는 점으로 느껴지는 사항을 본다.

나는 너무나 늦게 나의 길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것을 깨달았을 때에는 이미 나의 삶의 방향은 정해져 있었다. 용기 있는 사람들은 이럴 때 박차 버리고 나설 수 있었을 것이다.

확실하지도 않은, 거의 미지수의 그 길을 어떻게 선뜻 택할 수가 있겠는가 하는 문제에 자주 부닥치곤 한다. 그러나 나는 결국 이 길을 가면서 최대한 잘 살아 보기로 타협한 것이다.

참으로 어렵다. 내게 너무 벅차 감내할 수 없을 것 같은 문제이다.

 

 

1972년 9월 3일

인생이란 것을 생각할수록 그리스도에게서는 멀어지는 듯한 심각한 기분…. 그래서 초조하다.

 

 

1972년 9월 4일

그릇이 클수록 채우기가 어렵고 더디다. 범위를 크게 잡을수록 채워질 가능성은 희박해진다. 받는 것은 비슷한 분량인데 그릇을 너무 크게 벌려 놓으면 채우기 어려운 것은 당연하다. 기초를 완전히 다져 놓은 뒤에 무엇을 높이 쌓는다는 것은 엄밀히 말해 불가능하다. 신부가 되기 전에, 아니 전이건 후이건 간에 ‘철저한 인간을!’ 이라는 내 주장에 문군 文君 은 즉각 불교적이라는 판결을 내린다.

결국 인생의 여러 가지 길과 국면을 성찰한다는 건 일을 이루지 않겠다는 것과도 상통하는 것 같다. 그래서 이제까지 모든 한국 가톨릭 신부들은 좁은 토대 위에 자기 탑 하나만을 쌓아온 것이다. 그러니 답답해 보일 수밖에… 신부란 하느님의 뜻하심에 따라 불리운 사람이지 인생의 도 道 와 진리를 깨친 사람은 아닌 것이다. 오히려 그 정반대의 부류가 아닐는지. 그렇다면 인생과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이 길을 걸을 수 없다는 도저히 돼먹지 않은 말이 성립되는 게 아닐까.

그런데 나는 이것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는가 하면 이런 것에 끌려 깊숙이 묻혀 버리고도 싶은 거다.

여기서는 인생의 길 운운의 여지가 없다. 그걸 진작 느끼는 사람은 이곳에 들어오지 않았거나 벌서 나갔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아버지 같은 코스는(그러나 내게 그와 똑같은 결론만 주고 안주하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높이 평가하지만, 나는 일찍이 어떻게 해서 그랬든 간에 하느님에게 사로잡혀 있었다. ‘나’라는 존재를 전혀 느끼지도 않았고, 문제는 없었다. – 이것은 거의 아버지의 영향이다. – 그런데 지금 거미줄같이 아니 그보다 훨씬 복잡하고 불규칙하게 나를 얽매고 잇는 것들이 나를 압박한다.

빨리 이쪽으로 결론을 내려 나를 안주시키고 싶은 이 안타까운 심정!

 

 

 

동서의 피안

 

1972년 9월 5일 火

나는 요사이 온통 허깨비에 둘러싸여 허공에다 주먹질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안개가 약간 걷힌 듯하다.

예의 김 신부님이 큰 힘을 주셨다. 그 분의 말씀을 들으니 그 깊이와 성실함과 무섭도록 굉장한 의지, 그 각고를 좀 안 것 같아 내 안일함을 꾸짖게 된다. 이것은 과연 할 만한 것임을 느낀다.

장 신부님은 “궁극적으로는 자신을 초월하는 신념과 신앙의 근본적 결단 앞에서 사느냐 안 사느냐 하는 물음만이 남게 된다. 신념을 위해서는 자기 자신의 모두들 바칠 수 있는 근본적인 용의와 결단으로써 참 인간답게 산다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라고 설파. 그런 순교적 자세로 살지 않고서는 인간적 자세로 살 수 없는 것이라고 하셨다. 오늘 다시 읽기 시작한 <동서의 피안>에서 저자는 “그리스도교는 서방적이 아니다. 서방이 그리스도교적일지는 몰라도”라고 말해 나를 흡족 게 하였고, 용기를 주었다. 저자는 동양 삼교 東洋三敎 를 깊숙이 파헤쳐, “흡족하게 많이 얻었으나 홀연 자기 혼자더라.”하는 이야기도 했다.

 

 

1972년 9월 7일 木

들뜬 기분을 가라앉히자. 차분히 전진하자. 박 형이 내일 오지로로 떠난다고 고맙게도 찾아와 주었다. 용기와 위로가 될 수 있는 말을 많이 해 주고 갔다. 그 진지하고도 약간 유머러스한 얘기는 참으로 깊은 고뇌의 소산인 듯하여 그대로 받아들여졌다.

자기 가능성을 자기와 키워 나가는 것 –  자기 자신이 설 수 있어야 한다. <동서의 피안>을 깊은 감명 중에 읽고 있다. 옛날 고교 1학년 때 쯤이었지. 아버지가 손수 사다가 쥐어 주신 그 책을 별 흥미를 못 느끼면서 읽었었지만…, 그 책이 이렇게 나의 심금을 울릴 줄이야. 역시 모든 것은 시기가 있나 보다. 아버지께서도 지금의 내 모습을 보시고 얼마나 흡족히 생각하실까.

 

 

1972년 9월 8일 金

훠콜라레에 갔다 왔습니다. 그리고 오늘부터 다시 당신께 이 글월들을 올리기로 하였습니다. 현재 제가 생각하고 있는 문제란 ‘당신은 사랑이시며, 현재 상태 그대로의 나를 당신께 드려야 한다.’는 지도자의 충고와 ‘당신께 깊숙이 묻히는 것, 즉 당신께 대한 앎은 제가 좀더 삶 전반에 걸친 철저한 파악을 하고 나 후’여야 한다는 저의 주장과는 충돌에서 빚어지는 듯합니다. 그 지도자의 말대로 모두 맡겨 버리면 인생의 연구, 동양의 연구는 마감이 되어 버린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건 아무래도 좀 불합리하지 않습니까?

아, 제 말버릇이 굉장히 고약해졌습니다. 정말 저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저는 또 당신께 깊숙이 다가가지 않고는 허전해서 한 걸음도 내디딜 수 없는 심경이기도 합니다. 저는 당신을 자꾸 거부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군요. 저는 정말 조금이라도 빨리 확답을 하여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데요. 걸어가야 할 길에는 할 일들이 산같이 쌓였는데도 이런 길, 저런 길, 아니 샛길까지 두루 살펴야 한다는 고집 때문에 길의 끝에서 기다리고 계시면서 끝까지 걸을 수 있는 힘을 계속 주시는 당신을 외면하려 합니다. 정말 이젠 그만둬야겠습니다.

주님,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모두 해 주시는 당신이시니, 어서 그만두도록 강한 힘으로 저를 잡아 주십시오. 미지근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 설혹 여러 갈래로 된 길이더라도 그 모든 길 끝에는 당신이 기다리고 계시고, 모든 길이 결국에는 당신께로 이르게 된다 하더라도 문제는 그 길을 마칠 때까지 중도에 게으름부리는 일 없이 쉬지 않고 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택한 이 길을 저는 앞만 보고 가고 싶습니다. 가다가 치워야 할 장애물도 많을 것이고, 웅덩이도 건너야 하고, 등에 진 봇짐은 무겁게 내리누를 것입니다. 그리고 또 이 길을 같이 가는 많은 이들에게 용기와 위로를, 확신을 주어야 하는 제가 아닙니까?

이 길을 당신만을 믿고 무조건 가렵니다. 이제까지 당신은 저를 끔찍히 사랑하셔서 이 길을 택하게 해 주시고, 훌륭한 아버지와 어머니를 부모님으로 모시게 해 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다 저를 생각하시고 기묘히 안배하시는 당신의 사랑입니다. 문제는 이제 해결된 듯합니다. 강포한 자만이 끝까지 달릴 수 있다고 했습니다. 정말 그 많은 덤불을 헤치고 당신께까지 가기는 보통 억세어선 안 될 것입니다. 이제 오로지 앞만 보고 힘차게 달려가려 하오니 덤불을 제거해 주시고, 웅덩이를 메워 주시며, 괴는 자들을 물리쳐 주십시오.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해 주시는 주님, 줄곧 나아가게 해 주십시오. 아멘. 알렐루야.

 

 

1972년 9월 9일

개학한 지 꼭 일주일째 되는 밤이다. 새 기숙사의 내 방에서 일주일을 지냈다. 방학 때 흐트러졌던 기분을 가다듬고 이젠 오로지 전진할 자세를 갖추어 마음을 가다듬는다. 모든 것이 새 것이다. 책상, 선반, 형광등, 휴지통, 재떨이까지. 이 모든 것은 내겐 정말 과분하다. 이 엄청난 혜택 속의 나, 이제 남은 것은 바로 새 정신이다. 어느덧 타성에 젖어 쓰지도 달지도 않은 이 생활, 온갖 상념에 망설이다가 귀중한 나날을 보내버리기 일쑤였다.

이제 한 걸음 크게 다가들어 뛰려 한다. 한 우물을 주저치 않고 깊게 파는 것.

 

 

1972년 9월 11일

오늘 문득 자신을 시험해 보기 위해서 마라톤에 나갔습니다. 등수 같은 것은 상관없이 정신없이 이를 악물고 끝까지 뛰었습니다. 끝난 뒤 무섭게 피곤하였지만 그 흐뭇한 자신감은 피곤함을 충분히 메워 주는 것이었습니다. 한번 정하고 완주한 후의 충족감, 당신께 향하는 태도와도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번 뛰기 시작하고도 망설임이나 기권은 큰 비극이고, 그건 어떤 이유가 있었다 해도 불행입니다.

<동서의 피안>을 계속 읽고 있습니다. 그 저자는 당신과 석가가 그저 비슷한 분이라고 생각했었노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엄청난 오류였음을 곧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도 오류에 빠졌던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건져 주실 줄 믿습니다. 당신이야말로 생명이고 길인 것을 조금은 알 것 같아서입니다. 이 저자는 양편을 너무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결론을 내렸었나 봅니다. 계속 노력하겠습니다.

 

 

1972년 9월 16일

뜻밖에 이 법사님이 찾아왔다. 더욱이 정 형과 같이 온 것은 상상 밖이어서 무척이나 반가웠다. 정 형의 그 차분하고 고요한 목소리와 얼굴 모습이 눈 앞에 삼삼하다. 경복궁 박물관엘 같이 갔었는데 시간이 없어서 충분히 구경할 수 없어서 안타까웠다. 하는 수 없이 다음에 또 만나기로 하고 작별하였다. 참 좋은 사람들이다.

요새 이런 사정 저런 사정으로 공부를 계속 못 해 왔는데 그게 기분이 좋지 못하고 나를 암울케 만들고 있다.

어떻습니까, 예수님? 별 도리 없이 차분하게 다시 시작해야 하는 거 겠지요. 잘 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시오. 내일은 절두산에 가는 날입니다. 예수님, 안녕히 주무십시오. 잘 때에도 돌보아 주십시오. 불교와 저희와는 이런 점이 크게 다른 것 같습니다.

 

 

1972년 9월 17일

개학한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보름이 지났다. 나는 그 동안 특별히 하는 것도 없이 시간을 헛되이 보내고 있다. 생각해 보면 큰일이다.

산뜻한 새 건물에 벅찬 기분을 안고 들어왔건만 환경이 좋아졌다고 저절로 일이 잘되는 법은 없나 보다. 1학기 때 그 좁은 침실에서 아옹대며 살 적에는, 이제 조금만 기다려 새 집에 들어가면 모든 것이 궤도에 올라 만사가 순조로이 되어갈 줄 믿었다. 그러나 천만에! 오히려 어려운 환경에서 있을 때가 더 의욕적이고 생산적인 것이 내 경우였다. 옆에 있는 침대는 항상 나를 유혹한다. 옆방 친구에게 담배를 얻으러 가야겠다. 몇 호실 친구 방에는 주스가 있고, 또 몋 호실에는 식빵까지 있다. 바로 위층 상급생에게 인생상담을 하러 가야 하는데… 그러다 보니 아차, 벌써 9시 50분이다. 발도 씻어야 하고, 이도 닦아야 한다. “똑똑…” “아이쿠, 총장님이시군. 네, 알겠습니다. 곧 끈다니까요.”

드디어 침대에 누워 한숨을 푹 쉬고는 “아, 헛되고 헛되도다. 태양아래 새로운 것이 없도다.”를 연발한다. 내일은 좀 새로워져야겠는데. 예수님, 저는 어쩌면 좋습니까? 신학생 생활의 연장이 곧 신부 생활이라는데 이래 가지고 어쩐답니까?

내일은 양화진 성당에 가서 복자들의 얼을 추모하는 날이다. 자발적으로 그리스도의 길을 찾아 죽기까지 신앙에 투철하던 장한 그분들. 그분들에 비해 나는 얼마나 벌레 같은 존재인가. 그분들은 서글픈 미소를 지으면서 나를 내려다보실 것이다. 그리고 말씀하실 것이다. “우리들은 목자도 없이 그렇게 고생했건만 우리 후손들은 저렇게 훌륭한 건물에 훌륭한 지도자들을 모시고 얼마나 복이 많은가.”

각설하고 나는 이제 막 새로 세례를 받은 사람처럼 새롭고 뚜렷해져야겠다.

예수님, 조금 전 성당에서 나오기 직전에 방에 가면 무엇을 할 것인가를 확실히 하려고 생각을 모았던 것을 아실 겁니다. 그때에는 히브리어를 먼저 하겠다고 하였는데 이 일기장을 폈습니다.

며칠 집에 있는 동안에 저는 당신을 거의 잊고, 주일 미사도 억지로 생색만 냈습니다. 저녁 때 만과도 체면 때문에 억지로 했고, 성서 같은 것은 도저히 생각도 할 수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당신은 저기 한구석에 의무로서 즉 억지의 칸에 팽개쳐졌었습니다. 그러니 그게 무엇입니까? 그럴 수가 있는 일이겠습니까? 당신 앞에 있는 벌레에 지나지 않는 처지에 벌레가 태양을 우습게 안 거지요. 더욱이 태양을 태양으로 아주 조금이나마 알 수 있는 벌레였는데.

이곳에 돌아와서 당신을 다시 제일 앞에 꺼내 놓았습니다. 허나 순수와 열렬함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채입니다. 그리고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으나 밀레전展 을 같이 보러 간 귀여운 H양 말입니다. 제가 바랐다고 당신은 곧 기회를 만들어 주셨지요. 얼마나 감하할 노릇인지요. 참으로 제겐 즐거운 때였습니다.

마음에 곧 드는 사람과의 만남은 그렇게 즐겁고 그만큼 삶을 풍부히 하는 것인가 보지요. 당신을 당신으로 인식할 때, 아니 인식하려고 노력하고 약간씩 알아갈 때 그것은 생명이 넘치는 희열임을 지금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도록 해 주십시오.

정빈이네 집 식구들 그 어머니, 아버지, 할머니와의 만남도 이번 기간 중 잊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또 상신의 사랑하시는 아들인 저의 아버님을 다시금 벅차게 느꼈고, 저의 힘과 방향도 다시 선명해졌습니다.

계속 노력하겠습니다. 노력하게 해 주십시오.

 

 

 

인스브루크 행의 결정

 

1972년 9월 30일

굉장히 중요한 날. 학장 신부님 말씀. 인스브루크에 갈 수 있도록 했으니 학교 공부 잘하고 특히 독일어를 잘 공부할 것. 예수님, 이게 꿈은 아니겠지요? 꿈꾸고 바라던 것이 이렇게 이루어지기 시작하는군요. 이제 방향을 확실히 잡아 그쪽으로만 노력을 쏟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당신이 이렇게 방향을 정해 주셨으니, 이제 열심히 전진하게 해 주십시오. 정말 당신은 저를 사랑하십니다. 제가 무엇이 온데 그렇게 하십니까!

예수님, 조급한 마음으로 계획을 세워 보았습니다. 오늘 오후는 그 생각에 차분히 공부도 할 수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목표:

1. 독어 – 거의 완전하게 될 수 있도록.

2. 영어 – 자유 자재로 쓰고 읽고 말할 수 있도록.

3. 라틴어 – 상당히 능통하게 할 수 있도록.

4. 희랍어 –

 

 

1972년 10월 3일 火

조금 전에 겪은 감정은 참 괴상도 한 것이었다. 층계에 올라 복도를 지나니 눈 녹듯 사라져 버렸지만 참 두렵고도 아찔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지금은 상당히 극복되었다. 예수님, 감사합니다. 동시에 나 자신이 정말 너무도 하잘 것 없음이 다시 한번 드러난 거다. 요 며칠, 어제 집에 다녀오고 등등. 정말 안하무인 眼下無人, 안상무신 眼上無神, 정도로 자신만만이었다. 그러니 이 꼴이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심리적 요인도 약간 있었다.

첫째, 3일간 휴강이었다가 수업이 시작되는 저녁이란 점.

둘째, 비가 종일 오고 날이 잔뜩 흐려서 기분이 저기압이었다.

셋째, 사제직이 무언지 모르겠다는 친구의 얘기.

그리고 독일어가 좀체 궤도에 오를 것 같지가 않은 점이 안타까웠다. 한 달 쉬었다가 처음부터 해야 할 판이니 신경질도 나고 초조하기도 하고, 또 자유스러운 기분으로 할 때에는 재미있다가 의무적으로 하게 되면 무거운 고역이 된다는 진리가 바로 적중된 듯 암담한 기분이었다.

성가 연습을 끝내고 즉시 도서관에 자릴 잡았으나 텅 빈 도서관, 삭막하기 그지없었다. 요 며칠 친구들과 접촉도 거의 없었고, 그래서 따뜻한 품이 더욱 그리워지는 것이다. 방으로, 이부자리가 있고 어떤 부드러움과 따스함이 있는 그곳으로 가고 싶은 심정만 굴뚝 같은 심정,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복도를 걸으면서 결론을 찾을 수 있었다. 모든 건 주님이시라는 것. 아까 박 수녀님 얘기대로 내게 잘날 것이 있을 수 있나. 주께 의탁하고 해 주시기를 빌고 하리라는 것. 그렇지 않으면 커다란 공허에 휩싸이게 마련이라는 것. 결국 인간은 벌레, 갈대일 뿐이다. 이러한 상념이 내 영혼을 예리한 빛살처럼 비춰 주었다.

 

 

1972년 10월 7일

연극을 보고, 우선 그 노력에 충심에서 우러나는 치하의 박수를 보낸다. 그 친구들이나 우리나 똑같은데, 그만큼 열심히 뛰어 주었다는 것은 정말 눈물겹도록 반가웁고 고맙기까지 한 노릇이었다. 그러므로 연기니 대사니 효과 있는 처리니 하는 전문적인 평가는 뒷 문제라 하겠다. 연기는 L과 마라가 – 특히 마라가 뛰어났다 – 우수했으나 K가 좀 약한 편이었고, 대사는 좀더 부드럽고 확실하게 해야 한다고 느꼈다. 나중에 가선 지리하리만치 대사가 일인 독점식이어서 박진감이 있는 처리가 무척 아쉬웠다. 따라서 호소하고자 한 주제가 매우 흐릿해진 것 같다. 나로선 카인의 입장에 선 마라의 입장과 고민에 상당한 호감과 공감을 느꼈고, 그녀의 앙칼진 호소는 일품이었다. 그러나 주인공인 뷔오렌느 를 좀더 부각시켰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전체적으로는 작자의 의도가 잘 전달되지 못한 느낌이라서 전류가 통하듯 압도하여 오는 감명 같은 것은 없었다. 그러나 아마추어인 멤버들이 첫 공연을 이 정도로 멋있게 했다는 것은 입이 마르게 칭찬해도 모자라리라. 막이 내린 후 좀더 뜨거운 응원의 박수를 보내고 싶었는데 그럴 기회가 없었던 것도 섭섭했다.

사전을 샀다. 전같이 자신만만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 반대 현상이 두드러졌다.

그렇게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되는 법이 있을 리가 없다. 예수께서 해주시는 대로 – 나대로 최대의 노력을 기울여 – 감사할 뿐이다.

 

 

1972년 10월 8일

어젯밤, Y신부님께 영신 지도를 받는 학생들끼리 모임을 가져 유쾌한 시간을 보낸 후 교가를 합창하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도 얼마 전 부제 서품 축하식 때에도 마지막 순서로 교가를 합창했다. 이렇게 모임의 마지막을 교가로 장식하는 것은 뜻 깊은 일이다. 그럴 때 우리는 들떴던 흥취를 가라앉히며 다시 본연의 자세로 차분히 돌아와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다.

“성령이 그느르시는 아늑한 이 동산, 우리는 배우리라 구원의 veritas(진리)”

힘껏 목을 뽑아 소리를 모은다. 숙연해지는 순간이다.

우리는 여기 혜화동 낙산 신학교에서 무엇을 하는 것인가. 바로 교가 그대로 구원의 진리를 배우는 것이다. 하루하루, 한시한시가 구원의 진리와 관련 없는 것이 없다. 이른 아침 기상부터 한밤중 잠자리에 들 때까지, 아니 잠자는 중에도 우리는 구원의 진리를 익히는 것이다. 이러한 생활은 얼마나 복된 것인가. 만인이 부러워하는 생활이다. 서울 시내 같지 않게 깊숙하고 아늑한 이곳은 우람한 나무들 하며, 맑은 공기에 바야흐로 한창 가을이 익어 성소 聖所의 고장임을 확실히 느끼게 하여 준다. 마음껏 공부할 수 있고, 조용하게 산보할 수 있고, 공을 붙잡고 운동장을 누빌 수도 있고, 도서관에 가서 무진장한 보물을 들출 수 있고, 때가 되면 차곡차곡 정돈된 깨끗한 빨래를 가져오는, 기막힌 생활을 하고 있다. 생각해 보면 정말 지금 여기 hic et nunc 있는 나는 굉장한 혜택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새 집에서의 생활은 금상첨화인 것으로, 사제 생활의 진수를 깨달을 수 있게 하여 준다. 생각해 보면 정말 과분하기 그지없는 혜택들이다. 보통으론 상상도 못 할 혜택이다. 이것들 중 나의 노력으로 된 것이 하나라도 있는가? 이런 혜택 중 하나라도 얻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도 나에게는 순전히 공짜로 미 모든 것이 주어졌다. 어찌하여 이런 혜택이 내게 베풀어졌을까? 대답은 간단하고, 이미 벌써부터 알고 있는 것이다. 즉 구원의 진리를 깊이 배우라는 것이다.

하여 나는 우선 이 과분한 혜택을 감사히 느끼고, 전혀 합당치 않은 나를 여기서 생활케 하여주신 분께 조금이라도 보답하려고 한다.

 

 

1972년 10월 12일

대망의 자일을 타다.

만수를 생각하면서….큰 숙제를 푼 것 같다.

 

 

1972년 10월 13일

속리산 문장대. 효종이와 같이 오름. 오르면서 깊은 가을을 맛보았다. 어쩐지 한국의 산이라고 부르고 싶어지는 그 정취들, 단풍 든 나무들과 이끼 낀 바위, 흐르는 냇물, 문장대에 올라 천하를 조감 鳥瞰하니 하늘과도 직결됨을 느낀다. 아버지가 시간과 영원을 느끼시던 곳.

어머니가 해다 주신 부침개는 압도적인 인기와 환호를 받았다. 참 고마운 일이었다. 매괴 한 꾸러미 바치고 자리라.

 

 

1972년 10월 22일

K형이 집으로 와서 잠깐 만났다가 로마에서 재회하기로 하고 헤어졌다.  엄숙한 순간이었다. 그 형은 실로 내게 큰 영향을 주었다. 언젠가 괘 오래 전 도서관에서 그림을 그려 가며, 인생을 설계해야 한다던 그 형은 내게 꿈을 심어 주고 잠자던 가능성을 깨워 주었다.

 

 

1972년 12월 13일

어제 그리스도론 구두 시험 oral test에 들어갔더니 박 신부님이

“지난 번 리포트 잘 읽었어.”

“어디 간다면?”

“오지리 보내 주신다던데?”

“박차를 가해서 더 분발하도록” 하는 뜻밖의 말씀을 하셔서 당황했다. 마음이 뭉클해지는 순간이고 하였다.

 

 

1972년 12월 18일

새벽 0시가 지났으니 18일이지.

지금 희랍어 19과 5번을 하려고 하는 순간이다. 갑자기 아버지 생각이 나서.

아버지. 그렇게 좋으시고, 저를 그렇게나 끔찍이 사랑하시던 아버지. 지금 저는 조그만 전구를 켜 놓고 희랍어와 히브리어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그리고 예수님, 저는 요새 너무 안일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1972년 12월 20일

윤리 시험을 마치고 한고비를 넘은 지금, 너무도 허전하고 낭패감마저 짙다. 왜일까? 그렇게 온 정력과 시간을 쏟았는데, 그 결과는 이렇게 터무니없게 당황스럽기만 한 것이다.

본말이 바뀌었다. 수단과 목적이 바뀌었다. 이 두더지 생활 – 이 담배연기 – 속에서 하느님을 멀리했다. 나는 시험의 노예, 성적의 노예가 된 것이다.

내 앞으로의 생활이 요구하는 것. 나의 실존 전개의 필수 조건, 절제와 규칙과 건전한 정신. 문제는 무엇이냐? 근본 핵심이 무엇이냐?

하느님을 철저히 찾아 그에 맞춰 살 것.

이것은 너무도 훌륭한 작업이다. 건강하고 정상적인 일상 생활로 ‘하느님께 기도함’.

너무 강압적이고 완벽한 목표와 계획을 세우지 말 것. 이는 지혜이리라.

너무 실망 말 것. 이는 자초지화 自招之禍 이니라.

그러므로 언제나 그 시각에 그 자리에서 새롭게 시작할 것.

 

실천할 것들:

1. 일찍 잘 것 (11시 취침)

2. 벌떡 일어나서 산보하고 성당에로.

3. 낮잠은 최소한으로 줄이다가 이후 자지 말 것.

4. 낮에 두세 번 성체께 인사 갈 것.

5. 담배를 절제할 것.

6. 방 청소, 옷장 정리를 할 것.

7. 카드 보내는 것에 대한 구체적 계획.

8. 돈 문제의 완전한 해결책과 수습안 마련.

 

이상. 21일 새벽 1시 15분.

예수님은 이 절실한 고백을 들으소서.

예수님, 지금 이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아버지도 저를 격려해 주시길.

당신만이 유일한 힘이시고 해결이시고 마침내 전부이옵니다. 당신을 떠나서는 나는 금세 노예가 되며 앞에는 암흑과 절벽뿐입니다.

 

 

1972년 12월 25일

어젯밤 자시 미사, 지금도 약간 뻥한 기분. 이번 성탄은 박 신부님 덕분으로 강생 Incarnation의 참뜻을 조금 깊이까지 생각해 둔 바 있어, 그 뜻을 더 깊이 하려는 가운데 보냈다. 그래서 물론 들뜨지 않았고, 도 텔레비전에서도 “왕 중 왕”을 방영해 주어 그분의 탄생이 곧 죽음이라는 전체적인 안목을 잃지 않을 수가 있었다.

여러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였다. 미사 후 용규와 집에서 보낸 서너 시간은 우리의 각오를 새롭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요는 순교자적 자세로 매일을 살아야 하는데 신부는 그야말로 그 선봉이 되어야 한다는 것. 신부의 길이 바로 그 길이다. 신부의 사명이 마로 그것. 새로 나신 아기 예수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오후 4시에 H형을 만났다. 나를 그렇게나 생각해 준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또 문제의 핵심을 찔러 준다. ‘기도’를 통해 하느님과의 관계를 항상 살아 있는 것으로 내 안에 느껴야만 한다는 것. 이것은 얼마 전 시험을 보고 난 후에 내린 결론이다. 요사이 관심사였던 점이었다. 예수님, 그렇지 않습니까? 당신이 없이는 완전히 노예일 뿐입니다.

 

 

 

1973년

 

교회에 머물되 참 [眞] 만을

 

1973년 1월 10일

앞으로 공부하는 데 있어서 철학적인 자세가 크게 중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나는 전에 철학을 재미있어 했지만 이제는 결정적으로 신학에 굳어져 있는 셈인데, 최근 또 그러한 문제가 때때로 제기된다. 지금은 좀더 보완되고 어쩌면 한 차원 올라선 안목에서의 고찰이라고 할까? 아무튼 신학은 이 찬란하고도 혼탁한 인간을 있는 그 자체로서는 외면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지난 번 ‘예수의 유혹’에 대한 고찰은 날이 갈수록 새삼 그 중요성이 가슴 깊이 느껴지는데, 고맙기도 한 일이다. 예수가 모든 유혹을 한마디로 거부한 것은 우리로 하여금 참으로 깊은 신뢰를 가질 수 있게 한 유일한 모습이었다. 그는 가장 인간다운 인간이었고, 인간 본연의 모습 그대로였다. 뉘라서 그를 흠모하지 않을 수 있으리. 나아가 그는 인격신이므로 또한 나의 신앙은 설 수 있는 것 같다. 이런 진면목에 깊이 빠질 수 있다면! 문제는 계속된다. 시몬느 베이유 의 고민도 그것일 것이다. 카뮈는 무조건 거부하므로 합당치 않고, ‘교회’ 문제는 많은 사람들의 문제다. 교회에 머물되 조용하고 확고하게 참 [眞] 만을 부르짖어야 한다. 나는 전체적으로 공부하고 싶다. 내 자신의 실존과 이런 문제를 깊이 생각하는 사람을 위해서. 도 유혹을 거절한 예수를 위해서.

 

 

1973년 1월 18일

N 신부님 만나 뵘. 고맙게도 전화를 걸어 주셔서 곧 가서 만났다. 역시 다시 없을 그런 분이었다. 참 인간이기를 그렇게 올곧게 지향하는 분이심을 다시 느낀다. 나를 생각해 주시고 명예, 금전, 여자를 단호히 즉, 유혹을 단호히 거부하는 그 모습. 곧 예수의 가르침을 그만큼 따르는 분이심을 보여준다. 그런 힘차고도 엄숙한 결의에 찬 모습은 큰 힘이 된다.

가장 중요한데도 가장 간과하기 쉬운 것, 바로 진리이다. 쉽지 않다. ‘온갖 유혹을 단연 거부해야 함.’

 

 

1973년 1월 27일

나는 얼마나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는 걸까?

이 사회, 이 현실 앞에서 아주 작은 힘이나마 도움이 되기 위하여 나 자신 자유인으로서의 성격을 분명히 뜯어 고치지 않는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청교도적 자세!

순교자적 자세!

이걸로 전부를 살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될 수 없고, 아무것도 아닌 거다. 결국 모든 구실과 이유는 변명일 뿐이고, 확고하게 사는 것만이 나를 구제하는 유일한 길이다. 그런데도 나는 얼마나 희미해져 버리는가! 꿈에 몽롱히 취한 것 같은 생활뿐이다. 결국 아버지나 N신부님 같이 완전히 몸에 젖어 우러나오는 자기의 생활 태도가 없이는 아무것도 될 수 없다. 나의 노력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허무라는 것에 벗어나는 유일한 길로서, 소극적일지 모르나 결국은 그 모든 화려한 이유를 이 허황된 구실인 것이므로, 나는 오직 이 길을 확실히 하고자 하는 것이다.

‘하느님과의 관계’가 그 근본이다.

‘매일 하루의 시간을 보내는 생활’에서 이 모든 것은 얘기될 수 있다.

 

 

1973년 2월 9일

지금 생각하는 것들을 여기에 쓰기는 너무나 괴롭다. 그러나 이런 걸 쓰지 않는다면 이 일기장은 무엇 하는 것인가. 그리고 각오를 새롭게 하기 위해서도 생각을 모두어 여기에 쓰는 것은 필요한 일이며 해야만 할 일이다.

지금 어머니는 울고 계시다.

그 심사 – 어떻게 측량하랴.

어쩌면 나는 그렇게도 용렬한가. 이 집 분위기를 네가 좀 잘 해보라는 간곡한 말씀을 받아들이기는커녕 덜어 드릴 생각을 해 본 적도 없이 나는 모든 것을 요구만 하고, 받기만 하려고 한다.

지금 흐느끼는 엄마의 심정은 어떠할까. 하늘같이 믿고 의지할 큰 아들의 이러한 행동! 정말 못된 놈, 죽어야 할 놈은 난데…

나의 표어. ‘주자. 바디 말고 주자.’

하느님은 나를 돌아보사 보우하소서. 힘을 더해 주시고 약하게 되지 않게 하소서.

필요한 때 곤란할 때만 당신을 찾나이다.

그리고 내 생활도 N신부님 같이 밝고 건강해야 한다. 심신이 모두.

규칙적인 생활:

일찍 일어날 것.

공부를 최대한 열심히 할 것.

항상 어머니 일을 염두에!

 

 

1973년 2월 11일

어제 밤새워 읽은 <천국의 열쇠>와 또 아까 영화로 본 <악마의 얼굴을 한 천사>는 나에게 참으로 많은 문제를 던져 준다. 작자가 의도하는 바는 그만두고 그 책의 주인공 신부는 신학생인 나에게 각별한 흥미와 감명을 주기에 충분하였다. 즉 그들은 – 특히 치셤 신부 – 교회와 교리에 얽매이지 않는 탁 트인 마음으로 인간 본연의 모습에 충실했고, 나아가서는 하느님의 의도에 충실하였던 것이다. 누나의 견해로는 소극적이라고 할 것이 틀림없으나 아, 정말 그럴지 모른다. 하여튼 나의 마음을 뭉클하게 해 주는 것이었다.

N 신부님이 왜 <천국의 열쇠> 얘기를 하셨는지 이제 알겠다. 바로 그분이야말로 치셤 신부와 똑같은 것을 지향하는 분이고, 가장 닮은 인물이라고 하겠다.

그 책이나 영화는 본질적이고도 참신한 – 옛날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이런 것에 비추어 볼 때 나는 얼마나 생명을 죽이는 비루한 시도에만 급급하고 있는지. 우선 결론적으로 말해 본다면 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마음을 한없이 넓히어 변질된 안목을 벗어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1973년 2월 18일

누나가 와서 함께 얘기를 좀 나누었다. 나는 실로 오랜만에 본질적 자세를 되찾아 볼 수 있었다. <천국의 열쇠> 얘긴데 누나 역시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고, 본질적 핵심을 뚫어보는 누나임을 알았다. 다시 한 번 머리가 숙여진다. 참으로 누나 말대로 그런 자세에서 그런 노력에서 벗어나 있는 이상 고민은 끝날 날이 없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바로 그런 신부이어야 하는데 그럴 소질이 많지 않은 나는 ‘항시 긴장하여 그런 노력을 온몸과 정신에 충일 시켜야 한다.’ 상당히 많은 이가 – 요한 신부님이나 나도 – 그 이론에 공감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실천인 것이다. 한 마디 말로 써 버린 이 실천이라는 의미는 실로 차원을 완전히 달리하는 것이다. 만약 이것이 빠진다면 내 인생은 완전히 실패작이다. 문제는 의지로서 훈련을 해야 하는 것이 첫걸음이라는 점이다 .이 점에 얼마나 나는 무능한가? 나는 이 안락함을 찾고 나태해져 버린다.

하느님의 참뜻이 무엇일까? 그리고 어디에 있을까? 어느덧 나는 지극한 속물이 되어 버렸다. 특히 이 일 년, 공부를 지상 과제로 알고 모든 통로를 막아 버렸다.

정신력만은 살아 있어야 한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주저 없이 발표하고 행동에 옮겨라 – 이 길은 틀림없이 고생이고 가시밭 길이겠지! 그러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의지 훈련이 있어야 한다 – 긴장감이 넘치도록!

이렇게 하는 것만이 기도할 수 있고,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구원의 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간적이어야 한다. 진실로 인간적 이려면 깊은 고생 (시몬느 베이유)을 해야만 한다.  성직자의 선의가 먹혀 들지 않는 까닭은 바로 실제적인 고생을 하지 않는 데서 오기 때문이다.

 

 

1973년 3월 1일 木

특수한 인격과 특수한 성덕이 이뤄지지 않기를 나의 하느님께 기도하였다. 새로 시작하는 첫날 이렇게 기도 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누나는 코 때문에 계속 너무나 고생이 심하고, 멀쩡하고 활발한 것 같은 엄마도 실은 마음으로 육체적으로 굉장히 어렵게 지내신다. 금효도, 어린 데레사도 애처롭긴 하지만 신통하도록 꿋꿋하다. 모두들 정말 괴롭고, 웃음을 잃은 듯이 살고 있다. 나는 단연코 특수 체질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 것들이 바로 그대로의 나의 바탕인데도 자칫 속아 버리기 쉽다.

여기는 정말로 온실이다. 아침 일찍 미사 참여를 할 수 있고, 공부도 실컷 할 수 있고, 잠도 넉넉히 잘 수 있다. 무엇보다 자기 한 몸만 잘 꾸려 나가면 걱정될 것이 없다. 그런데 여기에 큰 맹점이 있다. 잘못하다간 함정에 빠져 버린다. 미흡한 대로 사는 것과 생활은 그런 것이다. 정말 잘 해야지.

우리가 해야 할 바는 여기에 하느님의 사랑의 복음을 전해 그들을 기쁘게 하고 변질시키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의 일의 본질은 이중의 영역에 걸쳐 있는 이중의 노고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화광동진 和光同塵 도 이런 뜻일 것이다.

특수 체질이 되지 말게 하소서! (치셤 신부는 전혀 특수 체질이 아니었다)

 

 

1973년 3월 16일 오전 8시

참 이상한 일이다. 눈이 진눈깨비가 되어 쏟아져 내려온다. 근래에 거의 없던 일이었는데 참 신기한 일이다. 그때도 꼭 날씨가 이랬었는데, 그 후에도 여러 번 이 날이 되면 꼭 이렇다. 눈을 내려 주시기는 하느님만 하실 수 있는데, 그렇게 볼 수밖에 없다. 아버지의 격려도 그 속에 포함되어 있으리라 믿는다. “예수여, 내 영혼을 당신 손에 맡기나이다. 맡기게 하여 주소서. 하느님, 계속 격려해 주십시오.” (아버님 기일)

 

 

 

미해결의 문제

 

1973년 4월 29일

근래에 없이 귀했던 시간, 그 여자는 참 굉장했다. 그래서 지금, 글쎄… 그리워진다. 어쩌면 그렇게 누나와 흡사한지. 어쩌면 그렇게 진지하고 깊은지 정말 샛별 같은 존재이다. 자기의 최종적이고 유일한 결론은 ‘존재에의 용기. 거기에 성실하는 것’이라고, 놀랍다.

그 얘기들은 그 동안 덮어 두었던 미해결의 문제를 다시 끌어내게 했다. 너무나도 고마웁다. 보기 힘든 영혼이다.

 

 

1973년 5월 8일

한참 만에 쓰는 일기다. 어머니날이라고 집에 갔다가 방금 돌아왔다. 흐뭇하다. 어제 저녁에 얼마나 당황했던가. 어제는 이렇게 쓰려고 앞머리를 잡았었지. “갈기갈기 찢어진 마음, 무섭게 피곤하다. 그분밖에 안정은 없는 것일까?”

집에 다녀와서는 기운이 좀 단다. 누나, 매형도 와 주었고, 신부님도 계셔서 한결 든든했다. 꼬마들이 할머니께 선물할 것도 잊지 않아서 흐뭇했다. 금효 책상의 헬무드 틸리케를 보는 순간 더욱 기운이 나고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시험을 우선 보아 놓고 그 책들을 보자. 그러면 뭔가 선명해질 것이다. 지금의 부진은 신경질적으로 과도히 문제를 생각하는 데서 비롯하는 것이다. 이렇다고 문제가 뿌리 뽑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침착하게 안정을 유지해야지. 신경질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모든 걸 그대로 인정하고 나를 가다듬어 보자. 하느님께의 귀의 확정. 나는 하느님을 믿지 않는가? 거부하고 있는가?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어제 헤링 신부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신앙은 자기를 드러내시고, 자신에게 우리를 바치기를 원하시는 하느님께로의 기쁨의 의탁”이라고.

인간적 차원이란 무엇인가? 정확히는 모르지만 항시 나를 잡아당기는 그것은 무엇인가? 신앙과 별개의 상충적인 것인가? 항시 이것에서 맴돌면서 한 발을 크게 내디뎌 보지 못하는 나는 어찌된 것인가? 그리고 이를 과도히 신경질적으로 처리할 것도 아니다. 나는 영지주의 靈知主義 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나는 그와는 정반대인 것이다. 다만 나는 어떤 바른 답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까지 다 포함시켜 알고 싶은 거다. 이것이 영지주의처럼 내 이성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고 싶어한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스라엘식의 신앙 – 성서의 신앙 – 을 받아들인다는 것. 거기에 나를 맡기고 바친다는 것. 그리고 이것은 바로 은총이라는 것. 그렇다면 내게 가장 부족한 것은 기도이겠다. 며칠간의 부진을 떨어버리고 다시 한번 공부에 매진하자.

 

1.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는데,

2. 동인 動因 이 결핍되어 있다.

3. 예수께 의탁 않고는 공부할 수 없다.

4. 예수께 의탁은 전폭적으로 될 수 없을 듯하다.

5. 인간 문제. 철학으로 그 단계를 벗어나야 한다. (이것은 4의 입장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것일까?).

 

결론인 5는 1과 지극히 상충적이다. 그러니 내가 어찌 바로 설 수 있단 말인가?

 

– 문제의 해결 (잠정적 해결)

위의 체계는 작년 1년을 보내던 것처럼 나의 주관적 상상에 의해 세워진 것이 아닌가. 그렇지는 않더라도 문제를 단순하게 본 것이 아닐까?

– 신앙 결단이란 무엇인가? (그것이 얼마나 중대하고 절대적이라는 것은 이미 아는 바다).

(문 1) 왜 신앙 결단을 해야 하나?

– 뼈저린 의식 없이 그럭저럭 신앙을 받아들였다고 믿으며 살 수 있는데…

– 배운 대로의 신앙 결단은 절대적인 것으로, 우리도 세리 마태오 같이 자기를 계속 굳혀야 한다고 한다.

– 세속, 가정, 기타 모든 것을 완전히 백안시해야 하는 것이라고,

– 그런데 왜 이렇게 해야 하나?

-이는 의식적으로 작위적으로 승인해야 하는 것인가? 그러나 작위적인 신앙 결단이란 결코 본질적 의미의 결단일 수 없다.

(문2) 신앙 결단을 할 수 있기 위한 나의 노력은 어떠해야 할까?

어떻게 창의를 발휘할 수 있을까?

 

교회는 인간을 다 담지 못하고 있으며, 진실을 다 포함하고 있지 않은 듯하다.

 

 

1973년 5월 13일 日

성소 주일 聖召主日 이다.

지금 <無常을 넘어서>를 꺼내어 훑어본다. 그 풍기는 모습들, 다시 한 번 새롭다. 나는 아버지 영향을 참 많이 받았다. 성만이가 염려하는 것과 같이 그녀와의 사이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나의 주님이시고, 예수님이 나의 님인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분을 모시고 얘기하는 것이니까. 그리고 아버지가 나를 잘 붙들어 주시리라 믿는다.

정말 그녀는 보기 드문 영혼이다. 그리고 잘 통하기도 한다. C 신부의 글을 상당히 평가하는 점이 고마울 정도로 반가웠다. 머리가 매우 명석하고 생각이 깊으면서도 적극적이고 명랑하다. 오라고 하기를 참 잘했다. 학교 안에서 보충할 수 없는 점을 얻기 때문인가. 분명한 것은 그런 얘기들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 일인데 가능하다는 점이다. 과자를 사서 들고 왔는데, 어떻게 생각해서 그랬는지 재미있었다. 6시가 다 되어 돌아갔다. 배웅해 주면서 “오늘 와 주셔서 참 좋았어요.” 했더니 자기도 좋았다고 한다. 예수님 안에서.

 

 

1973년 5월 22일 10시 40분

정신을 흩뜨리지 말고 차분히 생각해야 한다. 매일 하던 일을 변함 없이 하자. 성급한 결론을 내리지 않도록. 진정해야 한다. 참으로 놀랍다. 봄볕에 시냇가에 뒤덮였던 눈덩어리들이 사그러지듯 무언가 자꾸 부서져 내린다. 생각이 여러 갈래로 비약한다. 차분하게 예수님의 도움 속에서 생각해 봐야겠다.

 

 

1973년 5월 23일

엊저녁 사진을 정리하면서 그 동안 맺혔던 울분과 솟구쳐 오르던 감정들을 정리할 수가 있어서 참 좋았다.

예수께서 그렇게 해 주셨으리라.

 

 

1973년 5월 28일

벌써 28일. 얼마 안 남았다. 착잡한 마음을 좀 정돈했으면 해서 노트를 폈다.

-원인 분석

1) 신학생이고, 신부가 되련다는 얘기를 과감히 못한 것.

2) ob와 dass 를 구별치 못한 데 대한 초조감.

– 해결

최민순 신부님 말씀대로 성삼 聖三 께서 내주 內住 하지 않으실 때 모든 것이 그럴 것이다. 이제는 정말로 벽에 부딪치지 않았는가? 인간적 노력에 의한 해결 방안은 있을 수 없다. 성삼 聖三 만이 해결의 유일한 길이다. 그런데 왜 자꾸 거부하고 안주를 못 하는가.

 

그녀의 일이 크게 부담이 되는 것은 그것이 참으로 내게 도전인 까닭이다. 정말로 마음에 드는 여자가 나타났다면? 이제껏 문제가 없었다는 것은 이런 여자를 만나지 못했기 대문이라면 무어라고 답할 것인가?

인생의 방향과 신앙의 결단, 사제 성소에의 응답, 이 문제들에 대한 나의 답은? 참으로 신통치 못하다.

문제는 위의 질문에 대한 내 자신의 확고한 답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래서 초조하다. 이제껏 친구 덕에 그럭저럭 잘 지내왔는데, 근본적으로 ‘나’의 결단에 의한 투신이 필요한 것이다. 지금까지의 찬란하던 나의 이론은 이런 근본적 요청 앞에 무색하게 돼 버렸다.

 

 

1973년 6월 7일 木

신앙의 길이란 이렇게 어렵고 고통스러운 것인가? 사제의 길이란 이렇게 하루라도 편안한 날이 없는 것일까? 쉽고 무난한 안주는 경멸하지만 이렇게 순간순간이 어렵고 가련해서야. 하느님을 알면 만사가 형통 亨通 이 아니던가. 그런데 나는 그 양극을 왔다갔다하며 이렇게 발 붙일 곳을 찾지 못하고, 편안한 날이 없는 것이다. 너무나 벅차다. 곧 쓰러질 듯 힘들고, 숨 한 번 내쉬기조차 어렵다.

 

 

1973년 6월 9일 土

훠콜라레 여러분들의 말씀을 들었다. “당신 안에 그리스도는 살고 있는가?” 힘이 솟는 참 흐뭇한 시간이었다.

나의 목표대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결단’을 요구하고 있다. 훠콜라레 여러분들은 그리스도를 몸 전체로 택하여 감연히 나선 분들. 그러면 길은 더 밝아지고 분명해질 것이다. 나는 나의 이 무력을, 허무한 실존을 내 자신의 밑바닥에까지 떨어져 느낄 때, 그때야말로 하느님이 생각난다. 모든 처방을 다 써 봐도 시간과 재산의 낭비뿐, 마침내 믿음으로 예수의 옷자락을 만진 하혈하는 부인의 이야기. 참으로 성서는 한자 한자가 내 상태에 대한 경종인 듯하다.

교회 문제: 감상적이 되지 말아야 한다. 현실을 긍정하고 적극적 의미를 찾아야 한다.

성서의 가르침과 인생 탐구: 둘은 모순이 아니고 오히려 참다운 완성이고 해결 (크리스천적 실존).

사제독신의 의미: 전적인 봉사 [利他].

화광동진 和光同塵: 훠콜라레

 

 

1973년 6월 10일

문제를 풍선같이 불려서 볼 것이 아니다.

아까 성체 강복 후 다음의 것을 생각했다.

 

소위 ‘내 생각’ 이라는 것이 예수님을 반대하고 배척하며 그 영역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훠콜라레식으로 순진하고 명랑하게 하느님을 섬기면서 내 생각은 조화를 이룰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안에서 하는 노력이니까). 이렇게 밑에까지 떨어져서 허덕이고 지푸라기 하나 잡을 수 없을 때 하느님이 분명히 느껴진다.

– 다신 한 번 정미하고 강화하자. 이것은, 항상 그렇지만 일상 생활을 보다 잘 영위하는 데서 기대할 수 있다.

-규칙적 생활: 자는 시간은 12시를 절대 넘지 말 것.

– 대인 관계: 말을 적게. 날카롭게 꼬집는 말을 삼갈 것. 명랑하고 적극적으로.

– 담배를 적게.

– 영적 독서.

 

예수여! 이렇게 하려 하나이다. 이럴 수밖에 없나이다. 내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럴 수밖에 없나이다.

 

 

1973년 6월 11일 月

예수님, 속이 너무 답답하여 이 노트를 폈습니다. 지금 윤리 신학을 공부하는 중입니다만 아까는 조금 안개가 걷힌 듯 후련함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다시 숨이 막힐 듯 답답하고 갇혀 있는 듯한 기분을 느낍니다. 계속해서 ‘이는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데에서 오는 미지근한 태도’ 라고 나를 몰아댑니다. 제가 지금 크게 잘못되어 있는 건가요? 확고한 결단을 내리지 못해서 그런 겁니까? 생각은 저기 성당 깜깜한 속에 빨갛게 흔들거리는 당신의 현존에로 달음질치며 그것만으로 충족한 것 같은데, 지금은 다시 강의록의 인쇄된 글자들이 나를 무겁게 내려 누릅니다. 저를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는 주님, 저는 뭐 별나게 나쁜 길을 가려는 것이 아니라 제 딴에는 가장 순수하게 당신을 섬기려 하고 있는 게 아닙니까? 어디가 잘못되었습니까? 이 엉켜 있는 실 뭉치의 어디를 가위로 끊어야 풀리겠습니까? 참 너무 힘듭니다. 분명 저는 당신을 목말라 합니다. 그런데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습니까? 신학을 배우면서부터, 아니 철학과 때도 그랬지만 당신의 말씀을 직접 듣지 않았으니 압박과 저항을 느끼지 못했던 것 뿐입니다. 정말 저를 붙들어 주십시오.

‘붙들다’ ‘존립 存立 하다’ 란 말이 바로 신앙의 어원이라고 한 신부님 말씀이 생각납니다. 정말 그런가 봅니다. 이것은 제법 확실히 느껴집니다. 그런데 그 올망졸망한 교회의 조금한 제한들은 참다운 인간이 되지 못하게 괴상한 틀에 넣어 버리는 것 같습니다. 당신은 안 그러실 텐데 말입니다. 제게 힘을 주셔야 합니다.

 

 

 

J 와 인생

 

1973년 6월 14일 金

‘은총론’ 시험 준비를 마쳤습니다. 덕분에 여러 면으로 나의 신앙 생활을 점검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인상에 남는 구절은 “지기가 은총 지위에 있는지는 장담할 수 없는 것이지만 죄를 피하려 하는 것과 생활, 기도 등을 보고 짐작할 수 있다.”는 대목이었습니다. 뜨끔했습니다. 예수님 잘 부축해 주십시오.

아까 학원이 끝나고 <알마 마뗄> (교지)을 부지런히 들고 나가 J에게 주었습니다. 많이 아팠다고 하던, 어제보다는 약간 생기가 도는 새하얀 얼굴은 더 예쁘고 보기가 좋았습니다. 이런 묘사는 어떻습니까?

역시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것일까요? 마침 그녀가 좀 나가자고 해서 다방에 갔었습니다. 별 이야기는 없었지만 오랜만에 아늑한 시간을 가졌었습니다. 예수님은 저를 잘 붙들어 주시리라 믿습니다.

 

 

1973년 7월 22일

J 와의 문제에 단안을 내려야 하고, 내렸으면 확실하게 밀고 나가야 한다.

‘그래야 하는 까닭’

1. 실험적인 사귐은 있을 수 없다.

2. 그렇지 않으면 내 자신이 문제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타의에 의하게 됨.

3. 그녀를 위해서도 더 깊어지지 않는 것이 좋다. 실제로 나의 결론은 지어졌는데, 실행은 빠를수록 좋다.

4. 언젠가 끝에 가선 내가 당황하게 될 것이다.

이 문제는 내 힘, 내 의지만으로 될 수 없는 것이니 주님, 빛과 길을 주소서. 이럴 때 주님을 찾는다고 나무라지 마소서. 이럴 수밖에 없습니다.

 

 

1973년 7월 23일

J 씨 귀하.

이 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있어야 할 순간이고 또 그때는 빠를수록 좋기 때문입니다. 이런 책이며 글 같은 것이 부질없는 것이고 오히려 없느니만 못한 것이라고도 생각됩니다만 다른 방법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역시 글로 써야 제 뜻을 그래도 명확히 전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동안 정말 고마웠습니다. 그리고 참으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그 동안 받은 것에 대해 어떻게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주로 받기만 하고 드린 것은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제가 주는 방법을 몰라서가 아니라 줄 것을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자기의 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설령 기존의 길이란 있는 것이 아니라 해도 자기가 뜻을 정하고 온 가능성을 모으고 있는 터에 이와 상치되는 사상 事象을 지닌다는 것은 일을 이루지 않겠노라는 것과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의 목표가 확실한데 이런 상태를 계속한다는 것은 저로서 더 이상 용납 못 할 일입니다. 그것은 제 자신과 J 씨를 크게 속이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간이 길면 길수록 쓰라림만 커질 것입니다. 여기서 해야 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항상 이것을 알면서도 갈팡질팡하며 생각을 모으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그리고 오늘을 기다린 거지요.

지금 이 글월을 쓰면서 저는 이 글의 의미가 엄청난 데 스스로 놀랍니다. 이는 우리의 사귐에 대한 결단일 뿐 아니라 저로서는 제 삶의 의미를 향해 다시 한 번 크게 내딛는 순간이기도 한 때문입니다. 이런 결정이 일방적이고, 제게 있어서는 쉬운 일이고 또 회피가 아니냐고 하지 마십시오. 또 이 일이 그런 점을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하고, 단안을 반드시 필요로 하는 것이냐고 도 하지 마십시오.  제가 얼마나 힘들게 이 글을 쓰고 있는지 또 그런 만큼 얼마나 정확하게 그 의미를 파악하려 하고 있는지를 J 씨라면 아실 것입니다. 우리는 일생에 몇 번은 결정을 내려야 할 때를 만나고, 또 한 번 내린 결정은 단호히 밀고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J 씨는 제게 너무도 과분하고 소중한 분이었습니다. ‘두 번 다시 그런 사람은 만나지 못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그런 만큼 지금의 제 심정도 몹시 단호함으로 차 있습니다. 아니, 단호 하려고 애써 노력하고 있습니다.  학교 주소도 아시고 또 9월에 학관에도 나가겠지만 제게 소식 주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언젠가 고등학교 때 학생회장이 말했다고 한 것처럼 저도 J 씨가 그 근본을 향한 고귀하고 투철한 노력을 조금도 흩뜨리지 않고, 그 동안 얘기했던 모든 것을 이루실 수 있으리라고 굳게 믿으며, 용맹스럽게 전진하시기를 진정으로 빕니다.

 

김정훈

 

이 책은 그 동안의 우정에 대한 저의 기념의 선물입니다. 기꺼이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1973년 7월 25일

무섭게 피곤하다. 지금 내 마음은, 집요하게 파고드는 J 의 어떨 때 퍽 앳되게 보이던 그 얼굴로 가득 차 있다. 앞의 글월을 쓰고 난 후 내 마음이 어떤지 잘 알 수가 없다. 아까 학관에 갔을 때 그러지 않기로 분명히 했음에도 불구하고 은근히 기대하는 마음은 어찌된 영문인지?

 

 

1973년 7월 26일

최 신부님 말씀대로 성삼 聖三이 내주 內住 하고 있지 않으면 신부생활은 유지될 수가 없다. 계속적이고 부단한 성삼과의 대화와 그 열매인 환희가 없이는, 그것이 나를 행복하게 한다는 확신이 없이는 그런 생활은 있을 수 없다. 이것이 없는 나의 생활은 얼마나 불행한 것인가? 나는 지금 어떻게 해야 할까?

무섭게 피곤하고, 고독이란 말이 생각날 즈음 제동을 거는 것… 나는 괴로워하기는 해도 고독해질 수는 없다. 천주 성삼이 막아 건져 주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반쪽의 나는 천주 성삼께 달아[필사주: 달려?] 들지도 않고, 고독에 몸을 맡길 수도 없다. 이것이 내 문제의 핵심이다.

 

 

1973년 7월 27일 金

문제를 전체적인 안목에서 보아야 하리라. ‘다방에서의 J 와 나’로 한정해 버리게 되면 도무지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된다. 그리고 자칫 전체적인 안목을 잃기 쉽다. 나도 못 맡을 나 자신, 최후의 신념이란 것이 과연 내게 있는가?

이 결단은 결코 쓰라림 뿐이 아니다. 나 자신을 밝고 기운차게 만들 수도 있다.

 

 

1973년 7월 30일

J 가 오늘 신앙에 대해서 한 말은 나를 몹시 당황하게 만들었다. 나는 정말 무엇인가. 그러나 신앙을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J는 “신앙은 자기와 하느님과의 관계” 라고, 그런데 “신앙 안에서만 참된 좌절이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다른 좌절은 모두가 상대화시킬 수 있는 것으로 절대 순수한 좌절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성서 그대로의 신앙을 받아들일 때 실존적 좌절과 허무에서 구원될 것이라고, 따라서 이것을 살고 전하는 신부나 목사는 필요할 것이고 해 볼 만하다는 내 말에 찬동한다”고. 이상은 사실 내가 생각하던 것들과 별 다름이 없는 것이라고 보여진다. 나는 인간으로 태어남 – 옳고 확실한 것을 깨달아 잡아야 한다 – 철학 -종교 (一般 – 기독교 – 가톨릭 – 신부)라고 생각해 왔다. 종교까지의 단계가 확실해지기를 노력하고 있었던 것인데, 정답은 나와 있는데 그걸 잡지 못해 바둥거리고 있었다. 이것은 자연 신학적 노력이다. 그런데 정답이 나와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그간 종교 이전까지의 내 나름의 단계에서 수없이 맛본 작고 큰 좌절, 도대체 그곳밖에는 확실한 것이라고는 있을 수 없다고 느꼈던 사실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었다. 더 두고 생각해 보자. 오늘 그녀는 참 훌륭한 태도를 보여 주었다.

 

 

1973년 8월 6일

몇 가지 중요하고 참신한 가르침을 받았다. 오늘 뜻밖에 정 형을 만나 오후 몇 시간을 같이 남산 어린이 회관에서 보냈다. 그 모습 여전히 차분하고, 본질만을 좇으려는 노력도 전과 변함 없었다. 그를 만난 것을 감사한다. 중요한 것은 순수한 마음과 끈기일 것이라고… 안타까운 듯이 말했다. 작년 문화 비평의 내 글이 정말이냐고 물었다. 정말이라고 대답하기에는 지금의 나로선 거리가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거기서 K 씨의 영향을 받아 ‘정신적 고지 高地를 누림 – 그를 위한 노력’이라고 했는데, 지금의 나는 그와 같은 순수한 노력보다는 가톨릭 신앙에 집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자연 신학적 노력과 신앙에의 길에 거리를 느껴 힘들어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이 둘이 모순된 것이라는 점이다. 뭐랄까? 상호 보충적이며 한 가지에 확실할 수록 문제로의 접근은 용이해지는 것일 게다. 정 형 얘기는 “순수한 마음으로 끈기있게 투철할 것 –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 이었다. 나도 참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바이고, 그것이 지극히 어렵다는 것도 조금은 알고 있다.

밤에 영화 <퀴리 부인>을 보았다. 그전부터 존경하고 있었던 터이라 영화가 더욱 감동적이었는지 모른다. 마침 정 형과의 얘기도 생생한 터라 이 두 사실은 금세 하나로 묶여지고 만다. 퀴리의 큰 특징은 ‘일관되는 노력’이다. 나와는 전연 다른 과학에의 길. 그러나 위대한 목표를 향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특히 지극히 험난한 길이며 굉장한 노력을 요하는 일이라는 것을 감동적으로 보여 주는 영화에서 내가 노력하며 살고 있는 삶과 몹시 흡사하다는 것을 느꼈다. 무한한 추구를 요구하는 과학은 또한 보이지 않는 그 무엇(퀴리 부인의 경우 – radium)을 향해 투신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한 길을 묵묵히 걷는 인간의 모습은 참으로 눈물겹도록 고귀해 보인다. 이 느낌은 내 생각들을 차분히 모아 주고, 눈을 가렸던 비늘을 떨어내 주는 듯싶었다. 이러한 경지의 끝은 아마도 샤드댕이 도달했던 그 감동의 경지일 것이다. 아마 모르긴 해도 아인슈타인도 또 수학의 아름다움을 극찬했던 많은 사람들이 도취되었던 그런 세계일 것이다. 나도 작년부터 이렇게 생각하고 내 노력의 방향을 좁혀오지 않았던가… 그러던 것이 중간에 우연치 않게 비뚤어져 걷잡을 수 없는 상태에 이른 것이다. J 를 만났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거의 내 탓이다. J 는 참으로 올곧은 지향을 가지고 있다. 이상과 같은 내 상태는, 지금은 제법 뚜렷하고 분명한 것처럼 보여도 완전하여 의심의 여지가 없는 그런 것일 수는 없다. 누나 말대로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의 연속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소위 습관성 회의 懷疑 는 일을 크게 그르친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일을 전혀 이루지 못하게 할 수도 있다. 얼마나 불필요한 시간과 정력의 낭비인가. 박 형도 그랬었지. 회의와 고민을 구별해야 한다고.

퀴리 부인의 일관된 노력은 마침내 구하던 일념의 것을 얻기에까지 이르렀다. 그가 만일 회의와 주저에 시달려 중도에 ‘머물고 말았다면’ 그의 종말은 얼마나 비참했을까? 그기 위에 얻은 명성과 재산은 전혀 의미가 없다. 문제는 얼마나 성실하게 노력했느냐는 것이다. 나는 너누나 약하고 줏대가 없어 마구 흔들린다. 요사이의 풍토, 특히 선배 사회에서 떠밀리고 있는 풍파에 금세 휘말려 들어간다. 그리하여 적당히 결론을 내리고, 거기에 안주하려 한다. 나는 그런 적당한 안주도 힘들어할 것이고, 그렇다고 빠져 나오지도 못하고 헛된 고민만 계속할 것이다. 아무리 써 내려가도 결론은 하나뿐이다. ‘본질에 대한 순수하고 끈기 있는 노력’ 이것뿐이다. 그리고 한 가지 투철 透徹 할 것.

 

 

1973년 8월 21일

J 를 본 지 열흘이 지났다. 지난 금요일과 월요일에도 만나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다 하면서도 보고 싶다.

그냥 당겨지는 이 마음은 무엇인가? 왠가? 누가 무엇이라 한다 해도 이런 마음은 참 순수한 것이다. 그리고 자연적 현상이다.

간단한 기록으로 끝나려 했는데 또 길어진다. 내심에 잠겨 있는 것이 들고 일어나는 까닭이다. 파헤쳐 본다는 것도 힘에 겨웁다. 문제는 결단만이 해결의 관건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또한 결단을 내렸으면 책임지고 수행해야 하고, 끝까지 충실해야 한다.

그런데 결혼도 포기하고, J  와 같은 사람과의 사귐도 금기 금기인 신부가 되려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신부행 神父行을 결심한다는 것은 그만한 의미가 있어서일 터인데 과연 그런가? 어째서 내 단 하나뿐인 인생을 사제에다 걸었는가? 사제가 무엇인가? 그 본질을 분명히 보고 결단해야 하는 것이다. 오늘은 비교적 분명하게 문제점들이 드러난다.

 

내가 보는 신부에 대한 정의, 그 신원 身元은? 고전적 정의 古典的 定義로서는 내게 그 의미가 약하다.

–  목자 목자라는 것 ‘모든 이에게 교리를 전하여 교회로 이끈다’.

–  현대 상황: 고전적 정의는 설 자리가 없다. 그 정의는 나의 갈증에 못 미친다.

-문제의 핵심: 하느님과 신앙과의 관계. 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주님이시다.

– 나의 인생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분.

– 나의 온 실존적 좌절의 극점에서 만날 수 있는 분.

– 그분에게서 만이 비로소 인생의 의미가 밝혀지고 내 삶이 꽃필 수 있는 분.

– 그러므로 나의 전부이며 절대적인 분.

 

 

1973년 8월 26일 새벽 4시 45분

“‘어떤 일이든 참된 값어치를 얻는다는 건 열심히 일했을 경우뿐이에요. 하늘에서 그저 굴러 떨어진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어요….’ 크리스틴” (<성채> p. 374  A. J. 크로닌 지음. 구혜영 옮김)

 

 

1973년 8월 29일

J 와 만나 뜻밖에 긴 시간을 보냈다. J 는 나처럼 – 신부행  神父行,  결혼 가 可 혹은 불가 不可 – 등의 생각으로 다져진 사람에게는 약간 유 類 가 다른, 내가 요구하는 답변과는 좀 거리가 있는 이야기를 해왔다.  출발부터 생각을 달리하고 있었으니 얘기가 달라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이다. 나와 똑같은 전제를 갖고 있지 않은 J 로서는 지극히 당연한, 인간적이고 평면적인 대화의 전개는 나를 당황케 하는 무엇이 있었다. 그러나 이를 회피하거나 내 색의 사고 思考를 요구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오히려 나는 용감하게, 도전이 있으면 받아들이고 이를 처리해야 할 것이다. 오늘의 이야기에서 J 는 “인간 세상에는 완전한 조화란 바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 주변에는 사랑과 지성과 의지적인 거이 항존 恒存할 것이며,  따라서 고뇌도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하느님 사랑에 반드시 사람 사랑이 내포될 때 비로소 참된 것임을 굳게 믿는다.”고 하였다.

여하튼 J 는 자꾸만 안주하려는 나에게, 진리라는 것과 실제의 인생이라는 점을 계속 보여 주어 불안케 하고 괴로움을 일깨워 주는 존재이다. 그리고 사람이 사람일 수 있게 하는 요체 要諦 인 사람 사랑을 거부하는 것이 신부가 아닌가 하는 J 의 얘기에 대한 답변은 더 연구해 봐야 할 숙제이다. 그러나 숙제의 해답은 최 신부님의 말씀대로 사람은 ‘무엇’으로는 만족할 수 없고 ‘누구’로써라야 만족하는데, 그 ‘누구’는 천주 성삼이어야 한다는 것일 것이다. 신부라는 신분이 분명 사람 사랑을 거부하는 거일 리는 없는데…. 그것이 특정한 어떤 여자가 아닐 뿐이며, 이것이 오히려 진짜 사랑이라는 이론을 내 경우 어떻게 확립할 것인지.

 

 

1973년 8월 30일 木

내일부터 시작할 학교 생활에 약간의 설레는 흥분을 누를 길 없다. 하느님과의 관계 재 수립. 차분하게 그냥 사는 것이다.

 

 

1973년 9월 8일

내가 왜 여기 있어야 하는가? 왜 신부가 되어야 하는가? 하는 의문 – 중요하고도 무서운 – 에 대한 대답을 나대로 해본다.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정말로 어수룩하게 보이고 희망이나 즐거움이 없는 것 같이 보이는 이 생활이야말로 참으로 가치가 있는 일이다. 여기에는 학식이나 권세, 돈, 명예와는 무관하게 지극히 평범한 모습으로 다만 봉사만 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인간적으로만 본다면 이는 분명 가치 없는 일일 것이나 가톨릭 교회 안에는 그것을 훨씬 멀리, 훨씬 깊이 추월하는 무엇이 있어 오늘도 여전하게 자라고 있다. 이는 정녕 신비이다. 신비를 생각해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아까 버스 창으로 보이던 두 분 수녀. 그분들의 두터운 수도복은 그냥 한 마디로 두텁다고만 말할 종류의 것이 아니다. ‘두텁게’라고 만 본다면 이것은 그 이면을 간과한 것이고, 이렇게 인간적인 면만을 극대화한다면 나는 단연 여기에 머물 이유가 없게 되고 신부행을 집어 치워야 하리라. 그 속에 있는 그 ‘무엇’, 밝고 참신하게 드러나지 않은 채 깊이 숨어 있는 정체는 무엇일까? 입학 후부터 계속 많은 친구들이 신학교를 떠났다. 그들이 떠나야 한 것은 표면만을 극대화시켰던 탓이 아닐까… 어떻든 나는 이 면을 계속 조금씩이나마 맛 보여 주신 분명한 은총 때문에 나는 성소를 받은 것이고, 오늘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점을 일깨워 준 성만은 참 귀한 친구다.

 

 

1973년 9월 11일

예수님, 무섭습니다. 당신을 외면하고 살아 온 것이 진정 두렵습니다. 당신과의 관계가 이렇게 될 때 – 아니 항상 그런 채였지만 그것을 새삼 의식하게 될 때 – 모든 것은 허무로 돌아가 버립니다. 그저 무섭고 공허하고 당장 고꾸라져 죽을 것 같은 두려움만 느낄 뿐입니다. 의지할 곳이라곤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 자신을 재정비해 보겠나이다.

 

 

1973년 9월 20일

한낮의 주룩주룩 내리는 비를 창틀에 기대 한참 동안을 보았다. 왜 이렇게 까닭 없이 불안할까? 마음이 잡히지 않는다. 특별히 곤란한 일도 괴로운 일도 없는데 왜 이럴까?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런 식의 불안에는 분명히 그 원인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일까?

요즈음 생각하는 것들은 시험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 J, 예수님, 동료들, 진실이라는 것, 이것이 전부다.

그 가운데에서 유난히 두드러지는 문제는 ‘진실’이라는 것이다. 진실하다는 것은 자신의 안팎이 똑같은 것이라고 배웠다. 분명히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나의 태도, 나의 자세에 어딘가 잘못이 있는 것 같다. 언젠가 누나가 얘기한 심리적 요인 – 이 점을 최근 최 신부님이 정확하게 찔러 주셨다. – 이 점점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J를 만날 경우, 그런 얘기를 해야 한다는 강압감과 그와 맞서서 더 거세게 기피하려는 마음이 묘하게 꼬여 있다.

생각나는 대로 결론을 추려 적는다면 심리적인 이야기들은 결코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대좌해서 해결해야 한다. 너무나 어렵고 끔직한 일이다. 예수님만이 해 주실 수 있다. 나의 지금까지의 태도는 소극적으로 기피하는 태도였다.

그러나 내적으로는 심원한 목표를 가지고 있다. 설사 그것이 표면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 해도 내 안에는 지고 至高와 지순 至純 의 목표를 향한 열정이 타고 있다. 그러므로 겉으로는 바보 같고, 그렇게 보인다 해도 섭섭지 않다. 지금까지 멋있게 지탱해 온 내 자세가 지금은 문제점이 많아서 그래도 유지될 수 없을 것 같은 심정이어서 불안한 거다. 안팎이 일치하면 즉 진실할 때엔 내 자신은 강해지고 기쁘지만, 안팎이 일치하지 못할 때엔 더없이 약해지고 또 불안해지는 거다.

 

 

1973년 9월 23일

나는 지금 완전히 곤죽이다. 내 안에는 모든 것이 엉망으로 엉켜 무섭게 나를 눌러 피곤하게 만들고 있다. 의자에 똑바로 앉을 수도 없을 지경이다. 지금까지의 체계는 – 그 자신만만하게 나를 지탱하던 것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아! 모르겠다.

 

마침내 <동서의 피안>을 꺼냈다. 현재의 내게 맞는 말을 즉시 발견하였다.

 

“나는 신앙 생활에 대치할 만한 것을 하나씩 해 봤으나 그것들 전부가 나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신神은 그분 고유의 길, 즉 성자 聖者를 통한 계명의 실천으로만 발견되는 것이며…신앙의 증명은 생활에 있다…” (p. 210)

 

아! 그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 저 깊은 곳에까지 쑤시고 들어와 닿는다. 그 한마디 한마디는 곧 나의 한마디 한마디이다. 씹어 삼켜야 할 절대로 놓칠 수는 없는 것들이다.

방법론적 회의는 반드시 필요하다. 또 그러한 순수 純粹회의가 아니었다는 자책이 스며든다.

 

 

1973년 9월 26일

할 일이 산더미 같은데, 노트를 몇 겹으로 펴놓은 위에 이 일기장을 또 펼쳐 놓았다.

나의 참된 identity 本質. 유일무이의 나. 나는 절대로 다른 사람일 수 없다. 나일 뿐이며 그 나는 내게 절대적이다. 나는 내 자신을 손보아 가꾸면 그걸로 족한 것이다. 그런데 화강석이 옥玉이려고 한다든지 진달래꽃이 라일락이 되려 할 수가 있을까? 이 쉽고도 자명한 진리가 왜 내 몸 속에 스며들기는 이렇게 어려울까? 이것이 제대로 되지 않는 이상 나는 내 삶을 성공시킬 수 없을 것이고, 비극은 끝날 수 없다. 독어 선생의 질문에 답을 멋있게 못 하면 어떤가? 있는 대로, 지금 알고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는 것이 최고가 아닌가? 가령 내가 신부가 된다고 해도 근본적으로 ‘나’를 속임 없이 드러내 보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주체성 identify의 확립이 없이는 세상은 전혀 뜻이 없고, 내 인생도 성공했다고 할 수 없다. 어던 성과를 얻었다고 해도 순수한 본질 identity 앞에서는 빛을 발할 수 없다. 이를 성취하기 위해 나는 있는 힘을 다 기울여야 할 것이다. 또한 하느님과 대좌할 때에만 해소가 가능하다.

 

 

1973년 9월 29일 아침

그러고 보니 나는 얼마나 내 자신에 대한 내적 성찰에 등한했던가? 지금까지 온통 허깨비성을 쌓아 왔단 말인가?

‘개인과 공동’, ‘전체성’ 등은 완전히 내 관념권 외의 일이었다.

 

 

1973년 9월 30일

엊그제 J의 얘기와 조금 전의 성만과의 얘기 중에서 그 동안의 내 모습의 진상이 또 한번 드러나게 되는 것을 나는 몹시 두려워했지만, 이것은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뻐해야 할 노릇이다.

즉 지금까지의 나는 너무나 향방 없는 노력을 해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철학서 한 권 읽을 흥미도 갖지 못한 주제이면서도 온갖 잡문학 雜文學 사이를 돌아다니며, 각양각색의 주장들과 만날 때마다 마치 고향에 돌아온 듯 반가워하다가는 하릴없이 다시 떠나 버리는 것의 연속이었다.  그러니까 그 모든 것들은 하나도 나의 것들이 아니었고, 내가 만들어 가는 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내 것이 될 수 없었는데도 나는 큰 착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내 과거, 예컨대 군대 생활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그것들이 모두 내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모두 엄청난 착각이었을 뿐이다.

 

 

1973년 10월 6일

오늘은 토요일이라 3시에 시사를 들으러 학관에 갔었다. 혹시나 하던 J 는 오지 않았다. 연속 두 시간 반의 강의는 무섭게 지겨웠고, 온몸에 맥이 쏙 빠져 터덜터덜 돌아오는데 혜화동 성당에서 C신부와 마주쳤다. 마지못해 인사를 했다. 전에는 쳐다보지도 않던 신부님이 오늘은 유난히 살펴보는 듯한 눈초리여서 그야말로 김이 새는 기분이었다.

식당에서 밥을 먹고 담배 생각이 간절하여 – 실로 2시 10분부터 지금까지 담배 맛을 보지 못했다 – 운동장을 겨우 한 번 돌고는 매점으로 달려갔다.

C신부의 눈초리가 자꾸 떠오른다. 그 눈초리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야, 이 병신아, 왜 그렇게 풀 죽어 가지고 돌아다니는 거냐? J 가 뭔데 J 를 못 만났다고 그렇게 죽을 상이냐? 유학이고 뭐고, 유학 시험이 뭐길래 그렇게 다 죽어가느냐 말이다. 너는 너 아니냐? 너를 잘 가지고 있으면 그것이 전부지. 산다는 것이, 유학이나 가고 신학 박사가 되고 하는 것들이 별건 줄 아느냐? 도대체 산다는 것 자체가 우스꽝스러운 건데. 이걸 너는 모르는 모양이구나. 안다면 왜 그리 다 죽어가느냐? 정말 자중해라. 너를 꼭 붙잡아 흔들리지 말아라. 감정에 속지 말아라. 너는 너고, 너를 가지고 있을 때만 사는 거다…”

참 좋은 이야기다. 그리고 결코 이야기로만 끝내지 않으련다. 예수님은 똑 도와 주신다.

 

 

1973년 11월 9일

오늘 같은 날 출사표 出師表를 안 쓸 수 없다. 온몸에 올리브 기름을 바르고 경기에 출전하기 전날의 선수처럼, 결전을 하루 앞둔 전날 밤의 병사처럼, 나는 이 출사표 出師表를 쓴다. 혼신의 힘을 모아서, 당신께 밖에는, 당신이 주시는 것을 받을 수밖에는, 당신께 매달릴 수밖에는, 나는 굉장한 힘을 받고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1973년 11월 10일

예수님, 다녀왔습니다. 있는 대로 쏟았습니다. 당신만 바라봅니다. 당신 뜻대로 되게 해 주시고, 그 뜻이 곧 제 뜻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1973년 11월 24일

예수님, 이처럼 혼돈과 메마름만 계속되고 잇는 제 안에 한줄기 소낙비처럼, 심혼 心魂의 갈증을 촉촉이 적셔 줄 당신의 눈길이 있음을 믿고 있습니다. 정말 당신밖에는… 그것을 체험했습니다. 저는 무엇입니까? 아무것도 아닙니다. 해결과 정답이 어디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아직 멀었습니다.

 

어머니, 나의 어머니, 그렇게 맹목으로만 나를 사랑해 주시는 착한 어머니.

그저 안쓰러움과 미련이 남을 뿐입니다.

 

 

1973년 12월 19일

오랜만에 일기를 쓴다. 아까 강남에서 J 를 만났는데 참 반가웠다. 요새는 집안 얘기, 교회 문제 등 비교적 마음 편한 일상적인 얘기들만 하고 있다. 처음에는 심각한 얘기들을 했는데, 이것은 서로의 바탕들을 이젠 충분히 알았기 때문이리라. 당연한 과정이다. 다방으로 가면서 이 사귐의 정체가 뭘까 생각해 보았다. 그런 사람을 알고 있다는 것은 참 흐뭇하고 든든하고 복 받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까 미사 전에 카인의 얘기를 일고 좋았었는데, 나는 하느님을 카인 같은 식으로 사랑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생각을 차분히 모을 수 있었다.

이런 노력은 매사에, 매 순간에 필수적인 것이다. 그리고 걸으면서도 계속 생각했다. ‘무엇 하러’ 만나는가? 어떻게 하겠다고? 다음 순간 그 답을 얻었다. ‘무엇 하러’가 아니다. 어떻게 하겠다고 란 있을 수 없다. 도대체 우리가 사람을 알고 만나고 사귀고 하는 데에 무슨 목적으로, 무엇을 이루기 위해서라는 단서가 곡 필요한가 말이다. 살아가면서 좋은 사람, 좋은 친구,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과 친해지게 마련이고, 이건 썩 당연한 얘기다. 그 목적을 생각하는 건 순수치 못한 것이다. 옳지 못한 것이다. 지금까지 무엇 하러, 어떻게 하겠다고 에 집착을 했기 때문에 일이 복잡했었다. 그리고 내 길과의 관련에 직결시켰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이제 그럴 일이 아님을, 그럴 필요가 없는 것임을 새삼 깨달았다. 이런 결론을 얻을 수 있게 해주신 하느님, 감사합니다.

 

 

1973년 12월 20일

참 괴상한 밤이다. 여러 가지 상념들이 계속 꼬리를 이어 가만히 있지를 못하게 한다. 그것들이 한결같이 외치는 소리는 ‘그런 미봉책은 어림없다. 왜 안주만 하려 드느냐? 일어나라. 일어나서 불을 켜고 정리해 보고 대결을 하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어제 누나와 얘기한 것들 – 그리고 오늘 읽기를 마친 <주홍 글씨> – 저 먼저 정수가 말한 것과 창준이의 얘기들이 지금 나를 일으켜 앉힌다.

문제는 요사이의 나의 태도, 간헐적으로 다가오곤 하는 나의 본질에 관한 의문, 잃었던 나 자신, 공부는 왜 하나? 수단과 목적. 무엇보다 중요한 자기 자신. 요사이의 나는 자못 확립된 듯한 태도로 독일의 철학 박사나 된 듯 보이는데 이건 어찌된 노릇일까? 구체적 인간은 아 잊어버렸는가? 진리행 眞理行은 어디 가고, 이제 탑만 쌓겠다는 것인가? 이것이 지금 나의 문제이다. 요즈음의 나를 지탱케 한 이 체계 자체가 내게 의혹을 던지고 있다. 전에 그렇게도 혐오하던 박사 신부를 이제는 사뭇 코에 내걸고 있다. 나는 뇌수형 인간이라면서. 이건 엄청난 타락이 아닌가? 아니면 착각을 하는 건가? 그럭저럭 안주를 해가고 있는데 정수가 고통을 통한 인간 운운하며 내 허를 찔렀고, 누나마저 나를 당혹하게 만들었다. 조금한 마음으로 결론을 내리면

 

1. 공부는 하여야 한다.

2. 그러나 인간을 잊으면 안 된다.

위의 둘은 모두 이루어야 한다.

 

문제: 그러나 공부를 하노라면 인간을 잊기 쉽다(이는 분명한 것이 시험을 준비하는 중의 내 모습과 외국에 가서의 더욱 여유가 없을 나를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착안: 방법과 목적은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 공부는 방법 중 하나일 뿐이어야 한다.

문제: 공부 자체가 봉사하는 것이다라는 것은 어떤가? 즉 절대로 옳은 해답인 하느님을 모시고 있는 이상 기타 모든 것은 문제가 될 수 없지 않은가? 그렇게 될 때 그 구도 求道 라는 건 이미 없어지고 해결되고 순수한 봉사의 한 가지 길이 있을 뿐이 아닐까?  이 봉사를 효과적으로 이루기 위해 (2)는 약화, (1)은 강화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함으로써 전에 그렇게도 혐오하던 투명한, 피가 없는 박사 인간이 될 것이다.

어디가 잘못된 것인가? 긴장을 잃지 말아야지. <시골 신부의 일기>를 읽어보려 한다.

박사가 되는 것은 과연 편안한 안주이고, 고상한 성공의 길일까? ‘문제와 고통의 유무’에 따라 그럴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를 이론이나 논리적으로 따지는 건 우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야말로 내부에서 용솟음치는 자기 본질대로 일을 꾸려가야 하는 것이거늘. 뭐니뭐니 해도 마음의 개방 – 이점이 제일 큰 요건이다 – 그러나 어디까지 얼마큼이나 열어야 하는지는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무한히, 모든 사상 事象을 다 담기에 이르도록.

하느님을 지고 至高로 모신다는 것과 마음의 개방과는 결코 모순되지 않는다 – 치셤 신부의 예 – 결국 성인들은 이런 분이었으리라.

경계: 그러므로 마음의 폐쇄를 경계하라. 교회에만 집착하고, 모든 것을 손쉽게 간단하게 공식에 의해서만 하려는 태도를 경계하라. 얼마나 이런 식이 되기 쉬운가. 나는 현재 이렇게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경계하라. 백 번, 천 번 경계해도 모자란다.

 

건전한 생활 – 광의로 본 나의 인생 목표 – 내가 태어나 사는 이유를 찾음.

그리고 가능하면 남에게도 그 길을 전傳 함. 단 억지로써가 아니고 충만 된 내가 흘러 넘치는 방식으로.

 

 

1973년 12월 25일

왜 이리 머리가 혼란스럽고 만사가 귀찮을까? 며칠 사이 일이 참 복잡하게 꼬인 것 같다.

 

‘결혼한 남녀’, ‘신부가 되려는 나’ – 이 경우, 새로운 사귐은 옳은 것이 아니라고 본다. 이미 한 대상에게 성실할 것을 결단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새로운 사귐은 ‘악’이다. 더욱이 상대에게 해나 상처가 있어서는 안 된다.

아까 전화를 받으신 어머니의 태도에서 나는 J 에게 크게 미안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녀가 마치 무슨 죄나 범한 듯 어머니가 J를 책하셨기 때문이다. 잘못이 있다면 분명히 내게 있는 건데. 나는 사과해야 한다.

내가 신부가 되려는 것은 구도자 求道者로서인가?

문제: 구도 求道를 위해 반드시 신부가 되어야 하나?  결단한 한계 내에서의 구도란 있을 수 있을까?

분명 대답은 구도자로서의 신부행이다. 인생은 길이고, 그 길을 가는 것이니 내 생명이 다할 때까지 구도요 또 구도일 뿐이다. 해타심 없이 잘만 하면 구도의 최적의 방법은 신부가 되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공부를 계속할 수 있는 신부가 되는 것이다.

신부는 결혼을 하지 않고 노동도 하지 않으므로 평상적인 삶을 구체적으로 완전히 자기 것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좀처럼 해소되지 않을듯한 약점을 안고 있지만 구도행 求道行 의 가능성은 어느 것보다 크고 넓다.

문제: 구도의 가능성이란 허울 아래 안일 하려는 태도.

따라서 공부가 목적인 것은 절대 아니다. 구도의 최적의 방편일 뿐이다.

결론: 절대적으로 그 권내 圈內에 있는 나로서 하느님과의 대결은 나의 유일무이한 인생의 의미이다. 그 대결을 위해서 신부행 – 그 중에서도 공부하는 신부로서.

 

 

1973년 12월 26일

J 씨 귀하.

이 시각을 위해 사귐을 해 왔다는 말이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저는 초조하리만치 이 순간을 기다려 왔습니다. 뜻밖의 이 글월을 받고 놀라시리라 믿습니다만 끝까지 읽으시기 바랍니다. 이 글이 가능한 근거는 우리가 하느님을 지고 至高로 모시고 있고, 그 동안 J 씨나 저나 거짓 한 점 없이 서로 성실하였다는 사실 자체에 있습니다.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벌써 짐작을 하실지 모르나 정말 그렇습니다. 결단을 지금 내려야 합니다. 일찍이 저는 신부행 神父行 을 결단했습니다. 설령 각 사람에게 이미 정해진 길이 잇는 것이 아니라 해도 저의 그 선택에는 후회나 변함이 없습니다. J 씨는 제게 너무나도 소중한 분이었습니다. 지난 번에 J 씨가 말한 뜻대로 그 동안 우리는 분명 서로에게 성실하였습니다. 그러나 한계가 있다는 것 차제가 피지 못할 불성실의 시작입니다. 반드시 그렇습니다. 제가 J 씨를 아끼는 그만큼 이 문제는 절실합니다. 이 문제는 누가 무어라 해도, 어떤 식으로 가설을 세운다 해도 사실입니다. 이 점을 항상 의식한 저는 두려워하면서도 이 시각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한껏 회피하려 했으나 결단은 있어야 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빠를수록 좋을 것입니다. 비참하고 단호한 심정으로 이 글을 씁니다. 저는 이 글을 쓰기가 쉬웠고, J 씨는 읽기가 어렵다고 믿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의 만남, 사귐이 그렇게 순수했던 것처럼 이 시각도 서로에게 순수해야 하고, 전적인 동의로써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믿습니다. J 씨는 J 씨의 길을 힘차고 명랑하게 가십시오. 저도 제 길을 용기 있게 웃으면서 가렵니다. 이상이 제가 쓰고 싶은 전부입니다. 사실 J 씨는 이 글의 진의 眞意를 잘 알고 계십니다. 저의 집 전화 번호도 알고 또 찾을 수도 있지만 저를 찾지 마십시오. 이별은 엄청난 사건이지만 한 순간에 이루어집니다. 저도 결코 J 씨를 찾지 않겠습니다.

 

1973년 12월 26일 김정훈

 

 

 

1974년

 

애별리 愛別離

 

1974년 1월 5일

어떻게 살아가는지 모르겠다.

J. 보고 싶다.

그녀와의 사귐, 그리고 그러한 끝. 그것이 무엇이었을까. 알테리베 성냥갑에서 돌연히 물밀 듯 스며 오는 그녀의 체취.

내가 한 것이 무슨 짓이었나.

 

 

1974년 1월 6일

낮에 정 형을 만났다. “신부가 되면 온갖 제한을 받을 테데 어떻게 올바른 공부를 할 수 잇겠느냐고, 도 공부란 올바른 결정을 내리기 위해 하는 것이라고.” 아주 정곡을 찌른 말이다.

이제부터라도 이중성 二重性을 벗는다? 이것의 진정한 해소만이 내가 살 수 있는 길이고, 결국 참답게 하느님을 찾을 수 있는 길이다.

 

 

1974년 1월 9일

J가 얘기했다고 믿어지는 이규호 李圭浩 선생의 사람됨의 뜻 – <철학적 인간학> – 을 사서 첫 베이지를 읽는데 역시 일말의 불안이 가슴에 스며 오는 것은 웬일일까. 우선 첫 느낌은 이렇게 좋은 책을 추천해준 J 를 영 이별한 데 대한 아쉬움이다. 둘째 느낌은 나도 이런 책을 써서 교회 울 안에서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를 향해 발표해 보고 싶은 의욕이다. 그런데 이 은근히 스며 오는 불안감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하느님과의 멀어짐에 대한 느낌이다. <길은 여기에> 와 그 속편에서 느낀 ‘절대적으로 하느님을 신뢰함’과 이런 순수 학문과의 관계는 무엇인가? ‘나의 관심이 교회나 신부 됨이 아니다’라는 항시 계속되는 나의 대전제의 참뜻은 무엇인가? 과연 이 명제를 진정으로 수긍한다면 어째서 불안해 하고 긴장하고 있는가? 의문은 꼬리를 물고 나타난다. 하느님께 충실하고, 실족의 화를 면하려면 철학을 해도 스콜라 철학이나 형이상학, 논리학 따위 – 잘 모르지만 – 만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학문에는 전제가 없다는 말이 옳을 것 같은데 나는 왜 전제가 있기를 불안스레 바라고 있나? 나아가 J나 이규호 선생같이 전제가 없이 학문하는 사람들이 몹시도 부러워 보인다. 그들이 모실 하느님은 결코 장애를 요구하는 하느님은 아니다. 나의 하느님도 사실 그럴 리가 없는데, 나는 파우스트가 아니 될 수 없다. 파우스트가 된다 함은 그의 결론을 받아들인다는 말인데, 설령 그렇더라도 그 과정은 필연적으로 있어야 하는 것이다.

 

철학, 순수 학문, 파우스트 : 귀납.

복음 (무조건 긍정), 신학, 스콜라 철학, <길은 여기에> 전적 신뢰: 연역 = 신앙.

 

이 두 세계는 내게는 무던히도 달라 보인다. 상극인 것 같은 두 세계. 그런데 나는 이 두 세계를 똑같이 전적으로 찬동한다. 창준이라면 이 둘을 하나로 볼 것이다.

박 신부님 말씀대로 나는 신앙과 인간 실존 사이를 왕래하는 시계 추다. 해결책은 하나뿐임이 분명하다. 나는 내 식대로 파우스트가 되는 것이라고.

 

 

1974년 1월 11일

<철학적 인간학>을 읽어 가며 느껴지는 것은, 나로서는 전부로 알고 고정 불변으로 믿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여러 철학 사조와 철학자 중 한 몫만을 담당하고 있다는 사실 – 이는 사뭇 기이하달 정도로 새로운 사실이다. 우선 이 정도.

 

 

1974년 1월 14일 月

 Philosophische Anthropologie (철학적 인간학)을 몹시 흥미를 느끼면서 읽고 있다. 내일과 모레는 소양 교육이다. 착오 없이!

 

 

1974년 1월 15일 火

소양 교육 중 어떤 이가 얘기하기를 “외국어를 듣다가 모르는 것이 있으면 즉석에서 물어서 확인하라.” 고. 그렇지 않고 알아듣는 척하면 곧 봉변을 당하게 된단다. 참 옳은 얘기다. 이런 태도는 살아가는 과정 전반에 걸쳐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명심할 것.

마침내 초청장이 왔다. 오늘 들은 수속 절차와 합해 이제는 인스브루크행이 본격화한 것이다. 아무런 준비도 각오도 돼 있지 못한 채 결국 이렇게 해서 가는 것이고, 이는 죽은 순간에도 그럴 것 같이 느껴진다. S 형이 뜻밖에 찾아 왔는데, 상상 외로 심각한 그의 문제에 나는 송연 하여졌다. 수도원을 어중띠게 그만두고 새 사회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이전 생활에 대한 향수와 상처로 이렇게도 저렇게도 하지 못하겠다고. 이 문제는 바로 곧 나의 문제이기도 하므로 최근의 나의 생각들을 열변으로 토해 놓으니 그는 크게 감탄하는 얼굴이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1. 하느님을 지상 지상 으로 모시고 – 곧 생활 형태가 전부가 아니다.

2. 자기 본질에 충실해야 하며 – 어떤 길이든 자기 신념대로 나가면 곧 행복.

3. 그러기 위해 갖가지 외부적 압력을 제거하고, 자기 본질에 끝까지 매달려 대결해 나가야 하리라는 것.  

 

여러 전제를 갖지 말 것이며, 안경을 낀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도록. 자기의 생긴 대로 ‘나는 찌꺼기다. 맨 밑바닥이다.’ 라고 다짐하면서 마음을 놓고 살아가는 것.

그리고 사회 생활이란 것도 겁낼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일반적 기준이란 황당하기 그지없는 것이므로 먹고 살 만큼만 벌면 그것으로 족하지 않는가. 그도 금세 공감했다. 이는 누나가 말한 대로 바로 나의 문제이다. 이렇게 몇 줄로 써서 뱉어 버릴 수 없는, 항상 나와 함께 하는 나의 문제이다. 오랜만에 로사리오 기도. 고백 성사.

 

 

1974년 1월 17일 木

막시마(여동생의 세례명)의 시험, 주여, 이렇게 무사히 치르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집안에 새 공기(정신적 교육)를 불어 넣는데 있어서의 나의 임무.

–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기 (10시!)

– 책 읽기 (영적 독서).

– 일기 쓰기.

<시골 신부의 일기>를 읽고 있다. 굉장히 위대한 책이다. 시몬느 베이유도 이 책에 감동했노라고.

양 洋의 동서를 나는 크게 문제 삼아 왔다. 그런데 사실 그 둘이 질적으로 전혀 다른 것인가? 그렇지 않다고 생각된다. 한마디로 말해 모두가 인간인 때문이다. 가장 참되고 진정한 인간의 본질, 그것은 동양이나 서양이나 똑같은 것이다.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이기 때문이다. 너무 추상적으로 썼지만 앙브리쿠르 신부의 행적을 읽으니 이는 내 것이 되어야 할 것이었다. 모든 이가, 내가 순수해진다면 인간은 다 같을 수 있는 것이다. 아름답고 위대한 책이다. 하느님이 지상 至上 이기 때문이다. 주교님들과 청담 스님에게 느끼던 것 – 그건 의복이라는 외관의 차이일 것이 분명하다. 외관이 무시될 수 없다지만 어쩌면 인간세계에서 더 본질적으로 나타날 경우도 있는 모양이다 – 이 점은 토착화의 노력에도 좋은 시사를 던져 주는 것 같다. 앙브리쿠르 신부를 통해서 하느님이 보내 주신 선물이다.

나는 전체로서 본질이고 순수여야 한다. 타협의 온갖 유혹을 물리쳐야 한다. 그런 신부가 있다. 신부행이냐 아니냐가 문제될 것 같지 않다. 앙브리쿠르 신부의 선물은 훌륭하고 아름답다.

 

 

1974년 1월 18일 金

앙브리쿠르 신부를 다 읽었다.  엊저녁, 그토록 전신에 스며드는 감흥 속에서 일찍이 없었을 그런 열심으로 읽을 때에 비해 다 읽고 난 지금은 좀 공허한 느낌이다. 엊저녁 읽을 때에는 ‘이렇게 신부 노릇을 한다면 최고의 성공이다.’ 라고 감격하였고, 따라서 ‘이렇게 본질적일 수 있다면 바로 이것이 해답’이라 여겨지는 순간, 묘하게도 ‘그런데 그 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라면 이곳도 바로 내 것이랄 수는 없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스며들어 왔고, 그 순간 모든 것이 흐트러져 사라져 버리는 것 같아 아찔하면서 다시 공허해졌다. 분명 그렇게 본질로만 산 사람들은 신부 외에도 얼마든지 있다. 그 책에서만도 백작 부인, 올리비에 씨, 자살한 노의사, 그리고 샹탈 양 등 모두 처절하게도 자기 자신과 싸운 훌륭한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하느님의 평가는 신부라서 우선일 리가 없다.

또 한 가지는 앙브리쿠르 신부는 투철한 목자 의식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도한 그의 내세관도 너무나 뚜렷하다. 요새와 좀 거리가 있는 듯이 여겨진다. 그래서 무언가 내 심혼을 적셔 향방을 제시할 것 같다가 그만 무산돼 버린 듯 안타깝다. 창준이라면 이 단계를 훌륭히 넘어설 수 있으리라.

 

 

1974년 1월 26일

막시마, 합격! 감사합니다.

 

 

1974년 2월 18일 새벽 2시 45분

오랜만에 일기장을 폈다. 그만큼 불성실했던 것이 드러난다. 요새는 참 엉망으로 살았었지. 누나와 얘기를 나누게 되면 참 시원하고, 그러면서도 끈적끈적한 불안이 뒤따른다. 가려지지 않고 섞여 있지 않은 본질적 요체들을 일깨우고 각성시키고 재촉하기 때문이다. 결론이야 어느 때고 같은 거지만 그 내용의 심도와 농도는 많은 차이가 있다.

신학생을 의식하는 데서 오는 크나큰 불리 不利를 오늘도 잘 지적해 주었다. 정말 훌륭하고 고마운 일이다. 그런 꽁꽁 뭉쳐진 덩어리를 지니고 사는 이상 진리의 요체들은 결코 보여지지 않을 것이거늘, 매사에 그런 선입관과 전제로서 너무나 사태를 크게 망쳐 버리는 것이 분명하다. 참된 인간 관계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누나 말마따나 다소 우월감과 자긍이 섞인 이 뿌리 깊은 의식은 나아가 나의 성실에도 큰 마이너스이다.

이제 곧 전개될 매우 다른 상황에서의 10년. 어떻게 전개될지…. 문제는 나의 본질을 찾아 끝간 데 없이 게으르지 않고 성실하여야 하는 것이겠다. 각자마다 다른 바탕에 각기 다린 식으로 삶이 영위되는 것이지만 근본적 문제는 모두에게 공통인 것.

 

 

1974년 2월 22일

며칠간 여러 사람들에게서 지극한 후대를 받고 다시 소굴로 돌아왔다. 아까 버스 정류장에서 착잡한 심정으로 결론 비슷이 생각해 본 대로 어차피 인생은 그럴 것이매 애석을 과장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사상 事象을 받아들여 넓고도 큰 마음으로 이를 통째로 소화하기를 배워야 하겠다. 정든 고장, 정든 사람, 정든 때와 이별해야 하는 심정은 사뭇 가슴을 칼로 저며 내는 듯하다.

그래서 불가 佛家에서는 애별리 愛別離를 생사로병 生死老病과 같이 근본 고 苦로 치지 않는가.

무엇보다 큰 수확은 그렇게나 찾아 헤매던 구상 구상 선생님의 저서를 발견한 일이다. 천신만고 끝에 보물을 찾아 낸 탐험 대원의 기쁨에 비할 수 있을까. 제 題하여 ‘沈言浮語 침언부어’, 영성 靈性의 우위 優位를 외치는 인생을 결론부터 출발하였다는 이 저주 받은 탕아의 의연한 기개와 몸부림은 나의 의도를 넘치게 충족시킨다.

 

 

1974년 2월 28일

라영균 羅英均 씨 댁의 인상은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구라파에 가서 공부하게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하고 거기서 배울 것이 참 많을 것이라고, 정돈된 전통의 위대함이며, 무엇보다 철학을 한다니 얼마나 좋은 일이냐고, 생각해 나가는 방식, 논리 전개의 방식을 깊이 배워서 – information(지식 습득)만이 아닌 – 여기에 와서도 중단되지 않고 계속 공부해 나갈 수 있는 것이 중요할 것이라는 얘기를 해 주었다. 참 너무도 감사할 노릇이다. 내가 무엇이길래 과찬하고 과도히 기대하는 것일까. 철학했다는 사람은 많아도 정말 철학을 하는 사람은 적다고 여하튼 생각을 전개하는 것을, 깊이 사고 思考할 수 있는 것을 배우라는 것이 요체라는 말을 잘 간직하고자 한다.

 

 

1974년 3월 3일

이 처참한 무력함 – 허무 속에서 저는 살기 위하여 주여, 당신을 부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 탕아를 돌아보시고 차지하소서. 모두를 질식시키는 이 쓰디쓴 고민을 터질 듯이 안고, 하느님과의 사랑의 연계 連繫가 없이는 세상살이는 생지옥 그것이다.

이럴 때일수록 성서를 읽어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며, 잠을 많이 자고 건강해야 할 것이다.

 

 

 

 

인스브루크, 내 존재 저 밑바닥

 

 

1974년 3월 16일  아버님 9주기

어머님께 장문의 편지.

월남인 신부 – 아주 친절하고 착하신 분 – 와 함께 산책했다. 박 선생과 또 대화. 진지하게 인간성을 추구하는 분이다. 객지에서 그런 분을 만날 수 있는 내 복됨이여. 차분히 일기를 쓸 여유도 없이 매일이 지나간다. 요새 사실 일기를 쓰자면 한이 없을 텐데 매일 편지를 10 여 통씩 쓰느라고 더 여유가 없다.

정식으로 바짝 달려들어 말 공부를 해야 한다.

(주: 이하 독문 번역) 신학교 교장 신부. 나는 결국 그를 만나러 갔다. 건강하게 보이는 그분은 대단히 친절하였고 마음으로부터 나를 환영해 주었다. 정말 생각보다 훨씬 지내기가 수월하다. 모두가 잘 돼가고 있다.

아침부터 독일어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 여기서 잘 살기 위한 유일한 길은 독일어를 잘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곳 사람들은 모두 안정돼 보이고 착하다.

오늘 점심 후에 클레멘스와 그 동생과 함께 산책을 했다. 공기는 신선하고, 날씨도 맑고 따뜻하였다. 이곳의 많은 사람들은 산책을 즐겨 하는 것 같다.

 

 

1974년 4월 4일

문자 그대로 무엇보다도 무리가 없다. 사람이 순화될 수 있다. 사람이 찌들지 않고 성숙할 수 있다. 인간됨을 그대로 성취할 수 있다.

 

 

1974년 4월 26일

…다르다. 여기 것이 좋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것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아니 가지고 있으면서도 모르고 있는가. 우리는 우리의 고유한 좋은 것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것이 우리 것’이라고 내놓을 만한 것이 없다. 서구의 물질 문명에 현혹되어 – 그것이 서구의 전부인 양, 천만에 – 뱁새가 황새 걸음 걷기에 그만 급급하여 생기는 부조리와 모순, 그리고 극심한 좌절에 허덕이다가 ‘뱁새’인 것도 잃고 말았다. 애당초 뱁새는 뱁새일 뿐이고 황새는 황새일 뿐인 것을.

오지리 대통령이 죽었다. 애도하는 시민의 물결. 작위적인 데가 전혀 없다. 속과 겉이 다르지 않다.

 

 

1974년 4월 27일

오늘은 토요일. 조금 전에 열두 시가 넘었을 게다. 무어라고 쓸까. 참 무섭게도 허전하고 헤접었다. 오늘 밤엔 우리가 정말로 예외임을 몸으로 실감했다. 무엇에다가 의지할 것이며 무엇을 재미로 삼을 고. 무엇도 없고 누구도 없다. 평정한 마음으로 이 글을 쓰자. 제발 잠시의 위안 삼아 쓰는 글이 아니라 편견 없는, 선입관 없는 내 존재 저 밑바닥에서   우러나오고, 요구되는 그대로의 모습을 그리는 글이 되기를.

그래 무엇도 없고, 누구도 없다. 정말 누구도 없다. 사랑하고 자기 전부를 내줄 반려라 하여도, 어머니, 누나 혹은 아우라 하여도 내가 지향하는 바 누구는 아니다. 우리는 어차피 홀로인 것이 분명하거늘….그리하여 내 고독이 내 전체의 허무가 끝난 데까지 가 아련한 깊은 못에 잠겨, 이제 그 팽팽해진 줄을 더 이상 당길 수가 없게 되는 그때.

나는 거기서 하느님의 자국 – 실로 만사를 순간에 절대적으로 변케 하는 것 -을 보는 것이다. 그 자국은 나의 전부이다. 어찌 그러지 않을 수 있다고 할 수 있으랴. 절대로 모순된 말이 아니다. 나는 그것밖에 모른다. 지금은 형용사나 수식어 등 어던 장식도 쓰지 않으련다. 설령 그 장식이 중요하다 할지라도 내겐 관계 없다. 내 존재가 끝간 데까지 가 더 이상 걸음을 내디딜 수 없는 기막힌 순간에 가서야 잡게 될 그 희미한 자국. 어쩌면 그 자국을 나의 절대적인 전부라고 하지 않겠는가. 내 존재의 지주이며, 곧 나의 생명이다. 그것 없이는 나는 절대로 살 수가 없다. 나는 그것을 놓칠세라 결사적으로 붙들 뿐이다. 이것이 나의 전부이고, 내 살아온 나날의 전부이고, 내 생명이 마치는 날까지 내가 목표로 할 유일의 것이다.

그곳에 그 자국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고…. 글쎄, 그것을 부정하면 희망이 없어진다. 나는 살 수가 없다. 나는 살기 위해서 그 자국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말라 버린 빈 달팽이 껍질이 군화짝에 밟히듯 내 존재는 산산조각 가루가 나 버릴 것이다.

 

 

1974년 4월 29일

어제 김 교수 댁에서 한국 신문을 보면서 정말 한심하고 우울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물가가 오르고, 유류 값이 오르고, 육교가 무너져 사람이 한꺼번에 다치고…. 언제 우리나라도 잘 살게 될까? 여유가 있게, 한마디로 사는 것같이 살게 되려나? 불쌍하고 어리석은 백성. 그런 중에서도 모두들 열심히 살려 하고, 어떻게 착하게 살 것인가도 의논하겠지. 거기와 여기, 이 무슨 차이이며 이 무슨 비극인가? 어떻게 설명되고 이해할 것인지. 그 곳에서 어머니와 누나와 동생들이 살고 있단 말이지. 친구들이 복음을 전하여 복된 사회를 건설하겠다고 한단 말이지.

여기와 거기는 얼마나 다른가? 물질적으로도 잘 살고 편한 것은 젖혀 놓더라도 여유만만한 이 나라 사람들의 민도 民度, 찌들지 않은 사람됨됨이, 어린아이들의 그 성숙함.  오늘 이곳 대통령 장례식을 보았는데, 이런 나라 국민이며 참으로 내 나라라고 충심 衷心으로 말할 수 있으리라. 얼마 전 대학에서 국제 의학회가 열렸었다. 학생들은 공부하는 데에 티끌만치도 어려움이 없어 보인다. 그 여유, 자신감, 나아가 그 자족감. 우리나라와 여기는 이렇게나 다르다. 수천 년을 임금과 양반에게 절대 순종하며 ‘우리’를 만들어 온 우리들. 이제 근대화한다고, 풍요를 누리겠다고 그렇게 정신 없이 자기를 던져 버린 우리. 잘 먹고 자가용만 있으면 최고라고. 그것이 사는 목적이 노라고. ‘인간은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야말로 무조건적이고 제일의적인 자명한 명제.

 

 

1974년 5월 3일

뜻밖에 한국 아가씨 두 사람이 이 벽지를 찾아왔다. 그리고 바로 이 집 저 아랫방에 숙식을 한다는 것이다. 아가씨, 그것도 한국 아가씨가… 그러한 내방 來訪이 나와 전혀 무관하다 다짐을 하여도 역시 가까이 가 그 또랑또랑한 목소리를 듣고, 향기 풍기는 고운 얼굴이며 눈맵시, 입술을 탐내는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리라. 더구나 그 아가씨의 조용한 자태가 마음에 유난히 든다고 할 때에야… 손이라고 쥐어 보고, 허리라도 부둥켜 안아 보고, 가슴에 얼굴이라도 파묻고 싶어지는 이 마음 –  이런 마음이 들 때, 나는 초조해지고 자신이 참으로 조잡하며 왜소함을 느껴 정말 한심해진다. 나아가 나의 목표와 대조해 보노라면 눈 앞이 아찔하다.

이런가 하면 저 희고 푸른 산봉우리의 맑고 깨끗한 백설을 생각하며서 한 개피 담배에 이 모두를 담아 가슴을 펴며 저 깊숙한 곳에서 존재와 함께 울려 나오는 목소리를 듣는다. 한가함을 질책하며 삶의 리듬에 박차를 가하는 박력 있는 그 음성을 나는 알고 있는 것이다. 이 전연 다른 둘… 이것이 바로 세상의 삶이란 것일 게다. 아마도 모두들 이렇게 얘기를 전개하겠지.

자, 어떻게 결론을 내릴 것인가. 우선

 

1. 사람을 멀리하고서는 – 타이스의 은수자(주: 아나톨 프랑스의 소설 <무희 타이스>의 남주인공) 같아서는 절대 목적한 바를 이룰 수 없다.

2. 자연스레 대한다. 자신을 가지고 분열에 빠지는 일 없이 참여한다.

우선 이만하련다.

 

그러나 결론은 나지 않았고, 거머리처럼 달라붙는 끈적끈적한 마음은 가셔지지 않는다. ‘내 생활을 내가 하는 것으로’ 결론을 짓자. 이런 성향을 유혹이라고 몰아치는 건 한마디로 우스운 일이고, 결혼을 하지 않으려는 나에게는 이러한 문제는 일생을 따라다닐 것이다.

누나 말대로 결혼을 하면 그런 것은 너무나 뻔하게 파악되는 감정의 작희라는데, 그렇지 못한 내게는 아무래도 금단의 열매로 남을 뿐이다. 하느님에의 사랑으로 이걸 무산시킨다는 것도 옳은 일은 아닐 게다. 무산이란 말의 뜻에 따라 내용이 달라지겠지만.

‘신부 – 금녀 禁女 의 사람’ 이라는 공식의 신봉에는 큰 맹점과 위험이 내포되어 있다. 신선하고 밝은 삶의 기운! 모든 걸 포용하는 그 무엇을 나는 획득하고자 한다.

 

 

1974년 5월 4일

요 며칠 동안의 기록을 다시 읽으니 내가 어디까지 왔는지, 무엇을 하는지를 알 수 있어 다소 마음이 가라앉고 한결 차분해진다. ‘맨드라미 씹는 것도 소태 맛이다’라고 한 시인이 누구였던가? 그런 기분으로 책상에 와 앉았다.

‘바울로의 특권’이라고? 이론적으로는 잘 풀려 나가지만 절대적으로 수긍이 가는 것은 아니다. 아직 이르니 더해 봐야지.

 

이곳에서 생각할 수 있는 생활 태도의 두 가지 방향.

1. 생활 – 구체적이고 인간적인 생활에서 제외돼 버린, 기름이 물 위에 겉도는 듯한 피상적 생활이다.

2. 전혀 다른 세계인 것은 분명하다. 무한한 가능성도 볼 수 있다. 내가 이를 잘 극복하기만 한다면, 내가 그처럼 목마르게 갈구하던 나의 삶은 그 생활로 옮겨져 무한한 풍요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자! 나는 어떤 생활 태도로 하루를 살아야 할까?

나는 구체적인 삶을 살고 싶다. 사람과 부대끼며, 뜨겁고 부드러우면서도 차갑고 딱딱하게, 풍성하면서도 바삭바삭 부숴지는 이 모든 것 갖춘 삶을 살고 싶은 거다.

 

마침내 침대 누웠다. 이것저것 생각이 떠오르는데 좋은 생각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기 전에 잡아 두고 싶어서.

이런 쓰디쓴 과정이 결국 나중에는 내게 보탬이 될 것이라는 깨달음이 제법 또렷이 집혀 오는 것이다. 어느 부제 부제와 같이 우선 혜택을 못 받았다고 하나도 서러워할 필요가 없다. 정녕 복된 기회로 감사히 받을 일이다. 정녕 감사하면서.

왜냐하면 바로 이러한 암울하고 쓰디쓴 과정이야말로 나를 ‘사람되게’., 풍성하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기댈 필요는 없다. 오히려 인생을 풍부하게, 학문을 ‘진짜’로 깊게 하여 참된 교수가 될 자질(실력과 인격)을 갖추는 것이다.

떠나기 전의 라영균 선생 말씀이 떠오른다. “진짜로 공부하는 틀을 만들어 오라.” 고.

이렇게 어두운 밤이 지나고 새날이 밝아 오려는가? 초생달은 또 다시 뜨려는가? 아무리 오늘 떠난 그 아가씨가 눈 앞에 삼삼하고, 또 진정 훌륭한 아가씨임이 분명하다 해도 나는 내 길을, 내가 택한 길을 가련다. 의무라는 관념은 버려져야 한다. 내 길이 쓰디쓴 것만으로 가득 차 있어 나를 아무리 울리고 뒤흔들더라도 나는 그 길을 갈 것이다.

내 길을 가는 이 기쁨, 나는 의무니 하느님이니 속박이니 강제니 따위와는 관계없이 내 길을 가는 거다.

내가 방금 하느님이니 하면서 그분까지 한데 묶어 치워 버린 것은, 내 존재의 하느님이 아닌 속박의 하느님을 – 모든 무리 無理를 이 못난 나에게 불러 일으키는 정녕 하느님이 아닐 그 무엇을 – 가리킨 것이다. 이런 생활 중에서, 온갖 그릇됨과 거짓이 한데 뒤섞여 범람하여 사뭇 나를 짓밟고 집어 삼키려는 이 나날의 생활 속에서, 나는 가리고 치우며 그 속에 섞여 있는 하나의 ‘올실’을 골라 잡는 것이다. 내가 유일하게 믿을 수 있고 나를 성취시킬 수 있는 천변무비 天邊無比의 그 올실, 실로 내 존재에 연결되어 있고 그 끝은 아마 하느님이 붙들고 계실 그 올실을 나는 골라 잡는 것이다.

‘생활이 나를 속일지라도’ 하고 많은 올실이 한데 엉켜 정녕 어느 것을 골라 잡을지 모를지라도 나는 초생달이 내게 주는 재생에의 믿음을 가지고 다시 또 올실 을 찾으려는 것이다.

 

대지여, 숲이여, 맑은 산봉우리여, 기뻐하라!

여기 무겁게 태어나서 힘들게 허덕이는 한 사람이 있어 그 올실을 골라 찾아가며 쥐었다가는 놓치고, 놓쳤다가는 다시 쥐는 용감한 씨름을 벌이고 있으니…. 내 길을 가는 이 깊숙한 기쁨.

내 존재와 흔들림 없는 대지에서 솟아 나오는 이 기쁨, 나는 내 길을 가면서 기뻐하려는 것이다.

 

 

1974년 5월 8일

어머니 날이다. 어머님의 노고를 생각하며 위로하고 보답하기를 다짐하는 계기로 삼는 거다. 한국에 계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잠시 마음을 모은다.

우리는 날 때부터 고독하여 종생토록 고독한 존재다. ‘자기’는 곧 ‘고독한 것’이다. 이곳의 생활이어서 더욱 실감하지만 실은 어디서나 반드시 더불어야 할 것이고 – 왜냐하면 바로 자기 자신이니까 – 내 삶의 의미가 있으려면 이를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고독의 초극 超克이다. 즉 자기의 초극이 여기 있다. 이를 내 것으로 분명히 할 때 내 삶은 참으로 보람차게 되고 창조적이 된다. 결코 이를 회피하려고 미봉책을 꾸며 안주할 방도를 강구할 것이 아니다. 그러려고 하기 때문에 우리의 비참과 암울은 끝이 없는 거다. 삶의 한 가운데에서 이를 웃는 낯으로 덥석 쥐는 거다. 이리하여 쓰디쓴 소태를 씹는 투쟁이 계속 되겠지. 그렇다고 그 투쟁의 끝을 생각하여 내일을 기다리며 초조해 하지 말자. 그게 바로 목적이라고 안달할 수는 없다. 소태를 씹고, 그것도 소가 되새김질을 하듯 죽도록 씹으라. 그리하면서 창조적인 고독의 순간을 때로 맛본 것을 기억한다. 그때 나는 부르르 떨며 이런 순간의 연속으로 살 수 있노라고 적었었다. 바로 그렇다.

자기 존재에 바로 접한 자기가 서 있는 대지와 합일한 그때, 저 깊숙한 지심 地心에서 울려 오는 고동을 듣는 거다. 그게 바로 정말로 사는 거다.

정말로! 이런 생활이 내게 주어진 건 이 얼마나 큰 특혜인가! 이처럼 좋은 기회! 내가 무엇이길래 내게만 이 생활이 주어졌나. 내 존재의 하느님은 나를 이토록 사랑하시어 이렇게 살도록 하셨으니 나는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가. 나의 초극을 그렇게나 원하고 계시는 줄 나는 이제까지 깨닫지 못하였다. 니체가 왜 그처럼 부르르 떨며 기쁨에 겨워 외쳤는지 조금 알 것 같다.

 

 

 

 

이렇게 끝까지 와서

 

 

1974년 5월 10일 금효 錦孝 생일

사랑하는 나의 동생 금효. 이렇게 쓰고 나니 원래 의도했던 바와는 달리 물밀듯 집 생각이 밀려온다. 금효 – 제발 힘있게 보람된 하루하루를 살아다오. 기간 基幹을 붙잡아라. 언제까지나 그렇게 도로 徒勞 에 겨워할 것이냐? 내가 이곳에서 할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의 역사 役事 가 금효를 온통 꿰뚫어 침입하기를 절원 切願하는 것뿐.

뮌헨! 가고 싶던 도시였다. 김문숙 선생이 공부했다는 곳이고, 전혜린이 늦은 가을날, 해 저문 후에 오버 깃을 올리고서 두 손을 포켓에 찌르고는 지향 없이 낙엽을 밟으며 가지만 앙상한 대학가의 가로수 밑을 걸으며 ‘생의 한가운데’를 살겠노라 던 곳. 거기가 뮌헨이다.

 

 

1974년 5월 13일

하느님, 당신과 무척이나 멀어져 지낸 며칠이었습니다.  사뭇 당신을 팽개쳐 버리고, 제 자신도 챙기지 못한 채 발을 땅에 딛지 못하고, 당신이 내려 주신 줄도 놓아 버린 지 이미 오래입니다. 그간 나는 무엇에 나를 팔아 왔었습니까? 남은 것이란 자기 모멸과 지겨움, 구역, 그런 것이 전부였습니다.

제가 무엇하러 이곳에 왔단 말입니까? 아니 무엇 때문에 당신은 나를 이리로 보내신 것입니까? 이토록 얄팍하게 웃으며 살고, 하나도 자기, 둘도, 자기, 하나도 타인 부정, 둘도 타인 부정. 다시 한 번 분명히 깨달은 사실은 가볍게 농을 하며, 신나게 지껄이고, 세상의 온갖 부조리를 알고나 있는 듯 호언하는 것은 결국 자기 모멸밖에, 참으로 쓰디쓴 후회밖에 남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신을 향한 길 가운데에서 완전한 공백을 보여줄 뿐입니다. 참으로 중대한 문제입니다. 자기를 과시하려면 할수록 자기는 빛을 잃고, 그만 자기가 아닌 것이 되어 버립니다. 그것은 곧 자기를 망치로 부수고 손톱으로 할퀴어 엉망으로 훼손시키는 것, 나아가 당신이 만들어 주시고 당신이 원하시는 제 모습에서 크게 빗나가는 것입니다. 당신을 향하는 걸음은 그토록 처절하고 그렇게나 조심스러이 줄을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을. 저 사형수 오경무 씨가 그토록 집요하게 당신만을 향하여 자기 완성에로 간 것과, 사랑하는 친구 창준이가 그토록 순수하게 어리석을 정도로 소박한 것 – 이것이야말로 가장 참되고, 종래는 기쁨과 보람만을 안겨줄 것입니다.

아버님이 제게 주신 것이라면 바로 이것이 아니겠습니까?

‘모든 일에 끝을 생각하라.’ 이 말은 소극적인 표현이지만 오늘은 제 모토로 삼아 당신께 드립니다.

 

 

1974년 6월 3일

리히텐슈타인 에서 이틀을 지내고 셋째 날, 아주 상쾌하게 맑은 아침이다. 건너편 산들도 뚜렷이 보인다.

내가 무슨 복이 있어 이 분을 알게 되고, 이 ‘작은 집’의 가족이 되었는고!

이루마 아주머니의 호수 같은 인품,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시는 분.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떼어 놓으면서, 이 ‘작은 집’에 열쇠를 채운다. 많은 추억을 안은 채 다시 만날 날까지 안녕! 나는 이루마 아주머니를 모시고 갑니다. 그렇죠?

1974년 6월 4일

 

 

1974년 6월 9일 月

좋은 사람이 그렇게나 그리워지고, 책상 위를 쳐다보면 할 공부가 산같이 쌓여있는데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막막하다. 자기 극복은 언제나 나의 문제이지만 이곳에서는 한결 뚜렷이 부각된다.

이렇게 누구 하나, 무엇 하나, 내게 깊은 친구나 동반자가 도리 수 없이… 나는 그저 혼자뿐. 나는 혼자서 나를 만들고, 완성에로 매진시켜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외국의 생활이다. 지느냐, 이기느냐, 넘어지느냐, 꿰뚫고 그 좋은 걸 붙잡는 거냐 다. 그렇게 할 이유가 분명히 서야 그럴 수 있겠다는 종래의 주장은 지금 바뀌어졌다. 하느님과의 연계 連繫 나 내 진로에 대한 명확한 청사진이 설정된 후라야 힘차게 전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밑도 끝도 없는 전생애를 통한 과정에서, 보다 높고 보다 맑게 다듬어 가는 것이다. 카뮈가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자, 이렇게 더없이 끝간 데까지 와서 온 길을 되돌아보며 이제 조용한 자세를 다듬어 단어장을 들추려 한다.  지금의 나로서는 너무나 힘에 겨웁다.

 

 

1974년 6월 10일

비교적 공부가 잘 되어 조금 전 11시 반까지 독서실에 앉았다가 왔다. 시험이 눈 앞에 다가왔고, 그 준비가 만만치 않다. 유일한 목표 운운하더니 과연 잘 돼가야 할 텐데. 그래서 지금 머리가 온통 뒤엉킨 거미줄마냥 불규칙하게 얽혀 그 긴장을 풀어내지 않고는 잘 수가 없을 것 같다.

계훈이 편지를 받고 몹시 기뻤다. 할머님이 곧 돌아가신다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공항에서 그렇게 우시더니.. 그토록 긴 세월을 후회하고, 설움에 겨워하시는 거다. 아들도 먼저 가고, 양아들도 없느니만 못하고, 참으로 장탄식을 하실 일이다. 돌아가신다는 게 싫으실 게다. 너무나 한이 많다고 생각하시니까. 이 사실들이 점점 더 실감나게 느껴온다.

예수님, 당신의 오묘한 평화를 할머님께 비춰 주시어 마음의 평안을 얻게 하소서.

 

 

1974년 6월 12일

047호의 그 친구가 찾아와 두 시간이 넘도록 얘기를 주고 받았다. 이런 얘기를 얼마나 하고 싶었는지…

내가 독일어를 잘 할 수 있었다면 더 좋았을 걸.

그 친구에게서 많은 것을 얻었다. 유럽 사람들은 우리가 유럽을 동경하는 그만큼 우리를 동경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동양이 동양이기를 마다할 때 그 결과가 어떤지 알겠느냐고. 동양인은 한껏 내적인 부를 추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 친구에게 그런 정적인 점이 나는 안 좋다고 하니 의아할 밖에. 나중에 여러 설명을 통해 그 점은 서로 납득은 했지만 그는 우리가 유럽과 전혀 다른 문화 전통을 가지고 완전히 우리로서 남아 주기를 기대하는 것이었다. 일본은 다분히 그 본성을 잃었고, 홍콩은 서구화되어서 오히려 더 비극을 자초하는 것으로 생각한다고.

나는 우선 위의 모든 점을 완전히 시인하면서도 그러나 네가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네가 배불리 먹을 수 있고 편한 생활에 권태를 느끼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아프리카의 비참한 사진 속의 사람이 무엇을 위해 노력하겠느냐? 배불리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니겠느냐? 우리도 마찬가지다. 내적인 부를 추구해야 한다는 존재의 요구와 외적인 부도 반드시 더불어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고 말했다. 이런 얘기의 전개는 전혀 뜻밖이어서 처음에는 무척 싫었으나 갈수록 도전적이 되었고, 내게 주는 바도 컸다. 그에게도 아주 좋은 것 같았다.

내가 느낀 점은

우리는 결코 우리여야 한다는 것. 나는 특히 동양인임을 그대로 드러내고, 내 본연의 자세 그대로 처신해야 할 것이며, 이것은 내 자신에게도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그 친구 전공이 무엇인지, 이름도 모르지만 그런 화제는 참 귀한 것이었다. 이 점이 신학생들과 다르다. 많이 배워야 할 것. 신학생들은 흔히 공식적인 처리에 만족하고 한걸음도 더 나가지 않으려 한다. 일이 안 되면 자기가 부족해서 그렇다고 자신을 채찍질할 것만 생각할 뿐 합리적인 자기 체계는 불가침인 채다.

 

뜻밖에 김병학 신부님으로부터 편지가 왔다.

“부지런히 티롤(주: 오지리의 지명)의 대자연을 맛들이고, 그 사람들의 생활과 역사 속에 깊이 들어가서 인간 형성에 도움이 되게 하라.” 고.

 

 

1974년 6월 13일 木

클레멘스와 발터와 훙거부르크(주: 인스브루크에 있는 산)에 다녀왔다. 때맞지 않게 내린 눈과 짙게 덮여 있는 구름 사이로 보이는 산들은 가관이었다.

 

 

1974년 6월 14일 金

오랜만에 찬란히 맑음

정수에게 편지를 썼다.

“이건 사뭇 생활이 아닌 거다. 절대로 고독한 거다” 라고 쓴 후에 “그러나 기뻐한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기뻐하지 않을 수 없는 거다. 특히 이 가능성을 기뻐하는 거다. 하이야 어디서나 이 가능성은 다 주어져 있는 것이 분명하지만 여기서는 피부로 느끼고, 내게 확실히 부각된다는 점에서 – 네가 가능성 자체만으로 기뻐할 수 있을 만큼 형이상학적이냐, 그리고 그 가능성이 절대적으로 객관적인 거냐 하고 묻는다면 나는 할 말을 잃지만 그렇지 않고는 희망이 없으므로 – 이건 가벼운 바람 정도가 아니라 내 생명이 달린 절대적인 희망이므로.”

계속 빵을 찾으면서도 ‘빵만으로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굳게 믿고, 빵 아닌 하느님의 말씀으로도 살 수 있고, 그것이 훨씬 좋고 자유로운 것이며, 사람답게 한다고 믿는 것이다.

 

 

 

 

나의 근본문제

 

 

1974년 6월 15일 土

<의사 지바고>를 보았다. 지바고… 그는 타고난 시인이다. 그리고 인간이고 또 자유인이었다. 첫 장면부터 자연의 강한 낙인을 찍힌 그는 시종 자연을 바라고 살다가 그렇게 죽었다. 우리가 어떤 사상 事象에서 무얼 느끼기는 다분히 자기의 주관과 처지에 의하는 법. 그 어려운 처지에서도 그토록 신비로운 대자연에 접할 때마다 황홀해 하던 그! 인간이면 누구든지 돕고자 하던 그.

그는 철저히 자유로운 인간이고저 했다. 인간의 존엄과 인간 자체로서의 가치를 무한히 존중했다. 따라서 그에게는 정치니 혁명이니 주의니 하는 것을 알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 생겼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인간 지바고는 어릴 적부터 혼자였다. 누구와 같이 있어도, 어디에 있어도, – 설령 Lara와 같이 있는 순간에도 – 홀로였다. 그리고 홀로 사라져 갔다. 그런데 문제는 지바고와 라라, 그리고 토니아의 삼각 관계를 어떻게 보는가 하는 점이다. 지극히 대조를 이루는 라리와 토니아.  하나는 야생화이고, 한쪽은 온실에서 곱게 자란 화초였다. 이 둘을 지바고는 다 사랑했다. 누구를 더랄 것 없이 다 사랑한 거다. 그 둘에서 완전한 하나를 만들면서.

그러나 사회의 관습이나 꼬장꼬장한 교회법이 그걸 금해서가 아니지만 나는 그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는 결단을 해야 했다. 그가 정녕 원하던 밝은 인간은 결단을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니었을까? 남을 불행하게 만들면서 자기의 완성을 기할 수는 없다. 이 점은 칸트의 지상 명령만큼이나 자명하다. 그는 토니아를 더없이 불행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라라만큼 강하지도 못했고 –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 치명적인 불행을 겪어야 했다.

온갖 사상 事象이 나열된 그 영화가 바로 말한 대로 세상은 참으로 복잡하고, 인간은 지극히 여러 모양으로 산다. 날이 갈수록 획일적 질서나 법칙은 효력을 잃는다. 서구에서의 크리스티아니즘을 보면 알 수 있다. 점점 주관적이 되어 간다. 아찔하게 겁이 나는 현상이다. 모두가 기가 막히는 우여곡절과 비참 속에서 몸부림치며 살고 있다. 삶을 참답게 추구하려는 모든 사람은 그의 삶이 어떤 식으로 전개되든 그의 생은 성공이다. 점점 더 이상 결단과 필요성과 그 이유가 사라져 간다.

예수의 가르침은 내가 택한 삶의 방식이다. 은총으로 그것이 주어졌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게다. 그리고 그 삶을 더 철저히 하기 위해 이 길을 택했다. 하느님은 내 생명과 존재의 완전한 전부이다. 그분을 향한 계속 전진과 끊임없는 결단만이 나를 나답게 하고 나의 유일무이한 전부가 된다.

 

 

1974년 6월 16일 日

뜻밖에 오늘은 우크라이나 전례 典禮로 미사가 거행되었다. 비잔틴 의식의 하나로 성상을 모셔 둔 거시 특이하고, 제대 가운데 촛대가 유별나다. 우선 신기함에 열중했고, 전체적인 인상은 설명 그대로 ‘그리스도의 구원’에 철저히 집약되고 있는 느낌. 비교적 초대 교회에 가까운 모습을 볼 수 있어서 반가웠다. 그리고 오리제네스(주: 희랍 교부)가 살던 동방 전례여서 테르툴리아누스(주: 라틴 교부)의 로마식 전례가 아닌 게 분명히 느껴진다.

전체적인 구분은 있지만 예절이 일관되게 물 흐르듯 흘러 딱딱한 느낌이 없다. 이런 예식이 오늘날 젊은이들에게 어떻게 맏아들여질지는 의문이다. 로마의식이 좋다는 것보다 요새 많이 좋아졌는데, 이러한 진화를 받아들이지 않는지…

 

요새는 어찌된 일인지 이곳에 와서 느끼는 개방된 사회에서의 무리 없는 성장, 무한한 공간이 언덕 너머로 거대하게 전개되어 있는 느낌이 가끔 들어 아찔해지기도 한다.

 

 

1974년 6월 22일 土

참으로 무섭다. 이제껏 하노라 바둥대던 것이 무엇이었던가. 목표입네 하고 거창한 인생의 대전제를 외치던 나는 어디 갔는가? 이번 시험도 그 먼지 위에 쌓이는 하나의 먼지일 뿐, 내가 철학을 공부하겠노라고? 이토록 무기력하고 문제의식이 없고 생활에 철저치 못한 내가? 이제껏의 생활은 ‘신부가 무엇이길래 이토록 좌절감만 안기는 혀상 속에서도 그걸 고수하려는가’하는 다분히 잡문식 雜文式 의 사고가 전부였다. 오기 전 J 와의 대화들에서 이 점을 심각히 느꼈었지.

 

이 땅에 와서 그토록 보고 살고 배우고 싶던 곳 유럽! 발음만 해도 꿈과 희망을 불어 넣던 정녕 그 유럽! 와서 어떻게 해야 제일 잘 사는 것일까?

 

나는 항상 이런 식이다.

나 자신과 – 그것도 나의 생활 태도에 대한 자기 비판과 환멸 – 나의 목표와 – 신부행이 가한가, 불가한가 – 하느님이 내게 무엇인가 하는 것이 나의 문제의 전부이다. 이것이 항상 무의식의 심층구조로서 나를 잠시도 편안케 하지 않는다. 나는 이 문제에 사로잡혀 있어 늘 이것에만 관심할 뿐이다. 따라서 접하는 사상 事象이 신선하게 부각되거나 신기함이 기억에 남거나 하는 일이 거의 없다. 그런데 소위 나의 관심사라는 것이 철학적이라거나 쓸만한 것이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바로 나의 전부라는 그 문제가 허구일 뿐이라면 이는 바로 나 자신이 허사라는 얘기가 된다. 이렇게 되면 큰 문제다.

한때는 그 문제 자체에 탐닉했었다. 정말 진지하고도 열심히, 성실히 마음을 모두어 그 문제가 내게 무엇인가 생각했었다. 그때는 정녕 행복한 때였다. 군대에 갔다 올 때까지가 그랬었다. 그 후 문제에 대한 정답을 얻기란 지극히 어려운 일이고, 이젠 너무나 지쳐 공부나 하기로 했다. 혹시 공부하노라면 그 답이 나올는지도 모를 일이라고 생각했다. 공부하다 보니 재미도 있고, 이제까지의 나는 언제였느냐는 듯 까맣게 잊어버린 것 같았다. 그러자 사고의 줄이 끊기고 실어증이 생겼다. 창준이의 진면목을 알게 되고, J를 알아 나의 이제까지의 노력을 바라보게 되었다. – 이거 무슨 자서전을 쓰려는지? – 창준이는 낭비를 말라고 했고, J는 나더러 지극히 단순하다는 것이었다. 이제 공부라는 것을 천직으로 알고 그것만 할 수 있는 환경이 주어졌다. 하도 일이 복잡하게 꼬인 것 같아 그 속으로 도망갔다고나 할까? 그러고 보니 이건 기초가 너무나 빈약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도대체 기초라는 것이 있지가 않았다. 실력은 그만두고 문제점도 가진 일이 없었다는 것이 드러난 거다. 정말 한심스럽고 부끄러운 노릇이었다.

이리하여 끝에는 항상 4대 결심 (주: 일찍 자기, 일찍 일어나기, 미사 참여, 담배 덜 피우기)과 하느님을 올바로 섬김이라는 이 두 가지가 남았다. 아무리 도망치려고 해도 이 두 가지에, 나는 마치 시공 時空에 있을 수밖에 없듯이 들어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나의 유일한 구원은 이 길로만! 그래야 나는 살 수가 있는 것이었다. 이제까지의 나에서 일탈하여 참신하게 사상 事象을 접하는 것 – 이것이 나의 유일한 원이고 아마 유일한 구원의 길이겠지.

넘치는 박력을 가지고! 낭비를 하다니 있을 수가 있는 일인가!

우선 내 일상 생활에 철저해지면 실로 문제의 반은 해결된 것일 게다.

 

 

1974년 6월 26일 水 대체로 흐림

시험 종료의 환희도 잠시였다.

어제의 그 홀가분함. 눈물이 나도록 즐거웠던 마음. ‘끝났다’는 말이 떨어지자 나는 쾌재를 불렀다. ‘아, 지나갔구나’ 금상첨화인 것은 “당신은 우 優를 받을 것이다.” 하던 말이다. 그리고 즐거운 빨래, 전기 소제기로 방을 청소하고, 창문을 활짝 열고, 책 안의 연필 자국을 박박 지우고 – 거리거리마다 넘치는 여인의 치맛자락이 얼마나 짧아졌나를 보면서 가방 속에 스케치북, 소철학사(小철학史)를 넣어 둘러 메고, 티롤리아 (주: 인스브루크에 있는 서점 명)에서 <라이사 마리탱의 일기>를 주문하고, 카뮈의 일기를 사고, 암라스로, 암라스로.

그곳에서 스케치를 한 장하고, 벤치에 누워 <사랑하는 나의 고향>을 감회 깊게 부르고, 소리를 몇 번이고 질러 달아나는 마음을 가누면서 전차를 타고 내 소굴로 돌아왔던 것이다 – 그리고 도저히 그냥 자 버릴 수 없었다. 새벽 3시 반. 어렴풋이 동이 터, 이른 새벽 하늘이 검푸르게 밝아오며 새들이 울기를 시작했을 때 비로소 눈을 붙였던 것이다.

이제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내가 무엇 하러 여기 왔나’에 사로잡혀 있다. 인격적 완성에로의 발돋움과 공부. 그러나 이 둘은 기가 막히게 모순되게 보인다. 그리고 기실 이제까지의 나는 그래 왔다. 그랬기 때문에 그토록 학문에 진보가 없었다. 문제의 테마가 내게 흥미로운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속박으로만 여겨져 지겨움에 사뭇 떨렸던 거다. 나아가 이런 공부를, 아니 학문을 평생 하면서 교수가 되겠다는 나, 과연 가능할지…. 이렇게 내 인격과는 관계없이 내 마음에서 우러나지 않는 공부를 할 때 나의 생은 절대로 행복할 수가 없다. 언제까지나 밑 바진 독에 물 붓기. 슬프다!

그래서 신학은 신앙의 학문이라고, 신앙 없이는 되어질 수 없는 학문이라고 하였구나! 철학은 이와 좀 다를지라도 역시 종생할 과제의 과녁인 하느님을 향하고 있는 구원의 철학이라면 그 자세는 반드시 신앙의 자세여야 한다.

이런 돼먹지 못한 로마 제국의 유습 遺習 인 낡은 허울 운운하면서도 교회 법을 거친 나는 이거 참 안 그럴 수도 없고, 참으로 난감한 노릇이 아닌가.

문제를 축소시켜 결론을 생각해 보면 이건 분명하다. 즉 ‘학문을 인격의 과제로서 하는 거다’. 내 마음에서 우러나서 하도록, 그 안에서 기쁨과 사랑의 눈물을 발견하면서 해야 한다. 그 자세는 전인적으로 나를 내걸어 인격적으로 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향한 마음과 태도를 가다듬고 모두어, 그로써 유일한 원천이고 원인이고 결과임을 십분 자인하면서 사랑의 학문이 되도록 하여야 한다.

 

 

1974년 6월 27일

하루하루 지날수록 한국은 점점 잊혀져 간다. 3개월 여. 하루하루가 여실하다. 그 공기 – 그 현실 – 그 사람 됨됨이와 특징이 … 굉장히 빠른 속도로 기억에서 멀어져 가고 있다. 겨울 동안 쌓인 눈이 봄볕에 소리 없이 녹아 버리듯, 처음 와서 느낀 대단한 비교와 이질감은 이제 더 느낄래야 느낄 수가 없다. 참으로 안타까운 노릇이다.

말만 잘하면 이 모든 것을 뒤집어엎을 정도로 이곳 사람들과 비교해 가며 할 얘기가 많았는데, 이제 말을 좀 하게 되자 그러 의욕은 그만 두고라도 그럴 이유조차 없어져 버렸다. 완고할 정도로 강한 지반을 자랑하며 돌진한다는 시초의 목표는 눈 녹듯 자취도 없이 사라져 간다. 나는 얼마나 지반이 얕았길래, 한국 사람들이 얼마나 자기 속에 자기를 가지고 있지 못하길래 이렇게 되어야 하는가. 중국 사람들은, 그 거대한 흉중 胸中을 가진 사람들은 그 대륙적 기질하며, 돼지고기 비계로 속살까지 찌든 ‘자기’로 언제나 어디서나 중국 사람이라는데 우리는, 나는 도저히 그럴 수 없다.

여기서 이럭저럭 접하고, 소문에 실려 오는 한국의 모습, 그 공기 – 알 수가 없다. 생생한 분위기가 못 되는 생명이 빠져 버린 허튼 풍문으로 고국을 짐작할 수밖에 없다니 기기 막히는 노릇이다.

 

 

 

 

빈에서 – 단절과 나약성

 

 

1974년 7월 10일 빈이다

아까 시청 광장에서 그토록 흐뭇하게 음악을 통한 인류 운운하며 무조건 기뻐했건만, 헤어져 내 소굴로 돌아온 나는 맥이 빠진 절망에 찬 등신으로 변해 버린다.  창문을 닫고 잠을 강청할 밖에. 책상 위에는 켈(주: 독일 신학자)의 신약 신학이 다섯 장도 채 넘겨지지 않은 채로 단정히 사전과 함께 놓여 있다. 그리고 작은 표어 ‘슬근슬근 그러나 불같이!’도 있다.

일이 잘 돼갈 때 저 깊은 곳에서 울려 나와 내 존재의 하느님과 연결을 맺어 맛보는 그 기쁨. 푸른 하늘에 흰 눈이 덮인 산봉우리들. 그리고 내 존재가 온통 숨 가쁘게 응답하는 그 차원은 무엇인가? 이렇게 두 가지가 사뭇 무엇인지 모르게 나를 덮치고 있으니 내일을 기대하자.

 

 

1974년 7월 11일 아침

어제 늦은 오후, 시청 광장에서 젊은이들의 음악을 통한 상호 이해와 분위기에 젖었던 것은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체험해 본 독특한 것이었다. 미국 캘리포니아 사라토가 고등학교가 1위의 상을 받았다던가. 구경 나온 많은 시민들 –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가 일심동체가 되어 흐뭇한 마음으로 박수를 치고 – 우리처럼 마음이 안으로만 굽어지고 있는 사람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정도로 – 함께 기뻐하는 것이었다. 그런 모임을 그렇게 이해할 줄 아는 시민들의 수준이 놀라웠다.

일등 한 학교가 기념 촬영을 하려 하자 화가 난 폴란드의 한 학교는 사람들의 무리를 헤치면서 바로 그 앞을 행진해 지나가기도 한다. 사라토가 학교의 고별 연주. 그 자연스럽고도 소박하게 기뻐하는 모습. 시민들과 한 마음이 되어.

이러한 여유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경제적 안정에서. 물론 그 비중이 대단히 크리라는 것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것만은 아닐 거다. 전시 戰時라는 위기 앞에 섰을 때 또 이들이 보여 주었던 그 순수한 단합은 문제가 경제적인 것만이 아님을 증명한다. 그리고 이들은 고생일랑 아예 겪어 보지도 못한 순해 빠진 무구한 이들이 아님을 나타내 주는 것이기도 하다. 해결은 이들의 전통에서, 그 전통적인 사고와 자기 의식, 그리고 이런 방향에로의 교육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다 끝나고 모두들 흩어져 가는데 한쪽 구석에서 신나게 연주를 하던 오지리의 한 단체. 수상에서 제외되었건 말건 전혀 구애됨이 없이 고별인사를 하고 있었다. 그 그룹을 지휘하던 체격이 큰 친구의 여유 있는 모습. 담배를 피워 문 채 연상 농담을 해 가면서 지휘를 하다니… 지나가던 교통 순경도 차의 통행을 방해하는 이 모임을 나무랄 생각도 않는다. 모두가 한 마음으로, 똑같은 마음으로 기뻐하고 참여할 수가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렇게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점에 있는 것이다. 그 해답이 전통에서 오는 분위기와, 그런 식의 교육이라면 그 바탕은 그리스도교에서 찾아야 한다. 이들의 의식 세계를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으로 지배하는 사상적 기초는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이다. 우리 동양이 이와 다른 바탕을 가져 아예 비교할 수 없는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다고 하기에 앞서, 참으로 인간이 자기 인간됨을 성취하는 데 – 이건 양洋 의 동서를 막론하고 인간이라면 공통의 과제인 바 – 어떤 것이 바람직한 것인가는 분명 이야기할 수 있고, 또 반드시 비교되어야 할 것이다. 많은 우여곡절을 겪고, 교황권이 몰락하고, 인문주의 종교 개혁이 일어났어도 이에 구애됨 없이 그 진수는 엄연히 전해 내려오고 있다. 우리 국사에서 ‘서학 西學이 왜 그리 환영을 받았나’하는 것을 배웠던 것이 생각난다. 모든 인간은 본질적으로 평등한 것이며, 천부의 자유를 가졌다는 것. 그리스도교가 시민 정신에 끼친 영향은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어쩌면 헬레니즘과의 연결 속에). 그리고 상대방을 자기 같이 사랑하고, 상대방에서 예수를 찾아 읽으라는 적극적 계명 – 모두 다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 그러므로 이곳에서는 그리스도교 정신이 곧 시민정신이고, 곧 도덕이고, 그것이 바로 전통의 문화인 것이니 모든 이는 이 문화권에서 자양을 공급 받으며, 뼈 속까지 그것으로 채워졌을 것이다. 내가 이 곳의 장점만을 보고자 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이곳의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면을 간과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나 우선 보고 느껴지는 것은 이렇게 해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1974년 7월 12일

자려고 누었다가 어찌된 셈인지 지금까지 쓴 글들을 한 번 쭉 훑어보노라니 제법 마음이 차분해진다. 그리고 예의 그 기운의 자취를 약간 찾아낸 듯하다.

 

그러나 아직도 멀었다. 오랫동안 사뭇 환장(?) 한 듯 지내고 있었다. 눈에는 오늘 낮 돌 층계에 두 다리를 올리고 앉아 사뭇 거무스레한 깊은 속살까지 내놓아, 순간 나를 황홀케 하는 동시에 부끄러움과 수치를 안겨 주던 그 장면이 아른거린다.

 

이 일기장은 참 좋은 길 안내자다. 그런데 좋은 것은 멀리 하는 나인지라 쉽게 털어 놓으며 접근하려 하지 않는다. 조금 전 망설이다가 자리를 박차고 밖으로 나가 피곤한 다리를 강요하여 프랑크푸르트(주: 음식의 일종)를 고추에 곁들여 사 먹고야 말았다. 그리고 하나를 더 사고 맥주까지 한 병 사 갖고 들어왔다. 약간 속이 풀렸다. 마음까지도 약간 풀렸다.

 

간밤에 꿈을 꾸었는데 아버지를 만났다. 자세한 내용은 거의 생각이 안 나지만 꿈에 아버지를 뵌 건 돌아가신 후 한두 번뿐으로 흔하지 않은 일이었다.

아버지의 준엄한 눈초리가 얼만 날카로웠는지 꿈인데도 몹시 두려웠다. 그 동안 왜 그렇게 야단을 한 번도 안 치셨느냐고 물었더니 “내가 죽어서 너와 같이 있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시는 게 아닌가. 그 말씀에 깊이 공감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꿈에 뵌 아버지의 말씀이나 그 분위기는 나의 타성과, 용렬함과, 이토록 타락(?) 속에서 보내는 나에게 참으로 내심의 정곡을 찌르는, 예의 독특한 존엄한 표정임이 역력하였다. 참으로 망연자실할 일이나 바로 때에 꼭 맞춘 경고였다. 엊저녁에 조금 생각난 것인데, 우리와 이곳을 비교하면서 사고나 그 외 여러 가지 근본적 차이는 우리는 최근까지 임금과 그 권력 앞에 자기를 전혀 드러냄 없이 사뭇 임금의 의지가 곧 내 것이었고, 내 것을 찾으려는 요구가 거의 없었음에 비해 이곳은 자기를 찾으려는 요구가 일찍부터 강하여 군주는 그저 상징이나 – 아니 전체의 편의를 위한 존재로서 자기의 자유, 자기의 추구가 기분 바탕이 되어 온 것에 있다고 생각되었다. 자기 확립을 위해선 목숨도 내걸고, 자기가 중요한 만큼 남도 중요하다는 것을 일찍부터 알아 왔고, 자기의 영역에서 충실히 모든 이가 버티어 왔으므로 그것이 하나의 전체적인 조화를 이루어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마치 한 건물에 각개의 벽돌은 벽돌인 자기에 충실하려고 자기를 아주 단단히 굳혀 나갈 뿐으로 결코 기둥이나 대들보를 넘나 보며 시기하여 자기를 굳히는 데 불실치 않은 것과 같다고 하겠다. 이렇게 자기를 확립함, 보존함, 나아가 자기 자신에 충실함, 따라서 자기 만족함, 이것이 서구인의 정신의 근간이 되어 오늘 보는 이 훌륭한 문화를 이루고 가속도의 비약을 해 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정신 자세는 그리스도교의 평등 사상과 희랍 문화의 인본 사상 人本思想이 그 바탕이 되어 전통과 어릴 때부터의 교육으로 굳어져 간 것일 게다. 대조적으로 우리의 정신 지침이었던 유교의 기본 가르침은 무언가? 참으로 이와 정반대가 아닌가? 삼강오륜 三綱五倫! – 이건 임금과 아비와 남편의 절대 우위를 입이 닳도록 외쳐대는 것이고, 참으로 소규모적, 내향적, 가족적인 것이다. 거기에는 평등, 자유, 자기라는 것은 그림자도 없다. 이러한 차이가 오늘 이렇게 눈에 보이는 문명과 눈에 안 보이는 정신적 부의 차를 가져 오고야 말았다.

 

 

1974년 7월 17일 水

실로 오랜만인 것 같다. 맑은 정신으로 안정을 되찾은 듯하다. 이는 분명 하느님의 은총이다. 그리고 부수적인 선물도 주셨다. 하느님의 선물이다. 이렇게 정신을 제대로 가눌 수 있게 되다니 악몽 같은 요 얼마 동안이었다. 끔찍했던 그 동안 사뭇 마귀에 덮어씌운 듯 지냈다.

고백 성사를 보았다. 엊저녁 감히 성체를 받아 모시지도 못하고 해결책을 의뢰했었는데 그 답은 ‘고백 성사를 볼 것’이었다. 말을 잘못해서 어쩌나 한 것은 완전히 기우였다. 그 신부님이 한마디로 잘라 말씀하신 대로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보속으로 15분간 묵상을 하거나 영적 도서를 하라고. 내 허물에 비해 너무나도 신기하달 수밖에 없도록 쉽게 용서해 주시고, 내 지위를 회복해 주시고, 다시 살게 해 주셨다. 다시 얻은 이 연결! 소중히 다루어 놓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할 수 있는 바 유일한 도리요, 보답이다. 그리고 의지의 작용이 얼마나 중요한지. 얼마나 엄한 의지의 훈련으로 나를 조심히 다루어 나가야 하는지가 분명해졌다. 돈키호테의 말대로 “이것은 물리치기는 하늘의 힘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정말 실감한다. 사람이면 저절로 이를 극복할 수 없다. 내가 은총 지위 안에서 얼마나 행복한지. 이 안에서만 내 생존이 가능하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이는 나의 존립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분을 사랑하기 때문이라야 하는 거다.

그 동안 참 홍길동 같은 생활을 해 왔다. 어찌 그럴 수가 있었는지. 그러고도 신앙인이라고… 그 동안 나를 거두어 이렇게 좋은 기회를 하사하신 가이 없는 그 사랑에 꿇어 엎드릴 뿐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이 회복을 잃지 말고, 나아가 다시 박차를 가해 그분을 받아들이고 이곳 생활을 살아 나가는 거다.

막시마에세 편지를 부쳤다. 데레사와 지형이에게도 오랜만이다.

내가 맑게 정리되어 있지 못하면 도저히 집에 글을 써 보낼 수가 없다. 자명한 노릇이다.

 

아까 Untere Belvedere 의 첫 전시장의 그 여인이 자구 눈 앞에 아른거린다. 빨간 스커트에 위에는 무슨 블라우스였더라. 안경을 쓴 귀엽고 상냥해 보이는 여자였다. 어떠면 그렇게 친절할 수가 있을까? 이런 경우에 그 친절을 개인적인 호감이나 관심으로 착각하지 말라는 얘기를 어디선가 읽은 일이 있고, 나도 충분히 그렇다고 느끼는 터이지만 자꾸 아른거리는 데에야 어쩌랴. 그건 내가 이곳 생활에서 사람을, 그것도 젊은 여인과의 관계를 무척이나 그리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에 쓴 대로 온갖 것에 단절되어 있어 마냥 부드럽고 따뜻하고 상냥한 어떤 보금자리를 갈구하고 있기 때문이란 말이다.

 

실로 중대한 기로의 문제이다. 외국 생활의 어려움, 그리고 그 성패가 달린 문제다. 여기서 자신을 풀어 헤쳐 인간적으로 아주 나약해지면 틀림없이 그 결과는 끔찍하고 비참할 것이다. 이것은 다른 이들의 기대 때문만이 아니라 그보다는 자신을 위해서 너무나 큰 손실이고 인생의 둘도 없는 기회의 포기이다. 또 다른 한 면을 본다면 이 문제를 잘 소화하고 잘 이끌어 갈 때 그만큼 피와 살이 되어 결정적으로 인생을 풍부하게 할 것이란 점을 짧은 외국 생활을 통해 수없이 느꼈고, 반드시 나도 그래야 할 것은 명약관화! 그 방법의 첫째는 거의 절대 비중을 차지할 하느님과의 관계 – 나의 믿음의 생활이고, 둘째, 공부에 정진함 – 공부를 생활로. 셋째, 건전한 해소책을 평소 마련하는 기술적 문제가 그것이다 – 등산, 미술, 간식을 갖추어 놓을 것. 좋은 친구도 필요하다.

 

또 잊을 수 없게 못박힐 사건 – 그렇게 기대했던 규스타브 클리미트! (주: 화가) 그의 유디트 (주: 화제 畵題)가 바로 눈 앞에 있는 게 아닌가? 나는 사람들이 그 방에 하나도 없는 틈을 타 내가 이 그림을 보노라! 하며 손을 약간 대었다. 아뿔싸! 그 순간 굉장한 폭발음이 나는 게 아닌가! 나는 그만 놀라고 창피하고 당황하여 몸을 가눌 수 없던 그 심정. 호각 소리가 나고 책임자가 달려오고… ‘저 동양 놈 – 한국사람임은 밝혀지지 않았다 – ? 옷도 초라하게 입고 기다란 머리카락하며 구질구질해 보이는 저 놈이 그러면 그렇지, 우리 소중한 미술품을 훔쳐 가려고 수작하다니’ 라고 생각했으리라 짐작하니 참으로 기가 막히고 억울할 뿐이어서 그때까지 그렇게 즐겁고 기대에 부풀었던 마음은 간 데 없고, 구경이고 뭐고 어서 빨리 이 호구 虎口를 벗어나고만 싶던 그 심정! 참 불쌍하였다. 그래도 그 책임자 아가씨는 약간이나마 나를 이해해 주는 듯 함께 아파해 주는 위로의 말까지 해 주어 과연 대국의 훌륭한 교육을 받은 아가씨임을 느낄 수 있었다. 사과를 하고 계속 서너 방을 지나갔는데 또 한 녀석이 다가오더니 “손으로 만지지 말고 눈으로 보라”고 문자 그대로 멸시하는 듯한 훈계를 하는 모욕 – 내 탓이지만 – 을 당하였다.

밤에 텔레비전에서는 한 젊은 부부의 문제를 다뤘는데 오늘은 여인의 관점에서 그린 것이고, 내일은 남자의 관점에서 그린다 하니 내일 것이 기대된다.

 

 

1974년 7월 19일

텔레비전은 어제의 속편을 <결혼 – 남자 쪽에서 본 얘기>를 계속 보여 주었다. 어제는 남편을 참 용렬하고 의지 박약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그는 참으로 순수하고 용감한 남자였고, 참으로 가정을 생각하는 남자였다. 오늘의 여주인공은 너무나 허황되게 파리를 못 잊어하는 경망한 여자로서, 이것이 바로 그 남편 눈에 비친 자기 아내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날이 갈수록 두 사람의 대화의 광장은 좁아지고 급기야 그 노력마저 피차간에 없어지고 만다. 두 사람의 공감의 자리는 이제 더 회복될 수 없으리만치 좁아져 가기만 했다. 참으로 안타까운 노릇이었다. 그렇게 훌륭한 남녀가 서로 헛된 맴돌이만 하고 있는 것이다! 서로 만나지 못할 평행선 위에서 두 사람은 한 번도 사태를 검토해 보지 못하고 만다. 몹시 안타까웠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 서로를 이해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노릇인가! 일이 잘 돼갈 때에는 가능한 일이나 그렇지 않을 때에는 기대하기조차 어려운 것이다.

 

문제:

여자는 남자에게 한번도 전적인 신뢰를 주지 않았다. 더욱이 일일 빗나가기 시작한 후부터는 남자를 조금도 믿지 못하고 꼭 자기가 나서야 생활이 영위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결단을 내려 자기 나름의 일을 포기할 줄을 모른다. 남편이 의지가 좀 약하기는 하나 무능한 사람은 아니었는데 여자의 욕심이 너무 컸기에 그녀가 바라는 남편이 될 수는 없었다. 그녀에게는 볼 줄 아는 눈이 없었다. 똑똑하다고 할까? 무슨 일이건 척척 해내고, 용모도 단정하므로 어디에 가든지 대 환영을 받는 것 때문에 오히려 남편의 고민을 진정 근본적으로 숙고하지 못하고 만다.

 

 

 

 

한여름의 오지리 지방

 

 

1974년 7월 22일

내일 마리아첼에 가려고 한다.

기대한 만큼 재미있고 보람된 여행이 되기를 빈다.

가르멜 수녀원을 곡 찾아가 보리라!

8월을 지낼 일이 차츰 걱정이 된다. 튀빙겐에서는 왜 가부간에 소식이 없는지. 그곳에 가서 조용히 강의록 읽기에 전념하고 싶다. 튀빙겐으로 편지를 내야지. 어물어물할 일이 아니다.

 

 

1974년 7월 23일 月

오늘 마리아첼에 갔다 왔다. 기대했던 만큼 재미있고 보람된 여행이었다. 가르멜 수녀원에도 찾아가 보았다!

 

8월을 지낼 걱정이 없어졌다. 튀빙겐에서 좋다는 소식이 왔다. 그곳에 가서 조용히 강의록만 독파할 수 있게 되었다. 튀빙겐으로 편지를 낼 필요도 없다. 마음을 느긋이 가져도 된다.

 

마리아첼의 가르멜 수녀원에서.

데레지아 수녀님을 알게 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린다. 첫 미사를 여기 와서 하라시는 데는 그 외 모든 말이 이것에 압축되는 듯 충분히 상통하였다. 한국을 잘 알고, 사랑하시는 분이었다. 빈 태생으로 가르멜 수녀 특유의 내적 미를 갖추신 아름다운 분이라 생각된다. 내 이름과 주소를 적으시고 기도 많이 해 주시겠다고. 내 무슨 천복 天福이 이리 있을까! 감사할밖에. 서울 가르멜의 박 수녀님께 잊지 않고 글월을 내리라. 외부의 마리아 수녀님이란 분도 인상적이다. 아직 앳되어 보이는 얼굴로 서로 함께 굳게 기도하자고 하셨다. 참으로 든든하다. 여기와서도 이렇게 전과 다름없는 분위기의 유대를 맺어지리라곤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나오는 길에 조용한 연못의 차가운 공기 속을 유유히 헤엄치는 20여 마리의 백조 떼는 인상적이었다. 멀리 또는 가까이 겹쳐 보이는 산들과 희끄무레한 하늘, 이것이 오지리 지방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그렇게 초조히 기다리던 소포를 받았다. 친구들의 녹음도 반가웠고, 소포 내용이 그렇게 좋으니 너무나 고마운 노릇. 그 중 기쁨의 결정적 절정은 엄마의 글월이었다. 편지를 못 쓴다 못 쓴다 하시더니 어찌 그렇게 쓸 말만 요령 있게, 구체적이고도 특유의 말솜씨로 골고루 써서 정확히 전해 주시는지, 참으로 같이 있어 목소리를 귀로 듣고, 눈으로 뵙는 듯 여실하였다.

이렇게 모든 기대를 한꺼번에 훌륭히 해결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할밖에.

 

 

1974년 7월 28일 日

프란츠네 집에서 며칠을 잘 지내다가 떠날 생각을 하니 괜스레 마음이 착잡하고 서글퍼진다. 그러나 이것이 이곳의 생활이고 또 내 삶이다. 모두를 수긍하고 받아들이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참으로 완전히 뛰어들어 구경하고 또 배웠다. 그리고 일찍이 이곳에서처럼 마음 푸근하게 내 집같이 느꼈던 곳이 없던 것 같다. 풀 비린내가 확 풍기는 한여름의 낮은 지대의 오지리 지방, 회색 빛 젖소들의 방울 소리가 저 먼 곳에서 바람에 실려 들려 오로라면 마치 한국 어느 산속 절간의 풍경 소리를 듣는 것 같다 감회가 한층 깊어진다.

 

 

1974년 7월 29일 月

아까 프란츠에게 말했다. “이번 3,4일 동안 참으로 잘 지냈다. 지금까지 나는 멀리서 보기만 했는데 이번에 정말 뛰어들 수가 있었어. 이것이 내게는 대단히 중요한 것이야. 나는 항상 내가 다른 사람을 방해하지 않나 생각해 왔는데 이것은 좋은 일이 아니지. 그런데 이번에는 전연 그런 것을 느끼지 못했던 거야.”

멀리서 보는 것과 뛰어드는 것과의 차이.

마르틴과 산책을 하면서 내 시계가 얼마라고 말하고, 장래에 무엇을 하겠느냐고 묻고, 얼음 과자를 사 주었다. 안드레아와는 스케치를 했다. 내가 다리를 꼬집으면 아페터를 유모차에 태워 안드레아와 같이 산책하던 일, 데레사(주: 막내 동생)와 나이가 비슷한 모니카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던 일, 프란츠 형수의 서글서글한 눈매며, 유난히 흰 살결에 검은 머리를 한 흡사 동양 여인을 상기시키는 모습. 조금도 구김살 없이 한 벤치에 앉아 유모차를 흔들면서 이 얘기 저 얘기 하던 일. 프란츠 어머니, 그리고 큰형

유럽 땅에 온 후 처음으로 느껴 보는 가족적인 분위기였다. 여태까지 어느 곳에서도 그런 일이 없었다. 참으로 나는 긴장하지 않고 같이 호흡하며 굼 같은 며칠을 보낸 거다. 그리고 알수록 깊이 음미하게 되는 프란츠라는 친구. 조금은 귀찮은 듯 말을 낮게 천천히, 그리고 말수가 아주 적은 그 친구의 내심을 알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큰 수확이고 기쁨이었다. 한 사람을 제대로 안다는 것이 이렇게도 시간이 필요하고, 가까이 가야 하는 노력이 필요한 것을.

그리고 날씨가 근래 없이 유난히도 좋다. 그 낮은 지대의 오지리 지방의 전원. 산은 산이되 인스브루크 같은 백설과 기암과 고봉이 아닌 흡사 한국의 산들을 연상시키는 야트막한 산들, 숲, 그 짙던 풀비린내, 젖소들의 방울 소리, 여러 가지 딸기, 그 커다란 집.

정말 한 번 들어가서 보고 만지고 살아 보고 싶던 그 소망이 채워졌다. 이런 기회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린다. 그리고 프란츠에게도 참으로, 나는 구체적인 삶을 피부로 느끼면서 같이 웃고, 같은 걸 느끼면서 주고받을 수 있었다. 얼마나 그리워하고 기다렸던 분위기냐!

엊저녁에는 밥먹은 후 묵주를 굴려 철재와 금효를 성모님께 맡기면서 어두워져가는 길을 한참 산보했다. 그곳의 한밤, 그 차가운 공기며 맑디 맑은 하늘의 초롱초롱한 별들 – 한국의 여름 밤, 야영을 할 때의 공기와 같았다. 그리고 마침 그곳의 축제와 여러 가지 일들을 볼 수 있었다. 시골 여름의 춤, 그리고 풀베기 시합, 첫 미사라는 것, 이웃 초대하기 등.

트랙터로 이른 새벽에 일을 나가 들판에서 간식을 하기도 하고.

 

 

1974년 7월 31일 水

빈의 마지막 밤이다. 아마도 두 번 다시 이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것 같은 밤이다. 그 휘날레로 오페라 감상으로 장식하니 더욱 잘된 일이다. 오페라 – 비엔나의 참모습 중에서도 중요한 부분을 차지함이 분명하다. 그 극장이며, 무엇보다 음악의 생활화가 부러웠다. 관객들의 호흡도 놀랄 만하였다. 빈 – 참 아름다운 도시다. 많은 것을 얻어 가지고 간다. 제일 큰 것은 이 사람들의 높은 문화 감정이랄까. 구석구석에서 피부로 느낄 수 있었던 점으로. 분수와 조각품과 예술의 도시. 전시가, 전 시민이 예술이다. 함 점 빼내어 버릴 것이 없다. 잊지 못할 추억을 담아 가지고 떠난다. 금효 일이 무척 궁금하다. 9일 기도의 6일째가 끝났다!

 

 

 

 

리프프라우엔회에의 생활

 

 

1974년 8월 5일

튀빙겐에 다녀왔다. 기대했던 것에 어긋나지 않는 인상적인 도시다. 이 도시의 진면목은 무엇이라 해야 할까. 시 전체가 인스브루크와는 달리 ‘어떤 기운’에 넘쳐 흐른다. 프로테스탄트가 절반이라는 사실에서 풍겨 나오는 기운이다. 아름답고 구태의연한 것이 바로 가톨릭적인 인스브루크의 모습이라면 여기는 풍파를 겪고 생동하는 인간들이 자기네들의 의미를 찾아서 헌신하는 기운이 도시 전체에 가득 차 잇는 것 같다. 바로 사색과 철학하는 분위기라고 하겠다. 네카 섬의 산책길, 프로테스탄트의 신학부인 거대한 교회, 성에서 내려다보이는 고도 古都의 붉은 – 지붕 밑 방의 수없이 많은 – 지붕들, 인간이 자기의 의미를 찾고 역사와 세계를 탐구하려고 눈물겨운 투쟁을 하는 고독한 모습, 이것이 튀빙겐의 진면목이라 하겠다. 헤겔이 살았고, 셸링이 공부했다던 이곳, 인스브루크의 차분하고 점잖게 틀에 잡힌, 아름다운 자연에 파묻힌 – 그러나 거기에는 인간의 투쟁이나 고독 – 즉 철학이 없는 – 모습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어떤 기운 – 약간 불안하고 가슴 설레이게 하는 인간적이고 알 수 없는 하느님을 향해 노력하는 – 정답이 전제되어 있지 않은 – 그럼으로 해서 눈물겹도록 안쓰럽고 고독한 투쟁을 전개해야 하는 – 그런 생동적이고 위대한 기운 – 큰 교회가 있는 부근은 지대가 높고 낮은데, 좁은 골목을 오가는 젊은 남녀의 걸음걸이나 시선들에서 나는 이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프로테스탄트가 반’ 이라는 사실은 내게 참으로 신기했다. 그리고 그 내용도 이렇게 알찬 것이다.

 

 

1974년 8월 6일 火

T 신부 – 아니 T 형, 어쩌면 그렇게 될 수 있을까. 남의 걱정을 그렇게 자기의 걱정으로 알아 주다니! 고맙기 한이 없다고 하기 전에 우선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그 형은 애초부터 서신왕래 때마다 어머니께 대한 염려와 도움을 주고 싶다는 얘기가 진지하게 실려 있곤 했었는데 과연 그렇다. 더구나 사목자가 아닌 공부하는 사람이어서 얼마 정도는 면제받은 줄로 나는 생각하고 있는 터인데. 분명 공부는 그 이상일 수 없게 하면서 염려 도한 본인 이상으로 자상하고 그리고 놀라웁게도 적확[주: 정확? 적확이란 단어가 있나?]하게 사태를 본다! 이상스럽게도 높은 차원에서 – 신부의 진면목 – 그러면서도 신부라고 불리우기보다는 형이라고 불리우는 것을 더 좋아하는 그는 이상을 한 점 흐리지 않고 실현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1974년 8월 8일 木

6일에 쓴 것의 계속이라 할 내용을 머리 속에서 생각하며 써 본다.

 

– 신부는 상징적 존대다.

– 자기에게 달라 붙어 있으면 사태의 해결은 전혀 기대할 수 없다.

– ‘남을 먼저 생각하기’ 가 바로 관건이다.

위의 내용에 곁들이고 싶다.

T 신부 – 참으로 신부로서의 모범이고, 우리의 이상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 아님을 눈 앞에 보여 준다. 상징적인 신부의 진면목을 보여 준다. 그분이야말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충족시켜 하느님, 자기, 그리고 남을 모두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다.

 

그의 비밀은 무엇인가? 신부가 모두 다 이렇다면 하느님의 나라는 보다 더 가까이 다가올 수 있으련만. 그의 존재는 어디서나 빛난다. 그야말로 참다운 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인간됨을 이만큼 실현하고 있는 사람도 드물다. 그의 고통 받는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도 놀라웁다. 정말 어떻게 그렇게 한 마음이 되는 것이 가능할까? 그에게는 고통 받는 이의 어려움이 그대로 자기의 것이다.

사람이, 그것도 참다운 사람이 되는 것이 나의 유일무이한 목표라면, 그리고 그 ‘사람’의 의미가 원죄에서 벗어난 상태, 무명 無明을 극복한 상태, 하느님 모상대로 만들어진 인간인 것이라면 그러면, 나는 어떻게 노력해서 이를 조금이나마 성취할 것인지. 결론이 요약되는 것 같아 기분이 좋다. 얼마 전 부식 형과도 얘기한 대로 ‘자기를 비우고, 자기를 찾을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하기’이다. 바로 이 길만이 인간됨을 성취할 수 있는 길이다. ‘온갖 자기에서 해방되어야만’ 한다. 그래야 참된 자기를 발견할 수 있고, 그래야만 하느님을 찾아 뵈올 수가 있다. 덧붙이고 싶은 것은 그는 매일의 생활을, 훌륭히 변함 없는 성실과 박진한 노력으로 수행함으로써 참답게 성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생활이 우리를 속이더라도 그 유혹에 빠져 목표를 의심하거나 방황하지 말고, 그럴수록 곱절의 노력으로 이를 극복함으로써만 그 길로 나갈 수 있다.  내 자신을 속이지 말고, 부끄럽지 않게 살자. 때 맞춘 듯 읽은 <형제애>의 구절, 내적 쇄신으로 참답게 하느님의 빛을 계속 받으며 계획을 수립하기 – 여기에 진전한 단 하나의 구원이 달려 있다.

 

 

1974년 8월 9일

방금 저 아래층 신부님 방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왔는데 찡하게 가슴을 울려 주는 것이 있었다. 그와 관련하여 나의 사고 태도를 생각하게 된다. 커크는 부인이 있는 남자인데 다른 여성을 사랑하게 되고, 두 사람은 진심으로 서로를 생각한다. 이를 안 부인은 처음엔 그 여자를 저주하면서 더 이상 남편을 사랑하지 않겠다고 하지만 그 부인은 그것을 감당할 능력이 없는 여자였다. 곧 이어 이 여자는 울며 자기 곁에 남아있어 주기를 애걸한다. 그 남자는 이 여자를 버릴 수가 없다. 뒤늦게 커크를 만난 여성이야말로 드높은 정신력을 소유한, 모든 것을 갖춘 여인이다. 그녀는 남자의 한 마디 말에 모든 것을 알아차리고 작별하곤 떠난다. 이상이 줄거리이다.

문제점은, 두 연인을 알게 된 주인공은 나중에 만난 여인을 사랑하지만 먼저 만난 여인이 부인이고, 가정을 갖고 있기 때문에 머물고 만다는 데 있다. 주인공이 사랑할 수 있는 상태[주: ‘상대’의 오타?]는 부인이 아니었고, 두 여인의 차는 너무나 현격했다. 옛날 영화이기 때문에 ‘사랑하지만 떠난다’로 일견 해결이 아닌 듯한 종말이지만 많은 것을 생각게 한다. 즉 결혼이라는 제약 때문에 그 남자는 평생 행복해질 수 없는 듯 보인다. 그러면서도 결국 그렇게 해결할 수밖에 없어 보인다. 더 좋은 해결책은 있을 것 같지 않다. 이런 경우에 이혼을 생각하게 된다. 진정한 의미의 쌍방 합의 이혼의 가능성은 어떨까? 이 영화같이 한 쪽을 버려야 한다면 그건 용납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일은 순리로 해결돼야 하며 다른 사람을 불행하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 우선돼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맺어짐’이 어찌 쉽고 단순한 문제랴. 옛날 같은 관습, 도덕, 종교의 윤리적 규제가 십분 그 힘을 발휘할 때라면 모르거니와 지금은 인문주의가 팽창하여 인본적 人本的으로만 기울어지고 있으므로 갈수록 이 문제는 표면으로 대두될 것이다. 이런 경우 진정한 사랑은 나중에 만난 여인이다. 그런데도 그는 그 여자를 붙잡을 수 없고, 소태를 씹듯 부인에게로 돌아온다. 이게 과연 행복이란 걸까? 결혼이 무어길래 – 갈라질 가능성 – 그런데 나의 교회에서는 하느님의 뜻에 의해 이걸 엄금한다고? – 잘 모르겠다 – 나는 신부가 되려는 사람이지만 더 이상 자신있게 주장할 수 없다. 그 상태에 머물러 회의 상태가 지속된다. 그러고는 양 쪽 다 철저히 검토해 보지 못하고, 역시 어떤 결단이나 결론을 지을 수 없는 애매한 태도가 계속될 뿐이다. 이건 내 딴에 진정으로 사태 해결을 위한 노력이라고 자부도 하고, 위로도 해보는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것밖에 아무것도 아니었음이 이제사 드러난다. 즉 이제까지의 나의 고민은 텔레비전 적 고민이라고나 할까.

그런데 현실에서 벌어지는 양상은 이와 같지 않다. 그렇게 단순하게 순수한 사태란 거의 없을 것 같다. 텔레비전이나 소설은 한 사실의 단순 극대화다. 즉 땅에 발 붙이고 사는 인간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건 아니다. 정말로 이런 문제가 닥쳐 오면 그때까지 닦아온 해결력으로 최선을 다해 해결하려 할 뿐인 것으로 족하다. 있지도 않는 것을 있는 것으로 착각해 거기에 침잠함은 가소로운 일이다.

 

거기에 J 를 마다한 나는 어떤 각오로 나의 일을 하여야 할까! 그 만남과 헤어짐의 의미를 나는 충분히 깨닫고 있는가.

 

 

1974년 8월 11일

어머님 생신. 미사, 로사리오 기도 15단 – 제가 사람답게 살고 작은 빛이라도 되는 걸 보시도록 오래 사시고 계속 지켜 보시어 더욱 저를 위해 쪼개소서!

 

 

1974년 8월 12일 月

진실로 인간답게 살려면 얼마나 기막힌 의지적 노력이 필요한지! 인간성을 꽃 피우고 최고의 가능성을 실현시키려면 어물어물하며 회의에 계속 빠져 있다가는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다. 불의를 절대로 용납 지 않으며, 가난하고 약한 사람을 진정으로 – 자기 자신같이 – 돌볼 수 있으며, 지고의 성실성으로 매사에 임하여 인간으로서 취해야 할 바를 취하고, 취하면 안 될 것은 어던 유혹에도 불구하고 취하지 않을 수 있으려면 얼마나 철저한 자기의 노력과 단련이 필요한지! 지금까지 얼마나 갖가지 미명 美名아래 저변을 닦는다고 만사를 다 취해 몸과 마음을 흐릿하게 만들어 왔는가. 갈수록 정 正 사 邪 가 섞여 무엇이 무엇인지, 어떤 것이 옳은 것인지를 구별하기가 어려워지는데, 얼마나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어야 하는지!

 

갖가지 유혹,

돈 – 경제적 여유.

명예 – 남 앞에서 자기를 과시함.

여자 – 얼마나 나는 여기에 약하고, 크게 비중을 두고 있는가.

 

내가 꿈꾸는 유일한 목표!

그걸 닦아 가고, 그것에 다가서기 위해서는 현재의 한가지 한가지, 순간순간을 얼마나 철저히 살아야 하는지.

예수님 꼭 붙들어 주시고, 계속 힘과 빛을 주시어 변질되지 말게 해 주십시오. 항상 참신하게 해 주십시오.

 

 

1974년 8월 14일 水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내일은 성모 마리아의 승천 축일.

나는 신앙을 생활화하지 못하고 언제까지나 이러고만 있다. 어제 G 신부는 쉔스타트(주: 독일의 재속 수도 단체)의 목적과 그를 도모할 방법을 참으로 친절하게 설명해 주셨다. 계속 생각해야겠다.

 

 

1974년 8월 15일 木

오늘 성모 승천 축일. 주교님과 T 신부님. 그리고 G 신부님들이 함께 할머니를 위해 미사를 드려 주셨다. 할머니는 복되시지. 오늘 저녁 미사 후 행렬에는 나도 주교님, 신부님과 함께 수단을 입고 길다란 초를 들고 제대에 오르는 영광을 가졌다. 이렇게 은총의 직접적인 거느림 속의 생활로서 신앙 생활을 하는 이곳 사람과 이 집!  그 속에서 나는 감당할 준비도 되어 있지 않으면서 하나 바지지 않고 참여를 한다. 그러니 체할 수밖에 없다.

 

하느님은 내 근원이시지만, 이렇게 구체적인 생활의 매 순간까지 그분과 대면하지는 못했다.

소화를 하지 못한 채로 계속 무거운 것을 삼키니 찌꺼기가 남아서 쌓이는 기분이다. 그리고는 밑의 것부터 검토를 해서 소화해 내야지만 일이 해결된다고 믿긴 하나, 그러면서도 정장 그것에 정신을 집중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얼마간 잘(?) 지내다가 결국 내 근본 문제에 와 닿은 것이다. 결국 이럴 수밖에 없는 필연의 과정이었지. 더구나 그 문제를 검토하도록 이토록 격심하게 강요 받았을 지금이야. 올 것이 오고야 만 것이었지.

 

내 태도 – 적극적으로 해결하려 들지 않는 것. 정면을 끈질기게 대결하지 않는 것.

 

내가 이러고 있기 때문에, 내 것이 내 속에 없어 불안한 것이었다. 내가 이러고 있는 한 모든 것은 바람에 실려 왔다간 다시 가 버려 잡히는 것이 없을 것이다. 한국의 현실에 대한 문제도, 간난하고 억압받는 사람을 생각지 못하는 것도, 공부에 실질적 진전이 없는 것도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한다?

 

 

1974년 8월 18일

요사이 극심한 자기 분열증과 어디선가 읽은 나열증 같은 증세 속에서 살고 있다. 생각나는 대로 써가자.

T 신부님의 그 세계 – 문자 그대로 사제의 이상을 몸과 마음과 생활과 생각으로 훌륭히 해 나가는 것 – 그것이 참으로 원안이고, 나는 그분을 발견해 기쁘다는 초기의 신선하고 만족스러웠던 대가 지나간 것이다. 그에 비해 내 생활과 사고를 비교해 볼 때 너무도 현격함을 느껴 나는 참으로 몸 둘 바를 몰라 당혹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까지의 내가 확실한 신념에 의한 줄기찬 노력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기 때문에 나를 잡아줄 것이 없는 데서 오는 초조감! 이것이 나를 이토록 분열시키고 있다.

이처럼 투명하도록 명확한 은총의 생활을 ‘실제’로 하고 있는 이곳 리프프라우엔회에(주: 지명), 이것이 나를 불안케 하는 거다. 게다가 이것을 겉핥기로 그냥 스쳐 지나갈 수가 없다.

그라프 신부와의 산보 – 그분은 내게 이걸 강력히 촉구하여 나를 옴짝 못 하게 만들었다. 나는 자진하여 그것을 받아들이려고까지 했던 것이다. 이어 훠콜라레가 나를 깊이 감명시키지 못하고 만 것에 대한 열등감 내지 죄책감이 이 경우에도 나를 불안케 한다.

내가 하느님을 느끼기는 간혹 극심한 방황과 좌절 속에서만 가능했었는데, 이토록 문자 그대로의 전생활로 하느님을 모시라는 데는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다.

 

 

1974년 8월 24일 土

하느님 탐구하기를 일생의 목표로 정했음은 얼마나 다행한 일이고 복된 일인가! 다행하다 함은 딴 일로 공부와 생활이 분리되지 않고, 헛수고나 낭비를 방지할 수 있으므로 그런 것이고, 복되다 함은 이는 은총으로 말미암은 것이니까 감사하는 마음으로 내 처지의 복됨을 말하는 것이다.

‘나의 전인생의 지향점, 내 모든 – 하루와 순간의 – 생각과 말과 행동이 몽땅 집약되는 그 점. 내 인생의 체제의 확립’

 

철학 – 인간학 – 형이상학

 

– 근원에의 향수

제아무리 잘 살아도 (역사 철학, 정치 철학으로 해결 하려 해도 남는 것)

–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 (하느님을 따라 닮기, 그가 되기) -나의 대 전제 (나와 전인간의 인생의 해결)

– “네게 쉴 때까지는 안식이 없나이다.” 아우구스티노.

– 하느님이 사람이 되셨다 – 허무의 극복, 칼 라너.

– 하느님의 인류 구원 – 그를 통해서만 (믿음으로만) 인간은 인간일 수 있다. – 살 수 있다. 인간은 해결할 수 있다 – 구원의 가기 可期 – 인간의 자기 성취.

구체적 방법 – ‘사랑’, ‘모든 사람은 형제.’

 

* 인간이 어떻게 그런 하느님을 응낙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가? (이것은 은총이다. 그러나 철학으로 접근해 보자. 다분히 자연신학적)

인간이 무엇이냐? (인간학, 형이상학의 자리)

기묘한 존재, 정의 불가능성 자체 – 천사, 짐승, 둘 다 될 수 있는 인간.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

‘하느님을 닮아야, 그가 되어야 비로소 자기 성취가 이루어지는’ 인간의 본연의 모습은?

그런 인간의 본질은?

… <인간학>의 자리.

 

그 불변의 본질 – 구원의 철학 – 그 원안.

 

튀빙겐의 한국인 소풍에 함께 따라가 참석했다. 약 30명 모였을까. 썩 가족적인 분위기는 아니더라도 공부하는 사람과 점잖은 사람이 주축이 된 괜찮은 분위기였다. 한국사람이기 때문에 잘 통한다는 얘기는 어렵다. 하는 생각, 하는 일에 따라 무척 여러 가지의 사람들일 게다. 그렇다면 사고 방식과 의견이 합일하는 외국인과 얼마든지 잘 통할 수도 있을 게다. 한국의 풍습, 생활 태도 등 소위 기질이라는 것도 사실 근원적으로 따지고 보면 저 깊은 내면의 일치와는 직접적으로 결정적 관련이 없을 것 같다. T 신부와 여기 몇 사람과의 교환을 보면 더욱 그런 것 같다. 오늘 소풍에서 송 형과의 약간의 대화 가운데 나의 공부의 윤곽과 목표의 분명한 설정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이는 나의 사고와 설계를, 나아가 잡문식이 아닌 철학적 사고를 하기 위한 첫 걸음으로 좋은 시사를 받았다.

 

 

1974년 9월 1일 日

‘예수에게서 인간의 극치를 본다’ (불의를 보고 불의라고 말할 수 있고, 원칙은 있는 대로 지키면서 그렇게 자비롭고) – 는 말로 이번 한 달 동안의 리프프라우엔회에서의 생활의 결론을 지어 떠나려 한다. 조금 전 저녁에 T 신부가 내 방에 와서 하던 말 중의 하나.

 

인간적이어야 한다 – 인간적이란 무엇인가 – 태만, 나태, 자의 자의 가 아닌 ‘예수의 모습’이 바로 ‘인간적’인 것이라고 갈파했다.

 

그러므로 부지런히 예수를 닮기로 의지적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정녕 천사도 될 수 있고, 짐승도 될 수 있으니까.

리프프라우엔회에 – 뜨거운 여름 햇살 아래 은총이 가득 차 흐르는 곳이었다.

리프프라우엔회 – 이곳에 모든 것이 있었다!

내 걱정하지 않으리라. 얼마 전 부식 형의 말대로, 이대로 노력하면서 기도하고 공부하노라면 잘 되리. 모든 게 잘 되리라. 내 걱정하지 않으리라. 모든 걸 잘 이뤄 주시리라고 믿어지는 마음이 뜨겁게 일어난다. 하느님을 알고 섬기는 일이 내 죽고 살기가 매인 인생의 의미라면, 그런 대종 大宗을 붙잡고 앞으로 가려는데, 그런 대종을 확실히 잡고 있는데 왜 불안하고 열세를 느껴야 하는가. 기쁨과 평화가 전신에 차고 넘쳐야 될 것이다. 고민으로 어둡고 수심이 가득한 얼굴이 될 수가 없다. 불안할 것이 무엇인가!

 

한국 교회는 나를 이리로 보내었다.

혼자인 것을 느낌 -> 여인이 그리워지는 것은 정한 이치 -> 이를 처리함 -> 외국 생활, 나아가 사제행의 성패가 달린 관건(동료와 반드시 더불어야!)

약사를 생각함!

 

 

1974년 9월 15일 日

그리고 생각의 방향이 ‘내가 무엇인가’ 하는 존재론적인 것보다 다분히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하는 구체적이고도 사회학적인 데로 바뀐 것 같이 느껴진다. 빅토리아 씨와의 이제까지의 대화 중 가장 요점에 해당하는 것을 들었다. 참 고마운 얘기들이었다. 한마디로 ‘철저하게 자기가 죽어야 한다는 것’을 조금 깨달았다. 그 말의 뜻이 뭔지, 왜 그러해야 하는지를. ‘한 알의 밀이 죽어 썩으면’ 몇 배의 수확을 낸다’는 말의 뜻이 짐작되고 신부로서 반드시 이러해야 할 것임, 이렇게 하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그렇지 못할 바에야 ‘맛 변한 소금’일 뿐이라는 것. 그러나 근본적인 자기 변혁 – 본질적인 자기 변화가 없이는 진정한 개선이나 진보란 없다.

 

한국의 현실에서의 근본 문제 – 백성 전체의 민도의 향상!

어떻게 이를 도모? – 각자가 선각자적 자세로 있는 자리에서 썩는다. 한 장의 벽돌로서 최고의 질이 되도록. 그것만이 유일한 해결.

원시적 검소, 근면을 문자 그대로 실천하는 것만이 나와 백성의 구원의 길!

 

나는 얼마나 긴장하여 호리의 해타심도 없이 나를 가꾸어야 했었나!

 

 

1974년 9월 21일

가을 아침은 차다. 이른 아침 찬 곡이가 저리듯 가슴에 스며 오고 손가락 끝마저 차다. 레겐스부르크 를 떠나면서, 아니 이번 석 달의 결구로서 아래의 것을 다짐한다.

 

사제행은 소박한 기도가 근간이어야 한다.

안일함에의 경계 – 그 뜻과 중요성.

 

 

 

 

 

힘겹게 얻은 이 안정

 

 

1974년 11월 5일 火

두렵다. 이건 어찌된 일인가. 이렇게 오래 일기를 쓰지 않았다. 그래서 두려운 거다. 자세히 꼬집어 쓰기가 손이 떨리고 심장이 약해져 가슴을 저며 내는 듯하다. 아프다.

우리를 슬프게 하는 거, 나를 슬프게 하는 것. 모든 게 허물어져 사뭇 곤죽밖에 없다. 아까 오후가 시작될 때에는 이 상태가 눈으로 보이는 듯하여 ‘생활이 나를 속이더라도 슬퍼하거나 외로워하지 않을 수’가 있을 듯하였다. 나의 현재의 이러한 아픔은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오늘은 아무리 해도 처방과 그에 맞는 약을 먹을 수 없을 것 같다.

이때에는 별 수가 없다. 모든 걸 하느님 – 나의 전부이고 나의 생명 – 께 맡기자.

그리고 푹 자자.

 

 

1974년 11월 11일

그래 쓰자. 일기를 쓰자. 죽을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아니 죽더라도 일기는 쓰고 죽자.

이러한 ‘담담함’, 아니 이건 담담함이 아니라 사뭇 상처를 짓쑤셔 아픔을 자아내는 무서우리만치 혹독한 쓰라림.

그래 무어가 어찌 됐단 말이냐.

한시 한시 쫓기고 있다. 공부를 해야 한다. 나는 가뜩이나 모자라는 판이라 곱절의 노력으로 한시의 촌음도 아껴 공부를 해야 한다. 칼 라너의 <예수의 육화 肉化>를 읽어야 한다. 단어 찾을 기력이 없다. 신나게 거의 전부를 찾아야 하는 판이라 그래서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다. 이거 이럴 때가 아닌데. 이 모든 뜻들을 확확 주워 섬겨야 하는데. 이것 참 낭패군. P 신부를 봐라, K 신부를 봐라… 거기 비해 너는 어떠냐. 이런 주제에 무얼 하겠다는 거냐. 이런 판에 촌각을 아껴 하고 또 하고, 쉴새 없이 하고 더 해야 하는데, 내 마음은 분열에 분열을 거듭할 뿐이다.

여기는 치열한 생존경쟁의 터. 자기가 죽지 않기 위해서 궤도에 올라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비참한 패배자, 낙오자가 되어 추운 날 허허 벌판, 아니 행길에 나뒹구는, 지나가는 사람이 침 뱉고 밟고 가는 그런 말라빠진 가랑잎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죽는 것이다. 지금 이렇게 쓰는 것은 문제를 확실히 붙잡기 위해서다. 모래밭을 삽으로 파헤쳐 무엇이 들었는지, 목표물이 어디에 있는지 헤적이는 것과 같다.

 

그래서 나는 담배를 많이 태우는 거다. 그것만이 만만한 나의 반려이니까. 그리고는 목구멍과 허파 구멍을 시커먼 연통 – 그 속에 온갖 것이 엉켜 찐득찐득 거리는 진물이 가득한 – 으로 만들어 버리고 아침에 일어나서는 가슴을 치며 후회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어쩔 수 없다고 또 밤이면 벗을 찾고.

그래, 발터가 다녀가서 기분이 좋다고 이 작업을 ‘미봉’해 버리면 안 된다. 그런 것이 바로 유혹인 것이다.

 

요새는 히티 산(주: 지명)에도 다녀오고 해서 예정을 못 다 해냈고, 칼 라너도 소화해 내지 못해 영 더욱 쫓기고 있는 기분이었다. 이런 판에 우유부단하게 뉘른베르크가 웬 말이냐.

 

엊저녁에 유심히 읽은 기초 신학 몇 구절, 그래 나의 관심사는 이런 것들이었다. 여기 이렇게 보다 엄밀하고 깊고 성실하게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구나. 나날의 생활을 – 모든 것을 다 포함해서 – 소화 정리하지 못하고 거를 것은 걸러지고 남은 것들이 점점 모이게 되노라면, 어느 날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쌓이게 되어 우리는 놀라고 당황하고 초조해져서 결국은 비장한 결의를 가지고 철저한 정리 작업으로 들어간다. 그 때는 눈에 보이는 것이라곤 시커멓고 음울한 미궁뿐, 사뭇 깊이를 모를 심연으로 삼켜져 가는 무서운 순간들이 계속 된다. 그래서 하는 데까지 청소를, 대 청소를, 총 고백을 하고 나야 비로소 전망이 보이고 살아 움직일 수 있게 된다.

오늘 하필 때를 같이 해서 받은 창준이의 편지, 투명하기만 한 어두운 구석이라곤 티끌도 없이 치병 治病하고 투병하노라 한다. 한때 지극히 가깝게 느껴지고, 이제야말로 이것이야말로 은총의 해결 이노라고 내 존재의 저 깊은 곳에서 나오는 감미로운 숨을 내쉬었던 창준이의 세계가 또 박진한 압력으로 대두되어 온다.

미봉을 하려고 해서는 못 쓴다. 그것이 바로 유혹인 것이다.

전체적인 윤곽; 자기와, 세계를 있는 그대로 철저히 긍정함!

안정감과 그리고 어느 정도의 일정 거리를 유지하여 내 전체를 보전하는 것이 급선무다! 이건 분명하다. 사태가 악화된 것도 절망이랄 것도 구제 가망이 없는 것도 아니다!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의 정상 궤도를 가고 있는 거다. 내가 있는 것을 그대로 보지 못하고, 보더라도 인정치 않으려고 하는 데서 이런 무질서가 오는 거다.

이것이 바로 아집이다.

나는 결코 하느님과 멀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은 나를 내치시지도 않았고, 나는 하느님과 맺어진 줄을 놓아 버린 것도 아니다. 단지 정신 없는 사람이 손 안에 무얼 쥐고도 허둥대며 찾듯이.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님? 창준이의 해결과 그 세계는 그대로 나의 해결과 세계인 것이 분명하며, 이 둘은 흔히 듣듯 모순과 배타가 아니라 하나로의 조화적 아름다움이다.

 

– 구체적 실천안

첫째로, 결단코 일기를 매일 써야겠다. 그래서 매일을 소화해야 한다.

둘째로, 독일어 문법과 단어 실력 강화.

 

 

1974년 11월 1일 火

지금 뉘른베르크에 와 있다. 아까 클레멘스랑 발터랑 이곳의 성 城을 구경 갔는데 제법 쌀쌀한 겨울 날씨에, 그것도 밤에 보는 성에서 풍기는 맛은 독특하였다.

시 전체의 모습이 성곽으로 둘러싸이고, 많은 탑들이 서 있는 것이 보인다. 시간이 없어 알아 보지 못해 아쉬우나, 그런대로 역사적인 도시이고, 로마네스크 양식에서부터 고딕 건물들까지 카이젤베르크를 중심으로 기복이 심한 조용한 프로테스탄트의 도시라 하는 것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클레멘스는 이곳에서의 생활이 생각보다 고전을 하는 모양으로 몸도 야위어 보인다(솔직히 자기도 이렇게 구체적으로 생활하게 되는 그 뜻을 잘 모르겠노라고 한다). 분위기는 매우 자유스러운 듯하나 소수의 인원이 이런 큰 집에서 지극히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지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님이 분명하다.

 

 

1974년 11월 13일 水

새벽 2시가 넘었다. 조금 전 역에 도착, 내 집으로, 내 방으로 돌아왔다. 오늘 하루에 뉘른베르크 에서 – 뮌헨으로, 그곳에서 이곳까지. 게다가 그 여러 곳에서 제법 차분하게 둘러 살필 여유마저 누리면서. 박 형의 전혀 변함 없는 모습에 나도 차분해질 수 있었는데. “신부가 무엇 하는 사람인 거냐?” 이거다. 대원칙은 분명한데 신부가 되어 갈수록 지엽적인 곳에서 막힌다.

 

 

1974년 11월 14일

뚜렷해진 사실

– 장기전에 맞는 작전이어야만 하리라는 것 (영적 독서를 하고 독어 회화를 매일 해야겠다는 것).

– 그러기 위해서는 매일의 생활이 얼마나 박력과 긴장된 예민함에 차 있어야 하겠느냐는 것(시몬느 베이유를 보라). 그러기 위해서 하느님과 얼마나 친해야 하느냐 하는 점(그분이 활력을 주시지 않고서야).

나의 구체적 생활이 충실히 확보되어야 한다. 즉 장기전에 맞는 작전이라 함은 이래서 필요한 것이다. 긴장된 예민감을 가지고 있는 바대로의 내가 할 수 있는 한, 영적 독서를 하고 독어 회화를 배워야 한다. 이렇지 않고 매일 과중한 안간힘을 쓴다면 자신은 파괴되고 말 것이다. 내가 내가 아닌 듯 나 이상의 출혈을 할 때, 오히려 시간도 더 낭비되는 것임이 최근의 생활로 뚜렷이 나타났다. ‘내가 나임에 충실하는 것’ – 이것이 모든 것의 시작이고 최선책이다. 실리적으로 봐도 구체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바로 발전으로 연결될 것이기 때문이다.

 

 

1974년 11월 15일 金

오늘은 오후 미사였는데, 미트슈틸러 신부 집전으로 강론이 썩 훌륭하였다. 물론 못 알아 들은 채 넘어간 부분이 거의 지만 그분의 그 좋은 인상과 미소로 충족스런 분위기, 나도 매우 본받고 싶다.

어제 본 영화의 독이 아직도 가셔지지 않고 상당히 강렬하게 순간순간 상기되어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다. 아까 성체를 영하지 못하였다. 할까 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할 수가 없었다. 동시에 뚜렷해진 건 그런 영화나 그런 상념들이 나를 얼마나 손상시키나 하는 점이다. 다들 열심히 강론을 듣고 충족된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맞으러 뛰어나가는데 나만 그만 처져서 그 대열에 끼지 못한 것이었다. 그것은 내가 일부러 나를 할퀴어, 아름답고 순수하고 무구해야 할 내 모습을 그만 더럽혀 버린 것이다. 이런 것이 계속된다면….? 여기에는 돈키호테 말대로 ‘하늘스런 힘이 필요한 것’이다. 내일 아침에는 성체를 모시려 한다. 보우하소서.

 

 

1974년 11월 16일 土

힘겹게 얻은 이 안정 – 잃어버리지 말면 좋겠다. 주께서 주신 이 고요 – 조심하여 고요히 간직할 것이다. 얼마만인지 모르게 약간 가슴이 시원해지고 앞이 어두운 채로이나 바라다 보인다. 정말 얼마나 그 동안 힘들었었나. 되지도 않을 몸부림을, 용트림을 하였었지.

 

주께서 주셔야만 하는 것은,

고요히 보존케 하여 주소서. 그렇지 못하면 저는 부서지고 마나이다.

 

한 가지 뚜렷한 것, 주께서 주셔야 나는 얻을 수 있다. 내가 하는 것은 없다. 이것이 내가 나를 아는 길이고 바로 찾는 지혜다.

 

고요히 간직 게  하소서.

험한 물결에 휩쓸리지 않게 하소서.

겨울날의 맹렬한 바람에 날리지 않게 하여 주소서.

당신이 모든 것을 하시나이다.

 

마르틴과 점심 후 약간 산책. 상쾌하였다.

두 계집아이 – 무슨 이이들이 이래.

정말 구김살이라고는 티끌만치도 없었다. 거기 비해 나는 얼마나 돌 같이 굳었는가. 윤기라곤 없이 쥐면은 바삭 부서지고 말. 그렇게 활발하고 생명이 철철 넘쳐 흐르는 아이들. “너는 여기서 놀면 안 돼.” 했더니 “왜 그래요?” 하고 그 주제에 심각한 눈매를 하며 고개를 흔든다. 그래. 그렇지. 어째서 놀 수가 없단 말이냐. 이곳은 어둡고 굳어빠진, 생명이라곤 없는 무덤이란 말이냐. 게다가 온갖 방비선과 전제들과 나아가 독단의 철갑으로 무장한, 결국 하나같이 쓸데없는 인간의 조작뿐. 왜 놀 수가 없느냐.  이해가 안 간다. 여기는 이렇게 모래 무덤도 있고 잔디가 있고, 새도 우는데 이게 보이지도 않느냐?

나는 참으로 부끄러웠다. 내가 어느새 이렇게 늙어 버리고, 말하자면 속물이 되어 버렸나. 본질을 찾겠노라면서 생명 없는 허구의 이론을 구하였던 게 아니었는가? 나는 참으로 자신이 당황할 정도로 부끄러웠다. 어느 동화에선가 거인과 소년 소녀들의 대목을 읽은 게 생각났다. 내가 바로 그 거인이었다. 그렇게 좋은 정원과 주택에 살면서 높은 울타리를 쌓아 온갖 것을 단절하고 “여기는 출입 금지요. 나는 고독을 씹고 살아가오.” 다.

참 그런 계집애들이 어디 있담. 그렇게 하늘을 찌를 듯 몸 전체로 생명을 뿜어대는 애들이. “왜 여기서 놀면 안 돼요? 나는 이해할 수가 없어요.” 파우스트보다 훨씬 훌륭한 아이들.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다”(롱펠로). 그래, 우리는, 나는 얼마나 쓸데없는 일을, 생명과 관계없는 일들을 목숨을 바쳐, 비장한 미소를 지으며 해야 하는가. ‘생명이 빠져 버린.’

무서운 아이들, 고마운 아이들, 훌륭한 아이들.

 

데레사(주: 막내 동생)는 얼마나 철이 들고 사정을 잘 헤아리는지 – 그리고 점잖아야 한다고. 불쌍한 우리 데레사. 한 번 선물이라도 잔뜩 사 보내 줘야겠다. 말로만 그러지 말고.

그때의 내 표정. 굳을 대로 굳어져서 어떻게 하면 애들을 말을 듣게 만들어 쫓아낼까… 그 놈들은 나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을 게다. 그 놈들은 있는 그대로의 생명을 요구하는데 나는 오래 되어 누렇게 색이 바랜 못 먹을 아스피린을 먹이겠다고.

 

 

1974년 11월 17일 日

김 신부님께 고백성사를 보았다. 하느님은 이렇게도 쉽게 가까이 계시면서 나를 다시 붙들어 주시는 것이었다!

내일은 어디서 편지라도 서너 장 날아 들어올 것 같다.

 

 

1974년 11월 19일 火

어쩔까 하다가 국수를 약간 끓여 먹었다. 그런데 참 잘 했다. 집 생각이 울컥 난다. 막시마와 금효와 데레사 그리고 언제나 약한 것 같은 또또(주: 남동생의 애칭)

 

 

1974년 11월 20일

모처럼 일찍 자려고 자리에 누웠다. 내일은 아침 미사에 가고 맑은 정신으로 신나게 구약 강의록을 읽을 심산이었다. 그런데 이것 참! 잠이 오질 않는다. 아까 점심 먹고 정신 모르게 깊은 잠에 빠졌던 일, 그리고 조금 전 쌀밥을 과식한 것도 그 원인이 된 모양이다. 이것 참 낭패가 아닌가. 로사리오 기도 한 꿰미가 흔적도 없이 스르르 사라져 갔다. 결국 일어나 담배를 피웠다. 한 대, 두 대, 석 대, 그리고 오늘 받은 편지를 읽었다. 발신인은 묘령의 어여쁜 오지리 아가씨, 나와 무슨 상관이랴 하면서도 얼굴을 붉혀 가며 가슴 설레임마저 느끼며 받아 읽던 편지였다. 잠은 점점 달아나 버리고, 이건 1시 반이군. 11시 반에 자리에 누웠는데… 지금 내 마음은 열려져 있다. 이러기 참으로 얼마만인가. 오지리 오고서 처음인 것 같다. 내 목표의 윤곽이 제법 뚜렷이 보여 왔다. 이렇게 전체적인 전망 속에 현재의 좌표를 확인할 수 잇는 것은 얼마나 큰 기쁨인가. 독일말로는 Uberblick (주: 전망, 개관, 개요). 나는 보던 책 겉장에다 ‘나는 마치 몸에 묶은 밧줄을 수면의 배위에 안전하게 고정시키고, 자유로이 수중을 헤매는 수부 같아라’ (1974.11.20.)라고 우선 적어 넣었다. 철학적 인간학과 성서학적 인간학을 비교, 윤곽을 얻을 수가 있었다.

외국에 왔다고 무엇이 된 건 아니다. 천만에 오히려 자신을 망가뜨려 버리는 수가 많다. 내게 오늘의 개안 開眼을 해 준 서 신부나 그런 사람들은 얼마나 여기서 힘들었을까. 그 사람들이 ‘전망’을 얻기까지 얼마나 남모를 고통이 컸겠는가. 공부도 하고, 무엇도 하고, 무엇도… 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 자르지 않을 수 없다.

하느님은 나를 내치신 것이 아니다. 내가 그 줄을 놓아 버린 것도 아니다.

 

 

 

 

생활의 악순환

 

 

1974년 11월 21일

‘오래 산다’는 것에 절대적인 우위를 두던 내가 틀린 것이 확실하다. 오래 살아서 경험을 많이 쌓는다는 것에 절대적 우위를 두던 나. 이런 것이 무엇인가. 결국 훌륭한 타협뿐. 아, 정말로 더럽다. 과장된 엄숙한 한 마디, 제법 학문적인 이야기, 모든 게 꾸밈뿐이로다. 이게 특히 외국에서 생활하는 사람의 타락하는 과정이다. 여기서는 참되고 맑은 인간성을 계발시키기가 그만치나 어렵다. 이 찌들어 질식할 것 같은 주변.

진리는 단순한 데 있다는 말이 있다. 그리고 참되고 밝고 맑은 정신 세계가 있다. 그러나 얼마나 사람들이 오염시키기에 전력을 다하는지.

 

 

1974년 11월 25일 月

점심을 먹고는 종종 걸음으로 가슴 설레이며 방으로 돌아오건만 언제나 편지 한 장 없다! 허긴 내가 쓰질 않으니까 그렇지. 나는 지금 감퍼 교수의 끝없는 강의록을 읽고 있다. 오후에 신학교 교장 신부님이 방으로 찾아와 ‘시종직’ (주: 사제가 되는 과정의 하나로 사제나 부제를 돕는 일을 한다)과 내 공부의 전망을 묻고 가셨다. 공부가 그렇게 오래 걸릴 것으로 얘기하자 매우 놀라는 듯하였지만 별다른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닌 것으로 여겨진다. 정말 언제 이곳 학생들 같이 수업시간에 질문도 하고, 라너에게 본심을 토로할 수 있으려는지! 뜻밖에 칼 라너와 의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앉아 시종 열띠고도 진지한 동시에 유머가 깃든 대답을 구경(?!) 할 수 있었다.

 

교장 신부님이 내게 부탁한 사항 (나도 굉장히 중요하다고 여긴다).

 

1. 마음을 열고 여러 사람과 접촉을 가져라.

2. 이곳에서 제일 큰 문제는 영성이다. 이를 도모키 위해

1) 마음에 드는 동반자를 찾아라. 그리고 무엇이나 얘기하라.

2) 자기 교유의 하느님과의 관계를 도모할 방도를 강구할 것!

 

 

1974년 12월 2일 日

지독한 악순환이다. 지금 1시가 다 돼가고 골치가 띵하다. 아침 미사 한번 가보려다가 계속 실행을 못하고 있는 지가 벌써 일주일이 넘었다. 이렇게 얼마를 살아오고도 아직 어쩌면 좋을 지를 모르니 어찌된 일인지.

약한 윤곽이 잡힌다. 지독한 무리를 해서라도 7시에 일어나 아침 미사를 하고 아침 식사를 할 것. 이렇게 하면 악순환의 쇠고리가 잘리겠지. 그렇다. 그렇게 해야겠다. 그리고 내일은 집에서랑 편지가 와야 하는데..

 

 

1974년 12월 3일

오늘 아침 그렇게 일어나게 해 주시고, 하루 동안 의욕을 주신 하느님, 너무나 감사합니다. 당신은 그렇게 능하시나이다.

 

 

1974년 12월 4일

오랜만에 담배 맛이 기막히게 좋다. 참 희한한 일이다. 아침을 못 먹고 간신히 일어나 강의를 제 시간 듣고, 12시경에 방에 돌아와 담배를 한 대 깊숙이 들여 빨았다. 아, 머리가 휘청하니 저려오는 맛은 참으로 각별하다.

 

담배예찬 일단 一端

 

 

1974년 12월 9일

월요일이다.

어제 오늘 X-mas 카드 작성에 여념이 없었는데, 이것도 참 쉬운 일이 아니다. 돈과 시간이 무척이나 많이 든다.

또 다라서 정신력도 그만큼 확산돼 버린다.

내일은 새 강의록을 읽기에 박차를 가해야겠다.  그것을 이번 주에 다 보고, 피정 중에는 <메시아>를 보고, 그 후 <이사야서 입문>을 보면 제법 정리가 되는 느낌이다. 새로 나오는 두 개의 강의록은 1월 중에! 그러면 시험 3개를 몽땅 볼 수가 있을 거다.

 

 

1974년 12월 13일 金

성탄을 여기서 지낼 일이 갑자기 굉장한 현실로 내게 닥쳐 왔다.

홀로 밀린 공부에 전념하련다는 애초의 계획이 쉬울 것 같지가 않다. 이제까지의 경험으로 보아 모든 걸 동결시키고 공부하겠다는 목표가 오래 간 일이 없고 또 결코 성공한 일이 없었다는 사실.

이렇게 쓰니까 마음이 좀 풀리고 한 가닥 빛이 스며온다. 그리스도의 빛은 실로 만상을 순간에 철저히 변화시킨다. 칼 라너의 <그리스도 사람이 되심>에서 큰 힌트를 받고 참으로 마음을 비워 소담하게 그리스도를 기다리련다! 그리고 이곳 생활의 진수와 친해지고 싶다.

 

예수님, 잘 끌어당겨 주시어 더욱더 깊이 묵상하고 되새기게 해 주십시오. 내일은 아침 미사에 가고, 종일 공부 열심히 하게 해 주십시오.

집으로부터 난효 (주: 여동생)의 수고로 털모자와 기타, 달력 등 선물 받았습니다.

 

 

 

성탄절, 피정의 집

 

 

1974년 12월 15일 日

피정은 처음부터가 중요하다. 고요히 마음을 흩뜨리지 말고 정신을 모두어야 한다.

이렇게 조용한 수녀원에서, 조용한 방에서, 그리고 세상은 마침 눈가지 깊이 내려 이리 조용한데.

그 속의 나의 엉킨 거미줄같이 생긴 의식을 가지고 환경의 변화를 감각 지 못하면서…

정말 잘 해봐야겠다. 예수님, 잘하게 해 주십시오. 내일의 주제는 마태오 복음 8장 27절의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내게 무엇인가?’

갑자기 떠오른 한 가닥 빛, 생활 문제로 막혀 진실로 직접적으로 예수님을 구해 보지 못했던 나 (이제껏 신학교 생활이 전부 그랬던 것을 전에 밝혀 냈던 것처럼).

이제 여기 와서도 한국의 문제, 한국인의 문제를 가지고 과제를 삼는다면 이건 언제까지나 나의 좁은 울타리를 벗지 못하게 될 거다. 마태오 복음 8장 29절에 푹 잠겨 그것을 보자.

이곳 생활 – 고향을 떠나 유럽으로 소위 유학을 옴 – 을 생각해 본다.

 

이곳 생활을 전체적으로 반성하면서 무엇보다 이곳의 실태와 진상을 파악하며 – 그 속에서의 나의 좌표를 확인해야겠다. 나아가 앞으로의 전망을 세울 수 있도록 하자.

이곳과 서울 – 그 장단점은 극히 뚜렷하다. 즉 자율과 타율의 비교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이곳의 생활은 나의 방향 모색과 노력 여하에 따라 서울서와는 비교가 안 되리만큼 ‘풍부한 가능성’을 갖고 있다. – 그만큼 여기서는 의지적 노력이 나를 만들어 간다.

 

‘자율의 체득!’ 생활화 (인간성 개화의 극치에로).

이곳 생활은 근본적으로 고독하다.

– 이곳 생활이 줄 수 있는 좋은 혜택 (외국 유학)이 완전히 배경으로 사라져 버릴 우려가 있다.

– 자기 타락, 게으름으로 흐를 수도 있으며, 혼자서 자기를 못 지킬 때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것 -> 여성.

이웃 사람들과의 관계

외국인 – 폐쇄 – 아첨.

자국인 – 폭 넓지 못한 끼리끼리의 친교. 마음을 떠난 공허한 관계.

-사람이 변질되어 버린다.

자국적 인간상은 어디론지 가 버리고 ‘이곳의 생활형’으로 둔갑

– 문제의식의 ‘약화’. 철저한 자기 본위. ‘돈’을 경계하라!

모르는 새에 ‘돈’이 굉장한 목적, 굉장한 매력 – 그것이 있어야 책도 사고, 여행도 하고, 하루 생활도 여유 있게 하고 – 이 되고, 나아가 모든 생각이 이것과 연결 지어져 돌아가고 있다!

 

내가 이렇게 허약하게 환상에 쫓기고 있는 것은 내가 자양이 부족하고 마음이 약한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이곳 생활의 표피적 첫째의 특징 내지 현상이다.

– ‘기도’와 ‘이웃 사랑’은 신 神 체험의 양대 지주뿐 아니라 내 삶의 전개의 전부 (예수님이 하시듯).

– 노동 없이 ‘돈’을 얻는 것은 부끄럽고 변칙적인 일이다.

– 여자의 환상에 쫓기는 것은 몸과 마음이 약해져 있다는 증거. 몸과 마음이 튼튼하면 그건 아무것도 아니고, 전혀 나를 방해할 수 없다.

– 그리움 -> 고독

나이브한 감정에 여유를 주지 말 것.

공부와 <-> 예수님

– 실제로 예수님을 접하는 시간을 많이. 성체 조배 (규칙생활만이 이를 해결).

– 성모님께 소소한 일상사를 다 맡겨라. 어머니이시니 모든 걸 따뜻하게 배려해 주시고 쓰다듬어 주시고 잘 재워 주신다 (특히 여자기 그리워질 때).

 

아브라함에서 시작하여 예수에서 정점을 이루고, 그 예수 안에서 더 넓혀져 진행되는 이 구세사.

그 속의 ‘나’ – 성서적 세계관.

 

예수 안에서 인간성의 완성을 봄.

예수의 가르침은 인간성 개화의 최고의 교훈. ‘하느님을 알아 모시는’ 것이 바로 우리가 그리도 찾는 전지혜인 것이어늘.

 

 

1974년 12월 16일

케헨부르크(자비회) 수녀원, 피정의 집.

명확한 목표 아래 구체적인 결실을 거두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달라진 환경 안에서 달라진 자세로 당신께 침잠케 해 주십시오.

항상 의식해야 할 것은 예수님과의 직접적 관계를 대폭 개선할 것이다. 예수님은 생활의  대 원리로 좋은 칭호를 드려 배경에 파묻어 두고 는 나 나름대로 인생 철학을 모색한다는 식을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일정한 테마를 가지고 하나하나 해결 지어 나가야 하면, 지도자의 지도에 철저히 자기를 맞추어 나가야 한다.

 

15일 日 – 오후 도착.

마태오 복음 8장 27절 ‘메시아와 나.’

내게 어떤 분인가?

필립비 3장 13절-14절.

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보고서 달려갈 뿐이다.

 

16일 月 – 오전 모임.

로마서 1장 18절 – 3장 20절.

모든 이가 하느님 앞에 죄인이다.

필리비 3장 6절.

자기 자신(개인)의 죄와 공동의 죄.

이 대중 사회 속의 나.

솔제니친의 고발.

오후 모임 (4시 반).

무든 내용인지 통 파악하지 못한 채 무력감만 커졌다. 지도자의 인도에 철저히 좇아 보려 하나 우선 독일말이고, 그 내용도 너무나 수준이 높다.

 

 

1974년 12월 17일 火

8시 15분 아침 기도.

엊저녁에는 뜻밖에도 예의 습관으로 강의록을 제법 일고 잤다. 그러고도 잠을 잘 재워 주신 당신께 감사하나이다. 그런 것이 오히려 내 위치를 되찾은 느낌. 안정이 되면서 예수님도 잘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10시 반, 아침 모임.

두 가지 생각이 엇갈려 엘마 신부의 얘기가 잘 들어오지 않았다.

이곳 생활의 총 반성을 하려는 생각에.

점심 후 훙거부르크 절반까지 산책하였다.

점심 전 30분 묵상 연속:

우리가 고개를 돌리기만 하면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님은 가득한 미소로 우리를 맞는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여 예수에서 정점을 이루고 계속 흘러가는 구세사, 그 속에서의 나. 이 흐름에 다른 이들을 불러 모으기. 모든 이는 이 흐름 안에 포괄되고 있다! 성서적 세계관, 역사관, 이곳 사람들의 수준 높은 신앙이 놀랍고 부럽다. 그리고 그렇게 성서 중심이고, 구약까지도 그렇게 생활화하다니.

 

오후 모임 – 미사 – 저녁 기도.

내낸 강의록 읽기에 주력하고 말아, 도둑질하는 듯 마음이 편치 않았다. 마음이 가라앉지 않은 가운데 읽던 교재를 일단락 지우고  담배를 피워 물고 창문을 열어 찬바람을 맞으며 시가진 일곽을 본다. 엊그제 눈이 와서 그렇게 밝고 성스럽기까지 하던 그 모습은 자취도 없고 구정물만 뚝뚝 떨어지는 처참한 광경, 이것이 과연 그 시가였던 말인가. 계속 해서 밀려오는 깊은 안정감 – 하느님께 내 존재를 맡기고 안심하는 것.

그러나 하느님을 이렇게 기초 신학적 원리로만 이용, 배경 구실밖에 못 하게 해서야…. 여기서 일탈, 새 세계가 전개돼야 하는데.

 

 

1974년 12월 18일 水

오전 – 오후.

나 나름의 피정을 굳힘. <전망>에서 네메셰기 신부의 참으로 뿌듯한 구절들을 많이 읽고, 저으기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엘마 신부는 그 자신 그대로 좋은 모범이 되어 준다. 이제껏 보아 온 신부들과 또 다른 영성을 갖춘 그분은 참으로 좋은,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의 세 가지 커다란 특징.

– 하느님과 참으로 친하게 접하여 살며,

– 이웃에게(학생들에게) 그렇게 철저히 봉사하는,

– 깊은 신학의 지식을 갖춘 신부이다.

참으로 본받을 만한 훌륭한 신부, 지금 이 시대가 요구하는 훌륭한 신부다.

 

 

1974년 12월 19일 木

오전. 아침 기도 – 아침 식사.

여기서 잘 날도 하루밖에 안 남았다. 조금 있다가 엘마 신부가 방에 찾아 오기로 했는데 차제에 무슨 얘기를 구성지게 할까 적이 긴장이 된다. 그러나 할 말을 성모님께 맡겨 드려 그분이 꺼내시도록 하는 것이 제일 좋으리라.

 

 

1974년 12월 24일

여기는 괴치스(주: 지명), 조금 전 성탄 밤 미사에 다녀왔다. 성탄절 맞이하는 기분이 오죽 서먹할까 하여 긴장하며 대비했는데, 참으로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선물을 분명 받은 것을 적고 싶다. 우선 이 차분하고 구김 없는 이 집의 분위기와 사람들이 나를 그렇게 만들고, 저녁 식사 – 성탄 노래 – 복음 낭독 – 크리스마스 트리에 점화 – 선물 교환 등 가정의 축하, 그리고 10시 미사 – 자시미사가 아닌 것이 특이하였다.

본당 신부는 아주 다혈질의 사람으로 성탄의 진면목을 송두리째, 그 정열적이고 힘차면서도 약간 회의(?)도 섞인 듯한 어조로 파헤쳐 여러 어려운 사람을 외면한 들뜬 성탄을 엄중히 경고하는 것이었다.

훌륭한 음악. ‘사람이 되신’ 예수의 의미가 나를 헤접은 마음, 설워하는 마음에서 건져 올려 기쁨 섞인 희망 – 일종의 말할 수 없는 차분한 마음 – 을 주었다.

이것이 이번 성탄의 예수님의 선물이다. 유럽에서 받은 전체적 면모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다. 이 집에서 느낀 점은 아주 어린아이부터 늙은이까지 하나같이 가사에 참여하기 때문에 인생의 전 과정을 한눈으로 관찰할 수 있다. 결국 좀 별나고 신비스럽고 알 수 없는 앞날에 불안해하며 설레는 맛은 전혀 없고, 앞이 너무도 명백하게 빤히 보이는 주어진 조건대로 살다가 가는 인생이다.

 

 

 

 

1975년

 

 

동물 인간

 

 

1975년 1월 5일

쓰다 보니 한 장이 절로 넘어가 있었다! 이렇게 연속이면서 또 불연속인 채 한 해가 가고 새로 한 해가 왔다.

12월 25-26-27일 괴치스의 하인츨레 씨 댁

28-29-30-31-1일 뮌헨의 대학생 도시

1975년 1월 2-3-4-5일 빈의 부식 형 댁에서

 

지금 인스브루크 로 가는 길이다. 단순한 마음으로 예의 감퍼의 강의록을 펼쳤다. 185 페이지 다윗의 계약을 읽어 갈 참이다. 10 여일 동안 내 집을 떠나 괴치스의 하인츨레 씨 댁, 뮌헨에서의 형제애, 레겐스부르크, 빈의 부식 형의 세계와 접하다가 다시 마음을 여미는 기분으로 인스브루크 로 돌아가고 있다. 기차가 널찍하고 좌석이 아주 편하다. 로사리오 기도를 한 꿰미 드리는 마음으로 강의록을 읽어야겠다. 인스브루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우편물들이 보고 싶다!

잘 살아야겠다. 내가 사는 게 아니므로 잘 기도해야겠다.

 

아까 느낀 것: 나는 신부로서 무얼 주려는 생각에만 몰두하고 있었기 때문에 안 그래야지 하면서도 실은 그걸 무척 의식하고 있다! 내 자신을 채우는 일에 소홀했다.

신부로서 뭘 준다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주는 것과 같은 거다. 절대로 기술과 요령 습득으로 자기와 다른 어떤 면을 주는 것이 아니다.

 

 

1975년 1월 6일

아까 본 영화의 감상을 좀 적고 싶다. 제목은 <엄청난 포식>있었는데 풀어 얘기하면 <현대인의 종말론>이라고나 할까. 지독한 풍자 영화였다. 현대 사람들이 보는 매래는 그야말로 섹스와 먹는 일뿐이다. 거기에는 도덕도 종교도 윤리도 규범도 아무것도 없다. 거기에 있는 것, 있을 수 있는 것은 완전히 동물 인간이다. 거기서의 인간은 이미 ‘생각하는 갈대’도 아니요, ‘창조주의 모상 운운’은 신화요 잠꼬대 같은 소리다.

그리고 거기에 어김없이 찾아오는 죽음! 그냥 계속 먹으면서 섹스 중에 중을 뿐인 거다. 모두들 죽음을 향해 사는 거다.

 

이 영화는 현상을 그린 것이다. 김형이 얘기한 대로 우리에게는 확실한 결론과, 옳던가 그르던가 하는 윤리성이 항상 앞세워지기 때문에 윤리성이 직접적으로 다루어지지 않은 것에는 뜻을 찾기가 어렵다. 그러나 이것을 깊이 음미해야 하는 것이다. 내가 현대인의 고민을 이해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이것이 깊은 통찰에서 비로소 방향이 제시되는 것이니까.

 

이런 판국에 나의 종지 宗旨 인 크리스티아니즘 이 어떻게 힘이 있을 것이고, 나의 신분으로 어떻게 이런 사람을 대할 것인가를 생각하거나 나아가 방법론에 노심초사하기에 앞서 – 왜냐하면 이제까지의 나의 신분을 의식하고서 해결을 생각하는 것은 항상 실패였으므로 – 있는 그 현실이 과연 어떻게 틀린 것이고, 그 실마리는 어디라는 것을 모색하는 현상 자체의 해부가 출발점이 돼야 할 것이다. 오늘 받은 오기순 신부의 글월에서 이 문제의 해결을 찾으려 한다.

철학이 없는 인간 –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 따라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 수 없게 되어 버린 인간인 우리에게 원죄의 자국이 너무나 강력함은 사실이다. – 은 그냥 그대로 동물 인간이 되어 버린다. 영화 안에서 모두들 섹스와 먹는 일을 동시에 하면서 죽어가는 것은 심각한 풍자이고, 문제성 제시의 힌트이다. 그렇게들 죽어가는 것은 차라리 먹는 일에 아귀다툼하며 전쟁이라도 해서 적군의 칼에 죽는 것보다 더 비참하다. 지금으로선 ‘사람이 사람이기를 거부할 때 그런 꼴이 될 수밖에 없다’는 비약된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 내가 보는 사람은 – 하느님의 모상인 사람이다.

– 그런 꼴이 과연 비참한 것이냐 하는 논리적인 면이 먼저 해결되어야 할 문제.

– 이렇게 사색의 귀결이 항상 사람(하느님의 모상인 동시에, 원죄 속에 있는)과, 하느님(결단과 의지적 노력을 요구하는)에게로 모이는 것은 재미있고도 중대한 암시를 주는 일이다.

– 그렇다고 위의 결론에서, 그런 꼴이 되는 것이 무서워 그걸 피하려고 사람다워야 한다는 얘기는 어딘가 어색하고 결국 성립이 되지 않는 것 같다.

– 지금의 나에게 반성을 요구하는 요소는 나도 지금 지독히 먹고 있는 중이다라는 점이다.

 

냉혹과 정확성과 비정을 살인을 함으로써 내가 조금은 살고 있다는 의미를 실감하는 찰스 브론슨의 영화보다 고차원의 영화였다.

 

그 동안 밀렸던 편지들을 한꺼번에 받았다. 한 30여 통 될까. 굉장한 분량이다. 고국에서의 내 삶의 자리가 한꺼번에 들이닥친 거다. 가족, 친지, 친구, 선배들의 소리들이다. 한결같이 ‘뜻을 잘 이루어 훌륭한 신부가 되어 빨리 돌아오라’라는 거다. 그런데 그 의미가 지금의 내게 박진하지 못함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마치 눈 앞이 흐릿하여 사물을 분명히 볼 수 없는 것처럼 머리가 개운치 않고, 도무지 실감나지 않는 것은 웬 까닭일까. 전 같으면 하나하나에서 지독한 향수와 냄새와 더불어 그 진면목을 단번에 파악할 수 있었을 텐데…. 안타까운 노릇이고 약간은 겁이 나는 현상이다.

그건 아마 나의 좌표를 명확히 파악 지 못한 데서 오는 일련의 상충, 불협화음일 것이 분명하다.

정형은 어딘가에서 공부하고 수도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자기를 훈훈하게 한다고 했다. 정말 즉각 느껴지는 내용이고, 그건 바로 내가 염원하던 모습이었다. 그것이 이제 실감이 나지 않는다면 틀림없이 내가 변한 것이 아닌가. 그건 나의 시종하던 목표요 명제가 아니었던가. 얼마 전까지 이런 의식이 분명했었음을 잘 느낄 수 있었다. 그러던 것이 구라파의 이모저모를 냄새 맡고 넋을 잃은 사이, 한 모퉁이에서부터 하나하나, 봄볕에 눈 녹듯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 이 일기장을 봐도 수비게 알 수 있듯이 처음 이곳에서의 강한 의욕과, 고국의 것을 그대로 이어받으려던 목표들이 많이 변색되어 있다. 타락했다는 걸까. 안목이 넓어진 발전이라는 걸까, 필연적인 과정이 아닐까.

 

이 문제를 지금 더 이상 쓸 수가 없다. 단순한 마음이 되어 잠을 청하면서 누군가가 얘기한 대로 성서를 한 구절 읽어야겠다. 그리고 내일은 어머니께 자세한 편지를 써야겠다.

 

 

1975년 1월 11일

벌써 11일이다.

무언지 굉장히 찜찜한 기분이다. 하느님과 잘 연결되어 있지 못하고, 그래서 시야가 선명치 못하다. 맑고 상쾌한 기분이 아니다. 박진하는 느낌이 없다.

요 며칠 감기 몸살을 좀 심하게 앓고 있었다. 문제는 그것을 핑계로 지극히 절제 없는 생활을 했다는 것이다. 아까 영화를 겹치기로 두 개나 보고, 중국집에서 음식을 사 먹었다.

그 중국집에서 음식을 나르던 청년의 깔끔한 용모, HB 담배를 청하는 같은 동양 사람인 나를 보고, 속으로 얼마나 한심하고 불쌍하게 생각했을까.

내일을 기해, 아니 지금 이 시각부터 분발케 해 주소서!

할 일은 반드시 하고, 하지 말 일은 단연코 하지 말게 해 주소서.

 

 

 

1월 12일 주의 세례 축일

‘성 聖’과 ‘속 俗’. 서의 탈을 쓴 속.

성 聖을 가면으로 겉에다 쓰고 속에는 온통 속 俗뿐, 차라리 속 俗을 위한 방편인 성 聖.

순수한 성 聖 이 아니고서야 그것은 완전한 사기, 출세를 위한 도구.

부수적인 것, 생활적인 것에 맴돌지 말고 본질적인 것에 빠져들게 해 주십시오. 그렇지 않는다면 백 년 가야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진보란 없고, ‘성 聖’ 에로의 진전은 없는 게 아닐까.

 

 

1975년 1월 16일 木

고독, 지금은 이렇게밖에 표현을 못하겠다. 고독이 끝까지 가서 거기서 우러나오는 것 – 이것만이 진짜다. 거기에 온갖 창조의 샘이 있는 것이고, 칼 라너의 말대로 거기에 예수님이 – 사람이신 – 숨어 계시는 것이다. 거기까지 이르지 못하면 참다운 생명은 없는 것이니 심하게 말하여 제대로 사는 것도 못 된다.

고독이 끝간 데까지, 내 실존의 그 밑바닥에까지 가야만 되는 것이다. 거기 창조가 있고 생명이 있고 하느님이 계시는 것인데.

나는 전혀 거기까지 가질 못하고 있다. 학기로 구분해 보아 명확하다. 이번 학기는 참으로 시덥지 않게 살았다. 거기까지 단 한 번도 빠져 들어가지 못했다. 그러니 무슨 활력을 얻어 초생달의 신비면, 겨울 속 곧은 나목 裸木을 느낄 수 있었으랴. 그러니 사는 게 영 초점이 없고 예수님은 약간만 고마울 뿐이었다.

 

 

1975년 1월 17일 金

드디어 <구약에 있어서의 메시아>를 다 읽었다. 새벽 2시 조금 넘었다. 아주 후련하다. 그리고는 이제까지 읽은 저서를 모아서 가지런히 쌓았다. 전부 여섯 권이다. 두게도 상당하다.

사실 쓰고자 한 건 위의 내용이 아니다. 강의록 정리를 하다가 신약의 <그리스도론>을 정리한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런데 <골로사이 서간>에 이르자 정말 깜짝 놀랐다. 내가 생각해도 놀랄 정도로 꼼곰하게 무려 11페이지에 이르도록 깨알 같은 글씨로 정서를 한 것이다. 이게 무슨 일인가? 누가 한 건가? 소름이 끼칠 정도로 나와 생소한 것을 발견한 거다. 즉 고부하는 자세가 그 때와 (불과 5,6개월 전인데) 지금은 바로 천지간의 차이가 있다는 말이다. 상상도 못할 정리다. 나는 말게 모르게 그만치나 변한 것이다. 지극히 무서운 일이다.

아무리 긴장하여 자나깨나 의식하고 있어도 모자랄 뿐인 공부! 외국어로, 외국인으로서 생소한 문화 전통 속에서 모든 불리를 무릅쓰고 공부에 헌신하겠다던 최초의 각오, 오로지 그것만을 위해서 왔고, 그걸 통해 나의 삶을 보람차게 건설하겠다던 나! 생활면까지 다 포함해서 생각하자면 이 밤을 지새도 모자라고, 주먹이 다 닳도록 책상을 쳐도 부족한 노릇이다. 나를 죄는 나사는 얼마나 풀어져 있는가! 최근 얼마 동안의 이 해이. 오늘도 오후 나절부터 감미로운 한국 노래를 배경에 두고 불고기에, 말보로 담배에, 맥주에, 파인애플에, 그리고 아! 현학적이고도 위트가 있다는 호언에! 얼마나 시간을 보냈던가!

이제 제법 궤도 운운하면서 이곳의 사람들과 서신 할 생각, 좋은 분위기의 가정을 사귀어 금전적 보조도 받고, 그리기 위해 품도 빨리 받고 … 아, 큰 죄악이다. 가증할 죄다! 알게 모르게 나는 얼마나 거기 깊이 빠져들어 버렸는지. 그것이 바로 나의 정신의 타락이다. 내가 바로 그것을 원하고 있다는 것!

처음 와서는 명료하고도 단호하던 각오. 신선한 박력은 완전히 사라지고, 생활은 점점 윤기를 잃고 맥이 빠져간다.

 

순수한 기쁨 – 외국 생활 – 외국인 – 새롭고 신기한 것을 보고 느끼어 배움. 외국인과의 인간 관계에 한 걸음 한 걸음 친숙하게 진전하는 기쁨.

 

가공할 일상 생활 – 한 달에도 몇 번씩 가는 영화 – 성 性이 크게 대두된 건 나의 무질서하고 맥이 빠져 버린 정신력의 탓이었다!

 

아, 나는 어찌된 것인가? 고국의 친우들에게는 점점 할 말이 없어져 가고 있다. 그때는 커튼이 없어도 좋았고, 은인 본당 恩人本堂 이 아무래도 좋았고, 국수가 없어도 좋았다. 고국에서 오는 편지 몇 통이면 그만 충분히 만족하고 희열로 꽉 찼었다. 가장 중요한 건 고국의 친우들과의 연락이다. 내가 여기 있지만 그 바탕에 그 분위기에 그 목표점에 그 의식 구조에 있지 못하면 나는 반쪽만 살고 있는 것이고, 그런 위에 무얼 배운다 해도 그건 쓸모가 없는 오히려 반감만 가는 일이다.

 

 

1975년 1월 21일

날짜 가는 것이 무섭다. 말하자면 공부 안 하고 건공중에 떠가는 것이 무섭다.

몸도 정상이 아니다. 신실한 그 어떤 점 하나도 지금의 내게는 있지 않다. 어디서부터 뜯어 고쳐, 힘차고 건강하고 정상적으로 만들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알고 싶지도 않을 만큼 심신이 약해져 버렸다.

두 발로 땅을 디디고 서 있다는 감각도 없다.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지 짐작조차 가지를 않는다.

지금 바라기는 좀 푹 자고 내일 아침 미사에, 식사에, 그리고 내일 중에 목욕하는 것이다.

 

 

1975년 1월 24일 金

아직도 감기가 확실히 떨어지지 않은 지금 그래도 적이 안정을 되찾아 기분이 좋다. 어제 고백 성사를 보았다. 벼르기를 얼마 만에 굉장한 용기를 낸 것도 아니었는데. 주님은 그토록 관대하게 내 잘못을 사해 주셨다.

아, 가볍다. 아, 눈앞의 비늘이 떨어져 나간 이 밝음.

신앙은 창조적인 것이니 그 힘에만 의지토록 하라는 고백 신부의 말씀인 것 같았다. 그렇지, 신앙은 창조적인 것이고, 마치 안경 같은 것이리라.

 

카프친회 교회에 허실 삼아 들러 보았더니 종일 고백 성사를 주신다는 것이었고, 들어가 잠시 조배한 후 장치된 벨을 눌렀더니 실로 나보다도 빨리 신부님께서 고백실에 들어와 계시는 것이었다.

하느님은 그토록 정확하고 실질적으로 내 발걸음을 인도하시고, 고백 신부님을 보내 주시고, 단번에 내 더러움, 시커먼 콜타르 같던 내 심사를 완쾌하게 해 주시었다. 실로 가이없는 이 은혜, 이 보살피심, 나의 이러한 쾌적함, 이 선물, 나는 너무나도 감사하여야 하는 것이다.

 

 

 

 

시종직

 

 

1975년 1월 25일 土

내일 시종직을 맡는다. 아니 주께서 주시기로 하셨다. 그래서 오늘 저녁 때 성토베르트 성당에 가서 미사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미사 후 이곳으로 걸어오면서 묵상을 조금 할 수 있었다. ‘창조적 고독’, 그것이 인간의 진면목이라는 것을 알았다. 참 흐뭇하고 정다운 하느님의 손길을 느끼며 귀한 순간을 누렸다.

그것이 ‘창조적’일 수 있기는, 하느님이 계셔 내 존재를 전체로 지탱해 주시고 감싸 주시기 때문이고, ‘고독’이란 인간이 타고나 더불어 종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앙인은 그 ‘창조적 고독’을 속속들이 느낄 수 있고, 결국 최종적으로 자족 自足 – 엄밀한 뜻에서 자족이 아니다. 하느님의 은총의 선물이므로 – 할 수 있는 유일한 인간이다. 우리들 인간은 그 두 모습을 종생토록 왕복해야 할 존재이다.

그러나 위와 같은 인간의 진면목은 참으로 자기 주변과 눈동자 위에 두터운 안개를 가지고 다니는 우리에게는 쉽게 인식될 수는 없는 것이다. 조심하여 주변과 자신을 청결케 한 후에야 보이는 것이다.

 

시종직을 받는다. 결국 우리는 ‘신앙’이라는 푯말을 제시하면서 앞길을 알 수 없는 채로, 하느님의 인도의 은총에 의지하면서 계속 노력할 것이라는 가정하에, 한 과정으로서 그것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이렇게 간단할 수 없다. 위의 말에서 흠을 찾아낼 수는 없으나 과연 나로서 최선을 다했나 하는 것이 항상 부정적이기 때문이다. 사실 과정이란 말도 떳떳하지 못하다. 여지껏 얼마나 이 말에 안주해 왔는가. 이런 식으로 나가면 서품 敍品 (주: 신부직을 수여하는 예절)도 마찬가지, 임종에도 마찬가지이다.

매일의 혁명이 없이는! 참신한 매일의 극적인 참회! 구약의 구구절절이 모두 이러한 내용들이다.

수단을 입고 내일 직 職을 받기로 결심하였다. ‘옷’ 안에 특별한 뜻이 들어 있지는 않으나

첫째, 서울의 신학교 – 나의 삶의 자리 – 를 상기하기 위해서,

둘째, 간곡한 말씀과 축복을 주시며 띠를 매 주신 최신부님을 기억하고,

셋째, 첫째와 같은 내용이나 동기가 다른 것으로서 한국 사람이면 한국식으로 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넷째, 이 직 職을 받음으로 나의 자세가 보다 견고해지기를 바라는 외적인 표지로서! 이를 기화로 보다 철저히 주님을 탐구 하기다. 주여, 붙잡아 주실 줄 믿습니다. 주신 선 線을 놓치지 말게 하십시오. 그리고 보다 밝고 인간적인 인간이 되게 해 주십시오. 사제직에로 한 걸음 다가가는 그 진면목을 실천하게 해 주십시오.

 

 

1975년 2월 1일 土

기를 쓰고 그러나 오래간만에 여유를 지니며 9시에 학교에 갔다. 휄더러(주: 신학교수) 다음에 계속해서 감퍼(주: 대학교수)의 수업이 있을 참이었다. 그런데 휄더러가 휴강이란다. 그러나 이왕 온 것, 감퍼 강의를 듣고 가야지. 텅 빈 강의실 한 모퉁이로 가 의자에 궁둥이를 걸쳤다. 엊저녁 잠을 푸근히 못 잔 탓으로 온몸이 피로하고 아무런 의욕도 일지 않는다. 더구나 다른 공부할 것을 가져 오지 않았다. 꼭 이렇단 말이다. 공부할 것을 가져오면 강의가 항상 꽉 차 있고, 모처럼 안 가져온 날은 강의가 없다. 재수가 없는 건지. 할 수 있나. 더군다나 단어장도 가져오지 않았다. 반쯤 몽롱한 정신으로 계속 앉아 있으려니 화가 난다. 에이, 아까 집으로 가 버릴걸. 들으나마나 인 감퍼. 게다가 그 아프리카 친구 존이 나를 사뭇 놀린다. 그 애의 진심과 진면목을 알게 될수록 나는 놀랄 수밖에 없다. 어떻게 저리 구김살이 없을 수 있을까. 그리고 총력을 모아 잠시도 허튼 수작 하는 일 없이 공부하고, 생활에도 깊이 참여하고 있다. 나로선 어림도 없는 일이다. 더구나 그 모든 것을 모두 좋게 잘해 나가고 있다. 영어책 하나를 보라더니 곧 “유감스러우나 너는 이것을 읽을 수 없다”라고 한다.

“발음이 너보다 좋다”고 했더니 내가 사용한 형용사 besser는 독일어이고 better가 영어란다. 제기랄 누가 그걸 모르나. 그러나 영락없이 당해야만 한다. 그것도 여태 우습게만 알던 깜둥이 친구한테. 시간이 갈수록 신경은 날카로워지고, 정신은 몽롱하고 진작 가지 못한 것이 후회막심이다. 이제는 갈 수도 없다. 10시 10분 전이다. 에이 큰 맘 먹고 일어나 가서 한숨 자자. 막 일어서려는 찰나에 “때르릉” 10시 종이다. 그래도 모른 척하고 밖으로 나왔다. 나왔더니 도 생각이 변한다. 아니 이제까지 기다린 보람이 이것이냐, 너무하다. 조금만 더 있으면 감퍼가 오는데, 그래도 외투를 입고 내려갈 참이다. 빌어먹을 예의 존이 바로 거기 서 있지 않는가! “너 감퍼 안 듣냐?” 뜨끔하다. 거머리 같은 친구다. 기를 쓰고 음울히 내리는 비를 맞으며 – 아! 비까지도! – 방으로 돌아왔다. 참으로 씁쓸하다. 지금 그래서 10시 30분이다. 지금쯤 감퍼는 강의를 하고 존이나 마르틴은 듣고 있겠지! 나는 이게 뭔가. 그래도 들으면 얻는 것이 있을 텐데…. 이제 잠을 자자.

 

얼마나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는지. 그리고 도대체 공부를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어렴풋하게나마 윤곽이 잡혔다. 사실 한시 한초가 어떻게 이어져야 하는지도 뻔한 것이다. 모든 좋은 ‘허울’들이, 사실 순전 한 허울에 불과하다. 자기 합리화다. 이런 걸 박진한 현실로 항상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하는데, 무서운 몰각이다. 안경렬 신부와의 대화에서!

 

발렌슈타트의 본당 신부님이 나의 본당 신부님으로 정해졌다. 고맙다. 그런 분을 만나게 해 주신 부여, 감사하나이다.

 

 

1975년 2월 10일 日

빅토리아 씨의 소포 속에 어머니의 목소리! 정훈아! 할아버지의 목소리 정훈아! 다른 이들은 젊어서 괜찮다고 하거니와!

즉시 간단한 답을 내기로 하였다. 엄마의 걱정은 내가 과연 훌륭한, 그보다 유럽 바닥에서 신부가 될 수 있을까 하는 것! 괴치스의 안나 아주머니의 선물로 판토빌(영양제)를 샀다. 그리고 한 숟갈 먹었다. 감사!

간단하게라도 편지를 써야겠는데.

누나의 편지. 사랑하는 정훈에게 – 누나가.

 

 

1975년 2월 11일 火

사육제의 마지막 날이란다. ‘謝肉祭’ 이렇게 쓰던가. 거리에 우연히 나갔다가 놀랐다. 우체국 직원 아가씨도 가면이고, 전차 운전사도 가면이다. 마리아 데레사 거리는 온통 가면들로 가득 찼다. 더욱 놀란 건 여자들의 적극성, 이런 것 정말 상상 외였다. 나는 이 정도라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모든 이가 함께 참여해서 즐긴다는 점도 즉각 알아차릴 수 있었다. 늙은이도 아이들도 흐뭇한 표정들이었다.

아마 젊은이들의 탈선도 포함되어 있겠지.

 

 

 

 

인간적 나약성

 

 

1975년 2월 12일 水

굉장한 피곤을 느끼면서도 강행군이다. 꼭 열흘 남았군. 지금은 피곤보다 어쩔 줄 모를 무력감에 빠져 버려 행진곡이 담긴 테이프를 들어도, 국수를 삶이 먹어도, 간식을 먹는다 해도 다 소용이 없는 것 같다. 침대에 잠깐 드러누워 이 생각 저 생각 하다가 몇 줄 남겨 두고 싶은 생각이 났다. 이런 기막힌 무력감을 풀어낼 재간이란 전혀 없다. 얼마 전 읽은 욥기 해설, 아무것도 누구 하나도 기다릴 수 없는 절대의 무력감 속에서 하느님과의 생생한 공동체의 어떤 갑작스러운 인식이 솟아나는 것 같았다. 아니, 솟아나야 할 줄 믿게 되었다. 모래를 씹는 듯한 이 삶 – 그래도 모래를 씹겠다는 것이다. 하느님과 절대 절명으로 접해 있는 나의 존재 – 그뿐이다. 그리고 여기 외국 나그네 생활의 진면목이 다시 한번 생생하게 드러났다. 그 허 虛와 실 實이 눈에 보이는 듯, 손에 잡히는 듯. 그간의 나태했던 허송세월과 함께, 우리는 여기 공부하러 왔다. 가능한 한 빨리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나그네살이를 끝내고 고향으로 가야 한다. 마치 유배 중의 이스라엘이 두고 온 선조들의 땅, 가나안을 그토록 목말라하듯.

그러기 위해 필요한 진통을 얼마나 감내할 것인가가 문제의 요체다.

사람이 할 일은 참으로 여러가지다. 공부, 사목 司牧, 그 속에서 다양한 일로 또 나뉜다. 어느 것이 좋고 나쁘고가 없다. 그러나 한 가지씩 하도록 되어 있다. 적어도 우리들한테는 이건 강제도 억압도 아닌 자기의 자유로운 선택이고, 그 속에 참다운 자기 해결, 자기 해방이 깃들어 있다.

우리가 이곳에 공부하러 왔다면 공부 외의 딴 것에 눈을 돌려서는 안 된다. 그러나 고향보다 훨씬 잘 먹고, 잘 놀고, 안정되어 있는 이곳에 와 보니 생각이 달라진다. 공부하기가 쉽지 않다. 이 얘기는 공부가 누워 떡 먹듯 재미있지 않다는 얘기다.

얘기는 바로 인간적 나약성의 문제다. 많은 구실과 자기 합리화 속에서 자기는 점점 변질되고 경직되어 간다.

이 모든 것이, 알면서도 실행 못 하고, 좋은 걸 순수히 지키지 못하는 인간적 나약성이 문제다.

우선 공부 문제를 보자.

과거와 요즈음을 비교해 보면 그 윤곽이 뚜렷하다. 우리는 여러 가지를 동시에 할 수 없다. 이곳에 온 목적을 달성하려면 공부만 거의 주로 해야 한다. 한번 약하게 마음 먹기 시작하면 자꾸 미루어진다. 자꾸, 자꾸…. 여기 와 있는 우리 중에 순수하게 공부하는 이들이 다섯 손가락도 못 된다니… 짐작할 만하다. 계속해서 공부하려면 여러 가지로 공부할 조건이 되어야 한다.

우선 ‘몸의 건강’이다.

고향에서는 부모, 형제, 친구들이 돌보아 주어서 신경 쓸 필요 없이 내 일만 하면 되었는데, 여기서는? 이것도 굉장히 커다란 변화이고 나의 과제이다. 내가 비타민을 자진해서 먹고, 인삼 가루에다 꿀을 섞어 퍼먹는다는 것은 예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먹고, 입고, 자고, 돈 쓰고, 여가를 선용하는 것 이 모든 인간사 – 이제껏 거의 신경도 안 쓰던 이 문제가 심각해진다 – 를 내 스스로 공부할 수 있는 조건과 분위기로 조성해야 한다. 또 하나, 현재의 내게 중요하게 보이는 점은 ‘여성 문제’이다. 그럴 것이 나는 결혼을 하지 않는 신부가 되기를 목표하고 있으므로 특히 문제가 된다. 이것도 이제까지에 비해 큰 변화다. 잘 가리어진 터전에서는 생각이 거의 미치지 않던 이 문제가, 여기서는 절박한 현실로 대두됐다. 여인들이 얼마나 예쁜지, 정말 천사 같다. 그리고 여기 여자들은 몸과 마음이 모두 얼마나 개방적인가. 그리고 성 영화가 얼마나 많은지. 여자가 절대로 싫어서 결혼을 안겠다는 것이 아니므로 때때로 무섭게 심각한 현실로 대두된다.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할 것인지,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으로는 미봉책이 될까 말까다.

 

이 모든 현상들 앞에 우선 중요한 것은 나를 조심스럽게 가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절대로 자신 있는 척, 여유를 부릴 일이 아니다. 창준이가 말하는 대로 끈질긴 투병적 의지가 필요한 것이 명백하다. 그리고 이것이 가능한 근거는 – 나는 참으로 이렇게 결론 내리기를 좋아하거니와 – 우리가 하느님과, 내가 바로 하느님과 불가분의 접촉을 가짐으로써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각설하고 예수 마리아여, 나를 도와 주십시오. 나를 당신의 도구로 써 주십시오.

 

 

1975년 2월 13일 木

겹치는 강행군에 시간 안배의 무계획 등으로 온몸이 죽어가는 듯 마비가 오고, 가장 무서운 큰골의 정지 停止 현상이 기어이 오고야 말았다. 엊저녁 새벽 4시까지 무리를 했더니, 오늘은 전혀 맥을 차릴 수가 없다. 점심 때에야 간신히 침대에서 나와 식사를 하고 강변을 따라 산책을 했으나, 흐트러진 심신에 초점을 맞출 수가 없었다.

자, 이걸 어쩐다? 오늘까지 구약을 마쳐 놔야 하는데, 예정한 하루가 초과되었으니…그러나 쉬어야겠다. 큰골의 작용을 되살리기 위해서.

극장에 갔다. 해괴한 초현대영화인데, 도무지 어떻게 전개되는지 종잡을 수 없었다. 로미 슈나이더라는 여배우의 출연인데, 끔찍한 장면과 함께 여체의 모습도 간간 보여 준다. 어쨌든 허망하게 보고 나왔지만 뭔가 시원하였다.

학교에 들러 시험 시간을 다시 확인하고, 담배를 한 갑 사고, 공원을 돌아 신선한 공기를 실컷 들여 마시고, 미술관에 들러 내가 제일 좋아하는 그림을 구경하였다. 그 그림들은 한스 카롯사의 세계에 해당되는 것으로 티롤의 자연을 소박하고 두툼한 선으로 그려낸 것인데, 내 의식 구조에 가장 적합한 것들이었다. 그리고 방으로 돌아와 책상 앞에 불을 밝히고 <다윗의 계약>을 대하고 앉아 있다. 오늘 저녁에는 일찍 잘 작정이다. 예수 마리아여, 나를 도와 주십시오. 박 수녀님 말대로 내적 생활을 이뤄가게 하십시오. 그것만이….

 

 

1975년 2월 17일

내일 신약 신학하고 모레 구약 주석, 그리고 토요일에 구약 신학을 시험 치를 판이다. 점점 다가오더니 드디어 이번 주간에 다 결판 내게 되었다. 제일 아쉬운 건 <이사야 서>를 더 검토하지 못하고 시험에 들어가야 하는 것. 그것도 웬 만만하면 충분히 할 수 있었는데 참 아쉽다. 중간에 완전히 공친 날도 있었고 낭비도 많았지만… 참 이상하게 언제나 시험 때가 되면 꼭 하루가 모자란다. 옛날부터 그렇다. 그 동안 정말 무리해 가며 최선을 다했다. 끝나고서 차분히 정리 검토해야겠다. 뭐니 뭐니 해도 준비하는 때와 시험 바로 전날의 기분은 사뭇 다르다. 차원이 다르게 나를 억누른다. 그건 책임감 때문이다. 전혀 자유의 여지가 없는 결정적인 책임감 때문에, 완전히 그 의식 자체에 눌려 자기라는 것이 와해될 정도까지 이르게 된다. 이제껏 여유를 가지고 예비로서 열중하던 것과는 천양지차. 금싸라기 같은 이 시간에 이렇게 쓰고 있는 것은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서다. 점심 먹고서 산보하고 들어와 담배 피고 음악 듣고, 거기다 졸음이 와 한숨 자고 나가서 간식을 사오고… 뜸을 너무 많이 들였군. 자, 이제 <그리스도론>을 볼 참이다.

데레사 성녀의 사진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힘을 주시리라.

 

 

1975년 3월 9일

영화 <차이나 타운>

줄거리나 문제점에 관련 없이 두 주인공 – 남자와 여자 – 은 참다운 생활을 해나가는 사람들이었다. (특히 그 여자는 너무나 멋있었다. 내 전부를 걸어도 전혀 아까울 것 없는 그 여자. 이런 감정은 무선 형이상학이나 인생론을 의식하거나 숙고한 것이 아닌, 참으로 인간으로서 한 여자에 대해 우러나오는 감정이다). 그들은 복잡한 형이상학을 필요로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에 성실할 뿐이다. 그들은 말 한마디, 행동 하나, 죽는 순간에서도 거침없이 자기로 시종한다. 나처럼 한 마디를 심각하게 재고, 상대의 반응도 계산에 넣어 고작 어쭙잖은 몇 마디를 죽을 상을 하며 하지 않는다 그들은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나는 신 神 속에, 신학 속에, 보이지 않는 그 체계를 위해, 매사에 조심하며 비정 받은 방 한 칸의 책상에 엎드리어 죽은 문자를 붙들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얼마나 거침이 없고, 한 순간 한 순간 자기에게 성실한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붙들고 삶의 전부로 삼은 것은 무언가? 생활은 이 영화에서처럼 거침없이 흘러가는데, 일면 구라파에서의 교회의 모습이 그렇다.

 

 

 

 

조건 없는 사랑

 

 

1975년 3월 10일

왜 낮에보다 밤에 공부가 훨씬 잘 될까. 그것은 어두운 속에서 불빛이 있는 곳만을 의식하게 되니까 정신이 훨씬 잘 집중되기 때문인가 보다.

 

뜻밖에 빈으로 간 발터가 찾아왔다. 참 좋은 믿음직스러운 친구다. 그를 통해서 클레멘스와 그 가정까지 보게 되며, 참 복된 가정임을 느낀다. 아버지가 높은 지위에 있고, 아이들이 모두 건강하고, 높은 교육을 받고 있고, 3남 2녀라는 그것마저도 극히 이상적이다. 이런 주어진 좋은 조건 외에 그 집을 복되게 하는 보이지 않는 비결과 힘은 무엇일까? 그렇게 복되고 단란하고 이상적인 가정을 일찍이 본 일이 없다. 아이들 – 발터나 클레멘스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영육간에 흠 없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그 숨은 비결은 부모의 교육에서 찾아야 할 거다. 즉 부모의 서로 화합하는 인생관 – 이 경우 참된 신앙이 그 집을 복 받은 가정으로 만드는 것이리라.

사직동 김판사네 가정도 한국에서는 신앙으로 가꾸어진 훌륭한 이상적인 가정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 일이 잘 풀려 나가지 않는 면들도 보인다. 아이들이 제 발로 걸을 수 있을 때까지, 자기가 사리를 스스로 옳게 판단할 수 있을 때까지는 부모가 이끌어 주어야 한다. 그들의 인생관과 신앙에 근거해서. 그런데 압도적으로 비중이 큰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그만 손보기가 어려워져 버린 난맥상이 드러나고 있다.

 

현대라고 하지만 자기 발로 무리 없이 땅을 딛고 설 수 있다면, 문제는 그렇게 심각한 것도 아니고 충분히 모든 어려움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그 때까지의 일관된 교육이다.

곧 아버님 돌아가신 지 10년째가 된다. 벌써 그렇게. 강산이 정말로 크게 변했다. 아버지의 그 보화를 캐내어 나눠 줘야 할 큰 책임은 바로 나에게 있는 것이 이 순간 확연해진다. 내일 계훈이한테 편지 – <無常을 넘어서>를 같이 읽자고.

 

 

 

1975년 3월 12일 水

결국 다시 근본적인 해결이신 주께로 빠지게 되는 것. 나로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 명백하게 밝혀진 지금 모든 것은 주께서 해 주시는 것.

참으로 간명하고, 쉬운 원리이고, 너무 편하기까지 한 원리인 것을!

나로서 할 것은 주의 도우심으로 주를 향한 살아 있는 시선, 그 연결되어 있는 올실을 꼭 쥐고 놓치지 않는 것뿐, 이것은 내게 절대 절명의 과업이다.

모든 것을 주께 맡겨 그분이 다하게 해 드리는 것. 그렇지 않고 내가 해 보겠다고 바둥거려야 남고 쌓이는 건 자기 모멸과 쓰디쓴 환멸, 낙담뿐.

 

주여, 오늘은 제가 이 땅에 온 지 꼭 일 년이 되는 날입니다. 이제까지 엄청난 변화 – 어찌 보면 그런 것도 아니지요 – 속에서 저는,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고, 그리하여 어떻게 성장하고 있는 것입니까? 잘 나가고 있는 겁니까?

 

 

1975년 3월 13일

내칠 리히텐슈타인 (주: 아루마 옐레 아주머니 댁) 으로 갈 참이다.

대충 준비를 해놓고 11시 자리에 든다. 공부를 많이 안 해 꺼림칙하다. 쵸핑켄의 아헤르만 아주머니께서 다녀가라는 고마우신 말씀.

 

 

1975년 3월 15일

샤안 (주: 스위스 지명) 이루마 아주머니 댁에서의 두 번째 밤이다. 두 번째라서 감격은 좀 덜하지만 이 조용한 곳에서 고요하게 그러나 힘차고 명랑하게 사는 아주머니를 보는 것은 크나큰 행복이다. 그녀는 조건 없는 사랑을 뿜어대는 사람이다. 하느님을 현실로 사는 사람. 그래서 이웃을 참되게 사랑하는 분이다.

 

자기 자신의 마음이 맑지 않으면 아무것도 볼 수 없다. 자기 마음은 거울이다. 거울에 금이 가고, 금칠이 벗겨지고, 그 위를 먼지와 손자국이 가득히 덮고 있다면 그 거울은 상 像 은 받아들이지만 아무것도 비춰 낼 수가 없잖은가. 창준이의 투명한 인간상은 그러므로 모든 것을 꿰뚫어 가장 심부까지 일별해 낼 수 있는 것이다.

‘내적 질서’라고 저번에 표현해 봤지만 그게 든든치 않으면 만사 헛것이다.

하느님과의 친밀하고도 인격적인 우정을 계속 잠시도 끊지 않고 유지해야만 한다.

 

그런데 그게 얼마나 어려우냐.

아까 본당의 저녁 미사에 갔었는데, 모레부터 발렌슈타트에서 하게 될 역할이 연상되어 몹시 걱정스러웠다.

즉 이 사람들 – 부자로 잘 사는 외국 사람들이나 역시 어리석은 인간인 신자들 – 을 모범을 보여 주며 이끌어 줘야 한다. 그것도 신부로서. 그런데 나는 합당한가? 부당하지만 그렇게 해 보겠다는 용기를 낼 만큼 하느님을 사랑하는지.

갑자기 눈 앞이 캄캄해지며 빈혈 증세가 일어난다.

 

자그마한 고질적 악습도 못 떨쳐 버리는 내가 어떻게 이 사람들에게 표본이 되고, 더구나 성사를 집행할 것이냐? 고민은 무엇보다 그 악습에로 집약된다.

 

카스파 씨가 고맙게도 일부러 찾아와 스위스 알프스의 한 봉우리로 데려가 주었다. 얼마나 고마운지. 둘째 딸 돌리라는 아가씨도 같이 왔는데, 참 좋은 사람들이고 복된 가정을 이루어 티없이 사는 사람들이었다. 아마 오늘 소풍은 일부러 나를 위해 시간을 내지 않았나 생각할 정도로 너무 자상한 배려를 보여준다. 나는 고맙다는 말만 겨우 한 번 할 수 있을 뿐이었다. 도로테아는 조용한 자태로 고운 미소를 띄우는 참한 아가씨였다. 그 애가 같이 와서 더 좋았음은 부인 못 할 사실이다.

 

평화가 당신들과 함께!

당신은 저를 아버지처럼 돌봐 주시는, 항상 분에 넘치는 좋은 기회를 제게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러한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고 저는 이따금 생각합니다. 제가 어떻게 감사드릴 수 있습니까? 제가 당신과 소풍을 갈 수 있었다는 것은 거의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저를 그토록 배려해 주심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참으로 기쁨 속에서 당신께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저는 당신과 당신의 행복한 가정을 위해 기도드립니다. 이것이 제가 당신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입니다. 저는 다시 ‘대단히 감사합니다’라고 진정으로 말씀드립니다.

 

 

1975년 3월 16일 日

아버님의 10주기이다. 무얼 드리는 것이 제일 좋을까? 무얼 드리는 것을 제일 좋아하실까?

Sollen(당위)에 미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의식함.

 

어제는 종일 비가 오고, 날이 때에 맞지 않게 흐렸다. 아마 오늘 새벽까지 그랬을 거다. 진눈깨비다. 참 묘하다. 3월 16일이어서 그렇다. 작년은 어땠는지 기억이 없다. 재작년에는 신축된 기숙사 4층에서 퍼붓는 진눈깨비를 창 밖으로 바라보며 감회가 깊었었지. 이것은 중대한 증거이다 – 아버님이 살펴 주신다는 표지를 하느님이 주시는 것으로 믿는다.

 

당위(Sollen)에 미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의식함이 무언가? 어째서 마음이 편치 않는가. 넓고 막연하게 볼 것이 아니라 그런 것을 느끼는 지금 현재를 분석해 보자. 체, 말투가 우습군. 빗센샤프틀리히 (주: wissenschaftlich 학술적인) 야.

이런 감정은 자기 자신의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 여러 사람을 상대하거나 장소를 바꾸어 새 국면을 접할 때 생겨난다. 그 바뀜의 첫 순간에는 그렇지 않으나 곧 극히 피로해지고 그런 대면과는 다른 별도의 자기 자신을 의식하여 마음이 편치 않게 된다. 이것은 내적으로 내가 아닌 또 다른 나의 이중성을 나타내는 것이고, 위의 변화가 필연적인 것임에 비춰 보아 나의 이러한 이중성도 필연적이고 항시적인 것일 테니 극히 중대한 문제다.

 

 

 

 

바움가르트너 신부

 

 

1975년 3월 17일 月

마침내 발렌슈타트에 왔다. 아침 일찍 이루마 아주머니와 함께 샤안을 떠나 살간스에 도착하여 마중 나오신 바움가르트너 신부님과 함께, 좋은 자연 환경에 역사적 건물인 성당이며, 사제관 … 을 둘러 보았다. 그 모든 것이 주께서 안배해 주신 대로 흡족하기 짝이 없다. 하느님께 깊이 감사할밖에. 차츰 알아 가겠지만 첫날인 오늘 모처럼의 지역 사제회의가 있어 같이 참석해 큰 경험을 쌓고, 밤 8시에 병원에서 미사. 원장 수녀님이 참 좋으신 분 같았다. 그 후 맥주집에 들러 생활에도 참여했다. 신부님은 생각보다 훨씬 더 본당 (주: 일정 구역 내 관할 성당)을 사랑하는 사제였다. 조르주 베르나노스의 앙브리쿠르 본당 신부가 연상되었다. 읍으로 들어서면서 “이것이 우리 성당이고, 우리 성당은 아부 좋아요” 하시는 것에서 그 사랑이 잘 드러난다. 중요한 것은 자신을 넘지(over) 않는 것이다.

아버님, 이제 돌아가셔서 더욱 강하게 저를 붙들어 주시는 아버님, 원대로 스위스에 와 있음을 보십시오. 흡족히 여기시고 잘 들어 주십시오.

어머니, 여기 와 있습니다.

예수님, 저를 보십시오. 앞으로 어떤 날, 어떤 시간을 주시더라도 잘 받겠습니다. 저를 지키게 해 주십시오.

 

 

1975년 3월 19일 水

오늘은 취리히에 다녀왔다.

스위스의 작은 동네만 보다가 큰 도시도 봤다는 것은 기록할 만한 일이다. 그 둘을 합쳐서 스위스 윤곽을 그릴 수 있으리라. 몰론 아직도 그 깊숙하고도 정확한 정체를 알려면 멀었겠지만…

이 나라는 참 작은 것 같다. 그리고 천지가 산뿐이다. 산과 호수, 아름다운 자연 경치가 인간의 형성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 그도 연구해 볼만한 가치가 있을 테지만 지금은 시기상조이고, 이 나라는 면적이 작고 평야가 없는 산악뿐이므로 사람들도 잘다. 아메리카 대평원이니 중국 황하 유역이니 하는 광대한 개념이 전혀 있을 수 없다. 사람들은 굉장히 바지런하고(부지런이 아닌) 근검하여 오늘의 부를 축적하고 전세계에서 으뜸가는 국민 소득을 올린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외세(외민족)의 큰 침략이나 강탈을 당해 보지 않았으므로 평화의 천국임을 과시하는 것 같으나 그 진면목을 알지 의심스럽다. 즉 수치와 억압과 쓰라린 눈물 – 평화가 무언지, 남을 어떻게 동정하고 이해하는지를 할게 하는 – 이 없이 이 모든 가상의 외적에게 자기를 지키기에 일찍부터 능숙해 왔다. 이들은 우리 옆의 일본을 어쩌면 그리도 연상시키는지… 사람들이 잘고, 남에 대한 이해나, 약간은 어리숙하면서도 순진한 맛이 없다. 잽싸고 알뜰하고 지독히 노력하고, 안으로 안으로 자기를, 자기 나라만을 위한다. 우리 한국의 이조 백자 같은 맛이나 오지리의 모습과는 너무나 다르다.

참으로 나를 보는 이들의 눈길에서 (발렌슈타트에서부터, 또 기차이세, 그리고 취리히에서) 나는 지극히 얄미운 무관심을 느낀다. 오지리의 정겨운 눈초리와는 지극히 대조다. 이 나라 어디에 도깨비 같은 세계적 은행이 있다고 하거니와 전쟁이 날 리 없는 이곳에 대포 소리를 울리면 군사 훈련에 열중하는 것은 근검과 노력을 과찬하기보다 어딘가 지극히 이기적인 섬나라 사람 같은 삐뚤어진? (이렇게 쓸 수 있는지는 감히 자신할 수 없지만) 욕심 같은 것을 상기시킨다.

 

이곳에 와서 이틀 동안 본당 신부의 지극한 호의 속에 지내는 내가 이렇게 쓰는 것은 어딘가 내 자신이 비뚤어진 게 아닐까 염려스러울 정도로 부정적이나 우선은 이만, 아마도 너무나 잘 사는 깍쟁이 부자에 대한 시기와 나의 근거 없는 열등감이 섞여 이런 평가를 내린 것 같다.

 

이제는 설레임도 한 물 갔으니 차분히 <골로사이 서>를 읽어 가자. 부담 느끼지 말고 기도서를 읽듯 하자.

 

 

1975년 3월 20일

나의 상념들을 조정하여 그 초점을 맞춤.

내적 질서는 어디서 오는가?

‘있는 그대로 자기 자신을 받아들임 – 그것은 하느님의 의도이고 전적으로 은총이니까’

하느님은 나를 이와 같이 만드시고 지금이 나를 원하신 것이다. 조금 전에 미사에 갔다 왔다 – 미사 중에 하느님은 나에게 많은 것을 던져 주셨지만, 그것을 받고 그것을 키워 내 것으로 함은 내가 할 일이다.

지금 다시 사제관으로 돌아와서 맞추어진 듯 싶었던 초점이 흐트러진다. 그래, 초점을 맞추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아까 그 책에서도 평생을 노력해야 할 일이라고, 매일 아니 매시간에 다시 하느님께로 시선을 모으고 도 모아야 할 일이라고.

 

현재의 있는 그대로 자신을 인정하는 것은 하느님의 선물 그대로이고,  오히려 하느님이 원하신 것이라고.

 

따라서 남도 있는 그대로를 고스란히 인정해 주어야 한다는 것 – 아니, 있는 그대로를 보아야 한다.

 

요사이 사제관에서 지내는데 정리가 흐트러지는 것은 웬 까닭인가?

무언지 참 쉽지가 않다. 이렇게 쉽지 않을 줄은 정말 생각 못 했다. 나는 있는 그대로의 나로서, 한국 사람으로서, 신학생으로서 처신하리라. 그러면 만사는 다 잘 되어가리라 하고 자신했었는데…

내가 이렇게 장담할 때 안 신부는 그대로 믿지 않았다. 그리고 본당 생활을 해 봐야 안다고만 말했지. 허긴 이런 경험이 여러 번이다. 새삼 아버지 생각까지 난다. 아버지가 계실 때 나는 아버지의 눈총이나 말씀을 한시도 의식 지 않고 지낸 적이 없었다. 내가 내 자신에게 참으로 떳떳하지 못하다고 생각하기에 그 엄한 눈총, 말씀을 대하기가 더욱 두려웠던 거다. 집으로 다가갈 때마다 지금 집에 아버지가 계실까? 하는 항상 굳어지는 마음의 자세…. 참 석연치 않은 기분과 분위기의 연속이었지. 그 후에도 항상 그랬다.

있는 그대로의 나와 밖으로 보여져야 할 나. 다시 말하면 현재의 나와 원안 原案의 나를 지독히도 의식하며 살고 있다. 나는 지금 공부해야 하고, 기도해야 하고, 좋은 책을 일어야 하고… 그런데 나는 기도하기 싫고 좋은 책보다는 잡서를 읽고 싶다…. 이렇게, 해야 하는 것과 하고 싶은 것의 거리를 항상 의식하면서, 이 두 세계를 다 감당하느라 이중의 노력과 수고로 갑절 어렵게 살아가고 있다.

 

 

1975년 3월 27일 성목요일

예수님의 선물은 이렇게 기막히다. 그분께 조배하면서 나는 자못 초조하고 어떻게 얘기를 건네야 할지… 그만 모든 게 횡설수설이 되고 말았다. 나는 참으로 근래에 드문 좋은 묵시 默示를 기대했는데 모든 게 그토록 횡설수설이 되었고, 오히려 머리가 복잡한 것이 꺼림칙할 뿐이었다. 그래서 불안했다. 그리고 그 원인이 바로 내게 있음을 깨닫자 더욱 불안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 – 비록 내가 말을 잘 걸지도 못했지만 – 은 참으로 기막힌 것임이 지금 밝혀진 것이다.

아까 조배하면서 나는 내 자신을 어떻게 잘 추릴 것인가를 반성해 보려고 했다. 그것이 엉망이 되자 최후로 “당신이 다 해 주십시오.” “당신께 더 의탁하게 해 주십시오.” 그것도 아니면 거기서 ‘나’를 빼고, ‘해 주십시오’도 빼고 “자, 보십시오” 라고 만 말씀 드리면서 기도하려 했다. 최후로.

이것은 철학의 절대자와 신앙의 이스라엘 하느님의 결정적 차이를 가리키는 게 아니고 무엇인가! ‘자기 반성과 자기’에서 ‘나’를 뺀 ‘보십시오’.

집에 와서 신부님과 담소를 나눌 수 있게 해 주신 예수님께 깊이 감사한다. 그분의 선물이다. 이것이 그분의 은총이다. 오늘 ‘피’를 통해 ‘새 계약’을 결정적으로 세우시고 잡혀가신 그분이 오늘 내게 주신 가없는 은혜이다.

어떤 분과 인연 (불교 용어지만 참으로 좋은 말이 아닌가) 이 맺어질까 하면서, 그분과의 진실로 인격적인 관계를 바라던 염원이 과연 훌륭히도 실현되었다. 그분이 바로 스위스 발렌슈타트 본당의 비오 바움가르트너 신부이거니와, 그 우여곡절을 차치하고 과연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손길은 이토록 능하시다.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빼내신 그 능하신 손길로 독수리 날개처럼 바로 지금 여기 나를 거느리시는 것이니! 얼마나 오묘한 노릇인가. 가히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바로 이것이 하느님이시다.

철학의 절대자인 하느님을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스라엘의 하느님으로서 하느님은 파악되어야 한다. 바보스러울수록 – 소화 데세라 성녀가 가르쳐 주신 바대로 – 그리고 사랑할수록 하느님은 파악된다. 여기에는 창준이의 덕이 크다. ‘이해하기 위하여 믿는다’ 라고 했던가. 이해하기 위하여 라는 것이 지적인 이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닐 테지만 이해하기 위하여라 함은 어딘가 석연치 않다. 그래도 그런 대로 아주 잘 이해된다.

 신부님은 우선 경비문제에 대한 여러 가지 궁금증이나 미진했던 사항을 요령 있게 분명히 해 주시고, 내게 흡족하셨다는 사실을 얘기했다. 그리고 수산나와 잘 지내서 참 좋다고도. 정말 이렇게 부담이 없는 분이니 더 바랄 것이 없다. 하느님은 이렇게 나의 염려나 기우를 일소해 주셨다.

 

오늘 받은 은혜 – 각인된 은총 – 는 그러므로 항상 성체 조배를 하라는 것이다.

단순히 예수님 앞에 대좌해서 30분이고 한 시간이고 그냥 보고만 있으라는 것!

 

어제 타자기를 사 주셨다 – 그렇게 갖고 싶었는데 단숨에 해결되다니 너무나 감사할 일이다. 그러나 어떻게?

 

이루마 아주머니가 바람막이 자켓을 그새 챙기셔서 – 베레나의 솜씨라 한다 – 보내 주셨다. 카스파 씨가 자상한 배려로 발렌슈타트의 지도를 보내 주셨을 때는 정말 놀랐다. 이곳에 와서 내가 이런 편지를 받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한 터였고, 그 지도는 내가 살까 말까 한참 망설이던 그 지도였다(주: Verena, Kasper는 이루마의 조카로 남매간이다).

이 세 사람이 삼위 일체식으로 나와 연결되어 잇는 것 같아 재미있다. 고맙다. 정말 고맙다. 나는 이렇게 받기만 하는구나.

말리스의 어머니가 담배를 한 보루. 감사드린다. 며칠 전에는 두 갑을 주셨었지. 군인 부대 근처의 상점 영감님이 담배를 한 갑 주셔서 또 놀랍다. 스터이브산트(주: 담배이름)를 찾자 1,60 프랑이라고 한다. 1,80 프랑으로 오르지 않았느냐고 하자 자기는 1,60프랑 할 때 사 놓았으므로 그렇게 판다는 것이다. 참 듣던 중 희한한 일이다. 이게 원안 原案이건만! 참 놀라운 영감님이다. 그리고 내가 첫 미사 손님인 것을 알자 그냥 가지라고!

 

 

1975년 3월 28일 성금요일

예수님, 오후 3시에 돌아가셨다!

– 무릎을 꿇고 조배합시다 –

그분은 돌아가시면서 내게 큰 선물을 주셨다. 어제에 이어 꿈같은 일이다! 내 죄를 말끔히 씻어 주신 것이다. Bu B feier – 우리 말로는 공동 고백 – 에 참여케 하셔서 나의 가장 무거운 죄 – 죄가 무엇인지 이제 조금 알겠다. 즉 나를 사랑하시어 애타게 부르시는 하느님이신 그분에게 등을 돌리는 것,  그분의 호의와 아버지다운 배려를 거부하고, 그분의 미소 띤 수심 어린 얼굴에 침을 뱉는 것이다 – 를 순식간에 지워 주시고 다시 깨끗하고 순수하게 해 주셔서 당신과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시고 나아가나를 살려 주셨다. 정위치 正位置를 잡게 해 주셨다. 이제 나는 그 위치에서 이탈되지 않게 조심해야 되고, 그렇게 고마우신 벗! 예수께 항상 마음을 드려야 한다. 그것은 강압이 아니고 가장 즐겁고 신나는 일이다!

 

바움가르트너 신부, 놀라운 분이다. 이런 분을 만나게 해 주신 하느님께 정말 감사드린다. 이 성주간에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내게 무엇인가를 시사하시려고 주신 선물이다.

아까 8시 두 번째 공동 고백을 마치고 곧바로 – 얼마나 피곤하셨을까 – 타이프에 정신 없는 내게 오셨다. 그리고는 두 번째 공동 고백에도 사람들이 가득 찼다고 기뻐하셨다. 그리고는 맥주 한 병으로 연대 일치를 위해서 반씩 마시자고 하셨다. 이건 예삿일 같지만 보통 비범한 인격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다. 나와의 일치를 위해! 그리고 “우리가 싸우지 않는 이상 다음 첫 미사 (주: 사제품을 받은 후 드리는 첫 번째 미사) 는 너하고 하게 되겠다”고 농담을 하신다.

이건 나를 극진히 생각하시는 표시며, 무엇보다 인격적 대등 – 그것이 그리스도가 오늘 돌아가시면서 사랑과 화해의 기운을 듬뿍 주신 은총 속에서임은 말할 필요가 없거니와, 참으로 이리하여 나는 성교회의 최심 最深 축일을 뜻 깊게 보낼 수 있었으며, 지금까지 이런 일이 없었다! – 을 전제하시는 표시다.

너무나 고맙다! 얼마나 피곤하실까? 잠시 누울 틈도 없이 계속 사랑을 연구하여 퍼내 주어야 한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타이프에 머리가 반쯤 뻐개지는 듯하여 그 기분에 즉시 동조할 수 없었다. 그분은 일찍 자련다고 방으로 돌아가셨다.

이것이 사제의 생활이다. 사제의 중요한 진면목 중 하나다. 많은 이에게 기쁨과 평화와 용기를 준 후, 성당불을 끄고 문을 잠그고는 홀로 터덜터덜 텅 빈 사제관으로 돌아온다. 초저녁이라 하나 둘레는 벌써 어둑어둑해지고 스산하다. 때를 맞춘 듯 짓궂은 진눈깨비가 내리니 정신이 아스라해지고 으슬으슬 한기마저 느낀다. 이것이 사제이다. 외롭고 고독하다. 캄캄한 사제관, 반겨 주는 이가 하나 없다. 그가 진정한 사제라면 더욱 그렇다. 토르시의 본당 신부도 그랬다. 그러나 진정 그는 외롭고 고독할까?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이제 자신 있게 대답한다. 그 근거는 참으로 충분하다 – 오늘 예수님은 사랑을 주시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 바울로가 말씀하신 십자가의 어리석음이다!

진정한 사제라면 외롭지 않을 것이다. 혼자서라도 고독할 리 없다. 가장 신실 信實 한 평생의 반려 – 예수님 – 가 있으므로!

많은 신부들은 이런 것에 약해져서 사제다운 사제이기를 주저하고 그만 타협해 버리는 예를 수도 없이 보거니와, 이런 것들은 아직 사제이지 않은 내게는 무서운 사실이다. 불행하고 비참해진다. 그들은 더 이상 기쁘지도 않고, 자기의 생은 실패였다고 씁쓸한 후회만 삼킨다. 이미 때는 늦었고, 회복을 도모하기에는 너무나 용기가 없는 것이다.

 

바움가르트너 신부는 “나의 성당은 아주 좋은 성당이오” “나의 본당은 아주 좋은 본당이오” 라고 말할 수 있는 사제다운 사제이다. 이런 분 같으면 평생을 걸고 사제직 을 탐해 볼 만하다! 얼마 전 나는 어떤 영화를 보고 ‘저런 여성 같으면 평생을 걸어도 조금도 아까울 것 같지 않다’ 고 썼지만 이런 경우의 사제직은 너무나 좋고도 갑진 것이다. 너무나도 값지다!

 본당 신부 바움가르트너 – 그는 참으로 열린 마음의 소유자다. ‘열린 마음’ 이란 한 사람의 인격이고, 덕이고, 성덕이다. 아버지도 그렇게 근엄한 외표 속에서 참으로 열린 마음의 소유자였다. 보로스 (주: 헝가리 신학자 1927 – )는 짜증내지 않고 매사에 감사하는 열린 마음이야말로 사람의 사람됨이요, 인간 성취의 최고 형태라 했거니와, 이는 전혀 과정이 없는 옳은 말이다. 나의 왜소한 삶과 굳어진 표정을 봐도 그것이 얼마나 귀한 것이고 참된 덕인지 명백하지 않은가! 그가 복사들과 예절 연습을 마치고 껄껄 웃으면서 같이 걸어오는 모습을 보라. 차를 몰고 가면서 빠짐없이 신호하고, 후딱 방향을 바꾸는 모습을 보라. 그리고 그가 내게 대하는 태도와 마음 가짐을 보라. 그는 내게서 ‘나 이상’을 전혀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그는 달리(Dali)(주: 스페인의 초현실파 화가)의 그림을 가지고 묵상하면서, 오늘의 공동 고백을 아무도 모르는 중에 피눈물 나게 준비했다. 그의 삶이 그렇기에, 그가 열린 마음의 소유자이기에…

그가 양로원의 불쌍한 노인과 껄껄 웃으며 목청을 높여 얘기하는 모습, 그리고 엊저녁 누가 죽었다는 통보를 받고 하얗게 질린 모습으로 즉시 차를 몰고 나가던 모습. 그가 얼마만한 열성으로 새벽 6시에 병원에 가서 미사를 드리는지, 그리고 병자를 찾아가 침대마다 돌아다니며 얘기를 나누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도 그가 맥주 집에 앉아 껄껄 웃으면서 담소하는 모습을 보라. 동네 처녀 복남이, 순자, 누구든지 그와 친구처럼 지내는 것을 보라!

그가 어떠한 열성으로 안 신부의 첫 미사를 준비하는지, 신자들이ㅡ 기도를 써 가지고 – 이번에는 어린이의 마음이 되어서 – 곧바로 등사를 하고, 안 신부의 사진을 신문에 내고, 신자들에게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강조하며 그렇게 정성들여 십자가를 준비하는 것을 보라!

 

본당 신부 바움가르트너, 그는 참으로 발렌슈타트의 본당 신부인 것이다. 발렌슈타트는 ‘그의 본당’이다. 그가 토르시의 본당 신부 같은 열정으로 자기 구역과 구역민을 사랑하는 것을 보았느냐!

 

이것이 본당 신부인 것이다. 이것이 사제인 것이다.

 

이것이 이 성 주간 – 특히 오늘 금요일, 돌아가신 예수님이 내 죄를 사함과 동시에 주신 믿을 수 없는 정녕 지고의 선물이다.

 

 

 

 

 

당신께 밖에는

 

 

1975년 4월 10일 木

훠콜라레 의 음악회에 갔었다. 그 분위기는 나를 압도하였고,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느끼게 해 주었다.

 

그런 훌륭하고 고상한 인격들이 있다는 사실이 내게 크나큰 용기를 주었다. 이런 기회를 왜 하느님이 내게 주셨는지 잘 살펴 살아야 할 것이다.

 

오전에 시내에 나갔다가 고백성사를 보았다.

1. 그런 기회를 우선 철저히 피할 것이며,

2. 그리스도의 도움을 구해야 할 것이라고.

 

오후에 산책을 나갔다가 돌아왔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산다는 것, 그 밝고 기쁜 생활을 오늘 본 것이다. 그들의 내게 준 것, 한국에서의 훠콜라레가 준 것과 동일하다. 문제는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 내 것으로 하느냐에 달렸다. 하느님은 항상 주신다. 지금 새삼 주신 게 아니다.

 

 

 

1975년 4월 11일 金

생일이다.

스물여덟, 감상에 젖을 필요는 없다.

미사를 못한 지 여러 날이다. 오늘까지도!

영화를 보았다. 영화 속의 스티브 맥퀸. 사 邪 없이 할 일을 하고는 할 일을 했을 뿐이라는 담담한 모습. 멋있었다. 이게 사실 원안 原案일 터인데, 이러기가 얼마나 어려운 세상인가.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 또 하나 내게 중요한 것이다.

 

 

1975년 5월 6일

<성신학보>를 받고는 참으로 뭉클해지는 무한한 감회를 누를 길 없었다.

짧지 않은 1년 남짓한 이곳의 생활. 지금 이 순간만큼 내 고향, 내 모습이 어린 상념에 진하게 접한 적이 없다.

그것은 내가 생활한 산지 産地의 얼과 공기와 손때가, 그 아름다움과 쓰라림이 그대로 가득 묻어 있는 나의 모습 그대로인 것이다.

점점 뻣뻣해지는 신경과 무서운 불감증에 이젠 형용사도 많이 잊어 버렸다.

 

 

1975년 5월 10일 土

쓰고 보니 금효의 생일이다. 지극한 곤경 속에 있는 그녀에게 아무런 지원도 기도도 하지 않은 채 무료하게 하루가 흘러갔다. 일기를 계속 쓰지 않는 것이 벌써 그 언젠가. 요즈음은 그야말로 탈진된 채 숨만 쉴 뿐, 사는 게 아니다.

그 동안 나는 하느님을 찾지 않았다. 가장 큰 원인이 이것에 있음은 너무도 뚜렷하다. 그분이 내게 힘을 주지 않으니 나는 아무것도, 한 걸음도 옳게 내디딜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매일 생활의 뚜렷한 주도권을 찾아 거머쥐어야 한다.

미사, 아침 식사, 강의, 점심 식사, 산책, 낮잠, 공부, 간식, 저녁 식사, 뉴스. 이 모든 것의 주도권을 강하게 쥐어야 한다. 금효의 일은 하느님께 맡겨야 한다.

그 일이 특히 부담이 되는 것은 빅토리아 씨 말대로 선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큰 혼란을 일으켜 부담을 배가시키고 있다. 하루 중에서도 문득 이 생각이 떠오르면 아, 어떻게 내가 데려올 수 없을까 하는 생각에 모든 힘이 다 빠져버린다.

참으로 큰 문제다! 힘, 힘, 힘!

 

 

1975년 5월 11일 日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께 달아듭니다. 당신께 달아들게 해 주십시오. 그 마지막의 가는 한 오리가 실을 팽팽히 당겨 주십시오. 그렇지 못하면 내게는 죽음이기에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당신께로 당겨 주십시오. 당신을 향하는 마지막 시선, 그것이 제 생명선이라는 것을 항시 일깨워 주십시오. 그것밖에 저는 할 일이 없습니다.

 

지극한 와중에서

지극한 혼돈 – 그 엉키어짐 속에서도

그것만은 잃지 말게 하소서

절대 끊지 마소서.

 

다시 한번 돌이켜 당신을 쳐다보게 하십시오. 온갖 것은 당신이 하시는 것. 어둠의 절벽에 선 그 순간, 당신을 돌아보고 가냘픈 한숨을 몰아 쉬게 하십시오.

그 순간이 제게 죽음이게 마옵시고 다시금 당신을 우러르게 하십시오. 극진한 찬미가는 제가 못하는 것, 당신을 기릴 수도 저는 없습니다. 오로지 당신을 의식하게 해 주십시오.

당신이 얼마나 아름다우신지, 얼마나 크신 사랑인지 그것은 제가 헤아리지 못하는 것. 오직 그 돌아보는 한 가닥 시선, 그 가냘픈 올실, 그것을 끊지 말아 주십시오. 그것을 잃지 말게 해 주십시오. 이 어둠의 순간 한 번 더 당신을 생각하게 쳐다보게 하십시오.

 

 

1975년 5월 22일

– 순수.

– 안락함, 편안함을 경계.

자신에게 철저하고, 모범이 되지 않고서야.

약자, 고통 받는 이, 상대방을 이해한다는 것!

그들과 하나라는 것!

무서운 그 힘!

 

 

 

 

교회적이 아닌 신부

 

 

1975년 5월 26일 月

조금 전 학교에 갔다 오다가 생각난 것. 우리는 이곳 학생들보다 우선 공부하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많아야 한다. 실제에 있어서 3배는 많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선진의 고급 문화 – 그 질보다 풍요한 외적 문명 – 의 매력, 선망 때문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공부하는 이곳 학생들보다 오히려 공부하는 시간마저 적다.

 

집에 와서 계속 생각난 것.

나는 절대 고독을 한껏 회피하고 있다.

첫 학기에는 이 절대 고독과의 투쟁뿐이었는데… L 선생의 옛날 편지 한 구절, “철저한 자기 추구 없이는 어려워요.”

 

‘절대적인 고독’이야말로 이곳 생활의 요체다.

– 요체란 무엇인가? 빠질 수 없는 근본 요소를 말한다.

– 전부란 무엇인가? 절대다.

 

 

1975년 6월 3일

롯터 교수 (주: 인스브루크 신학교 교수)가 새로 냈다는 윤리 책을 사서 책장에 꽂다가 재미있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는 그분에게 직접 배운 일도 없고 시험을 치르지도 않았으나 좋은 비유가 될 듯하다. 그분을 잘 안다. 현재 인스브루크 대학 윤리 주임 교수이고, 학장이다.

결론부터 말해 몇 권 없는 내 책장에 새로 들어온 이 책은 전혀 존재도 없는 듯 보인다. 하물며 연구소에 꽂혀 있는 그 모습이며 나아가 도서관 또는 서적 목록 중 하나일 그 책을 연상해 본다.

참으로 눈에 띄지도 않는다.

 

그런데 교수란 무엇인가.

그건 내게 참으로 절대다. 나의 전생활, 내 전부를 바치며 나는 거기에 매달리고 있다. 그들은 애게 참으로 위대하다. 어떻게 저런 사람은 저렇게 훌륭히도 사태를 파악할 수 있단 말인가.

 

위의 토막 둘을 합쳐 보면 나오는 명확한 결론인즉 내게 그렇게 절대로 부각되는 것이 실은 참으로 하잘 것 없는 쌓인 먼지 위에 또 하나의 먼지일 뿐이란 사실이다.

이것은 엄청난 사실이다.

교수의 저서 한 권, 그 교수, 그 학문, 학문 전체, 인생, 이 도식이 내게는 절대로 보이나 기실 아무것도 아니라는 무서운 사실이다. 이 내용은 아까 본 <희랍인 조르바>의 주세인 ‘제행무상, 공수래공수거’ 나아가 ‘여상 如常’과도 잘 부합되어 잠시 숙연해졌었다.

 

그런데 여기서 붓을 멈추고 싶지 않은 충동은 또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아버지와 오경웅 선생이 밝힌 바 있는 불교와 그리스도교와의 차이인 것이다. “불교는 주어 없는 장엄한 수식어의 나열이다” 하고 오 박사는 밝혔다.

 

모든 것이 다 망가지고, 자기와 세상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 명백해진 그 순간, 오늘 영화의 그 두 사람이 춤을 추던 행위는 무엇을 나타내는가. 그것은 그렇지 않고서는 못 산다는 인간의 절망적인 너털웃음일 뿐인가?

 

 

그럴 것 같지는 않다. 그럴 수야 없다. 그렇지 않다고 믿고 싶다.

 

롯터 교수의 그 저서도 참으로 해변 백사장의 한 알 모래인 것이고, 영화의 주인공이 그 모든 엄청난 허구에 좌절되나 이 현실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한 마디로 모든 것이 이제 허구임이 밝혀진 이 순간, 그들은 이제 사태를 정확히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야 깨끗해진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엄청난 종교적 허구도 서구의 문화라는 허울도 씻겨 나가고 오직 있는 그대로의 적나라한 세상이 펼쳐진 것이다.

 

참으로 ‘아무것도 아니면서 그대로 하는’ 이 엄청난 진리는 새로운 개안 開眼이다. 이것이야말로 참된 종교의 내용이며, 문화의 진면목일 것이다. 본 회퍼가 말한 ‘세계의 성숙화’는 이와도 일치한다. 이제 비로소 운위될 수 있는 신 Gott, 그런 신이야말로 진짜 신이다.

본 회퍼의 이 이야기는 나의 불안을 해소시켜 준다.

이 영역까지 들어와야 비로소 제대로 인생을 살았다 할 수 있지 않을까?

치셤 신부의 인생도 이런 의미에서 참된 인생이 된다.

 

뮐슈타이거 교수의 세미나에서 논문 발표를 했다. 내용을 충분히 잘 숙지하고 있지는 못했으나 하면 된다는 용기를 심어 주기에 충분하였다.

 

 

1975년 6월 5일 木

훙거부르크로 가는 길로 산책을 나왔다.

나는 사제의 길을 택하기를 참 잘한 것 같다. 어느 특정한 누구 가 아니라 나는 삶과 그 삶을 누리는 형형 색색의 사람들을 무한히 사랑한다 – 이는 신학교 교과서의 조목과 다를 수도 있다.

그리고 가난하고 병들고 어려움 사람을 깊이 동정한다. 그리고 문학과 문학의 세계를 사랑한다. 그리고 하느님을 알고 있다.

 

나는 사제가 되려 하기를 참 잘했다고 생각하며, 그 길을 걷게 하시는 주께 참으로 감사한다.

그런데 신학서와 문학서의 관계 – 그 둘이 전개하는 바의 세계를 포함해서 – 는 어떤 것일까?

 

신학서 – 학문, 무미, 메마름, 의무…

문학서 – 인생, 풍부, 예측 못 함…

 

둘은 많은 공통점을 가졌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퍽 이질적이다.

이는 이제까지의 내 경우를 보아 더욱 확실해진다. 문학의 그 폭넓은 사상 事象 에 같이 울고 몸을 떨었건만 계속 허전함은 웬 까닭이었을까?

결국 자신을 형성하는 – 그 기초와 골격은 문학이 줄 수 없는 것. 문학은 분위기이고 형용사이다 – 여기에 만족할 수도 있을 것이나 결코 주체나 주어는 될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므로 철학, 신학을 보다 구체적이고 체계적으로 해야 할 필연이 있는 것이다.

 

 

1975년 6월 17일 火

신부는 (신부뿐 아니라 인간은) 본 회퍼가 말한 대로 단지 교회적이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자멸의 길이다. 신부는 ‘인간적으로 사회적’이어야 한다. 이것은 사회의 모든 구석을 샅샅이 체험해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과는 비슷하면서도 상당히 다른 뉘앙스를 풍긴다.

신부가 인간적이고 사회적이어야 한다 함은 가장 착하고, 가장 인간적으로 성숙하고, 사나이다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거다. 가장 착하고, 불의에 강하고, 아랫사람이나 약한 사람을 위하고 윗사람에게는 강해야 하는 것이 사나이다움이다.

이 시대에 부족한 점이 무엇인지, 본질의 궤도에서 어떻게 벗어나 달리고 있는지를 예언자적으로 간파해서 그 부족한 점을 메꾸는 동시에 그 점을 참되게 깨우쳐 줘야 한다. 그 점에서 선봉이 되어야 한다. 따지고 보면 시대를 막론하고 인간 역사는 공통된 모습이고, 이에 의한 임무라는 것도 공통되는 것일 것이다.

즉 ‘본질에의 충실’이다. 사람의 능력은 한정돼 있어서 그 일정량의 능력의 방향을 잘 잡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것을 본질에도, 한편으로는 사 邪 와 이기 에로도 쏟을 수 있다.

그간의 생활에서 이 대명제의 실현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절감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계속 본질로만 내딛는 사람 몇을 알고 있고, 그들과의 사귐이 내게는 둘도 없는 기쁨인 동시에 커다란 힘이다.

L 선생, 아버지, 그리고 정리가 잘 안 된 것 같은 누나.

이들은 얼마나 보람되게 주어진 삶을 알차게 살고, 살아가는지!

이들이 한결같이 내게 부는 교훈 – <희랍인 조르바>의 결론과도 같거니와 – 인생은 결코 뜬구름 같이 환상적이 아니라는 것. 그것은 그리 아름다울 것도 신기할 것도 없다는 것! 원래가 그런 것을, 어리석은 무명 無明에 사로잡힌 인간은 이를 제대로 못 보고 속기를 거듭하고 있다. 카뮈의 얘기도 이럴 것이다.

 

인생을 산다는 것은 모래 알을 씹는 것과 같으나 조용히 살아가는 거다. 그 근거는 나를 완전히 맡겨 버릴 수 있는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 본 회퍼가 말한 무력한 예수가 있으므로.

 

내가 신부가 되어 (무엇이 되건 그건 이차적이다) 그 이름이 가리키는 대로 봉사를 해야 할 때 위의 명제를 그대로 보여 주는 것이 유일한 길일 것이다. 교회적이 아니라 착하고 사나이답게, 선비답게 사는 것뿐이다. 그러나 참으로 어려운 일이므로 나는 그렇게 살고 있는 이들을 그렇지 못한 신부들보다 훨씬 존경하고 높이 평가하는 것이다.

금효 편지를 받았다. 여러 가지 서류와 사진도 함께. 불쌍한 내 동생 금효.

또박또박 쓴 낯익은 글씨의 커다란 편지 봉투 위에 사진을 올려 놓았다.

거기에 나타나 있는 금효, 큰 봉투와 균형 잡히지 않은 모가 진 글씨체위의 그 얼굴 – 아, 그것은 금효의 전부를 보여 주고 있다. 많이 말랐다. 그러면서도 미소를 지어 보이려다가 오히려 서글픈 얼굴을 한 금효. 눈물겹도록 안쓰러워진다.

사는 게 무엇인데, 그래도 살아야 한다고 그런 엄청난 좌절 속에서 여기 이 투쟁뿐인 이곳으로 오겠노라고?

사는 게 이런 것이라는 걸, 죽는 것보다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겠지.

아, 금효야, 너의 전부를 부서져라 감싸 안아 주고 싶다. 내 전부를 네게 주겠다. 내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내 살을 잘라 주어서라도 네가 마음에서부터 웃는 모습을 보아야겠다. 굳세게 살아다오. 너는 어떤 운명이길래 이리도 용렬하고 무력하고 엄청난 좌절을 겪어야 하는가? 결혼, 남편의 죽음, 죽음보다 오히려 더욱 혹독한 시련. 그리고 목표가 없는 그 무서움을 너는 몸에 배이게 갖고 있다. 갖지 않았으면 좋을 것을 너는 지니고 있다! 내 너를 무슨 일이 있더라도 충심으로 웃을 수 있게 하련다. 두고 보아라, 금효야.

이것은 도저히 맑은 정신으로는 쓸 수 없는 걷잡을 수 없는 분노다. 나의 절규다. 이때처럼 금효가, 그의 엄청난 허무가 내 전신을 휘감아 싼 적은 없다.

 

 

1975년 6월 끝날

이렇게 사경을 이르러서야, 아직도 덜 깬 정신으로 “주여, 내 주여, 나의 모든 것이고 생명이신 주요” 라고 외쳐봅니다. 아직도 방자한 술 냄새가 풍기는 채로 당신께 밖에 저의 살길은 없는 듯하여 이렇게 미흡한 정성으로 글월을 드립니다. 그러나 아직도 뉘우치는 마음은 진정이 아니옵고 사뭇 사 邪 함이 절반이나 섞인 채로입니다.

언젠가 당신의 귀여운 자녀였던 시절, 어머니가 읽어 주신 당신의 이야기. 탕자를 전심으로 받아 주셨다는 못 믿을 그 이야기!

그 동안 저는 무엇을 하였는지, 제 썩은 고름이 얼마나 악취를 풍기고 있는지. 그러나 아직도 아니라고 부정하며, 헛 주먹을 빈 공중에 휘두르기를 일삼으면서 미련스러움은 그저 그쪽으로만 가고 있는 체입니다만 문득 당신이 아스라한 추억으로 떠오릅니다.

내 인자한 아버지신 주여, 나뿐 아니라 모든 이의 근원이신 주여, 아우구스티노의 방자와 바울로의 열혈도 저는 지니지 못하였고, 9척 높은 담 속의 푸른 수의의 수인만치도 모질지 못한 채 그렁저렁 당신을 생각하는 듯 하다가도 몸은 취기에서 깨어나 본 적이 없는 저!

 

 

 

 

공산주의에 대하여

 

 

1975년 7월 19일

오늘은 할머니 기일이라 저녁에 성니콜라우스 성당에 가서 미사에 참여했다.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했다.

 

세계적으로 공산주의가 득세하고 민주 자본주의가 점점 궁지에 몰리는 현상에 대하여:

아시아, 아프리카, 구라파의 현금의 정치 사회 현상을 보면 최근 이런 경향이 점차 농후해짐을 알 수 있다.

아시아: 월남, 캄보디아의 자본주의의 몰락. 중공의 세력에 스스로 굴복하는 태국, 필리핀, 말레이지아, 공산 북한의 위협. 일촉 즉발 위기하의 민주 남한.

아프리카: 신생의 이 지역은 이제까지의 수탈 상태에서 벗어나게 되자 (아니 벗어나야 되겠기에) 공산주의에로 쏠림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구라파: 포르투갈, 스페인, 이태리의 경우. 얼마 전 오지리 브레켄츠에서의 데모.

 

이렇게 구체적 사례를 열거해 보면 현금의 사태의 면모가 뚜렷이 드러난다. 그것은 세계라는 인류 역사의 차원에서 설명해야 하리라. 이 현상은 공산주의가 이념적으로는 민주주의(차라리 자본주의) 보다 월등히 나으나 실은 인류에 공헌하기보다 서구 민주 자본주의의 타락과 자멸의 상태를 초래한다는 점이다. 아시아나 아프리카에서 민도가 낮고 가난한 나라는 바로 그 이유 자체로 자연히 이제까지의 수탈국이었던 민주 세력에 대해 지독한 혐오를 가져 공산주의로 향한다.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다. 그리고 구라파에서의 현상도 민주 자본주의 세력에 결탁된 보수 – 우익에의 반발이다.

공산: 사회주의, 좌익, 진보 (전체대중 – 무교회, 개신교)

민주: 자본주의, 우익, 보수 (특권층 – 교회, 로마 가톨릭)

2차 대전 이후 세계사를 주름답던 민주 자본주의는 ‘보수주의’로 대체되어 정의될 수 있는 점이 확연하다. 즉 ‘반복’을 그 특징으로 하는 (변증법적 종합이랄 수도 있다) 역사의 흐름에 옛 것이 가고 새 것이 등장 – 서서히 그러나 때로 전쟁, 혁명의 극단 방법을 병행해서 – 하는 ‘반 反’의 장 場 이 펼쳐지는 것이다.

 

왜 인간은 독같이 오류를 알고도 모르는 척 범하는 것일까? 소수의 고매한 정신의 인간임을 보여 주는 위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 간다, 롤랑 등 – 전체 대중은 아랑곳없이 동물 인간일 뿐이다.

 

인간은 무엇이길래? (신학, 철학을 동원하며 오히려 현상에서 어긋나는 투명 인간만을 알 수 있을 뿐.)

인간 = 동물 80% + 정신 20% (동물보다 훨씬 악덕하다). 20% 의지력으로 수많은 인간을 같이 끌어들일 수 있으므로.

인간 – 그의 삶은 1회적이다. 그러므로 절대적이다(죽음과의 대비에서).

기원 1세기의 예수, 300년 경의 아우구스티노가 신국 神國을 쓰고, 토마스 모어가 유토피아를 썼지만 대중은 아랑곳없이 여전히 동물을 극할 뿐이다.

그러나 다시 한번 인간이 무엇인가? 정말 그것뿐인가? 변천하는 반복의 역사 뒤에 불변의 공약수는 무엇일까? (그렇지 않을 가능성의 추출을 위해서)

우선 이론적으로 논리가 설 수 있다.

부자의 논리를 답습하지 않는다면, 모두 잘 살기를 실현시키려 한다면 ‘한계, 절제’를 지켜야 한다. (80% 동물인 인간으로 볼 때 이것이 어렵고, 문제다!).

 

이러한 가능성을 뒷받침하고 개화 개화 시키려는 노력 중의 하나가 ‘종교’이다.

종교의 자리가 과연 여기일지 논란될 수 있겠으나 보는 관점으로 – 이 관점이 일회적 一回的 인간인 우리에게 가장 실감이 난다 – 충분히 가능한 얘기다. 그리고 현세 구원의 이론으로 종교를 이해하는 경향이 당연한 일로서 각광받고 있다. 결국 분리될 수 없는 동일원리의 한 면으로서 ‘종교의 사회적 성격’이란 측면에서.

 

실제로 이 사회적 측면이 현재의 우리에게 가장 크게 부각되고 있음이 솔직하고 정직한 이야기다. 반드시 그래야 한다! 결국 한 측면의 강조는 무상이라는 인생의 인간성을 상기시켜 참으로 역사 속의 유한한 인간을 되새기게 한다. 그러나 사실을 파악했으면 전폭적으로 긍정, 솔직히 인정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의 시도이다.

 

현실적인 종교 비판.

 

‘바로크 성당’

– 낡은 금장식이 두껍게 장식되어 있는 내부 :  아기 천사가 구름을 타고 나팔을 불고 있고, 베드로 성인이 몽둥이를 들고 서있다.

– 마사를 집전하는 늙은 신부 : 머리는 아주 희고 목소리는 아직 그래도 카랑카랑하다. 마이크 장치가 있으나 정신을 집중하지 않으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 참석하는 신자: 늙은 할머니 십여 명이 참석자의 거의 전부다. 때로 이들이 미사 전후에 합송으로 하는 로사리오 기도는 유령의 바람 소리 비슷하다.

‘로마 교황청’

– 가톨릭 총 본산. 거대한 집단이다. 좀 체로 걷기를 싫어한다. 양 옆으로는 자동차가, 오토바이가 쌩쌩 달려가는데 이것은 걷기도 힘들어 한다. 하긴 몸통이 너무 크다.

 

‘성직자’

– 굶어 죽는 사람과는 아랑곳없고, 시대의 성인도 아니다. 전문 직업. 비교적 노동에 비해 보수가 좋은 편이고 주위에 늙은이, 과부 몇 씩은 존경을 드리고 있는 모습도 눈에 띈다.

 

 

1975년 7월 29일 火

잘츠부르크는 인스브루크보다 더 아름답다고 해서 전부터 한 번 보고 싶어하던 도시였다.

그래서 엊그제 마침내 가볍고 즐거운 마음으로 인스브루크를 출발, 이곳에 도착하였다.

아름답다는 잘츠부르크와 관광객들 – 이들은 아름답고 오지리적인 잘츠부르크를 더럽고 야비한 구둣발로 짓밟고 있었다. 나는 내 자신이 이들 속물 중 하나이기를 도저히 허락할 수 없었다. 아, 그 요란한 쇼윈도의 분수 넘치는 유객술과 그걸 마냥 좋다고 쳐다 보는 관광객들.

 

 

1975년 7월 30일

‘사람은 배가 좀 고프고, 걱정거리가 있고, 어려움 속에서라야만 세상을 바로 볼 수 있다.’ 오후 8시 반.

 

 

1975년 8월 9일 土

어제 샤안에 오후 7시 착. 카스파 씨가 휄드킬흐 (주: 오지리 지명)에서 일부러 왔다. 예의 산책을 같이 하자고!

항상 지속되는 친절과 세심한 배려!

등산화와 바람막이 자켓 선물 – 등산 도중에도 그렇게 배려 깊을 수가 없었다. 이루마 아주머니가 륙색을 줬다. 그렇게 준비하려 하던 도구들이 갑자기 진짜로 갖춰졌다.

 

 

1975년 8월 10일 日

샤안에서 9시 미사. 점심. 베레나, 카스파의 어머니 아네미. 그 후 베레나의 호의로 성게롤드에 갔다. 너무 고맙고 좋은 베레나. 저녁을 그 집에서 호식. “당신은 친척이 아닌 첫 손님입니다” 라는 말에는 참으로 감사!

 

 

1975년 8월 11일

타미나 슐라흐트. 지옥 같은 심연

이루마 아주머니의 가없는 사랑.

퓨퍼의 사회 사업 일도 고된 것이겠는데…

 

 

1975년 8월 12일 火

발렌슈타트! 내 은인 본당에 와 있다.

쓸 것들이 무척 많은 나날이 계속되었는데도 거의 못 쓰고 있다.

 

 

1975년 9월 12일 – 11월 15일

이 신선한 가을, 알알이 들어박힌 공기 알맹이.

 

빈에서, 부식 형 아들, 세례를 받다.

 

추기경님 뵈오러 뮌헨으로 가다.

 

 

1975년 11월 6일  永遠 속의,  세상의 시각 (주: 그림과 함께)

 

꿈이다, 이건 분명 꿈이다.

아니면, 아니, 꿈은 아니다. 天上을 맛 본거다.

龍宮에 다녀온거다.

그렇다. 거기에는 地上이라곤 그림자도 없었다.

모든 게 透明하고 밝게 맑았다. 드높은 푸르름뿐이었다.

나는 거기서 하느님의 얼굴을, 성 마리아의 玉聲 을 들었다. 天使들의 날개 소리 치맛자락 소리도 들었다.

그곳에서 나는 피곤하게 초라한 나를 보았다. 그 絶對 속에서의 나~ 아! 먼지 티끌도 아니었다.

그곳서 내려다보이는 地上 두껍고 완벽한 구름 층 밑에 아마도 있기는 있을 그 세상 – 모두들 어리석음을 뽐내며 첨단을 내걷노라 할 것이었다.

야곱이 꿈 중에 뵈운 天上이 네게 보인 건 웬 까닭일까?

 

 

1975년 11월 16일

마침내 추기경님을 뵙다.

김 추기경님 – ‘나의 주교님’으로서의 의미.

내가 그분을 사랑함보다 그분이 나를 더 사랑하시는 것이었다.

하느님의 사랑, 부모의 사랑, 아랫사람 사랑.

역시 큰 어른 – 깊은 영성, 시국관 -> 인격

많이 배웠다. 아주 중요한 것을.

정말 내가 필요로 하는 것과 알고 싶던 것을!

기도하는 법 – 마음을 비워 드림

(3 시간을 버팀)의 의미, 비밀.

현대는 영성을 갈구한다.

 

 

 

 

미사 보는 사람

 

 

1975년 12월 2일

나는 별제 별제 된 인간이고 싶지 않다.

그냥 가만히 놔둔 그런 완전히 보통사람이고 싶다. 모든 이들의 감시 속에서 – 자신은 엉망으로 감당 못 하면서 – 별나게 고고해야 하고, 사냥한 행동거지, 우아한 품위를 지닌…

모든 이들이 저 아래에서 쳐다보면서 저희들끼리 냉소하며 비웃음과 욕설로 나를 샅샅이 훑어내러 분해하려 한다.

아! 나는 그런 별제된 인간이고 싶지 않다. 무조건, 그렇게 되고 싶지 않다.

엄청난 철학의 이론 – 신학의 체계 – 학문의 상아탑, 한국 교회의 기둥, 서울 교구의 인재.

“장래를 걸고 우리 모두에게 줄 복음을 연구하러 유학갔대. 훌륭히 되어 돌아와서 우리에게 굉장한 걸 줄 거야.”

아! 당장 앞에 다가온 세미나. 그게 도대체 뭐냐?

나는 미사 드리는 사람보다 미사에 참여하는 사람이고 싶다. 내가 하느님을 모르겠다는 것은 아니다. 절대 그런 것과는 상관이 없다. 한 톨 밀알을 조심스레 뿌리고, 조그만 의미를 그냥 혼자서 체득하고 싶은 거다. 가만히 혼자서 하느님을 기리고 싶다는 거다. 아! 나는 조용히 모르면 모른다고, 좋은 건 좋다고, 재미있는 건 재미있다고 하고 싶은데 …. 왜 모르는 것도 아는 것같이 해야 하고, 좋은 것도 내색을 해서는 안 되고, 재미있을 때도 웃으면 안 된다는 건가?

 

 

1975년 12월 7일 대림 2주

생활, 그것보다도 삶의 핵심이 보이는 것 같은 때들.

칼 라너가 은총의 체험, 신비에의 환원이라고 말한 것, 그것은 가장 튼튼한 나의 기초. 그것은 환시나 착각이 아니다.

지극한 혼돈. 앞뒤가 전혀 보이지 않는, 전혀 짐작할 수 없는 생활 속에서 – 그러나 마음이 가라앉으면 보이고야 마는 생활의 기저 基底의 엄연한 틀.

그것은 항상 내 둘레에, 내가 눈만 뜨면 (눈 뜨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내가 손을 벌리기만 하면 (손 내밀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보이는 것, 잡히는 것.

기다림, 희망, 주의 나라의 임하심을 고대하는 것. 지극한 혼돈 속에서 우리를 지탱시켜 주는 그 희망, 결코 요란스럽게 찬란하지 않으면서, 조용히 다스하고 질긴 빛을 내는 그 희망.

 

의미를 받아들임 – 의미는 주어지는 것.

그것을 인정하기 – 받아들이기.

의미를 줌 – 의미는 내 행위 (이웃 사랑)를 통해 내가 만들어야 하는 것.

기왕의 의미 – 항상 지극히 새롭고도 감미로운 것.

신선한 그 회색 빛깔, 이미 있어 우리에게 주어진 의미를 인정하는 것,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얼마나 합리적인지, 실증적인지, 과학적인지, 자연적인지, 인간적인지….

 

 

1976년 1월 18일 새벽 3시

생활 지표.

원래 나는 생각이 복잡한 사람이기 때문에 이것저것 모든 것을 생각하고자 하면 한이 없다 (이제까지의 생활에서 이것이 무자극, 무사고, 비인간화라고 함은 분명하다).

현재 해야 할 것은 교의를 이곳 수준으로 알아 파악하는 것. 나의 졸업 논문을 본 궤도에 올려 놓는 것.

이것을 하려면 무엇보다 모든 정력과 관심사를 한 곳으로만 모아야 하며, 전체적 윤곽과 하루의 계획이 확립되어 있어야 한다.

이것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규칙적인 생활이 유지되어야 하며, 하느님과 계속 대면하면서 살아야 한다(이런 생활이 얼마나 멋있는가 – 등산과 더불어).

 

 

1976년 2월 8일

생활의 청정성 淸淨性, 이것 없이는 되는 일이 없다. 생활이 청정하면 인간에게서 멀어지지 않을까?  인간, 그 따스하고 차갑고 복잡하고 더럽고 위대한 그 인간에게서

 

 

 

 

 

1976년

 

 

부제품

 

 

1976년 3월 30일 火

오랜만에 이 노트를 펴고 무엇인가 적으려 한다. 아무래도 적으면서 나를 정리하는 것이 최선책이리라 싶어졌다.

첸센호프! 첫날을 보내고 지금 둘째 날. 오전 햇볕이 따스하고, 저 앞으로는 노르 케테의 연봉들이 머리에 백설을 인 모습으로 장관을 이루고 있다. 여기 이 첸센호프는 지난 번 피정 때의 그 수도원과는 사뭇 대조적인 분위기다. 커다란 농가처럼 보이는 이곳의 투박한 목조 성당, 가구란 장식이라곤 전혀 없고 금빛의 술을 늘어뜨리는 따위는 상상할 수도 없다. 주위는 밭으로 둘러싸여 흘러 들어오는 거름 냄새, 젖소 냄새가 더욱 소박하고도 차분한 아름다움을 주고 있다.

 

그렇다. 나는 모레 받을 부제품 (주: 사제가 되기 직전의 과정으로 부제가 될 때 각자는 일생 동안 독신으로 봉사할 것을 서약한다)을 준비하고, 그것을 성찰하기 위해 이곳에 와 있다.

요사이 생활의 온갖 혼돈을 모두 떨쳐 버리고, 기도하러 온 것이다. 계속 내 생활을 얽어 매고 있는 거미줄처럼 복잡한 혼란을 여전히 느끼고 있다.

바로 그제까지 연속하여 며칠을 몽땅 같이 지낸 김 양 생각, 슈로프너 세미나, 졸업 논문의 구조, 밀린 편지들, 금효 일, 금요일에 있는 달랍 (주: 인스브루크 대학 교수)의 세미나, 손님이 올까… 이 모든 것이 생활이며, 어둡기 만한 비관적인 것이라고는 볼 수 없으나 그 모든 구조가 나를 거미줄처럼 묶어 버리고 있다.

 

 

지난 번 그렇게 뜻 깊은 피정을 하게 해 준 활크너 신부가 이번에도 나를 지도해 주고자 옆방에 있고, 방금 첫 대화를 마쳤다. 나는 내 처지를 더욱 의식하고자 가장 존경하는 참으로 내 삶 전부의 스승인 두분, 아버님과 최민순 사師 의 사진을 책상 위 눈에 잘 띄는 곳에 놓고 있다. 이렇게 첸센호프와 인스브루크, 134호의 두 세계 중간에 있는 나는 앞으로의 내 삶 – 이제까지 내 삶의 연속이기도 하지만 – 을 결정적으로 확정할 참으로 이제까지 없었던 큰 사건을 눈 앞에 두고 그 뜻을 의식하고자 하는 것이다. 나는 이 사건을 아주 생생하고 실감나는 엄연한 현실로 맞아 들이고자 이를 위한 나로서의 준비를 위해 여기에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님의 도우심이, 그분의 조명이 절대로 필요한 것이다. 그러니 주여! 그렇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당신 뜻대로 하십시오!

 

작년 가을 부제품 副祭品 받을 사람의 명단에 내 이름을 기입할 때부터 나는 이 사건을 어떻게 보고 있었는가? 한마디로 이제까지의 내 삶의 한 연속으로 본다. 내가 지금까지 몸 담아 살아온 이 길, 이 방향에의 고착. 이 사건은 실상 전혀 이질적인 어떤 것으로서가 아니라 나의 이 방향에로의 몸부림에 부과하는 사뭇 자연스러운 진일보의 사건이리라. 이 말을 한 번 더 파헤쳐 본다면 이제껏 내 삶의 여러 양태 –  어두움, 진퇴 유곡, 광명이 비추임, 기쁨, 존재론적 안정, 그 씁쓸함, 자포자기, 울적함, 창피스러움, 자랑스러움 – 속에서 공통적인 한 요소 (최대 공약수라고 할) 라고 보기 때문에, 그 일관된 한 요소가 있음을 알기 때문에 이 방향으로 계속 갈 수가 있음을 느끼고, 이 사건의 이전이나 이후에나 내 삶의 양태는 같은 모양으로 전개될 것임을 알고 있다. 내 삶의 요체인 ‘공약수’란 무엇인가? 그것은 하느님이다. 그것은 하느님의 현존이고 은총의 그느르심이다.

그것은 가장 진정한 내 생의 반려자이며, 그것은 나의 존재를 지탱시키는 절대 유일의 그 무엇이다. 그것은 어떤 것보다도 강하고, 뚜렷하고, 가장 밝은 것이다. 그것은 나의 근원에로의 향수를 족히 해소시켜 주고, 여러 가지 사상에서 발견되는 참으로 모든 것의 근본 바탕이고, 한마디로 내게 가장 ‘확실한 것’ 이다.

그러므로 이제까지의 내 삶이 환각이 아닐진대 그 ‘가장 확실한 것’을 위한 이 길이 내게 가장 확실한 것으로 나타나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다시 한번 말을 바꿔 서 보자. 나는 하느님이 계심을 믿는다. 그리고 그분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음을 계속하여 느껴왔다. 즉 그분을 ‘알아 모시는’ 것이 내 삶인 것이다. 그러기 위한 나의 처신은 신부로서의 삶이며, 그런 방향에로의 움직임이 모레 맞게 될 부제품인 것이다. 그분을 ‘알아 모시기’가 내 생명의 삶에서 가장 ‘중요’하고 ‘확실’한 것이고, 그것을 위해 ‘나는’ 이 길을 가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 ‘내 길’이라면 거기에 요구되는 조건을 채워야 한다는 것은 또한 자명해진다. 그러므로 ‘이것은’ 참으로 자연스러운 것이며, (이질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내 삶 자체이기도 하다.

 

이 서술은 내 현 처지의 분석이다. 종합해 보면 ‘부제품 -> 내 생의 방향 -> 조건을 채움’ 이렇게 된다.

주여, 이런 분석이 우스웁지만 어여삐 보시고 기뻐하십시오.

위의 분석에서 한 가지 빠뜨린 중대한 요소는 그간의 생활 속에서 일관된 나의 추구, 그 속에서 반드시 그분의 손길을, 현존을, 구체적인 도우심을 감지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또한 가장 ‘확실’한 것이며, 나는, 같은 모양으로 전개될 내 앞날에도 그것이 – 내가 허구라고 절규하는 순간 나를 다시 붙잡아 일으켜 주는 – 반드시 있음을 믿는 것이다.

 

앞의 글을 쓴 지 이틀째 되는 오늘 인스브루크로 돌아가기 앞서 나는 앞과는 분명 다른 일종의 체험을 여기 쓰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한마디로 ‘나의 몰각’이다. 즉 나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온통 ‘주님’으로 대체되고, 채워지고, 채워져야 함을 조금 알게 된 것 같다. 감사합니다, 주여.

최민순 신부님은 “님으로 말미암은 이 목숨, 이 사랑 오직 당신 것이오니 도로 받으옵소서” 라고 쓰면서 생을 청산하였고, 아버님은 “나는 날개가 없는 사람, 실족의 화를 면하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 이라고 당신의 삶을 종합한 것과 같은 심정이다.

앞의 글은 온통 ‘나’로 가득 차 있다. ‘내’가 ‘내’ 인생을 사는데 주님이 도와주시고, 그리하여 ‘나’는 주어진 삶을 가장 훌륭히 살 수 있을 것이라 하면서 그것이 사제행일 것이라고 보았다.

그것은 다분히 동양적 – 불교적이다. ‘내’가 깨달아야 하겠다는 … 그런데 주님의 기독교는 어떠한가? 거기에는 완전한 ‘나’의 몰각이 최상이고, 유일한 나의 정위 定位 임이 드러나고, 아예 여기에는 ‘나’의 차원은 사라지고 주님의 차원으로 대체되면서, 그러한 형태로 ‘내’가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은 새로운 ‘나’이고, 진정한 ‘나’이다. 현재의 처지를 가장 잘 요약한 이냐시오의 기도를 보자.

 

영원하신 만물의 주여, 당신의 무한한 자비와 당신의 영광스러운 모친과 천상 세계에 있는 모든 성인 성녀들의 현존에 직면하면서 저 자신을 당신의 총애와 도우심을 힘입어 바치나이다. 당신이 저를 이 삶과 신분에로 선택하시고 받아들이신다면, 온갖 불의와 모욕과 외적이고 정신적인 온갖 가난을 견디어 내는 속에서 당신을 열망하는 것이 당신께 보다 큰 봉사와 찬미가 되는 한에서 제가 이를 원하고 그리워하며 이것이 제가 숙고한 결단이기를 바라나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나를 제물로 주님께 내어 드릴 뿐이라는 사실이다. – 이것마저도 은총의 작용이지만.

참으로 부제품이라는 큰 결정적인 사건 앞에서 내가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것 (그런 결단 – 긍정)은 나의 내적인 투쟁이나 기막히게 쓰라린 내적 고투 끝에 품을 받게 되는 것이 아닌 이상 철저하게, ‘이 결정적인 큰 사건 앞에 완전히 무력하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긍정하는 것뿐이다.’

이 사실은 정말 놀랍고 신기하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냥 땅에 주저앉아 나를 일으켜 세워 데리고 갈 동반자를 대기하는 것뿐이다. 이것은 참으로 인간의 처지로서는 당연한 것이다. 바로 아브라함의 행위 그것이라고 하겠다.

인간은 자기 삶을 자기가 마음대로 조작할 수가 없다. 어떤 제 삼의 요소가 그 인간의 삶을 결정적으로 좌우해 버린다. 약혼을 하고 결혼하는 사람도 앞으로의 자기 삶이 둘의 결합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미지수인 채, 거대하고 어두운 공간으로 투신한다. 거기서 바랄 수 있는 것은 두 사람이 최고의 성실을 보이려 한다는 것뿐, 이미 그 순간 두 사람의 삶 – 인생은 결정된 것이다.

참으로 이 결정적인 사건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전혀 없는 것이다.

이것을 긍정할 수 있는 힘을 선물로 주신 주여, 제 앞으로의 모든 순간을, 제 삶 전체를 가지소서. 그리고 당신이 보내시는 대로 기꺼이 갈 수 있게 하소서.

 

 

1976년 4월 4일 새벽 3시 반

현상 분석

무자극 <-> 무사고 <-> 비인간화

위기 : 점점 침체 (그것을 가볍게 의식하나 그냥 말려 든다). 참신한 기운을 챙겨 볼 여유라곤 전혀 마련 못 한 채!

결정적 고착 : 이것이 한순간의 충동인 것은 아니나 본질만 먹고 살아야 하는 두려움. (본질, 자유, 진리, 고독…)

 

앞으로의 어떠한 구렁과 위기와 패배와 좌절과 실의와 굴욕과 적막이 가로 놓여 있을지 모른다. 복음서에 의지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내 안에서는 이런 식으로 실현된다고 고백하련다.

나는 선택을 했다. 다른 여러 양식 중 내게는 이 양식이 주어졌고, 바로 이것을 받아들였다. 나는 하느님의 사랑을 원하고 믿기 때문에 내가 꿈꾸고 바라던 하느님의 사랑이 충일한 인간 최대의 성숙이 내게는 이런 양식으로 실현됨을 고백하련다.

그러므로 주여, 도와 주십시오. 기도의 채널을 항상 열어 놓아 주십시오.

 

그리고 나는 이 순간을 같이 기도해 주실 여러분을 한 번 더 생각한다.

제일 먼저, 돌아가신 나의 아버지 – 그분은 천국에서 가장 기뻐하시리라.

최민순 신부님.

어머니 – 나의 전부인 어머니, 이 순간을 보소서, 당신 뜻을 주께서 이뤄 주셨나이다.

오기순 사 師, 본당 신부 바움가르트너, 괴치스의 안나 아주머니, 그리고 미국의 글라라 수녀원의 38명의 수녀님들.

 

이 분들을 내가 아는 이상 나의 길은 확고하리라는 믿음이 더욱 든든하다.

주여, 나를 제물로 드립니다.

 

 

1976년 4월 17일 성토요일

이런 밤에는 무어라도 좀 서야 하는데, 분명 쓸 만한데 단도직입적이 되지 않는 건 내 생활이 오염되어 있는 까닭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내 생활의 테두리 안에서 어쩔 수 없는 것이라는 성급한 포기 – 여러 가지 합리적인 이유를 내세우며 – 는 더욱 슬픈 일이다.

 

– 박진 迫眞 하지 못하다.

– 삶은 원래가 그런 것 – 이것을 알고 그 위에서 더욱 박차를 가해야 할 텐데.

 

네게서 청년기는 살져 버렸는가? 아, 아쉽다. 좀더 그 파랗게 반짝이며 뜨거운 눈물 속에,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절망 속에 뒹굴고 싶건만… 그 모든 아름답고 찬란한 것, 그 설레임, 그 수줍음, 그 만용, 그 순수함.

청춘은 아름다워라. 헷세. 그것은 모두 사라져 버렸단 말인가. 이렇게 빨리도!

 

성토요일, 그리고 요즈음 며칠.

나는 무대 위의 배우같이 치밀한 연습으로 살수 없이 배역을 치르기에만 신경을 곤두세웠다.

감독, 연출, 주연 – 신부, 조연 – 나.

Lumen Christi (그리스도의 빛, 부활 전야 미사 때 사제나 부제가 노래하는 구절)를 노래해야 할 때 좀 어색했지만 그건 전혀 큰 문제가 아니었고, 이런 식으로 부제, 나아가 신부, 교회의 사람, 소위 별제된 인간으로 굳어지는 모양이다! 그리고 하루 이틀이 가는 사이 특별히 신경을 쓰지 않고 한 끼 밥을 먹듯이 자연스레 해치우겠지. 그러면서 ‘원래 이런 것이야’ 하면서 날들을 지나 버릴 게다.

 

라너에 대하여 : 칼 라너. 한국에서부터 들은 그의 이름. “그는 정말 얼마나 위대할까… 아, 그런 대 대 신학자를 한 번 멀리서 보기라도 했으면.”

라너의 이론을 공부함 : 그의 관심사 Anliegen, 그의 방법론 (순수 학문적인 의미에서), 그의 출발점 (이냐시오 묵상 – 기묘한 섭리적 일치)은 나의 가슴을 정녕 부풀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칼 라너 : 그에게 배워 가노라면 그의 관심사, 출발점을 알아갈 때 나의 불안, 의문도 가실 것이다.

한국인, 동양인 즉 기독교가 생활의 바탕이 아닌 자가 백지 인간에서 출발하여 자연적으로 삼위 일체의 신까지.

– 실망? 이것은 실망이 아니다.

달랍의 말처럼 ‘실망’ 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의 전부는 역시 순 스콜라적이다. 그 이상일 수는 없다. 아직도 너무나 성급한 결론은 나의 미성숙한 태도이다. 그의 순 인간 운운은 역시 엄청난 전제 위에서이다. 이 전제를 어느 만큼 수긍하느냐가 이제 문제의 전부임이 밝혀졌다.

 

이는 ‘나’라는 것에 가장 자연스레 화합하나 그런 전제 위에서야 만 그런 결론이 나온다는 것은 역시 ‘실망’이 아닌가? 이 전제 없이 출발할 수는 도저히 없는 것인가?

나? 신부? 교회의 사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

첫째로 그걸 원하는 사람에게 강력히 박아 주고, 둘째로 그걸 원치 않거나 모르는 사람에게 가르쳐 주는.

 

질문하는 인간에게서 어찌 자연스레 ‘인간의 은총 입은 본질’이 나온단 말인가?

앞의 항과 연결시켜

 

이런 전제는 나의 삶이다. 맨드라미 씹는 맛, ‘원래 그런 것, 그렇게 되어 있는 것.’ 이런 전제의 전제를 구하기. 이것이 나의 꿈, 청춘이었다.

이제 도저히 그것을 구한다는 것은 진퇴유곡임이 밝혀졌다.

그리하여 다시 한 번 처지지 않고 참다운 뜻에서 박진하기.

 

그러나 어떻게? 너는 그것을 알고 있다!

 

 

1976년 5월 5일

도대체 문제가 없이 살고 있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나아가 그건 그래도 좋은 건가? 문제가 이제는 해결되었다는 표시인가? 내가 내 위치를 알고나 있는가? 의문이 꼬리를 문다. XY 선상의 나.

 

참으로 이 문제 자체에 대한 분석은 너무 끔찍하고 신경을 곤두세우게 하는 피곤한 작업이므로 그만 일찌감치 접어 두고 마는 것이 상책이 아닐까 하는 강한 유혹.

 

A. 부제 – 이미 정해졌다. 사실 이전을 궁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 그게 과연 절대의 사실이냐 함은 논란될 수 있겠으나 그것은 사실이다.

B. 가장 경멸하던 안주, 타협, 속물화(기만, 미봉)

기성화 旣成化 – 부정적인 의미로.

C. 칼 라너의 인간학 – 그리스도론, 피정, 성무일도의 세계.

내가 아는 나, 불교, 누나, 이철교…의 세계.

두 세계를 시계 추마냥 왕복하고 있다. 어느 한 세계만이 절대인 것이 아니기에.

A’ B’.  Mozart 의 음악과 연극을 보러 자주 가야겠다. 한 권, 두 권 느는 책. 파이프. 부식 형의 편지 – 그 처절하도록 집요한 뿌리를 보고야 말겠다는 의지.

C’. 이렇게 하여 나는 기성화되고 있다 – 가장 경멸하던 J 신부님의 현실론 “어쩔 수 없는 거지.” “신부로서의 순수한 모습을 보여줄 뿐인 거지.”

 

흔히 내가 제기하는 ‘신부란 무엇인가’하는 문제는 그 실에 있어 ‘내가 신부로서 완전한 삶을 살 수 있을까’ 하는 지극히 현실적이고도 소박한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거창한 신학적, 학문적, 분석적 이론은 이 경우 무력한 것.

그렇다면 ‘내’가 신부로서 평생을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하는 문제에 답해 보자.

여기 첨가돼야 할 사항: 내가 보는 신부는 위의 A-C’를 하나라도 빠짐없이 갖춘 사람을 말한다.

 

부제품 – 부제: “그대는 준비되었는가?” “네, 저는 준비가 되었습니다.”

그 내용이 요구하는 대로 ‘살아 보도록 노력하겠다.’ 함. 이제까지의 관찰에 의해 결코 ‘내가 그렇게 살 수 있다.’ 가 아니다.

 

 

 

 

 

발터 씨 댁

 

 

1976년 6월 19일

박 선생은 못 보고, 뜻밖에 발터 씨 댁에서 극진한 호의를 받으며 신세를 지다.

이 집의 분위기는 참으로 이상적인 듯.

엄한 아버지, 인자한 어머니, 이 두 분의 조화 속에 아이들은 인간답게 자연스럽게 성장한다.

복된 가정이다. 모범적이다.

그러나 발터 씨 댁의 청아하고 학자적, 귀족적인 분위기와는 대조적으로 아까 역에서 기다리며 본 군중들은 참으로 정반대의 인간의 다른 면을 보여 준다. 이들은 지칠 대로 지쳐 생기라고는 하나 없이 도대체 ‘의미’란 말이 무색하였다. 그러고도 살기는 해야 하는 모양으로 그 너절하고 퇴색한 옷차림 속에 컴컴한 몰골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것이다. 이들에게서 얼굴을 돌려 구역질을 참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 피곤한 모습들…

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생의 의욕이고 의미고 탐구고 모두 너무나 덧없어져 버린다. 무엇 때문에 사서 고민을 해?! 어차피 인생은, 삶이란 이렇게 전개되게 되어 있는 건데…

요사이 내게 자주 떠오르는 생각 – 인생의 덧없음. 나를 찾는다는 나의 노력은 잘 보면, 이제까지 예의 발터 씨 댁 같은 분위기만을 접하고 그것을 자명한 것으로 알다가, 후자 즉 역에서 본 군중의 모습이 시간을 더해 감에 따라 보여지고 부각되기 때문이다.

‘다음에 계속.’ 이상 현상 분석.

 

 

1976년 6월 21일

당신네들은 정말 착한 사람들입니다. 어쩌면 갈 곳 없어 우연히 찾아 든 저 같은 사람에게 이렇게 잘해 줄 수가 있단 말입니까? 정말 어째서 그 모든 것이 가능한 것입니까?

당신네들은 요즈음 같이 삭막하고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무서운 세상에 ‘사람이란 이러한 것이다.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를 몸으로 보여 주는 참다운 사람들입니다.

당신들 같은 사람들이 이 세상 어딘가에 아직도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주는 커다란 선물입니다.

참으로 원죄가 없는, 때묻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보석같이 투명하고, 항상 훈기를 둘레에 뿜어대는 따뜻한 사람들입니다. 당신들은 정말로 하느님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소금’ 이란 바로 당신네들입니다.

인간을 진정으로 알고, 그 인간을 성취시키고 있는 사람입니다. 무슨 말을 이제 내가 더 쓸 수 있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인간의 참 모습을 보여 주시도록 같이 기도하는 것 외에…

1976년 6월 21일

김정훈 드림

 

 

 

 

존재론적 질서

 

 

1976년 7월 10일 土

현재의 내적 혼란은 당연하다.

이제껏 모든 잡음 – 그 중 쓸만한 것도 많은 – 에 귀를 막을 수밖에 없이 살다가 귀를 터놓았으므로.

그리고 그 귀를 막던 기간과 귀를 막던 솜의 철저량에 비례하여 그 혼란은 크고 격렬할 것이 당연하다.

 

 

1976년 7월 16일 金

요사이 부진의 원인을 곰곰이 생각해 본다. 참 처참한 지경이다. 이 상태는 여기 생활 2년 반 중에서 일기를 쓰기 않게 된 – 쓸 수 없다고 느껴진 – 1년 반 전부터 점차 쌓여 온 아주 근본적인 고질화된 상태이고, 최근 졸업 논문이라는 나를 붙잡아 매던 줄이 사라지자 완전히 눈에 보이게 무섭게 부각되는 현상이다.

한 마디로 ‘주체성의 상실’에서 오는 증세인 것이 분명하다.

지금 같아선 내가 누구이며, 무엇을 하려 하며, 왜 살고 있는지 이 근본 물음에 전혀 답을 내릴 수 없다. 따라서 사는 것 – 숨쉬는 한 순간 한 순간이 괴롭고 너무나 벅찬 짐이다 왜냐하면 매 순간을 지탱할 힘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하는 일에서 의미를 찾을 수 없으니, 보람을 못 느끼니, 말 그대로 기쁨이나 환희가 없는 완전히 죽어 있는 상태다. 아니 완전히 죽어나 있으면 괴로움이나 없지, 이건 정말 최악의 상태이다. 바로 “무엇을 해야 할지” “왜 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상태 – 이것이 현재 최악 상태의 요체이다.

 

 

1976년 7월 21일

나가이 다카시의 <묵주알>을 꺼내 들고 지금 100페이지째 읽는 중이다.

방금 읽은 대목 : “십자가는 기둥에 걸려 있으며 성모상과 성경도 있으니 이밖에 또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전우주의 재보를 전부 독차지한 감이 든다.”

이 말 외에 무슨 내용이 더 아름다울 수 있겠는가

omnia mea mecum porto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 그대로가 아닌가.

정말 잃었던 고향을 다시 찾은 듯 갖가지 감회가 절로 일어 도저히 한 줄 쓰지 않을 수 없다. 갖가지 감회, 그렇다. 그 순수하면서 풍만하고 요란하지 않으면서 푸르게 아름다운 이 존재론적 질서. 그 질서, 이것이 아름다움의 전부를 한 마디로 들어낸다.

본말 本末 이 전도되지 않은 이 조화, 이 질서. ‘사람은 천주를 알아 공경하고 자기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세상에 났느니라.’

이 최상의 아름다움, ‘질서’를 요사이 나도 세상도 잃어가고 있는 것은 너무나 물질 위주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는 한 우리의 행복, 구원의 행복은 이루어질 수 없다.

6.25 동란 – 피난 – 국민 학교 – 판잣집 – 두부 장수 (주: 아주 어렸을 때 땅에 떨어져 깨진 두부 대신 새 두부를 다시 주었던 두부 장수에 대한 추억) – 전기 라디오 (주: 어려운 환경에서 힘들게 마련됐던 전기 라디오에 대한 감격)… 이런 것들을 이미 나는 모조리 잃어버렸다. 나가이 다카시의 세계는 원자탄으로 모든 것이 일순간에 잿더미로 화한 – 그 아내까지도 – 그곳에서 꽃피고 있다.

‘자본주의는 공산주의화하고 공산주의는 자본주의화하게 마련이다.’ 이렇게 되면 샤르댕 (주: 테이야르 드 샤르댕 – 예수회 신부로서 고생물 학자이며 지질학자임) 이 말하는 우주의 진화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지. 너무 낙관주의적이 아닌지.

이 질서는 자기 분수를 알아 지키는 데에서 가능하다.

“마음으로 가난한 자는 진복자로다.”

“나물 먹고 물 마시고 팔베개하고 누웠노라.”

 

물질 위주로 치닫다 보면 거기는 참으로 ‘동물 인간’만이 남는다. 너무 부한 세계, 너무 빈한한 세계, 둘 다 똑같이 질서는 없고, ‘먹는 일’ 과 성 性만 존재한다.

– 현대인의 종말론.

모든 사람이 참으로 자기 분수를 알고 투명하게 살아 간다면…

나는 내 분수를 어떻게 알아 지킬 것인가.

‘나는 무엇인가’에 대한 성찰.

현재의 외국 귀향 생활 – 내게 주어진 것의 의미 – 그것을 잘하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공부’ 문제에 대하여 검토할 것).

 

내가 찾는 것 – 그것은 결단코 이론의 공부에서 올 수 없다 함은 날이 갈수록 사무치게 느끼고 있다. ‘노동’ 없이는 모든 것이 손에 잡히지 않고, 알기는 하되 느낄 수는 없다 함을.

나가이 다카시의 세계 – 그 질서는 내게는 내 양식 樣式으로 체득되어야 하고 실현돼야 한다.

아버지의 세계 – 그때와 지금.

모델이 없는 현대 – 기가 막힌 모델이 있다 하더라도 자기가 이를 극복해야 할 ‘자기’가 이루어지는 법.

칼 라너의 세계 – 이는 내게 내 나름으로 체득되어야 한다.

 

‘현재’처럼 ‘내’가 없는 생활 – 목적행이 아니지 않는다. ‘나’의 ‘현재’ : 쫓기는 생활 – 그 근원 : 공부, 아니 ‘시험 공부’. 전 도그마를 이번 달 안으로 완전히 소화하라는 지상 명령!

근본적 검토 : 사실상 무리다. 어학, 내용 이해의 부족. 다시 나가이 다카시의 그 심혼을 맑게 씻는 듯한 명료한 글을 읽어 보자.

 

 

1976년 7월 22일

나가이 다카시와 20세기 개종자들을 계속 읽는다. 자크와 라이사 마리탱 편에서 다시 샘 솟는 듯한 진리에 대한 열의를 느낀다.

그리고 내가 해야 할 기도가 떠올랐다.

“주여, 이 진리는 내가 습득한 것은 아닐지라도 당신은 이를 제게 체득시킬 수 있나이다.”

 

 

1976년 7월 23일

나는 참으로 ‘기도’를 해야 하는 것이었다. 일기가 진정한 일기로서 내 내면의 고백이 되려면 영성적인 것이 씌어져야 한다.

 

 

1976년 7월 24일

더글라스 하이드 – 공산주의자 (1907 ~ )

그는 영국의 공산주의자로 ‘자유, 해방, 착취의 말살’을 위해 싸우다 개종 改宗하였다. 이런 것을 공산주의는 폭력 (필연적으로)으로 쟁취하려 하며, 정신이나 문화가치를 인정치 않고 파괴한다. 이들은 유물론자이므로 인간성, 인간 정신의 가치, 문화, 나아가 종교를 파괴함으로써 참된 해방을 구하고자 한다. (경제가 전부) – 인간 본성의 파괴.

1976년 현재 공산주의가 어떻게 발전되어 왔는지 모르나 근본이세는 같을 것이다. 나는 내가 신봉하는 가톨리시즘을 이와 대비시켜 본다. 실상 거의 같은 내용을 가톨릭은 폭력 아닌 형제애로써 극복하려 하며, 예수의 생애는 이의 현실화이다.

내가 믿는 바 인간은 ‘물질만으로’ 될 수는 없으며, 그 역사적 전통과 문화의 창조 등 정신성의 가치는 찬연하다. 그리고 차원을 높여 보면, 이 인간은 바로 ‘하느님의 모상’이며 여기서야 말로 종교를 통한 ‘인간 본연의 최고 완성’이 이룩될 수 있겠다.

 

이렇게 둘을 대비해 보면 어는 것이 그릇된 것인가 하는 것은 너무나 명약관화하다. 그런데 왜 세상은 그러지 못한가?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1. 가난 – 착취: 사람은 죽지 않기 위해서 그 최저선에 이르면 모든 ‘정신성’은 완전히 망각되고 폭력, 혁명이 나온다.

2. 오해되는 가톨릭: 부르주아의 편이라는 인상의 가톨릭. 거기다 현대인은 거역과 반항으로 내닫는다.

 

‘2’ 의 문제에 대하여 나는 종래의 중요한 명제 주의 하나로 답을 하련다. ‘사태와 원안은 엄밀히 구별돼야 한다. 이러한 사태야말로 나의 이론에 더 박차를 가하는 것이 아닐까.’

‘2’ 의 문제는 지성인 – 자유를 사랑하고, 인간 본연의 보습을 추구하고, 진정 가식 없이 이웃을 생각하려 하는 – 에게 우선 부딪치는 당연한 문제이다. 여기서 수 많은 지성인이 기 고비를 넘지 못하고 ‘1’로 떠나버린다. ‘1’에서도 안주를 모 하는 이들은 결국 ‘자모이신 성교회’의 품으로 돌아오는 이가 있는가 하면, 영영 탐구의 노력을 포기하는 경우가 더욱 많다.

‘2’는 참으로 그럴 만도 하다. 만약 생생히 살아 호흡하고 있는 진리자체의 모습을 보여 준다면! 바로크의 성당에 만족하면서 부유한 여인들의 치맛자락, 탐구의 포기, 안주, 태평성대의 화려했던 죽은 전통만을 지킬 필요가 있는가! 왜 살아 있는 유기체임을 보여 주지 못하는가!

여기서 중요한 것은 ‘2’의 현상 중에서도 ‘놀랄 만한 덕행을 실천하는 숨어 있는 사람’은 항상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은총이 내게 미치려면 나는 ‘비어 있어야만 한다’.

자크 마리탱을 좀 더 연구할 것. 그의 사상과 생애까지, 그리고 라이사와 그의 친우들까지.

 

결국 내게 부족한 것은 철저한 자기 분석이다. 이것 없이 일을 손쉽게 이루려 함은 미봉책밖에 될 수가 없다. 그리고는 항상 비슷한 원을 돈다. 미사 중의 감미나 성체 대전에서의 환희, 일상 생활 중의 그 어떤 은총을 나무 찾고, 그것으로 문제를 해결한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얼마 전 나의 본질이라 생각되는 현상을 약간 검토하였는데 보다 근본적인 자기 분석이 필요한 것이다. 이래야 비로소 진정한 나의 본질이 추출되고, 그것이 비로소 문제의 해결일 것이다.

 

근본적인 자기 분석이란 무언가? 그리고 왜 해야 하는지?

나는 진리를 찾기 위해 – 나는 이 진리를 천주라고 표현한다 – 살고 있다. 그것은 유일무이한 내 삶의 목표이며, 전부다.

이 진리는 철저하게 현재의 자기 분석과 검토, 종합을 거쳐야만이 그 방향이 제시될 것이다.

 

그런데 실제의 작업에 있어 체계적으로 이를 전개해 갈 수가 없다. 만일 처음부터 체계적이라면 이는 이미 분석의 방향, 나아가서 그 결론까지를 예측하는 셈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손쉬운’ 문제에서부터 출발하려 한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는 지극히 고통스러운 일일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더욱더 분명한 것은 반드시 이 고통을 거쳐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가장 근본적인 일차적 현상의 출발인 불안.

이 불안은 어디서 올까? 희미의 교차인 하루하루, 한시한시.

 

 

1976년 7월 27일 火

어제 읽은 Carell 중에 ‘극기의 필요성’이란 말이 있었다. 사실 그 후로 곰곰이 되뇌어 볼수록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음이 인식된다.

 

내가 진리, 진리 하면서 ‘가지고 있는 진리가 진리로 보이지 않아’ 고민하노라고 한다면, 그 원인은 내 속에 내가 세어볼 수 있는 구체적 악습 속에 있는 것이 아닐까.

 

우선은 시험을 앞두고 진도가 더디기만 한 안타까움과 좌절, 어느새 구체적이고, 철저하고, 실천적인 신앙 생활을 못하고 있는 데서 오는 각종 이완감, 고백 성사를 본 지 몇 달이 되었는가?

정말 나는 얼마나 조심스레 정성을 다하여 하느님과 그 현실을 민감히 느끼려고 해야 하는지. 에디트 슈타인 (주: 나치에 희생된 가르멜 수녀) – 아, 그런 사람도 있었다.

 

모든 생활의 질서가 바뀌어져야 한다. 스탐스 수도원에서 온통 나를 휘감아 버렸던 그 질서에 빠져들어야 한다. 눈에 보이지 않으나 박진감 있는 그 질서! 주여, 저를 돌보아 주십시오. 원조의 죄에 빠지지 않게 해 주십시오.

 

왜 여기 와서 공부해야 하나?

신학: 신의 학문이다.

믿기 위해 – 믿을 수 있기 위해서, 지성을 추구하는 신앙.

‘한 사람을 안다.’ – 안다는 것은 그이 외모, 습성, 태도, 옷차림, 행동거지, 말투, 모두를 아는 것이어야 한다. 즉 그의 본질을 알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2천 년간 쌓이고 쌓인 문화, 역사, 전통의 총체적인 기독교를 안다는 것은 더 힘든 것이다. 더구나 근본적으로 알아야 할 본질이 신이고, 신앙이라면 이러한 일차적인 작업은 얼마나 더 필요한가?

 

 

1976년 7월 29일

‘신적 질서’에 살기 – 여기서는 모든 것이 아름답고 참되며, 무엇보다 일의 핵심을 단번에 알 수가 있다. 이 안에서는 본말 本末이 전도되는 법이 없다.

참되고 위대한 이 질서 – 유일하게 생명을 가지고 호흡하고 있다.

이 질서에 사는 것은 나의 ‘나’됨. ‘인간’ 됨의 성취이다.

주여, 이 안에서만 살게 하시고 혹 벗어나더라도 즉시 돌아오도록 하시어 회복시켜 주십시오.

오, 위대한 질서여! 위대한 생명이여! 살아 있는 호흡이여! 최고의 미 美, 지상 至上의 조화여! 존재하는 유일이여!

 

‘이밖에는 없음’이여, 허망이요, 죽음과 공포여! 전율이여!

오, 이 지극한 찬란함이여! 사슴의 도약이여! 푸르른 창공이여! 5월의 새순이여! 한여름 첫새벽의 짜릿함이여! 늦가을의 햇볕이여!

 

그것은 유일한 생명 – 이 위대한 질서여!

 

가장 강한 것은 진실이다. 이것만이 영속한다. 그리고 이것만이 아름다운 것이다.

 

아까 그 이태리 신부의 마지막 미사, 정성스럽게 미사를 마친 약관 25세의 신부. “내일 나와 나의 동료는 이태리로 떠납니다. 그래서 이 시각 18시 미사는 없겠습니다. 여러분들이 모두 여름을 잘 지내시기 빕니다.” 그나마 더듬거리는 독일어. 그의 독특한 m, n의 길게 끄는 발음은 우리를 완전히 사로잡아 미사의 분위기를 더 없는 온화한 향기로 가득 채웠고, 그 여운을 길게 남아 성당을 따뜻하게 감쌌다. 우리 모드는 참으로 ‘은혜로운’ 미사와 그 순간을 체험하면서 가슴이 따뜻해짐을 느꼈다.

참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거기에 주께서는 미소를 머금고 계셨다.

결코 그는 요란을 떨지 않았다. 오늘의 그 좋은 성서 구절을 인용한 것도 아니었고, 훈화조로 얘기한 것도 아니었다. 독일어 발음을 잘해 보려고 신경을 곤두세우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그는 우리 모두를 사로잡았다. 놀라운 이 사실, 이 비밀은 무얼까? 어디에 열쇠가 있는가?

그의 진가는 즉시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는 인간적으로 결코 대수로운 존재가 아니었다. 훤칠한 키에 어울리는 옷맵시를 한 것도 아니었고, 결코 학식이 뛰어나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이와는 정반대였다. 키는 우리 중 누구보다 작았고, 옷이라곤 검정 바지에 수수한 구두, 독일어를 잘하지도 못하였다.

그러나 그의 여운은 우리 가운데 오래 남는다. 그는 우리에게 아주 아름답고 깨끗하고 따뜻한 보물을 나눠준 것이 틀림 없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강하게 만들었을까? 그의 표정은 참 따스하고 온화했다. 미사 중에도 조용하고 잔잔한 목소리로 경문을 외운다. 가끔 합장을 하고 그 손가락 끝이 입가에 닿는 모습을 보는 것은 참 인상적이다.

그는 진실한 것이다. 즉 그의 태도는 그의 인간 전부가 합해 진리를 가지고 있음을, 그의 진리인 하느님을 가지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참으로 진실은 모두에게 공통적인 것이어서, 모든 이가 서로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즉각 그 진면모를 알아채어 공감을 가지는 것이다. 그에게서는 사 邪를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때문에 그는 있는 그 자체로 누구에게나 기쁨과 희망을 준다. 참으로 있는 그대로, 주께서 ‘그’라고 하신 그대로 자신을 긍정한다. 그가 그럴 수 있는 것은 참으로 하느님을 알고 ‘자기를 알기 때문이다.’

 

 

1976년 7월 30일

내일 샤안 – 스위스로 가기 위해 대충 짐을 정리하였다. 이번 행차는 마음 속에서 우러나와서 즐겁고 부푼 기대를 가지고 감이 종전과 다르다면 좀 다른 점이다. 가서 마음 편히 과일도 많이 먹고, 좋은 사람들과 즐거운 시간을 가지리라. 샤안에선 베레나와 카스파 씨도 함께 등산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내가 신적 질서를 그렇게 찬미하고 유일한 생명, 아름다움의 극치라고 분명한 의식을 가지고서 외치는데도, 마음 한 구석에는 에디트 슈타인 같은 명백성, 청결성 외에 검은 불안한 그림자를 의식하고, 멀지 않아 그것은 표출되고야 말리라. 이 무서운 현상은 어찌된 일인가?

어떻게 이 정반대의 두 현상이 가능한가?

신적 질서에만 묻혀 살고 싶은데도 세상의 질서가, 사 邪가 – 진 眞 이 아닌 – 고개를 반드시 들고야 마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어째서 이 두 가지가 원치 않는데도 있을 수 있는지.

그래서 자신을 무섭게 다루어 – 삼구 三仇 를 대적하고 육신을 멀리하여 – 보려 하였으나 그것은 빈번이 실패를 가져올 뿐, 일은 그렇게 해서 해결될 것이 아닌 것을 점점 뚜렷이 느껴 왔다. 이는 금욕, 고행, 극기의 부정적 측면이고, 타이스의 수사, 그리고 생명이 마른 듯 얼굴을 무섭게 찡그리고 창백한 안색을 한 성직자가 – 미소를 머금지 못하는 – 되게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 반대로 ‘인간적’을 모토로 되는 대로 살아야 진리가 파악되고, 하느님, 그 신적 질서에 다가설 수 있을까? 너무나 자명하게 천만에!

 

오늘 하느님의 자비를, 예수님의 구속 공덕을 – 내 전부를 힘있게 포옹해 주시는 – 내게 전해 준 고백 신부님의 말씀은 이 문제의 충분한 정답이 되어 주었다.

“젊은 친구, 우리가 우리 힘으로 그 질서에 머무를 수 있을 줄 생각하시오? 조용히 감사하고, 과실을 저질렀으면 조용히 꿇어 용서를 빌고, 다시 그러지 않게 해 주시기를 잊지 않고 기도해야만 가능할 것이오.”

 

 

 

 

 

여행과 열린 마음

 

 

1976년 7월 31일

여행과 열린 마음은 어떤 것이 먼저일까? 이것일 수도 또는 저것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여하튼 이 둘은 하나가 된다. 열린 마음으로 여행을 함 – 이것은 가장 내 마음에 드는 주제 중 하나다.

여기서는 모든 것이 아름답다. 창 밖의 경치, 둘레의 각종 사람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나 혼자의 열린 마음이 여기에 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 ‘omnia mea mecum porto'(내가 갖고 있는 전부)이다. 철학과 2년 때 영주, 안동을 가면서 느끼던 것.

 

여행은 그 자체로 지극히 풍부하다.

나는 여행을 참으로 사랑한다. 있던 곳을 떠난 자유가 있다. 나뿐 아니라 여행하는 모든 이가 이 비슷한 심정일 테지만 그 분위기는 참 너그럽다 이 사람 저 사람 관찰하는 것도 재미있다. 그리고 이런 다양성 속에서의 자기를 의식해 볼 때 여기서는 전제와 편견 없이 자기가 발견된다. 그리고 이런 심정은 그대로 신적 질서와 연결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으로 나는 참된 자유를 깊이 들이마실 수 있는 것인지.

– 샤안 행에서

 

 

 

1976년 8월 3일

푸르나에 와서.

스위스의 참 모습을 보다. 이 산들은 모두 몇 겹일까? 이 산악의 나라, 부지런한 사람들의 날, 평화의 나라.

이 겹겹이 쌓인 산들, 그 속에서 이곳 사람들은 산다. 이들의 수준, 이들의 삶은 낭만이 아니다. 무섭게 근면하고 지독하게 착실하다.  웃음이라고는 아주 적다. 이 집 주인 할머니 – 여기서 쾨블러 로스 같은 여자가 나올 것은 당연하다.

정말 이곳에서의 며칠 동안 ‘참 스위스의 모습’을 본 것은 큰 사건이다.

 

 

1976년 8월 17일

김장수 신부님 급서.

그것도 이역 만리서 자동차 사고라니.

그 날카롭게 예지에 빛나던 얼굴.

주여, 그를 받으소서.

 

 

1976년 8월 20일

금효 착 – 드디어 왔다. 그 동안 떨어졌었다는 실감이 거의 없다. 지금 곤해 하면서 저 방에서 잔다. 오늘은 둘이서는 거의 아무 얘기도 못했다.

앞으로의 이곳에서의 금효 – 굉장히 어려운 새 삶의 시작. 긴장된다.

절대 무난하지만은 않은 이곳 생활. 언젠가 일기에 쓴 대로 그를 행복하게 해 주기에 온 힘을 다 하리라.

거기에는 무엇보다 아니 절대적으로 하느님의 힘뿐이다.

주여, 당신이 우리를 돌아보고 계심을 아나이다.

 

 

1976년 8월22일

인스브루크 에 가서 라디오 등, 약간의 물건을 가져다 금효에게.

 

 

1976년 8월 23일

금효와 레겐스부르크.

젤너 신부님의 지극한 성의와 배려에 너무나 감사할 뿐.

 

 

1976년 8월 25일

다시 발레슈타트로. 선물 전함.

나를 굉장히 기다리신 비오 신부님.

본당 신부님의 사랑.

 

 

1976년 8월 26일

힌터루기에 산장 뒤쪽으로 차로 올라, 거기서부터 발렌으로 걸어 내려왔다. 오늘의 산행에서는 – 일찍이 맛보지 못한 산 – 그 조화 – 그 속에 피는 인정을 체험하였다. 참으로 독특한 기암 절벽의 쿠르피르스텐 두 단계를 내려와 목초지에서 두 발을 뻗고 드러누워 휴식을 취하다가 고개를 들어 뒤를 돌아보니, 아 거기 꿈에도 그리던 알프스의 기암과 검푸른 소나무, 그 밑의 활엽수군, 그리고 잊지 못할 목조 오두막집, 그리고 옆에 같이 드러누워 있는 새빨간 웃옷의 알프스 소녀, 그 이름이 하이디인 것이 더욱 깊은 인연을 느끼게 해 준다.

이리하여 참으로 꿈만 꾸어 오던 알프스의 진면목을 속속들이 느끼었다!

꿈의 실현, 너무나 아름다웠다.

 

 

1976년 9월 1일

본당 신부님의 아버지다운 사랑.

마침내 발렌슈타트을 떠나 루르드로 가기 위해 괴치스로 가다.

괴치스의 안나 아주머니의 정성과 배려.

 

 

1976년 9월 3일

마침내 루르드 행.

‘기적’이 주제라면 내적 기적이 내게는 원안이다. 매일의 일상생활 가체가 기적이고, ‘은총의 체험’이 아닌가. 이곳에서 주님의 시선을 느끼고, 뜨거워졌고, 남을 사랑할 수 있음을 알았다. 이것이 기적이다.

 

 

1976년 9월 3일

아르스 – CIULY – 테제.

너무 볼 것이 많아 소화를 못 시킨다.

충분히 자고서 건강한 사고력으로 행군을 해야겠다. 점심도 많이 먹고.

 

 

1976년 9월 5일

루르드 착.

감사, 은총에 마음을 열음 (내, 외)

주시려거든 벨라뎃다의 단순과 소박함을 주소서. 이 치유를 원하는 이에게 치유를 주소서.

 

 

1976년 9월 6일

동굴에서의 미사.

 

 

1976년 9월 10일

노트르담 드라 살레트.

 

 

1976년 9월 11일

아네시에서. 이번 루르드행의 마지막 날. 확실히 다른 세계, 그렇다. 은총의 질서 속에서 열흘을 보냈다. 이제 끝나려는 지금 나는 조금도 섭섭하지 않다.

하느님은 어디에나 계시고, 그분은 모든 것을 만드셨다. 원래가 이런 것이다. 일상을 성화해야 한다. 앞으로 무슨 일이 닥치더라도 이 원래 모습을 생각할 것이다.

 

 

 

 

 

삶은 시험

 

 

1976년 10월 6일 火

어째서 공부를 해야 하나? 우리는 정답을 미리 다 알고 있다. 그 정답이 나를 잘 충족시키는 길임을 또한 알고 있다.

 

그것은 은총에로의 응답이다. 기도다.

그것은 말로 표현될 수 없고 글로 쓰일 수 없는 ”살아 있는 생명’이다. 즉 그것은 학문의 대상이 아니다. 공부로 접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어렵게 힘들여 공부를 해야 할 필연이 어디 있는가? 몇 가지 쉽게 떠오르는 까닭들.

 

신학교 교수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그리스도교의 토착화에의 한 도모.

하느님과 그의 사정[啓示]을 보다 잘 알기 위해.

 

그러나 여기에는 직접적이고도 절실한, 즉 ‘나’의 ‘실존적 동기’가 결여되어 있지 않은가?

 

학문은 진리의 추구다. 진리에의 접근이다. 그런데 그 진리는 우리에게 이미 ‘알려져’ 있다. 이 ‘알려진’ 진리를 내 것으로 하여 남에게 전하는 ‘방법’ 또한 나는 알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들의 공부란 사실 ‘내적 필연’이 빠진, 동기가 약한, 불을 뿜는 정열이란 있을 수 없는 하나의 ‘제2차 방편’일 뿐.

 

 

1976년 10월 12일 火

아침에 성무일도(주: 성직자가 매일 하는 기도)를 공동으로 읽을 수 없어 내심 매우 부끄러웠다. 생각해 보면 엊저녁 임 형에게 의기양양하여 그 기도를 아침에도 하고 있다고 말한 것이 한 순간에 재가 되고 말았다.

아침에 임 형과 다른 동료를 보니 부끄러울 뿐.

왜 부끄러워하는가?

그것은 내가 이 기도를, 나를 위해(나의 영광), 적어도 내 내심의 자부를 위해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가이 다카시 (주: <영원한 것> <묵주알> 저자)가 ‘가난을 자랑하는 것’은 곧 그만큼 부를 원하고 있다고 말했듯이 – 이런 얘기는 ‘산 중에 숨어 삶을 자랑 말라’ 한 <채근담> 내용과도 일치한다 – 나는 나의 부지런함, 아침 일찍 일어남, 약간의 기도 등 이 모든 것을 자랑하고 싶었던 거다. 적어도 위에 쓴 대로 나 자신에게 의식시키려 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한결같은 평정심 平靜心에서 실은 행해져야 할 것이었다. 그리고 많은 친구들의 이것을 이미 벌써부터 하고 있다. 나는 이들보다 오히려 못하면 못했지 별것을 하는 것이 전혀 아니다. 또한 내가 나의 약속, 나의 계획에 얼마나 무능한가가 다시 한번 드러났다. 나의 한계 – 이것이 나의 실제이다. 사람은 이런 식으로 극히 심한 한계 – 고독 속에서만 진정한 자기를 알 수 있다(키르케고르 – 야스퍼스).

모사재인 謀事在人, 성사재천 成事在天.

나는 참으로 지극히 겸손하게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살아가야 할 것이었다.

 

 

1976년 10월 28일

요새 참 하루를 지독하게 힘겹게 지내고 있다. 교의 敎義시험, 그 엄청난 분량.

그것에 완전히 억눌려 이제는 온몸이 분해돼 버리는 것 같다. 머리가 띵하고 뇌가 작동을 하지 않는다. 굉장한 심리적인 부담이다.

‘심리 부담 – 신경’ 이것은 현재의 나의 운명을 좌우하는 실로 중요한 문제이다.

 

– 이것이 문제이지 않을 때

그때의 그 신선하고 개운함. 만사를 포용할 것 같고, 모든 것이 그렇게 아름다워 보이고, 존재의 의미까지도 들여다 보인다.

이런 때에는 공부를 해도 신이 나고 재미가 날 뿐이다. 하나를 보면 셋, 넷까지도 생각이 난다. 차분하고도 힘찬 생명력이 있는 내적 조화를 이룬 질서.

– 이것이 문제가 되어 버리면,

위 내용의 정반대가 된다. 완전히 죽을 상이 되어 가지고 시시각각 초침 소리가 들리는 중에 나의 질서는 완전히 망가지고 만다.

 

그런데 이것이 ‘마음가짐’의 문제인 것이 확실하다면 어떻게 개선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나의 자그마한 노력으로 사태를 바꿀 수 있지 않을까?

 

이러고 있을 때 나는 분명 내심의 소리를 – 그것은 하느님의 부르심, 은총의 소리이다 – 듣는다. 이 ‘내’가 ‘나’인 것이고, 결국 이렇게 처절하게 완전히 진퇴유곡에 빠져 완전히 가라앉으려는 순간, 여기서 초월은 가능하다. 이것이 실존인 것이다. 야스퍼스나 그 누가 좋아하는 키르케고르가 생각한 것의 전부인 여기 이 지점, 이를 파악했다고 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실존이 아닌 것이 또한 분명하지만.

그런 초월을 경험했다는 사실의 의미는 참으로 내 전부를 좌우할 정도로 크다. 칼 라너가 말하는 은총의 체험이 이것이다. 결국 이렇게 해서야 나는 ‘내’가 되는 것인가? 어찌 항상 비본래적 실존에서만 살고 있겠는가?

참으로 이렇게 해서야 이것이 원래의 ‘나’이다. 돌이킬 수 없고 부정할 수 없는 이 절대 상황 속의 나 – 원래 ‘나는’ 이것인 것, 그렇다면 이를 전폭적으로, 기꺼이 마음을 활짝 열어 긍정하고 포옹하는 것만이 유일한 타개책이 아니겠는가? 이것은 이래서 좋고 저럴 수도 잇는 성질의 문제가 아니다. 나의 존립이, 생사가 완전히 달려 있는, 실로 삶과 죽음의 분기점이다.

이것은 자포자기가 아니다. 내가 ‘나’임을 유일하게 찾는, 가장 생명력 있는, 있을 수 있는 문제의 전부이다.

여기서 만나는 하느님 – 아! 그 하느님은 인격 신이고 나의 자애로운 아버지이다. 탕자를 그토록 전폭 받아 주는 바로 그 아버지 하느님이다.

그러므로 내가 하고 있는 공부는, 지금 이렇게도 나를 초조하게 하는 이 공부는 ‘나의 실존이 가능한 유일한 조건’일 것이다. ‘공부하는 인생’이란 말이 있다. 참으로 공부가 나의 생활이 되어야 할 것이라면, ‘시험을 위해서’가 아닌 내 실존이 걸린 내가 유일하게 대좌해야 할 대상으로 그 곳에서만 나의 의미가 파악된다면, 이것은 절대 유일한 내가 나임을 찾는 길이고, 그 위에 초월자, 바로 탕자를 끌어안는 아버지 하느님을 만나는 길이라면, 나의 공부하는 태도도, 아니 바로 시험을 눈 앞에 두고 그 의미를 몰라 하는 마음가짐도 자연스러이 정돈되지 않을까?

‘이야말로 내가 사는 것이다’.

 

 

1976년 10월 30일 토 오후 6시

‘학문 – 학계!’ : ‘아무것도 아닌’ 위에서 박진하도록.

후랑센의 <은총론> 앞머리 몇 장을 읽다가 이런 생각들이 떠올랐다.

학문이란? 이 단어를 내 잎으로 발음하기조차 부끄럽다. 학문! 얼마나 숭고한 단어냐. 덧붙여 나의 인생관을 곁들여 생각해 보기에 이르렀다.

후랑센은 <은총의 발단>에서 현재 우리는 엄청난 오류와 허구 속에서 ‘이 은총’을 알아 들도 있다고 했다. 이는 서방의 독특한 빗나간 발전이며, 그 원형은 성서 내지 동방의 전통에 있는 것이라고 참으로 시원하게 지적해 낸다. 그리고 – 내가 느낀 점은 이것이다 – 이를 시정 내지 원래의 모습대로 알아 듣기 위해 오류와 이단, 사설 邪設 투성이의 서방 은총사를 공부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제 이만하면 은총의 올바른 모습을 충분히 알아내었으니 틀린 부분을 구태여 알아 둘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순간, 핵심을 알려면 – 그리고 다른 이에게 진정한 도움이 되려면 – 이 모순투성이의 역사를 구체적으로 아는 것이라고 했기 때문에 나는 크게 아차! 싶었다.

계속하여 그는 발그라훼라는 학자가 볼로냐 출신 피에트로 폼포나치 (1462 – 1524) 를 분석하여 얻은 결과를 덧붙여 싣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건 정말 놀라운 일이다. 후랑센의 <은총론>이 신학 중에, 이 세상 지식 중에 얼마나한 – 그 양이나 질로서나 – 위치를 점할 것인가? 나아가 그가 인용한 발그라훼가 15세기에 살다가 죽은 한 이태리 사람의 학설을 그렇게 분석해냈다니…원 세상에!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던 한 벨기에인 후랑센, 그리고 발그라훼. 이 이름도 괴상한 이태리인 – 이들이 내게 다 무어란 말인가? 몇 권 안 되는 내 서적 중의 한 부분에 나온 이들. 그런데 이 삶들은 자기 ‘전생애의 의미를 여기다 걸고’ 내게는 이토록 사소해 보이는 이 일을 해냈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 이것에 인생을 건 사람들, 아무도 알아 주는 이 없는데도 죽을 때가지 이 짓을 하는 사람들. 아니 불과 서넛이나 알까? – 알아주는 이도 없는데 … 이 짓을.

 

거대한 산, 세르레스의 동편 산 중턱 소나무 숲 속의 자그마한 바윗돌, 이것이 학자다.

이 작은 바위의 의미야말로 학자들을 대변해 준다. 작은 바윗돌들이 수없이 지나가는 이들의 발에 밟히며 아주 요긴한 디딤돌들이 되는 것, 이것이 학계이다.

이토록 이름 모를, 참으로 호화롭게 눈길을 모을 광희도 없이 하나의 몫을 한다. 하나만의 몫을. 그토록 철저히, 그토록 알차게! 이것이 학자이다. 이것이 학문이다. 그러나 이 이태리인 – 발그라훼, 후랑센은 실로 은총론의 흐름을 바꾸어, 신명나게 제 발로 걸어가듯 우쭐대는 수 많은 인생에서 참 삶을 계시한다. 그것이 학자다.

그렇다면, 이제 ‘아무것도 아닌 것’ 처럼 보이는 가운데 이처럼 박진한 것의 진상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왜 내가 그래야 하는지도. 실로 그것이 그토록 의미 있고 생명력 있는 것임을, 그것만이 영속하는 것임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가난, 가난, 청빈함, 가난, 검소, 가난, 가난.

가난이란 무엇인가. 가난하게 살아야 한단다. 진정 가난해지고 싶은데, 어떻게 하는 것이 가난한 것인가? 내 있는 옷가지를 모두 나눠주어 버릴까? 방에 있는 장식을 모두 제거해 버려야 할까? 담배를 끊고 용돈을 절반으로 줄이고 먹는 것도 줄여야 할까? 어떻게 사는 것이 진정 가난하게 사는 것인가. 이상은 막연한 듯하나 절박하게 대두되어 오던 문제를 이야기해 본 것이다.

 

가난한 이는 진복자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되다. 문제는 ‘마음’ 인 것이다. 그리고 이 마음의 가난은 바로 인격 신 앞에서의 적나라한 자기, 자기의 ‘자기 됨’을 십분 긍정하고, 유일의 대상은 하느님뿐임을 긍정하고, 하느님께 온 마음을 열어 놓음. 이것이 참으로 ‘가난함’의 진면목이다 (하시치카 신부의 <영적 담화>에서 얻은 답).

 

 

1976년 10월 31일

그토록 순수하고 뽐내는 일 없이 같이 즐거워하던, 볼프강에게 감사하면서.

노이슈반슈타인 성 – 바이에른의 루드빅 2세 – 을 다녀와서.

사진으로만 보던 성을 실물로 보는 감회가 깊었다. 참으로 이제까지 꿈꾸어 오던 것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과연 중세 유럽의 문화를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이상적인 아름다운 성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인상을 처음부터 얻은 것은 아니었다.

처음 성 앞에 섰을 때는 오히려 실망이 앞섰다. 내가 가장 첫 조건으로 꼽는 고색창연한 예스러운 맛이란 조금도 보이지 않는 허여멀건 미끈한 돌로 된 성의 외곽은 월트 디즈니가 모방해 세워 보았다는 어떤 모조품을 보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내부에 들어서면서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빈의 쉔브룬 (주: 빈에 있는 공원 이름) 라르카손을 본 나로서 – 베르사유는 못 봤다 하지만 – 이 건물의 양식이 내게 매력을 줄 리는 없다는 것을 다시 명기하고서 다만 그 규모적 아름다움 (美學的)은 별도로 하고 이야기하자.

오늘의 이 성행 城行 은 루드빅 2세라는 인간의 인간성과 그의 정신 세계와의 상봉이었다라고 하겠다.  나는 진시황을 연상치 않을 수 없었다. 아방궁, 분서갱유 焚書坑儒, 삼천 궁녀, 불로초의 인간 진시황을.

이 성은 아니 이 사람은 분명 어떤 절대의 영원성을 추구하고, 이를 감히 달성하리라 믿었던 사람 같다.

첫 방 대관실 戴冠室 이라던가의 천장의 태양 광선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그 절대를 붙잡을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최상의 완벽을 기하려는 역력한 모습이 도처에 보인다. 이는 흔히 볼 수 있는 성곽, 적군을 방어하기 위한 견고한 성과는 전혀 다른 인간 루드빅 2세의 순수한 개성의 소산으로 보인다.

그가 추구하던 완벽 – 와그너의 영혼의 세계를 감지하면서 – 그것은 어떤 인간에게든지 불가능한 것임을 죽어 가는 순간에 깨달았을까? 와그너의 예술 – 예술이 가장 승화된 혼의 경지로서, 신(절대자)과 가까이 접할 수 있는 길이라면 – 의 세계에서 접신 탈인 接神脫人 의 경지를 깊숙이 체험했음에 틀림없다. 신의 나라에서 온 자신의 체험을 현실화하고자 그는 성을 세워 와그너식의 분위기로 꾸미고, 이 세상의 인간의 신분으로서의 최상의 표현으로 절대성과 구원성 久遠性을 내 보이려 했던 것 같다.

 

 이상은 그의 전모를 알지도 못하므로 나의 일방적인 감상일지 모른다. 그러나 오늘 이 성과의 상봉은 바로 한 인간의 정신 세계를 볼 수 있었다는 것에 큰 비중을 두고 싶다. 나에게 굉장한 놀라움과 발견과 암시를 건네 주는 만남이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신분으로 영원성과 절대성을 그처럼 파헤쳐 보려 했던 생생한 흔적은 아름다웠다는 것으로 결론을 짓고 싶다.

 

 

1976년 11월 12일 시험 3일 전

어제 컨디션 조정을 잘못한 까닭에 오늘까지 사뭇 맑은 정신이 아니다.

시험. 언제까지나 이런 중압감 속에서 살아야 할까! 생각해 보면 이제까지 철들어 세상살이를 알아차리게 되고서부터 – 국민 학교 때부터라고 한다면 – 한시, 한 순간 시험의 중압감을 벗어나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지금도 무얼 쓰겠다는 생각도 없고, 좋은 빛 한 줄기를 본 것도 아니면서 차라리 노트를 폈다.

 

이 시험이 지난다 해서 시험이 끝난 것이 아니다. 죽을 때까지, 이 세상에서 인간의 신분으로 살고 있는 한 이 시험이라는 부담은 내게서 떠나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발버둥쳐 보아도, 별 묘안을 다 내어 대적해 본다 해도 나는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죽어서 내 질서가 완전히 바뀌어 버리지 않는 한 시험은 항상 눈 앞에서 나를 위협하고 강박할 것이다. 생각할수록 초조, 불안, 걱정은 커져 신경이 마비되고 그야말로 생지옥이 아닐까?

가을 낙엽의 조화스런 빛깔도, 하늘의 청정함도, 눈 덮인 산봉우리들도 내 눈에는 들어오지 않는다. 사냥개에 쫓기는 한 마리 가련한 산짐승! 이제는 더 달아날 기력조차 빠져 버린 상처투성이의 가엾은 짐승… 더욱 두려운 것은 나는 조만간 붙잡히고야 만다는 의식이다. 내 부모, 내 동료들이 잡혀 먹히듯 나도 곧 잡히리라는 의식이 더 두려운 것이다.

 

‘사실’이란 말의 의미를 보자. 그건 한 마디로 ‘내 능력이 닿지 않는 곳에 놓인, 내 동의 없이 주어진 그 어떤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정면에서 감당해야만 하는 절대적인 그 어떤 것’이다.

‘삶은 실험’. 이것은 ‘사실’이다.

삶은 내게 절대적으로 – 내가 도저히 피할 수 없게 – 문제의 정답을 찾기를 강요하고 있다.

이 사실에 대한 유일한 대비책은 사실을 진정 사실로서 인정하는 것 뿐 단 도리는 없다.

‘전적으로 긍정하는 것’, 이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이것은 우선 도로 徒勞를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다. 나아가 정답을 찾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이 사실은 ‘아무것도 아닌 것 위에서 박진하기’와 상통한다. 얘기가 여기서 그칠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박진하기’는 실로 여기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1977년

 

 

나의 백서

 

 

1976년 12월 29일 발렌슈타트

사람은 혼자 있을 때에만 이 ‘자기 자신’일 수 있다. 근 일 년에 걸친 ‘혼자’가 아니었던 생활 … 이 동안의 부진의 원인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아까 눈발이 흩날리던 호숫가에서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늦은 밤.

쌀쌀한 바람결 따라 계속 철썩거리는 파도.

뿌연 윤곽을 그리고 있는 산들의 침묵.

가지만 앙상한 포플라 나무들, 회색빛 대기 속을 비추는 희미한 가로등, 멀리서 반짝이다 사라지는 자동차 불들.

 

이렇게 혼자가 되자 나는 나 자신, 그리고 그리워하던 ‘나’로 돌아올 수 있었다.

공부도, 시험도, 서품 준비도, 돈 걱정도… 안중에 없다. 잇는 것이라곤 그 겨울 밤의 호수 – 철썩거리는 물결 소리가 유난히 생생한 – 에 서 있는 김정훈 그 사람뿐.

 

어떤 실마리를 잡는다.

그렇다. 그런 것이다. 그래야만 되는 것이었다!

근 일 년간 나는 한 번도 ‘혼자’였던 적이 없다. 처음에는 이런 것도 느끼지 못하면서 점점 자기에게서 멀어져 갔던 것이다. 그러다가 심한 진통이 와서야 병을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병이 너무 깊었기 때문에 처방이 묘연했었다. 병은 점점 더 깊어져 고질이 되고, 그 뿌리는 전혀 찾을 수 없었다. 몸부림을 치면 칠수록 사태는 악화될 뿐이었다.

참으로 이 일 년간을 ‘혼자’ 산책 한 번 해 보았는가? 한 번이라도 혼자 있어 보았느냐는 발터 얘기가 맞았다. 그 동안 나는 왜 그랬을까? 왜 완전히 감금된 사람처럼 청명한 대기 한 모금 마셔 보질 못하였을까?

 

금년이 시작되자마자 논문을 쓰기 시작했다. 6월이 끝날 무렵 논문을 제출할 때의 그 소동, 7월에는 시험을 보아야만 했고…. 금효가 왔고, 곧 이어…. 시작된 여행. 루르드, 파리. 그것이 끝나자 카드, 피정. 그 동안 등산도 갔었지만 한 번도 등산다웁질 못했다.

-볼프강과의 사귐, 끔찍한 배려. 그러면서 발터가 얘기한 그의 속도에 완전히 사로잡혀 버렸다.

– 많아진 한국 친구 … 매일 치는 탁구.

– 이렇게 해서 한 순간도 혼자 있어보지 못했다.

‘혼자이지 않으면 결단코 자기 자신을 수 없다.’ 첫걸음은 우선 ‘혼자일 것’!

 

청정. 성실, 순수에의 갈망. 구원이란 바로 이것의 성취이다.

이런 갈망을 의식할수록 나는 ‘죄인’임이 분명해진다.

‘나’는 무엇인가? 전에는 모상이라고 생각했는데 아, 이제 보니 이런 갈망 앞의 진짜 ‘죄인’인 것이 뚜렷이 드러난다.

 

 

 

1977년 1월 1일

본당 신부님의 말씀. “77년은 당신의 해이다.” “우리의 관계는 완전히 동료다.”

나도 그런 인격적 관계이어야만 한다고 생각하고 또 믿고 있다.

주여, 새 장이 시작되는 이 순간, 그러나 저는 여전히 ‘죄인일 뿐입니다’.

 

 

1977년 1월 29일

나의 백서

언젠가는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쓸 필요를 꼭 느꼈고, 늘 잠재 의식 속에서 써야 한다는 것을 결코 잊은 적이 없다.

그러나 나에 대한 백서를 백서답게 쓸 수 있다고는 생각 않는다. 내 자신을 완전히 안다고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 각도에서 어떤 부분만을 고찰해 보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두 개의 ‘나’.

– 남이 기대하는 나 – (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나) : 신부, 철학 공부, 교수.

– 내가 아는 나: 두 세계 중 어디에도 안주 못하며, 오늘은 여기에 내일은 저곳으로.

그리스도교적 진리 (한 점 자유도 없는 곳, 전제로 구성된 세계)와, ‘내가 알기를 원하는 진리’ (투쟁, 고투, 고독, 그러나 자유롭도다. 아직 파악 지 못해 비틀거리나 생명에 넘치도다. 미지, 불안, 호기심, 정열 의욕…).

왜 두 개의 ‘나’가 있나? 왜 하나만을 가지려 철저히 노력하지 않는가? 두 세계가 다 ‘내’게 실존적 의미가 있으므로.

위의 ‘두 개의 나’ 론이 내 백서의 사실상의 내용이다.

 

-그게 내 전부이다.

새로운 각도.

– 부진은 어디서 오나? (가장 단순한, 그러면서 가장 핵심이 질문법)

‘공부’ 관계에서. 무슨 뜻?

나의 유일한 생존의 의미는 ‘공부함’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공부를 의욕적으로 하고 있을 때에는 진척이고, 공부가 잘 되지 않을 때에는 부진인 것이다.

– 공부가 왜 안 되나?

내적 충동(동인)의 결여가 가장 큰 이유다!

– 어째서 내적 충동이 일지 않나? (이 문제의 고찰과 답이 문제의 핵심이다)

-무자극 – 무사고 – 비인간화

원리 : 비인간이고서는 어떻게 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내 가장 으뜸인 공부는 더구나 할 수가 없다.

비인간화는 무자극에서 온다.

그렇다. 무자극이 문제다. 나는 자극을 상실했다. 자극의 연원 淵源을, 부제품을 받고 일생을 결정해 버린 후, 내 세계는 반밖에 남지 않았다. 사실상 내게 자극이란 다른 반쪽에서 오던 것이었다. 나는 ‘내’가 공부를 하여 진리를 파악하고, 그래서 완전한 경지에 이르고 싶었다. 나의 자극은 진리행 眞理行 자체에 있었다. 그런데 이제 행 行 이란 것이 사라졌다.

내가 공부하려던 까닭은 진리를 ‘인식하려는’ 데에 있었다. 즉 ‘나’의 사사로운 동기가 90% 이었고 나머지는 봉사였다. 그리고, 이 경우, 내가 확신이 선다면 내게서 ‘넘쳐 흐르는’ 무엇이 있을 것이고, 이것이야말로 본래적 의미의 봉사라 믿어 왔다.

 

라너는 분명히 위대하다. 그를 공부하면 내가 바라던 무엇이 인식되리라 생각하니 얼마나 그 공부가 의욕에 넘쳤겠는가. 그러나 라너의 얘기는 그의 종교 철학, 그의 철학, 그의 인간론, 그의 신학을 완전히 전제한 것이어서 전혀 새로울 것이 없고 실망만을 안겨 주었다. 그의 복잡한 전개는 한마디로 ‘스콜라 철학’의 새로운 표현이었다.

그러니 그를 공부해서는 – 그 개인보다는 그가 대표하는 dogma계, 나아가 신학의 그 방법론밖에 도달되지 못할 스콜라 신학에 이르기까지 – 내가 원하던 인식을 이룰 수 없는 것이 너무나 일찍 폭로되어 버렸다. 부정하고 싶지만 부정할 수 없는 너무나 가슴 아픈 사실이다.

 

 

1977년 2월 2일

‘두 개의 나’ 론 에서.

두 개의 나는 얼마 전 ‘종교 철학’에서 읽은 대로 계몽주의 이래 전통적인 그리스도교와 세속적인 가치 사이에서 발생한 갈등의 단적인 표상이며, 계몽주의적 학문적인 것과, 전통적 정통 교리 사이의 차이와 같은 것이 아닌가?

계몽주의가 기정 사실이고, 세속화가 현상이라면 이 사실을 무서워하고 도피하고 외면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이 둘의 사이에서 뒹굴면서 정답 찾기를 시도해 봐야 하지 않겠나?

하느님, 그의 교회 (즉 그리스도교), 신앙은 근본적 기정 사실이고, 그 해석을 하는 것이 신앙과 종교를 전제로 하지 않는 그리스도 정신이라도, 어떤 두려운 결과를 가져 오게 되는 것이라도 해 봐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오히려 문제의 해결은 ‘과거에 연연해 하는 데 있진 않고, 계몽주의를 계속 밀고 나가는 데서만’ 찾을 수 있지 않는가?

 

나를 그다지도 뒤흔들어 버린 델 뮬러 Dell Muller의 글이 마로 나를 희망에 차게 해 준다.

이는 또 이론과 실천의 차이라는 문제도 있을 것이다. 내 경우 이론은 계몽주의 – 세속화적이나, 실천은 (내가 보고 접하며 느끼는) 전통적인 것에 의하는 것같이 보인다.

‘이론 – 실천’ 문제는 가장 어렵고, 항상 어디 가나 따르는 문제일 것이다.

따라서 ‘뒹굴면서, 항상 더불어 있으면서 정신을 차리는’ 것이 나의 지향할 바가 아니겠는가.

 

 

1977년 2월 22일

(1:42) 인스브루크 (5:59 – 8:00) 베로나 -> 9:38 베네치아 -> 성마르코 (13:27), 트리에스테 (17:35 – 22:15) -> 베로나 (2:59)

 

 

1977년 2월 23일 – 3월 2일

로마 1. 베로나 6:18 – 플로렌스 9:17

 

로마 2. 진리의 입 바티칸 성당

 

로마 3.

 

로마 4. 시스틴 성당, 가다콤바 – 카라칼라.

 

로마 5. 미사. 티볼리.

 

로마 출발 – 아시시 – 피렌체 머뭄.

 

피사 – 시에나 – 피렌체.

 

밀라노. 택준 형 만남 – 베로나 – 인스브루크 착.

 

 

1977년 3월 25일 金

세미나 준비를 위해 야스퍼스를 읽다가 : (사실상 백서의 계속이다)

 

철학, 철학 공부 – 생명감이 전혀 없다. 야스퍼스의 실존에 관한 이론 – 하이데거는 좀 달리 더 분석적으로 했다고. ‘누가 무얼 했고, 누구는 무엇을 했고’ 가 나와 무슨 관련이 있나.

이것은 그 사람의 지론이지 결코 내 지론일 수 없다.

내 지론은?

이미 결정되어 뚜렷이 보이는 한 점 목표 ‘사랑의 실천’ 이라고 (신부행의 충실). 과연 원안다운 신부!

여기에의 접근이 아니라면.

철학이 내 생의 완전히 파악된 목표에의 접근과 어떤 관계가 있나? (문제 해결의 핵심이다)

 

공부를 생명적 – 실존적 관심사로 그 자체로서 못하는 이유 (현재 그러하다):

적어도 구약 신학을 공부할 때는 ‘계약의 신’ 앞에 외경을 느끼는 전인 全人 이 있었다. 나와 동일시 할 수 있었다. 비록 길지 않았는지는 몰라도 나는 공부하면서 전심으로 기도할 수 있었고, 곧 공부는 내 생명의 관심사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것이 신학이다.

그런데 그럴 수 많은 없었다. 철학을 해야 했다. 그 두 문제를 잘 성명하는 라너를 공부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거기서 나는 철학 하려는 의욕을 상실치 않을 수 없었다.

스콜라 철학은 완전한 ‘방법론’이지 ‘행 자체’ 일 수는 없었다! 내가 피부로 느끼고 직관하면서 몸 담아 살고 있는 이 현실을 이론적으로 ‘조금 더’ 해명한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래야만 나는 내 삶을 보다 본래적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인가?

 

스콜라 철학이 ‘행’ 자체는 분명 아닐진대 야스퍼스, 막스 셰러는 더욱더 먼 길, 돌아가는 길이 아닌가.

공부를 ‘행 자체’로서가 아닌 어떤 다른 이유에서 할 수는 없을까? (내 경우 최대한의 합리적 이유를 찾아 우선의 책임을 수행키 휘한 추구로서)

 

 

 

 

신부행, 진리행

 

 

1977년 4월 10일

신부님 말씀대로 서품론이라는 것을 현실적으로 생각하는 것도 필요하다.

– 날짜 확정, 손님 이름들, 예절…

 

 

1977년 4월 13일 水

우연히 텔레비전을 보다가 에스터 빌라라는 여자를 알게 되었다. 이 사람의 전모는 즉시 내게 파악되었다.

아! 다시 한 번 내 다른 한 면을 – 그 동안 저 바람 안 통하는 지하 창고에 박아 두었던 -온통 뒤흔들어 다시 깨워 놓은 이 여자!

나는 이런 여자를 알고 있다. 사랑하는 나의 누나, 그리고 시몬느 베이유, 루이제 린저, 그리고 J, 시몬느 보봐르, 다 그런 여자다. 이 사람이 지었다는 책 <훈련을 통해 길들여진 사람>을 보거나 의사, 공장 직공, 심리학자 그리고 소설가에 이르는 그의 경력은 한 눈에 이 사람이 누구라는 것을 알아보게 한다. 참으로 몇 안 되는 극히 소수의 정예라고 할까… 그녀들은 대담하고 또 성실하게 자기의 인생을 자기 나름으로 살아간다. 더욱 신비로운 비극적인 분위기 – 약간의 예수와 천진스러움마저 풍기는 이들은 언제나 조용하나 그 깊은 속에는 거대한 화산의 불을 지니고 있는 여자다. 이 여자는 몸매마저 누나를 닮았다. 그러나 한 사람은 모든 것이 가능한 독일 땅에서 (이곳은 참으로 넓은 가능성의 세계다), 또 한 사람은 제약과 좌절의 세계, 결혼 후 온갖 쓰라림과 저주스러움 속에서 이를 악물고 기약도 없는 미래를 바라보며 산다. 살아야 하니까.

두 사람의 이러한 외부 조건의 차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나. 나의 세계, 나의 삶, 나의 성격, 참으로 진짜 ‘나’와 이 사람의 차이, 어디서부터 실마리를 잡아 풀어 가야 하나.

 

나는 여기서 감상적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감상 위에다 내 인생을 세울 수는 없다. 본당 신부가 한 마디로 지적한 나의 내성적 (관상적) 면이 나의 바탕인 것은 어쩔 수 없다. 거기다 아버지의 강한 입김 – 사람은 철저한 환경과 교육의 산물이다. – 에 의해 이루어졌을 스토아 적인 면, 그리고 엄마로부터 받았을 명랑함도 지녔을 것이다.

그리고 플라톤적, 네오 플라톤적 – 님과의 일치 – 에의 동경도 내 근본이라고 본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같은 타입이다. 감히 그 사람까지 들춰낸다면 – 로틴 (주: 중세기의 신비가), 야스퍼스 계다. – 이 점을 충분히 자인하고서, 이 위에 세워야 하는 것이 내 인생이다. 참으로 커다란 매력을 풍기는 에스터 빌라의 세계는 내 근본 바탕일 수는 없을 것이다. 정조 情調 위에서 내 생을 결단한다는 것은 큰 과오를 범하는 것이다.

내 신부행의 참다운 해석이 필요하다. 그리하여 여기 본당 신부 같이 자기 본질을 펴내면서 멋있는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을 연구해야 한다. 이것이 관건이다!

 

 

1977년 4월 14일

아주 조그만 탁자 위에 놓인 몇 가지 물건들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그 놓인 물건들의 이름을 그냥 적어 보고 싶어졌다. 언젠가 대신학교 철학과 일 학년이었을 때에도 나는 책상 위에 놓인 내 메모지의 내용을 그대로 베껴 본 적이 있는데, 난삽한 글 토막들이 그렇게 ‘나’를 잘 드러낼 수가 없었다. 이제 한 십 년쯤 지난 지금 – 사실 안팎으로 나는 별로 달라진 게 없다고 믿는다 – 도 같은 생각의 범주에서 불안을 맛보면서 신부행, 진리행을 하루에도 몇 번씩 되뇌어 보고 있다. 신부 지망생으로 온실 안에서 보호 받으면서 사는 생활, 교회와 웃어른이라는 체제 안에서 독립을 모르는 채 본질을 계속 추구해야 하는 속에서 살고 있다.

지금 이 조그만 탁자 위에 놓인 몇 가지 물건들, 십 년 전과 분명히 다른 것은 그때 쓰던 메모지 – 푸르름으로 가슴 벅차 하면서도 약간 불안한 속에서 대기를 호흡하던 – 가 없다는 사실이다. 이건 굉장한 차이를 의미한다. J 가 편지 끝에 쓰던 ‘뜨거운 정열과 끈기 있는 싸움’을 이제는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더욱이 언제 한번 싸움에서 이겼다는 시원한 기억보다는 아니 심혼을 기울여 싸우기보다는 불안한 마음으로 결전을 회피하다가 슬그머니 그 메모장을 없애 버린 것이다. 언제 없어졌는지조차 기억할 수도 없이 …. 지금 탁자 위에 있는 것을 적어본다.  omnia mea mecum porto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기도 하다). 소철학사, 소사선, 담배, 라이터, 재떨이, 소철학사 발췌 메모지 두 장, 안경, 시계, 볼펜, 그리고 나의 소중한 일기장.

푸른 메모지는 이제 어디에도 있지 않다. 진퇴유곡이다. 과거에도 물론 불확실성은 있었다. 그러나 본당 신부 표현대로 지금의 그것과 표현은 같을지 모르나 그 의미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때는 불확실성 속에서 확실성에의 강한 갈망, 그것은 꼭 얻어지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의기충천하여 그 불확실성 자체를 사랑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그 확신이 없지 않은가?

 

라너 논문 이후, 그리고 아마도 부제품 이후 고착 固着 의식이 형성되면서 이 확신이 없어져 버렸다.

불확실성이 참으로 나를 눌러 죽일 것 같아도 백 번이고 좋다. 그 속에 확실성에의 확신만 있다면!

 

 

 

 

나의 사제상

 

 

1977년 5월 24일 밤

모처럼 잠이 와 일찍 자리에 누웠다. ‘내일 아침에는 미사에 가고, 식사를 끝내고는 Muck (주: 철학 교수) 교수의 강의를 들으려 가면 참 신날 거다’ 하면서 밝고 힘찬 내일을 향한 기대감 속에 자러 갔다. 푹 자는 것은 얼마나 상쾌한 일이냐! 한 시간 동안이나 이 생각 저 생각이 꼬리를 문다. 신통한 생각거리가 있는 것이 아니어서 붙잡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왜 잠이 오지 않을까’ 하는 건 좋은 테마인 듯 싶어 좀 집중적으로 생각해 보려 하나 이내 다른 생각이 밀려 든다. 왜 이렇게 한 가지를 붙잡지 못할까. 마침내 일어났다. 불을 켜니 눈이 부시는 게 기분이 좋지 않다. 11시 반. 누구의 말이던가. ‘뇌를 꺼내 박하수에 씻어 볼까?’ ‘나 전체를 정비할 필요가 절실하다.’ 담배를 피워 무나 아무 맛도 없다. 오히려 입안만 찜찜한 게 더욱 답답해진다.

이 판국에 어차피 해야 할 것은 이 현상을 분석해서 실마리를 잡아내고 개선책을 강구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현재의 이 찜찜함, 부진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책상 앞의 철학사적 계보 – 형이상학의 각 세목을 꽉 붙여 놓은 게 도시 시원찮아 보일 뿐더러 압박감만 가중시킨다.

어지럽다. 체계적 파악은커녕 혼란뿐이다. 다 집어 치우고, 책상 위에 아무것도 놓지 말아 버릴까. 그러나 그걸로 해결될 현재의 부진이 아니다.

 

잠이 오지 않는 이유는 내가 현재 중심을 잃고 갈피를 못 잡고 있기 때문이다. 뭔가 뚜렷이 집중적으로 전진을 하고 있지 않는 이상, 이런 찜찜한 원인을 파악하기 어려운 상태는 오히려 불안만 확대시킨다는 것이 이 판국에서도 분명하다. 그렇다고 수수방관으로 시간에 맡기려는 안일한 생각은 자포자기인 것이고.

 

자,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처음 이곳에 와서부터 점점 가중되는 이 현상 – 때로 앞이 확 트이는 듯 하다가도 이내 가라앉아 버린다. 작년 가을 논문을 마치고 철학을 시작하면서부터 이 상태는 더욱 드러나게 계속되고 있다. 우선 여기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 보다 ‘왜 이럴까’ 를 아는 게 급선무이다.

 

‘왜 이럴까’는 나의 주체성이 중심을 잃고 방향을, 목표를 명확히 못하고 있는 데서 온다. 나를 구성하는 본질적 요소들은 어떤 것들인가?

예로부터 신학교 생활의 3대 요소는 건강, 성덕, 지식이다. 이 고전적 정의는 자율적인 이곳 서구 사제 양성에서도 지침이 되고 있다.

 

(1) 이곳 생활에서는 공부가 첫째 목표인 만큼 공부가 단연 으뜸가는 요소다.

(2) 신심 생활은 물론 모든 생활면의 총체 개념이나, 그것만 따로 고찰할 수는 없다.

 

(1) + (2) 가 사실상 지극히 민감한 상호 작용을 일으키는 ‘유기적 관계’ 라는 점에 문제의 전부가 달려있다.

지금의 상황에서 위의 (1) (2) 를 잘 종합, 분석이 사태 파악의 전모를 드러내 준다는 것은 너무 분명하다. 거기에 아마 서품 敍品을 눈 앞에 두고 있다는 점이 부수적으로.

(1), (2) 둘 중 하나가 확실치 않으면 내 주체성은 즉시 적신호가 울린다.

 

나는 지금 철학을 공부하려고 첫 발을 내디디었다. 요새 철학사의 전체 흐름과 제일 중요해 보이는 형이상학을 단숨에 파악해 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전자는 서문대로 ‘정신의 자유’이다. 모든 가능한 사상 事象의 반복, 나열이다. 그래도 그 조류나 각 개인을 살펴보려면 상대적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구원 久遠 철학은 빛 좋은 개살구, 내가 그걸 하려는 것은 우연히 주어진 환경 탓뿐이 아닌가.

그런데 위의 ‘유기적’ 운운과 연관시켜 생각해 볼 때, 그리고 나의 구체적 사제상과 연결시켜 종합해 볼 때 철학의 사실은 ‘참 중요한 관건’이다. 지금까지의 눈 가리고 아웅하는 철학 공부는 이제껏 나의 근원이고 지고 至高 인 하느님의 영상을 아주 흐리게 한다. 구약 신학을 공부하면서, ‘야훼, 유일 신’ 앞에서 전인 全人으로서 두려움을 느끼는 ‘한 인간’은 여기서 흔적도 발견할 수가 없다. 철학은 진리 탐구가 그 전부다. 그런데 한마디로 구상 具常 선생님의 ‘결론부터 출발한 인생’인 내게 있어 이 사실이 박진 할 수 없는 것은 자명하다. 그리고 그 결론이란 것은 내가 손에 쥐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모처럼 ‘환희’로서 파악되는 찰나적인 – 그럴 때는 모든 것의 총괄임이 분명해지는 = 현실이다. 그러니 철학 공부를 하는 재미나 내적 충동이 완전히 결여돼 있다.

(1) (2)는 하나의 양면이다. 그리고 사실상 일의 순서는 현재의 내게 있어 (1) -> (2) 이다.

‘이해하기 위해 믿는다.’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 이라 하지 않는가.

내게 주어진 지상 과업인 (1) 을 하는 중에 (2) 는 자연히 해결돼야 하는 것이다. 안간힘을 써서 믿으려고 하거니와, 적어도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믿는 현 처지에서.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위의 고찰로 약간 뚜렷해진다.

(1) 을 아우구스티노와 보나벤투라의 말을 따라 (2)와 겸행하면서 선 先해 감이 답이겠다. 즉 (1) 의 철저한 탐구. 사실 (1) 을 언제 철저히 해 보았는가. 변죽만 울리고서 (1) (2) 의 부조화만 탄식해 왔다!

그러므로 (1) 의 추구에 있어 예컨대 변증법적 유물론을 할 수는 없고, 칸트만이 내 주된 과제가 될 수는 결단코 없겠다. 실존주의 철학의 야스퍼스도, 매력 있는 셸러도 그것뿐일 수는 없다.

결국 토마스와 네오 스콜라 철학이 내가 해야 할 유일한 것임이 이제 분명해지는 것 같다.

그러므로 현재 (1) 에서의 혼란은 반드시 있어야 할 진통의 과정일 것이다.

 

– 내 사제상.

사제 司祭란 말이 너무 벅차다. 제사장이라는 것이겠지. 신부가 조금 낫다. 신 神자가 들어 있으나 덜 신화적 神話的이니까. 신부는 복음 선포가 해야 할 일의 전부이다. 사람들에게 실질적으로 세계를 주고, 하느님과 접하게 해야 하고, 그들의 신앙 문제, 나아가 인생 문제에 조언을 해야 하는 것이라고. 이것이 고전적 정의이다.

 

그런데 나는 이 점에 비춰 어떠한가?

 

신부는 결혼을 포기(?) 한다. 마찬가지로 결혼하는 이는 신부를 포기한다. 둘은 1/2 식의 가능성 중 하나를 택하는 것이다. 이 둘이 하느님을 향하고, 그분을 파악하려는 쓰라린 눈물겨운 길에 있어 우선권 같은 것은 애초부터 없다. 같은 차원에서 노력할 뿐인 것이다.

 

현재는 신부에게 많은 것을 – 대부분의 경우 초인적 이상적 그리스도를 요구하고 있다. 이게 틀린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일단 신부행을 결단한다면 이런 요구에의 보다 더 절식하고 철저한 노력을 하겠다는 조건마저 수락하는 것이다. 이점은 나도 긍정한다.

가장, 아니 보다 참된 그리스도인이기를 노력하고 싶다. 진정코! 내 나약하고 의지박약한 노력으로나마 나는 결단코 이 점을 잊지 않으려 한다.

 

그런데 그런 구체적인 양상은 어떻게 표시돼야 될까? 중요한 문제다.

1시 반, 키아라 루빅같이 되어야 하는가. 가르멜회에 입회를 해야 하는가. 그러는 것도 무척 좋을 거다. 그리고 잘만 하면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공부를 하지 않을 수 없다. – 내적 충동에 의한 목적 자체는 결단코 아니다. 그 길을 통해 내가 신부로서의 그리스도이고자 한다면 나는 현대의 와중에서 구원 久遠의 철학을 공부하여 청빈, 고독을 택하여 살아가는 한 조그마한 심볼이고 싶다.

성당에 꽃을 꽂는 그 수수한 수녀는 누구도 알아 주지 않으나 그 작은 숨은 노력은 성당을 아름답게 해 준다. 주께서 원하시면 그는 성당을 찾는 많은 구도자에게 보다 더 없는 귀중한 존재가 된다. 이런 작은 상징이고 싶다.

청빈과 고독을 스스로 택하여 사는 것, 이것이 내 사제행의 동기고 도 그런 그리스도이고 싶다. 그리고 주께서 원하신다면 조그만 향기를 풍길 수도 있는…..

 

 

 

 

III 메모와 편지

 

 

송별답사

 

바쁘신데 저를 위해 이렇게 자리를 마련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제가 떠나고, 앞으로 한참 동안은 서로를 못 보게 된다는 실감이 전연 나지 않습니다만 정신을 가다듬고 ‘나는 가는 거다. 이 학교와 친구들을 떠나는 거다’라는 다짐을 하면서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저로서는 이번에 피정이 없었다면 참 섭섭할 뻔 했습니다. 그것은 그 동안 많은 경험을 해오는 가운데 생각한 것도 많고, 고민깨나 하면서 재미나는 일, 재미없는 일도 참 많던 곳, 내가 이만큼 성장해 온 이곳에서 마지막으로 차분히 정리를 하고, 마무리를 잘 지어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니 모든 것이 새롭고, 다시 한번 눈 여겨 보아지고, 여러 친구들과 좀더 잘 지낼 것을 하는 후회도 되고 … 참 느끼는 바가 많습니다. 따지고 보면 모든 장서, 모든 시간이 같은 것이 없고, 같은 장소에 두 번 다시 있을 수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장소가 바뀐다고, 주위 사람들이 다르다고 내가 변할 리도 없는 것이거니와, 하느님을 지상 지상으로 모시고 있는 우리이니까 만남과 헤어짐을 그리 크게 생각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보다는 닥치는 매일이 일을 충실하게 해 나가려는 노력 속에 하느님을 향하는 열의만이 식지 않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고아가 되지 않도록 기도 많이 해 주십시오. 앞으로 한참 후이겠지만 서로 웃으면서 조금도 변치 않은 채로 만납시다. 그 동안 여러 가지로 염려해 주시고, 격려해 주시고, 아껴 주신 것 진정 감사합니다. 가서 힘 닿는 대로 한껏 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1974년 3월

 

 

 

사랑한다는 것

 

엊저녁 강의록을 읽던 중 참으로 깊이 음미해 보면서 함께 얘기를 나눌 만한 대목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신비로운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 자신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생활이 얼마나 순수하고 진짜인가를 재는 유일한 척도는 자기가 얼마나 사랑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고 또 그것을 얼마만큼 실천하는 가에 있다’라는 구절은 아마 새로운 것은 아닐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말을 들을 때마사 ‘과연 중요한 것이다’라고 마음에 새겨 두려는 노력도 했을 겁니다. 그러나 ‘공기’나 ‘물’이 우리에게 최고로 중요하지만 그 고마움을 느끼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들 합니다.

위의 구절도 너무나 자명한 것이지만 오히려 그렇게 때문에 그 소중한 내용을 계속적으로 속속들이 파헤치지 못하고 지나쳐 버리고 마는 것 같습니다.

문제는 ‘자기가 얼마나 진정으로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가’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능력’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사실 이 문제의 답은 가장 가까운 데 있습니다. 너무나 손에 잡힐 듯이 쉬운 내 가까운 곳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오히려 사랑이란 ‘삼위 일체의 내적 원리’이고 ‘만물의 소산’인가 보다 하고 하늘을 쳐다 보며 생각합니다.

 

사랑은 ‘단순’합니다.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받은 것이 아니고 ‘자기가 먼저’ 남에게 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계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투명하고 단순한 사리 판단에 훨씬 선행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절대적입니다 – 절대적으로 순수한 것입니다. 고개를 약간 숙이고 합장을 하는 데에 사랑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은 나의 ‘때가 이르지 않았으니’ 우선 책상에 앉아 공부나 열심히 하다가 ‘때가 되면 몇 갑절로 하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랑이 아닙니다.

또한 사랑을 행할 때에도 자기가 사랑을 베푼다는 의식이 조금이라도 들어 있다면 그것도 이미 진짜 사랑이 아닐 것입니다. 사랑은 투명하고 순수하기 때문입니다. 길가에서 손을 내미는 걸인을 볼 때에도 내 돈 10원이 과연 그에게 도움이 될까? 오히려 자활 정신을 길러주기 위해 주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는 계산을 하게 되는데 이것은 이미 틀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호퍼 신부님이 오셔서 기숙사 문제를 토의해야 하니 누구 한 사람 나오라고 할 때, 서로 미루는 것도 사랑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다 가지 못하더라도, 물론 그런 일에는 누구든지 한 사람밖에 갈 수 없을 것입니다. 똑 같은 마음으로 그 일에 참여하여 다녀온 사람의 보고를 잘 듣고 실천하는 것이 바로 사랑일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모든 것은 울리는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회칠을 하여 겉은 번지르하나 썩은 무덤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우리 노력은 모래 위에 집 짓기라는 사실을 다시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그 구절을 들어봅시다.

‘오늘날 자신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생활이 얼마나 순수하고 진짜인 가를 재는 유일한 척도는 자기가 얼마나 사랑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고 또 그것을 실천하는가에 있다.’ 참으로 그것만이 생명 있는 것이고, 그것만이 영원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지금 이 시각에 만나는 이웃에게 먼저 관심을 갖는, 조건 없는, 계산을 하지 않는 따뜻한 미소로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1976년 11월 1일 강론

 

 

 

참된 인간화

 

정돈과 청결과 규칙 생활은 바로 낭비 방지와 능률의 극대화에 그 의의가 있다. 그저 요령만으로 모든 일을 잘한다는 것은 장거리 경주에는 맞지 않는 전법이고, 곧 바닥이 드러난다. 이런 것이 비인간적이라고? 그럴 수도 있는 경우가 있겠으나 잘 보면 그것이 참된 인간화가 아니겠는가? 게으름, 무성의, 무질서, 분명치 못함이 인간적인 것이 아니다. 타협이 인간적인 것이 아니다. 누가 무어라고 해도 하느님께 밖에 해결의 길이 없고, 거기에 참된 진짜 인간화가 있는 것이다.

하느님과 교회, 교리, 신부는 구별해야 한다는 생각은 옳다. 단 그릇된 교회, 교리, 성직자의 모습과 구별하는 한에서 말이다. 이렇게 건강한 일상 생활과 여유 있는 자세와 참된 긴장은 곧 하느님과 직결되며, 이것이 진짜 인간화가 아니겠는가? 아, 참된 인간화 – 하느님.

 

 

 

하느님을 안다는 것

 

참 자기와 진리(인생과 우주에 대한)와 미의 인식.

예술과 학문과 자기 완성에의 끊임없는 정진.

 

그를 위해 일상적 빈 껍데기에 정신을 쓰지 말자.

 

결과에 너무 초조하지 말고 충실한 과정을! 순간을!

 

신부, 신부 됨, 신부 임, 너무 큰 전제이다.

하느님, 나, 다른 이들.

이 엄청난 정리 定理를 인정하기까지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나이도 어리고, 경험도 적고, 나이에 비해 늦게 성숙하고, 늦게 자아를 인식하기 시작했는데 (실로 아버지의 사망 이후에 나는 자아를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그 전제가 가톨릭이 아니고 하느님이라는 것을 안 것은 진정 해결의 큰 실마리였다.

– 내 목표는 하느님이다. 가톨릭이 아니다.

목표는 진리이신 하느님.

– 하느님의 인식, 동양적 방법.

내 심혼까지 스며들 수 있는,

생활화될 수 있는,

피부로 느낄 수 있는,

– 항상 이렇게 전체적으로 볼 수 있고, 정신의 긴장을 잃지 않게 해 주소서 (마음에 맞는 사람, 마음에 맞는 책).

 

오늘 저녁 전혜린 씨의 얘기들과 아버지의 생애를 같이 접할 수 있었던 것은 굉장한 수확이다.

두 사람의 차이점은 아버지는 한 계단 더 올라가 하느님을 찾아 냈다는 점이다. 이것은 이런 말 한 마디처럼 아주 근소한 차이일 수도 있고, 엄청난 차이일 수도 있다.

근본적인 차이 – 하느님을 인식함.

 

그렇듯이 소중한 인식을 그렇게도 값싸게 –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나, 그것은 습관성 인식에 의해서 그렇게 된다.

 

이제 길이 열리고 가능성이 보이고!

이유가 확고해졌다.

가장 깊이 학문할 수 있는 여건이 내게는 마련된 것이다.

얼마나 큰 혜택이냐?

 

– 1972년 2월 26일 오전 4시 30분

 

 

 

나는 어디까지 와 있는가?

 

나는 지금 여기서 무엇을 얻고 있으며

나의 지반은 튼튼한가?

전망은 밝은가?

그리하여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새 술은 새 부대에…

신학교 건물이 80년 만에 탈바꿈하였다.

실로 눈부신 변천이다.

그러나 잠깐,

나는 헐리는 구관 舊館의 의미를 알고 있는가?

새 건물에 입주할 자세와 각오는?

 

가련하고 사랑스러울손 어릿광대여,

그대만은 무서운 경화증을 충분히

의식하고 있으련만…

삶이 빠져버린 종교로서의 종교, 신학생으로서의 신학생은 어찌된 일인가.

 

‘생을 청한 일도 없는데…’

생겨난 나.

짙은 생명력을 지닌 유일 무이한 내 삶은 어떻게 조성되는 것인가?

인간의 참 모습의 추구가 그 얼마나 존귀하며, 반면 우리 자신은 삶의 창작에서 그 얼마나 멀어졌는가?

 

페난트와 구호와 홍수 속에 우리는 도로 徒勞 하고 있지 않는지.

우리 몸부림의 허와 실은?

 

영세 때 마귀를 끊어 버린 우리.

그리고 “네, 여기 있습니다.” 라고 힘차게 대답한 우리.

그러나 긴장과 대립과 도전 속의 사면초가란 웬 말인가?

우리는 인간 실존과 신앙의 양극성 사이를 아직도 얼마나 왕복해야 하는가?

 

나의 신앙 결단.

나는 십자가를 부끄러워하지 않으련다. 나는 신앙 결단의 요청을 체험하고 있으며, 나의 신앙 결단은 결코 추상적이 아니며, 이제 구체화시키기 위해 창의를 발휘하고 있다.

 

– 1973년 <Alma matel> 교지

 

 

 

하느님은 나를 나로 만들었다

 

구라파 생활이 내게 줄 수 있는 것 중에서 귀중한 것은

– 신앙에 관련되는 모든 사상 事象에 있어서 어느 것이 본질적인 것이고, 어느 것이 우연적인지를 비교적 저절로 알 수 있게 해 주는 것.

 

일단 긍정적인 답변을 추구한다 (인생과 전과제).

전인 全人 – 신앙 생활 (수계 守戒 와 교회).

– 학문.

– 산.

– 문학, 예술.

신부이어도 동양인이기에.

자유인 – 여러 종교 – 비종교인까지도.

하느님은 나를 ‘나로 만들었다.

 

학문

– 엄밀한 의미의 학자 타입은 아니다.

(논리 전개 자체는 무미 건조 – 생명이 감돌고 뿜어져 나와야)

– 학문, 신앙, 일상의 완전 조화.

(서로 별개일 수는 결단코 없는 것)

 

열린 마음.

– 침착, 평정 平靜 유지.

– 존재론적 자세 유지.

 

신앙. 피나는 철저성 (Radikalitat).

그것은 봄비가 온 땅을 빈틈 없이 촉촉하게 적시듯 내 심혼을 완전히 적셔야 한다. 그것은 요란한 흥분은 아니다 (전명성 – 평정성).

– 1976년 1월 20일 메모 5 중에서

 

 

 

믿는다

 

믿는다.

– 알아야 믿는다 (intelligo ut credam)

– 공부해야 안다.

– 공부한다.

 

‘내’가 인식한다 – 남에게 전한다.

‘내’가 확실히 ‘인식하고’ 있어야 전하지.

신부행은 신 인식에서 최고의 경지 (내게 있어).

알고 보니 가까운 데서 – 피나는 노력 : 지키기 – 예수의 삶. 다시 넘어진다. 낙관은 금물! 그러나 실망은 더 금물! – 나무 심기

노력 – 이 노력의 의미는 나의 생사가 달려있는 절대적 요청.

한국에서보다 몇 갑절 노력.

 

이상의 것이 이론적 허구이지 않기 위해.

주여, 하려 하오니 도와 주십시오.

 

– 메모 중에서

 

 

 

친애하는 비오 신부님

 

편지 1

찬미 예수.

안녕하십니까? 신부님께서는 건강하시고, 신부님의 아름다운 교회는 여전히 정돈되어 있는지요?

안 신학생이 저에게 전해 준 사진들은 감사히 받았습니다. 사진들은 신부님을 잘 기억나게 해 줍니다. 그 중 두 장을 저의 어머님께 설명을 자세히 적어서 보내드렸습니다.

이 그림책을 신부님의 생신 기념으로 선사하고 싶습니다. 마음에 드시는지요? 이 그림책은 서점에서 우연히 발견한 것입니다. 신부님의 마음에 들기를 바랍니다.

시험 때문에 로마로 갈 수가 없습니다. 요한과 저의 두 동료들은 지금 신부들입니다. 저들은 한국 민족이라는 짐을 하느님의 제단에로 지고 가고 있습니다. 사제로서의 그들의 삶을 위해 저는 기도합니다.

7월과 9월에 인스브루크에 있고 싶습니다. 이곳 카니시아눔 (신학원) 에서 공부가 제일 잘 되기 때문입니다. 다가오는 학기, 특히 세미나와 졸업 논문을 위하여 준비하려고 합니다.

7월 28일부터 8월 9일까지 저는 몇 동료들과 함께 잘츠부르크 대학 주간에 참가하려 합니다. 주제는 ‘한계, 체험, 죽음’이고 강의 8개와 세미나가 있을 것입니다. 제게는 주제가 무척 흥미로우며, 이 기회에 그 도시도 조금 구경하고 싶기도 합니다. 여기서도 신학교에 머물 것입니다.

신부님께서 휴가에서 돌아오신 후에 신부님께 가고 싶습니다. 저는 아직 신부가 아니기 때문에 신부님 댁에 머물더라도 신부님을 많이 도와드릴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결정했는데 신부님은 동의하시는지요?아니면 언짢으십니까? 정확한 일정에 관해서는 떠나기 전에 다시 알려드리겠습니다.

이번 학기에 두 개의 세미나와 논문과 시험이 하나 있습니다. 논문들 중에서 하나는 A를 받았고(교회 법), 또 다른 하나는 (교의 신학) 아직 모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었던 것은 모두 말씀드린 것 같습니다.

말리스 양과 수산나에게도 인사를 전해 주십시오. 신부님의 생신일에 만복을 축원합니다. 신부님을 다시 뵈올 것을 기뻐하고 있습니다.

 

1975년 6월 26일 인스브루크

김 베드로 올림

 

 

편지 2

지난 번 신부님과 헤어진 후 아무 글월도 드리지 못했습니다. 저의 불찰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는 편지를 항상 이런 구실로 시작합니다. 이런 구실없이 저는 편지를 시작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신부님께서 언젠가 저를 힐책하셨던 제 이야기투이며 사고 방식입니다.

수술한 뒤에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신부님께서 회복되셨다는 소식을 프란츠로부터 듣고 매우 기뻤습니다. 지금은 이전처럼 아주 정상적이십니까? 신부님께서 완전히 회복되시기를 바랍니다. 말리스와 수산나 양도 잘 지내고 있습니까?

이제는 올림픽의 소음이 지나고 인스브루크가 다시 정상으로 되었습니다. 올림픽 동안에 경기장에 세 번 가서 우리 나라 선수들을 위해 국기를 흔들고 고함을 지르고 하였습니다. 추측대로 성과는 대단치 않았지만, 제 자신은 석사 논문만이 문제라 그런 결과는 별로 관심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번 방학에 신부님을 뵈올 수 없다는 것을 말씀드려야 하겠습니다. 제 지도 교수님이 논문의 임시적 구상을 방학 끝까지 만들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여기에만 전념해야만 합니다. 며칠간의 소위 공식적인 방문을 이번에는 못 하겠습니다. 신부님, 언짢으십니까? 전혀 그렇지 않으시리라고 믿습니다. 교수님께서 제 세미나 레포트에 ‘A’를 주셨습니다. 이것은 제가 작은 격려였습니다.

4월 4일에 부제품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전에 며칠 동안 수도원에서 짧은 피정을 할 예정입니다. 그 후에 신부님께로 달려가겠습니다.

한 번 더 완전한 회복을 진심으로 기원하면서 여기서 마칩니다.

말리스 양과 수산나 양에게도 저의 안부를 전해 주십시오.

 

1976년 2월 18일 인스브루크

베드로 올림

 

 

편지 3

신부님, 주신 편지를 감사히 받았습니다. 이번에도 돈을 보내셨군요. 신부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100 프랑을 즉시 제 친구에게 신부님의 인사와 함께 전해 주었습니다. 그에게는 굉장한 기쁨이었습니다. 그 친구는 신부님께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습니다.

신부님, 제가 신부님을 도울 수만 있다면 저야 물론 기꺼이 대령하겠습니다. 그러나 부제는 관면 없이 병자 성사를 집행할 수 없다는 것을 유감스럽게 말씀드려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관면은 교구장이신 주교님만이 베풀 수 있습니다. 이러한 관면을 여기서도 받을 수 있는지 물었지만 위와 같은 해답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신부님께서 그곳에서 저를 위한 관면을 청해 주시기를 희망합니다. 제가 어떻게 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가가 의문입니다. 하지만 해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신부님의 휴가가 7월 10일부터 시작되므로 저는 7월 9일 신부님께 가서 그곳에서 머물겠습니다.

저는 여기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 사이 저는 논문에만 전념하여, 오늘 교수님으로부터 이 논문의 셋째 부분을 받았습니다. 교수님은 제 논문에 동의하시고 만족하셨기 때문에 지금 대단히 기쁩니다. 7월에도 신부님께 머물면서 계속 일하겠습니다.

제 친구는 저와 함께 신부님 댁에 머물 수 없는 것이 거의 확실합니다. 그의 휴가 계획이 바뀌어졌기 때문입니다. 신부님의 친절하신 배려에 대해서 한 번 더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신부님의 건강을 빌면서 안녕을 고합니다. 말리스 양에게도 제 안부를 전해 주십시오.

 

1976년 5월 22일 인스브루크

김 베드로 올림

 

 

편지 4

지는 저는 다시 집에 와 있습니다. 이제 겨우 도착해서 지금 본래의 질서를 찾기 위해 준비하고 있습니다. 순례 여행은 결코 잊어버릴 수 없을 만큼 대단히 아름다웠고, 은총이 충만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주 천주께서 제게 이러한 기회를 허락하신 것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왕복 여행 중에 우리는 발렌슈타트 Walenstadt를 통과하였습니다. 신부님과 아름다운 성당을 생각했습니다.

신부님의 세르레스 등반을 위해 신부님께서 문제없이 마리아 발트라스트까지 차를 타고 오실 수 있는지 전화로 알아 봤습니다 (거기서부터 정상까지 걸어서 3시간 반).

곧 다시 만나 뵙게 될 것을 기뻐하고 있습니다.

 

1976년 9월 13일

베드로 올림

 

 

편지 5

안녕하세요?

지금 제법 밥이 깊었습니다. 신부님께 편지를 쓰기 위해서 내일 아침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습니다. 신부님이 저를 좋아하시고 사랑하신다는 것을 저는 매우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망설이지 않고 신부님께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성작에 대해서 지금까지 생각해 오다가 비로소 지금에야 모든 것이 명백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도자기로 된 성작을 가지고 싶습니다. 신부님께서 아직 성작을 주문하시지 않았다면 하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저는 급하게 이 편지를 쓰는 겁니다.

저의 변덕을 용서해 주세요. 그러나 신부님은 저를 이해하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작에 대한 저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성작이란 한 사제에게 그의 사제직을 위한 상징이어야 하기 때문에 성작은 사제의 내적, 외적의 행동을 표현해야 합니다. 주님을 본받으려고 노력하는 사제는 이론적으로 뿐만 아니라 실제로 이것을 실현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저는 지금 금으로 된 성작을 가져야 할 아무런 근거도 찾지 못했습니다. 저는 위에서 너무 거창하게 ‘주님을 뒤따르고’, ‘실제로’ 등등의 낱말들을 썼습니다. 물론 저는 남의 모범이 될 만한 인물이 됩니다. 저는 그저 도자기로 된 성작을 가지고 싶다고 말씀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모두입니다. 이 결론은 저의 자유로운 마음에서 내려졌다는 것을 첨가하고 싶습니다. 지금 저는 테제 Taize에 있는 성작들을 기억합니다. 이러한 성작들 중에서 하나를 가지고 싶고, 이것을 위한 시간은 아직 있습니다.

또한 집에서 온 지난 번 편지에서 저의 한 친척이 제의 한 벌을 선사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제의를 걱정하실 필요가 없다고 믿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신부님을 모욕하는 것인지요? 전혀 그렇지 않으리라고 믿습니다. 신부님은 웃으시면서 “이것은 네 일이니 네가 알아서 할 일이다.” 라고 말씀하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십자가에 관해서도 전 하나의 생각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카니시아눔(신학원)에서 아주 좋은 그리고 단순한 십자가를 발견하였습니다. 어느 곳에서도 이 십자가를 본 일이 없습니다. 이 십자가는 이곳의 어느 방에서 걸려 있는 것이어서 바로 제 앞에도 걸려 있습니다. 이 십자가를 저의 특별한 십자가로 삼아서 후에 신부님께 가지고 가 보여드리겠습니다.

제가 복잡한 사람이라는 것을 신부님은 잘 알고 계십니다. 저를 용서하시고 화를 내지 말아 주십시오. 신부님께서 아직 성작을 주문하시지 않았다면 좋겠습니다.

친애하는 비오 신부님, 요즘은 어떻게 지내십니까? 말리스는, 수산나는, 그리고 프란츠는 잘 있는지요. 우리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2월 중순께 두 개의 시험과 석사 학위 시험이 있습니다. 다카우에 가려는 우리의 계획은 어떻게 되었는지요? 저는 시험 뒤에 다른 체험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2월 20일 전후라면 제게는 아주 적합하겠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물론 신부님께 달려 있고 전 항상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신부님, 신부님을 늘 생각하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여기서 마칩니다.

 

1977년 2월 5일 인스브루크

베드로 올림

 

 

 

편지 6

신부님의 두 편지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감사히 받아서 여러 번 읽었습니다.

지금에야 비로소 회신을 드리는 것을 용서하십시오.

신부님이 김정훈이라고 쓰신 것은 대단히 사려 깊은 것입니다. 이것은 제게 대한 신부님의 사랑을 표현하는 작은 표시이기 때문에 저는 더욱 기뻤습니다.

저는 신부님을 잘 이해한다고 믿습니다. 여러 점에서는 신부님이 저를 이해하는 것보다 더 잘 이해한다고 까지 믿습니다.

신부님께서 순전히 저 때문에 저를 위해서 많이 수고해 주셨습니다만 이 모든 것을 사랑으로부터 행하신다는 것을 저는 잘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게르씨의 두 번째 상본은 퍽 마음에 듭니다. 이 상본을 제 기념으로 택하고 싶습니다. 신부님이 동의하시고 그리고 다른 어려움이 없다면 게르씨의 두 상본을 각기 1천 매씩 인쇄하고 싶습니다. 제가 그 후면에 쓰고자 하는 것은 일자가 확정된 뒤에 신부님께 써 보내겠습니다. 상본에 관해 신경썼던 일들이 끝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단견적 短見的이고, 불확실하고, 자각심이 적고, 지나치게 겸양한 것(?)… 이것이 저의 모든 것입니다. 저는 좀더 사려가 깊고, 객관적 이려고 하지만 이것이 제겐 쉽지가 않습니다. 신부님의 관대하시고 아버지와 같은 사랑에 대해서 제 감사한 마음을 억제하기가 어렵습니다. 소위 현상론 現象論 의 근거가 여기서부터 나옵니다. 저는 무엇인가 제게 주어지면 좀더 순수하고 단순해져야 한다는 것을 느낍니다. 신부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만사에 있어서 종내에는 기도만이 기본적인 의미의 관건이 됨을 알겠습니다.

친애하는 신부님, 저는 기도 속에서만 어떤 것을 좀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점을 저는 잊지 않을 것입니다.

기도 속에서

 

1977년 4월 30일 인스브루크

베드로 올림

 

 

편지 7

지금 저는 아주 기뻐하면서 신부님께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마침내 서울로부터 편지를 받았습니다. 주교님께서 9월 1일 이곳으로 오셔서 저에게 사제 서품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주교님의 인사를 신부님께도 전해 주시랍니다. 이 모든 것이 때가 되었을 때 잘 진행되기를 바랍니다.

저의 주교님은 노트르담 대학교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지미 카터 대통령과 발트하임 유엔 사무총장 및 다른 사람들과 함께 받기 위해서 미국으로 여행을 떠나셨답니다. 이런 일들이 우리에게는 아주 중요한 일인 것 같습니다. 우리들 중에 한 사람이 7월 한 달 동안 신부님을 도와드리려던 계획은 아무래도 불가능한 것처럼 보입니다. 세 사람 모두가 다른 일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대단히 죄송합니다.

게르하르트로부터 신부님께서 어쩌면 그의 첫 미사 때에 티롤에 오르실지도 모른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저도 신부님께서 오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는 대단히 잘 지내고 있습니다. 프란츠 신부는 지금 해변가에 있는 본당에서 본당 사목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신부님께 이로써 ‘안녕’을 고합니다.

 

1977년 5월 13일

사랑과 충실 속에서

베드로 올림

 

 

 

어머님께

 

오랜만에 드리는 소식이군요.

그 동안 어떻게 지내고 계세요? 어깨와 무릎이 아프신 건 좀 어떠시구요? 지난 번 침을 계속 맞으셔도 별 효과가 없다고 들었는데, 그 동안의 모든 큰 일, 작은 일이 쌓여 그리 되신 것이지요. 그리고 보니 내일이 어머니날이에요. 저와 금효는 여기서 건강히 잘 지내는 것이 선물이겠고, 거기서 누나랑 꼬마들이 좀 기쁘게 해드렸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여기서의 소식 기다리셨을 거예요. 지난 번 정수 신부 편에 자상한 어머니 편지와 막시마, 계훈이, 데레사 그들 아주 반갑게 받아 읽었어요. 그리고 보내 주신 김자반과 잣도 아주 흐뭇했어요. 밤늦게까지 김을 만드셨다고 들어서 더욱… 무엇보다 또또가 아주 신통하게 열심히 공부를 한다 하니 무척 기쁘고 든든한 느낌입니다. 녀석, 이제 자기 속에서부터 공부를 하는 재미를 붙인 것 같아 아주 대견스럽군요. 과 科 문제도 차차 구체적으로 연구를 해야 할 때가 되었군요. 우선 그곳에서 대체로 가능성을 알려 주시면 저희도 여기서 연구를 하지요.

 

막시마도 다시금 궤도에 올라 해부를 하고 역시 ‘우리의 희망이고, 호프’로서의 노릇 잘 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구요. 지난 1년이 그 애한테 여러 모로 약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사람이 한 번 크게 쓴 맛을 봐야 자기 자신에 대해, 세상을 산다는 사실 자체에 보다 겸손하고 진지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런 쓴 맛을 일부러 찾는 건 어리석은 일이지만 일단 일이 주어지면 최대로 선용해야겠지요. 막시마가 정신적으로 많이 성숙했기를 바랍니다. 데레사도 여전히 잘 지내고 있다지요? 지난 번에 편지를 금효와 같이 읽으면서 무슨 구절에서인가 몇 번이나 깔깔 웃었어요. 데레사는 ‘우리 집의 보배’입니다. 아직 어리니 무럭무럭 크면서 공부고 세상일이고 를 잘해 갈 거예요.

 

계훈이는 일주일에 두 번 집에 온다지요? 방 친구들과 그런 대로 마음이 맞는다니 다행이고, 계속 성실하게 하지만 하면 아주 훌륭해질 거예요. 제가 좀더 편지를 통해서 의견 교환도 하고 대학 생활도 묻고 한다면서 쉽지 않아요. 하긴 잘 해갈 줄 믿고 있어서 걱정은 하지 않습니다.

 

할아버지는 어떠세요? 이제는 기력이 더 나아지실 리는 없을 것이고, 그저 기쁘시게 지내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지난 번 편지에 아저씨와 선효가 안부를 전한다 해서 기뻤지요. 언제 보시면 특별히 안부를 전해 주세요.

얼마 전 가톨릭 시보를 보니 엄마가 교도소 후원회에 계속 부회장으로 일하시게 되셨더군요. 건강을 생각하시면서 무리하시지 말고 (첫째!) 좋은 일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집 문제 때문에 걱정이 크시다고 정수가 그러던데 물론 그러시리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정든 사직동 집이 사라진다니 저로선 정말 애석한데 사정이 그렇다면 할 수 없지요.

그리고 수속은 얼마큼 진전이 있습니까? 지난 번 서류에 더 첨가돼야 하거나 잘못된 건 없었나요? 그리고 비행기표를 이쪽에서 산다는 얘기는 이씨와 잘 이해가 되었는지요. 수속 중 표가 있어야 된다면 연락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 서품은 아직 명확한 일자가 미정이어서 좀 답답합니다만 – 스위스 본당에서도 준비 관계로 빨리 일자를 알고 싶어합니다만 – 추기경님의 예정이 분명치 않으니 할 수 없지요. 여하튼 그런 중에 성작, 제의(라 선생님이 보내 주신 것과 본당서 간단한 것 하나 더 준비), 상본 등 2차적인 준비가 잘되어 갑니다. 엄마는 8월 중순경 – 그보다 빠르셔도 좋구요 – 오시면 적당하실 것이고 9월 말까지나 10월까지나 사정이 되시는 대로 머물다 돌아가시게 할 작정입니다. 리히텐슈타인의, 그 라 선생이 잘 안다는 아주머니가 엄마 계시는 동안 그 집을 사용해도 좋다고 해서 얼마간 (그 아주머니는 집을 비우고, 다른 곳에서 근무하고 주말에만 오시니까) 지내실 수 있어 고마운 일이지요.

하나 애석한 건 금효가 지난 번 4월 19일에 친 독어 시험에 합격이 되지 못했어요. 놀라시지는 마세요. 아마 지금쯤은 감정이 정리되고 새 기분이 되어 다시 꾸준히 공부하겠지만, 그 애로선 타격이 무척이나 컸지요. 객관적으로 보면 그만한 기간에 그 정도 수준까지 간 것이 굉장한 일이에요. 이 얘기는 너무 길게 쓸 것도 사실 없는 것인데 금효가 속 시원히 이런  자세한 얘기를 쓸 수는 없을 것이니까 제가 썼지요.

다음 시험은 10월에 있는데, 유감인 건 엄마가 오실 때 같이 여행할 계획인데 좀 안심하고 다닐 수 없지 않을까 하는 거지요. 이건 그때 가서 조정하면 되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계속 건강하고, 이제 앞 산의 눈들이 많이 녹아 등산을 슬슬 시작할 작정이라 아주 기뻐요. 여기선 공부 외에 건전한 소일거리가 반드시 필요한데, 등산을 할 수 있게 된 건 아주 큰 복입니다. 그 동안 여러 번 다녀왔고 몸에도 정신 건강에도 이보다 좋은 게 없습니다. 리히텐슈타인의 그 아주머니와 친척들한테서 배낭, 등산화, 등산복 등을 아주 좋은 걸로 선물 받았기 때문에 장비도 이제 골고루 갖추었고, 가끔은 같이 있는 한국 신부나 신학생들과도 갑니다.

공부는 이번 학기 중에 서품을 받지 않게 되어, 그대로 착실히 학기를 잃지 않아 다행입니다. 엊그제까지 세미나 두 개를 하고, 이번 6월에 시험을 한 과목 보면 철학에서 논문을 쓸 자격이 있게 됩니다. 그러나 철학은 신학과 아무래도 생소해서, 기본 바탕이 한국 학생에게는 좀 적으니 신학보다는 길게 걸리고 어려울 듯합니다. 우리가 하는 게 신학 – 신앙에의 추구가 원리 주임무이니 아무리 그리스도교 철학이라 해도 신학의 전제들을 다루게 되어 어렵지요. 그래서 신부들이 보통 신학을 하고 철학 전공을 꺼려하고 있는 거지요. 저도 큰 소리칠 일은 절대 아니지만, 바로 이런 이유에서도 – 한국에 철학 전공 신부가 거의 없으므로 – 하는 데까지 해보렵니다. 오기순 신부님이 자주 연락은 없지만, 성탄 카드 교환할 때마다 철학을 해볼 것을 여러 번 권고하셨습니다. 심 신부님도 그러시지요. 여하튼 문제는 계훈이가 항상 말한 대로 꾸준히 하루하루를 잘 키워 나가는 수밖에 도리가 전혀 없지요.

그리고 지난 1월 말에 엄마 앞으로 소소한 것들을 소포 뭉치로 해서 선편으로 보냈는데, 지금쯤 닿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달력들이 몇 개 들었는데 지금이 5월이니 우습지만 비행기편은 값이 너무 비쌉니다.

그러면 어머니, 수속의 경과를 한 번 알려주시기 바라고, 지난 번 정수편에 보낸 글월들, 선물에 대한 답을 이제사 드려 죄송합니다.

난효와 영일이는 계속 잘 있으리라 믿습니다.

자 그럼, 어머니 8월에 뵙고, 여기저기 여행도 하고, 제가 드리는 미사에도 참여하실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안녕히.

 

1977년 5월 7일

큰아들 드림

 

 

 

조정헌 신부님께

 

신부님!

이제 학기가 시작되었겠군요. 신학교 생활은 어떠십니까? 얼마 전 스위스에서 드린 글월 받으셨는지요? 언젠가 루르드에 가면 그때쯤 신학교에 계실 신부님께 인사드리겠다던 생각이 납니다.

단순해지려고 노력하면서 주님의 현실을 몸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1976년 9월 7일

같이 기도드리며 정훈 드림

 

 

신부님

바쁘신데 보내 주신 글월 감사합니다. 중략…

항상 말씀하시던 ‘원칙’을 계속 보여 주시기를 빕니다. 그게 사실 저희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임을 갈수록 느낍니다. 요사이 가을이 한창이어서 고비를 놓칠세라 시험에도 불구하고 산에 몇 번 갔었습니다. 오늘은 벼르던 베텔풀프 (2,725m)입니다. 같이 간 호퍼 신부님이 인사를 전하시겠답니다. 그럼, 안녕히.

 

1976년 10월 7일

 

 

신부님

지난 번 보내 주신 낯익은 필체의 글월 반갑게 받았습니다. 이제는 가르치는 방법이나 학생들의 호응, 동태도 많이 파악을 하고 계시겠군요. 그리고 요새는 검도부가 창립되어 열심히 운동하고 계시다는 말씀을 듣고 ‘여전하시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아직 신학생이라는 의식에 많이 기울어져 있어서 얼마 전까지 같이 얘기하고 운동하던 분이 교수 신부시라니 좀 어려워지고 생소한 느낌이 문득 들곤 합니다. 물론 이런 생각은 잠시의 느낌일 뿐이고, 신부님과 참으로 재미있게 지내면서 많이 배우던 때가 정말 좋았다고 거듭 생각하곤 합니다.

외람된 말씀이오나 모쪼록 학생들에게 무섭기만 한 교수 신부님이 아니시기를, 자주 말씀하시던 ‘원칙’이 살아 있는 가운데 좋으신 교수 신부가 되시기를 빕니다.

지난 부활을 즈음해서 여기는 계속 비나 눈이 와서 아직 산에를 못 가고 있습니다. 기다려지는군요. 그리고 저는 이제 철학 강의를 열심히 들으려 노력하는데 아무래도 신학에서의 분위기가 아니어서 제 생활 – 신앙의 구체적인 표현등과 생소한 기분입니다. 하지는 아직 무엇이 무엇인지 모르는 채이니 이런 말씀 드릴 계제는 아니겠지요.

건강하시고 재미있는 나날이시기 빌며.

 

1977년 4월 25일

 

 

 

 

현기호 신부님께

 

신부님께

…지난 5월 휴가 때 헐레벌떡 그곳을 떠나온 후 이제사 소식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아까 문득 상쾌한 가을 바람을 온 몸에 느끼자 즉시 3년 전 가을 도봉산으로, 오봉으로, 수유리로 신부님과 함께 다니던 기억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떠오르지 않겠습니까? 부적 신부님 생각이 간절해져서 곧장 내무반으로 달려와 아무 종이나 손에 잡고 이렇게 합천 신부님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직 거기는 가을이 오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여기도 나뭇잎이 물들었다든가 들꽃들이 져 버렸다든가 하지는 않았습니다만 바람 그 공기는 완연합니다. 아침 녘의 가슴 깊은 속가지 와 닿는 공기는 얼마나 좋은지요. 그저 ‘바람이 참 좋다’라고밖에 표현을 못 하겠습니다. …. 후략.

 

베드로 드림

 

 

신부님께

… 전략. 완월은 어떻습니까? 세 번째 싸움터시네요. 저는 요새 주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자기에게 보다 투철해질수록, 자기를 보다 철저하게 파악하려고 할수록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게 아닌가 하고요. 가톨릭의 이념, 하느님의 체계는 어쩔 수 없이 테두리 안이어서 인생이나 나를 파악하는 데 벌써 자유롭지 못하게 되는 것 같아요. 쓰다 보니 깊은 성찰 없는 말의 나열뿐이 아닌가 싶습니다만 문제임에 틀림없어요.

그 초록색 스타킹에 축구화를 신고 맹렬히 대시 dash 하시던 신부님, 당장 달려가 뵙고 싶지만 얼마를 더 기다려야 한대요.

 

1971년 정훈 드림

 

 

신부님께

… 본당 일은 잘 되어 가십니까? 무학산이라고 하셨는데 거기엔 여러 번 가셨겠지요? 특히 요새는 가을이 한창이어서 계곡은 더욱 깊어 보이고 정신도 맑아지더군요.

저희들은 지난 일주일 동안 (9-14) ‘알마 축전’이라고 해서 수업을 전폐하고 각종 행사를 벌여 좁은 범위지만 저희들의 기개를 과시했습니다. 과시했다고 말씀드리는 것은 행사를 너무 외적으로 형식적으로 했기 때문에 실제로 저희들이 느낀 것, 배운 것은 별로 없었다는 끝난 후의 허탈감 때문입니다. 저희들 모두가 너무 흥분하고 쇼 같은 일을 능사로 한 것 같아요. 이제는 차분히 반성하고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야 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부님, 여기 건물 새로 지어 놓은 것 못 보셨지요? 웅장하지는 않지만 지극히 편리한 현대식 건물들이 여러 채 들어섰어요. 구관을 헐렸습니다. 그 건물은 참 역사가 깊었고, 많은 곡절이 있는 보금자리의 상징이었는데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리니 참 섭섭했습니다. 모든 게 그런 식이에요. 없어진 구관이나 이번 축제나 너무들 얄팍하고 현대적이란 말입니다. 한 점 나무랄 데 없는 좋은 시설입니다. 신부님이 와 보시면 깜짝 놀라실 거예요. 그러나 이렇게 편리하면서도 무언가 잃어져 가고 사라져 가는 것 같은 허전함은 어쩔 수가 없군요. 새 건물 하나를 서너 달에 지어 버리는 것을 보고 너무나 섭섭했습니다. 보통 아침 미사 때만 수단을 입다가 성채 강복 때문에 저녁 때도 입고 있으려니까 수단을 입었다는 감회가 더욱 깊었습니다.

 

1973년 정훈 드림

 

 

신부님

… 전략, 여기는 정말 산이 많고 사람들도 등산을 무척 좋아해서 제법 자주 따라 나섰었지요. 한번은 세르레스라고 오지리 쪽 알프스 산맥 중의 한 봉우리라는데 2천 7백 미터가 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는 도시가 해발 6백 미터이고, 어느 정도까지는 자동차로 올라가기 때문에 그리 힘든 줄 몰랐습니다. 여하튼 백두산 정도의 높이에 올라갔다고 생각하니 감회가 무량하더군요. 산에 갈 때마다 저는 아버님과 신부님을 생각하고, 이런 산들을 오르시면 얼마나 좋아하실까 하는 마음이 듭니다…. 중략.

오늘은 미국의 추수 감사절에 해당하는 날인 모양으로 이곳의 미국 학생 10여 명이 영어로 미사를 지내고, 저녁이 되니 자기네 음식을 손수 만들어 학생 전체에게 나눠주고, 음악을 틀고 하면서 체통이 큼을 과시했습니다. 저는 미사에 참여하면서 독일말도 그런데 영어로 – 이곳에선 외국인인 그들이 – 응송을 하려 하니 걷잡을 수 없는 분한 마음(?)이 일어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복받치는 설움 같은 것을 억제키 어려웠습니다.

이 신학원에 기숙하는 학생은 150명 가량으로 그야말로 각국에서 모였고, 독일, 오지리 계통과 미국, 남미, 아시아, 아프리카 학생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참 동구 학생들도 제법 있어요. 대체로 그룹별로 개성이 다른데 잘 보면 재미가 있습니다. 추기경님을 뵙기는 그분이 로마에서 시노드를 마치시고 이곳 김정남 부제를 서품하시기 위해 오셨을 때였습니다. 여기서 서품 장소까지 가는 기차를 제가 동반하게 되어 귀한 분을 제가 네 시간 동안 독차지할 수 있어 여간 기쁘지 않았습니다. 저 같은 졸병에게 참으로 여러 말씀을 해 주셔서 그분의 인격을 다시 한번 우러르게 되었습니다. 정말 기뻤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 이곳 신학원에서 새 신부의 첫 미사를 드리게 되어 제가 우겨서 한국을 위한 – 부끄럽습니다만 그러지 않고서는 도저히 못 견딜 심사여서, 그리고 거기서는 신부님들이 그렇게 힘겹게 애를 쓰시는데 – 기도문을 등사해서 전체에게 나눠주고 합송하게 하였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선비’얘기를 가끔 하셨지요? 그렇게 절개 있게 순수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가끔 아찔합니다. 변질되지 않기만 빌 뿐입니다. 제 있는 그대로를, 동양 사람으로서 한국 사람으로서 어렵게 살고 있는 사람으로 살려 한다는 걸 알아 주세요.

 

1976년 11월 29일 새벽 2시 인스브루크에서

정훈 드림

 

 

 

 

이성만 신부 앞

 

주님의 평화

성만 신부님… 중략. 부임한 지 두어 달 될 테니 부대 안팎 사정에는 좀 익숙해졌으리라 믿는데 사병 생활만 한 내게는 ‘장교’라는 직책의 의미를, 그것도 군종 신부님의 위치를 잘 모르겠어. 흔히 하는 말대로 성실히 하려면 한없이 일이 많은 게 군대라면 정말 멋있는 군종 장교의 모습을 보여 주리라 믿어. 무엇보다 사병의 심리를 그들 입장에서 이해해 주기를 바라. 이건 군대 있을 때 군종 신부님께 제일 원하던 모습이니까. 공군은 좀 다를지 모르지. 여하튼 우리 이 중위님, 멋있게 본질적으로 해 가리라 믿고 성원을 아끼지 않을게.

그러면 내 생활로 이야기를 돌려 볼까. 살다 보면 점점 익숙해지는 건 당연할 거고. 다행히 건강도 무척 좋아. 자주는 않지만 주께 감사드리고 있어. 여기 생활은 참 무미 건조. 대신학교 때에는 시험 때만 공부를 주로 하는 것에 비해 종일 시험 공부해야 한다는 압박감 속에서 살고 있어. 그러다 보면 무척이나 안목이 좋아져 실생활과는 점점 유리되고… 내게 멋있어 보이는 세계가 사실 한 발자국만 밖에 나가 보면 다른 많은 이는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될 때는 퍽 우울해지지. 공부란 극히 재미있고 반드시 필요한 거지만 ‘그것만’이라면 문제는 간단하지 않을 게 아니야? 그래서 정신없이 한동안 작업에 몰두하다가 문득 이런 의문에 사로잡히면 만사 팽개치고 며칠씩 용트림을 하지. 그러면 어느새 인지 좀 개운해진 듯 싶고, 주어진 것이니 성의는 다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다시 시작하고… 또 하나 우리의 공부라는 게 우리에겐 말 그대로 절대이고 전부인 하느님 사정을 조금이라도 궁구 窮究 하는 것이고, 그걸 복음이라면서 다른 사람에게 전해 주는 것이 목적이라면 이건 나 개인의 확신과 무엇보다 하느님과의 생활한 대면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어야 할 거야. 그렇지 못하면 이건 완전한 도로 徒勞겠지. 이 점이 참 아쉬워. 아리숭한 문맥들을 꿰 맞추고 있노라면 계속 튀어 나오는 ‘하느님’, ‘교회’, ‘인간 본질’ 등 생명 있는 단어들은 완전히 죽어져 버려. 참 슬픈 일이야.

이 문제는 크게 보면 사실 나만의 문제가 아니겠지. 그리고 언제나 우리에게 붙어 다닐 문제겠지. 그리고 이 문제의 정답조차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 거겠지.

주여, 저를 당신으로 채워 주소서.

 

1976년 정훈

 

 

 

그리운 창준에게

 

찬미 예수!

사진 참 시원하지? 엊그제 강을 따라 쭉 산보했었는데 우리들이 캠핑을 가서 얼마 동안 묵으면 얼마나 좋을까? 실없는 소리도 좀 지껄여가면서 뒹굴면 정말 좋겠지. 언젠가 그랬었지. 그리고 언젠가 또 그럴 수 있을 거야.

여전한 네 모습 그대로의 편지, 참으로 잘 받아 읽었어. 네 편지는 그 동안 좀 흐트러져 있었던 마음을 다시 가누고, 내가 어디 있나? 무엇이 우리의 목표인가를 다시 일깨워 줬어. 덕분에 참신해졌어. 그리고 그간 밀렸던 편지들을 쓰고 방도 소제하고 빨래를 하고 산책도 했지.

네가 준 <형제애>를 그간 조금씩 읽다가 8월 중순경에 마쳤어. 정말 많은 것을 받았지. 생각의 방향이 ‘왜 믿나, 믿어야 하나,’ 에서 ‘어떻게 행동할까? 사랑할까’ 로 전환됨을 느꼈어. 기뻐해 주어. 그리고 계속 질타해 주기를. 네 편지는 두고두고 음미할 것임…

모두에게 안부 전해 줘. 다음 편지는 인스브루크의 원래 주소로! 그리고 가톨릭 시보를 네가 보낸 한 뭉치밖에 못 받았는데, 한번 알아봐 줘. 정수가 집에 갔었다고? 고마워!

이 시원한 사진이 우리와 너의 답답한 것들을 씻어 내고, 참신하게 하길 빌며.

 

9월 16일 정훈

 

 

창준아! 지난 번 전해 준 <테제의 규칙>을 잘 받았다. 방금 엽서를 쓰던 중… 이왕이면 그곳의 풍경을 보내고 싶어져서 엽서를 바꿨다.

한달 전쯤 루르드에 가는 길에 잠깐 – 두 시간 낮 공동 기도에 참석 – 들렀었어. 사전 지식이 없어 그곳과 그런 시도를 충분히 이해 못해 아쉬웠다. 네가 준 책을 일고 갔더라면 좋았을 텐데…. 사진은 테제의 일부이고, 이외에 커다란 현대 교회와 젊은이들을 위한 캠프, 숙박시설이 초대 교회식으로 자리잡고 있었어.

그 동안 어떻게 지냈니? 소식 한번 변변히 못 전해 말할 것 없이 미안. 아무리 바쁘다지만… 건강은? 또 부모님, 형제, 학교 친구들 다 안녕? 나는 현재 이달 말 졸업 시험에 고전, 그 동안 늘은 것은 약간의 배짱이랄까?

한 가지 부탁은 성신학보(19호)를 두 부 부쳐줄 수 없는지? 나는 물론 잘 받았는데 그 중 (Rahner의 학설) 대목을 보고 싶다는 사람이 있어서. 어려우면 한 부라도 좀! 금효가 와서 든든. 아직 자리잡아 궤도에 오를 때까진 마음이 놓이지 않지만…

 

1976년 10월 8일 테제에서 훈

 

 

 

라희균 선생님께

 

주님의 평화!

라 선생님… 엊저녁에 우연히 읽은 한 줄기 시원한 글귀와 지금 창 밖에서 펑펑 쏟아지고 있는 흰 눈이 마음을 맑게 씻어 주는 듯합니다. 지금은 토요일 오전, 조금 전에 학교에 가서 강의를 한 시간 듣고 왔습니다. 공부가 쉽지 않으리라는 것은 너무 당연한 얘기지만 점점 그걸 뼈저리게 느끼는 것은 새삼스러운 놀라움입니다.

여기 신학부는 토요일 대신 목요일에 수업이 없습니다. 로마와 이곳이 그렇다는 걸 보면 교회 전통인가 본데 이날 저는 바로 앞에 보이는 산에를 올라가곤 했습니다. 지금은 눈이 너무 많아서 높이 올라갈 수 없지만 그렇게 정신이 없다가도 일주일에 한 번 종일을 산에서 지낼 수 있다는 것이 커다란 복이지요. 언젠가 하루는 밑에 온통 안개가 꽉 끼어서 갈까말까하다가 간단히 다녀오자고 배낭을 지고 나섰는데 한참 가다 보니 안개가 걷히고 산봉우리가 선명히 나타나지 않겠습니까. 그 순간은 정말 잊기 어려운 감동을 주었지요. 여기서 죽는다 해도 한이 없겠다 할 정도로 전신을 내던지고 싶은 순간이었습니다. 그날 산에서는 한 사람도 못 보았고, 일종의 황홀한 기분에서 종일을 지낸 셈이었습니다. 정말 너무 좋았어요….

 

1975년 11월 22일

 

 

라 선생님

여기는 다시 Schaan입니다. 어저께 왔다가 오늘 스위스로 가려고 합니다. 이루마 아주머니는 오늘 아침 일찍 근무처인 병원으로 가시고 저는 지금 혼자 있지요. 어제는 등산다운 등산을 하려고 별렀는데 밤새 비가 와서 하는 수 없이 11시경에 가는 비를 맞으며 벤데른까지 라인강을 따라 쭉 산보를 했습니다. 가면서 계속 돌들을 줍고, 벤데른에서는 오래 도니 성당을 구경했지요.

참으로 이 조그만 집 (주: 스위스의 이루마 여사 댁)에는 무엇이나 다 있어요. 가장 중요한, 조건 없는 풍부한 인정이 있으니 그렇겠지요. 마음이 저절로 환하게 가득 채워짐을 느낍니다. 이제는 여러 번 와서 익숙해졌지만 올 때마다 모든 게 새롭게 보이는 것은 이분이 뿜는 살아있는 신앙 때문이겠지요. 이분과 이곳의 공기를 한아름 전해 드리면서.

 

1976년 8월 2일 정훈

 

 

라 선생님

전략… 오늘로 여기 온지 꼭 3년이 되었습니다. 그 동안 무얼 하며 어떻게 지냈는지 정말 눈깜짝할 사이에 3년이 지나갔지요. 최근의 두 학기는 졸업 논문과 졸업 시험을 치르느라 너무나 여유 없이 보낸 것 같습니다. 그 후인 지금 안도의 숨을 쉰다기보다는 그 동안 체득해야만 했던 자신의 한계 – 공부하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 – 역시 공부 자체를 통해서 자신의 문제 해결, 나아가 구원은 이룩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 등 앞에 망연 자실 하고 있습니다. 또 외국 생활의 무자극, 무사고, 비인간화를 재촉하는 듯도 싶어 여기서의 시간을 참신하게 보내기가 매우 힘든 것도 이제 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신학은 현 단계에서 중지하고 목표했던 철학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제사 신학이 무엇인지 조금 짐작을 할까 하는데 그것의 전제들인 철학에 빠지려니 좀 서먹합니다만 해 가노라면 재미가 생기리라 믿습니다…. 후략.

 

1977년 3월 13일 정훈 드림

 

 

 

 

책을 엮고 나서

 

김정훈 부제.

그는 마지막 일기에 ‘가난과 고독을 스스로 택하여 사는 것 – 이것이 내 사제행의 동기고 그런 그리스도인이고 싶다. 그리고 원하시면 조그만 향기를 풍길 수도 있는..’ 라고 적고 있다. 주님께선 그대로 이루어 주셨다고 믿는다. 그는 그를 알던 모든 이들 마음 속에 이처럼 향기로운 기억을 남겨 놓고 떠났기 때문이다.

그는 성직자이면서도 예술가였다고 생각된다. 순수함이 그의 천성이었고, 감성의 예민하고 풍부함, 사물에 대한 깊은 직관, 무엇보다 자연과 인간을 더없이 사랑하였다. 말로 표현할 수 없으리만큼 사랑하였다.

그는 그가 동경하던 초생달과 나목 裸木 들을 자주 스케치하곤 하였다. 산과 시골 풍경들을 파스텔로 아주 소박하게 아름다운 감동으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일기는 자기를 위해서 쓴 것이지만 한 사람의 인간으로, 젊은이로 너무나 진지하게 순수하게 살려고 노력하였고, 그렇게 살고 간 자국이므로 모든 이들에게, 성직을 지망하는 젊은이나 수도자들에게는 더욱더 깊은 공감을 줄 것이다.

회의와 좌절과 실망, 그리고 마지막 남은 한 가닥 희망인 하느님에의 의탁, 이러한 내적 생활의 리드미컬한 과정을 그대로 적나라하게 적고, 자기에 대한 부단한 추구, 성찰, 채찍으로 메워져 있다. 언제나 학문하는 길이 자신의 구원과 하느님과의 긴밀한 관계, 그리고 이웃에게 어떤 봉사가 되기를 열망하였다. 그러면서도 어린이와 같이 천진스러웠고 유머러스하고 따뜻한 인정을 그리워하며, 바깥 세계와 친구들에 대해서 언제나 많은 관심과 열린 마음을 가졌었다.

이 모든 그의 사람됨은 바로 우리들이 지녀야 할 우리의 것이므로 더욱 친밀감을 느낀다. 그의 말대로 인간이 지녀야 할 본연의 모습, 원안 原案 대로 살기를 갈망한 김 부제는 언제나 우리와 같이 있을 것이며, 우리에게 큰 힘이 되어 줄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 유고집을 내기까지 많은 도움을 주신 여러분, 특히 심상태 신부님께 감사드린다.

 

 

 

 

 

 

 

 

** 지금도 ‘필사 筆寫’ 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Disclaimer: 여기에 실린 글은 copyright가 된 책, 기사를 ‘발췌, 전재’를 한 것입니다. 모두 한 개인이 manual typing을 한 것이고, 의도는 절대로 저작권 침해가 아닌, fair use의 정신을 100% 살린 것입니다. 의도적으로 ‘시간적인 제한, 독자층의 제한’을 염두에 두었고, 목적은 단 한 가지 입니다. 즉 목적을 가진 소수 group (church study group, bible group, book club) 에게 share가 되었습니다. password protected가 되었는데, 만일 이것이 실패를 하면 가능한 시간 내에 시정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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