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eld of dreams, trancending time & place, autobio in progress..

용서하면
내가 용서해 주는 당사자는 물론이고
주변 모든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축복을 빌어주는 것이다.

 

 

 

1부
왜 용서해야 하는가?

 

용서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분명 용서는 아름다운 사랑의 선물이다.

 

1장
아름다운 생각이라고?

“용서는 아름다운 일이라고 누구나 생각하지만, 이는 자신에게 용서할 일이 생기기 전까지일 뿐이다”라고 C. S. 루이스 C. S. Lewis 가 말했다. 이 얼마나 정곡을 찌르는 말인가! 사람들은 일단 상처를 입게 되면 상처 준 상대를 절대 용서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저 화가 날 뿐이다. 용서라니… 가당치 않은 이야기다. 용서받을 자격조차 없는 사람인데 무슨 용서를… 용서해 줬다가 ‘상대의 마음이 편해질까 봐’ 두렵기까지 하다. 고통에 허덕이고 있는 와중에 용서하라는 충고를 들으면 참 어이가 없다. 살다 보면 상처를 한 두 번 받는 것도 아니고, 그저 용서고 뭐고 귀찮기까지 하다. 이해 못하는 일도 아니다. 용서라는 것이 워낙 엄청난 양의 겸손과 자비가 필요한 힘들고 고통스러운 작업이 아니던가. 기분 나쁜 생각에서 벗어나 훌훌 털어버리는 것보다 오히려 그냥 계속 화를 내고 있거나 되갚아 주는 편이 더 쉬운 해결책으로 보일 것이다.

사람들은 또 용서를 불가능한 일, 아니면 그저 바보 같은 일일 뿐이라고 치부해 보리기도 한다. 절대 용서받을 수도 없고 받아서도 안 되는 일이 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한 설문조사를 보면, 응답자의 반 이상이 강도나 강간범, 살인자는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고 답했다. 1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면, 용서는 ‘아름다운 일’이 결코 아니다. 부조리한 일일 뿐이다!

나는 언젠가 용서에 대한 인터넷 기사 댓글들을 읽으면서 위에 소개한 C. S. 루이스의 말이 얼마나 통찰력 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2 댓글 중에는 용서에 강한 이의를 제기하는 내용이 수없이 많았다. 용서하라고 말하는 사람은 ‘세상 물정을 모르는’ 사람이거나 ‘용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속이 뒤틀리게 하는’ 기사일 뿐이라는 사람들도 있었다. 심각한 상처를 받아본 적이 없었으니까 용서하라고 한다는 중장도 있었다. 만약 깊은 상처를 받아봤다면, 상처를 치유하는 것은 용서가 아니라 오직 보복이라는 사실을 알지 않느냐는 이야기다. ‘시간이 흐를수록 복수할 이유만 늘어난다’고 이 댓글은 끝맺었다.

원문과 댓글의 내용만 봐서는 댓글을 단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얼마 전 주말 피정을 지도하면서 다시 한번 느꼈듯이 가장 신실한 그리스도인조차도 용서에 대해 저항감을 갖는 경우가 종종 있음은 확실하다. 그 피정의 참가자는 대부분 누가 피정을 지도하며 어떤 주제로 진행되는지 모르는 채 피정을 신청했다.

나중에 듣기로는, 도착해서 피정의 주제가 용서라는 사실을 알고 대부분 실망했다고 했다. 용서에 대해 듣고 싶어 하지 않았다. 너무 ‘무거운’ 주제라는 것이다. 또 ‘주제가 나한테는 맞지 않겠어. 용서 못해서 부대끼는 일이 없으니까’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피정이 진행되면서 그들의 태도는 바뀌기 시작했다.

어려움에 맞닥뜨린 사람, 용서하고자 의욕이 고취된 사람 등 아무튼 모두가 뭔가 새롭게 깨닫게 된 것이다. 결국 참가자들은 모두 용서해야 할 거리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자기 자신을 용서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들도 있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용서에 대해 잘못 알고 있던 점을 바로잡기도 했다. 용서란 꼭 잊어줘야 하는 것이 아니며 화해나 관계 개선을 반드시 해야 하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어떻게 용서하는지, 어디에서부터 용서를 시작해야 하는지 전혀 모르는 사람들도 의외로 꽤 있었다.

결국 피정을 마칠 때가 되자 모두 용서해야 할 사람을 마음에 품게 되었다. 하지만 그 사실에 실망하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감사했다.
우리는 모두 용서해야 할 누군가가 있다. 난폭하게 끼어들기를 하는 운전자에서부터 나를 버리고 떠난 배우자에 이르기까지, 무관심했거나 항상 야단만 치던 부모, 가장 도움이 필요한 순간 모든 척한 친구, 그토록 믿었건만 내 비밀을 누설한 사람, 내 아이디어를 훔쳐간 직장 상사, 학창시절 나를 괴롭히던 불량배, 고해소에서 호되기 말하는 자비심 없는 사제, 돈만 받고 일은 마무리 짓지 않는 계약 상대, 반 친구들 앞에서 날 망신 준 선생님, 뒤에서 험담하는 동료, 날 이용한 연인, 소문을 퍼뜨리는 이웃, 거짓말하거나 부패한 정치인,우리 삶과 환경에 지대한 영향을 주는 탐욕스러운 사업가, 생전 전화 한 통 없는 배은망덕한 자녀, 인종차별주의자나 성차별주의자, 잔소리 심한 시어머니, 극악무도한 범죄자, 전시 戰時의 적… 예를 들자면 끝도 없다.

우리는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모두 상처받으며 산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은 고통을 준 상대를 용서하라고 한다. 그가 무슨 짓을 했든, 얼마나 여러 번 같은 짓을 반복했든, 사과를 하기는커녕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 해도 말이다. 다시 만날 사람은 물론, 다시 만날 수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용서해야 한다. 주변 사람들과 고통을 준 당사자를 위해 용서해야 한다. 그리고 하느님을 위해, 하느님께 영광 드리고 이 세상에 그분의 사랑을 드러내기 위해 용서해야 한다.
용서는 결심이고 과정이며 선물이다. 먼저 용서는 결심이다. 복수하고 싶은 마음을 버리고 고통과 원한에서 자신을 해방시키는 쪽을 마음먹고 선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용서는 또한 과정이다. 원한이 사라지게 하는 데는 시간이 걸릴 뿐 아니라 용서하겠다는 결심을 수도 없이 반복해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끝으로 용서는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고 예외 없이, 한도 없이 거저 주는 사랑의 선물이다. 용서는 얻어내는 것도, 받을 자격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용서해야 할 대상을 사랑하게 되면 고통이 아니라 행복을, 고난이 아니라 성공을, 지옥이 아니라 천국을 빌어주게 되어있다.

항상 그렇듯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길을 알려주신다. 몸소 모범을 보이시고 말씀으로 권유하시며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용서하신다. 우리처럼 예수님도 상처받으셨다. 예수님은 손과 발과 옆구리에 상처 자국들을 그대로 간직하고 계신다. 친구에게 배신당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버림받으셨다. 예수님은 편견과 탐욕, 이기심과 비겁함의 희생자였다. 완전하게 죄가 없으셨지만 모욕과 고문, 사형이라는 극도의 부당함을 경험하셨다.

그런데도 용서하라고 우리를 부르고 용서할 수 있도록 자비를 베푸는 분이 예수님이다. 예수님은 용서가 가능한 일일 뿐 아니라 당신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덕목임을 보여주신다.
용서라 단순히 ‘아름다운 생각’이 아니라 사랑의 필수조건이다. 마더 데레사는 이렇게 말했다. “진정으로 사랑하기 원한다면, 용서하는 법을 반드시 배워야 한다.”

 

 

용서하는 것이 육체적-영적-관계적으로 나에게 이롭다.

 

2장
당신을 위하여

 

일본의 진주만 공격 당시 미군이던 딕 피스크 Dick Fiske 는 전쟁이 끝난 후 참전용사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다. 3 그는 이미 위를 반 정도 잘라낸 상태였는데, 궤양에서 피가 멈추지 않아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생존 가능성마저 희박한 상태였다.

어느 날 건장한 군의관이 입담배를 문 채 피스크의 병실로 들어오면서 말했다. “중사, 도대체 뭐가 그렇게 당신을 괴롭히고 있소?” “모르겠습니다, 그저 트럭에 깔려있는 느낌입니다.” 피스크가 답했다. 의사는 피스크의 배를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여기를 고쳐줄 수는 있소, 그렇지만” (이번엔 머리를 가리키며) “여기를 치유할 수는 없소.” “무슨 의미입니까?” 피스크가 물었다. “당신의 기록을 쪽 살펴보았소.” 의사가 말했다. “중사, 대체 누구를 그렇게 증오하고 있소?”

바로 그때 파스크는 여러 해 동안 품은 증오 살상과 적에 대한 증오 로 자신이 파멸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 미움은 그를 죽여가고 있었다. 중국 격언이 옳음을 그는 몸소 증명하고 있었던 것이다. “용서하지 않으려는 자는 무덤을 두 개나 파는 격이다.”
역설적이게도 용서하지 않음으로써 상처받은 쪽은 결국 나 자신이다. 딕 피스크 중사처럼 말이다. 반면 용서를 하게 되면 하느님이 주시는 치유의 은총으로 가득 차게 된다. 감사하게도 피스크가 바로 이러한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는 의사와 한 시간 정도 이야기를 나눈 다음 어린아이처럼 울부짖으며 수백 킬로그램짜리 짐을 어깨에서 내려놓은 기분이라고 말했다. 그는 비로소 제대로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다. 용서하기 시작하자 고통은 떠나가고 평화가 찾아왔다.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랑이신 하느님이 주시는 치유의 능력에 힘입어, 아무리 상처 깊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용서를 통한 해방을 맛볼 수 있다.”

용서가 치유의 힘을 발휘한다는 사실은 최근 과학적으로도 밝혀지고 있다. 용서하는 사람이 더 오래 건강하고 행복하게 산다는 연구 결과가 속속 나오는 것이다. 한 예로 이러한 실험이 있었다. 피험자들에게 자신을 속인 사람 또는 모욕하거나 거부한 사람들을 생각하게 하고 심장 박동수, 혈압, 스트레스 정도를 측정했다. 그러고 나서 그들에게 선택하게 했다. 원한의 감정을 계속 유지하거나 용서해 주는 것을 마음에 그리도록. 그 결과는 어떠했을까? 용서를 떠올린 사람들은 평온함을 느끼고 자신을 잘 통제하게 되면서 심장 박동수와 혈압이 낮아졌다. 반면 원한의 감정을 유지한 사람들은 육체적 긴장과 함께 분노와 슬픔을 더 강하게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4 용서하지 않으면 면역 체계가 약해지고 우울증, 심장마비, 만성 요통, 그리고 암 발생 위험률이 높아진다고 밝힌 연구도 있다. 기억력과 올바른 판단력도 약해진다고 한다.5

용서에 실패하면 건강만 나빠지는 것이 아니다. 인간관계도 단절될 수 있다. 용서에 실패하고 나면 우리가 다시 상처받을까 봐 두려워하게 된다. 사람들을 믿을 수 없기 때문에 모호막 안에 꼭꼭 숨어 사람들을 멀리한다. 그 결과 분노뿐 아니라 혼자라는 고립감까지 크게 느끼게 된다. 또한 불행은 대체로 나 하나에 그치지 않는 특징이 있다. 우리는 괴로움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기 원한다.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나의 분노가 퍼져나간다. 그들은 점점 힘들어하다가 결국은 나를 사랑하기 어려워 피하게 된다. 만약 내 곁에 있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라면 나 때문에 미칠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겪는 불행은 나 자신을 규정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 나라는 사람의 정체성이 나의 상처와 동일시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그저 버림받은 배우자, 부모에게 인정받지 못한 자녀, 부당한 대우를 받는 직장인, 가엾은 희생양 등으로 기억될지도 모른다. 솔직히 이런 상황이 싫지 않은 측면도 있다. 순교자인 양 동정심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 고통을 준 사람보다 내가 도덕적으로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면서 교만하고 독선적이며 거룩한 사람이 되기도 한다. 심지어 그 사람 덕에 좋은 사람으로 보이는 상황을 즐길 수도 있다. 나는 ‘좋은 편’ 상대는 ‘나쁜 편’이니까. 그리고 당연히 다른 사람들도 이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하니까 망설이지 않고 상대를 험담하고 욕하게 된다.

용서하면 이러한 정체성을 벗어버릴 수 있다. 그러나 이미 이 정체성에 길들여져 편안하기 때문에 벗어버리기 두렵기도 하다.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한 발짝 뒤로 물러나 자신이 어떤 모습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모습이 정말로 내가 원하는 모습인가? 사람들이 지금의 나와 함께하고 싶어 할까? 두 경우 대답은 모두 ‘아니요!’일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분명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모습이 아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건강하고 행복한 사람이 되길 원하신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 그것도 충만한 생명을 주러 오셨다! 용서에 실패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함께 나누자고 초대하신 풍요로운 삶을 스스로 거부하는 것이다. 또한 하느님의 용서를 스스로 거부하는 것이다. 주님의 기도에서 아버지 하느님께 우리가 어떤 기도를 드리는지 생각해 보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하느님의 용서는 용서하지 않는 마음에는 들어갈 수 없다. 동료 사제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생명이 다해 예수님의 얼굴을 마주하게 되는 순간, 예수님은 아마 나를 가장 괴롭힌 원수의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라고. 왜 그럴까? 원수의 모습을 통해 우리가 얼마나 용서했는지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나는 원수를 용서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예수님의 용서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상처를 입으면 당연히 고통스럽다. 그런데 용서하지 않으면 고통에 고통을 더할 뿐이다. 상처에 소금을 문지르는 격이다. 용서하지 않으면 우리는 육체적-영적-관계적으로 또 상처를 입게 된다. 우리는 불행해진다. 다른 사람들도 불행하게 만들고 하느님마저 멀리 밀어버린다. 딕 피스크 중사처럼 말 그대로 우리 자신을 죽이게 될지도 모른다.

찰스 디킨스 Charles Dickens가 말했다. “내게 상처 준 사람을 용서하려는 마음이 없다면 내 삶의 의미 있는 방식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볼 수 없다.” 우리는 모두 의미 있는 삶을 살기를 원한다. 고통을 치유받기를 원한다. 행복해지기를 원하고, 동정보다 사랑받기를 원한다. 그리고 하느님과 가까이 있기를 원한다. 이 모든 것이 용서가 정말로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다.

 

 

용서하면 내가 용서해 주는 당사자는 물론이고
주변 모든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축복을 빌어주는 것이다.

 

제3장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동아프리카의 원주민 후투 Hutus와 투치 Tutsis는 수백 년 동안 사이 좋게 살았다. 그런데 1994년 그들 사이에 폭동이 일어나 팔십만 면이 목숨을 잃는 불행한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주로 르완다 지역에서 여성과 어린이, 노인들이 잔인하게 학살되었는데, 그들을 죽인 군인 중에는 어린 소년병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의 사회조직은 완전히 붕괴되고 말았다.

참혹하기 이를 데 없는 이 비극에서 살아남은 사람 중 한 명이 다티바 으턍게지 은가보이송가 Dativa Nyangezi Ngaboyisonga 였다. 6 다티바는 폭동이 점차 번져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몸을 숨기려 교회로 갔다. 그러나 교회에 비해 숨으려는 사람이 너무 많아 다티바는 자기 대신 친척을 들어가게 해주고는 정글로 도망쳤다. 그런데 결국 이 일은 다티바의 목숨을 구하는 일이 되었다. 얼마 못 가서 교회가 폭격을 당했기 때문이다. 한편 정글에서 뱀에 물려가며 갖은 고생을 하던 다티바는 결국 군인들에게 잡히게 되었는데, 그녀가 보는 앞에서 아버지와 고모는 고문당하고 목숨을 잃었다. 절망 속에서 다티바는 하느님께 약속했다. “만약 저를 구해주신다면, 당신이 원하시는 일이며 뭐든지 하겠습니다.. 당신께 봉사하고, 이 사람들에게마저도 봉사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 사람들’이란 자신에게 엄청난 시련을 안겨준 바로 그 사람들을 의미했다.

하느님은 다티바의 기도를 들어주셨고, 그녀는 자신이 한 약속을 지켜나갔다. 폭동이 끝난 후 다티바는 수감된 어린 군인들을 위해 통역봉사를 해달라는 수녀님의 부탁을 받았다. 다티바는 그 일을 맡았고, 결국 그녀가 돌봐준 수백 명의 청소년들이 그녀를 ‘엄마’라고 부르기에 이르렀다. 다티바는 하느님의 사랑과 용서의 소중함을 가르쳤다. 어린 병사들은 마침내 석방되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다.
다티바는 자신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주고 온 민족을 증오와 폭력에 시달리게 한 모든 사람을 용서했다. 자신뿐 아니라 그들을 위해, 그리고 참으로 나가 전체를 위해 그렇게 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그들의 마음은 바꿀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회를 다시 건설해야 하고 이 폭력 위에서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그녀와 그녀를 따르는 사람들이 노력은 좋은 열매를 맺었다. 지금 르완다의 모든 마을에서는 살인자와 희생자 가족들이 평화롭게 함께 살아가고 있다.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우선 자신에게 이롭다. 또한 다티바의 예에서 보듯이 용서받은 사람에게도 도움이 된다. 사실 내게 상처를 준 사람은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진심으로 미안해하고 있을지 모른다. 죄책감으로 몹시 괴로워하며 시간을 되돌리고 싶어 할 수 도 있다. 용서해 준다는 것은 후회와 수치스러움의 감옥에서 그들을 풀어주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그들을 치유해 주고 더 좋은 미래를 희망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다.

용서를 안 하고 버티면 그들을 계속 감옥에 가둬두게 된다. 벌주고 싶어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할지도 모르겠다. 고의적으로 그들의 평화를 허락하지 않겠다는 마음이다. 그러나 그러면 동시에 자신의 평화도 거부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평화도 빼앗게 된다. 용서에 실패하면 증오심을 품게 되고, 냉소적이며 분노에 가득 찬 사람이 되기 쉽다. 주위에 부정적인 기운을 퍼뜨린다. 불행은 나 하나에서 그치지 않는 것이어서 주변 사람들도 불행하게 만들고, 결국 그들을 멀리 쫓아버리고야 만다. 도망갈 수 없는 가족들은 나의 불행에 ‘사로잡히게’ 될 것이다. 불행은 전염된다. 암처럼 번질 수 있다.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인간에게 고통이란 짐이 지워진 것은 제대로 용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가족을 용서하는 일은 특별히 중요하다. 배우자나 친척, 시집이나 처가식구들을 용서하지 못하면 가족의 화합은 산산이 깨질 수밖에 없다. 이미 깨져버린 상황이라면 다시 이어 붙일 가능성마저 없게 된다. 우리는 ‘한쪽 편을 들도록’ 주변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강요한다. 모함하고 험담하며, 화해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있으면 방해까지 한다. 한때 가까웠던 사람들 사이를 이간질한다. 결혼이나 졸업식 같은 행사와 명절은 화목하고 즐거운 시간이 아니라 그저 못마땅하고 두려운 시간이다. 자녀들은 긴장을 감지하고 동요하거나 움츠러든다. 결국 그들은 잘못된 학습을 하게 되고 우리를 본보기로 따르게 될 것이다.

우리는 특별히 아이들에게 용서하는 모범을 보여야 한다. 그래야 아이들이 용서할 줄 아는 어른으로 성장한다. 용서는 저절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랑처럼 용서도 배워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용서는 가정에서 배워야 한다. <가톨릭 교리서> 1657항 이 가정을 용서의 ‘학교’라고 표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 가족이 여름이면 종종 참여하는 피정이 있다. 나는 그 피정에서 가정이 용서의 학교라는 사실을 실제로 체험하곤 한다. 피정 중 하루는 종일 용서에 초점이 맞춰진다. 그날 사람들은 가족에게 용서를 청하는 편지를 써서 저녁 모임 때 서로 교환한다. 형제들은 서로 사과한다. 배우자도 서로 사과한다. 자녀들은 부모에게 사과하고 부모는 자녀들에게 사과한다. 눈물을 흘리며 서로 포옹을 나눈다. 평생 잊지 못할 강렬한 체험이다. 그리고 참여한 모든 사람에게도 똑같이 강렬하고 가슴 뭉클한 시간이다.

물론 아이들만 용서를 배워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 세상에는 한 번도 용서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 용서하는 법을 배워 본 적이 없는 사람들, 용서는 무의미하거나 불가능한 일이라고 믿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그 사람들에게 내가 용서하는 모습을 보여서 이 세상에는 다른 면도 있음을 보여주면 좋겠다. 어떻게, 왜 용서해야 하는지를 알려주고, 용서는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꼭 해야 한다는 사실을 직접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가 모두 서로 용서하며 산다면 우리의 삶이 어떤 모습일까 상상해 보자. 천국 같지 않겠는가? 그러나 슬픔 현실은,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사실이다. 인간의 본성과 지금까지의 역사로 미루어 볼 때 앞으로도 항상 이 세상에는 미움과 증오, 복수와 무자비가 있을 것이다. 하늘의 이쪽 편에서는 불가피한 일인가 보다. 그러나 이런 일들이 생기는 데에 우리가 한몫을 거들 필요까지야 없지 않을까.
예수님은 우리 자신과 이웃, 더 나아가 인류를 위해 용서를 확장하고 평화를 증진하여 이 세상에 아주 조그만 천국이라도 창조하라고 우리를 부르셨다.
용서할 때, 우리는 이 어두운 세상을 그리스도의 사랑의 빛으로 밝히며, 사랑이 미움보다 강하다는 진리를 증거한다.

 

 

용서는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고
이 세상에 그분의 사랑을 드러내는 것이다.

4장
하느님을 위하여

 

책상에 앉아 뭔가 열심히 하고 있는 아이의 어깨 너머로 선생님이 아이를 지켜본다. “뭐하고 있니?” “하느님을 그리고 있어요.” 선생님이 짐짓 이의를 제기한다. “하느님이 어떻게 생기셨는지는 아무도 모르는데!” “내가 다 그리고 나면 모두 알게 될 거예요!” 장난스럽게 웃으며 아이가 대답한다.

만약 당신에게 하느님을 그리라고 한다면 어떤 모습을 그릴 것 같은가? 미소 짓는 모습일까, 아니면 화나신 모습일까? 이 질문을 하는 이유는 많은 사람이 하느님의 모습을 기분 좋지 않은 모습, 심지어는 화난 모습으로 상상하기 때문이다. 그들 마음속의 하느님은 쉽게 분노하고 징벌하시는 분이다. 그들에게 하루 하루는 하느님 앞에서 치르는 오디션과 같다. 신상생활은 희망과 평화보다 두려움과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있다. 하느님과 함께 걸어가는 것은 마치 달걀 껍질 위를 걸어가는 것과 같다. 고해성사는 기쁨 가득한 화해의 성사가 아니라 형을 집행 당하는 순간일 뿐이다.

하느님에 대한 이러한 이미지는 어디서 얻게 되었을까? 아마도 부모에게서 받게 되었을 것이다. 어렸을 때 하느님에 대해 갖는 이미지는 부모님이 알려주는 메시지와 부모님이 세상을 보는 시각을 통해 대부분 그려진다. 만약 야단을 잘 치는 부모였다면 아이는 자라며 하느님 또한 야단을 잘 치는 분이라 생각하게 됐을 것이고, 냉정하거나 일관성이 없거나 무관심한 부모였다면 하느님 또한 마찬가지라는 인상을 갖게 됐을 것이다. 신앙교육도 하느님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만약 우리 자신을 ‘화난 하느님의 손아귀에 있는 죄인’으로 여기도록 배운다면, 분노 말고 다른 어떤 모습으로 하느님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또한 힘들고 고통스러운 삶 때문에 하느님의 이미지를 잘못 그리게 되기도 한다. “왜 하느님은 나에게 이런 일을 허락하시는 걸까?” 라는 질문은, “도대체 무슨 하느님이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내버려 두신다는 말인가?” 라는 질문으로 쉽게 변할 수 있다. 하느님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하느님은 좋은 분이 아니라고 단정 짓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좋지도 않은 ‘하느님’에게 그저 겁이 나서 순종할 뿐이다. 사랑할 만한 분도 아니고 사랑을 베푸는 분도 아닌데 어떻게 사랑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느님은 우리가 당신을 이렇게 생각하기 원하실까? 당연히 아니다. 하느님은 당신을 제대로 알리기 원하시며 ‘억울한 누명’을 쓰실 때마다 진실을 알리도록 우리를 부르신다. 성 요한 보스코도 그렇게 부름을 받았다.
어린 시절 요한은 욕을 하며 나쁜 행동을 하는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꿈을 꾼 적이 있었다. 요한은 소리 지르고 싸우면서 못하게 막으려고 했지만 허사였다. 그때 얼굴이 환하게 빛나는 사람이 흰옷을 너울거리며 나타났다. 그 사람은 요한을 리더로 세우더니 “너는 주먹이 아니라 부드러움과 친절로 이 친구들을 설득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어른이 되어서 요한은 가난하고 버림받은 아이들을 돌보면서 늘 이 말을 가슴 깊이 간직했다.

요한은 자신의 일을 도와줄 수도회 구 개를 창립했다. 그는 당시의 훈육 방법과는 달리 편태 鞭笞 ‘회초리’ 나 어떤 형태의 체벌도 금지했으며, 어린아이들과 지낼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기쁜 마음과 다정함, 인내심임을 강조했다. 예수님이 우리 모두를 그렇게 대하시니 어린이와 청소년 또한 마땅히 그렇게 대접받아야만 한다고 가르쳤다.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예수님은 친절과 사랑으로 죄인들을 대하셨다. 이런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거나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하느님의 자비에 희망을 갖게 된 사람들도 있었다.”

우리도 용서하는 사람이 됨으로써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희망을 사람들에게 줄 수 있다. 그리고 하느님 – 예수님을 통해 계시된 하느님 – 에 대해 올바른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다. 요한 보스코 성인이 청소년들에게 징벌의 하느님이 아니라 사랑의 하느님을 증거해 보여주었듯이, 우리도 용서할 때마다 하느님이 어떤 분 이시라는 사실을 드러내 알려줄 수 있다. 곧 용서 함으로써 너그럽고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선포하는 것이다. 용서는 복음의 선포이며 복음의 기쁜 소식을 나누는 방법이다.

용서함으로써 우리는 하느님의 선하심을 세상에 알린다. 하느님의 용서를 믿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이 어떤 분이시지 진실을 보여준다. 하느님의 손길을 대신해 용서받는 상대를 어루만져 준다. 그리스도인이란 단순히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 다시 말해 교회다. 우리를 통해 오늘날 그리스도의 현존이 온 세상으로 퍼져나간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다음과 같이 아름답게 표현했다. “그리스도는 이제 이 세상에서 육신을 가지고 계시지 않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육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손도, 발도 없으시지만 당신은 갖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당신의 눈을 통해 세상을 자비로 바라보십니다. 그리스도는 당신의 다리로 선한 일을 하러 다니십니다. 그리스도는 당신의 손으로 세상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여기에 우리는 한 가지를 더 보탤 수 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마음을 통해 당신의 자비를 베푸신다.

용서는 하느님을 분노하는 분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뿐 아니라, 하느님의 존재 자체를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감동을 줄 수 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용서는 사람들의 마음이 하느님을 향해 돌아설 수 있도록 해준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기념하는 성금요일마다 우리는 이를 고백한다. 이날 전례 중의 기도에는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청원이 포함되어 있다. 이 기도에서 우리는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깨달을 수 있기를, 그리고 하느님이야말로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이요 우리 모두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기쁘게 인정할 수 있기를’ 하느님께 청한다. 용서는 바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드러낼 수 있는 길이다.
자신을 아는 것이 곧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하느님에 대해서도 지극히 맞는 말이다. 안타깝게도 너무 많은 사람이 하느님을 잘 모른다. 모를 뿐 아니라 알아야 할 하느님이 계시다는 사실조차 생각하지 않는다. 그나마 하느님에 대해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잘못 알고 있다. 하느님은 이러한 모든 사람이 당신을 알고 사랑하기를 원하신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알고 사랑하시는 것과 똑같이 그들도 알고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베푸는 용서를 통해 당신을 모르는 사람들을 사랑해 주시려고 하느님은 우리를 부르신다. 그 부르심에 응답한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용서와 사랑을 현실에서 구현하는 것이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2843항’ 에서 강조하듯이, 우리가 이렇게 할 때 “끝까지 사랑하는 사랑, 곧 용서에 대한 주님의 말씀은 구체화된다.”

 

 

용서했다고
모든 잊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흘려 보낼 수는 있다.

 

 

2부
용서의 특성은 무엇인가?

 

용서는 공평하지 않다.
용서는 사랑과 자비의 표현이다.

 

 

5장
공평하지 않아!

 

어느 날 내 친구가 <적과 흑 The Scarlet and the Black>이란 영화를 아버지와 보고 있었다. <적과 흑>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바티칸에서 수천 명의 유다인이 피신하는 데 도움을 준 용감한 아일랜드 계 사제, 휴 오플래허티 Hugh O’Flaherty 몬시뇰에 관한 영화다. 몬시뇰은 그 지역 게슈타포 우두머리이던 헤르베르트 카플러 Herbert Kappler대령에게 암살당할 위험에 늘 시달린다. 후에 연합군이 로마에 들어오자 카플러는 체포되는데, 오플래허티 몬시뇰은 감옥에 갇힌 카플러에게 꾸준히 면회를 갈 뿐만 아니라 아내와 자녀들도 돌봐준다. 결국 오플래허티 의 그리스도교 적 사랑에 감화되어 카플러는 가톨릭으로 개종하게 된다.

영화의 마지막에 용서를 호소하는 자막이 나왔다. 친구 아버지는 그 자막을 보고 벼락같이 화를 냈다. 2차 대전 당시 군인이던 그의 아버지는 절대로 나치를 용서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지 오래였다. 그토록 커다란 상처를 남기고 그토록 수많은 악행을 저지른 나치를 용서하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것은 너무나 불공평하다.

당연히 옳은 말이다. 그의 아버지에게 나치를 용서하는 일은 공평하지 않은 일이다. 그렇지만 용서에 관한 한 공평한 것은 없다. 우리는 상처받게 되면 똑같이 되갚아 주고 싶어한다. 내가 어떻게 느끼는지 상대도 똑같이 알았으면 좋겠고 쓰디쓴 고통을 맛보았으면 좋겠다. 나를 아프게 했으니 마땅히 되갚아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만이 공평한 일이니까.

엄격한 정의는 공평할지 모르지만 용서는 공평하지 않다. 하느님도 공평하지 않으시다. 이 이야기가 이상하게 들리지 모르겠다. 그러나 인생은 종종 공평하지 않아 보인다. 나쁜 일이 좋은 사람에게 일어나고 좋은 일이 나쁜 사람에게 일어난다. 부자는 점점 더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은 점점 거 가난해진다. 이 모든 불공평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느님은 마땅히 공평하셔야 하지 않나! 그러나 하느님은 공평하시지 않다. 이는 우리가 인간의 공평함 또는 인간의 정의라고 부르는 것과 하느님의 정의 사이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정의란 사람들이 받을 만한 것을 받는가의 문제다. 인간의 정의로 볼 때 ‘눈에는 눈’은 공평하다. 그러나 마틴 루터 킹과 마하트마 간디가 상기시켜 주듯이, ‘눈에는 눈’ 정신으로 산다면 모든 사람이 눈멀지 않겠는가! 감사하게도 하느님의 정의는 다른다. 연중 제25주일의 전례는 이를 아름답게 표현한다. “완전한 정의는 하느님의 사랑에서 찾을 수 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느님의 정의는 바로 사랑이다. 사랑은 다른 사람의 선익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다. 사랑은 우리가 마땅히 받을 만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받는 그런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사랑은 우리가 소위 말하는 공평한 몫에 마음 쓰지 않는다. 진정한 사랑은 대가를 바라지 않고 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바로 이 사랑, 곧 하느님의 정의를 베풀라고 초대받았다. 그런데도 우리는 정의라는 이름으로 이 기준에 못 미치게 행동할 때가 많다. 공평하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용서를 철회하기도 하고, ‘스트라이크 세 번이면 너는 아웃이야’라는 생각으로 용서를 제한하기도 한다. 이는 용서가 아니라 집행유예일 뿐이다. 심지어 그 사람은 고통 받아야 마땅하니 고통을 겪는 모습을 좀 봐야겠다고 벼르기까지 한다.

성경에는 요나 이야기가 나온다. 하느님은 요나가 니네베의 죄 많은 사람들에게 참회에 대해 설교하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요나는 니네베 사람들의 구원이 아니라 멸망을 보고 싶었다. 그래서 하느님에게서 도망치려고 했지만 아무리 도망치려 해도 소용없었다. 마지못해 니네베 사람들에게 설교한 요나는 정작 그들이 자신의 말을 듣고 회개하자 화가 났다. 그들이 마땅히 당해야 하는 멸망에서 벗어나 목숨을 구하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요나는 불평을 터뜨렸다. “저는 당신께서 자비하시고 너그러우신 하느님이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크시며, 벌하시다가도 쉬이 마음을 돌리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요나 4.2 하느님은 요나를 일깨워 주셔야 했다. 당신의 사랑 안에서 정의는 자비로 인해 부드러워지며, 당신이 죄는 참으로 미워하시지만 죄인은 항상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말이다.

요나처럼 우리도, 상대가 마땅히 당해야 할 일을 당하는 모습을 보고 싶을 때가 종종 있다. 엄격한 정의가 실현되는 것을 보고 싶다. 공평함을 원한다! 하지만 생각해 보라. 하느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셔서 얼마나 다행인가. 하느님은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주지 않으신다. 그분은 자비하고 용서하시는 분이다. 하느님은 당신처럼 우리도, 정의의 이름이 아니라 사랑의 이름으로 행하라고 요구하신다.
예수님은 임금에게 빚을 진 종의 비유를 말씀하셨다. 마태 18,230-35 엄청나게도, 그 중은 ‘만 탈렌트’나 빚을 졌다. 일 탈렌트는 보통, 노동자의 육천 일 日 의 임금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만 탈렌트를 벌기 위해서는 노동자는 매일 쉬지 않고 거의 이십만 년 동안 일을 해야 한다! 7 예수님은 종이 절대로 갚을 수 없는 액수의 빚을 졌다는 사실을 지적하시는 것이다. 이 비유에서 ‘자비로운’ 임금은 종의 빚을 탕감해 준다. 그러나 그 종은 자기에게 아주 작은 빚을 진 동료를 만나자 그를 위협하고 멱살을 잡아 감옥에 가두어 버렸다. 임금은 이 사실을 알고 몹시 화가 나서 말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마태 18,33

예수님은 이와 똑같은 말씀을 우리에게 하신다. 우리가 예수님께 용서받았듯이 우리도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라고 말이다. 예수님은 그것이 공평하지 않다는 사실을 아신다. 인생은 분명히 예수님께도 공평하지 않았다. 친구들은 그분을 배신했고 예수님께 사랑받던 사람들도 등을 돌렸다. 정부와 종교 집단은 예수님을 거부했으며, 그분은 완전히 죄가 없으신데도 사형 선고를 받고 고문당하고 죽임을 당하셨다. 예수님은 이 모든 경험의 흔적을 아직도 간직하고 계신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여전히 용서하신다.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없다. 길가의 어떤 교회 앞을 지나다가 이런 문구를 봤다. “우리는 그만 용서해도 된다. 단, 하느님이 우리를 그만 용서하신다면…”

 

 

어떤 잘못을 했든지 누구나 용서를 필요로 한다.

 

6장
예외 없이

 

2001년 9월 11일 무시무시한 테러 공격이 있은 다음, 미국의 한 저명한 정치가가 테러리스트들에게 경고했다. “하느님은 너희에게 자비를 베푸실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절대 그렇게 하지 않겠다!” 이 말은 그 참담하던 떼에 미국 사람들이 가진 태도와 분노를 그대로 드러낸다. 사람들은 복수와 보복을 원했다. 자비와 용서는 생각할 수조차 없는 일이었다.

용서해야 할 대상에 제한을 두는 것은 우리에게 이상한 일이 아니다. 많은 사람이 파렴치한 범죄자는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남편과 아내들은 배우자가 부정을 저지르면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고 한다. 유다인 강제수용소의 생존자인 사이먼 비젠탈 Simon Wiesenthal 은 자신의 책 <해바라기 The Sunflower> 에서, 죽어가는 나치 친위대 요원이 자신에게 용서를 청해온 경험을 전하며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냐고 독자들에게 질문한다. 작가 신티아 오직 Cynthia Ozick 은 그에 대해 이렇게 답했다. “용서는 매정한 일이다. 그것은 희생자를 잊는 일이다. 희생자들의 고통과 죽음을 희미하게 만든다. 과거를 사라지게 한다. 용서의 얼굴은 부드럽지만, 학살당한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냉혹한 일인가. … 나치 친위대 요원은 … 지옥에나 떨어져라.” 8

우리 가톨릭 신자들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용서하지 않을 때가 많다. 프란치스코 회의 주드 윙클러 Jude Winkler 신부가 들려준 재미있는 이야기를 소개한다. 천국 문 앞에 사람들이 두 줄로 서있다. 첫째 긴 줄에 서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교회에 다니던 품위 있는 사람들이다. 다른 줄은 훨씬 짧은데, 이 줄에는 예상치 못한 인물들이 서 있다. 칭기즈칸, 칼리굴라, 이디 아민, 조셉 스탈린, 그리로 이들과 마찬가지로 불미스러운 행적을 남긴 사람들이다. 더 충격적인 점은 이 짧은 줄이 긴 줄보다 더 빨리 천국 문을 향해 움직인다는 사실이다! 이 모습을 보고 교회를 다니던 사람들은 투덜대고 불평하기 시작한다. 그들이 못마땅해 하면서 말하기를, “저런 사람들도 천국에 들어가는 줄 알았더라면, 살아있을 동안 훨씬 더 즐기며 살걸!” 바로 그때 예수님이 나타나 말씀하셨다. “미안하다. 그러나 나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사는 줄 알았다. 만약 너희가 나를 진정으로 사랑했다면, 내가 이 사람들을 용서해 줘서 행복할 것이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은 천국 문을 닫아버리셨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물론 스탈린이나 히틀러나 그 밖의 사람들이 천국에 있다는 점을 암시하려는 내용은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결정이지 우리 소관이 아니다. 이 이야기가 말하고 싶은 점은 예수님의 모범과 교회의 가르침이 있지만 가톨릭 신자도 때로는 용서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용서를 베푸셨고, 우리도 똑같이 행하라고 요청하신다. 그들이 무슨 일을 저질렀든, 어떤 끔찍한 악행을 저질렀든 상관없이 말이다. 도미니코 회 신부 피터 캐머런 Peter Cameron이 쓴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용서는 가끔 하는 것도, 선택해서 하는 것도 아니다. 대수롭지 않고 용서하기 쉬운 죄만이 아니라 특별히 엄청난 죄도 용서해야 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지상 삶을 마치면서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고 십자가 위에서 청하신 것이다.” 9

예수님은 세상을 벌하러 오지 않고 구원하러 오셨다. 착한 목자가 잃어버린 양을 찾아 여기저기 헤매듯이 예수님은 용서하고 채유해 주시기 위해 죄인을 찾으신다. 지상에서 사시는 동안, 예수님은 죄인으로 낙인 찍힌 사람들과 어울려서 자주 비난을 받으셨다. 그리고 그 죄인들이 바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 죄인들은 지금도 여전히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
예수님은 어떤 제한이나 조건도 달지 않고 우리를 용서하신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어야 할 용서의 모범이다. 어느 어머니와 장성한 딸이 어느 날 심각하게 언쟁을 벌이다가 문득 자신들의 모습을 깨닫게 됐다. 순간 딸은 자기가 한 말과 행동을 사과하며 어머니에게 용서를 구했다. 어머니는 영 내키지 않는지 용서를 못하고 주저했다. 딸이 이를 느끼고 어머니에게 물었다. “제가 예수님께 죄송하다고 말씀드리면 예수님은 용서해 주실 거라고 생각하지 않나요?” 그러나 어머니는 달라지지 않았다. “예수님이 용서를 해주실지 아닐지 넘겨짚어 말하지 않겠다.”

주님의 길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주님의 길은 우리의 길과 같지 않고, 주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다르다. 그러므로 어떤 특정 상황에서 예수님이 그렇게 하실 것이다 아니다 를 주제넘게 추정하는 것은 신중치 못한 일이다. 그러나 용서에 관한 한, 우리는 예수님이 용서해 주실 것이라고 절대적인 확신을 갖고 말해도 된다. 예수님은 언제 어디서나, 그리고 어떤 사람에게나, 심지어는 임종 직전의 순간에도 용서를 베푸신다. 옛 영국 시 중에 말에서 떨어져 죽는 그 짧은 순간에 어떻게 하느님의 자비를 구하여 받았는지를 노래한 시가 있다. “땅으로 떨어지는 찰나 나는 자비를 구했고 또한 얻었네.”

살인자나 강간범, 무장 강도는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고 단언하는 사람들의 속뜻은 사실 그런 사람들을 용서할 능력이 자신에게 없다는 의미일지 모른다. 우리도 마찬가지 생각일 것 같다. 이런 극단적인 용서는 위대한 성인이나 특별히 거룩한 사람들만이 할 수 있고,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이다. 살인자나 테러리스트, 나치 수용소의 간수를 용서하란 말인가? 절대 못 한다!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너는 할 수 있다.” 예수님은 불가능한 일을 하라고 요청하시는 분이 아니다. 만약 우리가 그런 사람들을 용서할 수 없다면, 그렇게 하라고 시키지도 않으실 것이다. 예수님은 실패할 일을 하라고 하지 않으신다.

C. S. 루이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여러분 안에 있는 용서할 수 없는 모든 것을 용서하셨기 때문이다.” 우리의 용서는 제한이 없어야 한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용서는 한계가 없지 않은가! 예수님의 사랑도 마찬가지다. “하느님은 너에게 자비를 베푸시겠지만, 나는 아니다!” 라고 말하고 싶을 때가 종종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하느님이 너에게 자비를 베푸시기에, 나도 그렇게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용서는 조건 없이, 한도 없이 이루어져야 한다.

7장
조건 없이

 

“당신은 이미 용서받았습니다. 무슨 말인지 봉투를 열고 확인해 보세요!” 어느 날, 이런 문구가 적힌 봉투를 우편함에서 발견했다. 봉투를 열어보니 자동차 보험회사에서 온 광고전단이었다. 전단지에는 ‘4 GIVN 용서’ 이라고 쓰인 자동차 번호판 그림과 함께 “첫 번째 사고로 인해 당신의 보험료는 올라가지 않습니다. 단돈 일 원도” 라고 쓰여 있었다. 하지만 두 번째 사고가 나면 어떻게 되는지는 언급이 없었다. 짐작해 보건대, 두 번째부터는 ‘용서’란 없을 것이다.

보험회사가 ‘사고 면제’에 한도를 두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우리는 용서하는 데에도 한도를 두려고 한다. 첫 번째 잘못, 어쩌면 두 번째 잘못까지는 너그러이 용서해 줄 수 있다. 그러나 세 번째는? 그때는 ‘스트라이크 세 번이면 아웃’이다.
우리는 또 용서해 주기 전에 전제조건을 내세우려 한다. 호세 칸세코 Jose Canseco는 자신이 쓴 책 Juiced(약물에 취해)에서, 동료 선수인 라파엘 팔미에로 Rafael Palmiero가 스테로이드제를 불법 복용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팔미에로의 명성은 땅에 떨어졌고 국회에 불려나가 진술까지 하게 됐다. 팔미에로는 이렇게 말했다. “만약 칸세코가 그 엉터리 책을 쓴 일이 잘한 일로 판명되거나 그가 마음을 고쳐먹고 모범적인 사람이 된다면, 그를 용서하겠다.”10 이 진술에서 첫째 단어 ‘만약’은 팔미에로의 말을 이해하는 중요한 실마리가 된다. 그는 용서할 것이다. 단 그가 내세운 조건이 충족될 때만이다.

우리는 보통 용서는 얻어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남편이 꽃을 사가지고 들어온다면 이야기는 너무 뻔하다. 부인이 넘어갈 리 없다. “자, 뭘 잘못했는지 말해봐요.” 부인이 묻는다. 그녀는 남편이 뭔가 잘못을 했고, 꽃은 용서를 얻어내기 위한 뇌물이라는 것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러나 이런 방법이 하느님의 뜻과 같을까? 한 여인이 눈물을 흘리며 예수님의 발을 비싼 향유를 부었다. [루카 7.36-50] 예수님은 그녀가 저지른 수많은 죄가 용서되었다고 말씀하셨다. 그녀의 선물이 뇌물이었을까? 아니다. 예수님은 선물이 아니라 믿음 때문에 그녀가 용서받았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사랑과 마찬가지로 진정한 용서는 돈이나 뇌물로 살 수 없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용서는 무상의 선물이 아니라 대가 代價 일 뿐이다. 값을 치를 수 있는 사람만이 용서를 희망할 수 있다는 의미가 되어버린다.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가 죗값을 치를 길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신다. 감사하게도 하느님은 폭리를 취하는 분도, 고리대금업자도 아니시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갚을 길 없는 대가를 치르라고 요구한 적이 없는 자애로운 아버지시다. 우리의 죗값은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 십자기를 통해 치르셨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가 받는 용서는 대가를 치르고 받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처지에서 보면 용서는 완전 무상으로 온 것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재확인하고 싶을 때가 많다. 사실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좋은 일이라 오히려 믿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대수술을 앞두고 나에게 고해성사를 받은 한 중년 여성의 경우가 바로 그러했다. 그녀는 죄 사함을 받고 기쁨과 평화로 가득했다. 그러나 가다가 금방 다시 돌아서서는 이렇게 말했다. “신부님, 저는 하느님의 용서를 받을 자격이 없는 것 같아요.” “물론 당신은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 모두 자격이 없지요. 용서는 하느님이 주시는 무상의 선물입니다” 라고 나는 대답했다.

하지만 누군가는 이 말에 항의할지 모른다. “하느님도 조건을 두고 용서해 주시지 않나요?” 사실 예수님도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라고 기도하도록 가르치셨다. 이 기도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해야만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용서하신다는 의미 아닌가! 하느님께서 ‘기다리며 지켜보자’는 태도를 취하시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하느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이고, 그러므로 그분의 용서 또한 그러하다. 하느님의 용서는 은총의 선물이고 은총은 언제나 공짜다. 그러나 그것이 선물이라고 해서 모든 사람이 받으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용서를 받으라고 강요하지 않으신다. 용서는 우리가 언제라도 받을 수 있도록 늘 그 자리에 있다. 그러나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면 마음이 딱딱하게 굳어지고, 그 딱딱한 마음에는 하느님의 용서도 들어올 수 없게 된다. 용서하기를 거부함으로써, 결국 하느님이 주시는 용서도 거부하게 되는 것이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도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용서함으로써 용서받는다.”

하느님은 우리가 받은 용서에 대해 값을 치르게 하지 않으신다. 또한 우리를 얼마나 여러 번 용서해야 하는가에 제한을 두지 않으신다. 어떤 전제조건도, 불리한 약관도, 단서조항도 없다. 우리가 베푸는 용서도 이렇다고 말할 수 있는가? 신용대부를 조금씩 늘려주는 은행처럼 용서를 조금씩 늘려가는 경향이 있지 않은가? 융자를 받으려면 먼저 내가 신용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은행에 증명해야 한다. 그러고 나면 초과해서는 안 되는 융자금 한도가 설정된다. 만일 이자를 제대로 갚지 못하면 융자는 철회된다. 최소한 벌금을 물어야 한다. 우리는 용서도 이런 식으로 한다. 날 괴롭힌 상대가 용서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 확신이 설 때까지, 또는 정말로 미안해하고 있다는 느낌이 올 때까지 용서를 미룬다. 가끔은 그들이 벌을 받거나 창피를 당하기 바라면서 용서를 보류한다. 조건을 정하고 한도를 세워놓는다. 사과를 요구한다. 그리고 용서해 주면서 그 사람이 달라지기를 기대한다.

예수님은 위에 열거한 일 중 어떤 것도 하지 않으신다. 예수님은 사과를 기다리지 않으신다. 실제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보면 이런 말씀은 언급조차 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용서를 보류하거나 미루지 않으시고 한도도 두지 않으신다. 베드로가 얼마나 여러 번 용서해야 하는지 예수님께 여쭤보았다.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예수님이 대답하셨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야 한다!” [마태 18,22] 그러나 이 말씀을 너무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70 곱하기 7은 겨우 490이다. 이것이 상한선이라면 깨지지 않고 유지되는 결혼이 얼마나 되겠는가! 또한 몇 번이나 용서해 줬나 따져보라는 의미는 더욱 아니다. 그렇게 하는 건 예수님이 가장 원치 않으시는 일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7이란 숫자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7은 완전한 수를 뜻한다. 성경에서 숫자는 종종 하느님과 관련된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신 예수님 말씀은 우리도 하느님의 용서와 닮은 용서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다. 하느님의 용서란 조건이나 한도 없이, 미루지 않고, 너그러이, 거저 주시는 용서다. 이러한 용서, 곧 진정한 용서는 선물이다. 다시 한 번 용서란 말의 의미를 생각해 보자. 주기 위한 것 For-give.

 

 

용서했다고 모두 잊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흘려 보낼 수는 있다.

8장
용서하고 잊어버리라고?

 

‘용서하고 잊어버려라’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청결함은 경건함에 버금간다’라는 말처럼 성경에 나온다고 잘못 알려져 있는 구절 가운데 하나다. 성경에는 용서에 대한 내용이 아주 많지만 용서했으면 잊어버려야 한다는 이야기는 찾아볼 수 없다. 사실 ‘용서하고 잊어버려라’는 돈키호테가 시종인 산초 판사 Sancho Panza에게 한 말에서 유래한다.

‘용서하고 잊어버려라’라는 말은 숭고하긴 하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말은 비현실적이다.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돈키호테가 상상의 적과 창 싸움을 해서 이기는 것만큼이나 성공 가능성이 없다. 우리의 기억은 깨끗하게 지울 수 있는 컴퓨터 디스크가 아니다. 우리 마음에는 삭제 버튼이 장착되어 있지 않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심하게 받게 되면 그 트라우마는 여간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사실 그런 일은 다 잊어버려서도 안 된다. 그 기억 덕에 비슷한 상황에 다시 놓이는 경우를 피할 수동 있고, 도 상처 줄지 모르는 위험한 사람을 조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듯 역사의 교훈을 잊는 사람은 똑같은 일을 또 당할 운명에 처하게 된다.

그렇지만 우리는 용서하고 잊어버려야 한다는 말대로 해보려고 무진 애를 쓴다. 그래도 할 수 없으니 지쳐버릴 수밖에… 실패했다는 생각도 들고 창피하기도 하다. 사실 작은 상처들이야 잊을 수 있다. 기억은 시간과 함께 사라지니까. 그러나 심각한 상처는 용서하고 잊어버리려고 노력해 봤자 좌절에 빠질 뿐이다. 애당초 실현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서 가르치듯이 “당한 모욕을 더 이상 느끼지 않고 잊는 것은 우리의 능력을 넘어서는 일이다.” [2843항] 고통스러운 기억을 억눌러 놓을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저 묻어놓는 것뿐이다. 억눌린 기억은 곪게 되고, 언젠가는 다시 솟아오르게 되어있다.

나에게 일어난 일은 당연히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받은 상처를 일일이 마음에 담아두며 관계에 ‘점수를 매기라’는 의미는 아니다. 사도 바오로의 말처럼, 사랑은 ‘앙심을 품지 않는다.'[1코린 13,5] 그러나 우리는 상대가 잘못한 일을 마음에 차곡차곡 기록해 놓고 앙심을 품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가 다툴 일이 생기면 자신의 관점을 정당화하기 위해 그 기록을 꺼내 사용한다. 관계 전문 상담가는 이것을 ‘키친 싱킹 kitchen sinking’ [역주: 과거의 일들을 한꺼번에 다 쏟아내는 것]이라고 부른다. 현재의 문제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에게 창피를 주기 위해 과거의 사건들을 다 끄집어내는 것이다. 우리는 큰 소리로 이렇게 말한다. “기억 못해? 네가 그때…” 그러고는 과거의 상처를 몽땅 부엌 개수대에 쏟아놓는다.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쳐서 넘어뜨리려는 것이다. 이건 ‘정정당당한 싸움’이 아니다. 그저 잊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아직 용서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드러낼 뿐이다.

이렇게 상처를 계속 붙잡고 있음으로써 우리는 상대의 머리 위에 그 상처를 매달아 놓는 격이 된다. ‘머리 위에 매달아 놓는다’ 는 표현은 다모클레스 Damocles 에 대한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유래한다. 디모클레스 Damocles에 대한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유래한다. 다모클레스는 어느 날, 시라쿠사 통치자인 디오니시우스 Dionysius 왕의 위대한 권력과 권위를 칭송하며 비위를 맞추고 있었다. 그때 디오니시우스 왕이 하루 동안 서로의 지위를 바꿔보자고 제안했고, 다모클레스 는 즉각 받아들였다. 다모클레스는 왕으로서 하루를 즐겼다. 그러나 그것은 저녁 만찬 때까지였다. 그는 가느다란 말총 한 가닥에 날카로운 칼이 아슬아슬하게 묶여서 자기 머리 위에 매달려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 칼을 본 순간 다모클레스는 디오니시우스가 왕이란 지위 때문에 끊임없이 공포에 시달리며 살아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은 ‘다모클레스의 칼’을 상대방의 머리 위에 매달아 놓는 것과 같다. 상대방이 조금만 잘못 움직여도 말총은 끊어질 테고, 묶여있던 우리 분노의 칼은 풀릴 것이다. 우리는 분노의 공포 속으로 상대를 밀어 넣는다. 잊지 못하는 것은 정상이라 할 수 있지만 기억을 무기로 사용해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용서했다고 꼭 잊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용서했으면 이제 그만 흘려 보내야 한다. 흘려 보낸다는 것은 그 사건을 과거로 보내고 다시는 관심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는 의미다. 그러면 꽉 차있던 분노의 고통에서 놓여날 수 있다. 더 이상 복수를 원하지도 않게 된다. 싸울 일이 있어도 트럼프 카드를 주머니에서 꺼내듯 과거의 일을 끄집어내지 않는다. 기억을 자기 편할 대로 이용하지도 않는다. 그 대신에, 이미 일어난 일이고 다 끝난 일임을 인정한다. 잊지는 못하지만 용서한다.

17세기 프랑스 수녀인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 St. Margaret Mary Alacoque와 성 클로드 드 라 콜롱비에르 St. Claude de la Columbiere의 일화다. 성녀 마르가리타는 자신의 고해사제였던 성 클로드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성심을 환시로 보았다고 말했다. 성 클로드는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며,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에게 다음에 예수님이 또 나타나시면 클로드가 지난번 고해성사 때 무슨 말을 했는지 여쭤보라고 했다. 마르가리타는 정말로 클로드 신부가 무엇을 고백했는지 예수님께 여쭤보았다.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잊어버렸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이 잊어버리셨다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아신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 과거의 잘못을 깨끗이 지워버리실 수 있다. 예수님이 용서하신다는 뜻은 잊어 버리신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더 이상 우리의 죄를 붙잡고 계시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죄는 과거에 있고, 과거가 바로 그 죄가 머무는 곳이다.

경영 전문가들이 말하기를 과거에 묶여있는 사람은 사업에 성공하기 힘들다고 한다. 미래에 초점을 맞추는 사람들이 성공한다는 것이다. 이는 사람과의 관계나 영적 생활에서도 마찬가지다. 과거의 상처에 집착하면서 과거에 갇혀있으면 자신도 괴롭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상처를 준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루가 9,62] 예수님은 우리가 용서하고 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아신다. 그러나 예수님은 용서하고 떠나 보내라고, 그래서 고통스럽게 과거를 곱씹지 말고 믿음을 갖고 앞으로 나아가라고 우리를 초대하신다.

 

 

 

용서한다고 해서 상대의 잘못을 무조건 눈감아 주는 것은 아니다.

9장
동네북 되지 말기

 

나는 몇 년 전에 한 성당에서 용서를 주제로 몇 차례 강연한 적이 있다. 어느 날 저녁, 예수님이 ‘일흔 번씩 일곱 번’ 까지라도 용서하라고 가르치신 내용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강연 끝에 한 부인이 손을 들고 질문했다. 예수님의 그런 가르침을 따르려다가 오히려 학대당할 위험에 빠지는 것이 아닐까 걱정된다는 내용이었다. 우리를 괴롭힌 사람을 반복해서 용서해 주는 것은 또다시 괴롭혀도 괜찮다고 허락해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나는 그 부인, 아니면 그 부인과 가까운 누군가가 가정폭력의 희생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염려하는 점을 나눠준 그 부인이 고마웠다. 사실 가정폭력은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있다. 가정폭력에는 육체적 폭력뿐 아니라 성정-심리적-언어적, 그리고 경제적 학대도 포함된다. 학대하고 학대 받는 관계에는 전형적인 패턴이 있다. 가정폭력을 저지른 남성(가끔 여성인 경우도 있지만)이 용서를 구하고, 다시는 폭력을 휘두르지 않겠다고 약속한다. 그러면 여성은 용서해 준다. 그러나 얼마 후 그는 또다시 폭력을 저지른다. 이와 같은 용서와 학대의 악순환은 꽤 오랫동안 이어지게 된다. 폭력의 희생자가 그리스도교 신자인 경우, 학대하는 남편을 용서하려면 떠나서는 안 되고 떠나는 것은 곧 혼인 서약을 저버리는 배신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자신이 뭔가 잘못한 게 있겠거니, 심지어는 하느님께 벌을 받고 있나 보다 생각하기도 한다. 예수님이 고난 당하신 것처럼 자신도 고난을 받은 중이라고 결론 내리기도 한다. 고통을 참는 것이 사랑이고,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아니던가.

예수님은 우리가 너그럽게 용서하기를 원하신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동네북이나 샌드백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때로 십자가를 지고 고통을 겪도록 부름을 받는다. 그러나 가정폭력과 같이 불필요한 고통을 당할 필요는 없다. 예수님도 불필요한 고통을 당하지는 않으셨다. 많은 경우 예수님은 고통이나 학대당하는 일을 피하셨다. 예수님이 태어났을 때, 성모님과 요셉 성인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헤로데 군대에게서 예수님을 보호하기 위해 나라를 떠나셨다. 성경을 보면 사람들이 돌을 던지거나 절벽으로 밀어 떨어뜨리려고 할 때 예수님이 도망가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또한 당신에게 적대적이라고 생각되는 곳은 피하셨다. 그리고 가르침을 거부하는 마을에서는 발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고 떠나라고 제자들을 가르치셨다. 이처럼 예수님은 위험한 상황에서 여러 번 피하셨다.

물론 예수님은 끔찍하게 고통 당하셨다. 그러나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때에만 그렇게 하셨다.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면서 예수님은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인류 구원이라는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당신이 고난을 당하셔야 한다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그러기 위해서 마땅한 장소인 예루살렘에서, 그리고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아닌’ 정해 진 때에 고난을 겪으셔야만 한다고 말씀하셨다. [루카 13,31-33] 그날이 올 때까지, 예수님은 사명을 완수하는 데 방해되는 고통은 모두 피하셨다.
예수님이 명백히 보여주시듯이, 필요한 고통과 불필요한 고통에는 차이가 있다. 필요한 고통은 나와 주변사람들이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모습 그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과정에서 사랑의 마음으로 선택한 고통이다. 불필요한 고통은 단순히 우리를 다른 사람의 병이나 죄의 희생양으로 만드는 고통이다. 고통을 감수하지 않는 사랑은 감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흔히 말한다. 그러나 모든 고통이 사랑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처럼 우리도 불필요하게 고통 받는 해로운 상황을 피하거나 끝내야 할 때가 있다. 예수님은 이웃을 사랑하라고 거듭 말씀하시는 한편 자신 또한 사랑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자신을 괴롭히지 못하게 막는 것은 자신을 사랑하는 한 가지 방법이다. 고통을 주는 사람에게는 안 되다고 말해도 된다. 자신의 상황에 맞는 해결책을 찾아 대처해야 한다. 더 이상 참지 말고 “그만 좀 해” 라고 말하거나, 단호한 조치를 취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알리거나, 직장을 옮기거나, 집을 나가거나, 그 사람과 거리를 두거나, 자신을 변호하거나, 심지어 관계를 끝내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스스로 당당히 서서 자신을 지키며 사랑해야 한다. 용서해야 한다고 해서 자신을 괴롭히는 상대의 행동에 이의도 제기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을 위해서, 날 괴롭히는 행동은 못하게 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을 위해 단호해지는 일을 피할 때가 종종 있다. ‘되어가는 대로 내버려 두는 편’이 더 편하기 때문이다. 그냥 아무 일 없는 듯 지내고 싶지 평지풍파를 일으키고 싶지 않다. 그러나 피한다고 과연 평화가 올까? 괴로움이나 분노, 실망, 양심의 가책만 쌓이고 두통이나 궤양에 시달릴 뿐이다.

‘나머지 뺨도 내어주라’고 예수님이 가르치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시고자 한 내용은 복수 [악을 악으로 갚은 행위]를 피하라는 의미다. 우리 자신을 보호하는 것은 악한 일이 절대 아니다.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려는 것이 아니라 상처받지 않게 자신을 지키려는 것일 뿐이다.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은 분명 용서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 하지만 신뢰를 받을 가치는 없을지도 모른다. “당신을 용서합니다”는 “괜찮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아무 일도 아니에요” 와는 다르다. 상처를 받았다면 분명 그것은 중요한 일이다. 괜찮지 않다. 용서는 자신의 고통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묵과하거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이 가장하는 것도 아니다. 또한 내게 상처 입힌 상대의 책임을 면하게 해주는 것도 아니다. 상대는 여전히 그의 행동에 대해 해명할 의무가 있으며 책임이 있다.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자신을 암살하려고 한 메흐메트 알리 아그카 Mehmet Ali Agca를 용서하셨다. 그렇지만 아그카는 감옥에 들어갔다. 폭력적인 범죄자는 길 거리를 활보할 수 없다. 그들은 너무 위험하다. 비슷한 의미로 부정직하고 파괴적인 사람을 그냥 참아줘서는 안 된다. 그들은 믿을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용서받을 수 있다.
자기 자신을 방어할 힘이나 용기가 없는 겁쟁이들이나 용서한다는 말이 있다. 예수님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주신다. 또한 마하트마 간디 Mahatma Gandhi는 이렇게 주장했다. “약한 자는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 용서는 강한 자의 상징이다.”

 

 

 

우리는 항상 용서할 수 있다.
그러나 항상 화해할 수는 없다.

10장
회해하라고?

 

복자 주세페 풀리시 Giuseppe Puglisi 신부는 고향 시실리에서 영웅으로 존경 받는 인물이다. 1993년 마피아의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난 풀리시 신부는 마피아의 횡포로 시달리던 지역에서 용감하게 사목한 업적이 인정되어 현재 시성 諡聖 절차가 진행 중이다.
풀리시 신부의 사목생활은 인구 백 명 남짓의 작은 마을에서 시작되었다. 마피아가 기승을 부리던 그 마을에서는 이미 열다섯 건의 살인사건이 벌어진 적이 있었다. 풀리시 신부는 부임해서 이러한 상황에 정면으로 대처했다.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용서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다. 풀리시 신부의 노력 끝에 한 여성이 아들을 죽인 살인범의 어머니를 용서하려고 마음먹게 되었다. 숱한 어려움이 있었지만 결국 풀리시 신부는 두 여인이 만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했다. 용서하고 용서받았으며 화해가 이루어졌다. 파괴와 분열과 폭력으로 얼룩져 있던 공동체에서 치유가 이루어지는 아름다운 순간이었다.11

진정한 화해는 용서 없이 이루어질 수 없다. 하느님은 깨졌던 관계가 회복될 때 미소 지으신다. 하느님께서 스스로 인간이 되셨기에 우리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었다. 신학적으로 이것을 ‘속죄 atonement’라고 말한다. 이 말을 쪼개어 보면 ‘하나 됨 at-one-ment’이 된다. 예수님이 하신 일 덕분에, 그리고 예수님이 베푸신 용서 덕분에, 우리는 하느님과 ‘하나 at one’ 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용서가 항상 화해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가끔 화해가 불가능할 때도 있다. 용서해 준 사람이 죽었거나, 다시 만날 수 없거나, 아무튼 무슨 이유에서든 불가능할 경우가 있다. 때로는 용서해 준 사람과 화해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 수도 있다. 위험한 사람이라면 피하는 편이 낫다. 예수님은 분명 원수를 사랑하라고 요청하셨고, 그 사랑에는 용서가 포함된다. 그러나 원수, 또는 원수는 아니더라도 대하기 힘든 사람은 때로는 피하는 것이 상책일 수 있다. 거리를 유지해야만 하는 사람은 멀리서 용서해 줄 수도 있는 것이다.
동시에 우리의 삶에는 어떻게 해서든 곡 화해해야만 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와 ‘1차 관계’ 안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을 용서했다고 해도 화해하지 않는다면 그 용서는 완전하지도 진실하지도 못하다. 예수님은 제단에 예물을 바치러 가는 길에 ‘형제’에게 노여움을 품고 있다면 제단에 가기 전에 먼저 형제와 화해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마태 5,23-24] ‘형제’라고 말씀하실 때 예수님은 친척이나 동요 그리스도인을 의미하신다. 1차 관계에 있는 모든 사람을 형제라고 말씀하신 걸로 이해하면 된다. 그들은 어찌 되었건 우리 삶의 한 부분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다. 그렇게 때문에 그들과 화해하지 못하면 아무리 스스로 용서했다고 생각할지라도 거리감과 단절감, 거북함을 극복할 수 없다.

이것이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베드로와 화해하신 이유 가운데 하나다. [요한 21,15-19] 제자들이 밤새 배에서 고기를 잡던 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 이른 아침 화해가 이루어졌다. 베드로는 물가에 서계신 예수님을 알아보고는 물로 뛰어들어 힘껏 헤엄쳐 나온다. 그는 불 옆에 서계시는 예수님을 발견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재판을 받던 저택 안뜰에서도 불 옆에 있었다. 예수님이 예언하신 것처럼 베드로는 달기 울기 전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다. 그런데 이 아침, 베드로는 전과 다르다.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세 번이나 확실히 말한다. 예수님과 베드로가 대화를 마치는 순간 감명 깊은 화해가 이루어졌다.
화해가 이루어지기 전에 베드로는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예수님을 보고 이야기도 나눴다. 베드로는 가심이 벅찰 정도로 기뻤겠지만, 그와 동시에 자신이 버렸던 예수님을 보면서 창피하고 괴로웠으리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저택 안뜰에서 베드로가 세 번 예수님을 부인했을 때 예수님은 베드로를 바라보셨다. 예수님을 다시 만난 베드로는 예수님의 눈길을 마주할 수 있었을까? 아니면 돌아서서 애꿎은 발만 내려다보았을까? 그 동안 베드로는 닭이 우는 소리를 들으며 눈물 흘리던 순간을 수없이 곱씹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이 다가와 화해를 청하시자 그 무겁던 짐이 어디론가 사라졌다. 예수님과 베드로의 관계는 회복되었다.

1차 관계가 멍들고 깨진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당신께서 베드로와 하신 것처럼 화해하라고 말씀하신다. 남편과 아내는 분명히 그렇게 해야 한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한 몸’이 되도록 함께 부르셨기 때문이다. 부모와 자녀도 마찬가지다. 장성한 자녀도 예외는 아니다.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내용은 십계명에도 있는 가르침이며, 부모 또한 자녀를 존중해야 한다. 성경은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일치가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하여 가르친다. 예수님은 돌아가시기 전날 밤에, 예수님과 아버지 하느님이 ‘하나’ 이시듯 그분을 따르는 모든 사람도 ‘하나 되기’를 기도하셨다. [요한 17,21]

화해하려고 마음먹은 이상 너무 미뤄서는 안 된다. 아들을 용서했다고 하면서도 서로 소원한 상태로 화해를 이루지 못하던 부인이 있었다. 부인은 아들에게 화가 나있는 데다가 자존심이 강해 먼저 손을 내밀지 못했다. 결국은 임종을 앞두고서야 아들과 속이야기를 나누게 됐고, 서로를 진심으로 용서하고 받아들이게 됐다. 그 부인은 일생 중 가장 평화로운 모습으로 죽음을 맞았다. 감사한 일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이미 대답할 수 없는 사람에게 사과하면서 후회를 무겁게 떠안은 채 장례식장에 서있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화해하려고 하다 보면 어려운 일도 겪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집안에 불화가 있는 경우 대개 편이 갈리게 되는데, 화해를 시도하다 보면 배신자라고 오해하는 친척도 생길 수 있다. 그들은 ‘어떻게 우리 가족한테 그런 일을 저지른 사람하고 말을 할 수 있니?” 라고 비난할지 모른다. 옛날 격언이 말해주듯이, “착한 일을 하고도 고생한다.” 이런 일을 당하게 되면 좋은 동반자가 함께해 주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은 선하고 의로운 일을 하고 처벌받으셨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이 우리와 화해하기 위해 기꺼이 지불하신 대가였다.

 

 

철저한 용서는 오직 하느님의 은총으로만 가능하다.

11장
무슨 일이나 가능하다

 

나치가 네덜란드를 점령했을 때, 코리 텐 붐 Corrie ten Boom 가족은 유다인 가족들을 숨겨주는 지하조직의 일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결국 밀고 당해 강제수용소에 갇히게 되었고, 그곳에서 코리의 아버지와 언니는 세상을 떠났다.
코리는 신심이 깊고 열정적인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럼에도 박해자들을 향한 증오심에서 해방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이제는 그들을 용서할 수 있다고 믿게 된 코리는 세계를 돌아다니며 사랑과 용서의 메시지를 전하면서 전해 이후에도 계속되는 상처를 치유하는 데 기여했다.

코리가 뮌헨에서 독일 청중들에게 연설할 때의 일이다. 연설이 끝났을 때 한 남자가 손을 내밀며 다가와서, “당신 이야기 덕분에 우리의 모든 죄가 바다 저 밑에 가라앉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돼서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습니다!” 라고 말을 꺼냈다. 코리는 순간 공포에 휩싸였다. 그 사람은 강제수용소에서도 가장 잔인하던 간수가 아닌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알몸으로 그 사람 앞에서 샤워하던 끔찍한 기억이 떠올랐다. 코리는 그와 악수하려고 했지만 팔이 얼어붙어 움직이지 않았다. 다 없어졌다고 생각한 분노와 증오가 여전히 남아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절박한 마음으로 기도했다. “예수님, 도와주세요.” 바로 그때 그녀는 자신이 사랑받고 용서받았다는 느낌이 들면서 분노와 증오를 극복할 수 있었다. 그녀의 팔은 움직였고, 예전의 적과 힘 있게 악수를 했다. 후에 그녀는 이렇게 썼다. “예전의 간수와 포로는 오랫동안 서로의 손을 꼭 쥐고 있었다. 나는 그 순간처럼 하느님의 사랑을 강하게 느낀 적이 없었다.”

이렇게 놀라운 이야기에 우리는 보통 두 가지 중 하나로 반응한다. 먼저, 감동받고 희망 – 가장 끔찍한 적마저도 용서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 – 으로 가득 차게 될 수 있다. 아니면 이런 극단적인 용서는 우리와 같은 보통 사람이 아니라 정말로 예외적인, 거룩한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결론 내리고 오히려 희망을 잃을 수도 있다. 나를 모욕한 원수나 떠나간 친구, 배신한 배우자, 또는 내 아이에게 해를 입힌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이 내 안에 없다는 사실은 두려움을 느끼게 한다. 그러 수밖에 없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런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은 내 안에서 찾을 수 없다. 그러한 능력은 밖에서 오기 때문이다. 그런 능력을 갖고 계시는 분에게서 말이다.
예수님은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계시면서도 우리에게 용서와 자비를 베풀고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신다. 만약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하시면 그런 말씀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은 불가능한 일을 하라고 요구하시는 분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용서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예수님의 도움이 있을 때만 가능한 일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비 재정 지원 명령 unfunded mandate’, 곧 수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지도 않으면서 지켜야 할 법칙을 부과하지 않으신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용서하라고 명령하는 동시에 용서하는 데 필요한 은총을 함께 주신다.

내게 극심한 고통을 안겨준 사람을 용서해야 한다니, 실현 불가능한 임무를 받은 느낌일 것이다. 사실은 나도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있기를 간절히 원할지 모른다. 그리고 선의를 갖고 노력하지만 그 선의를 끝까지 따를 수가 없다. 예수님이 졸고 있는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과 같다.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따르지 못한다.” 꼼짝할 수 없는 느낌이다. 그렇지만 이런 상황이 나쁘지만은 않다. 왜냐하면 이런 상황이 우리를 하느님께 이끌어 이렇게 말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저는 못하겠어요.” 그러면 하느님께서 말씀하실 것이다. “그래 너는 할 수 없다. 그렇지만 나는 할 수 있다. 내가 도와줄 수 있게 해다오.” 이 말씀대로 하느님께서 도와주시도록 맡기면, 그분은 분명 도와주신다.

용서는 결심이다. 의지적 행동이 요구된다. 그러나 의지의 힘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높은 힘이다. 다시 말해, 예수님처럼 용서할 수 있으려면 단순히 예수님을 따라 하려는 의지적인 노력만으로는 안 되고 예수님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말이다. 오직 예수님만이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실 수 있다. 사도가 깨달았듯이 “나는 나에게 힘을 주시는 예수님을 통해서 모든 일을 할 수 있다.”

바로 이와 같은 교훈을 얻은 한 가톨릭 선교사의 체험을 사제 존 몽부르케트 John Monbourquett 가 How to Forgive (용서의 방법) 에서 소개하고 있다. 그 선교사는 어느 날 갑자기 소임을 그만두라는 뜻밖의 명령을 받게 되었다. 선교사는 전혀 예고 없이 그런 명령을 내린 관구장에게 호가 나고 원망이 생겼다. 그런 자신의 모습을 깨닫게 되자 선교사는 용서를 결심했다. 그때부터 그에게는 새로운 사명, 곧 용서하는 사명이 생기게 되었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관구장을 위해서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마음 속으로 관구장을 그리면서 되풀이해 말했다. “나는 당신을 용서합니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고통은 사그라지지 않았고 차츰 희망마저 잃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꼭 용서하고 나오리라는 단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피정에 들어갔다. 3일이 지나도 여전히 괴롭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때 그는 성경을 집어 아무 곳이나 펼쳤는데, 거기에서 ‘하느님 홀로 용서하실 수 있다’라는 말씀이 번쩍 눈에 띄었다. 순간 그는 자신의 노력만으로는 절대 이룰 수 없는 일을 하려고 발버둥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내려놓고 하느님이 하시도록 하라’는 교훈을 따르기 시작했고, 곧 자신의 노력으로는 절대 할 수 없던 용서를 하게 되었다.12

“잘못을 범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알렉산더 포프 Alexander Pope는 이렇게 썼다. 어떤 면에서 이 말은 전적으로 옳다. 우리는 모두 예외 없이 ‘잘못을 범한다.’ 다른 사람과 나 자신에게 상처를 주고 하느님에게서 등을 돌린다. 그러나 한편 포프의 말은 보완이 필요하다.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으로 만들어졌다. 이 말은 거룩하고 완전하도록 창조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죄를 저지르는 것은 인간의 본성에 못 미치는 것이다. 약해지고 타락한 우리의 상태를 반영하는 것일 뿐이다. 나약함은 하느님처럼 용서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을 가로막고 있다. 그렇게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 없이는 용서할 수 없다. 포프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 때문에 그는 “잘못을 범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고 용서는 신의 본성이다”라고 말을 맺었다.

 

 

 

 

다른 사람을 용서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느님이
나를 용서해 주셨음을 알아야 한다.

 

3부
어떻게 용서할 것인가?

용서하기 위해서는 기도가 반드시 필요하다.

12장
끝까지 기도하기

 

신학교 동창 중 신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영국의 작은 마을에서 청과물 장사를 한 친구가 있다. 신선한 과일과 야채를 사고 싶은 사람이면 누구나 믿고 찾을 만큼 그 친구는 좋은 물건을 팔았다. 문제는 그 친구가 꽤나 까다롭고 가끔은 노골적으로 인색했다는 점이다. 어느 날, 단골손님인 노부인 세 명이 그의 행동을 보다 못해 뭔가를 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이 결정한 일은 그를 험담하는 것도, 옆 마을로 물건을 사러 가는 것도 아니었다. 매일 그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노부인들은 그것을 실행했다.
몇 달이 지나고, 어느 주일 이른 아침 그 친구는 산책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는 미사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를 들었다. 비신자이던 그는 평소 같았으면 그 종소리를 무시하고 그냥 걸었을 테지만, 이번에는 뭔가가 자신의 마음을 잡아 당기는 듯한 느낌에 끌려 소리가 나는 곳으로 걸어갔다. 성당에 도착한 그는 잠시 멈칫했지만 곧 문을 열고 들어가 의자에 앉았다. 그때 뒤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 청년이네! 그 청년이냐! 드디어 왔네, 왔어!” 뒤돌아보니 자신이 가게에 매일같이 오는 노부인 세 명이 미소 짓고 있었다. 그들의 기도는 응답 받았다.

이 친구의 경우처럼, 하느님은 다른 사람들의 기도를 통해 누군가를 변화시키실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용서해야 할 사람이 생기면 우리는 항상 더 열심히 기도해야 한다. 예수님은 이렇게 가르치셨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마태 5,44] 우리는 그들이 변하기를, 종교를 갖기를, 또는 그들이 더욱 사랑하고 사랑 받기를 기도할 수 있다. “기도는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라는 유명한 표현도 있듯이 말이다. 그러나 하룻밤 사이에 결과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사람이 변하는 데는 당연히 시간이 걸리므로 인내심을 갖고 끝까지 열심히 기도해야 한다.

어머니 모니카 성녀와 아들 아우구스티노 성인을 생각해 보자. 청년이 되면서 아우구스티노는 신앙을 버리고 제멋대로 살기 시작했다. 어머니를 잘 모시지도 않았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들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매일 아들을 위해 기도했다. 18년이 지나서 드디어 어머니의 기도가 이루어졌다. 아우구스티노가 고향으로 돌아와 세례를 받고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는 삶을 살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아우구스티노는 위대한 주교이자 설교가가 되었다. 어머니 모니카의 끈질긴 기도는 응답 받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변화를 완강히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다. 살아온 방식에 너무 익숙해져 있거나 분노와 부정적인 생각에 매몰되어 있는 사람들이 대개 그러하다. 하지만 어떤 사람에게도 희망을 저버릴 이유는 없으므로 우리는 그들이 달라지기를 항상 기도해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시어 행복과 평화로 가득 채워주시기를, 그리고 그들을 치유해 주시기를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한다. 다른 사람도 변해야겠지만 우리도 변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하듯이, 자신의 반응에도 책임을 져야 한다. 대하기 어려운 사람을 잘 대할 수 있도록 지혜와 용기를 청할 필요도 있고, 인내심과 이해심을 키워주시길 청할 필요도 있다. 어쩌면 좀 더 둔감해지기를 청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누가 지금보다 나를 더 많이 괴롭힌다 해도 참아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또한 우리 안에 평화와 치유가 가득하기를 기도해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는 용서할 수 있는 은총을 청해야 한다. 이 은총을 청하는 기도의 방법으로 상상력을 동원하는 방법이 있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라고 기도할 때마다 우리가 용서해야 할 사람을 마음에 그리는 방법이다. “주님, 당신께서 저를 용서하셨듯이 제가 이 사람을 용서할 수 있도록 제발 도와주세요.”
우리가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일은 상대가 벌 받거나 상처받기를 청하는 것이다. 솔직히 상대가 벼락 맞아 쓰러지기를 청하고 싶은 유혹을 받을 때도 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어떤 마을에 갔을 때 반겨주지 않자 제자들이 바로 그렇게 느꼈다. 그들은 예수님께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그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시는지 여쭤보았다! 예수님이 허락하실 리 만무한 일이다. [루카 9,51-56]
상처받고 화난 마음에 우리도 상대의 머리에 불이 떨어지기를 바랄 수도 있다. 만약 그렇다면 그 생각과 느낌에 대해 하느님께 솔직해야 한다. 어차피 숨길 수도 없지 않은가. 하느님은 우리 마음속을 환히 다 알고 계시니까. 그러나 하느님은 기도 중에 우리 스스로가 솔직한 생각과 느낌을 나눠주길 원하신다.

사목을 하다 보면 사람들이 겪는 좌절이나 분노, 적개심 같은 감정을 알게 될 때가 있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말한다. “이런 일들을 저와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하느님과는 이런 이야기를 나눠보셨는지요?” 대개 답은 “아니요” 이다. 때로 사람들은 무척 두려워한다. 상대가 벼락 맞았으면 좋겠다고 하느님께 말씀 드렸다가 오히려 자신이 벼락을 맞을까 봐 두려운 것이다! 평소에 사람들은 하느님께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을 표현하지 않는다. 그런 식으로 하는 기도를 배워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하느님이 듣기 좋아하시리라 생각하는 것만 말씀드리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만 하느님은 검열당한 기도를 원하지 않으신다. 정직한 기도를 원하신다. 성격의 ‘기도, 책’ 시편을 생각해 보라. 시편의 많은 부분은 한탄과 불평이다. 그것이 우리가 드려야 할 기도와 모범이다.
하느님께 이렇게 말씀드려도 정말로 괜찮다. “어떻게 당신은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하시나요? 공평하지 않아요! 나는 이런 일을 당할 이유가 없어요. 당신은 모든 것을 당장 바로잡아 주실 수 있잖아요. 그런데 왜 안 하시죠?” 우리는 이런 식으로 감정을 솔직히 내보이기를 주저한다. 부족한 믿음이나 감당치 못하는 화, 또는 인격적 미성숙을 드러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괜찮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현실이고, 하느님이 우리를 만나 주시는 바로 그 지점이다. 하느님께 이 현실을 그대로 내보이는 것은 우리를 치유하고 도와주실 수 있도록 그분을 초대하는 것이다.

괴로움에 빠져 기도할 때 우리는 성모님을 보며 용기를 얻을 수 있다. 우리는 성모님의 아드님을 죽였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말했듯이, “악습과 죄 속에서 즐거워하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고 아직도 여전히 못 박고 있는 것은 바로 우리들이다.” 성모님은 이러한 일에 어떻게 응답하시는가? 부인하지도, 미워하지도 않으신다. 그 대신 성모님은 우리를 당신의 자녀도 받아들이신다. 그리고 당신이 하신 것처럼 우리도 기도하고 용서할 수 있도록 우리를 위해 기도하신다.

 

 

 

다른 사람을 용서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느님이 나를 용서해 주셨음을 알아야 한다.

13장
하느님의 용서 받아들이기

 

‘작은 꽃’이라고 불리는 리지외의 성녀 데레사는 잘못을 저지른 두 아들과 아버지에 대한 일화를 전한다. 맏아들은 잘못을 깨닫고 두려워 멀리 도망쳤다. 그러나 작은아들은 아버지 품으로 뛰어들어 용서해 달라고 빌며 앞으로는 더 잘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아버지께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벌 대신 키스해 달라고 부탁했다. 아버지는 작은아들의 부탁을 들어주면서 말할 수 없이 행복했다.
성녀 소화 데레사는 이 일화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잘못을 뉘우쳤다는 점은 두 아들 모두 같았다. 그런데 맏아들은 벌을 받으리라 확신한 반면 작은아들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작은 아들은 용서를 청했고 아름다운 용서를 받았다. 아버지는 그 아들이 분명 또다시 잘못을 저지르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고 성녀는 강조했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기쁘게 용서하고 키스로 ‘벌’을 주었던 것이다.

소화 데레사 성녀의 이야기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어떻게 대하시는 지에 대한 비유다. 우리의 아버지는 말할 수 없이 자비로운 분이시다. 하느님이 용서하지 않을 죄도, 사람도 없다. 구제불능의 죄인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사실을 선뜻 믿지 못한다. 너무 좋은 일이라 믿어지지 않는 것이다. 주일비사에서 사도신경을 외우며’ 죄의 용서’를 믿는다고 고백하지만, 사실은 감히 믿지 못하고 그렇게 되기를 빌기만 한다. 정말 용서받을 수 있나 의심하고 벌을 받게 되리라 걱정을 하기도 한다.

간음하다가 잡힌 여자 때문에 화난 군중과 예수님의 이야기를 통해 이 의심과 추측이 온당치 않음을 알 수 있다. [요한 8,1-11]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익명의 그 여자가 왜 곤경에 빠지게 됐는지 짐작한다. ‘육체의 죄’를 범하고 붙들려 나와 예수님 앞에 서있는 것이다. 이제 그 여자의 운명은 예수님 손에 달려있다. 그 여자는 자신을 에워싼 다른 사람들처럼 예수님도 분명 돌을 던져 자기를 죽이고 싶어 하리라 짐작하며 겁에 질려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비롭게 용서하시며 다시는 죄짓지 말라고 이른 다음 보내주셨다. 그 여자는 너무나 감사하고 놀라워 말문이 막혀버렸다.

우리는 사실 죄를 지었다 싶으면 예수님과 마주 서게 되는 상상만으로도 겁에 질리게 된다. 성경에 나오는 여자처럼, 돌을 던지려는 사람들과 예수님을 혼동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피해 빙빙 돌며 예수님이 다가오신다는 생각이 들면 멀리 줄행랑 친다. 고해성사를 하기커녕 영성체도 하지 않고 결국 냉담하기까지 한다. 이제 죄를 지었으니, 예수님이 그어놓은 선을 넘어버린 것이 틀림없구나 생각한다. 그리고 용서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경험을 통해 알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도 우리를 용서하기 어려우시리라 지레 짐작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용서하기 원하신다. 그리고 용서는 예수님에게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예수님이 어떤 집에서 설교하고 계실 때의 일이었다. 남자 네 명이 중풍병자 친구를 평상에 누인 채 데리고 왔다. 그 집은 너무나 혼잡해서 들어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친구들은 지붕으로 올라가 기와를 벗겨내고 중풍병자를 예수님 앞에 내려놓았다. 이를 본 예수님은 그 병자가 미처 말을 꺼내기도 전데 그의 죄를 용서해 주셨다. 군중은 놀라서 수군거렸다. 예수님은 그들의 반응을 보고 말씀하셨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이렇게 말씀하심으로써 용서하는 것이 더 쉽다는 사실을 거기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명백히 알려주신 다음에야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치유해주셨다. 이제 그는 평상에 누워있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더 이상 죄에 묶여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루카 5,17-26]

이 중풍병자에게 하신 것처럼,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풀어주고 싶어 하신다. 만약 예수님이 그렇게 하시도록 맡기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국 마비되고 말 것이다. 그 중풍병자처럼 육체적으로 마비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죄책감 때문에 영적으로도 마비될 것이다. 우리 죄를 하느님께 말씀 드리고 용서를 구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성경에 나와있다. “제가 입 밖에 내지 않으려 하였더니 나날이 신음 속에 저의 뼈들이 말라 들었습니다. 낮이고 밥이고 당신 손이 저를 짓누르신 까닭입니다. 저의 기운은 여름날 한더위에 다 빠져버렸습니다.” [시편 32,3-4] 시편 저자가 마침내 자신의 죄를 하느님 앞에 가지고 나가자 그에게는 평화와 기쁨이 넘쳐났다.

그러나 죄책감이 꼭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죄책감이 든다는 것은 양심이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고, 내 행동이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할 수 있음을 알고 있다는 뜻이다. 반사회적 성격이상자만이 죄책감을 못 느낀다. 하지만 죄책감이 우리를 마비시키게 둬서는 안 된다. 대신에 죄책감을 통해 행동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얻어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고, 결국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어야 한다.
죄책감으로 마비되어 있는 사람이 용서하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가 잘 정립되어 있고 양심이 평화로워야 바른 행동도 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해서 용서받았음을 아는 사람이 용서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하느님께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알 때만 우리도 하느님처럼 용서할 수 있다. 그토록 분에 넘치는 용서를 받아놓고 어떻게 용서를 안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므로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할 일이 생기면 먼저 하느님께 용서를 청해야 한다. 진실한 기도 속에서, 제단에서, 고해소에서.

더 많이 용서받은 사람이 더 많이 사랑한다고 예수님은 가르치셨다. [루카 7,47] 용서하기를 무척이나 좋아하시는 하느님을 모시고 있음에 우리는 감사해야 한다. 우리가 설령 죄짓는 것을 좋아한다 해도 하느님께서 우리를 용서하고 싶어 하시는 마음을 이길 수는 없다. 오죽하면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겠는가.
예수님은 세상을 벌하러 오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세상을 구원하러 오셨으며 우리를 용서하길 간절히 바라신다. 예수님은 용서하고 싶어 못 견디시는 분이다. 예수님은 이미 그것을 입증하지 않으셨던가!

 

 

 

용서에 미치는 고해성사의 역할

14장
이 밖에 알아내지 못한 죄도

 

스티븐 맥도널드 Steven McDonald 는 집안의 대를 이어 뉴욕에서 가장 훌륭한 경찰 중의 한 사람으로 성장했다. 29세의 젊은 나이로 그는 곧 태어날 아기를 기다리며 꿈같은 신혼을 즐기고 있었다. 1986년 어느 여름날 오후, 스티븐은 센트럴파크에서 섀보드 존스 Shavod Jones라는 십 대 청소년과 대치하는 상황에 맞닥뜨렸다. 그 청소년은 총을 세 번 쐈고, 스티븐은 머리와 목에 총을 맞았다. 총을 쏜 후 섀보드는 도망쳤고, 스티븐은 피를 흘리며 쓰러져 하느님께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스티븐은 다행히 목숨은 구했으나 목 밑으로 영원히 마비되고 말았다. 그는 18개월 동안이나 병원에서 지냈다.

이 비극이 벌어지기 전에 스티븐은 가톨릭 신앙에 특별히 열정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 사건이 모든 것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게 되었다. 그는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며 다가갔고, 그의 아내 패티 앤 Patti Ann도 마찬가지였다. 하느님은 응답하셨고, 자신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은 그 청소년을 용서하도록 스티븐을 인도하셨다. 다음 해 스티븐의 아들이 병원 성당에서 세례를 받던 날, 패티 앤은 스티븐이 쓴 짧은 글을 낭독했다. 섀보드 존스를 걱정하는 내용이었다. 스티븐은 이렇게 썼다. “나는 새보드 존스를 용서한다. 그가 평화를 찾고 인생 목표를 찾을 수 있길 바란다.”13

퇴원한 후, 스티븐은 대중 앞에서 연설하기 시작했다. 호흡의 힘으로 움직이는 휠체어를 타야 했고, 호흡장치 때문에 말하기가 어려웠지만 스티븐은 비폭력과 용서에 대한 메시지로 수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그는 말했다. “내 경추에 박힌 총알보다 더 나쁜 것이라곤 딱 하나 가지밖에 없는데, 그것은 마음속으로 복수심을 키우는 일입니다.” 스티븐은 자신이 섀보드 존스를 용서할 수 있었던 것은 가톨릭 신앙 덕분이라고 말했다. 특히 정기적인 고해성사가 결정적인 도움이 됐다고 강조했다. “하느님의 용서를 구하는 것은 이미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는 것을 내포하고 있습니다.”14.

스티븐 맥도널드의 몸은 앞으로도 치유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고해성사를 통해 그는 이미 엄청난 영혼의 치유를 경험했다. 고해성사는 이러한 치유 효과로 인해 치유의 성사로도 불려왔다. 죄는 치유되어야 한다. 죄는 우리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상처를 입히며 하느님과의 관계를 왜곡한다. 하지만 고해성사를 통해 우리는 죄를 용서받고 죄로 인한 상처도 치유 받으며 다른 사람들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힘도 얻게 된다.

나는 첫 고해성사를 통해 치유 받고 기뻐하는 신자들의 모습을 자주 본다. 첫 고백을 앞두고는 너 나 할 것 없이 걱정이 태산이다. 부끄럽고 떨린다. 하지만 일단 고백을 하고 나면 하늘을 날 듯 행복하다. 어깨를 짓누르던 짐을 내려놓으니 얼굴도 기쁨에 물들어 환히 빛난다. 그들이 고해성사를 했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아끼는지를 직접 보여주실 수 있도록 하느님께 기회를 드린 것이고, 그 체험을 통해 그들은 말할 수 없는 평화를 얻는다.

죄를 고백하지 않고도 평화를 가장할 수 있기는 하다. 그러나 죄를 고백하지 않으면 죄를 지으면 생긴 상처에 상처만 계속 더해가는 것이다. 죄를 감춰서 얻는 것이라곤 하나도 없다. 죄는 결국 우리 안에서 곪아 영혼을 갉아먹게 된다. 하느님께 뭔가 숨기려고 하면 결국 하느님과 나 사이에 높은 벽만 쌓는 결과를 낳는다. 고백하지 않은 죄가 있다면 그 죄는 방 안의 코끼리나 마찬가지다. 사실 하느님 앞에서는 어떤 비밀도 있을 수 없지 않은가. 그분께서는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속속들이 아시며 영혼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보신다. 이러한 사실을 생각하면서 커다란 위로와 기쁨을 느끼는 게 마땅하다. 그러나 죄를 고백하지 않으면 이 사실 때문에 괴롭다 못해 두려움에 짓눌리게 될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다른 사람을 용서하기는 참으로 어렵다.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도 비난하기 쉽기 때문이다.

양심이 둔감한 사람들도 많다. 이런 사람들은 고해성사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나는 기본적으로 착한 사람이야. 그리 크게 잘못한 것도 없잖아. 그런데 왜 내가 고해성사를 해야 되지?” 그러고는 선하게 바른 행동을 하며 책임감 있는 사람이라면 고해성사를 굳이 안 해도 된다고 결론 내린다. 이렇게 본다면 고해성사는 ‘기본적으로 선한’ 사람들은 할 필요가 없고 ‘기본적으로 악한’ 사람들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선한 사람이 되라고만 우리를 부르시지는 않았다. 거룩한 사람이 되라고 부르셨다. 거룩함은 죄와의 진지한 투쟁을 포함한다. 스스로 죄가 없다고 생각한다 해서 과연 거룩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단지 눈이 멀었을 뿐인지도 모른다.

또한 자신이 죄를 지었다는 사실은 알면서도 그 죄가 아무렇지 않게 느껴지는 경우도 있다. 예전 같으면 맘에 걸렸을 일이 이제는 별일 아닌 것처럼 괜찮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이렇게 말한다. “그게 바로 난데 뭘.” 환경 탓을 하기도 한다. 착한 일도 많이 했으니 웬만한 죄는 용서받겠지 하며 스스로 다독이기도 한다. 교도소에서도 착하게 살면 형량을 감해주지 않는가. 한마디로, 가던 길을 바꾸고 싶지 않거나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점점 무감각해져 한다. 마음이 굳어진다.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면 우리는 예수님이 필요하다는 사실도 잊는다. 예수님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잊으면 우리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용서받을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용서해야 할 필요도 느끼지 못한다. 하느님의 용서를 거부하는 사람은 남을 용서하는 것도 거부한다. 우리가 이 둘 중 한 경우라도 해당된다면, 예수님은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고해성사의 역할을 다시 생각해보라고 초대하신다. 두려움과 무관심을 물리치고 치유의 성사 안에서 그분께 마음을 열라고 요청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의 용서가 주는 기쁨을 알게 되고, 다른 사람들은 우리의 용서가 주는 기쁨을 알게 되길 바라신다. 마더 데레사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인은 용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어떻게 배울 수 있을까? 그것은 바로 우리도 역시 용서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용서에 미치는 성체성사의 역할

15장
상처받은 사람들을 위해 쪼개진 빵

 

어느 평일 새벽미사 중에 나는 회중들을 바라보았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아는 얼굴이 많이 보였다. 그들은 늘 미사에 오는 충실한 교우들이었다. 자리에 앉아있는 그 얼굴들을 쭉 훑어보자니 함께 이야기 나누며 알게 된 한 사람 한 사람의 사정이 떠올랐다. 건강이 안 좋거나 뭔가에 중독되어 고통 받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혼으로 몹시 괴로워하는 사람들도 있고, 자녀들과 소원해져 힘든 사람들도 있었다. 이혼으로 몹시 괴로워하는 사람들도 있고, 자녀들과 소원해져 힘든 사람들도 있었다. 노인이나 환자나 자립 능력이 없는 가족을 돌보느라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기를 갖는 게 소원이지만 임신이 안 되는 여성이 있는가 하면 아이가 많아 어찌할 줄 모르고 힘들어하는 어머니도 있었다. 외로운 미망인, 다른 도시에서 갓 이사 와서 모든 것이 낯선 젊은이, 그리고 먼 나라에서 온 쓸쓸한 이민자도 있었다. 고통스러운 관계 속에 갇혀있는 사람들도 있고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사실 미사에 나온 모든 사람들은 다 인생에서 나름의 고통을 겪고 있었다. 나 자신이 겪는 여러 가지 어려움과 고통도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미사에 참석한 우리 모두는 각자의 깨어짐과 부서짐 속에서 제단 주위에 모여있었다. 깨진 부분을 예수님이 다시 붙여주시길, 그래서 다시 온전해질 수 있기를 간절히 청하며 예수님께 나온 것이다.

미사를 드리러 가면서 우리는 각자의 짐이나 어려움, 골칫거리도 함께 가지고 간다. 삶의 무게에 짓눌려 있기도 하고, 인간관계 때문에 고민도 하며, 먹고 사느라 아등바등 힘들기도 하다. 자식 건강에 피가 마르는가 하면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슬픔에 허덕이기도 한다. 건강이 안 좋거나 외로워 마음이 시리기도 하고 직장에서 일이 풀리지 않아 힘이 들기도 하다. 내가 왜 그런 결정을 했을까 후회하기도 하고, 예전에 잘못된 일 때문에 아직도 짐을 지고 있기도 하며, 나쁜 습관과 한판 씨름을 벌이고 있기도 하다. 우리는 모두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며, 또한 나 자신에게도 상처를 부며 살아왔다. 부서진 채 예수님 제단 주위에 모인 우리는 예수님이 부서짐에 대해서 잘 아는 분이라는 사실을 떠올린다. 그분은 못과 채찍, 주먹, 가시관, 그리고 창으로 몸이 부서지셨다. 그분은 버림받고 배신당하는 고통을 아신다. 그분은 조롱 당하고 모욕 당했으며 저주 받으셨다. 고향 사람들이나 종교 지도자, 통치자 모두 그분을 거부했다. 그분은 갈릴래아 사람 또는 유다인에 대해 불신과 미움을 갖고 있던 사람들의 심한 편견에 희생되셨다. 야음을 틈타 그분을 체포하고 죄를 뒤집어씌운 사람들의 비겁함에 희생되셨다. 그분은 아무 죄도 짓지 않았음에도,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셨다. 여기에 더해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마르 15,34] 라고 부르짖을 때, 죄 때문에 우리 인간이나 겪게 되는 하느님과의 고통스러운 분리를 경험하기도 하셨다.

예수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어 자신이 부서지는 것을 허락하셨다. 미사 중에 우리는 이를 기억한다. “하느님의 어린 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이라고 신자들이 기도하는 동안 사제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한 빵, 즉 성체를 들고 쪼개는 순간이 바로 그때다. 성체를 쪼개는 이유는 예수님이 그렇게 부서지셨음을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것이다.
성체가 쪼개진 후, 사제는 쪼개진 성체의 작은 조각을 예수님의 피로 변한 포도주에 집어넣는다. 이는 십자가 죽음으로 분리되었다. 예수님의 몸과 피가 부활 때에 다시 하나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미사를 드리며 한때는 부서졌으나 다시 온전해지신 예수님 앞에 있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이 부서진 채 나와있는 우리를 만나주시고, 우리 또한 다시 온전해질 수 있도록 해주신다.
그렇게 하기 위해 그분은 그리스 말로 ‘좋은 선물 en charis‘인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고 우리를 치유해 주신다. 그분은 지속적인 인내심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에게 은총을 베푸신다. 성령의 위로로 우리를 가득 채우신다. 그분이 보시는 것처럼 우리도 자신의 어려움을 볼 수 있도록 지혜를 주신다. 믿음, 소망, 사랑의 선물을 풍부히 내려주신다. 우리가 외로움을 떨쳐 버릴 수 있도록 몸소 우리에게 오신다. 이웃과 스스로에게 상처를 주는 우리의 일상적인 죄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도 용서할 수 있는 힘을 주신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성체성사에 대해 이렇게 썼다. “성사 중에서 그 어떤 성사도 더 큰 치유의 힘을 갖지 못한다. 성체를 통해 죄가 없어지고, 선은 커지며, 영혼은 영적 선물로 풍부해진다.” 용서해야 할 일이 생겼을 때, 특히 그 용서가 하기 어려울 때, 가능한 자주 미사에 참례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게 되면 어떤 모습으로든 우리는 부서진다. 부서진 마음과 부서진 영혼을 갖게 된다. 육체마저도 부서지거나 상처받을지 모른다. 우리는 부서진 가운데 미사에 나가 예수님을 만나 기도한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받아 모시면, 그분은 치유의 은총으로 우리를 가득 채우신다. 죄를 용서받음으로써 우리는 자신에게 가한 상처를 치유 받게 된다. 힘을 얻고 위로 받음으로써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입은 상처도 치유 받게 된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용서와 치유를 나누기 위해 세상으로 파견된다.
그러나 우리는 홀로 세상에 파견되지 않는다. 예수님이 함께 가주신다. 아주 현실적인 방법으로 그분은 우리의 동행이 되신다. ‘동해 companion’이란 말은, ‘함께’ 라는 뜻의 라틴어 cum과 ‘빵’이라는 뜻의 panis 가 합성된 말이다. 예수님은 용서의 여정 중에 우리의 빵이 되어주신다. 곧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할 수도 있도록 양식을 주신다.

미사 전에 그 양식은 그저 보통 빵일 뿐이었다. 그 빵을 회중이 제단 앞에 봉헌할 때, 그 빵은 우리의 상처를 포함해 삶 전체를 예수님께 제물로 바침을 표현한다. 봉헌된 빵은 축성되어 사제의 손에 의해 쪼개진다. 이제 그것은 더 이상 그냥 빵이 아니다. 생명의 양식이다. 바로 예수님이다. 우리를 위해 부서진 그분이, 당신이 다시 온전해지신 것처럼 우리도 다시 온전해질 수 있도록 쪼개진 빵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세상과 그 선물을 나누기 위해 파견된다. 그 선물은 사랑과 연민, 자비와 용서를 통해 나눌 수 있다.

 

 

다른 사람을 용서하기 위해서는 먼저 나 자신을 용서해야 한다.

16장
자신을 먼저 용서하기

 

현대의 젊은이들이 그렇듯이, 17세기에 한 포르투갈 젊은이도 신앙에서 멀어져 방황하고 있었다. 양치기이자 군인이던 그는 어느 날, 성대한 종교 축제에서 아빌라의 요한이 하는 연설을 듣고 되었다. 연설에 감화된 젊은이는 군중 한가운데서 가슴을 치며 울부짖더니 목청이 터져라 자비를 청하기 시작했다. 그의 이런 행동은 몇 달이 지나도 계속됐다. 용서해 주십사 외치며 길거리를 헤매고 다니는 그 젊은이는 점차 사람들의 골칫거리가 되었고, 결국 미친 사람으로 몰려 정신병원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아빌라의 요한은 이 소식을 듣고 그 젊은이를 찾아갔다. 그리고 이제 그만하면 충분히 자신한테 벌을 줬으니 지금부터는 자신과 이웃들에게 도움이 되는 긍정적인 뭔가에 힘을 쏟으라고 말해줬다. 그 청년은 이 충고를 받아들였고, 남은 일생 동안 병자와 가난한 이를 돌보는 일에 헌신했다. 이 청년이 바로 천주의 성 요한 St. John of God 이다 15

천주의 성 요한은 아빌라의 요한이 하는 설교를 듣고 참회하고 회개해야 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의 참회와 회개는 도를 지나쳤다. 그렇다면 참회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세례자 요한에게 군중이 같은 질문을 한 적이 있다. [루카 3,10-14]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세례자 요한은 관대함과 정직함, 순수함, 그리고 공정함으로 행동하라고 대답했다. 그는 ‘자책하라’고 이야기하지 않았다. 자신이 저지른 죄와 그 죄가 입힌 상처를 가슴 아프게 후회할 수는 있다. 후회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구원받음을 항상 기뻐해야 한다. 우리가 저지른 잘못을 미워할 수는 있으나 절대로 자신을 미워해서는 안 된다. 하느님은 그러지 않으신다.

진실한 참회란 후회하면서 자신을 소모하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변화로 나아가는 것이다. 또한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믿고 바라면서 죄에서 멀어지는 것이며, 하느님이 우리를 용서하시듯이 우리 자신을 용서하는 것을 말한다. C. S. 루이스의 글처럼, “하느님이 우리를 용서하신다면, 우리는 반드시 우리 자신을 용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하느님보다 더 높은 심판석에 앉는 것과 같다.”
그런데 선한 사람들일수록 자신이 저지른 잘못으로 인해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된다. 고해소에 와서 그들은 이미 고백한 죄를 반복해서 다시 고백한다. 분명히 그 죄가 아직도 자신을 괴롭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경우 나는 예수님이 용서해 주셨다고 믿는지 물어본다. 보통 그들은 그렇다고 대답한다. 그러면 나는 다시 묻는다. “당신은 당신 자신을 용서하셨나요?” 대가 그 대답은 “아니요” 다.

자신을 용서하지 않으면 부끄러움과 죄의식에 사로잡히게 되고, 과거의 선택에 대한 후회로 무거운 짐을 지게 된다.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만약 그때 그렇게 했더라면” 또는 “만약 그 일을 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술이나 노름같이 자신을 파괴하는 일에 빠진 적이 있을 수 있다. 자녀를 키우거나 연로하신 부모님을 모시면서 잘못된 선택을 했을 수도 있다. 과거의 무절제한 성생활이나 낙태로 인해 계속 고문당하고 있을 수도 있다. 경제적-직업적 선택을 잘못했거나, 잘못된 관계 속에 빠져들었거나, 좋은 관계를 망쳤을 수도 있다. 또는 꼭 해야 할 일을 안 했을 수도 있다. 가족끼리 싸우거나 친구가 알코올 의존증에 빠지는 걸 보면 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야 했는데 말이다. 만약 이러한 일들 때문에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고 있다면, 다른 누구도 용서하기 어렵다. 우리가 갖고 있지 않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줄 수는 없지 않은가.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면 스스로에게 상처를 입히게 된다.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거나 나 자신에게 상처를 주면 마음이 아픈 것은 정상이다. 그러나 마음이 아픈 것과 자기 연민은 다르다.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면 자기 연민에 빠지게 된다. 그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나를 가여워해 주기를 바라게 된다. 지금 내가 얼마나 불쌍한데…. 스스로 자기 연민 파티를 벌여놓고 끊임없이 사람들을 초대한다. 그리고 술이나 약물이나 음식에 집착하며 위안을 얻기도 한다. 아니면 천주의 성 요한처럼 스스로에게 불필요한 고행을 가하면서 자신을 괴롭히기도 한다.

하느님은 우리가 불필요한 고행을 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좋아하실 만한 알맞은 고행이 있기는 하다. 그것은 우리의 죄로 어두워진 세상에 사랑과 선함을 보태는 일을 하는 것이다. 상처 준 사람에게 사과를 하는 것도 그러한 일이다. 그 사람이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해도 우리는 최소한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는 것이다. 또한 잘못한 일들을 바로잡으려고 노력할 수도 있다. 우리가 상처 준 사람을 위해 무너가 친절한 일을 할 수도 있고, 만약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다른 사람에게라도 친절을 베풀 수 있다. 스스로가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선한 일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아빌라의 요한이 천주의 성 요한에게 해준 충고였다. 그 충고는 효과가 있었고, 천주의 성 요한은 자포자기한 젊은이에서 성인으로 변화되었다. 선한 일을 하다 보면 스스로를 좀 더 쉽게 용서할 수 있게 된다.

이 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다른 일들도 있다. 먼저 하느님께 진실한 고백을 해야 한다. 고백 후에 받아 누리는 사랑의 위로는 중요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또 생각하는 방식을 달리해야 한다. 과거의 잘못을 곱씹고 괴로워하는 대신에, 하느님이 주시는 자비에 마음을 모으거나 과거에 한 착한 일을 떠올려 보는 방법이 있다.
그렇다고 우리가 잘못한 일을 부정하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과거의 잘못에 집착하는 것은 자신을 포함해 그 누구에게도 도움이 안 되기 때문에, 자신을 용서할 수 있는 은총을 청하고, 실수 때문에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성숙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 기도 드리는 것이 중요하다.

하느님은 우리가 더 좋은 사람으로 성장하도록 항상 도와주신다. 때로는 야단도 치시고, 용기를 북돋아 주기도 하시며, 우리에게 특별한 사람이나 기회를 보내주기도 하신다. 그리고 믿음이나 겸손, 연민 같은 덕목을 가르치기 위해서 때로는 우리에게 고통을 허락하기도 하신다. 우리를 책임감 있게 만들기 위해 내가 한 행동의 결과에 직면하게도 하신다. 그분은 결과를 강요하지 않으신다. 모든 결과는 우리의 선택에서 비롯된다.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 하느님이 우리에게서 등을 돌리신 게 아니라 우리 자신이 등을 돌린 것이다. 죄는 그 자체가 벌이다. 그렇게 때문에 마더 데레사는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하느님은 벌하지 않으신다.” 그런데 왜 우리는 자신을 벌하는가? 우리 자신을 용서하자. 그러고 나서 다른 사람을 용서하자.

 

 

상대를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도록 노력하자.

17장
상대의 처지 되어보기

 

찰스 디킨스의 소설 <크리스마스 캐럴>의 주인공 에버니저 스크루지 Ebenezer Scrooge 는 인색하고 매정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이었다. 어느 날 꿈에 그는 과거와 현재, 미래를 보여주는 유령을 만나는데, 과거의 유령이 보여준 그의 어린 시절은 비참했다. 부모에게 사랑 받기는커녕 텅 빈 썰렁한 기숙학교에 혼자 남아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모습이었다. 작가 디킨스는 어린 시절에 사랑받지 못한 경험 때문에 스크루지가 사랑할 줄 모르는 어른으로 성장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가엾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해서 어른으로서 스크루지의 행동이 모두 용서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자신이 만들어 온 현재 자신의 모습에 분명 책임이 있다. 바로 그 점을 일깨워주려고 세 유령이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스크루지의 불행한 어린 시절을 알게 된 독자들은 그가 그렇게 살게 된 배경을 이해할 수 있다.
누군가의 힘든 환경을 알게 되면 공감하고 용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커진다. 상대도 상처받은 사람이란 사실을 받아들이면 용서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 Henry Wasworth Longfellow가 썼듯이, “만약 원수의 비밀스런 역사를 읽을 수 있다면, 그 삶에 흐르는 고통과 슬픔을 알게 될 터이고 그러면 적개심을 모두 내려놓게 될 것이다.” [Drift Wood(유목 流木), 1857] 그 라살에 대해 많이 알수록 용서하기는 쉬워진다.
사람들의 부정적인 행동은 대개 고통이나 두려움이나 무지에서 비롯된다. 또한 욕구를 – 그 욕구가 정당한 욕구라 할지라도 – 충족시키기 위해 부적절한 시도를 하기 때문에 불거지기도 한다. 일례로 불량배는 자기 자신을 괴롭히는 불쌍한 사람일 뿐이다. 다른 사람들을 겁주고 못살게 구는 행동을 함으로써 사실은 자신의 부끄러움이나 불안을 감추려 하거나 낮은 자존감을 끌어올리려 하는 것이다. 남편이나 아내가 한눈을 팔게 되는 이유는 사랑 받지 못하고 단절되어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가톨릭 영성 작가인 헨리 나웬 Henri J. M. Nouwen 신부는 수감자들을 돌보면서, 그들이 저지른 범죄는 다름 아닌 도와달라는 울부짖음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더욱 겸허해질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여기 많은 형제자매들은 사랑의 손길을 알지도 못하고 전혀 받아 보지도 못했다.” 16

문제 행동 뒤에는 의학적인 원인이나 육체적 원인이 있는 경우도 물론 있다. 질병이나 우울증, 또는 피로감은 사람들을 화나게 하거나 흥분시킨다. 십대 들은 위험한 행동을 억제해 주는 뇌의 한 부분이 아직 완전하게 성장하기 않았기 때문에 무모한 행동을 하기도 한다. 주의력 결핍 과잉행동 장애 ADHD 가 있는 사람은 가족을 돌보지 않는 이기적이고 경솔한 사람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장애의 증상이지 의도적인 태만이 아니다.
에버니저 스크루지 처럼, 자라온 환경은 성인이 된 후에도 그 사람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유다인 대학살의 원인을 규명하고자 이스라엘이 후원한,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독일 사회에 관한 연구에서 나온 결론도 그러했다. 당시 독일의 어린아이들은 체벌을 받아가며 권위에 무조건 복종하도록 교육 받았다. 이렇게 자란 아이들은 커서 나치당의 폭압적인 권위를 조용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 배우고 자란 환경 때문에 어른이 되어서도 옳은 판단을 하지 못한 것이다. 17

하지만 우리는 누군가 나를 괴롭히면 그 사람이 두려움으로 그랬든 무지나 질병이나 헤어날 수 없는 고통 때문에 그랬든 상관없이 악마 취급을 한다. 다시 말해 그 사람 전부를 나쁘게 본다. 사랑에 빠졌을 때와는 정반대로 상대를 보는 것이다. 사랑에 빠졌을 때, 나의 연인은 잘못을 저지를 리가 없다. 너무나 심취해서 못 보거나 봐도 무시해 버리기 때문이다. 반대로 누군가에게 깊이 상처받게 되면 우리는 상대를 그저 내게 고통을 안겨준 원인 제공자로밖에 보지 않는다. 사랑에 빠진 동안에는 장밋빛 유리를 통해 상대방을 본다면, 고통 중에 있을 때는 조준용 십자선을 통해 그들을 보기 때문이다.

악마처럼 보이는 상대를 용서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예수님 시대에는 누군가 죄를 지으면 죄인으로 낙인 찍어 악마 취급을 했다. 그러니 죄인이 모욕당하고 용서받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사람들은 길거리에서 죄인과 인사를 나누느니 그들의 얼굴에 침을 뱉는 편이 낫고, 죄인과 딸을 결혼시키느니 차라리 딸을 죽이는 편이 낫다고 생각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죄인들을 환영하고 가르치셨으며 함께 음식을 들고 사랑해 주셨다. 그분은 그들을 죄인으로 비난하지 않으셨다. 그 대신에 그들을 ‘죄를 지은 사람들’로 이해하셨다. 이는 커다란 차이다. 성 아우구스티노가 잘 설명하고 있다. “인간과 죄인은 서로 다른 존재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셨는데, 인간 스스로 죄인을 만들어 냈다.”

예수님은 사람을 보실 때 그들의 조만을 보지 않으신다. 그분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사람을 보신다. 사람의 눈에서 당신 자신과 닮은 모습을 보신다. 물론 그분과 닮은 모습은 분명 어떤 사람들에게서는 더욱 잘 드러나고 어떤 사람에게서는 덜 드러날 것이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예외 없이 모든 사람에게서 회복되고 구원받고 용서받을 가치를 보신다.
예수님이 보시는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들을 본다면 예수님이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도 용서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잘못된 행동이 나쁜 환경 때문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충분히 잘 아신다. 사랑과 자비로 그분은 언제나 그 사실을 계산에 포함시키신다. 1세기 이집트 사막의 수사였던 가자의 성 도로테오 는 극단적으로 서로 다르게 자란 두 소녀의 대조되는 삶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한 소녀는 경건한 여성에게서 자라 선하고 거룩한 삶을 살았다. 다른 소녀는 관능적인 무희와 살면서 ‘악마 같은 일을 하도록 길들여졌다.’ 하느님은 부도덕한 환경에서 자란 소녀에게 훨씬 덜 기대하셨다고 성 도로테오는 설명했다. 그는 이렇게 질문한다. “하느님이 한 소녀에게 요구하신 것을 또 다른 소녀에게도 똑같이 요구하신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분명히 아니다! 그분께서 어떻게 똑같은 기준으로 그들을 보시겠는가?” 18

예수님은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그렇게 했다는 사실을 아셨다. 우리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들도 종종 그렇다. 단지 악한 마음으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다. 무지나 고통이나 두려움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그들의 행동은 잘못된 것이지만, 환경이 그들의 책임을 줄여줄 수 있다. 더불어 우리가 그들을 용서하기 쉽게 해주기도 한다. 예수님은 당신이 십자가에서 외치신 말씀을 우리도 똑같이 하라고 초대하신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루카 23,34]

 

 

 

다른 사람들에게 거는 기대를 낮추면 용서하는데 도움이 된다.

18장
기준 낮추기

 

많은 대중음악 가수들은 누군가 자신을 ‘구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노래한다. 외로움이나 절망이나 현재 자신의 모습에서 꺼내주기를 누군가에게 바라는 마음이다. 행복해지고 충만해지기를 진정으로 때로는 필사적으로 갈망하는 마음이 묻어난다.
예술이 인생을 모방한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오늘날 많은 사람이 자신을 구원해 줄 누군가를 찾고 간절히 원하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사실 우리는 모두 구원이 필요한 사람이므로 새삼 놀랄 일도 아니긴 하다. 그리스도교의 복음은 우리가 어떤 사람,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그 사람에 의해 구원받을 수 있음을 알리는 것이다. 연인도, 정치가도, 어떤 전문가도 아니고, 우리를 진정으로 구원할 수 있는 오직 한 사람은 인간이 되신 하느님, 예수님뿐이시다.

우리를 구원해 줄 대상을 만약 사람 중에서 찾는다면, 오직 예수님만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욕구를 그 사람이 채워주기를 기대하게 된다. 그런 기대는 그 사람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는 일일 뿐, 그는 결코 우리를 충족시켜 줄 수 없다. 우리의 기대를 실현시켜 줄 길이 없는 사람에게 기대를 했으니 당연히 실망할 수 밖에 없다. 화도 나고 실망도 하고 좌절도 하겠지만 그것은 우리의 잘못이다. 실현 불가능한 기대를 한 쪽은 우리니까.

물론 사람들도 우리에게 커다란 기쁨과 행복을 준다. 그들 덕에 덜 외롭기도 하고 사람의 방향과 목표를 잡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의 궁극적인 욕구를 채워줄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오직 예수님만 그렇게 하실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은 그저 우리와 똑같이 나약하고 상처받은 유한한 존재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항상 우리를 실망시킬 수밖에 없다. 예전에 고해성사에서 매우 의미 있는 보속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나는 지금까지도 그 보속을 마음에 소중히 간직하며 실천하고 있다. 성체 앞을 지나칠 때마다 무릎을 꿇고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다. “주님, 사랑을 향한 저의 깊은 갈망을 채워주실 분은 오로지 당신뿐입니다.” 이 기도를 자주 되풀이하면서 나는 큰 도움을 얻고 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실현 가능한 기대를 가져야 한다. 우리에게 현실적인 기대를 가지시는 예수님처럼 말이다. 그분은 우리 능력 밖의 일을 하라고 기대하지 않으신다. 흠 없는 사람이 되라고도 하지 않으신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생각해 보라. 예수님은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충분히 잘 아시면서도 제자로 삼으셨다. 제자들은 훌륭한 집단이라고 하기에는 여러 가지로 부족했다. ‘알아듣지 못해서’ 예수님을 실망시켰으며,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밤에는 잠에 취해있는 겁쟁이들이었다. 야고보와 요한은 복수심이 강하고 거만했으며 토마스는 의심이 많았다. 유다는 욕심 많은 배신자였다. 끝으로 제자들의 맏형 격인 베드로는 어떠했는가. 그는 다혈질이고 허풍쟁이였으며 예수님을 안다는 사실조차 부인하지 않았던가.

예수님은 제자들이 성장하는 중이라는 사실을 깊이 이해하셨다. 베드로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에서 이 사실을 알 수 있다. [요한 21,15-19] 처음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두 번 이렇게 물으신다. “나를 사랑하느냐?” 여기서 ‘사랑’으로 번역된 말은 그리스어 신약성격에서 아가페 agape로 쓰여있다. 아가페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사랑, 곧 자신을 내어주는 희생적인 사랑을 말한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확실히 대답한다. 그러나 베드라고 언급한 사랑은 아가페가 아니라 우정과 형제애를 뜻하는 사랑, 필리오 phileo이다. 그것은 베드로가 “주님, 제가 당신 친구라는 거 아시잖아요” 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왜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을까? 바로 며칠 전, 베드로는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고 큰소리쳤다. 하지만 몇 시간 만에 어떻게 되었던가. 두려움에 떨며 예수님과의 관계를 철저히 부인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베드로는 예수님이 물으신 그 사랑을 한다고 대답할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그저 정직하게 말한 것이다. 예수님은 이해하셨다. 그래서 베드로의 사랑을 다시 확인하는 세 번째 질문을 하실 때 예수님은 더 이상 아가페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으셨다. 필리오를 사용하셨다. 그것은 예수님이 “베드로야, 너는 내 친구이냐?” 하고 묻은 것과 같다. 베드로는 쉽사리 동의했다. 그는 자신이 아직 아가페 사랑을 할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고, 예수님 역시 아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가 줄 수 없는 것을 요구하지 않으셨다. 19

이와 같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현실적인 기대를 하셨다. 그분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현실적이시다. 그분은 우리가 완전함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아신다. 사실 이 세상에서는 성인들조차도 완벽하지 않다. 성인이 되는 기준은 완벽함이 아니라 ‘영웅적인 덕’이다. 이 둘은 큰 차이가 있다. 예수님은 완벽함을 요구하지 않으신다. 문제는 우리가 가끔 그런다는 사실이다. 완벽주의자들은 타인에게나 자신에게나 가혹하다. 기대가 지나치게 높다. 그 기대는 절대 충족될 수 없다. 그러니 완벽주의자들은 결국은 좌절하고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상처를 주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만약 완벽주의자가 되려는 경향이 있다면 조심해야 한다. 그러나 곡 완벽주의자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대부분 다른 사람에게 비현실적인 기대를 어느 정도는 한다. 갓 결혼한 사람들은 배우자가 자신이 원하는 사람으로 변하기를 기대한다. 부모는 자녀들이 원하는 길을 가도록 지켜보기보다는 자신의 뒤를 따라오거나 자신이 원하는 꿈을 이루어 주길 기대한다. 또 실컷 용서를 해주고도 기대를 버리지 못한다. 상대가 삶의 태도를 바꾸거나 용서해 준 데 대해 감사를 표하거나, 최소한 나한테 잘해주기를 기대한다.

우리가 이렇게 기대하는 것은 사실 우리 자신도 부족한 사람인데다 괴로움이 해소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고를 당해 누워만 지내는 남편을 돌보는 부인이 있다고 하자. 그 부인은 너무나 괴로운 나머지 사람들에게 비이성적일 만큼 지나치게 많은 관심과 도움을 요구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도 그 부인이 원하는 만큼의 관심과 도움을 줄 수는 없다. 부인은 사람들을 멀어지게 하고 결국 그들이 줄 수 있던 도움마저 받을 수 없게 된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그 부인은 점점 억울함만 가득한 사람, 걸핏하면 화내는 사람이 되고 만다.
우리는 이렇게 자기 마음대로 비현실적인 기대를 해놓고 실망하는 일을 반복한다. 그러면서 그래도 내가 용서해야지 하며 마음을 다잡기도 한다. 그러나 냉정히 말해서 그들은 용서가 필요한 일을 한 적이 없다. 문제는 그들이 아니라 나다. 해결책은 무엇일까? 기준을 낮춰야 한다. 상대방이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상대가 다른 사람이 될 것을 기대해서도 안 되고, 완벽하기를 기대해서는 더더욱 안 된다.

그렇다. 예수님은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마태 5,48] 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결점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만약에 그런 뜻이라면 말할 것도 없이 지금 우리의 모습은 너무나 많이 부족하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의미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사랑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 사랑은 아무 조건 없는 사랑이다. 그러한 사랑을 하려면 상대에게 기대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상대를 받아들여야 한다. 만약 그렇게 사랑하게 된다면, 한때 생각했던 것보다 용서할 일이 훨씬 적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내가 상처받게 된 데는 내 잘못도 있지 않을까?

19장
나는 뭘 했지?

 

어느 잡지 인터뷰에서 폴 매카트니는 비틀즈 시절에 썼던 <예스터데이> Yesterday라는 노래가 삼천 번 이상 리메이크됐다는 얘기를 했다. 그러면서 그 중 가사가 변형되어 있는 곳이 괘 많다는 사실이 흥미롭다고 말했다. 원래의 가사는 “내가 뭔가 말을 잘못했고, 지금 나는 과거를 그리워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랑하는 여인이 떠나간 이유를 이해한다. 여러 리메이크 고 중에는 이 구정이 “내가 무너가 말을 잘못했나 봐”로 변한 것들이 있다. 이는 “내가 말을 잘못했는지 무척 의심스럽다”라는 의미로 변하게 된 것이라고 폴 매카트니는 해석했다. 본인은 잘못한 것이 없는데, 여인이 오해를 했거나 너무 예민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는 것이다. 둘의 관계가 깨진 것은 내 잘못이 아니라 그녀의 잘못이다.20

시간을 두고 여러 차례 리메이크되면서 <예스터데이>가사가 이렇게 변했다는 사실은 잘못을 인정하고 책임지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예다. 핑계를 대거나 다른 사람으 향해 손가락질하거나 상황 뒤에 숨는 편이 훨씬 쉽다. 그런데 이렇게 한다면, 엄마가 애지중지하는 화병을 깨고는 옆에 있던 강아지가 깼다고 핑계를 대는 어린아이와 다를 것이 무엇이겠는가.
마음이 상한 때를 곱씹으며 우리는 쉽게 모든 잘못을 상대에게 돌린다. 하지만 그 당시 나 또한 뭔가 역할을 했을 수도 있다. 그런 상황이 오게 된 데는 내 잘못도 어느 정도는 있지 않을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상대방이 면죄부를 받은 것은 아니다. 분명 그가 한 행동에 대한 책임은 그에게 있다. 하지만 그 행동이 내가 한 어떤 행동에 대한 반응이었을 가능성은 없을까? 상대가 나에게 상처를 준 것이 혹시 내가 상대를 아프게 했기 때문은 아닐까? 용서하려고 할 때 우리는 이러한 질문에 대해 깊이 생각해 봐야 한다. 우리도 용서받을 일이 있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용서하기가 훨씬 쉬워진다.

예수님은 설교 중에 질문을 하면서도 답은 주시지 않을 때가 있다. 우리 스스로 답을 찾기 바라시기 때문일 수도 있고, 사람마다 답이 다를 수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바로 이런 질문이다. 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잘못은 잘 보면서 자신의 잘못은 보지 못하는가?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이러하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루카 6,41]

우리가 이런 실수를 범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우선 잘못을 인정하자니 너무 두렵고 창피하기 때문일 수 있다. 다른 사람의 잘못에 초점을 맞추다 보면 내 잘못이 덜 심각하게 느껴지기 때문일 수도 있고, 내 잘못을 감당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그냥 무시하려는 것일 수도 있다. 또는 누가 알려주기 전까지는 스스로 무슨 잘못을 했는지 깨닫지 못하는 수도 있고, 당장 내 괴로움이 너무 커서 나도 상대를 아프게 했다는 사실은 덮어버리고 싶은 것일 수도 있다.

단순히 귀찮아서 자신의 잘못에 눈감아 버릴 수도 있다. 책임을 다른 누군가에게 돌리는 것이 자신의 책임으로 받아들이는 것보다 훨씬 쉽고 편하니까 쉬운 쪽을 택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렇게 불평한다. “내가 술꾼이 된 건 다 직업 탓이야!”, “부모님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됐어!”, “세금도 꼬박꼬박 다 냈는데 정부가 무능해서 경제적으로 나아지는 게 없어”, “그 사람이란 결혼했으면 너도 나처럼 했을걸!” 더 고전적인 핑계도 있다. “악마의 꼬임에 넘어갔어.” 때로 더 설득력 없는 변명도 늘어놓는다. “다 그렇게 하잖아”, “난 정말이지 누구한테도 잘못한 적이 없어”,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인데 어떻게 바꾸겠어”, “하느님은 이런 일엔 신경도 안 쓰셔”, “겨우 일주일에 한 번 즐기는 건데 뭘!”

다른 사람의 잘못은 보면서 내 잘못은 못 보는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사람들은 대개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그들이 한 행동에 따라 평가하는 반면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그 행동을 하게 된 동기에 따라 평가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내가 과속을 하면 아주 중요한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이고 다른 사람이 과속을 하면 그저 난폭한 운전자일 뿐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는 데 빠르고 자신에 대해서는 변명하는 데 그만큼 빠르다. 다른 사람과 내가 완전히 똑같은 일을 했더라도 말이다. 자신은 최선의 동기에 따라 행동했다고 합리화하고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은 자신이 나약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문화는 능력이나 지배, 통제, 공격적인 독립성 같은 것들은 높이 평가하고, 약한 것은 모자란 것으로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약함은 패배다!” 이 말은 군대에서 사용되는 인기 있는 구호다. 전쟁터에서라면 이 말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영적인 삶의 전쟁터에서는 약함을 받아들이는 것이 승리이다. 약함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우리가 진실과 닿아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자신이 나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다른 사람의 나약함도 인정해 줄 수 있게 되고 용서도 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겸손함과 용기, 그리고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정직하게 자신을 돌아보며 스스로 약함을 받아들이고 잘못을 인정해야 한다. 이렇게 하고 나서야 밝은 통찰력과 깨끗한 양심으로 다른 사람의 삶과 행동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그러면 나를 괴로움에 빠뜨린 그 사건을 객관적인 시각으로 보게 되고, 나도 뭔가 잘못한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가만히 있어야 했는데 나섰나? 잠자코 있을 걸 공연히 말을 했나? 거만했나? 예의 없었나? 둔감했나? 경솔했나? 이기적이었나? 아니면 그저 단순히 무신경했거나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나?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은 이렇게 주장할지도 모른다. “네가 그렇게 하게 만들었잖아!” 물론 이 말은 옳지 않다. 내가 어떤 잘못을 했다고 해서 그것이 그 사람에게 나를 아프게 할 수 있는 자격을 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하고 받아들이면 용서라는 선물을 주기가 훨씬 더 쉬워진다. 그 사람은 아마 ‘용서를 부탁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하느님은 틀림없이 우리에게 용서하라고 부탁하실 것이다.

 

 

분노가 무엇인지, 왜 분노가 필요한지 제대로 알자.

20장
화내도 괜찮다

 

예루살렘 성전은 사람으로 가득 차있었다. 각지에 흩어져 살던 수많은 유다인이 파스카 를 기념하기 위해 몰려와 있었다. 예수님도 파스카를 기념하고 사람들을 가르치기 위해 성전에 계셨는데, 그곳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보고 몹시 화가 나셨다. 사람들은 이교적인 상 像 이 새겨져 있지 않은 동전으로 성전세를 내기 위해 동전을 바꿔야 했는데 그 틈을 노려 환전상들이 터무니없이 높은 수수료를 챙기고 있었다. 또한 사람들은 제물로 바칠 동물을 성전 안에 있는 상인들에게 비싼 값을 내고 울며 겨자 먹기로 사고 있었다. 물론 시내에 나가면 훨씬 싼 가격에 동물을 살 수 있었지만 성전 안에 있는 상인에게 산 동물만이 성전 관리의 검사를 통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부패한 시스템이었다. 소위 책임자라는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의 돈으로 자기 주머니를 불리고 있었다.21

예수님은 이러한 불의를 보고 몹시 화가 나셨다. 군중이 보는 데서 하느님의 집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든 사람들에게 호통치시며 그들의 탁자와 의자들을 둘러엎으셨고 채찍을 휘둘러 쫓아내셨다. [마르 11,15-19] 이 사건은 ‘성전의 정화’라고 불리는데, 분노가 예수님이 피하신 감정이 아니라는 사살이 이 사건을 통해 명백히 밝혀진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이 분노는 피해야 할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예수님이 원수도 사랑하라 하시고 다른 뺨도 내어주라 하신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있다. 그러니 분노와 그리스도교 신앙은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분노는 좋게 말해야 자제심을 일어버린 창피한 일이고 나쁘게 말하면 대죄인 것이다.

그러나 죄를 지으신 적 없는 예수님의 분노가 죄일 리 없다. 또한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의 삶을 사셨기 때문에 그분의 모든 행동은 우리의 행동을 함축하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라 살아야 하고, 우리가 따라야 할 그리스도는 가끔 분노하셨다.
예수님이 하신 모든 일이 그렇듯이, 분노 또한 그분의 사랑이 드러나는 행위였다. 이렇게 생각해 보자. 예수님이 ‘강도들의 소굴’로 변한 하느님의 성전에 애정이 없었다면, 그리고 착취당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가엾이 여기지 않았다면, 그저 눈감아 버리거나 상관없다는 듯 지나쳐 버리지 않았을까.

예수님은 불의에 대항해서 흥분할 수 있는 능력이 분노라는 사실을 알려주신다. 분노를 통해 우리는 불의에 맞설 수 있는 힘을 얻고 그 힘으로 불의에 맞서 행동할 수 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분노를 그 자매 덕인 용기와 함께 희망의 딸이라 설명했다. 어떤 일이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하기 위해 분노를 이용해도 된다. 분노를 통해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물론 모든 분노가 사랑을 드러내는 행위는 아니다. 분노가 원한이나 자기 연민으로 굳어져서 복수를 향한 목마름으로 벼하기도 하고, 때로는 눈먼 격분으로 폭발하기도 한다. 이렇게 될 위험이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화 자체가 문제라고 단정 짓는 것이다. 그러나 화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단순한 감정일 뿐이다. 좋고 나쁜 것을 결정하는 것은 화나는 감정에 반응하는 방식이다. 다른 사람에게 상처받았을 때 화가 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정상이다. 괜찮다. 문제는 그 화를 어떻게 진행시켜 나가는가 하는 것이다. 화를 부정하려고 하거나 그 화에 매몰되도록 내버려 두는 것 모두 피해야 할 일이다.

먼저, 화를 부정하거나 억압해서는 안 된다. 화는 무시할 수 없는 감정이다. 감정은 우리의 중요한 부분이므로 그 감정을 부정한다는 것은 자신의 일부를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화를 부정하려고 하며 그 화는 우리 영혼 안 깊숙한 곳에서 곪게 되고 결국 우리를 기쁨 없고 냉소적이며 우울한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다. 적절치 못한 반응으로 튀어나오거나 애꿎은 사람에게 화풀이를 하기도 한다. 직장에서 윗사람에게 당하고 집에 와서는 엉뚱하게 배우자에게 소리를 지르거나 개한테 발길질할 때가 있지 않은가.

우리는 분노에 매몰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마음속 깊이 원한이 생겨 상처 준 사람에게 복수하고 싶어진다. 큰 복수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이 사람 저 사람 붙잡고 험담을 늘어놓으며 상대의 명예에 흠집을 내기라도 한다. 생각할수록 화가 나서 속이 부글부글 끓다가 폭발하기도 한다. 올바른 판단력과 이성은 저 멀리 던져버리고 후회할 게 뻔한 행동을 할 수도 있다. 화는 풀어져 나올 필요가 있다. 그러나 가능한 한 천천히 나와야 한다. 화가 꽉 차게 내버려 두면 풍선 터지듯 터져버린다. 그렇게 되기 전에 서서히 빠져 나오게 해야 한다.
화를 천천히 푸는 것이 화를 적절히 다루는 방법이다. 우선은 화가 났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화가 난 데에는 이유가 있다는 점을 깨닫고, 스스로가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을 수 있을 때까지 그 화를 잘 다뤄야 한다. 자주 기도하고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 그러는 과정에서 상처 준 사람과 직면해야 할 수도 있고 그 사람의 행동에 도전해야 할 수도 있다. 상처받으면서 잃어버린 뭔가에 대해 슬퍼하는 시간도 필요하다. 그것은 관계나 꿈, 시간, 에너지 같은 것일 수도 있고 도둑맞거나 잃어버리거나 망가진 물건일 수도 있다.

화가 더 이상 문제 되지 않은 상태, 이런 상태가 되어야 상대를 용서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어려운 일이다. 특히 분노가 아주 심할 때는 그 분노에서 벗어나는 일이 가능할까 싶다. 그러나 용서는 결심이고, 분노가 활활 타오르고 있을 때조차도 우리는 용서를 선택할 수 있다. 그 선택을 늦추면 늦출수록 분노에 갇히게 될 뿐이다.

대중문화는 주장한다. “화내지 마라. 평정심을 유지해라.” 그러나 예수님은 화내도 괜찮다고 하신다. 평정심을 꼭 유지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신다. 그리고 또한 용서하라고 말씀하신다. 용서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화를 끝까지 잘 다뤄야 한다. 1985년 자신을 납치한 레바논의 시아파 테러리스트를 용서해 준 로렌스 젱코 Lawrence Jenco 신부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썼다. “고통을 감수하지 않으면 진정한 용서는 하기 어렵다.”

 

 

 

내 경험과 감정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며 얻게 되는 좋은 점

21장
터놓고 이야기하기

 

1995년 티머시 맥베이 Timothy McVeigh 가 오클라호마 시 연방정부청사 폭파 사건을 벌였을 때, 버드 웰치 Bud Welch의 딸 줄리도 그 안에 있었다. 버드는 마침 그날 줄리와 점심 약속을 해놓은 상태였지만 그녀는 그 약속을 끝내 지키지 못했다. 폭발의 굉음 속에서 167명의 다른 희생자들과 함께 줄리도 목숨을 잃었다.
버드 웰치는 딸을 잃고 그야말로 넋이 나갔다. 폭음을 시작했고 하루에 담배를 세 갑이나 피워댔다. 연방정부청사가 있던 사리가 보이는 나무 근처를 자주 배회하기도 했다. 그는 줄리를 생각하며 슬픔과 분노를 마음 가득 채워갔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문득 자신이 병들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복수가 필요한지 질문도 던져보고 앞으로 살아가는 문제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버드는 마침내 자신을 가득 채우고 있는 분노가 딸을 죽인 그 분노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 분노는 이제 자신이 먼저 끝내야겠다고 결심했다. 결국 그는 신앙의 힘으로 티머시 맥베이를 용서했고 용서의 필요성에 대해 대중 강연을 시작했다.
그때부터 버드는 미국 여러 개 주의회와, 영국과 유럽의 국회, 러시아 국회, 그리고 미국 하원의 법사위원회 등에서 증언했다. 도 <타임>과 <뉴스위크> 등 크고 작은 잡지와 신문에 글을 썼고, <식스티 미니츠 60 minutes>, <래리 킹 쇼>, <데이트라인 NBC>, 그리고 <투데이 쇼> 등 유명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에도 출연했다. 지금까지도 그는 자신의 개인적인 체험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당연히, 용서하고 싶은 많은 사람이 버드 웰치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그들은 버드 웰치의 증언에 감동받아 버드 웰치가 티머시 멕베이를 용서했듯이 자신들도 용서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용서의 길을 가본 사람만이 자신들의 생각과 느낌을 이해할 수 있으며, 또한 자신들과 같은 고통과 상실을 체험한 사람만이 바른 방향을 알려줄 수 있다고 믿는다. 버드의 관점에서 보면, 다른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어서 행복할 따름이다.

용서하기 위해서 우리는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 터놓고 말할 수 있는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혼자 모든 걸 움켜쥐고 끙끙거리며 힘들어하는 경우가 많다. 상처받은 그 상황이 난처하고 부끄러워서 그럴 수도 있고, 그저 남과 터놓는 성향이 아니라 속 얘기를 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아니면 도움을 청해봤자 자신의 나약함만 내보이는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면서 이렇게 생각한다. ‘하느님과 나 둘이서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기억하라. 그리스도교는 단지 ‘예수님과 나’ 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예수님과 우리’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몸을 구성한다. 바오로 사도가 묘사한 것처럼, 그리스도는 그 몸의 머리이고 우리는 지체다. 예수님은 당신 몸의 지체들이 서로 도와주고 지지해 주기를 바라시고, 때때로 지체의 손을 사용해 당신 치유의 손길을 뻗기도 하신다.
우리가 용서할 수 있는 은총을 예수님께 청한다면 그분은 분명 딱 알맞은 누군가를 보내시어 우리를 도우실 것이다. 그 사람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일 수도, 모르는 사람일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이미 용서하는 법을 배우고 버드 웰치처럼 그 경험을 우리와 나눌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일 것이다.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할 일이 생겼을 때, 우리는 스스로를 쉽게 속인다. 괴롭고 화가 난 상태라 객관적이거나 이성적이지 못해서다. 왜 용서해서는 안 되는지 또는 용서할 수 없는지 이유를 찾아내기도 하고, 그냥 무조건 괴로워하면서 화만 내고 있기도 한다. 바로 이때 상황을 좀 더 명확히 볼 수 있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성 요한 클리마코 St. John Climacus가 말했듯이, “하느님은 그 어떤 사람도 남이 보듯이 정확하게 자신의 잘못을 볼 수 있게 만들지 않으셨다!”

우리가 듣고 싶어 하는 말만 해주는 예스맨은 필요 없다. 그가 아무리 선의를 갖고 내 고통을 공감해 주더라도 말이다. 기대어 울 수 있는 어깨가 필요한 건 맞지만 내 고통의 정당성을 인정해 주기만 하는 봉사자는 필요하지 않다는 뜻이다. 진짜로 도와줄 의향이 있는 사람, 진실이 아무리 내 마음을 아프게 한대도 그 진실을 말할 수 있을 만큼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목적지로 날 이끌어 주리라 믿어야 한다. 그 사람은 때로는 내 손을 잡아주기도 하고, 때로는 발로 차고 고함치며 질질 끌고 가기도 할 것이다. 또 뒤에서 밀어주기도 하고, 용기를 주는 치어리더가 되기도 할 것이다. 가끔은 자기 연민에 빠져 허우적대는 나를 흔들어 꺼내주기도 할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어쩌면 이런 일들을 모두 해야 할지도 모른다.

물론 ‘터놓고 말하라’는 것이 상처 준 사람을 험담해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좋은 평판과 명예를 가질 권리가 있다. 동정심을 얻어내고 사람들을 내 편으로 만들기 위해서 상처 준 사람을 비방하거나 인신공격해서는 안 된다. 솔직히 그렇게 하고 싶을 때가 많다. 그래서 친구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너도 분명히 알아야 돼.” 친구를 걱정해 주는 듯 꾸미지만 사실은 내가 싫어하는 것만큼 친구도 그 사람을 싫어하게 하려는 것이다. 누군가를 위해 기도해 준다면서 사실은 흉보따리를 펼쳐놓는 격이다.
그러므로 힘겨운 몸부림을 나눌 때 우리는 지혜로울 뿐 아니라 내 말을 옮기지 않을 믿을 만하고 신중한 사람을 잘 골라야 한다. 가족이나 친구도 좋고 교유도 좋다. 본당사제나 고해사제도 몰론 좋다. 만일 우울증이나 심적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PTSD로 고통 받고 있다면 우리 신앙을 존중해 주는 전문적인 치료사가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 St. Bernard of Clairvaux은 이렇게 썼다. “자기 자신을 안내자로 따르는 사람은 누구나 바보의 제자가 된다.” 가혹한 말이지만 슬프게도 진실이다. 신앙의 여정에서 동반자는 반드시 필요하다. 예수님은 서로 도움이 되라고 둘씩 짝지어 제자들을 파견하셨다. 우리의 여정에도 도움이 필요하다. 용서하라고 부름 받았을 때는 더욱 그렇다. 진정으로 용서하고 싶을 때 혼자보다는 두 사람의 힘이 낫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용서하는 데는 인내와 시간이 필요하다.

22장
끝까지 계속하기

 

사촌끼리 즐거운 사냥 여행을 할 예정이었다. 크리스토프 ㄷ 샹탈 Christophe de Chantal과 M. 당르지 M. D’Anlezy는 총을 장전한 채 말을 타고 함께 달리고 있었다. 한 사람이 목표물을 발견했다. 그러나 총알이 빗나가고 말았다. 당르지가 쏜 총은 크리스토프의 넓적다리에 맞았고 심각한 부상을 초래했다. 때는 1601년. 크리스토프는 37세였고 결혼한 지 9년, 올망졸망한 어린 자녀가 네 명 있었다. 28세의 부인 요안나 드 샹탈 Jane de Chantal은 사고가 나던 시간에 집에 있었다.

크리스토프는 9일 동안 엄청난 고통에 시달렸다. 의사도 도움을 줄 수 없었다. 사고를 낸 당사지 당르지의 정신적인 고통 또한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괴로워하는 당르지에게 크리스토프는 누구에게나 사고는 일어날 수 있다며 오히려 위로의 말을 해 주었다. “사랑하는 사촌, 나의 친구, 그 일은 그냥 일어난 거야. 네 잘못이 아니야. 부탁하네,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자신을 미워하는 죄를 저지르지 말게나.” 크리스토프는 당르지를 용서했고, 나중에라도 사람들이 당르지를 고소하지 못하게 자신이 용서했다는 진술을 교회 기록에 남겨놓기까지 했다. 그러고 나서 얼마 후, 크리스토프는 요안나의 품에서 숨을 거두었다.22

크리스토프는 당르지를 용서하라고 요안나를 열심히 설득했으나 요안나의 처지에서는 당르지를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 크리스토프가 죽은 후에 그녀는 깊은 우울증에 빠졌다. 넉 달 동안 아무도 만나지 않았고 아이들도 돌보지 않았다. 당르지라는 이름은 그녀 앞에서 금기어였다. 슬픔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던 그녀는 차츰 건강을 해치기 시작했다. 그래도 다행스런 일은 이런 상황 속에서도 요안나가 가톨릭 신앙을 지키며 하느님께 영적 지도자를 계속 청했다는 사실이다. 하느님은 제네바의 주교를 통해 그녀의 소원을 이루어 주셨는데, 요안나의 영적 지도자가 된 주교가 바로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St. Francis de Sales 였다.

프란치스코 주교는 곧 요안나가 당르지를 용서해야만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주교가 지닌 특유의 지혜롭고 다정한 성품으로 용서에는 시간과 인내가 필요하다는 사실 또한 알았다. 요안나의 가족들은 그녀가 빨리 좋아지기를 바랐지만 주교는 서두르지 않고 요안나를 조금씩 변화시켜 나갔다. 서서히 요안나의 마음이 녹기 시작했다. 몇 년 동안 당르지를 피하던 그녀가 길에서 당르지와 마주치자 인사를 건넬 정도가 된 것이다. 그리고 다음에는 당르지를 집에 초대했다. 마침내 당르지가 딸의 대모가 되어달라고 부탁하자 요안나는 복받치는 감정에 눈물을 터뜨리면서도 그 부탁을 들어주었다. 크리스토프가 죽은 지 6년 만에 요안나는 당르지를 완전히 용서했다. 요안나는 143년 후에 시성되었다.

성녀가 될 정도로 훌륭한 사람이 용서하는 데 그토록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사실이 의아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하며 가장 독실한 신앙인에게조차 용서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다시 한 번 깨달을 수 있다. 만약 용서가 저절로 가능한 일이라면 성녀 요안나의 일화는 맞지 않는 예일 것이다. 그러나 용서가 저절로 가능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의 말씀처럼, 용서는 “악을 악으로 갚으려는 자연스런 본능에 거슬러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용서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이다. 용서는 결심이지만, 용서하겠다는 결심을 끝도 없이 반복해서 해야 하는 험난한 과정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하라고 가르치신다. 우리는 보통 이 말씀을, 누가 여러 번 반복해서 잘못을 하더라도 여러 번 다 용서해 주라는 의미로 이해하지만, 한 번 완전한 용서를 하기까지 계속 새로이 반복해서 용서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우리는 용서하기로 결심하고 평화를 맛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곧 다시 화가 솟구치고 앙갚음하고 싶은 마음이 스멀스멀 일어난다. 그러면 또다시 용서를 결심해야 한다.

바오로 사도는 해가 질 때까지 노여움을 품고 있지 말라고 그르친다. [에페 4,26] 우리는 존경하는 마음으로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을 따르고자 용서했다고 생각하며 잠자리에 든다. 그러나 아침이 오면, 아픈 기억이 다시 마음을 채우고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간다. 고대의 그리스도인 작가는 이러한 생각을 ‘아침 악마’라고 표현했다. 그 악마는 끔찍하게도 끈질기다. C. S. 루이스는 이렇게 썼다.

용서가 쉬운 것처럼 말하다니… 참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옛말에, “당신은 한 번 금연했지만 나는 열두 번이나 금연했소”라는 말이 있다. 이와 비슷하지 않은가. “그날 그 사람이 한 일을 용서했냐구요? 나는 이미 셀 수 없을 정도로 여러 번 그 사람을 용서했어요.” 용서는 끊임없이 반복해서 해야 하는 일이다.23

용서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몇 가지 심리적 변화 단계를 거치게 된다.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 Elizabeth Kubler-Ross 가 죽음을 맞는 사람들이 겪는 과정이라 설명했던 부정, 분노, 협상, 우울, 수용의 단계를 용서하려는 사람들도 대체로 겪게 되는 것이다. 부정의 단계에 있을 때, 우리는 충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고통을 피한다.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날 수는 없지!” 이렇게 주장한다. 그러나 결국 고통은 느낄 수밖에 없는 일. 분노가 떠오른다. 복수와 앙갚음에 대한 유혹이 일어난다. 왜 용서할 수 없는지, 용서를 해서도 안 되는지 핑계를 만들며 협상한다. 우울함이 따라온다. 눈물을 흘리며 잃어버린 것에 대해 한탄하기도 하고 보호막 속으로 후퇴하기도 하며 자신을 비난하기도 한다. 그러고 나서 이 모든 것이 결국에는 수용과 용서, 평화로 바뀌게 될 것이다. 이 여러 과정은 단계별로 차근차근 진행되지 않을 수도 있다. 모든 사람이 이 과정 전부를 겪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누구나 이 과정 중 일부는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하기 힘든 용서를 하려고 애쓰다 보면 좌절하고 낙담도 하게 된다. 그러나 이 힘든 투쟁 속에서도 은총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좀처럼 떨어져 나가지 않는 부정적인 생각이나 감정과 씨름하는 것은 비극이 아니다. 스위치를 끄듯 하룻밤 사이에 그러한 감정을 꺼버릴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어쩌면 그런 부정적인 감정들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 없을지도 모른다. 진짜 비극은, 항복이라고 외치며 노력하는 것조차 포기해 버리는 것이다.

용서가 이 세상에서 가장 하기 싫은 일 또는 요청 받아서는 안 되는 일로 느껴질 때는 용서가 의무라는 생각에 매달리면 도움이 된다. 이것이 테리 앤더슨 Terry Anderson이 사용한 방법이었다. AP통신의 기자였던 그는 7년 동안 레바논의 테러리스트들에게 인질로 잡혀있었다. 그는 너무나 큰 고통을 겪었다. “그 테러리스트들은 나와 내 가족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피해를 줬다”고 그는 후에 썼다. 용서는 정말이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 그리고 함께 포로로 있던 사제의 격려 덕분에 앤더슨은 서서히 용서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되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리스도인이고 가톨릭 신자다. 그래서 나는 용서해야만 한다. 그 용서가 아무리 어렵다 해도 말이다.”24

용서를 해야 할 상황이 오면 그저 ‘끝까지 계속해야 하는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테리 앤더슨의 체험을 통해 알 수 있다. 예수님도 그것을 잘 알고 계셨다.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용서하라는 명령을 주셨다. 그분이 주지 않으신 건 마감 시간이다.

 

 

진정으로 용서하면 나타나는 신호들

23장
상태 점검하기

 

아야톨라 호메이니 Ayatolla Khomeini 치하의 이란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무척 힘들었다. 그리스도교 관련 기관들은 재산을 몰수당하고 강제로 문을 닫았으며 지도자들은 시달림 당하거나 감옥에 갇혔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만으로도 폭력의 대상이 됐다. 1980년 어느 늦은 밤, 테헤란의 성공회 하산 데카니-타프티 Hassan Dehqani-Tafti 주교의 집에 난입자들이 들이닥치는 사건이 터졌다. 그들은 주교의 부인 마가렛의 침실로 쳐들어가 총을 다섯 발이나 쐈다. 한 발은 부인의 손에 맞았고 나머지 네 발은 다행히도 빗나가 베개에 맞았다. 결국 하산 주교 부부는 부인이 치료를 마치자마자 이란을 떠나 영국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아들 바흐람 Bahram은 고향에 남았다. 바흐람이 테헤란 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어느 날 밤이었다. 그는 정부 요원의 습격을 받았고, 결국 총격을 당해 사망하고 말았다. 하산 주교 부부는 망명 상태였기 때문에 아들의 장례식에도 참석할 수 없었다. 하산 주교는 멀리서나마 아들의 장례미사를 위해서 아름다운 기도문을 썼는데, 다음과 같이 끝을 맺는다.

 

오 하느님,
저희 아들이 흘린 피는
저희 영혼 안에서 영의 열매를 풍부히 맺었습니다.
그러므로 살인자들이 심판 날에 당신 앞에 서게 되면,
그들이 우리의 삶을 풍부하게 해준 그 영의 열매를 기억
하시고 용서해 주십시오.25 아무리 거룩한 사람이라도 아들 장례식에서 아들을 죽인 사람들을 용서하다니 정말 놀라운 일이다. 그리고 그들이 구원되기를 희망하다니 더욱 놀랄만한 일이다.

상대의 구원을 바란다는 표현은 진심으로 용서했음을 보여주는 강력한 신호다. 그 외에도 용서했음을 나타내는 여러 다른 신호들이 있을 수 있는데, 용서하려고 애쓰는 동안 이런 신호를 찾아보는 것은 도움이 된다. 때때로 스스로의 행동과 태도를 잘 살펴보면서 용서를 향해 잘 나아가고 있는지 점검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하산 주교의 예에서 보듯이, 진정한 용서는 상대의 궁극적인 구원을 바라는 데서 드러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그가 ‘천국에 가기를’ 원하는가 ‘지옥에 가기를’ 원하는가의 문제다. 삶에 지칠 때면 우리는 천국에 가서 받을 보상을 그려보며 위로와 격려를 받는다. 자연스럽고 적절한 일이다. 그런데 내 삶이 괴로울 때 그 책임이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 있다는 생각이 들면 일종의 자기 위로로, 언젠가 그들이 당할 일을 상상해 보기도 한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겠지만, 아마도 그들은 아니겠지.’ 이런 상상 속에서 우리의 ‘천국’은 독일인들의 표현대로 ‘부끄러운 기쁨’ – schadenfreude: 다른 사람의 고통, 몰락, 불행을 기뻐하는 것 – 으로 채워질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천국의 특징을 빛, 휴식, 행복, 그리고 평화라고 설명한 바 있다. 남의 불행을 고소해하며 바라보는 것은 그 목록에 없다. 과연 나는 용서해야 할 상대의 어떤 최종 운명을 바라는가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한다. 우리가 갈망하는 빛, 휴식, 행복, 그리고 평화를 그들도 누리기 원하는가? 아니면 그들이 그 반대를 견뎌내기 바라는가? 그들이 천국에 가기를 원하나, 아니면 지옥에 가기를 원하나? 만일 후자를 선택한다면, 아직 갈 길이 멀었다는 증거다.

그라나 사실 아무리 나한테 잘못한 사람이라 해도 그 사람이 천국에서 거부당하길 원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옛 속담처럼, “최악의 원수에게도 그것을 바라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한 가지가 완전히 용서했다는 증거가 되지는 않는다. 다음과 같은 질문을 스스로 하면서 얼마만큼 용서했는지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상처 준 상대를 만났을 때 정중하고 예의 바르게 대하는가, 아니면 냉정하게 대하거나 수동적인 공격성을 보이는가? 상대에 대해 험담하거나 나쁜 소문을 퍼뜨리는가? 아니면 흉보고 싶은 마음을 꾹 참거나, 더 나아가 상대에 대해 긍정적인 이야기까지도 할 수 있나? 상대를 위해 기도하는가?

감정 상태도 역시 점검해 보아야 한다. 고통과 분노 때문에 여전히 괴로운가? 내 안의 어딘가에서 아직도 복수를 원하는가? 용서하려고 갖은 노력을 했음에도 여전히 괴로워서 음식이 나 술, 문란한 성생활 등 부정적인 행동으로 괴로움을 잊으려 하지는 않는가? 아니면 어느 정도의 평화를 느끼고 있는가? 모임에서 우연히 상대를 만났을 때 신경이 곤두서거나 흥분하지 않을 수 있는가?
이러한 점검 과정에서 뭔가 감사할 일을 찾았다면 용서했다는 중요한 신호다. 상처를 받던 그 당시에는 하느님이 대체 어디 계시냐, 나한테는 관심도 없으시구나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 힘들던 순간에도 하느님의 손길이 있었음을 느끼며 내가 성장할 수 있도록 그 상황을 허락하신 하느님께 감사하게 되었다. 그리고 고통의 순간이 은총의 순간이며 용서할 수 있는 기회였음을 또한 알게 되었다. 이번 경험으로 나는 더 단단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했다. 나 자신과 다른 사람들, 그리고 하느님에 대해서 좀 더 알게 되었다. 또한 더 온전히 하느님께 의탁하는 법을 배웠다. 나는 사랑으로 미움에 응답했고 그리스도를 증거했다.

바흐람의 장례식 기도에서 하산 주교는 하느님께 많은 것을 감사 드렸다. 먼저 예수님의 고통을 따를 수 있는 기회를 주심에 감사했다. 또한 엄청난 시련이 ‘우리 안의 모든 이기심과 소유욕을 태워 없애버린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바흐람의 끔찍한 죽음을 통해 ‘하느님 사랑을 믿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음에 감사했다.26

예수님은 다른 사람에게서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다.’ [히브 5,8] 우리도 고난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그리고 그 사실에 감사하게 됐다는 것은 그 고난을 준 사람을 용서했다는 확실한 표시다. 우리는 용서를 통해 기쁨뿐 아니라 고통에 대해서도 하느님께 감사할 줄 아는 사람으로 성장하게 된다.

스코틀랜드 시인 조지 매시선 George Matheson, 1842-1906 은 이를 잘 표현했다.

 

하느님, 저는 저의 가시관에 대해서
당신께 감사드린 적이 없습니다.
제 장미에 대해서는 천 번 감사드리면서도
가시관에 대해서는 한 번도 감사드린 적이 없습니다.
제 십자가에 대한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세상을
기대하기만 했지
제 십자가가 현재의 영광이라는 것은
결코 생각해 보지 못했습니다.
………..
십자가의 영광을 가르쳐 주십시오.
제 가시관의 가치를 가르쳐 주십시오.
고통의 길을 따라 당신께 올라가고 있음을 알려주십시오.
제 눈물이 무지개를 만들고 있음을 알려주십시오.

 

 

 

용서하느냐 못 하느냐에 따라 미래의 우리 모습이 변한다.

24장
선택은 우리 몫

 

우리는 어두워진 성당 안에 서있었다. 주일미사가 끝나고 신자들이 모두 돌아간 성당은 전등불이 모두 꺼진 채 촛불만 부드럽게 빛나고 있었다. 성 요셉상 아래에 붉은 촛불, 성모님의 작은 제단에 푸른 촛불. 모두 신자들이 간절히 기도드리며 밝혀놓은 촛불들이었다. 주임신부님과 나는 침묵 중에 그 촛불들을 바라보면서 가만히 서있었다. 한참 지난 후, 주임신부님이 나에게 돌아서며 말했다. “저 촛불 하나하나에는 모두 상처받은 마음이 담겨있지요.” 정말 그렇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어떤 초는 주님의 은총에 감사하며 추수감사절 때 밝혀놓은 것이겠지만, 대부분은 도와달라는 울부짖음을 담고 있으리라.

우리 인생은 하느님에게서 받은 참으로 좋은 선물이다. 그러나 인생을 좋은 선물로 보기 어려울 때가 종종 있다. 죽음이나 세금처럼 고통은 피할 수가 없다. 그것은 그저 인간 조건의 일부분이다. 우리 타락한 인간은 서로가 서로에게, 그리고 스스로에게 상처를 입힌다. 누구는 좀 더 많이, 누구는 좀 더 적게, 그러나 우리 모두는 상처를 주고받는다. 그렇기 때문에 오래된 가톨릭 기도인 ‘성모 찬송 Salve Regina’에서, 이 세상을 통과하는 우리의 여정을 ‘슬픔의 골짜기’를 통과하는 것으로 묘사했으리라.

이렇게 눈물로 얼룩진 세상에, 특히 사랑이 가장 부족한 곳에서 사랑을 더하라고 예수님은 그리스도인인 우리를 초대하신다. 우리는 어둠의 한가운데서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모두 이 세상이 더욱 사랑이 넘치는 곳이 되기를 바란다. 이 세상을 그렇게 만드는 것은 우리 손에 달려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이 가르친 것처럼, “사랑이 없는 곳에 사랑을 심어라! 그러면 사랑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실천해야 할 사랑에는 용서가 포함된다. 용서는 다른 사람에게 주는 축복일 뿐 아니라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사랑의 몸짓이며, 우리 자신의 건강과 행복과 거룩함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사랑이 그런 것처럼 진정한 용서는 공평함과 상관없는 일이다. 공평함은 엄격한 정의를 요구한다. 그러나 용서함과 동시에 정의는 자비로 부드러워지며 은총으로 새 생명을 얻는다. “정의는 받을 만한 것을 받는 것이다. 자비는 받을 만한 것을 받지 않는 것이다. 은총은 받을 자격이 없는 것을 받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용서받는 데에는 자격이 필요하지 않다. 그것은 무상의 선물이다. 용서는 얻어내는 것이 아니다. 마더 데레사의 콜카타 어린이집 벽에는 이런 글이 적혀있다. “사람들은 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이며 자기중심적이다. 그래도 어쨌든 그들을 용서하라. 마지막 심판 때 용서는 당신과 하느님 사이의 일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테니. 그것은 결코 당신과 그들 사이의 일이 아니었다!”

용서하라고 우리를 초대하시는 하느님은 우리에게 용서를 너그럽게 쏟아부어 주신다. 고대 이집트의 사막에서 은둔하던 어느 사막 교부의 이야기가 이를 잘 표현해 주고 있다.

미오스 아빠스가 어느 날 젊은 군인에게서 하느님은 죄인을 용서해 주시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군인에게 상세하게 가르침을 준 후, 이번엔 아빠스가 물었다. “젊은이, 자네 망토가 해지면 버릴 거요?” “오, 아니요!” 군인이 대답했다. “기워서 다시 입을 겁니다.” 아빠스가 말했다. “젊은이도 자신의 망토를 그렇게 아끼는데, 하느님께서 당신의 창조물에게 자비를 보여주지 않으실 것 같소?”27

그 군인이 해진 망토를 깁는 것처럼,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고쳐주신다. 그분은 우리의 상처를 치유해 주시고 죄를 용서해 주시고, 그러고 나서 다른 사람을 치유하고 용서해 주라고 우리를 파견하신다. 그 말씀을 듣지 않으면 우리는 분노에 갇혀 괴로운 신세가 되기 쉽다. 심리학자 M. 스콧 펙 M. Scott Peck은 이런 상황을,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은 모노폴리 게임에 비교했다. 출발점을 지나면서 200달러를 받게 되면 싫든 좋든 게임은 계속된다. 게임을 끝내려면 굳게 마음먹고 이렇게 말해야 한다. “이제 더 하고 싶지 않아! 그만 할래!” 분노 게임을 멈추는 것이 바로 용서다.28

용서는 힘들다. 우리의 타락한 본성과 반대되는 일이기도 하거니와 겸손과 용기와 인내가 필요할 뿐 아니라 위험부담까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용서를 안 하려고 하면 그것은 세상에 슬픔을 보태는 일밖에 더 되겠는가. 세상에 슬픔은 이미 충분하다. 나에게 피해를 준 상대를 악마로 묘사하며(상대 처지에선 억울한 일이다), 용서라는 하느님의 선물을 우리 스스로 거부하는 것(어리석은 일이기도 하다)은 정말 슬픈 일이다.

용서를 하지 못하고 있던 영국 시인 로저먼드 허클로츠Rosamond Herklots 는 조카의 집 정원에서 잡초를 뽑다가 문득 깨달음을 얻었다. 잡초가 정원의 생명을 숨 막히게 하듯이 고통과 분노가 자신의 삶을 숨 막히게 한다는 사실이었다.29 그녀는 바로 시를 썼고 그 시는 인기 있는 성가가 되었다.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주님, 당신은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지요.
하지만 당신의 은총이 있어야만
저희는 그 기대대로 살 수 있어요.
어떻게 해야 당신의 용서와 축복이
고통에 갇혀 먼 옛날의 쓰라림마저 떠나보내지 못하는,
용서하지 못하는 이 마음에까지 올 수 있을까요?
당신의 십자가의 신비가 드러날 때
저희가 희미하게 알고 있는 진실이 밝혀집니다.
남들이 저희에게 진 빚이 그토록 사소한 데 반해
저희가 당신께 진 빚은 얼마나 큰지요!
주님, 저희 영혼의 심연을 깨끗이 씻어주시고
원한을 멈춰주소서.
저희 모두를 사랑의 끝으로 이어주시어
저희의 삶이 당신의 평화를 퍼뜨리게 하소서.30

 

죽어도 용서하기 싫을 때가 있다. 그러면 용서할 필요가 없다고 어떻게 해서든 스스로를 세뇌시키려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견일 뿐이다. 영원한 행복을 함께 나누기 바라시는 예수님은 멀리 내다보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깊이 생각해 봐야 한다. 삶을 마감하고 영원으로 건너갈 때 어떤 사람이 되어있기를 바라는가? 고통받고 분노한 사람이고 싶은가? 아니면 평화롭고 용서할 줄 아는 사람이고 싶은가? 더 좋은 방법도 있다. 용서해야 하는 상황이 왔을 때,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의 방법을 받아들여 우리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볼 수 있다. 삶의 끝에서 주님을 마주하게 됐을 때, 지금 내가 어떤 선택을 했기를 바라겠는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으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결심은 하나밖에 없다. 용서하려는 결심.

상처를 받으면 어둠 속에 갇혀있는 것 같다. 이럴 때 우리는 하느님께 도와달라고 울부짖으며 성당에 촛불을 밝힐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밝힐 수 있는 또 다른 촛불이 있다. “어두움을 탓하기보다 촛불 하나를 밝히는 편이 낫다”는 중국 속담이 있다. 좋은 충고다. 당신 안의 어두움을 탓하지 말고, 용서로 빛을 밝혀 그 어두움을 흩어버리기 바란다. 당신을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하느님을 위해서.

 

 

 

 

부록
용서의 10단계

 

용서는 여행이라고 말할 수 있다. 상처받은 경험을 출발점으로 해서 용서를 완성하는 목적지까지 가는 여행이다. 이 여행을 이제 막 떠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동반자가 필요하다. 여행 중에 도움도 필요할 것이다. 아래 제시한 10가지 단계가 용서 여행을 떠나는 여러분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여행을 잘 마치려면 한 걸음씩 차근차근 가야 한다.

 

 

1단계: 하느님께로 향하라

용서란 여행은 하느님을 향하여 방향을 돌리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분을 마주할 때마 우리는 자신의 고통과 대면할 수 있다.
하느님은 용서의 여행길에 우리의 동반자가 되길 원하시며, 우리가 혼자 조용히 여행하기를 원치 않으신다. 우리는 그분과 대화를 나눠야 하고, 치유와 인내, 용기와 지혜, 그리고 힘을 주시기를 청해야 한다. 하느님께 무엇을 말하느냐에 따라 여행의 방향이 바뀔 수도 있다. 대화는 아마 “도와주세요”로 시작해서 “감사합니다”로 끝날 것이다.

 

2단계: 갇히지 마라

상처받았을 때 화가 나는 것은 죄가 아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화낼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 그러나 그 화를 어떻게 다루느냐 하는 것은 용서라는 여행을 성공하게도 망치게도 할 수 있는 중요한 문제다.
화를 제대로 풀지 못해 억울함이나 원한으로 굳어지고, 그 때문에 복수할 방법을 찾게 된다면 화에 갇혔다고 말할 수 있다. 반면 화를 잘 다루면 발전적으로 나아가 불의에 맞설 수도 있고, 자신을 방어하거나 상처 준 상대에게 도전할 수도 있다. 분노와 사랑은 손잡고 함께 갈 수도 있는 것이다.
만약 하느님께 화가 난다면 하느님께 말씀드려라. 분노는 부족한 믿음과 신뢰를 드러내는 것일 수 있지만 하느님은 언제나 우리가 있는 그 자리에서 우리를 만나주신다. 그분은 혼자 급히 앞서 가시면서 따라오라고 재촉하지 않으신다. 하느님은 이 여행 중에 항상 우리 옆에 계신다. 갈 길이 아무리 멀다 하더라도 말이다.

 

3단계: 좁은 길을 택하라

용서는 감상이 아니다. 결심이다. 상처받으면 우리는 분노나 슬픔, 좌절, 혼란,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의 느낌이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용서를 선택하고 복수를 피하며 사랑할 수 있다.
용서의 여행길에서 우리는 갈림길을 만나게 될 것이다. 원한과 복수의 길, 용서와 평화의 길. 이 갈림길에서 우리는 어느 길이나 선택할 수 있다. 용서의 길이 아마도 더 좁고 힘든 길일 것이다. 그러나 그 길만이 궁극적으로 우리가 있고 싶은 곳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는 길이다.

 

4단계: 위험을 피하라

용서하려면 분명 험난한 길을 가야 한다. 그러나 불필요한 고난이나 명백한 위험을 알면서도 가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만일 폭력이나 심각한 학대의 피해자라면 도망가야 한다. 필요하다면 더 빨리 뛰어 도망가야 한다. 예수님도 여러 분 위험을 피하셨다.
예수님은 물론 고난받으셨다. 그러나 그것은 하느님의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서 필요할 때만 당하신 고난이다. 십자가를 지신 것은 그 중 일부였다. 우리도 십자가를 질 것이다. 그러나 모든 고통은 우리가 져야 할, 예수님이 바라시는 십자가는 아니다. 어떤 고통은 피해야 한다.

 

5단계: 성사생활을 하라

길고도 험난한 여행길에서 힘을 얻으려면 영양섭취도 필요하고, 여행 중 지치고 다치면 치료도 필요하다. 용서라는 여행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 두 가지 모두를 주신다. 고해성사를 통해 그분은 우리를 용서하시고 죄로 말미암은 상처를 치유해 주신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받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나눠줄 수 있게 된다. 그분은 또한 성체성사로 당신의 몸과 피를 주시며 우리를 먹여주신다. 그분은 우리에게 필요한 은총을 주시고, 사랑하고 용서하도록 평화와 함께 우리를 파견하신다.

 

6단계: 길을 물어라

용서라는 여행을 우리가 처음 떠나는 건 아니다. 우리보다 먼저 가본 사람들이 있어 그들이 우리를 도와줄 수 있다. 우리는 그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봐야 한다. 그 사람은 지혜롭고 믿을만한 친구, 교회의 형제자매, 성직자, 또는 전문 상담가일 수 있다. 하느님은 우리가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아신다. 그분은 우리가 제대로 길을 갈 수 있도록 누군가를 보내주실 것이다. 그들은 우리와 나란히 걷기도 하고 뒤에서 밀어주거나 앞에서 끌어주기도 할 것이다.

 

7단계: 짐을 가볍게 하라

예수님은 처음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 아무것도 지니지 말고 가라고 하셨다. 용서 여행에서 우리도 그렇게 가볍게 가야 한다. 그러려면 짐을 줄여야 한다. 하느님의 용서를 구함으로써 죄책감을 내려놓고, 우리가 용서하려는 사람에게 갖은 비합리적인 기대를 벗어버려야 한다.

 

8단계: 뒤돌아보라

용서를 향한 여행을 하면서 상처받은 때를 돌아보며 무슨 일이 있었는지 평가해 보는 것은 도움이 된다. 어느 면에서 내게 책임이 있었나. 상황이 그렇게 되도록 내가 뭔가를 했나, 아니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나. 내게 상처 준 상대는 어떤 사람인가. 상대의 인생 여정은 어떠했나. 무슨 이유로 그런 사람이 되었나, 아니면 그런 행동을 했나. 상대의 상처를 이해하면 용서하는 데 도움이 된다.

 

9단계: 되돌아가지 마라

용서는 단거리 경주가 아니다. 마라톤이다. 길고도 어려운 여행이므로 빨리 목적지에 도착하고자 욕심을 낼 일도 아니다. 때때로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겨우 한 걸음 앞으로 나갔나 싶으면 다시 두 걸음 뒤로 물러선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한 발짝씩 앞으로 나가야 한다. 예수님을 생각해 보라. 그분은 십자가 지실 것을, 십자가에 못 박히실 것을 알면서도 예루살렘에 가셨다. 그러나 그분은 그 여행이 부활로 끝나리라는 사실도 아셨다. 우리의 여행 끝에도 희망이 있다.

 

10단계: 여행의 끝

우리 여행의 목적지는 용서다. 그런데 목적지에 도착했는지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목적지에 가까이 가게 되면 우리의 생각과 행동, 그리고 느낌이 알려줄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인생이 끝날 때까지 우리의 용서 여행은 끝나지 않을지 모른다. 마지막 날을 상상해 보자.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의 얼굴을 마주했을 때 어떤 사람이 되어있고 싶은지 생각해 보자.
마지막 날이 올 때까지 우리는 자신의 마지막 모습을 희망하며 우리에게 상처 준 사람의 마지막도 우리와 같기를 희망해야 한다. 그것이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이니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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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산 주교가 세상을 떠났을 때 한 신문은 부고란에 “부드럽고 자비로운 영혼을 가지 하산 주교는 사람을 악하게 보는 능력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라고 썼다.[27. “The Rt. Rev. Hassan Dehqani-Tafti”, The Daily Telegraph, May 1, 2008, Obitua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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