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안셀름 그륀

* 1945년 독일에서 출생

* 독일 뮌스터슈바르짝흐 베네딕토 수도회 사제

* 형재 성직자, 수도자들을 위한 피정지도 및 수도회에서 운영하는 출판사 책임을 맡고 있음.

* 저서로는 <아래로부터의 영성> 등 많은 작품이 있음.

 

 

 

역자: 전헌호

* 1955년 5월 5일 출생하여 서울가톨릭대학교를 졸업하고 오스트리아의 빈 대학교에 유학하여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유학 중이던 1985년 7월 5일에 서품을 받았다.

* 현재는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 번역서로는 <교의와 교의신학> <넉넉함 가운데서의 삶> <코모 호숫가에서 보내 편지> <다시 찾은 기쁨> <불완전한 인간과 힘> 등이 있고,

* 저서로는 <인간에의 연민> <온 사랑으로>(공저) <천사와 악마는 어느 곳에?> (공저) <자연환경, 인간환경> <거룩한 갈망> 등이 있다.

 

 

 

 

 

차례

머리말

너 자신과 화해하라

– 마음의 평안으로 나아가는 길

행복이 찾아오면

– 그 경이에 관심을 갖자

놓아 주어라 – 행복으로 나아가는 왕도

– 너 자신을 잊고 자유로워져라

행복과 불행 – 우리 손에 달려 있다

–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방법

행복은 퍼져 간다

– 사랑을 주고, 사랑을 받고

욕심 내어 서두르지 마라 – 그냥 살아라

– 긴장을 풀고 고요하고 편안하게 쉬라

원전

 

 

머리말

<행복한 한스>라는 동화에는 위를 당혹하게 하는 어떤 점이 있다. 이 야기에서 한스는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것을 잃는 불행을 당한다. 그런데도 그는 끝내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라 행복한 사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간다. 이 이야기가 지닌 지혜는 어린이뿐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해당된다. 소유한 재산의 양과 행복의 크기가 결코 일정한 비례를 이루지 않는다. 은행에 돈이 쌓여 있어도 영혼은 텅 비어 있을 수 있다. 외부의 환경만큼 변화무쌍한 것도 없다.

여기서 남는 문제는 이러한 것들이다. 어떻게 하면 행복을 성취할 수 있을까?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행복할 수 있는 조건은 어디에 있을까? 외적 요소와 내적 요소는 어떻게 서로 연관되어 있을까?

이 책에서 소개하는 글들에 ‘행복’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하지는 않는다. 행복에 대한 아무런 보장도 없다. 빨리 행복할 수 있는 비방도 없다. 그러나 수많은 생각들에 공통으로 들어 있으며 확실하고 신비한 것은 다음과 같은 확신이다.

곧 불행하게 살기 위해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기 자신이나 주변세계를 두려워하고 고통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은 없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삶에서 즐거움과 기쁨을 누리도록, 내적 자유를 누리도록 정해진 존재이다.

우리 모두는 행복하기를 원한다. 그것도 지금 바로, 그리고 영원히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이를 꿈꾸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어찌하여 그렇게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불행한 삶을 호소하고 있는가? 사람들은 행복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자신의 시간을 몽땅 바친다. 행복을 가져오리라 생각되는 목표들을 향해 질주한다. 모든 사람을 정의롭게 대하려 하고, 일을 완벽하게 처리해 나가려 한다. 이를 악물고 있는 힘을 다한다. 다가올 수 있는 위험들을 방어할 준비를 철저히 하고, 삶이 가져다 주는 모든 것에 열린 자세를 취한다.

안셀름 그륀 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이렇게 열을 올리면, 불행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을까? 우리가 완전히 불타 버리고 만 것처럼 느낄 때, 그러면 그 내면의 불은 어디에 있는 걸까? 이 땅에 만연하고 있는 무료함의 원인은 무엇일까? 우리가 삶과의 투쟁에 고달파할 때, 우리가 어깨에 짊어지고 가야 하는, 그 긴 그림자를 남기는 무거운 보따리 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

안셀름 그륀의 글들은 자주 우리가 스스로 만드는 내면의 장벽들과 장애들에 대해 다룬다. 그의 글들은 우리가 실제로 가지는 느낌과 생각을 있는 그대로 인지하기를 권한다. 행복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자신이 가진 한계를 인식해야 하고, 동시에 자신의 고유한 꿈과 동경을 알아야 한다.

행복은 고요한 새와도 같다. 꿈을 꾸거나 잠을 청하는 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듯이 사람이 오라고 부른다 해서 이 새가 선뜻 다가오지는 않는다. 조용히 손을 내밀고 있으면 이 새가 다가와 그 위에 앉는 경우는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손으로 움켜잡으려 하면 새는 도망치고 만다. 행복을 붙잡으려는 의도를 가지고 행하는 모든 노력은 허사가 되고 만다. 행복은 사람이 목표를 정해 놓고 노력하여 성취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행복은 하나의 놀라움으로 다가오는 것이고, 어떤 것에 덤으로 따라오는 것이다.

행복은 가슴속에 품어 안을 수 있는 부드러운 선물이다. 그러기에 다음 사항들은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사실이다.

자기 자신을 부드럽게 대하는 사람이 행복할 수 있고, 자신에게 자비로운 사람이 행복할 수 있다. 사랑하고 사랑 받는 사람이 행복하고, 사랑에 열린 자세를 갖는 사람이 행복하다. 많은 것을 가지려는 것보다 나누어 주는 것이 생기 있게 한다.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주는 것을 감사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부유해진다. 행복은 하나의 선물이다.

행복은 얻기 위해 큰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데도 어느 날 갑자기 다가온다. 그러나 전적으로 우연히 다가오지는 않는다. 다행하게도 행복을 얻기 위해 무엇인가 할 수 있는 것이 있다. 때로는 눈을 비비는 정도의 작은 수고를 하기만 해도 행복이 눈앞에 와 있는 경우가 있다. 또는 외부세계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검은 안경을 벗어 놓기만 해도 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다름과 같은 점도 사실이다.

자신의 고유한 삶이 지닌 신비를 존중하고 섬세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 예기치 않는 방문객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하고, 행복이 들어올 문을 잠기지 말아야 한다.

다름과 같은 사실은 상당히 역설적이다. 내면의 평화는 우리가 온 세상을 정복해야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자신을 사랑하면 우리는 사랑스런 존재가 된다. 우리가 어떤 빛을 발하면 다른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도 있다. 마음을 당아 건 사람은 행복을 쫓아 버리게 된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곧, 어떤 것도 완전히 절대적으로 움켜쥐려 하지 말자. 물건도, 느낌도, 재산도, 판단도, 그 어떤 것도 움켜쥐고 고정시키지 말자. 또한 우리 자신에 대한 생각이나 다름 사람들에게 대한 생각도 고정시키지 말자.

모든 일에 언제나 끼어들려고 해서는 아무 데에도 있지 못한다. 현존한다는 것은 그 이상이다 – 그것은 자신의 고유한 삶에 있음을, 오늘 바로 이곳에 있음을, 자기 자신을 향하고 있음을,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개방된 마음으로 있음을 의미하고, 우리가 행복에 대해 꿈 꾸는 이상과 동경이 우리 안에 통하도록 투명하게 존재함을 의미한다.

안셀름 그륀은 “당신 자신의 고유한 삶의 길을 따르라.” 라고 말한다. 나의 고유한 삶의 자취는 나를 일상의 나날들에서 생기 있는 사람의 세계로 인도하고, 현존하고 있다는 기쁨으로 인도하며, 나의 삶을 멋진 축제가 되도록 인도한다. 이러한 것에 대해 미리 기뻐하는 것 자체가 가장 순수한 행복이다.

 

 

 

 

너 자신과 화해하라

    마음의 평안으로 나아가는 길

 

마음의 평안으로 나아가는 길

 

“현실의 나는 되고 싶어하는 이상적인 나를 만나기 위해 애태운다.”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이 말로 우리 모두가 체험하는 문제를 표현하고자 했다. 우리가 현재 되어 있는 실제의 나와 우리가 되고자 하는 이상적인 나 사이에는 흔히 상당한 거리가 있다. 모든 사람이 자신이 설정한 이상적인 인간이 되고자 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이다. 이상은 원칙적으로 매우 긍정적인 것이다. 이상은 우리로 하여금 성숙으로 나아가도록 도전하게 한다. 우리는 우리의 일상생활에 편안히 안주하는 데서 벗어나 성숙으로 나아가기 위해 이상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이상적인 자신을 현실의 자신과 혼돈하여 현재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용기를 갖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현실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 이들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무엇인가를 더 잘 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 주기 전에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거나 사랑 받지 못할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이들은 자신이 설정한 이상으로 빠져든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현재 모습 그대로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 받지 못할 것이라는 원초적인 불신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만약 너희가 나의 실제 모습을 안다면 나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라고 혼잣말을 하거나 ‘만약 다른 사람들이 내 안에 들어 있는 것을 안다면, 내가 어떤 공상들을 하고 있는지를 안다면, 그들은 더 이상 나를 존중하지 않을 것’ 이라고 생각한다.

나를 있는 그대로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 주지 못하는 이러한 원초적 불신에 빠져들지 않기 위해, 이러한 불신으로 고통 받지 않기 위해 겸손한 자세가 요청된다. 자신의 진면목을 바라볼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고, 자신의 어두운 면들을 받아들일 용기가 필요하다. 이러한 일에는 우선 고통이 따른다. 그러나 자신의 현재 모습을 부정하는 것은 행복과 내적 평화로 나아가는 길이 아니다. 자신의 진실을 최대한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마음의 평안으로 나아가는 지름길이다.

 

 

 

자신에게 어떤 것도 강요하지 마라

 

무엇인가 성취하도록 자신에게 강요하여 지나치게 많이 요구하는 것은 행복을 가로막는 요인이 된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이야기는 강요가 사람을 얼마나 불행하게 만드는가를 알려 준다. 그는 어느 길가에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들어다가 자신의 침대에 누여 보고, 그 사람이 침대보다 작을 경우에는 몸을 잡아당겨 침대 길이만큼 늘여 놓고, 침대 길이보다 길 경우에는 긴 만큼 도끼로 잘라 버렸다. 그래서 두 경우 모두 결국 사람을 죽게 만들었다. 이렇게 하여 프로크루스터스의 침대는 하나의 격언이 되고 말았다.

이상을 너무 높게 잡아 놓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자신에게 지나치게 많은 것을 강요하는 경우에도 우리를 지치게 만들고 결국에는 망쳐 놓는다. 이와 반대로 우리 자신을 너무 작게 생각하여 항상 죄의식과 열등의식에 시달리면서 자신을 괴롭히는 경우도 결국에는 자신을 망쳐 놓는다. 이상을 너무 낮게 잡는 것도, 너무 높게 잡는 것도 모두 자신을 망치기는 마찬가지이다.

 

 

 

완전하게 된다는 것의 의미

 

성서는 우리더러 “완전하게 되라.” 고 말한다. 그런데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아들어야 한다. 완벽주의자들이 추구하는 병적인 완벽함을 의미하지 않음이 분명할 것이다. ‘완전하다(vollkommen)’ 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teleos’ 는 본래 온전하게 전체적으로 존재하는 것, 전적으로 어느 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그리고 ‘telos’는 신비를 나타내는 말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본래 “하느님의 신비 안으로 봉헌되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의미에서 완전함이란 단어를 사용하면, 우리는 이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스쳐 지나가고 말 것이다. 라틴어를 사용한 사람들이 이 말을 이미 잘못 이해했었다. 이들은 이 말을 “perfecti estote(완벽하게 되라)” 라고 번역했다. 그러나 완벽하게 되는 것은 “완전하게 되는 것”과는 다른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완전하다’ 라는 말을 이렇게 해설하신다.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서 좋은 사람에게나 나쁜 사람에게나 가리지 않고 햇빛을 주시는 것과 같이 하라.”

예수님은 빛과 어둠, 선함과 악함이라는 양극을 하나로 연결하신다.

 

 

 

잘못이 의미하는 것은

 

우리는 우리의 약점들과 어두운 부분들을 결코 완전히 제거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들을 잘 다루는 방법을 배울 수는 있다. 잘못 자체가 그렇게 크게 나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말실수를 했거나 자신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았거나 어떤 것을 잊어버렸을 때, 이들 자체게 큰 비극은 아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다음과 같이 생각하는 데에서 비극이 생긴다.

“내가 만약 잘못을 범하면, 나는 가치 없는 존재가 될 것이고, 그러면 사람들이 나를 배척할 거야.’

이러한 잘못된 선입관이 이들로 하여금 그 잘못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한다. 그 결과 사람들은 어떤 경우에도 잘못을 범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게 된다. 그러나 그 동안의 경험은 어떤 잘못도 범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그 순간에도 잘못은 발생하고 만다는 것을 알려 준다. 언제나 자신의 삶을 통제 하려는 사람은 자신의 삶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게 되고 만다.

나는 인간이기에 잘못을 범할 수 있고, 잘못을 범한다는 것 자체가 자신이 인간임을 의미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내가 잘못을 범하기도 하고 약점들을 가지고 있기도 하지만, 나는 인간이기에 여전히 받아들여지고 사랑 받을 수 있는 존재이다. 물론 우리가 잘못을 범하고서, ‘그래 이것이 나야. 달리 어떻게 해볼 수는 없었어.’ 라며 손을 놓지 않고, 개선 해 보려 노력하는 것도 인간성에 속하는 중요한 일면이다.

그러나 나의 잘못들과 더불어 나를 있는 그대로 참으로 받아들이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두 번째 단계로 나아가 잘못들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해나갈 수 있게 된다. 여기에 자기수련(Askese) 1 이 필요하다. 내가 스스로 나를 훈련하는 것, 나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어떤 규칙을 지켜나가는 것, 내가 참으로 자유로움을 느끼는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 자기 수련에 해당한다. 물론 자기 수련을 통해서도 우리는 잘못을 하나도 범하지 않는 존재가 될 수는 결코 없다. 우리는 언제나 다시 잘못을 범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내가 인간이지 결코 하느님이 아님을 언제나 다시 새롭게 보여 줄 것이다.

 

 

 

하늘로 올라가는 사다리

 

전통적인 영성은 하늘로 올라가는 사다리라는 표상을 알고 있다. 영성의 길은 위로 올라가도록 인도하는 사다리와 전적으로 비교할 만하다. 그러나 사다리는 또한 땅에 단단히 박혀 있다. 사다리는 우리가 가진 인간성을 받아들일 때에만 위로 인도할 수 있다. 아래로 내려간 사람만이 위로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교의 역설이다. 땅에 뿌리를 박고 있는 자신의 인간성에서 벗어나기 위해 위로 올라가려고 시도하는 사람은 그때마다 언제나 다시 아래로 떨어져 결국 실패하고 만다.

이 문제에 대해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자신을 스스로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고, 지신을 스스로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말 것이다.

에페소서 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먼저 땅이나 자신의 저승을 향해 아래로 내려간 사람만이 하늘로 올라간다.

 

 

 

용기 있는 사람이 새로운 일에 도전한다

 

우리는 사람이 지닌 약점에 대해 관대하게 배려하지 않는 세상에서, 그런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다. 자신의 직장에서 실수 없이 일하도록 노력하는 것은 매우 필요하다.

그러나 어떤 실수도 하지 않으려는 사람은 새로운 것을 결코 이루지 못하는 것을 많은 회사들에서 자주 확인하게 된다. 단 하나의 실수도 하지 않고 완벽하게 일하고자 하는 관리자는 자신의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앉아 겨우 그 자리를 지키기에 급급 한다. 이들은 새로운 것에 대해 두려움을 지니고 있다.

새로운 것을 시도하다 보면 잘못을 저지르기도 한다.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려는 데에 급급하다 보면 사람이 경직되어 옛 것을 반복하기만 한다. 누군가가 자기의 잘못을 들추어낼까 봐 두려운 마음에서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데에만 신경을 쓴다.

나는 이런 사람은 용기와 믿음이 부족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자세는 사람을 소심하게 만들고, 결국 불행하게 만든다.

 

 

 

한계를 받아들여라

 

완벽해지고자 하는 모든 종류의 강박관념들은 전지전능한 존재가 되려는 환상과 연계되어 있다. 사람은 누구나 아무런 능력이 벗은 어린 시절을 거친다.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어린이는 이러한 상황에서 어서 빨리 벗어나고 싶어한다.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 중 하나가 자신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환상 속으로, 곧 ‘나는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행할 수 있을 만큼 막강한 사람’ 이라는 환상 속으로 빠져 드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에는 최종적으로 하느님처럼 되고자 하는, 어떠한 잘못도 하지 않는 완벽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기를 바라는 원죄가 들어 있다. 여기에는 사람을 삶으로 인도하지 못하고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소외시켜 종국에는 낙원에서 추방해 버리는 하나의 유혹이 들어 있다.

완벽해지려는 강박관념이 나를 내적으로 자유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인간성과 무능을 인정하는 것이 나를 자유롭게 하고,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바를 하도록 만든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 능력과 할 수 없는 무능 사이에 적절한 긴장과 균형을 언제나 유지해 나가는 것이 관건이다. 이 둘은 우리 안에 언제나 함께 있다. 인간은 무능하고 남의 도움에 의지해야 하는 존재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을 할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무엇을 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은 긍정적인 것이다. 무엇을 할 수 있는 것, 무엇을 계획하고 성취할 수 있는 것, 삶을 나름대로 계획하여 꾸려나갈 수 있는 것들은 우리가 가진 긍정적인 능력들이다.

우리가 주의해야 하는 것은 그러한 일을 하는 가운데서도 언제나 우리 자신이 가진 한계를 인식하는 것이다. 나는 내가 하고자 하는 모든 것을 할 수는 없다. 내가 가진 능력,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섬세하게 감지해야 한다. 물론 나의 한계에 도달하기까지 나아가 볼 수 있다. 바로 그러한 체험을 통해서도 내가 한계를 가진 존재란 것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성을 인정할 용기

 

현재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은 틀림없이 내가 해야 할 일 중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다. 이 일을 하기 위해서 겸손해야 하고, 겸손은 다음과 같은 것들을 필요로 한다. 나의 영혼의 가장 밑바닥으로, 어둠 속으로 내려가야 하고, 나의 공격성, 폭력적인 성향, 가학적이고 자학적인 욕구들을 인정해야 한다. 자기 자신에 대해 솔직한 사람은 자신 안에 이러한 것들이 들어 있음을 느낀다.

겸손은 내가 밑바닥으로, 나의 무기력으로 내려갈 것을 요청한다. 이것은 분명 가장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겸손은 바로 이것을 행하기를, 인간성 안으로 내려가기를 요청한다. 불행하게도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 과정을 건너뛰려 한다.

미국에서 사는 영성가들 중에는 영적 우회로, 영적 지름길에 대해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렇게 말하고 그렇게 행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름다운 종교적 생각, 느낌, 이상 등으로 무장하려 무진장 노력하지만, 자신의 인간성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만다.

 

 

 

다른 사람들의 기대

 

많은 사람들이 주변 사람들의 판단과 척도에 매여 있다. 오늘날 어떻게 하면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더 이상 관심이 없고, 어떻게 하면 좋은 동료들을 만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온통 관심의 대상이 되어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기대를 어떻게 채울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모든 사람으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을까 하는 데에 골몰한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거나 참된 인간이 되게 하거나 품위를 가지게 하지 못한다. 오히려 그 반대로 작용한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 사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들이 우리로부터 기대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는 데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만다. 그러면 우리는 온 삶을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데에만 초점을 맞추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품위를 해치는 것이다.

 

 

 

아직 용서받지 못한 잘못

 

우리는 조금의 잘못도 하지 않는 완벽한 삶에 대해 꿈꾸고 마치 자신이 그러한 존재이기라도 한 듯이 밖으로 내세우지만, 실제로 단 하나의 오점이 없이 윤리적으로 완벽히 사는 사람은 없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를 매우 슬프게 하지만, 다음과 같은 그리스도교 복음이 우리를 위로한다.

예수님은 저승으로, 지옥세계로, 내 안에 존재하는 지옥으로 내려오셨다. 그분은 모든 죽은 이들, 썩어 가는 이들, 압박 받는 이들을 다정하게 대하시고, 새로운 생명의 길로 인도하신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대로 존재해도 좋다는 믿음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기를 두려워한다. 그렇게 하면 자신이 지금까지 만들어온 삶의 장이 모두 무너지고 말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자신의 진면목을 들여다보는 것이 무엇 때문에 그렇게 두려운가를 물어 보면, 그들은 그렇게 하면 자기는 더 이상 붙들고 의지할 곳을 잃게 될 것이라고 대답한다. 또는 자기는 좋지 않은 사람이기에 자기를 파괴하고 말 무엇인가를, 변명의 여지도 없는 무엇인가를 발견하게 될 것이고, 그러면 자기를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을 것이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여기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내가 이 모든 것을 혼자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과, 그래서 내가 반드시 무엇을 성취해야만 가치를 가질 수 있다는 강박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언제나 하느님의 부드러운 눈길 아래에서 행할 수 있다. 나는 하느님 앞에서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존재해도 좋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그 자체로 나쁜 것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내 안에 있는 어떤 것도 나를 나쁘게 만들지 않는다. 모든 것은 변화될 수 있다 – 아직 용서받지 못한 나의 잘못마저도.

 

 

 

사람은 저마다 특별하다

 

많은 사람들이 특별하게 두드러지고자 한다. 그리고 사람마다 당연히 유일무이한 존재이기도 하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남보다 유별나게 큰 권력이나 재물의 소유를 통해서 특별한 존재가 되고자 한다. 그런데 먼저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내가 그 동안 살아온 삶의 여정은 어떠하고, 그 동안 받은 상처들은 어떠하며, 나의 감수성은 어떠한가?

나의 강점만이 아니라 나의 상처, 잘못들, 약점들을 포함하여 내 안의 모든 것이 나를 구성하고 있다. 내가 이 모든 것과 더불어 이 세상에 단 한 번만 존재하는 유일무이한 존재란 사실을 인식하여 그 모든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나는 하느님의 한 모습을 유일무이하게 드러내는 존재가 된다. 내가 특별하게 두드러지고자 하여 나의 인간성을 뛰어넘는 위대한 일을 성취하려고만 한다면, 나는 언제나 실패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 것이다.

 

 

 

오직 사랑만이

 

만약 우리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자신에 대해 알지 못한다. 오직 사랑만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 안으로 깊이 들어가게 하고, 우리의 참된 모습이 무엇인가를 알게 한다.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의 주위를 맴돌기만 하는 것과는 다르다.

 

 

 

용서의 체험

 

완벽주의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해주고 싶다.

“죄가 부정적인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성벽처럼 나를 둘러싸서 가두고 마는, 내 스스로 쌓아 올린 삶에 대한 좁은 소견들을 깨부수는 데에 한 몫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나 스스로 설정해 놓은 한계를 극복하고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데에 한몫을 한다.”

예수님이 죄인들에게 다가가신 것은 공연히 그러신 것이 아니다. 완벽주의자가 모든 것에 대해 방어망을 쳐서 종국에는 하느님마저 자신에게 다가오시지 못하게 하는 동안에 죄인들은 자신이 하느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느낀다. 물론 우리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언제나 다시 잘못에 빠져든다. 그러나 죄는 나로 하여금 먼저 나의 인간성을 인정하게 하고, 하느님께로 향하게 하며, 용서를 체험하게 한다. 나는 내가 나의 죄와 더불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짐을, 나의 죄로 말미암아 망가지지 않음을, 나의 과거에 붙들려 지배당하지 않음을 체험한다.

다음과 같은 내용은 그리스도교 복음의 핵심이다. 곧 우리는 언제나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완전히 실패하거나 망가지지 않는다. 우리의 삶은 언제나 다시 새로워지고 온전해질 수 있다.

 

 

 

완벽주의로부터의 탈출

 

평정, 자유, 자신의 가치에 대한 느낌, 행복 – 이러한 요소들은 완벽주의 뒤에 숨어 있는 두려움, 자신의 무가치에 대한 깊은 두려움과 공존할 수 없다. 내가 완벽하고자 하는 본질적인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아야 비로소 나를 가치 있는 존재로 느끼게 되는가? 그 뒤에는 내가 무엇을 성취해야만, 내가 한 점의 오점도 없어야만 비로소 가치 있는 존재일 것이라는 두려움이 숨어 있지나 않은가?

완벽주의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 하나 있다. 완벽주의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선 두 걸음만 내디디면 된다.

자유를 얻기 위한 첫 번째 걸음은 이 두려움의 정체를 자세히 관찰하는 것이다. 두려움의 정체 전체를 두루 살펴보고 나면, 나는 내가 있는 그대로 가치 있고,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에 가치 있다는 기쁜 소식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내가 완벽할 때에만 가치 있는 것이 아니다.

두 번째 걸음은 잘못을 하나 범하면 그것이 왜 그렇게 나에게 큰 문제가 되는가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는 것이다.

그 저변에 깔린 근본적인 두려움은 무엇인가? 그 잘못이 그다지도 나쁜 것이기 때문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되면 돌아올 비난의 화살이 두렵기 때문인가? 내가 나에 대한 어떤 이상적인 표상을 가지고 있어서, 그것이 부서지면 살아갈 수 없어서인가? 내가 만약 어떤 잘못을 인정하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그러면 내가 그 동안 가지고 있던 여러 종류의 환상들을 버려야 하겠지만, 이것이 바로 내적 자유를 얻는 길일 것이다.

내가 한 점의 오점도 없이 완벽하게 존재하고자 하는 의지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동경은 무엇일까? 더 나아가 내가 어떤 잘못을 범하면 그것이 그렇게도 나쁜 것일까? 그러면 무엇이 부서지고 마는가? 그것은 한낱 환상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지나치게 거는 기대는 아닐까? 그렇다면 내가 그러한 기대들을 반드시 충족시켜야만 하는 것일까?

 

 

 

위인들도 사람이었다

 

성서가 전하는 구세사에서 큰 역할을 한 위인들도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커다란 위안을 주는 복음이다. 만약 우리가 바오로나 베드로 또는 모세나 다윗이 살아간 삶을 뒤따르길 원한다면, 어떤 경우에도 완벽할 필요가 없다. 이러한 큰 위인들의 모범을 따라 산다는 것은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처함 상황에서 우리의 잘못들과 약점들, 그리고 물론 우리가 가진 능력들과 더불어 하느님께서 내가 하길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나를 이 세상에 보내신 원초적인 목적이 무엇인가에 대해 그때마다 언제나 새롭게 물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하느님 앞에 나의 잘못들조차 있는 그대로 다 열어 보여 드려야 한다. 나는 잘못을 저지르기도 하는 완전하지 않은 존재이기에 다른 사람의 불완전한 처지를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고, 단순히 다른 사람 위세 서지 않으려 하기보다는 그의 잘못도 용서하는 자비로운 태도를 취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알려 주는 존재가 된다. 완벽한 사람은 잘한 것과 잘못한 것을 낱낱이 기록하고 셈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표상, 성취하시는 하느님, 완벽한 하느님을 선포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일어서서 좀더 진보할 것을 요구하시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우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시는 자비로운 하느님을 선포하신다.

 

 

 

자신을 너무 큰 존재로 여기지 마라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데는 크고 위대한 무엇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의 순수한 미소나 마음 속에 어린이의 순수함을 지닌 사람의 섬세한 유머만 있어도 된다. 자기 자신을 매우 큰 존재로 여기는 사람은 자신을 그 표상에 적합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무진장 수고를 하거나, 그 표상에 적합하지 못한 실제의 자신에 실망하여 자신을 경시하고 무시하게 된다.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현재 되어 있는 그대로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에게 깊은 애정을 가져라

 

내가 자신과 화해한다는 것은 자신과 평화롭게 지내는 것을 의미하고, 현재 되어 있는 이대로의 나를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나를 이리저리 힘들게 하는 욕구들과 바람들 사이에 벌어지는 갈등을 잠재우는 것을 의미하고, 나 자신에 대한 이상적인 표상과 현실의 나 사이에 존재하는 격차 때문에 겪는 갈등을 잠재우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현재 나의 모습을 언제나 다시 거부하려는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내 안에서 나를 힘들게 하는 것들에 입 맞추는 것을 의미하고, 나의 잘못들과 약점들에 입맞추는 것을 의미한다. 나 자신에게 깊은 애정을 가지고 대하는 것을 의미하고, 나에 대한 이상적인 표상에 어긋나는 바로 그것을 부드럽게 대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의 마음을 만나자

 

나는 아픈 사람들과 외로운 사람들에게는 매우 자비롭지만, 자신에게는 무자비한 사람들을 많이 알고 있다. 그런데 자신에 대한 무자비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도움을 왜곡 시키게 된다. 자신을 무자비하게 대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 대해 가지는 사랑에 소유욕이 스며들게 된다. 이러한 사람은 자신이 보여 준 큰 사랑에 감사의 뜻을 표하지 않으면 분노한다. 다른 사람을 마음으로부터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위한 마음을 참으로 가지기 위해서는 먼저 내가 나의 마음과 접촉해야 하고, 내 안에 들어 있는 가난하고 불행한 존재들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나는 다른 사람들을 심판하기보다는 그들의 모든 불행, 분열, 곤궁, 초라함과 더불어 그들을 나의 마음에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면 나의 도움이 그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다. 그보다 오히려 그들이 나의 마음 안에서 안식처를 찾게 된다.

 

 

 

화해하고 이해하라

 

오직 나 자신과 화해하고 있을 때, 나는 비로소 나하고 또는 다른 사람들과 싸움 중에 있는 주변 사람들하고 화해 할 생각을 할 수 있다. 자신의 내면 세계가 분열되고 있고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의 주변에도 분열을 불러일으킨다.

 

 

 

자신을 자비롭게 대하라

 

자기 자신을 자비롭게 대한다는 것은 자신을 깊은 애정으로 대하는 것을 의미하고, 선하게 대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자신에게 화를 내지 않는 것을 의미하고, 자신을 여러 가지 지나친 요구 사항들로 힘들게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내 안에 있는 약점들과 병들고 버려진 것들을 따뜻한 마음으로 감싸 안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자주 우리 자신에 대해 자비롭게 대하지 않는다. 우리는 어떤 잘못을 저질렀을 때, 우리 자신을 심판하고 단죄한다. 어떤 것이 잘못되어 가면, 우리 자신에게 비난의 화살을 던진다.

우리는 우리 안에 무자비한 초자아를 가지고 있다. 이 초자아는 우리의 모든 생각과 느낌을 심판하고, 자신이 요구하는 대로 행하지 못하면 우리에게 벌을 내린다. 우리는 자주 이 무자비한 초자아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시달린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자비로운 아버지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 필요하다. 이 자비로운 아버지는 길을 잃고 헤매다 돌아온 아들을 내치지 않고 오히려 잔치를 베푼다. 이 아들은 길을 잃었다가 다시 되찾았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 돌아온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는 우리 안에 존재하는 심판자를 무력화하고 우리의 마음을 따뜻한 사랑으로 채워 주는 자비의 천사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자신의 감정을 받아들여라

 

많은 남성들은 자신의 감정과 내면의 삶을 살펴보기를 주저한다. 이들은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도피하려 하고, 자신의 힘을 직업이나 가족을 위한 일에 쏟는다. 그러나 자기 자신에 대해 적게 알수록 그만큼 더 자신 안에 들어 있는 알려지지 않은 존재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그럴수록 자녀들이 자신의 거울로서 눈앞에 펼쳐 내놓는 것에 대해 더욱 걱정스럽고 소심한 반응을 보인다.

 

 

 

자신을 결코 무가치하게 여기지 마라

 

겸손한 사람이란 자기 자신을 신뢰하지 못하여 어떤 과제도 수해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존재로 여기는 사람을 의미하지 않는다. 아무 데에나 비굴할 정도로 자신을 굽히고 쓸모 없는 존재로 깎아 내리는 사람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겸손한 사람이란 자신의 진면목을 들여다볼 용기를 가진 사람을 의미하고, 그래서 소박하게 일어서는 사람을 의미한다. 이들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부정적인 것들이 자신 안에도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이들은 아무도 심판하지 않는다. 이들은 자신의 진면목을 바라보고 몸을 땅으로 굽히기 때문에, 실패하고 넘어진 사람들을 일으켜 세울 수 있는 겸손의 천사가 될 수 있다.

 

 

 

자신을 발견하라

 

우리는 우리 자신이 가진 모든 상처를 살펴보고 소화하기까지 기다리고만 있을 필요는 없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을 발견하는 일이다. 예수님과의 만남은 우리가 우리 삶의 역사에서 얽혀 들었던 모든 사건 속에서, 그러한 사건들을 통화하여 결코 다치지 않은 온전한 나 자신을 발견하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다.

우리는 기도 속에서 언제나 다시 내면의 성역으로 물러나서 결코 다치지 않는 나,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입히는 상처가 아무런 힘을 쓸 수 없는 나를 만날 수 있다. 그러면 우리는 본래 만들어진 우리의 원초적인 모습, 결코 왜곡되지 않은 모습을 언제나 다시 만날 수 있는 우리의 고유한 삶의 길을 발견할 수 있다.

 

 

 

쾌활함을 불러일으켜라

 

쾌활한 사람과는 세상종말에 대해 대화할 수가 없다. 또한 이 세상의 상태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을 수도 없다. 쾌활한 사람은 이 세상의 구체적인 상황에 대해 눈을 감지 않는다. 그는 어두운 부분을 억지로 한쪽으로 밀쳐내어 가리지도 않는다. 그는 모든 것을 부정적인 사람이 보는 것과 달리 본다. 그는 최종적으로 성령의 시각으로 어두운 세계를 꿰뚫어보고, 마침내 그 밑바닥에 있는 빛나는 하느님의 보호와 섭리까지 들여다본다.

 

 

 

거룩한 공간

 

신비가들은 우리 각자 안에 고요와 자유의 공간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이 공간은 우리가 지금부터 노력하여 만들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 있는 것이다. 이 공간 안에서 우리는 온전하고 편안하다. 이 공간은 우리의 잘못과 약점들로 인해 손상되지 않으며, 다른 사람들의 판단이나 심판, 기대들에 의해서도 손상되지 않는다. 하느님께서 여기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유식을 취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이 공간에 닿으면 우리의 잘못이 우리에게 어떤 힘도 쓸 수 없고, 그러면 우리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둘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전혀 손상되지 않고 순수한 실제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나는 이 내면의 공간을 언제나 다시 체험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강요할 수는 없다. 내가 어느 피정에서 나를 완전히 내맡기거나 나를 완전히 잊어버리는 경우를 만나면 – 예를 들어 아침에 해가 떠오르는 것을 바라볼 때 – 나는 이 일치에 대해, 온전히 건강함에 대해 감지할 수 있고,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그러면 나는 이 자체로 좋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과 일치하고 자연과 일치하는 이러한 체험을 한다. 나의 삶을 동의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나에게 깊은 영적 체험이 된다.

성서는, 히브리서는 그리스도가 그 안에 계시고, 우리도 바로 지금 들어갈 수 있는 지성소에 대해 말한다. 에크하르트 는 ‘영혼의 불꽃’에 대해 말하고, 성녀 데레사는 ‘영혼의 성에서 가장 깊은 방’을 말한다. 또한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는 ‘내면의 방’에 대해서 말한다. 이들은 우리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표상이다. 물론 이것을 우리는 언제나 오직 한 순간만 체험할 수 있을 뿐이다. 누구도 이 체험을 붙들어 둘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영적으로 깊이 참된 행복을 체험하는 계기들 중 하나이다. 이것은 쾌활함의 가장 깊은 근원이다.

 

 

 

쾌활한 사람 가까이

 

쾌활한 사람은 두려움을 갖지 않는다. 그는 자기 자신 안에 든든히 있다. 그래서 어떤 것도 그를 전복시킬 수 없다. 만약 당신이 이러한 부류의 어느 쾌활한 사람과 대화를 하면, 당신의 내면세계도 명랑해질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당신 자신의 삶과 주변을 다른 눈으로 보게 된다. 쾌활한 사람 가까이에 있는 것이 당신에게 좋은 영향을 미친다. 모든 것을 검은 색안경을 끼고 부정적으로만 보는 사람 곁에 있는 것이 얼마나 불편하고 기운 빠지게 하는 일인가를 당신은 잘 안다. 그는 어디에서나 부정적인 것을 발견해낸다. 쾌활한 사람은 당신을 밝게 하고 일으켜 세운다. 그의 곁에서 당신은 몸과 마음이 가벼워짐을 느낀다. 나는 당신이 많은 수의 쾌활하고 명랑한 천사들을 만나게 되기를 기원한다.

 

 

 

모든 것은 좋은 것

 

쾌활함은 타고나는 성품이 아니다. 쾌활함은 내가 아무 조건도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졌다는 사실과 결국에는 모든 것이 좋은 것이라는 사실을 믿는 믿음에서 생겨난다. 그리고 이것은 자신의 진면목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용기를 통해 생겨난다.

 

 

 

 

 

 

행복이 찾아오면

    그 경이에 관심을 갖자

 

 

행복이 찾아온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착각을 하나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인간이 행복하기 위해 태어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가 한 말이다. 이 말을 통해서도 그가 얼마나 희망이라고는 없는 비관주의자였던가를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말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 직접 애를 쓰면 쓸수록 행복은 더욱 더 멀어진다. 행복은 내가 애를 쓴다고 해서 바로 성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행복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사랑할 때이고, 어떤 것을 성취할 때이며, 나를 감동시키는 어떤 것을 체험할 때이다. 나는 나 자신이 사랑으로 나아가도록 선택할 수 있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이 성취되어 어떤 좋은 결과를 가져오도록 노력할 수 있다. 나는 아름다운 음악에 도취도리 수 있고, 아름다운 풍광이 펼쳐 있는 시골길을 따라 산책을 할 수도 있다. 만약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 예를 들어 음악을 듣는 것, 산책하는 것, 보는 것, 먹는 것 등에 온전히 빠져들면 행복이 나에게 시들 수 있다.

나는 행복을 낚아 챌 수는 없다. 내가 삶을 받아들여 살아갈 때, 뜻하지 않게 갑자기 일어나는 사건들에 마음을 열어 둘 때, 나 자신을 위해 삶을 준비하고 있을 때, 행복이 나를 찾아온다.

 

 

 

사물의 뒷면을 보라

 

우리는 자주 오직 사물의 겉모양만 본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것을 본다. 그러나 그 안에 들어 있는 의미는 알아내지 못한다. 우리는 자연을 바라본다. 그러나 피조물의 아름다움을 통해 창조주를 바라보는 데에는 이르지 못한다.

우리의 생각을 쇄신한다는 것은 우리가 사물의 이면을 바라보는 것을 의미하고, 하느님을 모든 존재 사물의 본질적인 근원으로 이해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와 같이 새롭게 보는 훈련을 해야 한다. 이것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리가 어느 한 사람이나 사물에 대해 판단하기를 중단하면,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인다.

우리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우리는 그의 잘못들과 약점들을 본다. 그리고 그 뒤에 있는 그의 삶의 역사와 하느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그의 본질적인 모습을 본다. 우리는 일상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바라보고, 그 안에 들어 있는 하느님의 섭리를 알아낸다. 우리는 아름다운 전원의 경치를 바라보고, 그 안에서 어디든 불고 싶은 대로 불며 모든 것을 꿰뚫고 파고드는 하느님의 성령을 본다.

 

 

 

 

삶의 기쁨은 이른 아침부터 시작된다

 

삶의 기쁨을 알려 주는 천사는 이른 아침부터 활동한다. 이 천사는 내가 잠자리에서 눈을 뜰 때, 이 날이 가진 신비, 내 앞에 이미 놓여 있는 작은 기쁨들, 창문을 열 때 흘러 들어오는 맑은 곡기, 샤워를 할 때 만나는 나의 육체, 아침 식사를 할 때의 신선하고 맛있는 음식, 오늘 함께 일하게 될 사람들과의 만남에 대해서 눈을 열어 인식하도록 한다. 삶의 기쁨을 알려 주는 천사는 나의 손을 잡고 이끌어 삶 자체는 본래 좋은 것이란 사실을 일깨워 준다. 건강한 것은 아름다운 일이고, 자신의 몸을 움직이는 것도 아름다움 일이다. 가슴을 활짝 열고 시원한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시는 것은 큰 즐거움이다. 삶에서 매일 다가오는 경이로운 일들을 깨어 있는 의식으로 인식하는 것도 기쁜 일이다.

 

 

 

행복한 황소

 

“만약 행복이 육체의 만족에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소가 맛있는 풀을 뜯어먹을 때 행복을 느낀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 말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 가 <행복론>에서 강한 어조로 표현한 말이다. 이 말에는 수긍할 수 없는 면도 있다. 어떤 어린이가 행복할 때, 자신의 행복을 온몸으로 표현한다. 행복은 육체적인 성격도 지니고 있다. 만약 우리의 몸이 편안함을 느낀다면, 그것은 곧 행복을 알려 주는 하나의 징조이다. 헤라클레이토스 는 행복은 육체의 기쁨으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것이 곧 육체를 경시하는 영성 수련의 한 표현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나의 육체와 좋은 관계를 맺고 있고 나의 정신이 몸 안에 살고 있으므로, 또한 나의 육체를 사랑하고 이 육체가 나 자신이므로, 나는 온몸으로 행복을 느낀다. 육체적인 욕구를 만족시키는 것이 나를 행복하게 해주지는 않는다. 그것은 나를 불행하게 만드는 중독으로 나아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신이 육체 안에 살 때에만, 정신이 육체의 감각들로 보고, 듣고, 냄새를 맡고, 맛을 보고, 그리고 만지고 할 때에만, 정신은 온몸으로 행복을 체험하게 된다. 그러나 행복에는 언제나 한계가 따른다. 나는 맛있는 음식을 통해서 행복을 체험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그 맛에 집중할 때에만, 현재 그 순간에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모든 것을 한꺼번에 집어삼키는 사람, 먹을 것을 너무 적게 받지나 않을까 염려하는 사람은 즐거움을 가질 수 없다. 즐거움은 포기와 절제를 전제로 하고, 행복은 자기 수련을 전제로 한다.

 

 

 

삶 – 하나의 축제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들은 우리의 삶을 영원한 축제로 생각했다. 우리는 신적 품위를 지닌 인간이란 사실에 대해 기뻐하고 축제를 지낸다. 우리가 천천히 움직이면, 이 축제에 관한 무엇인가를 체험하게 된다. 우리는 주면 사물들을 서서히 파악하면서 차츰 진보해 나간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누군가와 대화할 시간을 허용한다. 식사할 시간도 허용한다. 우리는 천천히, 의식하면서 먹는다. 그러면 우리는 어느 순간 갑자기 먹고 있는 음식이 얼마나 맛있는 것인가를 인식하게 된다. 우리는 한 조각의 방을 천천히 씹어 먹으면서 그것을 하나의 축제로 삼게 된다.

 

 

 

지금 이 순간을 즐겨라!

 

오랫동안 굶주려온 사람은 음식이 가득 차려져 있어도 배불리 먹을 수 없다.

 

 

 

여름날의 기쁨

 

여름날 아침, 당신이 이슬이 가득 맺힌 풀밭 사이로 산책을 나간다면, 몸과 마음이 가뿐해지고 생기가 돋아남을 느끼게 될 것이다. 맨발로 풀밭 위를 달린다면, 당신의 온몸이 상쾌해질 것이다. 풀잎 끝에 맺힌 이슬은 당신으로 하여금 풀밭을 바라보게 하고, 이슬을 통과한 햇빛의 현란한 놀이에 감탄하게 할 것이다. 이는 누구도 손대지 않은 막고 순결한 어떤 것이다. 당신은 이 신비에 가득 찬 풍경을 쉽게 파괴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그냥 있는 그대로 눈여겨보고 관찰하도록, 그리고 감탄하도록 당신을 초대할 것이다. 여름날 아침은 당신의 영혼을 다시 생기 있고 기쁨에 차도록 해줄 것이다. 그러한 때에 사람들은 “저녁에는 눈물을 흘려도 아침이면 기쁘리라.” (시편 30,5)는 성서구절을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슬은 지난날 가졌던 마음의 걱정거리들을 온전히 씻어내어 우리의 영혼이 새로워지도록 한다.

 

 

 

특별히 새로운 것은 없다고

 

깊은 주의는 성숙과 관련된다. 주의 깊게 자신의 숨결을 인식하는 사람, 자신의 걸음걸이에 깊은 주의를 보내는 사람, 조심스럽게 숟가락을 손에 드는 사람,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온전히 몰두하고 있는 사람은 개어 있는 사람이다. 깊은 주의는 우리로 하여금 사물들, 사람들과 관계를 맺도록 한다. 참선을 하는 어느 스님이 선을 하는 동안 무엇을 하느냐는 질문에 대답을 했다.

“내가 무엇을 먹을 경우, 나는 그것을 먹습니다. 내가 앉을 경우, 나는 앉습니다. 내가 일어설 경우, 나는 일어섭니다. 내가 걸어갈 경우, 나는 걸어갑니다.”

그 질문을 던진 사람은 “그런 것은 특별히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미 하고 있는 겁니다.” 라고 시큰둥해했다. 그러자 그 스님은 “아닙니다. 당신은 앉을 때 이미 이러서고 있고 ,일어설 때 이미 걸어가고 있습니다.” 라고 응답했다.

 

 

 

기적이 발생하다

 

“기적이 발생하지 않는 곳에 행복한 사람도 없다.”

프리드리히 쉴러 가 한 말이다. 처음 들을 때에는 다소 놀라움을 불러일으키는 말이지만, 진리임에 틀림없다. 그는 ‘행복’이라는 시에서 행복은 자신의 힘과 노력만으로 획득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란 점을 밝히고 있다. 행복은 최종적으로는 언제나 선물이고 하나의 기적이다.

기적은 인위적으로 만들 수 없는 것이다.

기적은 발생하는 것이다.

기적은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며 엄습해 온다.

기적은 자신을 드러낸다.

그리고 기적은 언제나 하늘로부터 내려온다.

기적은 우리에게 내려온다. 우리는 기적이 우리를 스쳐 지나가지 않도록 손을 펼쳐들 수 있을 뿐이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내려 주시는 행복의 기적을 붙잡는 것이 우리의 과제이다.

 

 

 

당신의 천사를 존중하고 – 그를 믿어라

 

천사들은 하느님의 사자이다. 이들은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달한다. 사람들을 도와주고 치유하시는 하느님께서 가까이 계신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사람의 삶에 개입하여 위험으로부터 지켜 주고, 어디를 가든지 보호하고, 꿈 속에서 다가와 말을 한다. 천사들은 이 세상과는 다르고 깊은 또 하나의 실제를 알려 주는 사자이다. 이들은 안식처와 고향, 경쾌함과 기쁨, 생동감과 사랑을 그리워하는 우리의 동경을 드러내는 표상이다. 이들은 하늘과 땅을 하나로 연결한다. 이들은 우리에게 하늘을 열어 주고, 우리의 삶에 천상의 광채를 제공한다.

 

 

 

낯선 것을 받아들여라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본질적으로 외부에 있는 것을 받아들이는 존재이다.

스스로 어떤 일을 행할 수 있게 되기 이전에, 사람은 먼저 자신에 앞서 존재하는 이 세상을 파악하고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는 이 세상에 있는 것을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 자기에 앞서 존재하는 것을 있는 그대로, 그 모양 그대로 존재하도록 허용해야 한다.

사람의 정신은 그가 감각을 통해 받아들인 느낌들과 표상들에 의존한다. 토마스 데 아퀴노 는 이성이 이해하는 것은 모두가 이미 감각을 통해 받아들인 바를 자료로 삼아서만 가능하다고 말했다. 이성은 감각이 어떤 것을 제공해야만 작용할 수 있다. 그리고 감각은 자신이 이전에 받아들인 것만 제공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은 이 세상이 자신의 감각과 생각에 다가오는 것을 허용할 때에만, 어떤 낯선 것이 자신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받아들일 때에만 이 세상을 인식할 수 있다. 이 세상은 그에 앞서 존재해 왔다. 그러나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을 확인하는 정도에 머무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사람은 이 세상이 자신에게 다가오도록 허용해야 하고, 있는 그대로 존재하도록 놔두어야 하며, 이 세상이 자신을 있는 그대로 그에게 보여 주고 열어 주도록 승낙해야 한다.

 

 

 

자신의 생각을 재고하라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고, 우리의 생각으로 우리 자신을 얼마나 파괴하고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우리의 생각이 실제 세계와 일치하고 있나 아니면 현실을 왜곡하고 있나? 우리가 실제 세계에 대한 의미를 어디로부터 얻고 있나? 만약 내가 나의 직업과 일에 대해, 나를 혹사하고 이용하기만 하는 지루한 것이라고 부정적으로 평가한다면, 나는 결국 그렇게 체험하게 될 것이다. 내가 어떻게 느끼고, 주변 사람들을 어떻게 만나며, 일상생활을 어떻게 체험하는가는 내 생각에 달리니 문제이다. 나는 내 주변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대로 생각하는가, 아니면 하느님이 생각하시는 대로 생각하는가?

만약 우리가 하느님의 눈으로 실제세계를 바라본다면, 우리는 무엇이 우리에게 좋고 무엇이 우리를 온전하고 건강하게 하며 무엇이 우리를 참된 삶으로 인도하는지 명백하게 알게 될 것이다

 

 

 

현재 이곳에 존재하는 법을 배워라

 

현재 이곳에 존재하는 기예를, 삶을 집중적으로 살아가는 재주를 배워 익혀라.

당신이 낮에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도중 이쪽 사무실에서 저쪽 사무실로 옮겨가야 하는 일이 있을 경우, 의식적으로 천천히 걸어가기를 주저하지 말고 한번 시도해 보라.

산책을 하는 동안 의식적으로 한 발자국 두 발자국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당신아 어떻게 땅을 디뎠다가 뒤로 밀어내는지 인식하고 느끼도록 시도해 보라.

손으로 당신의 가방을 쥐는 것을 천천히 의식적으로 하도록 시도해 보라.

저녁에 집에 돌아와 겉옷을 천천히 벗어 보라.

그러면 당신은 겉옷을 벗는 것이 그 날의 수고와 함께 하루를 벗어 내리는 일을 의미하는 상징이 됨을 알게 될 것이다.

 

 

 

자신이 누구인가를 예감하라

 

꿈에 등장하는 어린이는 우리 안에 어떤 새로운 것이 자라고 있음을 알려 주는 하나의 표상이다. 그 어린이는 하느님께서 만드신 본래의 우리 자신을 나타내는 왜곡되지 않은 근원적인 표상이다. 우리는 가끔 상처 입은 어린이를 팔에 안고 있다든지 그 어린이를 아래로 떨어뜨리는 꿈을 꾸곤 한다. 또는 그 어린이를 잊어버리거나 어딘가에 혼자 서 있게 놔두는 꿈을 꾼다. 그러한 경우, 꿈은 우리 안에 들어 있는 어린이를 주의 깊은 의식으로 섬세하게 돌봐야 함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가를 예감한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이미 익숙해진 옛 역할과 습관으로 빠져들고 만다. 우리는 우리 안에 들어 있는 그 어린이를 다치게 한다. 꿈 속의 그 어린이는 하나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상징이기도 하다.

 

 

 

바로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 중요하다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하나의 커다란 은총이다. 그러나 은총들 중에서도 가장 큰 은총은 자기 자신을 잊어버릴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아는 사람들 중에는 언제나 자기 자신만을 맴도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휴가를 가면, 자연경관의 아름다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즐기지 못한다. 자신이 휴가를 가장 좋은 방법으로 보내고 있는지 골똘히 생각하고, 다른 곳으로 갔더라면 그곳의 날씨가 더 좋지나 않을까 생각하느라 여념이 없기 때문이다.

이들은 누군가를 만나더라도 그 사람이 자기를 어떻게 여기는가에 대해 생각을 되씹는다. 그래서 이들은 그 사람과 참된 관계를 맺을 수 없을 정도로 막히고 만다. 이들은 기도 할 때에도 그 기도가 자신들에게 무엇을 가져올 것인가에 대해 묻는다. 이들이 무엇을 하든, 모든 것 안에서 이들의 자아(Ego)가 가로막고 있다.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는 일은 바로 연재 있는 것에 자신을 온전히 몰두하는 기예로써 가능하다. 나를 잊어버릴 때에만 나는 참으로 그곳에 있게 된다. 나 자신과 외부로 드러나는 나의 행위에 대해 지속적으로 생각하기를 그만둘 때, 비로소 나는 만남을 가질 수 있고, 대화할 수 있으며, 우리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것을 즐길 수 있다.

 

 

 

사슬이 풀어지면

 

꿈도 외부의구체적인 현실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실재 중 하나이다. 꿈속에서 우리를 묶고 있는 사슬이 풀리면, 현실의 일상생활에서도 우리는 좀더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다. 무의식 세계에서 일어나는 것은 현실의 의식세계에도 영향을 미쳐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게 한다.

만약 내가 감옥의 높은 담이 무너져 내리는 꿈을 꾸었다면 현실에서도 나의 감옥이 무너져 내린다. 나를 괴롭히기 위해 쫓아오는 자가 나를 놓치면, 나는 나 자신이 되어 가는 길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된다.

 

 

 

자기 동경의 자취를 따라가라

 

표상들이나 그림들은 당신에게 어떤 것을 강압하지 않는다. 이것들은 당신이 원하는 것을 볼 수 있도록 당신을 자유롭게 해준다. 그리고 이것들은 당신에게 하나의 새로운 시야를 제공한다. 이것들은 창문을 활짝 열어 그것을 통해 당신이 지금까지 눈여겨보지 않고 스쳐 지나쳤을지도 모르는 어떤 실재에 대한 새로운 안목을 갖게 한다. 표상들이나 그림들은 당신이 서 있는 그곳에서 당신을 맞이한다. 당신은 이것들이 그리스도교적이든 그렇지 않든, 종교적이든 그렇지 않든 관계없이 당신의 원초적 동경들을 그들 안에 들여놓을 수 있다.

 

오직 당신 동경의 자취를 따라가라. 그러면 그 표상들과 그림들은 당신에게 당신 삶의 신비를 열어 줄 것이다.

 

 

 

어떤 것도 평가하지 마라

 

주의 깊은 마음으로 바라보면, 내가 그 동안 얼마나 많은 것들에 부주의했었던 가에 대해 민감하게 알게 된다. 이에 대해 나는 어떤 평가도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인식한다. 어떤 현상에 대해 평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것은 나를 평안으로 인도한다. 우리가 가진 불안의 원인은 종종 우리가 하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해 평가를 내리는 데에 놓여 있다.

그리고 이러한 평가는 대부분 올바른 척도에 따라 내려진 것이 아니다. 그러한 잘못된 평가로 우리는 이 세상과 자신에 대해 불만족스럽게 생각하게 되고, 그 결과로 우리 안에 불투명한 불안이 발생한다. 내가 현존하는 것에 어떤 가치 평가를 내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인식한다면, 나는 그것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강박감을 갖지 않고 있는 그대로 둘 수 있다. 내가 그것을 그냥 그대로 둘 수 있다면, 그것은 자기 스스로 변화해 간다.

내가 만약 나의 부주의와 싸우지 않고 있는 그대로 둘 수 있다면, 그것은 개가 복잡한 방법들과 기술들로 많은 수고를 하지 않아도 스스로 깊은 주의로 변화할 것이다. 나는 나의 불안을 편안하게 있는 그대로 인식한다. 나는 내 안에서 많은 것들이 움직이고 있음을 느낀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느끼는 나 스스로는 불안 속에 빠져 있지 않다.

 

 

 

 

기다림을 배워라

 

기다림은 우리에게 두 가지 효과를 가져온다. 곧 하나는 우리의 시야가 넓어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지금 체험하고 있는 것에 좀더 깊은 주의를 기울이게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과 대화를 하고 있다면, 기다림은 그 사람에게 좀더 관심을 가지고 귀를 기울이게 한다. 기다림은 마음을 넓혀 준다.

내가 누군가를 기다린다면, 나는 나 혼자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느낀다. 사랑하는 이를 기다리는 사람은 이 점을 잘 인식한다. 기다리는 동안 그는 자주 시계를 바라보며 이제나저제나 사랑하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나 애를 태운다. 그는 현재 이 순간에 개어 있으면서 약간 긴장된 마음으로 기다리는 사람이 지금 막 기차에서 내리지나 않는지, 문 앞에 와서 초인종을 울리지나 않는지 관심을 기울인다.

이러한 순간에 기다리는 사람은 오지 않고 다른 사람이 문 앞에 서 있을 경우, 그는 크게 실망하게 된다. 기다림은 우리 안에 일종의 경쾌한 긴장을 불러일으킨다. 우리 자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감지한다. 기다림 속에서 우리는 마음에 와 닿고, 마음을 설레게 하고, 동경을 채워 주는 것을 향하여 손을 내민다.

 

 

 

본질적인 것은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진다

 

기다릴 수 없는 사람은 자신을 결코 강하게 성숙시킬 수 없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즉시 충족시켜야만 한다. 그러는 동안에 그는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욕구에 매이게 된다. 기다림은 우리를 내적으로 자유롭게 만든다. 만약 우리가 욕구가 채워질 때까지 기다릴 수 있다면, 우리는 그 기다림이 우리 안에 불러일으키는 긴장을 견디어나가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마음을 넓혀 준다.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의 삶은 진부한 것이 아니라는 느낌을 갖게 해준다. 우리가 어떤 신비에 가득 찬 것을 기다릴 때에는, 그것은 우리의 깊은 동경이 채워지기를 기다리는 것이란 점을 우리는 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스스로 생각하고 내놓을 수 있는 것보다 우리가 더 큰 존재란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기다림은 본질적인 것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져야 하는 것이란 사실을 알려 준다.

 

 

 

날마다 연습하라

 

주의 깊음은 ‘주의하다, 존중하다, 고려하다, 곰곰이 생각하다’ 등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나는 충분히 고려하고 주의 깊게, 의식적으로 행동한다. 나는 지금 하고 있는 것에 온전히 있다. 지금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 지금 하고 있는 것에 나의 모든 감각을 모아 집중해 있다. 나의 육체와 영혼은 하나로 일치하여 함께 작용하고 있다. 주의 깊게 현존하는 것은 매 순간 온전히 이 현재에 있음을 의미한다. 나는 이 순간의 신비를, 시간의 신비를, 나의 삶의 신비를 감지한다.

그리고 나는 나의 모든 지식과 분명하고 투명한 의식을 동원하여 지금 하고 있는 것에, 지금 만지고 있는 것에, 지금 손에 들고 일을 하고 있는 것에 있다. 의식적으로 그리고 주의 깊게 나의 연장을, 볼펜을, 자동차 열쇠를 손으로 잡는다. 나의 컴퓨터를 조심하여 사용한다. 나는 나의 감각들에, 나의 육체에 있다. 나는 내 안에서 무엇인가가 움직이며 작용하는 것을 감지한다.

그러나 그러는 동안 이것이 나의 몸에 어떤 병이 있음을 의미하지나 않는지 근심하며 골똘히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는 주의 깊게 걸어간다. 나는 매 걸음마다 나의 움직임에 있다. 나의 몸과 근육 그리고 피부를 느낀다. 물론 매 순간을 의식하면서 살아갈 수는 없다. 그것은 나에게 지나친 요구가 될 것이다. 그러나 매일 일정한 시간 동안 이러한 깊은 주의로 사는 것을 연습하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다.

 

 

 

마음으로 생각하라

 

현명한 사람은 이성으로만 생각하지 않고 마음으로 생각한다. 그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기회를 따뜻한 마음으로 맞아들인다. 그리고 그는 거친 정신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가려져 있는 미세한 차이들도 본다. 현명함은 지식을 실제 세계에 맞아들이도록 활용하는 매우 실질적인 이성이다. 만약 당신이 지금 이 순간에 무엇이 옳은가를 알아내지 못한다면, 당신이 알고 있는 많은 지식은 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당신은 매우 소중한 사람이다

 

기다림의 긴장이 불러일으키는 것은 무엇일까? 사랑하는 사람이 오기를 기다리는 경우, 당신의 기분은 어떠할까? 어떤 새로운 것이 당신의 삶에 등장한다. 당신에게 어떤 큰 것이 선사된다. 당신은 그 사람에 대해 기뻐한다. 당신은 생생하게 살아 있음을 느낀다. 어떤 강한 느낌이 당신 안에서 높이 솟아오른다.

그러나 당신만이 기다리는 것은 아니다. 당신 역시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다. 다른 사람이 당신을 기다린다면, 하느님께서 당신을 기다리신다면, 당신은 어떤 느낌을 가지게 될까?

다른 사람들은 당신에게 여러 가지를 기대한다. 그들이 당신에게 거는 기대들이 당신을 부담스럽게 하고 옥죌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도 당신에게 어떤 것도 기대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당신 자신이 불필요한 존재라고 느끼게 될 것이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동안 당신은 마음을 활짝 열도록 초대되고, 또한 다른 사람들로부터 기다려지는 존재인 당신은 일어나 성장하도록 초대된다. 당신은 매우 소중한 사람이다. 많은 사람들이 당신을 기다린다.

 

 

 

하늘로 향한 창문

 

프랑스의 작가 생택쥐페리 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만약 네가 배를 한 척 건조하기를 바란다면, 사람들에게 바다를 동경하도록 가르쳐라.”

동경 속에는 우리로 하여금 유토피아를 실현해나가도록 하는 힘이 들어 있다. 동경은 중세시대의 사람들로 하여금 높은 첨탑이 있는 고딕식 성당을 짓도록 했다. 이 건축양식은 사람들의 동경으로 가능했다. 음악 역시 사람들의 동경으로 만들어진다. 동경은 하늘을 향해 창문을 만들어 연다. 모든 종류의 예술은 최종적으로는 영원을, 아직 결코 현존한 적이 없는 것에 대한 예시이고, 온전히 다른 것에 대한 동경의 표현이다. 동경은 다른 세상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이지 않게 되도록 스스로 쌓아 올린 갑옷과 벽을 부숴 버리는 힘을 가지고 있다. 동경은 우리의 좁은 세상을 열어 젖힌다. 동경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지평선을 열어 놓는다. 동경은 우리의 삶이 가진 무거운 짐과 부정적인 것들에 대해 눈을 감지 않는다. 동경은 우리로 하여금 현실을 두려워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면서도 희망의 길을 걸어가게 한다.

 

 

 

내면의 불을 보호하라

 

영성작가인 헨리 나웬 은 영적 삶을 우리 각자 안에 타오르고 있는 내면의 불을 보호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신 안에 있는 난로의 문을 외부로 너무 많이 열어 두어 완전히 다 타 버린다고 생각한다. 그러기에 그들 안에 이글거리는 불을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 그러면 그들은 빠른 속도로 다 타 버린 재가 되고 만다. 영적 삶은 나에게서 내면의 불을 보호하는 것을 의미한다.

 

 

 

어린 시절의 자취들

 

당신이 어린아이였을 때, 어떤 경우에 자신이 온전히 하나로 일치하는 것을 느꼈나?

당신이 가장 즐겨 한 놀이는 어떤 것이었나?

당신이 가장 좋아한 동화는 어떤 것이었나?

당신은 어떤 사람들을 모범으로 삼았었나?

당신은 어린 시절에 누구에게 열광했나?

당신은 무엇을 하면서 살아가고 싶어했으며, 당신을 매료시킨 것은 무엇이었나?

당신에게 가장 와 닿은 것은 무엇이었나(자연, 전례, 놀이, 음악, 그림)?

 

이 모든 질문들 속에서 참된 당신을, 당신 안에 들어 있는 원초적이고 왜곡되지 않은 하느님의 모상을 찾아내도록 시도해 보라!

 

 

 

삶에 대한 꿈

 

당신이 지금까지 받았던 상처들과 지금까지 가졌던 삶에 대한 꿈의 바탕에 있는 카리스마와 삶의 자취를 한두 마디 말로 정형화해 보라! 그것에 대해 너무 곰곰이 생각만 하지 말고 떠오르는 것들을 글로 죽 써 보라! 다음과 같은 범례를 따라 당신의 삶의 자취에 대해 정형화시켜 보라.

관계를 구축하다 – 삶을 일깨우다 -화해하다 – 시야를 넓히다 – 안식처를 제공하다 – 한계를 받아들이다 – 슬퍼하는 이를 위로하다 -쓰러진 이를 일으키다 – 아름다운 것을 만들다 – 삶을 안락하게 하다.

 

 

 

마음을 열어라

 

올바르게 말한다는 것은 마음의 창을 여는 것,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열어 그가 나의 가슴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말을 통해 관계가 증진되고 믿음이 발생한다. ‘말하다’ 에 해당하는 독어 ‘sprechen‘은 ‘bersten (파열하다), brechen (깨다, 부수다)’ 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말하는 중에 우리의 마음을 둘렀고 있던 벽이 부서져 내린다. 우리 안에서 무엇인가 표출되어 나온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우리의 정서들과 목소리, 그리고 조화롭고 안정되어 있는 내면에 함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우리가 말하는 것이 마음과 일치할 때, 그리고 느낌들과 일치할 때, 우리는 조화와 일치를 이루게 된다.

 

 

 

하늘과 땅은 하나

 

우리가 온전히 현재 이 순가에 있으면, 과거와 미래는 하나로 일치한다. 침묵 중에 나는 온전히 이 순간에 있도록 시도할 수 있다. 그러면 시간과 영원이 서로 하나라는 예감이 떠오른다. 영원 자신이 우리의 시간 안으로 들어오고, 현재 이 순간에 시간의 흐름이 멈추어 서 있는 것 같이 보이는 것은 시간이 가진 가장 깊은 신비다. 그러면 우리는 하늘과 땅이 하나이고, 시간과 영원, 하느님과 인간이 하나라는 것을 예감한다.

안젤루스 실레지우스 는 이러한 체험을 다음과 같은 멋진 말로 표현했다.

너 스스로 차별을 두지 않는다면,

시간은 영원과 같고 영원 시간과 같다.

내가 시간을 떠난다면,

내가 하느님 안에,

하느님이 내 안에 하나가 된다면,

나 스스로 영원이다.

 

 

 

 

 

 

놓아 주어라

행복으로 나아가는 왕도

    너 자신을 잊고 자유로워져라

 

 

 

행복을 위한 가장 좋은 길은

 

“나 자신을 더 이상 찾지 않는 순간부터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이반 세르게예비치 투르게네프)

 

자신의 행복을 찾기 위해 노력하면 할수록 그만큼 행복을 발견하기는 더 어려워진다. 러시아의 시인 투르게네프 는 자기 자신을 찾는 것을 포기했을 때 행복한 삶을 영위한 체험을 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더 이상 찾지 않고 자신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이 행복을 위한 가장 좋은 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은 행복으로 나아가는 길에서 매우 위험한 처지에 빠져들 수 있다. 우리는 자신도 잘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결국 행복을 찾아 나선다. 그리고 행복을 약속하는 방법을 선택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포기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우리가 자신을 포기하고자 하는 뜻 속에 이미 공명심이 들어 있고, 자아를 완전히 포기하기를 원하는 곳에 이 자아가 맴돌고 있음을 인식하지 못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포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러한 목적을 성취할 수 있는 길은 다르게 열려있다. 오직 내가 내 마음에 와 닿는 것을 향해 온전히 나아갈 때, 나는 나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내가 멈추어 서서 나를 벗어 버리려 하면, 나는 내 주위를 맴돌며 헛수고만 하게 될 뿐이다. 나를 포기하기 위한 노력만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면 나의 자아는 나의 노력에 들러붙어 결코 떨어져 나가지 않는다. 아름다운 새가 나뭇가지에 맵시 있는 자태로 앉아 있는 모습이 내 마음에 깊이 와 닿았을 때, 그 새에게 다가가는 것을 통해서 나는 나의 자아를 잊어버릴 수 있다. 나를 잊어버리는 순간에 나는 온전히 그곳에 있고 행복하다. 나는 의식적으로 나를 잊어버릴 수는 없다. 오직 내가 어떤 것에, 어떤 사람에게 몰두함으로써 나를 잊어버릴 수 있을 뿐이다.

내가 만약 하느님께 온전히 몰두한다면, 나를 하느님 안에서 온전히 포기한다면, 나는 어느 순간 갑자기 나의 자아를 더 이상 의식하지 않게 된다. 그러면 나는 행복하다. 행복하고자 하는 것마저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나를 아무런 조건도 없이 받아들인 것이다. 이것은 나의 행복을 잘못 설정한 자아로부터 해방시킨다. 나를 잊어버릴 수 있는 것은 은총 중에서도 가장 큰 은총이다. 이것이 바로 행복을 위한 왕도이다.

 

 

 

세 가지 소원

 

사람들의 소원들을 표현해 놓은 동화들이 수없이 많이 있으나 사람들이 가지는 소원은 대부분 세 종류이다. 또 자신에게 참으로 도움이 되는 것을 소망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대부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좋을지 모를 지경으로 수많은 소원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다 점차 자신의 소원들 안으로 얽혀 들어간다.

어느 동화에서 주인공은 더 이상 비가 오지 않는 좋은 날씨를 원한다. 그는 곧 비가 오지 않으면 아무것도 자라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래서 그는 밤에만 비가 오기를 소망한다. 그러자 야간 경비원들로부터 불평이 터져 나왔다. 최종적으로 그는 다시 본래 상태를 원하게 되었다.

그의 세 가지 소원은 빈털터리로 남게 되었다. 우리가 참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을 필요로 하는가? 우리는 무엇을 갈망하고, 무엇을 성취하고자 하는가?

 

 

 

행복을 빚어내는 대장장이

 

“각자는 자신의 행복을 빚어내는 대장장이이다.” 라는 속담이 있다. 그런데 불행을 빚어내는 기술도 있다. 심리학자 파울 바츠라빅 은 그의 유명한 책에서 이 기술에 대해 서술했다. 어떤 사람은 이 기술을 완벽하게 수행해낸다. 그는 모든 것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고, 사람들과 더불어 있을 때는 언제나 자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행복을 만들어낼 수 없는 존재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행복에 대해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긍정하느냐 긍정하지 않느냐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운명도 있는 그대로 아무런 조건 없이 받아들이면, 행복이 우리에게 달려온다. 행복은 우리의 기량에서 온다. 우리의 기량이 좋으냐 좋지 않으냐는 우리가 해석하기에 달려 있고, 이것을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

 

 

 

선물에 자기 마음을 담아라

 

오늘날 적지 않은 가족들이 더 이상 서로 선물하지 않기로 정해 두고 있다. 이미 모든 것을 충분히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정에는 분명히 건전하고 좋은 명이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생각이 부족하여 선물을 잘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서로 선물을 주고받는 것은 사랑과 생동적인 관계의 표현이다.

우리는 선물을 주는 가운데 우리 스스로가 선물을 받는 존재임을 표현한다. ‘선물하다’ 에 해당하는 독일어 ‘schenken‘ 은 본래 어떤 사람에게 마실 것을 준다는 데에서 유래한다. 독일에서 오늘날에도 포도주를 잔에 따를 때에 ‘einschenken‘ 이란 단어를 사용한다. 그러므로 schenken 은 목마른 사람에게 마실 것을 부어 주어 그가 목마름을 해결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 전혀 목마르지 않은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선사할 필요가 없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더 이상 단 것이나 포도주 또는 옷이나 가재도구들을 선물로 받고 싶어하지 않는다. 이러한 것들을 이미 충분히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사랑에 대해, 관심에 대해, 존중에 대해 목말라한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사랑과 관심과 존중이 담긴 선물을 그리워한다. 만약 내가 어떤 선물 속에서 그러한 나의 마음을 담으면, 그 선물은 받은 사람에게 다가가 그의 목마름을 해결할 것이다.

 

 

 

마음을 사물들에 매어 두지 마라

 

모든 고등 종교들은 어느 시대에나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으면 모든 것을 가지게 된다.” 고 말해 왔다. 자신의 마음을 열어 이 세상 사물에 매어 두지 않는 사람, 다른 사람들이 매여 있는 것을 놓아 줄 수 있는 사람만이 참으로 자유로울 수 있다.

 

 

 

탐욕에 빠져들지 마라

 

사람은 어떤 것을 손에 지니기를, 무엇을 소유하기를 원한다. 많이 소유할수록 그는 그만큼 자신을 더 많이 가지는 것으로, 그래서 자신의 주인 되는 것으로 믿는다. 그리하여 최종적으로는 자기 자신마저 소유하려는 희망을 키워 간다.

소유는 나쁜 것이 아니다. 사람은 살아가기 위해 옷, 음식, 집을 필요로 하지만 이러한 것들을 지나치게 소유하려는 욕망에서 위험이 발생한다. 짐승은 자신이 필요한 만큼만 갈망한다.

그러나 사람은 자신이 필요로 하는 정도를 넘어 지나치게 소유하려고 탐욕에 빠져들 수 있다. 사람은 지나친 탐욕을 부리다가 자신의 소유물에 얽매이게 된다. 자신이 모은 재산의 매력에 빠져 언제나 더 많이 소유하려 한다. 그래서 자신이 가진 것을 즐기기보다는 언제나 새로운 것을 더 소유하려 노심초사한다. 그러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물질에 대한 탐욕에 스스로 소유 당하고 만다.

 

 

 

행복한 한스

 

행복해지는 법을 배울 수 있겠는가? 고대 그리스의 다양한 철학자들은 행복해지는 법을 배워 익힐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그것을 의식적으로 열심히 노력하여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스토아 학파 사람들은 격정과 욕망을 잠재우고 덕을 익히는 것을 행복에 이르는 길로 간주했다. 모든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사람은 내적 평화와 행복에 이르게 된다. 에피쿠로스 는 그의 제자들에게 자신이 받은 것으로 만족하며 편안하게 현존하는 기쁨을 배우라고 권고했다. 신플라톤주의 학파는 관상을 익히는 것을 행복에 이르는 길로 보았다. 관상 속에서 자신을 하느님께 들어 높이는 사람은 하느님과 하나가 되고 참된 행복을 체험하게 된다. 동화들은 우리에게 행복에 이르는 다양한 길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대부분의 경우 위대한 영웅들은 공주와 결혼하여 함께 행복하게 살기 위해 많은 위험과 시험을 이겨내야 한다. 동화 속에서 행복은 수많은 난관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다가오는 것으로 서술되고 있다.

행복을 직접 주제로 다룬 동화도 있는데, <행복한 한스> 가 바로 그것이다. 한스는 일한 대가로 금 덩어리 하나를 받았을 때 행복했다. 그러나 그는 그 금을 말 한 마리와 바꾸었고, 그 다음에는 소, 돼지, 거위 등으로 바꾸었으며, 마침내 돌덩이 하나와 바꾸었다. 바꿀 대마다 새로운 것을 받은 그는 행복했다. 그러나 그것이 그에게는 점점 더 힘들기만 했다. 마침내 그 돌을 물에 빠뜨리고 말았을 때,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느꼈다.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난 다음 그는 자유로움을 느꼈고, 그래서 그는 행복했다. 그는 내려놓은 것에 대해 그 다음에 슬퍼하지 않았고, 언제나 그 순간순간을 즐겼다.

결국 한스는 행복을 배웠다. 배움의 과정 초기에 그는 재산, 힘, 즐거움, 성공 속에 행복이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많이 놓아 줄수록 그만큼 더 행복해진다는 사실을 서서히 배우게 되었다. 오직 그 자신만이었을 때, 자신의 길을 자유롭게 걸어갈 수 있을 때,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을 때 그는 참으로 행복했다.

 

 

 

 

안전에 대한 완벽한 보장은 없다

 

재산은 사람에게 언제나 안전을 보장한다. 재산은 사람이 갑자기 곤궁에 빠져들거나 어떤 것에 부족한 경우가 발생했을 때, 그것을 해결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된다. 안전에 대한 보장은 인간이 가진 기본욕구 중 하나이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일종의 존재적 불안전을 체험한다. 우리는 재산으로나 지식 또는 어떤 특정한 삶의 형태로 결코 완벽한 안전을 만들어낼 수 없다. 오늘날 수많은 종류의 보험들이 있다. 사람들 중에는 많은 돈을 들여 보험들에 가입함으로써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부정적인 것들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부류가 있다. 청빈은 이러한 안전장치들로부터도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걱정은 불안과 서두름을 불러일으키고, 사람의 마음을 흐려 놓는다. 신뢰는 자유와 평정을 선사하고, 하느님의 손 안에 있다는 확신과 안정을 제공한다.

 

 

 

 

삶은 순례다

 

지금까지 성취해온 것들을 놓아 주는 것은 안전장치를 놓아 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고향과 안식처에 대한 갈망을 느낄 때마다 우리는 이 세상살이에서는 여행 중에 있고, 그래서 언제나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의식해야 한다. 가족이나 친구들이 우리에게 선사할 수 있는 고향과 보호에 대한 체험은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휴식처들에 지나지 않는다. 옛 사람들에게 순례는 우리가 이 세상을 접촉했다가 언젠가 다시 놔두고 떠나가야 하는 순리에 대한 하나의 표상이었고, 하느님이 원래 계획하셨던 자기의 모습으로 변화할 때까지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여정에 대한 표상이었다.

 

 

 

행복과 유리잔

 

“행복과 유리잔은 쉽게 깨진다.” 는 속담이 있다. 우리는 행복을 붙잡아 둘 수 없다. 부드럽고 섬세한 손으로 받아서 조심스럽게 만지고 다루어야 한다. 만약 내가 유리잔을 손에 들고 있는 것처럼 행복을 계속해서 손에 쥐고 있으면, 나는 아무 일도 할 수 없게 된다. 행복을 손에서 내려서 옆에 두어야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다. 그리고 또 원한다면, 그 행복을 귀한 유리잔처럼 조심스럽게 다시 손에 들고 감탄하며 음미할 수 있다. 행복을 항상 두 손에 움켜잡고 있으려 하면, 그 행복은 틀림없이 부서지고 만다.

 

 

 

참된 삶의 기쁨

 

삶을 참으로 즐기고자 하는 사람은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한다. 내적 자유를 얻는 과정에는 자기 수련이 필요하다. 자신의 삶을 자신의 손으로 스스로 만들어 가고 있다는 느낌을 가지는 사람만이 그러한 사실에서 행복을 느끼게 된다. 자신의 욕구들에 완전히 노예가 되어 어떤 욕구가 발생하면 즉시 해결해야만 하는 사람은 결코 참된 삶의 기쁨을 누릴 수 없다. 그러한 사람은 기쁨을 누리기는커녕 자신의 삶을 스스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남으로 인해서 살아가는 듯한 몽롱한 느낌을 가지게 된다.

 

 

 

놓아 주자 – 그리고 즐기자

 

교부들의 금언집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우리는 오직 놓아 주는 것을 통해서만 즐길 수 있다.”

한 어린이가 유리항아리에 많은 호두가 들어 있는 것을 본다. 그는 호두를 가능한 많이 끄집어내어 먹기 위해 한 손 가득 움켜쥔다. 그런데 커진 손이 유리항아리에서 빠져 나오지 않는다. 그 아이가 호두를 먹으려면 손에 가득 쥔 것들을 먼저 놓아 주어야 한다. 그러면 그는 하나씩 집어내어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놓아 주는 일은 우리가 많은 노력을 해야만 성취할 수 있는 수덕적인 요소가 아니다. 그것은 내적 자유에 대한 동경으로 하는 일이고, 우리가 어느 것에도 매이지 않고 자유로워야만 우리의 삶이 열매를 맺을 것이라는 예감으로 하는 일이다.

만약 우리가 다른 사람이 우리에 대해 생각하고 기대하는 바에 더 이상 매이지 않는다면, 더 이상 사람들의 관심과 인정에 매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참된 우리 자신을 만나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을 포기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탐식하는 사람으로, 포도주를 즐겨 마시는 사람으로 불리기까지 했다. 삶의 목표는 즐기는 것이다. 신비가들은 영원한 삶은 하느님의 영원한 즐거움 안에 있다고 말한다. ‘하느님을 즐기는 것(Frui deo)’ 이 우리의 목표이다. 우리는 현재 이곳에서 하느님이 우리에게 제공하시는 선물들을 즐기는 데 숙달되지 않으면 하느님을 좀처럼 즐기지 못하게 될 것이다.

 

 

 

자신의 길을 가라

 

넓은 길은 누구나 가는 길이다. 당신은 당신의 고유한 길을 찾아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는 것으로는 족하지 않다. 당신의 길이 무엇인가에 대해 섬세히 고찰하고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 길을 발견하면 비록 그 길에서 심한 외로움을 느끼는 경우가 있더라도 용기를 내어 걸어갈 결단을 내려야 한다. 당신의 고유한 길만이 당신을 성장하게 하고 참된 삶으로 인도할 것이다.

 

 

 

 

자신의 과제를 발견하라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가 무엇인가를 발견해야 한다. 이는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이류를 아는 것과 관련된 중요한 일이다. 우리는 건강해지는 데에만 관심을 쏟아서 될 일이 아니고, 이 세상에서 이루어야 하는 사명을 알아야 한다. 그러면 우리의 삶이 의미로 가득 차 있음을 체험하게 된다. 이것은 오늘날 로고테라피 가 말하고 있는 것과 일치한다. 로고테라피 를 창설한 빅토르 프랑클 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서 아무런 의미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을 넘어서는 큰 의미를 바라보지 않기 때문에 병들어 있다고 자주 되풀이하여 말했다. 우리 스스로 우리의 삶에 가하는 의미가 우리를 건강하게 만든다.

 

 

 

자신의 욕구들을 잊어버리지 마라

 

어머니는 자주 자신의 정체성과 어머니라는 역할을 동일시하여, 자신의 욕구들과 자신이 여성으로서 지니고 있는 여러 측면들을 잊어버리곤 한다. 자신의 욕구들로 채워 가면서 사는 것이 허용될 때, 비로소 어머니는 자신의 딸도 제대로 먹이며 돌볼 수 있다. 이 말은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어머니가 딸이 필요로 하는 것을 줄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자신이 가진 욕구들에 대해서 아는 어머니가 필요할 경우에는 자신을 그 욕구들로부터 떼어 놓을 수도 있다. 자신의 욕구들을 자유롭게 다스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어머니는 자신의 욕구를 채울 수도 있고, 절제하거나 포기할 수도 있다. 이러한 내적 자유는 어머니가 자신의 욕구들과 딸 또는 아들의 욕구들을 구별하지 못하고 혼동하는 것을 막아 준다.

 

 

 

앞을 바라보라

 

예수님은 사람마다 자신의 고유한 의지를 가지고 있음을 확신하셨다. 문제는 사람마다 자신의 의지를 실행하는 것이다. 사람마다 자신이 성장하기를, 지신의 길을 계속 걸어가기를, 을 위해 인내심을 가지고 집요하게 일하기를 원한다. 예수님이 행하진 영적 치유도 의식적으로 각 개인의 의지에 관여하면서 이루어졌다.

예수님은 각 사람 안에 들어 있는 힘이 표출되어 작용하도록 노력하셨다. 그분은 병자들이 수동적으로 가만히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스스로 일어나도록, 그리고 용기를 내어 자신의 삶을 살아가도록 고무하셨다.

그리고 그분은 뒤를 돌아다보지 않으시고 앞을 바라보셨다. 우리는 우리의 과거를 건너뛰어서는 안되지만, 지난 삶의 과정을 모두 다 샅샅이 뒤져 보아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져야 한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언제나 과거에 입은 상처들의 주위를 맴돌기만 할 것이 아니라, 삶을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길을 선택해야 한다.

 

 

 

내가 의지하는 힘

 

나는 나의 삶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이는 내가 어머니의 사랑을 이제 더 이상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뜻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그보다는 내가 간절히 동경하는 것을 스스로 찾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나 스스로 나에게 어머니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모성적인 어떤 힘을 동경하고 있다. 나에게 하느님은 내가 그분 안에서 안식을 얻을 수 있는 모성적 공간이다. 여기서 하느님은 단순히 나를 달래기만 하시는 분이 아니다. 더 나아가 하느님과 그분의 조건 없는 사랑을 바라보는 것은 내가 너무 적게 체험한 인간적인 사랑에 고착되는 것으로부터 나를 자유롭게 한다.

 

 

 

자신의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길들

 

아들은 자신의 고유한 남성성을 계발하기 위해 아버지와 동일성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그는 자신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내가 아버지에 대해 감격한 것은 무엇일까? 아버지는 무엇으로 살아오셨을까? 자신의 상처와 실망을 어떻게 다루어 나가셨을까? 어떤 능력을 지니셨을까? 자신의 삶을 어떻게 관리하셨을까?

아들이 자라는 동안 아버지가 꾸준히 베풀어 온 것들에 대해 아들이 감사하게 생각한다면, 이것은 매우 좋은 일이다. 오직 이것을 통해 아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한다. 그리고 자신 안에서 솟고 있는 부성적 힘의 원천과 만나게 된다. 그래서 그는 남성으로서, 그리고 아버지로서 살아가는 것에 대한 흥미를 가지게 된다. 그는 자신의 번식력과 창조력을 발견하게 되고, 자신의 원초적 자취를, 생명력과 힘, 자유와 사람의 자취를 이 세상에 남기게 된다.

 

 

 

내면의 길

 

평안을 얻는 길은 단순히 외적인 요소만 갖추어서 성취되는 것이 아니다. 참된 평안으로 인도하는 길은 모두 나 자신의 본질적인 모습을 체험하고 하느님을 체험하는 과정을 거친다.

어느 날 하루를 잡아서 그 날은 “나는 나 자신이다.” 라는 문장만을 묵상하는 피정을 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이 말을 되풀이해서 묵상하다 보면, 나 자신에 대한 동정심에 빠져들어 헤매거나 자신의 불행한 처지에 대해 다른 사람들에게 책임을 전가하지 않게 될 것이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나 자신을 찾는 길 중 하나는 삶에 대해 어린 시절에 어떤 꿈을 가졌었던 가를 알아보는 것이다.

나는 어떤 직업에 종사하길 원했나? 내가 가장 즐기던 놀이는 무엇이었나? 그 놀이를 어떻게 했나? 놀이에서 참된 나에 대해 어떻게 표현했나? 나는 어떤 상황에서 나 자신과 온전히 일치했나? 어떤 상황에서 나는 온전히 나 자신이었나?

 

 

 

삶에 대한 새로운 맛

 

감사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사람은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받아들인다. 그는 자신과 자신의 운명을 거슬러 반항하는 자세를 멀리한다. 그는 자신의 삶에 매일 새롭게 한 천사가 다가와 온갖 종류의 불행으로부터 자신을 지켜 주고 사랑과 번영의 손길로 가까이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앞으로 몇 달 동안 감사의 천사와 함께 살아 가도록 시도해 보라. 그러면 당신은 자신이 모든 사물과 사건을 새로운 빛으로 인식하게 됨을 알 수 있을 것이고, 당신의 삶이 하나의 새로운 맛을 가지게 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현실적인 목표를 추구하자

 

먼저 당신은 현실적인 목표들을 추구해야지, 어떤 환상들을 쫓아가서는 안 된다. 당신은 자신이 참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 무엇이고, 당신이 화해하고 받아들여야만 하는 자신의 고유한 성격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 만약 당신이 자신 안의 어떤 것을 변화시키기를 원하고 그렇게 계획을 세웠다면, 그것을 중도에 포기하지 말고 꾸준히 실행해 나가라.

또한 그것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당신이 목표를 잘못 설정하지는 않았는지, 자신에게 너무 많이 요구하지는 않았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그러할 경우, 당신은 먼저 달성하기 쉬운 목표들을 설정해 보라. 그리고 그것을 꾸준히 실행해 보라. 그러면 인내가 열매를 맺는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태양과 같은 아이들

 

어느 쾌활한 사람이 우리에게 다가오면 우리는 “이제 태양이 솟고 있다.” 고 말한다. 쾌활함과 생동감을 어디에나 널리 퍼뜨리는 태양과 같은 아이들이 있다. 나는 당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태양과 같은 존재가 되기를 바란다. 당신은 다른 사람들에게서 “오늘 너는 태양처럼 빛이 나는구나.” 라고 말을 들은 적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한 당신이 어느 한 공간에 들어서면, 그 공간은 밝고 따뜻해진다. 그러면 태양이 좋은 기분과 강력한 빛과 함께 우리 가운데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행복해지고 모든 것이 잘 되어간다.

 

 

 

 

자기 안에 있는 어린이를 신뢰하라

 

우리는 자신이 이런저런 행동을 하면,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인상을 줄까, 다른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등에 대해 너무 많이 생각한다. 생기발랄함은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기대하는 것들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는 데서부터 자유로워짐을 의미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기대들을 옆에 내려놓고 우리 안에 있는 생명력을 신뢰한다. 우리가 평소에 연출해온 역할을 접어둔다. 우리의 내적 생명력을 자주 가로막는 가면을 벗어 놓는다.

생기발랄함은 용솟음치는 생명력이다. 우리는 이것을 마음대로 쉽게 만들어낼 수 없다. 때로는 우리 안에서 모든 것이 솟구쳐 나온다. 우리 안에서 말들이 마구 쏟아져 나온다. 우리는 한 사회 전체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우리는 생전 듣지도 보지도 못한 새로운 아이디어들을 갖는다. 이러한 생기발랄함에서 일어난 불꽃은 대부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된다. 그리고 여기서 자유가 발생한다. 다른 사람들도 자유로워져 어떤 목적이나 이익을 헤아리지 않고 그저 단순히 놀기를 원하는 자기 내면의 어린이를 신뢰하게 된다. 그 어린이는 자기 자신과 만나고 있다. 그는 주변 세계의 기대들에 의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의해 살아간다. 우리 어른들은 자신이 무엇을 해도 좋고, 무엇을 해야 하며,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지속적으로 고찰하고 생각함으로써 삶을 복잡하게 만드는 데에서 벗어나서 어린아이와 같이 단순하게 있는 그대로 살기를 동경한다.

 

 

 

 

 

 

행복과 불행

우리 손에 달려 있다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방법

 

 

 

빛과 어둠

 

“어떤 일이 발생하든 그 안에서 행복을 느끼느냐, 아니면 불행을 느끼느냐 하는 것은 나에게 달려 있다.”

이 삶의 지혜를 담은 말은 앤소니 드 멜로 가 한 말이다. 그의 말은 일리가 있다. 행복은 내면의 한 상태이다. 그것은 우리가 주변 세상을 어떻게 체험하느냐에 달려 있다. 또한 우리의 체험은 발생한 현상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해석하고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달려 있다. 물론 우리가 사랑하는 어떤 사람이 죽었다든지 하여 객관적으로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내면의 평화를 교란시켜 놓는 상태에 접어드는 경우도 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내가 다르게 해석하여 그 안에서 행복을 느낄 수는 없다. 그러나 내가 그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는 최종적으로 나에게 달려 있다. 그 안에서 나는 좀더 성숙해 나가고 나의 원초적인 샘들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하는 자극을 체험할 수 있다. 그러면 나는 이별의 슬픔과 아픔을 견디어내면서 내 안에서 어떤 새로운 것을 발견하여 그것을 통해 내가 행복이란 단어로 표현해도 좋을 어떤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 만약 내가 슬픔을 소화하는 길고 긴 과정을 통과하면서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에 대해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는 단계에 접어들면, 나는 라 로시푸코 가 다음과 같이 말한 것에 동의할 수 있게 된다.

“우리의 불행은 사물들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있다.”

물론 내가 이 말을 잘못 이해하여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만 평가해서는 곤란할 것이다. ‘긍정적으로만 생각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새로운 독재적 요소가 될 수 있고, 객관적 사실을 왜곡하여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만 바라보도록 할 수 있는 위험을 안고 잇다. 빛과 어둠, 기쁨과 아픔 모두가 우리의 삶에 속하는 것이다. 이렇게 대립되는 요소들이 우리의 삶에 공존하고 있음을 받아들이고 그것들과 화해할 때, 나는 나의 삶에 대해 아직까지는 나를 행복하게 만들지 못하고 있지만 앞으로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는 평가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

 

 

 

 

두려움 봉쇄

 

두려움도 하나의 의미를 지니고 있고, 나에게 어떤 것을 말하고자 한다. 두려움이 없다면, 나는 절제를 모르고 나 자신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할 것이다. 그런데 두려움 자체도 자주 나를 제대로 살아가지 못하게 봉쇄한다. 그러한 경우 두려움에 굴복하면, 두려움은 나를 잘못 설정된 인생관으로 이끌 수 있다. 두려움은 자주 완벽주의와 연관된다. 나는 나를 웃음거리로 만들지나 않을까, 잘못을 범하지만 않을까 두려워한다. 나는 혹시 말을 더듬지나 않을까,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말을 하지나 않을까 두려워 사람들 앞에 나서서 말하는 것을 신뢰하지 못한다. 혹시 중도에서 멈추어 서지나 않을까 두려워 사람들 앞에서 무엇을 읽는 것을 두려워한다. 이런 종류의 두려움은 언제나 나 자신에게 지나치게 많은 것을 요구하는 데에서 유래한다.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최종 원인은 교만이다. 두려움과 대화하여 이런 사실을 알아내면 나는 겸손한 자세로 나아갈 수 있다. 나는 나의 한계, 약점들 그리고 잘못들과 화해하게 될 수도 있다.

“나는 웃음거리가 되어도 괜찮아. 내가 모든 것을 알아야만 하는 것은 아니야.”

그러나 어떤 잘못 설정된 삶의 자세를 알려 주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불가피하게 사람과 함께하는 두려움들도 있다. 외로움에 대한 두려움, 상실에 대한 두려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누구에게나 어느 정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존재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 두려움이 특별히 강하게 작용한다. 그러한 경우 이 두려움과 대화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 나는 결국 한 번은 죽을 거야.”

두려움은 내가 죽음을 받아들여 화해하고 내가 결국 죽을 존재란 것을 인정하도록 하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다. 만약 내가 두려움의 저 깊은 밑바닥까지 내려가면, 그리고 그 두려움을 인정하면, 나는 두려움의 한가운데서 하나의 깊은 평화를 느낄 수 있다. 그러면 두려움은 평정, 자유 그리고 평화로 변한다.

 

 

 

 

부모로부터의 상처

 

뿌리를 깊이 뻗고 있는 나무만이 높이 자라서 가지들을 활짝 펼칠 수 있다. 부모님은 우리에게 뿌리를 제공하는 분들이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우리에게 상처를 주고 다치게 하는 경우가 있을지라도, 그들은 우리를 먹여 살리는 뿌리를 형성하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아들이 어머니의 뿌리를 자르고 따로 격리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 만약 그가 그렇게 한다면 뿌리를 잃게 되어 그의 나무는 말라 버리고 말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아들이 나무가 어머니의 나무와 함께 자라는 것도 문제가 된다. 어머니의 나무와 너무 가까이 있으면 그 그늘에 가리어 아들의 나무가 충분히 자랄 수 있는 공간을 가질 수 없게 된다. 어머니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사람, 어머니로 인해 마음대로 조종당하지 않고 대화를 할 수 있는 사람, 언제나 어머니에게 맞추느라 시달리지 않고 어머니와 함께할 수 있는 사람만이 제대로 자랄 수 있다.

 

 

 

새로 태어남

 

우리는 삶 안에서 언제나 다시 태어나야 한다. 그래야 삶이 생기를 갖게 된다. 우리가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것을 완전히 깨트리는 위기는 새로운 탄생을 위한 하나의 기회가 될 수 있다. 우리가 빠져들어 있는 이 불길은 우리 안에 태어나고자 하는 새로운 어떤 것을 드러내는 표상이 도리 수 있다.

 

 

 

두려움을 넘어서

 

실리학자 융은 우리가 언제나 두려움과 신뢰, 공격성과 사랑, 슬픔과 기쁨, 약함과 힘 등 양 극단의 감정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우리는 자주 두려움과 같은 어느 한 쪽 극에 고정되어 있다. 그러면 두려움은 지속적으로 우리가 다음과 같은 느낌을 갖도록 한다.

“나는 이것을 할 수 없어. 나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어.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나는 나를 웃음거리로 만들고 말 거야.”

나는 이 두려움이 내게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물어 볼 수 있다. 또한 나는 이 두려움에 대해 시편 118편의 구절을 대입할 수도 있다.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니 두려울 것 없어라. 사람들이 나에게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시편 구절이 두려움을 쉽게 몰아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내가 내 안에 깊이 숨어 있는 신뢰를 만나도록 해줄 수 있다. 내 안에는 두려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신뢰도 언제나 들어 있다. 성서구절은 나로 하여금 내 안에 이미 들어 있는 것과 만나게 해준다. 이를 통해 이미 내 안에 있는 신뢰가 의식세계로 떠오르고 성장해 나갈 수 있다.

이것은 나의 두려움을 상대화하게 된다. 이러한 방법은 나를 균형 갖춘 사람이 되게 한다. 이것은 부정적인 생각이 내 안에 자리잡아 나를 지배하는 것을 막아 준다.

나의 생각을 다스려 나가는 또 하나의 방법은 그것에 대해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하는 것이다. 오늘날 심리치료사들의 상담실이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무엇보다 우리가 지닌 부정적인 감정, 갈망, 약점, 그리고 죄 등에 대해 마음을 열고 가까이 있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기를 꺼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생각을 혼자 마음에만 품고 외로이 살아가고 있다. 이들은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생각을 억압한다. 그러나 억압받는 생각은 내부에서 부글부글 끓기 시작하여 언젠가는 뚜껑을 부수고 튀어나오기 마련이다. 내부에 들어 있는 생각을 토해내는 것은 위험하고 파괴적인 요소들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수도자들은 말한다.

 

 

 

영혼의 깊숙한 곳

 

여류시인 마리아 폰 에브너 – 에쇤바흐 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불행이 다가올까 봐 두려워하기 때문에 마음의 평안을 잃고 있다가 마침내 불행이 찾아오고 나면 대부분 그 속에서 걱정으로 잃어버렸던 평안을 되찾는다.”

많은 사람들이 다가온 행복이 오래 지속되지 못할까 염려 하느라 그 행복을 제대로 즐기지 못하고 만다. 이 말은 폴리크라테스 가 한 유명한 말이다. 그는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아름다운 반지를 잃어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에 그 반지를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행복해할 수 없었다.

행복의 한가운데서 앞으로 다가올지도 모르는 불행에 대한 염려에 시달리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몹시 염려하던 일이 다가오면 우리가 지녔던 환상들이 깨어지고, 우리는 그렇게도 두려워하여 그런 상황에 놓이지 않으려고 노심초사했던 삶의 최저점에 놓인다. 그러나 바로 이 점에서, 우리 영혼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 우리는 평안을 찾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우리는 고요 속에 평화를 발견하게 되고, 평화 속에서 행복에 대한 어떤 예감을 갖게 된다.

 

 

 

 

삶의 길

 

부모는 우리에게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언제나 주지는 않았다. 그렇다 할지라도 그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던지는 일은 그만두어야 한다. 그들이 우리에게 준 좋은 것들에 대해 감사를 드려야 한다. 우리는 그들로부터 많은 것들을 받았다. 그들이 우리 삶의 뿌리가 되어, 이것으로부터 우리는 오늘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이 뿌리들이 없다면 우리 삶의 나무는 말라 죽고 말 것이다.

부모가 우리에게 준 것을 받아들이고 우리의 삶이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해, 부모가 가졌던 한계와 삶의 역사를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만약 우리가 부모를 이해하면, 우리는 그들을 단죄하지 않게 된다. 우리는 그들을 그들의 가족 역사 안에서 처했던 갖가지 복잡한 사항들과 함께 보게 된다. 우리는 그들이 우리에게 주지 못한 것과 우리에게 상처를 준 것들을 그들 곁에 놓아 두고, 이제 더 이상 그것 때문에 그들을 원망하지 않게 된다.

자신의 운명에 대한 책임을 언제나 부모에게 전가하고 자신은 조금도 책임지지 않으려는 사람은 내적, 외적으로 자신의 본질적인 모습을 찾아내지 못하게 될 것이고, 자신을 삶으로 인도하는 길을 결코 발견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울어야 할 근거가 전혀 없는 사람은 누구인가

 

프리드리히 니체 는 “부모로부터 상처받지 않은 아이가 있겠는가?” 라고 말했다. 이미 아이를 낳아 키우고 있는 사람들을 포함하여 우리 모두는 부모의 아들이거나 딸이다. 우리 모두는 우리의 가족사를 지니고 다니며, 다른 사람들이 살아온 역사의 한 부분을 이룬다. 우리가 처음부터 부모와 함께 하는 역사는 언제나 긍정적인 면과 고통스런 면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삶의 길을 찾아내느냐, 아니면 살아온 삶의 역사에 지배되느냐 하는 것은 우리가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를 어떻게 치유하느냐에 달려 있다. 자신이 타인으로부터 만들어진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자신 안에 들어 있는 가능성들을 발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다. 그는 자신의 삶이 원하는 대로 진행되지 않아도 그 책임을 부모에게 전가하지 않는다. 우리가 체험한 모든 상처 속에서 자신 안에 가장 깊이 들어있는 본질적인 존재를 발견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그 동안 부모와 가졌던 관계를 올바르게 파악하고, 그 안에 존재하는 우리 자신을 키워온 긍정적인 요소들과 고통 받고 병들게 했던 요소들을 구분해낸다면, 우리의 참된 자아 속에 들어 있는 가장 깊은 신비를 만나게 될 것이다. 자신이 받은 상처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용기를 지닌 사람은 그러한 상처들을 통과하여 부모로부터 받은 긍정적인 뿌리들도 발견한다. 왜냐하면 부모는 상처만 준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것들도 많이 주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부모가 살아온 삶의 역사와 소질, 그리고 능력을 함께 나누어 갖고 있으며, 그들의 일부를 물려받은 존재이다. 아버지나 어머니로부터 받은 상처 때문에 일생 동안 부모를 원망하면서 사는 사람은 부모가 지닌 긍정적인 뿌리도 덩달아 잘라내고 마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그러면 그의 삶은 뿌리를 잃고 허공에 떠 있게 된다.

 

 

 

 

상처의 역할

 

상처를 통해 우리는 본질적 핵심으로 나아가게 된다. 우리가 그 동안 체험한 수많은 상처에도 이 핵심은 여전히 손상되지 않고 건강하게 존재한다. 만약 우리가 이 본질적 핵심을 발견하면 부모 원망을 그만두게 된다. 우리는 받은 상처에 머물지 않고, 상처를 통해 우리의 참된 본질, 원초적인 자아를 보게 된다. 우리가 어렸을 때 꾸었던 이상적인 삶에 대한 꿈을 살펴본다면, 어렸을 때 일생 동안 수행하기를 원했던 직업이 무엇이었던가를 살펴본다면, 우리는 왜곡되지 않은 우리의 원초적인 핵심에 도달하게 된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 볼 수 있다.

내가 미장이나 빵을 만드는 사람이 되고자 했을 때, 그 소망 안에 가졌던 본래의 목적이 무엇이었을까?

미장이가 도고자 한 소망 안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안식처와 같은 것이 될 수 있는 어떤 집을 만들고 싶은 생각이 들어 있었을 것이다. 빵을 만드는 사람이 되고자 한 소망은 다른 사람들의 삶을 달콤하게 해주고자 하는 생각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삶의 자취를 발견하는 또 하나의 길은 우리가 어린이로서 언제나 즐겨 놀곤 하던 놀이들이 무엇이었던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어느 부인은 소녀시절에 인형을 가지고 즐겨 놀면서 옷을 예쁘게 입히기도 하고 돌보기도 했다. 그녀는 이러한 놀이를 통해서 다른 사람을 보호하고 염려하며 돌보고자 하는 욕구를 표현한 것이다. 우리는 또한 어린 시절에 즐겨 들었던 동화들이나 큰 감동을 받았던 역사적 인물이나 사건이 무엇이었던가를 살펴보는 것을 통해서도 우리 삶의 자취를 발견할 수 있다. 어느 소녀는 난민들에게 언제나 큰 관심을 가졌었다. 이 소녀에게서 자신을 근원적인 본질로 인도하는 삶의 길은 바로 난민들을 받아들이는 일이었다.

 

 

 

 

어떤 것도 억압하지 마라

 

자신을 억압하는 것은 어떤 도움도 되지 못한다. 자신의 상처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그 상처에 의해 지배된다. 상처는 그의 삶의 방향을 왜곡시킨다. 그는 자신이 고유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실제에서는 오직 자신이 어린 시절에 받았던 상처를 되풀이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상처로 인해 결정된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의 상처를 바라보기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닌 긍정적인 자원들, 어린 시절부터 우리의 영혼이 마셔온 원천들, 그 안에서 우리의 참된 자아의 형상이 표현된 꿈들도 바라보아야 한다. 만약 우리가 하느님께서 본래 원하셨던 우리 자신의 본질과 접촉하게 되면, 우리는 피어나게 되고, 그러면 우리 안에서 새로운 에너지가 흘러나오게 되고, 우리의 삶이 살아볼 만한 가치를 지닌 것임을 느껴 이 일회적인 삶에 대한 흥미를 가지게 된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삶의 길을 발견했는가에 대한 시금석은 언제나 그 사람 안으로 삶이 흘러 들고 있는지, 그리고 그로부터 살이 흘러나오는지에 대한 물음이다.

예를 들어 내 삶의 길이 다른 사람을 위해 수고하는 것이라면, 나는 그러한 일에 흥미를 가질 것이고, 그것은 나에게도 좋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러나 내가 만약 어머니로부터 받은 상처를 잊기 위해, 더 나아가 내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관심과 인정을 받지 못한 아픔을 진정시키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돕는다면, 나는 얼마 가지 않아 그 일에 대한 흥미를 잃어 에너지를 쇠진하게 될 것이고 마침내 지쳐 나가떨어지고 말 것이다.

 

 

 

 

 

진주를 발견하다

 

우리는 언젠가 한 번은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을 지고 가야 한다. 이것은 또한 우리가 어린 시절에 받은 상처들과 화해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면 그 상처들은 삶의 원천으로 변화될 수 있다.

그러면 빙겐의 힐데가르드 가 말한 대로 우리의 상처들이 진주로 변화될 것이다. 우리 자신의 상처들을 곰곰이 살펴보면, 우리리 자신을 좀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이렇게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에 대해 우리 자신을 더 이상 단죄하지 않게 된다. 우리가 이러한 상처를 가지고 권위를 가진 존재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고 쉽게 다치며 초조해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이러한 점을 이해하고 나면 우리는 자책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이해하는 데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나의 상처들 속에서 나의 삶에 매우 소중한 진주와도 같은, 나에게 천부적으로 주어진 소질들을 발견해야 한다. 상처 속에는 언제나 기회도 들어 있다.

예를 들어, 내가 다정함에 대한 체험 부족으로 굶주려 있으면, 나는 사랑의 결핍으로 고통 받는 모든 사람에 대해 섬세한 관심을 가질 수가 있다. 그리고 나는 사랑과 친밀함에 대한 갈망을 충분히 채우지 못했기 때문에, 영성의 길을 걸어왔다. 나는 나를 잘 정비하고 돌보는 것으로 자족하여 주저앉지 않으며, 하느님께 대한 동경으로 생기를 갖는다. 바로 나의 상처 속에서 삶의 길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나의 상처들은 내가 고유한 카리스마를 발견하고 그것을 살아가도록 하는 하나의 계기가 된다. 이러한 방법으로 나의 상처는 나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축복의 샘이 된다.

 

 

 

 

한계에 대해 배우자

 

어머니는 아이에게 안식처와 원초적 신뢰를 선사한다. 어머니는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갓난아기가 만나는 첫 사람이고, 이 세상은 좋은 것이고 믿을 수 있는 것이며 세상과 사람들의 선의에 자신을 믿고 맡겨도 된다는 것을 아이에게 알려주는 존재이다. 어머니는 아이로 하여금 자신이 있는 그대로 존재해도 되고 갈망을 가져도 되며, 그 갈망이 채워진다는 것을 체험하게 한다. 어머니는 아이에게 다정함과 사랑을 보여 주고, 그가 환영 받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도록 하며, 아무런 조건도 없이 받아들여지고 사랑 받는다는  사실을 체험하게 한다.

갓난아이는 자신의 삶을 튼튼히 지탱해 줄 토대로서 이러한 근원적 체험을 필요로 하고, 그 위에 자신의 삶을 펼쳐 나갈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어머니도 이러한 과제를 언제 어디서나 완벽하게 수행해 나갈 수는 없다. 완벽한 어머니가 있다 해도 그것이 아이에게 그렇게 좋은 일은 아닐 것이다. 갓난아이는 어머니의 무한한 사랑을 알고 체험해야 할 뿐 아니라 어머니가 가진 한계도 알아야 한다.

 

 

 

 

혼자 있는 것은 하나의 축복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혼자 있는 것을 두려워한다. 이들은 혼자 있게 되면 불안해한다. 이들은 자신의 주변에 지속적으로 누군가가 있어 주기를 원하고,그래야 자신이 살고 있음을 느낀다. 그렇지만 혼자 있다는 사실이 하나의 축복이 될 수도 있다.

고독 속에 있을 때 나는 어떤 요소들이 나를 인간으로 존재하게 하는지를 느끼고, 내가 모든 것들에 동참하고 있음을, 모든 피조물과 함께하고 있음을, 최종적으로는 이 모든 것 안에 계신 하느님과 함께하고 있음을 느낀다. 만약 고독의 천사가 당신을 인간으로 존재하는 가장 근원적인 체험으로 인도해 가면, 고독과 혼자 버려져 있는 데 대한 모든 두려움이 당신에게서 사라질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혼자 있는 그곳에서 모든 것과 하나임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당신은 혼자 있음을 소회되어 외로움에 빠져드는 것이 아니라, 고향 또는 따뜻하고 포근한 집에 있는 것으로 체험한다. 고향에 있는 것 같은 체험은 오직 신비가 함께하는 곳에서만 가능하다.

 

 

 

 

우리 안에 하느님이 거주하는 장소가 있다

 

“깨달은 사람을 노예로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들은 노예가 되어도 자유인이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행복하기 때문이다.” (앤소니 드 멜로)

 

내면의 빛을 본 사람은, 하느님과 하나로 일치한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다. 어떤 외적 사슬도 이들로부터 행복을 빼앗을 수 없다. 그러므로 행복으로 인도하는 참된 길은 내면의 길이고, 프라톤 이 말하는 대로 관상의 길이다.

우리 안에는 하느님께서 살고 계시는 공간이 있다. 하느님께서 살아가시는 우리 안의 그 공간에서 우리는 자유롭고 건강하다. 그곳에서 우리는 행복하다. 그곳에서 우리는 빛 속에 있다. 그곳에서는 노예가 되게 하는 어두움도 우리를 불행으로 몰아 넣을 수 없다. 이 내면의 공간에는 이 세상과 세상의 권력이 작용할 수 있는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곳은 하느님께서 다스리시는 곳이다. 하느님을 지배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느님은 최종적으로 우리의 참된 행복이고, 아무도 빼앗아갈 수 없는 행복이며, 동시에 우리가 소유할 수 없는 행복이다. 하느님은 자신을 소유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서 살고 계신 하느님은 또한 우리로부터 벗어나 계시는 분이기도 하다. 그분은 우리 안에 계시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분이기도 하다.

 

 

 

 

치유를 가져오는 위기

 

아픔을 깨끗이 씻어 마음을 가볍게 해주는 눈물이 있다. 그러나 또한 눈을 흐려 놓기만 하고 아픔을 해소하는 데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눈물도 있다. 이 경우에는 눈물이 자신의 아픔만을 맴돌기 때문에 그렇다. 슬픔이 북받쳐 흘리는 눈물은 치유를 가져온다. 그러나 자기 연민에서 흘리는 눈물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고통 안으로 빠져들어 헤매게 한다. 이 눈물은 아픔을 씻어 주기는커녕 우리를 덮쳐 휩쓸어 간다.

 

 

 

 

변하지 않는 사람은 질식한다

 

새로 시작하는 것은 모두 다 처음에는 두려움을 동반한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익숙하고 편안하게 지내온 옛 것들이 부서지기 때문이다. 그것들이 부서지는 동안에 앞으로 나에게 다가올 것이 무엇인지를 나는 잘 모른다. 이것이 내 안에 불안한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옛 것이 부서지는 과정에는 동시에 새로운 것, 지금까지 있어 본 적이 없는 것, 한 번도 보지 못한 것에 대한 약속이 들어 있다. 언제나 다시 일어나 새로움을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늙고 질식한다. 우리 안에서 새로운 삶의 가능성들이 언제나 다시 일어나려 한다.

 

 

 

 

나 자신의 마음 안에서

 

“삶에는 본래 오직 두 종류의 시련이 있을 뿐이다. 그 중 하나는 간절히 원하는 바를 얻지 못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원하는 바를 얻는 것이다.” (앤소니 드 멜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소망이 이루어지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 가지 소망이 이루어지면 여러 다른 소망들이 생겨난다. 그리고 이미 채워진 소망은 흔히 진부하고 밋밋한 느낌을 준다. 우리는 대학입학시험에 합격하기를 학수고대했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을 때 우리는 잠시 동안 행복했다. 그러나 2주가 채 지나지 않아 우리는 이것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느끼게 되었다. 대학입학시험 합격이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가졌던 긴장을 풀어 놓을 수는 있었다. 그러나 행복해지기보다는 오히려 우울함과 같은 부정적인 심리적 느낌을 갖게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소망들이 채워지지 않기 때문에 불행을 느낀다고 여긴다. 이들은 자신의 소망들이 반드시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생각에 고착되어 있다. 이들은 자신의 행복이 이 소망들의 성취에 좌우되도록 함으로써 참된 행복에 대해서는 눈이 멀어 있다. 이들은 행복을 구체적인 어떤 선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선물과 행복이 동일한 것은 아니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떻게 그 선물을 받아 들이느냐 하는 것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참으로 행복을 찾을 수 있는 곳에서 행복을 찾으려고 애쓰기보다는 자신이 불행한 원인이 마치 하느님이나 자기 삶에 있기나 한 것처럼 비난의 화살을 던진다. 행복을 참으로 발견할 수 있는 곳은 오직 나 자신의 마음이다.

 

 

 

 

일어서라

 

우리는 자주 지금 자신이 살고 있는 삶에 대해 만족하지 못한다. 또한 우리는 지금까지 살아온 익숙한 삶을 털고 일어서는 것, 하나의 내적 외적 변화를 시도하는 것을 두려워 한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다시 일어나 앞으로 걸어나갈 준비가 되어 있을 때에만 삶을 살아가게 된다.

 

 

 

 

 

 

행복은 퍼져 간다

    사랑을 주고, 사랑을 받고

 

 

 

행복은 퍼져간다

 

“기뻐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다른 사람을 다치지 않게 하는 최선의 길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많은 사람들이 이웃을 사랑하려고 노력한다. 이들은 이웃을 사랑하는 첫걸음은 그들에게 고통을 주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들이 다른 사람들을 다치지 않게 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그만큼 더 자기 자신이 다치게 된다. 그러면 이렇게 해서 생긴 상처는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다른 사람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주고, 겉으로 꾸미는 친절한 자세 속에 숨어 있다가 결국 그것을 뚫고 나와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하는 화살을 쏘아댄다.

다른 사람들을 다치지 않게 하는 가장 좋은 길은 스스로 기쁘게 사는 것이고, 자신이 받은 것에서 행복을 느끼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받아들여 마음의 평화를 누리게 되면, 다른 사람을 다치지 않게 하도록 자신을 감시하고 억압할 필요가 없다. 그러면 우리가 자신에 대해 느끼는 좋은 감정이 다른 사람에게도 전달된다.  그러면 우리가 우리 안에서 느끼는 기쁨이 다른 사람도 일으켜 세울 수 있다.

행복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상처를 입은 사람이 자신의 상처를 더 이상 느끼지 않으려고 애쓰다 보면 다른 사랑을 다치게 한다. 행복한 사람은 자신의 행복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자신이 행복한 사람임을 드러낸다. 기쁨은 다른 사람들에게로 흘러나간다. 행복은 퍼져간다. 이것이 우리가 강한 의지로 많은 힘을 들여도 잘 되지 않는,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하고 아프게 하는 행위가 발생하지 못하도록 방지하는 최선의 길이다.

 

 

 

 

감사는 관계를 맺는다

 

우리가 어느 한 사람에게 감사하게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를 아무런 조건도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변화시킬 필요가 없다. 그는 지금 있는 그대로 충분히 가치 있는 존재이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감사를 표하면, 이들은 자주 이러한 것을 알아차린다. 우리가 어떤 사람에 대해 고맙게 생각하는 동안에 그 사람을 아무런 조건도 없이 인정하는 긍정적인 느낌이 우리에게서 뻗어나가, 그는 자신이 전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느낌을 갖는다.

 

 

 

 

참된 위로

 

나는 어디선가 읽은 좋은 말을 동원함으로써 고통 받는 사람을 참으로 위로할 수는 없다. 그를 진정으로 위로하려면, 그 사람으로 들어가야 한다.어둠과 분열, 그리고 고통으로 가득 찬 거의 집안에 있는 것을 견뎌내야 한다. 만약 당신이 슬픔으로 가득 찬 그의 집안으로 들어서기를 감행한다면, 슬퍼하는 그 사람은 당신을 위로의 천사로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는 당신에게서 하느님의 천사가 마치 ‘하늘 높은 곳에 뜬 구원의 태양’ (루가 1, 78 참조) 처럼 다가오는 것을 체험할 것이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위로는 무엇보다 상실이 불러일으킨 무의미를 거슬러 의미를 제공하는 말을 하는 데에서 발생한다. 이때 하는 말은 단순히 달래기 위해 동원하는 공허한 내용을 담고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러한 말은 그 사람에게 가서 닿지 않고 그냥 지나쳐 버리고 만다. 공허한 위로의 말을 건네는 것은 그에게 위로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나 자신도 확신하지 못하는 말들을 동원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런 의미도 전달하지 못하고 의지할 만하지도 않는 말을 입에서 내놓는 것일 뿐이다.

위로를 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다가가서 말을 하는 것이고, 그에게 와 닿는 말을 하는 것이며, 그의 마음 깊숙이 파고드는 매우 개인적이고 친밀한 말을 하는 것이다. 위로를 한다는 것은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달되는 말을 발견하는 것이고,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건네는 것이지, 단순히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화려하지만 속이 빈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위로를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심금을 울려 그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 주고, 그가 굳건히 설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주는 것이다.

 

 

 

 

동정심의 한계

 

당신이 어떤 사람에게 도움을 주려고 한다면, 당신은 그와 함께 느끼고 함께 고통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고통에 일정한 거리를 둘 줄도 알아야 한다. 만약 당신이 그의 고통에 함께 몰입해 들어간다면, 그의 고통에 거리를 전혀 두지 않는다면, 그러면 당신은 그를 그 고통으로부터 구출하기는커녕 함께 그 고통의 바다에 빠져들고 말 것이다.

거리를 전혀 두지 않는 동정심이 있다. 그러나 성서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동정심은 그것과는 다르다. 내가 나의 영혼 안에 중심을 잡고 안정되게 있을 때에만, 나 자신 안에 굳건한 발판을 가지고 있을 때에만, 하느님 안에서 안식을 누리고 있을 때에만, 나는 다른 사람에게 나의 마음을 열어 보일 수 있다.

만약 내가 다른 사람에게 거리를 전혀 두지 않는 무한한 동정심을 느낀다면, 나 자신이 직접 이 세상의 악함에 대해 깊이 탄식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 고통을 줄이지는 못할 것이다.

 

 

 

 

자기 곁에 머물러라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 끊임없이 판단하는 자신을 체험한다. 비록 소리 내어 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의 마음은 다른 사람에 대해 지속적으로 말한다. 이러한 판단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곁에 있지 못하게 한다. 언제나 다른 사람 곁에 있게 한다. 우리는 우리의 실상을 마주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언제나 다른 사람들에게서 그들의 잘못을 찾아 내려 한다. 그러나 그러한 것으로는 우리가 결코 우리 자신에게로 오지 못하고, 결코 내면의 평안을 누리지 못하게 된다.

 

 

 

 

집착하는 사람은 삶을 거부하게 된다

 

평정은 또한 자신을 놓아 주기를 요구한다. 나는 나 자신을 움켜쥐어서는 안 된다. 걱정이나 두려움, 우울하고 부정적인 감정조차 붙들어서는 안 된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상처에 자신을 얽어 맨다. 그들은 자신의 상처를 결코 놓아 보내지 못한다. 그들은 이 상처를 자신을 다치게 한 사람들을 거슬러 고발하는 도구로 사용한다. 그러나 그러한 행위를 통해 그들은 최종적으로는 자신의 삶을 거부하고 만다. 우리는 상처와 아픔도 내보내야 한다. 우리는 우리를 자신으로부터 거리를 두게 하고 물러나게 하며 우리 삶을 저편의 한 지점에서 바라보도록 가르치는 평정의 천사를 필요로 한다.

 

 

 

 

사랑을 받고 – 사랑을 하고

 

만약 우리가 우리 자신을 소모하기를 멈춘다면, 우리에게 다가오는 사랑을 받아들인다면, 점점 더 나약함과 공허함으로 나아가는 우리의 길도 멈추게 될 것이다. 우리는 다만 눈을 뜨기만 하면 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사랑을 건네고 관심을 보이고 있다. 우리는 이것을 붙잡기만 하면 된다.

우리는 부모가 우리에게 건네는 사랑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 각자는 아버지나 어머니가 소유한 것의 일부를 받아들일 자격이 있다. 자녀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는 부모는 없다. 부모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이 비록 제한되어 있었다 하더라도, 우리 모두는 부모로부터 많은 것을 받았다. 우리는 받았기 때문에 줄 수 있다.

 

 

 

 

 

서로 받아들임

 

서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어느 누구라도 다른 사람을 자기 자신을 위해서만 이용하지 않고, 서로를 위해서 존재하며, 좋은 관계 속에서 함께 도우며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것은 각자가 스스로 잘 설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내가 나 자신을 잘 받아들일 수 있을 때에만, 나 자신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을 때에만, 나는 비로소 친구를 받아들일 수 있다.

 

 

 

 

삶의 충만

 

어느 한 사람을 축복한다는 것은 그에 대해 좋은 말을 하고, 그에게 좋은 말을 해주고, 하느님으로부터 그에게 부여된 좋은 점들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그에게 있는 좋은 점들을 인정함으로써 그는 이미 자신에게 있는 좋은 점들과 만나게 된다.

축복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해 좋은 말을 하는 것만이 아니라, 좋은 말로 그에게 다가가는 것을 의미하고, 그를 일으켜 세우는 좋은 말을 그에게 들려 주는 것을 의미한다. 유다인들에게서 축복은 삶의 충만을 의미한다. 하느님으로부터 축복받은 사람은 자신이 필요로 하느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만약 내가 어느 한 사람을 축복한다면, 나는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좋은 것이 그에게 주어지기를 바라고, 하느님께서 그에게 충만한 삶을 주시기를 바라며, 그 자신아 다른 사람들을 위한 또 하나의 축복의 샘이 되기를 바란다.

만약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축복한다면, 축복은 우리로부터 우리의 주변세계로 퍼져 나간다. 우리는 그들을 어전과는 다르게 만나게 되고, 새로운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게 된다. 우리는 우리의 축복을 통해서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축복을 전달하는 작용을 한다. 그러면 우리에 대한 좋은 말이 퍼져 나올 것이고, 우리는 축복받은 존재가 될 것이다.

 

 

 

 

사랑의 눈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먼저 사랑으로 가득 찬 감정을 가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랑하다’를 뜻하는 독일어 단어 ‘Lieben’은 ‘좋다’ 를 의미하는 ‘liob’에서 유래한다. 사랑하고 선하게 대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대상이 좋은 것, 선한 것이라는 믿음이 선행되어야 한다. 사랑은 먼저 대상을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을 필요로 한다. 사라의 천사가 당신에게 새로운 눈을 선사하여 당신이 주변의 사람들과 당신 자신을 새로운 빛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당신 자신과 다른 사람들 안에 들어 있는 좋은 핵심을 발견할 수 있도록 당신의 천사에게 요청하라.

 

 

 

 

선한 것은 주변에 좋은 빛을 비춘다

 

우리를 좋게 생각하는 사람은 선한 사람이다. 선한 사람으로부터는 주변으로 따뜻한 기운이 뻗어나간다. 그의 선한 눈빛과 선한 말에서 사람들은 그의 마음이 선함을, 그 안에는 선한 것으로 가득 차 있음을 인지한다. 선한 것으로 가득 차 있는 영혼은 자신이 그러하다는 것을, 좋은 정신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자기 자신과 일치하여 평안을 누리고 있다는 것을 주변에 알린다. 자신의 영혼이 선함을 체험한 사람은 다른 사람 안에도 들어 있는 선함에 대한 믿음을 가진다. 그가 다른 사람에게서 선함을 보기 때문에, 그 자신도 다른 사람들로부터 선한 사람으로 대접받는다. 그는 자신의 선한 태도로 다른 사람 안에 들어 있는 선함을 들어올린다.

 

 

 

 

 

 

욕심 내어 서두르지 마라

그냥 살아라

    긴장을 풀고 고요하고 편안하게 쉬라

 

 

 

 

억압된 동경

 

자신의 동경을 억압하는 사람은 그것을 알코올 중독이나 마약 중독과 같은 병적 욕망으로 대체한다. 병적 욕망은 언제나 인정받지 못한 동경과 억압한 어떤 것을 드러내는 표현이다. 병적 욕망은 그것에 사로잡힌 사람으로 하여금 언제나 새로운 욕구를 충족시키도록 몰아간다. 그는 지속적으로 술을 마시거나 마약을 복용해야 한다.

일에 중독된 사람은 언제나 일에 몰두하지만 결코 만족할만하게 일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언제나 더 많은 일을 해야만 한다. 자신의 병적 욕망에 의해 내몰리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시달리고 있는 불안정은 그들을 지배하는 병적 욕망을 드러내는 한 표현이기 일쑤다. 병적 욕망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결코 만족할 줄 모르게 한다.

 

 

 

 

우리의 불안정한 마음

아우구스티노 에게 인간은 본질적으로 언제나 동경하는 존재이다. 인간은 무엇을 성취하기를 동경하고, 무엇을 소유하기를 동경하고, 친구를 가지기를 동경하며, 자기를 사랑해 줄 사람을 동경한다. 그러나 이렇게 모든 것을 동경하는 가운데, 인간은 최종적으로 하느님을, 참된 고향을, 절대적인 사랑을, 절대적인 안식을 동경한다.

아우구스티노 는 안식과 고향을 몹시 동경한 사람이다. 그는 <고백록>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누가 나로 하여금 당신 안에서 안식을 누리게 할 수 있을까? 누가 당신으로 하여금 내 마음 안에 오시도록 하여 내가 저지른 모든 죄를 잊고 당신을 품어 안을 수 있도록 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 스스로 답을 내리고 있다.

“우리의 마음이 당신 안에서 휴식하기까지 마음은 언제나 불안정하나이다.”

 

 

 

 

밀랍 날개

 

오늘날 영적 길들에 대해 너무 일찍 대단한 매력을 느끼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 이들은 자신을 인식해 나가는 어려운 과정이나 자신의 어두운 부분과 만나는 힘든 과정을 생략하고도 이러한 길들을 걸어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수도자들은 우리를 하늘나라로 인도하겠다고 나서는 영성을 조심하라고 경고한다.

우리도 조심하지 않고 경솔하게 판단하고 행동하면 밀랍으로 만든 날개를 달고 태양에 너무 가까이 다가갔다가 땅에 떨어지고 만 이카로스 처럼 되기 쉽다. 우리가 자신의 실제 모습을 만나기도 전에 만들어 단  날개는 다만 밀랍으로 된 것일 뿐이다. 이것은 우리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다.

 

 

 

 

육체와 영혼

 

평안은 영혼에서부터 시작한다. 우리 안에 있는 내면의 세계가 먼저 평안해야 한다. 그러면 그것이 몸을 통해 표현 된다. 마음이 고요해지면, 우리는 고요함과 평안 속에서 삶을 엮어가게 되고, 우리의 모든 행위가 내면의 고요함과 평안으로부터 흘러나오게 되며, 그러면 우리는 하느님의 창조적 고요함과 평안에 함께하게 된다.

 

 

 

 

고요하게 머물라

 

고요함을 누리기 위해서는 내면에 머물러 있을 필요가 있다. 바쁜 마음으로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것을 그만두고 멈추어 서야 한다. 멈추어 서서 나 자신 안에 머물러야 한다. 만약 내가 고요하게 있으면, 먼저 나 자신을 만나게 된다. 그러면 나는 더 이상 나의 불안정을 밖으로 몰아내지 않아도 된다. 그것이 내 안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불안정을 견디어내는 사람만이 고요함을 누리게 된다. 독일어에서 ‘고요함(Still)’ 은 ‘젖을 먹이다(stillen)’라는 동사와 연관된다. 어머니는 배고파 소리치는 아이에게 젖을 먹여 편안하게 있도록 한다.

나는 이와 같이 내적으로 소리치는 나 자신의 영혼을 진정시켜야 한다. 내가 더 이상 밖으로 이리저리 돌아다니지 않으면, 내 마음에 존재하는 배고픔이 자신을 알려온다. 이 배고픔은 먹을 것을 필요로 한다. 나는 어머니의 사랑으로 나의 마음에 다가가서 고요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자기 마음 안으로 들어가기를 두려워한다. 그들은 이곳 저곳으로 바삐 돌아다님으로써 자신의 마음을 피하려고만 한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계속해서 소리쳐댄다. 그래서 그냥 지나쳐가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마음은 관심을 원한다. 마음은 젖을 배불리 먹고자 한다.

 

 

 

 

의식을 존중하라

 

만약 내가나 자신의 삶을 스스로 꾸려간다면, 나에게 맞고 나에게 좋은 역할을 하는 일정한 형태를 내 삶에 제공 한다면, 나는 그와 동시에 삶에 대해 흥미를 가질 것이다.

그러면 나는 내 삶을 남으로 인해 살아가지 않고 나 스스로 살아간다는 느낌을 가지게 될 것이다. 아침에 어떻게 일어나고, 그 하루를 어떻게 시작하며, 어떻게 일하러 가고, 식사를 어떻게 하며, 하루를 어떻게 끝마칠 것인가를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할 수 있다.

어느 한 건강한 삶의 방식은 건강한 의식을 필요로 한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의식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는다면, 조절할 수 없고 건강하지 못하며 우리를 병들게 하는 의식들이 슬금슬금 기어들어올 것이다.

예를 들어 아침부터 서두르게 되어 아침식사를 급히 먹게 될 것이고, 언제나 직장에 늦을 것이다. 건강한 의식은 나로 하여금 질서정연하게 살아가게 하여 나에게 기쁨을 줄 것이고, 나 자신의 삶을 스스로 형성해 나가도록 할 것이다.

에르하르트 케스트너 는 아토스 산에서 관찰한 의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이 세상을 얻고자 하는 욕구 옆에는 언제나 옛날부터 내려오는 오래된 삶의 방식대로 살아가기를 바라는 욕구가 자리잡고 있다. 의식들 속에서 영혼은 편안함을 느낀다. 의식은 영혼이 그 안에서 살아가는 단단한 집이다. 영혼은 그 안에서 살아갈 수 있다…. 여기에는 먹을 음식이 가득 담긴 그릇들이 놓여 있고, 영적 봉헌을 할 제물들이 준비되어 있다. 영혼은 이곳에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데, 언제나 익숙한 제물과 익숙한 음식이다. 머리는 언제나 새로운 것을 원하지만, 가슴은 언제나 같은 것을 원한다.” (<거룩한 아토스 산의 시간을 알리는 북>).

건강한 의식은 삶에 신뢰, 안식처, 투명함을 제공한다. 그곳에서는 살아갈 수 있고, 고향처럼 편안하게 지낼 수 있다.

 

 

 

 

고요함과 평안은 인위적으로 만들 수 없다

 

현대인들은 고요함과 평안을 누릴 수 없기 때문에 이것을 참으로 동경하고 있다. 그래서 오늘날 내적 고요함과 평안으로 인도한다는 프로그램들이 넘치고 있다. 사람들은 심리학적 방법들이나 육체적 긴장이완 기술들을 통해 내적 고요함과 평안을 찾게 되기를 바라면서 그러한 방법들을 동원 하기도 한다. 그러나 고요함과 평안은 외적인 긴장이완 기술들만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영적 길의 결과이다.

 

 

 

 

근본적인 것과 접하라

 

묵상은 내면에 존재하는 평안의 장소에 도달하는 길이다. 묵상은 언제나 완전히 침묵하고 있어야만 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묵상을 무엇인가를 성취해야만 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자신에게 부담을 주어서는 안 된다. 묵상은 집중과 관련된 것이 아니다. 생각은 계속해서 일어난다. 이것을 완전히 정지시킬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에 관심을 두지 않으면, 말과 숨결로 자기 영혼의 깊은 바닥으로 점점 더 깊이 내려가면, 어느 순가에 우리 안에 깊은 고요가 찾아들 수 있다. 그러면 나는 지금 근본적인 것과 접하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된다.

 

 

 

 

행복으로 나아가는 카프카의 길

 

“이론적으로는 완벽한 행복의 가능성이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결코 파괴될 수 없는 영원한 것이 우리 안에 존재한다는 데에 대해 믿음을 가지되 그것을 만나려고 노력하지는 않는 것이다.” (프란츠 카프카)

 

유다인이고 시인인 프란츠 카프카가 행복으로 나아가는 길로 앞에 소개한 것은 매우 독특하다. 한편으로 우리는 우리 안에 결코 파괴도지 않는 존재가 있다는 것, 하느님이 우리 안에 거주하고 계신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애를 쓰지는 말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 안에 계시는 하느님을 명상이나 관상과 같은 방법들을 통해 만나고자 하는 것을 포기해야 한다. 우리는 하느님을 체험하거나 느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지 말고 우리 안에 계시는 그분께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 우리 안에 계시는 이 파괴될 수 없는 존재에 대한 생각과 믿음으로 이미 충분하다.  하느님께서 내 안에 살아 계신다는 생각과 하느님께서 살아 계시는 나의 내면 세계에 대해 이 세상은 어떤 힘도 쓸 수 없고 다치게 할 수도 없다는 생각은 나를 내적으로 자유롭게 만들고 내 안에 있는 행복을 발견하게 만든다.

카프카의 이 말은 하나의 역설이다. 만약 내가 행복을 느끼기를 포기한다면 나는 행복해진다. 만약 내가 명상적 방법이나 갖가지 수련기술들로 영원한 존재를 만나려는 시도들을 포기한다면, 나는 그 영원한 존재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된다. 내가 비록 느끼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영원한 존재는 내 안에 있다. 하느님을 체험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그분은 내 안에 계신다. 영원하신 하느님께서 내 안에 계신다는 믿음은 나에게 참된 행복을, 모든 체험을 넘어서는 행복을, 행복에 대한 모든 느낌을 넘어서는 행복을 선사한다.

 

 

 

 

삶에 대한걱정 – 삶의 목표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걱정거리들을 내려놓으라고 요청하신다.

“여러분은 무엇을 먹을까 혹은 무엇을 마실까 혹은 무엇을 입을까 하면서 걱정하지 마시오.” (마태 6, 31)

우리는 그 동안 삶의 과정을 충만 히 살아왔는지, 사람들로부터 충분한 관심과 사랑을 체험했는지, 너무 부족하지는 않았는지, 충분히 멋이 있고 잘나서 다른 사람들의 기대를 채우기나 했는지 등과 같은 생각을 끊임없이 하면서 골머리를 아프게 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런 것은 다 이방인들이 힘써 찾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먼저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으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이런 것들도 다 곁들여 받게 될 것입니다.”(마태 6., 32 이하) 오직 우리 스스로 우리 자신을 넘어서고 우리를 초월하는 목표를 향해 바라볼 때에만 우리의 삶은 건강해진다. 우리가 찾는 목표인 ‘하느님 나라’는 우리가 설정한 어떤 계획들이나 생각이 우리를 다스리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우리의 초자아 안에 내면화한 부모의 결정이 우리를 다스리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으며,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서 다스리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서 다스리시면, 우리는 참된 우리 자신을 만날 수 있다. 우리가 삶에서 성취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목표는 어떤 업적을 쌓아나가느냐 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존재하느냐, 그리고 어떤 모습으로 이 세상에 파견되느냐 하는 데에 있다.

 

 

 

 

흥분을 가라앉히라

 

만약 우리가 지나치게 흥분하거나 화가 난 경우에는 제법 긴 산책이나 조깅을 통해 그 불안정한 마음을 진정시키려 시도하는 것이 큰 도움이 된다. 나는 걸으면서 내적 불안정으로부터, 나를 이리저리 고민하게 하는 문제들로부터 서서히 자유로워질 수 있다. 덴마크의 종교철학자인 쇠렌 키에르케고르 는 떨쳐 버릴 수 없는 걱정은 없다는 사실을 체험했다. 조용히 달리면서 나를 온통 번잡하게 만드는 문제들로부터 서서히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조깅을 반드시 해내야 하는 부담스러운 과제로 여기거나 몇 킬로미터 이상을 반드시 뛰어야 한다고 목표를 경직되게 설정하는 경우에는 그러한 효과가 생기지 않는다. 나 자신을 달리는 움직임에 내맡겨야 한다. 나는 달리면서 내면의 움직임을 받아들여 그것을 고요하게 만들어 가야 한다.

산책을 한 후 방에 들어가서 조용히 묵상을 하기 위해 자리에 앉으면, 이전보다 훨씬 더 고요하게 있을 수 있다. 모든 내적 불안들이 다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특히 오늘날과 같이 바삐 돌아가는 세상에서 불안정하고 시끄러운 상태를 몰아내는 데에는 육체적인 방법이 필요하다. 산책이나 조깅 이외에 주말농장이나 정원에서 일하는 것도 좋은 방법들 중 하나이다. 나의 몸으로 내면의 화와 불안정을 진정시키면, 이전보다 훨씬 더 고요하게 있을 수 있다.

 

 

 

 

행복은 어디에 거주하는가

 

“가축 떼나 금을 소유하는 것에 삶의 행복이 있지는 않다. 행복이 거주하는 장소는 바로 영혼이다.” (데모크리토스)

 

많은 사람들이 가능한 대로 많은 재산을 소유함으로써 행복을 성취하려 한다. 그러나 재산이 행복을 가져다 주지는 못한다. 자신의 영혼 안에서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하고 아무리 많은 업적을 이룬다 하더라도 결코 행복할 수 없다. 아무리 많은 재산을 소유하고, 아무리 많은 업적을 쌓고, 아무리 많은 사람들로부터 관심과 존경을 받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 수는 없다. 행복은 영혼 안에, 사람의 깊은 내면세계에 거주한다. 사람이 자기 자신과 일치하는 곳에, 자신이 유일무이한 존재임을 느끼는 곳에, 지신의 신적 가치를 아는 곳에 어떤 실패도, 어떤 상실과 소외도 빼앗아갈 수 없는 행복이 존재한다.

 

 

 

 

평화는 스스로 자신을 확장한다

 

내적 평화를 체험하는 데서부터 주변 사람들에게 평화로 가득 찬 생각들이 퍼져나간다. 그러한 곳에는 악의적이고 적개심으로 가득 찬 생각들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나에게서 평화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평화롭게 살아야 하는 어떤 과제가 아니다. 그보다는 내가 나의 내면세계에서 체험한 평화가 주변 사람들에게 전달되어 간다. 내가 평호를 만들어내야 하는 것은 아니다.평화는 내 안에 이미 있다. 그 평화가 스스로 자신을 확장해 나간다.

 

 

 

 

자신만을 위한 시간을 가져라

 

만약 당신에게 혼자 있을 수 있는 용기가 있다면, 당신은 당신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기 위해 누구에게 어떤 것을 내놓을 필요도 없고, 어떤 것을 증명해 보일 필요도 없으며, 자신이 선하고 옳다는 것을 인정받기 위해 애쓸 필요도 없다. 다만 당신 자신을 위해 있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때에 당신은 완전히 당신 자신과 하나로 일치해 있음을 체험하게 될지도 모른다.

 

 

 

 

편안하게, 그리고 자기 자신과 함께 머물라

 

카시안 에 따르면, 우리가 마음의 참된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오직 “제 집 식구들을’ (마태 10, 36) 침묵하도록 했을 때에만” 가능하다.

“한 집에서 같이 사는 우리의 식구들이 더 이상 나를 거슬러 싸우지 않을 때에 비로소 마음의 평안 속에 하느님의 나라가 실현된다.”

우리가 더 이상 우리의 갈망과 감정, 욕구와 바람으로 인해 이리저리 헷갈리지 않는다면, 하느님 나가라 우리 안에 자리잡게 될 것이다.

 

 

 

 

온화하고 마음이 모여있는 사람

 

마음이 모여 있는 사람은 자신 안에 들어 있는 다양하고 흩어져 있는 것들을 모아 들인다. 그는 자기 자신과 하나로 일치해 있다. 그는 자기 자신고 하나이고 그가 하고 있는 일과 하나이다. 그는 여러 가지 사물들과 일들이 자신을 분산 시키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모아 들인다. 모음 또는 마음의 집중 등을 의미하는 독일어 ‘Sammlung’은 어미가 ‘sam’으로 끝나는 단어들과 연계되어 있다.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 (der Achtsame)은 그가 현재 이 순간에 하고 있는 일, 만지고 있는 사물에 관심을 갖고 깊이 생각한다. 신중한 사람 (der Behutsame)은 그가 하고 있는 것을 보호한다. 그는 자신이 하고 있는 모든 일을 보호하고 지켜나가고 성취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 깨어 있다. ‘Sammlung’ 이란 단어는 또한 온화하다는 의미를 지닌 형용사 ‘sanft’와도 관련을 맺고 있다.

온화한 사람은 자신이 함께하고 있는 사람들, 사물들과 평화롭게 지낸다. 그래서 마음을 모으고 있는 사람은 분열과 거부, 불안정으로부터 집중하고 조심하며 온화한 자세로 넘어간다. 자신이 지금 만지고 있는 것과 함께 있는 사람은 그것을 부드럽게 다룬다. 자기 자신과 하나가 되어 있는 사람, 자신의 다양한 요구와 바람, 욕망과 감정과 하나가 되어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부드럽게 대하고, 그 자신 안에 들어 있는 모든 것과 평화롭게 살아간다. 그리고 그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결코 거칠고 잔인하게 대하지 않는다. 그와 함께 있는 사람에게 온화하게 다가간다.

 

 

 

 

부드러운 빛

 

나에게서 부드러운 가을빛은 자기 자신을, 자신의 잘못들과 약점들을,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그들이 모든 인간적인 요소들과 더불어 부드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사람을 연상하게 하는 존재이다. 그러한 사람은 자신의 참된 모습과 자신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자신의 부드러운 눈빛으로 감싸 안는다.

부드러운 가을빛 속에서는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인다. 나무들에 붙어 있는 갖가지 색깔의 단풍잎들은 참으로 아름답게 빛난다. 그러한 때에는 바짝 말라 있는 나무들도 아름답다. 그러한 때에는 모든 것이 자신의 고유한 아름다운 빛을 지니고 있다.

나는 매우 부드러운 빛을 발산하는, 나이가 많이 든 사람들을 알고 있다. 나는 이들 곁에 있는 것을 좋아한다. 이들 곁에서는 내가 있는 그대로 있어도 된다는 것과 “모든 것이 결국은 좋은 것이다.”는 긍정적인 느낌을 가질 수 있다. 삶은 이 나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좋은 것과 궂은 것, 여러 다양한 것들을 체험하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이들은 인생의 가을을 맞이하여 부드러운 눈빛으로 모든 것을 바라본다. 이들에게는 모든 인간적인 것들이 결코 낯설지 않다. 이들은 그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뿐 판단하지 않는다. 이들은 이 모든 것을 부드러운 가을빛 속에 빛나도록 두고, 그것들이 이 삶을 지탱해 나가는 지주가 되도록 한다.

 

 

 

 

시간이 멈추면

 

시간과 영원은 현재 이순간에 함께 만난다. 만약 우리가 현재 이 순간에 온전히 있으면, 시간은 멈추어 선다. 우리 각자는 매우 아름다운 석양을 바라보면서 그것에 온통 빠져들어 본 경험을 했을 것이다. 그러한 순간에 우리는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전혀 인식하지 못했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어떤 것에 온전히 몰두해 있으면, 우리는 시간을 잊어버리게 된다. 그러한 순간에는 시간이 멈추어서고, 우리는 오로지 현재 이 순간에만 존재한다. 이것은 바로 영원한 안식과 행복에 대한 예감이다. 우리는 이 순간에 이미 이것에 참여하고 있다.

 

 

 

 

표범의 가르침

 

동물원 울타리 안에 잇는 표범을 관찰하며, 그가 놀랄 정도로 여유 있고 천천히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사냥할 때에는 순식간에 엄청난 속도를 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는 자신에게 시간을 허용하고, 충분한 시간을 가진다. 우리에게 시간은 돈이다.

 

우리는 좀더 중요한 데에 사용하기 위해 시간을 가능한 대로 많이 절약해 두려 한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에게 무엇이 더 중요한가 하는 점이다. 우리는 종종 우리에게 확보된 시간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모르는 때가 있다. 대부분 우리를 바쁘게 만들고 서두르게만 할 뿐이다. 그런데 그렇게 서둘러서 어디로 가야 하나?

 

 

 

 

완전한 평안

 

우리는 아름다움 꽃이나 경치 또는 그림을 구경할 때, 시간과 영원이 함께하는 완전한 평안을 체험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보는 것에 온전히 빠져든다면, 보는 우리와 보는 대상 사이에 구별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고, 둘이 하나로 일치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시간이 멈추어 선다.

또는 우리가 바하 나 모차르트 의 평화로운 음악을 들으면, 그리고 우리의 귀가 온전히 그 음악에 빠져들어 다른 어떤 것도 방해하지 못하도록 집중해 있으면, 그러한 들음 속에서 완전한 평안을 예감하게 된다. 그러면 우리는 시간의 한 가운데서 영원을 만나게 되고, 들음 속에서 시간이 멈추어 선다.

때때로 글을 읽으면서 이러한 체험을 하는 경우도 있다. 우리가 어떤 책을 읽는 도중에 어떤 구절이 우리 마음에 와 닿는다면, 우리는 더 이상 읽지 않고 멈추어 선다. 그 내용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하지 않고 우리는 그저 멈추어 선다. 이 순간 우리는 바로 이곳에 그냥 이대로 단순히 있는 것이다.

 

 

 

 

걱정하지 마라

 

마음을 졸이는 걱정은 정신을 어둡고 혼미하게 만든다. 나는 나의 미래에 대해 걱정하곤 한다. 그러나 걱정하면 현명한 판단과 행동을 하지 못하게 된다. 두려움은 나를 쇠진 시키고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보호막을 만드는 데에 주력하게 만든다. 여기서 주안점은 미래에 대해 걱정하면서도 동시에 그 걱정을 다시 내려놓아야 한다는 데에 있다. 나는 내 손으로 직접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그 다음에는 나를 믿음으로 온전히 하느님께 내맡겨야 한다.

 

 

 

 

나무 그늘 아래로

 

자신의 그림자를 몹시 못마땅해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걸어가는 동안 계속 자신을 졸졸 좋아오는 그림자가 못마땅하여 도망치기로 작정했다. ‘빨리 달려서 그림자로부터 도망치자’ 고 생각하고는 일어나서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그림자는 아무런 힘도 들이지 않고 그의 발이 땅에 닫는 손간에 바로 그를 따라오곤 했다. 그는 ‘좀더 빨리 달려야겠다’ 고 생각하고 점점 더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죽은 지경에 이르기까지 달렸고, 마침내 땅에 고꾸라져 죽고 말았다.

만약 그가 주변의 나무 그늘로 들어갔더라면 어렵지 않게 자신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고, 그러면 그는 더 이상 달릴 필요도 없이 나무 그늘 아래에서 편안하게 휴식을 취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여기까지 미치지 못했다.

 

 

 

 

 

원전

 

이 책에 실린 대부분의 글들은 안셀름 그륀의 다음 저서들에서 발췌한 것들이다. 단, 안셀름 그륀이 썼으나 이 책들에 실리지 않은 글들도 있다.

 

* 50 Engel Fur das Jahr,  Freiburg: Herder, 1997.

* 50 Engel fur die Seele,  Freiburg: Herder, 2000.

* Herzensruhe, Freiburg: Herder, 1998.

 * Jeder Mensch hat einen Engel,  Freiburg: Herder, 1999.

* Finde deine Lebensspur, Zusammen mit Maria M. Robben. Freiburg: Herder, 2001.

* Weihnachten – einen neuen Anfang feiern, Frieburg: Herder, 1999.

* osterlich leben,  Freiburg: Herder, 2000.

* Und alles lassen weil Er mich nicht lasst,  Lebenskultur aus dem Evangelium, Freiburg: Herder, 5. Aufl. 1998.

* Der Himmel beginnt in Dir.  Das Wissen der Wustenvater heute. Freiburg: Herder, 5. Auflage 2000.

 

 

 

 

  1. Askese는 절제, 고행, 훈련, 수련, 수덕, 금욕, 자기 수련 들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역자는 그 중에서 ‘자기 수련’이 본래의 의미를 가장 잘 드러낸다고 본다. 그러나 원문이 지닌 다양한 의미를 살리기 위해 Askese 란 단어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을 선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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