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eld of dreams, trancending time & place, autobio in progress..

안토니오 신부의 치유 피정

아주 특별한 순간

 

V. 안토니오 사지 VC 지음: 류해욱 옮김

 

 

지치고 힘들 때,

당신을 가장 사랑하시는 분이 아주 가까이 계십니다.

 

 

모든 성인은 과거가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죄인에게는 밝은 미래가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모든 죄인에게는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우리가 비록 과거에 넘어졌다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하느님의 놀라운 아들 딸들입니다.

 

 

추천의 글

 

하느님은 당신을 드러내 보이시는 방법으로 말씀을 선택하였습니다. 그 말씀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온전히 전해진 것이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성경이라는 활자로 접하게 되었으며, 그 말씀이 살아 움직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셔야 합니다. 여기 하느님의 말씀을 성령 안에서 뜨겁게, 그리고 생생하게 전해 주는 한 사제의 가르침이 있기에 감히 기쁜 마음으로 이 책을 추천해 드립니다.

 

‘성모님과 함께하는 6일간의 침묵피정’은 고인이 되신 요셉 빌 신부 (인도 성 빈첸시오 회)에게서 맨 처음 시작되었지만, 지금은 그 후임인 안토니오 신부가 맡아 전 세계적으로 1년 내내 복음의 선포자로, 말씀의 치유자로 하느님의 뜻을 이루며 피정을 이끌어 나가고 있습니다. 어쩌면 하느님께서는 그를 이 암울한 시대에 새로운 빛의 예언자적 소명을 주고 계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저는 매번 그 피정에 참여하면서 확신이 더욱 깊어졌습니다. 살아 있는 생명의 말씀! 그것은 바로 성령과 온전히 일치하는 사람만이 실천할 수 있는 일임을 알기 때문에, 저는 그분이야말로 이 시대에 성령 안에서 활동하는 참 말씀의 치유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앙의 해를 맞이한 지금, 그분의 은혜로운 말씀들이 새로이 여기 글자로 담겨 있으니 이 또한 큰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은혜로 운 말씀을 류해욱 신부님의 혜안으로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담아 여기에 펼쳐놓았으니 이 시대에 또 다른 복음화의 메시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말씀은 전달자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그 말씀을 읽는 사람들의 마음 상태도 참으로 중요하지 않을까요? 신부님이 매년 한국에 오실 때마다 그분의 말씀을 피정 안에서 직접 듣고 체험하며 깨닫는 것이 얼마나 크나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이 피정의 중재기도 모임에서 영적 지도를 담당하고 있는 한 사제로서, 침묵피정 중에 체험한 말씀의 은혜로움을 이 책의 독자들도 함께 맛보고 경험함으로써 생활 속에서 신앙의 열매를 맺어 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화식 베드로 신부 (춘천교구 총대리)

 

 

 

옮긴이의 글

 

<아주 특별한 순간: 안토니오 신부의 치유피정>의 출간 소식에 저는 마치 오랫동안 간절히 바라던 귀한 옥동자를 얻은 아기 엄마의 심정처럼 기쁘고 감사했습니다.

이 책은 인도 빈첸시오회 소속 안토니오 신부의 피정지도 내용을 엮은 것입니다. 하지만 저자 안토니오 신부에 앞서 요셉 빌 신부를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안토니오 신부 자신은 요셉 빌 신부의 후계자로서 피정지도를 하는 것임을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요셉 빌 신부는 인도 케랄라와 아프리카의 빈첸시오회 소속 사제로서 아주 헌신적이고 탁월한 피정지도자였습니다. 그는 세계를 돌아다니며 성직자와 수도자, 평신도들에게 치유미사와 대중설교를 통해 복음을 전했습니다. 하느님께서 빌 신부를 통해 주신 치유의 은사로 수많은 사람이 영적, 정신적, 육체적 질병을 치유 받았습니다.

요셉 빌 신부는 건강이 좋지 않았는데, 치유를 직접 체험하고 나서 치유자가 되신 분입니다. 그는 1958년 사제로 서품 된 후, 고향 케랄라 교구에서 오랫동안 교회의 고위 행정직을 맡아 다양한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그러다 48세 때 두 번의 심각한 심근경색을 앓게 되어 두 달 가까이 병상에 누워있게 됩니다. 그런 상태에서 케랄라의 성령쇄신봉사회가 주관하는 사제들을 위한 피정에 초대되었습니다. 피정이 끝날 무렵 한 주교가 빌 신부에게 손을 얹고 치유기도를 했는데, 그때 빌 신부는 2,000년 전 예루살렘에서 사람들을 가르치며 치유하신 그 예수님이 자신에게 손을 얹고 계신 것으로 느꼈습니다. 그 순간 내면에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고 그의 믿음도 강해졌습니다. 의사들이 여러 가지로 검사를 해본 결과 그의 병은 완전히 치유되었습니다.

그 후 빌 신부는 장상에게 청하여 행정소임을 그만두고 믿음에 의한 치유를 공부하려고 미국의 피츠버그로 갔습니다. 그가 공부를 마칠 무렵, 어느 성당에서 휠체어에 앉아 있던 전신마비 환자가 그의 기도를 자리에서 일어나 걸을 수 있게 되는 첫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예수님이 자신을 도구로 쓰고자 하신다는 것을 깨닫고 인도 전역을 다니며 가르침과 치유은사를 나누었습니다.

빌 신부는 세계를 돌아다니며 6일간의 침묵치유피정과 함께 치유미사와 대중설교를 했습니다. 10년 전부터는 우리나라에서도 6일간의 피정을 지도했습니다. 자신의 피정은 성령쇄신피정이 아니라 우리가 성령께 마음을 열고 인간의 영혼과 정신, 육체를 모두 치유 받도록 도움을 주는 피정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안토니오 신부는 고 故 요셉 빌 신부의 마지막 몇 주간을 함께 지내며 임종을 지킨 분으로, 요셉 빌 신부의 침묵치유피정 사목을 이어 받을 후임자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래서 요셉 빌 신부의 소임이던 피정 프로그램을 이어받아 세계를 돌며 피정지도를 하고 있습니다. 벌써 우리나라에서도 4년째 피정지도를 하고 있습니다.

 

저는 2년 전 우연히 안토니오 신부의 피정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안토니오 신부의 피정 내용은 놀랄 만큼 은총이 넘쳤고, 성령께서 안토니오 신부와 함께하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더구나 아무런 강의 준비 원고도 없이 성경 하나만을 들고서 강의하는 모습에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아무리 명석하고 기억력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성령의 영감을 받지 않고서는 그렇게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의 피정에 참석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분에게서 성령의 은총이 넘치는 것을 체험한다고 증언합니다.

저자 안토니오 신부는 피정자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만나는 체험으로 이끌어 주는 탁월한 능력이 있습니다. 피정자도 하여금 주님과의 관계를 통해 신앙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새롭게 성찰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저는 피정자로서 안토니오 신부를 통해 성령께서 일하시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그것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어서 그의 피정강의 내용을 옮기고 정리하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주 특별한 순간: 안토니오 신부의 치유피정>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성경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정통 가톨릭 교리에 어긋나지 않으면서도 아주 역동적이며 영감을 불러일으켜 줍니다. 깊은 묵상과 관상을 통해 나온 내용이기 때문에 단순히 책을 읽는 것에 그치지 않고 독자 스스로 깊이 성경 안으로 들어가서 묵상이나 관상을 하도록 이끌어 줄 것입니다. 이 책은 일상 삶에서 피정을 하기 위한 안내서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마리아 여인은 물동이를 버려두고 마을로 달려갑니다. 마을 사람들을 피해 뜨거운 정오에 물을 길으러 나왔지만 예수님을 만난 그녀는 이제 예수님을 전하러 마을로 달려갑니다. 이것은 엄청난 변화입니다. 이런 변화는 사마리아 여인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묵상이나 관상을 통해 예수님을 깊이 만나는 우리 모두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아주 특별한 순간: 안토니오 신부의 치유피정>은 사마리아 여인처럼 ‘물동이를 버려두고’ 마을로 달려가도록 우리를 이끌어 줄 것입니다.

 

류해욱 요셉 신부 (예수회, 영혼의 쉼터)

 

 

1

씨앗과 농부,

2

네가 알몸이라고 누가 일러 주더냐?”

3

믿음은 성경에 바탕을 둔다

4

믿는 자는 혼자가 아니다

5

물동이를 버려두고

6

야곱과 에사우축복

7

교회가 우리 영혼의 정비소다

8

하느님을 위한 아름다운 어떤

9

믿음은 경험이 아니다

10

겨자씨와 누룩

11

죄의 특징

12

십계명영혼의 길잡이

13

용서

14

저는 당신 손에 들린 연필입니다

15

착한 목자와 생명의

16

내적 치유

17

고해성사

18

엠마오로 가는

19

욥기

20

성령 1

21

성령 2

22

우리는 그분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존재합니다

23

가정 성소

24

카나의 혼인 잔치

25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

 

 

“마을 사람들의 험담을 피해 뜨거운 정오에 물을 길으러 나왔던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만난 후 그분을 전하러 마을로 달려갑니다. 이 엄청난 변화는 예수님을 깊이 만나는 우리 모두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이 책은 ‘물동이를 버려두고’ 마을로 달려간 사마리아 여인의 변화된 삶으로 우리를 이끌어 줄 것입니다.”

– 류해욱 요셉 신부(예수회, 영혼의 쉼터)

 

 

“안토니오 신부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도록 이끄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현존 안에서 나를 돌아보고 내면을 살펴보았기에 기쁘게 약점과 죄를 반성하며 치유와 용서를 받았습니다. 생활의 변화와 사명에 확신과 지혜를 준 이 강의를 몇 번이고 반복해 들어서 나의 지식과 체험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 허동선 마태오 신부(춘천교구 원로사제로 현대 다문화 가정 사목 중)

 

 

 

첫 번째 강의

씨앗과 농부, 땅

 

자비로우신 하느님, 온 세상을 위해 기도 드립니다. 우리나라와 정치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 드립니다. 저희와 저희 가족들을 위해 기도 드립니다. 우리 가족 모두의 소망이 이루어지도록 도와주십시오.

피정을 하는 이 한 주를 위해 기도 드립니다. 피정자들이 피정 안에서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모든 삶의 위험과 악에서 저희를 지켜주십시오.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성모님, 저희를 당신 망토 안에 지켜주십시오.

주님, 저희는 당신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존재합니다. 이 모든 말씀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먼저 루시아 자매님과 그의 팀, 스테파노 형제님과 베로니카 자매님, 통역을 맡은 소연 자매님께 감사 드립니다. 저를 소개합니다. 요셉 빌 신부님께서 2008년에 80세의 연세로 작고하셨습니다. 저의 수도회에서는 빌 신부님의 피정 사도직을 이어받도록 저를 임명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4년 전부터 이 일을 맡아 쉬지 않고 달려왔습니다. 이 일을 맡은 지 4년 만에 지난주에 일주일간의 휴가를 보냈습니다.

저는 인도 태생이고 수도회 사제입니다. 성 빈첸시오 수도회입니다. 저는 안토니오 신부입니다. 2002년에 아프리카로 갔고 거기에서 5년 동안 신학교를 다녔습니다. 아프리카에서는 케냐, 탄자니아, 우간다 에서 활동했습니다. 저는 지금 우간다 엔테베에 있는 피정의 집 부원장 직책을 맡고 있고, 주로 피정지도를 하면서 강의를 합니다. 저희 빈첸시오 공동체에는 22명의 사제가 함께 살고 있습니다. 저의 부모님은 살아 계시고 아버지는 55세이고 어머니는 54세입니다. 동생이 둘이 있습니다. 저는 한국에 오면 마치 고향에 온 것처럼 느껴집니다. 사랑으로 가득 넘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한국에 오면 늘 감동을 받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에게 부족한 점, 약함이 있다면 그분께 맡겨드리도록 합시다. 우리 삶에서 온전히 예수님의 뜻을 찾도록 합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십니다. 그분이 두드리실 때 문이 열리도록 우리 마음을 준비합시다. 그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그날 예수님께서는 집에서 나와 호숫가에 앉으셨다. 그러자 많은 군중이 모여들어, 예수님께서는 배에 올라 앉으시고 군중은 물가에 그대로 서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많은 것을 비유로 말씀해 주셨다. “자,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들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다. 어떤 것들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버린 것이다. 또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가버렸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 13,1-9)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입니다. 흙과 씨앗의 비유입니다. 토양도 좋고 씨앗의 품종도 좋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씨앗이 어떤 땅에 뿌려지느냐 하는 것입니다.

첫째, 길가가 있습니다.

둘째, 돌밭이 있습니다.

셋째, 가시덤불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좋은 땅이 있습니다.

 

씨앗은 무엇이고, 땅은 무얼 상징합니까? 씨앗은 하느님의 말씀이고, 땅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땅이 중요합니다. 씨앗은 검증된 좋은 품종입니다. 문제는 땅입니다.

 

첫째, 길가를 살펴봅시다. 길가의 모습을 그려보십시오. 길은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입니다. 그래서 딱딱하게 굳어져 있습니다. 길가는 하느님의 말씀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말씀이 자신과 삶과 별고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 삶에서 어떤 역할을 합니까?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 삶에 아무 역할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씨앗이 길가에 뿌려진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하느님에 대한 의무를 소홀히 합니다. 삶이 순전히 우리에게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삶은 우리 몫이니까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 만족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모든 일이 우리가 계획한 대로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전혀 생각하지 못했지만 우리 아이들이 술에 중독되고 마약을 하고 부도덕한 삶을 삽니다. 우울증에 빠지기도 합니다. 우리 아이들은 착하다고 생각했는데,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우리가 아이들에게 예수님을 알려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이들을 위해 진정으로 해주어야 할 것은 예수님을 알려 주고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지니고 살도록 가르쳐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서 일이 잘못 되었음을 알았을 때는 이미 상당히 어려운 지경에 빠진 상태입니다. 그때에는 은행에 잇는 통장의 잔고가 아무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 삶에 하느님을 무시할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리 삶에 위기가 찾아옵니다. 위기를 맞을 때, 우리는 도움이 필요합니다. 밖에서 오는 도움이 필요합니다.

 

둘째, 돌밭을 살펴봅시다. 돌밭에는 흙이 조금밖에 없습니다. 흙은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씨앗을 뿌린 후 금방 싹이 움터나옵니다. 그러나 태양이 그 돌밭에 내리쬐면 뿌리가 깊지 않기 때문에 금방 싹이 시들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처음에는 하느님의 말씀을 잘 받아들입니다. 감정이 아주 풍부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삶에서 위기가 오면 쉽게 믿음이 사라지는 사람입니다. 피정을 할 때는 기쁨이 넘치고 새로운 결심을 합니다. 그런데 일상생활로 돌아가면 기쁨 중에 결심했던 것들이 금방 시들해집니다. 햇볕이 내리쬐면 금방 시들어 버리는 싹과 같습니다. 그런 사람의 마음은 돌밭과 같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믿음의 뿌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믿음을 깊게 해야 합니다. 우리 삶에 뿌리 내린 믿음이어야 합니다. 우리 삶에 위기는 오기 마련입니다. 위기 없는 삶은 없습니다.

저는 어릴 때 생각했습니다. 부모님들이 부부생활에서 겪는 위기를 보면서 나중에 사제가 되면 위기를 겪지 않고 계속되는 기쁨 속에서 하루하루를 감사하며 살 수 있으리라고 요. 사제가 되면 아무런 위기 없이 마냥 행복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사제가 되니까 모든 것이 달랐습니다. 이 피정에 참석하고 계시는 중재기도회 지도 신부님이신 하 베드로 신부님이나 류 요셉 신부님께 물어보십시오. 신부님들은 어떤 위기나 아무런 걱정 없이 사시는지 물어보십시오.

어느 누구도 위기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미혼이든 기혼이든 수도자든 성직자든 평신도든 모두의 삶에 위기가 찾아옵니다. 다만 그 위기를 어떤 식으로 이끌어 가는가 하는 거이 문제입니다.

구름이 걷히면 햇살이 비칩니다. 우리에게는 그 위기에 대한 해답이 있습니다. 하느님이 바로 우리의 해답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우리는 구름에 가려도 하늘에 달이 떠 있다는 것을 압니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압니다. 흙이 부족할 때, 다른 흙을 가지려고 하지만 실상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뿌리를 내릴 땅입니다. 우리에게는 믿음의 뿌리가 중요합니다. 우리 믿음이 땅속 깊이 뿌리내릴 수 있도록 은총을 청합시다.

 

셋째, 가시덤불입니다. 흙은 좋습니다. 씨앗이 쉽게 잘 자랍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가시덤불이 싹을 조여옵니다. 무엇을 상징합니까? 세상의 쾌락 때문에 숨이 막히는 것을 상징합니다. 좋은 의향을 지니고 있지만 나쁜 습관을 만드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삶의 태도가 좋지 않습니다. 매일 텔레비전만 보거나 인터넷에 중독된 사람입니다. 한국과 같은 아시아 국가에는 아직은 술이나 마약이 큰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서구에서는 아주 큰 문제입니다.

우리 삶의 모습을 살펴보면 우리 마음가짐은 선합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우리는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오직 한 주인만 섬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냐, 세상이냐의 선택입니다.

우리는 물론 예수님을 선택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선택하여 우리의 삶이 달라져야 합니다. 가시덤불에 떨어진 채로 신자로서 사는 것은 어렵습니다. 세상과 타협하는 사람은 올바른 신자로서 사는 것이 어렵습니다. 우리가 신자로서 사는 것이 어려우면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는 것은 아닌지 곰곰이 살펴보아야 합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결코 세상과 타협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진리를 위해 삽니다.

이것을 위해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의 나라가 임하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때로 우리의 나라, 우리의 작은 나라들을 만듭니다. 주님의 나라가 오도록 해야 하는데 우리는 주님의 나라를 잘 느끼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자신들의 조그만 나라들을 만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질투의 나라, 교만의 나라, 이기심의 나라같이 조그만 나라들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이 나라들을 없애야 합니다.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만,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그 나라들을 없애는 것이 가능합니다. 어떻게 가능합니까? 우리 마음 안에 하느님의 말씀을 모셔 들여야 합니다. 예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 오십시오. 제 마음에 오십시오! 우리의 삶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우리 삶 깊숙한 곳으로 주님이 오시도록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하 베드로 신부님은 중재기도회의 지도 신부님이시지만 본당 신부님이기도 합니다. 신부님은 본당 일이 끝나면 당신 방으로 가십니다. 당신 방으로 가시면 외부에 공개되지 않은 신부님의 사생활이 있습니다. 사생활 중의 사생활이라고 할 수 있는 아주 내밀한 방이 있습니다. 바로 거기로 예수님께서 오시도록 청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그 내밀한 방, 거기에 예수님을 초대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삶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어떤 신자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영적인 삶에도 어떤 단계들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 공생활과 더불어 사생활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직장이나 교회에서 어떤 역할을 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진 삶이 있습니다. 평신도로서 교회에서 활동하는 공개된 삶이 있고, 가정 안에서도 남편이나 아내로서, 부모로서의 공개된 삶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 사생활 중의 사생활, 우리만 아는 아주 내밀한 방이 있습니다. 거기에 예수님을 초대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안팎을 모두 아시는 분이십니다.

구약성격의 시편은, 우리가 당신 얼굴을 피해 어디로 달아나겠느냐고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 거기에 하느님이 계시고 그분이 다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어디에서 예수님을 만나기를 바라야 합니까? 사생활 중의 사생활이라고 할 수 있는 우리의 내밀한 방에서 만나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살펴볼 땅, 비옥한 땅입니다. 이 땅에서는 열매를 맺습니다. 그런데 그 추수의 정도는 각각 다릅니다. 어떤 땅은 30배, 어떤 땅은 60배, 어떤 땅은 100배의 열매를 맺습니다.

씨가 좋은 땅에 떨어졌습니다. 농사를 짓는 사람은 농부이십니다. 하느님이 농부이십니다. 저의 부모님은 농부입니다. 원래 제 아버지가 사업가였는데 실패하신 후에 땅을 사서 농사를 짓습니다. 농사짓는 일은 힘듭니다.

예를 들어, 밭농사를 짓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우선 딱딱한 흙을 부수고 고르게 해야 합니다. 거기에 있는 가시덤불이나 돌을 다 제거해야 합니다. 밭을 잘 준비하는 것이 힘듭니다. 그러나 아주 중요합니다. 좋은 땅은 잘 준비된 땅입니다. 준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하느님 말씀의 씨가 뿌려졌을 때, 그것을 받아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준비뿐입니다. 나머지는 다 하느님이 하십니다. 우리는 땅을 준비하는 일만 잘 하면 됩니다. 열매를 맺을 수 있으려면 많은 준비가 필요합니다. 어떻게 준비할 수 있습니까?

교회의 연장들을 사용하면 됩니다. 무엇이 교회의 연장들입니까? 성경과 성사, 그리고 여러 신심행위들이 있습니다. 교회는 성체성사와 고해성사 같은 보화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의 성화를 위해 교회에 주어진 구원의 연장들입니다. 우리는 이런 연장들을 사용하여 흙을 준비해야 합니다. 씨를 받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말씀 드린 대로 씨는 하느님의 말씀이며, 하늘에서 내려오는 은총입니다. 그런데 이 은총을 잘 받기 위해서는 밑에서 올라가는 우리의 협조가 필요합니다. 은총과 우리의 협조가 서로 만날 때, 우리 안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씨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은총입니다. 우리는 그 씨를 받기 위해 밭을 준비해야 합니다.

우리 삶에 무엇이 필요합니까? 우리에게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에게는 잠을 잘 자는 것, 평화, 두려움이 없는 삶 등이 필요합니다.

제가 사는 우간다에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기본적인 것이 다릅니다. 그들은 집이 없고 옷이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기본적으로 집, 옷, 음식 등이 필요합니다. 그들은 그런 기본적인 것들이 아무것도 없지만 잠을 잘 잡니다. 아무 두려움이 없습니다. 콘크리트 바닥에서도, 커다란 트럭이 지나가면서 시끄러운 소리를 내도 그들은 잘 잡니다. 아무 걱정이 없기 때문입니다.

한번은 피정 때 4천명이 모였습니다. 그들은 먹을 것이 없고, 제대로 입을 옷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모시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평화가 있었습니다. 이에 반해 서구에서는 만은 사람들이 기본적인 것을 지니고 있습니다. 좋은 집이 있고, 옷이 있고, 좋은 자동차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잠을 잘 못 잡니다. 불안과 두려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심하면 우울증에 걸리기도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을 모시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평화가 있습니다. 두려움이 없습니다. 잠을 잘 잘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모든 것을 갖고 있지만 잠을 잘 잘 수 없고 불안하거나 두려움에 떨고 있다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우리는 근원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 삶의 원천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 삶의 원천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우리 삶의 중심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삶의 기초입니다. 매일매일 우리 삶에 필요한 것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추수를 살펴봅시다. 어떤 땅은 30배, 어떤 땅은 60배, 어떤 땅은 100배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흙은 좋은 흙입니다. 씨앗도 물론 좋습니다. 그런데 왜 각각 다른 열매를, 누구는 30배, 누구는 60배, 누구는 100배의 열매를 맺을까요?

여기서 우리 영정 삶에 다른 은총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 일합니다. 우리 영적 삶에 부여되는 은총에 대해 실망하면 안 됩니다. 우리 영적 삶에 부여되는 은총에 대해 교만해서도 안 됩니다. 30배의 열매를 맺든, 60배의 열매를 맺든, 100배의 열매를 맺든 그분이 주시는 은총입니다.

콜카타의 마더 데레사가 말했습니다. “우리 모두 위대한 일을 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니다. 다만 작은 일을 특별한 방법으로 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우리 삶에 각각 다른 방법으로 은총이 찾아옵니다. 예를 들어, 여기 피정에 다섯 명의 친구가 같이 왔습니다. 그런데 피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 다섯 친구가 받은 은총은 각각 다를 것입니다. 각자의 역할도 다 다릅니다. 우리는 피정을 마치고 예수님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어떻게 우리 삶에서 일하시는지는 다 다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삶에서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평범한 삶에서 특별한 방법으로 예수님을 증거해야 합니다.

은총이 각기 다른 것에 대해 슬퍼하면 안 됩니다. 우리 모두가 마더 데레사가 될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삶을 본받아 각자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입니다. 아프리카 격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너희가 심어진 곳에서 꽃을 피워라!”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그 계획이 우리 계획보다 좋습니다. 하느님께서 더 좋은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왜 우리에게 저마다 각지 다른 역할이 있습니까? 우리는 육체적으로 심리적으로 서도 다릅니다. 각자가 맡은 자리도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집에서 가정주부로, 어떤 사람은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맡고 있고, 어떤 사람은 교회에서 봉사를 하기도 하고 때로 지도자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하느님 나라를 이루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 나라가 성장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서서히 커집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만족해야 합니다. 나에게 주어진 의무를 다하고 나머지는 모두 하느님의 은총에 맡겨드려야 합니다.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 색안경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한국은 어떤지 모르지만 유럽이나 아프리카에는 아주 다양한 색깔의 색안경이 있습니다. 색깔이 모두 다릅니다. 노란색 색안경을 쓰면 모든 것이 노란색으로 보입니다. 칸트는 인식과정에서 대상의 파악은 인식 주관에 달려 있다고 보았습니다. 우리가 지닌 인식의 안경이 노랗다면 비록 대상이 수많은 색을 지니고 있어도 우리에게는 노란색을 지닌 대상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삶에서도 우리가 어떤 생각을 지니느냐에 따라 우리에게 비추어지는 모습은 다 다릅니다. 우리의 마음, 우리의 생각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악하면, 모든 것을 다 악하게 봅니다. 우리의 태도를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는 색이 들어 있지 않은 무색의 깨끗한 안경을 써야 합니다. 이렇게 안경을 바꿔 써야 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생각이 부정적이면 제대로 하느님을 알 수 없습니다. 무색의 깨끗한 안경을 써야 사물을 명확하게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특징은 무색의 깨끗한 안경을 쓰고 모든 사물을 바라보신 것입니다. 우리도 그분처럼 사물을 투명하게 보아야 합니다.

 

 

 

두 번째 강의

“네가 알몸이라고 누가 일러 주더냐?”

 

예수님께서 우리와 어떻게 다르십니까? 예수님은 대상들을 어떻게 보십니까? 예를 들어 자캐오를 어떻게 보십니까? 우리는 자캐오를 이름 그대로 자캐오라고 하지 않고 세관장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그를 죄인으로 부르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자캐오를 죄인으로 보지 않으셨습니다. 자캐오를 세관장으로 부르지 않고, “자캐오야!” 하고 그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편견을 버려야 합니다. 누구든지 착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바라볼 때 편견 없이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온전한 시각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는 존엄성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존중심을 지녀야 합니다. 우리 자신에 대한 존중심이 있어야 다른 사람한테서도 존엄성을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천 원짜리 한 장을 달라고 보여 주며) 이것이 무엇입니까? 얼마짜리입니까? 천 원짜리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무엇으로 만들어졌습니까? 종이입니까? 쇠입니까? (사람들이 종이라고 답합니다.) 여러분이 종이라고 했습니다. 이 종이로 작은 묵주 하나를 살 수 있습니다. 제가 갖고 있는 것과 같은 실로 엮은 아주 작은 묵주 말입니다. 예, 살 수 있습니다.

(앞에 앉은 자매님이 가진 백지 한 장을 들고) 이것은 무엇입니까? 종이입니다. 이 종이로 묵주를 살 수 있습니까? 이 종이로 묵주를 살 수 없습니다. 무엇이 이 종이와 이 종이를 다르게 만듭니까? 왜 이 종이로는 묵주를 살 수 있고, 이 종이로는 묵주를 살 수 없습니까? (신부님이 천 원짜리 지폐를 바닥에 떨어뜨립니다.) 자, 이 종이가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이제 이 종이로 묵주를 살 수 없습니까? 살 수 있다고요? 땅이 떨어져서 더러워졌는데도 묵주를 살 수 있다고요? (신부님이 천 원짜리를 구겨서 주먹으로 펑펑 칩니다.) 자, 이제 이 종이가 형편없이 구겨졌습니다. 이제 이 종이로 묵주를 살 수 없습니까? 아닙니다. 이 종이가 불에 타서 없어지지 않는 한 이 종이로 묵주를 살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정부가 이 종이에 가치를 부여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구겨도 대한민국 인장이 찍혀 있는 한 천 원짜리 돈은 항상 천 원의 가치를 지닙니다.

 

이 돈에 대해 말씀 드린 것을 우리 삶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완전한 계획에 따라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상을 따라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시편 8편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십니까? 신들보다 조금 못하게 만드시고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주셨습니다.”(시편 8,5-6)

하느님께는 우리가 소중한 존재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손에 인장을 새겨주셨습니다. 우리는 소중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대한민국의 인장이 새겨져 있는 한 천 원은 항상 천 원의 가치를 지니듯이 당신의 인장이 새겨진 우리는 하느님의 창조물이며 하느님의 눈에 소중한 존재이고 가치를 지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에 의해 존엄한 가치를 지니고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때로 바닥에 넘어집니다. 죄에 걸려 넘어집니다. 때로는 돈이 구겨지듯이 삶에서 엉망진창으로 구겨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치를 잃었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여전히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살아 계시는 한 우리는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 소중합니다. 유일한 존재입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말고 우리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존엄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유용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여전히 유용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로 하느님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상을 따라 우리를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과거는 과거일 뿐입니다. 과거에 우리가 넘어졌다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현재를 살고 있습니다. 현재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미래가 중요합니다.

모든 성인은 과거가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죄인에게는 밝은 미래가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모든 죄인에게는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우리가 비록 과거에 넘어졌다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하느님의 놀라운 아들 딸들입니다.

루카복음서 15장의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보십시오. 아버지의 둘째 아들은 모든 것을 탕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돌아왔을 때 그는 모든 것을 되돌려 받았습니다. 우리는 유용합니다. 우리는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미래를 지니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과거의 역사를 통해 가르침을 주십니다.

하느님이 처음으로 인간의 잘못을 고쳐주시고 가르침을 주신 것이 성경 어느 대목인지 아십니까? 창세기 3장 9절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에덴동산에서입니다. 어떻게 하느님께서 가르침을 주셨습니까?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께 불순종하여 죄를 지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따먹지 말라고 하는 과일을 따먹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늘 하시던 대로 동산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사람을 부르시며, ‘너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이제 그들이 대답합니다. 창세기 3장 10절입니다. “동산에서 당신의 소리를 듣고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

창세기 3장 11절이 아주 중요합니다. 이것이 처음으로 하느님께서 인간의 잘못을 바로잡아 주신 대목이기 때문입니다.

“네가 알몸이라고 누가 일러 주더냐?”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좋은 것만 알려 주셨습니다. 누가 그들에게 알몸이라고 일어 주었습니까? 사탄입니다. 악마입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무엇을 알아들어야 합니까? 에덴동산에서의 첫 번째 죄, 이 원죄가 우리에게 계속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은 것을 듣고 말합니다. 하느님의 말씀만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들으면 우리 마음이 슬퍼지고 고통이 생깁니다. 하느님이 말씀하시는 것만 들으면 우리에게서 슬픔이 사라집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알몸이라고 누가 너에게 일어 주더냐? 누가 너에게 네가 유용하지 않다고 말하더냐? 누가 너에게 네가 존엄하지 않다고 말하더냐? 누가 너에게 네가 소중하지 않다고 말하더냐?

우리가 하느님이 아닌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다면 알몸이라고 느낄 것입니다. 열등감이 생깁니다. 그래서 나는 아름답지 않다, 나는 볼품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알몸이라고 누가 말합니까?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소중하다. 너희는 온전함과 존엄성과 가치를 지니고 있다. 너희는 유용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심긴 자리에서 꽃을 피워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시간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이 아닌,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싶어합니다. 남이 우리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하는지 듣고 싶어합니다. 다른 사람이 우리를 칭찬하면 기분이 좋아지고, 비판하면 슬퍼집니다. 그러면 우리는 물 위에 뜬 거품이나 부평초가 되는 것입니다. 바람에 밀리는 물결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립니다.

우리가 여기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하느님의 말씀만 듣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말씀만 귀 기울여 듣도록 합시다. 그래야 우리가 부서지지 않습니다.

오상의 성 비오 신부님을 보십시오. 그분이 살아 계시는 동안 그분에 대해 비난하는 말이 많았습니다. 사실 교회마저 그분의 공적인 미사를 못하도록 조처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비오 신부님은 부서지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분의 마음은 돌밭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분을 흔들 수 없었습니다. 그분은 하느님의 말씀만 들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분이 다른 사람의 말을 들었다면 슬퍼졌을 것입니다. 그렇게 했다면 어쩌면 교회를 떠났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부님은 오직 하느님의 말씀만 들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존경 받는 성인이 되었습니다. 그분은 물 위에 떠 있는 거품이나 부평초가 아닙니다.

우리도 물 위에 떠 있는 거품일 수는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근본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는 원천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는 삶에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기초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바로 우리 삶의 기초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 우리에게 하는 험담은 다 잊도록 기도하십시오. 거기에 마음을 빼앗기면 안 됩니다.

시편 저자가 노래합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와서 보고 맛들여라!”

그런데 이것은 우리 삶에서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해서 옵니다. 소화 데레사도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해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알았습니다. 성 바오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는 미래가 있습니다. 밝은 미래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예언자 예레미야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너희를 멸망시키려는 것이 아니다. 너희가 잘되도록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고통을 겪었습니다. 우리도 삶에서 고통스러운 과정을 겪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님의 말씀만을 들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들으면 영정으로 성장할 수 없습니다. 우리를 다른 사람에게 봉헌하면 그들은 우리를 짓밟아버립니다.

 

“네가 알몸이라고 누가 일러 주더냐?”

 

여러분, 이 말을 잘 묵상하십시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아름다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 삶에 예수님을 중심에 두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 차를 가지고 있습니까? 기아차입니까? 현대차입니까? (한 사람이 기아차라고 답한다.) 기아차를 가지고 계신 분, 차 정비를 받습니까? 그렇게 좋은 차엔데 왜 정비를 받습니까? 여러 이유들이 있겠지만 종합하여 한마디로 말하면, 중간에 차가 멈추어 서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지요? 그래서 정기적으로 정비를 받습니다. 차가 우리가 원하는 목적지에 잘 도달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삶에도 정비가 필요합니다. 차를 미리 정비하면 돈이 많이 들지 않지만, 일단 차라 가다가 길에 멈춰 서는 일이 생기면 비용이 많이 듭니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단 우리 삶이 가다가 서버리면 다시 고치는 것은 아주 힘이 듭니다. 그런데 우리는 대개 삶이 망가져 서버린 후에 그것을 고치려고 합니다. 서버린 후에 다시 생명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천국을 땅으로 끌어내려야 합니다.

교회가 바로 정비소입니다. 교회를 통해 예수님께서 우리 영혼을 치유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마음을 재창조하십니다. 예수님이 추리를 치유하기 위해 사용하시는 도구는 하느님의 말씀과 성사입니다. 특별히 성체성사입니다.

제가 지난해 체코에서 청소년들 피정을 지도했을 때입니다. 13살에서 30살까지의 청소년 300명이 피정에 왔습니다. 그 중에 250면 정도가 마약을 하거나 약물 중독이거나 우울증을 앓고 있는, 다시 말해 삶이 중간에 서버린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는 그들을 바라보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어떤 청년은 마약을 한 지 15년 만에 마약을 끊었습니다. 피정 후에 딸이 어머니를 안았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끌어 안았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것 같은 이 행동들이 그들의 삶에 처음으로 일어난 일입니다. 저는 아름다운 화해의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재창조해 주셨다고 그들이 고백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도 어루만져 주십니다.

저는 그들에게 말합니다. 피정에 오라고 말하지 않고 휴가에 오라고요. 와서 쉬다가 가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쉬러 와서 정말 예수님 안에서 잘 쉬다가 갑니다. 많은 청소년들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들이 변화된 것을 보고 주교님들이 놀랐습니다. 그래서 내년에 체코의 주교님들 열다섯 분이 저에게 피정을 해 달라고 청했습니다. 제가 내년에 대주교님과 주교님들 열다섯 분의 피정을 지도하게 됩니다.

비밀은 실은 비밀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말씀과 성사, 이것이 비밀입니다. 교회가 이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는 대양과 같습니다. 교회는 보화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대양에서 어떻게 떠다녀야 합니까? 뚜껑이 닫힌 병처럼 떠다니면 안 됩니다.

우리가 성당에 다니지만 우리 삶에 변화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삶이 마치 뚜껑이 닫힌 병과 같기 때문입니다. 뚜껑이 닫힌 병에 어떻게 물이 들어옵니까? 병 뚜껑을 열어야 합니다. 그래야 물이 들어올 수 있습니다.

제가 이탈리아에서 피정을 지도할 때, 평판이 아주 좋지 않은 사람이 피정에 왔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사람이 피정에 왔다고 수군거렸지만, 그는 피정 후에 새 사람으로 변화되었고 삶의 기쁨을 되찾았습니다.

그런데 정통 신자라고 하는 사람들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할아버지의 형이 주교님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옛날 선조 때부터 성당에 기부금을 많이 내었다고 합니다. 그들에게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뚜껑이 닫힌 병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사두가이 파나 바리사이 파 사람들을 보십시오. 사두가이 파나 바리사이 파 사람들은 편견을 가지고 예수님을 대했습니다. 부정적인 시각을 지니고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들에게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세리나 창녀들, 죄인들이 예수님께 왔을 때 그들은 변화되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아주 내밀한 방에 예수님을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많은 사람이 성당에 오지만 은총 없이 그냥 돌아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마치 뚜껑이 닫힌 병과 같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닫힌 병뚜껑을 열어야 합니다. 비옥한 땅을 준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 우리가 닫힌 뚜껑을 열 수 있게 도와주시도록 청해야 합니다.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세 번째 강의

믿음은 성경에 바탕을 둔다

 

피정의 아름다움은 침묵을 지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세미나라고 하지 않고 피정이라고 합니다. 침묵은 우리 삶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마련해 줍니다. 우리는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잘못된 것을 침묵 안에서 바로잡을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됩니다. 이 피정 안에서 들은 많은 것을 잊어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침묵 안에서 예수님과 함께 보낸 시간은 영원히 남아 있을 것입니다.

제가 강론에서 말씀 드리는 모든 것이 여러분 모두를 위한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한마디로 충분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성체성사로도 충분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성체조배를 하는 시간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의 삶의 체험을 듣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러면 제가 왜 많은 말을 하면서 강론을 합니까? 제가 왜 하느님의 말씀을 강조합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의 미래를 위해서입니다.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말에 대해 신경을 쓰지 마십시오. 그렇게 되면 슬퍼집니다. 침묵의 중요성과 아름다움을 알아야 합니다. 침묵 안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의 말씀을 듣습니다. 마음의 침묵 안에서 그분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갓난 아기를 보십시오. 대부분의 시간을 요람에서 침묵 중에 보냅니다. 소음이 방해를 하면 아기가 웁니다. 아기는 침묵을 즐기는데 그것을 방해 받으면 싫어합니다. 그런데 자라면서 서서히 이 침묵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학교에 가서 친구들을 사귀고 말을 많이 하기 시작합니다. 커서 결혼을 하고 직장을 갖게 되면서 책임이 따르고 거기에 따라 말을 많이 하게 됩니다.

그런데 서서히 나이가 들면서 다시 침묵으로 돌아가게 되는 날이 옵니다. 직장에서 은퇴를 하고 사회의 중요한 위치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자녀들이 결혼을 한 후 떠나갑니다. 배우자가 세상을 떠나면 홀로 됩니다. 이제는 다시, 거의 침묵 속에서 보내게 됩니다.

침묵 안에서 우리의 미래를 바라보도록 합시다. 어떻게 침묵 안에서 미래를 바라봅니까? 많은 사람이 침묵에 잠기면 우울증에 걸립니다. 왜 그렇습니까? 침묵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시 침묵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침묵 중에 보내는 시간은 결코 낭비가 아닙니다. 침묵 속에서 우리는 묵상을 합니다.

이 피정에서 침묵을 지키며 예수님 안에 잠겼던 분들은 분명 변화되어 집으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침묵을 지키지 않고 옆 사람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보낸 사람들은 예전과 비슷한 모습으로 돌아가게 되겠지요. 옆 사람이 여러분에게 침묵을 방해하는 것을 허락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모두 소중한 시간과 돈을 지불하고 이 피정에 왔습니다. 왜 가른 사람이 방해하도록 허락합니까?

 

매일 아침 7시 30분부터 8시까지 성체조배가 있습니다. 성체조배는 예수님의 현존 앞에 머무는 것입니다. 우리 삶을 예수님과 함께 나누는 시간입니다. 우리 삶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아주 특별하고 유익한 방법입니다. 그냥 성체 안에 계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성체조배를 하면서 성경 내용을 묵상해도 됩니다.

요한 비안네 신부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성체조배는 예수님의 현존과 사랑 안에서 목욕을 하는 것입니다.”

성체조배를 하면서 예수님을 바라보면 그분이 우리의 고통을 가져가십니다. 우리가 안고 있는 많은 고통, 어려움, 과제를 혼자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예수님께 도움을 청하십시오. 저는 성체 앞에서 예수님께 말씀 드립니다. “당신의 종이 여기 왔습니다. 저를 사랑하시지요? 저는 당나귀처럼 많은 일을 합니다. 제가 이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저에게 이런저런 문제가 있습니다. 이 문제를 잘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30분 성체조배를 한 후에는 문제가 더 이상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가 없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문제를 크게 느끼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현존 안에 머무는 것이 아주 큰 힘이 됩니다.

 

점심 식사 후 3시까지는 자유시간이지만 쉬어야 할 시간입니다. 꼭 잠을 자지 않더라도 에어컨이 켜진 방에서 누워 휴식을 취하십시오. 몸을 쉬게 해야 합니다. 많은 말을 들었기 때문에 쉴 필요가 있습니다. 몸이 피곤하면 달콤한 말도 달콤하지 않게 들립니다.

우리는 삶에서 많은 문제들을 가지고 있고 바쁘게 삽니다. 조용히 침묵하면서 마음을 가라앉힐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 피정에서도 침잠 안으로 들어가려면 최소한 이틀이 필요합니다. 처음에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잘 참아내십시오.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부르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이곳에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계획 안에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 피정을 통해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주고자 하십니다. 그것을 믿도록 하십시오.

지금은 푹 쉬는 시간입니다. 때로는 가족들, 아이들에게서 떨어져서 쉬어야 합니다. 그것이 필요합니다. 장님이 장님을 이끌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쉬어야 다른 사람들을 쉬도록 해줄 수 있습니다. 이 피정 시간이 인생에서 아주 소중한 시간입니다. 피정을 잘 하기 위한 세 가지 요건이 있습니다. 첫째는 잘 먹는 것입니다. 둘째는 잘 쉬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시간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고해성사는 교회의 큰 보화입니다. 여러분은 고해성사의 아름다움을 보게 될 것입니다. 저는 지난 4년간 이 성사의 아름다움을 보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 고해성사 안에서 사람들을 변화시켜 주시는 것을 보아왔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신뢰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빈손으로 보내지 않으십니다. 축복을 주십니다. 우리 자신뿐 아니라 우리 가족에게도 축복을 주십니다. 가족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기도지향을 말씀 드리십시오. 기도지향을 바치는 작은 행위에 의미가 있습니다. 주님의 도움이 필요한 부분이 어디인지를 구체적으로 말씀 드리십시오. 자녀를 위해, 병환 중에 계신 부모님의 치유를 위해, 가족의 일치를 위해, 회개를 위해, 누구와의 화해를 위해 기도지향을 적어 미사 때 봉헌하십시오. 지향하는 여러분의 이름을 적을 필요는 없습니다. 미사 중에 주님의 잔을 들어 올릴 때 성작과 함께 그 지향들을 들어 올릴 것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그런 행위에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을 지니고 드리는 기도지향은 의미를 지닙니다.

불과 3주 전 체코에서 피정을 지도할 때입니다. 한 소녀가 반 장난으로 아버지와의 관계에 대한 지향을 쓰고 이 지향을 미사 때 봉헌했습니다. 제가 하는 말을 처음에는 비웃었답니다. 그래도 한번 해 보자는 심정으로 지향을 바쳤답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날 밤에 아버지에게서 전화를 받았답니다. 아버지는 한 번도 딸에게 전화를 해보지 않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 소녀가 제 방으로 달려와서 이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 소녀는 이것이 기적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소녀에게 말해 주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어라. 그러면 너는 더 큰 기적을 보게 될 것이다.”

기도지향은 작은 행위이지만 큰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보내는 시간은 모두 헤아려집니다. 믿음 안에서 투자를 하십시오. 조그만 신심행위 하나하나가 모두 투자입니다. 우리에게 위기가 닥칠 때 효과를 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사랑합니까? 왜 사랑합니까? 우리 삶의 가이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위로와 힘을 주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읽으면 편안해지기 때문입니다.

 

저에게는 아픈 과거가 있습니다. 저는 청소년 시절 거의 5년 동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습니다. 불면증이 있었지요. 저는 사제가 되기 위해 여러 수도원을 찾아 다녔습니다. 다섯 군데에서 모두 거절당했습니다. 교구 주교님도 저에게는 성소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겨우 빈첸시오 수도회에 받아들여졌지만 3개월 만에 거의 쫓겨날 뻔 했습니다.

저는 울며 예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제가 꼭 사제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제가 처음 성소를 위해 주교님을 찾아간 지 10년 후에 사제품을 받게 되었습니다. 저에게 성소가 없다고 말씀하신 그 주교님에게서 사제품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유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유머가 많은 분이십니다.

모든 것은 하느님의 계획 안에 들어 있습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은 우연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삶에 더 좋은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때로 그것을 알아채기까지는 시간이 걸립니다. 가나의 기적에서 보면 가장 좋은 포도주가 맨 마지막에 나오지 않았습니까? 우리 삶에서도 가장 좋은 포도주는 마지막 순간을 위해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날은 새로운 날입니다. 각각의 날에 축복이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는 가장 좋은 포도주를 받습니다. 내일은 내일의 가장 좋은 포도주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가장 좋은 포도주를 남겨놓으셨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하느님과 함께 머물렀던 시간은 영원히 남습니다. 그 시간을 보낸 사람은 결코 빈손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가장 좋은 포도주를 얻게 될 것입니다. 믿음과 희망을 잃지 마십시오.

저는 지적 능력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저는 같은 책을 두 번 읽지 않습니다. 저에게 어떤 책도 한 번 읽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이제 나이가 드니까 두 번 읽어야 되는 책도 있습니다마는 아주 예외적입니다. 그런데 성경만은 몇 번을 읽어도 늘 새롭고 전혀 지루하지 않습니다.

여기 네 번째 피정을 오신 분이 계시지요? 제가 피정에서 늘 새로운 성경 구절을 가지고 강론하는 것을 알아채실 것입니다. 성경은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더 많은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성경 안으로 깊이 들어가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의 보화입니다. 천국에서의 삶을 위한 보화입니다. 성경은 인류에 의해 가장 많이 읽힌 책입니다. 성경은 언제나 베스트셀러입니다. 성경에 관해 쓰인 책이 수백만 권도 넘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우리는 성경의 깊은 의미를 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무엇이 성경을 생생하게 살아 있도록 합니까? 그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의 힘입니다. 성경저자 안에서 활동하신 성령께서 우리에게도 영감을 주십니다.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에게도 성경을 듣는 사람에게도 영감을 주십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하느님의 여, 성령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구원을 위한 것입니다.

성경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도 나를 떠나겠느냐고 묻자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아닌 누구에게로 가겠습니까? 생명의 말씀을 지닌 성경을 통해 우리는 영감을 받습니다. 그것이 우리 삶에 도움이 되고 영감을 줍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모든 믿음이 다 좋습니까? 아닙니다. 진리를 담고 있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믿음은 성경이라는 진리에 바탕을 두어야 합니다. 교회는 가르치는 교회입니다. 그 안에 사도들이 있습니다. 사도들, 제자들은 배우는 사람입니다. 성경에 바탕을 두고 배우는 사람입니다.

영국에서 피정을 지도할 때입니다. 인도에서 온 어느 두 가족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인도에는 힌두교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여러 종파 중에 그들은 아티사리 바버 라는 유명한 사람이 이끄는 종교를 믿었습니다. 그 종교에서 그 가족에게 말하기를 가장이 96살을 살게 되고, 죽은 후 6년 후에 다시 회생하게 될 것이라고 했답니다. 그런데 96살은커녕 그 후 오래지 않아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종교에 속았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어린 거짓된 종교에 희망을 두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진리에 바탕을 두어야 합니다. 믿음은 단단한 증거 위에 서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성경이라는 진리, 성경이라는 증거 위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의 바탕은 성경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탄탄한 가르침을 줍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성경의 가르침을 받기를 원합니까? 우리는 편안함을 추구합니다. 안전함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때로 우리에게 편안함을 주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본당 신부가 신자들에게 술을 적당히 세 병만 마시라고 하면, 신자들은 그 본당 신부님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어느 본당 신부님은 술을 절대로 마시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면 신자들은 그 신부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구닥다리 신부라고 합니다. 이것은 실제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믿음이 좋은 땅 속에서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우리의 믿음은 순교자들의 피로 뿌리를 내렸습니다. 순교자들은 교회를 위해서 피를 흘렸습니다. 이것이 탄탄한 믿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믿음을 싫어합니다. 믿음에 따르는 희생을 치르고 싶지 않습니다. 성당에 나가고 성당 활동을 하지만 그냥 우리가 사는 대로 그대로 놔두기를 원합니다. 진정으로 우리가 변화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저도 신학생 때 똑같은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저도 지도 신부가 너무 까다로우니까 지도 신부의 성격을 바꿔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수련을 받으면서 수련장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수련장을 바꿔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바뀌어야 하는 것은 바로 저였습니다. 수련장 신부님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잊어버립니다. 변화되어야 할 사람은 바로 나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안토니오, 바로 너야!”

내가 다른 사람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나를 바꿀 수는 있습니다. 어떻게 바꿀 수 있습니까? 바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꿀처럼 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쌍날칼처럼 날카롭습니다. 저는 지난 4년간 하느님의 말씀을 가지고 피정을 지도하면서 변화를 체험했습니다. 피정을 통해 가장 큰 변화를 체험한 사람은 바로 저입니다. 저는 참으로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묵상할 때 우리에게 믿음이 생겨납니다. 성 예로니모가 말했습니다. “성경을 무시하는 것은 예수님을 무시하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성경을 경시하는 것은 예수님을 경시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치유의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약효를 지니고 있습니다. 저는 많은 곳에서 이것을 목격했습니다. 의학계에서 포기한 사람에게서도 치유가 일어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사람에게도 치유의 기적을 베풀어 주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아주 씁니다. 약효가 있는 약은 사실은 아주 씁니다. 다만 제약회사에서 약에 처리를 했기에 쓰지 않게 느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어떤 가르침은 아주 어렵습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치 제약회사에서 쓴맛을 느끼지 않게 처리하듯이 살짝 쓴맛을 제거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쓴 약을 주시지만 너무 쓰면 우리가 먹지 않을 테니까 쓰지 않게 처리하셔서 우리에게 주십니다. 부드럽게 우리를 어루만져 주시는 것이지요.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 삶에 길잡이가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위안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약효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통해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으면 모든 부정적인 것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 삶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네 번째 강의

믿는 자는 혼자가 아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귀담아들으면 성경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성 그레고리오 가 말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연애편지를 쓰셨다. 그것이 바로 성경이다.”

우리는 성경에서 하느님의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마음은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우리는 이런 하느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어미가 제 젖먹이를 잊는다고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을 것이다. 어미가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이 말씀은 우리에게 하시는 약속이기도 합니다. 성경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이 약속을 듣습니다.

저의 어머니는 저를 배어 일곱 달 되었을 때, 길을 빨리 걸으시다가 교통사고를 당하셨습니다. 의사는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아기를 포기하라고 했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기를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일곱 달 까지 어머니 배 속에 있던 저는 아주 활달했답니다. 그래서 나중에 축구선수가 되려나 하는 생각을 하셨답니다. 그런데 사고 후에 움직임이 없었고, 의사가 낙태시키라고 권유했답니다. 당시 인도는 의료시설이 그렇게 발당하지 못했습니다. 의사는 아기가 주었거나, 살아 있다고 하더라도 장애아로 태어나게 될 것이라고 했답니다. 어머니에게 요구된 선택은 하나였습니다. 낙태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말했답니다. “내 배 속에서 아기가 자라게 해 주십시오. 장애아라도 좋습니다. 아기를 돌보기 위해 제가 있습니다.” 어머니는 낙태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지금 여기 있습니다.

하느님은 나를 잊지 않습니다. 그것이 시편저자의 믿음입니다. 어머니가 저를 잊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제가 어머니를 사랑하는 큰 이유이기도 합니다. 어머니는 저를 소중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어떻게 어머니를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3년 전 저의 어머니는 위암에 걸렸습니다. 의사는 위의 90퍼센트 를 잘라내는 수술을 했습니다. 3개월 시한부 인생이라고 말했지요. 저는 기도했습니다. “주님, 어머니의 삶에서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주소서! 어머니께서 사시든 돌아가시든 오직 당신 뜻대로 해주소서!” 저는 매일 미사에서 어머니를 주님께 봉헌했습니다. 어머니는 수술 후 7일 만에 완전히 치유되셨습니다. 3년이 지난 지금 아주 건강하게 사십니다. 무슨 일이든지 다 하십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하느님 말씀에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가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들아, 네가 위험에서 처했을 때 나는 너를 보호했었다. 이제는 네가 나의 치유자가 되었구나. 처음에는 내가 너의 치유자였다. 그런데 이제 네가 나의 치유자다.”

 

우리는 하느님 안에서 생명을 주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에게서 생명을 받아서 그 생명을 나눠주는 사람이 됩니다. 각자 다른 상황에 놓여 있지만, 어떤 상황에서든 하느님에게서 생명을 받아 다른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일이 중요합니다.

성경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완벽하게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아빠 아버지로서의 사랑입니다. 그 아빠 아버지의 사랑을 성경에서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드리면서 부르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사랑과 우리를 낳아주신 아버지의 사랑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육신의 아버지는, ‘네가 언제나 나와 함께 있어주면 나의 재산을 너에게 주겠다. 아들아, 너는 나에게 와야 한다. 그래야 내가 너를 아들로 사랑할 것이다.’ 등의 조건이 붙습니다. 인간에게는 때로 이런 조건이 필요하기도 합니다만, 하느님이신 아빠 아버지의 사랑은 무조건적입니다. 어떤 조건을 달지 않습니다. 그냥 무조건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나는 너를 사랑한다.’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사랑의 큰 특징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었고 모두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둘째 아들이 자기 재산을 나눠 달라고 하여 그것을 가지고 아버지를 떠나 먼 고장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를 무조건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으로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본질에 대해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 아버지에 대해 반쪽만 아는 것이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아프리카 격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반쪽짜리 의사가 사람을 죽인다.”

 

제가 아프리카에서 피정지도 중에 열이 났습니다. 조그만 의원에 갔더니 거기 반쪽짜리 의사와 반쪽짜리 간호사가 있었습니다. 간호사가 저에게 ‘말라리아’라고 하면서 약을 주었습니다. 그 약을 먹었더니 땀이 나고 눈이 빠지는 것같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다시 갔더니, 이번에는 바이러스라고 하면서 주사를 세 대나 놔주었습니다. 그 주사를 맞고 저는 구토가 나기 시작하고 온 신경이 굳어 마비되는 것 같더니 결국 3일간이나 혼수상태에 빠졌습니다. 제 혈액이 응고되어 거의 죽을 뻔했습니다. 이것이 아프리카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결국 저는 나이로비로 옮겨져서 입원을 하고 치료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 이전까지 저에게는 병이 없었습니다. 다만 피곤할 뿐이지 병이 난 적이 없었습니다. 저는 나이로비에서 그들이 원하는 대로 치료를 받아야 했고, 얼마나 많은 약을 먹어야 했는지 모릅니다. 그전에는 아프지 않았기 때문에 병원에 간 적이 없고 약을 먹은 적도 없었습니다. 33년 동안 먹지 않은 약을 3개월 동안 다 먹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저를 겸손하게 만드시고자 그렇게 하셨는지도 모릅니다. 적어도 이제는 제가 아파 본 적이 없다고 말할 수 없게 되었으니까요. 제가 혼수상태라고 했지만 완전히 의식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제 안에 약간의 의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통을 느꼈는데, 저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일은 미사를 드릴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하느님께 찬미를 드릴 수 있어 감사한 마음이었습니다.

우리가 건강하고 힘이 있을 때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는 일은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찬미와 감사를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늘 더 좋은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반쪽짜리 의사가 곤란하듯이 하느님에 대한 반쪽짜리 이해는 곤란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그분의 아버지가 우리의 아버지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은 아버지의 집에서 해야 할 일이 많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죽였습니까?

한 가지 커다란 이유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당신의 아버지라고 불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신성모독이었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불경입니다. 유다인들은 감히 하느님을 쳐다볼 수도 없었습니다. 하느님은 너무나 거룩한 분이기 때문에 바로 쳐다볼 수 없고 아래를 보아야 합니다. 하느님이 계시는 지성소 앞에 휘장이 쳐져 있지요?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때 휘장이 찢어진 것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하느님은 자비로우신 아버지이신데, 그들이 잘못 이해했기에 그 앞에 휘장을 쳐놓았습니다. 왜 그렇게 했습니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휘장을 없애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셔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로우신 얼굴을 드러내기 위해 죽으신 것입니다. 죽으실 때 휘장이 두 폭으로 찢어지며 갈라졌습니다. 이로써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은 자비로우신 아버지라는 것을 보여주시고자 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 없이 이 세상을 살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제가 짧은 이야기 하나 들려드리겠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들이 아버지를 떠났습니다. 가출을 한 것이지요. 아버지는 너무 슬펐습니다.

신문에 광고를 내기로 했습니다. “나의 아들 토마스야, 제발 집으로 돌아오너라. 나는 너에게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 주고 싶다. 이 광고를 보거든 모 교회 앞에 있는 큰 나무 아래로 오너라. 내가 거기서 너를 기다리겠다. 나는 너의 사랑하는 아버지다.” 그 아버지는 자기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다만 ‘너의 사랑하는 아버지로부터라고만 썼던 것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십니까? 기다리기로 한 날, 그 나무 밑에 갔더니 거기 토마스라는 이름을 가진 500명의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이 이야기에는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집을 떠난 아이들은 돌아오고 싶어합니다. 그들은 세상에 지쳤습니다. 아버지 없는 세상에 넌더리가 났습니다. 우리는 아버지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말씀 중에서 우리가 분명히 의식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에게는 아버지가 계시다. 나는 혼자가 아니다. 그것이 처음 드러난 것이 언제입니까? 바로 열두 살 때, 성전을 방문하셨을 때입니다. 이 성전 방문 이야기는 커다란 진리를 담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나에게는 아버지가 계시다, 나는 아버지의 일로 바빠야 한다는 것입니다.

 

심리학자들은 12살이라는 나이가 인생에서 아주 중요하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아버지는 아이에게 별로 관심을 두지 않게 된다고 합니다. 아이들도 12,13살이 되면 이제 슬슬 거짓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여러 가지 핑계를 대기도 합니다. 그들은 중요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면서 자기의 모델을 찾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그 모델을 자기 아버지에게서 찾지 못하면 어디서 찾게 되겠습니까?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에서 찾습니다. 축구 선수나 영화배우가 아이들의 모델이 됩니다. 아이들은 아직 눈먼 상태에 있기 때문에 그들을 좋아합니다. 그들의 옷차림을 모방합니다. 눈이 먼 상태에서 무조건 그들을 모방하는 것입니다. 특히 여자아이들은 그들의 옷차림을 그대로 모방하고자 합니다.

한 살짜리 어린 아기의 특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부모와 함께 있으면 안전을 느끼는 것입니다. 아기는 놀다가도 부모가 있는지를 확인합니다. 부모가 자기를 봐주고 있는지를 확인합니다. 부모가 자기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고 느끼면 주의를 끌기 위해 소리를 지르거나 웁니다. 그러다가 부모가 자기를 쳐다보면 다시 행복해합니다.

아기는 보호를 필요로 합니다. 부모가 자기 곁에 있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자기를 돌본다고 느껴야 합니다. 그래야 안전을 느낍니다. 아기는 부모가 없으면 두려움이 생깁니다. 그래서 웁니다. 그러다가 아빠의 존재를 느끼면 다시 행복합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우리가 몇 살이든 상관없이 우리에게는 아버지의 보호가 필요합니다.

아이가 자라 12살 정도가 되면 학교에서 무엇을 배웁니까? 자립을 배웁니다. 홀로서기를 배우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믿음을 떠나라고 부추김을 받습니다. 은근히 신앙과 가족을 떠나라는 부추김을 받는 것입니다. 네가 성숙하기를 원하면, 홀로 서라! 가짜 아버지에 대해 배우기 시작합니다. 진짜 아버지에게서 벗어나라고 하면서 가짜 아버지를 내세우는 것입니다. 진짜 아버지는 아이가 위기에 처하면 도움을 청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가짜 아버지, 거짓 아버지는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너 혼자 직면하라. 가족에서 도움을 청하지 마라. 우리에게는 아버지가 필요 없다. 성숙하려면 홀로 서야 한다.”

우리가 몇 년이나 그렇게 살 수 있을까요? 마음에서 억압했던 아버지에 대한 갈망, 우리 내면에 있는 아기의 울음소리는 마치 화산이 폭발하듯 폭발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안 계시면 모든 것에서 두려움을 느낍니다. 심리적으로 두려움에서 우울증까지 생길 수 있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피하려는 나쁜 습관이 들고, 점점 삶이 끔찍해집니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거짓 아버지는 혼자가 되라고 하면서 아버지의 도움 없이 세상에 의존하도록 만듭니다.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에 몰두하게 만듭니다. 이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어디고 가게 됩니까? 부도덕한 삶이나 마약으로 빠지게 됩니다.

우리는 결정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에게 의존할 것인가? 세상에 의존할 것인가? 우리가 부모를 떠나거나 예수님을 떠나면 서서히 세속에 빠져들게 되어 있습니다. 거기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세상의 죄는 아버지 없는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아버지가 계십니다. 놀라운 아버지가 계십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의 모토가 무엇인지 아시지요? “믿는 자는 혼자가 아니다.” (역주: 교황님이 내신 잠언집의 제목이기도 하다)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아버지가 계십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보호를 필요로 합니다. 부모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아이처럼 우리는 하느님 아빠 아버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진실한 아버지를 찾고 그분의 인도를 따를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평화와 기쁨을 찾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다섯 번째 강의

물동이를 버려두고

 

예수님께서는 야곱이 자기 아들 요셉에게 준 땅에서 가까운 시카르 라는 사마리아의 한 고을에 이르셨다. 그곳에는 야곱의 우물이 있었다. 길을 걷느라 지치신 예수님께서는 그 우물가에 앉으셨다. 때는 정오 무렵이었다.

마침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으러 왔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고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러 고을에 가 있었다. 사마리아 여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선생님은 어떻게 유다 사람이시면서 사마리아 여자인 저에게 마실 물을 청하십니까?” 사실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 상종하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대답하셨다. “네가 하느님의 선물을 알고 또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고 너에게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네가 그에게 청하고 그는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 그러자 그 여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선생님, 두레박도 가지고 계시지 않고 우물도 깊은데, 어디에서 그 생수를 마련하시렵니까? 선생님이 저희 조상 야곱보다 더 훌륭한 분 이시라는 말씀입니까? 그분께서 저희에게 이 우물을 주셨습니다. 그분은 물론 그분의 자녀들과 가축들도 이 우물물을 마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 그러자 그 여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목마르지도 않고, 또 물을 길으러 이리 나오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이리 함께 오너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 여자가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 한 것은 맞는 말이다. 너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지금 함께 사는 남자도 남편이 아니니, 너는 바른대로 말하였다.” 여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선생님, 이제 보니 선생님은 예언자시군요. 저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선생님네는 예배를 드려야 하는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아, 내 말을 믿어라. 너희가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닌 곳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너희는 알지도 못하는 분께 예배를 드리지만, 우리는 우리가 아는 분께 예배를 드린다. 구원은 유다인들에게서 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실한 예배자들이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사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이들을 찾으신다. 하느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그분께 예배를 드리는 이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

그 여자가 예수님께, “저는 그리스도라고도 하는 메시아께서 오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분께서 오시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알려주시겠지요.” 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 (요한 4,5-26)

 

우리는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이 나눈 길고 아름다운 대화를 들었습니다. 잠시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그려보십시오.

예수님은 유다인이십니다. 당시 유다인은 사마리아인들과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서로 적대관계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많은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유다인이 아니라 사람들이 라삐라고 부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유다인들은 대중 앞에서는 여자들과 대화를 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라삐는 대중 앞에서는 자기 아내와도 대화를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관습입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전혀 다른 일이 벌어집니다. 문화적 배경은 다 잊어버립니다. 예수님께서는 길을 가시다가 지치셨고 목말라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에 대해 목말라하시는 것입니까? 누군가의 믿음을 목말라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목마름이 무엇을 상징합니까?

이제 사마리아 여인을 보십시오. 보통 여자들은 이른 아침이나 저녁에 물을 길으러 옵니다. 한낮은 무척 뜨겁습니다. 그런데 이 사마리아 여인은 정오에 물을 길으러 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 여인은 사회에서 평판이 좋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을 피하고자 정오에 물을 길으러 온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우리가 모두를 피할 수 있을지라도 예수님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기본적인 현실입니다. 우리가 왜 예수님을 피할 수 없습니까? 그분이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필요한 사람 앞에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의 삶의 수준으로 내려가십니다. 그 사람의 삶의 현주소까지 내려가셔서 거기서 기다리십니다. 왜 그렇게 하십니까? 그 사람을 이해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 사람을 새 삶으로 다시 초대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를 다시 희망으로, 기쁨으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거기 예수님이 계시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거기 계신 것을 보고 처음에는 외면합니다. 그러나 마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조금은 안심을 합니다. 그 여인은 얼른 물을 길어 집으로 가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아무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을 건네십니다.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여인이 깜짝 놀라며 말합니다. “선생님은 어떻게 유다 사람이시면서 사마리아 여자인 저에게 마실 물을 청하십니까?”

이 여인이 말하는 표현방법을 잘 보십시오. 표현하는 어투, 어법, 예수님을 부르는 호칭에 유념해서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미소를 지으시며 말씀하십니다. “네가 하느님의 선물을 알고 또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고 너에게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네게 그에게 청하고 그는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청했고, 여인은 어떻게 유다인이면서 사마리아 여인인 자기에게 청하냐고 묻는데 예수님은 오히려 당신이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그녀가 그에게 물을 달라고 청하고 그가 그녀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여인이 놀랍니다. 이 사람이 물을 가지고 있다니! 이 사람이 마법의 물이라도 가지고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 생각합니다. 아! 그런 물을 얻을 수 있다면 나를 험담하는 사람을 만나지 않아도 되겠다. 그래서 그 여인이 용기를 내어 다시 말합니다.

“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목마르지도 않고 또 물을 길으러 이리 나오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보십시오. 처음에는 유다인인 당신이 어떻게 물을 청하느냐고 하던 여인이 이제 예수님께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물을 달라고 청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이리 함께 오너라.”

가서 남편을 불러 오라는 이 말은 여인에게는 쓴 약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쓴 약을 너무 쓰지 않게 살짝 쓴맛을 없애는 처리를 하십니다. 다시 말해, 나무라시면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여인이 예수님의 말을 듣고 남편이 없다고 솔직히 대답합니다. 예수님께 말씀하시지요.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 한 것은 맞는 말이다. 너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지금 함께 사는 남자도 남편이 아니니, 너는 바른대로 말하였다.”

여인에게 남편에 대한 말은 가슴 아프니 상처입니다. 쓴 약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너무 쓰지 않게 처리한 약을 주시면서 상처를 치유해 주시고자 합니다. 여인은 계속 사랑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만족할 수 없었고, 지금 다른 남자와 살고 있지만 그도 자기를 사랑하는 남편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안과 밖을 다 보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사생활 중의 사생활이라고 할 수 있는 내밀한 방을 보고 계십니다. 그것을 다 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내밀한 방,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아픔을 보셨습니다. 여인이 지닌 상처를 아셨습니다. 어떻게 예수님께서 다 아셨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의 상태로 내려가신 것입니다. 여인의 마음 깊은 곳까지 내려가셔서 거기에 들어가신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목마름이었습니다. 여인의 믿음에 대한 목마름입니다.

이제 여인이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하지 않고 ‘예언자’라고 말합니다. 아, 이분이 내 마음을 다 알고 있는 예언자다. 그런데 더 나아가서 ‘단순히 예언자가 아니라 메시아인가?’ 라는 물음에 이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놀랍게도 여인에게 당신이 메시아, 구세주라는 것을 밝히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믿음이 생겨나고 그것이 서서히 자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은 과적을 통해 서서히 성숙해 나갑니다. 처음에는 믿음과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때는 다만 예수님이 ‘유다인’일 뿐입니다. 가까이 가서 대면하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선생님’으로 바뀝니다. 점점 대화가 깊어지면서 ‘예언자’라고 부릅니다. 그 다음에 마지막으로 ‘메시아, 구세주’라는 것을 알아보게 됩니다. 이것이 믿음이 성장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표징입니다.

여인은 과거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에게 퍼붓는 험담을 생각하면 슬퍼집니다. 그것이 너무나 힘들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잊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과거로 돌아가서 바라보면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과거로 돌아가서 바라보면 거기에 희망과 치유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과 함께 보지 않고 그냥 과거를 바라보면 죄책감이 들고 그것 때문에 절망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마음에 들어오시도록 해야 합니다. 사생활 중의 사생활이라고 할 수 있는 우리의 가장 내밀한 부분을 예수님 앞에 드러내놓고 그분이 그것을 가져가시도록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 우리의 가장 내밀한 부분을 숨기면 죄책감이 커지고, 우리는 점점 더 슬픔에 빠지게 됩니다.

반쪽 짜리 진리는 곤란합니다. 완전한 진리만이 우리를 치유해 줄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처음에는 반쪽 짜리 진리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완전한 진리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를 받아들였습니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지 않았습니다. 다만 예수님께 당신은 예언자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인의 마음 안으로 들어가셔서 그 마음을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것도 묻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은 왜 남편이 다섯 명이나 있었고, 지금은 왜 다른 남자와 사느냐고 묻지 않으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의 부서진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치유가 일어납니다. 여인은 그렇게 했습니다. 그리고 치유가 일어났습니다. 여인은 물동이를 그대로 놔두고 마을로 달려갔습니다.

 

이 여인의 변화를 보십시오. 여인은 마을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피해서 정오에 물을 길으러 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후, 여인은 사람들을 만나러 마을로 달려갔습니다. 자기에게 험담을 하던 사람들에게로 달려간 것입니다.

이것은 엄청난 변화입니다. 그 여인은 마을에 가서 말했습니다. 여러분, 오십시오. 여기 제 과거를 모두 맞힌 사람이 있습니다. 와서 보십시오. 여기 사마리아 여인에게 일어난 일을 통해 두 가지 사실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그것을 잘 보아야 합니다.

첫째는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거나 병을 치유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둘째는 예수님께서 단순히 죄를 용서하시거나 병을 치유해 주실 뿐 아니라 사회에서 다시 잘 살 수 있게 해주십니다. 우리 자리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그리고 다시 새 삶에 적응할 수 있게 해주십니다. 예수님과 함께할 때 우리는 다시 사람들과도 함께할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거기 계시며 활동하십니다.

사람들은 여인이 전하는 말을 듣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의 과거는 잊어버립니다. 이제는 그 여인이 전한 메시아, 구세주 예수님에 대해 생각합니다. 이 사마리아 여인은 첫 선교사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사람들에게 파견하신 것입니다. 여인이 파견을 받으면서 뒤에 무엇을 남겼습니까?

그 여인은 물동이를 남겨두고 달려갔습니다. 이것은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옛 습관을 버린 것입니다. 눈을 뜨게 된 사람이 겉옷을 남겨놓았습니다. 시몬 베드로와 다른 어부도 예수님을 따를 때, 배와 모든 것을 버리고 따랐습니다. 세리였던 마태오도 세관에 앉아 도둑질을 할 셈이었습니다. 거짓 방부를 만들었는데, 그것을 남겨두고 떠났습니다. 옛 습관을 남겨두고 떠나야 합니다.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하느님께서 더 좋은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 가지고 계신 더 좋은 계획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이제 거짓 장부가 아니라 진정한 장부를 기록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마태오를 거짓 장부가 아닌 진정한 장부, 바로 복음을 기록하는 복음사가로 부르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놀라운 일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모든 성인은 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죄인은 미래를 지니고 있습니다. 마태오는 자기가 훗날 진정한 장부인 복음을 기록하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도 자기가 마을 사람들에게 달려가게 되리라고는 미처 상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하느님이 마련하시는 미래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더 나은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더 좋은 포도주를 마련하십니다.

마을 사람들은 사마리아 여인의 말을 들었고, 예수님을 만났고, 행복해졌습니다. 그래서 외칩니다. 당신은 참으로 메시아, 세상의 구원자이십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이 알아차려야 하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메시아, 세상의 구원자이십니다. 그런데 그것을 알아채기까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처음에는 ‘유다인’이라 했고, 그 다음에는 ‘선생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이어서 ‘예언자’라고 불렀고, 마지막으로 ‘메시아, 구원자’라고 고백합니다. 그 과정은 서서히 일어납니다. 우리도 그 수준까지 믿음이 자라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만나고 이 세상에 구원자이신 예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면, 우리가 지닌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됩니다.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사마리아 여인처럼 변화되어야 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고통 받는 사람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이제 그 여인은 고통 받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 받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아버지가 계십니다.

진정 하느님 아빠 아버지에게서 우리의 안전, 우리의 구원을 찾아야 합니다. 세상에 의지하기보다 아버지께 의지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세상에 의지하면 부정적이 되고, 생명을 거스르게 되고, 고통스럽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현존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현존을 어디에서 알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성체성사 안에 현존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쓴 약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쓴 약입니다. 그러나 쓰게 느끼지 않도록 살짝 처리를 해서 주십니다.

왜 우리가 예수님 말씀을 쓰다고 느끼지 않습니까? 사랑과 함께 오시기 때문입니다. 사랑 안에서 우리의 상처를 치유해 주십니다. 사랑 안에서 우리를 용서해 주십니다. 사랑 안에서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십니다. 늘 기도하도록 합시다. 우리가 예수님을 보고 경험하고 증거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그것이 우리를 신앙의 완성에 으르게 할 것입니다.

 

 

 

여섯 번째 강의

야곱과 에사우 – 축복

 

하루는 야곱이 죽을 끓이고 있었다. 그때 에사우가 허기진 채 들어서 돌아왔다. 에사우가 야곱에게 “허기지구나. 저 붉은 것, 붉은 것 좀 먹게 해 다오.” 하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이름을 에돔 이라 하였다. 그러나 야곱은 “먼저 형의 맏아들 권리를 내게 파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에사우가 대답하였다. “내가 지금 죽을 지경인데, 맏아들 권리가 내게 무슨 소용이겠느냐?” 그래서 야곱이 “먼저 나에게 맹세부터 하시오.” 하지, 에사우는 맹세를 하고 자기의 맏아들 권리를 야곱에게 팔아 넘겼다. 그러자 야곱이 빵과 불콩죽을 에사우에게 주었다. 그는 먹고 마시고서는 일어나 나갔다. 이렇게 에사우는 맏아들 권리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창세 25,29-34)

성경 구절 한 대목으로 오늘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이 성경 대목에서 주인공이 누구입니까? 야곱과 에사우입니다. 여기 역사적 배경이 있습니다. 구원역사의 배경입니다. 우리는 이 역사적 배경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알파에서 오메가까지, 천지 창조에서 시작하여 오늘날 우리에 이르기까지의 구원역사입니다. 아담과 하와에서 시작된 구원역사는 구약에서 판관들과 왕들, 예언자들을 거쳐 예수님에 이르게 되고, 사도들로 이어졌고, 교부들과 많은 성인성녀들이 있었고,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이어집니다.

오늘날에도 구원역사는 우리를 통해 계속됩니다.구약에서 이스라엘을 통한 구원역사를 보면 아들들을 통해 계승되는 특징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낳았고, 이사악은 야곱과 에사우를 낳았고, 야곱은 열두 아들을 낳았는데, 거기 요셉이 있었습니다.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모세로 이어지고 모세를 잇는 후계자로 여호수아 가 있습니다. 그 후 판관들이 있고, 사울 과 다윗 등의 왕들이 있고, 예언자들이 있습니다.

이사악에게는 사랑하는 아들이 둘 있었습니다. 야곱과 에사우입니다. 야곱은 어머니에게 특별한 사랑을 받은 귀염둥이이고 에사우는 아버지의 사랑을 더 많이 받는 아들입니다. 에사우는 근육질의 남자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살갗이 붉고 온몸이 털투성이였습니다. 에사우는 그래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에사우는 자라면서 솜씨 좋은 사냥꾼 곧 들사람이 됩니다. 그는 열심히 일하지만 조금 우둔합니다. 한편 야곱은 머리가 좋습니다. 겉으로 볼 때 온순하지만 속으로는 아주 교활하기까지 합니다. 늘 어머니 곁을 떠나지 않습니다. 어머니는 야곱을 사랑하고 아버지는 에사우를 사랑합니다.

 

우리는 야곱을 유의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야곱은 변화됩니다. 회심 이전과 이후에 전혀 다른 삶을 삽니다. 야곱이 젊었을 때는 어머니와 가까웠습니다. 요리조리 잘 빠져나갔습니다. 모든 나쁜 것을 어머니에게서 배웠습니다. 어떤 어머니는 아들이 떠나는 것을 원치 않아서 늘 곁에 두고 싶어합니다. 레베카 가 그런 어머니였습니다.

야곱은 머리가 좋습니다. 꾀가 많습니다. 형 에사우를 속여 불콩죽 한 사발에 장자권을 팔아 넘기도록 했습니다. 야곱이 거짓말로 형을 속이는 일을 어머니가 도와줍니다. 어떻게 합니까?

에사우의 옷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을 야곱에게 입히고, 새끼 염소를 잡아 그 가죽을 야곱의 손목과 목에 둘러줍니다. 그리고 야곱이 아니라 자기가 만든 별미와 빵을 야곱의 손에 쥐어줍니다. 아버지 이사악은 이제 눈이 어두워져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누구냐고 묻습니다. 야곱이 에사우라고 말하자, 아버지가 말합니다. “목소리는 야곱의 목소리인데 손은 에사우의 손이로구나.” 다시 에사우냐고 따져 물었을 때도 야곱은 에사우라고 거짓말을 합니다. 아버지는 결국 야곱을 축복해 줍니다.

나중에 야곱은 장인을 속이고 달아납니다. 야곱은 자기 나름대로의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이 계획은 모두 수포로 돌아갑니다. 계획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거기서 새로운 야곱이 태어납니다. 야곱은 하느님 안에서 재정립하는 과정을 통해 새로운 야곱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그 과정 안에서 야곱은 20년간이나 장인에게 종살이를 해야 했습니다.

또한 그는 자기가 아버지를 속였듯이 자식에게 속임을 당하는 일을 겪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야곱이 각별하게 사랑했던 요셉을 이집트로 가는 상인들에게 팔아 넘기고는 죽었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역사가 되풀이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야곱은 처음에는 자기 머리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계획대로,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위로부터 오는 도움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야곱은 하느님께 의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에게 회심이 일어난 것입니다. 하느님을 신뢰하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이제는 자기의 지적 능력을 믿지 않고 하느님께 신뢰를 둡니다. 오랜 전 젊은 시절에는 자기의 머리와 능력을 믿었습니다.

오늘날 아직도 세상에는 야곱의 죄가 계속됩니다. 여전히 자기의 지능, 자기의 능력, 자기의 힘을 믿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러나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느님의 힘을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셔야 우리가 모든 것을 제대로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것을 가르쳐 줍니다.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고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다시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에사우가 사냥을 하러 나갔다가 빈손으로 돌아옵니다. 몹시 배가 고픕니다. 마침 동생이 빵과 붉은 불콩죽을 가지고 있는 것을 봅니다. 동생에게 말합니다. “나는 오늘 아무것도 못 잡았다. 하루 종일 뛰어다녔더니 배가 고프자. 그 불콩죽을 좀 먹게 해줘라.”

동생이 대답합니다. “주겠소. 그런데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형의 맏아들 권리를 내게 파시오.” 에사우가 생각합니다. “내가 지금 이렇게 배가 고픈데 장자권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에사우가 말합니다. “좋다. 장자권은 너 가져라. 그리고 그 불콩죽은 나에게 다오.” 에사우는 불콩죽을 맛있게 먹고 그것으로 배를 채웠습니다.

우리는 성경의 한 구절을 듣습니다. “이렇게 에사우는 맏아들 권리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맏아들 권리가 왜 중요합니까? 하느님의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는 축복이었습니다. 하느님이 주시는 축복입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에사우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에사우가 먹은 불콩죽 한 그릇이 무엇을 상징합니까? 우선의 안전, 물질을 상징합니다. 그것이 영원한 행복을 줄 수 없습니다. 잠시의 즐거움만 느끼게 할 뿐입니다.

에사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창세기 27장 30-38절을 읽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사악이 야곱에게 축복하고 나서 야곱이 아버지 앞에서 물러나자마자, 그의 형 에사우가 사냥에서 돌아왔다. 그도 별미를 만들어 아버지에게 들고 가서 말하였다. “아버지, 일어나셔서 아들이 사냥해 온 고기를 잡수시고, 저에게 축복해주십시오.” 그의 아버지 이사악이 그에게 “너는 누구냐?” 하고 물으니, 그가 “저는 아버지의 아들, 아버지의 맏아들 에사우입니다.”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이사악이 깜짝 놀라 몸을 떨면서 말하였다. “그렇다면 사냥을 해서 나에게 고기를 가져온 자는 누구란 말이냐? 네가 오기 전에 나는 이미 그것을 다 먹고, 그에게 축복해 주었다. 그러니 그가 복을 받을 거이다.” 에사우는 아버지의 말을 듣고 비통에 차 큰 소리로 울부짖으며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저에게, 저에게도 축복해주십시오.” 그러나 이사악이 말하였다. “네 동생이 와서 나를 속이고 네가 받을 축복을 가로챘구나.” 그러자 에사우가 말하였다. “이제 저를 두 번이나 속였으니, 야곱이라는 그 녀석의 이름이 딱 맞지 않습니까? 저번에는 저의 맏아들 권리를 가로채더니, 보십시오. 이번에는 제가 받을 축복까지 가로챘습니다.” 그러고서는 “저를 위해선 축복을 남겨두지 않으셨습니까?” 하고 묻자, 이사악이 에사우에게 대답하였다. “얘야, 나는 그를 너의 지배자로 세웠고, 그의 모든 형제들을 그에게 종으로 주었으며, 곡식과 술을 그에게 마련해 주었다. 그러니 내 아들아,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겠느냐?” 그러자 에사우가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아버지에게는 축복이 하나밖에 없다는 말씀입니까? 아버지, 저에게, 저에게도 축복해주십시오.” 그런 다음 에사우는 목 놓아 울었다.

 

 

우리는 불콩죽을 먹은 사람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봅니다. 에사우가 아버지에게 축복해 달라고 외치지만 이미 그의 축복은 야곱에게 넘어갔습니다. 불콩죽 한 그릇에 팔아 넘긴 것이지요. 오늘날 우리에게도 에사우의 죄가 계속적으로 발생합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의 관심은 오직 불콩죽으로 상징되는 물질입니다. 축복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는 왜 부모를 사랑하는지 모아야 합니다. 축복 때문인가? 불콩죽 때문인가?

축복은 언제나 함께 있는 것입니다. 부모도 잘 알아야 합니다. 지혜로워야 합니다. 자식들에게 무엇을 주는 것이 중요한지를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최우선은 하느님이어야 합니다. 하느님이 주시는 축복을 빌어주어야 합니다. 야곱도 처음에는 하느님이 최우선이 아니었습니다. 나중에 회심한 이후에야 하느님이 최우선이 됩니다. 야곱이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축복은 곧바로 즐길 수는 없었습니다. 그 축복을 누릴 수 없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불법으로, 거짓으로 받았기 때문입니다. 마음에서부터 얻어야 합니다. 거짓으로 얻은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사생활 중의 사생활이라고 할 수 있는 내면 깊은 곳에서 얻어야 합니다. 거기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어루만져 주시도록 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마음 깊은 내밀한 곳에서부터 하느님께 신뢰를 두어야 합니다.

이 성경 대목을 깊이 묵상하며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두 인물, 야곱과 에사우를 잘 묵상해 보십시오.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께 신뢰를 두어야 하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제 가족에게도 똑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제 할아버지는 9남매를 두셨습니다. 그 중에서도 제 아버지만 장애인입니다. 할아버지가 자식들에게 유산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인도의 법에 따르면 장애를 가진 자식이 우선 가장 좋은 몫을 나누어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형제들은 아버지를 속이고 할아버지의 땅에서 가장 쓸모 없는 땅을 아버지에게 주었습니다. 아버지가 소송을 하려고 하였지요. 그러나 어머니가 말렸습니다. “법정에서 땅을 찾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관계를 다시 회복할 수는 없어요. 땅은 잊어버립시다.”

어머니는 지혜로운 분입니다. 아버지를 속이고 할아버지의 재산을 쫓아간 아버지 형제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한마디로 다 망했습니다. 그 자식들은 모두 믿음을 잃어버렸고, 알코올 중독이 되거나 마약에 빠지거나 부도덕한 삶을 살았습니다 아버지 형제의 모든 가족이 파멸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그들이 나쁜 것을 계획하기 위해 하나로 뭉쳤지만 나중에는 유산 분배 사건으로 서로 싸웠습니다. 그리고 아주 불행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에사우의 죄가 계속되는 모습입니다.

우리 가족은 아무도 불행하지 않습니다. 우리 가족 안에는 행복이 있습니다. 경제적 어려움이 우리 가족을 새로 나게 도움을 주었습니다. 야곱과 에사우의 이야기가 있는 이 성경 말씀은 우리 가족에게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제가 더 깊이 묵상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축복을 받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불콩죽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최우선은 축복입니다. 하느님의 축복입니다. 하느님의 축복이 구체적으로 무슨 의미입니까? 부모님의 사랑입니다. 서로의 관계입니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부유한 가정의 부모와 자식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하느님께 다가갈 때도 똑같습니다. 불콩죽을 위해서 하느님께 다가가면 안됩니다. 좋은 배우자를 위해서 하느님께 갑니까? 좋은 직장을 위해서 갑니까? 그런 것도 필요한 것이 달라고 청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차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모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모시면 예수님이 가지고 계신 모든 것이 내 것이 됩니다. 예수님을 우리 삶의 중심에 모시면 우리는 모든 것을 지닌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기는 쉽지만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것이 사생활 중의 사생활이라고 할 수 있는 우리의 내밀한 방에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어루만지도록 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이것이 축복으로 향해 가는 여정입니다.

신앙의 여정은 서서히 일어나는 과정을 거치며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일어난 일입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모든 것이 되셨습니다. 이것이 축복입니다. 다른 남자들은 그녀에게 행복을 주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났을 때, 사마리아 여인은 모든 것을 되찾았습니다. 그녀에게는 이제 다른 남자가 필요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에게 물을 주겠다. 영원한 생명의 물을 주겠다.

생명의 물은 모든 것을 상징합니다. 모든 것은 다 축복이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축복으로 모든 것을 얻었습니다.

우리에게는 돈, 건강, 직장 등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차적인 것입니다. 최우선 순위는 하느님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보다 그 선물을 주시는 그분이 더 중요합니다. “주어진 것을 쫓아가지 마라.”는 격언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다룬 주제는 사랑입니다. 모두가 사랑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명심해야 할 것은 사랑에는 어려움이 따른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더 구체적으로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여러분, 십계명이 무엇인지 아시지요?

 

제1계명: 한 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라.

제2계명: 하느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말라.

제3계명: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

제4계명: 부모에게 효도하라.

제5계명: 사람을 죽이지 말라.

제6계명: 간음하지 말라.

제7계명: 도둑질하지 말라.

제8계명: 거짓증언을 하지 말라.

제9계명: 남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

제10계명: 남의 재물을 탐내지 말라.

 

이 십계명을 예수님께서는 몇 가지로 요약하셨습니까? 어떤 분은 하나라 하고, 둘이라고 하는 분도 있고, 어떤 분은 셋이라고 하니, 제가 헷갈립니다. 저에게 제대로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뭐가 맞습니까?

하나라고 답하신 분은 그 하나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하나라는 답도 맞습니다.

둘이라고 답하신 분은 그 둘이 무엇입니까?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둘이라는 답도 맞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닿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는 것이다.”고 말씀하셨으니, 둘이라는 답도 맞습니다.

셋이라고 답하신 분도 맞습니다. 셋째 계명은 ‘너 자신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데 이 계명은 다만 눈에 보이게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사실 이 셋째 계명을 따로 가르칠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즈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특별히 서구에서 그렇습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 당연한 것 같지만 이제 그렇지 않습니다. 서구에서 가장 큰 어려움 중의 하나가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고 오히려 미워하는 것입니다.

제가 지난번에 체코에 갔을 때입니다. 17세의 소년이 저에게 와서 말했습니다. 자신이 너무나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미워서 자살을 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살이 자기가 택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말했습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납니까? 답은 분명합니다. 아버지 없는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성적인 죄가 일어나는 것은 자존감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적인 죄를 지으면서 가족과 믿음을 버립니다. 그러면서 세상이 미워집니다. 자기를 사랑하기가 어려워집니다.

다행히 한국은 상황이 다릅니다. 아프리카도 다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랑해야 합니다. 누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까? 누가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입니까? ‘나’, 그리고 ‘우리’ 입니다. 여러분이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면 하느님도 아웃도 제대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인도에서는 여자들이 얼굴에 장신구를 답니다. 자기 얼굴을 사랑하는 것이지요. 스스로를 사랑하기 위해 장신구를 답니다. 우리는 몸에 장신구가 아니라 영혼의 장신구를 달아야 합니다. 나는 존엄하고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쓸모가 있습니다. 과거에 죄를 지은 죄인이지만 오늘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나는 미래가 밝습니다. 희망이 있습니다. 이것이 영혼의 장신구입니다. 사랑과 함께하는, 예수님과 함께하는 삶입니다. 이것을 사마리아 여인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후 사마리아 여인은 자신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자신에 대한 존중이 없었지만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셨고 그분이 자유롭게 해주셨기 때문에 예수님과 함께 새로운 미래에 대한 희망을 지니고 있습니다.

모든 죄인에게는 미래가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밝은 미래가 펼쳐져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많은 봉사를 합니다. 성당에서 활동도 열심히 하고, 이웃에 좋은 봉사도 합니다. 그런데 집에 오면 행복하지 않습니다. 사생활 중의 사생활이라고 할 수 있는 내밀한 방에서는 행복하지 않습니다. 다음 날도 밖에 나가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는 일하고 웃기도 하는데, 집으로 돌아오기만 하면 기쁨이 없습니다. 마음 안에 부정적인 생각을 지니고 다른 사람에 대해 질투의 감정이 일어납니다. 자기 내면 안에서 행복하지 않은 것입니다. 사생활 중의 사생활이라고 할 수 있는 내밀한 곳에서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말했습니다. “우리는 오직 우리가 지니고 있는 것만 남에게 줄 수 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여러분, 맥도널드 햄버거 좋아하세요? 그러면 우리 맥도널드 햄버거 집으로 가 봅시다. 거기서 예수님이 요리사입니다. 가장 훌륭한 요리사입니다. 여러분, 치킨버거 좋아하시죠? 아주 맛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맛있는 치킨버거를 만들어 주십니다.

이 치킨버거는 세 조각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맨 위에 빵이 있고, 가운데 고기와 야채, 양념 등이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리고 아래 다시 빵이 있습니다. 맨 위의 부분이 하느님 사랑입니다. 아래 부분은 이웃 사랑입니다. 가운데 부분이 우리 자신에 대한 사랑입니다. 이 세 부분이 합쳐져야 치킨버거의 제 맛이 납니다. 세 부분 중에서 어느 부분이 가장 중요합니까? 당연히 가운데 부분이지요. 빵도 맛이었어야 하지만 무엇보다 고기, 야채, 양념이 맛있어야 치킨버거 가 맛있습니다. 중간의 자기 사랑 부분이 아주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예수님께서 저에게 말씀하십니다. “안토니오야, 네가 온 세상에 다니면서 피정을 지도하고 복음을 전한다고 하더라도 너에게 행복과 기쁨이 없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우리가 기쁨을 느껴야 합니다. 나 자신이 먼저 행복해야 합니다. 그래야 다른 사람에게 기쁨과 행복을 나누어 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장 좋은 요리사입니다. 우리도 치킨버거를 만들어야 합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의 말대로 우리가 지닌 것만을 줄 수 있기에 예수님을 모셔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을 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의 내면을 깨끗하게 해주셨습니다. 그분께서 우리의 내면도 깨끗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오전에 두 가지 묵상거리를 받았습니다. 하나는 축복과 불콩죽 에 관한 묵상입니다. 다른 하나는 치킨버거를 어떻게 잘 만들 수 있는지에 관한 묵상입니다. 이 두 가지를 잘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일곱 번째 강의

교회가 우리 영혼의 정비소다

 

우리가 어떻게 맛있는 치킨버거를 만들 수 있습니까? 예수님과 함께라면 이것을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알아듣기 위해 학위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 필요합니까? 마음의 단순함과 겸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우리의 과거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을 잃었습니까? 우리가 잃은 것, 우리가 얻지 못한 것을 목록으로 적으면, 아마 성인호칭기도처럼 호칭기도를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가족들, 친구들, 그들과의 관계, 개인생활에서 사랑이 부족했던 순간들이 있었고, 자녀들에게 제대로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고, 배려가 부족했고, 이기적이었습니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희망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다시 다 되찾을 수 있습니다.

에사우의 아버지 이사악은 제약을 진고 있었습니다. 구약의 아버지였던 이사악은 에사우에게 축복을 줄 수 없었습니다. 신약에 와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아버지를 우리의 아버지로 주셨습니다. 아무 제약 없이 축복을 주실 수 있는 아버지입니다. 우리의 밝은 미래가 여기서 시작됩니다.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에게 미래가 열립니다. 미래에 희망이 있습니다. 믿는 사람은 혼자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셨을 때, 바로 우리를 위해 창조하신 것입니다.

 

제가 몇 달 전에 우간다 의 신학교 학생들의 피정을 지도하게 되었을 때입니다. 피정 중에 어느 신학생이 제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신부님, 오늘날 하이테크 사회에서 믿음이 무슨 소용이 됩니까?” 그 신학생들이 제게 그리스도교 영성이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오늘날 도대체 누가 하느님을 상관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놀랐습니다. 훗날 영적 지도자들이 될 신학생들이 그런 질문을 제게 던진 것입니다. 저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말을 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귀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입도 창조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마음도 창조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창조하셨을 때 하느님께서는 사랑도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 마음을 사랑으로 채울 수 있는 것은 그분만이 하실 수 있는 그분의 독점권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하느님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여러 가지 다른 것으로 우리 배를 채울 수는 있습니다. 여러 소리로 귀를 채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채울 수는 없습니다. 하이테크가 더 좋은 질을 지닌 물건을 잘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을 채우는 것은 그분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세상의 것으로 마음을 채우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것으로 채우면 채울수록 마음은 더 메말랐습니다. 우리의 창조주이신 그분께서 우리 마음을 채우시도록 허락해야 합니다. 부정적이던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께서 자기 마음을 채우시도록 허락했고, 이제 부족함이 없습니다. 제가 그 신학생들에게 그런 말을 했더니 그들이 말했습니다. “신부님, 우리는 미처 그런 생각을 못했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지니고 있는 한, 우리에게는 하느님이 필요합니다. 컴퓨터가 우리 마음을 채울 수는 없습니다. 세상이 이것을 알아듣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가정 안에서 서서히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컴퓨터가 해답이 될 수 없습니다. 인터넷이 해답을 줄 수 없습니다. 더구나 술이 우리에게 해답을 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적인 유혹에 대해 분명하게 아니라고 답해야 합니다.

우리는 원천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근원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에게로, 교회로 돌아가야 합니다. 교회가 정비소입니다. 교회가 우리의 구원과 좋은 삶을 위한 연장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잃어버렸든 아버지에게서 모든 것을 다시 돌려받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나쁜 것도 선으로 바꾸실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을 보십시오. 예수님 안에서 모든 것이 선으로 바뀌었습니다.

하느님의 능력을 생각하십시오. 하느님의 그 능력을 우리 삶에서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 생각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형상이십니다. 하느님 사랑의 구현이십니다. 하느님 사랑을 보여주신 구체적 인물입니다. 여러분, 진심으로 예수님을 사랑하십니까? 치유를 위해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까?

 

예수님을 따른 서로 다른 세 그룹이 있습니다.

첫째는 사도들입니다. 예수님께 특별히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둘째는 제자들입니다. 예수님과 온전히 삶을 나누지는 않았지만 진심으로 예수님을 따른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제자들이라고 부르지요.

셋째는 또 다른 그룹이 있습니다. 군중입니다.

 

먼저 사도들을 봅시다. 예수님과 깊이 일치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언제나 예수님과 함께 지냅니다. 그들의 온 삶을 주님께 봉헌합니다. 오늘날 수도자와 성직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을 하느님께 연결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모두가 사도가 될 수는 없지만, 우리의 기도와 사랑을 통해 그들의 하느님의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사도가 되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둘째로 제자들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들은 사도들보다 큰 그룹입니다. 성경에서 니코데모, 자캐오, 마리아와 마르타 등이 다 포함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들이 해야 하는 의무들이 있습니다. 오늘날 바로 여러분입니다. 여러분은 가족이 있고 아이들을 돌봐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24시간 하느님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누가 남편을 내조하고 아이들을 돌봐줍니까?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에는 의무가 따릅니다. 그리스도교의 믿음을 핑계로 각자의 의무에서 도망칠 수는 없습니다. 진정한 믿음은 구실이나 핑계를 대며 의무를 소홀히 하는 그런 믿음이 아닙니다. 의무를 다하는 믿음입니다.

마리아와 마르타 를 보십시오. 마리아는 하느님의 사랑을, 마르타는 이웃 사랑을 상징적으로 드러냅니다. 이것이 우리가 동시에 해야 하는 일입니다. 마리아의 역할과 마르타의 역할이 우리에게서 하나로 통합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둘이 하나로 융합될 수 있어야 합니다. 심리학적으로 균형이 잘 잡혀야 합니다. 균형을 잘 잡으려면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야 합니다. 미덕은 중간에 있습니다. 중용의 덕이지요. 극단은 위험합니다.

셋째로 군중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만났을 때, 껴안고 입도 맞춥니다. 빵을 배부르게 받아먹습니다. 주린 배를 채우기도 하고 평화를 추구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성지 주일의 복음에서 잘 드러나 있습니다. 성금요일의 복음에서도요. 성지 주일에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지는 예수님께 호산나! 하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성금요일에 보십시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칩니다. 그들은 빵을 먹기만 원합니다. 예수님을 마음으로 모시기는 원하지 않습니다. 치유를 위해서 예수님께 갑니다. 이익을 위해서 예수님께 갑니다.

 

우리는 어떤 그룹에 속하는지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제자들의 그룹에 속해야 합니다. 집에서뿐 아니라 일터에서도 예수님의 제자로서 여러분의 사랑이 구현되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우리 이웃 안에서, 말이 아니라 행동에서 드러나야 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은 우리 삶에서 드러납니다. 구체적으로 울 삶, 거기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제자는 아주 중요한 타이틀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예수님의 제자라는 타이틀을 갖게 됩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할 때입니다.

세상에 많은 타이틀이 잇지요. 세상이 주는 타이틀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예를 들어, 교수라는 타이틀이 있습니다. 그런데 교수직을 잃으면 더 이상 교수가 아니고 전직 교수라고 부릅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타이틀을 주지만 도로 가져갑니다.

탄자니아에서 제가 본당 신부였습니다. 그곳에는 대부분이 문맹이고, 학식을 가진 사람들이 별로 없습니다. 본당 신부는 거의 왕과 같은 대우를 받습니다. 그들 사이에서 저도 마치 왕처럼 살았습니다. 그런데 3개월 후에 장상이 저를 다른 곳으로 보냈습니다. 저는 더 이상 본당 신부라는 타이틀이 없어졌습니다. 세상이 주는 타이틀은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라는 타이틀은 다릅니다. 아무도 그 타이틀을 빼앗아 가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나의 제자다. 이 타이틀을 계속 유지하며 실망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세상의 타이틀을 얻기 위한 노력은 언젠가 그 타이틀을 잃게 되고 실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라는 영원한 타이틀을 얻기 위한 노력에는 실망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그분의 말씀을 듣기 위해 노력합시다. 왜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까? 그분은 우리의 벗이기 때문입니다. 성 바오로는 예수님이 바로 우리의 맏형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완전한 사랑을 지닌 분이십니다. 그러나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셨습니다. 어릴 때 울기도 하셨을 것입니다. 라자로의 죽음을 보고 우셨고, 패망할 예루살렘을 내려다보면서 눈물을 흘리기도 하셨습니다. 또 하루 종일 일하시고 피곤하셨습니다. 영혼의 재충전을 위해 산으로 기도하러 가시기도 했습니다. 낮에는 일하시고 밤에는 기도하시면서 아버지와 사랑을 나누시고 다시 그 사랑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히브리서는, 예수님께서는 죄를 빼고는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었다고 들려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알아듣기가 쉽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군중을 기다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개인을 기다리십니다. 우리의 이름을 알고 계십니다. 우리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남겨두고서 한 마리의 잃은 양을 찾아 다니시는 분이십니다. 그런 사랑의 마음을 지니신 분이 제가 말하는 그 예수님이십니다. 우리 삶의 수준으로 내려오시어 다시 생명으로 끌어 올려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이해하시는 분이십니다.

어떤 사람이 제게 와서 말했습니다. “신부님, 아무도 저를 이해해 주지 않습니다. 저에게는 저를 이해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누가 아무도 나를 이해해 주는 사람이 없다고 말하는가? 내가 있지 않은가? 나는 너를 이해한다…. 믿는 사람은 혼자가 아닙지다.

 

여기서 이해한다는 말이 무슨 의미입니까?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부부싸움을 하고, 남편이 아내에게 말합니다. “이제 당신을 알았고, 이해합니다.” 무엇을 알았고, 무엇을 이해한다는 말입니까? 상대의 약점과 잘못이 무엇인지를 알았다는 것이 이해입니까?

이미 말씀 드린 대로 여기 계시는 파스칼 수녀님은 아프리카 케냐에서 14년간 사도직을 하셨습니다. 보건소에서 일하셨지요. 제가 신학생일 때 수녀님을 알게 되었고, 수녀님을 찾아갔습니다. 제가 아파서가 아니라 마음의 걱정거리가 생겨서 그것을 수녀님과 나누려고요. 저는 내면의 비밀을 이야기했고 수녀님은 저의 모든 것을 이해하신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위안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비밀을 말하면서 이것을 비밀이라고 하면 그 뜻은 그 말을 방송하고 다니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수녀님이 요셉 신부님께 가서 제가 이야기한 내용을 모두 이야기합니다. 요셉 신부님은 비아에게 가서 말합니다. “비아야, 사실은 말이야, 저 안토니오 신부님은 별로 좋은 사람이 아니란다.” 이것이 세상이 우리를 이해하는 방식입니다. 우리에게 이해해 주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고 그 의미는 그가 우리의 약점과 잘못을 알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를 진정으로 이해해 주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메시아, 구원자입니다. 우리 구원자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무덤 앞에서 울 수 있는 분이며 동시에 죽은 이를 무덤 밖으로 끌어내어 그에게 생명을 되돌려 줄 수 있는 분입니다.

그분이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우리를 이해하심으로써 우리의 구원자가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사마리아 여인에게 구원자가 되셨습니까? 그녀를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약점을 알았고, 그 약점에서 그녀가 벗어날 수 있도록 해주심으로써 그녀를 이해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에게만 구원자가 되신 것이 아니라 온 마을 사람들에게 구원자가 되셨고 온 세상의 구원자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좋은 벗입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이 계신데 어떻게 우리를 이해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분이 우리를 이해해 주기 위해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하시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분이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라라!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우리는 그분의 제자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이해해 주시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도 다른 사람을 이해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도 다른 사람을 위한 구원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모범을 따라야 합니다.

 

 

 

여덟 번째 강의

하느님을 위한 아름다운 어떤 일

 

하루는 스물다섯 살 정도 된 한 아가씨가 저에게 와서 말했습니다. “신부님, 제가 밤에 잠을 잘 수 없습니다.저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 “낮에는 무엇을 하며 지내는데요?” 그녀가 대답했습니다. “낮에는 텔레비전을 보고 잠을 자요.” 낮에 잠을 자면 잠이 안 오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지요. 그래서 제가 말했습니다. “낮에 유용한 일을 하면 밤에 잘 잘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기도를 청할 때, 자기가 무엇을 청하는지를 잘 모릅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를 잘 이해하시는 분을 보았습니다. 여러분, 그분을 사랑하십니까?

고행성사는 주님의 이해를 잘 받게 되는 순간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성사라고 부릅니다. 요즈음은 은행도 신뢰할 수 없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미국의 은행들이 도산하는 것을 보십시오. 은행도 도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하늘에 보화를 쌓아라.”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보화가 무엇입니까? 바로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실천하면 그분께서는 곱절로 여러분에게 갚아주실 것입니다.

제가 아프리카에서 일어나는 일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저희 수도원에 20명 정도의 사제가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제들의 활동으로 전 세계에서 수만 명, 아니 수십만 명이 혜택을 받습니다. 수도원은 늘 사람들로 넘쳐납니다.

우간다에서 제가 기도하는 중에 어떤 영감을 받았습니다. 환시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분명히 저는 ‘안토니오야, 고아원을 시작하여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제가 기도를 마치고 성당에서 나왔는데 계속 그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어디에서 그 소리가 들리는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저는 장상 신부님과 이것에 대해 나누었습니다. 장상 신부님은 저에게 예수님이 주시는 영감일 거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수도자들은 어떤 영감 같은 것을 받으면 장상과 의논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실천적 방법입니다.

장상 신부님이 저에게 이 고아원을 시작하는 계획에 대해 생각해보라고 하셨습니다. 우간다에는 고아들이 200만 명이나 됩니다. 왜 그런가 하면, 대개 한 가정이 아이들을 6,7 명 낳는데, 많은 부부들이 에이즈로 죽어서 고아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저는 사제가 되고자 할 때 고아원에서 일하고 싶었습니다. 제가 피정지도를 하면서 이렇게 강론을 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 앞에 서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부제품을 받던 날, 그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그 후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더 좋은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때가 되면 그분이 들어 올려주십니다. 그분께 언제나 신뢰를 두어야 합니다.

고아원을 하려면 건물을 지어야 하는데 고아원을 지을 돈을 누가 줄 것인가? 저는 건축업자를 찾아가서 50, 60명 정도의 아이들이 살 건물을 지으려면 돈이 얼마나 필요한지 알아보았습니다. 50만 유로가 든다고 했습니다. 저는 50만 유로는커녕 50유로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한편으로는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신다는 신뢰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불평을 했습니다.

그런데 지난해 2월입니다. 피정에 왔던 어떤 사람이 제게 말했습니다. “신부님, 고아원을 지을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고요? 제가 땅을 가지고 있는데, 땅을 팔게 되면 그 중의 일부를 기부하겠습니다.” 그런데 몇 년 동안 팔리지 않던 그 땅이 이틀 후에 팔리게 되었고, 그 피정에 왔던 사람의 남편은 그것을 믿을 수 없어했습니다. 그리고 땅을 판 돈을 모두 주기로 했습니다. 그것이 20만 유로였습니다.

저는 가난한 사제에게 어떻게 이 일을 맡기느냐고 불평을 했었습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보십시오. 믿음에 대해 가르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믿음을 삶 안에서 살기는 쉽지 않습니다. 나중에 여러 사람들에게서 100만 유로를 기부 받았고, 14헥타르의 땅을 구입하여 고아원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학교에서 가깝고 도로가 잘 나 있고, 전기와 상수도원이 풍부한 아주 좋은 곳입니다. 그곳에서는 물이 금입니다. 기역자로 된 이층 건물을 짓게 되는데 내년 2월이면 고아원이 문을 엽니다. 저는 말씀 드린 대로 고아원에서 일하고 싶어 사제가 되었습니다. 장상 신부님이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안토니오 신부님, 하느님의 계획은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예수님의 은행에 투자하면 절대로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맬컴 Malcolm, Muggeridge이라는 BBC의 유명한 기자였던 남자가 있습니다. 그는 마더 데레사가 왜 유명한가에 대해 생각하면서 마더 데레사의 삶을 따라가 보기로 결심했답니다. 그러다가 깊은 감동을 받았고 회심했답니다.

마더 데레사의 삶은 가난한 사람에게 투자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맬컴은 마더 데레사에 관한 책을 썼습니다. 그리고 좋은 제목을 정하기 위해 10명의 친구들에게 물었지만, 아무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마더 데레사를 찾아가서 물었습니다. 마더 데레사가 웃으며 말했답니다. “‘Something Beautiful for God‘(하느님을 위한 아름다운 어떤 일)으로 하면 어떻습니까?”

맬컴은 이 제목에 아주 마음에 들었고, 그래서 그가 쓴 마더 데레사에 관한 책 제목이 Something Beautiful for God: Mother Teresa of Calcutta (하느님을 위한 아름다운 어떤 일: 콜카타의 마더 데레사)입니다. ‘하느님을 위한 아름다운 어떤 일.’ 아름다운 제목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위한 아름다운 어떤 일을 할 수 있다면, 우리 삶이 아름다울 것입니다.

하느님을 위한 아름다운 어떤 일을 하십시오. 여러분,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했습니다. 믿음을 통해 예수님을 사랑하는 데 우리가 성장해야 합니다. 여러분, 믿음이 있습니까? 그 믿음이 몇 킬로그램이나 됩니까? 어떤 슈퍼에서 샀습니까? 아니라고요? 그러면 그 믿음이 어디에서 났습니까?

이 자매님이 반지를 끼고 있습니까? 어디에서 샀습니까? 믿음도 같은 장소에서 살 수 있습니까? 무엇이 믿음입니까? 우리가 믿음을 살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믿음은 하느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을 성장시켜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나누는 사랑이 이 믿음을 성장시켜 줍니다.

 

히브리서 11장 1-3절을 읽어봅시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 사실 옛사람들은 믿음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믿음으로써, 우리는 세상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마련되었음을, 따라서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왔음을 깨닫습니다.

 

믿음에 대해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명확하게 믿음이 무엇인지를 들려줍니다. 믿음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려줍니다. 믿음은 히브리서가 들려주는 대로 확증이며 희망입니다. 우리는 구름에 가려 해가 보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구름 위에 해가 떠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 확신으로 매일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을 믿는 것을 어려워합니까?

하느님을 믿으면 고해성사도 보아야 하고, 성당도 잘 다녀야 하고, 해야 할 일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게으름을 피우고 싶어합니다. 현재 사는 대로 그냥 살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현재의 삶이 제대로 된 삶의 방향입니까? 쉽게 방향을 잃어버리는 우리에게 믿음은 삶의 방향을 올바르게 제시해 줍니다.

믿음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과 상관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할 때, 믿음이 생기고 자라며 다른 것도 얻게 됩니다. 치유가 일어나고 악한 것이 도망을 갑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준 특별한 은총이 세 가지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 병자를 치유하는 일, 마귀를 쫓아내는 일입니다.

이것이 사도들의 뒤를 잇는 사제들에게 주신 능력입니다. 사제들을 위해 특별히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사제들에게 많은 것을 맡기셨습니다. 더 많은 것을 받은 사람은 더 많이 돌려주어야 합니다.

여러분, 사제들을 위해 기도하십니까? 사제들을 위한 기도문이 있지요. 그 기도문으로 기도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립니까? 짧은 시간의 기도라도 사제들을, 수도자들을 도울 수 있습니다. 그들의 믿음을 위해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믿음은 선택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데 필수불가결한 요소입니다. 믿음은 기도를 통해 성장합니다.

사람들이 제게 와서 가족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청합니다. 예를 들어, 남편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청합니다. 남편이 술을 끊을 수 있게, 담배를 끊을 수 있게, 화를 내지 않게, 게으름을 고칠 수 있게, 싸움을 하지 않게, 무책임하니까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되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우울증을 앓고 있다고 기도해 달라고 청합니다. 이 기도지향들을 열거하면 성인호칭기도처럼 많습니다. 이 모든 하나하나의 지향을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더 사랑할수록 예수님을 더 잘 이해하게 됩니다. 제가 피정지도하는 첫해에는 별 질문을 던지지 청하는 기도를 다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질문을 던집니다. “남편이 믿음이 있습니까?” 그러면 대개 “아니요”라고 답합니다. 그러면 저는 남편의 믿음을 청하는 기도를 드리라고 합니다.

믿음이 있으면 다른 모든 것이 한꺼번에 옵니다. 여러분, 그 차이를 잘 보십시오. 우선 우리가 청해야 할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가 기도해야 할 구체적인 제목은 우선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나머지는 꾸러미로 옵니다. 믿음을 지니는 것이 우리 삶에 이득이 됩니다. 믿음을 지니는 것이 삶에 유익하다는 생각을 안 해보셨습니까? 그런데 이것은 사실입니다.

 

제 아버지가 성당에 갑니다. 아버지가 성당에 가는 이유는 어머니 때문입니다. 마치 뚜껑 닫힌 병과 같습니다. 성당에 가기는 하지만 본당 신부님을 싫어합니다. 아버지는 좋은 아내가 있고 4명의 자녀를 둔 가장입니다. 어머니와 저는 계속 아버지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우리에게 왜 신앙이 필요합니까? 하느님께 축복을 받을수록 더 하느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반대의 경우를 봅니다. 아버지는 사업이 잘 안 되어 거의 망하게 되었습니다. 3년 전에 당신에게 보물인 아내가 죽을 고비를 넘기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그제야 무릎을 꿇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제 아버지가 이런 과정을 거쳐 재정립의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어머니와 저는 31년 동안 아버지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31년이 지나서야 하느님께서는 저희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아버지에게 믿음이 생기자 나머지가 한꺼번에 덩달아 왔습니다. 전에 싫어하던 본당 신부님과 좋은 친구가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이해심이 더 깊어지고 너그러워지셨어요. 믿음을 갖는 것은 삶에 이득이 됩니다.

아버지는 본래 나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에게 뭔가 부족한 것이 있었고, 이것 때문에 잘못되어 가고 있었지만, 아버지는 그 잘못된 것이 무엇인지를 몰랐습니다. 믿음이 없는 것이 문제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님 위해 우리를 내시었기 님 안에 쉬기까지 우리 마음은 찹찹하지(평온하게 가라앉지) 않삽나이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쉬기까지는 쉴 수가 없습니다. 사마리아 여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녀는 자기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몰랐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후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믿음을 지니고 있으면 물 위에 뜬 거품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확신이 필요합니다. 욥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와 찬미를 드릴 수 있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속한 공동체를 위해서도 우리의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젊고 돈이 있을 때는 ‘신앙이 우리 삶과 무슨 상관인가?’ 라고 생각합니다. 제 아버지처럼 말입니다. 우리에게는 재정립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위기에 처했을 때, 오히려 우리는 재정립의 과정을 거칠 수 있습니다.

아직 우리가 젊고 무엇인가를 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신앙에 투자를 해야 합니다. 어떻게 투자할 수 있습니까? 미사에 참례하고, 성사 생활을 잘 하고, 성경 봉독, 묵주기도, 성지 순례, 환자 방문 등입니다. 신앙에 투자를 하십시오.

우리 모두가 마더 데레사가 되라고 부르심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작은 데레사가 되라고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제가 파도바의 안토니오가 되라고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다만 평번한 사제 안토니오가 되라고 부르심을 받았고, 그 부르심에 응답하여 저는 그렇게 살려고 합니다.

 

“주 예수님을 믿으시오. 그러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이오.” (사도 16,31)

 

예수님을 믿으면, 여러분과 여러분의 집안이 구원을 얻게 됩니다.

믿음을 지니게 되면 다른 것도 더불어 받게 됩니다. 믿음에 따르는 은총이 패키지로 옵니다. 그런데 예수님 없는 삶을 살면 세속에 살게 되는 것이고, 세속에 빠져 살면 악도 패키지로 찾아옵니다. 가족 안에 불일치가 생기고, 서로 증오하게 되고, 우울증에 빠지게 됩니다. 이것은 끔찍한 패키지입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은총의 패키지가 필요합니다.

작년에 7살 난 아이를 만났습니다. 이름이 필립입니다. 그가 치유미사에 왔고 미사 후에 저에게 축복을 청하러 왔습니다. 올해 8살이 된 어린 필립은 청소년 피정에 오고 싶다고 했습니다. 청소년 피정은 적어도 12살은 되어야 받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제가 피정 주관하는 사람들에게 잘 말해서 필립이 피정에 올 수 있었습니다.

필립은 아주 성숙했습니다. 혼자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건축가로 성당을 짓지만 신앙은 없습니다. 그 소년이 기도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가 신앙을 갖도록 기도한 것입니다. 아버지는 사탄의 패키지 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들의 기도로 신앙을 갖게 되고 얼굴이 아름다운 소년의 13살 된 누나도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누나랑 함께 피정에 왔습니다. 이것은 기적입니다.

프랑스에서 치유미사에 9살 된 소녀가 할머니와 함께 왔는데, 할머니는 울고 계셨습니다. 그 소녀가 자기 할머니의 눈물을 닦아드리면서 저에게 말했습니다. “신부님, 할아버지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 할아버지가 많이 편찮으셔서 할머니가 우시는 거예요.”

그 아이는 할아버지의 사진을 가지고 와서 저에게 그 사진에 강복해 달라고 청했습니다. 저는 그 사진에 강복해 주었습니다. 이제 저는 온 세상에 다니며 그 아이가 지닌 믿음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 아이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믿음입니까?

그 아이의 믿음으로 할아버지가 치유되었습니다. 할아버지가 치유된 후에 가족이 모두 저에게 왔습니다. 그 아이의 언니도 왔습니다. 그 언니는 결혼한 지 10년 되었는데, 남편도 신앙이 없었습니다. 제가 남편을 미사에 오도록 초대하라고 했더니, 결코 오지 않을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 남편은 어부이며 알코올 중독자라고 했습니다. 제가 피정지도 신부가 특별히 초대하니까 꼭 오라도 말해 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신실하라고 부르심을 받았지, 성공하라고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마더 데레사의 말입니다. 미리 안 될 거라고, 실패할 거라고 포기하면 안 됩니다. 미사를 드리는 장소는 리지외의 대성당이었습니다.

한 남자가 마치 극장에 온 것처럼 두리번거리면서 성당에 나타났습니다. 오지 않을 거라고 했던 아이 언니의 남편이었습니다. 저는 그를 알아보고 미사 동안 그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당신 안에 그를 채워주십시오.”미사 후에 저는 그를 만났습니다. 그는 눈물을 흘렸고 부부가 서로 포옹을 했습니다.

이렇게 한마디의 말로도 한 사람의 영혼을 어루만질 수 있습니다. 그분은 수많은 방법으로 은총을 주십니다. 그는 35살이었습니다. 저는 치유미사가 좋았다면 피정에도 와보라고 그에게 권했습니다. 그가 피정에 왔습니다. 그러고는 지금껏 아이가 없었다면서 저에게 아기를 낳을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고 청했습니다. 6개월 후에 다시 프랑스에 피정지도를 하러 갔더니 그 부부가 앞줄에 앉아 있었습니다. 부인이 임신복을 입고 있었습니다.

그가 처음에 어떻게 치유미사에 온 지 아십니까? 그가 금요일에 고기잡이를 나갔는데 폭풍이 치고 큰비가 내려서 고기잡이가 금지되었답니다. 그래서 집에 돌아와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모두 일이 있다고 해서 할 수 없이 혼자 지루해하며 있던 차에 마침 그때 치유미사에 와보라는 전화가 걸려온 것입니다. 처음에는 가지 않겠다고 생각했지만 심심하게 그냥 있느니 한번 가 보자고 생각하여 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야곱의 우물에서 사마리아 여인만을 기다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여러 방식으로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아홉 번째 강의

믿음은 경험이 아니다

 

“보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2코린 5,7) 이 말씀에 동의하십니까? 젊은이들은 이 말씀이 틀렸다고 합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을 믿으려고 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걷지 않고 보이는 것으로 걷습니다.

보고만 걸으려고 하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믿음 없이 살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다 가지려고 합니다. 믿음이 있으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다 가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믿음이 우리를 위험에서 벗어나게 해줍니다.

대학에서도 신앙이 있는 사람은 다릅니다. 신앙도 없고, 성당도 다니지 않는 대학생들은 모든 것이 다 좋다고 합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다 즐겨야 합니다. 모든 것이 다 좋다는 말은 맞는 말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다 우리를 위한 것은 아닙니다. 휘발유는 차를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모든 것이 우리를 위해 창조되었지만, 모든 것이 우리를 위한 것은 아닙니다. 휘발유는 마실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차를 위한 것입니다. 오렌지 주스는 마실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위한 것이니까요. 모든 것에는 질서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질서를 존중해야 합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이 믿음의 실질적인 측면을 보여줍니다. 교회 안에서 많은 회심이 이루어집니다. 성령 세미나나 피정 등을 통해 회심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영적 성장이 잘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사람들이 저에게 피정지도하면서 무엇이 가장 힘드냐고 묻습니다. 저는 대답합니다. “회개한 사람을 회개시키는 것입니다.” 자신이 회개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회개시키는 것이 가장 힘듭니다.

어떤 사람이 말합니다. “나는 이미 1973년에 회개했어요.” 그는 회개는 일생에 한 번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회개의 특징은 삶의 매 순간 일어나는 것입니다.

오늘의 우리는 과거의 우리가 아닙니다. 죄인이 성인이 되고, 동시에 성인이 언제든지 죄인이 될 수 있습니다. 삶의 매 순간 회개가 필요합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가 회개한 상태인가?’ 하는 것입니다. 1973년에 회개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믿음을 증거하는 사람은 오늘의 삶에서 증거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단에 빠져 문제가 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광신에 빠져 문제가 됩니다. 어떤 사람은 믿음을 지니면서 심각해집니다. 자기가 속한 그룹만 좋은 그룹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우리가 믿음을 갖습니까? 믿음은 우리에게 짐이 아닙니다. 우리 삶을 매끄럽게 하는, 차에서 윤활유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차에 윤활유가 없으면 소음을 내고 엔진이 마모됩니다. 기계가 잘 돌아가려면 윤활유가 필요합니다. 믿음은 마치 자동차의 윤활유처럼 우리 삶을 잘 돌아가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건강한 시민이 되도록 도와 주어야 합니다.

삶에서 웃는 것이 잘못입니까? 가족이 휴가를 즐기고, 가끔 영화를 보는 것이 나쁜 것입니까? 믿음을 지니고 사는 것은 완전한 금욕을 실천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이런 것을 다 하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믿음은 짐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건강한 삶을 살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빛이 되어야 합니다. 어둠 속에 사는 사람들이 빛을 볼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증거하는 삶이 필요합니다. 교회에 가서는 자기들만의 그룹을 형성하고, 그 그룹만 옳고 다른 사람들은 다 틀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교회가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이런 극단은 늘 위험합니다.

저는 믿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을 성장시키려고 노력합니다. 저는 제가 믿음을 지지고 있기 때문에 행복합니다. 시차가 없는 한 잠을 잘 잡니다. 마음이 평화롭습니다. 저에게 문제와 걱정거리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그것이 그렇게 큰 문제와 걱정이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걱정은 오늘로서 충분하다. 내일의 걱정은 내일에 맡겨라. 내일의 걱정으로 오늘의 평화를 깨는 일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예수님은 탁월한 심리학자이시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 걱정은 오늘로 충분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코너 신부는 그의 저서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경험에 기초를 두지 있지 않고 믿음에 기초를 두고 있다.”

무엇이 경험이고 무엇이 믿음입니까? 경험과 믿음은 어떻게 다릅니까? 많은 사람이 믿음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믿음이 아니라 체험을 통한 경험인 경우가 많습니다. 성당에 갔을 때, 신부님의 강론 말씀이 아주 좋았습니다. 그래서 그 본당 신부님이 좋습니다. 그 본당 신부님에게 제발 우리 본당을 떠나지 마시라고 청합니다. 그 본당 신부님의 좋은 강론을 들은 것은 좋은 경험입니다만 그것이 우리의 믿음을 키우는 데 반드시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이 경험의 차원에 머물 수 있습니다. 경험은 우리가 신체적이든 심리적이든 정서적이든 건강할 대 하게 됩니다.

10년간 열심히 성가대 활동을 하는 신자가 있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더 이상 성당에 나오지 않습니다. 목소리에 이상이 생겼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병이 들거나 위기가 생기면 더 이상 성당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성당을 다닌 것이 아니라 경험으로 다닌 것입니다.

믿음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신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 건강하든 건강하지 않든 상관없이 지속하는 것입니다. 한결같은 것입니다. 직업이 있든 없든 믿음을 지니고 있으면 변함이 없습니다.

제가 마더 데레사가 사시던 곳을 방문했을 때, 아주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더 데레사는 50년 동안 하느님을 경험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토록 놀라운 일을 하도록 한 것입니까? 마더 데레사는 하느님을 느끼지 못했지만 믿음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리지외의 성녀 소화 데레사가 죽은 후에 어떤 주교님이 성녀가 머물던 방을 방문했습니다. 그때 벽에 쓰여 있는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 벽에는 이런 글이 쓰여 있었다고 합니다. “예수님! 당신만이 나의 사랑입니다.”

이것은 소화 데레사가 하느님의 경험의 절정에서 쓴 글이 아닙니다. 오히려 어둠 속에, 극심한 고통 중에 있었을 때 쓴 글입니다. 고통 속에서 소화 데레사는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 당신은 내가 사랑하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그녀는 어려움과 고통 한가운데서 믿음으로 하느님의 계획을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늘 하느님을 느낄 수는 없지요. 어떤 때는 전혀 느끼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과정을 통해 우리의 믿음이 성장합니다.

복음서에 보면, 제자들이 폭풍이 휘몰아치자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그들에게 어려움이 닥치자 예수님을 찾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외칩니다. “도와주세요.” 예수님께서는 바다를 잔잔하게 해주십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찾았을 때, 예수님께서는 왜 주무시고 계셨을까요? 상징적인 어떤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위기 중에 우리는 그분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을 체험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그분이 주무시고 계시더라도 그분은 예수님이시란 겁니다. 그분이 일어나실 것이고 위기에서 구해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을 참 주님이 되도록 해 드려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느님께 베풀 수 있는 자선입니다. 하느님을 하느님이 되도록 해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느끼지 못해도 믿음 안에서 그분께 신뢰를 드려야 합니다.

예수님의 삶은 온전히 믿음의 삶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늘 말씀하셨습니다. 나에게는 아버지가 계시다. 나는 다만 아버지의 뜻을 따라 행할 뿐이다. 그분은 골고타 산 십자가 위에서 울부짖으셨습니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우리가 십자가 아래에서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하면 보물을 얻게 될 것입니다.

왜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께서 울부짖으셨습니까? 그 순간 아버지를 느끼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어떤 체험도 할 수 없으신 거지요. 그러나 그분은 다음 단계로 나가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큰 소리로 외치십니다.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에게 와서 배워라.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을 배우도록 합시다. 십자가 사건을 묵상하면 완전한 믿음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적인 약점, 약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약점 때문에 불평할 수 있습니다. “이 잔을 제게서 치워주십시오.” 라고 청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 뜻대로 하십시오.” 이것이 믿음입니다. 우리가 울면서 이 잔을 치워 달라고 청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맡겨드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런데 결코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위기가 닥칠 때 자신을 내어 맡길 수 있다면 믿음이 성장할 것입니다. 저는 건강합니다. 그런데 내일 반신불수가 된다면, 그것도 하느님의 뜻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 말하기까지는 아직도 한참 먼 거리를 걸어야 한다는 것을 저는 압니다.

루마니아 전례서 에 아주 아름다운 구절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쪼개지셨지만 완전히 부서지신 것은 아니다.” 우리도 매일의 삶에서 우리에게 믿음이 있음을 증거하는 삶을 살도록 합시다.

 

 

 

열 번째 강의

겨자씨와 누룩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무엇과 같을까? 그것을 무엇에 비길까?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정원에 심었다. 그랬더니 자라서 나무가 되어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다.”

예수님께서 다시 이르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무엇에 비길까? 그것은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루카 13,18-21)

 

복음서에서 아주 유명한 비유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래서 아주 단순한 이 복음에 대해 어떤 강론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하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비유는 공관복음서에서만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서 에서는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비유로 말씀하셨을까요?

각각의 비유는 하느님 나라와 연관이 있습니다. 비유는 천국의 의미를 담고 있는 지상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주 간단한 방법으로 커다란 진리를 말씀하십니다. 겨자씨와 누룩, 두 가지 다 예수님이 어릴 때부터 부엌에서 보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주 단순한 매일의 삶에서 보는 일상적인 것을 가져다가 큰 진리로 가르치십니다.

겨자씨는 아주 작습니다. 여러분, 보신 적이 있지요? 집에서 사용합니다. 인도에서는 사용합니다. 카레를 만들 때 겨자씨를 넣습니다. 이 작은 씨를 땅에 뿌리면 큰 나무는 아니지만 크게 자랍니다. 이 나무의 높이가 낙타 타 사람의 높이와 같다고 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요즈음 겨자나무가 키가 작습니다마는 예수님 당시에는 키가 컸었나 봅니다. 큰 나무는 아니지만 그래도 나무가 됩니다.

 

이 나무에 까만 씨가 달립니다. 공중의 새들이 이 까만 씨 때문에 매력을 느낍니다. 겨자씨는 아주 작지만 씨를 뿌리면 크게 자라 온갖 종류의 새가 날아듭니다. 이것은 모든 국가, 모든 종교의 믿음을 상징합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다른 모든 방법들을 다 수용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당에서 우리의 고유한 방식으로 하느님께 경배를 드립니다. 그런데 하느님을 다른 방법으로 경배 드리는 다른 예식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로마 가톨릭 전례 예식이지만 동방에는 동방 전례의 예식이 있고, 아프리카의 에티오피아에는 에티오피아 예식이 있습니다. 기본 내용은 같지만 전례 예식이 다릅니다. 루마니아 예식, 그리스 가톨릭 등의 다른 여러 예식들도 있습니다.

제가 아프리카의 콩고 지역에 가서 그곳 신부님과 함께 미사를 드릴 때 일입니다. 저는 처음에 무엇을 어떻게 하는지 몰랐습니다. 미사에서 이상한 소리도 내고, 하여튼 특이한 미사였지요. 봉헌할 시간이 되자, 그곳에는 돈이 없으니까 야채, 과일 등 자기들이 추수한 것을 봉헌했습니다. 그 봉헌할 물건을 들고 춤을 추면서 나오면 사제가 그것을 받고 축복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남자가 전통 의복을 입고 칼을 들고 춤을 추면서 나왔습니다. 저는 무서웠습니다. 저를 쳐다보고 저를 향해 나오고 있었습니다. 칼을 휘두르면서 달려들 것 같아 정말 무서웠습니다. 칼을 들고 발을 구르면서 제대를 세 번 돌았습니다.

미사 후에 그곳 사제에게 그가 무슨 일을 한 것인지를 물었습니다. 그가 기도를 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가 살아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이 함께 어우러지도록 기도한 것이라고 합니다. 기도지향을 바칠 때 발을 구르면서 죽은 사람들에게 그들과 함께 기도한다고 알려 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 참으로 아름다운 전례라고 생각했습니다. 거기에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미사는 살아 있는 사람뿐 아니라 죽은 사람들을 위한 잔치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전통 안에서 그것을 잘 표현한 것입니다.

본질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면 모든 것을 다 수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들의 모든 방식들을 다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것을 이 비유에서 알아들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작은 것에서 시작하지만 점차로 커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다 모아야 합니다.

 

두 번째로 누룩을 살펴봅시다. 밀가루 반죽을 하여 빵을 만들 때, 누룩이 없으면 빵이 작아집니다. 누룩을 넣으면 커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릴 때부터 이것을 보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아주 작은 곳에서 시작됩니다. 작은 밀가루 반죽에 누룩을 넣으면 점점 부풀어 오릅니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 각 사람의 마음에서 시작합니다. 각 사람의 마음의 변화가 사회를 바꿀 수 있습니다. 시작은 작은 곳에서 이루어지지만 커다란 변화를 가져옵니다.

마더 데레사가 어떻게 시작했습니까? 한 사람의 나병 환자를 데리고 와서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두 사람의 행려 환자를 데리고 왔습니다. 그 다음에는 10명의 병자를 데리고 와서 치료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시작한 일이 미국으로, 유럽으로, 아프리카로 번져 나갔습니다. 시작은 아주 작았지만 대단히 크게 확장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 삶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삶에 큰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보이지 않게 활동합니다. 누룩이 부풀어 오르는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눈으로 불 수 없지만 누룩은 작용합니다. 그것이 사실입니다. 많은 사람이 좋은 일이 일어나지 않는데 하느님 나라가 어디에 있느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누룩은 작용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점점 커집니다. 서서히 자랍니다. 누룩이 보이지 않게 작용을 하듯이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하느님 나라는 안에서부터 작용합니다.

누룩이 밀가루 반죽에서 떠나면 더 이상 작용을 하지 못합니다. 밀가루 반죽에 누룩을 집어넣어야 작용을 합니다. 반죽 안에 누룩을 집어넣으면 보이지 않지만 작용을 합니다. 우리 마음 한가운데에 누룩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 마음 안에 하느님 말씀을 받아 모셔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 말씀을 듣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느님 말씀이 우리 마음 안에 들어오도록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형제님이 안경을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안경을 손에 들고 있으면 효과가 있습니까? 안경을 목에 걸고만 있어도 눈이 잘 보입니까? 안경을 눈에 써야 안경이 제 역할을 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밖에서부터 옵니다. 밀가루 반죽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밖으로부터 오는 누룩이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나라는 밖에서부터 온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밀가루 반죽을 그냥 갖고 있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알코올 중독자가 바뀔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뀌기 위해서는 밖에서 오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죄인이 자기 자신을 구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죄인을 구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죄인의 구원을 위해서는 죄 없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약할 때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에 보면, 눈먼 이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그의 눈에 손을 갖다 대시면 고쳐주셨습니다. 불가능하게 생각된 일이 가능했습니다.

가정을 생각해 보십시오. 자식이 마약 중독에 빠졌습니다. 돈이 아무 소용 없습니다. 그러나 밖에서 오는 힘이 우리에게 희망을 잃지 않게 해줍니다. 예수님의 힘이 자식을 마약 중독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습니다. 늦지 않았습니다.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우리도 눈먼 이처럼 외쳐야 합니다. “예수님,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 그 외침을 들으시고 그 청을 반드시 들어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라면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모시는 것이 우리에게 이득이 됩니다. 우리에게는 누룩이 필요합니다. 그것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 안에 넣어야 합니다. 우리의 사생활 중의 사생활이라고 할 수 있는 내밀한 방에 그 누룩을 넣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교회가 갖고 있는 누룩은 뒤흔들어 놓는 역할을 합니다. 누룩이 들어오면 변화가 일어납니다. 활동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사회에서 누룩이 되어 사회를 뒤흔들어 놓는 역할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박해와 배척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행정관들 앞에 데려다 놓고 말하였다. “이 사람들은 유다인인데 우리 도시에 소동을 일으키면서, 우리 로마인으로서는 받아들이기에도 지키기에도 부당한 관습을 퍼뜨리고 있습니다.” (사도 16, 20-21)

 

바오로와 실라스 가 필리피 에 갔을 때 일어난 일입니다. 그들은 성령으로 가득 차 있을 때, 그들의 존재만으로도 사회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많은 사람에게 회심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불평을 합니다.

예수님이라는 누룩은 사회를 혼란 시키는 요소입니다. 사회를 흔들어 놓습니다. 예를 들어, 가정에서 혼자 신앙을 가지면 거기 혼란을 가져옵니다. 아주 힘이 듭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를 보고 미쳤다고 합니다. 신앙을 강요하지 말라고 합니다. 심하면, 신앙을 가지려면 차라리 가서 죽으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이 신앙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면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혼란을 느끼거나 방해를 받으면 여러분이 그리스도 인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큰 희망이 됩니다. 믿음 때문에 고통을 받을 때 포기하지 마십시오.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하라고 했습니다. 선을 행할 때 지치지 마십시오. 아이들이 성당 가고 싶지 않다고 하더라고 성당 데리고 가는 것을 결코 포기하지 마십시오. 다만 지혜롭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교육방법을 본받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쉬운 방법으로 교육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쓴 약을 그냥 쓴 채로 주시지 않고 쓴맛을 느끼지 않도록 처리해서 주셨습니다.

제가 6,7살 때 어머니는 저를 새벽 6시 미사에 데리고 다니셨습니다. 어머니가 미사에 가자고 저를 개울 때 저는 싫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저에게 졸리면 성당에 가서 자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일어나 졸면서 성당에 갔습니다. 성당에 가서 자려고 해도 성가를 부르니까 잘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미사에 참례했습니다. 어머니는 저에게 강요하지 않으셨고, 사랑으로 하셨습니다. 아이들은 강제로 당한다고 느끼면 나중에는 반발을 합니다. 머리를 잘 써서 지혜롭게 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은총이 우리를 도와줍니다. 어머니를 따라 간 미사가 제 삶에서 믿음이 자라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제 안에서 서서히 하느님 나라가 자란 것입니다.

성 이냐시오 는 생각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가 이런 일을 했고, 성 도미니코 가 이런 일을 했다면, 왜 그런 일을 나는 못하겠는가?’ 마더 데레사가 한 일을 왜 우리라고 못하겠습니까? 예수님의 사전에는 한 단어가 없습니다. ‘불가능’이라는 단어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저를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저는 성체를 모실 때 이렇게 기도합니다. “저는 당신을 받아들이기 위해 여기 있습니다.” 누룩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처럼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가 예수님을 모실 때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활동하십니다.

 

 

 

열한 번째 강의

죄의 특징

 

우리의 삶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 삶을 잘 보아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 죄책감이나 슬픔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죄책감을 가질 필요도 슬픔에 잠길 필요도 없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젊은이들이 제게 말합니다. “신부님, 우리는 진리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가르침이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 삶의 방향을 제시해 주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운 방법으로 이 가르침을 전해야 합니다. 제가 진리를 숨기고 적당히 듣기 좋은 말을 하면서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예수님께서 저에게 물으실 것입니다. “안토니오, 너는 왜 나의 자녀들에게 진리를 가르치지 않았느냐?” 저는 예수님에게 그런 말을 듣고 싶지 않습니다. 제가 사제로서 책임을 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 바오로는 자기는 죄인 중에 가장 큰 죄인이라고 했습니다. 성 빈첸시오도 자기는 가장 큰 죄인이라고 말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느님의 영광을 잃었습니다.(로마 3,23)

 

성경은 우리에게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게 됩니까?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갈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여러분, 제 수도복이 마음에 듭니까? 수수합니까? 완벽하다고요? 좋습니다. 그런데 실은 단추가 하나 떨어졌습니다. 저는 그래서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런데 멀리서 보면 단추가 떨어진 것이 보이지 않고 완벽하게 보입니다. 가까이서 보면 단추가 하나가 떨어진 것이 보입니다. 제 수도복에는 얼룩이 있는데 보입니까? 멀리서는 보이지 않습니다. 저도 잘 못 봅니다. 그런데 가까이에서 자세히 살펴보면 여기저기 얼룩이 보입니다.

 

우리는 우리 삶에 대해 이 진실을 깨닫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진리를 숨기고 진실을 억압합니다. 우리 영성 생활에 이와 똑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을 때는 고행성사가 필요하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을 때는 그러합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갈 때만이 우리는 우리의 얼룩을 보게 되고 고해성사의 필요성을 느끼게 됩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일어난 일입니다. 그녀가 예수님께 가까이 갔을 때 자기에게 얼룩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으로 그 얼룩을 지적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녀가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사랑의 아름다움에 대해 살펴보았는데 이제 우리 삶에 대해 좀더 구체적으로 보겠습니다.

 

“그러나 너에게 나무랄 것이 있다. 너는 처음에 지녔던 사랑을 저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추락했는지 생각해 내어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들을 다시 하여라. 네가 그렇게 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면, 내가 가서 네 등잔대를 그 자리에서 치워버리겠다.” (묵시 2,4-5)

 

이것은 사랑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것이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이제 사랑의 부재에서 회심하여 다시 사랑으로 되돌아오라는 촉구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사랑으로 돌아와야 합니까? 진정으로 회심하고 돌아와야 합니다.

회심은 모든 예언자들의 가르침의 주제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가르침의 주제도 회심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공 생활을 시작하시면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실 때, 먼저 “회개하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사람이 말합니다. “저는 예수님께 돌아왔고 예수님 안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행복하지 않습니다. 슬픕니다.”

성당도 다니고 피정도 가고 나름대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데 왜 행복하지 못합니까? 무엇이 부족합니까? 그들이 예수님께 돌아온 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진정한 회개 없이 돌아왔습니다. 진심으로 회심하고 돌아온 것이 아니라 죄책감 때문에 돌아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옛날처럼 살지는 않지만 별로 행복하지 않은 것입니다. 회개했다고 주장하지만 내면으로부터 회개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믿음과 경험의 차이를 보았습니다. 많은 사람은 자기들이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단지 경험을 한 것일 수 있습니다. 죄책감과 회개는 다릅니다. 이 양자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베드로와 유다를 비교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둘 다 죄를 지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했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그런 죄를 지은 후에 둘 다 울었습니다.

유다는 울었습니다. 왜 유다가 울었습니까? 죄책감 때문입니다. 그는 은전 30냥에 주님을 팔아 넘겼습니다. 그는 축복이 아닌 불콩죽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곧 불콩죽에 실망을 했습니다. 그 불콩죽이 죄책감을 갖게 했습니다. 그는 죄책감 때문에 나무에 목을 매어 죽었습니다.

베드로도 울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울면서 회개했습니다. 그의 눈물은 그를 죄책감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그의 회개는 예수님의 목에 다시 매달릴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죄책감이 유다를 나무에 목매달게 했습니다. 죄책감은 부정적인 감정입니다. 그러나 회개는 다릅니다. 긍정적입니다. 새 생명으로 나가도록 해줍니다. 그리스 말로 회개는 메타노이아 입니다. ‘가던 길을 돌아서 간다.’는 뜻입니다. 유턴을 하는 것입니다. 이 유턴은 바로 마음과 생각의 변화를 말합니다. 자기가 잘못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돌아서는 것입니다. 빛을 떠나 어둠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90도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이 회심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 되찾은 아들을 보십시오.

 

되찾은 아들은 아버지에게서 받은 재산을 모두 탕진하고, 돼지를 치며 돼지와 함께 뒹굴어야 했습니다. 그런 그가 ‘제정신을 차렸다.’ 고 성경은 표현합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했다는 의미입니다. 자기 자신을 보게 된 것입니다. ‘아, 내가 이 모양이 되다니! 이젠 돌아가야겠어. 아버지가 계신 집으로…’ 그는 유턴을 합니다.

그가 어떻게 돌아옵니까? 제정신을 차린 그는 말합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린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군 가운데 하나로 삼아주십시오.” 그는 자기의 처지를 알고 겸손해져서 돌아옵니다. 회개를 한 것이지요. 그가 돌아오기까지는 그에게 평화가 없었습니다. 돌아오기로 마음먹으면서 다시 그에게 평화가 찾아옵니다. 아버지의 집에 돌아올 때 다시 그에게 새 생명이 주어지게 되었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님 위해 우리를 내시었기 님 안에 쉬기까지 우리 마음은 찹찹하지(평온하게 가라앉지) 않삽나이다.”

저는 여기에 한 문장을 더 보태고 싶습니다. “내 마음 안에서 쉴 곳을 발견할 때까지는 하느님, 당신도 쉴 수가 없었나이다.” 아버지도 아들을 다시 만나기까지는 쉴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아들이 지쳐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올 때 그의 아버지가 어디에 계셨습니까? 문밖에 서서 아들을 기다리고 계셨지요. 아버지도 아들이 돌아오기까지 결코 쉴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만나는 순간 새 생명을 얻게 됩니다. 하느님을 만날 때까지 우리는 생명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그 순간, 아버지와 아들이 만나는 순간이 새 생명이 태어나는 순간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향해 나가고 그분을 만나려고 할 때 그분,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이미 한 발을 우리를 향해 내딛고 계십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껴안았습니다. 다시 사랑 받는 아들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회개할 때 얻게 되는 아름다운 은총입니다. 우리가 호심을 하면 하느님의 아들딸이 됩니다.

우리는 회심하고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몇 년 전에 회심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더 이상 그것에 대해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까?

예를 들어, 알코올 중독자가 피정 때 회개를 했습니다. 다시는 술을 마시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회개한 것입니다. 그는 집으로 돌아왔을 때 집에 있는 술을 다 없애야 합니다. 다시 술을 사지 말아야 하지요. 피정 때 결심은 다만 출발일 뿐입니다. 회개는 결심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드러나야 합니다. 회개의 진정한 의미는 매일의 삶에서 실천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예를 들겠습니다. 제가 사는 피정 집이 산 위에 있다고 말씀 드렸지요. 산 위의 들판이기 때문에 개미들이 있습니다. 아프리카의 개미는 큽니다. 그 개미에게 한 번 물리면 일주일 내내 가려워서 긁어야 합니다. 수도원 피정 집 앞에 개미가 떼로 줄지어 기어 다니기도 합니다. 아이들이 저를 보러 오기도 하고 피정 집 앞에서 놀기를 좋아합니다.

어느 날 아침에 한 소녀가 놀러 왔는데 밖에서 아이 우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신부님, 구해 주세요.” 제가 놀라서 뛰어나갔더니 6,7세 된 소녀인데 옷도 제대로 입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보니까 개미 떼 속에 있었습니다. 온몸이 개미로 덮여 있었습니다. 제가 그 소녀에게 말했습니다. “얘야, 어서 개미 떼 속에서 나와라. 그리고 몸에 뭍은 개미를 털어내라.” 그 소녀는 개미를 털어내지 않고 개미가 물고 있다고 불평을 합니다.

우리가 그 소녀와 똑같습니다. 개미 떼 가운데 서서 개미가 물고 있다고 불평을 합니다. 전화 받기를 원하지 않으면 전화번호를 바꾸어야 합니다. 전화번호를 바꾼 후에 다시 알려주고서 전화를 한다고 불평을 합니다.

저는 아프리카에서 그 개미에 물린 소녀를 보면서 지혜를 얻었습니다. 매일 그 소녀처럼 개미 떼 속에 서 있으면서 개미가 문다고 불평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개미 떼 속에서 나와야 합니다. 죄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죄를 지을수록 죄에 중독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 종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르지 못하지만, 아들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른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요한 8,34-36)

 

예수님께서는 죄를 짓는 사람은 모두 죄의 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종은 집에 그의 자리가 없다고 합니다. 집에 자리가 있는 사람은 아들입니다. 누가 종을 자유롭게 해줍니까? 바로 아들입니다. “죄를 짓는 자는 죄의 종’이라는 이 간단한 진리를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습니까?

 

어느 부부가 두 아이를 두었습니다. 큰 아이 마리아는 13살이고, 작은 아이 요셉은 9살입니다. 이들은 도시의 아파트에 살았습니다. 그곳에는 아이들이 뛰어 놀 마당이 없지요. 그런데 조부모님 집이 시골에 있었습니다. 마음대로 뛰어 놀 넓은 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방학 때마다 아이들은 조부모님 집에 갔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방학을 기다렸고 방학이 되자 할아버지 집에 가서 방학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아주 반갑게 손자들을 맞아주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넓은 풀밭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아주 신이 났습니다.

할아버지는 사냥꾼이었습니다. 하루는 요셉이 할아버지의 활과 화살이 거실에 놓여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가지고 사냥하러 숲으로 들어갔습니다. 숲에서 동물은 한 마리도 볼 수 없었습니다. 허탕을 치고 집 가까이 왔을 때, 담 옆 나무숲에서 무엇인가 움직이는 것을 보고 요셉은 그것이 토끼라고 생각하여 화살을 당겼습니다. 그 동물은 화살을 맞고 그대로 죽었습니다. 그런데 가서 보니 토끼가 아니라 할아버지가 키우는 닭이었습니다.

큰일 났습니다. 할아버지가 아끼는 닭을 죽였으니 이제 벌을 받게 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요셉은 죽은 닭을 얼른 땅에 묻었습니다. 그리고 누가 본 사람이 있는지 둘러보았습니다. 다행히 아무도 보지 못한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뒤에 누나 마리아가 서 있었습니다. 마리아가 다 봤습니다. 마리아가 말했습니다. “요셉아, 걱정하지 마라. 내가 다 알고 있지만 절대 할아버지에게 말하지 않을게.”

요셉은 집으로 돌아왔지만 쉴 수가 없었습니다. 할아버지가 집에 계실까 잔뜩 걱정이 되었습니다. 저녁을 먹으로 식탁에 갔습니다. 그런데 저녁 식사가 닭고기 국이었습니다. 요셉은 슬쩍 할아버지를 쳐다보았습니다. 다행히 할아버지께서는 아무것도 모르시는 것 같았습니다.

보통 저녁 식사 후에 식탁은 여자아이들이 치우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설거지는 늘 마리아의 몫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마리아가 아무것도 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고는 요셉에게 오늘은 네가 식탁을 치우고 설거지를 하라고 합니다. 요셉이 마리아를 쳐다보자 마리아가 요셉에게 말합니다. “요셉아, 할아버지에게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말할까?”

요셉은 설거지를 혼자 다 해야 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마당을 쓰는 일도 원래는 마리아의 몫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침이 되자 마리아는 요셉에게 마당을 쓸라고 합니다. 누나 마리아는 팔짱을 끼고 은근히 말합니다. “요셉아, 왜 하기 싫어? 그러면 할아버지에게 말할까?” 요셉은 마당도 다 쓸어야 했지요.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요셉은 더는 견딜 수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차라리 할아버지에게 다 말하고 용서를 빌겠다고 결심합니다.

요셉이 할아버지를 찾아가서 말합니다. “할아버지, 용서해 주세요. 사실은 제가 잘못하다가 그만 닭을 죽였고, 땅에 묻었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할아버지가 요셉에게 말합니다. “요셉아, 그래. 잘 말했다. 나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실은 그날 네가 먹은 닭고기 국은 네가 죽인 그 닭이란다. 나는 원래 그날 너희들을 위해 닭을 잡아서 국을 만들어 주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 그런데 마침 네가 닭을 죽여서 잘되었지 뭐냐. 다만 나는 네가 나에게 와서 일어난 일을 솔직히 말해 주기를 기다렸단다. 나는 네가 누나에게 시달림을 받는 것도 다 봤다. 왜 빨리 나에게 말해 주지 않았니? 그 동안 마음고생을 얼마나 많이 했느냐? 다 용서했으니까 이제 아무 걱정도 하지 마라.”

마리아는 요셉이 이제 자기 말을 듣지 않는 것을 보고 놀랍니다. 요셉이 왜 할아버지를 무서워하지 않을까요?

 

죄를 지은 사람은 죄의 종이 됩니다. 아들이 자유롭게 해주지 않으면 종살이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마리아가 요셉에게 말했었지요. “걱정하지 마라. 할아버지에게 이르지 않겠다.” 아주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런데 이르지 않겠다고 하는 데는 조건이 있습니다. “너는 나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자가 여자에게 말합니다. “혼전 성관계는 아무 문제가 없다. 자연스러운 일이다. 걱정하지 마라.” 그러나 나중에 남자는 여자에게 “우리 관계를 사람들에게 말할까?”라고 합니다. 마리아가 “요셉아, 할아버지에게 다 말할까?” 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죄를 지으면 고통을 당합니다. 거기에서 빠져 나오지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죄를 지은 자는 죄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빠져 나오는 것이 어렵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아들이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면 우리는 자유로워집니다. 할아버지가 요셉에게 말합니다. “요셉아, 너는 이제 더 이상 마리아의 종이 아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너는 나에게 왔으니,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니다.

마리아가 궂은 일을 다 시켰고, 요셉은 그대로 다 해야 했습니다. 죄는 우리를 사랑에서 떼어놓습니다. 우리를 교회에서 떼어놓습니다. 술, 마약, 부도덕한 삶이 우리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속삭이는 말을 신뢰하지 마십시오. 우울증이나 자살로 몰아갑니다. 죄의 종이 되게 합니다.

여러분, 죄의 종이 되기를 원하지 않으시죠? 그렇다면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도움은 밖에서 옵니다. 밀가루 반죽이 혼자서는 부풀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누룩이 필요합니다.

 

 

 

열두 번째 강의

십계명 – 영혼의 길잡이

 

우리에게는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켜 주시는 아드님이 계십니다. 우리가 죄의 종살이에서 고통을 받기도 하지만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오너라. 우리 시비를 가려보자. 너희의 죄가 진홍빛 같아도 눈같이 희어지고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되리라.” (이사 1,18)

 

이것이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에게 오너라. 하느님께서 시비를 가려보자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사랑의 말다툼을 하고 싶어하십니다.

 

어떤 화가가 최후의 만찬을 그리기로 했습니다. 예수님과 열두 제자의 그림입니다. 그는 유다를 그리기 위한 모델을 찾고자 애썼습니다. 아주 절망하고 우울증에 빠진 모습의 유다를 그리고 싶었지요. 마침내 거리의 어느 구석에서 그런 사람을 찾았습니다. 그는 얼굴에 수심이 가득한, 슬프고 너무나 절망적인 모습의 사랑이었어요. 머리는 길게 헝클어져 있고, 전혀 씻지도 않아 지저분했습니다.

그래서 그 화가는 그에게 자기의 모델이 되어 달라고 청했습니다. 내일 당장 자기의 작업실로 오라고 하면서 모델료의 선금으로 20만원 정도를 주었습니다. 나머지는 나중에 주기로 약속했습니다.

그 사람은 오랜만에 돈이 생기자, 우선 이발소에 가서 머리를 깎고 가게에 가서 옷을 새로 사 입었습니다. 다음 날, 말쑥한 차림으로 화가의 작업에 나타났습니다. 화가가 나와서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나요, 당신이 오늘 모델이 되어 달라고 해서 온 그 사람이오.”

화가는 그를 보고 내쫓으며 말했습니다. “당장 가시오. 누가 당신의 모습을 바꾸어서 오라고 했소? 나는 당신의 원래 모습을 원했는데 왜 그렇게 바꾸어서 내 일을 망친단 말이오.”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는 우리가 잇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당신에게 오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겉모습을 꾸미고 싶어합니다. 겉모습만 바꾸는 것이지요. 향수를 뿌리고 잔뜩 멋을 냅니다. 마음속에는 절망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 겉모습만 바꾸어 가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내면이 바꾸기를 원하십니다. 이 변화는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그것이 회심입니다. 회심은 우리가 예수님께로 갈 때 일어납니다. 회심은 우리 마음과 정신이 바뀌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은총이 필요합니다.

어떤 사람이 말합니다. “저는 고행성사를 봅니다. 그런데 회개를 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이 나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마치 회개를 슈퍼마켓에서 살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형식적인 고해성사를 통해 회개를 살 수는 없습니다. 진심으로 회심하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합니다. 믿음을 지녀야 합니다. 기도를 통해서 예수님께 가까이 갈 때, 진정한 우리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도 처음에는 아닌 척했지만 이내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을 보기를 원했습니다. 그녀가 그렇게 했을 때, 그녀 안에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하늘에서 오는 은총과 우리의 협조가 만남으로써 상황을 다르게 만듭니다. 되찾은 아들의 결심, 집으로 돌아가리라는 결심을 한 것이 협조입니다. 우리의 협조와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이 만날 때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것이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대화하기를 원하십니다.

진정으로 회심하기 위해서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단지 네 죄를 시인하기만 해 다오.

네가 주 너의 하느님을 거슬러 반역했고

온갖 푸른 나무 밑에서 낯선 자들에게 몸을 맡겼으며

내 날을 듣지 않은 죄를.” (예레 3,13)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가 당신에게 반역했다는 것을 인정하기만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죄를 알아차리기만 하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하십니다. 되찾은 아들이 말했습니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아버지에게는 아들의 그 말 한마디로 족했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너희 마음이 하느님을 떠나 방황하였으나

이제는 돌아서서 열 배로 열심히 그분을 찾아야 한다.” (바룩 4, 28)

 

회개를 결심하지만 진정으로 결실을 맺기가 어렵습니다. 회개를 뒤로 미루기 때문이지요. 왜 회개를 뒤로 미룹니까?

 

어떤 사람이 지옥으로 순례를 떠났습니다. 지옥에 갔더니 큰 회의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루치펠 과 작은 악마들이 모여서 토론을 하고 있는데, 주제가 ‘어떻게 고객을 모셔 올 수 있는가?’ 라는 것이었습니다. 루치펠이 한탄을 합니다. “우리 지옥에 더 이상 고객이 오지 않아 큰일이다. 봐라. 천국에는 사람들이 가득 차는데 우리 지옥은 텅 비어 있지 않은가?”

창문을 통해 멀리 천국을 보니, 천국에는 사람들이 가득합니다. 루치펠은 작은 악마들에게 어서 가서 사람들을 데려 오라고 보냅니다. 여러 종류의 마귀들이 날아갑니다. 그들이 열심히 일한 후에 다시 돌아옵니다. 루치펠은 초조한 마음으로 그들을 기다립니다.

그런데 돌아오는 마귀들이 모두 허탕을 치고 빈손입니다. 왜 아무도 데려 오지 못하느냐고 호통을 칩니다. 마귀들이 이제 땅에서 사람들을 더 이상 데려 올 수 없다고 대답합니다. 류 요셉 신부님 같은 사람이 피정을 열심히 지도하고, 하 베드로 신부님 같은 본당 신부님들이 열심히 사목활동을 하기 때문에 사람들을 지옥으로 데려 오기가 힘들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작은 악마 하나가 많은 사람을 데리고 왔습니다. 루치펠은 기뻐하면서 그 악마에게 어떻게 그렇게 많은 사람을 데려 올 수 있었는지를 묻습니다. 그 작은 악마가 대답합니다.

“그들은 머리가 좋습니다. 영성도 깊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머리를 써야 합니다. 우리도 우리 나름대로의 영성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저는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성당 다니는 것이 아주 좋다. 그런데 오늘은 비가 오지 않니? 굳이 비를 맞고 성당에 가는 것보다 사음 주에 가도록 해라. 기도하는 것도 아주 좋은 일이다. 그런데 오늘은 열심히 일해서 피곤하니까 내일부터 해라.’

알코올 중독자에게는 이렇게 말합니다. ‘술 먹지 마라. 술은 몸에도 해롭지 않으냐? 예수님께서도 네가 술 마시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신다. 그러니 술을 끊어라. 그래도 섭섭하니, 오늘 한 잔만 마시고 내일부터 끊어라.'”

내일은 결코 오지 않습니다. 우리는 착하게 살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고 내일부터 착하게 살고자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깨어 있어라.” 우리는 죄에서 벗어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죄는 관계를 깨뜨리고 우리 삶을 망칩니다. 성경에는 죄는 계명을 어기는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죄는 단지 계명을 지키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첫 사람, 아담과 하와의 죄는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어긴 것입니다. 그 다음에 카인의 죄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어긴 것입니다. 죄는 사랑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죄는 사랑의 부재입니다. 사랑이 없을 때 우리는 알몸이라고 느낍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알몸이라고 누가 너에게 일러 주더냐? 그분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다시 생명으로 데려 오겠다.

우리가 죄를 범하면, 알몸이라고 느끼기 때문에 그것을 감추려고 합니다. 그 수치를 아직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알몸이라고 누가 너에게 일러 주더냐? 아담이 뱀이 꾀었다고 핑계를 댔지만 결국 하느님 앞에 무릎을 꿇고 자기가 악의 유혹에 빠졌다는 사실, 곧 죄를 인정한 것입니다. 우리도 아담처럼 두려워 숨었던 곳에서 하느님 앞에 나와 죄를 인정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죄를 고백합니다. 그가 말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지만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힘듭니다.” 사도 바오로를 보십시오. 회심 이전에는 죄인의 삶을 살았지만, 회심 이후에는 거룩한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성인은 과거가 있고, 모든 죄인에게는 미래가 있습니다. 우리도 늦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새로운 삶을 살면서도 자꾸 과거의 삶을 생각하는데, 과거는 잊으십시오. 그렇게 하도록 하느님의 은총을 청하십시오. 하느님이 도와주실 것입니다. 성 바오로가 말했습니다. 내가 아이였을 때에는 아이처럼 말하고 아이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아이적의 것들을 그만두었습니다.

과거의 일은 모두 쓰레기입니다. 모두 예수님께 드립시다. 이제 오늘부터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영광을 향해 나아가고 영광을 위해 삽시다. 은총은 우리를 과거가 아니라 미래로 향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대학 기숙사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기숙사에 많은 학생들이 있습니다. 한 학생이 있었는데, 그가 오기만 하면 모두 그를 피해서 달아납니다. 그는 자기가 나쁜 사람이 아닌데 왜 모두 자기를 멀리하는지 몰라서 친구를 찾아갑니다. “나는 매일 옷을 갈아입고 샤워를 해, 그런데 왜 모두 피해 달아나지?” 그 친구가 말합니다. “맞아, 너는 매일 옷을 갈아입고 샤워를 하지. 그런데 양말을 갈아 신지 않잖아. 양말을 갈아 신어봐.”

그는 친구의 조언을 받아들여서 양말을 갈아 신었습니다. 비싼 양말을 사서 새로 신고 갔습니다. 그런데 친구들의 여전히 피해서 달아납니다. 그래서 친구에게 가서 따졌습니다. “내가 양말을 갈아 신고 갔는데도 여전히 달아난단 말이야.” 친구가 묻습니다. “정말 양말 갈아 신은 거야? 여전히 냄새가 나는데 어떻게 된 거야?” 그가 말합니다. “아직 헌 양말을 주머니에 가지고 있어. 보여주기 위해서 가지고 있어.” 보십시오. 양말을 갈아 신었지만 아직 헌 양말을 주머니에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어떤 것은 그냥 예수님 손에 맡겨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그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피정 때는 예수님께 맡겼다가 집으로 돌아가면 되찾아 갑니다. 그래서 변화가 일어나지 않고 끔찍한 삶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마태 11,28)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입니다. 지친 자, 무거운 짐을 진 자는 다 예수님, 당신에게 오라고 하십니다. 그분이 우리를 편히 쉬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우리는 믿음뿐만 아니라 지적 능력이 필요합니다. 믿음과 이성적 사고는 함께 갑니다. 믿음이 이성을 떠나서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라 지적 능력을 사용하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지적 능력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예를 들어, 약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우리 육체를 치유하기 위해서 약이 필요합니다. 지적 능력도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이 선물을 잘 사용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의 문제입니다. 우리의 사생활 중의 사생활이라고 할 수 있는 내밀한 방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우리의 짐을 예수님께 맡겨드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빛은 어둠을 몰아냅니다. 우리의 마음에서 악한 것들을 몰아내도록 해야 합니다. 빛으로 나가야 합니다. 빛으로 나가는 길잡이를 위해 우리에게 십계명이 있습니다.

여러분, 십계명을 아시지요? 어릴 적에는 알고 있었는데 이제 잊어 버렸습니까? 왜 우리가 십계명을 가지고 있습니까? 왜 우리에게 십계명이 필요합니까?

젊은이들에게 십계명에 대해 이야기하면 싫어합니다. 너무 주정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십계명을 아주 오래 전, 모세 때의 계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현대인이고, 우리에게는 컴퓨터와 인터넷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 이상 십계명을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여러분, 십계명을 좋아합니까? 아니지요? 젊은이들은 언제나 십계명을 지키기 어려워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랑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미덕은 자동으로 우리에게 익혀지는 것이 아닙니다. 나쁜 습관은 아주 쉽게 자동으로 익혀집니다. 2시간 동안 맥주를 마시는 것은 아주 쉽지만 30분 미사를 드리는 것은 어려워합니다. 15분간 묵주기도 드리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미덕은 자동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값을 치러야 합니다. 열심히 일해서 월급을 타면 가치가 있습니다. 진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십계명을 열 가지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건강하게 살기 위한 10개의 알약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명심하십시오. 어렸을 때, 십계명이라는 10가지 알약을 먹으면 나중에 정신과 약을 먹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는 어떤 약을 먹을지 결정해야 합니다. 10가지 약은 무료입니다. 정신과 약은 비쌉니다.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합니까? 한국에서는 차를 운전하기가 쉽습니다. 저는 보통 지도를 보고 차를 운전했습니다. 한국도 전에는 지도를 보고 차를 운전했을 것입니다. 제가 이곳에 올 때, 한 형제님이 저를 차로 데려다 주었습니다. 그 형제님이 차에서 조그만 상자 같은 것의 버튼을 누르니까 거기서 여자 목소리가 나왔습니다. 그 여자가 “왼쪽으로 도시오.”라고 하면 그 형제님이 왼쪽으로 돌았습니다. 저는 그 기계 이름을 모릅니다. 뭐라고요? 아, 내비게이션 이군요.

 

십계명이 우리 삶에 가장 좋은 내비게이션입니다. 우리가 잘못 된 길로 가면 언제 돌아와야 할지 알려줍니다. 언제 서야 할지도 알려줍니다. 우리가 오는 중에 길을 잘못 들어 이상한 곳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 기계 속에 있는 여자가 말했습니다. “잘못된 길로 들어섰습니다. 진로를 재 탐색합니다.”

우리는 정해진 목적지에 도달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를 방해하는 자들은 정해진 목적지가 아닌 이상한 곳으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그곳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곳이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분명한 목적지가 있습니다. 십계명은 우리가 목적지에 도달하도록 도와 줍니다.

 

 

 

열세 번째 강의

용서

 

십계명에서 셋째 계명이 무엇입니까?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라는 것이지요. 성당에 가서 미사 참례를 하는 것이 기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제게 묻습니다. “신부님, 왜 꼭 성당에 가야 합니까?” 그것이 오늘날의 일반적 경향입니다. 왜 주일에 꼭 성당에 가야 하는가?

어느 본당 신부님이 한 신자가 성당에 안 나오자 신자 방문을 했습니다. 겨울이었고 눈이 쌓여 있는 때였습니다. 노크 소리를 듣고 그 신자가 문을 열고 보니 본당 신부님이 서 계십니다. 성당에 나가지 않을 생각이지만 신부님을 집 안에 모셨습니다. 거실에 벽난로가 있었습니다. 벽난로에는 장작이 활활 타고 있었습니다.

본당 신부님은 교회나 신앙에 대한 이야기는 한마디도 없이 그냥 일반적인 이야기만 하십니다. 그러다가 벽난로에 작은 장작 하나를 집어 밖에 내놓았습니다. 1분이 채 되기도 전에 불이 붙어 있던 장작나무는 불이 꺼지고 재로 변했습니다. 몇 분 후에 신부님은 장작에서 재를 털어내고 다시 벽난로에 넣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타기 시작합니다. 본당 신부님은 신앙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는 신부님이 하시는 일을 보았지요. 그리고 다음 주에는 성당에 나왔습니다. 장작이 여러 개 같이 쌓여 있을 때는 불이 잘 붙었습니다. 그런데 한 개를 따로 꺼내놓으니까 이내 꺼지고 재만 남게 되었어요. 그러나 그 장작을 다시 벽난로에 넣었더니 다시 타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로 함께 있을 때 자랍니다. 이렇게 우리가 성당에 나가는 것은 우리의 책임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둘이나 셋이 모여 잇는 곳에 나도 함께 있겠다.

우리가 혼자 있으면 우리의 원수에게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활활 타오르던 그 빛을 잃어버립니다. 재만 남길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오래 전 부모님들 세대에서는 많은 위기를 겪었지만 아무도 우울증에 시달리지 않았습니다. 요즈음 많은 사람이 교회를 떠났고, 쉽게 우울증에 걸립니다. 희망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지를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분명합니다. 우리가 주일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가 인도의 타지마할 이라는 사실을 아시지요? 저는 그 사실은 알지만 타지마할이 어디에 있는지는 잘 모릅니다. 온 세계를 다니며 온 세계에 대하 알지만 오히려 인도는 제가 잘 모릅니다.

자, 이제 타지마할에 가 보겠습니다. 아주 아름다운데 가장 큰 특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흰 대리석에서 나는 빛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최근 몇 년간 흰 대리석에서 나는 빛나는 유택이 서서히 사라져 가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잘 닦지만 다시 한 달이 지나면 예전처럼 그런 아름다운 빛이 나지 않았습니다. 정부에서 왜 그런가를 전문가들에게 의뢰하여 알아 보았더니, 인근에 공장들이 들어서면서부터 생긴 공해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인도 정부는 타지마할을 보존하기 위한 법을 만들었습니다. 타지마할 반경 45킬로미터 이내에 있는 공장들의 문을 모두 닫을 수 있게 하는 조례를 만들어 통과시킨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공장이 문을 닫았더니, 타지마할의 대리석에서 다시 빛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왜 타지마할이 빛을 잃기 시작했습니까? 공해로 인해 오염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아이가 18세 때까지 빛나는 보석이었는데 점점 빛을 잃었습니다. 사회적 책임이 있습니다. 연대적인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아이들을 위해 기도할 때 다른 집 아이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아이들이 세상으로 나갈 때, 오염된 세상으로 나갑니다. 아이들이 오염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그들 모두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다른 가족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남편을 위해 기도할 때 다른 남편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깨끗해지려면 환경도 깨끗해져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우리 아이들의 빛나는 광택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혼자서는 빛날 수가 없습니다. 빛나지 않는 아이들이 있는 세상 안으로 들어가면 빛을 잃어버립니다.

우리 아이들의 신심행위가 빛나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아이들이 성사생활에서 벗어나면 빛에서 어둠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복사를 서면서 얼마나 기뻐했습니까? 그런데 크면서 친구들과 어울리고 다른 아이들 이야기를 들으면서 복사 서는 것을 창피해합니다. 이것은 잘못된 변화입니다. 하느님이 계획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계획은 은총으로 더욱 빛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불가사의 입니다. 저도 세상의 불가사의 입니다. 저를 위해 기도해주십시오. 저도 여러분을 위해 기도합니다. 우리 아이들이 세상의 불가사의입니다. 아주 아름다운 불가사의를 빛나게 해야 합니다.

 

하느님 사랑을 거스르는 모든 행위는 죄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가 아무리 크다고 해도, 하느님의 사랑으로 용서가 되지 않을 만큼 큰 죄는 없습니다. 인간이 죄를 짓는 것은 인간적입니다. 그러나 죄를 통회하고 회심하는 것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은총입니다. 죄 안에 빠져 계속 죄에 머무는 것은 악마의 힘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아름다움을 원합니다. 우리는 평화를 원합니다. 하느님에게서 오는 은총을 원합니다.

이제 다른 주제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것은 우리 정신과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실천하기가 아주 어렵습니다만, 이것을 실천하면 치유가 일어납니다. 두통이 사라지고 아픈 허리도 낫습니다. 더 큰 것은 우리 마음에서 돌이 없어집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지요. 용서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행동으로 옮기기는 아주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은총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정의에 바탕을 두는 것이 아닙니다. 은총에 바탕을 두어야 합니다. 증오가 무엇입니까? 증오는 삶을 망가트립니다.

 

“그러므로 하늘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임금이 셈을 하기 시작하자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 하나가 끌려왔다.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과 그 밖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그러자 그 종이 엎으려 절하며, ‘제발 참아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을 빚진 동료를 만났다. 그러자 그를 붙들어 멱살을 잡고 ‘빚진 것을 갚아라.’ 하고 말하였다. 그의 동료는 엎드려서, ‘제발 참아주게. 내가 갚겠네.’ 하고 청하였다.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서 그 동료가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 동료들이 그렇게 벌어진 일을 보고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죄다 일렀다.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들여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의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그러고 나서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마태 18,23-35)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구절이지요. 우리가 이 구절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백 데나리온 과 만 탈렌트의 차이가 어떤 것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좋은 심리학자이시고, 좋은 요리사 일 뿐 아니라 좋은 수학자이기도 합니다.

사업가들은 이익이 있어야 사업을 성사시킵니다. 사업가는 어떤 일을 성사시키려 할 때 그 일에서 전혀 이익이 없으면 거래를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업을 하시면서 여러분과 거래할 때 늘 손해를 보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언제나 이익을 보는 사람입니다. 우리에게 그럴 자격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이 자비하시기 때문에 그렇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이 성경 구절을 보면 왕이 종과 셈을 합니다. 종은 왕에게 만 탈렌트의 빚이 있었습니다. 종은 빚을 갚을 능력이 없습니다. 왕은 그 중에게 그가 가진 모든 것, 아내와 아이들까지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합니다. 그러자 그 종이 사정을 합니다. 시간을 주면 다 갚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왕은 그가 갚을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압니다. 왕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 빚을 다 탕감해줍니다. 아무 계약서도 쓰지 않습니다. 왕은 그냥 만 탈렌트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가 누구를 위해 만 탈렌트 를 잃어버리는 것입니까? 여러분과 저를 위해서이지요. 왜 그렇게 하십니까? 여러분과 제가 만 탈렌트보다 더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종이 빚을 다 탕감 받고 행복해 합니다. 그런데 밖으로 나오다가 다른 종을 만납니다. 친구입니다. 친구에게 백 데나리온을 빌려 준 일을 생각하고 그 친구에게 그것을 갚으라고 합니다. 그 친구가 기다려 달라고 사정을 합니다. 그런데 그는 그 사정을 봐 주지 않고 그를 감옥으로 데려갑니다. 왕이 나중에 이 사실을 전해 듣고 화가 나서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집진 것을 다 갚게 합니다. 물론 그가 갚을 수 없으니, 영영 감옥살이를 해야 합니다.

1 데나리온은 하루 품삯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1 탈렌트는 6,000 데나리온입니다. 그러니까 만 탈렌트는 육천만 데나리온입니다. 당시 평균 주 5일 일을 했으니까 일 년에 일해서 벌 수 있는 돈이 겨우 250 데나리온입니다. 만 탈렌트를 갚으려면 24만 년을 일해야 합니다. 우리가 몇 년을 삽니까? 300년 쯤 살지요? 아니라고요? 이것은 일을 해서 벌어서 갚을 수 있는 돈이 아닙니다.

왕이 지니고 있는 호의를 보십시오! 왕이 왜 손해를 보면서 빚을 다 갚아줍니까? 우리 죄인을 되돌아오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죗값을 치르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흘리시는 분입니다. 그 피의 덕택으로 우리는 고귀한 가치를 지네 됩니다. 그분이 우리의 빚을 다 갚아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이 종의 잘못이 무엇입니까? 1만 탈렌트의 빚을 다 탕감 받은 것을 감사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사시던 당시 예수님께서 쓰시던 아람어에는 빚과 죄가 동일한 단어였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떤 요구도 없이, 아무 계약서도 쓰지 않으시고 우리의 죄를 다 용서해 주셨습니다. 뉘우치는 눈물 한 방울을 보시고 빚을 다 갚아주셨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우리에게 백 데나리온의 빚을 진 사람을 보고 있습니까? 왜 거기에 마음을 씁니까? 하느님께 감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큰 빚을 탕감 받았는지 알고 있다면, 그것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다면, 백 데나리온에 신경 쓰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만 탈렌트에 대해 잘 모릅니다. 그렇기에 여전히 백 데나리온에 신경을 쓰는 것입니다. 그것은 정당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용서하지 않으면, 하느님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이 말의 의미를 잘 헤아려 보아야 합니다.

 

1830년 미국에 조지 윌슨 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살인죄로 수감되었고,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당시 대통령이 앤드류 잭슨 이었는데, 독립기념일을 맞아 사형수들에게 특별사면을 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조지 윌슨은 그 사면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대법원 판사가 판결을 내렸습니다. “사면은 종이 한 장과 같다. 이 종이의 가치는 사면을 받은 사람에 달려 있다. 조지 윌슨이 사면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이제 사면은 종이에 불과하다. 그가 사형을 받게 하라.” 그래서 그는 사형을 받게 되었습니다. 1830년에 미국에서 실제 있었던 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해 주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거부하면 하느님께서도 어쩔 수 없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의미는 하느님께서 용서해 주시기를 원하지만, 그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죄가 하느님에게도 그대로 남아 있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빚을 탕감 받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생명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왜 사람들이 용서하고 용서받는 것을 힘들어 합니까? 사람들은 용서하고 용서받는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우리는 요서와 사랑에 기름을 부어야 합니다. 우리가 용서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으면, 용서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지요? 생명으로 되돌아오기를 진심으로 간절히 원해야 합니다. 그 의미는 생명으로 되돌아오게 해주시는 분께 나아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분이 주시는 용서의 힘을 느껴보십시오.

한편, 용서는 우리가 단순히 받는 미덕이 아니라 밖으로 나가야 하는 미덕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왕에게 종이 탕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나누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받은 걸을 우리만 가지고 있으면 안 됩니다. 우리에게서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받아서 나누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세 그룹의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바위에 새겨진 글자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잘못된 일이 일어나면 그것을 바위에 새깁니다. 그것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겨로 용서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둘째는 모래에 써놓은 글자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뭔가 잘못된 일이 일어나거나 상처를 받으면 아파하고 슬퍼합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면 그들을 용서하고 잊어버리는 사람들입니다.

셋째는 흐르는 물에 쓰인 글자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잘못된 일이나 받은 상처를 금방 잊어버립니다. 복수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삶이 이와 같습니다. 예수님에게는 복수심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많은 욕을 하고 모욕을 주고 심지어 때리기까지 했습니다만, 예수님의 복수는 오직 사랑으로 갚아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첫째 그룹의 사람들이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우리 삶은 멸망으로 가게 됩니다.

 

지난 1월에 제가 2년 만에 고향을 방문했습니다. 한 친구가 저를 찾아와서 다른 친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 친구는 다른 친구에 대해 화가 많이 나 있었습니다. 들어보니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가 자기 가슴을 때리며 모욕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복수를 해주겠다는 것입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내가 가슴에 폭탄을 가지고 그 친구에게 가서 다시 내 가슴을 때리게 해서 그 친구의 손을 폭파시켜 버릴 거야. 손이 없어지면 더 이상 나를 때리지 못할 테니까 말이야.” 그래서 제가 기다리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그의 손이 폭파하기 전에 네 가슴이 먼저 폭파할 텐데. 그래도 좋아?”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증오를 품으면 다른 사람의 손만 봅니다. 그 증오가 우리의 심장을 먼저 폭파한다는 것을 생각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잠깐 멈춰 서라고 말씀하십니다. 만 탈렌트의 빚을 진 종을 생각해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마음을 생각해 보라고 하십니다. 우리 마음이 더 중요하다고 하십니다. 이것을 잘 생각해 봅시다. 용서하기는 아주 어렵습니다.

우리가 누구를 용서해야 합니까? 우리에게 큰 상처를 준 사람입니다. 우리에게 망신을 준 사람입니다. 그런 사랑을 용서한다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탕감 받은 큰 빚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입니다. 우리는 그 길을 따라야 합니다. 용서의 시작은 어렵지만 결국 끝에서는 이것이 이익이 됩니다. 어떻게 이익이 됩니까? 우리 마음 안에 돌이 없어집니다. 자유로워집니다. 이것이 이익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피정 중에 어떤 사람이 용서를 결심했습니다. 그는 어떤 신부님이 자기에게 큰 잘못을 했는데, 이제 그 신부님을 용서한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다 피정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갔고 나중에 다시 그 신부님을 보자, 막 화가 끓어올랐습니다. 어떤 용서가 있었던 것입니까? 피정 중에 용서했다고 한 것은 진정으로 용서한 것이 아니라 다면 경험일 뿐이었습니다. 묵주기도를 하거나 기도를 하는 중에도 가끔 그 신부님이 자기에게 한 일이 생각납니다. 어떻게 그가 나에게 그렇게 할 수 있었는가? 다시 화가 솟구칩니다. 그러면 용서가 무엇입니까?

나이지리아에서 어떤 영화를 본 적이 있는데, 그 영화에서 주인공이 말합니다. “나는 당신을 용서합니다. 그러나 잊으라고 말하지는 마십시오.”

많은 사람이 용서는 잊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용서는 잊는 것이 아닙니다. 20년 전에 누가 나에게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뺨을 때렸습니다. 시간이 지난다고 그 일이 잊어집니까? 잊을 수는 없습니다. 잊고 싶다면 그 생각을 잊는 것이 오히려 낫습니다.

용서는 기억한다는 것입니다.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기억하면서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해 주고 축복을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보통 기억만 합니다. ‘용서했어.’ 라고 하면서 그것을 기억만 하고, 땅에 묻었던 것을 다시 꺼냅니다. 냄새가 납니다, 헌 양말은 그것을 발에 신었든 주머니에 넣었든 가지고 있으면 냄새가 납니다. 사람과 사건을 기억하고 거기서 멈춰서는 안 됩니다. 그것을 기억하면서 동시에 기도하고 축복해 주어야 합니다. “그에게 기쁨과 행복을 돌려주십시오. 그의 일을 축복해 주십시오.”

그러면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은총이 작용합니다. 은총으로 그 상처가 없어집니다. 강렬했던 상처와 고통이 없어집니다. 타이어에서 공기를 빼면 어떻게 됩니까?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20년 전에 있었던 사건을 여전히 기억합니다. 그러나 더 이상 상처가 없습니다. 이제 아프지 않습니다. 그것이 어디로 갔습니까? 누가 그것을 없애 주었나요? 바로 성령께서 그것을 없애주셨습니다. 용서는 은총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증오는 영혼의 병입니다. 어떤 약으로도 치유할 수 없습니다. 오직 은총만이 치유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어디에서 배웁니까? 십자가에서 배웁니다.

예수님께서 용서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용서하시기 위해서 그분도 기억하셔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이것이 우리가 십자가 아래에서 얻을 수 있는 보화입니다. 십자가 아래 앉아서 묵상을 하면 삶에 관한 진리를 얻게 됩니다.

 

저는 예수님이 얼마나 놀라운 분이신지 압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십니다. 용서입니다.

인간에게 특징이 있다면, 첫째는 사랑입니다. 둘째는 용서입니다. 그런데 이 둘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용서는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있을 때 용서가 가능합니다. 우리가 사랑하기 어렵다면 용서에 관한 부분을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용서하기 어려우면 사랑하기가 당연히 어렵습니다.

사랑은 은총입니다. 은총은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생명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누구십니까? 그리스도는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은 누구십니까?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래서 사랑은 은총입니다.

은총을 청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은총으로 용서를 실천해야 합니다. 만 탈렌트의 빚을 탕감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 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더 이상 백 데나리온에 신경을 쓰지 않게 됩니다. 다른 사람의 손보다 우리의 심장이 더 소중합니다.

 

 

 

열네 번째 강의

저는 당신 손에 들린 연필입니다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 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마태 5,43-44)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마태 5,39-40)

 

두 가지 성경 말씀을 살펴봤습니다. 첫 번째 말씀인 마태 5,43-44 에서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원수를 위해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척 어려운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뭔가 재미있게 느껴지는 말씀입니다. 도대체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생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말씀인 마태 5,39-40은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래 대어라.” 보통 사람들을 뺨을 치면 어느 뺨을 때리게 됩니까? 왼손잡이가 아니라면 오른손으로 치니까 당연히 왼쪽 뺨입니다. 그런데 “오른뺨을 치거든”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깊은 의미의 용서를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그냥 화가 나서 뺨을 칠 때는 오른손으로 왼쪽 뺨을 치게 됩니다. 그런데 유다인은 너무 화가 날 뿐만 아니라 상대를 경멸하기 위해서는 오른손을 제쳐서 손등으로 오른뺨을 쳤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경멸을 하면서 상대가 우리의 뺨을 칠 때조차 용서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구약의 요셉을 보십시오. 그가 얼마나 고통을 당했습니까? 형제들이 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경멸을 당했고, 이집트로 팔려갔습니다. 이집트의 감옥에서 오랫동안 고통을 당했습니다. 요셉은 무죄한 소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고통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이 집을 잃었지만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그에게 한 나라를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더 좋은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나라를 얻어, 이제 자기 아버지를 그 나라에 모시고 옵니다. 그는 자기를 경멸하고 뺨을 친 형제들을 용서했고, 그것이 그의 삶에 이득이 되었습니다.

고통은 우리 삶을 아주 힘들게 합니다. 병이나 증오나 그런 고통이 한꺼번에 일어나면 거기서 벗어나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부정적인 것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여러분에게도 고통이 있습니까? 저만 고통이 있고, 여러분은 아니지요? 아, 여러분도 고통을 받는다고요? 저는 저만 고통을 받고 있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도 고통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밝게 웃습니까? 비결이 무엇입니까?

여러분, 장미 좋아하십니까? 우리가 장미를 볼 때 아름다운 꽃만 봅니다. 나무 전체를 보는 것은 잠시 잊어버립니다. 그런데 나무 전체를 보면 가시가 있습니다. 장미가 빛나는 것은 가시와 더불어 있을 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장미를 보면서 꽃만 봅니다.

여러분의 행복한 모습을 보면서 저는 여러분의 고통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것이 은총입니다. 고통 없는 삶은 없습니다. 낮이 있으면 밤이 있습니다. 행복이 있으면 불행도 있습니다. 성인도 죄인도 다 고통은 있습니다.

 

주어진 상황, 곧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치유의 시작입니다. 우리가 현실을 거부하면 더 슬퍼집니다. 더 슬퍼지면 더 메마르게 됩니다. 신경계통이 마비되는 현상이 옵니다. 나쁜 것도 패키지로 옵니다. 우리는 이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저도 지난 2월에 탄자니아에서 신경이 마비되었을 때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찬미를 드렸습니다. 죽든지 살든지 저에게 이득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산다면 그것도 이득이 되고 죽는다고 하더라도 그거도 저에게 이득이 됩니다. 주님과 함께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게 되니까요.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영원히 죽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 바오로가 들려주는 말이기도 합니다.

성 바오로를 보십시오. 그는 죽었지만 우리 안에 살아 있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도 마찬가지 입니다.

각각의 고통이나 슬픔은 우리를 예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게 해 줍니다. 아무 고통이 없는 세상은 없고, 그런 세상이 있다면 아마 더 이상해서 살기 힘들 것입니다. 우리가 위험이나 병에서 완전히 자유롭다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선진국의 어느 나라에 가 보면, 거리가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망가져 있습니다. 물질적 번영이 크면 사람들이 더 쉽게 망가집니다. 하느님을 잊고 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시편 작가는 저를 부자가 되게 하지도 마시고, 너무 가난하게도 하지 마시고 다만 필요한 것만 달라고 청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감사를 드릴 수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가난한 사람이 없다면 우리가 누구와 나누겠습니까? 늘 건강하면 우리는 그분의 계획을 모릅니다. 아프기도 하니까 그것을 통해서 하느님의 계획을 헤아려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픈 것이 다른 사람에게 기회를 줄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병을 보면서 자신들의 건강에 대해 감사로 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인도에 제가 아는 사람이 있는데, 이름이 토마스입니다. 그가 아주 좋은 일을 많이 한 유명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아이가 장애로 태어나 7살에 죽었습니다. 너무나 고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아이의 장례를 치르고 돌아오는 길에 기자가 토마스 씨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님을 위해 좋은 일을 많이 하셨습니다. 2천 명이나 되는 고아들을 돌보아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당신의 아이는 장애아로서 일곱 살밖에 안되었는데 죽었습니다. 도대체 당신의 하느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당신의 하느님을 어떻게 변호하시겠습니까?

아프리카 격언에 불타는 장작에 기름을 붓지 말라는 말이 있는데 기자의 질문은 바로 그런 일을 한 셈이었습니다. 그러나 토마스 씨는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장애를 지닌 아이를 누구에게 맡길까 생각하시다 저에게 맡기셨습니다. 하느님의 계획 안에 이 아이는 7살까지만 살도록 되어 있었고, 저를 보시고 7년 동안 저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이제 때가 되어 하느님께서 데려가신 것입니다. 저에게는 이 아이가 태어난 것, 죽은 것 모두 특권이었습니다.”

그 가자는 기사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사랑하는 독자들이, 제가 무슨 말을 더 물어볼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가 은총 안에 살 때, 은총은 늘 우리를 도와줍니다. 은총이 반드시 고통을 없애주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사도들과 모든 성인들이 얼마나 큰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까? 소화 데레사는 그 큰 고통 속에서도 자기는 하느님의 손에 있는 장난감 공이라고 했습니다.

마더 데레사는 말했습니다. “저는 다만 하느님 당신 손에 들리 연필입니다. 원하시면 연필로 글씨를 쓰십시오. 원하시면 글씨를 지우십시오. 글씨를 쓰시든 지우시든 저는 다만 당신의 손에 들린 연필입니다.”

성 베드로를 보십시오. 그는 십자가를 두려워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에게서 용서를 받았기에 용서를 가르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베드로는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시 만났을 때, 예수님께서는 세 번이나 물으셨습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각각 세 번의 물음에 마음으로부터 사랑한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내 양들을 돌보아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목자로서 양들을 돌보기 위해 혼신을 다했습니다.

목자의 역할이 무엇입니까? 양들을 위해 생명을 내놓는 것입니다. 한때는 위기를 두려워했지만 그는 더 이상 두려움 없이 생명을 내놓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성전 聖傳 으로 전해져 오는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이제 그는 이전과는 다른 사람입니다. 그는 주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할 때 그가 말합니다. “나는 주님처럼 바로 십자가에 못 박힐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저를 거꾸로 못 박아 주십시오.”

이렇게 베드로가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되는데, 그 의미가 무엇입니까? 베드로가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 무슨 말을 한 것입니까? 베드로의 십자가를 떠올려 보십시오. 우리의 눈이 십자가를 보면서 어디를 보게 됩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면서 우리는 먼저 예수님의 얼굴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십자가를 보면서는 우리 눈이 먼저 그의 발을 바라보게 됩니다. 베드로가 말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나의 얼굴이 아닙니다. 나의 발을 보십시오. 이것은 나의 구세주께서 씻어주신 발이고, 나의 구세주께서 입 맞추어 주신 발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당하면서도 그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써 하느님 아버지의 얼굴을 드러내셨습니다. 베드로는 죽으면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드러냅니다. 그리스도인은 결코 죽지 않습니다. “나의 구세주가 입 맞추시고 씻어주신 발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라라. 나에게 와서 배워라.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우리는 제자입니다. 제자로서 배우는 것에는 끝이 없습니다. 십자가는 고통의 의미를 줍니다. 세상의 모든 것에는 끝이 있습니다. 영원히 계속되는 행복은, 영원히 계속되는 승리는, 영원히 계속되는 성공은 오직 그리스도에게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 삶에서 행복이나 승리나 성공이 없다면, 왜 그런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스도와 함께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십자가와 함께 우리 삶을 생각해 보십시오. 십자가 아래서 묵상해 보십시오. 그러면 위로를 얻게 될 것입니다. 때가 되면 우리를 영광으로 들어 올려주실 것입니다.

 

 

 

열다섯 번째 강의

착한 목자와 생명의 강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양 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자는 도둑이며 강도다. 그러나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들의 목자다.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주고,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그리고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 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이렇게 자기 양들을 모두 밖으로 이끌어 낸 다음, 그는 앞장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낯선 사람은 따르지 않고 오히려 피해 달아난다. 낯선 사람들의 목소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에게 이야기하시는 것이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하였다.

예수님께서 다시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 나보다 먼저 온 자들은 모두 도둑이며 강도다. 그래서 양들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올 뿐이다. 그러나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 (요한 10,1-10)

 

오늘은 쉽지 않은 날이었습니다. 우리 삶을 살펴보았기 때문이지요. 우리 삶에 쓴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도 예수님께서 쓴 것을 그냥 주시지 않고, 많이 쓰지 않게 처리를 해주시기 때문에 별로 크게 거부감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사랑 안에 머무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오늘 복음은 매우 아름다운 대목입니다. 이 복음 내용 안에 두 가지 요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께서 착한 목자라는 것이고, 둘째는 그가 오신 이유입니다. 우리가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오신 것입니다.

 

우선 당신이 착한 목자라는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당신을 착한 목자라고 하셨습니까? 거기에는 배경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목자와 양 데에 관계에 대한 배경입니다. 구약시대에 백성의 지도자를 목자로, 백성을 양 떼로 보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양을 목자에게 맡겼습니다. 그런데 몇 년의 기간이 지나자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우리는 에제키엘 34장에서 목자와 양 떼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목자가 거짓 목자로 돌변한 것입니다. 오히려 목자가 양 떼를 잡아먹기 시작합니다.

 

“불행하여라! 자기들만 먹는 이스라엘의 목자들! 양 때를 먹이는 것이 목자가 아니냐? 그런데 너희는 젖을 짜 먹고 양털로 옷을 해 입으며 살진 놈을 잡아먹으면서, 양 떼는 먹이지 않는다.” (에제 34,2-3)

 

목자는 양 떼를 돌보고 지켜야 하는데 오히려 잡아먹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집니다. 이스라엘에서 왕과 사제들이 하느님께 순명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더 이상 사제들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사람들이 그들의 목자들을 더 이상 존경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당신이 착한 목자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양 떼를 돌보기 위해서 왔다. 나는 거짓 목자와 다르다.

나는 문이다. 양들은 이제 문을 통해 들어오게 될 것이며 문을 통해 들어오면 생명을 얻고 생명을 보호받을 수 있다.

나는 양 떼를 안다. 착한 목자인 내가 양의 이름을 부르면 양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착한 목자의 특징은 ‘이름을 부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개인적인 사랑을 나타냅니다. 이 새 목자는 구약의 목자와는 다릅니다. 목자는 양 떼를 지킵니다. 양 떼가 안심하고 그 목자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습니다. 거짓 목자에게는 양 떼가 가까이 갈 수 없습니다. 착한 목자는 양의 이름을 알고, 이름으로 부릅니다. 양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실현됩니까? 요한복음서에서 양이 목자를 만나는 극적인 대목이 있습니다. 요한 복음 20장입니다.

마리아는 무덤으로 달려갔지만 무덤에 예수님의 시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밖에 서서 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무덤 쪽으로 몸을 굽혀 들여다 보니 하얀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앉아 있었습니다. 천사들이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하고 묻자, 마리아가 그들에게 대답했지요.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뒤에 돌아선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지만 그분이 예수님인지를 알아채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셨지만, 마리아는 그분을 정원지기로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그만 정원지기가 되셨습니다. 그분은 정원지기가 아니라 착한 목자입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이름을 부르시자, 이제 양인 마리아가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습니다. 마리아는 돌아서서 대답합니다. 히브리 말로 “라뿌니!” 하고 부릅니다. ‘스승님!’이라는 뜻입니다.

목자가 양의 이름을 부르고, 양은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습니다. 목소리를 통해 그분이 목자이신 것을 알아채자 슬픔이 사라집니다. 생명이 다시 찾아옵니다. 그분은 우리의 이름을 알고 계신 분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어둠 속에서 부르시고, 우리는 응답하게 됩니다. 이름을 알고 있고 이름으로 부른다는 것은 개인적인 친밀한 사랑을 나타냅니다.

 

시편 23편을 보십시오. 구약이 배경이지만, 착한 목자의 본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오

내 영혼에 생기를 돋우어 주시고

바른길로 나를 끌어주시니

당신의 이름 때문이어라.

 

제가 비록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니

당신께서 저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막대와 당신의 지팡이가

저에게 위안을 줍니다.

당신께서 저의 원수들 앞에서

저에게 상을 차려주시고

제 머리에 향유를 발라주시니

저의 술잔도 가득합니다.

 

저의 한평생 모든 날에

호의와 자애만이 저를 따르리니

저는 일생토록

주님의 집에 사오리다.

 

주님이 우리의 목자이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아쉬울 것이 없습니다. 그분이 우리를 푸른 풀밭에 데려가셔서 쉬게 하시고 물가로 끌어 주시어 목을 축여주실 것입니다. 때로 죽음의 골짜기를 간다고 하더라도 안심할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삶에서 고통을 당한다고 하더라도, 그분이 거기 계시면서 우리를 지켜주실 것이기에 위로를 받고 다시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착한 목자의 참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착한 목자로서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저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 너에게 생명을 되찾게 해주기 위해, 너의 죄 사함을 위해, 너에게 하느님 아버지를 알게 해주기 위해 나는 내 목숨을 바친다.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 여기서 ‘생명’이 뜻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우리말로 ‘생명’이라고 옮겼지만 ‘생명’은 곧 삶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좋은 삶을 살고 있다고 할 때 무슨 의미입니까? 좋은 직장을 가지고 있고, 좋은 집에 살고, 좋은 차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생각입니다. 예수님께서 좋은 삶이라고 말씀하실 때는 다른 의미입니다. 외적인 것이 아닙니다. ‘생명’이나 ‘삶’은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에제키엘 서 47장은 우리에게 생명이 흐르는 강에 대해 들려줍니다. 미래의 성전 모습을 그립니다. 그 성전에 제대가 있고, 그 제대 밑으로 생명의 강이 흐릅니다.

 

“그가 다시 나를 데리고 주님의 집 어귀로 돌아갔다. 이 주님의 집 정면은 동쪽으로 나 있었는데, 주님의 집 문지방 밑에서 물이 솟아 동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그 물은 주님의 집 오른쪽 밑에서, 제단 남쪽으로 흘러내려 갔다. 그는 또 나를 데리고 북쪽 대문으로 나가서, 밖을 돌아 동쪽 대문 밖으로 데려갔다. 거기에서 보니 물이 오른쪽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가 나를 데리고 돌아갈 떼에 보니, 강가 이쪽저쪽으로 수많은 나무가 있었다. 그가 나에게 말하였다. ‘이 물은 동쪽 지역으로 나가,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로 들어간다. 이물이 바다로 흘러 들어 가면, 그 바닷물이 되살아난다. 그래서 이 강이 흘러가는 곳마다 온갖 생물이 우글거리며 살아난다. 이 물이 닿는 곳마다 바닷물이 되살아나기 때문에, 고기도 아주 많이 생겨난다. 이렇게 이 강이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살아난다.” (에제 47,1-2, 7-9)

 

신약에서는 요한 묵시록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천사는 또 수정처럼 빛나는 생명수의 강을 나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 강은 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에서 나와, 도성의 거리 한 가운데를 흐르고 있었습니다. 강 이쪽저쪽에는 열두 번 열매를 맺는 생명 나무가 있어서 다달이 열매를 내놓습니다. 그리고 그 나뭇잎은 민족들을 치료하는 데에 쓰입니다. 그곳에는 더 이상 하느님의 저주를 받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도상 안에는 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가 있어, 그분의 종들이 그분을 섬기며 그분의 얼굴을 뵐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마에는 그분의 이름이 적혀 있을 것입니다. 다시는 밤이 없고 등불도 햇빛도 필요 없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그들의 빛이 되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영원무궁토록 다스릴 것입니다.” (묵시 22,1-5)

 

구약에서와는 다른 생명의 강입니다. 요한은 환시를 봅니다. 이 생명이 어디에서 시작됩니까? 하느님의 어좌 밑에서 시작됩니다. 이 생명의 강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가는 곳마다 생명이 되살아난다는 것입니다. 이 강이 흐르는 곳은 비옥합니다. 강이 바다에 이르면서 소금기를 몰아냅니다. 그렇게 하여 물고기가 살 수 있게 됩니다. 모든 것이 완전하게 됩니다. 땅은 비옥해지고 생명은 풍부해지고 번영을 이루게 됩니다. 생명의 강이 흘러가는 곳마다 생명이 되살아납니다. 거기에 열매 맺는 놀라운 나무가 있습니다. 생명 나무입니다.

그 생명 나무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그 나무는 열두 번 열매를 맺습니다. 그래서 매달 열매가 풍성합니다. 모든 사람이 그 열매를 즐길 수 있게 됩니다. 나무의 잎은 약이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생명의 강기슭에서 자라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강에서 물을 빨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 나무는 사막에 심겨진 것이 아닙니다. 시들지 않습니다. 미네랄이 풍부한 열매를 맺습니다. 계절과 상관없이 열두 달 내내 열매를 맺습니다. 잎은 싱싱하고 늘 푸른 상록수입니다. 잎은 치유 효과를 지니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바로 그 나무입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보호 아래 심긴 나무이며, 하느님의 강가에 심긴 시들지 않는 나무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계절에 상관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가는 곳마다 생명이 다시 살아납니다. 기쁨이 다시 돌아오고, 치유가 일어납니다. 그리스도인은 치유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생명의 강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진리이신 분을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보호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섭리 아래 심긴 나무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치유자입니다. 여러분은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의 거룩함이 다른 사람들을 어루만져 줍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을 섬기는 데는 계절이 없습니다. 주님이 오시면 여러분은 열매를 맺습니다. 그것이 바로 마더 데레사의 삶이었습니다. 요셉 빌 신부님의 삶이기도 합니다. 그분은 80세로 선종하실 때까지 결코 쉬지 않았습니다. 열매로 가득 찬 삶을 사시다가 가셨습니다.

사람들이 요셉 빌 신부님을 치유자라고 불렀습니다. 왜 우리가 그분을 치유자라고 불렀습니까? 그분은 생명의 강에 뿌리를 내린 나무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성공의 비결이며, 요셉 빌 신부님의 성공의 비결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마다 생명이 되돌아왔습니다. 하혈병을 앓던 여인을 보십시오.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을 때 그녀에게 치유가 일어났습니다.

생명 나무의 잎은 약효가 있습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것이 생명인지를 잘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우리가 생명 나무가 되도록 도와주십니다. 우리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생명을 얻도록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제자가 되고 싶어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성령을 받으면, 나보다 더 큰 치유의 능력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책임입니다. 지금이 바로 우리가 게으름에서 벗어나 새 생명으로 살 때입니다. 지금이 바로 그때입니다. 우리 마음 깊은 고에서 생명의 강이 흐르게 해야 합니다. 그 강이 성전의 제단에서 흘러내린 것처럼 흐르게 해야 합니다. 그 강이 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에서 나와, 도성의 거리 한가운데를 흐른 것처럼 흐르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땅을 비옥하게 할 때입니다. 어떻게 할 수 있느냐고요?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분의 제자라는 타이틀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타이틀은 영원합니다.

 

 

 

열여섯 번째 강의

내적 치유

 

가톨릭교회 안에 있는 전통적인 신심행위 몇 가지에 대해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가 전통적인 신심행위들을 실천하면 우리뿐만 아니라 가족들 안에서도 치유가 일어나고 사업이 번창할 수도 있습니다. 적어도 가족 안에 일치와 기쁨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첫째, 십일조입니다. 우리는 수입의 십 분의 일은 교회 건설을 위해 서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드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 수입의 십 분의 일은 주님의 것이라고 여겨야 합니다.

우리는 사회, 정치적인 책임과 의무뿐 아니라 종교적인 책임과 의무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저에게 사업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조언을 구합니다. 그러면 저는 곡 십일조를 내는지 물어봅니다. 대부분이 아니라고 답합니다. 그러면 저는 교회를 위해 꼭 십일조를 내라고 말합니다. 저는 온 세계를 다니면서 여러 나라에서 이 이야기를 했고, 십일조를 내기 시작한 사람들이 변화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몇 주 전에 어느 아가씨의 결혼식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2년 전 제가 지도하는 피정에 왔던 자매였는데, 당시 남자친구가 없었습니다. 그녀는 제게 나이는 점점 들어가는데 남자친구가 없다는 고민을 털어놓았습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당신은 아주 좋은 직장을 가지고 있는데, 십일조를 냅니까?” 그녀가 아니라고 답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십일조에 대해 설명해 주고 십일조를 내는 일을 꼭 실천하도록 권유했습니다. 그녀는 꼭 그렇게 하겠다고 저에게 약속했고, 불과 1주일 만에 남자친구가 생겼습니다. 몇 주 전에 마침 제가 그곳에 다시 갔을 때, 그들이 결혼하기를 원했습니다.

이것은 마음의 미덕입니다. 은행에 잔고가 없고 내가 실제 돈을 갖고 있지 않으면 할 수 없지만, 많이 낼 수 있는 형편이 되면 많이 내는 것이 좋습니다. 주님께 인색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합니다.

 

어리던 내가 이제 늙었는데 의인이 버림을 받음도, 그 자손이 빵을 구걸함도 보지 못하였다. 그는 늘 너그럽게 빌려주어 그 자손이 복을 받는다. (시편 37,25-26)

 

하느님의 말씀은 사실입니다. 의인은 잘못될 수 없습니다. 의인의 자손은 구걸하지 않아도 됩니다. 물론 사람들 눈에 의인이 벌을 받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다 하느님의 더 좋은 계획 안에서 일어나는 일시적인 일입니다.

저의 어머니는 훌륭한 믿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지닌 신앙에 대해 못마땅해하셨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신앙에 관한 한 전혀 타협하거나 양보하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어머니의 신앙 덕분에 우리 형제들이 모두 잘 산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우리 형제들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말씀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가 있지만 신앙이 있기 때문에 쉽게 극복할 수 있습니다.

제 조카가 아주 어리지만 가족의 저녁기도를 이끌기도 합니다. 우리는 축복을 받으면 그 축복을 다음 세대에 넘겨주어야 합니다. 5살짜리 조카가 제게 자기 머리가 좋아지도록 기도해 달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렇게 해 주겠다고 했지요. 그러면서 너도 기도해야 한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서 저에게 자기가 여전히 머리가 좋지 않으니 삼촌이 기도를 잘 안 해주었나 보다고 말합니다.

저는 조카를 보면서 행복했습니다. 적어도 그 아이가 하느님을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 엄마가 그렇게 말하라고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오늘날 많은 이가 모든 것을 알약으로 해결하려 합니다. 심지어 아이들이 소란스럽다고 정신과 약을 먹입니다. 잘못된 것입니다.

아프리카에서 저희 수도원은 50명이 넘는 고아를 돌보고 있습니다. 저희 수도원에 27살 된 젊은 여성이 식복사 로 있습니다. 남편은 없고 아이만 세 명 데리고 사는 가련한 처지였기 때문에 3년 전에 수도원에서 식복사로 일하도록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1달이 지나자 자기가 거짓말을 했다고 실토했습니다. 실은 아이가 네 명이라고 하면서, 아이 하나를 더 데리고 온 것입니다. 네 명의 다른 남자에게서 네 명의 아이를 낳은 것입니다. 달리 방법이 없어 그 식복사가 수도원에 살면서 아이들을 키웁니다.

수도원이 아이들의 생활을 책임집니다. 옷을 사주고 교육을 시킵니다. 그러나 수도원에서 돈을 대주기 때문에 아주 엄격하게 합니다. 12월이 되면 저는 아이들을 데리고 쇼핑을 가서 직접 옷을 사줍니다. 아이들에게 아버지가 없다는 것을 느끼지 않게 해주기 위해서입니다.

우간다의 아주 가난한 보건소에서 아기를 낳은 여자가 있는데, 돈을 낼 사람이 아무도 없고 보살필 사람도 없다고 하여 제가 차로 보건소를 찾아갔습니다. 보건소는 나이로비에서 수녀님들이 운영하는 그런 시설을 갖춘 좋은 보건소가 아닙니다. 보건소에 가 보니, 아기를 낳은 여자는 16살도 안 된 소녀였습니다. 이 소녀가 아기를 낳자, 남자친구가 여자를 버린 것입니다. 남자친구는 아들을 원했는데 딸이라서 버렸다고 합니다. 16살의 소녀는 아기를 낳고 당장 먹을 것도 없어 굶주려야 하는 판이었습니다. 세상에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작은 토끼 같은 아기를 보면서 너무나 가련했습니다. 인간이 이런 상황에 처하는 것이 너무나 가여웠습니다.

저는 3개월 정도 먹고 살 수 있는 식품을 사서 그 소녀를 집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 소녀의 어머니는 딸이 임신을 하자 딸을 버린 것입니다. 제가 어머니에게 딸을 받아주도록 간청했습니다. 저는 그 후 3년 동안 그 여자와 아이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3년이 지난 후에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귀여운 여자아이가 제게 달려오면서 저를 보고 ‘아빠’라고 불렀습니다. 그 아이는 제 무릎에 앉아 무척 흐뭇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자기 머리를 제 가슴에 꼭 묻고 저를 껴안고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이 아이가 왜 나를 ‘아빠’라고 부르는지 저는 의아했습니다.

아이 엄마가 나왔을 때 저는 그녀를 알아보았습니다. 보건소에서 집으로 데려다 주었던 그 여자였고, 아이는 그녀의 딸이었습니다. 그녀가 제 사진을 가지고 있었고, 아이에게 보여주며 “이 사람이 네 아빠다.”라고 가르쳐 주었던 것입니다. 저는 그 여자에게 절대 아이가 오해하게 만들지 말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기쁨에 차 있었고, 행복해 보였습니다. 작은 일이지만 하느님을 위해 아름다운 일이었습니다. 저와 수도원 공동체 식구 모두가 기뻐했습니다.

저희 수도원에 많은 사람이 옵니다. 자신들을 위해 무너가 해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모든 일을 다 해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작은 일을 특별한 방법으로 할 수 있습니다.

 

“내적 치유’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여러분도 내적 치유가 필요합니까? 왜 그렇습니까?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인이고 열심히 성당에 나가고 성사를 보고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굳이 내적 치유가 필요합니까?

저도 삶 안에서 변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왜 우리에게 내적 치유가 필요한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내적 치유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 결과를 알아듣게 되었습니다. 결국 삶의 체험이 다른 어떤 이론보다도 실제로 더 도움이 되었던 것입니다.

제가 우리 집안에 대해 말씀 드렸지만, 저는 남인도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부모님이 계시고 2남 2녀 중의 장남입니다. 제 어머니는 아주 신앙심이 깊고 좋은 분입니다. 저의 아버지는 좋은 분이고 우리를 위해 열심히 일하시지만 약간 무뚝뚝한 남자입니다.

아버지는 우리가 당신에게 신체적 접촉을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니까 아버지를 껴안거나 만지거나 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모든 가정이 다 그런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가 우리를 보살피는 것은 알지만 아버지의 사랑을 그다지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에게서는 보살핌과 더불어 따뜻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아버지가 이른 새벽에 일하러 나가시고 밤늦게 돌아오시니까 우리는 늘 아버지의 부재를 느꼈습니다.

아이들에게는 아버지의 존재가 필요합니다. 어머니가 이것을 알아차리시고 대신 아버지의 몫까지 하려고 했지만, 분명한 한계가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사랑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제 여동생이 4살 때 아버지에게 달려가서 무릎에 앉았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동생을 밀쳐내셨습니다. 동생이 울면서 아빠는 왜 자기를 사랑하면서 밀쳐내는지 물었습니다. 동생은 아버지의 따뜻한 사랑을 받고 싶었지만 아버지는 그 사랑을 표현할 줄 몰랐습니다. 보통으로 딸은 어딜 때 엄마보다 아빠의 사랑을 더 받고 싶어합니다. 아버지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2년 전입니다. 제가 휴가로 고향에 갔다가 다시 아프리카로 돌아가게 되어 기차역으로 갈 때 아버지가 배웅을 나왔습니다. 그때 아버지가 저에게 말했습니다. “아들아, 일어서 봐라.” 제가 일어서자 아버지가 저를 껴안았습니다. 제가 태어나서 31년 만에 처음으로 아버지에게서 포옹을 받은 것입니다.

아버지가 저를 안아주시는 순간 몸에서 화학적 반응이 일어났습니다. 우선 눈물이 앞을 가려서 어두워졌고, 세상이 빙빙 돌았습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아버지가 떠나신 후 저는 기차 안에서 한참을 더 울었습니다. 6시간 기차를 타고 가는 동안, 예수님께서는 제가 과거를 방문하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저는 늘 좋은 환경에서 아무 문제 없이 자란 좋은 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좋은 교육을 받았고, 명석하고 완벽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제게 부족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제 성격에서 드러나곤 했습니다.

저는 화를 내고 싶지 않았지만, 가끔 저도 모르게 화가 나는 저 자신을 발견하곤 했습니다. 성격이 급합니다. 친구들을 다정하게 대하지 못합니다. 저는 결코 울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큰 고통이 와도 울지 않았습니다. 언젠가 한번은 제가 울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저를 안았을 때 저에게서 울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칠 줄 모르고 계속 울었습니다. 그 후 고통을 느낄 때 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큰 치유입니다. 저에게서 내적 치유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제 저는 별로 화가 나지 않습니다. 성격도 많이 변했습니다. 그렇게 급하지도 않고 사람들에게 다정하게 대합니다.

이것이 제 삶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제가 자신을 완벽하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제 마음 안에 큰 빈 공간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사랑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저를 안았을 때 저에게 부족했던 것, 그 큰 빈 공간이 채워졌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이 저의 부족함을 보상해 주었을 때 저에게 내적 치유가 일어난 것입니다.

 

저는 젊은이들이 왜 알코올이나 마약이나 부도덕한 삶에 빠지는지 이해합니다. 사랑의 부족이나 결핍 때문입니다. 부모의 사랑이 부족하거나 결핍되어 있을 때 아이들은 잘못된 길로 빠집니다. 부모가 이혼하게 되면 아이들이 잘못된 길로 빠집니다. 인간에게는 텅 빈 부분을 다른 무엇으로 채우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수도원의 식복사는 자기 아버지에게서 전혀 사랑을 받지 못했습니다. 14살에 70살 정도 되는 남자를 만나, 그에게서 아버지를 느꼈습니다. 그를 아버지로 여기며 그에게서 사랑을 구한 것입니다. 그 남자가 자기의 텅 빈 공간을 채워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2년이 지났을 때, 그 남자는 그녀의 텅 빈 공간을 채원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녀를 망가뜨렸습니다. 그녀를 강간한 것입니다. 그래도 다행이었던 것은 그녀의 어머니가 믿음 안에서 그녀를 키웠기 때문에 술이나 마약으로 빠지지 않고 미혼모로서 아기를 키우며 다시 새 삶을 찾은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마약을 하거나 우울증에 빠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아닌 다른 것으로 우리의 텅 빈 부분을 채우려 하면 안 됩니다. 젊은이들은 부도덕한 행위를 하면서 그것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들의 빈 마음을 어떻게 채워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지요.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부정적인 것에 빠지지 않도록 우리가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제 어머니는 아버지가 신앙을 갖고 아이들을 사랑해 주기를 얼마나 많이 기도했는지 모릅니다. 미사 봉헌과 단식과 기도를 많이 하셨습니다. 그래도 31년을 기다리셔야 했습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는 어머니에게 승리를 가져다 주셨습니다.

모든 것에 때가 있습니다. 씨를 뿌릴 때가 있고 추수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추수만을 원합니다. 씨 뿌리는 것은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씨 부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각각의 신심행위, 기도, 성체조배, 성사생활을 통해 씨를 뿌리면 때가 될 때 추수를 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긴 것을 뽑을 때가 있다. (코헬 3,1-2)

 

무엇이 아버지에게 변화를 가져오게 했는지 아십니까? 아버지가 하시던 사업이 망하게 되었고, 어머니가 위암이라는 중병이 들었을 때입니다. 이런 비극이 전화위복이 되었습니다. 고통이 아버지를 거듭나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시련의 과정을 통해 아버지는 서서히 변화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악에서도 선을 이끌어 낼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하느님께 감사 드립니다. 아버지 사업이 망해서 가난하게 된 것과 어머니의 병환에 대해 감사 드립니다. 그것들을 통해 아버지를 되찾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더 좋은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이런 배경을 가지고 하느님의 말씀을 되돌아 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성경에 바탕을 두어야 합니다. 성경은 철학에 관련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삶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제 아버지가 아프리카까지 전화를 하십니다. 하루 세 번 하시는 날도 있습니다. 저의 신학생 시절에는 도통 정화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들아, 어머니가 너 잘 있다고 전해 주는데 너에게 전화를 할 필요가 뭐가 있겠니?” 그런 아버지의 태도가 변하셨습니다.

만일 제가 예수님을 모시지 않는 삶을 살았더라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만일 저에게 신앙이 없었다면 저는 ‘한 번도 포옹을 해주지 않은 얼마나 나쁜 아버지를 가졌는가?’라고 불평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아버지를 원망하고, 아버지 때문에 이 지경이 되었다고 온통 아버지 탓만 하면서 살았을 것입니다.

믿음을 지니고 있다고 해서 반드시 치유가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말했습니다. “우리는 가진 것만 줄 수 있다.”

아버지를 생각하면 참 불쌍하다고 느낍니다. 주사를 잘못 맞아 장애인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부모, 형제들에게 거의 버림받은 셈이었습니다. 형제들이 재산을 가로챘습니다. 아버지는 이런 일로 마음이 부서진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마음 안에 사랑을 가지고 있지 않은데 어떻게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줄 수 있었겠습니까? 아버지는 결코 우시지 않았습니다. 장애인인데도 그것 때문에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열심히 일해서 자수성가하신 분입니다. 그러나 마음 안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우리가 부족한 것은 아버지가 채워주시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부모님은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니 어디서 보상을 받겠습니까? 이제 자녀들이 해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아버지를 사랑하고 아버지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아버지는 당신의 삶에서 잃어버린 것들을 아내와 자녀들을 통해 되돌려 받았습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을 우리는 다시 되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받은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되돌려 주어야 합니다.

아버지는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셨습니다. 이제 모든 것을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이 되셨습니다. 지금은 손자 손녀들이 아버지의 가슴에 안겨 자랍니다. 이것이 모두 아버지가 믿음을 갖게 되면서 일어난 일입니다. 믿음의 선물은 패키지로 옵니다.

은행의 잔고가 아무리 많아도 그 돈으로 그런 일은 할 수 없습니다. 믿음만이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때로 신앙 때문에 부서지는 일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완전히 파괴되는 일은 없습니다. 생명의 강이 우리 안에 흐르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을 나누어 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치유자입니다.

사람들은 우리에게 부정적인 말을 합니다. 우리가 남이 말하는 것을 듣고 싶어 합니다. 거기에 따라 우리의 기분이 좌우됩니다. 이제 그것을 그만두어야 할 때입니다. 이제 오직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만 들어야 합니다. 남의 말들은 다 쓰레기입니다. 쓰레기로 채우면 냄새가 나기 마련입니다.

빛으로만 채워야 합니다. 예수님에게서 모든 것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소박함, 단순함, 그리고 겸손입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 삶에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의 말이나 행동이나 삶에서 필요한 것은 소박한 믿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더 소박한 믿음을 지닐 때, 오히려 장애물이 더 생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전쟁터의 병사들과 같습니다. 언제나 적과 싸워야 합니다. 우리 주변에 늘 악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우리 앞에는 좁은 문이 놓여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모두의 마음 안에 작은 돌이 들어 있습니다. 때로는 그것을 알아채지도 못합니다. 우리 모두에게 아픔이나 상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내게 한 행동을 잊어버릴 수가 없어서 마음이 아픕니다. 잊으려고 하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면 불평이나 고통이 서서히 사라집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성령께서 그 아픔을 가져가십니다.

요셉 빌 신부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의사들은 많은 것을 할 수 있지만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예수님을 통해 일하시는 하느님의 능력에 대해 무지합니다.

우리에게는 내적 치유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성체를 통해 우리의 아픔을 치유해 주십니다. 우리에게 상처를 준 그것을 잊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가 느끼는 아픔의 강렬함을 가져가시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아픔 때문에 하느님을 더 찬미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그런 좋지 못한 경험이 없었다면, 예수님을 삶에서 잊어버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모든 것이 하느님의 계획 아래에서 이루어집니다. 이 모든 것을 우리는 믿음의 눈으로 보고 알아들어야 합니다.

행복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깨끗한 마음입니다. 그것이 기쁨과 행복의 요건입니다. 많은 사람이 일반적으로 ‘정신’이라고 표현하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마음’이라고 들려줍니다. 우리에게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떨 때는 그 마음을 고쳐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 깨끗한 마음을 제게 만들어 주시고 굳건한 영을 제 안에 새롭게 하소서. (시편 51,12)

 

우리를 올바른 길로 이끌어 주시는 올바른 영이 필요합니다. 누가 올바른 영입니까? 바로 성령이십니다. 우리에게는 성령이 필요합니다. “하느님, 깨끗한 마음을 제게 만들어 주시고 굳건한 영을 제 안에 새롭게 하소서.”

굳건한 영은 약효를 지니고 있습니다. 마음의 병에 좋은 약이 됩니다. 어떤 사람은 부정적인 생각이나 말을 지니고 환영을 보기도 합니다. 그것은 올바른 영이 아닙니다. “하느님, 깨끗한 마음을 제게 만들어 주시고 굳건한 영을 제 안에 새롭게 하소서.” 이 시편 말씀을 반복해서 읊으십시오. 성령께서 우리 안에 있는 강렬한 고통을 가져가실 것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를 빛으로 채울 것입니다. 자주 이 구절을 외우십시오.

아프리카 탄자니아의 어느 본당에 픽업트럭이 있습니다. 19년이나 된 아주 낡은 차입니다. 거기서 본당뿐만 아니라 35개나 되는 공소를 다녀야 하는데 길을 다 모르기 때문에 운전을 해줄 기사가 필요합니다. 운전기사가 차를 잘 닦아놓지요. 시트커버도 바꾸고 차 안에 향수도 뿌려놓습니다.

그런데 미사가 끝나고 나와 보면 차가 시동이 안 걸리거나 조금 가다가 서버립니다. 엔진오일이 새거나 아니면 보충수가 떨어졌습니다. 기사가 엔진오일을 체크하거나 물을 채워 넣은 일은 하지 않고 차 겉만 본 것입니다.

우리 삶도 같습니다. 우리 마음이 자동차의 엔진과 같습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을 체크해야 합니다. 차에서 엔진이 중요하지 겉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자극하면 때로 그 결과로 고통을 받을 수 있습니다. 마음을 잘 돌봐야 합니다. 마음을 돌볼 때 올바른 영을 따라야 합니다. 악한 영을 따라가면 그 결과 큰 고통을 받을 수 있습니다. 허락 받지 않은 치유방법을 따를 때 좋지 않은 결과를 낳게 됩니다.

예를 들어 뉴에이지 책은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이끕니다. 그러면 결과적으로 마음의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마음에 혼란이 오고 두려움이나 안달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나아가 우울증에 걸리게 되고 자살 충동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너무 끔찍한 일입니다.

우리 마음을 혼란하게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시편 51편을 자주 기도 드려야 합니다. “하느님, 깨끗한 마음을 제게 만들어 주시고 굳건한 영을 제 안에 새롭게 하소서.” 우리가 기도하면 예수님께서 도와주십니다.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은총을 주십니다. 그것이 제가 눈으로 목격하고 삶에서 체험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십니다. 우리가 과거의 아픈 삶의 노예로 살도록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다만 우리의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아버지, 저는 과거 죄의 노예였음을 고백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들려줍니다.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해줄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나와 함께라면 너희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우리의 약함이나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며 자유롭게 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그분이 도와주십니다. 씨를 뿌릴 때가 있으면 거둘 때가 있습니다.

 

 

 

열일곱 번째 강의

고해성사

 

우리가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의 마음에 더 가까이 나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아무런 편견이나 두려움 없이 자유로운 마음으로 그분께 다가가야 합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하시는 위대한 일에 대해 감사드릴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구체적인 방법이 고해성사입니다. 교회에서 고해성사는 치유를 가져오는 역할을 합니다.

고해성사가 무엇입니까? 고해성사를 이해하는 것이 참 쉽지 않습니다. 특히 서구에서 그렇습니다. 40년 동안 성사를 보지 않으면서 성체는 받아 모시는 사람을 만납니다. 그들은 왜 고해성사를 보아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그냥 예수님께 말씀드리면 되지 않느냐고 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반쪽짜리 의사입니다. 반쪽짜리 의사가 사람을 죽인다고 말씀드렸지요. 많은 사람들이 교회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무시하며 그냥 살고 싶은 대로 삽니다. 고해소는 가톨릭교회의 병원입니다.

현대 심리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토머스 톰슨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죄는 용서받을 수 있다. 하느님께서 용서하시는 분이니까. 그런데 신경체계에 대한 죄를 지으면, 신경체계는 우리를 용서하지 않는다.” 신경체계에 저지른 죄는 무엇입니까? 마약, 부도덕한 삶 등입니다. 우리가 신경체계를 약하게 하면 신경체계는 우리를 용서해 주지 않습니다. 신경체계가 약한 그대로 남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올바른 영성을 지니고 영적으로 사는 사람들이 더 장수한다고 합니다. 타임지에도 영적인 활동을 더 많이 하는 과학자들이나 심리학자들이 비교적 더 장수한다는 기사가 난 적이 있다고 합니다. 의사들도 일반적으로 좋은 영성을 가지고 있는, 다시 말해 영적인 삶을 사는 사람을 치료하기가 훨씬 쉽다고 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약 처방도 두 배로 하게 된다고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아도 고해성사가 아주 중요합니다.

 

고해성사는 누가 만든 것입니까? 용서는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죄를 용서할 수 있는 힘을 지닌 분은 오직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일어나 걸어가라.”

이 말이 함축하고 있는 뜻은 우리 병의 원인이 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죄를 용서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모든 병이 죄 때문에 생긴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 죄 사함의 능력을 사도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사도적 전통에 의해 이 성사가 유용하게 작용합니다. 성경적 배경을 살펴보면 고해성사에 대한 의심이 풀리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나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마태 16,18-19)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미리 알려 주셨고, 부활 후에 처음 제정하신 성사가 고해성사입니다.

 

이렇게 이르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요한 20,22-23)

 

이 성경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성령을 주시면서 그들의 힘을 강하게 해주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받은 능력을 사도들에게 나누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받은 능력으로 사도들이 이 성사를 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이 능력을 누구에게서 받았느냐고 묻습니다. 어떤 권위로 죄를 용서하느냐고 물은 것이지요.

사도 바오로가 말합니다.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해의 직분을 맡기신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2코린 5,18) 사도들은 이 직분이 예수님을 통해서 그들에게 맡기신 것이라고 분명하게 대답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다시 직분에 대한 의문을 제기합니다. 가톨릭교회 안에서 사도들을 잇는 사제들에게 이 직분이 주어졌다면 사제들이 어떤 권위를 지니는가에 대한 물음입니다. 사제도 사람이니까 죄인인데 어떻게 용서하는 권한을 가질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입니다. 그 대답이 코린토 2서 5장 20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절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권고하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여러분에게 빕니다.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절입니다. 시절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제가 한국에 오기 위해 비자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대사관에 가서 비자를 신청했습니다. 대사관에 나와 있는 사절들이 하는 역할은 무엇입니까? 그들은 대한민국 정부를 대표합니다. 우리는 그들을 사절이라고 부릅니다. 사제는 그리스도의 사절입니다. 고해소 안에서 사제는 그리스도를 대표합니다. 고해소 안에서 사제 앞에 있을 때 그리스도 앞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 죄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자비를 죄인이나 가난한 사람을 통해 드러내십니다. 죄인이나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면 우리가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잘 모를 것입니다. 예수님께 왔던 사람들이 기쁨으로 눈물을 흘리며 돌아갑니다. 제가 사제 된 지 겨우 5년이지만 매일매일 이것을 체험합니다. 예수님께서 사제들을 통해 당신의 일을 계속하십니다. 여러분은 사제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특별히 사제성소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습니다. 주님의 포도밭에서 일할 더 많은 일꾼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의 사절이 필요합니다.

사람들이 또 다른 물음을 던집니다. 기도모임이나 피정에 가서 죄를 고백하면 치유를 받느냐고? 치유에 대한 문제입니다. 기도하고 묵상을 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성 야고보가 대답합니다.

 

그러므로 서로 죄를 고백하고 서로 남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병이 낫게 될 것입니다. 의인의 간절한 기도는 큰 힘을 냅니다. (야고 5,16)

 

죄를 통회하고 고백하는 거기에 치유가 일어납니다. 고해성사 안에 치유가 있습니다. 고해성사를 보면서도 용서를 받았다고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고백을 하고 나오면서 생각합니다. “사제가 정말 내 말을 잘 알아들었을까?” “내가 정말 죄 사함과 축복을 받았을까?” 신부님이 자기 고백의 내용을 잘못 알아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또 다른 신부를 찾아갑니다. 그래서 이 신부님, 저 신부님에게 같은 죄를 여러 번 고백합니다. 그런 사람은 교황님한테 사죄경을 들어도 만족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한 번의 고백으로 충분합니다.

어떤 사람은 전혀 고해성사를 보지 않기 때문에 문제이고, 또 어떤 사람은 같은 죄에 대해 성사를 너무 자주 보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세심증에 걸린 것입니다. 성 이냐시오도 한때 세심증에 시달리다가 그것이 악마에게서 오는 유혹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미덕은 중요에 있습니다. 성 요한이 답합니다. “우리가 우리 죄를 고백하면, 그분은 성실하시고 의로우신 분이므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주십니다.” (1요한 1,9)

우리가 단순하게 죄를 고백하는 그것으로 죄를 용서받게 됩니다. 여전히 사람들은 이 성사가 과연 얼마나 유효한지에 대해서 물음을 던집니다. 사람들이 만은 구실을 대면서 이 성사에 대해 저항을 합니다. 주님께서는 그것을 아시고 성경 안에 해답을 마련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마음의 문을 닫고 어둠 속에 삽니다. 눈만 뜨면 빛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어둠 속을 걸어갑니다.

새 차를 사면 차에 대한 사용설명서를 줍니다. 회사는 고객이 그 사용설명서를 잘 읽고 차를 사용하기를 원합니다. 마찬가지로 교회 안에 성사를 위한 안내서가 있습니다. 만은 사람들이 그것은 오래된 낡은 전통일 뿐, 우리에게는 더 이상 유효하지 못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리를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진리는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래된 것이라고 무시할 수 없습니다. 휘발유는 늘 휘발유입니다. 휘발유가 오래되었다고 오렌지 주스가 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같은 하느님이십니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하느님은 진리이십니다.

성사를 잘 보기 위한 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고해성사는 죄를 뉘우치고 고백하여 용서받는 일로 성찰, 통회, 정개, 고백, 보속의 다섯 단계로 되어 있습니다.

첫째, 죄를 기억하고 성찰하는 것입니다. 성찰은 깊이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우선 죄를 기억하기 위해 하느님의 현존 앞에서 침묵 중에 머물러야 합니다. 자신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서 자기가 지은 죄를 알아내는 것입니다. 우리의 과거로 돌아가서 죄를 짓게 된 연유와 상황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와 함께 과거를 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죄책감만 느낄 수 있습니다.

둘째, 통회입니다. 통회에서는, 기억하고 성찰한 것에 대해 자기 죄를 인정하고 진심으로 뉘우치고 가슴 아파하는 것입니다.

셋째, 정개 定改 입니다. 정개는 새로운 결심입니다.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정개에서 굳은 결심이 서지 않는다면 죄는 다시 반복될 수밖에 없습니다. 통회하는 마음으로 결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젊은이들이 말합니다. “교회는 왜 우리를 질투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교회는 우리를 도와주지 않습니다. 제가 여자 친구와 지내는 것이 뭐가 그리 잘못된 것입니까? 지금은 동거를 하지만 후에 결혼할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가 그렇게 하라고 하니 성사는 보지만 다시 동거를 하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성사가 무슨 효과가 있습니까? 이것이 성사의 문제입니까? 성사를 통해 오늘까지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고, 내일 다시 죄를 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고해성사입니까? 스스로를 속이고 배반하는 것입니다.

죄는 인간적입니다. 죄를 통회하는 것은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죄에 머무르는 것은 악마의 힘입니다. 죄의 속박에서 벗어나기가 어렵습니다. 다시 죄짓지 않겠다고 결심을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키기가 어려워지는 일이 생깁니다. 교회가 이것을 이해합니다.

결심을 하는데 왜 다시 죄를 짓게 될까요? 세상이 오염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죄를 짓게 되면 성사를 보고, 다시 새롭게 결심을 하는 것입니다. 설령 똑같은 죄를 짓더라도 그냥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고백할 때, 그분이 사랑으로 받아주십니다. 그래서 고해성사는 사랑의 성사입니다.

넷째, 고백입니다. 고백은 말 그대로 고해성사를 주는 사제 앞에서 성찰하고 통회한 죄를 있는 그대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요셉 빌 신부님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신부님께 고백을 하면서 말했답니다. “신부님, 제가 밧줄을 하나 훔쳤습니다.” 그런데 그 밧줄 끝에 소가 달려 있었습니다. 고백은 솔직 담백해야 합니다. 소를 훔쳤으면, 소를 훔쳤다고 해야 합니다. 악마가 말합니다. “고해성사를 하러 가라. 그러나 죄를 있는 그대로 다 말할 필요는 없다.”

하느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어떻게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까? 하느님의 선하심을 믿고 용서를 받으려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죄를 고백할 때 그 죄에 대해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고백은 상담이 아닙니다. 단순하고 간략하게 있는 그대로의 죄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마음가짐이 가장 중요합니다. 아무것도 숨기려고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를 단순하게, 그리고 간략하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늘에 서 오는 놀라운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성사의 힘을 보게 될 것입니다.

다섯째, 보속입니다. 보속이란 사제가 고백하는 사람에게 지은 죄를 보상하고 마음으로 기도, 사랑의 실천, 생활 개선 같은 것들을 하도록 실천 사항을 주는 것입니다. 저는 제 영적 지도신부님을 통해 작년에야 알게 된 것이 있습니다. 제 영적 지도신부님께서 저에게 말씀해 주신 것은 우리가 성사를 본 후에 하느님께 감사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사를 통해 기쁨을 누리게 되는데, 그것에 대해 감사하며 머무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더러운 영이 사람에게서 나가면, 쉴 데를 찾아 물 없는 곳을 돌아다니지만 찾지 못한다. 그때에 그는 ‘내가 나온 집으로 돌아가야지.’ 하고 말한다. 그러고는 가서 그 집이 말끔히 치워지고 정돈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면 다시 나와, 자기보다 더 악한 영 일곱을 데리고 그 집에 들어가 자리를 잡는다. 그리하여 그 사람의 끝이 처음보다 더 나빠진다.” (루카 11,24-26)

 

예수님께 감사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찬미드려야 합니다. 성사 후에 우리 마음을 감사로 채우는 일은 아주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사 후에 우리 마음이 깨끗해진 것을 보고 다시 자기만 아니라 더 악한 영 일곱을 데리고 와서 자리를 잡습니다. 상황이 더 나빠지는 것이지요. 악이 계속해서 우리 마음에 들어오지 모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 마음을 늘 감사로 채워야 합니다.

작년에 유럽에서 피정을 지도할 때입니다. 어느 자매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20대 초반의 젊은 아가씨인데, 긴 머리가 헝클어져 있었고 우울증이 심한 상태였습니다. 삶에 대한 희망이 없다고 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다면, 피정을 하지 않고 그냥 집으로 가고 싶다고 했습니다. 저에게 말을 할 때도 저를 쳐다보지 않고 바닥만 쳐다보았습니다. 아주 괴로워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모니카 입니다. 저는 그녀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저는 한국에서의 피정을 이곳 안양 ‘아론의 집’에서 하고 다음 주에 부산에서도 합니다. 이렇게 보통 같은 나라에서 두 번 피정을 지도합니다. 이처럼 그 나라의 다른 지역에서 피정을 하는데 또 그 자매가 와서 강의실에 앉아 있었습니다. 별처럼 빛나는 아름다운 모습이었습니다. 거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전혀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그전의 모습을 찍어두고, 지금 다시 사진을 찍고 싶을 정도로 큰 변화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제 우울증이 사라졌고 잠도 아주 잘 잔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때 그녀에게 고해성사를 잘 보도록 권유했고, 그녀가 성사를 본 후에 변화된 것입니다. 고해성사를 보고 치유가 된 것입니다. 기쁨으로 차 있는 모습이 정말 놀라웠습니다.

올해 다시 그곳에 갔을 때 사람들에게 그녀에 대해 물었습니다. 그녀는 피정 후 5개월 동안 기쁨에 가득차서 잘 살았는데 한 남자와 만나 사랑에 빠졌답니다. 4번이나 이혼한 남자였답니다. 그 남자를 슈퍼마켓에서 만났는데 그 남자가 그녀에게 말했답니다. “나는 당신처럼 행복해 보이고 아름다운 여인은 본 적이 없습니다.” 그녀는 그 사람의 수작에 넘어간 것입니다. 그 남자는 그녀에게 섹스를 요구하며 그녀를 다시 악으로 이끈 것입니다. 그 남자는 마약을 했고, 지금은 감옥에 가 있다고 합니다.

3주 전 청소년 피정에 사람들이 모니카 를 데리고 왔습니다. 그때 저는 처음 만났을 때의 모니카 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머리는 다시 헝클어져 있었고 우울해 보였습니다. 악이 그녀를 사로잡고 있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정당화 하려고 했습니다. 아무리 좋은 말을 해도 그녀의 행동이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다시 우울증에 걸려 자살까지 시도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다시 은총 안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모니카는 다시 고해성사를 본 후에 새 생명을 찾았습니다. 혼자서는 남자에게서 빠져나갈 힘이 없었습니다. 그녀가 말했습니다. “신부님, 이제 저는 다시 그 남자에게 가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그녀에게 강복을 준 후에 말했습니다. “모니카, 네가 진정 하느님의 사랑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피정 후에 모니카가 집으로 돌아갔고 다시 좋은 직업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가 모니카에게 말했습니다. “너의 마음을 하느님께 대한 감사로 채워라.”

처음 피정에서 그녀는 큰 기쁨을 맛보았고, 고행성사를 통해 마음을 깨끗이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악한 영은 깨끗이 정리된 그녀의 상태를 보고 오히려 다른 악한 영들을 데리고 온 것입니다. 악한 영도 깨끗한 곳을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사 후에 다시 악한 영의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 감사드리는 일입니다.

한 소녀가 꿈을 꾸었는데,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미소를 지으셨답니다. 소녀는 잠에서 깬 다음에 너무나 흥분되어 다시 잠을 잘 수 없었습니다. 정말 꿈에 나타나신 분이 예수님이실까? 결국 본당 신부님께 찾아가서 의논을 하게 되었답니다. 본당 신부님이 그분이 정말 예수님이신지 시험을 해보자고 하였답니다. 본당 신부님은 예수님께서 다시 꿈에 나타나면 이런 질문을 하라고 했답니다. “예수님, 저의 마지막 죄가 무엇인지 기억하십니까?” 소녀는 다시 꿈에 나타나신 예수님께 물었답니다. “예수님, 제가 지은 마지막 죄를 기억하십니까?” 예수님께서 미소를 지으시며 대답하셨답니다. “그럼, 기억하고말고, 네가 내 딸이라는 것을…!” 소녀는 자기 질문에 대한 다른 대답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기억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지만 죄를 아파하는 마음으로 통회하면서 고백하면 우리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나는 내 사랑하는 딸이다. 이것이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 우리가 보는 것입니다.

둘째 아들은 자기는 아들로 불릴 자격이 없다고 하면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아들이 돌아왔다.” 그분이 죄인이 아니라 아들이 돌아왔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놀라운 사랑이며 이 사랑에서 치유가 일어납니다. 그분은 치유하는 사랑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와 거래하는 사업에서 늘 손해를 보십니다. 1만 탈렌트의 손해를 보십니다. 그러나 1만 탈렌트보다 소중한 것을 얻습니다. 여러분은 1만 탈렌트보다 더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시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 앞에 우리 마음을 열 수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를 이해해 주는 분이십니다. 다른 누구도 우리를 온전히 이해해 줄 수 있는 분은 없습니다. 성사 전에 우리 마음을 활짝 열 수 있도록 시간을 들여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성체 강복 전에 성체 앞에서 드리는 기도

 

저희는 여기 성삼위이신 하느님의 현존 앞에 왔나이다.

희망과 믿음을 지니고 여기 왔나이다.

저희에게 기도하도록 가르쳐 주신 분은 성령이십니다.

성령님, 당신께서는 저희가 어떻게 성자 예수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야 하는지 가르쳐 주십니다.

(가톨릭 성가 142장, ‘오소서, 성령이여!’를 부르면서 예수님의 힘을 우리에게 보내주시도록 청합니다.)

 

예수님 여기 저희가 왔나이다.

주님의 힘에 희망과 믿음을 지니고 왔나이다.

저희는 영혼과 몸의 치유가 필요합니다.

예수님, 저희가 영혼과 몸이 치유되기를 청하는 것이 옳습니까?

 

성 바오로는 테살로니카 1서 5장 23-24절을 통해 대답합니다.

 

“평화의 하느님께서 친히 여러분을 완전히 거룩하게 해주시기를 빕니다. 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여러분의 영과 혼과 몸을 온전하고 흠 없이 지켜주시기를 빕니다. 여러분을 부르시는 분은 성실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니 그렇게 해주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평화의 하느님께 우리를 치유해 주시기를 청하는 것은 옳습니다. 우리를 부르시는 분은 성실하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성실하고 자비로우며, 치유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신뢰하고 믿어주는 분이십니다.

 

예수님, 제 삶을 돌아보면, 저에게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제 생각과 말과 행동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저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제 성격이나 태도에 문제가 있습니다. 저는 약하고 깨지기 쉬운 사람입니다. 저는 착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쉽게 기분이 바뀌고 악한 생각이 들어오고 슬픔이 마음을 덮칩니다.

저는 옳게 행동하지 않습니다. 만족할 줄 모릅니다. 평화롭지 못합니다. 왜 그런지 모릅니다.

주님, 저는 당시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반죽이 누룩 없이 부풀어 오르지 못합니다. 저를 도와주십시오. 저를 만져주십시오. 제 마음 안에 당신의 영을 넣어주십시오.

저는 과거의 아픈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과거에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저에게 사랑이 부족합니다. 관심이, 이해가 부족합니다. 용기가 없습니다.

저에게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있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것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저에게 있었던 좋은 경험들은 다 잊어버립니다. 남들이 저에게 해주지 않은 것만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부정적인 경험을 생각하면 마음이 슬퍼집니다. 희망을 잃게 됩니다. 저에게는 태도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주님, 저의 과거의 아픔도 봉헌해 드리오니, 받아주십시오. 제 과거의 아픔을 없애주십시오. 당신의 힘 있는 손을 저에게 얹어주십시오.

사마리아 여인이 당신의 현존을 느끼며 마음이 기쁨으로 차오르고 행복을 되찾았습니다. 그녀는 사생활 중의 사생활이라고 할 수 있는 내밀한 부분을 열고 당신을 받아들였습니다.

여기 당신이 저희와 함께 계십니다. 저희와 함께 계시며 저희에게 사랑을 주십니다. 저희를 기다려 주십니다. 마치 사마리아 여인을 기다려 주셨듯이 저희를 기다려 주십니다.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예수님, 저 자신을 당신께 봉헌하오니, 제 과거로 오십시오. 제 과거로 오셔서 제 마음을 어루만져 주시고 상처를 치유해주십시오. 제가 새 생명을 얻게 해주십시오.

제가 어머니 배속에 있을 때, 어머니가 기뻐하셨는지 저는 모릅니다. 만일 기뻐하지 않으셨다면, 사랑으로 보살펴 주지 않았다면, 제가 느꼈을 것입니다. 제가 상처를 입었을 것입니다. 주님, 그 상처를 치유해주십시오. 제가 눈을 뜨기도 전에 이미 제 마음이 움직였을 것입니다. 사리분별을 하기 전에 이미 제 마음은 느꼈을 것입니다.

제 마음을 봉헌하오니, 받아주십시오. 제 부모가 저를 충분히 사랑하지 않았다면, 저는 사랑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상처를 입었을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을 목말라했을 것입니다. 제가 아플 때 사랑을 목말라했을 것입니다. 제 부모님이 저를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셨을 때 저는 상처를 받았습니다. 다른 아이들과 비교할 때 상처를 받았습니다.

주님, 당신 손에 이 모든 것을 봉헌해 드립니다. 저를 어루만져 주시고 치유해주십시오.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제 부모님을 사랑합니다. 당신께서는 원수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모님을 위해 기도하오니, 그들을 사랑으로 받아주십시오. 그들이 지니고 있지 않은 것을 어떻게 줄 수 있었겠습니까? 제가 이것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제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 주십시오. 저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잘 알지 못합니다. 제가 오염되었기 때문입니다. 학교 선생님에게서, 이웃에게서, 친척에게서도 오염이 되었습니다. 심리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악용되거나 피해를 받았습니다. 성적으로도 학대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슬픕니다. 저는 새로운 생명이 필요합니다. 저는 새로운 해답이 필요합니다. 저는 건강한 삶이 필요합니다.

주님, 저에게 상처를 주고 저를 학대하고 저를 악용한 모든 이들을 용서합니다. 그들에게 당신의 능력을 주시도록 초대합니다. 그들을 씻어주시고 축복해주십시오.

주님, 제가 어둠을 벗어나 빛이신 당신께로 나아가도록 도와주십시오. 거짓 사랑에 속아 부도덕한 삶을 살았습니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탓입니다. 저는 마음이 부서졌습니다. 잘못된 선택으로 고통을 느낍니다. 남들 때문이 아닙니다. 제가 진실하지 않았고, 진실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저를 정당화하려고 했습니다 저는 야곱처럼 새로 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저를 도와주십시오. 저는 당시의 아들이라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다만 당신의 자비, 당신의 사랑으로 당신의 아들이 됩니다.

 

 

 

열여덟 번째 강의

엠마오로 가는 길

 

바로 그날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순 스타디온 떨어진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었다. 그들은 그 동안 일어난 모든 일에 관하여 서로 이야기하였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토론하는데, 바로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 받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침통한 표정을 한 채 멈추어 섰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 클레오파스 라는 이가 예수님께, “예루살렘에 머물렀으면서 이 며칠 동안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혼자만 모른다는 말입니까?”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무슨 일이냐?” 하시자, 그들이 그분께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에 관한 일입니다. 그분은 하느님과 온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이 그분을 넘겨, 사형 선고를 받아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 일이 일어난 지도 벌서 사흘째가 됩니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 몇몇 여자가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들인 새벽에 무덤으로 갔다가, 그분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돌아와서 하는 말이, 천사들의 발현까지 보았는데 그분께서 살아 계시다고 천사들이 일어주더랍니다. 그래서 우리 동료 몇 사람이 무덤에 가서 보니 그 여자들이 말한 그대로였고, 그분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 그리고 이어서,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

그들이 찾아가던 마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예수님께서는 더 멀리 가려고 하시는 듯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 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하며 그분을 붙들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묵으시려고 그 집에 들어가셨다.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으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그들이 곧바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와 동료들이 모여, “정녕 주님께서 되살아나시어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고 말하고 있었다. 그들도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루카 24,13-35)

 

오늘 우리는 이 미사를 하늘나라에 있는 친아들처럼 하느님의 아들과 딸로서 드리도록 합시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고 아들이라고 부르겠다. 우리는 더 이상 종이 아닙니다. 그분의 아들이며, 딸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예수님을 우리의 맏형이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이해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이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마음에 사랑을 지니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도록 합시다. 하느님께서 어떻게 우리의 마음을 당신의 사랑으로 채우시는지 보도록 합시다. 독서는 ‘에티오피아 내시의 이야기’이고, 복음은 가장 유명한 이야기 중의 하나인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 이야기’입니다.

 

제자들 둘이 예루살렘에서 출발하여 엠마오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왜 예루살렘을 떠났습니까? 그들은 큰 위기를 맞았습니다. 그들은 위기를 맞아 그들의 집을 떠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우리의 집입니다. 예수님의 집이기도 합니다. 예언자들의 예언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예루살렘은 여러 이유로 우리의 집입니다. 집에는 아버지가 계십니다. 집에는 아버지가 계시기 때문에 품위가 있습니다.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곳입니다. 거기 구원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집을 떠나는 것입니다. 위기를 맞은 것입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향합니다. 예루살렘, 바로 집이 있는 곳, 아버지가 계신 곳을 떠나면 거기 슬픔이 따라옵니다. 두 제자는 침통한 표정이었습니다. 슬퍼 보였습니다. 집을 떠나니 당연히 슬픕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 둘째 아들이 집을 떠나 슬픔을 겪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버지의 사랑을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두 제자는 희망을 잃은 것입니다. 절망에 바진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걸으십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천천히 따라가십니다. 그들은 누가 자기들 곁에 와서 함께 걸어가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자기들끼리만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들은 눈이 가리어 있습니다. 2킬로미터 정도 함께 걸어가도 전혀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먼저 인사를 건넵니다.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 그들이 서서 예수님께 묻습니다. “며칠 동안 일어난 일을 혼자만 모른단 말이오?”

완전히 예수님을 이방인 취급합니다. 예수님께서 겨우 3일을 떠나 계셨는데, 3일 후에 예수님을 못 알아볼 뿐만 아니라 이방인 취급을 하는 것입니다. 슬픔이 그들을 눈멀게 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집을 떠났을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곁에 함께 걸어가시지만 그분을 이방인 취급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이해하십니다. 무덤을 찾아갔던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예수님을 정원지기로 생각했고,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예수님을 이방인으로 여겼습니다. 눈이 가리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눈에서 조금씩 어둠이 사라지게 됩니다. 실은 마음에서 어둠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마을에 거의 다다랐을 때입니다. 두 제자는 집으로 들어가려 하고, 예수님께서는 길을 더 가시려는 듯 보였습니다. 두 사람이 말합니다.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초대를 받아들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삶의 수준으로 내려오십니다. 왜 그렇게 하십니까  우리를 다시 생명으로 되찾아 주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길을 더 가시려는 듯 보이게 하셨을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예수님은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초대를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당신을 초대하는 것을 좋아하시는 분이십니다. 늘 우리의 초대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성 아우구스티노가 아주 재미있는 말을 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허락 없이 우리를 창조하셨지만, 우리의 허락 없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는 없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이 집에 들어가 가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묵시 3,20)

 

예수님께서 우리 방문을 두드리십니다. 우리가 열어줄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리십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분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문을 열면 그분은 우리와 함께 저녁을 먹자고 하십니다. 함께 음식을 먹는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사랑을 나눈다는 의미입니다.

하느님은 기다리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마음을 열도록 기다리는 분이십니다. 그분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문을 열고 그분이 들어오시도록 초대해야 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초대를 좋아하십니다. 그러나 우리 삶 안으로 억지로 들어오시는 분이 아닙니다. 물론 사도 바오로처럼 직접적으로 삶에 관여하시기도 하지만 흔하지 않은 경우입니다.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나누어 주셨을 때,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십니다. 어디로 가셨습니까? 왜 시야에서 사라지셨습니까? 이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시야’라는 말이 아주 중요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우리는 보고 걷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걷습니다.

빵을 받았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셨습니다. 이제 그들의 눈으로 예수님을 알아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알아보아야 한다는 상징입니다. 그들의 이제 믿음으로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그분이 그들 안에 들어가신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 안에 들어오십니다. 빵과 함께 우리 안에 들어오십니다. 사도 바오로가 말했습니다. 이제 내 안에 사는 것은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이시다.

이것이 성체성사의 놀라움입니다. 거기서 우리 안에 오십니다. 성체성사를 알아듣기 위해 이제 더 이상 우리의 눈, 우리의 시야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필요합니다. 성체성사는 믿음과 사랑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가 집으로 돌아가게 될 때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갑니다. 미사 끝에 우리는 듣습니다. 가서 섬기고 사랑하라. 그것이 성체성사의 삶입니다. 사랑과 봉사입니다.

엠마오 이야기는 성체성사의 깊은 의미를 알게 해줍니다. 예수님께서 그들 안에 들어가셨을 때 그들은 거기 쉬며 머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달려갔습니다.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거기, 아버지가 계시는 집으로 가야 합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가 다시 예루살렘으로 가게 해주십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오면, 거기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두 번째 요점은 여러분은 다시 예루살렘을 떠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언제 떠나게 됩니까? 우리에게 오는 힘을 얻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오는 힘을 얻으면, 우리는 땅끝까지 떠나야 합니다. 그것이 언제입니까? 성령이 오실 때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시면 우리는 성령과 함께 예루살렘을 떠나야 합니다. 성령과 함께 예루살렘을 떠나면 이제는 다릅니다. 이제는 슬픔이 없습니다. 성령이 오시기 전에 예루살렘을 떠난 그들은 슬펐습니다. 침통한 표정이었지요. 그러나 성령과 함께 떠나면 다릅니다. 두려움도 슬픔도 없습니다. 성령은 우리를 이끌어 주는 분이십니다. 성령은 교회를 이끌어 주는 분이십니다.

예루살렘에서 어디로 갑니까? 사명을 받은 곳으로 떠나는 것입니다. 사명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을 예루살렘으로 되돌아오도록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예루살렘에 사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나누어야 합니다. 그것이 피정을 주관하는 분들이 하는 일입니다. 피정을 하신 분들은 친구를 피정에 데리고 와서 예루살렘을 경험하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 삶이 그리스도의 삶의 연장입니다. 나자렛에서 시작한 예수님의 여정이 오늘날 우리에게서 계속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역사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세상을 바라보십시오. 슬픔이 가득합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예루살렘의 경험이 없이 사명을 수행하다가는 실패를 체험합니다.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와서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이 피정에서 예루살렘에 와 있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가득 채우기 위해서입니다. 이틀 후에 우리가 이 피정에서 나가면 성령과 함께 가게 될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보호해주실 것입니다. 성령께서 함께 계시면 우리에게 위기가 와도 위기를 이겨나갈 수 있습니다. 그분이 도와주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세상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세상이 예루살렘을 경험하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삶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이니까요.

독서로 사도행전 8장 26-40절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에티오피아 내시 이야기입니다. 내시가 성경을 읽고 있었지만 무슨 이야기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슬펐습니다. 그때 필리포스는 다른 마을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필리포스를 데리고 오십니다. 필리포스가 내시에게 다가가서 묻습니다. “지금 읽는 것을 알아듣습니까?” 내시가 대답합니다. “누가 나를 이끌어 주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습니까?” 필리포스가 설명을 해줍니다. 그 설명을 들은 내시는 세례 받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수레를 세우고 물에 내려가서 세례를 받습니다. 내시의 눈이 열리게 됩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그때 필리포스가 사라집니다. 마치 엠마오에서 예수님께서 사라지신 것처럼 필리포스도 사라집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사도들도 이어서 하는 것입니다. 필리포스가 어디로 갔습니까? 왜 사라진 것입니까?  그는 예수님이 아닙니다. 다만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사라지는 것, 이것이 제자들의 의무이며 특징입니다. 제자들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알게 해주고, 그들이 눈을 뜨도록 도와주는 사람일 뿐입니다. 필리포스는 내시에게 예수님을 전해 준 다음 사라져야 했습니다. 성령께서 잡아채듯 데려가신 것이지요.

이제 예수님께서 인도하시도록 맡겨드리는 것입니다. 필리포스는 예수님의 손에 들린 도구일 따름입니다. 예수님을 알아차리게 하고 그 다음은 예수님이 그 사람들과 함께 사시면서 그들을 이끄시도록 해야 합니다. 거기 필리포스가 남아 있으면 안 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혼동하게 됩니다. 이것이 사제들에게 좋은 교훈을 줍니다. 부모들에게도 좋은 교훈일 수 있습니다. 눈을 뜨게 해주면 사라져야 합니다. 필리포스는 무대 뒤로 사라진 것입니다.

성당에서 아주 큰 봉사를 하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는 지난 10년 동안 봉사를 했는데, 그 봉사직을 떠날 때 환송회도 안 열어준다고 불평을 하며 울었습니다. 왜 운 것입니까? 그가 예수님을 사랑하여 봉사를 한 것은 사실일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섬기면서 예수님은 커튼 뒤에 계시도록 하고 자기가 무대에서 주목을 받고자 한 것입니다. 만일 그가 예수님을 보여주고 커튼 뒤로 사라졌다면 사람들은 봉사한 그에게 감사했을 것입니다.

감사를 받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감사에 머물면 안 됩니다. 봉사를 감사 때문에 한다면 실망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군중의 특징을 잘 압니다. 오늘은 손을 들어 환호하지만 내일은 손을 뺍니다. 그냥 빼기만 하면 다행인데,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합니다.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이런 위험에서 보호해 주시도록 청해야 합니다.

우리는 다만 예수님을 보여주고 커튼 뒤로 사라져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의 소임을 다하고 그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달릴 길을 다 달렸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뭔가 하느님을 위해 아름다운 일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용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예수님의 삶에 동참해야 합니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이 사명을 계속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늘 기도하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지난 11월이었습니다. 제가 미사 후에 기도하고 있는데, 어떤 영감이 왔습니다. 우간다의 어느 신부님께 전화를 드리라는 아주 엉뚱한 생각이었습니다. 처음에 너무 엉뚱해서 무시하려고 했지만 그 영감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래서 전화를 했지요. 제가 전화를 한 그 순간에 신부님은 아주 큰 위기에 봉착해 있었습니다. 숲 속에 차가 서 버렸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크게 당황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제가 전화를 한 것입니다. 그곳은 아주 위험한 곳이었습니다. 제가 2006년에 강도를 만나 죽을 뻔한 바로 그 장소였습니다. 당시 4명의 강도가 권총을 빼어 저를 위협했습니다.

그 신부님이 다급하게 말했습니다. “안토니오 신부님, 시동이 걸리는데 차가 움직이지 않아요.” 저는 보닛을 열게 하여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었습니다. 간단한 일이었습니다. 안에 있는 줄이 하나 끊어져 있었는데, 그것을 연결해 주면 되는 일이었습니다. 차에 대해 아는 사람에게는 간단한 일이지만 차에 대해 모르는 사람에게는 엄청 당황스러운 일입니다.

제가 스위스에서 우간다에 있는 차를 1분 만에 고쳐주었습니다. 저는 차 수리공입니다. 자격증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그 신부님의 행복을 되찾아 주었습니다. 이것이 그분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는 다만 그분의 도구일 뿐입니다.

한번은 포르투갈에 있는 피정 책임자에게 전화를 하라는 영감을 받기도 했습니다. 제가 그곳 피정 책임자 루시아 자매님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물었더니, 그녀는 암 판정을 받고 크게 당황하며 고통스러워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전화로 그녀를 위해 기도해 주면서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해 주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람을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그녀는 걱정이 많이 사라진다고 하며 이제 그렇게 고통스럽지 않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용하시는지 보십시오.

이런 일들을 단순히 우연이 일치라고 생각합니다만, 아닙니다. 은총입니다. 우리는 은총으로 예수님의 사명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전화 한 통화로 슬픔에 잠겨 있던 친구에게 위로를 주고 그 친구가 다시 기쁨을 되찾는다면, 그것은 우리가 성령의 손에 들려있는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직도 기적만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 삶 자체가 기적입니다.  가장 큰 기적인 우리 삶을 무시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지 마십시오. 우리는 큰 바람은 알아차리지만 미풍은 잘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그런데 언제나 공기를 정화하는 것은 미풍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미풍처럼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큰 소리를 내지도,  큰 소동을 일으키지도 않으시면서 매일의 삶에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때로 고통 안에서도 그분이 함께 계시며 위로를 주십니다. 그것을 알아차리기 위해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성령의 도구입니다. 여러분이 집으로 돌아가면 이제 우기가 없다고 말씀 드리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에도 위기는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도망치고자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경 읽는 것을 그만두고 싶어지는 유혹이 있습니다. 성사생활을 그만두고 싶어지는 유혹이 있습니다. 우리는 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존재입니다. 고통을 느끼면 예루살렘을 떠나고 싶어집니다. 엠마오로 가고 싶어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엠마오로 가던 두 사람 곁에 그분이 걸어가고 계셨습니다. 여러분은 혼자가 아닙니다. 옆에 우리를 벗이라고 부르시는 친구가 있습니다. 그분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왜 그분이 걸음을 멈추고 섰습니까? 우리를 다시 예루살렘으로 되돌려 보내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열아홉 번째 강의

욥기

 

매년 피정에서 저는 성경 중에 한 권을 특별히 중점적으로 다루었습니다. 지난해까지 요한 묵시록, 사도행전, 루카복음서를 다뤘는데, 올해는 욥기를 다루고자 합니다.

여러분, 이 책을 잘 아십니까? 욥기를 다 다룰 수는 없고 마치 대양에서 물 한 방울을 꺼내듯이 욥기의 일부를 다루고 거기서 다시 1 퍼센트를 여러분에게 나누어 드립니다. 배경 설명을 통해 욥기를 잘 이해할 수 있는 방법론만 제시하는 셈입니다.

욥기가 어느 문학서에 속하는지를 알아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여러 문학서들이 들어 있는 방대한 책입니다. 시편은 시문학서에 속하고 열왕기나 역대기나 그리스도교 초기 삶을 다룬 사도행전 등은 역사서에 속하고 예언서들은 예언문학서에 속합니다. 요한 묵시록이나 다니엘서 일부와 같은 묵시문학서들이 있습니다. 묵시문학서의 성격이나 특징은 과거의 역사에서 일어난 일과 관련하여 미래의 일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 문학서도 단순히 읽고 이해하는 것이 상당히 어렵습니다.

또 하나의 중요하면서도 이해하기 쉽지 않은 문학서가 지혜문학서입니다. 욥기는 지혜문학에 속합니다. 잠언, 코헬렛, 지혜서, 집회서 등이 지혜문학서입니다.

원래 이스라엘에서는 전통적인 지혜를 믿었습니다. 전통적인 지혜는 아주 쉽게 이해하면 인과응보적인 지혜입니다. 우리가 행동을 잘 하면 축복을 받고 잘못하면 벌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부자이고 건강하면 그는 축복을 받은 거룩한 사람이고, 어떤 사람이 가난하거나 병이 들면, 그가 나쁜 행동을 해서 하느님께 벌을 받은 것으로 보는 것이 전통적인 이스라엘 문화권에서의 지혜입니다.

여러분, 이런 지혜에 동의하십니까? 이런 사고방식을 신약성격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태생 소경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이 태어날 때부터 눈먼 사람을 데리고 왔을 때, 예수님께 묻습니다. 누가 죄를 지어서 저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느냐는 것입니다. 저 사람입니까? 아니면 부모의 탓입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 된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아주 중요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아픈 사람, 가난한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제가 시작장애인입니다. 저는 걷고 있습니다. 이제 건널목에서 길을 건너야 하는데 길에는 차들이 오갑니다. 지팡이가 있지만 언제 어떻게 길을 건너야 할지 모릅니다. 여러분 중의 한 사람이 다가와서 제 손을 잡고 길을 건너도록 도움을 주었습니다. 무엇이 그 사람에게 자비심이 일어나게 하였습니까? 제가 시각 장애인이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들은 우리를 위해 존재합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자비를 실천하도록 도와줍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욥기는 왜 무죄한 사람이 고통 받는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왜 선생을 한 사람이 칭찬을 받지 않고 오히려 멸시를 당하는가? 왜 무죄한 사람이 고통을 받는가에 대한 전통적인 지혜의 답은 그 사람이 잘못을 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무죄한 사람도 고통을 당합니다. 그래서 지혜문학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지혜를 비추어 줍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지혜를 다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기원전 6세기에서 기원전 2세기에 지혜문학이 성행했습니다. 지혜문학이 생기게 된 계기는 왕조의 시작으로 볼 수 있습니다. 왕조가 시작되면서 왕들은 지혜 있는 사람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왕이 백성을 다스릴 때, 지혜 있는 사람들의 조언이 필요하게 된 것이지요. 다윗이나 솔로몬의 법정에서 왕의 지혜만으로는 모든 일을 처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의 통치체계 안에서 지혜를 구하게 되었습니다. 지혜로운 왕이 세워지면 왕국으로 현자들을 초대하여 국정운영 전반에 걸쳐 현자들이 왕을 도와주게 됩니다. 자연스럽게 현자의 가르침들이 모아지기 시작한 것이지요.

솔로몬은 지혜를 지닌 왕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솔로몬이 물론 지혜로웠지만 혼자만의 지혜로 모든 것을 다 해결할 수 없었고, 다른 현자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모든 지혜는 성령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다른 현자들의 지혜도 무시할 수가 없습니다. 지혜문학서들은 모두 현자들의 지혜를 모아서 만든 책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혜문학이 활발하게 이루어진 시기를 기원전 5세기에서 2세기로 봅니다. 왜 이 시기에 지혜문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는가 하면, 이스라엘의 바빌로니아 유배와 귀환과 연관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기원전 538년에 페르시아의 키루스 왕의 칙령으로 유배에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러나 돌아와 보니, 원래의 땅은 다른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었고, 계속되는 자연적 재앙으로 살기 어려워지면서 사람들의 마음이 점점 피폐해지고 부서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고대하던 고향 땅으로 돌아왔지만 거기 평화가 없었습니다. 그때 현자들이 그들이 말하는 지혜의 가르침을 따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그들의 지혜를 따르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기 시작합니다. 현자들은 절망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지니도록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현자들이 인기를 얻게 되고, 사람들이 그들 주위에 모여들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하여 그들의 사회에 영향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또 다른 이유로는, 예언자들의 시대가 지나가면서 더 이상 예언자들의 존재를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문화 안에 사제들이 있었지만 사제들은 진정한 목자가 아니라 점점 더 거짓 목자로 변질되었습니다.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는 집단으로 변질되었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사람들이 사제들을 외면하기 시작했습니다. 백성들 사이에서 사제들의 영향력이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이때 현자들이 종교적인 문제에도 관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하느님에 관한 놀라운 이야기를 시작한 것입니다. 그들의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기 시작합니다. 다시 번영을 되찾고 기쁨을 누리게 되리라는 희망입니다. 그런데 (기원전)2세기로 들어서면서는 그들도 영향력을 잃게 되면서 지혜문학도 쇠퇴기로 접어들게 됩니다. 무슨 일인가 하면 그리스 로마 문화의 영향을 받게 된 것입니다. 현자들이 그리스 로마의 가르침을 수용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다른 나라의 가르침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을 배척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기원전 2,3세기경에는 현자들이 사라집니다. 직접적으로 마카베오 시대로 접어들면서 현자들은 더 이상 발붙일 곳이 없어집니다. 전쟁이 계속되면서 사람들은 점점 메말라 갔습니다.  그들은 메시아에 대한 희망을 갖고 있었는데, ‘왜 메시아가 오시지 않는가?’라는 물음을 던지며 절망에 빠지는 시대가 됩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께서 메시아로 오십니다. 지혜문학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의 일입니다. 참 지혜이신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지혜문학은 더 이상 자리를 지킬 이유가 없어진 것입니다.

 

욥기는 지혜문학서에 속합니다. 지혜문학서의 특징은 성경의 다른 문학들과는 현저하게 다릅니다. 순수하게 이스라엘의 전통과는 다른 다소 이국적인 특별한 풍토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선 지혜문학은  성조들에 대해 언급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에 대해서도 거의 언급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에 대해서 언급하지만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시각이 다릅니다. 하느님을 보기를 원합니다. 원래 이스라엘 전통은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부르지도 못합니다. 너무나 거룩하여 이름을 언급할 수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지혜문학에서는 하느님을 보고 싶다고, 하느님을 만나고 싶다고 합니다. 전통 유다인들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욥기에서는 이스라엘의 역사에 대한 언급 없이 바로 무죄한 사람들의 고통에 대해 다룹니다. 이것은 단순히 이스라엘 백성만을 위한 이야기가 아니라 온 세계의 무죄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이방인을 위한 책으로 볼 수 있을 만큼 이국적인 색채가 강합니다. 우리는 저자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언제 썼는지에 대해 잘 모릅니다. 다만 확실하게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전통적인 지혜 때문에 고통을 당한 희생자에 의해 쓰였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도전을 던지고 있습니다. 왜 무죄한 사람이 고통을 받는지에 대해서.

욥기의 내용 안에 고통에 대한 해답이 들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고통을 없애기 위한 해답이 없습니다. 다만 고통은 어느 누구에게나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욥기는 고통에 끝이 있다고 말합니다. 고통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거나 고통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 고통을 극복하는 과정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욥기에는 5개의 장면이 있습니다. 연극으로 보면 5막을 지닌 연극입니다. 2개는 하늘에서 벌어지는 장면이고, 다른 3개는 땅에서 벌어지는 장면입니다. 보이지 않는 장면에서는 하느님과 사탄이 등장인물이고, 눈에 보이는 땅의 장면에 등장하는 인물은 욥과 그의 아내, 그의 친구들입니다.

욥은 올바른 사람입니다. 성경은 그가 하느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이라고 전합니다. 그에게는 아내가 있고, 아들 일곱과 딸이 셋 있습니다. 가축들이 아주 많은 부자입니다. 아들들이 번갈아 가며 잔치를 벌입니다. 욥은 혹여 아들이 잘못했을까 늘 번제물을 바칩니다. 하느님께 충실합니다.

욥도 처음에는 전통적인 지혜를 빋은 사람입니다. 자기가 착해서 그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바뀌게 됩니다. 고통을 겪으면서 전통적인 지혜에 대해 비판하게 됩니다. 초기의 욥과 후기의 욥은 다릅니다.

하느님과 사탄이 서로 이야기를 합니다. 천국에서 사탄이 큰 역할을 하는 것으로 그려집니다. 전통적인 지혜를 지닌 이스라엘 사람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국적인 색채가 들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사탄은 유다인들이 알고 있는 사탄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는 악마들의 우두머리 루치펠이 아닙니다. 사탄의 의미는 ‘반대자’, 또는 ‘상대’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단순히 악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악과는 상관없이 반대편에 서 잇는 자라는 뜻입니다. 사탄은 하느님 반대편에 서 있지만 여전히 하느님의 대화 상대입니다.

사탄의 역할을 보면 그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지상과 하늘을 왔다 갔다 합니다. 왜 지상에 옵니까? 사람들의 삶을 살피기 위해서입니다. 그러고 나서 그것을 보고하러 하늘로 올라갑니다. 사탄이 하느님께 보고서를 제출하는 것입니다. 인간들의 삶에 대한 보고서입니다.

이제 사탄이 하느님께 와서 보고를 할 때 한 사람의 이름이 언급됩니다. 욥입니다. 하느님이 먼저 욥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의 종 욥을 눈여겨보았느냐? 그와 같이 흠 없고 올곧으며 하느님을 경회하고 악을 멀리하는 사람은 땅 위에 다시없다.” 사탄이 말합니다. “욥이 착한 것은 맞습니다.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가 왜 그렇게 하겠습니까? 당신이 축복을 내리시니까 그렇게 하지, 축복을 거두어 보십시오.”

하느님이 욥에 대해 절대적인 신뢰를 보이십니다. “아니다. 욥은 나의 종, 나의 사랑하는 종이다. 그는 나를 사랑한다.”

사탄이 하느님께 내기를 하자고 청합니다. 하느님께서 그 축복을 거두면 욥이 하느님께 저주를 퍼부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하느님이 사탄에게 모든 소유을 넘겨준다고 하면서 축복을 거둘 것을 허락합니다.

이제 장면이 지상입니다. 지상에 내려온 사탄이 욥에게서 모든 축복을 거둡니다. 모든 것이 파멸됩니다. 의인 욥에게 엄청난 고통이 온 것입니다. 욥이 고통 속에서 무슨 말을 합니까? 고통이 욥에게 저주를 퍼붓도록 했습니까? 아닙니다.

욥이 고통 속에서 땅에 엎드려 말합니다.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 받으소서.” 다시 하늘에서의 두 번째 장면입니다. 사탄이 말합니다. ‘욥이 저주를 하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의 몸을, 그의 뼈와 그의 살을 쳐보십시오. 그는 틀림없이 저주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좋다. 그를 네 손에 넘긴다. 다만 그의 목숨만은 남겨두어라.” 다시 장면은 지상으로 옮겨집니다. 사탄은 욥에게 가서 그를 칩니다. 고약한 부스럼으로 칩니다. 온몸에서 고름이 나오고 악취가 진동합니다. 아내가 말합니다. “하느님을 저주하고 죽어버려요.”

그래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이제 욥의 삶을 보도록 합시다. 욥의 아내는 도망을 갔고 자식들은 다 죽었습니다. 재산을 몽땅 사라졌습니다. 건강은 어떻습니까? 몹쓸 병에 걸렸습니다. 이때 친구들의 욥에게 닥친 불행에 대해 듣고 찾아옵니다. 욥은 차라리 태중에서 죽었더라면! 하고 자기가 태어난 날을 저주합니다.

그러나 욥은 하느님을 저주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물음을 던집니다. ‘왜 내가 이 고통을 당해야 합니까? 왜 저입니까?’ 라고 묻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느님에 대한 저주가 아닙니다. 다만 그의 고통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를 찾아온 세 친구는 전통적인 지혜를 상징합니다. 세 친구는 처음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 7일 동안 함께 있으면서 한마디도 하지 않은 것은 욥의 고통이 너무나 큰 거이었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그 후 욥의 친구들은 욥에게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각각 다른 말을 하지만 쉽게 핵심만 말하면 이렇습니다. “욥, 자네는 죄 없다고 하지만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면 죄인임에 틀림없지 않은가. 자네가 죄가 있기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것이니, 죄를 뉘우치게나.”

욥의 친구들은 욥을 도와주러 왔지만 오히려 더 큰 고통을 줍니다. 우리가 고통 중에 있을 때 친구들이 찾아옵니다만, 그들은 우리의 고통을 더 크게 만듭니다. 그런 사람들의 말을 듣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욥이라는 이 지혜문학서가 갖고 있는 특징이 바로 그 교훈입니다.

 

제가 우간다에서 장례식에 간 적이 있습니다. 그 나라의 장례 관습이 아주 다릅니다. 부자들은 장례식을 거창하게 치릅니다. 시신을 세 달이나 보관하기도 합니다. 죽으면 바로 방부처리를 하는 것이지요. 시신을 두고 상을 치르는 일을 하는데,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모든 마을 사람들이 와서 음식을 나눕니다. 애도를 표하고 부조금을 냅니다. 보조금을 많이 받아 남은 가정은 돈을 벌기도 합니다. 사제를 불러 장례를 치르기도 하는데 제가 불려 간 곳은 부잣집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습니다. 제가 차에서 내려 시신이 모셔져 있는 곳까지 가게 되었는데, 처음에 그의 친척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저를 보자 울기 시작했습니다. 25, 30명 가량이 함께 울었습니다. 저는 ‘그들이 돌아가신 분을 무척 사랑했나 보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또 다른 중요한 사람이 오자 다시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지나가면 바로 웃으면서 농담도 하고 그럽니다. 그러다가 또 다른 중요한 사람이 오면, 다시 또 울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다른 문화권에 가면 너무나 다른 문화에 충격을 받을 수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울다가 조문을 마치고 가면 웃고 먹고 마시고 하는 그 문화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래도 장례인데 그럴 수 있다는 사실이 충격이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듣고 알게 되어 충격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들은 돈을 주고 곡하는 사람들을 산 것입니다. 직업으로 곡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부자들은 곡하는 사람과 계약을 맺습니다. 그들에게 손님이 오면 크게 울게 하고 돈과 음식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제가 이 문화를 접한 후에 욥의 세 친구들에 대해 더 잘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문화의 배경을 알면 이해가 훨씬 쉬워집니다. 욥은 고통을 받으면서도 세 가지에 대한 확신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첫째, 하느님이 자기와 함께 계시고 축복을 주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분이 주신 축복 때문에 설령 그분이 축복을 거두어 가신다고 하더라도 그분을 저주할 수 없습니다.

둘째, 자신이 죄인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셋째,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하느님이 늘 자기와 함께 계셨다는 것을 알고 있었노라고 말씀 드리리라는 것입니다.

욥은 하느님을 만나고 싶어합니다. 하느님께서 욥에게 나타나십니다. 거기서 대화가 이루어지죠. 하느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땅을 세울 때 너는 어디 있었느냐? 네가 그렇게 잘 알거든 말해 보아라. …. 빛이 갈라지는 길은 어디 있느냐? 샛바람이 땅 위에서 흩어지는 그 길은?” 당신께서 온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고 물으십니다.

욥기 40장 3-5절에서 욥이 말합니다. “그러자 욥이 주님께 대답하였다. 저는 보잘것없는 몸, 당신께 무어라 대답하겠습니까? 손을 제 입에 갖다 댈 뿐입니다. 한 번 말씀드렸으니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두 번 말씀드렸으니 덧붙이지 않겠습니다.” 욥은 하느님 앞에 자기가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인지를 인정합니다. 그는 자기가 얼마나 작은 자인지를 인정하면서 더 이상 대답하지 않겠다고 공손하게 말합니다. 이어서 주님의 두 번째 말씀이 이어집니다. 40-41장에 걸쳐 하느님께서는 욥에게 많은 물음을 던지십니다. 욥이 자신을 돌아보도록 이끄시는 것입니다. 그의 대답이 42장 2-6절에 나옵니다.

 

“저는 알았습니다.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음을,  당신께는 어떠한 계획도 불가능하지 않음을! 당신께서는 ‘지각없이 내 뜻을 가리는 이자는 누구냐?’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저에게는 너무나 신비로워 알지 못하는 일들을 저는 이해도 못한 채 지껄였습니다.

당신께서는 ‘이제 들어라. 내가 말하겠다. 너에게 물을 터이니 대답하여라.’ 하셨습니다. 당신에 대하여 귀로만 들어왔던 이 몸, 이제는 제 눈이 당신을 뵈었습니다. 그래서 저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며 먼지와 잿더미에 앉아 참회합니다.”

 

그가 하느님을 만났을 때, 이제 내 눈으로 하느님을 뵈었다고 감격스러워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 던진 바보 같은 물음들에 대해 부끄러워합니다. 욥은 하느님 앞에서 자기가 얼마나 보잘것없는지를 알게 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을 만나게 되었을 때 더 이상 불평을 하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자기가 겪은 고통, 그의 병고를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제 그가 친구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리고는 그의 축복을 되돌려 받게 됩니다.

욥기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면, 고통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느님을 만나고자 하는 열망이 중요합니다. 하느님과의 만남이 고통에 대한 해결책입니다. 그것이 진리입니다. 고통에 대한 만들어진 해답은 없습니다. 우리가 겪는 고통은 다 다릅니다. 그러나 하느님과 만날 수 있다면, 우리가 믿음 안에서 하느님께 온전히 그 고통을 내어놓을 수 있다면, 거기 축복이 있습니다.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면, 우리는 행복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욥에게 기회를 준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과 희망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모든 것에는 끝이 있습니다. 하느님이 승리로 이끌어 주십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 신실하게 항구하고 성심을 다하는 것입니다.

욥기에 대한 비판자들은 말합니다. “이 책은 고통의 문제에 대한 뚜렷한 결론이 없다.” 똑같은 것이 되풀이될 뿐, 뚜렷한 결론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욥기는 바로 우리 삶을 대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은 반복됩니다. 결론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것이 끝이라고 생각하지만 다시 반복됩니다. 그래서 삶이 너무 고통스럽게 느껴집니다. 그래도 그것이 우리 삶입니다.

욥기는 우리 삶에 관한 실제 이야기입니다. 그 사실을 기억하면서 욥기를 음미해 읽으면 각각의 구절들이 우리 마음을 어루만질 것입니다. 성령께서 영감을 불러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욥이 말했습니다. “나는 하느님을 뵙고 싶다.” 그 갈망을 잊지 마십시오.

 

 

 

스무 번째 강의

성령 1

 

여러분, 성령이 누구신지 잘 알고 계시죠? 여러분 모두 성령의 인도를 받고 계십니다.

삼위일체는 신비입니다. 이것은 말로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삼위가 누구입니까? 성부, 성자, 성령이십니다. 교회 역사 안에서 사람들이 삼위일체를 어떻게 이해했습니까? 오랜 시간에 걸쳐 토론을 했습니다. 성령이 성부에게서 나온다는 주장도 있었고, 성자에게서 발하신다는 등의 주장이 있었습니다. 교회 안에 재미있는 논쟁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공의회를 거쳐 교의들이 정립되면서 이제 삼위일체나 다른 논쟁거리의 여러 문제들에 대해 더 깊은 이해를 하게 된 것입니다.

성령께서 교회 안에 활동하십니다. 우리가 삼위일체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습니까? 아버지는 사랑이신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무슨 일을 하십니까? 주로 내 아들, 성자의 말을 들으라고 하십니다. 그것으로 만족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런데 아드님, 그리스도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다만 아버지의 말을 가르칠 뿐이다. 내가 하는 일은 모두 아버지의 일이다. 아들을 보면 아버지를 보는 것이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 아드님은 모든 것을 다 아버지께 돌려드립니다.

성경을 보면 성령께서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직 당신의 때가 되지 않았고, 다만 성자께 순명할 따름이기 때문입니다. 성자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아버지께 돌아가면 우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아버지께 청하여 다른 협조자를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주실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성령은 우리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갖도록 해주시고, 예수님에 대해 이해할 수 있게 해주시는 분입니다. 삼위일체는 놀라운 신비입니다. 삼위일체 안에 완벽한 사랑의 형태를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나눔, 순명, 그리고 일치의 형태입니다.

삼위일체적 사랑은 우리 인간 사랑의 모델입니다. 이것이 전부 우리 인간 삶에 관한 실제적인 모습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 삼위일체의 사랑을 이해하면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에 대해 놀라게 됩니다. 이것은 추론이나 추상이 아닙니다. 가까이서 체험하게 되는 아주 친근한 사랑입니다. 2000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는 성령에 대해서 잘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교회 역사의 체험 안에서 성령께서 우리 안에 살아 계시다는 것을 더 잘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모든 것을 성령 안에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성령은 누구십니까? 사람들 안에 살아 계시는 분입니다. 우리에게 올바른 가르침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저는 온 세계를 다니면서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들을 만납니다. 우리는 늘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제게 깨끗한 영을 지어주시고 새롭고 올바른 영이 저를 인도하게 하소서.”

누가 올바른 영을 지닌 사람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열매와 선물, 은사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열매를 맺으면 은사로 나타납니다. 선물을 주십니다. 누가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입니까? 이콘, 곧 이미지, 모습을 그리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얼굴 모습을 그리는 사람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마음 안에 예수님에 대한 방향을 제시하십니다. 하느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교회를 이끄시는 기초입니다.

성령에 대한 많은 몰이해가 있습니다. 왜 성령이 왜곡됩니까? 성경적 삶에서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 무슨 일이 생깁니까? 많은 사람이 성령께서 이끄시는 것이라고 하면서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이끌어 가려고 합니다. 처음에는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었고, 성령의 인도를 따랐습니다. 그러다가 점점 잘못된 방향으로 나간 것입니다.

삼손과 사울에게 일어났던 똑 같은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삼손의 경우를 봅시다. 주님께서는 삼손에게 복을 내려주셨습니다. 주님의 영이 그를 움직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힘센 사자가 달려들지만 사자를 찢어 죽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주님의 영이 삼손에게 들이닥쳤으므로 그렇게 할 수 있었다고 전합니다. 삼손은 성령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삼손이 불순종을 합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영감을 따르지 않고 원수의 꾐에 빠지고 맙니다. 들릴라를 사랑하게 되고, 그녀는 삼손에게서 힘의 비밀을 알아내려고 삼손을 들볶습니다. 삼손은 그녀에게 들볶이는 일이 지겨워 죽을 지경이 되어 결국 자기 속을 다 털어놓고 맙니다. 그가 성령의 말씀을 따르지 않은 죄를 지은 것입니다. 결국 필리스티아인들에게 묶이게 됩니다. 도망치려고 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주님의 영이 자기를 떠나셨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가 불순종했기 때문에 성령이 그를 떠나셨던 것입니다.

사울에게도 똑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사울은 다윗을 질투합니다. 질투는 사람의 눈을 멀게 합니다. 그래서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사울은 성령이 자기에게서 떠난 것을 몰랐습니다. 오히려 악령이 사울에게 들이닥칩니다. 사울을 보며 하느님께서 사울을 선택하신 것을 후회하십니다.

똑같은 일이 지금도 일어납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보시고 후회하시는 마음이 들게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주신 축복을 거두게 하실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올바른 영이신 성령의 인도를 받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매일의 삶에서 성령의 이끄심을 따라 응답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사도 바오로의 삶이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에 교회를 세우고 원로들을 임명하여 교회를 이끌어 가도록 했지요. 사도 바오로는 갈라티아에도 교회를 세우고 원로들을 임명하여 교회를 이끌어 가도록 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콜로새에도 교회를 세우고 원로들을 임명하여 교회를 이끌어 가도록 했습니다. 그는 많은 교회를 세웠습니다. 모든 교회가 성령의 은사로 넘쳤고 열매가 풍성했습니다.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의 지도자로 세원 원로들이 불순명했습니다. 그들이 교만에 빠진 것입니다. 성령을 커튼 뒤로 앉혀놓고 자기들이 마음대로 악한 것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성령을 전해 주었지만 사람들이 잘못 다룬 것입니다. 이 모든 잘못은 부, 명예, 교만에서 옵니다. 그들은 우상 숭배, 성적 무질서, 분쟁, 시기, 분열 등 육의 욕망에 빠진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가 그것을 알고 너무 슬퍼하면서 편지를 쓰기 시작합니다. 사도 바오로가 말합니다. “형제 여러분,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살아가십시오. 그러면 육의 욕망을 채우지 않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악령이 이끄는 육의 행실을 피하도록 권고합니다. 마음 안에 살아 계시는 성령을 피하지 않고 따라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사도 바오로의 말을 듣지 않고 잘못된 길로 이끌었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기초가 튼튼하지 않으면 어떻게 건물이 유지될 수 있느냐고 합니다. 기초는 성령께 순명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지 않으면 기초가 무너지는 것이지요.

7세기에 교회가 있던 곳이 모두 이슬람으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터키, 시리아 등의 지역을 보십시오. 사도 바오로가 선교한 곳, 초대 교회들이 자리 잡던 곳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여러분의 본당에서도 똑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기도회를 시작할 때는 사랑으로 시작했습니다. 거기 성령의 인도하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기도회를 이끄는 지도자 안에 자기가 이끈다는 교만이 자라게 되면, 회원 서로 간에 질투가 생기고 몇 년 지나지 않아 없어집니다.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지도를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지도의 기초는 성령이십니다. 성령의 이끄심을 따라야 합니다. 성 바오로가 말했습니다.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이 성령의 은사에 관해서도 알기를 바랍니다.” (1코린 12, 1)

 

성 바오로는 모든 사람이 성령의 은사를 알기를 바랐습니다. 바오로는 왜 사람들이 성령의 은사를 알기를 바랐습니까? 성령의 은사를 모르면 비극이 생깁니다. 성령을 아는 것은 그의 열매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의 선물, 성령의 은사에 대해 모르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열매입니다. 성령의 열매가 무엇입니까?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입니다.” (갈라 5,22-23)

9가지 열매입니다. 열매입니까? 열매들입니까? 성 바오로는 열매라는 단어를 복수가 아니라 단수로 쓰고 있습니까? 무슨 의미입니까? 열매가 단순히 9가지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 셀 수 없습니다. 9가지는 단지 열매의 일면일 뿐입니다. 가톨릭 교리 안에는 12가지 열매를 나열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리스어에서 번역할 때, 어떤 단어는 두 가지로 번역을 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선의를 옮기면서 선과 너그러움으로 옮겼습니다. 그리스어는 비교적 분명한 의미를 지칭하지만, 번역을 하다 보니까 그 의미를 한 단어에 다 담을 수 없어 두 단어로 옮긴 것입니다. 그래서 가톨릭 교리서에서는 12가지가 된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9가지에 너그러움, 중요, 정결이 보태어졌습니다. 9가지의 서로 다른 열매라기 보다 사랑의 9가지 다른 얼굴이라고 이해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은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코린토 1서 13장에서 우리가 듣습니다. 천사의 말을 한다고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랑이 가장 중요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9가지의 열매가 9가지의 사랑의 얼굴이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습니까? 그것을 이해하려면 9가지 얼굴의 특징을 알아야 합니다. 코린토 1서 13장 1-7절이 그 특징입니다. 9가지 얼굴을 보기 위해 우리가 잘 들어야 합니다.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와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요란한 징이나 소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깨닫고 산을 옮길 수 있는 큰 믿음이 있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내 몸까지 자랑스레 넘겨준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에 기뻐하지 않고 진실을 두고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스러지지 않습니다. 예언도 없어지고 신령한 언어도 그치고 지식도 없어집니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합니다. 그러나 온전한 것이 오면 부분적인 것은 없어집니다. 내가 아이였을 때에는 아이처럼 말하고 아이처럼 생각하고 아이처럼 헤아렸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아이 적의 것들을 그만두었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세 가제는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1코린 13, 1-7)

 

 

여러분, 이제 스스로에게 사랑이 있는지 없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을 측정하는 기준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다른 사람의 말이 아니라 성경에 기초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사랑을 지니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여전히 사랑에 성장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사랑의 특징입니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복음을 그대로 실천하면서 사랑을 살고자 했습니다. 그가 유명해지자 한 아가씨가 그의 영성에 매료되어 찾아왔습니다. 클라라입니다. 그녀가 프란치스코에게 와서 그의 영성을 따르는 여자 수도회를 시작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청했습니다. 프란치스코의 영성을 본받아 수녀회를 시작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때 프란치스코가 클라라에게 물었습니다. “클라라, 그대는 누구에게 삶을 봉헌하려는 것이오?” 클라라는 당연히 그리스도께 삶을 봉헌하겠다고 답했습니다. 프란치스코가 말했답니다. “맞습니다. 그대는 그리스도께 삶을 봉헌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대는 이기적인 사랑에게 그대의 삶을 봉헌하는 것입니다. 그대의 구원자는 이기적인 사랑입니다. 그대가 그분께 그대의 삶을 드리려면 온전히 남김없이 바쳐야 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클라라는 동의했습니다. 그리고 온전히 예수님께 바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녀는 성녀가 되었습니다.

사랑에 관한 한 예수님은 너무나 이기적입니다. 우리가 더욱더 사랑할수록 더 좋아하십니다. 남김없이 사랑을 드리기를 원하십니다. 제가 이기적이라고 한 말은 당신만을 사랑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잘 알아들으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여라.” 서로 사랑하는데 남김없이, 아까워하지 않고 몽땅 주는 사랑을 하라는 의미입니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어라.” 바로 그 방법으로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매일의 삶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구체적인 표현입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무엇이 사랑입니까? 하느님이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이 하루나 이틀만 사랑하는 것으로 만족하십니까?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매 순간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매일이 새로운 날입니다. 매일 그날의 축복이 필요합니다. 하느님께서 매일매일 우리에게 축복을 주십니다. 그 축복에 사랑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께 우리 삶을 봉헌하면 때로는 우리를 당나귀처럼 일하게 만드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이기적입니다. 그러나 좋은 점이 있습니다. 우리를 일하러 보내실 때 혼자 보내시지 않고, 아무 준비 없이 보내시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비아가 7살 정도 어릴 때입니다. 선생님과 친구들이 처음으로 1박 2일 여행을 가게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미아를 어떻게 보냅니까? 딸이 여행을 잘 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준비를 해서 가방을 싸줍니다. 갈아입을 옷, 물, 주스, 간식을 넣습니다. 무든 일이 일어날 것에 대비하여 용돈도 줍니다. 1박 2일 여행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비아는 어머니가 얼마나 수고하여 준비를 해주었는지 잘 모릅니다. 비아는 엄마가 해준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목마를 때 엄마가 준비해 준 물을 마십니다. 용돈으로 아이스크림도 사 먹습니다. 엄마가 수고하고 즐기기는 누가 합니까? 비아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완전한 준비를 해주십니다. 그분의 힘으로 우리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분의 삶을 살 때 우리는 지치지 않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일과 반대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일을 하면서 지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세상에서 1주일에 5일 일하고 하루 8시간 일하고 지칩니다만 우리는 지치지 않습니다.

비아는 자라면서 엄마의 사랑이 얼마나 지극했는지 서서히 깨닫게 됩니다. 7살 때는 엄마의 사랑을 모릅니다. 그냥 당연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15살이 지나고 철이 들면서 조금씩 지난날들을 돌아보면서 엄마가 해준 것을 알게 되지요. 엄마가 자기를 위해 얼마나 수고했고, 얼마나 큰 사랑을 기울였는지 알게 됩니다. 일단 그것을 알게 되면 비아는 평생 엄마에게 좋은 딸이 됩니다. 비아가 성장했기 때문입니다. 어른이 되면 어른처럼 생각하고 어른처럼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영적으로 더 성장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영적으로 성장할수록 더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하느님께  더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얼마나 좋은 분이신지 느끼는 것입니다. 이제 남은 삶을 하느님을 위해 살겠다고 생각합니다. 열매는 영적인 삶의 표시입니다.

열매를 보면 영적으로 성장하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가 우리 영적 삶에 도움을 줍니다. 하느님과 관계 맺는 것을 도와줍니다. 이웃과 관계 맺는 것을 도와줍니다. 그리고 나 자신과 관계 맺는 것을 도와줍니다. 거기서 이득을 얻는 사람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 삶에서 예수님이 맛있는 치킨버거를 만드시도록 해드려야 합니다. 무엇으로 맛있는 치킨버거를 만들 수 있습니까? 맥도널드에서는 빵과 여러 가지 야채와 고기로 만듭니다. 예수님의 부엌에서는 예수님께서 우리가 맺은 성령의 열매로 치킨버거를 만드십니다. 예수님의 치킨버거에는 모든 것이 들어있습니다. 맛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다른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됩니다.

 

 

 

스물한 번째 강의

성령 2

 

영적인 성장을 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알아봅니다. 장미꽃은 뒤에 두어도 향기가 납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고 거룩함에 성장할 때 예수님의 현존을 더 잘 느끼게 해줍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무는 모두 그 열매를 보면 안다.”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나뿐 열매를 맺는 것이 당연합니다. 어떤 사람이 하느님에게서 온 사람인지 알려면 그 사람의 행동, 그의 사람됨, 그의 열매를 보면 압니다.

 

성령의 첫 열매가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하느님의 특별한 현존입니다. 모든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하느님을 생각하면 기쁨이 옵니다. 아가페, 사랑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다음은 평화입니다. 아프리카 수단에서는 늘 전쟁이 있었습니다. 평화가 없었습니다. 남고 북으로 나뉘어 오랫동안 내전을 치렀습니다. 이제 평화협정을 맺어 평화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령이 열매인 평화는 그런 평화와는 다릅니다.

평화는 예수님의 선물입니다. 이것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 평화는 바로 성령이십니다. 이 평화가 있으면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시는 것입니다. 이 평화를 지닌 사람은 흐르는 물에 글자를 새긴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이 우리를 욕해도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마음이 산란해지지 않습니다. 거룩함을 지니게 됩니다. 거룩함이 중요합니다.

첫째는 기쁨입니다. 기쁨이 무슨 뜻입니까? 아들이 시험에 합격하면 기쁩니다. 좋은 직장을 얻게 되면 기쁩니다. 첫 월급을 받으면 기쁩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인 기쁨은 그런 기쁨과는 다릅니다. 이 기쁨의 특징은 시험에 합격을 하든, 불합격을 하든 상관없이 영혼의 아름다움을 지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기쁨에 차 계셨습니다. 기쁨으로 당신의 삶을 사셨고, 기쁨으로 당신의 죽음을 맞으셨습니다. 내적 기쁨입니다. 그 기쁨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잘 드러냅니다.

사랑, 평화, 기쁨, 이 세 가지 미덕이 우리가 하느님과 관계를 맺도록 도와줍니다. 이어지는 3가지 미덕은 우리가 이웃과 좋은 관계를 맺도록 도와주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인내, 선함, 친절입니다.

넷째가 인내입니다. 여러분에게 인내가 있습니까? 부부가 서로 오해를 했고, 그래서 다투었습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심한 소리를 하여 아내가 상처를 받았습니다. 아내는 참을성 있게 남편을 기다립니다. 복수할 기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런 인내가 아닙니다. 성령의 열매인 인내는 다른 이들을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인내 없이 좋은 가정을 이룰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열매인 인내를 지니고 서로에 대해 이해해야 합니다.

다섯째는 선함입니다. 형제자매들과 관계 맺음 안에서의 선함입니다. 이 선함이 다른 사람들에게서 선을 찾도록 도와줍니다. 성령께서는 철학자 칸트보다 위대한 분이십니다. 칸트는 노란색 색안경을 쓰면 모든 것이 노란색으로 보인다고 했습니다.

성령을 지니고 있으면 내적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좋은 점을 보고 격려해 줄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 안에서 부정적인 것을 보면 선의를 위해 성령께 기도해야 합니다. 그 사람의 좋은 점을 볼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캐오 에게서, 사마리아 여인에게서 좋은 점을 보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서 좋은 점을 보십니다. 우리가 배우자나 자녀들의 삶에서 좋은 점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좋은 점을 볼 수 있도록 성령께 기도해야 합니다.

여섯째는 호의입니다. 친절이라고도 할 수 있는 호의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는 나에게 상처를 부고, 고집불통인 사람에게 친절하거나 호의를 지니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인 호의는 우리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에게도 친절을 베푸는 것이지요. 우리가 상처 받으면서 호의를 베풀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 빈첸시오가 아주 좋은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누군가가 의자를 들어 성 빈첸시오의 얼굴을 쳤습니다. 그러자 성 빈첸시오가 말했답니다. “아, 다행히 의자 다리가 부러지지 않았네요.”

우리가 성령의 열매인 호의를 지니고 있으면, 사자가 우리에게 와서 고양이가 되어 돌아갑니다. 사자처럼 공격을 하던 사람이 고양이가 됩니다. 이것이 성령의 열매입니다. 호의를 지니고 있지 않으면 고양이가 사자로 돌변하게 됩니다.

위에서 본 세 가지 인내, 선함, 호의는 다른 사람들과 관계 맺도록 도와주는 열매입니다. 나머지 세 갖는 자신과의 관계를 잘 맺도록 도와주는 열매입니다.

일곱째는 성실입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믿음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수도 삶을 살거나, 가정생활을 하거나 우리는 자신에게 진실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제가 강론을 한다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강론을 해야 합니다. 사랑에서 나오는 강론을 해야 합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지 않으면서 그런 척할 수 있습니다. 가짜 미소를 지을 수 있습니다. 연극을 하면서 사람들을 확신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 방에 가고 제 사생활 중의 사생활이라고 할 수 있는 내밀한 방에 가면 제가 압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압니다. 사랑해서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압니다.  연극을 한 것이라는 사실을 압니다. 그러면 기쁨이 없습니다.

여덟째는 온유입니다. 마음이 온유하면 우리 자신을 위해 좋습니다. 온유함으로 행동하면 늘 품위를 지니게 됩니다.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메야 신사가 되고, 정장을 하고 좋은 핸드백을 들어야 숙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온유함을 지녀야 신사 숙녀인 것입니다. 온유함이 우리 영혼의 장신구입니다.

마지막으로 절제입니다. 절제는 우리 자신을 이해하도록 도와줍니다. 우리 모든 삶에 절제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절제를 할 수 있습니까? 우리에게 믿음이 필요합니다. 믿음이 우리를 불필요한 것에서 보호해줍니다. 믿음이 우리가 절제의 미덕을 지닐 수 있게 도와줍니다.

 

성령의 열매는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한다는 표시로 하느님과의 관계와 이웃과의 관계, 그리고 자신과의 관계에 도움을 줍니다. 성령이 주시는 모든 선물은 은총입니다. 하느님이 거저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 특별한 은총이 있습니다. 그것을 은사라고 부르지요. 그래서 성령의 선물을 은총과 은사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선물을 받았습니다. 그분께서 주신 것입니다. 이 선물은 개인적인 성화를 위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인 성장을 이루도록 주셨고, 우리는 그것을 받아 영적으로 성장합니다. 열매는 영적인 성장의 결과를 측정하는 표징입니다.

그런데 은사는 영적 거룩함의 표징이 아닙니다. 은사는 다만 성령의 도구입니다. 어떤 특별한 은사를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 주십니다.  교회 안에 여러 가지 은사가 있습니다. 같은 성령께서 여러 다른 은사를 여러 다른 사람에게 주십니다. 그것은 다만 성령의 도구로 사용하기 위한 것입니다.

은총은 다릅니다. 우리에게는 은총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은총을 받기 위해 거룩함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십계명을 잘 지켜야 합니다. 거기서 이탈하면 안 됩니다. 십계명은 모두 사랑에 관한 것입니다.

 

그 위에 주님의 영이 머무르리니 지혜와 슬기의 영, 경륜과 용맹의 영, 지식의 영과 주님을 경외함이다. 그는 주님을 경외함으로 흐뭇해지리라. 그는 자기 눈에 보이는 대로 판결하지 않고 자기 귀에 들리는 대로 심판하지 않으리라. (이사 11,2-3)

 

첫째, 지혜입니다.  무엇이 지혜입니까? 하느님의 지혜에 대한 경험입니다. 지혜는 지식과 다릅니다. 설탕에 대해 아는 것과 설탕을 아는 것은 다릅니다. 어떻게 다릅니까? 설탕에 대해 아는 것은 설탕에 미네랄이 얼마나 들어 있고, 비타민이 얼마나 들어 있는지 등의 지식적인 앎입니다. 그러나 설탕을 한 숟가락 먹으면 그것은 다릅니다. 설탕을 경험하게 됩니다. 지혜는 하느님이 진리에 대한 경험입니다.

둘째, 슬기의 영입니다. 슬기의 영은 진리의 내적인 의미를 알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하느님의 신적 진리를 알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예를 들어 삼위일체의 신비를 이해하도록 도와줍니다. 그것은 신비이지만 슬기의 영이 있으면 쉽게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성체성사의 의미도 쉽게 알아듣게 됩니다. 슬기의 영이 없으면 미사 중의 빵과 포도주는 단지 빵과 포도주일 뿐입니다. 그러나 슬기의 영이 있으면, 미사 중의 빵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라는 것을 알아듣게 됩니다. 그것이 슬기의 영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 슬기의 영을 가지고 계셨다는 사실을 요한 복음 8장에서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당신을 고소할 구실을 만들려고 하는 간교한 마음을 알고 계십니다. 그들이 지니고 있는 악한 생각을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 돌을 던지지 말라고 하면 율법을 어기는 것이고, 중죄인 간음죄를 허용하는 것이 됩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돌을 던지라고 하면, 당신이 가르치시는 용서와 자비의 정신에 어긋나는 것이고, 당신의 가르침은 힘을 잃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간교한 생각을 아셨고, 아주 슬기로운 답을 하신 것입니다.

셋째, 경륜의 영입니다. 우리는 매일 많은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경륜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너희가 오른쪽을 돌거나 왼쪽으로 돌 때 뒤에서 ‘이것이 바른길이니 이리로 가거라.’ 하시는 말씀을 너희 귀로 듣게 되리라.” (이사 30,2)에서 보게 됩니다.

이것이 경륜의 영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이 선물은 우리 삶에서 올바른 결정을 내리도록 도와줍니다. 솔로몬 왕이 이 선물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솔로몬 왕은 어려운 문제를 쉽게 간단히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경륜의 영이 함께했기 때문입니다.

넷째, 용맹의 영입니다. 우리에게 용기가 없다면, 많은 일을 수행할 수 없습니다. 제가 만일 용기가 없다면, 사제로서 제대로 살 수 없을 것입니다. 가정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용기가 필요합니다. 늘 용맹의 영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용기는 우리에게 희망을 줍니다. 박해를 이겨낸 순교자들을 보십시오.

여러분, 토마스 모어의 유명한 일화를 아시지요? 토마스 모어는 순교자입니다. 참수형을 받았습니다. 왜 순교를 당했습니까? 그는 예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바른 말을 하여 순교를 당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자기의 목을 베려는 집행인의 칼 앞에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답니다. “내 목을 벨 때, 내 수염은 자르지 마라 내 수염은 죄가 없으니까.” 죽음에 직면해서도 유머를 잃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용맹의 영의 선물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얻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강림 전에 사도들은 두려움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성령강림 후에 사도들은 용감하게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었습니다.

다섯째, 지식의 영입니다. 우리가 책이나 인터넷을 통해 아는 지식과는 다른 것입니다. 이 지식의 영은 우리가 창조주 하느님과 피조물인 우리 자신의 관계를 알아듣도록 해줍니다. 모든 창조물은 하느님의 현존을 반영합니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외쳤습니다. “어머니인 대지여, 누님인 달이여!”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보게 됩니다.

지식의 영을 받으면, 우리는 나병환자에게서 주님의 현존을 볼 수 있습니다. 그를 치료할 때 주님을 돌보아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높은 경지의 목적은 바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벌을 받을까 두렵기 때문이 아니라 진실로 사랑의 마음에서 예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죄 짓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징벌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께 상처 드리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해 성사가 이 선물을 더 풍성하게 해줍니다. 미래를 밝게 해줍니다.

여섯째, 경건함의 영입니다. 경건함의 영을 받으면 우리가 진정 하느님의 자녀라고 느끼게 됩니다. 하느님에 대해 아버지와 같은 사랑을 느낍니다. 그래서 우리 뜻과 우리 행동에서 그것이 나타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늘 경건한 마음으로 삶을 아름답게 수놓게 됩니다.

 

은사는 성령의 도구입니다. 우리는 성인들의 삶에서 여러 가지 은사를 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특별한 은사를 받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모두 성인은 아닙니다. 이것이 우리가 얼마나 거룩한 사람인가에 대한 척도는 아닙니다. 다만 성령의 도구입니다. 왜 교회 안에 특별한 사람들에게 은사를 주셨습니까? 교회를 건설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들에게 봉사하게 하려는 것이지요.

첫째, 말씀의 은사가 있습니다. 말씀의 은사는 무엇입니까? 말씀의 은사에는 다시 세 개의 선물이 있습니다. 신령한 언어를 말하는 은사, 신령한 언어를 해석하는 은사, 예언하는 은사가 그것입니다.

이 은사들은 모두 언어를 사용하는 은사입니다. 신령한 언어를 말하는 은사는 심령기도의 은사입니다. 왜 심령기도의 은사를 주시는 걸까요?

우리가 하느님을 찬미할 때, 우리 지능을 사용하여 올바른 말을 찾아 찬미하려고 하면 금방 지치게 됩니다. 온전히 찬미를 드리는 데 방해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이끌어 가도록 하기 위해 신령한 언어로 말하는 은사를 주십니다. 신령한 언어로 말하면 오랫동안 주님을 찬미할 수 있습니다. 찬미를 드리면서 기쁨으로 차오르게 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도 심령기도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심령기도는 공공장소에서 대중 앞에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버스나 기차 안에서는 침묵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께서는 언제나 절제를 가르치십니다. 절제 없이 하면 그것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어떻게 그 은사를 얻게 됩니까?

“그대가 지닌 은사, 곧 원로단의 안수와 예언을 통하여 그대가 받은 은사를 소홀히 여기지 마십시오.” (1 티모 4,14)

교회의 원로들의 안수와 예언을 통해 얻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은사를 사용할 때 교회에 순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악령이 교묘하게 이용합니다. 거기에 대한 경고가 있습니다. “그러나 놀랄 일이 아닙니다. 사탄도 빛의 천사로 위장합니다.” (2코린 11,14) 그렇게 때문에 늘 주의해야 합니다. 아주 위험할 수 있는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 바오로는 교회에 순명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교회의 가르침 없이 성령의 은사를 잘못 사용하면 우리 삶을 파멸로 이끌 수 있습니다. 영성생활에 부주의하면 멸망의 길로 들어설 수 있다는 것을 늘 명심하고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도움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더 많은 선물을 받으면 그만큼 도움이 필요한 다른 사람들을 위해 더 많이 내놓아야 합니다.

둘째, 지식의 은사입니다. 여기에는 지식, 지혜, 분별의 선물이 포함됩니다. 성령께서 이 은사를 우리에게 주십니다. 지식, 지혜, 분별은 지적 능력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지식의 은사라고 합니다. 베드로는 지식의 은사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니아스와 사피라의 죄를 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니아스, 왜 사탄에게 마음을 빼앗게 성령을 속이고 땅값의 일부를 떼어놓았소?”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황제에게 세금을 바쳐야 하느냐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동전을 가져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동전에 누구의 초상이 새겨져 있느냐는 물음에 그들이 황제의 초상이라고 하자,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리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올바로 분별하는 지식의 은사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어떻게 아느냐고 묻는 나타니엘에게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 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을 알아보는 지식의 은사를 지니고 계셨습니다.

셋째, 표징의 은사입니다. 치유의 은사, 기적의 은사, 믿음의 은사가 모두 표징의 은사에 속합니다. 이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이미 믿고 있는 사람들은 이런 표징의 은사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 믿음을 지니게 하기 위해 표징이 필요합니다.

치유의 은사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육체적 치유, 내적 치유, 그리고 육체적 치유나 내적 치유를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입니다. 육체적 치유 이전에 먼저 병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우리의 진정한 치유자는 오직 한 분, 예수님이시란 것입니다. 그분이 성령의 도구로 치유자를 세우시는 것입니다. 치유는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성령의 도구인 치유자가 하는 일이 아닙니다.

제가 동반하는 피정에서 어떤 사람이 내적으로 치유되었습니다. 제가 치유자입니까? 치유가 제 능력으로 일어납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런 치유가 일어납니까? 왜 그렇습니까? 성령께서 저를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치유자가 우리를 거룩함으로 이끌어 줄 수는 없습니다. 다만 성령의 도구로 사용하도록 은사로 주어진 것뿐입니다.

루르드에서 많은 치유가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루르드에 갔다고 모든 병자들이 치유되는 것은 아닙니다. 왜 모든 사람이 치유되지 않습니까? 그것은 하느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치유자의 능력에 신뢰를 해야 합니다. 우리가 치유의 은사를 지닌 사람에게 갈 때,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기대해야 합니다.

어떤 때는 누군가를 위해 기도할 때, 그 사람의 자녀에게 치유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누가 치유를 해주는 것입니까? 예수님입니다. 영광은 예수님께 돌려야 합니다. 왜 치유가 일어납니까?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치유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영과의 반은 하느님께, 나머지 반은 자기에게 돌리면 안 됩니다.

 

아프리카에서 피정지도를 할 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였고, 비를 피할 지붕이 없는 야외에서 하게 되었는데, 비가 내렸습니다. 한 사람이 저에게 와서 말했습니다. “신부님, 비가 그치도록 기도해 주세요.” 저는 함께 기도하자고 말했고, 비를 그치게 하여 피정을 계속 할 수 있도록 모두가 함께 기도했습니다. 놀랍게도 다른 곳에는 비가 오는 것이 보이는데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는 비가 그쳤습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기적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서입니다. 그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에게 일어난 일입니다. 안토니오가 길을 걷고 있다가 건물을 짓고 있는 공사 현장을 지나게 되었는데, 그는 한 인부가 지붕에서 미끄러져 떨어지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거기 멈추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인부가 공중에 매달려 있게 되었습니다. 안토니오는 본당 신부님께 갔습니다. 은사를 사용할 수 있는 허락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허락을 얻은 후에 그 사람에게 내려오라고 하여 그가 내려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은사는 순명으로 사용해야 하고, 은사의 영광은 하느님께 돌려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믿음의 은사입니다. 믿음의 은사란 믿음으로 기적이 일어날 정도의 믿음을 말합니다. 우리는 신앙을 지니고 있습니다. 단순히 그런 믿음이 아닙니다. 사도들에게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간질병 환자를 치유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치유를 한다고 했지만 치유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오셔서 치유해 주셨습니다. 사도들이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믿음을 지니고 있었지만 아직 그때까지는 기적을 불러일으킬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믿음의 은사란 그렇게 기적을 일으킬 정도의 놀라운 믿음을 말합니다.

 

제 삶에서 믿음의 은사를 체험한 두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2년 전 슬로바키아에서 피정을 지도할 때입니다. 중풍에 걸린 한 부인을 사람들이 피정에 데리고 왔습니다. 몸이 강철처럼 굳어 있었습니다. 네 명의 다른 여자들이 그녀를 부축하여 데리고 다녔습니다. 저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가슴이 아팠습니다. 매일 그녀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저는 그녀가 누구인지도 몰랐지만, 그녀를 위해 특별한 지향을 두고 기도했습니다. 목요일 미사 후에 제 방으로 가다가 네 명의 여자가 그녀를 데리고 가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저에게 어떤 영감이 왔습니다. 저는 그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그냥 손을 놔보세요.” 그리고 제가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줄리아 씨, 저에게 걸어오세요.” 그러자 줄리아 씨가 저에게 걸어왔습니다. 제가 그렇게 말했지만, 정말 그녀가 저에게 걸어올 때 저는 너무 놀랐습니다. 저는 교육을 받은 사람입니다. 제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믿음의 은사입니다.

성령께서는 누가 치유가 필요한지를 아십니다. 그녀가 지닌 믿음을 아셨고, 저를 도구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저는 손이 떨렸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성령께서 활동하십니다.

다른 예는 작년에 스위스에서 피정지도를 할 때입니다. 부부가 피정에 왔는데, 저에게 와서 자기들의 상황을 이야기했습니다. 두 사람 모두 결혼 후에 이혼을 했고, 이혼 후에 혼배 하지  않고 사회 결혼으로 죄 중에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아내가 혈액 암이었습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당신들이 그렇게 조당을 풀지 않고 함께 사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조당을 풀고 정식으로 혼배를 하면 병이 나을 것입니다.” 저는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한 말입니다. 그러고는 ‘만일 조당을 풀고 병이 낫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 하고 걱정이 되었습니다. 저는 믿음이 있지만 그런 정도의 강한 믿음은 아니었습니다. 제 믿음과 지성이 서로 싸웠습니다.

그런데 올해 다시 스위스에 가서 피정을 지도하게 되었습니다. 그 부부가 다시 올 것인지 궁금했고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강의실에 갔더니 그 부부가 첫째 줄에 않아 있었습니다. 저는 그들이 혼배를 했는지, 치유가 되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마음속으로 괴로웠습니다. 만일 치유가 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말할 것인지 난감했습니다. 그래서 첫 강의가 끝나고 얼른 그들을 피해 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저를 쫓아왔습니다. 저는 행복한 척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이 말했습니다. “신부님, 신부님 말씀 듣고 조당 풀고 혼배를 올렸습니다. 그 후에 피 검사를 했더니 암세포가 다 사라졌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사람에게 고통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믿음도 필요하고 지혜도 필요합니다. 무엇보다 올바른 영이 필요합니다. 잘못된 영에 이끌릴 수 있습니다. 늘 조심해야 합니다. 어떤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여자가 누군가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암에 걸렸습니다. 치유가 필요합니다. 나에게 치유를 받아야 합니다.”

그 사람은 두려운 마음에 병원에 가서 암이 있는지에 대한 검사를 했습니다. 돈을 많이 들여서 검사를 했는데 암이 없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 여자에게 가서 따졌더니, 그 사이에 자기가 치유를 해주었기 때문에 암세포가 다 사라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거짓 영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올바른 영이 필요합니다. 올바른 영만이 올바른 길로 이끌어 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가르침이 필요합니다. 모든 것이 성령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은사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순명 안에서 사용해야 합니다.

 

 

 

스물두 번째 강의

우리는 그분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존재합니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존재합니다.” 사도행전 17장 28절입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기도입니다. 제가 거듭나는 과정을 통해 이 기도문을 좋아하게 되었고, 그 후에 늘 이 기도를 바치고 있습니다. 아프리카에서는, 여러분이 영상물에서 본 것과 같은 비포장 도로에서 시속 180킬로미터로 차를 몰기도 합니다. 제가 미쳤기 때문이 아니라 미사시간에 맞춰 가려면 어쩔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저에게 정말 운전을 잘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계속 사고가 났습니다. 제가 잘못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잘못하여 사고가 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운전할 때 차가 구르는 사고도 일어났지요. 저는 예수님의 이름만 불렀습니다. 사고에서 목숨을 구해 주셔서 감사 드렸습니다. 저는 왜 그런 사고가 자주 일어나는지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숲 속에서 사고가 일어나면 난감합니다. 병원도 없고 의사도 없습니다. 작년에 한국에 오는 비자를 받으려고 나이로비에 갔을 때입니다. 수도원의 좋은 차를 타고 있었습니다. 신호대기 중에 갑자기 어떤 차가 와서 제 차를 들이받았습니다. 그 순간 제가 예수님께, “예수님, 저는 조심을 합니다. 이것이 저의 잘못은 아니지 않습니까?” 하고 말씀 드렸습니다. 아주 큰 사고였지만 저는 기적적으로 살아났습니다.

한번은 티카라는 곳에 다른 프로그램이 있어서 가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다른 사람이 운전을 하고 있었습니다. 작은 도로에서 큰 도로로 접어들려는데 갑자기 오토바이 두 대가 한꺼번에 달려와서 제가 타고 있는 차를 박았습니다. 폭주족이었지요. 오토바이에 탔던 사람들은 붕 떠서 나가떨어졌습니다. 하느님께 감사하게도 저는 크게 다치지는 않았습니다. 그 사고가 난 후에 제가 우연히 성경을 펼쳐서 읽었는데, 사도행적 17장 28절의 구절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때 이 구절을 읽데 되었습니다.

제가 운전을 잘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어떤 정신병자가 앞이나 뒤에서 언제 달려들지 우리는 모릅니다. 우리에게는 보호가 필요합니다. 주님께 도움을 청할 때 주님이 보호해 주십니다. 모든 것을 예수님과 함께 시작하고, 예수님 안에서 움직이고, 예수님 안에 머무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것을 외워 늘 기도하면 큰 보호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느님의 말씀에는 약효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빌라의 대 데레사가 말했습니다. “우리가 계획을 하지만 일을 이루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아빌라의 대 데레사는 영성의 단계에 대해 말합니다. 우리가 어떤 영성의 단계에 있는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영성은 계속 성장해야 합니다. 이것에 대해 소개할 시간은 없습니다. 다음 기회로 미룹니다. 하느님께서는 더 많은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대신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해드리겠습니다.

어느 한국인 남자가 아프리카를 여행했습니다. 사파리를 보고 싶었기 때문에 아프리카에 간 것입니다. 거기서 야생동물을 보기 위해서는 차를 타고 다녀야 합니다. 그런데 이 남자는 자기는 걸어서 가겠다고 했답니다. 사자나 코끼리 등의 동물을 만나면 위험할 수 있다고 했지만, 자기는 상관이 없다고 하면서 걸어서 야생동물원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사흘 정도를 걸어서 아주 깊이 들어갔습니다. 그곳에서 아주 큰 사자를 만났지요. 두 달이나 굶주린 사자입니다. 그 남자를 보고 사자는 잡아먹기 위해 쫓아왔습니다. 그는 겁에 질려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지쳐서 쓰러졌습니다. 쓰러진 채 뒤를 돌아다보았습니다. 사자가 바로 눈앞에까지 와 있었습니다. 그가 기도했습니다. “주님, 제발 이 사자가 그리스도적인 생각을 갖고 저를 잡아먹지 않게 해주세요.” 그리고 사자는 그를 잡아먹기 전에 식사 전 기도를 바쳤습니다. “주님, 저희에게 주신 이 음식과 저희에게 강복하소서!”

어떤 사람들은 기도는 마지막 순간에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 순간에 기도하면 그분이 들어주실 터이니 늘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도는 매 순간 드려야 합니다. 기도는 선택이 아닙니다. 우리가 휴가를 갈 것인가는 선택이지만, 기도를 할 것인가는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다른 이야기입니다. 아프리카에는 원숭이가 많습니다. 원숭이가 와서 핸드폰을 낚아채 가기도 합니다. 원숭이가 핸드폰을 손에 갖고 놉니다. 어떻게 다시 돌려받을 수 있는지 아십니까? 돌을 던지는 척 하면서 약을 올립니다. 그러다가 가까이 가서 진짜 돌을 던지면 원숭이는 화가 나서 핸드폰을 던집니다. 그래서 도로 찾습니다.

한 사람이 원숭이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는 원숭이를 아주 귀여워했습니다. 그런데 그 원숭이가 아주 키가 큰 나무에 올라가서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이 내려오라고 울면서 애원해도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웃 사람들이 바나나나 사과를 던져줘 보라고 하여, 그렇게 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나무가 너무나 높아 올라가서 데리고 내려올 수도 없었지요. 불자동차 사다리도 못 올라갈 만큼 키가 큰 나무였습니다. 어쩔 줄을 모르는데 마침 본당 신부님이 지나가다가 그 광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본당 신부님께 기도를 청했습니다. “신부님, 원숭이가 내려오게 기도해 주세요.” 신부님이 오셔서 나무 밑에서 기도하시고 강복을 주시자 원숭이가 내려왔습니다. 깜짝 놀라서 그 사람이 신부님께 “도대체 어떤 기도를 드렸기에 원숭이가 내려온 것입니까?” 하자 신부님이 말했습니다. “저는 원숭이에게 내려오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십자성호를 그었습니다.” 원숭이는 그 십자성호를 어떻게 알아들은 것입니까? ‘너, 내려오지 않으면 나무를 자르겠다.’ 라고 알아들은 것입니다. 그래서 겁이 나서 내려온 것입니다.

모든 기도에서 미사가 가장 좋은 기도입니다. 미사에서 우리는 가족들을 위해 특별한 지향을 두고 기도하게 됩니다. 여러분뿐 아니라 가족들이 행복해야 합니다. 미사에서 가족들을 위한 특별한 지향을 두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과 그분의 능력을 과소평가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우리가 한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에게도 한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시고 한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운전사나 택시 기사가 아닙니다. 비행기 조종사입니다. 비행기 조종사처럼 어디에서나 오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비행장이 없으면 헬리콥터를 타고 오십니다. 그분의 사랑과 능력에 대해 신뢰를 지녀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청할 때 그분이 오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나와 함께라면 너희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스물세 번째 강의

가정 성소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유다 지방과 요르단 건너편으로 가셨다. 그러자 군중이 다시 그분께 모여들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늘 하시던 대로 다시 그들을 가르치셨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모세는 너희들에게 어떻게 하라고 명령하였느냐?” 하고 되물으시니, 그들이 “이혼장을 써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을 모세는 허락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는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모세가 그런 계명을 기록하여 너희에게 남긴 것이다. 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마르 10,1-9)

 

 

우리는 교회 안에 4가지 다른 성소가 있다는 것을 압니다. 4가지 모두 거룩한 부르심인 성소입니다. 가정 성소, 사제 성소, 수도 성소, 독신 성소입니다. 이 4가지 다른 성소는 사람들이 하느님을 섬기는 4가지 다른 방법입니다.

가정 성소를 봅시다. 가정 성소는 축복입니다. 세상에서 가정을 이룬다는 것은 놀라운 축복입니다.

여러분, 텔레비전을 매일 보십니까? 어쩌다 한 번 보십니까? 리얼리티 쇼를 보십니까? 아, 한국에서는 그 프로그램을 방영하지 않는군요? 어떤 실제 상황을 생방송으로 인터뷰하는 프로그램입니다. 제작자가 세상에서 가장 모범적인 가정을 찾아 그 가정 구성원들과 직접 인터뷰를 하기로 했습니다. 5개 대륙을 모두 조사한 끝에 드디어 한 가정을 찾았습니다. 조그만 마을에 사는 한 부부가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가정이 세계에서 가장 모범적인 가정으로 선정되었습니다. 어느 마을의 누구네 가정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나자렛이라는 마을의 요셉과 마리아라는 부부이고, 그들의 낳은 예수라는 이름의 아들입니다. 이 가정이 가장 훌륭한 가정으로 선정되어 스튜디오에서 생방송으로 인터뷰를 하게 되었습니다.

스튜디오는 조명이 밝습니다. 여기저기 빛이 비쳐서 처음 스튜디오에 가면 조명이 몹시 거슬립니다. 그러나 아기 예수님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당신이 빛이니까요. 조명이 밝게 비치고 인터뷰가 시작되었습니다.

사회자가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 가정이 가장 모범적인 가정으로 선정되었는데, 그 성공 비결이 무엇입니까?” 요셉과 마리아는 서로를 쳐다봅니다. 그들은 누가 말해야 할지 잘 모릅니다. 그때 마리아가 아기 예수님을 안고 사회자에게 말합니다. “우리 가정의 성공 비결은 이 아기 예수입니다.”

사회자가 이번에는 요셉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요셉 씨, 마리아에 대해 좋지 않은 소문을 들으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그것을 극복하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게 되었습니까?” 요셉이 대답을 합니다. “저는 마리아를 알고 있습니다. 저는 마리아를 신뢰합니다. 하느님께서 마리아를 저에게 아내로 주셨습니다. 저는 하느님을 믿습니다. 그분이 저에게 최고의 아내를 주셨다는 것을 압니다.”

요셉이 지닌 확신은 세상의 모든 험담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믿음이 모든 장애물을 넘을 수 있게 해줍니다. 요셉은, 마리아가 하느님이 자기에게 주신 선물이라는 확신과 믿음을 진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남편이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선물이라는 확신을 지니고 있습니까? 오늘날 부부들이 이런 확신으로 삽니까? 상대방을 하느님의 선물로 여깁니까?

우리의 남편이나 아내가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알며, 가장 좋은 친구이신 예수님이 주신 선물이라는 확신을 지니게 되면 모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완벽한 사람을 찾습니다. 우리가 결혼했지만, 상대가 완벽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다른 완벽한 사람을 동경합니다. 그렇게 되면 재난이 시작됩니다. 어느 누구도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하느님만이 완벽합니다. 우리는 다만 노력할 뿐, 모두 약하고 깨지기 쉬운 존재입니다. 우리가 지닌 것에 만족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얼마 전에 어떤 남자가 제게 와서 말했습니다. “신부님, 저는 결혼한 지 15년 됩니다. 제가 여자를 잘못 선택했습니다. 저는 제 아내에 대해 잘 모르고 잘못 선택했습니다.” 그는 자녀가 셋이나 있는 가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게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잘못 선택했으니 바꾸라는 계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제가 신부가 아니었다면, 저는 그의 뺨을 때렸을 것입니다.

왜 그런 행동을 합니까? 하느님을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닌 것에 만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아니, 우리가 선물로 받은 것에 만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지닌 것이 하느님에게서 받은 선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수도 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수도자들도 삶에서 이것을 실천해야 합니다. 어느 공동체에서 어느 형제를 원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공동체 구성원들이 그가 하느님이 보내신 분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 형제 신부가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안다면, 수도원 안의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하느님의 눈으로 그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공동체 삶이 달라집니다.

젊은 부부들이 서로 성격을 바꾸면서 서로에게 적응하면서 산다고 하지만, 예수님을 모시고 살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가정이 선물이라는 이해만이 진정 소용이 있습니다. 요셉은 마리아를 이해했습니다.

누가 우리를 이해해 주는 사람입니까? 구원자입니다. 요셉이 마리아의 구원자가 됩니다. 한 사람이 약하면 다른 사람이 그 사람의 약함을 보충해 주면 됩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은총으로 그 약함을 채울 수 있는 강함을 지닐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은총으로 충분합니다. 이것을 잘 묵상해 보면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모시지 않으면 문제가 점점 커집니다. 기도하지 않는 가정은 쉽게 파멸로 갈 수 있습니다. 기도하는 가정만이 평화 안에서 함께 잘 살 수 있습니다.

요셉이 말했습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아내를 잘 생각해 보십시오. 아내가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바탕으로 상대를 판단하면, 상대에 대해 불평이 생기고 서서히 가정파탄이 옵니다. 예수님의 말씀만 들어야 합니다.

한국은 인도와 문화가 비슷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직도 결혼할 때 선을 보고 하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습니다. 여전히 가족 간의 깊은 일치나 유대를 중요하게 여긴다고 들었습니다. 혼전 순결도 중요하게 여긴다고요. 그런데 문화를 넘어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창세기 2장 24절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

하느님께서는 아이의 부모가 되도록 허락하셨지만, 때가 되면 떠나 보내야 합니다. 물론 자녀들은 부모에게 효도해야 하지만 결혼을 하면서 부모를 떠나는 것이지요. 이제 부부는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부에게 주는 메시지로서 부모를 떠나지만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정생활에 대한 해답입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살면 가정에 일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안 계시면 일치를 이룰 수 없지요.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용서할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우리 가정의 중심에 모시도록 늘 기도해야 합니다.

 

몇 년 전에 제 여동생이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결혼 이틀 전에 저는 동생에게 아주 분명한 교훈을 주었습니다. “너는 다른 사람의 집으로 시집을 가는 거다. 이제 그 집의 모든 가훈을 따라라. 그 집에 가서 살면서 네 두 눈으로 보려고 하지 마라. 오직 한 눈으로만 보아야 한다. 거기서 두 귀로 들으려고 하지 마라. 오직 한 귀로만 들어라. 분명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을 것이다. 거기 마음 쓰지 마라. 무슨 일이 생겨도 그 집안에서 해결하라. 절대 친정엄마에게 이야기 하지 마라.”

동생이 시집에서 있었던 일을 친정엄마에게 이야기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친정엄마가 슬퍼집니다. 그리고 다시 무슨 일이 있나 늘 궁금해합니다. 딸에게 전화를 하게 됩니다. 그러면 딸보고 자기에게 오라고 부릅니다. 함께 영화 보러 가자고 하고, 영화를 본 후에 커피숍에서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 남편이 슬퍼집니다.

인터뷰에서 이제 마지막으로 사회자가 요셉과 마리아에게 물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현대의 젊은 부부들에게 해주실 말씀이 있습니까?” 요셉과 마리아가 동시에 대답합니다. 그들이 아기 예수님을 안아 들어 올리면서 대답합니다. “여러분, 절대 예수님을 놓치지 말고 사세요!”

 

 

 

스물네 번째 강의

카나의 혼인 잔치

 

오늘 피정 마지막 날에 성모님께 대해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저는 보통 6일 피정에서 성모님을 단순히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제 한 강의를 온전히 할애하곤 합니다. 저에게 피정에서 ‘성모님’을 빼면, 다시 말해 성모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고 그냥 피정을 마치게 되면, 그것은 마치 정찬을 하면서 디저트를 빼는 것과 같습니다. 디저트가 없으면 정찬이 아니지요. 성모님은 디저트처럼 우리에게 달콤함을 주시는 분입니다.

 

‘카나의 기적’의 깊은 의미는 무엇입니까? 카나에 혼인 잔치가 있었고, 거기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습니다. 상상 안에서 그 장면을 그리면 많은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또 무엇을 볼 수 있습니까? 빈 물독입니다.

카나의 기적은 예수님께서 단순히 물을 술로 변화시킨 기적이 아닙니다. 이 기적을 통해 당신의 강한 메시지를 전하려 하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메시아에 대한 희망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메시아가 오시리라는 믿음과 함께 메시아가 오시면 다시 기쁨을 되찾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오랫동안 기다렸던 메시아가 오시지 않자, 점점 희망을 잃고 절망에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빈 물독은 희망을 잃어버린 모습을 상징합니다. 텅 비어 있다는 것은 메말라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은 메말라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그 물독에 물을 붓게 하시고, 그 물을 술로 바꾸어 주실 때, 그 의미는 예수님께서 메시아로서 축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사람들을 축복해 주십니다. 그분이 축복하실 때, 사람들 마음 안에 있는 메마름이 사라집니다. 빈 물독이던 그들의 마음이 맛있는 포도주로 채워집니다. 희망이 없던 삶이 이제 희망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 기적은 예수님께서 당신이 바로 메시아라는 것을 보여주시는 기적입니다. 그분은 메시아, 우리의 구세주이십니다. 그리스도라고도 하는 메시아께서 오신다는 것을 안다고 말하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하셨지요.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카나의 기적’을 통해 당신이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라는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 카나의 기적은 카나에서만 일어나는 기적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 기적은 오늘 우리 가정에서 일어나야 하는 기적입니다. 우리 가정에 포도주가 여러 가지 모습으로 부족합니다. 가정 안에 사랑이, 일치가 부족합니다. 우리에게 질병이 있습니다. 경제적 어려움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포도주가 부족합니다. 우리 자신, 우리 삶은 마치 빈 물독과 같습니다. 우리는 우리 삶에서 어떻게 이 부족함을 채워야 할지 모릅니다. 우리 안에 계속 텅 빈 메마름을 느끼지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릅니다. 우리는 우리를 이해해 주는 사람, 구세주가 필요합니다.

카나의 그들은 포도주가 떨어지자 어떻게 했습니까? 성모님께 갔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당신 아드님께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말씀 드려 주세요.” 성모님께서는 아들 예수님께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포도주가 없구나.”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어머니의 말을 들어주셨습니다.

우리에게 메마름이 올 때, 우리가 빈 물독이라고 느낄 때, 성모님께로 가야 합니다. 가서 그분께 전구를 청해야 합니다. “어머니, 우리 가정에 포도주가 모자랍니다. 아드님께 우리 빈 물독을 채워 달라고 청해주십시오.”

성모님께 부탁을 드리십시오. 성모님께서는 우리 가정의 어떤 필요든지 알고 계십니다. 성모님은 여성이며, 어머니이시며, 과부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은 우리 가정 삶에 대해 잘 알고 계시기 때문에 가장 효과적으로 전구해 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분의 전구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텅 빈 물독을 좋은 포도주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다른 어느 누가 우리의 무미건조한 물을 맛있는 포도주로 바꾸어 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풍부한 은총이 내릴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축복이 내렸습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을 모시는 것,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요한복음서는 깊이 묵상해야 그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옆구리에 몸을 기대었던 사람입니다. 그 동작은 예수님의 마음을 깊이 들으려고 하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예수님과 아주 깊이 일치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예수님의 “사랑 받는 제자’가 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성모님의 역할은 우리의 기도를 전구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머니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이것은 성경 깊숙이 에 바탕을 둔, 성경적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신학적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성모님께 전구하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여러분, 메마름, 메마른 감정을 경험해 보셨습니까? 저는 제 마음이 단순히 텅 빈 물독일 뿐 아니라 염분으로 가득 찬 소금기둥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2008년 요셉 빌 신부님께서 돌아가신 후, 수도회가 제게 빌 신부님의 사도적을 이어서 계속하라고 명했습니다. 저는 원래는 사람들 앞에 서면 작은 고양이가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가슴이 벌렁벌렁하고 온몸이 떨려오기 시작합니다. 제가 여러 수도회를 지원했을 때, 다 거부되었던 것이 이것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사람들 앞에 나설 수 있는 어떤 재능도 지니고 있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냥 고아원에서 일하고자 했습니다. 저는 다른 어떤 야심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사람들 앞에 서면 떨렸지만 저는 그것을 그렇게 큰 약점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것을 부정적으로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수도회는 빌 신부님이 선종하시자 그분의 일을 계승해서 여러 나라에게 피정 사도직을 계속하고자 했습니다. 저는 빌 신부님을 이을 좋은 신부님이 선택되도록 기도했습니다. ‘저희 빈첸시오 수도회는 500명의 회원이 있고, 400명의 사제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 좋은 신부님을 빌 신부님의 후계자로 보내주십시오.’ 라고 기도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인도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관구장 신부님이셨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안토니오 신부님, 수도회는 신부님을 빌 신부님의 후계자로 임명합니다.” 저는 처음에 이것이 농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농담이 아니었습니다. 수도회의 익명으로 써 내도록 했는데 만장일치로 저를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이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관구장 신부님께 말했습니다. “저는 경험이 없습니다. 저는 피정이 무엇인지도 모릅니다. 제가 어떻게 빌 신부님이 하시던 피정을 계속합니까?”

그가 말했습니다. “성령께서 신부님 앞에 있지 않습니까?” 제 앞에 성령께서 계시지만 저는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를 원했습니다. 피정지도는 아닙니다. 저는 제가 일하는 숲에서 잘 지내고 있었습니다. 비록 수도도 없고 전기도 들어오지 않지만 그곳에서 저는 잘 적응하며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곳 수도원에 30면의 사제가 있었고, 다른 29면은 잘 지어진 수도원에 살고 있었지만 저는 혼자 숲 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저를 도와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저는 제 동생에게 해준 말을 저 자신에게 상기시켰습니다. “두 눈으로 보지 마라. 두 귀로 듣지 마라.”

저의 수도 삶에서도 그 말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제들의 삶을 보면서 저는 저 자신을 망가뜨리게 됩니다. 제가 어머니께 전화해서 말할 것입니다. “어머니, 수도회가 저를 나무 밑에서 버려두었어요.” 그러면 어머니가 당장 비행기를 타고 와서 저를 집으로 데려갈 것입니다.

가족에게도 하지 말아야 할 말이 있습니다. 저는 부모님께 다만 제가 잘 살고 있다는 것만을 말씀 드립니다. 부모님은 제가 아프리카의 어디에 살고 있는지도 모르십니다.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릅니다. 다만 아프리카에서 잘 살고 있다는 것만 압니다. 가끔 피정지도를 한다는 정도만 아십니다. 부모님은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십니다. 제가 필요한 것은 그것뿐입니다. 왜 엉뚱한 말을 하여 어머니를 슬프게 해드립니까?

 제가 수도 삶에서 하고 있는 일을 여러분의 가정 삶에 적용시키라고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누구의 삶도 완벽한 삶은 없습니다. 예루살렘에 산다고 해도 삶의 위기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아버지가 계십니다. 그것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수도회가 저에게 이 일을 시작하라고 할 때, 저는 이 일을 1년쯤 후에 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1년 동안 여러 피정 센터에 가서 자료들을 모으고, 피정을 어떻게 지도하는지에 대해 배우고, 모든 것을 노트에 적고 준비를 하면 피정지도하는 것이 가능할 수 도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장상은 저에게 내년에 가라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바로 다음 주 토요일에 가서 일요일부터 피정을 지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오, 주님. 제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저는 이제 겨우 사제로 서품된 지 1년 된 풋내기 신부입니다. 그리고 저는 피정에 대해서는 겨우 2개의 주제만을 다룬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것도 유치원생을 위한 피정 주제였지요.

피정지도를 하러 가기 위해 비자를 받아야 했습니다. 아일랜드로 가는 비자입니다. 저는 비자가 거부되기를 기도했습니다. “오, 제발 비자가 나오지 않게 해주십시오. 그래서 제가 갈 수 없게 해주십시오.” 그런데 비자가 나왔습니다. 그것도 1주일 짜리 비자를 신청했는데, 1년 짜리 비자가 나왔습니다. 저와 같은 수도원에 살고 있는 동료 신부님들이 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제가 요셉 빌 신부님의 후계자로 피정지도를 하는 소임을 받게 되었다는 것을 알고, 너무나 안타까워하며 슬퍼해 주었습니다. 그들이 말했습니다. “아, 성령께서도 실수를 하시는구나!”

제가 신학생 때 가금 연회가 있었는데, 다른 신학생들은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잘 했지만, 저는 전혀 할 줄 모르기 때문에 대신 화장실 청소를 했습니다. 그것이 편했습니다. 저는 돼지를 돌보는 일 같은 것은 잘 합니다. 저는 돼지를 돌보는 일과 같은 보통 일을 특별한 방법으로 잘 합니다. 그것이 은총입니다. 그렇게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그 태도가 바로 은총입니다.

제가 부제품을 받을 때, 다른 특별한 은총을 받은 것은 사실입니다. 서품을 주시는 주교님이 저에게 손을 얹어 축복해 주실 때, 저는 29년 동안 시달렸던 문제에서 해방되었습니다. 다른 사람들 앞에 서기만 하면 가슴이 벌렁거리고 떨리는 것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 동안 그것에서 해방될 수 있도록 기도했지만 예수님께서는 들어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른 일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저는 예수님께 말씀 드렸습니다. “예수님,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것으로 족합니다.”

 

저는 피정을 위해서 오직 성경만을 가지고 비행기를 탔습니다. 티켓에 더블린인지 뭐라고 쓰여 있는 것을 보았지만 저는 유럽에 가 본 적이 없었습니다. 저는 숲 속에서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행복했습니다. 가난했지만 다른 사람들보다 더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비행기에 타면서 행복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비행기 안에서 피정지도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두려움이 몰려왔습니다.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피정이 이틀만 하는 것이라면 어떻게 해볼 수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3일 이상은 생각만 해도 너무 끔찍했습니다. 그런데 6일을 피정지도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비행기에서 옆에 탄 승객이 저를 쳐다보았습니다. 저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 승객은 아마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 청년이 분명 우울증에 걸려 있는데 오늘 약 먹는 것을 잊어버렸나 보다.”

더블린에 도착하자 피정을 주관하는 사람들이 마중을 나왔습니다. 저는 아일랜드에 성모 발현 순례지가 있는지 전혀 몰랐습니다. ‘아일랜드 메이오 군의 노크’라는 마을에 성모 발현 성지가 있고, 그곳에서 피정이 있었습니다. 저를 마중 나온 피정 주관자들이 저에게 물었습니다. “신부님, 피정 센터로 바로 갈까요? 성모 발현 성지 경당으로 갈까요?” 저는 발현 성지 경당으로 가자고 했습니다.

저는 신학교에서 공부할 때, 유럽에서는 사람들이 피정 같은 것을 잘 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피정이 있어도 겨우 대여섯 명이 참가 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아주 적은 수의 피정자들을 위해 피정을 지도하는 줄로 알았습니다. 두려워하면서도 저는 나름대로 피정에 대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저의 계획은 단지 피정자가 몇 사람일 테니까, 그들에게 제가 아는 성경 구절을 주고 그것에 대해 묵상해 보라고 하면서 다만 침묵만을 강조하면 되리라 생각했습니다.

제가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피정에 몇 명이나 오지요?” 그들이 말했습니다. “160명 전도 됩니다.” “160명이나 된다고요?” 저는 다시 두려움이 몰려왔습니다.

저는 성모 발현 성지 경당에 갔습니다. 경당은 아주 아름다웠습니다. 거기 아주 아름다운 성모상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 경당에 들어가자마자 성모님 상 앞에 엎디었습니다. 서품 받을 때 엎디는 것처럼 완전히 엎디어 기도했습니다. 성당 안에 있던 사람들이 생각했을 것입니다. “저 청년이 아마 정신이 나갔나 보다.” 사실이었습니다. 저는 정신이 완전히 나갔었습니다. 기온이 영하로 떨어진 곳에 왔습니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모님 앞에 엎디어 기도하는 중에 무엇인가 제 안에 불타 오르기 시작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성모님께 기도했습니다. “어머니, 저는 정말 이 피정에 오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당신의 아드님이 저를 이곳으로 부르셨습니다. 어머니, 저를 도와주십시오. 저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릅니다.”

그런 기도를 하는 동안 제 텅 빈 물독 안에 무엇인가가 채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는 한 번 말씀 드린 대로 지적 능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대학에서 모두 A학점을 받았습니다.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을 했습니다. 저는 자만심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제 물독이 텅 비게 되자, 아무것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저의 졸업장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저의 친구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저를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저의 모든 계획도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다만 텅 빈 물독이었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어머니, 저를 위해 전구해주십시오.” 저는 정말 마음속으로부터 간절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느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선택입니다. 제가 마음으로부터 기도를 드릴 때 성모상에서 미풍이 저를 스치고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주 부드러운 미풍이 제 얼굴을 스쳤습니다. 그 경험이 언제나 진짜입니다. 엎드린 곳에서 일어나자 저에게서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모든 걱정이 떠나갔습니다. 아무 문제도 없었습니다. 저는 성당을 나가 피정 센터로 갔고, 거기서 피정을 이끌게 되었습니다. 요셉 빌 신부님의 피정 강론 스케줄이 있었고, 저는 그 스케줄에 따라서 그냥 강론하기 시작했습니다. 강론을 하면서 아주 편안했습니다. 아무 걱정도, 아무 긴장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토요일이 피정을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성모님께서 어떻게 저를 당신 팔에 안고 다니셨는지 모릅니다. 저는 다만 성모님의 전구를 청하며, 그분의 전구를 통해 피정지도를 시작했을 뿐입니다. 성모님은 능력이 있는 전구자이십니다. 카나에서뿐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도 빈 물독을 채우도록 전구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성모님의 전구를 들으시고 우리의 빈 물독을 좋은 포도주로 채워주십니다.

저는 성모님을 사랑합니다. 제가 어릴 때 본당 주보성인이 성모님이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저는 성모상 앞에서 기도했습니다. 성모님께 전구를 청하면 들어주십니다. 그것을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기도하는 순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의 텅 빈 물독이 좋은 포도주로 채워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저는 인간적인 방법으로는 피정지도를 할 자격이 없습니다. 제가 피정지도를 하는 것은 다만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요셉 빌 신부님의 후계자가 되라는 것은 제게는 너무 큰 요구였습니다.  빌 신부님은 80세이셨고 저는 29세였습니다. 사람들이 저를 보고 실망했습니다. 아주 크게 실망했습니다. 어떤 여자가 제게 말했습니다. “안토니오 신부님, 신부님은 제 손자보다도 어려요.”

첫 번 피정인 아일랜드 피정에서 30명이 넘게 피정을 취소하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저는 그때 당시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는데, 몇 달 후에 들어서 알게 되었습니다. 아무도 저처럼 젊은 신부가 빌 신부님의 후계자로 피정지도를 하러 오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들은 제게 불평했습니다. “신부님은 너무 젊습니다.” 그것이 저의 약점이었습니다. 저는 제 약점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 문제를 조금씩 해결하겠습니다. 매년 제가 한 살씩 나이가 들어갈 테니까요.

 

하느님께서 어떻게 우리 삶을 바꾸십니까? 성모님께서 우리를 예수님께로 데려가십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가르치도록 도와주십니다. 그것이 성모님이 발현지에서 하시는 일입니다. 성모님께서는 파티마나 루르드에만 나타나시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 삶에 나타나십니다. 우리가 이 진리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오시는 성모님께 전구해야 합니다. 성모님의 전구로 우리 삶에서 텅 빈 물독을 좋은 포도주로 채울 수 있습니다.

교회는 성모님에 대한 여러 가지 좋은 신심행위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은 묵주기도입니다. 묵주기도는 성경적 묵상이며, 복음에 충실한 복음기도입니다. 묵죽기도가 어떻게 교회 안에 들어와서 자리 잡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다른 주장들이 있습니다.

학자들마다 견해와 주장이 조금씩 다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16세기에 들어와서 세 가지 신비, 그러니까 환희, 고통, 영과의 신비가 확실하게 자리 잡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수도자들이 먼저 묵주기도를 드리기 시작했고, 세상에 보급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사도신경’은 후에 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917년 파티마의 기도, “예수님,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지옥불에서 구하시며 연옥 영혼을 돌보시되 가장 버림받은 영혼을 돌보소서.” 라는 구원송이 첨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묵주기도는 교회 역사 안에서 서서히 오늘날의 기도 형태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묵주기도를 통해 수많은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어느 나라에서는 아주 놀랍고 강력한 기적이 일어나기도 하면서 사람들이 묵주기도를 점점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현대에 들어와서 첫째 신비인 ‘환희의 신비’와 둘째 신비인 ‘고통의 신비’ 사이에 큰 공간이 비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기 시작했습니다. 첫째 신비인 ‘환희의 신비’ 마지막 단인 ‘예수님을 성정에서 찾으심을 묵상’하는 것에서 예수님의 공생활이 다 빠지고, 바로 둘째 신비의 첫째 묵상, ‘겟세마니’로 넘어가는 것에 대해 뭔가 부족한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2002년에 다른 새로운 신비가 보충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빛의 신비’입니다.

묵주기도는 성경적 기도라고 했는데, 2002년 빛의 신비가 보충됨으로써 완벽하게 성경적 기도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로사리오는 원래 장미 꽃밭, 장미 정원을 뜻하는 라틴어 로사리움 rosarium에서 유래했습니다. 묵주기도를 통해 우리는 장미 꽃다발을 성모님께 드리게 됩니다. 묵주 한 알 한 알이 장미 한 송이인 것입니다. 우리가 묵주기도를 드림으로써 우리는 성모님 머리에 장미 화관을 만들어 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잉태하심, 엘리사벳을 찾아보심, 예수님을 낳으심, 예수님을 성전에 바치심, 잃으셨던 예수님을 성전에서 찾으심, 예수께서 세례 받으심, 카나의 기적을 행하심,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심, 거룩하게 변모되심, 성체성사를 세우심, 피땀 흘리심, 매 맞으심, 가시관 쓰심, 십자가 지심,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심, 부활하심, 승천하심, 성령을 보내심, 마리아를 하늘에 불러 올리심, 마리아께 천상모후의 관을 씌우심, … 각각의 신비 하나하나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묵주기도를 드림으로써 우리는 성경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는 것이지요. 묵주기도를 잘 하도록 권면합니다. 저는 묵주기도를 사랑합니다. 여러분도 묵주기도를 사랑하시지요? 이제 서서히 미사드릴 준비를 합시다.

 

 

 

스물다섯 번째 강의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

 

예수님과 제자들은 벳사이다로 갔다. 그런데 사람들이 눈먼 이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는 그에게 손을 대어주십사 고 청하였다. 그분께서는 그 눈먼 이의 손을 잡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그의 두 눈에 침을 바르시고 그에게 손을 얹으신 다음, “무엇이 모이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는 앞을 쳐다보며,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걸어 다니는 나무처럼 보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분께서 다시 그의 두 눈에 손을 얹으시니 그가 똑똑히 보게 되었다. 그는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집으로 보내시면서,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 하고 말씀하셨다. (마르 8,22-26)

 

피정을 주관하시는 분들은 이 피정을 위해 거의 일년 동안 준비했습니다. 이러한 준비를 통해 우리는 지난 한 주 동안 피정을 했습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실은 이제 집으로 가면서 진짜 피정을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 주 동안 했던 모든 일정은 우리가 예루살렘에 잘 머물기 위한 준비였습니다. 예루살렘에 머물면서 하느님에게서 오는 축복을 잘 받기 위한 준비였습니다.

우리가 피정을 한 것은 우리의 사명을 위해서입니다. 이제부터 우리의 사명이 시작됩니다. 이것은 우리 삶에서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느 곳에 있든 거기에서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이 진짜 피정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제 진짜 피정이 시작된다고 말씀 드린 것입니다.

여러분이 생명의 강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늘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의 잎이 약효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을 위한 약효를 지닌 사람들입니다. 그 약효를 지니기 위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님을 모셔야 합니다. 성체성사가 아주 중요합니다.

선종하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가톨릭교회에서 가장 위대한 기도는 바로 미사다.” 미사는 가장 큰 형태의 기도입니다. 성체성사보다 더 큰 기도는 없습니다.

우리는 매일 피정을 미사와 함께 했습니다. 우리는 매일 아침 성체조배로 하루를 시작했고, 매일 미사로 하루를 마쳤습니다. 미사는 말씀의 전례와 성체를 축성하고 모시는 성찬의 전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과 성체 안에 치유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과 성체 안에서 용서가 이루어집니다. 성체성사 안에 진정으로 풍성한 삶이 있습니다. 성체성사 안에서 예수님을 모심으로써 우리가 또 다른 그리스도가 됩니다. 성체를 모심으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에 나가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에 나가는 삶의 진정한 의미는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능력에 신뢰하십시오. 성체성사를 통해 현존하시는 예수님을 볼 수 있도록 하십시오. 그분이 우리 안에 현존하십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눈먼 이를 치유하시는 대목입니다. 사람들이 눈먼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그들은 눈먼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는 그에게 손을 대어 주십사 고 청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그를 만져 주기만 하여도 치유가 일어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눈먼 이를 예수님께 대리고 온 것이지요.

복음서를 보면 어떻게 예수님께서 치유를 하십니까? 어떤 사람은 치유를 위해 친구를 데리고 옵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를 데리고 온 그 친구의 믿음을 보시고 치유해 주십니다. 하혈병 을 앓고 있던 여자는 자신의 치유를 위해 예수님께 직접 다가옵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기만 해도 치유되리라고 믿습니다. 그 믿음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그녀를 치유해 주십니다.

또 다른 치유 상황도 있습니다. 로마의 백인대장의 경우입니다. 그는 자기 종의 치유를 청합니다. 데리고 올 수 없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아도 한 말씀만으로도 치유가 일어나라고 믿습니다. 백인대장이 말합니다. “저는 주님을 집에 모실 자경이 없는 사람입니다. 한 말씀만 하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백인대장의 믿음을 보시고 그의 종을 치유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치유가 필요한 사람이 당신에게 오기를 기다리시기도 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그가 당신께 오기를 기다리셨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당신이 직접 가시기도 합니다. 희망이 전혀 없는 사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을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 양의 문 곁에 가셨을 때, 거기에는 서른여덟 해나 않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마비되어 있었습니다. 마음이 부서져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물이 출렁거릴 때에 못 속에 넣어줄 사람, 그를 데리고 갈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그는 그냥 누워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몸소 그에게로 가십니다. 그리고 치유해 주십니다. 각 사람에 대한 예수님의 개별적인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벳자타 못 가에 있던 병자에게만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사랑에는 우리 모두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각각의 사람들 수준으로 내려오십니다. 왜 그렇게 하십니까? 하느님의 사랑을 전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죄를 용서해 주고 우리를 치유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오늘도 계속되는 일입니다. 복음서 안에서 우리가 보듯이, 제자들을 통해 예수님께서 하시던 일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예수님 삶의 연장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눈먼 이를 데리고 와서 만져 달라고 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치유를 하시기 전에 어떻게 하셨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그 눈먼 이의 손을 잡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셨습니다. 마을을 잘 살펴보십시오. 이 사람은 마을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를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셨습니다. 우리는 다른 이유로 마을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치유 후에 예수님께서 그를 집으로 보내시면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사마리아 여인에게도 일어난 일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만난 후에 자기 집으로 갔습니까? 아닙니다. 사람들에게로 갔습니다. 이것은 동방박사들에게도 일어난 일입니다.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기 위해 왔습니다. 처음에 헤로데에게 가서 물었습니다. 그런데 돌아가게 되었을 때, 그들은 꿈에 헤로데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다른 길로 자기 고장에 돌아갔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다른 길은 무슨 의미입니까? 다른 삶을 사는 것을 상징합니다. 눈먼 이의 치유에서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그가 마을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상징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치유를 위해 마을에서 벗어나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셨습니다. 마을을 벗어난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옛 삶을 떠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치유하십니까? 예수님께서는 그의 두 눈에 침을 바르십니다. 치유의 과정을 살펴보면, 두 가지 단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눈먼 이의 눈에 침을 바르시고 그에게 손을 얹으신 다음 물으십니다. “무엇이 보이느냐?” 그가 대답합니다.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걸어 다니는 나무처럼 보입니다.”

무엇이 그를 사람을 사람으로 못 보고 나무로 보게 했습니까? 마을에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예수님께서 이 눈먼 이에게 원하신 것은 마음의 눈을 뜨는 것이었습니다. 마음의 치유를 원하셨습니다. 언제나 마음의 치유가 먼저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의 두 눈에 손을 얹으시니 그가 똑똑히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된 것입니다. 이제 깨끗하게 보게 되었습니다. 실제 시력의 치유가 일어났습니다. 진리를 보기까지는 시간이 걸립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눈먼 이에게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으셨을까요? 눈먼 이는 무엇을 보기를 원했을까요? 그는 빛을 보기를 원했을 것이고, 예수님께 빛을 청했습니다.

 

누가 빛입니까?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세상의 빛입니다. 예수님을 볼 수 있을 때, 우리는 모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눈먼 이는 예수님을 보았을 때 빛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명확하게, 똑똑하게 보게 되었지요. 그가 예수님을 보기 전에는 아무것도 명확하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가 빛을 보기 전에는 모든 것이 흐릿하게 보였습니다.

이것은 눈먼 이에게만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리가 빛이 없는 삶을 살 때, 우리에게서 예수님이 없는 삶을 살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남편을 보면서 남편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걸어 다니는 나무로 보게 됩니다. 아내를 보면서 아내를 사람으로 보지 않고 걸어 다니는 나무로 보게 됩니다. 상대가 사람이 아닌 다른 나무로 서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 치유되기를 원해야 합니다. 우리에게서 이 부분을 고쳐주시기를 원해야 합니다. 남편을 남편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빛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빛이십니다.

 

빛이시여! 우리를 이끄소서!

빛이시여! 우리를 평화로 이끄소서!

빛이신 분이여, 우리를 어둠에서 빛으로 이끄소서!

빛이신 분이여, 우리를 모든 부정적인 것에서 벗어나도록 이끄소서!

 

예수님께서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 하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저 말을 상징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죄스러운 삶입니다. 우리의 오래된 습관에서 빠져 나와야 합니다. 거기서 빠져나올 수 있으면, 우리는 어둠에서 빛으로 나올 수 있습니다. 빛으로 나온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사는 삶입니다. 빛과 함께 사는 삶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빛과 함께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까?

감사 드리면서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욥처럼 감사 드리면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좋을 때만 감사를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그에게서 거두어 가도록 사탄에게 허락하셨을 때 욥이 어떻게 했습니까? 욥이 말했습니다.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를 받으소서!” 그 모든 일을 당하고도 욥은 죄를 짓지 않고 하느님께 부당한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과거에 일어난 부정적인 일들과 고통을 통해 하느님께서 우리를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고통 때문에 우리는 강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삶에서 많은 것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는 제자입니다. 제자는 배우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불평을 합니다. 우리에게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도 일어납니다.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나쁜 일에 대해 불평을 합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제 남동생에게 두 살짜리 아이가 있습니다. 그 조카는 아주 똑똑하지만 고집도 셉니다. 그의 행동을 보면 그의 성격을 알아채게 됩니다. 그의 부모가 그를 사랑합니다만 모든 것을 주지는 않습니다. 필요한 것만 줍니다. 어떤 경우에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엄마에게서 얻지 못합니다. 그러면 두 살짜리 아이가 방 한쪽 구석으로가 소리를 지르며 웁니다. 2년 동안 부모가 해준 모든 좋은 것을 다 잊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주지 않는다고 이제 모든 이를 미워합니다.

제 조카인 이 아이를 보면서 저는 제 영성생활이 이 아이와 같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무리 많은 축복을 주셨어도 잘못된 일 하나 생기면 과거의 축복은 모두 잊어버립니다. 우리가 받은 축복은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뭔가 잘못된 일이 하나 생기면 상황은 전혀 달라집니다.

우리는 욥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그는 행복할 때나 불행할 때나 감사할 줄 알았습니다. 우리도 모든 것에서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갖고 있지 않은 것에 대해 불평을 합니다만, 받은 많은 축복에 대해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피정을 통해 새롭게 되었습니다. 이 새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지적인 능력으로 살아야 합니까? 아닙니다. 현명함으로 살아야 합니다. 사려 깊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분별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에 머리 좋은 사람, 지적인 능력이 있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이 모두 좋은 삶을 삽니까? 현명함, 사려 깊은, 분별 없는 지적 능력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왜 분별 있는 삶이 중요합니까? 이것이 바로 성령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이 성령의 선물이 필요합니다. 성령을 받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오시는 성렬께 기도해야 합니다. 새 삶은 기도와 함께 이루어집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사탄의 공격을 받게 됩니다.

제가 어린이를 위한 이야기 하나를 해드리겠습니다. 여기 있는 비아(피정에 참석한 가장 어린 13세 아이)와 같은 어린아이들을 위한 이야기입니다.

 

어느 곳에 아름다운 숲이 있었습니다. 그 숲에 양이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아주 좋은 양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매우 좋은 삶을 살았고, 아주 만족했습니다. 그 양들은 떼를 지어 다녔습니다. 그런데 숲에는 이리도 살았습니다. 이리는 굶주려서 몹시 배가 고팠습니다. 양떼를 보자 양을 잡아먹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양들이 떼를 지어 다닌다는 것이었습니다. 양들이 떼를 지어 있으면 공격을 할 수 없습니다. 양떼에서 한 마리가 떨어지게 해서 잡아먹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한 마리를 떼어 내는지 압니까?

이리는 향 떼오 함께 나란히 걸어갑니다. 그리고 가장자리에 있는 양에게 이리가 말을 겁니다. “양아, 나는 말이야. 네가 작년에 나에게 한 일 때문에 상처를 받았어. 그래서 너에게 갚아주어야 하겠어.” 그 말을 듣고 양이 말합니다. “뭐라고? 나는 작년에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너에게 상처를 주겠어.” 이리가 다시 말합니다. “나는 네가 내 풀을 먹는 것을 보았다. 그것을 갚아주기 위해 너를 잡아먹어야겠다.” 양이 말합니다. “그렇지 않아. 틀렸어. 나는 풀을 먹지 않거든.” 이번에는 이리가 작전을 바꿉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하지만 너는 내 우물에서 물을 마셨잖아. 나는 네가 내 우물에서 물을 마시는 것을 보았어.” 양이 말합니다. “아니야. 나는 물을 마시지 않아. 나는 우리 엄마 젖만 마시거든.” 양은 이리에게 상처를 주지도 않았고, 풀도 먹지 않았고, 물도 마시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소용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이에 그 양은 양 떼에서 떨어져 나왔고 이제는 늦었습니다. 이리가 말합니다. “다 소용 없어. 그래도 나는 너를 잡아먹을 테니까. 저녁 시간이거든.”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그 양은 머리가 좋습니다. 이리가 말하는 것에 좋은 답을 합니다. 자기가 좋은 대답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그 양에게는 현명함, 사려 깊음, 좋은 분별력이 없었습니다. 이리는 나쁜 지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나쁜 지향을 지닌 자를 피하기 위해서는 머리 좋은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지적 능력과 더불어 사려 깊은 분별이 필요합니다.

이리의 작전을 보십시오. 그는 양에게 말을 걸고 대화를 하면서 서서히 양을 양 떼에서 떼어놓았습니다. 그 양은 이리 앞에 자기의 지능을 보여주었죠. 그러나 그에게는 현명함, 사려 깊음, 분별력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이 양과 같습니다. 머리는 좋지만 분별력이 부족합니다. 부서지기 쉬운 약한 존재입니다. 약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양떼를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가 신앙을 떠나면 악이 우리를 공격합니다. 우리가 믿음 안에서 살아가면, 이리가 우리를 공격할 수 없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늘 이리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양 떼와 함께 있을 때 우리는 안전합니다. 믿음을 지켜나갈 때 우리는 안전합니다.

성 바오로가 말했습니다. 우리는 보고 걷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걷습니다. 진주를 돼지에게 던져주지 말라는 말이 있지요. 우리의 믿음은 진주입니다.

여러분은 유일한 존재입니다. 예수님에게 소중한 존재입니다. 예수님께서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쉽게 유혹을 당한다는 것을 아십니다. 그분은 착한 목자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양들입니다. 목자와 함께 양 떼 안에 있으면 양은 보호를 받습니다. 그 양은 안전합니다.

우리에게는 존엄성이 있습니다. 온전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뭔가 부족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필요합니다.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는 삶은 안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믿음을 지니고 살아야 합니다.

왜 예수님께서 눈 멀었던 사람에게 저 마을로 돌아가지 말라고 하셨습니까? 그 마을로 다시 돌아가면 다시 눈멀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빛의 자녀들입니다만 부서지기 쉽고 유혹을 받기 쉽습니다. 우리에게는 현명함, 사려 깊음, 분별이 필요합니다. 이리에게 우리의 지능을 자랑하는 것은 어리석음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아버지와 함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모든 것을 지닐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목자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빛이시고 우리의 목자이십니다.

 

빛이시여! 저희를 인도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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