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h ash.. Wednesday, 2016

Ashes-2016

 

2월 10일, Ash Wednesday 2016 올해 재의 수요일이 슬그머니 다가왔다. 예년처럼 Holy Family CC 아침 9시 미사엘 가서 이마 위에 재의 십자가를 받고 왔다. 올해는 느낌이 사람이 예년에 비해서 더 많아진 듯 했다. 느낌인가.. 사실인가.. 무언가 가톨릭 교회의 근래 움직임이 활발해 진 것은 아닐까? 냉담자를 교회로 돌아오게 하려는 대교구의 운동, 물론 바티칸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이지만.. 전 같지 않게 나는 이런 움직임에 귀를 기울이고 싶다. 내가 변했다는 증거 중에 하나일 것이다.

올해의 40일은 어떻게 보내나.. 매년 생각하는 것들.. coffee를 줄이자.. 잠을 줄이자.. 같은 것은 이제 ‘촌스럽게’만 보인다. 더 깊은 것을 찾고 싶다. 눈에 안 보이는 것, 나의 깊은 속 마음을 들여다 보고 싶고, 더 높은 것으로 바꾸고 싶고.. 어떻게? 2년 전의 사순절, 1년 전의 사순절과 비교하기도 한다. 2년 전.. 다급하지만 무언가 이루어 질 것, 성모님의 손이 나를 꼭 잡았다는 느낌 같은 것.. 결국은 그 해 9월에 모든 일들이 시작되었지 않은가? 하지만 그것들은 사순절에 시작되었다고 봐야 한다. 작년도 마찬가지.. 비록 첫 산은 넘었지만 두 번째의 미지의 산을 기다리던 사순절이었다. 다급한 것은 큰 차이가 없었다. 올해는 어떤가? 성모님의 손에 끌려 (낯 가려운 표현이지만..) 두 번째의 산을 다치지 않고 넘었다. ‘그것’과 ‘저것’ basics들이 정말 그림같이 해결이 된.. 그런 기적의 성탄을 맞게 해 주셨다. 이것을 우리는 잊으면 안 된다. 홍해바다를 건넌 심정을 잊으면 안 된다. 올해의 사순절은 이런 배경으로 묵상을 해야 한다. 우리의 앞에 있는 산은 무엇이며, 그것을 맞는 의미와 사명은 무엇인가? 무엇을 하며 ‘그날까지’ 하느님 앞으로 갈 것인가?

두 번째 날리는 눈발

Backyard 시야를 가리는 태고의 눈발..눈발..

Backyard 시야를 가리는 태고의 눈발..눈발..

 

드디어 올 겨울에 와야 할 것이 드디어 두 번째로 아틀란타 지역에 찾아왔다. 지난 몇 년간 이것 때문에 고생한 것은 작은 개인역사에 남게 되었고 은근히 이것을 걱정하게도 되었지만.. 사람 심리는 묘해서.. 이것이 올 때쯤에 실제로 안 오니까.. 조금은 기다리게도 되었다. wintry mix.. ice storm같은 것들은 말만 들어도 등골이 오싹하게 되었어도 제 때에 못 보니까 조금은 섭섭한 것이다. 이것 사실 전형적인 ‘어린이 심리’가 아닐까? 이런 것으로 ‘비상사태’가 와서 내일 아침에 학교에 안 가게 되는 꿈.. 같은 기대감. 학교에 안 가도 되고, 직장에 안 가도 되는… 인생의 황혼기에 이런 것들은 간단히 말해서 깊이 쌓여가는 경험에 의한 향수 같은 것이다.

오늘 화요일, 도라빌 소재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에서 레지오 주회합이 있는 날.. ‘죽었다 깨어나도 빠질 수 없는‘ 모임이라 이날의 겨울 날씨는 항상 신경(차의 트렁크에는 비상도구를 가지고 다닌다)이 쓰이는데.. 왜 하필 이날 일기예보가 그렇게 애매한 것일까? 분명히.. wintry mix가 예보 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stay home하라는 말이 전혀 없으니까. 학교도 그렇고 직장도 그렇고.. Closing이란 말이 전혀 없다. 무언가 wintry mix가 내리는 것이 시간적으로 퇴근 후로 나와서 그럴 것이다.

집을 떠날 때부터 눈발이 나리기 시작했고, 우리와 비슷한 거리를 운전을 해야 하는 단원 실비아 자매, 무서워서 못 나오겠다고 연락이 왔지만 나중에 회합이 시작되자마자 ‘용감한 모습’으로 나타나서 우리를 기쁘게 했다. 올해, 오늘의 일기예보는 정확하였고, 우리가 다시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2년 전의 악몽이 서려있는 I-285 West를 달려서 집에 무사히 왔고, 거의 즉시로 다시 눈발이 내리기 시작하였다. 와~~ 이번의 예보 정확하구나.. 시간 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안 되는 때, 문제가 안 되는 양 정도 내린 셈이다. 집에 goal-in을 하고 푸근한 마음으로 창 밖을 보니.. 아름답게만 보이는 white stuff들이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한 때의 폭설에 대한 악몽을 제치고 잠깐이나마 시야를 완전히 가린 하아~얀 눈발은 1950년대 어린 시절, 서울 원서동에서 보던 그런 포근하기만 한 눈발을 다시 보는듯한 착각에 빠진 시간이 되었다.

Poor man’s lab bench

나는 현재의 집 saybrook court 에서 오랫동안, 25년 이상, 살면서 비록 나만의 공간, home office, study는 항상 가지고 있었지만 제대로 된 tinkering 용 lab-bench 같은 것은 한번도 가져본 적이 없었다. lab 역할을 하는 것은 그저 아무 곳에나 있는 work space, extra desk, table이 전부였다. 사실 lab역할을 할 만한 bench가 들어갈 공간이 없었다는 것이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현재 우리가 사는 집은 so called, traditional house이기에 더욱 그렇다. 모든 것이 ‘전원적, 아늑하고 조그마한’ 느낌을 주는 분위기와 방들.. 그 이후의 유행은 the bigger, the better 가 판을 치면서 지어진 집들은 전체 크기에 상관이 없이 모든 공간이 서로 연결이 되고 트여진 그런 구조가 standard가 되었다. 한마디로 ‘미친 듯이’ monster처럼 커진 공간으로 사람의 존재가 보잘것없게 보일 정도로.. excess of excess가 판을 치던 bubble craze 시대가 도래하고, 내가 그런 부류의 인간이었으면 아마도 그러한 널찍한 공간에 monster workbench를 놓아도 무방했을 듯하다.

 

poor man's personal electronics work bench

poor man’s personal electronics work bench

 

운명적으로 나는 현재의 ‘작은’ 공간에 만족하는 인간이었고, 현재도 그렇다. full-retirement 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책이 주로 있는 나만의 아늑한 공간에 어떻게 ‘고철이 즐비한’  lab-style 공간을 만들 것인가..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고 했던가? 아주 우연한 순간에 자그마한 lab-style work ‘bench’ idea를 얻었고 ‘순식간’에 만들게 되었다. 우리 부부의 bedroom에 쓰던 옛날 ‘고리짝’ 서랍장 drawer chest와, 이제는 모두 집을 떠나간 아이들이 어렸을 때 쓰던 desk hutch를 다시 recycle한 것이다. 크기가 정확히 도 잘 맞아 떨어지고 현재 나의 home office의 구석에 놓으니 크게 방이 작아 보이지도 않는다.

Basic setup, 시작은 간단했지만 진짜 문제는 내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electronic gadget stuffs junks 를 찾아서 버릴 것은 버리고 ‘남은 여생’에서 쓸 만한 것들을 정리해서 이곳에서 ‘갖고 놀 수 있게’ 만들어 놓는 작업.. 장난이 아니다. 한 달이 훨씬 넘어가고 있지만 아직도 junk들이 계속 나오니.. 언제나 끝이 날지도 모르고, 언제 ‘본격적’인 joy of tinkering & making 을 할 것인지 미지수지만 솔직히 말해서 너무 크게 ‘즐거움’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남아있는 세월과 시간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A Peaceful Saturday

오늘 토요일은 그 옛날 어릴 적 느끼던 토요일의 기분과 느낌과 견줄 수 있는 ‘기분 좋고 평화로운’ 그런 날이 되었다. 이번 주말의 schedule로 보면 무언가 stressful할 수 있는 일들이 있었기에 별로 기대를 안 해서 그런가.. 결과적으로 기대치보다 훨씬 낫게 토요일을 마감하게 된 것인데 거기다 잔잔한 평안과 평화로움까지 선물로 받았으니..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양양이의 승리 勝利 redux

백마고지를 점령한 '괴뢰군' Izzie

백마고지를 점령한 ‘괴뢰군’ Izzie

 

우리 집에서 고양이는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양양이’로 불렸는데 지난 10년간 우리 집의 양양이는 Izzie라고 불리는 ‘집 고양이’다. 우리 집의 터줏대감 pet dog 은 물론 12살이 지난 수컷 강아지(Dachshund, 덩치가 작아서) Tobey이지만 5년 전부터는 무슨 천생의 연분인지 이 두 마리가 같이 우리와 살게 되었고 현재까지 ‘무사히’ 동거하고 있다.

처음에는 양양이의 천성을 잘 이해하지 못해서 완전히 ‘고양이 항상 victim’ 라는 선입견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면 (TobeyIzzie를 공격하는 듯한 장면이 목격되면), 무조건 Tobey만 벌을 받기가 일쑤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사정은 거꾸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야말로 provoking하는 쪽이 ‘양양이’ 였던 것이고, 아마도 그것이 고양이의 천성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한다.

육체적인 덩치로 보아도 고양이는 개에게 못 당할 듯 보이지만 그것도 아닐지도 모르는 것이, 서있는 위치에 따라서 개가 고양이에게 완전히 고개를 숙이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물론 반대인 경우도 있지만. 오늘도 Tobey의 보금자리인 나의 office에 쳐들어온 양양이 Izzie, 당당하게 열어 놓았던 창문 틀에 올라가 주인을 농락하는 모습을 보고 한참을 웃었다. 이런 것이 pet animal 들과 함께 사는 즐거움 중에 하나가 아닐까?

1월을 보내며..

¶  1월을 보내며  달력을 넘길 때가 또 왔다. 1월이 다 가고 2월 달이 내일부터 시작된다. 무언가 많고 복잡한 느낌의 1월이 가는 것, 조금은 시원한 기분도 든다. 1월의 날씨는 그런대로 큰 사고 없이 얌전한 편이었다. 이것은 물론 2년 전 이맘때의 날씨악몽을 비교한 것이다. 지난 번 약간의 눈이 왔을 때.. 차 속에 survival kit (sleeping bag, portable bathroom etc)를 꼭 챙기라고 아이들이 성화를 했는데 그 정도는 못했어도 비상용 ‘통’을 절대로 가지고 다닌다. 사실 이곳의 경험에 의하면 진짜 ‘악질적 날씨’는 2월부터 3월 사이에 있기에 drive를 비교적 많이 하는 우리는 절대로 긴장을 풀지 않기로 각오를 한다. 그래도 2월부터 가끔 ‘반짝’하는 때에 느끼는 멀리서 오는 봄의 신호들을 상상하면..

 

¶  Instant Coffee’s back!  그 동안, 꽤 오랫동안 고장이 나서 못쓰던 under-sink instant water dispenser가 $300 이상의 투자로 다시 ‘펄펄 끓는 물’을 언제라도 쓸 수가 있게 되었다. 이’문명의 이기’로 제일 먼저 즐기는 것이 바로 instant coffee다. 특히 누가 ‘발명’을 했는지는 몰라도 coffee stick이란 것 (분명히 일본아이들의 idea였을지도..) 그야말로 instant중의 instant가 아닐까? 설탕, 크림까지 섞였으니 stick의 꼭지만 뜯어서 뜨거운 물만 넣으면 그야말로 즉석 coffee drink인 것이다. 문제는 뜨거운 물을 끓여야 하는 수고인데.. 이번에 이것도 완전히 해결이 되었다. 새벽에 추운 부엌엘 내려와서 물을 끓이며 벌을 서는 문제가 완전히 해결 되었다.

 

¶  This Old House 이번 생일에 나라니가 생일card속에 무슨 sticker를 붙여서 나에게 선물을 했는데.. 그것은 magazine, This Old House 2년치 subscription sticker였다. 몇 년 전에 Time magazine을 구독을 완전히 끊으면서 집에 오는 magazine이 하나도 없었는데.. 다시 mailbox에 잡지가 오게 되었다. 3월 달 발행 This Old House가 그제 배달이 되어서 정말 오랜만에 ‘집에 관한 잡지’를 다시 보게 되었다. 이 잡지는 PBS TV program으로 익숙하다. 다른 잡지들도, 오래 전에 잡지 전성기에는 꽤 많은 것을 구독했는데 Internet 때문인지 거의 다 사라지지 않으면 아주 축소되어서 명맥을 유지하는 듯 하다. 세상이 변하고 있는 것이 어떨 때는 섭섭하기도 하다. 우리의 시대가 이제는 완전히 가는구나 하는 그런 생각도 든다. 이제 우리 집이야말로 Old House가 되어서 아마도 나라니가 정든 우리 집, This Old House에 조금 더 신경을 써서 This New House로 만들라는 부탁인 것으로 느껴졌다. 올해부터는 집중적으로 집 renovation, remodeling에 투자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굴뚝같지만.. 이것은 큰 투자이기에 계획을 잘 세워야 할 듯…

 

Rage, under-sink

Road rage.. 차를 운전하다가 ‘열 받고, 열 내고, 심지어 욕을 하고’ 흔히 듣던, 가끔 나 자신도 실제로 경험해본 것 들이다. 결과적으로 이런 행동들 참 stupid한 것들이고 듣고 싶지도 않은 ‘부족한 인간이기에 생기는’것들에 관한 것들이다. Road rage는 나이가 들면서 나와 조금 멀어진 듯한데.. road rage가 아닌, 말의 느낌도 해괴한 Under-sink rage란 것을 이번에 체험을 하고.. 휴~ 나는 아직도 멀었다는 자괴감에 빠지기도 했다. 멀었다 멀었어..

요리조리.. 하기 싫어서 피하던 plumbing job이 있었다. 매일매일 맞대면 해야 하는 부엌의 필수품, Under-sink food disposer와  Under-sink instant boiling water dispenser가 그것들이었다. 쉽게 말해서 수명이 다 되어서 고장이 난 것들이지만.. 그것부터가 나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왜 하필 이 때에 고장? 그것도 2개씩이나? Hot water dispenser는 사실 꼭 없어도 지장이 없지만.. 때가 추운 겨울이고 보니, 갑자기 instant coffee나 tea를 마실 때 이것처럼 편한 것이 없었는데.. 하필 why now?

Food disposer는 겨울이라서 음식찌꺼기 버릴 일이 많지 않고 잠시 옆에 두었다가 텃밭에 거름으로 주면 제격이라 없는 것이 instant coffee와 달리 그렇게 아쉬운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것도 급히 ‘갈아버릴 찌꺼기’가 있으면 또 슬슬 ‘열을 받는다’.  요새 이것들이 나의 ‘uncontrolled‘ rage의 시발점이었고 이 episode는 다음과 같이 진행이 되었다.

  1. 전에 쓰던 것들, disposer나 hot water dispenser들은 모두 10년 이상씩이나 큰 탈 없이 잘 썼는데.. 왜 최근 것들은 모두 5년도 안 되어서 이렇게 고장이 나는가? Made in China를 의심했지만 기실은 모두 Made in U.S.A였다.
  2. 새 것들은 사려니.. $$$을 쓰는 것이 그렇게 아까울 수가.. 둘 다 합쳐서 거의 $400.. 장난이 아니다.
  3. 집에 ‘남자’가 없으면 분명히 돈을 주고 handyman을 불러야 하지만, 대신 별로 고생하지 않고 설치를 할 수가 있다. 하지만 우리 집은 내가 아직도 남자니까.. 고생을 할 각오가 필요.. 이것도 열을 받고.
  4. 두 개의 ‘쇳덩어리’ 물건들이 도착하면.. 설치할 준비.. 잘못하면 이제부터 악몽의 시작을 예상할 수 있다. 이것도 ‘물이 새는’ plumbing job인 것이다. 그것 뿐인가.. 그 어둡고 좁고 아픈 under sink에 sink를 보고 누워서 안 보이는 눈을 째리고, 감각이 예전 같지 않은 손가락으로 요상한 자세로 tool을 써야 한다는 것.. 생각만 해도 아찔한.. ‘으이구~’ 열 받는다.
  5. 몇 년 만에 필요한 plumbing tool, supply를 찾는 것..이 때 제일 ‘뜨거운’ 열을 받는다. 10년 만에 찾는 것이다. 그것이 어디에 있는가? 이것 때문에 사실 plumber를 그 비싼 돈을 주고 쓰는 것이다. 이것을 찾는데 머리를 싸매고 며칠 걸렸고 그 동안 숫한 rage 속에서 살았다.
  6. Surprise! 이런 일을 할 때 제일 무서운 것이 바로 이 surprise!인 것이다. 암만 미리 생각하고 조심을 해도 마찬가지다. 그 중에 나를 worst rage로 이끈 것은: 새로 산 ISE(InSinkErator) 가 old WasteKing brand의 dispenser와 맞지 않는다는 치명적인 사실!

결국은 이 #6 때문에 새로 ISE brand와 맞는 dispenser를 order해야 했고 며칠 뒤에 모든 것이 끝이 났다. 이렇게 ‘고생’을 하면 무슨 보람 같은 것을 느껴야 할 것이지만 솔직히 금새 모든 것을 잊어 버리게 된다. 정말 오랜만에 instant hot coffee를 타 먹는 것이 유일한 보람이라면 보람일 것이다.

 

2016-01-29 10.03.38-1

replaced ‘black’ boiling water tank

Replaced WasteKing food disposer

Replaced WasteKing food disposer

Instant 'boiling' water dispenser

Instant ‘boiling’ water dispenser

 

삼십육 년의 세월은..

달력에서 오늘이 2016년 1월 25일임을 보면서 다시 생각에 잠긴다. 36 주년 결혼 기념일.. 어제 아이들과 Marlow’s Tavern에서 나의 ‘늦은 생일’ brunch를 먹으며 이 ‘긴 세월 36년‘이 또 언급되었다. ‘무척 오래 같이 살았다’라는 딸들의 이야기.. 별로 생각 없이 36년을 거론하곤 했지만 듣고 보니 과연 ‘우아.. 같이 참 오래 살았다…‘ 라는 탄성이 낮게 나온다. 총각 때의 자유연애 시절이 끝나는 시점인 결혼은 사실 조금은 자유가 없어지는 시점이기도 해서 결혼 전에 신경이 쓰인 것은 사실이었지만 막상 결혼 후에는 그런 생각이 스스럼없이 사라졌다.

기쁜 우리 젊은 날이여.. 1980년 1월 말 제주도 서귀포에서

기쁜 우리 젊은 날이여.. 1980년 1월 말  honeymoon 제주도 서귀포에서

 

36년이란 숫자의 세월은 공교롭게도 일제시대 36년 이란 말이 연상이 된다. 그 옛날 일제시대 36년 어쩌구.. 했을 때 참 오랫동안 ‘쪽바리 치하’에서 고생했구나 하고 생각하곤 했다. 바로 그런 긴 세월의 36년이었다.

얼마 전에 25주년 결혼 은혼식 Silver Anniversary 축하를 친지들과 조촐히 했던 기억인데.. 그것이 벌써 11년 전이 되었고, 이제는 숫제 50주년 금혼식을 향해서 가고 있는 것이다.   결혼 당시 흔히 듣는 주례님의 말씀 중에 ‘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 하는 말로 오래 오래 같이 살라는 뜻의 주례사가 있었다. 당시에는 그런 미사여구 美辭麗句 에 큰  관심이 없었지만, 시간과 세월에 밀리듯이 이렇게 36년을 맞게 되니, 가급적 50주년도 기념을 했으면 좋겠다는 욕심도 생긴다.

지금의 세상이 하도 요상하게 돌아가다 보니.. 예전에는 당연시 되던 ‘백년 해로’하던 미풍양속이 흡사 ‘희귀동물’ 취급으로 축하를 요란하게 받게 되고, 심지어는 ‘남자와 여자’로 구성된 부부가 남달리 돋보일 정도로 한마디로 ‘해괴’한 추세를 느끼며.. 이런 ‘반역사적’인 것들이 과연 어디까지 ‘퇴보’할 것인가 한숨만 나온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 부부.. 36년을 맞으며 ‘자연법 인간역사‘에 일조를 했다고 자부하고 싶다. 

36년 전의 세상은.. 그 동안 강산이 3번 이상 변했다고 하면 짐작이 갈까? 잊고 살던 결혼 당시의 세상모습들이 떠오르고, 우리가 변한 모습에 또 한번 놀라고.. 이런 모든 것들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라 크게 놀랄 것 하나도 없다. Soviet를 위시한 살기등등했던 세계 공산당들이 물러간 자리에 목을 자르는 살인강도들이 종교의 이름을 팔며 설쳐대는 그다지 나아 보이지 않는 세상으로 변했다. 자연법에 따라 우리의 자식들이 세상의 빛을 보며 커가고 그에 맞갖게 부모님 세대들이 황혼의 빛으로 사라지셨다. 그 자리로 우리가 서서히 사라지는 중.. 이것도 하나 이상할 것 없는 지극히 자연적이고 순리적인 것이다. 아하~~ 이제서야 이런 변화들이 왜 하느님이 만드신 것이라는 이유가 어설프게 느껴진다. 한마디로.. 이렇게 큰 사고 없이 36년간 가정을 유지하게 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고 싶다.

We are all alone.. Rita Coolidge의 이 oldie는 결혼 전후로 꽤나 듣고 따라 불렀던 추억의 곡이다. 이 곡은 총각시절에는 외로움을 뼈저리게 느낄 때, 결혼 후에도 둘이서 외로움을 느낄 때 듣곤 했다.

 

 

We’re All Alone – Rita Coolidge

 

첫 눈발, 또 하나의 생일

내가 본 마지막 아틀란타의 설경, 2015년 2월 24일 이었다. 약간의 눈발과 dusting 정도..

내가 본 마지막 아틀란타의 설경, 2015년 2월 24일 이었다. 약간의 눈발과 dusting 정도..

 

¶  오늘은 올 겨울의 첫 하얀 것(일명 ‘눈 雪’, white stuff, a.k.a snow) 을 기다리는 예기치 않은 holiday이 되었다. 2년 전의 악몽 같던, gas가 거의 바닥이 난 차 속에 갇혀서 19시간을 꽁꽁 얼어붙은 I-285 freeway 에서 꼬박 밤을 지새웠던 것.. 그런 것 때문에 이번의 ‘비, 진눈깨비, 눈’의 일기예보는 분명히 모두들 over-reacting을 할 각오를 할 것을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오늘은 예정대로라면 신부님을 모시고 H자매님 봉성체 동행을 하는 날이었지만, 이런 날씨 처음 맞는 신부님은 모르겠지만 우리들의 불안감은 떨칠 수가 없어서 일 주일을 연기하게 되었고 그것이 우리들에게는 free holiday를 준 셈이 된 것이다.

2년 전의 악몽도 사실은 오늘과 비슷한 routine으로 시작되었지만 결과는 disastrous한 것으로 남았다. 당시에는 일기예보보다 훨씬 빠르게 점심시간 즈음부터 freezing rain-to-snow가 내리고 panic한 모든 차들이 한꺼번에 freeway로 몰리면서 그 유명한 2014 Atlanta Snow Jam, Snowmageddon이 역사에 남게 된 것이다. 오늘 것은 다행히 traffic hour가 끝나는 밤이 되어야 비가 눈발로 바뀐다고 하지만 문제는 모든 ‘직장’들이 정오 즈음에 문을 닫는다는 사실.. 그들이 또 모조리 freeway로 몰릴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우리를 떨게 하는 것이다. 물론 그 시간에는 비가 내릴 것으로 2년 전 같은 일은 안 날 것이지만.. 한번 놀란 기억이 머리에서 좀처럼 지위지지 않으니 어쩔 것인가?

이번의 weather system은 1990년대 초의 the storm of the century와 비슷한 pattern으로 deep South에서 습기를 몰고 northeast로 가면서 snow blizzard로 변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예년과 같이 Washington DCNew York쪽은 아마도 엄청난 기후 news가 될 듯하다. 이런 것들.. 그야말로 Mother Nature 그러니까 act of God이니 어찌할 것인가 도리가 없이 그저 자연에 겸손한 마음으로 승복을 하며 자연의 힘을 다시 한번 감상하는 수 밖에 없다. 그래도 positive한 것이 있다면.. 따뜻한 집안에서 hunkering-down하며 냄새 구수한 strong coffee를 즐길 수 있다는 정도일까.

Morning After, big chill Siberian postscript:

아침에 일어나보니.. 예보는 100% correct, 덩치가 큰 놈은 모두 예년대로 Washington DC 쪽으로 가서 그쪽은 완전히 눈 속에 파묻혔지만,  이곳은 조금 진짜 겨울 맛을 보여준 정도다. 하지만 약간 dusting정도의 white stuff은 완전히 얼어붙었고 시베리아 같은 무서운 얼어붙는 바람.. 이런 날 밖에 나가는 것은 bad idea. 모르긴 몰라도 언덕 같은 곳은 skating하기 좋은 상태일 것이 자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Local tv news의 ‘closing central’에는 church closing이 줄줄이 나온다. 아마도 우리의 Holy Family CC도 그 중에 하나여서.. hunker down, hunker down.. enjoy my ‘strong’ cup of coffee all morning!

 

Frozen snowy siberian morning emerges..

Frozen snowy siberian morning emerges..

 

¶  또 하나의 생일을 맞았다. 이번에는 이 몸이 이 세상의 빛을 본 날이 된다.  까마득한 옛날, 1948년 1월 21일, 어머니는 나를 서울에서 낳으셨다. 근래에 들어서 이날을 맞으며 나는 나 자신을 세상에 보내주신 부모님, 선조님들, 그리고 궁극적으로 하느님을 생각한다. 분명히 이것은 ‘고령’의 나이 탓일지도 모르지만, 어떤 쪽으로는 나의 생일이 흡사 ‘어버이 날’이 된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이런 날이 나의 것, 내가 주인공으로 ‘착각’하며 오랜 세월을 산 것이 크게 자랑스럽지 않은 것이다. Pope Francis 말씀대로.. 내가 과연 나의 것인가, 내 것이 과연 있는가.. 도대체 내가 어떻게 이 세상에 왔는가.. 올해는 유난히도 그런 것들이 나의 화두가 되었다.

올해는, 68이란 숫자에 무슨 magical 한 것 하나도 없는데, 한 번도 아니고 3번이나 ‘생일을 먹게’ 되었다. 이것이 무슨 ‘추태’인가.. 70을 향하는 ‘고령’에 겸손치 못하게.. 주책없이.. 하지만 이것도 순리에 속하는지 내가 control할 만한 것들이 아니었다.

첫 번째는 지나간 화요일, 레지오 주회합 날에 생일축하 회식이었는데, 우리 ‘자비의 모후’ 쁘레시디움은 전통에 따라서 생일을 맞는 단원이 회식 비용을 전담한다. 처음에는 조금 ‘해괴’한 풍습이라고 생각도 했지만 지내보니까 이것도 makes perfect sense한 것을 알게 되었다. 이날은 오랜만에 9명 전 단원이 모여 식사를 했고,  김 실비아 자매의 제의와 전담으로 ‘하얀 풍차 coffee & bakery’에서 2차까지 치러서 아주 오붓한 자리가 되었다. 이날 정오미사에 우리 레지오 단원들이 생미사를 봉헌했는데, 신부님이 ‘연미사’로 오인, 내 이름이 갑자기 돌아가신 것으로 발표가 되는 happening이 있었지만, 모두들 내가 오래 살 것이라 위로 아닌 위로를 받으며 웃기도 했다. 이 레지오 생일 회식은 특별한 것은 없다지만 나에게는 조금 이색적인 것으로, 나를 제외한 전원이 모두 ‘예쁘신 자매님’들이라는 사실.. 남들이 보면 너무나 부러워하지는 않을까.. 외톨이 남성단원이기에 받는 유쾌한 느낌은 아닐까?

두 번째는 어제 1월 21일 (1.21 사태, 1968년) 바로 68년 째 되는 바로 그날, 예의 ‘우리 전통 group1‘이 모인 것. 1월 21일은 우연치 않게도 최형 wife (진희 엄마)의 생일이기도 해서 근래에는 ‘같이 치르는 생일’로 변했다. 어제 모인 이 group은 한마디로 ‘인생 모범생’ 가정으로 짧지 않은 세월 동안 서로가 서로의 ‘나이 듦’을 보아주는 watch group의 역할도 한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모이는 횟수가 줄어들고 있지만 그 대신 모임자체는 아주 심도가 있고 stress 를 풀어주는 좋은 자리를 마련한다. 모두들 몸과 마음이 건강한 한 해가 되기를 바라며 차가운 비 내리는 늦은 저녁시간을 보냈다.

세 번째의 생일모임은.. 우리 식구들만 모이는 private한 것, 모두 바쁜 관계로 일요일 잠깐 모여서 전에 갔었던 Marlow’s Tavern에 가서 gourmet hamburger를 먹기로 했는데.. 과연 이 약속이 지켜질지는 100% 확신할 수 없지만, 그것은 상관이 없다. 이미 두 번씩이나 생일을 치렀기 때문이다.

 

2 Birthday Treats by Judy Collins 2

 

Amazing Grace – Judy Collins – 1971

 

Both Sides Now – Judy Collins – 1967  

  1. 일명 진희네 group: 최형, 윤형, 전 사장
  2. 20대 초에 좋아했던 flower girl Judy Collins,  그녀의 Both Sides Now는 인생과 사랑을 안과 밖, 위와 아래에서 바라보는 멋진 시였고, 후에 발표된 Amazing Grace는 가히 popular gospel song의 압권이었다. 특히 Amazing Grace의 가사를 천천히 음미하며 들으면 천상의 음악으로까지 들린다.

冊, 山 바람 하느님 그리고 나

김정훈 부제 유고집, 1978
김정훈 부제 유고집, 1978

산, 바람, 하느님 그리고 나.. 서정적인 시를 연상시키는 이 구절은 사실 어떤 ‘유고집 遺稿集’ 책의 제목이다. 언뜻 들으면 “산에 가서 부는 바람을 맞으며 하느님을 생각하는 나” 정도로 연상이 되기도 하지만 과연 이 책은 어떤 책인가?

주일 전에 아틀란타 도라빌 소재 한인 천주교회, 순교자 성당의 ‘성물방 책 코너 book corner’엘 들렸다가 ‘우연히’ 보게 된 책이었다. 이런 것들이 우연일 것이다. 전혀 계획을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우연이 정말 우연일 chance는 과연 얼마나 될까?

평소에 보통 나는 성물방엘 잘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은 예외적으로 10시 반 미사에 맞추어 성당 주차장 교통정리 봉사를 하게 되어서 아침 8시 30분 미사에 참례했어야 했고 12시 45분에 예정된 레지오 꾸리아 월례회의 때문에 ‘장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성물방에 있는 book corner에 들린 것이고 그곳에서 이 책을 잠깐 보고 대출을 받게 받게 되었다.

Scan10020-1이 책이 눈에 들어온 것은 이유가 있었다. 이 유고집 저자의 이름, 김정훈, 김정훈 베드로 부제 副祭.. 나의 거의 60년 된 깊숙한 곳 뇌세포에서 이 오래된 이름을 찾아 내었다. 1959년 서울 재동국민학교 6학년 동창이었다. 이 책을 대출 받으며 곧바로 나는 옆에 서있던 연숙을 바라보았다. 서로가 이 책의 제목을 알아본 것이다. 1990년 쯤 아틀란타에 이사 와서 처음 살던 Norcross의 직장 바로 근처에 있던 Four Seasons Apartment.. 우리 살던 아파트 건물 아래 쪽에 한국 상사직원 가족이 살고 있었는데 두 딸이 곧바로 우리 애들과 학교를 같이 가게 되었고 알고 보니 그 집 엄마가 나의 중앙고 동창 박우윤의 여동생이었다. 그 집에 책이 많이 있어서 연숙이 가끔 빌려보곤 했는데.. 그 당시 연숙이 그 책을 보고 ‘나와 비슷한 나이로 일찍 타계한 아까운 젊은 신부’에 대한 이야기를 했던 까물거리는 기억..  그 당시 나는 거의 직감적으로 ‘김정훈’이란 나와 동갑인 신부의 이름이 ‘나의 재동국민학교 동창’일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러고 나서 그 책은 곧바로 뇌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아마도 그 당시 연숙은 그 책을 읽었을 것이다.

고 김정훈 부제
고 김정훈 부제

이런 인연으로 이번에 다시 나의 ‘손에 들어온’ 이 책이 우연만은 아니라는 생각, 어쩌면 재동 동창생 김정훈을 다시 발견하게 될 기회라는 ‘사명감’ 같은 것도 느끼게 되었다. 김정훈, 김정훈 부제.. 1960년 재동국민학교 졸업, 1966년 경기중고교 졸업.. 가톨릭대학 신학부 졸업, 인스부르크 대학교 유학, 부제 서품, 1977년 6월 2일 예기치 않았던 등산길에서 조난 사.. 김수환 추기경까지 참석예정이었던 사제 서품을 바로 코앞에 두고 선종.. 흡사 작은 ‘개인 서사시’ 같은 느낌.. 흠~ 30세에 선종..이란 말이 나의 코를 찡~~하게 만든다. 어찌 채 날개도 못 펴고 그렇게 갔단 말인가?

내가 아는 김정훈은 사실 단편적인 평범한 오래 된 동창의 기억 정도다. 나와 ‘친한 친구’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같은 반이라는 정도지만 이 ‘친구’는 조금 더 기억이 나는 것이.. 6학년 때 ‘아마도’ 전학을 왔던 것 같다. 학년이 시작되고 중간에 들어온 case였던가? 당시 우리 반은 6학년 전체에서 가장 우수한 애들이 몰려있었는데.. 당시 담임 박양신 선생님 왈: ‘김정훈은 공부를 아주 잘한다’는 말로 소개를 했던 것. 아니나 다를까.. 이 애는 기기 막히게 공부를 잘했다. 하지만 말이 별로 없었고.. 그러니까 나이에 걸맞지 않게 ‘겸손’하다고 할까? 그것이 전부였다. 말썽을 피우지 않으니 크게 기억할 사건이 없는 것이다. 우리 반에는 당시 ‘경기중 지망’ 수재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대부분 집안들이 떠들썩하던 치맛바람이 아니면 아이들이 그다지 겸손한 편은 아니었는데 이 김정훈은 그런 기억이 전혀 없었다. 그러니까 ‘조용히’ 경기중학교에 간 것이다. 그런 사실만 나중에 알았고 곧 잊었는데.. 중학교 당시 나는 이 친구를 서울 낙원동 파고다 공원 (일명 탑골공원) 수영장 앞에서 ‘멀리서’ 보았다. 자기보다 나이 어린 아이를 데리고 수영장으로 들어가던 모양.. 그 이후로 나는 김정훈을 완전히 잊고 살았는데, 다시 이렇게 불현듯 나의 시야에 들어온 것이다. 그것도 ‘죽은 모습’으로…

재동학교 앨범사진
재동 앨범사진

연숙이 처음 이 책을 대하면서 아주 인상적이었던지 나에게 몇 번 언급을 하긴 했지만, 저자 김정훈이 나의 재동학교 동창인 김정훈이라는 100% 확신도 없었고 신부지망생이었다는 말도 나에게는 가슴 가까이 들리지 않았다. 그 당시는 그만큼 성소 聖召 란 말의 느낌도 나는 피하고 싶었던 ‘마음과 가슴이 황폐하던’ 기나긴 시절들이었다. 하지만 이번은 아주 아주 달랐다. 두말없이 그 책을 ‘2주 대출’을 받아왔고 관심 있게 이리저리 요모조모 앞과 뒤를 왔다 갔다 하면서 ‘조금씩’ 김정훈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요새 나의 버릇인 ‘난독’으로 거의 한번은 읽은 듯하고 이제는 조금은 체계적으로 읽어볼 까.. 현재의 느낌은 김정훈의 30세가 되어가던 그 당시 그의 생각과 나의 삶을 비교하며 너무나 애와 같은 생각으로 살던  나 자신을 보았다는.. 숨길 수 없는 사실 하나다. 아무래도 하느님을 이미 찾은 그의 인생에 대한 자세를 나와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지만 그래도 참 너무나 차이가 나는 30세까지의 우리 둘의 인생이었다.

mid january, tipping over..

¶  2016년 ‘정월 正月’ 1월, 깔딱 고개를 숨 겹게 넘어간다. 그런대로, 제대로 1월다운 ‘싸늘한’ 기온을 되 찾은 이 시점에서 무언가 머릿속은,  ‘무언가 할 것들이 꽤 있는데..’ 라는 편하지 않은 생각으로 꽉 차온다. 그것들은 거의 90% 이상들이 계속 반복되는 daily, weekly routines들일 것이다. 어떨 때는 그런 것들이 그렇게 무게로 느껴지지 않은데 왜 가끔은 짓누르는 쇳덩이처럼 느껴지는 것일까? 과학적인 biorhythm인가, 안 보이는 하느님의 섭리인가?

Kant (Immanuel) 의 시계 같은 산책 습관을 연상시키는 정확한 clockwork같은 나의 daily routine들,  가끔 ‘완전히 박살’을 내고 싶은 충동이 없다면 내가 지나치게 과신을 한 것이지만, “주님의 성령을 보내소서, 저희가 새로워 지리이다. 또한, 온 누리가 새롭게 되리이다.” 를 생각하면 그런 작은 문제들은 눈 녹듯 사라진다.

그래도 그런 충동이 없어지지 않는다면, 곧바로 별이 가득한 막막하고 까만 하늘을 보며 Cosmology, Big Bang, Quantum Enigma로 위로를 받는다.

 

¶  6년 전 쯤, 야심에 찬 계획으로 나도 “고래등같이 큰 집”에나 있는 (computer) server room에 필적하는 server closet을 시도하였고 부분적으로 성공을 하였다. 그 때부터 우리 집의 connectivity, computing, file sharing, streaming 같은 것들을 해결하는 server 들이 car garage 의 구석에 붙어있는 이 조그마한 server closet에 모두 한 곳으로 모이게 되었다.  이것을 위해서 대대적으로 cat5e cabling이  attic부터 garage까지 설치가 되었는데 사실 이 cabling, wiring 이 제일 힘든 job이었다.  Attic부터 벽을 뚫고 garage까지 wiring하는 것, 사실 pro들이나 하는 것이어서 나는 그저 ‘가진 것은 시간 뿐’이라는 motto로 결국 끝을 냈다.

 

Server Closet

Server Closet

Network/Phone Switches at Attic

Network/Phone Switches at Attic

 

당시만 해도 Wi-Fi(Wireless LAN, WLAN)의 수준이 아이들 장난 정도로 느렸고 coverage가 좁았다. 한마디로 reliable한 것이 아니었기에 거의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wired network 그것도 Gagabit speed의 유혹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 이후로 ‘나의 자랑: server closet’은 성실하게, 부지런히, 안보이는 곳에서 우리 집의 모든 family information hub의 역할을 다 해 주었다. 하지만 이것을 유지 maintain 하는 것, 공짜가 아니어서, 제일 큰 문제는 습도 높은 더운 여름에 air-condition이 안 된 garage의 높은 공기온도.. 그런 때마다 신경을 곤두세우며 온도 조절에 땀을 흘리기도 했다.

그 동안 가족의 ‘요구 사항’이 변해서.. 아이들이 다 나간 집에서 우리 부부에게 이런 business-class network system은 한마디로.. 웃기는 overkill. 이제는 Small is better, Less is more라는 생각 투성이여서.. 올해 들어서 이런 것들은 명퇴를 당해야 했고, 결국 며칠 전부터 철거가 시작되었다. 완전히 없앨 자신이 없어서 일부분만 나의 office바로 옆 옷장 closet에 옮겨다 놓았다. 나는 주로 virtual machine(on Proxmox KVM or Oracles’ Virturalbox)을 main desktop pc 로 쓰고 있어서 server를 완전히 없앨 수는 없지만, 올해 안으로 이것도 없앨 ‘각오’를 다지고 있다. 세월은 흐르고 변하고.. 그것이 순리일 것이다.

 

¶  지나간 일요일에는 원래 레지오 Curia 월례회의가 있어서 도라빌 순교자 성당엘 가야 했지만, 그것 말고도 그곳에 갈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본당 봉사의 일환으로 레지오 단원들에게 주차장 교통정리의 임무를 부여 받았던 것이다. 전에 다른 레지오 남성단원 K 빠치피코 형제가 ‘삐까번쩍’ 하는 교통안내원용 reflective vest uniform를 입고 ‘멋지게’ 교통정리를 하는 것을 목격한 적이 있었는데.. 그것이 우리에게 온 것이었다.

문제는 언뜻 보기에 이런 것 ‘남자의 임무’ 처럼 느껴졌는데.. 그것이 아니고 대부분 자매단원인 레지오에게 ‘무차별’로 주어졌다는 것. 10시 반 미사에서 가끔 교통정리를 하던 ‘청년, 분명히 형제들’ 들은 보았지만.. 자매님들은 본 기억이 없었다. 분명히 본당에서 꾸리아로 ‘지시’가 내려 갔을 것이라 ‘무조건’ 순명을 하는 자세로 우리부부는 갑자기 바람불고 추워진 아침에 처음 해 보는 교통정리를 하긴 했다.

이 임무가 주워졌을 때 나는 기왕이면 미사에 잘 안 나오는 남성 교우를 불러내어 도움을 청하면 일석이조 一石二鳥일 것이라는 생각으로 S 아오스딩 형제에게 별로 기대도 안 하고 부탁을 했더니.. 이게 웬 일인가.. 순순히 승낙! 좌우지간 이 친구, 가끔 예측불허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이게 웬 떡이냐.. 하는 심정으로 그 추운 날 같이 주차장에서 교통정리 봉사를 끝냈다. 이런 기회에 ‘냉담’ 교우를 ‘밖으로 나오게, 미사를 보게’ 하는 것은 우리 레지오 단원들에게는 아주 ‘점수 높은’ 활동에 속하기에 그날.. 참 기분 좋은 주일을 보낸 셈이 되었다.

 

¶  지난 해 한 여름에 만난 이후, 해가 가기 전에 만나서 식사를 하려고 했지만 결국은 해를 넘겼던 아틀란타 한국학교 ‘교사 동창’ 이동수 목사 부부, 결국은 며칠 전에야 부부가 둘루스 Duluth H-Mart 근처에 있는 일식집 해오름 에서 만나서 반년이나 지나간 동안의 이야기를 정답게 나누었다. 서로가 바쁘게 해를 넘겼지만 이 목사 댁의 이야기를 들으니 우리와는 비교가 될지 않을 정도로 굿은 일도 많았고 바빴음을 알고 놀랐다. 자세한 것을 당시에 알았더라면 다른 것은 못해도 기도는 해 줄 수도 있었는데.. 그 옛날 우리 집 큰딸 새로니가 사경을 헤 멜 때 이목사가 제일 먼저 달려와서 무릎을 꿇고 절실한 기도를 했던 모습이 떠오르기도 했다.

당시에 나는 기도의 뜻과 힘을 잘 몰랐지만 지금은 아주 다르지 않은가? 한 때 어려운 건강상 고비를 넘겼지만 이제는 오래된 (개척)교회를 끈기 있게 이끌며 가정도 건강하게 유지하고 있는 이목사 부부.. 이제는 우리가 기도를 해 줄 차례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불원간 목사님의 교회를 방문할 것을 희망하며 헤어졌다.

 

¶  레지오 주 회합이 있던 지난 화요일, 색다른 점심 회식이 성당근처에 있는 한식당 운암정 에서 있었다. 현재, 환자교우 H 자매를 교대로 돌보고 있는 helper group이 KaTalk space를 벗어나 face-to-face 로 모여서 서로의 의견을 나누는 자리였다. 나도 분명히 그 중의 한 member였기에 참석했지만 역시 이곳도 모두 자매님들이어서 조금은 더 신경을 쓰지만 subject가 조금 심각한 것이어서 그런 것도 사치라는 생각도 들었다. text로 의견과 보고를 나누었던 것에 비하면 다른 의견을 모으는데 큰 도움이 되었고, 레지오가 도와줄 수 있는 한계를 알게 되기도 했다.

모임 자체는 화기애애했지만 모였던 장소는 조금 불쾌한 곳이었다. 그 운암정 이라는 곳, ‘비싸고 불친절한’ (한국인에게만 그렇다는 이야기까지..) 그곳의 분위기가 걸맞지 않게 ‘고성방가’ 스타일로 무슨 가라오께 방 같은 시끄러운 분위기여서 도대체 조용히 진지한 이야기를 나눌 분위기가 못 되었다. 다시 그곳을 찾을 마음이 완전히 사라진 계기가 되었다.

 

¶  Ruby Tuesday regular 봉성체 환자 K 베로니카 자매님이 이번을 마지막으로 ‘안 와도 된다‘ 라고 ‘봉성체 service’ 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음을 선언하셨다. 가벼운 stroke으로 갑자기 거동이 불편해지신 이 ‘어머니 자매님’, 한동안 우울하게 집에 발이 묶여 지내시고 성체를 집에서 모셔왔는데 이번에 방문을 해보니 스스로 walker의 도움이 없이 걸어 나오셔서 우리를 깜짝 놀라게 했다.

편한 거동으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말씀이.. 이렇게 편하게 성체를 모시면 다시는 성당엘 못 가게 될 것 같다는 우려로 용단을 내리셨다는 말씀의 요지였다. 백 번 옳은 말씀이 아니던가? 오랜만에 환자가 크게 좋아진 상태로 봉성체 service를 끝내는 case가 되어서 우리는 너무나 홀가분한 심정으로 집에 돌아왔다.

다시 겨울로, final closure ..

¶  Brrrr…. 와~ 어쩌면 하루아침에 늦여름에서 한겨울로 날씨가 돌변을 하나? 섭씨 영하 훨씬 밑으로 뚝 떨어진 기온에 바람까지 겹쳐서 wind chill (체감온도)은 아마도 섭씨 영하 10도 정도같이 느껴진다. 크리스마스와 새해를 전후로 한여름에 연일 쏟아지는 장마 같은 비와 홍수까지 예보가 되었던 정말 ‘보기 싫은, 추억에 남지 않을’ 그런 주일들이 지나가고 결국은 mother nature의 제 모습이 찾아왔다. 한창 때를 모르고 피어나던 동백꽃들, 된 서리를 맞은 모습이 애처롭기만 하다. 하지만 모두들 이구동성으로 ‘겨울은 겨울답게 추워야 한다’ 입을 모은다. 올 겨울의 장기 일기예보에 의하면 ‘엘 니뇨’ 의 영향으로 이곳 Southeastern United States 는 평균보다 낮은 온도와 잦은 비를 예보하지만, 우리의 최대 관심사인 ‘눈 snow’ 같은 것은 아마도 크게 걱정, 기대를 안 해도 될 듯하다.

 

¶  Final closure..  어제는 3 주 이상이나 지연이 되었던 이 필립보 형제님의 장례미사가 있었다. 3주 전쯤 ‘독거사’라는 제목의 나의 blog에서 이 연세대 대 선배님의 급작스런 선종을 애도했지만, 당시에는 가족, 연고자들의 사정으로 이제서야 정식으로 장례미사가 치러진 것이다. 3주나 연기가 된 장례미사이기에 혹시 조객들이 적을까 염려도 했지만 그것은 기우였다. 생각보다 많은 조객들이 큰 대성전을 거의 채웠으니까.. 이것을 보아서 이 선배 형제님 인간관계는 좋았던 느낌도 들었다. 또한 80년의 인생을 살아오며 어찌 인생이 순탄만 할 수가 있을까마는, 각가지 사연을 가지고 사는 것이 인생일진데 이런 ‘늦은 장례미사’가 크게 문제가 될까? 하지만, 부인과 아들 딸의 혈육들이 다른 곳에서 다른 인생길을 걸어왔기에 이렇게 갑작스레 독거사 獨居死 로 보내는 것이 보는 주변 사람들을 을씨년스럽게만 느껴지게 한다. 

한국말을 전혀 못한다는 다 큰 자녀들, 아무 말도 없이 묵묵히 장례미사에 참례는 했지만 그래도 영어로 한마디만이라도 할 수는 없었을까? 아쉽기만 하다. 자업자득 自業自得 이란 말이 생각 나기도 하지만 어찌 쉽게 속단을 할 수가 있을까.. 그저 훗날에 저 세상에서 혈육들과 이승에서 못다한 관계를 회복하게 되시기만 어렴풋이 희망할 정도다. 이날의 장례미사를 보면서 나는 유난히도 ‘상상의 나래’를 펴서 내가 이 장례미사의 주인공이 되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별로 유쾌하지 않은 연극을 펴기도 했다. 아주 먼 훗날이 아닐 수도 있는 그날은 과연 어떤 것인가..

 

1983년 1월 5일

내일 1월 5일은 우리 집 큰딸 새로니의 33번째 생일이다. 그 옛날, 한때 뻑적지근했던 아이들의 생일이 이제는 어쩌면 그렇게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는가.. 그런 것들이 나에게는 거의 신비에 가깝다. 세월의 횡포인가 마술인가, 나이를 먹는 것이 그렇게도 좋았는지 싱글벙글 생일 잔치를 받던 아이들, 20대에 이르러 한결같이 시들해진 표정들로 변했고 30대에 이르러 이제는 숫제 거의 관심도 없다.

출산 5일 전, 신정 미사 후에 박재승 부부, 김원백 부부와.. 콜럼버스 한인성당에서.. 1983년 1월 1일

출산 5일 전, 신정 미사 후에 박재승 부부, 김원백 부부와.. 콜럼버스 한인성당에서.. 1983년 1월 1일: 2명 가족으로 마지막 모습

 

우리세대는 가난하고 찌들은 전통인지 생일날에는 그저 고기가 들어간 미역국을 먹던 것이 전부였고 더 나아가 자기를 낳아준 부모님께도 감사를 드리던 겸손한 전통이었는데, 그런 소박한 것들이 지금은 아주 신선하고 그립고 좋았던 기억으로 남는다. 그것들이 이제는 세계 보편적인지 서구적인지는 잘 몰라도 거의 똑같은 방식으로 앵무새처럼Happy Birthday to You..’ 를 따라 부르며 자기가 100% 주인공인 된 조금은 ‘오만한’ 생일을 맞는다. 이것이 요새 세상이 돌아가는 모양새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생일은 100% 자기의 날인 것이다.

Well after delivery, Riverside Hospital Columbus, Ohio Jan 1983
Well after delivery, Riverside Hospital Columbus, Ohio Jan 1983

벌써 4년이나 된 나의 blog에서 당시를 피상적으로, 감상적으로 회상을 해 보았지만, 오늘은 ‘4년 동안 더 배운’ 것으로 1983년 1월 5일.. 을 회상해 본다. 그 날은.. 우리가 만든 첫 생일이었다. 지금은 반드시 우리가 만들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begotten, not made..], 신비롭기만 한 새 생명, 그것도 ‘우리가 만든’ 생명이 세상의 빛을 본 그날이었다. 이런 표현은 사실 신앙의 눈이 뜬 지금에서야 차원이 높게 표현을 하고 있지만 당시에도 과연 그랬을까? 우리의 역할이 분명히 있었던 한 생명의 실존적 의미를 그 당시에 거의 실감을 못하며.. 그저 ‘한 인생의 자취’를 역사에 남기는 의무 정도로 생각하며 자질구레한 출산, 유아 쪽에 모든 신경과 노력이 쏟아지기 시작하던 겨울답지 않게 가랑비가 내리던 Columbus, Ohio의 1983년 1월 5일.. 이제는 조금은 더 가물거리는 기억을 더듬게 되었다.

태어날 당시 새로니는 참 많은 주위의 축복을 받았기에 그 애는 ‘잘 클 것’이라고 별로 걱정하지 않았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하지만 교황 프란치스코의 말씀대로 ‘자식은 나의 것이 아니다‘ 라는 말씀을 뼈저리기 절감을 할 정도로 놀라는 순간들도 많았다. 한 마디로.. 저 애가 과연 우리의 자식인가.. 하는 순간들이었다. 그런 순간들이 쌓이는 세월을 거치며 지금은 체념하는 심정이 되었고.. 아하.. 이것이 순리적인 인생의 법칙이로구나 하는 생각이다. 그것과 더불어, 나의 자식들은 ‘내 것도 아니고, 내가 만든 것도 아니다‘ 라는 말도 어쩔 수 없이 수긍하게 되었다. 고유한 영혼을 가진 인간을 우리가 ‘만든다는’ 것이 한마디로 어불성설 語不成說 인 것이다.

‘남아도는 풍부한 cash’가 없던 우리 집, 편안한 도움을 줄 수 없어서 거의 모든 것들을 자력으로 공부하고, 난관을 헤쳐나간 우리 큰 딸이 미안하기도 하지만 자랑스럽기도 하다. 그런 사실이 우리들이 생각한 ‘간접적인 효도’라는 생각도 들었다. 우리가 큰 걱정하지 않고 이 ‘애’를 두고 ‘보이는 세상’을 떠나 편안하게 눈을 감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색다른 선물인가?

1월 3일 모두에게 편한 날을 잡아서 다시 한번 ‘미역국’을 나누며 33년 전에 일어난 이야기를 나누며 또 한번 가족의 생일을 축하한다. 이제는 ‘완전한 노처녀’가 되었다고 우리는 푸념하지만 주위 ‘선배’들의 말처럼 요새는 옛날 같은 노처녀는 아니라고 하니.. 조금은 덜 신경이 쓰일 정도다. 요새 ‘아이’들.. 그야말로 self-sufficient generation, 부족한 것이 없으니 ‘남편의 도움’이 크게 절실하지 않은 모양이다. ‘할 것 다하고’ 생각하겠다는 태도에 우리도 이제는 완전히 익숙해져서 큰 걱정은 하지 않기로 했다. 다만.. 남은 인생은 그렇게 짧지도 않지만 그렇게 길지도 않다는 사실만 하루속히 깨닫는 순간이 오기만 바라고 있다.

 

Hold on Tight to Your Dreams – ELO – 1980년대 초 oldie

common sense by npr

NPR, National Public Radio.. 오래 전, 지루하고 지겨운 Atlanta Metro I-285  통근 길의 벗이었다. 이 방송을 거의 매일 들으면서 배운 것도 참 많았다. 특히 ‘통근시간’에 맞추어 방송을 하는  Morning & Evening News, ‘All Things Considered‘ 같은 program은 가히 일품이었다. 특히 그들이 자랑하는 independent & progressive value에 대해서 많이 배우기도 하였다. 하지만 가끔씩 신경을 건들이던 ‘going too far’ 했던 것들1이 나를 그들로 부터 멀어지게 하였다. 통근할 필요가 없어진 이후 나는 거의 그들을 잊고 살았다. 그 사이에 Internet이 traditional over-the-air mass media를  누르면서  FM radio를 따로 들을 기회가 없어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들도 Internet에 등장하게 되어서 다시 그것들을 듣거나 볼 기회가 없는 것도 아니지만 그 옛날 그들의 golden-age는 최소한 나에게는 지난 듯 싶다.

오늘 우연히 들린 그들의 website에 나의 눈을 끈 것이 하나 있었다. 건강에 관한 기사였는데, ‘유행을 타는 건강지식’에 대한 가벼운 경고를 포함하고 있는 주로 common sense에 바탕을 둔 것이어서 나도 많이 공감이 가기도 했다. 기사의 골자는 ‘치료보다는 예방’이라는 이제는 상식화 된 것인데, 예전에 이런 것들에 거의 관심이 없었던 나도 결국은 Medicare age로 들어가게 되면서는 이야기가 달라졌다. 골자는.. “언제 죽더라도.. 죽는 날까지 필요이상의 고통이 없이 살자” 라는 것. 그러니까.. 한마디로 ‘건강하게 죽자’ 라는 이상한 표현이다.

예방의학의 발전이 치료의학의 발전에 비해서 훨씬 앞서고 있다는 저자의 말, 그도 physician이고 보니 공감이 간다. 치료하는 의사들, 특히 primary doctor들이 병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것, 아직도 심하게 말하면 ‘추측하는 game’이라는 것, 조금은 소름이 끼친다. 확률적으로 진단, 치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재수없는 case에는 병을 키우고, 사망으로 이어지는 것일까? 그러면 예방의학 차원에서, 어떻게 살면 건강하게 죽을 수 있는 것일까? 이것이 바로 내가 보아도 상식, common sense가 아닐까 생각한다.

1. Get enough sleep.

2. Move your body throughout the day.

3. Eat well — a healthy assortment of foods. Mostly plants, and not too much. (An ideapopularized by author Michael Pollan.)

4. Interact socially. Isolation is not good for the body, soul or mind.

5. Take some time to reflect on what you are grateful for.

 

1. 숙면: 밤에 잠을 잘 잔다

2. 운동: 부지런히 움직이는 하루를 보낸다.

3. 음식: 적당한 양의 음식, 야채,과일을 잘 먹는다.

4. 사회적인 활동으로: 고립 됨을 피한다.

5. 자기 반성, 감사: 항상 뒤돌아 보며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다.

이 정도면 아하~~ 나도 알던 것이다 라고 생각을 한다. 하지만 과연 모두들 이런 것을 지키며 살까? 아닐 것이다. 이중에서 1,2,3 은 모두 소위 말하는 육체적인 건강에 관한 것이다. 과학적인 통계도 가능한 것들이고 이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나는 이중에 1, 2 는 그런대로 잘 하고 있다. YMCA에서 일주일 두 번 정도는 heavy workout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이외에 ‘움직이는 것’도 큰 문제가 없다. 매일 빠짐없이 (car) drive를 비롯해서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3번의 음식: 확실한 것은 모르겠지만 ‘적당한 양’이 관건인데 나는 소식 小食을 좋아하기에 이것도 pass다.  근래에 들어서서 연숙의 ‘권장’으로 매끼 빠지지 않고 야채와 과일을 먹게 되고 이제는 습관이 들어서 그것들이 식탁에서 빠지면 이상하게 되었다. 그러면 physical한 것이 아닌 4번과 5번 (사회적, 자기반성)은 어떤 것일까?

짐작으로도 4번과 5번은 그야말로 make perfect sense라고 할까. 특히 4번의 ‘사회적인 인간 교류’는 공감을 수없이 하고도 모자란다. 간단히 말해서 사람들을 가급적으로 face-to-face 만나는 것이다. 심리 과학적으로 이것이 body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지까지는 몰라도 경험적으로 이것에 이견을 가질 수가 있을까? 5번의 자기반성, 성찰, 감사 등은 어떤가? 어느 정도까지 이런 것들은 과학적으로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궁극적인 것은 모른다. 이것은 소위 말하는 ‘자연과학’적이 아닌 것이기 때문이다. 믿음이나 신앙처럼 그저 옳다고 믿는 것이다.

위에 열거한 것들은 물론 모두 경험통계에 의한 것들이고 그 대표적인 것이 소위 말하는 Blue Zones에 사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다. Blue Zones란 ‘지역’은 세계에 5군데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1. Okinawa, Japan

2. Ikaria, Greece

3. Sardinia, Italy

4. Nicoya, Costa Rica

5. Loma Linda, California  U.S.A.

이 다섯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물론 ‘장수촌’을 말하는 것으로, 건강하게 오래 사람사람들이 많은 곳들이다. 위에 말한 ‘건강습관’을 골고루 실천하는 이 지역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그런 습관이 배어있다고 한다. 적당한 양의 인근에서 재배한 채식을 중심으로 먹고, 적당히 걷고, 특히 다양한 세대에 걸친 인간적 교류가 눈에 뜨인다. 이들은 술도 적당히 마시고 고기도 적당한 양을 먹는다고 한다. 그러니까.. 극단적인 생활방식이 절대로 아닌 ‘상식적’인 사람들인 것이다.  다른 것으로는 이들은 거의 ‘정제된 설탕’을 피하고, 가공식품도 거의 피하며 산다는 정도다. 이런 것들.. 참 많이 들어 보았고, 이제는 상식화 된 건강지식들이다. 문제는.. 어떻게 보면 쉬운 이런 상식적인 것들이 실제로는 그렇게 쉽지 않다는 것이 아닐까? 결국은 ‘몰라서가 아니라 안 해서’ 문제인 것이다. 건강뉴스에 ‘미쳐서’ 무슨 새로운 발견에 빠져 이런 상식적인 것을 못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이런 기사를 읽으며 생각한다. 올해 나의 New Year’s Resolution에 이런 ‘상식적’인 것을 꼭 실천하리라 하는 것을 포함시키는 것.. 비록 대부분 나는 비슷한 life style을 가지고 현재 산다고 해도 더욱 잘 할 수 있는 여지가 많은 것이다. 특히 쉽게 먹을 수 있는 processed food (가공식품)들, 아차~ 하면 손이 가는 것들이다. 가끔 기분전환 한답시고 ‘맛있게 먹는’ Hamburger 류들.. (어떤 것들은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돈다) 이런 것들을 조금 더 신경을 써서 가려먹으리라 생각도 해 본다. 그렇다. 오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날’까지 건강하게 살고 싶은 것이다.

  1. mostly homosexual issues

small Reflection 2015

¶ 다사다난 多事多難 했던 2015년 을미년 乙未年 이 서서히 저문다. 일년 내내, 생각하면서 살아간다고 자부하곤 하지만 제일 생각을 많이, 깊이, 천천히 해야 할 듯한 년 말이 되면 무언가에 떠밀리고, 쫓기는 듯, 번번이 후회를 남기며 ‘하나도’ 생각을 못한 듯한 회한 悔恨을 남기고 새해를 맞곤 했다만, 올해는 그 달갑지 않은 전통을 깨어볼까.

2015년은 내가 살아온 나이가 ‘만 滿’ 으로 67세인 해로써 70대 쪽으로 ‘완전히 기울어진’ 나이였다. 그러니까, 70 이란 숫자가 60보다 훨씬 더욱 친근하게 느껴지던 그런 해였다. 60이란 숫자를 꼭 잡고 싶은 허황된 욕심이 없었다면 그것은 거짓말일 것이지만, 솔직히 그런 ‘아이 같은, 순진한’ 꿈을 꾸기에는 너무도 성숙한 나이가 되었다.  한마디로 나의 심정은  ‘초연.. 超然’ 한 것이다.

나는 과연 몇 살까지 살까? ‘늘어나는 평균수명’을 가지고 참 많이들 말장난을 하는 것 같지만 솔직히 나는 그것에 큰 관심이 없다. 분명 나 자신도 그런 ‘통계’의 일부일 것은 사실이지만, 나 자신이 그런 ‘통계’ 자체는 아닌 것이고 또한 언제 죽느냐 보다는 어떻게 죽느냐가 더 중요한 것이다. 보험 ‘장사’를 하는 곳에서는 이런 통계가 절대적인 것이겠지만 나는 그런 통계를 의식하며 살기는 싫다. 자연의 법칙에 위배되지 않도록 겸손하게 하루하루 살아가며 내가 역사적인 흔적을 조금이라도 남긴 이 세상에서 서서히 사라지는 것, 나는 그런 것을 원한다.

 

¶ 2015년의 ‘나의 사람’은 누구였던가? 비교적 자주 journaling을 하는 나는, 한 달처럼 느껴지는 1년 정도의 길지 않은 세월에서 내가 살아온 흔적을 찾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다. 문제는 그 ‘잡다한 흔적’들 속에서 어떻게 의미 있는 사람들을 찾는가 하는 것이다.

지난 해를 하루도 빠지지 않고 ‘초자연’적으로 나와 가족을 정북방향 true north을 잊지 않게 하시고 이끌어 주신 ‘성모님’, 비록 인간이셨지만 나에게는 하느님의 어머니로서 도와주셔서 지나가는 한 해를 나의 오랜 인생에서 ‘최고의 해’로 만들어 주셔서 ‘2015년 나의 사람’이 되셨다. 믿음의 결실이란 것이 무엇인가를 어려울 수도 있었던 지난 10년 간을 통해서 서서히, 확실하게, 조금씩 보여주셨다. 이제는 나의 어머니와 더불어 한시도 빠질 수 없는 나의 제2의 어머니가 되셨다.

뼈 저리는 그리움의 아픔이..

연말이라 또 그런 것일까? 아니다.. 나는 이런 참을 수 없는 가슴 속 깊숙한 곳으로부터 나오는 뼈 저린 아픔과 그에 수반되는 참을 수 없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을 때가 적지 않다. 물론 눈물을 쏟아내면 이상하게 시원함이 따른다. 하지만 아련한 아픔은 잔잔하게 남는다. 엄마와 가족들을 그리는 원초적, 생물적인 본능일까.. 아니다 그보다는 후회와 안타까움으로부터 나오는 참회의 눈물임이 분명하다. 곁들여.. 나의 아련한 옛날 옛적, 이제는 분명히 70년에 가까워지는 길어지기만 한 나의 인생역마차, 역정, 누나와의 운명적인 이별의 인생.. 이런 것들이 나를 ‘비극의 주인공’으로 만드는 듯 하고, 나는 ‘불행한 인간’이라는 주체할 수 없는 괴로움에 젖는다.

비록 근래에 나는 다시 찾은 신앙의 도움으로 가정과 나의 주위에서 제자리를 찾아가고, 제 정신으로 돌아오고, 하느님의 세계관에 의한 인간과 인생의 근본적인 위치를 알았다고는 하지만, 나의 옛적부터 쌓인 그리움의 기억들은 ‘조금도’ 지울 수가 없다. 아니 지워서는 안 된다. 절대로 안 된다. 그것이 나인 것을 어찌하랴? 하지만 나는 예전의 사고방식으로 이 그리움의 노예가 되기는 싫다. 새로 만난, 찾은 세계관에 의한 새로운 의미의 그리움, 그 속에서 포근한 安住感을 느끼고 싶은 것이다.

포근한 엄마의 자상한 ‘경우야~ 걱정 마’ 하는 말씀이 듣고 싶다. 나를 위로할 수 있는 존재는 나에게 현재 없다. 엄마의 그런 따뜻한, 무조건적인 사랑의 위로의 말씀을 나는 이제는 들을 수가 없다. 내가 상상할 뿐이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씩 나의 다른 어머니 성모님과 개인적으로 친해지려고 노력을 하면서 그런 ‘무조건적 사랑’의 말씀을 들으려고 노력은 한다. 우리 쓸쓸한 가족 3명이 살던 시절을 그린다. 나를 그렇게 보금자리 같은 곳으로 느끼며 자라게 해 주셨던 나의 어머님의 헌신적인 노력 덕분에 나는 따뜻한 곳에서 이렇게 달콤하고 포근한 추억들을 만들 수가 있었다. 그것을 나는 비록 감상적이긴 하지만 나의 보물로 간직하며 사랑하고, 즐거워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느낌을 남에게도 나누어 주고 싶지만 그것이 쉬울까? 요새 우리부부가 돌아다니며 노력하고 있는 봉사활동이 그런 것에 속할까? 얼마나 우리는 그런 포근한 사랑을 나누어 주고 있는 것일까? 어둡게 살고 있는 사람들, 나는 그들의 기분을 알 듯하다. 하지만, 하지만 어떻게 그들에게 내가 받은 사랑을 나누어 줄 수 있을까? 어떻게 남은 삶을 사는 것이 제일 보람된 방법일까? 묵주기도 속에 그것의 해답이 있을까? 새해를 맞이하며 계속 기도를 해 보자.

The 1st Day of Christmas

12days of

¶ 엘니뇨의 영향으로 미국 동부는 이상난동 異常暖冬에다 장마성 폭우로 사실 전통적인, 크리스마스 카드에 나오는 하~얀, 고향 같은 풍경의 기대가 완전히 사라졌다. 하지만 그런 기후적, 감상적인 것을 빼고는 사실 예년이나 다를 기분은 하나도 없고 Christmas Season (12월 25일부터 다음해 1월 둘째 일요일까지, 이번은 1월 10일, liturgical calendar) 의 첫날, 12 Days of Christmas 중의 첫날,  First Day of Christmas 를 지낸다.

올해는 우리 집 오랜 전통을 깨고, 처음으로 성탄미사에 참례를 하게 되었다. 오랜 동안 우리는 미국 성당에서 성탄 전야 미사에 온 가족이 참례하고 정작 성탄절에는 완전히 집에서 늘어지게 쉬곤 했었다. 이것이 근래에 들어서 잘못 되었다는 것을 알기에 고쳐야겠다는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었던 참이었었다.

 

푸근~한 느낌의 성탄미사가 끝나고... 도라빌 순교자 성당 2015년 12월 25일

푸근~한 느낌의 성탄미사가 끝나고… 도라빌 순교자 성당 2015년 12월 25일

 

2015-12-25 13.24.41푸~근~ 하고, 잔~잔~한 미소를 띤 모습으로 성탄절미사를 집전하시는 이재욱(요한) 주임신부님, 흡사 ‘젊은’ 산타클로스 같다는 느낌도 받는다. 성탄의 진정한 의미, ‘고차원적인 사랑‘ 의 느낌을 강론과 몸으로 보여주신다. 오늘 이곳 도라빌 순교자 성당, 한국본당에 오게 된 계기도 우연이 아닐 듯.. 순교자 성당에서 아주 멀지 않은 apartment로 얼마 전에 이사온 작은 딸 나라니가 올해 family Christmas meal을 준비한다고 한 것.. 거기서 가족들이 모이게 된 것들.. 모두 우연이 아니었을까? 오랜만에 우리 집이 아닌 ‘다른 집’에서 나라니가 준비한 fusion Christmas luncheon 으로 성탄 오후시간을 즐겼고, 오랜만에 우리 집에 없는 big screen TV로 우리 가족들의 오래 된 classic movie였던 Bing Crosby, Ingrid Bergman 주연, 가슴을 훈훈하게 적시는 ‘The Bells of St. Mary‘를 보며 각자가 느끼는 추억이 어린 논평을 하기도 했다. 그것은 warm heart, loving heart 의 기적에 관한 것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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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성탄절에 집에서 나왔던 덕분에 쓸쓸하게 성탄절 낮을 보낼 듯 했던 우리의 젊은 봉성체 환자 H 보나 자매님 댁도 찾아볼 수도 있었다. 이런 날, 몸과 마음이 쓸쓸한 영혼을 찾는 것은 우리들의 heart에도 엄청난 도움을 준다. 변함없는 모습과 감사하는 태도로 우리를 맞는 자매님, 비록  holiday decoration이 하나도 없는 조용한 집이었지만 그래도 최소한 가족들은 모두 가까운 곳에서 보살피고 있어서 그러한 쓸쓸함을 이기는데 도움을 준다. 사랑이 주제라는 성탄의 의미를 새겨볼 수 있는 거의 완전한 예들을 오늘 이렇게 경험한다.

오늘의 이런 ‘성탄절 봉성체’와 더불어 어제의 조금 다른 경험들이 나를 조금 움츠리게 한다. 지난 화요일 우리와 같이 고해성사를 했던 S 형제, 어제의 통화에서 다시금 우울한 holiday를 가족과 맞이하고 있음을 알고 나의 가슴은 주저앉는다. 오래 전의 나의 모습을 그에게서 보는 듯해서 더욱 우울해진다. 이럴 때 어떠한 말도 필요가 없음도 알기에 더욱 답답한 것이다. 어제 쏟아지는 빗속을 drive해서 올해 5월초 선종하신 배 베로니카 자매님 댁을 찾아가서 홀로 남은 두 아드님에게 작은 인사를 전하고 왔는데, 그 집도 역시 쏟아지는 빗속에서 성탄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고, 어둡게만 보였다. 쓸쓸한 모습으로 우리를 문 앞에서 맞은 그의 얼굴도 마찬가지로 쓸쓸하고 어두웠다. 밝은 빛이 탄생한다는 이런 날들에 이렇게 어두움이 있다는 것을 어찌 잊고 살 수 있을까.. 하지만 과연 어떻게 이들에게 빛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인가?

Ha.. single cup, finally!
Ha.. single cup, finally!

¶ 요사이 깜깜한 새벽에 일어나면 예외 없이 추위에 떨며 coffee를 ‘내려서’ 마시는 즐거움을 맞이하지만 문제는 그 ‘추위에 떠는’ 시간이 짧지가 않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번에 그것을 해결해 주는 perfect present를 ‘아이들’로부터 받았다. Single cup coffeemaker 이것이 바로 해답이었다. 현재 우리 집 drip coffeemaker는 10 cups 이상을 만들어야 제 맛이 나는 monster급이고, pour-over coffee maker는 ‘내리는데’ 시간이 걸린다. 비록 ‘고급’은 아니더라도 이제는 power switch만 올리면 자동으로 personal single cup coffee가 만들어지니.. 추운 새벽의 괴로운 dark morning routine이 다가오는 1월 달의 ‘강추위’를 조금은 덜 괴로울 듯하고, 차가울 수 있는 가슴을 훈훈하게 느끼게 한다. Thank you, Kids!

 

The Twelve Days of Christmas – John Denver & the Muppets

Stormy Christmas, misc..

¶  Unseasonal Christmas, 밤새도록 천둥과 번개, 폭우가 오락가락했다. 오늘이 무슨 날인가.. 성탄 eve 전날이 아닌가? Stormy holiday, 분명히 심상치 않은 성탄의 기분을 주지만, 문제는 이 stormy 란 것이 겨울이 아닌 여름, 그러니까 ‘열대성 tropical‘이란 사실이다. 이것도 몇 년 만인가? 기억에 3~4년 정도 전 이 맘 때였나? 맞다.. 2012년이었다. 그 때도, 억수같이 쏟아지는 폭풍우 속에서 ‘처량하게’ 가족 모두가 극장엘 가서 Spielberg의 Lincoln영화를 보았다. 왜 그랬을까? 절대로 포근한 추억이 아닌 것이다. 최소한 나의 style은 아니었다.

가족을 위해서 나갔다는 기억이 아직도 선명한 것을 보면 싫은 추억이 된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런 unseasonal holiday은 싫은 것 중에 하나다. 하지만 꼭 그럴까? Christmas란 것이 과연 무엇이며 어떤 의미가 있는지 사람들.. 몇 초 정도라도 생각을 하며 보낼까? ‘집단’ 군중심리에 밀려서, 무슨 zombies같이 ‘shop, shop, shop, 줄을 서서’ shopping이나 하는 지독히 세속화 된 크리스마스.. 기다림(advent)이 내일로 끝난다는 단 하나의 희망, 그것이 나를 위로하는 것이 되었나?

 

¶  며칠 전 일요일 저녁에 ‘세대 차를 뛰어넘는’ ‘100% 비공식’ 순교자 성당 구역 ‘친구’들의 간단한 저녁식사와 간담회가 있었다. 나의 레지오 협조단원이기도 한 ‘다多 차원적’인 host 형제님, 무섭게 바쁜 생활에서 틈을 내어서 이렇게 ‘마음이 맞는’ 형제, 자매들을 초대한 것 감사를 안 할 수가 없다. 비록 같은 구역에서 만난 사이지만 이야기들은 구역 politic을 초월한 것들, 개인적인 것들, 신앙적인 것들로 아주 화기애애하고 유익한 것들이어서 집을 나올 때 마음이 아주 가벼웠다.

어떠한 구역모임이 “이상적인, 본당이 바라는 모습”일까.. 이런 것도 허심탄회 虛心坦懷 하게 다루어졌고, 무언가 meaningful correction의 시점에 다다르고 있다는데 의견이 모아졌지만, 필요 이상의 ‘논쟁 성’ 대화는 아니었다. 이런 민감할 수도 있는 사안은 ‘순리’란 것에 맡기는 것도 좋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새해부터는 우리 구역도 조금은 “inclusive, faithful, ecclesiastical 한” 그런 쪽으로 나아갔으면 하는 마음이고, ‘잘 될 것’이라는 가느다란 희망도 가져본다.

 

¶  Busy busy Tuesday: 우아.. 이렇게 어깨에 천근만근 무게를 느끼며 보냈던 화요일이 있었을까? 레지오 회합으로 시작되는 화요일은 주로 봉성체로 끝을 내고 거의 저녁때 귀가하는 일정인데 이번 화요일은 그것을 넘는 일정들이 꽉~~ 차 있어서 그 전날에는 심지어 심한 stress까지 느낄 정도여서 왜 이렇게 schedule을 잡았나 하는 후회까지 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다 좋은 것들’이란 100% 확신이 있기에 주로 ‘don’t think twice, don’t look back, just say yes‘란 말만 되뇐다.

평소의 일정에 오늘은 ‘성탄 판공성사, 신부님 면담‘, 냉담교우 형제와 점심식사 에다가 저녁에는 친지들과의 Christmas dinner party까지 겹쳤다. 조금은 아찔한 일정이었지만 끝났을 때의 ‘날라갈 듯한 기분’을 미리 그리며 나를 달래기도 했다.  판공성사는 고백소에서 줄을 서서 해도 되겠지만 언제나 그것은 무언가 미흡한 뒷맛을 주기에 올해는 따로 면담 식으로 하고, 냉담하고 있는 ‘아오스딩, Augustine‘ 형제까지 불러 점심을 하고 같이 성사도 보게 되었다. 몇 년 만에 이런 기회를 갖게 된 이 형제와 조금은 깊은 대화를 하려 했지만 의외의 불청객이 있어서 무산되고 말았다. 이 형제님, 기나긴 냉담을 하고 있지만 항상 나의 기도 속에 있기에 ‘언젠가는’ 돌아오리라 굳게 믿는다. 고해성사의 ‘백미 白眉’는 역시 Matthew Kelly 1의 말처럼  ‘지난 세월의 때와 먼지’가 씻겨나가는 홀가분한 뒷맛이 아닐까?

저녁에는 올해 새로 이사를 한 C 사장, 나이는 한참 밑이지만 우리 ‘동년배’ 그룹에서 당당히 끼어서 오랜 교분을 유지했던 Ohio State 동창 후배, Riverside Drive에 있는 멋진  upscale 집을 찾아가서 늦은 저녁 시간을 즐겼다. ‘개천에서 용 났다’라고 자칭하는 이 그룹은 뒤늦은 나이에 모든 것들이 잘나가게 되는 case여서 나에게는 조금 미묘한 감정이 교차됨을 피할 수 없지만 그래도 오~랜 ‘친지’들이 아닌가?

 

¶  ‘갑자기’ 커진 우리 자비의 모후 레지오 쁘레시디움, 비록 새 단원들이 모두 자매님들이지만 이들 덕분에 평균연령이 훨씬 떨어진 것은 감사할만한 것이었다. 무슨 ‘긴급 수혈’을 받은 느낌이 들 정도로 분위기가 밝아졌다고나 할까? 들락날락하며 전체 분위기를 흐려놓았던 눈에 성가셨던 일도 올해로 끝나면 얼마나 좋을까? 모든 것을 ‘가급적 원칙대로’ 하는 우리 레지오의 전통을 모르긴 몰라도 두고두고 감사한, 중요한 인생의 교훈을 체득하는 삶을 살게 하리라 나는 믿는다. 지난 9월부터 서서히 ‘수혈’을 받아오면서 현재는 출석률 100%가 새로운 정상이 되었다. 전원 출석하면 박수를 쳐야만 했던 사실, 들락날락하던 것이 정상이던 것이 이제는 출석률 100%가 정상이 된 것이다. 레지오 교본의 말씀들이 정말 100% 모두 맞는다.. 이것은 누구의 도우심인가?

 

¶  아주 아주 오랜 만에 전호배 요셉형제KaTalk으로 통화를 했다. 나와 동갑 돼지띠 전 요셉 형제님, 작년 11월 쯤에 ‘갑자기’ 귀국을 했었다. 이곳에서 생활이 만족스럽지 않아서 그랬으리라는 짐작만 할 정도지만, 그래도 그가 황량 히 떠나버린 작년 12월은 찬바람만 부는 듯한 외로운 느낌을 주었다. 우리와 가까워진 지 일년도 채 안되었을 때 홀연히 떠난 것이다. 늦은 인생의 느낌을 말없이 공감할 수 있는 영혼을 만났다고 생각했었지만 그것은 조금 나에게 사치였는지.. 귀국한지 일년이 되는 지금에야 ‘무엇이 보인다’고 했다. 그 말이 확실히 무엇을 뜻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짐작은 할 수 있다.

편안히 안주해야 할 나이에 큰 변화는 사실 어렵거나 괴로울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상상도 못할 심리적, 혹은 육체적인 challenge가 왜 없겠는가? 그림이 잘 그려지지는 않지만 그래도 열심히 사는 모습이 느껴진다. 인근 성당(노원성당?)의 레지오에도 가입을 해서 활동을 시작했다고 했고, ‘조그만’ 직장도 잡아서 정상적인 생활을 하며 자매님은 양로원 같은 곳에서 일을 하신다고.. 정치적으로는 나와 잘 맞지는 않지만 그래도 곧은 지조와 믿음으로 만사를 해결하는 돼지띠 형제님, 모든 가족이 성탄, 새해를 잘 맞으시기 빕니다.

 

super-cute Christmas tree
super-cute Christmas tree

¶  ‘역사상’ 제일 ‘늦게’ 우리 집 mini 성탄 tree가 장식이 되었다. 그러니까 성탄 2일 전이다. 아이들이 이것에 대해 불만이 많은 듯 하지만, 그런 것에 개의치 않는다. 우리가 나가는 두 곳의 성당이 3일 전에 장식을 했으니까 우리는 ‘당당히’ 하루가 더 늦은 ‘쾌거’였다. 진정한 대림의 정신으로 잘 견디어낸 결과였고 ‘원칙’대로 1월 10일 이후에 치울 것이다. 어제부터 그렇게 보고 싶었던 작년의 movie collection을 하나씩 보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보고 싶었던 것이 The Christmas Box란 1995년 family classic. 여기 출연을 하는 Maureen O’Hara가 올해 타계를 했기에 더 이것을 보고 싶었다. 이 영화는 ‘진정한 성탄의 의미’를 지루하지만 차근차근하고 자상하게 보여준다. Family의 의미를 그렇게나 강조했던 1995년은 지금 생각하며 ‘고전적’인 시대였을지도 모른다. Transgender, LGBT, SS “Marriage’new normal이 되어가는 참 해괴한 세상이 도래한 이 시점에서 무엇을 더 언급하랴? 그래서 Advent의 희망이 더 무게를 더하는 (최소한 나에게는) 그런 2015년 성탄이 내일로 다가왔다. 우리 가족들과 함께 집에서 식사하는 것이 고작이지만 그래도 Christmas vigil Mass에 모두 간다는 사실이 거의 기적같이 느껴진다. 우리 아이들이 한마디로 C&E2 Christian3이 된 사실, 역사적인 irony에 속한다. 이것이 나의 personal Advent에 속하는 것이다.

 

2015-12-24 08.13.44

Lights along the stairway to heaven

 

  1. Australia-born American Catholic Author, Commentator, businessman, Author of ‘The Four Signs of A Dynamic Catholic
  2. Christmas & Easter
  3. 일년에 딱 두번 미사참례 신자

깡패 유감 有感

bully-1깡패.. 흠.. 참 더럽고 싫은 말 중에 하나다. 귀여운 깡패도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나에게는 99.99999% ‘증오의 대상’ 중에 하나다. 이 말이 주는 ‘더러운’ 느낌은 내가 어렸을 때부터 있었고 요새도 있는 것으로 보아서 참 잘 만들어진 단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어원은 무엇일까? 깡+패.. 그러니까 ‘깡, 오기’를 부리는 ‘패, 거리’ 정도 아니었을까? 소리지르고 깡만 부리면 통한다고 생각하는 불쌍한 쓰레기들인가.. 상관없다. 싫고 증오스러운 것은 변함이 없으니까.

나의 blog에서 ‘회고록 류’ 그러니까 memoir 는 가장 쓰기 힘든 것이지만, 그만큼 쓰는 보람은 그에 비례해서 제일 크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그 회고가 즐거운 것인가, 괴로운 것인가.. 에 따라서 일어나는 감정은 참 다르다. 그러니까 즐거운 추억이나 개인 역사를 더 잊기 전에 더 쓰고 남기고 싶었고, 나의 blog에서도 대부분 아련한, 즐거운, 포근한 그런 추억들을 주로 쓰곤 했다.

반대로 기억하기 괴로운 것들은 어쩔 것인가? 당연히 요리조리 피하며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은 것인데,그 중에서 ‘깡패의 추억’은 가히 괴로운 것 중에 괴로운 것, 잊고 싶은 것이다. 어떤 ‘개인적 사건들’은 가끔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잊고 싶었던 것들인데 분명히 나의 잠재의식 깊은 곳에 버젓이 살아 있어서 그럴 것이다.

하지만, 하지만 나의 나이가 70에 육박하면서, 조만간 早晩間 에 나는 이것을 정리하여야 한다는 강박감은 항상 가지고 있었고, 이것은 사실 불편한 것이어서 성당에서 고해성사 告解聖事하는 기분으로 깡패의 추억들을 다 ‘정리 해고’하고 싶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이것, 숨어있는 ‘이글거리는’ 증오심도 나의 dark side의 일부가 되었다면 나는 이것을 가끔 하는 고해성사에 포함시켰어야 되었을 것이지만 그만한 값어치 조차도 나는 여기에 포함시키지 싫었다.

깡패, 깡패들.. 내가 말하는 깡패는 100% 소위 말하는 ‘조무래기, 피래미 급’으로 이들의 특징은 철저히 ‘약육강식’의 쓰레기 철학으로 무장하고 자신들의 불만과 욕구를 철저히 채우려는 한마디로 ‘불쌍한 쓰레기’급 인간들이다. 문제는 그들의 연령층인데.. 유감스럽게도 내가 말하는 인간들은 모두 미성년이거나 지독히 젊었던 깡패들이어서 이것은 지금은 조금 다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떠한 환경이 그들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게 만들었을까 하는 사실이다. 그 ‘쓰레기’들이 과연 자기들이 하는 짓이 옳은 것인가.. 한번이라도 생각을 해 보고 한 것이었을까.. 집단심리에 의한 불우하거나 불행한 자기 환경의 산물이었을까.. 하는 것이다.

내가 자라던 6.25 이후의 역사적인 환경은 사실 어쩔 수 없는 깡패들을 무수히 배출하여야만 했던 암울하고 가난하고, 법 이전에 주먹이 훨씬 효과적이었던 그런 시절이긴 했다. 게다가 급수가 아주 높았던 ‘정치깡패’들이 판을 치던 그런 시절도 겪었다. 한마디로 ‘법치국가’란 것은 말 뿐이던 ‘폭력의 사회’ 가 생활의 일부가 되었던 6.25 전쟁 후의 대한민국 실정.. 나는 그런 ‘남자들의 험악한’ 환경에서 알맞게 적응을 못했던 것이었을까? 특히 가부장제가 굳건하였던 그 시절 아버지 없었던 집의 내성적인 남자아이가 사회적으로 겪었던 것은 남들보다 더 심각한 경험들이었다.

이번에 더 미루지 못하고 ‘깡패의 추억’을 논하게 된 마지막 계기는, 얼마 전 같은 성당구역의 교우형제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였다. 그 형제님 왈 曰.. 자기가 “깡패였다”고 서슴지 않고, 당당하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조금도 주저함이나 부끄러움이 그 태도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나이 탓인지 예전에 보던 그런 ‘나쁜 깡패’의 인상을 풍기지도 않았다. 모두들 오래 전의 아련한 추억 정도로 무협영화를 보는 정도로 들은 듯 하였지만 나는 복잡한 생각 뿐이었고, 이렇게 ‘정리해고’를 더 미룰 수는 없다.. 는 생각을 굳힌 것이다. 옛날 옛적의 ‘나쁜 놈들’ 이들을 용서할 것인가, 죽을 때까지 증오할 것인가?

내가 반세기도 넘는 옛날 옛적 70년대 초 미국에 처음 왔을 때 느낀 것도 깡패에 관한 것이었다. 이 나라 이 땅에는 주변에 추악한 깡패들이 안 보였던 것이다!  최소한 나의 눈앞에 그 놈의 ‘쌍판’들이 보이지 않았다. 아하! 내가 살 곳은 바로 이곳이로구나.. 쾌재를 불렀고 그 이후에도 나의 주변에는 깡패가 단 한 명도 등장하지 않았다. 어떻게 된 것인가? 왜 이렇게 같은 지구 위에서 사는 곳이 다른가?  경제적인 요인이 제일 먼저 떠 오르고 다음은 사회, 문화적인 것 등이 있지만 결과는 모두 ‘종합판’일 것이다. 복합적인 것들..

미국에도 bully 정도의 ‘순한 깡패’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경험했던 ‘한국판 bully’와는 game이 안될 정도다. 욕을 하는 정도가 하늘과 땅의 차이고, 폭력의 정도도 마찬가지다. 모든 ‘불운과 잘못’을 남에게 전가하며 남을 괴롭혔던 대한민국 조무라기 깡패들, 한마디로 ‘쓰레기 중의 쓰레기’였다. 내가 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할 때 정말 무서웠던 사실은 ‘맞아서 아프고 수치심을 느끼고’ 하는 것 보다는 ‘꿈에라도 기관총으로 이들을 모조리..’ 하는 생각이 들 때였다. 상상이지만.. 이것이 상상에서 벗어나는 것도 상상을 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나의 괴로운 추억들도 나이가 들면서 다 수그러지고 조금씩은 ‘자비’의 심정으로 그 쓰레기들을 이해하려고 노력도 하게 되었다. 내가 그들의 입장이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반전 scenario’도 생각할 정도였다. 하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역시 ‘나는 절대로 그런 쓰레기가 될 수가 없다’.. 였다. 그 쓰레기들.. 환갑을 넘기고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자기들의 과거를 어떻게 회상을 하며 손주들에게 이야기를 해 줄까.. 재미있는 상상도 꼬리를 문다. ‘할아버지가 옛날에 깡패였고, 누구누구를 매일 패 주었다’ 고 자랑을 할까.. 아니면.. 조금이라도 자기에게 괴롭힘을 당한 애들에게 조금이라도 미안한 심정이 들었다면 괜찮은 노후를 맞이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꿈 속에 ‘기관총으로 모조리..’ 라는 표현을 생각하며 나는 다시 한번 놀란다. 미국은 근래에 들어서 ‘깡패들에게 괴롭힘을 당한 아이’들이 실제로 ‘기관총 급의 무기’로  깡패들은 물론 옆에 있는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쓸어버리는 mass shooting이 다반사로 일어나는데.. 나는 100% 그 ‘정신병자, 피해자’를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의 mindset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것들 모두 극단적인 case이지만.. 원인을 따져보면 ‘쓰레기급 깡패’에게 책임이 없는 것이 아니다.

이제는 정말로 나의 마음 속 깊이 수십 년간 눌려있었던 나쁜 추억, 잠재의식, 분노..등을 ‘정리해고’할 때가 왔다. 나를 괴롭혔던 ‘쓰레기’들.. 용서하고 싶고 그들도 진정한 회개를 하며 노후를 맞이하기 바라는 마음이다. 잊을 수는 없겠지만 그들을 용서하려는, 하는 나의 의지는 변함이 없다. 혼자의 힘으로 안 되면 ‘높은 곳’의 도움을 청하고 싶다.

 


Sam the Sham & Pharaohs – Wooly Bully – 1965 

 

El Niño winter, Advent spirit, 또 찾은 사람..

Still, I'm dreaming of white.. in my old dream
Still, I’m dreaming of white.. in my old dream

¶  El Niño Christmas Holidays   한 마디로 ‘따뜻한 성탄절’을 말한다. 지나간 몇 년간 이곳 지역은 아주 추운 겨울을 경험했지만, 그런 weather system이  Northeast지방(I-95 corridors, New York, Boston)에서는 물러가는 모양으로 National news 에서는 온통 ‘따뜻한 겨울’이 뉴스거리가 되고 있다. 지난 5년간은 이 지역에서는 희귀한 white Christmas도 보았고 고드름과 폭설 같은 ‘북방’에서만 볼 수 있던 것도 보았던 세월이어서 사실 holiday의 기분을 마음껏 느낄 수는 있었다. Northeast 지방에서 그런 기후 pattern이 서서히 물러가는 모양으로, 이것이 ‘엘 니뇨‘ 현상이고 하는지 (따뜻한 태평양 수온), 앞으로 몇 년간은 그쪽 지방은 다시 비교적 조용하고 ‘따뜻한’ 성탄절이 되는가 보다. 우리가 사는 Southeast지방은 3개월 장기예보가 ‘wetter, cooler’ 라고 나와서 겨울이 가기 전에 눈(雪)같은 것을 기대해 볼만하지만  이번 성탄절을 즈음한 날씨는 ‘wet, very warm’이라고 예보가 되어서.. 미리 심리적으로 ‘white Christmas는 물 건너 갔다’ 라고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Advent, advent.. waiting & waiting .. with 4 candles

Advent, advent.. waiting & waiting .. with 4 candles

 

¶  Advent spirits, 2015   나의 전통적인 12월은 한마디로 Charles Dickens 의 classic  A Christmas Carol 에 나오는  Christmas Past 라고 할 것이다. 평소에도 “현재보다는 과거”를 더 많이 생각하면 사는 나에게 12월이 되면 어떨 때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감상적 늪에 빠지기도 한다. 설상가상 雪上加霜으로 나이가 ‘고령 高齡’으로 접어들면서는 나이를 더 먹게 되는 년 말이 되면 더욱 축~ 쳐지고, 우울해지기도 하는 괴로운 시기가 되기도 했다. 내가 ‘비정상’인지는 확실치 않아도 분명히 ‘정상적’인 것 같지는 않아서, 나의 감정이나 느낌을 남에게 보이기도 싫었다. 한마디로.. 결국 12월은 심지어 즐겁지 않았던 season으로 변하고 있었다. 하지만.. 수년 전부터 ‘서서히, 천천히’ 나는 이런 ‘bad trap’ 에서 벗어나기 시작해서 올해는 현재까지 중에 ‘최고’의 spirit을 찾게 되었다. 그러니까.. Christmas present를 찾게 된 것이다. 거의 “기적”과 같은 이 변화는 어떻게 가능했을까.. 참 인생이란 오묘하기만 하다.  

예전에 비해서 눈에 띄게 달라진 것 중에는: (1) Holiday decoration은 빨라도 12월 20일 이후에 하고, (2) Christmas carols, movies 같은 것도 그 이후에 즐기고.., (3) 가급적 holiday shopping같은 것을 피하고 정 필요하면 딱 하루 날을 잡아서 하고, (4) 진정한 성탄 holiday는 12월 25일에 시작이 되어, 다음 해 1월 5일 (12 Days of Christmas) 이후까지 지속된다. 작년에 이런 것들을 부분적으로 단행했는데, 결과적으로 너무나 뒤 느낌이 좋았다. 올해는 ‘모두’ 실천을 해 볼 계획으로 오늘까지 Christmas tree 장식 같은 것을 hold해 오고, carol이나 movie같은 것도 안 듣고, 안 보고 있다. 어떨까? 이것은 사실 ‘교회’에서 오랫동안 권장해 오고 있는 것들이지만.. 이제야 그 참 의도를 알 듯한 것이다.

과거에 성탄 전날까지 요란법석 시끌벅적 하다가 성탄 아침에 무섭게 선물을 나누어 뜯어 ‘버리고’, 거의 거짓말 같이 ‘모든 것’이 끝나던 정말 괴상한 풍습.. 어떻게 우리가 그렇게 보냈을까.. 성탄 씨즌이 성탄절부터 시작이라는 간단한 사실을 어떻게 그렇게 외면하며 살았는지.  좌우지간 이러한 것이 그런대로 진정한 ‘대림절의 정신’일 듯하다.

 

¶  염경자 누나   바로 얼마 전에, 나의 2011년  blog post: ‘가회동의 추억‘에 누가 찾아와 댓 글 comment를 올려 놓았다. 알고 보니 그 ‘사연’은 정말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가 없었고 꽤 놀라기도 했다. California (LA area)에 사시는 나와 같은 재동국민학교 졸업, 6년 정도 후배, 송요한 씨가 그 주인공인데, 오래 전 가회동에 같이 살았기에 나의 글을 찾았고 본 듯하다. 게다가 레지오 단장을 역임한 같은 천주교 교우.. 그러니까 송요한 형제님, 얼마나 반가운 사실인가?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가회동 내가 살던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을 곳에 사셨던 듯하지만 내가 더욱 놀란 것은 내가 살던 ‘주인’ 집의 ‘미인중의 미인‘, 막내 따님 염경자 누나를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참, 인연도 묘한 것이.. 송형제의 wife와 염경자 누나가 같은 항공사 스튜어디스 출신이라고 하며 그것도 같은 지역에 사신다는 것이다.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그렇게 연관이 될 수가 있을까? 그러니까 희미하게 알고만 있던 ‘주인집’ 소식을 조금 더 자세히 들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어린 시절의 추억이 흠뻑 젖었던 그 당시의 한 가족들을 찾은 것이다. 이것으로 tiny blog의 ‘무서운 위력’을 다시 실감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세월은 흘렀지만 추억과 기억이 변할 수는 없을 것이고 그런 것을 나눌 수 있는 ‘인연의 사람’들을 다시 찾는 것은 오래 산 보람이라고 할 것이다.