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eld of dreams, trancending time & place, autobio in progress..

어떻게 나에게 이런 일이

내과의사 안득수의 성령 체험기

안득수 지음

박인숙 정리

 

안득수 마리오

광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전남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했다. 전북대학교 의과대학 교수(29년)와 전북대학교병원 병원장(2년)을 지냈으며, 1986년부터 천주교 전주교구 성령쇄신봉사회 회장으로 봉사하고 있다. 천주교 전주교구 제10대 평신도 협의회 총회장(2년), 천주교 전동성당 사목회장(4년)을 역임했으며, 교황 그레고리오 대훈장(1987년)과 정부 옥조근정 훈장(2004년)을 수상했다. 지금은 전북 완주에 있는 성바오로복지병원에서 임종을 앞둔 환자들을 보살피고 있다.

박인숙 도미니카

자유기고가. 한국일보사 일간스포츠 기자로 일했으며, 2013년 8월 하느님 품으로 떠났다. 대담하여 엮은 책에 <김임순: 고아와 장애아들의 어머니>, <김지영의 장밋빛 인생>, <용서는 사람 사이에 물길을 튼다>, <나도 예쁘고 너도 예쁘다> 가 있다.

 

 

안 박사님의 증언을 반기며

 

안득수 마리오,

이분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오래 전 일입니다. 주교가 되고부터니까 22년도 더 된 셈입니다. 그러나 그때는 수많은 교우가운데 한 분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 오늘날까지 이분에 대한 앎은 점점 깊어져 갔습니다. 땅에 뿌린 씨가 세월과 함께 큰 나무로 자라나는 이치와 같다고나 할까요? 어느 날은 이 모습이, 다른 날은 저 모습이 더욱 선명히 나타나는 식이었습니다. 누군가를 계속 알아가고 알수록 더 깊이 존경하고 감탄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입니다.

우리 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의과 대학교 병원장, 교수, 존경 받는 의사. 이런 직함으로만 살았다면 지금쯤 물질적으로 상당히 여유 있고 편안한 노후를 즐길 수 있을 것입니다. 부인 되시는 분도 약사였으니 더욱 그렇겠지요. 그런데 실상은 칠순이 훨씬 넘은 연세에도 검소한 집 한 채만 지니셨을 뿐입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출세도, 영화도, 물질도 주님과 사람을 섬기는 일을 위해 모두 포기했거나 써버렸기 때문입니다.

이 대목에서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모든 것을 잃었고 그것들을 모두 쓰레기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려는 것입니다.” (필리 3,8-9: 이하 공동번역 성서)

그렇습니다. 이분을 뵐 때는 늘 이 말씀이 생각납니다. 이분은 그리스도를 만나면서 삶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본인만 그런 것이 아니고, 의과대학에서 장래 의사가 될 학생들을 가르칠 때 성서 반을 별도로 만들어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정신을 심어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지금 어디에서 일하든지 옛날에 배웠던 그 정신을 간직하여 만나는 사람들을 대하고 돌보는 모습이 남다릅니다. 교수직에서 은퇴하신 다음에도 대우가 훨씬 좋은 여러 곳을 다 마다하고 지금까지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을 보살피는 자리를 찾아 봉사하고 계십니다.

하느님을 아는 사람, 만난 사람, 복음의 세계를 맛본 사람. 늘 피곤하면서도 언제든 출동 준비가 되어 있어 낮에는 환자에게 인술을 베풀고, 밤에는 성령세미나를 통해 사람들의 영적 질병까지 치유하고 갈증을 풀어주는 일에 온몸을 바치며 사는 사람, 이분을 아는 이들이라면 이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분을 통해 더 많은 분들이 하느님을 알고, 더욱 사랑하며,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행복의 길을 깨닫는 데 큰 도움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2013년 7월 20일

전주교구장 이병호 주교

 

 

 

 

책을 펴내며

어느 날 바오로딸 편집장 수녀님의 전화를 받았다. 꽃동네 세계성령대회에서 평신도 강사였던 내 체험담을 들으셨는데, 그 내용을 책으로 엮어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신앙의 길을 걸으며 체험한 신묘한 일들을 기록으로 남겨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길잡이가 될 수 있다면, 생각하던 차였다. 반가워서 평소 생각해 두었던 제목도 말씀 들렸다. ‘어떻게 나에게 이런 일이.’

수녀님과 전주 바오로딸 서원에서 만나 담소를 나누고 책을 만들기로 했다. 하지만 이 일 저 일 바쁘다는 핑계로 미루는 사이 삼 년여의 세월이 흘렀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신자였던 나는 어느 날 하느님의 힘과 성경 말씀이 실제로 내 삶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을 생생하게 경험했다. 이후 보이지 않는 힘에 이끌려 하느님이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일에 열정을 쏟았다. 물론 숱한 역풍을 만났지만 난관을 견디면서 아름답게 끝을 맺는 체험도 아울러 했다.

이 책에 기록한 것은 다 그런 과정에서 겪은 일들이다. 한데 자칫 자랑으로 들릴까 봐 걱정이다. 지금도 아내는 한사코 출간을 말린다. 좋은 일 했다고 스스로 드러내 보이면 죽어 하느님께 무슨 상을 받겠느냐고 하니 마음이 흔들린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은 믿음을 갖고 일하는 사람 곁에 아주 가까이 계시며 삶 안에서 생생하게 체험됨을 증언해야 하지 않을까! 하느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자상하게, 섬세한 곳까지 손길을 미치시며 좋은 열매를 맺어 주심을 말이다.

사람의 내면은 그 누구도 볼 수 없고 하느님과 자기 자신만 안다. 나만 아는 나의 추한 생각과 삶은 임종 때 신부님께 총 고백하려고 준비 중이다. 남아 있는 날 동안 끊임없이 회개하고 정화하며 보속해 나갈 것이다.

이 책 출간에 결정적 역할을 한 바오로딸 단행본 팀 수녀님들의 끈질긴 이끄심과 기도를 생각하며 매스미디어의 첨단의 길을 걷고 계신 수도회 전체에 심심한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내 뒤에서 언제나 겸손 하라며 충고해 주고 말없이 건강을 뒷받침해 준 사랑하는 아내에게 감사하고, 수많은 원고를 정래하고 송고하며 도움을 준 최임선 선생님의 노고와 은혜도 잊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부족한 내 글을 다듬고 아름답게 이끌어 주신 박인숙 도미니카 선생님께 감사 드린다. 얼마 전 갑작스런 선생님의 부음을 전해 들었다. 주님 품에서 평안히 영면하시기를 기도 드린다.

수녀님의 관심과 사랑이 없었다면 영영 묻혀 사라졌을 이야기들을 책으로 묶어 조금이나마 주님께 영광이 된다면 큰 행복이겠다. 여기 소개된 것들로 인해 나를 너무 선하게만 보아서는 절대로 안 될 것임을 말씀 드리며 고개 숙인다.

 

2013년 9월

지은이 안득수

 

 

 

차례

 

안 박사님의 증언을 반기며

책을 펴내며

 

1장 말씀과 함께

 

말씀이 내게로

거저 내려주신 동아줄 | ‘부러진 갈대도 자르지 않겠다’ | 주님을 본받아

놀라운 일들

점쟁이 여인의 구마 | 벙어리 고등학생과 작은 십자가 | 난생 처음 들어본 ‘카보드’와 ‘헤세드’ | 철야기도회와 성모님

성전 지킴이

가슴이 내려앉는 사고 | 하느님의 집 | 숲정이 칼탑과 성인들의 통공

 

2장 값없는 초대

 

지푸라기 같은 시작

등록금 걱정과 영세 | 사막과 오아시스 | 돌봄의 손길

사랑으로 한 걸음씩

갈림길과 걸림돌 | 떼쓰는 아이 | 벗을 위한 기도

 

3장 임마누엘!

 

기쁨도 함께 슬픔도 함께

할머니의 영세와 십자고상 | 어머니가 가르쳐 주신 기도 | 아버지의 대세 | 은총의 병자성사와 성령 충만

측은지심

홀아비 처지 | 가여운 여인 | 새어머니와 큰아들

 

4장 아름다운 돌보심

 

종교의 벽을 넘어서

죽었던 여인의 소생 | 목숨 같은 한 방울 | 진즉 받을 것을 | 아멘

서로 사랑하라

앵두 | 사랑이란 | 친정아버지 마음 | 참 어려운 사랑

찰나와 영원

마지막 한마디 | 영원한 인연 | 죽음 앞에서 부르는 영가와 탄성

 

5장 믿음 안에서

 

호사다마와 예루살렘의 영광

뜨거운 마음으로 | 만약의 사태 | 소금물 호수 | 영원한 생명의 물

꿈결 같은 동행

성모님과 우리 집 | 가정기도와 수호천사 | 신기한 물고기 ‘바르나르’ 꿈

마지막 그물의 물고기

배 오른쪽에 그물을 쳐라 | 단 사흘의 기적 | 수호천사

 

 

 

1장 말씀과 함께

 

말씀이 내게로

 

거저 내려주신 동아줄

대학생 시절 가톨릭 세례를 받았고, 졸업 후 의사가 되었다. 결혼해서 아이들 낳아 기르며 전라북도 전주시에서 살아왔다. 신자로서 오랜 세월 성당에 다니며 신부님 강론을 듣고 성체도 영 했다. 하지만 내 귀에 성격은 그저 ‘좋은 말씀’일 뿐, 공자님이나 부처님의 명언과 별반 다르지 않게 여겨졌다. 주일이 되면 아이들 데리고 집사람과 함께 성당에 갔다 오면 그만이었다. 성탄절과 부활절을 맞았어도 내 신앙은 늘 거기서 거기였다.

그렇게 어영부영 세월만 흘려 보내던 믿음의 여정에 뜻밖의 전환점이 찾아왔다. 내 생각이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1986년 새해 초였다. 나를 비롯해 국립 전북대학교 부속병원에 근무하는 사람들은 곧 있을 병원장 인사로 뒤숭숭해했다. 누가 새 병원장이 될까, 궁금해 하면서 관련 정보에 신경을 썼다.

종종 내 이름도 후보로 오르내렸다. 병원을 통틀어 제일 규모가 큰 내과에서 몇 년째 과장을 맡아왔기 때문이다. 지금은 내과도 소화기 호흡기 알레르기 같은 여러 분과 중심으로 움직이지만, 당시에는 외과, 산부인과 등의 종합병원 파트 가운데 내과의 규모가 가장 컸다. 환자기 많으니 의사 수도 제일 많고 수입도 쏠쏠해서 내과를 책임진 과장의 영향력이 작지 않았다. 행정관련 직원들도 내과 과장에게는 특별한 예우를 해줄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자리를 탐내며 뒤에서 무슨 운동을 한다든가, 사람들한테 부탁을 하고 다닌다든가 하는 것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게 살았다. 주변에서 나를 후보로 꼽을 때마다 은근히 어깨가 으쓱대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내가 병원장이 된다는 것은 너무 허황된 일이라고 생각했기에 별달리 마음을 쓰지 않았다.

그 해 1월 15일 수요일 오후 두 시쯤으로 기억한다. 병원의 한 작은 부서장을 맡고 있는 과장이 불쑥 내 연구실로 들어왔다. 평소 친하게 지내지도 않던 사람인지라 무슨 일인가 싶어 쳐다보자, 별다른 인사도 없이 대뜸 이렇게 말했다.

“내과 과장님, 앞으로 제게 협조를 좀 잘해 주셔야겠습니다. 부탁 드립니다.”

협조를 잘해 달라니? 마치 자신이 병원장으로 임명될 언질이라도 받은 것 같은 태도였다. 누가 병원장이 되든지 나와는 상관없는 일로 여겼다. 그런데 막상 내과와는 비교조차 안 되는 마이너 minor 과 과장한테 이런 말을 듣자 잔잔하던 마음에 풍랑이 일었다. 자존심이 상하면서 스멀스멀 부아가 솟았다.

내 책상 위에는 십자가가 놓여 있었다. 예수님 시신을 덮었던 천을 찍은 사진으로 예수님 얼굴 모습을 새겨 만든 액자도 나란히 놓여 있었다. 물끄러미 액자 속 예수님을 바라보다가 안에서 문을 걸어 잠갔다. 그리고 책상 밑으로 무릎을 꿇고 앉아 기도를 시작했다. 그러자 속으로 부글거리던 화가 바깥으로 튀어나왔다.

“주님, 제가 저 사람보다 실력이 모자랍니까? 생김새가 못났습니까? 아니면 힘이 부족합니까? 제가 이 병원에서 제일 큰 내과의 과장 아닙니까? 저렇게 조그만 과의 과장이 벌써부터 병원장이라도 된 것처럼 으스대고 다니니, 대체 어떻게 된 일이랍니까?”

마음속에 눌러뒀던 말을 입 밖으로 꺼내자 화가 복받치는지 눈물이 따라 나왔다. 누구 보는 사람도 없겠다. 어린아이처럼 혼자 울고 불면서 한참 동안 기도를 했다.

마음이 좀 가라앉았을 때다. 불현듯 그날의 복음 말씀을 읽어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얼른 매일미사 책을 꺼내 1월 15일자를 펴 들었다.

 

나병환자 하나가 예수께 와서 무릎을 꿇고 애원하며 “선생님은 하고자 만 하시면 저를 깨끗이 고쳐주실 수 있습니다.” 하고 말씀 드렸다. 예수께서 측은한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손을 갖다 대시며 “그렇게 해 주겠다. 깨끗하게 되어라.” 하시자 그는 곧 나병 증세가 사라지면서 깨끗이 나았다. (마르 1,40-42)

 

 

복음을 눈으로 훑는데 순간적으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오냐! 내가 병원장 시켜주마. 부정과 타협하지 않는 깨끗하고 정직한 병원장이 되거라.’

뜬금없이 이런 기분에 휩싸이면서 꼭 내가 병원장이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상한 일이지, 왜 이런 기분이 들까? 별일이네…, 혹시? 아직은 내 느낌일 뿐이지만 만에 하나, 모르는 일 아냐?’

천천히 무릎을 풀고 일어나면서 생각을 정리했다.

‘그래, 사실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 침묵하며 기다려 보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채 천천히 나흘이 흐르고 주말이 됐다. 일요일인 1월 19일 새벽 여섯 시쯤이었다. 조용한 아침에 집전화가 울렸다. 수화기를 들자 낯선 사람이 안득수 교수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하자 나직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000 입니다. 제가 병원장 문제로 고민 고민하다가 선생님에게 낙점을 했습니다. 그렇게 아시고, 내일 임명장을 드리기 전까지는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말고 함구하세요.”

닷새 전 느닷없이 나를 뒤흔들던 이상한 느낌과 충동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사십 대 후반의 나이, 숱한 의사들 가운데 비교적 젊은 편에 속하는 내가 국립대학교 부속병원의 병원장이 되다니… 그날 1월 19일은 내 본명 ‘마리오’의 축일이기도 했다.

이십오 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 날짜보다 한층 뚜렷하게 기억하는 것이 있다. 수첩이나 노트가 아니라 내 마음에 새겨져 있어서다. 병원장에 임명되리라는 전화를 받기까지 며칠 동안, 나는 매일의 복음 말씀을 접할 때마다 도저히 무심코 지나칠 수가 없었다. 마치 꿀과도 같은 희망의 메시지가 계속 이어졌기 때문이다.

1월 18일 제1독서 말씀은 사무엘기 상권 10장 1절이었다.

 

사무엘은 기름 한 병을 꺼내어 사울의 머리에 붓고 입을 맞추며 이렇게 선언하였다. “야훼께서 그대에게 기름을 부어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의 수령으로 성별 해 세우시는 것이오. 그대는 야훼의 백성을 지배하시오.”

 

 

이것은 주님께서 병원 운영의 전권을 내게 맡길 것이니 직원들 잘 관리하며 환자 치유에 최선을 다하라는 뜻으로 읽혔다.

19일 제1독서 말씀은 이사야서 62장 1-5절이었다. 엄청난 축복을 받은 기분이었다.

 

시온을 생각할 때, 나는 잠잠할 수가 없다.

……….

모든 제왕이 너의 영광을 보리라.

……….

이제는 너를 “사랑하는 나의 임”리라,

너의 땅을 “내 아내”라 부르리라.

……….

신랑이 신부를 반기듯

너의 하느님께서 너를 반기신다.

 

평소 나는 성경을 그저 ‘좋은 책’ 정도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때는 말씀이 생생히 살아 움직이면서 나한테고 쑥쑥 굴러 들어오는 것 같았다. 의사인 나도 과학도다. 현미경으로 들여다보고, 실험과 통계로 입증하고, 수천 수만 번 되풀이된 경험을 차곡차곡 정리한 의학에 기초해 질병을 진단하고 치료한다. 그런데 종이에 인쇄된 성경 속 글자가 왜 살아서 움직이는 것 같을까? 누가 과학적으로 근거를 대며 설명해 보라면 아무 대책이 없다. 하지만 내겐 너무도 생생하고 분명했기에 지금도 그때의 떨림을 잊지 못한다.

 

 

‘부러진 갈대도 자르지 않겠다.’

당시 전북대학교병원은 금암동에 지하 1층, 지상 9층 규모로 새 건물을 짓고 있었다. 몇 백억 원이 들어가는 이전작업을 총괄하면서 병원 운영을 총지휘하는 자리가 바로 병원장이다.

나는 의사로서 진료만 했지 행정 경험은 전혀 없었다. 아직 나이도 쉰이 안 됐고, 더욱이 성격은 온순하며 외모는 연약해 보이기까지 한다. 이런 점들이 병원장 감으로는 영 미덥지 않게 비춰졌나 보다. 임명장을 받고 나서 선임 병원장에게 인사를 드리러 갔다. 2년 임기를 두 번 연거푸 지낸 분이라 따뜻한 격려와 자상한 노하우 전수를 기대했으나 얼음처럼 차가운 말만 하셨다.

“만약 안 교수가 임기를 잘 마치고 다시 평교수로 돌아온다면 내 손가락에 불을 붙이고 하늘로 올라가겠소.”

자신의 경험으로 봐서 나 같은 숙맥이 엄청난 이전작업과 병원 운영을 동시에 책임지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우니 명심하라는 뜻이었겠다. 정신 바짝 차리라는 경고인 줄은 알겠으나 말이 너무 차서 적잖이 서운했다.

병원장이 된 후 처음 맞는 주님 공현 대축일의 제1독서 말씀은 이사야서 42장 1-4절이었다.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믿어주는 자,

마음에 들어 뽑아 세운 나의 종이다.

그는 나의 영을 받아

뭇 민족에게 바른 인생길을 펴주리라.

그는 소리치거나 고함을 지르지 않아

밖에서 그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갈대가 부러졌다 하여 잘라버리지 아니하고,

심지가 깜박거린다 하여 등불을 꺼버리지 아니하며,

성실하게 바른 인생길만 펴리라.

그는 기가 꺾여 용기를 잃는 일 없이

끝까지 바른 인생길을 세상에 펴리라.

 

 

‘그래, 바로 이거야!’ 나는 그 성경 구절을 타자기로 쳤다. 그리고 ‘갈대가 부러졌다 하여 잘라버리지 아니하고, 심지가 깜박거린다 하여 등불을 꺼버리지 아니하며’에 짙은 색으로 밑줄을 그어 병원장 개인 책상 유리 밑에 넣었다. 임기 2년 동안 내 경영철학은 이 구절에 있다고 다짐하면서, 어떤 어려운 일이 생겨도, 팔백여 명에 달하는 직원 중에 잘못한 사람이 나온다 해도, 절대 그 잘못 때문에 직원을 해임시키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하지만 대규모 종합병원을 병원장 혼자 운영하는 건 아니다. 결심을 한 지 꼭 일주일 만에 내 뜻과는 정반대로 한 직원이 자리를 잃었다.

서울 출장을 앞두고 바쁘게 일 처리를 하는데 관리 책임자가 긴급한 의논이 있다고 했다. 어떤 직원이 근무시간 중에 마음대로 밖에 나가 술을 마시고, 다음 날엔 출근도 하지 않을 정도로 기강이 풀어졌다는 것이다. 그 직원의 해임 서류를 총무처에 보내겠다고 했다.

하느님께 약속 드린 말씀도 있고 해서 관리자를 말렸다. 출장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달라, 그 직원과 내가 면담을 한 뒤 처리하자고 신신당부하고 출장을 떠났다.

서울 일을 끝내고 전주로 돌아온 날 밤이었다. 집으로 전화가 오기에 받았더니 엄청난 욕설과 협박이 쏟아졌다. 칼로 당신을 찔러 복수하겠다. 왜 7급 국가공무원인 나를 당신이 새로 병원장이 되자마자 잘라버리느냐는 것이었다. 무슨 일인지 짐작이 갔다. 총책임자인 나의 결재도 없이 직원 해임이 처리된 것이다.

며칠 뒤 병원장 실에 문제의 직원과 면담을 가졌다. 그는 응접실 탁자 위에 칼을 꽂은 채 별별 위협에 욕지거리까지 갖은 협박을 다 했다. 설득 또 설득해서 그분 친동생을 재취업시키는 선에서 겨우 일을 마무리 지었다. 끝도 없는 욕설과 협박을 견디기란 정말 힘든 일이었다. 욱, 화가 치밀어 오를 때마다 순간순간 주님께 기도하면서 사랑과 인내로 참담한 공갈을 참아냈다. 나중에 보니 욕먹은 선에서 일이 끝나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병원장이 되고 채 두 달이 지나지 않아 또다시 예기치 못한 일이 터졌다. 철부지 교만의 극치라고 할까, 너무 순진하다고 해야 할까? 내 제자인 내과 수련의 중 한 명이 오십 대의 병원 직원과 무슨 일로 옥신각신하다가 그분 뺨을 때린 것이다. 건장한 체격을 가진 그분은 아들 같은 사람한테 뺨을 맞자 격분한 나머지 수련의에게 약간의 신체적 타격을 주었다. 이에 수련의 백사십이여 명이 똘똘 뭉쳐 소리소리 지르며 파업에 들어갔다. 의사를 때린 직원을 내보내라, 안 그러면 근무를 못하겠다는 것이었다.

수련의들이 파업을 하니 왜래 진료는 말이 아니고 입원 환자들도 엉망진창이 되어갔다. 신문들은 날마다 대서특필, 임명권자는 매일 전화로 나를 다그치며 빠른 수습을 독촉했다. 하지만 서기관급 직원은 대통령이 임명하는 지위여서 병원장 권한으로는 퇴출 결정이 불가능했다. 다른 부서로 이동시키겠다는 내 제안을 수련의들은 한마디로 거부했다. 그 직원과는 아예 같이 일을 할 수 없다면서 막무가내로 버텼다.

매일 수습을 다그치던 임명권자는 토요일까지 병원을 정상화시키라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부득이 사표를 받을 수밖에 없다고 최후통첩을 했다.

나는 이런저런 일로 골치 아프고 막막할 때면 성당으로 달려가 주님의 십자가를 쳐다보며 하소연하곤 했다. 주님은 침묵하시며 당장엔 아무 응답도 주시지 않지만 시간이 한참 지난 후 되새겨 보면 교묘하게 일이 풀려 좋게 해결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무리 머리를 써가며 수련의들을 설득해도 소용없고 해결할 묘책도 없이 토요일은 다가오고 있었다. 숨 막히는 일로 파김치가 된 채 금요일 저녁 퇴근길에 다시 성당을 찾았다.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십자가에 호소했다. 뭐, 굳이 병원장 안 해도 된다. 아무리 그렇다곤 해도 취임하자마자 물러나면 얼마나 불명예스러운가!

“예수님! 겨우 두 달 병원장 하고 쫓겨나게 하려면 뭐 하러 그 자리에 올리셨습니까?”

또 눈물이 났다. 여전히 주님은 가만히 계셨다. 천천히 집으로 돌아와 사표를 썼다. 비로소 마음이 좀 홀가분해졌다. ‘내일 출근하면 사표를 내야지.’ 마음을 굳히고 아내에게도 통보를 했다.

토요일 아침 출근길에 마지막으로 병원장 실에 들렀다. 조용한 방, 내 명패가 놓인 커다란 책상에 앉아 잠시 감회를 되새겼다. ‘참 내, 겨우 두 달이라니…’ 씁쓸하고 창피하고 자존심 상하는 심정을 애써 추슬렀다.

마음을 다독인 뒤 임명권자에게 가려고 의자에서 일어나는데, 뭔가 낌새가 이상했다. 엊저녁까지만 해도 병원장실 옆 강당에서는 수련의들이 때로 모여 큰 소리로 왁자지껄 농성을 했다. 그런데 외침 소리라곤 전혀 없이 조용하기만 하다는 것을 그제야 알아차림 것이다.

‘이상하네, 뭐지? 철없는 수련의들이 아예 병원 밖으로 뛰쳐나갔나?’ 일이 더 커진 건지도 몰라 황급히 관리처장과 계장을 불렀다. 잠시 후, 병원장 실로 들어오는 두 분은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나는 어안이 벙벙했고.

“원장님,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요?”

“뭔데요! 대체 무슨 일이죠? 밖이 왜 이렇게 조용해요?”

“아니, 갑자기 문교부에서 인사 발령이 내려왔어요. 수련의들이 내보내라던 그분이 다른 대학병원으로 발령이 났어요! 소식을 듣고 수련의들도 농성을 풀고 다 제자리로 돌아갔습니다. 참 다행이에요, 원장님. 제가 꽤 오래 근무를 했지만 이런 인사 발령은 처음 봤습니다.”

안도의 한숨과 웃음이 같이 터져 나왔다. 대체 얼마 만에 웃어보는 건지.

그게 다가 아니었다. 옮겨가는 그분 대신 우리 병원으로 오게 된 직원의 서류를 훑어보다가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한 달 전쯤이었다. 우리보다 한발 앞서 나가던 대전의 한 대학병원을 방문해 각 과를 돌아볼 기회가 있었다. 그 중 임상병리과가 아주 인상적이었다. 책임자가 얼마나 통솔력과 책임감이 뛰어난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분 명함을 받고 전화번호를 따로 수첩에 적으면서 나는 탐이 나서 말했다.

“당신 같은 분이 우리 병원에 오셔서 같이 일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분도 좋은 낯으로 말했다.

“임상병리과에 무슨 문제가 있으면 언제든 전화 주십시오. 저는 고향인 여기서 자라 학교도 대전서 마쳤고, 직장도 여기서 다닙니다만 멀리서나마 힘껏 도와드리겠습니다.”

지금은 특수법인으로 바뀌었으나 당시 전국에는 일곱 개의 국립대학 부속병원이 있었다. 서울대병원, 경상대병원, 경북대 병원, 부산대 병원, 전남대 병원, 전북대 병원, 충남대 병원.

병원 내부 인사를 할 때는 물론 병원장 의견이 반영된다. 그러나 병원들 사이의 인사는 다른 병원에도 각각 병원장이 있으므로 문교부가 총괄했다. 한데 내가 탐내던 바로 그분이 우리 병원으로 발령받아 오게 된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철없는 수련의가 문제를 일으켜 고생은 좀 했다. 하지만 결과는 오히려 더 좋게 풀렸다. 내 머리로는 전혀 상상할 수 없는 결말이었다.

첫 난관은 이렇게 기적같이 해결이 났다. 그 후에도 임기 2년 동안 숱하게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러나 단 한 사람도 해고하지 않겠다고 주님께 드린 약속은 끝내 지켜냈다.

 

 

주님을 본받아

든든한 배경이나 행적 경험이 전혀 없고 연륜도 짧은데 풍채마저 빈약하다. 그런 처지에 병원장을 하면서 나는 하느님의 은총을 정말 진하게 체험했다. 내가 보통 의사들과 다른 게 있다면 무엇이었을까? 돌이켜 보면 가톨릭 신자 의사로서 유달리 성모님을 사랑하고, 성모님 사랑에 무턱대고 의지했던 점일 것 같다.

군 제대 후 전주 성모병원에 근무하던 나는 1973년 전북도립의료원으로 일터를 옮겼다. 의료원은 머지않아 국립 전북대학교 부속병원으로 승격될 예정이었다. 직장을 옮기자마자 나는 서무과에 가서 직원 인사기록카드를 보며 종교란을 살폈다. 요즘은 남의 개인정보를 함부로 볼 수 없지만 그때는 특별히 막는 사람이 없었다.

천주교 신자를 뽑아보자 여섯 명이었다. 한 분 한 분 만나 봤더니 다들 냉담 중이었다. 그곳 도립병원 자리는 옛날에 순교자들이 갇혔던 형무소 터다. 거기서 일하는 교우들이라면 더더욱 굳은 믿음을 다져야 하리라는 생각에 나는 일주일에 한 번 점심시간에 이십 분간 함께 모여 기도하며 말씀을 묵상하자고 제안했다.

갓 직장을 옮겨온 사람의 말인데도 뜻밖에 다들 찬성했다. 그래서 내가 과장을 맡은 제2내과 외래 진료실에 일곱 명이 모여 기도모임을 시작했다. 책상에는 작은 성모상도 모셨다. 몇 달이 지나자 교우들 사이가 아주 화목해졌다.

어디서나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도 생기는 것 같다. 천주교 신자들의 모임을 달갑지 않게 여긴 한 간호사가 우리 모임을 간호과장에게 보고했고 이어 병원장에게까지 알려져 모임이 중단됐다. 우리는 다시 의논한 끝에 외래 진료실이 아닌, 제2내과 과장 내 개인 연구실에서 비밀리에 모임을 계속 해 나갔다. 문을 걸어 잠그고 기도했건만 들통 나지 않기를 바라는 건 무리였나 보다.

어느 날 회합을 하고 있는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부랴부랴 성모상을 치우고, 성경도 감추고 문을 열었다. 하지만 간호과장과 감독에게 발각이 되고 말았다. 한 번 더 이런 집회를 병원 안에서 하면 공무원의 종교적 중립 의무 위반으로 징계를 받게 하겠다는 경고를 받았다.

모임을 폭로한 간호과장은 다른 병원에서 옮겨온 지 얼마 안 된 분이었다. 그런 일이 있었으면 사이가 틀어지는 게 보통 아닌가? 한데 이상하게도 그 일이 있은 다음부터 간호과장과 나는 병원 안팎 이일 저 일 터놓고 의논하는 사이가 됐다. 급한 일 생기면 서로 부탁하고 기꺼이 도와주기도 하면서 친해졌다.

어느 날 그분이 무엇 때문에 그렇게들 모여서 기도를 했느냐고 물었다. 천주교에 대한 관심이 반갑고 고마워서 개인적으로 교리를 가르쳐 주겠다니까 그러라고 했다. 차근차근 교리를 익히게 하면서 영세를 준비했다. 병원에서 가까운 덕진 성당에서 고운 한복에 하얀 미사보를 쓴 간호과장이 세례를 받던 날, 기도모임 회원들과 많은 간호사가 참석해 예쁜 꽃다발로 축하해 주었다.

기도회를 중단시킨 장본인이 이젠 우리 편이 되었다. 간호과장에 이어 간호사들은 물론 영양실과 약제과 직원들도 속속 가톨릭 신앙을 갖게 됐다. 나를 포함해 일곱 명이 시작한 기도모임에도 나날이 회원이 늘었다. 특히 간호사들이 많이 참여해 공식적으로 아가다회를 발족시켰고, 동료 직원이자 신앙 선후배로서 서로 돈독한 정을 쌓아갔다.

 

여성들이 평소 얼마나 다정다감한가. 그러나 사탕처럼 살살 녹다가도 일단 화가 나면 남성보다 훨씬 다독이기 어렵다는 점 다들 알 것이다. 어머니부터 누나와 여동생, 또 집사람과 딸자식에 이르기까지, 여자들이 잔뜩 화를 내면 정말이지 감당하기 힘들다.

수련의들 파업이 진정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번엔 간호사들이 스트라이크를 일으켰다. 이번에도 원인 제공자는 내 제자였다. 간호사와 의사가 서로 잘했네, 잘못했네 하며 싸울 수는 있다. 잠을 제대로 못 자면서 일에 쫓기는 인턴과 레지던트들이 요즘 말로 종종 멘붕(멘탈 붕괴)에 빠지는 것도 모르지 않는다.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의사가 간호사를 벽에 밀쳐 놓고 청진기 줄로 목을 감을 수 있나?

발끈한 간호사 백 팔십여 명은 문제의 의사를 살인 미수자라고 몰아세우며 거세게 파면을 요구했다. 간호사들은 매일 일정한 시간에 강당에 모여 농성을 했다. 목을 졸린 간호사의 부모님은 의사를 고소할 뜻까지 내비쳤다. 이런 진통이 무려 한 달이나 계속됐다.

병원장으로서 양방의 잘잘못을 조사해 징계위원회에 넘겨 버리면 내 임무는 다한 것일 수 있다. 더는 속 썩지 않고 편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로서는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고 실수를 저지른 젊은 제자를 어떻게든 살려내고 싶었다. 병원장이자 스승으로서 사정사정하며 제자 의사를 구명하기 위해 나섰다. 하지만 가시 돋친 간호사들은 아예 귀담아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같은 신앙을 나누며 친하게 지내온 간호파트 임원들에게 애원하고 매달려도 아무 소용없었다. 그 동안 쌓은 정은 온데간데없이 얼마나 매서운 눈길들을 보내는지 무서울 정도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뾰족한 수는 점점 더 찾기 어려웠다. 달리 방법이 없었다. 내 나름대로 사과 방법을 계획한 뒤 제자를 만나 상의했다.

“내 말대로 해보세. 이렇게 해도 간호사들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자네가 수련을 중단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네.”

고개를 끄덕인 제자를 데리고 간호사들이 농성하는 강당으로 들어갔다. 우리를 보자 간호사들은 더욱 목청을 높였다. 얼마나 아우성들을 치는지 강당이 떠나갈 듯했다. 소리가 좀 잦아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내가 먼저 마이크 앞에 섰다.

“여러분 심정을 십분 이해합니다. 저라도 내 동료가 그런 일을 당했다면 가만히 구경만 하고 있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나 넓은 차원에서 한 번만 더 생각해 주세요. 지금은 여러분 감정이 격해져서 이 의사를 쫓아내기만 하면 만사 해결된다고 생각할 거예요. 하지만 한발쯤 뒤로 물러나는 것도 큰 이득이 된다는 거, 나중에 알게 될 겁니다. 그리고 이 의사가, 갈 때 가더라도 사과의 말이라도 하고 가겠다는데 그것마저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도리가 아니지 않습니까?”

날카로운 간호사들의 눈길을 받으며 백지장처럼 하얘진 얼굴로 제자가 말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저의 경솔한 행동을 용서해 주십시오.”

 용서를 청하며 제자는 무릎을 꿇었다. 아이 내가 다시 나섰다.

“병원 책임자로서 나도 이번 사건에 대해 통감합니다. 제가 참으로 덕이 부족한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저도 여러분에게 크게 사죄하는 마음으로 무릎을 꿇겠습니다.”

나까지 무릎을 꿇자 강당이 일순 조용해졌다. 왈칵 눈물이 쏟아지려고 해서 이를 악물고 참고 있는데, 평소 나와 가깝게 지내던 수간호사 몇 명이 놀란 얼굴로 황급히 뛰어 나왔다.

“아유~, 원장님이 이렇게까지… 그만 일어나세요.”

수많은 간호사 앞에서 무릎을 꿇다니, 병원장 체면에 말이 안 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예수께서도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지 않으셨던가. 장차 숱한 목숨 살려낼, 앞날이 창창한 예비의사의 장래를 터주는 일인데 다리 좀 구부리는 게 무슨 대수인가.

수간호사들은 우리 둘을 억지로 일으켜 밖으로 내보냈다. 강당에서 난상토론이 이어진 끝에 제자는 결국 용서를 받고 수련을 계속할 수 있었다.

돌아보면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큰 벽에 부딪히면 자연스레 예수님께 하소연을 하게 되고 성모님께도 매달렸다. 도움을 주십사 청할 뿐 이렇게 해야지, 저렇게 해야 되겠다고 무슨 궁리를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일주일쯤 매달리며 기도하다 보면 평소엔 생각지도 못했던 행동이 나왔고, 그게 해결의 실마리가 되곤 했다. 주님과 성모님의 도우심이었으리라.

의사훈련에 첫 발을 떼는 인턴들이 스트라이크를 일으켜 선배의사가 물러나야 할 위기에 몰린 적도 있다. 선배의사가 인턴을 교육하던 중 좀 험한 방법으로 질타를 하자 이를 문제 삼아 인턴 사십여 명이 집단으로 병원을 이탈해 버린 것이다. 책임자로서 그들을 만나 달래고 또 달랬다. 그러나 인턴들은 선배의사를 병원에서 퇴출시키라며 고집스레 버텼다.

잘못한 사람한테 책임을 묻고 징계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법대로 처리하면 일은 쉽다. 하지만 한 순간의 일로 종합병원에서 수련하는 좋은 기회를 놓쳐버릴 제자가 너무 안타까워, 선배가 잘못을 뉘우치고 후배들과 화해하는 쪽으로 해결을 시도하며 고군분투했다. 그러다 도리어 내가 언론의 질타를 받았다.

제자를 만나 진심 어린 사과를 권유했다. 자신의 탓으로 병원장 보직 사표 직전까지 내몰린 내 처지를 잘 알고 있던 제자는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자신의 일시적 과오를 사나이답게 솔직히 인장하고 후배들 앞에서 진솔한 사과를 했다. 인턴들도 감동을 받아 극적으로 사태는 해결됐다. 그 의사는 훗날 실력 있는 유능한 교수가 되어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위 두 사람이 병원의 징계를 받아 수련을 중단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내가 병원장으로 있는 동안 병원관리 총책임자가 세 번이나 바뀌기도 했다. 이 역시 일상적인 인사이동은 아니다. 그 중 마지막으로 같이 일한 서무과장이었던 서기관은 다른 대학병원 사무국장으로 승진되어 가면서 이런 말을 했다.

“저는 사십여 년 동안 서무 관리 업무를 해온 베테랑입니다. 행정 경험이 전혀 없는 안 원장님이 어떻게 그리 놀라운 판단력과 행정력을 익히셨습니까? 참 놀라웠습니다.”

병원장 임기 2년을 마쳤을 때 임명권자는 한 번 더 일을 맡아 달라고 했다. 나는 한사코 마다하고 평교수 자리로 돌아왔다. 취임 즈음해서 경고성 메시지를 던졌던 선임 병원장도 수고 많았다. 명 병원장이었다고 칭찬해 주었다. 나도 서운했던 감정을 깨끗이 씻었다.

하지만 대체 왜 그렇게 됐을까? 별다른 준비도 없던 사람이 왜 얼떨결에 병원장으로 임명됐을까? 또 왜 그렇게나 풍파가 많았을까? 하느님께서 맡겨주신 일이니 주님 말씀 따라 애덕을 실천하고자 했는데… 세월이 많이 지나도 언뜻언뜻 궁금해지곤 했다.

어느 날 루카복음을 읽던 중 ‘바로 이거였구나!’ 싶은 구절이 나를 사로잡았다. ‘항상 준비하고 있어라. 충성스런 종과 불충한 종’에 이어 ‘불을 지르러 왔다’고 하신 예수님 말씀이다.

내가 성령의 도우심으로 큰 공동체에 책임자로 입성하니 여러 곳에서 반대의 역풍이 일어나고 갈라졌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힘이 여전히 연약한 나를 도와 고비마다 반대세력을 무력화시키고 좋은 결과를 만들어 냈다는 것을 확연히 알 수 있었다.

 

나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이 불이 이미 타올랐다면 얼마나 좋았겠느냐? 내가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 이 일을 다 겪어낼 때까지는 내 마음이 얼마나 괴로울지 모른다. 내가 이 세상을 평화롭게 하려고 온 줄로 아느냐? 아니다. 사실은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한 가정에 다섯 식구가 있다면 이제부터는 세 사람이 두  사람을 반대하고 두 사람이 세 사람을 반대하여 갈라지게 될 것이다. (루카 12,49-52)

 

 

 

 

놀라운 일들

 

점쟁이 여인의 구마

지나온 날들을 돌아보자니 주님의 섭리를 깨우치는 데 왜 그리 더뎠는지 많이 아쉽다. 부족함이 참 많은데도 주님은 나를 저버리지 않으시고 구석구석 다듬어 주셨다.

1986년은 내 생애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해다. 전북대학교 병원 원장이 되자마자 의사며 간호사들의 농성이 일어나는 등 취임 직후 겪은 몇 가지 사건은 앞에서 소개 드렸다.

병원장 업무에 좀 익숙해질 무렵 또 하나의 중책이 주어졌다. 박중신 지도신부님의 기안과 주교님 추인에 의해 전주교구 성령쇄신봉사회 제2대 회장이 된 것이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채 일단 예정된 일정에 따라 움직여 나갔다. 그 무렵 성령묵상세미나는 동산동 본당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회장으로서 첫날 묵상회를 무사히 마치고 성당을 나서려는 참이었다. 어떤 여자분이 다른 여자분 손을 끌고 내게 오더니 다짜고짜 부탁을 했다.

“회장님, 이 사람은 점쟁인데 나쁜 귀신이 들렸다고 하네요. 악귀 좀 떼주세요.”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귀신을 물리쳐 달라니? 더구나 보통 사람도 아닌 점쟁이한테서… 의사인 나는 한 번도 그런 일을 해본 적이 없으려니와 어떻게 하는 건지 본 적도 없어 난감하기 이를 데 없었다.

‘아니, 저는 못합니다.’ 라고 말하려던 순간 마음을 돌렸다. 아무리 초짜기로서니 명색이 성령쇄신봉사회 회장인데, 직무 유기를 하는 것 같아서였다. 그냥 성경에서 읽은 대로 해보기로 했다.

점쟁이라는 사람을 성당 한곳에 세우고 그 머리에 내 손을 얹었다. 그리고 눈을 감은 채 혼신의 힘을 다해 주님께 기도한 뒤 큰 소리로 외쳤다.

“나자렛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령한다. 나쁜 영아, 이 여인에게서 나가라! 나가라!! 나가라~!!!”

‘나가라!’ 소리를 마치자마자 어디선가 쿵,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인가 싶어 절로 눈이 떠졌다. 둘레둘레 살피니 귀신이 들렸다는 이를 내게 데리고 온 분이 성당 콘크리트 바닥에 열십자로 누워 있었다. 기도에 집중하느라 우리 둘 외에 주변에 누가 또 있는지 전혀 의식하지 못했는데, 그분이 옆에 서서 지켜보다가 쓰러진 것 같았다.

 악귀를 떼어 달라고 할 때만큼이나 당황스러웠다. 딱딱한 바닥에 머리를 부딪쳐 뇌진탕이라도 생겼으면 어쩌나 싶어 얼른 맥을 짚어 보았다. 팔딱팔딱, 천만다행으로 맥은 잘 뛰었다. 그분 머리에도 손을 얹고 한참 기도했다.

얼마 후 그분이 의식을 되찾고 부스스 일어났다. 갑자기 누가 무엇인가로 활 후려치는 것 같았는데, 정신을 잃었었나 보다면서 별일 없이 깨어난 것에 안도했다. 점쟁이 여인도 악귀가 물러갔는지 이젠 정상으로 돌아왔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기뻐 얼싸안으며 돌아갔다.

‘주님께서 해주실 것을 믿고 기도하니 정말로 나쁜 영이 쫓겨가는구나!’ 초짜 성령회장인 나도 말할 수 없이 커다란 감동과 기쁨에 휩싸였다. 이런 일은 이성적 판단에 따라 일하는 의사인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그런데 멀쩡한 여자분은 왜 갑자기 쓰러졌을까?’

훗날 예수님께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신 이야기가 실린 마르코 복음서 1장과 9장을 보면서 그 경위를 알게 되었다. 영이 나가면서 사람한테 심한 발작을 일으키거나 뒤흔들어 놓았다고 복음서에 쓰여 있는 대로, 내 눈앞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이다. 나쁜 영이 점쟁이 여인한테 붙어 있다가 기도의 힘으로 쫓겨 나가면서, 점쟁이 여인을 성당에 데리고 온 여인한테 훼방을 놓은 것으로 생각되었다. 이 세상에는 나쁜 영 evil spirit이 이렇게 현존한다. 나중에 나는 그 반대의 좋은 영 holy good spirit 의 현존도 체험하게 된다.

 

 

벙어리 고등학생과 작은 십자가

우연치 않게 작은 십자가가 커다란 능력을 발휘하는 것도 보았다.

언젠가부터 나는 새벽미사를 보기 시작해 매일 또 매주 같은 본당에서 미사를 봉헌해 왔다. 그러다 보니 교우들도 내가 뭐 하는 사람인지 대략 아신다. 1989년 일이다. 어느 주일 교중미사를 마치고 나오는데 본당 여성 교우 한 분이 말을 건넸다. 아주 딱한 일을 겪는 사람이 있으니 꼭 좀 같이 가 보자는 것이었다.

교우는 치명자산 계곡에 다닥다닥 붙어 지은 무허가 건물로 나를 이끌었다. 어느 집으로 들어서자 아무도 없는 듯 조용한데, 큰방 쪽에서 인기척이 났다. 덩치가 어지간히 큰 남자아이가 이불을 덮어쓴 채 혼자 앉아 있었다. 아이는 낯선 우리를 향해 매우 불안정한 눈길을 보냈다.

“저 아이는 인보성체수녀원에서 운영하는 장애아 시설에 좀 넣어주실 수 없을까요? 고등학생인데 학교는 안 가고 저러고 있어요. 이 집 엄마는 매일 날품을 팔아 저 아들하고 고등학교 2학년짜리 딸아이를 키워요. 하도 형편이 딱해서 제가 나섰어요.”

남자아이는 2년 전부터 혼자 방에 틀어박혀 하루 종일 책을 펴놓고 손가락으로 긁기만 한다고 했다. 밥을 주면 먹기는 하는데 학교는 안 가고 책만 긁으니, 가난한 엄마가 너무 답답해서 장애아 시설에 맡기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장애 상태가 어느 정도인지 확인하는 게 먼저일 것 같아 이불을 걷어보려고 아이한테 다가갔다. 그러자 아이는 몸을 잔뜩 웅크리며 괴상한 소리를 냈다. 엄마도 없는데 아이가 몸으로 거부하니 강제로는 확인할 수가 없었다. 함께 간 교우와 나는 주모경을 바치며 간절히 기도했다.

‘이 아이를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까요, 지혜와 은총을 주소서…’

기도하는데 문득 성경에 나오는 것처럼 아이에게 벙어리 마귀가 들리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왼쪽 윗주머니에는 평소 지니고 다니는 자그마한 십자가가 있었다. ‘예수님을 보여줘 볼까?’ 십자가를 꺼내려고 주머니로 손을 가져갔다. 그러자 아이가 더욱 기괴한 소리를 냈다. 얼른 작은 십자가를 꺼내 손에 들고 4~5 미터쯤 떨어져 있는 아이에게 보여 주며 물었다.

“학생, 이게 뭐지?”

그 순간 돌발사태가 벌어졌다. 이불 속에 웅크리고 있던 아이가 큰 소리로 악을 쓰면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더니 우리를 피해 문을 박차고 있는 힘을 다해 집밖으로 뛰쳐나갔다.

허겁지겁 아이의 뒤를 쫓아갔다. 아이는 아랫도리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였다. 다 큰 고등학생이 벌거벗은 하체를 훤히 드러내고 동네 골목길을 내달려 교동 산등성이로 향했다. 등성이에 오른 아이는 높은 바위에 쪼그려 앉아 고래고래 괴성을 질러댔다. 내가 가까이 갈수록 소리는 더 커졌다. 게다가 바위에서 앉았다 일어났다 를 반복하며 팔까지 휘휘 흔들어댔다. 더 다가가면 뛰어내리겠다는 표시 같았다. 만에 하나 밑으로 떨어져 다치기라도 하면 큰일이 아닌가.

“알았다, 알았어. 더 안 갈게.”

내가 걸음을 멈추자 괴성은 조금 잦아들었다. 아이의 흥분을 가라앉혀야 했다. 뭐라도 관심을 끌 수 있는 게 없을까 둘러보니 저 아래 작은 가게가 보였다. 아이가 사과를 무척 좋아한다던 여교우의 말이 떠올랐다.

“아가야! 저기 가게 보이지? 사과 사주마. 집에 가서 먹어라, 응?”

헐떡이며 뒤따라온 여교우에게 사과 한 봉지를 사서 건네줬다. 아이를 안심시켜 집으로 데리고 가라고 당부하고 발길을 돌렸다. 천천히 비탈길을 걸어 내려오는데, 작은 십자가를 보자마자 아이가 벌거벗은 채 밖으로 뛰쳐나가던 모습이 좀처럼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성령으로 무장한 우리가 예수님 십자가를 꺼내 보여준 것만으로도 그처럼 놀라운 반응을 보이다니…

아, 나는 드디어 알게 되었다!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악의 실체가 우리 주변에서 여러 가지 나쁜 짓을 하며 현존하고 있음을. 이런 나쁜 영이 있다면 반대로 선하고 거룩하신 영도 분명히 우리 옆에 계실 것이다. 마음속에 절로 다짐이 우러나왔다. ‘아무리 힘들더라도 지금 하고 있는 성령운동은 지속돼야 하겠구나!’

그 십자가는 로마에서 공부하던 신부님이 귀국하면서 선물로 주신 것이다. 내 손바닥보다 조금 작아 잠깐씩 꺼내 들고 기도하기에 안성맞춤이라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 그 작은 십자가가 그토록 놀라운 힘을 드러내 보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난생 처음 들어본 ‘카보드’와 ‘헤세드’

평범한 평신도로 지내던 내가 처음으로 성령세미나에 참가한 것은 1985년 1월 2~3일이었다. 세미나는 강사님들의 좋은 강의와 신앙체험 발표, 그리고 요란한 성가 속에서 전주 전동성당에서 열렸다. 1박 2일 동안 색다른 집회에 참석은 하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스스로에게 자꾸 반문이 들었다. ‘꼭 이런 형태로 천주교 신앙생활을 해야만 하는가?’

마지막 날 밤, 참석한 모든 청중이 양손을 높이 들고 하느님께 통성으로 기도 드리는 시간이었다. 나는 전동성당 오른편 앞쪽 큰 돌기둥 뒤에 앉아 진행자의 인도에 따르고 있었다. 의사로서 체면도 있고 해서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기둥 뒤에 숨듯이 앉은 것이다.

통성기도를 하면서 나는 혼란스러웠다. 세례 받은 지 이십오 년이 됐는데도 오늘 이 시각까지 특별한 마음의 변화를 느끼지 못하고 지내온 내 신앙생활과 지금 이 성령기도회 형태와의 심적 충돌 때문이었다. 처음 해보는 통성기도라 어색하기도 했으나 그냥 인도하는 대로 따라 바쳤다. 그리고 한 번 더 열렬히 통성 심령기도를 시도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내 오른쪽 손목을 누가 곡 잡았다. 분명히 잡았다. 다 같이 두 손을 높이 들고 기도하니 혹시 뒷사람 손이 내 팔에 맞닿아 그랬나 싶어 눈을 뜨고 쳐다보았다. 전혀 닿지 않은 것을 확인한 뒤 다시 눈을 감고 양팔을 들어 기도를 하는데 또다시, 분명히 누군가가 내 오른쪽 손목을 꽉 잡았다.

갑자기 눈물이 나고 마음이 뜨거워지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하염없는 눈물과 함께 지난 내 삶의 교만함과 죄의식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요란한 기도 행사가 지나가고 조용해진 가운데 강사가 차분하게 성가를 독창했다. 그런데도 나는 눈물과 콧물이 멈추지 않아 손수건 하나가 흥건하게 다 젖었다. 손수건을 짜면 물이 떨어질 만큼 많이 울었다. 돌기둥 뒤에 숨어 그렇게 울면서 세미나를 마쳤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마음에는 기쁨과 평화가 넘쳤다. 그런데 눈에서는 여전히 눈물이 흘러나왔다.

‘왜 이렇게 계속 눈물이 날까? 과연 누가 내 손목을 그렇게 오랫동안 꽉 잡고 있었을까?’

그 신비한 느낌은 나만이 간직할 수 있는 소중한 신앙체험의 순간이었다. 그 뒤로 나는 매달 한 번씩 열리는 철야기도회에 한 번도 빠짐없이 참석했다.

이 년이 흐른 무렵인 1986년 12월 26일이었다. 그날 철야기도회는 성령봉사회 지도신부님이 계시는 효자동성당 지하 강당에서 있었다. 찬미하고 눈 감고 묵상기도도 바치면서 세미나는 무르익어 갔다.

밤 열한 시 반쯤이었다. 추운 겨울이라 두툼한 노란색 오리털 점퍼를 입고 지하 강당 맨 왼쪽 끝 열 중간쯤에 앉아 묵상기도를 하는데, 누군가 오리털 점퍼 위로 내 허리를 꽉 껴안았다.  조용히 뒤돌아보며 “누구요?” 물었으나 내 뒤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이상하다, 생각하며 다시 눈을 감고 기도하는데 이번에는 껴안는 힘이 얼마나 센지 허리가 잘려나갈 듯 강력한 포옹이 이어졌다. 비명에 가까운 소리로 신음하며 눈을 뜨고 내 옆과 뒤를 돌아봤으나 아무도 없었다. 갑자기 두려운 생각과 함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소리쳐 울고 싶지만 체면도 있으니 이를 악물고 훌쩍였다. 놀라운 뜨거움과 환희와 평화가 넘치는 체험이 십여 분이나 이어졌다. 참으로 신묘한 일이었다.

누구에게 이야기할 수도 없는 채로 이튿날 밤 가톨릭센터에서 열리는 베소라 성서강의에 참석했다. 성경 구절을 설명하시던 신부님은 예정에도 없이 하느님의 ‘헤세드’적 사랑에 대해 열강을 하셨다. 하느님은 당신의 뜻을 따르는, 곧 당신 계약에 충실한 이에게 강력한 포옹으로 껴안아 주는 체험을 주시는데 이러한 하느님 사랑의 증언을 ‘카보드’라고 한다는 것이다. 또 이런 체험을 받은 사람은 대단히 드물다고도 하셨다. 꼭 내가 어젯밤 철야기도회에서 체험한 현상을 설명이라도 해주시는 것처럼 말씀하셨다. 얼마나 큰 감동을 받고 또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도대체 하느님의 헤세드적 사랑과 카보드라니…’ 난생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근래 이 책 발간을 준비하면서 성경에 박학하신 병원 원목 신부님께 명확한 의미를 여쭤봤다. 히브리어 카보드 Kaboth 란 풍부함과 부 富, 명예로움과 영광, 존귀함과 그 지위, 명성의 남자라고 풀이해 주셨다. 아울러 헤세드 Hesed 란 하느님 자신이 세워 놓으신 계약 안에서 인간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이라고 가르쳐 주셨다.

그제야 전동성당에서 내 손목을 꽉 잡아주셨던 일과 철야 세미나 때 내 허리를 껴안으신 그 순간의 소중함을 조금이나마 깨달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분의 깊은 뜻을 우둔한 내가 어떻게 다 헤아릴 수 있으라! 다만 누구라도 이런 체험을 만날 때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까 해서 그 동안 혼자 간직해 온 일을 밝히는 것뿐이다.

훗날 프랑스 철학자 파스칼의 하느님 체험담을 접하면서 내 체험과 일맥상통한 점을 발견했다. 내 이야기에 객관성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그 내용의 일부를 소개한다.

 

은총의 해 1654년 월요일 11월 23일

치명록에 의한 치명자 교황 클레멘스 축일이며

그 외 다른 치명자들의 축일

치명자 성 크리소고느와 다른 성인들의 축일 전야

저녁 열 시 반경부터 밤 열두 시 반경까지

“불”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

그러나 철학자들과 지식인들의 하느님은 아니십니다.

확신, 확신, 느낌, 기쁨, 평화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

당신의 하느님이 나의 하느님이십니다.

세상에 대한 잊음, 하느님 외 다른 모든 것에 대하여 잊어버림

복음에 제시된 길을 통해서 그분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인간 영혼의 위대함, 의로우신 아버지,

이 세상은 당신을 알지 못했지만 저는 당신을 알았습니다.

기쁨, 기쁨, 기쁨, 기쁨의 눈물

나는 그분을 멀리했었습니다.

나의 하느님, 나를 떠나시렵니까?

영원히 당신 곁을 떠나지 않았으면!

 

이 체험이 얼마나 소중했던지, 파스칼은 자신의 외투 안쪽에 이 내용을 적은 종이를 죽을 때까지 넣고 다녔다고 한다. 나의 신묘한 체험도 여기에 적어두지 않으면 영원히 묻혀버릴 것 같아 당시의 기억을 더듬어 소상히 전해 올린다.

 

 

철야기도회와 성모님

전주교구 성령쇄신봉사회는 매달 넷째 주 금요일 밤 열한 시부터 새벽 네 시까지 전동성당에서 ‘은혜의 밤’ 철야기도회를 한다. 대략 백오십여 명이 모요 밤샘기도를 한다. 기도회가 끝날 무렵이면 몸이 아픈 이들과 나쁜 영에 시달리는 분들을 위해 안수기도를 해드린다. 신부님이 계실 때는 당연히 신부님이 해주시지만, 안 계시면 부득이 회장인 내가 한다.

차가운 비가 주룩주룩 쏟아지는 어느 겨울 밤이었다. 참석한 분들에게 차례차례 안수기도를 해드리며 지나는데 한 할머니가 기도를 받자마자 비르르 쓰러지셨다. 충만한 성령의 기운을 받으면 가끔 생기는 일이라서 처음엔 별반 주목하지 않았다. 그러나 할머니는 아예 일어나지를 못하셨다. 자세히 몸을 살펴보니 반신에 마비가 와 있었다. 의사인 나는 곧 뇌경색으로 오는 현상임을 알아차렸다.

누가 보호자인지 찾았으나 같은 동네에서 온 자매님들만 몇 분 계셨다. 전주 시내가 아니고 완주군 용진면의 한 시골 마을이란다. 복숭아 과수원을 하는 딸네 집에 사신다고 했다. 마을 아주머니 두 분과 나를 도울 남자 한 분과 함께 할머니를 차에 태우고 할머니 딸네 집으로 향했다. 추위 더위 아랑곳없이 그 멀리서 한 번도 빠지지 않고 기도회에 오셨다는 보통 정성이 아니셨다.

마을 가까이 이르자 넓은 복숭아밭 한가운데에 할머니 딸네 집 한 채만 덩그러니 모였다. 흙밭인데다 비로 미끄러워진 탓에 자동차 바퀴가 자꾸 헛돌았다. 겨우겨우 안마당까지 차를 몰고 가서 할머니를 방에 눕혀드리고 돌아왔다.

이틀 뒤 따님 집으로 전화를 해봤다. 병세가 좋아지지 않으니 내가 직접 왕진을 와주었으면 한다고 했다. 좀 서운해 하는 기색도 느껴졌다.

다음 날 근무를 마친 뒤 성령봉사자 두 분과 함께 용진 과수원으로 갔다. 진찰 결과 뇌경색이 심해 나를 알아볼 정도의 의식은 있으나 회복은 힘들 것 같았다. 큰 병원에 입원시킬 것을 권했으나 사위와 딸은 그냥 집에서 치료하겠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이미 안 계신데다 연세도 높은데 몸 반쪽은 완전히 마비가 됐다. 그 상태로 오래가면 한시도 손을 뗄 수 없는 과수원 일과 환자 수발을 어떻게 한꺼번에 하겠냐고 했다. 강제할 수 없는 일이기에 그냥 물러나왔다. 우리를 배웅하면서 따님이 남편에 대해 이런저런 말을 했는데, 어느 순간 내 귀가 그리로 확 쏠렸다.

“저이, 참 별난 사람이에요. 과수원에 일이 엄청 많고 힘드니까 술 한 잔 먹지 않고는 일 못한다며 매일 술을 마셔요. 그런데 참 신기한 게요, 술이 곤드레만드레 취했어도 일생토록 지금까지 성모님을 공경하며 삼종기도만큼 은 꼭 바치고 자요. 한 번도 거르는 걸 못 봤어요. 그런데 어젯밤에요, 성모님과 회장님을 봤다고 하더라고요, 꿈에서요.”

갑자기 하늘에서 검은색 헬리콥터 한 대가 그 집 주위를 빙빙 맴돌더니 근처 과수원에 내려앉더란다. 비행기 문이 열리고 가방을 든 한 남자와 여자 둘이 내렸는데, 가방을 든 남자가 뒤에 찬란하게 눈부신 빛을 발하며 성모님처럼 보이는 분이 서 계시더란다.

낮에 일하느라 남편은 꿈을 잠시 잊었던가 보다. 그런데 내가 검은색 차를 타고 왕진 가방을 들고 나타나자 꿈 생각이 난 것 같았다.

“회장님이 진찰 가방 들고 우리 집에 오시려고 성모님이 그렇게 나타나셨구나, 하면서 남편이 몹시 놀라더라고요. 너무 반갑기도 하다면서요.”

꿈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성모님의 따뜻한 사랑과 돌보심을 새삼 진하게 느꼈다. 칠삭둥이 같은 나를 늘 사랑하시고 내가 하는 일도 도우며 지지하고 계신다는 것을….

사실 성령봉사회장을 맡고 나서 상임위원회를 할 때면 나는 늘 성모님상과 아기예수님상을 같이 모시고 촛불을 켠 뒤 회의를 한다. 어떤 봉사자들은 성령기도 회합에 왜 성모님을 모시느냐며 못마땅해하기도 하지만 나는 불평에 구애 받지 않는다. 성모님을 모시고 기도 회합을 하면 그 공동체는 절대 해체되지 않고 잘 자라난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전에 도립병원으로 갓 직장을 옮겼을 때 교우 일곱 명과 성모님을 모시고 몰래 기도모임을 시작했었다. 중간에 발각돼 경고를 받기도 했지만 기도회는 계속됐고, 간호과장님을 비롯해 교수들까지 세례를 받는 사람이 차츰 늘어났다. 간호사를 중심으로 성모님의 레지오 마리애 쁘레시디움이 만들어졌고, 네 개의 쁘레시디움으로 성장해 병원 꾸리아가 창설됐다. 그리고 약사며 일반 직원들한테까지 기도모임이 퍼져 백팔십 명 규모로 번창했다. 덕분에 환자나 보호자는 물론 직원들에게까지도 활발하게 천주교 신앙이 전파됐다.

그뿐만 아니라 전북대학교 병원 안에 경당이 꾸며져 신부, 수녀님이 파견되셨다. ‘세계 병자의 날’에 병원을 방문하신 주교님께서 회원들의 열성적 활동을 보시고 대학병원인데도 마치 천주교 병원 같다며 칭찬해 주시기도 했다. 훗날 병원 꾸리아는 각 본당으로 이전해 갔다.

나는 성모님께서 우리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주님께 올바르게 전달될 수 있도록 끊임없이 기도해 주신다고 믿는다. 성모님을 모시고 시작한 병원 기도모임의 활기찬 성장이 그 사실을 일깨워 주었기에 성령쇄신 외합에도 성모님을 모신다.

밤 새워 성령께 기도하는 자리에서 쓰러지신 할머니가 성모님은 못내 안타까우셨나 보다. 또 솔에 취하고도 삼종기도는 꼭 바치는 사위의 정성을 갸륵히 여기시어 과수원집에 함께해 주신 것이리라. 할머니는 일주일 후 평안히 영면하셨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을 보시고 더러운 악령을 꾸짖으시며 “말 못하고 듣지 못하게 하는 악령아, 들어라. 그 아이에게서 썩 나와 다시는 들어가지 말아라.” 하고 호령하셨다. 그러자 악령이 소리를 지르며 그 아이에게 심한 발작을 일으켜 놓고 나가버렸다. (마르 9,25-26ㄱ)

 

마귀에서 호령하시자 마귀는 나가고 아이는 곧 나았다. 사람들이 없을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와서 “저희는 왜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의 믿음이 약한 탓이다.” (마태 17,18-20ㄱ)

 

 

성전 지킴이

 

가슴이 내려앉는 사고

전북대학교병원 원장 임기를 마친 뒤인 1988년 1월 새로운 부르심을 받았다. 내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새벽미사를 보러 다니는 정동성당에서 사목회장직을 맡게 된 것이다. 회장으로서 전례부, 교육부, 선교부 등 여러 파트 일에 간여하며 성당 사림을 꾸리다 보니 매일 습관처럼 드나드는 우리 성당이 얼마나 귀하고도 소중한 신앙 터전인지 절감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한 해 뒤면 본당 설립 100주년이 되는 해였다.

1889년 봄, 프랑스 선교사 자비에르 보두네 신부님이 초대 주임신부로 발령을 받으셨으나 곧바로 전주 시내로 들어오지는 못하셨다. 외곽에 머무시다 1891년 지금의 성당 자리에 터를 잡으셨다. 1891년은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순교자이신 윤지충 바오로, 권상연 야고보 두 분이 1791년 신해박해로 순교하신 지 꼭 100년이 되는 해였다.

또한 성당 자리는 두 분이 목숨을 잃으신 풍남문 성곽의 한 자락이었다. 1908년 성전 공사를 시작한 보두네 신부님은 일제가 신작로를 내기 위해 풍남문 성벽을 헐자 당국의 허가를 받아 순교자들의 피가 서린 돌로 성당 주춧돌을 세우셨다. 완공하기까지 무려 이십삼 년이 걸린 전동성당은 호남 최초의 로마네스크식 서양 건물로서 육중하면서도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정부에서도 1981년 9월에 국가기념물인 사적 제288호로 지정해 역사적 종교적 건축사적으로 높은 보존 가치를 인정했다.

호남권 신자들이 두루 다 아는 것은 물론 전국적으로도 알려지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늘어놓는 데는 까닭이 있다. 본당 임원들은 1988년 5월부터 내년에 맞을 설립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무엇을 할지 두루 의논했다. 오래되고 낡아 여기저기 손봐야 할 곳을 보수하고, 100년 동안의 자료를 수집해 성당의 뿌리와 역사를 차분히 정리하자는 데 의견을 모았다.

성당 100년사를 책으로 펴내려면 준비할 것들이 상당히 많았다. 분야별로 일을 맡을 책임자를 물색하는 한편, 본당 교우들에게도 널리 알려 사진과 자료를 수집해 나갔다.

예쁜 성당으로 소문이 나 평소에도 관광객이 많이 찾는 성당 주변이 단풍으로 곱게 물들어 한층 더 볼만하던 1988년 10월 10일이었다. 한낮에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 성전 2층 회랑에서 불이 나 그 귀한 성당의 천장과 지붕이 다 타버리고 만 것이다.

그날 나는 여느 때처럼 병원 근무 중이었다. 소식을 듣자마자 만사 제치고 성당으로 달려갔다. 매캐한 연기가 자욱한 성당은 천장이 뻥 뚫려서 하늘이 다 보였다. 말 그대로 망연자실, 너무 충격이 커서 가슴은 물론 다리까지 후들거렸다.

‘100주년 기념사업을 위해 달려가는 와중에, 하필이면 내가 사목회장일 때 이렇게 엄청난 일이 터지다니…’ 모든 게 다 내 불찰인 것 같아 두 다리 뻗고 앉아 엉엉 울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사목회장인 내가 아이처럼 울면 이미 눈물 철철 흘리고 계신 할머니며 아주머니들, 그리고 어린 학생들을 어떻게 달래고 위로하겠나.

처음 얼마 동안은 모두들 왜 불이 났는지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경찰이 오가고, 수사니 뭐니 성당 주변이 온통 어수선했다. ‘100주년 기념사업도 모두 수포로 돌아가는 것 아닌가?’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걱정과 두려움이 엄습했다.

하지만 지나고 보니 예기치 않은 화재는 건물의 낡은 곳을 손보는 땜질 수준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 성전을 보수 복원하는 계기가 되었다. 사 년간 사목회장을 맡으며 겪은 어려움을 무슨 말로 다하랴. 그러나 기기묘묘하게 일이 잘 풀리면서 오늘의 멋진 성당으로 꾸며졌고 기념사업도 잘 치러냈다.

우선 하드웨어로, 불탄 성당의 천장과 지붕은 화재 위험이 적고 단열효과도 높은 구리판으로 전면 교체했다. 흙과 부서진 벽돌로 꽉 차 있던 성당 지하는 원형대로 복원하고 통풍도 잘 되게 보수했다. 보두네 신부님이 중국인 기술자들을 데려와 직접 구워 쓰셨던 흙벽돌 위에 세월의 때처럼 묻어 있던 지저분한 페인트도 싹 벗겨내고 깨끗하게 단장했다.

소프트웨어로는 본당의 역사를 뒷받침하는 자료들을 모아 <전동본당 100년사 자료집>을 펴냈다. 신자들이 가지고 있던 사진들을 모아 <전동 100년>(사진첩)도 출간했다. 이 성전 터에서 순교하신 ‘윤지충 바오로, 권상연 야고보 순교 200주년 기념 심포지엄’을 열고 자료집도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이제까지의 역사를 통틀어 아우르는 <전동성당 100년사>도 펴냈다.

계획을 세우고 마무리 짓지 못한 일이 있다. 초대 보두네 신부님과 2대와 4대 주임 라크루 신부님의 편지와 자료를 우리말로 번역하는 일이다. 아쉽지만 다음 번 기념사업 숙제로 넘겼다.

 

 

하느님의 집

전주교구 역사의 큰 기둥이자 한때 주교좌성당으로 호남지역 선교의 요람이던 전동성당이 화재로 흉물스런 모습이 되자 교우들은 너나없이 허탈해했다. 당연한 일이다. 불탄 성전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교우들 마음속에는 어마어마할 보수작업에 대한 경제적 부담감도  자리하고 있었을 터였다. 이 또한 너무나 자연스런 일이다.

있는 돈 없는 돈 다 긁어 모아 귀한 성전을 보수해야 한다는 데는 누구도 이견이 없었다. 하지만 사목회가 100주년 기념사업도 계획대로 진행하려 하자 일부 교우들은 아주 답답해했다. 사실 교우들 힘만으로는 일억 원도 모으기 힘든 형편이었다. 성전 보수만 해도 벅찬데 기념사업까지 동시에 벌이려 하니, 현실을 모르는 돈키호테식 공상 같은지 애써 외면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나를 중심으로 한 사목회 임원들은 ‘주께서 하시는 일이라, 놀랍게만 보인다.'(시편 118,22: 마태 21,42)는 성경 말씀에 의지했다. 하느님께서 옳은 일이라고 여기시거나 본당 주보성인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전교성과 맥을 같이 하는 일이라면, 언젠가는 우리가 계획한 것들이 다 이루어질 것이라 믿고 격려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성전 보수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회의를 얼마나 많이 하면서 고심했는지 모른다. 그러다가 우리는 전동성당이 국가가 지정한 사적이라는 점에 주목했다. 보수비용을 나라에서 지원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

사목회 주도로 면밀하게 계획을 짜며 준비를 했다. 회장인 내가 신부님 허락 아래 지방자치단체와 중앙 각 부처를 찾아가 도움을 구하기로 했다. 그 일로 서울에 올라가는 날 저녁에는 교구차원에서 열리는 중요한 회합에도 꼭 참석해야 했기에 새벽미사를 봉헌하며 주님께 도움을 청했다.

“제가 오늘 서울에서 봐야 할 일들이 하나하나 좋은 결과를 얻도록 도와주십시오. 또 저녁 일곱 시 회합에도 곡 참석해야 하니, 모든 일정이 순조롭도록 이끌어 주시고 보호해 주십시오.”

미사를 마치고 아침도 거른 채 서울행 고속버스를 탔다. 내가 만나고자 하는 사람들과는 아무런 약속도 없이 기도만 하고 무작정 올라가는 길이었다. 버스 속에서도 주님의 자비를 간청했다. 무턱대고 낯선 사람들을 찾아가는 게 나라고 왜 겸연쩍고 쑥스럽지 않겠는가. 하지만 전동성당을 지키는 일은 신앙 선조들의 유훈을 지키는 일이기에 용기를 짜냈다.

먼저 세종로 매국대사관 옆에 있는 당시 문화공보부로 갔다. 문화재 예산담당 과장님 방이 어디인지 물어물어 무작정 안으로 들어갔다. 과장처럼 보이는 분이 책상 앞에서 선 채로 물었다.

“누구신데 이렇게 제 방에 들어오시나요? 저는 지금 과장회의에 가는 길인데…”

경상도 말씨였다. 허리 숙여 인사하며 전주에서 올라온 전동성당 사목회장 안 아무개라고 이름을 밝히고 긴히 오 분만 말씀 좀 드리고 싶다고 했다. 사람들 눈앞에서 거절하기가 뭣했는지 잠깐 앉아 요점만 말하라기에 빠르고 차분하게 용건을 밝혔다.

‘우리 성당이 사적 제288호인데 원인 모를 불이 나서 지붕이 타버렸다, 만일 비라도 내리면 큰일이다, 흙벽돌로 지은 건물이라 다 무너져 내릴 것이다, 과장님께서 보수 예산을 좀 올려주셨으면 한다, 긴급한 일이다…’

굳은 얼굴로 나를 주목하던 분이 조금씩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내 진솔한 태도와 열의에 마음이 움직인 것 같았다.

“그러시군요. 저도 안 과장, 종씨입니다. 좀 묘하기도 하군요. 오늘이 내년도 예산안 올리는 마지막 날인데 어떻게 아시고 바로 오늘 찾아오셨어요?”

서로 명함을 주고받았다. 잠시 후 그분이 친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주에 내려가시는 대로 빨리 서류를 꾸며 시청 문화재과를 통해 예산서를 긴급히 올리세요. 그나저나 종씨가 찾아오셨는데 죄송해서 어쩌나요? 제가 얼른 회의에 가야 돼서 커피도 한 잔 대접 못합니다.”

앞으로 전화로 연락하자면서 그분은 방을 나갔다. 일단 첫 단계는 그럭저럭 성공이다. 길을 건너 광화문 뒤 경복궁 관리건물 지하에 있는 문화재 국장실을 찾아갔다. 노란 공무원증을 수위에게 내보이자 무사통과시켜 주었다.

국장은 참으로 겸손한 분이었다. 내가 찾아간 이유를 설명하자 귀찮아하기는커녕 고개를 끄덕이며 그런 일로 서울까지 직접 오다니 열의가 대단하다며 칭찬을 했다. 바로 그때였다. 문이 열리며 누가 들어서는데 다름 아닌 전주시청 문화재 담당 계장님이었다.

“아니, 안 회장님이 여긴 웬일이십니까?”

의아해하는 계장님에게 알다시피 전동성당 보수 건으로 여기에 왔다고 했다.

“국장님, 이분은 의사신데요, 성당 일에 얼마나 열심인지 못 말리는 분입니다.”

전주에서 알고 지내던 계장님이 그 자리에 계신 덕분에 부드럽게 본론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국장님, 앞으로 전동성당 보수 복원 예산서가 올라올 겁니다. 그때 제일 첫 순서로 예산 배정을 좀 해주십시오. 문공부에서 문화재 예산담당 과장님이 올려도 국장님께서 통과시켜 주시 않으면 허사 아닙니까? 그래서 찾아왔으니 잘 부탁 드립니다.”

허허 웃는 두 사람과 따뜻이 인사를 나누고 밖으로 나와 택시를 잡아탔다. 다음으로 간 곳은 각 부처에서 올라온 예산안을 심의한 뒤 배정을 하는 경제기획원 예산실이다. 여기서 막으면 돈 줄도 막힌다. 과천 정부청사에서 예산실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하자 수위가 막아섰다. 공무원증을 보여주며 일부러 더 바쁜 척했다. 전화로 약속했다, 시간이 없다, 예산실장 방이 몇 층이냐? 내 윽박에 수위는 순순히 엘리베이터 문을 열어 주었다.

예산 실장실로 들어서자 비서가 물었다. ‘악속은 했느냐, 누구시냐?’ 고. 명함을 건네는 동시에 보면 알거라 고 말하면서 대답은 기다리지도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정부 각 부처에서 올라오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복잡다단한 예산을 주무르는 그 바쁜 국장급 실장이 마침 혼자 있었다.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을 만나 부탁까지 하는 입장이지만 나는 망설일 틈이 없었다. 어떻게 오셨느냐는 말에 친구를 들먹이며 운을 뗐다.

“제 고등학교 친구가 여기 기획원 0 차관입니다. 그 친구한테 국장님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시간이 없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말씀 드리죠.”

성당은 하느님의 집이다. 더구나 나라에서 보존한다고 사적으로 지정까지 한 건물 아닌가? 나는 꺼릴 것도 없고 기가 꺾일 일도 없다는 생각에 겸손하면서도 당당하게 상세히 설명을 했다.

“결론적으로, 문화재청에서 전동성당 개축 예산이 올라오면 국장님께서 깎지 말고 예산대로 배정해 주시라는 것입니다. 잘 부탁 드립니다.”

국장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웃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몇 마디 질문과 대답이 오가는 중에 그분 고향은 목포요, 나는 광주고등학교 출신이라는 소개가 곁들여졌다. 내가 한 번 더 용기를 냈다.

“어려운 요청이지만 점심때도 됐고 나도 밥을 먹어야 하니, 국장님을 모시고 간단히 점심을 나누고 싶습니다. 어떠세요?”

그날 마침 약속이 없었는지 뜻밖에도 승낙을 했다. 가까운 일식집에 가서 초밥을 먹으며 충분한 설명을 드렸다. 그분도 화답을 했다. 자신이 예산을 올릴 경우 국회 문공위원회에서 삭감되지만 안는다면 잘될 거라고.

계획대로 문화재 보수 예산을 담당하는 서울의 공무원 세 명을 다 만났다. 과천에서 택시를 타고 강남터미널로 가서 다시 전주행 고속버스를 탔다. 버스에는 잘 알고 지내는 콘크리트회사 사장이 타고 있어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전주에 닿자 사장은 자기 자가용이 기다리고 있다며 같이 가자고 했다. 내 바쁜 사정을 말하며 옛 가톨릭센터까지 데려가 달라고 부탁하자 두 말도 않았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회합실로 들어가며 시계를 보니 저녁 일곱 시 오 분 전이었다. 하루 팔백 리 길을 오르락내리락, 전혀 낯 모르는 관리들 방을 들락날락하고 마지막 일정에도 오차 없이 잘 도착했다 어떻게 하루 일정이 자로 잰 듯 완벽하게 치러진 것일까? 주님께서는 아침기도 때 드린 내 청을 하나도 물리치지 않으셨다.

그 해 전동성당 개-보수 예산으로 나라에서 십팔억 원에 가까운 돈을 지원받았다. 나중에 알게 됐는데 국회심의를 통과한 천주교 건물 보수 예산은 그게 처음이라고 했다. 이후에도 전동성당은 보수와 단장을 거듭해 풍남문, 한옥마을과 더불어 전국에서 관광객이 찾아드는 대표적인 전주의 명소로 각광받고 있다.

 

 

숲정이 칼탑과 성인들의 통공

1994년쯤의 일이다. 평소 존경하는 신부님과 한가하게 차를 한잔 나누게 되었다. 얼마 안 있으면 은퇴할 예정이던 신부님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나중에 꼭 00 아파트에서 살고 싶다고 하셨다. ‘왜 그 아파트?’ 하는 내 눈빛을 읽으시며 까닭을 들려주셨다.

그 아파트 바로 앞이 동정 순교자 이순이 루갈다 성녀(1781-1802년)를 비롯해 신유-기해-병인박해 때 전주교구 순교자 열세 분이 돌아가신 순교 터라고 했다. 일제 치하인 1935년에는 피의 박해를 상징하는 칼탑과 비석이 세워지기도 했던 곳인데, 안타깝게도 아파트 숲으로 변해 버려 마음이 아프다고 하셨다.

전주에는 스무 해 넘게 살았지만 그 아파트 단지 앞에 그런 곳이 있는 줄 전혀 몰랐다. 말을 빙빙 돌리지 못하는 직설적인 성격인데다 곧잘 감성에 빠지면서도 조금 저돌적이기도 한 나는 주저하지 않고 신부님께 말씀 드렸다. 거기가 어딘지 현장을 한번 가 보시자 고.

진북동으로 향해 아파트 관리사무실에 들렀다. 옛 해성학교 운동장 끝 부근, 칼탑이 서 있던 자리가 어딘지 물어 찾아가 보니 아파트 주님을 위한 유치원 건물이 세워져 있었다. 한참 동안 이리저리 건물과 주변을 둘러보던 내 잎에서 뜬금없이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신부님, 우리가 이걸 사버리면 어떨까요?”

신부님은 내 말이 뚱딴지 같기만 한지 큰 소리로 웃으셨다.

“허허허!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내친김에 다시 관리사무실에 들러 유치원 매입이 가능한지 알아보았다. 관리실 직원의 설명을 들으며 심장 박동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건설회사 자금 사정상 월말까지는 건물 인수자를 꼭 찾아야 하는데 몇 사람이 가능성을 타진하고 돌아갔을 뿐 아직 계약된 상태는 아니라고 했다. 아파트는 다 지어졌어도 주민들이 입주하지 않은 상태라 유치원을 사들여 운영할 마땅한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가격과 조건을 물어봤다. 월말까지 계약금 천오백만 원을 내고, 한 달 뒤 칠천오백만 원을 치러야 한단다. 놀랍고도 값진 정보였다. 사무실을 나오면서 신부님께 말씀 드렸다.

“좋은 수가 있습니다. 우선은 신부님이 계약금을 준비해 주세요. 제가 백방으로 모금을 하겠습니다. 일단 일을 저질로 놓고 보지요.”

앞뒤 재지 않고 불쑥 뱉는 내 말에 신부님은 어리둥절해하셨다.

“아니, 한두 푼도 아니고 그런 거액을 모을 수 있을까요?”

“예, 신부님. 한번 해보겠습니다. 신부님이란 저랑 주님께 기도하며 도움을 청해 보지요.”

어디서 어떻게 그 많은 돈을 구할지 당장은 묘책이 있을 리 없었다. 다만 순교자들의 피가 서린 거룩한 땅에 있는 건물과 부지를 꼭 매입하고픈 열망만 뜨거웠다.

“그럼, 안 회장님이 한번 추진해 보세요.”

긴가민가하면서도 신부님은 허락을 하셨다. 다음 날부터 신부님 두 분과  평신도인 나, 이렇게 셋이서 ‘숲정이 칼탑 부지 매입 추진위원회’ 문안을 만들고 함께 서명을 했다. 신자들에게 자세한 내용을 알리고 매입자금 통장을 새로 만들어 계좌 번호를 안내하면서 입금 요청을 했다.

먼저 월말 이틀 전에 두 신부님이 계약금을 조달해서 세 사람이 공동으로 계약서를 썼다. 천만다행으로 그때까지 다른 경쟁자가 없어 무모하기까지 한 우리의 계획은 일단 첫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한 달이라는 시간. 신부님들은 신부님들대로 나는 나대로, 연줄 닿는 모든 성당과 신자들에게 열심히 취지문을 나눠주면서 거룩한 순교지 매입에 관심을 가져 달라고 호소했다.

한국 천주교회 역사 초기에 혹독한 박해 속에서도 목숨 바쳐 믿음을 증거한 수많은 순교자 가운데 103위가 1984년 5월 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에 의해 처음으로 성인품을 받으셨다. 그런데 그 중 일곱 분이 숲정이에서 돌아가셨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다시 부각됐다.

우거진 숲이 많아 숲머리로 불렸던 숲정이는 조선시대 여러 처형지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단순히 역사적 사건이 벌어진 장소일 뿐 아니라, 신앙 선조들이 성령과 그리스도를 증언하며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고백했던 곳 아닌가. 전주 신자들의 신심을 대표할 만한 장소가 이름 없이 스러져 버릴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이 교구신자들에게 알려지면서 마음을 움직였나 보다. 만기 지급일을 일주일 남기고 은행에 가서 떨리는 손으로 통장정리를 해보았다. 벌써 오천여 만 원이 쌓여 있었고 계속해서 입금이 되고 있었다. 마침내 잔금을 치르기로 한 날 통장을 정리해 보니 칠천오백만 원을 훌쩍 넘는 거액이 들어 있었다. 믿음의 힘이 이렇게 엄청날 줄 정말 몰랐다.

이교인의 손에 넘어갈 뻔했던 옛 숲정이와 칼탑이 있던 곳은 이렇게 해서 다시 가톨릭교회로 돌아오게 되었다. 예전에 해성학교 운동장 끝에 있던 칼탑도 유치원 옥상에 멋지게 세워졌다. 정말로 많은 분이 정성을 모아주신 덕분에 일을 마무리 짓던 날, 두 신부님과 나는 마음껏 기뻐하며 행복에 젖었다. 우연히 차 마시며 이야기하다가 비롯된 무 無에서 유 有로 의 전환, 참으로 범상치 않은 기적이다.

물론 주님께서 허락하신 일이지만 성령께서 우리 세 사람에게 발심 發心 을 일으키셨다. 아울러 이순이 루갈다 성녀를 비롯한 순교성인들도 우리의 기도에 힘을 보태주셨을 것이라고 밖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근래 들어 나는 사도신경을 바칠 때마다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란 구절을 한층 실감한다. 아들 사제를 잃은 한 어머니께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들어서다 전주교구 시골 본당 자매님이 가난한 가운데 아들을 낳아 신학교에 보냈다. 아들이 사제가 되자 말할 수 없이 기뻤고, 잘 생긴 그 아들은 무척 활동적인 사제이기도 해서 어머니 마음은 한껏 부풀고 희망에 가득 찼다.

아들은 병영에서 신앙의 위기를 맞는 젊은이들에게 봉사하겠다며 군종사제가 되었다. 군대 생활의 어려움을 계기로 처음으로 주님과 만나는 새 신자들을 위해 왕성하게 활동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사람이 다 알 수는 없다. 어느 날 군 사목 중 오토바이 사고를 당한 아들은 그 길로 하느님 곁으로 떠났다.

아들을 위해 매일 미사를 드리고 늘 기도하면서 믿음에 의해 살아가던 어머니 꿈에 어느 날 돌연히 아들이 나타났다고 한다. 너무나도 그리운 모습이었기에 어머니는 마냥 반갑기만 한데, 무슨 일인지 아들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신부님, 무엇이 부족하세요?”

대답 없는 아들에게 어머니가 거듭 물었다.

“주님의 기도를 많이 바쳐드릴까요?”
역시 고개만 가로저었다.

“그러면 성호경을 많이 바쳐드릴까요?”

고개만 젓는 아들을 보면서 한참 궁리하던 어머니가 마침내 사도신경에 생각이 미쳤다.

“사도신경을 많이 해드릴까요?”

그제야 아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사라지셨다고 한다.

숲정이 칼탑 부지 회복도 순교성인들의 통공의 도움으로 가능하지 않았을까? 그곳은 현재 전주교구 교리신학원과 교구 직영 유치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갑작스런 제의를 관대한 아량으로 너그럽게 받아들여 주신 이병호 빈첸시오 주교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이렇게 성령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 성도들을 대신해서 간구해 주십니다. 그리고 마음속까지도 꿰뚫어 보시는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성령의 생각을 잘 아십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작용해서 좋은 결과를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로마 8, 27-28)

 

 

 

2장 값없는 초대

 

 

지푸라기 같은 시작

 

등록금 걱정과 영세

처음으로 성당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겐 호기심과 더불어 절박한 사연이 있다. 누군가 많이 아파서, 살기가 너무 힘들어서, 끝없는 절망과 두려움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사람의 힘을 뛰어넘는 하늘의 은총을 기대하며 지푸라기라도 잡고자 성당 문을 두드리는 심정을 알고도 남는다. 나 역시 그러했다. 민망스러운 걸음마였을망정 창피하지는 않다. 이제는 그 모든 것이 주님께로 불러주신 값없는 초대였음을 알고도 남기 때문이다.

대학생 시절 내가 성당에 가게 된 건 삶에 대한 철학적 사유나 세상의 부조리를 둘러싼 고민 같은 무슨 거창한 이유에서가 아니었다. 등록금 마련하기가 너무나 힘들어 도움을 받고 싶어서였다.

전라남도 함평의 농촌마을 고향에서 우리 집은 꽤 잘사는 편이었다. 어린 시절엔 가난이라는 걸 모르고 자랐다. 그러나 조금씩 나빠진 집안 형편은 내가 전남대학교 의과대학에 다닐 무렵 완전히 제로 상태가 되어버렸다. 등록금 낼 때마다 거의 매번 온 집안이 난리를 치렀다. 농사짓는 부모님이 일찍 알이 차는 올벼를 다 베어 팔아도 돈이 모자랐다. 외갓집이며 고모네 할 것 없이 여러 친척집에서 도움을 받았다.

광주에서 학교를 다녀야 하니 하숙이든 자취든 돈이 꽤 들었다. 예과 일 년을 겨우 마치자 앞으로 오 년을 어떻게 버틸까, 앞길이 막막했다. 중학생을 가르치는 입주 가정교사로 들어갔다. 잘 데 있고 밥 얻어먹으며 용돈도 조금 받았다. 그러나 등록금 해결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납부 미감에는 3차까지 기한이 있었다. 1차 마감 때는 돈을 낼 엄두도 못 냈다. 2차 마감도 지났는데 3차 마감이 다가오면 너무 초조하고 불안했다. 그때도 못 내면 제적을 당해 어렵사리 의과대학에 들어간 게 허사가 되기 때문이다.

동기생 가운데 그런 내 처지를 눈여겨본 친구가 있었다. 다리에 약간의 장애가 있는 부잣집 아들이었다. 어느 날 그가 천주교회에 다녀보라며 북동성당으로 데리고 갔다. 어디에서든 어떤 방법이든 무조건 도움이 필요했다.

절박한 심정으로 주일마다 성당에 나가 등록금 좀 해결해 주십사고 빌었다. 교리공부도 시작했다. 6개월 교육을 마치고 신부님께 예비자 찰고를 받았다. 여러 명의 학생이 문답을 하는데 나는 여섯째 순번, 그래서 속을 6번 문제의 답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떤 학생이 대답을 못하자 신부님이 돌연 나를 쳐다보며 10번 문제를 냈다. 갑작스런 문제 변경에 목이 콱 막혀 우물쭈물하자 신부님이 짧게 한마디 하셨다.

“다시 와요.”

고개를 푹 숙이고 신부님 방을 나오자 교리교사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분은 103위 성인 가운데 숲정이에서 순교하신 손선지 베드로 성인의 후손이다.

“아니, 어떻게 된 거야? 그 동안 결석도 한 번 안 한 자네가 왜 떨어졌어?”

몹시 안타까웠던지 신부님한테 말씀 드려 보겠다며 안으로 들어가셨다. 조금 후 나는 혹시나 했던 기대를 딱 접었다. 신부님한테 얼마나 심하게 야단을 맞으셨는지 선생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다시 6개월의 교육을 받고 두 번째 찰고를 받았다. 이번에는 나도 단단히 준비했다. 하지만 신부님은 한 수 위셨다. 차례로 문답을 하던 중 내 순서가 되자 불쑥 이런 질문을 하셨다.

“학생은 의대생이죠? 진화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해 보세요.”

인간의 몸과 질병에 대해 공부하는 의대생인 건 맞다. 하지만 세례를 받으려고 창조론과 진화론까지 비교분석해 보지는 않았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내게 신부님은 또 짧게 말씀 하셨다.

“다시 준비하고 오세요.”

‘6개월씩 두 번, 일 년이나 공을 들였는데 또 허사라니 뭐가 이렇게 까다롭담? 에이, 까짓 거 안 할란다!’ 부아가 치밀어 세례 받는 걸 포기하고 성당에 발길을 끊었다. 처음엔 시원했다. 하지마 석 달쯤 쉬다 보니 가슴에 구멍이 난 것처럼 뭘 해도 허전했다. 내 발로 다시 찾아가 교리반 3수를 하고서야 문답을 통과했다. 마침내 성당에 다닌 지 이 년이 다 돼가던 1960년 4월 16일에 비로소 세례를 받았다.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홀로 고학하는 처지였던 지라 나는 늘 외로웠다. 대부 代父 서줄 사람조차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세례식 날 내 앞자리에 앉은 영세자 대부에게 사정해 겨우 세례를 받았다. 보잘것없는, 누구 하나 알아주는 이 없는 가난한 고학생의 영세를 주님만이 큰 사랑으로 축복해 주셨다.

같이 교리를 시작한 학생 가운데 나 말고도 나중에 국회의원을 지낸 요셉 군 등 다섯 명쯤은 적어도 두 번 이상 찰고를 받았다. 골롬반회 아일랜드인 안 모란 토마스 신부님께서 일부러 하드 트레이닝을 시키시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단단히 준비시켜 주신 덕분에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냉담하지 않고 잘 버텨낼 수 있었으리라.

 

 

사막과 오아시스

벌거벗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계시고 마당에는 하얀 성모상이 서 있는 성당. 유교 儒敎 색 짙은 가부장적인 집안에서 자란 내게 성당의 전례는 하나같이 낯설었다. 외워야 할 기도문은 또 왜 그리 많은지. 하지만 나는 성당의 모든 것에 무조건 맹종했다. 소원은 단 하나였다.

‘등록금 때문에 힘들어 죽겠으니 제발 도와주세요!’

성당에 있노라면 조금 희망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러나 밖에 나오면 다시 사막과도 같은 하루하루…. 눈에 띄게 상황이 달라지지는 않아도 두 손 모아 빌며 마음 기댈 데가 있으니 적잖이 위로가 됐다.

애달픈 기도 덕분이었을까, 절실한 만큼 열심히 공부해서였을까. 예과 2학년 때 처음으로 공부 잘하는 사람한테 주는 성적 장학금을 탔다. 등록금의 10퍼센트 정도만 내면 한 학기가 무사통과여서 크게 짐을 덜었다. 의대는 한 과목만 낙제를 해도 일 년을 통째로 다시 다녀야 한다. 한 해 등록금이 얼만가! 장학금 맛을 본 되로 공부에 매진해서 서너 차례 더 혜택을 봤다.

예과를 마치고 본과에 올라가자 본격적으로 의학공부가 시작되었다. 외우고 이해해야 할 것이 무척 많은데 공부 범위까지 아주 넓었다. 게다가 나한테는 중요한 게 없었다. 영어로 된 <세실의학교과서 CECIL Cecil Textbook of Medicine> 다. 요즘 돈으로 이십만 원쯤 하는 비싼 원서를 살 돈이 내겐 없었다.

지금은 책도 많고, 없으면 도서관이나 친구한테 잠깐 빌려 복사를 해도 된다. 그러나 그때는 복사기도 없었다. 교수님이 강의하는 내용을 빨리빨리 받아쓰고 동기생 책을 빌려 베껴 써가며 공부를 했다. 책 없이 그 많은 공부를 해내려니 얼마나 갑갑하고 고생스럽던지. 가르치는 중학생이 복습하는 동안 옆에서 내 공부를 하면서 책이 있으면 참 좋겠는데, 중얼거리곤 했나 보다. 어느 날 가정교사 집주인 아주머니가 물었다.

“학생, 뭐 중요한 책이 꼭 필요하다면서?”

책이 없어 끙끙대는 내 사정을 학생이 어머니한테 전했던지 아주머니는 정말 감사하게도 책을 사라며 돈을 주셨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나 달고 시원한 물을 벌컥벌컥 들이키는 느낌이라고 할까. 꿈에도 갖고 싶던 세실 원서를 구입해 처음부터 끝까지 여섯 번을 꼼꼼히 읽었다. 그러고 나니까 눈을 감아도 몇 페이지에 무슨 내용이 있는지 다 떠올랐다. 지금도 나는 공부가 어렵다는 학생들에게 ‘아무리 어렵더라도 계속 읽어라, 되풀이해서 읽다 보면 차츰차츰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고 이야기해 준다.

본과 상급반으로 올라간 다음에는 가정교사를 그만뒀다. 공부하랴 실습하랴 리포트 쓰랴, 학생을 가르치면서 내 공부도 하기가 너무 버거웠다. 형편 따라 하숙이나 자취를 했다. 아버지가 도 道 에서 가장 큰 수리조합장이 되어 집안 사정이 조금 나아졌을 때 하숙을 했다. 그런데 하숙비가 몇 달치나 밀려 있어도 집에서는 돈이 잘 오지 않았다.

어느 날 저녁 하숙집 주인아주머니가 아버지께서 다녀가셨다고 일러주었다. 하숙비는 주고 가시더냐니까 고개를 저으셨다. 방에 들어간 뒤 내 무거운 가슴은 더 천근만근이 됐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오로지 내 힘의 원천이 되어주던 십자가와 성모상과 성경책이 온데간데없었다. 며칠 뒤 고향집 여동생한테 슬그머니 연락을 해봤다. 광주에 다녀오신 아버지가 무언가를 소 죽 쑤는 아궁이에 넣어 태워버리셨단다. 틀림없이 내 방에서 가져가신 성물 聖物 이었을 것이다.

 경제적 어려움은 풀리지 않고 사람에 대한 실망까지 겹쳐 성당을 쉰 적이 또 있다. 가톨릭 대학생한테 주는 오지리(오스트리아) 장학금이 있다는 걸 알고 기대를 잔뜩 품으며 신청을 했다. 의대생인데다 성적이 괜찮고, 학생회 부회장도 맡고 있던 터라 자격이 충분하다고 내심 자부했다. 하지만 장학금은 다른 학생한테로 갔다. 신부님 결정이 옳았으리라. 하지만 한 푼이 아쉬웠던 내 눈에는 친분에 기울어진 신부님의 편향된 결정으로 보였다. 실망한 나머지 화가 났다. 어려운 내 사정을 신부님도 하느님도 몰라주시는 것 같았다. 삐쳐서 성당에 발걸음을 끊었다.

이번에 여섯 달을 버텼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이 괴로웠다. 잘못을 참회하며 다시 십자가 주님 앞에 엎드렸다. 돌아보면 얼마나 유치한 행동이었는지 웃음이 난다. 하지만 갓 걸음마를 시작한 아기가 뜀박질도 한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숱하게 넘어지고 자빠져 봐야 달음박질도 칠 수 있는 것 아닌가.

장학금에 울고 웃을 정도로 내 형편은 어려웠다. 장남인 나 하나 대학공부 시키느라 온 집안이 허덕였다. 동생 셋 가운데 둘은 고등학교를 나오거나 중퇴했고 막내는 중학교만 마쳤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깻잎 반찬을 먹지 않는다. 상추쌈에 곁들이거나 양념 얹은 찜에 튀김까지, 사람들은 맛있다면 잘 먹어도 나는 영 젓가락이 안 간다. 자취하던 시절 내 반찬은 거의 어머니가 보내주신 된장과 된장 속에 박은 깻잎 장아찌가 전부였다. 그때 질려서인지 깻잎 특유의 향내와 식감이 나는 별로다.

 

 

돌봄의 손길

졸업이 다가올 무렵 동기생들은 의사 국가고시와 인턴시험 준비에 돌입했다. 통과하기가 그다지 어렵지 않은 국가고시보다는 인턴시험에 더 매달렸다. 졸업생의 10퍼센트 정도만 출신학교인 전남대학교병원에 인턴으로 뽑혀 일 년간 임상실습을 할 수 있다. 의사로서 탄탄한 앞날의 첫 관문을 넘느냐 마느냐가 인턴시험에 달려 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내 평생 잊지 못하는 사건 가운데 하나가 그때 일어났다.

인턴시험은 2교시로 치러졌다. 1교시는 의학 각 분야에 대한 문제, 2교시는 영어였다. 첫 시간이 시작되어 문제지를 받았다. 내과-산부인과-소아과 등 과목이 많아서 시험지가 여러 장이었다. 긴장한 채로 집중해서 문제를 풀어나갔다. 답을 다 썼는데도 아직 종 칠 시간이 덜 돼서 보고 또 정리하며 시간을 대우는 중이었다. 내 옆을 지나가던 감독관이 멈칫 서더니 내 책상 위를 자세히 살폈다. 커닝을 하거나 뭐 잘못한 일이 없기에 왜 그러시나 했다.

“학생, 여기 이 문제니는 왜 빼놨어?”

감독관이 영어로 된 문제지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거요? 영어 문제지 아닙니까? 2교시에 시험을 치르니 나중에 풀려고 남겨뒀습니다.”

감독관의 다음 말에 나는 거의 까무러칠 뻔했다.

“아니야, 이거 외과 문제잖아! 영어는 다음 시간에 문제지를 새로 주지. 얼른 써!”

깜짝 놀라 다시 보니 외과 문제지가 맞았다. 다른 과목은 다 한글로 문제가 나왔는데 그것만 영어로 쓰여 있어서 영어 과목인 줄 알았던 것이다. 남은 시간은 약 십 분쯤, 가슴은 쿵쿵 방망이질을 해댔다. 이를 꽉 물고 정신 없이 답을 써내려 갔다. 스무 문제 중 12번까지 풀었을 때 종이 울렸다. 빈자리가 수두룩한 답안지를 그냥 냈다.

졸업생 백이십 명 중에 열두 명만 뽑는 치열한 인턴시험이다. 다른 사람은 다 답을 썼는데 나만 절반 가까이 비어 있는 답안지를 냈으니 합격을 바라는 건 무리였다. 본원에 남기는 영 그렀구나, 낙담해서 발표가 있던 날엔 아예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런데 의외로 합격자 명단엔 내 이름도 들어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람?’

조용한 밤에 혼자 생각에 잠겼다. 그날 감독관이 학생들 답안지를 자세히 살피는 대신 자리에 앉아만 계셨다면 어찌 되었을까. 답이 맞았든 틀렸든 12번까지라도 풀었으니 망정이지, 한 과목을 통째로 다 날렸다면 본원에서 인턴 수련을 한다는 건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나를 보호해 주셨구나!’ 내가 하느님 손길을 알아차린 건, 실눈이나마 은총에 눈을 뜬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감독관을 통해 나를 살피고 돌봐주신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며 감사에 젖었다.

전남대학교병원에서 인턴 수련을 하면서 비할 데 없이 커다란 행운을 또 얻었다. 반려자를 만난 것이다. 병원에 근무하는 청년 가톨릭 신자들 모임이 광주 남동성당에서 열린 적이 있다. 나는 북동성당 신자로 참석했는데, 남동성당 레지오 단원 중에 아주 아리따운 아가씨가 있었다. 알고 보니 내가 수련하는 전남대학병원 약제과 약사였다.

의사 면허를 따기는 했어도 나는 갓 인턴을 시작한 신참, 아가씨는 대학병원 정식 약사다. 월급이 나보다 몇 배는 많으니 쳐다보기도 힘든 상대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남녀 사이 인연이 맺어지는 데는 뭔가 특별한 끌림이 있나 보다. 내가 얼마나 가난뱅이인지 모르고 만남을 이어가던 처자는 결혼을 승낙했다. 시집 온 뒤로 고생을 너무 많이 시켜 아내에게 늘 미안한 마음이다.

 

야훼의 천사가 하늘에서 큰 소리로 불렀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어서 말씀하십시오.” 아브라함이 대답하자 야훼의 천사가 이렇게 말하였다.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라. 머리털 하나라도 상하지 말라. 나는 네가 얼마나 나를 공경하는지 알았다. 너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마저도 서슴지 않고 나에게 바쳤다.” 아브라함이 이 말을 듣고 고개를 들어보니 뿔이 덤불에 걸려 허우적거리는 수양 한 마리가 눈에 띄었다. 아브라함은 곧 가서 그 수양을 잡아 아들 대신 번제물로 드렸다.  아브라함은 그곳을 야훼 이레라고 이름 붙였다. 그래서 오늘도 사람들은 “야훼께서 이 산에 마련해 주신다.”고들 한다.(창세 22,11-14)

 

 

 

사랑으로 한 걸음씩

 

갈림길과 걸림돌

믿음에도 인생살이에도 수많은 갈림길이 있다. 그때 왜 그렇게 됐을까? 곰곰 돌이켜 봐도 영 알 수 없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요, 신앙의 신비 아닐까 한다.

전남대학교병원에서 레지던트까지 수련을 마친 뒤 군에 입대했다. 대위로 임관되어 전방 야전사단에서 이 년, 후방 국군통합병원에서 일 년, 모두 삼 년을 근무했다. 제대를 하면 어떤 길을 갈지 많은 생각을 했다. 내게는 두 가지 방향이 있었다. 국내에서 그냥 평범한 의사로 살거나 미국에 가서 공부한 다음 이민 의사로 현지에서 사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후자의 삶을 살고 싶은 욕망이 더 컸다.

미국행 꿈을 품고 유학 실기시험과 어학시험을 열심히 준비했다. 다행히 두 시험 다 붙었다. 한껏 마음이 들떠 미국 각처 병원에 지원서를 보냈다. 그러나 나의 부푼 기대와 달리 오라고 불러주는 곳은 하나도 없었다.

제대를 한 달쯤 앞두고 있을 때였다. 전주교구장을 역임하시고 1971년부터 광주대교구장으로 계시던 한공열 베드로 대주교님이 한번 만나자고 연락을 주셨다. 높으신 대주교님이 무슨 일로 날 보자고 하실까? 토요일 퇴근길에 군인 야전복차림으로 당시 무등산 아래에 있던 주교관을 조심스레 찾아갔다. 주교님은 인자한 웃음으로 반갑게 맞아주시며 나를 보자고 한 이유를 말씀하셨다.

“안 선생, 제대하고 나서 무슨 일을 할지 계획이 있는가? 특별한 일 없으면 전주 성모병원에 가는 건 어떤가? 병원 수녀님이 자네를 그리고 좀 보내 달라고 부탁을 해왔어.”

반가운 초대였다. 그러나 내 마음속에는 아직 이민의 꿈이 남아 있었다.

“고맙고 반갑습니다만 주교님, 미국에 이민 의사로 가려고 여러 병원에 서류를 보내놨습니다. 아직 초청장이 오지는 않았습니다만.”

거절이나 다름없는 말인데도 주교님은 의외로 환한 얼굴이 되셨다.

“그래? 내가 미국 시카고에 있는 성 루카병원 원장수녀님을 잘 알아. 추천서 한 장 써줄까?”

주교님 추천서라니, 이런 행운이 어디 있나.

“네, 한 통 부탁 드리고말고요.”

성모병원 수녀님 부탁은 까맣게 잊으신 듯, 주교님은 직접 타자기를 쳐서 영문으로 추천서를 쓰셨다. 정성스레 봉투까지 봉해 건네주시며 내 꿈이 이뤄지길 기원해 주셨다. 주교님의 인자한 사랑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즉시 편지를 미국으로 보냈다. 일주일 만에 답장이 왔다. 드디어 대망의 미국 초청장을 받아 든 것이다. 연봉 2만 달러에 병원 숙소 무료제공까지, 조건도 아주 좋았다. 친구들은 부러워하면서도 자기 일처럼 축하해 줬다. 현지에서 근무를 시작해야 하는 날짜가 조금 촉박한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서둘러 수속을 밟기 시작했으나 집사람과 어린아이들 서류까지 다 갖추려면 시간이 걸렸다.

우선 내가 먼저 출국하고 아내와 아이들은 한 달 뒤에 오기로 계획을 짰다. 집과 짐을 정리하면서 비행기 티켓과 나머지 국내 서류들을 준비해 나갔다. 그런데 아주 엉뚱한 데서 걸림돌이 나타났다. 집사람이 서류가 다 갖춰지면 6개월 뒤에 같이 떠나자고 고집을 부린 것이다. 미국으로 건너간 의사는 인기가 너무 좋아 결국 남편을 다른 여자한테 빼앗기고 만다는 말이 있다면서.

지금이야 여행이 자유롭고 여권도 누구나 만들 수 있다. 하지만 1970년대 초반에 신원조회다 뭐다 해서 비자 받기가 무척 까다로웠다. 더욱이 미국에서 오는 초청장은 엄청난 혜택으로 여겨지던 시절이라 그런 괴소문이 돌았던가 보다. 차근차근 설명하고 설득, 똑 설득해도 집사람은 죽기 살기로 반대했다. 도저히 아내 뜻을 꺾을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시카고 병원에 근무 시점을 6개월 연기해 달라고 편지를 보냈다. 그것으로 내 이민의 꿈은 막을 내렸다.

무슨 조화였을까? 제대 후 나는 결국 주교님이 말씀하신 전주 성모병원에서 일하게 되었다.

 

 

떼쓰는 아이

성모님께 은총을 전구하며 수녀님들이 정성껏 환자를 돌보는 전주 성모병원에서 편안한 마음으로 일한 지 일 년쯤 지났을 때다. 갑작스레 그 병원을 떠나게 되었다. 전북대학교가 의과대학을 만들면서 설립 교수요원 중 한 사람으로 나를 골랐기 때문이다. 그냥 의사 노릇만 하는 게 아니라, 환자 보면서 연구도 하고 제자까지 키울 수 있는 자리니 마다하기 어려웠다. 설립 전까지 당분간 부속병원 역할을 할 전북도립의료원 제2내과 과장으로 옮겨갔다.

교수가 된다는 희망에 한껏 부풀어 차근차근 준비를 해나갈 때였다. 또 하나의 시련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학교수가 되려면 박사학위는 필수다. 당시 나는 전남대 약리학교실에 적을 두고 오 년에 걸쳐 박사과정을 밟고 있었다. 그 해 가을이나 다음 해 봄에는 학위를 받을 예정이었다.

어느 날 전남대 기초학교실 주임교수가 급히 부른다는 연락이 왔다. 부랴부랴 전주에서 광주로 갔다. 단독 면담 중에 교수님은 청천벽력 같은 말씀을 하셨다.

“나한테 박사학위를 신청한 대학원생들 가운데는 규정에 따라 정원과 열외에 적을 둔 사람이 있네. 자네는 열외에 적을 두었지. 실력도 잇고 주변 선생들도 인정을 하니까 학위 받는데 하등 지장이 없을 것 같아서. 그런데 이번에 일이 생겼네. 학칙이 크게 강화됐어. 대학원에 정식 규정에 따른 인원이 아닌 사람한테는 박사학위 논문을 쓸 수 있는 어학 자격시험을 불허한다는 결정을 내렸네. 어쩌겠나. 앞으로 정식 멤버로 다시 과정을 밟아야 할 것 같네. 미안하네.”

너무 황당해서 말이 안 나왔다. 지난 오 년 동안 낸 교실비며 이런저런 과정에 대한 말씀은 한마디도 없으셨다.

“자네가 운이 없네.”

그걸로 끝이었다. 둔기로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머릿속이 멍했다. 대학원에서 내린 결정이라 교수님도 어떻게 해볼 수 없다지 않은가. 전주로 돌아오는 내내 버스 창 밖으로 눈길을 줬지만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제까지는 열외 대학원생도 대학원장 재량으로 몇 사람은 어학 자격시험을 치를 수 있었다. 그런데 대학교수 자리를 눈앞에 둔 내가 하필이면 학칙 강화 첫 케이스에 걸려 시험을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창 밖으로 눈길은 주고 있어도 꿈에 헛것을 보는 것처럼 모든 게 아스라했다. ‘이제 국립대학 교수가 되기는 글렀구나. 개원의가 되는 수밖에…’ 어제만 해도 희망에 부풀어 뵙던 예수님 앞에 그날은 축 처진 어깨로 앉았다. 언제나처럼 그분은 말씀이 없으셨다.

정규 등록인원인 친한 친구는 한 달 앞으로 다가온 시험을 위해 열심히 준비하고 있었다. 그가 부러운 만큼 나 자신은 처량하게 느껴졌다. 서리 맞은 풀처럼 축 처진 나를 안쓰러운 눈길로 바라보면서 친구는 아무 말도 건네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친구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일찌감치 미국으로 가서 전문의 과정을 마치고 앨마배마 대학 방사건과 교수가 된 은사님 있잖아. 그분이 잠시 귀국해 광주에 오신다는데, 같이 가서 한번 만나보지 않을래? 그리고 너 말이야, 그렇게 가만히만 있으면 어쩌냐? 되든 안 되든 일단 밀어붙여 봐야 하는 거 아냐?”

친구의 말에 용기를 내어 같이 광주로 향했다. 우선 약리학 주임 교수님한테 갔다.

“교수님, 어학시험 응시가 불가능하다고 하셨지만 오 년이나 과정을 밟아온 저로서는 너무 억울합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노력을 한번 해보면 어떨까요?”

교수님은 기가 차다는 듯 껄껄 웃으셨다.

“그게 가능할까? 어디 능력 있으면 한번 발휘해 보소.”

면박이나 다를 바 없는 말인데도 나는 실날같은 희망을 걸었다. 우선 미국에서 오신 교수님이 어디 계신지 여기저기 수소문했다. 그날 밤 광주의 한 고급 한식집에서 친한 동창들이 모여 귀국 환영파티를 한다고 했다. 당시 의대 학장님과 대학원장님, 개업 중인 병원장님과 피부과 교수님 등, 모이는 멤버도 아주 굉장했다.

동창 모임이 있다는 식당을 찾아가 어느 방에 계신지 알아내고 기회를 보았다. 손에서 묵주를 놓지 못한 채 초조하게 기도하며 기다렸다. 방 안에서 정겨운 담소와 왁자한 웃음소리가 간간이 밖으로 흘러나왔다.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싶었을 때, 그분들이 너무 취하면 안 될 것 같아 당돌하게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갑작스런 나의 출현에 선생님들은 모두 ‘어! 자네 웬일인가?’ 하며 주목하셨다.

“평소 제가 존경하던, 미국에서 오신 은사님께 인사 드리러 왔습니다.”

방바닥에 엎드려 넙죽 절을 올렸다. 은사님도 오랜만에 내 얼굴을 보자 반가워하셨다.

“제가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는 절박한 사정이 있어 염치불구하고 찾아 뵈었습니다.”

무슨 일인지 말해 보라기에 재빨리 사연을 털어놓았다.

“2주 뒤에 박사코스 어학시험이 있는데, 대학원 규정이 바뀌어 응시를 못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전북대 의대 설립 교수요원으로 있거든요. 이번에 학위를 받지 못하면 교수는 물거품이 되고 맙니다.”

“허어~, 그리 됐구먼. 어쩌나….”

안타까운 듯 잠시 뜸을 들이던 은사님이 옆자리를 향해 말했다.

“어이, 대학원장. 이 사림 참 성실하고 능력도 있으니 한번 기회를 주소!”

학장님도 거드셨다.

“그래, 한번 다시 생각해 보소.”

개업 중인 선배도 응원을 했다.

“참 안됐는데, 어떻게 좀 도와줄 수 없을까?”

다들 자기 일인 양 내 처지를 안타까워하셨다. 그러나 대학원장님만은 노기 띤 얼굴이셨다. 온통 자신에게로 쏠린 눈길을 내치기라도 하듯 호통을 치셨다.

“이 친구, 공과 사도 구별 못하는구먼! 여기가 어디라고 찾아와 괴롭히는 거야? 올해부터는 학칙도 안 되고, 나도 안 된다고 이미 공언을 했잖아! 이렇게 달라붙는다고 뭐가 달라질 줄 알아? 에이 술 맛 떨어져, 당장 나가지 못해?”

더는 버틸 수 없었다. 큰절을 올리고 방에서 나왔다. 밖에서 기다리던 친구와 다시금 머리를 맞댔다. 그날 밤은 광주에서 자고 마지막 시도로 내일 아침 학장님을 찾아 뵙기로 했다. 광주 처가에서 하룻밤 묵고 다음 날 새벽 학장님 댁 동네 입구에서 친구를 만났다. 학장님은 마침 세수를 하고 계셨다. 어젯밤에 불쑥 나타나 술자리 분위기를 망친 것도 모자라 새벽부터 집으로 찾아가니 얼마나 성가셨을까? 그런데도 따뜻하게 맞아주셨다.

“자네 사정이 참 안됐네. 하지만 대학원장이 그렇게 완강하니 어쩔 수가 없구먼. 내 한 가지 알려줌세. 오늘 아홉 시에 내 방에서 대학원장과 상의할 일이 있거든? 그 자리에 와서 다시 한 번 원장한테 하소연 해보소.”

고마움을 담아 깊이 인사 드리고 학장님 댁을 나와 아침부터 먹으러 갔다. 둘 다 마음이 복잡해 말없이 밥을 먹는데 친구가 문득 생각난다는 듯이 말했다.

“아 참! 자네 일이 잘 풀릴 것 같은 예감이 들어.”

‘뭐가?’ 눈으로 묻는 내게 친구가 기이하다는 듯 고개를 외로 꼬며 말했다.

“어젯밤에 묘한 꿈을 꿨어. 나 개신교 신자잖아, 그런데 꿈에 자네랑 학장님 댁 골목을 들어가는데, 거기 하얀 옷을 입은 여인이 서 있었어. 성모 마리아인 것 같아. 별일도 다 있지. 아무튼 좋은 징조 같지 않아? 기적 같은 결과를 기대해 보세.”

목기 콱 막혔다. 입 속에 든 밥을 다 씹지도 못하고 꿀꺽 삼키노라는 눈물이 핑 돌았다. ‘아, 성모님! 엄마한테 떼쓰는 어린애처럼 막무가내로 억지 부리는 저를 위해 거기 서 계셨군요.’

 

 

벗을 위한 기도

광주시 학동 전남대 의대로 향했다. 학장 비서실 한쪽에서 엉거주춤, 안절부절못하며 대학원장님을 기다렸다. 원장님이 학장실로 들어가신 뒤 십 분쯤 기다렸다가 안으로 들어가 꾸벅 인사를 드렸다.

“안 군, 또 왔구먼!”

학장님은 웃으시는데 원장님은 정말로 싫다는 얼굴이 되시며 버럭 소리를 지르셨다.

“아, 이 친구 정말 끈덕지네. 아무리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그렇게 달라붙는다고 어떻게 될 줄 알아? 나가, 어서 나가라구!”

나는 고양이 앞에 쥐처럼 한구석에서 벌벌 떨며 끈질기게 서 있었다. 다시 원장님 목소리가 높아졌다.

“우리 지금 회의해야 되는 거, 자네 눈엔 안 보이나? 나가!”

그때 학장님이 갑자기 나를 보며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안 군, 가서 어학시험 준비하소! 내가 원장님과 담판을 지을 테니 자네는 가서 준비나 하게.”

갑작스런 학장님 말에 대학원장님이 당황하는 틈을 타 쏜살같이 학장실을 빠져 나왔다. 이제 가능성은 반반, 대학원에서 응시할 수 없다는 연락만 해오지 않는다면 시험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날이 지나고 다음 날에도 별 연락이 없었다. 타는 가슴으로 하루 이틀이 지나고 또 며칠이 흘렀다. 마침내 대학원에서 연락이 왔다. 영어와 독일어 두 과목 중 한 과목만 통과하지 못해도 자동으로 논문 쓸 자격이 박탈된다고 했다. 시험을 보라는 얘기나 다름없었다.

난리를 치르는 와중에 시험날짜는 이틀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그제야 책을 잡았다. 한 과목이라도 떨어지면 안 되니 걱정이 태산 같았다. 하지만 남들은 한 달도 넘게 준비한 것을 무슨 재주로 이틀 만에 따라잡으랴. 드디어 시험장에 들어갔다. 친구가 내 앞자리에 앉았다. 첫 시간은 영어 해석 문제, 아는 대로 전력을 다했다.

2교시 독일어 시험이 시작되자 감독관이 먼저 사전을 나눠 주었다. 사전에서 단어를 찾아가며 답안지를 채울 수 있으니 적잖이 안심이 됐다. 해석 문제가 두 개 나왔다. 언뜻 보니 1번은 모르겠는데 2번은 조금 알겠어 서 2번에 집중해 답을 썼다. 그 다음에 1번을 자세히 들여다봤으나 무슨 소린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한참 끙끙 대다 시계를 보니 남은 시간은 십여 분. 만약 이 과목에서 떨어지면 이제껏 여기저기 미친 듯 쑤시고 다닌 보람도 없이 모든 게 끝이다. 너무 다급하면 무슨 일이라도 저지를 수 있는 게 사람이라는 것을 나는 그때 알았다. 앞에 앉은 친구의 등을 쿡쿡 찔렀다. 고개를 숙인 채 답을 쓰던 친구가 등허리를 폈다. 거기에 대고 낮게 속삭였다.

“첫 문제 해석 좀 알려줘.”

반응을 기다리며 두 번 세 번 연거푸 등을 찔렀다. 친구는 마지못해 쪽지에 해석을 적어 넘겨주었다. 받은 대로 답안지에 적자마자 땡땡! 종료를 알리는 종소리가 들렸다.

시험장을 나오면서 기가 막혔다. 세상에 내가 커닝을 하다니. 성적 장학금이 아무리 절실해도 커닝은 안 했는데, 참으로 씁쓸했다. 이러고도 합격을 한다면 정말 기적이겠지…

일주일 뒤 대학원에서 전화가 왔다.

“안득수 학생이세요? 두 과목 다 패스하셨어요. 축하합니다.”

‘휴~! 절로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전화가 끊어지기 직전에 다급히 물었다.

“같이 응시한 제 친구 000 은 어떻게 됐나요?”

“그 학생도 합격했습니다.”

한숨과 더불어 미안함이 몰려왔다. 뒤에서 답을 가르쳐 달라고 졸라대는 나 때문에 혹시 실수라도 했을까 봐 걱정했는데, 합격을 했다니 참으로 다행이었다. 어학시험 일로 우여곡절을 겪는 내내 벌벌 떨며 묵주를 놓지 못하는 나를 사랑으로 지켜주신 성모님. 내 일을 자기 일처럼 여기고 한마음으로 기도하며 아낌없이 시간과 정성을 내준 벗. 위기에 처함 제자를 너그러이 감싸준 은사님들, 특히 원칙에 충실하고 깐깐하시기로 이름난 대학원장님의 크신 배려…

덕분에 어학시험을 통과했고, 논문도 준비해서 마침내 박사학위를 받았다. 친구와 나는 교수직에도 같이 올라 오순도순 이십구 년 동안 한 직장에서 형제처럼 지내다 은퇴했다.

선생님들은 자신의 말 한마디, 웃음 한 조각이 학생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잘 모를 수 있다. 하지만 옴쭉 못할 처지에서 어렵사리 빠져 나온 당사자로서는 결코 잊을 수가 없다. 아니 잊어서는 안 된다.

병원장 시절 항의 데모를 겪으면서도 나는 곤란에 처한 제자를 감싸기 위해 기꺼이 애를 썼다. 스승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제자의 앞날이 통째로 달라진다는 것을 내가 겪어봐서 잘 알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스승뿐이랴. 내 힘만으로 어떻게 그 난관을 뚫고 나올 수 있었겠는가?

한 발짝 한 걸음씩 나는 하느님과 예수님과 성모님 품으로 안겨 들어 갔다.

 

 

내가 다시 말한다. 너희 중의 두 사람이 이 세상에서 마음을 모아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는 무슨 일이든 다 들어주실 것이다. 단 수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마태 18,19-20)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요한 15,12-13)

 

 

 

 

 

3장 임마누엘!

 

 

기쁨도 함께 슬픔도 함께

 

할머니의 영세와 십자고상

내 복음 전교의 첫 결실은 할머니다. 일찍 홀로되신 할머니는 당신의 아들, 내 아버지를 삶의 전부로 여기셨다. 오로지 아들만 위하면서 온갖 정성을 다 쏟으셨다. 애지중지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란 아버지는 집안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셨다. 그러나 할머니에게만큼은 고분고분하셨고 효성도 지극하셨다.

할머니는 장손인 나도 무척 사랑해 주셨다. 어느 날 전주로 나들이 오신 할머니에게 ‘천국’이 있다고 말씀 드리자 매우 궁금해하셨다.

“그거이 뭐이다냐?”

내친김에 할머니를 전동성당으로 모시고 가니 전교회장님이 반기며 간단한 교리를 받으시게 했다. 할머니가 마리아 본명으로 영세하셨을 때 나는 말할 수 없이 기분이 좋았다. 이제 가족 중에도 하느님 나라를 향해 함께 걸어갈 동행자가 생겨서다.

그러던 어느 날 고향집에서 소동이 벌어졌다. 할머니와 아버지와 내가 겸상으로 밥을 먹고 있는데 아버지가 벽 쪽을 쳐다보며 수저를 멈추셨다. 이제까지 없던 십자고상이 거기에 걸려 있었던 것이다. 내 하숙방의 십자고상과 성경책을 아궁이에 던져버린 분 아닌가. 아버지는 심상치 않은 눈길로 십자가를 가리키며 호통을 치셨다.

“저게 뭐냐? 너, 당장 저거 떼서 가져가라!”

보통 때 같으면 아버지 명령에 지체 없이 따른다. 하지만 이건 십자고상이다. 내가 이러지도 저리지도 못하고 가만히 있자 할머니가 대신 응수하셨다.

“왜 띠(떼)라고 허냐? 애비야, 나가 저것을 붙인 담부터 가세(가위) 눌리고 목 졸리고 허던 나쁜 꿈이 싹 없어져 버리지 안혔냐. 맘이 너무 편코(편하고) 좋다. 제발 애비야, 띠라고 허덜 마라.”

할머니가 그러시자 아버지는 더 이상 말씀은 않으셨다. 그러면서도 몹시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시면 매서운 눈초리로 나를 응시하셨다.

 

 

 

어머니가 가르쳐 주신 기도

할머니는 아들과 손자한테 푸근한 사랑을 한없이 쏟으셨다. 그러나 며느리한테는 늘 인상을 쓰셨다. 이것저것 뭐가 그리 마음에 안 드시는지 무척 깐깐하게 대하셨다.

내 고향 마을은 안 씨 성을 가진 일가친척 백여 호가 안 씨 일촌을 이루고 사는 농촌이다. 대농의 큰며느리고서 어머니는 일 년 내내 많은 일꾼과 더불어 일을 하셨다. 그때마다 가난한 농부와 아낙들에게 음식이며 곡식을 나누어 주는 것이 어머니의 큰 즐거움이었다. 전라북도 고창 삼태에서 시집왔다고 해서 ‘삼태댁’으로 불린 어머니는 동네에서 늘 좋은 평판을 받았다.

하지만 며느리의 후한 인심과 느긋한 성격이 할머니한테는 눈엣가시였다. 아무한테나, 무엇이나 막 퍼주는 며느리 때문에 살림 다 망해 먹게 생겼다고 끊임없이 질책하셨다. 성격이 정반대인 시어머니에게 닦달을 당하면서 어머니는 위장병을 앓으셨다. 아내가 소화불령으로 밥을 제대로 못 먹어도 남편인 우리 아버지는 도통 관심이 없었다.

어려서부터 나는 어머니의 위장병 증세를 안타까이  지켜보며 자랐다. 전남대학교병원 인턴으로 있을 때 위 수술을 받게 해드린 뒤 어머니 병세는 한결 좋아지셨다. 위장병 없이 사니까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며 환히 웃으실 때마다 나는 어머니의 고생 고생이 떠올라 가슴이 뻐근했다. 의사되기 참 잘했다는 뿌듯함에도 젖었다.

어머니가 얼마나 순박한 분이지 절로 웃음이 나는 일화가 있다. 안나로 영세하신 어머니는 전주 우리 집에 오시면 집사람과 함께 주일미사를 드리시곤 했다. 어느 날 성당에 다녀온 집사람이 너무 창피한 일이 있었다며 얼굴을 붉혔다. 미사 중 신부님이 한창 강론을 하실 때였다고 한다. 갑자기 어머니가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 위로 올라서시더라 는 것이다. 깜짝 놀란 집사람이 어머니 치맛자락을 잡아당기며 앉으시라고 했지만, 어머니는 꿋꿋하게 의자 위에 올라선 채 둘레둘레 사방을 살피셨다. 질겁한 며느리가 강제로 끌어내려 자리에 앉히자 어머니는 무척 언짢아하며 타박을 주셨단다.

“왜 그냐? 애비 어데 앉았능가, 나가 찾아볼라는디…”

“아들아, 나 여기 있다~! 하고 소리치지 않으신 것만도 다행이다.

영세하고 이 년 뒤인 1980년 어머니는 갑작스런 고혈압과 뇌출혈로 고향에서 타계하셨다. 전동성당에서 장례미사를 봉헌하고 고향 선산에 모셨다. 아버지는 내가 천주교 신자인 것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셨지만 전동성당에서 가톨릭 절차로 장례를 치르겠다고 말씀 드리자 의외로 선선히 허락하셨다. 많은 신자가 문상 와서 전통 가락으로 연도도 해주고, 입관예식에 미사봉헌까지 하나하나 정성을 다하는 것을 보며 아버지는 경탄도 하셨다.

이승을 떠나시면서 어머니는 두 가지 아름다운 추억을 내게 남겨주셨다. 장례식 사흘 되 집사람 후배가 집사람한테 전화를 했다고 한다.

“언니, 어젯밤에 난데없이 언니네 시어머님을 꿈에 뵈었어. 왜 내 꿈에 언니 시어머님이 나타나셨을까?”

우리 시골집에서 어머니가 하얀 소복을 입고 나오시더니 하늘로 둥둥 떠올라 가시더란다. 소복 주위로 눈부신 빛을 환히 발하며 하늘 멀리 사라지셨다고 했다. 그 말을 전해 들으며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어머니상을 치르고 얼마 뒤 나는 일본 나고야 암센터로 내시경 연수를 받으러 갔다. 사십여 일 머무르며 낮에는 센터에서 연수하고 밤에는 시내 작은 호텔에서 머물렀다. 그 어느 날 깊은 잠 속에 어머니가 선명하게 웃으며 내게 말씀하셨다.

“득수야, 나는 잘 있으니 걱정하지 마라. 그리고 기도할 때는 이렇게 하거라. ‘주님은 모든 덕 德의 근원 根源이시며 모든 악 惡 을 소멸 消滅시키는 자원 資原이시다.’ 영적으로 기도할 때는 도날라 도날라 도날라, 알렐루야 알렐루야 하거라.”

한글만 익히신 어머님이 어떻게 이런 놀라운 진리의 말씀을 큰아들인 내게 가르쳐 주셨을까? 또 왜 그 후로는 한 번도 내 꿈에 나타나지 않으실까?

그때부터 나는 매일 밤 잠들기 전에 기도하면서 마지막에 어머니가 가르쳐 주신 대로 기도한다. 심령기도를 할 때도 이 기도를 바친다. 내가 무슨 행동을 하든 모든 억의 원천이신 예수님께 힘을 받아 사랑으로 처리하고, 힘든 일이 생기거나 악의 세력이 달려들어도 그분의 힘으로 당당히 맞서 재앙을 물리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좋은 일 했다고 가끔 사람들한테 칭찬받을 때면 절로 이 기도가 떠오른다. 내가 한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시는 주님의 영이 하신 것임을 깨닫도록 해주신 분은 다름 아닌 우리 어머니시다. 꿈이 아닌 현실에서도 매일 밤 사랑하는 어머니, 보고 싶은 엄마를 생각하며 어머니가 그르쳐 주신 대로 기도하는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

 

 

아버지의 대세

천주교 신앙은 나로부터 우리 집 온 가족으로 퍼져 나갔다. 할머니와 어머니, 누님과 세 동생까지 다 세례를 받았다. 유일한 예외가 아버지셨다. 부농의 큰아들로 태어난 선친은 할아버지께서 사십 대 때 갑자기 돌아가시자 할머니 사랑을 맘껏 누리며 고생 모르고 자라셨다. 일제  강점기에 고창 고등보통학교를 나와 전남도청과 교육청에서 사무관을 지낸 지식인이기도 하시다.

할머니는 알뜰치 못한 며느리 때문에 살림을 말아먹는다고 늘 어머니를 야단치셨다. 정장 튼튼한 살림 다 날린 장본인은 당신 아들이었는데…. 살림이 풍족할 때 고향집 사랑채에는 수시로 손님이 드나들었다. 북 장구 치며 목청 돋워 소리하는 국악 예인들도 자주 찾아와 창을 하며 쉬어갔다. 전라도는 동-서편제를 아우르는 판소리 고장 아닌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소리 몇 자락은 흥얼거릴 줄 안다. 아버지가 북을 잡고 예인이 소리를 시작하면 흥겨워하는 사람들로 사랑채가 온통 들썩였다고 한다.

그런데 아버지는 좋은 직장에 훌쩍 사표를 던지고 나와 수리조합장 운동에 뛰어드셨다. 농촌에서 조합 일을 본다는 것은 정치하는 거나 별반 다르지 않다. 그 통에 조금씩 줄어들던 살림은 내가 대학 다닐 무렵엔 등록금을 내기조차 버거울 정도로 쪼그라들었다.

노년에 빈털터리가 되어 공무원 아들한테 의지하며 사시는 동안 아버지는 자주 아프셨다. 증세가 좀 심하다 싶으면 내가 있는 전북대병원으로 오시곤 했다. 아픈 아버지를 진찰해 드리면서도 나는 애틋함을 못 느꼈다. 손을 잡아드리는 건 고사하고 청진기를 댈 때 아버지 몸에 내 살이 닿는 것조차 거북스러웠다. 부자지간에 친밀감이 거의 없어서다.

어렸을 때 나는 장난기가 많은 부잡스런 아이였다. 두 살 손위 누나가 깨끗이 닦아 놓은 마루에 흙 묻은 신발을 신고 올라고 주룩 미끄러지고, 높은 나무에 올라가 출렁대며 놀았다. 아궁이에서 타다 남은 잔불을 꺼내 장난하다가 부엌에 불을 낸 적도 있다. 사고를 칠 때마다 아버지는 나를 매우 엄하게 다루셨다. 대나무 막대기로 심하게 맞아 온몸에 상처가 난 적도 있다. 할머니가 나를 껴안고 펑펑 수실 만큼.

집안의 명예와 대를 이어나가 장손이 흉허물 없이 잘 크기 바라는 마음에서 아버지는 야단을 치셨을 게다. 하지만 나는 그런 아버지가 무섭기만 했다. 안아주거나 쓰다듬어 주는 따뜻한 스킨십을 아예 모르고 자라선지 아버지와 한자리에 앉아 있으면 오금이 저릴 정도로 힘이 들었다. 이 눈치 저 눈치 보며 되도록 그런 기회를 피했다. 병세가 점점 깊어가는 아버지를 지켜보며 내가 좀 자상하게 해드린 게 있다면 입원 중일 때 잡숫고 싶어하시는 음식 사다 드리고, 잘 안 맞는 틀니 다시 해드린 것 정도다.

아버지한테 살가운 정은 못 느껴도 영혼 구원에는 유달리 신경이 쓰였다. 마지막 가시는 길 만큼은 평안히 가실 수 있도록 돕고 싶었다. 그래서 우리 병원에 입원하실 때마다 레지오 단원이나 잘 훈련된 열심한 교우를 보내어 입교를 권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꿈쩍도 않으셨다. 종교는 자신이 결정할 일이라며 완강하고도 고집스럽게 거부하셨다. 번번이 실패를 거듭하면서 교우들이 도리어 마음에 상처를 입기도 했다. 하지만 나이 지긋하신 원목 수녀님은 좀 달랐던 모양이다. 어느 날 아버지의 대세 소식을 내게 전해 주던 교우가 재미있다는 듯 껄껄 웃었다.

“안 박사 아버님이라고 들었습니다.”

깍듯이 인사한 수녀님이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말씀을 드리러 왔다고 하자 아버지는 여느 때처럼 점잔 빼는 어조로 말씀하셨단다. 종교는 스스로 결정한다. 그 얘기 하려면 다른 방으로 가시라고. 그러자 수녀님이 냅다 소리를 지르셨다는 것이다.

“여보, 영감! 당신이 안 박사 아버지면 다요? 수녀인 내가 할 일이 없어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줄 아시오? 이런 실례가 어디 있소? 하느님 아버지에 대해 잠깐 말씀을 드리려 하는데 나가시오, 다음에 오시오, 하다니 말이 됩니까?”

수녀님의 추상같은 기세에 기가 꺾인 아버지는 수녀님이 4대 교리를 좔좔 읊자 꼼짝없이 다 들으셨다고 한다. 교우가 전해 주는 이야기를 마저 들으며 나도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영감은 이마가 훤칠하게 벗겨지고 머리도 커다란 게, 생김새가 바오로 사도를 닮았소. 그러니 세례명은 바오로로 합시다.”

바오로 사도가 누군지 아버지는 아마 처음 들어보셨을 것이다. 그런데도 어린아이처럼 예 예, 하며 대세를 받으셨다고 한다.

 

 

은총의 병자성사와 성령 충만

극적으로 신자가 되셨으나 아버지는 교리도 거의 모르고 열성도 없으셨다. 한 달에 고작 한 번 쯤이나 미사에 참례하셨다. 그런 분인데도 운명하시기 전 일주일 동안 정말 믿기지 않을 만큼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셨다. 병세가 깊어 임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판단이 서자 나는 교구청의 오 신부님께 아버지의 병자성사를 봐주십사 고  청했다. 신부님은 아버지에게 총고백을 요구해 다 들으신 뒤 머리에 손을 얹고 안수기도를 해주셨던가 보다.

점심시간이었는데 아버지가 급히 나를 찾는다기에 병실로 갔다. 왜 이렇게 몸이 뜨거운지 모르겠다며 흥분 상태에서 들뜬 목소리로 여러 가지를 말씀하시는데, 가만히 들어보니 유언이었다.

“큰아들인 너는 어쨌든 의사가 되었으니 고향의 생가와 할아버지 산소를 맡아 잘 관리해라. 둘째한테는 고향 앞산에 있는 밭 천 평을 주고 막내한테는 할아버지께서 남기신 논 열두 마지기를 줘라. 입원비가 만만치 않을 줄 안다마는 내 통장에 남은 돈과 여기 있는 현금은 네 새어머니에게 다 드려라. 그리고 나를 배신했던 고향 친척 아무개를 빠른 시간 안에 만나도록 해다오. 네 집사람도 조용히 불러와라….”

만감이 교차했다.

‘이제 정리를 하시는구나. 가실 때가 다가온 걸 아시나 보다.’

고향 친척께 연통을 넣었다. 관계가 나빠져 오랫동안 왕래를 끊고 지내던 두 분은 만나자마자 서로 끌어안고 엉엉 우셨다.

“동생, 내가 잘못 생각했어. 내가 자네를 너무 미워했는데, 용서해 주게.”

“아니요, 형님. 형님을 잘못 모신 것은 다 제 탓입니다.”

두 분은 한 시간 가까이 울고 불고 서로를 용서하고 화해하셨다.

집사람을 보시고는 손을 꼭 잡으시고 ‘고생이 많다. 네 손이 너무 거칠구나, 해준 것도 없이 빚만 짊어지게 하고 떠나게 돼 미안하다. 시애비를 용서해 다오.’ 하며 커다란 눈망울 가득 눈물을 담으셨다. 손을 잡힌 채 어쩔 줄 모르면서 아내도 아버지와 마음을 나눴다.

유교 전통에 철저한 분인지라 입원실에서조차 주변 사람들에게 근엄한 태도로 일관하셨는데, 병자성사 이튿날부터는 태도가 백팔십도로 달라지셨다. 병실 청소하는 아주머니께 수고 많다며 용돈을 주시고, 장례와 관련해 입버릇처럼 되뇌던 당부도 다 바꾸셨다.

평소 아버지는 외지에서 객사시키지 말고 반드시 고향집에서 임종을 맞게 하고, 삼베옷으로 굴건제복하되 한쪽 어깨는 빼고 문상객을 맞아라 등등 자잘한 엄명이 많으셨다. 그런데 장님이 있는 병원에서 세상을 뜨겠으니 고향집으로 데리고 가지 마라, 장례도 병원에서 치러라, 상복은 검정색 정장에 삼베 완장만 두르라고 하셨다. 평생토록 굳게 지녀온 유교식 가치관과 관습을 스스로 훌훌 벗어버리신 것이다.

누님한테 하셨다는 말을 전해 들을 땐 내 가슴도 뭉클했다. ‘사랑으로 형제간에 우애를 굳게 해라. 나를 이 좋은 천주교로 인도해 준 너희들과 나는 행복하다. 우리 큰아들 대한민국에서 찾아보기 힘든 효자다….’

천주교 신앙을 행복해 하셨다니, 더구나 보내드리는 돈의 액수가 적다며 늘 불망이셨는데 나를 칭찬까지 하셨다니, 고맙고도 감격스러웠다. 무엇보다도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신 것이 다행스러웠다.

익산에 사시는 불교신자 막내고모는 병문안 오실 때마다 비쩍 마른 큰오빠를 보며 하염없이 우셨다. 이 세상에 하나 남은 동생이 울면 아버지도 철철 따라 우셨다. 그러나 병자성사 다음부터는 울지 않으셨다. 오빠를 얼싸안고 큰 소리로 우는 동생에게 이제는 죽음이 하나도 두렵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편안히 저승으로 갈 것 같다. 울지 말고 행복하게 잘 살라며 위로와 격려도 하셨다. 고모가 다녀가신 다음 날 오후 다섯 시쯤 아버지 병실에 들렀을 때다. 아주 묘한 일이 있었다면서 신기하다는 듯 말씀하셨다.

“애비야. 내가 눈을 감고 누워 있는데 난데없이 새까맣고 기다란 얼굴을 한 사람이 다가오더라. 보통 사람보다 네 배쯤 큰 얼굴에 주근깨가 잔뜩 났어. 내가 ‘물러가라! 물러가라!’ 하고 크게 외쳤더니 사라지더라? 조금 있다가는 난데없이 침대 머리맡과 발치에 아주 예쁜 아이들이 두 명씩 있는 거야. 너무 예뻐서 머리맡으로 손을 뻗어 잡으려고 하면 깔깔 웃고, 발치 쪽으로 잡으려고 해도 깔깔 웃기만 했어. 눈을 감으면 분명히 있는데 눈을 뜨면 안 보이고, 잡히지는 않으면서 깔깔 웃어대는 얘들은 대체 누구냐?”

깜짝 놀라 언제 그런 꿈을 꾸셨냐고 물었다. 꿈이 아니라 눈을 감고 있는데 조금 전에 그랬다고 하셨다.

“야, 아버님! 참 좋은 체험을 하셨네요. 처음 새까만 얼굴은 아마 저승사자일 겁니다. 제가 가르쳐 드리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물러가라고 하셨어요? 잘 하셨네요. 두 번째 아이들은 천사들입니다. 그래서 아버님이 잡으려고 하자 웃은 거예요.”

“그러냐? 천사라니, 기분이 참 좋구나.”

아버지가 활짝 웃으셨다. 천진난만한 어린아이 웃음이었다. 근엄하기만 하던 분이 그렇게 웃으시는 건 난생 처음 보았다. 단 며칠이지만 아버지는 그렇게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셨다.

마침내 통증이 심해지자 양손으로 침대를 쾅쾅 치며 고통스러워하셨다. 기력도 쑥쑥 빠져나가셨다. 서울과 광주에서 달려온 형제들은 몇 번이나 임종기도를 바치며 마지막 가시는 길이 편안하시도록 빌었다. 전주 시내에서 작은 약국을 운영하는 집사람이 가게 문을 닫고 오느라 조금 늦게 병실에 닿았을 즈음, 아버지 몸은 거의 다 굳고 가냘픈 숨결만 있는 듯 마는 듯했다. 허겁지겁 달려온 아내가 아버지 귀 가까이에 입을 대고 인사를 드렸다.

“아버님! 저 큰며느리, 00 어밉니다. 평안히 가세요.”

작별을 고하고 나서 아내는 임종기도를 읽어 내려갔다. 그러자 놀라운 장면이 펼쳐졌다. 아버지가 오른팔을 들더니 머리를 향하다가 목 근처로 가져갔다. 그리고 양 어깨로 옮겨가는 손을 보며 ‘아, 십자 성호를 그으시네!’ 알아차리는 순간 팔이 힘없이 늘어지고 호흡도 멈췄다.

아버님의 마지막 일주일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성령이 충만한 병자성사가 떠오른다. 교리도 거의 모르고 천주교 신앙의 풍부한 유산도 전혀 알지 못하던 분이시다. 그러나 병자성사를 받은 후 깊이 회개하고 용서도 하셨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친절을 베풀고 자식들 고생 덜어주려고 여러가지로 마음을 쓰셨다.

마지막 숨이 끊어지기 직전 십자 성호를 긋는 힘과 믿음이 어디서 왔을까? 성령 충만의 은총 말고는 달리 무어라 설명할 길이 없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오래지 않아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게 될 것이다. (사도 1, 5)

 

 

 

측은지심

 

 

홀아비 처지

어머니가 소천하신 뒤 이 년여 동안 아버지는 홀로 지내셨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는 혼자 살기 힘드니 새어머니를 맞겠다고 하셨다. 나도 그게 좋겠다고 생각하여 천주교 신자 가운데 적절한 분을 찾았으나 선뜻 오신다는 분이 없었다. 아버지는 알음알음으로 새어머니를 소개받아 집으로 모셨다. 내가 매달 보내드리는 돈으로 아버지 혼자 쓰시기도 부족했을 텐데 두 분이 살림을 차리니 더욱 쪼들리셨을 것이다.

새어머니는 성격이 좀 거칠고 과격한 부이셨다. 웃는 일도 거의 없어 우리 형제자매며 배우자들과 쉽사리 친해지지 못했다. 장님인 나만 그분을 어머니라고 불렀다. 나이 차는 얼마 나지 않지만 아버지와 같이 사시니 그렇게 불러드렸다. 형제들은 비위도 좋다며 나를 놀리기도 했다.

새어머니 덕분에 아버지가 좀 편히 지내신 지 일 년쯤 됐을 때다. 고향 마을에서 가끔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는 소문이 전주에 사는 내 귀에까지 들려왔다. 마을에 널어둔 곡식이나 고추가 없어지더니 강아지까지 사라졌다며 수군수군했다. 백 년 이상 살아온 안 씨 일촌에서 한 번도 없던 일이었다.

이에 주민 대표들이 원인을 밝히기로 하고 비밀리에 유심히 마을 구석구석을 관찰했던가 보다. 그러다 새어머니의 사소한 잘못이 눈에 띄었다. 마을 어른들은 그 동안 일어났던 불미스러운 일들도 모두 새어머니가 한 것으로 추정했고 마을회의 끝에 새어머니를 배척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안타깝게도 새어머니는 떠나시고, 아버지는 하루아침에 다시 홀아비가 되셨다. 여섯 달을 혼자 버티시던 아버지가 나를 부르시더니 혼자서는 도저히 못 살겠다고 하셨다.

“네 새엄마가 밑바닥 장사는 다 하면서 거친 인생을 살아왔더라. 그러노라니 자연히 약간의 욕심은 생길 수 있지 않았겠냐? 그래도 집안 청소 깨끗이 하고 내 밥은 잘 챙겨줬다. 다시 데려오면 어떻겠니? 하지만 내 입으로는 도저히 마을 사람들한테 말을 못하겠구나. 어르신들이 네 말은 귀 여겨 들으니 어떻게 좀 방법을 찾아봐라.

말씀대로 해드려야 할 것 같았다. 생각 끝에 이런저런 준비를 한 뒤 고향 마을로 갔다. 동네 어르신들을 한곳으로 모셔 혈압도 재고 청진기로 진찰도 하며 검진을 해드렸다. 이어 고기며 술로 푸짐한 점심 잔치를 벌였다. 좋은 양주까지 맛보시며 거나해진 어르신들은 안 박사 최고라며 여기저기서 칭찬을 하셨다. 기회다 싶어 준비해 간 수건과 비누, 치약 같은 선물을 나눠드렸다. 잘 드시고 선물까지 받자 어르신들 모두 흐뭇해하셨다. 아버지는 잠깐 자리를 피하시게 하고 본론을 꺼냈다.

“여러 어르신들께서 언제나 아버님께 효도하라고 당부하신 말씀, 잘 명심하고 있습니다. 오늘 제가 아버지를 위해 참으로 어려운 청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먼저 용서해 주십시오. 새어머니가 저희 집을 떠난 지 여섯 달이 되었습니다. 아버지 혼자 계시니 고향에 올 때마다 집 안팎 곳곳이 도저히 못 볼 정도로 엉망입니다. 고민 고민하다 아버지께 여쭸습니다. ‘제가 어르신들한테 부탁 드려 보겠으니 아버지가 싫지 않으시면 침묵하십시오. 새 어머니를 다시 모셔오면 어떨까요….’ 아무 대꾸 없으신 걸 보니 아버지도 원하시는 것 같습니다. 어르신들! 앞으로 동네에서 도난사건이 일어나면 제가 무조건 열 배, 백 배로 책임지겠습니다. 그러니 저희 집에 다시 새어머니를 모실 때 제발 반대하지 말아 주십시오. 저를 보시고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장내에는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어르신들 중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분이 말씀하셨다.

“안 박사가 이리도 간청을 하니, 어쩔 수 없구먼.”

다른 분들도 동조하셨다.

“그래그래, 아들 효성이 지극하니 한번 봐주세.”

“다시는 그런 일 있으면 안 돼!”

곡절 끝에 아버지는 다시금 홀아비 신세를 면하셨다. 돌아오신 새어머니에게 간곡히 말씀 드렸다. 다시금 오해 살 일이 생기면 더는 동네 분들 설득 못하니 조심스레 행동하시기 바란다, 대신 매달 돈을 조금씩 더 보내드리겠다, 많이 드리지 못해 죄송하지만 나 역시 쉽지 않은 형편이라고…

이후 새어머니에게 신경을 많이 써드렸다. 생신날이면 봉투며 케이크, 꽃다발과 외식 등으로 꼭꼭 챙겨드리고 다정하게 ‘어머니, 어미니’ 불러드렸다. 그런 나를 보면서 막냇동생 부부도 새어머니에게 잘해 드리기 시작했다. 살림이 안정되어 가자 아버지는 새어머니를 정식 부인으로 맞이하고 혼인신고도 하셨다. 그걸 지켜보는 내 속내는 솔직히 조금 복잡했다.

시골에는 내가 태어난 생가와 조부모님 산소에 딸린 땅이 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면 새어머니 몫으로 다 돌아갈지도 몰라 걱정이 되었다. 땅에 대한 욕심이라기보다 조상님 묘소와 내가 태어난 생가, 또 백여 년을 내려온 논밭인지라 장손으로서 우려와 근심이 드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가여운 여인

두 분이 오순도순, 평화롭게 이 년쯤 지내셨을 무렵이다. 새 어머니가 몸이 아프다면서 숨을 헐떡이셨다. 전주에 모셔와 진찰해 보니 심장병이었다. 심장 판막이 고장 나 피를 제대로 순환시키지 못해서 생기는 증세였다. 우선 약물치료를 해보다가 호전되지 않으면 판막을 갈아 끼우는 수술이 필요하다는 진단을 받았다.

6개월 예정으로 약물치료를 시작했다. 그러나 점점 숨이 많이 차올라 집안일조차 할 수 없게 되셨다. 심장 판막 교체수술만이 대안이었다. 수술비가 만만치 않게 들어가기에 형제들과 의논을 했다. 하지만 다들 그냥 약으로 견딜 수 있는 데까지 견디다가 안 되면 어쩔 수 없는 일 아니냐고 했다. 나마저 단념하고 물러서기에는 새어머니가 너무 측은했다. 경비가 좀 들어가도 수술을 해드리자 마음을 먹고 밀어붙였다.

수술이 끝나고 한 달쯤 뒤, 새어머니가 조금씩 거동을 시작했을 즈음이다. 뭐가 잘못되었는지 긴급사태가 발생했다. 검사 결과 판막을 꿰맨 실이 터져 있었다. 즉시 2차 수술을 했다. 심장 수술이 어떻게, 어떤 과정으로 진행되는 건지 아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더구나 새어머니는 현대 의학지식도, 병원생활에 대한 상식도 전혀 없으셨다. 새어머니는 수술 뒤에 따라오는 심한 통증과 복잡한 회복과정을 못 참고 힘들고 아플 때마다 거친 본성을 드러내셨다. 의료진이 다가가면 ‘나를 죽여라, 죽여!’ 고래고래 소리도 지르셨다. ‘저분 진짜 안 박사 어머니 맞아?’ 사람들이 의아해하는 뒷말이 나한테까지 들렸다.

그래도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상태는 호전되었다. 성공적으로 치료를 다 마치고 퇴원하실 때 정산해 보니 수술 및 입원비가 그때 돈으로 칠백오십만 원이나 나왔다. 어느 형제 하나 협력하려고 하지 않아 집사람 눈치 보며 공무원 봉급쟁이 내 호주머니에서 다 충당했다.

매달 내가 우편으로 보내드리는 심장병 약과 고혈압 약을 드시면서 새어머니는 그럭저럭 잘 지내셨다. 그러나 이 년이 지났을 때 배가 부풀어 오르면서 또 호흡이 곤란해하셨다. 정밀검사를 하자 지난번 수술한 판막이 다 닳아 있었다. 한 번 더 판막을 갈아 끼우는, 세 번째 수술을 권유 받게 되었다. 형제들은 물론이거니와 이번에는 새어머니 친정 조카들도 반대하고 나섰다. 고민 고민 끝에 새어머니게 말씀 드렸다.

“어머니, 이번에 수술을 안 받으면 돌아가시게 되는데 어떻게 하시겠어요? 신중하게 생각한 뒤에 말씀해 주세요. 사실은 저희 형제들도, 친정 조카 분들도 다 반대하고 있어요. 그래도 어머니 뜻이 어떠신지 마지막으로 듣고 싶습니다.”

이틀 뒤 새어머니와 나는 고향 마을 앞 논길을 거닐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이미 두 번이나 겪어봐서 아시겠지만 세 번째 수술이니만큼 육체적으로는 물론 정신적 부담도 매우 클 것이다. 수술을 하려면 천주교 세례를 받자, 하느님께 정성껏 기도하면서 성공을 빌자, 차근차근 말씀 드리자 새어머니는 못 이기는 듯 받아들이셨다. 경비가 많이 들 텐데, 아들이 많이 힘들 텐데, 걱정도 하시며…

다음 날 전주로 모시고 올라와 입원을 시켰다. 병원 수년님을 모시고 가서 천주교 교리를 가르치고 마리아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받게 해드렸다. 어머님 수술이 성공적으로 이뤄지게 해주십사 기도도 해드렸다. 기도를 마치고 나서 나는 적잖이 놀랐다. 새어머니가 눈물을 흘리고 계셨기 때문이다.

“아들,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진심 어린 고마움도 표하셨다. 우리 집에 오신 뒤로 눈물을 보이는 모습을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강하고 거칠고 냉차고, 어떨 때는 철저 하다시피 자기중심적인 분이셨다.

수술 후 어머니는 일반 환자와 격리된 중환자실에서 거의 한 달을 지내셨다. 통증이 몰려오면 이번에도 막무가내로 거칠게 소리치셨다.

“왜 수술을 했어, 수술하지 말랬잖아!”

위문 와주는 사람이라고는 나와 병원 봉사자 몇 명뿐이었다. 외로우실 게 염려되어 되도록 자주 뵈려 했으나 워낙 내 일정이 바빴다. 잠시 머물다 금세 나와야 했으니 초라한 베풂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새어머니와 큰아들

겨울로 접어든 11월 하순, 퇴원을 해도 된다는 주치의 판정이 나왔다. 반가운 소식을 들으면서도 나는 적잖이 근심이 되었다. 수술과 오랜 병실생활로 어머니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워낙 허약해져서 적어도 보름은 요양을 받은 다음에야 시골집으로 가실 수 있을 것 같았다.

방 세 칸짜리 우리 집엔 네 아이랑 도우미 아주머니까지 조랑조랑 일곱 식구가 산다. 비좁고 불편하겠으나 달리 모실 만한 데가 없었다. 아내와 의논하자 애들과 약국 운영만으로도 버거운데 어떻게 새어머니 간병까지 맡기느냐고 펄쩍 뛰었다. 물론 동감하지만 다른 수가 없었다.

우선 시내 우리 집으로 모시겠다고 말씀 드리자 이번엔 새어머니까지 강하게 거부하셨다. 바로 시골집으로 데려다 달라고, 그냥 내려가자고 아주 간청을 하셨다. 어쩔 수 없었다. 퇴근 시간이 다 돼가던 오후 네 시쯤 내 자동차 트렁크에 어머니 짐을 실었다. 병원 식당에서 김치와 된장, 고추장도 얻어 싣고 고향으로 향했다.

두 시간 반을 달려 시골집에 닿았다. 아버지도 장기간 입원 중이셨기에 사십여 일 동안 비어 있던 집은 꼴이 말이 아니었다. 마루엔 먼지가 뿌옇고 그날 아침 얼마나 추운지 온 집안이 시베리아 냉골이었다. 수술로 지치고 병약해진 어머니는 추위를 못 이기고 덜덜 떠셨다. 도저히 안 되겠어 서 자동차 히터를 켜고 차 안에 계시도록 했다.

밖은 벌써 깜깜해졌어도 청소를 좀 해야 했다. 자동차 라이트 불을 밝히고 마루와 방을 대충 쓸고 닦았다. 보일러를 틀고, 밥을 짓네 어쩌네 하며 부엌을 오가는 사이 한 시간이 지났다. 그제야 바닥에 온기가 좀 도는 방으로 어머니를 모셨다. 병원에서 얻어간 반찬과 된장국으로 차린 조촐한 저녁상. 마주 앉은 우리 두 사람은 감개무량해하며 진솔한 이야기를 나눴다.

“아들, 참으로 고생 많았어. 고마워. 내가 태어난 이래 여태껏 밑바닥 인생을 살면서 한 번도 사람다운 대접을 받아본 적이 없어. 늘그막에 안 씨 가문에 들어와서야 이렇게 사람대접을 받다니…”

말끝을 흐리시며 어머니는 다시금 눈물을 보이셨다. 고맙다고도 하셨다. 말할 수 없이 허약한 몸임에도 어머니는 다음 날 새벽 일찍 일어나 내게 따뜻한 아침밥을 지어주셨다. 전주로 운전해 가는 내내 나는 평화와 보람에 흠씬 젖어 들었다. 어떠한 말로도 그 기쁨을 다 담아낼 수 없을 것 같다.

건강을 회복하신 어머니는 고향집 안팎을 산뜻하게 단장하며 아버지와 함께 행복한 시골생활을 누리셨다. 조부모님과 친어머니가 계시는 산소에 철망을 둘러치고 마치 공원처럼 깨끗이 관리하셨다. 어느 명절에 다 같이 성묘를 갔을 때, 아버지가 누우실 곳 옆자리를 가리키며 새어머니를 그곳에 모시겠다고 했더니 얼굴이 환해지셨다. 아버님이 영면하신 뒤로도 어머니는 혼자 고향집에서 지내셨다. 나는 가끔 들여다보면서 별 탈 없으신지 살펴드렸다.

어느 날 우리 병원에 오신 어머니가 진료를 마치고 돌아가시는 길이었다. 침대에 누운 채로 이 검사실 저 검사실로 옮겨 다니는 환자들이 목도에 가득했다. 그 광경을 보자 당신이 병원에서 지낼 때가 생각나셨나 보다. 얼마나 힘겨웠는지, 두런두런 이야기하던 끝에 유언과 같은 당부를 하셨다. 깨끗한 한복 한 벌이 시렁에 있으니 나 죽으면 절대 수의 壽衣 만들지 말고 그 옷 곱게 입혀 달라, 고향 산소에 묻을 생각일랑 말고 화장해서 화장터 뒷산 나무 밑에 뿌려 달라, 통장과 인감도장은 어디 있으니 자네가 알아서 처리하라고 다짐을 받으셨다.

“아니, 어머니! 아버님 묘 옆에 모시기로 이미 약속 드리지 않았습니까?”

“아니다, 그러지 마라.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게 인생이라지 않니? 안 씨 가문에 와서 자식들에게 큰 대접받고 행복하게 살았다. 내 부탁 꼭 들어다오.”

그렇게 고향으로 내려 가신지 일주일 만이었다. 갑작스레 새어머니 부음이 전해졌다. 둘째 동생이 소 기르는 농장에 불이 나 마을 사람들이 경황없이 불을 끄는 와중에 쓰러지셨는데 이내 돌아가셨다고 했다.

친정 조카들이 오셨기에 장례를 어떻게 할지 의논 드렸다. 일주일 전에 어머니가 당부하신 내용도 다 전했다. 조카들은 한 목소리로 나보고 알아서 처리하라고 했다. 장례를 마친 뒤 통장을 해지했다. 남아 있는 돈은 단돈 사십만 원이었다. 우리 집에 오셔서 사신 세월이 십여 년, 나름대로 내가 애는 썼고 어머니도 행복하셨다지만 그 동안 너무 적은 액수의 돈을 보내드린 것 같아 가슴이 저렸다.

 

 

그제야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를 깎았다. 그리고는 땅에 엎드려 입을 열었다.

“벌거벗고 세상에 태어난 몸, 알몸으로 돌아가리라. 야훼께서 주셨던 것, 야훼께서 도로 가져가시니 다만 야훼의 이름을 찬양할지라.”

이렇게 욥은 이 모든 일을 당하여 죄를 짓지 않았고 하느님을 비난하지도 않았다. (욥 1,20-22)

 

그러면 임금은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하고 말할 것이다. (마태 25, 40)

 

 

 

 

 

4장 아름다운 돌보심

 

 

종교의 벽을 넘어서

 

죽었던 여인의 소생

네 아이를 둔 아비이자 가톨릭 신자인 내가 집이나 성당보다 오랜 시간을 보낸 곳은 병원일 것이다. 아픈 사람들과 떼려야 뗄 수 없이 살아오면서 참으로 소중하고도 귀한 인연을 많이 맺었다. 그 중 몇 분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전주교구 베소라 성서연구원장으로 봉직하신 고 김정원 토마스 신부님이 매주 한 번씩 가르치는 성서공부반이 있었다. 나를 포함해 등록생 육십여 명은 신부님의 자상하고 해박한 설명에 매료되어 재미나게 성경을 공부했다. 신자로서 늘 성경에 접하지만 알 듯 모를 듯 어려운 이야기가 얼마나 많은가. 특히 구약성경에는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대목이 숱하다. 토마스 신부님의 성서공부반에 다니면서 하느님 말씀에 대한 목마름을 달게 풀 수 있었다.

그 성서공부반에 특이한 여성이 한 분 계셨다. 다른 종교 성직자 차림이라 가톨릭 신자가 아님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일 년 넘도록 착실히 출석하며 열심히 공부해서 모두들 신기해했다. 천주교 수녀님들도 다른 종교 경전을 배우실까? 호기심이 일기도 했다.

언젠가부터 그분이 결석을 하더니 한동안 눈에 띄지 않았다. 궁금했지만 평소 친분이 없었기에 그만뒀나 보다 했다. 하루는 공부를 마치자 신부님이 나를 부르셨다. 그 타종교 성직자가 중병에 걸려 앓고 있는데 나를 한번 만나보고 싶어한다는 것이었다.

수소문해서 집을 찾아갔다. 방문을 열자 여인이 보였는데,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벽에 몸을 기대고 겨우 앉아 있는 여인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창백하고 몸은 빼빼 말랐는데 배만 개구리처럼 볼록 튀어나와 있었다. 숨이 차는지 호흡이 무척 가빴고 두 다리도 퉁퉁 부어 있었다. 깔끔한 성직자 차림으로 성서공부를 할 때와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되었냐고 묻자 난소암이라고 했다. 암 진단을 받고 종합 병원과 전주 시내 유명한 산부인과를 다 다녀봤으나 복막까지 전이가 되었단다. 백약이 무효여서 죽기만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말은 그렇게 해도 행여나 무슨 방법이 없을까 싶어 나를 보자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과 전문의인 나로서는 어떻게 도와야 할지 난감했다. 한참 앉아 고심을 했으나 주님께 의탁하는 것 외에 다른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선생님, 성서공부도 하셨으니 하느님께 기도 드립시다.”

뜸을 들이며 앉아 있던 내가 어렵사리 청을 하자 여인도 수락했다. 같이 손을 잡고 기도를 바쳤다.

“사랑의 하느님, 주님의 말씀을 공부하던 자매가 많이 아픕니다.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요? 고통스러운 이분에게 도움 주시기를 간절히 청합니다….”

일주일 후 성서공부반에 갔더니 신부님이 또 부르셨다. 내가 다녀간 후 여인의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며 다시 와주기를 청하는데 어떤가? 하신다. 두말없이 예, 하고 곧바로 태평동 그분 집으로 갔다. 일주일 사이 배는 더 불러 있었다. 바늘만대도 터질 듯 빵빵한 게 마치 바람 잔뜩 채운 튜브 같았다. 불러 오른 배에 한방 뜸을 뜨다가 화상을 입은 곳은 세균 감염이 됐는지 고름까지 줄줄 흘러나왔다. 설상 雪上 에 가상 加霜, 눈 위에 또 서리가 내린 격이었다. 너무 안타까워 우두커니 바라보기만 했다. 한참을 앉아 있다가 어려운 권유를 했다.

“자매님. 자매님이 믿어온 종교도 훌륭하고 좋겠지만 제 말을 좀 들어보세요. 천주교에는 물과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지 않으면 구원받아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이 있어요. 물로 씻는 예식을 세례라고 하고요. 교육을 받아야 되지만 상황이 급하면 신부님이 비상으로 세례를 주실 수도 있습니다. 병원에 입원해서 세례를 받으시고 죽든지 살든지 기도하면서 시험 개복수술을 받아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시험 개복수술은 우선 배를 열어보고 어떻게 치료할지 판단하는 최후 비상수단이다. 여인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의 주님께서 모든 것이 좋은 결과를 이룰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십사 기도하고 그 집을 나왔다.

다음 날 여인은 우리 대학병원 내과에 입원했다. 오후 느지막이 신부님을 모시고 병실을 방문해 함께 기도 드렸다. 이튿날 출근길에 여인의 병실부터 찾았다. 나를 보자 환자는 물론 가족들도 기적이 일어났다며 야단이었다. 아직 치료도 안 했는데 무슨 기적? 눈이 동그래지는 내게 남편이 흥분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지난 여섯 달 동안 집사람은 숨이 차고 배가 불러서 자는 둥 마는 둥,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기 일쑤였어요. 한데 어젯밤 선생님과 신부님이 다녀가신 후 어린애가 요람에서 잠자듯 내내 숙면했습니다. 이게 기적이 아니면 뭡니까? 오늘 중으로 세례를 받겠답니다.”

반가워서 얼굴이 환해지는 내게 남편이 한 가지 청을 했다. 장모님이 아내와 같은 종교의 독실한 신자란다. 아침 이른 시간과 오후 다섯 시 이후를 피해, 장모님이 없을 때 세례를 받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점심 무렵이 괜찮겠다고 약속을 잡았다.

오후 두 시에 신부님이 영대를 걸치고 세례수를 갖고 오셔서 마리아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베푸셨다. 여인은 진지한 표정으로 예식에 임했다. 세례식을 마치며 끝기도를 하는 중이었다. ‘어머나!’ 하는 누군가의 외침에 얼핏 눈을 뜨니 여인의 모친께서 병실로 들어서고 계셨다. 신부님이 무언가를 들고 있고, 여인은 두 손을 모은 채 기도하는 자세였다. 그 광경을 보고 모친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금세 알아차리신 것 같았다. 말없이 한달음에 침대로 가시더니 딸을 끌어안으며 목을 놓아 엉엉 우셨다. 여인도 그 품에 안긴 채 폭포수 같은 눈물을 쏟아냈다.

“엄마, 죄 많은 나를 용서해 줘요.”

“아니야, 다 괜찮다. 어떻게 하든지 그저 살아나기만 해다오. 아무 걱정 마라. 네가 산다면 내가 뭘 더 바라겠니?”

 

 

목숨 같은 한 방울

울음소리 가득한 병실을 나 역시 축축해진 눈으로 빠져 나와 산부인과 의사와 마취과 의사를 만났다. 시험 개복수술을 해보자는 내 말에 둘 다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마취과 의사가 먼저 브레이크를 걸었다. 몸 상태가 저토록 취약한 환자를 마취하면 혈압이 떨어지면서 숨지기 십상이다. 수술대 위에서 사망하면 전적으로 마취과 의사의 책임이므로 안 되겠다는 것이다. 산부인과 의사 역시 위험천만한 이런 수술은 의미가 없다면 한마디로 거절했다.

환자와 착한 남편과 나, 셋이 머리를 맞대고 상의를 했다. 수술 중 사망해도 절대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자필 각서를 썼다. 각서를 내 보이며 두 의사를 다시 설득했다. 다행스럽게도 마취과 의사는 내 대자 代子 여서 내 청을 깡그리 무시하지는 못했다.

 “여보, 환자 본인과 남편이 저렇게 소원하지 않소. 한을 풀어줍시다. 나도 각서를 쓰겠소.”

“아이고, 대부님! 정 그러시니 하기는 합니다만, 어쩌면 그렇게 겁도 없고 고집이 세십니까?”

산부인과 의사에게는 복수만 좀 빼고 다시 봉합해도 좋으니 수술만 해 달라고 매달렸다. 머리를 긁적이며 겨우겨우 승낙을 했다.

드디어 수술시간이 잡혔다. 나도 멸균복을 챙겨 입고 수술장에 들어가 집도의 뒤에 서서 전 과정을 지켜봤다. 처음에 배를 가르면 복수가 튀어나올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우뭇가 사리처럼 흐물흐물한 덩어리가 쏟아져 나왔다. 한 겹 걷어 내면 또 한 겹이 연달아 삐져나왔다. 암 덩어리 때문에 주변 세포조직들까지 많이 변형이 된 것 같았다. 하나하나 그걸 걷어 내야 하니 여간 손이 많이 가는 게 아니었다. 집도의는 바삐 손을 놀리면서도 새로 덩어리 주머니가 나타날 때마다 연거푸 한숨을 쉬었다.

“아이고, 골치 아파라. 어휴, 애초에 이 수술 하는 게 아닌데… 아이참!”

집도의 뒤에서 지켜보기만 하는 나도 나름대로 바빴다. 치명자산 근처에서 책만 긁어대던 남자아이가 보자마자 괴상한 소리를 지르던 작은 십자가를 집도의 등 뒤에 대고 속으로 계속 기도를 드렸다.

“예수님, 기적을 베풀어 주세요. 불쌍한 저 여인을 부디 살려주세요.”

수술의사 멸균가운에는 아무것도 닿으면 안 된다. 주먹 하나 정도 사이를 두고 의사 등을 향해 십자가를 들고 선 채 세 시간 가까이 기도했다. 같은 자세로 오래 버티자니 나중에는 어깨가 빠지는 듯이 아팠다.

드디어 수술이 끝났다. 올챙이처럼 볼록하던 환자의 배가 푹 꺼졌다. 마취 때문에 걱정했던 심장도 별 탈 없이 잘 뛰고 있었다. 의사가 긁어낸 우뭇가사리 같은 덩어리는 수술대 밑 통에 담겼다. 얼마나 양이 많은지 양동이 하나로 가득했다.

환자는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이제 마취상태에서 의식이 깨어나고 소면이 잘 나오는지 관찰해야 한다고 했다. 소변은 생명 유지가 가능한지 알 수 있는 표시다. 삼십 분쯤 지나자 의식이 돌아왔다. 그러나 두 시간이 지나도 소면은 단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소변이 이렇게 안 나오면 이제까지 수고한 것이 다 허사라면서 두 의사는 더 지켜보지 않고 자기들 방으로 돌아갔다. 나는 환자 옆을 떠나지 못한 채 애타게 소면을 기다렸다. 세 시간 이십 분이 지났을 때 소변 받는 링거 세트에 마치 풀잎에 맺히는 이슬처럼 오줌 한 방울이 달렸다. 얼마나 반가운지!

여인의 눈물 같기도 한 그 오줌방울을 간절하게 보고 있자니 잠시 후 주머니 아래로 똑 떨어졌다. 사람이 살아 있다는 표시로 흘러나오는 오줌 한 방울이 얼마나 소중한지 절감했다. 일 분 후 다시 오줌 한 방울이 떨어지고는 이어 똑, 똑, 계속 소변이 나왔다.

마침내 수술실로 들어간 지 열 시간 만에 여인은 다시 산부인과 6인실로 옮겨졌다. 시체나 다름없던 몰골의 여인이 웃으며 돌아오자 다른 환자와 보호자들도 환호하며 반겼다. 보름 만 더 지체됐어도 여인은 목숨을 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느님께 의지하며, 죽음을 무릅쓰고 세례와 수술을 받은 그 여인은 지금까지 건강하게 잘 사고 계시다. 이렇게 이방인 여인은 기도와 세례 속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나와 함께 수술실을 지켰던 작은 십자가 역시 여전히 내 윗옷 주머니에 잘 있다.

 

 

 

진즉 받을 것을

군 제대 후 전주 성모병원에 근무하면서 나는 전주의 대표 문화재인 풍남문과 전동성당에서 가까운 풍남동에 자그마한 집 한 채를 구입해 살았다. 몇 십 년 세월이 쌓이면서 집도 낡아 두어 차례 개축을 했다.

집을 고칠 때 관리책임자로 일하던 분이 참 성실했다. 우리 집 식구들이 ‘부장님’이라고 부르던 그분은 집을 다 고치고 난 뒤에도 무슨 문제가 생길 때마다 부르면 언제든지 와서 친절하게 돌봐줬다. 하루는 그분이 자기 처제가 무슨 병이 들었는지 몸이 자꾸 마르고 소화가 안 되어 고생이 많다고 했다. 종합검진을 받아보도록 안내했다. 며칠 후 검진 결과 간내 담도암이 발견됐다. 주변까지 암세포가 다 퍼져 수술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통증이 별로 없는 것만도 큰 다행이었다.

처제는 남편을 일찍 잃은 과부였다. 그냥저냥 통원하기를 원해서 증상에 따른 대응만 해나갔다. 시일이 지나면서 암 덩어리가 담즙이 흘러나오는 담도를 압박해 황달이 왔다. 점차 황달이 심해지면서 전신이 노랗게 변했고, 그로 인한 가려움증으로 힘들어했다. 지켜만 보다가 어느 날 형부한테 슬그머니 알려주었다. 그냥 두면 담도가 막혀 한두 달 안에 운명하게 될 것 같다고.

“불쌍해서 어쩌자, 가엾어 어쩌나…”

생명을 좀 더 연장시킬 방법이 없겠냐며 나를 보는 형부의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담도에 비닐관을 꽂아 담즙을 몸 밖으로 빼내는 수술을 받도록 권했다. 옷 속에 차고 다니는 비닐주머니로 하루 700~1000CC 의 담즙을 받아내는 것이다. 수술을 하자 상태가 꽤 좋아져 집에서 약만 타다 먹어도 됐다.

가끔씩 처제는 으슬으슬 추우면서 열이 나고 통증으로 아파 죽겠다면서 응급실로 달려오곤 했다. 비닐관이 빠지면서 복막으로 둘러싸여 있는 복강으로 담즙이 흘러 들어 가면 나타나는 증상이다. 응급실에서는 외과와 방사건과 의사가 협력해 신속하게 비닐관을 바꿔 끼워 주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비슷한 일이 여러 차례 일어났다. 그때마다 양쪽 의사의 일정 맞추기가 그리 쉽지 않고, 응급실 입원비도 만만치 않았다. 비날관 문제에 익숙해지자 처제는 응급실로 가는 대신 나를 먼저 찾아왔다. 그때마다 환자를 데리고 응급실로, 외과로, 방사선과로 데리고 다니며 문제를 해결해 줬다. 어떤 날에는 비닐관이 빠지지는 않았으나 관이 꽂혀 있는 피부 주위가 많이 상해 고름이 흘러나왔다. 열이 나는지 오싹오싹 한기도 든다고 했다. 그 정도면 굳이 외과로 가지 않아도 될 것 같아 내가 깨끗하게 소독한 뒤 드레싱을 해 드렸다. 처제는 감사하다고 거듭거듭 머리를 숙였고, 나도 연신 괜찮다고 답례를 했다.

그러나 어느 날,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보아 몇 달 뒤면 처제는 세상을 떠날 것 같았다. 안타까웠다. 육신의 생명은 어느 정도 연장을 해왔지만 영혼의 구원은 어찌한다? 마침 진료실에는 외래환자가 다 끝나서 처제와 간호사 와 나 이렇게 셋만 있었다.

“아주머니.”

내가 나직이 부르자 그분은 ‘왜요?’ 하는 눈길로 쳐다봤다.

“아주머니 00 교에 다니시지요.”

“예, 그렇습니다.”

“얼마나 다니셨나요?”

“오래됐습니다.”

“내가 천주교 신자인 줄은 아세요?”

“그렇고말고요. 소문 많이 들었습니다.”

나는 대세와 천국과 구원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며 영세를 권했다.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처제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면서 화를 냈다.

“다시는 내게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또 그러시면 박사님께 치료 받으러 오지도 않겠습니다.”

“아, 알았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없던 일로 하겠습니다. 이 일과 상관없이 아프면 언제든지 오세요. 제가 계속 잘 돌봐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은 고아와 과부를 잘 돌보라고 특별히 당부를 하셨다. 다른 종교에 열심인 분이지만 예수님 말씀을 생각하며 그분이 올 때마다 계속 편리를 제공해 드렸다. 다섯 달이 지나자 더 이상은 통원치료가 힘들 만큼 상태가 나빠졌다. 울먹이는 형부에게 한 달 정도는 목숨을 연장할 수 있으니 입원하는 게 좋겠다고 조언했다.

내과병동 6인실에 입원한 환자는 언니도 언니지만 형부를 무척 의지하고 잘 따랐다. 병실에서 하루하루 쇠약해져 가는 환자를 볼 때마다 내 마음속에는 영혼 구원에 대한 안타까움이 자꾸 커졌다. 그래서 어느 날 형부를 따로 불러 조용히 제안을 했다.

“부장님. 천주교에는 대세라는 것이 있어요. 처제가 돌아가시기 전에 병원 신부님 모시고, 조용히 우리끼리만 알고 세례를 줘서 천국에 올라가시도록 해봅시다.”

그러나 이분도 정색을 하고 눈을 부릅뜨며 불쾌해했다.

“박사님, 제가 박사님을 존경하니 무엇이든 다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렇지만 오늘 같은 말씀은 다시 하지 말아주세요.”

“아, 알았습니다. 미안하고요, 다신 안 그럴게요. 최선을 다해 편안히 임종을 맞으시도록 도와드립시다.”

 

 

 

아멘

소화를 못 시키니 자연 먹지도 못해 환자는 링거주사로만 버텼다. 혈압도 90/60 선에 머무르며 서서히 생명의 불이 꺼져가고 있었다. 어느 날 오전 진료를 마치고 점심을 먹기 위해 교수식당으로 가는 중이었다. 내과병동에서 갑작스런 연락이 왔다. 처제 환자가 지금 위독한데 꼭 나를 보기 원한다는 것이다. 부랴부랴 6층으로 올라갔다.

“아주머니, 좀 어떠세요?”

물끄러미 나를 쳐다 만 볼 뿐 환자는 아무 말이 없었다.

“어디, 통증은 없습니까?”

역시 말없이 고개만 내저었다. 맥을 잡아보니 약하고 빨랐다. 한참 동안 우리 둘은 서로 눈길만 주고 받았다.

아무리 현대의학의 모든 수단을 동원한다 한들 의사가 생명을 주관하지는 못한다. 마지막 단계에 이르면 별달리 할 수 있는 것도 없다. 다시금 안타까움이 복받쳤다.

“아주머니. 제가 저번에 말씀 드린 천주교 대세를 지금 받는 게 어떨까요? 우리 속담에도 삼세판이라고 있지 않습니까? 마지막으로 묻습니다. 세례 받고 천국에 가시지요.”

다음 순간 나는 적잖이 놀랐다. 대차게 거절하던 분인데 고개를 끄덕이며 수락을 하는 게 아닌가! 그 순간을 놓칠세라 나는 황급히 간호사실로 가서 깨끗한 종이컵 하나와 소독된 거즈를 가져왔다. 컵에 깨끗한 물로 채운 뒤 환자 손을 붙잡고 십자 성호를 가르쳤다.

“이렇게 손으로 그으면서, 입으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자, 한번 따라 해 보세요.”

약함 힘이었지만 아주머니는 십자 성호를 잘 따라 했다.

“예, 잘하셨어요. 이제 제가 평신도 대세를 드립니다. 똑똑히 ‘아멘!’ 하세요. 이 세례를 받고 나면 아주머니는 하느님의 사랑스런 딸로 다시 태어납니다. 아멘!”

“아멘!”

“자, 그럼 이세 세례를 드립니다. 000 님, 내가 마리아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드립니다. ‘아멘.’ 하세요.”

“아멘!”

이렇게 아주머니가 수락한 지 오 분만에 평신도가 주는 대세식을 마쳤다.

“이제 끝났습니다. 편히 쉬세요. 혹시 제게 하실 말씀 있으신가요?”

고개를 가로젓는 아주머니와 눈인사를 하고 침대 평을 벗어났다. 몇 발짝 걸어 막 병실 밖으로 나서는 순간이었다. 그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아멘, 아멘, 아메엔!”

입을 벙긋할 기운도 없던 사람이 소리 높여 아멘을 외치고 있었다. 깜짝 놀라 침대 옆으로 달려갔다. 아주머니는 연달아 성호를 그으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계속 반복하며 소리를 질렀다. 외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모양이었다.

“박사님, 제가 진즉 받을 것을, 진즉에 받을 것을…. 아멘, 아멘, 아메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아메엔, 아메에엔”

목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아주머니는 병실이 떠나가도록 크게 소리를 질렀다. 위 혈압이 80-90 밖에 안 되는데 어디에서 힘이 나와 그렇게 큰 소리로 외치는지 경이로울 뿐이었다. 이런 현상이 성령 충만 세례인가 보다. 그러자 이번엔 옆 침대 환자와 보호자들이 시끄럽다, 조용히 하라며 여기저기서 소리를 질렀다. 침대마다 커튼이 드리워져 있으니 옆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들은 알 수가 없다. 점심시간이라 다들 밥을 먹고 있는데 아멘, 아멘, 시끄러운 소리가 자꾸 들리니 짜증이 난 것이다.

아주머니는 흥분된 상태로 십여 분이나 아멘을 외치다가 조금씩 조금씩 목소리가 낮아졌다. 천천히 안정을 되찾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이젠 괜찮을 것 같다 뒤늦은 점심을 먹으로 발길을 돌리려는 찰나였다. 내 등 뒤에 수간호사가 서 있었다. 환자게 대세를 받고, 소리소리 지르는 모습을 처음부터 다 지켜본 모양이었다.

“아니 수간호사님, 아직까지 점심도 안 들고 여기서 뭐 했어요?”

내 말에 대답도 않고 수간호사는 재빠르게 병실을 빠져나갔다. 나는 기쁨 밤 걱정 반, 묘한 기분이 되었다. 그 아주머니가 어디서 그토록 힘이 솟아올라 아멘을 외치는지 우선 놀라웠다. 다른 한편으로는 눈을 똥그랗게 뜨고 사라진 수간호사 얼굴이 떠올라 은근히 마음이 켕겼다. 그 수간호사는 처제 환자와 같은 종교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내가 종교적 편견으로 다른 종교인을 자기편으로 유도한다는 오해를 받을까 봐 늘 조심하던 차였다. 내가 자기네 신도에게 대세를 주는 것을 다 지켜봤다면 문제를 제기할 수도 있는 것이다.

아주머니가 그날 저녁 여섯 시쯤 평안히 임종했다는 보고를 다음 날 출근해서 들었다. 운명하시면서 통장에 있던 돈 이백만 원 중 백만 원은 언니와 형부에게, 육십만 원은 친하게 지낸 앞집 아가씨에게, 나머지 사십만 원은 불우 이웃을 위해 헌금하라는 유언도 남겼다고 했다.

그분이 돌아가시고 일주일쯤 뒤였다. 내과병동에서 학생, 레지던트들과 회진을 준비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등 뒤에서 내 귀에 대고 무어라 속삭였다. 고개를 돌리니 대세를 지켜본 그 수간호사가 서 있었다.

“뭐라고요?”

깜짝 놀라 되묻는 내게 수간호사가 미소 띤 얼굴로 귓속말을 했다.

“원장님! 저도 이번 주부터 성당에 나가고 있습니다.”

무엇이 수십 년 동안 간직했던 종교를 하루아침에 바꾸게 한 것일까? 아직까지도 미스터리다.

 

 

여러분 안에 계셔서 여러분에게 당신의 뜻에 맞는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켜 주시고 그 일을 할 힘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필리 2,13)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마음이 찔려 베드로와 사도들에게 “형제 여러분,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하고 물었다.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하였다. “회개하시오. 그리고 여러분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시오.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될 것입니다. (사도 2,37-38)

 

 

 

 

서로 사랑하라

 

앵두

새벽 네 시 반이면 나는 잠자리에서 일어나 아침기도 후 세수를 마치고 성당으로 간다. 전동성당은 1년 365일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 다섯 시 반에 하루의 첫 번째 미사를 봉헌한다. 어디 출장할 때를 제외하고는 빠짐없이 새벽미사를 보려고 애써왔다. 일요일만 좀 늦게 여섯 시쯤 일어나 느지막이 아침을 먹고 열 시 반에 봉헌되는 주일 교중미사를 본다.

내과 과정으로 있던 1970년대 중반 초겨울, 새벽미사를 마치고 아직도 해가 안 떠 어둑한 바깥으로 나서는데 어떤 신자분이 나를 보자고 했다. 한 여자아이 손을 잡고 있었다.

“이 아이가 지금 열다섯 살이에요. 당뇨병이 심해서 병원에 다니며 잘 관리를 해야 하는데 부모님도 없어 떠돌아다녀요. 너무 측은해서 박사님께 상의드리려구요.”

“딱하군요. 오늘 병원으로 데리고 오세요. 어떻게 할지 방법을 찾아봅시다.”

자매님이 데려온 아이를 만나 우선 접수를 시키려고 병원 수납부로 갔다. 그런데 아이는 자기 이름을 몰랐다. 성이 정씨라는 것만 알았다. 주소가 없으니 접수도 할 수 없었다. 차마 그냥 돌려보낼 수가 없어 머뭇거리다가 내과병동으로 데리고 갔다. 과장으로서 내과병동 수간호사한테 아이의 사정을 설명하고 환자 없이 비어 있는 침대에서 임시로 지내게 하자고 합의를 봤다.

병원에 등록조차 되지 않은 아이라 식사도 문제였다. 의논 끝에 입원환자에게 나오는 병원식 중에서 누군가 먹지 않고 그냥 밖에 내놓는 것을 아이이게 나눠주기로 했다. 아무리 무등록 환자라고는 해도 이름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아이의 곡 다문 입술이 빨갛고 앵두처럼 예뻤다. 내가 앵두라고 부르자고 해서 아이는 정앵두가 되었다. 보호자는 당연히 나였다.

얼마쯤 병원에 머물면서 당뇨관리를 잘 받으니 아이는 활기를 찾았다. 화장실 가고 식사하고 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앵두가 병원생활에 점점 적응을 잘해 나가자 병원 식구들도 하나둘 관심을 가지고 도와주었다. 간호사들을 언니라고 부르고, 수련의들도 잘 따르는 아이가 미등록 환자임을 알면서 병원 지도부도 그냥저냥 눈감아 주었다. 그렇게 앵두는 병원에서 아예 눌러 살게 되었다.

앵두가 어느 날 엉망으로 어질러진 수련의들 방을 깨끗이 청소했던가 보다. 이후로도 방을 말끔히 치우고 정리해 주니 다들 좋아했다. 의사들이 고마워하며 십시일반 돈을 조금씩 모아 가끔 앵두한테 수고비로 건제주기도 했다. 그렇게 앵두가 내과병동 빈 침대에서 보낸 세월이 어언 십사 년이다.

지금은 대학병원에도 사회복지후원회가 있어 형편이 정말 딱한 환자를 체계적으로 지원하며 돕니다. 당시에는 그런 제도가 없었다. 앵두의 처지를 안쓰러워한 병원 가족들이 이심전심 마음을 모았을 뿐이다. 어쩌면 앵두한테는 사회복지부서가 없는 게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십 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이름도 주소도 없이 빈 침대를 제공받으려면 정말로 수속이 복잡했을 것이다. 아니, 아예 불가능했을 것이다.

병원에서 그럭저럭 잘 지냈으나 앵두의 병세는 점차 나빠졌다. 십삼 년쯤 지났을 때 심한 당뇨 합병증으로 시력을 완전히 잃었다. 눈이 멀자 앵두는 누군가의 도움이 없으면 화장실도 못 가고 밥도 못 먹었다. 간호사들은 물론이고 옆 침대의 보호자, 어떨 때는 입원환자들까지고 기꺼이 앵두의 눈이 되고 손이 되어주었다.

그렇게 또 한 세월을 보내던 어느 날부터 당 조절이 거의 안 되더니 급성 폐렴이 찾아왔다. 신장 기능도 약화돼 온몸이 붓고, 폐렴으로 인한 호흡곤란 때문에 산소호흡기로 호흡을 시켜주어야 했다.

모니카로 영세한 앵두는 병원 가톨릭 봉사자들의 헌신적인 돌봄 속에 외롭고도 조용한 병상생활을 하다가 스물여덟 꽃다운 나이로 소천했다. 가족이 없으니 보호자인 내가 장례위원장이 되어 금상동 천주교 전주교구 공원묘지에 안장했다. 병원 신부님과 수녀님, 가톨릭 봉사자들이 묘지까지 따라가 기도해 주었다. 때마침 발그스름한 석양이 몹시도 아름답게 하늘을 물들이고 있었다. 그 광경이 마치도 어여쁜 앵두 자매 같아 우리의 눈과 마음이 더 축축해졌다.

이승의 짤막한 삶을 앵두는 멋지고 아름답게 마감했다. 병원에서 더부살이하는 젊은 아가씨가 먹고 싶고 입고 싶은 것, 어느 것 하나 마음껏 누리지 못하면서도 푼푼이 돈 오십만 원을 모았다. 이십만 원은 음성 꽃동네에 주고, 삼십만 원은 나환자촌에 전해 달라고 간호사한테 당부를 했단다. 가난한 과부가 작은 동전 두 닢을 헌금함에 넣자 예수님은 넉넉한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넣었다고(루카 21,1-4) 칭찬하셨다. 앵두의 봉헌도 예수님 마음에 쏙 들었을 것이다.

모니카가 떠난 지 오래되었지만 내게는 앵두의 자취가 진한 반성과 함께 남아있다. 오랫동안 병세를 돌봐주긴 했으나 둘이서만 따로 정답고 따뜻한 대화를 나눈 적이 없는 것 같다. 특히 외로운 모니카를 우리 집에 데려와 하룻밤 재우면서 가족처럼 식사 한 번 나누지 못한 게 진정으로 마음에 걸린다. 겉으로는 내가 앵두를 돌봤다고 칭찬받았지만 모니카의 마음 속에는 나에 대한 서운한 점이 많았으리라.

 

 

사랑이란

전주교구 성령쇄신봉사회장을 꽤 오래 계속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이 나한테 뭔가 특별한 점이 있을 거라고 기대하는지 가끔 철야기도회 강사로 와 달라고 청을 한다. 대학생 시절을 보낸 광주에서도 초청을 하기에 그러마 고 했다. 근무를 끝내고 밤에 다녀와야 하므로 먼 길은 좀 피곤하다. 정한 시간보다 삼십 분쯤 일찍 도착해 자동차 속에서 의자를 젖혀 놓고 잠깐 쉰 뒤 강연을 했다. 제목은 ‘사랑’이었다.

청중들의 요란한 박수를 뒤로하고 성당을 나와 부지런히 전주로 돌아가려고 차 문을 막 열 때였다. 그곳 봉사자 한 분이 헐레벌떡 달려 나오면서 “잠깐만요!” 하고 나를 붙잡았다. 환자 한 사람을 봐 달라고 했다. 식모살이를 하는 자매인데 무슨 병이 있는지 자궁 부위에서 고약한 냄새가 난다는 것이었다. 냄새가 하도 심히 일하던 집에서 쫓겨나 지금 언니네 집에 있으니 꼭 한번 봐 달라고 했다. 가만히 듣자니 자기들도 골치 아픈 환자인데 나를 통해 어떻게 해결해 보려는 눈치였다.

광주교구 성령회장님과 의논하시라고 정중히 거절하며 다시 차에 오르려고 했다. 하지만 봉사자는 나를 놓아주지 않고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두 번, 세 번 마다해도 마찬가지였다. 끝까지 냉차게 거절할 수가 없었다. 바로 조금 전에, 다른 것도 아니고 ‘사랑’에 대해 열강을 한 처지 아닌가. 먼저 광주 성령회장님과 상의해 보고 정 해결이 안 되면 그때 한번 생각해 보자고 달래 뒤 겨우 성당을 빠져 나왔다.

이튿날 아침 외래 진료실로 들어가는데 누군가가 반갑게 인사를 했다. 어젯밤 광주에서 끈질기게 나를 붙잡던 그 봉사자였다. 광주에서 여러 가지를 다 해보고 방법이 없으면 그때 보고자 했건만, 날이 새자마자 무작정 환자를 데리고 온 것이다. 초라한 모습의 오십 대 자매가 우물쭈물하며 옆에 서 있었다. 반갑지 않은 봉사자였으나 병색이 완연한 자매에게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다짐이나 받아놔야겠다 싶었다.

“봉사자님, 약속 하나 해주시지요. 이렇게 환자를 데리고 와서 저한테 맡기고는 나 몰라라, 무책임한 사람을 제가 여러 번 경험했어요. 저와 함께 이 환자를 끝까지 잘 돌봅시다.”

“그래야지요. 암~요. 그렇게 해야지요.”

철썩 같은 다짐을 받은 뒤 환자의 사연을 들어보았다. 병든 자매는 시골 큰 농가의 안사람으로 딸 하나가 있고 남편도 있으나 남편이 돌보지 않아 집을 나왔다고 한다. 광주로 나와 가정집 도우미로 두 해를 살았는데 자궁에서 심한 악취가 났다. 이 기관 저 기관에 알아봤으나 냄새가 너무 심하니 아무데서도 받아주지 않았다. 언니 쪽에서 어디로든지 맡기려던 참에 마침 나를 만났다는 것이다.

자기도 돌보겠다고 굳게 다짐했던 봉사자는 환자를 내게 맡기고 급한 일이 있다며 가버렸다. 고개를 못 들고 내 눈치만 살피는 불쌍한 환자를 어찌할꼬, 궁리하다가 무턱대고 2층 산부인과로 데리고 갔다. 전문교수에게 무슨 병인지 진찰을 받아본 결과 자궁경부암 4기로 들어났다. 간까지 전이가 돼서 황달도 와 있는 상태였다. 못 견딜 만큼 심한 악취가 나는 원인도 있었다. 경부암 부위에 세균이 증식하기 때문이니 kcl 이라는 액체가 하루 서너 번씩 계속 씻어내야 한단다.

우선 밥 먹을 곳도 없고, 냄새가 너무 심해 받아줄 곳도 없는 가련한 환자이기에 또 무턱대고 3층 산부인과병동으로 데리고 갔다. 천주교 신자인 수간호사에게 오늘 밤만 6인실에서 자궁 세척 좀 하고 밥 먹여 재우자고 사정사정했다. 착한 수간호사님이 병실에 넣어 주었다.

다음 날 병실에 들어가자 환자들이 나한테 막 항의를 했다. 어젯밤에 데려다 놓은 환자 때문에 잠을 설쳤다는 것이다. 어떻게나 냄새가 심한지 잠도 못 잤는데 밥은 또 어떻게 먹겠나 며 당장 데리고 나가라고 했다. 안 나가면 병원장한테 항의하겠다고까지 했다. 항의가 워낙 거세서 조금 근심이 되었다. 입원 수속도 없이 환자를 병실에 밀어 넣고 영양사에게 부탁해 공짜로 밥까지 먹였다. 산부인과를 책임진 수간호사가 징계를 받을 수도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날 하루 대여섯 차례나 자궁 세척을 했더니 다음 날부터는 병실이 좀 잠잠해졌다. 사람의 코는 처음에 낯선 냄새를 예민하게 감지한다. 그러나 같은 냄새를 계속 접하면 일종의 마비라고 할까, 어느 정도인지 분간을 잘 못하게 된다.

매일 약으로 씻어내고 매일 같은 병실에 있다 보니 냄새는 약간 풍겨도 주변에서 참지 못할 정도는 아니게 되었다. 자매는 한 달 가까이 무료로 얻어먹으며 자궁 세척을 받았다. 보호자가 없는데다 주민등록증도 없어서 정식으로 입원수속을 할 수가 없었다.

 

 

친정아버지 마음

무등록 환자로 있는 동안 자매는 교리교육을 받고 마리아라는 본명으로 영세를 했다. 가톨릭 봉사자들이 친절히 돌봐 주었고, 보호자나 다름없는 나도 거르지 않고 문병했다.

가족한테 버림받은 거나 마찬가지인데다 깊은 병마저 들었으니 어지간히 가련한 처지간만 의외로 얼굴이 밝았다. 나를 볼 때마다 활짝 반기며 스스럼없이 귤이나 초콜릿 같은 간식을 사달라고 청했다. 그게 도리어 갸륵했다. 오징어며 바나나며, 자매가 먹고 싶다는 건 한 번도 거절하지 않고 다 사주었다. 다만 황당이 와 있으니 과식만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매일매일 나와 봉사자 만나는 재미고 기쁘게 지내던 자매가 하루는 갈비탕이 먹고 싶다고 했다. 내 차에 태우고 병원 밖으로 나가 전주에서 제일 잘 한다는 집에서 사주었다. 맛있게, 정말 맛나게 갈비탕을 먹고 난 자매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박사님, 박사님은 꼭 우리 친정 아버지 같아!”

“그래 마리아. 박사님이라 하지 말고 친정아버지라 부르고 싶으면 그렇게 해.”

정말 그래도 되냐고 물으며 자매는 갑자기 ‘으하하’ 하며 큰 소리를 내어 웃었다.

어느 날은 보신탕을 먹고 싶다기에 배달을 시켜주었더니 맛있게 잘 먹었다며 고마워했다. 기회다 싶어 이야기를 꺼냈다. 무작정 이렇게 무등록 상태로 지낼 수는 없으니 남편 집에 가서 주민등록증을 찾아 오자고, 자매도 수긍을 하며 가끔 병문안 오는 논산 여동생이 오지 않는 날 가자고 했다.

토요일로 날을 잡아 봉사자 한 분과 같이 셋이서 남편 집을 향해 떠났다. 고속도로를 타고 광주 방면으로 가는데 자매가 또 먹는 이야기를 꺼냈다. 이번엔 불고기에 상추쌈을 먹고 싶단다. 하남공단에서 나주로 향하던 중 길가에 큰 식당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들어가 불고기를 시키자 아주 질 좋은 소고기가 나왔다. 자매는 상추에 불고기를 싸서 한없이 먹어댔다. 황달 때문에 고기가 괜찮을지 염려됐기에 어느 정도 먹은 뒤 자제를 시켰다.

전주에서 세 시간 반 남짓 달려 전라남도 끄트머리에 있는 남편 집에 닿았다. 하도 많은 일을 겪어서 웬만한 일에는 꿈쩍 않는 나지만 그때는 꽤 놀랐다. 집도 크고 살림도 상당히 윤택해 보여서다.

‘이렇게 잘 살면서 왜 부인을 식모살이 보냈을까? 무슨 사연이 있겠지.”

그 집 진돗개는 안주인이던 자매를 보자 컹컹 짖으며 제 집을 끌고 나오다시피 반겼다.

‘얼마나 반가우면 저렇게 난리를 칠까, 개는 저러는데 남편이라는 사람은 왜?’

봉사자와 나는 또 세시간 반을 돌아가야 했다. 돈 십오만 원과 휴대전화 번호가 적힌 내 명함을 자매에게 건네줬다. 만약 남편이 돈을 안 주면 그걸로 차지해 병원으로 와라, 잊지 말고 주민등록증 곡 챙겨오라 당부하며.

사흘 뒤 자매는 남편과 같이 와서 정식으로 입원을 했다. 수속을 마치지 남편은 떠나버렸다. 자매를 맡기고 간 봉사자도 처음 한두 번 얼굴을 비치더니 감감 무소식이었다. 자매는 산부인과 병실에서 6개월 가까이 지내다가 내과로 옮겨왔다. 황달이 아주 심해진데다 산부인과에서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치료가 없었다. 죽음을 예감한 환자는 주변의 권유를 받아들여 눈과 콩팥을 기증하기로 서약했다. 시신도 의과대학생들의 해부 실습에 내주기로 했다. 서서히 이별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자매의 상태를 매일매일 체크하던 나는 뜻밖에도 주님께 아주 초조한 기도를 올리게 되었다. 장기와 시신기증 약속을 이행하려면 자매가 사망할 때 내가 꼭 옆에 있어야 한다. 그런데 둘째 딸 결혼식 날짜가 다가오고 있었다. 만약 자매가 딸 예식 날 사망해서 내가 그 자리에 있지 못한다면 귀한 약속은 허사가 되고 만다.

“하느님, 제발 마리아를 데려가실 때, 작은딸 예식날만은 피해서 천국으로 불러가 주세요. 제가 딸을 시집 보내는 친정아비인데, 마리아도 저를 친정아버지처럼 여기지 않습니까? 둘 다 잘 보살펴야 하니 제발 제 기도를 들어주세요….”

드디어 결혼식 날이 밝아 아침부터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손님 맞고 예식 치르느라 긴장이 계속되는 중에도 잠시 쉴 틈이 나면 속으로 주님을 찾았다. 제발 병원에서 전화가 오지 않게 해주십사 고…

예식이 끝나고 신혼여행도 떠나 보냈다. 우리 집에 와서 마무리 잔치를 즐기던 친척들도 다 돌아가고 시계를 보니 밤 열한 시였다. ‘아이고, 다행이다!’ 한숨 돌리는데 휴대전화가 울렸다. 마리아 자매가 운명 직전이라는 것이다. 급히 병원으로 달려가 마지막 기도를 올리자 자매는 숨을 거두었다.

“오늘 몇 차례 아주 위험했어요. 박사님 기다리느라고 계속 숨을 멈추지 않았군요. 오시고 나니 조용히 운명하시네요.”

간호사의 말에 시계를 보니 자정을 갓 지난 0시 5분. 단 오 분이지만 주님은 내 기도를 들어주시어 딸 결혼식 다음 날 자매를 데려가셨다. 내 입회 하에 이식팀이 와서 장기를 가져갔다. 시신은 의과대학 해부학 교실로 보내졌다.

남편은 입원 수속 후 끝내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 자매가 그렇게도 보고 싶어하던 딸도 만나지 못했다. 그러나 지난 여섯 달 동안 자매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평화롭게 지냈고 자신의 육신을 필요한 이웃에게 선물했다. 신부님 이하 많은 봉사자의 정성 어린 기도를 받으며 엄숙하고 아름다운 장례미사가 봉헌됐다. 장례비는 시신을 받은 의과대학에서 부담했고, 여섯 달치 병원비 육백여 만 원은 봉사자들이 여기저기서 모으고 보태 말끔히 정산했다.

만약 입원비 마련이 여의치 않으면 어떻게 할까, 많이 염려했으나 그런 걱정은 기우일 뿐이었다. 내가 따로 지원할 경비는 한 푼도 없었다. 명원 봉사회 식구들 모두 감격에 젖어 행복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야훼 이레!(창세 22,14) 주님께서 다 마련해 주셨다.

 

 

 

참 어려운 사랑

새벽마다 잠자리를 떨치고 나와 성당으로 향한다. 육신을 일깨워 어둠을 헤치고 가는 길은 괴로우나, 장엄한 성당에서 고요히 새벽미사를 드리는 묘미는 누구나 쉽게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닐 게다. 어느 날의 새벽미사였다. 복음은 “이렇게 너희의 주인이 언제 올지 모르니 깨어 있어라. 만일 도둑이 밤 몇 시에 올는지 집주인이 알고 있다면 그는 깨어 있으면서 도둑이 뚫고 들어오지 못하게 할 거이다. 사람의 아들도 너희가 생각지도 않을 때에 올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늘 준비하고 있어라.” (마태 24,42-44)였다.

‘주인이 언제 올지 모르니 항상 깨어 있어라. 도둑처럼….’ 비유에 담긴 뜻을 헤아리며 한참 생각하는데 문득 전날의 일이 머리를 스쳤다.

‘아, 그것이었구나!’

이야기는 삼십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시내 어느 성당의 방 한 칸을 빌려 사는 외로운 할머니가 계셨다. 할머니는 넘어지면서 뼈가 부러지는 낙상골절로 우리 병원에 오랫동안 입원해 계셨다. 언제 봐도 할머니는 표정이 밝으셨고 병상 생활이 평화스러우셨다. 거기에 마음이 끌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흔치 않은 인연 맺음이 시작되었다.

나는 할머니가 퇴원하신 뒤에도 가끔 틈을 내어 댁을 방문하곤 했다. 한 병약한 소녀와 함께 사셨는데, 소녀는 할머니를 엄마라고 불렀다. 나는 그저 할머니가 늦게 딸을 두셨나 보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병원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박사님! 큰일 났어요. 내 딸년이 죽어가고 있어요. 도와주세요!”

할머니의 다급한 목소리였다. 황급히 가봤더니 딸이 무슨 음식이든 다 토해 낸다고 했다. 구급차를 불러 입원시키고 진찰을 해봤더니 어린 시기나 사춘기에 나타나는 약년성 당뇨병과 합병증으로 거의 죽어가고 있었다. 여러 가지 좋은 치료를 하면서 노력했으나 백약이 무효로 병세는 점점 악화되었다.

이제 하느님 품으로 돌아가는 일만 남은 것 같았다. 집에 가서 평안히 임종을 맞으라고 퇴원을 권하자 할머니는 너무나도 슬퍼하셨다. 그 모습이 하도 처량하여 무슨 묘한 방책이 없을까 궁리를 하는데, 퍼뜩 어떤 사람이 주고 간 조약 調藥 이 생각났다. 자기가 손수 만들었는데 중병 환자에게 한번 먹여보라며 놓고 간 것이었다. 그 약의 효과인지, 지금껏 치료했던 약들의 효능이 나타나는지는 알 수 없으나 두 달이 지나는 동안 소녀는 조금씩 조금씩 회복이 되어 죽음을 모면했다. 시간이 더 지나면서 건강을 되찾았다.

2-3년 세월이 흐른 어느 날 다시 댁을 찾았을 때, 할머니는 딸애가 몹시 시집을 가고 싶어한다고 했다. 좋은 총각을 찾아봐 달라고도 했다. 하지만 바쁜 생활에 쫓겨 그 일을 까마득히 잊고 지냈는데, 어느 날 내 책상에 메모지 한 장이 놓여 있었다. 급히 상의할 일이 있으니 퇴근길에 좀 들러 달라는 할머니의 연락이었다. 찾아 뵈었더니 너무 오랜만이라고 반가워하시며 딸애와 결혼할 총각이 생겼다고 장황하게 이야기를 늘어놓으셨다.

사실 그 딸은 할머니가 낳은 자식이 아니고 젖먹이 때부터 데려다 기른 아이라며 참으로 딱하고 가엾은 아이니 결혼식장에 손 한번 잡고 들어가 달라고 애걸복걸을 하셨다. 죽은 사람 원도 풀어준다는 옛말이 생각나고, 결혼식장에 손 한번 잡고 인도하는 게 뭐 그리 대단한 일도 아니라는 생각에 승낙을 했다. 그 죄(?)로 신랑에게 새 양복과 새 시계도 선물해 주고 식장에서 할머니 딸의 손을 잡고 인도해 주었다.

한데 그 다음부터 할머니 딸이 나를 ‘아빠’라고 부르는 게 아닌가. 할머니도 딸이 그렇게 부르고 싶어하니 거절하지 말아 달라고 하셨다. 이후로 내가 할머니 댁을 방문할 때마다 그녀는 나를 ‘아빠, 아빠’하고 불렀다. 하지만 내 마음에는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그렇다고 그렇게 부리지 말라고 말할 용기도 없어서 그냥 저냥 지내기로 마음먹었다.

결혼 후 그녀 내외는 가끔 나를 찾아왔다. 할머니 말씀에 따르면 아기를 갖고 싶어한다고 했다. 몸무게 38킬로그램의 왜소한 체구에 당뇨병도 있는데 어린아이를 갖고 싶어하다니, 나는 참으로 못마땅하게 여겨졌다. 하지만 그녀는 임신을 했고 아기를 갖자마자 자궁출혈과 당뇨 합병증으로 입원을 하기 시작했다. 무려 2개월이나 빨리 조기분만 할 때까지 여러 차례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다. 그때마다 내가 그 뒤치다꺼리를 다 해야만 했다.

천신만고 끝에 세상에 나온 딸은 병원 인큐베이터에서 두 달 가량 간호사들에 의해 길러졌다. 산모와 아기는 약 일 년이 지나서야 겨우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할머니는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모녀를 남겨두고 홀연히 세상을 뜨셨다.

그녀가 두 번째 임신을 하면서 나를 다시 찾아왔다. 온몸이 붓고 유난히 불러 오른 배를 움켜쥔 채. 다시 입원시키고 종합검진을 한 결과 태반이 있는 자궁 근처에 있는 전치태반에다가 놀랍게도 쌍둥이가 임신되어 있었다. 산모를 살리기 위해서는 임신중절이 불가피하다는 산부인과 전문의의 통보를 받았다. 그러나 천주교 신자인 그녀와 나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냥 장기간 병원에 있으면서 경과를 보기로 합의했다.

약 한 달간 입원해 있는 동안 우연하게도 자연유산이 일어났다. 유산되어 나온 두 영아에게 마리아와 베드로라는 세례 명으로 대세를 주었다. 사내아이와 딸아이였다고 알려주자 그녀는 몹시 안타까워했다. 아들을 무척 갖고 싶었던 것이다.

시내에 방 한 칸을 얻어 그럭저럭 살고 있는 그녀 내외는 몸이 아프거나 집안에 복잡한 사정에 생기면 나를 찾아왔다. 그때마다 그녀의 어린 딸은 나를 ‘핫바지!(할아버지), 핫바지!’ 하고 소리쳐 불렀다. 하지만 소녀시절 그녀가 나를 ‘아빠’라고 부를 때와 똑같이 내 마음엔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그날은 병원 수녀님과 오랜만에 점심약속이 있었다. 오전 진료를 끝내고 약속 시간에 맞춰 가운을 벗고 나가려고 서둘러 내 연구실에 올라갔다. 그런데 그녀와 딸애가 마치 ‘도둑처럼’ 내 연구실에 앉아서 기다리다가 나를 보자 ‘어머, 아빠!’ ‘할아버지!’ 하며 반가이 불렀다. 하지만 나는 왠지 짜증이 났다. 마음을 달래며 어디 아픈 데 업냐고 물었더니 며칠 전부터 옆구리가 계속 결린다고 했다. 청진기를 꺼내 진찰해 보고 방사선과에 데리고 가 가슴사진을 찍었다. 그런 뒤 그녀와 아이를 데리고 약속 장소에 갔다. 수녀님과 함께 점심을 먹고 다시 병원에 와서 가슴사진을 보니 다행히 이상은 없었다. 손녀(?)에게 과자 한 봉지를 사서 들려주고, 적지만 교통비도 주어서 모녀를 집으로 돌려 보냈다.

그랬건만 어쩐지 내 마음에는 기쁨과 보람보다 착잡한 죄책감이 가득 차 올랐다. 내게도 결혼시킨 딸이 있는데, 그 애들 내외에게 느끼는 감정과는 너무나 큰 괴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보잘것없는 한 사람에게 잘해 준 것이 곧 나에게 해준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지만 아직도 내게는 요원한 일처럼 느껴졌다. 누군가를 친딸, 친손녀처럼 사랑한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또다시 아이를 낳고 싶다고 이야기하는 그녀를 나는 강하게 질책하고 더 이상 임신하면 큰일이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그녀는 고집스럽게 세 번째 임신을 했다. 아니나 다를까, 임신 2개월도 되기 전에 출혈이 보여 다시 병원에 입원시켰다. 한 달간 안정을 취했더니 출혈은 수그러들었으나 장기간 입원한 끝에 어렵게 어렵게 둘째 딸을 조기분만 했다.

신생아실 인큐베이터에서 지낸 둘째 아이가 벌써 고등학교 3학년이다. 인간의 생명은 보살피기만 하면 성장하는 신비임이 분명하다. 얼마 전에도 둘째가 장이 안 좋다고 전화가 와서, 이내 수양딸 집을 방문해 장 검사를 한번 해보자고 약속하고 돌아왔다. 이제는 남편이 직장도 있고 수양딸도 당뇨병 약을 먹기는 하지만 그런대로 지내고 있으니 다행이다. 언제 응급 콜이 올지 항상 조심스러우면서도 하느님께 이 딸도 행복하도록 기도 드린다. 인간의 인연은 참으로 묘하다.

천사처럼 미소 짓던 할머니! 부족한 제가 따님의 보호자가 되어 이제껏 보살피고 있으니 천국에서 걱정 놓으시고 편안히 계십시오, 저희를 위해 기도해 주시면서.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있으며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1요한 4,16)

 

 

 

 

찰나와 영원

 

마지막 한마디

전주 근교 시골에 사는 열심한 교우를 알고 지낸 지 괘 오래되었다. 어느 날 그 교우가 같은 마을에 사는 오십 대 남자 분을 병원으로 데려왔다. 홀로 된 어머니를 모시고 아내와 외아들과 단란한 가정을 꾸린 여유 있는 부농인데, 까닭 없이 몹시 피곤해한다고 했다. 여기저기 아프다 하니 종합검진을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했다.

겉으로 볼 때 당장 큰 병은 아닌 것 같아 그러시라 하고도 아무 걱정도 하지 않았다. 일주일 후 교우는 친구와 부인을 대동하고 검진결과를 확인하러 다시 병원에 왔다. 결과를 보고 우리는 덜컥 놀랐다. 간에서 큰 암 덩어리가 발견된 것이다. 종양이 어떤 종류인지, 앞으로 무슨 대책을 세워야 할지 판단하기 위해 내과에 입원시키고 정밀검진에 들어갔다. 결과는 간내 담도암, 수술 불가능 판정이 났다. 항암제로도 별 효과를 기대할 수 없는 악성 종양이었다. 요즘 같으면 간 이식을 고려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잔잔하던 가정에 세찬 풍파가 몰아친 가운데 환자의 병은 황달로 인해 두 눈이 노랗게 물들 정도로 하루하루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그래도 두면 얼마 못 살 것 같은데 속 시원한 치료방법이 없었다. 연로하신 어머니는 물론 부인과 외아들은 환자를 살릴 방법이 없겠냐며 애절하게 매달렸다. 나라고 무슨 만족스러운 답변이 있을 리 없었다.

가족들 모두 경황없어 어찌 할 줄 모르는데, 정장 환자 본인은 아무 말 없이 의료진의 지시만 충실히 따랐다. 그렇게 한 달여 입원기간이 지나는 동안 날로 상태가 나빠져 음식도 거의 못 드시고 힘겨워하셨다. 짙은 황달을 빼내기 위해 담도에 비닐관을 꽂고 담즙을 몸 밖으로 빼내는 수술을 했다. 비닐관 삽입부위가 안정되면 퇴원한 뒤 집에서 요양하는 것 밖에 더 해드릴 수 있는 게 없다고 통보도 했다. 아무 희망도 없이 환자는 일주일 후면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어느 날 병실 회진을 마치자 부인이 복도로 나를 따라 나왔다. 남편이 아내인 자신을 물론 어머니나 아들한테까지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는 것이다. 뭐 먹고 싶은 게 있냐고 물어도 묵묵부답, 하루 종일 단 한 마디도 없다고 했다. 다만 의사들이 회진하는 동안에는 밝게 웃고 묻는 말에 또박또박 대답도 하니 가족으로서 매우 초조하고 답답한 모양이었다.

부인의 말을 들은 뒤 회진할 때마다 환자분 성품을 유심히 살폈다. 묻는 말에 답하는 어조나 표정, 또 내용으로 보아 천성이 아주 착하고 성실한 부인 것 같았다. 완치될 가능성이 없는 채 퇴원할 분의 육체적-심리적 부담을 덜어드리는 완화 의료 차원에서 나는 천주교 신앙을 권했다. 환자분이 선뜻 받아들여 교리를 가르치고, 퇴원 전에 병원 수녀님께서 사도 요한이라는 본명으로 대세를 베푸셨다. 세례식 때 내가 대부를 자청하자 환자분은 크게 만족해하며 스스럼없이 나를 대부라고 불렀다.

아무리 말을 시켜도 한마디도 없던 환자가 선뜻 입을 열어 나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보고 가족들은 크게 고무됐다. 그래서인지 회진을 할 때마다 옆에 있던 가족들은 나를 끌어 들이며 대화를 유도했다.

“선생님만 오시면 이이가 말도 하고 웃으니 참 좋네요. 여보, 대부님이 그렇게도 좋아요?”

환자분은 허허허 웃으며 그렇다고 답했다. 회진할 때마다 나도 일부러 말을 걸었다.

“요한 대자님, 오늘은 상태가 좋으시군요. 힘내세요. 그리고 억지로라도 음식을 조금씩 드세요. 소화가 안 되시면 제가 좋은 소화제를 드릴게요.”

“네, 그러지요. 대부님, 감사합니다.”

환자는 사십여 일간의 병원생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갔다. 이후 나는 서너 차례 그분 집에 다녀왔다. 시골에서 대학병원까지 환자가 오려면 쇠진한 기력에 거추장스런 비닐주머니와 링거 병까지 달고 움직여야 한다. 내가 왕진 가서 소독하고 링거 병도 갈아주면 여려 가지로 편하고, 환자와 가족의 만족도도 높았다.

간단한 진료를 마치고 나면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말 수 적어 과묵한 분이지만 성품을 더할 수 없이 진솔한 분이었다. 함께 기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느 날 왕진을 갔는데 환자분은 입이 다 타서 거의 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힘겨워하셨다. 그 며칠 후 조용히 운명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얼마 뒤 환자의 친구인 교우 분이 내게 와서 사도 요한 씨 임종을 지켜봤다면서 꼭 전해 줄 말이 있다고 했다.

환자가 마지막인 듯 숨을 몰아 쉬자 가족들이 울부짖으며 다그쳤다고 한다. 여보, 아들아, 아버지! 제발 무슨 말이라도 한마디만 남기고 좋은 곳으로 가세요.’ 가족들의 눈물 어린 호소에 환자가 바싹 마른 혀를 다셨다. 드디어 무슨 말을 하려나 보다, 온 가족이 그의 얼굴에 귀를 가져다 댔다. 그러자 환자가 모기만 한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대부님께 감사하다고 전해줘요.”

세상에, 나는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환자분과 내가 알고 지낸 것은 겨우 두 달이다. 회진할 때 가끔 만났고, 영세할 때 옆에 있었고, 자가 치료를 도와주고자 몇 차례 집을 방문한 게 전부다. 가족들한테 묵언으로 일관했던 분이 마지막 순간에 어떻게 나를 떠올렸을까? 서로 깊이 신뢰하는 믿음 안에서만 볼 수 있는 사랑과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짧은 기간이지만 믿음으로 변화되신 후 주님 곁으로 가신 요한 대자님. 천국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소서! 아멘.

 

 

 

영원한 인연

가톨릭 신자들은 ‘용서’라는 말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듣는다. 성전에서, 집안 기도 상에서 늘 뵙는 십자가 예수님이 그 모범이시다. 하지만 머릿속에 든 용서가 마음으로 내려와 실제로 몸을 움직이게 되기까지는 얼마나 힘이 드는지, 용서라는 힘든 고개를 넘어본 이들은 알고도 남을 것이다.

사람이 사는 동안 옷깃만 스쳐도 인연, 대학병원 의사로 살면서 수없이 만은 제자를 길러냈다. 그 중 지금까지 끈끈한 사랑의 인연을 이어가는 제자들이 몇 있다. 다들 내게 아주 힘든 시련과 용서의 체험을 안겨준 주인공들이다.

내가 병원 소화기내과 과장으로 있을 때다. 평탄하던 진료 현장에 엄청난 사건이 터졌다. 육십 대 할아버지가 우리 의료진의 분명한 잘못으로 갑자기 사망하신 것이다. 흥분한 가족들은 항의 또 항의하던 나머지 나를 감금했다. 주치의였던 내 제자 역시 같은 일을 당했다. 약 2주 동안 병원 업무가 거의 마비되다시피 한 큰 의료사고였다. 벌써 오랜 시간이 지난 일이지만 다시금 고인의 가족들에게 깊은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

자동적으로 형사 입건된 주치의는 경찰 조사를 받은 뒤 검찰로 인계됐다. 직접적인 원인 제공자는 아니어도 현직 과장인 나 역시 함께 입건 돼 조사를 받았다. 대한민국 법절차에 따라 시시비비를 가리면서 제자는 커다란 어려움에 직면했다. 우선 피해자 가족에게 민사상으로 도리를 다해야 하고, 형사상 책임도 져야 했다. 특히 형사상 처벌 수위에 따라 병원에서 수련을 계속할 수 있을지도 가려질 판이었다.

나 역시 형사 입건되는 시련을 겪으면서 내 마음도 복잡했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이번 일만 없었다면 여러 모로 유능하고 성실한 의사인 제자가 어떻게든 수련을 계속하게 할 묘수가 없을까?’ 하는 것이었다.

고민하고 또 고민하면서 예수님께 상의를 드렸다. ‘주님, 어떻게 살릴 방법이 없을까요?’ 줄기차게 기도하며 매달리던 중 문득 영감이 떠올랐다. 먼저 보상에 들어가는 경제적 부담 문제는 본인 스스로 책임지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에 보태 현직 교수들은 물론이요 내과 수련을 거쳐 간 모든 교실원이 합심해서 지원하면 해결이 좀 더 쉬울 것 같았다. 다음으로 수련 가능 여부는 법의 판결에 따라 병원 당국에 선처를 구하면 가능성이 전혀 없지는 않으리라 생각됐다.

다행히도 시간이 흐르면서 유족들의 격한 감정이 좀 가라 앉아 양측의 민사상 보상에 합의가 이뤄졌다. 이에 교수들과 내과에서 수련하는 동료 의사들을 중심으로 개업 중인 선배들까지 다 자기 일처럼 여기며 지갑을 열어 주치의의 경제적 부담을 조금이나마 덜어줬다.

‘결과적으로는 의료사고지만 실수로 빚어진 일이니 기소유예 조치가 떨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여러 상황을 참작해 관대한 처벌을 내려주십사고 검찰에 탄원서를 올려가며 최고 수장의 관대한 아량을 빌었다. 이런 노력이 좋게 작용했는지 정말 관대하게도 불기소 처분이 떨어졌다.

이제 마지막 남은 관문은 병원의 징계 수위다. 징계위원을 맡은 교수들을 일일이 찾아 다니며 아까운 젊은이 하나 살려 부자고 간곡히 부탁 드렸다. 비밀투표 끝에 두 명을 제외한 전원이 경징계에 표를 던졌다. 이로써 주치의는 급여가 깎이는 감봉 처리만 받고 극적으로 수련을 계속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 전문의로 다복하게 잘 살고 있는 그 제자는 해마다 명절이면 나를 못 잊고 찾아온다. 내가 병원장일 때 험하게 후배수련을 시키다가 인턴들의 항의 농성을 불러온 제자, 그리고 간호사들의 스트라이크를 일으킨 제자도 명절 단골손님이다.

내가 제자를 위해 예수님처럼 목숨을 바친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병원장 자리나, 형사 입건돼 불편한 내 처지에만 연연했다면 제자들과 이처럼 영원한 인연을 맺지는 못했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보니, 그리고 신앙 안에서 헤아려 볼 때 고난이 귀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참으로 그르침 없는 지리다.

 

 

 

죽음 앞에서 부르는 영가와 탄성

나는 의사로서 히포크라테스 선서가 가르쳐 준 환자에 대한 의사의 자세 중에서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몸소 지켜온 게 있다. 그것은 환자가 사망할 때 가능한 한 의사가 임종을 지켜보고, 사망하면 그 시각을 환자 차트에 정확히 기록한 뒤 서명하는 일이다. 후학들에게도 이 점을 강조하며 가르쳐 왔다.

그런데 호스피스 완화 의료 환자를 돌보면서, 언제부터인가 환가가 사망하는 마지막 순간을 예리하게 관찰하면서 임종하는 분의 ‘최후의 숨’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게 되었다. 임종하는 분들은 대부분 숨을 내뱉으며 온몸에 가냘픈 경련을 일으키며 운명하신다.

그런데 신앙이 신실한 소수의 사람들에게서 임종하기 직전 한국말이 아닌 이상한 언어로 헛소리 같은 것을 말하다가 숨을 거두는 모습을 드물게 만난다. 그런 경우를 소개한다.

 

 

첫 번째 사례는 스물일곱 나이로 소천하신 믿음 깊은 여인이다. 임신 중에 걸린 감기가 급성 폐렴으로 진행되어 입원한 지 십사 일 만에 중환자실에서 운명하셨다. 남편이 쓴 글에 그분의 최후의 모습이 담겨 있다.

 

날마다 하느님의 크신 은혜와 성모님의 도우심에 감사와 찬미를 드리고 의료진과 이웃들에게 감사하며 함께 성가를 부르고 성경을 봉독했다. 아내를 위한 생미사가 전동성당에서 봉헌되는 그 시간에 기도를 하던 아내는 갑자기 소리를 치듯 말했다.

“저기 봐요, 저 하늘의 십자가를…! 예수님과 성모님이 내려다 보시네요. 아, 층층대가 하늘에서 땅 위까지 내려왔어요.”

이어서 아내는 하늘을 우러러보며 나직하게 노래를 불렀다.

“라라라라, 르르르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지만 한참 동안 계속되는 그 노래는 무척이나 신비로웠고, 아내의 얼굴에는 평화의 빛이 넘치고 있었다. 그 후 아내는 숨을 거뒀다. 숨진 아내의 얼굴은 무척이나 곱고 아름다웠으며 입가에는 밝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라라라라, 르르르르…’ 신비로운 이 노래는 심령 심령의 영가 영가 라는 것을 나는 성령쇄신봉사회 일을 하면서 알게 되었다. 평소 성령운동과 전혀 관계가 없었더라도, 가난과 역경 속에서도 오로지 신실하게 믿음을 지키며 살아온 분의 마지막 모습에서 영가를 관찰할 수 있었다. 내 생각에 이런 분의 영가는 이승에서 놀라운 세계로의 입소가 확정되는 순간에 이루어지는, 죽음을 이긴 승리의 찬가가 아닐까 한다. 창세기에 이런 말씀이 있다.

 

(야곱이) 꿈을 꾸었다. 그는 꿈에 땅에서 하늘에 닿는 층계가 있고 그 층계를 하느님의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고 있었는데.(창세 28,12)

 

 

 

두 번째 사례는 고등학교 교사의 부인으로 두 남매를 남기고 운명하신 분이다. 자궁암과 위암 증세가 심해 가끔 돌연히 새빨간 피를 입으로 토하셨는데, 그토록 심각한 상황임에도 깔깔 웃고 밝게 이야기하며 굳은 믿음으로 명랑하게 병원 생활을 하셨다.

하루는 그분이 많은 양의 붉은 피를 토한 뒤 얼굴을 깨끗이 씻고 머리도 빗으며 예쁘게 단장을 하셨다. 마침 인보성체외 병원 수녀님이 오셨다가 그 모습을 보고 농담을 건네셨다.

“자매님, 죽음을 앞두고 예쁘게 단장하면 뭐해?”

부인은 정색을 하며 말했다.

“아니에요, 수녀님. 예뻐야 해요, 예뻐야 해요.”

“왜 예뻐야 할까?”

수녀님이 되묻자 그분이 답했다.

“주님을 만나면 예쁘게 보여야 해요.”

많은 피를 토해 창백해진 얼굴을 정성껏 단장하던 자매님은 그날 임종을 맞았다. 다음 날, 남편은 아내가 한참 동안 알 수 없는 외국어로 노래를 계속 부른 후 조용히 숨을 거뒀다고 신부님과 내게 전해 주었다.

 

 

세 번째 사례는 영세한 지 일 년 밖에 안 됐지만 레지오 단원으로 활동하며 열심히 살다가 담관암 말기로 온몸이 노랗게 황달로 물들어 소천하신 분이다.

이분 신심이 대단했다. 친정언니들이 열심한 개신교 신자여서 동생을 위해 할렐루야 기도원에 가자고 그렇게 설득하고 졸라도 끝까지 ‘언니들은 언니들 길을 가세요, 나는 천주교가 좋아 이 길을 갈게요.’ 라고 옹골차게 천주교 신앙을 지켰다. 그리고 초등학교 교사인 남편에게는 새끼손가락을 내밀며 자기가 죽으면 꼭 재혼하라고 약속과 다짐까지 받은 독특한 분이기도 했다.

임종이 다가오면 ‘예수 마리아, 예수 마리아 아멘!’을 계속하라고 대모님이 가르쳐 줬나 보다. 환자는 대모의 가르침대로 충실히 기도를 연습하며 임종을 준비했다. 새벽에 아내가 세상 뜨는 모습을 지켜본 남편은 한국말이 아닌 이상헌 언어를 한참이나 하더니 곧 숨졌다고 전해 주었다. 그리고 한쪽 손에 종이쪽지를 쥔 채 운명했는데, 쪽지를 펴보니 세 가지 당부가 적혀 있었다고 했다.

‘여보, 꼭 재혼하세요. 내 통장에 있는 돈은 장애인을 위해 헌금해 주세요. 아이들에게 반드시 신앙교육을 시켜주세요.’

 

 

네 번째 사례는 우리 병원에서 돌아가신, 마음 착하고 믿음 충만했던 자매님이다. 남편 직장이 있는 대전에서 살던 중 뜻하지 않게 간암에 걸려 대전은 물론 서울의 큰 병원에서 치료하다가, 소문을 듣고 나도 한번 만나보고자 우리 병원으로 오셨다. 이미 치료가 불가능할 정도로 증세가 악화되어 우리 병원에서 더 해드릴 수 있는 게 무엇일까 고민이 되었다. 일단 입원을 시키고 나와 병원 수년님이 합심해 기도를 바쳐드리자고 의견을 모았다.

내과병동 2인실에 머물면서 환자는 내가 회진하는 시간을 무척이나 기다렸다. 이분을 위해 정성 어린 기도를 두어 차례 바쳐드렸다. 기도를 받고 나더니 환자는 기쁨과 평화가 충만하다고 했다. 통증이 심해 두 시간마다 진통제를 맞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던 분이었는데, 진통제를 맞지 않고도 일주일 동안이나 잘 견뎌냈다. 참 신비스런 일이었다.

통증이 줄고 컨디션이 좋아지자 전북 장수의 어느 공소에 가 보기를 소원하셨다. 거기 계신 성모님께 기도 드리면 치유가 일어난다는 어떤 사람의 말을 들은 것이다. 말렸으나 바람 쐴 겸 한번 다녀오겠다고 해서 남편과 함께 가도록 허락했다. 그러나 거기에 다녀온 후 병세가 급속도로 악화됐다. 토요일 오전에 회진하며 기도를 해드리는데 나를 겨우 알아볼 정도였다. 그날 오후 늦은 시각, 그분은 병실에서 조용히, 그리고 평안히 운명하셨다.

자매님의 마지막 순간을 남편이 전해 주었다. 의식이 없는 상태로 서너 시간 지내던 그녀가 갑자기 ‘아버지, 어머니, 주님!’을 연속해서 부르기 시작하더니 라틴어 같은 말로 한참 동안 이상한 노래를 하다가 평안히 숨을 거뒀다고 했다.

하루 전에 유언을 남겼다고도 했다. 집은 대전이지만 그리 가지 말고 여기 병원에서 운명하도록 해 달라, 전주교구 성당 산에 묻어 달라, 눈과 장기를 기증해 달라고. 남편의 반대로 장기기증은 이뤄지지 못했다.

나와 생면부지이던 남편은 집사람이 나를 만나고 여기 병원에 입원한 뒤로 너무나 평안하게 지내다가 운명했다고, 이 은혜를 영원히 잊지 않겠다고 했다. 아울러 자신은 성당에 다니지 않았는데 이제 열심히 나가겠다고 다짐하며 몇 번이나 감사를 표했다.

 

 

다섯 번째 사례는 나와 형제처럼 가까이 지내는 데레사 자매 동생의 죽음이다. 오십 대의 동생은 평소 신실하고 독실한 천주교 신앙인으로 살았는데, 어려서부터 마음이 너무나 착했다. 비신자 가정으로 시집간 동생은 성당에 다니는 것을 시어머니와 시누이가 싫어하며 적극적으로 말리자 고통 중에서도 신앙을 쉬고 살았다.

남편은 해외 근로자로 오랫동안 타국에 나가 있어 부부가 떨어져 지냈다. 동생은 외국에 있는 남편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내어 주말만이라도 성당에 꼭 다니고 싶은 마음을 전했다.

측은하게 생각한 남편이 주말만은 아내가 성당에 가게 해 달라고 시어머니에게 편지를 보내주었다. 비로소 동생은 다시 성당을 다니게 되었고 얼마 후 시누이도 교리교육을 받고 신자가 되었다고 한다.

순진한 동생은 치질을 고치고자 어느 돌팔이 의사에게 항문에 무슨 주사를 맞았다고 한다. 그러나 주사를 맞은 뒤 온몸에 열이 나면서 수포가 생겼다. 출혈까지 생겨 죽게 되었으면서도 동생은 돌팔이를 원망하거나 고발하지 말라고 했다. 만약에 신랑이 알면 주사 놓은 사람을 고발해 당장 죽일 것이라면서, 끝까지 남편에게 그 일을 숨기고 돌팔이를 용서하며 운명했다고 한다.

데레사 자매가 동생의 임종을 지켜봤는데, 마지막 순간이 되자 거칠게 숨을 들이마시더니 큰 소리로 환성을 올렸다고 한다.

“저기 성모님이 천사들 손을 잡고 오시네! 천상에는 장미꽃이 만발해 있고 꽃들이 살아서 움직이고 있어. 새파란 들녘에 큰 배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천사가 나보고 그 배나무 잎 하나를 따라고 해서 송구스러워하며 땄어….”

그러고는 조용힌 운명했다고 한다. 그 잎이 동생분의 천국 입장 티켓은 아닐까?

 

 

이 다섯 분은 공통적으로 누구나 두려워하는 죽음을 눈 앞에 두고도 전혀 두려움 없이 열렬한 믿음으로 시종일관했다. 그 결과 자신의 영혼이 지상에서 꺼져갈 때 어떤 황홀경 Euphoria을 맞고, 자신도 모르게 신비경 속에서 본 내용을 외친 것이다. 나는 이 모든 것이, 믿음이 신실한 사람이 영적인 눈으로만 볼 수 있는 것을 볼 때 일어나는 현상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여기 서 있는 사람들 중에는 죽기 전에 하느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오는 것을 볼 사람들도 있다.” (마르 9,1)

 

“정말 잘 들어두어라. 너희는 하늘이 열려 있는 것과 하느님의 천사들이 하늘과 사람의 아들 사이를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요한 1, 51)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부한 생명력으로 여러분 안에 살아 있기를 빕니다. 여러분은 모든 지혜를 다하여 서로 가르치고 충고하십시오. 그리고 성시와 찬송가와 영가를 부르며 감사에 넘치는 진정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찬양하십시오.(콜로 3,16)

 

 

 

 

 

5장 믿음 안에서

 

 

호사다마와 예루살렘의 영광

 

뜨거운 마음으로

1990년대 후반 전주교구 성령쇄신봉사회는 불이 붙은 것처럼 열정적으로 움직였다. 봉사자들 모두 성령님이 함께해 주시는 뜨거운 체험을 하면서 각 본당에서 6일 단기 성령세미나를 잇따라 가졌다. 한 해  동안 적게는 열다섯 개, 많게는 스물다섯 개 본당에서 집회를 열었다. 그러노라니 이십여 명 봉사자들의 노고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회장으로서 어떻게 그분들에게 보답할까 궁리하다가 이스라엘 성지순례라는 큰 계획을 세웠다. 봉사자들 대부분은 경제사정도 좋지 않고 나이도 꽤 드셨다. 그런 분들이 평생에 단 한 번, 이스라엘과 이집트 성지를 순례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느님의 구세사 현장과 예수님이 살아생전 누비시던 곳들을 직접 본다면 더할 나위 없이 값진 선물이 되리라 여겨졌다.

언제 운을 떼나, 기회를 보는 중에 갑작스레 IMF 경제위기가 닥쳤다. 국가신용도가 떨어지면서 화폐와 주식 가치가 폭락하고 금융기관들이 망해 나갔다. 기업들도 줄줄이 문을 닫아 실업자가 엄청나게 늘어나면서 빚에 내몰리는 집도 많았다. 하지만 나라 경제가 좋지 않다고 순례 계획을 미룬다면 그 동안 숱한 애를 쓰며 정을 쌓아온 봉사자들이 함께 성지에 가 볼 기회는 영영 없을 것 같았다. 매우 조심스레 지도신부님에게 얘기를 꺼냈다.

의외로 신부님은 찬성하셨다. 봉사자들도 대환영했다. 일인당 경비를 줄이려면 사람이 많을수록 좋다. 봉사자들은 조금 덜 부담하고 본당 일반신자는 조금 더 부담하도록 액수를 조정하고 희망자를 찾았다. 경제가 좋지 않은 상황인데도 14박 15일 일정에 기다렸다는 듯 사람들이 신청을 해 서른여덟 명의 대규모 순례단이 꾸려졌다.

그 다음부터는 일사천리로 밀어붙였다. 인보성체수도회 수녀님한테 여행사 사장을 소개받아 전화로 일정을 의논하고, 신청자들에게서 돈을 걷었다. ‘전주서 버스를 대절해 공항까지 타고 오면 서울서 값을 치르겠다, 몇 시까지는 꼭 오셔야 한다, 뭐 뭐는 꼭 챙겨라…’ 여행사와 복잡다단한 의논을 마치고 출발 이틀 전날 팔천여 만원을 송금했다.

오랫동안 꿈꿔온 순례이니만큼 가방을 싸면서 들뜬 기분으로 가슴 설레었다면 얼마나 좋았으랴. 조그맣게 시작된 의문이 점점 커지면서 나는 그만 심한 걱정과 공포에 사로잡혔다. 여행사는 이름을 처음 들어보는 낯선 회사였다. 아마도 소규모일 것이다. 더욱이 사장하고는 전화만 했을 뿐 얼굴도 모르는 처지다. IMF 파동 직후라 여기저기 회사들이 부도를 내고 돈만 챙기고 달아나 버리는 여행사 소식도 뉴스에 종종 등장했다. 내가 너무 경솔하게 얼굴도 모르는 사람한테 거액을 송금하지 않았나 싶어 밤새도록 잠이 오지 않았다.

1998년 1월 초, 새벽 여섯 시에 전동성당에서 서른여덟 명을 태운 버스가 당시 국제선이 뜨던 김포공항을 향해 출발했다. 한데 떠난 지 얼마 안 돼 갑자기 눈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도로가 수북한 눈으로 덮여 전주에서 논산까지 시속 30~40킬로미터로 느림보 운행을 해야만 했다.

슬금슬금 시계를 보던 버스 기사님이 제시간에 공항에 닿지 못할 것 같다며 걱정을 했다. 총책임자로서 맨 앞자리에 앉은 나는 더욱 안절부절못했다. ‘비행기 시간에 못 가면 어쩌나, 만에 하나 여행사 사장이 공항에 안 나타나면 어떻게 뒷수습을 해야 하나….’ 불안을 떨쳐내려 묵주를 손에서 놓지 못했다.

다행히 논산부터는 도로에 눈이 얼마 없었다. 속도를 올리기 시작한 기사님은 휴게소도 들르지 않고 공항으로 직행했다. 가까스로 약속시간을 맞췄고 여행사 사장과도 탈 없이 만났다. 안도의 한숨 뒤 탑승 수속이 시작됐다. 숫자도 많거니와 일행 중엔 해외여행이 처음인 할머니들이 꽤 계셨다. 짐 부치고 탑승권 받고 신분증 보여주며 보안구역을 통과해 출국심사를 마치기까지 여기저기서 우왕좌왕 했다.

슬슬 머리가 무거워졌다. 이 많은 사람을 한 공동체로 이끌고 다니는 게 여간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채 엄청난 일을 벌인 것 같았다.

서른여덟 명 전원이 비행기 탑승구 앞에서 대기하고 있을 때였다. 익산에서 오신 어떤 분이 머리가 찢어지게 아프다면서 여행을 취소하고 집으로 돌아가면 안 되겠냐고 했다. 거기서 취소를 하면 얼마나 문제가 복잡해지는지 모르시는 것 같았다. 익산까지는 또 어떻게 내려가시려고? 어이가 없어 내가 멍하니 쳐다 만 보자 무슨 약이 없냐고 물었다. 혹 혈압이 올랐나 싶어 맥을 짚어보니 괜찮은 것 같아 준비했던 진정제와 두통약을 드렸다. 비행기에 오르고 몇 시간 뒤, 두통을 호소하던 자매님 상태가 좀 나아졌다.

비로소 안심을 하고 설핏 잠이 들었다. 어젯밤에 설친 잠을 보충하고자 했으나 금세 다시 깨어나야 했다. 감기 기운이 있다던 다른 자매가 오한과 두통이 난다고 했다. 체온계로 열을 재니 39도였다. 이런 고열 환자를 데리고 과연 2주 동안 여행 할 수 있을까? 바짝 긴장이 됐다. 떠나기 전에 누가 선물해준 미제 해열제 중에서 큰 알을 하나 꺼내주었다.

그럭저럭 암스테르담 공항에 닿은 뒤 카이로행 비행기로 갈아탔다. 경비를 아끼려고 요금이 싼 항공사를 택한 것이다. 떠난 지 이틀 만에 카이로에 내려 호텔에 짐을 풀었다. 잠시 침대에 눕자 ‘아이고!’ 소리가 절로 나왔다. 하지만 그 정도 긴장은 예고편에 불과했다.

 

 

 

만약의 사태

첫 일정으로 호텔 밖 눈에 안 띄는 곳에서 순례길의 안전을 기원하며 시사를 드렸다. 이집트는 이슬람 국가이므로 미사가 발각되면 안 되기에 조용히 봉헌했다. 영성체 후 묵상을 하는데 사방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그때가 마침 라마단 금식기간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도 기도하고 그들도 기도하지만 확성기 소리가 너무 크니 귀에 거슬렸다.

저녁을 먹고 좀 쉬는데 연락이 왔다. 감기를 앓던 자매 몸이 불덩이 같고 기침이 심해 밥을 전혀 못 먹었다는 것이다. 열을 재니 40도까지 치솟았다. 그렇게 열이 높으면 경련이 나면서 자칫 돌연사할 수도 있다. 여러 가지 준비해 간 약 중에서 퀴놀론계 항생제와 미제 해열제를 같이 먹였다. 그래도 열은 꿈쩍 안 했다. 하는 수 없이 덩치 큰 외국인들한테도 조심스러운 양인 두 알의 해열제를 한꺼번에 먹였다. 하루 여섯 알을 계속 항생제와 같이 먹으면서 다음 날 카이로 시내 관광은 빠지고 호텔에서 쉬도록 했다. 하루 푹 쉬고 나더니 열이 38도 정도로 조금 내려갔다.

넷째 날, 복잡한 카이로 시내를 빠져 나와 이스라엘로 향해가는 길목에서 먼저 홍해를 만났다. 상상은 했지만 말 그대로 ‘바다’인 홍해와 마주치자 신비감이 몰려왔다. ‘푸른 물결 출렁이는 저 바다에 길을 내시다니…’ 이제까지의 내 신앙 여정도 주님께서 젖은 바다에 내주신 마른 길을 걸어온 것이나 다름없을 터. 파스카 신비에 깊이 머물고 싶었으나 일행을 이끌자니 차분할 틈이 없었다.

이윽고 버스는 황량한 광야를 달리기 시작했다. 검붉고 험한 바위산과 다양한 색깔의 모래가 끝없이 펼쳐지는, 생명체라고는 보이지 않는 시나이 광야를 한없이 달려 씬 광야에 이르렀다. 이스라엘 백성이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던 곳, 광야의 의미를 돼 새기며 미사를 봉헌하고 다시 버스를 달렸다.

저녁 여섯 시쯤 시나이 산 밑에 있는 모텔에 도착했다. 간단히 저녁을 때운 뒤 내일은 새벽 두 시부터 야간 산행에 나서니 일찍 잠자리에 들라고 일행을 채근했다. 나도 피곤한 몸을 막 뉘었는데 밖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누군가가 급히 내 방문을 두드렸다. 그 자매 열이 다시 올랐나? 응급 구명가방을 챙겨 들고 방을 나섰다.

열이 나던 자매 방으로 달려갔는데 아픈 사람은 다른 자매였다. 목욕탕에서 비누칠하며 샤워하다가 미끄러운 바닥에 넘어지면서 왼손을 짚었는데, 손목이 어떻게 됐는지 붓고 아프다며 난리였다. 나는 골절에는 문외한이다. 하지만 의사는 나밖에 없는데, 병원에 가려면 차로 무려 여덟 시간이나 가야 한다고 한다.

아파하는 자매를 진정시키며 손목을 만져보았다. 부어 오른 곳에서 뼈 소리가 났다. 골절이 분명했다. 불현듯 카이로 시내 관광을 할 때 가이드가 코끼리 뿔로 만든 15센티미터 길이 구두주걱을 선물로 준 게 생각났다. 혹시 외상이 생길지도 몰라 정형외과에서 쓰는 탄력붕대도 가방에 갖고 다녔다. 궁하면 통한다고, 천만다행 지혜가 떠올랐다. 두 사람한테 다친 자매를 양쪽에서 붙들라고 하고 나는 다친 말을 잡아당겼다. 마취도 없이 잡아당겨 골절 부위에 맞췄더니 뿌드득 소리가 나면서 뼈가 이어졌다.

“이이고오~, 나 죽네에~!”

자매는 아파 죽는다고 비명을 지르며 얼굴이 새하얘졌다. 신속하게 코끼리 뿔 구두주걱 두 개를 골절 부위 앞뒤에 부목으로 대고 탄력붕대를 칭칭 감았다. 다른 붕대 하나로는 목걸이를 만들어 다친 팔을 걸치게 했다. 그만하면 꽤 괜찮은 임시 깁스가 됐다. 통증으로 괴로워하는 자매에게 진통제 한 알을 먹이자 잠시 후 좀 견딜 만하다고 했다. 팔 다친 자매와 열나는 자매는 산행을 쉬도록 하고 내 방으로 왔다.

자는 둥 마는 둥하고 새벽 두 시에 일어나 네 시간 동안 깜깜한 산길을 올라갔다. 모세가 하느님의 현현을 기다리던 시나이 산 정상에 오르니 해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곳 해돋이는 정말로 장관이었다. 꼭 천국을 체험하는 것 같았다. 한라산보다 높은 2,245미터 시나이 산 정상에서 새벽미사를 봉헌했다. 참으로 은혜로운 시간이었다. 다만 새벽 공기가 매우 차서 몸이 떨릴 정도로 추웠다.

미사를 마치고 가벼운 마음으로 여기저기 흩어져 구경하면서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어떤 자매가 입술이 파래지면서 갑자기 가슴을 움켜쥐고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얼른 살펴보니 심장의 근육에 이상이 생긴 협심증 증세가 틀림없었다. 그 자리에서 사망할 수도 있는 위급한 상황이었다.

주님은 어떻게 이런 것까지 미리 아시고 내게 협심증 구급약을 준비시키셨을까? 속으로 ‘야훼 이레!’ 외치며 메고 있던 배낭에서 순식간에 협심증 응급처치용 이소캣 스프레이를 꺼내 쓰러진 자매 혀 밑에다 연거푸 세 번을 쏘아댔다. 오 분쯤 지나자 아프다고 소리 지르던 자매의 통증이 슬그머니 사라졌다. 한숨을 돌리며 갖고 간 보온병에서 뜨거운 물을 따라주었다. 따뜻한 물로 몸을 덥히면 혈액순화에 도움이 된다. 혹여 심장이 다시 문제를 일으킬까 봐 산을 내려올 때는 그 자매를 내내 옆에 끼고 하산했다. 두 시간 동안 걸어내려 오는데 아무 일 없이 괜찮았다.

산 밑에는 아주 오래되고 유명한 성 카타리나 수도원이 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불이 붙어도 타지 않는 ‘모세의 떨기나무’가 있는 곳이다. 수많은 관광객이 수도원 앞에 줄을 선 채 문이 열리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이 수도원은 수도원의 필요에 따라 문을 연다고 했다. 보통 오전 열 시쯤 열어 두세 시간 개방하지만 아예 문을 열지 않는 날도 있다. 그런 날이면 아무리 오래 기다려도 허탕이다.

열 시쯤 하산을 마친 우리 일행도 대열 뒤에 줄을 섰다. 열한 시가 돼도 감감무소식이자 대다수가 그만 떠나자고 졸라댔다. 조금만 더 기다리자, 다시는 올 수 없는 곳이 아니냐고 다독이며 인내로 기다렸다. 마침내 열한 시 사십 분에 문이 열렸다. 너나없이 일제히 환호했다. 수천 년 전 모세의 떨기나무를 직접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도 보다니, 여행길의 고생과 피곤을 싹 씻어주고도 남는 감격이었다.

다시 버스를 타고 아일랏이라는 이스라엘의 항구도시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내일 오전에는 물에 누우면 몸이 둥둥 떠서 신문도 볼 수 있다는 사해를 구경한다. 그리고 오후에는 드디어 오매불망 꿈꾸고 희망하던 평화의 도시, 승리의 도시 예루살렘에 입성할 것이다.

 

 

소금물 호수

사해에 다다라 간단한 주의사항을 듣고 일행 가운데 스무 명쯤이 수영복으로 갈아입었다. 나이 드신 분들은 모래밭에 앉아 쉬면서 신기한 호수와 각양각색의 외국인들을 구경하셨다.

큰 수건 하나씩 챙겨 들고 첨벙첨벙 사해 물속으로 들어가면서 다들 어린아이가 된 듯 신나 했다. 나도 들어갔다. 허리를 구부리자 거짓말처럼 몸이 두둥실 물 위로 떠올랐다. 반쯤 누워 물 위를 둥둥 떠다니며 눈이 시릴 정도로 파란 하늘을 감상하고, 웃고 물장난도 치면서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이십 분쯤 재미나게 놀다가 샤워장에서 짠물을 씻어냈다.

막 옷을 입는데 한 봉사자가 큰일 냈다고 냅다 소리치며 달려왔다. “무슨 일인데 그래?” 쫓아가면서 물어봤으나 답을 기다릴 것도 없었다. 우리 봉사자 네 명이 물에 빠졌다가 건져졌는지 모래밭에 줄지어 누워 있고, 조용했던 백사장 안으로 앰뷸런스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달려오고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이냐 하면, 나처럼 반쯤 누워 둥둥 떠다니던 봉사자 한 명이 균형을 잃고 기우뚱 물속으로 빠져들자 옆에 있던 봉사자를 붙잡은 모양이다. 같이 가라앉던 봉사자가 또 옆 사람을 붙잡고, 그이 또한 옆 사람을 붙잡는 바람에 네 명이 한꺼번에 물에 빠져버렸다. 다행히 주변이 있던 분들이 황급히 달려들어 네 명 다 밖으로 건져냈다.

천만다행이다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물에 빠졌던 사람들은 ‘우웨억, 오요욕~’ 하며 모래밭에 구토를 해댔다. 소금물을 먹은 탓이다. 앰뷸런스에서 경찰이 내리더니 구급차가 달려온 까닭은 설명했다. 사해의 소금물은 26~33퍼센트로 농도가 매우 짙다. 그 물을 마셨으면 소화가 되니 별 탈 없지만 기도로 들어갔으면 큰일이란다. 허파가 부어 오르면서 폐기종이 생기면 대부분 사망한다고 했다. 죽은 사 死 에 바다 해 海, 영어로 데드 씨 Dead Sea라는 이름이 괜히 붙은 게 아니었다.

상황이 위급하니 빨리 가까운 병원으로 옮겨야 한다면서 경찰관은 토하는 사람들을 차에 실으려고 했다. 만약 병원으로 옮기지 않았는데 차후 무슨 일이 생기면 전적으로 자기들 책임이므로 당장 데리고 가야 한다면서.

‘경찰이 왜 우리한테 다가오지?’ 이상하게 여기던 봉사자들은 통역해 주는 사람의 말을 듣고 토할 때보다도 더 얼굴이 하얘졌다. 지금은 괜찮으니까 절대로 병원에 가지 않겠다면서 잔뜩 웅크렸다. 겁먹은 눈으로 고개를 가로젓는 봉사자들을 보며 경찰도 눈치를 챈 것 같았다. 누가 여기 책임자냐고 묻기에 내가 앞으로 나섰더니 사람들을 데리고 병원에 같이 가자고 했다.

하는 수 없이 내과 전문의라고 직업을 밝혔다. 그러자 작년에도 관광객이 이런 사고로 사망을 했다면서, 당신이 병원에 보내지 않겠으면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책임을 진다는 서류에 서명을 하라고 했다. 정말로 사망 사고라도 날까 덜컥 겁이 나서 봉사자들을 달랬다. 병원에 갔다 오라고, 우리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안심하고 다녀오라고. 하지만 그들은 절대로 가지 않겠다면 완강하게 버텼다.

참으로 난감했다. ‘지금은 괜찮지만 하루 이틀 지나 폐부종이 와서 사망하면 모든 책임이 내게로 돌아올 것 아닌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서 있지 경찰이 나를 연행하려고 했다. 그들이 말하는 내용을 다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당장 결단을 내리라는 독촉 같았다.

어쩔 수 없이 그 서류를 좀 찬찬히 보자고 했다. 경찰이 내민, 영어로 인쇄된 서류를 벌렁벌렁하는 가슴으로 읽어 내려갔다. 그렇게 시간은 자꾸 흐르고 일은 해결되지 않는 게 몹시 답답했던지 옆에 계시던 안 베다 신부님이 서류 좀 보자고 하시기에 넘겨드렸다. 그러자 신부님은 다 읽어보지도 않고 미처 말릴 틈도 없이 대문짝만 하게 사인을 해버리셨다.

서명된 서류를 받아 들자 이스라엘 경찰과 구급차는 돌아갔다. 봉사자 메 분을 포함해 일행은 다시 버스에 올랐다. 얼마 뒤 점심이 예약된 식당에 내렸다. 비상사태에 혼쭐이 난 뒤끝이라 선지 다들 밥을 먹으면서도 조용했다. 나는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얼마나 애가 탔는지 혀가 다 말라 침이 한 방울도 안 나왔다. 모래도 그런 모래가 없어 한 술도 못 떴다. 동행한 여행사 사장도, 유럽여행을 안내하면서 성지순례단을 꽤 이끌었지만 이렇게 사고가 많이 나는 팀은 처음 봤다면서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버스를 다시 타고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콜록콜록, 네 분의 기침소리가 들릴 때마다 내 애간장은 녹아 내리는 것 같았다. 예루살렘 시가지로 들어가기 직전에 병원이 있었다. 네 분 중 가장 기침이 심한 분을 데리고 가서 가슴사진을 찍고 혈액검사도 했다. 다행스럽게도 큰 문제는 없으니 약만 먹으라고 했다. 약을 타가지고 나와 기다리던 일행과 합류했다.

 

 

영원한 생명의 물

오후 네 시 사십 분쯤 드디어 예루살렘 성지에 서른여덟 명 전원이 입성했다. 다섯 시쯤에는 ‘최후의 만찬 성당’에 닿았다. 마침 거기에 대구대교구 신부님 두 분이 와 계셨다. 지도 신부님과 안 베다 신부님까지 네 분 신부님과 더불어 우리의 입성을 신고하는 미사를 봉헌했다. 주님께서 당신의 살과 피를 내주시며 성체성사를 세우신 곳에서 미사를 드리게 된데다, 미사 중 독서자로 갑작스레 내가 지목되어 더욱 뜻 깊었다.

감격적인 미사를 축복하며 강론하시던 베다 신부님은 오늘이 안득수 마리오 회장 영명축일이라고 소개를 했다. 나를 포함해 모두 깜짝 놀랐고, 회원들은 박수로 축하해 줬다. 그때까지 나는 그날이 무슨 날인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떠나기 전에 일정을 짜면서 언제 어디로 가서 무얼 할지 꼼꼼하게 체크했지만 정작 내 축일은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아, 내 영명축일에 예루살렘에 입성을 하다니. 게다가 예수님 최후의 만찬 성당에서 성체를 영 하다니. 형언할 수 없는 감사와 기쁨과 평화와 사랑!’

그 다음부터 아주 신기한 나날이 펼쳐졌다. 그 동안은 여기저기 병이 나고 다친 사람부터 위궤양 진단을 받고도 그냥 따라 나섰던 자매가 배가 아프다고 해서 위출혈이 난 게 아닐까 걱정한 것까지, 훼방꾼의 시기가 무려 여섯 번이나 우리를 괴롭혔다. 그러나 힘센 장사처럼 주님의 도움으로 시련을 이겨내고 예루살렘에 들어간 후부터는 한국에 돌아올 때까지 십여일 동안 단 한 건의 사고도 없었다. 고난 끝에 영광이 온다는 것을 이론상으로 알고는 있었다. 그래도 성지순례에서조차 귀한 체험의 기회를 주실 줄은 몰랐다. 예루살렘에서는 모든 것이 순풍에 돛 단 듯, 기쁘고 설레고 희망에 넘치는 즐거운 여정만 이어졌다.

갈릴래아 호숫가에 서자 호수 물결처럼 감동이 밀려왔다. 뛰어난 학식이나 능력을 갖춘 인재가 아니라 물고기 잡은 평범한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신 예수님, 제자들이 탄 배가 맞바람에 시달리자 친히 풍랑을 가라앉혀 주셨다. 주님을 따르는 이들에게는 어디서나 역풍이 거세게 몰아치겠지만 주님께서 잔잔하게 해주시니 두려움 없이 나아가리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 마지막 밤을 기도하며 보내신 예루살렘 동쪽 올리브 동산의 ‘겟세마니 성당’, 채찍질로 피벙벅이 됀 채 쓰러져 가며 오르신 ‘십자가의 길’. 곳곳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직접 만나 뵙는 것 같아 감격에 겨웠다. ‘이토록 좋은 날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절로 기도가 나오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우리 순례 일정의 하이라이트는 예수님 무덤이 있던 곳에 세워진 ‘주님 무덤 성당’이었다. 주님께서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신 부활의 현장! 그곳에 처음 닿았을 때 일행은 어느 때보다도 한층 엄숙하게 미사를 드렸다. 성당 중앙에는 예수님의 석관을 놓았던 무덤 제대가 있는데 그 안은 아주 좁다. 나는 일행 주 평신도를 대표해서 두 분 신부님과 같이 안에 들어가 따로 미사를 드리는 행운도 얻었다.

‘매일매일 거듭거듭 주님과 더불어 묻히고, 주님과 함께 부활할 수 있도록 은총을 주소서!’

마침내 예정된 순례를 다 마치고 예루살렘을 떠나는 날 낮 열두 시께, 우리는 마지막 일정으로 무덤 성당 앞 대광장에서 세계 각국에서 온 순례자들 틈에 섞여 주일미사를 봉헌했다.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실천합시다!” 신부님의 파견 강복을 받으며 이제 끝이구나, 아쉬움에 젖던 우리 일행은 돌연 어리둥절해졌다. 확성기에서 흘러나오는 퇴장 성가가 너무나도 귀에 익었기 때문이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애국가가 광장에 물결치고 태극기가 게양대 위에서 펄럭이고 있었다. 세계 각국 인파 속에서 애국가를 듣고 태극기까지 보자 다들 너무 좋아서 손뼉을 치며 하느님을 찬양했다.

“어머, 어머나! 하느님 감사합니다. 대한민국 만세!”

안 베다 신부님이 싱긋 웃으며 설명을 해 주셨다. 우리 일행이 무덤 성당에서 미사를 드릴 때마다 믿음의 봉헌금이 꽤 많이 나왔단다. 이에 관리인이 국기 게양대에 태극기를 올리고 마지막 퇴장성가를 애국가로 대체해 주었다는 것이다.

고난과 영광이 교차됐던 이스라엘 성지순례는 이토록 큰 기쁨과 설렘 속에 마무리됐다. 우리가 하느님 사랑의 길을 따르려고 하면 할수록 방해하는 훼방꾼이 반드시 우리 옆에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항상 깨어 있으면서 성령의 지혜와 슬기로 이겨내도록 기도해야 한다.

 

 

누가 감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혹 위협이나 칼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의 도움으로 이 모든 시련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 높음도 깊음도 그 밖의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나타날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로마 8, 35.37.39)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 (마태 28,20)

 

 

 

 

꿈결 같은 동행

 

성모님과 우리 집

전주 한옥마을은 검은 기와에 팔작지붕을 얹은 오백여 채의 한옥이 고풍스럽게 자리해 많은 관광객이 찾는 전주 시내의 명소다. 한옥마을과 맞닿아 있는 풍남동 우리 집은 1970년대 초 내가 전주 성모병원에 다닐 때 구입한 일본식 가옥이다. 당시 그 일대는 발전이 아주 더뎌 새로 이사 들어오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살림집을 거기 마련한 것은 집값도 사려니와 전동성당이 가까워서였다.

이후 전북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으로 승격할 전부도립의료원으로 직장을 옮겼다. 공무원 봉급으로 장차 아이들을 교육시키려면 어려움이 따를 것 같아 약사 면허가 있는 집사람이 시내에 작은 약국을 열어 살림을 도왔다.

전북대학교병원에서 2004년까지, 만 29년 직장생활을 하는 사이 두어 차례 집을 고쳤다. 하지만 워낙 오래된 집이라 이렇게 저렇게 고쳐도 살기가 참 불편하다. 언젠가부터 집사람은 새로 지은 아파트로 이사를 가자고 조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선뜻 그 요구를 들어주지 못했다. 가까운 친구들은 그런 나를 고집쟁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제 집사람도 일흔 살이 넘었다. 난방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자잘한 문제는 관리실에서 알아서 해주고, 경비원도 있는 아파트에서 편히 살자고 집사람은 자꾸 나를 조른다. 하지만 나는 이사할 생각이 조금도 없다. 집사람이 불평을 할 때마다 어떻게든 비위를 맞춰주며 다독거린다. 이 집을 떠나기 싫은 이유가 따로 있어서다.

도립병원 의사로 있을 때다. 그 무렵 전동성당에 새로 발령 받아 오신 신부님이 성모님을 많이 사랑하셨다. 부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신부님은 파티마 성모님상을 성당에 맞이하고, 각 가정에 성모님을 모시고 돌아가면서 기도하는 행사를 여셨다. 우리 집도 날짜를 배정받았다. 온 집안을 깨끗이 청소한 뒤 꽃을 꽂고 촛불을 준비해 건넌방 내 책상 위에 정성껏 성모상을 모셨다. 우리 부부는 물론 이웃 교우들도 초청해 이십여 명이 일주일 동안 매일 밤 성모상 앞에 모여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다.

엿새째 기도를 마치고 내일이며 파티마 성모님이 우리 집을 떠나기 전날 밤이었다. 건넌방에 성모님이 계시니 일주일 동안 우리 가족은 큰방에서 두 아이와 함께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꿈에 책상 위에 계신 성모님이 보이더니, 갑자기 용수철처럼 앞으로 툭 튀어나와 방바닥으로 내려오시는 게 아닌가?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시계를 보니 새벽 두 시였다. 곤히 자고 있는 집사람을 흔들어 깨웠다. 꿈 이야기를 하자 집사람도 놀라는 눈치였다. 무슨 일인지, 아무튼 가 보자며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손전등을 켜 들고 건넌방으로  갔다. 성모님은 책상 위에 그대로 잘 계셨다. 그냥 돌아 나오기가 영 찜찜해서 성모님상을 자세히 살펴봤다. 구석구석 한참 들여다보다가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조금이라도 성모님이 몸을 움직이시려면 꿈에서 본 것처럼 앞으로 튀어나올 수밖에 없는 구조였기 때문이다.

성모님상은 가방처럼 꾸며진 박스 안에 서 계셨는데, 허리 뒤쪽이 흰색 나사로 겉 박스와 단단히 연결돼 있었다. 앞쪽만 트여 있어 여닫이문으로 열었다 닫았다가 가능했다. 박스를 가방처럼 꾸민 건 한 가정에서 기도회가 끝나면 다른 집으로 옮겨야 하니 이동의 편리를 위해서인 듯했다. 옮기는 도중 자칫 흔들려 성모님상이 파손되는 걸 막으려고 나사로 박스와 성모님상을 단단히 연결하고, 나사가 눈에 잘 띄지 않도록 흰 페인트를 칠했던 것이다.

‘성모님이 내일 떠나시기 전에 우리 집 곳곳을 둘러보시려고 나사못을 풀고 용수철처럼 튀어나오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슴이 마구 떨렸다. 그때부터 내 마음 속에서 우리 집은 ‘성모 마리아의 집’이 됐다. 집사람이 아파트로 이사를 하자고 아무리 졸라도 나는 성모님이 우리 집을 둘러보셨던 게 마음에 남아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무마해 왔다. 집사람이 남편의 옹고집을 잘 참아줘 감사하는 마음이다.

풍남동 우리 집에서 사십여 년 사는 동안 네 아이 무탈하게 잘 키워 시집 장가 다 보냈다. 우리 부부도 건강에 큰 문제없이 신앙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 성모님의 깊은 사랑과 축복 때문이라고 믿는다. 천주교 신자들은 누구나 다 성모님을 사랑하지만, 내면적으로 각자 나름대로 특별한 신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신앙도 신비지만 성모님을 향한 우리들의 신심 또한 신비롭다.

나는 십자가 위 예수님께서 마지막 운명하시기 전에 남기신 말씀이 매우 궁금하다. 지극한 고통 속에서도 성모님께 요한, 곧 우리를 ‘어머니의 아들’이라고 하시고, 우리에게는 성모님을 ‘네 어머니시다.’ 라고 하신 말씀 (요한 19,26-27) 말이다. 예수님 당신이 설파하신 진리의 말씀과 불어놓고 가신 성령님만으로도 인류 구원이 충분할 텐데 왜 그러셨을까? 생각할수록 여기엔 깊은 뜻이 내포돼 있는 것 같다.

구원의 여정에서 우리가 살아남으려면 성모님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 아닐까? 또한 성모님께 끈질기게 매달리고 청원함이 우리 구원에 큰 힘이 될 것을 미리 알려주신 것 아닐까?

어머니, 어머니께서 전구해 주시는 기도를 제가 잘 챙길 테니 괴로우시더라도 그들을 잘 이끌어 주십시오. 그들은 무엇이 옳고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 줄도 모른 채 무조건 기도하니 말입니다, 하는 뜻이 함축돼 있는 것 같다. 나는 성모님께서 우리의 수많은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다 들으신 다음 올바르게 잘 정리해 주님께 전달해 주시며, 끈임 없이 그 기도가 이뤄질 수 있게 재촉하고 계신다고 굳게 믿는다.

 

 

 

가정기도와 수호천사

집사람이 나한테 아파트로 이사하자고 타령을 했듯이, 나라고 집사람한테 졸라댄 것이 왜 없겠는가. 아침에 눈뜨면 우리 부부는 새벽미사를 드리러 성당에 가기 바쁘다. 아침밥을 먹고 나는 나대로, 집사람은 집사람대로 하루 종일 이 일 저 일 쫓아다니다 보면 부부라고는 해도 아침-저녁기도를 시간 맞춰 함께 바치기가 쉽지 않다. 집사람은 홀로 조용히 기도하는 것을 좋아한다. 나는 집사람이랑 같이 기도하는 게 더 좋은데도.

단 두세 사람이라도 당신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함께 계시겠다고 주님은 말씀하셨다.(마태 18,20) 나는 성경 말씀까지 들먹이며 귀찮아하는 집사람에게 같이 기도하자고 졸라댔지만 집사람은 어느 틈엔가 홀로 기도하곤 했다.

어느 날 집사람의 고등학교 후배가 원장을 맡고 있는 익산의 한 봉쇄수도원을 방문했다. 원장수녀님은 가정기도, 특히 부부가 함께하는 기도의 중요성을 설명하다가 우리 집은 어떠냐고 물으셨다. 나는 기회다 싶어 사실대로 일러바쳤다. 수녀님은 쿡쿡 웃으시더니 오늘부터라도 꼭 같이 기도하라고 집사람에게 다짐을 받으셨다. 그 후로 적어도 저녁기도만은 같이 바쳤는데, 어느 날부턴가 집사람의 옛 버릇이 도졌다. 그래서 저녁을 먹고 나면 집사람의 움직임을 주시하다가 기도하려는 김새가 엿보이면 얼른 따라붙었다.

그러던 어느 밤이었다. 낮에 하도 여러 가지 복잡한 일이 많아 몹시 피곤한데다 가 저녁을 먹고 나자 몸이 나른해 잠깐 자리에 누웠다. 문 쪽 벽을 보고 옆으로 누워 잠이 들었나 본데 누군가 내 왼쪽 겨드랑이 밑을 세 손가락으로 힘차게 찔러 눌렀다. 겨드랑이를 손가락으로 찔러 누르니 얼마나 아프던지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깨어났다.

몸을 돌려 누우면서 보니 집사람이 또 혼자 기도를 하고 있지 않은가. 얼굴을 찌푸리고 일어나면서 왜 깨우지 않고 또 혼자 기도하느냐고 항변을 했다. 집사람은 내가 꿈 타령을 하는 줄 알았다면서, 너무 곤히 잠들어 깨우지 않았다고 했다.

방에는 우리 두 사람 밖에 없는데 과연 누가 내 옆구리를 그렇게 세게 찔러 눌렀을까? 빨리 일어나서 집사람이랑 같이 기도하라고 수호천사가 깨워주신 건 아닐까? 얼핏 이런 생각이 들자 은근히 집사람한테 서운하게 느껴졌던 감정도 슬며시 사라졌다.

 

 

 

신기한 물고기 ‘바르나르’ 꿈

잠을 자다 간혹 꿈을 꾼다. 평소 늘 일에 쫓기고 힘들 때가 많아서인지 내가 꾸는 꿈은 주로 악몽이다. 무서운 동물한테 마구 쫓기다가 비명을 지르며 깰 때가 가장 많다. 소중한 물건을 어디 두었는지 몰라 쩔쩔 매며 찾거나 여행길에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리고 진땀을 흘리며 사방을 헤매기도 한다. 자동차를 어디에 세워뒀는지 몰라 허둥대는 꿈도 꾼다. 참으로 시원하고 아름답다 싶은 꿈은 거의 꾼 적이 없다.

특별한 예외가 있었다. 너무 신기해서 날짜도 적어놓았다. 1991년 8월 24일 새벽이었다. 경치가 아름다운 강에 다리가 놓여 있었다. 다리 위에서 눈부시게 파란 강물을 내려다보니 한 어부가 조정 경기 때 쓰는 것 같은 기다란 배를 저으며 줄 낚시를 하고 있었다. 카메라가 있다면 한 컷 찍고 싶을 만큼 너무나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배가 쏜살같이 달려 나가면서 어부가 대나무처럼 긴 막대를 물속으로 쑥 넣었다가 건져 올렸다. 막대에는 줄낚시가 열두 개쯤 달려 있었는데, 낚시마다 팔뚝만한 잉어가 주렁주렁 매달려 올라왔다.

장면이 바뀌어 어부가 강가에서 물고기를 정리하고 있었다. 내가 옆에서 그 물고기들을 구경하는데, 왼쪽 끝에서부터 두 번째 낚시에 걸린 고기는 잉어가 아니었다. 부드러운 회색 벨벳 천으로 몸을 감싼 듯한 물고기가 아주 고상하고도 아름다웠다. 그런 물고기는 처음 보았다. 그런데 어부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이 물고기의 이름은 바르나르다. 이것은 세계적으로 희귀종이다.”

어부는 빙그레 웃으며 그 물고기를 내게 내밀었다. 받을지 말지 잠깐 망설이다가 손을 내밀어 받았다. 그리고 담배 한 갑 값이라도 주어야겠다는 생각에 호주머니에서 이천 원을 꺼내 어부에게 주었다. 빙그레 미소를 짓던 어부가 그 돈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흐릿한데 그러는 사이 자명종 소리에 잠을 깼다.

시계를 보니 다섯 시 이십 분. 새벽미사 시작 십 분 전이었다. 아내를 깨워 허둥지둥 성당 갈 채비를 했다. 아들 녀석이 예비군 비상훈련에 맞춰 일어난다고 시계를 늦춰놓은 줄 몰랐던 것이다. 서두르면서도 어부가 나한테 알려준 물고기 이름과 생김새가 너무 독특하고 묘했기에, 혹시 잊어버릴까 봐 마침 우리 방 화장대 위 요셉 성인상 앞에 놓여 있던 종잇조각에 ‘바르나르, 세계적 희귀종(물고기)’ 이라고 적어놓고 부랴부랴 성당으로 달려갔다.

종이에 적어놓기는 했지만 일상이 바빠 꿈은 금세 까맣게 잊었다. 한 달쯤 뒤 고 김정원 토마스 신부님의 성서공부반에서 갑자기 그 꿈이 생각났다. 히브리어에 능통한 신부님께 공부를 마치고 여쭤봤다.

“꿈에서 바르나르란 말을 들어 적어놨는데 무슨 뜻인지 좀 알려주세요.”

“바르 bar는 아들 son 인데 나르는 뭘까? 어, 여기 있네. 나르 Nar(네르 Ner)는 빛 light, 등 lamp, 가르침  instruction, 번성-융성 prosperity이란 뜻이군. 근데 어떻게 이런 좋은 꿈을 꾸었나?”

자초지종을 말씀 드리자 신부님은 크게 웃으며 말씀하셨다.

“아! 참 좋은 꿈이네. 어부는 예수님이시고 물고기는 안 박사의 사명을 말하는 거 같아. 내 생각에는 안 박사가 물고기를 받고 이천 원을 드리려고 했다는 것이 참 좋은 것 같네. 하하하. 안 박사, 안 턱 내야겠어.” 하시는 것이었다.

나름대로 생각해 보았다. 나는 자연과학을 전공한 사람이다. 수많은 책과 논문과 경험을 통해 배운 대로 이론적으로 환자를 치료하고, 교단에서 후학들을 가르칠 때도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과학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성령운동을 한다는 것 자체가 우선 기이한 일이요, 참으로 드문 일이다.

어부가 물고기를 건네는데 받을지 말지 망설인 것은 곧 회장직을 받을까 말까, 도 계속할까 그만둘까, 망설이다가 다시 또 맡고 한 것과 관련 있으리라는 생각도 해 보았다. 1986년에 전주교구 성령쇄신봉사회 2대 회장을 맡은 이래 나는 지금까지 무려 27년간 그 자리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있다. 속내까지 다 알 수는 없으나 많은 봉사자가 장기간 지속적으로 나에게 사랑과 지지를 보내주는 덕분이다. 역대 지도 신부님과 교구장이신 이병호 빈첸시오 주교님도 여전한 사랑의 지원을 계속 보내주고 계신다. 2년 임기를 마치고 내가 물러나려고 할 때마다 장기집권이 아니라 집봉, 집중 봉사직이라며 놓아주시지 않는다.

항상 힘들어 직을 내놓으려고 숱한 갈들 속에 지내면서도, 해박한 성경지식이나 그리스도교 영성에 대한 조예에 부족함이 많은 줄 잘 알면서도, 나 역시 봉사자들과 지도신부님 의견에 따라왔다. 꿈에서 본 어부가 예수님이시라면, 주님이 불고기를 건네주시듯 성령봉사회 직분을 맡기시는 것이라면, 감히 어떻게 내가 마다할 수 있으랴 싶어서다. 이 꿈은 평시도로서 나의 소명을 일깨워 주시고, 돈 존중해 주신 그분을 늘 생각하게 하는, 내 일생의 중대한 멘토가 되고 있다.

오랜 세월 같은 자리에 있다 보니 이곳 저곳에서 강의 요청을 받아 전주교구 각 성당은 안 가 본 곳이 없을 정도로 다니며 성령 강의를 해왔다. 도 전국의 각 교구도 빠짐없이 가 봤다. 바르나르란 말 뜻 가운데 가르침 instruction의 은사를 주신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때부터 유다인들은 예수께서 안식일에 이런 일을 하신다 하여 예수를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내 아버지께서 언제나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하고 말씀하셨다.(요한 5,16-17)

 

잘 들어라.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하겠다.(루카 12,8)

 

 

 

 

 

마지막 그물의 물고기

 

 

배 오른쪽에 그물을 쳐라

2009년부터 전북 완주군 소양면에 있는 성바오로복지병원에 다니고 있다. 샬트르 성바오로수녀회가 임종이 가까운 환자들을 사랑으로 돌보는 호스피스 병원이다.

2004년에 나는 삶의 한 축을 이루던 전북대학교병원에서 정년을 맞았다. 그 후 전주 시내 개인병원 두 곳에서 일하다 복지병원으로 왔다. 정년 후 얼마 동안 개인병원에 다니면서 대학병원 시절보다 훨씬 여유롭고 한가하게 살았다. 우선 병세가 심한 중환자가 그렇게 많지 않아 시간적으로, 심리적으로 부담이 덜했다. 급여도 대학병원보다 넉넉했다. 평생토록 공무원 월급으로 여기저기 쓸 일이 하도 많아 늘 주머니가 가벼웠는데, 집사람과 주변에 조금이나마 인심을 쓸 수 있어 다행스러웠다. 호사도 좀 했다. 새벽미사를 안 드려도 되는 주일 아침이면 좋은 목욕탕에 가서 냉-온탕을 오가며 건강을 다졌다. 열 시 반 주일 교중미사를 마치고 나면 사랑하는 교우 몇 사람과 맛난 것 찾아 점심 나들이고 다녔다. 주머니 사정 걱정 없이 계산할 수 있어 다행스러웠다.

삼 년여 그렇게 지내던 중 심경에 변화가 왔다. 2007년 사순절엔가, 소록도 본당 주임 강길웅 신부님의 복음 묵상 테이프를 듣고 나서다. 배 오른쪽에 그물을 치라는 신부님 말씀이 머리에 함빡 들어왔다. 너나없이 온통 재물과 건강을 찾아 인생의 ‘왼쪽’으로만 그물을 치는데, 참 보물이 있는 ‘오른쪽’으로 눈을 돌려보라고 권하는 말씀이었다.

왜 그런지 까닭을 말할 순 없어도 죽어가는 환자들의 영혼 구원에 유달리 관심이 많은 나는 임종환자를 정성껏 돌보는 복지병원에서 일하며 환자가 삶의 마지막 순간을 잘 정리하고 떠날 수 있도록 동반해 주고 싶었다. 내 마음의 움직임만 좇아 집사람과는 상의도 없이 독단으로 일터를 옮겼다.

소양면 야트막한 산자락에 둘러싸인 성바오로복지병원은 맑은 공기와 무공해 음식, 그리고 양질의 진료로 말기환자들에게 자연치유가 일어나도록 돕는 곳이다. 아울러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 수녀님들 손을 잡고 ‘예수, 마리아’를 외치며 천국으로 향하는 곳이다.

이곳 의료진의 일원으로서 나는 임종이 가까운 환자에게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수십 년 동안 병상을 지켜왔기에 이분이 일주일에서 보름 정도 지나면 돌아가시겠구나,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육체적 고통보다는 마지막 순간에 대한 공포가 더 심하다는 것도 잘 알기에,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판단이 들면 회진 후 의사며 간호가사 다 나간 뒤 따로 남아 환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같이 기도도 드린다. ‘숨이 가쁘다, 통증이 심하다, 변을 못 보겠다, 죽을 때 너무 고통스러울까 봐 무섭다…’ 대개 이런 것들을 호소하신다. 그럴 때면 충분히 공감하며 말씀 드린다.

“숨이 많이 가쁘시면 힘들이지 않고 숨 쉴 수 있게 산소를 대드릴게요. 변은 파내면 시원해져요, 제가 직접 해드릴게요. 통증이 심하면 진통제 놔드릴 테니 염려 마세요, 지난번에도 오래 지속되는 진통제 놔드리니까 밤새 아픈 줄 모르고 잘 주무셨지요? 나중에도 잠자듯 가실 수 있도록 해드릴 테니 아무 걱정 마세요…”

이렇게 사나흘 정도 나와 시간을 보내고 기도하면서 고통을 덜 느끼게 되면 환자들이 나를 마음으로부터 의지한다. 환자와 의사 사이에 신뢰를 주고받는 유대관계 “라포르 rapport’가 형성되면 환자는 무슨 고통이든 의사한테 털어놓을 수 있다. 몸의 고통은 물론 마음 저 깊은 곳에 숨겨둔 아픔까지도.

주님을 믿는 이들에게는 그때부터 차분히 ‘예수, 성모 마리아, 아멘!”을 연습시키고 심리적 부담도 덜어드린다. 진통이 심할 경우 잠시 깨어나면 ‘예수, 마리아, 아멘!” 하고, 다시 진통제를 맞으며 잠으로 빠져들 수 있게도 해드린다. 입으로 ‘아멘!’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으면 환자 귀에 대고 내가 대신 말해 드린다.

“나 왔어요. 예수, 마리아, 아멘, 하실 거죠?”

겨우 고개만 끄덕여도 나는 안심이 된다. 그 약한 고갯짓은 사실 주님을 증거하는 행동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마태 10,32; 루카 12,8) 하고.

밤 열한 시든 새벽 두 시든 임종하는 분이 계시면 예수님께 맡기고 먼 길 편히 떠나시도록, 나쁜 영이 범접하지 못하도록 기도 드리면서 환자 옆에 지키고 앉아 손을 붙잡아 드리려고 애쓴다. 새벽미사 볼 때 생미사나 연미사도 넣어드린다. 가끔 집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며 그냥 주님께 부탁드릴 사람이라고만 말한다. 집사람도 더는 캐묻지 않고 기도를 보태준다.

 

 

단 사흘의 기적

어느 날 오후 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수녀님이 전화를 주셨다. 가정방문을 하다가 많이 아픈 분을 만났는데, 그냥 지나칠 일이 아닌 것 같아 복지병원을 소개하셨다고 했다. 그 댁에 전화를 드려 가족들과 두루두루 통화를 해보았다. 소화기 암이 간과 폐 등 전신에 퍼져 임종이 가까운 상황으로 짐작되는데, 안타깝게도 본인은 물론 가족들도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하는 것 같았다. 어떤 상황인지 알려드려야 할 것 같아 입원을 하시도록 했다.

다음 날 출근해 보니 어제 늦게 입원했던 그 환자가 퇴원을 하고 안 계셨다. 저녁을 드신 다음 쓸쓸하다면서 하룻밤을 못 견디고 그냥 나가시더라 는 것이다. 일주일쯤 지났을까? 전화가 와서 받아보니 주치의와 상의 한마디 없이 퇴원해 버린 그분이었다. 복통이 너무 심하다면서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묻기에 다시 병원으로 오시라고 했다. 하지만 그 댁 분들은 우리 병원으로 온다고 했다가, 정읍에 있는 병원으로 간다고 했다가, 아니 대학병원 응급실로 가겠다고 했다가… 마음을 정하지 못한 채 자꾸 전화만 했다.

수십 차례 걸려오는 전화를 끝까지 인내하며 받아 따뜻하게 안내했다. 마침내 환자는 다음 날 우리 병원에 입원했다. 환자 상태는 위 혈압이 70밖에 안 될 만큼 괘 긴박했다. 그러나 의식은 아주 또렷했다. 잔잔한 미소까지 지으며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 물었다. 심각하다는 내 말을 듣고도 담담하게 말했다.

“제가 죽을까요? 박사님이 잘 봐주시면 회복하겠죠?”

싱긋 웃기까지 했다. 그 미소가 너무 멋있었다. 초연한 형제님을 보며 나도 저럴 수 있을까, 존경스러운 마음으로 치료에 최선을 다했다. 부인에게는 일주일을 넘기지 못할 것 같다고 따로 알려드렸다.

입원 첫날은 그럭저럭 잘 지나갔다. 둘째 날이 되자 복통이 심해지면서 혈압이 70 아래로 떨어졌다. 부랴부랴 가족들을 부르고 수녀님 신부님과 상의해 임종 준비를 서둘렀다. 저녁 여섯 시쯤 병자성사를 드리기 위해 신부님이 먼저 고백성사를 받으셨다. 영세한 지 오래된 환자분께 그 자리에서 견진성사를 드리고, 이어서 병자성사도 주셨다. 봉성체 예식이 끝난 뒤 자리에 있던 이들이 다 함께 성가 <믿음으로>를 불렀다. 석양빛이 가득 들어오는 2층 병실에서 아름다운 성가 선율이 하늘을 향해 퍼져나갔다. 잔잔한 감동이 아직 남아 있는 가운데 원장수녀님이 말씀하셨다.

“니콜라오 씨! 견진성사를 덤으로 받고 대부까지 새로 생겼으니, 정말로 은총을 가득 받으셨네요.”

“그렇고말고요, 수녀님, 대부님, 안 박사님. 앞으로 제가 잘 모시겠습니다!”

아직도 자신이 어떤 상황인지 잘 모르는 것 같은 남편을 보면서 곁에 있던 부인은 울먹이다가, 도 금세 웃었다 하며 감정을 다스리지 못했다. 그런 부인을 되레 남편이 위로했다. 며칠 전 잘못한 일에 대해 미안하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환자가 안정되는 것을 보며 퇴근을 했으나 집에 온지 한 시간도 안 돼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의사인 그분 딸이 서울에서 내려왔는데, 지금 대학병원으로 옮기는 중이라고 했다. 다음 날 새벽미사 때 전동성당에서 어제 내 대자가 된 환자분을 위해 생미사를 바치고 곧장 대학병원 응급실로 달려갔다.

“박사님, 여기까지 와주셨네요. 너무 반가워요. 어젯밤 많이 힘들었습니다. 조금 나아졌으니까 오전 중에 다시 복지병원으로 갈게요.”

그것이 나와 대자가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 오후 한 시 삼십오 분께 환자는 대학병원 응급실에서 조용히 귀천하셨다. 장례를 치르자마자 부인과 세 자녀가 우리 병원을 찾아왔다. 감사한 마음과 더불어 큰 액수의 후원금을 전하고 가셨다.

이틀 뒤, 환자를 내게 소개했던 수녀님께서 전화를 주셨다.

“박사님! 반가운 소식이에요. 제가 니콜라오 씨 댁에 와 있는데요, 부인께서 따님과 함께 다음 주부터 성당 교리반에 나오신대요. 수고 많으셨어요.”

니콜라오 씨와 내가 알고 지낸 건 단 사흘이다. 그 짧은 만남을 계기로 오랫동안 냉담하던 형제분이 주님의 품에 다시 돌아와 견진성사를 받았다. 아울러 그가 사랑해 마지않던 부인과 딸도 고인의 뒤를 따라 구원의 반열에 들어섰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자녀,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는 구원의 역사는 오늘도 이렇게 이어지고 있구나!’ 기쁨에 넘쳐 감사기도가 저절로 나왔다.

요즘도 고 니콜라오 대자의 부인은 가끔 안부전화를 주신다. 벌써 사 년의 세월이 흘렀는데도 단 사흘간의 주님 안에서의 사랑은 영원으로 이어지고 있다.

앞으로도 나는 계속해서 그물을 던질 것이다. 다만 내 팔의 힘은 차츰 떨어질 테니 그물이 배에서 멀어지는 거리는 점점 줄어들 것이다. 어떠면 내 말 바로 앞에 떨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저 그물을 던지기만 하면 된다. 물고기를 몰아주시는 분이 따로 계시니 염려하지 않는다.

 

 

수호천사

복지병원에 다닌 지 얼마 안 되어 병원 앞마당에서 잘 아는 얼굴을 만났다. 몸이 조금 뚱뚱한 청년이다. 나를 보자 그는 언제나처럼 활짝 웃었다. 나도 반가워서 절로 웃음이 났다. 청년이 가까이 오는 걸 보면서 내 손을 벌써 지갑을 찾아 주머니로 옮겨갔다. 청년도 언제나처럼 더듬더듬하는 말투로 청했다.

“박사님, 식권 하나 주세요.”

지갑에서 대학병원 직원식권을 한 장 꺼내주니 청년은 또 함박웃음으로 인사를 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박사님, 복 많~이 받으세요.”

돈을 달라거나 뭐 다른 걸 요구한 적도 없다. 그저 식권 한 장 받아 들면 좋아서 히히, 만면에 웃음 지으며 부리나케 돌아갔다. 청년과 내가 만난 것은 대학병원에서 은퇴하기 삼 년 전부터다. 은퇴 후 노송병원과 고려병원에 이 년 남짓씩 다녔다. 그때마다 어떻게 알았는지 청년은 내가 일하는 병원에 어김없이 나타났다. 그러더니 복지병원까지 찾아온 것이다.

대학병원에서 처음 만난 후 나는 청년을 위해 언제나 병원 직원식권 두세 장을 미리 사서 지갑에 넣고 다녔다. 개인병원에 다닐 때도 마찬가지였다. 한 번도 빈손으로 돌아가게 한 적이 없다. 그러면서도 청년이 어디 살고 무엇을 하는지는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 복지병원까지 찾아오다니, 조금은 의아했다. 전주 시내에서야 이 병원 저 병원으로 나를 찾아오기가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물어보면 어디 있다고 사람들이 알려주었을 테니까. 하지만 소양면에 있는 복지병원까지 오려면 택시로는 만오천 원 정도, 버스를 타도 적어도 이천 원은 든다. 그런데 이천 원짜리 식권 한 장 얻기 위해 여기까지 오다니… 일주일에 한 번씩 거르지 않고 찾아오는 청년에게 어느 날부터 나는 ‘천사’라는 호칭을 썼다.

“천사님 오셨어? 자, 여기 식권 있네.”

천사라는 말이 무슨 뜻인 줄 아는지 모르는지, 청년은 그저 식권 한 장 받아 들면 내게 함박웃음을 선물하고 돌아갔다. 대학병원에 있을 때, 하느님께서 불쌍하고 측은한 천사를 보내시어 내가 진실로 이웃을 사랑하는지 시험하시는 게 아닐까, 잠깐 생각한 적이 있다. 청년을 보자 그 일이 떠올라 아예 천사로 부르게 된 것이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어느 날 아침, 승용차를 타고 출근하는 길이었다. 저 앞에서 어떤 할아버지가 목발을 짚은 채 온몸으로 비를 맞으며 힘겹게 걸어가고 계셨다. ‘너무 힘들어 보이시네, 참 안 됐구먼…’ 속으로 혼잣말을 하는 사이 자동차는 할아버지 옆을 지나쳤다. 계속 운전을 하고 가다가 할아버지를 우리 병원으로 모시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른 차를 되돌려 천천히 몰면서 할아버지를 찾았다. 큰길이고 시간도 얼마 지나지 않았으니 쉽게 찾을 것 같았는데 할아버지는 눈에 띄지 않았다. 분명히 멀리 가지는 못했을 것 같아 이 골목 저 골목 뒤졌으나 어디에도 안 계셨다. 아무리 살펴도 보이자 않아 다시 차를 돌리면서 마지막으로 어떤 집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쳐다봤다. 마치 일부러 몸을 숨기신 것처럼 할아버지가 그 계단에 앉아계셨다.

“할아버지! 다리가 많이 아프시지요?”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셨다.

“어디 가시는 중이셨어요?”

이번에도 답은 없으셨다.

“할아버지, 제가 우리 병원에 모시고 가서 아픈 다리에 주사 놔드릴게요. 그러면 통증이 없어집니다. 제 차에 타세요.”

내 말에 할아버지는 순순히 차에 타셨다. 여기저기서 얻어 먹으며 지내시는지, 비 맞은 옷과 몸에서 나는 냄새가 좁은 차 안에 이만저만이 아니게 들이 찼다. 응급실로 모시고 가서 접수를 해드렸다. 우선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알아야 하므로 엑스레이 사진을 찍고 결과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할아버지가 침대에 앉아 계시는 것을 보고 응급실 옆 화장실에 다녀왔다. 그런데 나와 보니 할아버지가 안 계셨다. ‘잠깐 사이, 채 오 분도 안 되는 시간에 어디를 가셨지?’ 응급실 간호사와 남자 간호보조원에게 물었으나 ‘금방 여기 계셨는데?’ 할 뿐이었다.

응급실 인력이 다 동원돼 할아버지 소재 파악에 나섰다. 양쪽 다 목발을 짚고 계시니 빨리 걸을 수 없고, 누구나 기억할 만큼 눈에 띄는 모습이어서 곧 찾을 수 있겠지 싶었으나 아니었다. 급기야 정문 수위에게까지 연락해 철저히 찾아보라고 했지만 끝내 종적이 묘연했다.

그날 밤 기도 상 앞에 앉아 감쪽같이 사라져 버리신 할아버지를 생각했다. 갑자기 ‘아, 그분이 나의 수호천사 아니실까? 예수님이 내가 정말로 이웃을 사랑하는지 시험을 하신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각자에게는 수호천사가 계신다. 다른 형제에게 크게 잘못하면 그 형제의 수호천사에게도 잘못하는 것이 된다. 나중에 우리가 하느님 앞에 섰을 때, 그 천사가 우리에 대해 증언하실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부부는 아침마다 수호천사에게도 기도 드리며 하루를 시작한다.

“천제나 저희를 지켜주시는 수호천사여. 인자하신 주님께서 오늘 저희를 당신께 맡기셨으니, 우리를 도우시고 인도하시며 다스리소서. 아멘.”

식권 청년은 복지병원에 와서도 삼 년 동안, 대학병원부터 곱으면 지난 십 년에 걸쳐 일주일에 한 번씩은 변함없이 나를 찾아오곤 했다. 그런데 근래 두세 달은 웬일인지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청년이 나타나기를 은근히 기다리면서 이제야 젊은이가 어디 살고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내가 모르고 지냈다는 자각이 든다. 별일 없이 잘 있는지 안부도 궁금하다. 다음에 만나면 꼭 물어볼 작정이다. 복지병원까지 무슨 차를 타고 왔는지, 왜 그토록 나를 계속 찾아 다녔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식권 한 장을 빌미로 꼬박꼬박 나를 찾아 온 청년은 내게 주님의 현존을 일깨워 주는 수호천사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뜻밖에 만나게 된 모든 분이 다름 아닌 수호천사이심을 왜 진즉 알아보지 못했을까!

 

 

예수께서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아무것도 못 잡았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져보아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 그들이 예수께서 이르시는 대로 그물을 던졌더니 그물을 끌어올릴 수 없을 만큼 고기가 많이 걸려 들었다.(요한 21,5-6)

 

천사는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여, 기뻐하여라. 주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하고 인사하였다.(루카 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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